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설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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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살구나무 댓글:  조회:680  추천:0  2020-05-18
     봄이 오면 나는 정원의 연분홍화신에 취해 떠날념을 못한다. 봉오리가 상긋상긋 눈짓하는 살구나무의 봄은 님을 그리는 산골처녀의 애틋함이요, 님을 엿보는 처녀의 톡톡 튀는 심장이요, 옷고름 물고 돌아서는 처녀의 입술이였다. 이래서 아버지가 살구꽃 봉오리를 택하신것일가.      살구꽃이 만발한 그네터에서 구름같이 오르내리는 어머니모습에 넔을 잃었다는 아버지, 그날로 목단화 세송이를 외면하고 살구꽃 봉오리를 택했다는 아버지, 이것은 아버지 그림일기책에 생생히 그려져있는 사랑로맨스이다.     연변대학 초창기부터 교직에 몸 담았던 아버지는 상당한 선비집안 출신으로서 위만주시절 만선일보사의 편집으로 있었다. 인물 잘나고 박식하여 당시 상류계층의 인테리녀성들이 많이 따랐다고 한다. 목단화 세송이는 바로 그런 녀성들을 가리킨것이고 살구꽃 봉오리는 우리 어머니를 상징한것이다.       아버지에게 시집와서도 신이 아까와 컬핏하면 촌의 습관대로 신을 머리에 얹고 시내복판을 뛰여다녔다는 어머니, 그래도 나무리지 않고 허허 웃으며 오히려 예쁘게 봐주었다는 아버지. 아버지는 왜 꽃중의 왕이라 할수 있는 목단을 따려하지 않고 수수하기 그지없는 살구꽃에 반했을가.      살구꽃은 목단같은 고귀함도 화려함도 없다. 허나 산골짜기 부식토와 같은 순박함과 조선치마저고리 같은 다소곳한 운치와 예쁨이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살구꽃에 반했을가.        살구꽃은 목단의 우아함과 세련됨이 없다. 허나 금방 따온 풋옥수수 같은 풋풋함과 오이 같은 청신함이 있다.그래서 아버지가 살구꽃을 욕심냈을가.        살구꽃은 목단 같은 활달함과 섹시함이 없다. 허나 퐁퐁 솟구치는 샘물 같은 투명함과 천진함이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살구꽃을 택했을가 .        향기가 없는 목단과는 달리 살기꽃에는 아기젖내마냥 솔솔 탐스러움이 풍겨서 마음이 더 닿았을가, 아니면 살구꽃운치를 안받침하고 있는 살구나무 둥치에 마음이 더 닿았을가.       백양나무나 버드나무의 미츨한 둥치와는 달리 밑둥부터 푸짐하게 줄기를 펼쳐나간 살구나무 둥치는 아무 때나 기댈수 있고 앉아 쉴수 있는 천연적인 보금자리이다. 그래서 우리학교 학생들이 즐겨 찾는 휴식터로 되여있다. 그 모양은 묘하게도 아버지가 하루에 3시간만 주무시겠다는 굳은 결심의 표징으로 일기책에 그려놓은 3자형 걸상과도 같은 형태였다.     그랬다. 아버지는 걸상에서 매일 3시간 쪽잠만 쉬시고는 일체를 학문연구에 돌렸다. 하여 짧디짧은 5년사이에 언어학, 력사, 고고학, 철학등 령역의 론문과 대학교재들을 편찬했으며 연변에서 처음으로 돈화발해국 정혜공주묘 발굴과 연구정리사업을 벌이셨다. 아버지의 이런 초인간적인 학문탐구에는 반드시 쉬시면서 보다 큰 충발력을 충전하기 위한 살구나무둥치와 같은 보금터가 수요되였을것이다. 어머니는 바로 이 보금터와 같은 살구나무둥치의 역할을 달갑게 여기시고 당신의 일체를 희생한 분이였다.      어머니는 모델 못지 않게 인물체격이 훤칠하고 아버지한테서 천자문까지 숙달하게 떼어 4, 50연대로서는 그야말로 문무가 겸비한 인테리주부로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 월급이 상당한 수준이여서 어머니는 얼마든지 교수부인 행세를 하며 품위있게 살수 있었다. 히지만 어머니는 촌아낙네처럼 집에서 새끼를 꼬고 시장에나가 품팔이도 하며 어렵게 살림을 연명해나갔다. 아버지봉급으로는 몽땅 학문연구에 필요한 서적들을 사야했기때문이였다. 그렇게 사들인 책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5, 60년대에 외지 사람이 길 가던 사람 아무하고나 “연길에 책이 제일 많은 집이 어디요?” 하면 곧곧히 우리 집을 가이켜 주군 하였다. 그 많은 책들은 후에 아버지유언에 따라 연변대학도서관에 기증하였다.      비바람에 지붕이 날려가고 연통까지 무너져도 어머니는 학문연구에 지장이 간다고 아버지를 책상에서 까딱 일어못나게 하고 당신이 직접 지붕에 올라가 손질하셨다. 동네분들도 우리집은 원래 그런 법이려니 하고 동원되여 집수리를 해주군 했는데 글쓰는 아버지에게 방해가 된다고 연장 하나라고 그렇게 조심스레 다루었다 한다. 이것 역시 아버지 일기책에 그려져있는 생생한 스토리이다.      돈화발해정혜묘 발굴사업을 하실 때에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간을 절약해드리느라 당신이 손수 고물에서 난 녹을 하나하나 닦아냈고 고물들에 박힌 흙들을 솔로 털어냈으며 조각난 도자기들을 하나하나 원모양대로 맞추는 작업도 하셨다. 매 고물마다 주머니를 만들어 알뜰히 포장해 놓고 후에 성박물관에 바쳤다 한다.     헌신적인 내조, 아버지는 이런 살구나무둥치의 속성을 엿보아냈던것 같다. 해방후, 많은 고급지식분자들이 조강지처를 헌신짝 내치듯 내쳤지만 아버지는 보석단지마냥 어머니를 놓을련정 안했다. 세상 뜨기 전날까지 “사랑하는 명희야”를 일기책에 써놓은것을 보면 아버지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했던지를 알수 있다.     나무둥치에서 툭툭하고 맥박 같은것이 들려오며 억센기운이 뻗쳐온다. 인간의 혈액처럼 나무에도 수액이 있는걸가. 어머니의 가녀린 손가락 같은 살구나무뿌리들이 돌과 유리쪼각이 가득 엉켜진 땅속까지 비집고 들어가노라니 얼마만한 상처와 아픔을 겪었을가, 그래도 뿌리들은 쉬지 않고 수분을 빨아 나무의 수액을 만든다. 연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끈질긴 의지의 뿌리, 인내의 뿌리, 희망의 뿌리, 생명의 뿌리, 수수한 살구꽃봉오리에서 이런 뿌리정신까지 보아낸 아버지 혜안에 탄복된다.     그 믿음에 아버지가 어머니의 뿌리 같은 가녀린 손을 붙잡고 자식 여섯을 몽땅 대학까지 졸업시켜달라는 엄청난 유언까지 감히 내리셨을가. 서른다섯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세상뜨기 전해인 84세까지 꼬박 50년을 해마다 세번씩 아버지산소에 다녀오셨다. 가실 때마다 꼭꼭 살구나무 한가지를 아버지비석 앞에 정중이 모셔놓군 했다. 그것은 아버지유언을 꼭 실행하겠다는 뼈 같은 어머니의 결심이였다.      아니, 그것은 살구나무뿌리가 수분을 빨아 나무의 수액을 만들듯이 남편을 만들고 자식을 만드는 인간생명의 뿌리를 상징하였을것이고 살구나무 한그루가 자연의 일부이듯 세상자연을 만들어가고 우주를 만들어가며 하나의 큰 생명체를 만드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거룩한 상징이였을것이다.     수수한 살구꽃봉오리에서 살구나무의 옹군 정신을 보아 낸 아버지혜안에 다시금 탄복하며 나는 금년에도 어머니를 대신하여 살구나무 한가지를 아버지비석앞에 정중히 모셔놓았다.
28    식탁의 풍경 댓글:  조회:739  추천:1  2020-04-25
    밥과 찬을 진렬해놓은 기다란 식탁을 사이두고 북쪽켠에는 주방아줌마들이 힁대로 줄느런히 서있고 남쪽켠에는 점심식사를 하러 온 한국류학생들이 줄느런히 서있다. 량쪽을 관리하느라 식탁의 서쪽켠에 서있어야 하는 나의 관리각도는 연변과 한국의 문화를 한눈에 스케치할수 있는 ‘3.8선’과 같아서 재미난다.     남쪽켠의 한국학생들은 주방아줌마들을 향해 ‘잘 먹겠습니다’는 90도 인사를 꼬박꼬박 하는데 북쪽켠의 연변아줌마들은 장승처럼 목이 뻗뻗해서 밥과 찬만 퍼주고있다. 남켠은 ‘잘 먹고갑니다’는 인사를 꼬박꼬박하고 가는데 북켠은 그냥 ‘3.8’선의 초병처럼 꼳꼳해서 눈 한번 깜짝 안한다, 90도 0도가 따로 있을가, ‘황후의 밥’과 ‘걸인의 찬’이 따로 있을가.     하긴 남한테서 받아야만 고마워 할줄 아는 우리 나름대로의 인사상식으로서는 제돈 내고 밥먹고도 고맙다는 그들의 인사문화가 먹혀들리 없었다. 중국학생들은 둘째치고 나를 비롯한 관리부서인원들도 언제 한번 주방아줌마들과 곱다랗게 인사한적이 있었던가. 이런 불친절에 아주 면역이 돼버린 그들로서는 준것없이 친절한 한국애들의 인사가 적게 주고 많이 먹으려는 자본주의 나라 애들의 알량한 속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니 뻗뻗한 목질이상밖에 더 화답해줄 여유가 있었겠는가.    그때 류학생사감이였던 나는 늘 남북이 통일되려면 우선 우리 류학생식탁부터 통일돼야하지 않는가하는 웃으개를 피우군 했다. 또한 남쪽켠이 하냥 90도의 풍경을 고집하는한 북켠의 ‘3.8’자태도 원만한 곡선이 이뤄질것이며 풍성한 ‘황후의 밥과 황제의 찬’으로 통일될 날이 멀지 않을것이라는 ‘예언’을 내린적도 있었다.    내가 감히 이런 ‘예언’을 내릴수 있었던것은 해방전부터 겪어온 우리가정의 력사를 통하여 우리민족의 인사성이 가지고있는 거대한 에너지를 보아냈기때문이다 .    위만주국시기에 장춘만선일보사의 편집으로 있었던 우리 아버지 오봉협은 산동쿠리라고 한족들도 꺼리는 문지기로인을 언제나 어른으로 깍듯히 대접하며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꼭꼭 인사를 드렸단다. 그때 서너살이였던 큰오빠와 큰언니는 맨머리바람으로 밖에 나왔다가도 그 로인만 보면 도루 집에 들어가 모자를 쓰고 나오더란다. 인사할 때는 꼭 모자를 벗으며 해야하는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일본이 투항하자 사회망나니들이 삽과 쇠스랑이를 들고일어나 조선인만 보면 찍어죽이기 시작했다. 가족숙사 1층까지 쳐들어온 폭도들이 사람을 때려죽이는 소리가 들리자 급해난 아버지가 불시에 못을 거꾸로 박은 널을 뒤창아래에 드리워놓더니 어머니더러 그 못을 타고 3층 아래로 도망치라더란다. 아버지는 넘 급한김에 널을 타고 3층에서 내려가자면 어머니가 널에서 허망 떨어질가보아 널에 못을 박았던 모양이였다. 하지만 당장 해산을 앞둔 임신부가 아무리 급한들 어찌 살이 찢기도록 못을 타고 아래로 내려갈수 있단말인가? 어머니는 죽어도 그 못에 앉지 못하겠다고 악을 쓰고, 아버지는 어머니만이라도 살리겠다고 올라서라 윽박지르고, 이에 놀란 애들(오빠, 언니)이 바스러지게 울어대고, 그러던말던 폭도들의 발자국소리는 흉악스레 다가 오고…    바로 이런 아슬아슬한 순간에 그 문지기로인이 나섰다 한다. 그때 까딱 잘못 비호했다간 같은 한족이라도 덩달아 얻어맞아 죽을 위험이 있었는데도 견결히 문을 막아나서며 이집 고 소리치더란다. 그 천상의 복음같은 소리에 우리 네식구 아니, 배안의 둘째오빠까지 다섯 생명이 구원되였다 한다.     장춘에서 빠져나온후 우리집은 연길에와 자리잡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옆집에 사는 오즈네도 석탄을 운반하는 산동쿠리였다 그런데 그런 산동쿠리의 눈에도 우리 조선인들이 업시보여 부디 우리집 창문앞에 저네집 굴뚝을 세워놓아 절반 해를 막아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올리막인 우리 마당에다 도랑까지 파놓는것이였다. 상식적으로 아래막인 서쪽켠 옆집에다 도랑을 파야했으나  같은 한족이여서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것이였다. 오즈 엄마는 전족(缠足)인데다가 90도로 꺽어진 허리병신이여서 공동변소에 갈수가 없었다. 그래 일을 본다하면 대낮에도 그 도랑 첫머리에 앉아 빠다다다- 하고 내갈기기 일수였다. 일 다 보고나서는 구정물 한통을 와르르 쏟아놓는다. 그러면 온갖 오물들이 호호탕탕하게 우리마당에 흘러들군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군소리 한마디 없이 한족동네에서도 외면하는 산동쿠리를 늘 따거, 니 호우(형님, 안녕하세요?)하며 살갑게 대해주는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저랗게 쿠리와 곱싹곱싹하길래 한족들이 조선인을 더 치뿌(欺负)한다고 말하는것이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였다.     문화대혁명초기에 모주석의 조카인 모원신이 연변에 와서 연변의 주장인 주덕해를 타도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이에 격분된 군중들이 모원신이 타고있는 할빈공대선전차를 위궁(围攻)하고있었다. 그런데 해방전부터 독실한 천주교신자여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입당마저 마다했던 어머니가 불시에 그 차를 보호하겠다고 나설줄이야, 리유는 간단했다. 모주석의 조카를 위궁하는것은 모주석을 위궁하는것과 같다는것이였다. 그래 밤새껏 팔을 곁고 모원신이 타고있는 차를 막느라고 공격해오는 사람들한테 신발을 벗기우고 머리까지 한웅큼 뽑히웠다. 불시에 탈곡장처럼 훤해진 앞머리때문에 독보조로인들처럼 수건을 쓰고 출근하는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질투나서 어머니의 머리카락과 신을 몰수 했을것이라고 놀렸더니 예수님을 그렇게 말하면 벌을 받는다는것이였다.   아이러니한것은 예수님까지 배반하시며 모원신을 보호해나섰던 어머니가 바로 그 당사자들에 의해 판국폭란이라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목숨을 잃을번했다는 사실이다. 그자들을 반대하는 시위에 기발 들고 대렬앞에 나선 오빠를 막아나섰다가 총알이 빗나가는바람에 목숨을 건졌던것이다. 대신 뒤에 섰던 한족여자애가 맞았는데 사람이 정작 총을 맞고쓸어지자 모두들 쓸어진 사람을 버리고 와- 하고 달아나기시작했다. 어머니만은 피를 흘리고 있는 그애를 차마 두고갈수 없어 그애를 안고 쫓아오는 폭도들을 향해 ‘타디 한주,(他是汉族)…’하고 소리쳤단다. 너네와 같은 한족이니까 살려주라는 뜻이였다. 그러니까 총칼을 겨누던 그놈들도 흠칫하며 비켜가더란다.    그렇게 목숨을 건진 애가 후에는 결국 미쳐버리고말았다. 늘 쫄딱 벗고 모주석만세를 부르며 길가에서 달아다녔는데 어머니만은 용케도 알아보고 엄지손가락을 내미는것이였다. 그때마다 차라리 그때 죽게 내버려 둘걸, 하며 락루하시던 어머니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소위 ‘판국폭란’이 이렇게 처참하게 진압된후 반대편의 집들이 거진 대수색을 당했는데 한사람이 우리집 문앞을 지나가다가 당장에서 맞아죽는것을 나는 직접 보았었다. 바로 이런 피바람이 부는판에 역시 오즈네가 우리집을 막아나섰다. 오즈엄마마저 구십도로 꺽어진 허리중력을 마다하고 온종일 우리집 문앞에 지키고 앉아 그 산동특유의 아다못기로 폭도들이 우리 집문앞에 얼씬도 못하게하는것이였다. 그통에 수색의 중점대상인 우리동네의 ‘코신부대’맹장들마저 우리집에 숨어들수 있었다. (코신부대란 조선아줌마들로 조직된 홍군조직으로서 옛날 행주대첩때처럼 치마폭에다 돌을 싸들고 패싸움에 뛰여들어 유명했었다.)     우리 민족의 인사성은 이렇듯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고있었다. 사람들마다 인간평등을 부르짖지만 인간 본유의 능력과 처한 환경이 서로 다르기에 평등해질수 없는것이 또한 사람이다. 허나 우리에게는 우리아버지가 그랬던것처럼 또한 우리 류학생들이 그랬던것처럼, 산동쿠리와 기자선생님에게도, 대학생과 주방아줌마들에게도, 가난뱅이와 빌게츠에게도, 백치와 아인슈타인에게도 똑같이 90` 경례를 할수 있는 인사성이라는것이 있다. 그것이 곧바로 평등하지 않은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들어가는 창조력이고 평등을 창조해가는 생명력이며 또한 천한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평등해질수 있는 뭉침의 힘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였던지 우리 식탁의 풍경이 변해가고있었다. ‘혁명적’ 바이러스에 감염되였는지 가라지처럼 뻗뻗해가는 남쪽켠의 목들이 방불히 ‘3.8선의 초병’을 닮아가고있다. ‘잘 먹겠습니다’하던 인사소리도 모기소리처럼 약해지고 약재처럼 귀해가고 있다. 더욱 우리를 탄복케 하는것은 일부 류학생들의 목에는 각도를 조절할수 있는 레모콘이 있어  장소에 따라서는 5도 90도의 채널로 착착 굽혀진다는사실이다. 시험점수를 관할하는 선생님에게는 무조건90도경례, 나같은 사감에게는 5도 경례, 청소하는 아줌마들이나 문지기 로인들에게는 아예 5도 굽히기 싫어 마구 ‘3.8초병’이 돼버리고마는것이다.    이래서 우리 식탁의 ‘남북통일’이 싹 글러졌다는 웃으개소리가 탄식처럼 흘러나오게 되는 모양이다. 물론 한국학생들이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90년대에 비해서 그 비례가 놀라웁게 커졌다는 얘기이다. 오히혀 북켠의 목들이 상대방의 문화에 물들었는지 점차 원만한 곡선으로 변해가며 ‘고마워요’하는 인사도 제법 할줄 안다.     남북의 통일을 실현시킬수 있는것은 이런 ‘레모콘’적인 인사문화가 아니라 절대적인 인사문화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단순히 남북으로서의 통일이 아니라 인간평등으로서의 회복이고 생명가치로서의 부활이기때문이다.
27    관리원 댓글:  조회:1329  추천:0  2020-02-16
     "관리워이, 관리워이"     사무실동료가 손짓하며 부른다. 그러자 전쟁 싸이렌소리나 울린듯 난전을 벌렸던 떡과 남새광주리들이 우르르 숨어버린다. ㅎㅎ, 갓난애기 제방기에 놀란다더니 관리원이라니까 모두들 내가 세금받는 시장관리원인가 했던 모양이다. 장난기가 바짝 동한 나는 “주로우(猪肉的)디, 수이로우(水肉的)디, 퉁퉁 매바(卖吧)!”하고 한바탕 “중어”를 답새겨주었다. 저네 되오? 숨이 한줌만해 있던 떡과 남새광주리들이 포복요절하며 감히 다시 등장한건 5분후였던가.      관리원이라는 요 재밌는 명칭때문에 나는 늘쌍 이렇게 빗나가서 웃고 웃어서 빗나가는 일상이 된다. 어디 시장관리원뿐만이겠는가. 이불관리원, 책상관리원, 창고관리원, 심지어 장대걸레관리원까지… 도련님꽁무니에 쫄쫄 묻어다니는 방자처럼 천하고 값싸다는 물건들은 다 내 요 관리원 이마에 쫄쫄 묻혀다닌다.     조선친척때문에 이불을 얻어 달라는 친구가 있어 이불 몇채를 해결해주었더니 해준다는 소리가 류학생부에 있다니까 큰노릇을 하는가 했더니 겨우 "이불관리원"이였구나, 동아리들의 활동때문에 반공실용품들을 구해 내놨더니 시시한 "창고관리원"인 모양이다, 세집맡은 친구에게 장대걸레를 얻어줬더니 겨우 "장대걸레관리원"이구나, 아무튼 뢰봉동지따라 열심히 좋은 일을 해줄 때마다 딱딱 보답해주시는 명칭들이시다.     마치도 유치원생들이 심란이란 이름이면 “심술돼지”, 방자면 “방기퉁재”, 봉남이면 “뽕구대”하고 별명을 붙이듯 유치란만한 보답이 줄줄 이어진다. 류학생들이 숙사에서 애완견을 몰래 길렀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다간 "애완견관리원"까지 묻혀올수 있다.    이렇게 석탄바곤처럼 “천한”명칭이 줄줄 이어지던 일상의 어느날, 기껏해야 책상이나 장대걸레나 해결하던 이 관리원이가 글쎄 어벌도 크게 동아리들의 반공실까지 해결했단다. 이럴 때는 큰맘 먹고 "반공실관리"라도 붙여줘야 하잖는가, 하지만 석탄같은 천한 바곤에 어찌 반공실같은 어마어마한 이름자를 붙이리오, 그래 기껏 해주신다는 말씀이, 제같은 관리워이 어떻게 반공실을 다 해결하오? 정말 놀랐소!이다.     거기다가 헛간이나 행랑채에나 둔치고 있어야 할 “방자”같은 천한 놈이 감히 반공실에 궁둥이를 깔고앉아 커피나 마시는 수준이니 “형벌”처럼 견딜수가 없었던 모양, 베쮼동지처럼 불원천리하고 반공실까지 찾아 일깨워주신다. 이제 정돈하게 되면 저네 과실이 없어지고 공인편제만 둔다오, 원래 제가 하는 일이 공인편제나 하는 일들이지…     우리 과실책임자가 이말을 전해듣고 우스개를 피운다.      “ 저네 친구들이 다 갱년기를 잘못 넘긴게 아뉴?”      요럴 때는 아이러니하다는 현대식언어를 써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정말 놀랐소”라는 순진한 친구나 베쮼동지처럼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덜 순진한 친구나 역시 나처럼 덜도 더도 아닌 관리원이였다면? 더 뿌리캐다보면 관리원아래서 분주히 기계나 돌렸던 로동자였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코등이 낮은것은 모르고 객관적코등이 낮은것만 열심히 념려해주신다. 그네들을 볼라치면 나처럼 순 제노력으로 공인편제로부터 간부편제로 된것이 아니라 남편이나 부모들의 후광을 입고 그만한 자리에 홀라당 앉으신 분들이였다. 이런 지체가 허망 높아진 사람들일수록 심리평형을 찾느라 콤플렉스발산이 심한 법이다.       하긴 나도 앉으나 서나 관리원이였으면서도 여태 자기가 관리원인줄 몰랐으니 누굴 어떻다고 말할 처지도 못되는것이다. 대형기업의 공자와 로동정액을 책임졌던 나를 보통 로신(劳薪)이라 불렀지 관리원이라 부르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때 둬살된 우리 애마저 너 엄마 이름이 뭐냐? 하면 우리 엄마이름이 로신임다 할 정도로 그 명칭에만 익숙해있었던것이다.     그러다가 10년후인 89년도에 의학원에 조동해와 중급직함을 평하게 되였는데 당안을 복사하며 보니까 분명 “로신관리원”(劳薪管理员)이라고 적혀있었다. 공자와 인사공작을 하여도 로신관리, 회계나 출납을 하여도 재무관리, 연구원이나 도서관에서 잡지를 책임져도 도서관리, 결국은 다가 관리원이라는 직책이였다. 하지만 보통 선생 혹은 로신, 회계, 출납이라 부르지 관리원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을 사람이라 부르지 않고 김아무개, 리아무개라 부르는것과 똑같은 도리이다.      우리학교에서도 사감(숙사감독)을 선생님이라 부르지 관리원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튕기며 골랐다는 이 류학생사감만은 관리원이라 부른다. 그것은 류학생부가 금방 건립되면서 인원부족때문에 정식직공이 아닌 임시공을 초대사감으로 임명했다는 리유에서였다. 뿌리깊은 차별의식이 임시공을 쉽게 선생님이라 존칭할수 없었던 모양, 그렇게 습관된 명칭이 3년후인 나에게까지 세습된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본인의 직함이나 공자에 영향을 주는것도 아니여서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장마당의 떡과 남새광주리들처럼 모두들 공연히 개의들하니까 내사 다시 개의하게 되는것이다. 개의하다보니 수필에서의 발견처럼 발견된 면도 꽤 있어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되였다. 이런것을 현대말로 하면 반귀효과(反馈效果)라 하는가.     인간의 무의식에는 가장 낮은 서렬로부터 탈출하려는 교묘한 본능이 있다 한다. 이런 본능의 가장 생동하고 천진한 례로써 유치원을 들수 있다.      “오늘 아침 세수하고 온 어린이 손드세요, 기발을 올려줍니다.”      하면 아침에 세수하고 온 녀석이나 전날 묵은 코범벅을 그대로 달고온 녀석이나 다 손을 쳐든다. 더한층 높은 서렬로 되려는 귀여운 탈출들이였다. 그런데 뛰는놈우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난 어제 벌써 세수 다 했씀다!”      하고 우쭐렁대는 눔도 있다. 과시 창발성있는 견해였다. 선생은 한낮 세수라는 물리적인 행위로 서렬을 시도했지만 다섯살생은 어제와 오늘이라는 승화된 시간개념으로 서렬을 시도한다. 그러니 기발 하나를 더 올려줘야 하잖는가. 당연히 “어제세수”기발이 우에서 우쭐렁대고 “오늘세수”기발이 아래서 주눅들게 되였다. 원장선생이 아시고 못내 타발이시다. 그런 엉터리로 교육하는게 어디 있소?     엉터린게 아니라 인간은 본래부터 우, 아래 서렬을 만들어가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걸 원장님은 알으셔야 했다.     과거 소와 돼지를 잡던 백정들조차 나는 적어도 개는 안잡는다는식의 서렬을 시도했다 하니, 도서관리나 장부관리도 얼마든지 자기는 적어도 숙사따위는 관리안했다는식의 서렬을 시도할수 있잖은가, 거기다가 이불이나 장대걸레같은 접두사를 붙이면 더 효과만점이고, 지금 이 글을 쓰고있는 필자행위도 곧바로 이런 의식의 역설적인 발로가 아니겠는가.     너나 나나, 다들 그렇게 해서라도 앙금처럼 남아있는 무의식속의 ‘천한’농도로부터 탈출될수만 있다면, 그래서 “사람은 다 제 잘난 멋에 산다”는 애절한 심리를 보상받을수만 있다면, 또한 그러한 천진한 서렬시도가 타인의 우월감에 대한 위기감과 렬등감을 없애고 보다 높은 자부심을 키워갈수 있는 지렛대라도 될수 있다면, 하여 보다 조화로운 인간질서와 인간평화가 금자탑마냥 굳건할수 있다면, 이 “관리워이”가 기꺼이 웃층의 우월감을 확인시킬수 있는 밑층의 구실을 할련다. 기발 한대쯤 더 양보할 용의도 되여있다. 아직까지 그런 차원쯤의 서렬시도는 “어제 세수한 녀석”처럼 앙증스럽고 깜찍스러운 삶의 동력으로 봐줄수 있으니까. 까짓거, 장마당에서처럼 ‘주로우(猪肉)디, 수이로우(水肉)디, 퉁퉁 매바(卖吧)!’하고 한바탕 중어를 답새기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낮은 서렬에서의 탈출시도가 아니라 질투로 인한 인격폄하수단으로 될때는 이미 본능이 아닌 타락이기에 인간수양을 쌓을 필요가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26    톡톡 댓글:  조회:656  추천:0  2020-01-24
    자다가 발바닥이 텁텁한것 같아서 깨여났다. 대야에 물을 떠서 가만가만 발을 씻고있는데 가마목에서 쉬던 어머니의 잔소리가 깨여났다 .   에그, 아침저녁으로 발을 씻구두 모자라 이 밤중에 물질이냐, 도대체 물로 발을 씻냐, 발로 물을 씻냐, 저렇게 물오리질하다가 농촌에 내려가 며칠이나 견뎌내자구 저러누?     아닌게 아니라 모주석의 지시를 받들고 농촌에 내려갔던 이 하향지식청년이 거퍼 한달도 견디고 못하고 오직 모욕을 위해 젱젱 연길로 되돌아오고야 말았다. 아무렴 하루에도 열댓번씩 손을 씻고 발을 씻고 하던 이 물오리가 빈하중농집에 얹혀살며 하루에 고양이 세수나 겨우 한번 할수 있는 정도였으니 견딜수나 있을손가, 아무리 빈하농의 재교육을 받으며 열심히 사상이 붉어지자 해도 몸이 찐덕찐덕해가지고서는 도무지 붉어질수가 없었다.    그때 가정의 어려움때문에 겨우 3 원이라는 일년 생활비밖에 가지지 못한 신세였음에도 승승장구로 연길로의 모욕행차를 실시했던것이다. 누군가 “황후의 밥, 걸인의 찬”이라더 나야말로 한번의 모욕행차ㅡ황후의 밥에 차비 1원20전(총재산의 40%)나 탕진하고나니 “걸인의 찬”신세가 되고말았다. 돈이 없어 이팔청춘에 치솔질도 소금으로 해야 했고 세수도 빨래비누로 해야 했으니 언김생심 얼굴에다 덧칠이라도 해보겠는가?    두번 다시 ‘황후의 밥’을 꿈꿨다가는 걸인의 찬도 차레질것 같지 않았다. 그후부터 아예 산개울에 가서 목욕했다. 봄부터 얼음이 지는 초겨울까지 강에서 풍덩거렸는데 그것도 남이 본다고 밤에야만 해야 했다. 초겨울이 되여 얼음이 서걱거리는 개울물에 들어설 때면 그야말로 모주석의 어록으로 용기를 북돋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덜덜덜 떨면서도 결사적으로 모주석어록을 랑송하군 했는데 그것은 곧바로 “결심을 내리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만난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하자!”였다. 이렇게 천신만고로 승리를 쟁취하고 나면 얼굴이 얼어들다 못해 파랗게 날이 섰고 머리카락이 주렁주렁 고드름처럼 드리워 ‘빙산에서 온 손님’이 따로 없었다. 그야말로 목욕이라면 목숨도 마다할 드팀없는 각오여서 도대체 저 “톡톡”을 어느 눈 먼 총각이 데려가겠는가 하는 어머니의 걱정도 무리는 아니였다.        “톡톡”이란 새로 산 옷도 꼭꼭 씻어야 입고 씼어 말리운 옷도 기어이 털어야 입는 나의 습관때문에 “그렇게 톡톡 털다간 사람정도 다 털어버리네라.”하는 어머니의 잔소리에서 비롯된 별명이였다. 솔직히 나도 나의 톡톡 터는 습관때문에 앞으로 같이 털어줄 동반자가 없을가봐 은근히 걱정되였었다. 그런데 하느님이 도왔는지 마침내 “눈 먼”총각이 나타날줄이야. 하지만 톡톡 터는 버릇은 언니 말마따나 개도 못떼주는지 집안에 남들이 좀만 얼씬거려도 줄기차게 따라다니며 걸레질해대군 했다. 그 성화에 늘 나에게 푸른등 켜주는 남편도     “니 그게 병이다. 병”     하며 못마땅해했다. 그 “병”때문에 한타스나 되는 조카들은 물론이요, 두살터울이여서 친구처럼 지내던 막내오빠마저 웬간해서는 우리집에 오지 않았다. 혹시 일이 있어도 올라오지 않고 아예 봉당에서 얘기하다 돌아가군 했다.     어느날 큰언니가 우리집에 왔다. 그런데 불시에 화닥닥 뛰여나가는것이였다. 그 동작이야 말로 라스트선을 향한 단거리선수지 관절로 삐꺽거리던 늙은이가 아니였다. 너무 이상해서 따라가봤더니 워쩐걸, 길건너에 있는 작은 언니네 화장실에 들어가 빠따따ㅡ 하고 큰일을 보고있었다. 원래 며칠전부터 앓던 리질이 우리집에 오자마자 또 도졌던것이다.     “아무리 우리 톡톡공주가 톡톡 털기로서니 우리집이 무슨 농업비료 지원하는 장소요? 급하면 제자리에서 해결할거지, 우정 여기로 오기는, 그러다가 바지에라도 적시면 어찌자구 그러오?”      하고 죽겠다고 웃어대는 작은언니와      “똥이 륜기를 가르는 줄을 모르니?”      하고 무심중에 던진 큰언니의 말 한마디가 가슴을 찔러왔다. 언니 말대로 변은 확실히 륜기를 가르는것 같다. 남 자식의 대변은 더러워해도 제자식의 대변은 더러운줄 모른다. 누워않는 시아버님과 친정어머니를 차례로 모실 때도 어머니의 배설물은 마스크를 끼지 않고 처리하면서도 시아버님의것은 기어이 마스크를 끼고야 처리할수 있었다. 그랬다고      “똥을 가지고 편을 가르니?”     하는 남편의 지청구를 들어야 했고     “자기 아버지 역성을 들다 못해 이젠 아버지 똥까지 역성들겠구나.”     하고 맞다들어서 얼마나 웃었던가? 같은 이물질이라도 친부모와 시부모간에는 분명 더럽고 덜 더러운 감각이 있었고 계선이 있었던것이다. 가까운 혈육일수록 더럽다는 감각이 덜한것, 이것은 끊래야 끊을수 없는 륜기의 뿌리이자 륜기의 흐름이며 윤기의 본능이기도 하다.      이런 천성적인 륜기의 본능대로라면 언니는 꺼리낌 없이 우리집 화장실를 써야 했다. 그런데도 감히 쓰지 못하는것은 무엇때문이였 을가? 언니의 무의식저변에 내가 타인처럼 보였기때문이였을가. 나이차가 많아서 부모 맞잡이인 큰언니에게 이럴 정도였다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들에게는 또 얼마나 말못할 어려움과 피곤을 가져다주었겠는가. “물로 발을 씻니, 발로 물을 씻니, 그렇게 톡톡 털다간 사람정도 다 털어버릴라.” 하던 어머니의 잔소리가 40 여년만에 다시금 귀에 쟁쟁 울려온다. 아니, 가슴에 쓰르르 스며든다.     물로 발을 씻는것이 아니라 발로 물을 씻는다는 말은 물이 발의 서비스를 하는것이 아니라 발이 물의 서비스를 한다는 뜻이라 하겠다. 즉 깨끗함에 집착한 나머지 깨끗함의 노예가 된다는 어머니나름대로의 정의였을것이다. 지나친 깨끗함은 깨끗함이 아니라 결벽이다. 결벽이란 결국 인간의 정을 톡톡 털어버릴 정도만이 아닌, 인간의 삶을 감염시키고 인간의 륜기를 질식시키는 일산화탄소와 같은것으로서 의학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강박증에 속하는 심리적 병균이였던것 같다.     .    ”니 그게 병이다. 병”     하던 남편의 말이 진짜 중점 발언이였던것 같다. 인간의 륜기를 병들게 하는것만큼 루추한 “병원균”은 없으니까 말이다. 저혼자만 깨끗하고 우아한척, 남은 더럽고 저질이라고 생각하는것 만큼 유치한 심리적 바이러스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소위 수필을 쓴다는 나의 작품에는 이런 심리적 바이러스가 없었는지, 비단보안의 개똥처럼 속은 구리면서도 겉으로는 향그러운척, 거칠면서도 우아한척, 엉망이면서도 부드러운척, 딱딱하면서도 나긋한척, 아니면 제자랑만 잔뜩 늘여놓아 독자들의 시간을 축내 지나 않았는지, 한번 따갑게 반성해볼 일이다.     아니, 반성하기에 앞서 우선 우리 형제들이나 편안히 나들수 있도록 화장실부터 개방해야겠다.
25    몬스테라 댓글:  조회:570  추천:0  2020-01-02
   지원군으로 6.25전쟁에 나가셨던 시아버님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오시면서 몬스테라(龟背竹)란 식물 하나만을 달랑 들고 오셨단다.    어느날, 세돐된 아들녀석이 막대기 들고 소림사흉내를 내다가 몬스태라줄기를 꺽어놨다. 그러자 아버님이 벼락같이 소리치며 단박 지팽이로 손자를 후려칠 태세이다. 그것이 아무리 중한들 손자보다 더 귀할가. 당장 격분되여 도끼눈으로 아버지를 힘있게 올려다보며 애를 막아서려하는데 아버님이 불시에 식은 땀을 쫙 흘리며 한쪽다리를 붙잡고있었다. 꺽어져 푹 땅에 드리운 몬스테라 줄기와 아버지의 아픈다리가 45도 각을 이루면서 내눈을 아프게 찔러왔다.    운동 때 학생들한테 스팀관즈로 얻어맞아 꺽어질번 했던 다리였다. 할빈의과대학 제 1기 졸업생이고 졸업후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천신만고로 꾸렸던 개인 병원까지 혁명사업에 바쳤었다. 후에 주덕해주장님이 혁명하던 3지대에서 위생대대장직을 맡으셨고 조선지원군으로 나가실 때 이미 사장급이였다, 그러니 이마에 피도 안마른 녀석들의 시린 꼴이 눈에 차겠는가, 치면 칠수록 더 푸르낏낏 살아나 자식 꾸짖듯 호령했단다. 당내의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가 반란파맹장들하고 두 손 싹싹 비비며 빌어도 다 못빌겠는데 감히 반란파들을 호령하다니,  그 비참한 결과는 불보듯 뻔했다.    아버님은 다리아픔이 잠간 멎자 인츰 상한 몬스테라부터 치료하는라 분주했다. 전선의 부상병에게 붕대를 감아주듯 조심조심 줄기를 동여매고 제자리에 온전히 붙어있도록 막대기로 받쳐놓았다. 애도 금방 있었던 일을 금시 잊어버리고 대롱대롱 눈물을 단채 할아버지를 도와 가위랑 날라주느라 야단이다.    몬스테라는 누가 자기를 미워하고 사랑하는가를 다 아는 령물이야. 줄기를 꺽으면 우리 한생이 주사맞을 때처럼 아파한다구. 할아버지가 손자를 타일렀다.   그 후부터 아침이면 애가 할어버지따라 몬스테라잎을 살랑살랑 닦아주며 아파, 아파? 하고 묻는다. 꺽어진 줄기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보살핌속에서 점차 원모습으로 회복되여갔다. 어느날, 바깥 창문턱에 중뿔나게 돋은 풀이 눈에 거슬려 뽑으려는데 애가 가을바람에 놀란 여치처럼 황겁히 소리친다. 어머니 뽑지 마시요, 풀들이 주사처럼 아파합니다. 허참, 누가 그 할애비 손자가 아니랄가봐, 이젠 죄꼬만 자식놈의 시집살이까지 하게 생겼네.    몬스테라는 시집식구들이 아버님따라 하느님 모시듯 우러르는 화초이다. 그래그런지 키가 제맘껐 자라 푸르죽죽 천정을 뚫을듯한 기세다. 잎마저 물독아가리만큼 커가지고 거기에 년륜처럼 칼날같은 홈까지 패여있어 똑마치 거부기등같은 위엄기가 배여있다. 그 기세에 눌렸는지 금방 돋아난 애기잎들은 얼굴 감히 못펴고 담배말이처럼 돌돌 감겨나온다.    아버님도 군대성격이여서 자식들더러 죽어라하면 죽는 시늉까지 내야 하는 호랑이 아버지이시다. 자유분방한가정에서 어려움없이 자란 나는 응석은 커녕 말대꾸 한마디 못하고 그저 예, 예하며 순종만 하는 당신의 자식들이 안쓰러웠다. 약자의 편에 서게 되는것은 인간의 본능인가, 더구나 아들놈의 장난질로 아버님과 트러불이 생긴후부터 당신처럼 기가 엄청난 몬스테라까지 덩달아 미워지기 시작하였다,    어느날, 아버님도 료양를 가시고 남편도 외지로 일보러 나갔다. 마침 기회 만났다고 나는 몬스테라를 박대하기 시작했다. 우선 아버님의 간곡한 부탁을 어기고 비료삼아 공급하던 콩삶은 물을 끊어버렸다. 활 당긴김에 코물 닦는다고 아예 맨물마저 주지 않았더니 푸르죽죽하던 잎들이 노랗게 생기를 잃고 휘줄군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여 오랜만에 아버님의 기를 납작하게 만든것 같아 속이 다 후련해졌다. 흥, 손자는 어쩐다 해도 이 며느리와는 어쩌지 못하렸다.    보름이 지나 남편이 돌아올 쯤에야 근심이 좀 들었다. 몬스테라가 완전히 죽어버리면 남편과의 감정도 상하게 된다. 할수없어 문앞의 거지에게 묵은 밥 던져주듯 대수간 물을 뿌려주었다. 물을 주면서 볼라니까 푸르죽죽 텃세를 부리던 선배잎들이 황달에 걸린듯 노오래서 석삼년 묵은 수수대신세가 되였고 언녕 밀라죽었으리라 여겼던 애기 잎들이 오히려 푸르청청 기가 살아있었다.   너무 신기해서 처음으로 몬스테라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참대가지를 방불케 하는 몬스테라는 새잎이 새록새록 돋을적마다 한매듭씩 키돋음하며 쥐꼬랑대같은 곁뿌리를 낳고있었다. 그 곁뿌리들이 젖줄기처럼 얼기설기 엉켜 젖샘인 땅에까지 슬쩍 뻗는다. 아마도 공급을 조절하는 개페기(开闭机) 역할을 하는것 같았다.    물이 충분히 공급될 때는 개페기를 열고(꼬랑대곁뿌리를 땅에 슬쩍 박고)원뿌리를 도와 앞다투어 자양분을 빨아들인다.    물을 주지 않아 가물게 되면 선배잎들이 선듯히 개페기를 닫고(곁뿌리를 땅에서 건뜩 쳐들고)자양분을 어린 잎에게 양보한다  . 아니나다를가 요 며칠 박대받고있는 나날에 선배잎들이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곁뿌리들을 건뜩 쳐들고 단식투쟁을 하고있었다. 그 덕분에 애기잎줄기들은 그 어느때 보다도 굳건하게 곁뿌리들을 땅에 박고 자양분을 충분히 흡수할수 있었다.돌돌 말렸던 얼굴도 해바라기처럼 활짝 펴져가고있었다.    그야말로 자아생존본능을 초월한 생명예술 그 자체였다.    콩을 물에다 푹 불궈 삶았다. 남편이 들어오더니 고소한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며 이죽거린다. 오늘 해가 서쪽에 뜬거 아니오, 어쩌다 이렇게 자각적으로 몬스테라를 위해 복무하오?    어느날, 우리집에 운동후기조사조의 사람들이 왔다. 운동 때 살판치며 마구 사람을 폭행한 학생들을 조사해서 법적처리를 하는 사람들이였다. 나는 아버님이 다리 부러질직전까지 폭행당했던 분이라 언녕 격분되여 적발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아버님은 학생들이 젊은 의기에 혁명하다보면 그럴수도 있다며 오히려 두던해주는것이였다. 그놈들의 악행을 세세히 묻는데도 기어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분들이 돌아간후에 내가 더 격분하여 그 씹어먹을 망나니들을 왜 그냥 놔두냐고 했더니 적발하면 감옥가게 되는데 자식같은 애들의 전도를 어찌 망치냐 하시는거였다.    아버님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아버님은 운동 때 맞은 후유증으로 끝내 몸져누웠다. 직급이 있는 분이라 고급약이란 고급약은 얼마든지 쓸수 있었으나 고치지 못할 병이라며 점적주사도 거절하시였다. 공산당원으로서 나라돈 아니, 벡성들의 세금을 랑비할수 없다는것이였다. 호사들마저 감동되여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약도 안쓰고 버티다가 석달만에 아버님성격대로 후닥닥 세상를 뜨셨다. 암 초기라 여느 고급간부들처럼 고급약을 지그시 썼더러면 적어도 2.3년은 버텼을것을…     돌아가신날 몬스테라가 갑자기 화분채로 탕하고 온동네를 울리며 땅에 거꾸러떨어졌다. 안정도가 그지없이 큰 묵직한 화분통이 왜 밤 12시에 상에서 떨어졌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그 이튿날부텨 몬스테라가 갑자기 시들기 시작하였다. 물이 충분한데도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꼬랑대같은 곁뿌리를 건뜩 쳐들고 도무지 땅에 박을 념을 안한다. 백약이 무효였다. 식물들이 물리적인 영향만 받는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영향도 받는다는것을 그제야 알았다.    백골이 진토되여 넔이라도 있고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인가.    당에 향한 우리 아버님의 일편단심…   우리 자식들이 할수 있는 일이란 오직 아버님과 몬스테라에 다시 한번 고개 숙이는 일뿐이였다.
24    혁명적으로 댓글:  조회:1413  추천:0  2019-12-23
   문화혁명때 일이다. 길가에서 줄뛰기 놀고있는데 인분차가 지나가고있었다. 어망간에 코를 싸쥐고 아이구 쿠린내야 했더니 영숙의 눈이 번쩍하며 덫에 물린 쥐새끼 노리듯 매서워졌다.    “야, 니 반동이재, 어떻게 빈하중농의 똥을 함부로 쿠리다 말할수 있니? 혁명적으로 말해라. 향기롭다구.”    푼수없는 원두막에 개똥참외만 달린다더니 이건 공부는 꼴찌되여 가지고 말끝마다 혁명적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미친년 방아찧듯 선생님들을 투쟁하는데만 앞장서더니만 제 1차로 홍위병에 가입되고 입단까지 하게 되였다.    지식청년은 농촌에 내려가라는 모주석의 지시가 내리자 이 혁명적동지가 제일 먼저 호응해 나섰다. 밭고랑에 뿌리 박고 세계혁명을 내다본단다. 그 웅대한 실천적행위로서는 밤중 2시부터 “혁명적사원동무들, 콩가을 하러 가깁소!’.하고 동네길을 따개며 다니는 일이였다. 밤중에 우는 닭이 해방전에나 있는가 했더니 해방후에도 있구나. 저러다가 우리 ‘혁명적 똥’동지가 ‘혁명적 닭’으로 승천하는것은 아니신지.   아닌게아니라 이듬해에 밭고랑에서 제일 먼저 발을 빼고 공인계급으로 되였다. 듣자니 밤중에 콩가을만 웨친것이 아니라 금싸락처럼 귀했던 돼지대가리도 가을해서 대대혁명주임집에 바쳤단다.    그런데 유감스럽고 유감스러운것은 우리 ‘혁명적으로’가 너무 돌출혁명이여서 남성동지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개해서 만난 남자들이 련애하자고 자기를 좀 안아볼가 하면    ‘혁명적으로 하기쇼, 혁명적으로!!!’    하는통에 모두들 그 혁명이 무서워 달아난단다. 우리 남성동지들은 별라게도 입만 혁명적행동이고 실지적으로는 수정주의적 행동만 좋아하는 모양이다.    아무렴, 우리 ‘혁명적으로’가 시집을 못가면 못갔지. 수정주의적 행동을 취할 체격이신가. 하여 50대 초반까지 시집 못가고 아니, 안가고 ‘혁명적으로’만 있다가 그만 식물인이 되고말았다. 그런데 그런 식물인이라도 누군가 “모주석 만세” 하면 두 손이 번쩍 올라간단다. 정말 못말리는 “혁명적으로”이다.    나는 드문드문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개혁개방하지 않고 문화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였더라면 우리 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였을것인가. 빈하중농똥이 향기롭다는 영숙이 같은 인간들만 길에 들끓을것이다. 이런 단세포들이 밤낮 혁명, 혁명하다보면 나중에 자신들의 자궁마저 혁명적이 아닐수 있다는 강박증에 걸릴수 있다. 하여 단연히 자연출산을 포기하고 생명은 오직 오성붉은기가 휘날리는 시험관에서 혁명적으로 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시궁창에는 시궁창에 알맞는 벌레가 생기듯 시험관에서 생겨난 무자궁아기들도 두 눈과 두 코구멍, 입마저 오각별일것이다. 내시 같은 코맹맹이 소리로 “훙치싼싼”하며 시험관에서 바글거리면 ‘혁명적’닭들이 구구구 하고 몰려와 이게 웬 혁명적벌거지뇨, 하며 혁명적으로 톡톡톡…
23    반작이 댓글:  조회:1108  추천:1  2019-12-18
                                                                                       지주의 토지로 소작인이 농사를 짓고 그 수확물을 절반씩 나눠갖는것을 반작이 혹은 “5:5”제라 한단다. 해방전 지주들이 어떻게 반작이로 빈하중농을 착취하였는가를 오빠가 외할머님께 물었다가 단통 할머니의 된소리를 듣게 되였다.    “땅주인께 소작료르 바체야지, 바치지 않구 펀히 앉아 쌀밥 먹는 인간두 있다더냐.”   오빠의 입이 딱 벌어지며 할머니 반동이구나! 했다.    “반동할매”란 칭호에 불복이신지 할머니가 그날부터 부엌봉당에서 풍구 잣는 일을 아예 오빠에게 맡기고있었다. 천상 입으로만 행세하고 팔다리를 놀리기 싫어하는 오빠가 시키는 체력일을 고분고분 할리 없었다. 아닌게아니라 옆집 땜쟁(별명)이를 불러다 슬슬 구슬리더니 시걱할 때쯤만 되면 땜쟁이가 부른듯이 문을 떼고 들어섰다. 땜쟁이는 풍구를 열심히 잣고 오빠는 옆에 앉아 옛말을 해주기다. 1학년에서 련속 6년을 락제하여 "6년 묵은 배떨이"로 놀려대는 땜쟁이와 6년 최우등생으로 대대학습위원인 오빠가 체력로동과  뇌력로동간의 생생한 반작이를 하고있었다.    어느덧 가마도 끓고 오빠옛말도 익어갔다. 한 나라에 나라일은 뒤전이고 전문 훍땜질만 좋아하는 국왕이 있었단다. 궁전벽에 틈새 보이기만하면 대구 땜질을 해대서 궁전안이 온통 흙발림이 됐단다. 땜질을 하다하다 더 할곳이 없게 되자 손이 근질근질해 난 왕이 궁전밖을 나와 곳곳에 다니며 땜질을 해댔단다. 그 덕분으로 오늘날 지구가 흙덩이로 됐단다. 어마어마한 지구를 빚은 장본인이 고작 땜쟁이라니, 그야말로 오빠다운 기발한 착상이였다. 문제는 땜쟁이였다. 영화 림해설원의 땜쟁이처럼 까마잡잡하고 여위였다해서 오빠가 붙여준 별명이였는데 그 콤플렉스때문에 낯이 수수떡처럼 지지벌개나며 벌떡 일어섰다.    “임마, 니란게 내 벨메 땜재라구 땜재옛말으 제냇재? 이 옌말은 무조건 무효다. 니 후라이 친 값을루 이제부터 진짜옛말을 두개씩 하기다.    밥주걱으로 밥을 젓던 할머니가 깨고소해서 한마디 했다.    “그게 바로 반작이라는게다. 옌말을 해주는 대신 풍구 잣는거, 지주가 땅을 빌러주구 곡식 절반을 가져가는거하구 무에 다르냐, 그래도 이 할머니를 반동이라갠?”    할머니의 반동고집은 여전했다. 그런데 3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런 반동고집이 또 하나 나타날줄이야, 바로 소학교 1학년에 다니는 우리 집 개구쟁이다. 이 녀석은 금방 까난 물고기라도 암, 수를 가려낼줄 아는 재간이 있었는데 반급애들이 금붕어 살러갈 때면 꼭 우리 애를 청해간단다. 암컷 한마리 골라주는 보나스로 금붕어 한마리 차례진다나, 그 덕분으로 우리집 어항은 늘 초부하상태였다. 뢰봉정신으로 철저히 길들여온 우리 세대로서는 리해할수도 용서할수도 없는 가치관이였다. 이건 에누리 없는 “5:5”제, 지주들이 실시하던 반작이 아닌가.   좋은 일 하는셈 치고 그저 해주면 안되는가 나무랐더니 “지금 누기 공짜로 해주는 바보 있씀까? 울반에는 50전짜리 떡을 사다가 간식시간에 1원씩 팔아먹는 애덜두 있는데.” 하며 제쪽에서 억울해 야단이다. 여덟살 어린이들조차 떡을 사준 다리품으로 본전의 반할을 더 받다니, 모주석께서 제창하신 뢰봉정신이 개구쟁이들에 의해 바보로 전락되는 순간이였다. 하지만 어찌 개구쟁이들만 탓하랴, 이런 반작이 행위가 엄연히 직장선진을 선거하는데서도 실시되고있음에야.   올해는 왕년과 달리 선진공작자에 오백원 상금이 차례진단다. 90년대로 말하면 한달 월급에 해당되는 상금이여서 누구도 양보하려하지 않았다. 저마다 누군가가 자기를 선거해줄가하는 요행을 바라고 회의 내내 입을 떼지 않는다. 넘 선거되지 않아서 결국 아무 사람이나 선거해서 상금을 반작이 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방법이였다. 진짜 실용주의란 이런것인가. 다음해부터는 키 차례로 줄 세우듯이 차례차례 선진을 선거하잔다. 물질뿐만 아니라 월급인상의 조건인 선진명예도 반작이 하자는 목적이였다.    선진을 반작이 하는것은 좋은데 시키는 서방질도 못하는 저능아가 있어 걱정이였다. 일할줄 몰라 종일 빈둥거리는것은 젖혀놓고 기률, 시간개념이 전무여서 말썽이였다. 직장에도 가고싶으면 가고 오기싶으면 오는 공장장도 못말려내는 무정부주의자였다. 복리로 주는 콩기름 한병을 한동네에 사는 동료집에 가져다주라했더니 공공연히 제집에다 절반 덜어냈더란다. 무슨 머저리라고 공짜로 다리품 팔겠소. 하며 말이다. 이것도 반작이라면 반작이인가.   선진이라는 단어해설을 보면 발전이나 진보의 정도가 다른것보다 앞서는것을 말한다. 남보다 앞섰기때문에 여러사람들의 모범으로 사업의 추동, 촉진역할을 하라는 상징일것이다. 가령 이 저능아가 선진으로 선거되면 무슨 모범으로 추동, 촉진역할을 할것인가. 하긴 콩기름반작이 남보다 앞섰으니 이것도 모범이라면 모범이렸다.   정말인지는 믿기 어렵지만 이런 뒤소문도 있다. 어느 분이 학비 받고 글짓기를 배워줬는데 나중에 그 학비마저 성에 차지 않아 작품상도 학생과 반작이 하기로 협상한다는 사실이다.      선생 왈: 내가 네 글을 주물러 상을 타면 반작이 하겠니?    학생 갑, 을, 병 동시에 왈: 예, 어떻게 하나 상만 타게 해주쇼. 반작이 아니라 선새님이 다 가져도 의견이 없씀다.   듣자니 그 선생님이 평심위원이여서 학생 갑, 을, 병이 차례로 상을 타게 되였단다. 문제는 학생 갑과 을이 약속을 어기고 염소처럼 수염을 쓱 닦고말았다는 사실이다. 우리 직장의 저능아처럼 기름 반병사리라도 반작이 했더면 얼마나 좋을고. 그런 저질인 학생을 철석같이 믿고 상을 도매한 선생도 너무 순진하다면 순진하다. 유독 학생 병만은 그래도 먼 앞길을 내다보아 약속을 어김없이 지켰을뿐만 아니라 덤으로 전화료금마저 담당해주어 해마다 상이 차례진단다.     각설하고, 내가 집체호로 내려갔던 마을에 밤이면 "호르르 딱딱'”하고 산에서 홀로 우는 새가 있었다. 생산대 사원들은 그 새가 젊은 과부혼이 붙어서 "홀딱 벗고 같이 자자"하고 울며 한을 푸는것이라 했다. 말도 안되는 해석이지만 헌법에 위반될 일은 아니잖는가. 오늘 등산에는 반갑게도 매매 하는 염소소리가 들린다. 그 분들이 아직도 계신다면 저 매매 소리는 또 무슨 뜻으로 해석될가.   문뜩 염소도 풀라톤이 될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행여 그 선생의 작법대로라면 매매 하는 염소소리도 철학이고 시라고 평하지 않을리 없기에, 혹여 절반의 상금을 상납하기만 하면 염소도 노벨상을 탈수 있으리. 오! 반작이여...매매......
22    수염 댓글:  조회:1202  추천:0  2019-11-27
                                                          수염      어머니는 미인이라 불리울 정도로 인물체격이 출중했다. 패션에도 남다른 안목이 있어 아무 옷이나 걸쳐도 멋지고 우아했다. 하지만 그 멋지고 우아함이 5, 60년대의 간고소박한 작풍과는 대역부도한것이여서 자산계급사상작풍을 추구한다는 정치적인 말밥에 올랐었다.     그 여론에 차마 견딜수 없었던 어머니는 멋진 양복사지치마를 벗어내치고 아예 허리통이 훌렁한 “몸뻬”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 말썽많은 양복치마를 뜯어고쳐 앙증맞은 드레스로 만들었다. 허리까지 자래워 풀어헤친 나의 머리우에 머리통만한 분홍 나비리본을 얹고 엉덩이가 보일락말락한 짧은 드레스까지 입혀놓으니 짜장 서양인형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런 모습은 60년대로 말하면 그야말로 파격적이여서 길에 나서면 모두들 원숭이 구경하듯 나를 따라다녔다. 아무려면 어린애에게까지 정치모자를 씌우겠냐, 하는 배심으로 어머니는 이쁘게 단장시킨 나를 시위하듯 데리고다녔던것 같다.     당신의 타고난 미와 천성도 죄로 되는가, 억울함을 풀길 없었던 어머니는 실현할수 없는 리상속의 멋진 당신을 이 막둥이 딸에게 재현시키고있었던것이다. 그것은 몰개성적인 사회풍기에 대한 어머니나름대로의 일종의 반항이였을것이다.     어머니의 이런 집착에 가까운 편애는 자연히 나보다 두살 손우인 세째오빠에 등한하게 되였다. 녀자인 동생은 날마다 모욕시키고 팬티까지 다려입히면서도 남자인 오빠는 관리하지 않아 늘 때투성이였고 옷에 이가 득실거렸다. 새로 씻어꾸민 이불마저 녀동생이 초벌로 몇달 덮은 후에야 오빠를 덮게 하였으니…     “이 집에서는 맨날 엠나만 엠나라멘서리”하고 밤낮 툴툴거리던 오빠가 어느날인가부터는 갑자기 녀자그림만 보면 수염을 달아주는 버릇이 생기게 되였다. 그 버릇에도 무슨 편차가 있어 자기 교과서 녀자들 그림에는 류비요, 관운장이요 하는 호걸수염들을 달아주었지만 내 교과서에는 말짱 쥐나 고양이같은 맹꽁이수염만 달아주었다. 특히 교과서겉가위에 낫을 들고 환히 웃어주는 녀성동지에게는 손오공수염을 앙큼하게 그려놓아 전반 애들이 과당시간에 얼마나 웃어댔는지 모른다. 선생님한테 혼쭐이 난 나는 필통으로 오빠골통을 죽어라 찟쫗아놓았다.             그래도 그 버릇을 떼지 못해 이번에는 큰오빠의 수장품인 모나리자에 일본놈의 코밑수염까지 달아줄 줄이야. 저 녀석이 저러다간 산사람에게까지 수염을 그려놓지 않을가, 쳐들었던 큰오빠의 주먹이 허공에서 껄껄거렸다. 별명이 불칼인 큰오빠도 “도즈께끼”하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모나리자의 도톰한 수염앞에서는 어쩔수 없었던 모양이다.     큰오빠의 말대로 세째오빠가 그림속의 녀자수염만으로는 인이 덜 풀렸던지 이번에는 만만한 실물인 어머니얼굴을 노리기 시작했다. 어느날 김장에 지친 어머니가 초저녁부터 가마목에서 코를 드렁드렁 골자 얼씨구나 하고 어머니얼굴에 붓을 대기 시작했다. 먹물의 찬기운에 잠간잠간 움직거리는 어머니 잠투정에 땀을 빼며그림이 완성되였다. 그런데 장비나 관운장이 아니고 아래턱이 두툼한 저팔계수염이라니.      바로 이때였다. 철써덕 철써덕하는 찰떡치는것 같은 떡메소리가 들려왔다. 옆집 나그내가 널빤지로 마누라볼기를 치는 소리였다. 거의 여드레 한번씩 일어나는 이 떡메소리는 그야말로 폭력으로 점철된 “흑인력사”를 방불케 한다. 치보주임으로서의 우리 어머니는 또한 시시각각으로 “흑인해방”운동에 발벗고나서는 선두자였다.      아닌게 아니라 떡메소리가 세번도 울리기전에 어머니ㄱㅏ 용수철마냥 벌떠덕 튀여나갔다. 미처 말릴사이도 없었다.      “당장 매질을 그만 못두겠소!”      하는 어머니의 벼락같은 호령소리에 바야흐로 메질에 열을 올리던 삼각눈이 멈칫했다. 이어 어머니얼굴을 보더니 아닌 밤중에 희유동물을 본듯 삼각눈이 갑자기 생똥그래지였다. 이어 정신병자처럼 킬킬거린다. 어머니의 두툼한 저팔계모습을 본 모양이다. 바빠난 오빠가 어머니를 마구 집ㅇㅡ로 잡아끌었다. 하지만 “왜들 자꾸 이래냐, 싸움 말려야지.”하며 견결하게 된소리로 발언하는 소리에 구경왔던 동네얼굴들이 일시에 어머니얼굴에 쏠렸다.     푸하하, 저, 저…파…알계 보소, 하하하, 호호호, 히히히     급기야 온동네에 걷잡을수 없는 웃음폭포가 터졌다.     이 일이 있은후에 뜻밖의 기적이 나타날 줄이야. 여러해 동안 지속되던 옆집의 “흑인력사”가 종말된것이다. 널빤지로 마누라를 치려할때마다 우리 어머니 저팔계얼굴부터 떠오른다나, 따라서 동네 부부싸움도 덩달아 없어지게 되였다. 싸우려할 때마다 역시 저팔계가 떠올려진것이다.     어머니의 집착에 가까운 녀애편애는 오빠로하여금 녀애에 대한 그 어떤 질투와 원망과 얼울함이 생기게 된것 같다. 그 억울함의 해소장치가 곧바로 녀자그림만 보면 수염을 달아주고싶은것이였으리라.     나비효과란 말이 있다. 나비 한마리의 날개짓이 환경변화의 시스템을 통해 토네이도(龙卷风)를 일을킬수 있다는 말이다. 가장 큰 례로 히틀러를 들수 있다. 초등학교졸업사진을 찍을 때 학교의 수재로 떠받들리우는 유태인 학생은 교장선생님의 옆에 귀빈처럼 앉혀지고 렬등생인 히틀러는 꿔온 보리자루처럼 제일 뒤줄 구석에 앉혀지였다. 이런 서렬적 좌석안배는 히틀러로하여금 유태인아이를 미워하고 시기하던데로부터 반유태인적인 콤플렉스가 쌓이기 시작했고 나아가서 6백만 유태인을 학살한 세계를 훼멸시킬번한 2차대전의 장본인으로 되게 하였다. 우리 오빠의 녀자콤플렉스도 또다시 두번째 히틀러가 되지말란 법은 없다. 녀자만 학살하는 제3차세계대전을 일으킬수도 있다는것이다. 고려시대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金敦中)이 견룡대정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일이 무신의 란을 촉발했다고 한다.      다행히 착하고 슬기로웠던 우리 오빠는 그것이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결과적으로 그 녀자콤플렉스를 녀자수염이라는 유머와 예술로 승화시켜 우리 동네의 평화를 얻어왔다는것이다. 아니, 3차세계대전의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해 오늘의 평화가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콤플렉스란 인간내부속의 악마이기도 하고 천사이기도 하며 전쟁이기도 하고 평화이기도 한것 같다. 진실로 인간속의 악마와 전쟁을 평화의 천사로 승화시킬수만 있다면 콤플렉스란 분명한 동력이며 장점이며 철학이다.
21    삶의 절대적 공식 댓글:  조회:949  추천:1  2016-08-15
                                                    삶의 절대적 공식      만화를 그리며 삶의 철리도 연구해야 하는 아들녀석이 저녁에 전화를 걸어왔다.   "어머네, 제 생각에 가난한 아덜이 먼저 철든단 말이 틀린것 같슴다. 부모사랑도 못받고 어렵게 산 아덜중에 심성이 비뚠애들이 더 많슴데다. 부모사랑두 많이 받구 여유있게 자란 아덜이 오히려 더 반듯하고 착함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하는 녀석의 말에 늘 의문으로 남아있던 우리집 형제들의 상황에 문뜩 깨도되는바가 있었다.   여섯 신선이 강을 건너도 각각이라더니 우리 여섯형제의 성격이나 인격도 각각이였다.   큰오빠는 궂은 일 한번 안시키고 떠받들리우는 톡톡 도련님이였다. 하지만 맏이 노릇하느라 동생들에 대해서는 극진하고 너그러워 요순황제로 불리웠다.   큰언니는 소학교 6년내내 우등상 한번 못타오는 시라소니였지만 개근상만은 해마다 타오는 우직한 곰이여서 밥하고 빨래하고 김치 내오는 일을 도맡아 했다.   둘째오빠는 허우대 크고 억센 덕분에 김치움을 파거나 석탄을 퍼들이는 일에는 선두로 차례졌지만 맛있는 음식이나 새옷에는 늘 꼴지로 차례졌다.   작은 언니는 여든에 이앓이 하듯 콩콩거리며 병자랑만 하는 고양이였다. 게으른 고양이의 평생소원이 가마목 무상출입이라더니 천성적으로 게으른터에 과당시간에 오른팔 베고 줄창 잠만 자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여 팔을 툭 떨구며 맥이 없어 머리도 못빗겠단다. 영양부족으로 오른팔이 왼팔보다 많이 약해졌다나. 병신이 됐다고 당황해난 어머니가 한달동안 우유과 콩물로 영양보충을 시켜주었다. 내눈에는 아무리 살펴봐도 두 팔이 똑같아 보이는데도 기어이 한짝이 약하단다. 비자루로 남을 칠때는 어째 팔에 맥이 팔팔하오? 하고 놀렸더니 세째오빠가 눈을 끔뻑이며 언니하고는 팔이 약하다해야 좋아한단다. 세상에, 병신을 자처하는 사람도 있는가.       세째오빠는 꾀가 많아 제갈량으로 불리웠다. 나에게 차례진 과자나 사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얼려먹었다. 하도 얼리워서 어지간한 꾀에는 넘어가지 않았더니 하루는 꿈에 손오공을 봤단다. 손오공한테서 과자를 아무리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재간을 배웠는데 한번 실험해보지 않겠는가 한다. "또 황통 쓰재"하면서도 과자를 넘겨주었더니 변두리를 살살 돌아가며 홡아먹는다. 어찌나 얇게 홡았는지 둬돌개까지는 과자가 축나지 않았다. "봐라, 전마 아이 없어지재"하며 홡는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더니 삽시간에 과자가 절반이나 축났다. 그제야 속히인줄 알아차린 내가 아앙 하고 앙탈하는 사이 과자 몇개를 덥석 채고 수십메터 내빼였다. 역성드느라 거꾸로 쳐들었던 어머니비자루가 공중에서 킥 하고만것은 5분후였던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큰오빠는 집의 기둥이여서 춰세워야 했고 나는 제일 어린탓에 특별보호대상이였던것 같다. 기타 형제들에게는 굶어죽지 않을상만한 음식물밖에 차례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굶어죽어나가던 60년대 초에 식구들 다가 살아남자면 가슴아팠지만 층차적일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분배원칙은 결국 형제들의 다원적인 심리상태를 산생시킬수밖에 없었다.   부모의 총아로서의 큰오빠와 나는, 젖으로 놓고 말하면 충분히 젖을 물렸던 경우여서 부모사랑에 아쉬움도 미련도 없었고 부모와도 독립되여 있는 건강한 심리상태였다. 젖을 제대로 물지 못한 경우에 속한 다른 형제들은 정신적으로 부모사랑에 굶주리고 구걸하는 갈증상태여서 부모에 독립되지 못한 병적인 심리상태였다.   공부를 잘하지 못해 미움받고 일만 해야 했던 개근생 큰언니는 자비심이 많고 피해의식이 강했다. 항상 자신이 가장 가련하고 불쌍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부모 형제들의 자선만 바랐고 자기것을 내놓으라면 당장 풍을 일굴 지경인 베니스상인이였다. 찬밥신세였던 둘째오빠는 허기지고 고달팠던 관계로 남을 배려할줄 모르고 주먹으로 동생들것을 빼앗아 먹는 습관적 도깨비고 심술쟁이였다. 작은 언니는 힘도 재간도 없으니 아픈시늉으로 부모의 동정을 구걸하고 힘센 오빠들과는 아양으로 환심을 사는 약은 고양이였다. 나보다 두살 우인 세째오빠는 어려서 뺏을 담도 없고 구걸도 모르니 전문 수를 써서 협잡해 먹는 꾀둥이였다.   아무리 굶어죽어가는 흉년시기라지만 형제들 각기 살아갈 방법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 궁핍한 생존방식으로 인해 형제들의 심성이 비뚤진것만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였다. 자신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는 그러한 생존수단으로 큰오빠와 나의 후원을 많이 받았지만 우리 둘이 곤경에 처했을 때는 누구나 강건너 불보듯 했다.   반대로 큰오빠와 나는 부모가 알아서 챙겨주기에 무력이나 엄살 또는 꾀를 쓸 필요가 없었다. 자연히 심성이 착하고 반듯해져서 동네의 칭찬도 많이 들었고 자신심도 충만해 그 누구를 시기하거나 질투할줄도 몰랐다. 결국 형제들 일에 발벗고나서 가정을 이끌어나가는것은 큰오빠와 나였다.   착하고 반듯한것은 인간삶에 있어서 꼭 갖춰야하는 프로적이고 절대적이 심성이다. 시기하고 아첨하고 주먹쓰고 협잡하는것은 수시로 버려야할 업여적이고 상대적인 심성이다.   가정은 나라를 구성하는 세포로서 나라의 축소지향이라 할수 있다. 크게 확대할것도 없이 단순히 문예상이나 문학상을 타는 삶의 현상을 놓고봐도 그렇다. 상을 설치하여 응모하게 되면 안되는 어장에 해파리 끓듯 갖가지 인물들이 튀여나온다. 큰오빠처럼 착하고 반듯해 오직 정당한 경쟁으로 상을 쟁취하려는 절대적이고 프로적인 심성으로 사는 신사들이 있다.   반대로 큰언니처럼 우등상도 못타는 개근생주제에 어이없이 남을 시기하는가 하면 둘째오빠처럼 주먹과 권력으로 상을 롱단하는 도깨비도 있고 둘째 언니처럼 상 얻기 위해 천성적인 비천함과 가련상으로 빽있는 마누라의 허영심이나 채워주는 치사스러운 고양이가 있는가 하면 세째 오빠처럼 손오공꾀를 내여 상을 협잡하는 꾀둥이도 있다. 이런 계층의 사람들은 반드시 버려야할 업여적이고 상대적인 심성으로 살아가는 평민에 속한다.   하늘의 별들이 각개의 인력으로 우주를 유지하듯 인간의 삶도 원래 이런 절대적인것과 상대적인것간의 인력으로 돌아가는것 같다. 이러한것이 곧바로 삶의 질량이고 비중이며 체적이 아니겠는가. 질량이나 비중 체적이 없으면 가정이나 나라, 나아가서 우주의 평형이 이루어질수 없다.   하지만 한 나라를 질적으로 이끌어가는것은 상대적인 삶의 공식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착하고 정직하게 사는 절대적인 삶의 공식에 사는 소수의 신사들이라는것이다.
20    혈소청 댓글:  조회:974  추천:1  2015-08-17
         우리 어릴 때는 화장실을 변소라고 불렀다. 변을 보는 장소라 해서 간략해 그렇게 부른다지만 좀은 직설적인 감이 든다. 불교에서는 해우소라 부른단다. 문자 그대로 문자 그대로 번뇌를 가시거나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데 제일 더럽고 냄새나는 곳의 이름을 시적으로 승화시킨 것이 흥미롭다. 직설적이든 시적이든 결국 모두 배설물을 해결하는 목적이지 딴 의미는 없다. 그런데 요즘은 이 장소에 색다른 의미가 깃들어 있어 재미난다.   모 시의 국장님딸의 결혼식에 초청되여 간적이 있다. 국장님의 부인과는 갓 사귄 친구라 결혼식장에 아는 얼굴이 없었다. 어느 좌석에 갈것인가 고민하고있는데 그 시의 무슨 국장인가 하고있는 동창을 만났다. 한창 잘나가는 부시장후선인이였다. 나와는 특별히 허물없는 사이여서 구세주나 만난듯 반가웠다. 함께 앉자며 따라갔더니 결혼홀에는 안가고 별도로 마련된 고급방에 들어가고 있었다. 거기에 세 상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고급간부들을 위한 특별석인것 같았다. 한 상에 대여섯이 한담하고있고 두 상은 비어있었다. 동창이 화장실로 가겠다며 대여섯만 앉아있는 상에 짐부리듯 나를 부려놓는다. 한상에 같이 앉은 사람들은 내가 타시 사람이라 그런지 알은척도 않고 저네끼리 국장, 국장하며 찧고 까불고 있다. 독도에 버려진듯 외로워진 나는 동창만 애타게 기다리는데 이 동지는 화장실에서 큰놈, 작은 놈 새로이 만드시는지 한식경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다. 기다리다 못해 복도에 나가보았더니 그때까지 담배 물고 화장실 문어귀에서 서성거린다. '화장실냄새 맡기 그리 좋소?' 하고 성격이 나오는대로 한마디 폭 쏘고는 도루 들어와 앉았다.   그런데 한참 지나 우리 상에 사람이 금방 다 차자 동창이 기다렸다는듯 휙 하고 나타난다. 반가워 활짝 웃는 이 녀동창에게는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홍위병이 천안문 향하듯 줄기차게 시장들 좌석에로 향하신다. 아무렴 그렇겠지, 시장후선인이라는 분이 어찌 가볍게 국장들과 동석하랴, 문제는 인사발령이 나오지 않아 아직까지 국장급이라는데 있다. 분명 국장급이면서 시장들 좌석에 먼저 가 앉는다면 남들 눈에 날것이다. 매부 좋고 누이도 좋은 식으로 시장들좌석에 가서 편안히 앉자면 반드시 국장들 좌석이 다 차기를 기다려야한다. 요런 기회를 엿볼수 있는 장소가 화장실보다 더 맞춤한곳이 어디 있겠는가.   동창님의 뜻밖의 행위로 실망과 더불어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동창이니 너그럽게 리해해 주자 마음을 다잡았지만 눈에 염증이 오는지 눈알이 가만히 시려오는 것은 무었때문인가.   이튿날 동창님께서 식사 같이 하자고 전화가 왔다. 헐소청(歇所厅)이 무엇인지 아는가고 물었다. 모른다고 한다. 헐소청이란 옛날 권세있는 재상집대문안쪽에 별도로 마련한 방으로서 벼슬을 바라고 재상을 뵈러 온 궁한 선비들이 잠간 기다리는 장소라고 알려줬다. 이제나 저제나 재상님이 사랑방에서 나오시나 엿보며 네가 화장실에서 서성거리듯 궁한 선비들이 서성거리기 맞춤한 곳이라고 했다. 나 같은 서민과 같이 식사 해봤자 헐소청을 드나들 가치도 없겠으니 앞으로 이런 전화는 절대 사절이라고 오금박았다.   글 쓰는 사람들의 일종의 호기심이라 할가, 동창과의 그 조우가 있은 후부터 나는 파티 때마다 좌석에는 앉지 않고 공연히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류의해 보게 된다. 어느 해 년말총결이였다. 그날도 령도동지들이 다른 부문에 들러서 인사하느라 오래동안 대령치 않았다. 예상한대로 한 녀사동지께서 궁둥이를 온전히 붙이지 못한 채 팥죽단지에 생쥐 드나들듯 화장실로 들락거리신다. 때론 핸드폰을 귀에 걸고 열심히 입은 놀리지만 팽글팽글 도는 눈은 수시로 바깥동정을 게을리하지 않고있다. 혹은 무슨 기미를 알아채셨는지 화장실에서 급급히 나오시다 아쉽게도 목적한 님일랑 보이질 않으면 미처 말리지 못한 죄 없는 손만 반복적으로 터신다. 그 모양이 안쓰러워 우리 좌석에라도 잠간 앉아쉬라 권했더니 살포시 앉기는 앉는다. 그런데 수시로 되록거리는 360도 동공이 풀잎에 앉은 잠자리마냥 불안스럽다.   금강산구경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한참 두드러지게 먹고 나니 본인의 방광에도 찬란한 화장실 고민이 온다. 화장실 고민이 오자 곧바로 잠자리녀사 생각이 나서 둘러봤더니 예상대로 언녕 다른 상에 날아가고 없었다. 그런데 신고스레 두 번째로 날아가 앉은 좌석에서도 그 잠자리 같은 동공이 진정 못하고 되록거린다. 그 위태위태한 동공의 주파수를 보면 아무래도 시시각각 다른 좌석에 날아갈 예정 같다. 아마도 지금 자리잡은 상에 괜찮은 간부동지들이 있긴하지만 관건적이시고도 관건적인 제일 높으신 분이 안계신 까닭인것 같다. 아무렴 맹모도 세번씩이나 이사 했을라니, 우리 잠자리 녀사라고 세번 옮기지 못할 체격이실것 같은가. 하지만 아쉽게도 제 일 령도동지옆에 이미 발빠른 한 녀사동지가 호사스레 떡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고약한 지고!   마침 발빠른 "고약한 지고!"가 일이 있다고 나가신다. 대박, 오늘은 내나 슬금슬금 령도 옆자리나 차지해 볼가. 그렇잖아도 며칠전에 제 일 령도동지께서 연극표까지 주며 선심쓰는것을 마다했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라이벌경쟁의식이 생기는가. 이런것이 자기 갖기는 싫고 남주기도 싫은 요상스러운 사람심리인가. 어쨌던지간에 우리 맹모님이 오늘은 참 재수가 없어, 나처럼 요때쯤 해서 화장실 고민을 하실것이지, 하기에 빠른 놈도 살고 늦은 놈도 산다했다. 굼벵이처럼 느린 나도 맹모녀사처럼 나도 젖은 손을 부랴부랴 털며 화장실을 나와보자, 또한 우리 동창동지처럼 홍위병이 천안문을 향하듯 줄기차게 제 일 령도좌석을 향해보자! 그런데 에구, 또 한발 늦었네.   '내 여기 앉아도 되겠습니꺄.'하는 우리 맹모의 목소리가 언녕 앞서가고있을줄이야. 두툼히 화장한 못난 얼굴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자음을 빼고 모음만 남은 간드러진 허밍. 아, 이번에는 심마진이 오는지 온 몸에 두드러기가 슬금슬금 돋을가 한다.   화장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화장실에 관한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관광코스로 금방 지정된 마을이 있었다. 산골이다 보니 공용화장실이 없어 려행객들이 불편을 겪었는 모양이다. 횡재할 기회를 포착한 갑 농민이 재빨리 공용화장실을 지어 돈을 벌었다. 이에 건너집의 을 농민도 뒤질세라 화장실을 지었다. 그바람에 수입이 절반이나 줄어든 갑이 묘한 꾀를 생각해 내였다. 려행객으로 가장하고 아침부터 을 화장실을 차지하고 앉아있는것이다. 화장실문틈으로 토치카구멍 내다보듯 시시각각 엿보다가 사람기척만 있으면 컹컹 기침을 해서 쫓아냈다. 려행객들이 좋던궂던 갑 화장실에 돌아가 동전을 집어넣은것은 더 말할것도 없다. 그 화장실이야말로 횡재둔소(横财遁所)로서 더할나위 없는 장소라 하겠다.   갑의 마누라가 저녁 이슥토록 랑군이 돌아오지 않자 을 화장실로 찾아갔다. 그런데 랑군이 정신 잃고 쓰러져 있을줄이야. 점심시간도 마다하고 온 종일 똥냄새만 맡았으니 오죽하겠는가.   우리 동창동지나 맹모여사도 제 일 령도동지가 해종일 파티에 나타나지 않으면 갑 농민처럼 아예 화장실에 둔치고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지금의 화장실은 재래식이 아닌 수세식이라서 변독가스에 쓸어질 정도까지는 되지 않으리라.      이젠 화장실 정의를 다시 내릴 때가 된것 같다. 변소나 해우소라기 보다는 '헐소청'이라 함이 어떨가.      
19    진심 댓글:  조회:938  추천:0  2014-10-23
                                                                                                 진심                                                             오설추        시아버님이 저녁을 넘길것 같지 못하단다. 부랴부랴 응급실에 달려갔더니 아버님이 산소통을 단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있었다. 그런데도 큰동서하고 둘째동서는 문어귀에서 쿨적이고만 있었다. 왜 들어가지 않느냐 했더니 녀자들은 들어오지 말라고 한단다. 아무리 그래도 시아버지님의 마지막모습을 외면한다는것은 며느리로서의 도리가 아니였다. 말리는 두 동서의 손길을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님, 하고 부르며 아버님이 운명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드리고 남편을 거들어 아버님께 수의를 입혀드렸다.    아버님이 숨을 걷우시자 문밖에서 쿨적이던 동서들이 와- 통곡치며 복도에 쓰러졌다. 화들짝 놀란 시형들이 뛰쳐나가 각자의 마누라들을 달래느라 돌아가신 아버님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하여 우리 부부가 아버님을 담가에 옮기고 사체실까지 밀고가야 했다. 나의 한 친구는 시아버님이 돌아갔을 때 눈물이 나오지 않아 혼났다고 한다. 눈에 침을 바르는 쇼까지 해가며 겨우 난처한 장면을 모면했다는데 솔직히 나도 눈물이 나오지 않을가봐 은근히 근심했었다. 그런데 사체실까지 담가를 밀고가는 내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릴줄이야. 유감이라면 그때 밤 12시여서 내 눈물을 증명할 사람이 없다는것이다. 그날도 밤새도록 사체실에서 아버님을 지켜야 하는 일 역시 우리 부부 몫이였다.    이튿날, 세 아들과 며늘들이 아버님유상에 절을 하고 술을 부었다. 신문기자들까지 와서 사진 찍고 록상하는 타이밍에 맞춰 두 동서는 배우가 울고갈 정도로 대성통곡이였다. 그런데 이 세째 며느리만은 친정부모가 아니여서 그런지 이튿날까지 쿨적거릴 슬픔이 없었다. 랭랭한 나의 태도에 친정어머니마저 보기 구차하던지 옆구리를 찌르며 우는 시늉이라도 하란다.    장례를 치르고 단위에 출근하니 우리 사무실에 한 녀성이 전근해 와있었다. 첫대면부터 집이 어디에 있는가고 물어보기에 의학원울안에 있다했더니 의학원원장님이 돌아가신것을 아는가고 물었다. 내가 바로 그 집 며느리라했더니 자기의 친정아버지가 원장님과는 3지대 전우였단다. 장례식에 갔었는데 위의 두 며느리들은 슬프게 우는데 세째며느리만은 울지 않아 말들이 많더란다. 아무래도 그 며느리가 시아버님과 감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라며 그 녀성이 물었다. ‘저는 그 세째며느리 아니겠지.’ 버선목이면 뒤집어 보이겠는가, 내가 바로 그 세째며느리였다며 억울함을 하소연했더니 그 녀인의 말이 진짜 걸작이였다. ‘제 아무리 전날 저녁에 혼자 고생했다 해두 누기 알아봐주오? 장례식에서 가장 슬프게 우는게 효성이지. 그런 노력도 안했으니 욕먹어 싸오.’     ‘울기싶지 않는걸 억지로 우는건 노력이 아니라 가면입니다. ’     ‘가면이 다 나쁜건 아니지, 여자들이 화장하는것도 가면이 아니요, 얼굴을 가꾸는것도 부지런해야 하지 게으르면 못하오. 가면이란것  도 어쩌면 로동처럼 부지런해야 되지 않을가.’     이 녀자 수다스러워도 제법 철학적인 데가 있었다. 그 론리대로라면 장례식 전날의 궂은 일은 혼자 다하고도 장례식 날 울지 않은것은 게으른 표현이고 궂은 일엔 살짝 빠졌지만 이튿날 열심히 눈물 흘린 두 동서들은 부지런한 표현이란다. 비록 그 론리가 황당하긴 하였어도 여지껏 자신만만하게 지켜왔던 나의 삶의 진심이 도대체 무엇이였던가 반성하여보는 계기가 되였다.    진심이란 단어해석을 보면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이라고 하였다. 거짓이 없다는것은 마음과 행동, 다시 말해 속과 겉이 같다는 뜻일것이다. 옛날에 한 왕이 백여명 되는 어린이들에게 꽃씨를 노놔주며 가장 꽃을 곱게 피워온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 약속했다. 약속한 날자가 되여서 애들이 저마다 화사하게 꽃피워 온 화분을 가져왔는데 한 아이만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빈 화분만 가져왔더란다. 왕님이 특별히 그 아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으시며 너야말로 거짓말을 할줄 모르는 착한 아이라 하며 큰 상을 내리셨단다. 왕님은 원래 싹이 근본 틀수 없는 볶은 꽃씨를 애들에게 나눠줬던것이다. 어려서부터 학교나 가정에서나 대개 이런 옛말과 교육에 길들여진 우리 세대로서는 백분의 백은 아니라도 백분의 90프로는 거짓 없는 진심으로 살아왔던것 같다.    나는 늦잠꾸러기여서 날마다 8시 시계목을 부르쥐고 출근한다. 령도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사지장철 굳어있는 습관이다. 그런데 이런 굳어진 렴치도 눈 내린 날만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달음박질로 단위에 도착한 1분전 8시면 령도동지를 비롯한 동료들이 언녕 마당의 눈을 절반 넘어 쳐낸 뒤이기때문이다. 그때마다 다음 눈이 올 때면 꼭 일찍 출근해서 보상해야지 하는 큰 결심을 하면서도 또 다음 눈 오는 날에 그상이 장상이다. 세살 때 버릇은 여든이 되여도 못 고친다 했던가.    어느날, 큰눈이 온 날도 여전히 1분전 8시에 도착했는데 웬일로 마당의 눈이 고스란히 자리보전하고있었다. 대박, 하느님 감사합니다. 어쩌다 이 늦둥이에게 앞장 설 기회를 주셨습니까, 기쁜김에 가방부터 내치고 눈부터 치기 시작했다. 땀 흘리기를 한시간이 푼히 지났을가, 마당의 눈이 거의 3분의 1가량 축났는데도 사람 하나 보이질 않는다. 의아해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는데 불시에 반공실대문으로부터 동료들이 벼락소리에 놀란 개미마냥 우르르 쓸어나온다. 젠장, 모두들 반공실에 있으면서 빤히 내다보고만 있었구나. 그래도 모두들 늦게 나온 봉창이라도 하려는듯 열심히 눈을 치기에 마음의 평형을 잡을가 하는데, 한 5분이 지났을가, 문득 '눈을 치느라 다들 수고 많습니다.' 하는 처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오늘 새벽에 출장 가신다던 분이 웬 일로 돌아오셨지? 알고보니 기차시간이 연장되여 래일 떠나게 되였다고 5분전에 전화로 반공실에 알렸단다. 오직 바깥에서 열심히 눈을 친 나만이 감감 몰랐을뿐이다. 모두들 오랫동안 삽질을 한것마냥  기진맥진한 태도로 처장님주위에 몰려들어 처장님의 수고했다는 인사를 받아주는데 또 한발 늦은 나만이 꿔온 보리자루마냥 끼일 틈이 없다. 진심이란 이렇게 외면 당하기 마련이다. 왜서 늘 당하는가, 그것은 진심이 진심이란 맨 몸뚱이의 외길만 고집하기때문이다. 진심이란 가치를 제대로 발휘하자면 진심이란 알몸뚱이에 더더욱 분을 바르며 치장하는 가면을 곁들었어야 했다. 가면이 다 나쁜것은 아니다. 그것은 노력과 부지런함의 또 다른 대명사일수 있다. 장례식 전날, 궂은 일을 다한 기초상에서 이튿날 눈에 침을 바르며 우는 노력을 했더라면 적어도 몰인정한 며느리로 락인은 찍히지 않았으리라. 눈을 혼자 치던 날, 잠자리마냥 눈을 360도로 뒤룩거리며 사태의 진전을 게으름 없이 살폈더라면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처장님이 들어서는 타이밍에 열정을 낼수 일을것이리라.      하지만 보통 마음이 진심인 사람은 진실만 믿고 태만하며 비노력적이다. 진심 아닌 자들이 더 진심인양 부지런을 떤다. 하여 진심은 항상 화장 한한 게으른 녀인처럼 밉상이고 가심은 정성들여 화장한 부지런한 녀인마냥 곱상이다. 이 세상 도처에서 나 같은 진심이 외면당하는데도 실은 그만한 리유가 있는것이다.
18    별구름 코구름 댓글:  조회:1204  추천:0  2013-12-04
 전번 주 어느날, 우리 중한문화교류협회방문단 일행은 인천공항을 거쳐 순조롭게 루비님의 전세집에 도착했습니다. 옛날 18평 단칸집 같은 작고 아담한 아파트였습니다. 루비님집의 랭동기에서 아리바바보물마냥 술술 나오는 음식 덕분에 우리 일행은 만포식하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원래 잠자리를 바꾸면 잠들지 못하는 체질이라, 더구나 별구름님(아이디)의 특이한 코골이반주에 저는 아마도 새벽 4시까지 잠들지 못한것 같습니다. 짜증나다 못해 그 눔의 코를 막 조반(造反)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인격을 존중시하는 이 사회에서 어찌 남의 귀한 코를 주물러놓을수 있단말입니까, 못고칠 행위는 재밋게 봐줘라. 어머니의 명언이 생각됩니다. 그래, 가야금 소리를 즐기듯 재밋게 봐주자. 눈 펀히 뜨고 신경질로 온밤을 허송할 일이 있습니까. 이래서 궁하면 길이 생긴 다는 말이 나왔는 모양입니다.       별구름님 코의 첫시작은 그래도 남을 의식해서인지 아주 착하고 얌전한 소리가 나옵니다. 다르르다르르, 풀밭에서 유아차가 굴러가듯 그렇게 평화롭고 단조로울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유아기도 그렇잖아요. 세상이 겁난줄 모르고 첫발자국부터 탐방탐방 잘도 걸어갑니다. 항상 산같은 아버지와 바다같은 어머니가 지켜주는줄로 압니다. 균형을 잡지 못해 비청거려도 무서울게 없습니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을줄 애기는 언녕 의식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유년기는 저항없는 잔디밭입니다. 왕세자가 따로 없습니다. 다르르다르르, 안땅장단이라나 할가요, 그렇게 자유롭고 평화롭게 굴러가다 소년기를 맞게 됩니다.       우리 별구름님의 코소리도 받침없는 다르르 소리에서 받침 달린 다르릉다르릉 소리로 올리훑고 있네요. 울퉁불퉁한 비포장길을 만났는 모양입니다. 휘모리장단마냥 맥심이 뻗쳐나고 탄력이 넘쳐납니다. 책가방같이 묵중한 숙제부담, 성적표 압력, 부모들의 짜증나는 감독과 잔소리, 선생님들의 엄격한 요구와 통제, 이런것들이 어울려 번거로운 이응받침이 됩니다. 버겁게, 좀은 숨차게 부담을 안고 다르릉다르릉 굴러갑니다. 그러다가 청년기를 만나게 되지요.       우리 별구름님의 코소리도 덩달아 거세지고 있습니다. 이응받침에서 다르륵다르륵 기윽받침에로 줄달음치고 있네요. 굿거리같은 절주 있고 책임성 있는 장단입니다. 가정도 이뤄야 하고 가정을 책임질수 있는 직업도 찾아야 하고 하여튼 송아지를 갓 벗어난 여린 소에게 멍에를 씌우듯 고달픔의 시작입니다. 이제부터 홀로 갈아야 할 돌밭이랑이 이어지겠죠. 그렇게 갈다갈다 어느덧 장년기를 맞게 됩니다.       우리 별구름님의 코에서도 50의 년륜이 다 된것 같은 된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따라라 따라라, 승진을 해야 하고 상전의 눈치도 봐야 하고 자식들의 결혼비용, 아파트도 자가용차도 마련해 줘야 합니다. 따라라따라라 일생동안 분투하며 아껴먹고 아껴 모은 돈을 일시에 탕진합니다.       쿠루루쿠루루, 아이구, 깜짝이야. 별구름님코가 불시에 된소리에서 거센소리로 바꿔집니다. 늙다리 부림소가 막바지에서 숨이 턱에 닿았나, 아예 구들고래를 훑어라, 훑어. 그런데 이게 뭐입니까, 갑자기 쿠루룩 하더니 딱 멈춰집니다. 거의 1분이 조용합니다. 드디여 푸―하고 늙은 쇠 투레질하듯 거침없는 날숨이 굴러 내려옵니다. 숨이 넘어가지 않나 숨 죽였던 나의 코에서도 안도의 숨이 활 나왔습니다.       드디여 달관에 다달은듯 느리고 무게 있는 진양조가 나옵니다. 당그레 당당, 당그레 당당, 열반한 스님의 사리소리련가, 그렇게 숭엄하고 승리에 찬 환회일수가 없습니다.       음악이 장단이듯 자연도 곡선이고, 자연이 곡선이듯 사람의 인생도 굴곡입니다. 굴곡이 없는 직선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을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굴곡이 나무의 년륜마냥 우리의 무의식속에 새겨져 있었다는것, 그것이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잠속에서 코를 통해 음악의 장단처럼 흘러나온다는것.       직선은 예술이 아닙니다. 곡선이 예술입니다. 곡선이 예술이듯 인간의 삶도 예술이 아닐가요. 그 리치대로라면 코골이도 엄연한 예술입니다. 더구나 별구름이라는 시적인 언어가 코구름앞에 접두사처럼 버티고있으니 그 야말로 예술의 극치라 할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정말 코골이처럼 싫증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 우리 옆집 할머니가 그러하였습니다. 늘 우리집 쌀독이 아니면 장독에 손 대군 하였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록두죽을 써놓고 잠간 집을 비운 사이에 죽까지 퍼갔습니다. 그런줄 모르고 어머니가 할머니 대접하려 죽 한 대접 퍼들고 들어갔더니 깜짝 놀란 할머니가 죽사발을 팽개치며 소리치더랍니다.       “제사 내 도독질해 먹는가 해서 감시할라 왔재이요? 늙은이 먹으면 얼마 축낸다고 그래오.”       도둑이 도둑이야 소리친다더니 이건 정말 해도 너무 한것 아닙니까. 신경질이 나서 이런 할멈하고는 아예 상종도 말랬더니 어머니 말씀이 더 가관이였습니다.       “세살때 버릇이 이제 고쳐지겠냐, 도둑질 취미까지 없으면 할머니가 무슨 멋에 살겠니, 그저 재밋게 봐주어라, 그게 덕이다.”       어머니처럼 도둑질도 취미로 재밋게 봐주다나면 그런 못된 행위들도 삶의 그 어떤 굴곡점이 되고 예술점이 되여보인다는것, 하여 우리 몸뚱의 살점처럼 떨어질래야 떨어질수 없는 서로의 한부분이 된다는것. 그것이 곧바로 덕이라는것을 깨달았습니다.
17    한삽의 흙도 댓글:  조회:955  추천:0  2013-11-26
한삽의 흙도 학교정원의 샛길에 어느날 쥐 한마리 금방 죽어있었네 죽었어오 어찌나 가을콩에 살쪘는지 엎어진 등마루 꿇앉은 등굴쇠마냥 둥실했네 그렇게 둥실한채 이리저리 바람에  씹히더니 이듬해 봄에는 자라등같이 납죽해졌네 그래도 약간이나마 혈과 살이 버티고있어 눈섭의 릉선만큼이나 도톰해있더니 겨울 지나서는 아예 썰물처럼 다 빠져버렸네 둥실하던 쥐잔등이 수평선같이 평평해진것을 보면서 쥐 한마리 통채로 엎어있었던가 싶게 아예 땅으로 마무리된것을 보면서 문득 깨달았네 유는 곡선으로 확인되고 무는 직선으로 마무리된다는것을 생은 곡선으로 오고 사는 직선으로 간다는것을 청명마다 아빠묘지에 올리는 한삽의 흙도 유를 지탱하려는 생의 처절한 곡선이라는것을
16    수필:건강 댓글:  조회:963  추천:0  2013-11-06
   수필의 생명은 진솔성에 있다고 배웠다. 따라서 글쓰기의 어려움이란 바로 이와 같은 진솔성의 경지에서 자기를 성찰하고 승화하는 작업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진솔함의 부족이 일종 신체적 신경장애에서도 온다고 할줄이야.    우리들의 신체에는 각부를 지배하는 2개의 신경이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뇌척수신경으로서 입. 목, 손, 발, 가슴과 같은 신체기관을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는 신경이라고 한다. 례를 들어 한 동료가 곤난에 처해있을 때 방조해줄것인가 하지 말것인가 하는것은 자기의 의지로 결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바로 뇌척수신경의 작용이라고 한다. 이 신경을 동물신경이라고도 하는데 심리학적으로는 현재의식이라고도 한다. 다른 하나는 자률신경으로서 내장, 맥관, 선(腺)같은 불수의근 (不随意筋)을 지배하며 자기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신체가 놓인 그때 그 환경에따라 자률적으로 움직이는 신경이라고 한다. 례를 들어 거짓말을 하게 되면 아무리 아닌 보살을 하자 해도 저절로 낯이 빨개지고 살구를 생각하면 아무리 얌전을 피우자 해도 입에서 침이 나오고 긴장하거나 더우면 아무리 땀을 흘리지 않자 해도 땀을 흘리게 되는 등등이다. 이것을 식물신경이라고도 하는데 심리학적으로는 잠재의식이라고 한다.    인간의 신체내부에 있는 식물신경은 인간과 더불어 복잡다단한 사회현실을 헤쳐나갈 때 항상 동물신경에 자기 메시지를 보내준다고 한다. 다시 말해 잠재의식이 현재의식에 메시지를 보낸다는 말이다. 그런데 동물신경이 이 메시지를 포착못하거나 지나친 자기 타산때문에 외면하고 수용하지 않을 때 총애 잃은 후궁이 소박 받듯 식물신경이 소박을 받아 “식물신경실조증”이 오게 된다는것이다. 심리학적으로는 “잠재의식실조증”라 할는지 모르겠다.    지난해 1월에 난생 처음으로 나의 생존에 관계되는 큰 시비에 나섰다. 분명 내쪽에 도리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보취급을 하고 죄인 취급하는듯한 몰상식하고 건방진 담당자의 태도에 내 식물신경은 당장이라도 그자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령도사무실에 달려가 시비를 캐라는 강한 메시지를 보내주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빨리 내쪽에 유리한 결과을 보려는 리해타산은 나의 동물신경으로 하여금 애써 이 메시지를 외면하고 굳어지는 혀를 나긋하게 놀리며 그 개명치 못한 상대방의 환심을 사기에 전전긍긍하고있었다. 동물신경이 어처구니없이 식물신경을 배신하는 시각이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의 내 모습이 역겹다.    이번 일을 겪고나서야 간사함으로 정평이 나있던 동료가 왜 그런 삶을 살고있는가를 조금은 리해할수 있을것 같았다. 내가 평소에 제일 싫어하던 인간이였다. 회사의 장래와 운명에 관계되는 원칙적인 문제에서는 항상 인심을 잃을가봐 핼끔핼끔 량쪽의 눈치만 살피가가 일단 일이 마루리질것 같으면 그제야 나서서 서로 양보해야 한다느니 다투지 말고 해결해야 한다느니 하며 이 세상의 너그러운 일은 혼자 다 하는척한다. 마음속으로는 자기가 좋아하고 지지하고싶은 동료이면서도 그 동료를 경원하는 령도의 눈치때문에 입 한번 뻥긋 못하다가 그 령도의 대세가 기운것 같으면 그제야 그 동료에 대한 지지와 칭찬을 폭죽처럼 터쳐주는것이다. 더욱 웃기는것은 이런 칭찬에도 상대방 배경의 후광에 따라 그 강약을 조절하는 례모콘이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이지 너무 역겹다 못해 아주 무시해버린 인간이였는데 정작 내가 일을 당하고보니 그 동료만 무시하고 미워할 일이 아니였다. 그 동료보다는 보다 좋은 환경에서 생존에 부딪치는 리해관계가 없었을뿐 그 동료처럼 렬악한 환경에서였더라면 오히려 내가 더 간사한 인간이 되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진솔성이 소박당한 심적장애자가 글을 쓰면 과연 얼마나 잘 쓸것인가, 가령 억지로 한편을 썼다 해도 필경 독자들으 기펀하고 독자들의 시간이나 정력을 랑비하는 언어장난이였을것이다. 하다면 인체의 건강이 진솔성을 생명으로 하는 수필과 그 어떤 함수관계가 있지 않을가. 정말 이런 함수관계가 성립된다면 우선 인간의 심리건강부터 등급을 나눠보는것이 우선일것 같다. 마침 그런 글을 본 기억이 있어 내 나름대로 정리해본다.   첫번째, 기계 같은 건강- 시계추처럼 제 궤도에서만 왔다갔다하는 건강   두번째, 고물 같은 건강- 각성제, 진정제, 호르몬, 비타민약 등에 의뢰하는 건강.   세번째, 짐승 같은 건강- 누군가를 이겨야 승리할수 있다는 건강.   네번째, 인간적인 건강- 인간과 인간의 풍요로운 조화를 이룰수 있는 건강.   다섯번째, 창조적인 건강- 자연과 인간의 여유와 힘의 조화를 이루면서 새롭게 창조되는 건강.   자신의 심리건강상황을 상술한 등급에 따라 하나하나 체크해보면 자기가 썼다는 수필들에서 어느것이 “기계” 같은 수필이고 어느것이 “고물” 같은 수필이며 어느것이 “짐승” 같은 수필이였겠는가 하느것은 조금은 깨달을수 있을것 같다. 그 함수관계에 따라 자기가 쓴 글들을 성찰하는 동안 비록 달인에 가까운 “창조적인 건강”수필을 못 쓰더라도 동물신경과 식물신경의 벨런스가 취해진 “인간적인 건강”수필을 쓸 용의는 갖춰질것 같다. 적어도 자기는 마음이 항상 너그럽고 고상한척 남더러 부드러워야 한다는니, 소리를 높이지 말라느니, 한발 물러서야 한다는 위선을 떨지 않을것이다. 그러자면 글 쓰기 앞서 자신의 신체적 신경건강부터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식물신경실조증”은 산소결핍에서 온다고 한다. 그런데 연길은 분지여서 그런지 더 엄중할래야 더 엄중할수 없는 산소결핍현상이란다. 겨울 저녁녘에 모아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마치도 시커먼 악마가 공중에서 타래를 치는듯 보기만 해도 숨막힌다. 도시를 한개 유기체로 볼 때 연길시도 분명 “식물신경실조증”에 걸린 환자일것이다. 우리가 몸을 잠그고있는 도시환경이 이러할진대 인문환경이라고 “식물신경실조증”에 걸리지 말란 법은 없을것이다. 연변의 문인들이 산을 자주 찾는 리유를 알것 같다. 그것은 어쩔수 없이 앓게 되는 “실조증”의 삶속에서 자연만이 유일하게 만날수 있는 건강한 글이기때문이리라.
15    청보리와 노고지리 댓글:  조회:696  추천:0  2013-10-29
청보리와 노고지리 어둠속 뿌리 겨우내 찬바람에 열심히 밟히더니 투두둑 튕겨지더냐 푸른 힘줄이 드디여 하늘 차고 곤두선 찬란한 비명 지 종 지 종 질푸른 춤사위에 뿌리로 운다 지종지종 지지...쭁
14    빨간볏 쫗기 댓글:  조회:1877  추천:1  2013-10-17
   그녀가 아무리 우아한척 얌전을 빼도 녀자들은 그냥 그녀를 남자의 첩년이라고 쑥떡거린다. 고운 옷을 입고 나서도 남자 돈을 얼려 사입은거라하고 어디를 려행 갔다와도 남자의 돈을 빼내 잘도 놀아댄다고 한다. 협회선진이 되여 붉은 꽃을 달아도 남자의 본처눈에 피눈물 나게 하고도 저렇게 대소변 못가릴정도로 앞에 나설수 있는가 한다. 하긴 부부가 애글타글해도 자식하나도 키우기 벅차하는 녀자들이고 보면 애들이 딸린 과부가 아무 일 않고도 호의호식 하니 격분할만도 한 일이다. 이럴 때 차라리 그녀가 팥지 같은 박색이였으면 그 주제에 남자 꼬시는 재간은 있다고 편히 웃기나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콩지륙촌에나 가는 인물이여서 녀자들에게는 견딜수 없는 재앙으로 다가오는 모양, 겨울날의 된감기처럼 그녀의 일거수일투족마다 격렬한 기침을 내뱉는다.    아이러니한것은 그녀를 거들 때마다 그 남자를 밑반찬처럼 꼭꼭 곁들이는 녀자들이 정작 남자에게는 한번도 기침을 뱉지 않는다는것, 오히려 처첩도 거느릴수 있는 센스있는 남자란다. 남자가 바람나면 로맨스고 녀자가 바람나면 불륜인가. 듣자니 그 남자의 본처가 제남편은 멀쩡히 놔두고 그녀의 첩살림만 잡아두드리며 갖은 행패를 다 부렸단다. 녀자들이란 동성의 불륜에는 무자비한 독재이고 이성의 불륜에는 무한한 민주주의인가.    한무리 암탉들이 몰려들어 한 암탉의 볏만 피나도록 짓쫗아대는것을 본적이 있다. 왕따당하는 암탉의 볏이 특별히 빨갛고 예뻐 수탉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기때문이란다. 눈이 시도록 빨갛고 성감적인 볏은 그렇지 못한 보통 볏들의 성적본능에 상처를 입일수 있단다. 상처 입은 본능은 걷잡을수 없는 분노와 폭력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녀자들의 기침뱉기와 그남자 본처의 행패도 일종의 “빨간볏 쫗기”심리에 속한다고 말할수 있다.    이런 “빨간볏 쫗기”현상은 농촌에 빈하중농재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도 있었다. 나라 운명에 관계되는 엄숙한 정치로선투쟁회에선 병걸린 닭들마냥 꺼떡꺼떡 조는 아줌마들이 바람난 과부를 투쟁한다 하면 지렁이를 발견한 닭무리마냥 눈에 빛이 반짝반짝 나는것이였다. 하긴 이 과부가 보통 바람쟁이도 아니고 전문 혁명적간부들만 부식시키는 “반동적바람쟁”인데다 저네들처럼 앉으나서나 풍더분한 “몸뻬”가 아니라 남정네 눈을 쏙 빼먹을듯한 조롱박스타일이였으니, 그 덕에 밭일에 손가락 까딱 않고도 하루 삼시 이밥만 차례지는 상팔자여서 오로지 한 남정만 바라고 밥상밑의 묵은 조밥만 챙기는 저네들 하고는 비교도 안되는터였다. 그러니 어찌 이 순간에 눈이 반짝반짝 빛나지 않으리오, 언녕 가위까지 챙긴 “반짝반짝”들이 소여물 썰듯 그녀의 머리채부터 썩둑썩둑 자르는것이였다. 예쁜 “볏”에 대한 콤플렉스를 변비 풀듯 풀어내는 판이였다. 뒤이어 정치바람쟁이 과부에게 부식된 혁명적간부동지의 본처란 분이 체머리까지 벅차게 떨며 혁명구호를 웨치기시작했다.    “저 바람쟁이년을”    “저 바람쟁이년을” 빈하중농들이 우렁차게 따라웨쳤다.    “어쩔가?”    “어쩔가?” 빈하중농들이 따라웨쳤다.    따라웨치다 불시에 산사태 터지듯 웃음이 터졌다. 타도하자!해도 아직 덜 분이 풀리겠는데 어쩔가?라니, 계급립장이 견정하지 못해도 유분수지, 혁명이 무슨 손님을 접대하거나 문장을 짓는것인가, 혁명은 한 계급이 다른 한 계급을 뒤엎는 폭력적인 행동이다. 어찌 “어쩔가?” 라는 얼빤한 계급의식으로 혁명을 대체할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 혁명적코가 시물시물 웃는다더니 오늘은 혁명적주먹이 와하하 하겠다야. 아니나다를가 혁명적주먹이 와하하 하다가 혁명적아래까지 와하하 했는지 누군가 웃다가 “뿅” 하는 소리까지 내고말았다. 그바람에 모두들 배가죽이 세간 날 지경이였다. 이럴 때 어쩔수 없이 둔부에서 나오는 “뿅”소리는 도대체 혁명적소리라 해야하는가, 반혁명적소리라 해야하는가.     더욱 코미디한건 “어쩔가”의 혁명적간부남편이였다. 지은 죄때문에 앞장은 못서고 점잖게 뒤짐 쥐고 산책하듯 뒤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다들 참지 못해 웃어대는 장면에 가서는 저도 못참겠다는듯 되게 한번 웃더라는것이였다. 같은 죄인이라도 남자는 원고석이고 녀자는 피고석인가.     이런 ”빨간볏 쫗기”는 60년대에도 있었다. 우리 동네에 처녀로 애를 둘씩이나 낳아기르는 녀인이 있었다. 문제는 늘 앞가슴이 도도한 원피스와 둔부곡선이 완미한 스카드로 동네 “혁띠”들의 눈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것이였다. 이에 눈뿌리 시린 동네 “몸뻬”들이 문화혁명이 터지자 때를 만났다고 그녀의 옷궤부터 반란했다. 죄없는 원피스를 빨간볏 쫗듯 죽어라 찟고밟고하는것을 보면 처녀로 애를 낳았다는 기본투쟁목표보다 성감적인 그녀의 “빨간 볏”이 더욱더 우선이였던것 같았다. 그녀가 머리를 깎이우면서 절규하던 일이 어제련듯 생생하다.    "저도 당당한 공산주의 후계자의 어머니입니다!”      하지만 당당한 공산주의후계자를 버리지 않고 키운 어머니는 이렇게 꼬깔모자 쓰고 투쟁을 받고 공산주의후계자 둘씩이나 버린 아버지는 손색 하나 없는 씩씩한 “총각”으로 사대모 쓰고 처녀장가를 갔단다. 처녀가 애를 낳으면 뒤가 구린 과부이고 총각이 애를 만들면 뒤가 말짱한 총각인가.     이에 대한 남편의 결론 또한 걸작이다. 남자는 바람써도 되지만 녀자는 안되기때문이란다. 그야말로 남자에게는 자유주의요, 녀자에게는 맑스주의인 파시스륜리이다. 더욱 어이 없는것은 이런 파시스륜리하에서도 우리 녀자들은 한번도 눈에 빛이 반짝반짝 날만큼 남자에대한 격분이 일어 안났다는것, 오히려 다함없는 “민주주의 해볓정책”하에 우리 남편 같은 남자들로하여금 지속적으로 “륜리적 무정부주의상태”로 살아가게 만들고있다는 것.    기실 예쁘고 성감적인 녀성들의 매력도 일종의 예술이라 할수 있다. 아름다움은 선으로 통하고 선은 예술로 통하기때문이다. 하여 한수의 아름다운 시일수도 있고 멜로디일수도 있으며 한폭의 신선한 그림일수도 있다. 하지만 적지 않은 녀성들이 이런 신성한 예술품에대해 공연히 씹지 못해 안달이다. 오히려 “몸뻬”같은 풍더분한 녀자에게는 우호적이다. 예술품에는 자비감에 의한 불편함과 위기감을 느끼지만 “몸뻬”에는 자신감에 의한 안전함과 편안함을 느끼기때문이다. 이는 곧바로 예술수양의 평범함에서 비롯된 의식으로서 그네들의 미적표준이 아직 “몸뻬”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것을 설명한다. 이런 “몸뻬” 같은 자비심의 변태심리가 수탉들의 인기를 빼앗길것 같은 암탉들의 집단적공포 내지 폭력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녀자들이란 자기 “볏”만 곱게 다듬자해도 벅차다. 아름다움은 노력과 시간에 정비례되는것이기 때문이다. 제 볏은 다듬지 않고 밤낮 남의 볏만 찧고쫗고 해서야 언제 예뻐질 시간이 있겠는가. 그것은 예술의 파괴이기도 하고 자신의 파괴이기도 하다. 자신의 파괴는 곧바로 자신의 신성한 성을 죄인으로, 피고석으로, 피독재로, “어쩔가?”의 투쟁대상으로 몰아가는 장본인이다. “녀자의 력사”는 영원히 “흑인의 력사”라는 보봐르의 말씀을 잊으셨단 말인가.
13    까마귀 댓글:  조회:821  추천:1  2013-10-12
     까마귀 위태로운 거짓말 이리저리 맞물려 까만 둥지 틀어놓더니 벼락 맞은 둥지에 털만 곰팡 났구나 험한 도독질 후광에 등을 업고 때론 황관이 되여 날쳐도 보지만 장품 품은 내장은 건재하실가 제 목소리 아닌 남의 목소리 제부리에 집어넣는 거지 동전 같은 욕심 갑장선에 탈나서 개 보름쇠듯 오늘은 굶주린 목줄기만 외로운가 훔친 날개 빳빳히 살려봐도 골다골증이 심한 발로 오래 버티지 못한게다 까욱까욱 한옥탑 올리지른들 까만 귀면 까마귀지 봉황귀가 된다더냐 조경등의 참새가 웃겟다야 흐흐흐
12    보슬비 댓글:  조회:888  추천:1  2013-07-24
    문화혁명전 연변사범부속소학교 제 1기 졸업생들인 우리 동창들이 반주임이셨던 조영옥선생님에게 드리는 감사패에는 이런 글이 씌여있다.     "어여뻤던 조영옥선생님, 자식처럼 아껴주던 그 사랑을 오늘 우리 제자들은 부모에대한 사랑과 존경으로 선생님한테 보답하렵니다. 어여쁘게 오래오래 앉으세요."     정남길을 비롯한 우리 몇몇 동창들은 선생님의 75주년 지일에 즈음하여 무슨 선물을 드릴가고 고심참담하다가 마침내 제자들의 한결같은 마음을 표달할수 있는 감사패를 선물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것은 그 어떤 묵직한 선물이나 화려한 선물일지라도 옛날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쏟아부었던 사랑앞에서는 너무나도 무색해보였기때문이였다. 오직 마음속 뿌리에서 우러나온 글로만 선생님의 사랑에 저그만이라도 보답할수 있을것 같았다.     문화혁명전의 우리반은 짜장 문자 그대로의 '태자'반이였다. 주덕해주장과 김명한서기를 비롯한 고급간부들의 자녀들은 물론 정진옥, 동희철, 허동활, 방초선등 유명한 인사들의 자녀들도 거진 우리반에 있었다. 선생님은 바로 이런 막강한 후비군을 거느린 '태상황'이였다. 그떄 당시 선생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할려고들면 그야말로 '갈래갈래 로마'로 통하지 않는 길이 없었을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런데 대해서는 천성적으로 감각이 무딘 분이시다. 간부자녀에 대해서는 엄격한 요구로 다스렸지만 소부분(전반 학생들의10%)의 공인자제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애대와 관심을 주셨던 분이였다. 마치도 부모들이 강한 자식에 대해서는 오만해질가봐 엄한 사랑을 주고 약한 자식에 대해서는 기가 죽을가봐 부드러운 사랑을 주듯이 말이다.     한번은 주덕해주장님의 둘째아들 양청이가 간식시간에 심술을 쓰며 '단식'이란 왕패를 내들었다. 자기 앞에 차례진 사과가 다른 애들것보다 작다는 한차례 시위였다. 평소에 주장님께서 총명한 이 둘째아드님을 제일 총애하셨단다. 이럴 때 역어빠진 사람같으면 언녕 호떡같은 '태자'님의 심술을 보지 못해 못받아주었을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우둔'한 선생님은 저절로 굴러오는 호떡도 마다하시고 버릇을 뗀다고 사과를 주지 않았더니 아니나다를가 우리 '태자'님께서도 이런 '우둔'한 선생님 앞에서는 그 어떤 왕패도 무효라는것을 재빨리 판단하셨는 모양이다. 당장에서 '단식'하려던 결심을 취소하시곤 '삥간 께이바!'하고 소리치더란다. 금방까지 작은 사과는 안먹겠다고 내치며 벽에 돌아앉았던 모습과는 딴판이였다. 옆에 한족선생님도 있어 제딴에는 중어를 답새긴다는것이 그만 핑궈(사과)를 '삥간(과자)'으로 오발했던것이다. 이 일은 우리 동창들이 두고두고 웃어주는 에피소드중의 하나이다.     정남길국장은 지금도 잊지 않고 외우는 일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기 부모가 편찮았을 때 선생님께서 금싸락같이 귀했던 닭알을 사들고 병문안을 오셨던 일이였다. 그때 자기네 집은 생활이 곤난한데다가 평민자제여서 늘 위축을 받았었는데 선생님의 이런 따뜻한 보살핌으로하여 적지 않은 보상을 받았다고한다. 평민의 자식인 자기가 오늘 이만큼 떳떳하게 사회에 나설수 있었던것도 모두 선생님께서 보상해준 자존심 덕분이라고 한다.     4학년때 우리반에는 심한 소아마비후유증으로 두다리를 못쓰는 경자란 학생이 전학해왔었다. 아버지는 보이라공이고 어머니는 무직업이여서 차를 살 형편이 못되였던 모양이였다. 날마다 쇠약한 부모등에 업혀 학교로 다니고있었는데 특히 눈이 와서 길이 미끄는 날에는 우리 눈에 보기도 위태스러웠다. 학생들의 곤난한 처지만 보면 거저 지나치지 못하는 선생님은 마침내 당신의 호주머니부터 털어내놓았다. 이에 감동된 전반 학생들이 너도나도 뒤질세라 지원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학생들이 얼음과자 사먹을 돈까지 내놓았다. 지금 남경에서 방역사업을 하고있는 리택림이는 자전거(60년대는 자전거가 아주 희소했다.)까지 내놓았는데 그것이 세바퀴 인력차를 만드는데 큰몫을 담당하였다. 우리는 차를 만들어주는데만 그친것이 아니라 그 인력차에 경자를 앉히고 학교로 오가는일도 앞다투어 맡아나섰다. 그바람에 신체의 자비심으로 인한 성격때문에 늘 왕따를 당하던 경자가 일시에 반급의 총아로 탈바꿈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늘 가난한 학생들에게 도시락 반찬을 갈라주던일, 학생들이 등교하기전에 난로불을 뜨뜻히 피워놓고 학생들의 언손을 잡아주던일, 당신의 털수건을 벗어 얼어서 빨갛게된 학생의 귀를 감싸주던일, 간조시간만 되면 학생들의 점심도시락을 명심해 덥혀주던일, 일요일에는 학습성적이 낮은 학생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보도해주던 일, 우리가 마반산 2대로 일주일간 로동단련을 갔을 때도 젖먹는 막내딸 금화때문에 같이 오지 못했던 선생님이 로동단련 마지막 날에 사탕과 과자를 사들고 우리를 보러오셨다. 그때 눈물부터 글썽이며 우리를 와락 안아주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고 보면 선생님은 눈물이 많으셨던 분 같았다.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의 마실 물때문에 수도물을 마다하고 운동장밖의 우물터에 물길러다니셨다. 임신임에도 무거운 드레박으로 물을 올려 물바게쯔에 채워 들고오시군 했다. 선생님께서 늘 허리통이 헐렁한 옷을 입고다니셨기에 우리 녀학생들은 임신 막달에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거저 선생님이 불시에 실해졌다고만 생각했다. 선생님이 힘들게 물을 길어와도 아무 느낌도 없이 선생님은 응당 그러려니하고 서비스를 받아주는데 길들여져있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남학생들이 눈치채고 선생님의 드레박을 뺏기 시작했다. 녀자들이란게 임신중인 선생님을 돌볼줄 모른다며 한바탕 훈계하며, 선샌님이 이 일이 너무도 고마와 늘 다른 선생님들과 외우며 눈물을 글썽이군 했다. 주창권교장님이 문화혁명기간에 투쟁을 맞으며 고생하실 때에도 선생님이 이렇게 눈물을 글썽인적이 있다. 투쟁장소에 차마 가지는 못하고 학생인 나와 가만히 투쟁대회정황을 물어보면서 눈물을 흘렸던것이다. 듣건대 주교장님이 갇혀있으면서 월급도 제대도 받지 못하고있을 때 가만히 돈도 꾸어드렸단다. 교장님께서 너무 힘드시니 감히 다른 사람과 말 못하고 조선생님과 가만히 부탁했던 모양이다. 그때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잘못 보황했다간 같이 투쟁받을 위험성이 있었지만 선생님의 사랑의 마음이 이처럼 위험한 일을 감수하도록 하였던것이다.     선생님의 사랑은 이렇게 크지도 소리도 없는 보슬비와도 같은 사랑이였다. 눈에 띄우지 않는 보슬비는 땅의 뿌리가지 적실수 있지만 요란한 소낙비는 땅두께밖에 적시지 못한다.     선생님의 옛사랑이 30여년이 지난 오랜 세월까지도 마르지 않는 샘물마냥 우리 마음속 뿌리에 남아있을수 있었던것은 바로 이런 잔잔한 보슬비의 은혜요, 소리없는 보슬비의 은총이라고 생각된다. 보슬비의 은총으로 무성해진 마음의 뿌리는 다시금 사랑의 아지를 뻗어가며 더욱더 무르익은 사랑의 열매를 맺어갈수 있다.     "부모에 대한 사랑과 존경으로 선생님한테 보답하렵니다."는 우리 제자들의 한결같은 마음이 바로 이런 승화된 사랑의 표징이 아니였을가.     조영옥선생님과 같은 분들이 이 세상에 어디 한둘뿐이겠는가, 이젠 70에 가깝거나 70중턱을 넘어선 우리 선생님들 모두가 이런 사랑스러운 분들이라고 생각된다. 문화대혁명의 피비린 대동란속에서에도, 옥수수떡만 먹고 곡갱이질 하던 재교육의 나날에도 우리 모두가 변함없이 꾿꾿한 인간으로 될수 있었던것도 바로 이런 선생님들의 보슬비같은 사랑으로 커온 보람이였으리라.     아들의 선생님들한테 굽석거린 허리가 불편할 때마다 우리 학생들이 '황제'로 군림했던 옛시절이 생각나서 이 글을 쓴다.
11    댓글:  조회:1072  추천:8  2013-07-19
      어깨까지 드리운 머리가 탐스럽다. 한올이라도 빠질세라 조심스레 빗는다. 그래도 부시시 가을잎 떨어지듯 한다. 떨어진 머리카락 한올한올이 “살붙이”처럼 아깝다. 살붙이’들이 땅에 스르르 누워버린다. 매끈하던 타일바닥이 온통 실뱀들처럼 지글지글해진다. 빗을 팽개치고 줏기시작한다. 출근시간이 아득바득 다가오는데도 그만둘념을 안한다. 남편이 보다못해 소리친다. “머리카락과 좀 그만 '전쟁'하면 안되오, 그게 무슨‘계급의 적’이요?”      머리카락이 몸에 붙어있을 때는 생명이 있어 아름다운것이요, 떨어지는 순간 생명이 없어 추해보인다더니 그게 정말 생명이 없는 추물 같아서 ‘계급의 적’이 되여보일가. 그런데 얼마전에 본 이른바 생명이 없는 머리카락들은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한메터가 더되는 머리카락 수십만오리를 벽에 쭉 걸어놓고 전시하는것을 본적이 있는데 그야말로‘전설바다속의 밤물결’같은 극치였다. 이것들이 떨어진 내 머리카락들처럼 바닥에 쫙 널려있다면 어떨가? 보나마나 단떼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처럼 욱실거리는 뱀들 같았을것이다.     기실 뱀이라고 다 지옥같은것은 아니다. 곡예단의 꽃뱀을 구경한적이 있다. 이름 그대로 꽃같이 아롱진 몸체였지만 길다란것들이 스믈스믈 기여다닐 때마다 풍기는 음산한 기운때문에 그 꽃무늬들이 오히려 악마의 비늘 같은 감을 주었다. 그런데 이눔들이 몸체를 일자처럼 곧추 세우고 일제히 춤을 출 때 보니 천사의 날개가 돋친듯 색채의 조화가 생생히 살아있어 그야말로 률동미와 곡선미가 넘쳐나는 자연예술 그 자체였다.     “배궁사영”(杯弓蛇影)이란 성어가 있다. 술잔에 가로 비낀 활그림자를 뱀으로 착각하고 놀라 앓았다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때 그 활이 가로가 아니고 세로 비꼈더라면 과연 이런 성어가 생겨났을가.     보다싶이 똑같이 가늘고 긴 물체라도 남가일몽마냥 천당과 지옥을 오갈수 있는 요지경을 연출하고있다. 살붙이 되였다가 “계급의 적”이 되고 “밤물결” 같다가도 뱀 같고 천사의 날개 같다가도 악마의 비늘 같았다. 요는 그 무슨 생명과 죽음의 차이가 아니라 서있는것과 누워있는것간의 차이였던것 같다. 내 머리카락도 머리에 붙어 수직으로 드리워져있다가 땅에 떨어져 180도로 누워있지 않는가. 순식간에 요지경을 연출할수 있는 공간차이가 바로 황금 같이 둔중한 90도에서 비롯된것인것 같다.     어느날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는데 불시에 섬뜩한 기운이 끼쳐왔다. 몇해전 산에 갔다가 뱀에게 물렸던 감각이 확 되살아나는 순간이였다. 황급히 객실을 둘러봤으나 아무 흔적도 없었다. 이에 시름놓고 부엌으로 들어가다가 혹시나 해서 침실에 가보았더니 아니나다를가 화장대서랍이 활 열려있었다. 패물을 몽땅 들어간 모양이였다. 집에 들어섰을 때의 감각이 적중했었다.     순간적으로 포착되는 본능이 가장 믿음직하다했던가. 동네로인들과 물어봤더니 옛날부터 도적이 들면 꼭 “사람독”을 집에 남겨놓고 간다는다는것이였다. 호기심이 동해 유관재료를 찾아보니 마음속에 오래동안 뭉쳤던 탐욕, 불안, 공포들이 갑자기 폭발하는 순간 엄청난 량의 독이 뿜겨져나온다는것이였다. 과학자들이 그런 사람들의 입김을 모아 독극물실험을 한 결과 맹독성물질이 나왔다고한다. 도적들이 물건을 훔칠 때의 탐욕, 불안, 공포들이 분명 살아있는 독으로 집에 남겨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독을 뱀독과 련결시키게 되는것일가. 생각지 않던 도적을 뱀과 련계시키고나니 자연히 도적의 인생궤적도 뱀처럼 길고 가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란 량심과 탐욕이 동시에 움틀수 있는 동물이 아닌가. 탐욕을 종축으로, 량심을 힁축으로 인생좌표를 정할 때 주체할 길 없는 탐욕은 무한정 종적으로 치솟을터, 이에 미처 힁적으로 넓혀갈 여유가 없는 인생은 약하고 길다란 궤적밖에 이뤄질수 없을것이다. 이런 기형적인 궤적은 안정도가 특별히 낮아 넘어지기 십상이다.     이브의 유전이여서 그런지 나에게도 금과를 훔친 과거가 있다. 몇백명도 아니고 몇천명 공인들의 월급과 장례금를 주관하던 나에게 채색텔레비 한대쯤 후리는것은 스위찌 끄듯 쉬운 일이였다. 80년대만 하더라도 텔레비가 가장 큰 재산이였으니까, 월급인상을 전제로 슬쩍 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량심만은 슬쩍할 일이 아닌 모양이였다. 그 채색유혹으로 온밤을 사상투쟁하다가 결국 본인에게 돌려주기로 작심했다.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던 욕심이 어렵사리 90도 황금중력을 되찾은 인생좌표였다. 그때 나처럼 “채색낟가리” 쌓다가 종내는 바벨탑까지 넘보고 일어나지 못한 동료도 있었다. 이브를 사촉한 도적우의 우도적인 뱀도 하느님의 벌을 받아 기여다닐수 밖에 없지 않았던가. 어쩌면 집에 든 도적을 뱀독과 련계시킨것도 력대로 내려온 집단무의식의 발로가 아니였던가싶다.      간음은 생각만해도 죄라고한다. 그 리치대로라면 나도 엄연한 “도적”이였다. 하지만 그 90도가 받쳐준 덕분으로 직장이나 타인에게 손해준 일은 없었던것 같다. 우리집에 들었던 도적도 패물이나 훔치는 도적이여서 큰 손해는 없었다. 내 발등을 물었던 뱀도 의사님말씀대로 똘마니같은 뱀이여서 독이 허벅지에만 그쳤을뿐 생명의 위험까지는 없었다. 기실 이런 똘마니같은 도적은 크게 경계할바가 못된다. 진짜 경계해야할 큰 도적은 권력의 허울로 인민의 세금을 물쓰듯 하며 제앞길만 찬란히 닦는 자들에게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자들이야말로 의사선생의 말대로 “왕초 같은 뱀”이여서 나라심장에까지 독이 뻗칠수 있기때문이다.     권력의 말이 났으니말이지 기실 권력의 속성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이다. 권력자는 복무원답게 ‘황제’인 인민앞에 90의 황금중력같은 인생좌표로 서있을수 있어야 수시로 복무할수있는 기본자세일것이다. 권력은 ‘서’있어야 산다. 권력이 복무사명을 잊고 도적의 인생궤적처럼 잔뜩 키만 늘구다가 어느날엔가 넘어져서 뱀처럼 흙바닥을 벌벌 기여다닐지 누가 감히 장담할수 있으랴? 뒤꿈치나 물라고 가만 놔둘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것이다. 적어도 나처럼 아침지각을 감수하면서라도 기를 쓰고 머리카락 주어내듯 줏어내칠것이니까.
10    성애에 대한 정면교육을 댓글:  조회:1089  추천:1  2012-12-06
성애에 대한 정면교육을 오설추 부부간의 애무는 남보는데서는 안되는 금물로 생각하는 우리는 애앞에서 지나치게 "혁명적"행동을 취했었다. 하기에 언젠가 네돐 아들애가 엉뚱한 질문을 한다. "땐스에서는 어머니까 아부지 친친(亲亲)하는데 우리 집에서는 어째 안함다?" "땐스니가 그렇지" 허나 후에 나타난 어처구니 없는 일들에서 나는 나의 대답이 얼마나 미련했으며 애는 진작 자기의 눈과 마음으로 모든것을 감수하고있었다는것을 깨달았다. 어느날 외출했던 남편이 문뜩 집에 들어섰다. 그립던차라 서로 막 그러안고싶었지만 요눔의 보초군때문에 감정을 억제해야 했다. 내가 남편의 눈치에 따라 애 몰래 객실에서 들어서니 그이가 덥석 끌어안으며 키스를 퍼부었다. 그런데 아뿔사 이게 웬일이냐, 삐꺽 문이 열리며 쬐꼬만 골이 뽈마냥 쑥 들어오는것이 아니겠는가. 화뜰 놀란 우리는 똑마치 나쁜 일을 하다가 들킨 상이다. 순간 부모의 거룩한 현상이 구겨지는 무참한 심정이였다. "어머니까 아부지 친아디(亲爱的)하는가 해서..." 실로 울지도 웃지도 못할 노릇이다. 하긴 텔레비에서처럼 "친친"하지 않으니 우리 아빠 엄마는 도대체 웬 일인가? 한번쯤 정찰해보는것도 재미있는 일이겠다. 감추면 감출수록 들추고싶은것이 인간의 심리이거늘 하물며 호기심 많은 어린애임에야. 그날 저녁 기어이 우리곁에서 자겠다고 떼질써서 셋이 한자리에 누었는데 요눔이 천만 고맙게도 오래 까불지 않고 인츰 잠드는것이였다. 얼싸 좋다고 억제된 감정을 폭발해가며 서로 좋아 야단인데 이건 또 무슨 홍두깨비인가, 구석에서 흥알흥알 시가락이 흘러나온다. "어떤 아는 엄마라는게 애기처럼 서적쓰더라." 어이쿠, 요눔이 잠든척하고 수를 썼구나. 아직 어려서 구체직인 행동까지 기다려내지 못하고 서막을 연것이 천만다행이였다. "어머니 언제 서적썼니?" "이재 내 다 봤다. 아부지목을 안고 뽀뽀하메 서적쓰더라. 우리 아부지하구 서적쓴 값을 내" 제법 나하고 흥정까지 하려 든다. 아이의 호기심을 방심해두었다가는 이 놈이 또 무슨 수를 쓸지, 종당에는 부부간의 그 일도 발각될것 같았다. 모방성이 강한 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초래될 후과는 상상만 해도 엄중했다. 현실은 우리를 일깨워주고있다. 성애를 회피할것이 아니라 정면교육을 해야 된다고. 그래야 성애에 대한 신비감을 없애고 건전한 심리를 키울수 있다. 우리는 계발식과 직관식으로 교육하기로 하였다. 나는 우선 애를 끌어안고 뽀뽀를 해주며 물었다. "어머닌 왜서 한생이를 안고 뽀뽀할가?" "한생이 고와서." "나도 아버지가 고와서 뽀뽀하겠습니다." 뽕도 딸겸 님도 볼겸 우리는 애앞에서 열렬한 애무를 했다. 어리둥절해있던 아이가 불시에 내 품에 안기며 저도 뽀뽀하겠다고 야단이다. 슬그머니 소외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이튿날부터 우리는 예전의 "혁명적"행동을 버리고 자연스레 성애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내가 항상 먼저 출근하기에 남편은 문어구까지 따라 나와 살짝 키스를 보낸다. 그러면 아이도 뒤질세라 나에게 코범벅을 칠해준다. 순간, 온몸에 봄기운이 흐른다. 문밖에 나와서도 그 여운에 두둥실 뜬 기분이다. 오, 세상에 부럼없어라, 세상락원이 예 아니더뇨! 퇴근하여 남새를 사들고 기진맥진하여 집문앞까지 오면 남편과 아이가 환성을 지르며 서로 나를 뺏느라 야단이다.뉘라서 인삼록용만 피로를 풀고 정력을 돕는 약이라했던고? 이런 정감세계가 세상에 으뜸가는 보건약이렸다! 이젠 애가 커서 열네살이 되였다. 내가 좀 기분이 언짢을가 하면 제쪽에서 아버지를 부른다. "아부지 어머니를 좀 안아주쇼. 어머니 웃게서리" 부부간의 정애와 사랑이 밥먹고 잠자듯이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접수되였던것 같다. 생물에 흥취가 짙은 우리 애는 온갖 동물의 교배, 번식과정을 연구관찰하고는 자기의 견해와 감상을 꺼리낌없이 우리와 얘기한다. 교배는 생명의 련속을 위한 필수적인 행위이므로 하등의 이상할것도 없다는 너무나도 객관적인 태도이다. 더욱 재미나는것은 애가 손수 번식시킨 물고기중에는 물고기할아버지로부터 손자, 손녀 심지어 물고기 본처, 후처, 적자, 서자까지 수두룩한데 애가 신기할 정도로 이것들을 일일히 가려낼줄 아는것이다. 장담하건대 우리 아들은 장차 우수한 생물학자로, 따뜻한 세대주로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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