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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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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향소식] - 고향 화룡에 비행장 선다... 댓글:  조회:2984  추천:0  2020-07-02
화룡진달래통용비행장 건설 첫 삽 편집/기자: [ 안상근 ]  [ 길림신문 ] [ 2020-06-10 ]  화룡진달래통용비행장 정초의식이 6월 10일 오전 펼쳐지면서 화룡시는 통용비행장 건설의 첫삽을 떴다. 화룡진달래통용비행장은 국가발전개혁위원회와 국가민항국에서 확정한 단거리운수 시범공정이며 전성적으로 처음 비준받은 A일류 통용비행장 대상이다. 이 대상은 화룡시에서 국가의 내수확대정책의 기회를 다잡고 “3성”건설을 깊이있게 추진하는 중대한 조치인바 립체교통 네트워크를 완벽화하고 투자환경을 개선하고 관광자원을 종합하고 대외개방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놀게 될 전망이다. 료해에 따르면 새로 건설되는 화룡진달래통용비행장은 화룡시 룡성진 흥서촌에 자리잡고 있는데 총투자가 9.89억원에 달한다. 비행장의 총 부지면적은 97헥타르에 달하며 길이가 1200메터, 너비가 30메터에 달하는 활주로와 비행구 등급 2B로 건설되며 운-12통용비행기와 각종 직승비행기 및 기타 소형비행기들이 비행할수 있다. 이 대상은 3년내에 건설되는데 완공후 전성적으로 규모가 가장 큰 A1류 통용비행장으로 될 전망이다. 통용항공산업은 현재 우리 나라에서 갓 흥기하기 시작한 전망밝은 산업인바 국가에서 통용항공산업의 발전을 고도로 중시하고 통용비행장 건설을 크게 지지하고 있다.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화룡시당위서기인 김렬은 축사에서 화룡진달래통용비행장은 개통된 후 장춘, 장백산,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 조선 청진 등 국내, 국제 항공로선이 개통되면서 화룡을 중추로 중조로 3국 공중통로를 구축하게 되여 화룡시의 기초시설이 락후한 면모와 교통물류가 박약한 현황을 철저히 개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화룡시에서는 진달래통용비행장을 지탱점으로 공항경제구와 항공산업건설을 함께 추진시키면서 항공강습, 물류운수, 가공제조 등 기능이 일체화한 종합성적인 항공산업군을 창출하며 아울러 공로, 철로, 항구합작개발 등 기초시설건설을 다그치는것으로 점차 륙해공 립체교통망을 형성하며 두만강 출해구를 열고 해양경제를 발전시키며 동북아 지역의 상호 련락과 소통을 적극 실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화룡시에 통용비행장이 들어선 후 변경합작구건설과 전면적인 대외개방 확대 및 지역경제발전의 추진으로 빈곤부축개발이 큰 탄력을 받게 될것이며 길림성 항공운수사업에 적극적인 네트워크 지지를 주게 된다. 이외에도 장백산비행장과 연길비행장의 지선보충 작용을 하게 되여 우리 성 동부지역관광의 전역 련동도 실현하게 되며 지역경제발전과 변경안정, 생태환경보호에도 중요한 작용을 놀것으로 전망된다. /사진 화룡시당위 선전부제공
2    작가들의 큰 박수를 받은 민족개념/ "길림신문"/ 김승종 댓글:  조회:2684  추천:0  2020-07-02
지상토론(7)작가들의 큰 박수를 받은 민족개념/김승종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7-02 ]  《길림신문》이 펼친 구술시리즈 남영전편의 토템이야기를 들으면서 15년전 내몽고사범대학에서 그의 연설을 듣던 장면이 생생하게 살아나 감회가 깊었다. 2005년 9월15일, 내몽고사범대학에서 중국소수민족작가연구중심 개원식 및 문학세미나가 있었다. 필자가 이 큰 행사에 참석하는 행운을 가졌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날, 전국에서 100여명의 소수민족작가들이 모였었다. 내가 책 속에서 보아오던, 꿈에도 흠모했던 유명한 작가들이 대거 참석하여 나를 흥분하게 하였다. 이번 세미나에서의 중점 발언은 중국소수민족작가연구중심 주임, 몽고족작가 터싸인 바야얼 (特•赛音巴雅尔), 현대문학관 관장, 만족작가 서을(舒乙), 길림신문사와 장백산잡지사 사장이며 조선족시인인 남영전 등 5명의 작가들이였다. 남시인의 발언고는 였다. 남시인의 발언 서두는 특이하였다. “여러분, 오늘 이자리에 모인 분들은 자기 민족의 문화를 다 잘 알고 있는 작가들입니다. 고정관념은 민족을 왕왕 혈통으로 보는데 오늘 나는 이자리에서 반기를 들겠습니다. 저의 견해를 점검해 주시고 틀리면 비판하십시오.” 참석자들은 다들 긴장해서 남시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시인은 자신이 토템문화를 관심하게 된 경우와 토템문화가 현대생활에서의 표현 등을 이야기 하고 나서 민족개념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인류의 발전사, 민족의 형성사를 보면 민족은 여러 부동한 토템성씨들이 장기간 한 지역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형성된 의식주행어(衣食住行语)의 문화공동체입니다. 이 문화공동체가 곧 민족의 탄생이고 민족의 표지입니다. 때문에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닙니다. 혈통으로 말하면 각 민족은 모두 형제관계입니다. 저의 결론이 틀리면 여러분들이 비평하십시오.” 장내는 삽시에 열렬한 박수가 지속되였다. 그날 오찬 때 중국소수민족작가 대표인물인 몽고족 로작가 마라친부(원 중국작가협회 서기처 서기, 《민족문학》 주필)는 특이한 제의를 하였다. “오늘 오찬은 남영전 시인의 발언을 축하하는 토템연회입니다. 모두들 토템술을 기쁘게 듭시다.” 옆에 앉은 현대문학관 서을 관장도 술잔을 들고 “남영전 시인이 말하는 민족개념은 확실히 도리가 있습니다. 저도 대찬성입니다.”라고 하면서 건배를 제의하였다. 그때 행사에 참석한 조선족은 남시인 외 심양의 소설가 박성군, 그리고 연변의 김승종 시인 세명이였다. 8년 후인 2013년 6월, 전국작가 내몽고견학방문단 일원으로 나는 새롭게 건립된 중국소수민족문학관을 참관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때 아래의 사연을 알게 되였다. 중국소수민족문학관을 건립하는 데는 남영전시인의 공로도 한몫 있었다. 2005년, 그번 행사가 있은 다음 몽고족작가 터싸인바야얼, 조선족시인 남영전 등 소수민족작가 10명이 련명으로 온가보 총리에게 청원서를 올렸다. 온가보 총리는 이에 중시를 돌려 일주일안에 2,500만원의 경비를 비준하였다. 이리하여 4년 후인 2009년 9월, 내몽고사범대학 교정내의 100무의 부지에 5,500평방메터 되는 현대화한 중국소수민족문학관이 건립되였다. 문학관 공원에는 다섯개 정자, 다섯개 대리석다리가 있는데 련명으로 청원서를 써올렸던 소수민족작가들이 정자와 다리에 한개씩 이름을 짓도록 했었다. 남영전 시인은 그중 한개 다리의 이름을 원융교(圆融桥)라고 지어 그가 쓴 세글자가 다리기둥에 음각되여 있었다. 그리고 문학관 공원에는 만족작가 조설금(《홍루몽》저자), 로사(老舍)를 비롯한 10명의 소수민족 유명한 작가들의 동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남영전 시인의 제의로 조선족의 대표작가 김학철선생의 동상도 이 10명의 유명한 작가들 속에 의젓이 세워져 있었다. 남영전 시인은 토템원융의 기치를 든 시인이다. 그는 토템원융사회를 위해 어제도, 오늘도 한 시인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고 있다. /김승종 (1963년 출생, 화룡시작가협회 전임주석,  연변작가협회 리사. 《천하루밤과 시작노트와 시지기 삶》,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등 시집 3부 출판. 두만강여울소리, 연변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 문학상, 제20회 연변정지용문학상 등 다수 수상)
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재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407  추천:0  2020-07-02
‘천년의 빛’ 고려 나전칠기 돌아왔다 기사입력 2020.07.02.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고려시대 예술의 정수로 꼽히는 나전칠기는 전 세계에 20여 점만 전해질 만큼 귀중한 유물인데요. 이 중에서도 전 세계에 단 3점밖에 안 남은 독특한 형태의 나전칠기 유물 한 점이 일본에서 돌아왔습니다. 안다영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작디작은 국화 꽃잎과 넝쿨무늬가 영롱하게 빛납니다. 2~3mm 정도로 아주 작게 자른 자개와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바다거북 등껍질을 붙인 기법이 세밀함과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청자, 불화와 함께 고려시대 예술의 백미로 꼽히는 12세기 나전칠기 유물 한 점이 일본에서 돌아왔습니다. [김동현/국외소재문화재재단 유통조사부장 : "다양한 문양과 기법이 총망라된 우수한 작품입니다. 오랜 시간 보존하면서도 수리가 거의 되지 않아서 원형이 잘 남아있고."] 길이 10cm, 무게 50g의 작은 크기로, 뚜껑이 있는 '나전합' 형태입니다. 향이나 화장품 등을 담는 데 쓰였을 걸로 추정됩니다. 이 유물은 특히 큰 원형 합 속에 들어있는 작은 합 중 하나인데, 나머지 합들은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이런 모양의 작은 합은 이 유물을 비롯해 전 세계에 단 석 점뿐. 미국에 1점, 일본에 2점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일본의 한 개인이 소장해오던 한 점을 되찾아 왔습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년간의 협상 끝에 구매에 성공해 지난해 12월, 환수했습니다. [최응천/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 "가치가 충분한 유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마 우리가 어느 시점에 환수하지 않으면 다시 일본의 국유문화재로 바뀔 수 있는 아주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2018년 보물로 지정된 나전경함 등 모두 3점의 나전칠기 유물을 소장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환수된 나전합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돼 올해 12월 특별전을 통해 관람객과 만납니다. KBS 뉴스 안다영입니다. /안다영 기자  ======================================///   세계에서 단 3점 뿐인 나전칠기, 800년만의 귀환… 1.5~3mm의 '극초정밀' 예술 2020.07.02.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경향신문]  일본의 한 소장가가 갖고있던 고려 나전국화넝쿨무늬합(그릇)이 구입 환수되어 2일 언론에 공개됐다. 전세계에 단 3점 남아있던 온전한 형태의 나전합 중 1점이 환수된 것이다. 유일하게 매입가능했던 유물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은 환수라 할 수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세밀가귀(細密可貴)’라는 말이 있다. 고려시대 극한의 정밀한 공예품을 가리켜 ‘세밀하여 귀하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이 ‘세밀가귀’란 말은 본디 고려시대 공예품 중 나전칠기 기술을 콕 찝어 표현한 것이다. 즉 1123년(인종 재위 1122~1146)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에 “고려의 나전솜씨는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螺鈿之工 細密可貴)”고 언급했다. 현존하는 고려나전 제품을 보면 중국인들이 감탄사를 연발할만 하다. 고려 나전에는 대모(玳瑁·거북등껍질)와 전복껍질을 얇게 갈아 재료로 사용했다. 이 껍질을 일일이 곡선으로 오려내는 줄음질 기법으로 꽃잎과 이파리 등의 무늬를 표현했다.  그런데 꽃잎과 이파리의 한조각 크기는 1㎝를 넘지않는다. 작은 것은 2~3㎜에 불과하다. 꽃송이를 이은 넝쿨은 금속선으로 만드는데 그 두께가 불과 0.3㎜였다. 금속은 옻칠을 한 나무표면에 야교를 묻힌 이 작디작은 꽃잎과 이파리 조각을 일일이 붙이는 일은 극한의 인내력과 정교함을 요하는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작은 단위를 오리고 갈아내어 원하는 문양을 맞추는 일은 가히 극한직업이 아닐 수 없었다. 나전으로 만든 경전함의 경우 2만5000개의 나전 조각이 사용되었으니까…. 이렇게 만든 고려나전은 중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구입 환수된 ‘나전합’의 용도는 확실치는 않지만 화장용기 등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국화와 넝쿨무늬가 빈틈없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심지어 1080년(문종 34년)에는 나전으로 장식한 수레(나전장차·螺鈿裝車)까지 송나라에 진상한 일이 에 등장한다. 지금으로 치면 나전칠기로 장식한 최고급 승용차를 송나라 조정에 선물한 것이다. 또 인종 연간에 요나라 사신으로 떠난 문신 문공인(?~1137)은 요나라 관리들에게 고려나전제품을 개인적으로 선물했다는 기록이 에 등장한다. 는 고려 나전제품에 반한 요나라 관리들이 고려사신이 갈 때마다 ‘선물 안주냐’고 요구하는 바람에 큰 폐단이 됐다고 꼬집었다. 또 무신정권의 최고실력자인 최이가 “1244년(고종 32년) 연회를 베풀 때는 은테를 두르고 나전으로 장식한 화분 4개에 얼음산을 쌓았다”( ‘열전’)는 기록도 있다.  이밖에 몽골 간섭기인 1272년(원종 13년)에는 “대장경을 보관할 함(경전함)을 만들라”는 원나라 황후의 요구에 따라 고려에 나전제품을 제작하는 임시관청인 전함조성도감이 설치되기도 했다. 이뿐이 아니다. 중국의 칠기서인 에는 “나전 필갑(필통)은 고려국에서 생산되어 들어온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만큼 고려 나전은 중국인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로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한 예술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전함, 염주함, 향합(향을 넣는 그릇), 불자(먼지 터는 총채와 같은 불교의식용 도구) 등 고려 나전제품은 지금까지 파악한 것만 전세계를 통틀어 22점 뿐이다. 그것도 대부분은 일본과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의 주요박물관에 흩어져있다. 고려 예술을 대표하는 ‘세밀가귀’ 제품이 왜 이렇게 적은 숫자만 남았을까.  환수된 나전합의 세부무늬. 고려나전은 ‘세밀가귀’라는 칭송을 들을만큼 세밀하고 정교한 문양 구현으로 정평이 나있다. 거북등껍질과 전복 껍질을 얇게 갈아 3~8㎜ 정도의 크기로 일일이 오린 뒤 문양에 따라 붙여넣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우선 조선개국과 함께 화려함을 배격하고 청빈함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강조되면서 급속도로 쇠퇴했다. 단적인 예로 1448년(세종 30년) 6월3일 세종은 “속절(俗節·철이 바뀔 때마다 사당이나 조상의 묘에 차례를 지내던 날)에 진상하는 함을 나전으로 꾸미지 말라”는 명을 내린다. 그렇게 공이 많이 들어가는 화려한 제품을 왕실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쓰겠는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전제품은 옻칠한 나무에 1㎝도 안되는 수백 수천 수만개의 문양을 아교로 일일이 붙여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 떨어지기 쉽다.  이러니 고려나전이 남아있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는 불자(拂子·먼지 터는 총채처럼 생긴 불교의식용 도구) 1점 뿐이었다가 2014년 일본인 소장가에게서 나전경전함을 구입함으로써 2점이 되었다. 이 나전경전함은 2018년 보물(제1975호)이 됐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위임을 받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지난해 12월 전 세계에 단 3점 뿐인 고려시대 나전국화넝쿨무늬합(그릇·이하 나전합)을 일본소장가로부터 구입했다”고 2일 밝혔다. 이로써 국내의 고려나전 유물은 온전한 것을 기준으로 총 3점으로 늘어났다. 이번에 구입환수된 나전합은 이미 14년 전인 2006년 국내에 공개된 바 있는 유물이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 준비한 ‘나전칠기-천년을 이어온 빛’에 출품됐다. 이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오랜 시간 일본의 개인 소장자와 협상 끝에 나전합을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구입환수된 ‘나전합’에는 떨어져나간 부분이 더러 보인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것이 오히려 후대에 수리한 흔적이 없는, 원형 그대로의 12세기 고려나전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환수한 나전합의 용도는 확실치는 않지만 향 혹은 화장용기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의 큰 합(그릇)에 여러 개의 작은 합이 들어간 일종의 ‘모자합(母子盒)’이다. 김동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부장은 “전 세계 단 3점 만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데, 그 중 유일하게 매입할 수 있었던 나전합이었다”고 의미를 두었다. 이 나전합의 길이는 10㎝ 남짓이며, 무게는 50g 정도된다. 영롱하게 빛나는 전복패와 온화한 색감의 대모, 금속선을 이용한 치밀한 장식 등 고려 나전칠기 특유의 격조가 고스란히 반영된 수작이다. 뚜껑과 몸체에 반복되는 주요 무늬는 국화와 넝쿨무늬다. 손끝으로 집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작게 오려진 나전이 빈틈없이 빼곡하게 배치되며 유려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다. 국화 꽃은 지름이 10㎜였고, 꽃잎 길이는 3㎜, 폭은 1.5㎜ 정도에 불과했다. 큰 꽃무늬와 국화의 꽃술에는 고려 나전칠기의 대표특징 중 하나인 대모복채법(玳瑁伏彩法)이 사용됐다. 대모복채법은 바다거북의 등껍질(대모)를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판 안쪽에 안료를 칠해 앞면에 비쳐보이게 하는 기법이다. 뚜껑 테두리는 점 혹은 작은 원을 구슬 꿰매듯 연결시켜 만든 연주문(連珠文)으로 촘촘히 장식되었다. 또한 금속선으로 넝쿨 줄기를 표현하고 두 줄을 꼬아 기물의 외곽선을 장식했다.  최응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꽃잎과 이파리를 표현한 대모(거북등껍질)와 전복껍질, 넝쿨을 표현한 금속(구리)선이 이토록 조화롭게 구현된 고려나전 제품은 보기 드물다”면서 “고려 나전의 전성기인 12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2014년 구입환수된 나전경전함. 무려 2만5000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8년 보물제 1975호로 지정됐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합에는 꽃잎과 이파리가 떨어져 나간 곳이 더러 보인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또한 나전합의 가치를 높이는 요소라고 입을 모은다. 김미라 문화재청 감정관실 감정위원은 “수리 흔적이 있는 다른 고려나전과 달리 이 나전합은 원형 변형 없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뜻”이라면서 “그런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더 높을 수 있다”고 전했다. 한편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비파괴 분석 결과 나전합은 전형적인 고려 나전칠기의 제작기법과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나무로 모양을 잡은 뒤 그 위에 천을 바르고 옻칠을 한 목심칠기이고, 판재 안쪽 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칼집을 넣고 부드럽게 꺾어 곡선형의 몸체를 만들었으며, 몸체는 바닥판과 상판을 만든 후에 측벽을 붙여 제작된 점 등이 확인됐다. 환수된 나전합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며, 오는 12월22일부터 열릴 특별전(‘고대의 빛깔, 옻칠)’에 출품될 예정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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