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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홍철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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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1 ]

11    참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댓글:  조회:786  추천:0  2016-08-27
참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리홍철  하늘이 너무 파랗다. 나뭇잎이 너무 파랗다. 공기마저 너무 파랗게 느껴지네…. 길가는 사람들마저 너무 아름답게 보이네…   느끼지 못했다. 43년 많지 않은 연륜이지만 지금껏 한번도 보지 못햇던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다. 어제보다도 더 파란 세상이고, 어제보다도 더 활기찬 거리이고, 어제보다도 더 찬란한 해빛이다. 질투를 느낄 정도로 친구의 안부도 부드럽다… - 잘 지내고 있냐- 그렇게 맑은 세상의 공기를 한입에 삼키려듯 길게 심호흡하다 억- 숨이 먹히는 순간이다. 또 병이 발작하는가…. 파랗던 하늘이 부옇게 퇴색하고, 활기차던 거리가 저승길로 향하는 행열처럼 느릿하게 핏기없다…   몇일전부터 이상하게 명치끝 갈빗뼈 밑이 심한 통증을 느껏다. 지나친 흡연으로 수시로 숨쉬기가 가쁜것도 무심하게 지나치다 어느날 인터넷 검색으로 페암과 비슷한 증상이라는걸 알았다. 암이란 곳죽음을 의미하고 그 다음은 망연자실하다 점점 정신이 돌아 오면 살아 있을 날자를 계산하게 된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나면 살았을 날자에 대한 일정을 정리해 보며 걱정을 씹는다. 1. 내가 가면 보험료는 얼마가 나오는가? 2. 아무런 직업도 없는 마누라가 어떻게 아들놈 둘을 키울가? 3. 만약 마누라가 재혼한다면 마음약한 작은놈 눈치밥 어떻게 먹고…. 성깔 더러운 큰놈 맨날 구박받는건 아닐가… 4. 애비없는 놈이라고 혹시 밖에서 기시멸시 받지나 않을가… … … …  암을 느끼는 순간은 말기라고 한다. 그러면 그로부터 살아 있을 시간은 길어 봤자 두세달 정도란다. 근데 두세달 사이에 근심걱정없이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는 없을것 같다… 복권이나 당첨되면 몰라도… 물려줄 재산 하나 없는 내가 여지껏 부모라고, 남편이라고 자부하며 큰소리 치고 살았던 지난날들이너무 초라한 흑백사진처럼 안겨 온다. 들숨 날숨으로 심호흡하는 나에게 또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가 아츠럽다.. -당신 좀 운동해…뱃살봐~맨날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으니 몸이 다 망가지는거 아니야? (휴~망가졌어..인젠 다 망가지고 망가질것도 없어….) -아빠 어데 많이 아퍼? 성깔은 더러우나 그래도 인정미 있는 큰놈이 내 찌프려져 있는 얼굴을 응시하다 물어온다… 반가웠다. 그리고 고마웠다… 그렇게 물어보는 아들이 있다는것이 너무가 감사했다.. -응..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 바쁘고… 기실 이 대답은 아들애 한테 한것이 아니라 마누라가 들으라고 한것이였다… 아무리 아파도 나절로 병원에 가보겠소 하는 말은 어쩐지 이상하게 잘 나오지 않는다. 마누라가 병원에 가보라고 닥달을 쳐도 몇일 지나면 괜찮겠지 하고는 늘 귓등으로 들었던것이 조금 후회됐다… 한번만 더 병원에 가보라고 말을 하지… 그럼 못이기는척 하면서 가보겠는데… -아빠 그럼 병원에 가봐~ 계속 아프면 아빠 죽으면 어떻게 해~ 큰 아들놈의 울먹이는 소리가 가슴찡하게 안겨오면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엄청 강렬하게 느껴졌지만,그래도 병원가보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내일 한번 병원 가봐… 안가겠으면 아프다는 소리 말고.. - 당신 내일 시간 있어?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내 소리에 아내가 이상하다는 눈길로 나를 쳐다보더니 머리를 끄덕인다.   세상에 아픈 사람들 다 모인것 같다. 그래도 나만큼 아플가? 나는 페암에 걸린 환자인데… 살 날자도 몇일 안 남았을건데… 심장이 쿵쾅뛴다… 하늘이 샛노랗게 변해갈걸 미리 방지하고,  그리고 큰 병에 걸려도 대범하게 행동해야지 하고 마음을 단단히 잡았다… 페를 사진찍고, 의사의 간단한 진단을 받은후, 오후에 와야 결과를 알수 있단다… 오후 두시 또 마누라를 대동하여 병원에 갔다. -나 밖에 있을 테니깐 당신이 먼저 들어가봐… 자신이 없었다. 그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직접 들을 자신이 없었다. -페암 말기입니다… 이제 길어 봤자 남은 생은 2달입니다… 이런 소리가 자꾸 귀가에서 들려 오는것 같았다… 얼굴을 많이 찡그린 아내가 나한테 다가 오고 있다… … 그래 의사는 뭐라고 해? 무슨 병이래?? -휴~ 죽는 병이래… 뭔놈의 담배는 그렇게도 많이 피워? 맞구나.. 내 예감이 틀림없구나…. 병실복도에 놓인 걸상에 엉뎅이를 맥없이 떨어 뜨리며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그… 그래 .. 얼마 남았대? -뭐가? - 이제… 살.. 살수 있는 날자가…. 아내는 째릴듯이 나를 노려보더니 허구픈 웃음만 내 뱉는다… - 이제 담배를 끊으면 80살까지 살수 있고, 계속 담배를 피우면 내일 모레 죽는대… -뭐? 뭐라고? 그… 그럼 페암이 아니란 말이야? -ㅉㅉㅉ 페암은 무슨.. 근데 담배는 제발 끊어… 이사진 좀 봐.. 담배를 얼마나 많이 피웠는지 삼년 씻지않은 재털이보다 더 더러워… 의사가 말하길 담배를 끊치 않으면 정말 위험하대… 애들 봐서라도 제발 인젠 그만 피워…. - 그… 그래 알았어… 내가..내가 죽지 않는다구? 내가… 내가 살수 있다구… 꿈같았다.. 40여년을 산것도 싫증 나지 않을 만큼 너무나 행복했다.. 더욱 오래 살수 있다는것이 고마웠고, 이렇게 아름다운 날들을 내가 더 오랫동안 만끽할수 있다는것이 행복했다… 병원문을 나서는 순간, 와~ 세상이 원래는 이렇게 아름다웠구나…금방 소나기가 그친 다음의 그 싱그러움과 생기, 모든것이 과분하도록 아름답게, 너무 뼈저리게 느꼈다… 꽉 움켜쥔 호주머니 주먹속에 암세포 덩어리가 쥐여온다~부서지도록 움켜 잡았다…. -어델 뛰어 가는데? 저만큼 멀어진 내 등뒤에서 아내의 아름다운 악청이 귓등을 따갑게 적신다.. -어..저기 누가 쓰레기 봉투 버렸네.. 참.. 이 아름다운 세상에 왜 쓰레기를 마구 버리지?ㅉㅉㅉ 나는 바람에 날려가는 쓰레기 비닐봉투를 따라가며 중얼 거렸다… 그리고- 누구나 한번씩 나처럼 이렇게 암에 아닌 암에 걸려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파란 하늘을 향하여 아름다운 윙크를 날렸다. 뿅뿅하고…  2016.8흑룡강 신문 
10    차만섭을 아십니까? 댓글:  조회:1003  추천:0  2015-09-29
이미 세상을 하직한지도 근 20년 가까이 되고, 그분, 차만섭의 이야기는 동네에 살때부터 너무나 익숙히 들어 왔지만 종래로 그분의 입으로 하는 말은 들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모두 주위에서 말하는것만 주어 들었을 뿐이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말씀하셨고, 우리 큰아버지, 아버지 친구, 큰아버지 친구 분들의 말을 귓동냥으로 들었을뿐입니다....  스스로 말하지 안아서인지 그분은 영웅칭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그저 동네 조무래기들을 앉혀 놓고 전쟁터에서 희생된 전우의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그분은 종래로 자기의 영웅담은 이야기 한적이 없고 단지 친구의 영웅담만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분은 세상뜰때까지 정부에서 조달하는 30여원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종래로 자기가 영웅이라고 말한적이 없었지만 저희딀의 기억속에는 진짜 영웅이였습니다. 몇년도인지는 알수 없습니다..... 제가 태여나기도 전 십여년 전이였으니깐요.. 어느날 동네로 부고 한장이 날아 들었습니다. 차만섭 동지가 항미원조 전투에서 미제침락자와 영용히 싸우던 중 전사하였습니다... 동네에서는 우사마당에서 추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온 동네 모든 사람들이 모두  모이고, 촌정부에서 어느영도가 감명깊은 추도문을 읽고 있습니다.. 이때 제일 뒷줄에 선 누군가의 어깨를  툭툭 치는 이가 있었습니다. -누가 죽었어??? 너무 일찍 세상을 하직한 차만섭의 명이 아까워 눈물을 떨구며 느끼던 그 사람, 뒤를 돌아 보는 순간 자기 눈을 의심했습니다. 차...차만섭???? -차....차만섭?? 이..이게 뭔 일이야??? 귀신을 본듯 놀라던 그사람의 입에서 급기야 다급한 비명같은 소리가 터졌습니다. -차...차만섭이 살아 있다.... 차만섭은 어느한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고 혼절해 쓰러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본 부대는 사라진 뒤였습니다. 그래서 조선 어느 두메산골 시골집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부대를 찾으려 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별 수없이 고향으로 돌와 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장례식날 마을에 들어 섰던것입니다. 물론 장례식은 잔치날로 변햇구요... 근데 자신의 장레식에 두번씩이나 참가하게 될줄이야 누가 알앗겠습니까... 그후 고향에서 상처를 치료한후 완쾌하자 다시 부대를 찾아 조선으로 향했고 또 한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다시  어느한 두메산골 농부네 집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답니다. 치료를 받은후 부대를 찾아 복귀하려 햇지만 부대를 역시 찾기가 쉽지가 않았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는데...도착한 날은 어쩌면 지난번 추도식과 똑 같을수가 있을가요... 또한번 자신의 장례식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부로부터 차만섭이 이번에는 정말 희생되었다고 부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촌정부 주도로 추도식을 거행하였고, 추도식 도중 차만섭이 돌아 왔던것입니다....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자신의 장레식에 두번 참석한 차만섭 항미원조 영웅.... 그가 세상뜰때까지 이같은 이야기를 글로 남기려는 사람도 없었고, 그분 역시 전쟁이야기만 나오면 친구들의 이야기뿐이였습니다,,,,스스로의 무용담은 그분의 기억에 없었던것 같습니다.. 세상뜰때까지 정부에서 지원하는 몇십원의 무율금을 타는것이 그분으ㅣ 낙이였던것 같습니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진실이였습니다. 그저 진실이라고 증명하는 아무도 없을 뿐이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차만섭이였습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9    눈감고 웃을수가 있을가 댓글:  조회:617  추천:0  2015-09-18
눈감고 웃을수가 있을가 대략 9개월전부터 눈에 이상이 생겼다. 조금만 바람을 맞아도 눈물이 나오고, 새콤 거리고... 모든것은 나한테 있어서 시간이 약을 대처 하였던지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얼마전부터 아침에 눈을 뜨면 안개가 낀듯이 눈앞이 휘부옇게 형체조차 가늠할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약방에서 파는 11원짜리 눈약 하나를 사들고 요것만 사용하면 모든것이 끝나겠는데 하고 안심이 양반다리를 틀고 앉아 있는데 급기야 눈에 심한 통증이 일어 나기 시작했고, 그래서 난생처음 스스로 전문적인 안과 병원을 찾았다... 40년동안 무너지지 않았던 태평한 마음이 병원문을 떼고 들어서는 순간 물먹은 토담마냥 여지 없이 무너져 내렸다... -혹시 실명의 위기에 처한건 아닐가? - 혹시 내가 눈을 뜨고 세상을 볼수 있는 시간이 지금 이순간 뿐은 아닐가... 병원문을 떼고 들어서다 말고 나는 계단 옆에 주저 앉았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풍경을  이순간에 기억의 창고에 터지도록 저장하여 이제 앞을 볼수 없을때 소 여물 몰이듯이 조금조금씩 음미하고 싶었던 것 같다... 미여질듯이 부풀은 공공뻐스가 숨가쁜 경적을 뽑으며 지나간다... 할일이 많은  사람들이 투정을 부리며  비좁은 버스에 찡기느라 일그러진 얼굴들이 차창안으로 얼핏얼핏 지나간다... 뒷축이 다슬은 슬레바를 신고 힘겨웁게 오르막길을 오르는 과일장사군의 땀에 번들거리는 얼굴에 언덕을 넘으면 나머지 과일 모두 팔수 있다는 희망의 찬란한 광채가 너무 아름답게 보여온다..... 놀랐다... 그리고 이상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희부옇게 눈앞분별을 못하던 내 안광에 모든것이 이렇듯 선명하게 보여올 줄이야... 마음에 방심의 끈을 늦추며 스스로 병원문을 떼고 들어서는 내 마음이 그렇듯 평온했다... 여지껏 보아오지 못했던것, 그리고 느끼지 못했던것을 오늘 하루 마음껏 느끼고 보아온것에 대한 스스로의 만족감같은 이상한 것이 가슴을 쾅~ 치며 다가 오고 있었던 것이다... 내 스스로 내 자신에 게 묻는다... - 너 이제 앞을 볼수 없는 소경이 된다면 금방 본 모든것을 어둠속에서 찾아 볼수 있냐? -그것을 보면서 앞을 볼 수 없는 네 자신을 웃음으로 극복 할수 있냐??? 스스로 눈을 감고 벽에 부딛치면 웃음이 나오지만 앞을 볼수 없어 원하지 않게 웅뎅이에 빠졌다면 나는 정녕 웃을수가 있을가... .....          .....             .....               ..... - 老花眼이구먼...그리고 엄청난 염증이 있어.... 머??? 老花眼??? 먼 소리여? 난 금방 40이라구...내 피부와 내 마음과 그리고 흰머리카락도 몇대 없는 내 눈이 老花眼이라니??? -시력이 좋은 사람일수록 눈의 노화가 빨리 옵니다... 염증은 당신이 컴앞에 너무 장시간 앉아 있은 문제 때문인거 같구여... 불평이 쏟아져 나오는 순간이였다.... 감사하자... 내가 실명하지 않는것에 감사하자... 눈이 노화되어도, 그래서 이제 웅뎅이에 빠져도 스스로 웃을수 있는 원초의 내 자신으로 돌아가야겠다... 모든것을 감삼함으로 받아 드릴때, 앞을 못보는 소경으로 되어도 안과전문병원 문앞에서 기억의 주머니가 터지도록 담아 두었던 그 아름다운 그림들을 스스럼 없이 감상할수가 있는것이 아닐가 싶다.... 눈의 통증이 또 시작되고 있다... 두려움을 극복 할수 있는 내 자신의 비장의 무기를 들고 두려움 없는 동상처럼 저 앞의 암흑의 나라에 서슬의 칼끝을 겨눈다... .... .... .... 자기야~ 눈약 넣어야지... 나는 이제 눈을 감아야 한다... ....
8    쥐굴에도 볕들기를 기다려 (연재수기5) 댓글:  조회:639  추천:0  2015-09-11
쥐굴에도 볕들기를 기다려 (연재5) 리홍철 때론 아팠던 상흔들이 어느날엔가는 아름다운 문신으로  지워지지 않는 꿈같이 황홀한 추억을 만들수가 있다.  신문사에 있을때 어깨 넘어로 편집을 조금 배웠고, 신문편집에 필요한 프로그램도 그나마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잡지편집프로그램은 완전 생소한것이였다. 코렐이라는 프로그램이였는데 어쩜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지만 또다시 편집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그 두려움을 잊게 해 주었다.   광고디자이너 한테서 이것저것 물으며, 어깨넘어로 엿보며, 그리고 다 퇴근한시간에도 홀로 남아 밤 11시까지 때론 새벽 1시까지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홀로 이것저것 연구를 했다.  이때 배워 두었던 코렐프로그램이 앞으로 나와 내 가족이 밥먹고 살수 있는 가장  값비싼 도구였던것이다.   그렇게 잡지사에서 낮에는 업무뛰고 퇴근후에는 편집을 하면서 나의 일과는 하루가 24시간이 모자라게 빠듯했다. 그러나 일이 재미가 있다는 생각도 처음 가져보는 이때가 어쩌면 내가 청도와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였을가 생각이 들었다. 매 한페이지, 매달 편집완료시의 그 뿌듯함은 어쩜 나만이 느꼈던 희열이 아닐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업종이 불황을 겪고있는 경제공황시기라 잡지사 역시 결국엔 문을 닫게 되었다.   그때가 바로 첫애가 금방 태여난 이듬해였으니 2005년도였다. 한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막대한 중임같은것이 내 어깨를 무겁게 지지 누르기 시작했다. 아이가 없을때에는 어른들뿐이니 하루하루 있는대로 연명해나가면 되는 거였지만 금방 태여난지 백날밖에 안되는 아이는 분유도 먹여야 하고 이것저것 돈들어 갈곳이 한두곳이 아니였다.   그래서 생각해낸것이 잡지사에서 배워 두었던 편집디자인 재간이였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산다고 배운것이 그것밖에 안된 나는 결국엔 다시 디자인업에 발을 들여 놓았다.   집에는 막내처남이 게임정도라만 놀라고 준 로씨야에서 생산한, 품명도 알수 없는  노트북 하나뿐이다.    인쇄디자인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프린트기, 복사기마저 없다. 그것따나 노트북마저 과열로하여 10분에 한번씩 자동으로 꺼진다...   좁쌀 보총으로 중무장한 왜놈과 싸우던 일제시기의 항일전사와 같은 비장한 각오마저 들었다. -그래 이걸 가지고라도 시작해보자...컴퓨터나 주변기기는 이제 돈을 벌어서 사면 되는거지..   착찹한 기분을 자아위안으로 잠재우며 나는 이튿날부터 업무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청도시내에서 배포되고 있는 모든 한글잡지를 모아 놓고 금방 오픈한 식당이나 가게, 공장들을 일일이 체크하면서 전화, 메일, 팩스 번호들을 일일이 적놓고 오후부터는 전화기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인쇄소인데요..혹시 인쇄건이 필요하신가구 전화 드렸습니다... -네..근데 어느 인쇄소죠?   아차! 아이는 태여났는데 아직 이름이 없다...   내 스스로의 웅대한 포부와 세상의 그 어떠한 고난도 정복할수 있는 힘과 용기가 필요 했다. 정(征)우(宇)! 그래서 탄생된 회사이름이 우주를 정복한다는 포부를 꿈꾸며 정우디자인이 탄생하게 되었다. 오전내내 전화 통화에도 방문예약은 가물에 콩나듯이 듬성듬성이다... 그나마 반나절 공치는 날도 많았으며 방문예약이 되었다 해도 성사의 여부는 알길 없다...   뻐근한 손목과 인젠 새틋할 정도로 입안에서 굴려지는 하는 멘트마저 힘에 부쳤다.   하지만 해야 했다. 느끼한 멘트와 부러질듯한 손목에 힘을 주며 나는 다시금 전화기를 쥐어 들고, 다시금 신발끈을 묶었다.   오늘은 청양이다-   오늘은 류팅이다-   오늘은 황도다-   오늘은 교주다-   상품의 질, 가격, 납품기일, 및 약속과 신용이 사업에서 발전을 가져옴은 누구나 아는 사실, 그러나 그것을 실천에 옮긴 다는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웠다.   공장기계는 내가 가동하는 것이 아니였으며 하루 24시간 공장에 붙어 있을 여건도 안된다..   잘못된 인쇄품을 다시 생산하는데 일정한 시간이 소요 되며 그러면 따라서 납기일역시 늦어 진다... 그같은 차실을 공장에 밀어 붙일수는 없는 노릇... 내 신용도에 오점이 생겼다...   파동이 심한 가격때문에 가격대를 맞춘다는것도 고역이다... 주유값이 상승하면 함께 오르는것이 인쇄시장이다...그렇다고 오뉴월 오이 자라듯이 치솟는 인쇄가격따라 계속 함께 오를수는 없다...   나는 납품가능한 날자를 적어도 하루 늦추어 정했다...   가격은 처음에 조금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만 인쇄가격이 4번 상승할때까지 한번도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인쇄시 적어도 기계가동직후 인쇄품이 나오는걸 직접 확인하고 자리를 뜬다. 인쇄 효과에 대한 검증이다...   바이어 관리란 별거 아니다...   단 한번 오다를 준 업주라도 그 근처를 지날땐 꼭 한번이라도 들린다...   사업은 점점 호황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고정바이도 점점 늘어 갔다.   매년 청도 50여교회 및 10여개 업소,업체 고정 달력제작, 중국지역을 대상으로 한 대리점 전문 디자인인쇄, 부동산, 공장, 사우나... 등 업소들의 정우에 대한 호감도를 점점 높여가기 시작했다...   또한 잡지광고 업무를 뛰면서 쌓은 인맥도 한몫을 했다.    단 100장의 명함이나, 단 몇 백장의 전단지나 작은것 부터 큰것까지 일일이 챙겨주시는 스폰서님들 정우가 성장하고 나자신한테 용기와 힘을 부여해준 고마운 분들이다...    청보치과의원, 장수촌 황토방, 반석교회, 은하수무역, 국순당 막걸리, 리커의료보건품... 등 ....   때로는 막연한 어둠속 심연의 나락에서의 고역을 망각하게 해주시는 고마운 분들때문에 할 나 자신의 꿈이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것같은 벅찬 희열과 무한한 감격이 너울쳐 옴을 느낄수가 있었다...   성공은 꿈꾸는 자만이 가질수 있는 특권이다.   꿈꾸는 자의 행보는 오직 성공만을 향해 있으니깐...   이제 나한테 더이상의 시련이나 고통은 없을것이다...   40일간의 민들레 반찬이, 4일간의 본의아닌 금식, 그리고 한달 7컬레의 신발이 앞으로의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길수 있는 큰 면역력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한테 더 이상의 김은 심연은 없을것이다.    심연의 골짜기 맨 끝까지 나는 가 보았기 때문이다.   훈장보다 빛나는 역경의 상흔(伤痕)들은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문신으로 새겨질것이다...   -따르릉...따르릉...   나는 또 다시 신들메를 동여맸다.   어스레 비쳐드는 쥐굴속의 한갈래 빛줄기를 따라 저기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태양이 보여온다..
7    쥐굴에도 볕들기를 기다려 (연재수기4) 댓글:  조회:745  추천:0  2015-09-09
쥐굴에도 볕들기를 기다려 리홍철   굴러가는 바퀴를 멈추는 힘은 오직 나태와, 자아만족이다. 그것을 이길수 있는 힘이 있다면 행복은 영원한 질주를 계속할 것이다.   목을 매 죽으려 해도 바줄이 든든해야 죽을수가 있는것이다. 한 회사에 목을 매고 죽을때까지 버티려고 했지만 허기진 배와 죽을수까지도 없는 회사라는 생각에, 내가 회사를 버려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내 가슴을 허비고 판다.   그렇게 원하고 원했던 편집이라는 직업,  문학을 너무 좋아했기에 문학편집이라는 내 생애 최고의 직업을 단 배고프다는 이유하나로 버려야 한다는 너무 초라한 이유때문에 나는 더욱 슬펐던게 아닌가 싶다.   ... ... ....   문학선배로 부터 전화가 왔다.   광고잡지사에 출근하는데 오라고 한다. 적어도 배는 굶지 않을것이라 했다.   배만 굶지 않은다면 무엇이든지 하리라!   선배의 제의로 오픈 2개월된 광고잡지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잡지사도 아직은 알수 없는 상황, 정녕 나의 배를 굶기지 않을 회사인지, 정녕 나의 배를 불려 줄수 있는 회사인지....그것까지는 아직 알고 있는것이 하나도 없다.   -굶어도 혼자 굶자... 나때문에 내 사랑하는 사람까지 굶을수야 없지...   신문사를 사직하면서 받은 1800원에서 아내한테 1000원을 주었다.   -일단 이 돈으로 고향집에 가 있어... 내가 제대로 발을 붙인 다음 부를테니... 내가 부를 때까지는 절대 청도땅에 발을 들여 놓을 생각을 말어...   아내도 나한테 부담이 된다고 생각했던지 눈물을 글썽이며 돈을 받아든다...   -언제쯤 부를건데?... ... ...    -글쎄...알수는 없지만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빠른 시일내로 부를게...꼭 기다려줘...   그렇게 아내는 고향으로 떠나갔다...   이제 가장 믿고 의지하던 아내마저 떠나고 그 떠난 아내를 찾기 위해 나는 정말, 정말로 피터지는 노력을 할것을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잡지사에 입사하기 전날 저녁, 친구하나 없는 나는 썰렁한 방에 홀로 앉아 언젠가 피우단 만 꽁초 하나를 건져들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 언제까지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   .. 정녕, 정녕 나한테도 빛은 보일가?...   ... 굶지 않을 삶을 위한 목표가 언제면 이루어 질가...   ... 사랑하는 아내는 언제면 데려 올수 있을가... 구경 그런날이 있기나 할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초봄 살얼음을 뚫고 돋아나는 새싹같은 강렬한 무언가가 움트고 있었다...   세상이 나를 버려도 나는 세상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배는 고파 가죽이 등뒤에 붙어도 고향에 돌아간 아내만은 등뒤에 세우지 않을것이라고...가장 빠른 시간내에 꼭! 꼭! 아내를 다시 내 신변에 데려 올거라고...   잡지사 첫 출근이다.   업무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들은 후 나는 사무실 문을 나섰다. 광고를 끌어 오기 위해서는 뛰어야 했다.      그 당시 사무실에 광고업무원이 총 6명쯤 되었지만 핸드폰이 없는 직원은 나 한사람 뿐이였다. 그러니 사전 전화연락이라는것은 나한테 없었다. 길을 가다가 오픈한지 얼마 안되는것 같은 회사나 가계가 보이면 불문곡직하고 뛰어 들어가 사장님부터 찾았다. 사무실에서 9시에 나와서 점심 11시까지 나는 총 7개의 회사, 가계,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Xx잡지사에서 왔는데요. 혹시 광고하실 의향이 없으신지요...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나보다 한발 빠른 사람이 그렇게도 많을거라고는 생각못했는데 정말 많았다. 들어가는 곳마다 모두 타 광고잡지에 계재중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다가는 한달가도 광고 하나 잡을것 같지 못했다.   목이 마르다... 배도 고프고...   어느덧 점심시간은 지나 오후 1시가 되어 온다...   얼음과자 하나 사먹고 싶었지만 1원짜리 얼음과자 하나 살 돈이면 그돈으로 두부를 사면 저녁한끼를 때울수 있다는 생각에 호주머니를 슴새던 손은 스르르 미끌어져 나왔다.   그렇게 점심도 굶고 오후 두시쯤, 지친다리를 끌며 어느 뻐스역 간이걸상에 엉뎅이를 붙이는 순간 이상하게 가슴이 쿵쾅 뛴다. 정거장 바로 옆에 한글로 된 변호사사무소라는 간판이 보였다.   지금까지 계속 한글간판만 찾아 다녔지만 이상하게 그 간판이 그렇게도 마음을 끌었다.   무작정 들어갔다.   그리고 인젠 입에 익은 소리가 그대로 튕겨 나왔다.   -Xx잡지사에서 왔는데요 혹시 광고하실 의향 없으세요?   -아.. 그렇지 않아도 광고할려고 했는데 바로 오셨네요...   순간 나는 코끝이 찡 저려 옴을 느겼다. 결국 전면광고가 아닌 반면광고였지만 그것은 사하라사막 한복판에서 갈증에 죽음을 부르던 나한테 너무나 달콤한 생명수와 같은 것이였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된다. 계속 이정도로만 나가자. 하루 반면 광고만이라도 잡아오면 된다...   이튿날부터 나는 더욱 열심히 뛰었다.  광고 업무를 뛰는 근 두달간 나는 택시 한번 타본 기억이 없었으며 내가 살고 있는 이촌 지역내에서는 뻐스도 타본 기억이 없었다. 그저 두발로 뛰기만 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첫달 출근 18일만에 월급날이 되었다.   사장이 말했다.   -허허 출근 18일만에 광고 5섯개를 끌어 왔네.. 잘했어요..   평군 3일에 광고 하나씩 끌어 온 꼴이다. 총 광고 금액은 4500원 . 월급봉투를 펼쳐 보았다. 기본봉급 800원+광고수당 25%=1925원 8개월을 돈냄새도 맡아 못보던(마지막 결재제외)나한테 너무나 큰 돈이였다.   이대로라면 한두달 이내에 아내를 다시 데려 올것이다. 그러고 보니 18일간 내가 뛰어다닌 거리수가 얼마나 먼지는 알수 없지만 노천시장에서 산 25원짜리 신발 3컬레가 바닥이 구멍나 바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의 새로운 여정은 시작되었으며 배를 곯지 않겠다는 목표와 하루빨리 아내를 데려 오겠다는 목표가 서서히 가까워 오기 시작했다.   광고잡지사에 출근해서 첫달 광고 총액 4500원, 월급1925원, 두번째 달 광고 총액 9200원 월급 3100원...   나의 광고액은 꾸준히 오르기 시작했으며 아내가 떠나간 3달만에 나는 끝내 아내를 다시 내 신변에 데려 왔다.   그사이 원래 잡지 편집을 하던 선배가 사유로 편집을 그만두고 내가 편집까지 담당하게 되었으며 낮에는 광고업무를 뛰고 오후 다섯시부터 밤 11시까지는 편집에 임했다. 그러다 나니 편집비용 2천원까지 한달 급여가 근 5천원 이상이 되었다.   이제 내 삶은 오직 찬란한 무지개빛갈만이 영롱한것일가...더 이상 악몽과 같은 심연은 없는 것일가... 나의 노력이 멈추지 않은한 이 황홀함은 여전할것이라 생각되었다 .
6    검은점 댓글:  조회:562  추천:0  2015-09-08
검은점  리홍철 누군가 귀퉁이에 까만점 하나가 박힌 흰 수건을 들고 여러 사람들에게 무엇이 보이는가구 물었다. 사람들은 모두 `까만점`이라고 대답했다. 그사람은 다시한번 더 찬찬히 보라고 하였지만 누구나 그 이상의 다른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하다면 진짜 다른것은  없을가?   결국 그사람은 여러 사람들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인간은 항상 우점보다 결점에 더 민감하다. 10년 좋게 지내다가도 한번 실수에 원쑤로 변하는 우리 인간은 너무 모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흰수건의 검은 점에만 신경이 쓰이여서 흰수건 전체가 검은 색으로 보이는것 처럼 말이다. 그 검은점도 퇴색하면 희게 변하려만 인간은 그 퇴색할 시간마저 용납하기 두려워 한다.   그러나 기실 까만점 하나 박힌 사람을 웃는 그 자신이 되려 무수한 까만점을 박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망각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간혹 뭇사람들한테 칭찬 받을 좋은일 하나 하게 되면 그것은 마치 천연무택의 훈장으로 변한다. 또한 더 돋보인다. 이때엔 마치 검은 수건 한 모퉁이에 박힌 흰점처럼 말이다.   그같은 검은 점을 용납할줄 알고 씻어 줄줄 아는 사람만이 흰색의 소중함을 더욱 중히 여기는 사람이 아닐가 싶다.   하나의 흰점은 우연으로 생기는 단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만 그 하나의 점으로 하여 소외되는 인간은 그 소외로 하여 점점 더 많은 검은 점을 만들어 가게 된다. 악성종양처럼 점점 더 많이 번식하게 된다.   어느날 밤  잠이 오지 않는 조용한 밤에 당신은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시라.   당신하테 얼마만큼의 검은 점이 있는지... 그 숫자를 헤아리며 새벽까지 잠을 안자는 당신은 래일 아침이면 말갛게 표백된 흰 수건으로 될 것이다. 2006년 흑룡강 신문  
5    쥐굴에도 볕들기를 기다려 (연재수기3) 댓글:  조회:662  추천:0  2015-09-08
쥐굴에도 볕들기를 기다려  3  리홍철  내리막이 늘찰수록 더욱 높은 산마루는 어쩌면 나에게 꿈으로 남을 수도 있지만  애써 톱은 지금까지의 올리막길을 중단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워서 감히 포기를 못하겠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 같았다. 한 기 신문편집은 몇시간 아니면 끝나고, 그것도 신문사가 경제난으로 더는 출간할 수가 없는 상태에까지이르게 되었고, 나역시 근 8개월간 월급을 타지못한 신세였으며 신문사가 오래 지탱하기 힘들것이라는것을  깨달았지만 쉽사리 신문사를 떠날수가 없었다.    그무렵 나는 지금의 아내를 사귀게 되었다.   아내를 처음 만나던 날 내 호주머니에는 특별히 데이트를 위하여 빌린 돈 50원이 전부의 재산이였다. 더 많이 빌릴수 있는 곳도 없었거니와 또 더 많이 빌릴수 있는 체면이 나한테는 전무했던것이다.   약속장소인 이촌광장에서 만나고 다음으로 꼬치집을 향했다.. 호주머니의 50원짜리 한장이 그렇게도 나에게 큰 두려움으로 안겨올줄은 생각도 못했다...   별맛꼬치집-참으로 꼬치는 별맛이였지만 나는 무우를 씹는지 감자를 씹는지 분별할수가 없었다.   -돈이 모자라면 어떻게 할가...   -꼬치집 사장과도 안면이 없는 사이인데.. 외상은 할수없고...다행히도 아내가 눈치를 챈 모양인지 아니면 입맛이 당기지 않았는지 꼬치 세개에 닭날개 하나만 먹는것이였다..금방 저녁을 먹고 왔다고 한다..   결국 우리의 첫 외식은 20원으로 끝났고, 그때 그 일을 훗날 결혼후 아내와 말했더니 내 얼굴 기색을 보고 조금은 눈치 챘지만 호주머니에 50원만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한다. 적어도 100원은 있을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아내와 나는 사귄지 3달만에 동거하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나는 가정이란 한 지체의 머리로서 가정의 모든 근심걱정 부담거리들을 내가 지고 이고 가야만 했다... 근데, 월급은 계속하여 밀리고, 아내의 1200원 봉급에 매다려 사느라니 내 체면이 말이 아니였다. 담배는 꼬박꼬박 피워야 했고, 취재나 업무보러도 차비를 아내한테서 얻어 써야만 했으니..그러나 그것마저도 당시에는 복속에서 부르짖는 행복한 아우성이였다..   얼마후 아내가 병으로 사직하게 되었다..   기가 약한탓에 자꾸만 어림증을 느끼고 조금만 걸어도 힘들어서 녹초가 되기가 일쑤였다..   유일한 밥줄기였던 아내의 봉급이 끊기자 말그대로 우리는 마주앉으면 손가락 빨기밖에 더 할수가 없었다..   때시걱을 기다리는 일이 아내한테는 죽음을 기다리는것 처럼 두려웠다고 아내는 가끔가다 그때일을 회상하며 얼굴을 찌프린다...   회사에서는 월급을 계속하여 밀리고, 아내는 조금 비축해두었던 잔금까지 모조리 먹어 불어먹고 나니 얼마후 우리는 정말 손가락을 빨 지경이였다..   주방에 기름병은 기름대신 먼지가 부옇게 앉았고, 가스통은 비어버린지도 아늑하고, 간장병마저 텅텅 빈소리뿐이다..호주머사정은 더구나 말이 아니었다.. 돈냄새를 맡아본지도 언제인지 기억에 아득하다.   다행히도 쌀은 있는 편이라 전기를 이용하여 밥은 지어 먹을수 있었지만, 반찬이 문제였다. 일전한푼도 없는 처지라 고기는 꿈의 넉두리로, 녹색빛갈을 띤 채소마저도 먹어본지 아득하였으니깐. 며칠은 맨밥에 간장병만 빨다보니 아닌게 아니라 길을 지나다니며 땅에 떨어진 배추잎사귀마저 주워서 먹고 싶은 생각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퇴근하여 보니 집안 객실 전체가 민들레로 수북하였다. 아내가 아픈 몸을 끌고 노산빈관인가 어덴가 하는 근처에 가서 민들레를 캐왔던것이다.   기름은 없고, 간장도 없고, 고추가루도 없고.... 그래서 밥가마에 물을 끓여서 민들레를 데친 후 소금을 뿌려서 먹는 방법을 선택하였으며 이렇게 우리는 민들레가 꽃이피고 떨어질때까지 근 40일간 하루 세끼 소금을 뿌린 민들레만 먹었다...   참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나를 버리지 않고 떠나가지 않은 아내한테 정말 눈물나게 고마웠고, 감사하다..   근데 올리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라더니 나는 그때가 가장 내리막인줄 알았는데 더 내리막이 있을줄이야.. 내리막이다 못해 내리막 밑에 생긴 큼직한 구덩이가 있었던것을 ...   그렇게 배를 곯으며 기다리기도 싫은 양력설이 돌아왔다..   남들은 어떻게 하면 맛있게 먹고 잼있게 놀가를 궁리할때 우리는 오늘 저녁끼니를 걱정해야만 했다. 내일이면 양력설이다..그러나 신문사에서는 월급은 둘째로 설소비 한푼 안준다...   다행히도 내가 당겨온 광고가 하나 있었는데  사장은 그 광고를 결재받아서 나보고 쓰라고 한다. 나는 업체에 전화를 했다..이러저런 사연이 있는데 광고비용을 결재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광고비용 1000원을 손에 쥐게 되었으며, 또 천진하게 꾸지 말았어야 할 양력설의 영롱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 우선 우리 둘이 만난 첫 명절인것 만큼 재미있게 쇠야지.. - 내가 좋아하는 돼지고기는 댓근 사고, 아내가 좋아하는 닭날개도 좀 사고.. 술도 좀사고 ... 오랫만에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데 그 꿈마저 길지 못했다...   똑똑똑..   누군가 사무실 문을 노크한다...   웬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 거렸다...   슬며시 돈을 넣은 주머니 쪽을 손으로 눌렀다..   그러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내가 들어 사는 셋집 주인이다...   석달동안 집세를 밀렸더니 년말이라고 결산해 달란다..   울며 겨자먹기로 어쩔수가 없었다..   한달집세 330원, 석달치를 물고 나니 호주머니는 금시 홀쪽해 지고 단돈 10원 한장이 애처롭게 바스락 거린다...   당금 눈물이 쏟아 질것만 같았다..  허전한 마음으로 집에 도착하여 문을 떼고 들어서니 아내는 오랫만에 보는 밝은 웃음을 짓고 그리고 즐거워 한다..   그도 오늘 내가 광고비 천원을 받아 오는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돈을 집세로 물었음은 아직도 감감이였다...   그때 아내의 망연자실해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각하면 내가슴을 아프게 찢고 있다... 아내는 한동안 멍하니 서있더니 나한테서 돈 10원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한참후 그는 돼지고기 반근에, 1.60원을 주고 란링알취 라는 소주 한병, 그리고 훙찐 담배 한갑 사들고 들어왔다..   -인젠 돈 없어... 설인데 ... 고기에다 술은 마셔야지...그러더니 아내는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 쓴다...   가늘게 아주 가늘게 아내의 흐느끼는 소리가 내 심금을 아프게 허비고 있다...   이튿날 양력설날 아침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고기를 씹어야 했으며 눈물을 흘리며 술을 마셔야 했다....참고 참으려고 했지만 주체하지 못하고 흐르는 눈물은 막을수가 없었다...   내리막 끝의 이 아득한 심연의 골짜기는 구경 어데까지일가... 깊이를 알수 없는 그 끝없는 나락에 나는 정처없이...정처없이 빠져들고 있다....
4    쥐굴에도 볕들기를 기다려 (연재수기2) 댓글:  조회:568  추천:1  2015-09-07
청도에서 첫날     청도 도착은 아마도 밤 10시가 훨씬 넘은 것 같았다.    20여시간의 기나긴 장정을 거쳐 도착한 청도는 그렇듯 황홀했지만 무시로 떠오르는 심양역에서의 봉변이 내 등골을 차겁게 훑는다…어데 갈곳이 마땅 찮은데, 여관은 또 두려움의 단어로 각인 되었는데…   다행히도 제남역에서 오른 대학생 하나가 큰 도움을 주었다. 그를 따라 선로 뻐스에 오르고 거의 30분만에 도착한 곳이 대맥도라는 바다가 근처였다.  그의 소개로 한 아담진 여관에 행장을 풀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 여관문을 나서니 너무나 정답게 느껴지는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우리 글로된 이였다.   연변에서는 흔해빠진 한글간판이지만 이렇게 타향에서 우리글로 된 간판을 보니 너무나 감개무량했다.   급히 식당문을 떼고 들어서니 늦은 밤이지만 너무나 반갑게 맞는 식당 아줌마이다.   곱돌장국에, 김치볶음에, 청도맥주 한병, 소주반근을 게눈감추듯 하고 나니 그제야 전신이 맥지근해나며 진한 피곤기를 느꼈다. 여관을 돌아와서 피곤에 구겨진 몸뚱아리를 되는대로 침대에 던지고 순식간에 깊은 꿈의 나락에 빠져 들어갔다…   몇시인지 분간이 안가는 한밤중에 뇨의를 느껴 문을 당겼더니 아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 밀어 보았다.. 당겨보았다 ...역시 열리지 않는다…분명히 밖에서 잠궜다…   순간 또 재수없는 그 심양역에서의 봉변이 떠올랐다…   … 이 여관도??….큰일이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쳤다..    …快点开门… -  吓死我啦 … 干什么?   여관집 주인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어쩜 내 고함소리보다 더 높았는지도 모른다.. 자박자박 쓰레빠를 끝는 소리가 들리더니 드르륵 하고 내 방 문이열렸다…   참… 방문은 밀고 당기는 문이 아닌 옆으로 미는 다다미 형식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날의 그 창피했던 기억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고 있다. 그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보려 훗날 다시금 그 식당과 여관을 찾았더니 보이지 않았다…    첫 출근      이튿날 아침 택시를 태고 신문사 사장이 알려준대로 이촌에 도착, 중국은행 문앞에서 기다리니 한참후 직원 한명이 나와서 나를 사장의 집으로 안내했다.   사장집에서 한참 신문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다시금 숙소를 잡으러 사장과 함께 밖을 나섰다. 분명 회사경제난으로 회사에서 숙식해결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찾은 곳이 라고 하는 민박과 직업소개를 겸해하는 곳이였다.   한달 주숙비 450원을 주고 나니 호주머니에는 230원이 남았다. 그래도 다행인것은 먹고자는 근심을 덜었다는데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튿날 신문사 사무실에 정식으로 출근하니 제일 처음 맡겨진 임무가 청도 지리도 익힐겸 신문 배달원과 같이 신문을 배달하란다...   참... 편집으로 왔지 신문 배달온건 아닌데.. 하는 불편힌 심기때문에 저으기 어짢았지만 그래도우선  청도지리를 익히는것도 나쁠건 같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오전에는 이촌 지역을 배달하고 오후에는 어덴가 엄청 먼곳을 가는것 같았다...   아무리 자전거를 오래타도 다리가 아프다거나 힘든것을 느껴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힘들었다...   알고보니 자전거를 타고 배달한 지역은 류팅을 거쳐 청양이라는 먼곳이였다... 아마도 연길부터 용정가기보다도 더 먼것 같았다.. 그날 온하루 자전거 페달을 밟앗더니 저녁밥을 먹기 바쁘게 잠에 골아 떨어졌다.   출근 두날째 되는 날 사장이 나보고 뭘 하고 싶은가 물었다. 분명 문예편집으로 오기로했는데 또 뭘 해보고 싶은가 물어본다... 답답하기라구야...그래서 했더니 알았다고 문예편집을 하란다...   처음인데 어떻게 뭘부터 하라는 말도 없다.     배워주는 사람도 없다...   사무실을 둘러보아야 컴퓨터 한대가 있었지만 이때까지만도 컴퓨터를 만져도 보지 못했으니 촌놈이 새장속에 앵무새를 구경하는 꼴밖에 더 될게 없었다.   그저 멍하니 컴퓨터로 신문배판을 하는 여직원의 능수능란한 손끝을 보면서 나두 언제면 저렇게 컴퓨터를 잘할가 하고 부러운 눈길만 보낼뿐이였다.   이렇게 신문사 신고식은 맹물에 몽둥이 삶은 맛으로 미적지근하게 끝이 났고...이튿날, 삼일날, 사일날도 매한가지였다..다르다면 며칠후부터 나는 타자연습에 들어갔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하도 하는 일이 없고, 눈치는 보이고, 컴앞에라도 앉아 있으면 일하는 모양새가 나서 눈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머리에 털나서 이때에 나는 처음으로 컴퓨터를 만져보았으며 현재 평면디자인까지 하게 될 기초를 이때에 다졌던게 아닌가 싶다. 청도 청도타운 광고잡지에 발표 -내일 계속-
(연재수기)  쥐굴에도 볕들기를 기다려                                    리홍철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는 현재의 경과가  순간의 빛으로 남을, 즐길수 있는  가장 소중한 과정이다.   쨍하고 해뜰날을 기다려, 아니 기디린게 아니고 마주달려 어느덧 고행이란 말도 아깝지 않은 고고행의 10년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지난 지금 그나마 내 자신을 돌아볼수 있다는 것이 조금은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연길에서의 7년의 미련을 아깝지 않게 던져버리고 나서 처음으로 고향땅을 떠날 때는 아마도 2000년 9월즘이라 기억된다.   된장 세숫가락에 감자 한알로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며 버티던 연길이 아름답다기보다는 절명에 가까운 사지의 변두리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러다 행운의 신으로 생각되었던 신문한장이 내 운명을 서서히 바꾸기 시작했다.   청도 모 신문사에서 편집모집을 한다는 명함장 크기의 신문광고가 눈에 확 들어오며 순간에 심장은 크게 북을 쳤다.    17살에 처녀작을 발표하면서 그간 나름대로 부지런히 글들을 발표하였던 나는 꿈이 편집이였기 때문이다.   이력서고 뭐고 당장에 초빙광고를 낸 신문사에 전화를 했더니 너무나 쉽게 OK를 받았다.   연변  밖을 떠나는 시골뜨기의 마음은 희망으로 부풀었고, 모든것이 나를 위해 축복해주는것만 같았다. 배웅해주는 동생의 눈가에 맺힌 눈물 한방울도 나를 울리지 못했고, 뒤로 밀려가는 연길역도 그저 속시원한 눈길로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으며, 청도라는 산동땅에 내가 아는 사람 한사람 없는 생면의 타향이라는 생각도 두려움보다 반갑기만 한 도시로 가슴 뜨겁게 안겨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 아닌, 겉만 이쁘게 포장되고 속은 썩은 동아줄임을 나는 몰랐었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저 언덕 너머에 또 하나의 무서운 심연이 쩍 벌어진 악마의 아가리처럼 내 앞에 숨어있는 줄을 내가 알리 만무했다…   심양 역에서      변변찮은 중국어 실력에  태여나 처음으로 나서 자란 고향을 떠난 시골뜨기가 심양역에 내리니 참으로 동서남북을 분별못하는 촌닭신세가 되고 말았다.   물어물어 매표처를 찾고, 청도행 티켓을 끊으니 오후네시 기차시간까지는 근 7시간도 더 되게 남아있었다. 어데 갈곳은 없고 두리번 살피는데 보기에도 무던한 웬 아줌마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 住旅店吗?“   여관에 들겠는가고 묻는다. 금방까지만도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모르던 차에 그 아줌마의 한마디에 나는 피곤기를 느꼈다. 온밤 설레임 때문에 기차에서 한잠도 자지 못했던  터라 그 아주머니를 따라 나섰다.    여관비는 10원이란다.    너무나 싸고 좋았다.  거리도 도보로 5분이면 도착한다지, 트렁크도 그 아주머니가 빼았다 싶히 나꿔 채서는 자기가 들고 앞장선다.   근데 5분거리라는 여관은 너무나 멀었다. 걸어서 15~20분만에 도착해보니 웬 폭격맞은 집 같은 문앞에 멈춰섰다.   “倒啦“    근데 여관이라는 곳이 간판도 없는, 그리고 당금 쓸어질것 같은 오두막같은 곳일줄이야... 도심 한복판에 이같은 초라한 집이 있다는것 조차 믿어지지 않을 많큼 초라한 단층집이다.   그러나 왔던김에 별수 없이 안으로 들어갔더니 더욱 기가 막혔다 .   작은 침대 하나가 전부인 방이 몸 하나 돌리기도 힘들 정도로 비좁았고, 벽 네면에 개굿멍 같은 작은 출입문 하나가 전부였다. 구름한점 없이 맑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방에 들어서기 바쁘게 등불을 밝혀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 보다도 더욱 나를 기절 초풍할 일이 벌어졌으니...   " 要不要小姐?"   여관이 아닌 기생굴일줄이야....   순간 눈앞이 캄캄해났다.   두메산골에서도 매체를 통해 이같이 백주대낮에 여자를 미끼로 사기치는 날강도들이 간혹 있다는 소리는 익히 들어왔지만 내가 직접 부딛칠줄이야...   "不...不要..."   그러나 그들의 집요한 닥달은 끝이 없다.   경찰들도 와서 피로를 풀고 간다는둥, 정부에서 어느 영도도 와서 재미를 본다는둥...그러니 안심하라고, 한시간에 50원이니 비싼것도 아니지 않는가한다...   비싼지 싼지는 내가 겪어 못 봐서 모르고, 누가 와서 재미를 보고 갔던지 왔던지 그 같은것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내 머리는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오로지 이 귀신굴 같은 소굴을 벗어나고만 싶을 뿐 이였다.   알고 있는 중국어를 최대한 다 활용하면서 여관에 묵을 수 없는 이유를 만들기에 분주했다.   그러나 내 말에는 듣는둥 마는둥 그렇게 무던한 아줌마가 줄기차게 계속 무던한 표정을 짓더니 이번에 뭐라고 소리지르니 순식간에 우리 농촌 사내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처럼 군대말 같은 아가씨인지 아줌만지 분별이 어려운 여자 5섯명들어 왔다.   회포를 풀라는 것인지 아니면 날 때려죽이라고 불러왔는지 암튼 나의 공포는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 되었다. 몇 마디밖에 할수 없던 중국말까지 다 까먹고 니디워디도 나올수가 없었다.   한두매 맞는 것보다도 몇푼 안되는 로비까지 몽땅 빼앗기면 가도 오도 못하는 신세가 되는것이 두려웠다.   다섯명의 여자를 그 비좁은 방에 일열로 세워놓고 내 의사와는 관계업이 마음대로 선택하란다....   기가 떡 막혔다.   이럴줄 알았더면 돈을 조금 더 팔더라도 역전옆 국영여관에나 갔을것을.... 그들과의 씨댕이는 30여분간 지속되고, 그러다 밖에서 웬 사내의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시커먼 사내 셋이 머리를 기웃 들이민다...     5섯명의 여자들만도 기절직전인데  저승사자같은 사내들의 출현은 내 혓바닥을 완전 마비시켰다.   시골구석에서 간혹 싸움은 그저 주먹닥질이면 전부인데 비해 도시깡패들은 사시미 같은 흉기를 휘두른다고 하던데…   시골에서 위용을 부리던 주먹의 신용은 언녕 구중천으로 날려가 버린지 옛날이다....   그들의 고함소리를 상세히는  알아 들을수 없었지만 대체로 진짜 돈 없는 거지새끼 아니냐 하는 뜻인 것 같았다..   나는 부랴부랴 호주머니에서 몇백원 안되는 돈을 꺼내 보이며 이것이 전부인데 이것마저 너들이 가져 가면 난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고 하니 그들은 청도 어데 가는가고 물었다.   묻지 않아서 대답 못하던 차라 나는 제꺽 모 신문사 기자인데 청도 지사로 파견돼 간다고 거짓말 비슷한 거짓말을 둘러 대였다.   너그러워 보이던 아줌마의 기색이 써늘이 식어 가며 맹랑한 기색을 보이더니 어서 가보라는듯 머리를 끄떡 해보이고 나는 부랴부랴 문을 나서는데 그 군대말 같은 여자들은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꽁무니를 빼는 내 뒤에 대고 연신 키득키득 거리고 있었다.   간신히 악마의 소굴을 벗어나니 눈앞이 어질어질 해나며 전신에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찬란하던 햇살도 멀미를 먹은 아낙네처럼 노랗게 맥골 없이 보인다… 내일 계속
2    엄마의 전화 댓글:  조회:488  추천:1  2015-09-04
엄마의 전화 리홍철   엄마한테서 전화 왔다. -어데 아픈덴 없어?.... -네. 어머니는 어데 아픈데 없어요? -아니 난 괜찮다... 68세의 고령으로 타국이 아닌 타국에서 식당 설거지를 하시는 어머니의 지친 목소리가 제 구실 못하는 아들의 가슴을 아프게 저며 오고 있다. -어머니 어데 아픕니까? 이전과 달리 맥이 풀린 어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저으기 걱정 스러웠다. 대장암 4기 진단을 받고 수술후 항암치료도 받지 않은채 순 악으로 이겨온 어머니의 생명이다. - 살고 싶었지.. 정말... 아직까지도 너네 잘 사는걸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걸 생각하니 고통에 죽고 싶어도 도무지 죽어지질 않더구나... 아마도 그래서 어머니는 대장암 4기진단, 죽음의 문턱에 걸터 앉아 한참을 고민하고 돌아섰는가 싶다... 그렇게 우리가 잘사는걸 보고 싶다고 하고서는 손바닥에 털날 지경으로 편한한건 역시 죽기보다도 더 힘들다고 결국 수술 1년후 우리집에 계시다가 다시 한국행을 작정 하셨다. 그렇게 가지말라고 말리는 아들며느리의 소리에 –노는것 만큼 힘든게 없구나.. 움직일만할때 움직여야지 언제까지 너넨데 얹혀 살겠는냐...하시면서 끝내 년로한 몸으로 고행의 길에 들어서셨다. 그렇게 가신 어머니가 3일에 한번씩 전화 올 때마다 그렇듯 밝고 명랑하셔는데 오늘은 정말 아니었다. 너무나 무거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내 가슴을 철렁이게 만든다. -      어머니 어데 많이 아픈거 아닙니까? …. … 한참의 침묵이 흐른후- - 홍철아... 엄마가 많이 힘들구나...미란이(나의 아내)는 절대 한국 나오지 말라구 해라...  분명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있는게구나... -몸이 힘든건 괜찮은데 마음이 힘든건 정말 너무 참기 어렵구나... 설거지 두명이 하는데 사장도 아닌 사장 여동생이 올라오더니 한사람 빼서 2층에 내려가라구 하기에 내가 여기도 설거지 한명이서 힘든데요 했더니 별소리 다하더구나 나보다 20살은 더 젊은여자가 말이야 ..없는 말도 지어내고...ㅎㅎㅎ 내 늙으막에 이상한 소리 다 듣고... -어머니 뭐라고 말해요?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다..그저 바람새는듯한 소리의 허구픈 웃음만 웃을뿐... -홍철아 엄마 너네 집에가 살가?  -어머니, 아무걱정 말고 오쇼.. 안그래도 애 엄마도 외지에 가고 나하구 진영이 밖에 없는데... -아니다. 그저 하는 소리다.. 아무리 힘들어도 순간만 조금 참으면 다 지나가는 일 되더구나... 순간을 참지 못하고 같은양 했다가 짤리우기나 하면 내 이 나이에 어데가서 또 일자릴 찾겠냐... 지금 일하고 있는 여기도 나이 많다고 꺼릴가봐 3살을 줄이고 들어 왔는데 ...암튼 내가 몸이 조금이라도 성할때 내 뼈를 놀려 너넨데 보탬이 돼야지...근데 오늘 내가 너한테 전화한건 니 동생과 절대 말하지 말어. 알았어? 엄마의 열번 부탁은 도리가 있는것이였다. 성격이 불과 같고 벽도 문이라고 생각하면 뚫고 나가는 동생의 괴퍅한 성미로는 알면 큰 일 치를것이 당연 한것 이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말 할곳이 없네.. 아무 하구나 말해서 속이라도 풀고 싶것만 그러게 아무나하구 말할 상대가 없어서 이렇게 너한테라도 전화한거다...그런데 이렇게 전화하고 보니 또  너한테  괜스레 근심을 준거 같아 미안하구...그러나 걱정 말어.....엄마 지금은 괜찮아. ㅎㅎㅎ 엄마 원래 속좁은 노친네가 아니니깐 그깐일에 상처받을건 없어....ㅎㅎㅎ 엄마의 허구픈 웃음이 아프게 마음을 찢는다.. 엄마는 아프거나 슬프거나 고통스럽거나 단 한번도 내나 동생한테 털어 놓은적 없으시다. 아파도 혼자 아프고 싶고, 고통스러워도 혼자 싹이고 싶고 슬퍼도 혼자 울고 싶었던 것이다...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울때마다 어머니는 일감을 찾아 마음을 달래군 하셨다. 급작스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후 엄마는 근 세달간 친척접으로 떠돌아 다니셨다. 아버지가 없는 썰렁한 집은 들어가기가 싫다고, 그러다가 결심한것이 한국행이였고, 근 5년간 한국에서 고생하시다가  암이라는 불치의 병으로 저승문턱까지 갔다온 어머니...재입국으로 또 마음의 고생을 하시는 어머니, 그 아픔을 고국이라는 땅에서는 누구와 나눌수도 없었나 보다.. 그래서 좀체로 터놓지 않던 고통까지 터 놓으려 이 아들한테까지 전화를 걸었으랴.. 그러고도 또 다시 아들이 마음 아파할가봐 걱정하시는 어머니.... 오늘 엄마는 어떤 괄시를 받았을가... 그것이 궁금하지 않다..엄마는 절대 말하지 않을것이다... 그저 엄마가 이길수 없는 고통을 이기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 고통을 나한테 얼마라도 분담만 해줘도 좋을것 같다...그 고통마저 분담할수 없는 나의 마음이 찢어질듯 아프다... -어머니 청도에는 아들이 있습니다. 갈곳 없는 어머니가 아니고 마음푹 놓고 편히 쉴수 있는 어머니의 집이 청도에 있습니다... 어머니 그런 스트레스 받는 곳이라면 미련 없이 뿌려치고 아들의 곁으로 오세요.. 그러나 어머니는 또 말하신다.. 내 몸이 성할때 너넨데 도움이라도 줘야지... 내일 모레면 칠순의 엄마가 아들의 마음을 허비며 눈물을 내고 있다....
1    버리는 연습을 하라 댓글:  조회:529  추천:0  2015-09-01
버리는 연습을 하라 이홍철     얼마전 한국 바이어 통역으로 하남성에 갔었다. 원하던 바 대로 계약도 원만히 맺고 하남성 명승지인 소림사요, 포공사도 돌아다니면서 마음의 한가함을 달래는 좋은 시간을 가졌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분들이 항상 마음속의 근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계약날자대로 제때에 계약금을 입금할 수 있을것인지… 아니면 그저 형식상의 계약서인지… 여행동안도 내내 편한 마음가짐을 가지지 못하는 그분들이 너무나 안스러워 보여서 내가 한마디 하였다.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결과를 안아오지만 항상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은 부정적인 결과밖에 엊지 못한다. 어느한 목사가 주일날 설교에서 이런 말을 한적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이 잘사는 사람을 보고 당신은 기회가 잘 주어졌기에 지금 부자가 된것이오- 그것도 틀린 말이아니다. 그러나 가설적으로 이세상에 부자도 없이, 가난한자도 없이 동등하게 사람당 같은 액수의 돈을 주고 같은 기회를 주었다 할 때 10년후의 그들의 생활을 본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지금 가난한 사람은 10년후에도 가난할것이요, 지금은 부자는 10년후에도 여전히 부자일것이다.. 가난한 자는 계속 원래의 가난해질수 밖에 없는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에 가난할 수밖에 없는것이오, 부자는 부자가 될수 밖에 없는 그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에 또다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닐가 싶다. 사유가 바꾸지 않는다면 그들의 생활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사유를 바꾸자면 기존에 있던 머리속의 모든 것을 깨끗이 비우고 새로운 사물과 새로운 생각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근심걱정도 마찬가지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갖자면 내속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버려야만이 긍정적이 생각을 담을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것이 아닌가…아니면 부정적인 생각을 꽉찬 내속에 긍정적인 생각을 담을 공간이 있을 수가 없다. 내가 나의 바이어 보고 모든 부정적생각을 버리라고 한 것은 긍정적인 것을 받아드릴 준비를 하라는 일종의 충고인것이다. 아무리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기 힘들더라도 당신은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버리는 연습부터 하는 것이 필연적이라 생각된다.. 주워담는 욕심을 부리기 먼저 버리는 연습부터 하는 것이 확실한 성공을 위한 기초에 기초가 아닐가 싶다. 송화강 발표 (시간은 기억 안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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