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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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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은 왜서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았는가?
2014년 05월 24일 11시 24분  조회:5971  추천:3  작성자: 넉두리

대립은 왜서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았는가?


 
(번역)





 
누구도 국민당정보조직의 특무대부로 명성이 높은 중국국민당 민국정부 군통(군사위원회조사통계국) 국장 대립(戴笠)이 국민당 당원이 아니라고 하면 믿으려 하지 않을것이다. 국민당이 대립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은것도 아니였고 대립이 국민당을 반대한것도 아니였지만 대립은 죽을 때까지 줄곧 국민당에 가입하는것을 거절했다. 그는 비록 국민당원이 아니였지만 국민당의 군통국 국장이란 중요한 직무를 담임했으며 권세가 하늘을 찌를듯 했는데 이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정치해프닝이 아닐수 없다. 당시의 기형정치가 낳은 배경에서만이 대립식의 정치투기분자가 나타날수 있었다.
1897년에 절강성 강산현 보안향에서 출생한 대립은 본명이 춘풍(春风)이며 자는 우농(雨农)이다. 그는 “장개석의 검”, “중국의 게슈타포(盖世太保)”, “중국의 가장 신비한 인물”로 불리웠는데 잔인하고 무정한것으로 소문났다. 6살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1917년에 참군했고 1921년에 상해에서 두월생(杜月笙)을 알게 되여 결의형제를 맺었다.
그는 1927년에 광주에 들어가 이름을 대립이라고 고쳤으며 그해 9월에 시험을 쳐서 황포군관학교 제6기생으로 되였다. 북벌시기 국민혁명군 제1군 기병영 1련에 편입되였다. “4.12정변” 때 동학들중에 끼여있은 20여명의 공산당원을 적발한 공로로 장개석, 호종남(胡宗南) 등 국민당거물들의 높은 평가를 받아 기병영국민당당부 집행위원으로 선거된 그는 정보사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1928년에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상위(上尉)련락참모로 임명된 그는 정보사업을 주관했다. 1931년말에 장개석이 핍박에 의해 “한발작 물러났다가 다시 전진하려는 계책”으로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자 대립은 “련락조”를 조직하여 계속 장개석에게 충성했다. 1932년 1월에 장개석이 다시 남경으로 들어가 “중화복흥사(中华复兴社)”란 특무조직을 세우고 대립을 특무처장으로 임명했다. 대립은 장개석에게 “목숨을 다 바쳐 정의를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일하겠습니다”라고 표시했다. 대립은 선후로 저명한 진보인사 양전, 사량재와 애국명장 길홍창을 살해했다. 대립은 1935년에 남창항영조사과 과장으로 임명되였다. 후에 남창항영조사과가 군사위원회조사통계국과 합병되자 대립은 2처의 처장으로 되였다.
1936년 12월에 서안사변이 발생된후 대립은 송미령을 따라 장개석을 구하러 서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로부터 장개석의 심복으로 되여 장개석의 중용을 받았다. 1937년에 “소절행동위원회” 별동대 5개지대를 조직하고 자기저로 서기장 겸 총지휘를 맡았는데 후에 “충의구국군”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이듬해 대립은 군통국 부국장으로 임명되였다. 1939년초에 대립은 하영년(何永年)이라는 가명으로 향항으로 해서 하노이로 들어가 왕정위(汪精卫)암살을 지휘했다.
1942년에 대립은 미국 해군중장을 회견하고 정보사업을 상담했다. 다음해에 “중미특종기술합작소”를 세우고 미국 해군중장과 대립은 각각 정, 부 주임을 맡았다. 그들은 전국각지에서 특무활동에 종사하여 민주운동과 공산당조직을 파괴하고 수많은 진보인사들과 공산당원들을 살해했다.
대립은 출세한후 여러번이나 고향 강산현에 돌아간적이 있었다. 1937년말에 고향에 돌아갔을 때 강산현 현장 정종은 대립에게 자위대에 무기와 탄약을 배치해달라고 요구했다. 다음해 1월에 대립은 부하를 파견하여 50자루의 총과 1만발의 탄알을 가져다주었다. 1943년에 대립은 강산현에 중학교를 세우고 경비를 군통국에서 대주었으며 자신이 학교 리사장을 맡았다.
항일전쟁승리후 장개석은 대립에게 한간문제를 처리할 권력을 주었다. 1946년에 대립은 중국교통총국을 조직하여 원 군통무장조직인 “충의구국군”을 18개 교통총대로 확장했다. 그해 3월 17일에 대립은 청도에서 전용비행기를 타고 상해를 경과하여 남경으로 돌아오다가 비행기가 추락되여 남경부근의 판교진 대산에서 죽었다. 국민정부는 1946년 6월 11일에 명령을 발부하여 대립에게 륙군중장계급을 추증했다.
대립은 장개석이 가장 신임하는 유력한 장수였고 국민당군에서 생살대권을 틀어쥐고있었다. 그는 한번 말한 말은 다시 거두어들이는 법이 없었다. 그는 국민당군통국 국장을 맡은 8년동안 비밀명령을 내려 수많은 혁명동지들을 살해했다. 또 얼마나 많은 진보인사를 잔인하게 살해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대립은 죽을 때까지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가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은것은 장개석의 심리를 틀어쥐고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줌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더욱 굳건히 하려는데 있었다.
대립은 16살 때 학교에서 위생을 강조하고 진보를 제창하며 아편과 전족을 반대하는 “청년회”의 주석으로 되였다.
대립은 1914년에 결혼했는데 신부 모수총의 아버지 모응승은 현소재지에서 2~3킬로메터 떨어진 풍림진에 살고있는 지주였다. 1916년에 대립은 도적질하다가 붙잡혔는데 학교측에서는 그를 제명했다. 그 이듬해 대립의 아들 대장의가 출생했다. 그후 대립은 도박판에서 여러번이나 속임수를 쓰다가 붙잡혔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 대립은 항주로 도망쳐 참군했는데 반국강이 지휘하는 절강륙군1사(총부는 녕파에 있었음)에 들어갔다.
대립은 참군한 후에도 계속 도박을 놀면서 지방의 깡패들과 친했다. 지방깡패들은 그를 청방에 소개해주었다. 상급이 도박에 빠져 깡패들과 섭쓸리는 그를 징벌하려고 하자 그는 도주병으로 되였다.
1921년에 대립은 청방과의 관계를 리용하여 상해로 들어갔다. 항주에서 친했던 청방의 “스승”이 그를 당시 상해탄에서 가장 권세가 있는 청방의 거두 황금영을 소개해주었다. 대립은 이런 관계를 통해 류지륙, 장소림, 왕효뢰, 향해잠, 장자렴, 전득승, 풍석죽, 당소무, 석효선, 범소증이 세력을 휘두르던 시대에 상해깡패들과 친구로 되였다. 1923년에 대립은 늘 상해 소동문의 16포일대를 돌아다녔는데 그곳의 깡패들속에서 꽤 이름이 있었다.
대립은 31살 때 호종남부대의 정보사업을 주관했다. 대립은 자신의 미래 성과가 상해지하사회와 동맹관계를 건립하는데 달려있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대립은 당시의 상해경비구 사령 양호를 찾아갔다. 양호는 대립이 찾아온 뜻을 알고 “자네가 상해에서 정보사업을 하려면 한 사람과 관계를 잘 맺어야 하네”라고 알려주었다. 그 사람이 바로 두월생이였다. 명성이 높은 청방 거두 두월생은 젊은 대립이 “인재”라는것을 보아냈다. 후에 두월생, 양호, 대립은 결의형제를 맺었다.
대립의 일생에서 가장 좋은 친구는 호종남이였다. 대립은 호종남이 항주에 왔을 때 행운스럽게 만난후부터 중요한 동맹관계로 되였다.
대립이 출세하게 된 또 한번의 중요한 기회는 상해에서 장개석을 만난것이였다. 그들이 만난 구체적인 시간은 똑똑하지 않지만 가능하게 1921년이였을것이다. 당시 장개석은 대계도(戴季陶), 진과부 등 친구들과 함께 상해에서 주식무역시장을 경영하여 손중산을 위해 자금을 모으고있었다. 대립은 처음에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이런 혁명파들을 건달나부랭이로 알았다. 대계도는 자신과 같은 성을 가진 대립이 보통인물이 아님을 간파하고 그에 대한 태도를 고쳤다. 총명한 대립은 그들이 손중산이 파견한 광주의 특공일군들이란것을 추측하고 천방백계로 그들앞에서 자기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장개석은 대계도가 대립을 좋게 대하는것을 보고 대립에 대해 다른 눈으로 보게 되였다. 대립이 이미 대계도를 “아저씨”라고 부르는것을 보고 그에게 더욱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1938년 3월에 중경에서 국민당중앙위원회 림시전체대회가 열렸을 때 장개석은 대립을 중앙위원으로 확정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대립은 급히 달려가 장개석에게 “저는 국민당 당원도 아닌데 어떻게 중앙위원으로 될수 있겠습니까?”하고 보고했다. 장개석은 듣고 나서 매우 놀라면서 물었다.
“자네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이고 복흥사의 사원이며 또 나의 신변에서 여러해동안 일을 했는데 왜서 아직도 당원이 아닌가?”
대립은 차렷자세를 취하면서 대답했다.
“학생은 한마음 한뜻으로 교장님을 따르면서 먹고 입을게 모자란다든가 전도가 없다던가 입당을 한다든가 하는건 개의치 않습니다. 높은 직위와 많은 월급은 학생이 추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장개석은 매우 기뻐하면서 즉석에서 쪽지를 써주었다. 대립이 받아서 보니 쪽지에는 “장중정(장개석은 이름이 중정이고 자가 개석임)이 대립을 중국국민당당원으로 소개한다”는 몇글자가 씌여있었다. 대립은 급히 사양하면서 중앙위원으로 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장개석의 “무명학생”으로 살겠다고 맹세했다. 이어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교장께서 신임만 해시주면 학생은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1945년에 중경에서 국민당 6차대표대회를 열었을 때 장개석은 또 대립을 중앙위원의 자리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대립은 사절하면서 “교장께서 신임만 해주시면 당(党), 관(官) 두글자는 개의치 않습니다”라고 표시했다. 이에 장개석은 대립을 더욱 중시하고 극진히 관심했지만 한편으로 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것을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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