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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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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회 혁명성지 연안
2015년 01월 13일 16시 00분  조회:5039  추천:1  작성자: 김성룡

황하를 건너자 우리의 몸은 산서성을 떠나 이미 섬서성 경내에 와 있었다.

강 기슭 넓은 모래톱에서 우리는 멀리 벼랑가를 에돌아 황하에 흘러드는 무정하를 보았다. 강은 크지 않았지만 물살이 급했다. 바로 그곳에서 홍군선견대가 도하훈련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씩씩한 홍군전사들이 멸적의 기세로 총칼을 굳게 잡은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바람소리와 물소리만 들려올뿐이였다.

섬서성 청간현 하구촌은 황하와 무정하의 합수목에 위치한 작은 산간 마을이였다.

나루터에서 둔덕을 따라 마을에 올라오니 20여 세대가 오붓하게 살고있었다. 농가 마당에는 대추를 말리고 있었고 이따금 집을 나서던 사람들이 호기심 많은 눈길로 우리들을 지켜보군 하였다.

석루현 하가와촌에서 련락을 주었기때문에 마을 촌주임이 나루터에 나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우리는 추(鄒)씨 성을 가진 한 농가에서 물을 얻어 마시면서 잠시 쉬였다. 촌주임은 차는 준비했지만 네 사람이 탈수 없을것 같다고 하였다. 그는, 현성에서 온 승용차 한 대가 있는데 현성으로 가려다가 기자들이 온다기에 함께 가려고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내외간이 승용차를 몰기때문에 세 사람 밖에 더 싣지 못한다고 하였다.

답사팀 일행은 넷이여서 곤난하게 되었다. 마을에는 청간현 소재지로 가는 려객 뻐스 한 대가 있다지만 저녁에 출발하여 이튿날 아침에야 도착한다고하였다. 장밤 뻐스에 시달려야하거니와 옹근 하루시간을 랑비할 것 같았다. 우리는 저녁엔 반드시 연안에 들어서야 했다.

우리가 호기로 확정하였던 《서정》계획은 황하를 건넌후 더욱 큰 어려움에 봉착했던것이다. 여럿이 론의끝에 승용차에 그냥 비집고 가기로 하였다. 촌주임이 밖으로 나가더니 이윽고 승용차 한 대가 왔다. 상해에서 독일의 제조기술을 류치해 제조한 산타나(Santana)승용차였다. 차체가 비교적 널찍하였기때문에 우리는 네 사람이 모두 뒷좌석에 비집고 앉기로 하였다.

오후 3시쯤 차는 하구촌을 빠져나와 청간현 소재지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곳 지형은 황하 동안의 려량산구 보다는 험하지 않았다. 역시 울퉁불퉁한 흙 길에 크고 작은 구덩이도 많았지만 가파르지는 않았다. 셋이 앉는 뒷좌석에 대 남자 넷이 비집고 앉다보니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길이 엉망이여서 차가 몹시 흔들렸기때문에 더욱 불편하였다.

젊은 차 주인은 부인과 함께 하구촌 마을의 부모님을 보고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런대로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불편함을 잊으려 애썼다. 두시간 정도 달려서 앞에 아스팔트 포장길이 나타났다. 우리는 저도 몰래 환성을 터치면서 차를 세웠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저려나는 팔다리를 쭉 펴고 저마다 담배 한 대씩 피웠다. 담배를 끊었던 최룡수 교수마저도 담배를 한대 붙이면서 젊은 사람과 함께 다니니 혈기가 솟는다고 하였다. 그는 지금처럼 “혁명적 락관주의 정신”을 발휘한다면 극복 못할 곤난이 없다며 우리의 “서정”도 홍군의 동정 정신을 따라배우는것이라고 말했다.

하루나루 나룻배에서 바라본 섬서성 청간현 하구촌

섬북의 민가들

담배쉼을 하고있는 취재팀(오른쪽으로부터 최룡수 교수, 서봉학 주임, 김성룡 기자, 박군 기자)

섬북에 도착한 로농홍군(동정을 앞두고 활영한 력사사진)
 

우리는 다시 차에 비집고 앉아 현성으로 달렸다. 한시간 정도 달려 현 소재지에 들어서니 날이 어둡기 시작하였다. 청간현 소재지에서 택시를 바꾸어 타고 우리는 편히 연안으로 가게 되였다. 연안은 현 소재지에서 92킬로메터 떨어져 있었다. 차는 평탄한 아스팔트길과 고속도로를 달렸기때문에 불편하지 않았다. 석루현으로부터 하가와촌, 다시 하구촌으로부터 청간현까지 오던 일을 생각하면 그냥 “신선 놀음”이나 다름없었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여 우리는 저도 모르게 피곤한 눈을 붙이고 잠들어 버렸다.

긴 려행을 마치고 불빛 휘황한 연안시에 들어선것은 저녁 8시였다. 우리는 전력대주점(電力大酒店)에 자리를 정하고 밤거리에 나가 저녁식사를 하였다. 

10월 28일 아침 6시에 일찍 일어나 우리는 유명한 보탑산(寶塔山)에 가 보았다.

섬서 북부의 중심지에 위치한 연안은 고대에는 부시(膚施)라고 불렀다. 연하(延河)와 남천하(南川河)가 이곳에서 합치고 보탑산, 봉황산(鳳凰山), 청량산(淸凉山)이 둘러있어 연안은 예로부터 전략적 지위가 매우 중요하였다.

연안이라는 지명은 기원 607년 수조가 이곳에 연안군(延安郡)을 설치하면서 가진 이름이다. 1400여년간 섬북의 정치와 경제, 문화, 군사 중심이였던 연안은 중화민족의 발상지의 하나이다.

연안은 또한 중국혁명의 성지이다. 장정을 마친 중국공산당 중앙과 홍군은 이곳에 혁명의 씨앗을 뿌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의 승리를 이룩해냈다.

지금 연안에는 32만 인구가 살고 있다. 즐비한 고층건물과 널찍한 거리는 도시의 현대적인 분위기를 짙게 보여준다. 최근년간 연안시는 혁명유적지들을 보수하고 기념관을 세움으로써 혁명관광을 적극 확보하고 있다. 특정된 시기에 혁명 전통교양을 받으며 성장했던 중국인들은 지금 생활이 유족해지자 어려서부터 동경하였던 혁명관광을 많이 선호하면서 연안관광을 최선으로 꼽고있다.

길에 나서니 멀리 보탑산과 바른편의 청량산이 보였다.

많은 중국인의 무한한 동경을 자아냈던 보탑산은 연안의 상징이다. 사진이나 영화, 텔레비죤 방송에서 연안이라면 늘 산언덕에 높이 솟은 보탑산과 그 앞을 흐르는 연하가 나오군 하였던것이다. 산에는 적성루(摘星樓)와 가령서원(嘉嶺書院), 봉화대(烽火臺), 마애석각(摩崖石刻)을 비롯한 고적이 있다. 산의 원명은 가령산(嘉嶺山)이였는데 보탑이 있기때문에 보탑산이라고도 한다. 당조시기에 벌써 보탑이 축조되였지만 수차 파괴를 받아 지금 볼 수 있는 탑은 명조시기 복원한 건물이다. 높이가 44m인 팔각 보탑은 모두 9층으로 되였다. 루각식 벽돌 건물이기때문에 탑안의 나무 계단을 따라 탑에 오를 수 있다. 그리고 탑 우에서 창으로 내다보면 연안시의 전경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항일전쟁시기 전국 각지의 수많은 열혈 청년들이 혁명의 성지 연안을 동경하였다. 그들은 연하 기슭에 우뚝 솟은 보탑산과 보탑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혁명의 길에 나섰고 갖은 어려움을 이기며 연안에 찾아오기도 하였다. 조선혁명가이며 저명한 음악가인 정률성도 그 속의 한 사람이였다.

 

정률성(1918-1976)은 1918년 8월 13일, 조선 전라남도 광주시 양림동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명은 부은(富恩)이였다. 천성으로 맑은 목청과 예민한 청각을 가진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무척 즐겼다. 음악 선률에 많이 민감하였던 그는 음악으로 성공할 큰 뜻을 품고 사립 신흥중학교를 다닐 때 률성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던 정률성의 맏형 정효룡(鄭孝龍)과 둘째 형 정충룡(鄭忠龙)은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혁명투쟁을 계속하였다. 정효룡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여 옥중에서 일제의 갖은 혹형을 받다가 1934년에 병사하였다. 국민혁명군 중좌 참모였던 정충룡은 중국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대혁명시기에 희생되였다. 그리고 그의 셋째형인 정의은(鄭義恩)도 의렬단 단원이였다. 이처럼 형들로부터 애국사상과 혁명사상의 영향을 받은 정률성은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왔다. 

 

(권립교수) “정률성은 1933년에 남경에 가서 김약산이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다니면서 지하활동도 하고 피아노도 배웟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음악가 신성해를 알게 되였습니다.”

 

1933년 중국에 온 정률성은 상해를 거쳐 남경에 가서 의렬단이 국민당정부의 도움을 받아 운영한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그는 남경, 상해에서 음악을 배웠고 1935년에 남경의 진보적 문화단체인 《5월문예사(五月文藝社)》에 참가하여 리사로 활동하였다. 문예사 고문이며 간행물 《격류(激流)》의 주필이였던 라청(羅靑)은 중국의 유명한 민주인사이다. 그는 조선혁명가 김규광, 박건웅, 김산, 정률성과 아주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라청의 회억에 의하면 그때 정률성은 김규광, 박건웅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과 사귀게 되였고 김규광의 부인인 두군혜는 그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다. 이시기 정률성의 누이 정봉은(鄭奉恩)은 조선혁명가 박건웅과 결혼하였다. 로숙한 이들 혁명가들의 영향으로 정률성은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하고 반일투쟁 리론을 알게 되였다.

1937년 정률성은 라청을 찾아갔다가 중국의 저명한 음악가 선성해(冼星海)를 알게 되였다. 연안시기 유명한 《황하대합창(黃河大合唱)》으로 명성을 떨친 선성해는 음악적 천부를 가진 정률성을 무척 좋아하였고 두 사람은 깊이 있게 예술을 담론하였고 혁명을 이야기하였다.

《7.7사변》이 일어나자 정률성은 상해에서 대공전지복무단(大公戰地服務團) 선전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음악과 노래를 통해 항일구국 선전활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부상병들을 위문하였다. 상해가 함락된 후 그는 다시 남경에 왔다. 그는 항일의 제일선에 나가 싸울 결의를 다지고 연안에 가려고 했다. 

 

(권립교수) “1937년 지하당조직에서는 정률성을 연안으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섬북공학에서 공부하다가 1938년 로신예술학원이 서자 그곳에서 공부하는 한편 불멸의 연안송을 창작했습니다.” 



중국로농홍군 4개 방면군이 승리적으로 섬북에서 회사

연안의 청량산

연안의 보탑산 

1937년 겨울 정률성은 남경, 상해지역의 진보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연안에 오게 되였다. 항일구국 운동의 지도자였던 중국인 리공박(李公仆)과 두군혜는 그를 지하당 조직에 소개하였고 려비를 마련해 주었다. 정률성은 소개신을 가지고 서안 팔로군 판사처의 림백거를 찾아가 연안으로 오게 되였던것이다. 그는 수많은 열혈청년들과 함께 첩첩한 적의 봉쇄를 뚫고 도보로 혁명의 성지 연안에 와서 섬북공학(陝北公學) 제1기 7대에 배치 받아 공부하였다.
섬북공학 예술훈련반(藝術訓練班)에 몸을 담은 정률성은 늘 대중 가창활동에 참가하여 노래를 부르고 또 천여명 대중들을 모아 놓고 노래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일요일이면 그는 거리나 밭에 나가 사람들에게 노래를 연주해 주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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