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원춘
http://www.zoglo.net/blog/linyuanchun 블로그홈 | 로그인
<< 4월 2024 >>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문학 -> 발표된 작품 -> 대담

나의카테고리 : 칼럼/단상/수필/기행

[대담]생활 속에서 소설을 낚아올리다
2019년 07월 18일 10시 03분  조회:318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생활 속에서 소설을 낚아올리다
림원춘&김홍란
 
 
초대작가: 림원춘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전임 부주석)
진행자: 김홍란 (《도라지》잡지사 전임 주필)
 
일시: 2017년 9월 1일
장소: 연길시 백산호텔 커피숍 
사진: 김향자
 
김홍란(이하 김):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건강 때문에 고생 많으신 걸로 아는데 오늘 우리 문단의 저명한 소설가이신 림원춘선생님을 대담코너에 모실 수 있어서 내심 기쁩니다.
 
림원춘(이하 림): 감사합니다.
 
김: 현재 《장백산》잡지에 선생님의 장편소설 〈산귀신〉이 련재되는 걸 보며 고령이심에도, 그리고 건강이 안 좋으심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이어가시는 선생님께 크게 감동받고 있습니다. 1958년에 소설로 등단을 하시여 60년이라는 작가인생을 살아오신 선생님에게서 소설 쓰기란 정녕 멈출 줄 모르고 흐르는 강물과도 같지 않나 싶어요. 옹근 인생을 문학에 다 바쳐오신 그 정신과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이 후배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군요. 그런 뜨거운 열정이 선생님의 후배, 그 후배의 후배들에게서는 갈수록 미약해지는 현실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선생님 앞에 마주하는 마음이 많이 송구스러워지네요.
 
림: 저는 언제나 글 쓰는 작업을 제 살을 뜯어먹고 제 피를 빨아먹고 제 뼈를 갉아먹는 고된 로동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쉬임없이 쓰고 있어요. 왜? 저는 ‘민족’이라는 두 글자를 머리에서 비워본 적이 없어요. 우리 조상들은 두만강을 건너와 이 땅에 첫 괭이를 박았고 첫 귀틀집을 앉혔으며 왜놈들과 피어린 투쟁을 했습니다. 지금 연변의 언덕마다 마을마다 하얀 렬사비가 서있는데 그 렬사비는 항일투쟁의 95% 이상, 해방전쟁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우리 조선족 렬사들이 흘린 피로 세워진 겁니다. 우리는 이런 위대한 민족의 후손들이예요. 그런데 이런 민족이 지금 ‘동화’라는 두 글자를 앞에 두고 흔들리고 있어요. 울고 있어요. 민족의 동화는 과거에도 지금에도 언어로부터 시작됐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교육진지이고 하나는 문단이라는 진지입니다. 저는 이 진지를 지키는 굳건한 보초병이예요. 한마디로 민족에 대한 사명감입니다.
 
김: 선생님께서는 1937년 룡정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나셨어요. 어린 나이긴 했지만 일제시기를 겪었고 광복과 해방을 맞이했으며 해방초의 가난과 각종 정치운동 그리고 문화대혁명의 동란을 거쳐 개혁개방의 새 시기까지 쭉 살아오고 계십니다. 그 시간들은 조선족의 옹근 력사이기도 하죠. 선생님께서 60년간 창작하신 작품들 속에는 조선족 력사의 전모가 반영되고 있어 의미가 더 깊지 않나 싶어요. 평론가 림연선생님은 림원춘작가님을 “민족화어시대(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40년대)에 태여나서 국가화어시대(20세기 50년대부터 70년대)에 작가로 성장하여 현대화어시대(20세기 80년대부터 오늘까지)에 일약 중국조선족문단의 중견작가 내지 국외에까지 명성을 떨친 저명한 작가로 부상”하셨다면서 “작가 림원춘의 필봉은 민족사의 전 령역을 답파하고 있다. 민족사의 3단계중 그 어느 단계도 공백으로 남기지 않고 완주했다. 이 사실이야말로 이례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작가를 말하다’라는 문학대담을 진행해갈 수록 신선한 형식이여서 인기가 있을 것이라는 초반의 가벼운 생각보다는 비록 전면적이진 못하더라도 중점작가, 대표적 작가를 조명하는 일이 결국은 우리 문단을 전반적으로 정리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된다는 생각에 어깨가 점점 무거워집니다. 조선족문학의 제2세대 소설가이시고 우리 문단의 대표작가이신 림원춘선생님을 이번 대담의 초대작가로 모시게 된 건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의미가 깊다는 생각이 들어요.
 
림: 저는 《장백산》잡지의 대담코너를 앞두고 많이 망설였어요. 내가 나서야 하나 나서지 말아야 하나를 두고 말입니다. 사실 저는 저명한 작가도 대표적 작가도 아닙니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전에 이런 고배를 맛본 적이 있어요. 1984년, 소설〈몽당치마〉로 전국상을 받고 오자 모든 조선족 보도매체가 요란할 정도로 저를 올리췄고 〈몽당치마〉보다 더 좋은 작품을 써달라고 부탁을 해왔어요. 저는 그 칭찬을 편달로 삼지 않고 개 잡은 포수처럼 기껏 어깨를 살리고 창작담이요 보고회요 하면서 동북삼성을 답파하다 싶이 했습니다. 결국 도취감에 2년 동안이나 소설 한편 써내지 못했어요. 망신살이 들었던 거죠.
 
이 나이에 ‘과분한 칭찬이나 평가’를 듣는다고 들뜰리는 없겠지만 자제하고 싶군요.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김: 선생님께서는 어린 나이에 벌써 고된 로동을 시작하셨다죠. 어려운 생활여건 속에서도 자식들 공부시키기 위해 부모님은 먼 심심산골로 부대 파러 떠나시고 열살 어린이였던 선생님은 집안 살림을 도맡아하며 공부하는 형님의 뒤바라지를 맡으셨어요. 그 때의 한없이 고생스러웠던 생활이 오히려 후날의 창작에 큰 도움이 되였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참 인상에 깊이 남네요.
 
림: 사실 저는 동년을 모르고 자랐어요. 한창 투정을 부릴 나이에 부모가 부대 파러 동량리(연길현 용신구)로 떠나는 바람에 제가 소학교 2학년 때부터 형님을 시중들며 주부질하지 않으면 안되였어요. 그것도 쌀밥이면 하기나 쉽지요. 보리쌀에 감자를 얹어 하는 밥이라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어야 했고 하학하고 돌아오면 물을 긷는다 보리쌀을 삶는다며 저녁차비를 하느라 애들과 술래잡기 한번 못해봤어요. 그 뿐인가요? 먹을 감자조차 없어 굶은 채 학교 갔던 적이 한두번 아니며 2, 3일씩 굶다 보니 교실에서 쓰러진 적도 여러번 있었어요.
 
말 그대로 저는 어머니의 아들로가 아니라 딸로 동년기를 보냈습니다. 시집간 누나를 제외하고 어머니 곁에는 저 밖에 없으니 어머니의 시중을 제가 다 들어야 했지요. 소학교 4학년 때 저는 어머니 곁에서 두부콩 갈기, 두부 앗기, 메주콩 삶기, 장 담그기에다 감자떡, 시루떡, 송편, 증편, 순대, 팥죽 만들기∼ 못해본 일이 없으며 다 만들 줄 알아요. 그런가 하면 썩 후날 제가 몸 담고 있던 방송국에서 ‘백정’이라 불리울 만큼 돼지, 개, 양, 게사니, 오리 잡기에서도 능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생을 경험하고 생활에서 만능으로 살아온 경력이 소설가인 저에게는 나쁘지 않았던 거 같아요. 창작에서 많은 소재를 얻을 수 있었던 건 물론 작가의 삶에서 난관을 이겨내고 의지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였다고 생각합니다.
 
김: 1949년도에 형님 분이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입학하셨고 이어 1956년도에 선생님께서 형님의 뒤를 이어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입학하셨어요. 그 시대에 두 형제가 나란히 같은 대학, 같은 학부에 진학한 자체도 경이로운 일인데 선생님은 형님의 수업까지 들으며 문학공부를 하는 행운을 지니셨어요. 그렇게 롤모델이나 다름없을 형님의 영향으로 원래의 꿈이 공정사나 외교관이였다던 선생님은 작가 쪽으로 꿈을 바꾸게 되였고 대학교 시절 열혈청년, 팔방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셨던 선생님께서는 그 넘치는 에너지를 그 후 작가의 삶에서도 쭉 이어오시며 창작의 필을 한시도 멈추지 않으셨어요.
 
림: 어린 시절 룡정에서 함께 밥 끓여먹으며 공부할 때 우리는 거꾸로 된 형제였습니다. 제가 눈을 잡아뜯으며 일어나 아침밥을 해놓고 형님을 깨우면 형님은 응쭰하고 돌아누우며 조금만 더 자겠다고 투정부리군 했으니까요. 하하하.
 
그러던 형제가 1956년에 연변대학에서 외국문학강좌장(교연실 주임)과 학생의 신분으로 다시 만났습니다. 동북사범대학 연구원을 졸업한 형님은 교수를 잘하여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였어요. 그런가 하면 연변작가협회 회원으로 창작활동을 하기도 했죠.
 
형님은 저보고 문학을 하라는 말씀을 한번도 한적 없어요. 하지만 대성중학교 때 토지개혁선전대에서 연극, 노래로 맹활약했던 형님의 멋진 모습, 자기가 보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등 소설을 넘겨주며 과외독서를 시킨 영향, 형님이 신문에 발표한 수필 등 영향은 소학교 때부터 고중, 대학에 이르기까지 줄곧 연극, 합창대에서 활약하고 연변대학 문오부 부부장을 했던 저의 경력과 일치되면서 저의 지향은 차츰 ‘문학’이라는 두 글자에 못을 박게 되였어요.
 
우리 형제는 지금도 네 집 내 집 없이 다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언젠가 형님은 병석에 누워 저의 소설집을 보면서 “이젠 네가 내 문학선생이구나.”라며 대견하게 웃으셨어요. 내가 형님의 선생? 소 웃다 꾸레미 터질 소리. 저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한 형님의 학생입니다.
 
김: 선생님의 문학경력을 살펴보면 대학교 때 단편소설 〈쇠물이 흐른다〉를 《아리랑》에 발표하시며 등단합니다. 이어 오체르크, 장막극도 연거퍼 발표하며 소설문학과 극문학에 심취, 1960년 대학 졸업 후 연변인민방송국 문예부 부주임으로 일하는 동안 소설을 륙속 발표, 문화대혁명 기간 공백기를 맞이해야 했지만 작가의 꿈과 사명감을 버리지 않고 한동안의 휴식 후 단편소설들을 창작 발표, 1981년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전근하여 편집부 주임으로 발탁되였고 1982년 연변작가협회에 전근하여 전직작가, 국가1급작가로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칩니다.
 
지금까지 중단편소설 90여편, 평론 40여편, 시 20여수, 산문 20여편 발표. 단편소설집 《꽃노을》(1980), 《몽당치마》(1984), 중단편소설집 《몽당치마》, 중편소설집 《눈물 젖은 숲》(1995), 장편소설 《짓밟힌 넋》(1988), 《파도에 실린 사랑》(1986), 《우산은 비에 운다》(2004), 《그날의 25시》 외 《림원춘소설선집》(6권, 2011-2012), 장편실화문학 《분투자의 발자국》, 《예고된 파멸의 기록》(1992), 《태양에는 흑점이 없다》, 텔레비죤련속극본 《아리랑》 등 많은 작품을 창작, 출간하셨어요.
 
그런가 하면 전국우수단편소설상, 전국소수민족문학상(2차),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2차),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2차), 연변작가협회문학상(2차), 《연변문학》문학상, 《장백산》문학상(2차) 등 수차례 수상하는 경력을 쌓으셨고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중국소수민족문학학회 상무리사로 계시면서 문학사업의 발전을 위해 큰 힘을 보태셨습니다.
 
림: 저는 수두룩한 글을 쓰면서 과분할 만큼 상을 많이 받았고 영예도 많이 받아안았습니다. 하지만 그 ‘영예’는 언제나 ‘멍에’로 되군 했어요. 왜냐 하면 받을 때는 흥분되고 기분 또한 좋았지만 좀 지나면 무거운 ‘보따리’로 되기 때문이죠. ‘영예’가 동력으로 돼야 하는데 저는 한번도 그 영예를 동력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시름거리로 만들군 했습니다. 성숙되지 못한 글쟁이라서 그런 거죠.
 
김: 선생님의 작가생애를 살펴보면서 가장 강렬하게 인상받았던 건 선생님께서 자신의 초반기 창작에 대해 철저히 부정하신 부분이였어요. 전반에 걸친 선생님의 소설세계는 사실주의라는 굵은 선으로 관통되여있지만 거기에는 혁명적사실주의 창작에서 비판적사실주의 창작으로 넘어선 력정이 선명하게 찍혀있어요. 좌적인 사조가 살판칠 때 우리의 작가들은 스스로도 ‘인류 령혼의 기사’, ‘생활의 개조자, 설계사’, ‘시대의 선각자, 계몽자’로 자처하며 계급적, 민족적, 시대적 등 대단한 사명감에 들떠있었으며 그래서 순수문학보다는 참여문학이 훨씬 인기가 있었죠. 그런 시대적 영향하에 선생님의 작품에도 시대적 사명감에 의해 창작된 것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고 어느 평론가가 말씀한 것처럼 선생님 소설의 “혁명적사실주의는 거창한 시대적 담론을 충실히 담아”왔습니다.
 
썩 후날, 자신의 지나온 창작을 아프게 돌아보며 깊은 반성을 하신 선생님은 이런 글을 남기셨어요. “나는 나를 모르고 작가의 대렬에 들어선 사람이다. 누구나 다 자신을 알아야만 작가로 되고 좋은 글을 쓴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너무나 오랜 시간, 몇십년이라는 너무나 길고 긴 시간을 두고 나를 모르고 글을 쓴 사람이다. 나를 아껴주고 나의 작품을 보아온 독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신나는 ‘나팔수’로 됐고 얼마나 많은 ‘분치장’을 했으며 얼마나 훌륭한 ‘미용사’로 됐던가를. 그 때의 나는 나를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안다고 해도 모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에게 붙어다닌 작가라는 이 기형아는 남이 만들어준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앵무새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피해자이면서 또 가해자였다∼ 나는 원초적인 나를 되찾고 싶다. 늦었지만 잃었던 나를, 빼앗겼던 나를 갖고 싶다.”
 
선생님의 통렬한 반성과 간절한 소원이 담긴 이 글을 읽으며 가슴이 뭉클해났어요. 그 시대가 남겨준 뼈아픈 상처, 그것을 딛고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창작에서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부정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건 작가에게는 막중한 과제임에 틀림 없지요. 용기 내여 자신을 마주하신 선생님의 작가적 자세가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림: 사실 저는 많은 글을 썼지만 건질 만한 소설은 몇편 안됩니다. 1980년도 말, 저는 한국의 한 출판사로부터 소설집을 묶겠으니 단편소설들을 보내달라는 청탁을 받았어요. 단편소설집을 묶자면 세권도 넘을 분량의 작품을 썼으니 한권 분량 쯤은 어렵잖게 고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어요.
 
그런데 정작 작업에 착수하고 보니 고를 수 있는 작품이 얼마 안됐어요. 그러다 보니 중편소설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됐습니다. 단편소설집 《몽당치마》가 중단편소설집으로 된 건 이런 원인 때문이죠. 그 때야 저는 굳어진 의식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느끼게 되였어요.
 
자기반성이 없는 작가는 전도가 없다고 봅니다. 철저한 혁명적사실주의 작가로부터 비판적사실주의 작가로 변신하는 데는 뼈를 깎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긴 시간이 수요되였어요. 과거에는 취재의 초점을 ‘선진’이란 것에만 맞추던 데로부터 나중엔 ‘선진’ 속에 가려있는 ‘락후’에로 돌렸고 보통인간들 특히나 사회의 저층에서 허덕이는 보통백성들의 희로애락과 그들의 진실한 소망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로부터 저는 언제나 약자의 편이였으며 약자의 대변인이 되였어요. 하지만 과거에 저를 따라다니던 ‘혁명’이라는 두 글자는 그 후에도 끈질기게 저의 꼬리를 물고 놓지 않았으며 지금도 저의 작품에 가담가담 그 ‘혁명’의 냄새가 풍기군 합니다.
 
김: 소설가 림원춘 하면 누구나 가장 먼저 단편소설 〈몽당치마〉를 떠올리게 됩니다. 저 역시 80년대 초반 대학교 수업시간에 〈몽당치마〉를 배우면서 작가 림원춘선생님을 머리 속에 깊이 각인시키게 되였어요. 〈몽당치마〉는 그 시대에 대히트를 친 소설이였죠.
 
사실 문학정신의 부활과 문학 본체에로의 회귀로 특징지어지는 1980년대에 우리의 소설창작은 획기적인 성과를 이룩하였으나 이 시기 조선족작가들은 문학의 주체성, 인간의 주체성, 민족의 주체성에 대한 사고와 더불어 관념과 방법상에서 커다란 변화를 거치면서 소설창작에서 새로운 특징을 보여줍니다. 영웅의 시대가 사라지고 평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소설의 세속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1980년대 소설의 주요특징의 하나였어요. 작가들의 시각은 거시적 투시로부터 미시적 관찰에로, 력사적 사고로부터 세속적인 인생에로, 정치적인 내용으로부터 생활적인 내용에로 전환을 가져왔으며 문학은 점차 우아한 기질을 버리고 세속적인 인문주의 맛을 담았어요. 그리고 평민의식의 각성과 함께 인물의 평민화가 도래했죠. 그 중심에 〈몽당치마〉가 있었습니다.
 
〈몽당치마〉는 20세기 후반기를 시대배경으로 하면서 조선족의 전통적인 풍속을 집대성해보일 수 있는 결혼잔치를 무대로, 그 속에서 표현되는 친척들 사이의 미묘한 태도변화로 빈부와 지위의 변화에 따라 인간관계가 변화되는 비정한 현실과 인정세태를 한폭의 풍속도와 같이 그려 개혁개방 후 조선족문단에서 성공한 첫 세태소설로 주목받았어요. 당시 중국작가협회 당조서기였던 팽목은 《인민일보》에 실은 글에서 “림원춘의 단편소설 〈몽당치마〉는 중국조선족인민들의 아름다운 민속도이다.”라고 했죠.
 
림: 제가 〈몽당치마〉로 전국상을 받은 후에 한 첫마디가 “〈몽당치마〉는 우리 민족이 나에게 준 복이며 나는 그 복받은 행운아이다.”라는 말이였어요.
 
저는 자고로 부자집 문턱은 높고 못사는 집 문턱은 낮다고 여겼댔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가난의 문턱은 높고 잘사는 집 문턱은 낮았어요. 아버지는 언제나 당신은 친조카만 해도 열넷이나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사촌형은 단 한분 뿐입니다. 가난하다 보니 찾아오는 친척들이 없었지요. 그리고 어머니는 친척집 군일에 갈 적마다 보에 싸들고 간 몸뻬(녀성들이 집안에서 일할 때 입는 막바지)를 갈아입고 가마목을 차지하고 앉아서는 땀을 철철 흘리며 일만 하셨어요. 부조돈 대신 말입니다. 하지만 형님이 동북사범대학 연구원을 졸업하고 연변대학에 와서 교편을 잡은 데다 저까지 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인민방송국 기자로 사업하게 되자 사촌들은 물론 먼 친척들까지도 찾아들군 했어요. 그리고 친척집 잔치에 우리 형제가 참가하면 꼭 상빈으로 보내군 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베치마를 입고 다니셨어요. 치마기슭이 닳아 판나면 감싸고 또 감싸고 하다 보니 나중엔 무릎을 겨우 가리는 몽당베치마로 되였지요. 그 베치마가〈몽당치마〉의 원형이며 우리 집 가정사가 소설 〈몽당치마〉의 실제적인 소재입니다.
 
김: 〈몽당치마〉는 《연변문예》 1983년 1호에 발표되자 마자 조선족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1984년 전국우수단편소설상을 수상, 조선족문단에서 오늘까지 국가상을 수상한 유일한 작품입니다. 소설은 《연변문예》상, 연변작가협회문학상, 길림성정부장백산문예상, 제2차 전국소수민족문학상 등 수많은 영예를 받아안았고 지어 드라마로 제작되여 중앙 TV에서 방송되기까지 했어요. 또한 영어, 일어, 로씨야어, 에스빠냐어, 프랑스어로 번역되였으며 지금까지 줄곧 조선어문 고중교과서에 실렸습니다.
 
이토록 소설이 발표되자 마자 놀라운 효과를 거둘 수 있은 건 우선 짙은 민족적 색채와 향토맛 때문이고 다음은 ‘동불사댁’이라는 조선족녀성의 긍정적인 형상을 잘 부각해서라는 평을 받고 있어요. 〈몽당치마〉는 자신을 되찾고 싶다고 하신 선생님께서 혁명적사실주의 창작에서 비판적사실주의 창작으로 전이하기 시작한 리정표적 작품이자 조선족문단의 기념비적 작품입니다.
 
림: 과찬입니다. 저에게 그런 복과 행운을 준 백의겨레에게 그 영예를 돌립니다.
 
김: 평론가 최삼룡선생님은 “림원춘선생님은 시종 생활에 대하여 진실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사실주의 창작방법에 충실한 작가이며 자기의 작품을 광범한 독자들의 훌륭한 정신식량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숭고한 사명감을 지니고 붓을 드는 작가”라고 하셨어요. 선생님께서는 어느 글에선가 이렇게 적으셨지요. “나는 생활을 동경한다. 생활은 나의 스승이며 나의 토양이다.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최저한도의 요구이다.” 실제적으로 선생님께서는 몇달, 지어 1년씩 기층이나 농촌에 자주 내려가셔서 직접 생활체험을 하시고 문학 소재를 얻고 작품 창작을 하셨어요. 지어 “훈춘은 나의 제2고향이자 창작기지”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시죠.
 
림: 그래요. 저는 작가는 책상앞을 떠나야 하다고 생각합니다. “생활은 문학의 원천”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1981년 초, 저는 연변텔레비죤방송국으로 전근하는 기회를 빌어 두달간 훈춘에 내려가 생활체험하면서 하루에 평균 만자 지어 2만 5천자에 달하는 창작을 하며 장편소설 《짓밟힌 넋》을 완성했어요. 1984년에는 훈춘현 선전부 부부장 직을 맡고 훈춘으로 내려가 1년간 생활체험을 하며 12편의 단편소설을 써냈구요. 1990년에는 사회주의사상공작대로 룡정시 용신향에 내려가 수개월간 생활한 적도 있어요. 지금까지 수백만자에 달하는 저의 소설은 몽땅 그런 생활속에서 온 겁니다.
 
하지만 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는 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예요. 또 대중과 함께 일하고 그들과 함께 얘기를 나눈다고 하여 생활 속으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의 마음을 빼먹는 겁니다. 아니 우선은 제 마음을 빼주는 겁니다. 듣기 좋은 말로 한다면 진심을 다한 소통을 하는 거죠. 그들의 질고를 헤아려주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을 위한 일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별의별 일을 다 경험했어요. 주인집 애가 급성위장염에 걸리자 10리 령길을 넘어 공사병원으로 업고 가기도 했고 아주머니를 도와 나무를 패주고 저녁불을 때주고 물을 길어주기도 했으며 다리골절상을 입은 로농을 안고 병원을 찾아가기도 했어요. 그랬더니 지금도 그 마을로 가면 저를 남으로 생각하지 않고 제집식구처럼 대해줍니다.
 
대신 가족들에게는 마음에 상처를 남길 만큼 무심했어요. 소학교에 다니는 큰딸과 쌍둥이 두 아들을 안해한테 다 맡겨놓고 혼자 훈춘에 가서 2년간 생활체험을 한 무정한 저를 두고 안해는 “당신한테 집은 려관일 뿐이군요.”라며 서운해했죠.
 
김: 선생님께서는 또한 언제나 높은 작가적 사명감을 갖고 창작에 림하셨어요.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는 늘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작가는 그 민족의 훌륭한 작가로 될 수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리고 저 개인에게는 미안한 일을 할 수 있을 망정 조선족이라는 민족 앞에는 절대 티끌 만한 흠집도 남겨서는 안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으며 부끄럼 없도록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선생님의 그런 자부심은 사명감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족에 대한 관심과 고민에서 잘 나타나는데요. 8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선생님께서는 민족정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자랑스럽게만 생각해온 조선족이 내면에 안고 있는 문제점을 똑똑히 보아내게 되면서 선생님의 작품은 민족의 렬근성을 파헤치고 고발하는 데로 필묵을 바치게 되죠. 단편소설 〈반주술 두냥〉, 〈까치는 울어예건만〉, 〈그 날 해는 짧았다〉 등이 이에 해당한 작품들이라고 하는데요. 보다 싶이 선생님의 소설은 민족적 사명감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과 민족적 륜리의식을 보여주면서 민족적인 렬근성을 파헤친 작품들이 주요한 한 부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림: 저는 과거에도 그랬거니와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민족의 렬근성마저 덮어감추면서 민족을 사랑한다는 건 거짓이라고 봅니다. 우리 민족이 더 높은 차원에로 부상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 민족의 결함과 오유를 파헤치는 건 수치스러운 게 아니라 자기 민족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더 똑똑하게 알게 되였어요. 저는 중단편소설 뿐만 아니라 장편소설 <우산은 비에 운다>, <산귀신>에서 거침없이 쏟아냈어요. 이것이 우리 민족을 지키고 우리 민족을 위하는 절실한 태도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김: 한편 진, 선, 미에 대한 격찬과 가, 악, 추에 대한 질타는 선생님의 소설창작에서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또 하나의 계렬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선생님의 일관적인 미학주장을 보여주는 테마이기도 합니다. 그 대표작으로 장편실화문학 <분투자의 발자국>, <태양에는 흑점이 없다>, <예고된 파멸의 기록>이 있죠.
 
<예고된 파멸의 기록>은 선생님의 새로운 창작자세와 얼굴을 가장 뚜렷이 보여준 작품입니다. 90년대 초반, 조선족사회를 들썽하게 했던 대형사기사건인 한옥희사건, 돈이 어떻게 권력을 리용했고 권력은 또 어떻게 돈을 리용했는지 그 비리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선생님께서는 권력층에서 오는 온갖 위협과 압력을 무릅쓰고 취재를 하였고 끝내 제1부를 책으로 출간하여 3만 5천부를 발행하는 기록을 냈습니다. 선생님은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사회를 두고 그 밑바닥에서 생존을 위해 기여다니는 수많은 백성들의 대변인이 되여 그들을 위해 말하고 부르짖고 싶은 욕망으로 붓을 놓지 못했다.”고 하셨어요. 진정 사회의 비리를 외면하지 못하는 량심 있는 작가이신 거죠.
 
림: 진, 선, 미와 가, 악, 추는 어떻게 보면 저의 전반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력사거나 사회를 고찰하면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서민층에서 진선미가 많이 나타나며 권력층에서 가악추가 많이 표현됩니다. 한옥희사건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저층에서 허덕이는 백성들의 대변인이 되여 한발을 감옥에 들여놓는다는 각오로 반년 동안 숨어다니면서 한옥희사건을 취재했어요. 주당위 선전부, 주당위 부서기, 주공안국 국장들로부터 오는 “한옥희의 출판을 정지하지 않으면 당신한테 내려질 수갑을 책임질 수 없다.”는 엄중경고도 무시한 채 말이죠.
 
결국 권력의 벽을 뚫지 못하고 반성품으로 되고 말았어요. 그렇게 기대하고 응원해주신 독자들께 미안할 뿐입니다.
 
김: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수많은 단편소설을 창작함과 더불어 중편소설, 장편소설 창작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셨습니다. 그중 장편소설 <우산은 비에 운다>는 2002년 3월부터 2003년 3월 사이에 《장백산》 잡지에 련재, 2004년 12월에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판, 같은 해 한국에서 《족보》로 제목을 바꾸어 출판, 2012년 3월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재출판했습니다. 총 4차례의 출판은 흔치 않은 일이며 그만큼 작가의 저력과 작품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점이 아닐가요.
 
시대가 영웅을 낳지만 그들도 살이 있고 피가 있고 뼈가 있고 감정이 있는 보통인간이란 걸 늦게나마 깨달으신 선생님께서는 그들의 인간적인 내면을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려 했습니다. 소설가 허련순선생님은 <우산은 비에 운다>를 “서사에만 치우치던 창작방법에서 벗어난 심리소설로서 즉 인물들의 내면 탐색의 흔적을 성찰한 것이 주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내면 탐색과 관련하여 욕망의 뿌리로 내려가려는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며 제도나 권력, 의념의 제약 등 억겁의 굴레로부터 인간의 내면을 구원하려는 시도와 동시에 개인 주체의 위기에서 탈출하려는 강렬한 의지 또한 괄목할 만하다∼ 작가 특유의 입담과 날렵한 필치가 돋보이는 림원춘소설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라고 하셨어요.
 
림: 늦었지만 젊은 작가들을 따라배워 심리적 특점들에 력점을 두고 노력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입니다. 때가 지났지요.
 
김: 겸손한 말씀이십니다. 한편 <우산은 비에 운다>는 녀성테마 내지 페미니즘 성향의 소설이라고 보기도 하는데요. 사실 선생님께서는 오랜 기간 녀성 소재와 테마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오셨습니다. “문학이란 어느 한 부류의 인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해야 한다.”고 인정하는 견지에서 약소군체거나 소외된 인간에까지 인간애를 경주하고 있으며 예나 지금이나 낡은 륜리도덕에서 해방받지 못한 조선족녀성들에게 작가적인 사명감과 책임감을 다하지 못하고 있음에 죄의식을 느끼셨어요. 지어 ‘녀성들의 대변인’, ‘녀성작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녀성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으셨던 부분은 정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네요.
 
림: 자고로 우리의 녀성들은 사회에서나 가정에서 속박받고 멸시당하는 약소군체였으며 지금도 그 계률에서 완전히 해탈되지 못한 피동형 군체입니다. 만약 우리마저 그들을 외면한다면 그들은 지탱점마저 잃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들은 우리의 어머니들입니다. 영웅의 뒤에는 현처량모가 있듯이 훌륭한 가정도 그 뒤에는 현명한 안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녀성들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 녀성들을 위해 저는 눈 감을 때까지 그녀들의 대변인으로 나설 겁니다.
 
김: 선생님의 인생은 문학을 빼고는 얘기가 안될 정도로 선생님에게서 문학은 너무나 중요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만큼 선생님께서는 평생의 격정과 정력을 오로지 문학 하나에만 다 쏟아부으셨어요. 열정을 쏟아부으신 만큼 높은 문학적 성과를 거두셨고 수많은 우수한 작품을 남기셨습니다. 최고의 명예를 따낸 〈몽당치마〉와 초중, 고중 교재에 선정된 여러편의 소설, 그리고 후반기의 장편소설들이 이 점을 잘 증명해주고 있어요. 작가적 량심을 지키며 지금껏 문학에 모든 걸 다 바쳐오신 선생님, 그런 문학을 지금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림: 저는 문학을 위해서 자식도 미색도 돈도 권력도 다 저버렸어요. 그렇다 해도 저는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되려 남을 해치지 않고 한생 가난한 선비로 살아온 그것에 만족합니다.
 
유감이라면 제한된 환경, 제한된 사유, 제한된 언어, 제한된 필치 때문에 좋은 작품을 많이 쓰지 못한 점입니다.
 
김: 선생님께서는 후배사랑이 끔찍하신 걸로도 유명하십니다. 그 어느 시기든 줄기차게 자신의 창작을 견지하는 한편 끊임없이 문학후배들에게 관심을 보이시고 사랑을 쏟으셨어요. 소탈하고 꾸밈없고 진정으로 사람을 대하시는 선생님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죠. 선생님 댁에서 개잡이를 하거나 한밤중에 ‘쳐들어’가서 문학을 둘러싼 이야기로 열띤 분위기를 만들던 추억들을 후배작가들은 지금도 잊지 못하면서 선생님의 인격을 높이 사고 있어요. 또한 농촌에 내려가면 농민들을 가족처럼 스스럼없이 대하고 그들과의 정분을 몇십년간 이어오기도 하시다 보니 선생님에게는 그야말로 친구가 많으십니다. 그런가 하면 불의에는 가차없이 대하다가도 어려운 사람에게는 마음이 한없이 약해지시죠. 투명하고 깨끗하고 거짓 없으며 물욕에 오염되지 않고 세상과 인간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선생님을 문학후배들은 ‘샘 같은 분’이라고 합니다.
 
림: ‘샘 같은 분’, 하하하, 우습네요. 저는 그처럼 깨끗한 사람이 못됩니다. 남들을 모두 자기처럼 믿었다가 얼림수에 들어 애매한 사람을 탓하기도 했고 꼬임수에 들어 좋은 친구를 나쁜 사람이라고 욕설을 퍼부은 적도 있어요.
 
아무튼 지금 저는 문단의 어른으로 돼버렸네요. 어른이면 후배들을 사랑하고 보듬고 포옹해야 하는데 참 힘든 과업인 것 같아요.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김: 선생님은 또 지독한 낚시애호가인 걸로 알고 있어요. ‘첫번째 애인’이 문학이라면 ‘두번째 애인’이 낚시라고 할 정도라니 낚시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나봐요.
 
많은 지인 분들이 또 선생님의 ‘빙어冰鱼’ 맛에 그렇게 환상을 갖고 있더군요. 급하시기로 유명한 선생님의 성격은 번개불에도 콩을 구워먹을 수 있을 정도라는데 그렇게 급한 성격으로 어떻게 몇시간씩 고요하니 앉아 낚시를 할 수 있으셨는지 참으로 신기하네요. 아니면 급한 성격을 낚시하는 걸로 중화라도 시키시려 했던가요?
 
림: 이틀 전에도 훈춘에 낚시하러 다녀왔어요. (웃음) 낚시애호가라기보다는 낚시질군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겁니다. 낚시질이라면 저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낚시통을 끌어안는 낚시미치광이예요. 그래서 친구들은 제가 물에 빠지는 날엔 한 많은 고기들에게 뜯기여 뼈다귀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우스개를 하죠.
 
저는 손에서 일감이 떨어지면 엉뎅이를 붙이고 있지 못해요. 일감이 떨어지면 어데 가서 강도질을 하거나 싸움판이라도 벌려야 직성이 풀릴 그런 불 같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붓대만 잡으면 밤낮을 모르고 작품 속에 빠져드는 글귀신으로 돼버려요. 낚시질 역시 마찬가집니다. 고기가 잡힐 때는 안해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와도 “응, 좀 있다 가마.” 하면서 동동이에만 눈을 팔 그런 미치광입니다. 고기가 잡히지 않으면 머나먼 청산을 바라보며 채 끝내지 못했던 소설구상에 빠져들군 하죠. 그러다 큰 고기가 물려 낚시대를 끌고 가는 바람에 낚시대를 잃어버린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하하.
 
김: 소설에 빠져 멋지게 살아오신 선생님, 선생님께서 남기신 력작들이 앞으로도 우리 문단을 계속 빛내가리라 믿습니다. 문학을 향한 식지 않은 열정과 오로지 문학이라는 외곬에만 투혼해오신 우리 문단의 저명한 소설가 림원춘선생님의 문학정신에 진정 존경을 표합니다.
 
오늘 대담 참으로 고마웠어요. 내내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림: 고맙습니다.

출처:<장백산>2017 제5호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3 [대담]생활 속에서 소설을 낚아올리다 2019-07-18 0 318
2 작가는 탁상머리를 떠나야 한다 2019-07-09 0 193
1 [작가평]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2012-10-06 1 1270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