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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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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회 5월의 혈전
2014년 03월 25일 16시 58분  조회:5230  추천:0  작성자: 김성룡

웅위한 태항산맥의 한부분인 하북성 섭현 석문촌의 련화산은 그 아름다운 자태를 세인들에게 자랑하고 있다. 하늘높이 치솟은 높은 봉이 련꽃잎처럼 펼쳐졌다하여 련화산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이 산 기슭에는 항일전쟁시기 희생된 중국공산당의 최고급 장령인 좌권과 조선의용대의 우수한 간부였던 진광화, 윤세주가 묻혔던 묘소가 있다.

태항산, 섭현 석문촌 련화산의 윤세주, 진광화 렬사 묘소

렬사들에게 꽃묶음을 전하려 가는 고 최룡수 교수(중앙당학교)

석문촌 련화산기슭에 지은 조선의용군 렬사기념관

렬사묘소를 찾은 연변과 장춘의 중앙방송 애청자분들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사람들은 이곳을 잊지 않고 있다. 해마다 청명이면 마을사람들과 학생들이 이곳에 찾아와 렬사들을 기리고 있다. 렬사들의 유골은 해방후 하북성 한단시의 진기로예 렬사릉원으로 이장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마냥 이곳에 찾아와 렬사들의 공적을 기리고 항일전쟁시기 가장 처절했던 5월의 반포위토벌 전투를 회억하군 하였다.

최근년간에는 현지정부에서 조선의용군 기념관까지 세워놓았다. 그리하여 조선투사 진광화와 윤세주를 기리는 수많은 관련학자와 유가족이 자주 이곳을 찾아오기도 한다.

 

(권립교수) “1942년 6월에 있은 마전포위망 돌파전투는 보다 더 치렬했습니다. 1942년 5월에 일제는 수만명의 병력으로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이른바 5월 대소탕을 진행했습니다.”

 

1942년 5월 화북의 일본군 주력은 팔로군 태항산 근거지에 대한 대규모 소탕을 전개하였다. 팔로군의 백퇀대전에서 참패를 본 일본군은 항일근거지를 공격하여 후환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중국을 정복하려는 저들의 야망을 실현할수없다고 판단하였던것이다.

일본군 선두부대는 중국인 옷과 팔로군의 회색군복을 입고 근거지에 진입하였기때문에 백성들도 일본군이 근거지에 접근한것을 미처 모르고있었다. 교활한 적은 선진적인 정보기술로 전화와 전보가 비교적 집중된 팔로군 전방사령부의 위치를 파악했던것이다. 5월 22일, 일본군 41사단 주력이 료현(遼縣 지금의 좌권현)을 포위하였다.

팔로군 전방사령부 사령 팽덕회와 참모장 좌권, 정치부 주임 라서경(羅瑞卿)은 신속히 주력부대를 적의 포위권 밖으로 전이시켰다. 그러나 지휘부는 미처 전이하지 못한 상황에서 포위해 오는 적과 격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팔로군 사령부와 북방국, 당학교, 신화일보사, 조선의용대를 비롯한 기관일군 수천명이 마전(麻田) 부근의 남애포(南艾鋪)에서 수만 일본 정규군의 포위에 들었다.

이때 태항산에 모인 조선의용대 주력은 팔로군 전방사령부와 함께 있었다. 초기 소분대로 나뉘여 화북각지에 파견되였던 조선의용대는 형대전투를 비롯한 수차의 전투를 겪었다. 비록 많은 전과를 올렸지만 희생도 있었다.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은 잘 훈련되고 자질이 높은 조선의용대의 대원들을 아끼려는 목적으로 이들을 일선전투에 투입시키지 않고 후방에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침략군이 감쪽같이 팔로군 전방사령부를 포위하자 모두가 전투에 뛰여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팽덕회와 좌권은 분산돌파를 계획하고 좌권이 후위를 맡았다. 정치부 산하에 있던 조선의용대는 라서경주임의 지휘를 받으며 포위돌파를 시도하였다. 헤아릴 수 없는 적이 산기슭으로부터 공격해왔다. 라서경주임은 경위부대를 거느리고 적을 저격했지만 병력이 부족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 박효삼 대장이 자진하여 전투임무를 요청했다. 팔로군의 전투부대는 경위를 맡은 한 개 패와 조선의용대 백여명뿐이였기 때문에 라서경주임은 할수없이 조선의용대를 전투에 투임시킬 수밖에 없었다.

(권립교수)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팔로군 총정치부 주임 라서경동지가 령을 내렸습니다. ‘경위패는 서쪽 고지를 점령하고 비무장대오가 이전하도록 엄호하라, 조선의용대는 동쪽고지를 탈취하고 엄호하라!’ 우리 의용대는 박효삼의 지휘하에 비처럼 쏟아지는 일본군의 총탄을 헤치며 동산을 점령하고 하루종일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리하여 기관관부와 가족들이 안전하게 이전하게 했습니다.”

 

사령부 수십명 경위원들이 서쪽 고지에서 적을 저격하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박효삼 대장은 대원들을 이끌고 동쪽 고지에서 적을 저격하였다. 이들이 필사적으로 적을 막고 싸울 때 비전투원들은 신속히 포위권을 뚫고 나갔다. 적은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이동하고있는 비전투원들을 폭격하였다. 전투에서 부근 십자령(十字嶺)에서 진행된 치렬한 전투에서 팔로군 부총참모장 좌권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엄호를 맡고 혈전하던 조선의용대는 밤 장막을 타서 무사히 포위권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일부 대원들이 흩어졌다. 조선의용대 주요간부였던 진광화와 윤세주는 일부 녀성대원을 거느리고 화옥산을 빠져나가려 하였다.

27일 새벽 산속을 빠져나오던 이들은 적에게 발각 되였다. 윤세주와 진광화, 최채는 녀성대원들을 엄호하기 위해 적을 유인하기로 결정하였다. 적을 유인하여 산 아래로 달리던 진광화는 벼랑가에 몰렸다. 그는 적탄을 맞고 벼랑으로 떨어져 장렬히 희생되였다. 산허리로 달리던 윤세주도 적탄을 맞고 중상을 입었고 산우로 달린 최채는 동굴에 숨어서 무사할수있었다. 적이 떠나간 다음 최채는 비통한 심정을 달래며 진광화와 윤세주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윤세주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으로 희생되였던것이다.

 

(권립교수) “이번 전투에서 의용대 용사 10여명이 보귀한 생명을 바치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그중에는 의용대 정치위원 진광화와 <최후의 결전> 노래를 작사한 석정도 있었습니다. 석정은 중상을 입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숨지게 됐고 진광화는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절벽에서 뛰여내려 희생됐습니다.”

 

5월 반소탕전이 끝난후 태항산 군민은 렬사들을 위해 성대한 장례를 치렀다. 수천명 군민들이 장례식에 참가하여 렬사의 영령을 바래주었다.
조선의용대의 우수한 간부였던 진광화와 윤세주는 좌권장군 묘소 부근에 안장되였다. 전투에서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희생되였다는 보고를 접한 중공중앙 북방국과 팔로군 야전사령부 정치부에서는 조선렬사들을 기념할데 관한 규정을 내왔다.

(권립교수)“이 전투가 있은후 중공중앙과 팔로군에서는 조선의용군에 대해 큰 중시를 돌리게 되었습니다. 1942년 7월에 중공중앙 북방국과 팔로군 야전사령부 정치부에서는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사적을 각 근거지 학교 교과서와 팔로군 각 부대 전사독본에 수록하기로 했습니다. 1942년 8월에 팔로군 총부와 태항구 당위에서는 결의문을 내여 진광화, 석정 등 조선의용군 영웅들을 따라배울 것을 전당, 전군에 호소했습니다. 1942년 9월 24일에 주덕, 엽검영은 신화일보에 글을 실어 조선의용대 용사들을 추모함과 동시에 그들을 따라배울 것을 전군에 호소했습니다. 연안에서 의용군전사 추모회가 성대히 열렸습니다. 주덕이 추모연설을 했습니다. 10월 10일 태항산 근거지 섭현에서 규모가 큰 추도식이 있었습니다. 129사 사장 류백승과 라서경이 참가했고 주덕, 엽검영이 대련을 썼습니다. 그리고 진광화와 석정의 시신을 좌권동지의 무덤근처에 모셨습니다.”

중공중앙 북방국과 팔로군 야전사령부 정치부의 규정에 따라 9월 18일 태항산 지구에서 조선의용대 렬사들을 위한 성대한 장례를 치르고 기타 지구에서는 렬사들의 사적보고회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조선의용대 렬사들을 따라 배울것을 군민들에게 호소하고 렬사의 사적을 교과서로, 전사들의 독본(讀本)으로 만들어 널리 선전하였다.

태항산 진기로예 변구 정부는 상급의 지시에 따라 섭현 석문촌에 항일전쟁 순국렬사 릉원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좌권장군과 조선의용군 진광화, 윤세주 렬사의 유체는 릉원에 이장되였다. 릉원은 청장하 기슭 태항산의 풍수가 좋은 곳으로 선정하였다.

혁명성지 연안 각계 대표들도 희생된 조선렬사들을 위한 추도회를 가졌다.

팔로군 주덕총사령과 팽덕회부총사령은 신화일보에 조선렬사를 추모하는 글을 실었다. 주덕총사령은 자유를 위해 싸운 전사들의 생명은 영원할것이며 그들의 전투정신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항쟁하는 중국과 조선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것이라고 썼다.

팽덕회부총사령은 중국과 조선 두민족은 렬사의 감화를 받아 계속 어깨겪고 싸울것이며 일본제국주의를 전승하고 두 민족의 해방을 이룩할것이라고 썼다.

팽덕회부총사령은 또 조선의용대에 경기관총 한정을 선물하였다. 기관총대에는 《공동한 리상을 위하여 우리는 영원히 함께 싸운다》라는 글이 새겨져있었다.

해방후 한단에 진기로예 렬사릉원이 축조되자 좌권과 진광화, 윤세주의 묘소를 이장해 갔다.

 

한국의 윤세주 유가족에게 5월혈전을 설명하시는 고 최채 선생(2005년 봄)

조선의용군 렬사기념관의 전시사진

조선의용군 렬사기념관의 진광화와 윤세주 사적 소개

 

 

사람들은 반포위토벌 전투가 있었던 혈전의 5월을 잊지 않고있다. 혈전에서 희생된 렬사들은 영원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간직되여있다. 조선의용대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의 장렬한 죽음과 굴하지 않는 항쟁의 정신은 영원히 중국과 조선 두 민족 인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 묘소 사이에는 조선의용대 출신이였던 관건의 골회가 묻혀있다. 1984년에 조선의용대 출신인 간부들이 섭현을 고찰할 때 관건의 골회를 가져다 이곳에 묻었다고 리사화로인이 알려주었다. 관건은 태항산에서 싸우던 그 뜻깊은 나날을 죽어서도 잊지 못할것이라고 하면서 죽은 다음 진광화와 윤세주가 묻힌 곳에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관건의 원명은 황재연(黃載然)이다. 1910년, 길림성 쌍양현의 빈곤한 농민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하였다. 할아버지에게서 글을 조금 배웠던 그는 1934년에 혁명의 길을 찾아 관내로 들어갔다. 관건은 의렬단 단원 황병춘의 소개로 남경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2기에 입학하였고 또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그후 중국중앙륙군학교 강릉분교를 졸업하고 무한에서 조선의용대 제1대에 편입되였다. 1941년, 관건은 기타 대원들과 함께 락약을 거쳐 태항산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는 리익성이 거느린 제1대와 함께 안양(安陽)부근에서 선전활동을 하였고 그후 화북독립동맹 태악분맹(太岳分盟)사업을 맡아보았다. 태항산에서 관건은 조선청년련합회 간부로 사업하면서 진광화, 윤세주와 두터운 정을 쌓았다. 항일전쟁후 그는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여 동북전장에서 싸웠으며 장춘해방전쟁에 참가하였다.

해방후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조선의용군 출신인 혁명가들로 전지고찰단(戰地考察團)을 조직하였다. 고찰단은 1984년 5월 13일부터 15일 오후까지 섭현 경내에서 항일유적지를 답사하였다. 연변 총공회(總工會) 고문으로 계셨던 윤재덕선생과 작가활동을 하시던 정길운선생이 단장과 부단장을 맡은 고찰단은 이미 작고한 관건의 유골을 지니고 왔던것이다. 그들은 조선의용대의 훌륭한 지도자였고 전우였던 윤세주와 진광화 묘소 가운데 자리를 선택해 관건의 유골을 묻었다.

련화산 기슭 해빛 찬연한 언덕에서 리사회로인은 가렬처절했던 5월의 혈전을 이야기했고 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된 조선의용대의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관건의 골회를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묘소 사이에 이장한 경위를 설명해주었다.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의 유골은 1950년 가을 한단렬사릉원이 축조된후 좌권장군의 유골과 함께 그쪽으로 이장해갔다. 그러나 섭현 석문촌 련화산기슭의 묘소와 묘비는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는 해빛 찬연한 언덕에 고이 잠든 영령을 추모하였다. 푸르른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기만 하고 이따금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왔다. 아득히 먼 저 하늘 나라에서 자랑찬 우리민족의 영령이 미소짓는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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