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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렬사비4]추수봉기를 빛낸 국제주의전사 진룡학
2017년 03월 07일 11시 13분  조회:1750  추천:0  작성자: 리함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4)

□ 리 함

1

중국혁명사와 중국인민해방군 군사에서 1927년에 조직된 남창봉기와 추수봉기, 광주봉기를 3대봉기로 일컫는다. 이같은 3대봉기에 모두 우리 겨레가 참가하였으니 1927년 8월 1일에 일어난 남창봉기에 우리 겨레 수십명이 참가하고 피를 흘렸다면 이 해 12월 11일 광주봉기에는 200여명 조선동지들이 피못에 쓰러졌다. 이해 9월 9일의 추수봉기에는 조선동지-진룡학(陈龙鹤) 한 사람이 참가하였지만 진룡학은 국제주의전사인데서 그 의의는 자못 깊어 추수봉기를 말할 때면 자연히 진룡학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인 진룡학의 주요 활동무대는 강서 정강산으로 펼쳐진다. 2013년 8월 27일, 진룡학의 발자취 따라 정강산 현지답사길에 올랐었다. 이날 아침 7시 정강산시를 떠난 택시는 답사의 첫 역인 강서 영신현성으로 달린다. 진룡학이 참가한 그제날 영신현(永新县)성 진공 전투는 진룡학 연구에서 꼭 풀어야 할 선참 과제였다.

오늘에 와서 필자가 3만자에 달하는 진룡학전기를 집필하기전까지 진룡학에 대해 알려지는 연구자료는 너무도 빈약하였다. 진룡학은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이고 국민혁명군 제2방면군 총지휘부 경위퇀 전사이고 이 경위퇀을 토대로 개편된 중국로농혁명군 제1군 제1사에 소속되여 모택동이 지도한 1927년 9월 추수봉기에 참가하고 추수봉기부대를 따라 정강산투쟁에 참가하였다, 정강산 시절 중국로농홍군 제4군 제11사 제31퇀 1영 1련 1패 패장으로 오두강전투 룡원구 전투, 영신 3차 전투에 참가하였다, 1932년 4월 복건 장주전역에서 희생되였다 등이 전부였으니 진룡학을 알자면 현지답사길에 오르지 않을수 없었다.

진룡학은 삼만개편에도 참가했다. 사진은 삼만개편기념관과 그 뒤로 보이는 삼만개편기념비.

진룡학이 참가한 정강산지구 여러 전투들중 영신 3차전투는 1928년 5월과 6월 사이 모택동이 사장을 겸한 제11사 제31퇀을 따라 참가한 전투들이였다. 택시는 그런 영신현성을 바라고 달리고 달리며 정강산 라소산맥(罗霄山脉)의 중간부에 위치한 만양산(万洋山)의 한 산령을 넘어선다. 산령을 퍼그나 내리니 아스팔트길 왼쪽에 “하자진 옛집”(贺子珍故里)이 나타난다.

하자진(1909-1984)의 옛집은 영신현 연각향 황죽령촌(永新县烟阁乡黄竹岭村)에 자리하고있었다. 하자진의 옛집은 정강산시와는 16키로메터, 영신현성과는 22키로메터 상거한 지점이였다. 하자진의 옛집을 찾아보고 산을 내리니 산아래는 영신현성이고 영신현성에는 “하자진기념관”이 자리하고있었다. 하자진기념관은 2007년 11월에 개관한 기념관으로서 영신현성에서 가장 큰 홍색주제공원으로 손꼽히는 삼만공원(三湾公园)내에 위치하고있었다. 정강산시절 진룡학은 영신을 세번 치는 전투 모두에 참가한것으로 보이지만 오늘의 영신현성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수가 없었다.

2

정강산 현지답사의 두번째 역은 영신현성에 이어 룡원구전투현지. 주변이 모두 산으로 둘러있는 룡원구(龙源口)는 현성과의 거리라야 40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현성에서 룡원구진까지는 불과 16키로메터 밖에 안되는데 도중에 정강산 시절의 대형 홍군조형 구조물-물 흐르는 좁은 구간 높은 거도우에 정강산근거지 군민생활을 반영하는 조형물과 돌다리 전부를 “십송홍군”(十送红军) 다리로 꾸미고 다리우에 산 사람을 방불케 하는 여러 홍군조형물이 보이여 (여기가 정강산이구나!) 하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택시는 어느덧 룡원구진을 지나고 룡원구 마을을 지나 정강산의 상징으로 되는 룡원구다리에 이르렀다. 룡원구다리는 궁형을 이룬 돌다리로서 청나라 도광(清道光) 17년(1837년)에 건설되였다고 한다. 다리 길이는 33메터, 너비는 2.5메터, 높이는 9.2메터다. 모르면 강서에서 흔히 대할수 있는 한낮 평범한 시골다리로 볼수 있겠지만 실상은 1928년 6월 룡원구 전투가 벌어진 력사적인 고장이고 정강산의 상징으로 된 다리여서 그저 지나칠 다리가 아니였다. 이런 다리우로 우리의 진룡학이 걸어오고있다. 필자한테는 그렇게만 보인다. 오죽하면 룡원구 옛 다리 사진이 해방후 제2조 3원짜리 인민페 지페도안으로까지 되였을가.

진룡학이 참가했던 룡원구전투 현지-룡원구다리. 이 다리는 정강산의 상징으로 되여있다.

영신현성과 룡원구다리에 이어 당년의 삼만개편현지는 세번째 역으로 나섰다. 력사적인 삼만개편현지를 찾자면 삼만촌으로 가야만 한다. 삼만촌은 영신현 서부의 구롱산북쪽(九陇山北麓), 영신-정강산-련화(莲花)-호남 차릉(茶陵 )4개 현, 시의 교차지에 위치하지만 영신현성과의 거리는 고작 39키로메터, 큰길가 룡원구진과의 거리는 더욱 가까와 큰길 따라 나아가는 택시로는 한식경이면 달릴수 있는 거리로 나타난다.

하지만 삼만촌은 필경 시골마을이여서 큰길가에서 오른쪽으로 골안 따라 몇리 들어가야 하였다. 삼만촌으로 굽이지는 큰길 왼쪽가에는 삼만개편 관련 대형 기념광장이 선참 펼쳐져 오고가는 길손을 반기고있었다. 기념광장은 한창 건설중이라지만 세멘트 등으로 잘 닦아진 넓은 기념광장우에 20여개 철근기둥으로 받쳐진 지붕모양의 엄청 크기의 붉은 당기가 경사지게 조성되고 그 옆에 2층으로 된 주체건물이 세워져있었다.

영신현 삼만개편현지로 이어지는 큰길가에 마련된 대형 기념광장과 당기 모형

흥미로움은 붉은 당기 옆으로 날던 이름모를 검은 나비 한마리가 필자주위를 빙빙 돌다가 필자앞 기념광장 바닥에 살짝 내려앉은것. 그런 검은 나비의 두 날개는 앞뒤로 검은색과 푸른 으로 되고 날개 뒤부분은 반달형 붉은 선들이 여러 점 박히여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진룡학 찾아 먼길을 달려온 길손을 반기는 나비런가, 워낙 나비만 보면 카메라에 잡아두기 좋아하는 필자는 반가운 기분으로 조심조심 다가가 련속 사진화하니 기분이 그야말로 짱이다.

큰길가 삼만개편기념광장을 떠나 오른켠 삼만촌 향촌길로 굽어드니 향촌길 어구에 “개방번영으로 행복을 수놓자”(开放繁荣秀美幸福)는 선전문이 세워져 당지에서 삼만개편현지를 중시하고있음을 직감적으로 알려주고있었다. 삼만촌을 앞두고는 “삼만개편 빛뿌린다”(三湾改编放光芒)는 선전문이 뒤를 이었다. 이곳 선전문을 지나니 삼만촌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3

오늘의 삼만촌은 시골마을이 아니라 삼만 전체 옛 마을을 홍색관광지로 꾸미여 참신한 모습을 보이였다. 삼만에 들어서자 천지만엽을 자랑하며 소소리 솟아오른 세그루 옛 단풍나무가 첫 발목을 잡았다. 거대한 우산모양으로 다가왔다. 양산을 들어도 얼굴을 지지는듯한 남방의 열기속에 제법 훌륭한 그늘을 이루어주지만 천혜의 그 혜택을 누릴 겨를이 못된다. 부지런히 돌아쳐야 할 시점이였으니까.

세그루 옛 단풍나무는 삼만개편의 상징나무여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떠오르며 “풍수평”(枫树坪)이라고 불리웠다. 단풍나무아래에는 나지막한 모택동 반신동상이 자리하고있었다. 모택동 반신동상의 래력은 옆의 단풍나무 관광안내비가 알리였다. 관광안내비에 따르면 1927년 10월 3일 이른아침, 삼만개편후의 추수봉기부대는 여기 풍수평에서 모임을 가지였고 모택동이 중요강화를 하고 행군기률을 선포하였었다. 이는 또 황포 4기생 진룡학도 단풍나무아래서 모택동의 중요강화를 들었음을 잘 알려주고있었다.

삼만개편의 상징나무로 된 삼만개편 현지의 세그루 옛 단풍나무 풍수평(枫树坪)/이상 사진 2013년 8월 27일 현지촬영

그래서일가, 삼만의 세그루 옛 단풍나무는 그지없이 정다와보였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필자의 시야에는 모택동의 중요강화를 듣는 진룡학의 모습이며, 중요강화가 끝난후 곧 정강산 진군길에 오르는 추수봉기부대가 안기여든다. 환영이 아니였다. 추수봉기부대며 그 부대속의 진룡학이 분명 보이고있었다. 분명 그렇게 보이는 마음의 격랑이였다. 그렇게 인 마음의 격랑은 좀처럼 사그러들줄을 몰랐으니 세그루 옛 단풍나무 뒤산 언덕에 솟아오른 붉은기를 떠인 삼만개편기념비를 보며 그러하고 좁은 평지를 이룬 풍수평 왼쪽에 일떠선 “삼만개편기념관”을 보며 그러하다. 격랑은 격랑으로 사품쳐간다.

그 격랑속에서 답사의 발길을 먼저 오른쪽 퇀부자리-민국 초년에 지었다는 종가사(钟家祠)로 돌리였다. 력사속의 종가사란 종씨들로 똘똘 모여 세운 종친들만의 사찰이란 말이니 삼만의 이들 종씨는 진씨(陈氏), 리씨 등 50여호로 이루어진 성씨중의 한갈래였다고 한다. 그러던 종가사에 삼만에 이른 진룡학 소속 추수봉기부대 퇀부가 머물고있었다. 추수봉기부대가 삼만을 떠나간후 국민당부대는 홍군이 거치여간 집이라고 1929년 8월에 불태워버렸다고 하니 필자의 시야에 안기여든 옛집은 1967년에 지은 집으로서 약간명 사람들이 종가사 내부를 한창 정리하며 페인트칠에 여념이 없었다.

추수봉기 력사속으로 들어가보면 진룡학 소속 추수봉기 부대가 삼만에 앞서 강서 수수(修水)를 중심으로 추수봉기를 단행할 때 봉기군은 5000여명에 이르렀다. 그러던 추수봉기 부대가 영신현 삼만에 이르렀을 때는 1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력사적인 삼만개편을 거치면서 원래의 사를 한개 퇀으로 축소하고 퇀아래에 1영과 3영 두개 영을 설치하였다. 제1영은 1련, 2련, 3련 세개 련, 제3영은 7련, 8련, 9련 세개 련으로 무어지고 퇀 산하에 특무련, 군관대, 위생대, 치중대(辎重队,즉 군수품대)를 더 설치하였다.

4

삼만개편을 거치면서 진룡학은 제1퇀 제1영 제1련 제1패 패장을 맡아나섰다. 패장이라고 급별이 낮다고 보지 마시라. 진룡학 소속 제1퇀내 군관대, 위생대, 치중대를 제외하고도 퇀 산하에는 특무련까지 모두 7개 련을 두었다. 패로 말하면 21개 패라는 말이 되는데 진룡학은 이 21개 패가운데의 한 로농혁명군 패장이다. 그 시절 모택동의 로농혁명군 근 1000명중 퇀부 간부와 련부 간부 도합 29명이고 패장이 21명이라 할 때, 중국 최초 홍군대오의 50명 장관가운데의 한 사람이라 할 때 이들 50명 장관들속에 끼이는 조선인 진룡학의 지위나 급별은 결코 낮은것이 아니였다.

세그루 단풍나무와 퇀부자리-종가사 현지답사를 마친후 “삼만개편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은 2층으로 이루어지면서 1층은 삼만개편 진렬실과 영상청, 휴식실, 2층은 하자진과 영신출신 장군 전시, 문물창고, 사무실로 나타났다. 기념관의 한 강사와 황포 4기생 진룡학을 물으니 1층 진렬실에 삼만개편에 참가한 황포생 명단이 있다면서 가보라고 한다. 그러면 그렇겠지,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다.

지체할세라 기념관 1층 진렬실로 발길을 돌리였다. 1층 진렬실 한 구간 벽에는 “로농혁명군 제1군 제1사 제1퇀 조직기구표”와 더불어 “삼만개편에 참가한 황포생 명단”이 전시되여 있질 않는가. 삼만개편에 참가한 황포생 명단에는 모두 18 황포생 이름이 적히였는데 이들 18명 명단에서 진룡학의 이름이 열두번째에 밝혀져있었다.

삼만개편기념관 1층 진렬실에 전시된 삼만개편에 참가한 황포생 18명 명단

마음은 다시 세찬 격랑이 일었다. 그럴수 밖에 없는 필자이다. 중국홍군을 찾아, 그 홍군대오속의 진룡학을 찾아 산동 위해서 앞당겨 소흥으로 돌아갔고 소흥에서 다시 강서 정강산을 찾았으니 그 먼먼길에 여름방학 휴식도 마다하고 정강산을 찾은 필자가 아니였던가. 그런 필자한테 조선인 진룡학이 추수봉기에 참가하고 삼만개편에 참가한 황포생중의 한 사람으로 우렷이 떠오른다.

진정 정강산을 헛찾지 않았다. 조선인 진룡학이 추수봉기에 참가하고 삼만개편에 참가하고 정강산투쟁에 참가했다는 이 한마디면 족했다. 마음은 한없이 후련해난다. 그러면 중국혁명에 뛰여든 우리 조선사람들은 남창봉기에도 참가하고 광주봉기에도 참가하고 추수봉기에도 참가하였으니 중국혁명사와 중국인민해방군 군사에 대서특서된 3대봉기 모두에 우리 민족의 불멸의 위훈이 아로새겨지게 되였다.

필자는 그런 진룡학을 중국대륙에 솟아오른 또 하나의 불멸의 기념비라고 생각한다. 그래 불멸의 기념비지, 추수봉기를 빛낸 불멸의 기념비. 이 기념비는 오늘도 중국인민해방군 건군사의 리정표로 되는 저명한 삼만개편에, 정강산지구의 영신현 삼만개편기념관에서 빛나고있으니 삼만개편기념관에 이어 모택동과 주덕의 정강산 회사지점으로 되는 정강산시 룡시진을 거치며 정강산의 중심을 이루는 산속의 차평에 돌아가는 발걸음 내내 가볍기만 하다.

2017년 2월 13-14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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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장금용
날자:2017-06-08 11:52:18
열사들의 발자취를 찾아서, 단 우리 민족이라는 이유로, 동분서주하는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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