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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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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과 삶의 진정성 추구
2014년 03월 24일 15시 12분  조회:1367  추천:1  작성자: 도라지

격월비평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과 삶의 진정성 추구

-«도라지» 2012년 3호 격월평

오상순

 언제나 새로움을 꾀하는 《도라지》답게 2012년 3호도 청신함과 아름다움과 향기로 독자들을 끈다. 2012년 3호에 소설 3편, 수필 12편, 칼럼 1편이 실렸다. 쟝르는 다르지만 조선족으로서, 작가로서, 교수로서, 인간으로서 정체성 찾기의 처절한 몸부림이란 공통점이 있다.
  《도라지》3호에 홍만호선생의 수필시리즈 “기다림”, “외로움”, “참을성”이 실렸는데 그대로 년장자의 인생철학이라 할수 있다. 저자는 학자로서의 박학다식과 년장자로서의 풍부한 인생체험을 바탕으로 기다림, 외로움, 참을성의 변증적관계를 설득력있게 풀어나가면서 인생진리를 깨우쳐준다. 저자의 인생에 대한 달관과 초월의지는 젊은 작가들의 본보기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민족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박옥남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창작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한 작가중의 한 사람으로 고향마을을 무대로 조선족농촌의 생활풍경을 그림같이 그리면서 조선족농촌의 황페화와 조선족공동체의 해체 등 민족의 운명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온 작가이다. 청년작가들이 현대적인 감각을 추구하였다면 박옥남은 꾸준히 자기의 소설적공간과 주인공들, 소박한 전통기법과 우리 민족 고유의 방언을 고집하면서 자기의 브랜드를 만들었다고 할수 있다. 《도라지》 2012년 3호에 실린 박옥남의 실화소설 《고향》과 수필 《고향사람》도 박옥남의 브랜드를 한층 부각시키는 작품이다.
   박옥남의 실화소설 《고향》은 수필 같은 소설이다. 22년만에 고향에 내려와 변화된 모습들을 돌아보면서 과거를 회상하는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아무른 소설거리도 없는 소설이 큰 감동을 준다.
  조선족에게 있어서 고향마을은 민족공동체의 상징이다. 그런데 우리의 선조들이 피땀으로 가꾸어 아담하고 정답고 화목하여 무릉도원과 같았던 조선족마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있다. 이제는 아스라니 잊혀지는, 더는 찾아볼수 없는 옛고향의 아름다운 흔적들을 박옥남은 섬세한 필치로 그림 같이 그려내여 우리앞에 펼쳐주고 하나하나의 추억을 건져내여 독자들의 머리속에 심어준다. 박옥남의 《고향》을 펼쳐들면 고향에 대한 기억이 그렇게 아름답게 안겨올수가 없다. 
 
  집안이 빠개지도록 “모야!” “뒤돌이야!”하며 목에 피대를 세우고 떠들어대던 마을 아낙네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생각대로 윷사위가 나오면 개선장군들처럼 구들복판에 나서서 어깨춤을 추군 하던 아낙들, 인도사람들처럼 배꼽춤을 춘다며 옷깃을 말아올리고 함지박같은 엉뎅이들을 흔들어대여 배꼽을 잡게 했던 사람들, 마을치고도 제일 뚱뚱한 아낙 몇은 기록영화에서 본대로 일본의 스모선수들을 모방한다며 윷을 치다말고 윷판우에서 씨름판까지 벌려 좌중에 폭소를 안겨주기도 했다. 흥을 몸으로 표현할줄 알았던 우리 마을 아낙들은 술이 거나해지면 물을 담은 양푼에다 박바가지를 엎어놓고 장단을 치면서 저마다 재간껏 자기들의 기량을 자랑하기도 했으니 뭐니뭐니 해도 가장 고단한 삶을 가장 재미있게 살다간 사람들이 아닌가싶다.
 
  저자는 “봄이면 호드기를 불어대며 벌판을 주름잡고 여름이면 마을뒤 개울물에서 물장구를 치고 가을이면 잠자리떼를 쫓아 골목골목을 누비고 겨울이면 썰매놀이에 해 넘어가는줄도 몰랐던 동년이 살아서 돌아올것만 같”고 “하루일을 끝낸 어른들이 저녁노을에 물든 고샅길로 삼삼오오 떼를 지어 귀가하는 모습이 보이는것 같았고 집집의 굴뚝에서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풍경이 보이는것 같았으며 마당둘레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오순도순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던 이웃들이 보이는것 같았다.”고 애절히 표현한다. 소설 전반에 걸쳐 옛고향마을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큰 공감대를 형성하며 눈물겹도록 감동을 준다.
  소설의 다른 한 특징은 비교의 미학이다. 저자는 무릉도원과 같았던 옛 고향의 세태풍속과 오늘날 너무나도 피페해져 있는 고향마을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리여, 조선족농촌 황페화의 심각성을 더욱 부각시키고있다. 
  원래 110호가 운집해 살았던 마을에 조선족은 겨우 17가구에 24명, 대신 농사지으러 들어온 한족이 30호가 된단다. “중심거리에 한식경을 서있어도 아는 얼굴을 만날수가 없”고 옛집터를 찾아갔더니 “쉐이야?!”하며 꽥 소리치는 한족아낙과 웃통을 훌렁 벗어붙이고 길가에서 한담하는 한족 나그네들과 황둥개가 오늘날 이 마을의 풍경을 이루고있다.  
  내가 살던 집은 터만 남고 친구들과 소꿉장난하던 벽굽이쪽에는 범이 새끼칠 정도로 잡초가 무성했고 참외며 일년감을 심어먹던 터밭은 온통 콩밭으로 변해있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적은 간 곳이 없는 현실앞에서 “주위는 너무나 한적해서 오솔한 느낌마저 들었다.”고 저자는 아픈 마음을 토로한다. 
  전 공사적으로 이름이 뜨르르했던 조선족학교의 벽돌교사는 돈사로 변했다가 방치된 상태, 돈사바닥엔 말라 부스러진 나무가지와 돼지똥 같이 보이는 흙무지와 밟혀죽은지 오래되여 바싹 말라버린 쥐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있다. 저자는 페허속에 서서 “이곳에 우리 말로 글을 배워주던 학교가 있었댔다는 사실은 이제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전설로나 남을것”이라며 눈물 흘린다. 
  끊임없이 조선족마을의 피페화와 동화(同化)현상을 부각시켜 민족의 위기를 강조하던 박옥남의 이전 작품과는 달리 이 소설에서는 무릉도원와 같았던 조선족마을의 옛풍경을 되살려냄으로써 과거지향속에 새로운 동경을 시도해본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은 과거지향적인 성격을 띠고있는데 앞날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있다. 호도거리때 분여받은 땅외에 20쌍을 개간하여 한족사람한테 도급주어 일년에 양도금만 20만원을 받으면서 승용차를 끌고다니는 촌장, 저자는 그를 “신흥지주”라 칭했다. “땅만큼 실속있게 자기를 부자로 만들어준것은 없다”고 하면서 명년엔 마을에 상하수도를 놓고 일들을 벌려볼 심산이라면서 남에게 내주었던 땅을 걷어들여 정책 좋고 시세 좋은 농사일을 다시 시작해보겠다는 촌장은 조선족농촌의 미래의 한 상징이라 할수 있다.
  실화적인 제재, 려로형 구조, 대비적수법이 “고향”의 서사특징이라 할수 있는데 원근법에 의한 구성이 빈틈없이 탄탄하면서도 자연스럽다. 소설에서는 민족적정취가 물씬 풍기고 “풋풋한 흙냄새, 고향냄새가 짙게 피여오른다.”
  박옥남의 수필 “고향사람”은 “고향”과 “고향사람”에 담겨진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의 갈등과 추구를 파헤친다.  
   수필은 예전에 고향어른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는 꼭 “고향이 어디요?”하고 상식처럼 묻군 했다는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두번째 일화는 학교에 입학할 때 선생님은 꼭 “고향이 어디예요?”라고 물었는데 또랑또랑 대답하면 똑똑하다고 칭찬받고 어물어물하거나 동문서답하면 멍텅구리라고 꾸지람 듣기가 십상이였던 일, 선보러 가서 장인될 사람의 “고향이 어딘고?”라는 물음에 대답못하면 “반푼”으로 취급되고 혼사가 깨여질수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세번째 일화다. 이민1세들에게 있어서 고향은 자식들이 반드시 알아야할 필수지식이였다면 그 후대들은 “강다짐으로 기억해야 하는” “수학책의 공식만큼 난해하고 어려운 일로 생각”되였단다.
  네번째 일화는 한국인과의 대화이다. “미스박 고향이 어디예요?”하는 물음에 “흑룡강입니다.” 대답하니 “원적 말이야. 부모님 고향이 어딘가고?” 재차 묻는다. 함경도란 대답에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는 한국인, 민족은 같아도 고향이 다르니 관심이 없다고 판단한다. 조선족들에게 “고향사람”은 “뿌리는 하나”라는 공동체의식과 민족의식이 강조되였다면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에게 고향사람은 반도의 어느 지역이냐에 관심이 집중되는것이다. 
  산동성 교주시에서 근무할 때, 만날 때마다 “고향사람”이라 부르며 과일을 덤으로 주던 한족청년은 “한 고장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으로 보다 포섭적인 모습을 보였다. 
  결말에서 저자는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가 반색하던 고향사람이나 산동땅에서 만난 한족 야채장수나 나에겐 모두다 소중한 고향사람”이라고 단정한다.
  짧은 수필속에 조선족, 한국인, 한족의 정체성의식, 그리고 조선족 이민1세와 그 후대들의 정체성의식의 차이를 생동하게 부각시키면서 고향을 멀리 떠난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향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부축하면서 따뜻하게 살아갈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와 같은 존재라는 주제의식을 이끌어낸다. 
  이 수필을 더욱 빛나게 한것은 팔도방언의 생생한 구현이다. 

  “동두까리로 대갈통을 쳐부숴슬라므네 피가 사방 퉸수다.”
  평안도 아낙이 채소밭에 들어가 말썽을 부리는 씨암탉 때려잡던 소리를 하는데
  “무신놈의 달구새끼를 몽디로 잡능교?”하고 경상도 아낙이 중을 뜨니
  “달그 잡는데는 몽치보다 이 방치가 제격이 아니겠음둥?”하고 함경도 아낙이 동을 달고
  “아 그래갖고 닥을 지대로 잡것어? 짜른 방매이보다 긴 꼬장가리가 백배 낫제.”하고 다른 아낙이 총결을 짓는다.

  이 수필에서도 박옥남은 팔도방언을 재치있게 끌어들여 박옥남다운 개성을 살려내고있다. 주제도 좋고 구수한 방언이 민족적정취를 물씬 풍기면서 감흥을 주며 깔끔하고 빈틈없는 구성이 미감을 준다. 
  중학생 김광원의 수필 “그리운 향기”를 읽으면서 우리 문단의 미래가 보이는것 같아서  대견스러웠다. 수필을 구성하는 재치며 미끈한 언어구사며 주제를 심화시켜나가는 능력이며 빈틈이 없다. 어린 나이지만 민족에 대한 깊은 리해와 사랑에 감동했다.
  “그리운 향기”- 평범하면서도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이다. 어머니가 정성껏 준비한 아침상에서 구수한 된장국에 뚝딱 밥그릇을 비우고 입안에 퍼진 된장냄새를 빼려고 박하사탕을 찾는데 어머니께서 숭늉을 건네주던 일화로 서서히 숭늉에 대한 자신의 리해와 사색을 펼친다.
  기름진 음식에 속탈이 났을 때 어머니께서 건네준 숭늉을 투정부리며 낯을 찌프리며 처음 마실 때 숭늉의 볼품없는 겉모습과는 달리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구수함과 시원함이 가슴속까지 스며들어 그 한모금의 진한 숭늉맛에서 옛조상들의 절약정신과 삶의 지혜를 엿볼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때부터 숭늉이 고급스럽게만 느껴졌단다.
  저자는 숭늉은 미국의 코카콜라처럼 입맛을 자극하지도 못하고 프랑스의 와인처럼 우아하고 깔끔하지도 못하고 다만 시원하고 구수하다는 맛때문에 한끼 식사후의 입가심밖에 되지 못하는 껌 같은 존재, 옛날 우리의 선조들이 밥을 다 짓고 밑에 붙은 누릉지가 아까와서 다시 물을 부어 우려낸 숭늉, 저자는 그런 숭늉속에 내포된 함의를 “가난하더라도 바르게 살자”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원칙,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소중한 정신적유산”으로 리해하면서 우리 후대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있음을 가슴 아파한다.
  그대로 민족의 정취, 민족의 향이 짙게 풍기는 수필이다. 숭늉에 대한 리해도 참신하고 설득력이 있어 공명을 불러일으키며 민족의 얼, 민족의 문화, 민족의 미래에 대한 사색과 여운을 던져준다. 숭늉에서 이끌어낸 민족정신이 돋보인다. 
 
  ➤작가로서의 정체성 지키기

  조광명의 중편수필 “시인보다 가난한 라면은 없다”를 즐겁게 읽었다. 아이러니, 언어유희, 자조와 유머로 점철된 이 수필을 읽으면서 작가의 뛰여난 유머감각, 위트, 구상력, 감각적인 언어표현에 감탄했다.
  “시인보다 가난한 라면은 없다”- 론리성이 파괴된 시적인 제목이다. 가난한 시인과 라면의 등호관계- 작가의 뛰여난 구상력이 돋보인다. “세상에 시인보다 가난한 라면은 없다. 라면보다 가난한 시인은 있어도.”, “시를 쓰서 배고픈 시인들”이란 표현도 그대로 명언이다. 라면에 비유되는 작가들의 위치와 생활, 그것이 평생을 작품이란 밭을 가꾸어온 작가들의 현실이다.
  저자는 메신저로 친구와 말장난하는것으로 시작하여 “문학의 꿈에 미쳐 밤새워 독서하고 습작에 열을 올리던 배훌쪽이 소년이 40대 중반의 배불뚝이 펑퍼짐한 아저씨”가 된 오늘, “글재간 익히느라 밥벌이재간 익히기에 게을렀던” 자신, “시가 밥을 주는건 아니”며 “밥그릇에 시귀 적고 낄낄댈수만은 없는걸” 늦게 깨우친 자신을 자조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일년에 시 몇편 못쓰는 자신을 두고 “네가 시인이냐?”, “시들이 나를 버린것이 아니라 내가 시들을 버린줄 나도 잘 안다. 그런 나는 이제는 시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며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갈등을 느끼기도 하지만 “시 한수로라도 최고의 갑부로 된 기분으로” “아름다운 시 한수 구걸하기 위해 주린 배 더 줄이며 라면 한봉지 사먹기에도 린색하던, 그 배고프던 령혼의 10대소년”을 그리워하면서 “어쩌면 그때가 가장 배불렀던 시절이였는지 모른다.”는 대답을 얻는다. 
  결말에서 저자는 “아무래도 나는 장사체질은 아닌가부다.”고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시인은 아무리 가난해도 라면처럼 뽀골이파마는 하지 않는다.”, “꼬불이가 아닌 생머리라면, 그건 라면이 아니라 우동일것이다.”라는 말장난은 상징성을 띤다. 작가로서의 긍지감과 지조라고 할가…
  라면보다 가난한 시인의 현실에 대한 자조속에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현실이 조성된 사회에 대한 비판이 심층적으로 깔려있다. 시인으로서의 정체성 갈등과 확인이면서 문학을 외면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수필에서 언어유희는 즐거움을 듬뿍 선사한다. 언어유희속에 깊은 주제를 담고있어 돋보인다.
  김혁의 칼럼 “난 ‘상어’로소이다”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작가의 성공과 학벌이 꼭 등호관계가 아님을 주장하면서 “학벌지상주의”의 현실을 비판한다. 시적인 제목에서 자조적이고 역설적인 냄새가 다분하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 비유와 상징의 참신성에서 돋보인다. 졸업장이 없는 작가와 부레가 없는 상어, 그야말로 김혁다운 비유이고 상징이다.
  저자는 상어에 대한 사전적해석을 빌어 부레가 없는 상어는 다른 동물과 달리 24시간 내내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살수 있다는것, 상어가 다른 어종이 비하지 못할 힘찬 근육과 우람한 몸체를 갖게 된것도 그렇게 쉼 모르고 끊임없이 깊은 바다, 넓은 바다를 누빌수밖에 없는 “결손”때문이라고 하면서 부레가 없다는 결손때문에 하루종일 몸부림치는 상어처럼 무학력 작가들은 졸업장이 없다는 결핍때문에 끝까지 가보려는 시종여일의 정신, 작업에 림하면 온몸을 던지고 끝장을 보려는 가렬처절한 문학정신이 있기에 누구보다도 다산을 낳고 그 와중에 수작(秀作)을 낳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학벌지상주의”에 대한 비판도 날카로운데 탄탄한 구조속에 주제를 설득력있게 풀어나간다. 칼럼은 3부분으로 구성되였는데, 1에서는 남들이 띠를 물으면 상어띠라고 대답하는 에피소드로 자연스럽게 독자들을 본론으로 이끈후 2에서는 작가 프로필을 적을 때면 대학졸업생이 아닌 자신의 난감함을 고백한다.
  농부처럼 20여년 필밭을 경운하며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수상하고 작품집을 내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학력란은 “솎아낸 무밭마냥 한줄 비여 있어야 하고” 통신대학도 나오고 석사연구생공부도 했지만 “함수”와 “수료”라는 딱지는 어김없이 붙어있고 그 빈자리가 커보여 은근히 써놓고는 “백정이 가마타고 대학모퉁이”를 도는듯한 참괴감을 금할수 없는 마음을 고백한다.
  3에서는 학력과 성공한 작가가 꼭 등호가 되는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고금동서 수많은 위대한 작가들을 례들어 설명하고 오늘날 조선족문단에서 중견으로 활약하고있는 3, 40대 다수 작가들이 “부레가 없는 상어”신세임을 밝힌다.
  “가방끈이 짧다”고 좋은 작품이 나오지 못하는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들의 작품이 “이 사회 뒤골목에 내쳐진 밑바닥 삶을 사는 부류들처럼 거칠고 다부지며 치렬”하다는것, 생활을 자신의 피부로 접하고 느낀 그만의 “감성”으로 창작하는것이 무학력자들의 우세이며 때로는 최고 명문의 작품보다 더 명쾌한 경우도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학벌지상주의” 세상으로 변하여 번듯한 대학을 나와야 사람대접을 받는 사회, 능력보다 학벌을 보고 무학력자는 무능력자로 락인찍는 사회이며 우리 문단도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학력지상주의병페가 고스란히 드러나고있다고 비판한다.
  물론 고학력이 작가의 화려한 포장이나 멋진 옷만은 아니며 우리 문단에 고학력작가가 적은 현상은 문학적재능이 없기때문일수도 문학에 관심이 없어서일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문단은 무학력 작가들이 중견이 되여 활약하고있는것이 사실이다. 그들도 각자 직장생활과 가정생활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오히려 더 힘겹게 살아가지만 일편단심 문학에 대한 사랑으로 시종여일 창작을 견지하고있는것이다. “학벌지상주의” 페단도 없애야 하고 작가들을 지켜주고 키워줄수 있는 제도적인 조치가 따라가야 우리 문단이나 문학이 발전할수 있다.

  ➤교수로서의 정체성 확립

  김영옥의 “류월에 떠나보낸 짝사랑”은 잔잔한 감동을 주는 고백체의 경수필이다. 오랜 세월 교수사업에 몸담아온 저자는 자신의 교수생활을 소재로 4년간 정을 쌓으며 자식 같이 거두며 배워준 학생들을 졸업시키면서 느끼는 리별의 아픔과 그리움, 무엇보다 교수로서 학생들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을 섬세한 필치로 그리고있다.
  짝사랑이란 한쪽만이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사랑함을 말하는것으로 짝사랑이란 표현이 자칫 선생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리해할수 있어 처음에는 머리를 기우뚱했지만 수필을 읽으면서 “내리사랑”, “주는 사랑”, “짝사랑”에 빠질수밖에 없는 교수로서의 숙명과 교수직업의 신성함을 “짝사랑”이라는 표현으로 잘 살려내고있음을 알게 되였다.
  대학교수답게 수필언어가 수려하고 정확하며 녀성수필가답게 섬세하고 생동하여 편안하게, 재미있게 읽으면서 감동을 받게 한다.
  서두에 “해마다 류월이면 나는 어김없이 한번씩 짝사랑을 떠나보낸다.”로 시작되여 대학교 캠퍼스에서 날마다 청춘의 활력으로 넘치는 싱그럽고 앳된 얼굴들을 만나고 수업시간마다 “나”를 쳐다보는 총명하고 열망어린 눈동자들을 바라보노라면 저도 모르게 행복이 샘솟는듯하며 글 읽는 그들의 랑랑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가끔 발음도 억양도 어색할 때가 있지만 대견스럽기만 한 학생들, 가르치고 배우며 그들과 어울리다보면 어느날 문득 이 아이들을 향한 깊은 사랑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한단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문학이라는 “문”자조차 싫어하던 학광요라는 학생이 선생님의 열정에 감동을 받아 그처럼 하기 싫은 문학공부도 열심히 하게 되였고 언제부턴가는 문학수업을 좋아하게 되였다고 고백하는 순간, “그 평범한 한마디가 문학을 가르치는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였는지 그 아이는 지금도 모를것이다. 이런 아이들을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수 있단 말인가”고 저자는 감동한다.
  졸업을 앞두고 “김선생님, 우리가 선생님을 영원히 사랑해요! 청춘을 지키기 바랍니다. 예쁜하세요!” 라고 쓴 예쁜 카드를 펼치던 순간, 포복절도하면서 한국어문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떠나는 학생들에 대한 걱정과 부끄러움과 자책을 느끼면서 “이런 아이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수 있단 말인가?”고 고백한다. 저자는 학생들과 함께 했던 감동적인 나날들을 회상하면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수 없음을 고백한후 어느해 류월, 첫기 졸업생들을 떠나보내면서 자신의 사랑이 결코 짝사랑만은 아니였음을 알게 되였다고 고백한다.
  “가끔은 그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 애들과의 행복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면서 그리움에 젖기도 하고 각별히 사랑했던 아이들이 졸업후 련락이 드물거나 끊기다싶이 할 때는 은은한 상실감을 느끼며 간혹 엽서나 메일로 몇마디 안부를 물을 때면 또다시 행복으로 설레이는, 역시 못말리는 짝사랑”이라고 고백한다.
  “곧 류월이 닥쳐온다. 깊이 사랑했던 아이들을 떠나보내며 또다시 리별의 진통을 겪어야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것은 해마다 리별의 아픔끝에는 또 새내기들과의 새로운 만남이 있다는것이다. 다시는 아픈 짝사랑을 하지 말자고 맘속으로 늘 맹세하지만 싱그럽고 사랑스런 낯선 얼굴들과 매일매일 만나서 어울리다보면 나의 새로운 짝사랑은 또다시 시작된다.”는 결말은 서두와 잘 조응된다.  
  구성이 빈틈없고 사례도 생동하고 재미있다. 오랜 세월 학생들과 함께 했던 교수의 생생한 체험과 진솔한 고백에서 교수로서의 진정성이 절실히 느껴진다.
 
  ➤ 자아정체성 찾기와 삶의 진정성 추구
 
  김혜련의 단편 “서울역”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가 다순한 소설이다. 요지음 젊은 작가들이 그러듯이 이 소설도 일인칭 심리소설인데 사건들의 필연성이나 련관성이 배재되고 시공간이 타파되고 사건의 시말에 대한 교대가 생략되고 불확정적이고 임의적이다.  
  소설에서 “나”와 현의 갈등과 “나”와 어머니의 갈등이 교차되는데 그렇게 밑도끝도 없던 이야기가 엉뚱하게 결속된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축해둔 몇천만윈을 그들 몰래 전세집을 얻는데 써버렸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어머니는 “에미가 그거 안줄가봐 말 안하고 썼니. 너도 부모가 돼봐라.”하고 한마디 할뿐이다.
  “가족이란게 원래 맨날 지지구 볶구 싸우구 화해하고 그렇게 사는거지.”라는 엄마의 한마디에 이 소설의 주제적의미가 담겨있다고 본다.
  세상의 존재를 돈으로 살수 있는것과 돈으로 살수 없는것의 이분법의 자대로 재는 “나”와 다이아몬드가 밤하늘의 별 같아서 좋다는 말을 믿는 현, 로후준비는 각자 알아서 하자고 부모에게 선언하는 “나”와 2년여를 로숙자들과 어울리면서 아버지를 찾아헤매는 현, 별이 아름다운것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아름다워보이듯이 가족관계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나”와 가족이기에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는 현이는 대조적이다.
  별 주제가 없는것 같고 별 이야기가 아닌것 같은데 그 황당하고 임의적이고 편파적인 일화속에서 가족과 인정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보게 하는 작품이다.
  주향숙의 “소나기를 즐기며”는 아이디어가 참신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개성적이다. 소나기를 맞받아나가면서 환상적인 분위기에 젖어보는 저자의 랑만이 독자들을 흥분시키는데 저자는 소나기를 흠뻑 맞으며 나만의 자유, 나만의 즐거움, 나만의 느낌, 자신의 존재감을 만끽하면서 틀에 짜인 일상, 혼탁한 환경,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자기다운 인생을 살아갈것을 주장한다. 한번쯤은 일탈의 쾌감을 맛보는것도 멋있는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원래 고독한 혼자이며, 인간은 그렇게 시간의 흐름에 맡겨진채 하루하루를 죽여왔을뿐이며, 어려운 철학 같은것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여왔는가 하는, 어딘가 허무주의적이고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김창영의 수필 “죽음과 그 시작”은 묘족들이 조상들의 시체를 관속에 넣어 올려놓은 현관동(悬棺洞)을 돌아보면서 삶과 죽에 대하여 시인다운 사색을 펼친 수필이다. 언어가 수려하고 구성도 빈틈없다. 수필에서 시적인 표현으로 하여 음미의 공간과 몽롱미, 여운과  함께 리해에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김경희의 수필 “소음, 너마저 그리웠었다” 역시 인생과 삶의 의미와 방식에 대한 사색을 펼친 서정수필이다.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면 소음마저 그리웠을가 하는 호기심을 주는 제목이다. 소음마저 그리워하던 저자는 산책과 등산에서 행복을 만끽하면서 자신의 소극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반성하게 된다. 외롭다고 하소연할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일을 찾아하며 화려하지 못해도 수수한 들꽃 같은 삶을 살고싶다고 고백한다.
  외로움을 절감하다가 의미있는 삶을 살겠다는 전변과정이 어떤 계기가 주어지지 않아 아쉽다. 외로움을 느끼는 자신의 절실한 체험을 완곡법보다는 소박하게 직접 표현했다면 더욱 가슴에 와닿겠다는 생각이 든다. 외로웠다고 사유가 정지된것은 아니다.
  허옥진의 수필 “코구멍으로 보는 세상”은 제목 그대로 코구멍이라는 독특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삶의 존재적 의미와 당위성, 그리고 희생정신과 헌신정신을 고양한다고 할수 있다.
  그런데 시각이 혼란스럽고 비유가 어색하며 내용이 뚜렷이 안겨오지 않는다. “때론 우리는 잃어버린 한쪽 신발을 찾는 다른 한쪽 신발이 되여 종신보험을 위탁하지만 그 찾아헤매는 정체성은 바로 우리의 둥글지 못한 인생의 귀결점이 아닐가.”등 많은 표현이 모호하기만 하다. “혼탁되다”는 말도 오류다. 정체성이 귀결점이라는 표현도 어색하다. 오히려 저자의 시각에서 인생의 존재적 의미 내지 소망을 소박하게 표현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허경수의 단편소설 “양의 울음소리”는 전통적인 이야기소설이라 할수 있다. 음식점을 경영하는 석만길이 한마을의 강성국과 임구석을 “운반 림시공”으로 데리고 내몽골에 당나귀를 사러 가서 겪었던 우여곡절을 엮고있다. 소설적 공간을 내몽골로, 내몽골초원과 몽골족들의 성격과 생활풍속이 색다른 신선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소설이 너무 우연성으로 엮어져 진실감이 떨어진다. 쩍하면 찌프차가 고장나는데 그때마다 공교롭게도 승냥이떼를 만나고 들불을 만나고 총든 강도를 만나고 폭풍우를 만나 차가 웅뗑이에 빠지면서 우여곡절을 겪는다.
  들불에 당나귀 2천마리, 소 3천마리, 양 2천마리가 불타죽었다는것도, 차가 고장났을 때 배고프다고 불속에서 요행 살아난 어린 양을 잡아먹겠다고 칼을 빼든다는 이야기도 너무 억지스럽고 길에서 총든 강도들을 만났다는것도 현실에 부합되지 않으며 음식점을 경영하는 석만길이 두 친구에게 수고비를 주기 싫어 갑자기 음식점과 당나귀를 팔고 사라졌다는 사건설정도 진실성이 부족하다. 오늘날의 삭막한 인간관계를 비판하자는 작자의 의도는 알수 있으나 너무 억지스럽다.
 
  《도라지》3호에는 개성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도 있고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도 있다.  어떤 수필은 너무 기교에 빠져있고 언어오류도 심심찮게 보인다. 소박하고 담백하고 청신하여 미감을 느낄수 있는 수필이 좋다.
  조룡남의 시작노트는 련재중이여서 취급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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