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설추
http://www.zoglo.net/blog/wuxueqiu 블로그홈 | 로그인
<< 4월 2024 >>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    

방문자

홈 > 오설추

전체 [ 3 ]

3    살구나무 댓글:  조회:681  추천:0  2020-05-18
     봄이 오면 나는 정원의 연분홍화신에 취해 떠날념을 못한다. 봉오리가 상긋상긋 눈짓하는 살구나무의 봄은 님을 그리는 산골처녀의 애틋함이요, 님을 엿보는 처녀의 톡톡 튀는 심장이요, 옷고름 물고 돌아서는 처녀의 입술이였다. 이래서 아버지가 살구꽃 봉오리를 택하신것일가.      살구꽃이 만발한 그네터에서 구름같이 오르내리는 어머니모습에 넔을 잃었다는 아버지, 그날로 목단화 세송이를 외면하고 살구꽃 봉오리를 택했다는 아버지, 이것은 아버지 그림일기책에 생생히 그려져있는 사랑로맨스이다.     연변대학 초창기부터 교직에 몸 담았던 아버지는 상당한 선비집안 출신으로서 위만주시절 만선일보사의 편집으로 있었다. 인물 잘나고 박식하여 당시 상류계층의 인테리녀성들이 많이 따랐다고 한다. 목단화 세송이는 바로 그런 녀성들을 가리킨것이고 살구꽃 봉오리는 우리 어머니를 상징한것이다.       아버지에게 시집와서도 신이 아까와 컬핏하면 촌의 습관대로 신을 머리에 얹고 시내복판을 뛰여다녔다는 어머니, 그래도 나무리지 않고 허허 웃으며 오히려 예쁘게 봐주었다는 아버지. 아버지는 왜 꽃중의 왕이라 할수 있는 목단을 따려하지 않고 수수하기 그지없는 살구꽃에 반했을가.      살구꽃은 목단같은 고귀함도 화려함도 없다. 허나 산골짜기 부식토와 같은 순박함과 조선치마저고리 같은 다소곳한 운치와 예쁨이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살구꽃에 반했을가.        살구꽃은 목단의 우아함과 세련됨이 없다. 허나 금방 따온 풋옥수수 같은 풋풋함과 오이 같은 청신함이 있다.그래서 아버지가 살구꽃을 욕심냈을가.        살구꽃은 목단 같은 활달함과 섹시함이 없다. 허나 퐁퐁 솟구치는 샘물 같은 투명함과 천진함이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살구꽃을 택했을가 .        향기가 없는 목단과는 달리 살기꽃에는 아기젖내마냥 솔솔 탐스러움이 풍겨서 마음이 더 닿았을가, 아니면 살구꽃운치를 안받침하고 있는 살구나무 둥치에 마음이 더 닿았을가.       백양나무나 버드나무의 미츨한 둥치와는 달리 밑둥부터 푸짐하게 줄기를 펼쳐나간 살구나무 둥치는 아무 때나 기댈수 있고 앉아 쉴수 있는 천연적인 보금자리이다. 그래서 우리학교 학생들이 즐겨 찾는 휴식터로 되여있다. 그 모양은 묘하게도 아버지가 하루에 3시간만 주무시겠다는 굳은 결심의 표징으로 일기책에 그려놓은 3자형 걸상과도 같은 형태였다.     그랬다. 아버지는 걸상에서 매일 3시간 쪽잠만 쉬시고는 일체를 학문연구에 돌렸다. 하여 짧디짧은 5년사이에 언어학, 력사, 고고학, 철학등 령역의 론문과 대학교재들을 편찬했으며 연변에서 처음으로 돈화발해국 정혜공주묘 발굴과 연구정리사업을 벌이셨다. 아버지의 이런 초인간적인 학문탐구에는 반드시 쉬시면서 보다 큰 충발력을 충전하기 위한 살구나무둥치와 같은 보금터가 수요되였을것이다. 어머니는 바로 이 보금터와 같은 살구나무둥치의 역할을 달갑게 여기시고 당신의 일체를 희생한 분이였다.      어머니는 모델 못지 않게 인물체격이 훤칠하고 아버지한테서 천자문까지 숙달하게 떼어 4, 50연대로서는 그야말로 문무가 겸비한 인테리주부로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 월급이 상당한 수준이여서 어머니는 얼마든지 교수부인 행세를 하며 품위있게 살수 있었다. 히지만 어머니는 촌아낙네처럼 집에서 새끼를 꼬고 시장에나가 품팔이도 하며 어렵게 살림을 연명해나갔다. 아버지봉급으로는 몽땅 학문연구에 필요한 서적들을 사야했기때문이였다. 그렇게 사들인 책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5, 60년대에 외지 사람이 길 가던 사람 아무하고나 “연길에 책이 제일 많은 집이 어디요?” 하면 곧곧히 우리 집을 가이켜 주군 하였다. 그 많은 책들은 후에 아버지유언에 따라 연변대학도서관에 기증하였다.      비바람에 지붕이 날려가고 연통까지 무너져도 어머니는 학문연구에 지장이 간다고 아버지를 책상에서 까딱 일어못나게 하고 당신이 직접 지붕에 올라가 손질하셨다. 동네분들도 우리집은 원래 그런 법이려니 하고 동원되여 집수리를 해주군 했는데 글쓰는 아버지에게 방해가 된다고 연장 하나라고 그렇게 조심스레 다루었다 한다. 이것 역시 아버지 일기책에 그려져있는 생생한 스토리이다.      돈화발해정혜묘 발굴사업을 하실 때에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간을 절약해드리느라 당신이 손수 고물에서 난 녹을 하나하나 닦아냈고 고물들에 박힌 흙들을 솔로 털어냈으며 조각난 도자기들을 하나하나 원모양대로 맞추는 작업도 하셨다. 매 고물마다 주머니를 만들어 알뜰히 포장해 놓고 후에 성박물관에 바쳤다 한다.     헌신적인 내조, 아버지는 이런 살구나무둥치의 속성을 엿보아냈던것 같다. 해방후, 많은 고급지식분자들이 조강지처를 헌신짝 내치듯 내쳤지만 아버지는 보석단지마냥 어머니를 놓을련정 안했다. 세상 뜨기 전날까지 “사랑하는 명희야”를 일기책에 써놓은것을 보면 아버지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했던지를 알수 있다.     나무둥치에서 툭툭하고 맥박 같은것이 들려오며 억센기운이 뻗쳐온다. 인간의 혈액처럼 나무에도 수액이 있는걸가. 어머니의 가녀린 손가락 같은 살구나무뿌리들이 돌과 유리쪼각이 가득 엉켜진 땅속까지 비집고 들어가노라니 얼마만한 상처와 아픔을 겪었을가, 그래도 뿌리들은 쉬지 않고 수분을 빨아 나무의 수액을 만든다. 연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끈질긴 의지의 뿌리, 인내의 뿌리, 희망의 뿌리, 생명의 뿌리, 수수한 살구꽃봉오리에서 이런 뿌리정신까지 보아낸 아버지 혜안에 탄복된다.     그 믿음에 아버지가 어머니의 뿌리 같은 가녀린 손을 붙잡고 자식 여섯을 몽땅 대학까지 졸업시켜달라는 엄청난 유언까지 감히 내리셨을가. 서른다섯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세상뜨기 전해인 84세까지 꼬박 50년을 해마다 세번씩 아버지산소에 다녀오셨다. 가실 때마다 꼭꼭 살구나무 한가지를 아버지비석 앞에 정중이 모셔놓군 했다. 그것은 아버지유언을 꼭 실행하겠다는 뼈 같은 어머니의 결심이였다.      아니, 그것은 살구나무뿌리가 수분을 빨아 나무의 수액을 만들듯이 남편을 만들고 자식을 만드는 인간생명의 뿌리를 상징하였을것이고 살구나무 한그루가 자연의 일부이듯 세상자연을 만들어가고 우주를 만들어가며 하나의 큰 생명체를 만드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거룩한 상징이였을것이다.     수수한 살구꽃봉오리에서 살구나무의 옹군 정신을 보아 낸 아버지혜안에 다시금 탄복하며 나는 금년에도 어머니를 대신하여 살구나무 한가지를 아버지비석앞에 정중히 모셔놓았다.
2    식탁의 풍경 댓글:  조회:739  추천:1  2020-04-25
    밥과 찬을 진렬해놓은 기다란 식탁을 사이두고 북쪽켠에는 주방아줌마들이 힁대로 줄느런히 서있고 남쪽켠에는 점심식사를 하러 온 한국류학생들이 줄느런히 서있다. 량쪽을 관리하느라 식탁의 서쪽켠에 서있어야 하는 나의 관리각도는 연변과 한국의 문화를 한눈에 스케치할수 있는 ‘3.8선’과 같아서 재미난다.     남쪽켠의 한국학생들은 주방아줌마들을 향해 ‘잘 먹겠습니다’는 90도 인사를 꼬박꼬박 하는데 북쪽켠의 연변아줌마들은 장승처럼 목이 뻗뻗해서 밥과 찬만 퍼주고있다. 남켠은 ‘잘 먹고갑니다’는 인사를 꼬박꼬박하고 가는데 북켠은 그냥 ‘3.8’선의 초병처럼 꼳꼳해서 눈 한번 깜짝 안한다, 90도 0도가 따로 있을가, ‘황후의 밥’과 ‘걸인의 찬’이 따로 있을가.     하긴 남한테서 받아야만 고마워 할줄 아는 우리 나름대로의 인사상식으로서는 제돈 내고 밥먹고도 고맙다는 그들의 인사문화가 먹혀들리 없었다. 중국학생들은 둘째치고 나를 비롯한 관리부서인원들도 언제 한번 주방아줌마들과 곱다랗게 인사한적이 있었던가. 이런 불친절에 아주 면역이 돼버린 그들로서는 준것없이 친절한 한국애들의 인사가 적게 주고 많이 먹으려는 자본주의 나라 애들의 알량한 속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니 뻗뻗한 목질이상밖에 더 화답해줄 여유가 있었겠는가.    그때 류학생사감이였던 나는 늘 남북이 통일되려면 우선 우리 류학생식탁부터 통일돼야하지 않는가하는 웃으개를 피우군 했다. 또한 남쪽켠이 하냥 90도의 풍경을 고집하는한 북켠의 ‘3.8’자태도 원만한 곡선이 이뤄질것이며 풍성한 ‘황후의 밥과 황제의 찬’으로 통일될 날이 멀지 않을것이라는 ‘예언’을 내린적도 있었다.    내가 감히 이런 ‘예언’을 내릴수 있었던것은 해방전부터 겪어온 우리가정의 력사를 통하여 우리민족의 인사성이 가지고있는 거대한 에너지를 보아냈기때문이다 .    위만주국시기에 장춘만선일보사의 편집으로 있었던 우리 아버지 오봉협은 산동쿠리라고 한족들도 꺼리는 문지기로인을 언제나 어른으로 깍듯히 대접하며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꼭꼭 인사를 드렸단다. 그때 서너살이였던 큰오빠와 큰언니는 맨머리바람으로 밖에 나왔다가도 그 로인만 보면 도루 집에 들어가 모자를 쓰고 나오더란다. 인사할 때는 꼭 모자를 벗으며 해야하는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일본이 투항하자 사회망나니들이 삽과 쇠스랑이를 들고일어나 조선인만 보면 찍어죽이기 시작했다. 가족숙사 1층까지 쳐들어온 폭도들이 사람을 때려죽이는 소리가 들리자 급해난 아버지가 불시에 못을 거꾸로 박은 널을 뒤창아래에 드리워놓더니 어머니더러 그 못을 타고 3층 아래로 도망치라더란다. 아버지는 넘 급한김에 널을 타고 3층에서 내려가자면 어머니가 널에서 허망 떨어질가보아 널에 못을 박았던 모양이였다. 하지만 당장 해산을 앞둔 임신부가 아무리 급한들 어찌 살이 찢기도록 못을 타고 아래로 내려갈수 있단말인가? 어머니는 죽어도 그 못에 앉지 못하겠다고 악을 쓰고, 아버지는 어머니만이라도 살리겠다고 올라서라 윽박지르고, 이에 놀란 애들(오빠, 언니)이 바스러지게 울어대고, 그러던말던 폭도들의 발자국소리는 흉악스레 다가 오고…    바로 이런 아슬아슬한 순간에 그 문지기로인이 나섰다 한다. 그때 까딱 잘못 비호했다간 같은 한족이라도 덩달아 얻어맞아 죽을 위험이 있었는데도 견결히 문을 막아나서며 이집 고 소리치더란다. 그 천상의 복음같은 소리에 우리 네식구 아니, 배안의 둘째오빠까지 다섯 생명이 구원되였다 한다.     장춘에서 빠져나온후 우리집은 연길에와 자리잡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옆집에 사는 오즈네도 석탄을 운반하는 산동쿠리였다 그런데 그런 산동쿠리의 눈에도 우리 조선인들이 업시보여 부디 우리집 창문앞에 저네집 굴뚝을 세워놓아 절반 해를 막아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올리막인 우리 마당에다 도랑까지 파놓는것이였다. 상식적으로 아래막인 서쪽켠 옆집에다 도랑을 파야했으나  같은 한족이여서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것이였다. 오즈 엄마는 전족(缠足)인데다가 90도로 꺽어진 허리병신이여서 공동변소에 갈수가 없었다. 그래 일을 본다하면 대낮에도 그 도랑 첫머리에 앉아 빠다다다- 하고 내갈기기 일수였다. 일 다 보고나서는 구정물 한통을 와르르 쏟아놓는다. 그러면 온갖 오물들이 호호탕탕하게 우리마당에 흘러들군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군소리 한마디 없이 한족동네에서도 외면하는 산동쿠리를 늘 따거, 니 호우(형님, 안녕하세요?)하며 살갑게 대해주는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저랗게 쿠리와 곱싹곱싹하길래 한족들이 조선인을 더 치뿌(欺负)한다고 말하는것이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였다.     문화대혁명초기에 모주석의 조카인 모원신이 연변에 와서 연변의 주장인 주덕해를 타도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이에 격분된 군중들이 모원신이 타고있는 할빈공대선전차를 위궁(围攻)하고있었다. 그런데 해방전부터 독실한 천주교신자여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입당마저 마다했던 어머니가 불시에 그 차를 보호하겠다고 나설줄이야, 리유는 간단했다. 모주석의 조카를 위궁하는것은 모주석을 위궁하는것과 같다는것이였다. 그래 밤새껏 팔을 곁고 모원신이 타고있는 차를 막느라고 공격해오는 사람들한테 신발을 벗기우고 머리까지 한웅큼 뽑히웠다. 불시에 탈곡장처럼 훤해진 앞머리때문에 독보조로인들처럼 수건을 쓰고 출근하는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질투나서 어머니의 머리카락과 신을 몰수 했을것이라고 놀렸더니 예수님을 그렇게 말하면 벌을 받는다는것이였다.   아이러니한것은 예수님까지 배반하시며 모원신을 보호해나섰던 어머니가 바로 그 당사자들에 의해 판국폭란이라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목숨을 잃을번했다는 사실이다. 그자들을 반대하는 시위에 기발 들고 대렬앞에 나선 오빠를 막아나섰다가 총알이 빗나가는바람에 목숨을 건졌던것이다. 대신 뒤에 섰던 한족여자애가 맞았는데 사람이 정작 총을 맞고쓸어지자 모두들 쓸어진 사람을 버리고 와- 하고 달아나기시작했다. 어머니만은 피를 흘리고 있는 그애를 차마 두고갈수 없어 그애를 안고 쫓아오는 폭도들을 향해 ‘타디 한주,(他是汉族)…’하고 소리쳤단다. 너네와 같은 한족이니까 살려주라는 뜻이였다. 그러니까 총칼을 겨누던 그놈들도 흠칫하며 비켜가더란다.    그렇게 목숨을 건진 애가 후에는 결국 미쳐버리고말았다. 늘 쫄딱 벗고 모주석만세를 부르며 길가에서 달아다녔는데 어머니만은 용케도 알아보고 엄지손가락을 내미는것이였다. 그때마다 차라리 그때 죽게 내버려 둘걸, 하며 락루하시던 어머니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소위 ‘판국폭란’이 이렇게 처참하게 진압된후 반대편의 집들이 거진 대수색을 당했는데 한사람이 우리집 문앞을 지나가다가 당장에서 맞아죽는것을 나는 직접 보았었다. 바로 이런 피바람이 부는판에 역시 오즈네가 우리집을 막아나섰다. 오즈엄마마저 구십도로 꺽어진 허리중력을 마다하고 온종일 우리집 문앞에 지키고 앉아 그 산동특유의 아다못기로 폭도들이 우리 집문앞에 얼씬도 못하게하는것이였다. 그통에 수색의 중점대상인 우리동네의 ‘코신부대’맹장들마저 우리집에 숨어들수 있었다. (코신부대란 조선아줌마들로 조직된 홍군조직으로서 옛날 행주대첩때처럼 치마폭에다 돌을 싸들고 패싸움에 뛰여들어 유명했었다.)     우리 민족의 인사성은 이렇듯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고있었다. 사람들마다 인간평등을 부르짖지만 인간 본유의 능력과 처한 환경이 서로 다르기에 평등해질수 없는것이 또한 사람이다. 허나 우리에게는 우리아버지가 그랬던것처럼 또한 우리 류학생들이 그랬던것처럼, 산동쿠리와 기자선생님에게도, 대학생과 주방아줌마들에게도, 가난뱅이와 빌게츠에게도, 백치와 아인슈타인에게도 똑같이 90` 경례를 할수 있는 인사성이라는것이 있다. 그것이 곧바로 평등하지 않은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들어가는 창조력이고 평등을 창조해가는 생명력이며 또한 천한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평등해질수 있는 뭉침의 힘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였던지 우리 식탁의 풍경이 변해가고있었다. ‘혁명적’ 바이러스에 감염되였는지 가라지처럼 뻗뻗해가는 남쪽켠의 목들이 방불히 ‘3.8선의 초병’을 닮아가고있다. ‘잘 먹겠습니다’하던 인사소리도 모기소리처럼 약해지고 약재처럼 귀해가고 있다. 더욱 우리를 탄복케 하는것은 일부 류학생들의 목에는 각도를 조절할수 있는 레모콘이 있어  장소에 따라서는 5도 90도의 채널로 착착 굽혀진다는사실이다. 시험점수를 관할하는 선생님에게는 무조건90도경례, 나같은 사감에게는 5도 경례, 청소하는 아줌마들이나 문지기 로인들에게는 아예 5도 굽히기 싫어 마구 ‘3.8초병’이 돼버리고마는것이다.    이래서 우리 식탁의 ‘남북통일’이 싹 글러졌다는 웃으개소리가 탄식처럼 흘러나오게 되는 모양이다. 물론 한국학생들이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90년대에 비해서 그 비례가 놀라웁게 커졌다는 얘기이다. 오히혀 북켠의 목들이 상대방의 문화에 물들었는지 점차 원만한 곡선으로 변해가며 ‘고마워요’하는 인사도 제법 할줄 안다.     남북의 통일을 실현시킬수 있는것은 이런 ‘레모콘’적인 인사문화가 아니라 절대적인 인사문화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단순히 남북으로서의 통일이 아니라 인간평등으로서의 회복이고 생명가치로서의 부활이기때문이다.
1    관리원 댓글:  조회:1330  추천:0  2020-02-16
     "관리워이, 관리워이"     사무실동료가 손짓하며 부른다. 그러자 전쟁 싸이렌소리나 울린듯 난전을 벌렸던 떡과 남새광주리들이 우르르 숨어버린다. ㅎㅎ, 갓난애기 제방기에 놀란다더니 관리원이라니까 모두들 내가 세금받는 시장관리원인가 했던 모양이다. 장난기가 바짝 동한 나는 “주로우(猪肉的)디, 수이로우(水肉的)디, 퉁퉁 매바(卖吧)!”하고 한바탕 “중어”를 답새겨주었다. 저네 되오? 숨이 한줌만해 있던 떡과 남새광주리들이 포복요절하며 감히 다시 등장한건 5분후였던가.      관리원이라는 요 재밌는 명칭때문에 나는 늘쌍 이렇게 빗나가서 웃고 웃어서 빗나가는 일상이 된다. 어디 시장관리원뿐만이겠는가. 이불관리원, 책상관리원, 창고관리원, 심지어 장대걸레관리원까지… 도련님꽁무니에 쫄쫄 묻어다니는 방자처럼 천하고 값싸다는 물건들은 다 내 요 관리원 이마에 쫄쫄 묻혀다닌다.     조선친척때문에 이불을 얻어 달라는 친구가 있어 이불 몇채를 해결해주었더니 해준다는 소리가 류학생부에 있다니까 큰노릇을 하는가 했더니 겨우 "이불관리원"이였구나, 동아리들의 활동때문에 반공실용품들을 구해 내놨더니 시시한 "창고관리원"인 모양이다, 세집맡은 친구에게 장대걸레를 얻어줬더니 겨우 "장대걸레관리원"이구나, 아무튼 뢰봉동지따라 열심히 좋은 일을 해줄 때마다 딱딱 보답해주시는 명칭들이시다.     마치도 유치원생들이 심란이란 이름이면 “심술돼지”, 방자면 “방기퉁재”, 봉남이면 “뽕구대”하고 별명을 붙이듯 유치란만한 보답이 줄줄 이어진다. 류학생들이 숙사에서 애완견을 몰래 길렀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다간 "애완견관리원"까지 묻혀올수 있다.    이렇게 석탄바곤처럼 “천한”명칭이 줄줄 이어지던 일상의 어느날, 기껏해야 책상이나 장대걸레나 해결하던 이 관리원이가 글쎄 어벌도 크게 동아리들의 반공실까지 해결했단다. 이럴 때는 큰맘 먹고 "반공실관리"라도 붙여줘야 하잖는가, 하지만 석탄같은 천한 바곤에 어찌 반공실같은 어마어마한 이름자를 붙이리오, 그래 기껏 해주신다는 말씀이, 제같은 관리워이 어떻게 반공실을 다 해결하오? 정말 놀랐소!이다.     거기다가 헛간이나 행랑채에나 둔치고 있어야 할 “방자”같은 천한 놈이 감히 반공실에 궁둥이를 깔고앉아 커피나 마시는 수준이니 “형벌”처럼 견딜수가 없었던 모양, 베쮼동지처럼 불원천리하고 반공실까지 찾아 일깨워주신다. 이제 정돈하게 되면 저네 과실이 없어지고 공인편제만 둔다오, 원래 제가 하는 일이 공인편제나 하는 일들이지…     우리 과실책임자가 이말을 전해듣고 우스개를 피운다.      “ 저네 친구들이 다 갱년기를 잘못 넘긴게 아뉴?”      요럴 때는 아이러니하다는 현대식언어를 써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정말 놀랐소”라는 순진한 친구나 베쮼동지처럼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덜 순진한 친구나 역시 나처럼 덜도 더도 아닌 관리원이였다면? 더 뿌리캐다보면 관리원아래서 분주히 기계나 돌렸던 로동자였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코등이 낮은것은 모르고 객관적코등이 낮은것만 열심히 념려해주신다. 그네들을 볼라치면 나처럼 순 제노력으로 공인편제로부터 간부편제로 된것이 아니라 남편이나 부모들의 후광을 입고 그만한 자리에 홀라당 앉으신 분들이였다. 이런 지체가 허망 높아진 사람들일수록 심리평형을 찾느라 콤플렉스발산이 심한 법이다.       하긴 나도 앉으나 서나 관리원이였으면서도 여태 자기가 관리원인줄 몰랐으니 누굴 어떻다고 말할 처지도 못되는것이다. 대형기업의 공자와 로동정액을 책임졌던 나를 보통 로신(劳薪)이라 불렀지 관리원이라 부르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때 둬살된 우리 애마저 너 엄마 이름이 뭐냐? 하면 우리 엄마이름이 로신임다 할 정도로 그 명칭에만 익숙해있었던것이다.     그러다가 10년후인 89년도에 의학원에 조동해와 중급직함을 평하게 되였는데 당안을 복사하며 보니까 분명 “로신관리원”(劳薪管理员)이라고 적혀있었다. 공자와 인사공작을 하여도 로신관리, 회계나 출납을 하여도 재무관리, 연구원이나 도서관에서 잡지를 책임져도 도서관리, 결국은 다가 관리원이라는 직책이였다. 하지만 보통 선생 혹은 로신, 회계, 출납이라 부르지 관리원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을 사람이라 부르지 않고 김아무개, 리아무개라 부르는것과 똑같은 도리이다.      우리학교에서도 사감(숙사감독)을 선생님이라 부르지 관리원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튕기며 골랐다는 이 류학생사감만은 관리원이라 부른다. 그것은 류학생부가 금방 건립되면서 인원부족때문에 정식직공이 아닌 임시공을 초대사감으로 임명했다는 리유에서였다. 뿌리깊은 차별의식이 임시공을 쉽게 선생님이라 존칭할수 없었던 모양, 그렇게 습관된 명칭이 3년후인 나에게까지 세습된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본인의 직함이나 공자에 영향을 주는것도 아니여서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장마당의 떡과 남새광주리들처럼 모두들 공연히 개의들하니까 내사 다시 개의하게 되는것이다. 개의하다보니 수필에서의 발견처럼 발견된 면도 꽤 있어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되였다. 이런것을 현대말로 하면 반귀효과(反馈效果)라 하는가.     인간의 무의식에는 가장 낮은 서렬로부터 탈출하려는 교묘한 본능이 있다 한다. 이런 본능의 가장 생동하고 천진한 례로써 유치원을 들수 있다.      “오늘 아침 세수하고 온 어린이 손드세요, 기발을 올려줍니다.”      하면 아침에 세수하고 온 녀석이나 전날 묵은 코범벅을 그대로 달고온 녀석이나 다 손을 쳐든다. 더한층 높은 서렬로 되려는 귀여운 탈출들이였다. 그런데 뛰는놈우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난 어제 벌써 세수 다 했씀다!”      하고 우쭐렁대는 눔도 있다. 과시 창발성있는 견해였다. 선생은 한낮 세수라는 물리적인 행위로 서렬을 시도했지만 다섯살생은 어제와 오늘이라는 승화된 시간개념으로 서렬을 시도한다. 그러니 기발 하나를 더 올려줘야 하잖는가. 당연히 “어제세수”기발이 우에서 우쭐렁대고 “오늘세수”기발이 아래서 주눅들게 되였다. 원장선생이 아시고 못내 타발이시다. 그런 엉터리로 교육하는게 어디 있소?     엉터린게 아니라 인간은 본래부터 우, 아래 서렬을 만들어가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걸 원장님은 알으셔야 했다.     과거 소와 돼지를 잡던 백정들조차 나는 적어도 개는 안잡는다는식의 서렬을 시도했다 하니, 도서관리나 장부관리도 얼마든지 자기는 적어도 숙사따위는 관리안했다는식의 서렬을 시도할수 있잖은가, 거기다가 이불이나 장대걸레같은 접두사를 붙이면 더 효과만점이고, 지금 이 글을 쓰고있는 필자행위도 곧바로 이런 의식의 역설적인 발로가 아니겠는가.     너나 나나, 다들 그렇게 해서라도 앙금처럼 남아있는 무의식속의 ‘천한’농도로부터 탈출될수만 있다면, 그래서 “사람은 다 제 잘난 멋에 산다”는 애절한 심리를 보상받을수만 있다면, 또한 그러한 천진한 서렬시도가 타인의 우월감에 대한 위기감과 렬등감을 없애고 보다 높은 자부심을 키워갈수 있는 지렛대라도 될수 있다면, 하여 보다 조화로운 인간질서와 인간평화가 금자탑마냥 굳건할수 있다면, 이 “관리워이”가 기꺼이 웃층의 우월감을 확인시킬수 있는 밑층의 구실을 할련다. 기발 한대쯤 더 양보할 용의도 되여있다. 아직까지 그런 차원쯤의 서렬시도는 “어제 세수한 녀석”처럼 앙증스럽고 깜찍스러운 삶의 동력으로 봐줄수 있으니까. 까짓거, 장마당에서처럼 ‘주로우(猪肉)디, 수이로우(水肉)디, 퉁퉁 매바(卖吧)!’하고 한바탕 중어를 답새기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낮은 서렬에서의 탈출시도가 아니라 질투로 인한 인격폄하수단으로 될때는 이미 본능이 아닌 타락이기에 인간수양을 쌓을 필요가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