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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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정취
2022년 11월 04일 10시 49분  조회:462  추천:0  작성자: 한영철
시 골 정 취
   
     요지음  전원생활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 지고 있다. 일년 옹근 시간은 아니더라도 봄부터 가을까지  시골 전원주택에서 생활하며 채소도 심고 꽃도 가꾸면서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려는 사람들 말이다.
 
     내가 촌에 집을 짓고 뜨락농사를 짓으며 보내온 지도 어언 20년이 되여온다.20 여년 전 어느날 큰 동서가 말했다.요지음 촌에 가서 집을 짓고 사는 친구들이 있다고.그 한마디에 나는 귀가 뻘죽해지였다.그것이 좋겠네.그래 나도 도전해 보아야 하지.
   
     원래  농촌태생이여서 그런지 나는 시골생활을 무척 좋아 한다.80년대말 대학을 나와서 기관에 출근하면서 부터 나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들어 왔고  출근 첫해에 운이 좋게  70평방이 되는 아빠트를 분배받았고 그해에  입주하게 되였다.그때는 장식이라는 것이 없었고 큰형수가 집적 집에 하얀 도료칠을 해주고 또 벽밑 가장자리에는 새파란 페인트칠을 올려 주니 입주준비가 끝났다.내 집이라고는 난생 첫번째였다.나는 너무도 좋아 주방에 채색종이로 포도주잔과 숱가락모형을 오려 붙혀 놓았다.누가 그방이 주방아라는 것을 모를리도 없는데. 
  
     그때 외삼촌네는 촌에서 살고 있었다.집은 원래 마을의 건조실을 개조하여 만든것이 였는데 뜨락이 특별히 넓었다.매번 외삼촌집에 가면 그 뜨락이 그렇게도 마음에 들었다.하여 언제 조건이 허락되면 나도 이런집 에서 살아봐야 겠다는 꿈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원래 가지고 있었던 꿈도 있었던 차에 또 동서의 말까지 듣고 보니 하루 빨리 땅을 얻어 집을 짓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밀어 올라 왔다.그러던차 2002년 봄 우리 단위의 친구들이 마반산등산을 하게 되였다.3월초 였건만 그날은 날씨도 춥고 바람도 세차게 불어 대였다.고려대학에서 시작한 등산대오가 부암촌 부근까지 도착하니 어떤친구들은 매우 힘이 부치는 모양이다.그때 공작에 참가한지 얼마 안되는 한 친구가 춥고 맥이 없다며 등산을 포기하자고 졸라 대였다.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한후 우리는 단연히 등산을 포기하고 하산길에 들어 섰다.그래서 내려온 골이 발로 마반촌6대 골짜기였다.
 
    골짜기 수레길을 따라 내려오며 보니 량쪽 산등성이 안 옴폭한 곳에 오붓한 작은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마을 앞 탁트인 곳에는 브라하통하가 흘렀고 마을 량옆의 산등성이는 마치 안락의자의 손걸이 같았다.소소리 높은 시리봉은 마치 거인의 베개같이 생기였으니 이가 바로 더없이 좋은 명당자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치였다.그렇지 바로 이곳이 내가 찿아 다니던 제일 마음에 드는 집터였다.
 
    이튼날 나는 이 마을을 다시 찿았다.누가 팔집이 없냐며 물어 가던 중 최씨성을 가진 한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자기가 전에 살았던 초가집을 팔겠다고 하였다.소뿔은 단김에 빼랏다고 나는 인츰 계약을 맺고 선불금을 내였다.그집은 뜨락이   넓었는데 그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또한 지세가 상대적으로 높아 골짜기에 홍수가 져도 피해를 받을 가능성이 적어 보인점도 가산점이 되였던 것이다.
 
    초 가집을 사고 난 그해 여름 누님이 놀려가 보자고 하였다.그때는 자가용이 없던 시절이라 우리는 연길역에서 기차를 타고 마반산으로 향하였다.마반산은 작은 마을이지만 기차역을 가지고 있었다.내가 대학다닐때 백성지구에서 온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말이 장춘으로 오려면 집마을에서  마차를 타고 향소재지까지 가야 하고 향소재지에서 현성까지는 뻐스를 타야하고 다음에 기차를 타야한단다.거기에 비하면 마반산은 교통이 대단히 편리한 셈이다.
 
      한여름에 잡아 들었는지라 사람의 손이 가지 않은 울안에는 쑥이 허리를 치였다.우리는 가지고 간 낫으로 풀을 베면서 집앞으로 접근하였다.한참 베고 나니 집앞이 훤하게 자리가 났다.집에 들어가 보니 한때는 사람이 살던 집이라 회칠도 되여 있었고 물뽐프도 기능을 잃지 않고 있었다.누님은 가지고 간 반찬들을 내놓고 정심을 차려 주었다.
 
     이듬해 봄이 되자 나는 집짓기 준비작업에 들어갔다.그때 집에는 오터바이 한대가 있었는데 그걸 타고 채석장이며 벽돌공장이며 다니며 재료구입을 하였다.친구의 소개로 시공대도 청하게 되였다.4월 중순의 어느날 나는 단위의 봉고차를 빌려가지고 11명의 시공대를 거느리고 마반촌에 입주하였다.
 
     집을 짓는데 딱 한달이란 시간이 걸리였다.내 생각 같아서는 좀 더 시공기일을 단축할것 같았는데 일군들은 전혀 급해하지 않았다.나만 급해봐야 별로 해결할 문재도 없고 하니 나는 재료공급에만 신경을 썼다.우리 시공대 책임자는 성이 량가라는 호북성의 사람이였는데 시공일군들도 모두 그 마을 사람들이였다.
 
     지붕을 올리던 날 시공대장이 나보고 제사를 지내지 낞겠냐고 물었다.나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을 본적이 있는지라 그러자고 했다.장에가서 큼직하고 잘생긴 돼지머리를 사오고 제사상을 차리였다.물론룡왕님 입에 백원짜리 지페를 물리는것도 잊지 않았다. 또 깨끗한 동전 여러잎을 준비하고 가운데 구멍을 뚫고 쇠사슬로 꿰 매였다.빨간천을 사다가 붓으로  上梁大吉 坚如磐石란 글자를 써서 동전과 같이 대들보에 매였다. 나는 먼저 룡왕님께 절을 올리며 오늘은 대들보를 올리는 날인데 집을 튼튼하게 해주고 우리 가정을 보호해주십사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소원을 빌었다.다음 집 네면 벽에도 절하였다. 제사를 끝내고 폭죽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마지막 대들보가 천천히 올라가 제 자리를 잡았다.
 
     그날은 고기를 삼고 술을 내여다 마음껏 먹고 마시였다.시공대 여러분들은 좋아하며 큰소리로 이야기하고 웃었다.오래만에 우리 마을에서 큰행사를 벌린것이다. 5월15일날 시공대는 철거하였다.한달 동안 같이 생활하던 일군들을 보낼려니 섭섭한 마음도 금할길 없었다.
 
      집도 짓었겠다 토성으로 울타리도 치였으니 이제 남은것은 과일 나무도 심고 채소농사도 하며 전원생활의 정취를 느끼여 보는것이다.그뒤로 근 20년간 나는 부지런히 땅을 일구고 낟알을 넣고 기음을 매고 땀동이를 흘리며 노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특히 지난해에는 꽃도 심었는데 파란색의 채소밭곁에 피여난 떨기떨기 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여 오고 가는 손님들의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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