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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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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이 되였으나 잊을수 없는 윁남자위반격전
2017년 01월 14일 16시 52분  조회:5356  추천:1  작성자: 넉두리

옛말이 되였으나 잊을수 없는 윁남자위반격전
 
 
 




 
1978년 12월 25일에 윁남군은 10만이상의 병력과 여러개의 땅크부대를 동원해 캄보쟈를 침공했다. 윁남은 인도지나반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망을 가지고있었다. 그런데 언감생심 하찮게 보았던 캄보쟈가 그런 윁남을 저지하려고 했다. 윁남은 그런 캄보쟈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가르침”을 주려고 작심했다. 당시 캄보쟈수도 프놈펜에는 중국의 군사고문 6000명이 주둔해있으면서 캄보쟈의 좌파세력인 크메르 루주(红色高棉)를 지원했다. 윁남은 구쏘련과 우호조약을 맺었고 구쏘련군이 중국북쪽국경지역에 부대를 증강했기때문에 캄보쟈를 침공해도 중국이 개입하지 못할것이고 또 구쏘련이 중국의 개입을 저지할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윁남의 판단은 틀렸다. 1975년에 미군을 몰아내고 남북을 통일한 윁남은 120만명이나 되는 화교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그뿐만아니라 국경일대에서 1978년 하반기에만 해도 700차례에 거쳐 무장충돌을 일으켜 300여명의 사상자를 초래했다. 윁남측은 1978년에 중국의 윁남령토침입에 따른 충돌이 2175건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등소평은 일찌감치 “오만하고 감사할줄 모르는” 윁남에 대해 “징벌”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978년 9월에 열린 정치국회의에서 윁남을 공격할데 관한 문제가 직접 언급되였다. 정치국회의에 앞서 등소평이 윁남공격을 이미 결정했다는 설이 있다. 등소평은 1978년 11월초에 9일간 타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윁남을 공격할 때 이 나라들이 중국에 대해 가질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사전의 조치였다. 싱가포르 수상 리광요를 만난 자리에서 등소평은 윁남을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욕하면서 윁남이 캄보쟈를 공격하면 중국은 윁남이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할것이라고 말했다. 등소평은 또 쏘련은 중국과 윁남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을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쏘련쪽은 마음을 놓았지만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 알수 없었다. 1978년 12월 4일에 때마침 미국대통령 카터가 국교정상화를 제안했다. 등소평은 8일만에 전격적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979년 1월 1일에 중미는 국교를 정상화했다. 등소평은 1월말부터 2월초까지 서둘러 미국을 방문했다. 리유는 두가지였다. 윁남을 구쏘련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미국이 개입할 여지를 차단하고 미국을 활용해 윁남과 구쏘련의 군사협력을 막기 위해서였다. 등소평은 카터에게 “꼬마친구가 말을 안들으면 엉뎅이를 때려야 한다(小朋友不听话,该打打屁股了)”라고 말했다. 귀국길에 등소은 일본에도 들렀다. 일본 수상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를 만나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윁남징벌의 정당성을 천명했다. 공격준비는 이로써 끝났다.

1979년 2월 11일에 정치국확대회의가 열렸다. 공격날자를 17일로 결정했다. 4월에 시작되는 우기를 피하기 위한 선택일이였다. 기원 938년에 당나라가 멸망된 후 5대10국에 속한 남한(南汉)이 윁남에 패함으로써 1000년만에 윁남이 독립할수 있었다. 그 당시에 우기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한 전쟁을 벌렸기때문에 남한국이 윁남에 실패했던것이다. 등소평은 그런 력사를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북쪽에서 만약 구쏘련이 결빙된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을 건너더라도 곧 해빙되여 더이상의 작전전개가 어려울것이라는것도 강이 풀리게 될 날자를 선택한 원인중의 하나였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윁남국경을 넘던 1979년 2월 17일에 신화사는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다. “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남을 건드리지 않는다. 만약 남이 나를 건드리면 나도 반드시 남을 건드린다(人不犯我, 我不犯人, 人若犯我, 我必犯人)”는 모택동의 말을 인용했다. 중국은 전운(战云)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상대방이 먼저 손을 쓰기를 기다려서 다시 유리한 시기를 틀어쥐고 상대를 제압하는 “후발제인(后发制人)”의 전략이였다. 이는 미국이 9·11테로이래 “예방성전쟁(预防性战争)’이라는 명목으로 선제공격을 불사한것과 대조된다.

광주군구 사령원 허세우상장이 동선광서변방부대 총지휘를 맡았다. 허세우는 “무서워서 뒤걸음치는자는 죽인다! 싸움터에서 도망치는자는 죽인다! 전투기회를 지연시키는자는 죽인다! 적에게 투항하는자는 죽인다! 군사정보를 루설한자는 죽인다! 전쟁기률을 위반한자는 죽인다! 칼을 사용한자는 죽인다! 죽인다…”는 “십살령(十杀令)”을 내렸다.

무한군구 사령원 양득지상장이 곤명군구 사령원으로 임명되여 서선운남변방부대 총지휘를 맡았다. 양득지는 윁남이 프랑스에 항거해 싸우는 전쟁에서 중국군사고문으로 있으면서 윁남을 지원했었다.
허세우가 지휘하는 동선병퇀은 제41군, 제42군, 제43군, 제54군, 제55군, 제50군(149사는 서선에 배치됨)으로 구성되여 광서방향으로 출발했다.

양득지가 지휘하는 서선병퇀은 제11군, 제13군, 제14군, 제50군 149사로 구성되여 운남방향으로 출발했다.
1979년 2월 17일 자정에 중국인민해방군이 윁남국경 26개 지점을 통해 물밀듯이 공격해들어갔다. 9개군의 22만 5000명의 병력, 전투기 170여대, 땅크 200여대를 몰고 공격한 중국군에 맞서 윁남은 민병대와 지역수비대 10만병력으로 막아냈다. 당시 인도지나반도에서는 중국과 윁남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중국은 윁남공격에서 처음에 실패했다. 25년간의 전투를 통해 단련된 윁남지역수비대와 민병대의 로련함과 윁남의 특수지형때문이였다. 미군이 남기고간 50억딸라어치의 최신형 전쟁물자와 무기도 위협적이였다. 민병대는 윁남북부특유의 복잡한 땅굴과 엄페호, 산간지형을 십분 잘 활용했다. 문화대혁명으로 실전경험이 없고 장비가 낡은 중국군은 생각밖에도 윁남군한테서 악몽같은 타격을 받았다.

1954년에 사상 최초로 식민지군대가 제국주의군대를 격파했던 “디엔 비엔 푸전역(奠边府战役)을 지휘하고 미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무원갑(武元甲)장군이 윁남군을 지휘했다. 정규군 대신에 예비군병역 10만을 동원한 그는 유리한 지형을 리용해 중국군을 방어하는 전략을 펼쳤다. 그리고 최정예병력 5만은 정규전이나 장기전으로 확전될 경우를 대비해 하노이에서 대기하는 배수진을 쳤다.
경험을 섭취한 중국군은 전면공격을 개시하여 윁남의 중심도시를 하나 하나 점령했고 윁남의 가장 중요한 전략요지 량손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여 하노이를 핍박했다.

1979년 3월 5일에 동서량선의 아군은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전진하면서 윁남경내 40킬로메터까지 깊이 들어가 윁남수도 하노이가 직접 아군의 공격에 처하게 하므러써 윁남을 징벌하는 전략목적에 도달했다. 중국군은 1979년 3월 6일부터 1979년 3월 16일까지 모두 중국경내로 철군했다. 중국군은 로케트포와 장거리포의 엄호를 받으며 철퇴하면서 지뢰를 묻었다. 윁남군은 대규모의 추격행동을 하지 않았다. 1979년 3월 16일에 중국은 전쟁이 결속되였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1990년초까지 윁남은 줄곧 변경에서 끊임없이 도발행동을 감행했다. 1990년 2월 13일에 중윁 량국간에 마지막 한차례의 전투가 있은후 중윁변경은 조용해졌다.

당시 중윁전쟁에 대한 각국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1979년 2월 22일에 신화사는 중국의 자위반격전에 대한 각국의 태도를 종합했다.
첫째, 중국을 비난하고 윁남을 지지하며 중국군의 철군을 요구한 나라들로는 구쏘련, 꾸바, 체스꼬슬로벤스꼬, 벌가리아, 민주독일, 웽그리아, 뽈스까, 몽골,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모잠비끄, 알바니아, 앙골라 및 캄보쟈의 친윁헹삼린(韩桑林)정권으로 기본상 구쏘련과 그 위성국가들이였다.

둘째, 중국에 유감을 표시하며 중국의 철군을 요구한 나라들로는 라오스와 인도였다.
셋째, 중국을 반대하고 캄보쟈에 대한 윁남의 군사행동을 반대한 나라들로는 카나다, 스웨리예, 뉴질랜드였다. 뉴질랜드는 중국군의 철군도 요구했다.

넷째, 중국군이 윁남에서 철군하고 윁남군이 캄보쟈에서 철군할것을 요구한 나라들로는 미국, 일본, 동남아국가련맹 5개국, 오스트랄리아, 로므니아, 유고슬라비아, 영국, 이딸리아, 화란, 노르웨이, 핀란드, 이라크였다.
다섯째, 중국과 윁남에 모두 유감을 표시하며 윁남과 캄보쟈에서 자기절로 자기 나라의 운명을 장악하기를 바란다고 한 나라들로는 유럽공동체국가와 기타 나라들이였다.
여섯째, 담판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호소한 나라들로는 애급, 말리, 리비아, 마다가스까르, 방글라데슈, 끼쁘로스와 북유럽의 기타 나라들이였다.

일곱째, 공개적으로 성명을 발표하여 태도를 표시하지 않은 나라는 뽀르뚜갈이였다.
여덟째, 중국을 지지한 나라는 민주캄보쟈였다.
중윁전쟁은 참담했다. 17일간의 전투에서 중국군 2만 6000명과 윁남군 3만명이 사망되였고 중국군 3만 7000명, 윁남군 3만 2000명이 부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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