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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언어가 추상적으로 표현된 형태시의 력작 그림...
2017년 10월 19일 22시 14분  조회:2102  추천:0  작성자: 죽림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2) :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i (1866~1944)

 

추상(抽象)창조의 선구자

 

 

 

 

여자들이 있는 무르나우의 거리

 

작가들이 생활 환경의 대상물이나 일상 생활에서 얻어 진 체험들을 작품 모티브로 사용하는 예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무르나우는 뮌헨의 남쪽, 알프스의 산들로 싸인 아름다운 마을이다. 무르나우에 서 제작된 작품들은 자연의 외관이 눈에 띄게 주관적으로 처리되어 표현주의적인 화풍으로 대담한 전환을 시도했다. 형태의 단순화, 선명한 색상의 대비, 폭넓고 개성 있는 터치, 이미 칸딘스키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주관을 강하 게 나타내는 것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주관적인 '안으로의 응시'는 억제하기 어려운 욕구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 필연성' 때문에 생긴 것으로써, 늘 검증되고 있다.

 

 

 

 

 

나무줄기가 있는 풍경

 

 

이 작품에서는 공간감의 표현과 형의 대조로써 원근법적 묘사를 기피하고 화면에 수직으로 내린 굵은 나무 가지와, 중앙 부분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어두운 색 면, 그것들이 교차하는 십자형(十字型)의 강조는 화면에 큰 구조를 느끼게 한다. 아직 대상은 남아 있으나, 단순한 색면으로 환원되고 색채는 매우 절제되어 단순하고 간결함을 본다. 빨강·노랑·파랑·초록 등 색채들이 어울리고 있는 점은, 독일에서 그렸지만, 유럽적인 아니면 러시아 적이라고 할까. 어딘지 짙은 노스탤지어가 스며 있어 모스크바의 황혼, 붉은 환상의 지붕들을 연상시켜 향수와 시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차원 높은 조화는 독창적인 세계의 구축을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아라비아 1 (아라비아의 묘지)

 

 

칸딘스키는 서구적인 것에 강하게 끌리면서도, 동시에 러시아의 이콘(聖像)이나, 민예품의 장식적인 요소의 색채들을 잊지 못했으며, 과학적이 되게 하려고 하면서 일종의 동양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비주의적 인식을 줄곧 가지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상징성이 강한 장식성이 느껴진다. 이 상징성이 강한 장식성은 칸딘스키가 그 작풍을 변모시켜 가는 과정에서 표현을 바꾸면서도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큰 특색 가운데 하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평선과 수직선을 기조로 하여 약간의 곡선을 이입한 구도에 정리된 인물이 배치되어 있다. 다소 굵은 윤곽선이 사용되고 있으나, 형태는 단순하고 억양이 있는 터치로 칠해진 화면에 강렬한 색의 대비에 의해 음악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리듬감을 지니고 있다.

 

 

 

푸른 산

 

 

대담하게 설정한 구도는 종래의 구도론을 떠나 우리에게 중량 감 마저 느끼게 한다. 좌우의 균형을 맞춘 큰 나무는 하늘을 덮듯 큰 면적으로 처리하고, 그 사이 중앙에 피라밋 형의 푸른 산이 원형으로 그려져 있는 독특한 구도이다. 아래쪽에는 원경으로 그려져 있는 푸른 산을 앞에 두고 하늘을 향하여 질주하는 군마(軍馬)의 약동적인 형태가 인상적이다. 크고 작은 수많은 점들로 그려진 이른바 색점묘법(色 點描法)의 기법은 화면을 장식적인 세계로 이끌어가는 한편, 강렬한 원색의 대비는 포비즘의 영향을 받은 듯하나, 러시아의 민속 예술의 연상과 실현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아무튼 끝없는 실험의 연속으로 보아야 할 작가의 태도는 대담하고 특이한 구도에서 충분히 읽을 수가 있다.

 

 

 

로맨틱한 풍경

 

 

칸딘스키가 질주하는 기마(騎馬)를 작품의 모티브로 하여 제작한 것을 많이 볼 수가 있다. 말을 좋아해서 그렸다기보다는 화면에 속도와 힘을 주기 위해서 말이라는 대상물을 차용한 듯하다. 이 얼마나 위대한 발견인가. 화면에는 사선으로 비탈길 같은 것을 설정하여 한층 속도감을 고취시키면서 터치 또한 온통 사선으로 경사지게 표현하고 있다. 붉은 점으로 나타낸 태양과 주위의 점들은 엑조틱한 분위기를 짙게 감돌게 하며, 여러 방향에 걸쳐 실험적인 시도가 나타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칸딘스키는 내부에서 솟아 나오는 감흥을 되도록 강렬하게 표현하려 했으며 그것은 '내적 필연성'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

 

 

표현은 재료의 매체에 따라 많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유채란 캔버스에서 가능하지 않은 표현이 수채와 종이에서는 훌륭한 표현이 되는 예가 많기 때문에 작가들은 재료에 대한 관심이 높다. 화면에서 구체성을 띠는 대상물은 그 상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 때문에 감상자에게 이미지 전달로써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칸딘스키는 화면에서 이러한 대상을 제거하는 작업을 시도하게 되는데 유화에서는 좀처럼 대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내부에서 솟아 나오는 감동, 즉 '내적 필연성'을 형상화하는 실험으로서 종이 위에 자유로운 붓의 놀림과 수채의 부드러운 침투는 표현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위대한 발견을 맛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이며 칸딘스키 자신도 예견하지 못 했던 현대 회화의 큰 수확을 얻은 것이다.

 

 

 

콤포지션 5

 

<즉흥> 시리즈와 <인상> 시리즈와 아울러 <콤포지션> 시리즈도 칸딘스키에겐 중요한 계통적 작품군(作品群) 이다. <즉흥(Improvisation)>은 내적 필연성이 무의식적·우발적·음악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상태이며, <인상(Impression)>은 대상을 평면적으로 용해 하여 새로운 표현의 전개를, <구성>은 1910년 최초로 발표한 이래 죽음에 이를 때까지, 10점이 제작된 <콤포지션> 연작은 칸딘스키 예술의 중핵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군이다.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작품이다. 무엇인가를 연상케 하며 여러 가지의 자유롭고 유기적인 형태가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어떤 운동성을 나타내기도 하는 형태시(形態詩) 또는 드라마를 전개하고 있다. 칸딘스키의 조형언어가 유감없이 표현된 역작이라고 하겠다.

 

 

 

즉흥 '19'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궁전 극장에서 바그너의 '로엔그 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 '바이올린의, 베이스의, 관악기의 깊은 울림, 나의 마음속에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그것은 나의 눈앞에 있었다. 야성적이며, 거의 미친 것 같은 선이 눈앞에 그려졌다. 바그너가 '나의 시간'을 음악적으로 그렸다고 하는 표현을 나는 감히 사용하지 않겠다. 그러나 분명한 일은 예술이란 것은 내가 상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힘찬 것이며,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일이었다.'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칸딘스키는 예술의 이론이나, 제명에 음악과 관련이 있는 말을 잘 사용했는데 즉흥도 그 중의 하나이다. <즉흥> 시리즈에서 칸딘스키는 내부에서 솟아나오는 감흥을 자유롭게 화면에 정착시키려 했다.

 

 

 

 

 

인상 5

 

1909년 3월에 야울렌스키의 노력으로 뮌헨에서 신(新) 예술가 동맹이 결성되었는데, 칸딘스키가 의장이 되어 제 1회 전람회와 제 2회 전람회를 열었다. 이 때에 피카소, 브라크, 브라망크, 루오 등도 출품하여 국제 전위 미술 전람회의 성격을 보였으나, 제 3회 때 의견 대립이 생겨 신 예술가 동맹에서 탈퇴하여, 곧 새로운 그룹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청기사<靑騎士>)'를 결성한 해에 제작된 작품이다. '공원'이란 부제가 붙어 있으나 구상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평면적으로 용해시켜 전개함과 동시에, 임의 곡선과 두 개의 힘이 교대로 작용하는 각(角)이 있는 선의 등장 등은 자기의 사색에 확신을 가지는 시기였다. 칸딘스키는 이 작품에서 가장 간결한 형태를 표현함으로써 회화에 새로운 표현이 전개될 것을 비쳐 보이고 있다.

 

 

 

하얀 테두리가 있는 繪畵(회화)를 위한 밑그림

 

뮌헨의 신 예술가 동맹으로부터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 (靑騎士)에 이르는 시기, 즉 1909년부터 1914년까지에 칸딘스키는 한 작품마다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면서 많은 작품을 제작한 가장 충실한 시기에 해당하며, 추상적 표현주의를 전개해 나갔다. 이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불규칙적인 선과 형태와 색채가 서로 응집과 확산이 교감하는 상황을 이루고 있다.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의 전개는 내적 감동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오토매틱한 표출을 중시하면서도 그것이 전체의 질서 속에 통일되어 있는 점이 커다란 특색의 하나이다. 이러한 특색은 제 2차 세계 대전 후 앙포르멜이라든가 액션 페인팅 등 추상 표현주의가 대두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선구자적 성격을 매우 높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검은 곡선이 있는...

 

칸딘스키의 예술에 있어서 무대상(無對象)의 추상이 확고하게 성립된 것을 보여준 역작이다. 불규칙적인 작고 큰 선이 교차하면서 불가사의한 형을 안고 있으며, 색채들은 형체를 안고 울려 퍼져 나오고 있다. 화면 구성의 중심은 명제가 말해 주듯이 검은 곡선이다. 칸딘스키는 곡선에 관하여 '점, 선, 면'에서 '임의의 곡선에 주어진 자유 자재인 악센트 한계는 똑똑하지 않으면서도 확실히 존재하는 것. 선에 대해 서도 일체가 대비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은 점의 경우와 다름이 없다. 절대적인 것도 상대적인 것에 의해서, 똑똑하지도 않고 또한 울림이 약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계까지 간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이것에 대해서는 이론상으로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것보다 차라리 실제상으로 훨씬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즉흥 '30'

 

<즉흥> 시리즈는 1909년에 시작하여 13년 말까지의 사이에 34점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대단한 열성에 의한 작업량이다. 선과 면의 유기적이고 유동적인 교차에 있어서 전체가 가장 생생하게 잘 짜여져 있다. 색채가 다양하며 미세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화면 여러 군데에 자유로운 곡선들은 주위의 형태들을 용해시켜 응결된 응집력을 구축하면서, 그 사이에 강하고 다양한 색으로 메워 가는 비교적 섬세한 작업의 하나이다. '대포'라는 부제가 붙어 오른쪽 아래편에 대포의 형상이 보이기는 하나, 화면 전체의 구성상 빌어온 것인지 제 1차 세계 대전의 시대적 상황, 긴장과 불안한 심리 상태를 나타낸 것인지 보는 사람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푸가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靑騎士) 시대 말기의 대작이다. 조형 요소 중에서 가장 감각적인 것은 색채라고 할 수 있다. 보는 순간에 마음을 움직이고 갖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조형의 매력을 주는 것은 뭐라고 해도 색 채이다. 색채는 다른 조형 요소보다 생명적·본능적인 것이며, 천부나, 체질 또는 생활 감정에 더욱 직결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듯 칸딘스키는 무대상(無對 象)의 추상에서도 색채 화가라고 불릴 만큼 색채의 구사에 노력함을 엿볼 수가 있다.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곡선들이 색조와 복합적으로 뒤섞여 공간 속에 한데 어울려 음악적인 리듬과 멜로디를 울리게 하는 장대한 심포니를 듣는 듯하다. 중앙에는 흰색의 내밀한 도식적인 선과 조그마한 여러 형태를 가지면서 노란 색조의 커다란 운동은 화면을 긴장과 리듬으로 이끌고 있다.

 

 

 

밝은 바탕 위의 형상

 

1914년 7월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 칸딘스키는 러시아 사람이므로 뮌헨을 떠나야 했다. 뮌헨은 그 의 예술적 자기 발견의 실현과 예술의 성숙과 그의 일생에 하나의 전환기를 가져다 준 도시였기에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사실은 가혹한 충격이었다. 상심(傷 心)한 칸딘스키는 취리히를 거쳐 16년 스톡홀름에서 개인전을 마치고 가브리엘 뮌터와도 헤어져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화풍도 점점 정적(靜的)으로 변화하고 색채는 더 어두워져 갔다. 이 시기의 칸딘스키는 제작이 적었으나, 이 작품은 몇 점 안 되는 비교적 큰 작 품이다. 불규칙적인 커다란 형상 속에 가두어 넣은 색과 형태가 복잡하게 그려져 있다. 이 무렵의 작가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듯 우수와 상심이 화면에 깃들고 있다.

 

 

 

 

 

빨간 달걀 모양

 

꺼질 줄 모르는 전쟁과 미래에의 불확실한 전망은 칸딘스키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식히고 있었다. 1915년 과 1921년 사이에는 다른 창작기와 비교해서 극소수의 작품만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후, 소련 정부는 예술 부문에도 변혁을 하려고 혁신적인 예술가를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1918년에 소련 정부의 미술 행정위원이 된 칸딘스키는 그 전부터 열망하고 있던 종합 예술의 실현을 기대하여, 창립 주창자로서 교육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중앙 또는 지방 미술관을 정비하는 일에 힘쓰는 한편, 모스크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크게 노력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제작된 이 작품은 점차 도식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훗날 독자적인 상징적 기호성이 하나 둘씩 얼굴을 내밀고 있다.

 

 

 

 

 

 

파란 활 모양

 

칸딘스키는 1921년에 모스크바에 '예술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예술을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등용된 미술가는 말레비치, 타트린, 페브스너, 가보 등 대부분이 구성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메카닉한 예술 이론에 비판적인 칸딘스키는 고립하게 되었으며, 소련 예술은 1920년에 페브스너·가보 형제가 '리얼리즘 선언'을 한 것을 고비로 하여 급속히 정치적 이데올로기 지배로 기울어졌다. 환멸을 느낀 칸딘스키는 21년 12월에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옮겼다. 그러나 페브스너·가보 형제와의 교류는 칸딘스키 예술의 전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하학적인 형태나 구성적인 요소가 칸딘스키 예술의 주요한 과제가 되는 계기를 거기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명쾌한 평면성을 해석하여 간결하고 명확한 형태들이 나타나고 있다.

 

 

 

 

검은 綱版(강판)

 

1922년 6월 바우하우스의 창립자 윌터 그로피우스는 칸딘스키를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초빙했다. '모든 예술적 창작의 종합'을 목표로 삼고 그로피우스가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예술가를 교수로 초빙한 것은 유명하지만, 칸딘스키도 '공간과 씨름하는 일, 즉 건축과 협력하는 것은 나의 오랜 꿈이었다. 바우하우스에 부임하였을 때 나는 이 꿈이 꼭 실현되리라 믿었다.' 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수 생활에 큰 기대와 만족을 가지며 가장 결실이 많은 바우하우스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23년에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서 개최된 전람회 출품작으로 여러 가지 형상 가운데 명확한 윤곽을 갖는 것이 늘고 사각형의 선이 교차한 그물 같은 것이 강조되어 기하학적인 요소가 서서히 강해지고 있다.

 

 

 

 

 

검은 정방형의 안에서

 

1917년 니나와 재혼한 칸딘스키는 바이마르에 자리를 잡은 후에 그제서야 정신적으로 안정을 얻어 창작 의욕은 고조되었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 직선과 원을 기본적인 형태로 하고 조형 단위를 한층 더 승화시키고 공간을 시원스럽게 처리하였다. 직선과 곡선, 예각과 둔각, 원 등 거의 기하학적인 요소만이 밝은 배경 위에 떠돌아 다니는 것처럼 배치되어 있다. '점, 면, 선'의 한 구절에 각(角)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세 가지 각은 저마다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훌륭하게 도면적으로 번역한다. 1. 예각(銳角)-내면의 상면의 날카로움과 극도의 능동성. 2. 직각(直角)-노련한 완성(예술적 구상화) 때의 냉정함과 감정의 억제. 3. 둔각(鈍角)-제작을 완성한 후의 불만 스런 감정과 무력감.'

 

 

 

 

 

원 속의 원

 

원에 의한 구성을 탐구하고 있던 칸딘스키가 여러 가지의 원을 들고 별도의 방법으로 전개시켜 보고 있다. 원 그 자체가 기본적 모티브가 되어 화면 중심에 집중하고 교차, 중단 등으로 '4차원 공간' 즉 칸딘스키가 말하는 '정의하기 어려운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하여 원은 끝내 각양 각색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으로 변해 가며 점과 선과 원의 조합, 크기를 달리하는 원의 병치, 색채를 달리하는 크고 작은 원의 중첩, 이 중 어느 것인가가 원이 아닌 무엇인가를 여기에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포의 세계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 곡예사의 공 타기나, 가볍게 떠 있는 애드벌룬이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인공 위성까지도 연상케 하면서 그 빛나고 선명한 화면은 우주 공간을 보는 것과도 같다.

 

 

 

 

 

노랑=빨강=파랑

 

니나 부인이 분류한 원의 시대(1925년-1928년)의 초기 작품이다. 노랑을 주조로 한 바탕 위에 빨강과 파랑이 간결하게 자리잡은 위에 직선, 곡선, 원 등이 여러 가지 형태로서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면서 기하학적인 요소가 강한 왼쪽 부분과 오른쪽의 유기적이고 불규칙한 현장의 연출로 화면은 성격이 다른 형태들로 양분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대립되고 있는 것들과 총체적인 통합으로써의 노력이 강조되고 있다. '대립과 모순-이것이 우리들의 하모니인 것이다. 이러한 하모니에 바탕을 둔 콤포지션이 색채와 데생의 결합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그때 이들 색채와 데생은 각각 독립하면서 게다가 내적 필연성에 따라 꺼내어지며, 그리하여 그곳에 탄생하는 공통의 생명 속에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즉 회화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칸딘스키는 썼다.

 

 

 

 

 

단단하고 부드러움

 

1926년에 '점, 선, 면'을 출판하여 60세를 맞이한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 부교장으로서 그로피우스를 보좌하였다. 이 작품은 마치 우리 나라 민화(民話)를 보는 듯한 도식적 요소를 느낄 수 있다. 한참 의욕적인 제작에 몰입할 때 종이와 수채와 잉크에 의해 이 시기의 특색인 원을 화면에 구성시켜 가면서 곡선적인 형태와 예각적인 직선으로써 대조적인 형태를 공간에 떠 올려 조형적인 음악을 생각케 하는 심리적인 조화의 세계를 생성시키고 있다. 간결하고 정리된 화면은 추상을 초탈하고 생명적 형태만이 그려져 있다. 또한 화면 가득히 운무법(뿌리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방법이나, 이것은 끝없는 조형 언어의 실험적 연구로 받아 들여진다.

 

 

 

 

 

 

앞 끝의 위에

 

높은 이상을 내세우고 발족한 바우하우스의 혁신적인 운동은 바이마르의 보수적인 기풍과 맞지 않아, 데사우 시의 호의로 바우하우스는 1925년 4월에 데사우로 옮겼다. 칸딘스키 부부는 데사우에서 파울 클레 가족들과 이웃에 살았으며, 좋은 자연 환경 속에서 충실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바우하우스가 기능 주의로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예술 창조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의 비합리적인 요소를 중시한 칸딘스키는 끝까지 그의 예술 주장을 밀고 나갔다. 학생들은 칸딘스키가 벽화, 클레가 스텐인드 글라스를 담당한 이외에 1주일에 한 번씩 연 자유화 학급에 참가하였다. 이 작품은 무중력 상태에 떠 있는 애드벌룬을 지상에 강한 선으로 매고 있는 듯한 중력과 구조에 대한 해석으로 풀이된다.

 

 

 

 

 

여러 개의 원

 

칸딘스키는 '그 많은 기하학적 형태 중에서도 유독 원을 선택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원은 첫째, 가장 겸양하는 형태이면서 어디까지나 자기 주장도 하고 둘째, 간결한 반면 무한히 변화하며 셋째, 안정되어 있음과 동시에 불안정하기도 하고 넷째, 무수한 긴장을 갖고 있는 하나의 긴장이기 때문이다. 원은 최대한으로 대립하는 것의 종합이며, 이는 구심성과 원심성을 하나의 형태로, 더욱이 균형을 유지하며, 통일되고 있습니다. 세 가지의 기본적인 형태(삼각형, 정방형, 원) 중에서 원은 4차원에의 가장 명료한 지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원에 대한 조형 연구의 연속으로서 큰 원 안에 다수의 대(大)·소(小)원을 그리는 시도이다. 원이 우주적 요소를 띠고 마치 위성처럼 무한 공간을 떠오르고 있다.

 

 

 

 

 

다리

 

두 건물을 연결하는 것 같은 다리와 그 위의 삼각형도 인체인 것처럼 연상케 하고 있으나, 연상 작용을 유발 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칸딘스키는 일체를 조형적 해석으로서 나타내고 있다. 그는 '추상 예술은 이미 자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당신도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아닙니다. 추상 회화는 자연의 껍데기는 버리지만 그 법칙을 버리지 않습니다. 예술은 우주적 법칙과 결부하고 또 그것을 따르고 있을 경우에만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법칙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외면적으로는 자연에 가까운 경우에 말입니다-자연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체험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대상을 사용하는 일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답니다. 절대로 관계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연속

 

칸딘스키의 음악을 회화에 이입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는데 '음의 강약은 선이 가지는 날카로움의 증감 내 지는 농담으로 표현할 수 있다. 활(弓)에 가해지는 손의 가감은 연필에 가해지는 손 힘의 경우와 완전히 일치한다. 오늘날 널리 행해지고 있는 음악의 도형적 표현-기보법(記譜法)-이 점, 선을 사용하는 여러 가지 조합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특히 흥미 있는 일이며, 또한 특기할 일이다.' 이 작품은 마치 오선지 위의 음표를 보는 듯하다. 형태 와 색이 만들어내는 도형적인 형상이 수평선을 따라 리드미컬하게 울려 퍼져 자유롭고 명확한 윤 곽으로 그려져 있어 자유 분방하고 태평스러우며, 생생한 생명감을 느끼게 하는 한편, 전체는 어떤 질서 속에 멋지게 통일되어 있다.

 

 

 

 

伴奏가 딸린 중심

 

노란색을 주조로 하여 바탕에 칠한 다음 복잡한 형태들이 자유롭게 자리잡고 있으나, 매우 정리되고 단순하게 요약되어 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엄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칸딘스키의 회화의 구도가 평면성의 강조를 기본으로 하고, 형태의 도상학적(圖像學的)인 배치를 목표로 삼고 있는데 대해서는 러시아의 이콘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사실 칸딘스키는 '나의 예술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원천, 그것은 오직 러시아의 이콘이다.' 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또한 이 해에는 나치스 정부는 칸딘스키 작품 57점을 '퇴폐 예술'이라고 압수했다. 칸딘스키만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 뭉크도 같은 일을 겪었는데, 만년에 접어든 예술가에게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주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둘 사이

 

1932년에 데사우에서 베를린으로 부득이 옮긴 바우하우스는 더 한층 심해진 나치스 정권의 억압 때문에 33년 3월에 마침내 폐쇄당하고 말았다. 이 때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의 최후를 끝까지 본 후 파리 근교인 누이이 쉬르 센에 영주하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67세나 되었다. 칸딘스키가 오랫동안 고대했던 해외 여행의 실현으로 고대 동양 세계로부터 그리스, 로마, 그리고 근대 회화의 발상지 파리에 안착하기까지 이 귀중한 체험과 여러 가지 시도, 실험 등이 파리 시대로 옮김과 동시에 그의 예술은 '대종합 시대'를 맞고 현란하게 비치는 커다란 한 송이의 꽃을 차례로 피우게 되는 것이다. 불규칙적인 두 개의 형태를 대립적으로 대치시켜 긴장과 역학적 구조로 이끌면서 개개의 형태가 자립하여 제각기의 위치에서 응결하고 있다.

 

 

 

 

 

섬세한 고정

 

'예술가는 인생의 행운아가 아니다. 즉 그에겐 책무(責務)를 면하고 살 권리가 없다. 그는 종종 그 자신의 십자가가 되기도 한다. 고통스러운 일을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의 행위와 감정과 사상, 이들 모두가 섬세하여 손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확고한 소재를 형성하고, 거기서부터 자기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을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자유로운 것은 인생에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예술에 있어서라는 것을 그는 알아야 한다.' 라고 자각한 그대로 칸딘스키는 실천에 옮겼다. 수직과 수평으로 평행해서 달리는 직선의 교차와 간단한 형상들을 되풀 이해서 그려 놓은 이 작품은 어딘가 건축 장식의 에스키스를 연상케 하나, 각각의 다른 음색이 서로 겹쳐지면서 몇 가지 모티브를 만들어 내는 오케스트라의 악곡을 스케치한 것처럼 보인다.

 

 

 

 

 

빨간 형태

 

'내가 자연을 지나치게 과장한다. 그래서 내 그림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니까 나를 구하는 길은 '색을 파괴하는 일인 것이다' 라는 비평을 듣고 얼마나 이상하게 여겼는지 모른다. 뮌헨의 비평(부분적이 긴 하지만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다)은 나의 색채의 화려함을 내가 비잔틴 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려고 했다. 러시아 비평가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난폭한 표현으로 비방을 했다. 내가 뮌헨 미술의 영향으로 타락했다고 비난했다. 대부분의 비평가는 아주 뻔뻔스럽고, 심술궂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알았다. 이 사실은 반대로 말하면 영리한 예술가는 악의가 있는 비평에 견디어 낼 만큼의 냉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 칸딘스키가 걸은 길은 시대와 역사를 앞선 외로운 개척의 길이었다.

 

 

 

 

 

검은 원 속에

 

 

 

 

 

 

결합

 

1928년에 그로피우스가 사직하고 마이어가 교장이 되는 한편, 기능주의로 방향을 바꾼 바우하우스는 30년에 마이어로부터 미이스 판 델 로에로 다시 교장이 바뀌어 처음의 이념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시렌머, 클레 등 주요 스텝이 잇달아 떠나고, 강대해진 나치스의 압박도 심해져서 고난의 길을 더듬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곤란한 가운데서도 칸딘스키의 화풍은 무르익어 갔다. 이 작품은 직선을 주로 사용하여 힘차고 간결한 구성적인 표현을 보이고 있다. 구성은 잘 계산되어져 훌륭히 짜여져 있지만, 칸딘스키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시원한 공간이 설정되지 않아 다소 답답한 느낌을 준다. 큼직한 기하학적 형태들이 유기적으로 교착하여 하나의 구조를 얻고 있는 색다른 부류의 작품이다.

 

 

 

 

 

하늘 색

 

매우 투명한 그림이다. 푸른색의 공간에 여러 가지 유기적인 형태가 난무하고 있다. 첫눈에 민족적인 요소가 대단히 진한 형태이며, 추상을 벗어나 생명의 원초적 형태 같은 것에 가까워지고 있다. 젊은 시절에 민족학 조사단에 참가하여 북쪽 지방을 여행하였을 때 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흥미를 가진 민예품이나 이콘, 장식무늬, 공예품에서 영향을 받아, 오랜 시간 형태 연구를 통하여 칸딘스키의 내부에서 자라난 형태일 것이다. 그것을 상징적인 기호로써 배열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칸딘스키는 하나의 코스모폴리탄 이었지만 이국에서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독한 노년을 보내며,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러한 동화적 세계에 탐닉되었을 것이다.

 

 

 

 

 

상호의 화음

 

 

 

 

정확한 대비

 

지나치게 정선되어 단조로움마저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복잡한 형태가 매우 간결하게 요약되어 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엄밀하게 놓여져 있다. 중앙에 강조된 율동적인 커다란 형태의 내부에 즉흥적으로 보이는 묘선과 아무 생각없이 배치되어 있는 것 같은 기호적인 형태에 대해서도 그 자신을 철저히 검토하고 논리 적으로 검증하려고 하였던 것은 '점, 선, 면' 등의 저작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칸딘스키가 즉흥적으로 그린 것 같지만 그의 조형 언어를 확인하고 검증해 보이고 있다. 초기의 사실주의로부터 표현주의, 비구상 표현에서부터 기하학적 추상으로 표현형식을 변화시킨 칸딘스키가 만년에 기호적 배열까지 나타낸 화풍은 고향에서의 체험으로 회귀해 갔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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