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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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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토템과 남영전시인 11 댓글:  조회:2171  추천:0  2020-09-03
지상토론(11)남영전 시인은 문화의 폭과 깊이를 확실히 하였다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8-06 ]          저자 오기활   《길림신문》에서 펴낸 대형구술시리즈 에서 남영전 시인은 여섯편의 구술로 토템과 성씨, 민족, 민족전통풍속, 인류운명공동체 등 관계를 체계적으로 서술하였다. 필자는 남영전 시인의 에서 문화에 대한 정의, 문화내용의 폭과 깊이를 확실히 하였다고 생각한다. 2006년 3월 20일, 필자는 길림신문사의 “귀하를 길림신문사‘연변25시'의 대외사업/기획부장으로 정식 초빙합니다”란 초빙서를 받고 ‘연변25시'의 창간, 기획, 발행 등 사업에 열성을 다했다. 그러던 와중에 3년 후인 2009년 3월 28일에 필자는 길림신문사 남영전 사장이 내준 초빙서를 받고 신문칼럼을 쓰는 일에 몰두하였다. 2019년 2월, 남영전 시인은 일본에 머물고 있는 나에게 위챗으로 자신이 집필한 라는 글을 보내면서 “오선생님, 시간이 날 때 한번 봐주시고 조언을 부탁드립니다.”라고 했다. 나는 한면으로 기쁘기도 하고 또 한면으로는 큰 압력을 느끼기도 했다. 기쁨은 중국의 이름난 시인의 한분인 남영전선생이 필자에 대한 믿음에 고마웠고 압력은 시에 대해 물에 연돌인 내가 어떻게 명시인이 내준 숙제를 완성할 수 있겠는가는 우려 때문이였다. 고민 끝에 나는 를 통독한 후 는 제목으로 남영전선생에게 답장을 올리는 형식으로 숙제를 완성하기로 했다. “남사장님, 나는 시와는 거리가 아주 멉니다. 단 소학교에 다닐 때 조선어문에서 배웠던 동요시 몇 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때는 고리끼의 산문시 을 암송하고 농촌오락장에서 읊기도 했고 술상에서 모주석의 시사도 몇수 쯤은 읇었으며 20대에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도 사서 보면서 도깨비가 기와장을 번지듯 책장을 번졌답니다. 공자에 따르면 말(言)이 시(詩)가 되고 시가 노래로 되고 노래가 춤으로 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시, 노래, 춤이라는 흥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지난해 일본에서 개최한 시인 윤동주연구 국제포럼에 참가하여 시의 생명력과 인류에 남겨주는 공헌을 절실히 감수하게 되였습니다. 이 기회가 밑받침이 되여 최근에는 김학송, 석화 등 몇몇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한층 시인을 우러러 보고 숭배하며 짤막한 시구에 슴배여 있는 시인들의 로고를 얼마라도 짐작할 수 있게 되고 감명 깊은 몇구절의 시구가 시인들의 머리에서 짜낸 고귀한 뇌즙임을 알게 되였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덕분으로 를 공부했고 순간이나마 일연(一然)을 만나게 되였습니다. 기실 저는 토템에 대한 개념이 없고 몇년전부터 남영전이란 성함과 더불어 토템이란 명사를 듣게 되였습니다. 저는 를 읽으면서 믿겨지기도 하고 또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리둥절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전에 수로왕에 대한 전설이나 이야기를 약간은 들은 바가 있었고 특히 근년에 김수철교수님의 전기를 쓰면서 김교수님의 시조가 수로왕의 여섯째 동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수로왕을 김수철교수님의 전기에 언급하였습니다. 저는 남사장님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물음과 답안을 조상들의 토템이야기에서 찾았다는 것, 절강 호주사범학원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를 공공과목으로 설치했고 남영전 토템시 연구가 국내 일부 대학 석사와 박사 연구생의 졸업론문제목이 되였으며 2011년에는 남영전 토템시 내용이 대학입시 모의작문시험 제목으로도 선정되였다는 등등의 점에서 남사장님이 중국시문화발전에 남긴 거족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썩 몇년전에 읽었던 기사가 생각납니다. 2002년 3월에 프랑스 전역에서‘시는 령혼의 갈증을 달래는 물'이라는 주제로 시인의 봄이라는 축제가 열렸습니다. 그 때 도시의 공공기념물에는 현대의 명시를 담은 기발을 걸었고 지하철과 뻐스안에는 시민들이 접하기 쉽게 짧은 시들을 비치했습니다. 축제기간에 학교 교실에서 매일 시를 읽고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영화관에서도 영화상영전에 시를 랑송했습니다. 방송은 물론 연극배우와 가수들도 시의 대중화에 나섰습니다. ‘시인의 봄’포스터는 ‘시는 자연적이다. 그것은 제2의 갈증을 달래는 물'이라고 적었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는 것 역시 시가 삶의 열정을 채워주는 령혼의 샘물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남영전 시인은 에서 “문화란 개인과 군체를 식별하는 의식주행어의 표지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시인은 “인간생활은 이 다섯가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의는 복식문화를 가리키며 식은 음식문화, 주는 주거문화, 행은 사람들의 사상과 행위도덕과 풍속습관, 어는 언어를 말한다.”고 세분화 하면서 바로 이런‘5가지 자대'를 가지고 민족과 개인을 감별할 수 있다고 간결하고 통속적으로 귀납하였다. 필자는 남영전 시인의 이런 문화정의에 머리가 숙여지며 기립박수를 보낸다. 오기활 프로필: 1947년 5월 9일, 왕청현 석현진 달라자 출생.1974년, 연변농학원 축목수의학부 졸업.1986년, 연변대학 정치학부(통신학부) 졸업.연변일보사 도문주재기자, 연변일보사 해외부 기자, 대외사업부 부장, 《중국저널(月刊中國)》(한국), 《중앙경제신문》(한국) 연변지사장, 길림신문사 초빙기자, 특별기고인 《성공을 위하여》, 《부자로 가는 길》, 《일하는 멋 베푸는 삶》(정경락공저), 《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 쉬는 사람들》,《기업가의 인격》,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공저,《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 전》,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등 여러 편. 
1    [그것이 알고싶다] - "조선어학회" 댓글:  조회:3055  추천:0  2020-09-03
한국근현대사사전 조선어학회   [ 朝鮮語學會 ] 시대명 근대/일제강점기 1931년 12월 3일,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 현재의 한글학회. 처음의 명칭은 였으며, 장지영(張志暎)·김윤경(金允經)·이윤재·이극로·최현배·이병기 등을 회원으로 하여 연구발표회와 강연회를 갖고 한글의 우수성을 선전하는 한편, 27년 2월부터 기관지 을 발간했다. 29년에는 편찬사업에 착수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출판하지 못했다. 31년 학회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바꾸고, 33년에 을 발표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한글표기의 기준이 되고 있다. 42년 10월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 30여 명이 일제에 의해 검거, 투옥되었다. 해방 후 49년 한글학회로 다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글학회는 29년의 편찬사업을 이어받아 1957년 6권의 을 완간했다. 관련이미지 ①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 학회에 참여한 학자들.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거나 감옥 생활을 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②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감옥 생활을 했던 국어 운동가 최현배가 쓴 글씨.우리 글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③ 8 · 15 광복 후에 조선어 학회가 만들고 미군정청의 학무국이 펴낸 첫 교과서인 《한글 첫 걸음》.출처: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어학회 [朝鮮語學會] (한국근현대사사전, 한국사사전편찬회)   =================================///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 · 기구와 단체 · 역사 인물 조선어 학회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맞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한 학술 단체   요약 1921년에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장지영, 이윤재, 최현배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으며, 잡지인 《한글》을 만들고 《조선어 사전》 편찬을 시작했다. 1942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해체될 위기를 맞기도 했으며, 8 · 15 광복 후에는 ‘한글 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시대 일제 강점기 목차 풀이 심화 풀이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 학회에 참여한 학자들.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거나 감옥 생활을 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②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감옥 생활을 했던 국어 운동가 최현배가 쓴 글씨. 우리 글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③ 8 · 15 광복 후에 조선어 학회가 만들고 미군정청의 학무국이 펴낸 첫 교과서인 《한글 첫 걸음》. ①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 학회에 참여한 학자들.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거나 감옥 생활을 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②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감옥 생활을 했던 국어 운동가 최현배가 쓴 글씨. 우리 글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③ 8 · 15 광복 후에 조선어 학회가 만들고 미군정청의 학무국이 펴낸 첫 교과서인 《한글 첫 걸음》. 3 · 1 운동으로 터져 나온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에 놀란 일제는 1920년대부터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는 정책을 폈다. 이에 장지영, 이윤재, 최현배 등은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위한 학회를 만들었다. 여기서 ‘학회’란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기 위해 만든 모임을 뜻한다. 장지영을 비롯한 국어학자들은 일제의 정책을 그대로 따르면 우리 고유의 말과 글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조선어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국어에 대한 연구와 강연 활동을 주로 했으며, 1927년부터 《한글》이라는 잡지를 펴냈다. 1929년에는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끝을 맺지는 못했다. 1931년에는 학회의 이름을 ‘조선어 학회’로 고쳤고, 1933년에는 오늘날에도 한글 표기의 기준이 되고 있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다. 조선어 학회는 1942년에 일어난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위기를 맞았다. 일제는 1937년부터 모든 관공서에서 일본어만 쓰게 했고, 1940년부터는 학교에서 우리말을 아예 못 쓰게 했다. 우리의 말과 글은 물론 역사와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작은 사건을 꼬투리 잡아 조선어 학회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몇몇 사람들을 모질게 고문해 조선어 학회가 학술 단체를 가장한 독립운동 단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고, 이를 구실로 회원 33명을 잡아간 뒤 28명을 감옥에 가둔 것이다. 결국 모진 고문과 고통스러운 감옥 생활 끝에 이윤재, 한징 등은 목숨을 잃었다. 심화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 학회 사건 이후 조선어 학회는 큰 타격을 입고 위축되었으나 8 · 15 광복 후에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1949년에는 학회의 이름을 한글 학회로 바꾸고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한글 학회는 1929년에 시작한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이어받아, 1957년에 6권의 《큰사전》을 펴냈다. 조선어 학회는 국어를 연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강연과 잡지 출간, 사전 편찬 등의 활동을 벌였다. 특히 조선어 학회의 학자들은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힘을 쏟았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끝을 맺지는 못했다. 사전은 해방 후 한글 학회로 이름을 바꾼 뒤에 완성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어 학회 -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맞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한 학술 단체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 언어영역 조선어학회(한글학회)     교과단원 국어(상), Ⅱ. 짜임새 있는 말과 글, Ⅱ-보충 가람일기 목차 1. 교과서 속 주개념 조선어학회 2. 확장 개념 조선어학회 사건 3. 관련 지식 1) 한글맞춤법통일안 2) 외래어표기법통일안 1. 교과서 속 주개념 조선어학회 주시경 등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전에 창립되어 식민지 기간을 거쳐 오면서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위해 앞장섰던 학술단체이다. 1908년 8월에 〈국어연구학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가 이후 〈배달말글 몰음〉, 〈한글모〉, 〈조선어강습원〉 등으로 그 명칭을 바꾸면서 1931년 1월에 잘 알려진 〈조선어학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맞서 한글을 지키고 연구하는 데 앞장섰다. 해방 이후 1949년에는 〈한글학회〉로 그 명칭을 바꾸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일제 강점기 당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앞장 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개화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된 한글이지만 실제로 보급되어 매체 등을 통해 대중화 된 기간이 짧은데다, 곧바로 일제의 식민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상황에서 한글을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은 열악한 편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어학회에서는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면서 한편으로는 올바른 한글 사용을 위한 맞춤법 통일안 마련에 힘을 기울인다. 그 결과 1933년 10월에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발표되고 1936년 10월에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 나오게 된다. 학회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외래어와 외국 인명 및 지명에 관한 표기를 통일하기 위해 1941년 ‘외래어표기법통일안’을 발표한다. 여기에는 교과서에 실려 있는 〈가람일기〉의 저자 이병기 선생도 함께 참여해 국어 연구와 발전에 있어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맞춤법과 표기법을 정비한 조선어학회는 이와 함께 우리말 사전 제작에도 박차를 가한다. 1929년부터 시작된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은 1942년 봄에 이르러 조판을 앞두고 있었으나 그 해 가을 ‘조선어학회사건’이 터지고 구성원 대다수가 검거되고 투옥되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해방 후에는 일제 말기 조선어 말살 정책으로 인해 흐름이 끊겼던 국어교육을 되살리기 위해 〈한글첫걸음〉, 〈초등국어교본〉, 〈중등국어독본〉 등의 교과서를 편찬하여 우리말 되살리기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1945년 10월에는 10월 9일을 한글날로 바꾸어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 시대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중단되었던 사전 편찬 사업도 다시 시작하여 1947년과 1949년 그리고 1950년에는 〈조선말 큰사전〉 1권부터 4권까지를 내고 한국전쟁 이후 1957년에 6권을 마지막으로 사전 편찬 사업을 완결지었다. 한글학회의 활동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현재까지 수많은 사전과 고문서의 한글본을 펴내는가 하면 북한의 언어 연구와 디지털시대에 맞는 한글 연구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2. 확장 개념 조선어학회 사건 1942년 10월 일제에 의해 조선어학회 회원과 그 관련 인물들이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받아 대규모로 검거되어 투옥된 사건이다. 이는 일제 말기 우리 민족의 정체성 및 언어를 완전히 말살하고자 한 일제의 발악이 빚어낸 일이라 할 수 있다. 일제는 한글 연구와 보급에 앞장섰던 조선어학회를 일찍부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아왔는데 특히 1929년부터 시작된 〈큰사전〉 편찬 작업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기 시작한 1940년대 초에 이르러 이 사업에 소속된 조선어학회 회원 모두를 강제해산하기 위한 술책을 꾸민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일제는 먼저 함흥학생 사건을 꾸민다.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인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영옥이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을 맡고 있던 정태진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그해 9월 5일 그를 검거한다. 일제는 정태진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거짓 자백을 하게 만들어 10월에는 이중화, 장지영, 최현배, 이희승 등 조선어학회의 핵심 인물 11명을 검거한다. 이후 1943년 4월까지 모두 33명을 검거하여 고문을 가한다. 이들은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기소되는데 이 중 16명은 기소되고 12명은 석방된다. 기소되어 수감되었던 회원들 가운데 이윤재와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하였고, 나머지는 수감되었다가 해방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이들은 오로지 조선의 국어인 한글을 사랑하고 이를 연구·보존하기 위해 헌신하였을 뿐이나 일제는 이들 순수 연구자들까지 민족주의 운동가로 몰아 무고한 죽음을 당하게 만든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학회는 강제로 해산당했다가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년 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재결성되었다. 3. 관련 지식 1) 한글맞춤법통일안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 공표한 것으로 1948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개화기에 우리 나라는 한글을 공용문으로 채택하였으나, 통일된 맞춤법이 없어 그 사용이 제각각이었다. 조선어학회는 1930년 12월13일 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할 것을 결의하고, 이병기, 이윤재, 이희승, 최현배 등 12명이 참여하여 3년에 걸쳐 이 통일안을 만들었다. 이 통일안의 대원칙은 ① 표준말은 소리대로 적되 어법(語法)에 맞도록 하고, ② 표준말은 현재 중류사회의 서울말로 하며, ③ 각 단어는 띄어 쓰되 토는 그 앞 단어에 붙여 쓴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1988년에 〈한글맞춤법〉이 새로 나오기 전까지 우리 나라 국어 문법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2) 외래어표기법통일안 1941년에 제정된 것으로 외래어를 한국어로 적을 때는 국제음성기호를 표준으로 하지만 외래어의 원음을 완전히 나타내기 힘들 시에는 우리 나라 말에 존재하는 자모와 자형으로 바꾸어 적는다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한계와 외래어에 대한 생소함이 이 표기안이 널리 알려지는데 큰 장애가 되었다. 관련이미지 ①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 학회에 참여한 학자들.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거나 감옥 생활을 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②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감옥 생활을 했던 국어 운동가 최현배가 쓴 글씨.우리 글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③ 8 · 15 광복 후에 조선어 학회가 만들고 미군정청의 학무국이 펴낸 첫 교과서인 《한글 첫 걸음》.출처: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한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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