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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거리미술가, 사회활동가 - 키스 해링
2017년 01월 30일 18시 15분  조회:21029  추천:0  작성자: 죽림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년 5월 4일 ~ 1990년 2월 16일)은 1980년대 뉴욕의 거리문화에 영향을 받은 미국의 미술가이자 사회 운동가였다. 그래피티 예술가로 잘 알려진 인물로서, 하위문화로 낙인찍힌 낙서화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조하였다. 간결한 선과 강렬한 원색,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표현으로 그의 이미지는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생애[편집]

 
바르셀로나에 있는 해링의 벽화.

키스 해링은 19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레딩(Reading)에서 태어나 쿠츠타운(Kutztown)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흥미를 가졌으며 1976년 피츠버그의 아이비전문예술학교에 입학하여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1978년 뉴욕으로 이사를 와 시각예술학교(School of Visual Art)에 입학하였다. 그는 뉴욕 거리의 벽면과 지하철 플랫폼에 그려져 있는 낙서 스타일의 그림을 보고 깊은 영감을 얻어 길거리, 지하철, 클럽 등의 벽을 캔버스로 삼기 시작했다. 그의 간결한 선과 생생한 원색,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기법들은 뉴욕 지하철의 분필 그림으로서 처음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되었고 1981년 토니 샤프라치(Tony Shafrazi)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해링은 이 전시를 계기로 스타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낙서화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조해낸 그의 그림은 뉴욕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 활동 중 마돈나(Madonna)와 앤디 워홀(Andy Warhol)과도 친분을 쌓았다.

1985년에 해링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보르도(Bordeaux) 현대 미술관에 작품 전시회를 열고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하였다.

1986년 해링은 소호(SoHo)에 팝 가게(Pop Shop)를 열고 자신의 예술품들을 티셔츠, 장난감, 포스터 등으로 상품화하여 팔기 시작하였다. 그는 상위 예술과 하위 예술의 장벽을 무너트리려 노력하였으며, 팝 가게의 개점과 함께 그의 작품들은 더욱 더 에이즈(AIDS) 인식, 코카인 전염병 등과 같은 사회-정치적인 주제들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1988년 해링은 에이즈 진단을 받았으며, 1989년에 키스 해링 재단을 설립하여 에이즈단체와 어린이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에이즈에 대한 경각성을 일깨우는 데에 힘썼다. 같은 해 6월에 피사 Sant'Antonio의 교회의 후면 벽에 마지막 작품인 토투몬도(Tuttomondo) 벽화를 그렸다. 1990년 2월 16일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작품 세계[편집]

해링은 다른 낙서화가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작품을 거리와 지하철에서 벗어나 티셔츠와 장난감, 공익광고와 포스터,벽화 등으로 제작하였고 상업화하였다. 그는 탄생과 죽음, 사랑, 전쟁과 평화 등의 우주관을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활동을 통해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표현하고 인종차별 반대, 에이즈 교육, 동성애자 인권운동 등의 사회문제를 다루었다. 상위예술과 하위예술간의 장벽을 무너뜨리려 노력한 그의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

주요 작품[편집]《무제 Untitled》(1982)
《앤디 마우스-뉴 코크 Andy Mouse-New coke》(1985)
《무지=공포 Ignorance=Fear》(1989)


낙서화에 담긴 묵직한 사회문제 


"나는 예술가로 태어났고, 따라서 예술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 책임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살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그림은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림은 마법처럼 존재한다."

뉴욕의 도심부 빈민가를 중심으로 낙서화, 즉 그래피티 아트가 하위문화로 널리 확산되고 있었다. 작가 키스 해링은 뉴욕의 거리와 지하철역 벽을 메우고 있는 낙서들을 본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낙서에 담긴 인간 본연의 표현 욕구와 일상 속 공간에서 일어나는 대중과의 교감을 눈치챈 것이다. 그는 도시의 길거리에 흰색 분필을 들고 나섰고, 그의 재치 있는 낙서는 경찰과의 쫓고 쫓기는 일련의 소동과 함께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키스 해링의 작품 시리즈 중 하나로 총 17점으로 이뤄진 '블루프린트 드로잉'은 1980년대 초 해링이 블루프린트 인쇄를 염두에 두고 그렸던 이미지들을 후에 실크스크린으로 완성한 것이다. 빛나는 아기, 날아가는 비행접시, 짖는 개 등 해링을 특징짓는 만화적 이미지로 표현된 이 작품은 언뜻 보기에 가벼워 보이지만, 그 속에는 다른 낙서화가들과 달리 인종차별 반대, 반핵운동, 동성애자 인권운동, 에이즈 교육 등 무거운 사회문제를 담고 있다. 

 
해링은 1990년 만 31세에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예술가로서 본인의 책임을 생각하면서도, 예술이 실제 삶에 더욱 가까워져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기를 바랐다.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해링은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1988년 에이즈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싶다던 그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류정화 


위대한 낙서 (The Great Graffiti)
세계적 그래피티 작가들의 뮤지엄 쇼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

굵은 검정색 선과 대담한 색그래피티에서 영감을 얻은 만화 같은 인물로 가득 찬 독창적인 양식 덕분에 그는 예술계와 일반 대중 모두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았죠

그리고 모르시는 분들도 많으실거라고 생각되는데, 키스 해링은 동성애자였답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커밍아웃을 하고 이 문제를 그의 작품주제 중 하나로 삼아 이를 형상화했죠.

작품이 상업화가 되면서 키스 해링은 많은 돈을 벌게 되었지만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는 어린이와 에이즈 환자를 위해 지원하려고 노력합니다.

그의 화풍은 가장 순수하고 긍정적인 인간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동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해링의 천진난만한 캐릭터가 관객을 유혹하죠. 
해링의 아이콘에는 만화영화에서 봤던 여러 이미지들을 연상시켜 친근감을 줍니다.

해링은 만화처럼 그림을 빠르게 그렸기에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림을 조각으로 만들 때도 마치 대형 장난감을 보는 것 같이 마음을 즐겁게 하고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고 하네요. 반복되는 선의 뒤엉킴은 감칠맛이 나고 사람들의 잠재된 동화 속 환상을 자극하죠.

키스 해링은 평생 거리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았다고 합니다
그는 낙서를 통해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고 다소 무거운 주제들을 밝고 경쾌하게 풀어나갔죠.
아마 이렇게 재미있게 주제를 풀어낸 이유는, 어린이들 또한 그러한 주제들을 쉽게 인식하게끔 
만들어 주기 위한 해링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

1988년 해링은 에이즈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다음 해인 1989년에 키스 해링 재단을 설립하여 에이즈단체와 어린이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에이즈에 대한 경각성을 일깨우는 데에 힘썼죠.
(에이즈에 걸린 것만으로도 슬픔에 빠져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건강을 챙기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쏟아 부을 것 같은데... 이에 굴하지 않고 재단을 설립하여 남들을 돕고자 했던 키스 해링은 정말 대단한 분이신것 같아요.)

키스 해링의 마지막 작품 토투몬도 벽화

키스 해링은 같은 해 6월에 피사 Sant'Antonio의 교회의 후면 벽에 마지막 작품인 토투몬도(Tuttomondo) 벽화를 그렸고, 1990 2 16일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하위문화로 인식되는 낙서화의 형식을 빌려서 본인만의 독자적인 회화양식을 구축한 
대중적 그래피티의 아버지키스해링.  
상위예술과 하위예술간의 장벽을 무너뜨리려 노력했으며
간결한 선과 원색적인 색채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특유의 재치와 유머로 현재까지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아래는 이 포스팅의 하이라이트!
키스 해링의 명언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ㅎㅎㅎ가져왔어요. 
한번 감상해 보시죠 ;-)

나는 예술가로 타고났고, 따라서 
예술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 책임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다른 예술가들의 삶을 연구하고, 세상을 연구하면서 배웠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살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그림은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림은 마법처럼 존재한다.
- 키스 해링(Keith Haring) -

키스 해링에 대한 포스팅, 재미있게들 읽어 보셨나요?
그래피티의 시초이자 그래피티 역사에 거대한 한 획을 그은 거장, 키스 해링.
단지 그의 작품들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이지 
키스 해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번에 글을 쓰기 위해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자신의 유명세에 안주하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이 진심으로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분이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셨다는게 정말 안타깝네요.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작가였던 것 같습니다.








 

스티커 이미지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

키스 해링은 19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레딩에서 태어나 쿠츠타운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디즈니의 만화영화를 보면서 그림에 흥미를 가졌으며, 
1976년 피츠버그의 아이비전문예술학교에 입학하여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였죠
그러나 이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뉴욕으로 이사를 가서 시각예술학교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그의 주 무대는 길거리’ 였습니다
그는 뉴욕 거리의 벽면과 지하철 플랫폼에 그려져 있는 낙서 스타일의 그림을 보고 
깊은 영감을 얻어 길거리지하철클럽 등의 을 캔버스로 삼기 시작합니다.

키스 해링의 지하철 드로잉 사진

특히 키스 해링은 뉴욕 지하철의 비어있는 광고판에 분필로 그림을 그려나갔는데, 
공공기물 훼손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키스 해링의 단순한 표현들 뒤에는 무거운 주제들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인종차별에이즈동성애자의 인권반핵문제 등등의
 사회문제들이죠
그는 탄생과 죽음사랑전쟁과 평화 등의 우주관을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활동을 통해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표현하고 위와 같은 다양한 사회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키스 해링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양성 형상의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
손을 마주잡은 모습하트 이미지 등을 통해 그는 남녀노소인종과 인종
나라와 나라간의 차별 없이 모두가 하나되어 사랑하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1981년 토니 샤프라치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된 키스 해링.    
그는 이 전시를 계기로 스타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으며낙서화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조해낸 키스 해링의 그림은 
뉴욕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해링은 활동 
 마돈나 앤디 워홀과도 친분을 쌓았다고 합니다.

보르도(Bordeaux) 현대 미술관의 모습

 1985년에 키스 해링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보르도(Bordeaux) 현대 미술관에 작품 전시회를 열고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하였습니다.

키스 해링의 Pop shop. 2005년에 문을 닫았다고 하네요..또륵

 



그는 다른 낙서화가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작품을 거리와 지하철에서 벗어나 
공익광고와 포스터벽화 등으로 제작하였습니다
또한, 1986년 대중과 예술을 공유하기 위해 소호에 팝 가게(Pop Shop)를 열고 자신의 예술품들을 티셔츠장난감포스터 등으로 상품화하여 팔기 시작하였죠. 

그는 상위 예술과 하위 예술의 장벽을 무너트리려 노력하였으며가게 개점과 함께 그의 작품들은 더욱 더 에이즈(AIDS) 인식코카인 전염병 등과 같은 사회-정치적인 주제들을 반영하기 시작합니다.

스티커 이미지



 약 20년간 미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키스 해링의 실제 작업실로 쓰이던 곳,
매장 내부 기둥에 키스 해링의 원본 작품이 그대로 남아있어 눈길을 끈다.
화장품 브랜드 투쿨포스쿨 매장 개업[2016년 11월]
(웃 사진과 비교해 보세용^^... 기분이 알싸찌근...)



 

   맨해튼의 라파예트 스트리트에 자리한 뉴욕 작업실은
약 20년 간 미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키스 해링’이 실제 작업실로 쓰이던 곳으로, 
매장 내부 기둥에 키스 해링의 원본 작품이 그대로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투쿨포스쿨의 독특한 패키지 디자인과, 도자기 인형, 비커 등
브랜드 고유의 인테리어가 어우러져 실제 예술가의 아뜰리에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팝아트 슈퍼스타, 키스 해링' 전이 그의 사망 20주년을 맞아 소마미술관에서 오는 9월 5일까지 열린다. 그의 판화 130여 점과 영상자료, 3점의 조각 등 총 150여 점이 소개된다.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레딩에서 태어나 쿠츠타운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아버지로부터 드로잉의 기초를 배웠다. 1976년 피츠버그칼리지 그래픽디자인과정에 입학했으나 상업미술가가 되는 걸 포기한다. 

1978년 뉴욕명문 시각예술학교(SVA)에 다시 입학, 그러나 1980년에는 이마저 그만두고 거리로 나선다. 지하철, 클럽, 건물 벽을 캔버스로 삼아 작업한다. 공공기물 훼손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나 이런 방식으로 도시와 소통하며 그만의 아이콘을 만든다. 

1981년 '클럽75' 전 이후 그는 독일 카셀 도큐멘타,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초대됐고 뉴욕뿐만 아니라 유럽, 일본 등에 초대받는다. 워홀과 바스키아를 비롯하여 동갑인 마돈나, 마이클 잭슨 그리고 오노 요코, 브룩 실즈 등 당대 스타들과 폭넓게 교류한다. 그러나 1990년 2월 16일 31살에 에이즈합병증으로 죽는다.

심각한 사회이슈를 단순명쾌한 그림으로 


기사 관련 사진
▲  '남아프리카에게 자유를(Free South Africa)' Lithograph 102×81cm 1982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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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위에서 보듯 1982년 반핵운동을 시작으로 동성애와 에이즈, 문맹퇴치와 인종차별과 같은 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작품을 남겼다. 팝아트의 정신이 그렇지만 그는 무거운 사회적 이슈가 담긴 주제를 간결한 선과 강렬한 색채로 명쾌하게 그려내는 재주가 있었다.

동성애자였던 그는 당시로는 드물게 커밍아웃하고 이 문제를 그의 작품주제 중 하나로 삼아 이를 형상화한다. 동시에 성적 소수자의 인권과 취향을 옹호하는 운동에도 앞장섰다.

하긴 이 문제도 요즘은 생각이 많이 다르다. 최근 시카고대학의 세계적 신학자 테드 제닝스(Ted Jennings)는 교회의 동성애 혐오는 성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위선을 감추려고 보통사람들의 성을 죄악시한 탓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성서에서 말하는 죄란 권력 가진 자가 사회적 약자를 괴롭힐 때 그걸 외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냉전시대 따뜻한 팝아트를 선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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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제' 실크스크린 53×76cm 1989. '짝꿍(Best buddies)' 81×66cm 1990. '앤디 마우스(Andy Mouse)' 96×96cm 1986(중앙하단)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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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해링이 주로 활동하던 80년대는 정치보다는 경제에 관심이 높았고 과소비를 부추기는 시대였다. 레이건의 신자유주의로 빈부차가 심해지고 노숙자가 늘고 마약, 범죄 등이 증가했다. 동시에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 같은 곳에서는 힙합이나 낙서화 등 뒷골목문화도 성행했는데 키스 해링은 바로 이 구역에서 활동했다.

해링은 이런 냉전기에 밥처럼 따뜻한 팝아트로 사회분위기를 밝게 하는 데 일조한다. 그의 사상과 철학을 최소한의 기호로 바뀐 귀여운 이미지의 아이콘을 만들어낸다. 그의 멘토인 앤디 워홀을 미키 마우스의 이미지로 합성한 '앤디 마우스'를 봐도 그렇다.

그의 최고 장점은 천진난만한 동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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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예사(Acrobats)' enamel on aluminum 높이 122cm 1986. 아라리오갤러리소장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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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화풍은 가장 순수하고 긍정적인 인간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동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천진난만한 캐릭터가 관객을 유혹한다. 그의 아이콘에는 만화영화에서 봤던 여러 이미지들을 연상시켜 친근감을 준다.

해링은 만화처럼 그림을 빠르게 그렸기에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림을 조각으로 만들 때도 마치 대형 장난감을 보는 것 같이 마음을 즐겁게 하고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반복되는 선의 뒤엉킴은 감칠맛이 나고 사람들의 잠재된 동화 속 환상을 자극한다.

'현대판 이솝우화' 같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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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 Lithograph 114×90cm 1985. 릴랑가(Lilanga)작품(아래)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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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같은 개를 독창적으로 형상화한 위 작품은 유머와 위트로 넘친다. 마치 '현대판 이솝우화'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에게도 영감을 준 장 뒤뷔페(J. Dubuffet 1901~1985)나 릴랑가(Lilanga 1934~2005)와 같은 작가도 있었다.

작가의 메시지가 농축된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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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제' 실크스크린 15×15cm 1987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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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듯 상단에 자리 잡은 붉은 하트는 두 사람 간의 우정과 신뢰를 뜻하리라. 또한 하트에서 뻗어져 나오는 반짝이는 선들은 사랑이 뿜어내는 에너지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어깨를 감싸는 모습에서는 따사로운 인간애도 느껴진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메시지를 혼합한 아이콘으로 독특한 이미지를 일궈낸다. 예컨대 생명을 찬양하는 임신부, 후광 받는 아기들, 짖는 개, 심장에 구멍을 내는 막대 총, 교신하는 비행접시와 피라미드 등이다. 이는 모든 걸 넘어 하나로 춤추게 하는 유토피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미술관 벽 넘어 공공미술의 초석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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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스 해링이 뉴욕 41가(街) 지하철에서 벽화 그리는 모습(가상설치) 1983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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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팝아트작가답게 "대중에게도 예술을 즐길 권리가 있다. 예술은 만인을 위한 것, 대중이 이해하기 힘든 예술을 고집스레 추구하는 건 자기를 과시하는 허튼 수작일 뿐이다"라는 글을 일기장에 남겼다. 그는 이렇게 고급문화인 예술과 대중문화인 미디어산업의 경계를 없애려 했다. 

또한 그는 동시대 낙서화(graffiti)의 또 다른 거장인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와 함께 80년대 뉴욕지하철 광고판 그림으로 명성을 날렸다. 당시 광고나 간판글씨처럼 하위문화 취급을 받던 낙서를 당당한 미술장르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한다.

그렇게 그는 미술관 벽을 넘어 거리로 나선다. 개인적 감정도 공공적 공간에 표출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술은 누구나 즐기며 소비할 수 있음을 알린다. 점차 이런 생각이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발휘하면서 그는 뉴욕은 물론 베를린, 암스테르담, 런던, 동경, 파리, 보르도, 몽트뢰, 피사 등 세계도시로부터 초대받아 벽화작업을 하게 된다.

생사의 기로에서 마지막 날인 듯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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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말(Apocalypse)' 연작 실크 스크린 96×96cm 1988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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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누구보다 생명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인다. 그가 에이즈 감염자였기에 더욱 그랬으리라. 그래서 죽음을 생명으로 코드 변경하거나 잉태의 환희를 보여주는 작품이 많다. 그가 임신부를 많이 그리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가 죽기 2년 전 남긴 위 '종말' 연작에 바로 그걸 주제로 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 네덜란드계 보수적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그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는 종말론적 삶을 작품에 구현한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예술로 극복하려 했는지 모른다.

상업성을 뛰어넘은 탁월한 예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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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제' 실크 스크린 127×107cm 1983. 형광효과를 줌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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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의 이야기를 마무리해 보자. 그는 자신의 작품을 파는 가게인 팝 숍(Pop Shop)을 1986년에 열어 상업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으나 그는 그런 범주를 넘는 풍부한 상상력과 높은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그는 작업을 통해 신화를 부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키스 해링은 예술이란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세상은 더 멀리 볼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의 말처럼 그는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작업에 몰두하고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어느 날 혜성처럼 지구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의 업적은 사람들 가슴 속에 길이 오래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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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 [타산지석] - 우리 연변에도 "3D 벽화 마을"이 있었으면... 2017-10-16 0 1924
397 시작에서 자아(自我)의 결산을 발달된 색채의 극치로 보여주기 2017-10-16 0 1565
396 거대한 마음의 상징물들을 그림화한 "귀를 잘라 버린" 화가 2017-10-14 0 2248
395 사군자화(四君子畵) =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그린 그림 2017-10-13 0 2467
39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나무 구멍 사이에 그려진 그림들... 2017-10-13 0 2048
393 시작을 토속적인 방언으로 영원한 시의 지평을 열어야... 2017-10-13 0 1490
392 시작도 형(形)과 색(色)의 교향(交響)의 조합을 실현해야... 2017-10-12 0 1572
391 시인들도 시작에 자아도취하지말고 평생 만족할줄 몰라야... 2017-10-12 0 1703
390 시작도 실제 경험과 모순되는것의 합리적 느낌으로 쓰기... 2017-10-11 0 2255
389 시와 그림은 사촌지간이다... 2017-10-11 0 1819
388 2차원의 평편 위에 3차원 공간을 만든 화면의 연금술사- 에셔 2017-10-11 0 1515
387 네덜란드 판화가, 초현실주의 화가 - 에셔 2017-10-11 0 2024
386 [이런저런] + "그림의 마술사" =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 2017-10-11 0 2267
385 詩도 세로가로 이등분법(二等分)적 그늘과 양지로 표현해야... 2017-10-10 0 2134
384 한글, 우리 민족 이어주는 위대한 공동 유산 2017-10-09 0 1315
383 그림의 여백부분이 훌륭한 웅변적 표현력을 과시, 암시효과 2017-10-09 0 1828
382 과거와 현재를 한꺼번에 그리기... 2017-10-08 0 1809
381 [쉼터] - 같은 사진을 찍어도 좀 남다르게... 2017-10-05 0 1994
380 [쉼터] - 위인 초상화 2017-09-29 0 1452
379 [이런저런] - 마광수님, "문인화" 범주에서 "외도"해보기... 2017-09-26 0 1281
378 [중국 이모저모] - 중국 하르빈 "건축예술광장"에서- 2017-09-25 0 2234
377 [고향자랑] - 중국 연변 황금가을 구경 오이소... 2017-09-25 0 1252
376 [그림한점] - "인생아리랑" 2017-09-23 0 1319
375 [미술시장] - 청록색 전면점화 "무제" 새 주인 찾았다... 2017-09-19 0 1214
374 마광수님은 화가의 꿈도 꿨었다... 2017-09-14 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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