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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9)
2017년 05월 05일 23시 32분  조회:2149  추천:0  작성자: 죽림
허구도입(虛構導入)의 망설임 문제


수필가라면 때로 허구의 도입이 허용되는지 안 되는지 꽤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필평론에 있어서도 이미 이런 점은 공개적으로 쟁점화 된 바 있다. 구성화 하는 과정에서 사실은 사실 그대로여야 한다는 논리와 필요시엔 허구의 도입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가 맞서 있다. 허구를 일체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논자들의 논리는 수필이 '체험의 문학'이요,'사실의 문학'인 만큼 어디까지나 체험이나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수필을 소설과 대비해서 본다면 우선 그 논리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이 '허구의 문학'이라고 해서 일체의 어떤 사실이나 체험이 들어가서는 안 되고, 어다까지나 100% 허구이어야 한다고만 주장하면 그것은 개념적 정의에만 지나치게 속박시키는 폭력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필이 '사실의 문학'이라고 하여 허구가 조금이라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도 '사실의 문학'이란 개념적 정의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경직된 논리라고 하겠다.
나는 무조건적인 허구의 도입은 인정하지 않지만 예술적 효과나 감동의 창출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부분적 허구는 인정해야 된다고 본다. 가령 한 편의 수필에 있어서 뼈대가 되는 사건이나 사실 자체를 허구화시켜 사실인 양 내보여서는 안 되겠지만 지엽적이거나 구성적 동기부여라면 허용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을 수필가 이철호 씨가 '수필창작에 있어서의 구성과 그 전개'란 글에서 밝힌 바도 있는데 나도 상당부분 공감을 한 바 있다.
수필은 비록 '사실'에 충실한다 해도 100% 사실위주의 글이어야만 하는 일기문이나 르뽀르다쥬 그리고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만큼 '사실의 문학'이란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상 '선의의 거짓말'이란 말이 있듯이 '선의의 허구'는 용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필가는 사실의 충실한 기록자가 아니며, 단순한 작문가도 아니라 수필이라는 집을 창조적으로 지어내는 예술가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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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새로운 길의 모색

 

                                                                                                                이 동 민

 

 

 

1. 들어가는 말

 

 

 

오늘을 수필의 전성시대라고 말한다. 그만큼 쓰여지는 수필의 편수는 엄청나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가,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된 글인가를 따지게 되면 마냥 자신만만할 수가 없다. 이 글은 그 이유를 탐색해 봄으로써 수필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우선 수필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개념적 입장에서 살펴보자.

 

“수필은 산문 문학의 한 유형으로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사물을 소재로 하고, 자아(ego)의 표출을 기본으로 하되, 어느 특정한 주의나 주장, 또는 지식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하지 않는다. 체제에는 제한이 없으나 대체로 독백 양식이다. 미지의 가장 이상적인 상대(독자)를 상정한 일방적인 대화의 한계에 머문다.”1)

 

위의 글은 차주환이 ‘수필의 개념’이라는 논제로 쓴 글에서 발췌하였다. 위의 정의는 수필의 사전적 뜻이라든지, 학자들 간에 합의가 이루어진 정의는 아니다. 그러나 이 논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용하고 있는 이론이다.

 

이 글에서는 “자아의 표출이 기본이다.”라는 말을 유의한다면 ‘자아’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 수필의 본질을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독백의 양식’이라는 말과 같이 생각해 보면 수필은 작가의 인간성(personality) 내지 내면을 표현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인간성이라고 하면 적어도 보편자가 아닌 한 특수자로서 작가의 인간성을 담론으로 삼는다는 말이 다. 작가라는 한 사람의 인격체(자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배경이 투여된다. 이럴 때의 인격체는 단순히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니고 자아라는 존재론적인 사물이 된다. 말하자면 자아는 사회, 문화적인 맥락에서 다루어야 한다. 결국 한 인간성의 정체성(identity)으로 귀속한다.

 

작가가 자신을 ‘시공간의 존재론적인 사물’이라는 하나의 물상으로 다루게 되면 자아는 하나의 기술의 대상이 될 뿐이다. 앤서니 엘리엇은 이렇게 말했다. “사회는 자아를 훈육하고 조절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감정과 우리의 정체성은 더 깊은 뿌리까지도 여러 사회적인 힘과 문화적인 감수성에 의해서 형성된다.”2)

 

우리가 객체로서 기술의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자아는 ‘나’이면서도 사회문화적인 맥락이 만들어 낸 수동적인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아를 설명하는 또 다른 이론으로는 정신분석학적 담론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프로이트가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무의식이라는 심층심리 구조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본인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의식으로서 실제의 우리 행동을 지배하는 심층심리이다.

 

사회, 문화적 체계에서 우리의 행동을 수용할 수 없을 때는 억압이라는 심리기제에 의해서 내면 깊숙이 감추어 버린 것이 무의식을 구성한다. 억압하는 것은 성적 갈망과 가족 로망스에 대한 유년기의 기억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프로이트는 자신의 무의식 이론을 정립하였다. 욕망에는 언제나 유년기의 기억들이 잠재되어 있다. 억압되어 있는 유아기의 충동과 좌절된 소망이 심리구조의 틈새로 비집고 튀어나오려는 힘(리비도)이 숨어 있다.

 

장년기에는 그러한 유년기의 기억들이 환상의 영향을 받아서 필연적으로 복원한다. 우리의 개인사와 사적인 서사 내용들은 엄밀히 따져 보면 무의식적인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 각 개인이 주관적으로 갖고 있는 관심사들은 우리가 아무리 자신의 생활(삶의 행로)을 제어한다고 자신하더라도 무의식적인 관념과 환상과 충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3)

 

근대는 내면의 발견부터 시작한다는 주장도 있다. 내면의 발견은 공적인 사회적 영역으로부터 개인의 사적인 영역이 분화되어 나온 과정을 보여 준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공적인 영역에서 본질적으로 삶의 가치를 부여하였다. 반면에 근대 이후에는 사적 영역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장소로 여기고 있다.4)

 

오늘, 수필 분야가 크게 신장할 수 있는 사회, 문화적 배경은 위의 언급에서 찾을 수 있다. ‘자아의 표출’과 ‘독백 양식’이라는 수필의 정의적 개념은 바로 개인의 사적 영역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가장 적합한 문학 장르가 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수필이 아직 문학의 분야에서 제자리를 확고히 차지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 까닭이라면 수필이 과연 ‘자아 표출’을 하고 있는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수필 작법에 대한 여러 주장을 살펴보자.

 

 

 

수필은 생활이다. 성실한 생활이 없으면 수필은 없다. 우리는 수필에 의하여 인생을 키워나가야 한다.― 김우현

 

 

 

수필을 쓰려면 박학이어야 하고, 인생 체험의 축적이 풍부하여야 한다.― 윤오영

 

 

 

위의 인용문들은 수필의 특성을 설명한 글들이다. 이들의 주장에서 ‘성실한 생활, 박학, 인생 체험의 축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의 가치와 사적인 욕망이 충돌을 일으키면 욕망은 억압되어 버린다. 앞에서 수필의 특성으로 꼽는 것에는 사회, 문화적 체계가 수용하는 가치5)를 표현해야 된다는 말이다. 자아6)를 표출하는 독백적인 글이 아니라는 뜻이다. 공적인 사회 영역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수필 쓰기는 “내면의 발견에서 근대가 시작한다.”는 주장과는 많이 다르다.

 

근대는 내면의 발견을 중요시하는 만큼 ‘사적 가족의 발견’을 같은 맥락으로 다룬다. 사적 가족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표현되는 심리적인 갈등 구조인 동시에, 가족의 유대를 통한 사생활의 독립을 뜻한다. 내면과 사적 가족은 공적, 사적 영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만든다. 이로써 한 인간의 독립된 공간을 형성할 수 있다.

 

내면과 사적 가족 둘 다 외부와 자신을 구분시켜 준다. 인간의 내면을 다루는 문학의 장르에서 수필의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2. 성장 소설과 수필

 

 

 

작가를 주인공으로 다룬 소설의 영역에 ‘성장소설’이 있다. 물론 소설이므로 스토리의 전개에 극적인 플롯이 필요하므로 허구적 요구가 개입한다.

 

작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수필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수필에서는 장르의 특성상 허구를 도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대신에 진정성이라고 하는 더 깊은 감동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둘 사이에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성장소설을 살펴봄으로써 수필을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성장소설은 젊은이의 내면적인 성장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자기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열정이 그 어느 시기보다도 강하고, 그럴 가능성이 제일 많은 젊은 시절의 이상과 좌절하는 과정이 펼쳐지면서 작가의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교양 이념이 표출된다.

 

주인공의 개성적인 인격이 형성되는 과정은 교육학에서 말하는 인격 도야와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성장소설의 창작 동기를 교양 이념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감동적인 성장소설은 그 시대의 본질적인 문제와 대결한 작가의 자서전적인 체험의 기록이어서 교육학적 통념으로서의 인격 도야의 과정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자연적 능력의 발전에 필수적인 은총 같은 것에 순종하고, 만족할 수 없는 작가의 분신이 그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7)

 

“젊은이의 내면적인 성장 과정을 다루었다.”는 말을 ‘수필 작가의 내면적인 성장 과정’이라는 말로 대체한다면 바로 수필 자체를 설명하는 글이 될 수 있다.

 

“주인공의 개성적인 인격의 형성은 교육학에서 말하는 인격 도야와 상통하는 면이 있지만 성장소설의 창작 동기는 그것만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내용을 두고 수필의 입장에서 검토해 보자.

 

수필은 문학의 갈래 분류에서 ‘교술문학’으로 다룬다. 그렇다면 인격 도야라는 면은 수필문학이 다루어야 할 분야이다. 성장소설에서는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다.

 

수필은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할까? 나도 ‘설명할 수 없다’에 낙점을 주고 싶다. 교술문학이란 말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수필을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회귀시켜야 한다는 강한 지침서가 된다. 내면이라는 사적 영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수필의 특성에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근대를 열었다는 ‘내면의 발견’이나 ‘사적 가족’이라는 의미는 공적 영역과 상충된다. 내면과 사적 가족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수필로서는 결코 환영할 만한 조건일 수 없다.

 

성장소설이 태어난 배경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시민 의식을 꼽는다.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기계적 합리주의는 비인간성이라는 속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또 정치적인 이유로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태어나기를 강요한다. 보편적인 교양 이념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이러한 요인들은 온전한 자아 발전을 저해한다. 원만한 자기실현을 이룰 수가 없게 한다. 따라서 성장소설이란 순진한 상태의 한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성장소설의 전개를 살펴보면 사회 현실에 무지한 한 인간이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적합하게 이행함으로써, 결국은 공동체의 이념에 종속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장소설이란 주인공의 개인적인 성장을 다룬 개인사이다. 개인의 역사가 규범적인 사회 질서 속으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개개인이 갖고 있는 영혼은 거대한 사회의 규범(초개인적인 가치관)이라는 수레바퀴에 깔려서 괴롭게 신음할 수밖에 없다.8)

 

나는 여기서 성장소설과 수필의 차이점을 찾으려 한다. 욕망으로 구성된 인간의 내면이 초개인적인 가치 체계에 종속되기를 강요당하면 좌절을 겪기 마련이다. 인간의 내면이 형성되는 과정을 프로이트와 라캉의 주장으로 살펴본다면 차이는 극명하게 나타난다.

 

성장소설의 주인공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 명성과 행복한 결혼으로 귀결된다. 도덕 교과서에서 미리 정해 둔 과정을 걸어가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이 발달해 가는 과정은 그렇게 안일하지도, 일방적이지도 않다. 한 개인의 내면이 성장하는 과정은 심한 갈등과 좌절을 겪으면서 무의식 속에 하나의 그림자로 머물게 된다.9)

 

내면의 그림자란 성장소설의 결론처럼 아름답지도, 행복한 모습도 아니다. 어쩌면 추하고, 징그러운 모습이다.

 

다시 자아로 되돌아가서 내면의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살펴보자. 수필은 어차피 “자아의 표출이다.”라고 한 이상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자아의 형성 과정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원초적’, 혹은 ‘원형’이라는 심리적 형태로 태어난다. 배고픔이라는 욕구와 어머니의 젖가슴이라는 욕구 충족의 실현물에서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경험을 한다. 더 나아가서 성적 욕구도 어머니를 대상으로 발현한다. 그러나 아이는 곧 어머니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사회 가치적인 금지에 부딪힌다.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금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심리 영역에 속하는 욕망 자체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무의식 속으로 잠행하면서 자아가 형성된다. 그렇다고 하여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사회적 영역 즉 공적 영역에 속하는 자아의 개념으로 성장하였다면 바람직한 인격 도야가 일어난 것이다. 반면에 내면이라는 사적 영역에서는 끊임없이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심리적 성장사를 경험한다.

 

내면이라는 것에서 보면 욕망의 대상으로서 어머니와, 금지하는 사회적 법으로서의 아버지, 그리고 나 사이에 ‘가족 로망스’가 성립한다. 가족 로망스는 성장소설에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수필에서는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누구든지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오이디푸스 가족’에는 끼어들 틈을 발견하지 못하므로 영원한 타자가 된다. 금지의 대상인 어머니와 금지자인 아버지, 그 누구도 나와는 멀리서 존재하는 자들이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가까이하고픈 그리움의 존재들이다. 아버지는 두려움의 존재인 동시에 내가 닮고 싶어 하는 동일시의 존재이다.

 

수필에서 수도 없이 등장하는 고향(곧 한 개인의 유년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채울 수 없는 욕망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존재(사회적 금지)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수필을 쓰는 작가는 누구나 오이디푸스 가족에서 아들이 된다. 지금의 정의대로 수필을 쓴다면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서 안 되고, 금지자로서 아버지에 대한 살해 심리는 조금이라도 냄새가 나서 안 된다. 이런 유의 수필로는 ‘내면의 표출’이라고 할 수 없다. 공적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수필을 쓴다면 영원히 사적 영역에서 개인의 자유를 구가할 수 없다.

 

여기서 수필은 ‘성장소설’과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한다. 오이디푸스 가족에서 타자로서의 나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에서 떠돌고 있는 나 자신은 성장소설의 주인공처럼 해피 엔딩으로 끝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기 완성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술을 통해서 가능하다.10)

 

수필작가는 허구의 소설이 아닌 현실 자체를 다루기 때문에 해피 엔딩으로 끝낼 수 없는 비극성을 숙명으로 안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수필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대로 수필을 통해서 자기 완성을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아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적 모델로는 라캉의 거울 단계가 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바로 자신으로 인식하고 닮아 간다. 거울 속에 비친 영상은 실재의 자기가 아니고 상상으로서의 자기인 것이다. 동일시한 대상이 상상의 존재라면 자아도 하나의 허구인 셈이다. 거울 단계의 이론은 자아(ego)가 안쪽(자신의 내면)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바깥쪽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자아의 지각은 외적인 이미지에 따라서 구조화하는 것이다.

 

라캉의 대명제인 “주제의 욕망은 큰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결국 내면의 표현도 나를 감싸고 있는 사회 문화적인 욕망을 대변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다시 자아의 표현에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면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맞닥뜨린다.

 

나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오늘의 자아가 형성되기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표현하는 글이 수필이다. 자아의 형성 과정이 개개인에 따라서 다르기 마련이다. 글도 사람에 따라서 달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또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규정’을 하여야 한다.11)

 

이제 성장소설을 검토해 봄으로써 수필과 차이점을 인식하고 수필을 써야 할 방향을 짚어 보자. 우리는 수필을 통해서 오늘의 자신으로 성장해 온 과정을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자아의 표출’이기도 하다. 자아란 타자의 욕망에 의해서 사회, 문화적 가치에 순응하게끔 형성되기 마련이지만 심리적인 내면을 바라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좌절과 갈등은 숨어 있고, 환상으로 뒤덮인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다. 욕망은 내 인격의 그림자가 되어서 나를 짓누르고 있다. 수필은 이런 것을 솔직하게 표현해야 한다. 성찰을 통해서 그림자를 인격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표현해야 한다.

 

억압으로 숨기고 싶은 나의 추한 내면을 성찰 과정을 통해서 수필로 표현함으로써 한 단계 성숙한 인격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수필은 이런 것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성장소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픔과 고통이 따르겠지만 이것만이 수필이 나아갈 길이다.

 

 

 

 

 

3. 작품으로서의 수필

 

 

 

수필은 개인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개인이 사회와 문화라는 숲 속을 헤쳐 가는 여정을 보여 주는 글일 수밖에 없다. 개인은 외부의 온갖 위협으로 상처를 받는다. 자기 방어적으로 도사리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을 표현하다 보면 사회 비판적인 요소도 담긴다.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에서 나란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내면에서 형성되는 자아라는 것은 소위 타자라고 부르는 모든 외적 요소가 관여하여 형성된다. 자아는 곧 시간과 공간이 공동으로 만들어 내는 한 시대의 총체적 산물이다.

 

이렇게 보면 ‘나’라는 한 개인의 진술, 아니 개인이라기보다는 ‘자아’가 진술하는 기록은 의미가 매우 크다. 더구나 요즘의 신역사주의는 하부 구조의 삶의 방식에 더 큰 의미를 두므로 역사의 측면에서도 개인의 기록인 수필은 가장 적합한 텍스트가 된다.

 

한 개인이 만드는 문학 작품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문이 있다.12) 창조적인 작가들은 어린이들의 놀이처럼 공상적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자기가 창조한 세계를 진지하게 생각한다. 어린이들의 놀이는 욕망에 의해서 인도된다. 그러나 어른은 자신이 몽상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몽상을 불러오는 욕망 중의 어떤 것은 숨기고 싶은 것이 많다. 어른들은 자기의 몽상을 마치 유치하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인 양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몽상은 자기 자신이 영웅이 되는 자화자찬식이 대부분이다.13)

 

요약해 보면 문학 작가는 자신들의 몽상을 작품으로 형상화해 낸다. 그러나 몽상에는 남에게 숨기고 싶은 유치한 내용이 많다. 그러나 자기 예찬식 글을 씀으로써 유치함을 숨기고, 사실을 변형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수필을 이런 방식으로 써서는 내면은 전혀 드러내지 않으므로 자아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 표출된다. 이럴 때는 수필 작품의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황병하는 ‘얼마만큼 벗을 수 있을까?’라는 글을 통해서 시사성이 큰 언급을 하였다.14)

 

“자전소설까지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자전(自傳)은 문자 그대로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문학) 장르를 가리킨다.”

 

황병하는 그의 글에서 자전소설에서의 벗기를 다루고 있다. 자전소설의 자리에 수필을 대입하면 그대로 수필문학에 대한 비판이 된다.

 

그는 자전소설의 예로서 박완서의 ‘그 많은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와 신경숙의 ‘외딴방’을 비교하였다.

 

“박완서는 작가의 말에서 ‘그러나 자신을 바로 보기처럼 용기를 요하는 일은 없었고, 내가 생겨나고 영향 받은 피붙이들에 대한 애틋함도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라고 작가가 고백하는 데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엇인가 의도적으로 생략할 수밖에 없는 이 작품이 걸작이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미리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황병하의 말이다. 신경숙의 ‘외딴 방’을 평한 그의 글은 이렇다.

 

“신경숙의 ‘외딴 방’은 이러한 고교 동창생의 질책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미 널리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기 때문에 한때 자신의 나이를 속이고 동남전기에 근무했던 소녀 노동자였고, 여성 노동자를 위한 영등포여고 산업체 특별 학급의 학생이었던 사실을 밝혀야 하는 데서 오는 아픔과 고뇌를 신경숙은 극복한다. 바로 이 점이 신경숙과 박완서의 차이인 것이다.”

 

수필이 아닌 자전소설을 두고 황병하는 벗기에 대해서 이렇게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소설이 아닌 수필을 쓰는 사람에게 벗기를 따지는 일조차 무의미하다. 왜냐면 허구가 용납되지 않는 수필에서 벗기에 대한 논쟁이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수필은 허구를 인정하지 않는 문학의 장르를 차지하면서, 벗지도 않는 글을 써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프로이트가 몽상에서 논하였듯이 유치하여 숨기고 싶은 것들로 구성된다면 더더욱 벗기는 난감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수필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들을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그 글들도 사실을 얼마나 벗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벗어도 별로 부끄럽지 않는 내용들로 메꾸어져 있다. 드러내고 싶지 않는 나의 그림자는 언제나 꼭꼭 숨어서 숨죽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수필을 새롭게 조명할 필요성이 있다. 프로이트가 말하였듯이 놀이의 방법으로 자기 치유의 역할을 자아의 뒷면에는 그림자라는 무의식이 웅크리고 있다. 그림자는 의식의 세계에 머물기에 부적합하여 무의식의 세계로 쫓아 버린 것들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림자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은 일상 생활에서 별다른 저항이 없는 조그만 흠집도 의식 세계에 담아 두지 않는다.

 

시공간에서 형성되는 삶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 개개인의 그림자가 다르다는 것은 당연하다. 박완서가 많이 벗지 않는 이유도 그의 자아 뒤편에 있는 그림자가 벗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림자가 항상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의식화함으로써 긍정적인 기능을 가질 수 있다. 성찰을 통하여 나의 그림자를 정확하게 인식하여 나의 의식 세계로 편입함으로써 인격의 폭을 넓힐 수 있다.

 

그림자 속에 내포되어 있는 가치를 살리기 위해서 강압적으로 그림자를 없앤다고 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림자를 의식 세계에 받아들임으로써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갈등을 극복하는 용기가 필요하다.15)

 

수필에서 자신을 벗는 일도 그림자를 의식 세계로 불러내어서 인격화시키는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방식의 글쓰기는 가장 바람직한 수필 쓰기가 된다. 진정성에서 어느 장르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성장소설이나 자전소설의 방법을 좇아서 즉, 자기 성찰에 의해서 새로운 인격체로 재탄생하는 문학의 장르에 가장 적격이다.

 

서양에서는 하나의 장르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성장소설, 자전소설이 우리의 문학에서는 아직까지도 미답의 분야이다. 수필의 장르적 특성을 살려서 우리가 선점한다면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다.

 

 

 

 

 

4. 자서전과 수필

 

 

 

자서전의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필립 르죈은 이렇게 말하였다.

 

“한 실제 인물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소재로 하여 개인적인 삶, 특히 자신의 인성(人性=personality)의 역사를 중심적으로 이야기한, 산문으로 쓰인 과거 회상형의 이야기이다.”16)

 

이 정의는 거의 사전적 권위를 가질 만큼 일반화되어 있다. 이 규약에 따른다면 자서전은 산문으로 쓰여진 이야기 형태이다. 다루어진 주제는 한 개인의 삶과 그 개인이 오늘의 인성으로 형성되기까지의 역사이다. 책을 쓴 저자는 자서전의 화자와 동일 인물이어야 한다. 화자는 자서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회상 형식으로 쓰여진다.

 

자서전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 내면 문학의 갈래에는 회고록, 전기, 한 개인의 삶을 그린 자전적 사소설, 자전적 시, 내면 일기, 자기 묘사 이야기 그리고 수필이 있다. 필립 르죈의 분류에 의하면 수필과 자서전 사이에는 서로 전이가 가능할 만큼 깊은 연계가 있다. 자서전을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내면 문학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저자와 화자, 그리고 주인공 사이에 동일성이 성립해야 한다는 것이 필립 르죈의 주장이다. 말하자면 이 규약에 가장 근접해 있는 장르가 수필인 것이다. 수필 형식으로 자서전을 쓰는 것에 걸림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자서전의 규약에서 명시하고 있는 이야기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 소설이든, 자서전이든, 이야기에는 하나의 사건이 통일성을 이루면서 그 나름대로 하나의 구조 속에 수용되어 있다. 이 때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나’라는, 혹은 ‘주인공’은 동일인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장르가 달라진다.

 

자서전에서도 화자인 나는 이야기 속의 나(주인공)를 서술하므로 긴장 관계가 성립한다. 이 때의 화자인 나는 이야기 속의 나를 질책도 하고, 회한도 토로하므로 주관성이 나타나서 담론을 형성한다. 자서전을 설명하는 이 말을 수필의 기법으로 그대로 따른다면 수필도 훌륭한 자전 수필이 된다. 수필 쓰기도 자서전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삶을 과거 회상형으로 서술하면서 화자의 주관을 깊이 새겨 넣기 때문에 ‘자아의 글쓰기’인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할 때는 어떤 순서로 하여야 할 것인가. 거의 대부분은 태어날 때를 시발점으로 하여 이야기를 연대기식 순서로 전개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유년기를 정확히 기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더라도 심층심리 학자들은 대부분이 부정확할 뿐더러 왜곡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하더라도 우리는 기억이 이끄는 대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 행로를 돌아다니면서 여행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의 글쓰기에는 현재와 회상 속의 과거가 관계를 맺으면서 극적 요소를 형성한다. 왜냐면 우리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소설적 형식이 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과 사건의 극적 효과가 미묘한 관계를 형성하므로 우리의 글쓰기도 자연스레 관계를 부각시키는 방향이 된다.

 

연대기적 서술이거나 극적 효과를 노리는 소설적 구성이거나 간에 궁극적으로는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위에서 말한 관계 형성이란 말도 그런 뜻이 들어 있다. 사람이 긴 세월을 살아온 삶이 하나의 선으로 그을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자서전의 의미 생산에 문제점으로 나타난다. 클로드 모아는 이의 해결책으로 자신의 자서전 ‘나, 나는(Moi je)’에서 연대기적 기술의 순서를 부분적으로 뒤집는 방법을 선택하였다.17)

 

또 다른 실제의 예를 들면 미하일 조르첸코는 그의 ‘해 뜨기 전’에서 역연대기 순서로 서술하였다. 현재를 시발점으로 하여 장년기로, 청년기로, 유년기로, 그리고는 탄생에 관한 추억까지도 기술하였다. 사실상 탄생의 기억을 추억으로 불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서전에 이런 내용을 기술하였다면 자서전 쓰기에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 주는 것이다.

 

이런 형식의 자서전은 수필 쓰기의 방식이 훨신 더 유리하다.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지 않는 수많은 사건을 회상 형식으로 불러내서 단편적인 글들을 쓴다. 물론 단편적인 글들이라고 하여도 작가는 하나의 흐름을 기획하고, 구성하여 글쓰기를 하여야 한다. 그래야만이 의미를 생성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하나씩, 하나씩의 단편적인 기억들로 이루어진다. 과거에 묻혀 있는 삶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파편화된 여러 기억들을 짜깁기하듯이 재생해 낸다. 이런 경우에는 자서전에서 요구하는 연대기적 서술이라는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수필이 갖는 자유로운 구성으로 글쓰기를 할 수 있다. 자전 수필적 글쓰기에 의미 생성을 위해서 시간의 흐름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

 

자서전이 요구하는 또 하나의 규약은 총체성이다. 자기의 인생을 관통하여 흐르는 통일된 의미를 기술해야 한다. 자기의 인생을 자기의 이름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의미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파편화된 수필의 글쓰기에서도 전편에 일관되게 흐르는 의미를 담아내어야 한다. 그것은 오늘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회상의 형식이므로 그때의 삶이 지금의 가치관으로 반드시 긍정적인 것일 수는 없다. 과거의 자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자신을 설명해야 한다. 자서전에서 과거란 과거에 머물러서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나를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되므로 오늘의 나에게 귀속되어지기 때문이다. 18)

 

따라서 과거를 진술하는 방법에는 자전적/자기비판적인 이중의 양상을 띤다.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내면을 고백할 때는 이미 그 안에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이 담겨져 있다. 수필이 비록 내 인생에서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하나의 사건으로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긍정도 하고, 비판도 하므로 저자의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다.

 

성장을 통해서 형성되는 인간의 내면은 일의적인 내용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다양한 내면을 함유한다. 이와 같은 다면성을 통일을 이루도록 종합하는 일이 쉽지 않다. 결국에 자기비판적인 글쓰기를 하므로 통일성을 갖도록 종합하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종합성이란 자서전의 주인공이 살아오면서 형성된 현재의 가치관이 중심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줄거리로 연속하는 자서전의 글쓰기 방식보다는 자전 수필적 글쓰기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자전적 수필은 성찰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음을 확인해 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자서전/자전 수필 읽기에서 저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고, 감추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독자들은 저자의 진술을 마냥 순진하게 믿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에 의심을 가질 때는 사실이 아니더라도 저자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고 믿는다. 독자들이 의심을 가지는 것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다. 사소한 문제이겠지만 글을 너무 정성스럽게 다루어도 독자들은 무언가를 의심한다. 기교가 느껴지면 내용조차도 인위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글에서 너무 짙은 서정성으로 독자에게 감정의 폭발을 일으키는 경우에도 진실성에 의심을 일으킨다. 왜냐면 감정은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문장의 직접적인 내용만이 아니다. 언술의 행위가 감정을 일으키는 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글쓰기와 장식적인 수식어들이 난무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작가의 목소리가 우렁차거나 애조를 띠는 것도 독자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그렇다고 하여 독자들은 작가의 의도에 고분고분하게 따라 주는 존재는 아니다. 꼼꼼히 살피면서 의심을 한다.

 

작가와 주인공이 동일하다는 자서전의 절대적 규약은 진실이라는 진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규약을 어기면 자서전의 의미는 상실한다. 자서전 쓰기에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조건은 바로 여기에 있다. 소설로는 결코 이루어내지 못하는 진정성을 수필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5. 몇 가지 자전 수필적 글쓰기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

 

“먼저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가족 관계를 꼼꼼히 살펴보기로 하였다. 나를 알려고 할 때 ‘나’ 자신은 이러하다 저러하다고 하는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소용이 없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그런 말이 정확할 수 없다. 그래서 나와 가장 가깝고, 나를 길러 준 나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가, 그분들은 나를 어떤 방법으로 길렀는가, 하는 사실을 알아보기로 하였다.”19)

 

전인권은 전인권이라는 오늘의 성인이 된 한 남자로 만들어지기까지를 짚어 보았다. 먼저 부모와 맺어져 있는 가족 관계에 시선을 주었다. 전인권은 자신의 자서전적 책의 부제로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과정’이라고 이름 붙였다.

 

프로이트 이론에 의하면 한 사람의 자아(ego)가 형성되는 기제는 ‘동일시’이다. 부모는 애증이 교차하면서 동일시의 절대적인 대상이 된다. 말하자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심리적 갈등을 심하게 겪으면서 인격체를 가진 한 사람의 인간으로 탄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인권은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형성되는 인간관계를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나의 삼각관계라고 하였다.

 

전인권이 자서전적 책으로 출판한 ‘남자의 탄생’은 프로이트 이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탄생 과정을 살펴본 내용이다. 따라서 자신을 알기 위해서 부모를 알아보려 한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부모의 알기가 아닌 부모와 자신과의 관계 맺음에서 자신의 내적 심리 작용에 의해서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글쓰기의 형식이 너무 이론에 충실하려는 논리성 때문에 수필이라는 문학적 양식으로 분류하기에는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수필쓰기에서 나의 진정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심층심리의 이론도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배울 만하다.

 

 최인호의 가족소설 『가족』

 

최인호가 오래 전에 샘터지에 가족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인 ‘가족’ 시리즈의 글을 발표하였다. 어머니와의 관계, 아내와의 관계, 자녀들과의 관계를 수필적 기법으로 서술한 소설이었다. 소설이면서도 수필쓰기 양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자전수필의 좋은 보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어 보면 최인호라는 자신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없다. 가족 간의 긴장 관계를 의식적으로 표현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일상사를 수필 형식을 빌어서 소설을 구성하였다. 특별한 긴장감이 흐르지 않는 잔잔한 흐름의 가족 관계는 수필적 형식이 가장 적합하구나 하는 느낌이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자전수필도 이런 양식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다면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밤 열시 이후 걸려 오는 전화는 모두 딸아이의 전화였고, 딸아이의 전화는 밤 한 시건, 두 시건 계속 이어져서 방금 만나고 온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계속 히히 헤헤 호호 야단들이다. 나는 원래 전화로 수다 떠는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내가 친구들과 전화로 이야기하는 것도 싫어해서 아내는 전화를 걸 때마다 내가 없는 빈방으로 도망쳐서 눈치를 보면서 도둑전화하는 것이 보통인데, 밤이면 밤마다 걸려 오는 딸아이의 전화에 정말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서클 선배라는 남자 친구들도 전화를 걸 때면 ‘저는 누구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인사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대뜸 “다혜 바꿔 주세요” 하고 용건부터 말하는 것이 보통이니 나는 자연 비위가 상하고 밸이 꼴리고 아니꼬워서 내가 뭔가, 전화 바꿔 주는 교환수인가 하고 스스로 자신에게 묻곤 하였었다.

 

두고두고 보다가 한번 밤늦게 걸려 온 전화를 받자마자 분통이 터져서 “야 너는 최소한의 예의도 없느냐, 너는 에미 에비도 없느냐, 나는 이 집의 아버지이자 가장이지 전화를 바꿔주는 교환수가 아니다.” 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는데 그날 밤 나는 딸아이의 항의에 그야말로 묵사발이 되어 버렸다. 아버지는 야만인이고, 교양도 없는 독재자이며, 이해심도 없는 옹고집에 전형적인 구세대의 낡은 유물이라는 것이다.

 

 

 

최인호가 소설 형식을 빌려서 가족 이야기를 쓴 글이다. 비록 소설이긴 하여도 세대 간의 갈등과, 시대에 밀려나는 자신의 처지를 잘 나타낸 글이다. 그러나 내 가족들과의 관계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문학 형식으로는 수필이 가장 적합하다고 믿는다. 가족 간의 갈등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시대가 반영되고, ‘나’라는 인격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위의 글은 수필 형식을 빌린 소설이다 보니 진정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소설 형식을 빌린 수필로 표현할 수도 있다. 밀란 쿤데라의 많은 소설이 수필 형식을 빌리고 있다. 이는 소설이라는 허구에 수필의 장점을 접목하려는 시도이다. 반대로 수필에 소설 형식을 빌림으로써 갈등이나 긴장감을 더 높일 수도 있다. 최인호의 ‘가족’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므로 주인공이 나이더라도 나의 내면까지 보여 주는 데 한계가 느껴진다. 전화라는 하나의 사항을 두고 가족 간의 시선에 차이가 있다. 이를 자신의 내면에 투영하여 자아를 표현하는 형식의 글로 쓸 수 있다. 자전수필을 바로 이런 형식의 글로 쓸 수 있다.

 

 

 

고흐의 『영혼의 편지』

 

또 하나의 유형으로 나는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를 들고자 한다. 1881년부터 죽을 때인 1890년까지 쓴 편지가 668통이나 된다고 한다. 테오는 그의 동생이었지만 그의 삶에서는 인생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그의 편지에는 그의 내면 즉, 영혼까지 담겨 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그의 편지 중 일부를 모아서 『영혼의 편지』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다.

 

고흐가 쓴 편지는 허구가 아닌 사실이고, 그의 내면을 드러내므로 바로 수필이다. 앞에서 소개한 남자의 탄생이나, 가족보다는 수필 형식에 가장 충실한 글이다. 고흐의 편지는 인간 내면을 가장 진솔하게 표현하였으므로 수필적이다.

 

고흐가 서른 살 나이일 때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창녀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동거를 하였다. 가족들의 반대가 심하였다. 이 때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고흐의 내면이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시엔과 이렇게 지내고 있는 이상 결혼이라는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겠지. 비록 우리 가족은 그렇지 않다 해도 아버지가 결혼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와의 결혼에 반대하지만, 결혼도 하지 않고 사는 일은 더 나쁘게 보시겠지. 아마 시엔과 헤어지라고 하실 거다.

 

이제 나도 이마에 주름이 진 30살의 남자이다. 게다가 얼굴에 가득한 잔주름은 40대처럼 보이게 하고,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하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나를 어린애로만 보신다. 1년 6개월 전에 띄운 편지에서 아버지는 “이제 너는 첫 번째 청춘을 맞고 있다.”라고 쓰셨다. 과거에도 여러 번 들었던 터라 조금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20)

 

 

 

최인호의 가족소설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수필은 바로 이런 형식의 글이어야 한다. 고흐는 아버지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와의 갈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고흐의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양식에는 일기가 있다. 안네의 일기를 꼽을 수 있다. 사춘기의 문을 두드리는 한 소녀의 순수한 내면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수필은 개념적 정의에 이미 내면의 표출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내면을 감추는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독자의 확보에 실패하였다고 생각한다.

 

 

 

 

 

6. 나가면서, 그리고 자전수필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는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을 실행하므로 인생이란 결코 무의미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 그 의미를 굳이 찾으려 하지 않을 때만이 무의미한 것이다. 수필은 바로 그 의미를 찾는 하나의 방법이 되고 있다.

 

자전은 개인사이다. 개인사라고 하여 사회와 문화와 역사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자신이 만들어지기까지 숱한 충돌과 갈등과 고뇌를 겪으면서 만들어진 결과물인 것이다. 자전수필은 그러한 자신을 역사적인 맥락을 갖고 기술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라고 하면 개인의 삶은 묻혀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거대한 사건만이 있고, 거시적인 시간의 흐름만 있을 뿐이다. 역사적 사건 속에 호흡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개인의 존재는 망각되어 버린 것이 개인사가 실종되어 버린 이유이다.

 

우리는 우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회적인 가치관과 부딪히는 것을 두려워하여 표현을 포기하면서 살아왔다. 역사란 수많은 개체들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총체적인 흐름이라고 할 때 개인사인 자서전이나, 자전수필은 역사에서 중요한 몫을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쓴 수필은 자서전이란 장르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한 개인의 단편적인 느낌이나, 한순간의 사건들을 쓰므로 자신을 파편화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파편화되어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일관성 있는 가치로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여 자전이라는 장르에 편입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다.

 

서구의 문학 장르에서는 이미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서전 분야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씨를 뿌리는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른 생각나는 것이라고 백범 일지 정도이다. 이 분야에 수필이 자전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선점하자는 것이 이 글을 쓴 의도이다.

 

이러하기 위해서는 수필의 장점인 진솔한 내면의 고백으로 진정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그러면서 알을 깨고 새롭게 태어나 오늘의 자신이 된 과정을 진솔하게 표현하여야 한다. 침체의 늪에 머물고 있는 수필이 뻗어 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서 나름대로 찾아낸 길이 자전수필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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