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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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    2. 중국으로 온 후 댓글:  조회:938  추천:0  2020-09-13
중국으로 온 후   1   1923년 3월, 북경으로 온후 중국어가 생소한데서 무정은 선참 문화대학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웠다. 1924년에는 북방군관학교에 입학하여 포병과를 전공하였다. 일본학자 모리가와 노부아끼(森川展昭) 교수의 견해( 주. “관내지구 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회편” 하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1336페지)다. 중국과 한국의 무정 관련자료들을 검토하면 무정장군이 선참 문화대학에서 중국어를 배웠다는 견해를 같이하고있다. 북방군관학교 입학에 대해서는 견해가 전혀 다르다. 김순기선생은 북방군관학교가 아닌 보정군관학교(강무당)이며 이 학교 포병과를 졸업했다고 주장( 주.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1페지)한다. 무정장군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조선의용군 전사라 신빙성이 더 있어보인다. 중국과 한국의 허다한 자료들이 모두 김순기선생의 주장을 따른다.  무정장군 글을 비중있게 써낸 중앙인민방송국 기자 김성룡과 연변텔레비 기자 서봉학(徐凤学)도 보정군관학교설을 견지한다. 필자도 보정군관학교설에 의문을 가지질 않는다. 여러 면의 자료를 보면 모두가 보정군관학교에로 모아지고있다. 보정시는 하북성 중부에 위치하면서 북으로 수도 북경과 140킬로메터, 남으로 성소재지 석가장과 125킬로메터 떨어져있다. 보정륙군군관학교(保定陆军军官学校)는 보정 옛성에서 동북으로 5화리(5华里) 되는 동풍동로(东风东路) 585번지에 자리잡았다. 태항산항일근거지 첫 답사차 2009년 8월 14일에 보정에 이르러 보정륙군군관학교를 찾으니 전체면적 1500여무에 달하는 군관학교가 맞아주었다. 보정륙군군관학교 정문에는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륙군군관학교 간판이 걸리고 오른쪽 기둥에 보정군교기념관 간판이 내리 걸리여 여기가 그제날 보정군관학교임을 알리고있었다. 정문에 들어서면 단층집으로 된 학교건물이 안겨지면서 입구건물 정면의 군혼(军魂)이라는 커다란 금빛 두 글자가 유난히 눈부시였다. 이어  보정군관학교문물사료전시관을 찾아보니 문물사료전시관에는 1500여명의 졸업생 명단이 밝혀져있었다. 1902년부터 1923년까지 보정군관학교가 존재한 21년간 전후 9기에 걸쳐 근 1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할때 대부분 졸업생 명단은 밝히지 못한 현실이였다. 무정의 이름은 이곳 1500여명 명단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2   관련 소개자료를 보니 보정군관학교의 전신은 1902년과1903년에 꾸린 “북양륙군행정장변학당” (北洋陆军行营将弁学堂), “북양륙군속성무비학당”(北洋陆军速成武备学堂)이고 청정부가 중국에 처음으로 꾸린 최대규모의 전국적인 군관학교였다. 갑오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청정부는 군사를 진흥하고 신식군대 골간을 양성하기 위하여 매년 10만원의 경비를 학교에 지출함과 아울러 구라파, 미국, 일본 등 나라에서 교관을 초빙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해마다 외국에 류학생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장개석을 비록한 중국 국민당의 허다한 고급장교들이 이 학교의 졸업생이였다. 장개석의 회상에 의하면 그가 이 학교에 입학할 때 절강성에만도 1000여명이 지망을 했으나 입학할수 있는 사람은 겨우 14명밖에 안됐다고 한다. 그만큼 학교의 심사가 엄하고 입학점수선이 매우 높았다. 북경 문화대학서 초보적이나마 1년정도 중국어를 익힌 무정은 시험을 거쳐 보정군관학교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좋은 군사자질을 갖추었던 무정은 꾸준한 노력으로 포병전문가로 성장하였다. 보정군관학교 시절에 무정은 조선인으로서 군벌혼전을 이룬 국민당과 동북군 사이 남구전역(南口战役)에 참가하였다. 남구전역은 북경 13릉 서부에서 벌어졌다. 무정은 또 천진공격전에 참가하여 군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한후에는 국민당 염석산(阎锡山)부대의 포병대위(大尉)로, 22살 때에는 포병 중좌군관(中校军官)으로 활약하였다. 22살 때면 1925년을 가리킨다. 군벌간의 혼전에 언녕 실망을 느낀 무정은 미련없이 국민당군대에서 탈출하여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1925년 이해 장가구(张家口)에서 공산당원 문창빈(文昌彬), 명덕건(明德件)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후 무한에 이르러 당의 지하사업에 뛰여들었다. 1926년 5월 20일, 중국공산당의 직접적인 령도밑에 있는 국민혁명군 제4군 엽정독립퇀이 북벌군의 선견대로 선참 호남에 진격하여 북벌전쟁의 서막을 열어놓은뒤 7월 1일에 국민정부는“북벌선언”을 발표하였다. 7월 9일에 8개 군의 약 10만명이나 되는 국민혁명군은 서로, 중로, 동로 세갈래로 나뉘여 정식으로 북벌을 시작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영향과 추동, 인민군중의 지지밑에서 북벌군은 반년 남짓한 기간에 오패부(吴佩孚), 손전방(孙传芳)의 수십만명 주력부대를 소멸하고 중국의 절반땅을 점령하였다. 1927년 1월 광주의 국민정부는 무한으로 옮겨갔다. 혁명세력은 주강령역으로부터 장강, 황하류역에로 발전하였다. 화북이 눈앞에 보였고 조선도 멀지 않았다. 희열에 벅찬 무정은 지체없이 북벌전쟁에 뛰여들며 조선민족 대표로 무한에서 열린 “반일대동맹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3   1927년 4월, 장개석이 상해에서 4.12반혁명정변을 일으키고 7월 15일,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가 무한에서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하자 국공합작은 파렬되고 기세드높던 대혁명—북벌전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허나 투쟁의 시련을 겪으며 위대한 북벌전쟁에 나섰던 거의 모든 조선인혁명가들이 확고부동하게 중국공산당 켠에 섰다. 무정도 국민당의 공산당진압에 맞서 싸우다가 한구(汉口)에서 체포되여 감옥에 갇히였다. 사형에 언도되였다고한다. 그러자 무한의 대학과 중소학교 1만여명 학생들이 대시위를 가지고 조선인혁명가 무정의  즉각 석방을 강력히 촉구하여 나섰다. (주. “관내지구 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회편” 하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1336페지) 무한당국, 아니 왕정위 괴뢰정부다. 이자들은 학생들 대시위에 눌리워 무정을 가짜로 석방하고 암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무정은 혼자가 아니였다. 괴뢰정부의 무창(武昌)법원 법관중에 무정의 동지(주.“관내지구 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회편” 하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1336페지)가 있은데서 무정은 다행히도 상해로 무사히 빠질수가 있었다. 무한의 대학과 중소학교 1만여명 학생들 대시위, 무창법원의 동지—이러한 사실들은 공산당원 무정의 위인됨을 알리고도 남음이 있다. 무한에서의 무정은 조선인혁명가의 대표로 성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 시절 상해에는 중국공산당 조선인(한인)지부가 활동하고있었다. 적절히 말하면 중국공산당강소성위 소속 홍남구(洪南区)조선인지부이다. 이 조선인지부의 래력을 알자면 조선공산당을  곁들어야 할것 같다. 1925년 4월에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였다는것은 세인이 잘 아는 일이다. 이에 따라 상해에는 조선공산당의 지부가 조직되였는데 사회주의자 려운형이 지부책임자였다. 국제공산당 일국일당(一国一党)의 원칙에 따라 상해 조선공산당지부는 1927년 9월에 지부성원 전체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강소성위 홍남구소속(주. 관내지구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휘편 상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283페지)으로 되였다. 려운형이 의연히 서기였다. 려운형은 그때 복단대학 영어교수였다고 하는데 중공지부는 그의 사택인 상해 프랑스조계지 포석루 128번지(上海法租界蒲石楼128号)을 거점으로 달마다 2--3차의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였다. 로홍군이고 중화쏘베트 제1차대표대회의 유일한 조선인대표였던 최정무(崔政武)는 상해 복신로(上海福新路 )182번지 2층집이였다고  자기의 구술문—로홍군 최정무(주.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68페지) 에서 밝힌다. 중공상해조선인지부는 상해와 그 주변 조선인사회를 이끄는 중심기관이였다. 상해조선인지부에서 무정은 자기를 혁명의 길로 이끌고 중국으로 이끌었던 려운형을 다시 만나고 조선인지부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였다. 1929년에 상해조선인지부는 활동의 편리를 위하여 지부 외곽조직인 조선(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한인)청년동맹 등을 조직(주. 관내지구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휘편 상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283페지)하였다. 그 내막을 보면 무정 등의 역할로서 무정은 장세걸(张世杰),오명(吴明), 최정무(崔政武), 윤호(尹浩), 김원식(金元植), 허렬(许烈) 등과  더불어 “중국본부조선청년동맹상해지부”를 조직하고 그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다. 여기에서 흥미로움은 장세걸, 오명, 최정무, 윤호 등 무정의 동지들이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이라는 점이다. 무정이 1924년 하북성의 보정군관학교를 다닐 때 장세걸(원명 김홍묵), 오명 등은 그 직후  황포군관학교를 다니거나 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하나의 공동한 혁명목표를 위하여  상해로 모여 들었었다.   4   오명에 대해서 알려지는 자료는 거의 없지만 황포군관학교 제5기생 조선인교관 이름에 훈련부 기술조교로 적히여있다. 장세걸(1901—1933)은 원명이 김홍묵(金洪默)이고 서울 사람이며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이다.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광주에서 무한에 이른 장세걸은 장개석과 왕정위의 혁명배반으로 기세드높던 북벌전쟁—대혁명이 실패하자 국민당반동파의 무자비한 백색공포에서 무사히 벗어나 상해에 가서 상해조선인지부를 찾았었다. 그때로부터 무정과 장세걸은 뜻을 같이하는 혁명전우로 되였다. 그들은 또 힘을 합쳐 상해지부의 외곽조직인 조선(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한인)청년동맹 등을 조직하며 상해 조선사람들의 수령인물로 떠올랐다. 1930년 5월이후 장세걸은 상해조선인지부의 추천과 중공강소성위의 파견으로 강소에 가서 홍14군 제1사 사장 겸 제2퇀 퇀장으로 활약하다가 상해로 돌아왔고 1931년 초이후 중앙군위의 파견으로 강서 중앙혁명근거지로 들어가 홍1방면군 제1군단 제22군 참모장, 제1군단 제2사 제6퇀 퇀장 등 중책을 떠이였다. 장세걸은 중공강소성위 위원을 겸한 양림(杨林,원명 김훈-金勋-), 무정(원명 김무정) 등과 더불어 중앙홍군의 3김,  즉 세 김씨장군으로 활약하던 위인이요, 무정의 전우였다. 최정무와 윤호는 그 시절 쏘련 울라지보스또크 쌍성자(海参崴双城子) 태생이다. 최정무는 1910년 생이고 윤호는 확연히 알수는 없지만 같은 또래로 알려진다. 쏘련 공청단원들인 최정무와 윤호는 10대 중반의 나이에 원동지구의 조선인혁명가인 박우(朴禹)의 소개와 영향으로 혁명의 장도에 오른 젊은이들이다. 어느날 박우는 그들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혁명에는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갈라볼수 없는거요. 중국혁명에 참가하면  역시 조선혁명에 참가하는것과 마찬가지요. 그러니 중국 상해로 들어가도록 하시오.” 그러면서 박우는 손수건 하나를 건네주면서 상해가서 복신로 182번지 2층집을 찾으라, 려운형이란 분을 만나라, 그분은 조선당의 상해지부서기라고 동을 달았다. (주.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69페지) 1926년 최정무, 윤호 등 5명의 쏘련 공청단원들이 울라지보스또크 쌍성자를 떠나 중국 상해행에 오를 때 최정무의 나이는 16살이였다. 불원천리하고 상해에 이른 최정무 일행 5명은 복신로 182번지를 찾아 상해조선인지부서기 려운형선생을 만나 비밀소개신인 손수건을 건네였고, 려운형선생의 파견으로 광주 황포군관학교로 가서 제6기 예비생으로 입학하게 되였다. 1927년 초 넉달동안의 예비과목 단계를 거친후에는 제4기생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는 최정무의 경우이지만 동행한 윤호 등 4명도 비슷한 학습과 훈련과정을 거치였다고 보아진다.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 시절, 최정무는 조선인 양림혁명가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국공산당이 지도한 1927년 12월의 광주봉기에 뛰여들었다.(주.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73페지)윤호도 같은 과정을 밟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광주봉기 실패후에는 각기 천신만고로 상해에 이르러 조선이지부를 찾았고 보정군관하교 출신인 무정과 더불어 한 지부에서 당생활을 하며 상해 한인청년회를 개편한 “중국본부조선청년동맹상해지부” 성원으로도 뛰게 되였다.   5   무정은 보정군관학교, 오명, 최정무, 윤호 등은 황포군관학교—무정은 사기가 부쩍 올랐다. 다같은 중국 군관학교 혁명군인출신들이니 중국혁명에서 몸을 내번지며 해볼만 했다. 최정무가 말하는 원동지구 조선인혁명가 박우선생처럼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은 갈라볼수 없고, 중국혁명에 참가하면 역시 조선혁명에 참가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니까. 그런데 생때같던 윤호가 상해조선인지부와 “상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에서 별반 활동하지 못하고 1928년 5월 28일에 일부 동지들과 함께 불행히도 적들에게 체포되여 남경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무정과 그의 동지들은 분하여 펄쩍 뛰였다. 알고보면 이 적들이란  상해 프랑스조계지 순포방 순포(巡捕房巡捕)들이였다. 황포출신 윤호는 어찌하여 이자들에게 체포되였을까? 이는 조선의용군 출신의 항일로간부 최채평전 “불멸의 영령 최채”(류연산 저)에서 자상히 알려진다. 1928년부터 1932년 몇년 사이만 해도 상해의 조선인들은 무정 등이 지도하는 상해 조선인 중공당지부와 그 외곽조직인 “상해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청년동맹”의 지도하에 상해에서 광범위한 반일선전활동을 자주 벌리였다. 낮이면 반제집회, 시위행진 등이, 밤이면 프랑스조계지 공공조계지에 삐라와 포스터가 나타나니 조계지당국의 비위를 거슬릴 수밖에 없다. 이때를 두고 최채는 아래와 같이 알려주고있다.     프랑스조계지 순포방과 공공조계지공부국에서는 조선인혁명가를 체포하여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일본령사관에 넘겨 서울 서대문감옥 등에 압송하고 조선인으로 밝혀지지 않으면 국민당정부에 넘겨 남경감옥 등에 투옥케 하였습니다. 상해 조선인당지부의 주요 골간이였던 정향명(丁向明,일명 성시백)과 윤호, 김석철 등 동지들은 선후하여 체포된뒤 남경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였으며 우수한 공산당원인 강선필은 국민당한테 학살되여 남경 우화대(雨花台: 남경시 혁명렬사릉원)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최채의 이 증언은 황포출신 윤호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상해 프랑스조계지 순포방에 의해 체포되고 남경감옥에 투옥되였음을 잘 알리고있다. 일제측의 관련자료로 보면 무정 등 동지들의 지도하에서 상해 조선인들의 반일 혁명활동은 정말 활발히 전개되였었다. 1932년, 조선의 전민족적인 반일운동—3.1운동 13돐을 맞으면서 상해한인녀자청년동맹에서는 “3.1절을 당하여 동지에게 격(檄)함”을 발포하고 상해한인청년당에서도 “3.1기념 선언”을 발포하였다. 중국혁명호제회(互济会) 상해한인분회에서도 “3·1 운동 제13주년 기념 선언’을 발포하고 조선인 민간단체 화랑사(花郎社)에서도 “3.1절 기념에 대하여”를 발포하여 그 성세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런 발포문과 기념활동은 비록 무정이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홍3군단으로 떠난 후이라 하지만 상해 조선인 중공지부와 그의 외곽조직인 상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의 구체적인 지도의 결과라는것은 에누리없는 사실이다. 무정의 상해시절도 그러했었다. 상해시절의 무정과 그가  포괄되고 지도하는 상해 조선인 중공지부와 상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는 여러 반일활동들과 더불어 남경 감옥에 재감(在監) 중인 윤호(尹浩)·김석철(金奭哲)·성시백(成時佰) 등 3동지를 구출하기 위한   군중적 선동 및 위로금 모집 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무정은 이 구출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그러나 윤호는 조직과 동지들의 이같은 노력의 결과도 보지 못하고 남경감옥에서 옥사하여 상해 조선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구체적인 옥사시간이 어느해, 어느달인지는 밝혀지는 자료가 보이지 않지만 1932년 3월직후라고 추측을 가져본다.  
564    1. 밝혀지는 장군의 신상 댓글:  조회:1124  추천:0  2018-04-11
제1부 압록강을 건너     밝혀지는 장군의 신상                                         1   조선사람인 무정장군의 고향을 두고 함경북도 경성군(镜城郡)설이 절대적인것 같았다. 그 이상 상세한 고향은 밝혀지지 못했지만 중국 조선족사회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학계와 무정 연구가들 모두가 경성군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세불변의 권위적인 지배적 주장이였으니 학계에서는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 대세불변의 권위적인 주장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경성군설이 아닌 청진시 근동리설을 주장하는 분이 나섰으니 때는 지금으로부터 16년전인 1999년으로 돌아간다.     인연이 닿아서인지 새세기를 앞둔 1999년 7월에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에서 친척방문을 온 70대 조선로인ㅡ리상섭(李相燮)씨를 알게 되였다. 리상섭로인은 지난세기 50년대 중반시절 중국 청화대학에서 학습한 조선류학생으로서 무정장군과 부인 김영숙을 익히 알고있었다. 이제 본 평전의 결말부에서 보다 밝히겠지만  무정장군의 세번째부인이자 조선녀성인 김영숙과 50년대 김영숙의 청화대학 류학에 대해서도 가담가담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장군의 묘소가 평양 애국렬사릉에 모셔졌음도 처음 듣게 되였다.    연길에서 알게 된 리상섭로인, 아주 인상적인 지식인로인이였다. 새세기에 들어선후에도 수차 만남의 기회를 가지였지만 우리(조선에서)가 알고있는 무정장군의 고향은 절대 함경북도 경성군이 아닌 청진시 근동리라라는 주장은 변함이 없었다. 조선에서 온 분이고, 무정장군과 부인 김영숙을 알고있는 분이여서 그 말씀은 너무도 충격적이였다. 왠지 청진시 근동리설이 마음에 와 닿지만 절대적인 긍정을 할수는 없었다. 무정장군 연구가로서는 하나의 설로 받아들임이 옳을것 같았다. 언젠가는 무정장군 관련  실제자료가 밝혀질 때가 있으리라고 믿어마지 않았지만 그 밝혀짐이 그리도 빨리 다가서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다.    하늘이 도왔을까, 일찍 10대 후반의 무정장군의 어린 시절과 소년시절을 몰라 그리도 안타깝더니 조선이 아닌 내 고향 연변과 대련에 장군의 친지분들이 계신다는 기적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은 2015년 8월 27일 오후, 연변위성텔레비 관련 다큐팀 일행 셋과 함께 복건 영안을 거쳐 홍색수도로 불리우는 강서 서금에 도착하여 투숙하고있는데 연변주 공무원으로 사업하다가 일터에서 물러선 리영씨로부터 핸드폰이 걸려왔다. 무정장군의 8촌 형제되는 분의 따님이 룡정에 있고, 8촌 동생되는 분이 지금 대련에 계신다는 놀라운 소식. 이어 룡정의 녀사분과 긴 통화가 이어지고 현재 사업터 강남 소흥으로 돌아가면 다시 련락하겠다는 답변을 주었다.   8월 30일 룡정의 녀사분과 다시 통화가 이어지고 9월 7일 드디여 내 고향 연길과 룡정에서 무정장군의 9촌 조카ㅡ김천희(金天姬)녀사분을 만났다. 9월 9일 오후에는 대련에서 녀사분의 아버지를 뵈였다. 무정장군의 8촌 동생되는 분ㅡ김하수로인(金河寿,2015년 79세)님이였다. 김하수로인은 딸애한테서 소식을 듣고 기다렸다면서 1945년 조선에 귀국한후의 무정장군의 표준사진을 건네였다. 종래로 보지 못했던 장군의 정면 표준사진, 이어 장군의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여난 아들 김정신(이미 사망)과 일가 사진, 무정의 두번째 부인과의 딸ㅡ등연려의 사진 등이 환히 펼쳐진다. 무정장군의 가족사가 옛말같이 쏟아진다.                                  2   무정장군의 본명은 우리가 알고있는 김무정(金武亭) 아닌 김병희(金炳禧), 1905년 음력 5월 16일 생, 고향은 오늘의 함경북도 청진시 근동리, 가난한 집 자식이 아닌 꽤나 부유한 김해 김씨 가정의 장손. 형제로는 손아래 동생 인동(仁东)에 부친의 존함은 김기준(金基俊) !   알고보면 무정장군의 고향을 둘러싼 두가지 설 모두가 옳았다. 전자는 함경북도 경성군이라고 주장하지만 경성군 용성면 근동리라고까지는 밝히지 못했고, 후자는 청진시 근동리라고 옳히 밝히면서도 원래는 경성군 소속이였다가 현재 청진시 송평구역 소속 근동리라는 이 지명의 연변과정을 알리지 못하였다.    아는것만큼 보인다고, 력사속에 들어서면 모든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무정장군이 태여나던 비운의 해ㅡ1905년의 고향은 함경북도 경성군 용성면 근동리라고 불리였다. 경성군은 함경북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한개 군으로서 동쪽은 동해와 면하고, 서쪽은 무산군, 남쪽은 길주군과 명천군, 북쪽은 부령군과 접하여있었다. 그러던 경성군내 용성면 근동리가 1940년 3월이후 주변의 부령군 청암면 일부와 경성군 라남읍, 용성면이 청진에 귀속되면서 지명부름을 달리하게 되였다.        오늘날 함경북도의 이름난 항구도시 청진은 개항전 한적한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1908년 개항후 항만시설이 정비되며 급성장을 이루니 1914년에는 제법 부(府)로 승격한다. 1929년 함경선(咸鏡線)이 개통에 이어 1933년에 도문선(圖們線)이 부설된데다가 국내의 각 항구는 물론, 일본의 각 항구와의 정기항로,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 등 항로도 열리며 수륙 교통요지로 부상하니 그 발전이 보다 빨라진다. 그 발전속에서 1940년 3월이후 근동리 등의 청진으로의 귀속이 이루어졌다.    광복후 청진시도 여러 변혁의 시기를 거치여왔다. 1960년 10월의 청진시는 함경북도 소속이 아닌 직할시로 떠오르지만 그후 다시 함경북도에 소속되는 과정을 거친다. 청진시는 1977년에 이르러 다시 직할시가 되였다가 1985년에 다시 직할시가 폐지되면서 재다시 함경북도에 편입됨을 보인다. 변혁속의 청진시는 1993년 라진시와 선봉군이 라진선봉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라진시 소속 6개동·3개리를 넘겨받으니 조선 4대도시의 하나인  청진시는 행정구역이 7구역 93동, 14개리로 나타나면서 그제날 경성군 용성면 근동리는 오늘날 청진시 송평구역 근동리(松坪区域芹洞里)로 알려지게 되였다.  그러고보면 무정장군의 고향을 일컿는 함경북도 경성군설도 옳고, 청진시 근동리설도 옳다. 다만 장군이 태여나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을 보낸 고향은 의연히 경성군으로 불러야 하고, 오늘은 청진시 근동리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99년 7월과 그후 연길 등지에서 만난 조선로인ㅡ리상섭씨의 청진시 근동리 주장은 전적으로  옳았으니 백배천배 감사한 마음이다.    김하수로인의 구술에 따르면 무정의 아버지 김기준은 마음씨는 착하나 성격이 유달리 급하고 과격한 사람이라고 한다. 유년시절의 무정이도 자라면서 아버지의 성격을 쏙 빼닮았으니 후일 중국의 홍군시절과 팔로군시절, 태항산 조선의용군 시절, 조선 귀국후의 성격은 유년시절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성격의 계속이였다. 이 성격은 무정이를 홍3군단 총지휘 팽덕회와 지기로 만들어주며 홍군총부 작전과장, 팔로군총부 작전과장으로 키워도 주었지만, 이 성격은 또 무정이를 비운의 인물로 만들어준 토대이기도 하였다.                                   3   소작농을 둘만치 가정이 부유한 편인데서 무정은 고향 룡성면 근동리에서 무난히 6년제 천마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후 멀지 않은 옛 고을ㅡ경성군에 가서 경성농업학교를 다닐수가 있었다. 이후 커서 고향에서 가업을 빛내라고 한 아버지의 가르침 같았다. 하지만 그 시절 무정은 필경 10대 초반의 소년이여서 아버지 김기준은 시름을 놓지 못하다가 녀동생되는 무정의 고모가 경성에 가서 무정의 곁을 지켜주어서야 안심하더라고 동을 단다. 물론 김하수로인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성격을 물려받은 무정은 10대의 나이에 잡아들면서 눈에 거슬리면 참지 못하는 강인한 성격으로 번져갔다. 그 시절 경성농업학교 교장은 일본인교장인데 소년 무정에게는 정말이지 원쑤 쪽발이놈으로 보이였다. 1905년 을사늑약은 몰랐다지만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으로 인한 나라의 망국은 자라면서 가슴은 한으로 맺히였다. 일본사람들만 보면 눈에 불이 일었다. 무정은 학생들의 선두에서 일본인교장 구축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놈들의 눈에 났다. 무정은 부득히 경성농업학교를 떠나지 않을수 없었다.    장손인 무정은 아버지의 지지로 멀리 서울로 남하하여 경신중학교에 들어갔다. 전해지는 서울 기독교중학교설과 중앙고등보통학교(즉 중앙고보)설이 아닌 경신중학교라고 김하수로인은 찍어 말한다. 경신중학교(儆新中学校)는 오늘날에도 서울 종로구에 현존하는 100여년 력사를 가진 사립중학교로서 서양식 학교설치의 일환으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였음을 보여주고있다.   미국 선교사들이 오늘의 한국땅을 처음 밟은것은 1885년으로 거스른다. 1883에 인천항이 새로 축조되여 개항하면서 1885년 4월에 미국 북감리교회 아펜젤러 부부와 북장교교회 목사가 인천에 첫발을 내디디였다. 이어 아펜젤러 선교사는 서울 중구 정동 34번지의 한옥을 빌려 최초의 근대교육기관 배재학당을 세우게 되고, 역시 이해 1885년에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H.G.언더우드(원두우)가 경신중학교의 전신인  “언더우드 학당”을세우고 1905년 경신학교로 교명을 개명하기에  이르렀다. 다음해 1886년에 다른 미국 선교사 루이스 스크랜부인이 또 배재학당 린근에 최초의 녀성전용교육기관ㅡ리화학당을 개설하였다.    이로부터 보면 경신중학교는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배재학당, 최초의 녀성교육기관 리화학당과 더불어 그 이름이 뜨르르하다. 그러나 이런 최초의 근대 학교들은 조선 황실과 부유한 계층의 귀족자녀들만 다닐수 있었을뿐 가난한 집 자식들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였다. 1900년에 배재학당 정구부 학생들이 당시에는 낯설기만 하던 정구경기를 치르는 사진이 그러하고, 1900년대 초 전차타고 소풍가는 이화학당 학생들 사진(주. 1994년 10월 9일자 “동아일보”)이 그러하다. 가난한 집 자식들에게는 그림의 떡일수밖에 없다.    20세기 10년대에 이르러서도 가난한 집 자식들은 학교다니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부유하다고 알려진 무정의 김해 김씨 가족한테는 자식공부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서울의 경신중학교에서도 무정의 주위에 같은 또래들이 뭉치더니 무정은 점차 학생수령으로 떠올랐다. 15세되는 해 1919년 전민족적인 만세운동ㅡ3.1운동이 터져오르며 무정은 완연 다른 사람으로 번져갔다. 무정은 서울의 여러 중학교와 한맘으로 배합하면서 경신중학교, 서울학생 3.1운동의 전렬에서 나아갔다. 무정은 또 일제놈들에 의해 학교에서 추방당할 신세가 되고 단기적이나마 무정한 옥살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4   김하수로인은 또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무정이 팔로군 시절 만난 중국인 등기는 첫 부인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이야기, 무정의 첫 부인은 10대 중반이후 고향에서 례를 올린 조선녀성이란다. 이 첫 부인의 이름은 무엇인지 김하수로인도 모르고있었고, 부부를 이룬 그해도 딱히 알수가 없지만 16~17세인 1920년~1921년 경임은 틀림이 없는것 같다. 조선의 그 시절은 남녀가 15살 쯤이면 의례 장가들고 시집가야 하는 나이, 무정도 부모님들의 주선으로 자기 또래 조선녀자를 안해로 맞아들이니 얼마후 태기가 있다. 열달 잉태만에 아기가 태여나고 고추가 달렸다고 정신(正新?)이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무정은 서울에서 중학교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소년시절로부터 청춘시절로의 과도기를 거치였다. 어느덧 10대 후반의 유망한 젊은이로 성장한 무정은 서울 학생운동의 수령의 하나로 떠오르면서 국내에 들어와 사람을 물색중인 독립운동가이고 사회주의자인 려운형선생의 눈에 들었다. 일제놈들의 요시찰 대상으로 점찍힌 무정은 려운형선생의 영향으로 드디여 중국행을 선택하게 되였다.    무정의 중국행을 두고 가족에서도 몰랐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마도 조직과 개인, 가족 모두에 련루되는 일이니 비밀에 부친 모양인데 무정의 가족에서는 일본류학으로 알고있었으니 말이다.    무정의 아버지 김기준씨는 아들의 월사금을 다달이 일본 관련주소로 부치치만 번마다 돌아오군 하였다. 하도나 이상하여 김기준씨는 현해탄(玄海滩) 넘어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아들의 종적은 묘연하기만 하다. 귀로에서 김기준씨는 즐기는 의학서적 몇책을 품에 지니고 오다가 모두 빼앗겨야 했단다. 어찌하든 무정의 일본류학으로 인기된 일인데, 그후도 김기준씨는 서울로 다달이 월사금을 부치지만 그상이 장상이다. 무정의 할아버지는 다달이 돌아오는 월사금을 모아서 황페한 린근 공동묘지를 사서 여러가지 과일나무를 심고 덩실한 2층집까지 지을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김하수로인네와 무정네 친척사이를 보면 무정네가 벌수가 높다고한다. 김하수 로할아버지와 무정의 로할아버지가 친형제간일 때 김하수 할아버지 김우공(金禹公,아들 5형제에 딸 하나)과 무정의 할아버지는 사촌간, 김하수 아버지 김현사(金铉仕)와 무정의 아버지 김기준은 벌써 6촌간이다. 그러니 무정은 김하수의 아버지 김현사한테 7촌 조카로 된다.   
563    《무정장군》프롤로그 댓글:  조회:1264  추천:0  2018-04-11
프롤로그                       1905년.     력서로 보는 1905년은 새해 첫날을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해라지만 우리 겨레로 보는 1905년은 평년이 아닌 비운의 한해로, 망국의 시작해로 알려진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조선 격변기 시대가 이를 잘 알려준다.       19세기 말엽의 조선은 제국주의 렬강들의 패권다툼의 한 마당이였다. 풍전등화와도 같은 암담한 나라현실에다 오랜 기간의 쇄국정치로 나라안이 혼란스럽더니 1894년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화산처럼 폭발하였다. 동학 교주 최시형이 “인간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며 현세에 그런 세상을 만들자고 웨치니 헐벗고 굶주리던 나라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록두장군 전봉준을 선봉으로 학정과 외세를 반대하는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다.        그 시절의 기울어져가는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할 힘마저 따르지 못하여 이웃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은 이때가 기회라고 저들 군대를 바다건너 조선에 파병한다. 기세드높던 동학농민운동은 피비린 탄압으로 력사무대에서 사라지지만 조선정부의 철병요구를 무시한 일본은 청나라와의 주도권 쟁탈로 1894년 7월 25일에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조선반도에서의 력사상 청일전쟁의 폭발, 청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일본은 승승장구로 중국 료동반도 지배권을 거머쥔다. 프랑스, 독일을 부추킨 로씨야의 압력으로 일본은 료동반도를 반환해야 했지만 로씨야는 눈에 든 가시로 부상하였다. 대원군의 대항마로 떠오른 친청파 민비가 이번에는 친로파로 등장하면서 일본 배척정책을 실시하자 로씨야를 어찌할수 없는 일본공사는 로씨야를 몰아내는 방책으로 1895년 8월 20일, 경복궁에 란입하여 주권국가의 명성황후 민비를 시해하고 불태워 버리기를 서슴치 않는다. 고종황제는 로씨야 공사관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놈들이 저지른,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의 일이다.    로씨야 세력에 의해 고종황제는 로씨야 관내에 친로정부를 수립하고 일단은 친일파를 몰아내지만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일본의 야망은 사그러지지가 않는다. 1904년 1월 26일, 일본은 중국 료동반도 려순항에 정박한 로씨야함대를 기습공격하면서 로씨야와  로일전쟁을 벌리고 중국의 려순과 봉천을 함락하면서 불패를 뽐내던 로씨야함대를 격파한다.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일본은 이듬해 1905년 2월 22일에 일찍 조선의 령토라고 인정했던 독도(独岛)를 강제적으로 병합하고 다케시마(竹岛)로 명명하더니 1905년 11월에는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을 특명전권대사로 조선에 파견하고 11월 17일, 고종과 조정의 대신들을 강압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면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해 버린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온 나라, 온 백성들은 하늘을 우러르며 통곡한다. 장지연선생이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실은 “시일야방성대곡”,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실은 “시일야우방성대록”이 그러하지 않던가. 11월 30일, 비분에 잠긴 고종의 시종무관장 민영환을 비롯한 여러 애국지사들이 을사보호조약의 늑결을 개탄하며 자결하니 더욱 그러하다.     온 삼천리강산에 비운이 차고넘친다. 1905년은 그야말로 불운의 한해로 비운의 한해로 자리매김한다. 그 비운을 미리 알기라도 하듯 1905년 11월을 두달 앞두고 황룡포를 입고 찍었다는 고종황제의 사진얼굴에도 비운의 그림자가 비껴있다. 오죽하면 1905년 9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파견한 아시아 순방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조선을 방문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1884~1980)가 고종황제한테서 사진을 건네받고 훗날 그날의 사진을 두고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애처롭고 둔감한 모습”이였다고 회고하기까지 하였을까.     이같은 비운의 해ㅡ1905년에 겨레의 위인 한분이 서울에서도 멀고 먼 조선반도 최북단쪽 바다가ㅡ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여났으니 그 위인은 절세의 무정장군. 온 나라 비운의 해에 태여나 비운의 기운이 서린걸까, 인간세상에 왕림하여 장장 백년 ㅡ한세기의 력사언덕을 넘어서도록 이땅의 우리 겨레사회는 위인의 본명을 모르고 고향을 모르고 가족관계를 모르고 지나왔으니 무정은 비운의 운명을 안고 이 세상에 왕림했음이 옳은듯 하다.  
562    《무정장군》차례 댓글:  조회:1126  추천:0  2018-04-11
中国作家协会2013年少数民族重点作品扶持项目   (무삭제 원본)   무정장군     리 광 인 저      차 례   머리말   제1부  압록강을 건너 밝혀지는 그 시절 신상 중국으로 온후 상해시절의 일화   제2부  팽덕회의 수하에서 홍3군단의 첫 대포소리 군단직속 포병련 련장 무정과 팽덕회 이야기 독일제 크로백 대포 감강 순라정 포격 제1차 반포위토벌전 제2차 반포위토벌전과 군위 포병퇀  퇀장 제3차 반포위토벌전과 감주공격전   제3부  중앙혁명근거지 홍군학교 포병과주임 양씨사당 옛터 최음파와의 인연 조선인 홍군비행사의 고충 반제총동맹 집행위원 홍군특과학교 교장 양림과 더불어 장세걸의 불운   제4부  홍군장정길 (1) 군위제1종대 제3제대 사령원 적의 봉쇄선 헤치며 상강전역에 뛰여들다 군위포병영의 출현 준의에 머무른 나날   제5부  홍군장정길 (2) 청강파의 포소리 군단포병련으로 축소편성 준의 루산관에 올라 금사강을 도하하기까지 양림과 회리현성에 나타나 북으로 북으로   제6부  장국도와의 투쟁 (1) 장정길 첫 대설산 협금산 답사길 장국도 이 사람 망망초지 600리 반우와 파서의 웃음소리   제7부  장국도와의 투쟁 (2) 9월 9일 그날 밤 무정이 빠진 사이 이 팽덕회는 당신을 믿소 운명을 가른 나날 무정의 발자취 따라서   제8부  섬북에 이르러 홍군장정을 마친 사람 섬북땅에서 동정항일의 기치 들고 양림의 희생 홍군대학 1과생 홍군총부 작전과 과장   제9부  팔로군총부 포병퇀 퇀장 팔로군총부 작전과장과 포병주임 팔로군총부포병퇀 퇀장 포병퇀선전대 포병퇀 퇀가에 깃든 이야기 모택동의 부름을 받고 락천에서의 정돈훈련 1938년과 1939년 국민당의 반공고조에 맞서   제10부  백퇀대전에 뛰여들다 정태선 전역 유료 전역 피로 얼룩진 관가뇌 팽덕회 부총사령   제 11부 남니만으로 진군 연안행 천리 행군길 도보욕에 나타난 포병부대 섬북의 강남이로다 그이들의 사랑속에서   제 12부 조선민족의 수령 화북조선청년련합회 회장 무정이 지켜보는 조선의용대 신생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조선민족의 대표로 수령으로 섬감녕변구 참의원 정률성과의 형제인연   제 13부 조선의용군 사령원 조선의용군의 탄생 1942년 5월 반“소탕”전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부임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교장 태항산의 대생산운동 하남점 대중병원   제 14부 태항산 아리랑 즐거운 노래 아리랑 노래 김위녀사 발자취 연안으로 가는 길 첫패의 동지들이 떠나간후 조선의용군의 분맹사업 조선의용군 화중지대 희망의 래일 안고   제 15부 미더운 지도자 무정장군의 육성자료 진찰기변구 위문단 연안의 조선사람 동네 7차대회와 대회후 조선사람들 속에서 조직과장 김영숙   제 16부 광복 전후 조선만주공작위원회 8.15 그날 밤 동북으로의 진출 심양 대회합 조국으로 귀국한후 무정의 중국부인 등기 조선부인과 일가족
561    [겨레렬사비26]선렬들 찾아 천만리 댓글:  조회:1642  추천:0  2017-07-31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 (후기) □ 리 함 겨레 렬사비 렬사묘 답사 소감 “왜 사비를 털며 자기 품을 팔며 지꿎게 현지답사의 이 길을 걷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땅의 우리 겨레들 중 누군가는 걸어야 하는 길이니 운명은 나를 이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기만 한다.” “고독을 동반한 나 혼자의 알심으로 중국대륙을 누비며 이 땅에 널리 분포된 겨레 렬사비와 렬사묘들을 아는 대로 빠짐없이 세상에 알렸다는 것이 정녕 꿈만 같고 감개무량하기만 하다. 두발로 뛰며 써낸 것들이여서 더욱 감회가 깊다.” 2017년 6월 8일 답사길에 광서 흥안현 상강전역기념관에서 리함선생 1 중국대륙의 휘넓은 땅우에는 곳곳에 우리 겨레 렬사들의 기념비와 렬사묘들이 널리 자리하고 있지만 이 땅의 우리 겨레들은 하북대지의 태항산항일근거지 진광화, 석정, 4렬사묘와 무명렬사묘, 기동지구의 주문빈 묘소 외에는 거의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는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90돐이 되는 뜻깊은 해인데 이 기회를 빌어 중국대륙에 널린 겨레렬사들의 기념비와 렬사묘들을 신문지면을 통해 널리 알릴 수 없을가?’ 이 생각을 바탕으로 한 제의는 인차 《길림신문》 지도부의 대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올해 2월 초부터 매주 한편씩 편당 5000자 좌우의 특별기획 련재가 시작되였다. 한두곳도 아니고 거의 전체를 아우르는 중국 관내의 광활한 대지에 널린 겨레 렬사 기념비와 묘소에 대한 체계적인 소개로는 전례가 없는 일이였다. 이 련재가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로 고고성을 터쳤으니 마음은 한없이 울렁이고 경건하기까지 하다. 올해 써내기로 한 두편의 인물평전을 모두 뒤로 미루고 모든 정력을 《길림신문》의 이 특별기획 련재로 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지만, 올해도 자신 있게 건군 90돐 기념 길림신문 특별기획 련재를 벌렸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현유 이미 정리된 글로는 〈광주봉기렬사릉원 찾아서〉와 〈화북렬사릉원의 주문빈렬사기념비〉 두편의 글 뿐이였다. 그런대로 먼저 이 두편을 보내여 련재를 시작하였는데 그 다음 글들은 새로 써야 하니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 후 련속작전으로 〈8.1남창봉기와 우리 겨레들〉,〈추수봉기를 빛낸 국제주의 전사 진룡학〉 두편을 써내니 잠시 숨 돌릴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련재 제5기부터 몇기는 겨레 항일항공렬사들인 전상국과 김원영인데 이들의 묘소는 남경 자금산 북쪽기슭에 자리한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에 모셔져있었다. 이곳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 여러 비림에는 중국, 구쏘련, 미국 등 나라의 항일항공렬사 3304명의 이름이 새겨져있는데 이 속에는 조선인 전상국, 김원영 두 항공렬사도 들어있다고 했다. 하지만 국민당 계렬에서 항일에 나선 그네들이 이 땅의 우리 겨레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필자는 절강월수대 시절인 2013년 9월 13일, 남경사범대 유성운박사의 안내로 현지답사를 거친 데 토대하여 현지기행을 쓰면서 이제 《길림신문》을 통하여 두 항공렬사가 처음으로 중국조선족사회에 알려지면 어떠할가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조선족력사연구가의 책임이 무거움을 다시 느끼는 시각이였다. 다음은 그제날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묻힌 겨레 4렬사묘와 진광화, 석정 묘소, 무명렬사묘다. 혹자는 이 부분은 이미 《길림신문》에도 실리지 않았는가고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단순 그런 것만은 아니였다. 이 렬사묘들에 깃든 진실한 이야기와 력사의 전후관계를 틀림이 없이 사실 대로 알리는 것은 우리 조선족력사연구가의 책임이였다. 책임이니 력사에 충실해야 했다. 다년래의 연구와 진실한 현지답사에 토대하여 써내니 믿음과 자신감이 뒤따랐다. 2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남경항일항공렬사들인 전상국, 김원영 외 다른 렬사묘들은 필자와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흘러간 력사 속에서도 다다소소 알려지기도 하였다지만 그 다음 렬사기념비와 렬사묘들은 우리 력사에 관심을 가진 극소수외에는 중국조선족사회가 거의 모르는 사실들이니 보다 신중하고 설복력이 있어야 했다. 이 부분에서 가장 급선무로 나서는 이는 하북 기동지구의 주요지도자의 한 사람인 주문빈렬사라 하겠다. 주문빈렬사는 지난 혁명전쟁년대에 중국대륙에 쓰러진 겨레렬사들 가운데서도 특이한 존재였다. 다른 겨레렬사들과 달리 주문빈렬사는 묘소만도 렬사가 희생된 하북 풍윤지구와 당산시, 석가장시 여러 곳에 있다 하니 그 때 력사를 잘 모르면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석가장시 화북렬사릉원 밖에 다녀오지 못한 필자도 례외가 아니다. 진짜 묘소는 석가장시라고 하는데 혹자는 하북성 풍윤현의 양가포렬사릉원도 묘소라 하고 또 당산시 기동렬사릉원도 묘소라고 한다. 이번 련재는 현지답사기행이니 연구자료에만 의거할 수는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 하였다. 이 결단은 련재글만을 위한 희생이니 그 희생은 적어도 인민페 3000원 정도를 소모하며 하북성 당산시로 다녀오는 현지답사의 길이였다. 왜 사비를 털며 자기 품을 팔며 지꿎게 현지답사의 이 길을 걷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땅의 우리 겨레에서 누군가는 걸어야 하는 길이니 운명은 나를 이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기만 한다. 지난 4월 27일과 4월 28일 양가포렬사릉원과 기동렬사릉원 현지답사를 통하여 주문빈렬사의 묘소 문제가 원만히 풀렸고 이 세상 우리 겨레가 모르던 주문빈의 전신사진도 새롭게 발견되였다. 이런 현지답사 결과가 《길림신문》 이번 특별기획 련재 14기와 15기를 통해 고스란히 해빛을 보니 이보다 더 큰 기쁨 어디에 있을가. 돈으로 따질 바가 아니였다. 우리 조선족사회가 모르는, 우리 력사연구가들도 잘 모르는 하나 또 하나의 진실한 력사가 펼쳐지는 그 기쁨은 이 세상 무엇과도 비기지 못한다. 이번 《길림신문》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의 주체는 렬사묘였다. 렬사묘니 만큼 위대한 8.1남창봉기와 추수봉기, 광주봉기에 참가했거나 쓰러진 겨레렬사들도 모시고 국민당 계렬에서 항일의 싸움터에 나선 항일항공렬사들도 모셔야 했다. 선후하여 하북 기동지구와 석가장 화북렬사릉원에 묻힌 주문빈렬사도 모시고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쓰러진 조선의용군 렬사들도 모셔야 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선민족의 수령인물로 활동한 양림과 무정, 장세걸, 리철부도 꼭 모셔야 했다. 그러나 조선민족의 수령인물들을 모시기란 말 그대로 쉽지 않은 일이였다. 지난 세기 30년대 중공 천진시위 서기이고 하북성위 서기였던 리철부가 그러했다. 리철부는 1937년 7월 10일 연안 교아구에서 불행히 병사한 후 연안 청량산에 묻히고 1945년 4월 당7차대회 전야에 중공중앙 판공청에서 그의 묘소에 대리석 비석까지 세웠지만 오늘날 여러가지 원인으로 연안 청량산에서 리철부의 묘소를 찾을 수가 없다. 장정 전 홍1군단 참모장이고 홍23군 군장이였던 양림도 그랬다. 양림은 장정 후 1936년 2월의 황하도하작전의 선봉으로 나섰다가 그 해 2월 22일 희생되였고 선후로 산서땅 하가와촌과 황하 북안의 섬서땅 하구촌에 묻혔다지만 세월 속에 잊혀지면서 역시 묘소를 찾을 수가 없다. 홍22군 참모장이였던 장세걸도 그랬다. 장세걸의 묘소는 묘소조차 운운할 수가 없이 그가 일찍 홍14군 1사 사장으로 활동하였던 강소 땅에 무명동상으로 남아있을 뿐이였다. 2017년 5월 22일 다시 찾은 강소 여고의 홍14군기념관 1층 홀 17명 장령 군체 동상 3 그래도 이들은 ‘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 련재에 무조건 모셔야 할 수령인물들이였다. 그런 연고로 양림과 리철부는 이미의 현지답사에 토대하여 실사구시하게 련재글을 써서 발표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장세걸은 쉽게 쓸 수가 없다. 절강월수대 시절로서 5년 전인 2012년 1월 31일, 강소 여고시에 일어선 홍14군기념관을 찾아보았다지만, 홍14군기념관 1층 홀에 홍14군 17명 장령 군체 동상으로 모셔졌다지만 그중의 어느 동상이 장세걸동상인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5년 후인 2017년 5월 22일 홍14군기념관 두번째 현지답사는 이렇게 다시 돈 팔며 품 팔며 이루어지고 장세걸 련재가 제19기로 《길림신문》에 오를 수가 있었다. 이제는 무정장군이 맘에 걸린다.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익히 아는 태항산근거지가 아닌 무엇으로 무정장군을 모실가? 장정길 상강전역이 선참 안겨온다. 그래 상강전역이다. 무정장군 평전에서도 현지답사를 거치지 못한 상강전역이다. 헌데 주저도 없지 않다. 상강전역은 머나먼 광서 땅 계림지구여서 한번 다녀오자면 정녕 쉽지가 않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상강전역 현지답사길에 나서기로 작심하였다. 지난 6월의 계림 가족려행과 현지답사는 그렇게 이루어지고 〈상강전역 기념관에 떠오른 무정장군〉제20기, 21기, 22기는 그렇게 마음속에 뿌리내린 기념비로 계림 현지에서 씌여져 발표로 이어졌다. ‘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 련재에서 미안함도 없지 않다. 련재형식이 현지기행문인 만큼 모든 련재는 현지기행으로 씌여져야 했다. 그런데 이번 련재에 꼭 올리기로 한 조선의용군 문명철 묘소 련재는 당지 현지기행으로 되지 못하였다. 련재의 순서로 보아 주문빈과 장세걸, 무정 부분은 련재에 앞서 4월과 5월, 6월에 련속 하북 당산지구에도 다녀오고 강소 여고에도 다녀오고 광서 계림에도 다녀오면서 순차적으로 풀렸으나 문명철 부분에 이르러서는 다녀오기로 한 산서땅 흔주 황룡왕구촌에 다녀오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문명철과 그의 중국 련인 윤봉이 태항산근거지 출발을 앞두고 광서 계림에서 다시 만났기에 계림만남을 계기로 련재를 잡을 수가 있었다. 다행히 계림행에서 문명철과 윤봉 관련 풍부한 력사사료와 회고문 거의 전부를 수집할 수가 있어 련재 23기와 24기, 25기를 위해 석도에 돌아와서 써내려갈 수가 있었다. 보다 행운스러운 것은 윤봉으로 불리운 윤복구의 회고문을 계림에서 알게 되고, 계림에서 인터넷으로 구매한 회고문을 위해 석도에 돌아오자 받을 수 있은 것이라 할가. 윤봉 관련, 문명철 관련 이미 널리 수집한 사료들이 전면적이여서 회고문은 새로운 신선함은 안겨주지 못하였지만 윤봉의 경력상 약간부분은 조절할 수가 있어 좋았다. 더우기 윤봉의 회고문에서 처음 보게 된 문명철 사진, 윤봉의 옛 사진들을 접할 수가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모두가 이 땅의 우리 조선족사회가 처음 보는 사진들이였다. 계림행이 가져다준 엄청 큰 연구성과였다. 련재 1기부터 25기까지 쭈욱 훑어보며 소감을 적어보았다. 그 사이 《길림신문》 지도부와 담당 편집선생님의 로고 덕분에 무사히 련재를 마칠 수 있어 이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고독을 동반한 나 혼자의 알심으로 중국대륙을 누비며 중국대륙에 널리 분포된 겨레 렬사비와 렬사묘들을 아는 대로 빠짐없이 《길림신문》 기획련재로 엮어 세상에 알렸다는 것이 정녕 꿈만 같고 감개무량하기만 하다. 문명철렬사묘 외 모두가 필자가 두발로 뛰며 써낸 것들이여서 더욱 감회가 깊다. 운명은 필자를 어제도 이 길로 부르고 오늘도 이 길로 부르며 래일도 이 길로 부르고 있다… 2017년 7월 15일 위해 석도에서   길림신문
560    [겨레렬사비25]조선의용군 문명철과 그의 묘소 (3) 댓글:  조회:1341  추천:0  2017-07-25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 (25) □ 리 함 1     문명철 1993년 8월 복건성부련회 주임에서 물러선 후의 어느 날 윤봉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문정일(文正一)이 복주 서호호텔에 와서 찾는다는 통지를 받았다. 서호호텔에 가니 문정일은 윤복구인가고 인사하며 한국 렬사인 문명철을 아는가고 물었다. 일찍 연안 시절 이름 윤복구를 윤봉으로 고친 윤봉은 뒤미처 문정일이 한국에 갔다가 문명철렬사의 후손으로부터 문명철렬사의 묘지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문정일을 비롯한 중국내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모두 문명철이 어디에서 희생되고 어디에 묻혔는가를 알지 못하였다.   문명철을 알자면 문명철의 련인으로 알려진 윤복구를 찾아야 했다. 알고 보니 윤복구는 연안 시절 윤봉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44년 8월 우리 나이로 22세 때 남편 오홍상(吴洪祥, 1914-2005)과 소속 당지부에 결혼신청을 내였고 중앙조직부의 비준을 받았었다. 이듬해 1945년 4월 23일에는 남편 오홍상이 연안 양가령의 중앙강당에서 열린 당 7차 대회에 참가하였다. 해방전쟁시기 오홍상은 화중군구 소속 제4종대 제12사 정위로 활동하다가 1949년 8월 17일 복건 복주가 해방된 후에는 선후로 공청단복건성위 서기, 중공 룡암지위 제1서기, 중공 복건성위 조직부장, 성위 부서기, 서기, 부성장, 제5기 성정협 주석을 력임하였다. 윤봉은 복건성부련회에서 부장, 부주임, 주임으로 활약하면서 《복건일보》에 〈한국 전우 문명철을 심절히 그린다〉는 회고문장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문정일을 만나면서 문명철렬사의 후손들 뜻대로 문명철 묘소를 찾고 그의 유해를 찾아 한국에 보내는 것은 윤봉의 미룰 수 없는 책임으로 되였다. 이는 윤봉의 남편의 지지로 복건성위에 보고되고 성위 부서기 림개흠(林开钦)은 중한 두 나라 인민의 친선왕래를 알리는 력사의 견증이라면서 기꺼이 비준지시를 내렸다. 그 해 1993년 11월에는 한국으로부터 문명철의 조카인 김환종(金皖钟)으로부터 문정일선생을 통하여 알게 되였다면서 련속 두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후 김환종에게서 또 몇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편지에서 김환종은 윤봉을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자기를 윤봉의 아들로 간주하였다. 정이 넘치는 편지들이였다. 그 때에야 윤봉은 문명철의 본명은 김일곤(金逸坤)이고 다섯 형제자매에서 넷째이며 문명철이 희생된 후에는 큰형 김유곤(金裕坤)에 의해 그의 맏아들 김환종이 문명철의 아들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2 1993년 그 해 윤봉은 이미 70세의 로인이였다. 멀리 산서에 가서 문명철의 묘소를 찾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럴 때 윤봉의 작은사위 진지겸(陈智谦)이 국외에서 돌아와서 이 일을 알게 되고 처음으로 태원으로 날아갔다. 진지겸이 찾은 곳은 산서성 민정청과 당사연구부문이였으나 그들은 문명철을 근본 모르고 있었다. 당년의 《해방일보》에서도 렬사의 희생된 지점을 밝히지 않았기에 산서성 당사연구부문에서도 도와줄 수가 없었다. 진지겸은 복주의 집으로 돌아간 후 1943년 5월 18일 연안 《해방일보》를 거듭 검토하는 가운데서 신화사에서 띄운 기사임에 주의를 돌렸다. 진지겸은 이미 리직한 원 국가민위 부주임 문정일에게 련락하여 북경의 신화사 총사를 통해 문명철의 희생지점을 알아줄 것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의연히 추도회 지점 뿐이고 희생된 지점을 밝힐 수가 없었다. 복건성부련회 주임에서 물러난 후 1990년대 중반의 윤봉 그래도 진지겸은 락심하지 않았다. 그는 두번째로 태원행에 올랐다. 1994년 음력설 이후 출국하였다가 귀국길에 북경을 경유하면서 모 군사부문에서 사업하는 친구를 통해 1943년 4월 14일 문명철과 그의 전우들이 적들과 격전을 벌린 곳-산서성 흔현 흔오구(忻县忻五区)를 찾아냈으니 속이 든든하였다. 아니나 다를가 산서성과 흔주시 민정부문의 방조하에서 흔현 흔오구 소재지-흔현 합색향(合索乡)을 찾아냈으니 당년 전투가 벌어진 곳은 흔현 합색향 황룡왕구촌(黄龙王沟村)이였다. 알고 보니 당년 문명철 일행이 적들과 벌린 전투는 흔현 합색향 경내서 벌어진 유일한 전투이고 희생자는 문명철 등 도합 3명이였다. 진지겸은 황룡왕구촌에서 당년 력사의 견증자와 렬사유체를 묻은 두 로인 그리고 전투지점을 답사하는 가운데서 끝끝내 문명철의 희생경과를 듣고 진실한 묘소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문명철의 자세한 희생경과와 묘소는 이같이 우리 조선족이 아닌 머나먼 고마운 이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던가. 3 력사의 시침을 1943년 4월 14일로 돌려보면 이날 새벽 날이 희붐히 밝아올 때 팔로군 사복무장 공작대원인 문명철 등 일행 4명은 하루 동안의 긴장한 활동을 마치고 황룡왕구촌 맨 뒤켠에 있는 촌민 소근해(苏根海)네 집으로 들어갔다. 소근해의 형 소근무(苏根武)는 팔로군 흔오구의 양성대상인데다가 이 집은 들어오거나 퇴각하기 편리한 우점을 가지고 있었다. 문명철 등 넷은 흔오구에서 활동한 지 어언 넉달이나 되고 소근해 집을 여러번 드나들었기에 사람이나 주위환경이 비교적 익숙한 편이였다. 이들 네 사람을 보면 문명철은 조선독립동맹 진서북분맹 조직위원이고 팔로군 간부인 호이명(胡以明)은 호남성 태생으로서 30세 좌우였다. 이밖에 팔로군 통신원 류명량(刘明亮)은 산서성 태생이고 17세, 리동지(老李)로 불리우는 지방간부는 30여세로 알려졌다. 이들 팔로군 사복무장 공작대원들이 활동하는 황룡왕구촌은 100여명 인구를 가진 산간마을로서 팔로군 흔현 흔오구 관할구역에 속하였다. 실상은 적아교체구역이여서 당지 사람들에게 문명철은 장동지로, 호이명은 호동지로, 지방간부는 리동지로 통하였다. 문명철 등이 집안에 들어서자 소근해는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좁쌀죽을 끓이기 시작하였다. 1996년 문명철의 묘소가 한국으로 이장된 후 그 곳엔 혁명렬사기념비가 세워졌다. 죽이 다 되고 식사를 서두를 때다. 총창을 꼬나든 왜놈 몇이 갑자기 두번째 문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소근해가 먼저 적정을 발견하고 소리치니 모두들 자리를 박차고 구들에서 뛰여내렸다. 통신원 류명량이 먼저 창턱에 놓은 수류탄 하나를 집어 도화선을 당긴 후 두번째 대문에 던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왜놈 몇놈이 꺼꾸러졌다. 그 사이 문명철 등 넷은 담장을 넘어 서하구 기슭의 봇나무 숲속에 들어서며 서쪽으로 달렸다. 리동지가 제일 앞에서 달리고 그다음은 류명량과 호동지, 나중에 문명철이 달리며 동지들을 엄호하여나섰다. 페결핵을 앓고 있던 문명철은 몸이 휘청휘청하였지만 자기의 직책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날 동원된 왜놈과 괴뢰군은 도합 200여명이고 두길로 나뉘여졌다. 문명철 등은 앞쪽 적들의 포위는 헤쳤지만 뒤쪽 적들의 포위는 헤치기가 어려웠다. 적아쌍방은 어느덧 서하구 쪽 세갈래 갈림목에 접근하였다. 이곳은 골짜기가 불시에 90도로 꺾어들기에 적아쌍방은 대방을 보아낼 수가 없다. 류명량이 적들을 발견하였을 때는 적들과의 거리가 20메터 밖에 안되였다. 류명량은 수류탄을 던져 적 몇놈을 쓰러눕혔다. 류명량이 두번째 수류탄을 던지려고 할 때 적탄에 머리를 맞았다. 그러나 적들이 맹렬한 화력으로 문명철과 호이명을 골짜기 안에 제압하였기에 명량이한테 접근할 수가 없다. 그렇게 류명량은 희생되였지만 문명철과 호이명은 약 30메터 거리를 두고도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4 두 사람은 신속히 남구 쪽으로 후퇴하였다. 호이명이 앞에 서고 문명철이 뒤에 섰다. 남구 약 50메터 지점에서 적들의 화력에 의해 둘은 갈라지게 되였다. 그러다가 호이명이 희생되고 문명철도 탄알이 떨어졌다. 그의 수중에는 수류탄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적들은 대방이 전부 죽은 걸로 알고 총창을 꼬나든 채 문명철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찰나 문명철이 벌떡 일어나서 손에 총을 든 채로 적들을 향해 걸어갔다. 적들은 문명철의 다리에 총을 쏘았다. 문명철은 쓰러지고 권총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두 다리에서는 선지피가 마구 쏟아졌다. 적들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자 문명철은 류창한 일본어로 소리질렀다. “너희들 왜놈들은 조선과 중국에서 피비린내 나는 폭행을 저질렀다. 너희들도 처자와 나라가 있으면서 왜 중국에 와서 폭행을 감행하느냐? 위대한 중조 아들딸들의 항일사업은 정의적이다. 인류의 진보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적들은 일시 어안이 벙벙하였다. 이어 일본군관이 저자를 끌어가라고 소리지르자 한무리 왜놈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때라고 문명철은 품에서 마지막 수류탄을 꺼내여 도화선을 당기며 적들한테로 굴러갔다… 당년 문명철 일행이 적들의 포위를 돌파하며 싸우던 황룡왕구촌 타라산(陀罗山)의 한 모습 조선전우 문명철의 희생소식이 전해지자 진서북 각계에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1943년 5월 4일에 진서북 군구 주둔지에서는 ‘조선혁명전우 문명철렬사 추도대회’를 장중히 열었다. 이어 태항산근거지의 《항일일보》에서 특집을 내였다. 5월 17일부 연안 《해방일보》는 신화사 진서북 16일발 통신을 내면서 진서북 각계에서 조선혁명전우 문명철동지를 추모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1943년 6월 18일부 연안 《해방일보》 보도는 또 “1943년 6월 6일,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조선청년혁명학교 세 단체에서 태항산근거지에서 또 문명철, 김산륜 두 렬사를 위해 추도대회를 가졌다.”고 쓰고 있다. 흔현 합색향 황룡왕구촌(黄龙王沟村)이였다. 중국 동지들에게 조선전우로 불리운 문명철은 희생된 후 지금의 산서성 흔주시 흔현 합색향 황룡왕구촌 동산에 묻히였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나 문명철은 그의 중국 전우이고 련인인 윤봉과 그의 작은사위 진지겸, 여러 부문의 도움으로 황룡왕구촌 밖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일을 진지겸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보고하고 한국의 보훈처에도 알리였다. 한국 보훈처에서는 관원 두 사람을 파견하여 중국 현지에서의 확인을 거쳤다. 1995년 6월 중국 외교부에서는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에 문명철렬사의 유해를 한국에 이장함을 동의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드디여 1996년 10월 22일에 진지겸과 한국 김환종, 한국 보훈처의 두 관원 그리고 산서성 3급 민정부문의 사람들 도합 일행 10여명이 전문차로 산서 흔현 황룡왕구촌에 갔다. 이튿날 오후 중국땅에 장장 52년이나 묻혀있던 문명철렬사의 유해는 골회로 되여 한국 김포공항에 이르고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졌다. 5 그 무렵 한국의 김환종이 복건 복주에 가서 ‘이국모자’ 상봉을 이루었다. 잇달아 김환종의 19세 아들 김지수(金志洙)가 윤봉 부부의 도움으로 복건사범대학 중문학부에 입학하였다. 2004년 봄에 진지겸 등은 윤봉의 부탁으로 한국 대전에 가서 문명철렬사 묘소를 배알하고 전라남도에 가서 김환종 일가를 찾아보았다. 김환종의 딸 김수정(金秀婷)도 윤봉의 지지와 복건성정부의 특별비준으로 복건사범대학 해외학원에 학비면제로 입학하였다… 한국의 문명철(김일곤) 고향집 집터   /이상 자료사진 2017년 7월 11일 위해 석도에서 길림신문
559    [겨레렬사비24]조선의용군 문명철과 그의 묘소 (2) 댓글:  조회:1578  추천:0  2017-07-18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 (24) ■ 리 함 1   1940년 10월, 윤봉은 중경으로 출발하는 조선의용대 일행 속에 섞여 계림을 떠났다. 려비가 따르지 못하는 연고로 이들 일행은 뻐스 따위를 리용하지 못하고 짐을 가득 실은 화물차 편을 리용해야 했다. 그나마 화물차 꼭대기라 짐을 동인 바줄을 꽈악 잡아야 하는데 ‘마귀로선’이라 이름난 귀주 동재(桐梓)구간의 굽이굽이 ‘72굽이길’만 한시간 푼히 달릴 때면 머리가 쭈볏해났다. 그렇게 험악한 길을 달리며 중경에 도착하니 윤봉은 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와 더불어 남안(南岸)의 진가화원(陈家花园)에 자리한 조선의용대 총대부에 두달 동안 머물면서 휴식정돈과 학습에 나서야 했다. 문제는 페결핵을 앓는 윤봉이 늘 열이 오르고 피를 토하는 것. 그 때를 두고 윤봉은 〈잊지 못할 전우〉란 한편의 회고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문명철은 의사를 청해다가 나의 병을 보이고 생활면에서 시중을 들어주었다. 중경을 떠난 후 나는 또 학질에 걸렸었다. 문명철은 늘 나의 짐을 들어주기도 하고 이모저모로 살뜰하게 도와주면서 꼭 병마를 이겨내고 행군임무를 완수하라고 고무격려해주었다. 이에 대해 나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윤봉은 계속하여 문명철을 외우고 있다. 1938년 완남에서의 윤복구(윤봉)의 사진 행군길에서 문명철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자애로운 어머니와 아름다운 조국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했다. 그는 “조국이 없는 사람은 어머니가 없는 어린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하군 했다. 행군길에서 그는 여러가지 돌멩이를 줏기를 즐겼는데 돌멩이를 주어들고는 이 돌에는 어떤 성분이 함유되여 있고 저 돌에는 어떤 성분이 함유되여 있다고 하면서 호주머니에 주어넣었다가는 표본으로 삼았다. 그는 “혁명이 승리한 후 나는 과학가가 되여 지질학을 연구하고 광산을 개발하여 조국건설에 이바지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회고문은 전문 문명철렬사를 추모하여 쓴 회고문으로서 중국인 녀성 윤봉에 대한 문명철의 애틋한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사랑이 있었으므로 문명철은 그로부터 몇년 후 산서의 한 오지에 이름 없이 쓰러졌지만 사랑했던 련인인 윤봉에 의해 묘소가 발견되고 자기의 조국땅에 다시 묻힐 수가 있었으니 인연이란 참으로 갸륵한 존재였다. 드디여 그들은 1941년 1월 1일 새해 첫날에 윤봉은 조선의용대 총대부의 일부 간부들과 제1지대, 제3지대 대원들과 함께 중경부두에서 ‘민생호’ 기선에 올라 중경을 떠나 북상길에 올랐다. 국민당의 풍옥상, 리제심 등 애국장령들과 애국인사들은 조선의용대가 떠나는 전날밤 성대히 환송하면서도 우리 조선동지들이 국민당통치구역을 벗어나 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이동한다는 것을 몰랐다. 총대부에서 극비리에 팔로군 중경판사처의 주은래동지께 청시하고 결정한 일이여서 그들은 알 리가 만무했다. 그 때 태항산근거지 두리의 화북땅에는 20여만에 달하는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오매불망 바라던 념원이 현실로 되자 문명철 등은 가슴이 한없이 후더워났다. 2 ‘민생호’는 해종일 달린 끝에 산간의 자그마한 도시 만현(万县)에 이르렀다. 만현의 조선인 최성오의사와 그의 안해가 반갑게 맞아주고 술에 풍성한 안주까지 마련하여 제법 흥성한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조선의용대 대원들 속에는 조선녀성 장수연, 중국녀성 윤봉(문명철의 련인), 일본녀성 권혁에다 국민당 군대에 잡혀갔다가 의거한 조선동지들이 있어 국제적인 대오를 방불케 하였는데 오락판이 벌어지자 녀성대원들이 선참 공격목표가 되고 조선노래, 중국노래, 쏘련노래, 일본노래가 터져올랐다. 그중에서도 문명철의 련인 윤복구가 부르는 중국노래, 쏘련노래가 자못 인기를 끌었다. 열다섯살부터 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에서 사업해온 윤복구-윤봉에게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의례 한마디 “목이 쉬였어요”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날도 례외가 아니였다. 그가 옆에 앉은 문명철이를 곁눈질하자 눈치를 챈 문명철이 제꺽 하모니카를 꺼내들고 련인의 노래에 멋들어지게 반주를 해주었다. 문명철은 아무리 어려운 나날에도 하모니카만은 늘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틈만 생기면 꺼내 불군 하였다. 만현 최성오의사 병실 연회에서도 그 재주가 남김없이 드러났다. 윤복구(윤봉)랑 류숙하였던 동욕진 상무촌의 옛 사찰-홍복사 일각    /2017년 6월 현지촬영 중국인 녀성 윤봉과 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환난지우 사이를 잘 말해준다. 그들은 옹근 반년이란 기간 사천, 호북, 하남, 하북, 산서 등 성을 거치면서 그 해 1941년 6월 초의 어느 날 오매불방 태항산항일근거지-팔로군총부 소재지인 료현 동욕진(辽县桐峪镇)에 도착했으니 정녕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윤봉은 조선의용대 동지들과 더불어 동욕진 상무촌(上武村)의 옛 사찰-홍복사(洪福寺)에 류숙하게 되였다. 로신예술학교 태항분교도 상무촌에 자리잡아 진정 사람 사는 동네 같았다. 두어달 후, 적절히 말하면 윤봉은 팔로군총부 정치부에 소환되였다. 그 후 1942년 5월의 반소탕 때에는 또 연안 행에 오르면서 윤봉과 문명철은 다시 만나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연은 소중하여 문명철은 인편에 연안의 윤봉한테 포도당칼슘 주사약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 시절로 보면 그 주사약은 아주 귀한 약이였다. 문명철은 자기도 페병에 시달리면서도 자기에게 차례진 귀중한 주사약을 윤봉에게 보내주었으니 윤봉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포도당칼슘 주사약을 받은 후 윤봉은 다시는 문명철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문명철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는 그 후 연안에서 강생이 벌린 ‘실족자 구하기’(抢救失足者) 운동이 잘 알려주고 있다. 이 운동에서 윤봉은 국민당통치구에서 왔다는 것과 조선의용대 전우 문명철과의 련애관계로 하여 이른바 ‘실족자’로 락인되여 전문심사를 받게 되였다. 3 그 때의 연안은 말 그대로 남자가 많고 녀자가 적어 남녀청년의 비례가 대략 10분의 1을 이루었다. 그만큼 녀자들이 적으니 연안이란 이 특수한 환경에서 녀자들은 남자들이 추구하는 목표로 되였다. 윤봉도 례외가 아니였으니 늘 청년남자들이 주변을 돌며 호감을 표시하였다. 그래도 윤봉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는 윤봉이를 보고 윤봉이 소속 방직부의 한 지부서기 풍력(冯力)언니는 남자가 크면 장가들고 녀자가 크면 시집가기 마련인데 하며 리해되지 않아했다. 이에 윤봉은 자기에게는 남자벗이 있다고 속심을 터놓았다. 지부서기 언니는 누군가고 물었지만 윤봉은 아직 말할 수 없다고 뒤를 달았다. 윤봉은 문명철과 헤여져 연안으로 온 후 포동당칼슘 주사약을 받았을 뿐 그 후 한번의 련락도 없었으니 어찌 긍정적인 대답을 줄 수 있었으랴. 어느덧 시간은 살같이 흘러 1943년이 왔다. 이 해 5월 28일 연안의 《해방일보》 1면 톱기사에는 〈진서북 각계 조선혁명전우 문명철동지를 추모〉란 기사가 실렸다. 기사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1940년 11월 중경에서 찍은 윤복구와 오빠 윤복화의 기념사진 문명철동지는 진서북 모 분구에서 사업하며 적대투쟁의 최전선에서 적들 속을 드나들다가 4월 14일 불행히도 100여명 적들의 사면포위에 들었는데 돌파할 수가 없었다. 그는 두 중국동지와 함께 포위를 헤치고저 적들과 격전을 벌리며 몇몇 놈을 살상하였다. 마지막에 탄알이 떨어진 역경 속에서 최후의 수류탄을 적에게 던졌으며 자기도 수류탄 폭발 속에서 영광스럽게 순국하였다. 《해방일보》 기사를 본 윤봉은 놀라마지 않았다. 문명철은 일찍 윤봉이 영웅패장 역을 맡았던 단막화극 〈최후의 수류탄 하나〉의 영웅패장처럼 최후를 마치면서 “윤동지가 맡아나선 영웅패장은 우리가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입니다. 나 역시 영웅패장과 같은 경우라면 용감하게 희생될지언정 절대 적들의 포로가 되지 않겠습니다.”라던 맹세를 실천하였었다. 윤봉은 이같이 졸지에 자기의 친밀한 전우이며 사랑하는 조선오빠인 문명철을 잃었다. 그의 마음은 비통하기 그지 없었다. 윤봉은 뒤늦게야 문명철이 조선의용대의 동지들과 함께 1942년 7월, 오늘의 하북성 섭현 섭성진 중원촌에서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고 조선의용군 무장선전대 대원으로 뽑혀 적후무장선전활동의 진두에 나섰음을 비교적 자상히 알게 되였다. 4 어느 날 문명철 소속 무장선전대는 최전방 선전사업을 끝내고 돌아오다가 적들의 포위에 들었다. 싸우다가 포위된 곳은 한 농가 안이였다. 그는 농가의 창문을 리용해 반격하다가 천정을 뚫고 지붕 우로 나가서 놈들을 따돌렸다. 그러다가 마을 끝에서 왜놈 군대 하나가 나타나 총창으로 그를 막아나섰다. 문명철은 태연하게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놈의 가슴패기를 겨누었다. 왜놈이 일순 어리벙벙해할 때 문명철은 그 놈을 재끼고 마을을 벗어났고 무장선전대 대원들과 함께 무사히 귀가하였다. 또 한번은 모 분구에 파견되여 사업하다가 10여배에 달하는 적들의 포위에 빠져들었다. 극히 불리한 사태에서 문명철은 전우들과 더불어 맞불질로 적들을 쓸어눕혔으나 어언중에 탄알이 다 떨어졌다. 적병이 들이닥치자 문명철은 빈 총을 적의 가슴에 들이댔다. 적병이 깜짝 놀라 주춤하는 순간 문명철은 날쌔게 그 자의 총을 나꿔채여 그 자를 찔러죽이고 무사히 피해버렸다. 이같이 문명철은 류달리 용감하고 침착하고 기민하여 온 진동남 일대 군민들 속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 떠올랐다. 1942년 5월 진동남 반소탕 전역에서는 적들을 무자비하게 쓸어눕히며 기관총 9정을 로획하여 대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오늘의 흔주 황룡 왕구촌 모습 1942년 9월에 문명철은 진서북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 진서북분맹의 조직위원을 맡아나섰다. 1943년 초에는 팔로군 진서북군분구에서 사업하였다. 진서북분맹이나 진서북군분구 때나 주로 적후선전사업에 종사하며 사선을 넘나들었기에 문명철의 신체는 몹시 허약해갔다. 조직과 동지들이 후방휴식을 수차 권해도 그는 항일의 최전방에서 추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던 1943년 4월 14일 아침, 문명철은 다른 2명의 팔로군동지와 함께 적후의 한 마을에 머물렀다가 100여명이나 되는 적들의 돌연진공에 맞다들었고 마지막 남은 수류탄 하나로 적진에 뛰여들며 장렬한 최후(상세한 내용은 다음 회로 미룬다)를 마쳤으니 윤봉은 일순 비통에서 헤여나지 못하였다. 윤봉이 큰언니라고 부르는 풍력은 윤봉의 소속 지부서기로서 뒤늦게야 윤봉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였다. 사실 윤봉이와 문명철은 사랑다운 정식 사랑을 해보지 못하고 맘속으로 새겨두고 있었을 뿐이였다. 풍력언니는 윤봉에게 정식으로 오홍상(吴洪祥)이라는 청년을 소개해주었으니 오홍상은 민월감(闽粤赣)변구에서 선출되여온 당 7차 대회 대표이고 중공 민월감성위 청년부장 겸 영정(永定)중심현위 서기였다. 영정은 오늘의 복건성 영정현을 가리킨다. 2017년 7월 10일 위해 석도에서
558    [겨레렬사비23] 조선의용군 문명철과 그의 묘소 (1) 댓글:  조회:1356  추천:0  2017-07-12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23) ■ 리 함 1 조선의용군 문명철   /자료사진 광서쫭족자치구 계림시 중산중로(中山中路) 96번지는 ‘팔로군 계림판사처’로 되여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있다. 지난 6월 한달 간 계림에 머무르면서 수차 팔로군 계림판사처를 찾게 되였다. 그 때마다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은 계림에서 활동상을 보인 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战地服务团) 단원이고 공산당원인 윤봉(尹峰)녀성이다. 왜서 머나먼 남녘땅 계림에서 조선인도 아닌 중국녀성에 관심을 돌리게 되였을가? 이를 알자면 먼저 윤봉녀성을 알아야 하니 윤봉은 조선의용대 제1지대에서 활동하는 문명철 분대장의 전우였다. 이 중국 전우가 먼 후날 이 땅의 우리 조선족들이 모르는 문명철의 묘소를 찾아내면서 본 특별기획을 마감짓는 련재글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게 되였으니 실로 세상은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다고 할가. 윤봉은 본명이 윤복구(尹卜驹)로서 호북 무한 사람이다. 1937년 ‘7.7’ 로구교사변이 폭발하면서 일본침략자들이 중국땅을 짓밟을 때 윤봉은 한창나이의 15살 소녀. 학업에 몰두하던 이 소녀는 일본침략자들에 대한 증오의 한마음으로 항일구국이란 이 거창한 홍류속에 뛰여들었다. 그는 성해가영대(星海歌咏队)에 참가하여 선성해(冼星海)가 작곡한 (做棉衣) 노래를 부르면서 전방에서 추위에 떠는 항일전사들과 류리걸식하는 난민들을 위해 의연금과 옷들을 모금하고 모으는 일로 바삐 보냈다.  1938년 봄 윤봉이 완남에서 찍은 사진  /자료사진 그러던 1938년 3월의 어느 날 상해에서 무어진 ‘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이 무한에 이르러 녀단원들을 모집하면서 뜻 있고 유망한 청년들이 전선에 나가 싸움터의 봉사를 할 것을 수요하고 있었다. 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은 1937년 8월 13일, 일본침략군이 상해에 주둔한 중국군에 대해 대거 진공을 개시하면서 잇달아 생겨난 항일단체로서 단장은 사천 성도 사람이고 황포군관학교 제6기 녀성대 출신인 호란휴(胡兰畦)였다. 호란휴는 또 북벌전쟁에 참가하고 국민당중앙 부녀부에서 사업한 적 있는 중공 당원이고 저명한 부녀수령 하향응(何香凝)의 비서로서 하향응이 발기 조직한 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의 단장으로 나서게 되였다. 이런 단장에 이런 항일단체에서 단원을 모집하니 윤복구로 불리는 윤봉은 언니 윤복견(尹卜甄)의 지지와 련락으로 결연히 학업을 포기하고 신입단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언니 윤복견은 1917년 생이고 윤봉보다 6살 이상으로서 1937년 겨울에 이미 호북성녀자사범학교 중공 지하당 지부서기로 활동하고 있었다. 무한 한구에서의 며칠 간의 훈련을 거쳐 윤봉은 전지복무단의 자매들과 함께 동으로 달리는 렬차에 올라 무한을 떠나게 되였다. 그 후 전지복무단은 안휘 섭현(歙县)의 40호 병참 림시상병병원(伤兵医院)에서, 강서 구강의 싸움터에서 부상병들의 약을 갈아붙이기, 음식물 먹이기, 신문 읽어주기, 피 묻은 옷 씻기, 집에 편지 써주기 등 봉사일과 위문공연, 《전고》(战鼓) 편집 등 일로 바삐 보냈다. 그 속에서 표현이 두드러져 윤봉은 1938년 10월에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함을 보였다. 2 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에서 ‘전장극사’(战场剧社)를 조직하자 윤봉은 전장극사의 배우로 활동하였다. 전장극사에서는 선후로 (难民苦), (东北一角), (活捉东洋兵), , , (最后一颗手榴弹) 등 활보극(活报剧)이나 단막연극을 무대화하여 중국군들의 싸우는 전선에서 공연하여 항일군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1940년 초에 윤봉 소속 전지복무단은 강서의 고안(高安), 상고(上高) 일대에서 국민당 19로군에 소속된 조선의용대 신년위문공연에 나섰다. 그 때 공연한 단막연극 가운데는 중앙혁명근거지 시절 서금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 표현예술가 석련성(石联星)의 연출로 된 가 있었다. 연극의 주인공은 영웅패장. 어느 한차례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영웅패장이 거느린 패 전사들은 거의가 희생되고 패장은 적들의 포위에 빠지면서 포위를 헤칠 수가 없었다. 영웅패장은 결연히 수중의 최후 하나의 수류탄으로 적들 속에 뛰여들어 비장한 최후를 마친다. 이 영웅패장의 역을 윤봉이 맡아나섰다. 조선의용대 총대부가 머무르던 계림시 동령가 1번지. 동령가 1번지는 지금의 계림시 칠성(七星)공원 입구 내 화교(花桥)다리 동쪽가로서 사진 속 다리 오른쪽, 강물 아래 쪽 숲속이 1번지 원 구역이다.   /2017년 6월 현지촬영 어느 날 공연이 끝나자 조선의용대 제1지대 3대 대장 김세광이 부분적 전사들과 같이 무대 뒤에 나타나 윤봉의 영웅패장 표현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 속에는 작달막한 키에 딱 바라지게 강퍅한 문명철이도 섞이였다. 문명철은 윤봉과 문명철이라 부른다고 인사하면서 류창한 중국말로 “당신들의 공연을 보고 크게 감동되였습니다.”라고 말을 건네였다. 윤봉은 자기는 윤복구라고 부른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중국에 와서 중국인민의 항전을 도와나서니 우리가 조선의용대 동지들께 감사를 드려야지요.” “아니, 아니지요. 윤동지가 맡아나선 영웅패장은 우리가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입니다. 나역시 영웅패장과 같은 경우라면 용감하게 희생될지언정 절대 적들의 포로가 되지 않겠습니다.” 윤봉의 말에 대답한 문명철의 어조는 그렇듯 힘있고 견정하게 들렸다. 이는 중국녀성 윤봉과 조선인 문명철의 첫 만남이였으니 문명철을 비롯한 조선의용대 동지들의 열성적인 모습은 윤봉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해 1940년 여름 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는 대적전선에서 돌아오면서 신유현(新喻县)을 거치게 되였다. 신유현은 지금의 강서성 신여시(新余市)로 알려진다. 윤봉 소속 전지복무단이 마침 신유현에서 활동함을 알게 된 문명철 등은 특별히 전지복무단 류숙지를 찾아 윤봉을 만나주었다. 문명철과 윤봉의 만남은 그리도 자연스럽고 열성으로 넘치였다. 서로 이국의 남녀라지만 오빠와 녀동생 사이처럼 친근하고 허물이 없었다. 3 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은 국민당 제19로군에 소속되여 활동하였지만 그들 중의 허다한 녀성들이 우리 신사군의 지도를 받는 중공 지하당지부 당원들이였다. 한데서 이들의 전선복무활동은 언제나 뛰여난 열성으로 넘치였다. 이는 소극항전과 적극반공에 열을 올린 국민당내 반공 완고파들의 눈에 가시로 되여 전선복무단은 도처에서 감시를 받고 제한을 받아야 했다. 이는 불길한 징조로서 전지복무단의 중공 당원과 적극분자들은 국민당 완고파의 감시에서 벗어나야 하였다. 그 때 전지복무단 지하당지부에는 16명 공산당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 해 10월 하순 경에 지하당지부에서는 당원동지들과 진보적 청년 도합 20여명을 이끌고 무사히 국민당 제19로군을 벗어났다. 이는 실제상 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의 해산을 의미하는바 국민당의 감시에서 벗어난 전지복무단의 대부분 동지들은 계림으로 전이하여 팔로군 판사처의 지시를 기다리게 되였다. 본문의 서두에서 언급한 윤봉의 계림 등장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그 시절의 윤봉은 한창 페결핵으로 시달릴 때여서 늘 피를 토하며 신체가 허약하여 말이 아니였다. 전지복무단 당지부에서는 소속 동지들 앞서 윤봉이를 병치료의 명의로 먼저 광서 계림에 보냈기에 윤봉은 계림에서 약 두달이란 시간을 보내게 되였다. 1940년 8월 윤봉이 언니 윤복견과 계림에서 만나 윤봉이가 계림에 이르자 마침 녀성혁명가인 그의 언니 윤복견이 우리 당이 지도하는 계림의 ‘신안학교’(新安学校)에서 교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윤봉이는 언니와 함께 류숙하면서 치료하는 한편 팔로군 계림판사처의 배치를 기다리게 되였다. 이를 알기라도 하듯 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도 의용대 총대부가 자리잡은 계림으로 전이하였다. 1938년 12월 초에 조선의용대 총대부는 계림에 나타난 후 선후로 계림 동령가 1번지(东灵街1号)와 시가원 53번지(施家园53号)에 자리잡고 광서락군사(广西乐群社), 신화대극장(新华大戏院), 계림중학교 등지를 무대로 여러가지 형식의 항일활동을 펼쳤다. 그중 동령가 1번지는 지금의 계림시 칠성(七星)공원 입구 내 화교(花桥)다리 동쪽가를 가리키고 시가원 53번지는 칠성공원의 측문으로 되는 남문에서 시가원로(施家园路)를 따라 약 300메터 되는 곳을 가리킨다. 계림에 머무르는 기간 필자는 동령가 1번지 등 조선의용대 관련 유적지를 모두 찾아 사진을 찍고 동영상도 찍었다. 문명철은 조선의용대 총대부가 자리한 동령가 1번지와 시가원 53번지, 윤봉의 류숙지, 팔로군 계림판사처를 자주 드나들면서 윤봉과 그의 병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속에서 두달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윤봉은 조선인 문명철에 대하여 보다 깊은 리해를 할 수 있었다. 4 문명철의 본명은 김일곤(金逸坤, 1914년 생)이고 고향은 전라남도 담양군(潭阳郡)으로 알려진다. 어릴 때 살림이 째지게 어려웠기에 문명철은 한 방직공장에 들어가 3년 동안 아동공으로 죽기내기로 일하여야 하였다. 후에 백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당지 직업학교-중학교 공부를 무난히 마칠 수가 있었다. 1929년 11월에 문명철은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하였고 1933년 봄에는 중국 행에 올라 그 해 9월 김원봉(金元凤)의 의렬단(义烈团)에서 꾸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2기 생으로 입학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국민당정부의 지원으로 꾸리는 학교로서 이 학교에서 사용한 가명이 문명철이였다. 1934년 2월에 문명철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중퇴하고 상해림시정부의 김구(金九)가 운영하는 중국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洛阳分校) 한인특별반으로 전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그 때 조선인들에 대한 일제의 추적이 극심하였기에 문명철은 한인특별반에서 가명을 한광(韩光)으로 바꾸어버렸다. 조선의용대 총대부가 후에 머무르던 계림시 시가원 53번지. 시가원 1번지는 칠성공원의 측문으로 되는 남문에서 시가원로(施家园路)를 따라 약 300메터 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2017년 6월 현지촬영 한인특별반을 졸업한 후 문명철은 1938년 10월 무한 한구에서 설립된 조선의용대 첫패의 대원으로 되였다. 그 후 소속 조선의용대 제1지대를 따라 국민당군과 함께 호남, 호북, 광서, 운남 등지에서 일본군과의 싸움에 나섰다. 1939년 봄에는 호북성 통성(通城)-숭양(崇阳) 도로에서 혼자서 일본군의 땅크 두대나 까부시여 전구(战区)의 훈장을 받은 공신자이기도 하였다. 그런 출신의 문명철은 성격이 강직하고 고집이 세기로 이름이 났으나 중국 녀성 윤봉이 앞에서는 고분고분하기로 또 이름이 났다. 드디여 리극농(李克农)을 처장으로 하는 팔로군 계림판사처의 배치가 알려졌다. 윤봉과 임수당(任秀堂), 호서영(胡瑞英), 진란상(陈兰湘) 등 4명 당원은 연안에 가기로 하고 12명 당원과 10명의 진보적 청년들은 완남(皖南)의 신사군으로 가기로 하였다. 팔로군 계림판사처는 1938년 11월 중순에 중공중앙에서 중앙남방국 비서장 리극농을 계림에 파견하여 세우게 한 판사처로서 전체 면적 1,300여평방메터에 건축면적이 800여평방메터에 달하는 토목구조의 건축물이다. 원래는 ‘만상조방’(万祥糟坊)으로 알려지다가 중공 남방국에서 빌리게 되면서 팔로군 계림판사처로 쓰이게 되였다. 2017년 7월 5일 위해에서 길림신문
557    [겨레렬사비22] 상강전역기념관서 떠오른 무정장군(3) 댓글:  조회:1197  추천:0  2017-07-11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22) ■ 리 함 1 1934년 11월 25일부터 12월 3일까지의 상강전역을 보면 광서 흥안과 전주 사이의 상강과 그 부근에서 벌어짐을 보이였다. 그러나 상강은 그 발원지를 흥안현의 백석향(白石乡) 경내에 두고 있기에 흥안과 전주 사이의 강폭은 그리 넓다고 볼 수 없다. 상강전역 3대 저격전의 하나인 광화포저격전의 경우를 보아도 이 고장의 계수나루터는 본격적인 우기가 아닌 이상 강폭이 호남 경내를 흐르는 상강에 비하여 현저하게 좁은 편이다. 그래서 나는 택시운전사와 잠간 대화를 주고받았다. “계수나루터 구간 상강보다 더 넓은 구간의 상강전역 관련 상강을 보고 싶은데요.” “당년의 상강전역은 3대 저격전 외에도 여러 도강점들을 갖고 있지요. 봉황취 구간도 하나의 홍군 도강점인데 이 구간의 상강이 꽤나 넓어요.” “와아-그래요?!” 계수나루터 답사 이후 전주현 봉황향 화평촌(和平村) 구간 봉황취(凤凰嘴) 답사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봉황취는 계수 구간 광화포저격전 현지에서 북으로 6키로메터 쯤 되는 거리로서 이 구간 상강은 계수나루터 구간 상강보다 강폭이 훨씬 넓어보였다. 그만큼 그제날 이 구간에서의 중앙홍군의 상강 강행도하는 적정이 없다 해도 보다 어려울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렷다. 광서 전주현 봉황향 화평촌 봉황취 구간의 상강과 옛 홍군 도강 나루터 인상적인 것은 봉황취 구간 상강에는 다리가 없어 모든 차량과 사람들은 상강을 오가는 특정된 배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라 할가. 차량 몇대와 소소한 동력차들 그리고 약간의 사람들이 오가는 특정 배에 오르는 모습이 시야에 안겨드는데 그 움직이는 속도가 아주 느리여 이곳 상강을 한번 넘나드는데 시간이 꽤나 소요될 것으로 보였다. 지금까지 봉황취 구간 홍군 도강점으로 중앙홍군의 어느 홍군부대가 도강하였는지를 모른다. 어찌하든 ‘좌’경로선의 지배로 움직이는 우리 홍군대오가 홍군 장정길 상강전역이란 이 국민당군의 제4봉쇄선에서 3만여명이란 엄청 희생을 내여 너무나 통분할 뿐이다. 광화포저격전, 신우저격전, 각산포저격전은 물론 봉화취 홍군 도강점을 비롯한 거구(渠口), 대평(大坪), 병산도(屏山岛) 홍군 도강점도 례외일 수가 없지 않는가. 상강에 너무나 심취됨은 상강이란 이 강이 이곳 흥안현에서 발원하여 광서 최북단을 흐르다가 호남성의 최대 하류로 되여 나중에 악양시 경내에서 동정호에 흘러들기까지 장장 840여키로메터라는 데도 있겠지만 주되는 흥미는 상강을 보다 리해함으로써 홍군 장정길 상강전역에 대한 전방위적 리해를 보다 깊이하자는 데 있었다. 그래서 상강을 보면 상강전역을 깊이 떠올리게 되고 상강을 보면 중앙홍군대오, 그 대오 속의 무정과 양림을 더더욱 떠올리게 되는 것이리라. 2 전주현 경내 봉황취 홍군 도강점을 지난 택시는 303성도(省道)에서 점차 322성도로 달림길을 바꾸더니 관양현 경내 신우저격전 현지를 바라고 달리고 달린다. 이 구간 길은 6월 8일 오후 현지답사길에서 가장 먼 길로서 달리고 달리여도 답사의 목표가 쉬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죽하면 지력장애로 철부지에 지나지 않는 아들애가 “야, 멀기도 멀다!”고 할가. 어느덧 택시는 그닥 높지 않은 구릉지대를 넘나 싶더니 미끄러지듯 경사도가 느린 내리막길에 들어선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던지 저 앞 큰길 오른쪽가에 집채 같은 커다란 건물체가 보인다. 목적지에 이른 것 같더니 건물체 부근 큰길가에 이르러 택시는 오른쪽 넓은 공지로 떨어진다. 과연 우리가 바라는 신우(新圩)저격전 현지요, 주해정(酒海井) 홍군렬사기념비가 일어선 구간이였다. 관양현 서북부 도로가에 위치한, 신우저격전 현지에 새로 일어선 웅장한 홍군렬사묘. 택시에서 내리자 커다란 건물체로 보이던 건물은 하나의 웅장한 홍군렬사묘였다. 홍군렬사묘는 붉은 오각별이 박힌 홍군모를 떠이고 우뚝 일어섰는데 그 정면에는 검은 판에 붉은 글씨로 된 ‘홍군렬사 영생불멸’(红军烈士永垂不朽)이란 중문 여덟자가 씌여져 숙연한 기분 속으로 이끈다. 내가 홍군렬사묘에 여념없을 때 택시운전사가 다가왔다. “이 홍군렬사묘는 근래 새로 일떠선 거구요. 원 홍군렬사기념비는 저쪽에 있어요” 택시운전사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홍군렬사묘 앞 넓은 공지를 이룬 안팎 한켠에 세워진 지도 오래여 검실검실한 ‘홍군렬사기념비’가 보였다. 보매 신우저격전에서 희생된 홍군렬사들을 기리는 기념비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홍군렬사기념비 앞에는 제사대가 마련되여 제사를 지낸 지 얼마 되지 않는 흔적이 그대로 나타났다. 원 홍군렬사기념비를 배알한 후 다시 새로 일어선 홍군렬사묘로 돌아왔다. 선전란을 이룬 홍군렬사묘 앞 전망도를 보니 홍군렬사묘 주위와 렬사묘 앞 넓은 공지는 엄청 큰 규모로 일떠설 전망이였다. 하다면 이곳 관양현에서 어이하여 전망이 엄청 밝은 홍군렬사묘 군체를 건설하고 있을가? 이를 알자면 그제날 상강전역 신우저격전의 자초지종을 개략적으로나마 알고 지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3 신우는 광서 관양현(灌阳县) 서북부에 위치한 고장으로서 남으로 관양현성과 15키로메터 떨어져 있다. 상강 도하점과의 거리는 30~40키로메터로 헤아려진다. 관양에서 전주(全州)로 통하는 도로가 신우를 지나는데 홍군이 거치게 되는 서진로선(西进路线)의 최단거리인 대교촌 고령두(大桥村古岭头)와의 거리는 5키로메터 정도로 나타난다. 신우 이북으로부터 상강가까지는 모두 평탄한 지구라지만 신우와 그 이남 지대의 마도교(马渡桥)까지 10키로메터 되는 도로 량측은 구릉지대이고 초목이 무성하여 저격지대로서는 제격이였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홍군 서진로 저지를 막고 북상하는 관양현성 쪽의 적들을 물리치고저 홍3군단 제5사에 명령하여 마교도를 지키면서 적들을 신우 이남으로 막아내도록 하였다. 홍3군단 제5사 사장 리천우(李天佑)와 정위 종적병(钟赤兵)은 14퇀 15퇀 그리고 무정이 지휘하는 군위포병영 도합 3900여명을 이끌고 11월 27일 오후 4시 쯤에 계림군 먼저 신우에 나타났다. 신우와 그 남쪽 도로 량켠 산지대는 신속히 홍군의 점령지로 되였다. 잇달아 계림군 정찰련과의 조우전도 벌어지고 신우 쪽에 투입된 국민당 계림군은 7개 퇀 병력으로 알려졌다. 계림군의 주공부대는 계림군 제15군 44사로 나타났다. 신우저격전 현지에서 그닥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신우저격전진렬관 앞에서도 스치고 지났지만 이미 신우와 그 일대에 나선 홍3군단 제14퇀과 제15퇀은 관련 진지에 이르러 신속히 공사를 수축하면서 싸울 준비를 다그쳤다. 아군의 앞은 전주 쪽에서 관양(灌阳)으로 이어진 도로여서 적들이 상강 대안에 접근하자면 꼭 이 길을 거쳐야 했다. 도로 량켠은 구릉지대이고 수풀이 무성하여 매복하기가 좋았다. 홍14퇀은 좌익에 매복하고 홍15퇀이 우익에 매복하였다. 작전포치를 끝낸 아군은 정찰병을 파견하니 광서군 제7군 2개 사가 아군과 약 20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아군은 3~4일 간을 견지하면서 적군의 진공을 막아내야 하였다. 이럴 때 진지매복중인 홍 14퇀과 15퇀이 사수장으로부터 무정이 이끄는 군위포병영이 함께 싸우게 된다는 희소식을 알리였고 2개 퇀의 장병들은 적들을 물리칠 신심이 보다 굳어졌다. 적들은 도로를 따라 신우(新圩)를 바라고 달려들었다. 적들이 매복권 내에 들어서자 아군은 일제히 몰사격을 퍼부었고 서로간의 맹렬한 사격과 포격 연기로 적아전선마저 가려보기 어려웠다. 홍15군 제1영 장병들이 진지의 제일 앞에서 치렬한 싸움을 벌리면서 달려드는 적 1개 영의 진공을 물리쳤다. 옹근 영, 옹근 퇀의 적들이 아군의 진지 앞에 나타나자 조선인 무정이 지휘하는 군위포병영의 대포와 박격포가 포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포탄의 포격소리, 수류탄 작렬소리가 적진을 여지없이 들부셨다. 적들도 만만치가 않아 적기까지 무시로 폭격을 들이댔다. 4 적아간의 일대 격렬한 싸움이였다. 혼비백산한 적들은 무리로 쓰러지고 사상이 막심하여 내 꼴 봐라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아군의 보병들은 이때라고 보총, 기관총 소사를 들이대여 적들을 쓸어눕히였다. 첫날 전투에서 광서군 제7군 2개 사의 적들은 거듭 진공을 들이대다가 거듭 격퇴당하였다. 아군 진지 앞은 온통 적들의 시체로 덮였다. 아군도 극심한 희생을 내였다. 적아간의 싸움이 얼마나 가렬처절하였는가는 신우저격전 현지의 홍군렬사묘와 얼마 떨어진 관양현성 쪽 신우저격전진렬관 ‘홍군렬사영명록’(英名录)에서도 잘 알려진다. 신우저격전진렬관 구내는 역시 도로가이고 상강전역 첫 총성 석비, 신우저격전을 형상화한 군체 돌조각상, 신우저격전진렬관 등으로 구성되여 있다. 진렬관 입구 왼쪽가에는 ‘중국로농홍군 만세’ 글발이 새겨져 인상적인데 크지 않은 진렬관 내에는 신우저격전을 알리는 여러 사진과 문자설명, 실물들과 더불어 ‘홍군렬사영명록’을 전문 배치하여 보다 깊은 인상을 안겨준다. 영명록에 나타나는 하나하나의 홍군장병들 희생자 이름이 신우저격전 가렬처절함에 대한 가장 어울리는 대답이라고 보아진다. 신우저격전진렬관 구내 홍군의 전투모습을 형상화한 군체 돌조각상 신우저격전진렬관 내 홍군렬사영명록을 보면 홍6군단 홍군 희생자들도 일부 보이지만 그 거개가 홍3군단 홍군 희생자들로 밝혀져 있다. 11월 30일 오후 3시에 홍3군단 제6사 18퇀이 신우저격전 진지를 바꾸어 나섰다지만 그 때는 이미 제5사 참모장, 14퇀 퇀장, 부퇀장, 참모장, 정치부주임이 희생되고 15퇀 퇀장, 정위와 14퇀 정위가 중상을 입고 영 이하 간부 대부분이 희생되였었다. 신우저격전에 뛰여들 때 제5사는 3,000여명이였지만 신우저격전 진지를 물러설 때는 부상병들까지 하여 1000명을 웃돌 뿐이였다. 밤낮 3일 간의 격전에서 홍3군단 제5사 홍 14퇀과 15퇀은 도합 2000여명의 상망을 내였으니 그 손실은 막심하였다. 진지를 바꾸어 나선 홍6사 제18퇀의 손실도 극심한 형편이였다. 무정이 이끄는 군위포병영의 사상에 대해서는 알려지는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부부는 신우저격전진렬관을 돌아보면서 마음이 더없이 무겁기만 하였다. 밖에 나와서 신우저격전 홍군장병 군체 조각상이며 신우저격전 첫 총성 석비며를 다시다시 답사하면서도 마음은 개운하지가 못하다. ‘좌’경로선 지배하의 중앙홍군은 전체 상강전역에서 신우저격전의 희생을 망라하여 도합 3만여명의 손실을 내였으니 그지없이 통분하기만 하다. 신우저격전진렬관 구내 신우저격전 첫 총성 안내비  /이상 사진 2017년 6월 8일 현지촬영 그 때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하여보았다. 만약 상강전역에서의 첫 총성으로 되는 신우저격전에 무정이 지휘한 군위포병영이 참가하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가. 이것이 사실이였다면 신우저격전에 나선 홍3군단 홍5사의 손실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판국이였을 것이다. 그러면 무정과 군위포병영이 신우저격전에서 불멸의 위훈을 세웠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 아닐가. 무정, 중국로농홍군의 이 고급장령이 광서 흥안현성의 상강전역기념관에 한장의 사진으로 올려짐은 이같은 결과에 기인된다. 그 한장의 사진은 무정이란 이 국제주의 전사를 중국혁명사의 하나의 거룩한 기념비로 떠오르게 하였으니 사람들은 어제도 오늘도 상강전역 여러 현지와 상강전역기념관을 찾고 또 찾는다. 그럴 때면 무정의 사진은 조선인 국제주의 전사라고 알리고 또 알린다. 2017년 6월 13일 광서 계림에서 길림신문
556    [겨레렬사비21]상강전역기념관서 떠오른 무정장군(2) 댓글:  조회:1181  추천:0  2017-07-01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21) □ 리 함 1 광서 흥안현성 ‘상강전역기념관’에서 무정장군 전시사진을 찾아냈다면 윤탕회 관장으로부터 ‘홍군장정 상강전역돌파 기념 공원’ 안내서를 제공받은 것도 성과라면 성과라 하겠다. 양림평전, 무정평전을 집필, 출판하면서 전문가 못지 않게 상강전역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관련 자료를 수집하면서 폭넓게 연구하였다지만 필경은 자료연구였지 현지 물정에 대해서는 깜깜이였다. 그런 필자에게 상강전역 안내서는 가물에 단비처럼 더없이 귀중한 보물이였다. 안내서에는 상강전역을 내용으로 하는 홍색관광지가 자상히 밝혀져 있었다. 2017년 6월 8일 오전 상강전역기념관을 답사하고 현성의 한 음식점에서 대강 식사한 후 일가 셋은 택시 한대를 잡았다. 워낙 이곳 현성의 상강전역기념관을 답사하고 그 날로 계림으로 돌아서기로 한 걸음이여서 아무 준비도 없었지만 오후 시간도 있고 하니 그대로 돌아설 수가 없었다. 택시운전사와 상강전역 안내서를 내밀면서 오후 시간대에 광화포(光华铺)저격전과 신우(新圩)저격전 등 주요한 곳을 돌아볼 수 있겠는가고 물었다. 우리 겨레 무정, 양림 발자취 어린 력사의 고장이여서 꼬옥 가보아야 했다. 다행히 운전사는 40대 정도라지만 언젠가 상강전역 참가자인 어느 장군의 후손들을 모시고 다닌 적이 있어서 알겠다며 선뜻 대답을 주었다. 다음날로 미루기로 한 상강전역 현지답사는 이같이 즉각 현실로 펼쳐졌다. 흥안현 계수진 광화포 구간 큰길가에 일떠선 광화포저격전 옛터비 오후 상강전역 현지답사길에서 처음 찾은 곳은 계수저격전으로도 불리우는 광화포저격전 현지였다. 광화포저격전은 각산포(脚山铺)저격전과 신우저격전과 더불어 상강전역의 3대 저격전의 하나로서 흥안현성에서 북으로 15키로메터 떨어진 상강 서안(西岸)과 성도(省道) 303 큰길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1934년 11월 29일, 중앙홍군의 홍3군단 제4사는 명령을 받고 광화포에 대기하다가 계림 방향에서 달려드는 우세한 계림계군벌군대와 2박3일이나 가렬처절한 혈전을 벌리면서 4사 부대만 400여명, 홍3군단 전체 1,000여명의 희생자를 낸 피눈물의 력사현지였다. 눈물과 감동 없이는 마주설 수 없는, 계림계군벌군대의 진공을 물리치면서 우리 중앙종대와 홍군후속부대의 계수에서의 안전한 도강을 담보하기 위한 력사의 현지였다. 흥안현 계수진 광화포 구간 큰길가에 위치한 광화포저격전 렬사묘 우리 부부는 먼저 북행 왼쪽 큰길가 낮다란 산기슭에 자리한 ‘장정상강지전 광화포저격전 홍군렬사지묘’(长征湘江之战光华铺阻击战红军烈士之墓)를 찾았다. 홍군렬사묘에는 홍3군단 제4사 10퇀의 전후임 퇀장인 심술청(深述清)과 두종미(杜宗美)를 비롯한 18명 홍군렬사가 묻히였다고 한다. 기실 이들 18명 홍군렬사들은 광화포저격전에서 희생된 무수한 홍군렬사들 중의 극히 적은 일부분이였다. 홍군렬사묘 좌우켠 석비에는 홍군장령들인 양성무(杨成武), 장진(张震), 장애평(张爱萍) 등 장군들의 제사가 새겨져 이곳 렬사묘에 범상치 않은 이야기가 깃들어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2 홍군렬사묘 아래켠에는 ‘상강전역 광화포저격전 안내’ 석비가 서있고 홍군렬사묘 구간 큰길 오른쪽가에는 대형 ‘광화포저격전 옛터’비가 붉은기 물결을 이루며 길다랗게 펼쳐져 있었다. 관련 자료를 보면 2012년 8월 10일, 흥안현에서는 수백명 항전로병들과 가족, 사회 각계 인사들이 참가한 속에 이곳에 모여 ‘광화포저격전 옛터’ 제막의식을 가지였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의 일이였다. 이날 영상을 보면 붉은 오각별 박힌 홍군모자에 홍군복장 차림의 수십명 학생대오가 유난히도 활약적이였다. 택시운전사는 이곳 모두가 광화포저격전 현지라면서 광화포저격전 홍3군단 지휘부는 이곳에서 남으로 5키로메터 되는 계수진(界首镇) 상강가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로 가보자고 하니 택시는 잠간사이에 우리를 홍3군단 지휘부 옛터로 안내하였다. 어딜 가나 신속한 이동이여서 필자는 택시를 무척 선호하는 편이다. 표면으로 보아 택시놀이는 엄청 랑비 같지만 며칠 뛰여야 할 현지답사를 반날이나 하루 사이면 와닥닥 해제끼니 기실은 경제적이였다. 6월 8일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택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셋을 홍3군단 지휘부로 실어다 주었으니 계수진 옛 거리 어구 상강가에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되는 상강전역 옛터 ‘홍군당’(红军堂) 안내비가 선참 맞아주고 있었다. 다음은 철란간을 두른 입구 내 홍군지휘부 옛터 사당-삼관당(三官堂)이 또 우릴 불렀으니 마음은 훨훨 상강전역 그 나날에로 나래친다. 계수진 상강가 홍군지휘부 옛 사당 이곳, 홍군당으로 알려지는 이곳이 홍3군단 군단장 팽덕회를 중심으로 하는 홍군지휘부 자리였다. 이곳, 홍군당으로 알려지는 이곳이 당년 당중앙과 중앙군위 수장들을 모신 중앙종대가 상강을 돌파한 력사적인 자리였다. 그러면 또 어떤가. 계수 이곳 상강가는 중앙종대의 홍군장령들인 우리 겨레 무정과 양림이 중앙종대를 옹위하여 도강한 력사적인 자리가 아니던가. 이곳은 중앙종대의 상강돌파를 위한 광화포저격전 홍군지휘부 자리여서 팽덕회 군단장이 직접 광화포저격전을 지휘하는 안전지대 같지만 그런 것도 아니였다. 중앙홍군의 대오에서 이곳 계수나루터에 선참 도착한 대오는 홍1군단 제2사 4퇀 부대였다. 1934년 11월 27일 오후, 이들 부대가 명령을 받고 전주 경내의 석당(石塘)을 떠나 강행군으로 계수나루터에 이르니 계림군의 저애가 없었기에 순조로이 계수나루터를 점령하고 60리 상강 량안을 통제할 수가 있었다. 그때 숱한 짐과 짐군들을 거느린 연고로 행동이 굼뜰 수 밖에 없은 중앙종대 제1종대와 제2종대는 계암(桂岸)지구에서 산간소로를 따라 행동하다 보니 그로부터 4일 후에야 상강가에 이를 수 있었다. 3 그때 홍3군단은 5리 밖 광화포에 진지를 구축하였다지만 11월 30일 이날 자정이 지나 계림군이 홍3군단의 배후를 돌아 계수나루터를 탈환하려고 서둘렀다. 광화포를 지켜선 홍3군단 4사 10퇀에서 적들의 낌새를 알아채고 산하 3영 영장 장진이 지휘하는 대오를 보내 적들을 막아내게 하였다. 그러나 때가 이미 늦어 3영 장병들이 결사적으로 싸웠다지만 부분 적들은 종내 홍군방선을 돌파하여 계수나루터를 점령하고 말았다. 이같이 위기일발의 관두에 홍10퇀 퇀장 심술청은 친히 제1영과 제2영을 지휘하여 계수나루터 탈환 작전을 벌리였다. 수차의 치렬한 전투 끝에 계수나루터는 다시 홍군의 수중으로 돌아왔지만 격전 가운데서 심술청 퇀장과 후임 대리퇀장으로 나선 두종미 등이 희생된 결과를 가져왔다. 관련 연구자료에 따르면 상강전역 후 중앙종대 제1종대 제4제대 즉 군위간부퇀 제2임 참모장으로 나선 양림도 이곳 계수나루터 도강작전에서 뛰여난 업적을 쌓은 것으로 알려진다. 계수진 상강가 홍군지휘부 내 정면 모습 장정 가운데서 군위간부퇀은 ‘공관’(公馆) 또는 ‘땅크’(坦克)라는 대호를 가지고 있었다. 전 퇀은 모두 청일색의 공산당원에 특수장비로 무장한, 1,000여명의 대오를 가진 특수전투단위로서 당중앙과 중앙군위의 절대적인 안전을 보호하는 사명을 짊어졌다. 장정 초기에 모택동은 늘 군위간부퇀과 같이 행동하였기에 양림 등은 늘 모택동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런 군위간부퇀이 계수 부근 상강가에 이르렀을 때는 11월 29일부터 상강 량안의 국민당계렬 계림군이 우세한 병력으로 홍군대오에 대한 진공을 들이대면서 적기가 상강에 부설한 홍군부교를 련속 폭격하였기에 군위간부퇀도 홍3군단 등 홍군대오와 더불어 계수나루터 결사적인 사수에 뛰여들었다. 양림은 어떠했던가. 황포군관학교동창회에서 꾸리는 《황포잡지》 제1기에는 〈장정중의 조선적 홍군장령 필사제〉란 한편의 양림전기가 실려있는데 장정 초기의 양림, 더우기 국민당군의 제4봉쇄선-상강전역을 돌파할 때의 양림을 소개하고 있어 무척이나 주의를 끈다. 장정 초기 홍군간부퇀은 홍군총부로 구성된 제1야전종대의 지휘를 받았다. 국민당군대의 봉쇄선, 더우기 제4봉쇄선 때 필사제는 퇀장 진갱, 정치위원 송임궁을 협조하여 간부퇀의 영용한 분전을 지휘하여 경위와 엄호 과업을 비교적 잘 완수하였다. 양림 소속 군위간부퇀이 상강전역에 뛰여들었다는 자료근거로 되고 있다. 다른 여러편의 자료들에서는 양림이 앞장에서 총칼과 수류탄으로 적들과 결사적인 박투를 벌리였다면서 간부퇀은 여러날 격전 끝에 적군의 수차례 진공을 물리치며 중공중앙과 중앙군위 지도기관의 안전한 상강도하를 엄호하였다고 쓰고 있다. 4 6월 8일 이날 오후 한때, 우리 일가 셋은 상강전역의 3대 저격전중 가장 특수한 저격전으로 되는 계수나루터에 서있었다. 중앙종대가 도강한 계수나루터 자리여서 우린 이곳에서 재건된 삼관당 홍군지휘부를 보았고 그제날 홍1군단 정치위원인 섭영진의 제사로 된 ‘홍군장정 상강돌파’(红军长征突破湘江)란 제사비를 보았다. 지휘부 실내에는 중국로농홍군의 중심기발과 함께 좌우켠에 작은 기발 두폭이 드리운 속에 지휘부를 상징하는 책걸상이 놓이고 보다 떨어진 좌우켠 벽에는 당년 중앙홍군이 쓰던 총칼 복제품과 초모자, 풀비옷 복제품들이 전시되여 숭엄한 기분으로 이끌었다. 력사를 보면 1934년 11월 25일부터 12월 1일까지 광서 땅에 나타난 중앙홍군은 전주(全州) 이남의 상강 동안(湘江东岸)에서 적들과의 피어린 혈전에 나섰다. 그것도 절대적으로 우세한 근 3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병력이니 그 전역의 어려움은 일구난설이다. 우리 홍군장병들은 적들과 생사결단을 벌리며 마침내 적들의 삼엄한 제4봉쇄선을 돌파하였으나 그 대가는 참중이란 말로도 표현하기가 어렵다. 상강을 강행도하하고 보니 중앙홍군과 군위 2개 종대는 장정 출발 시의 8.6만여명으로부터 3만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제4봉쇄선인 상강전역에서의 손실만도 3만 8000여명. 중앙종대 제1종대와 군위 제2종대 손실도 만만치가 않았다. 양림-무정 소속 제1종대만 보아도 장정 출발 시의 4600여명으로부터 2000여명으로 줄었으니 절반 정도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섭영진의 제사로 된 상강가 홍군장정 상강돌파 석비에서  /이상 사진 2017년 6월 8일 현지촬영 상강전역, 이렇듯 상강전역은 그때까지 당과 홍군을 지배한 박고(博古) 등 ‘좌’경 지도자들의 도망주의(逃跳主义)로선이 조성한 엄중한 악과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중앙홍군의 상강전역은 장개석이 중앙홍군을 상강 이동에서 섬멸하려던 망녕된 기도를 짓부시고 전략상의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도 없다. 상강전역의 참중한 손실은 또 ‘좌’경로선의 엄중한 위해를 철저히 폭로하여 중공중앙과 중앙군위, 광범한 홍군장병들로 하여금 제5차 반‘포위토벌’ 이래의 군사로선과 군사지휘에 대해 심각한 반성을 하게 하면서 모택동의 등장을 가속화하는 위대한 전환의 계기로 력사에 남게 되였다. 잇달아 찾은 광화포저격전 현지와 계수 상강가 지휘부 옛터, 중앙종대의 상강 도하 계수나루터는 홍군장정길 상강전역을 눈으로, 마음으로 깊이깊이 리해하는 현지학습장이였다. 상강전역에서의 무정은 실로 양림과 더불어 불후의 위훈을 세운 우리 겨레 홍군장령으로 마음에 와닿는다. 2017년 6월 12일 광서 계림에서 길림신문
555    [겨레렬사비20] 상강전역기념관서 떠오른 무정장군(1) 댓글:  조회:1149  추천:0  2017-07-01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20) □ 리 함 1 지난해 6월, 상해에서 평전-《무정장군》 출간식을 가지였지만 마음 한구석은 내내 평온하지가 못하다. 홍군 장정길 상강전역 현지를 답사하지 못하여 상강전역에서의 무정을 실감나게 그리지 못한 책임감 때문이다. 이제 《길림신문》의 특별기획 련재-‘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에서도 이 부분을 비중 있게 다루지 못하면 그 책임감은 더욱 커질 것이다.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던 중 가족려행으로 광서 계림에 갔다가 상강전역 력사현지 등을 답사하기로 맘먹었다. 드디여 2017년 5월 31일 밤 광서 계림 땅을 밟게 되고 6월 8일에 일가 셋이 상강전역(湘江战役)의 력사현지를 돌아볼 기회를 가지였다. 상강전역의 력사현지에서도 처음 찾은 것은 계림에서 북으로 50여키로메터 상거한 흥안(兴安)현성. 흥안현성에서 서남으로 1키로메터 가면 그닥 높지 않은 사자산(狮子山)이 있고 사자산에는 점유면적이 8만평방메터에 달하는 홍군장정 상강돌파 렬사기념비원(烈士纪念碑园)-상강전역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기념비원은 대형조각군체(大型群雕), 상강전역기념비, 기념관들로 구성되여 이곳을 찾는 이들을 숙연한 기분 속으로 끌고 간다.  흥안현성 서남으로 1키로메터 거리에 위치한 상강전역기념관 우린 선참 상강전역기념관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마침 정오 직전이라 상강전역기념관은 개관중이였다. 기념관에 들어서니 ‘상강ㆍ1934’라고 내리쓴 붉은 글발이 정면으로 안기면서 력사의 시침을 현실의 2017년에서 대번에 83년 전 1934년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래 상강전역은 1934년 11월 25일부터 12월 3일까지의 일이였지!’ 사색의 나래는 력사의 언덕을 넘어 1934년으로 줄달음친다. 그 속에 홍군장정길 상강전역에서 불후의 위훈을 세운 우리 겨레 무정이 걸어나오고 양림이 걸어나온다. 그러면서도 가슴은 두근두근 뛰기만 한다. 만일 남녘 땅 멀리멀리 계림으로 달려왔어도, 상강전역 현지로 달려왔어도 무정이 보이지 않고 양림이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가. 상상하기도 싫어난다. “무정과 양림 중 누군가는 꼭 나타날 것이오!” 나는 안해와 조용히 말하면서 기념관의 하나하나에 눈을 박아야 한다고 동을 달았다. 아니나 다를가, 우리의 시선에는 ‘세번째 봉쇄선 돌파’ 전시가 펼쳐지더니 뒤이어 ‘군위종대 상강 강행도하(军委纵队抢渡湘江)’ 전시가 나타나면서 여러 인물 사진들 속에는 엽검영 등 군위종대 주요인물들과 더불어 중앙군위 간부퇀 퇀장 진갱, 정치위원 송임궁의 사진이 보인다. 그들 인물들 속에 말을 탄 무정장군의 사진도 어김없이 섞이여 있다. “그러면 그렇지!” 나와 안해는 너무도 기뻐 현장사진이랑 기념사진이랑 찍고 찍으며 이윽토록 떠날 줄 몰랐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이 사진 한장 바라고 가족려행 명의로 교동반도에서 광서 최북단 가까이로 달려왔더니 현실은 그 기대를 꺾어버리지 않았다. 사진 옆에 밝혀진 ‘중앙종대 제3제대 사령원 겸 정치위원’ 문자는 이 마음을 보다 둥둥 뜨게 한다. 2 알고 보면 당내 ‘좌’경로선 지도자들의 군사상의 모험주의와 보수주의로 하여 1933년 9월부터 시작된 제5차 반포위토벌전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홍군은 엄중한 좌절을 당하고 중앙혁명근거지 대부분을 잃는 비극을 가져왔다. 이 해 10월 11일,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별수 없이 중앙혁명근거지를 포기하기로 하고 홍군이동 중대한 명령 반포와 더불어 제5호 명령을 내리였다. 제5호 명령에 따르면 군위와 홍군 총사령부, 총정치부 및 직속부대를 제1야전종대로 구성하여 주력홍군과 함께 행동하며 엽검영이 사령원 겸 정치위원을 맡게 되며 제1종대 산하에 4개 제대를 두고 군위 제1종대로 부른다, 박고-장문천-주은래-모택동-주덕-왕가상-리덕 등은 제1종대를 따라 행동한다. 중공중앙 기관과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정부기관 등 단위들로 제2종대를 구성하며 리유한(李维汉)이 사령원 겸 정치위원을 맡는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제5호 명령에 좇아 군위와 홍군 총사령부, 총정치부 및 직속부대들인 간부퇀, 여러 홍군학교들은 군위 제1야전종대로 정식 편성되고 군위종대가 군위 제2야전종대로 되였다. 제1야전종대 사령원 겸 정치위원은 엽검영, 참모장은 종위검(钟伟剑), 정치부주임은 왕수도(王首道)가 맡았다. 상강전역기념관 내 무정장군 사진 전시 부분 제1야전종대 산하 4개 제대(4个梯队)를 보면 제1제대는 군위총부 제1, 제2, 제3국과 무선전 3대, 전화1패, 통신대, 경위련, 공병련, 운수2패로 구성되고 제2제대는 군위총부 제4, 제5국과 총정치처, 경위영, 홍군총정치부, 의무소, 운수1패로 구성되였다. 제3제대는 군위공병영, 포병영, 운수1대대, 부속병원 등 기술병종으로 구성되고 책임자는 무정, 제4제대는 간부퇀, 의무소, 운수1패로 구성. 책임자는 진갱(陈赓)과 송임궁(宋任穷). 그중 간부퇀은 홍군대학, 공략(公略)보병학교, 팽양(彭杨)보병학교, 특과학교로 합병하여 구성, 진갱을 퇀장으로, 송임궁을 정치위원으로, 필사제(毕士悌, 즉 양림)를 제2임 참모장으로 하고 산하에 4개영과 상간대(上级干部队)를 두었다. 이로부터 보면 무정은 1934년 10월 11일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제5호 명령에 따라 군위 제1야전종대 제3제대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정식 부임하면서 장정길에 오르게 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때 그 현실이 지금 우리 일가 셋 앞에 펼쳐지면서 우리 겨레 무정을 둥둥 띄워주고 있었다. 3 하다면 군위종대로 불리우는 군위 제1종대와 제2종대의 실정은 어떠했던가. 장정 시작 그 시절 제2종대 사령원 겸 정위인 리유한의 회고를 보기로 하자. “중앙의 지시에 따라 중앙기관을 2개 종대로 편성하였다. 제1종대를 ‘홍성종대’라고도 하는데 수뇌기관이고 총지휘부였다. 박고, 락보(洛甫), 주은래, 모택동, 주덕, 왕가상, 리덕과 기타 책임동지들이 모두 이 종대에 속하였다. 등영초, 강극청 그리고 무선(电台), 간부퇀도 이 종대 소속이였다. 간부퇀의 전신은 홍군대학이고 학원들은 모두가 부대의 련과 패급 간부들로서 그들 모두 수차의 전투를 거치였다. 간부퇀은 인원이 비록 많지 않았으나 전투력은 강해 실제상 수뇌기관의 경위부대였다. …제2종대는 ‘홍장종대’라고도 하는데 당중앙기관, 정부기관, 후근부대, 위생부문, 총공회, 청년단, 담가대 등으로 구성되였다. 약 만여명이였다. 중앙은 나를 제2종대 사령원 겸 정위로 임명하고 등발을 부사령원 겸 부정위로, 장종순을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사자산에 일어선 홍군장정 상강돌파 렬사기념비원 리유한의 회고에서 언급한 그 시절 군위 제2종대 참모장 장종손(张宗逊)도 회고자료를 남기였다. “1934년 10월 홍1방면군은 중앙근거지를 떠났다. 나는 홍군대학에서 중앙종대(즉 제2야전종대, 대호는 홍장종대) 참모장으로 전근되였다. 중앙종대 사령원은 리유한(즉 라맥, 그때 중공중앙 조직부 부장), 정치위원은 등발(그때 중공중앙 보위부 부장)이다. 군위종대(즉 제1야전종대, 대호는 홍성종대)는 엽검영이 사령원을 맡았다. 중앙종대는 군위종대보다 방대하여 당중앙기관, 중앙국가기관 외에도 방대한 운수대가 있어 서류, 도서와 인쇄공장 설비, 돈을 찍는 기계, 자료, 종이와 각종 설비 등 운수를 책임졌다. 중앙종대의 전투부대는 장경무가 사장을 맡은 교도사와 요철이 퇀장을 맡은 중앙보위퇀이였다.” 리유한과 장종손의 회고자료를 보면 장정을 앞두고 편성된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산하 2개종대의 내막이 쭈욱 펼쳐진다. 리유한과 장종손의 회고자료에서 빛다른 점 하나는 군위 제1종대를 홍성종대라고 부르고 제2종대를 홍장종대라고 불렀다는 회고이다. 중국당대출판사에서 출판한 《엽검영전》에 따르면 중앙홍군의 대규모 전략전이를 두고 군사비밀을 엄격히 지키기 위하여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군위 제1종대 대호(代号)를 홍성종대(红星纵队)라 하고 군위 제2종대 대호를 홍장종대(红章纵队)라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4 이쯤하면 광서 흥안현성의 ‘상강전역기념관’에서 왜 기념관의 한 구간을 전문 ‘군위종대 상강 강행도하’로 꾸미고 무정을 제3제대 사령원 겸 정위로 밝혔는가가 잘 알려진다. 군위종대는 다름아닌 제1종대와 제2종대로 구성되고 무정은 제1종대 제3제대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양림은 제1종대 제4제대를 이룬 군위간부퇀의 제2임 참모장으로 장정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상강전역기념관’을 현지답사하면서 유감도 없지 않다. ‘군위종대 상강 강행도하’ 전시부분에서 양림의 사진과 설명이 빠져있었다. 이것이 심히 마음에 걸린다. 기념관 현시답사 나중에 기념관 입구 접수실을 찾으니 접수실에는 마침 남자일군 둘과 녀자일군 하나가 있었다. 그들과 동북에서 왔고, 조선족 력사 연구일군이며, 무정과 양림 평전 조선문 집필자라고 하니 그들은 반가이 맞아주었다. 이때라고 ‘군위종대 상강 강행도하’ 부분에 양림이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하면서 건의가 있다고 하니 녀자일군은 저 분이 기념관 관장이니 관장과 직접 이야기하라고 한다. 남자 둘중 한분인 상강전역기념관 관장은 윤탕회(尹汤怀)라고 불렀다. 그는 나의 유감을 들어주더니 기념관 측에서는 양림을 모른다고 하였다. “그럴 수도 있지요. 중앙혁명근거지 시절 양림은 필사제라고 불렀고 홍군의 고급장령으로서 홍1군단 참모장이였습니다” “홍1군단 참모장은 좌권인데요.” “양림은 좌권 먼저 참모장이였지요.” “그래요? 그 후로는요?” “먼저 홍군학교 군사총교관으로 있다가 준의회의 이후 군위간부퇀 참모장으로 등장합니다.”   무정장군 사진 전시 앞에서 필자    /이상 사진 2017년 6월 8일 현지촬영 이야기 중심이 두드러지니 윤탕회 관장은 모르고 있었다면서 양림에 대한 소개를 바랐다. 내가 돌아가서 양림 전기 부분과 양림 사진 등을 보내드리겠다고 하자 관장이란 분은 아주 기뻐하면서 잘 연구하여 보겠다고 흔쾌히 답을 준다. 그러면서도 상강전역에서 양림은 물론 무정 소속 중앙종대의 구체적인 역할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럴 수 밖에 없나 봅니다. 장정 도중의 제1종대와 제2종대도 그러하지만 특히 무정과 양림 소속 제1종대에는 당중앙과 중앙군위 수뇌기관과 총지휘부가 모두 속해있고 간부퇀은 당중앙과 중앙군위를 직접 보호하는 특수과업을 지니여 많은 부분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요.” “건 사실이지요.” “실제 알고 보면 상강전역에서 무정과 양림은 국제주의전사로서 그 표현이 두드러졌습니다.” “관련 자료를 보여줄 수 있어요?” “자료가 많지 못하지만 관건적인 자료는 제시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윤탕회 관장은 명함장을 지니지 않았다면서 기념관의 전문용지에 련계주소와 련계전화 그리고 QQ까지 적어주면서 련계를 바란다. 그제서야 다소 위안이 들면서 마음이 많이 가벼워진다. 광서 흥안현 ‘상강전역기념관’에서 찾은 무정 사진과 사진설명, 그것은 상강전역의 거대한 기념비로 되여 우리 맘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2017년 6월 12일 광서 계림에서
554    [겨레렬사비19]장세걸 홍14군기념관에 동상으로 모셔져 댓글:  조회:1281  추천:0  2017-06-13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19) ■ 리 함 1     장세걸 자료사진 꼭 남방의 강남에서 살아가는 기분이다. 머나먼 강남땅 남통에서 여고로 달리는 뻐스에서 차창밖을 내다보노라니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황금물결 밀밭들이며 한창 씨털이에 여념없는 누우런 유채들이며 눈꽃처럼 하얗게 피여있는 류달리 커다란 여름 흰 목련들이며 모두가 이 시절 북방에서 볼 수 없는 강남만의 현상들이다. 5월의 강남 진풍경 속에, 강남의 생활 속에 묻혀있다는 착각이 그리도 달콤할 수가 없다.   신나는 도취 속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더니 어느덧 강소 여고시 중심뻐스부가 눈앞에 나타난다. 50여키로메터 거리를 한시간에 달려내니 꿈결에도 그리던 여고 땅이 반기여 준다. 뒤미처 이곳 홍14군 제1사 사장으로 활동했던 장세걸의 발자취 어린 홍14군기념관이 얼싸 품어준다. 드디여 여고란 강남의 품에 다시 안기게 되였으니 들뜬 기분은 둥둥 부풀기만 한다. 그런데 둥둥 기분도 한때라 홍14군기념관 바깥 입구를 지나 기념관 어구에 이르니 한창 기념관 1층 중앙홀 청소에 나선 녀청소공들은 오늘은 월요일이라 기념관은 문을 열지 않는단다. 그 소리가 뢰성벽력으로 되여 온몸을 강타한다. 머얼리 산동 위해서 강소 여고로 달려온 뜨거운 열성이 와그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다. 천길나락에 떨어지는 기분일가, 한참이나 어정쩡한 기분 속에서 헤여나지 못하였다. 멀리멀리서 달려왔어도 방법이 없다는 그녀들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기념관 사람들이 모두 휴식이라는데야. 찰나, 기념관 중앙홀 내에 름름히 일어선 홍14군 17명 장령들 동상군체가 시선에 잡혀온다. 그래 저 17명 장령들 동상군체를 보려고 다시 달려온 내가 아니였던가. 녀청소공들을 보고 중앙홀 내 17명 장령 동상군체만 잠간 보고 돌아서겠다고 청드니 그럼 행동을 빨리하라고 한다. 그러는 녀청소공들이 고맙기만 하다. 홍14군기념관 1층 중앙홀에 모셔진 홍14군 17명 장령들 동상군체. 이중 한 동상이 당년 홍14군 1사 사장 장세걸. 다시 꺼내보지만 강소 여고 땅 홍14군기념관 내 휘영청 넓은 중앙홀에는 홍14군의 장령들을 형상화한 17명 장령들 동상군체가 우람차게 서있다. 저 동상군체들 속에는 1930년에 벌써 홍14군 1사 사장이였던 장세걸도 섞이였으리만 5년 전 처음 이곳을 찾을 때는 미처 주의를 돌리지 못하였었다. 그것이 늘 마음을 허빈다. 그래서 근 2000리 길도 마다하고 홍14군기념관을 다시 찾으니 우리 겨레 장세걸이 어서 오라 손짓하는 듯 싶다. 소중한 기회, 소중한 시간. 나는 홍14군 17명 장령 동상군체 하나하나에 눈길을 박아보았다. 그러나 어떻게 살펴보아도 동상들마다 누구라는 것이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17명 장령 군체의 조각과 위치, 배치로 보아 장세걸도 이들 17명 동상군체 속에 섞이였음은 틀림이 없다. 너무도 자명한 일이렷다. 2 이날은 2017년 5월 22일, 시침은 오전 8시 직전을 가리킨다. 홍14군기념관 1층 중앙홀에 일어선 17명 장령 동상군체는 실명으로 밝혀지지 않았음이 사실로 드러났다. 홍14군기념관을 다시 찾음은 바로 실명이냐, 실명이 아니냐를 알자는 것이니 기념관 내 이모저모를 다시 돌아볼 수 없어도 무방할 것 같았다. 원인은 간단하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이미 홍14군기념관 구석구석을 샅샅이 찾으며 장세걸 관련 전시 모두를 보아냈으니 말이다. 이 기간 해마다 수차례씩 중문 바이두(百度)로 검색해 보아도 전시에서 변화는 알려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10여년 전만 해도 우리 조선족사회는 홍22군 참모장 장세걸이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 장세걸이라는 이름조차도 알지 못하였다. 새 세기에 들어선 후 2003년 가을부터 2년 남짓한 기간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를 중심으로 하는 보도매체에서 중국대륙의 겨레 반일투쟁 유적지 답사를 조직하면서 장세걸이라는 홍군의 고급장령을 찾아냈으니 그것이 처음이였다. 그때를 두고 중앙인민방송국 기자 김성룡씨는 김성룡 저, 최룡수 감수로 된 《불멸의 발자취》(민족출판사, 2005년 11월 출판, 제237페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강소 여고시의 홍14군기념관에 이르러 《중국공산당 조직사 자료》 제2권에는 홍군시절의 다른 한 조선인 군사장령의 이름이 나온다. 중국로농홍군 제22군 군장은 진의였고 참모장은 장세걸이였는데 장세걸은 조선인이라고 밝혀있다. 그러나 조선혁명가 장세걸에 대해서도 더 이상 연구가 없다. 그때까지 조선인 장세걸에 대해 아는 것이 홍22군 참모장이 전부였다. 하기에 김성룡씨는 여기 책에서 “고위장령 장세걸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없는 것이 안타까왔다”고 심경을 터놓았다. 필자도 《불멸의 발자취》를 통해서 조선인 장세걸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였으니 그 후 인터넷에서 여러 해를 두고 꾸준히 장세걸을 찾았으나 아무런 단서도 나서지 않았다. 그래도 맥을 버리지 않았더니 2011년 년말을 앞두고 인터넷에 장세걸은 조선이름으로 김홍묵이고 서울사람이며 홍22군 참모장에 앞서 홍14군 제1사 사장이라는 간단한 략력이 나타났다. 뒤미처 홍군음악가 최음파와 정강산 중대장 진룡학과 더불어 여태 몰랐던, 강소땅과 중앙혁명근거지에서 활동한 장세걸의 자료들이 보물을 이룬다. 가담가담 끊어지기는 하지만 수천자 정도의 인물전기는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3 때는 2012년 1월 4일 밤이려니 온밤 기분이 둥둥 뜨면서 절정을 이룬다. 하루밤 새 잘 모르던 최음파, 진룡학, 장세걸 세 홍군렬사 자료가 마구 쏟아지니 흥분이 절정을 이룰 수 밖에 없나부다. 이튿날과 그 다음날 1월 5일, 1월 6일 밤도 이들 세 홍군렬사 자료 찾기로 밤을 새우다 싶이 했으니 장세걸이 일찍 활동한 강소 여고에 홍14군기념관이 있다는 글도 보인다. 대단한 발견이다. 한시급히 강서 여고로 달려가고 싶지만 대학에서 강의 중이여서 어찌할 수가 없다. 드디여 겨울방학이 닥쳐왔다. 2012년 1월 31일 마침내 절강 소흥-강소 남통 행 쾌속뻐스에 올랐으니 아침 7시 45분에 소흥을 출발한 쾌속뻐스는 330여키로메터 거리를 4시간 반에 축내며 남통중심뻐스부에 들어선다. 남통에서 다시 여고 행 뻐스를 잡으니 50여키로메터 사이가 한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어 여고시내에서 홍14군이란 굉장한 주제공원을 찾아냈으니 널다란 광장 너머로 정문에 큼직한 붉은 오각별을 박은 웅장한 건물이 보이였다. 홍14군기념관 주체건물 보고 또 보아도 광장 너머로 안겨오는 웅장한 건물은 제14군 기념관이 틀림없다. 꿈이 아니였다. 그렇게 찾고 싶던 홍14군 1사 사장 장세걸, 그렇게 찾고 싶던 장세걸 소속 부대가 하나의 거대한 기념관으로 되여 필자 앞에 나타난다. 그 날 나는 기념관 1층 중앙홀에서 홍14군 장병들 립체군상을 찾아보고, 기념관 전시청 한 구간에서 장세걸의 사진과 문자소개도 찾아내면서 엄청 기쁨 속에 빠져들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중앙홀의 17명 립체군상이 홍14군의 장령들로 무어졌음을 알지 못하였다. 이 일을 두고 얼마나 후회하였는지 모른다. 그 후회는 지난해 2016년 《길림신문》에 장정기행 련재를 실으면서 생겨난 일이였다. 장세걸 련재물을 쓰면서 바이두(百度)에서 강소 여고의 홍14군기념관을 검색하니 2012년 1월 31일 그 날 오후 기념관 내 중앙홀에서 보고 사진 찍은 홍14군 장병 립체군상은 홍14군의 쟁쟁한 17명 장령들로 조각된 립체군상이였다. 홍14군 1사 사장인 장세걸도 립체군상 속의 한 조각상으로 섰다는 말이렷다. 이 점을 보아내지 못하였으니 두고두고 후회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2012년 1월 31일, 강서 여고의 홍14군기념관 현지답사는 후회가 있다지만 총체적으로 보면 성공적이였다. 필자는 우선 바이두 등 인터넷 검색에서 얻어낸 장세걸 관련 모든 자료를 홍14군기념관 전시자료들과 홍14군 관련 책자들에서 모두 찾아내는 일대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은 이런 자료들 확인 뿐 아니라 여러 면으로 기성자료를 보다 풍부히 하는 성과를 이룰 수가 있었다. 이름 정도 뿐이던 중국홍군의 고급장령 장세걸 발자취가 쭈욱 이어졌다. 4 그 후도 장세걸 연구는 끊임없었다. 지금까지 알려지는 장세걸(张世杰, 1901-1933)은 홍14군 1사 사장이고 홍22군 참모장으로서 원명은 김홍묵(金洪默)이며 서울사람으로 나타난다. 서울에서도 종로구 수은동 5번지 내 뢰혜붕(汉城授恩洞五番地转 赖慧鹏)으로 또렷이 밝혀진다. 1925년에는 중국 남녘 땅 광주에 자리한 황포군관학교 제4기 생으로 들어가 군사를 배우며 그 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고 전한다. 관련 자료 연구로부터 보면 황포 4기 생 김홍묵은 키가 크고 실팍한 편이며 목소리까지 웅글어 제4기 동기생들한테서 ‘검은 곰’(黑瞎子)으로 통하고 있었다. 1926년 1월, 황포군관학교 제4기를 졸업한 후 김홍묵은 당조직의 지시로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퇀 즉 엽정독립퇀 직속 공병련 중위 부련장 책임을 맡아나섰다. 이 해 5월 이후 위대한 북벌전쟁에서는 중국공산당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는 국민혁명군 제4군 엽정독립퇀이 북벌군의 선견대로 우선 호남으로 진격하면서 북벌전쟁의 서막을 열어제끼자 김홍묵은 북벌군 선견대의 중위 부련장으로 나섰다. 홍14군기념관 넓은 정원에 나붓기는 홍14군 군기  /이상 사진 2017년 5월 22일 현지촬영 1927년 장개석의 상해 ‘4.12’반혁명정변과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의 무한 ‘7.15’ 혁명배반으로 제1차 국공합작이 파렬되고 기세 드높던 북벌전쟁—대혁명도 실패로 돌아갔다. 북벌전쟁에 뛰여든 수백명 겨레 전사의 한 사람으로 무한까지 진출하였던 김홍묵은 국민당반동파의 무자비한 백색공포에서 결연히 벗어나 상해에 가서 중공 한인지부를 찾았고 한인지부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이였다. 1930년 4월 3일, 강소 여고에서 홍14군이 조직되면서 상해의 중앙군위와 중공 강소성위는 조선인 장세걸을 홍14군 제1사 사장 겸 제2퇀 퇀장으로 파견하였다. 장세걸의 강소 땅 출현은 이 같은 연유이지만 2011년 이전까지만도 중문 바이두(百度) 등에서 장세걸을 검색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2년 새해를 잡아 많은 연구자료들이 쏟아진 것은 나름의 연유가 있었다. 홍14군기념관이 2010년 4월 말에 준공되여 2011년 6월에 대외로 개방되니 강소 땅에서 활동한 홍14군 내 장세걸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숱한 연구자료들이 중문 인터넷에 오르게 되고 필자에게까지 다가서게 되였었다. 그래서 필자는 며칠 전 2017년 5월 22일에 가진 홍14군기념관 제2차 현지답사에서 기념관 이모저모를 돌아보지 못하여도 괜찮다고 보게 된다. 홍14군기념관 1층 중앙홀 재차 답사에서 중앙홀의 홍14군 17명 장령 동상군체 중의 한 동상이 조선인 장세걸이라는 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을가. 장세걸은 강소 여고의 홍14군기념관에 동상으로, 사진으로 모셔진 우리 겨레의 홍군 고급장령이요 위인이였다. 2017년 5월 27일 정리 길림신문
553    [겨레렬사비18]양림의 묘소는 하구촌 어디메냐 (2) 댓글:  조회:1182  추천:0  2017-06-13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18) ■ 리 함 1     양림(자료사진) 양림의 최후와 희생을 두고 홍군장정기사총서 《동방매력-장정과 외국인》을 출판한 저자이고 한족으로서 거의 유일하게 양림 전기를 비교적 품위 있게 다루고 있는 소현사는 너무도 애달픈 나머지 양림 전기 마지막을 이렇게 쓰고 있다.   1936년 2월 22일 필사제는 상처가 과중하여 구급이 효과를 보지 못하고 끝내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그는 최후의 한발자국을 동정 도중에 남기였으며 황하가에 찍었다. 양림이 황하가에 쓰러진 후 그의 조선인 전우이고 양림과 더불어 홍군장정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마친 무정장군은 섬감근거지에서 자기의 친구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장정결속 후 우리는 1936년 2월에 황하를 도강하였다. 그때 양림과 나는 둘 밖에 남지 않은 두 조선인 군관이였다. 양림이 황하를 강행하는 돌격대장으로 뽑히였다. 이는 목숨을 내건 과업이였다. 돌격대는 황하를 건넌 후에 황하가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양림은 탄알에 맞았다. 그때의 의료조건으로는 그의 생명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옹근 하루를 부대끼다가 고통스런 시달림 속에서 죽어갔다. 양림, 중국공산당인들로부터 국제주의전사와 공산주의전사로 불리운 겨레의 빛나는 별이고 홍군 고급장령인 양림은 이렇게 동지들 곁을 떠나갔다. ‘하다면 혹여나 양림의 묘소를 찾을 수 있을가…’ 택시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벌써부터 가슴은 두근거린다. 기대의 마음이 앞서는 심리작용이였다. 택시는 벌써 왕가하촌과 하구촌 사이 산언덕을 돌아돌아 내린다. 하구촌과 왕가하촌 사이를 누비며 황하로 흘러드는 무정하가 눈앞에 쫘악 펼쳐진다. 당년 양림이 홍15군단 황하도하 선견퇀을 배로 훈련시키던 그 무정하여서 정답기만 하다. 택시는 어느덧 무정하를 가로지나는 낡은 다리를 지나 하구촌에 들어선다. 하구촌 중심가에는 결혼하는 한쌍의 젊은 남녀를 옹위하며 숱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하구촌과 왕가하촌이 무정하를 사이두고 서로 이웃해 황하 대안의 현애절벽 우 하가와촌과 마주 바라보다. 목적지에 이르렀으니 택시를 보내야 하였다. 그런데 황하의 낮은 언덕가에 자리잡은 집 주인을 찾으니 지금은 황하를 건너는 배가 없고 황하를 거슬러 3~4키로메터 가야 황하를 건너는 다리가 있단다. 택시를 돌려보낸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황하 대안의 하가와촌으로 가자면 황하다리를 건너 에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되니 그 길은 10키로메터를 많이 벗어난다. 2 하지만 소침정서도 한순간, 이번에는 기분을 바꿔 하구촌 길가에서 한담하는 마을사람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잡담이기는 하지만 그런 잡담 속에 뭔가 건덕지가 잡힌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나였다. 잡담 속에서 과연 두가지 중요한 단서를 잡았으니 하나는 황하를 건널 수 있는 뽀트가 금방 강 대안으로 갔으니 자기들이 련락하여 주겠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곳 무정하 대안에 양림이라고 하는 홍군장령이 묻혔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두 홍군전사의 무덤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기어이 전사의 무덤이라고 못박는다. 그들 속에는 마을의 장년들과 나이 지숙한 70대의 로인 분들도 끼이였다. 이럴 때 황하 대안 산 서쪽으로 갔던 뽀트가 돌아왔다는 좋은 소식이 전해진다. 기쁜 김에 고마운 마을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급급히 황하나루터로 내려갔다. 뽀트는 우리 부녀 간을 태우고 미끄러지듯 황하를 가로질러간다. 아차, 후회가 전신을 감싼다. 좋다는 기분에 훌쩍 떠나다 보니 전사의 무덤이라는 그 묘소를 찾아보지 못함이 맘에 걸린다. 내친 걸음이라 돌아서기도 어려웠다. 이 뽀트는 황하 대안 산서 하가와촌의 뽀트로서 오늘 마지막으로 나서니 말이다. 양림 소속 황하도하작전의 옛 마을 하구촌이 보인다 어찌하든 뽀트는 거의 일직선으로 달린다. 이곳 황하 구간은 비교적 잔잔히 흐르는 구간이여서 뽀트는 평온하기만 하다. 보매 이곳 황하의 너비는 400-500메터는 잘될 것 같았지만 섬서 북안에서 산서 대안까지 거리를 잠간사이에 조여준다. 병풍을 두른 듯한 산서 대안의 현애절벽이 아스랗게 높아만 보인다. 뽀트를 몰아준 이는 산서성 석루현 신관향 저두촌(辛关乡咀头村)의 한 40대 사나이. 그는 황하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한편 뽀트로 산서땅과 섬서땅을 이어주고 있다고 한다. 황하 동안에 이른 후 그는 어디를 가느냐고 물어온다. “산우 하가와촌으로 가려는데요. 이곳 현애절벽 사이 오솔길을 타고 싶어유.” “아니 아닙니다. 오솔길이 있긴 해도 대단히 위험해요.” “그럼 어쩌지요?” “방법이 있어요. 저희와 같이 저 아래쪽 굽이 우리 마을로 돌아가시지요.” 일리가 있는 말이였다.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자라며 산을 잘 타는 필자라 해도 인젠 한다하는 젊은이가 아니였다. 산을 탄 경험도 없는 처녀애—딸애도 있지 않는가. 우린 뽀트 임자(두 사람)들을 따라 하가와촌 가까이 아래마을이라는 저두촌을 바라고 황하를 따라 내려갔다. 무거운 배낭이 어깨를 지지누른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그리도 보고픈 황하의 제1만(黄河第一湾)도 뽀트 임자네 마을에서 8키로메터 밖에 되지 않는다니 벌써부터 마음이 들뜨기만 한다. 3 그렇게 몇리를 걸었을가. 황하 동안에 병풍처럼 일어선 현애절벽은 차차 낮아지더니 황하가 오솔길은 수레길로 변해 산언덕을 굽이돌며 오르기 시작한다. 여기 산언덕은 대추나무로 덮이고 그 속에 황토고원의 움집들이 하나 둘 나타난다. 뽀트 주인은 자기들이 사는 저두촌(咀头村)이라고 소개하여 준다. 그러면서 손님들이 하가와촌 현지답사를 마치고 황하 제1만을 거치며 석루현성까지 가자면 굽이굽이 황토고원을 자유자재로 달리는 소형뻐스가 있어야 한다고 동을 단다. “소형뻐스요? 어디서 구해요?” “근심하지 마시고 천천히 걸으세요.” 나의 어이없는 모습에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뽀트 주인은 겅정겅정 앞서 나간다. 이윽고 소형뻐스 한대가 마주온다. 보매 뽀트 주인이다. 그는 자기는 소형뻐스를 몰기도 한다면서 우리들이 바라는 하가와촌이며 황하 제1만이며 모두 거치면서 석루현성까지 모셔다 주겠단다. 그 순간 뽀트 주인이 얼마나 반가왔는지 모른다. 우리 말로 하면 보통이 아니고 대단히 고마운 사람이였다. 뽀트 주인이 사는 저두촌에서 하가와촌까지는 2~3키로메터 거리였다. 황토고원의 한 산령을 이루는 길 따라 한참 톺으니 그렇게도 가보고 싶던 하가와촌이다. 하가와촌은 지금 석루현 신관향에 속하는 한 마을인데 고원의 산정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은 주로 두개의 골안을 이루는데 첫 골에 대부분 인가가 집중되여 있다고 뽀트 주인은 말한다. 인가라야 거의 전부가 황토고원의 움집들이다. 당년 양림은 홍15군단 선견대를 지휘하여 선참 황하를 넘어 하가와촌까지 짓쳐왔다가 적탄에 총상을 입고 이 마을에서 희생되였었다. 양림의 희생지 산 서쪽 하가와촌 하가와촌의 움집들은 당년의 집들이 아니여서 이 마을의 어느 곳에서 희생되였는지 알 수가 없다. 뽀트 주인은 양림에 대해선 금시초문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나는 딸애와 함께 하가와촌의 이모저모를 열심히 카메라에 담으며 뽀트 주인—소형뻐스 운전사와 부탁했다. 하가와촌 구내에서 살고 있으니 앞으로도 마을의 이상분들과 잘 문의하여 알아봐달라고 말이다. 뽀트로 황하 북안 하구촌에도 드나드니 꼭 명심해 봐달라고 청들어도 보았다. “양림이란 분이 희생될 때 나이가 얼마 돼요?” “36세입니다!” “36세요, 참으로 아까운 나이입니다. 홍군의 고급장령이라 하니 더구나 그렇지요.” 뽀트 주인은 아쉬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면서 꼭 기억하겠다고 흔쾌히 대답한다. 그러니 이곳 황하 량안 하구촌과 하가와촌을 이제도 몇번은 다녀야 함을 전에없이 강렬히 느끼였다. 어쩌면 양림의 무덤을 찾아낼 것만 같은 느낌이 전에없이 강하게 강하게 흘러든다. 소형뻐스는 잠간사이에 하가와촌을 지나 산의 정상에 이른다. 나는 차를 세워달라고 부탁하고는 세우기 바쁘게 딸애를 데리고 가까이 최정상 언덕으로 치달았다. 바로 턱밑은 아니나 좌우쪽 저 산아래 황하가 은띠처럼 환히 내려다보인다. 아래쪽은 하구촌 그대로이고 웃쪽은 하구촌 3~4키로메터 우에 있다던 황하다리가 아닌가. 운전기사는 이곳 최정상 부분은 옛날 산서군벌 염석산(阎锡山)이 홍군을 막느라고 만들어놓은 군사보루라고 알려준다. 4 이날은 2012년 7월 4일, 잊을 수 없는 하루였다. 이날 우리는 고마운 뽀트 주인의 받들림으로 황하 제1만이라는 넓고 희한한 원형의 엄청난 황하 굽이를 유람하면서 희생을 앞둔 양림과 주사제의 대화에 오른 석루현 의첩진(石楼县义牒镇)을 통과했으며 근 50리 밖의 석루현성에도 무사히 이를 수 있었다. 비록 양림의 묘소를 찾지 못하고 양림이 희생된 하가와촌의 구체 지점, 치료하던 집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제날 황하 도하 지점을 찾고 희생지를 거치였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느껴야 하였다. 그때로부터 어언 또 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5년 세월 속에서도 언제 한번 양림의 묘소를 잊어보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원인이 없지 않다. 조선문 《불멸의 발자취》 저자인 김성룡은 책에서 2003년 10월에 연변텔레비죤방송국과 중앙방송국 등 기자와 연구일군들로 이루어진 답사팀은 석루현성의 동정항일기념관과 하가와촌의 양림 희생지를 찾아보았다면서 중요한 단서를 알리였기 때문이다. 그들 답사팀이 석루현 당사연구일군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했다는 전보왕(田补旺)로인을 만났을 때 전보왕로인은 답사팀에 양림의 유체는 처음 하가와촌(황하 동안의 산서땅)에 안장했다가 동정을 마친 홍군이 철수하면서 다시 황하북안의 하구촌에 이장했다고 긍정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양림은 하구촌 북쪽을 이룬 사진 속 저 무정하 기슭 어디에 묻히여   /이상 사진 2012년 7월 4일 현지촬영 전보왕로인은 또 답사팀의 조선족 기자들에게 당년 홍15군단 참모장이고 홍15군단 도하사령원인 주사제(周士第)가 양림을 혼자 적후에 둘 수 없다고 하면서 황하와 무정하의 합수목인 하구촌에 이장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던 주사제는 해방후 양림의 묘소를 찾고저 이 고장을 찾아보았지만 오랜 세월 탓으로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참으로 유감중의 유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전보왕로인이 알려준 중요한 단서이기에 언젠가는 꼭 찾아낼 것만 같은 흥분으로 들뜨게도 한다. 양림의 묘소는 하구촌 어디메냐. 양림의 묘소는 하구촌 어디메냐. 아직도 막연하나마 일루의 희망을 버릴 수가 없다. 언젠가 이 일루의 희망이 현실로 펼쳐지리라는 기대도 하여본다. 본문의 주인공 양림은 누구던가. 홍15군단 75사 참모장에만 머무를가. 아니지 아니지. 강서 중앙혁명근거지에서 활동할 때의 양림은 국내외 군사학교를 6개 소나 다닌 황포군관학교 출신이 아니던가. 일찍 국민혁명군 엽정독립퇀 제3영 영장이 아니였던가.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중앙정부 로동과 전쟁위원회 참모장, 중앙군위 총동원무장부 참모장, 홍23군 군장, 홍1군단 참모장, 월감군구(粤赣军区) 사령원이 아니였던가.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을 맡은 우리 홍군의 고급장령이 아니였던가… 2017년 5월 9일 재정리 길림신문
552    [겨레렬사비17] 양림의 묘소는 하구촌 어디메냐(1) 댓글:  조회:1590  추천:0  2017-06-01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17) ■ 리 함 1 당신은 우리 겨레의 홍군장령 양림이 드라마 《홍군동정》에서 주요인물의 하나로 등장하였음을 알고 있는가? 이는 진정 사실로 펼쳐지니 드라마 《홍군동정》은 중공 석루현위와 석루현인민정부, 8.1영화촬영소, 산서방송텔레비죤국 등의 련합으로 제작된 장편 중대혁명력사제재 드라마로서 2010년 12월 14일 려량시 석루현에서 첫 촬영을 시작하고 2012년 4월 6일부터 신강위성채널에서 첫 방송을 시작하였다. 《홍군동정》에서 양림의 형상은 주로 제1집과 제7집에서 나온다. 양림의 황하도하와 전투장면, 희생을 다룬 것은 제7집인데 드라마에서의 양림은 불을 뿜는 적의 또치까가 전진의 앞길을 막아나서자 서슴없이 적진으로 돌입하여 폭발꾸러미로 적의 또치까를 요정내고 장렬히 희생된다. 씨나리오작자와 드라마제작자들은 실제와 다른 이런 모습으로 양림의 희생을 처리하여 유감도 없지 않지만 드라마이니 그런대로 리해는 간다. 양림, 리추악 부부.   /자료사진 희생을 앞두고 양림은 맘속의 말 “추악이, 사랑해!”를 높이 웨친다. 보다 감동적인 것은 드라마는 다시 장면이 바뀌면서 황하가 산우에 양림의 무덤이 나오는 것이라 할가. 현실에서 찾을 수 없던 양림의 무덤이 드라마에서 현실처럼 펼쳐진다. 한참은 착각 속에서 진짜 양림의 무덤으로 느껴지기만 한다. 그럴 때 양림을 찾아 섬북으로 달려오던 리추악은 뜻하지 않은 남편의 무덤과 마주치며 남편의 무덤 앞에서 오열한다. 리추악은 남편이 가장 즐기던 〈아리랑〉을 부르며 그리운 추억 속에서 아리랑 춤을 춘다. 이때 양림이 꿈결처럼 나타나 이들 부부가 흥겨운 아리랑 춤으로 빙빙 돌아간다. 문학작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좋았다. 나중에 양림은 가뭇 사라지고 리추악만 남는다. 그의 뒤에서는 모택동의 부인 하자진 등 한패의 동지들이 지켜본다. 드라마에서는 황하를 건넌 모택동, 장문천 등 중앙 수장들이 등장하며 마중나온 엽검영에게 모택동이 돌격대의 도하상망이 큰가고 묻는다. 엽검영은 우리 군은 두곳의 황하도하에서 수십명 동지들이 희생되였다고 하면서 “제75사 참모장 필사제동지가 불행히 적탄에 희생되였다.”고 말씀드린다. 엽검영의 회보를 들은 모택동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필사제동지는 조선인민의 훌륭한 아들입니다. 그는 피를 중국의 땅우에 뿌리였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황하가의 산우에 서시여 “우리는 영원히 그를 기릴 것입니다. 필사제동지여, 고이 잠드시라!”라고 하시면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린다. 2 력사현실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드라마 처리에 필자는 깊이깊이 감동되였다. 모택동 주석의 필사제-양림에 대한 평가는 천만지당하다. 그렇게 말씀할 수 있는 모택동 주석이다. 그러나 현실 속 장정 도중의 모택동과 중앙군위 간부퇀 참모장 양림은 그렇게 조석으로 어울리면서도 력사자료와 장정회고 자료들에서는 1934년 초 서금 중화쏘베트 제2차 대회 때를 제외하고는 모택동과 조선인 양림의 만남과 대화를 한마디도 찾을 수 없다. 이것이 오히려 유감스럽기만 하다. 그러던 유감을 현실세계의 드라마 속에서나마 볼수 있게 되니 감사한 마음이다. 《홍군동정》 드라마에서는 양림 무덤 앞에서의 리추악의 장면 장면들을 펼치다가 내레이션 처리로 바뀌면서 리추악에 대한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이때의 리추악은 동북의 철북지구에서 조일만과 더불어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건국쌍걸’이였다. 리추악은 동북으로 돌아간 후 군중들을 조직하여 기세 드높은 항일운동을 전개한다. 1936년 8월 불행히 체포되여 9월 3일에 영용히 희생된다. 리추악렬사가 일찍 감금되였던 흑룡강성 통하현의 옛 일본헌병대부 건물   /자료사진 드라마에서의 양림과 리추악에 대한 평가는 실로 사람들을 고무한다. 2012년 4월 6일부터 신강위성채널을 통해 드라마《홍군동정》이 방영되기 시작한 후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그 속에서도 양림의 형상이 두드러지여 시청자들에게 주는 인상이 자못 깊은 것으로 헤아려진다. 더우기 양림의 희생을 다룬 드라마의 처리를 두고 그 관심은 보다 높아지고 있다. 양림이 동정항일의 싸움터에서 황하가에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 때 그의 안해 리추악은 동북의 흑룡강성 통하현에서 조일만과 더불어 동북의‘흑백이리(黑白二李)’로 높이 받들리며 한창 일제놈들과 불요불굴하게 싸우고 있었다. 일찍 1934년 8월에 연수, 방정 두 현을 지도하는 중공 특별서기를 맡았던 그, 1936년 2월에 중공 통하특별지부 서기를 맡았던 그, 그러던 그는 1936년 8월 29일에 통하현에서 불행히 일본침략자들에게 체포되여 그 해 9월 3일 통하현성 서문 밖 형장에서 장렬히 희생된다. 그 남편에 그 안해였다. 필자는 어찌하여 본문의 서두부터 한동안 먼저 드라마 《홍군동정》 속 양림을 펼쳐보일가? 어찌하여 양림의 안해 리추악도 언급하여 볼가? 원인은 간단하다. 홍군장령 양림이 희생된 력사적인 황하가에 현실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양림의 묘소가 등장하고 양림과 리추악의 감동적인 만남이 황하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다면 어찌하여 양림의 묘소를 찾을 수 없다는 걸가? 이를 알자면 2012년 7월 4일 그 날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3 지금으로부터 5년 전 7월 4일은 정녕 잊을 수 없는 하루였다. 그 날 필자는 동행한 딸애 설이와 함께 연안을 떠나 당년 와요보회의가 열린 자장현을 찾았고 자장현에서 다시 청간현성을 거쳐 청간현성에서 50여키로메터 되는 황하가 황토고원의 하구촌을 찾았었다. 청간현성에서 하구 행은 황토고원 산정과 골안 길을 오르내리는 험한 산길이다. 바로 전날 비까지 내려 구간구간 길은 황토가 비에 씻겨내려 범벅을 이루었지만 택시운전사는 택시를 굽이굽이 잘도 몰아갔다. 황하가의 하구촌을 멀리 앞두고 신작로는 한창 대대적인 수건중에 있어서 말이 아니였다. 필자는 황하가 발아래 펼쳐지는 산언덕에서 택시를 멈춰세웠다. 산언덕 길가 굽이진 곳에 왕가하촌(王家河村)이라고 쓴 지명표시패가 박혀있었다. 마침 60대 후반 쯤 되는 로인 한분이 다리쉼을 하고 있기에 로인과 산언덕 저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 왕가하촌인가고 물으니 머리를 끄떡인다. 저 산아래 황하가에 자리한 마을이 하구촌이고 두 마을 사이 황하에 흘러드는 강이 무정하(无定河), 건너편 황하 대안 절벽 우 저쪽이 하가와촌(贺家洼村)이란다. 현지답사길에서 하구촌 건너 왕가하촌 로인을 선참 만나  /2012년 7월 4일 현지촬영 필자는 어언 하가와촌을 마주한 황하 대안에 서있었다. 황하를 마주하여 섰노라니 이 나라 어머니 강으로 불리우는 황하는 북에서 남으로 흘러내리며 한마리 길다란 룡처럼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강 대안인 산서땅은 모두가 현애절벽을 이루고 있어 더욱 장관이다. 그 현애절벽 우가 양림의 희생지-산서 석루현의 하가와촌이라면 황하 대안의 섬서땅 하구촌 쪽은 희생된 후의 양림이 묻힌 잊을 수 없는 고장이렷다. 력사를 펼치노라면 1936년 2월 20일 20시, 홍군 제1방면군은 동정항일에 관한 당중앙과 중앙군위의 명령을 받들고 하루 앞당겨 황하도하작전을 개시하였다. 황하도하작전의 선봉돌격 과업을 맡은 홍15군단 75사 참모장 양림은 중앙 수장들에게 “한개 련이라도 대안에 오르면 도하작전은 담보가 있게 됩니다.”라고 말하고는 제75사 223퇀 선두퇀 선두영의 장병들에게 “모주석께서 이곳으로 도하하게 됩니다. 우리는 기어이 도하의 성공을 담보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하여 지적하였다. 이에 앞서 양림은 223퇀 선두퇀 가운데서 수영에 능한 40여명으로 도하돌격대를 조직하였다. 선두퇀 선두영의 비밀도하가 시작되였다. 선두영의 40여명 돌격대가 양림의 직접 지휘하에서 황하 대안의 청간현 왕가하촌 부근에서 선참 배에 앉아 황하로 흘러드는 무정하를 따라 황하로 나아갔다. 어떤 자료들은 하구촌이라고 한다. 어떠하든 하구촌과 왕가하촌은 무정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마을들로서 하구촌은 황하 북안의 황하가 낮은 고장에 위치하고 왕가하촌은 황하북안의 산언덕에 위치하였다. 4 선두영의 배가 대안에 이르기도 전에 적들은 선두영의 움직임을 발견하고 사격을 해댔다. 양림은 비밀도하를 강행도하로 명령하고는 배사공들에게 배를 대안 기슭에 대게 한 다음 신속한 대안 쟁탈 전투로 적진을 무찔렀다. 금성철벽이라고 떠들던 황하 대안은 삽시에 아군에게 공략되였다. 양림은 계속 선두영을 지휘하여 하가와를 진공하였다. 격렬한 전투 끝에 하가와 길어구의 또치까가 박산났다. 승승장구로 적들의 중심진지를 들부시고 적 한개 련을 소멸하였다. 이때 뜻하지 않은 적탄에 양림은 복부에 중상을 입고 하가와마을에 남아 치료를 받아야 했다. 양림의 부상과 치료과정을 두고 주사제는 아래와 같이 회고하였다. 그때 나는 하구 도하사령원이고 장순청동지가 정치위원이였다… 도강 후 나는 하가와로 가서 필사제동지를 찾아보았다. 그를 전문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와 탄알이 창자를 관통하여 상처가 아주 중하다고 하였다. 그들은 모든 방법을 다하여 구급하고 있었다. 나는 필사제동지가 넓은 구들 우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얼굴은 창백하였다. 이는 2월 21일 오후 홍군 제15군단 황하도하 사령원이고 양림의 ‘동갑내기’ 전우인 주사제가 하가와를 찾아 얼굴이 창백한 양림을 위문할 때의 회고이다. 아래는 그 날 주사제가 양림과 나눈 대화이다. “전방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제75사가 바야흐로 의첩진으로 진공해가고 있습니다. 짐작컨대 오늘 밤으로 의첩진을 점령할 것 같습니다. 군단부와 제78사가 의첩진 부근에 이를 것입니다. 래일이면 제75사, 제78사와 군단부가 모두 석류현에 도착할 것입니다.” “한개 련이 하가와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군사위원회기관이 지금 강을 건너고 있습니다. ” “모주석께서 건느셨습니까?” “모주석께서 이미 강을 건넜습니다. 지금 의첩진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는 모주석께서 도하한 후에 건너왔습니다.” 양림 소속 황하도하작전이 시작된 곳의 황하  /2012년 7월 4일 현지촬영 양림은 모주석께서 무사히 황하를 건넜다는 말에 얼굴에 기쁨을 피여올리며 주사제를 빨리 떠나라고 재촉했다. 이때를 두고 1964년 7월 13일에 쓴 회고담에서 주사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원래 그가 누워있는 구들에 좀더 머물러있으려 하였다. 그런데 그가 나의 말을 들은 후 모든 생각을 모주석의 도하와 부대의 형편이며 의첩진의 상황에 몰부으니 조급해났다. 그가 안절부절할가 저어되여 나는 괴로운 심정을 가까스로 참으며 그와 악수하고 몸을 일으켰다. 양림의 최후 모습과 최후의 대화록이다. 그는 생명이 경각을 다투는 시각에도 모주석의 도하를 걱정했고 부대와 부대가 짓쳐나갈 의첩진을 걱정하였다. 양림과 그의 선봉영이 황하도하 작전길을 열어놓았기에 모택동과 모택동이 령솔한 홍군대오는 무사히 황하를 건너 동정항일의 장도에 오를 수 있었다. 홍군주력부대가 파죽지세로 적들의 황하방어사령부가 둥지를 튼 산서성 석루현 의첩진을 공략할 때 양림은 후방병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날은 1936년 2월 22일이다. 2017년 5월 8일 재정리  길림신문
551    [겨레렬사비16] 연안 청량산 리철부 묘소는? 댓글:  조회:1345  추천:0  2017-05-23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16) □ 리 함 1 리철부와 장수암 부부(자료사진) 아침 일찍 서안을 떠난 전용뻐스는 옹근 하루 낮을 달려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연안에 도착하였다. 그 시절 길이 그러했다. 1988년 10월, 공청단중앙 주최로 서안에서 조직된 ‘항전시기의 청년운동 학술토론회’ 연안참관단 일행 가운데서 나는 유일한 조선족이였다. 꿈결에도 그리던 연안이 아니던가! 나는 봉황산 밑에 자리잡은 연안호텔 3층의 한칸에 행장을 풀어놓고 창문가에 다가갔다. 불야성을 이룬 연안성이 시야에 안겨들었다. 찰나 기적과도 같이 등불에 현란히 싸인 보탑이 신기루마냥 어둠속에 불쑥 나타났다. 좀 후에야 안 바이지만 연안시에서는 우리 참관단 일행을 환영하여 설명절이거나 중요한 기념행사 때에만 켠다는 보탑 장식 등불을 일제히 켜놓았던 것이다. 이튿날 오전 8시 반, 우리 연안참관단 일행은 마침내 보탑을 얼싸안게 되였다. 연안시 동남쪽 연하(延河)강반의 가령산에 솟아있는 보탑은 그 높이가 44메터나 되는데 당나라 때 산물이라고 한다. 1937년 1월 13일 우리 당중앙과 중앙군위 등 령도기관이 처음 연안에 들어선 후 보탑은 연안의 상징으로 억만 로고대중의 마음속에 솟아올랐다. 보탑-연안, 그 얼마나 많은 열혈청년들과 혁명지사들이 구름떼처럼 연안에 몰려들었던가. 그 속에는 조선인으로서 첫패로 연안에 들어선 김산과 홍군장령 무정 그리고 그 후의 본문의 주인공 리철부 등 수백에 달하는 조선인 혁명가들이 들어있었다. 멀리 보이는 연안 보탑산 전용뻐스는 보탑을 끼고 산을 에돌아 아래로 내리더니 청량산(清凉山)을 거쳐 왕가평(王家坪) 연안혁명기념관에 이르렀다. 숭엄한 기분을 자아내는 기념관이였다. 1950년에 봉황산 밑에 세워졌다가 1973년에 이곳 왕가평에 옮겨진 기념관이였다. 기념관 정문과 정원을 지나 기념관에 들어서니 당년 연안의 생활 속에 뛰여든 심정이다. 기념관에서 홍군동정로선도(红军东征路线图,1936년 2월-5월)와 ‘중국공산당전국대표회의’ 문물과 사진들을 보아냈다. 조선인 혁명가 양림에 이어 리철부(李铁夫)가 조용히 미소 짓는 것 같았다. 1937년 5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 회의와 더불어 중공중앙 백색구역 사업회의가 연안성 내 대례당에서 열렸을 때 당시 중공 하북성위 위원 겸 천진시위 서기로 활동하던 리철부가 류소기, 팽진 등 동지들과 함께 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2 리철부는 회의에서 한두차례 발언에서 백색구역에서의 ‘좌’경페문주의 오유를 신랄히 비판하였으며 류소기, 팽진 등과 함께 모택동동지의 친절한 접견을 받았다. 대회 기간에 중공중앙은 리철부를 중공 하북성위 서기 겸 천진시위 서기로 임명하였다. 중앙의 령도동지들은 리철부가 장기간 백색구역에서 어려운 지하투쟁에 종사했고 또 페결핵으로 몸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그를 섬감녕 서북국에 먼저 남기기로 결정하고 그를 찾아 담화까지 하였다. 그런데 회의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장질부사에 걸리였다. 그러나 당시 의료수준이 따르지 못한 원인으로 장질부사를 감기로 오진하였기에 치료시간이 지체되여 리철부는 그 해 1937년 7월 10일에 연안 교아구(桥儿沟) 휴양소에서 불행히 서거하였다. 그런 기분이여서인지 ‘중국공산당전국대표회의’ 문물과 사진 전시 구간에서 이윽토록 발을 떼지 못하였다. 연안에서는 리철부의 추도회를 장중히 가지고 묘소를 청량산에 모시였으며 《신중화보》는 리철부의 략전을 싣고 추도회 소식을 보도까지 하였었다. 그 후도 당중앙은 조선인 리철부를 잊지 않았다. 1945년 4월, 당중앙은 연안 양가령(杨家岭)에서 당7차대회를 열었다. 대회 전야에 중공중앙 판공청에서는 리철부의 묘지에 대리석 비석을 세워주었다. 비석에는 “조선공산당 창시인의 한 사람이며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며 중공 하북성위 서기인 리철부동지 묘”라는 비문이 새겨졌다. 오늘의 연안혁명기념관 외경 리철부의 묘지와 대리석 비석이 연안 청량산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 날 오후 나는 연안참관단의 참관일정에서 조용히 빠지여 연하를 건너 청량산의 산밑 길가에 위치한 연안시민정국을 찾았다. 민정국에서는 그 시절 리철부의 묘지가 확실히 청량산에 있었지만 그 후 어떻게 되였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린다. 직접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 시절 청량산은 산기슭 부분에 건물들이 있을 뿐이지 산중턱부터는 전부가 울창한 나무숲이고 그 숲속에 덩실한 당지 묘지들이 수두룩하였다. 주인 없는 묘지들은 뭇풀들이 키돋움하며 자라나 보기에도 으스스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대수랴, 겨레 렬사묘소들을 찾아다니는 건 나의 겨레력사연구의 일환이였으니. 나는 개의치 않고 나무숲속의 묘지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하나하나 묘지를 주의하여 살피였다. 그런데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청량산의 묘지 사이사이를 다니고 다니였지만 리철부의 묘소는 종내 나타나지 않았다. 연안시민정국에서 리철부 묘소란 말에 뒤말을 흐리더니 과연 사실인 것 같았다. 3 어느덧 하루 길을 달린 해가 서산에 걸터앉으려고 서두른다. 유감천만이기만 하다. 1947년 3월 19일, 국민당 호종남(胡宗南)의 20여만 군대가 연안에 쳐들어갔을 때 국민당군대에 의해 훼멸되였는지? 그저 그대로 발길을 돌리자니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그때로부터 24년 세월이 흘렀다. 24년 세월 속에서도 리철부의 묘소를 찾지 못함이 늘 마음에 걸린다. 2012년 6월 25일부터 7월 8일까지 나는 양림, 무정 발자취 답사 차 섬북 땅을 다시 밟게 되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연안에 이르러 청량산을 다시 전면 답사하려고 하니 청량산은 24년 전과 완전히 달랐다. 그제날 수풀이 우거지고 묘지가 들어섰던 곳은 거의다 새 건축군으로 변해버리였다. 그 사이 새 건축군은 산아래로부터 산중턱 전부를 덮어버렸으니 리철부 묘소를 다시 찾아본다는 것은 허망한 꿈이였다. 연안 청량산 어구 모습 별수 없이 나는 동행한 쌍둥이 딸애와 함께 24년 전의 연안혁명기념관을 다시 찾았다. 와아! 거대한 변화 앞에서 경탄해마지 않았다. 연안혁명기념관은 1997년 1월 13일, 당중앙과 모택동동지가 연안에 진주한 60돐 기념일에 락성되였다고 하니 엄청 규모의 기념관은 기념관 앞 광장 면적만도 2.7만평방메터를 이루어 24년 전과 판이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 광장 중심부에 높이 5메터를 가진 모택동의 전신 청동상이 거연히 일어섰으매 두 손을 허리에 지르고 먼곳을 응시하는 모택동은 일대 위인의 형상으로 우렷이 떠오른다. 연안혁명기념관 내에는 리철부 관련 전문 전시는 없어도 〈연안에서의 국제 벗들〉(国际友人在延安)부분에 귀국을 앞둔 조선군정학교 전체 학원들이 연안 라가평에서 함께 남긴 사진(1945년 9월)과 정률성의 여러 사진 전시는 조선혁명가들의 연안에서의 활동상황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그 수백명 조선혁명가들 속에서 리철부는 몇몇 선두주자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였던가. 4 일찍 1937년 5월, 모택동은 중공중앙 백색구역 사업회의에서 왕명 ‘좌’경로선을 반대하여나선 리철부를 전면 긍정하면서 “화북당은 그때 중앙의 모험로선에 대하여 일찍 예리한 반대의견이 있었는데 그 수령은 리철부동지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만큼 리철부는 중국인민들 속에서 위망 높은 국제주의자로서 1901년에 함경남도 홍원(洪原)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원명은 한위건(韩伟键)이였다. 그는 조선 국내와 쏘련, 중국의 상해, 일본 등지에서 항일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종사하다가 1928년에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 후 북평반제대동맹 당단서기로 있다가 천진에 가서 중공 하북성위 선전부장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중공 하북성위 선전부장인 리철부는 1933년 11월부터 1934년 2월까지의 기간에 〈당내문제에 관한 몇가지 의견〉, 〈‘좌’경 기회주의의 반동성〉 등 10편의 글을 써서 살판치는 왕명의 ‘좌’경로선을 과감히 비판하였다. 그중 몇편이 성당위 간행물 《화선》에 실리였다. 이로 하여 그는 ‘철부로선’, ‘취소주의’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좌’경로선 실시자들의 타격을 받았으며 당조직과의 관계도 단절되였다. 물론 그의 안해 장수암도 타격을 면치 못하였다. 리철부는 천진에서 사업하는 기간 당의 지시에 좇아 장수암이라고 부르는 녀성혁명가와 부부로 가장하고 ‘동거’하다가 결혼에 이르렀다. 리철부는 ‘좌’경로선 실시자들의 타격을 받아 당과의 조직적 관계는 잃었지만 일편단심 혁명에 충성하는 굳은 절개는 변치 않았다. 어려운 그 나날 리철부는 안해와 함께 로동자, 학생, 직원, 지식인들 속에 들어가 군중을 묶어세우고 당원을 받아들였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의 기간에 그들 부부는 중화민족무장자위회와 천진 각계 구국회를 조직 령도하였으며 《화북봉화》, 《천진녀성》, 《민중항일구국보》 등 혁명적 잡지를 꾸리였다. 한편 장수암의 둘째오빠인 북평 경찰 총감 장벽(张璧) 등을 교묘하게 리용하여 ‘좌’경로선의 피해로 적에게 체포된 동지들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연안혁명기념관에 전시된 정률성 사진과 조선의용군 단체사진   /이상 사진 2012년 6월 30일 현지촬영 1935년 12월 18일, 천진학생들이 북평 ‘12.9’운동에 호응하여 성세호대한 항일구국대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이 대시위를 조직지도한 주요책임자가 리철부였다. 1936년 봄 류소기가 당중앙 대표로 천진에 와서 당의 북방국 서기로 사업하게 되였다. 따라서 리철부는 중공 하북성위 위원 겸 천진시위 서기란 중책을 짊어졌다. 그러다가 1937년 5월, 류소기, 팽진 등 동지들과 함께 연안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전국대표회의와 백색구역 사업회의에 참가하였다가 페결핵 아닌 장질부사로 그 해 7월 10일 연안 교아구에서 불행히 서거하였다. 리철부는 바로 이러한 분인데 연안 청량산에 모셔진 묘소와 대리석 비석을 찾지 못하니 나의 잘못이런 듯 마음 편하지가 못하였다. 지금 연안 청량산의 리철부 묘소와 대리석 비석이 어떻게 되였는지 알지 못한다. 완전히 흔적조차 없어졌는지 아니면 어디로 이장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민들의 맘속에 뿌리내린 리철부의 형상은 예나 제나 앞으로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2017년 5월 6일 위해 석도에서
550    [겨레렬사비15] 양가포서 찾은 주문빈 새 사진 댓글:  조회:1092  추천:0  2017-05-16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15) ■ 리 함 1 하북성 당산시 풍윤구 양가포 렬사릉원 2017년 4월 27일, 당산시 기동렬사릉원 첫날 현지답사를 마치고 귀로에 오르다가 택시운전사와 당산 중심부에서 당산시 구내 풍윤구까지 거리가 얼마이고 풍윤구에서 양가포까지는 거리가 얼마인가고 물어보았다. 택시운전사는 풍윤구까지는 28키로메터이고 풍윤구에서 양가포까지는 15키로메터라고 답한다. 그러면 택시를 곧추 양가포까지 몰고 갈수 있냐고 다시 물으니 갈 수 있다고 선선히 응해나선다. 당산시 풍윤구 양가포 택시 행은 이렇게 우연히 정해졌다. 때는 오후 2시 직후였다. 택시선택이 옳았음이 뒤미처 현실로 나타났다. 당산에서 풍윤구까지는 시간이 별반 걸리지 않았는데 풍윤구에서 북으로 15키로메터 되는 거리가 문제로 나섰다. 이 구간은 휘트인 신작로가 아니니 말이다. 좁은 콘크리트 포장길이 낡아서 말이 아니다. 시골의 수레길을 방불케 하니 뻐스도 별반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런대로 물어 물으며 양가포 마을을 찾고 다시 양가포 렬사릉원을 찾으니 높은 담장과 높은 철대문으로 둘러싸인 렬사릉원은 문이 잠기여 들어갈 수가 없다. 어떻게 찾은 양가포 렬사릉원이던가, 돌아서서 후일을 기약할 일을 생각하니 일순 눈앞이 캄캄해난다. 오도가도 못하다가 렬사릉원 입구 한켠에서 밭정리에 나선 몇몇 아낙네와 70대 남성로인 한분이 보이여 그들과 물어보니 렬사릉원지기는 년세가 있는 분인데 아마도 봄철이라 밭일에 나선 모양이라고 한다. 남성로인은 주문빈렬사를 찾아왔다고 하니 주문빈은 조선족이고 양가포 사람들이 너도나도 잘 안다고 하신다. 그럴 때 한 아낙네는 방법이 있다며 누군가와 핸드폰 통화를 하더니 마을방송으로 찾으면 곧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희망이 보이였다. 2 양가포 렬사릉원 내 기념비 그 사이 70대 남성로인과 주문빈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느냐 물으니 그는 자기는 올해 75세로서 마을 선배 로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면서 주문빈의 최후로 되는 1944년 10월 17일 양가포포위돌파전을 들려주기 시작하였다. 이야기 거의가 자료연구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지만 그 날 동원된 3,000여명의 일본군들 중에는 중국사람들인 위군들도 적지 않아 일본군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위군부대에서는 “동지, 동지 이쪽으로 오시오!”라고 암시하면서 팔로군부대와 혁명간부들의 탈출을 도왔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또 양가포포위돌파전은 렬사릉원이 있는 바로 이 바닥에서 벌어졌다고 하니 신선하기만 하다. 우리는 바로 양가포포위돌파전이 벌어진 력사의 현장에 서있었다. 로인은 계속하여 양가포마을의 동남과 서남은 확 트인 평지라지만 마을 동쪽은 마제산(马蹄山)이고 마제산은 마두산(马头山)과 남북으로 대치되여 있다. 마을 북쪽은 협산(夹山)과 접하여 있고 협산은 또 전모산(毡帽山)과 마주 바라보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여기 주변 산들엔 모두 일본군들이 올라있어 여기 바닥에 든 팔로군과 간부들 희생자가 태반이였다고 동을 달기도 한다. 당지 주유례 로인님 만나 취재한 후 알고 보니 로인님은 주유례(朱维礼)라고 부르는 분이였다. 생생한 이야기들이여서 흥미가 부쩍 동하지만 그렇게 반시간 정도 시간이 흘러도 와야 할 렬사릉원지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오후해는 어느덧 서산으로 내려앉기 시작하여 조급함이 앞선다. 그때 어느 아낙네인가 그럼 이렇게 있지 말고 마을에 가서 누구누구를 찾아보라고 건의한다. 렬사릉원과 마을과의 거리는 몇리 잘되였다. 택시로 마을에 가서 또 길가에서 한담하는 몇몇 로인들을 만나 도움을 바랐다. 그렇게 사처로 련락하며 들볶아서야 렬사릉원지기와 겨우 통화가 이어졌다. 조선족사회에 처음 알려지는 팔로군 복장 차림의 주문빈 전신 사진 시간은 이미 오후 5시를 앞둔 시점이다. 드디여 양가포렬사릉원에 들어서고 곧추 릉원구 내 오른쪽 가에 위치한 릉원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은 개인집을 방불케 하는 자그만한 기념관이지만 사진전시를 위주로 한 기념관은 제법이였다. 1944년 10월 17일의 양가포포위돌파전 전후 사진과 그림으로 생생히 재현되여 있었다. 그 사진전시의 중심부에 양가포포위돌파전 팔로군의 최고 수장이였던 주문빈렬사의 전신사진이 보통사람의 키 정도로 전시되여 있었으니 가슴은 퐁퐁 뛰기만 한다. 그래 이 사진이지, 올해 초 이후 바이두(百度)를 통해 양가포렬사릉원을 찾고 찾다가 렬사릉원에 전시된 이 전신사진을 보아냈으니 그때까지도 우리 중국조선족사회에서 모르는 주문빈렬사의 전신사진이였다. 이 전신사진을 보고 위해 석도에서 제남과 당산을 거치며 곧추 달려왔으니 어렵게 찾은 이곳 양가포렬사릉원 행은 종내 헛된 걸음이 아니였다. 3 처음 제 눈으로 보는 주문빈렬사 전신사진은 다리에 각반까지 친 팔로군복장이여서 다정다감한 위인으로서의 주문빈의 형상이 그대로 묻어났다. 문제는 사진 찍기였다. 사진 우에는 투명한 무엇인가를 씌워서 해빛이 들지 않는 실내에서도 빛이 반사되여 마땅치가 않았다. 입은 웃옷을 벗어서 정문유리를 막아나서도 허사였다. 정면으로 사진 찍기는 전혀 불가능이라 반사빛을 피하며 사진 량쪽으로 비스듬히 찍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정면효과보다 못하지만 그런대로 수습을 하여야 했다. 그때 주문빈의 전신사진 우에 씌여진 시 한수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 시는 이러하다. 려운이 한마을 주문빈이 한마을 두 마을 서로 이웃하니 그 정 깊고 깊어라 산도 물도 혼령을 부르며 그댈 회억하니 승리소식 동풍 되여 어딜 보나 봄이구나 (云一村,树一村,此日一家作比邻,年深情更深。 山招魂,水招魂, 尤叫人人常忆君,东风处处春。) 왕이(网易) 블로그에 오른 우효영(于效英)의 글 〈주문빈렬사를 기념하는 한수의 시로부터〉”(从纪念周文彬烈士的一首词说起, 2011년 5월 8일)에 따르면 이 시는 주문빈의 동지이고 전우인 려운(黎耘)렬사가 1945년 10월 경에 쓴 한수의 시로 알려진다. 다시 말하면 일본이 무조건 투항한 두달 남짓한 후, 양가포포위돌파전에서 장렬히 희생된 주문빈렬사 희생 한돐을 맞으며 쓴 시이니 그 의미가 깊고 깊다. 려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지만 우효영의 글에는 려운이 1942년 10월 경에 진찰기변구로부터 기동으로 파견되여 와서 존경하는 지도자인 주문빈과 2년 남짓이 같이 어울리며 극진히 보내였다. 그때 주문빈은 중공 기동지위 서기로 사업하다가 기열변특위 조직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 후 항일전쟁이 승리하니 려운은 지체할세라 주문빈의 묘소가 자리한 전모산의 소나무 아래를 찾아 주문빈을 부르며 그 그리움을 한수의 시에 담아냈던 것이다. 그런 시가 지금 주문빈의 전신사진과 더불어 발목을 잡고 놓질 않는다.   양가포포위돌파전에서의 주문빈동지(앞 오른쪽) 양가포렬사릉원에서의 새 사진 발견은 주문빈의 전신사진 뿐이 아니였다. 양가포포위돌파전을 알리는 여러 사진들에는 일본군의 대거 진공에 맞서 싸우는 주문빈과 팔로군 장병들의 모습이 희미하나마 그대로 알리는데 주의를 무척 끄당기는 사진은 두장이였다. 한장은 그날의 포위돌파전에서 자기들의 지도자 주문빈을 기다리는 팔로군 장병들의 모습이라면 다른 한장은 “우리들의 과업은 팔로군 기관과 전체 간부들을 보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팔로군장병들 속 주문빈의 모습이다. 양가포 렬사릉원의 원 안내비 무척이나 애를 태우며 찾고 찾은 당산시 풍윤구 양가포 렬사릉원 현지답사는 원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곳 렬사릉원 기념관에 이어 렬사릉원 기념비와 렬사묘소 구역 등지를 돌아보면서 싸움의 그 날의 양가포포위돌파전에 묻혀봄도 실감나는 일이였다. 렬사릉원 밖에 나와서 다시 한번 가렬처절한 생사박투의 전투가 벌어진 주변의 골안바닥이며 전모산 등지를 둘러보니 악악 소리 지르며 적들과 싸우는 팔로군 장병들의 모습이며 포위돌파전을 선두에서 지휘하는 주문빈의 모습이 보이는 듯 싶다. 양가포 렬사릉원의 옛 중심기념비  /이상 사진 2017년 4월 27일 현지촬영 2017년 5월 5일 위해 석도에서 길림신문
549    [겨레렬사비14]주문빈과 당산시 기동렬사릉원 댓글:  조회:1063  추천:0  2017-05-16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14) □ 리 함 1 당산시 기동렬사릉원 정문     주문빈 동상 주문빈렬사 묘소와 동상 그리고 기념물은 하북성 석가장시에 위치한 화북렬사릉원에 있을 뿐 아니라 주문빈이 중소학교를 보낸 북경시 통현 로하중학교와 주문빈의 활동지인 하북성 당산시, 희생지인 하북성 당산시 풍윤구(丰润区)에도 있다. 이곳들에는 각기 동상과 기념물들을 세우고 전시한 기동(冀东)렬사릉원과 양가포(杨家铺)렬사릉원이 있다. 장강남북의 광활한 대지 우에 우리 겨레 렬사 한사람의 기념물이 이같이 여러 곳에 넓게 분포된 현상은 오직 주문빈렬사에게서만 보아낼 수 있으니 주문빈 발자취를 좇아 당산시와 당산시 풍윤구 기동렬사릉원과 양가포렬사릉원을 찾은 것은 올해 2017년 4월 27일과 28일이였다.   교동반도에 벗꽃이 아름답게 피여나던 4월 26일, 산동성 위해시 영성(荣成)역에서 제남 행 고속렬차가 출발하니 시침은 오후 3시 35분을 가리킨다. 위해와 연태를 거치며 제남역에 도착하니 밤 8시 12분, 옹근 네시간 30분을 흘러보냈다는 말이 된다. 이날 밤 제남역 철도호텔에 투숙하였다가 이튿날을 잡아 당산 행 고속렬차로 제남역을 출발한 것은 오전 8시 52분이려니 이번 행은 두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산역에 이르니 정오 11시 26분이다. 점심시간이라 당산시의 기동렬사릉원은 문을 열지 않는단다. 정오 사이 시간을 헛보낼 수가 없어 택시로 ‘당산항진(抗震)기념비’를 찾으니 당산항진기념비는 당산역에서 동으로 10여리 상거한 당산시의 중심구역 넓은 광장에 거연히 솟아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76년 7월 28일 새벽, 이곳에서 중외를 진감한 7.8급 당산대지진이 일어나면서 24만여명의 생명을 앗아갔으니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소소리 높이 솟은 당산항진기념비는 그날의 참상을 알리면서 필자를 41년 전 그 나날로 이끌었다. 부근에는 당산항진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정오라 문을 닫은 상태다. 조용히 당산항진기념비를 거닐며 력사속에 묻히다가 다시 택시를 잡고 그닥 멀지 않은 남쪽가의 기동렬사릉원을 찾으니 아니나 다를가 기동렬사릉원 철대문 정문은 닫겨져 있다. 나이지숙한 택시운전사는 당산에는 당산항진기념비 뿐만 아니라 당산지진옛터기념공원도 있다고 튕겨준다. 내친걸음으로 그 택시 그대로 시가지 남쪽 변두리에 위치한 옛터기념공원을 찾으니 놀랍게도 41년 전 공장건물 잔해가 그대로 보이고 그날의 순난자 24만여명의 이름을 새긴 거대한 이름벽 10여개가 일렬로 길게 길게 뻗어있다. 옛터기념공원에는 당산지진박물관도 있어 당산대지진의 력사사진 이모저모를 처음으로 볼 수가 있었다. 2 기동렬사릉원 구내 높이 34.5메터의 웅위로운 렬사기념탑 처음 이른 당산에서 무엇을 볼가. 처음이 주문빈 동상을 모신 기동렬사릉원이라면 그 다음은 흘러간 당산대지진 력사흔적이 아닐가. 정오라 기동렬사릉원이 문을 닫은 덕에 당산항진기념비와 당산지진옛터기념공원, 당산지진박물관을 돌아볼 수 있었으니 시간을 헛보낸 것이 아니였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오후 1시 30분이 되여온다. 택시운전사는 택시를 다시 당산시 로남구릉원로(路南区陵园路) 2번지에 위치한 기동렬사릉원으로 돌리였다. 마침 기동렬사릉원 정문에 이르니 문은 열리여 있다. 그때까지 점심식사를 하지 못했더니 할 겨를도 없었다. 발걸음도 가벼이 고전 문패루(牌楼)형식으로 된 정문안에 들어서니 송림으로 우거진 7.5만 평방메터의 릉원이 맞아주었다. 그때에야 필자는 기동렬사릉원은 1958년 청명절에 락성되여 사회에 개방되였지만 1976년 7월 28일의 당산대지진으로 하여 릉원의 모든 건축물이 평지로 되였다가 1986년에 다시 준공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기동렬사릉원 정문 안내비 앞에서 고전 문패루 정문에 이어 필자를 맞아준 건축물은 높이 34.5메터에 이른다는 웅위로운 렬사기념탑. 흥미로움은 기념탑의 네 면 모두가 로일대 무산계급혁명가들인 주덕, 림백거, 팽덕회, 소극의 제사로 이루어진 것. 기념탑 정면 남쪽 면은 주덕의 제사로, 북쪽 면 안쪽은 팽덕회의 제사로 되여 보다 인상적이였다. 렬사기념탑 북쪽은 건축면적 2,146평방메터를 알리는 기동렬사기념관이라지만 아쉽게도 다른 사람 하나 얼씬하지 않는 릉원은 기념관 문을 꽁꽁 닫고 있었다. 얼마나 맹랑하던지. 멀리 위해 석도에서 제남까지, 제남에서 다시 당산으로 달려왔건만 기념관 복은 비껴가기만 한다. 다행히도 기동렬사기념관 앞은 송림속 동서 량측 록지에 대표적인 20명 기동혁명선렬들 동상을 모시여 마음이 많이 풀리였다. 바이두(百度)에서 언녕 찾아본 동상구역이여서 인상이 깊다지만 자기 눈으로 직접 보는 인상은 보다 깊어만 진다. 기동렬사릉원 최북쪽 렬사묘소 구내에 모셔진 원 주문빈 묘소 끝끝내 자기 발로 당산 기동렬사릉원 내 주문빈동상을 찾은 기쁨과 감수는 이루다 말할 수가 없다. 주문빈동상은 기동렬사기념관 앞 동쪽 구역에 반신상으로 나타났다. 석가장 화북렬사릉원의 주문빈동상에 이어 두번째로 현지에서 직접 대하는 동상, 남쪽 멀리를 응시하는 주문빈의 모습이 그리도 정답기만 하다. 중공당산공작위원회 서기요, 중공기동지위 서기요, 중공기열변특위 조직부장이 아니던가. 3 기동렬사릉원 구내 기동렬사기념관 20명 동상 구내를 한품에 안은 기동렬사기념관 북쪽은 묘소구역으로 펼쳐진다. 묘소구역은 기동렬사릉원의 최북부에, 전체 면적 4,749평방메터, 렬사묘소 166자리에 178명 렬사로 이루어졌다. 그중 주문빈렬사묘소는 묘소구역의 중앙부 제일 앞자리에 모셔져 당산지구에서의 주문빈의 력사위치를 알 것 같았다. 하다면 기동렬사릉원 이곳의 주문빈묘소는 진짜 묘소일가. 그런 것이 아니였다. 주문빈렬사 유골은 하북성 소재지 석가장에 위치한 화북렬사릉원으로 언녕 이장하였다니 이곳 묘소는 원 묘소를 그대로 모신 것이리라. 어언 기동렬사릉원을 떠날 때도 되여온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찾아볼가. 발걸음은 가볍지가 못하다. 기동렬사릉원 내 기동렬사기념관을 보지 못한 유감에서이다. 그러던 기회가 숨박곡질하듯 그 이튿날로 다시 펼쳐졌으니 옛말 같기만 하다. 내친 김에 기동렬사릉원에 이어 그길로 당산 중심부에서 북으로 28키로메터 떨어진 당산시 구내 풍윤구로, 풍윤구에서 다시 남으로 15키로메터 상거한 양가포렬사릉원으로 다녀오니 5.1절 대목이라고 고속렬차요, 모든 귀가표가 없다나. 귀가 고속렬차표는 4월 29일로 안겨지니 기동렬사릉원을 다시 찾을 기회가 주어진 것이였다. 기동렬사기념관 내 주문빈 전시물을 배경으로 이튿날 4월 28일 오전 9시 직후 필자는 기동렬사릉원을 다시 찾았다. 릉원 구내는 한적하기만 한데 한 젊은 녀성이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보매 렬사릉원의 사업일군 모습이라 무작정 청부터 들이댔다. 멀리멀리 동북 길림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주문빈을 찾아 달려왔는데 이곳 릉원 내 렬사기념관을 보지 못함이 유감이라 다시 찾아왔다고 하니 그녀는 련락해주겠으니 잠간 기다리라고 한다. 과연 조금 후 곡위(谷伟)라고 부르는 릉원 선전과의 젊은 남자일군이 찾아주었다. 그는 먼곳에서 온 분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리유가 없다면서 렬사기념탑 구내를 지나 렬사기념관으로 나를 안내하더니 기념관의 문을 하나하나 열어주며 등불을 일일이 켜주었다. 그 덕분에 기동렬사기념관의 한 구내에서 사진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국제주의 전사 주문빈〉 전시를 찾을 수가 있었다. 주문빈렬사 전시는 기동렬사기념관 주요 전시의 한 부분을 이루어 위인으로서의 주문빈의 위치를 잘 알려주고 있었다. 1958년 청명절에 기동렬사릉원을 찾은 주문빈렬사 어머니 홍기주와 녀동생 김신정 옛 사진  /이상 사진 2017년 4월 27일, 28일 촬영 당산시 기동렬사릉원의 주문빈 동상과 묘소, 기념관 내 기념전시물은 이렇게 이 땅의 중국조선족사회에 사실 그대로 알려지게 되였다. 그러는 발걸음은 정말이지 가볍기만 하고 마음은 즐겁기만 하다. 주문빈렬사여, 길이길이 빛나시라 ! 2017년 5월 4일 위해 석도에서 길림신문
548    [겨레렬사비13]동욕진 상무촌의 무명렬사묘 댓글:  조회:1029  추천:0  2017-05-16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13) □ 리 함 1 1941년 1월 10일, 태항산 항일근거지 동욕진 상무촌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설립대회가 열리였다. 회의에서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가 중공중앙과 팔로군을 대표하여 연설을 하였다. 팽덕회는 조선동지들의 련합과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설립을 축하하고 나서 항일투쟁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운 조선동지들에게 숭고한 혁명적 경의를 표시하였으며 조선동지들은 광범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제를 타승할 때까지 싸워 보다 휘황한 위훈을 세울 것을 희망하였다.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위치한 동욕진 상무촌은 오늘의 산서성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으로서 상무촌 뒤로는 하늘을 찌르는 듯한 웅장한 바위산이 일어서고 바위산 아래에는 규모가 상당한 불교사찰 홍복사(洪福寺)가 자리하고 있었다.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을 거쳐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달려온 30여명의 조선혁명가들이 이 홍복사에 자리잡았고 이 홍복사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설립대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2009년 8월 21일, 필자가 태항산항일근거지 현지답사 차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을 찾으니 홍복사는 촌의 동쪽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제날 홍복사는 보이지 않고 꽤나 길다란 단층집 하나만 달랑 남아 북방의 손님을 맞아준다. 알고 보니 당년 일본침략자들이 불살라버린 결과였다. 오늘의 단층집은 그대로 불교의 절로 리용되고 있었고 절 정문가에는 조선의용대 주둔지라고 밝힌 글자가 적혀있었다. 그 시절의 홍복사는 비교적 컸기에 조선동지들 뿐 아니라 로신예술학교와 위생학교도 자리잡았으며 라서경을 비롯한 팔로군 전선총부 주요 지도자들도 거주하였다고 전해진다. 1941년 1월 10일,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설립대회가 열렸던 동욕진 상무촌의 불교사찰-홍복사 현재 건물. /2009년 8월 21일 현지촬영 조선동지들이 이곳 상무촌 홍복사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40년 겨울로 알려진다. 조선의용대 출신들이 아닌 연안 등지에서 온 30여명 조선동지들이 첫패로 된다. 그들은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로신예술학교 등 사생들이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늘 다양한 야회를 가지였다. 야회는 야회 그대로 밤에 가지면서 널다란 마당에 우등불을 피워놓고 춤과 노래를 즐기였다. 그때마다 빠짐없이 울려퍼지는 노래는 〈아리랑〉 노래였다. 〈아리랑〉 노래에 호기심을 가진 학교 사생들과 마을 사람들은 따라 부르다가 제법 잘 부르며 엄지손가락을 내들었다. 그러나 중국동지들과 마을 사람들은 아리랑노래를 곧잘 따라 부르면서도 그 뜻은 알지 못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책임자 진광화는 중국동지들에게 조선민요 〈아리랑〉의 뜻을 보다 잘 알리기 위하여 〈아리랑〉 노래 가사를 중국어로 번역하고는 하나하나 차근히 설명하여주었다. 〈아리랑〉의 뜻을 알게 된 중국사람들은 조선동지들과 어울릴 때면 언제나 〈아리랑〉노래를 부르며 조선동지들에 대한 진지한 감정을 표달하군 하였다. 2 그러던 1941년 초 한겨울이였다. 조선동지들이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온 지 얼마 안 되던 때인데 하루는 한무리 일제침략군들이 상무촌을 기습하였다. 홍복사와 마을에 있던 조선동지들은 재빨리 마을 부근의 유리한 지세를 차지하고 적들을 맞아 싸웠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산으로 피신해서야 조선동지들은 싸움터에서 물러섰지만 이미 2명의 조선동지가 희생된 뒤였다. 마을에서는 리금주(李金柱)라고 부르는 농민 한사람이 숨지였다. 그러나 조선동지들의 군사엄호를 받지 못한 부근의 동욕촌에서는 150여명 마을 사람들이 일본놈들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가져왔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에서는 희생된 두 동지를 홍복사에서 멀지 않은 산비탈에 고이 모시였다. 그때로부터 이곳 상무촌의 사람들은 조선동지들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며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자발적으로 조선렬사의 무덤을 관리하여 나섰다. 그 진두에서 조선의용대 렬사묘를 묵묵히 지켜준 분은 마을의 조은경로인이였다. 조선동지들이 상무촌에 머무르던 그 나날 조은경로인은 10대 소년이였는데 일찌기 어머니를 여읜데서 셋째삼촌집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마침 셋째삼촌집에는 조선의용대 간부 2명이 류숙하고 있어 그는 늘 조선동지들과 격이 없이 어울리였다.   당년의 10대 소년이던 조은경할아버지와 무명렬사묘. /자료사진 1941년 봄 이후 국민당 항일전장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주력이 선후로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전이하여 왔다. 1940년 겨울 적후에서 첫패의 조선동지 30여명이 상무촌에 이른 후의 계속이였다. 이렇게 모여든 조선의용대와 조선동지들은 모두 100여명에 달하였다. 이들 100여명은 화북조선청년련합회에 소속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재편성되였는데 화북지대 지대장은 박효삼, 부지대장은 리익성, 정치지도원은 김학무가 맡아보았다. 화북지대 본부는 동욕진 상무촌에 설치되고 상무촌과 좌권현 마전진 운두저촌(麻田镇云头底村) 두곳이 조선의용대의 주둔지로 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대부분 동지들이 운두저촌에 주둔하면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다. 2009년 8월 21일 그 날 필자는 동욕진에서 멀지 않은 마전진 운두저촌에도 가보았다. 운두저촌은 300여세대에 1,000여명 인구를 가진 마을인데 마을어구에 해묵은 홰나무 한그루가 있어 퍼그나 인상적이다. 보다 인상 깊은 것은 마을의 서남쪽가에서 남각(南阁)이라고 불리우는 작은 문루(门楼)이다. 문루의 바람벽에는 항일의 피어린 나날 조선의용대 동지들이 써놓은 항일구호—“왜놈의 상관놈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 등 여러 구호들이 씌여져 있었다. 이런 항일구호들은 오랜 세월 속에 퇴색하였지만 흰색을 새롭게 올리여 잘 보이였다. 운두저촌에서도 조선의용대가 부르는 〈아리랑〉 등 조선노래가 끊임없이 울려퍼지였다. 〈아리랑〉 노래나 〈아리랑〉 이야기는 기실 조선의용대의 탄생과 함께 전해지는 주요 노래와 이야기로 유명하다. 조선의용대 제2지대는 1939년 3월, 계림시절에 이미 가극 〈아리랑〉까지 무대에 올렸다면 조선의용대 제3지대 북상길에서도 〈아리랑〉 노래가 울려퍼지였다. 3 때는 1941년 새해 년초인 1월 초였으니 조선의용대 제3지대는 중경의 총대부를 떠나 민생호 기선으로 장강을 따라 북상길에 오르게 되였다. 그들 일행은 조선의용대 부대장 박효삼과 제3지대 정치지도원 석정, 지대장 김세일, 문명철, 최채 등 20여명으로서 첫새벽에 중경을 떠나 그 날 저녁 무렵에 만현(万县) 부두에 이르렀다. 마침 만현에는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상해동남의학원(上海東南醫學院) 출신 민족혁명당 당원 최성오(崔省吾)가 있어 석정 일행은 최성오 부부의 뜨거운 초대를 받았었다. 그 날 저녁 초대석에서 석정은 최성오의 초대에 감격한 나머지 행군 도중에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제3지대 금주령(禁酒令)까지 해제함을 보이였다. 술이 거나한 대원 김무가 선참 〈각설이타령〉을 부르자 초대석은 인차 오락회로 번지였다. 〈아리랑〉 노래를 비롯한 조선노래, 중국노래, 일본노래, 쏘련노래가 마구 쏟아지면서 흥이 났다. 석정은 라운규의 조선영화 《아리랑》 해설을 줄줄 내리 엮으면서 나라 잃은 겨레의 피눈물의 한을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석정은 〈아리랑〉에 심취되여 있었고 고향의 노래 〈밀양아리랑〉을 부르기를 즐기였다. 도로변인 상무촌 바깥 입구에 세워진 ‘순국선렬전적비’ /2009년 8월 21일 현지촬영 그러던 〈아리랑〉 노래가 태항산근거지 상무촌에서 울려나오고 운두저촌에서도 울려나온다. 조선의용대는 〈아리랑〉의용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였다. 조선동지들과의 스스럼없는 관계속에서 10대의 소년 조은경은 조선의용대의 래력을 알게 되면서 감탄해마지 않았다. 조선동지 둘이 희생된 후 그는 조선의용대는 마을사람들을 구해준 은인이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준 미더운 사람들이라며 렬사묘 관리를 자각적으로 맡아나섰다. 한편 필자로서는 유감도 없지 않았다. 2009년 8월 21일 동욕진 상무촌을 찾고 마을 저쪽가에 자리한 홍복사를 찾았으나 조선동지 묘소로 되는 무명렬사묘까지는 이를 수가 없었다. 원인은 갓 큰비가 내린 탓이였다. 땅이 질척질척하여 마을의 안내자를 찾는다는 것이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무명렬사묘로 향하는 토지뇌 골안 어구가 전부 풀밭으로 덮인데다가 풀밭 모두 큰비에 후줄근히 젖어들어 헤치고 나갈 수가 없었다. 풀밭을 헤친다는 것은 입은 옷이고 온몸이 물병아리로 된다는 말이니 물러서야만 했다. 4 그로부터 8년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필자는 천만유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고마운 것은 조은경로인이 75세이던 2004년에 상무촌의 홍복사를 찾고 무명렬사묘를 찾은 한패의 조선족 답사조를 안내하며 취재를 받아들인 것과 필자의 현지답사가 있은 3년 후 2012년, 83세의 고령에 또 한패의 우리 조선족 답사조 현지답사를 다시 안내하여 나선 것이 아닐가. 조은경로인은 한두해도 아닌 장장 70년도 넘는 세월 속에서 어느 해도 거르지 않고 무명렬사묘를 찾아주며 묵묵히 지켜주었으니 진정 고마운 분이기만 하다.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을 찾던 날, 필자는 어쩔 수 없이 이 마을의 토지뇌에 일어선 무명렬사묘를 찾지 못하고 돌아서다가 상무촌의 한 흙집에서 흙벽에 붙어있는 ‘로신예술학교옛터’ 낡은 간판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낡은 간판은 글자를 알아보기도 쉽지 않았으나 유서 깊은 이 마을이 태항산근거지에서 활동한 로신예술학교의 발자취를 너무나도 잘 알리고 있었다. 조선동지들과 어울려 돌아가는 로신예술학교의 학생들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좌권현 마전진 운두저촌의 남각으로 불리우는 작은 문루는 ‘조선의용군항일표어’ 문루로 되여있다. /2009년 8월 21일 현지촬영 꼭 설명하고 지날 것은 로신예술학교의 발자취를 잘 모르는 이들은 우리 겨레 음악가 정률성도 이 마을의 로신예술학교에서 활동한 줄로 알고 있다는 착각이다. 사실 정률성이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부임하는 무정장군을 따라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42년 8월의 일, 그때 동욕진 상무촌과 멀지 않은 마전진 운두저촌에서 활동하던 조선동지들은 산서와 하북의 접경지대에 자리한 하북성 섭현 중원촌으로 언녕 전이한 뒤였다. 최근년간에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 무명렬사묘와 상무촌 입구에는 선후로 각기 기념비가 새로 세워졌다. 상무촌 무명렬사묘의 ‘의용군렬사지묘’ 기념비는 상무촌 전체 촌민들의 이름으로 2002년 음력 10월 1일에 세워지고 상무촌 입구의 돌거북 우에 세워진 기념비는 한국 순국선렬유족회와 좌권현인민정부에서 조선의용군 태항산지구 항일전 ‘순국선렬전적비’로 2002년 12월 26일 세웠다. 이곳의 두 기념비는 당년 조선의용군이 활동했던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세워진 여러 기념비 가운데의 두 기념비로 력사의 땅 상무촌에, 인민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여 고무를 주고 있었다. 2017년 3월 15일 정리 길림신문
547    [겨레렬사비12]진광화 석정 묘소에 깃든 이야기 3 댓글:  조회:1367  추천:0  2017-04-28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12) □ 리 함 1 리화림의 회고가 이러하다면 연안에서 활동하던 정률성이 태항산으로 온 시간도 1942년 8월일가? 이에 대한 해답은 정률성의 안해인 정설송(丁雪松)의 장편회고문에서 너무도 잘 나타난다. 정설송은 1981년 12월에 북경에서 쓰고 1982년 4월에 수정한 《영원한 기억(永存的记忆)》이란 장편회고문에서 연안을 떠나 태항산으로 간 시간을 1942년 8월로 밝혔다. 이 같이 보면 정설송의 회고와 리화림의 회고는 어김없이 맞아떨어진다. 두 회고 모두 연안에서 태항산으로 갔고 출발도 홀몸이 아닌 무정과 정률성 두 사람으로 밝혀진다. 태항산으로 갈 때 그들은 수수한 중국인 농민복장을 하고 떠났는데 정률성은 우에는 검은색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흰 수건을 둘렀다. 그때 정률성이 남긴 사진이 이런 모습임을 알리고 있다. 이쯤하면 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부임되여 갈 때가 확실히 1942년 8월이라고 단언할 수도 있지 않을가. 이는 또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가 당중앙에 청시하면서 무정을 새로 개편된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파견할 것을 요구한 시간인 1942년 7월과도 맞아떨어진다. 팽덕회의 청구에 따라 중공중앙과 중앙군위에서는 즉각 비준지시를 내렸으니 1942년 8월에 연안을 떠남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렸다. 섭현 석문촌 련화산 아래 좌권장군 원 묘소  /2009년 8월 20일 현지촬영 이에 앞서 조선의용대는 원 활동지들인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과 마전진 운두저촌(云头底村)을 떠나 태항산항일근거지의 섭현 섭성진 중원촌(일명 곡원촌-曲原村)으로 활동지대를 옮겼다. 1942년 여름에 이르러 1938년 10월 10일 한구에서 건립된 조선의용대의 북상이 기본상 끝났다. 이 해 7월 중순에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중원촌 주둔지에서 제2차 대표대회를 가지고 본 회를 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개편된 조선의용군은 팔로군의 통일지휘하에 태항산근거지에 본부를 두고 화북 각지에 지대를 두었다. 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정식 부임한 곳은 태항산근거지 내 하북성 섭현 중원촌으로 알려진다. 이에 따라 2009년 8월 20일, 무정과 무정 소속 조선의용군의 발자취를 좇아 하북—산서 접경지대의 하북성 섭현 중원촌을 처음 찾았다. 중원촌은 조선의용군 본부가 자리잡은 태항산항일근거지의 한 마을로서 섭현 현성에서 청장하(清漳河)를 따라 서쪽으로 5키로메터 떨어진 청장하 기슭의 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중원촌 마을에 들어서니 마을은 청장하가 흐르는 평야에서 산아래 언덕으로 치달으며 나타났다. 처음 눈에 띄는 것이 촌사무실로 보이는 단층집 대문가에 달린 섭성진 중원촌(涉城镇中原村) 지부위원회와 촌민위원회 간판이다. 마침내 당년 조선의용군이 활동한 태항산항일근거지 심장지대에 들어서고 중원촌의 사람들은 멀리 동북땅에서 온 이 조선족 나그네를 열성적으로 대해준다. 2 물어물어 지난 세기 40년대 초반 우리 조선의용군 본부가 자리잡은 원정사(元定寺)를 찾으니 원정사는 옛 모습 그대로, 마을의 제일 높은 지대로 보이는 언덕 우 색바랜 낡은 단층집으로 시야에 안겨들었다. 사합원(四合院) 형태를 이룬 원정사 단층집 바깥은 담장모양으로 담장벽을 이루고 대문에 들어서면 네 면이 모두 각이한 건축구조를 가진 여러채의 회색 벽돌집으로 둘러있다. 마을의 안로인 몇분이 원정사 내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필자가 동북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온 조선족이라고 소개하자 무척 반기면서 이 원정사가 당신들 조선의용군 본부가 자리잡은 중심부라고 했다. 중원촌의 안로인들과 대문가 세멘트로 된 표지석에는 한단시 문물보호단위 완정사(邯郸市文物保护单位完定寺)로 되고 대문 바로 우에는 원정사(元定寺)로 나타나니 웬 일인가고 물었다. 그들은 너나없이 이 옛 절은 조선의용군이 활동하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원정사’로 통한다고 긍정적으로 말하였다. 섭현 련화산 아래 진광화, 섭정 원 묘소.  /2009년 8월 20일 현지촬영 필자는 당년 우리 겨레 조선의용군 본부가 자리한 태항산의 중원촌에 서고 있었다. 당금이라도 무정이며 정률성이며 환히 웃는 모습으로 대문가에 들어서는 것 같고 〈아리랑〉노래를 부르는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웃고 떠들며 즐기는 것만 같다. 1942년 8월, 무정장군을 따라 연안을 떠난 정률성이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처음 들어선 곳이 이곳 중원촌 원정사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 시절 중원촌 원정사는 많이는 학교 교실로 리용되고 부족되는 류숙지는 흔히 주변의 민가에 잡았다. 필자는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원정사 주변에서 당년 조선동지들이 머무른 민가 여러채를 찾았다. 민가 주인들은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류숙한 적이 있는 한단락 력사를 집의 자랑으로, 마을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원정사 내에서 휴식하던 마을의 안로인들은 더구나 그러하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들중 한 안로인은 무정사령원을 알고 있다면서 엄지를 내들었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뜻이였다. 섭현의 중원촌은 팔로군 129사 사령부가 자리잡은 적암촌(赤岸村)과 청장하(清漳河)를 사이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조선의용군에 대한 당중앙과 팔로군총부, 129사 사령부의 뜨거운 사랑과 깊은 배려였다. 조선의용군 신임 사령원 무정이 중원촌에 이르자 그 달 8월, 팔로군총부와 129사 사령부, 근거지당조직에서는 근거지군민들에게 통지를 내여 피어린 항일전쟁에서 영용히 희생된 진광화, 석정 등 조선동지들의 영웅업적을 널리 학습할 것을 호소하였다. 3 한편 적암촌과 중원촌에서 멀지 않은 태항산의 섭현 련화산(莲花山) 기슭에 좌권(左权)장군과 진광화(陈光华), 석정(윤세주 尹世冑)의 유체를 모신 진기로예(晋冀鲁豫) 항일순국렬사릉원을 건설하였다. 렬사릉원은 련화산 아래, 청장하반에 위치한 섭현 석문촌(石门村) 가까이에 자리잡았다. 렬사릉원의 묘비는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창립시 선전부장이였던 조선의용군 화가 장진광이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해 10월 10일, 5월 반‘소탕’전에서 영용히 희생된 팔로군 부참모장 좌권과 화북조선청년련합회 부회장이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위원인 진광화, 조선의용대의 우수한 지도자의 한 사람인 석정 등 순난렬사의 추도대회를 장중히 가졌다. 팔로군총부, 중공중앙 북방국, 팔로군 129사, 태항군구, 진기로예변구정부와 각 군정, 민중 단체 대표 5,000여명이 추모대회에 참가하였다. 추도대회는 팔로군총부 등대원 부참모장의 사회하에 류백승, 등소평, 라서경, 변구정부 주석 양수봉 등 동지들이 참가하였다.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부임한 무정과 정률성 등 조선의용군 전체 동지들도 추도회에 참가하였다. 진광화 원 묘소  /2009년 8월 20일 현지촬영 주덕 총사령께서 이날 추도대회에 제자를 보내왔다. 라서경이 추도사를 드렸다. 그는 추도사에서 “국제주의정신을 남김없이 보여준 조선동지들의 피는 이미 우리의 피와 함께 흘렀다”라고 하였다. 주덕, 엽검영 등 동지들은 여러번 글을 써서 항일의 싸움터에서 희생된 조선동지들을 추모하였다. 주덕은 〈자유 위해 희생되였거니 그 생명 영원하리〉라는 추모연설에서 조선동지들의 희생정신과 국제주의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연안 《해방일보》 1942년 9월 20일) 우리의 조선혁명동지 11명이 희생되였다. 그들은 중국의 민족해방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생전에 우리 화북군민과 동심협력하고 함께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숭고한 국제주의정신을 보여주었다… 자유를 위해 희생된 투사들의 생명은 영원할 것이다. 그들의 전투정신은 자유를 전취하기 위해 싸우는 중조 인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그들이 몸 바쳐 싸운 위업은 더 많은 투사들에 의하여 계승 완수될 것이다. 이는 주덕 총사령이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섬감녕변구지회가 연안청년구락부에서 가진 재화(在华)조선순난렬사 진광화, 석정 등 11명 동지 추도식에 모처럼 참가하여 한 연설의 한부분이다. 엽검영도 〈희생된 조선의용군동지들을 추모하여〉란 추모글에서 조선동지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4 조선의용군은 1938년 10월 10일에 창건된 이래 여러 싸움터로 이동하여 싸우면서 4년을 하루와 같이 항일민중을 조직하고 대 적군 선전사업을 벌렸다. 특히 호북의 통산과 곤산, 호남의 석산, 광서의 곤륜산 및 화북에서 벌어진 여러 전역과 반소탕전에서 이 군대의 동지들은 모두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나가며 죽음을 초개같이 여기는 정신으로 싸우고 사업함으로써 적들에게 침중한 타격을 가하고 억압과 노역을 당하고 있는 (일본군과 괴뢰군의) 병사, 농민, 조선거류민들에게 투쟁의 방향을 가리켜주고 팔로군, 신사군의 행동에 유력하게 배합하였다. 진광화-석정 렬사가 처음 묻혔던 초장지-진기로예항일순국렬사릉원은 풍수가 좋은 태항산의 웅장한 련화산 아래, 청장하반에 위치한 섭현 석문촌 구내에 자리잡았다. 2009년 8월 20일 오전에 섭현 현성 부근인 적암촌과 중원촌 현지답사를 마친 후 오후시간을 타서 택시로 석문촌으로 갔다. 진기로예순국렬사릉원은 석문촌에서 조금 떨어진 련화산 아래 높은 지대로 펼쳐진 펑퍼짐한 언덕우에 위치하고 있었다. 석정 원 묘소  /2009년 8월 20일 현지촬영 택시는 조금 후 련화산 아래에 이르렀다. 처음 보이는 것이 이곳 언덕 아래 단층집을 이룬 ‘조선의용군렬사기념관’이고 그 아래에 꽤나 되는 공지를 만들어 정차하기가 좋았다. 공지 오른쪽은 수림 속에 꼭대기에 오각별을 올린 좌권장군 기념탑과 좌권장군 원 묘소가 보였다. 좌권장군 묘소는 여러 계단을 이루며 나타나 필자에게는 하나의 땅크 모양으로 형상화되였다. 좌권장군 묘소 왼쪽 가장 높은 언덕우에 진광화와 석정 원 묘소가 떠올랐다. 좌권장군의 묘소보다는 많이 작은 편이지만 모두가 조선의용군 화가 장진광이 설계한 터에 묘소 설계는 하나의 풍경선을 이루었다. 왼쪽이 진광화렬사 묘소이고 오른쪽이 석정 묘소로 나란히 펼쳐진 속에 뒤쪽은 ‘중한우의림’으로 되여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한단으로 옮겨지기 전 진광화-석정 첫 초장지였다. 진광화-석정 묘소에서 여러 계단을 이룬 돌계단을 따라 한참 내려가면 택시가 머무른 공지이고 그 공지에 조선의용군렬사기념관이 꾸려져 크나큰 위안을 받았다. 기념관에는 조선의용군 활동 사진들과 더불어 추모대회에 참석한 등소평, 류백승 등 팔로군총부 주요지도자들의 사진이 유난히 인상적이였다. 이 사진은 등소평이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좌권장군과 조선의용군 렬사 추모대회에 참석한 유일한 사진이라고 한다. 련화산 아래 진광화, 섭정 묘소 구간 조선의용군렬사기념관   /2009년 8월 20일 현지촬영 /2017년 3월 18일 재정리 길림신문
546    [겨레렬사비11]진광화 석정 묘소에 깃든 이야기 2 댓글:  조회:1295  추천:0  2017-04-21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11) □ 리 함 1 모택동은 벌써 옹근 하루 낮과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27일 밤에도 잠들 수가 없었다. 만약 팔로군총부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어느덧 동녘이 희붐히 밝아왔다. 이때 129사 류백승부대에서 팽덕회가 부대를 이끌고 석회요(石灰窑) 서북방향에서 포위를 헤치였고 좌권이 포위돌파중 장렬히 희생, 라서경 등 동지들이 흑룡동(黑龙洞) 방향에서 포위를 헤쳤으나 또 적들과 조우하게 되였다는 전보가 왔다. 모택동은 금방 온 전보문을 갖고 주덕을 찾았다. 이 두 로전우의 얼굴에는 더없는 초조와 불안이 비꼈다. 허나 팽덕회가 있는 한 총부가 있고 총부가 있는 한 태항산 항일근거지가 엄연히 존재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었다. 그 시각도 100여명의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목숨을 내걸고 팽덕회 부총사령과 팔로군총부를 지켜 싸우고 있었다. 5월 27일 새벽, 하청구에 이른 후 라서경은 긴급회의를 열고 아군의 전체 비전투원들은 분산시켜 각기 행동하라고 지시하였다. 조선인 40여명 비전투원들은 한밤중에 화옥산(花玉山)에 이르렀다가 또 4개 분조로 갈라졌다. 조선의용군 지도자인 석정, 진광화 등이 희생된 오늘의 장자령, 하북성 섭현 경내에 위치해있다. 진광화, 석정, 최채 등이 소속한 분조는 녀성도 몇명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권총 한자루와 수류탄 몇개 밖에 없었다. 날샐 녘에 그들은 한 산비탈의 관목림에 숨었다가 100여명의 적들에게 발견되였다. 진광화는 숲속의 동지들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석정, 최채 두 동지를 보고 셋이서 적들의 주의력을 딴 데로 끌자고 하였다. 그들 셋은 숲속에서 나와 산비탈을 따라 죽기내기로 내달았다. 진광화의 지시에 따라 그들 셋은 또 세갈래로 갈라져 뛰면서 적의 화력을 분산시켰다. 찰나 진광화와 석정이 부동한 지점에서 각기 다리에 부상을 입고 더 뛸 수 없었다. 진광화는 적들의 시선을 벼랑가에로 끌었다. 적들이 거의 다가들 무렵 진광화는 주저없이 벼랑에 훌쩍 몸을 던졌다. 적들이 진광화에게로 쏠리는 그 사이 석정은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기여서 벼랑사이에 몸을 숨겼다. 우리 글로 된 《석정전기》에는 “적들이 퇴각한 후 동지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희생되여있었다.”라고 씌여있지만 중문 연구자료는 이와 다른 면을 보이고 있어 주의를 끈다. 인터넷 http://blog.sina.com-청산간객(清山涧客)에는 〈태항아리랑 조선의용군의 이야기〉라고 제목한 상영생(尚荣生)의 텔레비죤 특별프로 해설사가 올라있는데 시간은 2007년 4월 2일이고 해설사에는 이런 단락이 있어 주의를 끈다. “…우리는 몇번이나 조선의용군 지도자 석정, 진광화 등이 희생된 장자령(庄子岭)에 올랐다. 산우에는 지금도 팔로군과 조선의용군 상병원들이 들어있던 산굴이 있다. 그때 석정은 포위돌파를 지휘할 때 몸에 중상을 입었는데 피가 멈추지 않았다. 전우들은 그를 장자령의 한 산굴에 전이시켰지만 사흘이 지나 피를 너무 흘린 탓으로 장렬히 희생되였다.” 2 상영생은 태항산 련화산자락에 있는‘조선의용군렬사기념관’관장으로 알려진다. 상영생의 이 텔레비죤 특별프로 해설사로 보아 석정이 희생될 때 석정 한사람 뿐이 아니였다. 해설사에 따르면 1942년 5월에 있은  반‘소탕’의 나날에 장자령에는‘팔로군어머니’라고 불리우는 리재청(李才清)녀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남편과 아들들과 함께 목숨을 내걸고 수십명 팔로군과 조선의용군 상병원들을 하나하나 장자령의 산굴에 옮긴후 보살폈다. 석정도 그가 보살핀 조선의용군 상병원가운데 한 사람이였을지도 모른다. 이 해설사의 저자인 상영생은 중국항일전쟁과 세계반파쑈전쟁 승리 60주년이 되는 해 여름에 한국손님들을 안내하여 장자령 산허리에 거주하는 리재청의 곽씨댁 옛집을 찾았다. 옛집 뜨락에는 100여년의 수령을 가진 호두나무와 버드나무 두그루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들을 맞아준 이는 리재청의 손자 곽수홰(郭树槐)였다. 곽수홰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거주한 방 뜨락에는 할머니 리재청이 무척 즐기며 아끼던 무궁화(木槿花) 두그루가 있다고 하였다. 무궁화라면 한국의 국화가 아닌가?! 흥분된 상영생 일행이 두그루 무궁화나무를 찾으니 무궁화나무는 꽃핀 상태로 푸르싱싱한 모습으로 맞아주었다. 할머니가 왜서 무궁화 두그루를 심었는가고 물으니 곽수홰는 모르겠다면서 당년 조선의용군 상병원들이 이 집에서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동을 달았다. 참으로 무궁화 두그루에 깃든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당년 영웅어머니로 불리운 리재청의 처소 그 후 한패 또 한패의 한국손님들이 해발 1700여메터의 이곳 태항산 장자령에 올라 진광화와 석정의 희생지를 찾아보았다고 해설사는 말하고 있다. 한국 MBC는 기록편 《태항산의 불꽃—조선의용군의 이야기》를 찍기까지 하였다. 그중 한국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라는 훈터 블로그에는 〈나의 항일무장투쟁기 답사기 1부〉가 보인다. 글에서 저자는 2013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한단, 섭현, 호가장 등지 화북지역 항일무장투쟁지를 현지답사하였다면서 석정, 윤세주 렬사가 부상을 입고 사경에 처했을 때 〈밀양아리랑〉을 불러달라고 하였다고 쓰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태항산 장자령 흑룡동에서 윤세주 렬사가 생전에 좋아하던 고향노래 〈밀양아리랑〉을 느린 곡조로 불렀다고 한다. 〈밀양아리랑〉노래 가사(진용선, 《중국조선족의 아리랑》, 한국 수문출판사, 2001년 1월, 제126페지.)는 이러하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씨구 넘어 넘어 간다 정든 님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 (후렴) 지척이 천리라더니 도랑사인데 호박잎만 흔들흔들 날 속인다 (후렴) 시화나 년풍에 목화풍년 들면 열석새 무명짜리 혼수차림 하세 (후렴) (리현기 창 김태갑 수집) 3 다시 당년 1942년 5월로 돌아가면, 5월 27일 밤에 포위를 헤친 팔로군총부와 북방국의 인원들이 소남산(小南山)림에 모였다. 팽덕회가 밀탈곡장에서 동지들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니 부총참모장 좌권과 진광화, 석정 등 수십명의 동지들이 장렬히 희생되였었다. 모두가 비분 속에 잠기였다. 이때 팽덕회가 동지들을 돌아보며 짙은 호남말투로 입을 열었다. “…동지들, 우리 모두 눈물을 닦고 이를 악물고 참모장을 위하여 복수합시다! 희생된 전우—조선동지들을 위하여 복수합시다! 비참하게 죽은 동포들을 위하여 복수합시다!” 이어 팔로군총부와 당중앙과의 련계가 이어지고 내외 협공으로 적들의‘5월대소탕’을 물리쳤다. 이번 반‘소탕’에서 조선동지들은 팽덕회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팔로군부대와 어깨 겯고 싸우면서 목숨으로 팔로군총부와 근거지를 지켜냈다. 그러나 팽덕회의 심정은 무겁기만 하였다. 팔로군총부와 북방국에 대한 적들의 습격으로 하여 좌권과 진광화, 석정 등 수십명 동지들이 장렬히 희생되였는데 이는 항전이 시작된 이래 팔로군 수뇌기관과 조선의용대가 당한 가장 큰 손실이였다. 조선의용대 전우들이 아니였더면 팔로군총부의 안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였다.   장자령의 한 바위에 새겨진 관련 글 팽덕회 부총사령은 반‘소탕’에서의 조선동지들의 역할과 희생을 여실히 당중앙에 보고하면서 조선동지들을 보호할 데 대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조선동지들을 아낄 데 대한 당중앙의 지시가 전달되였다. 그때부터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당중앙과 팔로군총부의 배려로 직접적인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정력을 집중하여 군사훈련과 정치문화학습에 몰두하였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팽덕회는 팔로군 야전정치부에 지시하여 중공중앙 북방국과 18집단군 야전정치부의 명의로 조선의용대 렬사 기념방법을 전문 규정하게 하였다. 팽덕회 부총사령의 지시에 좇아 팔로군총부와 변구당조직에서는 태항산근거지 군민들에게 통지를 내여 피어린 항전에서 영용히 희생된 진광화, 석정 등 10여명 조선의용대 렬사들의 영웅업적을 널리 학습할 것을 호소하였다. 한편 팽덕회는 당중앙에 청시하여 팔로군 포병퇀 퇀장이며 조선인인 무정을 새로 개편된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파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때 팽덕회는 팔로군 총사령 주덕이 연안으로 돌아간 후 태항산근거지와 화북 적후싸움터의 당, 정, 군, 민의 중책을 한몸에 짊어지고 있었다. 중공중앙과 중앙군위에서는 팽덕회의 청시에 따라 팔로군부대의 포병퇀 퇀장으로 있던 무정을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임명하게 되였다. 4 중공중앙의 임명과 더불어 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태항산근거지에 나타난 때는 언제일가? 1941년부터 1942년 7월까지 무정의 발자취를 쭈욱 헤아려보면 무정의 활동은 팔로군 포병퇀만이 아닌 화북조선청년련합회 활동, 조선의용군의 설립과 많이 이어진다. 무정의 조선의용군 사령원 정식 부임을 두고 어떤 자료는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2차 대표대회 기간인 1942년 7월이라 하고 어떤 자료는 1942년 말이라고 두리뭉실하게 말한다. 그러나 조선의용군 출신들이거나 조선의용군 관련 력사의 견증자들의 증언은 이와 다르다. 먼저, 조선의용군의 녀전사인 리화림의 장편회고의 한단락을 보기로 하자. “1942년 8월 ,당중앙에서는 무정동지를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태항산근거지에 파견하였다. 그때 정률성이 무정동지와 함께 연안에서 왔다.” (리화림, 〈진리의 향도 따라〉,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241페지.) 여기에서 리화림은 무정의 태항산근거지로의 파견시간을 1942년 8월이라고 밝히면서 이 시간대에 정률성과 함께 연안에서 왔다고 지적하였다. 그 후 리화림은 자기의 장편회고록 《머나먼 려정》에서도 1942년 8월의 주장을 견지하고 있다. “1942년 8월에 중공중앙은 무정동지를 파견하여 조선의용군사령부의 사령원을 담임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는 부임한 후 의용군전사들에게 정치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그때 나는 부녀대의 대장 직을 맡고 가정, 녀성 및 아동 사업과 군정학교의 후근사업까지 하였다.” 리화림은 첫 회고문으로부터 근 20년 세월이 흐른 지난 세기 90년대 초반까지도 이 같이 회고하여 변함없음을 보여주었다. 태항산 장자령을 찾는 유람객들     /이상 모두 자료사진 /2017년 3월 18일 재정리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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