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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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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알바트로스
2019년 07월 15일 09시 31분  조회:273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알바트로스 

김경화

 

 

1.

베개 근처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는다. 몇번의 더듬거림 끝에 부르르 몸을 떠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손가락의 느낌만으로 통화버튼을 누른다.

“홍화씨 오늘 출근 안해? 야간 아니야?”

“네? 아.”

나는 비명인가 탄식인가 구분하기 어려운 신음을 뱉어내며 벌떡 일어나앉는다. 베란다와 통하는 문에 검은 비닐을 테이프로 붙여놓은 집안은 칠흑같이 어둡다. 휴대폰 상단에서 깜빡거리는 시계를 보니 6시 40분을 막 넘어서고 있다. 미쳤어. 정말.

“지금 깨난 거야?”

“예. 아저씨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할 게 뭐 있어. 홍화씨가 통근차를 못 타는 게 걱정이지. 기다렸으면 좋겠는데 금방 못 나오지?”

“예. 그렇죠.”

“그럼 못 기다리겠네. 어떡해?”

“아저씨 걱정 말고 가세요. 저 택시 타고 갈게요.”

“택시비가 많이 나올 건데. 그래 알았어. 이따가 봐.”

“예. 아저씨 이따가 뵈요.”

휴대폰을 내려놓고 나는 허겁지겁 화장실로 달려간다. 화장실까지 가는 그 몇초 동안에 시간 계산을 해본다. 세수하고 치솔질하고 오분, 택시정류장까지 걸어나가는데 십분, 회사까지 택시로 넉넉 잡아 반시간 정도 걸릴 것이니 지각은 안할 것 같다. 머리는 감을 수 없겠군. 하고 생각하며 힐끗 거울을 보니 머리가 봉두란발이라 이대로 출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세면대에 마주서서 세수를 하고 대충 두어번 치솔로 이발을 문지르고 푸푸 입안의 치약거품을 빠르게 헹궈낸다. 치약거품이 세면대에 허옇게 묻어 물을 틀고 그것을 씻어내려보낸다. 치솔질을 끝내고 잠간 망설이다가 세면대에 마주서서 다시 수도물을 틀어놓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앞머리만을 적신다. 샴푸를 조금 짜서 앞머리에 바르고 거품을 내고 바로 씻어내린다. 머리카락이 세면대 하수구로 들어가 세면대가 막혀버릴가봐 신경이 쓰이지만 어쩔 수 없다. 요즘 들어 세면대에서 앞머리만 감고 출근하는 날이 부쩍 늘어간다는 생각에 가슴 한켠이 찔린다. 한달만 버텨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기숙사 생활을 할 때 세면대에서 머리 감는 애들 때문에 세면대가 자주 막혀 몇번 힘들게 뚫고 나서 세면대에선 세수만 하세요. 막히면 본인이 뚫으세요. 하고 써붙였던 게 나라는 생각을 한다. 

요즘의 나는 이렇다. 많은 걸 생략하고 건너뛰고 있다. 삶의 세세한 것들을 신경 쓰고 챙길 수 없다는 건 그만큼 내 삶이 안정적이지 못하고 내 육신이 지쳐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문지르고 드라이기를 코드에 꽂고 제일 강한 뜨거운 바람을 앞머리에 대고 확 불어버린다. 얼굴까지 화끈거린다. 앞머리만인지라 몇번 반복하자 금방 물기가 빠진다. 나는 채 마르지 않은 앞머리를 대충 손으로 헝클어뜨리며 회사까지 가는 동안 마르겠지 하면서 화장실에서 나온다.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선크림을 바르고 나니 오래동안 해빛을 보지 않은 탓에 얼굴색이 너무 피기 없이 허옇기만 하다. 분홍색 립스틱을 바르고 나니 그런 대로 거리에 나서면 환자로 오해하진 않겠다 싶다. 건조대에서 작업복인 진한 잉크색 반팔티를 건져올려 입고 손 가는 대로 청바지를 집어 다리에 꿰고 문어구에서 퇴근하면서 놓아둔 가방을 들어올려 안을 헤집어본다. 어제 저녁 야식용으로 나온 우유와 빵이 그대로 들어있다. 나는 미지근한 우유를 랭장고에 집어넣는다. 랭장고에는 벌써 같은 우유가 여러개 들어있다. 먹지는 않고 류통기한이 지나서 맨날 싱크대에 부어버리면서도 손 가는 대로 랭장고에 남는 우유를 넣는 건 그러니까 그걸 먹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습관이다. 나는 몇개의 각기 다른 종류의 빵이 놓여있는 부엌 싱크대 옆에 놓인 비닐봉지에 가방에서 꺼낸 빵을 넣어버린다. 이것 역시 먹으려고 하는 건 아니다. 곧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바로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놔둿다가 류통기한이 지나야 비로소 버릴 수 있게 된다. 나라는 인간이 그렇다.

다시 가방을 거머쥐고 신발을 신는다. 

집을 나서자 낮이 긴 여름이라 아직은 환하다. 나는 골목길을 벗어나 공공뻐스 정류장에 2분 정도 서있다가 무단횡단을 하여 길을 건넌다. 길을 건너던 승용차에서 어떤 남자 하나가 눈을 부라리며 뭐라고 한다. 검은색의 차체가 긴 승용차는 차에 대해 문외한인 내 눈에도 어마어마하게 비쌀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생겼다. 나는 입모양과 손짓만으로 그가 지금 나를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으로 몰아가는지 알지만 무신경하게 한번 바라보고 태연히 길을 건넌다. 

택시가 줄느런히 서있는 승강장에서 나는 맨앞에 있는 택시 뒤문을 열고 올라탄다. 나이 든 택시기사가 행선지를 묻고 나는 회사주소를 댄다. 거리가 꽤 있는 행선지에 택시기사의 얼굴에 웃음이 피여오른다. 택시기사가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자 네비게이션에서는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기계음이 나온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어림잡아 2만원 정도 나올 것이다. 적은 돈이 아니다. 택시가 달리는 동안, 나는 줄곧 창밖만 바라본다.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좀더 잠을 자둘 수도 있지만 나는 택시가 달리는 동안 경직된 자세로 창밖만 바라본다. 머리 속이 흐릿하다. 잠을 충분히 못 자서일 수도 있고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7월이다. 앞으로 내가 여기에 있을 시간은 기껏해야 한달 남짓 될 것이다.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료금미터기를 힐끔거린다. 저 놈의 말은 왜 쉴 새 없이 뛰는 건가. 미터기는 1만 6000원을 넘어서고 있다.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2만원만 넘지 말아라. 나는 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회사가 가까워온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잡념을 떨쳐버리려고 눈을 부릅뜬다. 문득, 출퇴근을 찍는 카드가 있나 확인해야 될 것 같아 가방 안을 뒤적인다. 어쩐 일인가. 카드가 보이질 않는다. 분명 아침에 퇴근하면서 삑 하고 카드를 찍고 가방에 허망 집어넣은 것 같은데 가방 안을 아무리 뒤져봐도 출퇴근을 찍는 카드가 없다. 나는 가방 안에서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천으로 된 작은 백을 꺼내 쪼르로기를 열어본다. 손거울, 립밤, 볼펜, 메모지 어지럽게 널려진 그것들을 샅샅이 헤집어보지만 그 안에도 카드는 없다. 맹랑하다. 근태계를 쓰면 되긴 하지만 이 때로부터 나의 신경은 날카로워지기 시작한다. 

무언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일이 엇나갈 때, 나는 순식간에 머리 속이 마구 헝클어지고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허둥댄다.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몽유병 환자처럼 때때로 이렇게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어쩔 줄 몰라한다. 

나는 헛일인 줄 알면서도 다시 가방 안을 샅샅이 뒤지면서 마구 자책하기 시작한다. 바보, 이런 정신머리. 금방 전에 둔 물건도 어데 뒀는지를 기억해내지 못하고 늘 무언가를 잊고 빠뜨리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요즘 들어 건망증 증세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은 더욱 급해난다. 

요즘의 나는 부속품이 고장난 기계처럼 늘 이렇게 뭔가 어긋나고 덜컥덜컥거리고 있다. 가방 안에 내가 찾는 출퇴근을 찍는 카드는 절대 없다는 걸 확인사심하고 나서 옅은 한숨을 쉬며 가방을 내려놓는다. 금방 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허탈감이 몰려오면서 온몸의 기운이 쏙 빠진다. 운전기사가 내 행동이 어이없다는듯 뒤쪽을 힐끔거린다. 

나는 기사를 외면하고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가슴이 답답해서 목에 손을 뻗었다. 맙소사. 이 손에 잡히는 넓은 천으로 된 줄의 감각은 뭐람. 차창유리를 바라보니 거기 검은 실루엣으로 비친 그림자에 내 목에 카드가 걸려있다. 아까 집에서 허겁지겁 나오면서 어떻게 가방에 있던 카드를 꺼내 목에다 걸고 나왔었나 보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가방 안을 뒤지다니. 후- 깊은 한숨이 나온다.

가방에서 카드를 꺼낸 사람도, 내 목에 카드를 걸어놓은 사람도 나일 텐데 왜 이렇게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 걸가. 

창밖으로 나무들이 하루 일상에 지친듯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그들은 가지를 늘어뜨리고 긴 잠에 빠져들려 하는데 나는 이렇게 삐걱거리며 하루 일상을 시작하고 있다. 

 

예상에서 많이 초과하지 않은 택시료금에 안도하며 돈을 꺼내 택시료금을 지불하고 회사 대문에 들어선다. 마침, 와르르 통근뻐스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한다. 하필 이 시간대를 맞춰서 오다니. 조금 전이나 후에 도착할걸. 나는 속으로 후회하며 얼굴근육을 움직여 누구를 향한 웃음인지 분명치 않은 웃음을 웃어준다. 까르르. 고개를 까댁해 나한테 알은체해주고는 뭐가 즐거운지 깔깔거리며 카드를 찍고 공장 안으로 들어서는 동료들. 그들은 평생을 다해 자신을 지켜줄 것 같았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작별인사도 없이 저 혼자 먼저 돌아올 수 없는 다른 세상으로 가버리는 충격을 온몸으로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자다가 화들짝 놀라 깨여난 푸르스름한 새벽, 어둠과 밝음의 경계 같은 그 푸른 빛의 세계에 손을 내밀어보며 가슴 속의 통증을 확인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미처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왈칵 저 혼자 푸른 새벽에 눈물을 쏟아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행여 내 안의 울음소리가 새여나와 아직 여리디 여린 자식에게 상처를 입힐가 두려워 잘게 밖으로 새여나오려는 소리를 씹어 안으로 꾸역꾸역 삼켜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야간조회는 늘 간단하다. 간단해서 좋다. 조회를 마치고 주간근무를 하는 언니와 교대를 하고 오늘 저녁에 할 일과 설비상태를 체크하면서 나는 일에 집중하려고 눈을 부릅뜬다. 야간근무 11개월째다. 나는 이제 낮에는 정오의 해볕 아래 머리를 내리뜨리고 꾸벅꾸벅 조는 병아리가 되여 쉬는 날에도 잠만 온다. 늘 그렇지만 야간에 출근을 하면 한두시간 정도는 어리벙벙해서 달아다니고 그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몸이 일에 반죽처럼 섞이기 시작한다. 

한달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지금까지 일년 동안 야간근무를 하면서 모은 돈과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전세금을 빼고 퇴직금까지 합치면 중국에 돌아가서 몇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아들애는 새학기면 중학교에 들어간다. 지금 돌아가서 무언가를 할 자신은 없다. 이 비칠거리는 몸과 유리처럼 어디에 부딪쳐도 부서질 것 같은 마음으로 뭘 할 수 있을 것인가.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다잡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면서 그렇게 살아야겠지. 그러다가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면 다시 한국에 나와서 돈을 벌어도 될 것이다. 그게 최선의 방법은 아닐 것이지만 많은 중국조선족들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어느 한곳에도 완전히 정착하지 못한 채 철새처럼 이동하듯이 나도 지금 어디에도 확실하게 내가 정착해야 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일하는 동안, 머리 속으로 저도 모르게 아직 살아보지 못한 날들을 마치 생산라인의 작업일지 적듯 적어보고 있었다. 푹 허구픈 웃음이 나온다. 삶이 내 뜻대로 되여준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내 뜻대로 살아지리라 여전히 아련한 희망을 품으며 이토록 세세히도 아직 다가오지 않은 앞날에 대해 뭔가를 계획하는 미련스러움이라니.

 

2.

“네?”

나는 미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차분한 목소리에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나한테 해주려는 말의 뜻이 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목소리로 보아 나와 비슷하거나 어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했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깜빡 통근뻐스에서 졸다가 전화를 받은 터라 리해력도 판단력도 바닥인 상태이다.

“그러니까 제 말은요. 이번 달 월세가 입금되지 않아서 전화를 드리는 거라구요.”

이건 무슨 소린가. 나는 전세집에 살고 있는데 월세라니. 

“저기요. 전화 잘못 거신 거 아닌가요? 전 전세집에 살고 있는데 월세라니요? 누구시죠? “

“박홍화씨 아닌가요?”

“네. 맞는데요.”

“지금 살고 있는 데가 경기 평택시 평택동 285번지 동화원룸 305호 아닌가요?”

“네.”

그런데는 어쨌단 말인가. 그는 어떻게 이토록 자세히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내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 말인가. 전화번호는 또 어떻게 알고. 

“아직 상황을 하나도 모르시나 본데…”

수화기 저편이 조용해진다. 낮게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다.

“난 그 집 주인이고 그쪽은 일년째 저의 집에 월세로 살고 있는 거잖아요. 계약 날자는 15일이고 박홍화씨는 스타부동산에 위임하여 부동산 업주 이름으로 월 35만원씩 꼬박꼬박 월세를 낸 게 아닌가요? 여태 이런 일 없었는데 이번 달 월세가 늦어져서 부동산에 전화를 해보니 사장님 전화가 꺼져있더라구요. 그래서 오늘 서울에서 차를 끌고 평택까지 왔는데 와보니까 부동산은 문을 닫은 상태고 사장은 전화련결이 안되고 주변에 물어보니 부동산이 문을 닫은 지가 이삼일 된다고 그러더라구요. 알아보니 부동산 업주가 계약금을 들고 튄듯한데요. 보증금 200만원 맞죠? 일단은 경찰서에 건물주들이 신고를 한 상태라고 하던데. 아,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합시다. 전화로 간단히 말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건물 앞 카페 아시죠? 아래층이 미용실이고 그 바로 웃층에 ‘향기가 있는 공간’이라고.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계약서 갖고 나오시구요.”

“아니…”

나는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눈앞에 대고 잠간 바라보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이것보다 더할가 싶다. 순간적으로 강한 회오리바람이 내 속을 굽이굽이 파고든다. 내 삶에 가파른 언덕길이 하나씩 생겨날 때마다 난 늘 이런 바람의 기운에 몸을 떨었었다. 보증금 200만원이라니? 나는 거금 4000만원을 주고 전세에서 살고 있는데. 며칠 전에도 나는 부동산에 곧 중국으로 들어갈 것 같다고 말하면서 전세금 날자 어기지 않고 돌려받을 수 있죠? 하고 확인했었고 너부죽한 얼굴에 야채를 판다면 꼭 덤을 얹어줄 것 같은 스타부동산의 아줌마 사장은 그럼, 말이라구. 걱정 마. 하면서 짐짓 눈까지 흘겼었다. 내게 계좌번호를 적어달라 했고 내가 내민 계좌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돌려 잠그는 걸 내 눈으로 확인했었다. 이건 뭔가 잘못되였을 것이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휴대폰 통화버튼을 껐다.

 

해빛이 강렬하게 열기를 뿜어댄다. 나는 눈을 쪼프리고 길을 건넌다. 우선 옷을 갈아입고 그를 만나러 가야 할 것이다. 그가 한 말은 아무래도 신빙성이 없다. 낯선 그의 목소리보다는 부동산 아줌마의 웃는 얼굴을 나는 믿는다. 그는 누구인가. 혹시 사기? 사기를 치려면 상대를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을 것이다. 사기당할 무엇도 나는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조금 씁쓸해난다. 그러나 어쨌거나 나는 그를 만나봐야 할 것이다. 집에 가서 샤워를 대충 하고 옷을 갈아입고 얼른 가서 만나고 와서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훅 바람이 불어온다. 어제밤 내내 뛰여다니며 땀에 젖은 몸에서는 바람이 스치자 순간 퀴퀴한 땀냄새가 짙게 코 속으로 파고 든다.

골목길에 들어서자 도로 한켠에 한무리 사람들이 모여있다. 무언가를 의론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언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목소리가 높았다 낮았다 하고 얼굴들이 굳어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내가 사는 원룸 앞에 선다. 

“이 건물에 삼가?”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는데 누군가 소리지른다. 돌아보니 금방 지나친 그 한무리의 사람들 속에서 목이 늘어진 카키색 면티를 입은 녀자가 내 쪽을 바라본다. 

“네.”

대답하면서 그 녀자 쪽으로 돌아서는 찰나,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한테로 쏠리는 걸 느낀다.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는 서너메터 쯤 된다. 녀자의 목소리가 컸던 것은 거리 때문이였을 것이다. 

“그램 여기루 오쇼.”

녀자가 나를 향해 손짓한다. 화장기 없는 얼굴의 녀자는 지친 표정이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스적스적 그쪽으로 다가간다. 

“햐… 당한 사람이 이렇게 많슴가?”

머리를 짧게 자른 남자 하나가 나를 보더니 머리를 저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뭔가. 저 기분 나쁜 남자는.

“아직 더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말하는 녀자는 돌이 지났을가 말가한 남자아기를 품에 안고 있다. 아기가 자꾸 움직여 녀자의 몸은 뒤로 휘여있다. 

무엇을 당했다는 말인가. 나는 떨떠름하다. 

“지금 출근한 사람도 많고 아직 모르는 사람도 많을걸요.”

 

그들의 말은 이랬다.

그러니까 스타부동산, 그 짧은 파마머리에 늘 사람좋게 웃던 아줌마가 이중계약으로 사기행각을 벌였다는 것이다. 집주인한테는 월세로 계약을 하고 세입자한테는 전세로 계약을 하고는 집주인한테 꼬박꼬박 월세를 납부하다가 며칠 전 문을 닫고 잠적해버렸다고 한다. 

“그럼 우리 전세값은 어떻게 되는 검가?”

“날라갔지 뭐. 주인이 돈을 주겠소?”

“햐… 완전 하루아침에 밖에 나앉게 됐구나.”

나는 비로소 방금 전 집주인이라고 하던 남자의 그 알 수 없는 통화가 무슨 의미인지를 희미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그, 이제 중국 들어가서 아들이랑 잘살아야제? 하고 활짝 웃어주던 그 자잘한 주름이 건너간 눈매, 나는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소리 속에서 부동산 아줌마의 웃음 어린 눈매를 생각했다. 사기라는 말보다, 내 전세금을 떼인다는 생각보다 바보스럽게도 그 순간, 그 웃음 어린 눈매가 먼저 떠오르면서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 눈매로 그렇게 환하게 웃던 그 웃음이 가짜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건 필시 무언가 오해가 있을 것이다. 무언가 잘못되였을 것이다. 나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할 때처럼 웃이로 아래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서있는 바닥이 한쪽으로 밀려나며 꺼져들고 있었다. 풀럭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까 나를 부르던 카키색 면티를 입은 아줌마가 서로 련락처를 물어보고 토론하자면서 전화번호를 물어온다. 전화번호를 가르쳐주고 쥐고 있던 휴대폰을 터치해보니 어느새 카톡추가가 들어와있다. 아줌마는 바로 나를 카톡 단체방에 초대한다.

전세사기방.

아줌마가 멋대로 지어버린 방이름이였다. 

사람이 한명 두명 추가되는 걸 보며 나는 그럼 이제 련락하자고 하고 돌아섰다. 방 이름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3.

“커피 주문하시죠?”

연푸른색의 셔츠가 주는 청량감에 침을 삼키며 나는 탁자 우에 놓여진 그 남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희고 매끈한 손 때문에 까맣게 돋은 털이 더 유표한 남자는 나와는 다른 행성에서 살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창밖을 바라보니 해빛이 자글자글 끓어오르고 있다. 

“음…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가씨는요?”

주문하시죠, 하면서 메뉴판을 내 쪽으로 밀어놓고는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나비넥타이의 웨이터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시럽 두방울만 넣어주시구요. 하는 남자. 그건 흉내낼 수 없는 몸에 밴 익숙함이다. 나는 메뉴판을 훑어본다.

“이거요.”

같은 걸루 주세요. 하고 싶었지만 몇시간이라도 잠을 자야만 야간근무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커피 대신 키위주스를 짚어보이고 나는 입을 다문다. 

그와 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엄밀히 말하면 그도 나도 같은 피해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고 그는 자신이 가진 수많은 것 중에 다만 지극히 적은 일부분을 잃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에 놓여있다. 나는 밖을 바라본다. 금방 샴푸하고 손질한듯 찰랑거리는 그의 머리카락은 충분한 영양분을 자랑하며 탱글탱글하다. 나는 손을 뻗쳐 금방 급하게 말린 나의 항시 푸석한 머리를 쓸어본다. 거울에 비춰보지 않아도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의 건조한 머리카락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메말라보일 것이다.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키위주스 나왔습니다.”

아까의 나비넥타이를 맨 애송이 웨이터가 그의 앞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 앞에 키위주스를 놓아주고 쟁반을 가슴에 표상처럼 안은 채 고개를 까댁하며 인사한다.

“맛잇게 드십시오.”

     

나는 빨대의 비닐을 벗기고 키위주스잔에 꽂는다. 한모금 들이켠다. 맛있다. 이 상황에서도 맛있는 것에 잠간 마음을 빼앗기는 인간이라니. 

“상황은 대충 들으셨습니까? 아니면?”

얼음 때문에 자잘한 물방울이 가득 맺힌 유리잔을 그는 살짝 손으로 잡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깊숙이 빨대로 빨아들이고 나서 잠간 생각에 잠기는듯하다가 그렇게 물었다.

“네. 지금 오다가 집 앞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대충 들었습니다.”

내 속에서 빠져나와 공중에 흩어지는 목소리는 힘없고 건조한 발뒤축처럼 잔뜩 갈라져있다. 

“혹시 전세로 계약하신 건 아니죠?”

남자는 잠간 나를 바라본다. 내 기색을 살피고는 역시나구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얕은 한숨을 쉰다. 

“계약서 갖고 나오셨으면 보여주시죠.”

나는 가방을 뒤져 일년 전 부동산 녀자한테서 받은 계약서를 그한테 내민다. 그는 미간을 살짝 쪼프린 채 계약서를 꼼꼼히 읽는다. 나는 그가 계약서를 읽어보는 동안 선생님께 숙제를 검사맞히는 학생처럼 얌전히 앉아있는다. 마치 그가 다 읽고 나면 무언가 지금의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해결해줄 것 같은 착각도 든다. 

그는 내가 내민 계약서를 다 읽고 나서 옆에 있던 서류가방을 열고 거기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 한장을 꺼내 나한테 내민다.

활자로 된 내 이름이 거기 있고 건물 주소가 명시돼있다. 거기까지는 내가 그한테 보여준 계약서와 다르지 않다. 다르다면 그 아래 보증금 200만원, 월 35만원이라고 되여있는 곳이다. 보증금 200만원, 내 계약서에는 전세 4000만원이라고 되여있다. 일년의 집세를 월세로 내고 살면 어림잡아 400만원 이상의 돈이 나갈 것이고 전세로 하면 계약이 끝나서 방을 빼는 대로 원금을 그대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내가 가진 전부의 돈에 언니한테서 꾼 돈까지 합쳐 부동산 사장한테 내민 돈이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내가 가진 전부이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걸 잃을 수 없다. 

“관리하기가 번거로워 부동산 주인한테 건물을 위임했는데 이런 일이 발생했네요. 골치거리인데 이거.”

그는 손으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내게 전부인 돈이 그에게는 살짝 미간을 찌프리며 커피잔을 만지작거릴 정도의 골치거리인가 보다. 사람은 자기가 놓인 처지에 따라 이렇게 같은 상황을 마주하고도 다른 마음인가 보다. 

“그런데 몇백도 아니고 몇천만원을 내고 전세를 맡으면서 어떻게 건물 주인을 만나볼 생각도 안하셨나요? 이 정도 돈이면 참 힘들게 버신 돈일 텐데.”

그가 조금 상체를 앞으로 내밀면서 낮으나 정확한 음으로 말한다. 왈칵 그의 친절에 눈물이라도 솟구칠 번해 나는 눈을 슴뻑인다. 어쩐지 창피해진다. 작은 친절에도 울렁이는 마음이라면 그건 종이장처럼 얇아져있다는 뜻일 터이다. 그와 나는 동년배거나 그가 나보다 조금 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같은 땅 우에서 같은 해빛 아래 같은 바람을 맞으며 살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마치 나는 그가 내가 영원히 닿지 못할 한계단 높은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남편이 떠나가던 그 날이 떠오른다.

“서철진씨 안해 분 맞습니까?”

“네. 그런데요.”

나는 저으기 뜨아했다. 너무 당연한 것을 물어오는 거에 대한 시들함, 뭐 그런 것이였다.

“여기. 연변병원인데 오셔야겠습니다.”

“네? 제가 거길 왜?”

“서철진씨 사망입니다.”

해독할 수 없는 먼 나라의 언어 같은 그 말의 뜻을 알 수 없어 나는 멍해있었다. 밖을 내다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고층아빠트 너머로 보이는 높이 솟은 송신탑, 창문 너머로 보이는 희뿌연 하늘, 모든 것이 고요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지금 나는 분명 뭔가 잘못 들은 것이다. 이 사람은 뭔가 잘못 알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시면 바로 1층 외과병동 쪽으로 와주십시오. 거기 오셔서 다시 전화를 주시던지요.”

뚝. 상대방이 전화를 끊었다. 꿈을 꾼 것일가. 나는 멍해있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지갑과 휴대폰과 엘레베터 출입 카드 따위를 챙겨들고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을 운동화에 집어넣다가 가스불을 끄지 않았음을 생각해내고 가스불을 껐다. 

밖에 나서자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나는 손을 량쪽으로 뻗어 팔을 감싸고 고개를 수그린 채 종종걸음으로 거리로 나갔다. 사람과 차들이 어지럽게 오고 가는 거리에 서자 자꾸만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갈 때까지 내가 했던 일은 흐릿한 정신을 똑바로 가다듬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앞을 똑바로 쳐다보는 일 뿐이였다. 

     

남편은 조용히 누워있었다. 머리 쪽에 친친 동여진 허연 붕대만 아니면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사고가 난 곳은 서성 쪽이였다고 했다. 남편이 운전한 차가 커브를 돌다가 다리 아래로 추락했다고 했다. 술을 마신 상태였다고 낯선 남자가 말해주었다. 

“거기 굽인돌이 커브가 갑자기 확 꺾어지는 데라 맨정신에도 정말 조심해야 되는데 어쩌다가 술을 마시고…”

처음 남편을 발견하고 구급차를 불러 병원까지 호송해왔다는 남자가 그런 말을 했다. 

누군가 다가오더니 흰 천을 끄당겨 남편의 얼굴을 덮었다. 나는 멀거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급기야 밀려오는 공포에 몸을 떨며 기신기신 밖으로 나왔다. 병원 복도의 길다란 철제의자가 등에 닿는 차거운 감촉을 느끼며 나는 말을 듣지 않아 자꾸만 엉뚱한 번호가 눌러지는 손가락을 가까스로 통제하며 남편의 친구들과 가족들한테 전화를 했다. 

“네. 사고로.”

전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남편의 사망소식을 알리며 비로소 나는 흑 하고 소리를 토했다. 눈물이 흘러내린 것도 그 때였다. 지금까지 꿈속을 헤매이다가 비로소 정신이 든 사람처럼 나는 그의 사망 소식을 알리며 비로소 그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갈비. 그 때 어이없게도 내가 생각한 것은 갈비였다. 싱싱하고 알맞춤하게 토막낸 갈비. 한번 부르르 삶아 피물을 빼고 다시 솥에 넣고 된장을 풀고 마른 고추를 한웅큼 집어넣고 푹 끓이다가 애배추를 듬뿍 넣은 갈비는 남편이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였다. 큼직한 손에 갈비를 들고 걸탐스럽게 살을 발라먹고 저가락으로 배추를 건져 우적우적 씹으며 남편은 행복해했다. 그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앞이 보이지 않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리 어디 쯤엔가 오고 갈데 가 없어 울고 있는 나의 환영이 보이는듯했다. 그 환영의 끝에 아들애의 실루엣이 스쳐 더욱 마음이 아리다. 

“참 난감하게 됐네요. 부동산 사장이 잡혀서 해결이 되면 좋겠지만…”

그는 말끝을 흐린다.

“일단 기다려봅시다. 많이 피곤해보이네요. 그만 일어설가요?”

반 쯤 남긴 커피를 두고 그는 일어선다. 

 

   4.

야식을 먹고 휴대폰을 켰다. 

“그럼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요?”

“그냥 이대로 돈 다 날리고 쫓겨나는 건가? 이런 젠장.”

“쫓겨나긴 뭘 쫓겨나. 죽치고 있는 거지. 집주인도 내쫓지는 못할걸. 자기도 부동산에 집을 맡기고 관리를 안한 책임이 있는데.”

“우리 집 주인은 이달 내로 방을 빼달라고 하던데요?”

“헐. 그 주인 완전 네가지가 없네. 절대 방 빼주면 안돼. 누구 좋으라구 방을 빼? 솔직히 주인하고 부동산하고 한통속인지 누가 알아?”

카톡방은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사람들로 시끌시끌하다. 이틀 사이 백명 가까이 추가됐다. 부부가 같이 추가된 사람들도 많으니 호수로 따지면 백호는 안되고 어림잡아 60호 정도는 될 것 같다. 이대로 돈을 떼이고 거리로 나앉는 게 아니냐는 말에는 은연중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달 내로 방을 빼라고 한다는 말에는 그나마 그런 주인이 아닌 게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든다. 그러나 주인하고 부동산하고 한통속이라는 말은 근거도 없을뿐더러 터무니 없다. 집주인이 한둘이 아니고 서울에 있는 사람도 있고 다른 지방도시에 사는 주인도 있다. 그 많은 주인이 부동산 사장하고 일시에 짜고들어 이런 일을 도모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산업단지가 개발이 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여기 원룸을 투자목적으로 사놓은 거고 그걸 자신들은 관리하기가 번거로우니까 부동산에 맡긴 거라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변호사를 청해가지구 우리 단체루 소송합시다.”

“좋소. 여기서 동의 안하는 사람은 자기절루 해결하쇼에.”

“한사람이 십만씩 돈 내가지구 변호사를 청하는 게 어떻슴가?”

“십만 가지구 될가?”

“누가 한사람 나서가지구 돈두 거두고 변호사도 찾아보고 해야갠데 누가 나설 사람 손 드쇼.”

“그래게 말이. 근데 모두 일하러 다니는 상황이고 일 안하는 사람들은 다 애기엄마들인데.”

“지금 일이 중요함가? 돈 몇천만원 그냥 날려가게 생겼는데.”

“그건 그거구 당장 또 일은 해야 먹구 살지? 아이 그렇소?”

“그럼 나서는 분 일당까지 주믄 어떻슴가?”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순간적으로 카톡방이 멈춘다. 말은 쉽지만 내 주머니의 돈을 꺼내는 일은 누구에게나 쉬운 게 아닐 것이다. 전세금을 건넬 때 이렇게 고민을 거듭하고 신중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뒤늦은 후회가 몰려오며 가슴에 은연중 통증이 인다.

“동의하오. 먼저 그럼 십만씩 거두기요.”

“그럼 내 변호사도 알아보고 책임질게.”

나는 그 말을 한 사람을 클릭한다. 해빛이 부셔 눈을 가늘게 뜬 녀자아이를 중간에 세우고 부부가 량쪽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웃고 있다. 이런 사람이라면 어쩐지 믿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 남편이였던 그와 부동산 사장의 웃는 눈매를 떠올린다. 이런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동의.”

“나도 동의.”

동의. 동의라는 단어가 카톡방 채팅창에 련이어 올라가고 남자가 계좌번호를 올린다. 나는 동의라는 글자를 썼다가 지웠다가 하면서 망설이다가 끝내 글자를 보내지 않은 채 채팅창을 닫는다. 

낮에 깜빡 두어시간 졸았던 게 전부이다. 그럼에도 졸음은 오지 않는다. 머리는 아프지만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정신은 유리알처럼 맑다. 야간 오후작업을 시작하기엔 아직 십오분 정도 남아있다. 나는 볼펜을 꺼내 작업일지를 적어내려가다가 다시 휴대폰을 켜고 변호사사무소를 검색하기 시작한다. 몇개의 전화번호를 캡쳐해 사진으로 저장해놓고 화장실에 갔다오고 나니 작업을 시작할 때가 된다.

 

“예약을 하셨습니까?”

모모 변호사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 피부가 맑은 아가씨가 상냥하게 묻는다.

“아니요.”

“그럼 못 만나세요. 그 분은 일정이 빡빡하셔서 예약을 하고 오셔야 만날 수 있습니다. 다른 변호사 분들도 훌륭하신데 추천해드릴가요?”

나는 잠간 멈칫하다가 힘없이 네. 하고 대답한다.

아가씨는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근엄하게 찍은 사진 중에서 몇분을 가리키며 뭐라고 하는데 내 귀에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뭐라고 하는지 통 알 수가 없다. 

“어떤 분으로?”

“예. 그냥 좀 상담하려구요.”

“그럼 이 분 추천해드릴게요. 잘 해결해주실 거예요. 상담비용은 30만원이세요. 선불하셔야 되는데 카드로 하시겠어요? 아니면 현금으로 하시겠어요?”

“아니, 난 그냥 상담만, 몇가지만 물어보려구요.”

“예. 그렇죠. 상담비용은 선불입니다.”

목이 마른다. 입에서 단내가 심하게 나고 있다. 상담만으로도 돈을 내야 한다니. 난 그저 내가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물어볼 것인데 그 몇마디의 물음에 30만원이라니. 

“돈이 없어서.”

나는 낮게 웅얼거린다.

쫓기듯 그 곳을 나와 몇개의 사무실을 더 돌아보는 동안 나는 돈이 없이는 내 몇마디의 말이 아니라 한마디의 말도 들어줄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법률구조공단에 한번 가보세요. 거기라면 무료로 상담도 해드릴 거예요. 지금 가면 될라나. 대기자가 많아서 오래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무료로 상담할 수 있는 곳은 그 곳 뿐일 거예요.”

마지막으로 들린 곳에서 나는 법률구조공단의 략도를 얻었다. 

“어떻게 찾아가면 되나요?”

그렇게 말하며 나도 내가 바보스럽게 여겨질 정도였다. 얼굴이 동그란 아가씨는 살짝 귀찮은 표정을 짓더니 검색하시면 안내가 나올 텐데요. 하더니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눈을 내리깔고 메모지 한장을 찢어 략도를 그려준다.

 

“오늘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약을 안하셔 가지구.”

“아. 그럼 언제?”

“일단은 예약을 하시고 오셔야 합니다. 예약해드릴가요?”

나는 망설이다가 그대로 돌아선다. 나오면서 법률구조공단의 간판과 주소를 휴대폰으로 사진 찍어 저장한다. 터덜터덜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갑자기 허기가 몰려오고 졸음이 쏟아진다. 나는 도로변에 놓인 의자를 바라보며 저기라도 누워 한잠 실컷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부동산 사장이 잡혔대.”

“그럼 이제 돈 받는 거재?”

지하철에서 민망할 정도로 옆사람에게 마구 기대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자다가 중간중간 깨여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그 문자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리를 고쳐앉고 머리를 매만지며 나는 정신없이 잠에 빠져든 사이 내 추태에 혀를 찼음직한 옆사람과 맞은켠 사람을 흘깃거린다. 다행히 그들은 내게 눈길조차 안 주고 하나같이 휴대폰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태연하게 등을 의자에 기대고 채팅방의 대화기록을 꼼꼼히 읽어본다. 몸 여기저기가 쑤시지만 한참 늘어지게 잔 덕분에 피로가 많이 가셨다.

잠은 오지 않고 심장이 후둑후둑 뛴다. 잡혔다면 돈을 받을 수 있는 건가? 설마 그 돈을 다 써버리진 않았겠지? 어마어마한 돈이였을 텐데.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남아있을가. 내 돈은 꼭 준다고 했는데. 이제 그 돈 받겠다고 모두 사정없이 달려들 텐데 나는 어떻게 하면 그 돈을 받을 수 있을가. 가서 손을 잡고 울어볼가. 내 처지를 말하며 인정에 호소를 해볼가. 따로 찾아가서 만나볼가. 

그 돈만 받을 수 있다면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나는 전철에서 내려 크게 발자국을 떼면서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그러나 집으로 가는 뻐스 안에서 열어본 카톡방은 좀 전의 그 희망찬 소식을 간단히 엎어버리는 소식들로 가득 메우고 있었다. 부동산 업주인 녀사장이 잡히긴 했지만 돈은 모조리 써버린 상태며 공범인 남편은 필리핀으로 도망가버려 경찰이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이였다.

“이제 끝인가?”

“돈이 바닥나니 도망간 거라재.”

여기저기서 맥을 놓고 한탄을 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 변호사 선임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겜가?”

“돈이 없는데 이제 와서 변호사를 구한다고 뭐 어떻게 되겠슴가? 그저 운수땜 한셈 쳐야 될 것 같은데.”

“무슨 소리. 그 돈이 어떤 돈인데. 50만원 달랑 들고 포승에 와서 주야간 하면서 아끼고 아껴서 2년을 모은 돈인데 그걸 허망 떼울 수는 없지.” 

 

탕. 바람이 불더니 주방 쪽 창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긴다. 나는 아까 들어와서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무릎을 세우고 두손으로 종아리 쪽을 부여잡은 자세로 앉아있다. 창문을 닫으려고 일어서는데 다리가 저리다. 창살 사이로 손을 내밀고 길게 팔을 뻗어 창문을 잡아당겨 꼭 닫고 걸개를 건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 외출하면서 왜 창문은 열어놓은 걸가. 참, 오늘 아침 퇴근하고 바로 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으니 창문은 어제 아침에 퇴근해서 열어놓은 것이구나. 이게 몇시간이야. 그래서 보니 싱크대와 가스렌지 주위가 온통 부옇게 돼있다. 손으로 쓸어보니 모래가 한벌 깔려 꺼글꺼글한다. 나는 수도물을 틀어 모래가 묻은 손을 씻고 바닥의 걸레를 적셔 싱크대와 가스렌지 우를 여러번 닦아내고 내친김에 바닥까지 닦는다. 

미끌.

지나치게 손에 힘을 준 탓인가. 걸레가 미끌하면서 오른손이 앞으로 쫙 밀려나간다. 나는 서슬에 바닥에 머리를 박는다. 고개를 드는데 눈물이 솟구친다. 밀려나간 쪽 팔이 근육이 잡아당겨졌는지 아프다. 나는 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걸레를 들고 울기 시작한다. 방울방울 눈물만 흘리다가 어느 순간 소리가 나오자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좀더 크게 울기 시작한다. 이 순간, 내게 위로가 되는 건 내 자신의 울음소리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자 더욱 서러워진다. 

실컷 울고 나서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려고 일어서는데 몸이 휘청하더니 눈앞의 사물들이 빙빙 돈다. 나는 머리를 붙잡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한참 후에 간신히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밑에 다크서클은 시커멓게 나와있고 눈알이 온통 빨간 녀자 하나가 머리를 산발하고 있다. 

나는 이불을 들쓰고 누웠다가 조장한테 문자를 보내 도무지 몸이 안 좋아서 오늘 나갈 수 없을 것 같으니 하루만 청가를 주시면 안될가요. 하는 내가 봐도 간절한 문자를 보낸다. 야간근무를 시작한 일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처음 청가를 맡는 터이다. 조장은 그래. 어쩐 일이야. 안 그래도 힘들어보였어. 푹 쉬고. 래일은 특근인데 나올 수 있지? 하고 답장한다. 내 몰골이 심하게 초췌했나 보다. 

“네. 감사해요.”

나는 문자를 보내놓고 그대로 베개에 머리를 묻고 잠이 든다. 

 

5.

남편이 떠나간 슬픔에 나는 오래 머물러있을 수 없었다.

감당해야 할 현실은 비정했다.

그가 떠난 후, 내게 남긴 건 달마다 갚아나가야 하는 집 대출과 망가진 차의 할부금과 소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였다.

비정규직 유치원 교사의 월급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지출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결단을 내렸다. 아이를 친척 고모한테 맡기고 한국행을 선택했던 것이다. 

대출도 거의 갚아나가고 이제 한달 뒤에 퇴직금을 받으면 귀국하려고 계획한 터이다. 

그런데, 늘 우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나군 한다. 운명의 장난처럼.

“홍화야, 미안한데 나 미국에 있는 아들이 오라 해서 아무래도 거기 가야 될 것 같어.”

고모가 위챗으로 보내온 문자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나는 부랴부랴 고모한테 국제전화를 걸었다.

 

“고모 무슨 얘기임가? 언제 감가?”

“응, 그게 그렇게 됐구나. 성일이가 언제부터 오라고 하는 걸 차일피일 미뤘더니 이번엔 비행기표까지 보내면서 막무가내로 오라 해서 가야 될 거 같어. 7월 20일 비행기표를 아들이 보내왔네. 너 인차 오는 거지?”

“아, 예 고모. 알았슴다. 걱정 말고 가쇼. 제가 8월에 가니까 그 전에 한달 정도만 다른 사람한테 준이를 부탁하면 됨다. 예예. 고모.”

통화를 마치고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머리 속으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내 아이를 한달이 안되는 시간 동안 돌봐줄 사람을 생각해본다. 결코 퇴직금을 포기할 수는 없다. 지금의 내게 그건 마치 생명줄처럼 느껴지는 것이였다. 

엄마는 양로원에 있고 가까운 친척도 없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고아나 다름없었던 남편은 내게 의지할 만한 시댁 식구 하나도 남겨놓지 않았다. 내 삶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둥그렇게 휘여가는데 나를 도와줄 사람 하나 없다는 사실이 왜 이다지도 서러운 것인가.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선배언니한테 문자를 보낸다.

“언니. 우리 준이 한달 정도만 봐줄 수 있어요? 내가 8월 중순은 되여야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인데 준이를 봐주던 우리 고모가 미국으로 간다 해서요.”

“그래, 그냥 보내라고 그래.”

선배언니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선선히 대답한다. 한숨이 후 나온다. 

나는 다시 고모한테 전화를 한다.

“고모, 친한 언니가 맡아준다니까 그쪽으로 준이를 보내시면 될 것 같아요. 그동안 감사했슴다.”

“오 잘댔다. 안 그래도 내 얼마나 신경 쓰이고 미안한지.”

 고모도 시름이 놓이는지 말투가 명랑해져있다.

 

나는 휴대폰을 놓고 일어서서 밥솥을 열고 밥을 양푼에 푼다. 랭장고를 뒤져보지만 딱히 먹을 게 보이지 않아 후라이팬에 계란 두개를 볶다가 양푼에 담긴 밥을 넣고 몇번 뒤적거려 다시 양푼에 담는다. 나는 양념간장통과 숟가락을 한손에, 다른 한손에 양푼을 들고 텔레비죤 앞에 앉아 리모콘 버튼을 누른다. 나는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오락프로에서 멈춘다. 뚱뚱한 아줌마 하나가 남편흉을 보며 까르르 웃고 있다. 아줌마의 표정은 행복해 보인다. 나는 아줌마의 기름기 번들거리는 얼굴을 바라보며 양념간장을 발라 양푼의 밥을 크게 한숟가락 떠서 입에 넣는다. 먼저 떠넣은 밥이 채 식도로 내려도 가기 전에 다시 숟가락이 넘치게 퍼서 입에 넣는다. 양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내려다보니 양푼이 어느새 텅 비여있다. 비여진 양푼에 숟가락을 담아 싱크대에 놓고 돌아서는데 배가 심하게 불러온다. 나는 그릇에 물만 담아놓고 소화를 시키려고 빙빙 좁은 집안을 돌며 서성거린다. 

비 오는 날, 아무런 가리개도 없이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종아리께까지 푹푹 빠지는 진흙탕을 맨발로 걷는다 해도 이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지그시 감는다. 급하게 먹은 밥 때문인지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인지 가슴에 통증이 밀려와 주먹으로 탁탁 가슴을 쳐댄다.

    

6.

새벽이다. 현장 한켠에 놓인 의자에 앉아 쉬다가 나는 휴대폰에서 메모장을 펼치고 거기에 이런 말을 적는다.

 

저는 열심히 일을 했고 돈 한푼 허투루 쓰지 않았고 술 마시고 취해본 적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맹세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 적도 없습니다. 직장에서도 항상 타인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삶은 이렇듯 저한테 가혹한 겁니까?

남편을 사고로 잃었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이제 나는 내가 아글타글 모은 전세값마저도 이제 날릴 위기에 빠져있습니다. 착하게 살면 그만한 보상이 있고 복을 받는다고 하던데 저는 왜 이런 겁니까? 하느님, 부처님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께 묻습니다. 제가 대체 무엇을 잘못한 겁니까? 무엇을 잘못한 벌로 이처럼 큰 벌을 저한테 내리시는 겁니까? 저는 지금 힘듭니다. 이럴 때일수록 강해져야 하고 힘을 내야 한다는 건 알고 있고 기운을 차리고 밝아지려고 큰소리로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 때면 이름 못할 공포가 밀려오고 순간순간 이름 못할 불안이 밀려와 저를 못 견디게 합니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무너지지 않을가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면 그 때는 다시 일어서기 힘들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 내 아이가 생각나고 그 아이가 가엾어지며 눈물이 솟구치고 가슴이 갑갑합니다. 

제게 벌어진 모든 일들을 시계바늘 돌리듯 원 위치로 되돌려달라는 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을 테지요. 다만 제가 성실히 일해서 모은 돈, 저와 제 아이가 밥을 먹고 생계를 유지할 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무너질 것 같은 전세금만 돌려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리숙해서 사기에 걸려들었다는 것을요. 그 선한 눈매를 믿지 말았어야 했었다는 것을요. 다시다시 의심해보고 확인하고 건넸어야 할 돈을 너무 간단히 의심 없이 건넸다는 것을요. 그 죄를 달갑게 받아 어느 정도 감안을 할 각오까지도 되여있습니다. 그러니 삼분의 2 정도, 절반만이라도, 그만큼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게.

 

여기까지 쓰고 나는 왈칵 눈물이 나오려고 해 눈을 슴뻑인다. 4000만원을 현금으로 찾아서 핸드백에 담으면 어느 만큼 차오를가. 그것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누군들 휘청이지 않고 받아들 수 있을가. 

아무튼, 절반은 너무 억울한 것 같습니다. 했다가 나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쓴다. 

 

그래도 정 안된다면 그것만이라도 보존할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방법을 알려주세요. 

 

하고 쓴다. 요 뒤에 점 세개를 찍었다가 지우고 감탄표 세개를 찍었다가 다시 지우고 점 하나만 찍어버리고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나는 하얀 종이에 지금 휴대폰에 메모한 글들을 프린트해 길을 가는 낯선 얼굴을 붙잡고서라도 저는요, 하고 내여주고 싶다. 그 손가락이 흰 집주인 남자에게 두손으로 공손히 무릎을 꿇고 눈물이라도 한방울 뚝 떨구어 동정심을 유발하며 내민다 해도 창피할 것 같지 않다. 하다못해 길가에 서있는 나무나 새, 꽃에게라도 지금의 내 사정을 토로하고 싶다. 

하지만, 결국 나는 아무에게도 이것을 내밀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타인의 아픔에 깊이 감정이입을 할 만큼 사람들은 여유 있거나 감성적이지 않다. 챙겨야 할 자신들의 몫을 챙기며 급급히 살기에도 힘든 세상이 아닌가. 

창밖으로 푸름하게 날이 밝아온다.

나는 또 하루를 버텼다.

 

7.

자리에 누웠다가 일어나 나는 컴퓨터를 켠다. 

오래된 컴퓨터가 웅 하고 신음을 토하며 부팅되는 동안, 나는 피로로 인해 자꾸만 깔깔해나는 눈을 깜박인다.

8월 13일까지 근무를 하면 14일 아침에 퇴근할 거고 짐을 챙기고 한잠 자고 떠나면. 하고 머리 속으로 생각을 굴리며 나는 비행기표를 검색해본다. 14일은 매진이고 15일부터 표가 있다. 나는 인천-연길 하고 쳤다가 다시 인천-장춘으로 쳐봤다가 다시 인천-대련 하고 쳐본다. 인천-대련이 가장 싸지만 대련에서 연길 가는 기차표를 합산하면 연길까지 직행으로 가는 것보다 얼마 차이나지 않는다. 

인천에서 장춘은 고속렬차표 가격을 합산해보니 인천에서 연길로 가는 직행과 엇비슷하다. 나는 비행기표를 수없이 검색해보다가 컴퓨터를 끈다. 비행기표를 어느 날로 예약해야 할지 도무지 결정할 수 없다. 선배언니하고 사정얘기를 하면 며칠은 더 아이를 봐주겠지만 적어도 애가 개학 전에는 돌아가야 할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입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입안 뿐만 아니라 몸의 수분이 해볕 아래 널어놓은 데친 나물처럼 서서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수분이 빠지다가 어느 순간 나는 해볕에 잘 마른 나물처럼 쥐여보면 파삭파삭해질 것이다.

카톡방은 며칠 전의 그 뜨겁게 흥분되여 떠들던 분위기가 사그라졌다. 다들 지쳐가나 보다. 벌써 어떤 집은 집주인이 방을 빼라고 찾아와서 고성이 오고 갔다고 하고, 누구는 내 돈 너라도 내라고 집주인의 멱살을 잡았다가 경찰서로 련행이 되였다고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논밭 한가운데 박힌 돌처럼 자리를 지키고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던 결의마저 실행할 수 없는 것이 되여버리는 건가.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나니 다들 힘이 빠지는 모양이다.

“우리 집주인이 천만원을 해결해줄 테니 집을 빼달라고 하지 않겠소?”

“전세금이 얼만데?”

“4500.”

“그저 콩고물 먹고 나가 떨어져라 이건데. 절대 그렇게 하면 안되지.”

“그런데 솔직히 다른 뾰족한 수는 있는 것 같지 않소. 집주인들도 자기네가 부동산에 건물을 맡기고 관리 안한 책임이 있고 이런 줄다리기를 하기 시끄러우니까 빨리 해결하려는 거지. 그런데 받아들이기엔 너무 액수가 적고 더 요구하면 그 사람들이 너네 법 대로 해라 이럴 건데 내가 알아보니까 법 대로 하면 우린 월세로 부동산하고 계약한 거라 이 돈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오.”

“정말 여기 이 방 사람들 모두 더럽게 재수 없슴다. 한국 돈 벌러 왔다가 사기나 당하구 완전 똥 밟았슴다.”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댄다.

나는 휴대폰을 켜본다. 

그 날 이후, 주인집 남자는 련락이 없다. 부동산 업주가 잡혔다는 소식은 그도 알 것이다. 그러면서도 련락을 하지 않는다는 건 자기는 급할 게 없다는 건가? 내가 중국에 곧 들어가야 한다는 걸 그 사람은 알 수 없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나는 어이가 없어 혼자 푹 웃는다. 

그 사람은 내 사정 같은 건 어차피 관심 없을 것이다. 내가 좀더 이 집에 있는다 해도 그건 그가 넓은 아량으로 묵인하는 것일 테고 그가 손해보는 건 기껏해 얼마 안되는 월세일 것이다. 그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고 그런 사람한테 그만한 돈은 있으나 마나 할 것이였다. 급하다면 내가 급할 것이다. 그와 내가 지금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면 결국 지는 쪽은 절박한 쪽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승 원룸에 살고 있는 사람인데요.”

결국 먼저 전화를 건 쪽은 나였다.

“아, 네.”

그도 나의 전화를 기다렸던 것인가.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로 보아 그는 수화기를 바싹 귀에 대고 진지하게 나의 전화를 받으려고 자세를 잡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부동산 업주가 잡혔다고.”

“네. 정말 안타깝게 됐네요.”

그는 자신이 한 말이 진심이라는 걸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했던 걸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아시다 싶이 저한테는 그게 정말 큰돈이예요. 남편도 없고 아들애는 이제 사춘기거든요. 저는 그 돈을 가지고 아들애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나는 그러니 그 돈을 저한테 줄 수 없나요? 그러면 제가 정말 평생을 다해 은혜를 잊지 않을게요. 하고 사정하면서 그의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어보고 싶다. 그래서 되는 거라면.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잠시 숨을 고른다.

“참 사정이 딱해서 저도 집사람이랑 계속 상의하고 있는 중이예요. 갑자기 나가라고 하기는 그렇고, 다른 집을 구할 때까지는 여유를 드릴 테니까 빠른 시일 내에 다른 집을 알아보는 게 어떨가요?”

그가 나는 지극히 너그럽고 인간적이다라는 뜻을 단어 사이사이에 담아 낮으나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다.

나는 갈라터진 입술에 혀로 침을 바른다.

“아니요.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네?”

상대방은 적이 놀란 목소리이다. 이런 호의를 거절하다니? 이건 무슨 경우지? 하고 그 목소리는 말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구요? 버티고 안 나가시겠다. 뭐 이런 배짱이라도 부릴 생각이라면 명백히 그건 위법행위이며 법적인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알려드리죠.”

상대방의 목소리가 조금 전의 부드러움을 싹 거두고 말할 수 없이 근엄해진다.

“그게 아니구요. 전 아무런 보상도 없이 이렇게 나갈 수 없어요. 법정에 서야 한다면 법정에 서고 저는 잃을 게 없거든요.”

그 말을 하며 나는 검은색 비닐을 창문에 봉해 낮에도 어둑한 방안에 엉거주춤 앉아있던 자세를 고쳐 다리를 앞쪽으로 뻗고 앉는다.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앵 하고 파리 한마리가 눈앞에서 날아지나간다. 

“허참, 이게 막무가내를 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예요. 뭐라고 해야 설명이 되려나.”

그는 어이없다는듯 한숨을 푹 쉰다. 당신처럼 말이 안 통하는 사람하고 대화를 하려니 답답해서 죽겠다는 말투이다. 

뭐라고 해야 설명이 되려나라고? 나는 중국에서 조선족학교를 다녔고 한국에 와서 십년 가까운 시간을 생활한 사람이다. 한때는 문학을 한답시고 수필도 몇편 발표한 녀자다. 말귀에 어둡지도 않고 판단력이 흐리지도 않다. 그런 나를 그는 지금 형편없는 무식쟁이 취급을 하고 있다. 그렇게라도 해서 내가 지금 재수가 없어 무식한 중국인 동포 녀자 하나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걸 말하고 싶은가 보다. 

아무런 결정이 없는 통화를 끝내고 나는 한참을 멍해 앉아있다가 일어섰다. 

세수를 하고 집정리를 하고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추려본다. 그동안 물건을 사지 않았고 옷도 작업복만 입고 사지 않았던 터라 옷걸이에 걸린 옷을 쳐다봐도 트렁크 한 귀퉁이 밖에 차지하지 않을 것 같다. 그것들을 뒤적여보자 중국까지 갖고 가서 입을 만한 옷은 별로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몇개는 남겨두기로 하고 비닐봉투에 담는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구석구석 보이는 대로 버릴 것들을 끄집어낸다. 나는 집 아래로 내려가 헌옷 수거함에 옷을 넣고 잡동사니들을 담은 쓰레기 봉투를 쓰레기장에 놓고 돌아온다.

어둑한 방안이 갑갑해 베란다 문을 한쪽으로 밀어 열어놓고 젖은 걸레로 바닥을 꼼꼼히 닦다가 와락와락 베란다에 붙여놓았던 비닐을 뜯어낸다. 공처럼 둘둘 비닐을 말아 출입문 쪽에 놓고 돌아서니 해빛이 무더기로 들어와있다. 방이 이처럼 환해본 적 없었던 것 같다. 기운을 빼서 그런지 잠이 몰려온다. 나는 금방 비닐을 떼여버린 베란다 창문에 뿌옇게 달라붙어있는 먼지를 바라보면서 금방 전에 개켰던 이불을 다시 펴서 덮고 누워버린다. 이내 까무룩 잠이 든다.

 

8.

카톡.

“언제 중국에 돌아가요?”

카톡소리에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오래 전 문학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하던 선배가 문자를 보내왔다. 

“글쎄요. 이달 중순 쯤?”

“그러면 가기 전에 봐야죠. 시간 내봐요. 내가 그 시간 맞출 테니. 주말이면 좋겠지만 주말 아니라도 괜찮아요. 한달에 하루는 월차를 쓸 수 있으니까.”

말은 고맙지만 내가 지금 누구 환송식을 받으며 비행기를 탈 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걸 이 사람은 죽어도 모를 것이다. 이처럼 모든 일이 실타래처럼 꼬여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목을 조여오는 압박감에 가슴을 치는 내 사정을 그는 짐작조차 못할 것이였다.

“네, 고맙지만 시간이 안될 것 같아요.”

“에이, 비싸게 군다. 가기 전에 안 보면 언제 또 보게요? 그러지 말고 시간 좀 내봐요. 스케줄이 무지하게 빡빡한 게 아니라면.”

“네.”

나는 그와 더이상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그냥 네 라고 대답한다. 

“진작에 이렇게 시원하게 대답을 해야지. 그럼 기다릴게요.”

나는 휴대폰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내려놓는다. 

 

“준이 왔어.”

“아.”

나는 안도의 탄식을 한다. 

“언니 그럼 잘 부탁해요.”

“아니야. 뭘 부탁하고 말고 할 게 있어. 어린애도 아니고 자기가 알아서 밥 차려놓으면 먹고 공부하고 놀고 하는데. 걱정하지 마.”

     

“네 언니. 고마워요.”

후 한숨이 나온다.

     

“야간근무를 하신다고 하셨죠? 래일 아침 집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집주인이다. 

드디여 그도 나와의 줄다리기를 끝내고 싶은 것일가. 나는 잠간 생각에 잠긴다. 

“언니, 밥 먹다 말고 뭘 그리 휴대폰을 보며 넋을 놓고 있어요?”

“엉?”

그러고 보니 나는 아까부터 숟가락만 들고 있은 것일가. 밥과 반찬은 담아온 그대로 있다. 민망한 마음에 한숟가락 퍼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넘기려니 체할 것 같다. 나는 식판을 들고 일어선다.

“언니 일하는 사람이 밥을 안 먹고 어떻게 일해요? 언니 요새 무슨 일 있어요? 얼굴색도 안 좋고 멍때리고 있을 때가 많고. 언니 왜 그래요?”

“응. 아니 그냥 피곤해서.”

“언니, 그러니까 그냥 주야간 해요. 야간 자체가 안 좋긴 하지만 그나마 주간 야간 번갈아가면서 하는 게 낫지 언니처럼 야간만 하면 몸이 절단나요. 언니 그러다가 아프면 어쩌려구.”

현매가 울상을 한다.

“그래.”

나는 입꼬리를 올려 억지로 현매에게 웃어보이고 돌아선다.

 

 9.

“그러니까 나도 당한 거고 서로 사기당한 거 아닙니까. 이달 내로 집을 빼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낮으나 힘있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한다.

나는 운동화 앞코를 내려다본다. 밤새 뛰여다니며 일한 터라 운동화 앞코가 뽀얗게 먼지가 묻어있다. 여름이지만 회사에 가서 신발을 갈아신어야 하는 게 귀찮아 이 여름 내내 나는 샌들을 신어본 적 없다. 아니, 나는 샌들을 갖고 있지도 않다. 

이제는 나도 타협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1500만원을 보상해주시면 15일까지 집을 뺄게요.”

“1500만원이요? 허허 참.”

어이없다는듯 그가 허구픈 웃음을 웃는다.

“집 빼고 문자 주세요. 머리 아픈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머리 아픈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의 뒤말을 한번 곱씹어본다. 이로써 우리의 줄다리기는 끝나고 이 일은 결론이 난 건가. 그가 돌아서더니 승용차 문을 열고 몸을 들이민다. 금방 세차를 한듯 깨끗한 흰색의 승용차 안에서 그는 단단히 핸들을 잡고 정면을 바라보며 태연히 나를 스쳐 지나간다. 

 

천오백이란 돈을 오만원권으로 바꾸면 부피가 얼마나 될가. 기껏해야 핸드백 밑바닥에 들어갈 만한 돈일 것이다. 일센치가 채 안되는 두께로 해서 세다발일 테니까 말이다. 

갑자기 달달한 쵸콜릿이며 과자를 종류별로 사다가 방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끝없이 먹고 싶다. 

나는 집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한고패 집을 휘 둘러본다. 며칠 후면 이 집을 떠난다는 사실이 아직은 낯설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비행기표를 검색해본다. 15일은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비싸다. 나는 십만원 정도 저렴한 16일 오후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주인집 남자에게 16일 날 새벽에 집을 나가겠습니다. 하고 문자를 보낸다. 알았어요. 간단하게 남자가 답장한다.

 

13일까지만 근무를 할게요. 야간근무로 회사에 출근해서 곧바로 과장한테 얘기를 하자 과장은 놀랍지도 않다는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참 성실하게 잘하셨는데 간다니 아쉽습니다. 그 날까지 출근하시고 사직서를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오시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판에 박힌듯한 인사말을 하는 과장한테 나는 고개를 숙여보이고 일하러 들어간다. 딱 일년이 되기를 기다려 사직하는 직원한테 그래도 웃어보이는 과장이 고맙다.

일을 하는 사이, 벌써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현매와 몇몇 동료들이 언니 그만둔다며? 이제 안와요? 하며 확인하러 왔다 간다. 

이제 드디여 가는 것인가.

그 생각을 하자 어쩐지 서글퍼진다.

아들애와 함께 있을 날을 바라고 악을 쓰고 버텨온 시간에 나는 아들애와 함께 있지 못했다. 이제 모든 것이 나한테서 등을 돌리자 비로소 아들애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라니.  

16일 오후 비행기라면 14일 퇴근해서 하루 반 동안의 시간이 남는다. 짐은 더이상 챙길 것도 없다. 그릇은 종이박스에 담아 내놓으면 될 것이다. 입던 옷가지와 아들애의 선물 그리고 선배언니의 아들애한테 선물로 옷이나 사가지고 가면 될 것이였다. 휴대폰은 필요하니까 계속 사용하다가 16일 오전에 공항뻐스 타러 가면서 해지하면 될 것이다.

끝내는 일이 이렇게 간단하다니. 나는 어쩐지 뭔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15일 날 시간 될 것 같아요.”

나는 쉬는 시간에 카톡으로 선배한테 그렇게 문자를 보낸다. 

 

10.

“이 코스로 갈가? 아니면 저 코스로 갈가?”

두갈래의 길에서 선배는 멈추고 나에게 묻는다. 나는 잠간 망설이다가 시간이 좀 덜 걸릴 것 같은 코스를 가리킨다. 

한여름의 산길은 숨이 턱턱 막힌다. 길옆 량쪽으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야산에는 듬성듬성 커다란 나무들이 퍼렇게 잎들을 드리우고 있고 풀들은 종아리가 넘게 자라있다. 오래동안 보수를 하지 않은듯 길은 중간중간 비가 내릴 때 패인 걸로 보이는 홈이 나있다. 

선배는 나와 비스듬히 경사진 위치에서 일메터 쯤 앞에 서서 말없이 길을 오르고 있다. 운동화를 신고 곤색의 등산용 바지를 입고 땀이 잘 스며드는 스포츠 브랜드의 티를 입고 산을 오르는 그의 뒤모습을 바라본다. 땀이 배여나와 티가 등에 찰싹 달라붙어 어깨라인이 유표하게 드러난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숨을 쉬듯 움직이는 등쪽 근육에 눈을 빼앗기다 내가 너무 자세하게 그의 뒤모습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민망해져 얼른 눈길을 거둔다.

운동화는 신었지만 이런 등산길에 오르면서 검은 정장바지에 푸른색의 긴팔셔츠는 왜 입었을가. 타인에게서 눈을 거두면 내가 보이는 법이다. 나는 내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못마땅해 눈살이 찌프려진다. 

“이렇게 걸으니 참 좋다.”

한참 걸어가던 선배가 뚝 멈춰서더니 돌아보며 웃는다. 나도 웃어보이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다. 내가 걸어서 그가 서있는 곳 가까이 다다르자 그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 

나는 금방 전 그가 돌아섰을 때, 이마에 해살이 비춰 배여나온 땀방울이 반짝거리던 걸 떠올린다. 그전에도 느꼈지만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그에 대해 자세히는 모른다. 다만 몇번 만났던 짧은 만남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누구나와 잘 어울리고 론쟁보다는 침묵할 줄 알며 타인에 대한 사소한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소문으로 그가 리혼을 하고 혼자 산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 그런 사람이 왜?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가 다시 누구를 사귄다거나 결혼을 한다거나 하는 소문은 들리지 않았다. 그도 소문으로 나의 사생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보여지는 것만으로 판단을 한다면 그는 리혼하고 혼자 외롭게 살 아무런 리유가 없는 사람이다. 물론 혼자가 꼭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세상의 기준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그럼 나는 어떠한가. 타인이 보기에 나는 남편을 잃고 숨이 턱턱 막히는 산을 오르기보다 더 힘들고 가파로운 삶을 살아야 할 녀자로 보이는 것일가.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한쌍의 남녀가 이 자글자글 끓어번지는 8월에 손을 꼭 잡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산을 올라오고 있다. 나와 선배가 거의 동시에 한켠으로 비켜섰다. 마치 중간자리는 그들한테 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선배도 나도 순간적으로 한 것일가.

알통이 야성적으로 툭 튀여나온 다리를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로 드러내고 흰 면티를 입고 벙거지 모양의 모자를 쓴 남자가 흰 다리를 시원하게 드러낸 겨자색 반바지에 하얀색의 팔랑거리는 블라우스를 시원하게 차려입고 채양이 넓은 모자를 쓴 녀자를 끌다 싶이 하며 오르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량쪽으로 비켜서자 당당하게 중앙으로 해서 올라간다. 그들이 저 앞에 작은 그림자로 보일 때까지 우리는 말없이 서있다가 다시 길을 오른다. 어쩐지 기운이 빠진다. 

     

산 중간 쯤까지 오르자 아이스크림과 커피와 물이며를 파는 행상들이 길에 줄느런히 서있다. 선배는 멈춰서서 “우리 뭐 먹을래요?” 하고 아까 산에 오를 때처럼 묻는다.

차거운 걸 잘 먹지 않아 어떤 해에는 일년이 다 가도록 아이스크림 하나 먹지 않고 보낸 여름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아이스크림을 가리킨다. 녹두로 만든 아이스크림 두개를 꺼내들자 선배가 돈을 꺼내 값을 치른다. 

땀을 흠뻑 흘리며 산을 오르다가 먹는 아이스크림은 무척 맛있다. 나는 빠르게 뭉텅뭉텅 물어뜯어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이것도 안 먹고 여름을 보냈었다니. 뭔가 억울해진다. 

지금 쯤 준이는 뭘 할가.  

엊그제 선배언니한테 전화를 했더니 어른이 걱정해서 그렇지 아이들은 어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복잡하지도 여리지도 않어. 이것아. 니 걱정이나 하고 잘 오기나 해. 라고 했었다. 

선배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내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기를 기다려 손을 내밀어 아이스크림 포장지와 막대기를 달라고 암시한다. 내가 다 먹은 포장지와 막대기를 내밀자 성큼성큼 도로변에 놓인 쓰레기통에 그것을 버리고 자, 이제 시원하게 먹었으니 다시 기운 내서 올라가볼가, 하면서 웃는다.

다시 걷는데 한결 걸음이 가볍다. 나는 선배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와 내가 결혼해서 살아온 시간 동안 이렇게 아이스크림 한번 나눠먹어본 적 없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 이렇게 눈을 마주치고 아이스크림을 나눠먹으며 서로를 향해 웃어주기라도 했다면,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와 포장지를 건네받고 건네주면서 살았더라면 그를 보내고 덜 아팠을가. 알 수 없다. 나는 머리를 흔든다.

락화암.

삼천 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락화암에 이르자 선배가 가파른 언덕 우로 올라가더니 돌아서서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나는 그 손을 물리치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 같아 잡는다. 선배가 힘껏 당기자 내 몸이 그 힘에 의해 가볍게 올라간다. 돌아서서 자세를 잡고 내려다보니 넓은 백마강이 한눈에 보이고 산자락과 저 멀리 도시가 발 아래 놓여있다. 

“참, 근데 이거 삼천 궁녀가 아니고 서른명의 궁녀도 온전히 서있기 힘들겠는데?”

선배가 웃으며 말한다.

“그러게요.”

바위는 선배 말대로 어른 서른명이 빼곡이 서있기도 힘들 만큼 작다. 

“하긴 뭐 그래서 전설이 있는 거겠지?”

“아마두요.”

 

“야호.”

선배가 소리지른다. 

메아리가 멀리까지 퍼진다. 그 울림이 내 마음에 스며든다. 

바람에 잔등의 땀이 식어가는 걸 느끼며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힘들었던 건 잊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알바트로스.”

“네?”

나는 선배의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돌린다. 

“그런 새가 있대.”

선배가 앞을 바라보며 말한다.

“평소에는 바보처럼 뒤뚱거리며 날개조차 잘 펴지 못하는 새가 있대. 그러다가 폭풍이 오면 센 바람 때문에 날지 못하는 다른 새들과는 달리 이 새는 큰 날개를 리용해 바람을 타고 그 어느 새보다도 멋지게 힘차게 날아간대. 한번 날아오르기 시작하면 한동안 내려오지도 않는다나. 하늘높이 날아 태평양도 건너가는 새. 가장 높이,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오래 나는 새야. 알바트로스라는 이름의 새. 언젠가 내가 힘들었을 때 우연히 이 새의 사진을 보게 됐지. 그리고 무심히 그 아래에 적힌 글들을 읽었어. 그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그것이 내가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 데 정신적으로 큰 도움이 되였던 것 같아.”

그렇게 말하고 나를 돌아보며 선배는 웃는다.

“멋있지 않아? 알바트로스.”

“아. 참 그러네요. 멋있네.”

나는 잠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락화암에서 내려와 려행객 답게 한모금에 삼년 젊어진다는 물을 한모금씩 마시고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을 건너왔다. 백마강의 물은 가까이에서 보니 진흙을 풀어놓은 것 같이 흐리고 팔뚝 만한 잉어들이 떼를 지어 헤염쳐 다닌다. 지나치게 크고 살쪄있는 잉어는 살아있는 물고기보다는 숨만 팔딱이도록 만들어놓은 모조품 같이 느껴진다.

유람선에서 내려 백마강을 뒤로 하고 걸어가는데 고작 한시간이 조금 넘는 코스를 돌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디 먼곳으로 려행을 갔다가 온 기분이다. 

“음료수나 한잔씩 마실가.”

주차장으로 가던 길옆에 슈퍼가 보이자 선배가 들어간다. 그가 음료수 두병을 꺼내 나에게 한병 내민다. 

“막걸리는 안 사? 공주 막걸리가 유명한데. 공주에 오면 꼭 막걸리는 마셔봐야 한다고 하잖아.”

나이 지긋한 주인할머니가 웃으며 막걸리를 들어보인다. 

“우린 술을 안 마셔서.”

나는 주인할머니가 무작정 손님을 붙잡고 매상을 올리려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한다.

“본인들이 안 마시면 선물이라도 하지 그래? 장모님도 드리고 시어머님도 드리고.”

순간적으로 민망해진다. 나란히 들어오는 나이 비슷해 보이는 남녀를 보며 할머니는 아마도 부부일 것이라고 추측을 한 건가 보다.

“하하.”

선배가 마구 웃더니 그럼 주세요. 하고 막걸리를 받아들고 돈을 낸다.

슈퍼에서 나와 콩국수를 한그릇씩 나눠먹는다. 콩국수는 콩을 적당히 삶은듯 비리지 않고 맛있다. 

“이따가 저녁에 막걸리나 마시지?”

콩국수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 물을 마시며 선배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린다.

아까 산에 있을 때까지는 말짱했는데 배가 부르면서 피곤이 몰려온다.

 

“여기서 역전까지 거리가 얼마나 돼요?”

“왜 지금 가게?”

식당에서 나와 한참 말없이 걷던 중이였다. 선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직 하늘 중간 쯤에서 조금 기운 해를 올려다보았다.

“네. 가서 준비도 하고 그래야죠. 래일 가야 하는데.”

“뭘 그리 준비할 게 많다고 그래.”

하더니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가며 말한다.

“역전까지 태워다 줄게.”

     

“난 이제 여기서 정착하고 살 생각이야. 살다 보니 여기가 좋아졌어.”

신호를 기다리는데 선배가 말한다.

“네.”

“가면 몸부터 추스르고 좋은 생각 많이 하고 그래.”

나는 차안을 둘러본다. 낡았지만 차안은 깨끗하게 정돈이 되여있다.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그런 생각을 한다.

렬차에 올라 좌석에 앉아 내다보니 그 때까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라니. 나는 차창으로 손을 흔들어보인다. 그제야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이고 그는 돌아선다.

렬차가 달린다. 

차창 너머로 나무가 지나가고 건물들이 지나가고 한순간 창밖이 어두워진다. 어두운 턴넬을 지나자 뜻밖에 한무더기의 꽃들이 무더기로 차창 너머로 달려온다. 그것이 끝인가 했는데 계속해서 꽃밭은 이어진다. 빨갛고 노란 꽃은 언뜻언뜻 스쳐지나는 바람에 무슨 꽃인지 알 수 없지만 무척이나 이쁘다. 그러고 보니 올여름 꽃을 본 게 처음이다. 진작에 피여있었을 터인데 나는 보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였다. 

카톡 소리가 나서 보니 선배가 사진을 좌라락 한꺼번에 보내왔다. 사진을 찍는다는 소리를 안하고 셔터를 눌러대길래 풍경만 찍는 줄 알았는데 내 뒤모습이며 옆모습을 찍은 사진이 여러장이다. 나는 사진들을 하나하나 눌러 저장하고 메모장을 클릭한다. 

그 때 그 때의 심경을 적은 몇줄의 고백 비슷한 게 있고 회사에 들어가 일하면서 작업에 관한 것들을 적은 메모가 있고 그 새벽에 나무와 풀에게라도 토로하고 싶었던 메모가 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클릭해 다시 읽어본다. 복잡하고 미묘한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나는 그것들을 한꺼번에 삭제해버리고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는다.

          

11.

현금인출기 앞에 서서 카드를 넣고 잔액조회를 누른다. 엥?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다시 들여다본다. 500만원. 다시 들여다봐도 앞에 1은 보이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열기가 발가락부터 정수리까지 확 올라온다. 카드를 뺐다가 다시 넣고 잔액조회를 해보지만 500만원이다. 힐끔 돌아보니 뒤에 벌써 여러 사람이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식은땀이 등골로 흐른다. 나는 카드를 뽑아 손에 들고 인출기 앞에서 물러난다. 기다렸다는듯 뒤쪽에 커다란 배낭을 멘 남자가 얼른 인출기 앞에 다가서고 뒤쪽에 있던 사람들이 한발씩 앞으로 다가간다. 나는 자리를 찾아 앉는다. 

휴대폰을 꺼낸다. 번호를 해지했으나 와이파이를 련결하자 카톡 문자는 뜬다. 나는 화면에 떠있는 여러개의 카톡 문자를 무시하고 주인집 남자와의 대화기록을 클릭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아침에 집을 나오면서 남긴 문자가 있고 그 아래 분명히 오분 쯤 간격을 두고 네. 하고 답장이 되여있다. 아까 휴대폰을 해지하기 직전에도 확인했던 문자이다. 

네. 라는 대답은 알았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1500만원을 입금해준다는 뜻으로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500만원이라니.

나는 입금을 잘못하신 것 같은데요. 하고 썼다가 500만원 밖에 안 들어왔는데요. 하고 썼다가 다시 지우고 1500만원 주시기로 한 거 아닌가요? 하고 보내놓는다. 

“그 돈도 하도 사정이 딱해서 드린 겁니다. 참. 욕심도.”

한참이 지나 문자가 뜬다. 욕심도 라니. 그럼 내가 과분한 욕심이라도 부리고 있다는 것인가. 

“더이상 문자하지 마세요. 한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는 것 같아 알려드립니다. 전세 계약은 댁이 부동산 사장하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댁과 부동산 사장과의 일이지 저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전 부동산 사장과 제대로 된 위임절차를 거쳤고 거기에 대한 서류를 완벽하게 갖고 있어요. 그 쪽 사정이야 어찌됐건 전 보증금 200만원을 받고 월세를 놓은 거라구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500만원은 하도 그 쪽이 딱해보여서 드린 거예요. 고맙게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무슨 말인지 제 말뜻 리해하시겠어요?”

나는 흠잡을 데 없는 그의 문자를 여러번 읽어본다. 짧지만 요점을 확실하게 말하고 있는 문자는 나와 전세사기방 모든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확실하게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그렇다. 사기를 당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였는데 어째서 나와 전세사기방의 교포들은 량쪽 다 피해자라고 생각을 했던 것인가. 다시 그와 나와의 대화내용을 떠올려보니 그는 내게 돈을 준다고 한 적 없다. 나절로 그가 나한테 돈을 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정지었고 그걸 믿었던 것 뿐이였다. 나는 망연해진다. 모든 것이 명백해지자 갑자기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다. 

머리가 어질어질해 주위를 둘러본다. 사람들은 태연하게 앉아서 휴대폰을 보거나 생기발랄하게 트렁크를 밀고 배낭을 메고 움직이고 있다. 난 이렇게 숨 막히고 더운데 왜 그들은 저토록 태연한 거지? 나는 더위를 먹은듯 어질거리는 머리가 공항 안의 온도 때문이 아니라 내 속의 열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로 한다. 속이 메슥거리며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아 명치끝을 꼭꼭 누른다.

다른 카톡 대화창을 클릭해본다. 

잘 가. 가서 련락하고. 다시 한번 부탁하지만 꼭 건강해야 돼.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마. 

선배의 문자다.

그 다음 몇개의 문자는 회사의 동료들과 친구들이 잘 가라고 보내온 문자이다. 

나는 전세사기방 대화창을 클릭해본다.

“집주인들이 돈을 내놓으면서 합의하자고 한다는 소문이 있슴다. 어찌 보면 이게 최선인 것 같기두 하구… 그런데 절대 쉽게 합의하면 안됨다. 모두 단합해서 가격을 올리기쇼. 여기서라도 버텨야 됨다. 아이 그렇슴가?”

“그럼. 합의할 때 서로 토론하고 하기쇼. 이 방에는 배신하는 사람이 없겠지에?”

“동의.”

동의. 동의. 

나는 그 대화들을 내리 읽어보다가 삭제버튼을 누르고 그 방을 나와버린다. 이제 내 휴대폰 화면에서 전세사기방이라는 채팅방은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인출기 앞에 선다. 이번에 나는 망설임 없이 출금버튼을 클릭한다. 촤르르르. 돈 세는 소리가 들리고 덜컹. 인출기의 현금이 나오는 검은 뚜껑이 열린다. 나는 돈을 한번에 손에 거머쥔다. 한손에 잡히는 얇은 부피에 가슴이 아리다. 가방 안쪽 칸에 깊숙이 돈을 집어넣고 쪼르로기를 닫는다.

출국절차를 다 마치고 면세점들을 지나쳐 항공권에 명시된 게이트가 보이는 곳에 놓인 걸상에 앉는다. 이제 저 문을 통과해나가면 그로써 이곳에서의 모든 것은 지워지고 나는 그 곳에서 새롭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새로운 전화번호를 만들고 아들애와 둘이서만 사는 새로운 삶에 적응해나가야 할 것이다. 

살아갈 날들에 대한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 

조용히 앉아 게이트를 바라보노라니 내가 바람 부는 벌판에 초라한 치마자락 펄럭이며 혼자 서있는데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입고 있는 치마가 펄럭이다 갈기갈기 찢기는듯한 느낌이 든다. 

어제밤, 선배는 그 막걸리를 마셨을가? 

“탑승수속을 시작하겠습니다. 연길로 가는 CZ2088 항공편 탑승수속이 곧 시작되오니…”

나는 안내방송을 들으며 가방에서 려권과 티켓을 꺼내 손에 들고 다른 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몇사람 서있는 줄에 합류한다. 뒤로 사람들이 하나 둘 줄을 서기 시작한다. 

 

“려권 주시겠습니까. 네에.”

내가 내민 려권과 티켓을 스캔하듯 쓸어보고 다시 나에게 내미는 손가락은 너무 가늘고 희다.

나는 성큼성큼 저 앞에 커다란 식인꽃처럼 사람을 빨아들이는 비행기 탑승구를 바라보며 걸어간다.

알바트로스. 

평소에는 날개도 제대로 펴지 못하다가 폭풍우가 오면 오히려 그 폭풍우에 몸을 맡기고 힘차게 날아오른다는 그 새. 그 새를 날게 하는 힘이 궁금하다. 

나는 슬쩍 겨드랑이를 만져본다. 

내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돋혀있는 대신 땀이 배여나와 축축한데 철판 우를 걸어가는 내 발자국 소리만이 내 귀에 들리고 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탑승구를 향해 허리를 꼿꼿이 펴고 힘차게 걸어간다. 

탕탕탕. 발자국 소리가 요란도 하다.

출처:<장백산>2018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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