박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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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왜 우리 말 잘 못하나?', 나부터 반성 필요 댓글:  조회:706  추천:2  2017-05-15
어느날 길가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곁에 있는 아이보고 “전에 널 가르치시던 선생님이신데 빨리 인사해라”고 한어로 말했다. 애는 기꺼이 나를 보고 역시 한어로 “로오쓰 호우?”고 인사했다. 그러자 친구가 또 한어로 “애두 참 왜 우리 말을 그렇게도 하기 싫어하니?”고 나무람 했다. 그러면서 나를 보고 “이 애가 한어 말만 해서 참 속상해요. 자칫하면 ‘한족애’란 말 듣겠어요. 그렇게도 우리 말을 하라고 해도 말 잘 안들으니”고 말했다. 그러자 애가 제꺽 “엄마는 왜 늘 나와 한어 말 만 하는 가요? 그러니 나도 한어 말 하는 거지요”고 반박했다. 그애의 되알진 반박에 친구는 “엉?…엉…”할 뿐이였다. 이 몇년간 나는 조선어를 가르치면서 이와 류사한 일들을 많이 목격했다. 방학이면 한족학교에서 공부하던 조선족애들도 우리 글을 배우러 오는데 첫날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데려다 준다. 그런데 거개가 애하고 한어 말을 많이 했다. 애가 조선 말을 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도 나보고 애가 집에서 조선 말 하기 싫어 하는데 좀 조선 말을 하게 끔 부탁드린다고 했다. 내가 애들을 보고 집에서 왜 조선 말을 하지 않는가고 물으면 애들 모두 부모들이 먼저 한어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냥 한어 말만 하다보니 그것이 습관이 된것 같다. 그러면서도 애가 한어 말만 한다고 하소연 하다니? 누구탓이란 말인가? 여기에서 한가지 감동적인 사연을 말하고 싶다. 재작년의 일이다. 대학을 졸업한 한 젊은이가 조선 글을 배우러 왔다. 본인이 배우고 싶어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핍박이란다. 어릴 때 한족학교에 보낸 걸 뒤늦게야 후회하면서 조선족으로서 우리 글을 모르고 우리 말을 잘 모르면 수치라 생각한 아버지란다. 공부를 시작한 첫날 젊은이 아버지가 집식구들한테 오늘부터 어느 누구든 한어 말 하면 벌금 50원 하는 규칙대로 실행한다고 했다. 여직껏 매일 한어로 대화하던 젊은이의 아버지, 어머니는 그날 부터 아들애의 공부에 도움이 되라고 조선 말만 했다 한다. 아주 사소한 일 같지만 그만큼 우리 글에 대한 애착과 중시를 돌렸다는 것이 감동이다. 우리 말을 제대로 할 줄 몰라서 생긴 일도 적지 않다. ‘창문을 열어라(开窗户)’고 말한다는 것이 ‘테비를 켜라(开电视)’는 ‘켜라’로 알고 ‘창문을 켜라’고 말해서 폭소가 터지고 “小时候犯点小错误是常事”를 “어릴 때 자꾸 ‘사고’를 치는 건 좋은 일이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한족학교에서 공부했다 해서 다 우리 말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나의 외조카는 한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에서 사는지라 유치원때부터 줄곧 한족학교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우리 말을 매우 표준적으로 잘한다. 집에 오면 부모들이 그냥 조선말로 대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실례가 많고도 많다. 애가 큰 다음 조선 말을 몰라 큰일이다 어쩌지 하면서 부랴부랴 강습반을 찾아가서 학비 많이 내면서 배우느라 해도 짧은 시간내에 배우면 얼마 배울수 있을가? 또 조선 말 발음이 틀릴가봐 위축감이 들어서 감히 하지도 못하는 애들도 적지 않다. 그런 애들을 바라보면서 만약 아무리 한족학교에 다녔다 해도 어릴 때부터 부모들이 우리 말을 중시하는 마음 가짐이 있었더라면 우리 말을 모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애들이 우리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아이들을 탓하기 전에 부모들은 먼저 자신을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 길림신문 2017년  5월 12일
4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의 차이 댓글:  조회:685  추천:0  2017-04-13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은 거의 다 고난과 실패, 불행과 고통을 겪으며 살고 있다. 그러나 마음자세가 다르면 대처 방법도 다르지 않을가 생각된다.   만약 사형이나 다름없는 암에 걸렸다면 어떤이는 대번에 얼굴이 새까매지면서‘난 왜 하필이면 이런 몹쓸병에 걸렸을가? 인젠 끝장이구나’고 탄식하면서 풀썩 주저앉겠지만 어떤이는‘암에 걸렸다고 무서워 할 것 없어. 이겨내보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래서 전자는 얼마 안되여 병마의 포로가 되여 사망하겠지만 후자는 병마와 이악스레 싸워 기적을 만든다.   만약 많은 돈을 잃어버렸다면 어떤이는 며칠이고 밥도 안먹고 속만 끙끙 앓겠지만 어떤이는‘에라 운수땜이거니 생각하자, 자꾸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고 아무일도 없는 듯이 여길 것이다.   또 어떤이는 리혼하면 늘 베개잇을 적시며 눈물로 밤을 보내겠지만 어떤이는‘뭐 속상해할 필요가 있어? 잘못 된 결혼은 포기해야지. 그리고 다시 새 생활을 시작하면 될 걸’고 생각하며 더 멋지게 살고 있을 것이다.   한 녀자친구가 있다. 그 친구한테서 감동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어느 하루 저녁 나는 그 친구집에 갔다. 1층 아파트에서 살다보니 층집 화장실 물호스를 따라 내리는 물소리가 쏴쏴 끊임없이 들려왔다. 내가 “밤에도 이 소리때문에 짜증나겠다.”고 말하자 그 친구는 이런 대답을 했다.   “그러잖아도 우리가 잘 때도 이 소리 때문에 자주 깨여난다. 딸애가 두덜거리면 ‘얘야, 우리 이 소리를 장백산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로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겠니? 남들이 못 듣는 소리를 우리가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고 하자 딸애도 이 생각에 찬성표를 낸다. “   나쁜 일을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마음도 편해진다.   친구는 몇년전에 리혼하고 딸애와 함께 살고 있는데 본가집 어머니가 딸이 혼자 사는게 불쌍하다며 늘 애 아버지를 원망한다. 그때마다 “어머니, 나는 언제나 애 아빠를 고맙게 생각해요. 만약 갈라지지 않았더라면 난 애 아빠의 괴벽한 성질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겠어요? 그는 나더러 편안히 살라고 리혼한거죠.”고 말한다.   그녀는 이렇게 나쁜 일에 부딪치면 언제나 좋은쪽으로 생각하군 했다. 그래서인지 그와 그의 집생활은 늘 밝고 생기로 차넘친다.   이 세상에 살면서 그 어떤 곤난에 접했더라도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꾸면 신심이 생기고 새 희망이 보이게 된다. 우리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보자. 그러면 우리의 생활은 더 감미롭고 아름다와질 것이다. / 박영옥 길림신문 2017-4-12
3    세배돈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420  추천:0  2017-02-15
음력설을 쇤지 열흘만에 친구의 초대로 식당에 갔다가 들은 말이다. 그 친구는 이번 설에 세배돈만 해도 3000원 나갔다 한다. “한달에 로임 2000원을 타면서 그렇게 많이 쓰고 어떻게 살아요?” “남편이 한국에 가서 벌어온 돈이 좀 있어서 그렇지. 지금 200원쯤은 얼굴이 뜨거워서 어디 내밀겠소?” 친구의 대답이다. 10년전에 유치원에 다니는 친척집 애한테 “6.1절”이라고 돈 100원을 주었는데 그 친척이 고맙게 생각하기는커녕 고만한 돈 가지고 뭘 살수 있느냐고 했다. 그때 나의 로임이 고작 600원 정도였는데 말이다. 마음 크게 먹고 내민 돈인데 되려 원망소리 들으니 기분이 이만저만 잡치는게 아니였다. 부조에 통이 크게 노는 어른들이 비일비재다. 할머니들은 손군들한테 1000원 지어 더 많이 내미는이도 있다. 소학교에 다니는 애가 한국에 간 삼촌한테서 세배돈 5000원 받았다니 입이 벌려지지 않을수 없다. 어른들이 이렇게 크게 노니 애들도 돈에 눈이 어두워지고 요구도 점점 더 상승선을 긋고있다. 아직 소학교 학생인데 세배돈을 모은것이 만원 정도 된다는 얘기를 귀등으로 지나칠 일이 아니다.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다. 한 할머니는 손군 넷이 된다. 해마다 설이면 돈을 주는게 아니라 재미나는 동화책을 사준다고 한다. 처음에는 손군들이 별로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였지만 차츰 습관이 되여 후에는 서로 누구한테 더 재미 있는 책이 차례졌는가를 비긴다고 한다. 애들한테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습관을 키워주고 애들이 책을 많이 읽고 보다 총명해지고 보다 세상을 많이 알도록 하려는것이 할머니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세배돈때문에 해마다 설이면 나의 어머니도 머리를 앓는다. 적게 내밀면 체면이 깎일것 같고 한달에 1000원도 안되는 양로금으로 네 손군한테 돈을 주자니 아름차다. 매 손군한테 적어서 200원 준다 해도 800원이다. 100원씩 주시라 하면 지금 세월에 100원 주는 사람이 어데 있느냐고 한다. 애들끼리 오가는 말이다. “너 이번에 세배돈 얼마나 가졌니? 난 2000원 가졌어”,“고까짓것? 난 3000원.” 소학교에 다니는 애들의 머리속에 벌써부터 돈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있다. 애들한테 세배돈을 푸짐히 안겨주기보다 아이에게 필요한 선물을 사주는게 더 명지한 처사가 아닐가싶다. 길림신문 2017-2-14
2    무정과 유정 댓글:  조회:967  추천:0  2012-03-30
무정과 유정 박영옥 선희가 의식을 회복했을때는 아침해살이 창문가에 담뿍 비껴있을때였다. 무거운 눈까풀을 겨우 올리뜨고 사방을 휘둘러보니 온통 흰색이 시야에 안겨왔다. 웬일일가하고 어리둥절하던 선희는 점차 몽롱한 의식속에서 생각을 더듬을수 있었다. 바로 어제  깊은 밤 갑자기 아래배가 극도로 아파나서 뒤집 순이엄마를 불러서 함께 병원에 온 것이다. 급진실에서 “급성맹장염”으로 진단받고 수술실에 들어간후의 일은 기억에 없다. 조금후 순희엄마가 들어오더니 깨여난 선희를 보고 희색이 만면해했다 “아이구. 난 시름놓았소. 얼마나 놀랐는지?” “이번에 정말 수고했어요. 한 동네에 살면서 내 일을 많이 도와주고…” 여기까지 말한 선희는 저도몰래 눈물이 핑 돌아 얼굴을 벽쪽으로 돌렸다. “그런 생각은 말고 어서 병치료나 잘해야지” 이때 간호원이 들어서더니 창문가에 있는 침대로 다가가며 소리쳤다 “홍복실 근육주사에요” 간호원을 따라 눈길을 돌리던 선희는 그만 와뜰 놀라고 말았다.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바로 자기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복실이였다. 복실이는 선희와 눈길이 마주치자 인차 외면하는것이였다. “저 여자는 무슨 병이래요?” 선희는 자기감정을 억제하며 순이엄마와 물었다. “듣자니 차사고로 다친것이 그만 골결핵으로 악화되였다오. 참 불쌍도하지. 쯧쯧” 순이엄마는 동정어린 마음이였지만 선희는 마음이 깨고소해났다.  (속담에 죄는 죄대로 간단 말이 바로 저런년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이렇게 저주하는 선희의 머리속에는 바로 7년전의 일이 떠올랐다. 어느날 선희의 집에 복실이가 찾아왔다.  . 그들은 동창생이라 만나자마자 얼싸안았다. 학교때는 그렇게도 절친한 사이였는데 졸업후 복실이는 타곳의 어느농촌에 시집갔고 선희는 앉은 석동의 신세를 면치못하고 태여난 곳에 삶의 터전을 닦았다.  그러다보니 그둘간은 서로 련락이 크게 없었다. 몇번이나 동창모임은 있었지만 복실이는 장기환자인 남편을 위해 대도시로 돈벌러 갔기에 만나지못했다. 그래서 은근히 복실이를 보고싶어했는데 이렇게 찾아온것이다. 선희는 반가움을 표시하기 위해 복실이를  데리고 진소재지 식당으로 갔다 그들은 서로 술을 붓고 마시면서 수많은 이야기로 저녁때까지 보냈다. 헤여질무렵 복실이가 선희보고 말했다. “우리동창들 대부분 한국에 갔는데 나도 갈가해.” “ 그럼 가야지. 나는 가고싶어도 일 못하니…또 남편이 이미 갔으니 괜찮아. 한사람은 집에서 아이라도 돌봐야지” “네 말이 맞아. 한사람만 출국해도 살만하거든. 그런데  돈 3만원만 빌려주렴. 한국에 시집간 사촌동생 남편이 초청장을 만들어주겠는데 이만한 돈을 달라는구나” “돈은 아직 없는데 어쩔가? 남편도 인제 간지 반년밖에 안되니 말이다. 정말 사정이 딱하구나” 선희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동창이라고 믿고 이렇게 왔겠는데… “오늘 여기서 돈 못 빌리면 정말 빌릴곳이 없어. 병 많은 남자를 만나서 내 지금껏 고생 얼마나 많았는지?” 여지까지 말한 복실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다. 선희는 마음이 몹시 측은해났다. 복실이는 어릴때 일찍 엄마를 잃고 계모의 손에서 눈치밥을 먹으면서 자랐다. 계모가 싫어서 스무살에 시집간 복실이건만 병 많은 남편을 만날줄이야… “가만, 내 우리사촌시형한테서 먼저 돌릴게. 며칠전에 한국에 시집간 딸이 돈을 보냈다더라.” 그날로 선희는 사정사정하며 시형한테서 돈을 가져다가 복실이 손에 쥐여주었다. “정말 동창생이 제일이란 말이 맞아. 내 인제 몇달후에 꼭 갚아줄게” 복실이는 떠나갔다. 처음에는 전화가 드문드문 오던 복실이가 후에는 소식이 없었다. 달이 가고 해가 지고 하면서 어느덧 반년이 되였다. 그래도  복실이는 돈은 켜녕 전화도 없었다. 후에 선희는 남편이 힘들게 번 돈 3만원으로 시형네 빚을 갚아버렸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통곡하였다. 세월은 흘러 일년 이년이 지났다.   선희는 실망하지 않고 사처로 소문하면서 복실이 행방을 알려했으나 많은 동창생들이 모두가 모른다는것이였다. (아니 이 몹쓸년이 이 지구 어느곳에 숨었을가?) 그동안 선희는 그 돈 때문에 밤잠 얼마나 설쳤고 눈물 또한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생각할수록 가슴은 란도질하는것같았다…. 그런데 7년전에 상처를 준 복실이와 한 병실에 누워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했다. 선희는 복실이를 붙잡고 한바탕 분풀이를 할가하다가 참았다. 아직은 환자이고 또 병실에서 떠들고싶지않았다. 인제 수술자리가 완전히 아물면 단단히 해내려고 잡도리했다. 선희가 수술자리 실 뽑는 날 아침이였다. 그녀가 눈을 떴을때 베게우에 쪽지가 있었다. 그것을 펼쳐보니 복실이가 쓴 쪽지였다. 선희야:  난 딱한 사정이 있어서 퇴원한다. 나는 이 며칠간 줄곧 너의 눈총을 받으면서 한 병실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난 널 조금도 원망하지 않아. 왜냐하면 내가 나쁜 여자기때문이야. 솔직히 말하면 난 그때 너한테서 꾼 돈으로 한국에 가려고 했었는데 일주일만에 비자가 나온다는 어느사람한테 돈을 맡겼는데 그만 그 사람이 그 돈 챙겨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졌어.. 너에게 이런 정황을 알려줄가하다가 내가 빚을 갚기싫어하는 수작이라고 오해할가봐 그만두었는데 결국 모두 내 잘못이였어. 어찌보면 나도 피해자지만 그래도 너하고는 성질이 달라. 선희야. 이 인간때문에 그동안 네가 마음고생 또 얼마나 많았겠니? 난 알고도 남음이 있어. 난 얼마전에 이런 못된 병에 걸렸는데 병원에서 수술하라는데 포기하겠어. 그 돈이면 먼저 너의 빚을 갚는게 옳다고 생각했단말이다. 선희가 이 나쁜인간을 용서해다우. 그리고 잊어다오. 돈 3만5천원을 너의 이불밑에 넣었다. 5천원으로 네가 여지껏 받은 상처를 치료할수는 없다지만 그러나 나의 속죄로 생각하고 받아줘. 나는 간다 아마도 내가 오래간 정을 묻어둔 복재촌으로 가야겠다. 인제 거기서 생명을 마칠가한다.. 인제 얼마를 살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안녕히 복실 올림 여기까지 읽은 선희의 손이 떨렸다. 그리고 마음도 착찹해났다. 복실이를 증오해야할지 동정해야 할지 혹은 용서해야 할지…딱히 말하기 어려웠다. 선희는 실을 뽑은후 곧장 복실이를 찾아떠났다. 그녀는 복실이를 용서해주리라 마음먹었다.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머리우에서 날아예고 있었다. 2011년 1월
1    느낌 자체가 곧 행복이였다 댓글:  조회:589  추천:0  2012-03-29
느낌자체가 곧 행복이다. 박영옥(안도현)   며칠전 나는  친구한테로부터 가을맞이 들놀이가 있으니 나더러 도시락을 준비하여가지고 승리촌마을 앞산 기슭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러잖아도 더 춥기 전에 한번 들놀이 생각이 있었는데 얼씨구 좋다고 나는 여러가지 특색적인 음식을 준비하여가지고 지점에 갔다. 오참시간이 아직 멀었는지라  친구들이 모두 산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산위에는 등산대들이 힘을 모아 잘 닦아놓은 놀이터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로 올라갔다온 친구들의 입에서  그 놀이터가 굉장히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은바가 있었다. 뭐 그네도 있고 나무걸상도 있고 평평하게 닦아놓은  운동장도… 어릴때 시골에서 자랐고 지금은 또 자그마한 현성에서 살고있는 나는 이런것같은건 크게 신기하게 느껴지지않았다. 그러나 소나무로 꽉 덮힌 산길로 올라가는 그 기분. 그리고 나처럼 불편한 다리로  산우로 오름으로서의 그 쾌감을 감수하고싶은 것이였다. 그리고 그산위의 경치는 그 어느산보다 더 아름답고 그 산위의 공기는 어느산보다 더 깨끗하고 시원할거라는 상상으로 늘 가슴을 들먹이였다.  “언제부터 저 산위로 한번 올라가봤으면하던 당신이 아니오? 오늘 내가 곁에 있을때 한번 그 소원을 풀어 보는게 어때? 내가 도와줄테니 산에 올라가기오” 함께 동행했던 남편이 이렇게 말하셨다. 나는 남편이 고맙긴했지만 머리를 저었다. 산이 높은건 더 말치않고서라도 일찍 오직 평길만 걸을수 있게 고정수술한 두 발목으로 올리막을 걷는단건 너무도 힘들다. 그래도 남편이 무작정 나를 이끌었다. 나는 막무가내라는듯 남편의 손을 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를 걷지않았는데  몸에 벌써부터 땀이 났다. 나는 땀을 훔치며 그만두자고 했지만 남편은 기어코 견지하잔다. 그래서 또 한걸음 한걸음 톱아올랐다. 고정된 발목은 어찌도 불편하고 힘든지? 매 한발자욱 내딜때마다 정말 천근 무게를 옮기는것같이 힘들었다. 아예 그만 돌아설가하다가 아내의 자그만한 소망을 풀어주려고하는 남편의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 나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상큼한 산바람이 나의 얼굴을 애무해주었다. 나는 붉게 상기된 얼굴의 땀을 훔치며 남편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또 앞으로 간신히 발걸음 옮겼다 한걸음 또 한걸음 …다른 친구들은 벌써 내려오는데 나는 아직도 올라가고있으니 참. 나를 보는 친구들이 힘내라고 소리치기도했고 또 인제 한참만 올라가면 된다고도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나는 끝내 꼭대기까지 올랐다. 승리자의 쾌감이 나의 온 몸을 감돌았다.  나는 너무도 좋아서 어린애처럼 그네도 타보고 돌걸상에도 앉아보고하면서 도무지 진정할수 없었다.. 정오의 햇님이 나를 반겨 생글거렸다. 나는 하늘이 너무도 푸르러 가슴이 설레였고 해님이 너무 따사롭고 정다워서 가슴이 설레였고  미풍에 하느작대며 춤추는 숲으로해서 가슴이 설레였다. 나의  가슴은 끝없이  설레이기만 했다. “오늘 당신 참 고마웠어요. 그리고 나 지금 참 행복해요.” 나는 남편의 손을 살며시 쥐고 이렇게 속삭였다. 장애로 된 다리고 그토록 힘든 올리막길을 정복했으니 행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두 무척 행복해” “당신은 왜 행복해요” 그래 남편은 왜 행복하실가? 나 때문에 남편 너무도 힘드셨겠는데…  “나 왜 행복한지 알어? 다른사람이 소원을 이루게 도와줬으니 행복한거야” 아 원래 행복이란 별게 아니였다. 이 세상의 모든걸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함을 느끼면  그 자체가 곧 행복인것이였다. 그래서 나도 남편도 그토록 행복한것이였으리라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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