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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밥상
2014년 07월 26일 08시 53분  조회:1098  추천:0  작성자: suseonjae


어머니의 밥상
 
 
 
 
된장찌개를 먹을 때면 아주 가끔씩
떠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두 가지의 기억이 있다. 
나에게는 두 분의 어머니가 계신다.
한 분은 돌아가신 나의 친모이시고,
또 한 분은 지금의 계모이시다.
두 분의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두 분의 어머니를 사랑한다. 
 
나는 두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따뜻한 밥상 이야기를 하고 싶다.
첫 번째는 나의 친모이신 어머니의 밥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몇 컷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 시절의 기억을 풍경화로 표현하자면
온통 흑백으로 칠해진 우울한 그림처럼 어두운 그림으로 남아있다.
그 그림들 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모습이 있다.
구석진 곳에서 울고 있는 한 아이 모습이다.

왜 그렇게 부부싸움을 많이 하셨는지 당시 나는 몰랐었다.
몇 컷 안 되는 기억 속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매 맞는 어머니와 그 옆에서 공포에 떨며 울고 있는 나의 모습….
슬픔으로 가득 찬 어머니의 모습과 눈물.
이 모습이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의 대부분이다. 
 
한동안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전에도 그런 적이 종종 있었던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것을 보면
그렇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도박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우리 집뿐만 아니라 외가댁에도 많은 도박 빚을 남겨서
그 빚을 갚느라 거동이 불편하신 외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환갑이 훨씬 지난 나이인데도 어부생활을 이어가셔야 했고,
부유했던 우리 집은 생계를 위한 화물차 한 대만을 남겨 둔 채
모든 재산을 정리해야 됐다.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3~4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쓰셨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고,
집에서는 간혹 교인들이 아버지가 없는 시간에 찾아와
함께 찬송가를 부르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주님의 자식에게
용기와 격려를 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번 잃었던 신뢰는 회복하기가 어려웠다. 
 
운송업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야 했던 아버지는
집을 비우는 일이 많으셨고,
자신이 집에 없는 시간에 어머니가 무엇을 하며 다니는지
철없던 나에게 물으시고 주변 사람에게 물으시며 뒷조사를 하고 다니셨다.
그런 날이면 언제나 부부싸움이 있었다.
부부싸움이라고는 하지만 일방적으로 매 맞는 어머니의 모습만
머릿속에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저녁으로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머니는 물으셨다.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는 옛날 기억을 더듬으며 어머니가 해 주신 음식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 기억이 오래되어서 모르겠는데 엄마가 해주던 건데….
국물이 빨갰던 것 같고, 꼬랑내 같은 냄새가 났었지만 아주 맛있었어.
두부도 들어갔던 것 같은데 그게 제일 먹고 싶어."
그것이 된장찌개였다는 것을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얼마 후 어머니는 맛있는 된장찌개와 반찬들이 맛깔스럽게 어우러진
푸짐한 저녁을 준비해 놓으시고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밥을 먹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계셨다.
밥을 다 먹고 나자 조용히 눈물을 흘리시며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나를 확 껴안으시더니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셨다.
영문도 모르고 품에 안긴 나는 어머니의 가슴이 따뜻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었다.

그렇게 한참을 우시고 나서 어머니는 만원을 건네주며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맛있는 거 사먹고 놀다오라고 하셨다.
그것이 내가 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어머니는 자살을 하셨다.
내가 밖으로 나간 뒤,
바로 농약을 먹고 한 많은 인생을 스스로 마무리하셨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어머니의 심장소리를 내 귀로 똑똑히 들었었는데,
영안실에 싸늘히 누워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믿겨지지가 않았다.
큰 충격이었다. 
 
그 뒤로 나는 명상을 만나기 전까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어머니가 새어머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친구 녀석들이
“어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셨냐?” 라고 가끔 물을 때마다
나는 “아파서 돌아가셨다.”고 얼버무리고는
죽음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기 전에 얼른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
그때의 기억을 닫아 버렸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밥상의 추억이다.
가슴 아픈 순간이지만
나는 이때 느낀 어머니의 따뜻했던 가슴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어머니에 대한 유일하게 따뜻했던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모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때면 이 순간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픈 기억도 함께 해야 하기에
따뜻한 슬픔으로 아마 오래도록 기억이 될 것 같다.
자식을 앞에 놓아두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심정을 느낄 때면 그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와 한참을 운다.

명상에 입문하고 나서 ‘나는 누구인가?’를 쓰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 밥상의 기억이 떠올라 몇 시간을 서럽게 울었다.
그 눈물은 어머니의 선택과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해
그 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자식의 서러운 삶이 함께 어우러진
두 모자의 눈물이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이 지나고 나서 지금의 새어머니가 오셨다.
두 번째 어머니의 밥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잠깐 가족 이야기를 먼저 해야 될 것 같다. 

 
 
나는 3형제 중 막내이고 아버지는 두 번의 결혼을 하셨다.
첫 번째 결혼하신 어머니와 지금의 형들인 아들 둘을 낳으시고 이혼을 하셨다.
왜 이혼을 했는지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만남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당시 아버지는 화물차 10대를 보유한 운송업체 사장이었고,
어머니는 그 회사에 근무하던 경리였었다.
외할머니의 말로는 당시 20살이었던 어머니는
영화배우 뺨치는 이국적인 외모의 아버지를 엄청 사모했었다고 했다.

당시 유부남이었던 아버지와 결혼을 하겠다고 때를 써서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시고
그 후 내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그동안 어머니의 빈자리와 돌보지 못했던 가정,
그리고 남아있는 아들들을 위해서 이혼하신 어머니와 다시 재혼을 결정하셨다.
아니 설득당하셨다고 해야 될 것 같다.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문 앞에 놓인 수 켤레의 신발들과 아버지의 구두를 보았다.
아버지는 허전함을 달래보고자 친구들과 종종 재미삼아 고스톱을 치셨다.
나는 아버지 옆에서 담배 심부름을 거들며 용돈 버는 재미에
신나게 고스톱 판을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때론 똥 광에 가위눌린 꿈을 꾸기도 하면서 말이다. 
 
나는 예전처럼 아버지 친구들이 고스톱을 치러 왔는가 보다고 생각하며
무심코 방문을 열며 “학교 다녀왔습니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처음 보는 낮선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선은 근심과 걱정, 한숨이 섞인 애달픈 눈빛들이었다.
그중에는 지금의 새어머니도 있었다. 
 
새어머니가 들어오고 나서 10년 정도의 생활은
지금의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어머니에게 구박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그 구박은 밥상 앞에서 더욱 심했다.
난 혼자서 밥 먹은 적이 많았다. 
 
큰 형은 지방에 대학생이었고, 작은 형은 입시준비로 밤에야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화물차 운전을 하시느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으셨다.
또 집에 있는 날에는 장시간 운전으로 인해 잠을 청해야 하셨기에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시간도 드물었다.

집에 있는 날이면 행여나 아버지가 잠에서 깰까 봐
방문도 도둑놈처럼 소리 없이 열고 닫아야 했고,
발뒤꿈치는 항상 들고 다녔다.
조금이라도 발소리가 나면
새어머니가 당장 달려와서는 불호령을 내리셨다.
아직까지도 이때 베인 습관이 종종 나오기라도 할 때면
습관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어쩌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을 때가 있다.
같은 밥상에서 나는 찬밥을 먹고 내 앞에는 김치만 놓여있다.
반면 형과 아버지 앞에는 따뜻한 밥과 반찬들이 풍성하다.

그 상황을 접하면 그냥 눈물이 먼저 나왔다.
참으려 해도 서러움이 밀려와 목이 메여 밥이 잘 넘어가지가 않는다.
그냥 고개만 푹 숙이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는
밥만 몇 번 씹어 삼키고는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
이 같은 일들은 종종 되풀이 되었다. 
 
이런 광경을 접하는 아버지와 형들은 어머니를 나무랐고,
그런 일들로 인해 나는 언제나 부부싸움의 화근이 되었다.
당시 나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집에서 보내는 하루하루의 시간들이
생존을 위한 눈치의 연속이었고
구박을 덜 당하기 위해서 최대한 머리를 굴려야 했다.
숨 조이는 시간들의 연속이었기에
나는 신경쇠약이라는 정신질환을 얻었다.

또 제대로 된 영양분을 섭취하지를 못해
황달과 간염 등의 질병들도 동시에 얻어
불행하고도 우울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힘겨운 중학교 시절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부터는
집에서 조금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는 집 앞에 있는 인문계를 선택하지 않고
차를 타고 30분은 가야 되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될 수 있으면 집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부터
집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밖에서 풀 수가 있었다.
고등학교 3년 중 반은 친구 녀석들의 집에서 보냈으며
녀석들은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을 알아가면서 각자의 환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나만 힘들고 어려운 줄로만 알았었는데
정도의 차이일 뿐 다들 비슷한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많은 친구 녀석들이 아버지나 어머니 중 한 분이 안계시고
생활 형편도 넉넉지 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환경을 접하고 그들의 고충을 바라보면서 새롭게 느낀 것이 있었다. 
 
비록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그래도 집에 가면
밥이라도 차려주는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이 참 고마웠다.
그것이 김치 하나에 찬밥이라도 나는
그 수고로움에 처음으로 새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물론 그 마음이 계속 유지되지는 못했지만
생각을 다르게 하고 마음을 바꾸어 먹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새어머니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조금씩 바뀌면서
새어머니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바뀌었다. 
 
비록 학창시절 동안 냉전은 지속되었지만
친구들의 환경을 접하면서
나는 새어머니를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어 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군대에 가게 되었다.
6개월 만에 첫 휴가를 받고 집에 왔을 때
새어머니는 펄펄 끓는 된장찌개와 내가 좋아하는 총각김치와 오징어채 등
맛깔스런 반찬들을 장만해 놓으셨다.
나에게 고생했다고 환하게 웃으시며 따사로이 반겨주셨다.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밥상 앞에서
새어머니에 대한 생각들을 하였다. 
 
배 아파 낳은 두 아이를 놔두고
아내로, 어머니로서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시리고 아팠을까…. 
 
자식과의 생이별이 얼마나 서럽고 슬픈 일인지
나는 그 기분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고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렇게 아픈 기억을 가지신 새어머니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원수 같은 여자의 자식을
지난 10년 동안이나 밥을 먹이고 키워준 것이다.
'얼마나 미웠을까, 힘드셨을 텐데….' 
 
입장 바꾸어 생각해봐도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신 것이다. 
나는 이런 새어머니가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다.
감사하는 마음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왔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서 자신의 자식들을 흉보면서
‘자식 키워도 다 소용없다고,
내가 지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하시면서
나에게 푸념을 털어 놓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하다.

나는 어머니를 보며 이렇게 말씀 드린다.
“어머니, 형들이 싫으시고 불편하시면
제가 꼭 모실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 편히 계세요.”
차려주신 밥상을 물리며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이렇게 너스레를 떨어본다.
“밥이 참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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