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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 문학비평용어
2015년 08월 22일 20시 15분  조회:6516  추천:0  작성자: 죽림
 

 

권택영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더니즘의 반발인가, 연장인가, 모더니즘과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외래용어는 우리 문화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한 세기의 마감을 앞에 두고 요즈음 이런 질문들이 오가는 것은 아마도 20세기의 후반부를 지배한 다른 나라의 문화현상을 진단하고 그것이 우리 문화와 갖는 관련성을 되돌아보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 시대의 문화현상은 늘 당대의 역사적 현실과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앞서간 시대와 어떤 식으로든지 관련을 맺는다. 그것은 기존의 사고체계나, 미학의 방식이 더 이상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은 경우 실험의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아방가드는 일어나는 당시에는 아무리 새롭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전통의 일부로 수렴되고 마는 운명이어서 그것이 반발인가 연장인가의 문제는 그리 단순히 어느 쪽만을 택할 수 없게 한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한 어느 비평가의 이론도 그것이 발표되던 시기, 그 사람이 처한 환경, 의도 등을 고려하여 평가해야 할 문제이지 그 이론 자체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론만큼 매력적이면서도 자의적이고 손안에 든 미꾸라지처럼 틈새만 있으면 빠져나가려 드는 게 어디 있는가. 가장 명확하게 어떤 현상을 가늠하면서도 제 스스로 무너질 수 있는 맹점을 지닌 것이 이론의 운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반발인가, 연장인가를 따지기 전에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부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고 용어도 미국의 것이지만 그 현상은 영국, 불란서, 남미 등 모더니즘보다 오히려 더 주변국가들과 관계를 맺고 있고 제3세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된다. 분야에 있어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모습을 드러낸 건축양식으로부터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무용 등 문화 전반에 골고루 퍼진 문화양식이다. 그리고 이런 양식의 저변에 흐르는 철학이나 비평이론들은 당대의 정치와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주변적인 것의 귀환, 절대이념의 와해, 개성의 중시, 논리의 다원화, 다국적 기업, 소수민족운동, 여성운동, 소유로부터의 탈출 등, 애초에는 소설양식에서의 새로움을 표현했던 용어는 이제 반세기의 문화 전반을 상징하는 것으로 확대된 느낌이다. 그러나 커다란 흐름에서는 공통점이 있는듯하면서도 분야마다 차이를 갖기 때문에 이 새로움에 대한 접근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80년대 논의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나의 큰 덩어리처럼 놓고 너무 쉽사리 이렇쿵 저렇쿵 요리를 해댄다. 예를 들어 최근의 맑시스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사회의 문화논리로 보고 상품사회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순응함으로써 정치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들의 논의에도 일리는 있으나 이것은 분야별로 시대별로 좀 더 세분되어 따져야 할 문제이다. 인간성의 해방과 열린 공간, 상상력의 확대, 안락과 미의 추구, 원시적인 환경으로의 복귀를 위해 60년대 중반부터 분산화를 시도한 건축운동이 본이 아니게 상업주의를 부추겨 결국 인간을 더욱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나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또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려는 문화의 대중화가 자본시장의 구매충동과 영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적인 팝아트와 난해함으로 읽히지 않던 메타픽션은 구별되어야 하고 반세기의 흐름 안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개별영역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차이가 무시된 채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학형식의 구체적인 얘기 무시된 채 포스트모더니즘이 옳다 그르다는 이론적인 논쟁은 이해보다는 오해를 낳기 쉽다.

이 글은 문학의 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일어난 시기, 변해 오는 과정, 형식상의 특징 들을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는 가운데 모더니즘과의 차이점 및 공통점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최근의 논쟁들을 요약하고 그 의미를 간추려 본다. 한 시대의 미학이론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세워진다. 그것은 이미 정설이 되어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를 억누르는 기존의 사유체계에 대한 반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에서 출발하기에 마감의 시점에서 보면 기존의 연장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반발인가 연장인가는 경계선을 어디로 잡을 것이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이렇듯 얼핏 쉬워 보이는 가름이면서도 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에 유독 논쟁이 야기되는지 둘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드러내 보고 싶은 게 이 글의 목적이기도 하다.

 

1. 흐름

 

약 한 세기 전, 그러니까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 오면서 있는 사실을 그대로 그리자던 사실주의 문학은 점점 자연주의적 색채를 띠고 세기의 문지방을 넘는다. 다원의 진화론, 부흥하는 상업주의, 게다가 실험대에 올려놓은 듯 인간을 냉정히 관찰하려던 실증주의적 태도는 어느덧 인간을 환경과 유전의 산물로 보게 된다. 인간을 자세히 관찰해 보니 그렇게 내재된 자유의지도 고상한 상상력도 없다. 바람 속의 지푸라기나 햇빛을 맞는 향일성 식물처럼 본능과 환경을 좇아 움직인다. 이처럼 자연주의 문학은 어두운 인간의 속성을 냉정히 파고들어 설득력 있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계를 맞게 된다. 인간이 언제까지나 동물과 같은 차원에 머무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 더 이상 내려설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객체에 대한 냉혹한 시선을 거두고 주체의 진실로 접근해 보자. 진실을 보는 각도를 바꾸는 것이다. 비평가 노드롭 프라이는 19세기 사실주의와 20세기 모더니즘을 객체의 진실과 주체의 진실에 접근하는 두 가지 다른 방향의 미학이론으로 본다(『비평의 해부』). 어떻게 하면 대상을 더 정확히 그리느냐는 객체의 진실이고 그 진실이 얼마나 주관적인가를 그리는 것은 주체의 진실이다. 인간을 객관대상으로 본 자연주의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향전환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주는 한층 더 혼동을 향해 나갔기 때문에 그것은 반발이면서도 동시에 연장이었다.

 

모더니즘 : 그 혁명성과 보수성

20세기초에 일어난 철학, 미학, 언어학의 공통점은 인간을 객관대상이 아닌 구조하는 주체로 보는 거이었다. 이런 현상은 이미 상징주의, 후기 인상파, 표현주의 등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대략 1910년대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910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상징주의에 반발하고 작품의 내용보다 형식을 우선시킴으로써 낯익은 것이 내리는 명령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말의 의미, 혹은 내용이라는 이념이 내리는 명령을 벗어나 한 단계씩 형식을 감상하면서 나름대로 의미를 엮는 것이다. 그러므로 낯설게 하기는 객체의 진실보다 인식주체의 경험을 우선시키는 미학이론이다. 191년대 중반 언어학의 소쉬르는 일반 언어코스의 강의노트에서 언어연구를 빠롤과 랑그로 구분한다. 지금까지는 언어의 역사적 측면, 혹은 의미의 측면을 연구해 왔으니 이제 그 언어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의미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들추어 보자는 거다. 이것은 언어를 의미 그자체로 본 것에서 자의적인 구조체계로 보는 방향전환이었다. 말하자면 매끄럽게 보이는 온갖 진리와 정설의 겉자락을 들추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봄으로써 진실의 자의성, 혹은 주관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언어는 한 언어조직내에서 다름(차이)에 의해의미를 갖는 자의적 구조라는 정의는 온갖 매끄러운 개념이나 논리 속에 내재된 상대적 구조를 암시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절대저인 것처럼 보이는 문화현상 뒤의 숨은 보편구조를 밝혔고 토도로프는 개별작품 속에 숨은 보편구조를 찾았다. 이처럼 빠롤이 아닌 랑그 찾기는 진리의 절대성으로부터 주관성으로, 진리의 닫힌 체계로부터 열린 체계로의 전환이었다. 본질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는 실존주의, 주관에 비친 진실을 그리던 입체파, 로고스, 즉 신은 죽었다는 니체, 개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인식 주체의 주관적인 경험에 가치를 둔 현상학 등, 20세기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구조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실천이라도 하는 듯 시작된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분야가 물리학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인간 인식의 망에 포착되는 진리란 객관적이거나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회의론의 출발이었다. 비평가 맬컴 브래드버리 Malcolm Bradbury는 모더니즘을 앞 시대와의 결벌 같은 것으로 본다.1) 파편성, 당혹성, 해석의 주관성, 다양화, 예술지상주의, 구조찾기, 기교중심주의, 회의주의, 불확실성의 논리, 무질서, 절망, 무정부적, 중심와해 등등. 그가 열거하는 모더니즘의 특징들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 서구 전지역을 휩쓸던 거의 혁명적이다시피 하게 일어난 새로움들이다. 그런데 그의 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다양성, 주관성, 허구성, 중심와해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과 다를 바 없는 어휘들이 튀어나온다. 말이 갖는 추상성 탓이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구별을 위해 실제 작품의 예를 들어 모더니즘의 특징을 살펴보자.

비평가들은 흔히 모더니즘의 최고 절정기간을 191년에서 30년 사이로 꼽는다. 미국에서는 시에서의 이미지즘운동과 파운드, 엘리어트, 그리고 거투르 스타인에게서 기법을 배운 헤밍웨이의  초기소설들로부터 시작되어 스티븐즈와 포크너에 이르러 절정을 맞는다. 영국에서는 조이스와 울프, 불란서에서는 프루스트와  지드가 전통적인 사실주의의 매끄러움을 와해시킨다. 흔히 모더니즘을 전통에 반기를 든 혁신운동으로 보는 비평가들 가운데는 브래드버리나 제랄드 그라프 Gerald Graff처럼 이를 낭만주의와 쉽사리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미지즘운동이나 엘리어트의 객관상관물이론은 앞시대의 낭만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일어났다. 파운드나 엘리어트가 실어한 것은 무엇보다도 감정이 축축한 직설적 표현, 그리고 개성을 알알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감정의 몰입(롱기네스의 낭만주의 전통인 엑스타시)을 싫어하고 감정의 거리두기(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주의 전통인 카타르시스)를 원했던 것이 모더니즘이고 보면 그것은 묘하게도 진리의 절대성을 거부하는 혁명성 속에 고전적인 질서찾기를 담고 있는 이중적인 것이다. 엘리어트는 전통 속에 시인의 개성을 용해시켜 보편질서를 찾았고 헤밍웨이는 자신에게 보이는 용기에서 출발하여 사회정의로 나갈 것을 원했으며 스티븐즈는 우주의 무질서 속에서 상상력, 오직 예술만이 지서를 내린다고 믿었다. 이들은 모두 혼돈의 우주, 신의 죽음, 객관진리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여 논리와 이념 대신 개인이 도덕과 단련을 중시했다. 그들의 역사의식은 직접 사회를 향하지 않고 개인을 통해 나가려는 우회적인 것이었다. 감정몰입이 아닌 거리두기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이다.

개인이 사회를 떠나고 개인의 상상력이 중시되고 예술의 세계로 도피하고 기법에 탐닉하고 게다가 진리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게 얼핏 낭만주의의 한 갈래인 것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단련과 질서찾기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마치 구조주의가 모든 정설이나 매끄러운 논리가 어떻게 구조된 것인가를 들춘 것은 혁명적인 것이었으나 그 속에서 끊임없이 <차이>라는 보편구조를 탐색한 것과 비슷하다. 객관진리가 허구이고 진실이 자의적임을 인식했을 때 모더니스트들은 혼동과 무질서의 우주 앞에 직면한다. 그들이 돌아서고 기댈 곳은 개인의 용기, 도덕, 단련, 그리고 상상력의 연습이었다. 이런 혁신과 보수라는 모더니즘의 이중성이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관계를 밝히는데 혼란을 야기시키곤 한다. 예를 들어 독일의 하버마스Jurgen habermas는 모더니즘만이 진정한 혁명이라고 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부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혁신과 보수 둘 다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혁신을 계몽주의와 하비주의 속에서 찾는 그에게 이성을 거부하는 듯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계획을 무산시키려는 음모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제 포크너의 소설을 예로 들어 모더니즘의 양면성을 논해 본다. 한 사람의 서술자가 소설 전체를 책임지던 사실주의와 달리 포크너의 실험 소설은 여러 명의 등장인물들에 의해 엮어진다. 등장인문들이 자신의 의식을 오가는 생각들을 서술하는데 이때 형식은 그의 개성이요, 내용은 자의적이다. 예를 들어 조야한 언어가 유난히 많은 서술은 그 인물의 거친 성격을 드러낸다. 일인칭 주어를 소문자로 쓰는 경우는 도피적 성격을 드러낸다. 돈을 좋아하는 인물은 유난히 <캐시>(현금)란 단어를 들먹인다 등, 저자가 등장인물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성격을 가늠해야 한다. 내용에서도 서술자를 그대로 믿던 사실주의와 달리 등장인물들의 서술을 읽고 우선 한걸음 물러난다. 이 친구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다른 인물들의 얘기와 비교하여 객관성이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같은 사건을 어떻게 달리 보는 가를 살펴 그 인물의 성격을 추측하고 그 속에 묻힌 사건의 윤곽도 밝혀야 한다.

입체파 그림을 연상시키는 이 혁신적인 기법의 보수성은 무엇인가. 우선 서술에 직접 몰이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판단을 유보하는 데 독자의 상상력과 자율성이 요구된다. 어떤 진술에 대해 일차적인 의문을 던지고 그 겉자락을 들추어 그 말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를 따지기에 힘들게 얻어지는 과정이 단련을 요구한다. 그리고 독자는 여러 사람들의 말을 종합하여 의미를 합성해 내는 과정을 통해 진실의 상대성, 혹은 자의성을 경험케 된다. 그런데 사실주의에서처럼 매끄러운 서술을 통해 의미가 전달되지는 않아도 모더니즘에서는 여전히 작가가 흩어진 서술을 통해 어떤 내용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를 읽으면서 독자는 네 사람의 서술을 통해 콤슨가의 몰락과정과 그 원인을 감지하게 된다. 여전히 그의 전통적인 도덕률이 반영되어 있고 그리고 사실과 허구의 경계선이 존재하는 것, 이런 점들이 포스트모더니즘과 비교하여 모더니즘이 갖는 보수성이다.

 

포스트모더니즘 : 반동과 연장의 이중성

진리의 주관성이라는 회의주의에서 출발한 모더니즘은 그 자체가 지닌 보수적 성향 때문에 예술의 고급화를 초래한다. 의식의 흐름수법, 복수시점, 자동기술, 객관상관물이론 등 기법은 점차 난해지고 개인은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예술지상주의에 몰입하는 인상을 낳게 된다. 게다가 모든 아방가드의 운명이 그렇듯 태어날 때의 혁신적인 요소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현실로 흡수되어 또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지는 경향을 띠게 된다. 위대한 모더니스트들이 죽고 세계대전으로 사회의식이 고조되면서 1930년대 이후 사실주의가 미국과 영국에서 부활되기도 하지만 역사의 흐름이 똑같은 양상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어서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은 1950년대에 가서야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50년대 미국에서는 노먼 메일러, 멜라무드, 솔 벨롤우, 랄프 엘리슨 등 유태계와 흑인작가들이 서서히 인간과 사회를 연계시키는 듯한 작품을 쓴다. 이들의 작품에는 모더니스트들과 무언가 다른 게 있었다. 우선 예술의 세계로 몰두하는 듯한 기법의 난해성, 복수시점 등이 없어진다. 그리고 진지함이 우스꽝스레 회화되고 작가의 도덕적 메시지가 흐려진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져서 사회가 작품 속에 들어오긴 하는데 사실주의와 달리 견고한 조직이 아니고 비현실적이다. 흔들리는 도덕적 모호성, 블랙 유머, 주인공 아닌 주인공 등 이제 소설은 부조리에 관한 게 아니라 부조리 그 자체가 되는 듯 했다. 비평가 어빙 호우 lrving Howe는 이런 현상을 모더니즘으로부터의 이탈현상으로 보아 <포스트모던 픽션>이라 이름붙인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50년대는 전환기였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기는 하지만 아직도 픽션은 리얼리티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전화기는 시에서도 나타난다. 모더니즘의 도덕적 진지함과 난해한 기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서전이나 개인의 감흥이 시 속에 그대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로웰, 로드크를 지나 알렌 긴즈버그에 이르면 엘리어트의 시와는 엄청난 거리를 지니며 시의 대중화가 이루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고급화된 예술양식, 개인 감흥의 절제와 달련, 그리고 아직도 소실이 무언가 진지한 도덕을 전달하려 한다는 것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현학적이고 위엄 있는 예술양식에 대한 반발이었고 급변하는 현실에 그 양식이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당대 상황과의 대응책이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한 우주시대의 열림, 캘리포니아 문화의 다원화현상, 뉴욕을 중심으로 한 불란서 실험문화의 영향, 그리고 민권운동,  여성운동, 반전운동, 케네디와 킹 목사의 암살 등 작자가 현실(혹은 실체)를 파악할 수 없을 때 정치와 초연한 채 기법에 탐닉해 있는 모더니즘은 맞지 않는 이념이요, 양식이 되고 만다. 고백시, 투사시, 즉흥시, 여성시가 쏟아지고 개인의 열정과 욕망을 막는 어떤 기준도 거부된다. 마치 자살하기 위해 태어난 듯싶은 실비아 프랱의 시에서 자신의 욕망을 막는 기준이나 지서는 아버지, 나치 등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인간의 저속하고 추한 모습을 더 이상 감추지 말고 드러내자는 것은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메일러는 단련과 고상함 뒤에 숨은 미국의 억눌린 광기를 암으로 상징했다. 긴즈버그와 친구였던 윌리엄 버로우는 『발가벗은 점심 The Naked Lunch』1959에서 섹스와 마약 등 환상적이고 에로틱한 세계를 저속한 어휘로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마치 둘이서 약속이나 한 듯 긴즈버그는 엘리어트에 도전하는 『신음소리 howl』를 쓰고 버로우는 헤밍웨이와 포크너의 도덕적 진지함을 회화시키는 벗은 작품을 쓴 것이다. 보네겉의 주인공들을 보면 한결같이 어린애 같고 우매하고 교활하다. 저지 코진스키의 주인공들은 의지도 생각하는 힘도 느낌도 없는 無 그 자체이다. 주위 사람들에 의해 성격이 주어지는 완전한 수동형이다.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몸부림, 어떤 기준도 단련도 거부하는 윈시에의 향수, 본능의 향휴 등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다져온 기준 밑에 숨은 광기를 드러내 사회와 인간을 정화시키려는 듯 격렬한 벗어던지기 운동이었다. 혼돈을 직시하고 감정의 거리두기를 통해 질서를 찾으려던 모더니즘이 다분히 고전적이라면 개성을 강좌고 기준을 무너뜨리고 혼돈 그 자체를 인수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다분히 낭만적이다. 이것이 둘 사이의 가장 뚜렷한 차이요,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반발로 볼 수 있는 측면이다.

그런데 반발로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은 후일 연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회의로 출발한 모더니즘은 진리가 주관적이라고 하면서 여러 인물들의 서술을 통해 그것의 상대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것조차 거부한다. 현실과 환상이 혼합된 소설을 통해 온갖 진리가 허구임을 드러낸다. 언어는 실체를 지칭하지 못하고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소설이 제 꼴을 돌아다보는 자아반사적 픽션이 나타난다. 데리다가 구조주의의 상대성을 뒤엎고 진리의 허구성을 드러내듯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상대성이라는 열린 체계를 한층 더 밀고 나가 다원성에 이른다. 담론의 자의성 드러내기가 아니라 담론 그 자체를 와해시킨다. 맥혜일 Brian mchale 은 최근에 펴낸 『포스트모더니스트 픽션』(1987)에서 이런 변화를 인식론 epistemology에서 존재론 ontology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이제 질문은 현실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느냐가 아니라 그 현실 자체가 실재냐 아니냐로 바뀐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장으로 보는 이유는 이렇듯 진리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한 걸음 더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장인가 반발인가의 문제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또 달라진다. 기준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이에 두 대는 물론 반발이요, 차이다. 그러나 기준을 19세기 리얼리즘과 20세기 모더니즘이라는 한 세기의 변화로 잡을 때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연장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19세기가 객체의 진실에 접근하던 시대라면 20세기는 모더니즘이건 포스트모더니즘이건 둘 다 주체의 진실에 접근하는 쪽이기 때문이다. 맬컴 브래드리가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을 연속으로 보고 둘 사이의 공통점이 차이점보다 더 많다고 하는 이유는 예술형식의 변화를 한 세기별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을 시대정신의 반영이요, 형식은 이념과 손잡고 나타나는 긴 시간의 거대한 변화로 본다. 린다 허천 Linda Hutcheon은 안드레아스 후이센 Andreas Huyssen이 언급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발적 요소에 연속적인 요소를 첨가함으로써 어떤 면이 반발이고 어떤 면이 연장인지를 보여준다. 예술의 자율성과 삶에서의 유리, 개인적 주관성의 표현, 대중문화와의 유리 등에 반발했지만 자의식적 실험, 아이러닉한 모호성, 리얼리즘의 모방이론에 대한 반발 등은 모더니즘 전략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연장이며 동시에 반발로 보는 견해 가운데 가장 간단한 표현으로 정수를 포착한 경우는 한스 베르텐스 Hans Bertens 의 다음과 같은 표현일 것이다.2)

 

포스트모던 예술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고 경험되는 것이다. 모더니즘 예술은 표층 너머에 숨은 어떤 의미를 자칭하고 이해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그 자체를 표층으로 제시하고 모던 예술은 그 표층 뒤에 숨은 깊이를 요구한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모더니즘보다 <훨씬 더 현상학적인 접근>이라는 베르텐스의 덧붙인 말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다르면서도 한층 더 회의론 쪽으로 나간 것을 잘 요약해준다.

 

2. 포스트모던 기법3)

 

패로디

모더니즘이 상황으로부터 기법으로 도피해 버렸다고 생각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소설 속에 다시 상황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제 그 상황이 허구임을 보여주어 아예 현실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는 셈이 된다. 아니 현실이 허구라는 식으로 현실에 대해 얘기한다. 그래서 소설은 어떻게 현실이 허구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메타픽션이 된다, 허구가 현실이요, 현실이 허구이니 어찌 현실을 반영하는 허구(픽션)를 쓸 수 있으냐는 것이다. 자의식적인 소설 혹은 반사실주의는 여러 가지 기법으로 현실 그 자체가 이미 허구임을 보여주는데 그 가운데 두드러진 자이가 패로디이다, 바셀미 Donald Bathelme는 『백설공주』(1967)에서 전통적인 동화를 패로디한다. 배경은 뉴욕이고 등장인물들은 현대 도시인들인데 왕자 역할을 맡을 사람이 없어 소설의 끝을 못 맺는다고 엄살을 떤다. 주인공, 시작과 끝, 성격발전이 없는 소설이다. 나보코프의 『세바스천 나일의 참인생』은 전기의 패로디이고 『창백한 불꽃 Pale Fire』(1962)은 비평의 패로디이다. 실제 인생이 어떻게 굴절되어 전기가 되는지, 비평이 어떤 식으로 자의적인지를 통해 실체가 허구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국의 존 파울즈John Fowles는 『불란서 중위의 여자』(1969)에서 사실주의 소설을 패로디한다. 한동안 진지하게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들이 스토리를 엮어 가다가 갑자기 뉴보로망 시대에 살고 있는 작가의 고민이 튀어나온다. 이 소설의 결말을 어찌 낼 것인가, 이 인물들에 관해 내가 아는게 무엇인가. 옛날에는 작가가 진지한 신이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못하니 고민스럽다는 것이다. 결말을 열어놓은 채 끝나는 이 소설은 사실주의를 패로디하는 반사실주의 소설이다. 투르먼 카포티의 『냉혈인간 In Cold Blood』처럼 실제 일어난 사건의 보도가 그대로 픽션이 되는 뉴저널리즘 픽션은 보도의 패로디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더듬어 새롭게 다시 쓰는 고어 비달의 『링컨』은 역사의 패로디요, 자신이 2차대전 때 겪은 경험을 그대로 쓴 코진스키의 『색칠해진 새 The Painted Bird』는 자서전의 패로디이다.

패로디란 기존의 개념이나 형식과 같은 꼴을 취하고는 전혀 반대의 얘기를 하는 문학적 장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패로디가 이토록 압도적인 이유는 그것이 지금까지 세워진 진리가 허구임을 보여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은 아무리 정확히 기록되어도 기록되는 순간의 산물이고, 보도나 역사는 아무리 정확히 자료를 수집해도 제공자와 기록자의 자의적 산물이며, 전기에서 실체는 몇 겹으로 굴절된다. 그러니 소설이 어떻게 실체를 반영하는가. 실체가 이미 허구인 것을. 그래서 소설가의 임무는 구태여 허구의 세계를 꾸밀 필요없이 기존의 형식이나 장르는 취하면서 전혀 딴소리를 하는 것이다. 물론 성공한 메타픽션의 경우 이런 패로디 기법은 작의성이 잘 드러나지 않게 묻혀 있기 마련이다.

 

환상적 리얼리즘과 미니멀리즘

패로디는 초기 약 10년 동안의 메타픽션에서 두드러진 양식이었다. 1975년 이후에는 또  한번의 조그만 변화가 일어난다. 소위 <포스트모던리얼리즘> 혹은 <새로운 사실주의>의 출현이다. 소설이 언제까지나 현실과 허구의 관계를 조명하고 제 모습을 되돌아보는 소설에 관한 소설일 수만은 없다. 미로 속을 맴돌던 언어가 탈출하여 무언가를 지칭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옛 사실주의와는 다르다. 메타픽션에서 한걸음 더 나가 이제는 환상이 이미 현실의 일부가 된 환상적 리얼리즘(혹은 매직 리얼리즘)과 플롯을 거부하는 미니멀리즘이다. 환상적 리얼리즘은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처럼 매끄럽고 풍요한 서사가 계속된 후 마지막에 그것이 지워져 왔음을 암시적으로 밝히는 자의식이 강한 경우도 있지만 75년 이후의 것들은 이와 조금 다르다. 토니 모리슨의 『소중한 사람들』이나 마가렛트 에트우드의 작품들에서 유령이나 환상은 작가가 현실을 그리는 데 어떤 문학적 장치인 듯 쓰인다. 말하자면 환상이 사실주의 소설에 고용되는 셈이다. 애초에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게 상황 혹은 역사의식을 문학 속에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고 보면 후반에 와서 사실주의가 환상을 누르고 부각되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허구가 현실을 누르던 초기의 메타픽션에서 현실이 허구를 종속시키는 후기의 새 사실주의는 환상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에서는 공통이다. 그러나 전자가 베케트의 침묵의 언어 이후 왜 소설이 아무말도 할 수 없는가를 보여주는 쪽이라면 후자는 그렇다면 못할 말이 뭐가 있느냐는 쪽이다. 표층 너머의 의미를 묻던 모더니즘과 달리 그저 표층에 머무는 것에서는 공통이지만 전자가 표층에 머무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이제 그 표층의 흘러넘침을 축복하는 쪽이다.

미니멀리즘 역시 대략 75년 이후에 나타난 새 사실주의의 한 갈래이다. 저자가 독자에게 권위를 양보해 가던 모더니즘 시대에 윌터 벤야민은 짧은 스토리의 중요성을 통해 저자의 사라짐을 얘기했다. 사실주의 소설은 권위적인 작가가 설명하고, 꽉 짜인 플롯으로 시작과 끝을 내린다. 그것은 닫힌 형식이며 소유이다. 그러나 설명이 없고 압축된 스토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대화이다. 듣는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그 사람은 다시 타인에게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의미가 풍요해진다. 그러므로 스토리는 소유가 아닌 경험의 교환이다. 이 벤야민의 스토리 텔러가 한 세기가 끝날 무렵 미니멀리스트로 부활한다. 미국 픽션의 최근의 동향을 실은 『믿을 이유들 Reasons to Believe』(1988)은 지난 십 년을 <단편소설의 르네상스>라고 언급하고 <문예평론 Literary Criticism> 지난 (1990년) 겨울호는 미니멀리즘을 세기말의 문학으로 꼽는다. 미니멀리즘의 특징은 우선 길이가 짧고 작가의 친절한 설명이 없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묘사하지 않는다. 외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추면서 주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드러내는 단절과 고립, 인간의 한계를 지극히 암시적인 수법으로 섬뜩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작가의 묘사보다는 독자의 파악하는 힘에 의해 이런 의미가 합성된다. 묘사나 설명을 하지 않고 마치 영화의 장면들처럼 외적인 행위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얼핏 압축된 기법이 헤밍웨이를 연상시키고 실제로 토바이아스 울프나 레이몬드 카버는 그의 영향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차이는 있다. 헤밍웨이가 자기단련의 입장에서 그런 기법을 쓴다면 미니멀리스트들은 독자에게 권한을 넘겨준 열린 소설의 입장이다. 벤야민의 말처럼 틈새가 독자의 상상력에 의해 메꾸어져서 소유가 아닌 경험의 교환이 되기 때문이다.

단절된 문장, 피상적이고 겉도는 대화를 통해 70년대 도시 중산층의 고립을 그리는 앤 비티, 플롯을 거부하는 열린 소설을 통해 마지막 순간의 거대한 변화를 기대하는 그레이스 페일리, 작가와 독자가 함께 삶의 방식을 그리는 가장 우수한 미니멀리스트, 레이몬드 카버······ 플롯이 없는 것, 작가가 설명을 하지 않는 것, 독자의 참여가 중시되는 것에서 미니멀리즘은 메타픽션과 공통이다. 그러나 언어가 사물을 지칭하고 일상이 묘사된다. 현대 도시인의 대화단절, 자아몰입, 마약과 술로 도피하는 사랑의 부재가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60년대의 자유화 물결이 낳은 고립과 단절을 진단하는 80년대의 미니멀리즘은 이처럼 경험의 교환과 타자의식을 강조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평가 안드레아스 후이센은 75년 이후의 변화를 언급하면서도 자세히 논의하지 않고 맥헤일이나 린다 허천도 이 부분을 간과한다. 패로디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진단할 경우 미니멀리즘은 예외로 취급되어야 한다.

 

저자의 죽음과 인식주체의 해체

사실주의에서 저자는 작품 위에 있고 모더니즘에서는 작품 뒤에 숨어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작품 속으로 뛰어든다. 현실이 복잡해짐에 따라 저자는 전능한 신의 위치에서 독자와 동등한 위치로, 그리고는 이제 작품 속으로 들어가 전통적인 저자의 죽음을 알린다. 메타픽션에서 저자의 죽음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나보코프의 경우를 보자. 저자는 등장인물을 고용하고 등장인물은 또 다른 인물을 고용한다. 그런데 그게 전부 저자 자신에 관한 얘기가 된다. 픽션이 현실을 반영하는 대신 자기 얘기만 하니 진리의 자의성이요, 결국 현실이란 저자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롤리타』에서 등장인물을 조정하던 작가 퀼티가 등장인물(훔볼트)에 의해 죽고 남은 작가 훔볼트는 더 이상 견고한 사실주의를 쓸 수 없다고 말놀음으로 돌아서는데 그게 바로 나보코프 자신의 예술관이다. 롤리타라는 실체를 아무리 추적해도 잡을 수 없고 포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사실주의(현실을 반영하는 소설이란 의미에서 모더니즘도 포함되는 넓은 의미) 소설을 쓸 수 있느냐는 거다. 마치 『세바스천 나잍의 참인생』에서 화자인 브이는 세바스천을 고용하고 나보코프는 브이를 고용하여 자기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다. 19세기 사실주의에서는 저자가 완벽하게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여 독자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믿는다. 모더니즘에서는 등장인물에게 서술을 맡기고 저자는 음성을 숨기지만 그래도 그 허구의 세계는 현실의 반영이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저자가 작품 안으로 뛰어 들어와 픽션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가정을 무너뜨린다. 작품 위, 혹은 뒤에서 등장인물을 조정하더니 이제 작품 속으로 들어와 내가 조정자요 하면서 자기모습을 드러내어 개연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커트 보네겉은 『참피온들의 아침식사』(1973)에서 등장인물을 조정하다 풀어 주는 자기모습을 담는다. 존 파울즈는 『불란서 중위의 여자』에서 내가 지금 얘기하는 이 스토리와 등장인물들은 모두 내 머릿속에서 고안된 것이라고 불쑥 나와 말한다. 사실주의에서는 서술자가 제시하는 세계에 독자가 그대로 몰입되어 저자의 의미를 받아들인다. 모더니즘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서술을 들으며 믿음을 일단 정지하고 이 말 저 말을 종합한 뒤 판단을 내린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믿음과 안 믿음, 둘 다를 유보한다. 저자가 소설의 틀을 와해시키고 그 속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저자이고 이 인물들의 창조자요 하면서 작품 속으로 들어오거나 등장인물들이 모두 저자 얘기를 하게 만들어 전통적인 작가의 죽음을 알리는 것은 더 이상 현실을 반영할 수 없다는 반영론의 포기이다. 현실이 환상적이고 진리가 허구적이므로 어떤 견고한 논리로 설 수 없다는 미결정성이 픽션을 열어놓는다. 과정이요 현재진행형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리오따르 Jean-Francois Lyotard는 <지금Now>이라는 단어로 표시하며 <포스트모던>에 이즘(-ism)을 붙이기 싫어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  혹은 의미의 잠정성은 인식주체의 해체를 뜻한다, 코진스키는 『그냥 있기 Being There』(1971)의 주인공에 <챤스>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정원사라는 직업 외에 과거도 현재도 없는 텅 빈 존재 nonentity 이다. 그런데 일단 그가 사람들 속에 던져지자 그에게는 갖가지 의미들이 달라붙는다. 의미는 그 자체가 고유하게 소유한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고유의미가 없는 그는 <되어가는 과정>일 따름이다. 이것은 바셀미가 목적지가 있는 배 한 척보다 바위조각 하나가 더 흥미롭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시간이 흐르면 바위조각에는 갖가지 동식물이 달라붙어 서식한다. 어느 틈엔가 바위조각에는 풍성한 의미가 흘러넘친다. 의미란 이미 존재하는 게 아니고 달라붙어 의미를 만든다. 그래서 꼴라쥬 등 온갖 파편화된 예술형식을 가지고 유희를 벌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반영론이 아닌 창조론이다.

 

3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쟁들

 

50년대의 부조리소설, 60대의 파편화된 메타픽션, 그리고는 점차 사실주의의 옷을 입은 메타픽션과 미니멀리즘 등, 픽션이 변모를 겪는 동안 이를 지켜보는 이론도 변모한다. 이론의 변모가 소설형식의 변모를 반영할 정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미국의 용어이고 미국 픽션들이 가장 요란스러웠지만 이런 현상을 불란서, 영국, 독일, 남미에까지 퍼졌고 물처럼 새어들어 각 나라의 건축이 미술, 그리고 철학과 정치이념에까지도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늘 보수성을 지키는 영국의 60년대 문학에 대한 글이 현실의 허구성을 강조하는 품은 마치 같은 시대 미국의 현상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4) 같은 맥락에서 논쟁들도 처음에는 미국적이더니 점차 국제적인 것으로 확산된다. 이들 가운데 주목을 받는 몇 개의 쟁점들을 살펴보자.

60년대에 나온 레슬리 피들러의 「경계를 넘어서고 간극을 매우며」나수잔 손탁, 이합 핫산의 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발과 혁신으로 본다. 모더니즘의 귀족성과 계급성에 대한 반발로서 온갖 경계의 무너짐과 원시적인 생명력의 찬양, 그리고 거의 무정부적인 낭만성과 다양성을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견해는 모든 아방가드의 논리가 그렇듯 새로움은 늘 일어나던 당시에는 기존의 전복이었음이 고려되고 읽혀야 한다. 예를 들어 핫산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를 전통과 급진으로 비교한 것은 분명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모더니즘에도 분명히 급진적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핫산의 견해가 60년대의 것이고 상대적인 개념밖에 담을 수 없는 언어를 절대용어로 사용한 <비교>가 갖는 위험성도 고려되고 비판되어야 한다. 제랄드 그라프의 『그 자체에 반항하는 문학 Literature Against Itself』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기존을 극복하는 척했지만 결국은 낭만적 무정부주의와 모더니즘의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더 밀고 나감으로써 전통 속의 일부가 됐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이 글이 나온 것은73년, 즉 메타픽션의 방자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다. 75년경부터 새로운 사실주의가 시도된 것을 보면 그라프의 글은 시기를 잘 탄 셈이다. 그러나 그는 모더니즘의 혁신 뒤에 숨은 고전적 질서찾기와 포스트모더니즘이 낭만적 개성표출이었다는 차이를 간과해 버린다. 일어나던 당시의 차이를 무시해 버린다면 연속의 범주로 휩쓸리지 않을 아방가드가 어디 있겠는가.

이번에는 독일의 하버마스와 블란서의 리오따르의 논쟁을 본다. 1981년 하버마스는 「모더니티 對  포스트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을 무산시키려 든다고 비난한다. 판단의 유보와 자기부정적 혁신, 그러면서도 계몽주의적인 합리성을 가진 모더니즘은 문화와 사회를 접목 시킬 안정된 근거를 가진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지나친 회의주의와 무정부적인 분열성으로 이 기반을 위협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혁신을 막는 신보수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데리다를 비롯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이 보수적이라고 비난한 것도 같은 논리에 근거한다. 물론 데리다는 당신이 더 보수적이라고 했고 안드레아스 후이센은 이들의 싸움을 가르켜 <거울아, 거울아 누가 더 보수적이니?>라고 빗대어 논의한 적이 있다. 하버마스의 비난에 대해 리오따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1982) 로 답한다. 사실주의는 비판적 거리를 지키지 못하고 모더니즘은 거리는 있는데 사회를 외면하고 예술로 도피했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둘의 결함을 보충하여 모더니즘이 못다한 혁신을 이루려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은 쾌감과 고통을 동시에 지닌 장엄하고 모호한 정서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유일한 기능이다. 그것은 모든 논리를 열어놓아 끊임없이 흐르게 하는 진짜 혁신이다․․․․․.

하버마스는 모더니즘의 장점을, 리오따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장점을 잘 본다. 자신의 것을 잘 보기에 상대방의 것을 간과하는 모든 논쟁의 묘미이다. 1960년대 이후 독일에서는 아도르노나 브레히트 등 흘러간 모더니스트들의 복구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하버마스는 그런 분위기에서 모더니즘 미학과 사회를 연결시키려 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방해처럼 여겨진다. 리오따르는 니체적 입장에서 불란서의 해체적인 안목으로 모더니즘을 본다. 그래서 그것이 보수적이고 진짜 혁신이 아닌것 같다. 어쨌든 이 논쟁이 주는 공통된 인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성에 대해서는 둘 다 잘 모르거나 명쾌한 설명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리챠드 로티 Richard Rorty 는 <새 실용주의 New Pragmatism>를 가지고 이 논쟁에 뛰어든다. 어떤 논리로 세울 수 없는 미결정성으로 해체론이 비난을 받자 로티는 미결정성에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를 접목시켜 사회성을 부여한다. 어떤 이론에도 회의적이고 어떤 위치도 갖기 않음으로써 그것이 진리냐 아니냐를 묻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해체론적 입장이다. 어떻게 이 아포리아로부터 벗어나는가. 다만 그것이 필요하냐 아니냐라는 <유용성>만을 묻자. 그러나 로티의 이런 인식론적 행동주의는 그보다 더 정치성을 요구하는 여성운동가들이나 사회개혁자들에게 그리 안정된 근거를 주지 못한다. 그래서 하버마스의 편에 선 사람들은 로티를 비난한다. 언어의 유희와 침묵으로부터 탈출하자던 핫산이 1987년에 발표한 글 “the Postmodern Turn”도 제임스의 실용주의적 입장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보는 것이다. 핫산은 이보다 조금 먼저(1983)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발과 연장의 이중성으로 보는 글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의 글을 시대순으로 읽으면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시각의 변모를 볼 수 있어 흥미롭다.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쟁은 최근에 한층 더 사회와 역사의식 쪽으로 기울고 있다. 제임슨, 이글턴, 뉴먼 등 맑시스트들의 비난을 살펴보고 이런 공격에 대한 린다 허천의 방어를 들어보자. 맑시스트들의 비난은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후기자본사회에 순응하면서 애초에 의도했던 극복의 의지를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데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깊이가 없고 역사성의 희박하고 고통이 없고 비판적 거리가 없다고 말한다. 테리 이글턴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저항했으나 사회의식이 약하고 문화를 탈정치화시켰다고 말한다. 챨스 뉴먼 Charles Newman 은 성역으로서의 예술이 모더니즘의 마지막 환상이었듯이 자율성으로서의 예술은 자본사회 개인주의의 마지막 숨소리라고 비난한다(the post-modern Aura, 1985). 이 둘은 모두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장으로 본다. 체제에 순응한 모더니즘의 결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층 더 비정치적 이론으로 그 체제를 연장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맑시스트들의 비난에 대한 최근의 방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반정치적 정치성)을 갖는다는 쪽이다. 현실이 허구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거리두기로서 어떤 논리에도 몰입하지 않는 비판의식을 기른다. 독자의 상상력을 통해 자율성을 기르는 틈새의 축복이다. 폴 드 만은 언어의 유희와 오독의 찬양이 언어에 대한 성찰과 동시에 역사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린다 허천이 역사편찬적 메타픽션 historiographic metafiction이란 용어로 포스트모더니즘 시학을 보는 의도도 여기에 있다. 주로 사실주의를 패로디한 작품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녀는 <역사를 자의식적 시선으로 보는 역사성>, 이념의 허구성이 갖는 이념성을 강조한다.(180,194-196면). 비록 특정 작품들에만 초점을 맞춘 결함은 있지만 후기구조주의를 배경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는 그녀의 경우가 구조주의와 억지로 연결시키려든 후이센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이론상의 타당성 때문만이 아니라 한 시대의 이념은 미학형식과 손을 잡는다는 아방가드의 논리 때문이기도 하다.

한때는 도전과 반발이었던 실험정신이 시간이 흘러 또 하나의 정설이 되고 체제의 순응이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는 아방가드의 운명. 역사로부터 뒷걸음친다고 모더니즘을 나무라며 상황과 역사의식을 불어넣었지만 차마 19세기 사실주의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단순한 반영이론에도 반기를 들다 보니 반역사적 역사성이라는 역설을 낳는다. 포스트모더니즘. 혹시 이 역설의 시대는 한 세기의 변화를 가늠할 때 모더니즘에서 다시 리얼리즘으로 넘어가는 전환기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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