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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사람, 작곡가, 그리고 음악세계...
2016년 12월 07일 21시 13분  조회:3678  추천:0  작성자: 죽림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그 위대한 탄생(ZOGLO) 2016년11월24일 
인물이름 : 김봉호

색 바래지 않는 예술인생---저명한 음악가 김봉호선생님의 50년 창작인생을 더듬어

 

들어가며

누군가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는 힘이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음악은 유일한 합법적 마약이라고 했다.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그만큼 음악은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의 삶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것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족한것이 많고 단조롭던 시대에는 더 그러했을것이다.

1960년대에 창작된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붉은 태양 변강 비추네”, “나는 혁명을 위해 떼목 모네” 등 노래와 개혁개방초기에 창작된 “아름다운 마음”, “금실북과 은실북”, “쫭족아가씨”…등 노래들은 그야말로 한 시대를 대표하고 그 시대를 풍미하며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이런 곡들이 우리민족 음악가에 의해 탄생되였다는게 우리 후대들에겐 더없이 자랑스러운 일이다.

김봉호선생님과는 4년전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0주년 프로그램 특별제작때문에 인연을 맺게 되였다. 다짜고짜 전화를 해 인터뷰를 요청했고, 생각밖에 선생님은 흔쾌히 승낙을 해주셨다. 쟁쟁한 곡들을 많이 창작하신 이름난 분인것만큼 상대하기 어려울거라는 상상과는 달리 선생님이 주는 첫인상은 푸근하고 친절하기만 했다. 그리고 칠순을 넘기셨다는게 전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젊은 모습이였다. 늘 마음속에 고운 선률을 담고 사셔서 그럴가.

(1)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 위대한 탄생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자택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이는것은 피아노였다. 딱딱한 대화를 어떻게 열어갈가 고민중이였는데 피아노가 눈에 들어오자 선생님께 먼저 연주를 부탁했다. 너무나도 귀에 익은 아름다운 선률이 피아노 건반을 타고 온 집안에 기분좋게 울려퍼졌다.

우리 맘속에 붉은 태양,

조국변강 비춰주네,

장백천리 해란강반 붉은 기발 물결치네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차분한 목소리로 노래까지 하면서 연주를 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였다.

피아노 선률과 함께 선생님의 이야기는 시작되였다.

1964년 6월말, 연변에서는 전 주 전문단체 문예합동공연이 있었다. 선생님이 소속돼 있던 화룡현 문공단도 공연에 참가했고 마지막 날 총화대회가 있었다고 한다. 연변가무단 정진옥단장은 총화대회에서 자신의 창작경험담을 소개하고 끝으로 대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그 제안이 선생님의 인생을 바꿔놓을줄 누가 알았으랴.

정진옥단장은 “연변은 로해방지구이고 모택동동지의 올바른 지도아래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당의 령도와 모주석을 노래한 노래가 적고, 있다고 해도 질 높은 노래가 없다”며 누가 이와 관련해 우수한 노래를 창작할지 기대해보겠다고 말했다.

보고를 듣고 있던 선생님은 곁에 앉은 한윤호선생님의 옆구리를 쳤다. 직접적인 대화는 없었지만 한윤호선생님은 그 뜻을 곧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위대한 노래는 이렇게 무언의 약속과 함께 잉태되였다.

문예합동공연이 끝나 다들 화룡으로 돌아갔고, 그 해가 지나도록 한윤호선생님은 가사를 내놓지 못했다. 선생님은 가사가 애타게 기다려졌지만 조르기도 무안한 일, 속으로 끙끙 앓기만 했다.

그렇게 한해가 가고 1965년 가을 어느 하루, 선생님이 악대실에서 한창 반주곡을 정리하며 옮기고 있는데 한윤호선생님이 찾아왔다. 한선생님은 옆구리를 찌르면서 할말이 있다고 선생님을 악대실밖의 울바자 옆에 불러냈다.

“내가 모주석을 노래하는 가사를 썼는데 한번 보오!”

그 말을 듣자 선생님은 흠칫했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해 도저히 마음을 다잡을수 없었다.

“지금은 머리가 복잡하니 집에 가 조용히 보겠다”고 말하고나서 선생님은 가사를 조심스럽게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머리속에는 온통 작곡에 대한 생각뿐이였다. 선생님은 이번 곡은 꼭 민족성을 살려 정성껏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분은 모두 창작에서는 햇내기였다고 한다. 전공이 손풍금이였던 선생님은 문공단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민족악기, 양악기도 다루는 다면수이긴했지만 창작은 거의 해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문공단도 창작조라는게 따로 없이 모두 군중창작으로 나갔다.

(우리 같은 햇내기가 어찌 연변인민을 대표할수 있겠는가, 단지 우리의 소박한 “계급” 감정으로 모주석을 노래해야겠다,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의 특색을 살릴수 있을가...)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며 어렵게 퇴근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선생님은 장구와 가야금을 특별히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선생님의 창작시절

장백산 봉이마다 보배많아 보배산

기름진 공사벌엔 풍년들어 황금산

보배산, 황금산은 그 누가 주었나

경애하는 우리네 령수, 모주석이 주셨지

아, 좋구나 우리네 연변은 살기도 좋아서

사람마다 한 마음으로 모주석을 노래하네

조용한 곳을 찾아 가사를 보면서 선생님은 가야금을 뜯었다. 가야금을 익숙하게 다루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의 특색이 짙은 안딴 절주로 열심히 곡을 맞춰보았다. 창작을 끝내고 나니 흥분돼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 일찍 한윤호선생님을 찾아갔다. 한창 아침식사중인 한윤호선생님을 무작정 밖으로 불러냈다.

“내가 곡을 다 썼으니 한번 들어보오!” 격앙된 목소리로 선생님은 밤에 쓴 곡을 부쳐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노래를 다 부르고도 한참이 지났는데 한윤호선생님은 가타부타 말이 없고 오히려 표정이 엄숙하게 굳어졌다.

(내가 쓴 곡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구나...)

선생님은 저으기 걱정되였다.

“다시 한번 불러보오!” 한윤호선생님은 노래를 다시 부탁했다. 풀이 죽긴 했지만 선생님은 다시 정서를 살려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다 듣고 난 한윤호선생님은 주먹으로 선생님의 어깨를 툭 내리치면서 “아주 좋소!”라고 한마디를 힘있게 내뱉었다.

그때를 회억하며 선생님은 마치 가슴을 억누르던 바위덩이가 쿵하고 내려앉는 소리를 듣는듯 했다고 하셨다.

며칠뒤, 문공단 당지부서기가 농민업외문예합동공연이 곧 열릴텐데 새 노래가 없어 걱정이라며 선생님에게 그 곡을 베껴줄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노래는 당시 화룡현 서성대대 18살 나는 김순자사원에 의해 처음 불려졌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사전예고도 없이 농민들은 공연 가는 길에 직접 손풍금을 치면서 김순자사원에게 노래를 배워줘 공연에서 부르게 했다고 한다. 그렇게 짧은 시간내에 배워 부른 노래지만 대회에서 절찬을 받고 금방 전반 사원들에게 보급되였다. 이 같이 노래는 애초부터 강한 생명력을 과시하였다.

노래가 점차 보급되면서 선생님은 신심을 얻게 되고 “우리의 태양-모주석”으로 돼 있던 노래 제목을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로 수정할것을 한윤호선생님에게 제안했다. 그리고 가사도 당시 정세에 맞게 부분적으로 수정했다.

그해 겨울 길림성 문화실무회의가 장춘에서 열렸다. 화룡현 문공단은 길림성에서 하향공연 2등상을 받아 연변대표단과 동행하게 되고 회의 축하공연무대에까지 오르게 되였다. 그때 공연종목의 하나로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가 선정되였다. 노래는 가야금 병창으로 편곡돼 공연에서 불려졌고 회의에 참가한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노래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렇게 노래는 또 연변을 벗어나 전 길림성에까지 보급되였다.

그 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와 선생님은 문공단을 따라 변방 순회공연을 다녔다. 그러던중 이 노래가 연변잡지의 뒤표면에 실린것을 우연히 보았다. 직접 투고한것이 아니였지만 노래가 잡지에 실린것을 보고 선생님은 하늘을 그대로 얻은듯 무등 기뻤다. 잡지에는 “장백산 봉이마다 보배많아 보배산”이 “우리네 연변은 산마다 보배산”으로 가사가 바뀌였다. “연변”을 한결 더 각인시켜줄수 있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뒤 선생님은 잡지사로부터 원고료 5원을 받았다.

한창 순회공연에, 창작에 바삐 돌아치던 1966년 여름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거리마다 대자보가 나붙고 사람들의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선생님도 시국을 피해갈수 없었다.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에 대해 부정적인 립장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잇달아 “전주가 계급성이 없다, 노래가 모주석의 형상을 모독했다, 표절했다” 등등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일로 선생님은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해 8월 1일 건군절, 룡정 연길현 공연팀이 226군병원에서 공연을 하게 되였다. 공연팀은 손풍금수가 없어 화룡현 문공단에 부탁을 하였고 그 부탁에 선생님이 따라나서게 되였다.

무대에서 공연준비를 다그치고 있는데 부대가 잇따라 들어오면서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웨치면서 열기를 돋구었다. 그러던중 공연을 앞두고 한 부대가 한어로 선생님의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를 구성지게 불러제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 일손을 멈췄다.

(해방군이 내 노래를 부른다는건 나를 인정하고 내 노래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선생님은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 저절로 눈물이 두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이제야 살았구나…) 선생님은 대뜸 깊은 수렁속에서 빠져나와 해볕을 본듯 눈앞이 훤하게 밝아졌다. 그때로부터 선생님의 명성은 날개 돋친듯이 전국에 알려졌다.

1972년 길림성 작곡 학습반에서 가곡 “당의 빛발 연변을 비추네”를 창작하며

그후 선생님은 연변조선족자치주 관계부문으로부터 곡은 그대로 두고 가사를 다시 쓴뒤 찾아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선생님은 한윤호선생님과 의논한뒤 “우리 마음속의 붉은 태양, 조국변강 비춰주네”로 가사를 고쳐 쓰고 연변인민방송국 회의실에 찾아갔다. 문을 떼고 들어서니 당시 작사분야에서 꽤 이름있는 선생님 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 끝에 부분적 가사를 재수정하고 화룡현 문공단의 황인순가수가 레코트에 노래를 록음했다.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공연 현장, 노래에 황인순가수, 손풍금반주(왼쪽)에 김봉호선생님

그해 길림성 혁명위원회가 설립되는 날, 중앙인민방송국에서 인민일보 사설을 발표하였다. 사설은 밤 8시 뉴스로 방송되고 사설 앞뒤에는 황인순이 부른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가 두번 방송되였다.

그렇게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는 전파를 타고 전국에 울려퍼졌다.

선생님은 중앙인민방송국 관계자로부터 모든 노래가 금지되였던 그 시절, 유일하게 이 노래가 방송을 타게 된 경위를 전해들었다. 바로 주은래동지가 특별히 이 노래를 점찍어 주었고 그 관련 자료는 지금까지 방송국에 보관되여 있다.

이렇게 선생님의 대표작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는 파란만장한 세파를 겪고도 전국 인민의 사랑을 받으며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극좌로선으로 하여 가사가 지금에 와서는 비난을 받을수도 있지만 아름다운 선률만은 여전히 격정으로 차넘치던 그 시절 추억을 생생하게 재현시켜주면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준다. 

중앙인민방송국 조향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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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丽的心灵》,《金梭银梭》- 개혁개방의 봄바람을 타고(ZOGLO) 2016년12월7일 

색 바래지 않는 예술인생
- 저명한 음악가 김봉호선생님의 50년 창작인생을 더듬어

80년대 선생님 모습

1974년 선생님은 길림성 문화국 부국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관직보다는 창작에 더 열성을 보였다. 연변을 떠나 장춘에서 근무하면서 선생님의 창작세계는 한차례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1979년 봄 어느 하루 절강성 문화국에서 선생님께 가사집 하나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가사집에는 2,3십수 노래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아름다운 마음”이라는 가사가 유난히 선생님의 눈길을 끌었다. 그때까지 선생님은 당과 조국을 노래하고 수령을 노래하는 작품을 주로 창작해왔기때문에 언젠가는 로동자나 농민과 같은 일반인을 노래하는 작품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 선생님의 소망을 이루기에는 “아름다운 마음”이 안성맞춤이였다.

새벽의 정적 깨뜨리며 방울소리 울려오네

옷자락을 날리면서 처녀는 청결차를 모누나

아, 그대는 천만의 인민에게 건강과 행복을 안겨주네

지극히 평범한 일터에서 자신의 신근한 로동으로 아침을 깨우고 사람들에게 깨끗하고 행복한 생활환경을 마련해주는 처녀 환경미화원을 노래한 가사 주제에 맞게 선생님은 경쾌한 절주, 잔잔하고도 작은 물결 출렁이는듯한 률동을 넣어 곡을 창작하였다.

곡을 부친뒤 선생님은 길림성 예술학교 교원들을 찾아갔다. 교원들이 피아노로 곡을 연주해보더니 너무 아름답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인정을 받고나니 선생님은 신심이 생겼고, 곡을 바로 주봉박가수에게 보냈다. 그러나 답복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이듬해 4월, 선생님은 가사를 쓴 진설범(陈雪帆)씨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진설범씨는 주봉박가수의 인터뷰기사가 실린 절강일보를 동봉해 보냈다.

기사는 주봉박가수가 항주에서 독창회를 갖고 노래 24수를 불렀는데 어느 노래가 가장 마음에 드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름다운 마음”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는 내용이였다. 주봉박가수는 외국에 나가 공연하면서 많이 느낀바로는 외국 녀성들은 더 천한 직업을 선택하더라도 환경미화원 직업만은 피하려 한다고 하면서 이 노래는 처녀 환경미화원의 아름다운 모습을 형상화하고 우리나라 사회주의 우월성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선생님 작품 음악회에서 박은화가수 등이 “아름다운 마음” 열창

1980년 초 문화부는 전국 우수가요 평의활동을 진행하면서 환경미화원으로부터 “아름다운 마음”에 대한 평가를 직접 들었다고 한다. 환경미화원들은 “아름다운 마음”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하는 일에 대해 보람을 느끼게 되고 “아름다운 마음”이 환경미화원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주었다고 적극 평가했다. “아름다운 마음”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전국에 널리 보급되고 길림성 인민정부로부터 “장백산문예상”을 수상받았다.

그해10월 도꾜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구 음악평의회의에서 “아름다운 마음”은 또 우수가요로 선정되고 아시아태평양지구 음악교재에 실리는 영광을 누리게 되였다.

중국음악가협회 가곡 편집부 간행물 표지에 실렸던 선생님 사진

1980년 선생님은 개혁개방시기 또 하나의 대표작인 “금실북과 은실북”을 창작하였다.

당시 중국은 금방 개혁개방의 봄바람을 탔고 전국인민은 네가지 현대화 건설에 뛰여들어 정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금실북과 은실북”은 바로 그 시절 자신의 일터에서 성실한 마음으로 분초를 아껴가며 열심히 일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그린 가사였다. 가사를 쓴 리유용(李幼容)씨는 당시 제2포병대 문공단에 있었고 해군들과 함께 바다에 나가 미사일 발사 관련 설계를 검토하면서 령감이 떠올라 가사를 쓰게 되였다는 사연을 선생님께 전해주었다. 선생님은 곡을 부치면서 당대 젊은이들이 각자 일터에서 분발향상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최대한 살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선생님 작품 음악회에서 김선희 가수 “금실북과 은실북” 열창

선생님은 완성된 노래를 주봉박가수와 김만가수에게 각기 보내주었다.

그러고나서 1981년 겨울 선생님은 문화부의 초청을 받고 음악 평심으로 북경에 오게 되였다. 북경 호텔에서 아침을 맞는데 방송에서 “금실북과 은실북”이 매주일가로 나왔다. 지방도 아니고 북경에서 매주일가로 방송된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선생님은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크게 힘을 얻고 이 노래가 생명력이 있을거라는 짐작을 하게 되였다. 때마침 주봉박가수도 이 노래를 레코트에 담아 출시했다.

북쪽에서는 김만가수가 부르고 남쪽에서는 주봉박가수가 부르면서 “금실북과 은실북”은 북과 남에 이어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국에 보급되기까지는 또 다른 계기가 있다. 바로 1983년 중앙가무단 단장이 노래를 탭댄스로 편곡해 음력설 야회 무대에 올리면서 “금실북과 은실북”은 화려한 비상을 위한 날개를 달게 되였다. 그 뒤 유명한 배우 강곤(姜昆),리문화(李文华)가 재담에 노래를 인용하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1984년 “금실북과 은실북”은 국경 45주년 행사 노래로 선정돼 천안문광장에서 크게 울려퍼졌다.

이밖에도 선생님은 “쫭족아씨(壮家妹)”, “눈썰매(小雪橇)”, “국기와 병사” 등 아름다운 곡들을 많이 써 음악계에서 위상을 높이고 저명한 음악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壮家妹”를 부르고 있는 吴碧霞가수

吴碧霞가수와 함께 (오른쪽 부인)

당시 선생님의 노래는 “문화대혁명”이라는 힘든 과거를 잊고 늦게 나마 인성의 격정과 랑만을 감지하며 분발된 정신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이바지하는 전국인민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냈다. 

중앙인민방송국 조향란
 

색 바래지 않는 예술인생

--- 저명한 음악가 김봉호선생님의 50년 창작인생을 더듬어

중앙인민방송국 조향란

제4편 식을줄 모르는 열정 – 애틋한 고향 정

선생님의 최근 모습

선생님은 1937년 조선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태여났고 1941년 부모님을 따라 길림성 화룡현으로 이주하였다. 선생님은1957년 화룡현 문공단 응시에 합격되여 문공단 배우, 부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63년 6월, 선생님은 중국 음악가협회 연변분회에 가입하였고 1974년 길림성 문화국 부국장으로, 1978년에는 길림성 문학예술계련합회 음악가 협회 부주석 겸 길림성 문학예술계련협회 위원으로, 1984년에는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정치부 문공단 예술지도로 있었다.

그동안 선생님은 중국 음악가협회 제4기 상무이사, 중국 조선족 음악연구회 상무이사로도 활동하였다.

은퇴해서는 중국 음악저작권협회 이사, 중국 음악문학학회 회원, 중국 소수민족성악학회 이사로 있으면서 각종 문화행사에 참가하고 있다.

동북삼성 창작강습반 학원들과 함께

“중국민요(中国民歌)”프로그램 게스트로 초대, 조선족가수들과 함께

최근 선생님은 북경시 조선족사회 행사에도 가끔씩 얼굴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북경 근교인 하북성 삼하시 연교에서 열린 “워커힐”컵 전국조선족노래자랑에 선생님은 심사위원으로 초대되기도 했다.

노래자랑 심사위원으로

그동안 선생님은 천5백여수의 작품을 창작하였고 국가급, 성시급 상을 무려 백여차례나 받아안았다. 선생님의 서재에는 그동안 받은 상장들이 두툼하게 쌓아져 있다.

1996년 선생님은 “중국가요계 20년의 휘황한 력사”의 작곡 성과상을 수여받았고, 2005년에는 국제중화문화예술협회로부터 “중화우수예술가”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선생님의 존함과 업적은 또 “중국예술가사전”, “중국대백과전서”, “중국당대문화예술명인사전”, “음악감상”, “중국공산당원명인사전”, “중국소수민족예술사전” 등에 수록되였다.

선생님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여나 50여년간 예술인으로 살면서 이 같이 평범치 않은 성과를 이룩하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몇년 다니지 못하고 중퇴해 농사일로 뼈를 굳혔으며 음악에 대한 애착심 하나로 화룡현 문공단에 들어가 한걸음 한걸음 자리 깊은 발자국을 남기며 외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성공의 비결에 대해 선생님은 대중성을 첫자리에 놓고 군중들과 고락을 함께 나누며 군중속에서 령감을 얻고 진정 군중을 위한 노래를 창작한것이라고 간단하게 이야기하셨다.

듣고 보면 쉬운 말이지만 그렇게 한다고 하여 누구나 성공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음악에 대한 식을줄 모르는 정열과 피타는 노력이 숨겨져 있다.

선생님은 업계에서 “부지런한 작곡가”로 정평이 나있다. 창작초기, 선생님은 신변의 음악가들, 말하자면 정진옥, 동희철, 리인희 등 선생님들이 쓴 곡들을 반복적으로 듣고 분석하면서 그속에서 정수를 뽑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갔다. 그렇게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정립하고 시대와 더불어 혁신을 거듭하면서 선생님은 시대를 풍미하는 수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선생님의 존함과 작품은 말 그대로 “력사의 기억이고 시대의 부호”이다.

길림성 출신 성악작품음악회 음악가들과 함께

칠순을 넘기신 지금도 선생님의 창작열정은 식을줄 모른다.

몇년전 선생님은 해남도 관계부문의 요청을 수락해 려족과 묘족 기념행사 주제곡을 썼다. 공연에서 선생님이 쓴 주제곡은 대절찬을 받았다.

그리고 또 북경에서 열린 전국소수민족문예합동공연을 위해 주최측의 요청으로 민족단결을 구가한 “우리의 가원 (共同的家园)”이라는 주제곡을 창작했다. 선생님의 인기는 아직도 식지않은 모양이다.

음악계 지인들과 함께 해남성 현지 고찰

선생님은 또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으면서 “장고야 울려라”를 창작했다. 당시 선생님은 연변문학예술인련합회로부터 고향을 노래하는 곡을 써줄데 관한 청탁을 받았다. “고향”이라는 단어만을 듣는것으로 선생님은 가슴이 뭉클했고 그 자리에서 선뜻 청탁을 받아들였다. 창작과정을 회억하면서 선생님은 고향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그대로 드러냈다.

“장고야 울려라”, 길림성 제8기 장백산문예상 수상

고향이 선생님께 한마디로 어떤 존재이냐고 물었을때 선생님은 “고향은 생활의 원천”이라고 주저없이 대답하셨다. 선생님은 “고향이 없으면 나의 일체가 없다, 고향의 물, 고향의 쌀이 나를 길러줬기때문에 어데 가나 고향을 잊을수가 없다”고 감개무량해 하셨다.

이젠 고향을 떠난지도 40년 가까이 되지만 선생님의 고향 사랑은 끈끈하다. 연변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꿈을 꾸어도 장춘이나 북경이 아니라 고향에 관한 꿈을 꾼다는 선생님, 같이 일하던 문공단의 동료들, 고향 마을 어느 초가집 그 누구, 길가의 이름 모를 화초들…정녕 고향은 선생님의 전부나 다름없다. 선생님의 노래를 통해 선생님의 그 고향사랑이 고향의 모든 사람들께 전해질수 있었으면 좋겠다.

맺으며

누군가 좋은 작품은 창작이 어렵고 그보다 더 어려운것은 보급이며 그 보다 또 더 어려운것은 긴 생명력을 갖는것이라고 하였다.

선생님이 창작한 노래들이 몇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불려지는것을 보면 선생님은 그 어렵고 어려운 일을 결코 해내신 셈이다.

높은 학력, 전문 교육도 없이 단지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오늘날 국가1급 작곡가 김봉호선생님을 탄생시켰고 앞으로도 선생님을 영원히 색바래지 않는 예술 인생속에 머물게 할것이며 선생님을 영원히 청춘으로 이끌어갈것이다.

수많은 영예증서가운데서 선생님께서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감사패

연변조간신문 총편으로부터 감사패 넘겨 받으며

후기: 취재를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선생님은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셨다. 그동안 자신을 키워주고 빛나게 해준 고향인민들에게 꼭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고, 또 음악회를 위해 물심량면의 도움을 준 연변조간신문, 연변농촌상업은행주식유한회사, 연변우의유한회사...등 여러부문에도 사의를 전하고 싶다고 하셨다. 정상에 오른 선생님이지만, 지금까지도 초심을 잃지 않고 항상 자세를 낮추며 이렇게 가슴 한가득 고마움을 지니고 사신다. 선생님의 행복한 만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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