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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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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작가평]고향의 개울물은 오늘도 소리내여 흐른다 댓글:  조회:412  추천:0  2019-07-19
고향의 개울물은 오늘도 소리내여 흐른다 김경화   고향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가 개울물이다. 알알이 모래알마저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개울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손가락 하나 쯤 뻗어 물 속에 담그어보면 그 시린 온도에 주춤하곤 했다. 그것도 잠시 다시 손 전체를 넣어보면 그 기분 좋은 청량함에 머리 속까지 맑아지곤 했었다. 들여다보는 돌멩이가 물 안에서 손을 뻗쳐 만져보는 돌멩이와 형태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다는 걸 알아가면서 나는 나이를 먹고 성장해갔다. 언제나 거기에 그렇게 그 모습으로 있을 것 같아서 기분 좋고 세상이 다 변해도 그것만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 든든한 존재, 고향의 개울물은 내게 그런 것이다. 그 개울물을 닮은 사람이 있다. 한없이 순수하고 투명해보이는 사람인 듯한데 한발 다가서보면 엉뚱함이 불쑥불쑥 튀여나오고 장난기 다분한 사람, 조용하고 말수 적은듯 보이지만 친해지면 정말 재밌는 사람, 오래 들여다보고 깊이 있게 알아야 비로소 보이는 사람, 언제라도 떠올리면 기분 좋은 사람, 내가 본 소설가 조원은 그런 개울물 같은 사람이다. 나이로 보나 문단데뷔로 보나 나한테는 훌쩍 선배지만 전우씨 하고 부르며 시시한 롱담을 무랍없이 할 수 있는 사람, 굳이 “이건 비밀로 해주세요.” 하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 없는 사람, “이런 말 해도 되나요?” 하고 조심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소설가 조원은 내게 그런 친구이다. 계기라는 게 있다. 사람을 만나게 되는 계기, 사물을 만나게 되는 계기. 그건 어떤 계시이기도 하다. 델 것 같은 해볕이 아스팔트를 녹이던 그 여름, 나는 기차를 타고 서너시간을 달려 대구로 갔다. 회사에서 야간근무를 하면서 심신이 많이 지쳐있던 때였다.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걱정거리도 많던 시기였다. 나는 숨을 쉬고 싶었다. 그러다가 소설가 조원을 만나기로 했다. 특별한 리유가 있는 건 아니였다. 그를 만나면 뭔가 숨이 쉬여질 것 같아서도 아니였다. “언제 한번 만나 식사나 합시다.” 하는 서뿌른 약속을 한 지도 오래됐고 딱히 만날 사람도 없고 갈 데도 마땅치 않던 차에 소설가 조원이나 만나 롱담처럼 했던 약속이나 지켜보자 한 것이였다. 어쩌다가 한번 쉬였던 그 주말, 짧지 않은 거리를 기차를 타고 헐금씨금 달려갔다. 대구기차역에 막 내려 주위를 슥 돌아봤다. 그 낯선 기차역 한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드나들고 렬차시간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시끄러운 그 속에 언제나처럼 말라있는 그가 소년처럼 천진한 미소를 머금고 쭈볏거리며 서있었다. 《도라지》잡지에서 청년작가작품집 출간식 행사를 하던 때 한번 봤으나 딱히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초면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생경함, 서먹함, 이런 것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기차에서 딱딱하게 굳은 표정일가 아니면 머쓱하게 웃으며 서있을가 하면서 그의 모습을 예상해봤던 나한테 그의 그런 모습은 의외였다. 나는 그의 그 순수함 가득한 미소에 그냥 풉 하고 웃어버렸다.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할 법한 서먹함이 그 기차역 지붕을 뚫고 저 하늘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버리는 순간이였다. 그 날, 해볕이 너무 뜨거워서 나는 그한테 몇번이고 “오늘 날씨 몇도라 했죠?” 하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마다 그는 차분하게 대답해주었다. “36도라네요. 덥죠? ㅎㅎ” 참 인내심 있는 사람이구나. 그에 대한 내 첫인상이였다. 그 날, 우리는 두피가 빨개지고 피부가 익는 게 아닌가 걱정하면서도 신나게 돌아다녔다. 너무 뜨거워 걷다가 멈춰서 음료수로 목을 추기고는 다시 또 돌았다. 김광석다시그리기길, 방천시장, 이상화고택, 마치 돌아다니기에 굶주린 사람들처럼 우리는 그 날 열심히 돌아다녔다. 풍경들을 사진에 담고 돌아다니면서 “맞아요, 그러니까.” 하고 맞장구를 쳐가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뜨거운 한여름, 한국에서도 가장 뜨거운 대구의 여름, 그 대구의 여름중에서도 그 날은 가장 뜨거운 날이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 기억은 내게 떠올려보면 즐거움으로 남아있다. 아마 그가 풍기는 좋은 에너지 때문이였으리라. 많은 아픔을 겪었음에도 그는 순수함이 있었고 웃음이 있었다. 우리가 소설에서 추구하는 것도 비슷하고 좋아하는 작가도 비슷하다는 공통점을 찾아내고 나서 그는 아이처럼 신나했다. 그는 좋은 것, 즐거운 것들만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게 너무 좋았다. 우리는 서로 무심한 척 상대방의 아픈 곳을 외면하며 최대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파본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배려였다. 나는 그게 너무 다행스러웠고 편했다. 그는 적절히 거리를 두면서도 선배답게 진심어린 충고와 위로를 잊지 않았고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으며 말 한마디도 례의에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깍듯이 나한테 존대말을 했으며 행동 하나에도 신중하고 조심하는 성격인 듯했다. 허황한 것을 바라지 않으며 온전히 땅에 두발을 딛고 한발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진중하고 바른 사람, 변하지 않고 믿을 만한 사람, 내가 그 날 그에게서 받은 인상이였다. 그 만남 이후, 우리는 한동안씩 련락을 안하다가도 위챗으로 한참씩 주절주절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소설에 대한 견해를 나누고 요즘 읽는 책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어쩌다 쉬는 주말이면 가끔 일정을 잡아 문화기행이네 하면서 한곳씩 정해서 구경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그런 만남은 우리에게 그 상황에서 부릴 수 있는 사치였고 숨을 쉬는 어떤 통로였다. 교대근무를 하는 와중에도 그는 틈틈이 책을 읽고 소설을 쓴다고 했다. 나한테도 소설을 쓰라고 부추겼다. 도저히 몸이 힘들고 정신적으로 피페해있던 때인지라 나는 그의 그런 에너지가 다만 부러웠다. 지금은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다고 푸념하듯 털어놓자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그럼 쓰지 마요.” 그는 알았을 것이다. 그 때의 내 상황에 꼭 맞는 답이 어떤 것인지를 말이다. 도저히 할 수 없을 때는 하지 않는 것, 가끔은 다 내려놓을 줄도 아는 것, 그는 내게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 같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불평 없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시시하거나 재미없지 않은 건 일상의 재미를 알고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서이다. 출퇴근길에 무심히 지나쳐도 좋을 소소한 풍경 하나하나가 모두 그의 즐거움이 된다. 그는 날씨가 맑으면 감탄하고 어느 고물상 울타리 안의 항아리가 정겹다고 은근슬쩍 침범해들어가 사진을 찍는 엉뚱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소주 한잔의 여유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술을 가까이 안하는지라 함께 술을 마셔보진 못하고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은 있다. 술 한잔 들어가면 그는 즐거워한다. 기분도 좋아보이고 수다스러워진다. 알 수 없는 횡설수설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귀 기울여 들어보면 왠지 그럴듯해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러다가도 나중에 만나면 언제 그랬나 싶게 다시 아닌 보살을 한다. 소설가 조원의 인간적인 구석이다. 내가 십년 가까이 되는 한국생활을 접고 귀국할 때 그는 가끔 만나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를 잃었다고 내심 아쉬워했다. 돌아가면 건강에 주의하고 소설 쓸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도 했다. 돌아와서 소설을 썼을 때 나는 첫 사람으로 그한테 자랑했고 그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나도 쓸래요.” 하고 질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돈이나 벌어요, 소설은 내가 쓸 테니.” 하고 견제했는데 이렇게 또 《장백산》에 톱으로 나간단다. 아이처럼 좋아하면서 나한테 작가평을 써내라고 협박한다. 못 말리는 친구 같으니라구. “나도 작가평을 쓰게 해줘요. 이미 다 생각했응께.” 하고 은근히 나한테 《장백산》에 톱으로 나갈 만한 소설을 써내라고 협박한다. “왜 소설을 써요?” 그에게 물은 적 있다. “저한테 소설은요, 자기 구원이랄가. 저한테는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요.” 그가 하는 말이였다. 그는 또 한번 스스로를 구원한다. 일상의 지루함과 따분함으로부터 자신을 건져올리고 있다. 자기 스스로를 놓지 않는 이상 그는 소설을 쓸 수 밖에 없는 사람인 듯하다. 얼마 전, 고향에 갔었다. 십여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음에도 내 고향의 개울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촐촐촐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그 개울물에 손을 담그고 나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친구 조원을 떠올렸다. 밝은 가을해살이 찬연하게 대지를 고루 비추고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가을날씨였다. 나는 저 멀리 대구의 하늘 아래에서 오늘도 자신의 삶에 열정을 다하고 있을 그의 행복을 빌어보았다. 출처:2017 제6호
9    [단편소설] 손가락 감싸면 주먹인 것을 -김경화 댓글:  조회:413  추천:0  2019-07-18
김경화  손가락 감싸면 주먹인 것을    1  어데로 가야 하나. 몇시 쯤 되였는지 알 수 없다. 푸르스름한 새벽 기운을 느끼며 집을 나왔고 아빠트단지를 한바퀴 돌고 여기까지 어슬렁거리며 걸어왔으니 대략 짐작해보면 아침 여섯시에서 일곱시 사이 쯤 되였을 것 같다. 주머니에 핸드폰이 있어 꺼내보면 시간을 알 수 있겠지만 그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산한 뻐스정류장 한쪽에 비켜서서 정면을 주시하고 있다. 무언가에 골몰한듯 보이지만 실은 어떤 것에도 집중해있지 않다. 뻐스가 달려온다. 선로번호가 씌여져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뻐스의 행선지를 추정해보려 애쓰지만 기억은 너무 흐릿하다. 이 도시에는 그의 이름으로 된 집이 있고 엄연히 호적에 또렷하게 찍혀있는 그의 부인과 아들이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낯설고 꿈의 한 장면같이 비현실적일 수가 없다. 지금 쯤, 안해는 쌀을 씻고 있을가. 주름이 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희고 통통한 손을 앞으로 뻗어 밥물을 맞추겠지. 오늘 아침은 국을 끓일려나, 아니면 도마도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계란과 함께 볶을려나, 아들애를 깨워 잔소리를 해가며 밥을 차려주고 입을 옷을 골라 주겠지. 완벽한 가족의 아침 풍경이라고 해야 할 것들이다. 그는 그 완벽해보이는 가족의 남편이고 아버지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러하다. 그것을 믿어도 좋은 것일가. 모든 현실이 힘을 합쳐 그를 밀어내고 있다. 땅이 한쪽으로 기우는 듯한 착각에 그는 발끝에 단단히 힘을 준다. 그가 침을 삼킨다. 다리가 저려난다. 이곳을 지나는 뻐스는 네대다. 그는 하나하나 자세히 훑어본다. 이 시간 그가 갈 만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 이대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이 폭발할 것 같은 마음으로 집에 들어간다면 눈앞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것들을 그가 그의 손으로 부숴버릴가 그는 두렵다. 그가 애써 쌓은 탑을 그의 손으로 무너뜨리고 그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주먹으로 땅을 칠 것 같아 그는 두렵다. 꽉 틀어쥔 주먹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모든 것에 무감각해진 그가 멀거니 주먹사이로 빠져나가는 검붉은 액체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게 될가 그는 두렵다. 꾹꾹 가슴속에서 올리미는 충동을 억누르며 그는 눈을 쪼프리고 낯설고도 익숙한 역 이름들을 내리훑는다. 모아산? 여기로 가볼가? 흙의 냄새를 맡고 나무를 만져보고 풀잎이라도 손을 뻗어 쓰다듬고 싶다. 그러면 불덩어리가 들어있는 것 같은 이 마음이 조금 다독여질 수도 있을지 모른다.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하고 생각을 정리하자. 그는 목표를 정하고 오른손을 뻗어 주머니를 뒤진다. 세 개의 짤린 손가락 끝은 물체에 닿을 때마다 아릿하다. 지갑을 꺼내 열어보니 일원짜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주위를 흘깃거리다가 정류장 뒤편에 있는 슈퍼에 들어가 물 한병을 산다. 일원짜리 두장을 손안에 거머쥐고 다시 단단히 섰다. 차가 스르륵 멈춰서고 문이 열리자 그는 훌쩍 올라탄다. 주말이 아니라서 그런가. 차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밖을 내다본다. 꼭 십년 만이다. 십년후 여름, 그는 다시 이 도시로 돌아왔다. 중간에 장모가 돌아갔을 때 닷새일정으로 급히 왔다가 장례만 치르고 떠났었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은 낯설다. 십년 사이, 이 도시는 너무도 많이 변했다. 변하지 않은 것은 그 뿐인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가장 많이 변한 것은 그 자신일 수도 있다. 그는 더 이상 젊고 기운 차지 않으며 열개의 손가락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그는 그가 아니다.    2 그는 안해를 안았다. 왼팔을 안해의 머리께로 뻗자 안해가 기다렸다는듯 그의 팔에 머리를 묻었다. 안해의 몸에서 알싸한 박하향이 풍겼다. 서먹함과 설레임이 교차했다. 내 안해지만 오래만에 살을 대하니 미묘한 낯설음이 있다. 누운 안해는 성숙한 녀자의 매력이 풍긴다. 그는 약간 떨리는 손으로 안해의 등을 더듬어 브래지어의 호크를 풀었다. 그는 잠간 망설인다. 성한 손으로 팔베개를 한터라 잘린 손가락으로 안해를 만져야 한다. 그는 망설여진다. 잠간 주춤하다가 그는 아직 성한 엄지를 안해의 가슴에 가져갔다. 부드럽게 늘어진 가슴이 다소 그의 긴장을 늦추게 한다. 그는 손을 뻗어 가볍게 유두를 만졌다. 그때였다. 안해가 몸을 뒤튼 것은.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였지만 그는 멈칫했다. 가슴에 서늘한 무엇이 비껴 지나가는 순간이였다. 엄지만으로 만지려다가 잘린 손가락이 안해의 가슴에 닿았고, 그 순간 안해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 미세한 동작이였지만 그는 또렷이 느꼈다. 그는 멈칫했다. 눈앞이 아득해지려고 했다. 그 미세한 몸짓의 언어를 알 것 같아서였다. 그는 침을 삼키고 용기를 내여 몸을 일으켰다. 떨리는 손으로 안해의 마지막 한겹을 벗겨냈다. 안해의 그곳은 차갑게 닫혀있었다. 건조했고 경직돼있었다. 그의 남자도 축 고개를 떨구고 도무지 머리를 들 기미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스르륵 안해의 몸에서 손을 거두었다. 애써 짜냈던 한 가닥의 용기도 어부가 그물을 거두듯 스르륵 거두어졌다. 어디선가 풀벌레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허물어지듯 안해한테 등을 보이고 누워버렸다. 안해가 말없이 뒤에서 그의 등을 두어번 쓰다듬다가 스르륵 팔을 거두고 그를 등지고 돌아누웠다.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나 보다. 잠에서 깨여 일어났을 때, 안해의 숨소리만이 적요한 방안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 우뚝 섰다. 카텐 틈새로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방안에 스며들어 안해를 비추었다. 그는 모로 누워 잠든 안해를 들여다보았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가린 안해는 흰 어깨를 이불 밖으로 드러내고 쌕쌕 가벼운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어깨로부터 목까지 이어지는 선이 희고 매끈하다. 뛰여나게 예쁘진 않지만 누구나 탐할 만큼 매력적이다. 게다가 안해는 서글서글한 성품에 친화력이 좋은 편이여서 낯선 사람하고도 어렵지 않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다. 녀자 나이 마흔이면 한창이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안해는 마흔살이다. 염색을 하지 않으면 흰머리가 반을 차지하고 막로동에 거멓게 탄 피부와 제법 굵은 주름이 건너간 그에 비해 안해는 아직 젊고 싱싱하다. 열살이라는 나이차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나이에 비해 훨씬 겉늙어버린데 그에 비해 안해는 나이보다도 훨씬 젊어보인다. 그는 베란다로 나와 담배를 한대 꺼내물었다. 잘린 식지와 중지에 라이터를 끼고 아직 성한 엄지로 라이터불을 당긴다. 세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불을 붙였다. 손가락이 시큰거린다. 고작 라이터불 하나 켜고 시큰거리는 손으로 이제 무엇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정통편이라도 먹어야겠다. 그는 주방 쪽 전등만 켜고 그 불빛을 빌어 랭장고 옆 서랍장을 열고 약상자를 뒤적거린다. 각종 감기약과 소염제가 있다. 그는 하나씩 꺼내 확인해본다. 정통편이 어디 있을 터인데 보이지 않는다. 그때였다. 그 약곽이 눈에 들어온 것은. 약곽의 글자를 확인하는 순간, 그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는 약곽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다시한번 글자를 확인하고 나서 천천히 손을 뻗어 약곽을 열었다. 약은 반이상 빼여먹은 상태이다. 그는 잠간 주춤하다가 약을 도로 상자에 넣고 서랍장을 닫아버렸다. 우뚝 랭장고 앞에 섰다가 랭장고문을 열고 물병을 꺼냈다. 커다란 사기컵에 가득 차가운 물을 담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혼자 사는 녀자가 먹어버린 피임약이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서 있는 바닥이 그대로 밀려나가는 듯했다. 뭔가 희미하던 것들이 또렷해지고 있었다. 일년전 쯤부터였나. 전화를 하면 받지 않다가 다시 지금 전화해줘요 하고 위챗으로 문자가 오던 거며 이제 돌아가서 연길에서 뭐라도 해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 아직은 한국에서 버는 게 낫슴다 하고 한마디의 고려도 없이 보내던 안해의 문자며, 이렇게 오래 갈라져있어서 이제 세식구 같이 있어야 되지 않겠냐는 그의 말에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뭐 하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던 것들, 공항에 마중 나온 안해를 보고 전에 비해 옷차림이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느꼈던 것, 울리는 전화를 그대로 꺼버리며 사기전화가 너무 많이 온다고 과하게 짜증내던 것, 집안에서도 전화기를 항상 갖고 다니던 것, 순간적으로 불쾌했으나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시간의 편린들이 한꺼번에 수면 우로 떠오르며 이제 실체가 확실해지고 있었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들은 결코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아니였다. 그는 방안을 노려봤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도 거실은 잘 정돈돼있음을 알 수 있다. 안해는 정리정돈을 잘한다. 텔레비죤도 쏘파도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반듯하게 놓여있다. 건조대의 빨래도 반듯하게 걸려있다. 안해는 누구한테나 잘 웃어주며 서글서글한 인상이다. 원래 하얀 피부가 좋은 화장품을 쓰며 잘 가꾼 탓인지 탄력 있고 윤기가 흐른다. 무엇보다 아직 젊다. 눈이 있는 사람은 모두 안해를 볼 것이며 안해의 이러한 매력을 느낄 것이다. 왜 이 생각을 못했을가? 왜 그토록 미련하게 돈을 버는 일에만 미쳐있었을가? 한주에 한번 하는 전화통화도 거의 아들애에 관한 거였으며 늘 지쳐있어서 위챗으로도 길게 얘기를 해본 적이 별로 없다. 그는 살가운 말을 할 줄 모른다. 남자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돈을 버는 것만이 가장의 의무이며 책임이라고 생각했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후회되고 있었다. 그는 머리속이 헝클어진 실타래마냥 마구 엉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을 감았다. 그가 서 있는 오른쪽 방에는 사춘기의 아들애가 단잠에 빠져있을 테고 텔레비죤 옆으로 문이 나있는 큰방에는 그의 안해가 잠들어있다. 모든 것이 잘 정돈된 서랍 같은 온전한 가정이다. 그는 이 온전한 가정의 가장이고 남편이며 아버지이다. 그가 악을 쓰듯 지켜내고저 했던 것들이다. 그는 이것들을 이룩하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해왔고 한번도 후회한 적 없다. 언제까지나 후회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이 한꺼번에 후회되는 순간이 오게 된 것이다. 그가 이 가정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엄연하다. 아니, 엄연하다고 믿고 싶다. 이 온전한 것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였다. 틀어쥔 주먹 안에서 뜨거운 열기가 차오르고 있음을 느끼며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 자신은 지금 이 모든 것을 부수어버릴 수도 지켜낼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그의 손안에 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며 그는 두려워졌다. 두려움에 뒤걸음질쳤다. 그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3  여기가 모아산인가? 십년 전에 비해 눈이 홱 돌아갈 정도로 모아산은 변신해있다. 기차역에 있던 호랑이가 모아산입구에 떡하니 와서 앉아있고 사람 손이 많이 간듯 화단에 꽃이 예쁘게 피여있다. 작은 나무정자도 보인다. 모든 것이 잘 가꿔져있다. 화장실도 번듯하게 세워져있다. 그는 화장실로 들어간다. 번듯한 외관과는 달리 냄새가 진동을 한다. 손을 씻으려고 보니 비누 한쪼각 보이지 않는다. 여긴 겉만 번지르르하네. 그는 중얼거리며 화장실을 나온다. 한참 섰다가 길을 가로질러 나무계단 밑에 이른다. 계단을 따라 오른다. 여름샌들을 신었지만 걷는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계단은 평평하게 만들어져있다. 숲에서 풍겨나오는 아침공기는 제법 시원하다. 앞에서 등산차림을 한 중년 녀자 두명이 팔을 앞쪽으로 내밀어 기역자로 뻗으며 힘차게 걷고 있다. 이 정도 산도 산이라고 옷차림을 갖추고 나왔남. 그는 괜히 아니꼬와진다. 그러고 보니 추리닝에 곤색 반팔티를 입고 샌들을 신은 그가 산에 더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푹 웃음이 나온다. 두 녀자가 쫑알거린다. 한국에 있을 때는 말이야. 그때는 그렇게 연길 오고 싶었는데 오니까 또 가고 싶어. 왜 이런거야? 그래? 실은 나도 그래. 왜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또 가야지? 그럼. 가야지. 아마 그녀들도 그처럼 한국에서 금방 날아온듯 싶다. 하긴 요즘 연변사람치고 한국에 한번이라도 안 가본 사람이 있을가. 그만큼 한국은 가까운 곳이다. 한국에서 돈을 벌고 울고 웃고 그 한국 때문에 그도 촌에서 이 도시로 이사를 오고 아빠트에서 살게 된 것이고 그 한국에서 손가락 세개가 잘렸다. 그 한국에서 보낸 십년동안 그는 일에 목숨 건 사람이 되여있었고 안해는 다른 남자의 품을 그리워한 것이다. 그는 가슴에 통증이 느껴진다. 계단을 오르다가 보니 계단 옆에 크고 작은 돌들이 탑을 이루고 있다. 하나하나씩 쌓은 돌들이 저렇게 탑을 이루다니.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기에 돌을 올려놓은 거야. 누가 저렇게 소원들을 많이 빌었을가? 무슨 소원을 빌었고 그 소원들은 얼마간이라도 이루어지긴 했을가? 그가 녀자를 본 것은 그 찰나였다. 돌탑으로부터 눈길을 거두던 그 순간, 녀자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그와 대각선으로 서서 돌탑을 바라보고 있는 녀자. 안해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녀자는 작고 마른 체구에 옆얼굴이 까무잡잡하다. 녀자는 무슨 소중한 걸 바라보듯 돌탑을 노려보다가 결심이라도 한듯 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서 돌탑으로 다가선다. 가장 큰 돌탑 앞에 멈춰서서 팔을 한껏 추켜올리더니 꽉 잡았던 주먹을 펼쳐 손바닥 절반도 안될 만큼 작은 돌을 조심스럽게 탑 가장자리에 올려놓는다. 잠간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듯 서 있던 녀자는 뒤걸음질로 물러서서 다시 돌탑을 바라본다. 그가 녀자를 흘깃흘깃 바라보는 순간 녀자도 그의 시선을 느낀 걸가. 녀자의 눈과 그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녀자가 혀를 홀랑 내민다. 돌탑을 바라볼 때 녀자는 세상을 다 살아버린 사람 같은 표정이였다면 그를 향해 혀를 홀랑 내미는 녀자는 아직 때 묻지 않은 무구함을 갖고 있다. 마흔중반쯤 되였을가? 아니 어쩌면 그보다 어릴 수도 더 나이 들었을 수도 있으리라. 녀자 나이란 그렇게 가늠하기 쉬운 것이 아니지를 않은가. “저기…” “네?” 녀자가 웃으며 머리를 가리킨다. 그는 얼떨결에 손을 머리께로 뻗었다. 뭔가 뭉클 손에 잡힌다. 손을 내려보니 기억에 가물가물한 나무에 붙어사는 파란 벌레다. 그는 손을 흔들어 털어버리고 게면쩍게 웃었다. “등산 좋아하시나 봄다. 이 아침에 여기까지 올라오신 걸 보니.” 녀자가 웃으며 말을 건넨다. “아… 네. 뭐.”  그가 말끝을 흐린다. “사실은 머리가 아파서. 아 그게 아니고…” 그는 자신의 답변이 너무 어설프다고 생각하며 과장되게 소리 내여 웃는다. 녀자가 웃어보인다. 돌탑을 다 쌓았으니 볼일을 다 본 모양인지 돌아서서 계단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간다. 멀거니 녀자의 뒤모습을 바라보다가 급기야 그는 녀자가 간 쪽으로 걸어간다. 왜 그쪽으로 가는지는 그도 말할 수 없다. 그냥 발이 그쪽으로 갔다라고 하는 게 리유라면 리유가 될 수 있겠다. 아무튼 그는 그렇게 간다. 너무 바싹 따라가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녀자의 뒤를 따라갔다. 안해는 지금 쯤 뭐하고 있을가? 아들은 학교에 갔을 테고 안해는 늦은 아침을 먹고 있을가? 이른아침에 집을 나간 그를 생각하고 있을가? 그는 지난 십년을 생각한다.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지났고 안해는 이제 더 이상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고 그만 알던 순하디 순한 어린 녀자가 아니다. 막말을 번지기 시작하던 아들은 이제 코밑이 거뭇해지고 묻는 말에 건성으로 대답한다. 그가 비행장에서 훌쩍 커버려 그의 아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아이한테 두 팔을 벌려 껴안으려고 했을 때 아이는 어색한듯 고개를 돌렸다. 뭉텅 짤려나간 필름같이 그 십년의 간격을 넘어 어떻게든 앞뒤로 맞추어보려고 해도 도무지 맞추어지지 않는 퍼즐이 그의 현실인 것 같다. 그가 욕망에 몸부림치며 보냈던 그 불면의 밤들에 그의 안해도 욕망으로 달구어진 몸을 뒤척일거라는 생각을 왜 못했던 걸가? 참아야 한다고 이겨내야 한다고 악을 쓰듯 살아온 십년, 과연 무엇을 이겨냈고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그는 답할 수 없어 막연해진다. 어제 밤, 그의 잘린 손가락이 가슴에 닿았을 때 안해는 어떤 느낌이였을가? 방금전 그가 느꼈듯이 벌레가 기여가는 징그러운 느낌이였을가? 안해는 잠간 비껴나갔던 거고 가정을 지키려고 지금 애쓰고 있는 걸가? 만약에 그렇다면 그가 이 화산 같은 마음을 억누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걸가? 발밑에 묵은 나무잎들이 밟힌다. 해살이 나무가지 사이로 비춘다. 그는 제법 통이 굵은 나무를 손으로 짚어본다. 그는 자신에게 묻는다. 아무 것도 못본듯이, 아무 의심 없이 모든 것에 태연할 수 있냐고. 그러나, 그는 대답할 수 없다. 고개 들어보니 녀자는 보이지 않는다. 배가 고파난다. 간이의자에 앉았다. 먹을 것은 없다. 그는 물을 한모금 마신다. 식어버려 미지근한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4  그는 안해를 처음 만났던 때를 생각한다. 그와 안해는 중매로 만났다. 그때 그는 적은 월급이나마 받는 림업국산하 검측원이였다. 어찌하다 보니 서른을 막 넘기는 차에 친한 형의 안해가 중매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고 딸 둘이 엄마랑 사는 시골아가씨인데 만나보지 않겠냐고 했다. 장가갈 나이가 찬 로총각인 그에게 이런 중매자리는 고마울 수 밖에 없었다.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는 면도를 하고 최대한 잘 차려입고 아가씨를 만나러 갔었다. “애기구나.” 안해를 마주한 순간 든 생각이였다. 금방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안해는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단둘이 마주한 그 시골집에서 안해는 애매한 비자루만 잡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난 그쪽보다 나이가 열살이나 더 많고 그렇게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성실하신 분이라고 들었슴다. 동생 공부시켜주시고 어머니 돌봐주시면 저는 다른 요구는 없슴다.” 뜻밖에 안해의 목소리는 옹골졌다. 뭔가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였다. 그는 안해를 바라보았다. 눈가에 이슬이 촉촉히 맺히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뭉클했다. 오죽했으면 저렇게 눈물을 보이랴. 그는 저 아기 같은 녀자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여름에 만난 그들은 몇번의 어설픈, 련애라고도 말하기 힘든 만남을 가지고 그해 겨울 결혼했다. 그는 약속대로 처제가 공부할 수 있게 뒤바라지를 했고 장모님을 가까이 모셔왔다. 그의 집에는 그 외에도 아들이 두명 있었으므로 그는 처가집의 아들이자 사위로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그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였다. 안해는 그런 그한테 고마워했다. 아버지 없는 집의 큰딸답게 안해는 어리지만 철이 든 녀자였다. 아들을 낳고 애기 키우는 일에 열중했으며 살림도 알뜰하게 했다. 그는 행복했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기를 원했다. 아기 같은 안해가 옹골지게 살림하고 아이랑 노는 걸 보는 게 기쁨이였다. 그는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느꼈다. 그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기를 바랐다. 셋이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서로 마주보며 웃고 밤이면 그와 안해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손을 뻗어 지치도록 사랑을 나누며 그렇게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국바람이 불고 먼저 약삭빠른 사람들이 나가서 돈을 벌어 도시에 아빠트를 사고 이사를 가고 차를 사고 미처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삶을 시작하자 그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안해는 누구누구네는 시내로 이사간대요. 누구누구네는 아빠트를 샀대요. 우리 건이도 시내 가서 공부시키면 좋을 텐데 하고 언제부터 그를 할깃거리며 넌지시 말을 던져왔다. “그래, 까짓거 나도 나가보자. 나가서 몇년만 고생하고 오면 될 텐데. 내 자식도 마누라도 남한테 뒤처지게 하지 말아야지.” 어느 푸른 새벽, 드디여 그는 결심했다. 아들애의 볼에 입 맞추고 눈물짓는 안해한테 애써 웃어보이고 돌아서서 그도 눈물을 훔쳤다. 드디여 그도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산을 누비며 림장일로 뼈가 굵은 그에게 한국에서 막로동을 하는 건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힘든 일은 아니였다. 노가다도 하고 회사도 다니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빨리 돈을 벌어서 돌아갈 생각으로 그는 일에만 매진했다. 정신없이 일을 할 때는 아무 생각 없다가 일을 끝내고 텅 빈 자취방에 들어서면 쓸쓸함이 한가득 몰려왔다. 그는 이겨내야 한다고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다. 일주일에 한번 집으로 전화를 해서 안해와 아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걸 위안으로 삼아 다시 새로운 일주일을 버텨갔다. 어느 정도 돈이 모여지자 그들은 이사를 계획했다. 그는 작은 아빠트를 사려고 예상했지만 안해가 애가 크면 공부방이 있어야 되고 학교가 가까워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대출을 해 안해가 원하는대로 방 세칸짜리 아빠트를 사고 시내로 이사왔다. 한층 부담이 커졌지만 그는 묵묵히 일을 했다. 안해가 고생할가 봐, 애가 다른 애들한테 뒤처질가 봐 그는 돈을 버는 족족 안해한테 보냈다. 생활에 쓰고 나머지 돈은 모으라고 했다. 곧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하지만 세상에 뜻대로 되는 일이 있던가. 장모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동안 모은 돈은 장모의 치료비로 다 들어갔다. 일년후 장모가 돌아갔다. 그는 부랴부랴 청가를 맡고 비행기를 탔다. 돌아와보니 번듯한 집에 현대식 가전, 가구들이 즐비한 집에서 제법 도시티가 나는 안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애는 들어올릴 수 없게 커있었다. 안해는 전처럼 돈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먹고 쓰는 물건들은 모두 고급이였다. 그는 그동안 아끼고 아끼며 살아가던 자신을 생각하며 한숨이 나왔다. 돈을 얼마나 더 벌어야 되는 것인가. 아득했다. 안해는 시내로 오니 물가도 비싸고 학원비도 많이 들고 돈이 많이 남지를 않는다고 했다. 안해는 물질적인 것에 눈을 뜨고 있었다. 그는 막연했지만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는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며 좀더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 외에 그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가장이고 남편이고 아버지라면 이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것이 그를 착잡하게 했지만 돈만 더 번다면 그것 또한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돌아가야지.” 그 무렵 그를 다급하게 하던 생각이였다. 그는 초조해지고 있었다. 십년이 가까워온다. 그 사실을 생각하자 그는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전화기너머로 아들애의 목소리가 굵어지고 있었다. 부부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데 어영부영 십년 가까이 되는 시간이 흘렀지 않은가. 지금까지 가정이 잘 유지된 것만도 생각해보면 천만다행이다. 한몫 쥐고 들어가겠다는 욕심은 여전하지만 한집 건너 리혼했다는 세월에 이러다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 아닌가. 그는 남은 시간에 돈을 좀 더 벌고 이제 지체 말고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사고는 귀국을 앞둔 두달전 쯤에 일어났다. 순식간이였다. 돈을 좀더 벌 목적으로 산에서 풀 베는 일을 시작한 지 삼일째 되던 날이였다. 그날따라 몸이 찌부둥했다. 일을 시작해서 얼마 안됐을 때 눈앞에 날아가는 말벌을 쫓느라 고개를 한쪽으로 튼 순간,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면장갑을 낀 손이 제초기에 빨려들어갔다. 억, 신음이 나갔다. 옆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달려와 제초기를 멈추고 그의 팔을 끄집어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면장갑이 피범벅이 되여버렸고 손가락 쪽이 너덜너덜해져있었다. 그는 그저 멍해있었다. 장갑을 벗고 손가락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할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구급차가 오고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그는 그저 모든 게 꿈이기를 바랐다. 기적처럼 손가락에 아무 이상이 없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꿈이 아니였다. 그는 그 순간의 사고로 인해서 손가락 세개가 중간을 짤린 채로 병원문을 나서야 했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인가? 그는 무감각한 상태로 십년의 시간들을 보낸 방을 정리하고 아릿한 손가락을 놀려 짐을 쌌다. 산재보험으로 받은 이천만원이 든 손가방을 옆구리에 꽉 낀 채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올랐다. 드디여 돌아가는 것인데 이상하게 모든 것이 아득해지려고 했다.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그는 눈을 껌벅였다. 비행기 차창너머로 손을 뻗으면 만져질 듯한 하얀 구름이 끝없이 펼쳐져있었다. 이상하게 아무런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구름 우를 걷는듯 꿈과 현실의 경계사이에 있는 듯한 느낌이였다.   5  불쑥 검은 주머니가 그의 눈앞에 들이밀어진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까 보았던 녀자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심까? 한참 서있었는데도 모르게. 이걸 좀 잡수쇼. 아침도 안 드셨을텐데.” 녀자가 내민 주머니를 엉겁결에 받아들고 열어보니 일회용도시락곽에 김밥이 반정도 남아있다. “얼른 잡수쇼. 난 배부르게 먹었으니 걱정마시구.” 녀자가 살갑게 권한다. 그는 망설이다가 김밥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쌀이 퍼진 건가. 김밥은 입안에서 질척거린다. 하지만 배가 고팠던 차라 그는 김밥을 연신 집어 입에 넣는다. 엇. 얼결에 그의 눈이 굳어졌다. 녀자의 유두 한쪽이 빼꼼히 얇은 등산티 우로 솟아올라있다. 스멀스멀 동물적인 남자의 욕망이 뱀이 머리를 쳐들듯 쳐드는 걸 느끼며 그는 민망해졌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물을 한모금 마셨다. 녀자는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으로 날씨가 너무 덥다면서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녀자의 얇은 옷을 아무렇게나 찢어버리고 새침하게 솟아오른 녀자의 유두에 입술을 갖다대고 걸탐스럽게 탐하고 싶어졌다. 녀자를 쓰러뜨리고 등산객들이 다 뒤집어지게 녀자의 속옷까지 찢어버리고 싶어져 얼굴을 붉혔다. “잘 먹었습니다, 배가 고팠는데.” 그는 괜스레 녀자한테 미안해졌다. “뭐하는 분이심가? 주말도 아닌데 이 아침에 등산 다니시는 걸 보니 출근하시는 분은 아닌 것 같구.” 녀자는 샐쭉 웃어보이더니 말끝을 흐리며 그의 얼굴을 살핀다. “그럼 그쪽은 뭐하는 분임가? 아침에 밥도 안하고 이렇게 나오시구.” 그는 녀자의 얼굴을 흘깃 살폈다. “아. 뭐 좀 함다. 장사를.” “아…” 녀자는 그냥 봐도 장사를 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어딘가 어수룩해보인다. 사회경험도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어쩐지 녀자는 가정주부가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초면에 너무 자세히 물어보는 건 실례인 것 같아 말끝을 흐린다. “저기 내려가서 식사하러 안 가시겠슴가? 김밥도 잘 먹었는데 밥 한끼 사기쇼.”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녀자는 대답대신 웃더니 먼저 앞서서 내려간다. 몇시 쯤 되였나. 해빛이 델 것 같이 뜨겁다. 이 녀자는 뭐하는 녀자인가? 그냥 봐서는 시골아낙네같이 어수룩해보이는데 이른아침에 밥도 안하고 산에 와서 돌아다니고, 그렇다면 챙겨야 할 식구가 있는 녀자는 아닌듯 싶고. 그건 그렇고 지금 나는 제정신인가? 멀쩡한 안해를 집에 두고 처음 본 녀자 뒤꽁무니나 따라가고, 멀쩡한 안해, 갑자기 그는 도망치고 싶다. 모든 현실에서 도망쳐 멀리멀리 떠나버리고 싶다. 그는 하늘을 쳐다본다. 파란 하늘은 건뜻 들려있다. 화창한 날씨이다. 잔등이 축축해난다. 이마에서 땀이 뚝하고 떨어진다. 그는 손등으로 땀을 훔치며 걷는다. 녀자의 뒤를 따라 산을 내린다. 뻐스정류소에 이르러 녀자와 한걸음 떨어져 서서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본다. 점심때가 다 되는 시간이였다.   6  “아…” 그의 입에서 탄식처럼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이게 절대로 다단계는 아님다. 뭐 내가 다단계를 소개하겠슴가. 그냥 1688원 주고 가방이나 이불세트 사면 자기 가게 하나 가진단 말임다. 면세점 물건이고. 이보쇼. 물건이 영 좋슴다.” 녀자는 핸드폰을 그에게 내밀었다. 가방이며 향수며 진렬된 인터넷가게다. “정말 이건 첨에만 투자하면 그담에는 누워서 자는 시간에도 돈이 술술 들어옴다. 내 밑에 누가 가입하면 가입비 들어오고 내가 물건 사도 돈이 들어옴다. 나두 몰랐는데 친한 친구 이거 한단 말임다. 그래가지구 친구 소개로 가입해봤는데 아직 나는 돈은 못 벌었슴다. 친구는 돈을 마이 범다. 나두 지금 열심히 노력하는 중임다. 같이 해보지 않겠슴가? 아무래도 집에서 쓸 게 많잼가. 그런거 사면서 또 돈도 번단 말임다. 한국에랑 가서 죽게 일해서 돈 버는 건 정말 우둔한 짓임다. 다들 형세를 몰라서 그랜단 말임다. 이제는 한국 가지 마시구 요거 하쇼. 그래구 다른 것도, 내 항목 몇개 소개해드릴게. 다 친구 하는겜다. 몇개만 하면 정말 앉아서 돈 벌게 된단 말임다.” 이게 말로만 듣던 다단계라는 건가? 녀자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여있다. 녀자의 말투는 자신 있지 못하다. 약간 더듬거리면서 그에게 자신도 딱히 모르지만 친구는 돈을 잘 버는, 소위 앉아서 누워서 돈이 들어오는 일을 설명하고 있다. 녀자가 못 먹는다고 돈 랑비하지 말라고 극구 만류해서 명란볶음 하나에 오이랭채만 시켰었는데 그마저도 반도 축나지 않고 있다. 애초부터 녀자는 먹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걸가. 그는 아까부터 맥주 한잔을 놓고 홀짝거리는 녀자의 잔을 채워주고 자신의 잔에 맥주를 넘치게 부었다. 잔을 들어 단모금에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음이 평정을 찾고 있었다. “내 화장실 좀 다녀오기쇼.” 녀자한테 량해를 구하고 그는 화장실로 갔다. 오줌줄기가 길게 뻗어나간다. 녀자는 이 일을 금방 시작한 게 틀림이 없다. 누구를 속일 만큼 절대 영악해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속히우기 쉽게 순해빠진 인상이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가? 남편이 없어서 혼자 벌어서 살아야 되는 녀자인가? 녀자가 지금 하고저 하는 것이 무엇이면 어떠한가. 다단계라도 좋다. 어쨌거나 녀자는 저토록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삶에 애착을 가지고 애쓰고 있다. 그는 지난 십년간 아침마다 깨여나면 오늘 하루도 열심히 돈 벌자고 웨치던 호기롭던 자신을 생각한다. 자칫 잊을 번했던 단단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그는 마음이 저릿저릿해난다. 이름 모를 녀자는 그가 잊고 있었던 그의 내면의 것들을 깨우고 있었다. 뇨도에 마지막 남은 한방울까지 짜내고 그는 지퍼를 잠그고 돌아섰다. 녀자는 그가 음식값을 지불하는 동안 밖에 나가 기다리다가 그가 나가자 어색하게 웃으며 어디 가서 커피라도 하고 말끝을 흐린다. 녀자는 그새 브래지어를 정돈해서 티 우로 크지 않은 가슴이 얌전하게 내밀어져있다. 아까 산에서 녀자의 반팔티 우로 솟은 유두를 마주했던 그 격정은 온데간데 사그라들고 없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누이동생이나 오래된 친구처럼 그는 녀자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는 다음에 봅시다 하면서 녀자한테 웃어주었다. 녀자도 별 뜻 없이 한 말인듯 푹 웃더니 고개를 숙여보이고 돌아선다. 그는 녀자의 뒤모습을 바라본다. 작고 마른 녀자의 걸음걸이는 뜨거운 해빛 탓인지 지쳐보인다. 그는 녀자의 신발이 많이 닳아있음을 느낀다.     7  그가 추적추적 걸어서 집에 돌아왔을 때, 안해는 어데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집은 아침에 청소를 한듯 바닥이 알른알른하게 닦여있다. 식탁에 씌워져있는 흰색의 보자기를 거두자 정갈한 반찬이 차려져있다. 더운 날에 맥주를 마셔서인지 숨이 차다. 그는 주방에 우뚝 섰다. 그가 밖에서 헤매고 있는 동안 여기에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가 헛헛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몸부림치고 있을 때 적어도 그를 기다리는 것들은 존재했다. 아니, 있었다고, 존재했다고 이 순간 믿고 싶다. 뭉텅 잘려져 나간 필림 같다고 여겨졌던 십년, 도무지 맞추어지지 않는 퍼즐 같아 그가 절망했던 그 십년은 그냥 잘라져 나간 것만은 아니라고 이 순간, 그는 굳게 믿고 싶다.  그는 핸드폰과 지갑을 식탁에 놓고 빨래건조대에서 팬티를 집어들고 화장실로 갔다. 입었던 옷을 모조리 벗어 세탁기에 처넣고 갈아입을 팬티는 세탁기 우에 놓고 샤와기를 집어들었다. 윽. 그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낸다. 물이 너무 차가워서이다. 세수비누로 온몸에 비누칠을 하고 몸을 문질러댄다. 형편없이 쪼그라든 그의 남자는 수도꼭지처럼 얌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는 손을 뻗어 천천히 그의 남자를 문질러 씻는다. 손가락 세개는 잘려나갔지만 아직 엄지와 새끼손가락은 붙어있다. 그는 새끼손가락을 쳐들어본다. 적당히 굵은 그것은 너무 멀쩡하다. 그는 세상을 향해 유혹하듯 그것을 까댁까댁해본다. 웃음이 나온다. 새끼손가락으로 세상을 향해 푹 찔러보고 싶어진다. 그는 주먹을 쥐여본다. 엄지가 세개의 잘린 손가락을 감싸고 새끼손가락이 받쳐주어 하나의 주먹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세상 어디를 향해서든 충분히 내지를 수 있는 주먹이였다. 그는 어깨를 펴고 몸을 곧게 핀다. 그때, 그의 남자가 빼꼼히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고, 죽었다고 생각할 때에도 사실은 안에서 멀쩡하게 살아숨쉬고 있었다고 시위라도 하는 듯했다. 그는 까댁까댁하면서 머리를 들고 있는 그것을 멀거니 바라본다. 어디서 개업이라도 하는 걸가. 밖에 폭죽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탕탕탕. 탕탕. 그는 샤와기를 끄고 조용히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밖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자동차의 경적소리, 아직 끝나지 않은듯 퉁탕하고 끊기다가 또 울리는 폭죽소리가 들려온다. 그 모든 소리들을 들으며 그는 그렇게 주먹을 틀어쥐고 거인처럼 우뚝 서 있었다.  
8    [수필] 길목에 서서 댓글:  조회:395  추천:0  2019-07-16
길목에 서서 김경화   아침산책을 한다. 10월의 막바지에 이른 북방의 아침은 은근히 매섭다. 나는 그 옷깃을 여미게 하는 매서움이 짜릿하다. 동쪽으로, 서쪽으로, 남과 북으로, 나는 매일 순례길에 나선 성실한 구도승이 되여 길을 밟는다.  그 길에서 나는 많은 것을 만난다. 계절을 알리는 락엽을 만나고 물이 제대로 올라 가슴께가 푸르고 아래도리가 정결하게 흰 북방의 가을무우를 무더기로 만나 괜히 가슴이 설레인다. 무심코 길을 가다가 우연하게 친구를 만나 총알처럼 뛰여가 얼싸안는 어떤 소녀의 터지게 환한 얼굴을 만난다.  사람냄새가 지분처럼 묻어있던 골목은 재개발을 앞두고 허연 뼈를 드러내고 있다. 처연하게 치부를 드러낸 녀인네처럼 그것은 쓸쓸하다. 나는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해 한참을 머뭇거린다.  터벅터벅 가다 보면 어떤 길이든 끝나는 시점이 있다. 다행스럽고 허전한 마음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이 길이 끝나는 것처럼. 한순간, 깨달음을 얻은 현자의 마음이 된다. 사랑이 영원할 것을 믿었던 시간이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픈 사랑은 지구 저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까마득한 일인듯 착각했거나 혹은 그렇게 믿고 싶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던 시간이 있었다.  깊이 사랑했을 때, 처절하게 아플 것이라는 예상도 했어야 했지만 온통 나한테는 무지개빛만 비출 것이라고 헛된 상상에 사로잡혔던 시간이 있었다.  그 영원하리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던 사랑이 퇴색하고 깨여지는 동안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오직 텅 빈 가슴을 그러안고 신음하는 일 뿐이였다.  바람이 분다.  이마가 서늘하다.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걸 알기에 비로소 사랑도 소중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아플 수 있어서, 영원하지 않아서, 어쩌면 사랑은 더욱 아름답고 우리는 사랑을 열망하는 건 아닐가. 사랑 이외의 것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영원을 살고, 이 모든 우주의 만물이 퇴색하지도 변화하지도 않고 정지된 시간처럼 우리 곁에 머물러있는다면, 천년을 산다 한들 만년을 산다 한들 무슨 재미가 있으랴.  권태가 우리를 바줄처럼 꽁꽁 묶어버려 우리는 질식해 죽어버리고 말 것이 분명하다.  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매서움이 곧 사라지고, 견딜 수 없는 추위가 몰려와 내 몸이 옴츠러들게 하고, 눈이 내리고 칼바람이 몰아치고, 그러다가 또 시간이 흐르면 따듯한 바람이 불어오고 새싹이 돋아날 것이라는 걸 알기에, 내 얼굴에 스치는 이 칼날의 단면 같은 선뜩한 느낌이 그리 오래 가지 않을걸 알기에 지금의 이 매서운 감각이 더욱 짜릿할 것이다.  사람의 인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 아이의 지금의 모든 순간이 소중한 건 아이는 곧 성장할 것이며 그래서 지금의 이 순간이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부모님 역시도 나이가 들고 늙고 병들고 언젠가는 생명이 다해 내 옆을 떠나갈 것임을 알기에 지금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순간이 소중할 것이다.  어떤 인연 혹은 스치는 모든 사물들 역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깝게는 내 자식과 부모 친구. 가끔 가다 얼굴을 부딪치는 이웃들. 멀리는 무심히 길거리에서 만나는 나와 별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 나와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먼 나라의 사람들. 그리고 이 바람, 이 공기, 저 나무와 풀과 돌멩이 하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자리 그 곳에 다시 그 사람이, 그 물건이 있을지라도 지금과 똑같은 모습과 똑같은 상황은 아닐 거라는 걸 알기에 소중할 것이다.  지현. 성주. 사랑해. 언젠가 등산길에서 만난 돌멩이에 새겨진 사랑의 증표를 기억한다. 그렇다.  저들은 사랑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기에 기어이 저 돌멩이에까지 두 사람이 사랑하는 순간의 그 절절한 마음을, 너무 사랑해서 심장마저 아파나는 그 마음을 증표처럼 검은 글씨로 새겨놓고 두 이름 사이에 심장 같은 하트를 새겨놓았을 것이였다.  사랑이 처음 그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면 어떠할가. 항시 처음 만나던 그 순간처럼 설레고 가슴이 두근거린다면 누군가의 말처럼 심장이 고장나서 죽어버리기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 두근거림은 희소성이 떨어져 대단한 게 아니게 될 것이다.  사랑이야 두 사람의 마음속에 뿌리 내려 서로를 이어주겠지만 어떤 련인도 설레고 두근거리는 시간은 일정한 기간 뿐이다. 그래서, 영원하지 않아서, 지극히 짧은 동안만 설레고 두근거리기에 사랑은 더욱 소중하고 사랑은 영원한 화제이고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모든 남녀가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찾아나서는 것이 아닐가.      길은 끝난다. 영원토록 이어지는 길은 없다.  길은 끝난 게 아니다.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진다. 이 길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몹시도 망연한 마음이 되였는데 또 다른 길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가 끝난 게 아님을 알게 해주어서 참으로 다행스럽다. 하나의 길이 끝나는 길목에 서서 또 다른 길을 한참을 바라본다.  내 하나의 사랑은 갔지만, 이 길처럼 언젠가는 또 하나의 사랑이 내 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 때가 오면 나는 두려움 없이 저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가리라.  바람이 분다. 나는 옷깃을 펄럭이며 그림처럼 서있다. 마음에 맑은 샘물이 차오르는 순간이다.  출처:2018 제6호
7    [중편]알바트로스 댓글:  조회:272  추천:0  2019-07-15
알바트로스  김경화     1. 베개 근처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는다. 몇번의 더듬거림 끝에 부르르 몸을 떠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손가락의 느낌만으로 통화버튼을 누른다. “홍화씨 오늘 출근 안해? 야간 아니야?” “네? 아.” 나는 비명인가 탄식인가 구분하기 어려운 신음을 뱉어내며 벌떡 일어나앉는다. 베란다와 통하는 문에 검은 비닐을 테이프로 붙여놓은 집안은 칠흑같이 어둡다. 휴대폰 상단에서 깜빡거리는 시계를 보니 6시 40분을 막 넘어서고 있다. 미쳤어. 정말. “지금 깨난 거야?” “예. 아저씨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할 게 뭐 있어. 홍화씨가 통근차를 못 타는 게 걱정이지. 기다렸으면 좋겠는데 금방 못 나오지?” “예. 그렇죠.” “그럼 못 기다리겠네. 어떡해?” “아저씨 걱정 말고 가세요. 저 택시 타고 갈게요.” “택시비가 많이 나올 건데. 그래 알았어. 이따가 봐.” “예. 아저씨 이따가 뵈요.” 휴대폰을 내려놓고 나는 허겁지겁 화장실로 달려간다. 화장실까지 가는 그 몇초 동안에 시간 계산을 해본다. 세수하고 치솔질하고 오분, 택시정류장까지 걸어나가는데 십분, 회사까지 택시로 넉넉 잡아 반시간 정도 걸릴 것이니 지각은 안할 것 같다. 머리는 감을 수 없겠군. 하고 생각하며 힐끗 거울을 보니 머리가 봉두란발이라 이대로 출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세면대에 마주서서 세수를 하고 대충 두어번 치솔로 이발을 문지르고 푸푸 입안의 치약거품을 빠르게 헹궈낸다. 치약거품이 세면대에 허옇게 묻어 물을 틀고 그것을 씻어내려보낸다. 치솔질을 끝내고 잠간 망설이다가 세면대에 마주서서 다시 수도물을 틀어놓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앞머리만을 적신다. 샴푸를 조금 짜서 앞머리에 바르고 거품을 내고 바로 씻어내린다. 머리카락이 세면대 하수구로 들어가 세면대가 막혀버릴가봐 신경이 쓰이지만 어쩔 수 없다. 요즘 들어 세면대에서 앞머리만 감고 출근하는 날이 부쩍 늘어간다는 생각에 가슴 한켠이 찔린다. 한달만 버텨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기숙사 생활을 할 때 세면대에서 머리 감는 애들 때문에 세면대가 자주 막혀 몇번 힘들게 뚫고 나서 세면대에선 세수만 하세요. 막히면 본인이 뚫으세요. 하고 써붙였던 게 나라는 생각을 한다.  요즘의 나는 이렇다. 많은 걸 생략하고 건너뛰고 있다. 삶의 세세한 것들을 신경 쓰고 챙길 수 없다는 건 그만큼 내 삶이 안정적이지 못하고 내 육신이 지쳐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문지르고 드라이기를 코드에 꽂고 제일 강한 뜨거운 바람을 앞머리에 대고 확 불어버린다. 얼굴까지 화끈거린다. 앞머리만인지라 몇번 반복하자 금방 물기가 빠진다. 나는 채 마르지 않은 앞머리를 대충 손으로 헝클어뜨리며 회사까지 가는 동안 마르겠지 하면서 화장실에서 나온다.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선크림을 바르고 나니 오래동안 해빛을 보지 않은 탓에 얼굴색이 너무 피기 없이 허옇기만 하다. 분홍색 립스틱을 바르고 나니 그런 대로 거리에 나서면 환자로 오해하진 않겠다 싶다. 건조대에서 작업복인 진한 잉크색 반팔티를 건져올려 입고 손 가는 대로 청바지를 집어 다리에 꿰고 문어구에서 퇴근하면서 놓아둔 가방을 들어올려 안을 헤집어본다. 어제 저녁 야식용으로 나온 우유와 빵이 그대로 들어있다. 나는 미지근한 우유를 랭장고에 집어넣는다. 랭장고에는 벌써 같은 우유가 여러개 들어있다. 먹지는 않고 류통기한이 지나서 맨날 싱크대에 부어버리면서도 손 가는 대로 랭장고에 남는 우유를 넣는 건 그러니까 그걸 먹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습관이다. 나는 몇개의 각기 다른 종류의 빵이 놓여있는 부엌 싱크대 옆에 놓인 비닐봉지에 가방에서 꺼낸 빵을 넣어버린다. 이것 역시 먹으려고 하는 건 아니다. 곧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바로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놔둿다가 류통기한이 지나야 비로소 버릴 수 있게 된다. 나라는 인간이 그렇다. 다시 가방을 거머쥐고 신발을 신는다.  집을 나서자 낮이 긴 여름이라 아직은 환하다. 나는 골목길을 벗어나 공공뻐스 정류장에 2분 정도 서있다가 무단횡단을 하여 길을 건넌다. 길을 건너던 승용차에서 어떤 남자 하나가 눈을 부라리며 뭐라고 한다. 검은색의 차체가 긴 승용차는 차에 대해 문외한인 내 눈에도 어마어마하게 비쌀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생겼다. 나는 입모양과 손짓만으로 그가 지금 나를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으로 몰아가는지 알지만 무신경하게 한번 바라보고 태연히 길을 건넌다.  택시가 줄느런히 서있는 승강장에서 나는 맨앞에 있는 택시 뒤문을 열고 올라탄다. 나이 든 택시기사가 행선지를 묻고 나는 회사주소를 댄다. 거리가 꽤 있는 행선지에 택시기사의 얼굴에 웃음이 피여오른다. 택시기사가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자 네비게이션에서는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기계음이 나온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어림잡아 2만원 정도 나올 것이다. 적은 돈이 아니다. 택시가 달리는 동안, 나는 줄곧 창밖만 바라본다.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좀더 잠을 자둘 수도 있지만 나는 택시가 달리는 동안 경직된 자세로 창밖만 바라본다. 머리 속이 흐릿하다. 잠을 충분히 못 자서일 수도 있고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7월이다. 앞으로 내가 여기에 있을 시간은 기껏해야 한달 남짓 될 것이다.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료금미터기를 힐끔거린다. 저 놈의 말은 왜 쉴 새 없이 뛰는 건가. 미터기는 1만 6000원을 넘어서고 있다.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2만원만 넘지 말아라. 나는 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회사가 가까워온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잡념을 떨쳐버리려고 눈을 부릅뜬다. 문득, 출퇴근을 찍는 카드가 있나 확인해야 될 것 같아 가방 안을 뒤적인다. 어쩐 일인가. 카드가 보이질 않는다. 분명 아침에 퇴근하면서 삑 하고 카드를 찍고 가방에 허망 집어넣은 것 같은데 가방 안을 아무리 뒤져봐도 출퇴근을 찍는 카드가 없다. 나는 가방 안에서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천으로 된 작은 백을 꺼내 쪼르로기를 열어본다. 손거울, 립밤, 볼펜, 메모지 어지럽게 널려진 그것들을 샅샅이 헤집어보지만 그 안에도 카드는 없다. 맹랑하다. 근태계를 쓰면 되긴 하지만 이 때로부터 나의 신경은 날카로워지기 시작한다.  무언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일이 엇나갈 때, 나는 순식간에 머리 속이 마구 헝클어지고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허둥댄다.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몽유병 환자처럼 때때로 이렇게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어쩔 줄 몰라한다.  나는 헛일인 줄 알면서도 다시 가방 안을 샅샅이 뒤지면서 마구 자책하기 시작한다. 바보, 이런 정신머리. 금방 전에 둔 물건도 어데 뒀는지를 기억해내지 못하고 늘 무언가를 잊고 빠뜨리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요즘 들어 건망증 증세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은 더욱 급해난다.  요즘의 나는 부속품이 고장난 기계처럼 늘 이렇게 뭔가 어긋나고 덜컥덜컥거리고 있다. 가방 안에 내가 찾는 출퇴근을 찍는 카드는 절대 없다는 걸 확인사심하고 나서 옅은 한숨을 쉬며 가방을 내려놓는다. 금방 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허탈감이 몰려오면서 온몸의 기운이 쏙 빠진다. 운전기사가 내 행동이 어이없다는듯 뒤쪽을 힐끔거린다.  나는 기사를 외면하고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가슴이 답답해서 목에 손을 뻗었다. 맙소사. 이 손에 잡히는 넓은 천으로 된 줄의 감각은 뭐람. 차창유리를 바라보니 거기 검은 실루엣으로 비친 그림자에 내 목에 카드가 걸려있다. 아까 집에서 허겁지겁 나오면서 어떻게 가방에 있던 카드를 꺼내 목에다 걸고 나왔었나 보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가방 안을 뒤지다니. 후- 깊은 한숨이 나온다. 가방에서 카드를 꺼낸 사람도, 내 목에 카드를 걸어놓은 사람도 나일 텐데 왜 이렇게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 걸가.  창밖으로 나무들이 하루 일상에 지친듯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그들은 가지를 늘어뜨리고 긴 잠에 빠져들려 하는데 나는 이렇게 삐걱거리며 하루 일상을 시작하고 있다.    예상에서 많이 초과하지 않은 택시료금에 안도하며 돈을 꺼내 택시료금을 지불하고 회사 대문에 들어선다. 마침, 와르르 통근뻐스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한다. 하필 이 시간대를 맞춰서 오다니. 조금 전이나 후에 도착할걸. 나는 속으로 후회하며 얼굴근육을 움직여 누구를 향한 웃음인지 분명치 않은 웃음을 웃어준다. 까르르. 고개를 까댁해 나한테 알은체해주고는 뭐가 즐거운지 깔깔거리며 카드를 찍고 공장 안으로 들어서는 동료들. 그들은 평생을 다해 자신을 지켜줄 것 같았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작별인사도 없이 저 혼자 먼저 돌아올 수 없는 다른 세상으로 가버리는 충격을 온몸으로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자다가 화들짝 놀라 깨여난 푸르스름한 새벽, 어둠과 밝음의 경계 같은 그 푸른 빛의 세계에 손을 내밀어보며 가슴 속의 통증을 확인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미처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왈칵 저 혼자 푸른 새벽에 눈물을 쏟아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행여 내 안의 울음소리가 새여나와 아직 여리디 여린 자식에게 상처를 입힐가 두려워 잘게 밖으로 새여나오려는 소리를 씹어 안으로 꾸역꾸역 삼켜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야간조회는 늘 간단하다. 간단해서 좋다. 조회를 마치고 주간근무를 하는 언니와 교대를 하고 오늘 저녁에 할 일과 설비상태를 체크하면서 나는 일에 집중하려고 눈을 부릅뜬다. 야간근무 11개월째다. 나는 이제 낮에는 정오의 해볕 아래 머리를 내리뜨리고 꾸벅꾸벅 조는 병아리가 되여 쉬는 날에도 잠만 온다. 늘 그렇지만 야간에 출근을 하면 한두시간 정도는 어리벙벙해서 달아다니고 그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몸이 일에 반죽처럼 섞이기 시작한다.  한달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지금까지 일년 동안 야간근무를 하면서 모은 돈과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전세금을 빼고 퇴직금까지 합치면 중국에 돌아가서 몇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아들애는 새학기면 중학교에 들어간다. 지금 돌아가서 무언가를 할 자신은 없다. 이 비칠거리는 몸과 유리처럼 어디에 부딪쳐도 부서질 것 같은 마음으로 뭘 할 수 있을 것인가.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다잡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면서 그렇게 살아야겠지. 그러다가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면 다시 한국에 나와서 돈을 벌어도 될 것이다. 그게 최선의 방법은 아닐 것이지만 많은 중국조선족들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어느 한곳에도 완전히 정착하지 못한 채 철새처럼 이동하듯이 나도 지금 어디에도 확실하게 내가 정착해야 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일하는 동안, 머리 속으로 저도 모르게 아직 살아보지 못한 날들을 마치 생산라인의 작업일지 적듯 적어보고 있었다. 푹 허구픈 웃음이 나온다. 삶이 내 뜻대로 되여준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내 뜻대로 살아지리라 여전히 아련한 희망을 품으며 이토록 세세히도 아직 다가오지 않은 앞날에 대해 뭔가를 계획하는 미련스러움이라니.   2. “네?” 나는 미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차분한 목소리에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나한테 해주려는 말의 뜻이 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목소리로 보아 나와 비슷하거나 어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했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깜빡 통근뻐스에서 졸다가 전화를 받은 터라 리해력도 판단력도 바닥인 상태이다. “그러니까 제 말은요. 이번 달 월세가 입금되지 않아서 전화를 드리는 거라구요.” 이건 무슨 소린가. 나는 전세집에 살고 있는데 월세라니.  “저기요. 전화 잘못 거신 거 아닌가요? 전 전세집에 살고 있는데 월세라니요? 누구시죠? “ “박홍화씨 아닌가요?” “네. 맞는데요.” “지금 살고 있는 데가 경기 평택시 평택동 285번지 동화원룸 305호 아닌가요?” “네.” 그런데는 어쨌단 말인가. 그는 어떻게 이토록 자세히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내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 말인가. 전화번호는 또 어떻게 알고.  “아직 상황을 하나도 모르시나 본데…” 수화기 저편이 조용해진다. 낮게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다. “난 그 집 주인이고 그쪽은 일년째 저의 집에 월세로 살고 있는 거잖아요. 계약 날자는 15일이고 박홍화씨는 스타부동산에 위임하여 부동산 업주 이름으로 월 35만원씩 꼬박꼬박 월세를 낸 게 아닌가요? 여태 이런 일 없었는데 이번 달 월세가 늦어져서 부동산에 전화를 해보니 사장님 전화가 꺼져있더라구요. 그래서 오늘 서울에서 차를 끌고 평택까지 왔는데 와보니까 부동산은 문을 닫은 상태고 사장은 전화련결이 안되고 주변에 물어보니 부동산이 문을 닫은 지가 이삼일 된다고 그러더라구요. 알아보니 부동산 업주가 계약금을 들고 튄듯한데요. 보증금 200만원 맞죠? 일단은 경찰서에 건물주들이 신고를 한 상태라고 하던데. 아,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합시다. 전화로 간단히 말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건물 앞 카페 아시죠? 아래층이 미용실이고 그 바로 웃층에 ‘향기가 있는 공간’이라고.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계약서 갖고 나오시구요.” “아니…” 나는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눈앞에 대고 잠간 바라보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이것보다 더할가 싶다. 순간적으로 강한 회오리바람이 내 속을 굽이굽이 파고든다. 내 삶에 가파른 언덕길이 하나씩 생겨날 때마다 난 늘 이런 바람의 기운에 몸을 떨었었다. 보증금 200만원이라니? 나는 거금 4000만원을 주고 전세에서 살고 있는데. 며칠 전에도 나는 부동산에 곧 중국으로 들어갈 것 같다고 말하면서 전세금 날자 어기지 않고 돌려받을 수 있죠? 하고 확인했었고 너부죽한 얼굴에 야채를 판다면 꼭 덤을 얹어줄 것 같은 스타부동산의 아줌마 사장은 그럼, 말이라구. 걱정 마. 하면서 짐짓 눈까지 흘겼었다. 내게 계좌번호를 적어달라 했고 내가 내민 계좌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돌려 잠그는 걸 내 눈으로 확인했었다. 이건 뭔가 잘못되였을 것이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휴대폰 통화버튼을 껐다.   해빛이 강렬하게 열기를 뿜어댄다. 나는 눈을 쪼프리고 길을 건넌다. 우선 옷을 갈아입고 그를 만나러 가야 할 것이다. 그가 한 말은 아무래도 신빙성이 없다. 낯선 그의 목소리보다는 부동산 아줌마의 웃는 얼굴을 나는 믿는다. 그는 누구인가. 혹시 사기? 사기를 치려면 상대를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을 것이다. 사기당할 무엇도 나는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조금 씁쓸해난다. 그러나 어쨌거나 나는 그를 만나봐야 할 것이다. 집에 가서 샤워를 대충 하고 옷을 갈아입고 얼른 가서 만나고 와서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훅 바람이 불어온다. 어제밤 내내 뛰여다니며 땀에 젖은 몸에서는 바람이 스치자 순간 퀴퀴한 땀냄새가 짙게 코 속으로 파고 든다. 골목길에 들어서자 도로 한켠에 한무리 사람들이 모여있다. 무언가를 의론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언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목소리가 높았다 낮았다 하고 얼굴들이 굳어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내가 사는 원룸 앞에 선다.  “이 건물에 삼가?”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는데 누군가 소리지른다. 돌아보니 금방 지나친 그 한무리의 사람들 속에서 목이 늘어진 카키색 면티를 입은 녀자가 내 쪽을 바라본다.  “네.” 대답하면서 그 녀자 쪽으로 돌아서는 찰나,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한테로 쏠리는 걸 느낀다.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는 서너메터 쯤 된다. 녀자의 목소리가 컸던 것은 거리 때문이였을 것이다.  “그램 여기루 오쇼.” 녀자가 나를 향해 손짓한다. 화장기 없는 얼굴의 녀자는 지친 표정이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스적스적 그쪽으로 다가간다.  “햐… 당한 사람이 이렇게 많슴가?” 머리를 짧게 자른 남자 하나가 나를 보더니 머리를 저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뭔가. 저 기분 나쁜 남자는. “아직 더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말하는 녀자는 돌이 지났을가 말가한 남자아기를 품에 안고 있다. 아기가 자꾸 움직여 녀자의 몸은 뒤로 휘여있다.  무엇을 당했다는 말인가. 나는 떨떠름하다.  “지금 출근한 사람도 많고 아직 모르는 사람도 많을걸요.”   그들의 말은 이랬다. 그러니까 스타부동산, 그 짧은 파마머리에 늘 사람좋게 웃던 아줌마가 이중계약으로 사기행각을 벌였다는 것이다. 집주인한테는 월세로 계약을 하고 세입자한테는 전세로 계약을 하고는 집주인한테 꼬박꼬박 월세를 납부하다가 며칠 전 문을 닫고 잠적해버렸다고 한다.  “그럼 우리 전세값은 어떻게 되는 검가?” “날라갔지 뭐. 주인이 돈을 주겠소?” “햐… 완전 하루아침에 밖에 나앉게 됐구나.” 나는 비로소 방금 전 집주인이라고 하던 남자의 그 알 수 없는 통화가 무슨 의미인지를 희미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그, 이제 중국 들어가서 아들이랑 잘살아야제? 하고 활짝 웃어주던 그 자잘한 주름이 건너간 눈매, 나는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소리 속에서 부동산 아줌마의 웃음 어린 눈매를 생각했다. 사기라는 말보다, 내 전세금을 떼인다는 생각보다 바보스럽게도 그 순간, 그 웃음 어린 눈매가 먼저 떠오르면서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 눈매로 그렇게 환하게 웃던 그 웃음이 가짜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건 필시 무언가 오해가 있을 것이다. 무언가 잘못되였을 것이다. 나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할 때처럼 웃이로 아래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서있는 바닥이 한쪽으로 밀려나며 꺼져들고 있었다. 풀럭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까 나를 부르던 카키색 면티를 입은 아줌마가 서로 련락처를 물어보고 토론하자면서 전화번호를 물어온다. 전화번호를 가르쳐주고 쥐고 있던 휴대폰을 터치해보니 어느새 카톡추가가 들어와있다. 아줌마는 바로 나를 카톡 단체방에 초대한다. 전세사기방. 아줌마가 멋대로 지어버린 방이름이였다.  사람이 한명 두명 추가되는 걸 보며 나는 그럼 이제 련락하자고 하고 돌아섰다. 방 이름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3. “커피 주문하시죠?” 연푸른색의 셔츠가 주는 청량감에 침을 삼키며 나는 탁자 우에 놓여진 그 남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희고 매끈한 손 때문에 까맣게 돋은 털이 더 유표한 남자는 나와는 다른 행성에서 살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창밖을 바라보니 해빛이 자글자글 끓어오르고 있다.  “음…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가씨는요?” 주문하시죠, 하면서 메뉴판을 내 쪽으로 밀어놓고는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나비넥타이의 웨이터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시럽 두방울만 넣어주시구요. 하는 남자. 그건 흉내낼 수 없는 몸에 밴 익숙함이다. 나는 메뉴판을 훑어본다. “이거요.” 같은 걸루 주세요. 하고 싶었지만 몇시간이라도 잠을 자야만 야간근무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커피 대신 키위주스를 짚어보이고 나는 입을 다문다.  그와 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엄밀히 말하면 그도 나도 같은 피해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고 그는 자신이 가진 수많은 것 중에 다만 지극히 적은 일부분을 잃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에 놓여있다. 나는 밖을 바라본다. 금방 샴푸하고 손질한듯 찰랑거리는 그의 머리카락은 충분한 영양분을 자랑하며 탱글탱글하다. 나는 손을 뻗쳐 금방 급하게 말린 나의 항시 푸석한 머리를 쓸어본다. 거울에 비춰보지 않아도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의 건조한 머리카락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메말라보일 것이다.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키위주스 나왔습니다.” 아까의 나비넥타이를 맨 애송이 웨이터가 그의 앞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 앞에 키위주스를 놓아주고 쟁반을 가슴에 표상처럼 안은 채 고개를 까댁하며 인사한다. “맛잇게 드십시오.”       나는 빨대의 비닐을 벗기고 키위주스잔에 꽂는다. 한모금 들이켠다. 맛있다. 이 상황에서도 맛있는 것에 잠간 마음을 빼앗기는 인간이라니.  “상황은 대충 들으셨습니까? 아니면?” 얼음 때문에 자잘한 물방울이 가득 맺힌 유리잔을 그는 살짝 손으로 잡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깊숙이 빨대로 빨아들이고 나서 잠간 생각에 잠기는듯하다가 그렇게 물었다. “네. 지금 오다가 집 앞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대충 들었습니다.” 내 속에서 빠져나와 공중에 흩어지는 목소리는 힘없고 건조한 발뒤축처럼 잔뜩 갈라져있다.  “혹시 전세로 계약하신 건 아니죠?” 남자는 잠간 나를 바라본다. 내 기색을 살피고는 역시나구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얕은 한숨을 쉰다.  “계약서 갖고 나오셨으면 보여주시죠.” 나는 가방을 뒤져 일년 전 부동산 녀자한테서 받은 계약서를 그한테 내민다. 그는 미간을 살짝 쪼프린 채 계약서를 꼼꼼히 읽는다. 나는 그가 계약서를 읽어보는 동안 선생님께 숙제를 검사맞히는 학생처럼 얌전히 앉아있는다. 마치 그가 다 읽고 나면 무언가 지금의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해결해줄 것 같은 착각도 든다.  그는 내가 내민 계약서를 다 읽고 나서 옆에 있던 서류가방을 열고 거기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 한장을 꺼내 나한테 내민다. 활자로 된 내 이름이 거기 있고 건물 주소가 명시돼있다. 거기까지는 내가 그한테 보여준 계약서와 다르지 않다. 다르다면 그 아래 보증금 200만원, 월 35만원이라고 되여있는 곳이다. 보증금 200만원, 내 계약서에는 전세 4000만원이라고 되여있다. 일년의 집세를 월세로 내고 살면 어림잡아 400만원 이상의 돈이 나갈 것이고 전세로 하면 계약이 끝나서 방을 빼는 대로 원금을 그대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내가 가진 전부의 돈에 언니한테서 꾼 돈까지 합쳐 부동산 사장한테 내민 돈이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내가 가진 전부이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걸 잃을 수 없다.  “관리하기가 번거로워 부동산 주인한테 건물을 위임했는데 이런 일이 발생했네요. 골치거리인데 이거.” 그는 손으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내게 전부인 돈이 그에게는 살짝 미간을 찌프리며 커피잔을 만지작거릴 정도의 골치거리인가 보다. 사람은 자기가 놓인 처지에 따라 이렇게 같은 상황을 마주하고도 다른 마음인가 보다.  “그런데 몇백도 아니고 몇천만원을 내고 전세를 맡으면서 어떻게 건물 주인을 만나볼 생각도 안하셨나요? 이 정도 돈이면 참 힘들게 버신 돈일 텐데.” 그가 조금 상체를 앞으로 내밀면서 낮으나 정확한 음으로 말한다. 왈칵 그의 친절에 눈물이라도 솟구칠 번해 나는 눈을 슴뻑인다. 어쩐지 창피해진다. 작은 친절에도 울렁이는 마음이라면 그건 종이장처럼 얇아져있다는 뜻일 터이다. 그와 나는 동년배거나 그가 나보다 조금 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같은 땅 우에서 같은 해빛 아래 같은 바람을 맞으며 살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마치 나는 그가 내가 영원히 닿지 못할 한계단 높은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남편이 떠나가던 그 날이 떠오른다. “서철진씨 안해 분 맞습니까?” “네. 그런데요.” 나는 저으기 뜨아했다. 너무 당연한 것을 물어오는 거에 대한 시들함, 뭐 그런 것이였다. “여기. 연변병원인데 오셔야겠습니다.” “네? 제가 거길 왜?” “서철진씨 사망입니다.” 해독할 수 없는 먼 나라의 언어 같은 그 말의 뜻을 알 수 없어 나는 멍해있었다. 밖을 내다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고층아빠트 너머로 보이는 높이 솟은 송신탑, 창문 너머로 보이는 희뿌연 하늘, 모든 것이 고요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지금 나는 분명 뭔가 잘못 들은 것이다. 이 사람은 뭔가 잘못 알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시면 바로 1층 외과병동 쪽으로 와주십시오. 거기 오셔서 다시 전화를 주시던지요.” 뚝. 상대방이 전화를 끊었다. 꿈을 꾼 것일가. 나는 멍해있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지갑과 휴대폰과 엘레베터 출입 카드 따위를 챙겨들고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을 운동화에 집어넣다가 가스불을 끄지 않았음을 생각해내고 가스불을 껐다.  밖에 나서자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나는 손을 량쪽으로 뻗어 팔을 감싸고 고개를 수그린 채 종종걸음으로 거리로 나갔다. 사람과 차들이 어지럽게 오고 가는 거리에 서자 자꾸만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갈 때까지 내가 했던 일은 흐릿한 정신을 똑바로 가다듬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앞을 똑바로 쳐다보는 일 뿐이였다.        남편은 조용히 누워있었다. 머리 쪽에 친친 동여진 허연 붕대만 아니면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사고가 난 곳은 서성 쪽이였다고 했다. 남편이 운전한 차가 커브를 돌다가 다리 아래로 추락했다고 했다. 술을 마신 상태였다고 낯선 남자가 말해주었다.  “거기 굽인돌이 커브가 갑자기 확 꺾어지는 데라 맨정신에도 정말 조심해야 되는데 어쩌다가 술을 마시고…” 처음 남편을 발견하고 구급차를 불러 병원까지 호송해왔다는 남자가 그런 말을 했다.  누군가 다가오더니 흰 천을 끄당겨 남편의 얼굴을 덮었다. 나는 멀거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급기야 밀려오는 공포에 몸을 떨며 기신기신 밖으로 나왔다. 병원 복도의 길다란 철제의자가 등에 닿는 차거운 감촉을 느끼며 나는 말을 듣지 않아 자꾸만 엉뚱한 번호가 눌러지는 손가락을 가까스로 통제하며 남편의 친구들과 가족들한테 전화를 했다.  “네. 사고로.” 전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남편의 사망소식을 알리며 비로소 나는 흑 하고 소리를 토했다. 눈물이 흘러내린 것도 그 때였다. 지금까지 꿈속을 헤매이다가 비로소 정신이 든 사람처럼 나는 그의 사망 소식을 알리며 비로소 그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갈비. 그 때 어이없게도 내가 생각한 것은 갈비였다. 싱싱하고 알맞춤하게 토막낸 갈비. 한번 부르르 삶아 피물을 빼고 다시 솥에 넣고 된장을 풀고 마른 고추를 한웅큼 집어넣고 푹 끓이다가 애배추를 듬뿍 넣은 갈비는 남편이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였다. 큼직한 손에 갈비를 들고 걸탐스럽게 살을 발라먹고 저가락으로 배추를 건져 우적우적 씹으며 남편은 행복해했다. 그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앞이 보이지 않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리 어디 쯤엔가 오고 갈데 가 없어 울고 있는 나의 환영이 보이는듯했다. 그 환영의 끝에 아들애의 실루엣이 스쳐 더욱 마음이 아리다.  “참 난감하게 됐네요. 부동산 사장이 잡혀서 해결이 되면 좋겠지만…” 그는 말끝을 흐린다. “일단 기다려봅시다. 많이 피곤해보이네요. 그만 일어설가요?” 반 쯤 남긴 커피를 두고 그는 일어선다.       4. 야식을 먹고 휴대폰을 켰다.  “그럼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요?” “그냥 이대로 돈 다 날리고 쫓겨나는 건가? 이런 젠장.” “쫓겨나긴 뭘 쫓겨나. 죽치고 있는 거지. 집주인도 내쫓지는 못할걸. 자기도 부동산에 집을 맡기고 관리를 안한 책임이 있는데.” “우리 집 주인은 이달 내로 방을 빼달라고 하던데요?” “헐. 그 주인 완전 네가지가 없네. 절대 방 빼주면 안돼. 누구 좋으라구 방을 빼? 솔직히 주인하고 부동산하고 한통속인지 누가 알아?” 카톡방은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사람들로 시끌시끌하다. 이틀 사이 백명 가까이 추가됐다. 부부가 같이 추가된 사람들도 많으니 호수로 따지면 백호는 안되고 어림잡아 60호 정도는 될 것 같다. 이대로 돈을 떼이고 거리로 나앉는 게 아니냐는 말에는 은연중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달 내로 방을 빼라고 한다는 말에는 그나마 그런 주인이 아닌 게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든다. 그러나 주인하고 부동산하고 한통속이라는 말은 근거도 없을뿐더러 터무니 없다. 집주인이 한둘이 아니고 서울에 있는 사람도 있고 다른 지방도시에 사는 주인도 있다. 그 많은 주인이 부동산 사장하고 일시에 짜고들어 이런 일을 도모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산업단지가 개발이 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여기 원룸을 투자목적으로 사놓은 거고 그걸 자신들은 관리하기가 번거로우니까 부동산에 맡긴 거라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변호사를 청해가지구 우리 단체루 소송합시다.” “좋소. 여기서 동의 안하는 사람은 자기절루 해결하쇼에.” “한사람이 십만씩 돈 내가지구 변호사를 청하는 게 어떻슴가?” “십만 가지구 될가?” “누가 한사람 나서가지구 돈두 거두고 변호사도 찾아보고 해야갠데 누가 나설 사람 손 드쇼.” “그래게 말이. 근데 모두 일하러 다니는 상황이고 일 안하는 사람들은 다 애기엄마들인데.” “지금 일이 중요함가? 돈 몇천만원 그냥 날려가게 생겼는데.” “그건 그거구 당장 또 일은 해야 먹구 살지? 아이 그렇소?” “그럼 나서는 분 일당까지 주믄 어떻슴가?”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순간적으로 카톡방이 멈춘다. 말은 쉽지만 내 주머니의 돈을 꺼내는 일은 누구에게나 쉬운 게 아닐 것이다. 전세금을 건넬 때 이렇게 고민을 거듭하고 신중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뒤늦은 후회가 몰려오며 가슴에 은연중 통증이 인다. “동의하오. 먼저 그럼 십만씩 거두기요.” “그럼 내 변호사도 알아보고 책임질게.” 나는 그 말을 한 사람을 클릭한다. 해빛이 부셔 눈을 가늘게 뜬 녀자아이를 중간에 세우고 부부가 량쪽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웃고 있다. 이런 사람이라면 어쩐지 믿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 남편이였던 그와 부동산 사장의 웃는 눈매를 떠올린다. 이런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동의.” “나도 동의.” 동의. 동의라는 단어가 카톡방 채팅창에 련이어 올라가고 남자가 계좌번호를 올린다. 나는 동의라는 글자를 썼다가 지웠다가 하면서 망설이다가 끝내 글자를 보내지 않은 채 채팅창을 닫는다.  낮에 깜빡 두어시간 졸았던 게 전부이다. 그럼에도 졸음은 오지 않는다. 머리는 아프지만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정신은 유리알처럼 맑다. 야간 오후작업을 시작하기엔 아직 십오분 정도 남아있다. 나는 볼펜을 꺼내 작업일지를 적어내려가다가 다시 휴대폰을 켜고 변호사사무소를 검색하기 시작한다. 몇개의 전화번호를 캡쳐해 사진으로 저장해놓고 화장실에 갔다오고 나니 작업을 시작할 때가 된다.   “예약을 하셨습니까?” 모모 변호사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 피부가 맑은 아가씨가 상냥하게 묻는다. “아니요.” “그럼 못 만나세요. 그 분은 일정이 빡빡하셔서 예약을 하고 오셔야 만날 수 있습니다. 다른 변호사 분들도 훌륭하신데 추천해드릴가요?” 나는 잠간 멈칫하다가 힘없이 네. 하고 대답한다. 아가씨는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근엄하게 찍은 사진 중에서 몇분을 가리키며 뭐라고 하는데 내 귀에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뭐라고 하는지 통 알 수가 없다.  “어떤 분으로?” “예. 그냥 좀 상담하려구요.” “그럼 이 분 추천해드릴게요. 잘 해결해주실 거예요. 상담비용은 30만원이세요. 선불하셔야 되는데 카드로 하시겠어요? 아니면 현금으로 하시겠어요?” “아니, 난 그냥 상담만, 몇가지만 물어보려구요.” “예. 그렇죠. 상담비용은 선불입니다.” 목이 마른다. 입에서 단내가 심하게 나고 있다. 상담만으로도 돈을 내야 한다니. 난 그저 내가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물어볼 것인데 그 몇마디의 물음에 30만원이라니.  “돈이 없어서.” 나는 낮게 웅얼거린다. 쫓기듯 그 곳을 나와 몇개의 사무실을 더 돌아보는 동안 나는 돈이 없이는 내 몇마디의 말이 아니라 한마디의 말도 들어줄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법률구조공단에 한번 가보세요. 거기라면 무료로 상담도 해드릴 거예요. 지금 가면 될라나. 대기자가 많아서 오래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무료로 상담할 수 있는 곳은 그 곳 뿐일 거예요.” 마지막으로 들린 곳에서 나는 법률구조공단의 략도를 얻었다.  “어떻게 찾아가면 되나요?” 그렇게 말하며 나도 내가 바보스럽게 여겨질 정도였다. 얼굴이 동그란 아가씨는 살짝 귀찮은 표정을 짓더니 검색하시면 안내가 나올 텐데요. 하더니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눈을 내리깔고 메모지 한장을 찢어 략도를 그려준다.   “오늘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약을 안하셔 가지구.” “아. 그럼 언제?” “일단은 예약을 하시고 오셔야 합니다. 예약해드릴가요?” 나는 망설이다가 그대로 돌아선다. 나오면서 법률구조공단의 간판과 주소를 휴대폰으로 사진 찍어 저장한다. 터덜터덜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갑자기 허기가 몰려오고 졸음이 쏟아진다. 나는 도로변에 놓인 의자를 바라보며 저기라도 누워 한잠 실컷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부동산 사장이 잡혔대.” “그럼 이제 돈 받는 거재?” 지하철에서 민망할 정도로 옆사람에게 마구 기대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자다가 중간중간 깨여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그 문자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리를 고쳐앉고 머리를 매만지며 나는 정신없이 잠에 빠져든 사이 내 추태에 혀를 찼음직한 옆사람과 맞은켠 사람을 흘깃거린다. 다행히 그들은 내게 눈길조차 안 주고 하나같이 휴대폰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태연하게 등을 의자에 기대고 채팅방의 대화기록을 꼼꼼히 읽어본다. 몸 여기저기가 쑤시지만 한참 늘어지게 잔 덕분에 피로가 많이 가셨다. 잠은 오지 않고 심장이 후둑후둑 뛴다. 잡혔다면 돈을 받을 수 있는 건가? 설마 그 돈을 다 써버리진 않았겠지? 어마어마한 돈이였을 텐데.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남아있을가. 내 돈은 꼭 준다고 했는데. 이제 그 돈 받겠다고 모두 사정없이 달려들 텐데 나는 어떻게 하면 그 돈을 받을 수 있을가. 가서 손을 잡고 울어볼가. 내 처지를 말하며 인정에 호소를 해볼가. 따로 찾아가서 만나볼가.  그 돈만 받을 수 있다면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나는 전철에서 내려 크게 발자국을 떼면서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그러나 집으로 가는 뻐스 안에서 열어본 카톡방은 좀 전의 그 희망찬 소식을 간단히 엎어버리는 소식들로 가득 메우고 있었다. 부동산 업주인 녀사장이 잡히긴 했지만 돈은 모조리 써버린 상태며 공범인 남편은 필리핀으로 도망가버려 경찰이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이였다. “이제 끝인가?” “돈이 바닥나니 도망간 거라재.” 여기저기서 맥을 놓고 한탄을 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 변호사 선임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겜가?” “돈이 없는데 이제 와서 변호사를 구한다고 뭐 어떻게 되겠슴가? 그저 운수땜 한셈 쳐야 될 것 같은데.” “무슨 소리. 그 돈이 어떤 돈인데. 50만원 달랑 들고 포승에 와서 주야간 하면서 아끼고 아껴서 2년을 모은 돈인데 그걸 허망 떼울 수는 없지.”    탕. 바람이 불더니 주방 쪽 창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긴다. 나는 아까 들어와서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무릎을 세우고 두손으로 종아리 쪽을 부여잡은 자세로 앉아있다. 창문을 닫으려고 일어서는데 다리가 저리다. 창살 사이로 손을 내밀고 길게 팔을 뻗어 창문을 잡아당겨 꼭 닫고 걸개를 건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 외출하면서 왜 창문은 열어놓은 걸가. 참, 오늘 아침 퇴근하고 바로 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으니 창문은 어제 아침에 퇴근해서 열어놓은 것이구나. 이게 몇시간이야. 그래서 보니 싱크대와 가스렌지 주위가 온통 부옇게 돼있다. 손으로 쓸어보니 모래가 한벌 깔려 꺼글꺼글한다. 나는 수도물을 틀어 모래가 묻은 손을 씻고 바닥의 걸레를 적셔 싱크대와 가스렌지 우를 여러번 닦아내고 내친김에 바닥까지 닦는다.  미끌. 지나치게 손에 힘을 준 탓인가. 걸레가 미끌하면서 오른손이 앞으로 쫙 밀려나간다. 나는 서슬에 바닥에 머리를 박는다. 고개를 드는데 눈물이 솟구친다. 밀려나간 쪽 팔이 근육이 잡아당겨졌는지 아프다. 나는 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걸레를 들고 울기 시작한다. 방울방울 눈물만 흘리다가 어느 순간 소리가 나오자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좀더 크게 울기 시작한다. 이 순간, 내게 위로가 되는 건 내 자신의 울음소리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자 더욱 서러워진다.  실컷 울고 나서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려고 일어서는데 몸이 휘청하더니 눈앞의 사물들이 빙빙 돈다. 나는 머리를 붙잡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한참 후에 간신히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밑에 다크서클은 시커멓게 나와있고 눈알이 온통 빨간 녀자 하나가 머리를 산발하고 있다.  나는 이불을 들쓰고 누웠다가 조장한테 문자를 보내 도무지 몸이 안 좋아서 오늘 나갈 수 없을 것 같으니 하루만 청가를 주시면 안될가요. 하는 내가 봐도 간절한 문자를 보낸다. 야간근무를 시작한 일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처음 청가를 맡는 터이다. 조장은 그래. 어쩐 일이야. 안 그래도 힘들어보였어. 푹 쉬고. 래일은 특근인데 나올 수 있지? 하고 답장한다. 내 몰골이 심하게 초췌했나 보다.  “네. 감사해요.” 나는 문자를 보내놓고 그대로 베개에 머리를 묻고 잠이 든다.    5. 남편이 떠나간 슬픔에 나는 오래 머물러있을 수 없었다. 감당해야 할 현실은 비정했다. 그가 떠난 후, 내게 남긴 건 달마다 갚아나가야 하는 집 대출과 망가진 차의 할부금과 소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였다. 비정규직 유치원 교사의 월급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지출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결단을 내렸다. 아이를 친척 고모한테 맡기고 한국행을 선택했던 것이다.  대출도 거의 갚아나가고 이제 한달 뒤에 퇴직금을 받으면 귀국하려고 계획한 터이다.  그런데, 늘 우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나군 한다. 운명의 장난처럼. “홍화야, 미안한데 나 미국에 있는 아들이 오라 해서 아무래도 거기 가야 될 것 같어.” 고모가 위챗으로 보내온 문자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나는 부랴부랴 고모한테 국제전화를 걸었다.   “고모 무슨 얘기임가? 언제 감가?” “응, 그게 그렇게 됐구나. 성일이가 언제부터 오라고 하는 걸 차일피일 미뤘더니 이번엔 비행기표까지 보내면서 막무가내로 오라 해서 가야 될 거 같어. 7월 20일 비행기표를 아들이 보내왔네. 너 인차 오는 거지?” “아, 예 고모. 알았슴다. 걱정 말고 가쇼. 제가 8월에 가니까 그 전에 한달 정도만 다른 사람한테 준이를 부탁하면 됨다. 예예. 고모.” 통화를 마치고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머리 속으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내 아이를 한달이 안되는 시간 동안 돌봐줄 사람을 생각해본다. 결코 퇴직금을 포기할 수는 없다. 지금의 내게 그건 마치 생명줄처럼 느껴지는 것이였다.  엄마는 양로원에 있고 가까운 친척도 없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고아나 다름없었던 남편은 내게 의지할 만한 시댁 식구 하나도 남겨놓지 않았다. 내 삶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둥그렇게 휘여가는데 나를 도와줄 사람 하나 없다는 사실이 왜 이다지도 서러운 것인가.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선배언니한테 문자를 보낸다. “언니. 우리 준이 한달 정도만 봐줄 수 있어요? 내가 8월 중순은 되여야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인데 준이를 봐주던 우리 고모가 미국으로 간다 해서요.” “그래, 그냥 보내라고 그래.” 선배언니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선선히 대답한다. 한숨이 후 나온다.  나는 다시 고모한테 전화를 한다. “고모, 친한 언니가 맡아준다니까 그쪽으로 준이를 보내시면 될 것 같아요. 그동안 감사했슴다.” “오 잘댔다. 안 그래도 내 얼마나 신경 쓰이고 미안한지.”  고모도 시름이 놓이는지 말투가 명랑해져있다.   나는 휴대폰을 놓고 일어서서 밥솥을 열고 밥을 양푼에 푼다. 랭장고를 뒤져보지만 딱히 먹을 게 보이지 않아 후라이팬에 계란 두개를 볶다가 양푼에 담긴 밥을 넣고 몇번 뒤적거려 다시 양푼에 담는다. 나는 양념간장통과 숟가락을 한손에, 다른 한손에 양푼을 들고 텔레비죤 앞에 앉아 리모콘 버튼을 누른다. 나는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오락프로에서 멈춘다. 뚱뚱한 아줌마 하나가 남편흉을 보며 까르르 웃고 있다. 아줌마의 표정은 행복해 보인다. 나는 아줌마의 기름기 번들거리는 얼굴을 바라보며 양념간장을 발라 양푼의 밥을 크게 한숟가락 떠서 입에 넣는다. 먼저 떠넣은 밥이 채 식도로 내려도 가기 전에 다시 숟가락이 넘치게 퍼서 입에 넣는다. 양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내려다보니 양푼이 어느새 텅 비여있다. 비여진 양푼에 숟가락을 담아 싱크대에 놓고 돌아서는데 배가 심하게 불러온다. 나는 그릇에 물만 담아놓고 소화를 시키려고 빙빙 좁은 집안을 돌며 서성거린다.  비 오는 날, 아무런 가리개도 없이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종아리께까지 푹푹 빠지는 진흙탕을 맨발로 걷는다 해도 이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지그시 감는다. 급하게 먹은 밥 때문인지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인지 가슴에 통증이 밀려와 주먹으로 탁탁 가슴을 쳐댄다.      6. 새벽이다. 현장 한켠에 놓인 의자에 앉아 쉬다가 나는 휴대폰에서 메모장을 펼치고 거기에 이런 말을 적는다.   저는 열심히 일을 했고 돈 한푼 허투루 쓰지 않았고 술 마시고 취해본 적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맹세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 적도 없습니다. 직장에서도 항상 타인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삶은 이렇듯 저한테 가혹한 겁니까? 남편을 사고로 잃었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이제 나는 내가 아글타글 모은 전세값마저도 이제 날릴 위기에 빠져있습니다. 착하게 살면 그만한 보상이 있고 복을 받는다고 하던데 저는 왜 이런 겁니까? 하느님, 부처님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께 묻습니다. 제가 대체 무엇을 잘못한 겁니까? 무엇을 잘못한 벌로 이처럼 큰 벌을 저한테 내리시는 겁니까? 저는 지금 힘듭니다. 이럴 때일수록 강해져야 하고 힘을 내야 한다는 건 알고 있고 기운을 차리고 밝아지려고 큰소리로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 때면 이름 못할 공포가 밀려오고 순간순간 이름 못할 불안이 밀려와 저를 못 견디게 합니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무너지지 않을가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면 그 때는 다시 일어서기 힘들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 내 아이가 생각나고 그 아이가 가엾어지며 눈물이 솟구치고 가슴이 갑갑합니다.  제게 벌어진 모든 일들을 시계바늘 돌리듯 원 위치로 되돌려달라는 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을 테지요. 다만 제가 성실히 일해서 모은 돈, 저와 제 아이가 밥을 먹고 생계를 유지할 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무너질 것 같은 전세금만 돌려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리숙해서 사기에 걸려들었다는 것을요. 그 선한 눈매를 믿지 말았어야 했었다는 것을요. 다시다시 의심해보고 확인하고 건넸어야 할 돈을 너무 간단히 의심 없이 건넸다는 것을요. 그 죄를 달갑게 받아 어느 정도 감안을 할 각오까지도 되여있습니다. 그러니 삼분의 2 정도, 절반만이라도, 그만큼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게.   여기까지 쓰고 나는 왈칵 눈물이 나오려고 해 눈을 슴뻑인다. 4000만원을 현금으로 찾아서 핸드백에 담으면 어느 만큼 차오를가. 그것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누군들 휘청이지 않고 받아들 수 있을가.  아무튼, 절반은 너무 억울한 것 같습니다. 했다가 나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쓴다.    그래도 정 안된다면 그것만이라도 보존할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방법을 알려주세요.    하고 쓴다. 요 뒤에 점 세개를 찍었다가 지우고 감탄표 세개를 찍었다가 다시 지우고 점 하나만 찍어버리고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나는 하얀 종이에 지금 휴대폰에 메모한 글들을 프린트해 길을 가는 낯선 얼굴을 붙잡고서라도 저는요, 하고 내여주고 싶다. 그 손가락이 흰 집주인 남자에게 두손으로 공손히 무릎을 꿇고 눈물이라도 한방울 뚝 떨구어 동정심을 유발하며 내민다 해도 창피할 것 같지 않다. 하다못해 길가에 서있는 나무나 새, 꽃에게라도 지금의 내 사정을 토로하고 싶다.  하지만, 결국 나는 아무에게도 이것을 내밀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타인의 아픔에 깊이 감정이입을 할 만큼 사람들은 여유 있거나 감성적이지 않다. 챙겨야 할 자신들의 몫을 챙기며 급급히 살기에도 힘든 세상이 아닌가.  창밖으로 푸름하게 날이 밝아온다. 나는 또 하루를 버텼다.   7. 자리에 누웠다가 일어나 나는 컴퓨터를 켠다.  오래된 컴퓨터가 웅 하고 신음을 토하며 부팅되는 동안, 나는 피로로 인해 자꾸만 깔깔해나는 눈을 깜박인다. 8월 13일까지 근무를 하면 14일 아침에 퇴근할 거고 짐을 챙기고 한잠 자고 떠나면. 하고 머리 속으로 생각을 굴리며 나는 비행기표를 검색해본다. 14일은 매진이고 15일부터 표가 있다. 나는 인천-연길 하고 쳤다가 다시 인천-장춘으로 쳐봤다가 다시 인천-대련 하고 쳐본다. 인천-대련이 가장 싸지만 대련에서 연길 가는 기차표를 합산하면 연길까지 직행으로 가는 것보다 얼마 차이나지 않는다.  인천에서 장춘은 고속렬차표 가격을 합산해보니 인천에서 연길로 가는 직행과 엇비슷하다. 나는 비행기표를 수없이 검색해보다가 컴퓨터를 끈다. 비행기표를 어느 날로 예약해야 할지 도무지 결정할 수 없다. 선배언니하고 사정얘기를 하면 며칠은 더 아이를 봐주겠지만 적어도 애가 개학 전에는 돌아가야 할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입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입안 뿐만 아니라 몸의 수분이 해볕 아래 널어놓은 데친 나물처럼 서서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수분이 빠지다가 어느 순간 나는 해볕에 잘 마른 나물처럼 쥐여보면 파삭파삭해질 것이다. 카톡방은 며칠 전의 그 뜨겁게 흥분되여 떠들던 분위기가 사그라졌다. 다들 지쳐가나 보다. 벌써 어떤 집은 집주인이 방을 빼라고 찾아와서 고성이 오고 갔다고 하고, 누구는 내 돈 너라도 내라고 집주인의 멱살을 잡았다가 경찰서로 련행이 되였다고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논밭 한가운데 박힌 돌처럼 자리를 지키고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던 결의마저 실행할 수 없는 것이 되여버리는 건가.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나니 다들 힘이 빠지는 모양이다. “우리 집주인이 천만원을 해결해줄 테니 집을 빼달라고 하지 않겠소?” “전세금이 얼만데?” “4500.” “그저 콩고물 먹고 나가 떨어져라 이건데. 절대 그렇게 하면 안되지.” “그런데 솔직히 다른 뾰족한 수는 있는 것 같지 않소. 집주인들도 자기네가 부동산에 건물을 맡기고 관리 안한 책임이 있고 이런 줄다리기를 하기 시끄러우니까 빨리 해결하려는 거지. 그런데 받아들이기엔 너무 액수가 적고 더 요구하면 그 사람들이 너네 법 대로 해라 이럴 건데 내가 알아보니까 법 대로 하면 우린 월세로 부동산하고 계약한 거라 이 돈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오.” “정말 여기 이 방 사람들 모두 더럽게 재수 없슴다. 한국 돈 벌러 왔다가 사기나 당하구 완전 똥 밟았슴다.”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댄다. 나는 휴대폰을 켜본다.  그 날 이후, 주인집 남자는 련락이 없다. 부동산 업주가 잡혔다는 소식은 그도 알 것이다. 그러면서도 련락을 하지 않는다는 건 자기는 급할 게 없다는 건가? 내가 중국에 곧 들어가야 한다는 걸 그 사람은 알 수 없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나는 어이가 없어 혼자 푹 웃는다.  그 사람은 내 사정 같은 건 어차피 관심 없을 것이다. 내가 좀더 이 집에 있는다 해도 그건 그가 넓은 아량으로 묵인하는 것일 테고 그가 손해보는 건 기껏해 얼마 안되는 월세일 것이다. 그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고 그런 사람한테 그만한 돈은 있으나 마나 할 것이였다. 급하다면 내가 급할 것이다. 그와 내가 지금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면 결국 지는 쪽은 절박한 쪽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승 원룸에 살고 있는 사람인데요.” 결국 먼저 전화를 건 쪽은 나였다. “아, 네.” 그도 나의 전화를 기다렸던 것인가.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로 보아 그는 수화기를 바싹 귀에 대고 진지하게 나의 전화를 받으려고 자세를 잡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부동산 업주가 잡혔다고.” “네. 정말 안타깝게 됐네요.” 그는 자신이 한 말이 진심이라는 걸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했던 걸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아시다 싶이 저한테는 그게 정말 큰돈이예요. 남편도 없고 아들애는 이제 사춘기거든요. 저는 그 돈을 가지고 아들애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나는 그러니 그 돈을 저한테 줄 수 없나요? 그러면 제가 정말 평생을 다해 은혜를 잊지 않을게요. 하고 사정하면서 그의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어보고 싶다. 그래서 되는 거라면.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잠시 숨을 고른다. “참 사정이 딱해서 저도 집사람이랑 계속 상의하고 있는 중이예요. 갑자기 나가라고 하기는 그렇고, 다른 집을 구할 때까지는 여유를 드릴 테니까 빠른 시일 내에 다른 집을 알아보는 게 어떨가요?” 그가 나는 지극히 너그럽고 인간적이다라는 뜻을 단어 사이사이에 담아 낮으나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다. 나는 갈라터진 입술에 혀로 침을 바른다. “아니요.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네?” 상대방은 적이 놀란 목소리이다. 이런 호의를 거절하다니? 이건 무슨 경우지? 하고 그 목소리는 말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구요? 버티고 안 나가시겠다. 뭐 이런 배짱이라도 부릴 생각이라면 명백히 그건 위법행위이며 법적인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알려드리죠.” 상대방의 목소리가 조금 전의 부드러움을 싹 거두고 말할 수 없이 근엄해진다. “그게 아니구요. 전 아무런 보상도 없이 이렇게 나갈 수 없어요. 법정에 서야 한다면 법정에 서고 저는 잃을 게 없거든요.” 그 말을 하며 나는 검은색 비닐을 창문에 봉해 낮에도 어둑한 방안에 엉거주춤 앉아있던 자세를 고쳐 다리를 앞쪽으로 뻗고 앉는다.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앵 하고 파리 한마리가 눈앞에서 날아지나간다.  “허참, 이게 막무가내를 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예요. 뭐라고 해야 설명이 되려나.” 그는 어이없다는듯 한숨을 푹 쉰다. 당신처럼 말이 안 통하는 사람하고 대화를 하려니 답답해서 죽겠다는 말투이다.  뭐라고 해야 설명이 되려나라고? 나는 중국에서 조선족학교를 다녔고 한국에 와서 십년 가까운 시간을 생활한 사람이다. 한때는 문학을 한답시고 수필도 몇편 발표한 녀자다. 말귀에 어둡지도 않고 판단력이 흐리지도 않다. 그런 나를 그는 지금 형편없는 무식쟁이 취급을 하고 있다. 그렇게라도 해서 내가 지금 재수가 없어 무식한 중국인 동포 녀자 하나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걸 말하고 싶은가 보다.  아무런 결정이 없는 통화를 끝내고 나는 한참을 멍해 앉아있다가 일어섰다.  세수를 하고 집정리를 하고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추려본다. 그동안 물건을 사지 않았고 옷도 작업복만 입고 사지 않았던 터라 옷걸이에 걸린 옷을 쳐다봐도 트렁크 한 귀퉁이 밖에 차지하지 않을 것 같다. 그것들을 뒤적여보자 중국까지 갖고 가서 입을 만한 옷은 별로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몇개는 남겨두기로 하고 비닐봉투에 담는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구석구석 보이는 대로 버릴 것들을 끄집어낸다. 나는 집 아래로 내려가 헌옷 수거함에 옷을 넣고 잡동사니들을 담은 쓰레기 봉투를 쓰레기장에 놓고 돌아온다. 어둑한 방안이 갑갑해 베란다 문을 한쪽으로 밀어 열어놓고 젖은 걸레로 바닥을 꼼꼼히 닦다가 와락와락 베란다에 붙여놓았던 비닐을 뜯어낸다. 공처럼 둘둘 비닐을 말아 출입문 쪽에 놓고 돌아서니 해빛이 무더기로 들어와있다. 방이 이처럼 환해본 적 없었던 것 같다. 기운을 빼서 그런지 잠이 몰려온다. 나는 금방 비닐을 떼여버린 베란다 창문에 뿌옇게 달라붙어있는 먼지를 바라보면서 금방 전에 개켰던 이불을 다시 펴서 덮고 누워버린다. 이내 까무룩 잠이 든다.   8. 카톡. “언제 중국에 돌아가요?” 카톡소리에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오래 전 문학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하던 선배가 문자를 보내왔다.  “글쎄요. 이달 중순 쯤?” “그러면 가기 전에 봐야죠. 시간 내봐요. 내가 그 시간 맞출 테니. 주말이면 좋겠지만 주말 아니라도 괜찮아요. 한달에 하루는 월차를 쓸 수 있으니까.” 말은 고맙지만 내가 지금 누구 환송식을 받으며 비행기를 탈 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걸 이 사람은 죽어도 모를 것이다. 이처럼 모든 일이 실타래처럼 꼬여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목을 조여오는 압박감에 가슴을 치는 내 사정을 그는 짐작조차 못할 것이였다. “네, 고맙지만 시간이 안될 것 같아요.” “에이, 비싸게 군다. 가기 전에 안 보면 언제 또 보게요? 그러지 말고 시간 좀 내봐요. 스케줄이 무지하게 빡빡한 게 아니라면.” “네.” 나는 그와 더이상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그냥 네 라고 대답한다.  “진작에 이렇게 시원하게 대답을 해야지. 그럼 기다릴게요.” 나는 휴대폰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내려놓는다.    “준이 왔어.” “아.” 나는 안도의 탄식을 한다.  “언니 그럼 잘 부탁해요.” “아니야. 뭘 부탁하고 말고 할 게 있어. 어린애도 아니고 자기가 알아서 밥 차려놓으면 먹고 공부하고 놀고 하는데. 걱정하지 마.”       “네 언니. 고마워요.” 후 한숨이 나온다.       “야간근무를 하신다고 하셨죠? 래일 아침 집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집주인이다.  드디여 그도 나와의 줄다리기를 끝내고 싶은 것일가. 나는 잠간 생각에 잠긴다.  “언니, 밥 먹다 말고 뭘 그리 휴대폰을 보며 넋을 놓고 있어요?” “엉?” 그러고 보니 나는 아까부터 숟가락만 들고 있은 것일가. 밥과 반찬은 담아온 그대로 있다. 민망한 마음에 한숟가락 퍼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넘기려니 체할 것 같다. 나는 식판을 들고 일어선다. “언니 일하는 사람이 밥을 안 먹고 어떻게 일해요? 언니 요새 무슨 일 있어요? 얼굴색도 안 좋고 멍때리고 있을 때가 많고. 언니 왜 그래요?” “응. 아니 그냥 피곤해서.” “언니, 그러니까 그냥 주야간 해요. 야간 자체가 안 좋긴 하지만 그나마 주간 야간 번갈아가면서 하는 게 낫지 언니처럼 야간만 하면 몸이 절단나요. 언니 그러다가 아프면 어쩌려구.” 현매가 울상을 한다. “그래.” 나는 입꼬리를 올려 억지로 현매에게 웃어보이고 돌아선다.    9. “그러니까 나도 당한 거고 서로 사기당한 거 아닙니까. 이달 내로 집을 빼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낮으나 힘있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한다. 나는 운동화 앞코를 내려다본다. 밤새 뛰여다니며 일한 터라 운동화 앞코가 뽀얗게 먼지가 묻어있다. 여름이지만 회사에 가서 신발을 갈아신어야 하는 게 귀찮아 이 여름 내내 나는 샌들을 신어본 적 없다. 아니, 나는 샌들을 갖고 있지도 않다.  이제는 나도 타협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1500만원을 보상해주시면 15일까지 집을 뺄게요.” “1500만원이요? 허허 참.” 어이없다는듯 그가 허구픈 웃음을 웃는다. “집 빼고 문자 주세요. 머리 아픈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머리 아픈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의 뒤말을 한번 곱씹어본다. 이로써 우리의 줄다리기는 끝나고 이 일은 결론이 난 건가. 그가 돌아서더니 승용차 문을 열고 몸을 들이민다. 금방 세차를 한듯 깨끗한 흰색의 승용차 안에서 그는 단단히 핸들을 잡고 정면을 바라보며 태연히 나를 스쳐 지나간다.    천오백이란 돈을 오만원권으로 바꾸면 부피가 얼마나 될가. 기껏해야 핸드백 밑바닥에 들어갈 만한 돈일 것이다. 일센치가 채 안되는 두께로 해서 세다발일 테니까 말이다.  갑자기 달달한 쵸콜릿이며 과자를 종류별로 사다가 방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끝없이 먹고 싶다.  나는 집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한고패 집을 휘 둘러본다. 며칠 후면 이 집을 떠난다는 사실이 아직은 낯설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비행기표를 검색해본다. 15일은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비싸다. 나는 십만원 정도 저렴한 16일 오후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주인집 남자에게 16일 날 새벽에 집을 나가겠습니다. 하고 문자를 보낸다. 알았어요. 간단하게 남자가 답장한다.   13일까지만 근무를 할게요. 야간근무로 회사에 출근해서 곧바로 과장한테 얘기를 하자 과장은 놀랍지도 않다는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참 성실하게 잘하셨는데 간다니 아쉽습니다. 그 날까지 출근하시고 사직서를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오시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판에 박힌듯한 인사말을 하는 과장한테 나는 고개를 숙여보이고 일하러 들어간다. 딱 일년이 되기를 기다려 사직하는 직원한테 그래도 웃어보이는 과장이 고맙다. 일을 하는 사이, 벌써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현매와 몇몇 동료들이 언니 그만둔다며? 이제 안와요? 하며 확인하러 왔다 간다.  이제 드디여 가는 것인가. 그 생각을 하자 어쩐지 서글퍼진다. 아들애와 함께 있을 날을 바라고 악을 쓰고 버텨온 시간에 나는 아들애와 함께 있지 못했다. 이제 모든 것이 나한테서 등을 돌리자 비로소 아들애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라니.   16일 오후 비행기라면 14일 퇴근해서 하루 반 동안의 시간이 남는다. 짐은 더이상 챙길 것도 없다. 그릇은 종이박스에 담아 내놓으면 될 것이다. 입던 옷가지와 아들애의 선물 그리고 선배언니의 아들애한테 선물로 옷이나 사가지고 가면 될 것이였다. 휴대폰은 필요하니까 계속 사용하다가 16일 오전에 공항뻐스 타러 가면서 해지하면 될 것이다. 끝내는 일이 이렇게 간단하다니. 나는 어쩐지 뭔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15일 날 시간 될 것 같아요.” 나는 쉬는 시간에 카톡으로 선배한테 그렇게 문자를 보낸다.    10. “이 코스로 갈가? 아니면 저 코스로 갈가?” 두갈래의 길에서 선배는 멈추고 나에게 묻는다. 나는 잠간 망설이다가 시간이 좀 덜 걸릴 것 같은 코스를 가리킨다.  한여름의 산길은 숨이 턱턱 막힌다. 길옆 량쪽으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야산에는 듬성듬성 커다란 나무들이 퍼렇게 잎들을 드리우고 있고 풀들은 종아리가 넘게 자라있다. 오래동안 보수를 하지 않은듯 길은 중간중간 비가 내릴 때 패인 걸로 보이는 홈이 나있다.  선배는 나와 비스듬히 경사진 위치에서 일메터 쯤 앞에 서서 말없이 길을 오르고 있다. 운동화를 신고 곤색의 등산용 바지를 입고 땀이 잘 스며드는 스포츠 브랜드의 티를 입고 산을 오르는 그의 뒤모습을 바라본다. 땀이 배여나와 티가 등에 찰싹 달라붙어 어깨라인이 유표하게 드러난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숨을 쉬듯 움직이는 등쪽 근육에 눈을 빼앗기다 내가 너무 자세하게 그의 뒤모습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민망해져 얼른 눈길을 거둔다. 운동화는 신었지만 이런 등산길에 오르면서 검은 정장바지에 푸른색의 긴팔셔츠는 왜 입었을가. 타인에게서 눈을 거두면 내가 보이는 법이다. 나는 내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못마땅해 눈살이 찌프려진다.  “이렇게 걸으니 참 좋다.” 한참 걸어가던 선배가 뚝 멈춰서더니 돌아보며 웃는다. 나도 웃어보이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다. 내가 걸어서 그가 서있는 곳 가까이 다다르자 그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  나는 금방 전 그가 돌아섰을 때, 이마에 해살이 비춰 배여나온 땀방울이 반짝거리던 걸 떠올린다. 그전에도 느꼈지만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그에 대해 자세히는 모른다. 다만 몇번 만났던 짧은 만남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누구나와 잘 어울리고 론쟁보다는 침묵할 줄 알며 타인에 대한 사소한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소문으로 그가 리혼을 하고 혼자 산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 그런 사람이 왜?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가 다시 누구를 사귄다거나 결혼을 한다거나 하는 소문은 들리지 않았다. 그도 소문으로 나의 사생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보여지는 것만으로 판단을 한다면 그는 리혼하고 혼자 외롭게 살 아무런 리유가 없는 사람이다. 물론 혼자가 꼭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세상의 기준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그럼 나는 어떠한가. 타인이 보기에 나는 남편을 잃고 숨이 턱턱 막히는 산을 오르기보다 더 힘들고 가파로운 삶을 살아야 할 녀자로 보이는 것일가.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한쌍의 남녀가 이 자글자글 끓어번지는 8월에 손을 꼭 잡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산을 올라오고 있다. 나와 선배가 거의 동시에 한켠으로 비켜섰다. 마치 중간자리는 그들한테 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선배도 나도 순간적으로 한 것일가. 알통이 야성적으로 툭 튀여나온 다리를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로 드러내고 흰 면티를 입고 벙거지 모양의 모자를 쓴 남자가 흰 다리를 시원하게 드러낸 겨자색 반바지에 하얀색의 팔랑거리는 블라우스를 시원하게 차려입고 채양이 넓은 모자를 쓴 녀자를 끌다 싶이 하며 오르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량쪽으로 비켜서자 당당하게 중앙으로 해서 올라간다. 그들이 저 앞에 작은 그림자로 보일 때까지 우리는 말없이 서있다가 다시 길을 오른다. 어쩐지 기운이 빠진다.        산 중간 쯤까지 오르자 아이스크림과 커피와 물이며를 파는 행상들이 길에 줄느런히 서있다. 선배는 멈춰서서 “우리 뭐 먹을래요?” 하고 아까 산에 오를 때처럼 묻는다. 차거운 걸 잘 먹지 않아 어떤 해에는 일년이 다 가도록 아이스크림 하나 먹지 않고 보낸 여름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아이스크림을 가리킨다. 녹두로 만든 아이스크림 두개를 꺼내들자 선배가 돈을 꺼내 값을 치른다.  땀을 흠뻑 흘리며 산을 오르다가 먹는 아이스크림은 무척 맛있다. 나는 빠르게 뭉텅뭉텅 물어뜯어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이것도 안 먹고 여름을 보냈었다니. 뭔가 억울해진다.  지금 쯤 준이는 뭘 할가.   엊그제 선배언니한테 전화를 했더니 어른이 걱정해서 그렇지 아이들은 어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복잡하지도 여리지도 않어. 이것아. 니 걱정이나 하고 잘 오기나 해. 라고 했었다.  선배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내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기를 기다려 손을 내밀어 아이스크림 포장지와 막대기를 달라고 암시한다. 내가 다 먹은 포장지와 막대기를 내밀자 성큼성큼 도로변에 놓인 쓰레기통에 그것을 버리고 자, 이제 시원하게 먹었으니 다시 기운 내서 올라가볼가, 하면서 웃는다. 다시 걷는데 한결 걸음이 가볍다. 나는 선배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와 내가 결혼해서 살아온 시간 동안 이렇게 아이스크림 한번 나눠먹어본 적 없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 이렇게 눈을 마주치고 아이스크림을 나눠먹으며 서로를 향해 웃어주기라도 했다면,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와 포장지를 건네받고 건네주면서 살았더라면 그를 보내고 덜 아팠을가. 알 수 없다. 나는 머리를 흔든다. 락화암. 삼천 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락화암에 이르자 선배가 가파른 언덕 우로 올라가더니 돌아서서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나는 그 손을 물리치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 같아 잡는다. 선배가 힘껏 당기자 내 몸이 그 힘에 의해 가볍게 올라간다. 돌아서서 자세를 잡고 내려다보니 넓은 백마강이 한눈에 보이고 산자락과 저 멀리 도시가 발 아래 놓여있다.  “참, 근데 이거 삼천 궁녀가 아니고 서른명의 궁녀도 온전히 서있기 힘들겠는데?” 선배가 웃으며 말한다. “그러게요.” 바위는 선배 말대로 어른 서른명이 빼곡이 서있기도 힘들 만큼 작다.  “하긴 뭐 그래서 전설이 있는 거겠지?” “아마두요.”   “야호.” 선배가 소리지른다.  메아리가 멀리까지 퍼진다. 그 울림이 내 마음에 스며든다.  바람에 잔등의 땀이 식어가는 걸 느끼며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힘들었던 건 잊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알바트로스.” “네?” 나는 선배의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돌린다.  “그런 새가 있대.” 선배가 앞을 바라보며 말한다. “평소에는 바보처럼 뒤뚱거리며 날개조차 잘 펴지 못하는 새가 있대. 그러다가 폭풍이 오면 센 바람 때문에 날지 못하는 다른 새들과는 달리 이 새는 큰 날개를 리용해 바람을 타고 그 어느 새보다도 멋지게 힘차게 날아간대. 한번 날아오르기 시작하면 한동안 내려오지도 않는다나. 하늘높이 날아 태평양도 건너가는 새. 가장 높이,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오래 나는 새야. 알바트로스라는 이름의 새. 언젠가 내가 힘들었을 때 우연히 이 새의 사진을 보게 됐지. 그리고 무심히 그 아래에 적힌 글들을 읽었어. 그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그것이 내가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 데 정신적으로 큰 도움이 되였던 것 같아.” 그렇게 말하고 나를 돌아보며 선배는 웃는다. “멋있지 않아? 알바트로스.” “아. 참 그러네요. 멋있네.” 나는 잠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락화암에서 내려와 려행객 답게 한모금에 삼년 젊어진다는 물을 한모금씩 마시고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을 건너왔다. 백마강의 물은 가까이에서 보니 진흙을 풀어놓은 것 같이 흐리고 팔뚝 만한 잉어들이 떼를 지어 헤염쳐 다닌다. 지나치게 크고 살쪄있는 잉어는 살아있는 물고기보다는 숨만 팔딱이도록 만들어놓은 모조품 같이 느껴진다. 유람선에서 내려 백마강을 뒤로 하고 걸어가는데 고작 한시간이 조금 넘는 코스를 돌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디 먼곳으로 려행을 갔다가 온 기분이다.  “음료수나 한잔씩 마실가.” 주차장으로 가던 길옆에 슈퍼가 보이자 선배가 들어간다. 그가 음료수 두병을 꺼내 나에게 한병 내민다.  “막걸리는 안 사? 공주 막걸리가 유명한데. 공주에 오면 꼭 막걸리는 마셔봐야 한다고 하잖아.” 나이 지긋한 주인할머니가 웃으며 막걸리를 들어보인다.  “우린 술을 안 마셔서.” 나는 주인할머니가 무작정 손님을 붙잡고 매상을 올리려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한다. “본인들이 안 마시면 선물이라도 하지 그래? 장모님도 드리고 시어머님도 드리고.” 순간적으로 민망해진다. 나란히 들어오는 나이 비슷해 보이는 남녀를 보며 할머니는 아마도 부부일 것이라고 추측을 한 건가 보다. “하하.” 선배가 마구 웃더니 그럼 주세요. 하고 막걸리를 받아들고 돈을 낸다. 슈퍼에서 나와 콩국수를 한그릇씩 나눠먹는다. 콩국수는 콩을 적당히 삶은듯 비리지 않고 맛있다.  “이따가 저녁에 막걸리나 마시지?” 콩국수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 물을 마시며 선배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린다. 아까 산에 있을 때까지는 말짱했는데 배가 부르면서 피곤이 몰려온다.   “여기서 역전까지 거리가 얼마나 돼요?” “왜 지금 가게?” 식당에서 나와 한참 말없이 걷던 중이였다. 선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직 하늘 중간 쯤에서 조금 기운 해를 올려다보았다. “네. 가서 준비도 하고 그래야죠. 래일 가야 하는데.” “뭘 그리 준비할 게 많다고 그래.” 하더니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가며 말한다. “역전까지 태워다 줄게.”       “난 이제 여기서 정착하고 살 생각이야. 살다 보니 여기가 좋아졌어.” 신호를 기다리는데 선배가 말한다. “네.” “가면 몸부터 추스르고 좋은 생각 많이 하고 그래.” 나는 차안을 둘러본다. 낡았지만 차안은 깨끗하게 정돈이 되여있다.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그런 생각을 한다. 렬차에 올라 좌석에 앉아 내다보니 그 때까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라니. 나는 차창으로 손을 흔들어보인다. 그제야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이고 그는 돌아선다. 렬차가 달린다.  차창 너머로 나무가 지나가고 건물들이 지나가고 한순간 창밖이 어두워진다. 어두운 턴넬을 지나자 뜻밖에 한무더기의 꽃들이 무더기로 차창 너머로 달려온다. 그것이 끝인가 했는데 계속해서 꽃밭은 이어진다. 빨갛고 노란 꽃은 언뜻언뜻 스쳐지나는 바람에 무슨 꽃인지 알 수 없지만 무척이나 이쁘다. 그러고 보니 올여름 꽃을 본 게 처음이다. 진작에 피여있었을 터인데 나는 보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였다.  카톡 소리가 나서 보니 선배가 사진을 좌라락 한꺼번에 보내왔다. 사진을 찍는다는 소리를 안하고 셔터를 눌러대길래 풍경만 찍는 줄 알았는데 내 뒤모습이며 옆모습을 찍은 사진이 여러장이다. 나는 사진들을 하나하나 눌러 저장하고 메모장을 클릭한다.  그 때 그 때의 심경을 적은 몇줄의 고백 비슷한 게 있고 회사에 들어가 일하면서 작업에 관한 것들을 적은 메모가 있고 그 새벽에 나무와 풀에게라도 토로하고 싶었던 메모가 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클릭해 다시 읽어본다. 복잡하고 미묘한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나는 그것들을 한꺼번에 삭제해버리고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는다.            11. 현금인출기 앞에 서서 카드를 넣고 잔액조회를 누른다. 엥?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다시 들여다본다. 500만원. 다시 들여다봐도 앞에 1은 보이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열기가 발가락부터 정수리까지 확 올라온다. 카드를 뺐다가 다시 넣고 잔액조회를 해보지만 500만원이다. 힐끔 돌아보니 뒤에 벌써 여러 사람이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식은땀이 등골로 흐른다. 나는 카드를 뽑아 손에 들고 인출기 앞에서 물러난다. 기다렸다는듯 뒤쪽에 커다란 배낭을 멘 남자가 얼른 인출기 앞에 다가서고 뒤쪽에 있던 사람들이 한발씩 앞으로 다가간다. 나는 자리를 찾아 앉는다.  휴대폰을 꺼낸다. 번호를 해지했으나 와이파이를 련결하자 카톡 문자는 뜬다. 나는 화면에 떠있는 여러개의 카톡 문자를 무시하고 주인집 남자와의 대화기록을 클릭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아침에 집을 나오면서 남긴 문자가 있고 그 아래 분명히 오분 쯤 간격을 두고 네. 하고 답장이 되여있다. 아까 휴대폰을 해지하기 직전에도 확인했던 문자이다.  네. 라는 대답은 알았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1500만원을 입금해준다는 뜻으로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500만원이라니. 나는 입금을 잘못하신 것 같은데요. 하고 썼다가 500만원 밖에 안 들어왔는데요. 하고 썼다가 다시 지우고 1500만원 주시기로 한 거 아닌가요? 하고 보내놓는다.  “그 돈도 하도 사정이 딱해서 드린 겁니다. 참. 욕심도.” 한참이 지나 문자가 뜬다. 욕심도 라니. 그럼 내가 과분한 욕심이라도 부리고 있다는 것인가.  “더이상 문자하지 마세요. 한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는 것 같아 알려드립니다. 전세 계약은 댁이 부동산 사장하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댁과 부동산 사장과의 일이지 저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전 부동산 사장과 제대로 된 위임절차를 거쳤고 거기에 대한 서류를 완벽하게 갖고 있어요. 그 쪽 사정이야 어찌됐건 전 보증금 200만원을 받고 월세를 놓은 거라구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500만원은 하도 그 쪽이 딱해보여서 드린 거예요. 고맙게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무슨 말인지 제 말뜻 리해하시겠어요?” 나는 흠잡을 데 없는 그의 문자를 여러번 읽어본다. 짧지만 요점을 확실하게 말하고 있는 문자는 나와 전세사기방 모든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확실하게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그렇다. 사기를 당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였는데 어째서 나와 전세사기방의 교포들은 량쪽 다 피해자라고 생각을 했던 것인가. 다시 그와 나와의 대화내용을 떠올려보니 그는 내게 돈을 준다고 한 적 없다. 나절로 그가 나한테 돈을 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정지었고 그걸 믿었던 것 뿐이였다. 나는 망연해진다. 모든 것이 명백해지자 갑자기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다.  머리가 어질어질해 주위를 둘러본다. 사람들은 태연하게 앉아서 휴대폰을 보거나 생기발랄하게 트렁크를 밀고 배낭을 메고 움직이고 있다. 난 이렇게 숨 막히고 더운데 왜 그들은 저토록 태연한 거지? 나는 더위를 먹은듯 어질거리는 머리가 공항 안의 온도 때문이 아니라 내 속의 열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로 한다. 속이 메슥거리며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아 명치끝을 꼭꼭 누른다. 다른 카톡 대화창을 클릭해본다.  잘 가. 가서 련락하고. 다시 한번 부탁하지만 꼭 건강해야 돼.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마.  선배의 문자다. 그 다음 몇개의 문자는 회사의 동료들과 친구들이 잘 가라고 보내온 문자이다.  나는 전세사기방 대화창을 클릭해본다. “집주인들이 돈을 내놓으면서 합의하자고 한다는 소문이 있슴다. 어찌 보면 이게 최선인 것 같기두 하구… 그런데 절대 쉽게 합의하면 안됨다. 모두 단합해서 가격을 올리기쇼. 여기서라도 버텨야 됨다. 아이 그렇슴가?” “그럼. 합의할 때 서로 토론하고 하기쇼. 이 방에는 배신하는 사람이 없겠지에?” “동의.” 동의. 동의.  나는 그 대화들을 내리 읽어보다가 삭제버튼을 누르고 그 방을 나와버린다. 이제 내 휴대폰 화면에서 전세사기방이라는 채팅방은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인출기 앞에 선다. 이번에 나는 망설임 없이 출금버튼을 클릭한다. 촤르르르. 돈 세는 소리가 들리고 덜컹. 인출기의 현금이 나오는 검은 뚜껑이 열린다. 나는 돈을 한번에 손에 거머쥔다. 한손에 잡히는 얇은 부피에 가슴이 아리다. 가방 안쪽 칸에 깊숙이 돈을 집어넣고 쪼르로기를 닫는다. 출국절차를 다 마치고 면세점들을 지나쳐 항공권에 명시된 게이트가 보이는 곳에 놓인 걸상에 앉는다. 이제 저 문을 통과해나가면 그로써 이곳에서의 모든 것은 지워지고 나는 그 곳에서 새롭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새로운 전화번호를 만들고 아들애와 둘이서만 사는 새로운 삶에 적응해나가야 할 것이다.  살아갈 날들에 대한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  조용히 앉아 게이트를 바라보노라니 내가 바람 부는 벌판에 초라한 치마자락 펄럭이며 혼자 서있는데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입고 있는 치마가 펄럭이다 갈기갈기 찢기는듯한 느낌이 든다.  어제밤, 선배는 그 막걸리를 마셨을가?  “탑승수속을 시작하겠습니다. 연길로 가는 CZ2088 항공편 탑승수속이 곧 시작되오니…” 나는 안내방송을 들으며 가방에서 려권과 티켓을 꺼내 손에 들고 다른 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몇사람 서있는 줄에 합류한다. 뒤로 사람들이 하나 둘 줄을 서기 시작한다.    “려권 주시겠습니까. 네에.” 내가 내민 려권과 티켓을 스캔하듯 쓸어보고 다시 나에게 내미는 손가락은 너무 가늘고 희다. 나는 성큼성큼 저 앞에 커다란 식인꽃처럼 사람을 빨아들이는 비행기 탑승구를 바라보며 걸어간다. 알바트로스.  평소에는 날개도 제대로 펴지 못하다가 폭풍우가 오면 오히려 그 폭풍우에 몸을 맡기고 힘차게 날아오른다는 그 새. 그 새를 날게 하는 힘이 궁금하다.  나는 슬쩍 겨드랑이를 만져본다.  내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돋혀있는 대신 땀이 배여나와 축축한데 철판 우를 걸어가는 내 발자국 소리만이 내 귀에 들리고 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탑승구를 향해 허리를 꼿꼿이 펴고 힘차게 걸어간다.  탕탕탕. 발자국 소리가 요란도 하다. 출처:2018 제5호
6    [중편]사랑한 죄 댓글:  조회:268  추천:0  2019-07-14
사랑한 죄 김경화   1. “은서야 가자.” 등교시간이 다가오는데 아이는 자꾸만 길옆의 화단에 눈을 팔고 있다. 그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재촉한다. 아이는 그의 재촉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한테 다가오기는 커녕 화단 옆에 붙어서서 이름 모를 작은 꽃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꼭 다문 입술과 새초롬히 내리깐 저 눈이라니. 그는 아이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는 순간, 며느리를 떠올렸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올랐다.  “가자니까 말을 안 듣냐?” 그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이가 뜨거운 것을 만진 사람처럼 화뜰 놀라며 꽃에서 손을 뗀다. 여전히 입술을 꼭 다물고 새초롬히 내리깐 눈이 일그러지며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이 되더니 화단에서 물러나 앞에서 총총 걸어간다. 에미를 닮아 성질머리 하고는.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따라간다.  학교 문앞에 이르자 아이는 뜀박질하듯 빠른 걸음으로 들어간다. 그는 아이의 뒤모습을 바라본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으로 뒤돌아보지도 않고 뛰여간다. 행여 저 멀리에서라도 뒤돌아보지 않을가 싶어 그는 아이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본다. 하지만 아이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는다. 인사를 꼭꼭 하라고 그리 가르쳤건만.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문다. 어차피 여기서 소리를 질러봤자 들리지도 않을 것이였다. 그는 들쑥날쑥한 마음을 애써 가지런하게 다독거리며 돌아섰다.  저도 견뎌야 할 것이 있을 것이다. 학교 등교시간이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꽃잎을 어루만지며 기어이 뭔가를 시위하듯 하고 싶은 게 있을 것이였다. 할아버지한테 기어이 등을 보이고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하는 인사 따위를 거부하고 싶은 뭔가가 있을 것이였다. 그는 그렇게 어린 손녀의 마음을 리해하고저 한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다 못해 홀랑 나와버려 반바지라고도 말하기 힘든 바지에 겨드랑이가 휜하게 들여다 보이는 팔이 없는 민소매를 입은 녀자애 둘이 종알거리며 지나간다. 요즘 애들은 옷도 참 민망하게 입고 다닌다. 적당히 가리고 다니면 보기에도 좋고 더 이쁘련만 왜 저렇게 홀랑홀랑 살을 쉽게 내놓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보기 흉할 정도로 구멍이 펑펑 난 바지는 대체 왜 입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다. 옷이란 기후에 맞춰 몸을 보호하라고 입고 이쁘라고 입는 건데 구멍이 뻥뻥 뚫린 바지가 뭐가 이쁘다고 입고 다니는 건가. 며느리도 저러고 다녔었다. 아가씨도 아니고 애까지 있는 녀자가 옷차림이 너무 경박해보여 그가 몇번이나 아이 엄마 답게 정숙하게 하고 다니라고 듣기 좋게 말해주었다. 어른이 말하면 례의상 예 하고 수긍하고 잘못된 걸 고쳐나가는 게 도리건만 며느리는 그의 말에 내키지 않는다는듯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거리고는 또다시 뻥뻥 구멍 뚫린 바지를 입고 가슴골이 다 파인 적삼을 입고 돌아다녔다. 전혀 말이 먹히지 않는 애라는 걸 인정하고는 그도 포기를 했었다. 그렇게 녀자가 고집을 꺾지 않더니 결국 집안꼴이 이렇게 되여버린 것이다. 그는 도리를 젓는다.  바람이 불어온다. 이마에 스치는 바람이 차지 않고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제 봄이 오긴 왔구나. 그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러고 보니 이 더운 날씨에 손녀한테 하필이면 긴팔을 입혔다. 손녀가 반팔을 입겠다고 아침에 고집 피우는 걸 아직은 춥다고 기어이 긴팔을 입힌 건 그였다. 더울가? 그나마 얇은 소재로 된 긴팔티라 괜찮긴 할 것 같지만 어쩐지 신경이 쓰인다. 티를 입고 우에 교복을 입혀놔서 더우면 교복을 벗긴 하겠지만 그래도 날씨를 보아하니 점심나절부터 오후 한두시까지 땡볕이 내리쬐면 더울 것 같다. 그냥 반팔을 입게 내버려둘 걸 그랬다 싶은 게 슬그머니 후회스럽다. 그래도 추운 것보다 더운 게 낫겠지 하고 자아위안을 해본다.  오늘은 참 날씨가 화창하다. 하늘도 파랗게 개여있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멀지 않은 산자락에 나들이를 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은 날씨이다. 그 생각을 하자 조각조각 깨여진 나루배처럼 다시 회복될 여지가 없이 깨여진 자신의 가족이 떠올라 그는 마음이 어수선해진다. 아들놈은 그 안에서 밥이나 제대로 먹고 있을가. 부연 죄수복을 입고 입술이 초들초들하게 말라있던 아들을 떠올린다. 초점을 잃은 퀭한 눈은 꼭 혼이 빠진 놈이였지. 하긴 안해를 제 손으로 죽이고 딸은 이 먼곳에 두고 저도 제정신이 아닐 테지. 화김에 저지른 살인이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저도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 죄값을 받아야지.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한다. 사람을 죽이고 제대로 밥을 먹고 잠을 자면 그게 사람일가. 더구나 아이를 낳고 함께 살을 비비고 살던 안해를 죽였으니 그 놈도 그 안에서 죽지 못해 살아있을 것이다. 그래도 모진 놈, 편지라도 한통 보내오지. 부모와 자식한테 어떻게 있는다는 소식이라도 좀 전해오면 좋으련만 감옥에 들어간 지 3년이 되도록 아들은 그가 간간히 보내는 편지와 손녀의 사진을 받아보았을 텐데 답장 한번 없다.  후… 한숨이 나간다.  그는 자신의 안해를 생각한다. 안해가 집안에 갇혀버린 지가 이제 반년이 거의 된다. 안해를 가둔 건 안해 자신이다. 그리고 그걸 방관한 건 다름아닌 그였다. 생각 같으면 오늘처럼 날씨 좋은 날, 안해를 데리고 어디 가까운 곳에라도 나들이를 다녀오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안해는 동물원의 관상용 동물처럼 기꺼이 집안에 갇혀 얌전히 웅크리고 구세주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안해인들 바깥바람을 쏘이고 싶지 않겠는가. 하루하루 얼굴이 허옇게 뜨고 표정에 그늘이 짙어가는 안해를 바라보는 그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먹고 사는 일이 먼저니까. 밥 한그릇이 절박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른다. 모든 것에 앞서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안해도 그도 그걸 너무 잘 알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못할 일은 없다. 그와 안해만이라면 이 모진 고통을 안으로 삭히며 짜면 고름이 흐를 것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느니 차라리 언녕 함께 죽었을 것이였다. 그러면 이 고통스러운 삶이 끝날 것이니까. 아무 것도 모르면 편안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도 안해도 아직은 죽을 수가 없다. 손녀가 커서 자립할 때까지 그들은 죽음도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남의 귀한 딸을 죽인 살인범을 아들로 둔 처지에서 미안하고 렴치없지만 그는 아들이 감옥에서 풀려나오기를 기다린다. 아들은 우발적인 살인이고 음주로 인해 심신이 미약한 상태였다는 것이 참작되여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3년이 지나갔으니 이제 12년이 남았다.  잘 버텨내야 할 텐데, 단 얼마간이라도 사람답게 살아보고 그 놈도 죽어야 하는데, 이쁜 딸하고 시간도 보내보고 죽어야 하는데… 그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흠칫하고 놀란다. 자기 자신이 너무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안해가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집안에 갇혀버린 건 지난 가을에 량주가 페품 주으러 다니다가 만난 어떤 아주머니의 말 한마디에서였다.  “아니, 할머니는 다리도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자식도 없슴두? 이렇게 페품 주으러 다니시는 걸 보니 참 안됐네요.” 그러면서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하더니 이제 애들이 다 커서 필요 없게 됐다면서 교과서며 참고서 따위를 무더기로 내놓는 것이였다. 돈을 주려고 해도 기어이 싫다고 하며 가지고 가라고 손사래를 치는 착한 아줌마였다. 랭장고에서 음료수까지 꺼내서 주며 아줌마는 그들 량주한테 친절을 베풀었다. 어떻게 되여 두 로인네가 성치도 않은 몸으로 이렇게 돌아다니냐는 말에 안해는 빙그레 웃었다. 언제나 안해는 그렇게 말 한마디도 아끼는 사람이였다.  “아들도 며느리도 죽고 없수. 우리 량주가 손녀를 키우는데 이거라도 해야 먹고 살지.” 그는 그렇게 내뱉었다. 자기가 내뱉고는 웬지 울컥 설음이 북받쳤다.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런데 그들 량주가 돌아서는 등뒤로 그 아줌마가 던지는 말이 있었다. “페품 주어서 돈이 얼마나 되겠슴둥? 차라리 가두에 가서 말해봅소. 최저생활보장금이 두분 것도 나오고 손녀 것도 나올게꾸마. 그래구 요새는 어려운 분들 도와주는 사회단체도 많스꾸마. 하긴 두분 다 아직 운신할 만하니까 조건이 안될지는 모르겠스꾸마. 한분이 운신을 못한다거나 하면 그건 또 사정이 다르니 도와주는 데가 많겠지만은.” 뒤통수를 확 때리는듯한 말이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태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서 살 생각만 했지 남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해보지 못하고 살던 그였다.  “여보, 나 그냥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 들어앉아있을가 봄다. 내가 나가봤자 제대로 걷지도 못해 당신한테 별로 보탬도 안되구… 저번에 그 아줌마 말처럼 차라리 남의 도움을 받는 게 더 낫지 않을가 싶슴다.” 그 날 저녁 안해가 다리를 주무르며 하는 말이였다. 안해의 두 다리는 금방 쪄낸 순대처럼 팽팽하게 부어있었다.  “당신 다리 아파서 쉬라고 했잖소. 기어이 따라다니더만.” 그는 안해를 나무랐다.  안해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날 이후, 안해는 일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가 혼자 나다니자 아빠트 주민들이 할머니는 아프시냐고 물었다.  “할머니 이제 걷지를 못해유. 화장실 출입도 못하는 걸유.” 처음이 어려웠으나 몇번 그렇게 말해보니 그 자신도 가끔 안해가 이제 바깥출입을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가두에 찾아가서 사정을 얘기했더니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떼오라고 했다.  “아예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힘들게라도 걸을 수는 있을 텐데…” 의사가 안해의 다리를 잡고 무릎을 굽혔다 펴게 해보고 여기저기 꾹꾹 눌러보더니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전혀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는 걸요. 억지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면 숨이 넘어갈 것 같아요. 아퍼서…” 안해는 낮으나 힘든 투가 력력하게 말했다.  그는 침을 삼켰다. 의사는 사진을 찍어보자고 했다. 속이 조마조마했지만 다리가 전혀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안해의 태연한 반응과 두다리를 찍은 엑스레이 사진에 선명하게 나타난 무릎관절에 자라난 군살을 보며 젊은 의사는 체념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안해는 천연덕스럽게 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은 상태에서 손으로 다리를 잡고 하나씩 옮겨놓았다. 다리가 옮겨질 때 안해는 웃이로 아래입술을 지긋이 누르고 이마살을 찌프렸다. 누가 봐도 고통스럽고 힘겨운 기색이 확연해보일 만한 표정이였다. 그도 놀랐다. 안해에게 저런 구석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의외였다. 눈물이 나오려고 해 그도 안해처럼 웃이발로 아래입술을 눌렀다. 그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 안해를 업고 병원을 나왔다.  병원 진단서를 가두에 가져가자 최저생활보장금이 내려왔다. 달마다 나오는 돈이 생기자 숨이 나왔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할머니와 어린 손녀를 몸이 성치 않은 칠순의 할아버지가 돌보면서 살아간다는 사연은 련민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가두를 통해 사연을 접하고 아빠트 주민들이 이것저것 먹을 것을 들고 왔고 낯선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오고 가정방문을 왔다. 돈도 가져오고 물건도 가져왔다. 량주가 페품을 줏기보다는 퍽 나았다.  그런데 집에서 쉬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 같았던 안해의 다리는 다리를 끌면서 페품을 주으러 다닐 때보다 증세가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벽을 짚고 안깐힘을 써서야 겨우 일어난다. 한발한발 앞으로 다리를 옮겨놓는 안해의 표정은 병원에서 의사를 상대로 지었던 고통스러운 표정과 똑같았다.  그 표정을 떠올리자 가슴이 뾰족한 칼로 찌르는듯 아파난다. 그는 침을 삼킨다. 후둑후둑 심장이 가파르게 뛰면서 호흡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쉬였다가 후 하고 내뱉는다. 안해가 집에 갇히고 이런저런 후원을 받으면서부터 이렇게 가끔 가다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고르지 못한 증세가 생겼다. 몸에 무슨 병이 생긴 건지 아니면 마음이 불편해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스적스적 걷는다. 올해 봄은 유난스러웠다. 겨울이 지나고 이제 봄이 오는가 싶었는데 반팔을 입고도 땀이 날 정도의 초여름 날씨가 련며칠 지속되였었다. 훌쩍 봄을 건너뛰는 건가 했더니 또 갑자기 눈이 펑펑 쏟아졌었다. 들쑥날쑥한 그의 마음처럼 하늘도 견디기 힘든 게 있어 이토록 몸부림을 치는구나 할 무렵, 몸부림 끝에 비로소 평정을 찾은듯 이렇게 제대로 된 봄이 찾아온 것이다.  화단 곁을 지나다가 그는 우뚝 멈춰섰다. 화단 중앙께는 키 큰 꽃들이, 가장자리에는 키가 작고 꽃송이가 자잘한 꽃들이 이쁘게도 피여있다. 꽃모종을 떠다가 줄을 세워 옮겨놓은듯하다. 아침 일찍 물을 뿌려놓은듯 자잘한 물방울이 아직 꽃이파리에 남아있다. 그는 한참 서서 꽃들을 바라본다. 맨드라미, 국화 그리고 저 작은 꽃은 이름이 뭐더라. 애써 이름을 떠올려보지만 기억은 쉽게 소환되지 않는다. 이토록 이쁜 꽃인데 어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질 열살짜리 녀자애라면 이런 꽃 앞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게 이상할 것이였다. 마음이 아릿하다. 지각할 정도는 아니였는데도 왜 그토록 아이한테 역정을 내며 소리를 질렀던 것일가. 좀 참고 기다려줄 걸 그랬다. 그는 자책하며 손으로 꽃이파리를 만져본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느껴진다. 쉽게 마음을 풀지 못하는 성격인 손녀는 분명 오늘 하루종일 기분이 잡쳐있을 것이였다.  안 그래도 엄마 아버지의 사랑이 뭔지를 모르고 자라 마음이 허전할 아이를 왜 나까지 들쑤셨을가. 여리디 여린 어린 것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는 손녀를 어루쓸고 보듬기보다는 이렇게 역정을 내고 소리를 지르는 일이 더 많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구수한 장국냄새가 코를 찌른다. 안해가 식탁을 짚고 서있다가 그가 들어서자 애써 입꼬리를 우쪽으로 끌어당겨보인다. 안해는 언제부터인가 그를 마주하면 저렇게 억지로라도 웃어보려고 애를 쓴다. 그게 우는 것보다 더 상대의 마음을 후벼놓는다는 걸 안해는 몰라서 저럴 것이다. 저렇게라도 웃어보이며 살려고 모지름을 쓰는 게다. 살자고, 살아야 한다고 자신한테 말하고 그한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안해한테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장국과 김치를 놓고 량주는 조용히 밥을 먹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도 하고 밥도 폭폭 야무지게 떠먹고 학교에 갔으면 좋으련만 손녀는 아침에 두번 세번 깨워서야 겨우 일어난다. 아침을 차려놓아도 먹지를 않아 이제는 아예 빵과 우유를 먹여 보내고 아침은 량주만 먹는다.  아침밥상은 늘 그렇듯이 부실하기 짝이 없다. 그도 안해도 두 사람이 먹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손녀가 밥상에 마주앉는 저녁이라야 고기반찬도 가끔 하고 갈치나 고등어도 구워올린다. 다 늙은 두 로인네가 좋은 걸 먹어 뭐 하겠는가. 배만 부르면 되는 것이다.  밥을 먹는 동안, 안해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그는 장국을 한숟가락 푹 떠서 입에 넣어본다. 잘 익은 감자가 입안에서 으깨여지고 진한 된장향이 입안에서 감돌다가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아침에 손녀한테 소리를 지른 것 때문에 치런치런했던 그의 마음이 안해가 끓인 장국 한숟가락이 들어가자 비로소 차차 자리를 잡아가는듯 가지런해진다. 평생을 먹어온 장국인데도 맛있다. 어데 가서 장국을 먹어도 안해가 해주는 이 맛은 흉내낼 수 없다. 그는 묵묵히 밥 한공기를 다 비우고 일어선다. 안해가 힘겹게 다리를 손으로 짚으며 일어나 빈 그릇을 싱크대로 가져간다. 그는 위태로운 안해의 몸짓을 슬쩍 쳐다보고는 그대로 식탁에서 물러난다. 안해를 도와줄 법도 하지만 그는 안해가 혼자서 저 정도는 하게 내버려둔다. 그래야 안해도 덜 그에게 미안해하고 들쑥날쑥한 마음도 달래고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낀다는 걸 그는 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바닥에 펴놓은 자리 옆에 앉아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대 꺼내 입에 물고 라이타로 불을 붙인다. 깊숙이 한모금 빨아들이자 익숙한 향기가 페속까지 스며든다. 손녀 앞에서 그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어린 것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그다. 이렇게 방바닥에 편안히 앉아 담배 한대를 피우는 건 마누라하고 단둘이 있을 때만 누릴 수 있는 호사이다.  담배 한대를 다 태우고 그는 일어선다.  오늘은 산에 가기로 했다.  “일요일에 무슨 애심협회 사람들이 방문 온다고 전화 왔습데. 저번에 가두에 그 아즈마이 제보를 했나 봅데. 해주겠다고 하더니만. 후원학생으로 선정되면 고중 졸업할 때까지 달마다 오백원씩 준다는구만.” 그는 신발을 신고 일어서며 그렇게 무심한듯 말한다. 안해가 엉금엉금 기여다니며 장판을 닦다 말고 그를 바라보며 끄덕끄덕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겠다는 뜻이다.  굳이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안해는 이제 얌전히 두다리를 뻗고 저 자리에 누워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가며 화장실도 스스로 갈 수 없는 중환자가 되여있을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극본이 없이도 그와 안해는 호흡이 척척 맞는 환상의 연기를 펼쳐갈 수 있을 것이다.  안해도 그도 알고 있다.  이 삶을 기어이 살아내야 한다는 걸. 어떤 식으로든.   2. 그는 부모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가 세상에서 태여나기 전 그의 아버지는 큰비가 련 며칠 내려 마을 앞강물이 다리를 넘도록 불어나고 밭뙈기가 물에 잠기던 어느 여름, 물에 떠내려가는 돼지를 건지려고 시누런 흙탕물 속에 뛰여들었다가 그만 그대로 물살에 휘말려 내려갔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여나서 얼마 안되여 그를 포대기에 꽁꽁 싸서 할머니네 집 앞에 가져다 놓고 마을 뒤산의 커다란 느릅나무에 목을 매달고 목숨을 끊었다. 녀자가 한번 시집을 가면 그 집 귀신이 되여야 한다는 관념이 뿌리 깊었던 그 년대에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막막했을 터였다.  “할머니, 난 왜 엄마가 없고 아버지도 없슴가? 다른 애들은 다 엄마 아버지하고 사는데 왜 나는 할머니하고 삼가?” 어린 그가 그렇게 물으면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머리를 쓸어주며 혀를 끌끌 찼다.  “이 불쌍한 것을 어쩌노.” 할머니는 말끝을 흐리며 대답 대신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을 만져주었다. 그럴 때면 머리며 얼굴이 옥수수잎으로 문지르듯 꺼끌꺼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그 손길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다는 알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아파나고 눈물이 솟구치려고 했다. 다른 아이들이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은 애초부터 가지지 못하고 있구나. 나는 다른 애들과 뭔가 다르구나 하는 어렴풋한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그의 어린 마음을 고양이가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가 내버린 실뭉치처럼 헝클어버리군 했다.  어린 나이에 견뎌야 했던 아픔은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래 남자애들과의 싸움에서 지는 법이 없었다. 그가 특별히 덩치가 크다거나 싸움기술이 좋아서는 아니였다. 그에게는 그 아이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 있었다. 마음속의 단단함으로부터 솟아나는 배짱과 지면 안된다는 오기였다.  그가 앞집 용식이를 끝내 쓰러눕히고 항복을 받아낸 날이였다. 또래 중에서 서열 2등이였던 용식이와의 싸움은 특별히 의미가 컸다. 그 싸움으로 인해 그는 또래에서 대장인 자기보다 두살 더 먹은 영수 바로 밑이 될 수 있었다. 승리의 희열은 입가에 흐르는 피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게 해서 그는 슥 입을 문질렀고 손에 묻은 피를 그대로 방치한 채 터덜터덜 걸었다. 용식의 주먹과 발길질에 맞은 배와 허벅지의 아픔이 얼얼하게 느껴질 때는 오히려 그것이 승리의 훈장이라도 된듯 달콤하기까지 했다. 찢어진 바지가랭이가 바람에 너풀거렸다. 꼭 승리를 경축하는 기발 같았다. 그러나 그 승리의 달콤함을 그는 오래 느껴볼 수 없었다. “아이구, 이것아, 어쩌려고 이런다냐. 너 같은 건 구뎅이에 빠져도 건져줄 사람도 없다는 걸 왜 모르냐.” 할머니는 그의 그 대단한 승리에 대해 전혀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 나 이제 용식이 다음이 됐단 말임다. 싸움에서 지면 애들이 나를 얕잡아본단 말임다. 그래서…”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오히려 호되게 그의 어깨를 때렸다.  그는 억울해서 할머니한테 대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고개를 할머니한테 돌린 순간,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보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고무풍선처럼 부풀어올랐던 흥분된 마음이 누가 바늘로 콕 하고 풍선을 찔러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서서히 김이 빠지더니 스르르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였다. 그날 밤, 할머니는 등잔불 밑에서 그의 바지를 한뜸한뜸 기웠다. 그는 옆에서 바늘에 실을 꿰여 할머니한테 드리고 공손하게 두손을 앞으로 모으고 앉아 할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김치독에 돌을 얹어 김치를 누르듯 할머니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천천히 바늘을 놀려가며 바지를 기워나가는 할머니 입가에 밖으로 스며나오지 않게 하려고 안으로 삭히는 한숨이 걸리는 걸 그는 보았다.  그 날 밤, 그는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서렬 2위가 되기 위해 주먹을 갈고 닦았던 시간이 허무하고 어이없게 생각되였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며 무엇보다 할머니가 속상해하실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그는 다른 아이가 되였다.  열심히 공부를 하고 할머니의 일손을 도왔다. 밭머리를 다니며 능쟁이와 비듬을 한주머니씩 캐왔다. 할머니는 이발이 다 빠져 이몸만 남은 입안이 들여다보이도록 웃었다. 그가 캐온 능쟁이와 비듬을 커다란 고무다라에 놓고 씻은 다음 옥수수겨를 넣고 커다란 가마에 끓여서 돼지죽을 쑤었다.  그의 마음을 알리 없는 아이들이 대결을 신청해왔다.  싸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기에 그는 상대방이 이기고도 화를 낼 정도로 허망하게 져주었다. 허망했지만 대결은 대결이였다. 그것은 이긴 사람과 진 사람으로만 구분되였고 곧 서렬로 이어졌다. 그는 주먹으로 앞자리 다섯 안에도 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이들과의 서렬다툼 정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할머니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세투리를 뜯어다가 통나무를 짤라 만든 칼판에 놓고 무딘 칼로 쪼아 옥수수겨에 버무려 닭모이를 만들어 닭을 먹이고 여기저기 닭알을 주어들이고 밭일도 도왔다. 그가 풀을 뽑고 량쪽 밭고랑을 날이 잘 선 호미로 썩썩 후벼 곡식 주변에 흙을 모아놓으며 기음을 매나가면 할머니는 엉금엉금 뒤에서 그를 따라나오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구야. 니가 할미보다 백배는 낫구나. 할미는 이제 다 늙었다.” 그는 때이르게 철이 들었고 까불고 잘 웃던 아이로부터 과묵한 아이가 되여버렸다. 아이들이 골목길에서 딱지치기를 하고 쇠구슬을 치는 걸 보면 같이 뛰놀고 싶기도 했지만 그는 참았다. 그는 점차 아이들과 멀어져갔다.  그는 외로워졌지만 할머니는 기뻐했다. 동네방네에 다니면서 손주자랑을 했다. 할머니의 얼굴에 피여나는 웃음은 그로 하여금 친구들과 뛰여놀고 싶은 마음과 담배도 피워보고 술도 마셔보고 싶은 마음의 반란을 누를 수 있게 했다. 이제 그는 그가 원하는 것 따위는 멀리 던져버렸고 대신 할머니가 원하는 대로 커갔다. 그 할머니가 자신의 전부이듯이 자신 또한 할머니에게 세상의 전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였고 할머니를 속상하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할머니는 언제부터인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학교에 큰아버지와 먼 친척들이 찾아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집에 가자.” “네? 할머니가? 그럴 리 없어요.” 그는 혹시 잘못 들었겠지 싶어 다시 물었다.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할머니가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어제까지 내 손을 잡아주고 이름을 불러주던 할머니가 어떻게 말을 멈추고 숨 쉬기를 멈출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상복을 입고 할머니의 상여를 따라 걸었다. 커다란 구뎅이에 할머니가 누워있는  나무관이 들어가고 큰아버지가 먼저 흙을 한삽 떠서 관을 덮었다. 이어 마을 어른들이 삽으로 흙을 퍼서 관을 덮기 시작했다. 관이 흙으로 덮이고 이어 봉긋한 무덤이 만들어질 때까지 그는 그저 멀거니 서서 그 과정을 지켜만 보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왔다. 훌쩍 웃자란 쑥이며 자주색 꽃봉오리가 지기 시작한 익모초들이 고개를 흔들며 술렁거렸다. 분명 여름인데도 그는 추웠다. 두손을 올려 한기가 오스스 올라와 떨려나는 량쪽 팔을 붙잡고 그는 나는 이제 어떻게 되나 하고 생각했다. 큰아버지가 다가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호상이라고 했다. 그 때 년세로 팔순을 넘기셨고 자리보존을 하지 않고 복하게 돌아갔다고 했다. 할머니를 산에 묻고 와서 사람들은 기장쌀로 친 떡을 먹었고 아이들은 할머니 제사상에 올려놓았던 밀가루로 만든 손바닥 만큼 큰 과자를 나누어 먹었다. 그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데 그의 사촌형제들과 동네 아이들은 잔치라도 열린듯 즐거워하며 평소에 손에 쥐여볼 수 없는 과자를 뜯어먹고 개눈깔사탕을 씹는 소리가 옆에서도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먹을 수 없었다. 혼자 강가로 나와 강물을 바라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었다. 밤중에 큰아버지가 찾아나와 어깨에 두손을 얹었다. “걱정 말어. 이제 큰아버지 집에서 사는 거다. 큰아버지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할머니는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다. 저세상에서도 널 내려다보고 있을 게다. 그러니 너무 상심해하지 말거라.” 큰아버지가 큼직한 손으로 힘차게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쿵쿵 큰아버지의 손바닥이 그의 어깨에 닿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는 그제야 참았던 울음을 엉엉 크게 소리내여 터뜨렸다.  커다랗고 둥근 달이 하늘에 둥실 떠있던 밤이였다. 그는 눈물로 부옇게 흐린 눈으로 달을 올려다 보았다. 할머니가 달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얼굴이 온통 주름으로 자글자글했다. 그 이후로 그는 아무리 해도 그 날 밤처럼 환한 달을 볼 수 없었다.    “고모네 집에서 자랐슴다.” “아, 나는 큰아버지네 집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는 할머니하고 살았구.” “예, 그렇다고 들었슴다.” 녀자가 수줍게 웃었다. “냐. 아버지는 내가 태여나기 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나를 낳고 얼마 안돼서 돌아가셨소. 난 부모 얼굴을 보지 못했소.” “나두. 어쩜 이렇게 처지가 똑같슴까.” “그러게 말이요.” 그는 녀자를 흘긋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녀자는 수줍은듯 손을 뻗어 키 낮은 풀을 어루쓸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날 밤은 별들도 금방 세수를 하고 나온듯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녀자가 앉은 바닥이 차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웃옷을 벗어 바닥에 깔고 녀자보고 앉으라고 했다. 녀자는 아니아니 하고 사양하다가 못이기는 척 살포시 앉았다. 썰물이 밀려오듯 따듯한 것이 그의 가슴으로 밀고들어와 기분이 좋아지게 했다. “어느 해 봄이였슴다. 학교에서 봄이면 산으로 들놀이를 가잖슴가. 5월인가? 5월이 맞을 겜다. 고모는 며칠 전에 시내에 가서 우리가 들놀이 갈 때 갖고 갈 간식거리들을 미리 사다가 창고 안 쌀뒤주에 넣어놓았는데 그걸 어떻게 사촌동생이 발견하고 꺼내 먹었던 겜다. 들놀이 가기 전날 저녁에 창고로 들어갔다가 반 이상 먹어버린 간식을 보고 고모가 란리 난 겜다. 고모부가 우리 셋을 불러놓고 누가 한 짓인가를 조사했슴다. 우린 셋 다 고개를 저었슴다. 그런 일 없다고. 그 때 서로 옆사람을 곁눈질해보았던 것 같슴다. 사촌동생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누구보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 걸 보면서 아 죄인이 얘구나 생각했슴다. 고모부가 소리질렀슴다. 셋 다 아니면 쥐가 물어갔니? 강아지가 물어갔니?” “큰일났군. 그래서?” “제대로 말 안하면 셋 다 오늘 밤 내쫓을 거라고 했슴다. 그런데 사촌동생이 겁이 났는지 덜컥 언니가 먹어버렸다고 하는 겜다. 고모부는 멈칫했슴다. 그러더니 나를 바라보며 정말이니? 하고 묻는데 그 낮지막하고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가 왜 그리 심장 떨리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는 겜다. 잠간 고요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는데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야 될 것 같았슴다. 고개를 끄덕이고 고모부 잘못했슴다.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겜다. 그만 소리내면서 울어버렸슴다.” ‘겜다’를 버릇처럼 뒤에 달아가면서 녀자는 그렇게 말했다. 지난 일을 떠올리는 것인데도 녀자는 감정이 격해져 눈가가 촉촉해지고 있었다. 그는 알 것 같았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남의 집에 얹혀사는 자의 빚진듯한 마음이랄가. 그리고 항상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기회가 올 때마다 수렁인 줄 알면서도 주저없이 발을 들이미는 심리가 무엇인지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임다.” 녀자는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른듯 말을 이었다. “놀라운 건 고모부의 반응이였슴다. 방금 전까지 눈을 부릅뜨고 죄인을 찾고야 말겠다는듯 비장한 표정이던 고모부가 스르르 굳어진 얼굴을 펴는 겜다. 그러더니 그래, 알겠다, 하고 일어서더니 아무 일 없다는듯 고모한테 지금 합작사에 다녀오라고 하는 것이였슴다. 고모는 예 하면서 고모부를 바라보면서 웃었슴다. 그 때 그 고모의 표정, 그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표정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슴다. 민망하게 쉽게 울음이 그쳐지지 않아 흐느끼면서 그걸 바라보는데 그냥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싶습데다. 아무튼 사건은 그렇게 끝나버리고 사촌동생은 살아났다는듯 후 하고 숨을 내쉬고 사촌오빠는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서더라구요. 지난 일이지만 그 때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모르겠슴다. 그런 기분 아마 부모 있는 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아무리 설명해도 모를 겜다.” 그는 손을 뻗쳐 녀자의 손을 잡았다. 녀자의 작은 손은 그의 손안에서 두어번 꼼지락거리다가 가만히 있었다.  손으로 전해오는 녀자의 따듯한 체온을 느끼며 그는 가슴이 먹먹해났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했다. 이상하게 할머니가 갑자기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아무 것도 없이 시작했으나 둘 다 생활력이 강했기에 그와 안해는 남 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 서로가 아픔을 알았고 가정을 사무치게 그렸던 터라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살았다. 아들을 낳았다.  그는 아이를 엄하게 키웠다. 아들애는 그의 바람 대로 공부도 어지간히 하고 말썽도 피우지 않고 잘 커갔다. 그도 안해도 아이를 여럿 낳아 키우고 싶었지만 웬 일인지 아들애를 낳고 나서 안해는 더는 임신하지 못했다. 지금이야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도 해보고 인공적으로 임신도 한다지만 그 때는 그저 안 생기면 못 낳는 법이려니 하던 시절이였다.  그와 안해는 모든 희망을 하나 뿐인 아들에게 걸었다. 합작사에 천이 오면 안해는 천을 끊어다가 밤도와 야무진 손재간으로 아들애의 옷을 지어입혔다. 닭이 알을 낳고 일어나기 바쁘게 안해는 주어들여다가 콩기름을 넣고 노랗게 볶아서 아들애한테 먹였다. 그는 아침 일찍 소에게 풀 뜯어먹게하려 나갔다가 들판에 말뚝을 박아놓고 돌아오면서도 딸기며 머루며 개암이며를 따다가 잠든 아들애의 베개머리에 놓아주었다.  호도거리를 하자 그는 안해와 함께 남들이 내버리는 밭을 당겨서 해바라기를 심어 시내 해바라기 장사군한테 넘겨 돈을 만들었다. 닭도 키우고 돼지도 키우고 소도 정성을 다 해 키웠다. 살림은 나날이 윤택해져갔다. 그는 아들애를 공부시켜서 그와는 다른 삶을 살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도시에 나가고 그처럼 밭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고 싶었다.  “아버지, 그림 그리고 싶슴다.” “뭐?”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그는 화가 났다. 앞길이 묘연한 그림을 그리겠다니, 공부를 해서 미래가 보장되게 살라는 부모 마음을 이리도 모르다니, 그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리유를 묻지 않고 아들애의 멱살을 잡고 귀뺨을 쳤다. 아들애가 코피를 쏟으며 푹 무릎을 꺾어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쓰러진 아들애를 걷어차며 소리질렀다. “이눔 자식아. 넌 대학에 가야 해. 아버지 엄마는 공부하고 싶어도 환경이 안돼서 못했어. 친부모 밑에서 자라는 게 얼마나 복한 겐지 니는 알고 있냐. 이눔아. 넌 공부도 하고 출세해서 좋은 녀자 만나 애도 여럿 낳고 잘살아야 한단 말이다. 이 망할 눔아.”  안해가 아들애를 그러안았다. 그는 더는 아들을 때리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여보, 사실은 쟈가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슴다. 당신 쟈 그림 그린 거 한번도 못 봤잼가?” 그 날 밤, 안해가 그에게 아들애가 그린 그림이라며 그림 몇장을 내밀었다. 이상한 그림이였다. 나무나 강이나 강아지나 고양이를 똑바로 그렸다면 모르겠지만 무슨 해골 같은 모양을 그린 것도 있고 산도깨비 같은 모양에 험상궂은 표정을 한 괴물을 그린 것도 있었다. 크레용으로 꼼꼼히 칠한 그 그림은 그림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가 봐도 뭔가 예술작품이긴 한 것 같은데 어쩐지 분위기가 침침했다. 그는 화가 버럭 났다.  “무슨 이따위 걸 그리느라고 아까운 도화지를. 당신도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구… 말리지는 못할망정 뭘 철없는 애 편에 서서 붙는 불에 키질 하려구 그래오? 무조건 공부를 해야지.” “이게 무슨 예술그림이라는데 우리는 알아보지 못하지만 뭐라고 하던데 .” “그만하래두.” 안해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듯 입을 열었다가 멈칫하더니 다시 닫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번의 귀뺨으로 아들애는 철이 들었는지 더는 이상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깊은 생각에 잠긴듯이 가만히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들애의 노르스름한 손끝을 보고는 단단히 혼을 낼가 하다가 저도 무엇으로라도 마음을 풀고 싶을테지 하고 리해하기로 하고 그만두었다.  한동안 지나자 아들애는 안정되는듯했다. 여전히 말은 별로 없었지만 공부를 수걱수걱 했다. 성적은 뛰여나지 않아도 중간 이상은 되였다. 마을 아이들이 하나 둘 공부를 그만두고 돌아왔다. 아들애는 공부를 이어나갔고 고중에 붙었다. 마을에서 몇 안되는 고중생이 된 것이였다. 고중에 가서도 아들애는 여전히 썩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의 바람 대로 대학에 붙었다.  그는 이제 한고비 넘겼다는 생각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3 그는 오토바이를 길가에 세워놓고 산에 오른다.  그닥 가파르지 않은 언덕임에도 벌써 허리가 시큰거리고 숨이 차올라 중간에 한번 쉰다. 한달음에 달려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던 곳인데 산 중간께도 못 와 숨이 가빠지며 헉헉 소리가 난다. 허리가 지끈거린다. 허리를 쭉 펴보는데 저절로 아구 하고 신음소리가 나간다. 허리를 굽히고 한참만 걸으면 이렇게 통증이 일어난다. 휴… 내가 벌써 나이를 이렇게 먹고 몸이 이렇게 망가졌나 싶은 게 서글프다.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본다.  앞만 보고 달리기를 하듯 살아온 세월이였다. 옆도 뒤도 돌아볼 새 없이 살았었다. 돌아봐서도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다시 살아본다면, 다시 살 수 있다면 옆도 살피고 뒤도 돌아보면서 살고 싶어진다. 다시 아들이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던 그 때로 돌아간다면 그 이상한 그림이 아무리 해괴하고 어둡더라도 그래 네가 해보고 싶은 걸 해봐라 하고 내버려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때, 그 그림을 그렸더라면 살인범이 되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저릿저릿해난다.  그는 복잡하게 밀려오는 생각들을 떨쳐내고저 머리를 흔든다. 이미 식탁에 엎질러진 물잔처럼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자꾸 생각해서 뭣 하겠는가. 머리만 아파날 뿐이다. 긁어 부스럼을 내는 일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  그는 스적스적 산중턱을 가로질러 나무들이 울창한 사이로 들어간다.  갓 봄이 시작되던 4월에 와서 참도스깨를 뜯어가고 한동안 안 왔는데 그새 풀들이 발목을 넘게 자라있다. 고개를 숙이고 풀들을 헤가르며 나아가다가 그는 얕게 탄성을 지른다. 자연은 성실하다. 때를 어기지 않고 기름고비가 무더기로 자라있다. 막 자라난 거라 손을 대니 실도 일어나지 않고 똑똑 잘도 꺾인다. 저녁에 데쳐서 볶아주면 손녀가 맛있게 먹을 것이다. 고사리가 나물 중에 제일 맛있다고 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제철에 난 기름고비가 고사리 이상으로 맛있는 나물이다. 고사리가 독성 때문에 데쳐서 많이 우려내야 하는 거라면 기름고비는 데쳐서 여러벌 씻어 다리에 부스스한 털만 떼서 그대로 볶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그는 이 동네에서 이 산을 뛰여다니며 자랐다. 이 산은 그에게 눈을 감으면 어느 곳에 어떤 바위가 있고 어느 곳에 개암이 나고 어느 곳에 머루가 나고 어느 곳에 산딸기가 무더기로 나고 어느 곳에 어떤 나물이 나는지 환하게 떠오를 만큼 익숙한 곳이다. 그는 물이 오른 나무가지를 눕혀가며 산을 누벼나간다. 두벌두릅이 파랗게 돋아나있다. 그는 두릅을 하나하나 따면서 요건 아무래도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터이니 아빠트단지 아래에서 팔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굳이 시장까지 가지 않아도 그가 손수 따서 가져가는 산나물은 자리를 펴고 내놓기 바쁘게 아빠트 주민들이 앞다투어 가져갈 정도로 인기있었다. 우정금과 삽주도 보여 그는 몇개 손 가는 대로 따서 넣는다. 안해가 좋아하는 나물이다. 안해는 우정금과 삽주를 데쳐 기름에 볶다가 물을 붓고 육수를 만들어 옥수수온면을 만들 것이다. 안해가 나물을 고명으로 해서 만든 온면은 별미이다.  허리를 오래 굽히고 있었나 보다. 시큰거린다. 그는 일어서서 허리를 편다. 시원하게 바람이 불어온다. 숨통이 확 트이는 것 같다. 이 시간에 안해는 무엇을 할가. 아픈 다리로 엉금엉금 기여다니면서 집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겠지. 집에만 갇혀있는 일이 답답하기도 하련만 안해는 그런 내색조차 없다. 안으로 모든 걸 꾹꾹 눌러 담으며 안해는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 저렇게 눌러 담다가 더 이상 누르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어떡할가.  그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될수록 잡념을 덜고 단순하게 그날그날 살고저 그는 노력한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더러 쓰나미처럼 잡념이 몰려오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그는 산속 깊이 들어가 소리를 지르고 미친듯이 땅이라도 파헤치고 광기를 부려보고 싶다. 그는 그런 순간이 오면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감고 애써 자신을 진정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을 꾹꾹 누르는 일 밖에 없다는 걸 그는 안다.  오늘은 수확이 꽤 좋다. 쌀포대 밑굽을 톡톡히 차지한 나물은 어림잡아도 무게가 5키로 이상은 나갈듯하다.    “은서야.” 아직 아침의 앙금이 남아있는지 그가 소리쳐 부르자 아이는 쭈볏거리다가 다가와 그의 손을 잡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손안에서 꼬물거린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걸어서 십분 가량이다. 낡은 오토바이가 있지만 그는 늘 이렇게 걸어서 아이를 학교에 데려가고 마중해서 데려온다. 이제 다 큰 애를 뭐 하러 데려가고 데려오냐고 혼자 학교 다니게 하라고 주변에서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아직 아이를 혼자 다니게 할 수 없다. 자신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도 이 아이를 건드릴 수 없게 보호해줄 것이다. 허리가 아파도 몸이 말째여도 그는 하루도 아이를 학교에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을 빼먹은 적이 없다.  어린 시절 그가 할머니에게 가졌던 그 감정을 그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손녀가 지금 그에게 가지는 감정도 그러할 것이다. 아마 그래서 그는 더더욱 손녀한테 각별한지도 모르겠다.  “은서야, 날도 더운데 아이스크림 먹겠니?” 아이스크림가게 앞을 지나는데 아이가 자꾸만 멈칫거리길래 물어본다. 분명 먹고 싶어 입술을 감빨면서도 아이는 선뜻이 먹겠다고 하지 않는다. 이제 열살짜리 아이는 너무 일찍 자기 처지를 알고 가난을 알아버린 걸가. 종래로 뭘 사달라고 하지 않는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한족아주머니가 깔대기 모양의 과자를 손에 쥐고 기계버튼을 아래로 누른다. 아주머니의 손의 움직임에 따라 하얀 색과 분홍 색이 무늬처럼 섞인 아이스크림이 깔대기 모양의 과자에 라선형 모양으로 담겨진다. 그는 아이스크림을 받아 건네준다. 아이는 덥석 받아든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저리도 손놀림이 급할가 싶다.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 아이는 먹기가 아까운지 혀를 내밀어 아이스크림을 아래로부터 핥는다.  “그냥 뚝뚝 끊어서 떼먹어. 그렇게 핥지 말구.” 그래도 아이는 여전히 혀로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걷는다. “너 그러다가 또 다 녹아서 아이스크림이 땅에 떨어진다 저번처럼. 빨리 먹어.” 그가 다그쳐서야 아이는 입을 벌리고 조금 떼서 먹는다.  “할아버지, 오늘 학교에서 칭찬받았슴다. 글씨 이쁘게 썼다구.”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깔대기 모양의 과자까지 오작오작 씹어먹고도 아쉬운지 입을 다시던 아이가 여태 꼭 닫고 있던 입을 연다. 말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니 기분이 한결 좋아진 것 같다. “그래? 잘했구나. 이따가 집에 가서 보자. 얼마나 곱게 썼는지.” “그리구 오늘 달리기도 2등 했슴다.” “그래? 잘했구나. 일등은 못하겠더니? 이제 더 잘해서 일등 해야 한다 알았니? 넌 꼭 뭐든지 남보다 잘해야 한다. 알겠냐?” “네. 할아버지. 알겟슴다.” 아이가 입술을 감빨며 머리를 끄덕인다. 까만 고무줄로 하나로 동여맨 머리가 아래우로 찰랑거린다.    4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가. 그는 아직도 아들이 왜서 살인자가 되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다.  특별히 문제될 만한 건 아무 것도 없던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우락부락했던 아이도 아니였다. 그가 아이를 엄격하게 키우긴 했지만 그것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항상 행동을 바르게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례의범절에 어긋나지 말라는 옳바른 교육을 한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는 맹목적으로 아이를 때린 적도 없었다. 딱 한번 그 때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을 때 귀뺨을 때린 것 외에는 그가 기억하는 한 없었다. 그는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지도 않았고 성실하게 일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가장이였다. 안해도 집청소를 깨끗하게 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밥상을 차려놓는 나무랄 데 없는 엄마였다. 다른 집 아낙네들처럼 그한테나 아들한테나 잔소리를 심하게 늘어놓지도 않았다. 부모가 싸우는 모습을 아들한테 보여준 적도 없었다. 그와 안해는 서로 리해하고 존중하고 아껴왔다. 집에서 큰소리 한번 난 적이 없었다. 그들 부부는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을 최대한 아이에게 주려고 애썼고 눈동자처럼 아들을 사랑했다. 그번의 그림사건 이후, 아이가 말이 없고 웃지 않는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그게 문제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아이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제 시름을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대학졸업 이후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들애는 한동안 집에 있더니 남방으로 가서 회사에 취직했다. 가끔 전화가 와서 물어보면 잘 있는다고 했고 두어번 용돈도 보내왔다. 그는 흐뭇했다. 아들만 자기 인생을 잘 살아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그와 안해는 남은 삶을 지금까지 그래왔듯 서로 기대고 리해하며 살아가다가 때가 되면 조용히 가버리면 될 것이였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인생은 완전하게 둥글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애가 거기에서 자리잡고 결혼하고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아들애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큰 도시에서 자리잡으려면 집도 장만해야 하고 돈이 많이 필요할 것이였다. 그는 한국행을 선택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길로 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단단하게 혼자서 풀숲을 헤치듯 삶의 힘든 과정들을 맨몸으로 헤쳐가며 살아온 그에게 주저되는 일은 없었다. 그는 밭을 남에게 양도하고 다리가 아픈 안해는 집에서 쉬게 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남들은 일이 고되고 힘들다고 했지만 그는 딱히 힘들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가 못해본 일이 무엇이겠는가. 농장일, 노가다일 닥치는 대로 했다. 돈은 벌어졌고 그는 한장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통장에 착착 돈이 모아지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는 그 돈을 고스란히 안해한테 보냈고 안해도 일전 한푼 허투루 쓰지 않고 모았다. 언젠가는 아들이 집을 살 때 보태줄 료량이였다. 3년 만에 돌아왔을 때, 아들은 녀자친구를 데리고 왔다.  “만만한 애는 아니겠구나.” 아들의 녀자친구를 보는 순간 드는 생각이였다. 각진 코날에 어딘가 고집스런 눈매가 마음에 걸렸다. 말이 없고 조용하지만 의외로 고집스런 면이 있는 아들의 짝이라면 너그럽고 시원시원해서 아들을 품어줄 수 있는 녀자거나 안해처럼 모든 걸 남편의 의사대로 따르는 순종적인 녀자가 좋겠다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들이 좋다면 됐지 하고 그와 안해는 동의했다.  그는 좀더 돈을 벌려고 한국으로 다시 나갔다.  아들이 드디여 결혼을 했다. 그는 결혼식에 참가하려고 들어왔다가 인차 다시 한국에 나갔다. 안해가 아들이 남방에서 다니던 회사가 별로 마음에 안 드는지 돌아올 것 같다고 했다. 얼마 후에는 며느리가 임신했다고 하더니 아기를 낳을 무렵 둘이 함께 고향에 돌아왔단디. 이제 남방으로 가지 않고 여기서 살 거래요, 여보. 안해가 전화로 말했다. 그는 뭔가 석연치는 않았지만 모았던 돈으로 집을 사주라고 했다. 어디서든 자리를 잡고 살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얼마 후, 안해는 시내에 집을 사라고 아들한테 돈을 줬다고 했다. 아들과 며느리는 새로 지은 아빠트를 샀고 인테리어를 하고 살림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 집에서 며느리는 아기를 낳았다. 눈이 커다란 녀자아이라고 했다.  “여보, 그렇게 이쁠 수 없슴다. 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보다 더 신이 나고 이쁨다.” 손녀가 태여나던 날, 평소 조용하던 사람이 웬 일인가 싶게 안해는 수화기 저편에서 흥분된 목소리로 손녀가 태여났다고 알려왔다. 그도 기뻤다. 철학관을 찾아가서 특별히 손녀의 이름을 부탁했다. 은서라는 이름을 지어서 보내며 그는 흐뭇해했다.    그런데 손녀는 커가는데 아들이 통 취직할 생각을 하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이상한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였다. 숨이 컥 막혀왔다. “무슨 그림을 그리오?” “전에 아이 때처럼 해골이나 그런 건 아닌데 갈대들이 가득 서있는데 보일락말락하게 작은 나그네가 갈대밭 한끝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본다든가, 하여간에 보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가슴이 무너지는 그림을 그림다. 여보, 어찜까?” “이런 망할 놈” “여보, 며느리는 남편이 돈을 벌어오지 않는다고 바가지를 긁어대고 소리를 박박 지르고 이 녀석은 뭘 잘했다고 짜증을 내고 둘이 갈 때마다 전쟁임다. 아이는 빽빽 울고 가보면 부산스러워서 앉아있지를 못하겠슴다. 에구, 키워서 장가까지 보내놓으면 끝나는 줄 알았더니 이건 결혼하기 전보다도 더 속을 바글바글 태우니 어쩌면 좋슴까?” “저런 썩을 자식, 대학까지 나와서 집에 틀어박혀 놀고 있다니? 결혼하고 자식도 있으면 피를 토하고 죽는 한이 있어도 밖에 나와 돈을 벌어서 안해와 자식을 먹여살려야지. 이런.” 그는 화가 나서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사지 멀쩡한 놈이 한창 피 끓는 청춘에 무지렁이처럼 집에 들어박혀 그림이나 그린다니? 그것도 돈도 안되고 아무 짝에도 쓰지 못할 것을 번연히 알면서 하는 노릇이라니 더욱 기가 막힌다. 대학까지 나온 놈이 어디인들 자기만 노력하면 일자리 하나 못 구해서 집에서 안해한테 그따위 대접을 받으며 놀고 먹는지 도무지 리해할 수가 없었다. 저런 놈이 내 아들이라니 용납이 안되는 노릇이였다. 며느리도 그렇다. 남자들이란 살다 보면 비딱하게 나가기도 하고 철없는 아이처럼 방황하기도 하는데 그걸 좀 다독여서 마음을 잡게 하면 좀 좋을가. 처음부터 각진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애까지 낳은 녀자가 왜 저다지도 융통성이 없을가 싶은 게 속이 부글부글 괴여오른다.  “여보, 그래서 말인데 어떡함까. 당신이 힘들게 번 돈이지만 애들 생활비로 좀 주면 안되겠슴까? 내 자식이 저래고 있으니 며느리한테 미안해서 죽겠슴다. 돈이라도 보태주면 며느리가 좀 덜 짜증을 내겠는지. 휴…” 안해가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을 지었다. 그도 한숨이 나갔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였다. 그렇게 그 때부터 그가 버는 돈은 아들네 생활비로 들어갔다.  당분간이겠지. 애가 커가면 정신을 차리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애가 첫돌 생일이 돼서 그가 집에 돌아와보니 아들은 문제가 심각했다. 어쩐 일로 비오기 직전의 하늘처럼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었고 소리내여 웃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 나이 또래에 있어야 할 생기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며느리네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그는 아들을 찬찬히 건너다 보았다. 고민으로 가득해보이는 텅 빈 눈, 말없이 빠르게 비우는 술잔, 세상으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싶어하는듯한 모든 것이 귀찮다는 표정…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속이 문드러질 지경이였다. 게다가 며느리는 남편 밥 먹는 것조차 꼴보기 싫다는듯 식탁에 앉아서 몇번이나 남편을 흘겨보는 것이였다. 어쩌다 아들이 입을 열면 짜증난 말투로 톡톡 남편한테 쏘아붙이고 있었다. 다 큰 아들을 때릴 수도 없는 터라 그는 못 본 척하고 밥을 먹고 물러나 앉아 손녀를 안았다. 손녀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만지며 해쭉해쭉 웃었다.  그는 손녀의 재롱에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한겨울에 홑옷바람으로 바깥에 서있는듯 시려왔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아들 녀석을 방안에서 끌어내고 세 식구가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할 만한 방도를 생각해봤으나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장애물은 어떤 일이 닥쳐도 잘 헤쳐나왔는데 자식의 일을 마주하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그는 다시 한국으로 갔다. 그가 돈을 벌어 보내고 안해는 그 돈을 아들네 생활비로 갖다주는 생활이 다시 되풀이되였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공사장에서 허리를 상해 수술을 받게 되였다. 더 이상 공사장에서 일을 못하게 되자 그는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돌아오자 그와 아들네 식구까지 다섯의 생계가 모두 문제가 되였다.    “아버님, 저 한국으로 나가겠슴다. 애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맡아주쇼. 돈을 벌어야 먹고 살 거 아님까.” 며느리가 하는 말이였다.  “그럼 넌 어쩔 거야?” 아들을 흘긋 쳐다보았다.  “저도 나가겠습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아들이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며느리는 아들을 할끔 쳐다보더니 못마땅하다는듯 눈을 내리깔았다.  아들과 며느리가 트렁크를 끌고 멀어져가는 뒤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였다. 드디여 아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기로 한 것인가 싶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한국에 나가 처형의 도움으로 집을 잡고 한국에서 H2비자를 취득하기 위해 공부를 하러 다녔다. 얼마 후에는 며느리가 식당에 다닌다고 전화가 오고 곧이어 아들도 회사에 취직이 되였다고 했다. 뭔가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님, 전 리혼하겟슴다.” 며느리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왜 여태 이렇게 한심한 남자하고 살아보겠다고 애를 썼는지 저절로도 리해가 안 감다. 그동안 제가 너무 순진하고 바보스러웠던 것 같슴다. 생각할수록 내 청춘이 아깝고 이 사람과 앞으로 살아갈 날을 생각하면 아득함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 여태 내 아들이 무능해서 네가 고생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회사를 잘 다니고 있지 않니? 둘이서 돈을 벌고 돌아와서 은서를 데리고 잘살아야지, 그럼 안된다.” 그는 목소리를 최대한 차분하게 누르면서 며느리를 달랬다. “아버님, 회사를 잘 다닌다구요? 그동안 아버님이 걱정할가봐 말 안했는데 이 사람 회사를 벌써 몇번째 바꿨는지 모름다. 뭐가 문제인지 짧으면 며칠이고 길면 한두달 다니고 회사를 그만둠다. 무슨 애도 아니고 이렇게 적응을 못하면 어떡함까? 이런 사람 믿고 제가 어떻게 평생 삼까? 아버님 저도 제 인생이 있슴다.” 후… 한숨이 나왔다. “그래 내가 좀 따끔하게 말해놓을게. 네가 고생이 많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아들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너 한 집안의 가장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 마누라와 자식을 위해 가장은 뭐든지 참아내야 하는 거다. 알겠니?” “예. 제가 못나서… 죄송함다, 아버지.” 겨우 목구멍에서 짜내는듯한 목소리로 아들은 그렇게 대답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한국에 가서 얼마 안되여 며느리는 밖으로 나돌았다. 다른 남자가 생겼던 것이다. 물질의 유혹과 새로운 사랑에 빠진 며느리한테 직장에 적응도 하지 못하는 아들은 귀찮은 걸림돌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며느리가 늦게 귀가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둘은 끊임없이 싸웠다. 며느리는 아예 며칠씩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밖으로 나돌았다.  보름 만에 안해가 집에 돌아왔었습니다. 전 직장을 그만두고 며칠째 빈 속에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안해는 나갈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긴 생머리였었는데 파마를 했고 옷도 새로 산 것 같았는데 비싸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보지 못했던 가방을 들고 있었고 신발도 새로 산 것인듯했습니다. 한마디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져서 들어왔습니다. 안해가 집에 들어와서 한 첫마디가 리혼하자는 것이였습니다. 나는 어떤 놈이냐고 따졌습니다. 안해는 벌레를 바라보듯 경멸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픽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꼴에 남자라고 질투가 나냐? 병신 같은…라고 중얼거리는데 그 말에 저는 리성을 잃었습니다. 주방 쪽으로 다가가 식칼을 잡았고 도망가려는 안해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쓰러뜨리고 칼로 찔렀습니다. 아들이 진술한 사건의 전말이였다.  아들은 식칼로 며느리를 사십여곳을 찔렀다. 사건 직후, 아들은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사람을 죽였다고 했다. 경찰이 당도했을 때 아들은 피투성이된 안해를 껴안고 있었다고 했다. 그가 우들우들 떨며 손녀를 안고 있는 안해를 두고 한국에 갔을 때 며느리는 벌써 사체실에서 랭동시체가 되여있었다. 땅에 주저앉아 울기도 지친듯 고개만 주억거리던 안사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죄인의 마음으로 들어서는 그를 그저 한번 쳐다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후사정이야 어찌됐건 내 자식이 남의 귀한 딸을 데려다가 잘 보듬기는 커녕 목숨을 빼앗았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며느리의 장례를 치르고 그는 아들을 면회하러 갔다.  저게 과연 내 아들인가.  살인죄로 기소되여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아들이 머리를 수그리고 걸어나와 걸상에 앉았다. 그는 흘긋 아들을 건네다 보았다. 산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얼굴이였다.  그도 아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면회시간은 침묵 속에서 끝났고 아들은 다시 고개를 수그린 채 일어나 그에게 등을 보이며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제 저곳으로 걸어가면 나오지 못하겠구나. 멀어져가는 아들을 바라보다가 돌아서는데 현기증이 일었다.  쓰러지면 안돼.  그는 호흡을 애써 조절하며 숨을 몰아쉬였다.   5 “안녕하십니까.”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흘러나온다. “예. 뉘신지?” “예, 송은서 할아버지 되시죠? 저는 연길시 별빛애심협회 학생부장을 맡고 있는 박춘연이라고 합니다.” “아. 예.” 그는 자리를 고쳐앉았다. “예, 할아버지, 저희는 불우한 학생들을 돕는 민간단체 조직이구요, 십년 넘게 학생들을 돕는 사업을 이어온 정규적인 애심협회입니다. 제보를 받고 상황을 료해하고저 전화를 드렸는데요, 할아버지, 전화 통화 괜찮으시죠?” “예, 예.” 한껏 교양을 살린 목소리는 화단에 핀 꽃이파리처럼 부드럽다.  “예, 지금 은서는 10살이고 소학교 3학년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 “예, 3학년 맞습니다.” “예, 할아버지, 제보한 분을 통해 사정을 들었습니다. 애기 엄마는 돌아가시고 애기 아버지는 감옥에 있다고 했죠?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대소변을 받아내고 있고 할아버지는 할머니 시중을 들어야 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구요?” “예, 예. 그 눔이 그렇게 사고를 치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화기를 바싹 귀에 갖다 대며 그는 애써 마음을 진정한다. “가정의 경제래원은 어떻게 됩니까?” “예, 지금 경제래원은 없지요. 띠보라고 최저생활 보장금이라 함까. 그게 세식구 합쳐서 800원 나옴다. 나하고 로친 거는 200원 나오구 애게 좀더 되더라구요. 400원 해서 그게 총 800이고 밭을 양도해준 게 일년에 이천원 나오고 그 다음엔 없습니다.” 그는 없습니다를 힘주어 말한다. 걱정했는데 정작 마주하고 보니 별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 그러면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어휴- 할머니 치료는 어떻게 하십니까? 다리가 아프셔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시던데 관절염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통, 통풍으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집안일이라도 해주면 내가 밖에 나가 아무 일이라도 해서 좀 보태겠는데 아예 움직이지 못하다나니 내가 해야 해서 아예 죽겠습니다.” 말을 하며 그는 정말로 죽을 것 같아 숨을 후 내쉰다.  “예, 할아버지, 그럼 집은 어떻게 됩니까? 집은 본인 집인가요?” “집은 시골에 있는데 애 공부 땜에 시내로 나오다 보니 지금 집은 한국에 있는 친척이 있으라고 해서 림시 있습니다.” 저도 몰래 식은땀이 흐른다.  그들이 원하는 건 좀더 그럴듯한 감동 어린 스토리일 것이다. 그것을 위해 그는 좀더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다고 해야 한다. 그래야만 후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달에 오백원씩 정기적으로 들어온다고 하니 꼭 따내야 할 것이였다.  “예, 할아버지, 일단 잘 알겠습니다. 은서 공부성적이나 품행이나 등 학교생활에 관한 건 제가 담임선생님한테 전화로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저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품행이 단정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우선 제가 은서 학교와 가정에 관해 전화로 기본적인 걸 조사하고 이걸 협회에 회보할 거구요, 그 다음 일요일에 말씀드렸던 대로 가정방문을 가게 됩니다. 할아버지, 저와 몇분이 함께 가서 가정정황을 좀더 료해하고 후원여부를 결정지을 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예.” “그럼 할아버지, 일요일에 뵐게요. 은서도 그 날 집에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저희는 아이 정면사진은 찍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예, 알겠슴다. 감사합니다.” 휴대폰을 내려놓으니 숨이 훌 나온다.  안해는 다리가 몹시 아픈듯 벽에 기대앉아 저 혼자 다리를 주무르고 있다.  다가가 안해의 다리를 말없이 꾹꾹 주물러주었다.  안해가 희미하게 웃어보인다.  안해와 눈길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밖을 내다본다. 비가 오려는 걸가 하늘이 잔뜩 흐려있다. 오늘은 우산을 가지고 손녀 마중을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힘주어 안해의 다리를 주무른다.    6 “은서야, 네 이름이 은서지?” 애심협회에서 방문을 왔다. 남자 몇명과 전화통화를 했던 학생담당이라는 애된 아가씨로 보이는 녀자가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과일과 우유와 고기와 쌀을 내려놓고 그들은 엉거주춤 바닥에 앉는다.  “은서 공부 잘하니? 반에서 몇등?” “모르겠슴다.” 손녀가 쑥스러운듯 몸을 탈며 대답한다.  “오, 그래? 모르는구나. 호호 선생님한테 물어보니 은서 잘하다고 하더라. 은서 필기장 보자. 어머 글씨도 이쁘게 쓰네. 얘 글씨 쓴 것 좀 보세요.” 학생담당이라는 녀자가 이것저것 손녀한테 묻는다. 가까이에서 보니 눈가에 가늘게 주름이 건너간 걸로 봐 서른은 넘겼을 법하다. 아까 차에서 내릴 때 스물대여섯살 정도로 보였던 건 작고 마른 몸매와 하얀 피부 때문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는요? 할머니는 아예 운신을 못한다구요?” 남자  묻는다. “내가 이렇게 들어앉아있어서 저 령감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름다. 다리가 아예 굳어버려서 앉았다가 겨우 눕는 것 밖에 못하니 령감 고생이 막심하지요.” 안해가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그도 놀랐다. 안해가 저렇게까지 할 줄은 미처 몰랐다. 학생담당이라는 녀자가 할머니 울지 마세요. 하면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안해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준다. 쭈글쭈글한 손에 쥐여진 빨간 꽃이 수놓인 하얀 손수건은 목이 다 늘어진 회색 적삼을 입고 세상의 모든 것에 미련을 버린듯이 앉은 안해와 너무 대조적이다. “아… 애도 어리고 할머니도 편찮으시고 참…” 나이 들어보이는 회장이라는 남자가 머리를 끄덕끄덕한다. “참 너무 안타깝습니다.” 학생담당이라는 녀자가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이것저것 적는다.  그는 엉거주춤 앉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린다. 손녀는 처음에 쑥스러워하더니 학생담당이라는 젊은 녀자와 곧잘 대화를 나눈다. 평소에는 낯선 사람을 보면 입을 닫아버리더니 저게 어린 녀자를 보고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엄마가 그리웠나 싶어 눈시울이 붉어진다. “자식을 키울 때 사람을 죽이라고 키우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불쑥 입을 열어 하고 보니 너무 앞뒤가 맞지 않는 말 같아 그는 스스로 어이없어진다. “할아버지, 저희 그만 가보겠습니다. 돌아가서 저희끼리 좀더 토론해보고 후원여부를 결정지어서 다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예, 예. “ 그는 검은색의 승용차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허리를 굽신거렸다. 이제 그는 돈을 벌기에는 너무 늙었고 몸도 쇠약해져있다. 조금만 무리를 하면 통증으로 시큰거리는 허리지만 그 허리를 굽신거려서 안해와 손녀를 먹여살릴 수만 있다면 허리가 부러질 때까지라도 굽신거리고 싶다.   7 감동할 만한 스토리 덕분이였는지 아니면 안해의 눈물 덕분이였는지 애심협회에서는 방문하던 날 저녁에 바로 학생담당 아가씨가 후원이 결정되였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계좌번호를 보내달라고 하면서 달마다 10일에 후원금 500원이 들어갈 거라고 했다.  안해가 운신 못하는 환자로 둔갑해 그동안 집안에서 갇혀지낸 보람이 있구나 싶은 게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밭을 양도한 것이 일년에 이천원 나온다고 했지만 실은 칠천원 정도 나온다. 거기에 쌀 600근을 받기로 했으니 쌀은 사지 않아도 된다. 최저생활보장금이 한달에 800원 나오고 딸은 죽었지만 외손녀를 외면할 수 없어 사돈이 한달에 천원씩 보내오는 돈이 있고 가두에서 쌀이며 기름이며 화장지 같은 생필품을 들고 방문을 온다. 그가 가끔 나물을 뜯어 팔고 가두의 소개로 생과일즙을 만드는 공장에 가서 도와주고 받아오는 돈도 많지 않지만 몇백원 정도 된다. 이번에 방문 온 애심협회에서 달마다 오백원씩 보태주면 이제 그럭저럭 살아가기엔 문제 없다.  “예? 은서가요?” “예, 그렇다니까요, 할아버지, 뛰여가는 애를 발로 걸어놔서 애가 콩크리트바닥에 넘어지면서 무릎이 까졌는데 피가 심하게 나서 병원에 왔슴다. 여기 지금 무릎 까진 애 부모님들도 와있고 은서도 있슴다. 저는 수업이 있어서 지금 학교에 들어가야 됨다. 할아버지, 얼른 병원에 오셔야 될 것 같슴다. 빨리 와주세요.” “무슨 일이람까? 은서가 어떻게 됐담까?” 안해는 벌써 우들우들 떨고 있다. 아들이 사고를 쳤을 때 생긴 병이다. 안해는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온몸을 덜덜 떤다. 그는 별일 아니라고 안해를 안심시키고 집을 나섰다. “은서야.” 병원에 도착하여 두리번거리는데 은서가 병원 복도 의자에서 일어선다. 크게 혼내야겠다고 벼르고 왔는데 정작 겁에 잔뜩 질린 아이의 얼굴을 보니 혼내지도 못하겠다.  “은서 할아버지 되심까?” 아들 또래나 될 법한 남자가 걸상에서 일어선다. 잔뜩 굳어있는 얼굴이다.  “예. 제가…” “아…” 남자가 그를 아래우로 훑어보더니 한숨을 내쉰다. “뭐 은서 상황에 대해서는 담임선생님한테서 대충 들었습니다. 저희도 귀한 아들이라 화가 나긴 했지만 할아버지네 상황을 들어보니 치료비를 받기도 애매함다. 그만 애를 데리고 들어가십시오.” “아, 그래도 어떻게 치료비는 우리가 내야지요.” 그는 손녀의 손을 잡고 공손하게 두손을 모으고 남자 앞에 섰다. 남자가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님다. 애는 무릎을 세바늘 꿰매고 엄마가 데리고 갔슴다. 휴- 이런 애하고 한반에 다니다 보니 그렇게 된 걸 뭐 어찌겠슴까. 집에 가서 애 단속이나 잘 시키세요. 어디 무서워서.” 남자가 혀를 끌끌 차며 냄새 나는 음식 대하듯 그들을 힐끔 바라보고 가버린다.  그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굳어있었다. 너그러운 척 착한 척 하면서 묘하게 사람 기분을 밟아놓는다. 꽉 틀어쥔 주먹에서 우드득 소리가 난다. 이런 애하고 한반에 다니다 보니라니, 어디 무서워서라니. 사람을 모욕해도 분수가 있지. “집에 가자.” 그는 손녀의 손을 잡고 병원문을 나섰다.  밥을 먹으면서 건너다 보니 손녀는 아무 말 없이 폭폭 밥을 떠먹는다. 아무리 아이라고 해도 그 큰 일을 저지르고 저렇게 태연히 밥을 퍼먹다니? 아직 자기 잘못이 뭔지를 모르는 건가?  “은서야,” 그는 아무래도 아이를 따끔하게 혼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이의 이름을 각진 목소리로 불렀다. 막 된장찌개에 숟가락을 들이밀던 아이의 손짓이 그대로 뚝 멈춘다.  “너 학교에서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야지 오늘처럼 친구를 밀어놓으면 되니?” 될수록 부드럽게 말하려고 그는 모진 애를 쓴다.  아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여전히 숟가락을 든 채 굳어져있다.  “다시 그러면 안된다. 알았지? 너 오늘 가네 부모님이 맘씨 좋아서 치료비를 내라고 안했으니 다행이지 돈을 내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니? 너도 알다 싶이 할아버지 할머니는 돈이…” 거기까지 말하다가 그는 멈춘다. 어린 아이 앞에서 너무 구질구질하게 신세타령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너 잘못을 뉘우치고 이제 그 애가 래일 학교에 나오면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선생님한테도 잘못했다고 하고 알았지?” 아이는 여전히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이의 굳게 다문 입술과 결연하게 내리깐 눈을 보느라니 화가 확 치밀어오른다.  “은서 너, 얼른 예 하지 못하니?” “싫슴다.” 아이가 입을 열더니 낮으나 단호하게 말한다. “뭐?” 너무 뜻밖의 반응에 그는 아연해진다. 싫다니? 사과를 하지 않겠다는 건가? 고작 열살짜리가 무슨 고집이 이렇게도 세다는 말인가. 그것도 녀자애가. 이렇게 달래듯이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할아버지가 한번도 너를 때리지 않았지? 한번 할아버지한테 맞아볼 거야?” 그가 손을 번쩍 올리쳐든다. “아이구, 당신두 참. 은서야, 얼른 할아버지 잘못했습니다 하고 사과해.” 안해가 그의 손을 잡고 아이를 재촉한다.  딱 소리가 나게 아이가 숟가락을 내려놓은 것은 그 때였다.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왜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자꾸 사과를 하람까?” “야가 점점. 너 사람을 때려서 피가 났는데두 잘못한 게 없어?” “없슴다.” 그가 안해한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한대 쥐여박았다. 기다렸다는듯이 와 하고 아이가 울음보를 터뜨린다. 아이의 입안에서 밥알들이 뿜겨져나와 식탁에 어지럽게 흩어진다. “갸가, 성주가 나를 살인범의 딸이라고 놀렸단 말임다. 너도 감옥에 들어가라고 했단 말임다. 그런데 왜 선생님은 성주는 혼내지 않고 나만 혼냄까.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왜 내가 왜 성주를 때렸는지는 물어보지 않고 나만 혼냄까. 아버지가 엄마를 죽인 것도 난 다 암다. 아버지가 지금 감옥에 있는 것도 난 다 암다. 앙앙…” 가슴에 걸레가 컥 막히는 기분이다. 그는 손녀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태 아무 내색도 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다 알고 있었다니. “은서야. 어서 가서 세수하고 공부해.” 그는 한껏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제야 아이는 숟가락을 놓고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더니 구석에서 네모진 밥상을 꺼내 펼쳐놓고 앉아 책가방을 뒤적인다.  후… 한숨이 나온다.  안해는 절름거리며 아이가 뿜어낸 밥알을 걸레로 닦아내고 설겆이를 한다. 종이로는 불을 감쌀 수 없듯이 결국은 아이한테 아무 것도 숨기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손녀를 그렇게 놀려주고 있다는 건 전혀 몰랐던 일이였다. 저 혼자 그동안 그걸 견디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을가. 저 어린 것이 그토록 모질다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제 열살, 아이가 앞으로 견뎌야 할 모진 것들은 그가 상상하는 이상일 것이다.  밖은 어느새 어둠이 썰물처럼 밀려와 한낮의 눈부시던 것들을 어느새 수월하게 덮어버리고 있다.  삶이 저토록 수월하다면 얼마나 좋을가. 내가 덮어버리고 싶은 건 덮어버리고 지워버리고 싶은 건 지워버리면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고단한 하루가 끝나간다.  두려운 건 래일도 달라질 게 별로 없는 하루일 것이라는 것이다.    8 “아니, 할아버지가 이 시간에 어떻게.” 당황스러운 기색이 력력하다.  그는 들고 간 산나물봉다리를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 딸기를 먹고 있던 참인가. 통통한 남자아이가 반쯤 베여먹은 딸기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빨갛고 커다란 딸기는 갓 밭에서 따온듯 싱싱하다. 은서는 저런 딸기를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지. 그는 가슴이 아리다.  “니가 우리 은서가 밀어놨다는 애구나. 너 이름이 뭐니?” “성주.” “성수?” 아이가 머리를 절레절레 젓는다.  “성주.” “오, 그렇구나. 다리 많이 아프냐?” 그가 손으로 붕대를 친친 감은 아이의 다리를 어루만지려 하자 아이의 엄마가 얼른 아이를 끌어당긴다. “정말 죄송하오. 우리 손녀 때문에 집의 아이가 다쳐서 정말 미안하오.”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뭐 찢어져서 꼬매고 피도 많이 나긴 했지만 뭐 어쩌겠슴가. 애들이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고. 할아버지가 이 시간에 찾아와서 이렇게 사과하시니까 됐슴다.” “치료비라도.” “아니, 우리 그 정도 돈이 부족하지 않슴다. 갠찮슴다.” 그의 사과에 마음이 풀어졌는지 아이 엄마도 됐다고 하고 아이 아버지도 아까 병원에서 날 선 말을 하던 것과는 달리 괜찮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 애도 잘못했더라구. 우리 은서한테 들을라니.” 그는 드디여 참았던 말을 한다.  “예? 그게 무슨.” “이 집 성주가 먼저 살인범의 딸이라고 우리 손녀를 놀려서 우리 손녀가 화가 나서 밀어놨다는구만. 선생님도 왜 그랬는지 은서한테 묻지 않았구 나도 집에 가서 손녀만 나무랐는데 들어보니 그렇더구만.” 그가 흘깃 쳐다보니 성주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다. “너 정말이니?” 아이 아버지가 아이를 바라본다.  “너 래일 학교 가서 우리 은서한테 사과하고 다시는 우리 은서를 놀려주지 말어. 자식을 낳을 때 사람을 죽이라고 낳은 부모가 없고 사람을 죽인 아버지의 딸이 되고 싶은 자식도 없단다. 알겠니? 우리 은서도 너한테 사과를 하도록 말해놓을게. 잘못은 서로 빌어야지 않겠니?” 성주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두 젊은 부부는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바라본다. 뒤통수를 맞은 표정이다. 그는 이제 가야겠다고 하고 일어섰다.  “전학을 시키던지 해야지 원.” “와, 저 늙은이 완전 여간내기 아님다. 사과하러 온 줄 알았더니 이건 뭐 똥 뀐 놈이 성낸다구.” 등뒤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9 손녀는 그번 일이 있고 난 뒤에 말수가 적어졌지만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교도 잘 다니고 있었다. 성주가 손녀한테 사과를 했는지 안했는지 전학을 갔는지 어쨌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고 손녀가 학교를 잘 다니고 있으니 어쨌거나 안심이 되는 일이였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간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다.  안해의 걸음걸이는 점점 못해진다. 이제 벽을 짚고 모진 애를 써서야 겨우 한발을 옮겨놓는다. 화장실을 가기도 버거운 눈치이다. 전처럼 집청소도 하지 않아 항상 반짝거리던 바닥은 부옇게 먼지가 끼여있다. 저러다가 정말로 드러누워버리는 게 아닐가 싶어 기분이 우울해진다.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그는 정성을 다해 안해의 시중을 들 마음의 준비가 되여있다. 그는 안해를 사랑한다. 어떤 남편보다도 더 특별하게 안해를 사랑한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그루 토끼 한마리.   여느 때처럼 은서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니 전에 없이 안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안해의 노래였다. 그는 안해도 노래를 부를 줄 안다는 사실에 놀랐다. 결혼식 날에도 끝끝내 노래를 하지 않은 안해였다. 오래 사니까 별일이 다 있다 싶었다.  문제는 푸른 하늘 은하수 하고 시작한 노래가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하는 걸로 이어져 밤비 내리는 령동교를 할 때부터였다. 심심풀이로 노래를 한다고 보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목소리가 크다는 생각에 그는 안해를 바라보았다. 안해는 마치 노래를 부르는 일에 인생을 건 사람처럼 때로는 얼굴을 찌프렸다가 때로는 폈다가 하면서 완전히 심취되여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보, 그만하지.” 그가 말했다.  안해는 들은 척도 않고 계속해서 노래를 부른다.  이상하다.  “여보, 그만하라니까.”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해가 노래를 멈추더니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는 너무 크게 소리를 질렀다는 생각이 들어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말했다. “여보, 시골도 아니고 여긴 층집이재요. 좀 목소리를 낮추어 살랑살랑 불러야지.” 안해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눈을 찌프리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누구심가? 왜 우리 집에 있슴가?” “여보,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여보, 왜 이러오? 여보.” 그는 안해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든다. “할아버지, 이러지 마쇼. 아픔다.” 안해가 고개를 반짝 쳐들고 그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비워낸듯한 순진무구한 얼굴이다. 정말로 어깨가 아픈듯 안해의 얼굴은 일그러져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도 불지 않는 고요한 날씨이다. 나무들이 미동도 없이 서있다. 빨간 승용차 한대가 서서히 미끄러져 지나가고 뚱뚱한 아줌마가 터질듯하게 꽉 낀 치마를 입고 뚱기적거리며 걷는다.  세상은 이토록 평온하게 굴러가는데 그는 가슴에 더러운 걸레가 콱 막힌듯 답답해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는 안해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스르르 내렸다. 참으로 삶이 힘들구나. 난 열심히 살았는데… 안해를 사랑하고 아들을 사랑하고 손녀를 사랑하고 그 옛날 어린 시절엔 할머니를 사랑하고. 열심히 내가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사랑한 죄 밖에 없는데 왜 이토록 삶이 힘든 것인가. 남들보다는 더 지극히 더 특별하게 사랑하고 죽기내기로 열심히 산 죄 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삶은 내게 가혹한 것이냐.  그는 손바닥을 펴서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 크게 한숨을 내쉬였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안해도 후- 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그와 안해가 한숨을 내쉬자 고요하던 하늘에서 바람이 불어 창밖의 나무들이 일제히 가지를 흔들며 술렁거렸다.  출처:2018 제4호
5    삶의 대화 댓글:  조회:253  추천:0  2019-07-09
삶의 대화 김경화     열살 때 일이다.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한마리가 있었다. 회색 털에 눈이 똥그랗고 털이 반들반들한 강아지였다. “이리 온.” 하고 부르면 총알같이 달려와 꼬리를 흔들고 “왼발 줘봐.” 하면 왼발 주고 “오른발 줘봐.” 하면 오른발을 펼쳐진 내 손바닥 우에 올려놓던 강아지였다. 하학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 내 발자국소리를 들었는지 저 멀리서부터 뛰여왔고 친구집으로 놀러 가도 항상 따라오던 강아지였다. 나는 좁쌀에 감자를 섞어 먹던 그 시절에 늘 내 몫의 밥을 조금씩 남겨서 옥수수가루와 풀을 섞어 끓여서 만든 개죽에 넣어주곤 했다.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자린고비인 아버지도 내가 강아지를 이뻐하는 마음에 감동이라도 받은 건지 그것만은 뭐라 하지 않았다. 강아지는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허리께가 늘씬해지면서 제법 우람한 개로 커갔다. 나는 앉은키가 나 만한 강아지를 껴안고 무수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늘그막에 낳은 딸이라고 친구들이 아버지를 보고 너네 할아버지냐 했을 때 창피했던 거며 그 때 나보다 여섯살 이상인 오빠가 몰래 담배를 피웠는데 비밀로 해주긴 했어도 어쩐지 나쁜 일을 숨기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한데 그렇다고 어른들한테 말하면 고자질이 되는 것 같고 그래서 심히 혼란스럽다는 거며 새로 부임되여오신 잘생긴 체육선생님이 나를 무지 이뻐한다는거며 그게 참 좋은데 친구들 앞에서는 아닌 척 한다는 거며 아무한테도 터놓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그러면 내 말에 개는 눈을 끔뻑끔뻑거렸고 나는 넌 알아도 못 듣지? 하면서 툭 이마빡을 쥐여박군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그 개가 보이지 않았다. “촌에서 청년활동이 있는데 우리 개를 사갔다. 아마 지금 쯤 잡아서 가마에 끓이고 있을 걸.” 언니가 내 눈치를 살피며 그런 말을 해주었다. 툭. 내 어깨에서 국방색의 천가방이 미끄러 떨어졌다. 세상이 무너지는 슬픔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더없이 비통한 마음으로 청년활동이 있다는 아래집 박철이네 마당께로 다가가 자잘한 널판자로 된 울타리 너머로 그 집 마당을 들여다보았다. 박철이네 집 마당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영이네 엄마, 부녀주임, 동춘이네 아버지도 보였다. 마당에 림시로 돌을 막아 부뚜막을 해놓고 거기에 커다란 솥을 걸어놓았는데 장작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빨간 다라에 한가득 고기덩어리가 담겨져있었다. 영이엄마가 가마뚜껑을 열자 김이 확 피여올랐다. 다리, 갈비쪽, 차마 우리 집 개라고 믿을 수 없는 그것들이 하나씩 가마 안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불에 그슬려 눈께가 시커멓게 된 대가리가 건져올려졌을 때 나는 차마 그것을 마저 보지 못하고 돌아서서 강으로 달렸다. 믿을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은 책에서 보던 나쁜 사람들이 아니였다. 길에서 만나면 이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삶은 옥수수를 쥐여주던 사람들이였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였고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이였다. 그런 사람들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개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불로 개의 털을 그슬리고 내장을 빼고 각을 떠버렸다는 것, 그 행위들을 심지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웃으며 행하고 있다는 것, 맛있는 한끼 식사가 누군가에겐 고통이 된다는 걸 전혀 모른다는 것. 열살짜리 소녀에게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였다. 강물 속의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들여다보면서 해가 지도록 강가에 하염없이 앉아 고민했던 그 저녁, 나는 처음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세상은 리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고 온통 모순덩어리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저녁이였다. 나이를 먹고 점차 어른이 되면서 나는 이 모든 것은 생존의 법칙이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알게 되였다. 또한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였다. 많은 걸 안다는 건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의미라는 것도 동시에 알아버렸으니 말이다. 세상이 내게 보여주는 모순 속에서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던 많은 시간들, 그 시간들을 거쳐가면서 나는 늘 마음이 헛헛했다. 그 헛헛함은 달달한 음식으로도 우정으로도 사랑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내 글쓰기는 그것이다. 채워지지 않는 내 마음의 헛헛함을 위한 것, 그러므로 내 글쓰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해야겠다. 거창한 것도 아닌, 지극히 내 자신의 내면의 충일을 위한 것,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전부의 리유이다. 첫 소설을 시작해서부터 꼭 십년이 된다. 십년 동안 쭉 글을 써온 건 아니다. 소설이 밥이 되지 않는 세상을 살며 꿈과 일상 사이에서 모순에 빠지고 아파하는 수많은 선배님들과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밥을 버는 일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나를 던져왔다.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해 육체적으로 아픈 시간도 있었다. 그 시간을 거쳐 이제 나는 안다. 정신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웨치는 건 참으로 철없던 시간의 오기 같은 것이라는 것, 육체가 무너지면 정신은 손가락 사이로 새여나가는 모래알보다 더 빨리 무너져버린다는 것. 그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는 분이 어떻게 저런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할 수가 있지? 그렇게 생각하며 리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우뚱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아, 저렇게 추악한 사람의 내면에도 아주 작은 빛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글도 쓸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나이가 되였다.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육체적으로 많이 피페해져있었고 따라서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던 시기였다.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고 어떤 것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시기였다. 몸만 회복되면 글 같은 건 안 써도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이 회복되고 일말의 여유가 생기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아, 이제 소설을 쓸 수 있겠구나였다. 아마도 나는 글을 써야 되는 사람인가 보다. 글을 쓰다 보면 정말 난 재능이 꼬물 만치도 없는가 보다 하면서 한없이 절망하는 시간이 온다. 더듬더듬 어둠 속을 짚어나가다 보면 가까스로 한편의 글을 완성하기도 한다. 그런 걸 보면 썩 문학적인 재능이 있는 건 아닌가 보다는 스스로의 평을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의 소설을 완성하면 그렇게 뿌듯하고 글 쓰는 동료와의 대화보다 더 신명나는 일이 없는 걸 보면 아마도 나는 글쓰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 시간의 발자국을 짚어올라가 내 열살 소녀의 가슴을 온통 치런치런하게 했던 그 강아지를 다시 안아본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내 강아지를 일용할 량식으로 간주했던 그 분들도 너그럽게 안아보기로 한다. 삶은 본래 그러한 것을. 모든 사물은 존재 자체가 모순인 것을. 내 글쓰기는 그 모순투성이인 삶을 향해 던지는 내 방식의 대화이다. 부디 나와 삶 사이에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할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덜 헛헛할 테니까.
4    [중편] 겨울개구리 댓글:  조회:212  추천:0  2019-07-09
겨울개구리 김경화   1. 가마를 열자 김이 확 몰려온다. 눈앞이 하얗다. 그는 바가지로 물을 푼다. 법랑칠이 벗겨진 소래에 담는다. 소래에 그려진 그림은 사과다. 가운데가 칠이 벗겨지는 바람에 대야에 그려진 사과는 뭉텅 벌레가 파먹은 사과가 되여버렸다. 한때 그것은 빨갛게 탐스러웠을 상처 없는 사과였을 것이다. 물에서 김이 솟아오른다. 그는 이번에는 물독에서 찬물을 퍼내 뜨거운 물에 섞는다. 적당하다고 느껴질 때 쯤 그는 식지를 집어넣어본다. 이 정도면 된다. 손가락을 집어넣어 뜨거운 기운이 느껴질 정도, 사람의 피부가 데지 않을 만큼의 온도가 되면 끝이다. 그것은 기름개구리를 죽이기에 적당한 온도이다. 그가 사는 이곳은 해란강 발원지라 기름개구리(林蛙)라 부르는 북방 산개구리가 서식한다. 몸길이가 4~7센치로 산개구리 중 가장 큰 이 놈들은 몸색갈이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등면은 황갈색 혹은 적갈색이고 작은 흑색 반점들이 산재해있다. 등 량쪽으로 갈색의 륭기선이 두줄나있다. 배면은 회백색 또는 황색이며 주둥이는 원형이지만 뾰족한 편이다. 눈 뒤에서 목덜미까지 흑갈색의 줄무늬가 있다. 눈 뒤에 둥근 고막이 뚜렷하다. 수컷은 턱  아래에 울음주머니 한쌍이 있다. 이 종은 복부와 턱밑의 바탕색이 우유빛 흰색이다. 암컷은 번식시기에 턱밑과 복부에 붉은색 얼룩무늬들이 나타난다. 2월에서 4월까지 번식기에 해당되는데 물흐름이 적은 논웅뎅이나 습지에 산란을 한다. 수컷은 암컷을 움켜쥐고 포접한다. 10월경부터 류속이 느리고 수심이 깊은 곳에 있는 돌이나 바위 밑에서 동면을 시작한다. 때로는 흙 밑으로 파고 들어가 동면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륙상의 곤충류와 지렁이 등을 먹고 산다. 수명은 7~8년이고 수컷은 3~5년생 그리고 암컷은 4~6년생이 주로 짝짓기를 한다. 기름개구리는 귀중한 중약재로 불린다. 함유된 활성물질과 일부 인자는 인체에 뚜렷한 의료, 미용, 보건 작용이 있다. 이놈들은 식탁 우의 일품료리이기도 하다. 암놈 개구리의 탱탱한 알과 쫀득한 곱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쫄깃한 다리살까지 개구리는 그 맛이 일품이라 개구리의 외형이 징그럽다고 하면서도 한번 먹어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이런 기름개구리를 양식이 아닌 야생으로 먹어볼 수 있는 건 산에서 사는 사람의 혜택이다. 그는 벽에 걸어놓은 그물망을 집어든다. 펄떡펄떡 간헐적으로 숨을 쉬며 그물 안에 갇혀있던 개구리들은 그가 그물망을 집어들자 움직임에 반응하듯 마구 요동친다. 그물망 안은 개구리와 개구리가 뿜어낸 거품이 섞여 뒤죽박죽이 돼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물망을 이미 물온도를 맞춰놓은 대야에 담근다. 와장창 그물망 안에서 순간적으로 복새통이 일어난다. 개구리들이 뜨거운 기운을 느끼고 한꺼번에 우로 기여오르려고 모지름을 쓴다. 최후의 발악인 셈이다. 빠르게 움직이던 개구리들의 동작이 점점 느려지다가 드디여 다리를 뻗으며 고요해진다. 그는 그물망을 가볍게 흔들어본다. 움직임이 없다. 다시 자루를 열고 생을 마감한 개구리를 대야에 쏟는다. 완벽하다. 반들거리는 껍질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물이 너무 뜨거우면 개구리는 껍질이 홀라당 벗겨지고 미적지근하면 개구리는 한번에 죽지 않는다. 반드시 적당한 온도여야 한다. 그는 오랜 시간 개구리를 죽여본 사람답게 감으로 그 온도를 안다. 그는 개구리를 손으로 대충 주물주물해서 두어번 물을 갈아내며 씻는다. 감자와 고추장을 풀고 미리 끓이고 있던 남비에 씻은 개구리를 집어넣는다. 가을과 겨울의 사이인 시기라 개구리는 깨끗하다. 따로 배를 가르고 손질할 필요가 없다. 하얀 김이 남비에서 피여오르고 비릿한 냄새, 얼큰한 고추장냄새가 코안을 자극한다. 맛있는 개구리탕이 완성되여가는 것이다. 이제 그것은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 가운데 가장 원초적인 먹는 욕망을 채우기 위한 맛있는 반찬일 뿐이다. 그것은 곧 한껏 벌려진 동굴 같은 입으로 들어가고 위를 통과할 것이고 스며들고 부패하고 배설되여 종당엔 흔적조차 없이 증발해버릴 것이다. 눈이 오겠구나. 그는 새벽녘에 돌아누우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허리가 욱신거렸기 때문이다. 그의 몸은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다. 비가 오면 온몸의 뼈들이 쑤셔난다. 그럴 때면 그는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뼈들이 오랜 시간 쇠가마솥에서 끓어오르는 물에 이리저리 부대끼며 삶아져 구멍이 숭숭 난 소뼈다귀처럼 되여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새벽 다섯시, 어김없이 눈이 떠지는 시간이다. 그는 몸을 일으킨다. 몸이 무겁다. 카텐을 쳐본 적 없는 창문 너머로 푸르스름한 새벽이 다가와있다. 그 청량한 푸른 새벽의 시간 속에 희끗한 눈발이 보인다. 그는 저벅저벅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본다. 창밖은 바로 산이다. 어둠과 밝음의 경계 같은 푸른 새벽의 시간 속에 나무들이 몇잎 남지 않은 잎을 거멓게 드리운 채 처연히 서서 온몸으로 눈발을 맞고 있다. 그 아래 지난 여름 무성히도 웃자랐던 쑥과 익모초와 갈대들이 언제 푸르렀고 언제 소리치며 웃자랐냐 싶게 푹 고개를 꺾은 채 시누렇게 말라 서로를 껴안으며 떨고 있다. 눈발이 떨어질 때마다 그것들은 진저리를 치는듯 물러서지만 끝내 비껴가지 못한다. 그는 그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있는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저려나서야 그는 창가에서 물러난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새로울 것도 없는 그 풍경들을 그는 언제나 넋을 잃고 바라본다. 나무는 뼈 같은 존재라고 그는 생각한다.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게 뼈라면 산을 지탱하고 있는 건 나무라고 생각한다. 저 나무들은 끝끝내 겨우내 내리는 눈발의 무게를 견디고 차거운 바람을 이겨내고 다시 봄을 맞이하겠지만 숭숭 구멍난 소뼈다귀처럼 구멍나고 있는 자신의 몸의 뼈와 그보다 먼저 구멍나버릴 가슴은 언제까지 지탱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두렵다. 그는 두려움에 뒤로 물러선다. 벼랑 끝에서 마침내 물러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람처럼 그는 한발 물러서서야 드디여 안도한다. 건조한 눈을 껌뻑거린다. 그는 뱀이 허물 벗듯 어제 밤에 아무렇게나 벗어서 바닥에 던져버린 검은색의 츄리닝바지를 집어 발을 들이민다. 회색의 면티를 입고 검은색의 경량패딩을 입는다. 그의 방에는 색채가 없다. 허연 벽과 검은 옷장, 종래로 개여본 적 없는 곤색의 이불, 벽에 못을 쳐 옷걸이로 사용하고 있는 공간에 걸린 옷들도 전부 검은색이거나 곤색이거나 회색이다. 위성이 들어오지 않아 오래된 CD를 돌려볼 때만 켜는 시커먼 텔레비죤까지, 그의 방은 온전한 무채색의 세계이다. 이 집과 산의 주인 격인 동국이가 위성을 설치해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는 철저히 바깥세상과 격리되여가고 있다고 느끼지만 구태여 그 세상으로 나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드르륵, 그는 미닫이문을 연다. 문소리에 말을 잃어버린 그의 로모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로모는 잠이 없다. 그가 새벽같이 깨여 미닫이문을 열면 항시 로모가 잠기라고는 묻어있지 않는 건조한 눈으로 그를 돌아본다. 로모는 자기는 하는 걸가. 언제 잠이 들어 언제 깨는 걸가. 그가 밖에서 일을 마치고 들어설 때도 로모는 자고 있는 법이 없다. 눈을 감고 있을 때도 있지만 그는 로모가 가수면상태인 걸 안다.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쪼글쪼글 늙지 않았을 때에도 그는 단잠에 빠진 엄마를 본 기억이 없다. 언제부터 엄마는 잠을 자지 않았던 걸가. 그러니까 로모가 되기 전, 엄마였을 때부터였을가. 아니면 그 이전부터, 아니면 그 이전부터일가. 로모는, 그러니까 엄마는 아직 서른살이 되기 전 그야말로 새파란 나이에 남편을 잃었다. 그의 아버지는 목재부업을 가서 벌목을 하다가 사고로 죽었다. 그러니까 톱으로 나무밑둥을 켜고 나무가 자빠질 방향 반대 쪽에 서있어야 하는데 그만 방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해 나무가 쓰러지는 방향에 서있었던 것이다. 정면으로 쓰러지는 나무에 젊은 아버지는 그대로 깔렸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한다. 죽은 아버지의 얼굴은 땅에 박혀있었고 아버지를 들어올렸을 때 흙들이 살을 파고들어 얼굴이 까만 주근깨가 덮인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나무가 쓰러질 방향을 몰랐던 게지. 어느 만큼 밑둥을 켜야 하고 어느 쪽으로 쓰러지고 어느 방향으로 피해있어야 하는 건지 그걸 몰랐던 게야. 그런 건 말이다. 그건 말이야.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란다. 감이라는 게 있어야지. 느낌이란 거 있잖냐. 니들 느낌이 뭔지 아냐? 그래. 그런 거지. 그냥 몸으로 느끼고 감으로 알고 그렇게 하는 건데 니네 아버지는 그걸 모르는 사람이였던 게지. 본인이야 가고 나니 끝이지만 결국 애매한 마누라만 고생시키는 거잖냐. 생과부로 만들어놓은 것도 모자라 아들 둘까지. 어린 녀자를 날지도 뛰지도 못하게 만들어놨으니 니네 아버지야말로 죄인이지. 그러니까 말이야, 사람이란 느낌이 있어야 한단다. 알겠냐? 니네 두놈, 잘 들어둬라. 느낌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하단다.” 외삼촌이 술 한잔 들어가면 그와 동생을 앉혀놓고 읊어대던 레퍼토리였다. 외삼촌은 그의 아버지의 말을 할 때마다 일찍 죽은 네 아버지가 아까운 게 아니라 미련한 인간이라 한심스럽다고, 그렇게 그만한 것도 감을 잡지 못해 죽어버린 네 아버지한테 시집간 당신 누나가 안타까워 죽겠다는 표정이였다. 그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이지만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외삼촌의 말을 빌자면 머리가 더럽게 나쁘고 소위 말하는 감이라는 것을 몰라 사고를 당해 허망하게 가버린 아버지는 그야말로 죽어서도 용서를 구하기조차 힘든 죽일 놈이였다. 외삼촌의 넉두리는 매형을 향한 멸시 같기도 하고 그런 매형한테 시집가 아들을 둘씩이나 낳은 누나에 대한 분노 같기도 했다. 그는 꿉꿉한 마음으로 외삼촌의 넉두리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런 날이면 항시 오줌이 마려웠지만 왠지 그 자리를 뜰 수 없어 그는 부푸는 오줌보를 참느라 주먹을 폈다 쥐였다 하며 외삼촌의 넉두리를 끝까지 들었다. 그 레퍼토리는 그가 아버지 없는 집안에 기둥 같은 존재였던 외삼촌을 결코 진심으로 좋아할 수 없었던 리유이기도 했다. 남편을 보내고 새파랗게 젊은 엄마는 곧 애들을 시엄마한테 떠넘기고 재가를 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아들 두형제를 키우며 혼자 버텨냈다. “독하기도 허지. 어린 것이.” 생전에 몸이 뒤로 젖혀져 팔자걸음을 걸었던 할머니는 엄마를 바라보며 그렇게 혀를 끌끌 차군 했다. 남편 없이 혼자 사는 누나에게 외삼촌은 동생으로서의 의무를 온전하게 다했다. 이른바 감이 있는 사람인 외삼촌은 자기 집 밭농사를 하면서 그의 집 밭농사까지 거들었다. 밭갈이를 해주고 후치질을 해주고 땔나무를 해주고 말이 없는 엄마 대신 그들 형제를 훈계하고 가끔 으름장을 놓았다. 대신에 엄마는 외삼촌네 집 온갖 허드레일을 다 도맡아 해주었다. 외삼촌네 아이들, 그러니까 그의 사촌들이 겨울에 입는 털실옷은 전부 솜씨 좋은 엄마가 밤을 새가며 뜬 것이였고 사촌들이 들고 다니며 먹는 과줄이나 골무떡은 그의 엄마가 뜨거운 가마목에 발바닥이 빨갛게 데여가면서 만든 것이였다. 어린 시절의 그는 뽀얗게 분을 바르고 여유롭게 마실 다닐 줄 아는 외숙모와 집채 같은 삶의 무게를 혼자 떠메고 묵묵히 일만 하는 엄마를 대조해보군 했다. 어떤 엄마가 더 좋은 엄마라는 판단은 할 수 없었지만 엄마를 바라보면 늘 가슴이 아릿했다. 어린 그는 엄마가 어쩐지 벼랑 끝에 서서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버티나, 언제까지 버티나, 버티다가 버티다가 종당에 버텨내지 못하는 건 아닌가, 만약에 버텨내지 못하는 날이 온다면 나와 동생은 어떻게 되나 걱정했다. 그는 그렇게 아릿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엄마를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하지만 버텨내면 끝내는 버텨지는 건가. 엄마는 끝내 버텨냈다. 그 버티는 시간 동안 힘이 들었을 법도 한데 엄마는 한번도 눈물을 보이지도 않고 소리내여 웃지도 않으면서 온전하게 버텼다. 마치 소리라도 크게 내면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모든 것이 와르르 깨져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가봐 조심스러웠던 걸가. 엄마는 그저 조용하게 시간의 흐름을 견뎌냈다. 고요하게 죽은듯이 모든 것을 버텨냈다. “일 잘하고 튼튼한 남자를 만나 재가하오. 아이고, 사람도 미련하지. 하나도 아니고 아들 둘을 데리고 어떻게 혼자 버티려고 그러오? 애들 데리고 갈 만한 자리를 알아봐줄가? 사람이 적당히 버티다가 못이기는 척 기댈 줄도 알고 그렇게 살아야지. 어떻게 이다지도 미련스럽소? ” 외숙모는 그렇게 끌끌 혀를 차며 엄마한테 재가를 권했지만 엄마는 그 때마다 그냥 고개를 숙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눈을 돌려 로모를 바라본다. 로모의 눈은 아무 것도 담겨져있지 않다. 모든 것을 비워낸듯 담담하고 깨끗하다. 뇌경색으로 쓰러졌다가 깨여난 뒤 로모의 눈은 텅 비여있다. 아무 것도 담아보지 못한 눈 같기도 하고 모든 것을 담았다가 깨끗이 비워낸 사람의 눈 같기도 하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저렇게 그 어떤 욕망도 찾아볼 수 없는, 아무 것도 담아본 적 없는 눈빛이 될 수 있을가. 버텨내기만 했던 그 시간들이 엄마는 지금 억울하지도 않은 건가. 뜨끈한 물에서 헤염치다 마침내 다리를 뻗는 개구리처럼 이제 삶에 아무런 희망도 남아있지 않은 엄마는 온힘을 다해 소리라도 한번 질러보고 싶지도 않은 걸가. 그는 로모와 눈이 마주치지만 어떤 말도 건네지 않는다. 그는 다정하지 못하다. 로모한테 더러 웃어보일 때도 있지만 그것 역시도 웃음이라고 하기도 힘들 정도로 희미한 것이다. 그는 종래로 늙고 병든 엄마한테 잘 주무셨습니까 하는 인사 같은 걸 건네본 적이 없다. 타고난 성정인가. 아니면 성장과정의 영향인가. 그는 어른임에도 소위 인간관계라는 것에 서툴러서 사춘기 소년처럼 아무한테도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쉽게 마음을 열지도 못한다. 지금도 그렇고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건 로모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야 말을 잃었다지만 말을 잃기 전에도 로모는 표현에 서투른 사람이였다. 누가 뭐라 하면 조용히 웃으며 낮고 불확실한 목소리로 확신 없는 자기 의사를 표달하군 했다. 그는 가끔 엄마가 자신의 삶에 어떠한 확신도 없는 사람이여서 저다지 목소리도 자신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였다. 자기가 낳은 자식한테도 늘 서름서름한 사람이였다. 남들은 착하다고 하지만 그는 엄마의 옆얼굴이 단호해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그는 늘 엄마한테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했었다. 끝없이 엄마 하고 달려가 안기고 싶고 어깨에 손을 얹어보고 목을 그러안고 매달려보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끝없이 시달리며 그저 망설이기만 했었다. 그 끝없이 망설였던 아이, 그는 그 아이를 생각하면 왠지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그러나 같은 엄마였지만 그런 엄마를 대하는 동생의 태도는 달랐다. 외모부터 성격까지 그와 동생은 전혀 다른 스타일이였다. 동생을 대하는 엄마의 태도는 그를 대할 때보다는 많이 따뜻했고 부드러웠지만 그렇다고 아주 화끈하고 뜨거운 적은 그가 보기에도 없었다. 그러나 동생은 종래로 그것을 서운해하거나 연연하는 아이가 아니였다. 내가 아닌 어떤 타인으로부터도 상처받지 않는 아이, 항상 랭정하고 현실적이여서 아이 같지 않았던 아이, 동생이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아이, 삶과 자신 사이에 그물 하나 쳐놓고 사는 아이, 동생은 그런 아이였다. 그도 가끔은 온전하게 사랑받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동생처럼 저렇게 온전히 차거울 수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못나게도 치런치런한 마음을 쉽게 잘라내지 못하는 성격이였다. 늘 엄마한테 서운한 마음과 사랑받고 싶은 욕망과 엄마가 가엾다는 아픈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 이룰 수 없는 욕망과 아픔을 간직한 채 그는 텅 빈 마음으로 커갔다. 그는 자주 가슴이 시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감정이였다. 어른이 되고 많은 일을 겪으면서 모든 것은 희미해져갔고 지금은 어떤 것도 서운하지도 속상하지도 않다. 지금 그는 모든 것에 무덤덤하다. 삶의 자잘한 감정들에 일일이 반응할 만큼 그의 정신은 올올이 깨여있지 않다. 그는 그것이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텅 빈 눈으로 서로를 응시하다가 로모와 그는 고개를 돌려 서로를 외면한다.   2. 그가 ㄷ자형으로 파인 장판널에 손을 넣어 걷어낸다. 장판널 세장을 거두자 동굴 같은 부엌이 드러난다. 그는 그 동굴 같은 부엌바닥에 놓인 뒤축을 꺾어버린 낡은 운동화에 발을 겨낭하고 성큼 뛰여든다. 그는 다리만 부엌에 잠긴 상태로 솥가마뚜껑을 열어본다. 물이 반쯤 차있다. 그는 동굴 같은 부엌에 쭈그리고 앉는다. 포대에서 마른 잣껍데기를 두손 가득 집어내여 아궁이에 넣고 그 우에 마른 장작을 어긋나게 놓는다. 오른손 켠에는 마른 장작이 가득차있고 왼켠에는 젖은 참나무 장작이 쌓여있다. 장작 앞에는 반으로 접어 펼쳐놓은, 잣껍데기와 봇나무껍질이 들어있는 포대 두개가 있다. 그는 봇나무껍질을 집어내여 손바닥 만큼 찢는다. 득~ 성냥을 그어댄다. 기름을 머금은 봇나무껍질에 확 불이 당기자 그는 그것을 잣껍데기에 갖다댄다. 잣껍데기가 빨갛게 불을 머금고 마침내 다 타버릴 때 쯤 장작에 불이 붙는다. 모든 것은 수순이 있다. 모든 것은 적당해야 한다. 불이 붙고 가마에 물이 끓어오르고 옴푹한 평가마가 달궈질 때 쯤이면 그는 젖은 장작으로 불길을 눌러놓고 부엌에서 튀여나온다. 뜨끈한 물과 찬물을 섞어 적당한 온도로 대야에 반쯤 물을 채운다. 거기에 수건을 적셔 로모한테 갖다놓는다. 로모는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고 마비된 왼쪽팔을 끄당기며 혼신의 힘을 다해 일어나 앉는다. 덜덜 떠는 손으로 간신히 수건을 집어들어 얼굴을 닦는다. 그동안 그는 아침을 준비한다.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치고 뚝배기에 된장을 풀어 평가마에 얹어놓는다. 뚝배기가 끓어오르는 사이 그 안에 들어갈 감자를 깎는다. 가스가 있지만 구태여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평가마에 놓을 남비를 물로 헹궈놓고 그는 랭장고를 연다. 며칠에 한번씩 이 산을 도급맡은 동국이가 부리워놓는 보따리 덕에 랭장고 안은 허전하지 않다. 그는 랭장고에서 닭알을 꺼낸다. 로모가 후들거리며 일어나 벽을 짚고 선다. 부들부들 떨며 한걸음씩 옮겨 딛는다. 로모는 불편한 재래식 화장실을 안깐힘을 쓰면서라도 꼭 당신 스스로 간다. 처음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부축해서 화장실까지 가자 로모는 부들부들 떨며 화장실에 들어가 그한테 문을 닫으라고 시늉했다. 문이라고 해봤자 널판자로 막은 거지만 로모는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듯했다. 자식한테 마지막 한겹만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것은 어쩌면 죽어가는 개구리가 우로 솟아오르듯 마지막 발악 같은 것이 아니였을가.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는 일부러 로모가 저렇게 화장실로 갈 때면 외면한다. 딱히 리유를 말할 순 없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 그가 밥을 다 차려놓고도 한참을 기다려서야 로모는 덜덜 떨며 한쪽으로 자꾸만 기우는 몸을 위태롭게 옮기며 들어왔다. 로모한테 숟가락을 쥐여주자 로모가 부들부들 떨며 찌개국물을 뜬다. 로모가 입가에 숟가락을 가져가고 마침내 로모의 오래되여 허물어지기 직전의 동굴 같은 입 속으로 숟가락이 삼켜질 때 쯤 찌개는 반 이상 쏟아져있다. 그는 묵묵히 밥을 먹는다. 개구리를 집어들고 손가락으로 불그스름하고 가득찬 알 때문에 축 처진 개구리배를 가른다. 수많은 개구리가 세상에 나올 수도 있었을 암놈이다. 그는 단단한 검은색의 개구리알을 집어내 혀로 핥고 북~ 다리를 뜯어 로모의 밥공기에 얹어주고 자신의 입안에도 집어넣는다. 그는 맛있다고 생각한다. 묵묵히 입안에 이것저것 쓸어넣으며 오늘 할 일을 생각한다. 오늘처럼 산에 가지 않는 날도 쉴 틈은 없다. 잣을 보관하는 창고도 새로 지어야 하고 잣탈곡하고 남은 껍데기도 한곳에 모아 말려서 불을 때든지 해야 한다. 세탁기도 돌려야 하고 집도 대충 치워야 하고 할 일은 쌓여있다. 그는 불을 지피는 순간처럼 일의 순서를 정한다. 로모는 그가 집어준 개구리는 외면하고 계란볶음을 숟가락으로 간신히 떠서 우물거리며 넘긴다. 찌개에서 피여오르는 허연 김, 읍읍~ 하고 들리는 벙어리의 모지름처럼 들리는 로모의 입안에서 음식이 으깨여지는 소리, 그의 단단한 이가 허연 녀자의 속살 같은 배추김치대를 마침내 아작 하고 부서뜨리는 소리, 그것이 전부이다.   3. 하늘이 유리잔처럼 투명하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시간, 얼굴을 스치는 공기가 제법 선뜩선뜩하다. 은밀하게 숨겨진 계곡에는 투명한 물소리 처량하게 울리고 가을을 보내는 숲에서는 새들이 기지개를 켠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갈대들이 흐느적거린다. 멀리서 바라보면 한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짤랑 하고 거울처럼 깨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풍경은 멀리서 바라봐야 한다. 그가 산에 오른다. 주머니로 만든 배낭을 메고 키의 세배 쯤 되는 장대를 손에 거머쥔 그의 뒤모습은 칼날의 단면처럼 단단하다. 그 단단한 뒤모습을 보이며 그는 거뭇거뭇한 나무들이 뼈처럼 서있는 속으로 들어간다. 피부를 찢고 마침내 살을 헤집고 들어가 뼈를 느끼며 꽂히는 단단한 칼날처럼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걸어들어간다. 청량한 숲의 공기가 페로 들어오고 아릿한 송진냄새가 코를 통해 마침내 가슴까지 통과할 때면 그는 비로소 활기를 띤다. 고기가 물을 만난듯, 사랑에 어섯눈을 뜬 소년이 볼이 발갛게 피여오르는 소녀를 만난듯 그는 온몸의 굳었던 근육이 비로소 풀리는듯하여 눈을 슴벅거린다. 그는 나무를 헤집으며 자주 올려다본다. 본격적인 잣따기철이 끝나고 허술한 잣따기군들이 모두 물러난 때, 가을과 겨울의 사이 같은 이 시기를 그는 좋아한다. 산이 남정네한테 허연 아래도리를 감각 없이 내놓은 채 감흥 없는 정사를 끝낸 중년녀인네가 되여 마침내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 같은 시기이다. 적당히 잣이 달려있는 나무에 이르면 그는 각반으로 끈을 묶어 등뒤에 배낭처럼 메고 있던 자루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빨간 코팅이 되여있는 면장갑을 꺼낸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꾹꾹 눌러 꼼꼼히 장갑을 끼는 그의 입술은 단단하게 닫혀있다. 나무께로 다가가 팔을 뻗어 그는 나무를 껴안아본다. 맨발로 오를 만한 나무인지 보조기구가 필요한 나무인지를 가늠한다. 마침내 그는 장대를 나무아지에 걸터놓고 나무에 오른다. 잣따기철에 일군들이 오르기 힘들거나 잣이 시원치 않게 달려 내버려둔 나무들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그에게는 주저할 만한 리유 따위가 되지 않는다. 그에게 오르기 힘든 나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산발을 타면서 단련된 그의 몸은 기민하다. 적당히 근육이 붙어있고 누가 봐도 어설프지 않은 구리빛으로 피부가 해빛에 그을려있다. 쭉~ 쭉쭉~ 아지를 잡고 상체를 밀어올리면서 그는 민첩하게 발을 옮겨딛는다. 서너메터 쯤 오르면 다시 장대를 집어 우로 옮기면서 거침없이 나무에 오른다. 나무를 타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나무아지를 딛고 나무 우에서 어떻게 몸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를 망설여야 하겠지만 그는 결코 그런 망설임 따위를 모른다. 동작 하나하나가 긴밀하게 이어져있고 아주 민첩하다. 어둠에 익숙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들고양이처럼 그는 한치의 주저도 없이 나무에 오른다. 마침내 장대로 잣을 칠 만한 거리에 오르면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숨을 한번 고른 다음 단단히 몸을 고정하고 자세를 바로잡은 뒤 장대로 정확하게 잣송이를 품고 있는 아지를 내리친다. 한번, 두번 그의 장대가 허공을 가른다. 나무가 비틀거리고 반동에 의해 그의 몸도 흔들린다. 마침내 찍~ 소리를 내며 잣이 무더기로 떨어져나간다. 그는 다시 또 숨을 고른다. 천천히 장대를 아래로 한단계씩 내려놓으며 나무를 타고 내려간다. 가끔 그는 잡고 있는 아지를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푸르른 하늘을 향해 훌쩍 몸을 날리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부르르 몸을 떨며 뒤로 상체를 제끼고 어깨를 편다. 그런 자신이 두렵다.   4. “형님, 난 형님 땜에 먹구 사오.” “형님, 형님은 일당백이요. 형님이 있어서 난 든든하오.”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법을 동국이는 어디서 배운 걸가. 이 산을 도급맡은 동국이는 늘 그렇게 그를 치켜세운다. 그리고 사람 마음을 어찌나 잘 읽어내는지,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게 뭔지를 알아내고 적당한 때에 내밀어준다. 가끔 술을 사들고 와서 밤 늦도록 그와 잔을 기울이며 그한테만 털어놓는 비밀인듯 착각하게 하는 말투와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도 적당한 거리감을 두어 동생 벌 되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게 한다. 그는 가끔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건 어떻게 배우는 걸가. 원래부터 그렇게 타고나야 되는 걸가. 아니면 스스로 배워지는 걸가. 무상으로 모든 걸 내주는 줄로만 알았던 산이 어느 순간, 개인에게 도급주는 때가 왔었다. 시장통 정육매대에서 돼지고기 자르듯 잣산을 구역 별로 토막내서 도급준다고 했다.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했지만 얼마 안 지나 그건 말이 되는 소리라는 게 증명됐다. 돈 있는 외지사람 누가 어느 잣산을 사고 누가 어느 잣산을 샀다고 했다. 이 동네에서 자손 삼대가 밤낮없이 벌어도 가당치 않을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그들은 그렇게 쉽게 지불하고 동네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슥 끌어당겨갔다. 따뜻한 물속에서 헤염치다가 서서히 다리를 쭉 뻗고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동네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당하고 멍해있기만 했다. 잣에 이어 개구리도 강을 구역 별로 도급주면서 개인소유가 되여버렸다. 이제 산과 강의 모든 것이 무상으로 가져올 수 없게 되여버렸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곧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좋은 차에 고급진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나타나 산을 누비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것을 그는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창턱을 손톱밑에 때가 시커멓게 낀 손으로 짚고 바라보았다. 저것은 허망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그는 체념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였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욕심내본 적이 없는 사람, 늘 삶의 한켠에 비켜서서 살았던 사람이였다. 그렇게 되는구나.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집이나 학교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산을 잃는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아릿했다. 사람들은 이제 시골에서 살 재미가 없어졌다고 떠나야 한다고 했다. 이곳을 떠나야 하나, 떠나서 어데로 가야 하나, 그는 그 나이까지 살면서 처음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그럴 즈음 동국이가 술이며 안주를 한구럭 들고 찾아왔다. 동생의 친구라고 하지만 어릴 때부터 주먹을 쓰면서 동네 애들을 손에 넣고 뒤골목을 누비던 동국이와 드물게 동네에서 수재인 그의 동생은 서름서름한 사이였다. 그러니 그런 동생의 친구하고 그가 가까운 사이일 리가 없었다. “형님, 이곳에서 우리 살아보기요.” 방바닥에 오징어와 땅콩 따위를 벌려놓고 술 한잔씩 들어가자 동국이가 지저분한 방안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잣산을 산 형님이 나보고 관리를 해달라오. 뭐 산이 외지사람한테 넘어간 건 나도 안타깝지만 어찌겠소. 그게 세상이 아이요? 힘 센 사람이 뭐든 가지는 거. 우리야 가진 게 없으니 어찌겠소.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형님, 동네에서 잣이든 개구리든 형님이 전문가 아니요, 그야말로 산전문가. 형님, 나랑 같이 손잡고 해보기요. 콩고물이라도 주어먹기요.” 소나기가 쏟아지던 밤이였다. 동국이는 눈을 들어 창밖의 비줄기를 쳐다보며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플라스틱맥주컵에 가득 차있는 배갈을 들이켜자 가슴이 뜨뜻해졌다. 그는 동국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였다. 동국의 말마따나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할 줄 아는 거라곤 산에 가서 잣 따고 개구리 잡는 것 뿐인 그가 갑자기 어데 가서 뭘 하겠는가. “형님, 나가봤자 별 볼일 없소. 어디 가나 다 마찬가지요. 우린 여기서 승부하기요. 산에서 태여난 놈은 산에서 놀아야지. 지금 동네사람들은 여길 버리고 간다지만 돈 있는 사람들은 산을 사려고 들어오는 게 안 보이요? 우리보다 몇배 더 똑똑한 사람들이 그럴 때는 그게 다 리유가 있지므. 형님, 산에 돈이 널렸는데 이걸 버리고 어딜 가겠소?” 그는 동국이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어떤 확신으로 가득차있었다. 그처럼 한번도 중심에 서보지 못하고 변두리로 비켜나 살았던 사람은 가져볼 수 없는 어떤 꽉 찬 자신감이였다. 그는 그게 부러웠다. 하지만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않고 다만 생각해보겠다고만 했다. 가끔은 이 산골을 떠나 다른 세상에 던져보고 싶은 욕망이 희미하게나마 있었던 건 사실이였다. 하지만 그 욕망 또한 희미한 환영 같은 것일 뿐 륜곽도 실체도 없었고 그 희미한 욕망의 실체를 알 수 없어 자주 마음이 허전했다. 그런 허전함을 그는 친구들과 앉아 허술한 안주에 비닐봉지에 든 배갈을 끝없이 마시는 걸로 달래군 했었다. 그가 떠나면 엄마는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가면 어데로 가야 할가. 시내에서 고중을 다니고 있는 동생이 대학을 간다면 그 뒤바라지는 내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는 막연한 것들을 밤새 궁리하다가 새벽녘이 되여서야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해 봄이 오기 전에 마을을 떠났다. 동생이 대학교에 들어갔고 많은 돈을 벌어야만 했다. “힘들더라도 네가 그렇게 해주었으면 하지. 나야 그저 니네 둘만 잘살면 되는 거지. 내 걱정은 하지 말아라.” 엄마는 그렇게 조용히 그의 등을 떠밀었다. 잘난 둘째아들의 출세길을 위해 엄마는 기꺼이 멍석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라는듯 낮은 목소리 끝에 간절함도 묻어있었다. 그는 외삼촌과 사촌형의 도움을 받아 한국수속에 필요한 돈을 마련했다. 아버지 없는 집안의 맏형답게 그는 가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 끝에 기꺼이 쭈그리고 앉기로 했다. 개구리처럼 옴츠리고 자신의 어깨 우에 동생을 올려놓기로 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였다. 처음 비행기를 탔고 처음 외국에 나가본 것이였다. 먼저 간 친구 집에 머물러있으면서 그는 한국에서 취업을 위한 교육을 받았고 여러 곳의 일자리를 전전했다. 돈을 벌어 동생한테 보내고 전화를 했다. “형님, 고맙소. 내 공부해서 꼭 출세할게. 엄마도 형님도 행복하게 할게. 형님 은혜 잊지 않을게.” 동생은 감격에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전화 저편에서 맹세했다. 그는 비정기적으로 외삼촌네 집 전화를 통해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오, 그래. 잘 있지 나야. 니가 고생한다.” 헛헛한 목소리로 로모는 수화기 저편에서 짜내듯이 말했다. 고마움과 동시에 미안함이 섞여있는 말투였다. “엄마는 잘 지냅니까?” “응. 잘 지내지. 잘 지내구 말구.” 그렇게 말하며 엄마는 웃는 흉내라도 내야 한다는듯 설익은 웃음소리를 실어보냈다. 잘 지내지 못해도 잘 지낸다고 할 로모였고 아파도 아프다는 내색조차 안할 엄마였다. 전화기를 내려놓았고 긴 한숨을 내쉬였다. 어째됐건 그가 없어도 가족은 잘살고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다만 중요한 것도 부족한 것도 돈이였다. 많이 배운다는 건 많은 돈이 필요한 일이고 아프지 않냐고 묻는 백마디 안부보다 약 한통이 휠씬 더 강력한 사랑을 표달하는 것임을 그는 느꼈다. 동생은 항상 돈이 부족하다고 했다. 돈,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가. 그는 가슴이 타들어갔다. “형, 잣 따러 안 갈라우?” 그 때 쯤이였다. 한동네서 살던 동생 친구 벌 되는 용식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기도? 한국에도 잣이 있다는 소리야?” 그는 어리둥절해졌다. “형님, 무슨 소리 하는 거요. 사람 사는 데야 어디든 똑같지. 여기 사람들은 무서워서 잣나무에 안 올라가오. 내 가평에 잣산 도급맡아서 하는데 가기요. 잣나무 올라가는 데야 형님이 전문가재요. 샘골에서 형님 별명이 살아있는 손오공이였재요. 내 형님 전화번호 알아보느라고 여기저기 숱한 사람한테 전화했댔소. 좀 련락이랑 하메 살기요.” 그는 솔깃해졌다. 나무를 타는 것이라면 무엇보다 자신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돈을 번다는 것에도 마음이 동했지만 그는 숲의 공기, 아릿한 송진냄새를 맡고 싶어져서 부리나케 짐을 쌌다. 한국의 잣나무는 거의 고목이였다. 맨발로 올라갈 수 있는 나무는 별로 없고 거의가 신발에 사갈을 끼고 올라가야 하는 나무였다. 돈을 보고 몰려들었다가 잣나무를 돌아보고는 그냥 돌아가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도착한 첫날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찾은듯 페로부터 나오는 깊은 숨을 내쉬였다. 오랜만에 쉬는 깊은 숨이였다. 나무에 올라 잣을 따고 밑에서 잣을 주어 큰길까지 내가고 차에 실어 산 아래로 잣을 내려다가 탈곡하는 것까지 모든 게 잘 배분되여있었다. 장대를 들고 나무에 올라가 오랜만에 휘청이는 나무가지에 몸을 지탱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그의 마음은 물이 차오르듯 싱싱해났다. 나무를 오르는 사람한테 가장 많은 돈이 차례졌고 그는 누구보다 많이 나무에 올라 잣을 땄으므로 그 해 잣철이 지났을 때 꽤 많은 돈을 벌었다. 동생한테 돈을 보내주고 엄마한테도 보내주고 외삼촌한테도 용돈이나 하라고 돈을 보내주었다. 동생도 엄마도 외삼촌도 전화기 저편에서 좋아했고 그도 비로소 뿌듯해나서 웃을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잣철이 끝나고 사람들이 산을 내려갈 무렵 산을 도급맡은 용식이는 잣철이 지났다지만 아직 군데군데 미처 손을 대지 못한 잣을 따고 이미 따놓은 잣을 탈곡도 해야 하고 일손이 필요하다며 그가 산에 남아주기를 제안했다. 딱히 갈 데도 없었으므로 그는 남기로 했다. 이삭주이 잣따기를 하고 잣탈곡을 하고 개울에서 개구리가 뛰여가는 걸 바라보며 그는 여기가 샘골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가 성장한 샘골과 이곳은 생활습관도 다르고 생각과 관념도 다르지만 산과 강은 같았고 자라는 잣과 개구리는 같았다. 여기에서 그는 개구리를 잡지 않는다. 야생개구리는 여기에서 포획금지대상이라지만 그런 리유가 아니라 해도 굳이 이곳에서 개구리를 잡고 싶지도 개구리료리를 먹고 싶은 욕망도 일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몸의 느낌이다. 그에게 느낌은 항상 생각보다 먼저다. 산과 강을 누비며 물속에 들어간 개구리처럼 활기차게 숨을 쉬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전념했다. 용식이는 그런 그가 고맙다고 늘 넉넉하게 일당을 쳐주었다. 그는 생각을 굴려보았다. 잣은 래년에도 달릴 것이고 이렇게 돈을 번다면 동생과 엄마한테 용돈을 보내는 외에 어느 정도 돈도 모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내에 아빠트를 한채 사야겠다. 엄마도 모셔오고 녀자도 만나고. 녀자, 거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아래도리가 뜨근해났다. 처음으로 가정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았고 자신도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 비슷한 것에 그렇게도 가슴이 뭉클하고 눈확이 슴벅거려지는 것이였다.   5. 사랑에 대해 그는 모른다. 다만 그가 그 녀자를 만났을 때 가슴이 아팠다는 것 뿐이다. 조그만 녀자였다. 손도 조그맣고 발도 조그맣고 목소리도 작아 그 녀자와 마주하면 괜히 유리잔 대하듯 조심스러워지던 그런 녀자였다. 그가 녀자를 만난 것은 용식이가 형님, 남의 고기 먹어보기요 하면서 데리고 갔던 산 아래 고기집에서였다. “가위 바꾸오. 안되겠소.” 잘 잘라지지 않는 고기를 들고 쩔쩔 매는 녀자한테 용식이가 그렇게 롱담을 던졌고 다들 와르르 웃었다. 녀자는 얼굴까지 새빨개지며 안깐힘을 다해 고기를 자르고 있었다. 녀자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바라보며 그는 난데없는 통증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 내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그렇게 순식간이라는 것을 그는 처음 알았다. 그 날, 그 고기집에서 시끌시끌한 소리, 고기 타는 냄새, 시끄럽게 술잔이 부딪치는 속에서 그는 시종일관 그 녀자의 행동을 주시했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정신없이 뛰여가는 녀자를, 황급히 랭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쟁반에 담아들고 달려가는 녀자를 보았다. 어서 오세요, 거기 앉으세요, 아니, 거기 말고 저기요, 네네, 금방 치워드릴게요, 네네, 금방 갖다 드릴게요. 그는 녀자의 다급한 걸음걸이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녀자의 작은 가슴이 은밀하게 오르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그 작은 가슴을 움켜잡고 싶은 욕망에 얼굴을 붉혔다. 그는 손을 내밀어 술잔을 부여잡고 녀자를 바라보며 그 어떤 아픔을 느꼈다. 욕망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그 날, 그 밤, 그 고기집에서 그 조그마한 녀자를 바라보며 알았다. 기어이 용식이가 데려간 술집에서 그 날 저녁, 그는 망설였지만 끝내는 끓어번지는 남자의 본능적인 욕망을 누르지 못하고 두껍게 화장한 녀자의 가슴에 잣따기로 거칠어진 손을 밀어넣었다. 녀자가 그의 등을 그러안았고 그는 마침내 출처가 불분명한 부푼 욕망을 서걱서걱 풀었다. 이상한 것은 그가 그 과정에도 그 조그마한 녀자를 생각했다는 것이였다. 일을 끝내고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며 그는 그답지 않게 눈물이 솟구쳐 눈을 슴벅이기도 했다. 그 날 새벽, 대리운전을 부른 용식이는 시내에 있는 집으로 내려가고 그는 일군들 몇명과 함께 숙소로 묵고 있는 펜션에 돌아왔다. 자려고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아 그는 쓰러져 코를 골고 있는 사람들을 헤집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꼼꼼히 샤워를 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분노 비슷한 감정을 느꼈고 세수비누에 거품을 내 면도를 했다. 이상하게도 괜히 얼굴이 붉어졌고 괜히 미안했고 괜히 자신의 욕망이 치욕스러워지는 이상한 밤이였다. 일군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는 그 고기집이 단골이였다. 그는 그 곳에 갈 때마다 이상하게 거울을 보고 옷차림을 체크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무리 거울을 보아도 거멓게 그을린 얼굴에 뚜렷하지 못한 이목구비는 녀자들의 호감을 끌 만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초조해나기도 했다. 초조하면서도 괜히 흥분되여 그런 날이면 허둥대며  휴대폰도 떨어뜨리고 묘하게 기분이 업되였고 싱숭생숭했다. 어디선가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맑은 물이 돌돌돌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으며 한국에 와서 단 한번도 불어본 적 없는 휘파람을 파란 하늘에 날리기도 했다. 고기집에 몇번 드나들면서 그는 녀자의 이름이 민주라는 것, 다른 시이긴 하지만 고향이 연변이라는 것 정도를 알게 되였다. 사람을 쉽게 접근하는 용식이가 고기쟁반을 들고 들어온 녀자에게 이름을 물었고 고기를 잘라주는 사이에 또 고향을 물었던 것이였다. 그를 달아나게 한 것은 방금 채득한 녀자의 신상에 대해 그만이 아니라 모든 술자리에 있던 일군들이 다 아는 것이라는 사실이였다. 그는 녀자에 대해 좀더 알고 싶었다. 모든 술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공개적이고 시시한 것이 아닌 그만이 알고 있는 무엇인가를 욕망했다. 녀자와 그 사이에 둘만의 비밀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몸을 달구었다. “술 사주시면 안돼요?” 술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오다가 그가 떠듬거리는 말투로 얼굴까지 붉혀가며 녀자에게 식사 한번 할 수 있겠냐고 조심스레 물었을 때 뜻밖에 조그만 녀자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응낙했다. 저것이리라. 저 작고 가냘픈 몸으로 저 작은 목소리로 이 세상을 버티는 힘은 저 당돌함이리라. 녀자가 쉬는 날을 맞춰 그는 용식의 오토바이를 빌려 식당으로 찾아갔다. 녀자가 근처에서는 마시기 싫다고 거절해왔기에 그들은 택시를 불러 멀리 시내로 나갔다. 택시가 채색의 불빛이 쏟아지는 시내 번화가 쪽으로 들어갔을 때 멍하니 밖을 바라보던 녀자는 엉뎅이를 틀어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 날 저녁, 그는 끝없이 녀자의 잔에 술을 채워줘야 했다. 녀자는 식당에서 고기를 자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쩔쩔 매며 어쩔 바를 모르던 녀자가 아니라 단호한 어조로 여기요, 하면서 서빙하는 아줌마를 불렀고 뭘 저리 꾸물대냐고 투덜대기도 했으며 메뉴를 불만스러워하며 안주를 시켰다. “난요. 남보다 못난 것 하나 없다구요. 그런데 왜 이렇게 살아야 되죠?” 취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툭툭 의미 모를 말만 짧게 던지며 연거퍼 술잔을 비워내던 녀자가 볼이 발그스름해지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이제 말문을 열기로 한 걸가. 그는 녀자가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하려 무등 애를 썼으나 처음으로 자신이 배운게 없다는 것이 못내 불만스러웠다. 근사한 말로 녀자를 달래주고 무엇인지 모를 녀자의 불안을 잠재워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워 그도 빠르게 술잔을 비워갔다. “난요. 이렇게는 못살아요. 오빠? 나이가 얼마라 했죠? 나보다 세살 많으니 오빠라고 부를게요. 오빠는 이게 좋아요? 자고 깨나면 일하고 일 마치면 또 자고. 미치겠어. 내 시간이라는 건 아예 없고. 사람이 바보가 되는 것 같지 않아요? 손님들 잔소리는 또 얼마나 많은지. 정말 이렇게는 못살겠어. 오빠는 억울하지도 않아요? 아 근데 오빠는 왜 아직도 연변말투만 써요? 사람이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 있잖아요. 난 촌스러워서 연변말 안하는데.” 녀자의 한국말은 흉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지만 지치지 않고 열심히 흉내냈다. 주절주절 이어지는 녀자의 말은 횡설수설 두서가 없었다. 그는 떠듬거리며 다 잘될 거라는 따위의, 그로서도 알 수 없는 말을 했지만 녀자는 숫제 그의 말은 듣는 체도 하지 않고 술만 먹어댔다. “싫어, 싫어, 싫다고. 다 싫단 말이야.” 꾸역꾸역 쌓여있는 것들을 다 끄집어내고야 말겠다는듯 푸념하듯, 호소하듯 말하고 중간중간 침묵하는 순간이 오면 녀자는 빠르게 잔을 비웠다. 녀자는 드디여 눈이 풀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하며 손을 내젓다가 푹 앞으로 고개를 꺾었다. 그 날 밤, 그는 술을 먹고 기절한 녀자를 업고 모텔을 찾았다. 누워서 웩웩 토해대는 녀자의 토사물을 치워주고 모텔 침대에 눕힌 다음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조금 사이를 두고 팔을 베고 누웠다. 손만 내밀면 바로 녀자의 하얗고 말랑말랑한 살을 만질 수 있었지만 왠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새벽 쯤 녀자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술에서 깬 녀자는 어제밤에 했던 행동들이 생각난듯 그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가야 하는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섰으나 이내 비틀했다. 녀자는 아아, 도저히 걸을 수 없어요. 하고 탄식하며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 날 밤, 그와 녀자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와 그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의 숨소리를 느끼며 누워있어보는 건 처음이였다. 누군가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처음이였다. 종래로 그렇게 오래 진지하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도 없었고 그가 그렇게 자신의 것을 다 내놓고 싶을 만큼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사람도 없었다. 녀자도 그와 같은 시골에서 태여났으며 맏이가 아니라 막내라고 했다. “내가 철이 들자 부모는 늙어버렸어요. 언니들은 시집을 가고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 아직 화장실에 미처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벌써 바지에 일을 저질러버려 어쩔 바를 모르겠는 그런 거 있잖아요. 이렇게 말하면 표현이 되나. 아무튼 그런 거예요.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쩔쩔 매야 하는 거. 그것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혼자서 헤매야 하는 거.”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 없는 시골 집안의 맏아들인 그 역시 철이 들어서부터 삶의 무게라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걸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이 그가 맏아들이여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맏이라는 이름의 무게, 아버지가 부재한다는 현실의 무게, 당연히 짊어져야 하는 무게, 그게 바로 맏이라는 생각, 동생 만큼 잘나지 못했기에 당연히 잘난 동생이 더 빛나고 더 앞으로 나아가도록 밀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 은근히 그걸 강요하는듯한 엄마의 말없는 표정이 때론 서운하고 때론 서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내도 힘들 수 있구나.” 그는 중얼거리듯 그런 말을 뱉었다. 맏이나 막내라서가 아니라 잘못 던져진 삶들의 고달픔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료양병원에 있어요. 그리구 어제는 남자친구가 결혼했어요.” 녀자가 쿡쿡 웃으며 말한다. 그 웃음은 숫제 눈물이라도 쏟아질듯 서글프게 안겨왔다. “사랑이라는 게 뭘가요. 잘 모르지만 그냥 너무 좋고 안 보면 보고 싶고 그 사람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시간도 많았지만 많이 싸웠어요. 좋은 집안에서 근심이 뭐고 걱정이 뭔지 모르고 곱게 자란 사람하고 집채처럼 삶의 무게를 떠안고 있는 나는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은 늘 우리 두 사람의 일만 생각했고 나는 그게 아니였으니, 아닐 수 밖에 없었으니…” 녀자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무거운 부담을 가냘픈 어깨에 떠메고 있는 녀자를 보며 엄마가 떠올랐다. 그는 가슴이 아팠다. 동시에 그는 자신과 녀자 사이에 어떤 통로 같은 게 생겨나는 느낌을 받았다. 아프고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뭔가 뜨거운 것이 몸을 달구는듯한 그런 느낌이였다. 아침을 먹고 점심때 쯤 출근을 해야 하는 녀자를 데려다주고 그는 펜션으로 돌아왔다. 잠간의 만남이였고 뜨거운 청춘남녀 사이에 당연히 일어날 법한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는 갑자기 세상 모든 것이 달라보였다. 하늘은 더 푸르고 맑은듯했고 개울물도 갑자기 정다워졌으며 숲의 공기는 한결 청신해진 것 같았다. 오래된 창틀을 수세미로 밀고 기름칠을 하면 새것처럼 환해지던 것과 같은 일이 자신한테도 일어나고 있는듯이 느껴졌다. 그리고 용식이랑 술집에 가지 말아야겠다고, 화장이 두꺼운 녀자를 안고 부푼 욕망을 서걱서걱 푸는 따위의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그것은 자기 자신한테도, 민주한테도 미안한 일인 것 같았다. 쉬는 날이 맞지 않아 민주와 한번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였다. 모처럼 시간을 맞춰 만난 날, 민주가 물었다. “뭐하시려구요?” 그 말에 그는 얼굴을 붉혔다.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놓고 그는 잣을 따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민주와 만나서 할 일들에 대해 생각했으나 민주를 마주하는 순간까지 확실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던 것이였다. 민주의 제의에 의해 그들은 시내로 나가 영화를 보았다. 처음으로 영화관이란 곳에 와본 그는 모든 게 너무 낯설었다. 영화도 망설임 끝에 민주가 고른 것이였다. 영화는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민주를 곁눈질해보니 민주는 골똘히 영화를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숫제 영화에 몰입해있었다. 그는 혹시 자신이 재미를 찾을 줄 몰라 그런 게 아닌가 의심되여 재미를 찾으려고 애썼으나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영화에서 어떤 녀자가 울면서 떠나가는 남자를 잡고 있었다. 그가 돌아봤을 때, 어둑시그레한 영화관 조명 아래 민주의 얼굴에 물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그 물기를 닦아줄 념을 못하고 다만 몸을 옹송그렸다. 민주는 고기집 서빙 일을 힘들어했다. 작고 여린 그녀의 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로동임을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좀더 능력이 있고 가진 것이 있어 민주가 그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 무렵 마침 동생이 졸업학년이라 돈 쓸 일이 많았고 잣철도 지나서 그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산의 풀을 베고 버섯을 따는 따위 별로 돈이 되지 않는 것들이였다. 동생한테 돈을 보내고 엄마한테 용돈을 보낼 정도의 벌이는 되지만 여유는 많지 않았다.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민주와 그는 서로 침묵하게 되는 시점이 있었다. 료양병원에서 암투병으로 많은 돈이 필요한 민주의 엄마와 아직 갈길이 먼 그의 동생과 그의 엄마의 이야기에 대화가 미치면 그와 민주는 약속한듯 서로 침묵하다가 말없이 술잔을 비우고는 쓱 저가락을 내밀어 안주를 집어 잘게 씹었다. 그들은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없는 사람들이였다. 삶의 무게라는 것이 켜켜이 쌓여 이끌고 안아야 하는 게 너무 많아 미처 자신은 돌볼 여유를 가질 생각조차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였다. 어쩌면 그것은 운명 같은 것이여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마다 그는 가슴이 저려왔다.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민주가 떠나기 전날, 노래방에서 부르던 노래였다. 민주는 노래를 잘하는 편은 아니였다. 그렇다고 아주 못하지도 않았다. 잠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민주의 옆얼굴은 어릴 때 그가 보았던 엄마의 망설임이 담긴 얼굴처럼 차겁게 느껴졌다. 그 날 밤 모텔에서 그는 민주의 말랑한 육체를 안았다. 그도 민주도 최대한 말을 아낀 밤이였다. 사랑한다는 말도 못해본 채, 그래서 굳이 헤여진다는 말도 없이 그들은 그렇게 헤여졌다. 좀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야간근무를 하는 전자회사로 가야겠다는 민주를 그는 잡을 수 없었다. 고속뻐스 차창으로 손 한번 조그맣게 흔들어보이고 그렇게 민주는 떠났다. 오래도록 그 자리에 굳어져있다가 다리가 저려나서야 그는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회색으로 다가오던 날이였다. 그의 삶을 빛나게 해주던 것들은 찰나의 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민주로 인해 빛나던 모든 것들은 민주가 떠나감으로 그 빛을 잃고 윤기를 잃어버린 것이였다. 터덜터덜 끝없이 걸었던 날이였다. 왠지 뻐스도 택시도 싫어서 그는 한시간여를 걸어 펜션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로 쓰러져 시체처럼 자고 또 잤다.   6. 동생이 드디여 졸업했다. 대학을 다니던 곳보다 고향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 직장을 잡았다. 마치 냄새 나는 음식을 피하듯 동생은 최대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겠다고 했다. “형, 대학만 나오면 내가 엄마를 모시고 집안의 부담 다 안을게. 형님 고생한 것도 보답하고.” “형님, 내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기다리오. 그 때가 되면, 그 때면 형님은 고생 끝일게요.” 호언장담처럼 그가 돈을 보내줄 때마다 동생이 하던 말이였다. 그는 담배를 물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 오래된 말을 떠올려보았다.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던 건 아니였다. 하지만 왠지 모를 서걱거림이 그의 마음을 치런치런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지, 한마디 변명조차 없는 동생한테 어쩐지 서운함이 느껴졌다. 그는 담배를 깊게 한모금 빨았다. 치런치런한 마음이 조금씩 다독여지고 있었다. 담배연기가 하얗게 피여올라간다. 그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원래부터 그럴 걸 알았으면서 뭘 하며 속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동생은 그 곳에서 중국녀자를 만났다고 했다. “형, 한족이면 어떻소. 나한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녀자요.” 이제 동생도 술을 배운 건가, 알콜냄새가 느껴졌다. “아무 힘도 빽도 없이 살 만한 세상이 아니라는 거 형님도 알지 않소. 난 힘이 필요하고 빽이 필요하오. 대학을 졸업했다지만 누가 뒤 받쳐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을 쓰고 우로 올라오려고 난 버텼소. 담배도 안 피고 술도 안 먹고 대학 다니는 동안 바보라는 소리, 별종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련애도 안했소. 죽어라 공부만 했소. 그게 우로 올라가는 사다리라고 생각했소. 하지만 이제 조금 올라와보니 형, 여긴 피비린내가 진동하오. 아래서 올려다볼 때는 꽃향기가 날 것 같았는데 가까이 다가와보니 살륙전이요. 우로 올라올수록 더욱 물고 뜯는 세상이란 걸 알았소. 형, 그래도 난 높이 올라가야겠소. 거기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올라가봐야겠소. 우리가 샘골에서는 죽을 때까지 벌어도 이 도시의 화장실 한칸도 살 수 없다는 것이 난 화나오. 참을 수 없이 화가 나오. 샘골에서 태여난 나도, 아버지 없이 자란 나도 이 도시의 화장실 뿐만 아니라 아빠트도 내 이름으로 마련하고 차도 사고 미친 척 하루밤에 샘골사람들 일년 수입 되는 돈을 술값으로 써버리며 그렇게 살고 싶소. 형, 형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소? 아니라구? 그렇지 형과 난 다르니까. 난 형과 다르잖소. 난 다르오. 다르고 달라야 하고 달라지고 싶소. 다르다는 걸 만천하에 보여주고 싶소. 보여주고 미친 척 웃으며 이를 갈며 그렇게 살 거요. 그렇게 살아서 뭐 하냐구? 글쎄 뭐를 하겠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꼭 뭐를 해야 하오? 형님은? 그럼 형님은 어떻게 살고 싶소? 그렇게 살아 뭐 하려구? 그렇지만 형, 난 이렇게 미친 척 살고 싶소. 살아보고 싶소. 난 그렇게 살아야겠소!” 형, 형님. 동생은 울분을 토하듯 토해내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모은 돈을 긁어 동생한테 결혼비용으로 보냈다. 그래, 네가 소원이라면 멀리 올라가거라. 이건 니가 올라가는 길에 디딤돌 하나 쯤도 못되겠지만 내가 줄 수 있는 전부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밤하늘에서 별 하나가 아득한 지구 저편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먼곳에서 치러진 동생의 결혼식에 그는 가지 않았다. 어쩐지 가고 싶지 않아 일이 많아 몸을 뺄 수가 없어서 못 갈 것 같다고 핑게를 대고 가지 않았다. 동생도 기어이 오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술기운에 열기 비슷하게 달아오른 몸을 벽에 기대고 동생이 위챗으로 보내온 사진을 받아보았다. 사진 속에서 동생은 검은색 외제 차에 몸을 기댄 채 과장된 웃음을 활짝 보이고 있었다. 이름이 쑤메이라고 동생이 말한 턱이 뾰족한 중국녀자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동생한테 살짝 기대고 깨끗하게 웃고 있었다. 쑤메이의 고르고 하얗게 빛나는 치렬은 그로 하여금 치아가 새까매서 항시 웃고 나선 뒤늦게 손으로 입을 가리던 민주를 떠올리게 했다. 그렇잖아도 무척 말라서 초라해보이는 엄마는 초록색 한복을 입어 더욱 왜소해보였다. 엄마는 마치 백조무리에 낀 닭처럼 잔뜩 긴장되여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민주는 떠나간 뒤로 소식이 없었다. 그는 몇번이나 민주한테 전화를 해보려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가 종당엔 포기하고 말았다. 잠 안 오는 밤, 위챗에서 민주의 이름을 찾아 클릭해놓고 무수히 많은 말을 썼다가 지우고 다시 또 무수히 많은 말을 썼다. 허나 끝내 보내기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그는 하지 못한 말들을 가슴에 꾹꾹 삼켜버리고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민주는 그에게 삶과 같았다. 그에게 다가와 잠간 희망도 주었지만 끝없는 고통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러면 민주에게 자신은 무엇이였을가. 민주에게도 나는 고통만 남긴 존재는 아니였을가. 그는 머리를 저었다. 더 이상 복잡한 것은 싫다. 생각하기도 싫고 그저 단순하게 살고 싶다. 그 즈음 그가 늘 하는 생각이였다. 그럭저럭 삶은 지속되였다. 버텨졌고 살아졌다. 한때 그는 민주가 자신의 전부인듯 느껴진 적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옅어졌다.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걸 잃고도 여전히 그렇게 태연하게 살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는 놀라웠다.   7. “엄마가?” “그래, 니네 엄마 터밭에서 꼬꾸라졌다. 지금 병원에 있다. “ 잣나무에 잣이 애기주먹 만큼 자랐을 때 그는 외삼촌의 전화를 받았다. “혈압이 높으셨습니까? 그럼 평소 식습관은 어떠셨습니까?” 하얀 가운에 싸여 어딘가 근엄해보이는 중년의 남자의사가 그와 동생을 번갈아 훑으며 채근하듯 물었다. 그도 동생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어 침묵만 지켰다. 회사를 단 하루도 비우기 힘들다는 동생은 이튿날로 돌아가고 그가 엄마의 곁을 지켰다. 엄마는 깨여났지만 반신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되였다. 몰라보게 수척해진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마음이 짠했다. 엄마는 언제 이렇게 늙어버린 걸가, 저 주름들은 언제 저렇게 패인 걸가. 링게르가 꽂힌 엄마의 손은 파랗게 피기라곤 없었다. 그럼에도 심장은 뛰고 숨은 쉬여지고 하루하루 조금씩 회복되여갔다.   “엄마를 료양병원에 모시자구?” 그는 동생을 바라봤다. 엄마가 퇴원하는 날을 맞춰 먼 도시로부터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동생은 검은색 서류가방을 단정하게 들고 슬프지도 흥분하지도 않은 얼굴로 병실에 들어섰다. 동생은 병실에 들어서서 엄마를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그를 끌고 복도 한켠으로 나왔다.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해가 지고 있었다. 하루의 사명을 다 마친 해가 너울너울 지구 뒤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넘어가면 오늘의 해는 다시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침을 삼켰다. “그래도 어떻게.” 그는 처음으로 동생한테 분노를 느꼈다. 바쁘다는 핑게로 아픈 엄마한테 미음 한숟가락 떠넣지 않은 동생이, 요강 한번 비워본 적 없는 동생이 마치 자신이 엄마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라도 있는듯 단호하게 말한다. 엄마도, 형도 이제는 동생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여버린 게 아닌가. 높이 올라가려고 꼭대기만 바라보느라 옆도 앞도 다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그는 동생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에 몸을 떨었다. 동생의 꼭 다문 얇은 입술이 벌어지고 마침내 찢기고 거기에서 터져나온 뜨끈한 피가 흘러내려 동생의 얼굴을 적시고 옷을 적시고 바닥을 적시게 하고 싶었다. 동생의 피도 뜨겁기는 한지 한번 쯤 느껴보고 싶었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끝내 날리지 못한 주먹을 틀어쥐고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모든 걸 꾹꾹 눌러담고 우뚝 서있었다. 동생의 반듯한 양복과 깨끗한 흰 셔츠의 깃을 바라보며 거기에 번지는 피자국을 환영처럼 보고 있었다. 슬픔 같기도 하고 아픔 같기도 한 이름 못할 감정이 꾸역꾸역 가슴 속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글쎄 어쩔 수 없지 않소. 형님, 형님은 다시 한국으로 나가야는 게 아니요? 형님한테는 아무래도 한국이 낫지 않소? 그리고 운신도 잘 못하는 엄마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소? 지금 이전하고 달라서 녀자들이 시엄마를 모시는 건 신화 같은 말이요. 더구나 쑤메이 걔는 공주처럼 자라서 세상의 중심이 자기인 줄 아는 애요. 그깟 돈 좀 있는 것 땜에 나도 더러운 대로 그저 걔가 하자는 대로 하면서 살고 있는 처지요. 집청소 해주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신던 양말도 세탁기에 집어넣을 줄 모르는 애요. 내가 가진 게 없다 보니 장인 장모한테도 허리 굽혀야 하고 회사에서도 허리 굽혀야 하고. 그러면서 나도 버티고 있소. 올라가려고 살아보려고 버티고 있소.” 동생이 눈을 감았다가 뜬다. “나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러지. 료양병원도 시설이 좋아서 로인들 지내기는 좋답데. 거기 가면 친구도 있을 테고.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오. 비용은 형님하고 내가 반씩 부담하고. 그게 좋지 않겠소?” 동생이 채근하듯 묻는다. 어디론가 자신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빨리 엄마를 류배라도 보내고픈 심정이라는듯 동생은 엄마를 료양병원에 보내야만 하는 갖은 리유를 갖다 붙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산에서 돌들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는 흡- 하고 숨을 내쉬였다. 료양병원에 들어서자 매캐한 냄새와 소독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빛이 들지 않는 복도 량쪽으로 칸칸이 나뉘여져있었다. “여기는 자립할 수 있는 분들 칸이구요.” 작은 방에 머리를 짧게 자른 할머니들이 멍하니 앉아 텔레비죤을 보다가 “누가 또 오나 보오.” “어쩌겠소. 이제 여기를 거쳐야 죽는 거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반신을 못 쓴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여긴 안되고.” 원장이 수군대는 로인들이 있는 칸을 지나 앞쪽으로 안내했다. “아야. 정말 이 아바이는 너무 잡순다니까. 맨날 누워만 있으면서도 저리 식성이 좋으니 렴치가 없는 거지. 아 구려 정말.” 살이 덕지덕지 붙은 아낙네가 커다란 종이뭉치를 들고 나가며 투덜거린다. 저게 말로만 듣던 어른들이 차는 기저귀인가. “이 방이 어떻습니까?” 침대 두개가 량쪽 벽에 바싹 붙여놓은 방에 들어서서 원장이 그와 동생을 쳐다봤다. 검버섯이 얼굴의 반 이상을 덮은 안로인이 후들거리는 손으로 이불깃을 만지며 놀란 눈으로 불청객들을 쳐다봤다. “여기 이 방에 로인분이 금방 돌아가셔서 자리가 비였습니다. 이 방 아님 자리가 없어요.” 원장이 그들을 쳐다본다. “흑흑…” 갑자기 안로인이 울음을 터뜨린다. 원장은 밥 먹고 똥 싸는 것처럼 늘 있는 생활이라는듯 허허 웃는다. “로인들 이렇습니다. 같이 생활하다 보면 정이 들고 돌아가시면 또 저래 울고.” “할머니, 곧 친구 찾아드릴게요.” 원장이 울고 있는 로인네 앞으로 다가가 큰소리로 말한다. 로인은 끄덕끄덕하면서 팔소매로 눈물을 닦는다. “내가 샘골로 모시고 갈게.” 양로원을 나와 도로가 있는 큰길까지 내처 걷다가 그는 동생한테 그렇게 말했다. 뚝, 동생이 멈춰섰다. “형님, 정말이요? 잘 생각해보오. 형님이 정 그러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형님한테 맡기기보다는 료양병원에 모시는 게 나는 마음이 편하오. 그리고 랭정하게 잘 생각해보오. 엄마를 끌어안고 있으면 형님 인생은 어쩌려구? 형님도 녀자를 만나고 결혼도 하고 남들처럼 살아야지 않소. 정말 잘 생각해보고 하는 말이요?” 동생이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는 동생을 외면하고 고개를 들었다. 비가 오려나 하늘이 잔뜩 흐려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생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8. “형님, 정말 잘 왔소.” 오랜만에 만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동국이는 어제 금방 만나기라도 했던 사람처럼 큰소리로 형님 하고 부르며 그의 집에 들어섰다. 안 본 몇년 사이 동국이는 몸이 나고 제법 유들유들해져 메마른 그에 비해 기름기가 보이는 사람이 돼있었다. 그는 막 자리를 깔고 엄마를 눕히고 주섬주섬 집안을 치우고 있던 참이였다. “어머이, 이제 갠찮스꾸마. 큰아들이 와서 얼매나 좋슴둥. 혼자서 외롭게 지내시더만 이제 아들이 와서 얼매나 좋슴둥.” 동국이는 로모한테 다가가 손을 잡고 인사를 했다. 동생은 저렇게 아픈 엄마 손을 저토록 다정하게 저토록 아무 망설임없이 덥석 잡은 적 있던가, 나는 있었던가. “형님, 형님이 정말 진짜 효자요. 민호 그 개새끼 집안에 돈은 지가 다 끌어다 쓰고 자기 혼자 도망 가서 잘살겠다고 뒤도 안 돌아보고. 형님 동생이지만 욕 좀 할게. 어머이, 귀한 둘째아들 욕 좀 할게요. 하하. 그래도 어머이는 귀한 아들 욕하니 안 좋은가 보오. 허허 알았슴다. 어머이, 욕 안할게요. 어머이 아들이 이 동네서야 수재입지.” 동국이가 자리를 고쳐앉으며 그를 바라본다. “형님, 어머이도 돌보고 나한테 와서 일 좀 해주오. 한국에서 벌기보다는 못해도 괜찮을게요. 가지 말고 여기서 나랑 살아보기요.” 그는 로모를 바라본다. 로모는 고개를 덜덜 떨며 이불자락을 만지고 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내 게요.” 동국이는 학교 운동장 서너배는 되게 울타리를 친 땅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들이 떠나가면서 버린 집을 내가 다 사들였소. 여기 철길이 놓인 거 봤지? 저기 앞에 남구산 쪽으로 철길이 지나간 거 보이지?” 그는 눈을 들어 동국이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봤다. 마을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남구산을 가로지른 철길이 보인다. “형님, 여기 이제 외지에서 들어오고 싶어도 못 들어오오. 빈 땅에 집을 지어도 집조를 안 내주오. 여기서 집조 내자면 있는 집을 허물고 지어야 집조를 내주오. 호구 있어도 와서 살기 바쁘다는 말이 되지므. 이제 몇년 안으로 도로도 뚫린다 하고 이제 광천수공장도 선다 하오. 그럼 여기 집값이며 땅값이 엄청 뛸게요.” 동국이는 어깨를 쫙 펴고 팔을 뻗어 자신의 장난감을 자랑하는 아이처럼 우쭐해있었다. “형님, 어떻소, 나도 이만하면 괜찮지 않소? 형님 동생 만큼 잘나진 못해도 이만하면 나도 잘 구을러왔다고 생각하오. 여기 잣산도 내가 샀고 사람은 얼마 없지만 촌장도 맡았소. 형님 동생이 공부 잘해서 학교서 반장할 때 나는 싸움 잘해서 뒤골목반장 했으니 갸가 시내에서 우로 올라갈 때 나는 샘골에서 땅바닥에 곤두박질이라도 쳐야지므. 형님, 나하고 여기서 굴러보기요. 난 형님 동생처럼 은혜를 몰라라 하는 놈은 아니오. 누가 나한테 해준 것 만큼 반드시 돌려주는 놈이요. 그게 은공이든 주먹이든 나는 여태 그렇게 살았소. 형님, 나랑 같이 살기요.” 동국이의 굵고 분명한 목소리가 귀가에 들린다. 산도 그 산이고 흙도 그 흙인데 모든 것이 변해있는듯하다. 그는 오랜만에 느끼는 고향의 공기와 훌쩍 변해버린 모든 것에 막연해져 신발로 발밑의 땅을 문질렀다. 돌돌돌, 개울물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저 소리. 변하지 않은 것은 저 개울물소리 뿐일지도 모르겠구나. 저 안에 개구리도 헤염치고 있을 테고 돌쫑개도 숨어있을 테지. 그래, 그것들은 그대로일 테지. 그는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사실에 가느다란 마음을 한줄기나마 내려놓기로 했다.   9. “여길 어떻게.” 반가움과 생경함으로 약간 떨리는듯한  목소리가 목구멍을 겨우 빠져나온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건조하다고 생각한다. “오빠가 여기 이야길 많이 했잖아요. 그래서인지 그 때 한국에서 가평을 떠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동안에 문득문득 여기 생각이 났어요. 어떤 곳일가 궁금했구… 특히 이거. 오빠가 늘 말하던 앞개울이 가장 궁금했어요.” 낮게 퍼지는 민주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한국엔 또 가는 거구?”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될 것 같아 그는 그렇게 묻는다. “글쎄요. 또 가는 건지만 묻고 왜 들어온 건지는 안 물어봐요?” 분위기가 너무 무겁다는듯 민주가 그를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던진다. 그는 민주를 흘깃 곁눈질해본다. 회색의 얇은 경량패딩에 감춰진 민주의 몸은 전보다 더 마른듯해보였다. 거칠어진 피부와 너무 많은 것을 겪어 이제 더 이상 놀라울 것도 없다는듯한 민주의 표정이 아프게 맞혀온다. “엄마가 돌아갔어요.” “어?” 그가 놀라 민주를 바라본다. 그러나 민주의 옆얼굴은 담담하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멀리에 시선을 보내며 민주가 말한다. “엄마의 사망소식을 한국에서 들었죠. 난 엄마가 영원히 살 줄 알았던 걸가. 왜 그 때는 한번도 엄마가 갑자기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했던 것 같아요. 그냥 돈을 벌어서 돌아가서 엄마를 내 손으로 돌봐야지. 막연하게 그런 생각만 했어요. 그래서 미친듯이 일만 했어요. 남들이 안하는 야간고정을 하면서 정말 나를 던져 일에만 매달렸어요. 쉬는 일요일이였어요. 낮에는 잠만 자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 미치겠어서 모든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텔레비죤 앞에 앉아 채널만 바꾸며 밤을 꼬박 새고 뻥뻥해진 머리로 아침에 전철역에 나가다가 길에서 전화를 받았어요. 양로원 원장님이 아침에 돌아가셨다구… 엄마가 돌아가셨다구… 그랬어요. 그 순간 내 느낌은 뭔가 아득했어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아… 했어요. 그다지 놀라지도 않고 눈물도 나오지 않고 그저 꿈을 꾸는 것 같고 그렇더라구요. 언니랑 오빠한테 전화를 하고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공항에서 셋이 만나서 그렇게 엄마의 장례를 치르러 들어왔어요.” 민주는 잠간 말을 끊는다. 표정이 굳었다가 서글프게 푹 하고 웃는다. “양로원에 후사를 부탁하고 들어오니까 정리가 다돼있더라구요. 어차피 가족 중에 그런 걸 해줄 어른도 안 계셨구 해서 그냥 양로원에 부탁을 했어요. 비용만 지불하면 지금은 다해주더라구요. 유품들은 모조리 태웠고 엄마는 화장터 사체실에 랭동되여있고. 할 일이 별로 없었어요. 오빠는 오래 련락 안하던 친구들이며 친척들에게 전화를 끊임없이 돌리더라구요. 어떻게 하나 한명이라도 더 불러 장례식에서라도 뭔가 과시하려는듯이. 될수만 있다면 돈을 내고 사람이라도 사다가 세워놓고 싶어하는 사람 같았어요. 오빠는 그런 사람이예요, 보여지는 게 중요한 사람. 언니는 그게 불만이였어요. 그저 뭐든지 간단하게 하자. 그게 언니의 주장이였어요. 제사상 차림도 간단하게 필요한 것만 사자. 우리끼리 그저 조용히 하고 말자. 그랬어요. 화장터 랭동실에 엄마를 두고 그렇게 둘이 밤새 싸우고 있었어요. 살아 생전에 양로원에도 와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웃기게도 엄마가 돌아가시니까 갑자기 열정적으로 매달리더라구요. 웃겼어요, 모든 게. 난 그냥 빨리 끝나버렸음 좋겠다, 언니랑 오빠가 빨리 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요.” 겨울해가 수면 우를 비춰 개울물이 반짝반짝 빛난다. 바람이 분다. 제법 차다. 민주가 추운지 몸을 옹송그린다. “결국 언니 말대로 조용하게 치렀어요. 조용히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끝없이 전화를 했으나 오빠가 부른 사람들은 장례식에 오지 않았던 거죠. 랭동실에서 누런 포대 같은 안에 들어있는 엄마의 시체가 들 것에 들려나오는데 마지막이라고 한번 볼 거냐고 하는데 언니도 오빠도 보지는 않겠다고 하더라구요. 나야 원래부터 보고 싶지 않았어요. 왠지 못 볼 것 같았어요. 그냥… 내가 감당이 안될 것 같았어요. 언니가 마른 목소리로 곡을 하고 나도 따라하고 눈물도 잘 나오지 않았어요. 화장터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골회도 수습하지 않기로 해서 그냥 그렇게 끝났어요. 순식간에, 너무 빨리. 그렇게 끝나더라구요. 거기서 또 한번 언니랑 오빠는 싸웠어요. 제사를 지내는데 언니가 하얀 종이를 준비하지 않아서 신문지를 폈다고, 그게 남들 보기에 창피하다고 오빠는 화를 냈어요.” 민주의 조그만 어깨가 가냘프다. “그렇더라구요. 사람 사는 게 그렇더라구요. 허망하죠?” 대답을 기대한 물음이 아니라는듯 민주가 말을 잇는다. “언니는 이제 자기가 제사를 챙긴다고 엄마의 영정사진을 아들 집에 갖고 갔다가 아무래도 못하겠던지 그 날 밤 아빠트단지 아래로 내려와서 태워버렸다고 했어요. 오빠는 길길이 뛰였고 둘은 그렇게 한국 가는 날까지 싸우다가 서로 다른 비행기로 가버렸어요.” 고양이 한마리가 개울가를 산책한다. 허리를 쭉 뻗고 한껏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의 털이 해빛에 눈부시다. 누구네 집 고양이일가 그는 궁금해진다. “언니 오빠가 가고 빈 집에 혼자 남게 되니까 왜 갑자기 졸음이 그렇게도 몰려오던지요. 며칠을 내내 잤어요. 밥도 먹지 않고 자고 자고 또 자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그냥 여기 생각이 났고 그래서 와본 거예요. 오빠가 한국에서 돌아와서 여기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그냥 뭔가 숨을 쉬고 싶었어요. 그런데 왜 여기로 오고 싶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요.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렇게 리유가 확실하게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 요즘 많이 해요.” 민주는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아무런 윤기도 묻어있지 않는 목소리로 그렇게 혼자말처럼 내뱉는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 말없이 서서 먼곳을 바라본다. “여기 참 좋네요. 이런 곳에서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럴 수만 있다면…” 민주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리고 쓸쓸하게 웃는다.   택시가 앞에 와서 선다. 민주가 천천히 다가가 뒤좌석 문을 연다. 그는 움직이지도 입을 열지도 못한다. 입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맴돌고 있는 수많은 단어들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며 묵묵히 서있는다. 다만 뚫어질듯한 두눈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기어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영원히 두눈에 담아놓고야 말겠다고 굳게 다짐한 사람 같았다. 문을 열고 민주가 잠간 멈칫하며 고개를 돌린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민주는 어색하게 웃는다. 수초의 머뭇거림이 민주의 얼굴을 스친다. 민주가 끝내 고개를 돌린다. 민주가 탄 택시는 빠르게 그의 시야에서 멀어져간다. 그것은 하나의 점이 되여버렸다가 끝내 아득하게 하늘로 피여오르는 먼지 한줄기만 남기고 그의 시야에서 영영 사라진다. 꿈을 꾼 건 아닐가. 가슴이 구멍이라도 뚫린듯 헛헛하다. 그는 저려나는 다리를 감각 없이 옮겨 개울가 쪽으로 간다. 민주의 쓸쓸한 웃음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꾸역꾸역 올라와 그를 견딜 수 없게 달구고 있다. 크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진다. 첨벙첨벙, 그가 개울물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그가 발을 옮겨놓는 자욱마다 커다란 물보라가 하얗게 일어난다. 츄리닝바지가 젖어들어 옮기는 발에 힘이 들어간다. 순식간에 찬 기운이 온몸을 감싸오고 아래다리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쓸쓸하게 웃고 있는 민주가 떠오른다. 날이 잘 선 칼 하나를 가슴에 품고 세상을 살아가는듯한 동생이 떠오른다. 난, 남보다 못한 게 없어요. 난 억울해요. 소리지르던 민주의 얼굴이 떠오른다. 형, 난 올라갈 거야. 미친듯이 노력할 거야. 기어이 올라가고 말 거야. 동생의 열띤 얼굴이 떠오른다. 잣을 딸 때 잣나무를 타고 올라가 마침내 꼭대기에 다달아 잣을 쳐서 떨어뜨리고 나면 마음이 헛헛하듯이 민주도, 동생도 마침내는 헛헛한 마음이 되지는 않을가. 그 헛헛한 마음을 민주도 동생도 견뎌낼 수 있을가. 엄마는 어떻게 삶에 으악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견뎌냈던 걸가. 한번이라도 소리내여 울고 싶고 온힘을 다해 크게 한번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을가. 죽어서도 자식들의 얼굴 한번 못 봤다는 민주의 엄마는 지금 저 하늘에서 헛헛하지 않을가. 무엇이 로모를 끝내 말을 버리고 입을 다물고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한 것일가. 개구리는 어떻게 스스로 입을 닫을 줄 아는 것일가. 해빛에 개울물은 하얗게 반짝인다. 그는 두손을 물에 넣고 적시다가 손바닥으로 물을 탁 친다. 탁탁탁 쳐댄다. 물을 치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의 손에서 튕겨져나간 물들이 초원을 달리는 숫말의 말갈기처럼 솟구쳐오른다. 수많은 순간들에 머뭇거리기만 했던 사람, 언제나 꾸역꾸역 모든 것을 안으로 안으로 구겨넣었던 사람, 묵묵히 모든 것을 다만 견뎌왔던 사람, 그 사람은 내가 맞는 건가. 그는 그 사람이 한없이 가여워져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폴짝, 개구리 한마리가 뛰여간다. 막 겨울잠에 빠지려고 몸을 숨길 돌멩이를 찾아가는 놈인가.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는다. 손안에 물컹한 것이 느껴진다. 그는 두손가락을 뻗어 갈색의 륭기선이 두줄 나있는 개구리 등뼈를 잡는다. 까끌까끌한 뼈의 감각이 손가락에 맞혀온다. 그가 손가락을 쳐들자 등뼈를 잡힌 개구리는 두다리를 쭉 늘어뜨린다. 배 아래쪽이 붉고 배속의 알 때문에 아래배가 축 늘어진 그것은 수많은 새끼개구리를 품고 있는 암놈이다. 그는 다른 손 엄지를 내밀어 천천히 오래 전 다물어버린 개구리의 입을 만져본다. 차거우면서 미끌미끌한 감각이 랭기로 얼얼한 몸에 전해진다. 그는 아무 것도 담겨져있지 않는듯한 개구리의 눈을 바라본다. 개구리의 툭 불거진 눈은 마치 모든 것을 비워낸듯 투명하다. 그것은 로모의 시선과 닮아있다. 그는 허리를 굽혀 물속에 손을 넣는다. 그가 손의 힘을 빼자 개구리가 그 틈을 타 슬쩍 빠져나간다. 그의 손에서 빠져나간 개구리는 몇번 헤염치다 돌멩이 틈새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터덜터덜, 뻣뻣해가는 다리를 움직여 그가 드디여 개울물에서 걸어나온다. 물에서 나오자 온몸이 덜덜 떨리며 이발이 아래우로 딱딱 부딪친다. 그는 걸음을 옮겼으나 몇발자국 걷지 못하고 비칠한다. 젖은 발이 돌멩이에 미끌어 그만 자빠진다. 일어나는 대신, 그는 사지를 활짝 펼치고 벌렁 땅에 들어눕는다. 클클. 그가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낸다. 몸에서 빠져나온 소리들이 멀리 퍼져나간다. 지구 저편으로 넘어가는 저녁노을이 붉게 빛난다. 진붉은 노을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그의 얼굴을 감싼다. 물기에 번들거리는 그의 얼굴은 마치 물감이라도 칠한듯 울긋불긋하다. 그 얼굴에 노을빛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겨울이 지나면 꽃이 피고 따스한 바람이 불고 새들이 노래하는 봄이 올 것 아닌가. 개구리도 그것을 알고 돌멩이 밑에서 겨울을 견디는 것이 아니겠는가. 봄은 올 것이다. 누구에게나 봄은 올 것이다. 남자의 눈빛이 새로 태여나는 아이의 눈빛처럼 깨끗하게 맑아지고 있었다. 
3    [중편]언니 댓글:  조회:241  추천:0  2019-07-08
언니 김경화     기우뚱하고 몸이 한쪽으로 쏠린다. 손바닥을 펼쳐 조수석 의자 뒤잔등을 밀며 간신히 평형을 유지해보려는데 덜컹하고 차체가 뒤집힐듯이 요동친다. 나는 하마트면 조수석 의자에 머리를 박을 번한다.  헝클어진 자세를 바로잡으며 흘깃 운전석 쪽을 곁눈질해보니 머리가 반나마 벗어진 중년의 기사아저씨는 평온한 얼굴로 태연하게 운전대를 잡고 있다. 쉴 새 없이 엉뎅이를 들썩거리게 하는 도로사정에도 고요하기 그지없는 눈빛이다. 여기 도로가 이런 걸 몰랐어? 초행길도 아니라면서 뭘 새삼스럽게 호들갑이야. 아저씨의 표정이 내게는 그렇게 읽힌다. 짐짓 제풀에 멋적어져 눈을 돌린다. 밖을 내다본다. 누런 먼지가 뽀얗게 달라붙은 차창 너머로 시퍼렇게 물든 산이 집어삼킬듯 마주 달려오다가 물러간다. 십년 가까이 되는 시간이 흘렀다. 도로는 보수도 안하는지 전보다 더 나빠진 것 같고 산은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과 달라지지 않았다.  “응. 나다.” 며칠 전 걸려온 전화 속 언니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있었다. 뭔 일이 있는 건가 하는 걱정보다는 짜증이 확 났다. 또 무슨 부탁이 있는 건가. 언니는 꼭 자기가 도움 청할 일이 있으면 이렇게 온몸의 힘이 다 빠진듯한 목소리가 되여버린다.  “냐.” 나는 애써 감정조절을 하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너 요즘 바쁘니?” 바쁘기야 하지. 출근하랴, 애 키우랴, 살림 하랴. 거기에 한국에 나가있는 당신하고 오빠가 시도 때도 없이 똥강아지 훈련시키듯 심부름을 시키지 않소. 내가 뭐 슈퍼우먼에 초능력자나 되는듯이.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참는다. “뭐 그냥 그렇지 머. 괜찮소. 왜?” “응, 니가 시간이 나면 형부한테 한번 가봤으면 해서.” 형부? 나는 순간 떨떠름해진다. 서류상으로 리혼도 했고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한번 변할 시간 동안 전화 한통 없었으면서 형부라고 어쩌면 이렇게 스스럼없이 말을 할 수 있나 싶은 게 입이 딱 벌어진다. 하긴 뭐 언니라면 가능할 법도 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무슨 소리긴. 그냥 궁금해서. 듣자 하니 샘골로 돌아갔는데 거기서 양봉을 해서 돈을 잘 벌고 있다고 하더라. 정말인지 아닌지 니가 한번 알아봤으면 해서.” 알아봐서는 어쩔 건데 하려는데 언니의 말이 이어진다. “그냥 한번 가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봐라. 진짜로 그렇게 자리잡고 돈 잘 벌고 있는 건지. 그렇다면 은근슬쩍 언니도 그동안 많이 힘들었다구, 여태 혼자서 열심히 돈만 벌었다구 하구, 형부 소식을 물어보더라, 그렇게만 하면 된다. 그러면 반응이 있을 거다. 다른 말은 필요없다. 모르긴 해도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다. 샘골에 우리가 살던 집을 여태 팔지 않고 남겨뒀다는데 그것만 봐도 분명 그래.” “글쎄…” “아니야, 글쎄는 무슨 글쎄.” 꿈이라면 이제 깨여날 때도 됐는데 여전히 이렇게 허황한 생각에 젖어있는 언니가 한심해 한숨이 푹 나간다. 내 시들한 반응이 못마땅하다는듯 언니는 대뜸 목소리를 한옥타브 높인다.  “그 나그네를 내가 모르면 누가 안다니? 십년이 아니라 이십년이 지났어도 날 기다릴 사람이다.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야.” “그러니까 형부가 아직 기다리고 있던 거라면 다시 합치려구? 합치면 이제 뜬구름 잡는 생각 안하고 살 수 있겠소? 정말 그렇게 결심했소? 괜히.” 장마철 날씨보다도 더 가늠하기 힘들고 변덕스러운 언니인 걸 아는지라 나는 그렇게 대놓고 물어본다. 보아하니 사는 게 힘들던 차에 형부가 돈 좀 벌고 있다는 소리를 얻어들은 것 같고 저 혼자 형부가 큰 부자라도 된 걸로 어림짐작해버리고 지금 당장 팔자를 고칠 것 같은 꿈에 젖어있는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해 깊은 바닥까지 잘 안다는 건 좋은 게 아니다. 그 사람의 추하고 비루한 면까지 다 알아버리면 때로는 나 자신이 우울해지고 비참해진다. 지금 내 기분이 그렇다.  쩝. 나는 입을 다신다. 할 말이 없다.  “얘 좀 봐라. 누가 나 좋자고 그런다니? 다 준이 때문이지. 이제 갸도 결혼할 나이가 다되여오는데 부모가 리혼했다면 어쨌든 사돈집에서도 못마땅해할 거고 결혼식 할 때도 애매할 거란 말이다. 한쪽 부모만 례식장 부모자리에 앉아있기도 그렇고 거기서 어색하게 만나 결혼식 치르기도 그렇고, 어쨌든 상황이 애매할 거다. 그래서 그러는 거다. 자식 때문에 이러는 거야.” 기껏 변명을 한다는 게 조카를 끌어다 붙인다. 그렇게 준이만을 위한 거라면 조건부 없이 재결합을 해야지 형부가 돈을 잘 벌고 있는지 아닌지는 왜 렴탐하라고 하냐고 쏘아붙이려다가 길도 멀고 힘들어 그만둔다.  “여보, 소문에 형부 샘골에서 양봉도 하고 잣산도 도맡고 돈 잘 벌고 있다는 것 같슴다. 정말일가?” “누구? 준이 아버지?” 형부면 준이 아버지지 누구겠슴가. 하려다가 찔리는 데가 있어 네 하고 대답해버린다.  “그렇다구? 그거 잘됐구만. 부지런한 사람이니까 잘할 테지. 지금 꿀 가격도 많이 올랐고 잣도 비싸니까 돈이 될게요. 그 형님은 또 그런 일이 적성에 맞을 테지. 그런데 당신 어디서 그런 소리 들었소? 준이한테서?” “아니, 그냥 들었슴다.” “거 잘됐구만. 돈 많이 벌구 좋은 녀자도 만나 그 형님 좀 멋있게 살았으면 좋겠소. 난 항상 그 형님 생각을 하면 영 마음이 안 좋다니까.” “예 뭐 글쎄 말임다. 잘살면 좋지 뭐. 근데 정말 그렇게 잘살고 있을가? 새로 녀자를 만났을가? 언니 밖에 모르던 사람이였는데.” 나는 슬쩍 같은 남자로서의 남편의 생각을 알고 싶어 그렇게 던진다.  “녀자야 만나자면야 왜 못 만나겠소. 널린 게 녀자인데. 그 형님 어디가 모자라서? 뭐 처형이 맨날 자기가 잘났다고 우쭐해서 그렇지 까놓고 말해서 처형보다 못한 것두 없소. 처형이야 겉보기엔 그 정도면 괜찮지만 다른 거야 어디.” 남편은 평소 은근히 언니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때를 만났다고 아주 대놓고 험담을 하려고 든다. 사람의 마음이란 요상하다. 내 혼자 속으로는 그보다 더한 욕을 수없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그렇게 나오자 기분이 확 나빠진다. 그러니까 나는 내 언니에 대한 욕은 나만 할 수 있는 전매특허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냥 만났을가 어쨌을가 하는 말임다. 궁금해서.” 애써 내 감정을 감추려 목소리톤을 낮춰보지만 바닥에 질펀하게 깔리는 짜증만은 숨길 수가 없다.  “당신 설마? 설마 처형이 그 형님이 돈 잘 번다니까 다시 생각 있어하는 거 아니지?” “아니, 무슨 소릴. 아무리 그래도 언니 그 정도 치사하진 않슴다. 사람을 뭘로 보구.” 남편이 정곡을 쿡 찌르자 나는 스프링처럼 반사적으로 튕겨오른다.  “아니면 좋구, 혹시라도 그렇다면 야, 처형두 정말 량심 없는 거요. 뭐 남자가 내 마음대로 버렸다 주었다 하는 장난감인 줄 아나.” “아니라니까 그램가?” 그제는 듣기 싫어져 소리를 빽 질러버린다.  “아니면 말구, 혹시라도 당신 또 말두 안되는 처형 부탁을 들어준다고 나설가봐 미리 침 놓는 게요. 사람이 량심이 있어야…” 밖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남편은 괜히 흥분하며 사설을 풀어놓으려고 한다.  괜히 말을 꺼냈다 싶다. 재결합하면 하는 거지 안될 건 또 뭐가 있냐고 하려다가 그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뻔뻔스러운 것 같아 입을 다물고 돌아서서 설겆이를 했다. 그 쯤 되자 남편도 재미가 없어졌는지 사설을 중단하고 거실로 들어가 텔레비죤을 켰다. 신랑과의 실랑이는 그렇게 마무리됐지만 문제는 나였다.  언니의 그 말도 안되는 부탁을 기어이 들어줘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힌 건 아니였다. 하지만 언니의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 형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지더니 자꾸만 언니와 형부가 재결합해서 사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였다. 무던하고 착했던 형부가 다시 가문의 일원이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았고 조카는 늦게나마 온전한 가정이 생겨서 언니 말처럼 결혼식을 해도 보기 좋을 것이다. 언니는 의지할 언덕이 생기는 것이니 남은 삶은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어이없고 한심하지만 언니가 아닌가. 언니가 잘살아야 나도 마음이 편할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였다. 그렇다면 결국은 나를 위한 건가? 아무려면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해버렸다. 인간이란 참으로 리기적인 동물임에는 틀림없었다. 적어도 그 생각을 하는 내 머리 속에 형부를 위한 건 없었다.  굽인돌이를 힘겹게 벗어난 택시가 비로소 평지에 들어선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본다. 언니네가 살던 동네까지는 앞으로 반시간 안으로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언니 말처럼 형부는 여태 언니를 기다리고 있을가. 형부가 사람이 우직하긴 하지만 무작정 일방적이고 지고지순한 사랑도 있을가? 남녀간의 사랑은 모름지기 상호간에 주고받는 감정이 아니던가. 메아리처럼 한쪽이 소리 지르면 다른 한쪽에서 화답해주는 게 사랑이 아닌가.  미루어 짐작컨대, 십년이란 시간이면 이미 형부는 아프고 힘들고 절망하고 체념하는 모든 단계를 다 거쳤을 텐데 싶은 생각이 들며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저녁 무렵의 어둠처럼 기여오른다. 모르지, 또 내가 모르는 어떤 상식과 상상을 초월한 사랑의 경지도 있을지. 나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잠간 헛된 꿈을 꾸어보기로 한다.  하늘이 맑다.  일기예보를 보지 않고 길을 떠난 터라 걱정했었는데 다행스럽다. “샘골엔 무슨 일로 가요? 거기 누가 있어요?” 차가 요동치면서 손님이 머리를 박을 번한 게 미안해서인지 아니면 말 한마디 없이 산길을 달리는 게 지루해서였는지 택시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네, 형… 아니, 친척이 있어서요.” “아, 그래요? 친척이 누군데요? 나 여기 거의 이틀에 세번은 다녀서 샘골 사람들 많이 아는데? 말해봐요. 친척이 누구인지. 집앞까지 태워다줄 테니까.” “아, 아니예요.” 나는 어쩐지 귀찮아져 고개를 젓는다. 기사아저씨는 힐끗 나를 바라보더니 멋적은듯 입을 다물고 앞을 바라보며 단단히 운전대를 잡는다.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나 누구를 만나러 가요. 하고 때늦은 고백처럼 말을 건네기는 싫다.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이 흐른다. 나는 무료함을 달래려고 휴대폰을 꺼내 위챗 아이콘을 클릭한다.  오늘 독일하고 멕시코 축구 승자는 누구일가? 말이라구. 당연히 독일이지. 변수가 있을 수도 있지.  에이, 변수야 있을 수 있겠지만 독일이야. 피파랭킹 1위라구. 지금 독일에 돈 건 사람들이 엄청 많을 걸.  그러다가 지면 어떡해. 돈 다 날리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도박이지. 돈 날리는 생각부터 하면 누가 도박을 하겠어? 이기면 돈이 몇십배로 뻥튀기하듯 튀는 거니까 로또보다도 이건 더 유혹적인 거야.  위챗그룹들마다 월드컵 경기 승부로 떠들썩하다. 체육복권을 몇장 사는 정도는 경기관람에 재미를 더해줄 거니까 바람직한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이건 하루아침에 인생역전할 꿈을 꾸면서 도박을 한다니. 저들의 허공에 들린 발이 슬그머니 걱정스러워진다.  샘골과의 거리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형부를 처음 만난 건 열살 때였다.  혼자 집에서 놀고 있는데 언니가 해실해실거리며 어쩐지 실없어보이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왜 또 저러나 하고 바라보니 언니 뒤로 얼굴이 새카만 남자 하나가 쭈볏거리면서 따라들어왔다.  “선희야 엄마 어디 갔니? 엄마 오라고 해.” 언니가 하는 말이였다. “응, 왜?” 집안 돌아가는 사정을 맑은 강물 속 돌멩이 들여다보듯 빤하게 알고 있는 내가 그 시간에 엄마가 어디에 가있다는 걸 모를 리 없지만 나는 그렇게 되물었다. 언니의 지나칠 정도로 흥분해있는 표정과 낯선 남자에 대한 경계도 있었다. “너 얼른 가서 엄마 모시고 오나. 집에 손님 왔다고 그래.” 언니가 명령조로 말했다. 나는 슬쩍 그 낯선 남자를 곁눈질해보았다. 그리고 이 남자가 과연 언니와 무슨 관계일가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열살이였지만 어른들의 수다를 귀동냥으로 많이 들으며 자랐고 나이보다는 조숙한 아이인지라 어렵지 않게 그 상관관계를 추측해냈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어디서 저렇게 까만 얼굴에 멋있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남자를 데려온 거야.  나는 언니한테 입을 삐쭉해보였다. 언니는 혀를 홀랑 내밀어보이며 나를 놀렸다.  그 철없어보이는 행동이 꼭 언니가 아니고 동생 같아 저렇게 철이 못 들었어도 시집은 가려나 보다 싶은 게 어이가 없었다. 언니는 엄청난 미인은 아니였지만 갸름한 얼굴에 피부가 희고 눈이 커 우리 마을 언니네 또래에서 내세울 만한 미모였다. 평균을 조금 웃도는 키에 적당히 통통하게 살집이 있어 녀성미가 돋보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럴사하게 포장된 언니의 겉껍질에 불과한 것이였다. 사람들은 일단 겉껍질에 마음을 뺏기면 껍질 안에 숨겨진 진짜 중요한 알맹이를 보는 눈이 흐려지게 된다.  가족은 외부에서 보는 눈과는 반대로 알맹이를 그대로 들여다보는 관계이다. 때문에 나는 언니의 알맹이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언니는 나이만 먹었지 정신년령은 아직 성장중인지 아니면 다 자랐어도 여전히 미숙한 건지 심하게 유치했다. 덩치는 엄마보다 더 커가지고 과자 하나도 나나 오빠한테 양보하는 법이 없었다. 따발사탕 하나라도 칼도마를 내려놓고 식칼로 세몫으로 쪼개놓고는 그 크기가 조금씩 다른 것들을 기어이 같다고 우기고는 제일 큰 조각을 자기가 홀랑 집어먹었다. 말도 안되는 걸 우겨대다가 본인의 무식이 드러나면 바락바락 화를 내는 건 일상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성격이 변덕스러워 금세 좋았다가 금세 화를 내였고 룡두사미처럼 뭐든지 시작은 거창하게 하고 끝은 항상 미미해 세타도 시작해놓고 며칠은 엄청난 열성으로 짜다가 어느 순간 훽 방 한구석에 뿌려던지군 했다. 엄마는 어휴 언제 철이 들겠냐 하고 푸념질하며 그걸 마무리하군 했다.  뭐 여기까지도 봐줄 만은 했다. 가장 큰 문제점이라면 언니는 늘 허공에 발이 들린듯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꿈을 꾸듯이 산다는 것이였다. 앞마당에 바나나나무를 심고 싶다는 둥, 앞강물에 갈치며 명태새끼를 키워 먹고 싶을 때 아무 때나 건져서 먹고 싶다는 둥, 쌀 한알이 고구마 만큼 크면 한알만 먹어도 배불러서 좋을 텐데 말이야 하고 허황한 소리를 하는 것이였는데 문제는 눈빛이며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운 것이였다. 뭐 여기까지도 한번 심심해서 장난 삼아 던져본 유머로 받아들이면 별문제 아닌 것이라는 생각에 그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니가 백마 탄 왕자가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자기가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되는 이야기를 막 해주다가 저도 모르게 자기가 만든 세계에 도취된듯 황홀경에 빠져있을 때는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열살의 내 눈에 비친 언니는 위태롭고 철부지였다. 나는 과연 언니가 성숙한 성인만 가능하다고 그 때 내가 생각하던 결혼이란 걸 하고 시집이란 걸 갈 수 있을가 하는 걱정을 했다.  하지만 남자라고 분류되는 인간 종류들은 녀자를 볼 때는 시력이 나빠지는 것인지 언니는 성격 좋은 인자언니나 손재주 좋은 명자언니를 제치고 남자들한테 인기가 대단했다. 나는 언니한테 쪽지를 전해달라는 한심한 남자들의 부탁을 귀찮을 정도로 받아야 했다. 싹둑 거절할가 싶다가도 쪽지와 함께 건네는 사탕이나 과자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쪽지를 갖다주면 언니는 때로는 그걸 읽어보고는 새침한 표정으로 흥, 어디서 감히. 하고 잘난 척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잔뜩 흥분에 들떠있기도 했다.  언니는 여러번 련애를 했다.  양은냄비처럼 금세 달아오르고 금세 식어지는 성격인지라 언니의 련애는 오래가지 않았고 상대가 자주 바뀌였다.  언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련애를 하면 금방 티가 났다. 시도 때도 없이 저런 주책이 다 있나 싶게 음정 박자 맞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흥분해있는가 하면 밥을 먹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방문턱에 앉아 부끄럽다는듯 혼자 입을 막고 웃었다가 몸을 좌우로 흔들거리며 요람에 누운 아기 흉내를 내기도 했다.  잠자리에 누워 이불 안에서 갑자기 발을 동동 구르다가 엄마한테 솜 떨어진다고 혼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세상을 다 가진듯 행복한 표정이 되였다가, 또 어느 날은 세상을 다 잃은듯한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기도 했다. 나는 흥분했다가 우울했다가 화를 냈다가 하는 언니의 다양한 감정기복을 통해 매번 언니의 련애가 어느 단계인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언니가 사귄 남자들을 라렬해보았다. 언니가 데리고 온 이 남자는 그 모든 남자들 중에서 가장 외모가 처져보였다. 큰 고려 없이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만 덥석 믿고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언니의 성격으로 미루어보면 의외였다.  너보다 못하지 않냐는 친구들의 말에 언니는 형부를 선택한 리유를 이렇게 말했다. “일 잘하고 돈 잘 벌고 부모들도 젊어. 그리고 둘째아들이라 나중에라도 내가 시부모를 모실 일은 없거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내 말이라면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한다는 거야. 아줌마들이 그러는데 시집갈 남자는 이래야 한대. 여태 내가 철이 없었던 거야. 두고 봐. 난 공주처럼 살 거야.” 나는 언니가 드디여 철이 드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무던하고 일 잘하는 남자라 언니를 고생시키지는 않겠다고 엄마 아버지는 언니와 형부의 교제를 허락했다. 형부는 감지덕지한 표정이였고 언니는 시뚝해하다가 약간 기분이 나쁜 것처럼 미간을 찌프렸다. 벌써 마음이 변한 건 아닌가 싶어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 언니는 이번에는 마음을 굳힌 건지 끝낼 만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귀고 있었다.  얼마 후에 언니가 그 먼저 사귀던 성일이 삼촌한테 딱지를 맞아서 화김에 형부를 사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성일이 삼촌은 언니 친구 동생하고 사귀고 있었다. 사람들은 성일이 삼촌이 인물만 보고 언니와 사귀였다가 언니가 철이 없어서 언니한테 딱지를 놓은 거라고 했다. 언니는 펄쩍 뛰였다. 성일이 삼촌이야말로 겉만 반지르르하지 가정조건도 별 볼일 없고 돈 잘 버는 것도 아니고 어디를 보나 텅 빈 깡통이라 자기가 차버린 거라고 했다. 진실을 알 수는 없었으나 그 때는 이미 언니가 량쪽 가정의 허락을 받고 정식으로 형부와 사귀고 있었다. 그 전에 몰래 하던 련애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였다. 나는 드디여 언니가 철이 좀 들어 이제 시집을 가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시골 치고는 시댁이 꽤 잘살았으므로 약혼식 때 형부네 집에서는 그 시절에는 드물게 화장품세트와 영구표 자전거, 돈 이천원 그리고 몇벌의 옷을 례물로 가져왔다. 언니는 시뚝해서 구경하러 온 친구들 앞에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자랑했다.  일년여의 오고가는 련애 뒤에 언니는 결혼을 했다.  방학이 되여 놀러 가보니 언니네 신혼살림은 꽤 근사했다. 큼직한 흑백 텔레비죤도 있었고 새로 짠 가구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불장 안에는 두툼한 이불들이 꽉 차있었고 새 소래며 사발이며 4단으로 된 식장에 가득차있었다. 언니는 뭐 이 정도 가지구 하는 표정으로 시뚝해하며 옷장을 열고 그 안에서 두툼한 양털탄자며 앙증맞은 애기 배내저고리며를 꺼내보였다. “이것 봐. 이거 다 시어머니가 해준 거야. 이거 시내 백화점에서도 젤 비싼 거야. 신강에서 진짜 양털로 만든 거래. 만져봐. 털이 엄청 부드럽고 포근해. 백화점에 같이 갔는데 시어머니가 나 보고 고르라고 해서 젤 좋아보이는 걸로 골랐더니 판매하는 아줌마가 나 보고 안목이 있대. 호호. 흠. 애기 업고 이걸 씌워가지고 나가면 다들 부러워하겠지? 그렇지? 흠. 배내저고리 귀엽지? 그나저나 우리 시엄마도 참 웃겨. 애기를 언제 낳을 지도 모르는데 벌써 이런 걸 다 사주다니, 웃기지? 선희야. 훗.” 짐짓 부끄럽다는듯 몸을 비탈며 언니는 입을 막고 호호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더니 정색해서 말했다. “아무튼 선희야, 너도 꼭 잘사는 집에 시집을 가야 해. 알았지? 가난한 집에 시집가면 이런 탄자는 꿈도 못 꾼단다. 구질구질하게 산단다. 알겠지?” 그 때 한창 사랑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소설에 빠져있던 나는 역시 언니는 참 속물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니네 집에 있으면서 지켜보니 부러운 마음이 슬그머니 들 만큼 언니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형부는 언니를 무척이나 아꼈다.  아침이면 먼저 깨나서 부엌에 불을 지피고 큰 가마솥에 가득 물을 부었다. 집안에 훈기가 돌고 가마솥에서 김이 나면 비로소 언니가 배시시 웃으며 짐짓 눈을 쥐여뜯는 척하며 일어나는 것이였다. 언니가 가마뚜껑을 열고 따듯한 물을 바가지로 퍼내 찬물과 섞어 적절한 온도를 맞추어놓고 세수를 하는 사이, 형부가 사랑채에서 쌀을 퍼다가 주고, 언니가 쌀을 씻어 밥을 안치는 사이에 형부가 언니의 지시에 따라 감자도 양푼에 담아 건네주고 사랑채에 들어가서 닭알도 가져다주고 하는 것이였다.  엄마는 항상 우리 식구 중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 널장판을 거두고 불을 때고 혼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밥을 했었는데 이건 완전 다른 세상이구나 싶었다.  형부는 집안일 뿐만 아니라 바깥일도 잘했다. 둥글소를 끌고 산으로 가서 나무도 아버지보다 더 굵은 걸로 발구에 실어왔다. 그걸 전기톱으로 켜서 도끼로 짝짝 내리 쪼개는 솜씨를 보니 어린 마음에도 보통솜씨가 아니구나 싶었다. 언니가 하는 일이란 고작 형부가 패놓은 나무를 울바자 곁에 쌓아놓는 것이였는데 그마저도 언니가 할라 치면 형부는 추운데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였다.  형부는 나도 무척 이뻐했다.  저녁이면 드라마가 나와도 내가 보고 싶은 그림영화를 보게 했고 내가 그 동네 또래 애들과 슬슬 친해지는 걸 보더니 같이 타고 놀라고 썰매도 만들어주었다. 시내에 갔다오면서 그 겨울에 집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었던 커다란 사과도 여러개 사다줄 무렵에는 완전히 형부한테 매료되였다. 나는 형부가 너무 좋아져서 될 수만 있다면 형부하고 똑같은 사람을 하나 복제해놨다가 내가 커서 시집가고 싶은 마음까지 들 지경이였다.  형부는 사냥도 잘했고 버섯 따기, 나물 부업, 농사일, 어느것 하나 막힘이 없었다. 형부 덕분에 언니네 생활은 나날이 윤택해져갔다. 얼마 후에는 조카가 태여났다. “이 집 준이는 또 옷을 샀소? 아버지가 돈을 잘 벌어가지구.” “이건 뭐 금이요? 목걸이 이쁘다.” “네. 생일이라구 준이 아버지가 사준 겜다. 호호.” 그즈음, 내가 본 언니는 그 동네 또래 아줌마들의 부럽고 시샘 어린 눈길 속에 에워싸여서 생글생글 웃으며 가진 자의 여유와 우월감에 잔뜩 들떠있었다.  언니가 원하는 대로 꿈을 꾸듯 살던 때가 있다면 아마 그 때였을 것 같다.    * “한국 로무수속을 넣었는데 안됐지 뭐야. 아휴 짜증 나. 그나저나 이 집 국수 오늘 왜 이렇다니.” 잘 헹구지 않았는지 잔뜩 뭉쳐있는 면발을 신경질적으로 저가락으로 뚜지며 언니는 잔뜩 얼굴을 찌프리고 있었다. “여기 가위 좀 갖다줘요.” 손을 번쩍 들더니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에 힘을 넣어 언니가 소리 질렀다. “안되면 말지 뭐. 형부는 시골에서도 잘 벌재요. 뭘 그렇게까지 욕심을 내면서.” “얘 좀 봐라. 무슨 애가 할머니 같은 소릴 하구 있니?” 언니가 나를 째려본다.  썩둑 썩둑. 랭면이 아니라 남편과 바람난 년 머리카락 짜르듯 언니는 면발을 향해 분노의 가위질을 해댄다. 저렇게 자르다가는 국수를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우리 동네에서도 벌써 리비아로 고기 잡이 배 타러 간 사람에, 한국에 간 사람에, 외국 나간 사람이 서넛 된다. 매도 첫매를 맞아야 한다는데 우물쭈물하고 망설이다가 내가 하도 닥달하니까 이번에 넣은 건데 안됐지 뭐야. 벌써 외국 나간 집은 돈 들어오는 액수가 달라. 형부도 빨리 외국 나가 돈 벌어서 시내에 아빠트도 사고 차도 사고 반짝반짝 살아야겠는데 짜증 나.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이 싫어. 밤에도 번쩍번쩍 불빛이 눈부신 시내에서 살고 싶다.” 짜증 나를 말끝마다 붙이는 언니를 바라보니 얼굴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듯 푸들거린다.  “언니, 너무 그러지 마우. 그 동네에서는 언니네가 제일 잘살재요.” 뻐스부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얼굴을 펴지 않는 언니한테 그렇게 위로랍시고 던졌는데 마른 장작에 불이 달린듯 확 성질을 낸다. “너 자꾸 사람 속 뒤집어놓을 거야? 우물안 개구리 같은 소리 하지 말래두. 애초에 시내에 있는 남자한테 시집을 갔어야 했는데 그 때는 내가 정말로 우물안 개구리였어. 시골에서 본 게 없고 들은 게 없어서 뭘 몰랐던 거지. 어쩌면 시골에서 시골로 시집갔나 몰라. 시내로 시집을 갔어야 시내사람으로 자리잡고 사는 건데. 바보, 멍충이. 아이 짜증 나. 엄마 아버지도 그래,뜯어 말렸어야지 왜 철없는 내가 덥석 시집간다 한다고 무작정 동의하냐구, 그 동네에서 잘살면 뭐한다니? 시내 아빠트 화장실 가격도 시골 집 한채보다 비싼데.” “나 갈게. 회사에 들어가봐야 돼서.” 엄마 아버지한테까지 화살을 돌리며 현실에 불만을 람발하는 언니의 투정을 들어주려니 피곤이 몰려왔다. “그래, 알았다. 근데 오늘 랭면은 진짜 맛없었다. 짜증 나게.”  귀찮아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언니가 톡 쏘아붙이고는 홱 고개를 돌리고 쥉쥉 걸어간다. 어휴, 정말 언니이길 다행이지 동생이였으면 저걸 그냥. 나는 언니의 뒤모습을 흘기다가 돌아섰다.  언니의 바람과는 달리 형부는 그 뒤에도 외국행 비자를 받지 못했다. 그 때 쯤 시골에 사는 것 자체가 싫다고 이마살을 찌프리던 언니는 무작정 시내로 이사를 가자고 형부를 닥달했다. 형부는 언니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조카가 일곱살이던 늦은 가을, 탈곡을 마치고 언니네는 서둘러 시교에 단층집을 사고 이사를 왔다.  여긴가. 어렵사리 찾아간 언니네 새집은 아빠트가 즐비한 시내 중심을 벗어나 외딴 섬처럼 단층집들이 들어선 동네, 거기서도 맨 끝에 위치한 집이였다. 그것은 도시와 격리된 섬마을처럼 외롭고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게다가 도로에서 푹 꺼져들어가있어 비라도 오면 어쩌나 싶은 집이였다. 시골에 있을 때의 가구를 그대로 가져다 놓았는데 시골집에 놓여있을 때는 반짝거리던 가구들이 어쩐지 부옇게 빛을 잃고 있었다.  “언니 시내로 오니 어떻소?” “뭐가 어떻기는, 보면 모르냐.” 언니가 퉁퉁 부은 소리를 하며 손바닥 만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나 이 주름이 생기는 거 좀 봐라. 저번에 친구들 만났는데 세상에 영자 그 기집애는 신랑이 한국 가서 돈을 벌더니만 주름 없어지는 크림을 발라서 아주 눈가에 주름 하나 없이 탱탱하더라. 이건 뭐 몇십원짜리 화장품 사려 해도 손이 떨리게 살고 있으니.” 언제는 시내로 오기만 하면 된다더니 이제는 생활수준 차이가 또 문제가 되는 것인가. 하긴 인간의 욕망이란 원래 그런거니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형부는?” “응. 좀 있으면 올 거다. 석탄 실으러 갔다. 네 형부가 뭘 배운 게 있냐, 재간이 있냐. 시내로 오니 뭘 할게 있어야지. 석탄 실어다가 팔고 있는데 한차 팔아봐야 오십원 륙십원 떨어진다. 그것도 융통성이 없어 가지구 남들은 석탄을 더 적게 싣고도 많이 실은 것처럼 웃부분을 뾰족하게 해가지구 말로 막 밀어붙여서 파는데 이 나그네는 고지식하게 듬뿍 실어놓구는 팔짱을 끼구 서서 입도 동면하는 개구리처럼 떡 붙이고 있으니 팔리겠니? 남보다 적게 떨어지지, 많이 못 팔지, 뭔 돈을 벌겠니? 하튼 머리가 안 돌아가.” 고개까지 도리도리 흔들어가며 형부를 영 형편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데는 듣는 내가 심기가 불편할 지경이다. 뭐 어릴 때처럼 형부 같은 사람 하나 복제해서 시집가고 싶은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형부 만한 사람도 없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던 터라 언니의 행동이 더 못마땅할 수 밖에 없다.  “뭐 어쨌든 일은 하니까. 돈은 벌구 있는데 너무 그래지 마오. 착하고 성실하고 마누라한테 잘해주지, 아들 이뻐하지. 도박을 하나, 바람을 피나, 술을 많이 마시나. 그 정도면 괜찮은 거지. 언니처럼 사람을 닥달해서야 어디 사람이 기를 펴겠소? 하도 형부니까 봐주는 거지.” “어머, 얘 좀 봐라. 누가 들었으믄 니가 내 동생인게 아니라 시누인가 하겠다. 동생이 되가지고 언니 편을 들어야지 어떻게 넌 형부 편에 서냐?” 언니가 나를 향해 사정없이 눈을 흘긴다.  퉁퉁퉁 손잡이뜨락또르 소리가 들린다. “형부 오는 거 아니요?” “응, 그러네. 오나 보다. 오면 오는 거지 뭐.” 언니는 거울을 내려놓고 일어선다.  “선희 오랜만에 왔구나.” “예, 형부.” 누가 오래만인 걸 모르나. 부자연스럽게 웃으면서 나를 반기는 형부는 그제날의 형부가 아니였다. 도끼로 나무를 쩡쩡 쪼개던 때의 활기도 없어졌고 커다란 토끼를 잡아오던 때의 자신감은 차치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사람이 풀이 죽어있었다. 언니가 사람을 아주 그냥 달달 볶는구나 하는 생각에 풀잎에 손이 베이듯 슥 가슴이 베인다.  그저 그런 일상사를 단답식으로 형부와 재미없게 주고받으며 나는 두 사람 사이도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꼈다. 형부가 불을 때고 언니가 밥을 하며 알콩달콩하던 부부는 전설이 되여 사라져버린듯했다. 언니는 자꾸만 짜증을 냈고 형부는 말없이 밥을 먹었다.    * “나 한국 간다.” “언니가? 어떻게?” “어떻게는 뭐. 위장결혼으로.” “언니.” “얘, 목소리 좀 낮춰라. 애 떨어지겠다.” “아니, 그게 말이 위장결혼이지 리혼에 가짜 진짜가 어디 있구 결혼에 가짜 진짜가 어디 있소? 형부도 돈을 벌고 있고 밥 먹고 못살 정도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정 가고 싶으면 다른 방법을 알아봐야지.” “아니야, 난 결심했어.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더라. 다른 건 비자 나올 가능성도 적구, 돈도 꾸어야 하구. 난 한국 갈 거다. 가서 돈 벌어서 준이도 출세시키고 나도 좀 다르게 살아봐야겠어.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다가 마느니 훅 죽어버리는 게 나을 거 같애.” “무슨 말을 그렇게. 언니, 언니 준이를 이뻐 죽으면서 아들 장가나 보내야 죽지?” 무슨 말을 해야 할가 하나 하다가 롱담조로 던지고 푹 웃어버렸다.  “아무튼 난 결심했어.” “그럼 먼저 리혼을 해야 할 건데 형부가 동의하겠소?” “그거야 뭐. 동의하도록 해야지. 동의 안하면 또 어쩔 건데.” 정색해서 눈을 내리깔고 새초롬해있는 언니의 표정은 낯설고도 서늘했다.    * 언니가 리혼을 했다. 구두상 가짜이고 서류상 진짜인 리혼이였다. 형부와 언니 사이에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언니 말로는 한국에 가서 국적이든 영주권이든 따는 즉시로 리혼을 하고 다시 형부와 합치는 조건으로 리혼을 했다는 것이였다.  “어떻게 형부가 그걸 동의했소?” “그거야 뭐, 내가 잘 구슬린 것도 있고. 또 뭐 자기가 능력이 없는데 어떡하겠냐? 흠. 아무튼 난 한국 갈 거다. 곧 한국에서 남자가 오기로 했어.” 그게 무슨 자기 능력에 대한 과시라도 되는듯 언니는 너무도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그런 말을 했다.  얼마 후에 언니는 한국남자를 만났다. 자기를 첫눈에 마음에 들어했다는 말도 언니는 서슴없이 했다. 아직 내 미모가 살아있다고 들떠서 자랑삼아 말할 때는 너무 한심해보이긴 했다.  사진을 찍네, 서류를 하네, 비자 받으러 심양으로 가네, 어쩌네 하고 부산을 피우더니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너 당분간 준이 맡아줘라. 난 한국 간다. 하고 빚 받으러 와서 큰소리 치는 사람처럼 통보를 해버리는 것이였다. 입이 하 벌어졌으나 얼마 후에 여름방학이 되자 가방을 멘 조카를 사전 통보도 없이 데리고 왔을 때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동생이 애를 낳은 지 석달 밖에 안됐는데 조카까지 맡을 수 있겠는가 하는 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동생한테 애를 맡기려면 우선 동생 남편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상식 따위는 개나 줘버려라 싶은 막무가내였다. 내 언니지만 너무 한심하고 하는 행동이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거렸다. 하지만 한껏 풀이 죽어 엄마 뒤를 따라 들어온 조카애를 보고는 어쩔 수 없었다. 애기방으로 하려고 꾸며놓았던 방에 조카애 짐을 내려놓고 나니 남편한테 어떻게 말해야 하나 걱정이 앞을 가로막았다. “여보, 언니가 준이 맡아달라고 무작정 데려왔는데 어떡함까.” “내가 뭐 처가집 조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아버지하고 있는 게 애한테도 낫지 않소? 부모가 둘 다 없다면 모를가 이건 좀 아니오. 형님은? 형님도 동의했다오?” “예, 언니 말로는 동의했다는데.” “마누라 없는데 애까지 여기 오면 형님은 허전해서 어찐다오? 처형은 정말 자기 생각만 하네.” “언니는 준이가 중점대학 가려면 학교가 이쪽이 낫다구…” “공부야 어디서 하든 매한가지지. 어떤 학교서 다니냐보다는 본인이 어떻게 하냐가 중요하다는 걸 당신도 알지 않소? 참. 중학교가 다 거기서 거기지 아들하고 아버지하고 생리별을 시킨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거지. 왜 언니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다들 상식이 안 통해?” “그럼 이미 데려온 애를 보내람까?” “언니보다 당신이 더 문제라는 생각 안해봤소? 틀린 건 틀린 거라고 아무리 언니라 해도 말해야지 이건 잘못된 거에 동조하는 것 밖에 안되잖소.” “도리로야 뭔들 말을 못함까? 이미 왔고 애도 여기서 다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럼 어찌람까?” 팽팽한 줄다리기 같은 남편과의 실랑이는 여러날 이어졌다. 결론이 있을 수 없는 실랑이였다.  며칠 후, 나와 남편의 판가름 나지 않는 전쟁과는 상관없이 어쨌거나 조카애는 전학수속을 하게 되였고 우리 집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나 한국에 잘 왔다. 그래. 걱정하지 말구. 형부가 차 가지고 데리러 와서 지금 가는 중이다. 형부 전화로 너한테 거는 거지. 그래, 또 전화할게.” 참, 가짜 결혼이라 서로간에 주고받는 비즈니스라 할 때는 어쩌고 형부라는 말을 서슴없이 갖다 붙이다니. 내 불편한 마음과는 달리 언니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들떠있었다.  필요에 따라 색갈을 변화시키는 카멜레온이 떠오른 건 거의 자동반사였다.   * 형부를 마지막으로 본 건 언니가 가고 나서 반년 정도 되고 나서였다.  어쩌다가 전화를 해도 간단한 안부만 묻던 형부가 갑자기 오겠다고 했다.  나는 대뜸 리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즈음 언니는 형부와 전화련락을 끊고 있었다. 리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언니는 더 이상 형부가 기다리는 집으로 오고 싶지 않아한다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내가 관여할 문제도 아니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손 놓고 있는 터였다. 형부는 언니의 소식을 알아보러 오는 것임이 분명했다.  아직 남편은 퇴근하지 않았고 애를 보행기에 태워놓고 저녁준비를 하고 있는데 형부가 고기며 과일이며를 사들고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억지로 형부는 웃어보였다. 마음고생이 심해서인가, 아니면 아들도 없고 마누라도 없으니 음식을 제대로 챙겨드시지 않았는가. 형부는 그 사이에 살이 쏙 빠져있었다. “공부는 잘하니?” “예, 그냥 좀 함다.” “오. 친구는 많이 사귀였구?” “예, 좀 있슴다.” “지성이랑 찬우랑 너 언제 오냐고 여러번 물어보더라.” “예.” “선생님은? 원래 학교 선생님처럼 널 고와하니? 원래 반주임은 너한테 잘해줬재야. 너 선생님 집에 가서 밥도 먹고 공부도 하고 그랬지 않니.” “예, 그냥 괜찮슴다. 그 선생님 만큼은 아니지만 괜찮슴다.” 하학해서 돌아온 조카애와 형부가 대화를 주고받는데 형부는 무척 궁금한 게 많은듯하나 조카애는 마지못해 응부하는 식으로 시들하게 대꾸한다. 나는 형부가 들고 온 비닐주머니를 열어보았다. 피가 잘 빠지지 않았는지 색갈이 다소 검게 보이는 소고기가 꽤 큼직한 덩어리로 들어있다. 이 정도 소고기를 사려면 지금 형부의 경제형편에서는 버거운 지출일 것이다.  돼지고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소고기는 푹 삶아서 양념간장과 함께 내놔도 잘 먹고 고추와 함께 간장에 생강과 마늘을 넣고 졸여줘도 잘 먹는 조카애를 위한 것임이 분명했다. 나는 형부의 부성애에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  도마에 올려놓고 써는데 칼이 잘 들지 않는 건지 고기가 질긴 건지 칼날에 고기가 씰룩씰룩 밀리면서 잘 썰어지지 않는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그 때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형부와 조카의 뒤모습을 바라보았다. 제발 언니의 전화는 아니여야 할 텐데. 발신자 번호를 보니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다. 하필이면 이 시간에 맞춰서 전화를 걸어오다니. 형부와 조카의 대화는 어느 순간 뚝 멈춰있다. 이 전화에 온통 신경이 쏠려있다는 건 맑은 물속 돌멩이 들여다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다고 걸려온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없다. 그게 더 이상할 테니까. 나는 숨을 죽이고 전화기의 수신 버튼을 눌렀다.  “오, 나다. 잘 있니? 나 지금 형부랑 바다로 왔어. 와 너무 좋다.” 잔뜩 신이 난 언니의 목소리다. 이 하이톤이라구야. 나는 형부와 조카애 귀에 다 들리는 건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고 당황하다.  “아. 예예.” 나는 얼버무린다.  “준이 아버지 온 거야? 알았다. 끊을게.” 내 더듬거리는 말투에 대뜸 눈치를 채고 언니는 똑 하고 전화를 끊었다.  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전화기를 내려놓는데 민망하기 짝이 없다. 형부와 조카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마주볼 수 없을 것 같다. 얼굴이 화끈거려 저도 모르게 두손을 볼에 갖다 댄다. 주섬주섬 형부가 일어섰다. 조카애는 미동도 없이 앉아있다. 나는 어쩔 바를 모르고 서서 형부가 벗어놓았던 잠바를 주어입고 나오는 걸 지켜본다. 형부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있다. 그럴 테지, 그 정도로 호들갑스럽게 소리 질렀으니 들리지 않았다면 더 이상할 테지.  형부는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천천히 신발장 문을 열고 신발을 집어든다.  “아니, 형부 어쩌다가 오셨는데 식사는 하고 가야지 왜. 좀 있음 우리 신랑두 돌아올 건데 식사를 하고 가쇼. 준이하고도 더 얘기를 하고.” 나는 급기야 황황하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도적질을 하다가 들켰어도 이보다는 덜 민망할 것 같다.  “아니다. 갈게.” 형부의 목소리는 한여름 뙤약볕에 시든 호박잎처럼 가라앉아있었다. 나는 그 낮고 갈린 목소리에 가슴이 뾰족한 무엇에 찔린듯 통증이 밀려왔다. 신발을 신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형부는 나갔다.  그 날 저녁, 조카애는 소고기졸임에 저가락도 대지 않았다. 그 날 이후, 형부는 다시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조카애만 명절이나 방학이면 아버지한테 가서 있다가 왔으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절대 하지 않았다. 나는 형부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물어보기가 껄끄러워 몇번이나 망설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조카애는 대학에 가면서 우리 집을 떠났고 형부에 대한 소식은 그 후로는 알려고 해도 알 수 없게 되였다.  언니는 위장결혼을 한 한국남자하고 불과 두달도 동거하지 않았다. 겉보기엔 멀쩡하고 차도 몰고 다니고 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일하기는 싫어하고 술을 좋아해서 형제들 중에서도 기피대상이고 모아놓은 돈이 없는 건 물론이고 여기저기 빚을 지고 사는 처지였다고 했다. 뭐 거기까지는 국적을 목적으로 결혼한 남자니까 국적 따낼 때까지는 참자 했는데 언니가 식당에서 일해서 월급을 받자 처음엔 그 돈 좀 꾸어달라 하더니 나중에는 대놓고 술 사오라, 고기 사오라 한다는 것이였다. “내 돈은 절대 못 내놓지. 어떻게 번 돈인데.” 언니는 그렇게 단단하게 말했다.  언니는 남자 몰래 집을 나왔고 또 우여곡절 끝에 얼마간의 돈을 주고 남자와 리혼을 했고 이번에는 나이가 언니보다 스무살 정도 년상인 왕년에 잘 나갔지만 현재는 아들한테 회사를 물려준 사업가를 만났다.  “부자는 망해도 삼년 먹고 살 건 있다고 했어. 아들한테 다 넘겨줬다지만 그래도 어느 만큼은 남긴 게 있을 거 아니야. 집에 가봤는데 그렇게 크고 으리으리한 집은 처음 봤어. 집에 가보고 내가 결정한 거 아니야? 내가 어리고 이뻐서 그런지 나한테 아주 푹 빠졌어. 뭐 이 정도면 가진 걸 다 내놓는다고 봐야지. 이제 기다려봐라. 내가 한몫 단단히 챙기면 너한테도 섭섭하게 안할 테니까.” 언니는 잔뜩 꿈에 부풀어있었다.  엄마 아버지도 다 돌아가시고 없으니 언니 쪽에야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지만 그 사업가의 자식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나이가 스무살 가까이 차이나고 중국에서 온 녀자라는 게 반대 리유였다. 돈을 다 빼내면 도망갈 거라고 한다는 것이였다.  “뭐 지네는 아버지를 모시고 살지도 않으면서 돈에 눈이 뒤집혀가지구 거품 물고 달려들어 반대한다니까. 량심도 없는 것들. 그런데 문제는 이 아저씨도 완전하게 자식들 의사를 무시하지 못한다는 거야. 참 나.” 언니는 투덜거렸다.  “자식들은 정 같이 살 거면 법적인 절차 없이 그냥 동거만 하라고 한대. 어이 없어.” “그럼 어떡하오?” “뭘 어떡하긴. 연극을 하든 앙탈을 부리든 혼인신고를 하도록 해야지. 걱정 말아. 한다니까. 내가 누군데.” 언니는 큰소리를 땅땅 쳤다. “혼인신고를 했다.” 얼마 후에 언니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끝내는 해냈구나. 그 로인네 정말로 언니 말처럼 언니한테 푹 빠졌나 보네. 그럼 언니는 이제 목적을 달성한 건가? 그런데 이 심드렁한 목소리는 뭐지? “근데 왜 목소리가 이렇소?” “응, 하긴 했는데 하고 나서야 로인네가 나랑 혼인신고하는 조건으로 모든 재산을 미리 다 자식들한테 증여를 했다고 하네? 재수없는 년은 고추가루 팔러 가면 바람이 분다더니 내가 그 꼴이다. 꼭 사기당한 기분이 들어. 재수 없어.” “그럼 어떻게 하려구?” “뭘 어떻게 하기는. 이미 혼인신고도 했으니 같이 살면서 살살 구슬려봐야지. 늙으면 다 능구렝이가 되는 거야. 말로는 전혀 없다고 하지만 그럴 리야 있겠니? 어딘가에 숨겨놓은 게 있을 수도 있어. 뭐 정말 아무 것도 없으면 2년 후에 국적이 나오면 그 때 가서 리혼해버리면 되지.” 전화기 저편에서 결혼과 리혼을 언니는 마치 치마 한벌 사는 것처럼 간단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블록을 쌓고 있었다. 집이 다 완성되고 우에 빨간 지붕을 얹으면 될 판이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빨간 삼각형으로 된 지붕을 집어 올려놓는다. 그런데 지붕을 올려놓고 가만히 뒤로 조심조심 거둬들이던 아이의 손이 집 한켠을 확 짚어버린다. 집은 순식간에 웃켠이 무너진다. 아이는 그만 화났는지 반쯤 무너진 집을 두손으로 아예 확 밀어버린다. 집은 형체조차 없어진다. 언니한테는 삶이 저 아이의 블록 쌓기보다도 더 장난스러운 것인가.    * 조카애는 대학을 나오고 고향 쪽이 아닌 남방으로 날아가 자리를 잡았다. 언니는 로인한테서 아무 것도 건져내지 못했다. 영주권을 받고 리혼을 했다. 이제는 다 지겹고 귀찮아서 혼자 살 거라고 했다.  “다 소용없어. 이제 준이나 잘 키워서 장가 보내야지 머. 내가 남편 복이 없나 보다. 내가 낳은 내 자식 밖에 믿을 게 있겠니? 이젠 자식 바라보고 살련다.” 그즈음 바뀐 언니의 인생관이였다.  그 이후, 한동안은 언니의 신경이 온통 멀리 있는 조카애한테 쏠려있었다. 보고 싶으면 비행기표를 사가지고 보러 가면 될 터인데 끊임없이 전화에만 매달려있었다. 조카애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시작된 관심은 한발 더 뻗어가 사귀고 있는 녀자친구로 이어졌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녀자애의 신상부터 시작해서 부모들은 어떤 사람이고 뭘 하는지 모든 걸 알려고 했다.  조카애와 전화 통화를 하고는 다시 나한테 전화가 와서 조카애의 말에 상처받았다는 둥, 여태 고생스럽게 키워놨더니 저 모양이라는 둥, 아들을 왜 키웠는지 모르겠다는 둥, 저 녀자애 아무리 해도 난 며느리로 삼고 싶지 않다는 둥, 내가 늙어서 아들 덕 볼 수 있겠냐는 둥, 종류도 다양하게 푸념질을 했다.  혼자 외롭게 사는 걸 생각하니 안스러운 마음이 들어 짜증이 올라오는 걸 꾹꾹 누르며 푸념질을 들어주고 나면 기운이 쏙 빠졌다.  언니의 말 중에 반 이상은 말도 안되는 것이였다. 고생스럽게 여태 키워놨다는 말만 해도 그렇다. 글쎄 어렸을 때는 키웠다 쳐도 중학교 이후에는 생활비야 보냈지만 내가 키운 건데 무슨 이런 소리를 하나 싶어 어이가 없었다. 본인은 여태 누구의 말도 들은 적 없이 독단으로 결정을 해가며 기껏 인생을 살아놓고는 아들이 녀자친구를 사귀는 문제마저 완전히 좌지우지하려고 들다니 조카애가 불쌍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언니와 조카애 사이의 일인지라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여서 나는 그저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차가 멈추어선다.  아니 여기가?  시내 아빠트 단지에나 있을 법한 운동기구가 도로 옆 공터에 턱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나무가 아닌 파란색 양철로 된 울바자가 길옆을 가로막고 있다. 줄을 맞춰 서있는 덩실한 벽돌집들이 새 것이 가지고 있는 반짝거림과 오기를 자랑한다. 제대로 찾아온 건가 의심이 갈 정도로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샘골이라면서요. 여기가 마을 중간 쯤인데. 누구네 집에 가는지를 말하지 않아서 여기 세웠어요.”  은근히 뒤끝 있는 아저씨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돈을 건네고 차문을 열고 내렸다. 엉뎅이가 아프다.  차에서 내려 아래우를 훑어보니 그래도 옛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놀이터 아래쪽으로 나있는 길은 강으로 통하는 길이고, 그렇다면 뒤돌아서서 지금 커다란 벽돌집이 있는 웃길로 해서 들어가면 언니네 집이 있던 곳이지.  장님이 담벼락 더듬듯 더듬거리며 찾아나선다. 언니네 집이 있던 위치가 맞는 것 같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나는 멈춰섰다. 울바자에 둘러싸인 그곳은 온통 푸르러있었다. 종아리께를 넘어선 옥수수가 바람에 잎을 날리고 있는데 금방 후치질을 한듯 고슬고슬한 흙이 옥수수 뿌리께를 덮고 있었다.  시퍼렇게 독을 쓰고 있는 오이넝쿨 사이사이로는 오이넝쿨이 타고 올라가라고 꽂혀있는 일정한 굵기의 엄지손가락 굵기만한 나무들이 가쯘하게 꽂혀있었다.  밭 주인의 알뜰한 손길이 그대로 드러나있어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어, 저건. 채소밭 끝머리 쪽에 거리가 멀어서 꽃인지는 모르겠으나 분홍빛 꽃들이 피여있었다. 언니의 꽃밭이 떠오른다. 형부는 꽃을 좋아하던 언니를 위해 항시 채소밭 끝머리에 꽃씨를 뿌렸었다. 형부가 물을 줘가며 정성스럽게 가꾼 꽃밭에는 여름이면 분꽃이며 봉선화가 피고 가을이며 코스모스가 한들거렸었다. 언니는 꽃이 피면 이쁘다고 호들갑을 떨며 냄새도 맡아보고 꽃옆에 서서 사진도 찍어달라고 형부한테 응석을 부렸다. 그러면 형부는 입이 귀에 걸려 사진을 찍어주었었다. 그 꽃밭에 서서 환하게 웃던 언니는 그토록 아름다웠었다.  지금, 저 꽃밭은 누구의 것인가? “누구네를 찾아온 아가씨요?” 꽃에 정신이 팔려있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몸이 뒤로 젖혀진 키가 자그마한 할머니가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예, 그게.” “이 동네 많이 변했지? 오랜만에 오는 사람이면 찾기 바쁠 게요. 누구네를 찾아온 게요? 내가 길 안내해줄게.” 짐짓 길 안내까지 자청하는 할머니다. “아, 예, 준이라고 아시는지 모르겠슴다. 준이 아버지 이 동네에 사심까?” 나는 잠간 망설이다가 이런 할머니라면 물어봐도 괜찮겠다 싶어 말을 꺼낸다.  “준이? 준이라고 누기던가? 애들 이름은 잘 몰라가지구. 아아, 한석구 아들 아니요? 가만 보자. 그 석구네 집에 놀러 다니던, 누구던가? 어째 그래 보니 낯이 익은데. 생각이 날듯말듯하네. 이제 늙어가지구 영 기억력이 없다니까.” 그제는 나도 어렴풋이 주름이 깊게 패인 할머니의 얼굴을 더듬어 오랜 기억을 살려낸다. 언니네하고 서너집 떨어진 이름이 뭐더라, 한때 같이 놀기도 했던 녀자애네 할머니였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할머니가 혹시 나를 기억해낼가봐 더럭 걱정스럽다. 나를 기억해내면 언니 말이 나올 거고 그러면 로인네 특유의 오지랖으로 언니가 형부하고 리혼했네 어쨌네 한국 가더니 소식이 없다더니 이런 말로 이어질 것 같아 귀찮아진다.  “여긴 처음임다. 친척은 아니구 그냥 볼일이 좀 있어가지구.” “아, 그렇소? 그런 걸 난 또. 이젠 봤던 사람도 낯선 사람 같구 처음 본 사람도 어디서 봤던 것 같구 그렇소. 나이가 웬수라니까.” 할머니는 입을 막고 호호 웃더니 손가락으로 꽃밭 너머로 보이는 하얗게 회칠을 한 벽돌집을 가리킨다. “저거 아니요. 저게 석구네 집인데. 여기로 돌아가면 대문 보이지? 집에 있을라나 모르겠네.” “아, 예.” 길게 말을 늘여놓으려는 할머니한테 인사를 하고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테두리는 쇠로 하고 가운데 널판자를 비살무늬로 엮어넣은 대문은 뼁끼칠을 한 지 오라지 않은듯 색갈이 선명하다.  언니가 들은 소문이 완전한 뻥튀기는 아니였구나 싶다. 형부는 샘골에서 자신의 터밭을 일궈낸 걸가.  동그란 문고리에 손을 갖다댔다가 멈칫한다. 불쑥 들어가서 형부 하고 부르긴 아무래도 좀 그렇다.  한참을 망설이고 있다가 돌아서려던 때였다. 덜컥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문이 활짝 열린다.  나는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린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서로가 놀라서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진다. “아니, 선희야. 네가 어떻게.” 먼저 말을 꺼낸 건 형부였다.  시간의 흔적을 말해주듯 얼굴에 주름은 몇가닥 건너가있지만 형부는 살도 적당히 붙었고 얼굴표정도 밝다.  “예, 그냥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나는 정작 마주하고 보니 어색해 말꼬리를 흐린다. “들어와라. 어서 들어와.” 형부가 문을 잡고 한쪽으로 비켜선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물러설 길은 없다. 나는 성큼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콩크리트로 다져진 뜨락은 상상 이상으로 널직하다. 나는 마당을 둘러보았다. 손잡이 뜨락또르가 세워져있다. 아까 멀리서 보았던 꽃밭은 가까이에서 보니 줄을 세워 꽃들을 심어놓아 참으로 가지런하고 이쁘다.  “집에 들어와라.” 엉겁결에 형부의 뒤를 따라 집에 들어선다.  아담한 집이다. 비싼 가구나 전기제품은 별로 보이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잘 정돈되여있다.  “집이 좋슴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말을 고르다가 겨우 그렇게 말한다.  “응, 나라에서 좀 대주고 나머지는 자기 돈으로 해가지고 지었다. 너 거기 좀 앉아있어라. 뭐가 있던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자식을 챙기는 아버지처럼 형부는 랭장고문을 열고 기웃거린다. 나는 오래 전, 열살의 소녀가 되여 치런치런한 마음이 되여버린다.  “커피 줄가?” 형부는 탱글탱글한 살구가 가득 담긴 그릇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묻는다.  “예.” “요즘은 농촌사람들도 다 커피를 마시고 산다. 허허.” 형부가 롱담처럼 그런 말을 던지더니 허허 웃으며 전기포트에 물을 담고 버튼을 눌러놓는다.  “그거 살구 여기 뒤울안에서 딴 거다. 잘 익어서 맛있을 거다. 약은 한번 쳤다.” “예.” 나는 여전히 솔직한 형부의 말투에 푹 웃으며 살구를 하나 집어들었다. 잘 익어서 입안에서 몽글거리는 살구는 약간 새큼한 맛이 돈다. 맛있다.  형부가 내 앞에 김이 피여오르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마주앉는다.  “너 그동안 준이 공부 시키느라 얼마나 고생 많았니. 참 면목 없다.” “아니 뭐 저절로 공부를 한 검다. 제가 해준 건 딱히 없슴다.” “갸가 뭘 제절로 했겠냐. 다 니 덕분이다.” “예, 뭐.” 나는 커피를 한모금 마신다. 물조절을 적당히 해서 커피는 싱겁지도 텁텁하지도 않아 마실 만하다.  “애기 많이 컸겠다. 신랑은 잘 있구?” “예, 이제 컸다고 말도 잘 안 듣슴다. 신랑은 그냥 출근하고 그저 그렇죠 뭐. 준이는 전화 자주 옴가?”  “가끔 온다. 잘 있는다니 된 거지 뭐.” “예…” “여기서 무슨 일을 함가?” “저기 송림동 골안에 벌을 백통 좀더 되게 놓았다. 잣산을 맡아가지구 그것두 하구. 갈 때 꿀 가져가라. 꿀을 뜨면서 니 생각 했었는데 들고 갈 수도 없구 해서…” 벌 백통이면 꿀이 얼마나 나오고 돈은 얼마 정도 벌어지는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어 나는 아… 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헌데 형부는 언니에 대해서는 전혀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는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그 때였다. 마당으로 막 어떤 녀자 하나가 들어서고 있다. 나는 엉겁결에 일어섰다.  “앉아있어라.” 형부는 나를 만류했다.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이쪽은 내가 말하던 준이 이모요.” “아. 얘기 많이 들었는데. 고생 많았다구. 어서 앉소.” 녀자가 환하게 웃으며 반색한다.  나는 형부의 옆에 앉은 녀자를 흘깃 건너다보았다. 자그마한 체구에 이쁘지는 않지만 부드럽게 생긴 중년녀인이다.  나는 괜히 맹랑해진다. “손님한테 뭘 좀 대접하지 않구.” “글쎄 나야 뭐가 어데 있는지 알아야지. 허허.” 곱게 형부한테 눈을 흘기는 녀인과 환하게 웃는 형부는 누가 봐도 몇십년은 산듯한 자연스럽고 친숙한 부부로 보인다. 나는 언니를 퍼즐처럼 그 두 사람 사이에 놓아보는 가상을 해보다가 고개를 흔든다. 내 눈앞에 있는 저 두 사람 사이에는 비집고 들어갈 만한 어떤 틈도 보이지 않는다.  “이만 가겠슴다.” “점심을 잡숫고 가오.” “어쩌다 왔는데 밥을 먹고 가지.” “아님다. 가겠슴다.” 더 이상 내가 앉아있을 자리가 못되는 자리라는 걸 알았으니 일어나는 게 맞을 것이였다. 나는 만류를 뿌리치고 일어났다.  “언니는 잘 있는다니?” 택시를 기다리다가 드디여 형부가 지나가는 말처럼 무심하게 묻는다.  “예 그냥 한국에 있슴다.” “오 그래. 나도 한국에 가서 삼년을 있다가 왔다.” 아. 나는 흠칫 놀랐다. 형부가 한국에 갔었다는 사실보다 한국에 가서 삼년을 있었다는 사실에 더 놀라고 거기 가서 그렇게 오래 있으면서도 언니를 찾지 않았다는 것에 더더욱 놀란다. 그렇다면 형부는 아주 오래 전에 벌써 언니를 깨끗이 놓아버렸다는 말이 되겠구나.  “그 때 그렇게 언니를 한국에 보내고 설마설마 하면서도 기다렸다. 리혼이 가짜라고 생각해서가 아니구 언니를 놓을 수 없었던 거지. 사람의 정이라는 게 무서워서… 힘든 시간도 많았는데 시간이 오래 지나니까 차차 마음 정리가 되더라. 원래부터 나랑 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자 오히려 편하더라. 혼자 있으면서도 놀지는 않았다. 이것저것 하다가 한국수속이 돼서 한국에 갔었지. 거기 가서 노가다를 하다가 저 사람을 만났구. 돌아와보니 시골도 살 만하다 싶구 저 사람도 여기서 살고 싶다고 해서 눌러앉은 건데 큰 돈은 못 벌어도 살 만은 하다.” “예, 형부. 좋은 분 같슴다.”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그렇게 말했다.  대화가 끊기고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걱정하던 차에 저 멀리서 택시차가 누렇게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다. “그래. 허허. 얼른 타라.”  십키로는 됨직한 꿀을 기어이 택시차에 올려놓고 형부는 물러선다.  나는 형부한테 손을 흔든다. 저 사람은 이제 내 형부가 아니며 그러므로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터덜터덜, 턱턱. 택시는 몸을 떨었다가 요동쳤다가 하며 갔던 길을 되짚어 내려온다. “래년이면 길을 닦는대요. 이렇게 엉뎅이를 들썩거리며 달릴 날도 얼마 안 남았어요.” 모든 일에 락천적일 것 같은 기사가 웃으며 말한다. “아. 네 그러면 좋겠네요.” “길 닦으면 다니기 편할 거예요.” “예, 그렇겠네요.” 이 길이 포장된 후에 올 일은 없을 것이다.  * 피파랭킹 1위 독일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멕시코에 패했다. 독일을 굳게 믿고 돈을 걸었던 사람들이 무더기로 돈을 날렸다.  오랜 독일 축구팬이였던 나도 돈을 잃은 사람들처럼 절망적이지는 않았지만 잔뜩 기분이 다운되여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뒤통수를 쳐도 적당히 쳐야지 독일이 어찌 멕시코에, 그것도 0대 1로 꼴 한번 넣어보지 못하고 패할 수 있단 말인가.  하필 날도 후덥지근하다. 괜히 짜증이 난다. 남편은 그런 와중에 하필이면 만두가 먹고 싶다고 했다.  “메이퇀으로 배달시킬가?” “집에서 한 게 맛있재? 난 밖에 음식은 별루…” “오우, 괘씸스러워.” 신혼 초에는 당신이 한 음식이 어떤 맛집 음식보다 더 맛있다는 남편의 말에 붕 떠서 온갖 재주를 다 부려가며 료리를 했었다. 이제 그 붕붕 뜨는 신혼은 아득한 옛말이 되여버리고 집밥만 고집하는 남편이 귀찮고 짜증난다.  그렇다고 별것도 아닌 만두 먹고 싶다는 소박한 남편의 요구를 싹둑 자를 수가 없어서 소만 하고 만두피는 사왔다.  가장자리에 물을 묻히고 소를 놓고 만두를 싸다 보니 들쑥날쑥했던 마음이 어느새 가지런해지고 있었다.  “우앙, 만두다.” 딸애가 환성을 지르면서 달려들어온다. 고개를 들어보니 뒤따라 들어선 남편도 빙그레 입가에 웃음을 물고 있다.  “얼른 손 씻어. 엄마가 금방 삶아줄게.” 커다란 남비에 물을 가득 담아 가스불에 올려놓고 마늘 두쪽을 칼등으로 두드려 썰었다. 만두 찍어먹을 간장을 해놓고 나니 물이 적당히 끓어오른다.  “우리 만두 맛있게 먹고 저녁에 축구 구경하자. 너네 엄마 좋아하는 독일이 집에 갔으니까 이젠 시름 놓고 아무 팀이나 응원하면 된다. 하하.” 남편이 크게 웃는다. 그래, 사는 게 별 거 있나. 이렇게 만두 하나에 온 집식구가 행복할 수 있으면 된 거지.  나도 푹 웃어버린다.    * 언니한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내가 샘골로 다녀온 이틀 뒤였다.  “그래 어떻데? 니가 직접 가보니까 어때?” 언니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하고 속사포처럼 말을 쏘아댔다.  나는 언니한테 형부가 샘골에서 작은 집을 짓고 벌 몇통 하고 있더라고 말했다.  형부가 삼년 동안 한국에 있었다는 말과 샘골의 그 아름다운 꽃밭과 그 부드러운 인상의 중년녀자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런 걸 또 그렇게 소문만 무성했구나. 하긴 그렇겠다 했다. 벌 몇통 하는 걸 또 무슨 몇백통 해서 돈 엄청 버는 것처럼 소문이 돌더라니. 사람들이 왜 그런다니?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돼. 너 내 말은 안했지?” “안했지.” 말을 했으면 크게 혼이라도 낼 기세다. “그래 잘했다. 나도 뭐 생각해보니 어휴 왜 그런 생각을 잠간 했나 싶더라. 하도 준이 결혼시킬 생각을 하니까 아버지 엄마가 나란히 앉아있으면 보기가 좋겠다 싶어서 잠간 그런 생각을 한 건데 요새 뭐 리혼한 가정이 한둘이야? 그건 뭐 허물도 못된다고 다들 그러더라. 그리고 뭐 니네 형부 착하긴 했었지만 나보다 못한 거야 사실이지 뭐. 잘해주긴 했어도 사는 동안 숨이 탁탁 막혔어. 어휴 애초에 눈을 좀 높였어야 하는데. 준이 얼굴 까만 걸 보면 괜히 짜증 나는 거 있지.” 그렇게라도 해야 실망한 마음이 위안이 되는 것인지 언니는 형부를 다시 만나고 싶어한 그 잠간의 마음이 사실은 진실한 마음이 아니였음을 구구절절히 늘여놓았다. 마치 그래야만 잠간 구겨질 번한 자존심이 다리미로 주름을 펴듯 펴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언니가 이제라도 허황된 꿈만 버릴 수 있다면.    장마가 갑자기 시작되였다. 해가 쨍쨍한 날씨라 잘 안 입는 치마까지 꺼내입고 김치가게를 하는 후배한테 가서 밥 먹고 커피 마시러 가는데 갑자기 토닥토닥 아기 잔등 두드리며 어르듯 해비가 떨어지는 것이였다. “해비가 오네.” “그러게 말임다. 어릴 때는 해비 오면 키 큰다고 나가서 비 맞았는데.” “맞아.”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데 비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 때까지는 뭐 곧 지나가는 비려니 했다. 한참 지나자 예상 대로 비줄기가 가늘어져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불과 몇십메터도 채 못 가고 우리는 어느 려관으로 올라가는 아빠트 현관문 안에 허겁지겁 뛰여들어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비는 점점 거세지더니 그제는 좌락좌락 대야로 물 끼얹는 소리가 나는 것이였다. 큰길에 물이 고이기 시작하더니 차들이 물살을 헤가르고 달리고 있었고 우리는 아빠트 물받이에서 락수물이 폭포처럼 떨어지는 걸 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시골 산골짜기 도랑물 수준이다 그렇지?” “언니 완전 도랑물이 흐르는데요.” 그렇게 주고받을 때 쯤에는 급기야 바람까지 불어 길가의 백양나무가 긴 머리채를 마구 휘날리고 있었다.  다행히 한참 지나 비가 가늘어져 우리는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그새 발목을 치게 물이 차있는 큰길을 깔깔대며 건너 무사히 후배네 가게까지는 도착했다. 도착해서 얼마 안돼서 또 언제 그랬냐 싶게 해가 반짝 났다. 우리는 하필 우리가 오고 나서 해가 나냐고, 우리가 올 때 비가 그쳐있다가 도착한 뒤에 소나기가 마구 두드려대야지 하면서 웃었다.  집에 돌아와 얼마 안 지났는데 통유리창에 눈 먼 새가 마구 날려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열콩알 같은 우박이 하얗게 올챙이떼처럼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다행히 시간 맞춰 집에 왔기에 우박은 피했다고 안도하며 나는 저녁준비를 했다.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치고 오이 세개를 씻어 칼도마에 놓고 칼로 두드려서 깨뜨렸다. 너덜너덜해진 오이에 칼집을 넣어 썰고 참기름과 마늘과 소금을 넣어 버무린다. 반찬통에 담아 랭장고에 넣어놓고 돼지고기를 꺼내 작은 토막 여러개를 낸다. 한토막만 남기고 랭동실에 넣는다. 돼지고기를 작은 정방형 꼴로 잘게 썰고 표고버섯 한개를 썰고 감자 하나를 껍질 벗겨 작은 네모꼴로 썬다. 기름에 돼지고기를 볶다가 감자를 넣고 버섯을 넣고 한참 볶아주다가 물을 조금 넣고 뚜껑을 덮는다. 고기와 감자가 익는 사이, 카레가루를 꺼내 적당히 그릇에 덜어놓고 찬물에 잘 저어가며 푼다. 뚜껑을 열고 고기 하나를 숟가락으로 건져내 빛갈을 보니 적당히 잘 익었다. 카레가루 푼 것을 조금씩 흘려가며 넣고 천천히 젓다가 걸죽해질 무렵 가스 불을 끈다. 이걸로 저녁은 다해놨다 싶어 돌아서려다가 밥솥이 보온으로 되여있는 걸 보는 순간, 이게 왜 오늘은 칙칙거리지도 않고 벌써 밥이 되였나 싶은 게 아무래도 미심쩍다.  뚜껑을 열어보니 이게 웬 일인가. 취사버튼을 누른다는 게 그만 보온을 눌러버린듯하다. 잔뜩 퍼져 쌀이 봉긋하게 올라와있다. 이걸 그냥 눌러버리면 밥은 되겠지만 맛없어서 못 먹을 거고 그렇다고 퍼서 버리자니 농사군의 딸인지라 아까워 죽겠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이 너무도 고민스러워 밥솥 뚜껑을 열어젖힌 채 우두커니 서있는데 식탁 우에서 휴대폰이 드르륵 드르륵 요동을 쳤다. 집어들고 보니 언니가 위챗으로 음성통화를 보내왔다. “너 잘 있냐?” “냐, 언니는?” 착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는듯한 언니의 목소리에서 나는 언니한테 좋은 일이 있구나 하고 류추해낸다. 무슨 일일가? 나는 선뜻 언니한테 있을 좋은 일을 짐작해낼 수 없다.  “저기 길림에 말이다. 거기 살기 좋을가?” “아니, 갑자기 길림에는 왜?” “응, 여기 언니 일하는 회사에 키 크고 멋있는 남자가 있는데 너무 죽자살자 따라다녀 가지구. 돈 좀 벌어서 길림에 가서 살재. 그 사람 길림사람이거든.”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말투를 보아하니 벌써 사귀고 있는 모양이였다.  “언니 잘 알아보지 않구.” “빠릿빠릿하고 돈도 있는 사람이야. 결혼은 했었다는데 애도 없고 집에서 막내라 아무 부담도 없어. 나한테 엄청 잘해. 나 목걸이도 선물받았다? 노오란 금목걸이인데 네 것처럼 가느다란 게 아니구 엄청 굵은 거야. 이제 사진 찍어서 보여줄게. 호호.” 언니의 웃음소리가 명랑하다. “언니 준이는 잘 있지?” “응? 준이? 잘 있겠지 머. 이제 녀자친구까지 있는 놈을 뭐하러 걱정하냐.” 언제는 아침에 뭘 먹고 저녁에 몇시에 자는 것까지 궁금해하구서는 완전 딴사람처럼 엉뚱한 소리를 한다. 하긴 그게 언니가 아닌가.  “언니 그럼 이제 준이 걱정 안하려구? 녀자친구 맘에 안 든다더니 그건 또 어찌오?” “이제 관심 끊었다. 달가워하지도 않는데 뭐 하러 걱정한다니? 다 부질없다. 이제 이 사람이랑 내 인생 살란다. 자식은 키울 때 뿐이지 다 소용없어.” 통화를 끝내고 나니 이상하게 피로가 몰려온다.  번쩍 하고 눈앞에서 빛이 보이더니 우르릉 꽝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난다.  참으로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 그 날 밤, 자정에 있은 독일과 한국 월드컵에서 한국은 피파랭킹 1위인 독일을 2대 0으로 이겼다.  위챗그룹과 인터넷은 온통 한국의 승리를 경축하는 축제로 시끌시끌했다. 한국이 이기는 체육복권을 산 위챗그룹의 후배 몇명이 기쁨의 훙보를 뿌렸다. 나는 의외로 마음이 담담했다. 그래 그렇구나. 세상일이란 그렇구나. 뭐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던 것 같다. 모두가 즐거움을 만끽하던 그 시각. 누군가 강물에 뛰여들었다는 영상이 올라왔다.  “독일을 샀나 봐.” “허황된 꿈을 꾸다가 참.” “독일이 질 줄 누가 알았겠어?” “알 수 없기에 도박을 거는 거지.” “참 안됐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메시지들을 읽어보다가 나는 위챗을 껐다. 깊은 한숨이 나왔다.  나는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깔린 바깥은 고요했다. 군데군데 땅바닥에 고여있는 물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나는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카텐을 쳤다.  뽀송한 이불을 가슴께까지 올려덮으며 나는 아무런 꿈도 꾸지 말고 깊은 잠에 빠지기를 바랐다. 
2    [단편] 적마(赤馬),여름 지나다 댓글:  조회:1000  추천:0  2015-07-22
단편소설    적마(赤馬),여름 지나다    김경화                                《집에 좀 다녀가거라.》     어제저녁, 여느때와 같이 엄마는 전화가 왔고 여느때와 꼭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가거라가 마치 들판에 매놓은 소가 허망 죽어서 혼자서 휘여휘여 끌고오다가 요행 누군가를 만나 도움을 청하는 농부처럼, 힘에 겨웁다는것이였다.     내가 엄마를 알아서부터 쭈욱 보아온 엄마의 모습은 언제나 애절하거나 혹은 나약하거나 그런거였다. 그러나 막바지에 다달은듯한 힘겨움은 여태 처음이였다. 그냥 여느때처럼 지나칠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나,     하얗게 밤을 새웠다.     J.     어쩌면 J때문이였을지도 모른다…        고민을 했다.       집을 나와서 3년만에 처음 하는 고민이다.       잇히히~ 오싹 소름이 돋게 하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집을 떠올리면 영낙없이 떠오르는 잇히히~ 소리. 통나무를 마구 엮어 만들어진 울바자를 부여잡고 네모진 얼굴에 초점없는 눈방울을 희뜩이는 녀자가 나를 째려보며 서있다. 오래전부터, 그 녀자를 알았던 그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그 녀자로부터 도망치는 작업을 열심히 해왔던것일가.       그러나 단발머리 소녀가 서른살 가까워오는 녀자로 되기까지 나는 한시도 그 녀자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꽝~ 천둥이 친다. 이어 번쩍번쩍~ 빛줄기가 작은 내 방문을 때린다. 그리고 내 마음에도 내리꽂히는 비줄기…       나는 아침밥도 건너뛴채 서둘러 준비를 했다. 드디여 길을 떠나기로 한것이다. 3년전에 내가 떠났던 그 곳으로.       시계를 보니 십분전 여덟시. 점심전에는 도착할수 있을가? 룡정-화룡구간이 도로보수를 한다고 들었는데…       화장은 생략하기로 했다. 웬지 그래야만 할것 같았다.       어두운 톤의 반팔티에 흰색의 반바지를 입고 백을 들고 나는 집을 나섰다.       나의 이런 차림을 J가 본다면 어떨가? 이런 나의 외출, J는 본적이 없다. 맨 얼굴로 밖에 나간다는것 자체를 거부했던 나였으니 말이다.       선물이라도 살가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나는 비속으로 간다. 그것도 3년동안 발길 한번 돌리지 않던 곳으로 간다. 풀릴듯 풀리지 않는 실마리의 미궁같은 답을 위해서라도 나는 이 길을 떠나야만 하는것이다. 처음으로 내게 남자의 어두운 공포감에서 탈출하여 조금씩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한 J. 그런 나의 감정이나 J가 나를 향한 그 애틋함을 내가 언제까지 간직해야 할지 나는 그 답을 찾아서라도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누군가 사랑은 리유도 조건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J와 나사이를 3년간 오간 그 시간과 추억과 우리의 마음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마음과 모순되는 J의 안해를 생각할적마다 아릿하게 맞혀오는 씁슬함. 그것은 마치 미궁과도 같은 시커먼 혼돈의 숲이였다. 그 숲속에서 나는 어찌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하고 길 잃은 한마리의 적마(赤馬)처럼 무작정 헤매고 방황했었다.       적마,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스스로를 길을 잃은 한마리의 붉은 말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있었다.       3년전 집을 떠나오던 그때, 기차역에서 차표 한장 들고 우두커니 서있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시대에 걸맞지 않게 턱수염을 길게 자래운 남자였다.       가방을 들고 기약없는 미래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며 서있는 내게 마침내 그 수염 긴 남자는 다가왔고,       《혼인에 곡절이 많을 처녀구만?》       《네?》       눈을 새똥그랗게 뜨는 나.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지?》       《78년생인데요. 왜요?》       《후―》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상대로구만. 적마라… 속에서부터 끓어번지는 이 엄청난 불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혼인을 일찍 하면 필시 깨여질 혼인을 하겠고… 후실로 들어가면 그런대로 아들 하나는 보겠다만… 해도 살이 너무 세여… 험난한 인생 앞으로 어찌 살아가노.》       《…?》       남자는 마치 산속에서 백여년 도를 닦은 신선처럼 말하고있었다.       (꽤나 싱거운 사람이네.)       전에도 나는 이런 소리를 엄마로부터 심심찮게 들었다. 내 이마에 삼태성이 떠있었고, 그것이 지나가는 어떤 할머니를 말을 시켰는데, 울면서 젖달라고 보채는 내 앞에 이런 말을 휙 꼬아던지더라는것이다. 넌 적마야. 신랑을 잡아먹을 애라구. 액을 면하자면 후실로 들어가야겠어.       후실, 당치도 않은소리!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은 나를 본의 아니게 자꾸 다른데로 끌고가고있었고 그 할머니나 수염 긴 남자의 예언을 실증이라도 할듯이 현실은 나한테 시커먼 그늘만 던져주고있었다. 따라서 나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속에 망연해 했고 또한 무서움에 떨어야 했던것이다.       아, 적마여서 불행할수밖에 없는 녀자, 나. 그렇다면 나는…       커다란 혼돈속을 허우적거리며 나는 갑갑하게 헤매고있었다.       아버지.       나를 길러주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나는 집에 가기를 거부했었다. 그동안 간간히 전해오는 소식들에 마음이 아파나기도 했지만 기어코 고향행차만은 병적이지 않을가싶도록 무섭게 피해왔었다.       집에 다녀가거라 하면서도 오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한테서 전화가 와서 집에 다녀가거라 할 때마다 알았다고는 하면서도 3년동안 한번도 발길을 돌린적 없는 나. 그러나 이제 나는 그 혼돈속에서 탈출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비속을 뚫고 달려가야만 하는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는 물에 빠져본 사람의 경험담이 가장 좋은 구명줄이 되듯이 나 역시 그러하리라. 3년전 고향을 떠나올 때에도 비는 저렇게 모질게 내렸음을 나는 기억한다.       생각밖으로 도로사정은 좋았다. 갓 보수한 도로라 비속이라지만 택시는 별로 머뭇거리지 않고 달린다. 길옆에 코스모스가 무더기로 쓰러져있었다. 운전수는 자꾸만 후시경을 통해 히끗히끗 나를 돌아본다. 아무래도 이 폭우에 무려 백리넘는 길을 떠나는 내가 이상할것이다.       그러나 말거나 나는 전혀 그런 운전수의 눈길따위는 의식하지 못한듯 비물에 얼룩진 차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어디쯤일가? 검은 메돼지가 무리로 내려오고있었다. 얼핏 보아서는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잘 구분이 안될만큼 완벽한 조형물이였다.       저 메돼지는 이 비속에 춥지 않을가? 저들에게도 가야 할, 아니 갈수 있는 집이 있을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비속에서도 산야는 불그스름하게, 노르스름하게 물들어가고있는것이 알렸다.       이제 좀더 지나면 빨갛게 노랗게 단풍이 들겠고 그담엔 눈도 내리겠지. 그리고 또 어느날엔가는 새싹이 돋아나고. 모든것이 바뀌는듯 하지만, 어쩌면 돌고 또 돌아서 결국은 원점으로 복귀하는 자연의 순리. 세상의 모든 명과 암, 아픔과 고통, 그러한것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여오는구나.       J,       지금쯤, 당신은 무얼 하고있나요?       눈이 부시게 하얀 카텐속을 뚫고 들어오는 해살과 더불어 한껏 기재개를 켜고 일어났을 당신, 당신 눈에도 저 갈리고 바뀌는 계절은 보이나요?       당신은 당신의 안해에게 말할수 없는게 너무나 많다고 하셨죠.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제가 당신에게 말할수 없는것 역시 아주 많음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당신은 당신과 당신안해는 마치 두마리의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듯 연출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숨기고 은페하면서 살아오고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관계가 진저리나고 싫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알고있습니다. 당신은, 그 두마리의 고슴도치같은 관계에서 영원히 해탈할수 없다는것을. 아니, 당신 스스로가 어쩌면 그것을 원하고있는지도 모른다는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당신,       저는 스스로 저 자신이 어쩌면 역마살이 겹겹이 쌓여있는 한마리의 적마가 아닌지를 의심하는, 혼돈속에서 방황하는 적마임을 아시나요?       당신, 머리가 아파옵니다.       아마 나는 조금 눈을 붙여야 할것 같습니다…                 덜컹~ 갑자기 차가 급정거를 했고, 나는 화뜰 놀라 깨여났다.       그새 잠이 들었던것인가. 수면제를 한줌씩 먹어도 잠이 안들던 내가 달리는 택시속에서 안일하게 잠들수 있었다는것이 아이러니하지 않을수 없다.       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택시는 울퉁불퉁한 흙길로 접어들고있었다.       어디쯤일가? 운전수에게 물어볼수도 있었지만 나는 기어이 입을 다물고있었다. 그러자 인차 눈에 익숙한 작은 시장이 나타났고 서문경이 노닐던 기생마루같은 이층집도 보였다.       송하평― 이제 차는 이십분이내로 목적지에 도착할것이다.       힐긋, 왼손을 들어보니 시간은 열시 16분을 넘어서고있었다. 예상보다 빨리 달려온것이다.       비줄기는 아까보다 많이 수그러들어 투두둑 투두둑 힘없이 내리꽂히고있었다.       운전수가 또 한번 피뜩 나를 돌아본다. 대체 이런 비속을 뚫고 시가보다 배나 되는 택시값을 지불하며 달려와야 할 그 무엇이 저 산골마을에 있는지 도무지 알수 없다는 표정이다.       《가을비치고는 정말 큰 비네요…》       운전사가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린다.       나의 반응을 기다렸겠지만 그러나 나는 표정을 더한층 엄숙하게 가다듬고있었고 더욱 근엄해지고있었다.       무료한 정적을 깨뜨리려고 애를 쓰는 운전수와 그런 운전수를 향해 몸으로 항거하는 내가 서로 버티고있는속에서 휘익휘익 택시는 3년전, 내가 떠나던 곳으로 이제 막 다닫고있었다.       사랑했나봐 잊을수 없나봐… 느닷없이 울리는 핸드폰벨소리.       J, 나는 보지 않고도 전화를 걸어온 이가 J임을 알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J를 위해 특별히 설정한 J만의 벨소리였던것이다.       나는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며 벨소리를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추억은 나를 3년전, 그 밤으로 끌어간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였지.       《선아, 이년.》       번쩍~ 꽈당~ 번개불빛에 이는 천둥이 집을 들썩 들었다놓았다.       무서움에 잔뜩 움츠린 나의 눈앞에 나타난 섬찍한 한쌍의 눈.       《아부지…》       그때 갑자기 눈앞이 번쩍해지며 뻥뻥해오는 머리. 얼떨결에 얼굴을 싸쥐였고 그 손으로 얼굴을 만지는 순간, 기함했다.       피~ 검붉은 피가 살인마의 그것처럼 흉측스럽게 손바닥으로 흘러내리고있었다.       《선아!》       어데서 나타났는지 그때 엄마가 달려들어와 나를 마구 그러안았다.       《니들 둘다 오늘 내 손에 죽었다!》       날뛰는 야수 한마리.       《이 빌어먹을 년, 에미년 닮아서 쪼고만게 벌써부터 남자를 밝혀?!》       《아니? 남자라니요?!》       수건으로 나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주던 엄마의 손이 뚜욱! 허공에서 멈추었다.       《물건너 홍가네 막내아들하고 니가 그런 사이라며? 박대장네가 초두부를 했다고 해서 갔다가 내 그 소리 듣고 이가 갈리더라. 이년아. 니가 홍가네 막내아들하고 뻘건 대낮에 저 앞산에서 손잡고 다니는거 박대장마누라가 다 봤다더라. 망칙한 년!》       한껏 비웃듯 야멸차게 노려보며 한마디 한마디 이새로 뱉아내는 아버지.       《아니, 그게 사실이니? 동하, 동하랑 너 그러는거니?》       엄마의 눈이 공포에 떨고있었다.       《엄마, 나 스물두살이란 말이예요. 나만한 나이의 녀자애치고 남자 한번 안사귀여본 애는 나밖에 이 동네에 더 있어요? 그리구 엄마, 동하와 나 진심으로 좋아한단 말이예요.》       나는 스스로도 놀라고있었다. 나에게 공포와 무서움의 대상으로 태산같게만 마주오던 그 거물앞에 드디여 나는 대항하고있었던것이다.       《뭐야, 이년이? 입은 살았다고… 오냐 바람재녀편네 딸답다. 오냐오냐.》       막걸리냄새에 절은 곰팡이냄새가 마구 섞인것 같은 퀴퀴한 냄새가 전해오는 서슬에 나는 그만 구역질이 일었다.       아~ 아~       《나도 사랑할 권리가 있다구요!》       《뭐라, 이년이 주둥이는 살아가지고!》       이내 재떨이가 날아왔고 등긁개가 날아왔다.       끙~ 그때 비명같은 어떤 소리가 들린다. 언니가, 언니가 돌아눕는 소리인것이다.       《여보, 애 잡겠어요.》       엄마는 나를 힘껏 그러안았고, 우리 모녀의 등뒤로 투덕투덕 비자루세례가 떨어졌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겨난것일가. 나는 와락 몸을 일으켜 아버지를 있는 힘껏 떠다밀었다.       무방비상태였던지라 아버지는 힌들 나가 떨어졌고,       《아아~ 선아 쎄다. 아부질 막 때린다.》       잇히히히~       초저녁부터 누워서 배꼽을 다 드러내고 세상모르고 자던 언니가 떠들썩한 소리에 깼는 모양, 소름끼치는 웃음을 란발하고있었다.       나는 무작정 앞으로 뛰였다.       욕설과 고함소리가 등뒤에서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앞으로 달리다가 멈춰서보니 강물소리만 쏴쏴~ 소리치고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가.       《선아.》       동하였다.       《선아야, 너… 너…》       《흑, 흑…》       나는 동하의 품에 얼굴을 묻고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말았다.       《어떻게 알구 왔어?》       우리는 비를 피해 강옆 버드나무아래에 가지런히 앉았다.          《아까 너네 아부지가 박대장네 집으로 봉지술을 들고 가는걸 봤어. 그래서 온저녁 근심하다가 이리로 나와본거야.》       《너 어떻게 할거니?》       동하가 물어왔다.       《글쎄… 나 더는 집에 못있겠어. 어데론가 떠나고싶어.》       《선아…》       동하가 나를 껴안았다.       《바람쟁이 년! 바람쟁이 년!!》       순간을 같이 하여 뇌리에 질호처럼 박혀오는 소리. 그 가운데 머리를 부여잡고 울기만 하는 엄마가 보였다.       내가 철이 들면서 제일 먼저 귀못이 박힌 소리가 바람쟁이 년이였고 가장 익숙해진 소리 역시 그것인것 같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소리죽여 울기만 하면서 빌기만 했고 나는 그런 엄마가 한없이 싫기만 했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웬지 그 도화선의 끝초리쪽이 나를 향하고있음을 언제부터 나는 아프게 느껴야 했었다.       언니, 그리고 언니가 있었었지.       느닷없이 잇히히 하고 소름끼치는 웃음을 란발하는 언니, 언니는 항상 나를 괴롭히군 했다. 느닷없이 꼬챙이로 나를 찌르는가 하면 내 책가방에 문득문득 돌멩이나 개구리같은것을 집어넣어서 나를 당황하게 했다. 나는 그런 언니가 싫었다. 애들의 놀림감으로 되는 언니가 싫었고 누구 동생이라는 소리가 죽기보다 싫어서 부러 애들앞에서 언니를 놀렸고 무섭게 굴었다.       한번은 애들한테 놀림당하고 우는데 언니가 다가왔다.       코가 묻어 반들반들한 손수건을 내미는것이였다.       《퉤, 다 니때문이야. 모든게 니때문이야! 죽어, 죽어!》       나는 땅에 딩굴며 행악질을 했고, 그날 언니는 웬 일인지 나를 혼내지 않고 퀭한 눈으로 손수건을 거두지 못한채 어쩔바를 모르고있었다.       엄마,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것이다! 나는 왜 그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던것일가. 엄마처럼 산다는게 어떤건지는 딱히 모르지만 바람쟁이 년이란 한마디는 결코 좋은 말이 아니라는것만은 알고있었다.       나는 동하를 왈칵 떠다 밀치고 마을을 향해 뛰여갔다.       《선아! 선아!》       등뒤에서 동하의 부름소리가 비소리와 섞여 울려퍼졌다.       달음박질치듯 닫다가 숨이 차서 멈춰섰을 때 내 앞을 가로막은건 우리 집 울바자라기보다는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면서도 또 사랑할수밖에 없는 그래서 더 화가 나는 엄마였다.       《엄…마…?》       나를 기다리기 위해 거기 꽤 오랜 시간 버틴 모양이였다. 엄마는 옷이 다 젖어있었다.       《아부지도 자고 언니도 잔다. …사랑채에 가서 엄마랑 잘가?》       엄마는 나를 돼지죽 끓이는 집과 붙혀 지은 사랑채로 끌었다.       겨우 3평방이나 될가 한 온돌. 시큼한 돼지죽냄새. 우리 모녀는 젖은 옷을 벗어서 바줄에 널어놓고, 나란히 누웠다.       따스했다. 몇시쯤 됐을가? 밖이 고요한걸 보니 아마 자정이 넘고 비도 끊은듯 했다.       그제사 나는 얼어든 몸을 의식했고, 움츠렸다. 어느새 갖다놓았는지 엄마가 탄자를 구석에서 집어들어 나한테 덮어준다. 그리고 살며시 그 속으로 들어온다.       《선아, 너 래일 떠나거라. 엄마가 돈도 준비해놓고 그랬어. 연길에 가면 일자리 많다더라. 언니땜에 니가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아부지한테 혼나고… 어디 가면 집보다야 못하겠니? 나야 방법없이 이대로 쭈욱 살아야지만 너는, 너는 잘 살아야 한다. 어디 간들 니밥 한술 못먹겠니. 흑~》       엄마, 엄마는 왜 이토록 바람쟁이 년이란 소리를 들으면서 구박받으며 사는건데? 대체 무슨 일이 있는거야? 나는 속으로 웨치고있었지만 그것은 내 가슴속에서 소용돌뿐 출구를 찾아 나오지는 못하고있었다.       돼지죽냄새속에서, 까만 어둠을 타고 밤은 그렇게 깊어갔고, 어느새 나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후, 이마의 상처가 거의 아물었을 때 나는 엄마가 알뜰히 차려준 행장과 돈 오백원을 쥐고 무작정 연길로 가는 뻐스에 몸을 실었다.       엄마처럼은 살지 않으리라, 속으로 부르짖었다…                 나는 J를 떠올렸다. 그리고 밤마다 나를 괴롭히던 악몽…       밤이면 밤마다 나는 거의 산처럼 뻗치고 섰는 정체모를 녀자를 만난다.       《화냥년, 바람쟁이 년.》       마구 떨어지는 구타와 함께 썩뚝~ 머리카락이 잘려나가고 급기야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언제나 바람부는 들판에 찢어진 옷가지를 걸치고 그 정체모를 녀자에 의해 한없이 초라하게 던져져버리는것이였다. 그리고 다음순간, 나는 놀랍게도 그 던져진 녀자가 바로 나 자신임을 보군 했다. 그런 이튿날은 아침에 일어나면 항시 허리가 쑤시고 몸 전체가 지긋지긋 아파났다.       흙탕물에 18이라는 수자를 겨우 알아볼수 있는 도로표시판이 보였다.       화룡시가지에서 18키로 떨어진 곳. 이름하여 청산. 이제 조금 더 가면 청산마을에 들어설것이고 나는 3년만에 엄마를 만나게 되고 내가 자란 집에 들어설것이다. 운전수와의 말없는 전쟁도 곧 끝나겠지.       문득 이상한 감각이 맞혀와서 눈길을 그쪽으로 꼬아보니, 세찬 비속임에도 불구하고 국방색 비옷을 걸친 사람 하나가 있었다.       일어설 때 구부정한 뒤모습과 그다지 날렵해보이지 않는 몸동작은 보이지 않는 그의 나이를 말해주는듯싶었다. 중키에 조금 살집이 있다싶은 그런 몸매였다. 꽉 낄 정도로 팽팽한 비옷이 그렇게 말해주고있었다.       허리를 굽혔다 폈다하면서 무언가에 아주 몰입한듯 해서 자세히 보니, 돌멩이따위를 비물에 패인 웅뎅이에 처넣기도 하고 높은 곳의 흙을 삽으로 퍼서는 낮은 곳에 놓고 쭈욱 그러고있었다.       뭐야? 이 시골길도 보수하는 사람이 생겼나?       헌데 비를 맞으면서까지…       어쩌면, 어쩌면 저 남자 역시 비속에서 울부짖는 말 한마리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어떤 색갈의 말일가?       적, 등, 황, 록, 청…       딱히 어느 색갈의 말인지는 한순간에 알수 없었지만 그러나 웬지 나는 남자 역시 내가 모르는 어떤 색갈을 지닌 한마리의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마을은 가까워오고, 택시는 그 사람을 지나쳤다.       나는 내가 살던 집을 눈빗으로 찾았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자로 잰듯 가?S한 널판자로 된 울바자. 거기에 하얀 회칠. 울바자 량옆으로는 흐느러진 코스모스들이 간밤에 내린 비에 쓰러졌던것일가. 군데군데 흙이 달라붙어있었지만 누군가의 손에 의해 알뜰하게 일으켜세워져 바자허리에 묶여있다. 내가 잘못 왔지는 않나 했지만 그러나 너무나도 익숙한 날아갈듯한 청기와며, 마당 한쪽에 여느때처럼 놓여있는 선매돌이며가 이곳이 바로 내가 오기로 했던 곳임을 말해주었다.       나는 차를 세우라고 갈린 목소리로 웨쳤다.       운전수는 그러는 나를 사뭇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나는 약속했던 돈을 치뤄주고는 돌아섰고 이로서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갈것이다. 어쩌면 인생 자체가 바로 이렇지 않은가싶기도 하다. 타인으로 살기.       눈에 익은 파란 뼁끼칠을 한 출입문 손잡이를 잡는 내 손이 자르르 떨리고있었다.       《엄마…》       구들을 쓸던 참이였을가, 구들중간에서 서성이던 엄마의 손에서 툭~ 하고 비자루가 떨어진것은.       《선아!》       엄마는 그제는 맨발바람으로 봉당에 내려섰고,       《니가 왔구나. 드뎌 왔구나!》       어느새 맺히는 하얀 이슬.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하며 허구프게 웃었다.       《엄마, 올라가요.》       《오, 그래, 올라가야지.》       헤덤벼치며 엄마는 나의 손에서 핸드백과 비닐주머니를 빼앗듯 나꿔챘다.       모든것이 익숙하다. 때묻은 테레비도 그대로, 나의 옷장도 옛날 그대로다. 내가 없는동안 나의 물건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제자리에 고스란히 자리매김하고있었다.       《엄마, 이제 올 때 이상한 사람 봤어. 길을 손질하는 사람같던데, 이 비속에 왜 그러지?》       길을 수리하던 남자가 궁금해서가 아닐것이다. 그동안 엄마하고 쌓였던 서먹서먹한 감정때문에 지나가는 소리를 지껄였을것이다.       《그으래?》       엄마는 이상하게 눈초리끝을 어디다 갖다댔으면 좋을지 몰라한다.       《선아, 너 좋아하는 칼치졸임이랑 달걀지짐이랑 만들어놓았어. 떡도 했다. 니가 제일 좋아하는 시루떡을. 마침 점심때를 맞춰서 면바로 왔구나.》       그러고보니 가마목이 사뭇 분주하다.       J.       언젠가 제가 당신에게 엄마가 만든 시루떡에 대해 말했었죠? 찹쌀과 매입쌀을 적당하게 섞고 팥보다는 올새알열콩을 박고 한 엄마의 시루떡을요. 매끈한 쌀가루와 달콤한 열콩이 어우러지고 적당히 열콩물이 묻어있어 더욱 싱그러운 그 맛을 저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말했습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당신도 먹어보고싶다구요. 당신도 이전에는 당신엄마가 해주셨던 열콩을 넣은 시루떡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구요.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살던 시골을 떠나 멀리멀리 대학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도시에 남기 위해 도시출신의 안해와 결혼한후부터 당신은 엄마가 한 시루떡을 먹을수 없게 되였습니다. 이제 당신, 당신은 당신 어머니가 하신 시루떡만이 아닌 어쩌면 제 어머니가 하신 시루떡도 먹을수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J. 어쩌면 우리는 도로표시판을 잘못 보고 길에 들어선 려행객은 아닐가 이 순간 생각해봅니다.       《너한테 매번 집에 다녀가라는 전화를 걸고는 그냥 버릇처럼 이렇게 니가 좋아하는것들을 만들어놓곤 했었단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니가 오지 않아서 결국 버리군 했었지만.》       희끗희끗한 머리, 좀더 깊어진 주름살. 엄마는 그새 많이 늙어있었다. 어쩔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리라. 허나 웬지 모르게 생기있어보이고 기운이 넘쳐보이는 내 마음속 저 느낌은?       엄마는 아버지의 죽음이거나 정신질환을 앓고있는 언니에 대해서는 전혀 말을 꺼내지 않고있었다. 엄마와 나사이에 어떤 규제로 남아있는 금지사항, 그것을 깨고 내가 먼저 물어볼수도 있었으련만 나는 종내 입을 열지 않았다.       가방의 쪼로로기를 열었다. 먼가 다른것에 집중하고싶었던것이다.       나의 핸드백은 대체로 깨긋했다. 언제나처럼.       나는 조심스레 핸드백속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빨간색의 가죽지갑, 내가 선호하는 색이다. 한켠에는 은행카드 두개가 나란히 꽂혀있고 다른 한켠에는 나의 사진이 조그맣게 오려진채로 꽂혀있었다.       소지품이래야 별것 없다. 핸드폰과 수시로 꺼내볼수 있는 나무로 된 손거울 하나와 분첩 그리고 립스틱, 눈섭그리개 등 간단한 화장품이 들어있는 작은 헝겊필통, 휴대용물수건과 휴지, 엄마가 수놓아서 만들어주신 낡은 손수건이 전부이다.       J는 무슨 고물같은 손수건을 갖고다닌다고 놀렸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 내게 엄마를 떠올릴만한 물건이 없음을 그가 어찌 알랴.       나는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다가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핸드폰을 펼쳐보았다. 시골이라 신호가 없다는 표시가 나와있었다.       J의 이름으로 음성메모가 하나 들어와있었지만 나는 그냥 무단삭제를 하고 핸드폰을 꺼버렸다.       갑자기 아버지가 새삼스레 떠올랐다. 스무살이 넘도록 한집에서 산 아버지, 어쩌면 나는 그 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비통에 땅을 쳐야 하고 그리움에 떨어야 했을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면 그저 어둡고, 시리고, 아픈 기억들뿐인것을 어찌하랴.       어느날, 비를 후줄근히 맞고 밖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반겼을 때 랭랭하게 밀치던 그 차거운 손이라니.          《내 곁에 오지 마랏!》       그것은 어린 나에게 얼마나 혹독한 시련이였던가. 그리고 그것은 후날 아버지가 술마시면 잡아댕기던 머리끄뎅이와 화가 나면 주먹으로 상을 치며 나한테 나가라고 호통치던 기억과 더불어 내 마음에 앙금처럼 쌓여있는것이다.       3년동안 조금씩 없어지고 조금씩 사라져서 이제 나 자신도 다 잊은줄 알았던 그것들이 3년만에 다시 돌아온 이 집에서 또다시 살며시 꼬리를 들고있을줄이야.       《잇히히히~ 주서온 아다, 주서온 아.》       퀭하니 초점 잃은 눈을 한 녀자아이 하나가 나무꼬챙이로 나를 찌르며 횡설수설한다.       《에구, 이 미친것이, 제 동생을.》       엄마는 그때마다 언니를 밀치며 나를 그러안고 달래곤 했고, 나는 공포속을 오락가락 헤매야 했었다.       누군가 이 집에 들어오고있다, 고 느낀것은 그때였다.       전광화석처럼 익숙한 그림자 하나. 어데서 본듯 한 푸른 비옷의 사내.       내가 아까 길에서 본, 길을 수리하던 남자를 막 떠올리는 사이 그 남자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삽을 처마밑에 세우고 출입문을 소리없이 열고 들어서는것이였다.       찰나, 허공에서 부딪힌 여섯개의 눈…       나는 그때 어쩌면 하늘을 날으는 천마 한마리를 봤는지도 모르겠다.       《어머, 이 비에 어데 가셨댔나유?》       엄마가 황급히 그리고 당황해하며 그 남자에게 수건을 건넸다.       《아… 저 길 좀 손보러…》       남자는 어머니가 건네주는 수건을 한손으로 받으며 다른손으로는 안경을 추스린다. 그러는 한편 남자의 눈은 내내 나한테서 판박이처럼 떨구지 않고있었고.       오래전부터 알고있던 사람처럼 느껴지는 익숙함. 부우연 안경알너머임에도 불구하고 섬광처럼 예리한 저 눈빛. 누구라도 편하게 말을 걸수 있을것 같은 수더분함이 몸 전체로 흐르고있다. 누구일가? 사람에 대한 첫인상치고는 정말 처음이였다. 그것도 남자에 대한 첫인상이라면.       《선아?》       남자와 나 사이에 흐르고있던 그 답답한 장벽을 먼저 깨뜨린건 결국 남자였다.       《녜?!》       화들짝 놀란건 나였다.       《오~ 저…》       엄마는 이제 시나브로 떨고있었다.       남자가 침울해지고있었다.       《저 뒤집 사는 분이신데… 아니 뒤집에 이년전에 이사오신 분이신데, 내가 많이 도움받고있어.》       《…》       《인사해라. 편할대로 부르고.》       엄마는 말까지 더듬고있었다. 그리고 저 멈출 곳을 찾지 못하여 헤덤비는 눈빛이라니.       그 순간, 나는 더이상 침울해질수 없는 남자의 눈빛속에서 어떤 무너진 기대감같은 실의를 읽어야 했던가.       《선아야, 어서 상 놓고 밥 먹자.》       엄마는 떨리는 가슴을 애써 누르는듯, 목소리를 겨우 짜냈다.       밥상은, 그러나 풍성했다. 소고기졸임, 감자와 고추만을 넣은 된장찌개, 오이랭채, 소천엽생회, 칼치졸임 그리고 큰 양푼에 담은 시루떡, 닭알지짐.       우리 셋은 마치 한집식구마냥 상에 동그랗게 마주앉았다. 나는 시루떡을 하나 쥐고 야금야금 톱질을 하고있었고 엄마는 식장안에서 술병과 술잔을 내리워 남자에게 내밀었다. 그 옛날 아버지가 마시던 흰 바탕에 시퍼런 줄이 두줄 쭉쭉 건너간 엉성한 공기가 아니였다. 작고 앙증맞은 새하얀 사기술잔이였다.       《선아야, 니가 좋아하는것들이다. 많이 먹어.》       엄마는 여전히 죄지은듯 고개를 숙이며 낮게 말했고 남자는 묵묵히 사기잔에 술만 기울이고있었다.       집을 떠난지 3년만에 마주앉은 밥상. 나는 조심스레 토장국에 숟가락을 넣어 조금 맛보았다. 순간, 온몸에 차오르는 격동이라니! 오래만에 만난 엄마한테서도 느끼지 못했던 격동과 설레움을 그 한숟갈의 토장국에서 감지하고있었던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시루떡을 한입 베물었다. 목이 꽉 멨다. 나는 바삐바삐 일어섰다. 자칫하면 눈물이 떨어지려고 했으므로 일어나지 않을수가 없었던것이다.       《왜 더 먹지 않고?》       엄마의 파르스름한 목소리.       《아까 차에 왔더니 좀 불편해서요… 두분 많이 드세요.》       나는 애써 웃음을 만들며 웃목에 비켜앉았고 엄마는 먹는지 마는지 한본새로 땅만 보고 앉았고 남자는 남자대로 술잔만 부지런히 기울이고있었다.       이름모를 남자의 정체.       하지만 나는 이미 남자를 다 알고있는지도 모른다.       비소리를 들으며 나는 몸을 한껏 옴츠렸다.       《나 먼저 가보겠수. 오래만에 딸하고 회포도 풀구… 나 소여물도 주구 뒤집에도 들러보구 올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이내 부시럭부시럭 신신는 소리, 그리고 투벅투벅하는 무거운 신발소리와 함께 들리는 문닫히는 소리.       그 신발소리가 아주 사라졌을 때쯤 나는 조금씩 조금씩 기운을 되찾고있었다.       엄마와 나만 남은 방안.       침묵이 흐른다.       이제 엄마는 나한테 말해줘야 했다. 어린시절 나를 지지누르던 그 악몽과 정체모를 남자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과 정신질환을 앓고있는 언니에 대해서.       《참, 불쌍하고 불쌍한 분이지…》       엄마는 주인없는 밥상을 마주하고 손톱여물을 썰면서 드디여 그렇게 입을 뗐다. 그러는 엄마의 파르르 떨리는 눈빛…       《너한테 있어 그분은 항상 고마운 분이란다. 알겠니?》              남자의 이름은 김세창, 군인이였다고 한다.       엄마가 남자를 처음 만난건 언니가 일곱살나던 해라고 한다.       때는 70년대말.       언니를 이끌고 봄동배추 씻으러 우물가로 나갔다가 거기로 세수하러 온 군인 한분을 만나게 되였다고 했다.       그 남자가 배추씻는 엄마곁에 다가섰을 때 엄마는 웬지 숨이 칵 막혔다는것. 그 남자의 냄새, 여지껏 맡아본적 없는 알싸한 세수비누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엄마는 그 냄새에 그대로 넋을 빼앗겼다는것. 남자는 물을 드레박으로 끌어올려, 한손으로 물을 부으며 한손으로 세수를 하고 궤춤에서 수건을 빼내 얼굴을 닦았고 엄마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배추를 애매하게 만지기만 했다는것. 다음, 허공에서 부딪친 두쌍의 눈, 그리하여 맺어지지 말아야 할 인연은 맺어지고 만것이니―       성분이 부농이라는 오점 하나로 오종종한 키라지만 단아한 얼굴이 받쳐주어 미인소리를 심심찮게 들었던 엄마는 그러나 원치 않는 결혼을 할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부농이라는 성분은 마치 온역처럼 엄마와 외가집을 따돌림당하게 했고, 눈물로 나날을 보내던속에서 엄마는 화룡시가지에서는 가장 극빈한 빈고농으로 소문났던 할아버지네하고 혼약이 맺어지게 된것이다. 바로 그 애정없는 혼인이 맺어지지 말아야할 인연의 도화선이 된건 아니였을가.       어느날, 엄마와 그 남자는 일곱살배기 언니한테 끝내는 보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보이고 말았으니, 결국 언니는 자기가 목격한 그 엄청난 장면을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에게 고자질했다고 한다.       나의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들고있었다.       그렇게 되여 결국 남자는 군복을 벗고 멀리 감숙성으로 개조를 가게 되였고 엄마는 영원히 지울수 없는 흑점 하나를 단채 시집식구들한테 물매를 맞고 김치굴에 갇히우면서 마을사람들의 손가락 비난질을 받게 되였다고 한다.       죽을래야 죽을수 없었던 나날들, 그 악몽의 나날에 엄마는 몸도 마음도 거의 탈진상태였고 외할머니와 이모는 일곱살배기 언니가 엄마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기나 한듯 윽박지르고 혼내고 했다는것이다. 더욱 기막힌건 어느날 엄마가 배속에서 꿈틀대는 새생명을 느끼고 바줄로 사랑채에 목을 매단것이다. 목을 매달고 밑에 받치고섰던 걸상을 차버리는 순간, 사랑채문을 떼고 들어선 언니. 언니의 고함소리와 울부짖음소리. 그 서슬에 모여들었던 사람들. 엄마는 그렇게 되여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나의 손이, 그리고 발이 떨리고있음을 나는 알수 있었다.       J.       당신을 만난지 이제 3년이 되여오는군요.       당신과 나는 어떻게 만났던가요?       아, H식당이였습니다.       달랑 행장 하나와 빈 몸뚱아리만을 끌고 무작정 당신이 있는 도시에 다달은 나. 길잃은 미아가 되여 거리를 헤매다가 나는 H식당의 복무원모집광고를 보고 들어갔지요. 어찌어찌하여 나는 일을 하라는 말을 듣게 되였고 다음날부터 정식 일하게 되였어요. 그러다 만난게 당신. 당신은 손님을 한무리 배동하여 왔었습니다.       나중에 당신이 말했던가요? 제가 당신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료리를 들고 다가갔을 때 당신은 저의 들국화같은 향기에 넋을 잃을번 했다구요. 물론 그게 무슨 료리였던지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를 몇분동안이나 뚫어지게 쳐다보던 당신의 그 해맑은 눈빛은 도무지 잊을수가 없군요.       당신은 저를 아침이슬을 머금은 한송이의 들국화같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살던 고향길에 아침이면 령롱한 이슬을 머금고 어여쁜 자태를 자랑하던 그 들국화를 말해주셨던가요?       그러나, 당신.       들국화는, 고기만 먹는 육식동물이 어느날 따분해진 입맛에 잠간 맛을 본 야채같은것이 아닐가요? 육식동물은 결국 고기를 떠날수 없을거고 고기한테로 돌아가게 될것임을 저는 알고있습니다.      산행길의 가녀린 들국화가 당신이 사는 그 도시에 무작정 뿌리내리려 했던 그 무모함은 숨막힌 외로움과 아련한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 간간히 악몽처럼 나타나는것들과 사람을 질식시키는 잇히히소리에 열병처럼 시달리고있었음을 당신은 알고있습니까?       당신의 따스함과 배려 그리고 그 절절함을 저는 뿌리칠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세상에 저항할 힘이 없었고, 아니 저항하기 싫었고, 그리고, 그리고 사람이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이 식당에서 나오라고 했을 때 저는 나왔고 당신이 작은 아파트를 구해주면서 거기에서 함께 사랑하자고 했을 때 저는 그 사랑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사람냄새가, 그리고 사람향기가요. 아무런 꿈도 비전도 저한테는 없었던것일가요?       먹고 자고 단장하고… 일주일에 한번 꼴로 오는 당신을 절절히 기다리고 울면서 떠나보내는 반복이 저의 바램이였을가요?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고 부딪히기 싫으며 모든것에서 도피하려고 싶었던 그 마음을 당신은 혹시 아시나요?       화장대에서 거울을 보다가, 어느 깊은 밤 바람소리를 듣다가 목을 놓아 꺼이꺼이 울었던 그 시간들속에 제가 있었음을 당신은 아시나요?       배속에서, 제 배속에서 당신이 꿈틀거리고있군요. 당신이고 저일수도 있는것의 꿈틀거림이 너무 싫습니다. 당신.       우리가 억지로 사랑이라고 규제하는 나와 당신사이에 가로놓인 도덕과 규제와 사회의 손가락질을 아시나요? 아무리 우리 스스로가 순결하다고 그래서 신성한 사랑이라고 억지를 써봐도 사랑 역시 정해진 범주와 규제안에서만 가능한것이라는 점은 어쩔수 없는가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그것이 규제와 범주를 벗어난것이라면 세상은 불륜이라고 손가락질할수밖에 없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군요. 엄마의 그것이나 나의 그것이나 세절적으로 조금씩 틀릴뿐 전체적인 의미에서는 꼭같지 않냐고 제가 말했을 때 당신은 바보라고 하며 제 이마를 튕겨주었지요. 그리고 당신은 저를 꼬옥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       세상의 모든 규제를 벗어난것들이 다 그렇지 않을가요? 내가 사랑이라는것이 세상이 불륜이라고 하는것임을 어쩔수 없이 시인해야 하는 그런게 아닐가요?       아버지.       아버지는 아마 오점 있는 안해일망정 버릴수는 없었던것일가.       화룡 성덕이라는 곳에서 누구도 모르게 가만히 이곳으로 야밤도주하듯 이사를 해버렸고 그렇게 되여 엄마는 거기서 애를 낳고 한해 두해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엄마는, 엄마가 목을 매달았던 그 이후 언니가 가끔 멍하니 한곳만 쳐다보고 얘야, 하고 불러도 불에 덴듯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발견해야 했으니…       아버지는 걸핏하면 술을 마시고 엄마를 팼고 언니는 그러한 가정환경속에서 점점 심한 증세를 보이더니 급기야는 히스테리적으로 웃기도 하고 그러더니 아주 돌아버렸다는것이다. 그리고 섬찍하게 던지는 한마디,       《주서온 아다. ㅎㅎㅎ.》       혼돈, 끝을 알수 없는 혼돈속을 헤매고있는듯 나는 답답하고 숨막혔다.       갓난애한테 개구리를 잡아 던지기도 하고 식구들이 안보는 틈을 타 목을 조르기도 하면서 언니는 나한테 강한 적대심리를 보였고 엄마는 그러는 언니때문에 내 걱정에 한시도 시름을 놓을수가 없었다고 한다. 모든것은 다 바뀐듯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끈질기게 련결되고있다.       나는 어쩌면 오늘은 없는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오늘이란 덧없이 흐르는 과거와 미래사이에 끼인 흐름일뿐…       나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는듯 했다. 나는 이제 모든것을 너무나도 싱겁게 알아버린 우스운 꼴이 돼버리고 만것이였다. 나는 방구석에 놓았던 가방을 주어들고 주섬주섬 내려섰다.       《선아, 아까 그분… 한번 더 보고 가면 안되겠니? 반년전에 내 소식을 듣고 여기에 오셨고 여태 너만 기다리던 분이다. 니가 언제 오나 해서 마을앞길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보수하고 그랬어. 감숙성에서 개조를 하고 여태 홀몸으로 살다가 찾아오신 분인데…》       나는 지페 몇장 드릴가고 가방을 열었다가 그대로 닫고 신을 신었다.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박절함이 몰려왔던것이다. 숨이 차고 혈압이 올라왔다. 내가 묵묵히 출입문고리를 당기고 삽작문을 열 때까지 엄마는 더이상 말리지 않았다.       비는 어느새 그쳤고 금방 머리감고난듯한 해가 노랗게 웃고있었다.       J.       이제 나는 비로소 내가 비속을 뚫고 달려와야 했던 그 엄청난 답을 찾은듯 합니다.       예고없이 나타난 국방색비옷의 남자, 그 남자가 내게 기인 나날동안 내가 찾아헤매고 방황하던 엉키고 설킨 실머리의 답이 아니였을가요. 그리고 불쌍한 내 엄마…       이제 나는, 이제 더는 당신을 이렇게 부르지 못할것 같군요.       내가 이곳을 떠나고 남자가 나의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아마 저 남자가 내 가슴에 남긴 커다란 흔적과 파문을 지우지는 못하리라.       《언니는, 언니는 얼마전에 그분께서 정신질환치료로 북경에 데려다주고 오셨어. 많이 호전되여 전화까지 왔더구나, 널 보고싶다고. 한번만이라도 온전한 정신으로 널 제대로 봐야겠다고.》       먼 지구끝에서 울려오는듯 길고 어두운 목소리가 해빛에 산산히 부서지고있다.       J. 나는 지금 당신이 살고있는 연길로 가고있습니다. 여기 청산은 이미 비가 그쳤습니다. 연길은 어떤지요, 아직도 비가 오나요? 이제 나는 시간의 늪을 어떻게 지나야 하는지를 배운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제 가야 그 늪에서 벗어날지는 알길이 없습니다. 그건 이제 남은 시간들이 증명하겠죠. J. 나는 지금 아침까지도 내가 살았던 연길로 돌아가고있습니다.       《아버지는 니가 집나가고나서 점점 더 술만 마시더니 그만 어느날엔가 피를 토하고 쓰러져 위출혈로 돌아갔고… 참 그건 알고있는거지?》       나는 어서 빨리 이 모든것으로부터 도망치고싶었다.       그때 내 앞으로 마주 덮쳐오는 노란색 택시 하나. 나는 무작정 앞을 가로막았고 서기가 바쁘게 뛰여올랐다.       《선아야…》       엄마의 애절한 목소리.       《오늘이 그분 생신인데…》       (아, …)       뒤통수가 하나 얻어맞은듯 뻥해났다.       까닭없이 화가 나고있었다. 방울방울 눈물이 올리솟고있었다.       택시는 아릿한 마음의 풍경 하나하나를 스치면서 빠르게 흘러가고있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택시를 멈춰세울만한 용기가 없었다.       나는 어쩌면 새로운 숙제 하나를 안고 여기를 떠나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평생을 다해 그 숙제를 풀어야 할지도.       길고 어두운 여름은 이제 서서히 지나간다.       그리고 내 귀에 펄럭펄럭 들렸다, 혼돈보다 더 깊고 태초보다 더 긴, 시간의 늪을 지나는 적마의 그 어둡고 답답한 말편자소리가. 투덕투덕, 투덕투덕…  
1    아버지의 유산-김경화 댓글:  조회:1227  추천:2  2012-11-19
아버지의 유산 김경화 날씨도 이젠 점점 추워지고 아침저녁으로 뼈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소름이 오싹오싹 돋아난다. 남 다 사는 난방아빠트에서 하루도 살아보지 못한채 평생 불 때는 집에서 고생만 하다 얼마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요즘 따라 자꾸 꿈에 나타난다. 엄마가 혼자 불 때는게 걱정되여서인가? 바쁜 일정을 제쳐놓고 친정에 부랴부랴 달려갔더니 다행히 엄마는 별일 없으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이젠 다섯달이 되였는데 엄마의 슬픔은 아직도 여전하신듯하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만나 평생 오로지 서로만을 사랑해온 부모님이시니 그럴만도 하다. 아버지 유물을 이것저것 정리하시며 엄마는 또 그리움에 목메여 눈물을 지으신다. 문득 오래동안 보이지 않던 텔레비죤만큼 큰 라지오가 눈에 띄였다. 언제 우리 집에 왔던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집에 온지 참 오래 된 라지오이다. 저게 아직도 있었나? 덩치 크고 무거워서 자리나 차지했지 요즘 세상에 누가 라지오 듣는다구 저걸 아직도 보물단지처럼 모시고있지? “네 아버지 고집을 모르니? 나두 저걸 없애버리려구 몇번이나 말했는데 네 아버지가 다치게 하니 어디? 그게 어떤 라지온데 페물로 팔아버리냐며 뗑하는데 내가 뭐 어쩔수 있어야지?” “어떤 라지온데 아버지께서 그렇게 보물취급 했어요?” 어릴 때 아버지한테서 들은 기억이 날듯말듯하면서 도무지 잡혀지지 않아 엄마한테 물어서야 연변일보의 지난 력사와 엉켜진 옛이야기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는 뭐든지 하나밖에 몰랐던분이시다. 열일곱살 되던 1957년에 연변일보사에 통신원으로 취직해서 얼마뒤 전신부에 옮겨진 뒤 장장 40년 세월동안 바위처럼 드팀없이 그 일터를 묵묵히 지켜오셨다. 그때는 지금처럼 통신망이 발달되지 못한 때여서 신화사에서 발송하는 뉴스를 무전으로 받아 라지오방송으로 교정한 뒤 시사부에 넘기면 시사부에서 우리 말로 번역해 조선문판 연변일보에 실었다고 한다. 우리 집의 쏘련제 고물 라지오가 바로 그 담당자였다. 이 라지오의 래력을 말할라치면 아득히 먼 7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것 같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투항을 선포한 뒤 한동안 무정부상태였던 때가 있었단다. 연변에서는 그때 《한민일보》,《연변일보》,《길동일보》, 《인민일보조문판》이 련이어 나왔고 북만(지금의 흑룡강)에서 《인민일보》,《신민일보》,《단결일보》가 나왔으며 남만(지금의 료녕)에서 《민주일보》가 탄생했다. 1949년초, 주덕해가 연변으로 파견되면서 《연변일보》, 북만의 《단결일보》와 남만의 《민주일보》를 합쳐서 《동북조선인민보》를 꾸리게 했다. 그때 《민주일보》에서 이 라지오를 가지고왔었다. 몇해전에 《민주일보》 창시인의 한분이셨던 김윤송이 우리 집에 놀러오셨다가 이 라지오를 보더니 감개가 무량해하셨다. 1946년에 《민주일보》를 꾸리긴 했는데 통신설비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매하구를 거쳐 심양까지 가 쏘련홍군이 관리하던 중장철도사무실을 찾아 지원을 요청했다 한다.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 쏘련홍군장교가 물을 때 눈에 띄는게 바로 이 라지오였단다. “이겁니다. 이걸 주면 됩니다.” 그 장교는 김윤송의 요구에 흔쾌히 대답하였고 그후 인차 국민당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져 그들은 이 라지오를 메고 조선에 가 피난하면서 신문을 꾸렸다고 한다. 그때 이 라지오를 통해 서울, 평양, 일본, 미국, 쏘련 방송을 들으면서 시사편집을 할수 있었단다. 후에 컴퓨터가 나오고 통신이 발달함에 따라 력사의 무대에서 밀려나 별 쓸모가 없이 구석자리만 차지하던 그 라지오를 신문사에서 싼 값으로 처리하면서 우리 집에 옮겨오게 되였던것이다. 아버지는 집에 계실 때면 늘 그 라지오를 켜놓고 국내국제뉴스를 듣군 하셨다. 참 오랜 세월의 풍랑을 거치고나서도 라지오의 음질은 마냥 맑고 부드러웠다. 그후에도 김윤송은 연변에 왔다가 우리 집에 들리셨다. 그때 이미 퇴직하고 북경에 거주하고있던 김윤송은 우리 집에서 그 라지오를 보자 잃었던 자식을 다시 만난 부모처럼 눈물이 글썽하여 오래오래 그 라지오를 어루쓸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모진 세월 거친 비바람속에서도 여전히 빛 바래지 않고 윤기나는 외곽, 아직도 맑고 깨끗한 그 음성… 참 우리 아버지를 많이 닮은듯 하다. 평생 청빈하게 사시면서도 불의한 재물 일전어치도 챙기려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그러면서도 누구네 집 가전제품이 고장났다 하면 밥도 안 잡수시고 달려가 고쳐주시고도 일전 한푼 받을줄 몰랐던 고지식한 우리 아버지, 중병에 돈 쓸 일도 많으시련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그 라지오를 못팔게 지켜나선 아버지…어쩌면 아버지한테는 그 라지오가 아버지의 한평생 정열을 고스란히 바쳐온 연변일보와 끈끈히 이어진 자식과도 같은 존재였던지도 모른다. 아니, 이 라지오는 정녕 돈으로 계산할수 없는 아버지의 소중한 유산이다. 아버지의 오랜 손때 묻은 고물라지오를 보면 그 곁에서 뭔가 골똘히 듣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오늘도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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