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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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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제 부의의 사랑이야기
2015년 01월 04일 09시 54분  조회:7420  추천:3  작성자: 넉두리

마지막 황제 부의의 사랑이야기

 
(번역)




 
 
아이신줴러 부의(爱新觉罗·溥仪)는 중국력사상의 마지막 황제였다. 부의는 광서 32년(1906년) 1월 14일에 순왕부(醇王府)에서 출생했다. 부의는 도광황제의 증손이며 광서황제의 친동생 재풍(载沣)의 장자였다.
1908년 10월에 자희태후와 광서황제는 동시에 중병에 걸렸다. 자희태후는 중남해에서 군기대신들을 불러놓고 후사를 상의했다. 광서황제에게 후대가 없었고 청나라의 내외정세가 혼란에 빠져있었기때문에 군기대신들은 나이가 든 사람을 황위에 올려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자희태후는 대노했다. 결국 3살인 부의를 황위에 올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후 광서황제와 자희태후는 이틀을 사이두고 사망되였다. 15일후에 부의는 태화전에서 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광서황제의 황후 륭유와 재풍이 섭정했다. 이듬해 년호를 선통(宣统)이라고 고쳤다. 선통 3년(1911년)에 신해혁명이 폭발했고 이듬해 2월 12일에 륭유태후는 핍박에 의해 “퇴위조서”를 내렸다.
그후 부의는 1934년부터 1945년 일본이 투항하기까지 위만주국황제로 되였는데 년호를 강덕(康德)이라고 했다.
황제로부터 백성으로 되기까지 부의의 인생은 전기적 색채를 띠였다. 그의 혼인 또한 매우 복잡하고 곡절적이였다. 그는 일생에서 선후로 1명의 황후, 1명의 황비, 두명의 귀인과 1명의 안해를 맞았는데 두번 리혼했고 두번 상처했으며 자녀가 없었다.
그러면 5명의 녀인과의 혼인생활은 어떠했을가? 매 녀인이 그에게 끼친 영향은 어떠했으며 그가 매 녀인에게 어떠한 생활을 가져다주었을가? 최근에 위만주국황궁박물관의 연구원이며 길림성민속학회 부리사장인 심연은 장춘도서관에서 광대한 독자들에게 말대황제 부의의 혼인생활과 애정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의의 운명중 행운과 비애는 늘 부동한 배경하에 재현하군 했다. 그는 일생에서 3번 제위에 올랐다. 부의와 완용의 혼인은 행복으로 시작되였다가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부의와 완용의 혼인은 24년동안 지속되면서 중국사회의 가장 혼란스러운 년대를 경험했다. 부의는 황궁에서 쫓겨나고 피해다니고 괴뢰황제로 되는 굴곡적인 길을 걸었다. 부의와 완용 개인의 전도와 운명은 국가의 전도와 운명과 긴밀히 련결되여있었다. 1922년에 17살의 부의는 왕공대신들과 상의하여 내무부 대신 영원의 딸 완용(婉容)을 황후로 책봉했다.
17세에 황후가 된 완용은 시체를 따르는데다가 재능이 있고 다정하여 부의에게 새로운 생활을 가져다주었다. 완용은 늘 부의에게 영어를 배워주었고 서양음식에 대해 알려주었다. 부의는 완용에게 엘리자베스(伊丽莎白)란 영문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황궁에서 살아온 부의는 완용의 덕에 서양문화를 접수하게 되였고 사랑과 활력을 감수했다. 하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완용과 부의의 관계가 파렬된 주요원인은 그들의 정치견해가 달랐기때문이다. 완용은 정치리상과 포부가 있는 녀인이였다. 그녀는 줄곧 부의를 도와 “복벽대업”을 완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9.18”사변후 부의가 일본인의 품에 안기자 완용은 부의가 일본인의 괴뢰황제가 되는것을 극력 반대했다. 이에 부의는 완용을 자신이 복벽의 꿈을 실현하려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인정하면서 몹시 미워했다.
괴뢰황제의 황후가 되는것을 원하지 않았던 완용은 두번이나 “황궁”에서 도망치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완용은 초조하고 불안해하면서 화를 잘 냈다. 그러다가 아편인이 박혔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그녀는 임신하게 되였다. 그후 29세일 때 완용은 부의에 의해 랭궁(冷宫)에 들어가게 되였다. 완용은 40세에 사망될 때까지 랭궁에서 살았다. 부의와 완용의 혼인비극은 그들의 운명처럼 력사의 희생품과 식민통치의 희생품으로 되였다.
1922년 11월 30일에 13세의 문수(文绣)는 숙비(淑妃)로 책봉되여 황후인 완용보다 하루 먼저 황궁에 들어가 부의와 혼레식을 치루었다. 그러나 문수는 황비로서의 즐거움과 행복을 얻지 못했다. 이 혼인은 그녀의 비극적인 인생의 시작으로 되였다. 서양의 교육을 받은 황후 완용은 1부1처제를 견결히 주장하면서 천진에 있는 7년동안에 늘 문수와 다투었다. 문수는 완용만 감싸주는 부의에게 몹시 실망했다. 불평등한 대우를 참을수 없었던 문수는 1931년 가을에 부의와 리혼하기로 결정하고 법에 리혼소송을 걸었다. 이 황제와의 리혼풍파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중국력사상에서 황제가 리혼하는 일은 처음이였다.
1937년에 완용이 랭궁으로 쫓겨난후 부의는 완용에게 보복하기 위해 당시 북경중학교에서 공부하고있던 녀학생 담옥령을 “상귀인(祥贵人)”으로 맞아들였다. 17살의 담옥령은 홀로 장춘으로 와서 부의와 결혼했다. 담옥령은 젊고 예쁜데다가 온화하고 현숙하여 주위사람들과의 사이가 매우 좋았다. 입궁후 그녀는 부의와의 관계도 매우 좋아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담옥령은 북경에서 공부할 때 진보사상의 교육을 받았고 기차에 앉아 동북으로 오면서 일본군의 침략폭행을 목격했기때문에 부의의 처지를 리해할수 있었다. 부의에게 담옥령은 한줄기의 따뜻한 해빛과도 같았기때문에 그녀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다. 하지만 홍안박명이라고 담옥령은 부의와 결혼한지 5년만에 22살의 나이로 병으로 사망되였다. 담옥령이 병으로 앓는 기간에 부의는 줄곧 곁에서 보살펴주었다. 담옥령의 사망은 부의에게 매우 큰 타격을 주었다. 담옥령을 기념하기 위해 부의는 명령을 내려 담옥령에게 “명현귀비”라는 시호를 내려 청왕조 귀비의 신분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담옥령이 사망된후 부의는 죽을 때까지 그녀의 사진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 사진의 뒤면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옥령”이라고 씌여져있었다.
담옥령(谭玉龄)이 죽은후 일본관동군은 부의를 통제하기 위해 부의에게 일본녀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이라고 했다. 비록 부의는 괴뢰황제였지만 혼인문제에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생활이 일본인의 감시를 받는것이 두려웠기때문에 일본녀자를 부인으로 맞지 않겠다고 강하게 나섰다. 결국 부의는 위만주국의 녀학생 리옥금(李玉琴)을 “복귀인(福贵人)”으로 맞아들였다.
리옥금은 출신이 가난했고 나이가 어렸기때문에 입궁후 멸시를 받았다. 부의는 “21조”를 제정하여 리옥금에게 반드시 청왕조의 례법을 지키고 사상상에서 자신에게 절대 복종하도록 얽매여놓았다. 그리하여 리옥금은 황궁에서 평등과 자유가 없이 부의의 놀이개로만 살아야 했다. 1945년 8월에 일본의 투항과 함께 위만주국이 해체되자 리옥금은 부의를 따라 위만주국의 황궁에서 나와 통화 대률자로 갔다. 새중국이 성립된후 리옥금은 정부의 도움을 받아 장춘도서관에서 사업했다. 1955년에 리옥금은 무순에서 부의를 만났을 때 리혼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일본이 투항한후 부의는 일본군과 함께 도꾜로 도망치려다가 공항에서 구쏘련군에게 붙잡혔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후 모택동은 부의를 사면해주었다.
부의는 특별사면을 받은후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였다. 1960년 3월에 부의는 보통공민의 신분으로 난생처음 북경식물원의 원예사직업을 얻었다. 1962년에 부의는 북경관상병원의 간호원 리숙현(李淑贤)과 결혼했다. 그는 보통백성으로서의 진정한 가정이 있게 된것이다. 결혼후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 사랑하여 떨어져서는 살수 없는 사이가 되였다.
어느날에 부의는 리숙현을 껴안고 “이전에 내가 황궁에 있을 때는 근본 부부지간에 응당 있어야 할 관심과 사랑에 대해 모르고있었소. 황후나 황비는 나의 노리개일뿐이였소. 기분이 좋으면 같이 자고 기분이 나쁘면 외면하였소. 당신을 만나기전에 나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몰랐소. 당신을 만나서야 나는 인간세상에 이렇게 달콤한 남녀간의 사랑이 존재한다는것을 깨닫게 되였소”라고 말했다. 부의는 말과 같이 안해 리숙현을 끔찍히 사랑했다. 1963년 여름의 어느날이였다. 그날은 폭우가 많이 내려 공공교통이 저애를 받았다. 그날에 부의는 퇴근하여 안해가 돌아오지 않자 급히 우산을 찾아들고 안해의 마중을 나갔다. 반나절이나 기다려도 리숙현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그는 도로의 하수도덮개가 열려있는것을 발견했다. 그는 혹시 안해가 오다가 하수도에 빠질가봐 하수도앞에서 안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부의와 리숙현은 5년동안 행복한 부부생활을 했다. 부의가 사망될 때까지.
부의가 1967년 10월 17일 새벽 2시 30분에 사망된후 골회는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1980년 5월 29일은 부의가 사망된지 13돐이 되는 날이였다. 그날 당과 정부에서는 부의를 위해 추도회를 거행했다. 1995년 1월 26일에 부의의 골회함은 청서릉내의 숭릉(광서릉)부근의 화룡황가릉원에 매장했다. 이는 리숙현이 직접 처리한것이다. 부의가 사망되여 30년이 지난후인 1997년 6월 9일에 리숙현은 페암으로 사망되였다. 향년 7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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