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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 중국으로 온 후 댓글:  조회:938  추천:0  2020-09-13
중국으로 온 후   1   1923년 3월, 북경으로 온후 중국어가 생소한데서 무정은 선참 문화대학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웠다. 1924년에는 북방군관학교에 입학하여 포병과를 전공하였다. 일본학자 모리가와 노부아끼(森川展昭) 교수의 견해( 주. “관내지구 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회편” 하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1336페지)다. 중국과 한국의 무정 관련자료들을 검토하면 무정장군이 선참 문화대학에서 중국어를 배웠다는 견해를 같이하고있다. 북방군관학교 입학에 대해서는 견해가 전혀 다르다. 김순기선생은 북방군관학교가 아닌 보정군관학교(강무당)이며 이 학교 포병과를 졸업했다고 주장( 주.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1페지)한다. 무정장군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조선의용군 전사라 신빙성이 더 있어보인다. 중국과 한국의 허다한 자료들이 모두 김순기선생의 주장을 따른다.  무정장군 글을 비중있게 써낸 중앙인민방송국 기자 김성룡과 연변텔레비 기자 서봉학(徐凤学)도 보정군관학교설을 견지한다. 필자도 보정군관학교설에 의문을 가지질 않는다. 여러 면의 자료를 보면 모두가 보정군관학교에로 모아지고있다. 보정시는 하북성 중부에 위치하면서 북으로 수도 북경과 140킬로메터, 남으로 성소재지 석가장과 125킬로메터 떨어져있다. 보정륙군군관학교(保定陆军军官学校)는 보정 옛성에서 동북으로 5화리(5华里) 되는 동풍동로(东风东路) 585번지에 자리잡았다. 태항산항일근거지 첫 답사차 2009년 8월 14일에 보정에 이르러 보정륙군군관학교를 찾으니 전체면적 1500여무에 달하는 군관학교가 맞아주었다. 보정륙군군관학교 정문에는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륙군군관학교 간판이 걸리고 오른쪽 기둥에 보정군교기념관 간판이 내리 걸리여 여기가 그제날 보정군관학교임을 알리고있었다. 정문에 들어서면 단층집으로 된 학교건물이 안겨지면서 입구건물 정면의 군혼(军魂)이라는 커다란 금빛 두 글자가 유난히 눈부시였다. 이어  보정군관학교문물사료전시관을 찾아보니 문물사료전시관에는 1500여명의 졸업생 명단이 밝혀져있었다. 1902년부터 1923년까지 보정군관학교가 존재한 21년간 전후 9기에 걸쳐 근 1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할때 대부분 졸업생 명단은 밝히지 못한 현실이였다. 무정의 이름은 이곳 1500여명 명단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2   관련 소개자료를 보니 보정군관학교의 전신은 1902년과1903년에 꾸린 “북양륙군행정장변학당” (北洋陆军行营将弁学堂), “북양륙군속성무비학당”(北洋陆军速成武备学堂)이고 청정부가 중국에 처음으로 꾸린 최대규모의 전국적인 군관학교였다. 갑오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청정부는 군사를 진흥하고 신식군대 골간을 양성하기 위하여 매년 10만원의 경비를 학교에 지출함과 아울러 구라파, 미국, 일본 등 나라에서 교관을 초빙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해마다 외국에 류학생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장개석을 비록한 중국 국민당의 허다한 고급장교들이 이 학교의 졸업생이였다. 장개석의 회상에 의하면 그가 이 학교에 입학할 때 절강성에만도 1000여명이 지망을 했으나 입학할수 있는 사람은 겨우 14명밖에 안됐다고 한다. 그만큼 학교의 심사가 엄하고 입학점수선이 매우 높았다. 북경 문화대학서 초보적이나마 1년정도 중국어를 익힌 무정은 시험을 거쳐 보정군관학교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좋은 군사자질을 갖추었던 무정은 꾸준한 노력으로 포병전문가로 성장하였다. 보정군관학교 시절에 무정은 조선인으로서 군벌혼전을 이룬 국민당과 동북군 사이 남구전역(南口战役)에 참가하였다. 남구전역은 북경 13릉 서부에서 벌어졌다. 무정은 또 천진공격전에 참가하여 군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한후에는 국민당 염석산(阎锡山)부대의 포병대위(大尉)로, 22살 때에는 포병 중좌군관(中校军官)으로 활약하였다. 22살 때면 1925년을 가리킨다. 군벌간의 혼전에 언녕 실망을 느낀 무정은 미련없이 국민당군대에서 탈출하여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1925년 이해 장가구(张家口)에서 공산당원 문창빈(文昌彬), 명덕건(明德件)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후 무한에 이르러 당의 지하사업에 뛰여들었다. 1926년 5월 20일, 중국공산당의 직접적인 령도밑에 있는 국민혁명군 제4군 엽정독립퇀이 북벌군의 선견대로 선참 호남에 진격하여 북벌전쟁의 서막을 열어놓은뒤 7월 1일에 국민정부는“북벌선언”을 발표하였다. 7월 9일에 8개 군의 약 10만명이나 되는 국민혁명군은 서로, 중로, 동로 세갈래로 나뉘여 정식으로 북벌을 시작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영향과 추동, 인민군중의 지지밑에서 북벌군은 반년 남짓한 기간에 오패부(吴佩孚), 손전방(孙传芳)의 수십만명 주력부대를 소멸하고 중국의 절반땅을 점령하였다. 1927년 1월 광주의 국민정부는 무한으로 옮겨갔다. 혁명세력은 주강령역으로부터 장강, 황하류역에로 발전하였다. 화북이 눈앞에 보였고 조선도 멀지 않았다. 희열에 벅찬 무정은 지체없이 북벌전쟁에 뛰여들며 조선민족 대표로 무한에서 열린 “반일대동맹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3   1927년 4월, 장개석이 상해에서 4.12반혁명정변을 일으키고 7월 15일,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가 무한에서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하자 국공합작은 파렬되고 기세드높던 대혁명—북벌전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허나 투쟁의 시련을 겪으며 위대한 북벌전쟁에 나섰던 거의 모든 조선인혁명가들이 확고부동하게 중국공산당 켠에 섰다. 무정도 국민당의 공산당진압에 맞서 싸우다가 한구(汉口)에서 체포되여 감옥에 갇히였다. 사형에 언도되였다고한다. 그러자 무한의 대학과 중소학교 1만여명 학생들이 대시위를 가지고 조선인혁명가 무정의  즉각 석방을 강력히 촉구하여 나섰다. (주. “관내지구 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회편” 하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1336페지) 무한당국, 아니 왕정위 괴뢰정부다. 이자들은 학생들 대시위에 눌리워 무정을 가짜로 석방하고 암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무정은 혼자가 아니였다. 괴뢰정부의 무창(武昌)법원 법관중에 무정의 동지(주.“관내지구 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회편” 하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1336페지)가 있은데서 무정은 다행히도 상해로 무사히 빠질수가 있었다. 무한의 대학과 중소학교 1만여명 학생들 대시위, 무창법원의 동지—이러한 사실들은 공산당원 무정의 위인됨을 알리고도 남음이 있다. 무한에서의 무정은 조선인혁명가의 대표로 성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 시절 상해에는 중국공산당 조선인(한인)지부가 활동하고있었다. 적절히 말하면 중국공산당강소성위 소속 홍남구(洪南区)조선인지부이다. 이 조선인지부의 래력을 알자면 조선공산당을  곁들어야 할것 같다. 1925년 4월에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였다는것은 세인이 잘 아는 일이다. 이에 따라 상해에는 조선공산당의 지부가 조직되였는데 사회주의자 려운형이 지부책임자였다. 국제공산당 일국일당(一国一党)의 원칙에 따라 상해 조선공산당지부는 1927년 9월에 지부성원 전체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강소성위 홍남구소속(주. 관내지구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휘편 상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283페지)으로 되였다. 려운형이 의연히 서기였다. 려운형은 그때 복단대학 영어교수였다고 하는데 중공지부는 그의 사택인 상해 프랑스조계지 포석루 128번지(上海法租界蒲石楼128号)을 거점으로 달마다 2--3차의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였다. 로홍군이고 중화쏘베트 제1차대표대회의 유일한 조선인대표였던 최정무(崔政武)는 상해 복신로(上海福新路 )182번지 2층집이였다고  자기의 구술문—로홍군 최정무(주.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68페지) 에서 밝힌다. 중공상해조선인지부는 상해와 그 주변 조선인사회를 이끄는 중심기관이였다. 상해조선인지부에서 무정은 자기를 혁명의 길로 이끌고 중국으로 이끌었던 려운형을 다시 만나고 조선인지부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였다. 1929년에 상해조선인지부는 활동의 편리를 위하여 지부 외곽조직인 조선(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한인)청년동맹 등을 조직(주. 관내지구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휘편 상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283페지)하였다. 그 내막을 보면 무정 등의 역할로서 무정은 장세걸(张世杰),오명(吴明), 최정무(崔政武), 윤호(尹浩), 김원식(金元植), 허렬(许烈) 등과  더불어 “중국본부조선청년동맹상해지부”를 조직하고 그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다. 여기에서 흥미로움은 장세걸, 오명, 최정무, 윤호 등 무정의 동지들이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이라는 점이다. 무정이 1924년 하북성의 보정군관학교를 다닐 때 장세걸(원명 김홍묵), 오명 등은 그 직후  황포군관학교를 다니거나 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하나의 공동한 혁명목표를 위하여  상해로 모여 들었었다.   4   오명에 대해서 알려지는 자료는 거의 없지만 황포군관학교 제5기생 조선인교관 이름에 훈련부 기술조교로 적히여있다. 장세걸(1901—1933)은 원명이 김홍묵(金洪默)이고 서울 사람이며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이다.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광주에서 무한에 이른 장세걸은 장개석과 왕정위의 혁명배반으로 기세드높던 북벌전쟁—대혁명이 실패하자 국민당반동파의 무자비한 백색공포에서 무사히 벗어나 상해에 가서 상해조선인지부를 찾았었다. 그때로부터 무정과 장세걸은 뜻을 같이하는 혁명전우로 되였다. 그들은 또 힘을 합쳐 상해지부의 외곽조직인 조선(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한인)청년동맹 등을 조직하며 상해 조선사람들의 수령인물로 떠올랐다. 1930년 5월이후 장세걸은 상해조선인지부의 추천과 중공강소성위의 파견으로 강소에 가서 홍14군 제1사 사장 겸 제2퇀 퇀장으로 활약하다가 상해로 돌아왔고 1931년 초이후 중앙군위의 파견으로 강서 중앙혁명근거지로 들어가 홍1방면군 제1군단 제22군 참모장, 제1군단 제2사 제6퇀 퇀장 등 중책을 떠이였다. 장세걸은 중공강소성위 위원을 겸한 양림(杨林,원명 김훈-金勋-), 무정(원명 김무정) 등과 더불어 중앙홍군의 3김,  즉 세 김씨장군으로 활약하던 위인이요, 무정의 전우였다. 최정무와 윤호는 그 시절 쏘련 울라지보스또크 쌍성자(海参崴双城子) 태생이다. 최정무는 1910년 생이고 윤호는 확연히 알수는 없지만 같은 또래로 알려진다. 쏘련 공청단원들인 최정무와 윤호는 10대 중반의 나이에 원동지구의 조선인혁명가인 박우(朴禹)의 소개와 영향으로 혁명의 장도에 오른 젊은이들이다. 어느날 박우는 그들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혁명에는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갈라볼수 없는거요. 중국혁명에 참가하면  역시 조선혁명에 참가하는것과 마찬가지요. 그러니 중국 상해로 들어가도록 하시오.” 그러면서 박우는 손수건 하나를 건네주면서 상해가서 복신로 182번지 2층집을 찾으라, 려운형이란 분을 만나라, 그분은 조선당의 상해지부서기라고 동을 달았다. (주.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69페지) 1926년 최정무, 윤호 등 5명의 쏘련 공청단원들이 울라지보스또크 쌍성자를 떠나 중국 상해행에 오를 때 최정무의 나이는 16살이였다. 불원천리하고 상해에 이른 최정무 일행 5명은 복신로 182번지를 찾아 상해조선인지부서기 려운형선생을 만나 비밀소개신인 손수건을 건네였고, 려운형선생의 파견으로 광주 황포군관학교로 가서 제6기 예비생으로 입학하게 되였다. 1927년 초 넉달동안의 예비과목 단계를 거친후에는 제4기생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는 최정무의 경우이지만 동행한 윤호 등 4명도 비슷한 학습과 훈련과정을 거치였다고 보아진다.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 시절, 최정무는 조선인 양림혁명가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국공산당이 지도한 1927년 12월의 광주봉기에 뛰여들었다.(주.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73페지)윤호도 같은 과정을 밟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광주봉기 실패후에는 각기 천신만고로 상해에 이르러 조선이지부를 찾았고 보정군관하교 출신인 무정과 더불어 한 지부에서 당생활을 하며 상해 한인청년회를 개편한 “중국본부조선청년동맹상해지부” 성원으로도 뛰게 되였다.   5   무정은 보정군관학교, 오명, 최정무, 윤호 등은 황포군관학교—무정은 사기가 부쩍 올랐다. 다같은 중국 군관학교 혁명군인출신들이니 중국혁명에서 몸을 내번지며 해볼만 했다. 최정무가 말하는 원동지구 조선인혁명가 박우선생처럼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은 갈라볼수 없고, 중국혁명에 참가하면 역시 조선혁명에 참가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니까. 그런데 생때같던 윤호가 상해조선인지부와 “상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에서 별반 활동하지 못하고 1928년 5월 28일에 일부 동지들과 함께 불행히도 적들에게 체포되여 남경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무정과 그의 동지들은 분하여 펄쩍 뛰였다. 알고보면 이 적들이란  상해 프랑스조계지 순포방 순포(巡捕房巡捕)들이였다. 황포출신 윤호는 어찌하여 이자들에게 체포되였을까? 이는 조선의용군 출신의 항일로간부 최채평전 “불멸의 영령 최채”(류연산 저)에서 자상히 알려진다. 1928년부터 1932년 몇년 사이만 해도 상해의 조선인들은 무정 등이 지도하는 상해 조선인 중공당지부와 그 외곽조직인 “상해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청년동맹”의 지도하에 상해에서 광범위한 반일선전활동을 자주 벌리였다. 낮이면 반제집회, 시위행진 등이, 밤이면 프랑스조계지 공공조계지에 삐라와 포스터가 나타나니 조계지당국의 비위를 거슬릴 수밖에 없다. 이때를 두고 최채는 아래와 같이 알려주고있다.     프랑스조계지 순포방과 공공조계지공부국에서는 조선인혁명가를 체포하여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일본령사관에 넘겨 서울 서대문감옥 등에 압송하고 조선인으로 밝혀지지 않으면 국민당정부에 넘겨 남경감옥 등에 투옥케 하였습니다. 상해 조선인당지부의 주요 골간이였던 정향명(丁向明,일명 성시백)과 윤호, 김석철 등 동지들은 선후하여 체포된뒤 남경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였으며 우수한 공산당원인 강선필은 국민당한테 학살되여 남경 우화대(雨花台: 남경시 혁명렬사릉원)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최채의 이 증언은 황포출신 윤호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상해 프랑스조계지 순포방에 의해 체포되고 남경감옥에 투옥되였음을 잘 알리고있다. 일제측의 관련자료로 보면 무정 등 동지들의 지도하에서 상해 조선인들의 반일 혁명활동은 정말 활발히 전개되였었다. 1932년, 조선의 전민족적인 반일운동—3.1운동 13돐을 맞으면서 상해한인녀자청년동맹에서는 “3.1절을 당하여 동지에게 격(檄)함”을 발포하고 상해한인청년당에서도 “3.1기념 선언”을 발포하였다. 중국혁명호제회(互济会) 상해한인분회에서도 “3·1 운동 제13주년 기념 선언’을 발포하고 조선인 민간단체 화랑사(花郎社)에서도 “3.1절 기념에 대하여”를 발포하여 그 성세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런 발포문과 기념활동은 비록 무정이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홍3군단으로 떠난 후이라 하지만 상해 조선인 중공지부와 그의 외곽조직인 상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의 구체적인 지도의 결과라는것은 에누리없는 사실이다. 무정의 상해시절도 그러했었다. 상해시절의 무정과 그가  포괄되고 지도하는 상해 조선인 중공지부와 상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는 여러 반일활동들과 더불어 남경 감옥에 재감(在監) 중인 윤호(尹浩)·김석철(金奭哲)·성시백(成時佰) 등 3동지를 구출하기 위한   군중적 선동 및 위로금 모집 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무정은 이 구출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그러나 윤호는 조직과 동지들의 이같은 노력의 결과도 보지 못하고 남경감옥에서 옥사하여 상해 조선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구체적인 옥사시간이 어느해, 어느달인지는 밝혀지는 자료가 보이지 않지만 1932년 3월직후라고 추측을 가져본다.  
6    1. 밝혀지는 장군의 신상 댓글:  조회:1123  추천:0  2018-04-11
제1부 압록강을 건너     밝혀지는 장군의 신상                                         1   조선사람인 무정장군의 고향을 두고 함경북도 경성군(镜城郡)설이 절대적인것 같았다. 그 이상 상세한 고향은 밝혀지지 못했지만 중국 조선족사회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학계와 무정 연구가들 모두가 경성군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세불변의 권위적인 지배적 주장이였으니 학계에서는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 대세불변의 권위적인 주장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경성군설이 아닌 청진시 근동리설을 주장하는 분이 나섰으니 때는 지금으로부터 16년전인 1999년으로 돌아간다.     인연이 닿아서인지 새세기를 앞둔 1999년 7월에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에서 친척방문을 온 70대 조선로인ㅡ리상섭(李相燮)씨를 알게 되였다. 리상섭로인은 지난세기 50년대 중반시절 중국 청화대학에서 학습한 조선류학생으로서 무정장군과 부인 김영숙을 익히 알고있었다. 이제 본 평전의 결말부에서 보다 밝히겠지만  무정장군의 세번째부인이자 조선녀성인 김영숙과 50년대 김영숙의 청화대학 류학에 대해서도 가담가담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장군의 묘소가 평양 애국렬사릉에 모셔졌음도 처음 듣게 되였다.    연길에서 알게 된 리상섭로인, 아주 인상적인 지식인로인이였다. 새세기에 들어선후에도 수차 만남의 기회를 가지였지만 우리(조선에서)가 알고있는 무정장군의 고향은 절대 함경북도 경성군이 아닌 청진시 근동리라라는 주장은 변함이 없었다. 조선에서 온 분이고, 무정장군과 부인 김영숙을 알고있는 분이여서 그 말씀은 너무도 충격적이였다. 왠지 청진시 근동리설이 마음에 와 닿지만 절대적인 긍정을 할수는 없었다. 무정장군 연구가로서는 하나의 설로 받아들임이 옳을것 같았다. 언젠가는 무정장군 관련  실제자료가 밝혀질 때가 있으리라고 믿어마지 않았지만 그 밝혀짐이 그리도 빨리 다가서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다.    하늘이 도왔을까, 일찍 10대 후반의 무정장군의 어린 시절과 소년시절을 몰라 그리도 안타깝더니 조선이 아닌 내 고향 연변과 대련에 장군의 친지분들이 계신다는 기적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은 2015년 8월 27일 오후, 연변위성텔레비 관련 다큐팀 일행 셋과 함께 복건 영안을 거쳐 홍색수도로 불리우는 강서 서금에 도착하여 투숙하고있는데 연변주 공무원으로 사업하다가 일터에서 물러선 리영씨로부터 핸드폰이 걸려왔다. 무정장군의 8촌 형제되는 분의 따님이 룡정에 있고, 8촌 동생되는 분이 지금 대련에 계신다는 놀라운 소식. 이어 룡정의 녀사분과 긴 통화가 이어지고 현재 사업터 강남 소흥으로 돌아가면 다시 련락하겠다는 답변을 주었다.   8월 30일 룡정의 녀사분과 다시 통화가 이어지고 9월 7일 드디여 내 고향 연길과 룡정에서 무정장군의 9촌 조카ㅡ김천희(金天姬)녀사분을 만났다. 9월 9일 오후에는 대련에서 녀사분의 아버지를 뵈였다. 무정장군의 8촌 동생되는 분ㅡ김하수로인(金河寿,2015년 79세)님이였다. 김하수로인은 딸애한테서 소식을 듣고 기다렸다면서 1945년 조선에 귀국한후의 무정장군의 표준사진을 건네였다. 종래로 보지 못했던 장군의 정면 표준사진, 이어 장군의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여난 아들 김정신(이미 사망)과 일가 사진, 무정의 두번째 부인과의 딸ㅡ등연려의 사진 등이 환히 펼쳐진다. 무정장군의 가족사가 옛말같이 쏟아진다.                                  2   무정장군의 본명은 우리가 알고있는 김무정(金武亭) 아닌 김병희(金炳禧), 1905년 음력 5월 16일 생, 고향은 오늘의 함경북도 청진시 근동리, 가난한 집 자식이 아닌 꽤나 부유한 김해 김씨 가정의 장손. 형제로는 손아래 동생 인동(仁东)에 부친의 존함은 김기준(金基俊) !   알고보면 무정장군의 고향을 둘러싼 두가지 설 모두가 옳았다. 전자는 함경북도 경성군이라고 주장하지만 경성군 용성면 근동리라고까지는 밝히지 못했고, 후자는 청진시 근동리라고 옳히 밝히면서도 원래는 경성군 소속이였다가 현재 청진시 송평구역 소속 근동리라는 이 지명의 연변과정을 알리지 못하였다.    아는것만큼 보인다고, 력사속에 들어서면 모든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무정장군이 태여나던 비운의 해ㅡ1905년의 고향은 함경북도 경성군 용성면 근동리라고 불리였다. 경성군은 함경북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한개 군으로서 동쪽은 동해와 면하고, 서쪽은 무산군, 남쪽은 길주군과 명천군, 북쪽은 부령군과 접하여있었다. 그러던 경성군내 용성면 근동리가 1940년 3월이후 주변의 부령군 청암면 일부와 경성군 라남읍, 용성면이 청진에 귀속되면서 지명부름을 달리하게 되였다.        오늘날 함경북도의 이름난 항구도시 청진은 개항전 한적한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1908년 개항후 항만시설이 정비되며 급성장을 이루니 1914년에는 제법 부(府)로 승격한다. 1929년 함경선(咸鏡線)이 개통에 이어 1933년에 도문선(圖們線)이 부설된데다가 국내의 각 항구는 물론, 일본의 각 항구와의 정기항로,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 등 항로도 열리며 수륙 교통요지로 부상하니 그 발전이 보다 빨라진다. 그 발전속에서 1940년 3월이후 근동리 등의 청진으로의 귀속이 이루어졌다.    광복후 청진시도 여러 변혁의 시기를 거치여왔다. 1960년 10월의 청진시는 함경북도 소속이 아닌 직할시로 떠오르지만 그후 다시 함경북도에 소속되는 과정을 거친다. 청진시는 1977년에 이르러 다시 직할시가 되였다가 1985년에 다시 직할시가 폐지되면서 재다시 함경북도에 편입됨을 보인다. 변혁속의 청진시는 1993년 라진시와 선봉군이 라진선봉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라진시 소속 6개동·3개리를 넘겨받으니 조선 4대도시의 하나인  청진시는 행정구역이 7구역 93동, 14개리로 나타나면서 그제날 경성군 용성면 근동리는 오늘날 청진시 송평구역 근동리(松坪区域芹洞里)로 알려지게 되였다.  그러고보면 무정장군의 고향을 일컿는 함경북도 경성군설도 옳고, 청진시 근동리설도 옳다. 다만 장군이 태여나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을 보낸 고향은 의연히 경성군으로 불러야 하고, 오늘은 청진시 근동리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99년 7월과 그후 연길 등지에서 만난 조선로인ㅡ리상섭씨의 청진시 근동리 주장은 전적으로  옳았으니 백배천배 감사한 마음이다.    김하수로인의 구술에 따르면 무정의 아버지 김기준은 마음씨는 착하나 성격이 유달리 급하고 과격한 사람이라고 한다. 유년시절의 무정이도 자라면서 아버지의 성격을 쏙 빼닮았으니 후일 중국의 홍군시절과 팔로군시절, 태항산 조선의용군 시절, 조선 귀국후의 성격은 유년시절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성격의 계속이였다. 이 성격은 무정이를 홍3군단 총지휘 팽덕회와 지기로 만들어주며 홍군총부 작전과장, 팔로군총부 작전과장으로 키워도 주었지만, 이 성격은 또 무정이를 비운의 인물로 만들어준 토대이기도 하였다.                                   3   소작농을 둘만치 가정이 부유한 편인데서 무정은 고향 룡성면 근동리에서 무난히 6년제 천마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후 멀지 않은 옛 고을ㅡ경성군에 가서 경성농업학교를 다닐수가 있었다. 이후 커서 고향에서 가업을 빛내라고 한 아버지의 가르침 같았다. 하지만 그 시절 무정은 필경 10대 초반의 소년이여서 아버지 김기준은 시름을 놓지 못하다가 녀동생되는 무정의 고모가 경성에 가서 무정의 곁을 지켜주어서야 안심하더라고 동을 단다. 물론 김하수로인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성격을 물려받은 무정은 10대의 나이에 잡아들면서 눈에 거슬리면 참지 못하는 강인한 성격으로 번져갔다. 그 시절 경성농업학교 교장은 일본인교장인데 소년 무정에게는 정말이지 원쑤 쪽발이놈으로 보이였다. 1905년 을사늑약은 몰랐다지만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으로 인한 나라의 망국은 자라면서 가슴은 한으로 맺히였다. 일본사람들만 보면 눈에 불이 일었다. 무정은 학생들의 선두에서 일본인교장 구축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놈들의 눈에 났다. 무정은 부득히 경성농업학교를 떠나지 않을수 없었다.    장손인 무정은 아버지의 지지로 멀리 서울로 남하하여 경신중학교에 들어갔다. 전해지는 서울 기독교중학교설과 중앙고등보통학교(즉 중앙고보)설이 아닌 경신중학교라고 김하수로인은 찍어 말한다. 경신중학교(儆新中学校)는 오늘날에도 서울 종로구에 현존하는 100여년 력사를 가진 사립중학교로서 서양식 학교설치의 일환으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였음을 보여주고있다.   미국 선교사들이 오늘의 한국땅을 처음 밟은것은 1885년으로 거스른다. 1883에 인천항이 새로 축조되여 개항하면서 1885년 4월에 미국 북감리교회 아펜젤러 부부와 북장교교회 목사가 인천에 첫발을 내디디였다. 이어 아펜젤러 선교사는 서울 중구 정동 34번지의 한옥을 빌려 최초의 근대교육기관 배재학당을 세우게 되고, 역시 이해 1885년에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H.G.언더우드(원두우)가 경신중학교의 전신인  “언더우드 학당”을세우고 1905년 경신학교로 교명을 개명하기에  이르렀다. 다음해 1886년에 다른 미국 선교사 루이스 스크랜부인이 또 배재학당 린근에 최초의 녀성전용교육기관ㅡ리화학당을 개설하였다.    이로부터 보면 경신중학교는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배재학당, 최초의 녀성교육기관 리화학당과 더불어 그 이름이 뜨르르하다. 그러나 이런 최초의 근대 학교들은 조선 황실과 부유한 계층의 귀족자녀들만 다닐수 있었을뿐 가난한 집 자식들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였다. 1900년에 배재학당 정구부 학생들이 당시에는 낯설기만 하던 정구경기를 치르는 사진이 그러하고, 1900년대 초 전차타고 소풍가는 이화학당 학생들 사진(주. 1994년 10월 9일자 “동아일보”)이 그러하다. 가난한 집 자식들에게는 그림의 떡일수밖에 없다.    20세기 10년대에 이르러서도 가난한 집 자식들은 학교다니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부유하다고 알려진 무정의 김해 김씨 가족한테는 자식공부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서울의 경신중학교에서도 무정의 주위에 같은 또래들이 뭉치더니 무정은 점차 학생수령으로 떠올랐다. 15세되는 해 1919년 전민족적인 만세운동ㅡ3.1운동이 터져오르며 무정은 완연 다른 사람으로 번져갔다. 무정은 서울의 여러 중학교와 한맘으로 배합하면서 경신중학교, 서울학생 3.1운동의 전렬에서 나아갔다. 무정은 또 일제놈들에 의해 학교에서 추방당할 신세가 되고 단기적이나마 무정한 옥살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4   김하수로인은 또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무정이 팔로군 시절 만난 중국인 등기는 첫 부인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이야기, 무정의 첫 부인은 10대 중반이후 고향에서 례를 올린 조선녀성이란다. 이 첫 부인의 이름은 무엇인지 김하수로인도 모르고있었고, 부부를 이룬 그해도 딱히 알수가 없지만 16~17세인 1920년~1921년 경임은 틀림이 없는것 같다. 조선의 그 시절은 남녀가 15살 쯤이면 의례 장가들고 시집가야 하는 나이, 무정도 부모님들의 주선으로 자기 또래 조선녀자를 안해로 맞아들이니 얼마후 태기가 있다. 열달 잉태만에 아기가 태여나고 고추가 달렸다고 정신(正新?)이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무정은 서울에서 중학교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소년시절로부터 청춘시절로의 과도기를 거치였다. 어느덧 10대 후반의 유망한 젊은이로 성장한 무정은 서울 학생운동의 수령의 하나로 떠오르면서 국내에 들어와 사람을 물색중인 독립운동가이고 사회주의자인 려운형선생의 눈에 들었다. 일제놈들의 요시찰 대상으로 점찍힌 무정은 려운형선생의 영향으로 드디여 중국행을 선택하게 되였다.    무정의 중국행을 두고 가족에서도 몰랐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마도 조직과 개인, 가족 모두에 련루되는 일이니 비밀에 부친 모양인데 무정의 가족에서는 일본류학으로 알고있었으니 말이다.    무정의 아버지 김기준씨는 아들의 월사금을 다달이 일본 관련주소로 부치치만 번마다 돌아오군 하였다. 하도나 이상하여 김기준씨는 현해탄(玄海滩) 넘어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아들의 종적은 묘연하기만 하다. 귀로에서 김기준씨는 즐기는 의학서적 몇책을 품에 지니고 오다가 모두 빼앗겨야 했단다. 어찌하든 무정의 일본류학으로 인기된 일인데, 그후도 김기준씨는 서울로 다달이 월사금을 부치지만 그상이 장상이다. 무정의 할아버지는 다달이 돌아오는 월사금을 모아서 황페한 린근 공동묘지를 사서 여러가지 과일나무를 심고 덩실한 2층집까지 지을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김하수로인네와 무정네 친척사이를 보면 무정네가 벌수가 높다고한다. 김하수 로할아버지와 무정의 로할아버지가 친형제간일 때 김하수 할아버지 김우공(金禹公,아들 5형제에 딸 하나)과 무정의 할아버지는 사촌간, 김하수 아버지 김현사(金铉仕)와 무정의 아버지 김기준은 벌써 6촌간이다. 그러니 무정은 김하수의 아버지 김현사한테 7촌 조카로 된다.   
5    《무정장군》프롤로그 댓글:  조회:1263  추천:0  2018-04-11
프롤로그                       1905년.     력서로 보는 1905년은 새해 첫날을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해라지만 우리 겨레로 보는 1905년은 평년이 아닌 비운의 한해로, 망국의 시작해로 알려진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조선 격변기 시대가 이를 잘 알려준다.       19세기 말엽의 조선은 제국주의 렬강들의 패권다툼의 한 마당이였다. 풍전등화와도 같은 암담한 나라현실에다 오랜 기간의 쇄국정치로 나라안이 혼란스럽더니 1894년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화산처럼 폭발하였다. 동학 교주 최시형이 “인간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며 현세에 그런 세상을 만들자고 웨치니 헐벗고 굶주리던 나라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록두장군 전봉준을 선봉으로 학정과 외세를 반대하는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다.        그 시절의 기울어져가는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할 힘마저 따르지 못하여 이웃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은 이때가 기회라고 저들 군대를 바다건너 조선에 파병한다. 기세드높던 동학농민운동은 피비린 탄압으로 력사무대에서 사라지지만 조선정부의 철병요구를 무시한 일본은 청나라와의 주도권 쟁탈로 1894년 7월 25일에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조선반도에서의 력사상 청일전쟁의 폭발, 청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일본은 승승장구로 중국 료동반도 지배권을 거머쥔다. 프랑스, 독일을 부추킨 로씨야의 압력으로 일본은 료동반도를 반환해야 했지만 로씨야는 눈에 든 가시로 부상하였다. 대원군의 대항마로 떠오른 친청파 민비가 이번에는 친로파로 등장하면서 일본 배척정책을 실시하자 로씨야를 어찌할수 없는 일본공사는 로씨야를 몰아내는 방책으로 1895년 8월 20일, 경복궁에 란입하여 주권국가의 명성황후 민비를 시해하고 불태워 버리기를 서슴치 않는다. 고종황제는 로씨야 공사관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놈들이 저지른,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의 일이다.    로씨야 세력에 의해 고종황제는 로씨야 관내에 친로정부를 수립하고 일단은 친일파를 몰아내지만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일본의 야망은 사그러지지가 않는다. 1904년 1월 26일, 일본은 중국 료동반도 려순항에 정박한 로씨야함대를 기습공격하면서 로씨야와  로일전쟁을 벌리고 중국의 려순과 봉천을 함락하면서 불패를 뽐내던 로씨야함대를 격파한다.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일본은 이듬해 1905년 2월 22일에 일찍 조선의 령토라고 인정했던 독도(独岛)를 강제적으로 병합하고 다케시마(竹岛)로 명명하더니 1905년 11월에는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을 특명전권대사로 조선에 파견하고 11월 17일, 고종과 조정의 대신들을 강압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면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해 버린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온 나라, 온 백성들은 하늘을 우러르며 통곡한다. 장지연선생이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실은 “시일야방성대곡”,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실은 “시일야우방성대록”이 그러하지 않던가. 11월 30일, 비분에 잠긴 고종의 시종무관장 민영환을 비롯한 여러 애국지사들이 을사보호조약의 늑결을 개탄하며 자결하니 더욱 그러하다.     온 삼천리강산에 비운이 차고넘친다. 1905년은 그야말로 불운의 한해로 비운의 한해로 자리매김한다. 그 비운을 미리 알기라도 하듯 1905년 11월을 두달 앞두고 황룡포를 입고 찍었다는 고종황제의 사진얼굴에도 비운의 그림자가 비껴있다. 오죽하면 1905년 9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파견한 아시아 순방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조선을 방문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1884~1980)가 고종황제한테서 사진을 건네받고 훗날 그날의 사진을 두고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애처롭고 둔감한 모습”이였다고 회고하기까지 하였을까.     이같은 비운의 해ㅡ1905년에 겨레의 위인 한분이 서울에서도 멀고 먼 조선반도 최북단쪽 바다가ㅡ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여났으니 그 위인은 절세의 무정장군. 온 나라 비운의 해에 태여나 비운의 기운이 서린걸까, 인간세상에 왕림하여 장장 백년 ㅡ한세기의 력사언덕을 넘어서도록 이땅의 우리 겨레사회는 위인의 본명을 모르고 고향을 모르고 가족관계를 모르고 지나왔으니 무정은 비운의 운명을 안고 이 세상에 왕림했음이 옳은듯 하다.  
4    《무정장군》차례 댓글:  조회:1126  추천:0  2018-04-11
中国作家协会2013年少数民族重点作品扶持项目   (무삭제 원본)   무정장군     리 광 인 저      차 례   머리말   제1부  압록강을 건너 밝혀지는 그 시절 신상 중국으로 온후 상해시절의 일화   제2부  팽덕회의 수하에서 홍3군단의 첫 대포소리 군단직속 포병련 련장 무정과 팽덕회 이야기 독일제 크로백 대포 감강 순라정 포격 제1차 반포위토벌전 제2차 반포위토벌전과 군위 포병퇀  퇀장 제3차 반포위토벌전과 감주공격전   제3부  중앙혁명근거지 홍군학교 포병과주임 양씨사당 옛터 최음파와의 인연 조선인 홍군비행사의 고충 반제총동맹 집행위원 홍군특과학교 교장 양림과 더불어 장세걸의 불운   제4부  홍군장정길 (1) 군위제1종대 제3제대 사령원 적의 봉쇄선 헤치며 상강전역에 뛰여들다 군위포병영의 출현 준의에 머무른 나날   제5부  홍군장정길 (2) 청강파의 포소리 군단포병련으로 축소편성 준의 루산관에 올라 금사강을 도하하기까지 양림과 회리현성에 나타나 북으로 북으로   제6부  장국도와의 투쟁 (1) 장정길 첫 대설산 협금산 답사길 장국도 이 사람 망망초지 600리 반우와 파서의 웃음소리   제7부  장국도와의 투쟁 (2) 9월 9일 그날 밤 무정이 빠진 사이 이 팽덕회는 당신을 믿소 운명을 가른 나날 무정의 발자취 따라서   제8부  섬북에 이르러 홍군장정을 마친 사람 섬북땅에서 동정항일의 기치 들고 양림의 희생 홍군대학 1과생 홍군총부 작전과 과장   제9부  팔로군총부 포병퇀 퇀장 팔로군총부 작전과장과 포병주임 팔로군총부포병퇀 퇀장 포병퇀선전대 포병퇀 퇀가에 깃든 이야기 모택동의 부름을 받고 락천에서의 정돈훈련 1938년과 1939년 국민당의 반공고조에 맞서   제10부  백퇀대전에 뛰여들다 정태선 전역 유료 전역 피로 얼룩진 관가뇌 팽덕회 부총사령   제 11부 남니만으로 진군 연안행 천리 행군길 도보욕에 나타난 포병부대 섬북의 강남이로다 그이들의 사랑속에서   제 12부 조선민족의 수령 화북조선청년련합회 회장 무정이 지켜보는 조선의용대 신생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조선민족의 대표로 수령으로 섬감녕변구 참의원 정률성과의 형제인연   제 13부 조선의용군 사령원 조선의용군의 탄생 1942년 5월 반“소탕”전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부임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교장 태항산의 대생산운동 하남점 대중병원   제 14부 태항산 아리랑 즐거운 노래 아리랑 노래 김위녀사 발자취 연안으로 가는 길 첫패의 동지들이 떠나간후 조선의용군의 분맹사업 조선의용군 화중지대 희망의 래일 안고   제 15부 미더운 지도자 무정장군의 육성자료 진찰기변구 위문단 연안의 조선사람 동네 7차대회와 대회후 조선사람들 속에서 조직과장 김영숙   제 16부 광복 전후 조선만주공작위원회 8.15 그날 밤 동북으로의 진출 심양 대회합 조국으로 귀국한후 무정의 중국부인 등기 조선부인과 일가족
3    항일장령 무정장군의 인생비화 3 댓글:  조회:1843  추천:1  2016-09-18
상해시절의 일화 상해시절 무정의 활동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런 활동들은 하나 또 하나의 상해시절 일화로 엮어져 오늘까지 전해지고있다. 실제상 상해조선인지부는 1927년 9월에 지부성원 전체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강소성위 홍남구 소속지부로 되기전에 이미 동북을 제외한 중국 실무를 전담하는 조선공산당 국제련락부였다. 중국공산당소속으로 넘은 뒤에도 그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조선인혁명가들의 국제련락부였기에 상해에서 활동하는 중공림시중앙 정치국과 중공강소성위는 당의 정신, 요구를 직접 이들 지부를 통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조선인혁명가들에게 전달하고 시달하였으며 조선인지부와 긴밀한 단선련계를 가지고있었다. 적들의 겹겹한 포위속에 있는 상해에서, 혁명의 배신자들이 가끔 나타나 수시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해에서 중공상해지부의 조선인혁명가들을 이같이 믿고 받들었다는것은 그만큼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는 무정 등 이들 조선인혁명가들이 신뢰할만한 견실한 혁명가들이였기때문이였다. 상해지부의 동지들은 바로 이같이 견실한 국제혁명가들이였다. 1927년 9월 이전의 조선공산당 시절에는 조직선을 따라 멀리 극동지역(远东地区)과 조선 국내, 일본, 중국 동북에서 오는 하나 또 하나의 조선인 열혈청년들을 맞이해 중국혁명의 봉화가 타오르는 광주의 황포군관학교나 중산대학으로 보냈고 중국공산당시절에는 북벌전쟁과 남창봉기, 광주봉기 좌절후 찾아오는 조선인혁명가들을 뜨겁게 맞이하여 시간을 들이며 다시 동북에 파견하거나 강서 등지 중앙혁명근거지로 파견하였다. 파견된 동지들은 흔히 중공중앙과 중공강소성위의 명의를 띠였다. 이같이 상해지부를 통해 파견된 동지들이 실로 적지 않다. 황포출신들인 오성륜, 진공목, 박근만, 박근수(吴成仑,陈公木,朴根万,朴根洙) 등은 남만으로, 최석천, 반경우, 리계동(崔石泉,潘庆友,李启东) 등은 북만으로, 리용, 마천목, 신춘(李镛,马天穆,申春) 등은 동만으로 파견되였다. 동북으로 파견된 황포출신들은 적어도 20여명에 달하는데 이들은 모두 중책을 떠메고 동북의 동만과 남만, 북만의 중공당조직 건설과 항일유격대, 항일련군의 건설과 발전에서 불멸의 기여를 하였다. 장세걸, 최정무, 최음파 등 한패 또 한패는 강서 중앙혁명근거지로 파견되였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중앙혁명근거지로 파견된 황포출신, 광주봉기 출신 조선인혁명가들은 3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중국 홍군장정에 참가한 조선인혁명가들을 보통 30여명이라고 하는 설이 많은데 실제 중앙혁명근거지로 파견되고 장정에 참가한 조선동지들이 10여명이라고 하는것이 력사사실에 부합된다. 그중 장세걸은 홍22군 참모장으로 활동하다가 1933년 11월에 너무도 일찌기 희생되였다. 최음파는 중국 홍군의 첫 작곡가와 음악가로 활동하다가 1935년 봄 중앙혁명근거지 포위돌파전에서 불행히 희생(?)되였다. 본문에서 동북과 중앙혁명근거지로 파견된 주요한 조선인혁명가들을 하나하나 지적함은 이들 모두가 황포출신들이고 북벌전쟁이나 남창봉기,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민족의 엘리트(精灵)들이였고 이들 모두가 상해지부 무정 등 동지들의 지도와 믿음으로 파견된 무정의 상해시절 생사전우들이기때문이다. 보정군관학교 출신인 무정은 황포출신인 이들이 조선민족과 혁명의 귀중한 재부들임을 너무도 잘 알고 그들에게 큰 믿음과 희망을 기탁하고있었다. 황포출신 혁명가들과 무정과의 전우일화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무정의 "사꾸라몽둥이"라는 별명의 유래는 “무정장군 평전 상해시절”에서 꼭 밝히고지나야 할 사항이다. 김순기선생의 《무정장군에 대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 일화는 이러하다.
2    항일장령 무정장군의 인생비화2 댓글:  조회:1289  추천:0  2016-09-18
1930년 5월 이후 장세걸은 상해조선인지부의 추천과 중공강소성위의 파견으로 강소에 가서 홍14군 제1사 사장 겸 제2퇀 퇀장으로 활약하다가 상해로 돌아왔고 1931년초이후 중앙군위의 파견으로 강서 중앙혁명근거지로 들어가 홍1방면군 제1군단 제22군 참모장, 제1군단 제2사 제6퇀 퇀장 등 중책을 맡게 되였다. 장세걸은 중공강소성위 위원을 겸한 양림(원명 김훈), 무정(원명 김무정) 등과 더불어 중앙홍군의 3김, 즉 세 김씨 장군으로 활약하던 위인이요, 무정의 전우였다. 최정무와 윤호는 그 시절 쏘련 울라지보스또크 우쑤리스크 태생이다. 최정무는 1910년생이고 윤호는 확연히 알수는 없지만 같은 또래로 알려진다. 쏘련 공청단원들인 최정무와 윤호는 10대 중반의 나이에 극동지역의 조선인혁명가인 박우(朴禹)의 소개와 영향으로 혁명의 장도에 오른 젊은이들이다. 어느날 박우는 그들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혁명에는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갈라볼수 없는거요. 중국혁명에 참가하면 역시 조선혁명에 참가하는것과 마찬가지요. 그러니 중국 상해로 들어가도록 하시오." 그러면서 박우는 손수건 하나를 건네주면서 상해로 가서 복신로 182번지 2층집을 찾으라, 려운형이란분을 만나라, 그분은 조선공산당 상해지부 서기라고 동을 달았다. 1926년 최정무, 윤호 등 5명의 쏘련 공청단원이 울라지보스또크 우쑤리스크를 떠나 중국 상해행에 오를 때 최정무의 나이는 16살이였다. 불원천리하고 상해에 이른 최정무 일행 5명은 복신로 182번지를 찾아 상해조선인지부 서기 려운형선생을 만나 비밀소개신인 손수건을 건네였고 려운형선생의 파견으로 광주 황포군관학교로 가서 제6기 예비생으로 입학하게 되였다. 1927년초 넉달 동안의 예비과목 단계를 거친후에는 제4기생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는 최정무의 경우이지만 동행한 윤호 등 4명도 비슷한 학습과 훈련 과정을 거치였다고 보아진다.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 시절, 최정무는 조선인 양림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국공산당이 지도한 1927년 12월의 광주봉기에 뛰여들었다. 윤호도 같은 과정을 밟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광주봉기 실패후에는 각기 천신만고를 겪으며 상해에 이르러 조선인지부를 찾았고 보정군관학교 출신인 무정과 더불어 한지부에서 당생활을 하며 상해 한인청년회를 개편한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 성원으로도 뛰게 되였다. 무정은 보정군관학교 출신이였고 오명, 최정무, 윤호 등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였다. 당시 무정은 사기가 부쩍 올라있었다. 다 같은 중국 군관학교 혁명군인 출신들이니 중국혁명에서 몸을 내번지며 해볼만했다. 최정무가 말하는 극동지역 조선인혁명가 박우선생처럼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은 갈라볼수 없고 중국혁명에 참가하면 역시 조선혁명에 참가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니까. 그런데 생때같던 윤호가 상해조선인지부와 "상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에서 별반 활동하지 못하고 1928년 5월 28일에 일부 동지들과 함께 불행히도 적들에게 체포되여 남경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무정과 그의 동지들은 분하여 펄쩍 뛰였다. 알고보면 이 적들이란 상해 프랑스조계지 순포방 순포들이였다. 황포출신 윤호는 어찌하여 이자들에게 체포되였을가? 이는 조선의용군 출신의 항일로간부 최채평전 "불멸의 영령 최채"(류연산 저)에서 자상히 알려진다. 1928년부터 1932년 몇년사이만 해도 상해의 조선인들은 무정 등이 지도하는 상해 조선인 중공당지부와 그 외곽조직인 "상해 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청년동맹"의 지도하에 상해에서 광범위한 반일선전활동을 자주 벌리였다. 낮이면 반제집회, 시위행진 등이, 밤이면 프랑스 공공조계지에 삐라와 포스터가 나타나니 조계지당국의 비위를 거슬릴수밖에 없다. 이때를 두고 최채는 아래와 같이 알려주고있다. “프랑스조계지 순포방과 공공조계지 공부국에서는 조선인혁명가를 체포하여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일본령사관에 넘겨 서울 서대문감옥 등에 압송하고 조선인으로 밝혀지지 않으면 국민당정부에 넘겨 남경감옥 등에 투옥케 하였습니다. 상해 조선인당지부의 주요 골간이였던 정향명(丁向明,일명 성시백)과 윤호, 김석철 등 동지들은 선후하여 체포된 뒤 남경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였으며 우수한 공산당원인 강선필은 국민당에게 학살되여 남경 우화대(雨花台: 남경시 혁명렬사릉원)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최채의 이 증언은 황포출신 윤호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상해 프랑스조계지 순포방 순포들에 의해 체포되고 남경감옥에 투옥되였음을 잘 알리고있다. 일제측의 관련 자료로 보면 무정 등 동지들의 지도하에서 상해 조선인들의 반일혁명활동은 정말 활발히 전개되였었다. 1932년, 조선의 전민족적인 반일운동—3.1운동 13돐을 맞으면서 상해한인녀자청년동맹에서는 "3.1절을 당하여 동지에게 격함"을 발표하고 상해한인청년당에서도 "3.1기념 선언"을 발표하였다. 중국혁명호제회(互济会) 상해한인분회에서도 "3.1 운동 제13주년 기념 선언"을 발표하고 조선인 민간단체 화랑사(花郎社)에서도 "3.1절 기념에 대하여"를 발표하여 그 성세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런 발표문과 기념활동은 비록 무정이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홍3군단으로 떠난후라 하지만 상해 조선인 중공지부와 그의 외곽조직인 상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의 구체적인 지도의 결과라는것은 에누리없는 사실이다. 무정의 상해시절도 그러했었다. 상해시절의 무정과 그가 포함되고 지도하는 상해 조선인 중공지부와 상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는 여러 반일활동들과 더불어 남경감옥에 수감중인 윤호, 김석철, 성시백 등 세 동지를 구출하기 위한 대중적인 선동 및 위문금 모집 활동을 활발히 벌렸다. 무정은 이 구출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그러나 윤호는 조직과 동지들의 이같은 노력의 결과도 보지 못하고 남경감옥에서 옥사하여 상해 조선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구체적인 옥사시간이 어느해, 어느달인지는 밝혀지는 자료가 보이지 않지만 1932년 3월 직후라고 추측을 가져본다.
1    항일장령 무정장군의 인생비화1 댓글:  조회:1801  추천:1  2016-09-06
무정장군.  1920년 3월 1일 중국 상해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사진.  중국공산당의 영향과 추동, 인민군중의 지지밑에서 북벌군은 반년 남짓한 기간에 오패부, 손전방의 수십만명 주력부대를 소멸하고 중국의 절반 땅을 점령하였다. 1927년 1월 광주의 국민정부는 무한으로 옮겨갔다. 혁명세력은 주강령역으로부터 장강, 황하 류역에로 발전하였다. 화북이 눈앞에 보였고 조선도 멀지 않았다. 희열에 벅찬 무정은 지체 없이 북벌전쟁에 뛰여들며 조선민족 대표로 무한에서 열린 “반일대동맹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27년 4월, 장개석이 상해에서 4.12반혁명정변을 일으키고 7월 15일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가 무한에서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하자 국공합작은 파렬되고 기세 드높던 대혁명-북벌전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허나 투쟁의 시련을 겪으며 위대한 북벌전쟁에 나섰던 거의 모든 조선인혁명가들은 확고부동하게 중국공산당 켠에 섰다. 무정도 국민당의 공산당진압에 맞서 싸우다가 한구에서 체포되여 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사형에 언도되였다고 한다. 그러자 무한의 대학과 중소학교 1만여명 학생들이 대시위를 가지고 조선인혁명가 무정의 즉각 석방을 강력히 촉구하여 나섰다. 무한당국, 아니 왕정위 괴뢰정부는 학생들 대시위에 눌리워 무정을 가짜로 석방하고 암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무정은 혼자가 아니였다. 괴뢰정부의 무창법원 법관중에 무정의 동지가 있었기에 무정은 다행히도 상해로 무사히 빠질수 있었다. 무한의 대학과 중소학교 1만여명 학생들 대시위, 무창법원의 동지-이러한 사실들은 공산당원 무정의 됨됨이를 알리고도 남음이 있다. 무한에서의 무정은 조선인혁명가의 대표로 성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 시절 상해에는 중국공산당 조선인(한인)지부가 활동하고있었다. 적절히 말하면 중국공산당 강소성위 소속 홍남구(洪南区)조선인지부다. 이 조선인지부의 래력을 알자면 조선공산당을 곁들어야 할것 같다. 1925년 4월에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였다는것은 세인이 잘 아는 일이다. 이에 따라 상해에는 조선공산당의 지부가 조직되였는데 사회주의자 려운형이 지부 책임자였다. 국제공산당 일국일당(一国一党)의 원칙에 따라 상해 조선공산당지부는 1927년 9월에 지부성원 전체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강소성위 홍남구소속으로 되였다. 려운형이 의연히 서기였다. 려운형은 그때 복단대학 영어교수였다고 하는데 중공지부는 그의 사택인 상해 프랑스조계지 포석루 128번지(上海法租界蒲石楼128号)를 거점으로 달마다 2~3차의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였다. 로홍군이고 중화쏘베트 제1차 대표대회의 유일한 조선인대표였던 최정무(崔政武)는 상해 복신로 182번지 2층 집이였다고 자기의 구술문-로홍군 최정무에서 밝힌다. 중공 상해조선인지부는 상해와 그 주변 조선인사회를 이끄는 중심기관이였다. 상해조선인지부에서 무정은 자기를 혁명의 길로 이끌고 중국으로 이끌었던 려운형을 다시 만나고 조선인지부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였다. 1929년에 상해조선인지부는 활동의 편리를 위하여 지부 외곽조직인 조선(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한인)청년동맹 등을 조직하였다. 그 내막을 보면 무정 등의 역할로서 무정은 장세걸,오명(吴明), 최정무, 윤호(尹浩), 김원식(金元植), 허렬(许烈) 등과 더불어 “중국본부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를 조직하고 그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다. 여기서 장세걸, 오명, 최정무, 윤호 등 무정의 동지들이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무정이 1924년 하북성의 보정군관학교를 다닐 때 장세걸(원명 김홍묵), 오명 등은 그 직후 황포군관학교를 다니거나 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하나의 공동한 혁명목표를 위하여 상해로 모여들었다. 오명에 대해서 알려지는 자료는 거의 없지만 황포군관학교 제5기생 조선인교관 이름에 훈련부 기술조교로 적히여있다. 장세걸(1901-1933)은 원명이 김홍묵(金洪默)이고 서울 사람이며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이다.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광주에서 무한에 이른 장세걸은 장개석과 왕정위의 혁명배반으로 기세 드높던 북벌전쟁-대혁명이 실패하자 국민당반동파의 무자비한 백색공포에서 무사히 벗어나 상해에 가서 상해조선인지부를 찾았었다. 그때로부터 무정과 장세걸은 뜻을 같이하는 혁명전우로 되였다. 그들은 또 힘을 합쳐 상해지부의 외곽조직인 조선(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한인)청년동맹 등을 조직하며 상해 조선사람들의 수령인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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