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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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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런 사람이라고?!... "살아서 죽었고, 죽어서 살았다"
2020년 10월 15일 21시 15분  조회:2281  추천:0  작성자: 죽림
 
추모수필; 

허창렬이 죽었다고?
20-09-29    

 

   /살춘각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구제비 스무고개 같은 소리를??

 

    부고:

    (재한동포그룹)의 췬주님이신 허창렬시인님이 어제(9일) 불상사로 타계하셨습니다. 지금 사인 해명중입니다.

    부고 작성자: 정동(장경률)

 

    9일이면 어제가 아닌가? 나는 변사또한테 전화를 넣었다. 변사또라면 잘 알 터이다. 창렬이가 한국에 도착해서부터 곁에서 도와준 사람이 그였으니까. 그러나 신호음이 떨어지기 바쁘게 끊는다. 다시 넣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각해보다가 이번에는 배사장한테 넣었다. 받는다.

    “야, 사실이냐?”

    “응.”

    “상세히 좀 말해봐.”

    “나도 금방 들었어야. 잘 몰라.”

    녀석의 목소리는 잔뜩 꺼져 있었다. 우리 셋은 동갑이였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너 지금 어디야?”

    “어디긴. 진천이지.”

    “충주? 아직도 거기냐?”

    “아니면 어떡해? 일자리가 없는데... 지난 달 와이프가 중국서 돌아왔잖아? 한 번밖에 못 봤어야.”

    그러는데 변사또한테서 문자가 왔다. 창렬이 갔다?

    문턱 하나 넘는 게 그렇게도 간단한지?

    내가 창렬이를 본 것은 아마도 1998년도였을 것이다. 년말이였고, 작가협회 “문학의 밤” 행사모임때였을 것이다. 저녁식사자리에 우리 또래들 일여덟명이 빙 둘러앉아 있는데 어떤 두억시니 같은 놈이 우리 상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와서는 다짜고짜,

    “여기 혹시 량영철이라고 있소?”

    묻는다. 김현순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내 앞의 잔에다 들고 온 술을 철철 넘치게 붓는다.

    “량영철이야말로 진짜 소설가지! 나머진 다 쓰레기들이야.”

    그리고는 되돌아서 가는 것이였다.

    현순이랑 발끈했다. 두억시니의 뒤통수에 대고 한 마디씩 꼬아 던졌다.

    “저 놈 누구야?”

    “어디서 온 새낀데 시건방지네.”

    “우리한텐 붓지도 않고... 인사도 안하고 갔잖아.”

    “허창렬이 아니야? 시를 쓰는.”

    “몰라. 처음 보는 놈이야.”

    그때 나는 처음 들었다, 허창렬이란 이름을. 그 해박한 두억시니처럼 생긴 놈이 허창렬이라는 것도 그날 알 게 되였다. 감히 문인들을 앞에서 쓰레기라 말할 수 있는 간이 크고 배짱이 둑실한 놈이라는 것을 모르던 데로부터 알 게 된 것이다. 하루 강아지 같은 놈! 귀여운 놈!! 어쩌면 나는 그때 속으로 그렇게 웃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놈을 잊어버렸다.

    20년이 지났다. 이번에 나는 놈을 한국에서 만났다. 놈은 나보다 석 달 먼저 와 있었는데, 방문취업제 H-2 비자였다. 어떻게 알고 내 위챗을 먼저 추가해왔다.

    “살춘각?1언, 2언, 3언을 읽었다. 글 안 쓰니까 죽었는가 했더니 죽진 않았더구나.”

    녀석은 신대방의 한 개장집에다 료리를 시켜놓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이였다. 나는 가던 길을 틀어 사촌동생 조은경네로 향했다.

    창렬이가 헐레벌떡 쫓아왔다.

    “야, 이놈아. 이 형 면목도 좀 봐줘야지. 대갈통도 안 디밀구 가뻐리ams 나는 뭐가 되냐? 암튼 난 이미 샀으니까 나중에라도 군소리하기 없기다?”

    그때부터 나와 창렬이는 자주 만났다. 집 떠나기 딱 싫어하는 령감님 성질 때문에 주로 창렬네 집에서 만났다. 대신 술과 안주는 허령감이 갖췄다. 하기 쉬운 닭이나 오리 따위였다.

    마주 앉으면 우리는 티각태각했다. 나는 창렬의 시를 시도 아닌 가사도 아닌 짬뽕이라고 놀렸고, 창렬이는 내 소설을 삼류라고 비하했다. 창렬이는 시도 쓰고 평론도 쓰는 재간둥이였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창렬이는 돈이 없다보니 평론을 돈 받고 퍼그나 써 줬는 모양이였다. 그것을 창렬이는 한면으론 부끄러워 하면서도 두면으론 자랑스러워도 하는 것이였다. 부끄럽다는 것은 돈을 받았다는 것이였고 자랑스러웠다는 것은 그 사람이 시인으로 떠올랐기 때문이였다.

    창렬이는 노래도 많이 만들었다. 시도 가사에 시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문단행태를 보면 가차없이 필을 날렸다. 그런 칼럼이 나간 뒤면 모두들 뒤에서 욕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썼다. 그래서 창렬이는 친구가 별로 없다. 한때 중국조선족문단을 욕해놓고 스스로 왕따 당하기도 했다. 입이 걸싸서 욕이 심한 건 둘째 치고 눈에 거슬리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였다. 본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겠느냐고 지사 왼고개를 치는 걸 어찌하겠는가.

    알아본즉, 창렬이는 리혼을 하고 한국에 나온 터였다. 말로는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그리 됐다는데 진실여부는 알바 없다. 하지만 창렬이는 리혼한 마누라를 몹시 사랑했다. 돈지갑에 마누라사진을 항상 넣고 다녔는데 어느 날 창렬이 취한 틈을 타 억지로 구경했다. 미인이였다. 가히 미인이라 할 수 있는 한 미모를 지닌 녀인이였다. 사진이여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남자라면 이쯤 되는 여자를 데리고 살아야지 않겠냐? 나 이제 돈 벌어서 꼭 마누라를 데려오고야 말거다. 절대 다른 놈한테 안 뺏겨!”

    창렬이한테는 효정이라는 딸이 하나 있는데 연변대학에 다녔다. 어느 여름방학 때에는 한국에 와서 놀았는데 계산해보니 한화로 500만원이나 썼더라는 것이다. 기집애, 돈 쓰는 건 지 애비 닮아갖고, 잔뜩 헤퍼서 어쩌겠는지 몰라. 혀를 툭툭 차는 것이였다.

    남들은 창렬이를 속이 좁아 터졌다, 남자란게 잘 삐진다... 말하지만, 의외로 나한테만은 수월했다. 나는 창렬이네 집에 가면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지고 나온다. 피우는 거, 마시는 거, 신는 거, 입는 거... 그래도 창렬은 더 주지 못해 헤맨다. 그만큼 창렬은 의리파인 것이다.

    창렬은 웬만한 사람들의 시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창렬의 말대로라면 세상에서 허창렬만큼 시를 잘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창렬의 눈에 드는 시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욕이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합지졸 같은 시를 놓고 창렬은 한바탕 훈계까지 서슴치 않는 것이였다. 그러니 옆에 사람이 있겠는가. 창렬이를 따르던 녀자들마저 다 떨어져나가고 마는 것이였다. 해도 창렬은 꿈쩍도 안했다. 널린 게 녀자인데 뭐.

    창렬은 부지런했다. 눈만 뜨면 시를 썼다. 밥 먹다가도 쓰고, 화장실 가면서도 쓰고, 지하철은 물론, 일을 하면서도 썼다. 하도 핸드폰을 들고 끄적이고 있어서 나한테 핀잔을 들은 적도 있다. 니가 토끼냐.

    한국에서 살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노가다일이란게 보통일이 아니다. 노가다일을 십년만 하면 온몸이 다 노달이 나서 절거덕거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창렬이는 노가다에 붙었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8남매의 막내로 자라난 창렬이가, 그것도 별 고생 모르고 성장한 창렬이가 노가다를 하면서 시를 쓴다는 걸 한 번 상상해보라. 그림이 안 나올 것이다. 어느 한 번 창렬이는 나한테 손을 내보여줬다.

    “아침이면 손이 펴지지를 않는다. 싹 꼬부라들어서 반시간씩 주물러줘야 그날 일을 할 수가 있다.”

    작년 12월 말이였다. 중국에 들어왔던 나는 사회통합프로그램시험 보러 한국에 들어갔다. 창렬한테 전화를 넣었더니 수원에 있단다. 일자리가 줄어들어서 지방으로 밀려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언제까지 있느냐 시간 맞춰 올라오겠노라고 했다. 나는 배부른 소리를 했다. 힘들게 올라오느라 바쁘게 내려가느라 하지 말고 새해에 다시 만나는 걸로. 그런데 놈이 내가 귀국하기전 밤도와 올라왔다. 역시 은경네다.

    “니눔 하나 보구 싶어서 왔지. 아직까지 이 세상엔 나를 미친 눔, 꺼질 눔, 싸가지 없는 눔이라고 욕할 수 있는 놈은 너밖에 없다. 나는 남을 욕할 수 있어도.”

    그게 놈과의 마지막 자리였음을 그때의 내가 어찌 알았으랴. 그때까지만도 나는 태평스레 래년 일이월에 다시 보자, 벚꽃축제때 보고 무궁화머리때 또 보자 했다. 정말이지 나는 그럴 수 있을 줄로 알고 있었고 또 믿고 있었다. 코로나씹구인지 코로나씹팔인지 하는 것이 전 지구를 휩쓸지 누가 꿈엔들 알았겠는가.

    구정 쇠고 나간다던 것이 못나갔고, 꽃이 필 무렵이 되자 하늘길이 완전 막혀버렸다. 좀 잠잠해질 것 같더니 이번에는 광화문집회요 사랑교회요 하더니 아주 트위데믹으로 터져버렸다. 녀석과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8월 1일 저녁 8시 20분으로 나와 있었다.

    그날 녀석은 무슨 말을 했던가. 그렇지. 딸 허효정에 대해 얘기했었지.

    “야, 내 딸 대학 졸업하고 얼마 전 광주에서 취직했다”

    “그래? 잘 됐다. 시름 놨구나. 이제 집어주기만 하면 되겠네? 제발 너 같은 밴댕이만 만나지 말기를.”

    “이런, 코풀레기. 그나저나 우리 딸내미 돈이 필요하다는데 나 지금 돈이 얼마 없어. 한 이천소시 있을가. 광주에서 세집 맡고 생활비 쓰고 하자면 적어도 만원은 있어야겠는데 말이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요 몇 달 일을 전혀 못했잖니.”

    “효정 외가집에다 말해봐.”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햐~ 그나저나 개 쪽팔린다야. 이 허창렬이 언제부터 이런 신세가 됐다냐...”

    이게 마지막 통화였다. 그리고서 녀석은 9월 7일 일요일 서울시간으로 오전 11시 27분 <재한동포작가그룹>에서 이런 말을 한다.

    ?강원도 철원에 하루 일당 8만원 받고 감자 캐러 가는 친구를 지켜보며 내가 왜 눈물이 날가?

    ?그놈은 그래도 친구인 내가 생각이 났는지 전화가 와서 좀 힘들긴 하지만 한 번 해볼래 하길래 하루 일당 15만원씩 받던 내가 그것까지 해야 되나 잠간 망설여지다가도 너무 갑갑한 현실에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어느 강원도 깊은 산골에라도 들어가 감자라도 캐야 하나도 싶고? 내 인생이 진짜 드라마 ㅋㅋ.

    그리고 월요일 오전 9시 42분에는 “새끼 손가락”이라는 신작 시를 올린다.

 

    산으로 간 애인은

    다섯 손가락 중 어느 것이 제일 예쁜가고 묻는다

    이 세상의 수많은 것을 움켜쥐였다가

    남자의 심장을 꽈악 움켜쥔 그 손에서는

    맑은 피방울이 아침 미소로 곱게 피여 오른다

    살고 싶은가 순종하라

    태여나면서 내 것이였던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없다

    태양이 지구를 팽이 돌리듯이

    지구가 우리를 끌어당기는 그 힘,

    우리가 매일 산으로 가는 원인은

    숨가쁜 하루 일상에서 잠간 벗어나고 싶기 때문일뿐이다

    수컷들이 암내를 맡고 매일 암컷들의 주변을 맴도는 것은

    암컷들에 대한 일종의 존중일뿐이다

    암컷들이 매일 수컷들의 눈치를 살피고

    수컷들이 암컷들에게 선뜻이 고기 한 점 내여주는 것은

    사랑이 아닌 본능일뿐이다

    기실 난 내 애인의 다섯 손가락 중에서

    가냘픈 새끼 손가락을 제일 좋아할지도 모를 일이다

 

    창렬이는 그렇게 강원도 산골로 감자 캐러 떠났다. 화요일 오후에 올라가서 이튿날 9일 새벽에 잠자는 모습 그대로 시체로 발견됐다.

    창렬이는 현재 경기도 파주 의료원에 있다고 리동렬이 전했다. 한국에 있는 큰누나가 경찰서에서 상담 받고 있고, 사인은 심근경색으로 잠정 결정됐다 한다. 경찰서에서는 부검까지 갈 모양이다. 따라서 장례시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설사 정해졌더라도 나는 갈 수가 없다. 멀리서 명복만 빌뿐이다.

    창렬은 소신이 있다. 우리 둘은 마주 앉으면 풍란화 같은 지조에 대해 자주 얘기했다. 작가에게서 지조를 빼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소신이 있는 만큼 창렬은 외로웠다. 어디 술 마실 친구조차도 변변찮았다. 창렬은 생활에서도 외로웠다. 말로는 널린 게 녀자라고 큰소리쳤지만 정작 마음먹고 만날 녀자는 없었던 모양이다.

    창렬은 본처를 기다렸다. 그리고 사랑했다. 어느 날 창렬은 본처에게 남자가 생긴 것 같다며 눈가에 물기를 번들거리는 것이였다. 그 이후로 창렬은 본처에 관한 말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창렬의 사인 심근경색에 대해서는 나름 짚이는 데가 있다. 창렬이는 마흔이 넘으면서부터 양위에 시달렸다. 그 처방으로 비아그라를 복용한 것이다. 한 번은 나한테 비아그라 한 알을 주면서 하얀 병 두개를 주는 것이였다.

    “심장에 관여하는 약이다. 비약 먹을 땐 꼭 함께 먹어줘야 돼. 안 그럼 위험해.”

    “너 혹시...?”

    “응. 별로 좋진 않아. ㅎㅎ.”

    그 노란색의 비아그라를 나는 지금까지도 가지고 있다. 그 속에서 창렬이가 방불히 웃고 있는 것 같다.

    살려고 애썼던 친구.

    시를 목숨처럼 여기고 일가를 이루려고 했던 친구여.

    너 알고 있니? 니가 죽자 그룹마다에서 너의 시로 도배되고 있다는 걸. 살아서는 개싸가지였다가 죽으니까 천재로 칭송되는 너라는 걸. 너 알고 있니?

    살아서 술 마실 적에도 우린 롱담처럼 그런 말을 주고받았었지. 천재가 되고 싶거든 일찍 죽어라.

    하지만 창렬아, 넌 너무 일찍 죽었다. 뭐가 그리 급해서 그리도 서두른 것이냐. 그리도 천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냐. 나는 지금도 네가 죽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창렬이가 죽었다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하던 창렬이가 죽었다고!

    “우리는 <중국조선족>”이라고 웨치던 풍란화 같은 삶을 신봉하던 그 창렬이가 죽었다고?!

 

    1

    나는 살아 죽어야 하리

    이 나라 이 땅에

    개구쟁이처럼 쑥부쟁이처럼

    가난에 목 메인 웃음

    신들메로 꼬옥 조이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들로 산으로 그렇게 떠나 가리!

    구려하 칠백리 료동벌은

    삼학사의 통곡소리련가?

    백암성 오홀골성 소쩍새 울음소리는

    뼈에서 짜낸 휘파람소리련가?

    선친들이 일궈놓은

    밭고랑 떠나 나는 구름으로

    먼 곳을 떠나간다

 

    2

    한치의 제땅도 없는 내 인생에

    진달래꽃이 활짝 핀다

    아리랑꽃이 활짝 핀다

    눈물은 사치한것,

    뒤돌아 보면

    위나암성 성벽에는

    류혈이 랑자하구나! 누가

    우리를 쪽박 차고

    두만강 건너 압록강 건너

    살길 찾아 떠나온

    월강 민족이라 하였던가?

    어디에 살던 우리네

    가락에 덩실덩실

    우리네 정서에 훈민정음이

    뼈속까지 법글로

    새겨진 중국조선족

 

    3

    어디에서 어떻게 살던

    내 이름 석자에 조상의

    얼이 깃들어 있으면 그만

    어디에서 무얼하며 살던

    만나면 반가워

    서로 어깨 부둥켜 안고

    김치에 막걸이에

    진한 정 짠하게 나누면 그만

    생성사멸의 인생

    두만강 기슭의 자갈돌이면

    어떠하리 압록강 기슭의

    이름 모를 물새면 또 어떠하리?

    봄이 오면 새 울음소리에

    씨앗 뿌리고

    가을이면 도리깨 높이

    쳐들어 하늘을 타작하던

    우리는 중국조선족

 

    4

    너무 멀리는 가지마라

    갔던 길 되돌아 올수 있게끔

    길섶에 봉선화며

    진달래꽃 뿌리며 가자

    백합이 만개할 무렵

    고향이 그리워

    친구가 그리워

    인정이 그리워

    엄마가 그리워

    아빠가 그리워

    고향으로 되돌아 올적에

    갔던 길에 꽃내음

    맡으며 길 잃지 않게끔

 

    5

    올망졸망 강기슭 따라

    오손도손 모여앉았던

    하얀 초가집이 쓰러진다

    아버님의 연자방아

    디딤돌위에 잡초가 무성하다

    내 고향은 컴퓨터 마우스로

    이제 말끔히 지워야 하나?

    품생품사 품두논족

    난 이제 내 이름에

    금빛 도금해야 떠떳이

    살수가 있나?

 

    6

    남에 가면 조선족

    북에 가면 동포

    이률배반의 어설픈 명작ㅡ

    동질의 이질감에

    상처만 깊게 패인다

    백년도 채 못 사는 인생

    뭘 바라고 네것 내것

    그렇게 알뜰히 따져왔던가?

    돌아서면 언제나

    슬며시 따라와 내곁에 서는

    너는 나의 그림자

    나는 너의 구름

    한송이ㅡ

 

    7

    연변에 살아도 좋다

    료녕에 살아도 좋다

    흑룡강에 살아도 좋다

    이 세상 그 어디에 살아도 좋다

    만나면 반갑게 두 손

    덥썩 잡고 알싸한 된장국에

    술 한잔씩 털어 넣고

    아리랑에 쓰리랑

    눈물 딲으면 너는 조선족

    이 나라 이 땅에

    무궁화 꽃이 아닌

    개나리 천지꽃이라도 좋다

    북경에서 만나도

    상해에서 만나도

    서울에서 만나도

    뉴욕에서 만나도

    품생품사 품두논족

    우리는 중국 조선족?

 

    그렇다. 창렬이는 살아서 죽었고, 죽어서 살았다.

    “중국조선족”, 창렬아. 너야말로 진짜 프로다.

    잘 가라, 친구야.

    부디?

===============================================///

[편집후기]
「허창렬시문집」을 펴내면서
(ZOGLO) 2020년11월25일 

이동렬 재한동포문인협회 대표

고 허창렬(필명 허인) 시인이 심근경색으로 불시에 세상을 하직한 것은 지난 9월 9일 저녁이었다. 1968년생인 그는 만 52세의 아까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해서 재한조선족문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멘붕이 왔었다! 그래도 가슴 떨림과 함께 고 허창렬 시인의 파란만장한 삶의 기록과도 같은, 그 속에서 응축되고 점화되어 피어난 불꽃같은 생각이며 사상이며 감성들을 그린 시편들을 모으고 선정하여 기어이 '먼 훗날'이란 시문집으로 내놓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 과정은 너무나 힘들고 버금찼었다. 거의 두 달간, 나는 허창렬 시인의 시적 세계에서 그가 아파하고, 외치고, 갈구해온 시들을 보면서, 시도 때도 없이 하염없는 눈물을 흘려온 것 같다. 사람이 어떻게 그리 외롭게, 하루아침의 이슬마냥 허무하게 갈 수가 있을까? 삶이란, 목숨이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누군가 훅 불면 쉽게 꺼져 버리고마는 그런 존재일까?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들은 물론, 그를 알고 그의 시를 아끼던 모든 독자들도 허 시인의 불행에 대해 가슴 아파했고 애석해 했으며 깊은 조의를 표했다. 또 허 시인이 생전에 내지 못한 '시문집'을 출판해주자는 데 함께 뜻을 모았다. 맨 처음에 고인의 지기인 변창렬 시인이 찾아와서 "가슴이 먹먹하다"면서 "허창렬 시문집을 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해서 같이 고민을 하다가 나는 "그러는 게 좋겠다"고 바로 결단을 내리고 '추진위원회'를 설립했다. 그의 시문집을 내는 것이 바로 고인에 대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라는 생각을 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문집을 편집하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허창렬 시인이 생각하고 아파하고 사랑해왔던 것이 바로 우리 회원들이 지금 겪고 있는 디아스포라 삶의 복사본이 아니겠는가! 그의 문학이 바로 우리 동포들의 문학이요, 그가 거둔 성취가 바로 우리 동포문인들의 성취인 것이다! 삶과 죽음의 터널에서 그가 주조해낸 시문학의 주춧돌들을 가져다가 마땅히 우리 동포문학의 성전을 쌓아가는 데 써야 바람직할 것이다.

이에 변창렬 시인이 '허창렬 시인 시문집' 출판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장경률, 김경애 재한동포문인협회 공동회장과 리춘화 수필가가 부위원장을 맡았으며, 총괄은 내가 담당하기로 했다. 변창렬 시인이 100만 원의 후원금을 내고 유족이 50만 원 후원금을 내자 중국과 한국의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금들을 내서 바로 출판 자금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전광옥, 리춘화, 변창렬, 리다연, 리성철, 차영화 등 추진위원들이 위챗이나 조글로 등에서 허창렬 시와 평론을 앞다투어 수집해서 제공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특히 리춘화 선생과 리다연씨의 노고가 컸다. 교정은 김경애 시인과 강성봉 동북아신문 편집인이 책임을 지고 했고, 책 편집 및 출판 등은 '도서출판 바닷바람(발행인 이동렬)'에서 진행을 했다. 마침내 '허창렬시문집'에는 허창렬 시인의 130수의 시와 8편의 평론, 김철호 시인과 장경률 칼럼니스트의 추모글 2편을 선정해서 수록하게 되었다. 많은 분들이 추모글을 보내오셨지만, 작품을 한편이라도 더 싣자는데 의견이 모아져 아쉽게 이렇게 마무리를 했다.

솔직히 지난날, 고 허창렬 시에 대해 나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시를 너무 쉽게 쓰지 않느냐는 생각에서다. 성격도 어지간이 과격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를 주었다. 재한동포문인협회에서 부회장을 역임했고, 동포문학 대상도 받은 사람이라서 더욱이 그의 언행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후 나는 곧 그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고 절대 독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됐다. 협회 행사를 할 때 초청을 하면 꼭꼭 참석을 했다. 자존심이 강한 그는 항상 형님이 불러서 할 수 없이 왔다고 말했다. 사석에서 가끔 술잔을 나눌 때면 "형님, 형님" 하면서 몹시 친근하게 굴었다. 우리 협회가 금방 설립됐을 당시 그는 "형님, 이래가지고 될 것 같아요? 다들 이런 수준을 갖고 무슨 문학을 한다고 그래요?"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개별적으로 협회 회원들한테 간혹 인정 사정없이 비평을 하면서 "시가 시 같지 않다. 그렇게 쓸 바에는 아예 절필해라"고 화를 내기도 했었다. 물론 몇 년 후 협회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자 그도 어느 정도 인정을 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가 지적한 것이 옳았었다.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문학의 경지에 대해 이해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협회의 화목도 중요하지만 문학다운 문학을 해야 진정한 문학 단체로 거듭날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선비였다. 아주 꿋꿋한, 문학에서만은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지켜온 올곧은 선비였다. 일찍 중국 요녕일보 문학편집 및 기자로 재직했던 그는 오직 문학으로 살고 문학으로 죽은 선비다운 시인이었다.

그의 시를 선정, 편집하면서 느낀 점은 먼저 우리가 너무도 허 시인을 몰랐다는 점이었다. 그의 시를 읽어보면 이미 허창렬다운 시풍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의 시문학의 기조는 역시 디아스포라문학에 기반을 둔 것이다. 가족과 친인들이 고향을 떠나 각자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살아가는, 고국이라지만 낯선, 자식 대학공부를 시키기 위해 부득불 돈 많이 받는 건설현장에서 뛰어야 했던, 고속도로 발전하는 자본주의 현대문명과 접목점을 찾을 수 없었던…! 아무튼, 신문사 기자 출신이었던 자존심을 한국 생활에 녹여 내기 정말 힘들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런 자존심은 그대로 그의 시문학에서 표출됐다. 그의 시는 방황하고 아파하고, 그러면서도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시 '춤추는 왜긍하倭肯河'는 첫 구절부터 '나는 왜 아버님을 그곳에 묻고 여기 왔을까?'로 시작을 해서 가족의 아픈 역사를 써 내려가다가 이미 고향을 떠난 자신한테 '왜긍하는 내 삶의 하나의 인생 정거장이다'라고 고백한다. 떠나면서 고뇌하며 사는 것이 운명이란 말이다. '밥 한끼' 시 첫머리를 보자. "내 늘그막에/얼마나 큰 금덩이 안고 살려고/이 밥 한 끼/게걸스레 삼키고/목이 콰악 메이는가?"라고 토로했다. 디아스포라 현장에서 먹고 살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뛰어온 중국동포들이라면 이 한 마디 시구에 누구나 가슴이 울컥해 날 것이다. 시 '산다는 것1' 마지막 연에서 그는 "산다는 건/눈물이 나는 일/산다는 건/미어지는 앞가슴을/햇볕에 깨끗이 말리워야 하는 일/웃으면 하얗게 소금이 내 돋는 일"이라고 쓰고 있다.

그렇게 밥 한끼를 위해 뛰면서도, 밥 한끼에 "목이 콱악 메이"면서도, 그는 눈물을 "햇빛에 깨끗이 말리워" 웃으면서 "하얗게 소금"을 빚고 있었다. 시 '용쓰는 날'을 보면 그가 심장병과 당뇨병을 앓으면서도 가장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향에 두고/떠나 온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다/사랑하는 딸애의 학비를 부치며/먹고 살기 힘들다보다/그래 조금만 힘내자/눈물로 술 한 잔 삼키는 것이/이 세상 아버지들의/가장 쓰라린 마음일 뿐이다"라고 읊고 있다. 시인의 양심고백이다. 이런 시들이 그의 시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한편, 그는 아파했기에 물욕으로 꽉 차서 넘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자기만의 아름다운 세계와 사랑을 추구했었다. 그의 시구속에는 유난히 '별'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많이 표현한 것 같다. 시 '먼 훗날'을 보면 "어느 하늘 어느 별/아래에서/그대가 내 이름을/불러 준다면/내 평생 부르고 싶어도/못 다 불렀던 그대 이름을/목이 메여 불러 주리라"고 쓰고 있다. 이 시구에는 사람간에 삭막해지는 현실의 '非情'을 빗대고 비판하면서 서로가 나누고 싶어하는 정과 사랑에 대한 갈구를 눈물겹게 보여주고 있다. 묻노니 과연, 그게 "어느 하늘/ 어느 별/아래서"만 가능한 일일까?

그의 시구는 소박하고 간결하고 직설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수법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다. 절대 미사여구가 없다.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선비의 기질로 점철되어 있다. 어쩌면 그는 김소월이나 윤동주 시인의 시를 많이 보고 답습하면서 그들의 시풍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기의 시풍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평론가가 아니다. 또, 여기서 허창렬 시인의 시를 다 평한다는 것도 무리다. 말타고 꽃구경하는 식으로 편집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간략하게 적을 뿐이다. 앞으로 문학세미나 등을 통해 고 허창렬 시인의 시에 대해 제대로 되는 평가를 내려주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뿐이다.

마지막으로, 허창렬 시인의 딸 허효정씨와 연락이 되어 그가 보내온 글을 책의 머리글로 대신할 수가 있어 한결 마음의 위안이 된다. 고 허창렬 시인도 하늘나라에서 고마워할 것이다. 이미 대학을 졸업해서 중국 광주 모회사에 출근하고 있는 허효정씨는 글을 통해 아빠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너무나 절절하게 보여주었다.

이 세상에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움은 항상 남아있을 것이다! 허 시인의 시 '먼 훗날'에서 읊었듯이 "그대가 내 이름을/불러 준다면/내 평생 부르고 싶어도/못 다 불렀던 그대 이름을/목이 메어 불러 주리라". 서로가 부르면서 이해하고 생각하고 사랑해준다면 이 세상은 그래도 살맛이 나지 않을까? 허창렬 시인이 꿈꾸며 바란 것도 바로 그런 세상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이 사랑을, 고 허창렬 시인의 영전에 바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20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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