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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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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사람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댓글:  조회:1082  추천:0  2015-03-23
사람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의식주에서 식食의 비중이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그 의식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세계화의 비중이 갈수록 높아짐에 따라 식생활도 많은 변화가 있어  우리 방식만을 고집할 수도 없게 되었지요.      어떤 이는 식도락가여서 음식을 즐기기 위해 시간과 돈을 과감히 쓰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식탐이 많아서 음식에 욕심이 많기도 하지요.  아마 넉넉하지 못하였던 그 어느 시절에 생긴 습관이 몸에 배인 탓일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유기농의 바람이 부는 것을 보니  먹거리의 귀중함을 우리는 몸으로 느끼나 봅니다.  사람이 귀하다고 하므로 사실 귀한 음식을 먹어줘야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음식을 준비할 때는 또한 정성스레 해야 하지요.  음식과 함께 바로 그 정성을 먹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남의 집에 가서 대접을 받고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낄 때는  바로 주인의 정성에 감복해서일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는 그렇지만 또한 안 먹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고 보는데, 어디서인가 어느 스님께서 일년에 한 달 정도는 단식을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제 무릎을 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종교관에 의해서도 하시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도 음식의 고마움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또한 자신의 몸에게 쉴 시간을 주면서 나쁜 기운을 배출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배가 고파오면 사실 정신은 더 맑아집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오전금식 이런 식으로 시도를 해 보시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무리는 금물이며 3일에서 일주일 이런 식으로 시작을 해서 조금씩 더 늘려나가는 것이 방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때로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먹거리로 해결할 때가 그럴 수도 있고  또한 마음이 고플 때는 먹어도 먹어도 허전하고 배가 차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자신의 마음을 채워줘야 합니다.      사람은 본래 불완전하게 창조가 되었다고 하는군요.  그 불완전을 완전에 가깝게 변화시킬 때 사람은 사실 만족하게 됩니다. 물론 한꺼번에 변화시킬 수는 없어 하나씩 하나씩 조금씩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인데요. 충족을 시켰을 경우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며 자신감이 충만하게 되지요.  스스로 만족 시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을 제외한 다른 이는 모두 안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우리는 곧잘 “저 사람은 저게 문제야” 하는 말을 하지요.  모두가 문제인 줄 아는데 본인은 스스로에게 익숙한 탓인지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거나 하지요.      사실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이니 어떻게 이런 문제를 파서 볼 것이며 또한 본인의 문제를 안다고 하더라도 어떤 방법으로 해결을 할 것인지요. 그러므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답을 찾으려 노력하지는 않지요.      사람들은 누구라도 진화 내지 영적인 발전을 해야 만족을 하게끔 태어났으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진화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항상 갈망하고 있답니다.      우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찾아 다니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배움의 방법으로, 때로는 일탈의 방법으로, 때로는 방랑의 방법으로요.     그러므로 허전함을 느낄 때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알아 내셔야 합니다.  정신적인 허전함은 음식으로는 해결이 안 되며  만약 음식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결국 육체적인 비만으로 이어지겠지요.  본인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그 무엇을 찾아 내셔야 합니다.  사람이 먹어야 하는 양식은 식食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50    몸과 마음 댓글:  조회:1069  추천:0  2015-03-19
몸과 마음     욱체는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이자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의 결과가 몸을 통하여 표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몸이라는 것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나를 싣고 갑니다.  나를 대표하며, 나를 반영하며, 나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지요.      사람의 인체는 소우주라고도 하며 아주 오묘해서 신비스럽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의학이 많이 발달되어 인체의 구석구석이 다 파악이 되고 있지만  막상 질병의 발병 원인이나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이 나타나는 병원체 등은  의학계에서도 큰 숙제로 남아있을 것 같군요.      사람의 인체는 사실 기본적으로는 다 똑같으면서도 이상하리만큼 모든 사람이 다릅니다. 비슷하지만 길이, 넓이, 폭, 색깔 등이 모두 다르며 그래서 생김새가 모두 다르게 생겼지요. 그에 따라 행동들 역시 판이하게 다르고요.      우리의 몸을 크게 세 등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초, 중초, 상초인데요.    하초는 배꼽아래부터 골반부분이며 에너지인 힘을 담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생명력, 의지력이 주 임무이죠. 하초의 장부로서 주主가 되는 것이 신장이 되겠습니다.      중초는 흔히 말하는 오장육부가 자리하고 있는 상체부분인데 위장, 간, 심장, 폐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 색깔의 감정을 담당하고 있으며, 많은 감정 중에서도 사랑이 가장 많이 언급이 되죠.      그리고 상초는 지식과 지혜를 담고 있으며 생각을 주도하는 머리부분이죠. 각 개인의 컨트롤 타워입니다. 아직은 대략의 개요 외에는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신경계, 면역계 등 그 수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삼초 위주로 설명을 해보았습니다.  또한 장부는 육체적인 기능과 동시에 정신적인 기능도 같이 수행을 합니다.      예를 들어 위장인 소화기능이 약해졌을 때는 본인의 인간관계가 뾰족한 면은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소화기관는 음식만이 아니고 주변의 인간관계의 소화 능력 역시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간의 기능이 떨어졌을 때는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평상시 화를 잘 내시는 분이 아니신지 보고 그 성향부터 고치셔야 됩니다. 간이 태과 되었다고들 하지요. 그럴 경우 연계가 되는 부위인 눈, 목 등이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큰 그림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사람마다 모두 다르며 환경 등에 따라서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마음의 표현이 몸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관찰하면서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몸과 마음의 연계에 대해서 언급을 했지만 아시다시피 내적인 균형상태를 이루기 위해서는 육체적으로 시초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관리에 대해 서 중점적으로 설명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몸을 자동차에 비유를 하고 마음을 짐이라고 생각을 해보면 어떤 이는 태어날 때 어떠한 이유로 인해 아주 소형차를 부여 받았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최신 벤츠와 같은 좋은 차를 부여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몸이 아무리 좋은 차라 하더라도 짐을 반 이상 실으면 안 됩니다. 항상 반은 비어있어야 되지요. 용량이 크고 좋은 차라고 해도 가득 채워가지고 다니면 머지않아 고장이 나고 망가집니다.      또한 아무리 몸이 강건해도 이 몸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고장이 잘 나는 차를 가지고 먼 길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지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인 우리의 몸과 마음을 타인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몸의 중요성을 간과하여 너무 험하게 다루기도 하지만 사실 이 몸은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타인에게 맡기지 마시고 스스로 아껴주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주는 방법을 터득하여야 된다고 봅니다.       
49    부부관계 댓글:  조회:1139  추천:1  2015-03-16
  부부관계           우리는 태어나서 많은 만남을 가집니다.  우선 자신을 만나고 가족을 만나고 그리고 또 나의 가족을 이룰 상대를 만나게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 주변에서 우연을 가장한 많은 인연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나의 삶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만남도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만남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것을 어떻게 승화를 시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은 이 중에서도 부부관계에 대해서 언급을 해보려 합니다.  틀림없이 아군이라고 생각하고 가족까지 이루었을 터인데  보통은 적수로 변해버리는 탓에 콩깍지 타령도 하게 되지요.   명상을 통해서 이 모든 만남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의 모난 면도 예쁘게 봐 주실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눈을 감아 버릴 수도 있지만 부부라는 관계는 다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라고 하더군요.  나에게 없는 기운이 상대방에게 있을 때 우리는 서로 끌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내성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을 만나면 끌릴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모자라는 부분을  상대방을 통해 찾으려 하고 만족하려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에게서 찾는 것은 한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타인에게 눈을 돌리며 다른 이를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많은 불완전한 면을 완벽하게 채워줄  완벽한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꼭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되고 해서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서로 맞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고 또 우리 사회가 너무 개인적인 것에까지 참견을 하는 경향이 있어서 남까지 끌고 들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그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같이 살아가면서 부부 서로간에 하는 잔소리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어떤 불완전한 면을 지적해서  고쳐주려 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로 게으른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채찍질을 해서 고치려 하는 것이지요.  당하는 이는 괴롭습니다.  이것을 지적 받기 위해서 가족을 이루었다기 보다는  사랑하고 싶고 편안하고 싶고 만족하고 싶어서  가족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으니까요.   허나 사실은 감사해야 할 대상입니다.  나의 모난 점을 지적해주는 감사한 사람인 것이지요.  그리고 지적을 하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대충 얼버무리고 칭찬을 하면서 좋은 소리 듣는 것이 더 쉽지요.         요즘은 부부의 정형이 바뀌고 있습니다.  하나의 정형이 있어서 꼭 이래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유형의 부부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문화가 앞서 가는 곳에서는 말이죠.   최근에는 인연이 있으면 가족을 꼭 이루어야 한다는 편견보다는 좋은 친구로서 서로 도움을 주면서 같이 가는 경향도 많습니다.  요즘의 젊은이들에게서 부모의 세대보다  영성 면에서는 오히려 더 뛰어남을 봅니다.    그리고 가족을 이루어 본인이 선택한 가족에 대해서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끝없는 책임을 지려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우직한 신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다는 답은 없습니다.  혼자 가는 길이 아닌 같이 가는 길을 선택한 분들은  그에 걸맞은 어려움과 또한 즐거움이 있겠지요.  단지 혼자 가는 사람은 스스로의 격만 올려놓으면 되지만 같이 가는 사람, 다시 말해 가족을 이룬 사람은  그중 한 명으로 인해 모두의 격이 같이 떨어질 수가 있지요.  같이 상승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길이랍니다.  
48    자신의 길을 가다 댓글:  조회:1159  추천:0  2015-03-12
자신의 길을 가다       오래 전 노자 할아버지께서는 도덕경이라는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시작하신 적이 있습니다.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여러 가지로 해석이 분분합니다만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도는 도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도라고 하지는 않아도 좋다” 본인이 설명을 하기 위해서 “도” 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뜻이죠.     그리고 다음은 우리 명상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도道와 덕德은 따로따로 가 아니고 하나다 라고요. 굳이 풀어보자면 덕德의 길道이 되겠네요.     사람의 삶의 여정을 길(道)로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어떤 사람은 탄탄대로와 같은 길을 가며 어떤 사람은 골목길과 같기도 하지요.   또 어떤 이는 산 넘어 산, 또 넘어 산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길이 억울하고 공평치가 못하다고요? 그러게요. 많은 이들은 억울하고 분하게 살다가 원망하면서 허겁지겁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감사하면서 가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잘 알지를 못해서 그렇지  무슨 이유가 있겠지요. 우리네 교육이 그러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추구하는 것도 다르니 그 범위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흔히 세속적이다 라고 표현을 하는 것 말입니다. 자신의 길 각자가 다릅니다. 각자가 다른 것은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죠. 전부가 왕이 될 수도 없는 것이며   그렇다고 전부가 하인으로 살 수도 없는 것이듯 말이죠.      흔히 어떠한 사람을 보고 우리는 무슨 끼가 있다고 합니다. 특히 연예인이나 예술가들에게 끼가 있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죠.  하지만 때로는 가지고 있는 그 끼와는 상관없는   사회분위기에 의한 직업을 부모님이나 타인에 의해 강요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닌데도 하는 것이며 마치 보도블록이 다른 보도블록 위에 얹혀 있는 것처럼 자신의 자리에 있지 않고 타인의 자리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이 길이 자기 길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되시는 분은   정말 열정이 샘솟는 일인지, 만족스러운 일인지 다시 생각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행복하실 거예요. 어렵더라도 보람을 느끼실 것이고요. 자신의 역할은 사실 본인이 압니다. 단지 본인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며 잘 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길에서 자신이 경험하고, 배우고, 깨우치는 것은   자신의 진화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얻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이고요.     누군가 길은 길어서 오래 걸을 수 있으면 좋고, 좁은 길이라 구경하는 재미가 있으면 좋고, 게다가 좋은 친구가 있으면 좋은 길이라고 하네요. 생각만 해도 즐거운 길입니다.     인생의 여정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고불고불 돌고 돌아 결국 풍성한 자신을 만나는 것, 결국 본연의 자신을 만나기 위한 길(道, The Way)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나를 응원합니다!    
47    감사하는 이유 댓글:  조회:1126  추천:0  2014-11-19
    지현곤씨 (최보식기자 직격인터뷰에서)     방안에서 40년 동안을 엎드려 지내온 만화가 지현곤씨 (7월 28일보다).  그 뒤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마산의 경남대학 정문 옆 골목으로 들어가 후미진 주택 2층 단칸방에서 그는 여전히 살고 있다.      2m X 3m 크기의 방,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닿는 방이다.  척추결핵으로 뼈와 살이 말라붙은 그의 하체는 담요 속으로 숨었다.  머리맡에는 펜과 연필 들이 담긴 통, 잉크, 화판, 작업 중 통증을 완화해줄 물파스가 그대로 놓여있다.      “글쎄요, 뭐, 순식간에 ‘천지개벽’할 수가 없겠지요. 전에 봤던 그대로 틈틈이 만화를 그리고 크게 바뀐 게 없어요. 사람들의 관심에 비해 내가 부응하지 못해 아쉽네요.”     방 안에서 엎드린 그의 낙(樂)은 열린 방문을 통해 달을 보는 것이었다.  겨울에는 그쪽 방향으로 달이 뜬다.  인터뷰 당시 그의 카메라 액정 속에는 달 사진들이 들어있었다.      “망원렌즈가 없어, 쌍안경을 구해가지고 카메라 렌즈에 연결해 찍었어요. 수십, 수백억 원을 들여 하늘에 떠있는 달에 며칠간 머무는 호사를 누리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나도 만약 그런 금전적 여유가 있었더라면 꼭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물었다.    -하필 달이 왜 보고 싶은가?  “해는 눈이 부셔 볼 수 없지 않는가? 도시에서는 반짝이는 별도 보기 힘들고, 그러니 달뿐이다.”     -달을 보고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드나? “만월(滿月)이었다가 줄어들고 없어지고, 그런 달의 변화를 보면 내 생활에 변화가 없어서인지 좋더라. 일반 사람들은 달을 보고서 ‘아, 좋다’고 하는 이가 드물지만,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그대 일상에 평범한 게 다름 사람에게는 소중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것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 지난 겨울에는 만화 그리는 일보다 그냥 방문을 열어 놓고 밤새 달만 쳐다봤다. 마냥 자유롭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그와의 약속으로 나는 천체망원경을 사서 보내줬다.  그가 달을 더 즐길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망원경은 ‘장식품’이 됐다.  거동이 불편한 그에게 천체망원경은 너무 크고 지지대는 너무 높았다.  이런 사실에 그는 미안해했고, “천체 망원경이 있으니 방 안이 그럴듯하게 보여 좋다”고 말했다.      그의 계좌로는 알음알음 600여만원이 들어왔다고 한다.    장애인 만화가 진현곤씨는 지난 7월 인터뷰 후 노트북 컴퓨터를 기증받았다. 그는 “몸이 이래서 한 손가락으로 치지만, 홈페이지도 들어가고 인터넷으로 다른 분들의 만화를 보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그 성금으로 갖고 싶은 물건을 좀 샀나?  “성금으로는 신장 계통의 약만 사먹는다. 내 돈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서, 다른 용도로는 쓸 수가 없다.”     그는 만성 신장(腎臟)질환도 앓고 있다.  단백질이 몸에 저장되지 못한 채 빠져 나오는 증상이다.  40년 동안 방 안에서 지내면 이를 그냥 안고 살아왔다. 그는 외출을 두려워했다.      서울 남산에 있는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에서 그의 카툰(만평)작품이 전시됐을 때, 평자(評者)들은 “정규학력으로는 초등학교 1학년 1학기가 끝인, 말 그대로 못 배우고 방 안에서만 지낸 사람이 이 경지에 오른 것을 불가사의”라고 했다.      주최 측은 전시회에 그의 참석을 원했다. 세인들의 주목을 더 받게 함으로써 그에게 어떤 도움이 됐으면 했던 것이다.      그는 거절했다.  그 뒤 앙코르 전시회가 열렸고 훨씬 더 강한 참석 요구가 있었지만, 역시 그는 몸을 사렸다.      “방 안에서 늘 혼자 살아왔으니, 외부에 대한 공황(恐慌)장애일 수도 있고, 공포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못 간 이유는 대소변 문제 때문이다. 수십 년간 나 혼자 힘으로 그걸 해결해왔다.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하고 싶거나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 ‘참 별나다. 까다로운 성격이네’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바꿀 수가 없다. 이는 내가 인간으로서 마지막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다.      방 안에 화장실이 딸려있어 씻는 것도 내가 씻는다. 머리도 내 손으로 깎는다. 내 머리가 짧은 것은 취향이 아니라, 신장(腎臟)이 안 좋아 몸 속에서 열이 생기면 머리가 조금만 자라도 머릿속이 화끈거려 참지 못해 밀어버리는 거다. 앞부분은 그런대로 깎지만, 뒷부분은 깎고 나면 오톨도톨하다.”     이렇게 말했던 그가 인터뷰 후 40년 만의 외출을 했다.  한 번은 방송사가 와서 ‘화면’을 위해, 그를 안아서 집 바로 옆에 있는 경남대학에 옮겨졌다. 다른 두 번은 신장 계통의 질병 치료를 위한 병원 행(行)이었다.      “복지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 가게 됐다. 장정들이 저를 달싹 안고 계단까지 내려가 휠체어에 태우고, 리프트가 장착된 차량에 실었다.”     -40년 만의 외출은 어떠했나?  “경황이 없었다. 차에 실려서 거리 풍경을 봤는데...... 뭐, 사람 사는 게 다 같지. 내 마음대로 찬찬히 둘러봤으면 모르지만, 동행한 분들이 모두 바쁜데, 어디 가보자는 말이 차마 안 나왔다. 병원에 볼일 보고 다시 오는데 2시간쯤 걸렸다.”     40년 만의 외출은 우리의 기대보다 그에게 큰 의미로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그의 삶을 바꿔놓고 있는 것은 ‘노트북 컴퓨터’다.  방송사를 통해 장애인복지단체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다.  그는 평생 처음 컴퓨터를 만졌다고 한다.      “조작하는 법도 모르고, 다들 바빠서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뒤집어엎기도 하고, 불통되기도 했다. 몸이 이래서 한 손가락으로만 친다. 얼마 전에 이메일을 보내는 방법을 알았고, 딱 두 번 보내봤다.”   그의 이메일 주소는 acdozzz@naver.com이다. 가장 손쉬운 자판을 눌려서 만들어진 주소다.  요즘에는 종일 인터넷을 끼고 산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뭘 하나?  “다른 홈페이지에 들어가고 검색도 하며,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한다. 어제도 인터넷으로 다른 분들의 만화를 보느라 새벽 4시까지 했다. 인터넷에 빠지다 보니 만화는 한 달에 한 점도 제대로 못 그린다. 전에는 두 점쯤 그렸는데, 나도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나는 만화를 열심히 그려야지, 그런 재주밖에 없는데. 그래도 인터넷이 너무 재미있다. 옛날에 망원경이나 카메라에 굉장히 관심이 있어, 광고지를 보고 해당 업체에 카탈로그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 사이트에 다 나오더라. 달을 보는 것도 그렇다. 카메라에 찍어 확대해 봤는데, 인터넷에 들어가니 망원렌즈로 찍은 달 사진이 많다. 내가 찍어 보는 것보다 이걸 보면 되겠더라.”     -만화 작품은 좀 팔렸나? “아직 한 점도 안 팔렸다. 가진 사람은 없으면 불편하지만, 없는 사람은 없어도 금방 크게 불편할 것은 없다. 신문에 난 뒤로 마산시청 분들이 ‘정말로 그런 사람 사나’ 싶어 들르셨다. 그러더니 내년 초에 작품이 판매되도록 전시회를 열어주겠다는데……”     -외부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나? “나를 찾는 전화는 하루 종일 한 통도 안 걸려온다. (웃으며) 인기가 시들해져. 내 동생이 만들어준 홈페이지에는 하루 두세 명쯤 들어온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  “한 살을 더 먹어가는 게 두렵다. 나는 원숙이나 성숙함과는 거리가 먼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도움을 받았으니 사회 본보기가 돼야 할 텐데……”    
46    이화에 월백하고 댓글:  조회:1033  추천:0  2014-11-10
이화에 월백하고             김 주사, 이조 고종 재위 시 이 땅에 태어나 농사일을 천직으로 알고 생업으로 삼으시며 일흔일곱 해를 사시다 삼십 이년 전 향천 하신 분.       관직은커녕 동네 이장일 한 번 해본 적 없으신 이분을 동네 사람들은 물론 인근 주민들까지 김 주사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냥 김 씨라고 부르기엔 왠지 실례되는 것 같고 미안하여, 당시 면사무소의 부면장급인 주사로 우대하여  한두 사람 그렇게 부르던 것이 돌아가실 때까지 영원한 명예직 김 주사가 되었다고 한다.    정식 교육은 받아본 적이 없으나 한글 사용에 불편이 없으셨고 웬만한 한자 정도는 읽고 쓰는 수준인데,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서 한 번 들은 것은 토씨하나 흐림이 없을 정도이니 이분의 실력을 가히 알만하다.    농사일 외에 이분이 즐기시는 일이 하나 있는데 약주를 좋아하시고 시조 부르기를 좋아하시는 거다. 약주 드시고 취기가 적당하면 긴 수염 두어 번 쓰다듬어 내리고 두 눈을 지그시 감으시고 시조 한수 읊으시는데 이 소리가 토담 넘어 앞산마루에서 휘감김을 하는 듯하였다. 식구들 이럴 땐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움직이는데 신발 끄는 것도 안 된다. 두 손에 고무신 쥐고 싸리문 밖으로 나오면 우물에서 물 깃던 아낙네 귀 기울여 듣기 예사였다.    평시엔 조용하고 오가는 길에 마주치는 이 인사라도 할라치면, 어떤 사람이건 반드시 경어로 답례하시고 길 트여 주심을 잊지 않으셨다. 혹여 남루한 걸인이 구걸이라도 할라치면 결코 하대하지 않으시고, 소반 상에 밥 차려 드리라고 하여 오히려 얻어먹는 자가 당황하기도 하였다.      이분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약주를 너무 좋아하시는 거다. 열흘이 멀다하고 찾아오는 벗들과 건넛마을 주막집에서 한잔 드시다 귀가가 늦어지기라도 하면 자식, 손자들 동구 밖까지 나가 기다리다 모셔오곤 하였는데, 양옆에 자식들 부축 받으시는 김 주사 어른, 이럴 때면 꼭 시조 한 수 하신다.       한가할 때 손님이 오셔서 집에서 술상이 차려지고 술잔이 몇 순배 오가면 으레, 시조경연이 벌어지곤 하였는데 언제나 장원은 김 주사이시다. 감히 인근에 이분을 따를 자 없는 듯하다. 수십 편의 시조를 암기는 물론, 작자, 년대, 배경까지 둘둘 꿰고 있었으며 부드럽게 시작하여 회오리처럼 쓸어 올리고 뚝 꺾이면서 변화를 주는 김 주사님의 시조창은 정통이었으며 지금도 아련한 추억이다.     여간해서 같은 곡을 부르시지는 않는데 즐겨 부르시던 시조가 이조년의 ‘이화에 월백하고’와 김상헌님의 ‘가노라 삼각산아’이시다. ‘이화에 월백하고’를 부를 때는 어떤 사련의 정이 솟구치고 ‘가노라 삼각산아’에서는 사나이 굳은 충절을 나타내시기라도 하는 듯 두루마기 자락을 ‘휙’ 젖히기까지 하셨다. 이렇게 김 주사님이 시조를 잘하게 된 이유가 있었으니 첫째는 소질이 있으셨다. 둘째는 시조수집이다.     김 주사에게 초등학교에 다니는 넷째 아들이 있었는데 꽤나 공부를 잘하여 은근히 자랑스러운데 기특하게도 학교에서 매번 쏙쏙 시조를 배워다 알려준다.      시조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담임선생님이 이 넷째 아들에게 시조를 가르쳐 주셨는데, 이 시조는 그날 저녁이면 김 주사에게 어김없이 넘겨지고 김 주사 어른 참 열심히 시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 '풍년초' 봉지 담뱃갑 헛되이 버리지 않고 잘 모아 두었다가 이렇게 넷째가 전리품처럼 가져오는 신선한 재료를 몽당연필로 꼭꼭 눌러 쓰셨다. 시조집은 아랫목 머리맡에 모셔지는데 빛바랜 담배종이 날로 두터워지는 기쁨은 부자간의 보람이었다.    저녁에 도착한 따끈한 소재는 이튿날 아침이면 김 주사 어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데 얼핏 들어도 한자 틀림없다. 김 주사 일흔 되던 해, 늦게 두어 걱정 많던 넷째아들 장가보내 살림 내어 놓으니 부자간의 물리적 공간이 너무 커 시조 소리 듣기 어려워지는데 무심한 세월은 김 주사를 김 노인으로 만들어 가고 더구나 지난해 아내마저 저 세상 사람 되어 자식, 손자 보고 싶다고 인편에 연락 주신다.  넷째아들 술사고 안주 장만하여 고향집에 들어서며 “아버지” 부르니 누워있던 아버지 반색을 하신다. 따뜻하게 덥혀서 약주 올리는데 앙상한 아버지의 손에 들린 술잔이 슬프게 다가온다. 넷째아들 가슴이 아파 “아버지 옛날처럼 이화에 월백하고 한 번 하시죠.”하니 아버지 쓸쓸히 앞산만을 바라보신다. 앞산 참나무 가지에 감겨 되돌아오듯 하던 시조 소리가 그리우신가 보다.    "얘야, 이제는 어지간히 때가 온 것 같구나. 시조도 늙어서…."    그날 아버지의 시조는 듣지 못했지만 유언이 되고만 마지막 말씀을 주셨다. 네가 공부 잘해서 착해서 참 자랑스러웠다고. 시조 참 좋았다고…. 자식들 공부 잘 시켜서 너희로 하여금 가문을 일으키고 명문가로 발돋움하라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며칠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그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이 되었으니….      아버지!  넷째도 아버지 그때처럼 흰머리 많고 아버지처럼 자식 손자들 그리며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못난 자식 믿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해 주셔서.    하늘, 자연, 사람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공부를 하는 저희들 잘 지켜봐 주시고요, 우리들의 헌정각에 부모님 모시고 있습니다. 내일 새벽에도 향 사르고 정화수 올릴게요. 맑은 두촌리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러 갑니다.  넷째 네는 아버지 별, 어머니 별, 이름은 ‘고은 별’을 가만히 올려다봅니다.    
45    내 삶의 카모메 식당 댓글:  조회:1083  추천:0  2014-11-07
  내 삶의 카모메 식당           얼마 전 선생님의 권유로 카모메 식당이라는 일본영화를 보게 되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딱 취향인 내게, 이런 유의 영화는 참 심심하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뭔가 얻을 것이 있으리라 기대하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 속 핀란드의 한 항구도시, 일본여자 한 명이 작은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 손님은 한 명도 없이 텅 빈 가게. 창밖에는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릴 뿐이고, 뚱뚱한 핀란드 여인 세 사람이 한참을 바라보다 사라진다. 주인공은 아침마다 혼자 이상한 동작을 하며 집 거실을 왕복하는데, 가라데라는 무술의 기본동작이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배운 거라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해오고 있다고.   우연히 서점에서 만난 또 다른 일본여인이 가게에 일손을 돕겠다고 오지만, 여전히 손님은 없다. 어쩌다 들른 핀란드 청년 한 명이 첫손님이자 지금까지 마지막 손님이다. 그것도 첫손님이라고 돈을 받지 않겠다는 주인.   주인공은 그래도 매일 요리준비를 한다. 자신은 일본음식이 이곳 핀란드에도 잘 팔릴 거라고 생각한다고…. 장사가 전혀 안 되는데도 조금도 불안한 기색이 없다. 편안하고 맑은 얼굴이다. 주인공은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웃음과 정성으로 대접을 하고, 방문하는 사람들은 서서히 손님으로 또는 함께 일하는 동료로 식구가 되어가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어느새 식당은 점점 사람들로 가득하게 된다. 점심시간이면 식당은 시끌벅적하고, 조용한 핀란드 항구도시의 거리 한 모퉁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카모메 식당. ‘갈매기’라는 이름의 식당. 참 재미없는 영화였지만 보고 난 지 한참이 지나도, 그 이미지는 지워지질 않는다.     몇 년 전부터 일 년에 한 번씩 회사를 옮기고 있다. 처음 회사를 옮길 때면, 이리저리 회사를 변혁시켜보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점점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열정은 사그라졌다.   ‘여긴 아니야. 내 꿈을 이룰 곳은 다른 데 분명히 있을 거야. 내 능력이 필요한 곳이 꼭 있을 거야’ 그리곤, 회사를 옮겨 다시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고, 장애물을 만나고, 한두 번 실패하고, 실망하고. 그리곤 또 떠난다. 올해로 벌써 네 번째이다. 이번엔 그래도 일 년을 넘겼다. 난 이제 갓 일 년을 넘겼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벌써 몇 해째 반복되는 일에 많이 지친 기색이다. 뭔가 새로운 일을 하겠다며 날 불렀지만, 일 년이 넘도록 여전히 그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저 하루하루 일상을 넘기고 있을 뿐….   어느새 나의 일상도 지루해지고 있다. 반복되는 스케줄, 희망이 점점 사라져가는 회사 상황, 마치 핀란드의 나른하고 한적한 항구도시처럼. 의욕도 없고, 열정도 사라지고,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다.   영화를 본 후, 메시지는 분명했었다. 아무리 희망 없는 열악한 상황이라도 그 상황을 바꾸고,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다는 것. 나도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면,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핀란드나 네덜란드 같은 북구의 평화로운 도시에서 그런 식당 하나 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참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부러워했다.   오늘 새벽, 난 내 옆에 있던 텅 빈 식당 하나를 발견했다. 힐끗거리며 창안을 쳐다보지만,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들. 희망을 그리고 싶지만, 이젠 삶에 지쳐버려 미래를 그릴 힘도 없는 우울한 사람들. 누군가가 뭔가 해주기를 바랄 뿐, 자신은 뭔가를 만들어갈 여력은 없는 사람들. 그들이 주변에 있었다. 사무실에, 버려진 내 블로그에, 몇 개월째 개점 휴업상태인 내 온라인 카페에…. 출근하자마자 이메일을 쓴다.   =========================================   다음 주 월요일부터 뜻이 있는 분들부터 모여서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콘텐츠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 함께 논의하는 모임을 가지겠습니다.     매주 월요일 오전 11시~12시 (1시간) 인원은 몇 명이 모이든 상관없이 그냥 진행합니다. 아무도 없으면 혼자 공부할 겁니다.^^ 관심 있으신 분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아마 아무도 참석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매일 그 시간에 회의실에 앉아 있을 것이고, 그 시간에 혼자라도 스터디를 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우연히 들른 핀란드 청년처럼 한 사람이 와 앉을 것이고, 창밖으로 힐끔거리며 지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매주 난, 같은 시간에 그렇게 내 카모메 식당을 열고, 찾아올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할 것이다. 언젠가는 식당이 넘치게 북적거리며, 내가 준비한 음식을 맛볼 그 날을 그리면서.   딩동! 답장 메일이 왔다. “이사님, 금요일 11시~12시는 어떠신지요? 아무래도 금요일에는 행사가 적어서 이 시간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저도 금요일을 선호합니다.” “저도 금요일 좋습니다.”^^ “저도 금요일이요~~” “예, 알겠습니다. 당연히 해야죠.^^; 저는 요일 상관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필참!”   벌써, 손님이 이렇게나 많이 오면 안 되는데…. 내 삶의 카모메 식당!  바로 여기였다.   * 명상을 시작한 지, 9년째가 되어가지만, 삶의 힘겨움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며칠 전 명상일기를 적으며, 내 삶의 카모메 식당을 찾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우울한 상황이, 내가 들어가 빛을 내어야 할 카모메 식당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처음 시작은 초라하고, 비록 손님이 하나도 없더라도, 나의 꿈을 그리고 키우며, 미래의 손님을 기다리며 꾸준히 준비해 나간다면, 언젠간 북적거리는 날이 올 것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불편한 상황들이 날,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게 해주는 감사한 상황이란 것도 알았습니다. 꾸준함만이….   내 삶의 카모메 식당을 가꿀 수 있는 열쇠란 걸 알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44    어디 아프세요? 댓글:  조회:978  추천:1  2014-11-03
어디 아프세요?             "할머니! 무릎이 울퉁불퉁한 것을 보니 고생을 많이 하셨겠어요."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선생님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울컥’ 한다고 하신다. 지금은 그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다. 그 한마디가 그간의 세월을 회상시켰다는 것을…. 내가 그분들과 대화를 할 수 있기까지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한 손에는 다양한 해부 생리학적 지식을, 다른 한 손에는 나만의 철학을 들고 매일 매일 환자와의 전면전을 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어김없이 돌아오는 것은, "어제 보다 더 아파!" 였다.    이쯤 되고 보니 내 길이 아닌가 싶어 직종을 바꾸기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다시 나를 같은 곳으로 돌려놓았다. 결국 다시 이 길로 돌아오게 되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나름 책도 많이 보고 정성껏 치료도 하는데 환자는 왜 나날이 줄어드는 것이지….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10년이란 세월 동안 물리치료사로서의 나의 위치는 변치 않은 채 예전 그대로였다. 줄어드는 환자도 스트레스이지만 낫지 않으면서도 계속 오는 환자는 더욱 스트레스가 되었다. 낫지 않으면 알아서 다른 곳으로 갈 것이지 매일 똑같다고 하면서 더 자주 온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그런 고민을 해가면서 점점 환자가 아닌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름 책임의식이 있고 성실하지만 편하지 않고 내가 나를 봐도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 내 자신에게 너그럽지 않은데 다른 사람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인식이 생기면서 조금씩 변화를 시도해 보았다. ‘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려고 하였다.  아픈 곳이 어딘지 묻는 것 대신에 식사는 하셨는지, 치료 끝나고 어디 가시는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살아 계신지…, 누구하고 사시는지, 고향은 어딘지, 젊은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는지….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묻다보면 왜 아프게 되었는지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치료는 일상을 묻는 대화를 통해서도 할 수 있고, 등 한번 토닥이는 것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마음을 열어야 몸이 치료에 반응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비록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몸은 지난날을 고스란히 저장한다는 것을 알아가게 되었다. 몸속에는 많은 스토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매일 매일 많은 분들이 그분들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오신다. 난 이제 그 이야기들을 들어보려고 한다.   수많은 환자분들이 무심한 나의 손을 스치며 지나가는 동안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정말 중요한 치료법은 책에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틀에 한 번씩 치료 받으러 오시는 할머니는 한 겨울에도 내복을 입지 않고 다니신다. 따뜻하게 해놓은 치료용 베드를 늘 뜨겁다고 꺼 달라고 하신다.   "난 아파 죽겠는데 원장은 다 나았다고 오지 말래!" 하시면서 매일 같은 투정을 하신다. 그래서 그 할머니가 오시는 날 온도를 꺼놓고 그 자리를 권해드리니 감기 걸려 죽겠는데 차갑게 해 놓았다고 또 투덜거리신다. 가끔 그 분의 무릎이 진짜 아픈지 궁금하다. 만져보면 괜찮은 듯한데….^^;    
43    사랑의 춤 댓글:  조회:1006  추천:0  2014-10-30
사랑의 춤           여러분들은 울적할 때 어떤 행동을 하세요? 저는 울적하거나, 자신이 무척 자랑스러울 때 스스로 몸을 주물럭주물럭, 비비적비비적 거리며 마사지를 해준답니다. 위로를 해주거나 포상을 해주는 거지요! 하하하!    어느 날 기분 좋게 마사지를 시작했는데 내 몸 어딘가에서 슬픔이 퐁퐁 올라옵니다.    '어, 왜 이러지? 아…. 슬프다!' 눈물이 한두 방울 떨어지더니 급기야는 꺼억꺼억 목놓아 우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무엇이 그리 슬펐냐고요?'    제게는 유난을 떨며 집착을 하는 단어가 있답니다. 변치 않는 믿음, 변치 않는 사랑, 변치 않는, 변치 않는…. 명상을 하면서 우주의 진리는 변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도 당연히 변하는 것이라는 것. 그래서 마음도 당연히 변하고 움직인다는 것!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큰 충격에 휩싸였는지 모른답니다. 전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변치 않는 무언가를 지독히도 꿈꾸고 동경하거든요. 사실 그 마음 때문에 명상을 시작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목놓아 펑펑 울고 난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처음 든 느낌이, ‘슬프다. 외롭다…’였어요.    그래서 그 실체를 찾아 들어가 보았더니 그 안에 스스로에 대한 실망의 상처가 있더군요. 사람이 태어나서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저 역시 30년 남짓 살아오며 많이도 만나고, 또 헤어지고, 또 만나고…. 그랬지요.    아까 제가 변하지 않음에 대한 집착이 있다고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그런데 다 변해버렸던 거지요. 변하지 않도록 지켜내지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저는 모두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봐요.   ‘난 실패자다! 난 사랑의 실패자다!! 난 사랑을 지켜낼 수 없는 엄청난 결함을 가진 인간이다!!!’  의학적으로 사랑의 유효기간이 2년 6개월이라고 한다지만, 저는 변치 않는 마음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지켜내지 못한 자신이 참 실망스러웠어요. 그런 스스로가 용납되지 않았지요.    슬프게 멍~~하니 앉아 있는데 창문너머 바람이 쉬이익 불어옵니다. 언젠가 이런 온도의, 이런 촉감의 바람을 맞아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갑자기 방안이 그때의 거리로 함께 했던 사람들로 그때의 웃음, 감촉, 향기로 가득 찼어요. 왠지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웃음이 배시시 나옵니다.    문득 예전의 그들을 한 명 한 명 초대해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부스스 일어나 한 명 한 명 불러내 춤을 추었지요. 하하…. 좀 이상한가요? 어쨌든 한 명 한 명 불러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춤을 추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나더군요. 실패란 것은 없다!    그 하나하나의 과정 속에서 서로 많이 사랑했고 많이 나누었고, 지켜주었고, 즐거웠기 때문에. 그 모든 하나하나의 시간들이 다 사랑이었던 것! 그 자체로 완성이구나! 그래서 지금은 어떠냐고요?    그런 이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것. 나의 18살에 23살에 26살의 설레고 즐거웠던 기억들이 어딘가의 바람에 햇살에 묻어 있다는 것에 아주 많이 감사하지요! 실패를 많이 한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제가 알아낸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더라고요! 바로 우주의 진리는 ‘변하는 것’이라는 거.  그래서 사람도 변한다는 것. 사람의 마음도 변한다는 것. 또 그 변하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거예요. 변한다는 것은 유통기한을 넘긴 통조림이 변질되는 것하고는 아주 다르다는 것이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요!! 변하기 마련인 사랑을 변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궁금하신가요?     더 가지려고 하지 않고 서로의 빈 공간은 그대로 빈 공간으로 유지를 하며 그 안으로 바람도, 나비도, 구름도 흐를 수 있도록 남겨 두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득 고여 흐르지 않는 물처럼 썩어 버리지 않도록 말이에요. 물의 습성대로 흐르도록 두는 거죠. 그 빈 공간은 유지하며 공간 안의 꽃들과 나무와 아름다운 집과 하늘을 공유하는 것이 인간의 만남이 아닐까 합니다. 공유하고 또 흘러가면 그대로 흘러가는 대로 두고…. 흘러가 보았자 같은 하늘 아래인 걸요….    사랑의 춤을 추고 싶습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그런 춤이요. 그래서 세상사람 모두가 사랑의 춤으로 들썩들썩~~~ 하하! 호호!  그날을 꿈꿉니다.    
42    첫 자전거 여행 댓글:  조회:1013  추천:0  2014-10-26
첫 자전거 여행             끝을 알 수 없는 길이 계속 되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고 멀리서 흔들거리는 불빛은 꺼져가는 등불처럼 희미했다. 온몸 구석구석으로 밀려드는 3월의 추위는, 나의 몸과 마음을 점점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대학교 입학이 결정되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입학 전 3일간 자전거로 달려 입학식에 참가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추억 중의 하나가 될 듯했다. 그것도 무전여행으로…. 혹시라도 잘못될까 걱정하실 아버지껜, 자전거는 기차로 실어 보내고 저도 조금 일찍 가겠다고만 말씀드렸다.    평소 애지중지하던 클래식 기타 한 대와, 전국 도로 지도, 그리고 옷가지들을 챙겨 자전거에 올랐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국도로 약 500km! 온갖 부푼 꿈과 희망으로 시작한 하이킹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남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 밤낮의 극심한 기온 차, 갈증과 허기, 거기에 체력의 한계까지. 내가 생각했던 아름답고 감동적인 자전거 여행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겨우 하루를 넘기고 둘째 날. 대구에서 출발해 대전까지를 목표로 세웠지만,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옥천 경계를 넘을 때쯤, 벌써 해는 지고 주위는 온통 캄캄했다. 밤 10시가 넘어 겨우 발견한 마을 슈퍼에서, 초코바와 우유하나를 사서 먹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 가다간 탈진해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약국 문을 열고 사정을 얘기하며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는지를 물었지만, 허사였다. 처음 보는 사람을 그것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집안으로 들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당연해, 부탁한 내가 잘못한 거야’ 그나마 근처 경찰서가 있으니 가보라는 얘기에 희망을 갖고 문을 나왔다. 추위에 계속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경찰서 문을 열었다.  “하이킹하고 있는데 하룻밤만 재워주시면 안 될까요?"  "누구? 이 동네 사람인가?"  “아뇨, 부산에서 왔는데요.”  “여기는 총 같은 것도 있고 위험해서 안 돼. 다른 데 가서 알아봐.”  “밖이 너무 추워서 그러는데, 그리고 총 있어도 상관없는데요.”  “그게 아니고…. 총 가져가면 어떻게 해? 안 돼. 다른 데 가봐!”    갑자기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위험한 사람이란 얘기에.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나는 철저하게 혼자란 생각이 들었다. 온갖 감정들이 교차하면서 머리가 멍해졌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애원하듯 다시 부탁하였다.    “저 지금 너무 춥고 힘들어서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제발 좀 재워주세요. 여기, 소파에서 잘게요. 무기고 있는 곳은 얼씬도 하지 않을게요. 네?"    소용없었다. 허튼소리 말고 여기서 빨리 나가라는 말에, 너무 서럽게 느껴져 눈물이 나왔다. 혹시나 마음이 약해져 따라나오려나 싶어 뒤를 돌아봤지만, 차갑게 닫힌 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눈물이 흘렀다. 온종일 땀을 흘리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는데,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눈물이 나는지.    ‘그래, 설마 죽기야 하겠어? 밤새 한번 달려보자!’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하지만 몸은 더 이상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다 죽어갈 것 같은 몸을 겨우겨우 추슬러 길을 가는데, 저만치 불빛 하나가 반짝였다. 주유소였다. 다시금 희망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어디에서 힘이 났는지 빠르게 페달을 밟아 주유소 앞에 도착했다.  “저, 하이킹하는 학생인데요. 너무 추워서 그러는데 여기서 몸 좀 녹이고 가면 안 될까요?"  "아! 밖이 상당히 추울 텐데. 여기 앉아서 몸 좀 녹여요.”  “정말요? 정말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맞아주는 환대에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겨우 참았다. 몸을 녹이며 몇 마디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 재워줄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오히려 사장님이 오시면 큰일 나니 빨리 나가라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똑같구나. 어쩔 수 없지. 몸만 녹이고 가야겠다’  갑자기 침울해진 내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을까? 남아있는 눈물자국에 마음이 움직인 것일까? 그는 꼬깃꼬깃 구겨진 3만 원을 바지주머니에서 꺼내 내게 건넸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여관이 있어요. 거기 가서 자요. 힘들게 여행하는데 잠은 잘 자야죠. 여관비는 이 정도면 될 거예요.”  “아뇨. 전 그냥 여기서 불만 좀 쬐다 가면 돼요. 괜찮아요.”  “받아요. 여관에 가서 따뜻하게 자요.”  그저 감사하단 말밖엔 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그는 내게, 빨리 가서 따뜻하게 자라는 얘기만 계속했다. 너무 고마워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나를, 그는 문까지 열어주며 따뜻하게 배웅해주었다. 다시 자전거에 오르며 눈물은 마르고 몸은 찬바람에 떨렸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포근했다. 그날 밤, 깊은 산 속 어느 이름 모를 마을의 한 여관에서 나는 내 생에서 가장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었다.     * 고3 때, 1시간 정도를 자전거로 통학하며 시작된 나의 자전거여행은 대학생활을 거쳐 군대시절까지 계속되었다. 남들과 다른 가정환경, 충족되지 못한 부모님의 사랑, 그 어디에도 발견할 수 없는 내 자신의 존재.  무기력한 나의 운명 앞에, 나는 지고 싶지 않아서일까? 무작정 달렸다. 그 속에서 내가 만나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제 그때의 기억들은 아주 오래된 낙엽처럼 나의 낡은 사진첩과 가슴 한편에 깊이 묻혀 있다. 지금 다시 하겠냐고 물어본다면 절대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아마 다시 태어나 그때 그 나이가 되었을 때, 난 또다시 자전거를 타고, 옥천의 한 산등성이를 넘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속에 하나의 깨달음이 자리 잡기 시작한 건. 그건 바로,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다. 언제나 깊은 절망과 어둠은, 희미한 희망의 빛과 함께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다만, 희망이란 빛이 너무 희미해서 나중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오늘도 신은 내게 어둠을 보여주며 묻고 있다.  “여기서 그만 끝내고 싶은가?”  “아뇨, 그럴 순 없어요. 조금만 더 가보면, 조금만 더….”  “그럼 조금만 더 가 보거라. 네가 날 버리지 않는 한, 나도 널 버리지 않을 테니까.”     
41    행복을 굽는 매장 댓글:  조회:978  추천:0  2014-10-23
행복을 굽는 매장           “맛있는 냄새가 나네요~"  은행에 업무상 잔돈을 바꾸러 갔을 때 여직원의 첫 인사였다.    "번 냄새가 나요." 번이라 함은 로티 번을 말하는데, 커피와 함께 먹는 둥글납작한 빵의 일종이다.  그렇다. 나의 직업은 바리스타이며 커피전문점에서 일을 하고 있다.^^  커피뿐 아니라 음료와 차, 그리고 맛있는 빵도 파는 작고 아담한 곳이다. 사실 직장을 구하기 전, 나는 열심히 기도를 드렸었다. 가라앉을 때나 들떠 있을 때나 맑을 때나 탁할 때나…. 나의 바람이 하늘로 퐁퐁퐁 전달이 되도록~^^  그래서일까? 하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사실 서비스직 치고 소위 사무실 시간대인 9시~6시 근무에 일요일 휴무인 곳이 많지 않은데 그러한 곳에 세 군데나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 중 한 곳이 바로 내가 일을 하고 있는 곳이다. 부부가 운영을 하시는데 나이가 어머니 아버지 나이랑 비슷하시다.  '헉! 두 사장님을 모시고 일을 해야 하다니!!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처음의 염려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두 분은 투박하신 말투와는 달리 비둘기가 오는 시간에 맞춰 빵가루를 뿌려 주시는, 마음은 아주 따뜻하신 분이셨다. 감사하게도 나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첫 번째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다. 이곳 사장님, 사모님은 말투가 투박한 편인데도 오픈한 지 7개월밖에 안 된 매장치곤 단골손님이 많았다. 바로 고객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까닭이다. 손님들도 말투 너머로 따뜻한 온정이 있는 마음을 보았나보다. 내가 느낀 것처럼.   사장님께선 손님들이 언제 자주 오는지, 무엇을 잘 드시는지를 대부분 기억하고 계셨다. 때론 직업까지도.  '저 손님은 토요일마다 호박 라떼를 드시러 오셔'  '저 손님은 헬스 강사인데 체대를 나왔어’ '저 손님은 이틀에 한 번씩 오는데 시럽을 안 넣으셔'    평소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나. 열렬히 마음이 맞는 친구를 원하면서도 방어벽을 치며 혼자 있던 나. 때론 사람들이 두렵고 무서워 피하고 싶던 나. 이런 나는 사라져야 했다.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미소를 지으며 따뜻하게 맞아줄 수 있는 나여야 한다. 사람들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갖고 즐겁게 웃으며 반기는, 그런 행복한 공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사장님한테 '서비스'에 대한 강의를 15분가량은 들은 것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길 원하며 그러기에 최상의 서비스는 관심이라고 하셨다.    점심시간에 손님들이 와르르 몰려오는 바람에 정신없이 바쁠 때는 잘 웃어지지가 않고 표정 관리가 안 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웃으며 친절하도록 노력 중이다. 매일매일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환한 웃음이 자연스러운 내가 되지 않을까? 따뜻한 마음을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나이고 싶다. 더 따뜻해지고 싶다.     두 번째는, '책임감'이다. 우연인진 모르겠지만 7개월 동안 이곳에 직원이 몇 있었는데 거의 다 안 좋게 그만두었다. 첫 번째 남자직원은 툭하면 술 마시고 안 나오고, 두 번째 여자직원은 일도 잘하고 손님들한테도 잘했는데, 매일 5분, 10분, 30분 지각하고 무단결석 두 번에 일주일 동안 잠수. 사장님들께서 많이 애를 태우신 모양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왜 그러냐고 하시면서….    허나 그들의 모습이 불과 얼마 전까지의 내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내게 있어 책임감이란 친구는 한동안 가출을 했다가 1년 전부터 슬슬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한 피해를 입으시며 사람이 아무리 일을 잘해도 '기본'이 중요함을 강조하시는 모습에 책임감 있게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기본적인 예의와 배려의 중요함을 다시 한 번 배우고 있다.      세 번째는 '일관성'이다. 왔다 갔다 하지 않는 것.^^  실은 수년 전 내가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 이상 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왜 그랬는지, 고치려고 많은 노력을 했고 많이 개선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뿌리 뽑히지가 않았는지…. 그러한 부분에 대한 터치가 있었다. 여러 일들이 있지만, 주문을 받을 때의 예를 한두 가지 들자면, 간혹 고객 분께서 주문하신 메뉴를 계속 바꿀 때가 있다.    “아메리카노 하나, 카라멜 마끼아또 하나요.” 보통 주문을 받음과 동시에 마음속으론 음료 만들 준비도 진행된다.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하려 하니,  “아니, 그냥 카라멜 마끼아또 두 개 주세요.” 그래서 포스에 주문 받은 음료를 수정하고 다시 계산하려 하면, “잠시만요. 저, 근데 녹차라떼는 맛있나요?”  “….” 결국 그분은 녹차라떼와 캬라멜 마끼아또를 사 가셨다는…. 한번은 이런 경우도 있었다. 아이스커피가 들어와서 신속하게 음료를 만드니,  “어! 벌써 다 만드셨나요? 카페라떼가 더 먹고 싶은데….”  허걱! 음료를 만드는 고새 마음이 바뀌신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가끔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럴 때면 하늘이 나에게 고쳐지지 않는 부분을 다듬어 주시려고 이렇게 당하게(?) 하시며 ‘사람이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나의 예전의 갈대 같던 마음에 비하면 양호한 지라 그저 묵묵히 받을 뿐.^^;  아직 일을 시작한 지 2주가 채 안 되었는데 적응하는 단계라 힘이 들 때도 있지만, 점점 이곳이 좋아지고 있다. 요 며칠 크림을 돌돌 말아 올려서 직접 빵도 구워 봤는데 오븐에 구워지는 빵을 보면 빵들이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 살아나는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손길을 거치며 태어나는 빵은 어쩐지 더 사랑스럽고 애정이 간다.    미친 듯이(?) 일을 하던 전 매장에서 벗어나 옮긴 이곳 매장은 사람답게 일한다는 생각이 든다. 바쁠 땐 바쁘지만 한가할 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여유도 있다. 음악 프로그램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동영상으로 '라떼아트'를 공부할 수 있는 시간도 주어진다. 아마 이곳에서 일을 하며 나는 점점 더 사람다운 사람이 될 것 같다.  그 외에도 알뜰함, 꼼꼼함 등 배우고 있는 부분이 많지만 아직 많이 모자라기에 이 모든 배움이 온전히 내 것이 되기까지는 분명 일정 기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삶의 여정에서 어떤 상황에서건, 환한 웃음과 여유를 지니는 따뜻한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나의 웃음이, 나의 맑음이, 나의 밝음이, 나의 따뜻함이 사람들을 적시고 주변을 적셔서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삶의 향기를 전하는 이가 되고 싶다.  
40    요령부득 이 선생 댓글:  조회:973  추천:0  2014-10-21
요령부득 이 선생           “아가씨, 금강산이나 설악산 봤어요? 거기 바위들이 바둑알이나 보도블록처럼 반듯반듯하니 똑같이 생겼습디까?” “아니요.” “거기 바위들과 산세가 다 그렇게 똑같이 네모 반듯하다면 사람들이 구경하러 가겠어요?” “….” “사람 얼굴이나 치아들도 마찬가지예요. 크게 생명이나 생활에 지장이 없으면 되도록 건드리지 않는 거예요. 다 조금씩 비뚤어지고 다르게 생겨야 의미가 있어요. 생니 발치하고 교정하는 것이 문제들이 없고 괜찮은 걸로 아는데 그게 우리 뼈를 뽑고 흔드는 거예요. 인위적으로.”    선량하고 서민적으로 보이는 그녀는 입에 힘을 안 주면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였다. 한눈에도 심한 뻐드렁 앞니였다. 그리고 말할 때나 웃을 때 반드시 입을 가렸다. 환자 대기실에서 그 광경을 보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와! 저 정도면 앞으로 넘어져도 코는 안 다치겠구나. 입이 먼저 땅에 닿을 테니. 시집가기도 힘들겠다. 키스하기도 어려워. 쯧쯧…’    그렇게 심한 정도였다. 하지만 그 치과의사는 하늘을 우러러 필요 이상의 진료행위는 절대로 환자에게 권하지도 시술하지도 않았다. 바로 그 의사선생님, 바로 울 아버지 되시는 분의 가치관 때문에 키스하기도 어려운 그 아가씨는 결국 우리 병원에서 교정치료를 받지 못했다. 아마 어려운 형편에 긴 시간 모은 적금을 가지고 더 비싸고 얼른 손님을 받는 딴 치과로 직행했으리라.      동그란 얼굴과는 달리 아버진 손이 섬세하고 길었다. 다소 저렴하고 솜씨가 섬세하다는 소문도 났다. 그리고 한창 나이 때에는 환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특히 수입이 짭짤한 교정, 치아미백 같은 미용 목적의 치과 진료엔 이런 대화와 앞 풍경 같은 실랑이가 흔했다.   “아 참 글쎄, 내 말 듣고 웬만하면 하지 마세요.” 그리하여 급기야 정직, 자연주의, 요령부득 이 치과의 병원 자리는 수세식 화장실도 없는 오래된 건물 한편에서 내내 사글세였다.  그랬어도 성장기에 우리 집이 가난했던 기억은 나에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 집안 살림과 자녀 교육비를 꾸려야 했던 자연주의 이 치과 사모님 즉, 울 엄마는 항상 돈에 쪼들렸다. 게다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최고 부잣집 아이들이 득실득실한 사립 특목고에 내가 합격하는 불상사까지 일어났다. 그 학교는 촌지조차도 단위 수가 틀렸다.    엄마는 더욱더 “돈! 돈!!!” 하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고 니 밑으로 집안 돈이 다 들어간다는 소릴 난 밥보다 더 자주 먹고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였는지 난 그다지 물욕이 없는 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가난한 집 아이들보다 더 돈에 짜증이 나 있었고 우리 집 경제 파탄범이란 자책감에다 모난 자존심만 뾰족해 있었다.   아마 그래서 내가 그렇게 말한 것 같다. 고등학생에겐 적지 않은 용돈을 내미는 아버지 손을 뜨악하게 바라보면서 “아, 쓸 만큼 아직 있다니까요.” 하고 몇 차례나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받으면서 “고맙습니다.” 라고 깍듯하게 말한 것은….   그때 아버지가 서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럼 용돈을 주면 고마운 아버지고, 줄 수 없는 아버진 고마운 아버지가 아닌 거냐? 가족은 그냥 있어주는 것으로 고마운 거지 무얼 주었다고 고맙고 줄 수 없으면 안 고맙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부모 자식 간에는 그렇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땐 난 잘 몰랐다. 고맙다고 이야기한 것이 왜 그리 아버지를 서운하게 했는지…. 하지만 그때도 무언가 가슴을 훅 후려치면서 덜컹하니 내려앉는 무엇인가가 있긴 있었다.     난 아직도 그때의 아버지 표정을 잊지 못한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아버지는 기분 좋은 사람에게서 들어 온 수입 중에서 빳빳한 새 지폐 신권만을 골라서 내 용돈을 따로 준비하셨다. 그리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가정 경제 파탄범인 나는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그것을 받았다.   십수 년 후 나도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먹고 사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도 도제 제도 같은 전통이 남아있는 이쪽 바닥은 제자의 수가 수입과 세력의 척도다. 어떤 능력 좋은 이들은 사립학교들의 가정환경 조사서까지 뒤진다. 그리고 나선 성적 좋은 부잣집 아이들을 제자로 만들려고 아이의 적성과 관심은 생각지도 않고 학부모들에게 허황된 풀무질을 해댄다. 그럴 때 난 이렇게 말했다. “글쎄, 웬만하면 전공시키지 마세요. 정말 자신이 하고 싶다고 몸부림치기 전에는.”  그리고 피식 혼자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그러면서 점점 세월이 흘러 그때의 아버지의 나이와 비슷해져 가면서 새삼스레 느껴지는 것들이 생겼다. 당연한 ‘나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 일에 누군가에게 깍듯하게 ‘고맙다’ 인사를 받으면서 나도 그 서운함을 맛 본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그저 깍듯한 인사 안에는 친구도 가족도 없고 ‘나, 이 정도로 예의바른 사람이에요’ 라고 말하는 손님밖엔 없음을….    그때 내가 받았어야 하는 것은 단순히 두둑한 용돈이 아니라 기가 세고 똑똑하기까지 한 부잣집 아이들 사이에서 기 죽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난 그때 고맙다는 형식 대신 구김살 없이 방끗 웃으면서 아빠의 주머니를 더 강탈하는 효도를 해 드렸어야 했다.  “역시 울 아빠 최고!! 근데 아버지~~~ 용돈 줄 토끼 없으면 돈 벌 재미도 없죠? 조금만 더요. 예?” 이러면서 말이다.    아이를 마음으로 기르는 것 같은 정말 중요한 일엔 고맙다는 말도 부피가 너무 얇다.  이 중요한 공부를 그때 아버지가 이미 시켜주신 듯싶다.    이제 아버지가 의사가운 대신 입게 된 환자복엔 내가 애교부리며 강탈할 수 있는 주머니는 없다. 그 자존심만 강한 헛똑똑이 아버지는 현재 치매에 반신불수로 누워 계신다.    이제 이분이 이렇게 가시고 나면 나한테 무조건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은 지구상엔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러기에 더욱더 고맙단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는 이 세상에 한 분 뿐인 정직, 자연주의, 요령부득 이 선생님을 다시 한 번 섭섭하게 해드릴 순 없다. 그래서 난 오늘 먼 산 바라보며 이렇게 혼잣말 한다.  ‘설악산아, 금강산아, 기암괴석에 삐뚤빼뚤 반듯하지 않아서 고마워요!’     
39    엄마처럼 안 살 거야 댓글:  조회:938  추천:0  2014-10-14
엄마처럼 안 살 거야               어릴 적부터 난 유난히 어머니의 뒤꽁무니만 따라 다녔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가 어딜 가시려고 엉덩이만 들썩거리면 먼저 따라나서곤 했다. 번번이 어머니께 혼나면서도 어머니를 쫓아다니곤 했었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 어디든 따라나서기를 하니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는 돌팔매로 날 따라오지 못하게 하신다.   어머니가 때론 돌을 던지시며 “따라 오지마라. 빨리 집으로 안 가나!” 하셔도 저만치 가시면 또 따라간다. 그렇게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싶고 함께 하고 싶어 하던 아이는 자라면서 어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 자신은 없고 언제나 가족이 먼저이고 특히 아버지를 많이 챙기시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시는 어머니. 아버지는 다정한 말 한마디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도 않으시면서 언제나 핀잔만 주셨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임을 나중엔 알게 되었지만.     엄마는 아버지를 위해 곰국을 끓이신다. 어릴 적엔 곰국과 고기는 아버지만 드시는 것으로 알 정도로 우리에게는 한 점의 살코기도 안 주시는 엄마가 야속하고 미웠었다. 우리 육남매는 아버지께서 드시는 곰국도 먹고 싶고 살코기도 먹고 싶어 했었다.   "난 크면 엄마처럼 안 살 거야!" 어머니 당신은 없고 아버지만 챙기시는 어머니가 싫어서 곧잘 그렇게 얘기했다.  "맛난 것 내가 먼저 먹고 남편보다 아이들보다 내가 더 좋은 옷 입고 그렇게 살 거야!" "한번 결혼해서 살아봐라.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나? 누구는 좋은 옷 맛있는 음식 먹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많은 식구들 먹이고 입히려면…." 하시면서 말끝을 흐리시곤 하셨다.   그땐 몰랐다. 어머니 당신도 좋은 옷, 만난 음식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또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밤새 끙끙 앓으시고도 아침이면 밥을 지으시고 논으로 밭으로 산으로 일을 나가시는 것이다. 아프면 좀 쉬시면서 조리를 하시면 되는데…. 그것도 못마땅해 했었다. 내가 해 드릴 수 없는 부분이어서 더 그렇게 어머니께 독설을 퍼부었는지 모르겠다. “난 절대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큰소리치며 그렇게 다짐했건만 어느 날 나의 모습은 어머니와 똑같이 살고 있었다. 내 옷보다 남편의 옷, 아이들의 먹거리를 먼저 장만하고, 밤새 끙끙 앓고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아침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울 속 나의 모습도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음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어머니를 닮지 않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던 나도 별 수 없이 어머니가 걸으신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세월이 흘러 몸이 많이 아픈 시기가 있었다. 가정을 위해 나의 몸은 돌보지 않고 살아온 세월이 헛살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남편은 처음엔 몸이 아픈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곤 했었지만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긴 병마와 싸우는 동안 남편은 싫은 내색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픈 데도 없이 건강하게 잘 사는데 당신은 장모님 닮아서 아픈 곳이 너무 많다면서 구박 아닌 구박을 하는 것이었다.   남편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나의 심장을 찔렸다. 매일 밤 “이리 밀어라, 저리 밀어라, 팔 좀 내려달라, 다리 주물러 달라, 손 좀 주물러 달라…” 이렇게 요구사항이 많으니 어느 사람인들 귀찮지 않을까.    남편을 이해는 한다. 밤이면 깊은 잠에 못 들어 아프다며 눈물 콧물 흘리는 아내를 보는 것도 지겨울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어디 아프고 싶어서 아픈가! 아프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아프지 않고 편안히 살고 싶단 말이야. 다 가정을 위해 나를 돌보지 않고 고생해서 이렇게 된 것이지 내가 편히 살면서 이렇게 되었나? 야속한 마음에 밤이면 밤마다 눈물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팔을 다치게 되었다. 다행히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 팔이다. 가정 일을 하는 데는 별 문제는 없었으나 단, 설거지가 문제였다. 그때부터 설거지는 남편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 사고 이후로 난 엄살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의 몸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할까? 몸이 극도로 아파야만 내가 자리보존을 한다는 것을 남편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것을 이용하기 시작했었던 것이다.   밥하기 싫고 청소하기 싫으면 자리보존하며 누워있다. 그러면 남편은 저 사람이 정말 많이 아픈가보다며 스스로 밥을 짓거나 설거지를 하는 것이었다. 슬슬 재미가 붙었다.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남편이 주방에서 떨거덕거려도 내다보지 않곤 한다. 그러면 밥을 차려서 밥 먹으라고 한다. 히히히 재미있다. 이렇게 난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던 내 말을 실천하고 있다. 물론 어머니처럼 살아온 세월도 있었지만.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그래 잘 지내나? 이 서방은 뭐하누?"    "히히 지금 설거지 중이예요."   "어데 아프나?? 와 이 서방이?"   "나중에 엄마처럼 아버지를 60년 동안 수발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챙길 수 있도록 지금 교육 중이지요~"   "못 됐다. 그래도 남편은 하늘인디…."   "하늘도 땅에게 잘 해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요즈음은 땅값이 많이 올라서 좀 비싸요. 한 번이 중요한 거예요. 엄마도 아프시면 좀 쉬어가면서 하세요.”   "야야~, 나는 누워 있으면 좀이 쑤셔서 몬 누워 있다 아이가."   "참 성격도 이상하시지…. 하긴 저도 아프면 못 누워 있긴 하지만…. 이것도 엄마 닮았네요."   "야가 야가! 안 좋은 거는 다 날 닮았다고 하네…."   "엄마, 저 많이 미웠죠? 엄마한테 못 된 딸이었죠?"   "아니다. 다 내가 못나 너거들을 잘 가르치지 못하고 고생만 시켜서 미안타."   "엄마,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죠? 사실은 하고 싶은데 쑥스러워서 그랬는데…. 엄마 사랑합니다!"   "그래 나도 널 마이 사랑한데이."   "히히, 한번 하고 나니 괜찮네. 엄마 진짜로 사랑합니다."   "야가 야가 자꾸 와 카노? 나도 사랑합니다."    * 팔순노인이 되셔도 이제껏 마음 편히 쉬신 적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다리를 절뚝절뚝 거리며 불편해 하시면서도 아버지 진짓상을 차려주십니다. 몇 년 전 어머니께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자주 쓰지 않던 말이라 참 어색했지만 한번 하고 나니 괜찮더라구요. 그래서 요즈음은 가끔씩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어머니께서도 “나도 사랑합니다.” 하십니다. 그런 어머니가 귀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합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딸을 많이 보고 싶어 하시고 기다리십니다. 엄마 자주 찾아뵙고 전화 드릴게요. 어머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38    아빠의 꿈 댓글:  조회:960  추천:0  2014-10-08
아빠의 꿈             “아빤 꿈이 뭐였어요?”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별 기대 없이 했던 질문이었습니다. 아빠의 어릴 적 꿈은 작은 산을 하나 사서 그곳에 여러 동물들을 풀어놓고 키우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대학 졸업 후, 주 5일제 근무에 좋은 조건의 유명 제약회사에 취직하셨다지요. 그러나 전공인 화학공학도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석유화학기업의 입사시험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제약회사를 그만두셨지요. 시골에서 대학등록비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다 하셨던 홀어머니의 기대와 자신의 꿈 사이에서 고민하며 혼자 뒷산에서 울었던 날이 많으셨다는군요. 다행히 원하시던 회사에 입사하여 제품연구에 최선을 다하셨고, 지금도 미련이 없다고 하십니다. 아프시기 직전에는 퇴직한 4-50대 분들이 일할 수 있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이 꿈이셨다네요.    좀 의외였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열정이나 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해봤거든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눈물이 납니다. 그러고는 한참을 목 놓아 울었습니다. ‘왜 울지?’ 스스로도 어리둥절했습니다. ‘아…’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고3 수능을 마치고 뚜렷하게 가고 싶은 대학도, 과도 없었던 저였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집에서 통학할 수 없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와 한 집에서 사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제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의견을 전혀 존중하지 않으셨고, 주제를 막론하고 자주 큰 소리로 어머니를 혼내셨습니다. 집안의 모든 일은 TV프로그램을 정하는 일부터 큰일까지 아버지 마음대로였습니다.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하신 날에는, 그 날 집안 식구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지내야 했습니다.   달걀형 얼굴에 쌍꺼풀까지 있는 아버지와 달리 저는 넓은 얼굴에 쌍꺼풀이 없습니다. 그런 저에게 아버지는 늘 “지연이는 객관적으로 예쁜 얼굴이 아니야, 지연이는 누굴 닮았지? 엄마를 빼닮았구나.” 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한 번도 ‘예쁘다’는 말이나 ‘사랑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창살 없는 감옥에 사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가출을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혼날 일이 무서워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요. 다행히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집에 전화 한 통 할 생각도 하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의 대화 이후,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도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소신과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고자 하는 열정과 행동력도 있는, 그런 멋있는 ‘한 사람' 말이지요.   맡고 계신 역할 중 하나가 ‘김지연의 아버지’일 뿐, 단점도 있고, 실수도 하는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점점 죄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를 '나를 사랑하고 인정해 주어야 하는 사람, 완벽한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하는 사람' 이라고 여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분노했던 것이지요.   명상을 시작한 후, 나름대로 아버지를 용서하려고 애쓰던 날들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저는 용서하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봅니다. 눈치 없고 철없는 제가 고생 한 번 없이 평탄하게 살아올 수 있도록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셨고, 한평생 성실하고 반듯하게 살아오셨던 모습의 아버지가 보입니다. 그 사실만으로 저에게 큰 가르침을 주시는 분…. 아버지,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    
37    내 딸 천지수는요 댓글:  조회:930  추천:0  2014-10-03
내 딸 천지수는요             “엄마, 나 대학 합격했어!” “뭐? 정말? 축하한다. 그동안 고생했어!” 제 딸 천지수가 요즘 기고만장해져 있습니다.   수능시험을 보고 수시에 떨어졌을 때는 코가 석자나 빠져 있더니 정시모집에서 합격하고 자신이 원하는 학과를 골라서 등록을 하니까 기가 좀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좋은 대학은 아니구요, 서울에 있는 대학입니다. 하지만 평상시 공부했던 것에 비하면 감지덕지한 대학입니다.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00여대 아동심리학과. 저는 다른 대학 일본어과를 추천했지만 제 딸은 저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습니다.     사실, 저는 지수가 대학에 갈 거라는 생각을 지레 접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볼 때만 책을 들여다보았고, 그것도 일주일 벼락치기 공부였으니 성적도 항상 중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수학은 20~30점대(저도 수학은 잼뱅이였음, 이런 걸 닮다니^^;;) 외우는 과목은 그래도 상위권, 평균하면 항상 중간이었습니다.   저는 지수가 공부하는 데 별로 보탬이 되질 못했습니다. 스스로 학원을 선택했고, 학원이 맘에 안 들어 인터넷 강의 듣겠다고 하면 강의료 내주는 정도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 끝나면 데리러 오라고 했을 때도 몇 번 데리러 다니다가 체력이 따라주기 않아 용돈 조금 올려주고 버스를 타고 오라고 했습니다. 새벽에 나가려면 일찍 자야 하는데 데리러 갔다 오면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혼자 공부하고, 혼자 대학 검색해서 등록하고, 거의 모든 걸 혼자 한 셈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 하늘의 보살핌’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수가 대학에 합격하고 며칠 후, 9년째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있던 전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지수를 잘 키워줘서 고맙다. 지수 등록금은 내가 대주겠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전화를 할 거라는 생각도 못했을뿐더러 ‘고맙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듣다니요!!! 더더군다나 등록금까지….   제가 키웠다기보다는 스스로 컸고, 그다지 잘 키웠다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어쨌든 등록금 대 준다는 말에 넘 감사했습니다. 제가 돈에는 좀 약합니다.^^;;   하지만 등록금을 꼭 받아야겠다는 마음은 접었습니다. 주면 감사하고, 안 줘도 그만이죠. 그 사람 형편이 그다지 좋은 것 같지도 않고, 그 사람 말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있던 중 얼마 후에 00여대 홈페이지를 열어 본 지수가 탄성을 지릅니다. “엄마! 나 장학금 받아!” “정말? 넘 잘됐다. 그동안 애쓴 보람이 있구나!”     남편과 이혼을 할 때 지수는 10살이었습니다. 저는 위자료도 양육비도 필요 없고 그저 이혼만 하기를 원했고, 어린 지수는 아빠랑 같이 살면 안 되냐고 울었습니다. 이혼을 하자 “아빠는 같이 살고 싶어 하는데, 엄마가 이혼을 한 거야.”라며 저를 원망하며 성격이 점점 더 송곳처럼 변해갔습니다. 지수를 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수가 미울 때도 너무 많았습니다. 지수의 삐딱한 행동에 울화통이 터질 때도 많았지요. 하지만 지금은요, 지수를 통해 저를 바라봅니다. 제 딸 천지수가 제 삶의 잣대입니다.  제가 부드러워지는 만큼 지수도 부드러워지고, 지수가 밝아지는 만큼 저도 밝아지고 철이 드는 만큼 저도 철이 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명상을 알지 못했더라면 아마 지금도 울화통을 터트리고 있을 겁니다.^^* 별 볼일 없는 부모 밑에서 큰 탈 없이 잘 자라준 지수. 오늘따라 불쑥 커 보이는 나의 딸. “지수야, 고마워! 사랑해!!!”  
36    한나절의 사랑 댓글:  조회:1053  추천:0  2014-09-21
한나절의 사랑               설날. 어머니와 삼형제. 가족이 모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그런지 예전처럼 흥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어떤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 집에 있었다. 어머니만 살고 있는 집이지만 가족이 모이면 그 집은 가족 전체를 감싸고 보살피는 당신의 커다란 손길로 변한다. 갖은 음식은 당신의 몸에서 자라난 것 같고, 집안의 온기는 당신의 품 속 그대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내 짐을 넣어둔 방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새로운 옷들이 옷걸이에 걸려 있다.  어릴 적 내 옷을 산 기억이 별로 없다. 넉넉하지 않는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아우가 자라기 전까지는 사촌형들과 친형의 옷을 입었고, 아우가 다 자란 후에는 아우가 산 옷도 입었다. 처음엔 옷 투정도 하곤 했지만 이내 어려운 가정 형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터인지 어머닌 내 옷을 챙기신다.   가족하면 가장 먼저 어머니가 떠오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 또한 그렇다.    고1 때,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의 병세는 더욱 나빠졌다. 간경화 때문에 대구의 유명한 병원을 다니곤 했는데 살 수 있다는 3년이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선친은 세상에 대한 도전도 남달랐지만, 세상에 대한 비관도 대단했다. 날로 늘어만 가는 한탄과 화풀이는 고스란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당신에게 우리는 그날그날의 불화가 빨리 잦아들게 하기 위해 당신이 모든 짐을 지시길 강요하곤 했다. 힘들어도 선친에게 맞추어  살면서 화목한 가족이 되는 것을 위해 한시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셨던 당신에게 그냥 어머니가 잘못했다고 그러시라며 당신의 편이 되어드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는 선친의 말씀에 형제들이 흩어져 어머닐 찾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부둣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어머닐 발견했다. 그 후론 물에 뛰어들어 죽으려 하다가도 자식들이 물에 어른거려 그러질 못했노라고 늘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다소나마 헤아릴 수 있을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대학에 들어가고 머리에 쓸데없는 지식이 들어차면서 내 자신을 '모성결핍'이라고 진단하였다. 어릴 적에 어머니와 처음으로 같이 산 기억은 9살 여름방학 부터였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날 때 건축업에 종사하던 선친은 공사 중이던 건축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갓 태어난 나를 업고 어머니가 시작한 일은 장사였고, 큰 시장에서 나를 등에 업고 무거운 배추와 무를 이고 들고, 힘겨운 걸음을 터벅거리며 먼 길을 오가며 길가에서 파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20대가 되기 전까지 내 기관지는 매년 한두 차례 탈이 났고, 기침 소리가 날 때마다 마치 힘겨웠던 그때의 무거운 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어머닌 안쓰러운 생각에 그때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곤 하셨다.    선친이 출감한 뒤 두 분은 어린 아우만 데리고 경찰을 피해 도피생활을 했었고, 형과 나는 큰댁과 이모 댁을 오가며 자랐다. 내 기억에는 가끔 어머니가 나타났고,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가 깨면 이미 사라져버린 당신을 찾아, ‘엄마’를 부르며 온 동네를 울면서 뛰어 다녔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성결핍은 작은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어릴 적엔 형과 아우에 대한 부모님의 편애가 있다는 피해의식도 있었다. 무뚝뚝한 외모에 늘 사마귀와 티눈이 얼굴과 손발에 가득했고, 눈에는 화상 자국도 나 있어서 그다지 호감이 가는 얼굴도 아니었다. 형제에 비해 작았고, 'ㅅ'발음도 되지 않아서 거의 불구자 취급을 받았다는 생각을 30살이 넘도록 하곤 했다.    식당을 하는 어머니를 돕는다고 나름 노력했지만, 잘못을 저지를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 가게에 가서 술을 몇 병 사오는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보통은 술을 배달해 주는 차가 오지만 그 차가 오기 전에 술이 떨어지면 인근 가게에서 좀 더 비싸게 술을 사 오곤 했다. 그렇지만 가게에서 사오는 술보다 우리 집에서 파는 술은 더 비쌌다. 안주도 나가고 자리도 차지하니 당연한 것이었지만 당시 어린 생각에는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차액에 맞추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사고는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잔돈이 없다는 내 말을 듣고 가게에 다녀오시더니 집 앞에 서 있는 나는 보시고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당시 선친의 사업은 몇 년의 실패 끝에 마침내 일어나고 있었지만 물건을 사간 사람으로부터 대금을 받지 못해 상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한 푼이라도 보태려고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노력을 하시는 어머니였지만, 철없는 자식을 나무라진 않으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1년마다 있는 군민체육대회 때였다. 우리 면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우리 집에서 맡게 되어 인근 고등학교에 자리를 잡고 불을 때고 솥을 걸었다. 나는 고기를 사오는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평소 잘 아는 집이었지만, 그날따라 아주머니가 없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고기를 반만 썰어서 내게 건넸다. 반박하지 않고 그냥 가지고 돌아오니 어머니는 이게 전부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머니는 또 묵묵히 일을 하셨다.    나는 그 시절 어머니 마음만 아프게 하는 못난 사람 같았다. 나의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를 착하다고 자랑했다. 착하다고. 착하다고. 마치 곰이 사람으로 변하는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쩌면 나는 그 주문이 사실로 받아들여지도록. 그래서 어머니의 자랑이 사실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증명하려고 노력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주문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어릴 적 친구들처럼 어두운 세계로 걸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기준점이다. 어느 곳에 있더라도 때가 되면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모이게 된다. 어머니가 있는 곳이 바로 사랑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게 있어 어머니의 사랑은 믿음인 것 같다. 어머니가 내가 있는 곳의 기준점이라면 이 믿음은 내가 가야할 곳에 대한 좌표라고나 할까? 당신이 믿어주시는 만큼 나는 나아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당신의 믿음은 자식에 대한 당신의 사랑만큼이나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곳에 가지 못하는 것은 단지 내가 한없이 어리석고 부족해서일 뿐일 것이다.     언제 어느 때고 전화하시곤 밥은 챙겨먹고 있냐고 물으시는 어머니. 그 마음은 온 우주를 덮고 있는 사랑의 파장에 연결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9년간 떨어져 살던 때에도, 형제를 편애한다는 생각을 할 때에도, 어디에서 그 어떤 바보 같은 삶을 살고 있을 때조차도 그 사랑의 마음과 믿음은 얇지만 질긴 옷처럼 항상 나를 감싸고 어루만져왔을 것이다.    그 옷이 펄럭이며 내게 이야기한다. 지금보다 백배 천배 어머닐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단 한나절 나를 사랑한 어머니의 고마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35    내 사랑 호호 할머니 댓글:  조회:1071  추천:0  2014-09-15
내 사랑 호호 할머니         달님은 정월 대보름을 막 넘긴 것이 아쉬운 듯 아직은 동그랗게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혼자 수선을 피우며 해 먹는 것이 귀찮기도 해서 민숭민숭한 보름을 지내고 보니 해마다 어김없이 갖은 산나물과 찰진 오곡밥을 지어 주시던 할머니의 사랑이 그립습니다. 조미료를 넣지 않고 담백하게 조물조물 무쳐 주신 산나물 반찬과 기름기 좌르르 흐르는 구수한 오곡밥. 피부병 없이 무탈하려면 비린 생선을 먹으라시며 노릇하게 구워 주신 청어구이. 호두랑 밤으로 부럼을 깨게 하셨고, 귀밝이술로 직접 담은 포도주를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조금씩 마시게 하셨습니다.    손이 많이 가는 먹거리를 미리 다듬고 손질해 두셨다가 특별한 날이 되면 정성껏 만들어 주셨지요. 막상 엄마의 자리가 되어 아이들의 점심과 저녁식사 모두 학교에서 급식으로 해결하니 한편으로 편하기도 하지만 슬며시 미안한 마음도 듭니다.^^;   그때는 철도 없이 할머니가 해 주신 것은 촌스럽다고 타박 했었는데…. 이젠 할머니의 손맛이 그립고 감사합니다.   자그마한 체구와 조용하면서 자분자분 재미있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해주시던 할머니. 유난히도 하얗게 세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하얀 할머니 집’으로 불리기도 해서 초행길 친척들이 우리 집을 쉬 찾아올 수 있었지요. 한글을 깨치지 못하고 시집 오셔서 시조부님으로부터 글을 배우셨다는 할머니는 틈틈이 무슨 경전 같은 것을 열심히 읽곤 하셨습니다.   이른 새벽 한결같이 정갈하게 단장하시고 하늘을 향해 정성으로 기도를 올리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때는 원래 할머니들은 자식 잘 되라고 다들 그러시나 보다 했었지요. 배앓이를 할 때면 어김없이 약손이 되어 배를 슥슥 문질러 주시면 정말 감쪽같이 다 나았습니다. 누구나의 할머니처럼 그렇게 손녀에게 사랑을 녹여 주시던 할머니. 그런데 그런 할머니에게 대못을 박는 짓을 하고야 말았네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 해 칠월 칠석 무렵. 병석에 오래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를 묻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 사이 할머니는 우리의 추억이 담긴 가족사진들을 모두 태워 버리셨습니다.   어머니의 긴 투병기간 동안 나름대로 '착한아이 강박증'에 힘들었던 감정이 서운함을 빌미로 폭발하듯이 할머니에게로 풀려 나갔습니다. 그렇게 엄마가 죽기를 기다렸냐고. 뜻밖의 나의 행동에 죄인처럼 절규를 듣고 계시던 할머니….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내가 먼저 죽어야지 젊은 것이….” 하는 죄 아닌 죄책감으로 힘들어 하셨는데 철도 없이 내 감정만 표현하고야 말았습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사람 마음대로가 아님을 알면서도….  할머니는 그 후로 며칠을 앓으셨고 신념과도 같이 하늘을 향해 올리시던 간절한 기도마저도 며칠 동안 쉬셨습니다. 그 날 이후로도 삭아 버린 사춘기를 보내면서 늘상 마음씨 고운 할머니께 성질을 풀었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할머니의 가슴에 박은 대못이 부메랑이 되어서 나의 가슴에 되돌아와 박혔나 봅니다. 이제야 부끄러움을 넘어서 가슴이 절절해집니다. 기억 속에 머문 할머니의 모습을 차분하게 떠올리며 그려봅니다.     새하얀 머리카락  뽀얀 얼굴 총명한 눈빛 누구에게나 귀엽게 웃으시던 모습 내 사랑 호호 할머니   언제나 저에게 관대하셨듯이 지난날을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지상에서 인연이 되어 베풀어 주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을 놓고 가벼이, 가벼이 높이 오르시기를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    
34    바보엄마 댓글:  조회:1007  추천:0  2014-09-11
바보엄마             "엄마는 언니만 좋아하고, 오빠만 좋아하고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막내딸의 100데시벨이 넘는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온 집안을 휘감고, 나의 목을 휘감고, 나의 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시작하면 족히 그렇게 두 세 시간 걸리는 똑같은 이야기의 ‘소리 지르기’가 또 시작되었습니다. '아, 오늘도 그냥 안 넘어가는구나!' 점점 귀가 아파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귀에서 혈관이 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혈관이 튀는 부분을 누르고, 나의 딸은 그 모습을 보고는 더욱 더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또 내 말 안 듣고, 귀 틀어막는 거 봐!!!"  옆에 바짝 다가와서 더 크게 말합니다. 아이 덕분에 가는귀가 먹었습니다. 좀 작은 소리는 잘 안 들립니다. 조용히 말하라고 한마디 하자 대꾸가 세배로 돌아옵니다. 한마디 했다가는 더 길어 질 테니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대답을 않는다며 또 시비를 겁니다.    저는 '참자, 참자' 참습니다. 아이는 더 바짝 다가오며 악에 받쳐 소리를 지릅니다. 참다 참다가 한마디 했습니다. 대답이 거세게 돌아옵니다. 또 대답했더니 더욱 거세게 돌아옵니다.    '그래, 오늘은 그냥 뭐라고 하는지 끝까지 들어보자!' 하고 귀가 아프든 말든 가만히 앉아서 마주하고 들어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모두가 못 마땅한가 봅니다. 참고 더 듣자. 한 시간, 두 시간…. 이제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습니다. 나는 그냥 듣고 있습니다. 듣기 싫지만 듣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지금 나한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동안 하도 소리 질러대어 듣기 싫었던 그 말들을 또 말하고 있습니다. "엄마는! 엄마는! 엄마는!!!" “엄마는!” 이 말이 가장 많이 들립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보다' 목소리가 조금 조용해지는 것을 보니 힘이 드는 가 봅니다. '아! 내 딸은 나한테 자기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거구나.' 갑자기 말할 수 없이 아이가 측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내게 사랑을 갈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아이가 말하는 것을 참고 들으며, 물끄러미 바라보니 다른 때와 달리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아이가 못된 것이 아니라, 내가 못된 사람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리를 지르는 것은 내가 아이의 말을 잘 듣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별 생각 없이 말을 하여 아이로 하여금 기대감에 부풀게 하고 약속을 지키기 못한 것은 아닐까? 아이가 배려심이 부족한 것이 아니고, 내가 배려심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무심코 한 것이 비교한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들자 순간, 갑자기 내 입에서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아이는 '이 엄마가 또 우는가보다'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아이를 때리느니 차라리 견디기 어려워지면 가끔은 울고 맙니다. ‘이 아이가 나의 잘못된 점을 알게 하도록 나를 일깨우는 구나‘ 하는 것이 온몸으로 전해지면서 아이를 끌어안았습니다. 항상 그리 소리를 지르면 싸아~ 하니 냉담해지는 나의 태도에 익숙한 아이는 살짝 당황해합니다.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하고 끌어안았습니다. 아이도 가만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소리가 많이 잦아듭니다. 이런 것이었구나…. 엄마로서 나의 자존심만 세우고, 막내의 말은 소홀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아직도 매일의 전쟁은 심심찮게 벌어집니다. 당장 고쳐지지 않는 나의 단점들을 보며 한심하지만, 반드시 고치리라 다짐해봅니다. 내 딸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나에게 아픈 말들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알려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막내가 소리를 지르면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힘겹고 어렵지만, 그래도 감사를 드립니다. 나에게 마음 공부하라고 소리 지르는 막내의 외침이 잠잠해질 때면 나는 좀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오늘도 한바탕 전쟁이 휩쓸고 지나갑니다. 자식을 통해 조금씩 내 모습을 알아가면서, 아이의 행동이 나를 보며 배운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겨웠습니다. 올해는 몸과 마음의 여유를 갖고 막내와 나의 쌓인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직장을 휴직하였습니다. 적극적으로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아이에게 사랑을 퍼부어주는 시간을 만들렵니다. 이 많이 덜 된 엄마를 마음 공부시키느라 힘겨운 막내에게 감사를 보내며, 맑고 밝고 따뜻함을 이 엄마에게서 느낄 수 있도록 열심히 수련하겠습니다. 또한 딸로 하여금 나를 바로 보게 하고 제 자신을 다듬어주는 보이지 않는 따스한 손길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33    성탄선물 댓글:  조회:987  추천:0  2014-08-31
성탄선물           '고맙다고 말하는 것 잊지 않기!'  수첩 한 귀퉁이에 적힌 글귀를 중얼거리며 읽어본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적어두고 기억해야 하는 모자란 인간이 나란 사람이다.   이런 내게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다. 여덟 살이 되던 해 성탄 전야.  아빠는 전에 없이 성탄선물에 예쁜 케이크까지 준비해 가족 모두 모여 성탄 전야 예배를 드리자고 하셨다. 그 날 밤에는 예쁘장한 여자 손님이 초대되었다. 지금의 새어머니이시다. 참 고맙지 않은 일이었다.    어색함을 달래느라 성탄선물로 받은 어린이 기도집을 이리저리 뒤적이다 보니 어느 페이지엔가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때 난 그 구절을 읽자마자 너무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린 나이에도 참 이해가 가질 않아 같은 구절을 읽고 또 읽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까지는 뭐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나머지 두 구절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항상 기뻐하라니…. 무슨 기쁜 일이 있어야 기뻐하는 거지! 범사에 감사하란 말은 더더욱 이상하다. 아무렇지 않은 일에 어떻게 감사하라는 것인지??? 더욱이 반갑지도 않은 손님과 함께 해야 하는 오늘 같은 밤에 말이다.    너무 이상해서 그 페이지를 넘기지도 못하고 뚫어져라 보고 있었더니, 속도 모르시는 아빠는 내가 그 구절이 좋아서 그런 줄 아셨던 모양이다. 우리 딸이 좋은 성경구절을 찾아냈으니 함께 봉독하는 게 좋겠다며 그 말씀을 소리 내어 읽으신다. 그리곤 다함께 눈을 감고 우리 모두 범사에 감사드리는 가족이 되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렸다.      내가 여덟 살이 되도록 언니와 내 곁엔 늘 엄마 대신 할머니가 계셨는데, 어린 내 기억속의 아빠는 늘 술을 먹고 늦게 들어와 주무시다가 토하시곤 했다. 그땐 너무 어려서, 세상의 모든 아빠는 원래 그렇게 늘 술을 먹고 토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린 두 딸과 함께 아내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술로 달래며 홀로 아파하시던 모습이었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술을 마시고 토하는 아빠를 위해 세수 대야를 가져다 드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는 내게 “고맙다.”고 하셨다.  고작 그것이 내가 어린 시절 익숙하게 들은 ‘고맙다’는 말의 전부였다. 암튼 그 이상한 성경 구절은 사는 동안 내내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새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갈등할 때도, 나를 낳기만 하고 버린 친엄마를 원망하면서 또 한 편 그리워할 때도….   ‘애증’이라는 감정은 내가 그 어려운 어휘를 습득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내 가슴속에 공기처럼 익숙하게 스며 있었다. 그 후로 갈등할 때마다, 그럴 때마다 난 이렇게 기도했다.  ‘이런 갈등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범사에 감사하란 말인가요? 알려주세요!’    극도의 갈등이 계속될 때마다 난 언제나 발전이든 퇴보든 양단간에 결단을 내야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난 스스로 강해지는 길을 택했다. 가슴속에 날카롭게 날을 세운 칼을 품고 극도의 갈등 속에서도 꿋꿋이 앞으로 나아갔다. 스스로 품은 칼날에 베이고 아팠지만 그래도 그 칼날은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굳은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누구도 못 말리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겉으론 온순한 듯 보여도 결정적인 순간 세치 혀 밑에 숨겨둔 날카로운 칼날을 꺼내 있는 힘껏 휘두르면, 세상없는 천하장사도 나를 이기지 못했다. 나는 직선적이고 지나치게 논리적인 말로써 빠져나갈 구멍이 없도록 궁지로 몰아넣는 아주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이 칼날에 가장 많이 베이고 다친 사람은 당연히 가족들이다.  자라는 동안 알게 모르게 내게 상처를 주었던 부모님께 난 가슴에 비수가 되는 몇 마디 말로 그동안 받은 상처를 단칼에 다 돌려 드리고도 남을 만큼 큰 죄를 지었다. 이런 나를 좋아해주고 사랑해 준 한 남자에게도.  그를 사랑했고 결혼을 했으나 그 또한 나의 칼날에 베여 많이 아팠으리라. 남편이 이런 나를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갈 무렵, 고맙게도 명상을 만났다.    이혼을 하고 명상을 시작할 무렵 객관적으로 난 너무도 외로웠다. 내 곁엔 부모도, 남편도….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었다. 감사라고는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갈등 속에 점철되어 온 내 삶이건만, 가슴 깊이 품은 칼날이 스스로도 아파 날마다 미친 듯이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라니….    고통은 마치 나를 한없이 나아가도록 곁에서 끝없이 채근하는 수석 코치마냥 내 곁을 맴돌았다. 덕분에 나는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내 허물들을 아주 자세히 현미경 배율로 확대하여 대형 스크린에 공공연히 비춰보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난 밑바닥의 편안함을 제대로 알게 되었고, 실로 그 공부는 내게 말할 수 없는 편안함과 자유를 선물로 되돌려주었다.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 같다.      이제야 깨닫게 된 한 가지 사실은, 고마움은 삶 속에서 뜻하지 않게 주어지는 선물에 대한 ‘결과’로서 일으켜지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마움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삶의 태도 중 하나이며, 스스로의 삶을 보다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여덟 살, 순수했던 어린 소녀가 장차 그렇게 무서운 비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게 되리란 사실이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성탄 전야에 찾아 온 그 이상한 성경 구절은 말하자면 소녀가 자신의 칼날에 다칠세라 염려하신 하늘이 미리 알고 예비해 두셨던 치유의 선물이 되었듯이.  그 사실을 깊이 깨닫고 나서야 난 비로소 ‘범사에 감사하라’는 오래된 성서의 가르침에 순순히 ‘예’하게 되었다. 여덟 살 성탄 전야에 드린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가 이제야 이루어 진 모양이다.    하늘은 늘 세상을 아름답고 섬세하게 연주하시는 음악가처럼 내 영혼을 어루만지신다. 그 섬세한 손길에 온전히 나를 맡길 수만 있다면 왠지 오늘은 지금 당장이라도, 온 우주를 통해 울려 퍼지는 조화로운 천상의 선율을 운 좋게 들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어둡고 둔한 나의 귀를 비비고 크게 키워 조심스레 귀 기울여 본다.    
32    딸의 결혼식 댓글:  조회:1012  추천:0  2014-08-25
딸의 결혼식         "엄마, 이분은 누구야?" "응. 엄마의 이모, 그러니까 주영이에겐 이모할머니가 되겠네. 왜 한두 번 뵈었잖아."   "아~ 김해 할머니! 부산할아버지는 지금보다 훨씬 젊으셨네. 히히. 근데, 엄마! 외할머니는 어디 계셔? 안보이시네?"   "음…."   엄마 아빠의 결혼 앨범을 들여다보는 아이는 신기한 듯 종알종알 갖가지 질문들을 쏟아낸다. 예쁜 새신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을 일견 뿌듯해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이의 마지막 질문에 나는 멍하니 할 말을 잊었다. 하던 말을 멈추고 쓰린 가슴을 쓸어안으며 나는 7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갔다.     "니 결혼식 못가, 아니 안 갈 거야. 스님이 무슨 딸 결혼식이냐. 됐다…. 절에서 결혼식 무사히 잘 끝나도록 염불이나 실컷 하련다. 결혼식 때 사고 많이 난다더라. 걱정 마. 엄마가 우리 정은이 잘 살라고 부처님께 기도도 많이 드렸어. 어린 것이 그동안 고생 많았지. 좋은 신랑 만났으니 이제 호강하면서 잘 살아야지. 그래, 둘 다 가진 것은 없어도 공무원이니 찬찬히 아껴서 잘 살면 그럭저럭 괜찮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그나저나 엄마가 해줄게 없어서 낯이 안 선다. 그 놈의 돈! 어째 그리 나한테는 안 붙어 있는지 모르것다. 으이구!"   새하얀 걸레로 불전을 정성스럽게 닦으시며 엄마의 넋두리는 끝이 없었다.    "걱정 마, 엄마. 내가 다 알아서 할께. 그리고 나 잘 살 테니 염려 마. 결혼식도 다 잘 될 거야. 주무세요. 저 가요…."   매번 이런 대화를 마치고 자취집으로 향할 때마다 나는 별을 보며 울었다. 나의 가난이 싫었고 일찍 가족을 떠난 아빠가 그리웠고 평범하지 않은 엄마, 그래서 딸의 결혼식에조차도 올 수 없는 엄마, 떠맡아야 하는 어린 동생,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현기증을 느꼈다. 모든 것을 혼자 끌어안고 내 가슴은 점점 피멍이 들어갔다. 그래서 난 떠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훌훌 털어버리고 나만 혼자 쏙 빠져나와 근사한 경찰 신랑이랑 보란 듯이 행복하게 ‘딴딴딴~’ 잘 살고 싶었다. 그 한 가지 생각으로 똘똘 뭉친 나는 혼신의 힘으로 결혼식을 준비했다. 이모, 외삼촌들, 큰아버지를 비롯한 친가에 결혼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고생바가지로 살던 나 유정은이 시집을 가니 이번에 확실하게 기부하시는 분에게는 그동안 우리 세 가족을 무시하며 살아온 세월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겠노라고. 그러니 동참하시라고 은근히 협박 아닌 협박을 하였다.   이모와 외삼촌들은 엄마를 대신하여 가구와 전자제품들을 책임져주셨고 친가에서는 몇 백 만원의 돈을 마련해주셨다. '아, 드디어 가긴 가는구나!'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결혼식 날 이모와 이모부가 부모 좌석에 앉을 거면 굳이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밝히지 말고 친 부모인 것처럼 연기를 제대로 하자는 거였다. 시어머니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나도 원하는 바였다. 30분이면 끝날 결혼식. 남들에게 구태여 불쌍하게, 가련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랬다.    결혼식 전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괜찮아? 내일이네. 무지 떨린다. 결혼식 마치고 저녁 비행기 타고 서울로 가요. 신혼여행은 그 다음날이니까 서울 도착하면 바로 달려갈게. 참, 준우한테 비디오 녹화하라고 확실히 얘기해 두었으니까 걱정 마세요. 생생하게 찍어서 보여드릴게. 엄마! 딸 시집가니까 좋지? 나 잘 살 거야. 걱정 마. 얼른 주무세요. 끊어요."   딸은 엄마에게 그래도 결혼식장에 오지 않겠느냐고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엄마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가발을 쓰지 않아도 그 모습 그대로 너무 예쁘고 자랑스럽다고…. 빈 말 한마디 남기지 않는다.   결혼식 당일, 시작부터 끝까지 나의 가슴은 쉼 없이 울렁거렸고 긴장되어 있었다. 슬플 겨를이 없었다. 누가 알까 두려워 결혼식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쫓기는 마음으로 치룬 나의 결혼식.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서울행 비행기에 탑승한 나는 텅 빈 마음, 씁쓸한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혼식은 완벽하게 잘 끝났지만 내 마음은 왜 이렇게 아프기만 한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검은빛 하늘을 보니 오로지 엄마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신혼집에 도착한 나는 짐만 내려놓고 무조건 뛰었다. 엄마에게로. 너무나도 오랜만에 엄마 손을 잡고 우리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엉엉 울었다.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고 되뇌면서 말이다.   나보다 더 슬프고 외로웠을 엄마는 초대받지 못한 그날, 하나뿐인 딸의 결혼식 날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 지금도 나의 후회는 끝나지 않았다.   태어남의 기쁨을 주시고 진한 경험과 수확을 주시고, 사랑과 따뜻함을 알게 해주신 어머니께 이 자리를 빌어 가슴 깊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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