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홍철
안돼…
이대로 잠들면 안돼…
죽을순 없어…
줘마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흠뻑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사위를 분별할수 없는 어둠이 끝간데 없이 펼쳐져 있고 간간이 번쩍이는 번개빛 사이로 녹색의 빛갈들이 아직도 초원임을 알려주고있다.
얼마동안 걸어왔고, 얼마동안 기여왔는지 가물가물하다. 그저 아직도 자신이 무리 초원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불현듯 몽이 생각났다. 비록 앞다리 하나가 승냥이 덫에 치여 잘려나간 사자견이지만 어쩐지 그놈에게라도 기대고 싶었다.
오한에 걸린듯 온몸은 오싹오싹 떨려난다. 말라붙은것 같은 창자는 인젠 꼬르륵 소리도 멈춰버렸다…
마른 야크고기를 뜯고 싶다.
슬쩍 익힌 양고기를 뜯고 싶다.
고소한 짬바를 먹고 싶다.
그리고 한잠 자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줘마는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 …
무리대초원-
서녕시내에서 2백킬로를 달려 깡차에 이르고 또다시 산행길로 150킬로를 달리노라면 말그대로 하늘과 맡붙은 것과 같은 해발 5300미터 높이의 무리 대초원에 이른다.
끝간데 없이 펼쳐진 녹색의 잔디들, 구름같이 흐르는 양떼와 지천에서 뛰어다니는 두더지들…
줘마는 12살때 소학교를 중퇴한 후 처음으로 목장에 왔고 그후 매년 5월이면 엄마와 아버지를 따라 여기 무리목장에 온다. 이곳은 그들의 사유목장이다. 사방 몇십킬로가 모두 그들의 목장인 것이다. 여기서 풀이 마르는 9월말까지 지내고 다시 하산을 하게 된다. 이같은 일정들이 매년 반복되고 하루 한번은 소나기가 내리는 이 광활한 대초원에 인젠 슬슬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줘마네는 부자다. 천여마리의 양과 백여마리의 야크, 그리고 7필의 말을 소유한 부자다.
매년 하산땐 큰 숫 양과 큰 숫 야크를 모두 처분하면 적어도 몇십만원의 수입을 올린다. 그리고 이듬해 목장으로 와서는 또다시 양과 말의 개체수가 늘어난다..
아버지가 말했다.
젠장, 풀만 풍족해도 이것들을 팔지 않어.그러면 명년에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지…
말이 초원이지 5300미터로 해발이 높다나니 풀의 자람새 역시 더디다 . 크게 자라 봤자 기껏 5~6cm미터에 불과하다. 그래서 겨울에는 몽골로부터 수입한 풀을 멱여야 한다. 그 수입풀의 가격이 너무 비싼지라 이 지역 목민들은 거의 대다수가 하산시에는 큰 양과 큰 야크들을 모두 처분한다.
언제부터인가 낯선 사람들이 드문드문 이곳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말탈줄 모르는 사람들이 소리만 요란한 차를 끌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와서는 과일이며 휴지며 밀가루며 등 생필품을 내여놓는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들에게 양고기와 우유차, 짬바를 대접한다..
알고보니 그들은 외지에서 온 약재 거간군들이였다. 이곳에 동충하초가 많이 난다는 소문을 듣고 동충하초를 채집하러 온 모양이다.
그들은 아버지한테서 장막 하나를 빌렸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목장에서 약재를 채집하는 비용이라면서 5천원을 내여놓는다..
아침부터 분주하다.
아버지는 장막옆에 작은 장막 하나 또 세우고 있다. 그리고 장막 위에는 이쁜 빨간 댕기를 걸어놓는다.
너도 인젠 시집 가야지. 여자 나이 열여덟살이면 시집가서 애를 낳기 딱 좋은 나이야.
그렇게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며 일손을 다잡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줘마는 알지 못할 두려움이 스밀스밀 밀려오는 감을 느꼈다. 두려웠다. 발정난 숫놈 야크의 흘레를 바라볼때면 웬지 모르게 두려워졌다. 어쩌면 저 장막에 그놈의 야크가 뛰어들가 두려웠다..
너 오늘부터 여기서 자.
아버지는 손을 툭툭 털며 만족스레 장막을 둘러보고는 줘마를 보고 말했다.
심장이 쿵쾅 뛴다.
여지껏 남자라고는 아버지밖에 모르고 지내왔다. 티비도 본지가 오래다. 언젠가 중고로 구입한 애플 핸드폰은 여기 목장에서는 시간을 알리는 작용밖에 할수가 없다. 신호가 뜨지 않으니깐.
어슬어슬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고 먹이를 찾는 승냥이들의 소리가 간간히 들려 온다. 짬바에 마른 야크고기 한점을 뜯다 말고 줘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만 더 꾸물거렸다가는 또 아버지의 말채찍이 소리를 낼 거 같았다.
우두커니 장막 한복판에 서있다 말고 양가죽 담요위에 쪼크리고 앉았다. 어스레한 촛불이 부옇게 장막 구석구석을 조금씩 비춰준다. 양가죽 담요 하나와 붉은 이불 한채가 전부다.
그리고 뒤쪽으로 길쭉하게 늘어선 줘마의 그림자가 귀신처럼 미동도 않는다.
큰 장막은 그런대로 정부에서 제공한 태양에네르기 덕분에 등불이 밝지만 줘마의 작은 방은 붉은 초 한대가 전부다.
언제 자리에 누웠는지 줘마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7살때 처음으로 가본 서녕시내가 어슴푸레 머리속에 떠오른다. 아롱다롱한 이쁜 옷들, 처음으로 보는 높은 건물들, 구경한적도 먹어본적도 없는 수많은 사탕과 과일들…그리고 이곳 남자애들은 모두가 그리도 잘 생겼었다.
하지만 누구도 줘마와 놀려고 안한다.
목장에는 물이 귀한탓에 1년이 다 가도록 목욕을 하지 못한다. 세수도 물 한바가지로 세식구가 대충 얼굴만 문지르면 끝이다.
이런 줘마의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어떤 잘 생긴 남자애가 말했다.
울고 싶었지만 소리낼수가 없었다. 감히 그 잘 생긴 남자애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도 없었다.
문뜩 섬뜩한 느낌에 줘마는 눈을 떳다. 하지만 어느새 꺼진 초불때문에 얼굴을 가려 볼수 없는 어떤 육중한 무게에 숨이 꺽 막혔다.
앗! 숫 야크…
두려워하던 숫 야크가 들어온 것이다. 숫 야크는 줘마의 육중한 양털조끼를 스스럼없이 벗겨낸다.
그런데 손길이 예사롭지 않다. 분명 사람의 손길이다. 그리고 여기 목민들의 꺼칠한 손길이 아닌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금방 발육을 시작한 줘마의 가슴을 거칠게 문지른다. 웬지 모르게 거부감이 없다. 반항할수 없는 무기력함이 줘마를 꼼짝 못하게 하였고 잇따라 이상하게도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이라는 걸 잊은듯 어느덧 줘마는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남성의 무서운 돌진에 줘마는 흑흑 느끼다 흘레를 원하는 암승냥이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줘마의 신음에 사내는 더욱 거칠어진다. 대초원에 불어치는 폭우보다 더 거센 비바람이 작은 장막에서 불어치고 있었다. 탈진한듯 쓰러진 줘마의 몸은 어느덧 땀벌창이 되었다.
아…끝내 시집을 가는가…
풀린 눈길로 멀거니 천장을 쳐다보며 줘마는 새삼스레 자기한테서 냄새가 난다고 하던 그 잘 생긴 서녕의 남자아이를 떠올랐다.
숫 야크한테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여지껏 한번도 맡아 보지 못한 향기로운 냄새다. 꽃냄새 같기도 하고 우유 냄새 같기도 한 냄새다. 금방이라도 누군지 알것 같았다. 행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라면 목축민 생활을 접고 시내에 가서 살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가 내주는 팔베개에 살며시 머리를 얹으며 줘마는 행복한 환상에 사로잡히며 깊은 꿈의 나락에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줘마 빨리 일어나.
어느새 밝아온 아침햇살이 줘마의 장막틈사이를 비집고 들어 온다.
눈을 뜨며 줘마는 옆자리를 살폈다. 자기에게 꿈을 주었던 그 야크를 찾았다. 그러나 옆자리는 어느새 텅 비여있었다. 썰렁하게 비여버린 자리는 줘마의 꿈을 산산쪼각내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널려진 휴지조각들이 엊저녁 일들이 꿈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줘마는 허겁지겁 일어나 장막밖으로 나왔다. 응당 보여야 할 저쪽 멀리 장막이 보이지 않는다..
아빠, 그 약초재집군들은 어디 갔어요?
오늘 새벽 일찍 갔어.
두다리가 휘청거리며 현기증을 느꼈다. 깨여지는 꿈들이 쪼박난 유리쪼각같이 아프게 줘마의 마음을 찢었다…
꿈을 버려. 넌 평생을 목민으로 살아야 할 명이야.
어제 밤 일을 알고있는듯 아버지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저 앙지는 일곱번만에 시집을 갔잖어.
순간 줘마는 가슴이 꺽 막혀오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앙지가 결혼하던 날 두돐이 넘은 아들애는 옆에서 아장아장 걸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그 애는 한번도 친아빠를 본적이 없으며 앙지 역시 친아빠의 이름 한글자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였다. 아빠를 모르는것이 전통으로 전해내려온것도 이 부족민들의 문화의 일부분으로 고착됐기 때문이였다.
그럼 난 아직도 몇번을 더 겪어야 한단 말인가?
줘마는 자기의 처녀를 앗아간 그 약초거간군의 모습을 잊을수가 없었다. 이름 한글자라도 기억하고 싶었지만 그는 자기 이름을 말한적이 없었다. 그의 목소리마저 어떻던지 기억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저 꿈인지 생시인지 어슴푸레 들리던 말소리가 그저 가물가물 기억에 남을뿐이다.
젠장 똥 밟았네.
새벽에 비몽사몽간에 사내가 이렇게 내뱉었던 거 같다. 줘마는 그게 꿈인줄로만 알았다. 그러고보니 사내는 나가면서 줘마에게 저주를 퍼붓고 달아난 것이 정말이란 말인가.
줘마의 얼굴에는 여덟살때 말등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자국이 왼쪽 눈위로부터 눈섭을 가로 질러 사선으로 길게 나있었다. 그 탓에 왼쪽 눈이 오른쪽 눈보다 훨씬 작게 보인다.
그 사내는 아마도 어둠때문에, 그리고 끓어오르는 욕정때문에 그날밤에는 제대로 살펴 보지 못했던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고 줘마의 얼굴을 보고는 많이 실망했던 것 같다.
사실 줘마는 밉게 생긴 얼굴이 아니다. 그저 눈에 난 상처가 흠이지 어느모로 보나 비바람에 그슬린 초원의 여느 처녀들과 많이 달랐다. 수십갈래로 땋은 가는 머리태는 늘 윤기 흐르고 정결했으며 천성적으로 하얀 피부는 거친 비바람도 변색시키지 못했다. 성한 한쪽눈만 본다면 맑은 청해호를 보는듯한 느낌이 든다. 맞춤하게 도톰한 입술은 종래로 굳게 닫혀지는 법이 없다. 조금 벌려진 입술 사이로 백옥같은 이빨이 늘 빛난다.
하지만 이 모든 아름다움은 눈위에 난 상처때문에 말끔히 가리워져 보이지 않는다. 아물어 붙은 상처 주위는 검게 변색했고 쪼그라 붙은 눈은 외눈박이 암 승냥이를 방불케 한다.
줘마는 그 사나이의 말이 제발 꿈이기만 바라고 바랐다. 그리고 더욱더 그 사내를 기억에 또렷이 새기고 싶었다. 기억에서 지워질가 두려웠다.
줘마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장막앞의 양똥을 정리하며 야크의 젖통을 쥐어 짜며 짬바를 만드는 일로 일정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었지만 한시도 그 사내의 모습을 기억에서 지워본적 없었다. 약초 장사군이니 명년 이맘때면 또다시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지루한 대초원의 일상을 그나마 이겨나갈수 있게 한것이였다.
악마의 배속같은 시커먼 어둠이 금방까지만 해도 새파랗던 무리의 하늘을 뒤덮어 버렸다. 변덕 많은 초원의 날씨에 인젠 습관이 된 줘마는 조급한 기색 하나 없이 장막앞에 산더미처럼 무져진 양똥을 풍천으로 덮었다. 그리고 꾸역꾸역 밀려오는 양떼들을 살핀다.
문득 저멀리서부터 말 한팔이 달려오더니 줘마네 장막 앞에 멈춰 섰다. 양 50마리의 털은 사용했음직한 묵직한 옷에 철렁이는 은단검을 찬 웬 낯선 사내가 줘마네 장막으로 들어섰다.
데모데모
쵸데모
아버지와 수인사를 건네고는 어머니가 건네는 쑤유차를 사양도 없이 받아든다.
양 한마리 잃어버렸단다. 그래서 혹시 줘마네 양무리에 끼여있는지 확인차 왔다고 했다. 초원에서 간혹 다른집 양들이 섞일때가 있다.
사내가 아버지와 이말 저말 담소를 나누는 중에도 이상하게 줘마는 그 남자의 섬뜩한 눈길을 느낄수가 있었다. 이상하게 또 숫 야크가 서서히 떠올랐다.
한줄기 소나기를 피해 장막에 머물던 사내는 비가 그치자 장막을 나섰다. 그리고는 날렵하게 말 잔등에 올라타더니 야릇한 웃음을 머금고 줘마의 작은 장막을 흘낏 바라본다.
오후 비가 한줄금 내리고 멈추는가 싶더니 밤 10시가 되자 또다시 소나기가 쏟아 붓는다. 천둥이 치고 하늘을 가르는듯한 번개불빛에 캄캄칠야 초원도 순식간에 대낯처럼 밝아진다…
우비 한장 거치지 않은, 양털 모포를 뒤집어쓴 거쿨진 사내가 큰 장막을 흘깃 바라보더니 자기집 안방처럼 무람없이 작은 장막의 커텐을 들어 제친다.
악!
줘마는 숨이 꺽 막혔다.
약초채집군한테 당할때도 이 정도는 아니였다. 처녀성을 잃으면서 찢어지는듯한 고통도 소리없이 삼켰었다. 그저 도시진출의 꿈이 약초채집군한테 달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근데 지금은 너무 아팠다.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양똥더미와 씨름하고 야크의 능글진 젖통과 씨름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냄새를 느꼈다.
문득 줘마의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하던 서녕시내 잘 생긴 꼬마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 그리고 기억에도 생생한 약초채집군의 그 향기로운 냄새가 저도모르게 그리워졌다.
어디에서 솟아났는지 알바 없는 힘이 줘마의 몸에서 솟아오르면서 힘껏 그 사내를 밀쳤다.
비켜!
한창 끓어번지는 열기를 식힐 반출구를 찾던 그 사내는 줘마의 느닷없는 반격에 순간 어정쩡한 모습으로 쭈크려 앉는다.
왜? 뭐 하는 짓이야??
나가요! 난 당신이 싫어요!
찢어지는듯한 줘마의 고함소리에 사내는 잠시동안 엉거주춤 하는가 싶더니 다시한번 발동을 건다. 거세게 달려드는 사내를 이기지 못하고 줘마는 탈진한듯 바람따라 흔들리는 풍선인형처럼 그저 그 사내가 하는대로 몸을 맡길수밖에 없었다. 반항할 기운조차 없었으며 그 사내의 몸에서 풍기는 이상한 악취에 정신마저 혼미해 졌다.
어둠속에서 줘마의 눈이 이상한 빛으로 번뜩이였다.
줘마네 목축민 부족은 이전부터 전해내려온 이상한 풍속을 갖고 있다. 타민족과 결혼은 금령으로 전해졌으며 혼인적령기란 정해진 나이도 기준이 없다. 아마도 그저 생육할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에 따라 혼인적령기가 결정되는것 같다. 또한 혼인 적령기가 되는 쳐녀들은 줘마처럼 큰 장막 곁에 작은 장막 하나를 곁들여 세운다. 그것은 이 집에 결혼할 처녀가 있으니 남정네를 구한다는 뜻이다. 길가던 나그네가 하루밤 그 작은 장막에서 여자를 점하고 아침 일어나서 만약 마음에 들면 결혼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먼지 털듯 그 자리를 뜨면 그만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모르는 애들이 적지 않았으며 애 낳고 결혼하는 처녀들이 많다. 그것이 이들한테는 수치가 아니였다.
때론 자식의 전도를 위해 줘마 아버지처럼 본 민족이 아닌 다른 부유한 민족이라도 모르쇠를 대며 눈감아주는 부모들도 때론 있었지만 극히 드물다.
앙지나 쥬메는 일곱명, 다섯명의 사내를 거쳤다 하지만 줘마는 인제야 두명의 사내가 거쳐 지나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직까지도 여유로운것 같았다.
음메~ 음메~
아버지가 벌써 양 방목을 떠나는가 보다.
양들은 밤새 장막곁을 떠나지 않는다. 동풍이 불면 장막 서켠으로 무리지어 옮겨 가고 서풍이 불면 장막 동쪽으로 무리지어 옮겨온다. 다리 부러진 사자견은 양들이 자리를 옮기던 말든 관계없이 그저 장막 문어구에 대충 지어준 작은 풍천 굴에서 그때까지 코를 곤다.
줘마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밤새 배설한 장막주위의 양똥을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야크젖을 짜고 쑤유를 만들어야 한다. 번복되는 일상이 양의 울음소리와 같이 시작되는건 인젠 너무나 평범한 일로 되었다.
반쯤 벗겨진 양털조끼를 여미던 줘마는 그제서야 그때까지 곁에 누워 코를 고는 간밤의 그 숫 야크를 발견하였다. 의례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사내가 아직도 누워 있었다.
순간 줘마의 가슴은 긴장감으로 세차게 뛰었다. 고산지대의 거친 바람과 따가운 해볕에 그을릴대로 그을린 사내의 얼굴은 서부대초원의 승냥이를 연상시켰다.
인기척에 사내는 거슴츠레 눈을 뜨더니 줘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러다 다시 스르르 눈을 감는다.
줘마는 포기하듯 혼자 장막밖을 나선다. 등뒤에서 잠꼬대하는듯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 왔다.
젠장..
네??
줘마는 장막을 나서다말고 되돌아서 물었다. 알수 없는 사내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너 얼굴에 흉터는 뭐야? 어제밤엔 보지 못했었는데… 젠장 외눈박이였네.
사내는 질끈 눈을 감더니 모로 돌아누워버린다. 새 신발 신고 좋아 날뛰다가 똥밟은 모습이다.
가끔 그녀의 아버지마저 그녀의 상처를 들먹일때가 있다.
젠장, 너 그 상처때문에 시집이나 제대로 가겠는지 모르겠네. 그저 결혼하자면 아무하구나 해. 결혼례단으로 양 10여마리만 받으면 돼.
사내의 찌르는듯한 말과 아버지의 신경질적인 말이 함께 버무러져 줘마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줘마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성한 줘마의 눈에서 또 한번 이상한 빛이 번뜩이였다.
언제부터인가 줘마는 말수가 부쩍 적어졌다. 물어보는 말이나 겨우겨우 대답하는 정도다. 양똥을 정리하다 말고 먼 하늘을 응시하는가 하면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장막밖에 쪼크리고 앉아 있기가 일수였다.
그러는 그에게 누구 하나 관심을 보여주는 이가 없었다. 어쩌면 줘마가 이 장막에 거주하는 것조차 까먹은듯 보였다. 또한 그런 부모님들에 대해서도 줘마 역시 관심밖이였다. 그저 시키는 일이나 꾸역꾸역 하면 될려만 때론 그 시키는 일도 제대로 할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진 줘마였으니 그저 아버지의 욕설 주기성이 더 짧아진 것뿐이다.
젠장 저 검은 대가리가 또 우리를 뛰어 넘었군
아버지의 고함소리에 줘마는 머리를 돌렸다 .
머리가 검은 양 한마리가 우리문을 열기도 전에 우리를 뛰어넘어 저 멀리로 뛰어 가고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 아버지는 그 양을 뒤쫓지 않는다. 의례 다시 돌아 오리라는것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네깐 놈이 뛰면 어데까지 뛸건데. 밤이 어두워 지면 지가 무서워서라도 돌아 오겠지.
검은 머리 양은 우리를 뛰어넘어 탈출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매번 저렇게 우리에서 탈출하고는 얼마 안되어 다시 돌아오군 한다. 다른 양들은 우리를 뛰어 넘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것 같다. 그저 우리 문만 열리면 천군만마 같이 함께 무리지어 뛰쳐나갈 뿐이였다.
배가 아프다. 탈난 음식을 먹었는지 이 아침만 해도 벌써 세번째다.
줘마는 주섬주섬 일어서더니 아침에 갔던 그 장소에 또 갔다.
초원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다. 으슥진 둔덕밑이면 곧 화장실이다. 친환경적인 자연 화장실이 좋았다. 언젠가 서녕에 갔을 때 들린 백화점 화장실은 정말로 뒤를 보기가 난처할 정도로 너무 깨끗했다. 어쩌면 이렇게도 깨끗한 곳에서 뒤를 볼수 있을가가 의심이 갔다.
웅크려 앉은 자세로 줘마는 미동도 없이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엔 머리 검은 양이 한가로이 홀로 풀을 뜯고 있었다. 우리를 뛰여넘은 쾌락의 대가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줘마는 벌떡 일어섰다. 불현듯 자기가 검은 양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부…불이야…불이야..
이른 아침 밖으로 나갔던 엄마의 기겁한 소리에 한가로이 쑤유차를 마시던 아버지가 급히 장막을 뛰쳐나왔다.
불길은 줘마의 작은 장막에서 일어났고 장막은 순식간에 재더미가 되어버렸다.
줘….줘마는…줘마야…
엄마의 기겁한 소리에 그제서야 아버지는 엷은 잿무지로 변한 장막을 발끝으로 후비적거려본다.
엄마, 아빠 잘 있어. 나 이 초원이 싫어. 시내로 갈 거야.
저기 멀리서 말등에 앉아 날아갈듯이 질주하는 줘마의 모습이 아스란히 멀어지고 있었다.
줘마는 쉬지 않고 달렸다. 아마도 거의 두시간은 달린 것 같다. 말도 지치고 줘마도 지쳐가기 시작했다. 태여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빨리, 오래동안 말등에 앉아 본 것 같다. 뱃속에서는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난다. 급히 나오다보니 뭐하나 챙긴 것 없다. 마른 야크고기와 쑤유덩어리랑 챙겼어야 했는데 떠날 생각만 하다보니 그만 잊어버린 것이다. 후회 막급이였다. 먹을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다.
말등에서 내린 줘마는 저려나는 다리를 비비며 힘겹게 걷고 있다. 말 발자국 웅뎅이에 고인 빗물 둬모금을 추기고 축축한 풀밭에 엉뎅이를 내렸다. 아직도 얼마나 더 가야 초원을 벗어날지 막연하다. 말타고 꼬박 두시간을 달렸으니 적어도 40킬로는 달렸을 거 같다. 대략 짐작으로도 아직 거의80킬로 이상은 가야 한단 말이 된다. 그럼 말 타고 또 거의 네시간을 뛰어야 한다. 근데 말이 걱정이다. 지금 두시간을 뛰고 온몸은 흠뻑 땀으로 젖었는데 이제 또 네시간을 더 뛸 수 있을가?
흠뻑 젖은 말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침부터 풀 한포기 먹지 못했다는 생각에 말 보기가 저으기 미안해 났다.
줘마는 결심했다. 초원이 아무리 넓어도 이곳은 줘마가 평생을 살아가야 할 곳이 아니라는걸 느꼈다. 언젠가 또 하루밤 자고 결혼할 남자가 생겨도 그 남자와 평생을 함께 행복하게 살 자신이 없었다. 자기처럼 평생을 친아버지마저 모르고 살아갈 자식을 낳을가 두려웠다. 십여마리의 양떼를 끌고 신랑이라 찾아올 냄새나는 대서부의 거친 승냥이도 싫었다. 그리고 작은 초막도 두려웠다. 어둠이 깃들기가 두려웠고 낯선 남자들이 두려웠다. 어쩌면 모두가 발정난 숫 야크로 그저 하루밤 쾌락만 즐기려는 나쁜 남자들 같이 생각되었다.
머리 검은 양이 부러웠다. 아무리 우리에 가두어도 아무때건 뛰쳐나가는 그 용기가 부러웠고 순간이라도 자유로이 초원을 달리는 검은 머리 양이 그렇게도 부러울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울타리도 없는 광활한 초원에서 그저 무형의 올가미에 걸려 반항조차도 못하는 자신이 미워났다. 채바퀴 돌듯 같은 일정으로 하루해를 지우는 지겨운 목민 생활이 신물나게 싫었다. 아직도 얼마나 더 많은 남자가 거쳐갈지 모를 정거장 같은 작은 장막이 두려웠다.
온밤을 뒤척이다 이른 새벽 줘마는 아버지의 장막밖에서 지난번 약초채집군들이 두고간 휘발유 통을 찾아들었다.
이 초원에서 나의 모든 흔적을 지울거야. 그리고 울타리도 없는 이 초원을 벗어 날거야. 시내로 가서 미용으로 상처도 지울거야. 그리고 그 약초 채집군을 찾을거야.
줘마의 그닥 이쁘지 않은 모든 추억은 훨훨 타오르는 세찬 불길에 전부다 없어지는 것 처럼 보였다.
말은 잘 눕지 않는다. 잠 잘 때도 서서 잔다. 그저 병들거나 죽을 임박이면 눕는다.
그런 말의 성질을 잘 아는 줘마는 지금 말이 풀도 뜯지 않고 그저 서만 있는 것에도 말의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먼 하늘로부터 서서히 밀려오던 시커먼 먹장구름이 악마의 군단같이 순식간에 초원을 덮어버렸다.
후둑후둑 굵은 빛방울들이 점점 세차게 떨어지고 있다.
불현듯 말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줘마를 팽개치고 오던길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의리란 꼬물만치도 없는 놈.
줘마는 말을 탓하지 않았다. 빙그레 웃음을 짓고 멀어져가는 말의 뒷모습을 바라 보며 생각했다.
그래, 초원은 네가 살아야 할 곳이지. 내가 가는 곳을 네가 따라갈수 없지. 초원밖에는 내가 찾아가야 할 사람이 있지만 초원에는 너를 기다리는 너의 종족들이 있으니깐. 검은 대가리도 인젠 제 굴로 도로 찾아갔겠지…
어느덧 말의 모습은 주먹만큼 작아졌다. 단 한번이라도 뒤를 돌아볼줄 알았던 말은 내처 그대로 뛰어간다. 말은 아마도 저렇게 곧추 뛰어 목장 장막까지 가겠지. 거기엔 야크고기랑, 양고기랑 따뜻한 쑤유차랑 있겠지. 그리고 양우리와 타버린 나의 작은 장막도 있겠지.
줘마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흠칫 몸을 떨다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쓰러질 때까지 걸어도 비 피할 곳을 찾기가 힘듬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우두커니 계속 서 있을수만 없는 노릇이였다.
창대같이 쏟아지는 비는 도무지 멈출줄 모른다.
줘마는 자기가 어떻게 넘어졌는지 모른다. 아니, 가다가 자기절로 드러누운 게 틀림없었다. 줘마는 가까스로 눈을 뜨다 말고 도로 스스르 감았다. 따뜻했다. 평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따뜻한 온기였다. 엄마의 품에 안겼던 기억이 새롭다. 엄마의 손가락에 감긴 짬바를 빨던 기억도 더욱 푸르르게 다가온다.
코끗을 자극하는 서녕시내 꼬마의 향기와 따뜻했던 약초 채집군의 부드러운 애무에 줘마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온통 새하얗다. 혼령같은 하얀 생령들이 갔다왔다 한다.
내가 죽은건가? 죽으면 안되는데. 난 그 약초 채집군을 찾아야 해. 서녕시내에 한번 더 가고 싶단 말이야…
줘마, 정신이 들어?
귀에 익은 목소리다. 엄마의 조급한 목소리가 분명했다.
젠장, 치료비는 얼마 나왔대? 빨리 치료 끝내고 목장에 돌아가야지.
아버지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온다.
줘마야, 살아줘서 고마워. 실은 약초채집군이 널 살렸어.
그날 약초 채집군도 초원을 빠져나가다가 폭우와 조우했고 그래서 멈춰서서 폭우가 끊기를 기다려서 빠져나가던 중 초원에 쓰러져있는 줘마를 발견하고 깡차진 병원까지 실어왔던 것이다.
약초채집군은?
줘마는 아직도 흐린 동공으로 급급히 주위를 살폈다.
그 사람은 널 병원에 데려오고는 서녕으로 돌아갔어.
엄마가 줘마의 마음을 읽었는지 중얼거렸다.
젠장, 빨리 가서 검은 대가리 찾아야 하는데. 엊저녁 폭우때 검은 대가리가 우리로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야. 어데가 뒤졌는지.
줘마는 다시 스스르르 눈을 감았다.
우리를 뛰쳐나가 돌아오지 않는 검은 머리 양을 생각했고 목장으로 되돌아간 의리 없는 말을 생각했고 서녕시내로 돌아간 약초 채집군을 생각하며 이제 자신이 돌아갈 그 광활하지만 양우리 같이 좁은 목장을 생각했다.
벗을수 없는 올가미를, 뛰여 넘지못할 그 울타리를 줘마는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곳에는 또 서부 승냥이 같은 그날밤 숫 야크가 기다린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송화강 8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