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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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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 개국황제 주원장
2014년 09월 27일 13시 06분  조회:7577  추천:1  작성자: 넉두리

명조 개국황제 주원장



 
 
미국 워싱톤대학교의 저명한 중국력사학자인 패트리셔 에브리는 “중국 력사상 한 개인이 력사에 큰 영향을 미친 례로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보다 더 두드러진 례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또 청나라의 학자 조익은 “명태조는 성현의 면모, 호걸의 기풍, 도둑의 성품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였다”고 말했다.
1328년에 호주(濠州)의 종리(钟离—지금의 안휘성 봉양현)에서 출생한 주원장은 도적과 같이 먹고 살아야 할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호걸처럼 살 기회를 잡음으로써 출세할수 있었고 마침내 몽골족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시킬수 있었다.
주원장은 본명이 주중팔(朱重八)이였는데 후에 흥종(兴宗)이라고 고쳤다. 소년시절에 주원장은 하루 한끼도 먹기 어려운 생활을 견디다못해 승려가 되기로 하고 황각사라는 절에 들어갔지만 절이라고 끼니가 충분할리 없었다. 두달만에 그는 탁발승이 되여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는데 거지와 다름없는 생활을 4년 남짓이 했다. 하지만 란세란 특별한 절망과 함께 특별한 희망도 주는법이다. 주원장은 25살 때 안휘성에서 봉기한 홍건군 두령 곽자흥(郭子兴)의 수하로 들어갔다. 그후 주원장의 숨은 재능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서 몇년 안되여 곽자흥군의 2인자위치까지 올라갔다. 곽자흥의 양녀인 마씨처녀와 혼인도 치렀는데 그녀는 후일에 지혜롭기로 유명한 마황후로서 주원장의 정치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주원장은 곽자흥이 죽은후 그 아들을 명목상 받들며 실질적인 두목노릇을 하며 세력을 키운 주원장은 1356년에 집경(지금의 남경)을 점령한후 그곳을 “응천부”로 개명하고 본거지로 삼았다. 이로써 주원장은 당시 홍건봉기군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3대세력(장사성, 진우량, 주원장)의 하나로 발돋움했다.
주원장은 원나라에서 천대받으며 묵묵히 학문에만 정진해온 강남의 선비들의 힘을 중시한 덕분에 천하쟁패의 싸움에서 최종적 승리자가 될수 있었다. 송렴, 유기, 장일, 섭침 이 “4대선생”을 비롯한 선비들은 주원장에게 명분을 뚜렷이 내세우고 민심을 잡으라는 조언을 했다. 주원장은 “절대로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라. 백성을 괴롭히는 자는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처단하겠다”는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북방오랑캐의 압제를 물리치고 중화를 회복한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주원장은 “당장 원나라조정과 맞싸울것이 아니라 우선 강남을 평정해야 한다”는 선비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10년이 넘도록 다른 홍건봉기군들의 북벌에는 동참하지 않고 오직 강남에서 세력을 늘이는데만 힘썼다. 그 사이에 원나라는 홍건봉기군을 격파했지만 지칠대로 지쳐서 주원장이 본격적으로 북벌에 나서자 막을 힘이 없었다.
그후 주원장은 진우량을 쳐서 승리를 거두었고 1367년에 강남을 평정하는데 성공했다. 주원장은 얼마후 소명왕 한림아가 죽자(주원장이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마침내 1368에 남경에서 황제의 보좌에 앉고 국호는 대명(大明), 년호는 홍무(洪武)라고 했다. 칭키스칸이 금나라를 격파하고 북경을 점령한지(1215년) 150여년만에 북경이 다시 한족의 땅이 된것이다.
“중화의 회복”은 단지 군사적, 정치적인것에 그쳐서는 안된다는것이 명태조가 된 주원장의 신념이였다. 그는 수백년동안 북방민족의 지배가 남긴 사회적, 문화적 영향을 말끔히 청소하려 했다. 그래서 먼저 한족고유의 옷차림과 머리모양을 하도록 했다. 또한 유교의 가르침을 장려하고 과거제를 실시해 사대부들이 다시 관료로서 국가를 경영하도록 했다. 그리고 국가가 나서서 개간과 둔전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리고 치수와 관개사업 역시 힘썼다. 이렇게 농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농업을 기반으로 국가를 운영하도록 했으며 상업은 최소한으로만 허용한다는 뜻에서 화페류통을 대부분 금지시키고 대외무역 역시 금지해 “한쪼각의 널빤지조차 바다에 띄우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명태조는 정부조직과 법령 역시 새롭게 바꾸었다. 승상제도를 페지하고 륙부를 황제에게 직속시켰으며 군사행정의 핵심인 대도독부를 다섯으로 나눈 다음 륙부와 마찬가지로 황제에게 직속되도록 해서 문무의 최고통치권을 한손에 거머쥐였다. 지방에는 아들들을 포함한 황족들을 왕으로 봉하여 두루 파견했다. 겉으로는 황족들을 각 행성에 파견했던 원나라와 비슷해 보였지만 명나라의 분봉왕들은 원나라때와는 달리 독자적인 행정권, 조세징수권을 일체 갖지 못했고 단지 그 지역의 군사지휘권만을 가졌다. 말하자면 아직 국가적 통합이 덜 된 변방을 잠시 군사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의미일뿐 사실상 모든 권력은 황제인 명태조에게 집중되여있었다.
명태조가 많은 업적을 이룩하고서도 후대의 평판이 별로 좋지 않은 까닭은 이처럼 독재체제를 구축하고는 그것이 조금이라도 훼손될가봐 두려워 끊임없이 피바람을 일으켰기때문이다. 1380년에 개국공신이던 승상 호유용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처형되였다. 명태조는 이를 승상제도페지의 핑게로 삼았는데 문제는 호유용의 역모라는것이 이렇다 할 증거가 전혀없이 고문에 의한 자백만으로 확정되였다는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련루되여 함께 처형된 사람이 무려 1만 5000명에 달했다는것이다. 이어서 1384년에는 역시 개국공신인 리문충이 독살당했고 그 다음해에는 강남평정과 북벌통일의 전쟁에서 둘도 없는 공헌을 했던 로장 서달이 독살되였다. 그리고 1390년에는 리선장 등 1만 5000명이 호유용의 역모에 련루된 혐의를 다시 받아 처형되였고 1393년에는 남옥이 호유용처럼 사실여부가 의심스러운 역모혐의를 받고 2만여명의 련루자들과 함께 처형되였다.
주원장에게 천하제패의 계책을 알려주었던 “4대선생” 역시 좋은 끝장을 보지 못했다. 유기는 락향해 있다가 독살되였고 송렴은 류배지에서 죽었다. 한마디로 명태조는 개국공신을 한사람도 살려두지 않았다. 공신뿐만아니라 조금이라도 권세를 가진 신하는 항상 의심의 대상이 되였다. 명태조는 검교라고 하는 첩보조직을 키워 그런 신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살펴보게 했다.
이처럼 공포와 불신만이 가득한 군신관계는 문제가 있다고 여긴 사람중에는 황태자인 주표(朱标)도 있었다. 그가 신하들을 의심하고 죽이는 일을 그만두라고 청하자 명태조는 가시가 잔뜩 박힌 막대기를 가져오게 해서 주표에게 집어보라고 했다. 주표가 “가시때문에 잡을수 없습니다”고 하자 명태조는 “그러면 내가 너를 위해 가시를 말끔히 잘라내주겠다. 지금 내가 하고있는 일이 바로 그런것이니라. 어째서 그뜻을 몰라주느냐?”라고 말했다. 사실 애써 세운 왕조가 강력한 공신들때문에 힘을 잃고 결국 멸망한 례는 중국력사에 흔했다. 명태조는 자신의 숙청에 왕조의 기반을 다진다는 정치적 의의를 찾고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신뿐만아니라 그 관계자들까지 수만명씩 살해하는 일은 아무래도 정당화될수 없었을것이다. 아울러 명태조는 “문자옥(文字狱)”이라는것까지 일으켰다. 누가 자신을 비웃는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고 불우했던 옛시절을 부끄러워했던 그는 상소문이나 공문서 등에 “광(光)”, “승(僧)”, “적(贼)”자가 들어가 있으면 그것을 쓴 사람을 가차없이 처형했다. “광”은 승려였던 자신의 깎은 머리를 련상시켰고 “승”은 승려를, “적”은 도적을 뜻하기때문이라는것이였다. 이런 터무니없는 “문자옥”은 갈수록 심해져서 “적(贼)”과 발음이 비슷한“칙(则)”, “도(盜)”와 발음이 같은“도(道)”, “승(僧)”과 발음이 같은 “생(生)”자 등이 계속 금기어가 되였을뿐만아니라 조금만 황제를 거스르는듯한 글을 쓰면 모두 처형장으로 보냈다. 법률자체도 엄해져서 그가 집대성해 반포한 대명률(大明律)은 과거의 법률에 비해 한층 엄격했으며 잔인한 처형방식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스물 여섯명의 아들과 열여덟명의 딸을 둔 명태조는 30년동안의 치세를 끝내고 1398년에 70세로 숨을 거두었다. 죽기직전에 그는 “짐은 그동안 모든것을 오직 혼자서 담당해왔다. 돌이켜보면 이는 너무 괴로운 일이니 다음대를 이을 사람은 좀 더 신하를 믿고 일해야 할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분명 북방민족의 천하를 중화의 천하로 바꿔놓았다. 그러나 애써 과거제를 부활시켜 지식인을 우대하는 세상을 만들었지만 그 지식인들은 형식화된 시험제도와 글 한글자를 잘못쓰면 목숨을 잃는 정치때문에 마음껏 기를 펴지 못하고 기회주의적인 소인배가 되여갔다. 그가 만든 세상에서 중국인들은 몽골인들에게 날때부터 차별을 받지 않고 자유로울수 있었지만 동시에 도처에서 사슬에 묶여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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