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원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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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담]생활 속에서 소설을 낚아올리다 댓글:  조회:321  추천:0  2019-07-18
생활 속에서 소설을 낚아올리다 림원춘&김홍란     초대작가: 림원춘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전임 부주석) 진행자: 김홍란 (《도라지》잡지사 전임 주필)   일시: 2017년 9월 1일 장소: 연길시 백산호텔 커피숍  사진: 김향자   김홍란(이하 김):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건강 때문에 고생 많으신 걸로 아는데 오늘 우리 문단의 저명한 소설가이신 림원춘선생님을 대담코너에 모실 수 있어서 내심 기쁩니다.   림원춘(이하 림): 감사합니다.   김: 현재 《장백산》잡지에 선생님의 장편소설 〈산귀신〉이 련재되는 걸 보며 고령이심에도, 그리고 건강이 안 좋으심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이어가시는 선생님께 크게 감동받고 있습니다. 1958년에 소설로 등단을 하시여 60년이라는 작가인생을 살아오신 선생님에게서 소설 쓰기란 정녕 멈출 줄 모르고 흐르는 강물과도 같지 않나 싶어요. 옹근 인생을 문학에 다 바쳐오신 그 정신과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이 후배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군요. 그런 뜨거운 열정이 선생님의 후배, 그 후배의 후배들에게서는 갈수록 미약해지는 현실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선생님 앞에 마주하는 마음이 많이 송구스러워지네요.   림: 저는 언제나 글 쓰는 작업을 제 살을 뜯어먹고 제 피를 빨아먹고 제 뼈를 갉아먹는 고된 로동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쉬임없이 쓰고 있어요. 왜? 저는 ‘민족’이라는 두 글자를 머리에서 비워본 적이 없어요. 우리 조상들은 두만강을 건너와 이 땅에 첫 괭이를 박았고 첫 귀틀집을 앉혔으며 왜놈들과 피어린 투쟁을 했습니다. 지금 연변의 언덕마다 마을마다 하얀 렬사비가 서있는데 그 렬사비는 항일투쟁의 95% 이상, 해방전쟁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우리 조선족 렬사들이 흘린 피로 세워진 겁니다. 우리는 이런 위대한 민족의 후손들이예요. 그런데 이런 민족이 지금 ‘동화’라는 두 글자를 앞에 두고 흔들리고 있어요. 울고 있어요. 민족의 동화는 과거에도 지금에도 언어로부터 시작됐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교육진지이고 하나는 문단이라는 진지입니다. 저는 이 진지를 지키는 굳건한 보초병이예요. 한마디로 민족에 대한 사명감입니다.   김: 선생님께서는 1937년 룡정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나셨어요. 어린 나이긴 했지만 일제시기를 겪었고 광복과 해방을 맞이했으며 해방초의 가난과 각종 정치운동 그리고 문화대혁명의 동란을 거쳐 개혁개방의 새 시기까지 쭉 살아오고 계십니다. 그 시간들은 조선족의 옹근 력사이기도 하죠. 선생님께서 60년간 창작하신 작품들 속에는 조선족 력사의 전모가 반영되고 있어 의미가 더 깊지 않나 싶어요. 평론가 림연선생님은 림원춘작가님을 “민족화어시대(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40년대)에 태여나서 국가화어시대(20세기 50년대부터 70년대)에 작가로 성장하여 현대화어시대(20세기 80년대부터 오늘까지)에 일약 중국조선족문단의 중견작가 내지 국외에까지 명성을 떨친 저명한 작가로 부상”하셨다면서 “작가 림원춘의 필봉은 민족사의 전 령역을 답파하고 있다. 민족사의 3단계중 그 어느 단계도 공백으로 남기지 않고 완주했다. 이 사실이야말로 이례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작가를 말하다’라는 문학대담을 진행해갈 수록 신선한 형식이여서 인기가 있을 것이라는 초반의 가벼운 생각보다는 비록 전면적이진 못하더라도 중점작가, 대표적 작가를 조명하는 일이 결국은 우리 문단을 전반적으로 정리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된다는 생각에 어깨가 점점 무거워집니다. 조선족문학의 제2세대 소설가이시고 우리 문단의 대표작가이신 림원춘선생님을 이번 대담의 초대작가로 모시게 된 건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의미가 깊다는 생각이 들어요.   림: 저는 《장백산》잡지의 대담코너를 앞두고 많이 망설였어요. 내가 나서야 하나 나서지 말아야 하나를 두고 말입니다. 사실 저는 저명한 작가도 대표적 작가도 아닙니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전에 이런 고배를 맛본 적이 있어요. 1984년, 소설〈몽당치마〉로 전국상을 받고 오자 모든 조선족 보도매체가 요란할 정도로 저를 올리췄고 〈몽당치마〉보다 더 좋은 작품을 써달라고 부탁을 해왔어요. 저는 그 칭찬을 편달로 삼지 않고 개 잡은 포수처럼 기껏 어깨를 살리고 창작담이요 보고회요 하면서 동북삼성을 답파하다 싶이 했습니다. 결국 도취감에 2년 동안이나 소설 한편 써내지 못했어요. 망신살이 들었던 거죠.   이 나이에 ‘과분한 칭찬이나 평가’를 듣는다고 들뜰리는 없겠지만 자제하고 싶군요.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김: 선생님께서는 어린 나이에 벌써 고된 로동을 시작하셨다죠. 어려운 생활여건 속에서도 자식들 공부시키기 위해 부모님은 먼 심심산골로 부대 파러 떠나시고 열살 어린이였던 선생님은 집안 살림을 도맡아하며 공부하는 형님의 뒤바라지를 맡으셨어요. 그 때의 한없이 고생스러웠던 생활이 오히려 후날의 창작에 큰 도움이 되였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참 인상에 깊이 남네요.   림: 사실 저는 동년을 모르고 자랐어요. 한창 투정을 부릴 나이에 부모가 부대 파러 동량리(연길현 용신구)로 떠나는 바람에 제가 소학교 2학년 때부터 형님을 시중들며 주부질하지 않으면 안되였어요. 그것도 쌀밥이면 하기나 쉽지요. 보리쌀에 감자를 얹어 하는 밥이라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어야 했고 하학하고 돌아오면 물을 긷는다 보리쌀을 삶는다며 저녁차비를 하느라 애들과 술래잡기 한번 못해봤어요. 그 뿐인가요? 먹을 감자조차 없어 굶은 채 학교 갔던 적이 한두번 아니며 2, 3일씩 굶다 보니 교실에서 쓰러진 적도 여러번 있었어요.   말 그대로 저는 어머니의 아들로가 아니라 딸로 동년기를 보냈습니다. 시집간 누나를 제외하고 어머니 곁에는 저 밖에 없으니 어머니의 시중을 제가 다 들어야 했지요. 소학교 4학년 때 저는 어머니 곁에서 두부콩 갈기, 두부 앗기, 메주콩 삶기, 장 담그기에다 감자떡, 시루떡, 송편, 증편, 순대, 팥죽 만들기∼ 못해본 일이 없으며 다 만들 줄 알아요. 그런가 하면 썩 후날 제가 몸 담고 있던 방송국에서 ‘백정’이라 불리울 만큼 돼지, 개, 양, 게사니, 오리 잡기에서도 능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생을 경험하고 생활에서 만능으로 살아온 경력이 소설가인 저에게는 나쁘지 않았던 거 같아요. 창작에서 많은 소재를 얻을 수 있었던 건 물론 작가의 삶에서 난관을 이겨내고 의지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였다고 생각합니다.   김: 1949년도에 형님 분이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입학하셨고 이어 1956년도에 선생님께서 형님의 뒤를 이어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입학하셨어요. 그 시대에 두 형제가 나란히 같은 대학, 같은 학부에 진학한 자체도 경이로운 일인데 선생님은 형님의 수업까지 들으며 문학공부를 하는 행운을 지니셨어요. 그렇게 롤모델이나 다름없을 형님의 영향으로 원래의 꿈이 공정사나 외교관이였다던 선생님은 작가 쪽으로 꿈을 바꾸게 되였고 대학교 시절 열혈청년, 팔방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셨던 선생님께서는 그 넘치는 에너지를 그 후 작가의 삶에서도 쭉 이어오시며 창작의 필을 한시도 멈추지 않으셨어요.   림: 어린 시절 룡정에서 함께 밥 끓여먹으며 공부할 때 우리는 거꾸로 된 형제였습니다. 제가 눈을 잡아뜯으며 일어나 아침밥을 해놓고 형님을 깨우면 형님은 응쭰하고 돌아누우며 조금만 더 자겠다고 투정부리군 했으니까요. 하하하.   그러던 형제가 1956년에 연변대학에서 외국문학강좌장(교연실 주임)과 학생의 신분으로 다시 만났습니다. 동북사범대학 연구원을 졸업한 형님은 교수를 잘하여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였어요. 그런가 하면 연변작가협회 회원으로 창작활동을 하기도 했죠.   형님은 저보고 문학을 하라는 말씀을 한번도 한적 없어요. 하지만 대성중학교 때 토지개혁선전대에서 연극, 노래로 맹활약했던 형님의 멋진 모습, 자기가 보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등 소설을 넘겨주며 과외독서를 시킨 영향, 형님이 신문에 발표한 수필 등 영향은 소학교 때부터 고중, 대학에 이르기까지 줄곧 연극, 합창대에서 활약하고 연변대학 문오부 부부장을 했던 저의 경력과 일치되면서 저의 지향은 차츰 ‘문학’이라는 두 글자에 못을 박게 되였어요.   우리 형제는 지금도 네 집 내 집 없이 다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언젠가 형님은 병석에 누워 저의 소설집을 보면서 “이젠 네가 내 문학선생이구나.”라며 대견하게 웃으셨어요. 내가 형님의 선생? 소 웃다 꾸레미 터질 소리. 저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한 형님의 학생입니다.   김: 선생님의 문학경력을 살펴보면 대학교 때 단편소설 〈쇠물이 흐른다〉를 《아리랑》에 발표하시며 등단합니다. 이어 오체르크, 장막극도 연거퍼 발표하며 소설문학과 극문학에 심취, 1960년 대학 졸업 후 연변인민방송국 문예부 부주임으로 일하는 동안 소설을 륙속 발표, 문화대혁명 기간 공백기를 맞이해야 했지만 작가의 꿈과 사명감을 버리지 않고 한동안의 휴식 후 단편소설들을 창작 발표, 1981년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전근하여 편집부 주임으로 발탁되였고 1982년 연변작가협회에 전근하여 전직작가, 국가1급작가로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칩니다.   지금까지 중단편소설 90여편, 평론 40여편, 시 20여수, 산문 20여편 발표. 단편소설집 《꽃노을》(1980), 《몽당치마》(1984), 중단편소설집 《몽당치마》, 중편소설집 《눈물 젖은 숲》(1995), 장편소설 《짓밟힌 넋》(1988), 《파도에 실린 사랑》(1986), 《우산은 비에 운다》(2004), 《그날의 25시》 외 《림원춘소설선집》(6권, 2011-2012), 장편실화문학 《분투자의 발자국》, 《예고된 파멸의 기록》(1992), 《태양에는 흑점이 없다》, 텔레비죤련속극본 《아리랑》 등 많은 작품을 창작, 출간하셨어요.   그런가 하면 전국우수단편소설상, 전국소수민족문학상(2차),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2차),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2차), 연변작가협회문학상(2차), 《연변문학》문학상, 《장백산》문학상(2차) 등 수차례 수상하는 경력을 쌓으셨고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중국소수민족문학학회 상무리사로 계시면서 문학사업의 발전을 위해 큰 힘을 보태셨습니다.   림: 저는 수두룩한 글을 쓰면서 과분할 만큼 상을 많이 받았고 영예도 많이 받아안았습니다. 하지만 그 ‘영예’는 언제나 ‘멍에’로 되군 했어요. 왜냐 하면 받을 때는 흥분되고 기분 또한 좋았지만 좀 지나면 무거운 ‘보따리’로 되기 때문이죠. ‘영예’가 동력으로 돼야 하는데 저는 한번도 그 영예를 동력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시름거리로 만들군 했습니다. 성숙되지 못한 글쟁이라서 그런 거죠.   김: 선생님의 작가생애를 살펴보면서 가장 강렬하게 인상받았던 건 선생님께서 자신의 초반기 창작에 대해 철저히 부정하신 부분이였어요. 전반에 걸친 선생님의 소설세계는 사실주의라는 굵은 선으로 관통되여있지만 거기에는 혁명적사실주의 창작에서 비판적사실주의 창작으로 넘어선 력정이 선명하게 찍혀있어요. 좌적인 사조가 살판칠 때 우리의 작가들은 스스로도 ‘인류 령혼의 기사’, ‘생활의 개조자, 설계사’, ‘시대의 선각자, 계몽자’로 자처하며 계급적, 민족적, 시대적 등 대단한 사명감에 들떠있었으며 그래서 순수문학보다는 참여문학이 훨씬 인기가 있었죠. 그런 시대적 영향하에 선생님의 작품에도 시대적 사명감에 의해 창작된 것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고 어느 평론가가 말씀한 것처럼 선생님 소설의 “혁명적사실주의는 거창한 시대적 담론을 충실히 담아”왔습니다.   썩 후날, 자신의 지나온 창작을 아프게 돌아보며 깊은 반성을 하신 선생님은 이런 글을 남기셨어요. “나는 나를 모르고 작가의 대렬에 들어선 사람이다. 누구나 다 자신을 알아야만 작가로 되고 좋은 글을 쓴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너무나 오랜 시간, 몇십년이라는 너무나 길고 긴 시간을 두고 나를 모르고 글을 쓴 사람이다. 나를 아껴주고 나의 작품을 보아온 독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신나는 ‘나팔수’로 됐고 얼마나 많은 ‘분치장’을 했으며 얼마나 훌륭한 ‘미용사’로 됐던가를. 그 때의 나는 나를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안다고 해도 모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에게 붙어다닌 작가라는 이 기형아는 남이 만들어준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앵무새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피해자이면서 또 가해자였다∼ 나는 원초적인 나를 되찾고 싶다. 늦었지만 잃었던 나를, 빼앗겼던 나를 갖고 싶다.”   선생님의 통렬한 반성과 간절한 소원이 담긴 이 글을 읽으며 가슴이 뭉클해났어요. 그 시대가 남겨준 뼈아픈 상처, 그것을 딛고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창작에서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부정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건 작가에게는 막중한 과제임에 틀림 없지요. 용기 내여 자신을 마주하신 선생님의 작가적 자세가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림: 사실 저는 많은 글을 썼지만 건질 만한 소설은 몇편 안됩니다. 1980년도 말, 저는 한국의 한 출판사로부터 소설집을 묶겠으니 단편소설들을 보내달라는 청탁을 받았어요. 단편소설집을 묶자면 세권도 넘을 분량의 작품을 썼으니 한권 분량 쯤은 어렵잖게 고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어요.   그런데 정작 작업에 착수하고 보니 고를 수 있는 작품이 얼마 안됐어요. 그러다 보니 중편소설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됐습니다. 단편소설집 《몽당치마》가 중단편소설집으로 된 건 이런 원인 때문이죠. 그 때야 저는 굳어진 의식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느끼게 되였어요.   자기반성이 없는 작가는 전도가 없다고 봅니다. 철저한 혁명적사실주의 작가로부터 비판적사실주의 작가로 변신하는 데는 뼈를 깎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긴 시간이 수요되였어요. 과거에는 취재의 초점을 ‘선진’이란 것에만 맞추던 데로부터 나중엔 ‘선진’ 속에 가려있는 ‘락후’에로 돌렸고 보통인간들 특히나 사회의 저층에서 허덕이는 보통백성들의 희로애락과 그들의 진실한 소망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로부터 저는 언제나 약자의 편이였으며 약자의 대변인이 되였어요. 하지만 과거에 저를 따라다니던 ‘혁명’이라는 두 글자는 그 후에도 끈질기게 저의 꼬리를 물고 놓지 않았으며 지금도 저의 작품에 가담가담 그 ‘혁명’의 냄새가 풍기군 합니다.   김: 소설가 림원춘 하면 누구나 가장 먼저 단편소설 〈몽당치마〉를 떠올리게 됩니다. 저 역시 80년대 초반 대학교 수업시간에 〈몽당치마〉를 배우면서 작가 림원춘선생님을 머리 속에 깊이 각인시키게 되였어요. 〈몽당치마〉는 그 시대에 대히트를 친 소설이였죠.   사실 문학정신의 부활과 문학 본체에로의 회귀로 특징지어지는 1980년대에 우리의 소설창작은 획기적인 성과를 이룩하였으나 이 시기 조선족작가들은 문학의 주체성, 인간의 주체성, 민족의 주체성에 대한 사고와 더불어 관념과 방법상에서 커다란 변화를 거치면서 소설창작에서 새로운 특징을 보여줍니다. 영웅의 시대가 사라지고 평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소설의 세속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1980년대 소설의 주요특징의 하나였어요. 작가들의 시각은 거시적 투시로부터 미시적 관찰에로, 력사적 사고로부터 세속적인 인생에로, 정치적인 내용으로부터 생활적인 내용에로 전환을 가져왔으며 문학은 점차 우아한 기질을 버리고 세속적인 인문주의 맛을 담았어요. 그리고 평민의식의 각성과 함께 인물의 평민화가 도래했죠. 그 중심에 〈몽당치마〉가 있었습니다.   〈몽당치마〉는 20세기 후반기를 시대배경으로 하면서 조선족의 전통적인 풍속을 집대성해보일 수 있는 결혼잔치를 무대로, 그 속에서 표현되는 친척들 사이의 미묘한 태도변화로 빈부와 지위의 변화에 따라 인간관계가 변화되는 비정한 현실과 인정세태를 한폭의 풍속도와 같이 그려 개혁개방 후 조선족문단에서 성공한 첫 세태소설로 주목받았어요. 당시 중국작가협회 당조서기였던 팽목은 《인민일보》에 실은 글에서 “림원춘의 단편소설 〈몽당치마〉는 중국조선족인민들의 아름다운 민속도이다.”라고 했죠.   림: 제가 〈몽당치마〉로 전국상을 받은 후에 한 첫마디가 “〈몽당치마〉는 우리 민족이 나에게 준 복이며 나는 그 복받은 행운아이다.”라는 말이였어요.   저는 자고로 부자집 문턱은 높고 못사는 집 문턱은 낮다고 여겼댔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가난의 문턱은 높고 잘사는 집 문턱은 낮았어요. 아버지는 언제나 당신은 친조카만 해도 열넷이나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사촌형은 단 한분 뿐입니다. 가난하다 보니 찾아오는 친척들이 없었지요. 그리고 어머니는 친척집 군일에 갈 적마다 보에 싸들고 간 몸뻬(녀성들이 집안에서 일할 때 입는 막바지)를 갈아입고 가마목을 차지하고 앉아서는 땀을 철철 흘리며 일만 하셨어요. 부조돈 대신 말입니다. 하지만 형님이 동북사범대학 연구원을 졸업하고 연변대학에 와서 교편을 잡은 데다 저까지 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인민방송국 기자로 사업하게 되자 사촌들은 물론 먼 친척들까지도 찾아들군 했어요. 그리고 친척집 잔치에 우리 형제가 참가하면 꼭 상빈으로 보내군 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베치마를 입고 다니셨어요. 치마기슭이 닳아 판나면 감싸고 또 감싸고 하다 보니 나중엔 무릎을 겨우 가리는 몽당베치마로 되였지요. 그 베치마가〈몽당치마〉의 원형이며 우리 집 가정사가 소설 〈몽당치마〉의 실제적인 소재입니다.   김: 〈몽당치마〉는 《연변문예》 1983년 1호에 발표되자 마자 조선족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1984년 전국우수단편소설상을 수상, 조선족문단에서 오늘까지 국가상을 수상한 유일한 작품입니다. 소설은 《연변문예》상, 연변작가협회문학상, 길림성정부장백산문예상, 제2차 전국소수민족문학상 등 수많은 영예를 받아안았고 지어 드라마로 제작되여 중앙 TV에서 방송되기까지 했어요. 또한 영어, 일어, 로씨야어, 에스빠냐어, 프랑스어로 번역되였으며 지금까지 줄곧 조선어문 고중교과서에 실렸습니다.   이토록 소설이 발표되자 마자 놀라운 효과를 거둘 수 있은 건 우선 짙은 민족적 색채와 향토맛 때문이고 다음은 ‘동불사댁’이라는 조선족녀성의 긍정적인 형상을 잘 부각해서라는 평을 받고 있어요. 〈몽당치마〉는 자신을 되찾고 싶다고 하신 선생님께서 혁명적사실주의 창작에서 비판적사실주의 창작으로 전이하기 시작한 리정표적 작품이자 조선족문단의 기념비적 작품입니다.   림: 과찬입니다. 저에게 그런 복과 행운을 준 백의겨레에게 그 영예를 돌립니다.   김: 평론가 최삼룡선생님은 “림원춘선생님은 시종 생활에 대하여 진실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사실주의 창작방법에 충실한 작가이며 자기의 작품을 광범한 독자들의 훌륭한 정신식량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숭고한 사명감을 지니고 붓을 드는 작가”라고 하셨어요. 선생님께서는 어느 글에선가 이렇게 적으셨지요. “나는 생활을 동경한다. 생활은 나의 스승이며 나의 토양이다.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최저한도의 요구이다.” 실제적으로 선생님께서는 몇달, 지어 1년씩 기층이나 농촌에 자주 내려가셔서 직접 생활체험을 하시고 문학 소재를 얻고 작품 창작을 하셨어요. 지어 “훈춘은 나의 제2고향이자 창작기지”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시죠.   림: 그래요. 저는 작가는 책상앞을 떠나야 하다고 생각합니다. “생활은 문학의 원천”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1981년 초, 저는 연변텔레비죤방송국으로 전근하는 기회를 빌어 두달간 훈춘에 내려가 생활체험하면서 하루에 평균 만자 지어 2만 5천자에 달하는 창작을 하며 장편소설 《짓밟힌 넋》을 완성했어요. 1984년에는 훈춘현 선전부 부부장 직을 맡고 훈춘으로 내려가 1년간 생활체험을 하며 12편의 단편소설을 써냈구요. 1990년에는 사회주의사상공작대로 룡정시 용신향에 내려가 수개월간 생활한 적도 있어요. 지금까지 수백만자에 달하는 저의 소설은 몽땅 그런 생활속에서 온 겁니다.   하지만 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는 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예요. 또 대중과 함께 일하고 그들과 함께 얘기를 나눈다고 하여 생활 속으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의 마음을 빼먹는 겁니다. 아니 우선은 제 마음을 빼주는 겁니다. 듣기 좋은 말로 한다면 진심을 다한 소통을 하는 거죠. 그들의 질고를 헤아려주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을 위한 일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별의별 일을 다 경험했어요. 주인집 애가 급성위장염에 걸리자 10리 령길을 넘어 공사병원으로 업고 가기도 했고 아주머니를 도와 나무를 패주고 저녁불을 때주고 물을 길어주기도 했으며 다리골절상을 입은 로농을 안고 병원을 찾아가기도 했어요. 그랬더니 지금도 그 마을로 가면 저를 남으로 생각하지 않고 제집식구처럼 대해줍니다.   대신 가족들에게는 마음에 상처를 남길 만큼 무심했어요. 소학교에 다니는 큰딸과 쌍둥이 두 아들을 안해한테 다 맡겨놓고 혼자 훈춘에 가서 2년간 생활체험을 한 무정한 저를 두고 안해는 “당신한테 집은 려관일 뿐이군요.”라며 서운해했죠.   김: 선생님께서는 또한 언제나 높은 작가적 사명감을 갖고 창작에 림하셨어요.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는 늘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작가는 그 민족의 훌륭한 작가로 될 수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리고 저 개인에게는 미안한 일을 할 수 있을 망정 조선족이라는 민족 앞에는 절대 티끌 만한 흠집도 남겨서는 안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으며 부끄럼 없도록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선생님의 그런 자부심은 사명감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족에 대한 관심과 고민에서 잘 나타나는데요. 8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선생님께서는 민족정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자랑스럽게만 생각해온 조선족이 내면에 안고 있는 문제점을 똑똑히 보아내게 되면서 선생님의 작품은 민족의 렬근성을 파헤치고 고발하는 데로 필묵을 바치게 되죠. 단편소설 〈반주술 두냥〉, 〈까치는 울어예건만〉, 〈그 날 해는 짧았다〉 등이 이에 해당한 작품들이라고 하는데요. 보다 싶이 선생님의 소설은 민족적 사명감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과 민족적 륜리의식을 보여주면서 민족적인 렬근성을 파헤친 작품들이 주요한 한 부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림: 저는 과거에도 그랬거니와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민족의 렬근성마저 덮어감추면서 민족을 사랑한다는 건 거짓이라고 봅니다. 우리 민족이 더 높은 차원에로 부상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 민족의 결함과 오유를 파헤치는 건 수치스러운 게 아니라 자기 민족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더 똑똑하게 알게 되였어요. 저는 중단편소설 뿐만 아니라 장편소설 , 에서 거침없이 쏟아냈어요. 이것이 우리 민족을 지키고 우리 민족을 위하는 절실한 태도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김: 한편 진, 선, 미에 대한 격찬과 가, 악, 추에 대한 질타는 선생님의 소설창작에서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또 하나의 계렬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선생님의 일관적인 미학주장을 보여주는 테마이기도 합니다. 그 대표작으로 장편실화문학 , , 이 있죠.   은 선생님의 새로운 창작자세와 얼굴을 가장 뚜렷이 보여준 작품입니다. 90년대 초반, 조선족사회를 들썽하게 했던 대형사기사건인 한옥희사건, 돈이 어떻게 권력을 리용했고 권력은 또 어떻게 돈을 리용했는지 그 비리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선생님께서는 권력층에서 오는 온갖 위협과 압력을 무릅쓰고 취재를 하였고 끝내 제1부를 책으로 출간하여 3만 5천부를 발행하는 기록을 냈습니다. 선생님은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사회를 두고 그 밑바닥에서 생존을 위해 기여다니는 수많은 백성들의 대변인이 되여 그들을 위해 말하고 부르짖고 싶은 욕망으로 붓을 놓지 못했다.”고 하셨어요. 진정 사회의 비리를 외면하지 못하는 량심 있는 작가이신 거죠.   림: 진, 선, 미와 가, 악, 추는 어떻게 보면 저의 전반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력사거나 사회를 고찰하면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서민층에서 진선미가 많이 나타나며 권력층에서 가악추가 많이 표현됩니다. 한옥희사건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저층에서 허덕이는 백성들의 대변인이 되여 한발을 감옥에 들여놓는다는 각오로 반년 동안 숨어다니면서 한옥희사건을 취재했어요. 주당위 선전부, 주당위 부서기, 주공안국 국장들로부터 오는 “한옥희의 출판을 정지하지 않으면 당신한테 내려질 수갑을 책임질 수 없다.”는 엄중경고도 무시한 채 말이죠.   결국 권력의 벽을 뚫지 못하고 반성품으로 되고 말았어요. 그렇게 기대하고 응원해주신 독자들께 미안할 뿐입니다.   김: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수많은 단편소설을 창작함과 더불어 중편소설, 장편소설 창작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셨습니다. 그중 장편소설 는 2002년 3월부터 2003년 3월 사이에 《장백산》 잡지에 련재, 2004년 12월에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판, 같은 해 한국에서 《족보》로 제목을 바꾸어 출판, 2012년 3월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재출판했습니다. 총 4차례의 출판은 흔치 않은 일이며 그만큼 작가의 저력과 작품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점이 아닐가요.   시대가 영웅을 낳지만 그들도 살이 있고 피가 있고 뼈가 있고 감정이 있는 보통인간이란 걸 늦게나마 깨달으신 선생님께서는 그들의 인간적인 내면을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려 했습니다. 소설가 허련순선생님은 를 “서사에만 치우치던 창작방법에서 벗어난 심리소설로서 즉 인물들의 내면 탐색의 흔적을 성찰한 것이 주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내면 탐색과 관련하여 욕망의 뿌리로 내려가려는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며 제도나 권력, 의념의 제약 등 억겁의 굴레로부터 인간의 내면을 구원하려는 시도와 동시에 개인 주체의 위기에서 탈출하려는 강렬한 의지 또한 괄목할 만하다∼ 작가 특유의 입담과 날렵한 필치가 돋보이는 림원춘소설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라고 하셨어요.   림: 늦었지만 젊은 작가들을 따라배워 심리적 특점들에 력점을 두고 노력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입니다. 때가 지났지요.   김: 겸손한 말씀이십니다. 한편 는 녀성테마 내지 페미니즘 성향의 소설이라고 보기도 하는데요. 사실 선생님께서는 오랜 기간 녀성 소재와 테마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오셨습니다. “문학이란 어느 한 부류의 인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해야 한다.”고 인정하는 견지에서 약소군체거나 소외된 인간에까지 인간애를 경주하고 있으며 예나 지금이나 낡은 륜리도덕에서 해방받지 못한 조선족녀성들에게 작가적인 사명감과 책임감을 다하지 못하고 있음에 죄의식을 느끼셨어요. 지어 ‘녀성들의 대변인’, ‘녀성작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녀성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으셨던 부분은 정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네요.   림: 자고로 우리의 녀성들은 사회에서나 가정에서 속박받고 멸시당하는 약소군체였으며 지금도 그 계률에서 완전히 해탈되지 못한 피동형 군체입니다. 만약 우리마저 그들을 외면한다면 그들은 지탱점마저 잃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들은 우리의 어머니들입니다. 영웅의 뒤에는 현처량모가 있듯이 훌륭한 가정도 그 뒤에는 현명한 안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녀성들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 녀성들을 위해 저는 눈 감을 때까지 그녀들의 대변인으로 나설 겁니다.   김: 선생님의 인생은 문학을 빼고는 얘기가 안될 정도로 선생님에게서 문학은 너무나 중요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만큼 선생님께서는 평생의 격정과 정력을 오로지 문학 하나에만 다 쏟아부으셨어요. 열정을 쏟아부으신 만큼 높은 문학적 성과를 거두셨고 수많은 우수한 작품을 남기셨습니다. 최고의 명예를 따낸 〈몽당치마〉와 초중, 고중 교재에 선정된 여러편의 소설, 그리고 후반기의 장편소설들이 이 점을 잘 증명해주고 있어요. 작가적 량심을 지키며 지금껏 문학에 모든 걸 다 바쳐오신 선생님, 그런 문학을 지금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림: 저는 문학을 위해서 자식도 미색도 돈도 권력도 다 저버렸어요. 그렇다 해도 저는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되려 남을 해치지 않고 한생 가난한 선비로 살아온 그것에 만족합니다.   유감이라면 제한된 환경, 제한된 사유, 제한된 언어, 제한된 필치 때문에 좋은 작품을 많이 쓰지 못한 점입니다.   김: 선생님께서는 후배사랑이 끔찍하신 걸로도 유명하십니다. 그 어느 시기든 줄기차게 자신의 창작을 견지하는 한편 끊임없이 문학후배들에게 관심을 보이시고 사랑을 쏟으셨어요. 소탈하고 꾸밈없고 진정으로 사람을 대하시는 선생님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죠. 선생님 댁에서 개잡이를 하거나 한밤중에 ‘쳐들어’가서 문학을 둘러싼 이야기로 열띤 분위기를 만들던 추억들을 후배작가들은 지금도 잊지 못하면서 선생님의 인격을 높이 사고 있어요. 또한 농촌에 내려가면 농민들을 가족처럼 스스럼없이 대하고 그들과의 정분을 몇십년간 이어오기도 하시다 보니 선생님에게는 그야말로 친구가 많으십니다. 그런가 하면 불의에는 가차없이 대하다가도 어려운 사람에게는 마음이 한없이 약해지시죠. 투명하고 깨끗하고 거짓 없으며 물욕에 오염되지 않고 세상과 인간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선생님을 문학후배들은 ‘샘 같은 분’이라고 합니다.   림: ‘샘 같은 분’, 하하하, 우습네요. 저는 그처럼 깨끗한 사람이 못됩니다. 남들을 모두 자기처럼 믿었다가 얼림수에 들어 애매한 사람을 탓하기도 했고 꼬임수에 들어 좋은 친구를 나쁜 사람이라고 욕설을 퍼부은 적도 있어요.   아무튼 지금 저는 문단의 어른으로 돼버렸네요. 어른이면 후배들을 사랑하고 보듬고 포옹해야 하는데 참 힘든 과업인 것 같아요.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김: 선생님은 또 지독한 낚시애호가인 걸로 알고 있어요. ‘첫번째 애인’이 문학이라면 ‘두번째 애인’이 낚시라고 할 정도라니 낚시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나봐요.   많은 지인 분들이 또 선생님의 ‘빙어冰鱼’ 맛에 그렇게 환상을 갖고 있더군요. 급하시기로 유명한 선생님의 성격은 번개불에도 콩을 구워먹을 수 있을 정도라는데 그렇게 급한 성격으로 어떻게 몇시간씩 고요하니 앉아 낚시를 할 수 있으셨는지 참으로 신기하네요. 아니면 급한 성격을 낚시하는 걸로 중화라도 시키시려 했던가요?   림: 이틀 전에도 훈춘에 낚시하러 다녀왔어요. (웃음) 낚시애호가라기보다는 낚시질군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겁니다. 낚시질이라면 저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낚시통을 끌어안는 낚시미치광이예요. 그래서 친구들은 제가 물에 빠지는 날엔 한 많은 고기들에게 뜯기여 뼈다귀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우스개를 하죠.   저는 손에서 일감이 떨어지면 엉뎅이를 붙이고 있지 못해요. 일감이 떨어지면 어데 가서 강도질을 하거나 싸움판이라도 벌려야 직성이 풀릴 그런 불 같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붓대만 잡으면 밤낮을 모르고 작품 속에 빠져드는 글귀신으로 돼버려요. 낚시질 역시 마찬가집니다. 고기가 잡힐 때는 안해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와도 “응, 좀 있다 가마.” 하면서 동동이에만 눈을 팔 그런 미치광입니다. 고기가 잡히지 않으면 머나먼 청산을 바라보며 채 끝내지 못했던 소설구상에 빠져들군 하죠. 그러다 큰 고기가 물려 낚시대를 끌고 가는 바람에 낚시대를 잃어버린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하하.   김: 소설에 빠져 멋지게 살아오신 선생님, 선생님께서 남기신 력작들이 앞으로도 우리 문단을 계속 빛내가리라 믿습니다. 문학을 향한 식지 않은 열정과 오로지 문학이라는 외곬에만 투혼해오신 우리 문단의 저명한 소설가 림원춘선생님의 문학정신에 진정 존경을 표합니다.   오늘 대담 참으로 고마웠어요. 내내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림: 고맙습니다. 출처:2017 제5호
2    작가는 탁상머리를 떠나야 한다 댓글:  조회:194  추천:0  2019-07-09
작가는 탁상머리를 떠나야 한다 림원춘(소설가)     언제부터였던지 비평가들이나 작가들 입에서 ‘생활’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별로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지어는 서먹서먹하게 안겨오는 잊혀진 용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난 9월 2일,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에서는 룡정시에서 ‘다매체시대 소설문학의 출구는?’라는 테마로 세미나를 가졌었다. 몇시간에 걸치는 그 토론에서도 나는 생활이라는 말을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생활’이라는 두 글자가 빠져버리니 어쩐지 소설문학의 한 귀퉁이가 잘리운 것 같은 서운함을 감출 길 없었다. 나는 외래어를 자랑하며 지식을 과시하는 적잖은 글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가슴에 와닿고 생활맛이 짙은 글은 그리 많이 보지 못했다. 물론 그런 글도 필요하겠지만 좋게는 우리 문학의 현주소를 두고 입씨름을 해야 하지 않을가 생각한다. 문학은 인간을 떠날 수 없다. 인간이 생활을 떠날 수 없듯이 우리의 문학 역시 ‘인간생활’을 떠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생활’을 운운하기 꺼려하며 ‘생활’을 말하면 마치 시대에 몹시 뒤진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의 작품이 왜 독자들을 잃어가고 독자들의 외면을 당하는가 하는 것을 두고 우리 작가들은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하며 절대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시대적 요인도 있겠지만 작가에게 절대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일부 소설들을 보면 책상 앞에서 꾸며냈거나 언어희롱을 했다는 감을 주는가 하면 아무런 가공도 거치지 않은 원초적인 생활을 라체 그대로 소설이랍시고 드러내는 페단들이 있다. 생활을 떠날 수 없다 하여 생활 자체가 소설로 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생활을 외면하고 올리는 글도 역시 소설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소설은 절대적으로 인간을 떠날 수 없고 인간생활을 떠날 수 없다. 그런 만큼 소설가들은 행장을 둘러메고 생활 속으로 들어가 인간들의 희로애락을 발굴하고 재창조하여 소설이라는 옷을 입혀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고역’이라는 두 글자를 항상 업고 다녀야 한다. ‘생활 속으로’라는 말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소설은 재미있게 써야 한다고 말해왔다. 재미없게 써놓고 독자들이 보지 않는다고 독자들을 나무라서는 절대 안된다. 또 재미있게 썼다 하여 그것이 다 력작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로 되는 것은 먼저 독자들을 보게 하는 것이다. 봐야 좋고 나쁨을 가릴 것이 아닌가. 독자들이 모르고 있는 작품을 천평 우에 올려놓고 “력작이요, 졸작이요.”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싶다. 좋은 작품은 언제나 독자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나는 이 때까지 몇백만자에 달하는 많은 소설을 썼다. 그 작품들 속에 우리 민족의 삶의 흔적이 담기지 않은 작품은 한편도 없다. 그렇다 하여 내 작품 모두가 명작으로 된 것은 아니다. 부끄럽지만 그 속에서 건질 만한 작품은 몇편 되지 않고 북데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생활’을 강조하면서 ‘생활’ 속으로 들어갔다는 작가가 쓰레기만 남기다니? 많은 작품들이 생활의 ‘복사’라는 그 언덕을 넘지 못했으며 우리 민족의 운명에 파문을 그릴 수 있는 돌을 던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림원춘의 창작‘한계’가 아닌가 싶다. 이제 나에게서 다른 그 무엇을 바란다면 “이젠 저의 소설을 접어줍소서!” 하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남은 것은 ‘나이 먹은 타령’ 밖에 없으니까. 붓을 들었던 김에 한가지만 ‘덧들이’할가 한다. 지금 우리의 문단에는 ‘만세’평론이 란무하고 있다. 나는 ‘만세’평론은 작가에게도 비평가에게도 해를 끼칠 뿐 아무런 도움도 없다고 말해왔었다. 내 말이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릇됐거나 틀린 것을 묵인하고 ‘인심 잃을 글은 쓰지 않고’ 만세만 부른다면 언제 가야 우리 문단이 활기를 되찾을 수 있겠는가? 심히 걱정된다. 이제 오래잖으면 새해의 동창이 밝아온다. “새해에는 좋은 작품을 많이 써줍소사!” 하는 것이 선배작가로서 후배작가들에게 드리는 간곡한 부탁이다.  
1    [작가평]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댓글:  조회:1271  추천:1  2012-10-06
작가평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림원춘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거나 말해야한다는 이 두마디는 로작가거나 신진작가, 성과를 올렸거나 올리지 못한 모든 작가들을 망라하여 작가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서 입버릇처럼 떠나지 않는 으로 되고 있다.     백번 지당한 말이다. 왜냐하면 작가는 작품을 떠날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잖은 작가들은 이 말의 무게와 진의를 다는 터득하지 못하고 있다. 창작활동은 우리들이 쉽게 말하는것처럼 그런 손쉬운 일이 아니라 제 살을 뜯어먹고 제 피를 빨아먹고 제 뼈를 갉아먹는 고된 로동이기 때문이다. 하여 웃으며 들어섰다가 울며 나온다는 말도 생겨나지 않았나싶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이 심오한 이미지와 함께 먼저 떠오르는것이 이 말 앞에서 떳떳하지 못했던 자신과 서글퍼지는 자신이다. 그런가 하면 좀 늦다 싶지만 이 말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붓끝을 날리는 한 작가가 선연히 떠오른다. 그가 바로 작가 허룡석선생이다.    허룡석이라는 이 이름 석자를 작가들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현임 연변작가협회주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석이라는 허룡석은 알고 있었지만 많은 독자층을 점유하고 있는 허룡석은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보도매체에서 장기간 지도일군으로 사업했던 허룡석은 알고 있었지만 수필과 소설에서 두각을 내밀었던 허룡석은 모르고 있었다.    이젠 옛말로 돼버렸고 우습광스러운 일로 흘려버렸지만  허룡석선생이 연변작가 협회주석으로 선출될 때 , 하면서 이러쿵 저러쿵 말도 많았었다. 지어 분과를 편성할 때 면서 비난의 목소리도 그치지 않았다. 이렇듯 작가들의 말밥에 올랐던 허룡석선생이 이 몇해사이 무게있는 소설들과 수필들을 륙속 뽑아내여 문단을 깜짝 놀라게 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것이다. 지어 말밥에 올려놓았던 사람들이 되려 무색할 지경으로.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였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허룡석선생의 근작에 대해 몇마디 곁들일가 한다. 1. 비리와의 전쟁     어찌 보면 비리와의 전쟁은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 작가들의 앞에 놓인 과제가 아닌가싶다. 지어 비리가 문학을 만들고 비리가 문학을 발전시킨다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세계명작 모두가 비리를 취급하지 않은 작품이 없고 비리를 떠난 것이 없다. 그렇듯 우리의 문학은 한시각도 비리와의 전쟁을 멈춘적이 없고 그 전쟁은 앞으로도 계속될것이다.     작가의 한 작품으로 비리를 근절시킨다는것은 얼토당토 않은 거짓이다. 하지만 인류문명의 기사라고 일컸는 작가라고 한다면 적어도 비리를 보고 분개할 줄 알고 통탄할줄 알고 폭로할줄 알고 비판할줄 알아야지 않겠는가. 비리를 보고도 외면하거나 에돌아간다면 훌륭한 작가로 될수 없거니와 지어 작가라고 말할수 없을것이다. 작가의 사명감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는가 싶다. 사명감, 사명감 하면서 말로만 외우지 말고 한번 붓끝에 담아 보시라. 자칫하면 코피가 터질수 있고 정갱이가 물러날수도 있으며 옥살이도 할수 있다. 우리 민족의 력사를 간단히 훓어보아도 비리와의 전쟁에서 정배살이를 했거나 단두대에 올랐거나 떼죽음을 당한 문인들이 수두룩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하여 들은척만척 본척만척 할수 없지 않는가. 김학철선생님처럼 황제도 말에서 끌어내릴수 있는 담략과 전투적 정신이 있다면 제몸에 불이 달린다한들 무서울것 뭐랴?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다 할수있는 쉬운일이 아니다. 바로 쉽지 않다는 이 말에 력점을 두면서 허룡석선생의 단편소설 (도라지잡지 2009년6기)를 말해볼가 한다.    단편소설 는 마치 러시아 작가 고골리의 처럼 씌여진, 권력층 자체가 자체의 비리를 직설적으로 폭로한 폭로문학이자 풍자문학이다.    이 소설의 리해를 위해 내용을 간추린다 .    성당위 조직부 부부장 초효화가 렴정건설조사조를 거느리고 시위서기 조희문이 똬리를 틀고 있는 도시로 내려온다. 조사조성원으로는 부패행위를 수자와 때, 장소와 사람이름, 전화번호, 지어 핸드폰번호까지 100 % 로 검측하는 전자뇌와 과학일군.     제일 처음 전자뇌의 검측을 받은것은 시급간부들이다. 그중 시규률검사위원회 서기 리만규의 검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97차에 거쳐 도합 3478만원 수뢰. 1차성적으로 제일 많이 수뢰한 금액 500만원인데 수뢰한 금액밑에는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돈을 주었다는것까지 똑똑히 밝혀져 있었으며 회뢰한 사람과 이름, 전화번호, 핸드폰번호까지 낱낱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거래하고 있은 애인은 8명, 그녀들의 이름, 년령, 직업, 전화번호, 핸드폰번호까지 찍혀 나왔으며 제일 나어린 녀성은 18세밖에 안되였다. 그 중 6명의 녀인에게 집을 사주었고 2명의 녀인에게 승용차를 사주었다...그리고 상급지도자들에게 회뢰한 금액은 600만원, 그속에는 시위서기 조희문에게 회뢰한 금액 백만원도 들어있다. 시당위 부서기 석기성, 시정건설을 책임진 부시장 장덕진, 시정협부주석 왕수산, 시인대부주임 관두성...몽땅 수뢰와 회뢰투성이고 오물투성이다.                                                                                                         소설은 전자뇌라는 매개물을 통해 황당적인 수법으로 당과 정부의 일부 간부들의 부패상을 신랄하게 폭로,비판하고 준절히 통책하고 있다.    항간에는 돈이자 권력이고 권력이자 돈이라는 말이 말의 반찬처럼 떠돌고있다. 옛날에는 뢰물이 수류탄 두개와 비행기 한대 (술 두병과 닭 한마리 )면 족했었다. 그러다 시계, 자전거, 록음기, 텔레비죤수상기로 발전됐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금화, 그것도 과급, 처급, 현급, 지구급…올라가면 갈수록 관직의 값도 가배로 올라간다. 이런 소문은 헛소문만은 아니다. 신문매체가 보도한데 의하면 이러한 부패행위가 사천성에도 있었고 흑룡강성에서도 있었다. 진공상태가 아닌이상 전국각지에 다 있은것이다. 그토록 렴정건설이 잘 된다는 우리 연길시에도 있지 않았던가!    보시다 싶이, 아시다싶이 비리는 도처에 있다. 문제는 우리의 작가들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음페적이거나 공개적인 수단을 망론하고) 이런 비리를 대하는가에 있다.      단편소설 는 황당수법과 유모아를 곁들인 폭로문학으로 부정부패를 근절하려는 당의 결심과 부패간부를 송두리채 잡아냈으면 하는 인민대중의 념원, 또한 자기들의 부정부패를 덮어감추기 위하여 갖은 수작을 꾸며대는 부패간부들의 인물형상을 잘 그려냈다. 비록 전반적으로 보아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이르지만 부정부패척결을 소설에 담아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우리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준 훌륭한 작품이라고 보아진다.    특히 우리들을 감탄하게 하는것은 허룡석선생의 작가적태도이다. 다 알다싶이 허룡석선생은 연변작가협회주석이다. 그는 주석이라는 베일을 벗어버리고 보통 작가들도 말하기 힘든, 말하기 저어하는 당내의 비리를 서슴없이 파헤쳤다. 웬간한 결심과 담략이 없이는 실로 하기 힘든 작업이다. 나는 허룡석선생이 보여준 이런 작가적 정신을 흠모하고 찬양한다. 2. 뜨거운 사명감 우리 백의겨례는 당에서 부르면 부르는대로,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우량한 혁명전통을 갖고 있다. 항일 투사의 98%, 조국해방전쟁의 93%의 혁명렬사들을 갖고 있는 우리 민족은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언제나 앞장에 나섰으며 운동때마다 자신들의 영웅을 배출하군 했다. 당에서 준 임무를 초과하면 했지 절대 적게 하지 않는 그런 들끓는 열정을 갖고 있는 민족으로 소문이 짜하다는것을 자타가 다 알고있는 일이다. 하여 혁명은 북경으로부터 연변으로가 아니라 연변으로부터 북경으로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 이것은 우리 민족의 고유의 특징이자 우점이다. 그리고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무조건 따른다는 무조건은 맹목성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맹목성은 류의민 민족으로서의 렬근성에서 오기도 하지만 이 만들어 낸 강압에서 오기도 한다. 하여 틀린 당의 말도 옳다하면 옳다하고 전진하라 하면 전진해야 했고 또 전진했었다. 그로하여 우리 민족이 입은 손실이 적단 말인가? 전국적으로 제일 먼저 진행된 토지개혁에서는 좌경으로 하여 있어서는 안되고 또 있지 말아야 할 이라는 계급을 하나 더 만들어 냈고 호조합작시기에는 이라는, 로시아의 를 답습한 오유적인 을 만들어 내여 수억의 농민들에게 피해를 입혔고 총로선, 대약진, 인민공사 때에는 공산주의로 간다며 공공식당까지 만들어 배를 곯아야 했고 논 한무에서 10만근의 벼를 수확했다는 허풍치기에 앞장서기도 했다. 강철대약진, 대채따라배우기, 문화대혁명… 모든 운동에서 앞장서는 민족, 그 민족이 바로 우리 조선족이였다. 더욱 한심한것은 민족정풍때 조선족이 조선족 민족주의 분자를 잡아내는 한심한 꼴을 보여주기도 했다. 때는 숱한 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산아제한정책 역시 그랬다. 인구과잉은 소수민족인구의 증장에서 온것이 아니라 전국인구의 95%를 점하고 있는 한족들에 의해 초래된것이였다. 하지만 1가족 1인 출생이라는 평균주의로 (소수민족은 1가족 2인 출생도 허용했다) 소수민족 인구는 급격한 하강선을 긋게 되였다. 이 운동에서도 우리 조선족은 훌륭한 을 보여주었다. 층층이 내려오면서 동원대회를 열고 당원대회에서는 당성으로 보증하라 하고 가족단위로 보증서를 쓰게 하고 보도매체에서는 여차여차하게 저출생률이 상해시를 초과했고 천분의 몇프로안에 들었소 하면서 떠들썩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병원마다 절육수술실을 따로 두고 무료로 절육수술을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순회절육수술대를 조직하여 촌마다 마을마다 돌아 다녔는가 하면 시내에 있는 가도에까지 내려와 강압적으로 절육수술을 하군 했다. 저출산률과 산아제한 퍼센트에서 전국의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마지막엔 집법기관까지 동원된 놀라운 사실까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오늘 허룡석선생의 중편소설 ( 내가 처음 보았던 제목은 였다.)를 진맥한다. 중편소설는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의 충격으로 조선족집거지구의 해체, 해외로의 진출, 인구의 마이너스성장, 문화교육의 답보와 후퇴, 경제의 부진 등등으로 날로 가속화되는 라는 네 글자를 앞에둔 시점에서 씌여진 작품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민족은 이라는 말에 습관된 민족이며 그것으로 만족하는 민족이다. 하여 빈곤현이 속출하고 로임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면서도 모범자치주요 민족단결모범이요 문명단위요 선진단위요 위생도시요 하는 등등의 월계관만은 수두룩히 쓰고있다. 또 그것으로 오늘의 오점들에 면사포를 씌워주며 부족점들을 미화해주고 있다. 지금 항간에는 연변은 의 장소라는 말까지 떠돌고 있다. 그것도 그럴것이 경제는 춰세우지 못했지만 이런저런 월계관 덕분에 많은 지도간부들이 성으로, 중앙으로 승진하고 지방에서도 층층히 올라오면서 그런 월계관으로 승급의 사다리를 놓고…    허룡석선생은 자기의 중편소설 에서 산아제한이라는 특정된 단대목을 틀어쥐고 우리 민족의 절대적순종, 이라는 자아만족, 이라는 허영심…등등 고질로 돼버린 약점들을 신랄한 필치로 폭로하고 질타하였으며 산아제한으로부터 급하강선을 그은 인구의 마이너스성장으로 하여 빚어지는 우리 민족의 불운을 통탄하고 있다.    민족의 동화는 언제나 언어의 동화로부터 시작된다. 언어는 바로 그 민족의 상징이며 가장 중요한 표현수단이다. 인구의 마이너스성장으로 하여 우리의 언어를 지키는 보루였던 학교가, 촌마다 향마다 있던 학교가 페교되고 닭사양장으로 돼지사양장으로 돼버렸거나 돼버리고있다.    허룡석선생은 중편소설 에서 당의 민족정책을 덮어감춘 산아제한정책의 가혹성과 그 후유증을 홍순이와 채옥이라는 두 조선족녀인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구병원 한 병실에서 30년간이나 내려오면서 한이 맺혔던 두 녀인이 서로 만난다. 한 녀인은 지구산아제한판공실주임 김홍순이고 한 녀인은 지금도 평안촌에서 한생을 자궁병으로 고생하는 양채옥이다.    30년전, 김홍순은 하향지식청년으로 입당까지 하고 대전공사 부련회주임까지 승진한다. 그때 부부한쌍이 자식 하나만 낳아야 한다는 산아제한정책이 내려왔다. 김홍순은 당위의 지시하에 산아제한사업에서 락후한 면모를 개변시키기 위하여 도보로, 자전거로 대대마다 생산대마다 답파하면서 절육수술을 강요한다. 그는 평안촌 양채옥이 두번째 자식을 낳으려고 청수동림장 양봉장에 피신한, 임신 여섯달이나 되는 양채옥까지 찾아내여 류산시키려고 현립병원에로 호송한다. 양채옥은 정신적구박과 육체적 타격으로 병원문앞에서 6개월태아를 류산한다. 공사당위에서는 그렇게 하고도 안심되지 않아 김홍순더러 양채옥은 물론 전 공사의 생육년령에 속하는 부녀들에게 부인병을 검사한다는 미명으로 몰래 피임환까지 넣게 한다.    산아제한으로 공을 세웠고 명성을 날린 공사당위서기는 광명현당위의 부서기로 승진하고 김홍순은 또 광명현 산아제한판공실주임, 지구 산아제한판공실주임으로 련이어 승급하여 전국산아제한경험교류회에서 경험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후 그는 자궁암에 걸려 지구병원에 입원한다.    한편 양채옥은 류산시간을 훨씬 초과한 태아를 류산한 후유증과 몰래 넣은 피임환 때문에 30년간 고생하다가 자궁병으로 지구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는데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공교롭게도 한병실에서 한생 한을 품고 있었던 김홍순을 만난다.    양채옥의 행패질과 욕소리속에서 점차 자책과 죄의식에 모대기던 김홍순은 몰래 양채옥의 치료비를 대주고 림종시에 는 말을 남기며 눈을 감았고 갈등과 모순속에서 지난날의 옹이를 푼 양채옥은 남편을 시켜 김홍순의 혼을 부르게 한다.    허룡석선생의 중편소설 는 대조적 수법으로 조선족 두 녀인의 같지 않은 운명을 보여준 생태학적 소설로서 두녀인의 운명을 통하여 우리민족의 렬근성을 폭로하고 비판한 우수한 작품이다.    특히 짚고 넘어가고 싶은것은 가 우리 문학의 공백점을 메워 주었다는 그점이다. 산아제한은 우리 민족에게 잊을수 없는 뼈아픈 한을 남긴 으로서 우리 민족의 발전과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 비극이였다. 하지만 이때까지 그 어느 작가도 이 제재를 다루려 하지 않았고 또 다루지도 못했었다. 과거에 산아제한을 칭송하는 시 몇편 본듯한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오늘 허룡석선생의 붓끝에서 잊혀졌던 제재가 우리 문단에 등단했으니 진짜 칭송할만한 희사라하지 않을수 없다.   3. 풍자와 해학    1937년, 2차세계대전직전에 쓰딸린은 불안정한 변방을 공고히 한다는 미명으로 울라지보스토크 등 동부연해지구에 있던 우리 동포들을 중앙아세아로 강제이주시켰다. 뭐 조선사람은 일본사람과 친한 불온민족이라나? 그때 중앙아세아로 강제이주한 제1세대 조선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그 고생을 무어라 형용할수도 없었다. (지금 그 1세들은 거의 다 사망하였다) 기차와 트럭에 실려 중앙아세아 초지에 나무단처럼 부리워진 1세들은 모기, 마실물, 량식, 폭우와 눈보라…등 자연계의 갖은 시달림을 받으며 죽지 못해 살았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사실이 기간 연변땅에서도 있었다. 라는 노래가 연변땅에 울려퍼질 때 변방을 공고히 하기 위해 변방에 살고 있는 들을 몽땅 내지로 강제이주시켰다. 허룡석선생은 중편소설 ( 2009년 제6기)에서 재치있는 필치로 강제이주라는 특정된 환경과 혁명이라는 전제하에서 팔부마저 현행반혁명으로 만들어 강제이주를 시키는 의 무단성, 참혹성, 극단성, 몽매성을 에누리없이 폭로, 비판하고 있다.     만약 팔부가 아니라 정상인이 반혁명모자를 쓰고 강제이주를 당한다면 그때의 정치환경으로 보아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일수 있다. 하지만 지력상수가 빵점인 팔부ㅡ부부간의 짓거리도 부끄러운줄 모르고 자랑하고 일 잘하기에 팔간집 새각시가 공평하게 12부를 주어야 한다고 제기하니 자기가 자보한 8부를 주지 않고 왜 12부를 주겠다고 하느냐며 행패를 부리고…이런 팔부가 년말총화때 사원들이 잘한다고 춰주는 바람에 흥이 나서 잔치집에서만 부르라는 라는 노래를 불러 현행반혁명이라는 모자를 쓰고 강제이주를 가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팔부가 아니라 그가 보통백성이였어도 그토록 독자들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것이다. 팔부에게마저 반혁명모자를 씌우고 강제이주를 시키는, 정치와 혁명이라는 잔혹성, 비인간성을 라체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공감대를 만들었던것이다. 소설은 먼저는 흡인력이 있어야 한다. 독자를 끌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만이 보고 자기만이 흠상하자고 글을 쓰는 작가는 한사람도 없다. 보이기 위해서 글을 쓴다. 보여야 사명감이요 백의겨례요 뭐요 하며 운운지설할것이 아닌가? 허룡석선생의 중편소설 는 아주 재치있게 씌여진 구독성이 강한 소설이다. 어떤 사람은 작가가 독자들을 끌기 위해 짓거리를 많이 썼고 짓거리가 많기 때문에 재미있다고들 한다. 얼핏보면 그런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런것이 아니다. 주인공을 팔부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짓거리를 쓰지 않을수 없고 또 그 짓거리가 팔부라는 인물형상의 훌륭한 밑거름으로 되기 때문이다. 진짜 흥미선은 그 짓거리에 있는것이 아니라 풍자와 해학에 있다. 풍자와 해학은 쌍둥이처럼 풍자가 없으면 해학이 없고 해학이 없으면 풍자가 없는 인과관계를 갖고있다. 허룡석선생의 필체거나 언어를 보면 밭머리 쉼 할때 신문지에 잎담배를 굵직하게 말아물고 풀썩풀썩 연기를 뿜으며 시름없이 담배를 피우고있는 농부들이거나 시원하게 오이냉국 한사발 마시고 땀을 훔치는 농촌 아낙네들 같은 구수한 맛을 다분히 주는 이야기거리와 언어를 쓰기 때문에 기름에 튀긴 맛이 아니라 토장국냄새가 물씬 풍긴다. 때문에 독자들이 쉽게 접근하고 받아물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고있다. 거기에다 풍자와 해학적수법을 교묘하게 도입하다보니 자연스레 독자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허룡석선생의 중편소설 는 , 특히는 9차당대회의 승리적 페막을 경축하는 장면을 심혈을 기울려 대서특필했지만 하나도 지루하거나 지겨운 감을 주지 않고 너무나 진실하다는 감을 준다. 그 진실속에는 무서운 풍자가 숨어있다. 경축활동에 팔부가 참가한다거나 초롱불을 흔든다거나 10리 남아되는 공사로 초롱불행진을 한다거나 공사에서 영접하는 사람이 없다거나 등등, 그러면서도 웃음거리는 비일비재이다. 짓거리를 하다가 채 못하고 경축활동에 참가하는 팔부거나 그 짓거리를 위해서 밤을 새며 팔부를 기다리는 팔부안해…정치와 운동에 대한 풍자적 수법이 이 소설의 사건, 인물 전편에 관통되여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따분하지 않고 다 읽지 않고는 손을 뗄수 없게 만든다. 이 소설에는 또 하나의 주의를 돌려야 할 은유가 숨어있다. 그렇게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팔부가 자기가 부른 노래를 누구한테서 배웠느냐고 공작대가 그렇게 족쳐댈 때에도 자기에게 노래를 배워준 를 대지 않고 생뚱같이 죽은 아버지한테서 배웠다고 끝까지 뻗힌것이다. 그 살벌한 시기에 수많은 펀펀한 사람들도 자기 생존과 리익을 위하여 핍박에 의해 다른 사람을 물어먹었었다. 그런데 팔부는 을 혼자 뒤집어쓰고 로 몰려 강제이주를 당할 때까지도 당사자를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있다. 아무런 욕심도 없고 아무런 리해관계도 없는 팔부가 왜 그 노래를 죽은 아버지한테서 배웠다고 뻗혔을가? 팔부의 량심 밑바탕에도 그 무슨 남을 동정하는 인간성이 깔려있어서일가? 아니면 자기가 불면 그 사람도 자기처럼 끌려나와 투쟁받는것이 싫어서였을가? 작가는 마지막에 “성철형과 고모 그리고 형수가 억울하게 죽은지 수십년이 지났다. 하지만 오늘까지도 나는 거짓이라고는 모르는 팔부 성철형이 공작대가 그렇게 족쳐댈 때에도 왜 그 노래를 죽은 아버지한테서 배웠다고 뻗혔는지 의문이 풀리지 않고있다.”고 서술하면서 사색의 여운을 독자들에게 남겨주었다. 우리는 그 여운을 씹으면서 팔부형을 동정하던데로부터 존경하게까지 되며 의 잔혹성과 비인간성을 더욱 저주하게 된다. 허룡석선생의 중편소설 는 풍자적수법으로 운동을 가장 진실하게 밑뿌리까지 파헤치고 가장 예리하게 비판한 문제작으로 성공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 소설 역시 가운데서의 강제이주라는 공백점을 메워주었다는것을 기껍게 지적하는바이다. 3. 사회문제를 다루는 작가 작가라 하면 글을 만든다는 공통한 이미지가 있지만 글을 만든다는데는 여러가지 부류가 있다. 전문 사랑만을 취급하는 애정소설가, 정탐소설만을 쓰는 탐정소설가, 필봉을 비판에만 돌리는 비판소설가, 전문 풍자하고 조소하는 풍자작가, 남녀간의 성만 다루는 성문학가… 우에서 말한 비판소설가를 더 준확한 말로 바꾼다면 사회문제를 다루는 문제작가라고 하는것이 옳을것이다. 그렇다면 허룡석선생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 작가일가? 두말없이 문제작가라고 해야 적중한 말일것이다. 앞에서 말한 단편소설 , 중편소설 , 중편소설 등 모두가 문제작일뿐 아니라 이번에 나가는 수필 인생3부곡 , , , 잡문 , , 단편소설 은 모두가 훌륭한 문제작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수필과 잡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붓끝을 돌려 단편소설 에 대해 엿줘볼가 한다. 허룡석선생의 단편소설 은 독특한 기법으로 씌여진 문제작으로 내용이거나 사건 모두가 허룡석선생도 이미 써먹었고 기타 많은 작가들이 써왔던것으로 신선도가 낮은것이다. 그러면서도 소설이 왜 새롭게 느껴지는것일가?  이라고 불리는 장부시장이 개발상 고승래의 초청을 받고 시에서 유일한 5성급호텔인 로 간다. 미녀들의 배동하에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한 미녀와 동침까지 한다. 이튿날 깨여보니 회뢰했던 돈뭉치도 미녀도 간곳없이 사라지고 부시장은 장기들의 반란으로 고통을 겪다가 병원에 실려간다. 그런데 죽는줄 알았던 이 수술을 하고 나와 몇달후에 대리시장으로 승진한다. 작자는 이렇게 반전을 꾀함으로써 부정부패 척결이 아직도 준험한 단계에 처해 있으며 오랜 시일이 걸려야 할것임을 시사해준다. 만일 을 죽게 했거나 들통이나 잡혀가게 했더면 부정부패 척결의 승리를 보여줄수도 있었겠지만 이것으로 현실을 덮어감출수 없으며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수 없는것이다. 이것이 전부의 내용이다. 어찌보면 소설이 될것 같지 않은 소재로 소설을 만든것 같다. 그러나 읽어내려갈수록 새록새록 새롭게 느껴진다. 그것은 바로 독특한 창작기법때문이다. 기존의 소설과는 달리 장기들을 동원시켜 진수성찬과 술에 초부하를 받는 장기들의 고충과 연회석의 진전이 잘 배합되는, 다시 말하면 내외호응이 잘 맞아떨어지고 내용과 형식이 치륜처럼 잘 맞물리는 예술형식을 취했기 때문이 아닌가싶다. 이런 이인화기법은 과거 많은 작가들이 써왔지만 대상물과 피대상물의 유기적배합, 대상물도 말하고 피대상물도 말하는 수법은 처음 보아온다. 형식상의 새로운 창도가 돋보인다. 허룡석선생은 이라는 틀을 완전히 깨버리고 탈바꿈한 사회문제를 다루는 문제작가로 우리들에게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그러한 창작정신, 그러한 작가적 태도, 그러한 창작열정은 좋은 토양으로 되여 더 좋고 더 우수한 작품을 만들어낼것이다. 믿어의심치 않는다. 우리들에게 좋은 작품을 선물한 허룡석선생에게 감사드린다.   2010년 제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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