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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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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회 석루현 홍군동정기념관 (상편)
2014년 07월 14일 15시 02분  조회:5681  추천:1  작성자: 김성룡

조선민족의 자랑찬 아들이며 중국공산당의 훌륭한 고위 군사간부였던 양림은 1935년 10월에 홍군 주력부대와 함께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하였다. 홍군간부퇀 참모장으로 장정에 참가한 양림은 전사들과 함께 수많은 전투를 겪었다. 그는 홍색간부퇀 전사들을 거느리고 금사강의 천험을 돌파하였고 직접 돌격대를 거느리고 적의 요새인 통안주를 점령하였다. 홍군의 위대한 2만 5천리 장정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양림은 섬북에 도착한후 새로운 임무를 맡고 홍군의 동정전투에 참가하였던것이다.

답사팀이 5시간의 긴긴 로정을 거쳐 석루현 소재지에 도착한 것은 2003년 10월 26일 오후였다.

석루현의 홍군동정기념관

홍군동정기념관 정면

기념관앞 꼬마나팔수 동상

 

석루지구는 옛날 굴지(屈地)라고 했다. 편벽하고 황막하기 그지없는 곳이지만 신석기시대에 벌써 이곳에 인류가 자취를 남겼다. 노예사회인 상조(商朝)와 춘추시기, 이곳에 비교적 큰 도시가 형성되였고 수나라이후부터 석루현으로 불리웠다. 현지 당사일군들은 이곳이 강태공(姜太公)이 출생한 곳이라고 했다. 《강태공의 낚시》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남긴 강태공이 바로 중국력사에 나오는 유명한 군사가, 정치가로서 주무왕을 도와 상주왕(商紂王)의 폭정을 뒤엎은 자아(子牙) 강상(姜尙)이다. 기재에는 출생지가 동해 해빈(海濱)이라고 하지만 수천년전의 일이기때문에 강상의 출생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석루현이 강상의 출생지라는 여러가지 근거도 있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며 증거도 유력하지 못하다. 다만 이곳은 상조로부터 주조로 바뀌는 중국력사 격변기의 주요무대였다는것만은 출토된 문화재와 여러 기재로부터 증명되고있다.

석루현 소재지로 굴산하(屈産河)라는 작은 강이 흐르고있었다. 강은 이곳으로부터 50킬로메터떨어져있는 황하에 흘러든다고 한다. 부근 산중에 굴담천(屈潭泉)이라는 유명한 샘이 있어 현성의 수원을 보충하고있다. 그리고 석루현은 음료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수도물을 쓰지만 향과 촌에서는 아직도 우물에서 물을 길어 쓴다. 빈곤현인 석루현은 인구 당 한해 수입이 인민페로 1,000원도 안된다 한다.

현 소재지라고하지만 거리는 하나밖에 없었다. 거리에는 행인이 많았고 난전이 질서 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액세사리와 야채를 팔고 사고하였다. 그러나 흙먼지가 많아 모든것이 어지러워 보였다. 우리는 현정부 부근의 현빈관(縣賓館)에 짐을 풀고 부근 음식점을 찾아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남은 시간을 리용해 홍군동정기념관에 가보기로 하였다.

 

(권립교수) “1935년 10월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한 양림동지는 홍군 제15군단 75사 참모장으로 임명되였습니다. 넉달이 지나 홍군은 항일최전선에 나가 화북의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동정할 전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동정하려면 우선 황하를 건너가서 염석산이 산서성 황하동쪽에 구축한 또치까 방어진지부터 까부셔야했습니다. 중앙군위에서는 이 무거운 과업을 양림의 부대에 맡겼습니다.”

 

1935년 12월, 홍군이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한후 중공중앙은 와요보에서 정치국회의를 소집하고 금후의 작전방침을 연구, 포치하였다. 당시 국민당군은 세면으로 섬북을 포위하고있었다. 남부와 서부는 장학량의 동북군과 양호성의 서북군이 있었고 염선산이 동부 산서에 둥지를 틀고있었다. 그리고 진성이 거느린 장개석의 직계부대 3개 군이 락양부근에 포진하고 수시로 섬북을 공격할 태세를 취하고있었다.

모택동은 회의에서 동으로 황하를 건너 산서성에서 무장선전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광범한 인민들에게 항일구국 강령을 전파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홍군은 항일사상을 가진 장학량과 양호성 부대와 비밀리에 담판을 진행하면서 협조적으로 지냈기때문에 남부와 서부를 공격할 리유가 없었다. 그리고 락양쪽으로 장개석의 직계부대를 공격하면 기회를 빌어 섬북지역에 더욱 많은 직계부대를 파견할 구실을 장개석에게 주게 된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산서에 둥지를 틀고있는 염석산을 공격하는것이 홍군에게는 가장 좋은 선택이였다.

중화문화의 발상지인 황하는 내몽골 경내에서 큰 굽이를 돌아 북에서 남으로 흐르며 섬서성과 산서성을 량분한다. 황하 동안은 염석산의 천하였다. 북벌전쟁시기부터 염석산은 산서를 자기의 사유지로 간주하고 누구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산서를 확보하기 위해 그는 북벌전쟁후 장개석, 풍옥상과 수차 큰 충돌을 일으켰다. 중원대전이 있은후 염석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굴복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막강한 병력을 가지고있어 장개석도 산서성을 호락호락 넘보지 못하고있는 상황이였다.

홍군이 섬북에 도착한 소식을 접한 염석산은 홍군을 막기 위해 황하와 황하기슭 려량산의 지세를 리용하여 보루를 만들고 10만 병력을 모아 수비진을 쳤다.

1936년 2월, 홍군 제1방면군 주력부대가 황하기슭에 도착하였다. 이때 황하의 얼음은 벌써 녹기 시작하여 크고작은 얼음쪼각이 물에 떠내리고있었다. 그리하여 배를 리용해 도하하려는 홍군에게 적지 않은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당시 홍군 15군단 75사 참모장을 맡았던 조선혁명가 양림은 직접 도하 선견대를 거느리고 하구(河口) 나루터에서 황하를 건넜다. 황하를 건너 계속 적과 싸우던 양림은 복부에 적탄을 맞고 황하 기슭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던것이다.

2월 20일, 도하를 시작한 홍군 제1군단과 제15군단은 적의 수비진을 헤치고 신속히 진격하여 23일에는 석루현을 포위하였다. 이틀간의 전투를 거쳐 홍군은 석루현을 점령하고 많은 적을 소멸하였으며 1,200여명을 포로하는 전과를 올렸다. 3월 하순 홍군 각 부대는 순조롭게 황하를 건너 려량산 내지로 진격하였다. 염석산의 잔여부대를 소멸한 홍군은 지주와 토호를 타도하고 빈곤한 백성들에게 량식을 나누어주면서 항일구국 사상을 선전하였다. 1936년 4월, 장개석은 직계부대를 산서에 파견해 남부로 공격하였고 태원의 염석산도 주력부대를 파견해 북으로부터 공격해 왔다.

이 시기 장학량과 양호성, 염석산은 모두 대표를 파견해 중국공산당 대표와 비밀리에 접촉하고있었다. 모택동과 중공중앙의 항일 민족통일전선 주장은 장학량과 양호성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항일에 뜻을 둔 그들은 섬북을 전력으로 공격하려하지 않았다. 염석산도 홍군의 동정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산서 경내에 들어온 장개석 직계부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홍군이 철수하면 장개석 직계부대를 산서에서 축출할수있다고 생각한 그는 홍군과 타협하려하였다. 이를 감안한 모택동은 홍군에게 포로된 염석산부대 곽등영(郭登瀛)퇀장을 직접 만나보았다. 그는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항일하자》는 내용의 비밀서한을 곽등영에게 주면서 염석산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홍군은 5월 5일까지 다시 황하를 건너 섬북으로 개선하였다.

75일간 지속된 홍군의 동정은 비록 예기한 목적을 전부 실현하지 못했지만 정치와 군사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홍군은 국민당군 7개 퇀을 소멸하고 4,000여명을 포로했으며 실전에서 홍군부대의 전투력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산서 수비에 급급한 염석산이 섬북으로 진출한 부대를 철수했기때문에 섬북근거지에 대한 위협을 제거할수 있었다. 홍군은 동정에서 8,000여명의 병사를 새로 흡수하고 30여만원의 군비를 확보함으로써 홍군과 근거지의 력량을 크게 확대하였다. 또한 선서성 20여개 현에서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공산당의 항일구국 사상을 선전하였고 일부 항일유격대와 유격구를 창설하였다. 이는 그후 려량산 항일근거지를 개척하는 밑걸음으로 되였다.

하북성 석루현의 사학자들의 노력과 현정부의 유력한 지지로 홍군동정기념관이 축조되였다.

석루현 소재지가 위치한 곳에서 굴산하 하곡(河谷)을 지나면 산비탈에 축조된 하얀 신식 건물이 보인다. 흰 벽과 록색 기와로 된 그 건물이 바로 새로 지은 홍군동정기념관이다.

가릴것 없이 황토를 드러낸 산은 거칠고 조잡하게 느껴졌다. 기념관 주변에 푸른 솔을 심었지만 전반 산의 황막한 분위기를 지울수 없었다. 건물 기와를 록색으로 한것도 리해가 되였다. 나무가 적은 산에 조금이라도 생기를 보태주려는 의도였을것이다.

홍군동정기념관은 1936년 모택동이 홍군 제1방면군을 거느리고 동으로 황하를 건너 산서로 진격한 력사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축조된 성급 기념관이다. 건축면적은 11,000평방메터, 주건물의 면적은 1,100평방메터였다. 전시청과 기념비 두 부분으로 나뉘여진 기념관 건물은 조형이 우아했고 전시청 뒤에는 화단과 기념비가 있었다. 돛 모양으로 된, 높이 솟은 하얀 대리석 기념비는 멀리서 바라보면 만경창파를 헤치며 달리는 돛배 같았다. 기념비 높이는 19.36메터 인데 홍군동정 시간인 1936년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임석평부현장을 비롯한 석루현 사업일군들과 함께 흙 길을 따라 하곡을 건너 기념관으로 갔다. 기념관 정면에는 공격의 나팔을 부는 꼬마 홍군전사의 조각상이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기념관에 들어서니 커다란 대청이 나타났다. 대청에는 붉은 깃발과 홍군 동정의 노래 악보가 있었으며 동정에 나선 홍군 부대의 조직 편성표가 있었다. 해설원이 첫 전시청으로부터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홍군동정의 노래 악보

홍군 15군단 편성표, 75사 참모장으로 필사제가 바로 양림이다

기념관의 양림 약력

장정을 마치고 섬북에 도착한 중앙홍군

전시청에는 75건의 유물과 70여부의 문서자료, 190여장의 력사 사진들이 전시되여있었다. 그중에는 조선혁명가 양림에 대한 전문소개도 있었는데 황포군관학교 시절의 양림 사진과 약력이 있었다. 약력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여있었다.

《삐스티 소전. 삐스티(1898-1936)는 양녕, 양림이라고도 하며 조선인이다. 1919년 중국에 망명했고 길림 주하(珠河 지금의 흑룡강성 상지현 尙志縣)에 있었다. 1921년 운남강무당 제16기 포병과에 입학하고 졸업한뒤 황포군관학교 구대장으로 있었다.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이해 11월에 엽정 독립퇀의 제3영 영장으로 임명되였다. 1927년 남창봉기와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9.18사변후 중공만주성 군위서기를 맡았다. 1932년 중앙혁명근거지에서 사업하다가 장정할 때 군위 간부퇀 참모장으로 있었다. 섬북 쏘베트구역에 도착하여 홍군 15군단 75사 참모장을 맡았다. 1936년 2월 21일 동정 도하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때 나이가 38세였다.》

전시청에는 또 홍군 동정부대 편제를 도표로 작성되여있었다. 홍군 제15군단 군단장은 서해동(徐海東)이였고 산하에 81사, 75사, 78사를 두었다. 15군단의 주력인 75사 사장은 장소동(張紹東)이고 참모장은 삐스티였다.

제15군단은 장국도의 제4방면군 부분적 부대를 토대로 신병을 확충해 편성한 부대였다. 중앙군사위원회는 부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또 신병을 훈련시켜 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해야했다. 이때 모택동과 주은래는 믿음직하고 신병훈련 경험이 풍부한 양림을 이 부대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줄곧 주은래의 신뢰를 받아온 양림은 군관학교 출신일뿐만 아니라 홍군대학 총교관을 지낸 경력이 있었고 서금의 중앙쏘베트지역에서도 많은 훌륭한 간부를 양성해 냈었다. 그리하여 그는 제15군단의 75사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석루현 임석평 부현장(오른쪽)

석루현 당사연구일군들(가운데와 오른쪽)

석루현에 홍군동정기념관을 만들기 위해 적극 진력해왔고 또 이면의 연구를 했던 임석평 부현장도 조선혁명가 양림에 대해 높이 평가해주었다.

(임석평) “1936년 홍군이 동정할 때 홍군 15군단의 75사 참모장으로 있던 필사적은 큰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홍군의 선견부대를 거느리고 황하 천험을 돌파하여 산서 경내로 진격해왔습니다. 홍군은 동정에서 5천만원에 달하는 군자금을 모았고 8천명 산서성 자녀들이 홍군에 참가해 홍군부대가 크게 확대되였습니다. 때문에 동정은 우리 당과 우리 군의 력사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가집니다. 조선인 양림은 홍군 도하작전을 완수한후 장렬히 희생되여 나젊은 생명을 바쳤습니다. 중국인민은, 현지 인민은 그를 잊지 않고있습니다. 기념관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웅 양림을 전시하고있습니다. 그리고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제자를 써주었습니다. 조선인 양림은 중국혁명에 아주 큰 기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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