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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상해 1차당대회 현지 찾아서 댓글:  조회:9187  추천:6  2011-07-01
당창건 90돐을 맞으며 우리 겨레사회에 뭔가 유익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상해 1차당대회 현지와 가흥 남호 현지를 답사하고 인터넷에 올리면서 관련 조선인 혁명가를 소개하는 것인데 기말시험 기간이라 어디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최근년간 다녀온 현지 사진을 올리기로 하고 지난 5년간 찍어 둔 인터넷속 수많은 사진들을 검토하니 필자가 상해 1차당대회 현지를 다녀온 것은 2007년 10월로 나타났다.       2006년 9월부터 강남 로신의 고향에 와서 대학의 한국어강의를 시작한후 필자는 여가시간을 타서 항주와 녕파, 상해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와 현대 겨레발자취 답사를 시작하였다. 겨레 고대부분은 당나라 리백과 더불어 중국문화의 2대거장으로 받들리는 지장보살 김교각, 고려 명승 의천 대각국사를 중심으로 하는 옛 겨레스님들의 강남진출이고, 현대부분은 팔로군, 신사군의 무정, 양림 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북벌전쟁, 남창봉기, 광주봉기. 중앙혁명근거지, 2만5천리 장정길, 연안,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의 겨레 혁명활동이니 2007년 10월에 상해 1차당대회 현지를 찾음은 1921년 7월 전후로부터 시작된 중국공산당 계렬 우리 겨레의 발자취답사 시작를 의미한다.   우리 북방의 10월은 마가을의 시작이라 날씨가 제법 쌀쌀한 기운을 풍기기도 하지만 강남의 상해는 한창 여름철과 다름이 없다. 여름철 차림새로 상해 황포강가를 거쳐 상해 원 망지로 106번지, 오늘의 흥업로 76번지를 찾으니 1차당대회 회지를 찾는 사람들이 그칠줄 모른다. 2층건물로 된 오른쪽 건물우로는 오성붉은기가 나붓기고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회지(会址)라고 밝힌 정면 벽의 표시패가 발목을 잡는다. 회지 표시패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노라니 감개무량하기만 하다. 필자가 상해 1차당대회 현지를 찾은것은 2007년 10월이 처음이 아니다.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한 이듬해 1983년 5월과   6월, 화룡현위 당사연구실에 출근하게 된 필자는 당사연구실의 왕청산선배님과 같이 상해, 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첫 남방답사길에 오르게 되였는데 이해 5월 상해에 이르러 먼저 찾은 곳이 1차당대회 현지렸다. 우리 력사연구 외통길에 오른 필자로서는 선참 마음이 끌림을 어찌할수 없다할까. 처음 보는 상해, 처음 찾는 1차당대회 현지가 20대 후반 한창나이 젊은이의 마음을 활활 불태운다.    그로부터 근 30년 세월이 흐른 속에 다시 1차당대회 현지를 찾으니 외면은 별로 변화를 모르겠으나 내부는 훨씬 크고 많이 달랐다. 근 30년 전에는 1차대회 자리외 전문 전시관이 별로 없은것 같은데 지금은 전시관이 1층과 2층으로 되여 방문객들을 끌고있었다. 필자의 주의를 끄당김은 중공 1차대회부터 16차대회 사진전시로 새로 꾸며진 “빛나는 려정”, 필자는 1차~16차 대회의 개요를 일일이 카메라에 담으며 후일의 당력사 공부자료로 남기였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내내 1차당대회 이모저모에로 쏠리였다. 필자로 말하면 그럴만한 리유가 없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상해 1차당대회 현지를 처음 찾은 1983년 그때는 잘 몰랐으나 세월과 력사지식이 정비례를 이루니 상해를 비롯한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의 겨레 혁명활동이 쫘악 펼쳐진다. 그속에, 1차당대회 전후 세월속에 성큼성큼 걸어오는 겨레의 한 위인이 있으니 그이는 전문 연구일군들 외 우리 겨레가 잘 모르는 안병진 조선인 혁명가다. 후일 안병진과 더불어 조선의용군 투쟁의 일익을 이룬 그의 아들이고 조선의용군 전사인 안화응의 관련 회상기를 보니 “아버지 안병진은 1921년에 상해에서 활동하는 큰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상해로 망명하여” “당시 상해에 주재하는 제3국제 동양부장 웨이진스끼와 중국공산당 책임자 진독수지간의 수차례 회담에 참가하여 국제당관계자 조훈과 같이 통역사업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안병진 관련 력사자료를 헤아리면 이는 진실한 력사로 확인되지만 국제공산당 파견자가 웨이진스끼인 것으로 보아 시간은 1920년을 1921년으로 잘못 회상하고 있음을 인차 보아낼수 있다. 먼저 안병진의 아들 안화응이 밝힌 가족사를 보면 안병진은 3형제중 막내로 나타난다. 큰형님은 안병찬이고, 둘째형님은 안병규이다. 3형제 맏이 안병찬은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왕조를 협박하여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던  1905년 11월 그 세월에 벌써 고종황제께 지부(持斧)상소를 올리여 학부 대신 리완용, 군부 대신 리근택, 내부 대신 리지용, 외부 대신 박제순, 농상부 대신 권중현 등 “을사 5적”을 처단하고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잡을 것을 요구했다면 1909년 10월 26일 할빈역에서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쏴죽인 안중근의사가 려순감옥에서 재판을 받을 때 영국 변호사들과 함께 안중근의사 구원운동을 힘있게 내밀기도 했다.   안병찬의 위인다운 처사였다. 이런 위인이 1917년 로씨야 10월혁명을 통해 레닌의 길이 진리임을 터득하고 1921년 5월 상해에서 조기공산주의자 리동휘를 도와 고려공산당을 창건하고 주요책임자로 활동하며 이해 6월 고려공산당 대표들인 남만춘, 한명세 등과 더불어 모스크바에 가서 국제공산당 제3차총회에 참석하고 대회에 앞서 이들은 로씨야 공산당대표 슈미야스끼의 도움으로 5월 말에 레닌의 접견을 받는다. 1919년 3월에 국제공산당 제1차 총회에서 조선인 강상주가 레닌과 함께 사진을 찍는 영광을 가지고 1920년 7월 국제공산당 제2차총회에서는 리동휘의 한인사회당 대표 박진순이 또 레닌과 함께 사진을 찍는 영광을 가지였는데 안병찬 등은 레닌의 접견을 받기까지 했으니 보다 영광이 아닐수 없다.   그러던 안병찬은 귀국도중 중국 만주리에서 맏아들 안철웅과 같이 일제놈들에게 암살되였다. 둘째 안병규는 중조변경에서 비밀통신활동을 벌리며 중국 안동에서 배를 타고 조선 신의주로 건너가다가 일제놈들에게 불행히 체포된다. 그는 감옥에서 갖은 혹형을 받다가 중풍을 만나 앉은뱅이로 되고 가석방되여 집에 묵박히는 처지로 떨어졌다.   이럴 때 안병진은 신상은 잘 알려지지 않으나 로씨야 모스크바에서 동방대학을 다녔다하고 1920년 봄에 국제공산당 대표 웨이진스끼(维金斯基) 일행과 함께 중국으로 오게 된다. 상해 중국공산당 제1차전국대표대회 회지기념관에서 편찬한 100개 애국주의교육시범기지총서 “천지개벽의 대사”에서는 1920년 3월에 국제공산당에서 웨이진스끼가 대표단을 인솔하여 중국에 오게 하였는데 일행은 부인과 비서, 통역으로 화교 양명재라고 말하고있다. 그러면 안내와 통역에 양명재와 안병진 두 사람인데 이들은 선후로 북경과 상해에서 웨이진스끼가 리대소와 진독수를 만나 회담하게 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창립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그후 안병진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27년 봄에 신의주에서 체포되고 10년 감옥살이 끝에 1937년에 석방된다. 출옥한후 옛 동창생의 목재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1942년에 상점을 따라 천진으로 가고 천진에서 지하공작자로 활동하며 연안과 태항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위해 헌신적으로 싸운다.   안병진은 실로 견실한 조선인 혁명가로 혁명전사의 삶을 이어간다. 지금으로 보아 1차 당대회 전후기간 안내와 통역으로서의 안병진의 력사사실을 익숙히 헤아릴 수는 없으나 국제공산당 대표 웨이진스끼의 통역으로 북경에서 리대소를 만나고 상해에서 진독수를 만나 국제공산당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을 한데 이어 놓으며 중국공산당 창립준비에 기여한 것은 력사적 사실로서 우리를 크게 고무한다.   2007년 10월 상해 1차당대회 력사현지를 찾은 때로부터 또 근 3년 세월이 흘렀다. 중국공산당 창립에 기여한 조선인혁명가 안병진, 그의 발자취는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서 싸운 겨레발자취의 빛나는 한페지로 아롱져있다. 그래서 1차당대회 현지 찾는 마음 보다 뜨거워나는 것일까.   2011년 6월 30일    
390    【장정발자취】(9) 홍군시절 거치어 온 엽평의 녹나무 댓글:  조회:9001  추천:4  2011-06-28
  【장정발자취】(9)         홍군시절 거치어 온 엽평의 녹나무
389    【장정발자취】(8) 쏘베트 1차 대회와 겨레 한 젊은이 댓글:  조회:7670  추천:11  2011-06-25
【장정발자취】(8)              쏘베트 1차 대회와 겨레 한 젊은이   편자의 말:      서금의 엽평에서 쏘베트 1차 대회 장소를 답사하고 주석단 자리에도 올라 보면서 떠오른 한 사람은 우리 겨레의 한 젊은이--최정무였다. 아래 글을 보면 쏘베트 1차대회와 겨레 한 젊은이 최정무가 그대로 나타난다.        대혁명 실패후 남창봉기, 광주봉기 등에 참가하였던 수십명 조선동지들은 불타는 희망을 안고 중앙혁명근거지로 들어갔다. 무정, 양림, 최정무, 최음파 등 조선인청년들이 그 돌출한 대표로 된다. 1930년 3월, 조선인 최정무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상해를 떠나 서금으로 갔다. 복건성서부를 지날 때 그는 뜻밖에도 엽검영동지를 만났다. 엽검영이 광주봉기를 지휘할 때 최정무는 광주봉기의 보통전사였다. 오래간만에 상봉한 그들은 그날 저녁 한 침실에서 자면서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서금에 간후 최정무는 홍군기계수리공장에서 일하게 되였다. 그때 그는 홍군 후방부대 정치부 주임 모택담을 알게 되였다. 1930년 6월의 어느날, 모택담이 최정무를 불렀다. 무슨 새로운 과업이 있는가부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잉어반찬을 올린 술상이 그를 기다리고있지 않겠는가, 그가 너무 송구스러워 몸둘바를 몰라하고있는데 모택담이 구속없이 대하며 술을 따라주었다. 그들은 술상에 앉아 온 오후 이야기꽃을 피웠다. 최정무로 놓고 말하면 실로 잊을수 없는 하루였다. 1931년 11월 7일, 중앙혁명근거지 서금에서 제1차중화쏘베트공화국 로농병대표대회가 성대히 열리였다. 여러 혁명근거지와 상해, 무한 등 도시에서 온 로동자, 농민, 병사, 혁명적지식인 대표 도합 600여명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최정무가 유일한 조선민족대표로 력사적의의를 띤 그번 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최정무는 쏘련 울라지보스또크 쌍성자 하구촌 출신(1910년생)이다. 10월혁명후 쌍성자학교를 졸업한 그는 조직의 파견을 받고 1926년 5명의 조선인 쏘련공청단원과 함께 우쑤리강을 건넜다. 그뒤 상해를 거쳐 광주에 가서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 그때 그는 조선인 양림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광주봉기에도 참가하였다. 최정무는 쏘베트회의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받고 자기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의 말을 빈다면 《참으로 꿈만 같았다.》 그해 20살밖에 안되는 그는 높뛰는 가슴을 안고 대회장소인 서금 엽평의 옛 절간으로 찾아갔다. 최정무는 대회에서 모택동동지와 주덕동지의 보고를 듣고 또 대표발언시 연단에도 올랐다. 발언준비가 되지 못한데다가 감격에 목이 메여 말이 나가지 않았다. 주석대에 계신 모택동, 주덕 등 동지들이 그에게 자애로운 눈길을 보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긴장하기만 했다. 그가 몇마디 못하고 연단에서 물러나자 모택동동지는 나이가 얼마며 무슨 일을 하는가 친절히 묻기까지 했다. 회의기간에 모택동동지께서 경위원을 보내여 최정무를 찾았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모택동은 주덕과 이야기를 나누고계셨다. 그는 너무나 흥분되고 긴장한김에 무슨 인사말을 올렸으면 좋을지 몰랐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모택동은 어쩔줄 몰라하는 그를 자애롭게 자기 곁에 앉혔다. 그리고는 가정생활형편, 사업형편을 물으신 뒤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선청년으로서 중국혁명에 참가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동무는 지금 혁명의 첫 발자국을 내디디였습니다. 혁명의 길은 아직도 멀고도 머니 계속 학습을 잘하여 중국혁명과 조선독립을 위하여 끝까지 잘 싸워야 하겠습니다.》 모택동의 말씀은 마디마디 힘있었고 사랑으로 차넘쳤다. 1932년 봄, 최정무는 모택동동지의 배려하에 중앙쏘베트구역의 홍군군정학교에 가서 제3기생으로 학습하게 되였다. 류백승이 홍군군정학교 교장이였고 무정이 사격훈련교원이였다. 3개월간의 학습이 끝난후 최정무는 선후로 홍군 제22군 제1퇀 제2련 부련장, 지도원 직을 맡고 국민당의 군사《포위토벌》을 물리치는 피어린 전투에 뛰여들었다. 1933년 봄, 최정무는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한 국민당의 제4차포위토벌을 분쇄하는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홍군 제3병원으로 호송되여 오래동안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조직에서는 그가 다시 전선에 나갈수 없는 형편을 고려하여 홍군 제3병원 제3소 지도원책임을 맡기였다. 후에는 또 병원의 당총지 부서기사업을 맡았다.  
388    【장정발자취】(7) 서금 첫 답사지--엽평 옛터 댓글:  조회:8099  추천:16  2011-06-21
【장정발자취】(7)                  서금 첫 답사지--엽평 옛터     남창에 이어 찾은 곳은 그젯날 중앙쏘베트근거지 서금. 2009년 7월 10일 오후 늦은 때 서금에 이르고 서금 첫 답사지는 엽평 옛터로 잡혀졌다.    엽평 옛터는  서금시 도시구역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엽평향 엽평촌 구내에 자리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가장 잘 보존된 혁명 옛터의 하나라는 엽평 옛터는 그젯날 혁명 옛터와 기념건축물 22자리를 포괄하는데 그중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만 해도 16자리에 달했다.    엽평 옛터는 중국의 첫 전국성 홍색정권--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중앙정부 탄생지로서 일찍 모택동, 주은래, 주덕, 임필시,  왕가상 등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사업하였으며  "모주석"이란 칭호도 엽평으로부터 시작되였었다.    이런 엽평 옛터에 우리 겨레의 발자취도 어려 있으니 서금 엽평은 우리가 서금에서 찾은 첫 답사지였다. 답사 시작은 2009년 7월 11일 오전 8시 직전부터.
387    【장정발자취】(6) 쾌속버스는 서금으로 달린다 댓글:  조회:6541  추천:22  2011-06-17
【장정발자취】(6)                쾌속버스는 서금으로 달린다     2009년 7월 10일 오전 8시반경, 남창을 떠난 쾌속버스는 남으로 남으로 달린다. 강서땅 남부 복건 장정과의 변계지대에는 당년 홍색수도로 불리운 중앙혁명근거지 서금이 있다.    쾌속버스는 강서의 어머니 강--감강을 끼고 달리기도 하고 누우런 평야의 논밭 모습, 산천이 수려한 풍경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좋이 6시간 푼히 달려서야 서금에 이른다.    서금의 모든것이 필자한테는 신선하기만 하다.  중앙혁명근거지 서금에는 양림 등 우리 겨레의 발자취가 스미여 더욱 그러한것 같다. 처음 이른 서금, 서금행 시작이다.
386    【장정발자취】(5) 등왕각에 올라 전적지 굽어 보며 댓글:  조회:7551  추천:21  2011-06-17
【장정발자취】(5)              등왕각에 올라 전적지 굽어 보며   강서성 성소재지 남창을 가로지르는 감강가에는 하늘을 찌를듯 솟아 오른 등왕각이 보인다. 등왕각(滕王阁)은 당나라 시절 당태종의 동생인 등왕(滕王) 리원영이 축조하였다하여 등왕각이라  한다는데 호남의 악양루, 호북의 황학루와 더불어 중국 강남의 3대 명루로 불리운다.    2009년 7월 9일 오전,  우리는 8.1남창봉기기념관 등 답사를 마치고 그 부근의 감강기슭에 자리한 등왕각에 올랐다. 등왕각은 높이 57.5미터이고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는 강남의 3대 명루의 하나여서 그야말로 장관이지만 필자는 그런 장관에 별로 흥취를 느끼지 못하였다.    등왕각에 오르니 주변의 남창 도시 모습과 감강의 모습이 환히 펼쳐지는 속에 남창봉기기념관 쪽과 하룡지휘부, 봉기의 치렬한 싸움터 하나였던 강서성가무극원 쪽이 한눈에 안겨진다. 그속에 멸적의 함성높이 적진을 들부셨던 강석필, 김래준, 홍범기 등 겨레 전사들의 모습이 방불히 보이는듯 싶다……
385    【장정발자취】(4) 남창봉기 곳곳에 발자취 남기다 댓글:  조회:6882  추천:18  2011-06-16
【장정발자취】(4)                 남창봉기 곳곳에 발자취 남기다 1927년 8월 1일에 일어난 남창봉기는 중국혁명사에 길이빛날 위대한 봉기이다. 8월1일은 후에 우리 인민해방군의 탄생일로 되였는데 바로 80여년전의 이 위대한 봉기는 어쩌면 오늘의 세대—청소년들에게는 거리가 멀어보일수도 있지만 우리 겨레의 열혈청년들도 참가하여 피를 흘렸다고 할  때는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를것이다. 1926년 7월에 정식으로 시작된 기세드높은 북벌전쟁은 혁명세력을 주강류역으로 부터 장강류역에로 발전시켰다. 혁명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고 전국이 희열과 흥분에 잠기였다. 바로 이러한 떄 국민당내의 장개석과 왕정위집단은 1927년 4월 12일과 7월 15일에 선후로 혁명을 배반하고 공산당원과 혁명군중에 대해 피비린 체포와 도살을 감행하였다. 중국의 절반땅을 휩쓴 북벌전쟁은 중도에서 실패되고말았다. 중국혁명은 칠성판에 올랐다. 중국공산당은 혁명을 만구하기 위하여 우리 당의 영향과 장악하에 있는 부분적 국민혁명군, 즉 북벌군으로 남창에서 무장봉기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엽정이 지휘하는 제2방면군 제11군의 24사, 섭영진, 주사제 등이 지휘한 제4군 제25사, 하룡이 지휘하는 제20군은 우리 당이 장악한 무장력량이였다. 주덕이 령도한 제3군 군관교육퇀, 무창국민정부 경위퇀, 중앙 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도 우리 당의 지도를 받았다. 상술한 병력은 3만여명으로 헤아려졌다. 그중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 모두가 북벌에 참가한 동지들이였다. 1927년 8월 1일 새벽 2시, 세방의 총소리가 이른새벽의 대기를 썰며 남창시를 들깨웠다. 몇발의 붉은 신호탄이 새벽하늘을 헤갈랐다. 엄밀히 대기하고 있던 우리 봉기군은 주은래를 서기로 하는 중공전적위원회와 하룡, 엽정, 주덕, 류백승 등의 령도하에서 비호같이 적진으로 육박하였다. 엽정부대 제11군 24사는 적의 중요거점인 천주교회당과 광려중학교를 맹공격하였다. 이 부대 제 72퇀의 박인, 김철강 등 조선인전사들은 전우들과 함께 적 제3군 23퇀과 24퇀을 답새겼다. 이 두개퇀은 적군 주력이였다. 헌데 간밤에 23퇀 퇀장과 24퇀 정, 부 퇀장 셋이 주덕이 베푼 《연회》에 끌려들었기에 지휘자를 잃었다. 적들은 미처 손쓸사이도 없이 몽땅 들리였다. 화룡현 개산툰 정동학교 출신인 박인은 이 전투에서 무비의 용맹을 떨치였다. 적 제6군 57퇀이 봉기군의 진격로를 막아 나서자 봉기군 제24사 71퇀 3영은 인차 돌격대를 무어가지고 천주교회당의 대문을 짓부시며 들어갔다. 돌격대의 조선인 방월성은 전우들과 더불어 정면공격을 들이댔다. 다른 봉기군부대가 배후공격을 들이대자 적들은 투항하는수밖에 없었다. 하룡부대 제20군은 적의 제5방면군 총지휘부를 들이쳤다. 적의 총지휘부는 봉기군 제20군 지휘부와 거리 하나를 사이두었는데 거리 서쪽에는 옛 성루가 솟아있었다. 적들이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화력으로 성문을 봉쇄한데서 봉기군은 쉽사리 뚫고나갈수 없었다. 하룡과 류백승은 몸소 전투를 지휘하였다. 20군의 조선인전사 강석필, 홍범기, 김래준 등은 탄우속을 헤치며 성루에 뛰여올랐다. 높은 지세는 싸움에 유리했다. 분노의 총탄은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적들은 더 배겨내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봉기군 제20군 교도퇀과 제6퇀은 적군 제9군 79퇀, 80퇀을 소멸할 과업을 맡았다. 8월1일 새벽 이들은 적과 벽 하나를 사이두고 대기하고있다가 불의습격을 들이댔다. 적의 군영은 수라장을 이루었다. 적의 군영에 뛰여든 조선인 김래준 등은 적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79퇀의 적들은 거개가 옷도 바로 입지 못하고 손을 들어야 했다.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불과 4~5시간만에 적 3000여명을 섬멸하고 남창시를 공제하였다. 봉기에 참가한 실제부대는 2만여명인데 그중 조선인전사가 수십명이다. 제4군교도퇀의 박영, 리용 등 200여명 조선인전사들은 국민당신군벌 장발규의 강박하에 부대와 함께 남하하였다가 광주봉기의 주력으로 되였다. 8월 2일 남창시 5만여명 군중들은 새로 창립된 혁명위원회의 지도밑에 성대한 집회를 가지고 남창봉기의 위대한 승리를 열광적으로 경축하였다. 8월 3일부터 6일까지 기간에 봉기군은 남창에서 물러나 광주로 남하하였다. 봉기군은 남하하는 도중 우세한 적들에게 포위되여 큰 손실을 당했다. 남창봉기에서 용맹을 떨쳤던 연길현 동불사사람 김철강, 훈춘현 대황구사람이고 룡정 은진중학교출신인 강석필, 왕청현 라자구사람 리범홍, 밀산현 사람 홍범기 등 조선인전사들은 해륙풍지구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되였다. 남창봉기는 국민당반동파에게 첫총을 쏘았다. 남창봉기는 우리 당이 무장투쟁을 독립적으로 령도하기 시작하였다는것을 세상에 장엄히 선포하였다. 주덕, 진의가 거느린 일부 부대는 1928년 4월 정강산에 이르러 모택동이 령도하는 추수봉기부대와 합치여 로농홍군 제4군으로 편성되였다. 8월 1일은 후에 중국인민해방군의 건군절로 되였다. 중국혁명사에 길이 빛날 남창봉기—이 봉기에는 박인(화룡현), 김약산, 성준용, 김철강(연길현), 방월성, 강석필(훈춘현), 홍범기(밀산현), 김래준, 리범홍(왕청현), 김영준(동녕현), 방국성(녕안현), 김강(녕안현), 권상선(녕안현), 전승익(화룡현), 최관일(훈춘현) 등 수십명 조선인전사들이 참가하였다. 력사, 력사는 그들을 잊지 않을것이다.            
384    【장정발자취】(3) 북벌영웅 김준섭렬사 모셔진 곳 댓글:  조회:7673  추천:17  2011-06-13
              북벌영웅 김준섭렬사 모셔진 곳 【편자의 말】    지금으로부터 28년 전 그 세월 8.1남창봉기기념관을 처음 찾았을 땐 북벌영웅으로 불리우는 겨레 김준섭렬사가 여기 남창봉기기념관에 모셔지고 있었는데 28년후 다시 찾으니 남창시 81대도 399번지--강서혁명렬사기념당 한 구간에 모셔지고 있었다. 필자는 시름을 놓았다. 우리 겨레렬사를 강서 렬사들과 더불어 같이 모신 강서 사람들이 그지없이 고마왔다. 이에 고 현룡순교수의 정리로 된 김준섭렬사 전기를 이곳에   올리여 본다.     북벌전쟁에는 수백명의 조선족전사들이 참가하였는데 우수한 공산당원이며 조선족청년인 김준섭도 그가운데의 한사람이였다. 그는 북벌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26년 2월에 국민혁명군의 기관총 교관으로 배치되였다. 김준섭(金俊燮, ?--1926)은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오동리 사람으로서 조선 3.1운동후 동북에 들어와 혁명사업을 하다가 조직의 파견을 받고 쏘련에 들어가서 군관학교의 기관총전문과에서 학습하였다. 그는 혁명에 참가한후 사업의 수요에 의하여 강화일이라고 변성명하여 적들과 결사적투쟁을 하였으며 북벌전쟁에서 빛나는 공로를 세운 우수한 조선족혁명투사이다. 김준섭은 쏘련으로부터 중국의 광동성에 이르렀을 때 광동혁명정부는 제2차동정을 끝내고 잠시 휴전하였다. 혁명정부는 이 기간에 혁명군을 대대적으로 확대하여 6개 군단으로 편성하였다. 김준섭은 국민혁명군 제6군 제55퇀 기관총련의 소좌 교관으로 배치받았다. 당시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에서는 북벌전쟁을 대폭적으로 지지하였으며 많은 우수한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을 국민혁명군에 파견하여 군사지휘와 정치사업을 맡게 하였다. 김준섭이 속한 제6군에는 림백거가 정치부 주임을 담당하였으며 제2군의 정치부 주임은 리부춘이 담임하였다. 국민혁명군내에서 공산당원들이 정치상, 군사상에서 일으킨 핵심적역할은 북벌전쟁이 승리할수 있는 결정적요인으로 되였다. 국민혁명군은 부대를 정돈하고 재편성하면서 북벌전쟁의 준비사업을 다그쳤다. 제6군의 각 퇀에는 기관총련이 조직되였다. 그런데 기관총련의 지휘관들과 기관총수들은 정규적인 훈련을 받지 못했으므로 전술상에서나 무기를 다루는 기술면에 있어서 아주 서툴렀다. 그리하여 우선 기관총련의 지휘관들에게 군사기술을 시급히 전수시킬 문제가 급선무로 나섰다. 제6군에서는 광동성 혜주현에 기관총훈련소를 꾸려 각 퇀 기관총련의 련장, 패장, 반장들을 집결시켜놓고 군사기술을 배워주었다. 김준섭은 기관총훈련소의 교관으로 초빙되여 석달동안 낮에 밤을 이어 온갖 심혈을 기울여 사업하였다. 기관총훈련소의 학원들은 모두 한족이였고 조선족은 김준섭 한사람뿐이였다. 군사훈련에서 가장 큰 난제라면 언어문제였다. 김준섭은 한어를 잘 알지 못했던것이다. 그가 쏘련에서 기관총에 대해 전수받은것이라면 전적 로어로 받았는데 그 지식을 한어로 옮겨놓는다는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도 기관총을 다루는 기술지도라면 괜찮은편이였다. 기관총의 부속품들을 하나하나 뜯어 분해하였다가 도로 맞추면서 몸짓, 눈짓 손시늉하면서 벙어리강의를 할것 같으면 학원들은 대강 알아들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리론강의는 도무지 시늉으로 대체할수 없었다. 그는 부대내의 한어에 능숙한 조선인을 찾아 강의내용을 그자신이 우선 조선어로 번역한후 대방에게 한어로 번역케 한 다음 한어발음을 한마디한마디씩 배워가면서 강의를 계속하였다. 물론 맨처음에는 그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고 학원들은 더구나 알아듣지 못하였다.하지만 학원들은 강의가 끝나면 열렬한 박수로써 교관을 고무하여주었다. 김준섭은 학원들의 학습열정에 감화되여 짬만 있으면 학원들에게서 한어를 배웠다. 김준섭과 기관총훈련소의 학원들사이에는 서로 선생이 되고 서로 학생이 되여 서로 배워주고 서로 배우는 혁명적동지관계가 건립되여 아무런 허물없이 친밀하게 지냈다. 제6군의 각 퇀에 배치된 기관총들은 그 대부분이 두차례의 동정을 통해 진형명의 군대에서 로획한것으로 그것은 미국과 영국에서 들어온 무기들이였다. 부분적 기관총은 봉계군벌 장작림의 손을 거쳐 입수한 무기도 있었다. 이러한 기관총들은 제1차세계대전에 쓰던것으로 새무기는 별반 없고 거의 낡은 무기였다. 김준섭은 낮엔 학원들에게 기관총에 관한 리론지식과 사용방법을 배워주었고 밤에는 늦도록 전군의 고장난 기관총을 하나하나 수리하였다. 그가 류숙하고있는 방엔 매일밤 자정이 넘도록 등잔불이 꺼지지 않았다. 이것을 알게 된 어떤 학원들은 교관의 건강을 념려하여 일찍 주무시라고 권고하였으며 어떤 학원들은 자원적으로 그와 함께 기관총을 수리하였다. 짧디짧은 훈련기간에 김준섭교관의 드높은 책임성과 학원들의 학습열정에 의하여 예기하였던것보다 더욱 큰 성적을 거두었다. 학원들은 학습임무를 완성하자 기관총도 교관의 손에서 말끔히 수리되였다. 1926년 5월, 북벌에 관한 결정에 이어 7월에 광동국민정부에서는 《북벌선언》을 공포하였다. 광주에 집결하여있던 국민혁명군 6개 군 및 후에 혁명의 편에 기울어진 광서군과 호남군의 2개 군을 합하여 8개군의 10여만명의 병력은 몽땅 북벌전쟁에 동원되였다. 북벌군은 3로로 나뉘여 진격하였다. 북벌에서 김준섭이 양성하여낸 각 퇀의 기관총련은 매우 큰 위력을 나타냈다. 동년 8월, 호북성의 정사교를 공격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정사교는 월한철도에 있는 중요한군사거점으로 3면이 물로 둘러싸였고 한면은 높은 산이 깎아세운듯 우뚝 솟아 천험지로 이름 높았다. 방어하기 쉽고 진공하기 어려운 이 험지에 직계군벌 오패부는 주력군 2만여명을 끌어넣어 지키게 하였다.  북벌군은 12차나 공격하였으나 번마다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시 김준섭이 소속한 부대는 서로의 총예비대로 있다가 엽정이 지휘한 《철군》으로 불리우는 제4군 독립퇀과 배합하여 유명한 정사교공격전에 참가하였다. 김준섭은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적의 화구들을 막았다. 불벼락을 퍼붓는듯한 기관총의 엄호하에서 엽정부대가 우회작전하여 우익으로부터 맹렬히 공격하여 이 거점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난공불락이라고 호언장담하던 오패부의 《철옹성》은 끝내 함락되고야말았다. 이 격렬한 공격전에서 김준섭이 지휘한 기관총련은 《철군》과 배합작전을 잘하였다. 그리하여 김준섭은 부대의 표창을 받았다. 제3전선에 속한 국민혁명군 제2군과 제6군은 강서성에 쳐들어가 강서의 남부와 서부를 점령하면서 남창을 핍박하였다. 김준섭은 부대를 따라 서로로부터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향해 진격하여 들어갔다. 동년 8월 14일, 북벌군은 제1차로 남창을 점령하였다. 그런데 제1군에서는 공산당원들을 배척하였기때문에 전투력을 잃게 되였다. 그 결과 직계군벌에 속하였다가 당시 독립적일파를 이룬 군벌 손전방부대에게 격파되였다. 손전방부대는 승리한 그 기세로 남창을 포위하게 되자 북벌군은 하는수없이 거기에서 철퇴하여 나오지 않을수 없었다.  이 긴요한 관두에서 김준섭이 소속한 부대가 후위를 섰다. 김준섭이 지휘한 제6군 55퇀의 기관총련은 후퇴전에서 또 한번 그 위력을 과시하였다. 적의 포위망을 뚫고 철퇴하는 가렬한 전투에서 기관총련은 완강하게 적의 진공을 물리치면서 서서히 후퇴하였다. 김준섭의 지휘하에 있는 기관총련은 진공전에서 영용하게 적의 화구를 제압하였을뿐더러 후퇴전에서도 침착하게 엄호하여 혁명군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기관총련은 전군의 후퇴를 엄호하면서 완강하게 싸우다가 탄약이 떨어지게 되니 대오를 뒤따라 안의를 거쳐 봉신으로 철퇴하였다. 기관총련은 후퇴전에서 완강하게 싸우면서 적지 않은 병사를 잃었다. 김준섭은 봉신에 머물러있는 동안 새 전사를 받아들여 훈련을 다그쳤다. 제3전선에 소속된 부대들은 무한 3진을 점령하고 남하한 제1전선의 제4군 등 부대와 협동작전을 하였다. 북벌군은 11월초에 또다시 남창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각 군은 수차의 전투를 거쳐 손전방의 부대를 각곳에서 격파하면서 남창으로 죄여들었다. 제6군은 악화역전을 공격하는 전투임무를 맡았다. 김준섭은 3정의 기관총을 지휘하여 역전에서 내뿜는 적의 화력을 제압하였다. 1926년 11월 19일 오후였다. 악화역전을 고수하고있던 적들은 좀처럼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김준섭은 적정을 살펴본후 3정의 기관총을 대각선으로 걸어놓고 적의 보루에 몰사격을 퍼부어 진격로를 헤쳐놓으려는 생각으로 우박처럼 퍼붓는 적탄도 헤아리지 않고 뛰여다니다가 그만 복부에 중상을 입었다. 전우들은 군사상에서는 그렇게도 엄격하였다가 생활상에서는 그처럼 살뜰한 교관의 상처입은 몸을 보고 몹시 근심하였다. 《강교관!강교관!》 (당시 김준섭은 강화일이라고 변성명하였다) 상처를 입고 풀밭에 누워있던 김준섭은 조용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푸른 하늘이 보이고 전우들의 정다운 얼굴들이 보였다. 김준섭은 전우들의 손을쥐고 미소를 지으면서 힘겨웁게 또박또박 말하였다. 《전우들! 혁명은 피흘리게 마련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시우!》 당시 국민혁명군에는 전선구호사업이 잘 조직되여 있지 않았으므로 김준섭은 제때에 치료를 받을수 없었다. 지나치게 피를 흘린 그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북벌군의 전우들은 그의 시체를 둘러싸고 차렷자세로 모자를 벗어들고 머리를 숙였다. 전우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교관을 잃은 전우들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왔으랴? 더구나 제6군 각 퇀의 기관총련 장병들의 가슴은 찢어지는듯 아팠다. 하지만 그들은 교관의 유언대로 슬픔속에 잠겨있을수만 없었다. 혁명은 피를 흘리게 마련되여있지 않는가! 국민혁명군의 장병들은 결연히 일떠섰다. 《강교관의 복수를 하자!》 《군벌을 타도하자!》 북벌군의 구호소리는 하늘을 찌르듯하였다. 전사들의 멸적의 기세는 더욱 높고 사기는 더욱 왕성하여 싸우면 싸울수록 세차게 불타올랐다. 제6군은 그 기세로 맹공격하여 그날 오후에 악화역전을 점령하였다. 김준섭의 시체는 매령기슭에 있는 적전초에 안장하였다. 북벌군이 남창을 점령한후 국민혁명군 제6군에서는 남창에서 규모가 방대한 추도회를 열었다. 그런후 그의 시체를 다시 희생된 북벌군의 장병들과 함께 청운보에 이장하였다. 그리고 남창시 진현문밖에 있는 피장구에 그의 비석을 세웠다. 북벌전쟁의 포화속에서 희생된 김준섭은 우수한 공산당원이였으며 자랑찬 조선족의 혁명전사였으며 전문적훈련을 받은 기관총지휘관이였다. 그의 혁명투쟁정신은 영예로운 중국혁명의 력사와 함께 오래오래 전하여내려갈것이다.                                            현룡순, 조선족백년사화(제2집), 료녕인민출판사, 1984년 4월
383    【장정발자취】(2) 8.1 남창봉기 기념관 댓글:  조회:8143  추천:25  2011-06-11
【장정발자취】(2)                     8.1 남창봉기 기념관 남창을 가로지르는 감강 기슭에 남창의 명루—등왕각이 있고 등왕각 가까이 남창시 중산로 48번지에 8.1남창봉기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8.1남창봉기기념관 구내에 들어서면 4층으로 된 웅위한 회색청사가 보이는데 이 회색청사가 바로 옛날 강서대려사 청사로서 당년 남창봉기 지휘부로 쓰이고 있었다. 하룡, 주은래 등 봉기지도자들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위대한 남창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1983년 여름 첫 남방답사길에 남창봉기기념관을 돌아 보았는데 그때 기념관내 한 구간에는 북벌전쟁시기 남창 악화역 공격전에서 장렬히 희생된 조선인 김준섭렬사가 그의 추모사진 그리고 회중시계와 함께 모셔지고 있었는데 아무리 구간구간을 헤아려도 김준섭렬사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다른 곳에 모신것 같았다......  
382    【장정발자취】(1) 영웅 도시--남창에서 댓글:  조회:8042  추천:26  2011-06-11
【장정발자취】(1)                        영웅 도시--남창에서       올해는 중국공산당 창건 90돐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당창건 90돐을 맞으면서  필자는 카메라로 보는 “장정발자취”, “태항산으로 가다”를 련재하게 된다. 민족출판사로부터 양림, 무정 두 장군 평전을 쓸 과업을 맡고 필자는 2009년 7월 여름방학부터 양림, 무정 두 장군 발자취를 따라 겨레발자취 답사길에 올라 보았다. 겨레발자취 첫 답사지는 영웅 도시로 불리우는 남창이였다. 남방 모 대학에 재학중인 딸애 설이가 동행하였다. 남창에서 우리는 8.1남창봉기기념관과 남창봉기의 여러 지휘부, 전적지들을 돌아 보았다. 남창봉기기념관은 1983년 여름 남방답사길에서 찾아 보았지만 이런 남창봉기 지휘부, 전적지들엔 당년 1927년 위대한 남창봉기에 참가한 우리 겨레 수십명의 피어린 발자취도 어리여 있었다. 8.1남창봉기기념관에서 필자는 우리 겨레 양림도 남창봉기에 참가하였다는 관련자료를 찾았다. 지금까지의 중국조선족사회 양림연구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발견, 새로운 자료였다. 남창에 이어 우리는 당년의 홍색수도로 불리우는 중앙쏘베트근거지—서금으로 달려갔다. 서금의 여러 홍색관광길에서 양림, 무정 관련 새로운 자료를 적잖게 찾아냈고, 장정길 양림, 무정 전기는 다시 써야 했다. 남창, 서금에 이어 필자는 2009년 여름방학에 홀몸으로 하북, 산서의 태항산항일근거지 전면답사에 나섰다. 태항산항일근거지 곳곳에는 팔로군에서 활동한 조선의용군의 발자취가 어리여 있었다. 2009년 겨울방학과 2010년 여름방학엔 당년 신사군에서 활동한 조선의용군의 발자취 따라 강소땅을 누비고, 운남, 사천, 귀주로 달려가 장정길에 오른 양림, 무정 장군의 발자취를 계속 추적하였다. 양림, 무정 두 장군의 평전집필을 더 늦추더라도 곧 닥쳐 올 올해 여름방학, 필자한테는 더없이 귀중한 이 시간을 타서 사천 경내 로정교탈취 자리, 설산초지 주요한 자리와 연안에 다시 가고, 양림의 희생지—황하가 산서 석루현에 꼭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오늘 2011년 6월 11일부터 먼저 “장정발자취” 카메라련재를 시작한다. 먼저 첫 장정길은 아니지만 장정길로 이어가는 남창부터 보여 드린다. 여러 분들의 진지한 왕림을 기대하여 보는 바이다. 그러노라면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서 활동한 우리 겨레의 발자취가 강서, 운남, 사천, 귀주 경내 장정길에서 펼쳐질 것이고, 팔로군—신사군에서 활동한 조선의용군의 발자취가 펼쳐질것이다.   2011년 6월 11일        
381    김염의 미망인 진이녀사 모시고 댓글:  조회:5891  추천:28  2011-06-05
              김염의 미망인 진이녀사 모시고    5월 29일 , 상해서 “중국영화황제 김염” 출판기념식이 열린다. 책의 저자 김창석씨로부터 초청서를 받은 필자는 절강월수외국어대 량복선교수님을 모시고 상해로 달려 갔다. 출판기념식에서 중국영화황제 김염의 미망인이고 조선족의 며느리인 대스타 진이녀사를 만날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 뜨거워 난다. 필자가 영화배우인 진이녀사를 영화를 통해 너무도 잘 알게 된것이 문화대혁명 전 중국 영화로 된 “철도유격대”인것 같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건 줄행랑을 놓는 놈에게 수류탄을 뿌린다는 것이 뢰관을 뽑지 않은 탓으로 터지지 않아 맹랑해 하던 그 장면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 70년대 까지만도 필자는 “철도유격대” 영화속의 이 수류탄의 주인공이 중국영화황제 김염의 미망인인줄 모르고 있었다. 70년대 말~80년대 초 그 시절에야 “철도유격대”의 이 수류탄녀배우가 우리 김염의 미망인이란것을 알고 우러르는 마음이 한없이 샘솟았다. 터놓고 말해 필자는 한늬 우리 겨레역사와 씨름을 하여서인지 명인이요, 스타요 하는데 아무 흥취가 없다. 숭배의식은 더구나 없다. 하면서도 진이녀사를 비롯한, 우리 겨레와 이어지는 분들은 예외인가 본다. 연변력사연구소 옛 시절부터 김염연구에 짙은 흥미를 가진 필자는 진이녀사를 찾아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2006년 9월부터 상해와 가까운 절강월수외국어대에 초빙된 후부터 더욱 그러하다. 진이녀사와 가깝게 지내는 “중국영화황제 김염”의 저자 김창석작가와도 여러번 부탁하다가 드디여 만남의 기회를 갖게 된것. 5월 29일 오후 상해 홍교문화중심에서 열리는 중국영화황제 김염 출판기념식은 오후 2시반에 열리기로 되였는데 진이녀사는 아직 이르지 않고있었다. 오후 3시쯤에 진이녀사가 출판기념식 자리에 나타나자 언녕 대기하고 있던 필자는 첫사람으로 진이녀사 앞에 “중국영화황제 김염” 책을 내여 놓았다. 90고령이라는 진이녀사는 친필사인의 로고를 념려하여 이미 마련한 사인도장을 꺼내들고 첫사람으로 눌러 주었다. 첫사람 첫사인이여서 만일이 걱정되여서인지 진이녀사는 다른 흰종이에 한번 찍어 보고서야 필자가 사든 책에 찍어 주셨다. 진이녀사는 말이 90고령이지 실제는 금방 60을 넘긴 녀인 같아 보였다. 이렇게 젊어 보인다는 말인데 필자는 반가운 마음에서 진이녀사의 손을 잡아주고 첫사람 자리에서 물러선후 량복선교수님과 상해외국어대학 김영규박사의 사인장면을 두고 련속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우린 서로 찍어주기로 약속하고 대기하고 있었었다. 사인의식 자리는 사인 받으려는 사람들로 붐비여 사진 한장 찍기가 쉽지 않았다. 필자는 사람들 팔굽아래로 머리를 박으며 헤둥거려서야 김영규박사, 량복선교수, 상해 강옥자씨를 카메라에 담을수 있었다. 우리 모두의 얼굴엔 만족의 희열이 일었다. 출판기념식이 시작되자 필자는 여러 사진기자들과 더불어 주석대를 오르내리며 부지런히 디지털카메라를 눌러댔다. 하나 또 하나의 출판기념식 전경과 진이녀사 모습이 찍히여졌다.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던 필자와 우리 남방아리랑 상해 홍순범시인은 무대 아래서 잠깐 숨을 돌리며 휴식을 청했다. 필자가 주석대에 오른 저 5명중 녀사 한분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홍순범시인은 저분이 김염 책을 써낸 한국 박규원녀사라고 한다. (아니~박규원녀사라고, 사진찍기에 정신이 없다보니 주위를 돌리지 못했구려!) 필자는 홍순범주인과 말하다말고 주석대로 다시 올라가 사진 몇장을 찍었다. 유감이라면 카메라 섬광에 반사된 박규원녀사 얼굴이 남달리 빛으로 반사되여 사진효과가 리상적이지 못한 것이라 할까. 출판기념식이 끝나자 약삭바른 사람들이 우르르 무대우로 올라갔다. 필자도 그중의 한 사람이라 우리 량복선교수님을 무작정 대회주최측 녀사들 옆에 서라고 말씀드리고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진이녀사와의 진귀한 사진이 찍히여졌다. 나 차례는 또 김영규박사가 찍어주었다. 진이녀사가 자리를 뜬후 우리는 박규원녀사와도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김염연구가인 필자한테는 한장 또 한장 진귀한 만남의 사진들이였다. 2011년 5월 29일의 상해, 나는 끝끝내 김염의 미망인 진이녀사와의 첫 만남, 첫 기념사진을 이룰수가 있었다. 이런 기회를 마련해 준 연변인민출판사 상해지사 김창석지사장이고 김염 책의 저자인 김창석씨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이는 근근히 시작이라 김염연구가의 한사람인 필자는 이제도 진이녀사를 얼마나 찾아 뵈여야 할지 모르겠다.   2011년 6월 5일                    
380    옛 영화스타는 완령옥 아닌 원령옥 댓글:  조회:4706  추천:49  2011-06-01
         옛 영화 스타는  완령옥 아닌 원령옥 1   금방 상해서 중국 100년 영화사에서 처음으로 “중국영화황제” 칭호를 받은 거물급 대스타 김염의 일대기를 다룬 중국 조선족명인 평전시리즈—“중국영화황제 김염” (김창석 저)출판기념식이 펼쳐지고 “예술세계”에 영화황제 김염 관련 글이 련재되면서 지난 세기 30년대 김염과 더불어 영화속 부부로 떠오른 대스타 원령옥이 다시 우리 사회의 주목을 끌고 있다. 헌데 우리 글로 된 일부 책들과 잡지들에서 따짐과 분석도 없이 원령옥 원씨를 완씨로 받아 들이여 혼란을 빚고 있다. 그럼 원령옥 원씨로 보는 사람 성씨 롼(阮)이 원씨일까? 아니면 완씨일까? 이를 알려면 이땅의 우리 글로 되였거나 우리 글 번역으로 된 책이나 잡지, 신문들에서 원씨를 쓰냐 완씨를 쓰냐를 볼것이 아니라 롼(阮)의 근본, 즉 뿌리를 캐 보아야 한다고 보아진다. 한국에서는 국민이요 하며 나라 사람들을 총칭할 때 중국에서는 인민이요 인민대중이요 백성이요 등으로 부른다. 구두어에서는 흔히 백성이라고 하는데 백성이란 명사의 시원이 나라 백가성에서 왔다는것을 쉽게 헤아릴 수가 있다. 이에 따라 운남교육출판사 최근 (2010.1)출판으로 된 “백가성대전”(百家姓大典)을 펼치니 阮씨의 유래가 쭈욱 밝혀진다.   2   이 백가성대전을 보면 원씨 성의 유래는 감숙 경천(泾川)으로부터 시작된다. 경천의 의미는 경수(泾水)란 강이름에서 오는데 경수는 감숙성에서 발원하여 섬서성에 흘러들어가 위수(渭水)와 합수하는 강을 말한다. 경수와 위수를 합치여 “경위분명” (泾渭分明), 경위불분(泾渭不分) “경청위탁”(泾清渭浊)이란 여러 개 성구까지 생겨났다. 그 뜻은 경수는 맑고 위수는 흐림에서 오는데 “경위분명”은 맑은 경수의 물과 흐린 위수의 물이 합치면 그 계선이 분명하다는 말로서 시비나 한계가 뚜렷하고 분명함을 비겨 이르는 말이고, “경위불분”은 선악이나 시비를  똑똑히 가르지 않음을 비겨 이르는 말이다. “경청위탁”은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 뚜렷하게 구분됨을 비겨 이르는 말로 통한다. 필자가 원씨성의 유래를 따져 보는 글에서 관련 성구를 밝힘은 원씨의 시원으로 되는 감숙 경천이 이런 흥미로운 고장이라는 데서이다. 이 고장에서 시작된 원씨 후예들은 점차 섬서, 하남, 산동, 산서, 하북 등지로 이주하기도 하고, 서진 시절 영가지란(永嘉之乱) 때에는 강소 남경 일대와 절강 소흥 일대, 광서 합포 일대로 이주하기도 한다. 남북조 시절에는 원씨들이 또 안휘, 강서, 호북, 호남 등지로 이주하다가 오늘의 월남으로 이주함도 보인다. 오늘의 월남이라는 나라에 원씨들이 많음은 이때문이라 하겠다. 그후 여러 력사 시절에 원씨들은 또 복주로, 소주로, 대만으로 전국 각지로 이주함을 보이기도 한다. 감숙 원씨들 개략적인 유래와 갈래들이다. 이들 원씨들은 유사이래 정치와도 천갈래 만갈래 련계를 보이기도 하는데 중국 은나라, 상나라 시절에 벌써 감숙 경천에 원(阮)나라를 세우기도 했다. 상나라 말기에 주문왕이  원나라를 멸하니 원씨 자손들은 멸족의 화를 피하여 각지로 흩어지게 된다. 동한 말년, 조나라—위나라 초년에도 원씨들은 정치무대의 활약을 보인다.   3   그런 3000여년의 력사에 문학 등 면에서 위인들이 출현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초기 위인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문학가이고 사상가인 원적을 먼저 들수가 있다. 원적은 그의 조카 원함과 더불어 “대소원”(大小阮)으로 불리우며 둘다 력사상 “죽림7현”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들 원씨는 “죽림”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원적(阮籍, 210—263)은 진류위씨 (오늘의 하남 위씨현)사람으로서 “건안7자”의 하나인 원우(阮瑀)의 아들이고 “죽림7현”(竹林七贤)의 하나이다. 그는 위, 진  교체시기에 살면서 로, 장 사상을 부러워하고 자연을 동경하였으며 세속에 구애되지 않고 방탕하게 굴었으며 소극적인 반항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위인이 오언시 창작에 능하고 성취가 커서 그의 작품으로는 오언체 “영회시”(咏怀诗) 82수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런 시들은 원적의 “원보병(阮步兵)집”에 남아 있는데 그중 영회시 한 구절은 이러하다.   맑고 푸른 장강물 굽이치는데 언덕우엔 단풍숲이 설레이누나 란초덮인 강가의 오솔길 따라 나는듯 청려말이 질주하누나   원적은 이같은 위인이여서 중국문학사 위진남북조 시기 문학작품에서는 원적과 원적의 시가들을 다루고 있다. 하기에 원 연변대학 조문학부 중국고전문학강좌 김영덕, 허룡구, 김병수 교수님들은 상고시기로부터 청나라 말기에 이르는 기나긴 력사시기에 창조된 중국문학유산들 알짜를 뽑아 “중국고전문학작품선”(전 3권)을 묶어 료녕인민출판사로 출판((1985년 6월)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얻어 보고자 함은 원적이란 이 고대 위인을 말할 때 그의 성이 “완”이 아닌 “원”이라는 점이다. 당년 우리 조선족사회의 쟁쟁한 학자들이고 대학교수들이며 중국고전문학의 일류 번역전문가들이였던 김영덕, 허룡구, 김병수 교수님들이 그러했다. 뿐만 아니라 원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허룡구, 박정양, 리승매의 “중국문학사”(1987년 7월) 제3장 위진남북조 문학에서 "죽림7현"의 阮籍을 다루면서 원적이라고 분명 밝히고 있다. 독자들은 연변대 고 허룡구 교수님은 물론 박정양, 리승매 교수님들도 중국고전문학강좌에서 활약하면서 우리 조선족사회의 쟁쟁한 학자, 교수, 번역가들임을 알 필요가 있을것 같다.                 4   그러면 원씨란 그분들 쟁쟁한 우리 학자님들. 번역가님들 임의의 창조물일까? 아니다. 우리들의 기초작업으로 되는 옥편이나 연변대학출판사에서 1998년 10월에 펴낸 “신화자전”(수정본)에서 롼(阮)자를 사람의 성씨에서는  “원”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중국력사상에 출현하는 롼(阮) 성씨들은 모두 원씨로 되여 있고, 이웃 나라 월남의 원씨 출신 총리 등 월남 원씨들도 완이 아닌 원씨로 번역되고 있다. 이는 중국이나 한국, 조선이나를 막론하고 우리 글 성씨 번역에서는 다름이 없이 중국어 阮이 원씨로 되여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럼 이들 원씨들을 어찌하여 완씨라고도 하는가? 여기에는 근거도 없지는 않다. 1992년에 중한수교가 되고 그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땅에 한국어가 급속히 전파되면서 이러루한 사전류들이 많이 출판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런 사전류들에서 때때로 사람 성씨 원씨를 완자라고도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중 하나의 실례를 들면 료녕민족출판사에서 2008년 5월 한국 화서당(华书堂) 편저로 된 한중사전—“실용 한중중한 사전”에서  阮자를 해석함에 있어서 나라 이름으로 완, 원으로 한다고 밝히면서 원씨네 옛 사람으로 이름이 있는 원함(阮咸)을 완함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국에서 국제 통용상 발음의 원칙에 따름을 리해는 하지만 중국 조선말규범집에 따르는 중국조선족사회에서는  원함을 완함이라고 번역함은 엄연히 틀림을 지적하여 둔다. 여기 원함이 바로 우에서 밝힌 원적의 조카로서 그는 삼국시절 위나라 문학가이고 사상가인 원적과 더불어 “대소원”씨로 불리우며 “죽림7현”의 일원이였다. 필자는 대학시절 중국문학사에서 죽림7현을 배우며 원적에 대해서는 일정한 리해가 있으나 원함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안다는 것이 관련 사전에서 둥글고 평평한 몸체에 4개의 현으로 구성된 악기를 원함으로 부른다는 것과 원함이라는 부름은 이 악기를 만든 원함이란 죽림7현의 한사람에게서 온다는 점 뿐이다. 분명한것은 이 사람 이름은 완함이 아닌 원함으로 부른다는 것과 감숙 경천에 유래를 둔  阮씨들은 완씨가 아닌 원씨로 부른다는 것이다.   밝힐 것은 두루 밝히고 말할 것은 두루 말한 것 같다. 한마디로 사람 성씨에서 阮씨는 완씨 아닌 원씨로 불러야 하고 원씨의 후예이고 아버지가 광동사람인 원령옥은 완씨 아닌 원씨로 불러야 한다. 성씨 阮 자체가 원씨이지 완이 아니다. 阮 를 대하는 우리 조선족사회의 원 번역들이 모두 그렇게 흘러 왔다. 잠시 잘 리해가 가지 않으면 원씨를 다루는 그 뿌리와 우리 사회 번역기준들을 캐여 보시라, 그러면 납득이 가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2011년 6월 1일 오후, 강남 두앵원에서        
379    노오란 금사매 비속에서 피어난다 댓글:  조회:5255  추천:56  2011-05-23
            노오란 금사매 비속에서 피어난다   2~3일 사이 강남땅에 노오란 망종화--금사매가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5월 23일, 오전 10~11시 사이 대우릉 구내 남하가에 가서 방울방울 어린 비속 금사매를 카메라에 담아 보았습니다. 해종일 잔잔한 비가 내립니다...
378    오늘은 기분이 짱입니다 댓글:  조회:6144  추천:43  2011-04-24
                  오늘은 기분이 짱입니다     오늘은 4월 23일 토요일, 왠지 대우릉에 들어가 4월 20일 대우 참배대전 뒤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습니다. 안개가 흩어지지 않았지만 25도를 기록하는 해맑은 날씨만은 틀림 없습니다. 월수대 교수아파트를 내려 동방언어학원 국내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이름모를 고운 나비 한마리가 호르르 날아와 내앞에서 길을 안내하듯이 앞으로 날개를 퍼덕이며 나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옆으로 살짝 비키며 금방 꽃이 진 푸르른 동백나무에 살포시 내려 앉았습니다. 얻기 어려운 기회여서 제꺽 카메라를 꺼내서 나비의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정말이지 진정할줄 모르는 나비를 두고 나비사진을 찍기란 여간 쉽지가 않습니다. 사진 몇장을 찍자 나비는 훨훨 날아 갔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나비였습니다. 나비가 미동하지 않은채 앉아 있는 모습은 흔치않은 모습입니다. 한해속에서도 두세번 정도나 차례질가 하는 나비 모습, 그것도 나앞에서 나풀거리다가 말입니다. 옳지 그래, 이름모를 령물나비는 오늘 당신이 신령스러운 대우님 뵈러가니 재수가 좋을 거라고 알려주는 상 싶었습니다. 기분이 별스레 좋았습니다. 자라나는 애들 세대로 말하면 기분이 짱입니다. 월수대 캠퍼스를 지나고 남대문을 지나 대우릉 구내에 들어서니 “고월우풍대주루”(古越禹风大酒楼)가 선참 맞아주고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어서 오라 꽃잎 파르르 맞아 줍니다. 수양버들 우거진 아늑한 호수가에서는 집오리들이 자유로이 노닐며 해바라기를 하고있었습니다. 대우릉 구내 대우릉으로 이어진 신도에 들어서고 대우릉 제사광장에 들어서니 대우릉은 4월 20일 대우 참배대전 기분이 여전합니다. 소흥시에서는 1995년부터 해마다 4월 20일 대우 참배대전을 가집니다. 최근 년간에는 지구, 성급으로부터 중앙급으로 격상되였습니다. 유람객들은 삼삼오오 대우릉을 거닐며 대우 참배대전의 기분을 되찾고 있습니다. 촬영애호가들은 여기저기 사진찍기에 여념 없습니다. 대우 제사광장이며, 9000근 종이며, 대형 북이며, 대우 토템 세 기둥이며, 대우릉이며, 대우릉 다리며 모든것이 대우 참배대전 기분으로 물씬 풍기여납니다. 대우릉 남쪽가 백조락원 구내 철벽옥천은 신선세계 무릉도원을 방불케 합니다. 얼마전까지도 호수가 따라 붉은 복숭아꽃으로 화알짝 덮히였으니 무릉도원이 옳기도 하지. 무릉도원 속에 비껴오는 회계산 석범산정의 높이 21미터 대우동상이 즐겁고 숙연한 기분을 뿌려 줍니다. 그 기분속에 비둘기 몇마리가 백조락원 쪽에서 포르르 날아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평화로이 즐기고 푸른잎속에 피여나는 3월의 목련화가 어엿한 자태로 안겨 듭니다. 언녕 지고 사라질 흰목련화가 대우 참배대전 직후까지 환히 피여나 웃습니다. 오늘은 정말 기분이 짱입니다. 오늘의 대기 투명도가 100퍼센트 맑지마는 않지만 안개가 걷히며 강남의 태양이 자글자글 열기를 발산합니다. 아까와는 달리 땡볕이 쏟아지며 왜 짧은 팔 적삼을 입고 오지 않았나 힐난하는것 같습니다 산과 들에 신록이 짙은 이 좋은 4월의 강남 봄날에 그대로 귀가한다는건 하늘에 미안한 일이지, 대우릉 산책과 더불어 한주일 전인가 본 대우릉 어구 남하가 세투리가 생각났습니다. 마침 늘 하는 나물캐기 야외 버릇대로 지니는 자그마한 채소칼이 가방에 들어 있었습니다. 대우릉 구내를 벗어나 남하가에 이르니 세투리는 여전히 싱싱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태전인가 대우릉 구내 한곳에서 무더기 싱싱한 세투리를  보고 캔후로 처음입니다. 사실말이지 어려서부터 몸에 밴 우리만의  함경도 방언이라 세투리라고 정다이 부르지만 표준어로 말하면 씀바귀입니다. 이런 씀바귀라는 표준어를 두고 연변대 조문학부 출신이요,  기자출신이라는 놈이 상당한 세월속에 씀바귀를 무슨 들레—민들레—한자어 포공영으로 알았으니 어떤 면에서는 한다는 그 지식이 토끼꼬리 지식에 지나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고집만은 여간내기가 아니여서 지금도 씀바귀가 싫은 세투리로 부른답니다. 나는 차분히 자연산 봄나물—세투리를 캐기 시작했습니다. 한해 사계절 강남나물을 캐기에 습관된 우리—나였습니다. 2~3월에 캔 미나리요, 민들레요, 달래요 봄나물들을 지금도 먹는 우리인데요. 이같은 자연산에 빠져 버린 내가 오늘은 또 세투리에 빠져 버리니 강한 해님의 강타가 싫어 해님을 등지고 퍼더 앉아 버렸습니다. 세투리는 말없이 한줌한줌 늘어만 갑니다. 그러니 붉은넥타이 시절 집에서 기르는 100여마리 토끼를 위해 봄이면 봄마다 2~3일에 한번 세투리를 주머니들이로 캐여들이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세투리가 맛나는 대자연속 나물이라는것을 몰랐나 봅니다. 먹어보지도 않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생활하던 초시절, 해마다 봄이면 연변대학 뒤언덕과 신풍쪽 논밭과 부르하통하에서 미나리, 세투리를 캐여 강가에서 갖고 간 무엇으로 데쳐 맛나게 먹으며 봄을 즐기던  생각도 났습니다. 새생활이 꽃피던 20대 후반 시절, 랑만속에 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세투리는 어느덧 무드기 캐여졌습니다. 그 자리 세투리 전부를 캐지 않아도 먹거리로는 풋풋했습니다. 오늘은 그야말로 기분이 짱입니다. 첫걸음의 대학구내 이름모를 나비로부터 대우릉 호수가 집오리, 대자연의 강남야생화, 대우릉 참배대전의 여전한 모습, 지지않은 3월의 흰 목련화, 무릉도원의 철벽옥천 비둘기, 철벽옥천 속에 안겨들던 대우동상—모두가 기분에 기분을 더해주는 순간순간들이였습니다. 어지러워진 손이랑 칼이랑 씻으려고 남하가로 가니 따스한 강물에서 미역을 감는 강남의 남정들이 보이는가 하면 강가따라 일매지게 붓꽃들이 피여나 그야말로 가관이였습니다. 4월22일 대우릉 바깥 북쪽 남하호수가에서 첫 붓꽃을 카메라에 담은 후 두번째입니다. 남하에 비껴오는 파아란 붓꽃들이 그리도 매혹적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을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은 바깥세상 걸음마다 즐거운 기분만이 겹치는 날입니다. 기분이 짱입니다. 대자연을 사랑하고 대자연을 즐기며 진정 대자연과 한마음이 되여 어울릴 때만이 기분이 짱인 법, 하늘이 펼쳐준 기분나고 신나는 흔치않은 4월의 강남 봄날속에서 나는 인차 헤어나질 못합니다.   2011년 4월 23일 밤, 강남 두앵원에서        
377    3월 삼짇날 이야기 댓글:  조회:4794  추천:46  2011-04-16
                    3월 삼짇날 이야기     오늘은 3월 삼짇날, 해마다 맞이하는 삼짇날이건만 올해는 류달리 삼짇날이 청명날로 되여 있다. 어머님한테서 내가 태여난 날이 삼짇날이 드는 청명날이라는건 들어 알고 있지만 헴이 들어 삼짇날을 청명날로 생일을 쇠여 본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어른들은 다 알겠지만 해마다 삼짇날은 음력 3월 3일로서 이날을 또 삼질이라도 부른다. 삼짇날이란 옛 사람들의 상사일(上巳日), 중삼(重三)으로부터 기원되는데 우리 겨레로 말해 삼짇날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 오는 날이요, 산과 들에 꽃이 피기 시작하는 때라 겨우내 집안에만 있던 녀자들은 음식을 갖추어가지고 산과 들에 나가 진달래꽃을 따면서 화전놀이를 즐긴다. 또 삼짇날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소담하고 아름다워 진다고 녀자들은 내가에 나가 머리를 감는 풍습이 전해진다. 삼짇날에는 또 여러가지 나비가 첫선을 보이며 꽃을 찾아 날아든다고 한다.  흰나비를 먼저 보면 그해에 상복을 입게 되고 호랑나비를 먼저 보면 길하다고 믿어 왔으며 이날 약물을 먹으면 년중무병하다고 여기였다. 지역에 따라 룡왕당이나 삼신당에 거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원하기도 하고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며 춘경제를 지내기도 했다는 날. 조선반도(한반도)의 삼국시대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설날, 정월 보름, 3월 3일 등을 명절로 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은 3월 3일, 이날 삼짇날은 병사들이 무술을 겨루는 날로서 활쏘기와 말타기 재주로 상무(尚武)정신을 길렀다. 조선반도(한반도)가 이러했다면 960만 평방킬로미터 신주의 대지는 음력 3월 3일이 갖는 의미가 굉장히 심오한것으로 알려진다. 전하는데 의하면 음력 3월 3일은 중국력사속 황제의 탄신일이고 전설속 서왕모 반도회(蟠桃会) 날이다. 서왕모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불사의 녀신이요, 녀왕이라면 전설속에서 서왕모의 딸 직녀는 인간세상의 견우를 사랑하며 아들딸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도교의 진무대제(真武大帝)의 탄신일도 3월 3일이라고 한다. 하기에 예로부터 음력 3월 3일은 대단히 길할 날로 알려져 왔다. 이런 길할 날—음력 3월 3일은 주체민족 한족이나 소수민족을 망라하여 전통적 명절로 쇠여진다. 3월 3일은 먼저 황제님의 탄신일이기에 중국에서는 자고로부터 “2월2일에 룡이 머리를 들고, 3월 3일에 헌원(황제의 이름)이 탄생”(二月二,龙抬头,三月三,生轩辕)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3월 3일을 “상사절”(上巳节)로 지내왔다. 위진 이후에 상사절은 3월 3일로 번져져 오늘에 이르며 주체민족과 소수민족들 가운데서 다양한 명절모습을 보이고있다. 대만이나 복건 등지에서 음력 3월 3일을 “3월절”로 맞이한다면 써족은 3월 3일을 곡물의 생일로 쇠면서 집집마다 “흑미밥”(乌米饭)을 먹기에 이른다. 려족들에게는 이날이 수렵과 풍수의 명절이고 투쟈족은 련인절, 뚱족은 불꽃놀이절(花炮节). 요족은 킬로바절(千巴节)로 통할 때 한해 4계절 모두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절강 려수의 써족들에게 있어서 음력 3월 3일에 가지는 제사가 가장 중요한 제사활동으로 자리를 잡는다. 절강 소흥에서는 음력 3월 3일을 란정서예절로 기념하고 있다. 그 뿌리는 1600여년전 동진시절의 대서예가 왕희지와 관련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진영화(晋永和) 9년(기원 353) 음력 3월 3일에 란정과 그 주변의 명인대가 42명을 불러 왕희지를 기리는 오늘의 란정풍경구 란저산 아래에서 흐르는 잔잔한 내가에 술잔을 띄우며 시를 읊조리는 모임을 가지였다. 왕희지는 그 자리에서 필을 날려 “란정집서”(兰亭集序)를 써냈는데 이 서예가 후세사람들에게 “천하제1행서”(行书)로, 란정은 서예성지로  길이길이 전해진다. 지구급 시인 소흥시 인대상무위원회에서는 1984년 1월에 음력 3월 3일을 서예절로 결정하고 해마다 서예절을 쇠여 왔다. 관련자료로 보는 우리 삼짇날—음력 3월 3일의 개략적인  상식이라 하겠다. 그러나 무식해서일까, 나의 생일 3월 3일이 삼짇날로 통하다가 청명날로 이어지기도 하니 지난 세월속에 해해년년 께림한 생각도 없지 않았었다. 청명이 아무리 맑고 청신한 뜻이라고 해도 청명날에 산소에 가서 가토를 하고 귀신을 쫓는다는 날로 알려지니 그럴만도 하지. 하나 이 모든것은 지난시절—“철”이 들지 못한 시절의 이야기. 오늘에 와서는 생일날이 의미깊은 삼짇날로 번져지니 얼마나 신나는지 모르겠다. 나를 이런 삼짇날에 인간세상에 내려준 부모님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후 나의 생일날이 내가 태여나던 해 계속으로 청명날로 이어지면 좋겠다고 기다려도 보았으나 생일날—청명날이 쉽사리 펼쳐지지 않더니 올해 2011년 생일 음력 3월 3일이 청명날이란다. “나 기억속에 생일날이 청명날로 겹띄운 때가 없는것 같은데…” “아니, 언제인가 청명날에 생일을 쇠여 본 기억이 나는데요.” “그랬던가, 나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구려.” 집사람과 생일날을 두고 얘기하다가 중국희극출판사에서 1999년 10월에 펴낸 “민속만년력”을 펼치니 내가 태여나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일날이 청명날로 겹띄운 날은 모두 4번이였다. 그중 한번이 1992년이니 집사람의 말은 조금도 그르지 않았다. 재미나는건 내 생애 4차의 생일날—청명날은 19년에 한번씩이라는것, 이 19년래 음력으로 쇠는 생일날이 어느해가 양력 3월 26일이면 19년후 생일날도 3월 26일이 아니면 하루 차이 밖에 없다는 것이라 할까. 19년에 한번씩  순환되고 있었다. 정말 재미나는 력서의 하나의 법칙이다. 유구한 력사가진 력법의 오묘한 법칙은 이뿐이 아니다. 어느덧 청년으로 자라난 지력장애자 아들애는 어린 시절부터 내 고향 연변서 “요일신동”으로 널리 알려진 애로서 어느해 어느날이 무슨 요일인가고 물으면 척척 알아 맞춘다. 어떻게 아느냐를 말로 표달하지 못하니 그 오묘한 법칙을 헤아릴수는 없으나 아들애가 가담가담 말해내는 력서의 법칙이 수두룩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력서가 몇년에 한번씩 중복된다는것, 그의 변화는 4년에 한번씩 윤년이 드는해 2월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그러던 내가 생일날과 청명날을 두고 만년력을 뒤적이다가 19년에 한번씩 중복됨을 발견했으니 뭐라고 할까. 해마다 음력 3월 3일이 우리 겨레로 말해 삼짇날이요, 중국내 한족과 소수민족으로 말해 의미가 깊은 민속명절이라고 할때, 맑고 청신한 의미의 청명전후가 우리 북방으로 말해 새봄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림이라 할때 이 마음 마냥 즐겁기만 하다. 이런 날 삼짇날에 세상에 왕림한 나 기분도 말그대로 맑기만 하다. 그래서 해마다 춘3월의 생일둥이들이 그리도 많을까, 우리 절강월수외국어대 한국어과만도 류은종교수님을 주도로 여럿이다. 그속에 나도 끼이지만, 음력 3월의 가장 뜻깊은 날이라지만 나도 생일이랍시구 벅적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여러 동료들의 축복속에서 생일이라고 쇠였다면 되는거지. 이런 의미에서 나는 올해 또 생일소감 한편을 쓰기로 하고 절강월수외국어대 캠퍼스와 주변의 대우릉 구내를 산책하며 강남봄에 취하며 19년만에 다시 만나는 삼짇날—청명날 뭇꽃들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3월 삼짇날 꽃으로 피여났소” 남방아리랑 코너 삼짇날 꽃묶음들은 이렇게 생겨났다.   2011년 4월 15일                
376    남장성--강남장성 어디에 있을까 댓글:  조회:4377  추천:29  2011-04-06
            남장성—강남장성 어디에 있을까                            1   지난 3월 절강월수외국어대 한국어학과 작문과에서 08본과의 한 녀대생이 한편의 작문 “그리운 고향”을 쓸 때 자기 고향 림해에는 북의 북장성과 더불어 남장성이라고 불리우는, 민족영웅 척계광과 관련되는 강남장성이 있다고 자랑스레 밝히였었다. 절강지도를 펼치니 강남장성은 지구급시인 대주시의 림해에 보이였다. 마음이 크게 동한 필자는 강남장성행을 윽벼르다가 짧은 청명련휴기간에 일가족과 더불어 끝내는 소흥—림해 행 쾌속버스에 오르고야 말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4월 3일 그날따라 날씨가 흐리며 바람이 불며 비가 내리며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건말건 쾌속버스는 지궂은 비속을 헤가르며 상우, 승주, 신창, 천대를 거치며 고속도로로 남으로 남으로 200여 킬로미터를 거침없이 달리더니 두시간 10분만에 절강 대주의 현급시인 림해시에 이르렀다. 림해 중심역에서 7선시내버스를 바꾸어 타니 얼마후 이른 곳이 림해 풍경구의 하나인 동호가의 강남장성 어구. 강남장성 어구에 이르매 산우로 곧추 올리 뻗은 장성의 입구가 펼쳐져 마음이 붕 뜬다. (그러면 그렇겠지, 강남장성이로구나!)   벌써부터 들뜬 일가족이지만 강남장성으로 오르자면 198계단을 이룬 호한파 비탈 계단길을 올라야 했다. 계단 하나의 높이가 20센치미터가 넘고 비탈 경사도가 급하여 련속 20개 계단을 돌파하기가 쉽지 않다. 가담가담 다리쉼을 하며 숨을 고르르며 계단정상에 오르니 선참 맞아주는것이 강남장성의 첫 성문—람승문이다. 람승문 내에 들어서니 정원에는 민족영웅—척계광의 동상이 서있어 강남장성은 척계광과 관련됨을 알리고 있었다. 먼먼 옛날 중학교 시절 중국력사과에서 척계광이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된후 척계광이란 이름은 중국 동남연해에서 왜적을 몰아낸 민족영웅으로 이 마음에 자리를 잡더니 그런 민족영웅의 동상이, 그것도 처음보는 척계광이 바로 내 눈앞에 거연히 서 있는다.    산등성이라 람승문가는 찬바람이 거세차 서 있기도 그러하다. 그럴 때 장관을 이룬 산아래 림해의 동호가 한눈에 안겨와 잠간이나마 때아닌 봄추위를 잊게하는데  강남만의 특유한 다리며 전각들이며 수풀들이 밤하늘의 뭇별마냥 총총하여 탄성이 절로 난다. 집사람은 그런 동호보기에 취하여 떠날줄 모른다. (하다면 강남장성이라는 장성은 어디로 뻗었나?) 수건중에 있는 람승문을 한바퀴 빙 돌아보노라니 장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오른쪽으로 뻗어 있었다. 가는데까지 가자고 장성을 밟아보니 저앞에 첫 쌍층적대(双层敌台)가 나타난다. 쌍층적대 벽에는 명나라 가경년간인 1559년에 민족영웅 척계광이 수건한 쌍층적대라고 밝혀져 있다. 쌍층적대 내에는 강남장성과 주변의 이모저모 풍경구를 알리는 채색사진과 설명들이 걸리여 있어 강남장성을 리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강남장성의 첫 쌍층적대를 나서면 장성은 골안따라 내리막을 이루다가 건너산으로 톺아 오르며 산우에 웅위한 옛건물이 나타난다. 산우 옛건물까지는 장성으로 이어지는 “백보준”(百步峻) 가파른 비탈, 관련자료에 따르면 이 일대가 험준하여 당나라 시절 대장군 위지공은 나라 군민들을 이끌고 성을 쌓다가 이곳에 이르렀지만 이 일대 성쌓기에 성공하지 못한 유감을 남기고 있다. 흥미로운 력사지식을 떠올리며 백보준 구간을 조이니 산우에는 강남장성 동쪽구간의 최고점에 일떠선 백운루가 람승문에 이어 두번째로 유람객을 맞아준다. 지금은 옛날의 가파른 모습이 많이 사라지고 산허리에 흰구름 감도는 모습은 볼수가 없다지만 백운루에서 금방 지나온 백보준 구간과 장성으로 이어진 람승문 구간을 내려다 보면 비내리는 흐린 하늘아래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거대한 한폭의 유화가 펼치지는 기분이다.   2   여기까지 이르니 척계광이 어찌하여 이런 곳에 장성을 쌓았고, 어떤 위인이였을까가 궁금하기만 하다. 척계광 관련 자료를 펼치면 척계광은 명나라 시절 걸출한 군사가이고 민족영웅으로서 산동 등주(오늘의 봉래)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워낙 하남 위휘부출신인데 척상이라는 6대할아버지가 일찍 주원장을 따라 원나라를 뒤엎고 명나라를 세우는 정권투쟁에 뛰여든데서 개국공신의 한사람으로 받들린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척상의 공적을 기리여 척상의 아들 척빈을 장군으로, 등주 위지휘첨사 (卫指挥佥事)지휘관직을 내린다. 척빈은 척계광의 5대할아버지인데  “지휘”란 용사 1만명 이상 거느리는 자만이 가질수  있고 지휘 군사관직을 세습할수 있었다. 고로 척빈의 5대손인 척계광은 자라서 등주 위지휘첨사로 되고 조정에 의해 가정 34년 (1555)에 절강, 복건으로 파견된다. 척계광이 나서 자란 명나라 가정년간은 중국 동남연해에 왜적이 창궐하던 시절이였다. 그에 앞서 섬나라 일본은 남북조시대(1336—1392)를 맞아 남북이 치렬히 싸웠는데 때때로 중국 연해지구 침입을 일삼았다. 북조가 일본을 통일한 후에는 남조의 무사들이 해상에 널리면서 중국 연해지구 침입은 극도에 달하였다. 이 간악한 무리들은 해안에 거점까지 세우고 발광하였는데 무리가 많을 때는 몇천명, 가장 많을 때는 2만명으로까지 헤아려졌다. 절강, 복건으로 온 13년래 척계광은  림해에만 8년간 머무르면서 대주 지부 담룬과 더불어 림해의 고장성을 수건하고 장성의 곳곳에 료망대로도 되고 휴식활동처로도 되는 쌍층적대를 세웠다. 군대를 엄격히 훈련시킨 척계광은 이 장성과 쌍층적대에 의지하여 림해 8년에 왜적의 침입을 9전9승으로 물리치는 자랑찬 전과를 올리였다. 그와 더불어 절강, 복건 등지의 대주, 횡서, 평해위, 선유 등 전역을 성과적으로 펼치여 동남연해지구에 기여든 왜적들을 기본상 소탕해 버렸다.   륭경 2년 (1568)  계주(蓟州)로 자리를 옮긴 뒤에 척계광은 계진총병으로 활약하면서 림해의 경험으로 오늘의 북경 부근의 장성을 보다 높이고 넓히며 쌍층대를 건축하는 한편 군대를 보병, 기병, 전차, 운수 등 여러 부문으로 나누어 훈련을 강화하면서 나라의 안녕을 도모하였다. 장성의 수건은 모두 척계광의 설계요구에 따르고 그들 속에는 일찍 림해장성을 구축하던 강남의 3000명 군사도 섞이였다니  오늘날 북경의 팔달령, 사마대, 남북구, 천진의 황애관, 하북 산해관 부근의 로룡두, 각산 등지의 장성 모두가 그러했다. 그러니 절강 림해사람들이 북에는 북장성, 남에는 남장성이라고 하면서 림해의 강남장성이 북장성의 수건본보기였다는 말이 조금도 그르지 않은것 같다.   3   강남장성의 백운루 구간을 벗어나면 장성은 서북쪽으로 구비를 타며 점차 고도를 낮추어 간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척계광 관련 쌍층적대가 나타나고 그 아래 구간에서 장성우는 넓게 펼쳐지면서 오른쪽 성아래 누운 바위비탈에 청나라 옹정황제 어서(御书)로 되였다는 “지진묘도”(至真妙道) 네 글자가 시야에 안겨들고 왼쪽은 장성과 이어지는 성황묘가 나타난다. 성황묘는 도교사찰, 발목을 잡는것은 사찰내 1393살 수령의 옛 고목—녹나무 한그루이다. 강남에 와서 여기저기 불교사찰들에서 많은 옛 고목들을 보아왔고 1200살 수령의 고목까지 보았지만 1393살 수령은 처음이라 눈길이 끌리는데 이 녹나무는 너무도 늙어서 나무 통아리가 다 없어지고 대신 한면의 겉면만이 넓게 펼쳐지는 특이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 모습에도 녹나무 웃부분은 무성하여 싱싱한 모습을 자랑하니 녹나무의 생명력이란 얼마나 끈질긴가를 너무도 잘 알수가 있다. 성황묘 구간을 지나 강남장성의 서북각 최고점에 이르면 가다가 장성의 왼쪽가에 커다란 원형의 대가 솟아 있음을 볼수가 있다. 이 원형의 대가 수도 북경의 천단을 떼닮은 천단인데 원말명초의 농민봉기 수령 방국진이 이곳 북고산에서 나라를 세우고 왕으로 자처하면서 세운 것이라 한다. 집사람이 천단의 복판자리에서 소리를 질러보니 북경의 천단처럼 과연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천단에서 다시 장성을 따라 내리면 또 하나의 장성건물이 나타나고 가파른 그 아래는 옛날 모습 그대로의 림해시가지와 시가지 외곽을 따라 흐르는 령강(灵江)이라는 큰강이 시야에 안겨든다. 그런 산아래 기슭에 또 하나의 쌍층적대와 더불어 장성이 크게 반원을 이루는 성문이  나타나니 필자는 그것이 강남장성의 끝인줄로 알았다. 뒤미처야 강남장성은 산이 아닌 평지구간에 이르러서도 령강을 따라 끊임없이 뻗어갔다는걸 알게 되였다. 해당자료를 보면  1994년에 국무원에 의해 국가력사문화명성으로 명명된 옛 강남장성은 성문이 7개이고 쌍층대가 13개, 6000여미터 길이를 이루고 있었다하나 지금은 5000여미터가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여기에 1995년에 전체 강남장성을 새로 수건했다고 하고 시가지와 령강을 따라 뻗은 강남장성은 군사용 외에도 홍수방지 면에서도 훌륭한 역할을 놀고 있다고 하니 몇억도 아닌 보다 거액을 강남장성 수건에 투자한 림해사람들의 결단과 지혜, 혜안에 탄복하지 않을수가 없다.   비와 추위속을 헤치면서 평지 강남장성을 따라 계속 걸어 보았다. 저 앞에서 강남장성은 시가지와 령강을 따라 왼쪽으로 굽이를 타다가 천북탑, 동대탑, 남산전탑 등 건산탑군체(巾山塔群)와 불교사찰 룡흥사 그리고 천우사를 이룬 시가지 변두리 산에 이르러서도 끝날줄 몰랐다. 강남장성은 건산기슭을 따라 앞으로 계속 뻗어나갔다. 그에따라 필자의 마음도 후일 강남장성의 보충답사로 이어지면서 남장성--강남장성과 민족영웅 척계광이 우렷히 솟아 올랐다.   2011년 4월 6일                
375    19년 만에 가장 크다는 보름달을 두고 댓글:  조회:4450  추천:35  2011-03-20
         19년 만에 가장 크다는  보름달을 두고      2011년 3월 19일은 음력 2월 보름날, 이날 뜨는 새해 두번째 음력 보름달은 19년 만에 가장 크다하여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시글벅쩍이던 존재이기도 하다. 하나 3월 19일 이날 강남 소흥은 날씨가 흐린데서 이 두만강—천문 아마추어도 19년 만에 가장 크다는 2월의 보름달을 볼수 없음이 천만유감. 별수없이 음력 2월의 보름날 밤은 고느적히 흘러 지나는데 하늘이 유정하여서일까, 밤마다 무척 늦게야 잠자리에 드는 나로서는 새벽에 흔히 일어나지 못하는데 새날 3월 20일은 새벽 2시반 기상이다. 행여나 하여 캠퍼스내 아빠트 창문가로 다가가니 저게  뭐야? 서남쪽 저 하늘에 2월의 보름달이 두둥실 떠있질 않는가. 새벽하늘 날씨는 아직도 흐리터분하여 환히 밝은 달을 기대할수는 없다지만 다행히도 달구간은 엷은 구름, 유정한 하늘이 기회를 주어 달은 자기의 아름다운 얼굴을 지장없이 자랑하고 있었다. 2월의 보름달, 적절히 말하면 보름달의 하루밤 이음인 3월 20일 새벽달에 빠지여 다시 잠자리에 들지 못했더니 구름속을 끊임없이 자맥질하는 하늘나라 달님은 새벽 5시반에야 저멀리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어두운 밤과 동트는 시점의 바로 교차점이다. 달은 우리 은하, 우리 태양계내 하나의 행성을 이루는 지구의 하나뿐인 유일한 위성으로서 지구와의 평균거리가 38만 킬로미터로 헤아려진다. 이런 달이 29일, 정확히 말해 29일 12시간 44분 2.8초를 주기로 자전과 공전을 하지만 달의 자전과 공전의 주기가 같아서 달이 지구를 향하는 면은 항상 같은 면이다. 하기에 지구의 인류는 지구라는 땅덩어리에서 달의 한면—같은 면만 보고 달의 뒷면을 볼수가 없다. 보는바와 같이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타원궤도를 따라 끊임없이 자전하며 공전하기에  지구와 가장 멀 때는 거리가 40만 킬로미터 조금 넘어선다지만 가장 가까울 때는 35만여 킬로미터까지 가까와진다. 어제 3월 19일이 바로 우리 지구와 19년 만에 가장 가깝다는 35만 6577킬로미터다. 하긴 말이 5만 킬로미터나 가까와져 우리 지구에 그 무슨 재앙이 있을듯 떠들어대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은 육안으로 보건대 그 크기를 거의 식별할수가 없는 자연현상일 따름이다. 사람들은 또 달은 약 한달을 주기로 모습을 바꾼다는 것을 잘 알고있다. 지구의 위성인 달은 우리 태양계나 다른 외부 항성에서 발견되는 행성들처럼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 즉 항성에서 받는 빛을 받아야 빛을 내므로 지구를 공전하면서 태양빛을 받고 반사하는 달표면이 날마다 모양을 바꾸게 된다. 이 모양 바꾸기가 바로 초생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 변화과정이고 매일 밤 달의 변화위치에 따라 태양, 지구와의 관계속에서 주기적으로 일식과 월식을 토해 내기도 한다. 이 글의 주제를 이루는 달은 이같이 우리 인류가 밤하늘에서 만날수 있는 가장 친근한 벗이요, 천체이다. 달은 지름이 3475킬로미터라 할 때 지구 지름의 4분의 1밖에 안되고 81개 정도 달을 뭉쳐 놓아야 지구와 질량이 비슷하다고 하지만, 우주를 려행하는 다른 천체들처럼 지구 주위를 시속 3700킬로미터 속도로 돌고있다고 하지만 달에도 지구에서처럼 광활한 대륙이 있는가 하면 수많은 크고작은 분화구가 있고 산맥이 있고 계곡이 있고 절벽이 있다.5000미터 이상의 산봉우리가 그러하고 600킬로미터나 뻗은 산맥도 그러하다. 이런 달이 지구에 자기의 중력을 미치면서 바다물의 높이에 영향을 주는 밀물과 썰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니 달이 가장 크다는 보름달을 두고 재앙설을 들고나오는 사람들도 있으니 아무런 도리도 없는 재앙설에 현혹되지 말지어다. 사람들이여~~밤하늘의 달에 관심을 가져 보시라, 맨눈으로도 보이는 달에는 뭐가 있을까? 재미나는 것은 달표면의 어두운 부분들인데 어두운 부분은 달의 바다로 불리운다. 지구의 바다와 같이 물의 바다가 아니라 용암이 흘러나와 메워지면서 검게 보일뿐이다. 이런 어두운 부분들이 우리 인류에  의해 상아가 달나라에 날아갔소, 옥토끼가 방아 찧소 류의 아름다운 전설들을 낳으니 흥미를 가져볼만도 하다. 더우기 우리 일반인들이 갖출수 있는 소형 천체망원경이나 쌍안경을 가지고 보름달이나 상현달, 하현달을 보면  달의 밝고 어두운 부분들을 괜찮게 가려 보면서 달의 많고많은 분화구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달의 분화구 대부분은 류성의 충돌로 생긴 것이요, 일부분이 화산의 폭발이나 달의 지각현상에 의해 달의 표면이 움푹 꺼져 들어간 것임을 리해한다면 이 아니 좋을손가. 아는것만큼 보인다고, 우주의 도리, 은하와 태양계, 지구와 달의 도리를 터득한다면 터무니없는 재앙설에 넘어갈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찌하든 누구의 덕분일런지, 나는 3월 20일 새벽 한때 19년 만에 가장 크다는 보름달을 보았으니 유감이 없다. 이 가장 크다는 준확한 시간대가 우리 여기 시간으로 새벽 3시 10분 때이니 나는 운이 좋게도 생각지도 못한 기상으로, 생각지도 못한 구름의 엷음으로 19년 만에 가장 크다는 보름달을 보고 새벽사진까지 찍을수 있었으니 행운아라 할수 있겠다. 천문현상에 짙은 흥미를 갖고있는 아마추어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2011년 3월 20일 오전, 강남땅에서                        
374    인생소감--이해도 뛰고 또 뛰여 보았다 댓글:  조회:4624  추천:21  2011-02-10
【인생소감】                  이해도 뛰고 또 뛰여 보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밖에서는 부슬부슬 2월의 찬비가 내린다. 설날 전후 7~8일간이나 10도 이상 20도 쯤으로 강남 첫 봄날을 하사하던 날씨는 최저기온이 0~1도로 곤두박질하며 온 하루 지꿎은 찬비를 내리여 녕파 상산현의 석포진으로 가려던 김염, 왕인미 관련 답사를 떠날수가 없다. 겨울방학이라 한국어과 우리 선후배 선생님들이 거의 떠나버린 자리에서 2월의 부슬비를 하염없이 바라 보노라니 흘러간 한해--뛰고 또 뛰여 본 2010년이 꾸역꾸역 뇌리에 흘러 든다.    (그래, 이 시간은 나 인생의 한해로 아롱지는 2010년을 돌이켜 보는거다. 갓 력사의 저 언덕너머로 사라진 2010년은 무척이나 일을 많이 한 한해가 아니던가.) 선참 뇌리를 때리는 것은 대학 한국어과 강의 두학기. 08응용한국어 3반과 09조선어 2반의 한국어강의를 맡고 대학생애들과 어울리며 신뢰를 모으며 학년내 성적이 뒤진 두 학급의 한국어과 성적을 눈이 뜨이게 높이였지. 한국어강의를 잘하지 못하고선 입이 열개라도 할말도 없는 현실을 정시해야 했다. 또, 한국력사과로 되는 중한고대관계사 첫 강의를 맡고 새로운 과문을 쓰며 강의하며 08본과 4개반 근 100명 중국대학생들에게 옛날 최치원이며 의천 대각국사며 중국남방내 발자취를 심어 주었었지. 과외지도로 되는 한국어글짓기에서는 화동지구 한국어글짓기 금상과 절강성 한국어글짓기 금상을 일궈내며 화동지구 한국어글짓기 평심위원장으로도 뛰여 보고. 해도해도 한국어강의란 이 울타리에만 매울 내가 아니였다. 나라는 소인은 비록 초야속의 이름없는 일개 선비여도 겨레란 한 뿌리속의 한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어 겨레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뛰고 뛰여야만 했다. 나에게서 겨울, 여름 두 방학만이 한해중 절호의 기회여서 2월에 이어 7월하순, 8월속에 근 40일이라는 시간을 내여 강소란 이땅의 신사군속 우리 겨레발자취, 옛날 당나라~신라 시절 최치원, 송나라~고려 시절의 의천 대각국사 발자취 좇아 남통, 양주, 진강, 염성, 익림, 률수, 고순 등 현지 답사길에 오르고 양림, 무정 장군의 두 평전 집필하고저 홍군장정 발자취 좇아 운남, 사천, 귀주의 곤명, 대리, 려강, 샹그리라, 판즈화, 회리, 통안, 금사강 교평도, 귀양, 준의, 오강천험 등지를 다녀오며 홍군장정 시절의 양림, 무정 두 장군과 하많은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그때가 금시 같은데  그 무더운 여름도 지나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고 또 한해의 새봄이 발뼘발뼘 다가서고 있다. 그리곤 우리 겨레를 위해 내가 할수 있는 일 또 뭐던가. 연변작가협회 산하 절강창작위원회를 무었다면, 남방의 여러 지역사회 문인들 결속을 위해서 남방아리랑을 무었다면, 남방아리랑 항주, 상해, 무석, 남경 대표들을 무었다면 뭔가 일이라도 해야지. 항주의 현장님과 남연님, 상해의 김창석님, 전은종님, 홍순범님, 무석의 황춘옥님, 남경의 유성운님과 연변문학지와 손을 잡으니 5월의 중앙민족대 서영섭교수 남방 조선어특강, 연변문학지와의 항주필회와 연변문학 11월호 남방특집, 중국영화황제 김염탄생 100돌 상해 묘소 기념행사들이 쭈욱 펼쳐진다. 하다면 절강창작위원회, 남방아리랑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나부터 글을 써야 하는거지. 우리 발자취요 우리 문학이요 하면서 기행, 평론, 수필 등 수십만자를 쓰니 그중 문학, 력사 론문이 근 10편, 연변문학에 윤동주, 로신 관련 연구론문 2편을 실어 보았다. 그속에 양림, 무정, 서일 장군 각기 평전을 위한 기초작업이 끝나가고 이미 썼거나 계속 쓰고있는 “이야기 조선족항일투쟁사” (전4권), “겨레발자취 기행” (전5권), “력사문학연구문집” 제3권, “나의 문학예술세계” (전 2권), “겨레 항일지사들” 제5책, 당창건 90돌맞이 중공당원으로 된 “조선족항일녀렬사 90인전” 등 10여부 저서가 보다 완미해지고 마무리되여 간다. 흘러간 한해 2010년을 돌이키며 가장 흥나는것은 중국영화황제 김염과 섭이, 전한과의 관계를 헤아리면서 중국영화사, 중국혁명사의 높이에서 그려낸  이땅의 우리 겨레가 잘 모르는 김염 계렬글 5만자가 올해 “예술세계” 제1호부터 련재를 시작한것. 우리 겨레를 위해 또 하나의 좋은 일을 했다고 하니 이 마음 후련하기만 하다. 확실히 지난 2010년은 그 어느해보다 부지런히 뛰고 또 뛰여 본 한해였다. 그러나 나도 필경은 세월속에 50대 후반에 들어서는 사람. 한국어과 강의외 과외로 뛰자니 힘에 부치고 조급증에 사로잡힐 때가 가끔 있다. 주어진 인생길에 한없는 욕망은 금물이거늘 버려야 할 욕망은 대담히 버려야겠는데 알면서도 잘 되지 않는일이 욕망버리기인가부다. 새해 2011년은 이 끝없는 욕망과의 큰 싸움을 벌려야 할것 같다. 언제면 나에게서 많고많은 시간을 앗아가는 현실생활에서 해탈되여 모든 시간과 정력을 내가 하고픈 일에 바쳐 볼까, 그날이 기대되고 기다려진다. 밖에서는 계속 강남찬비가 내린다. 지꿎은 찬비는 새로운 한해—2011년은 힘에 어울리게 뛰여 보라며, 마음을 차분히 다듬어 보라며 소리없이 일러준다. 될수가 있을까, 나는 그저 웃어 본다.   2011년 2월 10일    
373    추모(3) 친구가 가다니 믿을수가 없구려 댓글:  조회:6698  추천:30  2011-01-25
             친구가 가다니 믿을수가 없구려   1   2011년 1월 23일 아침, 절강월수외국어대 방룡남박사와 연변작가협회 우광훈 동갑친구를 통해 친구 류연산의 비보(1월 22일 오후 3시 37분 타계)를 듣고 확인한후부터 마음이 부산하여 아무일도 할수가 없다. 23일과 24일 지나 오늘 25일에 이르기까지도 그 상이 장상이다. 자다가도 깨여만 나면 류연산의 생각 뿐이고 친구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연산친구와 나의 사이는 그럴만도 한가부다. 돌이켜 보면 연산친구와의 인연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1978년 10월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하기 전의 일인데 문학을 한답시고 문학친구를 찾던 나는 20대 초반의 그 시절 고향인 화룡현 경내를 누비다가 서성진 북대촌에서 류연산을 만나게 되였는데 그때가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된 직후의 1977년 겨울인가 1978년 봄 사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던 문학도 우리가 둘다 소원성취하여 연변대학 조문학부 78년급 대학생으로 되니 날뜻히 기뻤다. 서로의 고향도 목도고개 하나 사이 둔 해란강반이여서 둘 사이의 인연은 남달랐다. 여기에 대학 재학시절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연산친구는 소설을 지향하고 나는 시를 지향하며 습작도 많이 하며 그때의 “연변문예”에  조시 “인삼장에서”를 발표하기까지 했는데 가끔 연산의 핀잔을 받아야 했다. 자기처럼 소설에 뜻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였다. 그때 연산이는 벌써 연변일보사의 윤효식기자님이나 연변인민출판사의 김봉웅편집님 등 어마마한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다. 그 영향으로 나는 시를 점차 멀리하다가 소설에 빠져 들었고, 소설에서도 이땅의 우리 조선족의 피어린 항일투쟁사를 장편소설화하겠다는것이 소신으로 자리잡아갔다.     그렇게 력사공부를 하다가 저도모르게 우리 력사에 매료되여 력사연구란 이 외통길을 걷는것이 나 인생으로 되여 버렸다. 다시 말해 내가 우리 력사와 씨름하게 된것은 소설로의 영향을 받은 친구 연산의 영향과 갈라 볼수가 없다 이것이다.                                                                       2   1982년 7~8월에 연변대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연산이는 뜻대로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실에 배치받고 나는 처음 화룡현위 당사연구실에 배치 받았다가 연변일보사 기자로, 연변력사연구소 연구일군으로 옮겨 앉게 되였다. 둘다 소원성취하여 자기가 하고픈 인생행로에 오르게 된 셈이라 볼수가 있겠다. 인연은 인연이라 우리 연변력사연구소가 상당한 기간 연변인민출판사 1층에 자리 잡은것, 연산친구의 문예편집실도 1층. 한데서 우리는 한 직장처럼 때도 시도 없이 서로 만나 즐길수 있었고 나도 문예편집실의 일원인양 허물없이 드나들며 조룡남시인, 김응준시인 등 선배님들과도 인연을 맺게 되였다. 이 시절에 나와 연산친구만의 에피소드 하나가 또 있다. 1985년 4월에 연변주민정국 편, 연변인민출판사 출판으로 된 연변항일렬사전—“장백의 투사들” 제2책이 출판되였는데 이 렬사전의 편집은 출판사 문예편집실에서 맡게 되고 류연산이 이 책의 책임편집으로 나섰다. 일이 이쯤되자 우리 둘은 늘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장백의 투사들 (2)에 골몰하게 되였다. 재미나는 것은 “장백의 투사들” (2)에 34명 항일렬사 전기기 수록되였다면 34명 중 9명은 나의 정리 (일부는 2인합저로 됨)로 되고 나 혼자 맡은 인물이 많다 하여 화룡현 당평강구위 제1임서기 주현갑 등 6명 항일렬사 자료를 다른 분들께 주어 그분들의 정리이름으로 발표하였다는 점이다. 9명 정리도 말이 내가 정리이지 연산친구가 열성적으로 수정하며 손을 많이 댔다. 그때 대학을 갓 졸업한 나는 문학이 아닌 력사에 뛰여들다보니 나의 글쓰기수준은 소설을 쓰는 연산에 비할바도 못되였다. 34명 항일렬사중에서도 가장 무게가 있고 분량있게 다뤄진 항일렬사전기-- “장백의 불사조” 제목으로 된 박상활렬사도 나와 연산친구의 합작으로 되였다지만 연산이가 새롭게 재미있게 쓴것이였다. 화룡현의 항일렬사가 책 전체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것도 연산의 숨은 노력이 컸다. 연산이는 이 렬사전의 편집과 출판을 위해 많은 힘을 기울리였다.   3   그후 세월은 살같이 흘러 80년대 언덕을 넘고 90년대의 언덕을 넘어 21세기의 첫 10년에로 들어섰다. 세월속에서 당년 연변대 조문학부 시절 애티 함함했던 20대 청춘들이 50대의 중년으로 나타나고 북방과 남방이란 머나먼 6000리를 사이두고 지내야 했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의 인연, 우리의 우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매번 여름, 겨울방학이 되여 연변으로 가면 우린 서로 만나 회포를 풀군 하였다. 글을 쓰느라고 무척이나 시간을 쪼개는 연산이지만 나한테는 옹근 반날, 옹근 하루씩이라도 시간을 내여 주었다. 2008년 8월 9일과 10일, 우리 연변대 조문학부 78년급 동창 엄영준, 김호웅 등 10여명이 돈화행에 올랐다. 그중에는 류연산부부와 나도 끼이였으니 나는 연산친구의 자가용에 앉았고 우린 오며가며 달리는 차안에서 많고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 주제는 우리 조선족문단의 희노애락들이였지만 남방에 간후의 전국으로의  우리 력사답사와  갖가지 책쓰기도 화제의 한 부분이였다. “형님, 죽자고 그러오. 좀 작작하오. 욕심을 더러 버리란 말이오” 불시로 연산이가 와락 소리를 지른다. 나는 일순 할말을 잃다가 반말로 “글쎄~~연산이 말이 옳긴 한데, 잘 안되는게 이일이거든. 그럼 너는, 욕심은 나보다 더 많아 가지고 누굴 훈계하네. 히히히.” 하면서 맞장을 떴다. 이 맞장에는 연산이도 말이 막히는지 하하 크게 웃는다. 8월 10일 귀로에서 우린 돈화의 성산자산성을 같이 답사하게 되였다. 성산자산성은 바로 발해국의 첫 탄생지—그젯날 동모산으로서 돈화시 구역에서 서남으로 22.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성산자 산성답사의 의미로움은 우리 겨레력사에 깊이 빠진 두 친구의 첫 공동답사라 할까. 이날 우리는 기원 698년, 발해국의 창건자인 대조영을 떠올리며 옛 성터 자취를 따라 성터를 찾으며 둘레 2000미터 전부를 답사한 기록을 올리였다. 성산자 산성을 수차 답사하였음에도 옛 산성의 전부를 답사하기는 나로서도 처음 있은 일, 연산친구의 공로였다. 이해 8월 23일에는 상기 돈화행 참가동창들이 다시 연길 가까이 팔도—김호웅동창의 시골집에 모여 동창들 재모임을 가지였다. 그날은 마침 아들애 생일이여서 내가 말미를 맡고 귀로에 오르니 연산친구가 자가용으로 나를 연길까지 바래는 성의를 보여주었다. 그리고도 모자라 부부동반으로 우리 집에 들러 아들애 생일을 축하하더니 쌍둥이 딸애들께까지도 학용품에 보태라며 돈을 내놓아 우리 사이 인연을 자식들에게 실감있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4   그로부터 또 한해가 흘렀다. 2009년 4월에 연산친구 부부가 상해와 가흥을 거쳐 소흥에 다녀간후 우리 우정은 보다 두터워지는것 같았다. 이해 여름방학에 연변으로 돌아가자  7월 23일 연산친구가 나를 불렀다. 그는 다짜고짜 자가용에 오르라더니 나를 싣고 도문으로 달리였다. 이날 우리는 도문의 두만강공원과 연도의 룡가미원을 돌아보고 왕청 배초구까지 다녀 왔으니 친구사이 또 한번의 의미있는 만남과 답사걸음이였다. 7월 30일에는 “장백산”문학지 리여천주필의 연길행에 리여천, 류연산, 리혜선, 나 넷이 모아산을 산행하고 모아산의 한 산중음식점에 모이였으니 이날 만남의 조직자는 류연산친구였다. 연길, 장춘, 강남의 만남이 쉽지만은 않았으니 조글로 추모 (2)에 올린 모아산—문학친구들과의 만남사진은 이렇게 찍어진 것이였다. 그러던 연산친구의 소식—투병소식을 류은종교수님으로부터 들은것은 그로부터 몇달 뒤인 이해 2009년 12월 초순의 일, 치료가 어려운 병환소식이다. 상해 수술후인 12월 12일, 나의 일가족 셋과 방룡남박사 넷이서 상해로 달려가니 수술효과가 좋고 정신상태도 좋았다. 연변으로 돌아간 후에도 연산한테서 치료상황 메일을 두번 받고 통화까지도 하고,  연산이를 두고 친구들인 우광훈작가와 리혜선작가와 수차 통화하면서 완치가능성은 없겠고 적어도 몇년은 괜찮겠다고 보았으나 그게 아니다. 1월 22일 오후 3시 37분 타계비보는 그렇게도 슬픈 비보다. 온 하루 일손이 갚히질 않고 친구 소흥행을 쓴 수필과 관련 사진들을 찾으며 멍해 지다가 자주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이구, 가느라고 강남에도 다녀 갔구나, 내가 연산의 말을 할 때면 집사람도 가끔 눈물을 훔친다. 류연산친구가 하늘 나라로 떠난지도 3일, 3일 내내 눈만 뜨면 친구의 생각 뿐이고 친구가 나한테로 다가와 락천적인 유머기분 그대로 나와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유명이 다름이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연산친구는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연산이를 나 인생의 가장 절친한 30년 변함없는 친구로 생각하고 대해 왔으니 한사람의 인생에 서로 믿고 따를 절친한 친구가 몇이나 되랴, 나는 그런 친구를 잃고 지금까지도 마음을 다잡질 못하겠다. 인생이 무상함을 다시다시 느끼게 된다.   지금 나의 앞에는 친구가 쓰고 친구의 친필싸인으로 된 장편기행문 “혈연의 강들”(상, 하)와 불멸의 지사 류자명평전, 불멸의 지사 심여추평전이 놓여 있다. 친구가 못다 한, 욕심도 많고 할 일도 많은 우리 겨레연구—연산의 이 30년 지기가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꾸준히 이어갈수 밖에 없나부다.   류연산친구여, 가는 길 구천길 평안하소서 !!!   2011년 1월 25일, 강남 두앵원에서                            
372    추모(2) 모아산--문학친구들과 더불어 댓글:  조회:4881  추천:39  2011-01-24
【추모】(2)           모아산--문학친구들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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