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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그 어떠한 령혼을 흔들수 있는 시를 써야...
2017년 05월 11일 22시 53분  조회:2139  추천:1  작성자: 죽림

광기의 나날에 핀 아픔이라는 꽃
ㅡ이승하론


주 영 숙

 2. 침묵의 거리에 서 있는 목격자 

  날카로운 변증(辨證)의 재능을 갖고 있던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절망 혹은 고뇌는 인간이 스스로 죽을 수 없다는 바로 그것에 기인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렇게 절망은 죽을병에 걸려 있는 사람의 상태와 비슷하다. 이 병자는 거기에 누워서 죽음 때문에 시달리고 있으나 죽을 수는 없다. 이렇게 '죽으리만큼 앓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죽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지만 그렇다고 삶에의 희망이 아직 거기에 있으리라는 것은 아니다. 죽음이라는 최후의 희망까지도 있을 수 없다는 희망의 상실인 것이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인 때에 사람은 삶을 바란다. 사람이 다시 더 두려워할 만한 위험을 배워 알게 되면 그는 죽음을 원한다. 죽음이 희망의 대상이 되는 정도로 위험이 증대된 때, 절망은 죽을 수 있다고 하는 희망까지도 잃는 것이다. 


  이승하 시인은 폭력과 광기뿐만 아니라 공해와 질병, 절망감과 소외감으로 이 도시의 위험수위가 점점 차오르는 것을 우뚝 선 채로 목격한다. 그리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아픔 때문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 치밀어오르는 신음을 내뱉고 있다. 아픔에 대해서만은 체념의 도에 다다라 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그 아픔을 아프지 않게 해줄 재주가 없다. 다만 한잠 자?nbsp;나면 아프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혹 아파서 죽더라도 다른 무수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고, 그런 말만 되뇌이다가, 문득, 아픔의 꽃을 피우면 될 거라는 삼라만상의 순리에 해당하는 대안을 내놓기도 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타인의 아픔이나 죽음에 대하여 우리는 그저 목격자일 뿐이다. 시인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목격자일 뿐이라고. 시집을 주마간산격으로 훑어보자. 

  발작이 멎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아침이다. 피고름의 병실 한 구석에…… 네 눈의 희미한 빛. 단 한번 죽어서 무수히 살아나야 한다. 무거운 시간에 짓눌려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목을 만져보면 아직 붙어 있는가…… 인질이여. 가족이여, 우리 허물어진 가축들이여……. 나는 불발탄, 끝끝내 터지지 않고 그냥 타인과 함께 살아갈 뿐이다. 칼바람 부는 이곳, 서울바닥에서. 울지 말고 가자, 자꾸 뒤돌아본들 버린 고향 버려진 유년…… 혼자 돌아누울 수 있는 자유, 혼자 가려운 곳 긁을 수 있는 자유, 그 어마어마한 자유가 없는 이곳에서 그대 천장 노려보며 이빨 꾹 깨물고서 참고 있구나…… 뼈가 갈리는 비명을. 나는 내 뼛속의 고통에게 타전한다. 한번 지독하게 아파본 사람은 알리라. 새벽 동이 트기까지가 얼마나 가파른 길인가를…… 하반신이 마비된 어느 별은 아무 말 없이 버틸 때까지 버틴다. 소원은 단 하나, 집에서, 죽고, 싶다는 것. 침묵이 흐르는 21세기 벽두, 대형 전광판이 빛을 쏘아대는 휘황한 거리에 서 있는 나는 목격자야. 나는 이승하야. 


  한 순간에 한 사람이 사라져 
  하나뿐인 소우주가 폭발하였다 
  '그'는 틀림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지구상 유일한 목격자로서 

  (……)

  다음 날 아침 아스팔트 위에는 
  핏자국과 흰 스프레이 자국 
  며칠 후 그 거리에는 '목격자를 찾습니다' 
  플래카드 외롭게 펄럭이고 색 바래고 

  ……침묵이 세상을 암흑에 휩싸이게 한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외로운 신은 얼마나 가슴아파하고 있을까
  침묵이 흐르는 21세기 벽두의 거리 
  대형 전광판이 빛을 쏘아대는 휘황한 거리 

  ……그는 나다. 
                                      [침묵의 거리] 부분 


  이승하 시인이 2002년 6월 15일 날짜로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글(제2회 지훈문학상 수상 소감)에 이런 내용이 있다. 


  조지훈 선생은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승무], [고풍의상], [완화삼] 등 주옥같은 시를 남긴 시인입니다. 그러나 지훈 선생은 탁월한 문학론을 전개하여 저를 일깨워준 분이었습니다. 지훈 선생의 문학론은 문학의 예술성과 독자성을 강조한 순수문학론, 문학정신의 지향점이 된 민족문학론, 민족문학의 실천적 방법으로 삼은 고전주의적 문학론, 이 세 가지로 집약됩니다. 지훈 선생이 쓰신 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순수시는 경향시에 대한 정통시요, 순수시의 영역은 정치, 종교, 사회, 어디에도 갈 수 있는 무제한이나 다만 시가 되고 예술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무제한이다." 이 말씀을 저는 시라는 것이 공리적인 가치나 정치·종교·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완전히 별개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가치를 초월하는 이상적인 가치, 혹은 미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순수시라는 이름을 가지려면 그 소재가 비록 폭력이어도 반드시 예술성을 지녀야 한다. 그렇다면 시인 이승하는 한 편 한 편의 시마다 정치·종교·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완전히 별개일 수는 없으면서도 그런 가치를 초월하는 이상적인 가치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승하는 공리적인 가치를 초월하는 이상적인 가치, 즉 행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미적 가치를 추구했음이 시 편편에 드러난다. 그런데 결국 폭력이라는 것은 인간의 뇌에서 나오고 시인 역시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을 부정하기? 아직 그 대답은 성급하다. 우선은 인류의 역사가 폭력의 역사였다는 부정의식이 나온다. (물론 인간의 역사가 그 자체로서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기도 하지만.) 그 부정의 둘레에는 '나'의 책읽기와 개인적 경험이 놓여 있다. {폭력과 광기의 나날}에서 시사된 바 있는 각종 신문이나 책에서 오려낸 사진이나 기사, 수기의 편린은 폭력의 항구성과 편재성을 반복적으로 타전한다. 그 폭력의 항구성과 편재함에 대한 지식이 시간의 경계와 공간의 경계마저 넘어서게 되는 것은, 그러나, 책읽기의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사의 기억에 의해서이다. {폭력과 광기의 나날}에 끔찍하게 묘사되어 있는 '개인사'의 잊지 못할 기억은 끔찍한 폭력에 붙들려 있다. 


  계속 화를 내시는 아부지, 참다 못해
  누이가 한마디 뱉자마자 저 얼굴에 밥상을
  (……)

  딴 집 아부지는 술 취하면 애들을 팬다는데 
  왜 늘 맨정신으로 아부지, 불쌍한 어무이 고만 때리이소
  할무이 앞에서는 제발 상 엎지 마이소
                                      [10대] 부분


  웃음을 잃은 무기력한 어머니. 가슴 치며 혼절하는 할머니. 니체를 읽는 초인이 되어 "찬란한 성적표를 들고" 오는 것이 최선이던 형. 참다못해 누이는 한마디 내뱉는다. 그러나 누이는 "눈에 띄는 빗자루나 총채로 흠씬" 두들겨 맞기만 한다. "벌레처럼 누이는 비명도 못 지르고/ 벌레처럼 내도 죽은 시늉"을 한다. 아버지를 제외한 여타 가족의 삶은 벌레의 삶과 다를 바 없다. 그 벌레 같은 삶의 끝은 발작이다. "누이를 데리고 다닌 이 나라 정신병원의 수와/ 내 입 속으로 털어넣은 몹쓸 알약의 수"([본회퍼의 혼에게 띄우는 편지])를 시인은 셈할 수 없다.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한 시집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에는 그 누이에 대한 시가 나오는데, 이러하다. 


  누이는 어느 날부터인가 
  월경이 멎고, 식욕을 잃었다 
  낮에 웃고 밤에 바장이고 
  혼자 웃고 혼자 흐느끼고 
  잘 쉬어라 쉬어 
  네 곁에서 나직이 휘파람 불면 
  누이는 일어나 두 팔 아느작거리며 
  집을 나섰다 마을을 나서 
  혼자 가만가만 웃다 바람이 이끌면 
  네 혼을 불러내는 정든 시내 
  그 냇둑에 서서 바람을 그리겠다고 
  바람의 매무새를 그리겠다고 

  甘川아, 甘川의 바람아, 착란의 이 땅아 
  내 누이는 영원히 어린애란다 
  나와 누이를 연결시켜 주는 끈은 없단다 

  버려진 내 누이, 너는 아직 곱게도 미쳐……
                                      [바람 그리기] 부분 


  10대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모든 인간관계가 파탄된 그 지점에서 '나'의 삶은 시작되었다. 이런 인식은 '나'란 존재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의혹으로 이행되어 간다. 그러나 '나'는 누이 앞에서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45년이 바다임을 말해주기 위해 어머니, 살아 있어야 했고 아들, 살아남아야 했던" 45년 기다림 끝의 90대 노모도, 70대의 그의 아들도 아니다. 내 큰아버지가 "할아버지 정액 속의 한 마리 정충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는 모두 물에서 나와서/ 열 달 동안 양수 속에서 살다/ 추깃물이 되어 땅 속으로" 스밀 뿐이다. 깊이깊이 한숨짓는 바람의 다발을 울음 참고 오래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력한 목격자일 뿐이다. 


   3. 버려지는 것들에 대한 양심 고백 

  이승하는 {뼈아픈 별을 찾아서}에 '아버지'가 제목에 들어가는 시를 다섯 편 실었다. 그 시편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가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식솔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술을 간혹 마시긴 했지만 장이 안 좋아 과음을 하면 꼭 배탈이 났었다 하니, 알코올 중독자가 될 턱이 없었다. 취한 모습도 1년에 고작 서너 번, 아주 드물게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시인 이승하는 그런 아버지를 부엌칼을 들고 자기 식솔들을 협박하는 인물로 그렸고, 자발적으로 배설하지 못하는 몸으로 그렸고, 뇌사 상태에 빠뜨렸다가 결국 임종의 순간을 맞이하게도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승하 시인이 사기를 친다고 하며 배신감에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시집 {뼈아픈 별을 찾아서}를 아버지에게 보냈고, 아버지가 그것을 읽어주기를 바랐다. '용서'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용서는 할 수 없어도 이해는 해야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인은 뼈아픈 별이 된 누이, 아버지의 딸이었던 그 누이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시편 속에서나마 일련의 벌을 받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누이더러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하늘의 별에 대고 애소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집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에서 와서 시인은 아버지를 '산불 진화에 나선 아버지'로 만들어놓고 아버지에 대한 그 모든 서운함을 한줌 재와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물이 점점 줄어들어 메말라가는 세상
  아, 아버지의 옷에 지금 불이 붙어 있습니다
  활활 불이 되어 쓰러지면
  아버지가 못다 끄신 불을
  제가 나서서 끄겠습니다 마지막 불씨까지.
                                      [산불 진화에 나선 아버지] 부분    


  시집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는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소외되고, 버려지고,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썩어가는 것들"이기도 하고 "혀, 혀가 자, 잘/ 도, 도, 돌아가지 않는"([혀]) 것들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꼬꼬댁꼬꼬댁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푸드득푸드득 하늘 향해 날개를 치며" "한꺼번에 죽어가는"([닭을 잡던 날]) 닭들이기도 하다. 시인의 이들 존재에 대한 애정은 우리 사회의 풀뿌리라고 할 수 있는 민중에 대한 애정과 맞물리면서 오늘을 '무사히' 살아가고 있는 독자들의 양심을 고문한다.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는 형이상학적인 사유와 성찰보다는 고통의 실재에 대한 감각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고통을 철학적인 대상화로 허용하지 않고 절박한 즉자적 현실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시인의 의도가 반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 비유와 수사의 장식을 배제한 산문적인 서술형의 언술은 고통의 구체적인 사실성을 배가시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또한 시적 대상으로 주로 아들·아버지·외할머니·어머니·할아버지 등 가까운 가족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신문지상에 거론된 인물들을 직접 등장시킴으로서 결과적으로 독자들이 고통의 실상을 일상의 층위에서 체험적으로 환기하고 공유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어린 날, 비가 오면 마당에서 
  지렁이가 몇 마리씩 기어다니곤 했다 
  저 징그러운 놈들을 괴롭혀주자 
  재미로 몸 위에 소금을 뿌리면 
  온몸으로, 미친 듯이 춤추는 지렁이의 
  아아 그 열렬한 몸짓이라니 
  그 처절한 발광이라니 

  내 필생의 화두는 
  '고통의 뜻을 알자'는 것 
  지렁이처럼 기어가는, 짓밟히는 
  소금을 처바르고 몸부림치는 
  그놈들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그러므로 내 시는 이래서는 안 되는 것! 
                                      [지렁이 괴롭히기] 부분 


  곱창전골을 노래한 시 [질긴 창자]의 "얼마나 많은 죽은 것들의 살과 뼈마디를 내 창자는 소화시켜 왔는가"를 읽으면 모든 생명은 타자의 목숨을 담보로 영위되고 있다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얄팍한 피부 안으로 뭇 짐승과 동일한 색깔의 붉은 피가 흐르고 있다. 그런데, "내 필생의 화두는 '고통의 뜻을 알자는 것'"인데, "지렁이처럼 기어가는, 짓밟히는/ 소금을 처바르고 몸부림치는/ 그놈들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지렁이를 괴롭히는 현장을 재미있게 써서는 안 될 일이다. 재미 위주의 가벼움은 이승하의 시와는 거리가 멀다. 통통 튀는 상상력보다는 체험의 진실성에 무게를 둔다. "그러므로 내 시는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다짐도 시인의 진지한 현실인식의 산물일 것이다. 지렁이가 아무리 폐쇄혈관계를 가지고 있고 100마디 이상의 몸을 가진 환형동물이지만 그 나름대로 매우 유익한 존재인데, 단지 작고 보잘것없다고 해서 마구 괴롭혀서야 되겠는가. 그런 의도였는지 시인은 이 시집의 마지막 작품으로 [지렁이 괴롭히기]를 놓았다. '지렁이를 대표로, 이 세상 모든 약한 것들을 괴롭힌 폭력에 대해 나는 양심 선언을 한다. 나의 시를 읽는 모든 이들도 반성해야 한다.' 마치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는 듯이. 

  "내 필생의 화두는 고통의 뜻을 알자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는 시인의 심상이 사랑과 평화에 대한 열망에 접근해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고통의 뜻을 알고 나면 과연 잔잔한 평화가 올 것인지, 끝없이 용서의 주문을 외우며 반짝여댈 별들에 대한 노래를 계속 부를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을 논자가 알 수가 없지만, 그러나 공허한 관념을 되씹고 있는 오늘의 시단에서 그가 제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뚜렷한 문제의식, 모든 약하고 소외받는 것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폭력의 양상을 연구한 그의 시편들은 반드시 주목받아야 할 것이다. 눈물 그렁그렁한 생명체들의 비명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겠지만 언젠가는 한 송이 한 송이 꽃으로나마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라고 시인은 믿고 있다. 이승하 시의 힘은 바로 이런 믿음에서 나오고 있다.  

  주영숙 :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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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순토바하 
―곽재구(1954∼ )

내 꿈속에 꽃이 핀다면
저런 형상으로 필 것이다

신이 내 꿈속의 마을을 방문한다면
그는 바로 저 빛깔의 사리를 입고 올 것이다

누군가 내 꿈속에서
지상의 별들을 모두 잠재울 노래를 부른다면
그는 바로 저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볼 것이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아기를 잠재운 어머니들이
비로소 떠나고 싶은 한세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저 꽃의 순결한 그늘일 것이다

 

 

동무여, 가난한 내 노래는
한 잔 2루피 찻집의 호롱불보다 침침하고
환멸과 탄식으로 가득 찬 내 영혼은
그믐의 조각배 위에 위태롭게 출렁거리나니

언젠가 한번 꼭 피거든
이 꽃만큼만 피어라
언젠가 한번 빚을 죽음이거든
이 꽃만큼만 처절하게 시들어라




젊은 날에 푹 빠져서 읽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한 구절, ‘편도나무여, 내게 신의 이야기를 하여다오/그러자 편도나무는 활짝 꽃을 터뜨렸네’가 뭉클 떠오르게 하는 시다. 보순토바하는 ‘봄의 말, 또는 봄의 노래라는 뜻을 지닌, 느티나무만큼 큰 꽃나무’인데 노란색 꽃이 핀다고 한다. 
 

 

인도를 여행하던 어느 봄날, 시인은 가지마다 노란색 꽃 가득 인 나무와 마주치고 영혼이 흔들릴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그늘도 순결하단다. 신의 숨결과 눈빛이 느껴지는 환하고 장엄한 꽃나무! 신성할 정도로 아름답게 꽃 피운 그 나무를 실제로 보았으니 이후로 시인은 ‘꿈속에서 꽃이 핀다면/저런 형상으로 필 것이다’. 부러워라, 그런 축복은 방안풍수에게는 찾아오지 않는다. 제 발로 찾아가야 만날 수 있을 테다. 그 강렬한 순간이 세상을 떠돌고 헤매는 여행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일 테다.

누구 못지않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를 써온 한 시인이 이제껏 써온시를 가난하고 침침하게 느끼고, 제 영혼이 환멸과 탄식으로 가득 찬 걸 깨닫게 하는 이국의 봄나무 보순토바하. 너무 큰 것은 사람을 압도한다.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압도당하면서 찬미하고 다짐한다. ‘언젠가 한번 꼭 피거든/이 꽃만큼만 피거라!’ 죽음을 걸고 처절하게 아름다우리라. 지극한 그 노래는 지상의 삶, 그 환멸과 탄식의 고단한 때를 부드러이 씻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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