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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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독서인생 댓글:  조회:746  추천:0  2020-04-29
독서인생    좋은 책을 읽는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보약과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책속에 지혜가 있고 책속에 지식이 있고 책속에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얼마나 읽었느냐고 하면 왕왕 시간이 없어 못 읽는다고 한다. 사실 지금 사람들은 시간에 쫓게 살고 있는것도 나름대로 사실이라 하겠다. 직장에서 맡은바 직책을 완수할라니 집에서 자식교육을 책임질라니 바삐 보내고 있는것  현실이다. 거기에다 취미생활이요 친구들 사이 술자리요 하노라면 당연히 시간이 부족할수 밖에 없다.       일본사람들의 생활절주는 우리 보다 많이 빠르다. 얼마전 친구가 일본류학시절의 이야기를 하는데  일본에서 불법체류를 대대적으로 단속하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그 많은 행인중에서 중국인 불법체류자를 용케도 찿아 낸다고 했다. 일본사람들은 시간에 쫓기듯 종걸음이 거나 뛰여 다니는 반면 불법체류자들은 여유 있는 걸음을 걷는다고 했다. 일본사람들은 손에 메모지를 들고 하루의 스케줄을 점검하며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사람들의 독서량은 우리 보다 엄청더 많다. 우리가 시간이 없어 책을 못읽는다고 할때 생활절주가 우리보다 빠른 일본사람들이 일년에 읽는 책권수가 우리 보다 10배이상 많다. 통계에 의하면 일본사람들은 년 평균8. 7권의 책을 읽는 반면 중국사람들은 년 평균 0. 7권의 책밖에 읽지 않는다고 한다. 책을 읽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허지만 짬짬의 기간이라도 유용하게 리용하면 독서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우리가 시간이 없어 책을 못 읽는다는것은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편면적이고 불계통적인 소식 전파에 익숙해 지게 되였다. 하기에 소통과정에서 종종 누구에게서 들은바에 의하면 여느 온라인에서 본데 의하면 이라는 말을 곳잘한다. 온라인에 등재된 문장은 왕왕 편집자의 기호를 반영한 불확실한 경우가 많다. 하기에 온라인에 중독되면 결국 불확실하고 편면적인 소식 입수에 그치게 된다. 결국 독서를 통한 료해와 분석 사고를 통한 론단이 아니라  풍문에 얻어 듣은 말로써 자기의 관점을 대처하는 것이다. 혹여 자기의 관점을 감추기 위한 수법일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종합소질이 낮거나 주견이 없고 깊이가 옅은 사람으로 락점될수 있다. 우리가 많은 독서를 통하여야 시비가 바르고  품위가 높고   추구가 있는 사람으로 발전할수 있다.          요지음 나는 «어머니»라는 제목의 책을 읽게 되였다. 여느 호남성 상서(湘西)지방의 한 시골소년이 어엿한 대학생으로 중국작가협회 전직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에 어머니와 자기사이에 얽인 사랑과 분노 포용과 탈출 보수와 진보를  엮은 이야기 였다. 비록 자신은 문맹이여도 자식을 큰 재목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어머니의 희생정신에 나는 저도 몰래 많은 감동을 받았고 또한 자기의 지나온 길일 돌이켜 보게 되였다.       독서의 범위는 고정된 틀이 없다. 자기의 애호에 따라 사회의 조류에 따라 임의로 선택할수 있다. 나는 비교적 "잡식"형인데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다. 마음에 드는  소설이나 잡지 그림책이면 쟝르에 관계없이  구독한다. 지금와서 책을 읽는건 벼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독서가 인생의 한부분으로 되였기 때문이다.
123    온라인 문학 댓글:  조회:537  추천:0  2020-04-29
온라인 문학         나는 차를 운전한면서 방송을 듣는 습관이 있는데 특별이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도 노래도 듣고 소식도 듣을수 있어 좋다. 특히 차에서 우리말 방송을 잘 듣는데 재미나는 프로도 듣고 또 조선족사회가 돌아가는 현황도 알수 있게 되여 실로 콩먹고 알먹기라 하겠다. 오늘 운전하고 시골로 가는데 우리말 방송에서 온라인 문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글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지라 나는 자연히 방송에 귀가 솔깃해 지였다.       지금 우리말 문학은 지면문학과 온라인 문학으로 나뉘는데 상호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전통적인 지면문학은 여러 문학잡지사 신문사 등에서 다루고 있다.  창작된 작품들은 투고와 퇴고를 거듭하며 편집선생님들의 수정을 거쳐서 완성작으로  세상에 태여 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작품의 질량이 상대적으로 높다. 온라인 문학작품은 자발적인 창작과 발표로 진행되고 있는데 여러가지 온라인 싸이트에 자기의 작품을 올리는 방식으로  발표된다. 아마추어들이 애용하는 교류방식이라 하겠다. 온라인 창작의 우점이라고 하면 시간과 지면의 제한없이 작가의 생각과 주장을 자유롭게 발표할수 있는 령활성이다. 지금 잡지사 신문사들에서도 문학싸이트를 운영하고 있지만 민간적인 작품교류에 비하면 그리 활발한 편이 아니다. 잡지사나 신문사에서도 온라인 문학교류와 작품에 관심을 보였으면 좋을것 같다.      지인들의 소개로 작년에 나는 여러개 문학췬에 가입하였다. 온라인에는 전문 시를 다루는 위챗동호회가 있는가 하면 시 소설 수필을 겸하여 다루는 위챗췬도 있었다. 대체적으로 보면 한500명이 되는 우리민족 문학애호가들이  여기저기 췬에 몸을 잠그고  문학담론도 하고 작품도 교류하는것 같다. 췬의 이름을  문학사라고 달지 않았지만 문학췬은 결국 문학애호가들의 활동장소요 출간지같은 것이였다. 지금은 시대 발전의 힘을 입어 문학애호가들 끼리도 쉽게 련락할수도 있고 또 자기들의 글에 대하여 자유롭게 담론할수 있게 되였다.  이런 외부적 조건이 문학발전에 큰 도움이 될수있다.       관방에서 꾸리는 잡지나 신문은 문턱이 좀 높은 편이다. 정규적인 출판물로서 작품의 정치적인 경향이나 필력에 대한  요구가 엄격하다. 이방면의 요구는 여느 매체들도 매 한가지다. 하기에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매체들도 췬주를 포함한 운영진은 이러한 요구를 철저히 지켜 나가야 할것이다. 문학애호가들은 작품을 온라인에 발표하는데 끝히지 말고 잡지나 신문에 발표하기에 노력하면 좋을것이다.       우리말 문학의 발전이 겪고 있는 장애는 두가지로 볼수있다. 하나는 작가수가 적은 것이고 둘째로는 독자수가 적은것이다. 그러니 우리 문학이 활기를 띠려면 작가대오와 독자대오를 건설하는것이 급선무라 하겠다. 량변이 있어야 질변이 있다. 많은 좋은 작품으로 독자를 흡인하여야 함이 우선 해결해야할 과제라고 본다. 볼거리가 많아야 한다는 말이다. 좋은 작품은 독자들을의 마음을 흡인한다. 듣는말에 의하면 우리말 출판물에서« 노인세계»가 독자수가 제일 많다고 한다. 중장년층이 우리글로 된 문장을 많이 읽고 있다는 말이다. 가능하면 우리민족 기성작가분들이 자신들의 창작활동을 펼쳐나가는 동시에 후배들을 배양하는 각도에서 문학사이트에 특강같은 절목을 설치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쓰기 아마추어들도 배움의 장소가 있게 말이다.        자기들이 창작한 작품을 열독하는것을 통하여 독자들 사이는 더욱더 친근하여 지고 교류의 장은 더욱더 커질것이다. 그러니 당금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더라도 대수가 아니라고 본다. 많이 사고하고 많이 쓰노라면 기필코 질적인 변화를 가져올것이다. 하루 강아지가 범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맨발을 한 사람은 신발을 신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할바가 아니다. 하고 싶어 하는 일인데 비평해도 좋고 비앙거려도 관계없다. 오직 목표를 향하여 부지런히 가노라면 그어느때인가 웃을 날이 올것이다.  
122    독서일 댓글:  조회:531  추천:0  2020-04-29
독서일        오늘은 세계 독서일 이다. 독서는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전문지식도 습득하고 또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를 터득하고 새로운 관점 조류(潮流)를 접속하게되고 아름다운 새생활을 동경하게 된다. 하지만 요지음 우리 주위에는 책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은게 현실이다. 책을 읽으라하면 그무슨 곤역을 격는것처럼 싫어하는 같다.      독서를 고무하려고 정부차원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독서에 관한 토론을 진행한다 던지 «독서가정»평의 활동을 조직하는 등 활발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헌데 결과적으로 보면 효과가  리상적이지 못할때가 많다.  결국 정부나 관련부처에서는 열을 올리고 있는데 독서해야할 시민의 반응은 미지근 한 상황이다.  주요원인이 무엇일까?      첫째 원인은 가치관과 관계된다고 본다. 개혁개방이래 많은 사람들은 경제리익 추구를 가장큰 목표로 삼았다.  경제가 발전하여야 과거 하고 싶었지만 못하였던일을 할수있고 과거 해결하고 싶었지만 해결하지 못하였던 일들을 해결할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누가 돈을 더 많이 더 빨리 벌어들이는가가 성공인사의 기준이 되였다. 그러니 무릇 돈버는일에는 시간과 정력을 할애하지만 돈과 거리가 먼 독서에는 흥취가 없다.      두번째 원인은   품위가 낮은 것과 관계된다. 어떤 분들은 게임 드라마 유흥 등 분야에서는 활약적이지만 독서에는 냉담하다. 술이나 한잔 들어 갔다하면 고금중외 경제  외교 군사 등분야에 대하여 열띤 담론을 하기 좋아 하지만 대부분 얻어 듣은 진가를 가르기 힘든 풍문을 재탕하는데 끝힌다.  책을 보아도 고추장 맛보기식으로 몇줄 읽는데  불과하다. 이런식으로는 책속의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한다. 독서가 인생의 한부분으로 습관이 되여야만 자신을 부단히 제고할수 있고 시야를 넓힐수 있다.      독서는 습관이고 독서는 품격이고 독서는 인생이라 할수 있다. 독서라는것은 매개인의 개인행위 범주를 벗어난 민족과 나라에 장래와 관계되는 큰일이다. 독서하기 싫어하는 민족과 나라는 희망찬 내일이 없다.      우리는 독서를 통하여 살아가는데 필요한지식이나 상식을 터득하게 새로운  관점들을 수립하게 된다.  그런데 요지음 사람들은 더욱 쉽게 더욱 빠르게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 한다. 그러니 어떤 사람들은  체계적이고 완정하게 서술된 서적을 멀리하고 文摘라던지 토막소식이라던지 八卦소식들에 열중하게 된다.        그리고 요지음 사람들은 텔레비드라마 오락프로 개임 핸드폰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드라마는 아무리 많이 보아야 별로 도움이 없다. 다른데 열중하다 보면 책을 읽을 시간이 자연히 적어질수 밖에 없다. 나의 단임선생님의 명언을 빈다면 "사람에게 시간이 제한되여 있기에 놀음을 탐낸다면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새집을 장식하면 다른건 다 갖추는데 책장이 없는 집이 많다. 그나마 애들이 어릴때는 집에 참고서적이라도 갖춰져 있었지만 대학을 보낸후로는 집에는 새로 구입한 책이 별반 없다. 그러고 서야 어찌 돌변하는 시대에 적응 할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라도 독서하는 습관을 양성하자. 좋은 책을 벗하고 살다보면 자기도 우수해질수 있다.
121    설맞이 댓글:  조회:600  추천:0  2020-04-27
설 맞 이        설이 다가 오고 있다는 가장 집적적인 감수는 행사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실(科室) 처실(处室)의 총화모임 동사자들 사이 친구들 사이 동창들 사이 모임 그리고 객지에서 사업하던 친척 친우들의 고향방문 모임 등등 명색도 가지가지다.  그중에 어떤 모임은 사전에 참석할 준비가 되여 있었지만  또 어떤모 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도 있다.  그러다 보니 세밑은  행사가 겹치고 스케줄이 비교적  빡빡한 상태다.       요지음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였던 행사에 참석해달라는  요청도 여러번 받았다.  다른 사람들이 요청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대방의 심중에 있다는것을 말한다. 그러니 웬간하면 참석하는것이 례의다. 행사장에 가면 다들  설맞이 모임이라고 운을 떼지만 솔찍히 말하면 설을 구실로 삼아 련계를 가지고 감정을 이어 가자는것이 목적이다.        지금 설맞이 분위기는  옛날에 비하면 차이가 많다. 물질생활이 결핍하던 그 시절에는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설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였다. 설이 되여야 새옷도 얻어 입고 고기도 베고 폭죽도 터칠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설의 의미는 새로운 한해를 시작 한다는 외에는 별로 느껴지는 바가 없다. 하여 어떤 가정에서는 설이면 아예 려행을 떠나기도 한다. 설 련휴일기간 남성들은 술과 씨름하고 녀성들은 주방에서 료리를 만들다 보면 모두 피곤하기만 하다. 그리고 번거로운 손님접대와 가무는 가정불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하기에 명절끝에 이혼률이 상승한다고도 하지 않는가.        중국사람들은 설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건강과 행복을 념원하기도 하고 사업에서 성과를 올릴것을 바라기도 하고  부자되라고 축복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시작을 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념원과 축복은 모두 아름다운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한해 한해를 맞이하고 또 분발노력하며 새로운 삶을 영위해가고 있다.        " 지나온 나날을 돌아 보니 먼데 앞날을 내다보니 가깝구다. " 얼마전 소꿉친구들이 모인 행사에서 한 친구가 감탄하며 하던 이야기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상반전에는 성과를 비교하고 권력을 비교하였다면 하반전에는 건강을 비교하고 수명을 비교하여야 한다"고 했다. 친구들도 웬간이 나이가 드니 건강에 신경을 쓰는것이 확실하다.  실천이 증명하다 싶이 건강이 없는 삶이란 암울하기 그지없는 생명연장에 불과하다. 친구들 사이에는 말말간에도 간강이라는 단어가 툭툭 튀여 나온다. 20대 30대들 사이에서는 별로 쓰지 않던 단어다. 간강이 첫째라는 말이다.         새해에 대한 기대와 소원은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집으로 말하려면 아들애가 념원대로 학업을 잘 해나가고 안해가 건강하고 내가 하는 일이 순리로왔으면 하는 것이다. 그외 별로 바라는것이 없다. 과분한 욕망은 오히려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다.        저녁에 인평강뚝에서 천지다리쪽을 바라 보니 마치 시골에서 대도시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시내쪽에는 여러가지 색갈의 장식네온등불이 도시를  아름답게 장식해 놓았다. 이제 설이되면 강뚝에서는 폭죽을 터치운다. 그소리가 어찌나 세고 밀집한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대포소리같이 우둔한 소리를 내는 폭죽도 많으데  폭팔소리에 유리창이 다 울린다.        묵은 년을 보내고 새년을 맞이하는 이때 부모님의 은덕을 잊지 말아야하고 혈육의 정을 잇어나가야 한다. 또한 가정의 안녕을 지켜가야 하고 친구간의 정분을 더욱 보듬어 가야 할것이다.       나는 새해에  우리 모두에게 행운과 행복을 깃들기를  바란다.    친구들이여 보고 싶네.
120    고향 댓글:  조회:552  추천:0  2020-04-27
고    향         설이 다가 옴에 따라 이국땅에서 타향에서 사업하고 출근하던 분들이 륙속 고향을 찿아 오고 있다. 오늘 손님 마중으로 공항에 나가 보니 고향을 찿아 오는 사람들로 무척 붐비였다. 인천-연길 항공편에는 귀국방문객으로 가득했다. 한사람이 귀국하는데 마중 나간 사람은 온가정인 같다. 상봉의 희열로 퐁퐁 뛰는 젊은 사람이 있냐하면 마중나온 아이를 안고 싱글벙글하는 아빠도 있다.         설이 되면 자식들은 사업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길이 아무리 멀더라도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에 찿아 온다. 이것은 력대로 이어온 관습이다.  잘 나가는 사람이나 못 나가는 사람이나 모두 고향의 부모님집으로 모인다. 부모님께 새해의 인사를 올리고 지난 한해의 평안을 보고 드린다. 그리고 가족이 모여서 맛있는 고향음식도 맛보며 오손도손  혈육의  정을 나눈다.  설음식을 장만하는데 종래로 돈을 아끼는 법이 없다. 동양사람들은 가족의 정을 중시한다.  그중에서도  중국사람들이  특별한데 설이면 가족의 상봉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온집 식구가 상봉했다는 것은 모두가 안전하게 한해를 보냈다는 것을 설명한다. 자주 상봉해야 정이 오가고 정이 오가야 더 아낄것이 아닌가.           부모님이 계시기에 고향이 있고 고향이 있기에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누구나 고향에 대하여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동년시절에 고향이  유명해서도 아니고 고향이 부유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부모님들이 신근하게 로동하고 생활하고 우리를 교양시켜준 곳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우리의 태줄을 묻은 곳이요 우리를 자리운 곳이고   짜개바지 친구들과 뛰 놀던 곳이요  철이들게 하였던  곳이고 잔뼈를 굳혀 주었던 곳이다.  더 나가서  우리의 뿌리가 내린 곳이다. 고향의 이야기 고향의 풍경 고향의 먹거리 이 모든것이  고향이라는 큰 가마속에 용해되여  끈끈한 정을 만들어 내였고 그것은 또 언제나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준다.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짙은 향기를 만들어 내고 시간이 흐를수록 고향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乡愁)를 불러 이르킨다.           아무리 성공한 엘리트라도 매일과 같이 직장에서 바삐 돌아치는 평사원(社员)이 더라도 방송에서 혹은 신문에서 고향소식 한줄이라도 접할때면 저도 몰래 흥분하게 된다.  특히 고향을 떠나 이국땅이나 타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향은 한시도 잊지 못할 존재다. 현재 고향의 부모님들이 이미 하늘 나라에 가시였더라도 혹은  친척 친우들이 고향을 떠났더라도 머리속에 남아 있는 고향은 언제나 포근하고 정이 넘쳐나는 존재 그 자체다. 그것은 마치 아름드리 소나무의 가지리인냥 아무리 얼기설기 엇갈려 있어도 아무리 멀리 뻗쳐있어도 결국은  뿌리를 떠나지 못하는것과 흡사하다.         고향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뿌리라고 할수 있다.  뿌리가 있기에 우리는 아무리큰 난관에 봉착해도 이겨나갈수 있고 위안을 받을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찿고 있는것이 아닐가.
119    리발 댓글:  조회:536  추천:0  2020-04-27
 리 발          설날이 다가 오고 있다. 모두들 집무실에서  사무를 보고는 있지만 명절 기분에 일이 손에 닫지 않는 모양새다. 어떤 친구는 서성거리기도 하고 또 여느 친구는  주섬주섬 서류를 모아 놓기도 한다. 설이라고 해야 옛날같이 크게 기대되는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긴 휴가기일이라  많이 기다리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슈퍼에 가면 사람들이 복새통을 이루고 거리에는 차량들이 분빈다. 특히 외지 번호판를 단 차량들이 눈에 많이 띄운다.         나는 설전에 가뜬히 리발하고 명절분위기를 잡으려고 리발관을 찿았다. 우리 동네는 번화가와 좀 떨어져 리발관도 많지 않다. 한집은 이미 문을 닫아버리였다. 일찍이 어디론가 떠난 같다.  다른 한 집을 찿아 갔더니 손님이 두명이 대기중이였다. 다른 곳을 갈려면 멀기도하여 기다리기로 하였다.          자리에 앉아  리발사를 바러보니 40세가 좀 넘을가하는 녀성분이였다. 그런데 웬지 리발수평이 그리 탐탁해 보이지 않았다. 리발이라는 것은 올리 깍는 것이 기본인데 이분은 자꾸 내리 추리기만 한다. 리발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표현이다.  손님은 고중생같이 보였는데 그저 담담한 표정이다. 언젠가  나도 저런 리발사한테 머리를 맡긴 적이 있었는데 좀처럼 시원치 않았다. 진종일 머리를 만지기만 하고 축도 내지 못한다. 이런 리발사들은 대부분 면도질도 서툴다.          나는 이집은 아니다 싶어  단연히 나왔다.  20여년째 머리를 깍는 단골집이 한집 있기는 하나 거리가 멀다.  90년대 말부터 그집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리발사부부는 원래 복무공사 산하 국영리발관에 출근하다가 개체로 리발관을 꾸린분들 이다.  남자는 이전에 하남다리부근 리발소에 출근했는데  그때도 나는  그집 단골이였다. 후에 그들 부부가 개체리발관을 한다기에 줄곳 그 집만을 리용하게 되였다. 단골이기에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 부부가 척척  알아서 해주니 그뒤로 다른 집에 가본적이 별로 없다. 그 집에 가서 리발하면 우선 머리를 가뜬하게 깍아 주니 정신이 나서 좋고 면도까지 빡빡하게 밀어 주니 시원해서 좋다. 헌데 내가 집을 이사한후로는 거리가 멀고 주차하기도 힘들어 리발가는 차수가 적어 지였다.          이집 부부는 원래 하향지식청년으로 농촌재교육을 받은 분들로서 정책락실후 도시에 올아온 뒤로는 줄곳 리발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40여년을 리발하였으니 진짜 전문가수평이다. 키가 크고 여윈 남편은 매우 자상한분으로 한번 머리를 리발하는데 반시간정도 걸린다. 이리 다듬고 저리 다듬는데 여간만 소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몸집이 큰 안해는 성격이 활달하고 목소리도 높고  시원시원한데 머리깍는 솜씨가 하도 잽싸서  리발을 하는데 20분도 채 안걸린다.          리발관에 들어서 보니 이미 손님 한분이 머리를 깍고 있었다. 주인은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얼마나 많은 손님이 리용하였는지 리발의자의 가죽 겉면은 파손된 곳도 여러 곳이다. 고물과도 같은 존재로써 또한번 이집의 력사를 말해 주고 있다. 전문 리발집과 미장원의 구별은 리발용의자를 보면 알수있다. 이집은  남자리발 전문이다 보니 의자도 리발전용의자다.  미용원이란 간판을 단 집들은 의자부터 틀리는데 전통방식의 리발전용의자가 아니고 대체로 간이식 의자다. 그러니 누워서 면도를 받을수도 없다.         내 차려가 되여 의자에 앉으니 리발사가 말없이 익숙한 솜씨로 머리를 깍기 시작한다. 지금은 리발기도 충전식으로 가볍고도 잘 먹힌다. 원체 나는 두주일에 한번 정도 리발하기에 머리가  길지 않다. 리발사는   시원시원 올리 밀고 다음 순서로 가위로 찰칵찰칵 다듬기 시작한다. 가위솜씨가 어찌나 현란한지 마치 가위가 머리위에서 춤추는 같다. 어느 정도 잘 되였다 싶으면 면도칼로 머리 밑부분을 갖쭌하게 끊어 준다.  다음 목에 수건을 돌려주고 샴프를 바르고  두손으로 머리를 빡빡 감는데 그렇게 시원할수가 없다.         이집에서는 다른 리발관에는 없는 서비스도 제공하는데 두손을 합장하도 머리를 도닥여 준다. 토닥토닥 두드릴때면  자연적으로 머리가 까댁거리게 되는데  마리가 한결 시원하고 맑아지는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량쪽 어깨를 두번씩 치고 등을 크게 한번 쳐주면 안마는 끝이다.  다음 눕혀 놓고 면도를 하는데 면도질 솜씨 또한 수준급이다.  매번 면도하기 전에는 습관적으로 면도칼을 가죽띠에 쓱쓱 문질어 준다. 면도는 이마부터 시작하여 볼과 턱까지 싹싹 밀어주는데 전기면도로는 전혀 느낄수 없는 빡빡하고 거뿐한 느낌이 든다. 머리를 다 씻은 뒤에는 건발기로 머리를 말리 우고 또 리발기와 가위로 요리조리 잘 다듬어 준다.  끝날무렵 리발사는 거울속의 나를 보며 어떠냐고 묻는다. 머리도 짧게 잘 깍았고 볼턱의 수염도 잘 밀어 낸지라 나는  기분 좋게" OK"이라고 했다.        거리를 나오니 사람들이 붐빈다. 찬 바람을 맞으니 머리는 한결  시원하고 날것 같은 기분이다. 이제야 내가 진짜 설을 맞이하는 기분이 들었다. 경자년 설을 맞이하며 머리깍은 기분 진짜 좋다.  
118    갈색추억 댓글:  조회:610  추천:0  2020-04-27
갈색추억        어느날  책을 보는데 서글픈  노래 한수가  TV에서 흘러 나왔다. 고개를 돌려 화면을 보니 이목구비가 청수한  한 남성 가수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희미한 갈색등불 아래   싸늘이 식어가는 커피잔   사람들은 모두가 떠나고   나만 홀로 남은 찻집        나는 보던 책을 접고 TV에 집중하였다. 그 남자의 눈에는 애틋한 감정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가사 또한 쓸쓸한 사연을 호소하고 있었다. 검은색 외투에 흰 목수건을 두룬 그 남자의 마음속에는 분명 그 어떤 떨쳐버리지 못할 옛 련인에 대한 미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저도 몰래  노래에 끌리여   갈색추억이 담긴 찻집을 그려 보게 되였다.        밖에는 추적추적 가을 비가 내린다. 손에 검은 우산을 든 청년남녀들은 비를 피하려고 빠른 걸음으로 찻집 창문 앞을 지나쳐 간다. 손님들이  다 빠져나간 찻집에서 어떤 남자만 홀로 남아 있다. 어지간히 취하여 있는 듯도 하다. 원래 그처럼 달콤하게 느껴지던 커피도 오늘은 웬지 쓰기 만 하고 넘기기 힘들다. 접시위에 댕그랗게 놓여진 커피잔은  오늘 따라 그 남자의 고독한 모습과도 흡싸하다.         아무런 약속도 없는데     그사람 올일도 없는데     나도 몰래 또다시 찿아온     지난날 추억속의 그 찻집         그렇다. 그들은 이미 헤여지었고 남남이 되였다. 현실은 현실이 아니더냐. 헌데 가끔 악착스레 밀려오는 옛추억으로 하여 남자는 가끔 고민에 모대긴다. 만나자고 약속한 일도 없다. 그리고 그녀가 올 일도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 도시를 떠나 어디론가 가버린지도 오래 되였다. 남자는 오늘도 저도 몰래 또 다시 그 찻집 문고리를 잡는다.         TV에서는 수심이 어린 얼굴의 녀자가 나오며 노래한다. 어찌 보면 아직도 대학생티가 다분한 그녀도 가끔 추억속에 묻혀 사는가 보다.  옛사랑에 미련을 가지고 있은들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우리는 나란히 커피를 마시며    뜨더운 가슴 나누었는데    음악에 취해서 사랑에 취해서    끝없이 행복했는데        노래의 곡조에 매료 되여 나는 또 다시 상상의 나래를 펼치였다.  열련에 빠진 모든 청년남녀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은  대학가 근처  찻집의 단골이였다. 책을 보다 가도 노래를 듣다 가도 대방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뛰여 나와 상봉하던 곳이 바로 이 찻집이였다. 그들은 달콤한 커피를 마시며 바라 보는것 만으로도 행복했고 만족했다. 레코트 판에서 모기 소리처럼 앵앵거리며 흘러나오는 흘러간 옛노래마저 자기들을 축복하여 주는것 같다. 그때는 세상이 다 자기들의것만 같았다.       어느날 갑자기 그대는 떠나고     갈색등 불빛만 남아     외로운 찻잔에 싸늘한 찻잔에     희미한 갈색추억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그남과 다투었다. 별일도 아닌것을 가지고 작으마한 모순으로 크게 화내였다. 그리고는 앵하니 돌아지였다. 전화소리가 끊지 않았지만  받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변할수도 있는가 보다.  매냥 찻집에서 만나던 그친구가 그처럼 좋았지만 자그마한 일 때문에 대방에게 화풀이를 한것이다. 그후 그녀의 마음의 평온도 찿았건만 끝내 량해를 구하지는 않았다.       하건만 남자는 매일같이 찻집을 찿는다. 갈색등불밑에 고독하게 앉아있는 남자는 꿈에라도 그녀가 나타나길 고대한다.       노래는 다시 울려 퍼진다.         오래동안 어떤 노래에 빠져본 적이 없었다. 오늘은 나름대로 TV노래를 감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였다. 노래속 사람들의 이야기에  감동받아 언감생심 자기의 감상을 피로하였음을 밝힌다. 살아가면서 몇번쯤은 노래에  빠져 드는 것도 마음이 따뜻해 지는 일이다.
117    탁구를 즐기는 사람들 댓글:  조회:1502  추천:1  2020-01-06
탁구를 즐기는 사람들         사람마다 애호가 다양하다. 운동에 대한 애호도 저마다 다르다. 우리 주변에는 탁구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느 한 친구는 전원주택에서  생활하는데 집에다 탁구판까지 가져다 놓았다.         연길체육장 2 층에는 정부에서 지원하는 면비 탁구회관이 있다. 개장한지 일년정도 되는데 손님들이 끊을 사이가 없다. 탁구판이 20여개나 되지만 늦게 간 사람은 자리가 없다. 하여 기다리다가 남들이 쉬거나 돌아간 다음 에야 칠수 있다. 탁구 칠러오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중로년분들이 대부분인데  솜씨를 보면 옛날에는 다 내노라하는 분들였음이 틀림없다. 퇴직후 취미로  새로 배우는 분들도 일부 있다.         탁구회관은 아침 7시면 개장하는데 일찍 오는 사람들이 많다. 짝을 묶어 오는 사람들도 있고 혼자 오는 사람도 있다. 오래 다닌 사람들 지간에는 호상 익숙한것 같다. 허나 일단 시합을 치르면  사정을 두는 법이 없는데 친구건 파트너건 상관 없다.  탁구경기를 관람하노라면 관중들도  덩달아 즐겁다. 공을 올려 뜨리고 잽싸게 깍으면서 시작하는 사람이 있나하면 또 공을 손에 꼭쥐고 있다가  깜쪽같이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선수들은 저마다 비밀 무기들이 있다. 수준이 비슷한 선수들이  공격하는 장면은 참  멋지다. 몸까지 써가면서 공격해 대지만 상대도 전혀 두려움이 없이 맞공격 한다. 똑딱 똑딱 탁구공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총알같이 날아 다닌다.          탁구운동은 반응이 빨라야 한다. 탁구공은 운동괴적이 짧고 변화무쌍하다. 진공측에서는 모든 기교와 수단을 다하여 공의 락하점을 때로는 오른쪽 모서리에 때로는 왼쪽 모서리에 견주어 방어측으로 하여금 곤난에 빠뜨리게 한다. 방어측에서는 대방으로부터 날아 오는 여러 류형의 공을 잽싸게  받아 내고 방어에서 공격으로 돌진 한다.  기회만 포착되면 사정없이 공격을 들이 대는데  절때 사정 두지 는 법이 없다. 짧게 낮게 빠르게 연속공격을 들이 댄다. 이렇게 공격에서 방어로 방어에서 공격으로 넘나들며 경기를 펼쳐 간다. 한번 두번 세번 여지없이 공격하는데 대방측의 위기반전 능력도 만만치 않다.  그러다가 아차 실수하면 1 점을 잃는것이다.  이때에야 득점수는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내는데 얼굴에는 승자의 미소가 어려있다. 이멋에 탁구할려 온 사람들이 시간도 잊고 피로도 잊고 경기에 몰두하는것이 아닐까.         나의 로처장님은 어려서 부터  탁구선수 였다고 한다.  수준급인데 웬만한 경기에 나가면  우승하는건 보통이다.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고 취미로 탁구회관에 나가 학생들을 배워 준다.  연변탁구계에서 로처장의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별반 없다.         우리 친구가운데도 날쌘 선수가 있다. 그 친구는 매주 토요일이면 경기가 아니면 훈련에 나간다. 혹여 금요일 저녁에 친구들 행사가 있으면 청가를 맡기가 일쑤다. 연변일보에서도 몇번이나 그 친구가 우승했다는 보도를 본적이 있다.  우리 단위에서 한다는 탁구선수와 그 친구를 아는가고 물어 보니 자기보다는 한수 위라고 했다.         광주에도 탁구애호가 친구가 있다. 탁구를 배운지 시간은 길지 않지만 진보가 빠르다. 경상적으로 광주회계사협회 탁구 시합에 나간다고 한다. 명년에 친구들이 청도에서 행사를 가지는데 탁구시합종목을 넣어야 할지  고려중이다.         운동은 신체단련에만 좋은것이 아니라 기분전환에도 만점이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땀을 뚝뚝 흘리며 운동하고 나면 온몸이 거쁜하고 정신이 맑아진다. 하루동안 사업일정으로 하여 쌓여던 피로와 스트레스가 확 날려 보내는 순간이다. 그래서 총명한 사람들은 운동을 끊지 않는다.         일전에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요지음 부터 연길역전 탁구회관에 나가 탁구를 배운다고 했다.  좋은 선택이다. 이제 배워 언제 선수가 되랴만은 열심히 운동하면 신체건강에 도움이되고 재미도 되고 일거량득이 아닐수 없다. 
116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도 댓글:  조회:978  추천:0  2020-01-03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도             연변은 아름다운 곳이다.  고속렬차를 타고 훈춘에 가면서 차창밖의 가을풍경을 바라 보노라면  경치가 마치 한폭한폭의 수채화같이 아름답다.  늦가을의 하늘은 공활하고 하얀 구름이 높이 떠 있는데 산비탈에는 소떼들이 무리지어 먹이를 찿고 있고 밭에는  옥수수를 거두어 들이는 농부들의 분망한 모습이 안겨 온다. 차창밖의 경치는 봄이면 꽃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록음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황금파도 설레이고 겨울이면 림해설원을 이룬다.  이 고속철로는 고객들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개혁개방의 봄바람을 타고 연변의 교통건설은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 왔다.  고속공로가 통하고 고속철로가 뚤리는 대장거를 이루어 내였다. 2015년9월20일은 연변교통력사상 대서특서해야할 중요한 날이다. 이날 연변은 고속철로가 없던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고속렬차가 개통하였다. 고속철로가 개통함으로 하여 연변은 명실공히 한시간 경제권을 이루었다. 지금 연길에서 고속렬차로 40분이면 훈춘 돈화에 도착할수 있다. 전에는 꿈에서도 생각못했던 일이다.         이제 가장 아릅다운 고속철도 연길-훈춘 구간을 달리며 자연경관을 구경하고 인문력사도 일아 보자.        연길-훈춘 고속철도의 가장큰 특점은 다리가 많고 텐널이 많은 것이다. 그만큼 철도가 강을 많이 건너고 산을  많이 통과한다는 말인데 텐널은  무려 20개나 된다. 지금은 진짜"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고 산을 만나면 굴을 뚫는" 시대가 되였다. 고철은 비용이 많이드는 항목인데 1킬로메터당 투자가 1억원 이상이 수요된다.          고속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연길서부는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오고 있다. 신축 고층 아빠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있는데 새로 분양하는 아빠트가격은 균가로 6000원이 넘는다. 지금 역전 맞은 편에 산산성(衫衫城)이라는 주택단지를 조성하고 있는데 연길에서 가장 큰 주택구역이라고 한다.         차가 연길역을 미끌어 나가자 브라하통하에 건설된 연천대교가 한눈에 안겨 온다. 미끈한 몸매를 자랑하는 연천다리는 금년 5월에 정식 개통되였는데 지금  고속철도역과 연길하남구역을 련결하는 교통중추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옆으로 보이는 하얀 건축군은 연길인민경기장 건축군이다. 자치주창립60주년 헌례건축군인데 그 모양새가 마치 별나라에서 날아온 비행접시같다.          고속렬차가 달리다가 잠간 다리를 지나게 된다.  마반산협곡을 지나가는 순간이다. 마반산은 연길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해발이 592메터로서 해발이517메터인 모아산보다 높다. 마반산은 연변고대장성의 동북쪽끝이기도 하다.  지금도 마반산에 오르면 옛봉화터가 그대로 보인다. 브라하통하와 해란강은 성자산부근에서 합쳐서 동으로 흘러가는데 제법물살이 세다. 마반산역전 앞부근에서 부터 강폭이 좁아 지면서 강물은 높은 골짜기사이로 거품치며 흘러 간다. 마반산협곡을 통과하는것이다. 정부에서는 이곳에 마반산발전소를 세웠다.          마반산협곡을 통과한 고속렬차는 동으로 달린다. 렬차는 훤하다 어둡다를 반복하는데 텐널을 통과하는 것이다. 고철스피카에서는 도문북역에 도착한다고 안내방송 한다.          도문을 과거에는 회막동이라고 불렀다. 도문시는 조선남양과 마주하고 있다. 도문의 일광산은 근년에 아름답게 꾸며지고 있는데 조각공원도 조성되였고 화해(花海)도 만들어져 있다.  여름 한철이면 화해구경을 오는 류람객들의  차량들로 종종 도로가 막힌다. 일광산에 위치한 이름난 화엄사(华严寺)에는 많은 선남신녀들이 찿아 오고 있다.  일광산정에 올라 서면 두만강 건너 남양이 환히 보인다.  2002년도 나는 어린 아들을  업고 일광산정에 등산한적이 있다.         도문역을 지나 얼마 지나면 량수가 나타난다. 량수에는 그 유명한 단교(断桥)가 있다.  2차세계대전이 거의 끝날 무렴 쏘련홍군의 지면부대의 추격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일본군은 당시 소좌녀특무 三司를 파견하여 온성다리를 폭파하게 하였다. 1945년8월12日새벽 三司은 온성다리 제5번 기둥에 폭파약을 안장하고 다리를 폭파시키였다. 온성다리는 통차하여서 부터 폭파하기까지 8년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2006년 도문시인민정부에서는 이곳을 도문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명명하였다.          근 40분을 달린 고속렬차는 종착역인 훈춘시구역에 들어 선다. 차창밖으로 3만개의 관중석을 가진  이쁜 조형의 훈춘인민경기장이 보인다.  훈춘시 절부에서는 시민들의 신체단련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경기장을 무료로 개방하였다. 개혁개방이래 훈춘의 도시건설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훈춘시와 훈춘합작구를 이어주는 훈춘산림대교와 훈춘대교가 건설되여 도시 교통대동맥을 이루고 있다. 훈춘대교는 2017년10월9일에 정식 개통되였는데 교량길이가617메터이고 주탑의 높이는 85메터다. 매번 저녁이되면 네온등으로 장식된 훈춘대교가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홍기하 강반에는 고층아빠트들이 즐비하게 들어 섰고 거리에는 훈춘을 찿은 로씨야유람객과 국내손님들이 많다.        고속철로의 개통은 사람들의 생활과 생산에 매우 큰 변화를 가져 왔다. 지금은 아침에 장춘을 떠나 오전에 도착하여  훈춘구경하고 정심에 양고기뀀을 맛보고 오후에 집으로 돌아 갈수 있는 여건이 현실화 되였다. 또 그렇게 하는 친구들이 많다.         외지에서 온 손님들은 한번은 고속철도 량켠의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고 두번째는  연변특색의 미식에 또 한번 감탄한다.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도의 이야기는  고속철도를 타고 인터넷을 타고 조국의 방방곡곡에 전파되고 있다.
115    황연농사 댓글:  조회:847  추천:0  2020-01-02
황 연 농 사         담배는 독초와 황연으로 나누는데 독초는 해빛에 말이고 황연은 건조실에서 말리 운다. 과거에 독초는 일반적으로  매개 가정을 단위로 생산 하나 황연농사는 집단적으로 하는것이 관례였다. 아마 그세월에 생산자료가 주로 생산대에 귀속되였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보편화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황연농사는 집단농사하던 그시절에  생산대로 말하면 부업에 맞먹는 것이였다. 우리 마을에는 기본상 논농사를 주로하였는데 밭에는 담배를 많이 심었다.   돈이 될만한 황연을 심는것이 수지가 맞는 일이였던것이다.          황연농사는 손이 많이 가는 일이였다.  이른 봄이 되면 우선 생산대에서는 유리온상 수선부터 하여야 한다. 온상이라 해야 일년에 한번 담배모를 심는데  끝히다 보니 방치 되여온 온상을 수라하는것도 큰 역사였다.  깨여진 유리도 바꾸어 넣어야하고  떨어져나간  벽은 다시 흙으로  발라주어야 한다. 열 손실을 막기 위하여 서는  여느 틈새나 모두 잘 막아 놓아야  하는데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보수 사항이다.         여러가지 보수가 끝나고 나면 온상에 부식토를 깔고 바닥을 수평 잡고 담배씨를 골고루 뿌리여 준다.  마감으로 위에 엷게 보드러운 흙으로 덮어 주고 물을 뿌린다. 한편으로 온상밖에 설치된 아궁이에다 불을 지펴 온상내부의 온도를 높혀 준다. 해볓의 열로만은 담배씨 발아에 필요한 에네지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뜻한 온상에서 담배는 싹이 트고 흙을 뚫고 잎사귀가 나온다.         당시 담배 온상은 생산대 마다 갖추어져 있었다. 황연농사는 기본상에 농촌부녀들이 몫이다. 밖에는 찬바람이 쌩쌩부는 초봄이지만 유리온상안의 온도는 30도를 밑돈다. 부녀들은 온상모판위에 널판자를 올려 놓고 그우에 쭈크리고 앉아서 참대 펜센트로 잡풀을 뽑아 낸다.          잎이 4잎정도 나오면 다시 영양단지에 옮기는데  담배묘는 모살이를 거치게 된다. 어느 정도 뿌리가 잡혔다 싶으면 담배묘는 유리 온상을 떠나  비닐 온상에 날라가야 한다.  그때는 봄이면 바람이 세게 불어치였다. 촌에서는 바람을 막으려고 수수대를 엮어 울타리를 세웠는데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였다. 해볓도 맞고 바람도 맞으면 묘는 건실하게 자란다.           5월말쯤이면 황연묘가 대전에 나간다. 7월 하순쯔음 부터는 담배잎을 수확한다. 담배밭에 가면 담배냄새가 코를 찌른다. 해볓이 쨍쨍 내리 비추는 한여름 담배잎 뜯기 로동은 그야말로 고역이다. 담재잎을 수레에 싣고 탈곡장마당에 운반해 오면 녀성들이 새끼끈으로 담배잎을 달대에  꼬아 맨다. 다음 건장한 남성들이 건조실에 들어가서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담배 달대를 걸쳐 놓는다.         담배대를 다 갈쳐 놓으면 건조실에 석탄불을 지펴 온도를 올린다.  건조실 화부는 기술업종에 든다.  불이 너무세면 담배를 태울수 있고 너무약하면 말리기 힘들다. 이래 저래 책임이 크다. 허나 일이 고되거나 힘든 것은 아니다. 휴식할수 있는 여유시간도 많다. 어떤사람들은 휴식시간을 리용하여 돌절구도 만들었다.        어릴때 우리는 강냉이며 감다를 훔쳐다 건조실에 와서 곧잘 구워 먹었다. 건조실은 한동네의 활동실 같은 장소였다. 저녁이면 마을 어른들이 건조실 마당에 모여 쑥불을 지펴 놓고 모기를 쫓으며 한담도 하고 동네 정보도 교환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텔례비조차 없던 그 세월에 무슨 문화생활이 있었냐 싶다.         황연이 다 마르면 이른 아침 사원들을 동원하여 담배 달대을 내리 운다. 바싹 마른 담배잎이 부서지는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달대를 내리우는 일은 반드시 해 뜨기전에 완성한다. 다음 말린 황연은 반지하로된 창고에 움직이여 습기를 준다. 다음 녀성들이 모여 앉아서 황연을 곱게 편 다음 왼손으로 꼭지쪽을 꽉 쥐고 오른손으로 동여 준다. 여러개 꼭지를 모아서 황연덩어리를 만든다. 어느정도 산품이 모이면 촌에서는 황연을 연초공사에 가져다 팔게 된다.          황연농사는 대단히 고된 로동이다. 이른봄 씨앗을 뿌려서 부터 묘가 대전에 나가기 까지 얼마나 많은 부녀들의 손길이 가는지 헤아릴바 없다. 황연 잎을 뜯고 달대에 걸고 말리고 조례하는 어느 한가지도 쉬운 것이 없다. 허나 그시절 황연 농사는 돈이 되는 일이였다.         어린 나이의 우리에게는 온상이며 건조실이며 반지하 창고 모두가 더 없이 좋은 놀이터자 전쟁터였다. 지금도 여느 촌마을을 지나다가 건조실을 만나면 더없는 친철감을 느낀다. 
114    집법기록의(记录仪) 댓글:  조회:820  추천:0  2020-01-02
집법기록의(记录仪)        요지음은 행정집법이 점점 규범화 되고 있다. 과거 향항 영화를 보면 경찰들이 집법기록의를 제복(制服)에 부착한 것을 볼수 있다. 법을 집행할때 경찰은 기록의를 피집행자한테 돌리고 무슨 연고에 의하여 어떤법을 집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피집행인에게 당신의 권리와 의무는 무엇이라고 알려 준다. 영화에서나 볼법하던 이런 일을 지금은 우리 주변서도 자주 목격 할 수 있다.          몇해전 여름날 저녁 나는  차를 운전하여 고속도로를 빠져나오게 되였다. 차가 출구를 나오는데 경찰이 다가 오더니 집법기록의를 나한테 돌리고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이였다. 그리고는 가사증과 기동차증을 제시하라고 했다. 기동차를  훝어 보더니 하는 말이 나의 차량에 또 다른 기동차증이 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없다고 나는 주장했다. 그러자 경찰이 어딘가 기동차증을 가지고 가는것이 였다.         이윽해서 돌아온 경찰이  나와 하는 말이 이것은 작페된 가사증이고 새것이 따로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음 부터는 새 기동차증을 소지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후에야 알게 되었는데 내가 소지했던 기동차증은 진짜로 작페된 것이 였다. 어느때인가 기동차 년검을 하게 되였는데 기동차증을 찿지 못하여 새것을 발급 받았던 것이다. 경찰이 나의 차를 세운 것은 내가 년검표식을 부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내가 이 사건을  말하는데는 원인이 있다. 법을 집행할때 집법자는 자기의 신분을 밝히여야 하고 현재 무슨 검사를 하고 있고 피집행자에게는 어떤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될수록 표준화된 언어와 행동을 취하여 자기의 집법에 따른 책임을 최대한 감소하여야 한다. 집법기록의는 피집법자의 언행을 기록하지만 집법자의 언행도 고스란히 기록하니 말 그대로 쌍인검(双刃剑)인것이다.        요지음 고속렬차를 타면서 보니 렬차장들도 기록의를 부착하고 있었다. 허나 그들에게 있어서 기록의는 단순한 기록의에 불과할뿐 집법기록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렬차장은 공무원이 아니고 집법인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무원의 요구에 근거하여 새해 각행정집법단위들에서 집법기록의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 세무계통에서도 새해부터는  규정된 몇가지 집법행위는 무조건 집법기록의를 사용하게 되여 있다. 이제 집법이 한층 더 규범화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일방적인 집법행위를  지금은 집법자와 피집법자의 모든 행위를 기록하고 있기때문이다. 법정에 나간다면 집법기록의가 기록한 내용이 그 어느쪽에 유리할지는 법관의 판단에 맡기여야 한다. 
113    춥다고 움츠러 들지 마라 댓글:  조회:892  추천:0  2020-01-02
춥다고 움츠러 들지 마라        진정 동장군이 왕림하였다. 오늘 낮 기온이 영하12이고  4~5급 바람이 불어 쳤다. 올해치고 제일 추운 날씨였다. 조금만 밖에 있어도 손발이 시리다.  전형적인 겨울 날씨임이 틀림없다. 며칠전에 병원에 갔댔는데 주사실에는 기침소리로 콜록거리는 환자가 가득하다. 날씨의 급격한 변화에 감기환자들이 급증한것같다.         허나 추운 날씨가 매냥 나쁜것만은 아니다. 추울때는 추워야 한다. 난동이라고 겨울날씨가 따뜻하면 그에 따른 피해가 속출하게 된다. 북빙양의 얼음이 녹아 내려 바다수면이 상승하면서 일부륙지가 바다에 잠긴다고 한다. 일본에서 온 친구가 말하는데 과거에는 찌바지역에는 태풍피해가 적었지만 지금은 늘어 난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가 불러온 변화라고 한다.        연길은 분지에 자리 잡은 도시다.  도시외각에는 농촌마을이 산재되여 있고 또 촌주민들은  난방용으로 대부분 석탄을 때고 있다. 그러니 겨울이 되면 매캐란 석탄연기로 도시가 시달리고 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아침 출근대에 모아산에서 연길시내를 바라 보면 도시는 자오록한 연기속에 잠겨 있다. 이런 화면을 바라 보노라면 마음이 서글프다. 연길은 바람이 불것을 요구한다. 찬 바람이 불어야 오염된 공기를 밀어 내고 사람들은 맑은 공기를 마실수 있고 도시가 활력으로 차넘칠수 있다.         동지날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겨울내 가장춥다는 39도에 들어 서게 된다. 혹독한 추위가 시작됨을 알리는것이다. 어제 장춘에서 고철을 타고 연길로 오는데 길림역에서 오르는 손님들 날씨가 춥다며 손을 마주 비빈다. 듣는 말에 의하면 혹한속에서 나무도 얼어 터진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추운 겨울을 즐기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등산운동이 그 가운데 한가지라 하겠다. 등산대원들은 아무리 추운 날씨라고 하여도 결근하지 않는다. 마치 휜눈이 뒤덮힌 산마루에 무슨 금은 보화나 있는 것처럼 등산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추운 날씨를 향수하는것이다. 산봉우리에 오르면 산정을 정복했다는 쾌감으로 피로가 가시여진다.           스키운동도 겨울을 즐기는 전향적인 방식이다. 나의 한친구는 길림 흑룡강등 지방의 스키장을 다 누비였다. 돈있는 사람들은 알프스산맥으로 스키 할려 다닌다고 한다. 진짜 멋쟁이들이다. 친구의 소개에 의하면 스키를 타고 산정에서 날아 내려 오는 그 속도감은 안 해본 사람은 영원히 느낄수 없다고 한다. 일망무제한 천연림 그가운데 넓게 틔인 스키코스는 마치 산정상에서 흰 명주천을 드라운것 같고 그위를 날아 내려오는 스키맨들은 마치 날아 내리는 제비 같다.         등산운동이나 스키운동은 산을 떠날수 없지만 빙상운동은 빙판만 있으면 얼마든지할수 있는 운동이다. 연길시에서는 근년에 브라하통하 빙판을  리용하여 빙상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아주 총명한 거사라고 본다. 이전에는 영빈교와 무지개다리사이의 빙판을 리용하여 빙상운동을 전개 하던 것이 일약 브라하통하 얼음강판을 리용하는 바람에 빙판의 면적이 대면적으로 증가되였다. 그만큼 코스도 길어 지였고 놀이터도 많이 늘어 났다.         요지음 정부부문에서는 빙설경제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우리 나라에서 동기올림픽주최권을 획득함에 따라 북방지구에서 빙상운동도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북방사람들이 겨울철 돈을 팔아 남방에 유람간다면 남방가람들은 기꺼히 돈지갑을 열어 북방에 와서 눈구경 얼음구경 빙설운동을 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그러니 정부에서 돈이 되는 빙설경제에 대하여 중시하지 않을수 없다.         춥다고 음츠러 뜨리면 점점 더 춥다. 춥더라도 집에서 뛰쳐 나와야 한다. 지금 방한복들은 엷고 따뜻하여 움직이는데 아무 불편이 없다. 밖에 나와야 신선한 공기를 마실수 있고 밖에 나와야 자연과 가까히 할수 있고 밖에 나와야 활기가 넘친다. 
112    북해찰기 댓글:  조회:1060  추천:1  2019-12-31
북 해 찰 기         12월초 출장길에 나는 광서쫭족자치구 북해시에 다녀오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북해는 광서에서도 최남단에 자리 잡고 있다.  대륙땅끝이 뢰주반도인데  북해는 뢰주반도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북해라고 하면 자연히 다단계 판매를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과거에 사람들의 머리속에 북해의 의미지가 밝지못했던것 같다.             북해는 광서자치구 14개 지구급도시중 한개 도시인데 인구는 200만명으로서 연변인구보다 좀 적은 편이고  면적은3337평방키로메터인데 연길과 도문시면적을 합한것과 비슷하다.  그러니 자연히 인구밀도가 연변에 비하여 높다.  관하에는 3개구 한개현이 있고  2018년 재정수입은225억원이라고라니 우리 연변의 4배가량된다.             북해는 1984년 국무원에서 발표한  14개개방도시 중의 하나다.  거리에 나가 보면 새아빠트들이 즐비하고 집을 파는 거간군들이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여 나온다.  몇마디 물어 보았다 하면 사람을 잡고 놓지 않는다.  동북의 로인들의 선택가운데 첫번째로 꼽는 곳이 해남도라고 하면 버금으로 가는 곳이 북해다.  북해는 집값은 해남도애 비하여 싸나 기후와 자연경물은 해남과 비슷하다.  하여 북해에 와서 집을 사는 동북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추운 겨울 따뜻한 북해에 와서 보내는 것도 좋은 일이다.              북해에서 가장 큰 자랑거리가 바로 은탄(银滩)이다.   은탄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바다 모래가 은백색을 띠고 또 부드럽다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는것이 습관된 나는  아침5시가 넘자 무작정 호텔을 나왔다.  북해는 아직도 컴컴한 밤이다.  일조가  우리 연변과 한시간 넘게 차이가 나는것 같다.  12월초 북해 낮 온도가 20도 좌우 밤 온도가 10좌우라고 하니 연변의 초여름 따스한 날씨를 련상시킨다.  나는 가로등 불빛을 따라 한시간 정도 보행운동을 하였다.  가로수로써  종려나무들을 많이 심은것 같았다.            아침 7시가되니 날이 희붐하게 밝아온다.  호텔부근으로 돌아 오는데 무슨 풍경구 같은 시공현장이 보였다.  관리하는 사람도 없길래 일단은 공사현장을 꿰뚫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불씨로 앞이 훤하게 트인다.  바다가로 나왔던것이다.  나는 잰걸음으로 나무숲을 지나 백사장에 들어섰다.           바다가는 너무도 황홀한 모습이였다.  아득히 뻗은 바다가에 은백색의 백사장이 펄쳐져 있었다.  멀리에는 철썩이는 바다가를 조용히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정박한 물고기잡이 어선들위의 빨간 등불도 보인다.  발밑에는 부드러운 촉감을 주는 흰색의 모래불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앉아서 한웅큼 잡아 보니 흰모래는 마치 곱게 가루낸 쌀가루같이 어여쁘다.  세상에 나는 흰 모래를 처음으로 접해 본다.             이윽고 동녘 바다가에서 해가 불끈 솟아오른다.  동쪽을 바라보니 하늘은 온통 붉은색이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일출은 너무도 황홀하였다.  돌아서서 서쪽을 바라보니 방금까지도 너울로 얼굴을 가린 신부같이 아리송하게 보이던 백사장이  언제 그랬냐 싶게 더욱 가깝게 더 환하게 안겨 온다.  해볓을 받은 은탄이 너무도 환상적이다.          은탄은 마치 처녀의 주릅잡힌 치마자락같이 부드럽고 눈부시다.  가히 범접못할 깨끗함과 아름다움을 겸비하였고 사람들로 하여금 무한한 추구와 련상에 사로잡히게 한다.  허나 정작 마주하면  너무도 부드럽고 너무도 대범하다.  천만년의 파도의 세례를 받은 은탄은 두팔을 벌려 세상 방방곡곡의 손님을 반긴다.  그이름도 만천하에 날리여 "천하제일탄"이란 미명을 가지고 있다.           북해의 또하나의 자랑거리는 금해만 홍수림(红树林)이라는 풍경구다.  총서기가 다녀간후로 홍수림을 찿는 유람객들이 더욱 많아지였다고 한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어느날 늦은 오후나는 홍수림을 찿았다.  국가급산구(山口)홍수림생태자연보호구는1991년10월에 국무원으로부터 첫번째국가5대해양자연보호구가운데 하나로 평정 받았다고 한다.  홍수림풍경구는 은탄풍경구과 련결되여 있는데 시내와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홍수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나무가 붉은가하고 생각할테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잎도 푸르고 줄기도 푸르다.  홍수림은 열대 아열대해안조간대(潮间带)의 특유한 태생(胎生)목본식물군락으로서 "해상산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밀물이 들어 오면 잠기고 썰물이 지면 모습을 나타내는데 해수를 정화하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           금해만 홍수림풍경구는 방파제를 따라 건설한 공로를 위주로하여 홍수림안쪽의 잔도를 따라 구경하는 시스템이였다.  잔도를 따라가며 뻘을 내려다보니 얼기설기뒤엉킨 나무들이 진흙속에 뿌리를 내리였다.  썰물이 진때라 바다물은 저 멀리로 빠져나가고 나무뿌리사이로 새끼게며 이름모를 해양동물들이 기여 다니는것을 볼수 있다.  혹간 내가 알아보는 조개 새끼낚지도 보인다.  이홍수림에만 해도 12종의 식물과 백여종의 조류 곤충 조개가 서식한다고 한다.  자연보호구를 설치하였기에 여러가지 식물과 해양동물들을 보호할수 있었다.           잔도를 따라 걸어가며 홍수림을 바라보노라니 저멀리 뻘에서 조개 줏는 어민녀인들 모습이 보인다.  그녀들은 모여서 작업하는데 참대로 결은 모자를 쓰고  꽃다지 천으로 지은 이쁜옷을 입고 있었다.  가까이에온 어민들을 살펴보니 모두 옆구리에 그물망태기를 차고 있었는데 수확한 어물들로 가득했다.  물어보니 작은 조개는 한근에 5원이고 큰것은 10원이라 한다.            한참 걸어가노라니 석양이 물든다.  서쪽하늘은 점점 붉게 물들고 진종일 대지를 밝혀주던 태양이 서서히 바다속으로 들어 간다.  그때  바다도 붉어지고 홍수림도 붉어진다.  하루의 일과가 끝날무렴 때아닌 회오라기 몇마리가 홍수림에서 날아 오른다.  바다와 홍수림과 일몰이 조화되여 아름다운 한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키였다.           북해는 아름다운곳이다.  은탄도 있고 홍수림도 있는 아름다운 유람도시다.  아직까지 어민들의 소박한 인품이 보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또한 도약을 꿈꾸는 도시다. 
111    중경샤브샤브 댓글:  조회:932  추천:0  2019-12-30
중경샤브샤브         오전에  시내에 나왔는데  돌아 갈때는 이미 정심때가 되였다. 나는 안해보고 정심이나 먹고 집에 가자고 제의하였다.  안해도 그러자고 하여 우리는 미식거리를 찿았다. 뭘 먹을가 하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는데 중경샤브샤브 라는 간판이 눈에 띄였다. 오래 동안 매운음식을 안 먹었더니 매운맛이 당기는 같았다.        문을 밀고 들어가 보니  아주 정갈하게 꾸며진 식당이였다. 이른 정심인데도 벌써 사람들이 북쩍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창문옆 테불을 자리하고 앉았다. 주인이 나와서 뭘 드시겠는가고 묻는다. 이집은 여러가지 식자재를 그릇에 담아 손님이 자기로 가져다 먹게 된 시스템이였다.         국은 전자렌지로 끓이고  있었다. 우리는 원앙가마를 요구하고 매운것과 안 매운 두가지를 자유롭게 선택 할 수있게 하였다. 일단 양고기는 매운 국가마에  야채는 안 매운국가마에 넣었다. 이윽고 매운 붉은 가마가 먼저 끓었다. 그것은 국에 기름이 많기 때문이다. 긴 참대 젓가락으로 양고기를 집어 내여 후후 불어 가며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에 넣었다.         와___아. 맵다. 그리고는  후_후 하며 들이 숨을 연거퍼 쉰다. 그것은  후죠(胡椒)의 매운맛 때문이다. 고추의 매운맛과 후죠의 얼얼한 맛이 번갈아 힘을 발산하는것 같았다. 입만 매운것이 아니라 온몸이 열기를 발산하는것 같았다. 너무 매워서 나는 차물을 마시였다. 하지만 또 붉은 탕에 젓가락이 간다. 이것이 바로 중경샤브샤브의 매력일것이다. 후_후하며 고기며 야채며 건두부며를 먹었다. 이마에서는 저도 몰래 땀이 줄줄 흘러 내린다.         사천료리의 특점이라면 마라(麻辣)를 손 꼽을수 있다. 중국서남지방에는 "무섭지 않은 것이 매운것이도다. 매운것이 무섭지않도다. 맵지 않을가 무섭도다. "(不怕啦,辣不怕,怕不辣)라는 말이 있다. 뜻인즉 사천 귀주 호남사람들이 매운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즐겨 먹는다는 말이다. 듣는 말에 의하면 하룡원수님께서 "사천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은 것이 매운것이고 귀주 사람들은 매운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호남사람들은 맵지 않을가 무서워 한다"고 했다 한다. 우리 조선사람들도 매운것을 즐기지만 우리의 매운맛과 사천의 마라맛은 틀린다. 우리는 고추의 매운맛과 고소한 맛을 선호한다면 그네들은 매운맛과 얼얼한 후죠의 혼합된 맛을 즐긴다.         서남쪽사람들이 마라를 즐기는데는 원인이 있다고 한다. 서남쪽에는 비가 많이 오고 흐리는 날씨가 많다. 특히 겨울이 되면 온난 설비가 갖추어 지지 않은 그 동네의 날씨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냉기를 느끼게 한다. 습기와 냉기를 머금은 몸뚱아리는 어서 빨리 몸속의 습기와 랭기를 몰아 낼 것을  제의 한다. 그  해결 방법중에 가장 경제적이고 간단한 방법이 바로 마라음식을 섭취하는것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마라탕은 명말청초 중경시 가릉강반 조천문(朝天门)등 부두 품팔이군들의 음식이였다고 한다. 그때 들어간 주요 식자재들로는 소채갑 소피 동물의 내장이고 가마는 큰 소래로 대처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20~30년대에 대거 류행하였고 30년대에는 고급식당에서도 중경샤브샤브를 경영하였다고 한다.          연길에서 중경샤브샤브가 소문낸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아니다. 사천샤브샤브의 독특한 매운맛과 중독성이 강한 향신료맛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도 몰래 다시 발길을 돌리게 하는 마력이 있다. 연길식객들도 례외가 아니다. 중경샤브샤브가 연길에 들어 오자 대뜸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처음으로 연길에 들어 올 때가 아마 1994년 좌우라고 생각된다. 그때 중경샤브샤브집 위치가 중앙소학교  근처라고 생각된다. 친구의 추천으로 몇번 먹어 보았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한주일에 한두번 다닐 정도였다. 당시 공부연(孔府宴)이라는 술이 흥행할때였는데 우리는 컵에 술을 반쯤 붓고 그위에 생계란을 까서 부어 넣었다. 그리고는" 동방에서 태양이 솟네"하며 한모금에 넘겨 버리였다. 그리고 그 얼벌한 양고기라던지 건두부를 건져 안주로 하였다. 그때는 아마 흰술이라야 말로 중경샤브샤브에 맞는다고 생각 했던 같았다. 아마 찰떡궁합쯔음으로 여기였다.          중경샤브샤브를 먹기 가장 적합한 시기는 바로 겨울철이다. 헌데 술소리가 나온김에 하는 이야기지만 겨울에는 특별히 술을 조심하여야 한다. 매운 중경샤브샤브에 소주를 겯들어 마시노라면 웬만해서는 그 자리에서는 취하지 않는다. 마치 술량이 늘어난 같은 느낌이 든다. 허나 막상 술상이 끝나고 밖에 나와 찬 바람을 맞으면 당금 취 할 때가 있다. 나도 그런 경험을 몇번 해본 적이 있다. 그러니 요지음 같이 추운 날씨에는 소주도 적당히 마시고 일찍 귀가하는것도 상책이다.          오래전에  한번은 서울에 가서 며칠 있게 되였다. 이런 저런 음식도 먹어 보았지만 별로 거뿐한 느낌이 없었다. 말말중에 나는 친구보고 "여기 마라탕집이 없냐"고 물었다. 헌데 대답은 너무도 충격적이 였다. 있을 뿐만 아니라 주인장은 진짜 사천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다. 하여 우리는 이국땅 대림동에서 중국 사천마라탕을 맛보게 되였다. 이국에서 맛보는 마라탕은 맛이 일품이 였다. 얼마전에 듣을 려니 지금 한국에서 마라탕이 인기가 있다고 한다. 전철부근의 마라탕 집들은 대박이 난다고 한다.      음식이란 이런것인가 보다. 맛있는 음식은 지방과 관계없이 국경과 관계없이 사람들이 즐겨 먹고 또 전파시키는가 보다.  
110    눈보라치는 아침 댓글:  조회:895  추천:0  2019-11-18
눈보라치는 아침        며칠전부터 일기예보에는 눈이 온다고 하였다. 온다 온다하더니 지난밤 큰 눈이 내리였다. 이른 아침 일어나 큰길을 내려다 보니  눈이 내려  거리는 더없이 환하게 보인다. 가로등 불빛이 차겁게 거리를 비춘다. 이른 때라 차량도 적다. 저 멀리 고속철역이 평소보다 더 가깝게 보인다. 대지는 어디라 할것없이 일매지게 힌눈으로  덮히였다.  주민구역내 작은 광장을 내려다 보니 은은한 불빛을 뿜는 상점집 등불과 밤새 내린 눈과 조화되여 마치 무대의 한 배경같이 보인다.         우리 동네는 강가에 있다 보니 바람 또한 세차다.  집안은 따뜻하건만 기승치는 바람소리 그리고 눈보라를 보노라면 완연한 겨울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제 아침 출근이 문제다. 이처럼 눈이 많이 내린 날에는 교통사고가 빈번하다. 초보들이 운전하고 나왔다가 손해보는 경우도 허다하다. 밖에서 눈치는 삽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띄염띄염 들려오기도 한다. 나도 일찍나가 동네 눈치기 로동에 참가하여야 겠다.               눈을 치려고  밖에 나와 보니 지난밤에 내린 큰 눈으로 대지는 온통 백설세계로 변하였다. 마치 하느님이 요술을 피워 하루밤사이에 대지를 동화세계로 이끌어 간듯 하다. 산도 들도 도시도 농촌도 모두 올해 첫눈의 세레를 받았다.  주민구역내 운동기구에도 한뼘 정도의 눈이 덮히여 있었다. 모든것이 눈속에 파뭇혀 있었다.  자가용차들이 늦은 속도로 꿈지럭 거린다.         동네 경비원과 청결원 몇명이 부지런히 눈을 치고 있었다. 첫눈은 마치 햇솜마냥 부드럽고 깨끗했다. 차가 지나지 않은곳의 눈은 치기도 쉽다. 허나 차가 지난면서 굳어진 눈치기는 힘들다. 비록 물업비용을 내고 있지만 시간날때 내려 와서 눈을 치우는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부지런히 일하다 보니 머리에서는 땀이 돋는다.       이런날에는 걸어서 출근하는것도 좋다. 공기는 엄청 차거우나고 깨끗해서 좋다. 가로수에 내린 눈은  너무 무거워 당금 나무가지가를 끊어버릴듯 하다. 거리에는 평소보다 보행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안전에도 도움 되고 또한 첫눈을 만끽한다는 점에서 일거 량득이 아닐수 없다.       올해는 눈이 늦게내린 셈이다. 11월 중순인데 첫눈이 내렸으니 이만하면 밭농군들에게도 채밭주인들에게도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준 셈이다. 농군들에게 있어서 절기는 철저히 지키야야라는 불문률이다. 씨앗을 넣을 때 넣어야 하고 거두어 드릴때 거두어야 한다. 몇년전에 폭설이 내린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 촌에서는 옥수수를 거두어 들이지 못한 상황이였었다. 정부에서는 기관공무원들을 동원하여 농민들을 도와 폭설의 피해를 줄일것을 동원하였다. 사람들은 눈이 무릎을 넘는  밭에 들어가 옥수수를 뜯어 내였다. 절기를 맞추어 거두어 들이였더면 훨씬 쉽게 할수 있는 일이였다.        이제 한달 남짓하면 올해도 막간다. 올해 제반 사업들은 어떻게 하였는지 총화해야 할 때도 되였다. 완수한 사업들은 총화를 잘  하여야하고 못 완수한 사업들은 하나하나 렬거하여 시간배치를 잘해야 한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그렇다고 미루기를 한다 던가 대충대충 얼렁뚱땅해서는 안된다.       년말이되면 각 부서마다 일손이 바빠진다. 그렇지만 행사는 행사대로 이루어져야 할것이다. 우리화고 365반급에서는 년말이면 송구영신 모임을 가진다. 단임선생님을 모시고 지나온 한해를 총화하고 다가 오는 한해를 기획한다. 동창들은 그날을 기약한다.       눈보라치는 아침 이제야 겨울이 온것 같다. 겨울은 겨울같은 날씨가 있어야 사람들건강에도 좋고 자연에도 좋다. 
109    총각김치 댓글:  조회:845  추천:1  2019-11-06
  총각김치            총각이란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남자를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연변에 총각이란 이름을 붙인 김치가 나왔다. 국어사전을 찿아 보니 굵기가 손가락만 한 또는 그보다 조금 큰 어린 무를 무청째로 여러 가지 양념을 하여 버무려 담근 김치를 총각김치라 한다.        배추김치는 처녀김치 무우김치는 총각김치라고 했다. 김치의 생김생김을 두고 하는 말하는것  같다.  총각(總角)이란과거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남자를 가르키였다.  총각은 머리를 묶고 상투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총각김치는 흰무의 무청을 따지 않고 무우와 같이 절구는데 밥상에 올릴때 무청을 돌돌 말아서 접시에 담는다. 그러니  머리를 묶은 총각처럼 생기였다고 얻은 이름이 아닐까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배추김치는 왜서 처녀김치라 할가?그 건 암만 생각해도 알바 없다.       가을 총각무는 9월초순에 심어도 먹을수 있다.  일반적으로   50일좌우면 수확할수 있다.   금년에는 오이와 도마도 넝쿨을 걷우어 내고 그 자리에 총각무를 심었다. 물도 주고 비료도 주었더니 총각무농사가  잘되였다.  야들야들한 파란 잎사귀 그밑에 숨어 있는 백옥같이 희고 고운 총각무 보기만 해도 자기농사에 대해 만점을 주지 않을수 없다.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리였다. 나도 이만하면 로농수준이다.     우리는 우선 무를 뽑아 지하수에 씻었다. 시들고 마른 잎은 뜯어 버리고 몸통이에 묻은 흙은 솔로 닦아 버리였다. 그뒤 여러면 휭구고 나니 총각무우가 한결 희고 푸르러 보인다. 한3분의 1가량밭의 무를 뽑았는데도 두식구가 먹기에는 충분한 량이였다. 나머지는 형님네 몫이다. 소금물을 비닐통에 부어 넣고 또 총각무우를 가득 채워넣었다. 이로써 초절이가 끝난 셈이다.       우리집에서는  매번 먹을 때마다 조금씩 꺼내여 양념장에 버무려 먹는다. 지뻘건 고추양념을 바른 총각김치는 쨍하기도 하고 사각사각하기도 하고 얼벌하기도 하여 밥 도둑이나 다름 없다. 자꾸 젓가락이 가게 된다. 총각김치는 외모상에서 무와 무청이 붙어 있는 상태라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다. 한꺼번에 무맛과 무청맛을 다 볼수 있는 김치다. 몸뚱이는 희고 머리발은 푸르다. 좀큰 무우는 반이나 네등분으로 쪼개여 담구면 먹기가 쉽다. 하지만 그것도 양념을 버무릴때 하는 일이지 너무일찍 무우에 칼을 대면 무맛이 변하게 된다.     한국 총각김치 양념에는 여러가지 재료가 많이 들어 간다. 우리도 그것을 많이 배워 오고 있다. 고추가루 생강 소금은 물론이고 무슨 멸치젓 찹쌀풀 물엿 매실 쪽파등도 들어 간다고  한다. 그러니 맛이있을수 밖에 없다.             지금은 무가 철모르기나 다름없다. 봄부터 가을 까지 내내 싱싱하고 질 좋은 무를 수확할수 있다. 그러니 총각김치도 사철 먹을수 있는 김치로 되였다. 로인님들 말에 따르면 날씨가 따스한 경상북도에서는 김치움이라는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늘진쪽에 땅을 한삽정도로 파고 김치독을 앉히면 끝이라 한다. 땅의 기운을 받으니 자연히 시원할것이요 날이 따스하니 발효가 잘 된다고 봐야 할것이다. 어떤집에서는 서까래나 옥수수대로 움막 같은 것을 설치하고 그아래에 김치독을 앉히기도 한다고 했다.    총각김치는 배추김치와 달리 많이 하지 않는다. 배추김치는 복아 먹어도 되고 국을 해도 되고 밴새속을 해도 되지만 총각김치는 시굴면 맛이 간다. 하기에 총각김치는 적게 담구어 제때제때에 먹는 것이 좋다. 
108    배추김치 댓글:  조회:886  추천:0  2019-11-05
      배추김치         촌에서는 이맘 때면 배추김치를 담구 었다. 너무 일찍이 담구면 쉽게 시굴어 질수 있고 너무 늦어 지면 가을 한철 먹거리가 적어 진다. 매개 가정마다 김치를 담구는 시간은 좀씩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촌에서 탈곡철이라고 보면 된다.       지금은 따로 배추김치 탈곡철이 없다. 왜냐하면 수확기로 가을과 탈곡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인력으로 가을하고 묶고 하지고 운반하고 동네에서 탈곡마당을 공구고 탈곡하던것을 지금은 수확기가 한번에 끝내여 버린다.     그러니 탈곡철이란 말도 없어 질수 밖에 없다. 눈이 내리지 않고 큰 바람이 불어 치지 않는다면 수확이 조금 늦어도 별로다. 기계로 가을하면 바로 벼긁을 별수가 없기 때문에 벼집단을 얻을 수도 없다.      배추김치를 담구는 절차는 대체적으로 세개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번째로 질 좋은 배추를 마련하여 해볓에 쪼여 시들게 한다. 그래야 배추가 상하지 않는다. 전에는 조선족마을에서 채소농사 하는 사람들이 적었다. 마을에서 심기도 하였으나 포전관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등 페단으로 질좋은 배추를 얻기 힘 들었다. 한족채대에서 심은 통배추는 포기를 쪼개면 노란 속잎이 나오는데 사각사각 하고 맛이 달았다.   배추농사에서 관건은 시비와 물주기 작업이다. 제때에 물을 주지 않으면 배추 잎이 질기고 속이 탄탄하게 앉지 못한다. 식구가 많은 집에서는 보통 1000근 정도의 배추를 마련하게 되는데 겨울철 채소가 부족하던 그 세월에 배추김치는 주요 채소 래원이였다.     낮에는 배추를 해빛에 쪼여 어느 정도 수분을 빼여 버린다.  저녁이 되면 배추뿌리은 밖으로 잎은 안으로하고 둥그렇게 쌓아 올린다. 마지막으로 헌 이불 같은것으로 위를 덮어 주어야 하는데 주요하게 얼굼을 방지하기 위하여 서였다. 이런 작업을 열흘정도 거친다. 한해 겨울 먹을 김치를 할 배추이기 때문에 모든 사항을 허투로 대할수 없다.         두번째 순서로는 초절이다. 지난해에 사용했던 김치독들을 김치움에서  꺼내여 잘 씼는다. 김치란것은 발효음식이기 때문에 김치독을 잘 씼지 않으면 독에 붙어 있던 효소균이 번식되여 새김치에 곰탈이 나게 할수 있다.  맑은 물로 여러번 깨끗하게 휭구어야 한다.  마감으로 벼짚에 불을 붙여 독안에 여러번 돌려 준다. 불로 균을 잡는 절차인데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금물을 독에 붓고 배추를 한포기 한포기씩 곱게 독에 넣는다.  꽁꽁다져 넣은후 돌로 위를 눌러준다.  이때 배추는 반드시 소금물에 잠기여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배추가 공기와 접촉하면 변하기 때문이다.       마감으로 덮개를  잘 덮어 주고 돌로 눌러 준다. 그것은 주요하게 바람에 덮개가 날려 다거나 짐승들이 법근하여 덮개를 번져 놓은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서다.           때를 맞추어 농촌에서는 김치양념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 간다. 고추가루 마늘 생강은 필수다. 집체농사를 하던 시절에는 촌에 회의가 많았다. 낮에는 밭에 나가 일하고 저녁이면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대체적으로 상급회의정신 전달이거나 계급투쟁에 관한 학습과 토론이다.       이때면 녀성들은 마늘을 소버치에 답고 회의에 참가하기 일쑤다. 남성들은 웃방 쪽에 모여 앉고 녀성들은 정주칸 가마목쪽을 차지하게 된다. 대장는 회의를 소집하는데 집중하고 남자들은 초담배를 피우는데 집안에 연기가 자옥하다. 녀성들은 소버치에 담아온 마늘을 까기에 여념없다. 지금 시장에서 파는 마늘은 쪽이 크고 까기도 쉽지만 전에는 토종마늘이라 쪽이 작고 껍질이 엷어 까기가 힘들다. 총명한 사람들은 마늘을 부수고 물을 뿜어 수분을 주는데 그러면 상대적으로 마늘 까기가 쉬워진다. 허나  껍질이 연한 붉은 색을 띠는 토종마늘은 즙이 많고 맛이 월등하다. 회의가 끝날 역이면 마늘 까기 작업도 완성되여 간다.       다음은 순서는 깐 마늘과 정선한 생강 굵은 소금과 고추가루를 머리에 이고 방아간에 간다. 어려서 외할머니와 어머니같이 쌀가루 내려 방아간에 자주 갔었는데 김치양념 할 때도 예외가 아니였다. 먼저 마늘과 소금을 두르고 방아질하다가  거기에 고추가루를 넣는다. 그래야 마른 고추가 날리지 않는다. 쿵덕쿵덕 내가 방아를 딛으면 어머니는 밥주걱으로 뱁싸게 양념을 뒤번져 놓는다. 마늘 양념장을 곱게 찧으려면 골고루 자주 번져 주어야 한다. 아니면 통마늘이 나오거나 고추가루와 마늘이 잘 섞여 지지 않는다. 한해 배추 김치를 담구려면 양념장만해도  여러 소랭이를 준비하여야 한다.      세번째 단계가 바로 김치를 담구는 날인데 제일 중요한 작업이다. 우리집에서는 통상적으로 버치를 리용하였다. 먼저 초절이한 배추포기를 맑은 물에 휭구어 준다. 소금물이 다 빠지도록 여러번 씻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김치가 너무 짭게 되여 맛이 없다.  다 씻은 통배추를 한포기씩 버치에 올려 놓고 물을 찌운다. 다음  배추속으로 부터 바깥으로 한잎한잎 번져 가며 손으로  양념장을 골고루 발라 준다.       배추김치를 담군다기도 하고 번진다고도 한다. 아마 한잎씩 번져가며 양념을 바른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배추김치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하여 동네에서 녀성들이 도우려 오기도 한다. 대게 손바꿈이라고 보면 된다.  남정들도 할일이 많다.  물을 날라 주어야 하고 완성된 김치를 움에 운반하고 독에 넣어야 한다. 어떤 집들에서는 무우를  손바닥 만큼씩 넓쩍넓쩍 썰어서 김치독맨 밑에 넣는데 그것도 별미다.       촌에서 배추김치를 담구는 날은 큰행사날과 다름 없다. 왜서 글 첫머리에 탈곡철에 김치를 담군다고 했냐하면  그때가 배추김치를 담구는 가장 적합한 기온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갓완성된 배추김치를 소랭이에 듬뿍 담아 탈곡장에 내온다. 그러면 탈곡에 지친 녀성들이 둥그렇게 모여서서 빨간 양념이 가득 발린 배추김치를 손으로 쭉쭉 찟어 입에 넣는다. 마늘의 톡쏘는 맛과 생강의 당기는 향 달짝비근한 고추가루와  짭잘한 알소금의 맛이 조화되여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은 후후하면서도 입가에 고추양념을 바르면서도 손은 저도 몰래 김치소랭이에 간다. 배추김치를 탈곡장에 내 오는데는 또한 자기의 배추김치솜씨를 자랑하려는 뜻도 은근슬쩍 비쳐져 있다.     우리 민족은 김치를 떠날수 없다. 장춘에서 대학공부할때 우리 학교 담장밖에 배추밭이 있었다. 저녁이면 몰래 담장을 넘어 우리는 배추를 훔쳐 오기도 하였다. 서툰솜씨로 세수소랭이에 담군 초절이도 아니한 막김치였건맛 별맛이였다. 우리 침실 한족친구들도 먹어 보고는 맛있다고 야단이다. 자기들이 배추를 구해올테니  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촌에서 먹거리가 귀하던 그시절 배추김치는 절반 량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온동삼 김치가 밥상을 떠날 때가 없었다. 시래기국에 밥 한그릇  그리고 밑둥이를 썩둑 자른 배추김치 한포기 이것이 전부의 밥상이였다. 우리는 그것을 먹고 자랐고 힘을 키웠다.      한번은 서울의 어느해장국집에서 밥을 먹게 되였다. 뼈국한사발과 공기밥이 나오는데 김치는 자기절로 떠먹느라고 하였다. 부엌옆에 김장독이 있었는데 벽에는 "먹을 만큼 담고 랑비을 하지 맙시다. 김치는 우리의 자존심입니다"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글을 보면서 나는 뭔가 뭉클 해오는 감이 들었다. 김치는 우리의 자존심이다. 그렇다. 김치는 비록 산해진미가 아니지만 비록 값비싼 재료로 만든 음식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특수한 감정이 있다. 우리민족은 김치에 밥을 먹고 일하고 자식을 키우고 공부시키였다. 비록 초졸한 밥상이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먹고 자랐다. 김치는 단지 먹거리라는 범주를 떠나 고생 많던 과거에 대한 회억과 옹기종기 아이들이 모여 앉아 밥먹던 그시절을 환기시키는 매개물이 되였다. 우리는 우리 것을 아끼고 지키여야 한다. 우리가 김치를 가득 담아 내오고 먹지 않고 버린다면 남들도 우리 음식을 귀중하게 여기여 주지 않는다. 김치는 우리의 자존심이다.    김치움에서 방금 내온 시원한 배추김치 허연 밑둥이를 썩둑 자른 배추김치 생각만해도 슬슬 군침이 돈다. 
107    사랑이 뭐길래 댓글:  조회:1101  추천:1  2019-10-21
사랑이 뭐길래          요지음 퇴직하였거나 퇴직을 앞둔 부모들에게는 새로운 일거리가 생기였다. 바로 손자손녀 보는 일이다.결혼한 자식들이 바쁘다고 아우성치는데 모르는체 할수도 없다.        60 년대 출생한 부모들은 위로는 부모님한테 효성했지만 자식들 한테 소외당한 세대들이다.  부모님들 모시랴 자식키울랴 출근할랴 눈코뜰새 없이 보내다가 이제 좀 숨돌릴까 하니 또 일거리가 생긴것이다.  이전에는  아이를 자기가 낳고 자기로 양육하였다면 지금은 낳는것과 양육하는것이 점차 분리되는 시대를 맞이하는 같다. 그리고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애를 낳고도 무슨 누구를 위하여 큰  일을 해놓은것처럼 으시대기가 일쑤다.         과거에 마나님들이 애를 낳기만 하고 영아양육은 어멈들이나 아환들이 하더니만 지금 젊은축들은 자기 아이를 의레 부모님들이 돌봐 주려니 한다. 돈 있는 집은 괜찮으나 경제상황이 넉넉하지 못한 집들에서는 꼼짝 못하고 불려 간다.  이렇게 하는데는 자식이 대학생이건 연구생이건 박사생이건 별로 상관 없다.  하나같이 부모를 시켜먹으려 하고 있다.     부모가 아이를 볼경우 경제적으로 절약 되고 질적으로 담보 받게 되고 게다가 집안일까지 해줄수  있는 일거 삼득의 우점이 있으니 말이다. 자식들이 그러한 심리상태를 가지게 된데는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다.      부모들도 자식들의 곤난을 알고 남음이 있다.  손자 손녀와 가까하 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한도시에서 생활한다면  어느정도 보모노릇 해봐야 별로 관계 없다. 허나 대도시라든지 외국에 가서 생활하는 자식들의 뒤바라지 할 경우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손자손녀가  영아일때는 어쩌랴 싶어 보아 주었더니 유치원 가도 봐 달라고 한다. 자기들이 출퇴근 할려니 시간이 없으니  애들을 유치원에 보내주고 데려 오라고 한다. 참고 참아서 학교가기전까지 돌봐주었더니 소학교 저급학년까지만  더 봐달라고 한다. 원래 대도시나 외국에는 집값이 하도 비싸다 보니 방면적이 보편적으로 작다. 연길집들은 웬만하면 백평방이 남는다. 작은 집에서 여러명이 생활하다 보면 불편하기로 말이 아니다. 하여 남편들은 다시 집에와 홀로 생활하는 편이 적지 않다. 직장에서 존중 받고 사회에서 나노라 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 리산가족으로 전략되고만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보모역을 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수 있다. 어떤 분들은 북경 상해같은 대도시에 달려 가서 어떤 분들은 한국 일본 미국에 가서 까지도 자식들  보모노릇을 한다.        북경에 사는  친구가 말했다. "아빠트 소구역에 가보면 외지에서 온 부모님들이 가득혀. 말씨를 들어보면 전국 각지 다 있어요. 하나 같이 손자손녀 보모역 할려 왔지"   미국에간 친구가 말했다. "영어를 모르는 대륙에서 간 부모들끼리 모여서 한담하고 그래요. 시간 맞추어 유치원 뻐스를 마중하고. 말이 안통하니 답답하지"       누가 부모님한테 제일 효도하냐고 조사해보았는데 배운것이 많을 수록 효도하지 않았고 적게 배운 자식이 더 효도한것으로 나타 났다. 이런 현상이 절대적인것은 아니지만 그 배후에 현실적인 문제도 내포되여 있다. 공부를 잘하여 북경 상해등 대도시에서 대학공부를 하고 외국에가서 연구생 공부를 하고 타향에서 사업하고 생활하게 되였다면 언제 효도할수 있겠는가.      효도란것이 무슨 절대적으로 경제적으로 돕는다는것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보다도 더 나가서 생활상에 보살펴 드리고 정신적으로 기탁이 되여주고 심지어 아침저녁으로 인사드리고 말동무 하여 주는것도 효도다. 지금 세상에 효도란 물질적인것을 넘어 정신적인 안위와 보살핌이라 하겠다. 아플때 찿아 뵙고 병원에 모셔가고 답답 할때 안위해주고 이런것이 아니겠는가.        얼마전에 위챗에 오른 어떤 부모가 쓴 글을 보게 되였다. 부모가 결혼을 앞둔 자식 보고 물었단다.  너희가 결혼하는데 어떻게 치루었으면 좋겠느냐고 . 하니 아들이 하는 이야기가 기왕이면 잘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한다. 그래서 일생의 적금을 다털어 결혼을 시켜주었다. 나이를 먹고 아프고 하니 자식한테 말했다 한다. 나도 아프고 하니  병원도 가야 하고 약도 먹어야 한다고. 그랬더니 자식하는 말이 왜서 젊어서 보험에도 들고 그러지 않았냐고 반문하더란다.         이글을 보고 나는 깊은 사색에 잠기였다. 교육의 실패를 실감하는 시각이였다. 나는 이 이야기를 안해에게도 아들에게도 하였다. 아들애가 우리를 보면서 시원하게 말했다.   "근심 말아요. 내가 모실게요" 말로라도 감사한 일이였다.       자식 자리우는것이 무슨 효도를 받기 위한것은 아니다. 헌데 요지음 젊은이들이 부모님한테도 너무나도 리기적이다. 어떤 젊은 부부는 자기애를 부모집에 보내고 자기들끼리는 전자유희놀려 간다고 했다. 한심한건지 아니면 철이 못 든건지모를 일이다. 모든것을 자기중심으로 하다보면 부모님한테도 잘 할수 없다.       그리고 해외에 나가 직장을 구한 친구들도 피차일반이다. 국내에서 하던것과 똑같이 한다.     어느대학에서  부모님들의 희망수명에 대하여 설문조사한바가 있다. 헌데 생각외로 부모님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교육경비도 엄청 많이 써가면서 공부시킨 자식들의 답이 너무도 빗 나갔다. 오래 앉기를 바라지 않은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였다.      사랑이 뭐길래. 내리 사랑이라고 하지만 할 말은 하여야 한다. 교육이 따라가지 못하면 아이들 하자고 하는 대로 방관하면 결국은 자식을 해치는것이다. 적당히 지적도 하고 거리도 두어야 한다. 
106    갑돌이와 갑순이 댓글:  조회:1316  추천:1  2019-10-18
갑돌이와 갑순이       «갑돌이와 갑순이» 이노래는 많은 청소년 남녀들이 불렀고 또 그들의 심금을 울리였다.  내가 처음 이노래를 접한 것은 70년대말 즈음으로 기억된다. «눈물젖은 두만강»,« 나그네 설음»,« 갑돌이와 갑순이» 등 노래가 불러지기 시작되던 시기였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더래요     그들 둘은 서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내가 이 노래에 인상 깊은 것은 친구판(朋友版) «갑돌이와 갑순이»사연과 관련된다. 친구는(아래서 부터는 갑돌이라고 부르자) 웃동네 살았고 그가 사모하던 녀자애(아래서 부터는 갑순이라고 부르자)는 아래 동네에서 살았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남자 녀자에 어섯눈이 뜰때 갑돌이는 갑순를 좋아 하기 시작하였다.  갑순이에게 무한한 호기심과 흥취를 가지였다. 그녀의 모든 것이  마음을 들었고 만나기만 해도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숨이 차지였다.       원래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학년이 아니였다. 갑순이는 초중2학년때 무슨 연고인지 웃학년에서 한학년 내려 앉았다. 그와 같이 여러명의 녀자애들이 내려 앉았는데 모두 웃기를 좋아 했다.       갑순이는 공부를 잘 하였다. 매번 기중시험 기말시험에서 일등을 하는데 많은 애들이 흠모하는 대상이였다. 지금 말로는 아마 粉丝라고 할가.  많은 애들이 갑순이를 따랐다. 교장선생님도 학기말이면 전교사생들 앞에서갑순이를 표창하였다.       갑돌이의 마음에는 갑순이 밖에 없었다. 갑순이만 보면 공연히 흥분해지고 또 뭔가 자기 재간을 보여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친구 갑돌이는 나와 한학년 한반급으로서 아주 친근한 사이였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남자애 녀자애 화제만은 제외였다. 갑돌이는 늘 갑순이가 상학하고 하학하는 길에서 서성거리였다.     재네는 어떻게 살까     재는 뭘 좋아 할까     재내 집에는 뭐가 있을까 정작 갑돌이는 갑순이를 만나면 할말을 잊는다.     "학교가니?"     "집을 가?"    그리고 혜식한 웃음만 짓는다. 갑순이도 묻는 말에 얼굴이 홍당무우되여 겨우 한마디로 답한다.      "응"      "그래"     허나 갑돌이를 대할때와는 달리 성격이 활달한 갑순이는 늘 자기또래들 과는  웃고 떠들며 학교로 다니였다. 매번 갑순이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갑돌이는 혼이 빠지는것 같다.        갑순이의 모든것에 알고 싶은 갑돌이는 궁리끝에 실전에 들어 갔다 . 우선 어려서 부터 한마을에서 자란 뒤집에사는 영옥에 대한 공략을 펼치였다. 왜냐하면 영옥이와 갑순이가 친하기 때문이다. 갑순이와 친하려면 영옥이를 건너 갈수 없다. 그러자 매번 영옥이와 어깨동무하고 다니던 갑순이는 갑돌에게 살풋이 웃음도 짓도  대화도 하였다.       갑돌이는 미칠뜻이 기쁘다. 오라 갑순이가 나를 좋아하는 구나. 그뒤로 부터는 갑순이와 더욱 가까워 지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하학시간이 되면 갑순이 앞에서  뽈도 차고 노래도 하였다. 사실 공부하나만 빼고는 갑돌이가 갑순에게 짝질게 하나도 없었다. 부리부리한눈 건장한 체구 발달한 사지 비록 아직 어린나이지만 자뭇 남자다운 멋이 보였다.       그러던 어느날 갑순이가 갑돌이를 찿았다. 시내 학교로 전학한다며 잘 있어라 공부 잘해라는 말을 하였다. 갑돌이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갑순이만 바라보다다 이윽고 말했다. "응 너도  잘가 . 놀려와"        할말은 많았지만  어리벙벙하여 뭘 말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뒤로 갑돌이도 시내학교로 전학하였다. 비록 같은 학교는 아니지만 그래도 두사람의 차이를 줄이려면 이것도 방법이였다.       갑돌이도 갑순이도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갑돌이는 학교를 나와 닥치는 대로 일하였다. 돈을 벌려고 건축판에도 심지어 우물 파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갑순이 뿐이였다. 돈을 벌어 기타도 샀는데 내가 보기에는 갑순의 마음을 끌기 위하여서였다. 나는 그때 학교를 다니였는데 갑돌이는 이미 사회청년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그뒤 갑순이는 한시기 앓았다고 했다. 대학입시도 포기하고 사회로 진출하였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갑돌이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어깨가 쳐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갑순이는 도시호구고 나는 농촌호구라는 열등감을 밀어 내칠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보면 아무일도 아닌것을 그때 당시에는 넘기 바쁜 산이 였음이 틀림없다.       시간이 날때마다 갑돌이는 갑순이네 집에 가서 일손을 도왔다. 그때 갑순이네는 새집을 짓고 있었다.  갑돌이는 더러운 일 무거운 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도와주었다. 갑순이 부모들도 갑돌이를 무척 반기였다. 때론 갑순이 아버지는 갑돌이와 술마시면서 자네같은 사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이야기 했다고도 한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사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그러나 겉으로는    안 그런척 했더래요       허나 갑돌이의 맘속에 자리잡은 렬등감이 그로하여금 용기를 내여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게 하였다. 두 청년남녀는 사이 좋은 친구사이로 보낼뿐 다른 동향이 전혀 없었다. 갑돌이의 사랑고백을 기다리다 지친 갑순이는 상대를 정하고 말았다.        뒤늦게 이사실을 알게된 갑돌이는 미칠것만 같았다. 비록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해 보았지만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지만 얼마나 사모하고 얼마나 좋아 했는데 네가 나를 제치고 다른 사람한테 마음을  주냐.  이런 분노감  허탈감이 뒤엉키여 그날 얼마나 많은 술을 마시였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뒤 갑순이는 시내 총각한테 시집 가고 갑돌이는 한마을에 사는 처녀와 결혼하였다. 갑순이가 결혼하던날 갑돌이가 울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렀다. 갑돌이도 5살이된 손자를 둔 할아버지가 되였고 갑순이도 7살짜리 외손자를 둔 할머니가 되였다.       매번 행사가 있을 때면 우리는 만난다. 한국에가서 일하는 갑돌이는 신체가 건강하다. 일전에도 행사가 있어 만났는데 친구가 갑돌이와 갑순이보고 우스깨한다.      " 이제라도 손 한번 잡아보라구"     그러자 갑돌이가 허허 웃으며 하는 말이    "아니야 나는 순결한걸 좋아 한다구"   이때  갑순이가 갑돌이 보며 말한다.   "갑돌이는 원래 이래"한다.       사람들은 이룬것에는 대수러워 하지 않지만 못 이룬것에 대해서는 집착하는가 보다. 갑돌이와 갑순이의 옛사랑 이야기는 언녕 끝났지만 소꿉친구들의 행사때마다  화제에 올린다. 갑순이가 말한다.    "너희들은 내말 안하면 할이야기도 없어?"      그러건 말건 친구들은 좋다고 야단이다. 
105    누나 사랑해 댓글:  조회:1223  추천:1  2019-10-16
누 나  사 랑 해        누나는 나보다 10살 이상인데 우리 형제중에 유일한 녀자다. 70년대 중반 20세 나이에 당원에 가입하였으니 열성이 얼마나 대단하였겠는가를  짐작할수 있다.  누나는 젊은 나이에 선전대공작인원으로  민흥촌에 파견되여 일년 단련받기도 하였다. 50년대 출생한 누나의 가장 큰 특점이라면 헌신정신이다.  남의 일도 자기일처럼 하고 친구들사이가 형제자매처럼 친근하다는 것이다.        누나는 70년대말 마지막 공농병대학생으로 중앙민족학원에 추천받는 영광을 가지였다. 이런 영광을 누나가 받을수 있은것은 부모님들의 엄격한 교육과 본인의 노력과 갈라 놓을 수 없다. 당시 소식을 접한 마을은 마치 큰 잔치를 치루는 기분이였다. 여느 보통학교도 아니고 조국의 수도 북경에 가서 공부할수 있는 기회란 당시 촌에서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였다. 당시 나에게는 중앙이라는 두글자가 그렇듯 거룩하고 자애롭게 안겨왔다.        그때 학생모집을 나온 선생님이 우리집을 방문하고 하루밤 머물게 되였다. 어머니는 집에서 할수있는 제일 좋은 음식을 대접하였다. 찰떡 순대 토닭 두부는 지금이나 그제날에나 우리 민족의 최고 음식이였다.  어머니로 말하면 수도 북경에서 그것도 중앙민족학원에서 딸을 초생하려고  왔다는것이 일생에서 제일 큰 영광이 아닐수 없었다. 그때 소학교를 다니던 나는 북경에서 온 선생님의 일거일동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토록 우아하고 멋져 보이였다.  선생님이 북경으로 돌아 갈때 많은 동네분들이 동구밖까지 나와서 바래주었다.        우리 집으로 말하면 누나가 제일 먼저 바깥세상과 접촉하였다. 누나는 매번 서신을 통하여 북경의 많은 재미나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조언해주었다. 누나는 나에게 무선전 안테나와 같은 존재였다. 안테나가 설치되였기에 바깥세상 소식이 끝임없이 집으로 전달되였고 나는 또 미래에 대하여 무한한 동경을 가지게 되였다.        누나가 나에 대한 사랑은 특별한 것이였다. 내가 화룡에서 대학입시 공부할때 아버지어머님이 돌아가시였다. 어쩌면 같은 해에 시간차이도 얼마 두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시였다. 그때 막바지 노력을 경주하는 동생을 위로하려고 누나는 맛나는 음식꾸러미를 들고 자주 숙사를  찿아 주었다. 물론 입시준비를 잘 하라는 무격려도 잊지 않았다. 나의 입학통지서를 받은 누나는 그토록 즐거워하였다. 장춘에서 대학 공부할때도 누나는 학교를 찿아 주었다. 그때만 해도 형제들이 학교를 찿아 오는 일이 매우 적었다. 우리는 같이 장춘위만주국황궁을 참관하고 정심도 먹었다. 그때 연길과 장춘사이에 장도뻐스가 통하였다. 내가 한번 타 보고 싶다고 하자 누나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일본 고모집 방문 갈 때도 우리는 같이 다녀 왔다. 도꾜 혹가이도를 구경하였고 고모님과 잊지못할 만남을 이루었다.         누나는 항상 앞서 나가는 나의 본보기 였다. 공작에서나 생활에서나 누나는 항상 락관적이였다. 지금도 나는 어떤일에 부딪치면 누나라면 어떻게 처리했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누나는 단위에서는 중견인물로 뛰였고 집에서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자식을 교육하였다. 딸애는 중국과학기술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연구생을 마치고 지금은 한국에서 사업한다. 누나는  퇴직후 서울과 북경을 오가며 딸애와 외손자를 봐주고 있다. 추석에 누나는 잠시 연길에 머물었다. 60대 중반이지만 허리도 꼿꼿하고 걸음도 가볍고 목소리 또한 또렷하다. 그래서 나는 기분이 좋다.        몇해전에 우리 아들애가 북경건대에 입학하였다. 당시 북경에 체류하던 누나와 매부는 자기 자식일처럼 기뻐하며 집적 학교를 발문하였다. 학교식당에가서 식사도 해보며 여기저기 상황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누나가 북경에 있으니 애걱정 아무것도 하지말라고 한다. 한번은 우리 애가 배탈을 만났는데 참을수 없이 고통스럽다고 전화가 왔다. 하여 고모한테 빨리 전화하라고 했다. 누나는 소식을 듣고 당금 학교에 달려가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가 보이였다. 고모가 근처에 있기에 우리애는 얼마나 편리한지 모른다.      누나네는 올해에야 새집에 들었다. 얼마나 바랐던 일인가!결혼하여 세집살이도 했고 비좁은 집에서 자식도 자리웠다. 생활에서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언제 한번 우리 앞에서 내색을 낸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새집들이 할때마다 자기일처럼 기뻐해주고 축하해주었다.         자기를 희생하고 동생들을 먼저 생각해주는 누나 이런 누나 형님들이 있었기에 내가 순조롭게 학업을 마칠수 있었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맡은바 과업을 완수할수 있게 되였다.   누나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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