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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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    나의 세 어머님 댓글:  조회:1820  추천:0  2021-11-12
나의 세 어머님 오기활 나에게는 생모, 계모, 장모가 있었지만 이들은 나의 입에서 “어머님”이라는 부름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생모 전정숙 생모는 내가 말을 번지기도 전에 사망하고 계모는 ‘후어머니’라는 신분 때문에 ‘후어머니’이라 불렀고 장모님을 처음 만났을 때 년세가 70대이다 보니 생전 엄마를 불러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머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그냥 보이는 대로 ‘로인님’이라 불렀다.   엄마 전정숙(1919ㅡ1948년)은 나를 낳고 15개월 만인 32세에 사망하셨기에 엄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30대가 돼서야 엄마의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나는 외가집이 전씨라는 것만 알았지 엄마의 이름은 몰랐다. 엄마의 이름을 몰라서 난처해보기는 1973년 연변농학원에서 입당할 때였다. 입당 서류에 엄마의 이름을 올려야 하는데 엄마의 이름을 몰라서 난처해하다가 ‘조직에서 간대루야 몇십년전에 사망한 사람을 조사하겠는가’하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나름 대로 전정숙이라고 써넣었다. 그 후 도문시 홍광향 축목수의소 소장으로 있을 때의 1975년의 어느 날 사업차로 홍광향 오공 7대에 갔다. 그 때 몇년전부터 알고 지내던 리창순씨를 만나 그의 집에서 마련한 점심 술상에서 서로 얘기를 나누던중 우연하게도 창순씨의 어머니가 우리 엄마의 사촌 녀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래서 엄마의 이름을 물었더니 엄마의 애명이 ‘꽃분이’이라는 것만 알았지 본명은 몰랐다. 1976년에 훈춘에 갔다가 엄마의 큰 언니를 찾게 되고 큰 이모네 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면서 외가집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그래도 네 에미는 천명이였다…” 큰 이모는 이렇게 말문을 열며 이왕지사를 말했다. “어느 하루 내가 동네 마실을 갔다오는 데 집 동쪽에 자리한 퇴비장 부근에서 아기의 울음 소리가 나기에 가까이에 가보니 글쎄 그 애기가 바로 몇달전에 낳은 내동생이더라. 나는 너무 놀라 애기를 꼭 안고 정신없이 집에 들어서니 울어서 눈이 둥둥 부은 아버지가 하는 말씀이 ‘여러 식솔에 집이 하도 구차해서 가정형편이 좋은 마음 착한 사람이 가져다 잘 키우라고 아이를 포대기에 꽁꽁 싸서 따뜻한 재무지 우에 놓았다’라고 하더라.” 큰 이모는 생활난으로 둘째 녀동생도 어릴 때 한족집의 시녀로 보냈다고 했다. 70대가 다 된 이모는 기억력도 좋았다. 나는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눈물겨운 가정사를 듣다가 무심중에 엄마의 이름이 무엇인가고 물었더니 글쎄 전정숙이라고 답하지 않겠는가. “전정숙이라구요?” 내가 너무 놀란 표정으로 반문하니 이모는 제법 ‘全貞淑’이라고 썼다. 세상에 이런 일이? 내가 엄마의 이름과 관계되는 이야기를 꺼내자 큰 이모는 “네가 용케도 엄마 이름을 맞게 썼구나!”며 “그래도 무엇이 통하는 게 있는 가 보다”며 희한해하셨다. 2014년 11월 18일, 한창 눈을 치고 있는 데 셋째 누님 오금자(당시 71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라비요? 올해에도 엄마가 하늘에서 눈 이불을 보냈구만!” , “눈 이불이라니?”, “엄마가 세상을 뜬 후 65년간 해마다 제사 날인 음력 10월 15일이면 눈이 내렸소.” 뜻밖의 전화를 받고 방금까지도 부담으로만 생각했던 아름차던 눈 마당이 하늘에서 엄마가 펴주는 흰 이불이라고 생각하니 일손이 잡히지 않아 곧장 셋째 누님네 집으로 향했다. “누님, 나는 엄마 제사 날에 해마다 눈이 내린다는 말을 처음 듣소. 그 눈이 엄마가 우리를 그리며 흘리는 눈물이 아닐가요? ” 우리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서로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누님은 엄마 기억이 있소?”   2000년 9월 중순에 찍은 필자의 형제 (앞줄 왼쪽으로부터 필자의 동생 오기용, 큰 누님 오계옥, 필자, 뒤줄 왼쪽으로부터 둘째 누님 오순옥, 셋째 누님 오금자)   “글쎄…다섯살 때 큰길에서 빈 마대를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렸는데 엄마가 욕할가봐 울던 일이 생각나고, 엄마가 사망할 때 어른들이 엄마의 입을 벌리고 ‘구술’을 넣으면서 ‘자식들이 배불리 먹게 해달라’며 부탁하던 일이 생각나구…” 6살에 엄마를 잃은 셋째 누님의 엄마 이야기가 기껏해야 이뿐이였다. 나는 80세가 다된 큰 누님 오계옥은 치매로 아무 것도 모르기에 왕청에 있는 둘째 누님 오순옥에게 전화를 하니 둘째 누님도 엄마 제사날이면 해마다 눈이 내린다며 엄마 얘기를 했다. “엄마는 결혼 후 10년이나 큰집과 같이 살다가 분가한 후 아버지께서 병으로 일을 못하게 되자 혼자서 농사일로 바삐 돌아치다가 우리 네 형제를 남기고 세상 떴소.” “엄마가 돌아가실 때 큰 언니는 13살, 나는 (둘째 오순옥) 열살, 금자가 여섯 살, 오라비는 두살이였소” 둘째 누님에 따르면 그 때 우리 집이 매우 가난하여 여름에 엄마가 신을 신고 다니는 것을 못 봤다고 한다. 엄마가 사망한 1948년에 동네분들의 도움으로 우리 집에서는 제일 마지막에 탈곡을 끝냈는데 엄마는 그 날에 촉한을 만나 병에 걸려 1주일을 앓다가 사망했다. 림종전에 엄마는 혀가 굳어져 겨우 한마디씩 이런 말을 남겼단다. “물남(곡수)에서 시아버님이 이 둘째 며느리를 빨리 오라고 부른다. 큰 형님이 저 철부지들을 거둘라니 얼마나 고생 하겠슴둥… 기활이를 한번 더 보고 가겠으꾸마!” 둘째 누님은 엄마가 돌아가시자 금자의 ‘울음병’과 나의 병이 거짓처럼 떨어졌다고 했다. 지난 세기 70년대에 동네 전길선아주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 엄마는 체격이 크고 마음이 한량이 없다 했다. 아버지가 술 끝에 말다툼을 하려면 일에 지친 엄마는 “싸울 맥이 없으니 내가 입안의 밥을 다 삼킨 후에 싸우깁소”라고 하며 고비를 넘겼다 한다. 엄마가 해마다 자식들에게 눈 이불을 내려보낸다는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가 ‘누구를 닮았다’는 선색을 알고 엄마와 비슷하게 생긴 외가 친척의 원본 사진에 비춰 모 화백으로부터 엄마의 초상을 그려서 고이 모셨다.   계모 김수동 계모 김수동(1927ㅡ2001년)의 이야기는 누님들에게서 들었다.   엄마가 사망한 이듬해에 아버지는 김수동과 재혼하였다. 계모는 10대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1녀 2남중 맏이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천보산 동광에서 설계원으로 있었다. 청춘과부로 보내온 계모의 친정 엄마는 “귀한 딸을 나이 든 가난한 남자한테 시집을 보내면 좋다”는 어느 점쟁이의 말을 듣고 나어린 딸을 목단강시 정미소에서 삯일을 하는 리씨 성의 남자한테 시집을 보냈다. 그런데 결혼해서 얼마 안돼 리씨가 1946년 5월에 한국 경기도 안성시에서 10여리 떨어진 고향에 간다기에 계모도 남편을 따라 한국에 갔다. 친정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겨우 한달만에 중국에로 돌아왔다. 아들 돌전에 남편이 와서 아들 이름을 리덕선이라고 짓고 돌생일을 쇠준 후 다시 한국에로 돌아가면서 생리별했다. 1994년, 1996년 아들 리덕선이 부친 리관현을 찾았지만 종무소식이였다. 계모는 친정 엄마, 아들 리덕선과 함께 천보산에서 보내다가 22살에 세살 짜리 아들을 데리고 10년 년상 농민인 우리 아버지와 재혼했다. 1950년 6월 11일에 나와 배다른 동생인 오기용을 낳았다. 그 때 대학생들이 청혼해도 재혼을 안하겠다던 계모는 우리 아버지의 멋진 인물에 남자다운 매력에 반했는지 아니면 소개자를 믿고 재혼했는지 아무튼 손시계까지 차고 자식많은 농민한테 시집을 왔다고 동네서 후론이 있었다 한다. 계모는 23세에 여섯 자식의 어머니로 되였는데 계모와 큰딸 간의 년령 차가 9년 밖에 안되였다. 나는 처음부터 계모를 “후엄마”라고 부른 데서 아버지가 안해 보기가 난처했던지 나더러 “후엄마”라고 부르지 말고 “엄마”라고 부르라고 몇번이나 당부했다. 아버지는 당당한 설계원으로 있던 ‘후어머니’가 20대 초반에 여섯 자식 어머니로 되여 고생하는 것이 측은했던지 재혼하여 2년도 안돼 ‘세 딸을 시집보낸 후 재결합한다’는 조건으로 ‘합의 리혼’을 하였다. 리혼하던 날 아버지는 결혼하듯 안해더러 치마저고리를 입고 술상까지 차리고 동네는 물론 구정부 간부까지 초대했다. 그 후 계모는 리씨 아들을 데리고 살면서 재결합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8년 후에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생을 포기하고 목에 바를 매고 자결하려다가 동네 분들에게 발견되여 구원되였다. 결국 계모는 고급 공정사로 정년퇴직했고 큰아들이 50대에 차사고로 식물인이 되자 연길의 모 경로원에서 몇년을 보내다가 향년 74세로 2001년에 사망하였다.   장모 김옥녀 장모 김옥녀(1906ㅡ1989년)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벌써 70대 로인이였다. 안해에 따르면 장모님은 12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8명은 요절되고 남은 2남 2녀중 맏이 큰언니는 해방전에 조선으로 갔고 큰아들은 결혼하자 참군하여 사평해방 전투에서 희생되였다. 그러니 장모님은 아홉 자식을 가슴속에 묻었으니 평생 눈물과 동무하며 살았다.   한번도 “엄마”라는 두 글자를 불러보지 못해 장모님을 만나서 “어머님”이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고 게다가 70대 로인이라 첫 눈에 보이는 그대로 ‘로인님’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큰사위는 본 적이 없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막내 사위마저 “어머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니 장모님이 서운해 할 것은 물론 처가 편에서 “저 사람이 부실하지 않는가?”며 후론을 했다고 한다. 나는 장모님의 사위 사랑에서 처음 엄마의 사랑을 피부로 느꼈다. 1975년 10월 1일 우리가 결혼할 때 처가집은 대흥구립업국 청산림장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청산림장은 대황구에서 6, 7리 떨어진 영벽 마을에서 산길로 60리 길을 더 가야 하는 깊은 산골이였다. 그 때까지도 뻐스가 통하지 않아 60리 길을 도보로 다녔다. 1976년 늦가을의 어느 저녁 무렵, 장모님은 동네에서 개추렴을 했다며 사위를 대접하려고 노란색 비닐통에 개고기국을 들고 오셨다. 청산림장에서 대황구까지 66리, 대황구에서 기차 타고 130리나 떨어져있는 도문까지 개고기국을 들고 온 장모님을 본 나는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어서 감사하다는 말 대신 “대흥구에서 도문까지 오는 왕복 차비만도 이 개고기국물보다 더 비싸꾸마...”, “이런 사위 사랑을 두번 다시 하지 맙소”하며 큰소리로 랭대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장모님이 얼마나 서운해 하셨을가?! 또 어느 한번 장모님은 고령에 산을 넘나들며 위병에 좋다는 삽주뿌리를 캐서 알뜰히 말리워 가루까지 내서 들고 오셨다. 초겨월의 어느 날 장모님은 사위에게 털실 옷을 떠 입히겠다고 농촌에서 양털을 사서는 씻고 말리우고 실을 뽑아서 가져오셨다. 장모님은 7년을 사이 두고 출생한 나의 아들딸들도 등에 엎고 키우셨다. 장모님 생전에 제일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다녀 온 날은 1989년 6월 1일이였다. 그 때 우리는 자체로 집을 지으려고 집터를 팠다. 장모님은 새로 판 집터를 보고 기뻐하셨다. 장모님은 “이번 걸음이 마지막 걸음일 것 같다”며 큰 병에 인삼담근 술까지 사가지고 오셨다. 장모님 말 그대로 장모님은 새로 지은 우리 집을 보지 못하고 1989년 8월 26일에 향년 83세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비록 32년이란 짧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8년 만에 하늘 나라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재회하였다. 엄마가 두고 떠난 네 자식은 모두 무탈하게 잘 자라 지난해 큰딸인 나의 큰 누님은 86세에 돌아 가셨고 셋째 딸은 코로나19로 인한 격리로 한국의 모 경로당에서 자식들을 보지 못한 채 뇌출혈로 78세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사진 한장도 남기지 못하고 급급히 떠나가셨지만 당시 두살 밖에 안된 아들의 효도로 본명을 찾고 후세에 전할 수 있게 그림으로나마 초상을 남기게 되였으니 불행중 다행이라 하겠다. 계모는 비록 74세까지 살았지만 재혼 날을 합쳐봐도 부부생활을 2년도 넘기지 못하고 청춘과부로 보냈다. 그가 낳은 두 아들중 리씨는 50대에 차사고로 식물인이 되여 몇년을 시달리다가 60대 초반에 사망하고 오씨는 50대에 중병으로 사망했으니 계모의 삶은 더없이 비참하고 외로운 삶이였다. 장모님은 비록 전반생은 아홉 자식을 가슴에 묻고 말없는 눈물로 보냈지만 후반생은 막내 사위 덕에 외롭고 고독한 산골 마을을 떠나 딸 가까이에 있는 변강 도회지에서 생활하셨다. 장모님의 손끝에서 자란 외손자는 세계 명문대의 교수로 있고 외손녀도 사회의 떳떳한 일원으로 잘 보내고 있다. 한번도 “어머님”이라고 불러보지 못한 나는 이 글에서나마 세 어머님을 불러보련다. “어머님!” 길림신문
396    “만남”이란 말 아시죠? 댓글:  조회:2058  추천:1  2021-11-08
어제(10.31) 다사했던 10월의 달력막장을 넘기고나서 묵은자료를 정리하던 중에 필기첩두껑안에 그젯날 명심해 보관했던 편지한통을 발견하였다. 편지는33년전 도문시문화관 김원필선생이  한국의 조카(김영웅)한테서 받은 편지라며 오기자가 필요하면 갖고가라던 활자로인쇄한편지였다. 필자는 십수년전에 감명깊게  읽어본 편지를 오늘 재독하고서 (혼자만이 보기가 아쉽다)는 생각에서 편지를 여러분들과 공유하고저 한자도가감없이 그대로 올린다   원필 삼촌께!   그동안 별고없이 가족들 모두가 평안하신지요? 이곳은 참으로 다사다산했지만 그래도 지난 ‘98년을 아쉬움속에 보내고 언제나 그랬듯이 또다시 부푼 기대와 설레임으로 새해의 희망을 품고 오는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도문에서 “참으로 형제와 핏줄의 정이 이런 것이나 “하고 많은 것을 느끼고 왔습니다.  같은 핏줄이며 천척이라해도 초면에 너무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오니 너무나도 송구스럽고 또한 고맙기만합니다.  이제서야 안부를 전하려니 죄송하기만 하군요.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막상 글로 전하려니 솔직히 말씀드려서 별로 쓸 말이 없군요 갑작스런 만남과 초면이기 때문이 아닌가는 생각을합니다마는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만남”이란 말 아시죠? 그리고 “인연”이란 것도 아시겠죠? 이것만큼은 모두가 잊지않고 기억하면서 우리들 가슴속 깊이 간직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길을 가다 옷 깃을 스쳐도 5백생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부부가 되려면 천생의 인연이 되어야 하며 부모자식간이 되려면 3천생의 인연이 닿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형제, 일가친척이라해도 이 또한 무수한 인연이 없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것입니다. 일생을 50년만 계산하더라도 만남을 위해 얼마나 많은 긴 시간을 약속해야 했습니까?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들처럼 모든 것이 우연히 이루어지거나 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인정을 안합니다. 뼈를 깍는 아픔이 없이 , 땀흘린 노력도 없이 우연히 공짜로 얻어지거나 기적이 생긴다면 그건 불미한것이며 허공에 뜬 구름을 잡으려는 것과 똑 같습니다. 세상사 모든 치는 “자업자덕”(自业自德),즉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 인과응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문의 삼촌들과 친척들 그리고 한국 인천에 사는 우리들 모두는 우연히 이뤄진 만남이 아니라 무수한 생을 지어 쌓은 인연공덕에 의해 이뤄진 만남이기에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해하시지는 마시고 마음 편히 하시기를 바라면서 감히 한가지 부탁을 드려봅니다.  자세히는 모르겟지만 어쩌면 내가 잘 못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원철분가족들과 사촌들의 관계가 어디가 모르게 서먹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상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들이 어우러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못난 사람들은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잘난 사람은 못난이들을 위해주고 감싸주고 도와주면서 사는 것이 보람되고 생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부터는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과거의 집착을 털어버리고 보다 밝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누구나 과거에 머문다면 진정한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고 봅니다.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고 잠깐씩 여러나라를 다녀봤습니다만 어데를 가나 사람들 사는 곳은 모두 같더군요. 력사는 모두가 만남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만남이였고 자주 만날 수 없지마는 우리가 생을 다해 사라진 먼훗날에라도 력사가 그치지 않고 이어지기 위해서는 어쩌면 중요한 만남이 아니였는가? 하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를 위해 극진히 대접을 해주신 여러분께 다시한번 감사드리면서 아쉬움 속에 다사다난했던 무인’98년을 보내며 희망가득안 기묘년 새해에는 바라시는 모든 소망들이 꼭 이루어지시기를 이곳 한국에서 간절히 기원합니다. 끝으로 우리 모두 새로운 각오와 변화된 모습으로 힘차게 뛰여 봅시다. 《望 天 天 的 好 日!》                   1999년 1월 1일 새아침 仁天에서 조카 英雄 올립니다.   (독자들의 댓글을 부언합니다.)
395    “달력”은 명실공한 달력구실을 해야.. 댓글:  조회:2197  추천:0  2021-11-02
“달력”은 명실공한 달력구실을 해야... 오기활   필자는 해마다 이때면 새해달력준비로 서두르는데 원인은 한해의 월과 일의 주요행사를 달력에 문자기록을 남기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필자의 기억으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달력문화가 배기게 시작한 근 40년을 살펴보면 필자가 본 중국산달력은 거의 모두가 미인, 명인, 풍경...들로 달력장의 “수림”을 차지했고 “눈에 확띄여야 할” 달력속 일력들이 쇠외 된 “풀포기” 상이였다. 그러니 꼭 문자로 표기해야 할 행사일를 달력에 기록하려해도 글씨를 쓸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나라의 국문이 열린후 필자가 조선, 로씨야, 한국, 일본 등 나라들을 나들이하면서 만난 달력은 완전히 명실공한 달력으로서 달력장마다에 당월, 전월, 후월까지 알게쉽게 밝혀있고 그외도 국민들이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력사기념일, 국정휴가일, 절기, 량력, 음력, 일기록, 월기록 ....등 정치, 경제, 문화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두를 밝혔다.   이런 실정에서 필자는 해마다 년말이면  렴치를 무릅쓰고 해외에 있는 친척들게 “새해의 달력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명심한다.    이에 필자는 어느 문화용품을 경영하는 업주에게 달력문화에 관한 필자의 주장과 견해를 말했더니 하는 말이 “그때는 단위에서 공가돈으로 관계단위와 관계일군들게 달력쑹리(送礼)를 하기에 비싼 달력장사로 우리가 돈을 잘 벌었는데 지금은 공가에서 “쑹리”를 못하게하여 달력벌이가 안된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 밖에 필자는 지난 10월초에는 오래간 실무로 알고지내는 연길시 모 인쇄공장 공장장에게 상기 현상을 반영하면서 세가지 달력견본까지 보내며 “사용호들의 수요에 따라 달력구실을하는 달력을 출품하면 꼭 전망이 밝을것이다”고 건의했는데 아직까지는 회답이 없다.    필자는 인쇄업경영업주들이 소비자들에게 눈을 돌려 사로를 찾는다면 새로운 시장이 개척될것이라고 믿어진다. .  
394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40) 댓글:  조회:1648  추천:0  2021-11-01
                                       제 3 부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3, 90대 고령의 “구멍난 양말” 례찬  “박선생이 지구촌의 ‘해당화대통령’으로 불릴 것이니 지금부터 품위 있는 대통령걸음을 련습하세요… ” 이는 지난 5월 7일 아침 식사 때 조선족의 “리시진” (김수철. 93세, 연변농학원교수, 식물박사)이  40년이나 년하인 제자(박영호, 54)에게 술을 권하며 하는 유모아이다. 훈춘시농업방송학교부교장 박영호(정교수급 농업기술추광연구원)는 연변농학원을 졸업하자 바람으로 훈춘국영농장에 터를 잡고30여 년간을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원예사업에  충성하면서 20여 종의 우수한 과수품종을 육종, 그가 육종한 사과, 복숭아, 해당화는 관상성이 좋은데서 시장전망이  밝고 특히 그가 육종한 “훈춘해당화”의 과일은아주 훌륭한 건강식품으로 독일이나 이딸리아의 해당화(과일)를 초과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영호연구원과 김수철교수   2003년에 김수철교수는 박영호더러 “경신해당화에 신경을 쓰라”고 건의, 그에 따라 박영호는 “경신해당화”(훈춘해당화)육종사업을 시작, 10여 년간의 알찬육종성과로 그의 해당화육종과업이 국가계획과 성급 과학연구항목으로 선정 되였다. 계속하여 김교수는박영호를 “미츄린”에 비하며(당자는 ‘원예해호자’로 자칭) 박영호의 “구멍난 양발”을 례찬한다. ㅡ 어제 점심식사 때 보니 박선생의 양말에 큰 구멍이 났더군요. 이는 그만큼 박선생이 많이 걸었음을 증명합니다. 박영호는 자기가 신은 양말이 구멍이 난 것을 모를 수도 있고 아니면 알면서도 시간이 없어서 바꿔 신지 못할 수도 있지요. 만약 몰랐다면 박선생이 일상생활에서 데면함을 말하고 만약 알고도 바꿔 신지 못했다면 박선생의 사업이 그만큼이나 분망함을 설명합니다. 박선생이 신은 구멍이 난 양말에서 부인의 넉넉한 심성을 볼수 있습니다. 사시장철 산을 찾고 흙과 싸우는 남편을 부인이 탓하고 바가지를 긁는다면 박선생의 오늘과 같은 업적은 운운도 못하지요. ㅡ 박선생이 돈이 없어 양말을 못 삿을가요? 지금은 10원이면 양말 네 컬을 사는데 어제 점심에 박선생이 우리를 대접한 돈(326원)이면 아마도양말을 130여 컬레를 살수 있지요…허 허 허 ㅡ사람이 명성을 날리면 “관리”로 등용될수 있습니다. 만약에 관리로 된다면 일반적으로 자기의 삶이 아닌 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자리에서 제자에 대한 바람은 머리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을 하면서 자기의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해당화대통령’자리가 박선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말에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속담이 있듯이 “미츄린”의 사정을 “리시진”이 불 보듯 하였다. 김교수가 읊는 “구멍양말” 례찬이 “리시진”과 “미츄린”이 한 동전잎의 량면임을 말해준다. 일로매진(一路邁進)이란한 가지 뜻을 세우면 온힘을 다해 그 길을 걸어가야 함을 말하는 사자성어이다. 또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란 한 가지 일에 매달려 온 정성을 쓰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경구다. 해빛은 하나의 초점에 모아질 때만 불꽃을 피운다. 김수철교수와 박영호연구원은 “일로매진”정신과  “구멍난양말”로 오늘에 “리시진”과 “미츄린” 이란 별칭을 얻었다.                                 오기활                                  2017년 06월 26일(조글로)        
393    안개속의 고향마을 댓글:  조회:2811  추천:0  2021-10-29
                                               안개속의 고향마을                                                   손홍범 내가 살던 고향인 도문시 량수벌은 좀 특이하게 생겼다. 조선족 부락은 거개가 북쪽으로는 산기슭에 남쪽으로는 강을 두고 있다. 그런데 량수마을은 북쪽은 높이 쳐다보이는 언덕이고 언덕에 올라서면 넓은 벌이다.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 그제야 산이 나타난다.     교원사업을 할 때 유람으로 장백산아래 첫 동네란 숭선으로 간적이 있는데 그곳 지형이 량수와 같았다. 그러고 보면 량수지형은 장백산천지 주위의 마을 지형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한다.   언덕에 올라서면 량수벌 풍경 한눈에 안겨온다.   동쪽은 살구꽃에 잠겨있는 신흥동 마을인데(지금 영화촌이라고 부른다) 경치로 인기를 끌어 연변의 유명한 화가 임천의 작품에도 많이 오른 곳이다.   남쪽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 위에는 허리가 동강난 커다란 다리가 엎드려 있다.   왜놈들이 동북의 자원을 수탈해가려고 엄청 크고 견고하게 지었다. 2차대전후기 왜놈들은 도망갈 때 쏘련홍군의 추격을 막으려고 폭파해 끊어 버렸는데 그 소리와 진동에 멀리 마을의 돼지굴(돼지우리)의 돼지도 놀라서 한길 솟더란다. 지금은 관광유적지로 돈벌이에 이용되고 있다.   서쪽을 바라보면 만경대벌과 하서마을, 좀 뒤로는 하서4대마을이 있다. 이전엔 술을 빚는 집이 있었다하여 술칸부락이라고 불렀다.   량수마을 풍경은 또 어떠하더냐!   이른 아침 언덕위에 높이 솟은 새하얀 열사기념비 앞에 올라서면 연안보탑산에 오른 심경인데 언덕 아래로는 넘실거리는 흰 안개바다가 펼쳐진다. 량수마을과 마을 앞 푸른 논 어디라 없이 흰 비단 같은 안개에 잠겨 보일 듯 말듯하다.   그 무엇으로 형용하랴. 몽롱미를 자랑하는 그 모습, 너울 쓴 첫날각시마냥 어여쁘기만 하여라!   안개속의 집집마다 울바자엔 나팔꽃이 만발하고 열콩이 주렁졌으리라. 뜨락마다 노란 호박꽃 피고 파란오이 드리웠고 푸른 파 이슬에 젖었으리. 또 밤새 익은 토마토는 포기마다 매달려 빨간 얼굴 자랑하며 코흘리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한집, 두 집 굴뚝엔 파란연기 피어오를 때 마당에서도 풍노불 피기 시작하리라. 강아지는 허리 늘구며 채석에서 내려오고 병아리들은 울바자 밑에서 벌레 찾아 삐약 거리리.   아. 안개 덮은 고향마을아. 너는 기지개 켜며 잠을 깨는 내 사랑의 여인이 아닌가!   고향마을. 안개속의 고향마을아. 너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어여쁘더냐!?   나는 스피노자(구라파 철학가. 엥겔스는 그의 책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며 즐겼다고 한다)가 쓴 윤리학이란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그 책에는 사람의 정감에 관해서도 기하학적공식으로 수십 개 종목으로 나누어 언급 했는데 그 가운데 이런 공식이 있다   ㅡ한 사람이 다른 한사람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지 모를 때에는 반드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렇다. 나에 대한 맘속에 품은 사랑의 이유를 모를 때 사랑하게 된다. 그러니 내 연인의 깊은 맘속이 똑똑히 보일 때 보다 알릴 듯 말듯 희미하게 몽롱히 보이면 상상의 꽃 너울에 감겨 더 아름다워 보이는구나. 안개속의 고향마을도 그와 같으리로다.   그럼. 연애중인 그대가 더 열광적인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좋아 하는가 묻는다면 내 심정을 안개로 덮어두고 알려주지 말라. 미루면 더 좋으리라   ㅡ결혼식을 올린 후 알려드리겠어요   ㅡ아이를 낳은 후 이야기 하지요   ㅡ아이가 대학간 후 보자요   ㅡ아이가 결혼한 후 말하겠어요   마지막 이별을 앞두고   ㅡ이 못난 나만 믿고 끝까지 살아온 바보같은 사람아. 내가 어디가 좋았어?   라고 물으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려나.   ㅡ모르겠어요. 그냥 좋았어요. 저 세상 가서도 우리 함께 있자요.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으면   아.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사랑을 두고 목석인들 그 어찌 마음이 찢어지지 않겠는가. 어느 누가 말했던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아. 고향마을아. 너는 내 사랑. 내 여인. 부디 길이길이 예뻐다오. 꿈에만 보이지 말고 내 앞에 신기루로 나타나 다오. 그러면 이 내 마음 천방지축 달려가 네 품에 안기리라. 그리고 오래오래 흐느끼리라. 가슴 후련하도록. 
392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39) 댓글:  조회:1610  추천:0  2021-10-01
제3부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2, “로인세계” 2017년 1기 특별선정 인물 90대에 넘치는 20대의 싱싱한 기운 ㅡ “중국 길림성 식물도감”출판에 여생을 붙태우는 김수철교수 1925년 4월 1일, 연길현 조양천진 태양향황도촌 향양툰에서 출생한 김수철교수는 연변농학원(지금의 연변대학 농학원) 제1기 졸업생이다. 1950년부터 1987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장장 45년동안 농학부 식물학 교연실 강사, 교수로 있으면서 식물형태, 식물해부, 식물분류, 식물라틴어 등 교수 및 과학연구사업에 혼신을 불태웠다.  농학, 과수, 축목, 생물화학 등 농학원 전문반과 의학원 학생, 연구생들을 상대로 식물학, 수목학, 과수분류학, 라틴어 등 교수를 담당하면서 국가인재양성에도 뚜렸한 자국을 남겼다.  또한 한국 서울사립대학 박사연구생들의 장백산원정실습, 연변대학 의학원 한국반 학생들의 장백산 현지식물실습 등을 지도하였다. 김수철교수는 젊은 시절부터 일요일, 명절, 방학 등 휴일은 대부분 식물채집과 표본제작으로 바삐보냈다. “나는 길가의 풀을 먹고 지금까지 병원을 모르고 건강하게 삽니다,” 이는 김교수가 늘쌍 앞세우는 입버릇 자아소개다. 그만큼 그분은 식물에 대해 손금 보듯 환히 알고있었다. 1973년도에 김교수는 장백산아래 청산림장에서 15일간 우리 축목수의전업 학생들을 이끌고 중초약을 가르쳤다. 그때 김교수는 “식물퀴즈(알아맞추기)왕”이였다. 학생들이 어떤 식물을 물어봐도 그 식물의 학명, 별명, 생육지, 용도, 채집계절, 분포를 척척대답했다. 식물조사를 위해 해발 1000메터 되는 산정상을 톱아오르고 야수가 횡행하는 장백산밀림에서 우등불을 지피고 밤을 밝힌적이 얼마인지 모른다. 김교수는 고생을 마다하고 동북3성의 험산준령을 넘나들면서 목숨을 걸고 채집한 식물표본들로 표본실을 설립하였다. 2만 5000점에 달하는 장백산식물표본을 소장한 표본실은 이 방면의 교수 및 과학연구에 견실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김수철교수는 연변생물학회 리사장, 길림성식물학회 리사, 길림성초원학회 고문, 길림성자연자원(동부 자원식물, 목초, 중초약재 등)조사사업 기술고문, 중화인민공화국 동식물검역국(도문)기술고문 등 많은 사회적인 직무를 맡았다.  또 “연변중초약”“장백산 동북 경제식물지”등 저서를 편찬, 출판하여 중국축목사, 길림성정부농업위원회 등 부문에서 발급한 성과상과 길림성 로력모범영예를 수상하였다. 그가 “대중과학”에 발표한 “진달래”는 길림성 과학기술협회상을 수상, 그가 그린 사생화(버섯)는(中國長白山經濟植物彩色圖鑑, 延边人民出版社,1996) 한국서 출판한  “백두산버섯도감”에 수록되였다. 김교수는 선후로 “중국 동북 국화과 식물습유(拾遺), “중국 항암식물약리용의 현황과 전망”, “중국 장백산 경제식물” 등 가치가 높은 19편의 론문을 발표(국내 10편, 한국 8편, 일본 1편)했고 “장백산 동북 야생식물지” 등 9편의 저서를 펼쳐냈다. 2011년 3월 28일, 필자가 민간초약성능에 관한 독자들의 여러가지 질문에 답복을 주고저 졸업후 37년만에 김교수를 방문했다. 문밖까지 마중을 나온 교수님은 너무나 정정해보였다. 저으기 놀라는 필자의 모습과 물음에 교수님은 “나는 길가의 풀 덕분에 지금까지는 병원을 모르고 일반사람들보다 건강하게 삽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시작된 사제간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그동안 필자는 “조선족의 리시진”, ”식물학 왕중왕”, “실물학화백”으로 불리우는 김수철(93세)교수와 수차나 무릎을 마주했다. “책무지를 마주하고 길가의풀을 안주 삼고 장백산정기를 만끽”하며 살아온 김교수는 “시중에서 값이 비싸야 좋은 약이라는 편견을 청산해야한다”며 생당쑥, 익모초, 삽주, 골담초의 특별한 효능을 렬거하면서 “솔잎 한가지만으로도 많은 성인병을 막아낼수 있다.”며 자부심에 넘쳐 얘기한다. 1987년에 정년퇴직이후 김수철교수는 식물학연구의 새로운 황금시기를 맞이했다. 중한수교후 한국과 손잡고 연변에서 중초약재배기지를 마련하던중 조양천진 삼성촌의 풍수지리에 매혹되여 헐망한 농촌집과 토지 10여헥타르를 임대 맡았다. 그리고 정년직후에는 아예 이곳에 삶의 터전을 옮기고 25년간 중초약재배에 종사해왔다. 김교수는 다년간의 중초약 연구와 재배에 종사해온 경험에 비추어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변의 재래약초를 현대적설비로 가공한다면 값 싸고도 효능이 높은 약을 제조할수 있습니다.” “병원에서 쉽게 치료할수 없는 병을 쉽게 치료할 민간중약처방이 너무 나 많습니다.” 김교수는 중약은 무철에, 서약은 단발총에 비유하며 중초약의 무궁무진한 약효를 설명한다. “불이야! 하면 ‘앉은뱅이’도 벌떡 일어나서 도망친다고 하지 않습니까? 병들도 불을 만나면 쩔쩔매지요.” 김교수는 젊어서 병으로 한쪽 신장이 기능을 거의 상실한데서 한때는 농학원의 “절름발이교수”라는 별명이 뒤따르게 되였다. 그는 뜸으로 자기의 신장병을 뗐다고 한다. 2016년에 필자가 김수철교수(93세)를 방문했을 때 여전히 정정한 모습이였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귀를 잘 못 들을뿐 안경을 쓰지 않고도 책을 보고 원고를 집필했다. 그리고 5헥타르 밭에 콩농사를 지었다며 건강을 자랑했다. 아픈데도 없고 운신에 아무런 불편을 모르는 아버지를 곁들며 자식들이 아버지가 100세까지 문제 없다고 하자 김교수는 “생리학 리론대로 산다면 125세까지 산다.”며 장담했다. 그때 김교수님은 “중국 길림성 식물도감”편집출판준비로 사모님마저 딸집에 보내고 혼자서 식사를 챙겨가며 2600가지 식물표본을 그리기에 여념이없었다. “내가 정리하며 그리는 2600가지 식물그림을 화가들이 그리자면 아마 20명은 움직여야 할것이다. 그런데 화가들은 식물을 직접보지 못하고 그리다보니 꽃입이 다섯개인데 엉뚱하게 열개씩 그릴 때가 있다. 그래서 내가 일일이 손으로 이렇게 그리고있는것이다.” “나는 지금 죽을 준비로 자료를 정리한다. 정리해야 할 자료가 너무 많아서 흘러가는 시간이 정말 아깝다.” “이미 출판된 ‘길림성 식물명록’은 루락된 것이 많아서 내가 보충해야 한다.” 한장한장의 식물표본이 교수님의 필끝에서 생생히 살아났다. 교수님은 이 식물표본그림에 천연색사진을 배합하고저 지난여름에 만여원으로 촬영기재를 새로 준비해가지고 몇 달간이나 혼자 몸으로 내몽골 서북지구를 답사하면서 만여장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지난 10월 연변대학 로간부처, 연변대학 로과학기술사업자협회, 연변로교수협회 책임자들과 김수철교수의 학우대표들이 교수님을 방문했다. “여러분들이 고군분전하는 저를 위해 이렇게 집에까지 찾아와서 위문하니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여러분들이 저의 인생저녁(만년)에 아침(새 힘)을 보태주었습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을 잘하는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미국의 강철대왕이며 최고 자선가인 카네기는 한 사람이 취득한 업적에 사회의 힘과 노력이 85%을 점하고 개인의 노력과 힘이 15%를 점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저의 15%노력을 여러분들에게 회보하겠습니다.” 김교수는 이렇게 자세를 낮추며 대표적인 저서와 “중국 길림성 식물도감”을 출판하기 위하여 그린 “길림성 식물세밀화”를 보여주었다. 영원한 진행형교수, “중국 길림성 식물도감”출판을 위해 혼신을 몰붓는 김수철교수님의 여생이 진정 멋지고 자랑스럽다. 김수철교수님은 “길림성로력모범”으로 성과 국가급의 많은 상을 받은 과학자이기도 하다.   (“로년세계”편집부2017년 제1기 “이달의 인물” 특별기고)                                       오기활    
391    살아보고 결혼하라 댓글:  조회:2468  추천:0  2021-09-29
일전에 결혼전 동거를 주제로 연변, 북경, 상해, 천진, 광주, 청도 등 지역과 한국, 일본의 187명 조선족대학생(대학원)을 설문조사 한데 따르면 조사대상들의 86%가  찬성한다고 하였다. 지난 한 때 결혼전 동거가 입에 올라 이러쿵저렇쿵 하던 입씨름이 어제일이 였는 데 오늘에는 다민족국가에서, 평균문화수준이 제일 높다는 우리 조선족들의 대학생들의 설문조사대상의 86%가 결혼전 동거를 찬성을 한다니 실로 전통적인 정조관념과 결혼관념에 대한 도전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성공철학(자기계발)”의 “괴짜강사”로 불린 래리 윙켓은 “결혼이 대개는 리혼으로 끝난다는 것이 조금도 신기하거나 놀랍지 않다”며 “당신이 함께 살아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알수 없다” “두 사람이 일년간 함께 살아 보기전에는 결혼을 할수 없다는 법률이 통과되면 리혼률이 절반 이하로 줄어 들것”이라고 장담했다.  “당신이 함께 살아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알수 없다”에 동감이다. 자연계(인체)는 길항(吉抗)작용과 반(反)길항작용의 조화로 이뤄진다고 하지만 자석이 아닌 인간의 부부관계는 상반된 성질을 가진 사람에게 끌려 흡인돼 산다고 말하기 어렵다. 상반된 성질을 가진 부부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감정 하나로 이뤄진 부부관계는 일단 감정이 파괴되면 “님”이 “남”으로 되니깐.   래리 윙켓이 어느 기회에 “잘못된 결혼을 지속하기보다는 리혼을 하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하자 그의 곁에 있던 로인분이 무릎을 탁 치면서 “맞는 소리”라고 대 찬성을 하기에 래리 윙켓이 당신의 결혼년령이 얼만가고 물으니 62년이라고 하였다. 그래 당신은 잘못된 결혼을 지속하기보다는 리혼을 하는 편이 낫다면서도 “결혼회갑”이 지낫으니 당신의 영구결혼“비결”이 무엇인가는 반문에 로인은 “상대를 내 방식으로 바꾸려고 할 필요 없이 그냥 그 사람으로 놓아 둔데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명답이라 하겠다. 그래서 “결혼은 창문을 닫고는 못잔다는 사람과 창문을 열고는 못잔다는 사람간의 종교적 련합체”라고 한다. 완전한 인간이 없는 한 완전한 결혼도 있을수 없다. 리혼은 잘못된 결혼에 대한 정정이다. 필자는 “먼저 살아보고 결혼하면 리혼률이 줄어든다”는 래리 윙켓의 관점에 찬성이다. 그리고 “상대를 내 방식으로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 사람으로 놓아둔 채 유지하라”는 로인님의 “비결”을 “리혼항체”라 칭하고 싶다. . “먼저 살아보고 결혼”하면 지금의 “번개식” 결혼에 따르는 “뢰우식” 리혼이 줄것이고 “무계획생육”으로 초래되는 부모, 자식 및 사회적인 “후환”이 줄게 될 것이며 결혼식에 참가한 하객들에게 리혼으로 “답”하는 불미한 일들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오기활기자                  《길림신문》2009.3.3.)    
390    네번째로 꼬집는다! 댓글:  조회:2237  추천:0  2021-09-12
  어제(9일) 필자는 고향의 친구가 “내가 생전에 제일큰 대접을 받았다”며 보내온 동영상을 받았는데 내용인즉 지난 8일에 지낸 “전 주 가장아름다운 로인 회갑연”을 친구의 가족이 찍은듯한  짧막한 록상이였다.  친구의 기쁨인즉 내 기쁨이라 필자는 십초도 안되는 록상이 너무 아쉬워서 연변텔레비방송국의“연변소식”재방송을  기대했다. . 그런데 10일 아침 6시반에 재방송하는 “연변소식”(한어)을 보니“전 주가장아름다운 로인”들로  국가민위 전임 주임 리덕수를 선두로 거의 모두가 주장, 인대주임....등 직무를 지낸 선임 주1급 지도자들이였다.    그래서 다시 “연변일보”를 찾아 보니 9일자 “연변일보”에 “8.15 로인절을 경축하기 위해 주로년사업위원회는 올해에 ‘가장 아름다운 로인’으로 평의된 전 주 29명의 로인을 위해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로 가득한 풍성한 환갑연을 준비했다.”“환갑연은 알록달록한 한복을 차려입은 자녀와 사회 각계 인사들이 “아름다운 로인들”게 축배와 큰절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기원,자녀와 손님들의 축복에 로인들이 기쁨을 금치 못해 덩실덩실 춤을 췄다.”고 보도했다.  텔레비에서 방송한“연변소식”에 실망한 필자는 저도 몰래 (또 그 모양이구나!)며 네번째로 꼬집는 직언직필(直言直笔)로 필을 들었다.   첫번째의 직언직필은 2012년의“60명 조선족환잡잔치유감 3”이다.  2012년 8월 15일에  주정부에서 조직한 “60명 조선족환갑잔치”는 연변자치주성립 60돐 경축활동의 하나였다.   당 행사에 필자는“참 잘했다”는 평가와 함께“환갑을 지내고나면 ‘흉갑’이 된다”는 격으로 “잔치유감(遺憾)1,2.3”을  “길림신문”에 발표했다. 2012년 8월 16일자 “길림신문”은 “인생 60을 한 순회로 하는 조선족의 환감잔치는 조선민족의 미풍량속으로서 이미 국가급무형문화재로 등록되있다”고 밝히였다.  그러니까 조선족의 환갑은 인생 60을 단위로 하는 인생단계의 수자적인 개념이다. 비록 시대의 발전에 따라 지금은“60청춘, 70 환갑”이라고 말을 하지만 어째뜬 환갑(回甲)은  61세 생신을 말한다.  60갑자를 다 지내고 낳은 해의 간지가 다시 돌아온다는 의미로 환갑이고 다음해부터 60갑자가 다시 진행된다는 데서 62세의 생신이 진갑(進甲)이다.     수연 (壽宴)은 어른의 생신에 아래사람들이 상을 차리고 술을 올리며 어른들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전통적인 수연은 육순(六旬, 60 생신), 회갑(回甲,還甲 61 생신), 진갑(陳,進甲 62 생신), 미수(美壽, 66 생신),`칠순(稀壽,七旬, 70 생신),희수(喜壽 ,77 생신), 팔순(八旬,80 생신), 미수(米壽, 88 생신), 졸수(卒壽,九旬, 90 생신), `백수(白壽,99 생신)수연으로 나뉜다. 그런데 2012년“60명 환갑잔치”에 참가한 분들의 년세를 보니 자치주와 동갑(60)은 없고 최하가 64세, 연길시 하남가 백풍사회구역의 김옥금할머니는 87세였다. 그러니까 그번의 잔치는”60명환갑잔치”가 아닌 “60명 수연잔치”로 칭해야 한다.   두번째 직언직필은 2017년의“텔레비화면 유감 1,2,3”이다.   이글에 올린 필자의 유감(遺憾) 첫째는 주 로령사업위원회에서 조직한 “2017년 연변‘가장 아름다운 년장자(最美长者)”표창대회의 텔레비화면에서 본 "아름다운 년장자 "의 주인공의 거의 모두가 주 1 급 책임자를 지낸 지도자들이라는 것과“2017 룡정 제 8 회 중국조선족농부절 축제”의 텔레비화면도 현직 각급지도자와 선임 주 1 급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이하는 어느 스위스 화교가 중국기자와 한 얘기다. “나는 해마다 중국신문과 스위시신문을 함께 주문한다. 어떤 날 중국신문의 1 면은 3/2의 지면이 관리들의 기사였다.”  “스위스신문에는 국왕이나 총리, 부장들의 활동소식이 거의 없다. 있다면 간단한 ‘성냥갑’소식이 아니면 어느 부장이 탈세를 했다, 국비를 랑비했다는 등의 풍자적인 기사이다”  “내가 본데 따르면 중국신문은 관리를 위촌하고 스위스신문은 민생을 다룬다.” 유감의 둘째는 2017년  1월에 열린 주 3회(당대회, 인대회, 정협회)와 10월 11일에 열린 “전주 민족문화사업회의’에서 조선민족복장을 입은 조선족대표와 조선족주인공들이 우리말을 안하는 것이다  그래 자기 민족의 말조차 꺼려하는 지도자나 대표들이 자기 민족을 사랑한다면 어느만큼 사랑하겠는가? 언어문자를 상실하면 민족정체성이 사라지는데 말이다. 유감의 세째는 텔레비화면에서 출연하는 조선족들의 복장이다.  우리 민족의 복장차림은 평시는 평복, 일할 때는 로동복, 조상(弔喪)때는 상복, 명절과 례식에는 민족복장(례복)을 차려 입는것이 전통이다. 그런데 텔리비에서 보면 조선족들이 한복차림을 하고 사과배를 따거나  벼가을을했다.   필자는 상술한 화면을 볼때마다 (타민족들이 저 화면을 보고 조선족들을 어떻게 생각 할가?), (저 것은 아닌데…)라는 반감으로 울컥해 졌다.   세번째의 직언직필은 2017년의 “전 주 가장 아름다운년장자 표창 유감 1,2,3”이다.  필자가 2017년 8월 25일에 조직한 “전 주 가장 아름다운 년장자 표창”대회를 “유감으로 꼬집은 내용인즉 “전 주 가장아름다운 년장자"들에 주 1급 령도자들이 10%나 차지했다는 것, 그리고 텔레비화면에“가장 아름다운 년장자44명”에 주1급 령도들만 올렸다는 것이다.   네번째의 직언직필로  올해의“전 주 가장아름다운로인 회갑연”이다.   꼬집는 첫째는“전 주‘가장아름다운 로인’회갑연”을 환갑연이 아닌“수연례”라 해야 한다(친구의 환갑연이 지난지도 14년)는 것이고 둘째는 텔레비화면의“전 주 가장아름다운 로인”들로 몽땅 주1급 선임령도간부라는 것이다. 이한 현상을 상술한 례로 이미 꼬집었으니 본문에서 더는 전개하지  않겠다.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 그래서“평생기자”를 추구 하는 필자는 사회와 민족에 대한 기자의 책임감으로 무릇 사회와 민족의 형상에 불미한 “병”을 보기만 하면 .“평생기자”의 사명감으로 드팀없이 당당하게 직언직필을 할 것이다. 물론 어느 령도간부나 어느 해당부문의 눈치를 살필 것 없이. 당당하게 말이다.     오기활  
389    <<지치주성립경축의 노래>> 및 <<노래비>>를 말한다 댓글:  조회:2278  추천:0  2021-09-04
2012년 07월 24일 08시 49분 조회:7113 추천:4 작성자: 오기활     지난 1월 11일 필자는 자치주환갑을 맞아 지면을 통해 연변조선족자치주 리룡희주장에게  를 조직할것을 건의한후를 계속하여 등기우편으로  를 리룡희주장한테 부쳐드렸다.   타임캡슐이란 인류의 문화유산을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주고 보존하는 특수행사로서 인간이 이 세에 존재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특수방부처리를 한 용기에 당년 시대를 대표하고 기념하는 물건을 넣어 땅속에 보관시켰다가 먼 훗날에 후세들이 땅속의 발굴하여 보는 특수한 기념문화행사이다. 최초의 타임캡슐은 1939년 뉴욕만국박람회때 각종 일용품과 금품, 화확섬유, 공업재료, 곡물, 서적, 백과사전, 신문, 영화 등을 5000년 후에 개봉할 예정으로 150메터 지하에 묻었다. 그 후로 1965년 뉴욕세계박람회때, 1970년 일본 만국박람회때, 1985년 한국 중앙일보 창사 20주년 기념때, 1994년 한국 서울정도(定都) 600년 기념때 타임캡슐을 묻었다. 필자는 우리도 자치주회갑잔치기념행사에서  을 묻는다면 정녕 오늘의 력사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한 당대 주민(州民)들의 노력과 형상에 후세들이 긍지와 자랑을 감수할것이며 후세 또한 타임캡슐계주봉을 후세에 전하고 빛내기에 열과 성을 다 할 것이라 믿는다. 필자는 건주60주년기념타임캡슐행사로 내용물의 선정을 전국, 또는 전 지구촌의 조선민족을 대상하여 를 벌린다면 연변조선족자치주회갑명절이 필경 전국, 전 지구촌 조선민족의 대잔치로 부상될 것이라 믿어졌다. 이에 필자는 타임캡슐의 내용물로 를 추천하려고 하였다.  며칠후 필자는 에서 연길진달래광장에 노래비를 세운다는 기사를 읽고 크게 고무되였다. 노래비란 노랫말을 새긴 비석을 말한다. 《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는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성립과 함께 창작된 노래로 이 노래는 연변의 조선족들이 나라의 주인이 되고 자치권리를 부여받은 기쁨과 격정을 흥겨운 노래에 담은 력사적인 노래로 6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조선족들의 사랑을 받는 대표적인 노래다. 그러기에 2010년 연변 송해숙(73세)녀사가 2012년 연변TV음력설문예야회 리허설을 보고나서 고 즉설했다.     는 어느 시인이나 작곡가가 순간적인 령감이나 흥분으로 창작된 것이 아니다.   1952년 여름, 당시 연변지위 선전부장이였던 최채동지의 지시로 연변조선민족자치구(당년에는 자치구였음) 성립경축일에 부를 노래를 창작하기 위한 특별한 좌담모임이 소집되였다. 좌담회에 참가한 문예사업일군들은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의 성립과 함께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하에 조선족들이 자기 언어문자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던데로부터 국가의 주인으로 되였고 자유롭게 자기 언어문자로 창작하고 자치권리를 향수할수있게 된것에 크게 고무되여 드높은 열의와 적극성을 보였다. 좌담회후 문예사업일군들은 분분히 필을 들고 경축대회에서 부를 노래를 창작하였는데 창작된 허다한 노래속에서 차창준 작사, 김성민 작곡으로 된《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가 선정되였다. 연변조선민족자치구성립의 날인 1952년 9월 3일 오후 3시, 3만여명의 백의 민족의 남녀로소가 기쁨과 환희가 차넘치는 연길인민광장에서 를 부르고 또 불렀다.  필자는 이 노래는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을 만방에 알리는 로서 자치주 며 라고 칭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60돐을 맞아 이런 력사적인 의의를 가지는 불후의 노래를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영원한 기념비로 남기고저 연변조선족자치주문학예술계련합회와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연길시가정행복협회, 연변월마트무역유한회사 등 사회단체의 박서성, 한석윤, 전웅렬, 장진철 등 유지인사들은 《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기념비를 연길진달래광장에 세울것을 발기, 연변주당위 장안순서기는
388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련재 38) 댓글:  조회:1640  추천:0  2021-09-01
                               제 3부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1, 장백의 불로송 우리가 탄 승용차가 김수철교수님의 둘째아들댁문앞에 이르렀을 때 허리구부정한 늙은분이 끝신을 신고나와 계셨다. 저분이 그래 오늘 내가 찾아뵙자고한 김수철교수란 말인가 ! 올해91세라는 교수님은 보기좋게 허허웃으시며 나한테 왔다. 나는 허리굽혀 공손히 인사하면서 거쿨진 교수님의 두손을 잡았더니 교수님이 어찌나 으스러지게 잡는지 흠칫놀랐다. 그 년치에 비하면 너무나도 억센손아귀였다. 나는 교수님댁에 들어가서 교수님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비록 머리에 희슥희슥한 서리가 내렸어도 혈색이 좋은 면상에는 잔주름이 한오리도 없었다. 단 넓으신 이마에 깊은주름이 건너갔을 뿐이였다. 나는 김교수님에게 관계되는 자료를 많이읽고 왔다. 그러니 자연히 교수님이 왜서 허리가 이렇게 구부정했는가를 가늠했다. 젊어서부터 무거운 철통을 짊어지고 강을 건너 들을지나 산을 톱아오르며 식물을 채집하느라 너무도 고생하시여 허리가 이렇게 구부정했구나고 생각하면서 교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우러러보았다. 소탈하고 푸접이 좋은 김수철교수님과 나는 얼마지나지않아서 허물없는 사이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수 있게 되였다. 자습하여 인재로 나는 김교수의 자료를 보면서 의문난점이 있었다. 다름아닌 그가 대학교에 입학했다가 쫓겨난 신세인데 어떻게 대학교교수로 되였는가는 것이다. 김교수는1944년에 위만간도성 왕청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에 룡정의과대학에 입하엿는데 항일군정대학이 룡정의과대학을 이관받고 신입생들에 대한 정치재심에서 가정성분이 규편중농이라는데서 입학자격을 취소당했다. 그러다가 사람이 착하고 책임성이 강하며 파고드는 정신이 좋은덕에 연변농학원 생물학강좌실험원으로 일하게되였다 이런 실험원이 대학교교수로 된다는 것은 실로 조련치않은 일이였다. 알고보니 김교수도 여느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허심히 학습하고 부지런히 실천하면서 대담하게 개척하고 끈질긴노력을 경주하여 알찬열매를 가꾸어 냈던 것이다. 첫째, 허심히 과학지식을 학습하였다. 대학공부를 못하고 실험원으로 일하자니 모든 것을 처음부터 하나씩 배워야만했다. 그는 밤을 패가면서 대학교과서를 열심히 학습하면서 학생실험지도를 하였다. 1952년부터1959년까지 농학원조교로 교수일선에 나서게된 그에게는 과학지식이 더더욱 필요하게 되였다. 워낙 친취심이 강하고 탐구력이 강한 김교수는 교수하는 한편학습을 늦추지아니 하였다. 둘째, 부지런히 실천하였다. 식물학은 원래부터 말그대로 식물을 접촉해야만 한다. 하여1950년부터1958년까지 여름방학과 공일을 리용하여 연변각지와 백두산일대를 돌아다니며 식물표본을 3000점이나 수집정리하였다. 1959년부터6 5년까지 여름방학을 리용하여 동북3성을 돌아다니며 식물표본2500점을 수집정리하였다. 문화혁명기간에 남들은 혁명을 한답시고 돌아칠 때 김교수는 통화지구, 백두산일대, 동북3성, 내몽고, 산서, 해남도 등 성시의 50여개 산봉우리를 오르내리며  2500점의 식물표본을 채집정리하였다. 김교수는 발이 부르트도록 만리길을 걸어다니면서 눈이 아플정도로 몇천종의식물을 관찰하고 손이 저리도록 25000점의 식물표본을 수집정리하였다. 이렇게 채집한 표본들을 잎과 줄기, 뿌리를 관찰분석한 기초상에서 식물을 우선 무화식물과 유화식물로 나누고 무화식물을 또 뀬식물과 이끼식물로, 유화식물은 라자식물과 피자식물로 분류한 다음 목, 과, 속, 종으로 분류하며 식물학의 과학연구원시자료를 축적하였다. 김교수는 1960년부터ㅡ1978년까지 강사로, 1980년에 부교수로 진급하였다. 그는 대학강당에서 “식물형태학”, “식물해부학”, “식물분류학”, “식물라틴어학”등 과목을 강의하였다. 셋째, 자기가 수집한 재료에  대한 끈질긴연구를 하였다. 그는 1977년에  “연변중초약”(연변인민출판사)을 출판하고1984년에 “중국민족약지”(인민출판사), 1982년에 “연변사료용식물명록”(연변인민출판사), 1987년퇴직전까지 함금량이 높은5편의 론문을 발표하였다. 김교수는 비록 학벌도 학위도 없었지만 자기가 창조한 과학연구성과와 교수성과로 1985년7월에 끝내 교육계의 최고직함인 교수직함을 따내였다. 김수철교수야말로 명실공한 자학으로 성공한 교수이다. 식물학박사 김교수에게는 정년퇴직이란 있을수 없었다. 1987년 그는 퇴직을 하자 재직기간에 쌓은 원시재료를 기초로 새로운 과학지식과 과학연구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퇴직하여 지금까지 저작과 론문 17권(편)을 중국, 한국, 일본에서 발표, 출판하였다.1992년에 한국“자원식물학회지”에 “중국항암식물약리용현황과 전망”, “백두산항암식물유전자원조사연구보고”란인기론문을발표, 2007년에 일본동경대학 “아세아주환경자원연구중심학술보고대회”에서 “중국장백산자원식물”이란 론문을 발표하여 국제적인 중시를 불러이르켰다. 김교수는 식물학연구국제무대에로 진출하기위하여 완강한 의력으로 영어공부에 몰두하였다. 그는 1941년 연길국민고등학교에 다닐 때 영어교과서1책을 배운 밑천으로 문화혁명기간에 영어교원을 청하여 10여일을 배우고 자기로“영어단어카드”를 만들어 가지고다니며 외우고 또 외웠고 1980년대부터는 록음기를 리용하여 영어를 배웠고1990년대부터는vcD를 리용하여 영어를 자습하였다. 1991년 한국에서 조직하는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자니 영문으로된 론문이 아니면 안된다기에 중의학방면의 “영어공구서적”, “중의중한영한사전”등 공구서적과 동무하면서 “한영식물사전”까지 자편하면서 영어공부에 몰두하였다. 하여 조선어, 한어, 일어, 영어로 론문을 쓸수있는 학자로 식물학국제무대에 등단하게되였다. 김교수에게는 식물원시표본도 필요하지만 식물사진표본과 식물그림도 수요되였다 .하여 년세가 많은 그가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미술교원을 찾아가서 스켓취방법을 배워채집한 식물을 그림으로그릴수 있게 되였다. 이렇게되여 김교수는 현재3200종의 식물표본을 원시자료, 그림자료, 사진자료로 만들어 중화민족의식물학계에 귀중한 재부를 남겨놓았다. 김교수는 백두산밀림속의수천수백종의 식물을 조선어, 라틴어로  학명, 별명, 산지,약효등 전부를 장악한 식물학박사급수준에 오른 학자로 되였다. 1986년 연변조선족자치주 “로동모범”칭호를, 1987년 길림성정부에서 그에게 중약자원보충조사”선진공작자”, “길림성로동모범”영예를,1990년에 중화인민공화국농업부에서 그에게 “초원자원조사우수상”을 수여하였다. 현재 김교수는 연변생물학회명예회장, 길림성초원학회고문, 대한민국 자연식물학회고문, 연변 aloe연구소소장직을 맡고있다. 묻노니 이런 거룩한 성과를 이룩한 사람, 이런상을 수여받은 사람, 이런 사회적직무를 가진 사람이 당당한식물학박사가 아닌가? 박사는 원래 학술연구단체에서 수여하는 직함이다. 그런데 우리의 김교수는 백두산산천초목이 우러러보는 박사이며 우리조선족들이 너남없이 떠받드는 당당한 박사이며 세계가주목하는 식물학박사이다!          Xxx            xxx          xxx 나는 우리가 존경하는 교수이며 우리의 자랑찬 식물학자 김수철교수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올랐다. 나의 눈앞에는 김수철교수님의 예지로 빛나는 두눈이 두렷이 떠올랐다. 아직도 탐구와 창조의 빛나는 두눈! 90대고령에 그처럼 완강한 의력으로 식물학연구에 몸과 마음을 다바치는 김수철교수님의 성스러운 모습에 나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나는 김수철교수님의 새로운 성과를 기대하여본다. 지금 김수철교수님은 2300종에달하는 “길림성식물도감”편집에 한창이다. 나는“길림성식물도감”의 출판을 기원하며 스스로 김수철박사님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였다.                          글/ 성문                          (연변대학“불로송”잡지 2017창간호)    
387    사회가 《장애》 댓글:  조회:1708  추천:0  2021-08-24
월전에 인테넷 “길림신문"이 장춘 경찰이 가짜《화페》337만원을 몰수한 소식에 이어 연길시 삼도만진 당위 부서기, 조직워원, 판공실주임, 비서, 삼도진정부 부진장, 출납, 방산관리소 일군, 진무장부 부장 등 8명 공무원들이 시장애자협회조직 담당과장의 알찬 노력으로 제2대《장애자증》을 딴 소식을 올렸다. 《장애(障碍)》란 《무슨 일을 하는데 거치적거리며 방애(妨碍)가 되는 일》, 《장애인》은 《신체적, 정신적인 결함으로 각종 생활에서 제약을 받는 사람》을 말한다. 장애인은 비록 심신적으로 열악할뿐 결코 무슨 일을 하는데 방애되거나 또는 《장애물》이 아니다. 그런데 장애인이 무슨 일을 하려는데 오히려 《사회가 장애》로 되는것이 문제다. 홀로서기로 공인받은 모시 2급지체장애자 최모가 제2창업으로 해당부문에 무리자대부금을 수차 신청하니 2만원을 주겠다더니 《하강증(下岗證)》을 가져오고 국가공무원으로 담보인을 찾으란다. 꿈에도 상강(上岗)을 못해본 《앉은뱅이》가 어디에 가서 하강증을 떼와야 하며 친척에 공무원이라는 명색조차 없는데 누구를 찾아가서 《앉은뱅》의 담보인으로 서달라 하겠는가? 할수없이 또 해당부문을 찾았더니 글쎄 《몇년전에 맡은 무리자대부금도 상환하지 않고 무슨 또 대부금이냐?》며 《신용불량자》란 모자를 씌우며 퇴자를 줬다. 금시초문이였다. 요행을 바라는 대부금신청인데 《신용불량자》란 웬 말이냐고 반문하니 몇년전에 시장애인련합회책임자가 최모의 이름으로 무리자대부금을(5만원) 맡았다며 꾸중했다. 연길시 삼도만진 8명공무원들이 《장애자》증을 딴 일, 시장애인협회책임자가《앉은뱅이》의 이름을 도용해 자기들의 사리를 챙긴 이 모두가 그래《사회가 장애》가 아닌란 말인가. 미국 부시대통령이 취임후 첫 국민만남이 장애인대표였다. 미국적 한인맹인 강영우씨도 장애인대표로 자리를 같이 했다. 그때 강영우씨가 대통령한테 《나한테 국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할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다면 힘껏 잘하겠습니다》고 말했더니 얼마후 대통령이 《국가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의 자리를 줄테니 5400만명의 장애인들을 위해 일을 잘 해달라》고 당부했다. 하여 강영우는 미국백악관 최고위 맹인공직자로 되여 한국인구보다 더 많은 미국장애인들의 복지사업을 위해 적극 기여 한데서 미국사회의 명인으로 발탁되였다. 제2차 전국장애인설문조사에 따르면 연변에 16만명이나 되는 장애인이 있다. 이는 도문시인구에 상당한 주민(州民)이 장애인이라는 말이다. 장애자사업은 더는 《장애자의 날》이나 단적인 하루활동수단으로 추진할 사업이 아니다. 선진국에는 전세기 90년대에 벌써 《장애인 차별금지법》을 실시, 국회위원에 장애인대표비례까지 제정되여있다. 조화사회건설에서 장애인의 사업은 더더욱 법적보호와 보장을 받아야 한다. 필자는 《장애자》를 《불편(不便)자》로 칭하자는 주장이다. 《불편자》란 어떤 일을 하는데 거치적 거리는 《장애(障碍)》나 방애(妨碍)되는 사람이 아닌, 《지체불편자》다. 정상인들이 못하는 일을 지체가 불편자들이 해내는 실례가 너무도 많다. 《광주아세아장애인운동회》가 이를 너무나도 훌륭하게 실증해 줄것이다.        오기활                                                             길림신문 : 2010,12,11,                    
386    목단강반의 “연변” - 서안구 댓글:  조회:1856  추천:0  2021-08-21
지난 7월 말,  필자는 목단강철도로간부부 리헌(85세,조선족) 옹이 “8.1”절에 목단강에서 열리는 ‘흑룡강성관광사업현장회’ 를 계기로 목단강을 관광하라는 초청을 받고 목단강을 다녀왔다.   낮 기온이 35도를 웃도는 삼복철에 2박3일간의 관광이 비록 “말타고 꽃구경”이였으나 (연길에도 없는 우리 민족의 거물급 민속대형조각상과  경물들이 목단강에있구나!)는 것으로 필자는 큰 감동을 먹었다. 목단강은 흑룡강성에서 조선족이 제일 많이 집거(4만명)한 도시로서 서안(西安)구에 1만 6000명, 흑룡강성의 유일한 조선족가도,와 해남조선족향이 서안구내에 자리하였다.   목단강시정부는 2000년에 목단강시관광발전규획에 따라 서안구에 “조선민족민속거리”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서안구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목단강 조선족상업무역단지의 중심에 자리한 “조선족민속거리”는 총 길이가 1900메터, 남북너비 500메터로 총 면적이 100만평방메터,“조선족민속거리”의 입구에는  높이가 5메터너나 되는 “조선족민속거리”라는 석비에 맞춰 거리량쪽의 거의 모든 간판이 조, 한글로 된“연변간판”이였다.  목단강시 조선족 중, 소학교, 조선족도서관, 조선족예술관, 한국정품성, 조선민족병원 등 단위와 점포 400여 개가 “조선족민속거리” 주변에 자리하였다. 구정부 관계자의 소개에 따르면 서안구는 목단강시 음식업의 1번지로서 시음식업 총수입의 46%, 그중 200여개나 되는 조선족들이 경영하는 음식업수입이 40%란다. 전국서 “왕아매”로 불리는 목단강“조선족어머니 독보조”도 목단조선족가두판사처관할내인 동단사구 3층에 있다. “조선족 어머니독보조”는 1953년에 흑룡강성렬사모범인 김정순어머의 발기하에 7명의 회원들로 조직,개인집을 활동장소로 하였었다. 근 70년간을  이 독보조 회원들은 초심을 잊지않고 독보조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청명절 렬사비참배, “8.1”절 옹군활동, 재해구지원 등 사회활동과 공익사업에 적극 참여한데서 정부에서 3층짜리 활동장소를 제공, 지금 150여명의 회원들이 매날을 즐겁게 보내고 있다. 이 독보조는  흑룡강성정부와 국가 해당부문으로부터 “옹군우속(拥军优属)”모범”,  “?j옹모범(双拥模范)”, “군민일가친(军民一家亲)”등 많은 영예를 수여받은데서“광명일보”,“중국재경보” 등 국가급 신문과 잡지에까지 소개되였다. 필자는 서안구가 목단강시 명브랜드로 목단강시 문화관광산업발전의 명실공한 “효자”로 될것이라 믿어진다. 오기활    
385    옛 이야기로 배우는 인생조언 댓글:  조회:1707  추천:0  2021-08-11
                  사랑과 관심   사람은 누구나 얼마간의 장애를 갖고 살아 간다. 단지 정상인으로 보일 뿐이다. 비록 몸은 정상이지만 마음에 욕심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 차 있다면 과연 정상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몸의 장애보다 마음의 장애가 더 무섭다. 우리 주위에는 몸의 장애로 힘겨워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진정 바라는 것은 무엇일가? 풍요로운 물질보다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정상인과 장애인을 구분하지 않는 시선이다.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따뜻한 손을 한번 내밀 때 그들은 행복해 한다. 이런 훈훈한 사랑과 관심이 그들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하는 비타민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W 부부는 1967년에 그들의 다섯 살 난 아들 아더가 정신장애라는 것을 처음 알게되였다. 이들은 아들이 가족사랑을 모르고 또 그 사랑에 보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늘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아더를 장애아수용소에 보내지 않고 그냥 집에서 키우기로 했다.   이들은 아이를 비장애아처럼 대하려고 노력하였다. 일요일에는 교회에 함께 갔고 평일에는 특수학교를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도록하였다. 그러나 아더는 여전히 바보처럼 웃기만 할 뿐 말도 제대로 못했다. 어느새 아더는 특수학교를 졸업하고 장애인들이 모여서 일하는 직장을 다니게 하였다. 허나 아더는 일보다는 가족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 하였다. 시간이 흘러 아더가 20대 후반의 건장한 청년이 되였다. 그는 장애인 직장에서 간단한 전자장비를 조립하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새로 부임된 캐렬이라는 책임자는 아더에게 숨은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컴퓨터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을 가르쳤다. 또 몇년이 더 지나는 사이에 캐렬은 아더가 매우 똑똑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너무도 기삐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아더의 부모를 청하였다. 그리고는 함께한 자리에서  컴푸터 자판으로 아더에게 “오늘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더는 손가락을 아주 천천히 그리고 힘들게 움직여 키보드를 쳤다.  아더가 한 문장을 만드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드디여 글이 완성되였다.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하게 되여 행복합니다!”   아들의 글을 읽은 부모들은 너무나 놀랍고 감동되여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힘껏 아들을  포옹했다...      오기활   
384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련재37) 댓글:  조회:1658  추천:0  2021-08-03
제 3부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제 10            “내 인생의 저녁에 아침을 보태 주었습니다!” 지난 10월 12일, 연변대학 로간부처, 연변대학 로과학기술사업자협회, 연변로교수협회 책임자들과 김수철교수의 학우대표들이 김수철교수(92세)의 저택을 방문하였다. 제4기 연변농학원졸업생일동은 “福如東海 壽比南山”“21세기‘ 리시진’ 김수철교수에게  드립니다”는 글문을 새긴 금기를 증송하였다. 김수철교수는 45년 동안이나 연변농학원식물학교연실에서 교학과연구사업에 종사하면서 농학, 과수, 축목, 생물화학 등 농학원전업반과   의학원학생, 연구생들에게 식물학, 수목학, 과수분류학, 라틴어 등 교학을 하면서 나라의 인재양성에 큰 기여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 서울시립대학 박사연구생들의 장백산원정실습, 연변의학원 한국반학생들의 장백산현지식물실습 도 지도하였다.   김수철교수는 동북3성의 험산준령을 메주밟듯 하면서 25000점의 표본을 수장한 식물표본실을 건립한데서 우리나라의 식물교학과 그에 따른 과학연구에 튼실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김교수는 연변생물학회리사장, 길림성식물학회리사, 길림성초원학회고문, 길림성자연자원(동부자원식물, 목초, 중초약재등)조사사업기술고문, 중화인민공화국동식물검역국(도문)기술고문 등 직무를 지냈고 “연변중초약”, “장백산동북경제식물지”등 저서를 편찬, 출판하여 중국축목사, 길림성정부농업위원회 등 국가와 성급정부에서 발급한 성과상과 길림성로력모범의 영예를 따 냈다. 그가 “대중과학”에 발표한 “진달래”는 길림성과학기술협회상을, 그가 그린 사생화(버섯)는 한국에서 출판한 “백두산버섯도감”에 수록되였다. 최근 3년간 김수철교수는 “중국길림성식물도감”(한문,북경인민출판사)의 출판을 위하여 90고령에 독거생활을 하면서 2600폭에 달하는식물세밀화를 친히 그렸다. “여러분들이 고군분전하는 저를 집까지 찾아와서 위문하니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여러분들이 나의 저녁(만년)에 아침(새힘)을 보태준 셈입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을 잘하는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미국의 강철대왕이며 최고 자선가인 카네기는 한사람이 취득한 업적에는 사회의 힘과 노력이 85%를 점하고 개인의 노력과 힘이 15%를 점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저의 15% 노력을 여러분들에게 회보하겠습니다” 김수철교수는 이렇게 겸손하게 말하며 교수님의 대표적 저서와 친히 그린 “길림성식물세분화”그림을  보여 주었다. 김수철교수에 따르면 “길림성식물세밀화” (2600종)를 그리려면 20여명의 화가들이 동원돼야 하는데 화가들이 식물을 모르고 그리기 때문에 틀린 것이 있어 마음에 안든단다. “이미 출판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적지않아 내가 보충해야 한다. 심양의 림업토양연구소의 보고서도 틀린 것이 있다 “중국길림성식물도감”은 마땅히 한족이 출간해야하는데 지금 그림을 직접 그리는 식물학자가 나밖에 없으니 내가 해야한다. 조선족으로서 떳떳하다” 이렇게 말하는 김교수는 이번에 출판할 “중국길림성식물도감”은 해당부문의 항목이 아닌 개인적으로 출판하며 독자들을 책임지기위하여 자기의 식물표세분화에 질좋은 식물원색사진을 배합하고저 지난 여름부터 혼자서 내몽골서북지구를 돌아다니며 만여장의 사진을 찍었다고 하였다. “술은 마십니까?” “원래는 애주가인데 지금은 마시면 취기  때문에 공제를 합니다.” “담배는 피웁니까?” “원래 배우지 않았습니다. 담배는 재난입니다.” “몸에병은없습니까? 늙으면무엇이다릅니까?” “병은 없는데 늙으니까 귀가 덜 듣기고 맥이 없는 것이 다릅니다 ” 이날 방문객들은 김교수의 숭고한 인생가치관에 감동되였고 우리민족의 걸출한 인재를 뒤늦게 발견한 것에 미안을 표하면서 연변대학 당안관에 김수철교수의 인물관을 세우기 위한 사업을 적극 추진할 것을 표시하였다.                              오기활                                              길림신문                     2016-10-28 10
383    옛 이야기속의 인생조언 댓글:  조회:1705  추천:0  2021-07-08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끈   한 목동이 수백 마리의 양떼를 몰고 강변으로 오고 있었다. 아마도 그 많은 양떼를 몰고 강을 건너려는 것 같았다. 물을 싫어하는 양들을 몰고 강을 건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였기에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본 아들이 걱정이 되여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저 목동이 저 많은 양떼를 몰고 어떻게 강을 건너려는 거지요?” “글쎄, 하지만 애야, 저 목동의 얼굴은 아무 걱정도 없이 평온해 보이지 않니? 자기만의 무슨 방법이 있어 보인는데...” 그래도 걱정이 풀리지 않은 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목동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아니, 이 많은 양떼를 어떻게 강을 건러려고 합니까?” 목동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그야 간단하지요, 세상의 리치만 알면...”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리해할 수 없었다. 그때 강변에서 양떼들이 울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물을 본 새끼 양들은 놀란 눈으로 어미 양 옆으로 모여 들어었다. 그때였다. 목동은 겁먹은 눈으로 서 있는 많은 양들 가운데서 귀여운 새끼 양 한 마리를 안아서 번쩍 높이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어깨에 둘러 메였다. “어머니, 목동이 어쩌려고 저럴까요?” “곧 알게 될 테니 기다려보자꾸나.” 어머니는 목동이가 양떼와 함께 강물을 건너는 방법을 알았다는 듯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새끼 양을 둘러멘 목동은 성큼성큼 강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강폭은 넓었지만 물은 그다지 깊지는 않았다.  순간 새끼를 빼앗긴 어미 양이 놀란 울음을 울더니 강물속으로 성큼 뛰여 들었다. 그것이 신호가 되여 수백 마리의 양들이 일제히 물속으로 뛰여들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ㅡ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끈은 사랑이다. 이 사랑의 끈은 어떠한 칼에도 끊어지지 않는다. 위협이나 시련이 닥치면 오히려 더욱 튼튼해 지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 사랑은 쓰러진 사람을 일어서게도 하고 웃음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기도 한다. 또 때로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 사랑이 없이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나무와 꽃에는 사랑이 향기리라면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힘이다. 사랑이 깊은 한 마리의 어미 양이 다른 많은 양들로 하여금 강을 건너게 했던 것이다. 오기활
382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 (련재36) 댓글:  조회:1547  추천:0  2021-07-01
              9 ,“한족이 해야 할 일을조선족이 하니 영광이지요.” 지난 1월 12일 필자는 정경락선생과 함께 “조선족리시진” 김수철옹(92세)을 찾아가 건강자문을했다. 떠나기 안날에 전화로 련계하니 장담은 못하나 놀려오는셈치고 한 번 와 보란다. 연변농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던 김수철교수는 한국 해당부문과 손잡고 연변에 중초약기지를 건설했다. 그러던 중 룡정시조양천진삼성촌5대의 풍수지리에 매혹 되여 정년퇴직후 10여 헥타르의 토지를 임대맡고 삶터를 이 곳에 옮겼다. 88세 나이에120세를 내다보며 90여 평방짜리 문화주택까지 짓고 만년을 식물채집과 저서 집필 및 식물연구로 보내고있다. 김교수는 퇴직한후 중한전문가팀을 무어 2년간 장백산의 식물을 탐사하고1994년에 농학, 식물학, 약학, 림상학, 축산학 등 자연과학의 연구지침서로《백두산자원식물(김수철, 안상덕, 리상래공저)를 세상에 처음 내놓았고 17 권(건)의 귀중한 론문과 저서를 출간한 평생교수이다. 김교수의 댁에 들어서니 복도부터 방에까지 온통 책무지였다. 자료를 정리하던 김교수가 “아직 일을 끝내기전에 절대 보도하지 말라”는 부탁으로 김교수가 하는 일을 잠시 “비밀”로 한다. 김교수는 “나처럼 그림까지 그리는 식물학자가 중국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안경을 모르고 일한다.”며 언보를 뗏다.  “나는 지금 죽을 준비를 한다. 자료를 정리해 놓고 죽어야지. 정판룡교수가그랬다. 암에 걸린 몸으로 죽기 묘칠전까지 일을 하다가 죽었다. 나는그에 비하면 죽을 날이 아직 멀었다. 정리해야  할 자료가 너무 많아서 정말 아깝다.” “내가 정리하는 식물그림을 그리자면 화가들이 20명은 동원돼야 할 것이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린다고 해도 식물을 모르고 그리기에 마음에 안 든다. 그들이 샘플을 보고 그리기에 안된다. 꽃잎이 다섯개인데 열개나 그린다. 둥근 것을 압축한 표본을 보고 그리니까 안 되는 것이다. 례하면 금혼초(金婚草)를 제대로 그린 온전한 그림이 없다.”  “나는 지금 합작이 아닌 혼자서, 항목이 아닌 개인으로 2300가지식물을 그리고 있다. 이미 출판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서 내가 보충해야 한다. 지금은 재료가 많아 조건이 구비되였다. 심양에 동북림업토양에 관련한 《동북식물연구소》가 있는데 식물연구소의 역할만 할 뿐이다. 그들의 보고서를 보면 틀린 것이 많다.” “한족이 해야 할 일을 조선족이 하는 것이 영광이지요” “나는 혼자서 지내며 식사는 좋다는 재료를 다 섞어서 한가마에 끓인다. 아무래도 위에서 합해지는데 영양을 따지며 먹으면 된다.” “감태는 암에 좋다. 지난세기 70년대 캄보쟈의 시하누크친왕이 담낭염에 걸려 중국에 와서 중약치료를 했다. 그때 감태와 참대잎을 주약으로 치료했다. 페는 발과 련계된다. 발은 페의 반사물이다.” “암치료는 안마부터 하면 더욱 빠르고 철저하다. 몸에 기운이나면 병을 빨리 이긴다. 병치료는 급해말고 개울물이 늘 흐르듯이 해야한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기타를 배제하고 치료를 꾸준히 견지해야 한다. 자연규칙에 위반되는 일은 몸도 용서하지 않는다. 순응을 해야 약이 잘 든다.” “술은 좋은 음식인데 술의 좋고 나쁨은 마시는 사람에게 달렸다. 술은 피를 흐리게 한다. 그런데 내가 왜 마시는가구?” “술은 사람관계의 매개로 만들어 졌다. 술을 례의로 마신다. 손님을 만나고 접대하고… 경상적으로 마시지 말아야 한다. 드문드문 폭음을 하는 것은 홍수가 물곬을 청소하듯이 혈관 청소에 유조하다.” 동석한 정경락선생이 “ 92세까지 살면서 어느 때가 황금시기였습니까?”는 물음에 김교수는 “지금이다. 시간이 많고 하고싶은 일을 하니깐 정말 행복하다. 지금은 겁이 없다. 이 세상이 다 내 것인듯 하다. 참 자유롭다.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 혼자서 일하는 멋이 있고 혼자서 사는 법도 배운다. 나는 지금 로친을 딸집에 보내고 혼자서 지내며 일을 다그친다.”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는 정경락선생의 물음에 김교수는 “겁이 안 난다. 자연사 인생으로 받아 드리면 겁이 적어진다. 죽음이란 참외나 도마도가 다 익으면 절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이것이 자연사이다. 옛날엔 화장터에 가면 겁이 났는데 지금은 화장터가 친해진다. 공포감이 없다. 자연사는 철학적인생이다. 로자의 철학이 과학적이다. 불교사상에 로자의 철학이 담겨져 있다.” 김교수는 한참동안 정경락의 명함장을 보고 또 보았다. “정성룡을 아오? 내가 지금 정성룡의 아들을 생각하고 있는데….”, “정성룡은 우리마을(당년의 태양향횡도촌9대)사람이오. 해방을 같이 맞이 했고 문예공연도 함께한 동갑내기요.” “내가 정성룡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85세에 사망하였습니다.” 너무나도 뜻 밖인 정경락의 대답에 김교수님은 “경락이 여기 오오, 한번 안아 보기요” 하면서 힘껏 포옹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필자도 흐르는 눈물을 감출수 없었다. 우리는 준비한 음식으로 술상을 차렸다. 정경락선생이 김교수에게 큰절을 올리고 술을 부어 올렸다. “신문사부주필까지 했다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만…오늘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났소.” 김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증손자 한테서 선물로 받은 일본술을 내놓았다.  “이 기쁜날에 안마시면 언제 마시겠소. 경락이 우리 한잔을 하기요!” “나는 담대포천(膽大包天)이다. 나에게는 비밀이 없다. 나는 진짜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깊은지를 모른다. 내가 하는 일을 끝내면 사회의 감독과 지지를 받게 될 것이다.” 김교수의 말을 이어 정경락선생이 “사회의 지지를 받는다는데 어떤 지지인가요?”고 묻자 김교수는 “주위의 사람들이 와서 청소도 해주며 여러모로 생활을 돌보아 준다. “ 고 했다. “선생님에 대한 평가는 자기에 대한 평가이다. 나는 오기활선생이 온다고 하니 집을 거뒀다. 미루 집청소를 했으니 이만하지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들이 앉을 자리도 없을 것이다. 기억력이 떨어져 손에 쥔 물건도 찾을 때가있다. 나는 찾기 쉽도록 널어놓고 일을 한다. 열어놓을 開에 놓을 放으로 몽땅 개방하고 일을 한다. 볼라니 한국의 어느 시인도 나처럼 살더군. 허허허…나는 앞만 보고 뒤를 모른다. 나는 뒤거두매를 못한다. ” 김교수는 정경락선생이 기침을 할 때마다 등을 다독이면서 솔잎차를 마시는 등 교수님의 처방대로 1년간 견지하면 병이 꼭 치유되니 걱정말라며 희망을 주었다. “우리는 령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유인으로 돌아가야 한다. 애들이 왜 그렇게 즐거워하는가? 애들은 명예욕이 없는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조용히 사는 것이다. 법정스님은 자기집을 감옥이라고 했다. 감옥에서는 그래도 석방 될수 있는데 집은 영원 한감옥이라고 했다.” 정경락선생이 “ 석정스님이 하늘냄새가 그립다는데 하늘냄새란 무엇입니까?”고 믈으니 교수님이 “하늘은 늘 비여있는 마음이다. 령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무런 욕심이 없는 것이다.” 고 답했다.  “나는 혼자라고 해도 적적할새가 없다. 지금 해야 할 일로 인민출판사에 련계하고 있다. 《중국길림성식물독본》을 한족이 펼쳐내야 하는데 할 사람이 없어서 내가해야 하니 생각하면 조선족으로서 떳떳하다.” “지난해에는 《연변일보》가 배달이 잘 안돼서 올해는 《연변일보》사에 직접 찾아가서 주문을 했더니 장려로 《민족문학》잡지를 주더라. 시간이 없어서 수필만 봤다.” “오기활선생은 연변에서 인간수양필독서인 명심보감을 펴냈다. 사회를 폭로하고 사회를 진맥, 치료하며 침을 찌르고 사상을 관리하며 조선족을 위해 노력한다. 남은 좋은 말만하는데 오선생은 문제를 집어내고 비평을 가한다. ” “《길림신문》에서 연변축구를 춰세웠다. 민족발전과 경제발전에는 체육과 정비례 된다고 본다. 《길림신문》이 연변축구를 살려냈고 길림축구를 위해 공헌했던 타계한 사람들을 살려내는 큰 일을 했다.” “연변일보가 우리민족문화를고집, 발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밥도 못 먹고 빈방에서 덜덜 떨며 일을 했다는 오태호식기자들에게 동정이 간다. 신문은 민족의 기둥이라 할수 있다. 우리민족을 키워주고 앞길을 열어주는 좋은일을 하고 있다. ” 이날 교수님은 길림축구의 유공자를 화두로 신문과 건강에 대하여 매우 많은 덕담을  하였다. “다음엔 아무것도 들고오지마오. ‘습근평정부’는 렴결을 제창하오…” 우리가 떠날 때 멀리까지 나와서 바래다 재봉을 약속하는 김교수의 부탁이다. 정경락, 오기활    길림신문   2016-01-28
381    《익수당》(益寿堂)의 추구-치료+양생 댓글:  조회:1777  추천:0  2021-06-19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6-18 14:34:32 ] 클릭: [ ] 세계를 휩쓴 코로나 사태를 겪어내면서 사람들의 관심사는 자연 건강쪽으로 보다 많이 쏠리고 있다. 건강이 대세인 오늘날에 이르면서 병원경영에서도 리념의 변화를 촉구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 하겠다. 병원은 병을 치료하는 곳이라는 보편인식을 넘어‘양생'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양생쉼터',‘건강충전소'로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병원이 있다. 연길시 신흥가 민안골목 6-2호에 자리잡고 있는 《익수당》종합문진은 워낙 맥박을 짚어 병을 진단하고 침구와 중약치료를 위주로 하는 중의진료소이다. 이 진료소는 최근 들어 천억복(天亿福)그룹과 손잡고 건강관리봉사쎈터를 내왔으며 건강검진과 질병치료, 예방과 양생에 관한 시설들을 도입하였다. 천억복그룹은 봉사를 근본취지로 하는‘중국뢰봉기업'이다. 산하 천억복건강관리쎈터는 국민들의 비건강생활방식을 개변하고 국민들의 아건강상태를 개선하는데 운영 목적을 두고 있다. 양생과 건강 , 봉사를 일체화하는 천억복건강관리봉사쎈터에서는 신체 건강 정밀 검사, 신체 조기 건강 평가, 보조 물리 치료, 시력 건강 관리 및 고등학교 과학연구제품 등으로 봉사차원의 경영을 진행하고 있다. 《익수당》종합문진 리철범 원장은 천억복건강관리쎈터의 시설에 대해 네가지 방면으로 소개를 한다. 첫째, 10분내에 인체의 4대 조직, 8개 계통 및 224개의 혈 등 인체수치 지표를 정밀 검사하여 조기 건강을 평가한다. 둘째, 테헤르츠광파 세포복구기기로 전립선염, 부과염증, 유선염, 피부병, 담낭염, 관절염, 풍습 등과 같은 병치료효과를 높인다. 셋째, 선자기공명복구기로 아건강상태, 고혈지, 고협압, 고혈당, 면역력 증강 등에 조절효과를 높인다. 넷째, ‘대자연공기 속의 비타민'이라 불리우는 유산소이온으로 머리를 맑게 하고 피부의 탄력을 증강시키며 로쇠를 완화할 뿐만 아니라 호흡계통질병과 심뇌혈관질병을 예방한다. 리철범 원장은 다년간 연길시정치협상회 의료조 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의료차원에서 백성들의 건강도를 높이고 행복감을 높일 수 있는 경로를 탐색하였다. 그는 건강은 일종 행복이고 책임이며 양생은 또한 인생의 계획이고 의무라고 한다. 그러면서 “미래의학은 더는 환자를 사경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예방, 재활과 조기건강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우리 부모, 형제자매들이 익수당에서 적은 비용을 내고 병치료도 하고 양생도 하면서 건강을 챙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이 따로 없겠다."고, 익수당을 하나의 '건강쉼터'로 환자들과 지역주민들이 널리 활용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380    옛이야기로 배우는 삶의 지혜 댓글:  조회:2041  추천:1  2021-06-10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오래전 어느 마을에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알고 있다고 알려진 로인분이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네방네에 그렇게도 용한 로인이 계신다는 것이 입소문으로 널리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을 찾아가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루는 어떤 젊은이가 그 분을 찾아가서 자신의 힘겨운 생활과고민을 털어 놓으며 “저에게 힘이 될수 있는 글을 주십시오, 비탄에 빠졌을 때 희망을 주고 행복에 겨워 있을 때에는 교훈을 줄수 있어야 합니다. 제발 저에게 그런 진리를 주십시오.” 젊은이의 간절한 소원을 듣고난 로인은 한동안의 심사숙고 끝에 이런 글을 써 주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겨울이 지나가면 봄이오기 마련이다. 행복과 불행이 우리에게 찾아 오는것을 막을 수 없듯이 행복과 불행이 지나가버리는 것 또한 막을 수 없다. 위기(危機)란 위험과 기회가 공존한다는 것으로 위기속에 기회가 있다.  문제는 어떻게 화위전복(禍爲傳福)하느냐에 있다. 기회는 준비된 자의 몫이다.  일은 있는데 할 사람이 없고 사람은 있는데 할일이 없다.  필자는 이 지구촌의 촌장이 그 할아버지를 찾아서 “지금 온 지구촌이 코리나로 비탄에 빠져 허덕이는데 마땅한 대응이 없을가요?”고 묻는다면 아마도 로인님이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처방전을 줄 것이리라고 믿어진다.   오기활    
379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35) 댓글:  조회:1555  추천:0  2021-06-01
                                               제 3부:  신문잡지로 읽은 김수철 8 . 얼굴이 뜨거워 졌다 11월 30일 오기활선배와 함께“중국 길림성 식물도감” 출판을 위하여 밤낮으로 고군분전하는 연변대학 농학원 김수철교수님(94)을 방문하였다. 첫 눈에 안긴 저택대문 어구에 자리한 큰 종이함 “신문상(報刊箱)”, “오늘 새벽 4시까지 글을 쓰다 보니 방금 잠에서 깨여났습니다”며 손님 맞이에 등한했다는 사과의 말씀, 지금까지 해마다 연변일보, 길림신문 등 신문잡지를 주문한다는 소개, 며칠 전에 1000원을 팔아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사료전집”(총 30권)을 샀다는 자랑…에 실로 젊은이로서 얼굴이 뜨거워 났다. 배움의 길은 끌이 없다. 94세 고령에 초심을 잊지 않고 뭉치 돈1000 원을 팔아“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사료전집(全集)”을 사놓고 열심이 구독한다는 김교수님의 독서욕에 머리가 숙여지며 어쩌면 내고향 산천의 한 줄기 시내물이 계곡을 헤치며 쉼없이 용용히 대해로 내달리는 경관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필자가 얼굴이 뜨거워 진 데는 이런 원인도 있다. 지금은 년말이라 새해의 당보, 당간행물을 주문하라는 상급의 문건정신에 따라 큰 단위는 만 여원, 작은 단위는 몇 천원씩 팔아 당보, 당간행물을 주문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신문잡지를 참답게 구독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필자가 알아 본데 따르면 령도분들은 시간이 없다는데서, 또 재직 공무원들은 별로 볼 내용이 없다는 데서이다. 그래서 많은 당간행물들이 우편봉투도 뜯지 않은 채 쓰레기 신세로 년말에외면되여 쓰레기로팔린다. 이런 현상과 현실은 재정랑비이고 지식재충전의 랑비다. 글쎄 공무시간에도 핸드폰에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신문잡지는 시간이 없고 내용이 없어 안 본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94세 김옹이 2300종에 달하는 “중국 길림성 식물도감” 출판을 위해 지난 2년간 거의 혼자 몸으로 길림성과 몽골지구산천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또 신문사와 잡지사를 찾아 다니며 신문잡지를 주문하는데 그에게 시간이 남아설가? 아니면 “볼 것이 없는” 신문잡지에서 남없는 “보물”을 찾으려고? 김교수의 말씀이다. “나는 신문잡지에서 칼럼과 수필을 빠짐없이 다 봅니다. 거기에는 인생을 깨우치는 철리가 있으니까요?” 이에 비춰 도문시 법원 최은호법관의 말이 생각된다. “몇 십년간 신문에서 수집한 ‘법률해석’ ‘법률문답’ 자료책이 나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되였습니다” 90고령에도 인생의 철리를 찾아 방황하는 김수철교수님을 새 시대 새 삶의 모델로 모시며 뜨거운 얼굴을 식혀본다.                               성송권                                2017년 12월 03일 (조글로)  
378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34) 댓글:  조회:1686  추천:0  2021-05-01
제 3부 :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7,      자식을 낳아 준 로친이 정말 감사하지요!” 4월 23일, 연변농학원농학계의 “3 인방”이라고 불린 김수철(93), 황영수(85),김륜범(82)옹이 조양천 김수철댁에서 한자리를 하였다. 이날의 만남은 룡정의 황영수옹과 김륜범옹이 필자가 김수철옹을 만나려 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필자에게 연변농학원의 “불로송”, 조선족의 “리시진”으로 불리는 김수철교수의 감동적인사적을 제공하려고 특별히 동행했단다. 지금 김수철교수님은 2300여 종에 달하는 “길림성식물도감”을 출간하고저 로친을 딸집에 보내고 홀몸으로 조양천 세집에서 고군작전을 하고있다. 11시 20 분경, 세 분 교수님들이 하곱던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에 “경복궁”(식당명)에서 여러분들게  점심을 잘 대접하겠다는 김수철교수님의 말씀에 필자가 김교수님이 일부러 아침시장에서 점심준비를 했다는데 이좋은 분위기속에서 교수님이 마련한 음식대접을 받자고 건의하니 주객모두가 “서로가 허물이 없는데…”하며 주방간 일에 솜씨가 있다는 황영수 옹이 김수철 옹의 시킴에 따라 점심상을 차렸다. 이날 술상에서 오가는 로교수님들의 생활담에서 필자는 종래로 들어 못보고 읽어 못 본 “가정수양”교육을 받으며 감사했고 자책도 하였다. 교수님이 주방벽에 모신 로친사진   술잔을 부딪치며 된장술을 한모금 쭉ㅡ마이고 나서 김수철옹이 하는 말씀이다. “우리 로친이 아무런 장애나 허물도 없는 건실한 자식 4남1녀를 낳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그중에 불구자가 하나만 있다면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겠소? 아무리 명망이 높은 교수나 국회위원도 불구자식이 있다면 마음이 편하고 가정이 행복할가요?”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로친에게 감사한 마음이오. 그래서 로친의 사진을 주방벽에 붙혀 놓고 늘 보면서 늘 감사해 한다오”  이에 자식이 2녀 1남이라는 황영수 옹, 자식이 2남이라는 김륜범 옹이 김교수님의 말씀이 철리라면서 수철교수님이야말로 명실공한 “불로송”이요 가정병을 치료하는 “리시진”이라고 하였다. 김수철옹의 계속되는 얘기다. “우리의 혼사는 두집 부모들이 내가 낳기도 전에 정했다오.” “로친(맹영자)이 문맹인데다가 나보다 년상(94)이여서 처음에는 곡절도 많았구,,,” “지금보면 정말 다행이오. 로친에게 농촌녀성의 매력이 있고 거기에 문맹이다보니 리론적으로 나의 학술을 반박할 일이 없으니 얼마나 편안하고 화목한지 모르겠소. “ “나는 80년대 현대문명에 오염 되였지만 로친은 현대문명에도 오염이 안된 록색로친이지요, …” “록색로친”이라는 신조어에 모두가 배꼽이 빠지도록 웃음보를 터뜨렸다. 김수철옹은 막내로 딸이 있으니 얼마나 좋냐며 딸이 돈벌이로 한국에 갔다가 년로한 어머니를 잘 모시겠다며 돌아와서 어머니를 모신다며 기쁨의 실눈으로 술잔을 들었다. 이날 “3인방”이 오가는 인생담에 감복된 필자는 존경하는 지식분자 들에게 존경의 술을 부어 올렸다.                                 오기활                              “조글로”   2017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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