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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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리영씨 ≪조선명곡집≫ 출간 댓글:  조회:2621  추천:0  2013-09-24
리영씨 ≪조선명곡집≫ 출간      중국과 조선 두나라 건교 60주년을 기념하면서 리영씨가 편역한 ≪조선명곡집≫ 이 북경출판집단공사 북경출판사에 의해 최근에 출간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가무, 교예, 집단체조 등 면에서 "예술지국"이라고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60년래 중국, 조선 두나라 문화예술간의 교류는 더없이 친선적이고 빈번하고 활발히 진행되여 왔다. 특히 60-70년대의 "꽃파는 처녀"," 꽃피는 마을","남강마을 녀성들" 등 조선의 영화는 중국의 수많은 관중들을 매료시켰으며 영화의 아름다운 선률은 중국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주었다. 이미 수십년이 흘렀지만 50-60세 이상의 사람들은 "꽃파는 처녀"의 노래를 생생히 기억하고있으며 지금도 즐겨 부르고있다.    리영씨는 조선의 이런 좋은 노래를 한어로 번역해 작품집으로 출간하려고 시도한지 오래다. 하여 그는 5년동안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7시까지 분주히 돌아쳤다. 이런 습관이 지금 고질병으로 되여버렸다. 그는 만여수의 조선노래가운데서 "김일성장군의 노래", "꽃파는 처녀" 등 130수를 선재하고 편역했다. 편역에서 제일 큰 난도는 조선노래의 원 자료가 없는것이였다. 그는 조선의 원판가곡을 찾기 위해 도서관, 방송국을 누비는 동시에 민간통로를 거쳐 원 가사를 수집하였다. 때론 디지텔사진기로 촬영해다가 편역했고 지어 자기의 주머니를 헤쳐 300여원씩 고가로 조선가곡 DVD원판을 사다가 한편 들으면서 대조해 보았다.     구경 어떤 노래가 "예술지국"이라 불리우는 조선의 예술수준을 대표할수 있는지? 중국인은 조선의 어떤 노래에 흥취가 있는지? 이것이 리영씨가 조선의 노래를 선정하고 명곡을 편역함에 있어서 제일 고려되는 점이였고 제일 중시를 돌리게되는 돌파구였다.     그는 우선 조선의 예술전문가들이 알선해준 명곡을 수집한후 부동한 년령, 부동한 민족을 찾아 조사연구를 하고 그들의 부동한 흥취에 따라서 입에 쉽게 오르고 귀맛을 당기는 노래를 한곡 한곡 편역하기 시작했다. 부분적 노래는 출간되기 전에 조선중앙방송악단 반주, 박리정 노래로 CD로 출간되였으며 지난해 9월 조선영화악단에서 중국 방문시에 공연을 하였다. 리영씨는 문자수준이 높을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허지만 조선명곡을 편역하는것이 창작하기 보다 더 힘들었다. 그는 적당한 단어 하나 때문에 며칠씩 골머리를 앓을 때도 푸술했다. 그리고 편역한 글자를 원 가사의 글자수에 맞춰야 했고 음률에 맞추어야 했다. 그는 130수의 가곡을 "혁명을 노래", "조국을 노래", "고향을 노래", "자연을 노래", "생활을 노래", "인물을 노래", "애정을 노래", "군민을 노래"등 8개 부분으로 구성하고 노래마다에 적당한 사진과 도안을 배합시켰으며 조선족들의 편리를 위해 한어목록뒤에 조선 원 가곡의 이름을 달아 주었다. 원 중앙텔렐비방송국 부총편집이며 중국문련 위원이며 중국음악가 협회 리사인 장화산선생은 ≪조선명곡집≫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리영씨는 성스러운 책임감과 사명감을 안고 업외시간을 타서 을 출간하였다. 그는 조선어와 한어, 작사 작곡에 능통하며 조선가곡의 원 의미를 터득하고있기에 이번 편역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과 량호한 질을 담보하였다. 하기에 중국 해당전문가들과 조선전문가의 충분한 긍정을 받을수 있었다."    ≪조선명곡집≫ 을 보면 60년대이후 매 시기의 우수한 가곡을 전면적으로 대폭 수록한것이 첫째 특점이고 여러 사람들이 익숙히 알고있는 이전의 노래뿐만 아니라 조선의 변화시대의 현실을 반영한 신곡을 새로운 시각에서 새로운 리해와 새로운 수법으로 편역한것이 두번째 특점이며 조선노래의 원 의미를 정확하게 보류하고 표달한 기초에서 한족의 언어습관과 가사의 규범에 맞추어 대담하게 창조성적으로 "재 창작"을 함으로써 고도의 완미성을 구현한것이 셋째 특점이다.     "관리는 순간적이고 인간으로 되는것은 평생의 일이며 정신적 정품을 창출하는것은 영원한 일이다." 이를 리영씨는 자기의 정신적 추구로 간주하고있다. 이런 리념의 지배하에 리영씨는 다년간 연변의 사상문화건설에 몸 잠그고 중국특색의 조선족문화를 탐구하고 실천하는데 진력해 왔으며 중화민족의 대가정속에서 조선족의 형상을 부각하기 위해 힘찬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선후로 열몇권의 저서를 한어로 출간했으며 600여수의 가사를 "인민일보", "광명일보", "시간" 등 신문 잡지에 발표하였다. 그가 창작한 "진달래"가사는 중국음악 최고상인 "금종상"을 수여 받았고 "아, 장백산"은 중국 "금종상", 길림성 "장백산문예상",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 문예상"을 수상했다. 이번에 ≪조선명곡집≫ 의 출간은 중국과 조선 두나라 건교 60주년을 기념하는 면에서 력사적, 현실적 의의를 갖고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음악무대에 한떨기 아름다운 "진달래"를 증송함으로써 중국과 조선 두나라 친선을 도모하는 면에서도 황홀한 색채를 돋구어 줄것이다.      ≪흑룡강신문≫ 2010. 1. 13.  
38    민족의 언어를 살리려는 후더운 마음들 댓글:  조회:1850  추천:0  2013-09-24
민족의 언어를 살리려는 후더운 마음들   지난 8월초에 있은 한번 취재에서 정이 든 한국화술교육회 리사장 고재갑선생이 국경절 전날에 연길에 도착하자 나는 면담을 청했다. 이번에 오게 된 사연을 물었을 때 고재갑선생은 나의 물음과는 다른 사연부터 알려주었다. 말하자면 서울특별시의회 김기영의장이 연변대학 객원교수로 초빙되였다는것이였다. 김기영의장은 9월 30일 연변대학에서 “복지사회 구현과 서울시의회의 역할” 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내가 김기영의장을 취재해볼 의향을 밝혔더니 고재갑선생은 쾌히 동의하고나서 시간을 10월 2일 점심으로 정해주었다. 국경절을 쉬고 이튿날 11시,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백산호텔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에게는 우려심도 없지 않았다. 서울특별시의회 의장이라 하는데 취재를 접수할런지? 범접하기 어렵지나 않겠는지 하는 생각이였다. 이런 우려는 김기영의장을 만나는 순간부터 마치 봄눈 녹듯 녹아버렸다. 훤칠한 이마, 정기도는 눈, 테넓은 안경을 건 김기영의장은 옷차림이나 몸가짐은 남보다 특이하지 않았고 웃는 얼굴, 부드로운 목소리 통쾌한 웃음소리로 하여 여러 사람들속에서 얼핏 보아선 어느분이 의장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자하고 소박한 분이였다. 남을 포섭하고 남의 인격을 존중하는 김기영의장은 흰소리를 잘 치는 뜨내기장사군이나 “사장”, “회장”으로 나서면서 틀거지를 부리는 “어른”들과도 너무나 판이한 대조를 이루었다. 김기영의장은 서울시의회에 대한 소개부터 앞섰다. “서울시의회는 25개 자치구에서 선출된 의원 94명과 비례대표의원 10명 도합 104명으로 구성되여 있습니다. 모든 의원은 수도도시의 특성과 도시규모의 방대함에 따라 무거운 책임을 안고있으며 년륜이 짧은 한국지방자치제의 성공적인 정책이 우리 의회 활동에 달려있다는 각오로 의정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김기영의장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연변화술협회 김영택회장과 서방흥비서장이 호텔방에 들어섰다. 점심 때여서 나의 취재는 식탁에서 계속되였다. “그 바쁘심에도 화술사업을 그처럼 중시하고 지지하신다지요?” “저는 서울시의회 의장일을 보면서도 한국화술교육회의 수석부총재로 위임되여 있습니다. 정치를 하다보니 자연히 화술을 중시하게 되였지요. 정책을 발표하고 사상을 토로하고 감정을 교류할 때에도 화술이 자못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발성, 악센트, 마이크사용, 감정토로 이 모든 요소가 대통령선거나 의장선거에서도 직접 투표와 련관이 있습니다. 김대중대통령도 이전에 웅변가협회 부회장으로 있은적이 있습니다.” 김기영의장은 화술을 직접 투표선거와 정치에 련관시키였다. 이처럼 화술에 재능이 있는 분이기에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더듬지 않고 군더더기 한마디 없이 류창하게 엮어 내려갔다. “의장님은 재능이 있고 정직하고 말재주가 좋은 덕으로 의장선거에서 95% 이상의 투표를 얻었습니다. 서울에서 다 희귀한 일이지요.” “과찬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자, 이런 얘기 그만두고 한잔 더 비웁시다.”하고 김기영의장은 화제를 따돌렸다. 나도 한잔 따라하고나서 연변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그는 간판도 우리 민족의 글로 씌여 있고 말도 서로 통하니 얼마나 편안하고 좋은지 모르겠다고 몇번인가 외웠다. “제가 10년전에 국회의원인 김대중대통령의 큰 아들 김홍일씨와 함께 연변에 왔었습니다. 오늘 와보니 고층건물도 즐비하게 늘어섰고 환경위생도 잘 되고 사람들의 인정미도 더 깊어진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일 기쁜것은 우리 민족의 얼이 하냥 살아있다는 그 점입니다. 우리 민족의 문자와 언어 그리고 민족의 풍속습관을 고스란히 지켜오고 발전시켜가는 우리 동포들이 고맙고 민족정책을 잘 관철하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에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김기영의장은 이번에 주인대 오장숙주임을 만나서도 화술교류의 촉진을 위해 새로운 구상을 털어놓았다 한다. 함께 동행한 한기종부회장이나 서순옥교수도 그렇고 모두 화술령역에서 활약하는 분들이여서 입을 열기만 하면 귀맛당기는 술어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화술교육회 고재갑리사장도 우리 말이 아름답기 그지없다면서 다시 한번 자랑의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말은 우리 민족이 오랜 력사를 두고 가꾸어온 귀중한 민족문화재부로서 오늘 세계에서 가장 발달하고 우수한 언어의 하나로 긍정받고있습니다. 인간은 물과 공기를 떠나서 살수 없는것처럼 말을 떠나서는 한시라고 살수 없는가 봅니다.” 1994년 8월에 한국화술교육회와 연변화술협회가 자매결연을 맺은후 지금까지 연변에서 7차나 화술콩클을 가지였다. 고재갑선생은 번마다 참석했고 크나큰 지지와 성원을 주었었다. 이 모든것을 잘 알고 계시는 김기영의장은 고재갑선생을 보고 연변화술제고에 더 큰 지원을 주라고 당부하면서 한국화술교육회의 역할을 충분히 긍정해 주었다. “한국화술교육회는 해마다 한두번씩 웅변대회나 화술콩클을 열고있습니다. 지금 한국화술교육회와 연변화술협회에서 손잡고 여러가지 활동을 벌리고있는데 이는 국제적으로 주는 영향이 매우 큽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화술을 발전시키는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려 합니다.” 연변화술협회에서 외빈들에게 기념품을 선사, 김기영의장에게 옥으로 만든 네모난 도장을 선사했다. “이런, 글자도 참 멋지게 새겼군요. 크기나 모양이 마치 궁전에서 왕이 쓰던 인감 같네요.” 이 말에 좌석은 또한번 폭소가 터졌다. 한국화술교육회와 연변화술협회에서는 년말에 제8차연변화술대회를 규모가 더 크게 할것이라고 고재갑선생이 밝혔다. 이처럼 민족의 언어를 발전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심혈을 쏟고있는 이분들이 돋보이였다.      ≪연변라지오텔레비신문≫ 1999. 10. 11.
37    민족의 언어를 살리려는 후더운 마음들 댓글:  조회:2115  추천:0  2013-09-18
민족의 언어를 살리려는 후더운 마음들   지난 8월초에 있은 한번 취재에서 정이 든 한국화술교육회 리사장 고재갑선생이 국경절 전날에 연길에 도착하자 나는 면담을 청했다. 이번에 오게 된 사연을 물었을 때 고재갑선생은 나의 물음과는 다른 사연부터 알려주었다. 말하자면 서울특별시의회 김기영의장이 연변대학 객원교수로 초빙되였다는것이였다. 김기영의장은 9월 30일 연변대학에서 “복지사회 구현과 서울시의회의 역할” 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내가 김기영의장을 취재해볼 의향을 밝혔더니 고재갑선생은 쾌히 동의하고나서 시간을 10월 2일 점심으로 정해주었다. 국경절을 쉬고 이튿날 11시,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백산호텔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에게는 우려심도 없지 않았다. 서울특별시의회 의장이라 하는데 취재를 접수할런지? 범접하기 어렵지나 않겠는지 하는 생각이였다. 이런 우려는 김기영의장을 만나는 순간부터 마치 봄눈 녹듯 녹아버렸다. 훤칠한 이마, 정기도는 눈, 테넓은 안경을 건 김기영의장은 옷차림이나 몸가짐은 남보다 특이하지 않았고 웃는 얼굴, 부드로운 목소리 통쾌한 웃음소리로 하여 여러 사람들속에서 얼핏 보아선 어느분이 의장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자하고 소박한 분이였다. 남을 포섭하고 남의 인격을 존중하는 김기영의장은 흰소리를 잘 치는 뜨내기장사군이나 “사장”, “회장”으로 나서면서 틀거지를 부리는 “어른”들과도 너무나 판이한 대조를 이루었다. 김기영의장은 서울시의회에 대한 소개부터 앞섰다. “서울시의회는 25개 자치구에서 선출된 의원 94명과 비례대표의원 10명 도합 104명으로 구성되여 있습니다. 모든 의원은 수도도시의 특성과 도시규모의 방대함에 따라 무거운 책임을 안고있으며 년륜이 짧은 한국지방자치제의 성공적인 정책이 우리 의회 활동에 달려있다는 각오로 의정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김기영의장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연변화술협회 김영택회장과 서방흥비서장이 호텔방에 들어섰다. 점심 때여서 나의 취재는 식탁에서 계속되였다. “그 바쁘심에도 화술사업을 그처럼 중시하고 지지하신다지요?” “저는 서울시의회 의장일을 보면서도 한국화술교육회의 수석부총재로 위임되여 있습니다. 정치를 하다보니 자연히 화술을 중시하게 되였지요. 정책을 발표하고 사상을 토로하고 감정을 교류할 때에도 화술이 자못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발성, 악센트, 마이크사용, 감정토로 이 모든 요소가 대통령선거나 의장선거에서도 직접 투표와 련관이 있습니다. 김대중대통령도 이전에 웅변가협회 부회장으로 있은적이 있습니다.” 김기영의장은 화술을 직접 투표선거와 정치에 련관시키였다. 이처럼 화술에 재능이 있는 분이기에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더듬지 않고 군더더기 한마디 없이 류창하게 엮어 내려갔다. “의장님은 재능이 있고 정직하고 말재주가 좋은 덕으로 의장선거에서 95% 이상의 투표를 얻었습니다. 서울에서 다 희귀한 일이지요.” “과찬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자, 이런 얘기 그만두고 한잔 더 비웁시다.”하고 김기영의장은 화제를 따돌렸다. 나도 한잔 따라하고나서 연변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그는 간판도 우리 민족의 글로 씌여 있고 말도 서로 통하니 얼마나 편안하고 좋은지 모르겠다고 몇번인가 외웠다. “제가 10년전에 국회의원인 김대중대통령의 큰 아들 김홍일씨와 함께 연변에 왔었습니다. 오늘 와보니 고층건물도 즐비하게 늘어섰고 환경위생도 잘 되고 사람들의 인정미도 더 깊어진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일 기쁜것은 우리 민족의 얼이 하냥 살아있다는 그 점입니다. 우리 민족의 문자와 언어 그리고 민족의 풍속습관을 고스란히 지켜오고 발전시켜가는 우리 동포들이 고맙고 민족정책을 잘 관철하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에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김기영의장은 이번에 주인대 오장숙주임을 만나서도 화술교류의 촉진을 위해 새로운 구상을 털어놓았다 한다. 함께 동행한 한기종부회장이나 서순옥교수도 그렇고 모두 화술령역에서 활약하는 분들이여서 입을 열기만 하면 귀맛당기는 술어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화술교육회 고재갑리사장도 우리 말이 아름답기 그지없다면서 다시 한번 자랑의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말은 우리 민족이 오랜 력사를 두고 가꾸어온 귀중한 민족문화재부로서 오늘 세계에서 가장 발달하고 우수한 언어의 하나로 긍정받고있습니다. 인간은 물과 공기를 떠나서 살수 없는것처럼 말을 떠나서는 한시라고 살수 없는가 봅니다.” 1994년 8월에 한국화술교육회와 연변화술협회가 자매결연을 맺은후 지금까지 연변에서 7차나 화술콩클을 가지였다. 고재갑선생은 번마다 참석했고 크나큰 지지와 성원을 주었었다. 이 모든것을 잘 알고 계시는 김기영의장은 고재갑선생을 보고 연변화술제고에 더 큰 지원을 주라고 당부하면서 한국화술교육회의 역할을 충분히 긍정해 주었다. “한국화술교육회는 해마다 한두번씩 웅변대회나 화술콩클을 열고있습니다. 지금 한국화술교육회와 연변화술협회에서 손잡고 여러가지 활동을 벌리고있는데 이는 국제적으로 주는 영향이 매우 큽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화술을 발전시키는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려 합니다.” 연변화술협회에서 외빈들에게 기념품을 선사, 김기영의장에게 옥으로 만든 네모난 도장을 선사했다. “이런, 글자도 참 멋지게 새겼군요. 크기나 모양이 마치 궁전에서 왕이 쓰던 인감 같네요.” 이 말에 좌석은 또한번 폭소가 터졌다. 한국화술교육회와 연변화술협회에서는 년말에 제8차연변화술대회를 규모가 더 크게 할것이라고 고재갑선생이 밝혔다. 이처럼 민족의 언어를 발전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심혈을 쏟고있는 이분들이 돋보이였다.      ≪연변라지오텔레비신문≫ 1999. 10. 11.
36    석양노을 그 빛 황홀하다. 댓글:  조회:1925  추천:0  2013-09-18
석양노을 그 빛 황홀하다.   얼핏 보아도 학자다운 사진의 주인공은 말 그대로 박학다문하고 다재다능한 분이다. 대학문을 나선 그날부터 36년을 방송사업에 몸을 담고 빛과 열을 발산해 왔다. 그는 우리 언론계의 원로의 한분이며 보도사업에 몸바친 방송인이며 문학수업에서 성과를 올린 작가일 뿐만아니라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의 겸직연구원이며 국제고려학회의 핵심인물중 한분이다. 그가 바로 중앙인민방송국 역심(교수급) 김형직선생이다. 기자는 북경출장길에 마침 “김형직선생 방송생애 35주년 및 조선문판 출판기념식”에 참석하여 김형직선생을 모실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점잖고 우아한 몸가짐도 돋보였고 말마디마다에 다분히 안겨오는 철리도   인상적이였다. 방송사업의 원로이며 선배이신 김형직선생 앞에서 후배인 내가 이야기를 나누자고 보니 어쩐지 송구스러웠다. 하도 그의 소탈한 웃음과 해학적인 언어로 하여 팽팽하던 나의 마음의 탕개가 풀리면서 ≪고문관지≫ 책을 둘러싸고 김형직선생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다. 기(자): 어떻게 되여 책이름이 ≪고문관지≫로 되여 있습니까? 김(형직): 이 책이 고문에서도 으뜸가는 명편들을 엮었다는 의미가 우선 들어있습니다. ≪좌전≫의 “계찰이 주악을 구경하다”에서 계찰이 악무 “소수”를 구경하고 찬탄한  “으뜸가는것을 보았도다 (观止矣)”라는 말에서 책이름을 ≪고문관지≫라 따온것입니다. 기: 조선문판이 나오게 된 경과를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김: 40대초반에 번역한 책을 60대가 되여서 출판하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고 감구지회가 착잡합니다. 로자가 “대기(大器)는 만성이라”고 갈파했듯이 나는 대기는 못되지만 성공은 늦게 되였지요.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에서 기자로 활약하며 짬짬이 시간을 내여 명편들을 우리 말로 옮겨놓다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되리라 생각했던것이 정작 붓을 들고보니 눈앞이 캄캄할 때가 많았습니다. 번역에서 눈으로 뜻을 새기기와 글로 박아 번역하기가 확연히 다름을 이때에야 깨닫게 되였습니다. 고심참담 수년만에 비로소 역문과 주해를 마무리하여 한 출판사에 보낸것이 또 자금난으로 13년동안 해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의 평생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책이고 40대 중반에 저의 청춘과 정열과 피땀을 쏟아 엮은 책이기에 언제든지 빛을 보게 하려고 벼르는 아버지의 절절한 심정을 깊이 헤아린 저의 딸 채련이가 출판비용 4만원을 내고 민족출판사에서 응해나섰기에 저의 결실 ≪고문관지≫ 조선문판이 여러분들과 대면하게 되였습니다. 기: 선생님은 어려서부터 고문에 대해 각별한 흥미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여기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 고문은 알아보기 힘들기에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며 흔히 고문을 피하고있습니다. 저는 대학시절부터 고문을 무척 즐긴것만은 사실입니다. 고문을 배우는 한편 우리 말로 풀이하여 노트에 정리해보는것을 재미로 생각하였고 리해하기 어려운 구절은 선생님께 물어 해득하군 했습니다. 이렇게 여러해를 두고 노트에 정리했더니 적지 않은 고문번역문이 정리되였지요. 이것이 ≪고문관지≫ 를 번역하게 된 계기로 되였고 또 ≪고문관지≫번역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습니다. 기: ≪고문관지≫가 후대들에게 미치는 의의와 영향에 대한 선생님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김: 이 세상에 우수한 책이 기수부지지요. 이런 책마다속에서 이것저것 다 읽는다는것은 거짓말입니다. 또한 자기로 체계를 잡고 두서를 잡아 읽자면 끝이 없을것입니다. 대표작을 골라서 정리한 고문을 학습하게 되면 그건 고문학습에서 지름길을 걷는것과 다름없지요. 지금까지 다른 글로 ≪고문관지≫를 옮겨놓은것은 오직 조선문밖에 없습니다. 이 책에는 력사전기, 론설문, 견문, 기행문, 잡문, 소품 등 십여가지 쟝르의 글이 망라되여있어 중국 고문의 휘황찬란한 면모를 보여줄뿐만 아니라 글의 대부분이 사상성과 예술성이 무척 높아 읽는 이들의 찬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한편 우리들에게 력사지식과 문학지식을 가르쳐주는것은 물론 고문을 배움에 있어서 교재로도 쓸수 있습니다. 이런 고문을 통하여 중국문화의 정수를 섭취할수 있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문화를 발전시키는데도 참고로 될것입니다. 기: 36년을 필과 벗하여 많은 귀중한 재부를 남겼는데 인젠 편안히 휴식하셔야지요? 김: 어떻게 얘기할가요?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것은 아닙니다. 이 몇년간 숨차고 어렵고 험난한 산마루를 톺아왔습니다. 이것이 생활의 제1부입니다. 지금 20여만자 되는 기자작품집을 한창 마무리 짓고있습니다. 정년퇴직하면 사회의 자유인으로, 수필가로, 사회활동가로서 생의 제2부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물론 발전하는 시대의 변화에 가끔 얼굴을 돌리고 사색의 실마리를 들추면서 락조어린 아리랑고개를 톺을것입니다. 그런다 해도 생활의 제2부는 가볍고 느슨하고 거뿐하고 유쾌하고 자우로울것입니다. 보라!  이처럼 박식한 학자이기에 말이 청산류수였고 수첩에 옮겨놓으니 한편의 훌륭한 글이 되였다. 30여년간 김형직선생이 내놓은 “즐거운 모임 긴장한 경기”, “소수민족 수상작가 좌담회”, “제10회 아세아경기대회보도”, “봄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한 많은 방송작품이 중앙인민방송국 우수상을 받았고 전국조선어방송 우수작품평의에서도 수상하였다. 번역작품으로는 “당조설화”, “고대백화단편소설집”, “케리라와 디무나” 등 여러권이 있고 편역작품으로는 “조선옛이야기 365컬레”, “중조관계사화”, “불굴의 투사”등 여러 책, 수필로는 “어머니”, “도라지”, “흘러간 동년시절”, “벼종자”, “부채” 등 수십편이 있다. 이렇게 큰 성과 앞에서도 해놓은 일이 별로 없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김형직선생이 더없이 우러러 보이기만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있다. “작가에겐 정년퇴직이 없다. 사유와 붓대는 쉬지 말아야 한다.” 이 한마디 말에서 마치 석양에 비낀 그의 청아한 모습을 보는듯 싶었다. 석양에 지는 해도 뜨거운 빛을 뿌린다고 하지 않는가?  금후에도 김형직선생한테서 알차고 호함진 작품이 쏟아져 나올것은 불보듯이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김형직선생은 이번에 ≪고문관지≫ 8백부를 찍었는데 한부도 팔지 않고 전부 기증하겠다고 피로했다. 그는 이 책은 어디까지나 정신적 재부이지 절대 물질적 재부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기자를 보고 책을 요구하는 분한테서 전화나 편지가 오면 책임지고 우편으로 부쳐주겠다고까지 하였다. 환한 웃음을 보이며 이렇게 내비치는 그의 말에서 명예나 리익을 탐내지 않는 김형직선생의 깨끗한 마음을 읽을수 있었고 민족문화와 후대들을 위하는 그의 티없이 맑고 후더운 마음을 페부로 느낄수 있었다.   ≪세월이여, 인생이여(중국조선족기자문선) ≫ 수록. 2001. 12.
35    하냥 뛰고있는 서방흥아나운서 댓글:  조회:1462  추천:1  2013-09-11
  연변라지오텔레비신문은 새해 첫기부터 “화술강좌”란을 설치하고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 주임인 서방흥선생의 작품을 륙속 싣게 된다. 기자는 시대발전과 현실언어생활의 혼란, 새 세대들이 “말할줄 아는 벙어리”가 되여가는 현실을 감안하고 12월 13일 일요일에 한창 “우리말공부교재”를 집필하고있는 서방흥선생과 그의 사무실에서 마주앉았다. 서방흥-하면 청중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다. 이미 방송지도(교수급) 직함을 가진 서방흥선생은 마이크앞에 앉아 27년간 웅글지고 박력있고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로 연변방송의 같지않은 쟝르의 방송풍격을 창조했으며 또한 방송원후대양성사업, 사회언어규범화발전을 위해 정열을 쏟아왔다. 시대발전변화에 따르는 매 시기 그의 방송은 청중들의 좋은 평을 받아왔고 이미 발표한 “방송원입문”저서와 30여편의 론문은 우리말 방송과 사회언어생활제고에 큰 기여를 하였다. 서방흥선생과 한동안 한담이 흐르다가 저도 모르게 화술에 대해 말이 오가게 되였다. 기자: 오래동안 방송사업을 하면서 별반 어려운점은 없지요? 서방흥: 어떻게 말씀드릴가요?  오랜기간 방송을 해왔지만 첫발을 떼던 그 시기가 어려웠고 지금 고봉에 오르는 이때가 또한 어려운것 같습니다. 모든 사업이 그러하겠지만 방송사업은 그 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이 느낄수 있는 어려움이 따로 있는데야 어찌겠습니까? 기본으로 되는것은 방송질 제고에서 봉착하는 난관입니다. 방송이야 어디 자기가 잘한다해서 잘하는겁니까? 청중들의 “심판’에 맡길수 밖에 없는거지요. 기자: 방송생애에 대해 더듬어본적이 있습니까? 서방흥: 예. 있구말구요. 방송생애에 대해 저는 어디까지나 랑만적입니다. 청중들이 저한테 “붉은 패쪽”을 내들기전까지는 마이크앞을 떠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입니다. 허나 돌변하는 시대에 경험과 실력에만 의탁하고 하냥 한본새로 방송한다면 형세에 뒤진것이고 저의 방송생애도 마무리짓는거지요. 시대의 발전변화에 맞는 방송풍격을 새롭게 하기 위해선 열심히 뛰여야지요. 지금은 편집, 기자가 써준 원고를 읽을 때가 아니라 머리로 말할 때니깐요. 청중의 사랑받는 벗으로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하고 끈질기게 노력해야 된다고 봅니다. 저한테는 방송후대들을 참답게 이끌어가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방송원사업은 끝까지 두려움과 맞서 분투하는 성스러운 삶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해보기도 합니다. 기자: 그러니까 서선생은 얼마나 다망하십니까? 그런데도 사회언어발전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사업을 펼치고있습니다. 이번 “화술강좌”도 그렇고요. 어떤 의도에서 사회활동을 하게 되였는지요? 서방흥: 좋은 물음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얘기는 마음속 말입니다. 우리 방송은 그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방송원의 매 한마디의 말은 직접 선전효과에 영향주고있습니다. 현재 사회언어생활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한어의 섞임, 외래어의 사용, 비표준발음의 란발… 이뿐만아니라 말을 더듬고 곱씹고 군더더기를 넣는 사람, 어쨌든 자기의 생각을 조리있게 표달못하고있습니다. 전직화술일군들까지도 발음규범을 지키지 못해 틀린 발음이 나갈 때도 있으니 정말 가슴아프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사회언어생활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두고 많은 생각을 굴렸습니다. 비록 아직까지 우리말을 옳바르게 이끌어나가기 위해 강유력한 조직적인 조치가 따라가지 못하고 학교교육에서 글공부가 위주인데다 발음법은 나왔으나 그것을 잘 지키지 못하는 원인도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반드시 우리말을 잘 해야 한다”는 명확한 인식이 자리잡지 못한데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직면한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성음전달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이 말이 전파되고 컴퓨터로 말이 글로 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말잘하는것을 순교제의 질과 효과를 높이기 위한것으로만 볼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품위와 인격을 인정받을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척도로, 나아가 민족의 자질, 민족언어의 발전과 전도에 관계되는것으로 인식해야 할것입니다. 방송원이라면 하나의 비규범적인 발음도 민족앞에 죄진다는 높이에서 자책감을 느껴야 할것입니다. 제가 제일 근심되는것은 우리의 후대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좀이라도 도움이 될수 있는 일을 할수 없을가 하는 마음에서 사회활동을 벌리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사회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서방흥: 예, 화술의 연구 발전을 위해 “연변화술연구회”를 세웠습니다. 이 연구회의 주요책임을 맡고있는 저는 여러차례 주내 범위에서 화술콩클을 벌렸고 대학, 사범학교, 여러 중소학교에 가서 화술강의와 지도를 했습니다. 허나 몇사람의 힘으로야 감당하기 어렵지요. 비록 그 힘이 미약하지만 사회에 좀이라도 도움이 될수 있는한 저는 우리 민족의 발전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뛸것입니다. 기자: 귀중한 말씀 많이 주셨습니다. 앞으로 우리 민족을 위해 계속 뛰여주시겠다니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금후 타산은 어떠합니까? 서방흥: 우리의 방송사업은 한창 생존을 위한 개혁단계에 있습니다. 개혁을 하지 않으면 내리막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원이라면 앞으로 방송실에서 청중들과 직접 대화하며 봉사방송을 하고싶은 마음이 있구요. “우리말공부교재” 같은걸 꾸며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부탁한가지 있습니다. 이제 곧 독자들과 대면하게 되는 저의 “화술강좌”를 두고 한마디 하겠습니다. 편폭의 제한도 있고 또 많은 부분의 내용이 질제표달 훈련과정을 서술한것으로서 독자들의 편리, 훈련에서도 실효를 위해 의문되거나 알고싶은것, 리해되지 않거나 어려운것이 있으면 직접 저와 문의할수 있도록 매 편마다 저의 자문전화를 밝혀주었으면 합니다. 독자층이 학생들이 많을것으로 보아지는데 문의만 하면 부담없이 열심히 책임지고 가르쳐줄것입니다. 서방흥선생과의 담화가 끝났다. 그 무엇인가 가슴을 "탕" 치는 충격이 일었다. 서방흥, 그는 민족의 화술, 민족의 얼을 살려가려는 웅심을 지닌 방송화술계의 스타, 우리 민족의 자랑, 이런 분들이 있으므로 하여 우리의 언어가 이어지고 발전되고 우리의 문화가 꽃펴가고있는것이 아닌가? 기자는 본 직업을 그렇게도 사랑하는 마음, 자기를 대하는 옳바른 자세, 방송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있는 그의 모습과 우리 말의 발전, 전도를 두고 후대양성사업에 모든것을 바쳐 뛰고 또 뛰는 그의 정력적인 사업에서 우리 민족언어의 밝은 앞날을 기대해 볼수 있었다. 서방흥선생의 이 모든것을 위해 몇달간의 로임을 모아 록음기를사다 화술을 전공하라고 고무해 주던 안해의 진정어린 애틋한 마음, 귀중한 목소리를 위해 술, 담배를 떼라고 진심으로 충고하던 딸 서홍의 부탁, 어디가나 아버지를 알고있다며 자호감으로 기뻐하는 아들 만승의 흡족한 모습, 이 모든것이 서방흥선생이 방송에서 끈질긴 노력을 기하도록 밑거름이 되였고 또한 방송개성의 창조에서 정신적 기둥이 되였을것이다. 그 어떤 힘이 뒤에서 밀었던지, 그 어떤 황홀한 자석이 앞에서 당겼던지간에 서방흥선생은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길림성방송원경연 1등상, 제2차, 3차, 4차 길림성방송원경연에서 련속 특등상의 월계관을 안아왔으며 길림성 “최우수 방송원”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서방흥선생의 그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는 하늘상공에 울려퍼지는 전파를 타고 우리 민족의 자랑으로 뭇 사람들의 심금을 하냥 울려줄것이다.      ≪연변라지오텔레비신문≫ 1998. 12. 25.
34    이름없는 보통당원들 댓글:  조회:1125  추천:0  2013-09-11
  3월 8일, 이날도 도문행급행렬차는 제시간에 맞추어 새벽정적을 깨뜨리며 안도현 남구역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탕, 탕, 탕” 어지럽게 들려오는 문두드리는 소리. “문 열어주십시요. 문 좀…” 뒤따라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 “이봐요. 누가 왔어요. 빨리…” 왕영명의 안해는 공포에 떨며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워낙 말수가 적고 무던한 왕영명은 안해의 다급한 소리에 와닥닥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가 봉당에 내려서려는 순간 와지끈하고 문걸개가 마사지는 소리가 나더니 뒤미처 장승같은 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 왕영명은 흠칫 놀랐다.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 뒤따르는 의심과 함께 그는 방어태세를 취하였다. 때마침 안해가 전등을 켜자 캄캄하던 집안이 불시에 환해지며 두 검은 그림자의 형체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딱 붙어있었다. 그중 한사람은 온 얼굴이 피투성이였다. “아!” 왕영명내외가 그들의 두발에 채워진 족쇄를 보았을 때 저도 모르게 새된 소리를 질렀다. 안해는 그저 벌벌 떨기만 했다.  (도주범!) 왕영명의 틀림없는 판단이였다. 그는 궁리했다. 오래 머뭇거리고있어서는 안된다. 이자들의 몸에 무슨 흉기가 있지나 않는지? 탈옥범인지, 아니면 압송도주범인지 딱히 알바는 없으나 경찰을 해지고 도망나온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 나같은 사람을 해치기는 아주 헐할것이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그들을 전혀 당할수가 없다. 그렇다고 곰상곰상 그들의 말만 들어준다면… “자, 이쪽 방으로 들어갑시다.” 이런 저런 궁리를 돌리던 왕영명은 아무일 없는듯이 자신을 진정시키면서 건너방에 들어가 쉬라고 두 도주범에게 말을 건늬였다. 두 도주범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여간 주의하지 않았다. 왕영명은 도주범을 피하며 단한번의 눈짓을 하였다. 그것은 이 위급함을 빨리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신호였다. 이 신호는 특별한 훈련된 동작도 아니요, 부부간이 사전에 약속을 한것도 아니였지만 안해는 곧잘 그 신호의 함의를 알수 있었다. 남편이 도주범을 데리고 건너방에 들어가며 문을 꾹 닫자 안해는 문을 열고 바람같이 밖으로 나왔다. 남편이 “알리라”고 눈짓했는데 도대체 누구부터 알려야 하는가? 남편은 당원이다. 그러니 가장 바쁠 때면 그래도 당원들을 찾아가야 되지 않겠는가? 그녀는 무작정 촌당지부서기네 집으로 뛰였다. “웬일이요? 빨리 들어오시오.” 당지부서기 양만해는 다급히 문두드리는 30대의 그녀를 인차 맞아주었다. 왕영명의 안해의 말을 듣고 난 양만해는 사태가 긴급함을 느꼈다. 양만해는 더 생각할사이 없이 집을 뛰쳐 나왔다. 그는 남구소학교 교장이며 당지부 선전위원인 진해양을 첫사람으로 찾았다. 찾아온 사연을 대충 들은 진선생은 재빨리 옷을 주섬주섬 주어입으며 밖으로 나왔다. 조직위원네 집으로 향하던 양만해서기는 인차 발길을 돌려 전화가 있는 기간민병인 양동무네 집으로 달렸다. 공안기관에 먼저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번개쳤던것이다. 전화는 인차 걸렸다. 안도현공안국형사경찰대에서는 인차 갈테니 범죄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시간만 지연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양만해서기는 그 즉시로 당지부 조직위원과 기타 당원들을 찾아 떠났다. 그런데 길가에서 그는 남구역 역장을 만났다. 남구역 역장도 양만해서기를 찾던중이였다. 역장의 말에 의하면 급행렬차가 남구역을 지날 때 웬 사람이 창문유리를 마스고 달리는 렬차에서 뛰여내려 도망했다는것이였다. 그래서 도주범이 아닌가싶어 찾는중이라고 했다. 양만해서기는 역장(공산당원임임)을 보낸후 로인과 병자들을 제외한 젊은 당원과 기간민병을 거의다 동원하였다. 10여명이 잘되였다. 이럴즈음 왕영명의 집안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 “좀 먹을것이 없소? 촐촐해서 죽겠소.” 한도주범의 말이였다. “당신들은 왜 도망하는거요? 이 밝은 천지에서 도망을 하면 어디로 간다구 글쎄..” 게걸스레 밥을 입에 퍼넣는 그들을 보고 왕영명은 롱삼아 이런 말을 걸었다. 도망에 명을 맡긴 죄인들이라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모를쇠를 놓는것이 오히려 그들의 의심을 더 자아낸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아니, 우리는 큰 죄를 지은것이 아니라 렬차안에서 옷견들을 훔치다가…” 그들은 뒤말을 흐리였다. “큰 죄도 아닌데 도망은 왜 하는거요?” 사람들이 모여들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겠다고 생각한 왕영명은 무척 관심을 모으는듯 우정 이런 저런 말을 늘여놓았다. “야 이거 말도 많다. 그러지말구 이 족쇄나 끊어주오. 그러면 이 은혜를 한일 잊지 않겠소.” 두 도주범은 눈을 부라리며 위협도 해보고 좋은 말로 구슬려보기도 했다. “다른걸 해달라면 해줄수 있지만 이것만은 정말 못하겠소. 죄를 지으면 혼자서 지을게지 나까지 죄를 짓게 해서야 되겠소? 난 못하겠소.” 집주인의 방조를 받을수 없게 된 그들은 집구석을 두루 살피다가 도끼를 발견하자 그것으로 족쇄를 까부시기 시작하였다. “짤랑!” 족쇄가 끊어졌다. 때를 같이하여 마을 사람들이 문을 떼고 욱 모여들었다.  인젠 “자유”를 찾았다고 기뻐하던 두 도주범은 아연해졌다. 너무나도 생각밖이였다. 그것은 아련해 보이는 집주인의 안해가 지금도 그냥 저쪽방에서 우들우들 떨고만 있으리라고 여겼던것이다. 뒤이어 공안일군을 태운 찌프차도 들이닥쳤다. 도망하여 한시간도 못되여 두 범죄자는 또다시 법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흑룡강신문≫ 1989. 6. 1.
33    사원들을 치부의 길로 이끄는 인민대표 댓글:  조회:1339  추천:0  2013-09-05
사원들을 치부의 길로 이끄는 인민대표 -룡정현 광개향 광소촌 당총지서기 박룡호에 대한 이야기   지난 5월 9일, 룡정에서 도문으로 향해 질주하던 뻐스가 광개향 광소촌에 와 멈추어 섰다. 이때 보통키에 두눈이 부리부리한 한 중년남성이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뻐스에 올랐다. 그가 바로 전국인대6기 2차대회에 참가하러 북경으로 향하는 룡정현 광개향 광소촌 당총지서기이며 제6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인 박룡호이다. “잘 가셔요.” “안녕히 다녀오십시요.” 사람들은 뻐스가 굽인돌이를 돌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사원들의 마음은 자기들을 치부의 길로 이끌기 위해 애써온 그에 대한 감사의 정으로 부풀어 올랐다. 지난해 9월 13일 박룡호는 광소촌에 찾아온 길림성인민정부 부성장 조남기한테서 통화지구에서 포도재배를 많이 하고 잘한다는 말을 들었다. 박룡호는 인차 19명의 사원을 데리고 통화지구 류하현 타요령향의 “포도왕”김원길을 찾아가서 포도재배경험을 듣고 경제효과를 따져본 뒤 집에 돌아왔다. 박룡호는 집에 돌아온 그 즉시로 당총지확대회의를 열었다. “우리 촌에서도 전문호를 적극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 간부들이 전문호의 튼튼한 뒤심이 되여야 합니다.” 박룡호를 비롯한 당총지 위원들은 사원호들을 찾아다니면서 포도를 재배할것을 선전했다. 그리고 대대방송을 통해서도 선전했다. 며칠사이에 50여호에서 포도를 재배를 하겠다고 신청해 나섰다. 박룡호는 지난해 10월달에 과수기술원들을 데리고 두번째로 통화지구 김원길을 찾아가 포도묘목 4만그루를 사왔다. 포도모를 가져온후 박룡호는 먼저 자기 집의 120평방메터에 달하는 터밭에 온실을 지어놓고 묘목을 과동시켰다. 지난 1월 4일 통화지구의 김원길이 광소촌에 와 보고 “확실히 하자고 잡독리를 한다.”고 하면서 포도모 5만그루를 무상으로 더 보내왔다. 사원들이 포도모를 가져간후 박룡호는 사원호들을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배워온 기술을 전수했다. 지난 4월 20일 박룡호는 8대 김창세네 집으로 갔다가 포도모의 잎이 너무 자란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런 원인은 실내온도가 높고 수분이 너무 많기때문이라고 인정하고 인차 방송을 통해 포도모의 온도, 습도, 통풍 등에 대한 기술조치를 여러번 알려주었다. 북경으로 떠나던 날 새벽에도 그는 포도기술문제를 가지고 방송선전을 했다. 지금 이 촌에는 60여호가 9만그루의 포도를 재배하고있다. 박룡호는 전문호, 중점호를 부추켜주기 위해 각별의 노력을 들였다. 재작년 11월말에 6대의 한 청년이 박룡호서기를 찾아왔다. 박룡호는 그 청년이 집안에 들어와서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것을 보고 짐작가는데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소? 말해 보오.” 박룡호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전… 뜨락또르를 사서 부업하러 하는데 자금이 천원가량 모자라 그럽니다.” 그 청년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런 곤난쯤이야 뭐 못해결할라구.” 박룡호는 이렇게 말하며 자기 집의 저금통장을 몽땅 털어주었다. 지난해 11월에 그 청년이 돈을 돌려왔다. 그런데 며칠 안되여 6대의 한 사원이 찾아와서 뜨락또르를 사겠으니 돈을 꿔달라고 청들었다. 그는 두말없이 돈 1,300원을 그의 손에 쥐여보냈다. 광소촌 3대에는 참군했다가 신병을 얻어 로동능력을 상실한 문기송사원이 있다. 호주가 늘 시름시름 않다보니 이 집 생활은 말이 아니였다. 지난해 봄 박룡호는 이 가정을 찾아갔다. “남들은 지금 부유해지고있는데 이 집에서는 가만있겠습니까?” “우리야 용빼는수가 있습니까?” 문기송의 안해가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기에 힘에 알맞는 일거리를 쥐여야지요. 소를 치면 안될가요?” “남편이 앓다보니 소야 어떻게 기르겠습니까? 닭치기나 해볼가 하는데 손에 아무것도 쥔것이 없어서…"   "해보려는 결심만 있으면 안될리 없지요. 자금은 제가 힘써 보겠습니다.” 박룡호는 그길로 향신용합작사에 가서 리자없는 대부금 300원을 내다주었다. 지난해 문기송가정에서는 닭치기를 해서 순수입 1,000원을 올리고 닭치기전문호로 되였다.  박룡호가 힘쓴 보람으로 지금 이 촌에는 닭치기, 운수, 포도재배, 소사양 등 업종에 종사한 전문호가 170여호로 늘어나 전 촌 사원호 총수의 40%이상을 점하게 되였다. ≪연변일보≫ 1983. 6. 12.
32    “산 뢰봉” 댓글:  조회:1408  추천:2  2013-09-05
“산 뢰봉” -연길뻐스부 민병 림학성에 대한 이야기   연길뻐스역으로 가게 되면 보통키에 27, 8세 되여보이는 한 청년복무원이 늘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안아 뻐스에 올려주며 려객들의 짐을 들어주는것을 볼수 있다. 그가 바로 시운수공사 모범민병이며 “산 뢰봉”이라고 창찬받는 림학성동무이다. 림학성은 1980년에 부대에서 제대되여 이 뻐스부에 배치받았다. 그는 뢰봉을 본받아 뻐스부를 활무대로 삼고 손님들에게 딱한 사정이 있을 때면 선뜻이 나서서 해결해 주었고 자각적으로 인민을 위해 좋은 일을 찾아했다. 지난 1월 9일 오후 4시경이였다. 여섯살나는 녀자애가 길을 잃고 뻐스부문앞에서 울고있는것을 본 림학성은 그애한테 다가가서 집이 어데 있는가고 물었다. 그애는 눈물을 씻으면 그저 북쪽켠만 가리켰다. 림학성은 두말없이 이 녀자애를 업고 흥안, 연집으로 가는 신작로에 올랐다. 그날 따라 북풍이 몰아치면서 랭기가 몸에 스며들었다. 만나는 길손들과 이 애를 아는가 물었지만 모두 모른다는 것이였다. 대지에는 어듬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 애의 부모는 얼마나 속이 타겠는가?” 시가지를 벗어나 한 마을 에 이르니 등에 업힌 녀자애가 저기 보이는 것이 자기집이라고 좋아서 소리치는것이였다. 학성이는 즐거운 심정으로 그집에 들어섰다. 헌데 집이 텅 비여있을줄이야! 그러자 녀자애는 또 쿨쩍거리기 시작했다. 학성이는 어린애를 달래는 한편 부엌에 불을 지피고 어린애한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자기손으로 그애의 손발을 녹여주었다. 그래도 녀자의 부모는 돌아오지 않았다. 학성이는 할수 없이 어린애를 이웃에 맡기고 귀로에 올랐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때 녀자애의 아버지는 출장나갔고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였던것이다.  녀자애는 할머니가 없는 틈에 신작로로 나온것이 그만 길을 잃고 뻐스역까지 온것이다. 지난해 12월말의 어느날이였다. 퇴근시간이 되자 림학성은 습관대로 대합실을 한바퀴 돌아보다가 60여세 되여보이는 한 할머니가 면색이 창백하여 걸상에 누워계시는것을 발견하였다. "할머니 웬 일입니까?" 림학성이 다가가 묻자 그 할머니는 맥없이 머리를 돌리며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난 집이 위자구에 있는데 연길에 병보이러 왔댔소. 그런데 차를 놓쳐 여기서 하루밤 묵자구…" “병있는 할머니를 어떻게 이리 찬 곳에서 주무시게 한단말인가? 그러다 병이나 더해지면…” “할머니, 려관에 갑시다.” 학성이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할머니를 업고서 뻐스부 부근에 있는 건강려관으로 모셔간 다음 과자와 사탕을 사다 할머니께 드렸다. 이튿날 아침, 그는 려관에 가서 려관비를 결산하고 할머니를 뻐스역까지 업어온 다음 또 자기돈으로 차표까지 사서 할머니를 위자구로 가는 뻐스에 모시였다. 그 할머니는 너무 감동되여 “정말 친손자보다도 낫소!”하고 연신 칭찬하였다. 한번은 또 이런 일이 있었다. 룡정에서 온 손님 한분이 병으로 정신을 잃고 대합실에 쓰러졌다. 이를 본 림학성은 인차 그를 업고 연변병원으로 달려가 구급치료를 하여 그의 생명을 구하였다. 그는 자기 돈지갑을 털어 환자의 치료비를 물었다. 정신을 차리고 영문을 알게 된 환자는 림학성의 두손을 잡고 눈시울을 적시였다. 림학성은 뻐스역에 온후로 2년 남짓한 동안에 이처럼 인민을 위해 200여가지 좋은 일을 하였다. 이러한 민병을 그누가 칭찬하지 않을수 있으며 “산 뢰봉”이라 한들 어찌 과언이라 하겠는가?      ≪동북민병≫ 1982년 7월호
31    신근한 로동 희망찬 생활 댓글:  조회:1582  추천:0  2013-08-16
신근한 로동 희망찬 생활 -삼합3대 리방길가정을 찾아서   록음이 짙은 6월 중순의 어느날, 기자는 양어장에 과수원까지 가지고있다는 연길현 삼합공사 삼합3대 사원 리방길가정을 찾았다. “뭐 해놓은 일도 없는데 이렇게 찾아오기까지 하셨습니까?” 삼합대대마을에서 약 2리가량 떨어져 있는 양어장에서 리방길사원은 기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 양어장을 언제 만들었습니까?” 기자의 물음에 그는 양어장을 만들던 일을 이야기 하였다. 리방길사원은 논물이 고여 늪을 이룬 7무가량 되는 이곳에 눈독을 들인지는 오래였다. 그는 양어장을 만들자고 생산대지도부에 수차 제기했으나 생산대에서는 일손을 뺄새 없어 손을 대지 못하고있었다. 그러던중 금년에 생산대에서 사원호도거리책임제를 실지하자 리방길사원은 대부금 1,100원을 맡아서 양어장을 꾸리였다. 그는 늪을 손질하고 한마리에 5전 5리씩 하는 새끼고기 1만마리를 사다가 늪에 넣었다. 그리고 정년퇴직간부 김호섭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양어장에 나가 물오리가 해치는가고 살펴보았으며 늪가의 풀을 말끔히 베여주었다. “가을에 가서 수입을 얼마나 올릴수 있겠습니까?” “가을에 물고기 6-7천근을 잡을것 같습니다. 현수리국에서 고기 1근에 일원씩 처리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수입이 6-7천원이 되겠지요.” 퍼그나 커보니는 이 양어장에서 한뽐씩 잘되는 물고기들이 살진 몸뚱이를 물우에 솟구쳤다가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흐뭇한 마음으로 고기들에 눈을 팔고있는 나를 보고 리방길사원은 7월에는 양어장곁에 막을 짓고 나와있으면서 양어장을 관리하겠다고 한마디 보태였다. 우리는 그가 가꾸었다는 과수원으로 발길을 옮기였다. 집남쪽비탈에 돌을 쌓아 다락밭을 만들고 거기에 과일나무를 심은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야!”하고 감탄이 나왔다. 그는 7년전부터 돌각담을 쌓고 다락밭을 만든 다음 거기에 과일나무를 심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이게 어느때라고 함부로 덤벼치느냐 하며 그를 극구 말리였다. 그러나 그는 불모의 땅에 과일나무를 심는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하며 아침전, 점심 그리고 달밤을 타서 널려있는 돌들을 주어모아 돌각담을 쌓고 다락밭을 만들고 거기에 과일나무 165대를 심고 거름을 주며 알뜰히 가꾸었다. 스산하던 산비탈은 그의 노력에 의해 마침내 푸르른 과원으로 변모되였다. 먼저 심은 과일나무들에는 과일이 맺히고있었다. “리동무네는 전문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논 1헥타르에 밭 6무를 도맡았습니다. 농사일이 바쁠 때면 외지에 나간 아들들이 집에 돌아와서 농사일을 돕지요. 우리들은 금년에 벼모내기를 6월 5일에 끝냈습니다. 지금 논의 벼도 밭의 농작물도 잘 자라고있습니다.” 리방길사원네 양어장, 과수원을 돌아보고 진짜 신근한 로동으로 가정살림을 꾸려가는 그들 가정이 더없이 부러웠다. “가정에서는 정말 맡은 포전도 잘 다루고 가정부업도 통이 크게 벌렸습니다.” “네, 이전엔 아무리 재간이 있어도 발휘하지 못하였지만 지금은 시름놓고 가정살림을 부유해지게 할수 있지요.” 이렇게 말하는 리방길사원의 얼굴에는 자랑과 긍지, 자부심이 함뿍 담겨있었다.      ≪연변일보≫ 1982. 6. 28.  
30    그는 먹게 접어들었다. 댓글:  조회:1310  추천:0  2013-08-09
그는 먹게 접어들었다.     나는 얼마전에 도문시에 갔다가 홍광공사 수남5대의 리창한동무가 지난해 2월에 생산대 대장으로 선거될 때 "5년 동안만 련속 생산대 대장으로 고정시켜 주십시요. 그러면 저는 책임지고 나서겠습니다." 라고 하였다는 말을 듣고 귀가 솔깃한 나머지 그를 찾았다.   1958년부터 1967년까지 생산대 대장사업을 하다가 림표"4인무리"의 극 "좌"적 로선의 박해를 받아 여러가지 억울한 루명을 쓰고 한쪽에 밀려나앉았던 그가 이런 요구를 제기한데는 그렇다 할만한 까닭이 있었다.   리창한이 한쪽에 밀려나앉은 12년 동안에 이 생산대에서는 생산대장을 10명이나 바꾸었다."돌개 생산대장"이란 별명이 달릴만도 했다. 쩍하면 생산대장을 바꾸는 통에 나서는 사람은 장원한 타산을 가지지 않고 당해치기만 하다보니 생산대의 기본건설이 잘되지 않는것은 물론 량곡수확고와 사원수입도 해마다 내리막재주만 피워댔다. 과연 한심하기도 하고 원통하기도 한 일이였다. 전 대대치고 일곡수확고가 제일 높던 이 생산대가 어떤해는 밥벌이도 하지 못하여 국가대여곡을 먹지 않으면 안되였으니깐 말이다. 생산대장을 온정시키지 않고 생산대의 면모를 어떻게 개변시킬수 있겠는가? 이 모든 정형을 자기 눈으로 뻔히 보아오던 리창한은 사원들이 자기를 대장으로 천거하자 아무래도 할바에는 좀 먹게 해보자고 작심하고 그런 요구를 떳떳이 제기하였던것이다.   당조직의 신임과 사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생산대 대장으로 나선 리창한은 일거리마다 기준량관리를 엄격히 실시하면서 사원들의 앞장에 서서 억세게 일했다. 사원군중들이 대장을 믿고 또 대장의 지휘에 잘 맞추어 주니 못해낼 일이 없었다. 지난해 이 생산대에서는 알곡총수화고를 재작년보다 39.9%를 더 높여 국가에 여유량곡을 1만2000근을 팔고 인구당식량이 502근씩 돌아가게 하고 로력공가를 그 전해의 81전으로부터 1원 2전으로 높였으며 인구당 수입을 그 전해의 120원으로부터 155원으로 높였다.   지난해 가을에 잡아들자 그는 생산대의 기본건설을 시작하였는데 180평방메터 되는 담배저장실과 105평방메터 되는 담배유리온실을 지었으며 탈곡장주위에 울바자을 든든히 두르고 방화용 우물을 파놓았다. 이와 더불어 올해 농사차비까지 깐지게 해놓았다. 지금까지 계획보다 400여립방메터 더 많은 1,420립방메터의 거름을 반출하였다. 리창한의 첫걸음을 눈여겨 본 사원들은 신심으로 벅차서 더욱 높은 로동열의를 보이고있다. 리창한을 만나보고 또 생산대 이모저모를 돌아본 나는 리창한동무처럼 1년이 아니라 장구적으로 생산대를 잘 꾸리자고 접어든다면 아무리 락후하거나 가난한 생산대라도 조만간에 춰세울수 있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연변일보≫ 1980. 3. 5.
29    꽃을 만난 나비 너울너울 춤추네 댓글:  조회:1682  추천:0  2013-07-12
우리 말에는 이성에게 마음이 쏠리는것을 표시한 속담으로 “물 본 기러기, 꽃 본 나비”라는 말이있다. 아마 여기에서 물이요 꽃이요 하는 말은 필시 녀성을 두고 하는 말일것이다. 그런데 요즘 나는 훈춘현 마천자공사 마신대대에서 우에 말한 속담과 딱 들어맞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해 12월 9일, 훈춘시내로 생산대 짚을 실어다 팔고 집으로 돌아오던 마신1대 사원 김동섭은 소수레에 앉아 흥흥 코노래를 부르며 소를 재우쳤다. 하긴 김동섭에게 있어서 흥타령이 날만도 하였다. 올해따라 마신대대는 대풍이 들어 말그대로 집집이 오구작작, 사람마다 희희락락 웃음꽃으로 나날을 보내는 판이니까 말이다. 그가 얼마쯤 갔을 때였다. 양포공사로 간다는 한 할머니와 40여세 되여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소수레에 앉자고 청을 들었다. 김동섭의 선선한 대답에 수레에 앉은 할머니와 아주머니는 그가 마신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 형편을 물었다. 그러지 않아도 대풍을 안아와 뭉치돈을 탄 자기 대대 사람들의 기쁨을 어디다 말하지 못해 궁금해 하던 김동섭은 때를 만난지라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마신1대만 보더라도 돈을 타지 못한 집이 없지요. 식량표준은 매인당 750근이고 공가는 2원 50전씩 갔지요. 돈을 제일 많이 탄 집에서는 2,900원이요, 제일 적게 탄집이 300원이랍니다. 그래서 지금 자전거, 재봉침을 다투어 사느라고 야단입니다. 어떤 집에서는 텔레비죤까지 사놓았지요!” 그 할머니와 아주머니는 이 소문을 못들은것도 아니고 지나 다니며 못본것도 아니였지만 이 청년의 말에 혀를 끌끌 찼다. “마신에 맞춤한 총각이 있으면 오죽 좋겠소?” 할머니 이 말에 김동섭은 귀가 번쩍 띄웠다. “우리 마신대대에는 27-28살되는 총각들이 많습니다. 저도 총각입니다. 얌전한 처녀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요.” 김동섭은 제법 푸접좋게 말하였다. 이때야 할머니는 김동섭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하였다. “말이 낫으니 말이지 이 할머니가 지금 사위감을 고르는 중이요.” 옆에 앉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아주머니가 넌지시 곁쐐기를 질렀다. 김동섭은 원래 처녀들과 마주쳐도 먼저 눈길을 피하는 수집은 성격을 가지고있지만 아주머니의 이 말을 듣고 그 할머니쪽으로 돌아 앉으며 롱을 걸었다. “제같은 사람한테 딸을 주면 평생 고생은 안합니다.” 이 일이 있은뒤 김동섭은 롱담삼아 한 그 말을 감감 잊어버렸다. 그러나 시집 보낼 딸을 가진 그 할머니는 이 총각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의 말을 스쳐버리지 않았다. 어느 하루 할머니는 집안식구들을 앉혀놓고 속생각을 터놓았다. “마신의 그 총각이 마음이 고와보이구 듬직해 보이더만!” “고장부터 마음에 듭니다. 그런 곳에 시집보내면 남부럽지 않게 살지요.” 아들과 며느리도 맞장구를 쳤다. 키는 보통키이고 마음씨 곱고 예쁘장하게 생긴 처녀는 어머니, 오빠, 형님의 말을 다소곳이 들으면서 골을 숙인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녀의 생각은 여느 집안식구들보다 깊었다.  (시내면 어떻고 농촌이면 어떠랴? 새시대의 청년으로서 어찌 잘 사는 고장만 탐내겠는가? 하지만 가난한 면모를 개변한 그들의 정신은 얼마나 고귀한가? 황금파도 물결치던 벼포기마다에 낯모를 그 총각의 땀방울도 스며있을것이다.)  이런 생각에 잠긴 처녀는 은근히 가슴이 울렁거리고 그 총각을 만나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처녀는 둘이 손잡고 사회주의 새 농촌을 꾸릴 황홀한 래일을 그리며 달콤한 희망을 가슴속에 수놓기 시작하였다. 소뿔은 단김에 빼야 한다고 처녀의 오빠는 김동섭의 정황을 알아보려고 마신으로 갔다. 집으로 돌아온 오빠는 동네 사람한테서 알아보고 또 당자와 이야기 해보았는데 과연 좋다고 하였다. 미구에 동섭이와 포자연 4대에 있는 그 처녀가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런데 이전엔 왜서 마신대대 총각들이 대상을 얻기 바빴다고 하는가? 그것은 마신이 구차했기 때문이다. 3년전만 해도 전 대대 평균 공가가 60전이고 인구당 식량이 410근 좌우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천자공사에서 구차한 곳을 보려면 마신에 가서 보라고까지 하였다. “4인무리”가 녹장난 뒤 마신대대의 사람들은 농촌에서의 당의 제반 정책의 위력하에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뭉쳐 싸워 가장 가난하던 이고장을 전 현치고도 가장 부유한 고장으로 만들었다. 신록이 움트는 새 봄, 푸르싱싱한 벼가 키를 다투며 자라는 한 여름철, 황금나락이 물결치는 가을, 줄지어 일어선 벽돌집들은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고 놓지 않는다. 그러니 어찌 딸가진 부모들이 이런 풍요한 고장으로 시집보내려 하지 않고 또 처녀들이 새 생활이 꽃피는 이 고장 총각들과 연분을 맺으려 하지 않으랴? 살림이 활짝 꽃피니 몇해째 장가들려고 벼르던 총각들이 겨울 한달사이에 다섯이나 대상을 얻었다. 여기에 동섭이까지 합하면 여섯이나 된다. 실로 꽃 만난 나비, 물 만난 기러기란 이래 두고 하는 말이리라!      ≪연변일보≫ 1980. 2. 16.  
28    인민의 참된 의사-리춘홍 댓글:  조회:2364  추천:1  2012-12-03
인민의 참된 의사-리춘홍   -훈춘현 하다문공사 중심대대 맨발의사 리춘홍에 대한 이야기   “의사가 되여 인민의 고통을 덜어주리라!” 이것은 훈춘현 하다문공사 중심대대 맨발의사 리춘홍이 1965년 5월에 현위생학교 대문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가슴에 뿌리 내린 굳은 신념이였다. 이 드팀없는 신념을 안고 3년동안 학습한 리춘홍은 마침내 태평대대 맨발의사로 되였다. 그때로부터 그는 농촌의료사업의 보람찬 길에서 인민을 위해 전심전의로 복무하여 왔다. 학교에서 의학공부를 3년밖에 못한 리춘홍은 의료사업가운데서 수시로 곤난에 봉착하였다. 특히 의료수준이 낮은것이 제일 큰 난관이였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부단히 실천속에서 인민의 건강을 위해 기어히 의료수준을 높이리라 마음 먹었다. 이렇게 마음 먹은 그는 의학서적을 꾸준히 읽으면서 수많은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리춘홍이는 밤늦게까지 책을 보다가도 책상에 엎드린채 소르르 잠든적이 한두번만 아니였다. 그러다가도 그는 안해가 방문 여는 소리에 벌떡 깨여나서는 찬물에 세수를 하고는 또 의료서적을 뒤적이군 했다. 그는 밭머리에서 회의전 시간에도 식사시간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의 이런 피타는 노력은 그의 의료수준으로 하여금 재빨리 제고되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군중들도 날이 감에 따라 그를 더욱 신임하였고 열밤중에 찾아가도 얼굴한번 찡그리지 않는 그를 “우리의 의사”라고 친절히 불러주었다.  1972년 11월 어느날 밤 열시경에 그는 신흥에 있는 아버지의 병이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십리길을 단숨에 달려갔다. 집에 도착하니 아버니는 위출혈이 와서 의식을 잃었던것이다. 그는 긴장히 서둘러치며 약 반시간가량 아버지에게 구급조치를 대고있는데 한대대에 있는 사원이 탐투성이 되여 집안에 들어섰다. 그 사원은 가쁜숨을 몰아쉬며 아이가 풍을 일구었는데 생명이 위급하다는것이였다. (아직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있는데 이 자리를 떠나면 아버지는 구급해 낼수 없지 않는가?) 리춘홍은 정신을 잃고 신음만 하는 아버지를 내려다 보면서 잠시 안타까운 심정에 사로잡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잠간후 그의 머리속에는 자기가정의 고통만 어찌 고통이라 하랴? 애가 풍을 일구었으면 부모들은 얼마나 놀라있겠는가? 인민의 의사로서 남의 고통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것이 마땅히 취해야할 태도라는 생각이 번개쳤다. 그는 뒤미처 그 무엇을 더 생각할 사이 없이 약가방을 둘러메고 그 사원과 함께 달려가 마침내 어린아이를 사경에서 구해내였다. 이때 손에 땀을 쥐고 어린애와 리춘홍의사의 일거일동을 지켜보던 그집 식솔들은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리춘홍에 대한 감사의 정을 금치 못했다. 어린 아이를 구급하느라고 피로해진 리춘홍은 새벽 세시경에야 집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그런데 또 한사람이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그의 안해는 간밤에 세사람이나 데리러 왔댔다고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또 지체없이 문을 차고 나서더니 아침 다섯시가 넘어서야 왕진을 마치고 간신히 발걸음을 떼며 집으로 돌아 왔다. 리춘홍의사의 지성어린 손길에 다른 환자들은 모두 별고없었으나 그의 아버지만은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리춘홍의사는 몇년간 태평대대 의사로 있다가 1973년 3월에 공사소재지인 중심대대에 옮겨 왔다.  1975년 3월이였다. 68세나는 윤금복로인이 뇌출혈이 와 2일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리춘홍은 윤로인 병때문에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는 서적들도 뒤져보고 다른 의사들과 물어도 보면서 윤로인의 치료에 온갖 지성을 다 들이였다. 그런데 윤로인의 심장맥박이 점점 미약해지더니 그만 호흡이 중단되군 했다. 이렇게 되자 다른 의사들은 인젠 희망이 없다고 했고 윤로인네 가정에서도 관을 준비하려 했다. 하지만 리춘홍은 백분의 일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숨이 넘어가는 한순간까지라도 치료를 들이대는것이 의사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숨져가는 윤로인에게 혈압을 올리는 주사를 놓으려 했다. 그런데 피골이 상접한 윤로인의 팔에서는 혈액순환까지 정지되다보니 혈관을 찾을래야 찾을수 없었다. 리춘홍은 윤로인을 구해내고야 말리라는 불타는 마음과 굳은 신념을 지니고 마침내 혈관을 찾았다. 순간 리춘홍의 뜨거운 정성이 슴배인 주사약물이 윤로인의 혈관을 통하여 심장에 흘러 들었다. 그러자 약 2분동안 숨이 끊어졌던 윤로인은 긴숨을 한번 몰아쉬더니 심장이 약간씩 뛰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리춘홍은 윤로인을 구급할수 있다는 신심을 다지고 옹군 엿새동안이나 윤로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치료를 다그쳤다. 그는 윤로인에게 주사를 놓아준다 초약을 대려준다 지어 대소변까지도 직접 받아내면서 온갖 정성을 다 넣었다. 그런 보람은 헛되지 않아 윤로인은 마침내 의식을 회복하게 되였다. 윤로인이 소생하게 되자 그의 친척일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리의사 덕분에 로인을 구했다면서 그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렸으면 좋을지 몰라 했다. 그후 3개월동안 리춘홍의사의 치료를 받아 걷게까지 된 윤로인은 구사일생이라고 하면서 리의사를 찾아 아들이면 이보다 더 끔찍하겠는가고 감격해 말하였다. 그러면서 윤로인은 “다 죽게된것을 살려주었는데 인제는 일터에서 죽어도 원이 없다.”라고 하며 이듬해 모철에는 벼모까지 뽑았다. 작년 가을 경로원의 박금복할머니가 공사병원에 입원하였었다. 박할머니는 딸집에 있으면서 리춘홍의사의 치료를 받을것을 소원하였다. 리춘홍의사가 박할머니를 맡아본 첫날 박할머니의 열이 불시에 41.4도까지 올라 헛소리도 하고 점차 의식을 잃었다. 환자에 대한 언제나 불같이 뜨거운 마음을 지닌 리춘홍의사는 14일동안이나 하루에도 몇축씩 찾아다니며 박할머니에게 알콜로 온몸을 닦아준다, 입안에 약도 떠넣어준다 하면서 무진애를 다 썼다. 그런 보람으로 나중에 박할머니의 열이 38도로 내려왔다. 리춘홍은 대대합작의료참에 경제가 충족하지 못한 정황하에서 한쌍되는 밭을 가꾸어 여러가지 약재를 심고 제약공장도 꾸려 많은 약들을 자체로 해결하였다. 하여 합작의료자금이 8백여원으로부터 지금은 7천 600원으로 늘어났다. 원래 중심대대는 전현에서 질병률이 제일 높은 대대의 하나였다. 리춘홍의사는 몇년래 예방을 위주로 하는 방침을 실행하면서 환경위생을 잘 틀어 쥐였다. 그는 친히 삽을 메고 변소도 치고 사원들과 함께 재료도 메여다 변소도 짓고 쓰레기를 끌어다 고온발효거름을 만들었으며 생산대 위생원을 데리고 산에 가서 할미꽃뿌리, 고삼 등 약초를 캐여다 달이여 집집에 나누어도 주고 전간에도 가져다 줌으로써 리질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이렇게 예방위주의 방침과 환경위생을 잘 틀어쥔데서 리질, 간염 등 여러가지 전염성 발병률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리질이 제일 심하였던 1974년에는 질병발병률이 1천 2백여인차였는데 작년에는 72인차로 줄어들었다.  이와 같이 리춘홍의사가 환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여온 범상치 않는 로정에는 깊은 밤에 바지를 돌려 입고 환자를 구하러간 우스운 이야기며 환자를 간호하느라 사흘동안이나 굶어 길가에 쓰러진 놀라운 일이며 환자집의 나무도 패주고 불도 때준 감동적인 이야기는 이루다 헤아릴수 없다. 이처럼 인민에 대하여 한없는 사랑을 지니고 충성스럽게 사업해온 리춘홍의사는 1977년부터 전 주 맨발의사 선진개인으로 표창받았으며 올해는 길림성 춘기애국위생선진생산자로 표양받았으며 몇년래 련속 훈춘현 우수당원, 로동모범으로 당선되였다.   연변인민방송 1979년 2월 5일
27    전국 교통안전기준병-김청금 댓글:  조회:2209  추천:0  2012-11-27
1981년 4월 15일에 있은 연길시려객운수공사 종업원대회에서는 06-50501호 련결뻐스운전사 김청금에게 교통부에서 보내여온 “전국교통안전기준병”이란 상장과 금메달을 수여하였다. 1950년 조선전쟁터에서 군수품을 수송하는 운전사였던 김청금은 1958년에 연길시운수공사에 배치되여 왔다. 그는 초기에는 짐차를 몰았는데 후에는 뻐스를 몰고 려객을 수송하게 되였다. 지난 32년 기간에 김청금은 “안전하게 차를 모는것이 첫째”라는 사상을 튼튼히 세우고 차를 몰아 116만여킬로메터의 로정(지구를 스물다섯번 돌수 있는 거리에 상당함)을 안전하게 달렸다. “안전수송”에 일념을 불태워 온 김청금은 자동차를 자기의 눈동자처럼 아끼면서 일상적으로 빈틈없이 점검보수하여 수송과업수행가운데서 뜻밖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루 막아버렸다. 그는 30여년을 하루와 같이 일찍 출근하여 차를 세밀하게 검사하고 알뜰하게 보수보양하여 고장날 흠집이 없다고 판정된 때에야 발차하군 하였다. 많은 재부를 창조해주는데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지난해만 해도 그는 년간려객수송과업을 119%넘쳐 완수하면서 1,500킬로그람의 휘발유를 절약하고 1,600여원의 수리비를 절약하여 나라에 3만 2,000여원의 리익금을 올려주었다. 올해 첫계도에도 그는 려객수송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여 나라에 8천여원의 리익금을 올려주었다. 이처럼 수송과업수행에서 빛나는 성과를 올린 김청금은 주와 시 로동모범, 길림성교통안전기준병의 영예를 안게 되였으며 이번에 우리 성에 셋밖에 없는 “전국교통안전기준병”의 한 사람으로 되였다. ≪연변일보≫ 1981.5.14.
26    무사고운행 100만킬로메터 댓글:  조회:2354  추천:0  2012-11-27
무사고운행 100만킬로메터 - 연길시려객운수공사 뻐스운전수 김청금에 대한 이야기 100만킬로메터 무사고운행! 이것은 연길시려객운수공사의 련결뻐스 운전수 김청금동무가 29년간 조국과 인민에게 충성을 고스란히 몰부어 온 자랑찬 기록이다. 1 1950년부터 자동차핸들을 잡은 김청금동무는 가렬처절한 조선전쟁터에서,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우는 청장고원에서, 연변의 변강산촌에서 시간과 경주하며 급행차를 몰아왔다. 그가 달린 길은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낮설었고 그가 다룬 자동차는 쏘련제, 미국제, 일본제, 국산제로 무려 10여형종으로 바뀌웠다. 그러나 청금이에게 있어 “안전운행!” 이 네글자만은 언제 어데서 어떤 급선무를 집행하든지를 물론하고 변함없이 심장에 새겨졌고 뇌리의 판박이로 되였다. 그는 안전운행을 위하여 오관의 감각을 강구었고 안전운행을 위하여 심혈을 쏟아부었다. “다이야가 구을기 시작하면 교통사고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운전수는 자신의 일거일동이 인민의 생명안전 및 나라의 물질재부창조와 직접적으로 관계되여 있다는것을 한시각도 잊어서는 안된다.” 이 말은 청금이가 운전실에 처음 오르면서 다진 맹세인데 청춘시절부터 운전실에서 머리가 세도록 이 맹세를 점점 더 굳혀 왔다. 그가 연길시운수공사에 온지 2년이 되던 1960년 섣달 어느날이였다. 그는 왕청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뒤바퀴스프링천장이 끊어진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조심히 차를 몰고 오다나니 밤 여덟시가 넘었었다. 공사에 돌아오니 수리공들은 이미 다 퇴근하고 없었다. 뒤바퀴스프링을 혼자서 바꿔넣기는 너무 힘겨웠고 수리하지 않는다면 이튿날 삼도만으로 목재실으러 제때에 갈수 없었다. 이튿날의 운수임무와 안전운행을 위하여 혼자서라도 수리해야겠다고 작심한 그는 자기가 여벌로 두었던 낡은 스프링을 가져다 바꿔넣기 시작하였다. 이때 청금의 집에서는 저녁밥상이 조용히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시정기를 쫒으며 청금이는 수리를 다그치고있었다. 이때 당직원이 다가와 늦었는데 래일 아침에 수리하라고 권하자 청금이는 웃으면서 “이미 고장난 곳을 발견한 이상 손질하지 않고서는 잠이 오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하늘의 별들은 졸고있고 민가의 등불은 꺼진지도 이슥하건만 청금이는 차밑에다 헌 마대를 깔고 반듯이 누워 손전지를 입에다 물고 나사를 조이였다. 뼈를 에이는듯한 설한풍도 심장속을 속속 들이파고드는 랭기도 안전운행을 위하여 고생도 피로도 두려워하지 않는 청금의 피끓는 심장만은 식힐수 없었다. 이와 같이 그는 검사가 끝나지않고서는 손을 떼지 않고 수리가 끝나지 않고서는 차에서 물러서지 않는 자아규정을 세우고 이 규정을 신조처럼 지켜왔다. 조직에서는 원래 화물차를 몰던 그에게 뻐스를 맡겼다. 이때 그는 미국놈들의 폭격에 다섯발가락을 잃은 오른발이 걱정되였고 또한 다른 사심잡념도 없은것은 아니였지만 조직의 수요이고 당의 부름이라고 생각했을 때 두말없이 복종했다. 뻐스를 몰면서부터 그의 책임성은 한결 더 강해졌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여 차를 세심히 검사했으며 시험해보고서야 발차하군 하였다. 퇴근하여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그는 래일 지나야 할 로정을 그려보았다. 고개는 몇이나 되고 굽이돌이는 몇곳이나 되며 위험한 구간은 몇곳이나 되는가를! 청금동무는 교통경찰이 없는 산골에서도 교통지휘패말을 교통경찰로 간주하고 그 패말의 “지휘”대로 고스란히 복종하였다. 1971년 겨울에 툰전으로 갈 때의 일이다. 탄광을 지나면 가파롭고 좁은 올리막길인데 그날따라 눈이 와서 대단히 미끄러웠다. (행여나 굽인돌이로 내려오는 차가 있다면?)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오른쪽으로 비켜 천천히 차를 몰기 시작하였다. 과연 의심골에 범이 있다고 해방패자동차 한대가 쏜살같이 내려오는것이였다. 그 차는 청금의 차앞에서 제동하였지만 길이 미끄러워 차는 멈춰서지 못하고 그냥 내리밀리웠다. 차가 금시 부딪칠 아슬한 찰나에 청금이는 제꺽 오른발로 제동기를 디디고 오른손으로 날래게 단을 꺾어 뒤걸음쳤다. 약 2-3메터의 간격을 두고 얼마 내려오면 청금이도 그만큼 후퇴했고 빨리 미끌면 청금이도 빨리 뒤걸음 쳤다. 뻐스에 않은 손님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쥐였다. 그런데 자동차는 멈추어설줄 모르고 계속 미끌어 내려오기만 했다. 청금이는 평생에 배웠던 재간을 다 피워 계속 후퇴하였다. 청금이의 차가 이제 조금만 더 뒤걸음질하면 벼랑에 떨어질 위기에 다행히도 미끄러져 내려오던 자동차가 청금의 뻐스앞에서 드디어 멈추어섰다. 해방패자동차운전수는 땀을 훔치면서 청금의 손을 뜨겁게 잡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 이렇게 청금동무는 늘 안전을 념두에 두고 경각성을 높였으며 항상 자신의 몸에서 불안전인소를 찾아 그렇게 즐기던 술과 담배마저도 떼버렸다. 2 “자동차는 운전수에게 있어서 병사의 무기와도 같다. 하기에 운전수는 차를 자기의 눈동자처럼 아끼고 보살펴야 한다.” 이는 청금동무가 늘 하는 말이다. 그는 출근해서 절대 한가히 보내지 않는다. 철판도 두드려보고 손잡이도 흔들어보며 나사도 조이고 유리도 닦으며 손이 쉴새 없다. 그는 운전수로서 차를 잘 보양하지 않는다면 그 어느때 기계사고를 빚어낼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3-4일에 한번씩 각 부위에 기름을 치고 주기적으로 꼭꼭 휘발유통에서 물을 뽑아내군 하였다. 만약 운행도중이라도 차에 이상한 기미가 있기만 하면 즉시 멈춰세워 검사를 하고 손질했으며 차가 내리막길에 들어설 때는 우선 제동기를 밟아 시험해보고서야 내려가군 했다. 한번은 룡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모아산에서 제동기를 습관적으로 밟아보니 기압계기가 3킬로그람 아래로 내려갔었다. 그는 즉시 차를 세운 다음 차밑에 기여들어가서 흙과 먼지를 닦아내고 자세히 검사해보니 총뽐프의 이은 곳이 동강났던것이다. 그는 제꺽 손질하여 순리롭게 내려왔다. 울퉁불퉁한 길을 지날 때 조금만 류의하지 않으면 차에 않은 손님들을 들볶아 놓게 되고 조금만 빨리 몰면 키질하듯 하게 된다. 이럴 때마다 청금동무는 손님들의 고통을 먼저 생각했고 차가 손상되는것을 가슴아파 하였다. 금년 3월초, 그는 룡정으로 통하는 신작로의 한 곳이 패여 차들이 그곳에 와서는 속도를 늦추는것을 발견했다. 이런 정황을 목격한 그는 여러가지 생각에 휩싸이게 되였다. (본체만체하겠는가? 그것은 안된다.) 자기가 수리하자고 보니 또 남들이 어떻게 볼지 주저심도 들었다. 이때 그는 자기가 당기앞에서 공산주의 실현을 위하여 종신토록 분투하겠다고 장엄히 선서하던 정경이 선히 떠올랐다. 그래 남들이 비웃음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공산당원이라 할수 있겠는가? 이 길로 하루에도 몇백대의 차들이 오가는데 다이야가 닳고 휘발유가 소모되고 또 저마다 시간을 지체하게 되니 이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예까지 생각한 그는 자기가 직접 파손된 길을 수리하리라 결심하였다. 하여 그는 퇴근후 석탄재를 싣고 패인 곳을 찾아 달렸다. 그곳에 이르자 그는 웃옷을 벗어던지고 부지런히 삽질하기 시작했다. 해가 서산에 기울어지자 봄철의 날씨는 싸늘했다. 하루의 운행으로도 피로한데 이런 로동까지 겸하니 허기증이 났다. 그의 몸에서 흐르는 땀방울은 그의 붉은 마음과 함께 석탄재에 스며들었다. 집에 돌아오니 온몸이 녹초가 되여 밥술을 쥘 생각조차 없었다. 이윽고 영문을 알게 된 그의 안해는 “차나 몰면 됐지요. 공연히 고생을 찾아할게 뭐얘요? 혁명을 당신혼자 하나요?”라고 핀잔하였다. 하기야 그러했다. 운전수가 차만 몬들 누가 뭐라하랴? 더우기 양로단도 있는데. 허지만 안전운행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생도 달갑게 여기는 김청금이라 안해의 말이 떨어지자 대뜸 정색해 하면서 “자동차가 공로를 떠난다면 고기가 물을 떠난것과 같소. 그래 자기가 늘 다니는 길이 파손된걸 보고도 못본체 하고 내버려둔다는게 말이나 되오?”라고 엄숙히 말했다. 김청금은 그후 서너축이나 퇴근후 시간을 타서 석탄재를 싣고 가서는 파손된 길에다 펴놓았다. 하여 마침내 길은 평탄하여졌다. 이곳에서 더는 지체되지 않고 줄달음칠수 있게 된 운전수들은 이곳을 지날 때면 “청금의 수리도”라고 우스개를 피웠다. 3 두살에 아버지를 잃고 네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손에 끌리여 동냥살이로 커온 청금동무는 항상 행인들의 처지에서, 농민들의 립장에 서서 운행규률을 힘써 모색하였으며 장악하였다. 정신병자와 술취한 사람을 만났을 때, 겨울에 방한모를 눌러쓴 사람이거나 비오는 날에 우산을 받쳐든 사람을 만났을 때 그 경우의 여하를 물론하고 항상 경적을 울리며 저속으로 달리는 한편 수시로 제동자세를 갖추며 차나 사람을 만났을 때 지날수 있다고 짐작되여도 명심해서 경적을 울려야 한다. 자전거를 탄 사람을 만났을 때 우선 그 사람이 재간이 어떠한가를 헤아리며 속도를 조절하였다. 청금동무의 조심성은 결코 여기에만 그친것이 아니다. 마을 부근에 이르면 닭과 오리가 자주 나타난다. 처음에 닭무리를 만났을 때 아무리 경적을 울려도 날아가지 않았다. 이때 청금동무는 일반적으로 닭을 쫒을 때 “쉬,쉬”하므로 제동할 때 나는 “쉭-”소리를 내였더니 닭들이 분분히 달아나는것이였다. 그로부터 그는 가축가금의 생활습성을 눈박아 관찰하여 행동규률까지 포착하였다. 돼지는 뒤걸음질하기 싫어하는 짐승이기에 돼지가 길을 건너갈 때 앞쪽길이 넓어도 뒤쪽길을 택하여 지나가야 하며 길가에 누운 개의 옆을 지날 때는 무턱대고 넓은 쪽을 택할것이 아니라 궁둥이쪽으로 몰아야 하며 소나 말처럼 눈이 량쪽으로 두드러져 나온 짐승이 길복판에서 뛸 때는 절때 복판에서 쫒을것이 아니라 한쪽옆에서 쫒아야 비켜선다는것도 알아내였다. 김청금동무가 해마다 국가운수임무를 넘쳐 완수하고 해마다 선진생산자로 평의받으면서 100만길로메터의 무사고운행을 담보해온 빛나는 로정에는 일편단심 조국과 인민을 위한 그의 붉은 마음과 안전제일을 위하여 분투해온 신근한 노력이 깃들어 있는것이다. 이처럼 청금동무는 마침내 전 주 교통전선의 무사고운행표병, 길림성 교통안전표병이란 영예를 지니게 되였다. ≪연변일보≫ 1978. 12. 7.
25    《돌이켜보니 부끄럽기만하다》차례 댓글:  조회:1894  추천:0  2012-11-27
차례 작품집 《나머지 인생은 흑룡강신문과 함께 살리라》 (머리말을 대신하여) 제1편 남성편 1. 100만킬로메터 무사고 운행 2. 전국 교통안전기준병-김청금 3. 인민의 참된 의사-리춘홍 4. 꽃을 만난 나비 너울너울 춤추네 5. 그는 먹게 접어들었다 6. 신근한 로동, 희망찬 생활 7. “산 뢰봉” 8. 사원들을 치부의 길로 이끄는 인민대표 9. 이름없는 보통당원들 10. 하냥 뛰고있는 서방흥아나운서 11. 석양노을 그 빛 황홀하다. 12. 민족의 언어를 살리려는 후더운 마음들 13. 리영씨 ≪조선명곡집≫ 출간 14. 서군선씨의 일가견 15. 행복한 미용성형외과 대가정 16. 리씨부자의 “천연식품 숙취해소제” 고고성 17. 의술과 인품으로 경쟁에서 솟아난다. 18. 민족의 언어는 끝까지 살려야 한다. 19. 소설가 조명희의 피줄- 조철호사장 20. 그가 지금도 걷고있는 그 길 21. 멋진 스타일의 남자-서태문 제2편 녀성편 1. 보람찬 사업, 크나큰 영예 2. “월하로인(红娘)”으로 미담을 엮어가는 백의 천사 3. "친딸이면 이렇겠수!" 4. 상장에 깃든 토막이야기 5. 고향의 안방마다에 목소리 선물 6. 그녀가 이끄는 중서의병원 7. 녀강자가 부르는 창업의 노래 8. 북경미인송문화매체유한공사 오향옥사장의 이야기 9. 봄빛이 완연한 대주호텔 찾아서 10. 여성의 자랑, 민족사업의 긍지감 11. 연길 “예 스마일 치과병원”의 유미옥 원장 12. 고상한 지성인 민족의 장한 녀성 13. 구지욕으로 혼신을 태우는 탤랜트 장미옥 14. 공장으로부터 음식업으로 15. 광막한 러시아 땅, 한 떨기 싱싱한 진달래 제3편 잡편 1. 눈치를 맞춰야지요(꽁트) 2. 봉창하느라 하다가(꽁트) 3. 아들을 참 잘 두었소(꽁트) 4. 친구의 마음 (수필) 5. 다시 찾은 배움의 길(수필) 6. 두번째 취재 길(벽소설) 7. 인사과장(벽소설) 8. 봄의 무명초(시) 9. 여름찬가(시) 10. 가을 단상(시) 11. 겨울 호랑이(시) 12. 바다에게(시) 13. 노을의 두이름(시) 14. 자연을 낚다(시) 책을 내면서(후기)
24    관직이 인간을 잘못 만들기도 한다. 댓글:  조회:2439  추천:13  2012-11-13
낡은 사회에서 관리의 벼슬자리를 관직이라 했다.지금은 지위 혹은 직위라  부른다.  관직이든 직위든 아무튼 높은 자리를 이르는 말임에 분명하다. 누구도 직위에 금방 올랐을 때는 맡은바 사업을 잘 하겠다고 결심을 가진다.허지만 일부는 점점 세태에 오물이 들면서 흔히 처음과 달라지면서 변질한다. 지금 보면 사람중에 일단 지위가 올라갈수록 거만해지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위에 오르기만 하면 우선 틀부터 배우는가 하면 팔자걸음에 몸가짐도 무게를 보이면서 위엄기를 보이느라 애를 쓴다.우정 건가래를 떼면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성대에 무게를 주면서 말을 한다. 언론인 김대현선생의 시조 한수가 떠오른다. 공금을 뜯어먹고 /뚱뚱보 되더니만 / 이제는 /팔자걸음 량반틀 차리누나 /제기랄 /저런놈한테 /오줌이나 싸볼가. 틀차리는 량반들이 오죽 보기싫었으면 김대현선생이 이런 조시를 썼을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 퇴직간부가 들려준 이야기다. 자기가 국장일 때 후배를 점찍어 양성했고 자기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후에는 자기보다 더 진급했다.누구의 생일에 갔는데 그 후배도 참석했다. 서슴없이 상좌에 앉고  행동도 거만했단다. 그 퇴직간부는 이 일을 말하면서 너무 꼴불견이더라고 서운한 심정을 토로했다. 거만한 태도로 위세를 부리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남한테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다. 지위가 올라가도 치마 례절이야 지켜야지 않는가? 례절바른 사람은 말로써 행위를 살수있고 남들한테 경의를 표한만큼 경의가 돌아온다. 평시에 틀만 차리던 한 령도는 자기가 직위에 있을 때 숱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후에 직위에서 나 앉으면 "고문"으로 모시겠다는 둥 "명예회장"으로 초빙한다는 둥 하던것이 정작 자리를 내놓으니 한 사람도 찾지 않더란다. 그런 사람들은 직위를 존중한것이지 사람을 존중한것이 아니다. 그 령도가 사업을 얼마나 잘했으면 그 정도까지 이를가?! 때문에 명지한 지도자라면 지위에 의해 존경을 받으려 하지 말고 덕과 재능에 의해 존경을 받아야 한다. 본인이 지위에 올라 틀거지를 부리는것도 보기 싫은데 안해마저 틀을 차리는건 더 꼴불견이라 하겠다. 이전에 그처럼 싹싹하고 인사성이 밝던 여인이 남편이 국장이 된후 잘아는 사람 만나도 인사를 하는지 마는지 골만 까딱한다.남편의 승진에 따라 안해도 승진했나 본다.남편이 국장이나 부장이 되면 안해는 고문이 된다더니 말이다.지어 국장의 차를 모는 기사도 부국장의 행세를 부려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다. 지위에 있을 때 안하무인이던 령도가 자리에서 물러않은후 사람들을 만나면 유별나게 싹싹한 어조로 인사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지않게 볼수 있다.상대방이 어리둥절할 지경으로. 지어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다. 자기가 국장으로 있을 때 한 하급의 주임자리를 떨궈버리려 하던것이 지위에서 나앉은후 그 주임을 보고 "원래 당신을 부국장으로 등용시키려 했다."고 엉뚱한 소리를 하더란다. 이때 듣는 사람의 심정이 어떻했으랴?! 이처럼 지위에 있을 때와 나앉은후 판판 다르고 속과 겉이 판판 다르니 어찌 한심하다 하지 않으랴? 리발관에 가서 리발사가 머리를 숙이라면 누구도 머리를 숙여야 하고 병원에 가서 간호원이 바지를 벗으라면 벗어야 한다. 경찰이 경복을 벗으면 평민이 되고 관원이 관직을 내 놓으면 역시 평민이 되고 죄수가 죄수복을 벗으면 자유로운 공민이 된다.마치 사우나에 가면 모두가 알몸뚱이 되는것처럼. 지위가 올랐으면 그 고상한 상징의 참뜻을 터득하고 처사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자연히 숭배할것이다.지위가 오를수록 틀을 버리고 남을 존중한다면 품위있는 지도자라고 평을 받을것이며 안목이 높은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을것이다. 권력이 어찌 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할수 있으랴? 지위란 언제나 잠시적인것이다. 옛날에 자기를 "과인"이라고 자기를 스스로 낮추어 부르는 임금도 있었으니 말이다. 좀 더 높이 서겠다고 발끝으로 서 보라.오래 서 있을수 없다. 멀리 가겠다고 다리를 한껏 벌리고 가 보라.절대 멀리 갈수가 없다. 순리에 따라야지 이런 부자연스럽고 현실을 떠난 행동은 결코 본인의 의도에 역행되는 결과만 불러올것이다. 류소기는 "한 사람을 놓고 볼 때 최대의 행복은 사람들의 신임을 얻는것"이라고 말하였다. 지위가 올라갈수록 리기적인 욕망을 버리고 인민대중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의 자세를 실천해 보라. 틀림없이 기대하지 않았던 행복의 방문과 만족감이 가슴 채워지고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것이다.
23    부모 공적은 바다 같고 자녀 마음은 돛단 배 같아 댓글:  조회:1977  추천:13  2012-07-30
내가 15살 되던 해에 엄마가 세상 떴으니 인젠 40여년이 넘어 된다. 엄마를 일찍 잃다보니 사랑 받은건  별반 생각 안나고 욕 먹고 매 맞던 일만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속담에 "귀한 자식 매 한개 더 때린다."고 엄마가 날 사람이 되라고 매를 댔겠지만 당시 엄마가 그처럼 미울수가 없었다.  나한테는 욕과 매를 들이댔지만 엄마는 너그러운 인품으로 친척이나 이웃들과 화목하게 지내였다. 우리 집에 할아버지,할머니 고모네 식솔까지 아마 열둬명 식구가 한동안 한집에 모여산거 같다. 한번은 내가 아침에 늦게 일어나 눈을 비비며 밥먹으러 정주간에 가니 그때야 엄마가 "아이구,저기 무스게 하나 더 있구나."하면서 나한테 숟가락을 쥐여주는것이였다. 이럴 정도였으니 집안에 항상 사람들로 벅적이였다. 허지만 이로해서 엄마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내 기억에 동네 아줌마들이 쩍하면 우리 집에 모여 한담을 나누기를 즐겼다.엄마는 항상 웃는 얼굴로 그들을 반겨주었고 지어 맛나는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군 했다. 엄마는 특히 메밀국수를 잘 만들었다. 국수우에 닭고기를 몇점 놓으면 세상에 별미였다.그러면 아빠친구들이 몰려들어 술상을 벌리군 했다. 엄마는 남의 빨래도 잘 도와주고 군일이 있으면 동네 어느집에나 다 가서 일손을 도와주군 했다. 하기에 엄마하구 이웃 사이에 다투는 일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 엄마는 례의가 몹시 밝은 분이라 보아진다. 매일 아침 일어나 나의 할아버지한테 "밤새 무고하셨습니까?", " 지난 밤 잘 주무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는것이였다.   식사때면 할아버지한테 작으마한 6각상을 받쳐드리고 중간에 좀 큰 네모나는 밥상에 아빠, 형님들 거기에 나까지도 끼여들수 있었지만 엄마는 누나랑 함께 구들에 밥사발을 놓고 식사를 하셨다.아마 밥상이 모자라서 그랬을거다.   이웃 마을에 아빠가 결의로 모시는 형님 한분이 계셨다. 간혹 큰 길에서 그 분을 만나면 엄마는 길 복판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리군 했다. 엄마는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분이였다. 우리한테 늘 이상분을 보면 하루에 몇번이라도 곱게 인사를 해야 하고 어른들의 앞길을 질러건너지 말라고 당부했다. 더우기 누나들한테는 이상분 앞에서 큰소리로 웃고 떠들지 말며 하품을 짝짝 해도 안되고 다리를 쭉 펴고 앉아도 안된다고 구속을 주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가  비록 일자무식이기는 하지만 유가사상에 물젖은듯 싶다. 엄마한테는 한가지 습관이 있었다. 내가 시험 칠 때마다 나한테 찰떡이 아니면 기장밥을 해주었다. 오죽하면 내 어린 생각에 매일 시험이 있었으면 싶을 정도였다. 엄마가 해준 찰떡이나 기장밥을 먹으면 배가 든든했다.그래서인지 시험장에 들어서도 당황하지 않고 평시 알고있는것은 제대로 다 적어넣을수 있었다. 어떤 학생은 평시에 공부를 잘하나 일단 시험장에 들어서면 긴장하여 항상 시험점수가 낮았다. 나는 엄마가 있는것이 항상 뒤심이 든든했나 본다.엄마의 소망과 념원을 담아서인지 나는 늘 시험성적이 좋았다. 우리 민족은 "소 팔아 자식 공부시킨다"는 말이 있다. 우리 집에 소는 없었지만 엄마가 돼지,개,닭을 쳐서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해준건만은 분명하다. 엄마가 우리한테 본보기를 보여준것은 책을 사랑하는 점이였다. 엄마는 책을 귀중히 여겨야 공부를 잘할수 있다고 하면서 책가방에 책을 거꾸러 넣어도 안되고 책을 보다가 펼친그대로 놔두어도 안된다고 했다. 책이 벌어져 있으면 책의것이 다 밖으로 흘러버린다는 론리였다. 엄마는 내 베개에 책을 넣어주군 했다. 당시 베개에 짚을 보드럽게 썰어 넣기도 했지만 대부분 겨를 넣었는데 그 중간에 얇고 작은 책을 넣어 주군 했다. 책을 넣은 베개를 베면 책의 지식이 다 골속에 들어온다는것이였다. 그런 책을 절대 가로 타고 건너지 못해게 했으며 책을 밟기만 하면 혼줄이 날 정도였다. 커서 알게 되였지만 유태인들이 그처럼 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민족이였다. 때문에 유태인들은 책을 절대 태워버리는 법이 없다. 지어 자기 민족을 비난한 책일지라도 불태우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한다.유태인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철이 들면 "성서"를 펼치고 거기에 꿀을 떨어뜨리고 아이가 입을 맞추도록 한다. 책이 꿀처럼 달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의식이고 또한 귀한 자식들한테 "뽀뽀"를 해주는것처럼 커서라도 책을 귀여워하고 사랑해 주라는 뜻 같기도 하다. 유태인들은 이사해도 제일 먼저 차리는것이 책이란다. 그리고 유태인의 묘지에는 흔히 책이 놓여있다고 한다.비록 생명은 다 했더라도 공부는 끝나지 않았다는것을 의미한다.유태인들의 이런 민족전통의식으로 해서인지 전 인류의 1천 3백만명 밖에 안되는 민족이지만 경제,물리, 예술분야 등에서 그들의 행보는 세계의 중심을 이룬듯 하다. 노벨상을 보아도 물리,화학,의학부류 수상자가운데 12%이상을 유태인이 차지했으니 말이다. 울 엄마가 나한테 전수해준 보배가 바로 책을 아끼라는 그 정신이다. 비록 내가 인물이 되였거나 성공인이 된건 아니지만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책을 아끼고 독서를 즐긴다.나도 아들 딸한테 책을 아끼고 사랑하고 많이 읽으라고 충고한다. 또한 애들이 시험 칠 때면 찰떡을 사다 먹이군 했다. 그래서 애들이 중점고중이나 중점대학에 간건 아니겠지만 엄마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저 풍속습관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애들이 시험에 못 붙어도 찰떡과 연관시켜 본적도 없고 애들을 한번 원망해 본적도 없다. 엄마는 날 낳아서 키워준 은인이고 제일 교육자이며 엄마의 품은 나의 둘도 없는 보금자리였다. 이 세상 엄마들이 다 그럴것이다. 이처럼 언제나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주고 극진히 보살펴 주는 어머니이기에 "어머니당", "어머니조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느 지성인은 이럴게 말하였다.  "부모의 공적은 바다와 같고 자녀의 마음은 한척의 돛을 단 배와 같다"고.   
22    부모에 대한 효도는 인간의 천직 댓글:  조회:2404  추천:20  2012-05-15
올해는 5월 13일이 어머니절이였다. 어머니절은 어머니한테 감사하다는 명절로서 제일 먼저 고대희랍에서 출현했다. 하여 세계적으로 류행되는 어머니절은 5월의 두번째 일요일로 정해졌다. 어머니절에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자기를 낳아서 길러준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한번은 영국문화협회에서 4만명을 대상으로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영어단어"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결과 5위는 "영원", 4위는 "사랑". 3위는 "미소", 2위는 "열정", 그리고 1위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란 단어속에는 영원, 사랑, 미소, 열정이 다 포함되여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따스함과 친근함이 느껴지는 인류 모두의 언어이다. 나한테는 30여년을 막역지우로 사귀여 온 친구가 있다. 이 친구부부가 부모님을 어찌나 극진히 모시는지 린근에 소문이 자자하다. 우리 친구들끼리 술상에 앉아서 부모에 대한 말만 나오면 이 친구를 떠올리군 한다. 나는 이런 친구가 있는것이 자랑스럽고 자호감을 느낄 때도 많다. 몇년전에 그의 아버님이 세상 뜨고 지금은 90고령에 오른 로모를 모시고있다. 물론 그들 부부가  청춘시절에 사랑을 나눌 때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조건부로 그 어떤 낙언을 한것도 아니고 결심발표도 한적은 없지만 아들로서 며느리로서 부모를 모셔야 하고 모시면 잘 모셔야 한다는 것을 천직으로 사명으로 받아들인것 같다. 지금도 그들 부부는 간혹 식당에서 식사를 해도 어머님이 즐겨 자시는 음식을 챙겨 갖고 가는가 하면 늘 상점에 들려 사탕,과자를 사가군 한다.  몇년전의 일이다. 친구가 장춘에 가서 근무하게 되였는데 시간이 긴박하고 임무를 채 완성못해 어머님의 생일에 참가할수 없게 되였다. 그는 한밤중에 친구한테 전화를 해서 이튿날 점심에 자신을 대신하여 어머님의 생일을 쇠여 달라고 흐느끼며 부탁을 해온적이 있다. 어느해 겨울 어머님이 얼음 길을 걷다가 그만 넘어져 팔,다리를 상하게 되였다. 이들 부부간은 어머님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한숟가락씩 음식을 떠 넣으면서 정성껏 간호했다. 노문(함경북도 방언)한 어머님은 쩍하면 화장실을 범벅이로 만들군 한다. 그들한테 이것이 제일 골치거리다.뒤를 보고 처리한다는 것이 아마 손이 제대로 말을 안 듣는 모양이다. 친구의 아내는 원래 큰 병원의 총간호장으로 사업하다 퇴직하였다. 아무리 간호원출신이라 해도 이런 정경에 목격하고 나면 억이 막히군 했다. 친구의 아내는 울컥 올라오는 것을 가까스레 참으면서도 부르튼 소리 한마디 없이 화장실을 깨끗이 청소를 하군 했다. 이런 말은  듣기는 쉬워도 정작 자기가 할려면 너무나 아름찬 일이다. 현실에 부모를 모시기 싫어 자식들간에 부모를 마치 배구뽈처럼 이리 저리 넘기거나 부모를 모시기 싫어 료양원에 보내는 자식들에 대비하면 너무나 천양지차이다. 실지 지금 여자애들한테 시부모를 모신다고 하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옛날 노인들은 부모를 괄시하면 "네가 장차 자식을 길러봐야 안다"고 말하군 했다. 내가 이 말을 아버지한테 들었다면 지금은 내가 아들한테 이 말을 해줄 차례다.결혼해서 새 생명이 태여나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으랴?!  재롱을 피워도 곱고 웃어도 울어도 곱기만 하다. 아빠의 머리를  쳐도 곱기만 하고 엄마의 젖꼭지를 물어뜯어도 곱기만 하다. 이처럼 쥐면 부서질가 놓으면 날아날가 애지중지 키워온 자식이지만 커서 부모를 모른다면 어쩔수 없는 일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불효한다고 화김에 당장 저 세상 갈수도 없는 일이고 또 자식이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다하여 만족해 인생을 끝마치는것도 아니다. 사람마다 명이 있고 자식복이 따로 있는가본다. 말은 바른대로 하지만 자기에게 생명을 준 부모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정과 사랑을 운운할수 있겠는가?! 부모를 사랑하고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다른 가정을 사랑하고 존중하겠는가?! 하기에 갚고 갚아도 평생 갚지 못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낳아 길러준 부모의 은공이다. 그러므로 부모 세상 뜬다음에 눈물코물 쥐여짜며 땅치며 통곡하지 말고 부모 생전에 뜨거운 물 한컵이라도 마음으로 올리고 따뜻한 말 한마디로 위안하는것이 자식의 옳바른 처사가 아닌가 생각된다. 한마디로 말해 효도하고 감은할줄 아는것이 바로 부모에 대한 자식들의 신성한 책임이고 의무라 하겠다. 부모에 대한 끝없는 효성과 부부간의 꿀같은 애정, 자식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지극한 사랑에서 나는  내 친구 부부야말로 유리같이 맑은 인생을 보낸다고 생각한다. 다시말하면 빛나면서도 깨끗한 삶이라겠다. 이러한 친구앞에서 나는 자연히 머리가 숙여지는것을 어쩔수 없다.
21    약속의 의미를 되새기며 댓글:  조회:2429  추천:13  2012-02-16
외지에 있는 아들이 이번 음력설에 일이 바빠 집에는 못온다며 메일로 인사말과 함게 올 설을 계기로 꼭 술을 적게 마시라는  부탁을 해왔다.  나는 원래 술재간이 없었다. 어찌다 술을 마시면 토하가 일쑤다. 오죽하면 내가 술마시고 집에 돌아오면 서너살 된 아들이"아버지 세수대야를 가져오랍니까?"고 물어보았을까. 내가 술을 마시게 된것은 방송국 기자부에서 광고부로 건너간 후부터이다. 술 한두잔에 광고수입이 몇천원 지어 몇만원이 드나들었으니 아무리 힘들어도 화장실에 가서 토할지언정 또 술을 마시군 했다. 반면 담배는 멀리했다. 대학다니는 아들한테 금연하라고 하니 아들은"아버지가 술을 끊으면 담배를 끊겠다."는 조건부를 내걸었다. 아들의 말에 고깝고 괘씸했지만 서로간 끊을수 없는 처지여서 처음으로 한 아들과의 약속이 무산되고말았다.   실상 연변에서 완전 금주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생일,환갑,결혼식이 매일이다싶이 있고 명절이 끼이고 장례식에도 참가하다보면 술상과 떨어질래야 떨어질수 없다. 친구 아들의 결혼식이 어제인가 싶었는데 벌써 손자의 첫돌생일에 참가해"빛을 내달라"고 청첩이 날아오니...나무는 고요히 서있으려 하나 바람이 잦질 않는다.   이번 설에 아들의 부탁을 받고 많이 생각해보았다. 아들이 전번처럼 술을 근절하라는 부탁이 아니고 신체를 고려해서 적게 마시라는것이다. 아들의 이 간절한 부탁을 들어줄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술 마시는 차수를 줄이고 술량을 줄이는것이다. 술차수를 줄이려면  피할수 있는 술장소를 될수록 피해버리고 생일상을 줄이는것이다. 내 생일에 50명이 왔다면 나도 그들의 생일에 한달 네번 정도는 참가해야 한다. 모든 일이 단지 술장소에만 이루어지는것이 아니기에 메일,전화 등 통신기구를 많이 사용하면 될것이다.  이번 음력설에 나는 아들의 부탁대로 술을 적게 마시려고 노력했다. 아들의 부탁을 선선히 들어주는데는 물론 내 신체를 고려하는 점도 있지만 아들한테 미안한 점도 많기 때문이다. 한낱 젊어서 저녁늦게까지 술마시고 귀가하면 아들은 잠이 들었고 이튿날 아침 내가 깨여나면 아들은 학교로 갔었다. 이처럼 아들의 얼굴을 못 보고 아들과 대화 한마디 못하고 지난 시간이 너무 많았다. 훌륭한 아버지커녕 아버지 자격조차 잃을 정도였다. 훌륭한 아버지라면 애들의 선생님으로,친구로 되여야 한다. 자기가 알고있는 모든것을 아들한테 차근차근 알려주고 또한 자연공간을 느끼게 하는것으로 부모와 자식간의 새 장을 만들고 정이 오가게 하고 함께 하는시간을 채워야 한다.  아들이 유치원 때만 해도 우격다짐으로 눌러놓았지만 소학생이 되여서는 아버지와 시비를 캐려 들었고 우주에 대해서도 자연현상에 대해서도 파고드는것이였다. 아들한테 좀 알려주다가  권태를 느끼고"모르면 래일 학교가서 선생님께 물어봐라." 하니 새침해 하던 아들의 그 모습이 지금도 가슴에 걸린다. 아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함을 나는 좋은 음식이나 물건을 사주고 소비돈을 푼푼히 주는것으로 보상하려 했지만 그건 오직 한부분에 속할 뿐이였다. 아들은 아버지가 곁에 있어주고 웃으면서 옛말도 듣고 공원놀이도 하면서 함께 공유하는 시간을 간절히 바랐고 많은것을 아버지한테서 터득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아버지라면 자식의 특성과 잠재력을 파악하고 그 개성을 키워주는 교육을 실행해야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노릇이 절대 돈으로만 할수 있는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돈으로보다 마음으로 시간으로 진정으로 하는 아버지노릇이 더 우월함을 느끼게 된다.  아들은 자기자신의 생명의 연장체이다. 그러므로 아들과의 약속도 약속이다. 피줄로 이어지는 약속이기에 절대 태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이번 설에 북경에서 온 조카의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번 조카가 세살난 딸애를 데리고 장마당에 갔다가 기어이 새끼오리를 사라해서 한마리 사가지고 집으로 왔단다. 조카의 시어머니가 어찌나 잘 먹였는지 오리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갔다. 오리가 컸고"꽈ㅡ꽉"하는 울음소리가 싫었던지 조카의 딸애도 오리를 처리하는데는 동의하지만 죽이지는 못한다는것이였다. 하는수 없이 오리몸에 표시를 해서 의화원 호수에 놔주었다. 조카 딸애는 일요일이면 엄마손을 끌고 의화원에 가서 오리를 보고 온단다. 당시 나였다면 그 오리를 잡아먹고 시장에서 사온거라 거짓말 할지도 모른다.교원사업을 하는 조카는 어린애들한테 거짓말을 하면 안되고 어린 심령에 상처를 주지 말며 자그만한 일이라도 등한시 하지 말고 절대 약속을 저버려선 안된다는 주장이다. 부자간이든 모녀지간이든 서로간의 약속을 지켜주는것이야말로 서로 믿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실제 표현이다. 이런 리치를 늦게나마 깨달았고 또 아들과의 어릴적 만나는 시간을 보상해 줄수는 없지만 지금이라도 약속을 굳건히 지키는것으로  다소 위안을 얻으려 한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아들과의 약속을 명기하고 올 음력설부터 술차수를 줄이고 술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요만한 약속도 어긴다면 장차 중대한 약속을 어찌 실행할수 있겠는가?!  전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김진길은 어느 한번 눈치기 동원대회에서"눈치는 이런 작은 일조차 못하고 어찌 큰 일을 해낼수 있겠는가?"고 말한적이 있다.   작은 일은 하기 싫고 큰 일은 해내지 못한다면 무슨 일을 할수 있겠는가? 서로간의 약속을 지키는데는 마음과 결심이 우선이다.무슨일인들 해야 한다는 의지가 송곳 같으면 아무리 단단한 나무라도 뚫고 들어갈것이다.
20    퇴직은 새 생활의 시작 댓글:  조회:2697  추천:2  2012-02-06
20년전, 로선배가 퇴직환송대회에서 마이크 잡고 격정을 살려 이런 말을 하였다,  "몸은 비록 퇴직하지만 마음은 재직에 있습니다. 석양에 지는 해도 빛을 뿌릴 때가 있다고 우린 아직 성쌓고 남은 돌이 절대 아닙니다..."  그 당시 무심히 지나쳐버린 말이였으나 내가 오늘 정작 퇴직증서를 받아쥐니 그때 로선배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안겨오며 미묘한 심리상태에 빠지는걸 어쩔수가 없다.  어느 누구는 퇴직하는 날 아쉬운 마음을 걷잡지 못해 회사 주위를 다섯바퀴나 돌았다 한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그 정든 회사에서 책상을 마주하고 수십년 고락을 함께 나누다가 서로 갈라지게 되니 말이다. 허지만 어찌하랴? 자연의 섭리는 막을수 없는 법이다. 중앙국제방송국의 내 친구도 인차 퇴직하게 된다. 그는 38년간 아나운서의 방송생애로 해서 가슴 뿌듯하다고 한다. 그는 "영원이란 없으므로 때가 되면 웃으며 물러서는것이 옳바른 자세"라고 하면서 퇴직후 좋은 일거리가 기다려 언제 섭섭한 생각을 할 사이가 없다고 속심을 털었다.  퇴직후 할일이 있다는 자체가 안위이고 보람이다. 육체로동이든 정신로동이든 가릴거 없이 영예로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할것이다.  나는 트럼프도 마작도 모르고 문구나 등산도 별반 즐기지 않는다. 다만 독서하는것만이 취미생활이다. 우리 집 재산이라면 책밖에 없다. 전문가나 학자가 되려고 그런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기면서 부지런히 책을 모은 덕이다. 그래도 새책을 사면 한번은 읽기가 마련이다.  학자들은 "책을 읽는 민족은 희망이 있으며 책을 읽는 인간에게는 밝은 미래가 있다"고 했다. 난 이런 비전을 바라서가 아니고 책을 쥐기만 하면 책속에 빠져 울적하던 마음이 봄눈 녹듯 사라져 버리군 했기때문이다. 이런 연고로 책을 모았기에 나의 서재는 가정의 장식품으로 드러났다.  아버지는 농민이다보니 사망할 때가 퇴직이였지만 나한테는 퇴직이 있다. 직장에 참가한 누구든지 "퇴직"이라는 이 정거장에는 꼭 들려야 하는 법이다.  퇴직은 결코 생활의 종점이 아니다. 조용히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퇴직이란 생활의 전환점이고 새로운 생활의 시작이라 하겠다.  출판사나 잡지사에서 남들의 작품을 수없이 편집,출간해 주다가 퇴직 후 자기 작품집을 륙속 출간하는 분들이 많다. 한 신문사에서 퇴직한 명망있는 기자선생은 로임전부를 털어 자기 작품집을 출간한다고 들었다.얼마나 돗보이는 소행인가? 퇴직 "종합증"에나 걸렸는지 세상만사를 고깝게 생각하면서 쩍하면 성내는 분들, 그리고 우울증에 걸려 머리를 푹 숙이고 기를 못펴는 사람들을 보면 리해가 안간다. 사람마다 취미가 있는한 자기 생활의 공간을 스스로 창조하고 하고싶은 일을 잘 만들어가는 사람이 바로 마음을 다스릴줄 아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항상 마음을 다스릴줄 아는 사람의 심정은 언제나 즐겁고 젊어질것이며 마음도 편하고 몸은 청춘으로 약동할것이다.  한낱 젊어서 나는 사업의 수요라 핑게대고 매일 숙취해 몸을 망가뜨렸지만 지금은 책이나 읽고 간혹 친구들과 마음의 회포를 풀고 스트레스나 풀려고 술을 청하기에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오늘 퇴직증을 쥐고 서산을 바라보니 서산마루에 비낀 부채살같은 저녁노을은 한결 아름답고 황홀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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