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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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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명상 건강
2007년 10월 09일 14시 03분  조회:3287  추천:103  작성자: 명상클럽


구자라트')의 아마다바드')에 있는 의학협회에서 강연한 내용

사랑하는 그대들,

인간은 질병이다. 인간은 질병에 걸리지만 인간 자체도 질병이다.
이것이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의 독특함이다. 아울러 이것은 인간의 행운이며 인간의 불행이기도 하다. 지구상의 어떤 동물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나 근심, 긴장, 질병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런 상태 자체가 인간을 성장하게 만들었고 진화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질병은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질병은 인간을 역동적으로 만들었으며 활동적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이것은 인간의 다행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초조하고, 불행하며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제외하면 어떤 동물도 미치지 않는다. 인간이 동물들을 미치게 하지 않는 한, 동물들은 스스로 미치지 않으며 신경과민이 되지도 않는다.
정글 속에 있는 동물들은 미치지 않지만 서커스단의 동물들은 미치게 된다.
정글 속에서 사는 돌물들은 변태가 되지 않지만 동물원에서 사는 동물들은 변태가 되고 만다. 어떤 동물도 자살을 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자살을 한다.
인간이라는 질병을 치료하고 이해하기 위해 이제까지 두 가지 방법이 시도되어 왔다. 하나는 의학이고 다른 하나는 명상이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학은 인간의 질병을 개별하므로 고찰한다는 것을 알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의학은 :신체의 각 부분에 분석적으로 접근한다.
그러나 명상은 인간 자체를 질병으로 여긴다.
명상은 바로 인간의 인격(personality)을 질병으로 여긴다.
의학에서는 질병이 인간에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질병이 인간의 외부에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견해 차이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으며, 의학 역시 "질병을 치료하지 말고 환자를 치료하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이것은 질병이 다름 아닌 환자 자신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병에 걸리지는 않는다. 질병들도 그 자체의 개체성과 특성이 있다.
만일 내가 결핵을 앓고 있고 그대 또한 결핵을 앓고 있다 해도 우리는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결핵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다른 개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결핵을 치료한 방법이 그대에게는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근원은 질병이 아니라 환자에게 있는 것이다.
의학은 인간의 질병을 매우 피상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명상은 인간을 깊은 내면에서부터 이해한다. 다시 말해 의학은 인간의 건강을 내부에서 가져오려 하지만, 명상은 인간의 내적인 존재를 건강하게 유지하려고 한다.
의학이 없다면 명상은 완전할 수 없다. 명상이 없다면 의학도 완전할 수 없다. 인간은 육체이며 동시에 영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을 육체이며 동시에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학적인 오류다.
수천년 동안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별개의 실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런 생각은 매우 위험한 두 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그 중 하나는 사람들이 인간은 오직 영혼뿐이라고 생각하여 육체를 등한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 명상은 발달할 수 있었지만 의학은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의학은 학문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육체가 철저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부 사람들은 인간을 그저
육체로만 간주하여 영혼을 등한시하였다. 이들은 의학에서 많은 연구와 발전을 이루었지만 명상 쪽으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인간은 육체이며 동시에 영혼이다. 나는 이것도 언어학적인 오류라고 말한다.
인간이 육체이며 동시에 영혼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별도의 두
개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같은 기둥의 양쪽 끝이다. 인간을 제대로 통찰한다면 인간이 육체와 영혼을 합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정신-육체(psycho-somatic)이거나 육체-정신(.iomato-psychic)이다. 혹은 마음-몸(mind-body)이거나 몸-다음(body-mind)이다.
나는 영혼 중에서 감각기관이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이 육체이며, 육체
중에서 감각기관이 인식할 수 없는 부분이 영혼이라고 정의한다.
비가시적인 육체가 영혼이며, 가시적인 영혼이 육체다. 육체와 영혼은 서로 다른 두 개가 아니며, 서로 다른 두 개의 실체가 아니다 그들은 같은 실체가 서로 다른 진동상태에 있는 것이다.
육체와 영혼이 두 개라는 개념은 인류에게 막대한 해를 끼쳤다.
우리는 항상 '둘'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에 봉착한다. 예전에 우리는 물질과 에너지가 별개라는 관점에서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물질과 에너지가 분리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물질이 에너지라고 말한다. 과거의 용어를 사용하면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물질이 에너지라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한 쪽에서 보면 물질로 보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에너지로 보이는
어떤 것이 있다. 이것들은 둘이 아니다. 이것들은 같은 실체가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육체와 영혼도 같은 실체의 양극(兩極)이다. 질병은
양극 중 어디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 질병은 육체에서 시작하여 영혼에 이를 수 있다. 사실 육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진동은 영혼에서 느껴진다. 때때로 어떤 사람이 육체적으로 완치된 후에도 여전히
아프다고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질병은 육체를 떠났다. 의사는 아무 ?병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환자는 여전히 아프다고 느끼며, 다 나았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다양한 조사와 검사 결과 임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환자는 계속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환자는 의사들을 무척 괴롭힌다. 왜냐하면 모든 검사 결과가
질병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병이 없다는 것이 건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은 그 자체로 긍정적(Positive)인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무이다.
질병이 없다는 것은 단지 부정적(negative)인 상태일 뿐이다
가령 우리는 가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시가 없다는 것은 단지 가시의 부재(不在)를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꽃이 존재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의학은 아직 건강이 무엇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의학은 단지 질병이
무엇인지 밝혀 내려고 노력해 왔다. 의학자에게 질병에 대해 물어 본다면
그는 어떤 정의를 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건강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그는 거긱말을 할 것이다. 그는 질병이 없을 때 거기 남아 있는 것이
건강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기만이지 정의(定義)가 아니다.
어떻게 건강을 질병과 연관지어 정의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꽃을 가시와 연관지어, 삶을 죽음과 연관지어, 빛을 어둠과 연관지어
정의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남자를 여자와 연관지어 정의하는 것과 같으며
혹은 여자를 남자와 연관지어 정의하는 것과 같다.
의학은 아직까지 건강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했다. 의학은 단지 질병이
무엇인지만을 말해 줄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의학은
모든 것을 표면에서 파악하며 판지 육체에 나타난 것만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표면에서는 질병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건강은 오직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으로부터 감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힌두어의 스와스티아(swasthya)라는 말은 정말 훌륭하다.
영어의 '건강(health)'이라는 말은 스와스티아와 동의어가 아니다.
'건강(health)'은 '치료(healing)'라는 말에서 유래했으며, 질병과도
관련된 개념이다. 건강은 '치료되었다(healed)'는 것을 의미한다. 건강은
질병으로부터 회복된 사람을 의미한다.
스와스티아는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스와스티아는 자기 자신
속에 정착한 사람, 자기 자신에 도달한 사람을 의미한다. 스와스티아는
자기 자신 속에서 우뚝 서 있을 수 있는 사란을 의미한다. 이것이
스와스티아가 건강과 다른 점이다. 사실 세상의 어느 언어에도 스와스티아에
비견될 만한 단어는 없다. 세상의 언어에는 '질병(disease)' 혹은
'질병없음(nodisease)'이라는 말들의 동의어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스와스티아의 개념은 바로 질병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질병이 없다는 것은 스와스티아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스와스티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다른 극(極)에서
온 어떤 것, 내면에서 온 어떤 것이 필요하다. 비록 질병이 표면에서
시작되더라도 그 진동은 영혼에까지 울려 퍼진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다고 가정해 보자 돌이 수면에 떨어지면 그
곳에서는 소요7'1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생긴 파문(波紋)은 돌이
떨어지지 않은 호수의 저쪽 기슭에까지 이른다. 이와 유사하게 육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파문은 영혼에까지 이른다. 그런데 임상의학이
단지 육체만 치료한다면 저쪽 기슭에 도달한 파문들은
어떻게 될까? 우리가 호수에 돌을 던지고 돌이 떨어진 곳에만 집풍한다면
돌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된 파문들은 어떻게 될까?
일단 사람이 질병에 걸리면 그 진동은 영혼 속으로 들어간다. 종존
육체가 치료를 받아 완쾌된 다음에도 질병이 존속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질병이 존속하는 것은 그 진동이 환자의 가장 깊은 존재에까지 메아리
쳤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의학도 아직까지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명상이 없다면 의학은 언제나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질병은 치료할 수 있지만 환자를 치료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질병만 치료되고 환자는 치료되지 않아서 환자가 항상 다시
찾아온다면 의사에게는 이익이 될 것이다!
질병은 반대극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사실 인간이 존재하는 상태 속에
이미 질병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은 이미 많은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른 어떤 동물도 이런 식으로 질병애 걸리거나
초조해하지 않으며 긴장하지도 않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어떤 동물도
마음 속에 다른 무엇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개는
개다. 개는 다른 것이 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인간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는 아직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개에게 개 이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모든 개는 동등하게 개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 어떤 인간에게 인간 이하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결코 완전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난다. 그러나 다른 모든 동물은 완전하게 태어난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인간은 완전해지기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 이런 불완전한 상태가 인간의 질병이다. 인간이 24시간
내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부자가 되더라도
단지 괴로움의 수준만 바뀔 뿐, 괴로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실 가난한 사람은 결코 부자가 가지고 있는 근심을 가질 수 없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최소한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즉, 가난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부자의 근심에는 합당한 근거가 없다. 부자는
자신이 근심하는 이유조차 정확히 모른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근심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 이유가 있다면 안심할 수 있고 위안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이유를 제거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근심이 생긴다면 문제는 커진다.
가난한 국가들은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부유해지는 날
부유한 나라도 나름대로의 고통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인류가 가난한 자의 고통이 아니라 부유한 자의 고통을 선택하기를 바란다.
고통을 선택하는 것이 문제라면 부유한 자의 고통을 선택하는것이
더 낫다. 그러나 그때 초조해지는 정도는 더 심해질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불안과 근심은 세계의 어느 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것보다 크다. 비록 어느 사회도 미국만큼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현실을 보면 환멸이 최초로 고개를 든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처음으로 환상이 깨져 버린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근심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미국에서 밝혀졌다. 인간 자신이 바로 근심이다.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근심거리를 만들어 낸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인격은 끊임없이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요구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날이 갈수록 의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가 이미 성취한 것은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린다. 인간은 아직 엎지 못한 것을 얻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니체는 어느 책에선가 인간은 두 개의 불가능 사이에 놓여 있는 다리
라고 말했다 인간은 항상 불가능한 것을 얻으려고 하며, 항상 완전해
지려고 한다. 모든 종교가 탄생한 것은 바로 완전해지려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한때 지구상에는 성직자가 의사이기도 하던, 즉 종교 지도자가 의사
이기도 하던 때가 있었다. 한 사람이 성직자이면서 의사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가 같은 상황을 다시 맞이하게 된다 해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단지 약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의사가 성직자를 겸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문제가 육체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졌고, 아울러 육체가 완전히 건강하다
해도 이런저런 문제가 증가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내면에
존재하는, 육체와는 다른 측면에 존재하는 질병을 처음으로
감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감각기관 역시 원인을 필요로 한다. 만일 다리에 가시가 박히면
그제서야 우리는 다리를 느끼게 된다. 가시가 다리를 찌르지 않는 한
우리는 다리를 의식하지 못한다. 다리에 가시가 박히면 그 사람의
영혼은 화살처럼 다리를 향하게 되고, 자연히 다리에만 관심을 쏟게 된다.
그러나 다리에서 가시가 제거되면 우리는 또 다른 것에 관심을 쏟게 된다.
비록 허기가 채워지고, 좋은 옷을 입고, 집이 잘 정돈되어 있고
원하던 아내를 얻는다 해도-세상에 이보다 더한 불행은 없지만
-그대는 또 다른 것에 관심을 쏟게 될 것이다. 자기가 원하던 아내를
얻은 사람의 고통은 끝이 없다. 원하던 아내를 얻지 못한다면 최소한
희망 속에서 약간의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하던 아내를
얻게 되면 그것마저도 잃게 된다.
정신병원에 관한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정신병원을 방문했다.
병원장은 그에게 병실을 구경시켜 주었다. 어느 독방 앞에서 그가
원장에게 물었다. "이 환자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러자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얻지 못해
미쳤습니다 " 다른 독방에서는 한 환자가 창살을 두드리고, 가슴을 치며
머리털을 잡아뽑고 있었다. 이 사람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자
원장은, 이 사람은 아까 그 사람이 얻지 못한 여자를 얻었는데 그래서
미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한 첫번째 사람은
미쳤으면서도 그녀의 사진을 가슴에 지닌 채 행복해했지만, 두번째 사람은
창살에 머리를 부딪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한 연인들은
참으로 다행이다!
사실 우리는 얻지 못한 것을 희망하며 그 희망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일단 희망하던 것을 성취하게 되면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면서
의사가 인간의 육체적 문제를 해결하면 그날부터 그는 다음
차원의 일을 떠맡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 인간은 내면의 질병을 자각할 것이다. 처음으로 그는 내면의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며 표면에서는 모든 것이 정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도 정상이 아님을 알고 의아해할 것이다.
인도의 24명의 티르탕카라(tirthankara)"'가 모두 왕자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붓다도 왕자였고 라마')와 크리슈나")도 모두 왕족
출신이다. 이들에게는 윽체 차원의 불안은 사라졌다. 그러나 내면에서의
불안이 시작된 것이다.
의학은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도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질병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지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인간이라는 질병은
불가능한 것을 갈망하는 질병이다. 인간이라는 질병은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질병이다. 인간이라는 질병은 그가 얻은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며, 그가 얻지 못한 것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질병이다.
인간이라는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바로 명상이다. 다른 모든 질병은
의사들이 치료를 하고 의학이 치료를 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이 특별한
질병은 오직 명상으로만 치료가 가능하다. 우리가 인간의 내면을
분해하고 내면을 연구하기 시작하는 날, 의학은 완전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해하기로는 우리의 내면에 앉아 있는 병든 자가 육체 차원의
수많은 질병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육체가 아플 때마다 그 진동, 그 파문은 영혼에서도 ~
느껴진다. 이와 유사하게, 영혼이 병든다면 그 파문은 육체 차원에
도달하게 된다. 세상에 그토록 많은 치료법이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병리학(病理學)"이 진정한 학문이라면 수천 가지나 되는 치료법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질병은 수천 가지나 되므로 그런 일도
가능한 것이다. 어떤 질병들은 역증요법(逆症療法)"'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에서 발생하여 표면으로 옮겨온 질병들은 역증요법이
소용이 없다. 표면에서 시작하여 내면으로 들어간 질병들은 역증요법이
매우 효과적이다. 내면에서 표면으로 옮겨온 질병들은 결코 육체적인
질병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육체에 나타났을 뿐이다. 이런
질병들의 기원은 항상 정신 속에 있거나, 혹은 그보다 더 깊은 영혼 속에
있다.
만일 누군가가 정신 속에 질병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어떤 임상적인
약물로도 구제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해로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약물이 작용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해를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약물이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반드시 어떤 해를 끼치게 되어 있다. 아무 약효가
없는 약만이 해를 끼치지 않는다. 가령, 동종요법(同種療法)")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동종요법은 아무 약효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동종요법은 효과가 있다. 동종요법은 약효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효과를 본다는 것과 약효가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것은
두 개의 독립된 현상이다. 누군가가 정신 차원에서 질병을 만들어 내고
있고 그래서 어떤 플라시보(placebo)가 필요하다면, 그는 효과를
보게 된다. 그에게는 플라시보가 필요하며, 위안이 필요하다. 그에게는
자신이 아픈 것이 아니라 단지 아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이런 확신은 탁발승의 유골이나 신성한 갠지스 강물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
최근에는 플라시보라고 부르는 위약(僞藥)에 데한 실험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만일 열 명의 사람이 같은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그 중의
세 명은 역증요법으로 치료받고, 다른 세 명은 동종요법으로, 나머지
세 명은 자연요법(自然療法))으로 치료받고 있다면, 흥미있는 결과가
발생한다. 이 세 요법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비율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 비율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 결과에 대해서는 곰곰이 쟁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내가 보기엔 역증요법만이 과학적인 치료법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비과학적인 면이 있으므로 과학적인 치료법만으로는 효과를 얻기 힘들다.
역증요법만이 인간의 육체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다룬다 그러나
역증요법만으로는 모든 질병을 100퍼센트 치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내면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조적이며 투사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역증요법이 듣지 않는 사람은 비과학적인 이유 때문에
앓고 있는 것이다. 비과학적인 이유 때문에 앓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대는 과학적인 치료법과 비과학적인
치료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과학적인 질병과
비과학적인 질병이 있다고 말한다. 비과학적인 질병이란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질병에 걸리는 것을 뜻한다. 정신에서 시작해서 육체에 나타나는
모든 질병은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치료될 수 없다.
나는 장님이 된 젊은 여자를 알고 있다. 그녀가 장님이 된 것은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은 손상되지 않았다 안구 전문가들은
그녀의 눈이 정상이며 그녀가 모든 사람을 속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누구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불길 속으로 안내한다면 그녀는 불길 속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벽에 머리를 부딪혀 다치곤 하였다. 그녀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앞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질병은 의사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나에게 데려왔고 나는 그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녀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으며 그녀의 가족이 그 사람을 보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계속해서 묻자 그녀는 이 세상에서
그녀의 연인말고는 어느 누구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연인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보지 않겠다는 이 결심‥‥‥ 그리고 결심이 그 전도로
강하다면 심리적으로 눈은 장님이 된다. 눈은 장님이 되어 어떤 것도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눈을 해부해 보아도 이런 사실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눈의 해부학적인 구조는 정상이겠지만,
보는 메커니즘은 기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눈 뒤에 있던 보는 자가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일을 매일 경험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육체의 메커니즘은 우리가 육체 속에 현존해 있는 동안에만
작용한다.
다리에 상처를 입은 채 하키를 하고 있는 어린 소년을 생각해 보자,
그는 피를 흘리고 있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런데 30분 뒤에 경기가 끝나면 그는 자신의 다리를 보고 언제
다쳤느냐고 고함을 치며 묻기 시작한다. 통증이 심해진 것이다. 이제
그가 다친 지 30분이 지났다. 그는 다리를 다쳤으며, 다리에 있는 감각
메커니즘은 완전히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외냐하면 30분 뒤에 그에게
통증을 알려준 것은 감각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리의
통증은 왜 좀더 일찍 전달되지 않았을까? 그의 관심은 다리에 있지 않고
경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기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다리를 인식할 수 없었다. 다리는 계속해서 그에게 정보를 주었고
-근육과 신경이 경련을 일으켰음에 틀림없다-가능한 모든 창구를
두드렸다. 그러나 그는 잠들어 있었다. 그는 깊이 잠들어 있었거나
혹은 다른 홋에 있었다. 그는 부재(不在)중이었으며 현존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30분 뒤에 되돌아왔을 때, 다리에 상처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그녀의 가족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었다. 나는 그녀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없게 되자 부분적인 자살, 즉 눈의 자살을 한 것이라고
가족에게 말해 주었다. 부분적인 자살을 한 것말고는 그녀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녀의 연인을 만나게 하라. 가족들은 말했다
그것이 눈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일단 그렇게 해 보라고 했다.
그녀가 연인을 만나도 되고, 연인이 5시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녀는 문 앞에 가서 기다렸다. 그녀의 눈은 정상이 된 것이다!
이것은 허위가 아니다. 최면술의 실험들은 이것이 허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것은 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만일 깊은 최면에 빠진 사람에게
조약돌을 쥐어 주고 그것이 뜨거운 석탄 조각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타다 남은 불씨를 쥐고 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는 조약돌을 집어던지고 불에 데었다고 울부짖으며
소리칠 것이다. 여기까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손에 실제로
물집까지 생길 것이며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불타는 석탄을 쥐고
있다는 상상만으로 손에 물집이 생겼다면 육체 차원에서 이 물집을 치료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런 물집은 마음의 차원에서 치료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의 한쪽 면만을 고려했기 때문에 육체에 침범한 질병들을
서서히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음에서 기인하는 질병들은
증가하였다. 오늘날에는 과학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최소한 50퍼센트의 질병이 마음에서 생긴다는 사실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마음의 질병에 걸리려면,
먼저 강한 마음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아직 95퍼센트의 질병이
육체에서 생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마음에서 생기는 질병이 증가하고 있다.
마음에서 생기는 질병은 보통 내면에서 시작하여 표면으로 번져 나온다.
이것들은 표면으로 나오는 질병이다 그러나 육체에서 시작하는 질병은
안으로 들어가는 질병이다. 정신에서 기인한 질병이 육체에 발현
(發顯)한 것을 치료하려 한다면 질병은 즉시 다른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정신에서 기인한 질병이 한두 군데 혹은 두세 군데에서 나타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곳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우 의사들은 질병을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사들은 질병을 여러 가지 형태로 늘려 놓은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한 군데를 통해서 나을 수 있는 것이 이제
여러 군데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엉뚱한 곳에 댐을 쌓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명상은 인간의 다른 측면을 치료한다. 약물은 물질에
의존하며 그 화학적 구조에 의존하지만, 명상은 의식(意識)에 의존한다.
비록 사람들은 명상에 사용되는 알약을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그런
알약은 없다. LSDI')나 메스칼린(mescalin)'), 마리화나(marijLlana)") 등
수천 가지의 것들이 시도되었다. 명상을 위한 알약을 만들려는 수많은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알약은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런 알약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마치 육체 차원에서만 치료를
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낡은 고집일 뿐이다. 정신이 내면에서
병들었어도 우리는 표면만 치료할 뿐, 결코 내면을 치료하려고 하지 않는다.
메스칼린이나 LSD 같은 마약은 내면이 건강하다는 환상을 줄 뿐,
실제로 내면을 건강하게 하지는 못한다. 어떤 화학 물질을 통해서도
인간의 내면 깊숙한 존재 속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화학 물질의 효과는 약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육체적이거나 물질적인 접근 방식은 덜 중요해진다.
내면에서는 비물질적인 접근 방식, 혹은 정신적인 접근 방식이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편견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의사라는
직업은 세상에서 가장 인습적인 직업 중 하나이다. 교수와 의사는
인습적인 사람들 중에서도 첫째로 꼽힌다. 그들은 여간해서는 낡은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아마도 매우 당연한
이유일 것이다. 의사나 교수가 낡은 생각을 버리고 융통성을 갖게 된다면
그들은 아이들을 가르치기가 어려울 것이다. 만일 사물들이 고정되어 있다면
그들은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개념들이 불확실하거나
유동적인 것이 아니라 명확하고 변함이 없다면 그들은 가르치는 동안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범죄자들조차도 교수들이 필요로 하는 것만큼의 확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수는 자기가 말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직업상 이런 종류의 확신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은 인습적이 된다.
교사들은 점차 인습적이 된다. 이것은 커다란 해를 끼친다. 왜냐하면
교육은 가장 인습적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육이
발전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사들이 발명가가 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모든 대학에는 수많은 교수들이 있지만 발명이나
발견은 대학 밖의 사람들에 의해 이구어진다. 노벨상 수상자의 70퍼센트
이상이 대학 밖의 사람들이다.

인습으로 가득 차 있는 또 다른 직업이 의사라는 직업이다. 거기에도
역시 직업적인 이유가 있다. 의사들은 매우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
환자들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의사들이 깊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환자는 죽고 단지 생각만 남을 것이다. 의사들이 매우 자유분방하고
새로운 이론을 실습하며, 매번 새로운 실험을 시도한다면 거기에도
역시 위험이 따른다. 의사는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하며,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들은 주로 과거의 지식에 의존한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매일 즉석에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과거의 지식에 의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료업(醫療業)은 의학적 연구에 비해 30년이나 뒤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환자들이 불필요하게 죽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시도되지 못하는 것들이 곧 시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직업적인 위험 요소이다. 그리고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들
가운데 몇 가지는 그들 내면에 매우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인간보다 약을 더 신뢰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의식(意
識)보다 화학을 더 신뢰하며, 의식보다 화학을 더 중요시한다 이런 태도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화학에 더 많은 중요성이 부여될 때
의식에 대해서는 아무 실험도 행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예를 몇 가지 들려줄 테니 아이디어를 얻기 바란다.
아이를 낳을 때 산고(産苦) 없이 출산하는 것, 즉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오래된 과제였다. 물론 성직자들은
고통 없이 아이를 낳는 것에 반대한다. 사실 성직자들은 세상에서 고통과
근심이 사라진다는 생각 자체에 반대한다. 세상에서 고통이 사라지면
그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직업은 의미를 잃게 된다
세상에 고통과 근심과 불행이 있다면 그때는 기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아무 고통이 없다면 아마 신조차도 완전히 무시될 것이다
사람들은 거의 기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고통 속에 있을 때에만
신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항상 고통 없는 분만에 반대해 왔다.
그들은 출산의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출산의 고통은 없어져야 한다. 출산의 고통이 신의 섭리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어떤 신도 아이를 낳을 때 고통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의사는 고통 없는 출산을 위해 약물을 투여하거나
마취를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의사들이 취하는 이런 조치는 산모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수세기 동안 여자들
스스로도 이것을 시행해 왔다‥‥‥
75퍼센트의 아이들이 밤에 태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낮에는 산모도
매우 활동적이며 깨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 일이 어렵다. 잠들어
있을 때 산모는 좀더 이완되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기 수월한 것이다.
밤에는 산모도 잠을 자며 좀더 이완되어 있다. 그래서 75퍼센트의
아이들은 태양이 떠 있을 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 산모는 아이가 태어나려는 바로 그 순간부터
장애를 만들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는 나중에도 많은 장애를
만들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산모는 장애를 만들기 시작한다.
의사들이 취하는 조치 중의 하나는 약물을 투여해서 산모의 육체를
잠잘 때처럼 이완시키는 것이다. 이런 조치가 취해지고 있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의식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식에 대한 신뢰가 계속 줄어들면 의식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로젬(Lotem)이라는 의사는 인간의 의식을 신뢰했다. 그래서 수천 건의
무통 분만을 유도해 냈다. 이 방법은 산모의 의식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산모는 출산시에 명상적으로, 의식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가 출산에 대항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출산을 환영하게 해야 한다.
출산의 고통은 아이의 탄생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산모가 아이의 탄생에 저항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산모는 아이의 탄생과
관련된 신체의 모든 메커니즘을 위축시키려고 한다. 출산의 고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에서 생긴 이 저항이 아이의 탄생을 막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테어나려고 할 때, 두 사람 사이에는 난투가 벌어진다.
산모와 아이 사이에는 커다란 충돌이 생긴다. 이런 싸움 때문에
고통이 생기는 것이다. 이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싸움과 저항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산모의 저항을 해결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산모에게
진정제를 투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 상태에서 아이를 낳는 산모는
진정한 의미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거기에
이유가 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아이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도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 사실은 두 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이가 태어나며 다른 한편으로는 보통의 여자가
어머니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무의식 상태에서 태어나면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가 일그러진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태어나지 않고 단지 유모만 남게 될 것이다.
나는 화학 물질이나 다른 피상적인 방법으로 산모를 진정시켜서 아이를
출산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산모는 분만하는 동안 충분히
의식적이어야 한다. 바로 그 의식 속에서 어머니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대가 이 사실을 통감한다면 산모의 의식은 분만에 대비해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산모는 명상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어야 한다.
명상은 산모에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산모가 저항하거나
싸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모는 분만 과정에 협조해야 한다
마치 강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바람이 불듯이, 낙엽이 떨어지듯이
산모는 자기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에 완전히 협조해야 한다. 만일
산모가 분만시에 완전히 협조하고, 저항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명상적으로 완전히 빠져들 수 있다면, 고통 없는 출산이 가능하다. 고통은
그냥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나는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 이 방법을 이용한 많은
실험들이 행해졌다. 앞으로 산모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파급효과는 상당히 클 것이다.
첫째, 우리는 처음 대할 때부터 고통을 주는 일이나 사람에게는 나쁜
감정을 갖기 시작한다. 처음 만날 때부터 싸우게 되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적의(敵意)를 갖게 된다. 이것은 우호적인 관계를 만드는 데 방해가 된다.
처음부터 마찰을 일으켰던 사람과는 협조라는 교량을 만들기가 어렵다.
그것은 피상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산모가 아이를 낳는 데
협조할 수 있고, 충분한 각성 속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여기 흥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출산의 고통'이라는
말은 들어 왔지만 '출산의 행복'이라는 말은 결코 들어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모가
풍분히 협조한다면 '출산의 행복'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고통 없는 탄생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탄생에 찬성하는 것이다.
의학의 도움으로는 기껏해야 고통 없는 탄생을 이를 수 있을 뿐, 결코
행복한 탄생을 이를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의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행복한 탄생을 이를 수 있다 그리고 탄생의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산모와 아이 사이에 의식적인 내면의 연결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면으로부터도 무엇인가가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한
한 가지 실례에 불과하다. 질병에 걸릴 때마다 우리는
단지 표면에서만 질병과 싸우려고 한다. 문제는 환자가 내면에서도
정말 질병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 사실을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질병은 환자가 자초(自招)한 것일
가능성도 많다. 사실 환자가 자초한 질병의 수는 많다. 제 스스로 찾아오는
질병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질병은 환자가 자초한 것이다. 물론 질병이
찾아오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그 질병을 초대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의 연결 고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이 세상에 있는 어느 사회에서도 성교와 아이의 탄생 사이에
연결 고리를 만들 수 없었다 거기에는 아홉 달이라는 긴 시간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원인과 결과를 서로 연결
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성교가 아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굳이 그 둘을 연결시켜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인간이 아홉 달 전에 있었던 일이 지금 아이의 탄생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질병과 관련해서도 일어난다.
우리는 종종 질병을 초대하지만 질병은 나중에야 찾아온다. 그 둘
사이에는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래서 우리는 둘 사이에서 어떤 연결 고리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파산 직전에 놓였던 한 남자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시장이나 상점에 가기를 두려워했다. 거리를 걷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어느 날 그는 욕실에서 나오다가 넘어져서 그만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온갖 방법으로 치료가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반신불수가 되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반신불수가 되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혹은 그가 반신불수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는지 아닌지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마 그는 반신불수에 대해서 결코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 어딘가에서, 혹은 그의 무의식에서
그는 시장이나 상점이나 거리에 나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것이 첫번째다.
둘째, 그는 사람들이 덜 적대적이기를 바랐다. 그는 사람들이 동정심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 이제 육체가 그를 도와 줄 것이다. 육체는
항상 그림자처럼 마음을 따른다. 육체는 항상 마음을 도와 준다. 그리고
마음은 항상 모든 조치를 취해 준다. 사실 우리는 마음이 무슨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다. 그대가 하루 종일 굶었다면 마음의
배려에 의해 밤에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마음은 꿈속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는 하루 종일 굶었으므로 틀림없이 시장할 것이다.
그러나 궁전에서 열리는 잔치에 참석하라: 그대는 꿈속에서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마음은 육체가 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해 조치를 취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꿈속에서 보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마련한 대용품이다. 낮에 할 수
없었던 것을 밤에 하는 것이다. 마음이 모든 조치를 취해 준다. 가령
밤에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다면 마음이 알람을 울려 줄 것이다 마음은
꿈속에서 그대를 화장실에 보낼 것이다. 그래서 방광의 긴장을 덜
느낄 것이다. 그대는 화장실에 다녀왔으므로 모든 것이 편안하다고 느낄 것이다.
수면이 방해받지 않도록 마음이 조치를 취한 것이다. 마음은
그대의 욕망이 충족되도록 하루 종일 조치를 취한다.
이 남자는 반신불수가 되어 쓰러졌다. 이제 우리는 그의 반신불수를
치료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치료는 사실 그에게 해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로 반신불수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병을 부른 것이다. 그의 반신불수를 치료하더라도 그는 두번째나 세번째
혹은 네번째 질병에 걸릴 것이다. 그는 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질병으로 시달릴 것이다. 그리고 그가 쓰러지자마자
그는 모든 상황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 그는 자신이
비관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변명거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하겠는가? 나는 반신불수가 되었다! 이제 그는 채권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제가 어떻게 당신 돈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지금 제가 처한 상황을 보지 못합니까?" 사실 채권자는 돈을 달라고 하기가
부끄러울 것이다. 그의 아내는 그를 돌보고 아이들은 시중을 들고
그럴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이 그를 만나러 올 것이고,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누군가가 질병에 걸리기 전에는 결코 그에게 사랑을 』
보여 주지 앉는다. 그러니 사랑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질병에 걸려야 한다.
여자들이 항상 질병에 걸리는 주된 이유는 그것이 사랑을 받을 슥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달리 남편들을 집에 잡아 둘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남편을 집에 잡아 둘 수 없지만 질병은
남편을 잡아 둘 수 있다. 일단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이것이 마음 속에
새겨진다면, 우리는 동정을 받고 싶을 때마다 질병에 걸리게 된다. 사슬
아픈 사람에게 동정심을 럴여 주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동정심을 통해
그의 질병에 어떤 낼새가 더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헐한 일이다. 그대는 단지 그를 치료해야 할 뿐이다.
반신불수가 된 이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기껏해야 』
그로 하여글 질병의 종류만 계속 바꾸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질병에
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깊은 자기암시일 뿐이다
이 남자의 반신불수는 그 기원(起源)이 정신 속에 있는 것이다
반신불수가 된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두 해 동안
반신불수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일어설 수도 없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불이 나자 가족이 모두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갑자기 그들은
이 남자가 어찌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이 남자가 뛰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남자는 앉아 있지도 못하던
사람이었다. 그때 그의 가족이 그가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 남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는 사람들을 놀린 것이 아니다.
그의 질병은 육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차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가 환자의 질병이
마음 속에 있다고 말할 때 환자는 그 소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그 말은
환자가 불필요하게 죄병을 앓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아무 이유 없이 아프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사람은 없다. 질병에 걸리는 데에는 정신적인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들은 육체가 질병에 걸리는 이유만큼이나 중요하다. 혹은 그
보다도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이유 때문에 실제로 육체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사가 비록 실수로라도 어떤 환자에게
그가 정신적인 이유 때문에 질병에 걸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의사의
잘못이다. 환자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의사에게
씁쓸함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마음에서 기인한 질병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태도를 갖지 못한다.
만일 내가 다리를 다쳤다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동정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마음이 아프다면 사람들은 마치 내가 무슨 잘못이나
한 것처럼 그것이 정신적인 질병이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내가 다리를
다쳤다면 나는 동정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마음에서 기인한 질병을
앓고 있다면 그것이 마치 내 잘못인 양, 나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마음에서 기인하는 질병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의사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의사들은 단지 육체에서 기인하는 질병에 대한 치료법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마음에서 기인한 질병들은
의사의 치료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질병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그는 이런 질병이 가신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는 그대에게 다른 타입의 의사를 찾아보라고 조언해 주어야 한다.
마음에서 기인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은 먼저 내면을 치료한 이후에
표면을 치료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명상은 안에서 바깥으로 치료해 나가는 방법이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붓다를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철학자입니까? 아니면 사색가입니까? 아니면 성자 혹은
요기(yogi)입니까?" 붓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단지 치료하는
사람, 즉 의사일 뿐이다. "
붓다의 이 대답은 정말로 경이롭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단지
치료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면의 질병에 대해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해
그대와 이야기하고 있다.
육체에서 기인한 질병을 완전히 근절할 수는 없으므로 마음에서 기인한
질병에 대해서도 무슨 조치를 취해아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날,
우리는 종교와 과학이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날
우리는 의학과 명상이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이 간격을 메우는 데 의학보다 더 도움이 되는 학문은 없다.
화학은 아직 종교에 가까워질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물리학과
수학도 아직은 종교에 가까워질 이유가 없다. 수학은 종교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수학이 종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기 대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수학이 종교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경우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수학은 그
게임을 영원히 계속할 수 있다. 수학은 단지 게임일 뿐,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생명을 다루고 있다.
아마 처음으로 종교와 과학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게 되는 사람은
의사일 것이다. 사실 그런 일은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문명이
발달하고 이해력이 있는 나라에서는 이미 그런 일이 진행되고 있다.
의사들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jung))')은 죽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나를 찾아오는 환자들은 근본적으로 종교가 없어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그는 의사의 입장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지적이다. 만일 환자들에게 신앙생활을 하게 하면 그들은 다시 건강해질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점은 알아둘 만하다. 삶이 내리막길에 접어들게 되면‥‥‥
서른다섯 살까지는 오르막길이나 그 이후의 삶은 내리막길에 접어들게 된다.
서른다섯이 삶의 절정이데-. 그러므로 서른다섯 살까지는 명상에서
가치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때까지는 육체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육체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아마 이 단계에서의 모든 질병은 육체의
질병일 것이다. 그러나 서른다섯 살 이후의 질병은 새로운 방향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제 삶은 죽음을 향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성장할 때
그것은 외부로 확장된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에는 안으로 수축한다.
노년기는 안으로 수축해야 하는 시기이다.
노인들의 모든 질병은 대부분 죽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대개
사람들은 아무개가 이런저런 질병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개가
죽음 때문에 질병에 걸렸다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종류의 질병에 걸리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는
다양한 질병에 노출되며 질병에 걸리기 시작한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내일 죽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면 질병에 걸릴 것이다.
모든 것이 정상이다. 체온이나 혈압, 맥박 등 모든 검사 결과가 정상이다.
청진기로도 아무 이상을 찾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내일 죽게
된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여러 가지 질병에 걸릴 것이다. 24시간 안에
걸릴 수도 없는 수많은 질병에 걸릴 것이다.
이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는 모든 질병에 대해 자신을
활짝 열어 놓은 것이다. 그는 질병에 저항하기를 그만둔 것이다.
그는 죽음을 확신했기 때문에 내면에서 모든 질병에 대해 보호막을
만들어 주던 의식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이제 그는 죽을 준비가 되었으므로
질병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은퇴한 사람들이 일찍 죽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퇴하려는 사람들은 이 점을 잘 알아두어야 한다. 은퇴한
사람들은 5년이나 6년 정도 일찍 죽는다. 일흔 살에 죽을 사람은 예슨
다섯 살에, 여든 살에 죽을 사람은 일흔다섯 살에 죽을 것이다. 은퇴하고
있는 10년이나 15년의 세월은 죽음을 준비하는 데 소비될 것이다.
그는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자신이 삶에서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거리에서도
아무도 그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
그가 사무실에 있을 때는 달랐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를 거들떠
보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경제 원칙에 의해서 움직인다. 사무실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있으며
이제 사람들은 그들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그들은 이 사람에게
계속 인사할 여유가 없다. 그들은 그를 잊을 것이다 갑자기 그는 자신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단는다. 그는 뿌리째 뽑힌 듯한 느낌을 갖는다.
그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의 자식들도 자기 아내들과
극장에 가기 바쁘다. 전에는 그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갑자기 그는 나약해지며 죽음에 대해 완전히 열려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은 언제 내면에서 건강해지는가? 무엇보다도
그가 자신의 내면 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는 때이다. 보통 우리는 내면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의 모든 느낌은 손이나 다리, 머리, 가슴 등 모두 육체와
관련된 것이다. 거기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은 없다 우리의 모든
자각은 집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집에만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만일 내일 집이 무너진다면
나는 내가 무너진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생각 자체가 나에게
병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단지 집에 거주하고 있을 뿐이며, 비록 집이
무너져도 나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그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명상을 하지 않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명상의 첫번째 의미는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 속에 있는 동안, 의식은 항상 다른 것을 자각한다. 의식은 결코
의식 자체를 자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홀로 앉아 있을 때 졸음을 느끼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고 있다면
깨어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어두운 방에 홀로 있으면 졸음이
올 것이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으므로 의식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면 잠자는 것말고 무엇을 하겠는가?
달리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이야기할 사람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이 홀로 있다면, 잠이 그대를 엄습할 것이다 다른 방도가 없다.
잠과 명상이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같고,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라. 잠은 홀로 있지만 혼수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명상은 홀로 있지만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유일한 차이이다.
홀로 있을 때 그대 자신을 자각할 수 있다.
어느 날 붓다와 함께 앉아 있던 사람이 발을 흔들고 있었다. 붓다가
그에게 물었다. "왜 발을 흔들고 있는가?"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괘념치 마십시오. 단지 발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발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
붓다가 말했다. "발이 움직이고 있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
그렇다면 그 발은 누구의 발인가? 그대의 발인가?"
그 남자가 말했다. "그것은 제 발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까? 어서 하시던 말씀을 계속해 주십시오."
붓다가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무의식 속에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발의 움직임을 자각』하도록 하라.
그러면 두 줄기의 각성이 생길 것이다. 그대는 발을 자각』하면서
동시에 주시자도 자각하게 될 것이다. "
자각은 항상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밖으로 진행하고 다른 하나는
내면을 관통한다. 그러므로 명상의 기본은 육체와 자신을 동시에
자각하는 것이다. 이런 자각이 생기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의학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해 주지 못한다면
인간이라는 질병을 결코 치유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의학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단지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을 연장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오래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금 기다리는 것이 더 낫다.
사람들은 수명을 연장함으로써 죽음을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의학이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킨 나라에서 어떤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지 아는가?
바로 안락사를 위한 울동이다. 노인들은 죽을 수
있는 권리를 헌법에 명시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삶을
영위하기가 어렵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단지 그들을 병원에 묶어
둘 뿐이다. 사람들은 사람을 산소 탱크에 넣어서 끝없이 살아 있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를 계속 살아 있게 할 수 있지만 그런 삶은 죽음보다도
못하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산소 탱크에
연결된 채, 거꾸로 혹은 다른 이상한 자세로 병원에 누워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금세기 말이면 세상에 있는 모든 문명국이 죽을
수 있는 권리를 헌법상의 인권으로 갖게 될 것이다. 당사자의 요청을 무시하고
그를 계속 살아 있게 할 권리가 의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단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킴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수는 없다.
인간을 좀더 건강하게 하는 것 역시, 그를 좀더 행복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주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는 결코 죽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런 이해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명상은 이런 불멸성, 즉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오직 껍데기만이 죽을 뿐이다. 그대는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육체를 돌봄으로써 육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이 그대의 문 앞에 와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을 자각해야 한다. 이렇게 내면을 이해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다.
내면에서의 명상과 표면에서의 치료를 통해 의학은 완전한 학문이 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명상과 의학은 같은 과학의 양극(兩極)이다. 그러나
아직 연결 고리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서히 명상과 의학은 서로
가까워지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주요 병원에서는 최면술사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최면은 명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걸음 다가선 것이다 최소한 인간의 의식에 대해 무엇인가가
행해져야 하며, 육체를 치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현재는 최면술사가 병원에 들어갔으므로 다음에는 사원(寺院)이 병원에
들어갈 것이다. 아마 시간이 걸릴 것이다. 최면술사 다음으로는
모든 병원이 요가과(yoga科)나 명상과(冥想科)를 신설할 것이다. 사실
그래야 한다. 그때 우리는 인간을 전체적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육체는 의사들이 돌볼 것이고, 마음은 심리학자들이 돌볼 것이며, 영혼은
요가나 명상이 돌볼 것이다.
병원이 인간을 전체로서 받아들이고 전체로서 치료하는 날, 그날은 인류에게
환희의 날이 될 것이다. 나는 그대들이 그날이 빨리 올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사랑과 침묵으로 나의 이야기를 경청해 쿤 그대들에게 감사하다.
끝으로 그대들 모두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신에게 인사드린다. 나의 인사를
받아 주기를·

오쇼

園 譯註
1) 구자라트(GLliarat◎ 인도의 서해안에 있는 주(州).
2) 아마다따드(Ahmadabacl) : 子자라트 주(州)의 주요 도시로 서인도에서는
봄베이 다음가는 대도시다.
3) 임상의학(臨床醫學, clinical medicine) · 직접 환자와 접촉하면서 진료하는
의학의 한 부문. 의학은 기초의학·사회의학 임살의학으호 대별된다.
4) 티르탕카라(tirthankara) :자이나교에서, 윤회라는 삶의 흐름을 건너는 데
성공한 후 다른 사람들이 따를 길을 만든 구원자를 가리키는 말. 자이나교
신앙에 따르면 각각의 우주적 주기마다 24명의 티르탕카라가 나타난다고 한다.
티르탕카라는 회화나 조각에서는 카요트사르가(kayotsarga ' 육신으로부터의 해탈)
라고 알려진 부동의 자세로 서 있거나, 사자좌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런 형상은 종종 근리석 또는 그
밖에 매우 반들반들한 돌이나 금속에 새겨지는데, 그 차가운 느낌을 주는 표면은
일상세계에 대한 냉엄한 초연성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티르탕카라들은
완벽한 존재이므로 상징적인 색깔이나 표상을 제외하고는 서로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5) 라마(Rama) :가장 널리 숭앙받는 힌두교 신들 중의 하나로 무용(武勇)과
미덕의 화신. 인도 전승(傳承)에 따르면 세 명의 라마(파라슈라마·발라라마·
라마찬드라)가 나오지만, 라마라는 이름은 주신(主神)인 비슈누의 일곱번째
화신인 라마찬드라를 주로 가리킨다. 라마는 고대 인도의 영웅으로서 뒤에는
신격화 되었지만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6) 크리슈나(Krishhna) 인도의 신들?가운데 가장 널리 숭배되고 사랑받는  신의
하나. 최고 신으로 숭배되기도 하고 힌두교 비슈누 신의 여덟번째 아바타라
(avatars)로 숭배되기도 한다. 박티(bhakti)를 강조하는 수많은 종파들이
크리슈나를
중심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오랜 세월 시 ·음악·회화 등의
분야에서 풍부한 종교적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가장 널리 알려진 크리슈나의 모습은
청년 크리슈나가 그를 흠모하는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피리를 부는 모습이다.
7) 병리학(病理學, pathology) 질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질병 발생의 기전
(機轉), 시간 경과에 따른 장기(臟器)조직의 변화를 육안적 ·조직학적으로
관찰하며, 아울러 기능적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 궁극적으로 질병의 본태를 밝히고,
시간의 경과에 따르는 형태학적 ·기능적 변화를 규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8) 역증요법 .치료하려는 질환과 전혀 반대의 증상을
일으키는 약제를 쓰는 치료법. 이증요법(異症療法)이라고도 한다.
9) 동종요법(同種療法, homeopathy) : 19세기에 널리 쓰인 치료법의 하나로
"같은 것은 같은 것을 치료한다(like cures like)"는 원칙에 기초하여,
건강한 사람에겐 투여했을 경우 어떤 질병이 나타나는 약물을, 그와 같은 질병에
걸렸을 때에 소량씩 투여함으로써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 동종질환동종치료
(同種疾患同種治療法)떼 기초한 이 치료체계는 1796년 독일의 의사 사무
하네만이 도입했다. 이 치료법의 기본 요점은 첫째, 건강한 사람에게서 그 병
비슷한 증상을 일으키는 약물이나 치료법이 질병치료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
둘째 특절 약물이 치료효과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사람에게서
그 효과가 '증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동종요법의 또 다른 특징은 용량론이다.
동종요법 전문가들은 의약품이 매우 소량 투여되어도 작용한다고 믿는다.
20세기에 들어서 동종요법은 의학자들 사이에서 거의 호응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특히 질병의 증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질병의 원인을 밝혀 내려는 연구에는
소홀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10) 플라시보(placebo) 약리작용을 갖지 않았거나 가졌더라도 직접적인
결과보다는 심리적인 효과를 목적으로 환자에게 약을 투여하는 것으로, 가약
 또는 위약이라고도 한다. 플라시보는 라틴어의 placere(위로하다
에서 유래한 용어이며. 보통 유당(乳糖, lactose)을 많이 사용한다.
11) 자연요법(自然療法, n剡uropathy) ·공기 태양열 ·물·온천 · 열 등 」
연계의 물질이나 환경을 치료에 응용하는 물리요법을 말한다. 화학요법이나
침술요법 등을 위주로 하는 현대 임상의학과는 대립적인 면이 있는 요법으로
의료 및 건강법의 보조적인 부분이다.
12) LSD(IYEergic aclll rliethylamlde) : 맥각(麥角 , e.1:of) 알칼로이드(alka
1()irA)의 일종인 리세르그산 디에칠아미드의 약칭으로, 리세르기드라고도 한다
1,SH는 입을 통해 20mg만 섭퓌해도 중추신경계 및 말초신경계의 기능에 뚜렷한
변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물체의 윤곽은 파도치듯 찌부러져 보이고, 주위으
사람 또한 이살하게 보이며 소리를 들으면 그것이 객채의 변화로 전환되어,
마치 깐화결을 늘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색채나 형대가 변화한다. LSD를 연용하면
점차 효과가 저하되는 네성이 생긴다. 사람에 따라서는 LSD 섭취에
치해 장기간에 걸쳐 펑신병(17sych(),tis) 증상이 출철하는 일도 있다.
13) 메스칼린(mescaline) :선인장과의 여러해살이 풀로 구슬선인장의 일종인
로포포라(Lophophora williamsii)의 꽃머리 페요테(peyote)에 들어 있는
마취성 알칼로이드의 하나. 페요테는 선인장의 혹 위에 생긴 단추 모양의 것인 데
메스칼린 등의 독성이 있는 알칼로이드를 함유하고 있다. 이 성분은 진해
(鎭咳) ·진통 작용이 있으나 대마(大麻)처럼 명정( drunkenness) ·망상을
일으키며 구토 현기증 동공산대(瞳孔散大)를 일으키기도 한다. 중독되면
다채로운 색채가 나타나는 환시나 음악이 들리는 것 같은 환청 등이 나타난다.
14) 마리화나(marijuana) : 칸나비노이드(cannabinoide) · 하시시(hashish) -
대마(大麻)라고도 한다. 인도대마초(Cannabis sativa roar indicts)의 잎 꽃·
줄기를 말린 것으로, 옛날부터 아시아에서 끽연 등의 기호품이나 치료약으로
사용되어 왔다. 끽연 등의 수단으로 마리화나를 사용하면 도취상태가 되고,
비현실감·기분좋음·환각·망상 불온(不穩), 사고의 혼란, 공간 및 시간 감각
의 왜곡 등 정신변용(精神變容)을 초래하게 된다.
15) 칼 구스타프 응(Carl Gusta.·Jung, 1875∼1961) :스위스의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영향을 받아 분석심리학을 세웠으며 외향성
·내향성 성격, 원형(原型) 등의 개념을 제시하였고, 개인의 무의식 속에
역사적 배경을 가진 집단무의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 애들러 등과
함께 국제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하였으나 리비도에 대한 프로이트와의 의견대립으로
탈퇴한 후 치료와 저작에 전념하였다. 주요 저서로 (:리비도의 변전과
상징기, (:심리적 유형3, (:무의식의 심리학:) 등이 있다.


        제1장
건강의 정의

최근에 스승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초목(草木)처럼 지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음 또한 축제가 될 수 있는 삶의 예술(art of living)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인간은 삶을 성취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나 그것을 성취하고
안 하고는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인간은 삯을 놓칠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숨쉬고, 먹고, 늙고, 무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은 삶이 아니다. 이것은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는 70년에 결친 점진적인
죽음일 뿐이다. 그대 주위에 있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렇게
서서히 죽어 가므로 그대 또한 그들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모든 것을 배운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먼저 내가 의미하는 '삯'이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단지 나이를 먹는 것이 삶은 아니다. 삶은 성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다. 나이를 먹는 것은 어느 동물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장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다. 오직 극소수만이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성장은 매 순간 삶의 원칙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그대는 내면의 불멸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대는 죽음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단지
옷을 갈아입거나 집을 바꾸거나 형태를 바꾸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무 것도 죽지 않으며, 아무 것도 죽을 수 없다.
죽음은 가장 큰 환상이다.
성장하는 것을 보려면 나무를 지켜보라 나무는 성장함에 따라 그 뿌리가
더 깊이 내려간다 거기에는 균형이 있다. 나무가 더 높이 자랄수록
뿌리는 더 깊이 내려간다. 뿌리가 작은 나무는 40여 미터의 높이로
자랄 수 없다. 작은 뿌리는 그렇게 큰 나무를 지탱할 수 없다. 삶에 있어서
성장은 자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곳에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명상이 삶의 첫번째 원칙이다. 다른 모든 것은 두번째 일이다.
그리고 유년 시절은 최적기(最適期)이다. 가이를 먹음에 따라 그대는
무덤에 더욱 가까이 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명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명상은 불멸성 속으로, 영원성 속으로, 신성
(神性)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아직 지식이나
종교나 교육 혹은 기타의 쓰레기를 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명상을
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그는 순진무구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순진무구함은 무지라고 비난받는다. 무지와 순진무구함은 유사하긴 하지만
서로 같은 것이 아니다 무지 역시 순진무구함과 마찬가지로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이 간과해
온 커다란 차이가 있다. 슨진무구함은 박학한 것은 아니지만 박학해하려고도
하지도 않는다. 순진무구함은 그 자체로 충만해 있으며 완전히 :
비워져 있다‥‥
삶의 예술에서 첫번째 단계는 무지와 순진무구함 사이에 경계선을 ÷
짖는 일이다. 순진무구함은 지지되어야 하며 보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현인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발견한 위대한 보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인들은 자신들이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다고, 다시
태어났다고 말해 왔다‥‥‥
삶을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순진무구함이라는 첫번째 원칙을
회복하라. 지식을 떨쳐 버리고 종교와 경전과 이론과 철학을 잊어버려라.
그리고 다시 태어나서 순진무구해지라. 이것은 그대의 손에 달려 있다.
마음을 깨끗이 닦아 내라. 그대 스스로 알아낸 것이 아닌 것,
빌려온 것, 전통과 인습에서 온 것, 부모나 선생이나 대학 등 남으로부터
이어진 모든 것을 버리라. 그 모든 것을 제거하라. 다시 한번 단순해지고
다시 한번 어린아이가 되라. 이런 기적은 명상을 통해 가능하다.
명상은 진정한 존재만 남기고 그대의 것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잘라낸다.
명상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린다. 그래서 바람 부는 태양 아래 =
홀로 벌거벗고 서 있게 한다 마치 그대가 지구상에 내려온 첫번째
사람인 것처럼.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을 발견해야 하고
구도자가 되어야 하고, 순례를 떠나야 하는 사람처럼.
삶의 두번째 원칙은 순례이다. 삶은 찾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삶』
이것 혹은 저것이 되려 하거나 혹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수상이 되는
야심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를 찾기 위한 탐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누군가'가 되려고 하는 것은 매운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누군가가 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무엇인가가 되려는 것은 영혼의 병이다. 존재(being)가 그대이며,
그대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 삶의 시작이다. 그때 매 순간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며 매 순간 기쁨이 생긴다. 그리고 새로운 신비가 문을
열며, 그대 속에 새로운 사랑이 자라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전에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자비와 미(美)와 선(善)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이 그대 속에서 자라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작은 풀잎에서도 엄청난 중요성을 발견할 만큼 민감해진다.
그대의 감수성은 작은 풀잎조차도 존재계에서 가장 큰 별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줄 것이다. 그 작은 풀잎이 없다면 존재계는 지금보다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풀잎은 독특하며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작은 풀잎도 자신의 개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감수성은 그대에게 새로운 우정을, 나무와 새와 동물과의
우정을, 그리고 산과 강과 대양과 별과의 우정을 선사할 것이다.
사랑이 자라나고 우정이 성장함에 따라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대가 민감해짐에 라라 삶은 더욱 커진다. 삶은 작은 연못이 아니다.
삶은 대양같이 광활하다. 삶은 그대와 그대의 아내, 그대의 아이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삶은 결코 한정된 것이 아니다. 존재계 전체가 그대의
가족이 된다. 존재계 전체가 그대의 가족이 되지 않는다면 그대는 삶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수백만 가지 방법으로
연결된 광활한 대륙이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이 전체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그만큼 작아질 것이다.
명상은 감수성을 가져다 주며, 그대가 이 세상에 속한다는 크나큰 느낌을
가져다 준다. 이 세상은 우리의 세상이다. 별들은 우리의 것이며
우리는 이방인이 아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존재계에 속한다. 우리는
존재계의 일부이며 존재계의 십장이다.
둘째로, 명상은 거대한 침묵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잡다한 지식은
모두 사라졌으며 지식의 일부인 사념들 역시 사라졌기 때문이다‥‥‥
거기 엄청난 침묵이 있고, 그대는 놀란다. 이 침묵이야말로 유일한
음악이다. 모든 음악은 어떻게든 이 침묵을 표현하려는 노력일 꾼이다.
고대 동양의 선지자들은 모든 위대한 음악, 시, 춤, 그림, 조각 등』
예술이 모두 명상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해 왔다. 이런 예술들은
순례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해서든
불가지(不可知)의 것들을 알려진 것들의 세계로 가져오기 위한 노력이었다.
단지 순례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선물인 것이다.
어쩌면 노래가 존재의 근원을 찾으려는 욕망을 부추길지도 모르며
어쩌면 조각이 그런 욕망을 부추길지도 모른다.
이 다음에 고타마 붓다나 마하비라')의 사원에 가게 되면 그저 고요히
앉아서 조각을 바라보라‥‥‥ 그 조각은, 그것을 바라보면 침묵에 잠기게끔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상의 조각이지 결코 고타마 붓다나
마하비라와 관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대양 같은 상태에서 육체는 특정한 자세를 취한다. 그대 자신에게서도
그런 것을 관찰했겠지만 자각하지는 못했다. 화가 날 때 육체가
특별한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화가 날 때 그대는 손을
펴고 있을 수 없다. 화가 날 때에는 주먹을 쥔다 화가 날 때 그대는
미소를 지을 수 없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감정에는 육체의
특별한 자세가 뒤따른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내면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지나간 세대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 수세기 동안 어떤
비밀스런 과학이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책이나 언어를 통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침묵이나 명상, 평화같이 좀더 내면 깊이 들어가는
어떤 것을 통해서였다 그대의 침묵이 성장함에 따라 우정과 사랑도 성장하고
삶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춤이 되고 기쁨이 되며 축제가
된다.
왜 전세계에 걸쳐 모든 문명과 모든 사회에는 일 년에 며칠씩 축제
기간이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 며칠간의 축제는 단지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모든 사회가 그대의 삶에서 축제를 빼앗아가고서
그대에게 아무 보상도 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삶은 문명을 위험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명은 약간의 보상을 해 주어서 그대가
완전히 불행과 슬픔에 빠졌다고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보상은
가짜다.
그렇지만 그대의 내면세계에서는 지속적인 빛과 노레와 기쁨이 가능하다.
사회는, 그대에게 보상을 해 주지 않으면 억압된 것이 폭발하여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느낄 때에만 보상을 해 준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라. 사회는 그대의 억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러나 이런 것은 진정한 축제가 아니며, 진정한 축제가 될 수도 없다.
진정한 축제는 그대의 삶으로부터 와야 하며, 그대의 삶 속으로 와야 한다.
진정한 축제는 미리 날짜를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1월 1일에
축제를 벌이겠다고 미리 정해 놓는 것은 진정한 축제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대는 일 년 내내 불행하게 지내다가 11월 1일이 되면
갑자기 불행에서 빠져나와 춤을 춘다. 그렇다면 그대의 불행이 가짜거나
11월 1일의 축제는 가짜다. 둘 다 진실일 수는 없다. 그리고 11월 1일이 지나면
그대는 다시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가며, 모든 사람이
불행과 근심 속으로 되돌아간다
삶은 지속적인 축제가 되어야 하며, 일 년 내내 계속되는 빛들의
향연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대는 성장할 수 있고 꽃필 수 있다.
사소한 일들도 축제로 변형시키라‥‥‥‥ 그대는 모든 것을 통해 그대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거기에는 그대의 서명이 있어야 한다 그때 삶은
지속적인 축제가 된다.
비록 몸이 아파 침대에 누워 있다 해도 그대는 침대에 누워 있는
간들을 아름다움과 기쁨의 순간으로, 휴양과 휴식의 순간으로, 명상의
순간으로, 음악이나 시를 듣는 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프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들은 사무실에 있는데 그대는 침대에 )
누워서 왕처럼 휴식하고 있으므로 행복하게 여겨야 한다. 누군가가 그를
위해 차를 준비하고, 사모바르(samovar)')는 노래를 부르며,
친구는 그대를 위해 피리를 불어 준다. 이런 것이 어떤 약보다도 더 중요하다.
아플 때는 의사를 부르라,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약은 없기 때문이다
그대 주위에 아름다움과 음악과 시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르라.
제 분위기보다 더 잘 낫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약은 가장 낮은 차원의 치료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망각한 듯 하다.
그래서 약에 의존하게 되고 그 결과, 우울하고 슬퍼진다.
마치 사무실에서 누리고 있던 커다란 기쁨을 잃은 듯이! 그러나 사무실에 %
있을 때에도 그대는 불행했었다. 단지 하루 사무실에 나가지 않았는데도
그대는 여전히 불행에 매달린다. 그대는 불행을 놓아 주지 않는다.
모든 것을 창조적으로 만들라, 최악의 것에서 최상의 것을 만들어 내라.
이것이 내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이 삶의 모든 순간과
삶의 모든 상황을 아름다움과 사랑과 기쁨으로 만드는 데 보냈다면
그의 죽음은 그가 전 생애 동안 노력한 것의 궁극적인 절정이 될 것이다.
그의 마지막 끝마무리는‥‥‥ 그의 죽음은 매일 있는 평범한 죽음과는 달리
결코 추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죽음이 추하다면 그것은 그대의
전 생애가 헛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평화롭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죽음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옛 친구들과 옛 세상에게 즐겁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
속에 어떤 비극도 있어서는 안된다‥‥
명상과 함께 시작하라. 그러면 그대 속에서 침묵과 고요와 축복과
감수성이 자랄 것이다 그리고 명상으로부터 생기는 모든 것을 삶으로 가져오라.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라. 나누어진 모든 것은 빠르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거기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슬픔의 눈물은
흘릴 필요가 없다. 아마 기쁨의 눈물은 있겠지만 슬픔의 눈물은 없을 것이다.

약과 명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명상(meditation)'이라는 말과 '약(medicine)'이라는 말은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약은 육체를 치료하는 것을 의미하고 명상은 영혼을
치료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둘 다 치료하는 것이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치유(healing)'라는 말과 '전체(whole)'
라는 말도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치유된다는 것은 어떤 것도
놓치지 않고 전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치유라는 말에는 다른 의미가
하나 더 함축되어 있다. '신성하다(holy)'는 말도 같은 어원에서
온 것이다. 치유(healing), 전체(whole) , 신성하다(holy)는 말은 그
어원이 다르지 않다.
명상은 그대를 치유하고, 그대를 전체로 만들어 준다. 그리고 전체가
되는 것은 신성해지는 것이다.
신성함은 어떤 종교나 교회에 속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신성함은 단지 그대가 내면에서 전체이며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아무 것도 놓치지 않는다. 그대는 가득 채워져 있다. 그대는 존재가
원하는 대로 존재하고 있다. 그대는 자신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종교는 내면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며, 명상이 그 길이다. 명상의 ·
제 역할은 가능한 한 깊이 그대를 의식 속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의 몸은 외부적인 것이 되며 마음조차도 외부적인 것이 된다. 가슴은 존재의
중심에 매우 가까이 있지만 가슴조차도 외부적인 것이 된다. 몸과
마음과 가슴, 이 세 가지가 외부적인 것으로 보일 때 그대는 존재의 중심에
도달한 것이다.
중심에 도달하는 일은 모든 것을 변형시키는 엄청난 폭발이다.
그는 결코 이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제 그대는 몸이
단지 외부의 껍질이며, 마음은 조금 더 안쪽에 있기는 하지만 진정한
중심이??아니며, 가슴은 조금 더 안쪽에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대의
익숙한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는 몸이나 마음이나
가슴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그대는 처음으로 결정화(結晶化)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대는 예전처럼 미지근한 사람이 아니다. 그대는 전에 알지 못했던
엄청난 에너지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죽음은 몸이나 마음이나 가슴에게
일어날 뿐, 그대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대는 영원하다. 그대는 항상 여기에 있어 왔다. 그리고 항상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대는 여러 형태로, 궁극적으로는 아무 형태도 없는
상태로 항상 여기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대는 파괴되지 않는다.
파괴될 수가 없다. 이런 자각이 그대로부터 두려움을 몰아낸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자유가 찾아오고 사랑이 찾아온다. 이제 그대는 나누어 줄 수 있다.
원하는 만큼 줄 수 있다. 이제 그대는 엄청난 샌명수의 원천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명상은 그대를 전체로 만들어 주며 신성하게 만들어 준다. 명상은
그대를 고갈되지 않는 원천으로 만들어 준다. 그래서 그대는 배고프고
목마르고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다 그대는
빛이 된다‥‥‥ 명상은 그대 존재의 주인이 되는 길이다. 신도 필요 없고,
교리문답서도 필요 없으면, 신성한 책도 필요 없다 아무도 기독교인이
되거나 유태교인이 되거나 힌두교인이 될 필요가 없다. 이런 것은 순전히
란센스다. 필요한 것은 중심을 찾는 일이다. 그리고 명상은 중심을
찾는 가장 간단한 길이다.
명상은 그대를 전체로 만들어 주며,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
명상은 세상의 모든 영적인 빈곤을 없앨 수 있을 정도로 그대를 풍요롭게
해 준다. 영적인 빈곤이야말로 진정한 빈곤이다
의식주의 빈곤은 과학이나 기술에 의해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이나 기술은 그대에게 축복을 줄 수 없다. 축복은 과학이나 기술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더라도
평화나 고요, 침묵, 엑스터시를 얻지 못한다면 그대는 여전히 빈곤할 것이다.
사실 그대는 전보다 더 많은 빈곤함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대조가
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황금 궁전에 살고 있지만 자신이 거지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의 내면이 황금 궁전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제
그대는 내면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대는 단지 공허할 뿐이다.
인류가 더욱 지성적이 되고 더욱 성숙해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랑들이
삶은 의미가 없다고, 삶은 단지 우발적인 것이라고, 삶을 지속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느끼기 시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양의 현대 철학들은 모두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자살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물론 내면의 세계를 모른 채 바깥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면 자살이 유일한 해결책처럼
보일 것이다.
명상은 내면을 풍요롭게 해 준다. 그때 자살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대가 자신을 파괴하려 해도 그럴 방법이 없다. 그대의 존재는 파괴될 수 없다.
이런 불멸성을 앎으로써 그대는 죽음과 질병과 노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런 것들은 왔다가 가지만 그대는 건드려지지 않은 체
상처입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이다 내면의 건강은 모든 질병을 넘어서 있다.
내면의 건강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지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

의학이나 생리학, 심리학은 단지 인간의 표면만을 다루므로 아주
미숙하다. 이런 학문들은 인간의 중심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학문들은 마음이나 죽음을 넘어선 의식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신비가들이 의식의 중심을 발견하기 위해 행한 엄청난
노력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거나, 편견을 갖고 있다.
생리학자나 의사의 진단은 그들의 시야가 별로 포괄적이지 못한 까닭으로
완전히 잘못된 것일 때가 종종 있다. 그들은 인간을 단지 물질로만
이해한다. 그리고 마음은 물질의 부산물, 혹은 물질을 넘어서지 못하는
그림자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인간에게 영원한 것은 없으며
영원히 남아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지성인들을 절망에
빠트리는 인간의 자화상을 만들어 왔다. 그들은 의식의 존재를 단호히
부정하므로 그들의 접근 방식은 과학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접근 방식은  종교적 정치적인 광신자들의 접근 방식처럼 미신적인 것이다.
과학은 인간의 의식이라는 내면의 하늘을 탄험해서 그것이 백일몽 같은 것이며
실체가 아니라 단지 그림자라는 것을 발견하지 않는 한,
의식을 부인할 권리가 없다.
과학은 인간의 의식을 탐험하지 않았다. 단지 가정해 왔을 뿐이다.
마치 신이나 천국이나 지옥이 종교 세계의 미신이듯이, 유물론은 단지
가설일 뿐이며 과학 세계의 미신일 뿐이다.
과학은 아직 숲수한 학문이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은 아직 순진무구하지 않으며, 편견을 버리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조건화(conditioning)"를 버리고 진리와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당신은 서양 의학이 인간을 전체적인 유기체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으며 , 인간은 아픈 부분만 치료해서는 안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좀더 섞명해 주시겠습니까?

가령, 그대에게 두통이 있다고 해 보자. 서양의 의사들은 그대에게
아스피린을 줄 것이다. 아스피린은 치료제가 아닌다. 아스피린은
단지 증상을 자각하지 못하게 해 줄 뿐이다. 그것은 두통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두통을 느끼지 못하거1 해 줄 뿐이다. 아스피린은
그대를 교란시킨다. 두통은 그대로 있지만 그대는 더 이상 두통을 자각하지 못한다.
아스피린이 일종의 망각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왜 두통이 생기는 걸까? 일반적으로 의학은 이 점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그대가 의사를 찾아간다면 의사는 왜 그대에게 두통이
생겼는지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대에게 두통이 있다! 의사에게 두통은
간단한 것이다. "두통이 있으니 이 약을 드시오. 그러면 두통이
사라질 것이오." 두통은 사라지겠지만 다음날 그대는 소화장애를 일으킬 것이다.
이제 다른 증상이 생긴 것이다.
인간은 하나이며 전체다. 인간은 유기적인 통합체다, 그대는 문제를
한 쪽으로 제껴 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다른 곳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물론 한 쪽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튀어나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튀어나올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밀려난 문제는 또 다른 곳으로 밀려날 수 있다. 인간에게는 공간이 많으므로
그대는 계속해서 문제를 이곳저곳으로 떠밀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대는 점점 더 병약해질 것이다. 그리고 가끔-
매우 사소한 질병이 커다란 질병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가령 두통이
복통,요통이 찾아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통증이 찾아오는 즉시
약을 복용해서 통증을 멈추게 한다면 ‥‥ 몇 년 동안 중단하지 않고
이렇게 질병을 억제한다면, 어느 날 모든 질병이 한데 모여서 더욱
조직적인 방법으로 그 자신을 표현할 것이다. 그것은 암이 될 수: 있다.
한데 모인 질병은 마치 폭발하듯이 그 자신을 표현할 것이다.
왜 우리는 아직까지 암 치료제를 발견하지 못했는가? 아마 암은 인간이
억제한 모든 질병이 표현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까지
간단한 질병을 억제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암은 간단한 질병이 아니다.
암은 매우 복합적인 질병이다. 암은 모든 질병이 손을 맞잡고
한 데 모여서 전체적으로 발병한 것이다. 모든 질병이 모여서 군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대를 공격한다. 이런 이유로 암에는 약이 소용없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암 치료제를 발견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암은 새로운 질병이다. 원시 사회에는 암이 존재하지 않았다. 왜
원시 사회에는 암이 존재하지 않았는가? 원시인들은 질병을 억압하지
않았으며, 질병을 억압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암은 바로 그대의 ?
신체 조직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대가 억압하지 않았다면 반란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작은 일들이 생겼다가 사라졌을 것이다.
질병에 대한 종교적인 태도는 증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근원을 찾는 것이다.
나는 인것을 '붓다들의 심리학(psycholog? of the budclhas)'
이라고 부른다. 두통은 질병이 아니다. 사실 두통은 근원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몸의 신호다. 그러니 근원으로 달려가라!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찾아내라. 머리는 단지 위험신호를 줄 뿐이며,
경종을 울려 줄 뿐이다. "육체에 귀를 기울이라. 뭔가 잘못되고 있다.
그대는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으며, 육체의 조화를 깨는 일을 하고 있다.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두통이 계솥해서 그대에게
경종을 울려 줄 것이다. "
두통은 질병이 아니다. 두통은 그대의 적이 아니다. 두통은 그대의 친구다.
두통은 그대에게 봉사하고 있다. 그대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뭔가
잘못되고 있을 때 육체가 경종을 울려 주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고치는 대신 그대는 경종을 꺼 버린다. 그대는
아스피린을 복용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것이 의학이나
정신요법에서 행하고 있는 소위 '대증요법(對症療法)'")이다.
이것이 본질적인 것을 놓치는 이유다. 본질적인 것은 근원을 바라보는 것이다.
다음에 두통이 생기거든 실험적으로 간단한 명상법을 시도해 보라.
그런 다음 좀더 큰 질병이나 병적인 증세에 대해서도 이 방법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두통이 있을 때 작은 실험을 해 보라. 조용히 앉아서 두통을 주시하고
두통을 들여다보라. 그러나 적을 바라보듯이 들여다보지는 말라.
적을 바라보듯이 들여다본다면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피할 것이다.
아무도 적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누구나 적을 피하려고 한다.
두통을 친구처럼 바라보라. 두통은 그대의 친구이며 그대에게
봉사하고 있다. 두통은 "뭔가 잘못되었으니 한번 들여다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조용히 앉아서 두통을 멈추려고 생각하지 말고 들여다보라.
두통을 없애 버리려는 욕망이나 갈등, 투쟁, 적의를 갖지 말고 그저
두통을 들여다보라. 단지 두통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라,
만일 내면의 메시지가 있다면 두통이 그것을 전할 수 있도록 주시하라.
두통은 암호로 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조용히 지켜본다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렇게 조용히 지켜보면 세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첫째, 두통을 주시할수록 두통은 더 심해질 것이다. 그때 그대는 이런
당황해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두통이 더 심해진다면 주시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 두통은 더 심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두통을
피해 왔기 때문이다 두통은 머리 속에 있었지만 그대는 두통을
피해 왔다. 그대는 아스피린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두통을 억압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두통을 들여다볼 때 억압이 사라진다. 그래서 두통은
본래의 통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솜마개로 귀를 틀어막지 않고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그때 소리는 굉장히 크게 들릴 것이다.
첫째, 두통은 더 심해진다 두통이 더 심해진다면 그대는 제대로
주시하고 있는 것이므로 만족해도 좋다. 두통이 더 심해지지 않는다면
아직 두통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아직도 두통을 피하고 있다.
두통을 들여다보라. 그러면 두통은 더 심해질 것이다. 이것이 두통을
관찰하고 있다는 첫번째 신호다.
둘째, 두통 부위는 바늘 끝처럼 작아질 것이다. 그것은 넓게 퍼지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 그대는 "머리 전체가 아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머리 전체가 아픈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두통은
단지 작은 부위에만 있다. 이것 역시 그대가 두통을 좀더 깊이 주시하고
있다는 신호다. 통증이 널리 퍼져 있다는 느낌은 속임수다 이것은
통증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다. 통증이 한 군데에서 느껴지면 그것은 더 ·
심해진다. 그래서 그대는 머리 전체가 아프며 통증이 머리 전체에 퍼져 :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 통증은 어느 부위에서도 그다지 심하지
않게 느껴진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거짓을 만들어 낸다.
두통을 주시하라. 그러면 두번째 단계로 두통 부위가 점점 작아질 것이다.
그러다가 두통 부위가 바늘 끝처럼 굉장히 예리해지며 매우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그대는 결코 머리에서 그런 통증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 통증은 매우 좁은 부위에 한정되어 있다.
계속해서 그 지점을 들여다보라.
이제 가장 중요한 세번째 일이 일어난다. 두통이 한 군데 집중되어
매우 심해졌을 때 계속해서 주시하면 두통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시가 완벽할 때 두통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두통이 사라질 때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얼핏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두통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대의 주시가 더 이상 예민하지 않고
집중되어 있지 않다면 두통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대가 정말로
주시하고 있을 때 두통은 사라질 것이다. 두통이 사라질 때 그 뒤에 숨어
있던 원인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두통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보여 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통의 원인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것들은 서로 다른 것들이다.
그러나 매번 같은 경종이 울린다. 왜냐하면 경보 체계는 단순하기 떼문이다.
육체에는 많은 경보 체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원인에 대해서도
같은 경종이 울린다. 최근에 그대는 분노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대는 분노를 표현하지 않았다. 그때 마치 계시처럼, 분노가
거기 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동안 지녀 왔던 모든
분노를 보게 될 것이다‥‥‥ 마치 그대 안의 고름처럼. 이제 분노는
너무 많이 쌓여서 분출되기를 바라고 있다. 분노는 카타르시스(정화)를
필요로 한다. 정화(淨化)하라! 그러면 즉시 두통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아스피린이나 다른 어떤 조치도 필요가 없다:
그리고 분노가 사라지면 아스피린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전혀
다른 질의 안락함이 있을 것이다. 아스피린은 두통을 억압할 뿐이다.
분노는 내면에 남아 있지만 폭력이 그대의 내면을 쉽쓸고 다닌다. 그것은
단지 경종을 껐을 뿐, 내면에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단지 더
이상 경종이 울리지 않을 뿐이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분노는 더욱 축적될 것이다 그것은 궤양이 될
잎인 결핵이 될 순도 있다. 어느 날 그것은 암이 될 수도 있다.
괴양의 분노가 쌓이면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육체도 참는 데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육체는 아프기 시작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육체와 마음을 서로 분리된 두 개의 실체로 생각하지 말라.
육체와 마음은 둘이 아니다. 인간은 몸-마음(body-mind)이며 정신-◎
(p,jycho-somatic) 이다.

명상중에 무엇을 하든지 끊임없이 깨어 있고, 의식하며, 자각하라,
싫증을 느낀다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통증에 주의를 집중하라. 주의야말로
모든 것을 잘라 버리는 위대한 검(劍)이다. 그대는 그저 통증을 지켜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명상의 마지막 단계에서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
그대는 몸에서 여러 가지 이상을 느낀다·. 다리가 마비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팔이 가려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개미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직접 보면 개미는 없을 것이다.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 있을 뿐, 실제로 개미가 기어가는 것인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리가 마비되고 있을 때 주시하라. 모든
의식을 다리에 쏟으라. 가려움을 느낄 때 긁지 말라. 긁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지 주의력을 집중하라. 눈을 뜨지 말라. 주의력을 내면으로
돌리고 주시하며 기다리라. 몇 초 안에 가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주시하라. 복부나 머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더라도
주시하라. 명상중에는 육체가 변화하기 때문에 이런 통증이 생기는 것이다.
명상은 육체의 화학 구조를 바꾸어 놓는다. 이제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육체는 혼돈 속에 있게 된다. 때로는 위장이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많은 감정을 위에 억압해 놓았는데 이제 억압된 것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속이 메스껍고 토하고 싶을 것이다.
때로는 머리에 심한 통증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이 뇌의 구조를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명상을 하다 보면 그대는 정말로 혼돈 속에 있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곧 안정될 것이다 하지만 한동안은 모든 것이
불안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머리의 통증을 지켜보고 주시하라.
주시자가 되라. 그대가 행위자라는 것을 잊으라. 그러면 서서히 모든 것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 아름답고 너무 우아해서
직접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할 것이다. 머리에서 통증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통증을 일으켰던 에너지를 주시하는 동안 사라지면서
동일한 에너지가 기쁨으로 변한다. 그 에너지는 똑같은 것이다.
통증과 즐거움은 같은 에너지의 두 차원이다. 그대가 조용히 앉아서
산만함에 주의를 기울이면 산만함은 사라진다. 그리고 모든 산만함이
사라졌을 때, 그대는 문득 몸이 모두 사라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오쇼는 통증을 주시하는 방법이 또 하나의 광신(狂信)이 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매일 명상을 하는 중에 아픔이나 통증, 구토 등의 불쾌한 육체적
증상이 3∼4일 이상 지속된다면 마조히스트(masochist)가 될 필요가 없다.
즉시 의사의 조언을 받으라. 이것은 오쇼의 모든 명상법에 적용된다.


당신이 이해하기에 . 건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진전한 건강은 내면에서, 주체(,iubje班ivity) 속에서, 의식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의식은 탄생과 죽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의식은
시원하다. 의식 속에서 건강하다는 것은 첫째 깨어 있는 것, 둘째 조화를
이루는 것, 셋째 엑스터시 속에 있는 것, 넷째 자비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네 가지가 충족되면 내적으로 건강한 것이다. 산야스는
이 네 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 산야스는 그대를 좀더 깨어
있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명상법은 그대를 좀더 깨우기 위한 1이며
그대를 형이상학적인 잠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춤이나 노래, 환희는 그대가 좀더 조화를 이루게 만들 것이다.
거기 춤추는 자가 사라지고 춤만 남는 순간이 있다. 그 춤은 순간 속에서
그대는 조화를 느낄 것이다. 노래하는 자가 완전히 잊혀지고 노래만이
남을 때, 거기 '나'라고 하는 중심이 없어진다. -'나'는 완전히
존재한다. 그대가 흐름 속에 있을 때, 그 흐르는 의식은 조화롭다.
깨어 있고 조화를 이루면 엑스터시가 일어날 가능성이 생긴다.
엑스터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적인 기쁨이다. 엑스터시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적당하지 않다. 그대가 엑스터시에 도달한다면, 혹은 기쁨의
궁극적인 절정을 맛본다면 자비는 당연한 결과로서 따라올 것이다.
그대가 궁극적인 기쁨을 가지고 있다면 그 기쁨을 나누어주고 싶을 것이다.
그대는 기쁨을 나누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
귀결이다. 기쁨이 흘러넘치기 시작하며, 그대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기쁨이 저절로 흘러넘치는 것이다.
이 네 가지가 내면의 건강을 이루는 기둥이다. 내면의 건강을 얻으며
그것은 우리의 타고난 권리다. 우리는 그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
건강이란 무엇인가? 먼저 이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통 의사에게
건강의 정의를 물어 보면 건강이란 단지 질병이 없는 상태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는 부정적인 것이다. 건강을 질병과 관련지어
정의해야 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건강은 긍정적인 것이며,
긍정적인 상태이다. 그러나 질병은 부정적인 것이다 건강이 우리의 본성이며
질병은 본성에 침벙한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을 질병과
관련지어 정의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주인을 손님과 괄련지어 정의해야 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건강은 우리와 공존하고 있지만 질병은 가끔 찾아오는 펏이다. 건강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와 함께 있어 왔지만 질병은 피상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의사에게 건강의 의미를 물어 보면 '건강은 질병이 없는 상태'
라고만 말할 것이다. 파라켈수스(Paracelsus)")는 이런 해석은
잘못된 것이며, 건강의 개념을 긍정적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긍정적인 정의에, 창조적인 건강이란 개념
해석에 도달할 수 있을까?
파라켈수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내면의 조화(inner harmony)'
상태를 알지 못하는 한, 기껏해야 우리는 질병으로부터 3.대를 구제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내면의 조화가 건강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질병으로부터 그대를 구해 내면 그대는 즉시 다른 질병에
걸릴 것이다. 왜냐하면 내면의 조화에 대해서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은 내면의 조화다. "'

건강은 오직 한 종류만 있을 뿐이다. 건강에는 어떤 형용사를 붙일
필요가 없다 누군가가 "건강이 어떠십리까?':하고 묻는다면 그대는 "아주
건강합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는 "어떤 종류의 건강입니까?" 하고
묻지 않는다. 만일 그가 "어떤 종류의 건강입니까?".하고 묻는다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대는 "단순히 건강입니다! 건강은 건강일 뿐입니다.
아무 것도 잘못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으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느낌, 이 행복한 느낌이 바로 건강입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건강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가? 아니다. 오직 건강함(healthiness)이
라는 한 종류만이 있다. 그러나 질병의 종류는 수백만 개나 된다.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진리는 하나뿐이다. 그러나 거짓은
수백만 개나 된다. 거짓은 그대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원하는
만큼의 거짓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질병도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대는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잘못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잘못된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는 새로운 질병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건강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같은 것이다. 항상 새롭기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다. 건강은 가장 오래된 것이며 동시에 가장 새롭고
가장 최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5천 년 전에 누군가가 건강했고 지금 그대가 건강하다면 거기에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는 그대와 피부색이 다르고 그대의 언어를
못한다. 그리고 5천 년이 지났다. 그러나 누군가가 건강했다면 그가
누구였는지, 그의 언어가 무엇이었는지, 피부색이 어떠했는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혹은 젊은 사람이었는지 늙은 사람이었는지는 모르더라도
최소한 한 가지 사실은 알 수 있다. 즉, 그는 건강했다는 것이다.
그대는 건강이라는 그 느낌을 체험할 수 있다. 그에 대해서 다른 것은-
가령 그가 아름다운지 추한지 혹은 키가 큰지 작은지는-알 필요도 없고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 즉 그는 건강했고
그대도 건강하다는 사실에서 일치한다. 한 가지 체험은 똑같다.
그러나 질병은‥‥‥ 매일 새로운 질병이 생긴다 이미 수백만 종류으
질병이 존재하지만 인간은 앞으로도 더 많은 질병을 만들어 낼 것이다.
건강하다고 느낄 때 그대는 결코 의사를 찾아가지 않는다. 그대는
보름 동안 나는 건강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의사를 찾아가겠는가?
실제로 고대 중국에서는 기억해 둘 만한 일이 하나 있었다. 아마
그런 일은 미래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중국에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의 아이디어 중 하나는‥‥ 실행에 옮겨져서 수세기
동안 효력을 발휘했다. 그 아이디어란, 의사는 환자의 질병을 고쳐 준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건강하게 지켜 준 대가로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의사가 질병을 고쳐 준 대가로 돈을 받는다면
의사는 그대가 계속 아파야 돈을 벌게 될 것이다. 의사는 그대가
더 자주 아플수록 좋아할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아플수록 좋아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사의 마음에는 갈등이 생길 것이다
먼저 그대는 의사들로 하여금 그들의 역할이 사람들을 건강하게 지켜
주는 것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대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당신의 역할은 사람들의 수명과 원기와 젊음을 연장시키는 것입니다. "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젊고 건강하며 아무도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면
의사들은 굶어죽을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건강하다면 그때는 의사들이
병에 걸려 죽을 것이다.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겠는가?
의사의 기득권이 그가 배워 온 의사로서의 철학에 상충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사람들이 계속 아플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아플 수록
좋아할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한 가지 이상한 일을 보게 된다.
가난한 사람이 병에 걸리면 부자보다 더 빨리 회복퇴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왜 가난한 사람들이 더 빨리 회복되는가? 왜냐하면 의사가
그를 빨리 내쫓아 버리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불필요하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사상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들을 건강하게
지켜 준 대가로 의사에게 월급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한 달 내내 건강했다면 의사에게 일정량의 돈을 지불한다. 그러면
그가 질병에 걸렸다면 의사의 월급은 삭감된다
처음에는 매우 이상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세계에서 이와 정반대로
하고 있기 래문이다. 그러나 공자의 생각은 매우 논리적이고 분별있는 것이다.
공자는 매우 분별있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주치의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치료해 준 대가로서가 아니라, 건강을
지켜 준 대가로 주치의에게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다가 질병에 :
걸리면 치료비나 그 외의 모든 비용은 의사가 부담해야 한다. 그리고 :
의사의 월급도 삭감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사가 그를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이런 방식이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의사나 환자 모두에게 대단히 좋은 것이었다. 의사들은 너무 많은 1을
하지 않아서 좋았고, 환자들은 의사의 수입이 자신들의 건강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어서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의사는 사람들이 질병에 걸려야 하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흥미가 없었다. 대신에 사람들의 건강을 위하여 걷기나 수영
그 밖의 운동을 하도록 처방을 내렸다. 공자의 영향력이 지속되던 수세기
동안, 중국은 틀림없이 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나라였을 것이다.

서양 사회는 이제까지 존재했던 것 중 가장 돈이 많이 드는
의료체계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매년 수조원의
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방 같은 분야에서는 실제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보다 더 많이 아픈 것 같습니다. 건강이란 무엇입니까?

서양 의학은 인간을 자연과는 동떨어진 별개의 개체로 보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범한 가장 커다란 잘못 중 하나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인간의 건강이란 다름 아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서양 의학은 인간을 기계처럼 보고 있다. 그래서 기계 수리공이 성공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서양 의학은 성공한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유기적인 개체다. 아픈 부분만 치료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아픈 부분은 단지 전체 신체조직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상에 불과하다. 아픈 부분은 단지 그곳이 가장 약한 곳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대는 아픈 부분을 치료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이제 질병은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질병이 아픈 부분을 통해 표현되는 것을 막았으므로
그대는 질병을 더 강하게 만든 것이다 그대는 인간이 전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건강하든지 질병을 앓고 있든지 둘 중의 하나다.
그 중간은 없다. 인간은 전체적인 유기체로 다뤄져야 한다.
확실한 이해를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침술(鍼術)은 약 7천 년 전에 중국에서 우연히 시작되었다. 한 사냥꾼이
사슴을 잡으려고 화살을 쏘았는데, 무심코 지나가던 사람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화살이 다리에 박힌게 되었다. 그 사람은 평생 편두통을
앓아 왔는데 화살이 다리에 박히는 순간 편두통이 사라졌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도 이런 일을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침술이 발전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완전한 학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침술사에게 가서 "제 눈에 문제가 있습니다. " 혹은 "머리나
간에 이상이 있습니다" 하고 말하면 그는 눈이나 머리나 간에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대라는 하나의 유기체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그는 전체로서의 그대를 치료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는 아픈
부분만 치료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침술은 인간의 육체에 7백 군데의 포인트(poirlt)·)가 있음을 발견했다.
인간의 육체는 살아 있는 생체전기적 현상이다. 인간의 육체는
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생체전기(bio-electricity)라고 부른다.
이 생체전기는 몸에 7백 군데의 포인트를 가지고 있으며, 각 포인트는
멀리 떨어진 신체의 어떤 부위와 연관이 있다. 그래서 화살이 생체전기가
흐르는 포인트 중 머리와 연관이 있는 곳에 박히자 편두통이 사라진 것이다.
침술은 보다 전체론")적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간을 기계로 여길 때 그대는 인간을 부분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가령 손이 아프다면 그대는 단지 손을 치료할 뿐, 그 손이 속해 있는
육체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 인간을 기계로 보는 것은 인간을
부분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부분적으로는 성공하겠지만 그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다. 왜냐하면 약이나 수술 등에 의해 손으로
발현되지 못하고 억압되어 있던 질병이 다른 곳에서 더 악화된 형태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학이 눈두시게 발달하고 외과학이
대단한 학문이 되었지만 인간은 이전보다 더 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딜레마는 당연한 현상이다. 인간은 전체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유기적 개체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의 서양 의학은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한다. 서양 의학은 그대가 몸-마음(body-mind):
구조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대를 하나의 기계로
여긴다. 그래서 그대의 눈은 교체될 수 있으며, 팔이나 다리도 교체될 수 있으며
조만간에  뇌도 교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죽어 가고 있을 때 그의 뇌를 꺼내서
이식을 한다면, 가령 폴란드인 교황의 두개골 속에 이식을 한다면 교황이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될 것이라고 생같하는가? 뇌는 단지 육체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는 폴란드인과 아인슈타인 사이의 잡종이 될 것이다.
적어도 지금 현재 그는 완전한 폴란드인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교황인지 물리학자인지-모르는 림보(limbo)"' 상태에 처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수혈도 하고, 신체의 일부를 다른 것으로 교체하기도 하며
인공 심장까지 나와 있다 인공 심장을 가진 사람은 진짜 심장을
가진 사람과 같을 수 없다. 인공 심장을 가진 사람은 사랑을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을 한다 해도 마음(mind)을 통해 사랑을 할 것이다.
나는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식으로 사랑을 할 것이다.
이것은 가슴에서 직접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심장이
없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거의 5천 년 전에 의학이 발생했다. 그대가 알면 놀라겠지만
5천 년 혹은 7천 년 전에 씌어진 경전 속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수술법이 동양의 위대한 외과 의사 중의 한 사람인 수쉬루트
(Sushrut).))에 의해 정확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 고대 의학은
사장(死藏)되었다. 바로 이 점이 내가 그대에게 인식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왜 발달된 학문이 사장되었는가? 그것은 수술법이 인간을 기계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파괴하기보다는 수술법을 포기한 것이다.
수쉬루트의 경전에는 현대의 수술에서 사용하고 있는 가장 정교한
기구들까지 기술되어 있다. 모든 수술법들, 심지어 뇌 수술에 대해서도
마치 현대의 수술 효과서처럼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7천 년 ‥‥ 적어도 5천 년 전의 일이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팥은 수준의 수술법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그들도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과 같은 문제에 봉착한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잘못을 발견한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많은 노력을 해 왔다‥‥‥‥ 그러나 질병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우리가 질병이 없는 사람을 만든다 해도 그 사람이 건강한 것은 아니다.
질병이 없는 상태가 건강은 아니다. 이것은 건강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정의일 뿐이다. 건강은 좀더 긍정적인 의미를 가져야 한다.
건강은 긍정적인 것이며 질병은 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을 정의하고 있다.
건강은 안락함을 느끼는 것이다. 건강은 온 몸이 아무 장애 없이 최고의
상태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대는 안락함을 느낀다.
존재계와 일체감을 느낀다. 이런 일은 수술법을 통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인도는 수술법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혀 새로운 접근 방식인
아천베다(Ayurveda)')를 발전시켰다. 아유르베다는 생명의 과학을 의미한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서양의 의학은 단지 질병을 찾아낼 뿐이다.
그러나 건강은 의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의학은 모든 기술을
동원해서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유르베다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다. 아유르베다는
생명의 과학인다. 아유르베다는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도와 준다. 다시 말해 아유르베다는 그대를 건강하게
지켜 주어서 질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 준다. 동양과 서양의 방식은
인간을 전체성을 가진 영적 존재로 보느냐 아니면 기계로 보느냐 하는
데에서 다르다‥‥‥
둘째, 서양 의학은 인간의 면역성을 약화시켜 왔다‥‥‥
진정한 의학은 면역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켜야 한다.
진정한 의학은 그대를 약하게 만들어서 온갖 질병에 걸리기 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강하게 만들어서 어떤 질병과도 싸울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델가도(Delgado)는 동물 실험을 해 오고 있다.
그는 쥐들에게 하루에 먹이를 한 끼만 주면 두 배나 오래 산다는 것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하루에 두 끼를 먹은 쥐들은 수명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음식을 적게 먹이면 수명이 길어지고, 음식을 많이 먹이면
수명이 짧아진 것이다. 이제 그는 하루에 한 끼의 식사로 충분하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그 이상은 소화 기관에 부담을 주고, 그로 인해 수명이
단축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의학은 그들이 죽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그들이 사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식물인간처럼 살아갈 것이다.
인간은 모든 전통과 모든 근원을 재고해야 한다. 허용되는 모든 사실들에 대해
재고찰해야 한다. 그래서 침술이나 아유르베다, 그리스의
의학, 델가도와 그의 연구 내용에 바탕을 둔 완전히 새로운 의학적 접근
방식이 나와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기계가 아니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 의학적 접근 방식이 나와야 한다. 인간은 다차원적이고 영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거기에 맞는 대접을 해야 한다.
건강은 부정적으로 정치되어서는 안된다. 질병이 없다고 해서 건강한
것은 아니다. 건강을 긍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왜 그동안 건강에 대한 긍정적인 정의가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질병은 객관적이지만 안락하다는 느낌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서양 의학은 그대 안에 어떤 주체(subject)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서양 의학은 단지 육체를 인정할 뿐, 그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의학적 방법들은 하나로 종합되어야 한다.
이것들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는 이 방법들이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운영되고 있다. 이 방법들은 하나로 종합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대에게 더 나은 삶을 줄 수 있고, 그대로 하여금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우리 몸의 모든 것이 뇌에 그 중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특히 뇌를 다루는 외과 의사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손이 마비되었을 때 손을 치료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대는 손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손을 잘라 내고 기계손을 부착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면 최소한 그 손을 움직일 수 있고
그 손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비된
손은 전혀 쓸모가 없는 죽은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마비된 손은
죽은 것이 아니다. 머리 속에는 손을 조절하는 중추가 있는데 그 중추를
치료해야 한다. 손은 전혀 건드릴 필요가 없다. 중추에 어떤 문제가
있으므로 작동되지 않는 것이다.
조만간 모든 의학이 뇌의 중추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것이다. 이 중추들이
육체의 모든 것을 조절하고 있다 중추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육체에 그 문제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대는 육체를 치료할 뿐, 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현대의 서양 의학은 피상적이다. 그대는 왜 갑자기 손이 마비되었는지
바로 그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뇌의 중추에 어떤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뇌의 중추는 매우 쉽게 치료될 수 있다.
그것은 생체전기의 중추이므로·.
그대가 안락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대의 배터리가
소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는 재충전이 필요하다. 손이 마비되었다면
아마 뇌의 중추에서 전기를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추는 다시
충전될 수 있다. 어떤 약이나 수술도 필요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인간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시대와 문화가 서로 다른
사회에서 인간을 어떻게 치료해 왔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끔
이상한 방법이 효과가 있는 곳에 보치면 그것에 반대하기보다는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질병의 70퍼센트는 단지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는 사실 질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질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럴 때 그대에게 역증요법제를 주는 것은 위험하다. 모든 역증요법제는
어떤 식으로든 독성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질병이 있을 때 약을
투여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실제로 질병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질병에
걸렸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면 그때는 동종요법이 최선이다 동종
요법은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동종요법제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인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동종요법으로 치료되고 있다.
동종요법이 진짜 치료법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가공의 질병에 걸렸다면 그들에게는 가공의 치료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종요법제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아무 질병도 없으면서 질병에 걸렸다는 생각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도 있다.
동종요법은 이들에게 즉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동종요법은 사람들을
낫게 할 뿐,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다. 동종요법은 가짜 치료법이다.
그러나 가짜로 아픈 사람들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인도의 의사들과 노련한 간호사들은 狂레이나 기타 어떤 의료 장비도
갖고 있지 않다. 심지어 청진기도 갗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단지 심장의
박동을 검사할 뿐이다. 이 방법은 수천 년 동안 완벽한 역할을 해 왔다
그들이 심장의 박동을 검사하는 것은 심장의 박동이 생명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만일 심장의 박동이 완벽하지 않다면 그것은 어떤 조치를
하라는 신호다. 그들은 질병을 치료하기보다는 그대의 심장 박동이
더 조화를 이루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의 치료법은 심장 박』동이
좀더 조화를 이루도록 도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질병은 즉시 사라진다.
이제 그대는 질병이 치료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질병은 단지
폰이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아유르베다에서는 외과학(外科學)을 완전히 버렸다.
과학은 인간을 기계로 전락시킨다. 신체 조직에 채를 주지 않고 광물이나
약초, 천연물 등으로 모든 것을 쉽게 치료할 수 있는데 왜 불행하게
부작용이 있는 독성 물질을 인간에게 투여하는가?
아마도 의학이 성장하고 발전해 온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독성물질의 작용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질병도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의학은 질병을 치료하지만 그것은 독성 물질로 치료를 하는 것이다.
물론 질병은 사라지겠지만 독성은 신체 조직에 낟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독성이 부작용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약초나 광물질 혹은
동종요법제 같은 것이 모두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
의학이라는 곯나의 줄기에는 여러 분과(分科)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의료인들은 환자를 어느 분과로 보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환자에게
"당신에게는 질병이 없습니다" 하고 말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그들은 다른 의사를 찾아갈 것이다. 그는 "당신에게 질병이 있습니다" 하고
하는 의사를 좋아할 것이다.
살려는 의지를 상실한 환자들도 일부 있다. 그때에는 어떤 치료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살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
이미 죽은 것이다. 단지 장례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살려는 의지를 줄 수  있는
새로운 요법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다른 치료
방법은 그 후에야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모여 하나로 종합될 때, 인간은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것이다 인간은 최소한 3백 년은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과학적인 추종이다. 인간의 육체는 3백 년 동안 계속해서 새롭게
재생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오고
있는 일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인간이 나이 70에 죽는 것을
보면 그렇다.
여기 증거가 있다‥‥‥ 지긍은 파키스탄의 영토가 된 캐시미르의 한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보통 백오십 살까지 산다. 러시아에도 백오십 살
된 사람들이 많으며, 심지어 백팔십 살이나 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사랑들의 음식과 습관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음식과 습관을 널리 알려아 한다. 러시이히 코카서스 산맥에 살고 있는
』팔십 살이나 된 사람은 아직도 젊은 사람처럼 들판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늙지도 않았다. 그의 음식과 생활 방식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 코카서스에는 나이가 백팔십이나 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정말로  강인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조지프 스탈린1')도 그 지역 출신이며, 조지 구제프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엄청나게 강인한 사람들이다.

의학은 완전히 새롭게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 지금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속속들이 알려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시작하는 순간부터 편견에 사로잡히지만 않으면
그런 일이 가능하다.
오늘날 의학에서는 치료의 주관성(,iLIa◎沆Vit)r)이 논와되고 있습니다.
같은 약이라도 의사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공언하는 의학의 주관성에 대해 말해
주시겠습니까?

인간과 관련해서는 어떤 것도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
무엇이든 어느 정도의 주관성을 인정해야 한다. 같은 약이라도 의사가
쓰면 효과가 달라질 뿐 아니라, 같은 약을 같은 의사가 써도 환자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은 객체(object)가 아니다.
먼저 그데는 '주체(subject)'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돌은 단지
객체일 뿐이다. 돌멩이는 내면(irlteriority)도 없고, 내면성(innerness도 없다.
그대는 돌을 두 개로 쪼갤 수 있다. 그때 두 개의 객체가 생긴다.
그대는 돌을 네 개로 쪼갤 수 있으며 그때에는 네 개의 객체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어떤 내면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주관성(subjectivity)이란, 인간도 겉으로 볼 때는 다른 객체들인
같이나 죽은 육체, 살아 있는 육체처럼 단지 객관적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무엇일까? 조각은 단순히 객체이며 주관성이 없다.
육체도 한때는 주관적인 현상(phenomeno굿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텅 빈 집일 뿐이다. 집에서 살던 사람이 떠나 버린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조각이나 죽은 육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객체
(objectivity)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
내면의 차원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존재계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다.
세 사람이 같은 질병을 앓고 있을 때, 같은 약이 세 사람 모두에게
효과가 있지는 않다. 한 사람에게는 효과가 있을 것이고, 두번째 사람에게는
단지 반만 효과가 있을 것이며, 세번째 사람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을 것이다. 같은 질병을 앓고 있지만 환자의 내면이 다르기 때문이다.
환자의 내면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마 의사는 서로 다른
환자에게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서로 다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내 친구 중에는 나그푸르(Nagpur)")에서 명성을 날리던 외과 의사가
한 명 있었다. 그는 대단한 의사이기는 했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결코 수술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수술비는 다른 의사들보다
다섯 배나 많이 청구했다. 그와 함께 머물고 있을 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좀 지나치군. 같은 병을 가지고 다른 의사들이
청구하는 것보다 다섯 배나 많은 돈을 청구하니 말일세."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거둔 많은 성공의 비결이 바로 그걸세.
환자가 다섯 배나 많은 돈을 낼 때는 반드시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이지.
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러는 것만은 아니야. 환자들은 다른
곳에서 더 싼값에 수술을 할 수도 있네. 하지만 내게 다섯 배나 많은 돈을 내고
수술을 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수술 비용이야 어떻든 꼭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얘기지. 내가 거둔 성공의 50퍼센트는 살아야겠다는
환자의 결심 때문이네."
환자들 중에는 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의사에게
협조할 마음이 없다. 약은 복용하지만 살겠다는 의지는 없다. 오히려 약이
듣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야만 자살을 해도 비난받지 않을 것이고
동시에 삶에서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서는 이미
손을 놓아 버린 것이다. 약은 그의 내면을 도울 수 없다. 그리고 그의 내면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의사도 거의 손을 쓸 수가 없다. 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그 외과 의사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모를 거야. 가끔 나는 완전히 비도덕적인 일을 한다네.
그러나 환자를 돕긴 위해서는 어쩔 수 없네."
내가 물었다. "무슨 말이야?"
"나는 동료 의사들에게 욕을 먹고 있네‥‥‥‥ 그는 나그푸르에 있는
모든 의사들로부터 이렇게 비난을 받았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기꾼을
본 적이 없다. "
그의 방식은 대개 이렇다. 환자를 수술실의 수술대 위에 눕힌다.
의사들은 수술 준비를 하고, 간호사들도 대기 상태로 들어가고, 학생들은
위층의 관랄석에서 지켜본다. 그러면 그가 환자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수술 비용을 만 루피1')에 하긴로 합의했지만 그것 갖고는
안되겠소. 당신의 질병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단 말입니다.
그러니 2만 루피를 내시오. 그래야 수술을 시작할 것이오. 그게
싫으면 일어나서 나가시오. 더 싼값에 수술을 해 주는 의사를 찾을 수
있을 것이오. "
그런 상황이라면‥‥‥ 그런데 환자는 돈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동의할 수 있겠는가? 환자는 승낙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2만 루피를 내겠소. 그러니 제발 살려만 주시오."
그 친구는 내게 말했다. "어느 의사라도 그 환자를 살릴 수 있었을 거야.
그러나 그토록 확신에 차 있을 수는 없었겠지. 그 환자는 2만 루피를
냈기 때문에 전적으로 내 편에 서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의 내면의
존재가 나를 도와 주게 되지. 사람들은 나를 비난하네. 그건 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물론 만 루피에 수술하기로 했다가 수술실에
누워 있는 환자의 귀에 대고,'2만, 혹은 3만 루피를 내시오. 그게 싫으면
일어서서 나가시오, 나는 병이 그렇게까지 깊이 진행된 줄은 미처 몰랐소.
나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데, 이 일은 그동안 쌓아 온 내 명성이
걸린 일이오. 그러니 만 루피에는 수술하지 못하겠소. 나는 인생에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소. 성공이 내 규칙이오. 나는 수술에 성공할 수
있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할 때에만 수술을 하고 있소. 그러니 당신이 결정을 하시오.
나는 시간이 별로 없소. 밖에 다른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오.
그러니 2분 안에 결정을 하시오. 동의하든지, 아니면 일어나서
나가시오' 하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비도덕적인 일이지. 당연히 그
사람은 '당신이 원하는 만큼 낼 테니 제발 수술을 시작하시오' 하고 말하지.
그게 불법이고 비도덕적이기는 하지만 비(非) 심리학적이라고는
볼 수 없네."
인간과 관련된 것은 어떤 것도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나에게는 의사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는 지금 감옥에 있다.
무자격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의과대학에 다닌 적이 없었고, 그가
자신의 서명 옆에 적어 넣은 학위는 모두 가짜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가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가 학위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수천 명의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
특히 학위를 가진 의사들을 찾아다니는 데 지쳐 버린 가망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 친구는 그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학위는 없었지만 어떤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병원을
마치 마술의 세계처럼 꾸며 놓았다. 그의 진찰실을 들어서는 순간,
환자들은 놀란다. 그 환자들은 모든 병원을 가 보았었다‥‥‥ 대개가
최후의 수단으로 나의 친구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숨겨진 사실이 아니었으며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그를 한 번 보는 것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
그의 병원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데, 그 정원을 지나면 그의 사무실이 나온다.
그는 접수 계원으로 아름다운 여자들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치료법 중의 일부였다. 죽어 가는 사람도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살려는 의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접수 창구를 지나면 환자는 그의
실험실을 지나가야 했다. 실험실을 거쳐 환자를 들어오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환자들에게 자신이 보통 의사가
아님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의 실험실에서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는 아무 소용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는 많은 시험관과
마스크가 있었으며, 착색된 물이 한 쪽 플라스크에서 다른 플라스크로
이동하고 있어서 마치 위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나서야 환자는 의사를 만나게 된다. 그는 결코 평범한 방법으로
맥박을 측정하지 않는다. 환자는 리모컨으로 조정되는 전기 침대에
눕게 된다 침대는 공중으로 부양되고, 환자는 침대에 누운 채 위에
달려 있는 커다란 시험관을 보게 된다. 그리고 전선이 환자의 맥박과
연결되어 있어서 맥박이 뛸 때마다 시험관 속의 물이 출렁이게 된다.
비록 똑같이 심장을 체크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청진기로 측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는 이 모든 장치들을 보여 줌으로써 환자로 하여금
전문가를 찾아왔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아무런 학위도 없었다. 대신 그가 고용한 약사에게 모든
학위가 있었으며 약사가 처방전을 써 주었다. 그는 약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어떤 범죄 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결코 약을 처방하지 않았으며 처방전에 서명하지도 않았다. 이런 일은
학위를 가진, 완전히 자격을 갖춘 사람이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
그런 모든 일을 했다는 것과, 자신의 서명 옆에 이상한 학위를 써 넣었다는
것 때문에‥‥‥‥ 하지만 그런 학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 나는 그것이 불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학위를
실제로 존재하는 대학에서 받았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이
가짜였지만 그 가짜가 도움이 된 것이다.
나는 진찰만 받고도 반쯤은 나아 버린 환자들을 보았다. 진찰실을
나와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직 약을 먹지도 않았는데 거의 나은거 같아요.
처방전이 여기 있어요. 이제 약을 사러 갈 거예요."
그러나 그가 이런 일을 했다는 이유로‥‥‥ 이때 나는 법률이 맹목~
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불법적인 일은 결코 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있다. '사람을 속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도 속이지 않았다. 환자가 더 오래 살게 도와 주는 것이 사람을
속인 것이라면 의료활동이란 과연 무엇인가?
인간 때문에 의학은 결코 100퍼센트 객관적인 학문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유르베다나 동종요법, 자연요법, 침술 및 그 밖의 많은
의학 유파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도움이 된다. 동종요법은
설탕 알약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도움이 된다. 문제는 환자가 그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자연요법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자연요법말고는 어떤 것도 그들을 도울 수 없다. 그러나
자연요법은 질병과 아무 관계가 없다
내가 아는 교수 한 분은 광적으로 자연요법에 빠져 있었다. 어떤 병이든지
그는 배에 머드 팩(mud pack)을 붙이라고 말한다. 나는 단지
즐기기 위해 그를 찾아가곤 했다. 그 방법이 매우 편안했고, 그곳에는
시설도 그리 훌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욕실과 샤워실 ·
나는 아무 어려움 없이 그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는 지금
심한 편두퐁을 앓고 있습니다. "
그러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배에 머드 팩을 붙이시오.
배에 머드 팩을 붙이는 것은 편두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편두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흙으로 가득 찬 욕조 속에 들어가서 머리만 내놓고 누워 있으면
매우 편안하고 매우 시원하다. 곧 그는 내가 자주 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계속해서 새로운 질병을 가지고 찾아오는군요."
내가 말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요법에 관한 책을
한 권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 책에서 질병을 하나 얻어 가지고 교수님께
오는 것입니다 먼저 책을 읽고 교수님이 어떻게 하나 보려고 오는 것입니다.
제가 받고자 하는 자연요법이 있으면 저는 그 질병을 가지고 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불필요하게 진흙 속에서 30-분씩이나
누워 있겠습니까?"
"나를 속여 왔단 말인가요?"
"교수님을 속인 게 아닙니다. 저는 교수님의 가장 유명한 환자입니다.
대학 내에서 모든 사람들이 교수님을 비웃고 있지만 저는 교수님을 :
지지하는 유일한 파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오는 다른 사람들은 저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편두통이 사라졌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했다. "맙소사, 이제 내 머리가 아프군. 썩 꺼지시오!"
사람들은 내게 화를 내곤 했다. 그들은 내게 말했다. "편두통이 사라지기는 커녕
더 심해졌습니다. " 왜냐하면 배를 차갑게 하는 것이 편두통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 중에는 동종요법만이 올바른 치료법이라고 믿는 광적인
동종요법사들도 있다. 이들은 다른 모든 치료법은 위험하며 특히 역증요법을
독(毒)이라고 믿고 있다. 동종요법사에게 가면 그는 먼저 그대의 ?
생에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병력(病歷)에 대해 물어 볼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단지 두통을 앓고 있을 뿐이다.
동종요법사 한 명이 내가 살고 있는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께서 나를 보러 오실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그 동종요법사에게
모시고 가곤 했다. 동종요법사는 내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아버님을
모시고 오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 아버지는 3대
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조부가
어떤 병이 있었고‥‥‥‥
내가 그에게 말했다. "저희 아버지도 동종요법사입니다. 그분은 문의
근원으로 깊이 파고드는 겁니다 "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분은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단지 두통을
앓고 있을 뿐입니다! 그분은 조부가 앓았던 모든 질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나서 부친이 앓았던 모든 질병에 대해서‥‥‥ 그리고 나서야
자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 자신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쯤이면
거의 하루가 끝납니다. 다른 환자들은 모두 돌아가고 나는 그분이 어린 시절부터
무슨 질병을 앓았는지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결국
두통을 앓고 계시는 것입니다. "
"내가 '맙소사, 왜 진작 두통을 앓고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분은 '당신처럼 나도 동종요법사입니다. 당신에게 완벽한
상태를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하고 말하는 겁니다. "
동종요법사들은 먼저 그대가 앓아 온 모든 질병에 대해 묻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질병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대의 삶도 하나로
연결된 전체라고 믿기 때문이다. 동종요법사에게는 그대의 머리에 이상이
있든, 다리에 이상이 있든 큰 차이가 없다. 머리나 다리는 같은 육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종요법사는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동종요법사는 그대가 어떤 역증요법제를 복용해 왔는지 물어 볼 것이다.
그것이 그대가 앓고 있는 모든 질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역증요법제가 독성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역증요법제가 독성
물질이라는 것은 자연요법사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연요법사들은
역증요법으로부터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단식이나 관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단 그대가 역증요법으로부터 깨끗해지면‥‥
인간은 주관적인 존재다. 환자가 의사를 사랑하면 그때는 물도 약처럼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환자가 의사를 증오하면 어떤 약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환자가 느끼기에 의사가 냉담하다면‥‥‥ 일반적으로
의사들은 냉담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도 인간인데 하루 종일
환자들을 돌봐야 하고, 매일같이 환자는 죽어 가고‥‥‥‥ 그들은
서서히 무감각해지며, 자신들의 감정과 정서와 인간성에 장벽을 쌓는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그들이 주는 약은 효과가 없어진다. 그들은 마치
계가 약을 주듯, 거의 로봇 같은 방식으로 약을 준다.
사랑이 있다면 환자는 약을 받을 뿐 아니라 약 주변의 보이지 않는
것도 함께 받는다. 의학은 인간의 주관성과 사랑을 이해해야 하며,
사랑과 약이 환자를 돕는 데 함께 이용될 수 있는 어떤 종합을 이루어 ~야 한다.
의학을 완전히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한 가지는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그것은 의학은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플라시보 요법이라 불리는 새로운 요법이 등장하고 있다 플라시보는
약효가 전혀 없는 가짜 약이지만 환자에게는 진짜라고 여기게끔 하면서
약을 주어야 한다. 환자만 그 약이 진짜라고 여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 역시 그 약이 진짜라고 여겨야 한다. 의사의 몸짓이 진실을 폭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도 그 약이 가짜라는 것을 모르고 있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의사에게 물을 주사하도록 하거나, 혹은 진짜 약의
이름과 상표가 붙어 있는 설탕 알약을 주도록 해야 한다. 의사도 그것을
약으로 알고 있고 환자도 그것을 약으로 알고 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약효 성분이 없는 그 약이 효력을 발휘하여 환자가 치료되는 것이다.
의사가 그것이 약이라고 믿음으로써 환자가 치료될 수 있는 분위기
심리적 효과, 최면술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병원의
 전체적인 설비가‥‥‥‥ 환자가 질병이 낫기를 바라고 있을 때 유명한
의사가 약을 주면 틀림없이 효과가 나타난다. 그 약이 진짜든 가짜든
상관이 없다.
진짜 약과 가짜 약이 같은 비율로 효력을 나타낸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70퍼센트의 환자가 진짜 약으로 치료된다면 70퍼센트의 환자는
가짜 약으로, 플라시보로 치료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의학계에 커다란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실제로는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첫째, 질병이 마음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질병이 나을 것이라고 마음이 확신을 하면
질병이 낫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의 진료비가 그다지
비싸지 않다면 치료 효과가 별로 없는 것이다. 진료비가 비쌀수록 치료
효과는 더 크다. 진료비가 아주 비싸서 그대가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 그대는 치료 효과를 빨리 볼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빨리 낫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진료비가 무료일 때 질병이 낫거나 말거나 누가
신경쓰겠는가?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돈을 내지 않았으니 질병이
나아도 좋고 낫지 않아도 좋다. " 그러나 돈을 냈을 때 그대는 질병이 낫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낫는다!
붓다는 마음이 요술쟁이라고 말했다. 마음은 질병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질병을 치료할 수도 있다. 마음은 온갖 종류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
아름다움과 추함, 성공과 실패, 부유함과 가난함‥‥‥ 마음은 계속해서
이런 것들을 만들어 낸다. 일단 어떤 생각이 그대의 마음에 자리를 잡으면
모든 생명 에너지는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한다. 모든 샐각은
사물이 된다. 그리고 모든 사물도 처음에는 단지 생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대는 일종의 최면 속에서 살고 있다. 붓다는 이 최면이
깨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최면을 깨뜨리기 위해 노력한
종교는 없다. 인간은 최면에서 깨어나야 한다. 인간은 고통과 즐거움,
탄생과 죽음 등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것을 완전히 깨닫게 되면 마음이라는 요술쟁이는 사라진다‥‥‥ 그리고
진리만이 남게 된다. 그 진리가 그대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의학적 치료법들-동종요법이나 아유르베다나
술 등-중에서 역증요법을 제외하면 어떤 것도 인간의 육체와 마음에 있는
내면의 자연적인 기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역증요법을 제외하고'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른 치료법들도 종종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과학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치료법들의
도움 역시 적지 않다. 이들의 도움을 살펴본다면 그것 역시 굉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유르베다나 침술, 동종요법, 자연요법은 전체 사례 가운데 거의 '
70퍼젠트는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그러나 70퍼센트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 이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70퍼센트의 질병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
70퍼센트의 질병은 단지 마음에 있을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약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가짜 약이라도 _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70퍼센트는 적은 비율이 아니므로 나는
이 '치료법들'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이 치료법이
인정되기를 바란다. 70퍼센트는 큰 비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런 70퍼센트의 경우는 역증요법으로 치료하기가
매우 어렵다. 실제로 질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단지 질병에 걸렸다고
믿는 사람들을 역증요법으로 어떻게 치료하겠는가? 역증요법으로1
이런 사람들을 도울 길이 없다 그러므로 오직 30퍼센:트의 사람들만이
역증요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참으로 이상한 세상이다. 30퍼센트의
사람들은 가장 과학적인 접근 방법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70퍼센트의
사람들은 온갖 가짜의, 실제로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미신적인
치료 방법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도 도움이 된다.
가장 과학적인 접근 방법인 역증요법은 자연에 데한 깊은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그것은 육체가 자체의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자연요법은 역증요법을 비난한다. 역증요법은 환자에게
바이러스를 주사한다. 왜냐하면 역증요법은 몸에 바이러스가 들어
오는 순간 몸이 즉시 항체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몸은 즉시 바이러스와 싸우기 시작한다. 몸은 자체의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몸 전체는 바이러스를 파괴하기 위해 즉시 비상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나 자연요법은 이런 사실을 비난한다. 역증요법이 사람들에게 질병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질병을 없애 줄 줄 알았는데 반대로
독이 있는 바이러스를 체내에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요법은 단식으로, 혹은 그대가 믿지 못할 이상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육체를 깨끗이 세척한다. 그러나 자연요벌은 진짜 질병을 앓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도움이 될 뿐이다:"

오쇼의 다이내믹 명상법
다이네믹 명상은 한 시간 동안 진행되며 다섯 단계로 되어 있다. 이 명상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여럿이 모여서 하면 에너지가 더욱 강력해진다. 명상은
개인적인 체험이므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라. 명상을
하는 동안 눈은 감고 있어야 하는데, 눈가리개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위장은 비워 두는 것이 좋으며 옷은 헐렁하고 편안한 것을 입는 것이 좋다

· 제1단계 : 10분
코를 통해서 빠르게 호흡하라. 강렬하고 혼돈스럽게 호흡하라. 폐 속 깊숙이
호흡하라. 가능한 한 빠르고 깊게 호흡하라. 몸이 굳지 않게 하라. 목과 어깨를
이완시키고 가능한 한 빠르고 깊게 호흡하라. 그대가 호흡 자체가 될 때까지
계속하라. 호흡을 혼돈스럽게 하라(일정하거나 예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호흡하지 말라). 일단 에너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에 따라 몸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몸이 움직이제 내버려두라. 그리하여 더 많은 에너지가 생기도록
하라. 팔과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내버려두면 더 많은 에너지가 생길 것이다.
에너지가 생기는 것을 느끼라. 1단계에서는 템포를 늦추지 말라.
· 제2단계 : 10분
몸을 따라가라. 몸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표현하게 하라‥‥‥‥ 폭발하듯
몸이 그대를 장악하게 하라. 내던질 필요가 있는 것은 모두 내던지라, 완전히
미치라. 노래하고, 소리지르고, 웃고, 외치고, 울고, 점프하고, 흔들고. 춤추고
발로 차고, 그대 자신을 내팽개치라. 어떤 것도 남기지 말라. 온몸을 움직이라.
처음엔 몸을 약간 움직여 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마음이
간섭하지 못하게 하라. 몸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 제3단계 : 10분
어깨와 목을 이완시키고 두 팔을 가능한 한 높이 올리라. 두 팔을 위로 올리고
아랫배에서 나오는 소리로 가능한 한 깊이 후‥‥! 후‥‥! 후‥‥! 하고 외치면서
위로 점프하라.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마다(발뒤꿈치가 땅에 닿게 하라) =
소리가 성 센터를 깊이 두드리게 하라.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완전히
녹초가 되라.
· 제4단계 : 15분
정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그대로 멈추라. 어떤 식으로든 몸의 자세를
조정하지 말라. 재채기, 혹은 어떤 작은 움직임이라도 에너지의 흐름을 흩어
버릴 것이다. 그러면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된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시하라
· 제5단계 : 15분
축하하라! 춤과 음악으로 내면의 모든 것을 표현하라,
하루 종일 생기발랄을 유지하라.

주시자로 남아 있으라. 주시를 잃지 말라 호흡하고 있는 동안 주시를 잃을 수 있다.
호흡과 하나가 되면 주시를 잃을 것이다. 그때 핵심을 놓치게 된다.
가능한 한 깊고 빠르게 호흡하라. 그러나 계속 주시자로 남아 있으라. 마치
판자처럼, 마치 모든 일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처런, 마치 모든
일이 몸에서 일어나며 의식은 중심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일어나는 모든 (
것을 관찰하라. 처음 세 단계 동안은 주시를 해야 한다. .그러다가 네번째 단계에서
모든 것이 멈추면 그대는 얼어붙은 것처럼 활동을 완전히 멈추라. 그때
각성은 절정에 이른다:"

     譯註
1) 마하비라(Mahavira, BC 599-527) :출가 전의 이름은 바르다마나(Vard
hamana). 자이나교를 일으킨 스물네 명의 티르탕카라 가운데 마지막 인물.
크샤트리아 출신의 여자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고 30세가 되었을 때 출가하여
수도의 길에 들어섰다. 12년간의 고행을 거쳐 최상의 지혜를 얻은 그는 사람들에게
모든 생명체에 대하여 비폭력을 실천하고 철저한 금욕 생활을 하면 물질의
오염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마하비라는
오대서원(五大誓願)' 즉 생명체를 죽이지 말 것, 진리가 아닌 것을 말하지 말 것,
탐욕을 내지 말 것, 성적 쾌락을 추구하지 말 것, 애착을 갖지 말 것을 내세워
승단을 이끌었다.
2) 사모바르(samovar) :러시아의 차 왔이는 주전자.
3) 조건화(conditioning) :조건화란 각 개인이 살아오고 경험하며 입력되고
형성된 그 사람의 특정한 관념작용이나 사고의 틀을 일컫는다.
4) 대증요법(對症療法, ,jymptomatic treatment) :질환의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환에서 나타나는 증세만 치료하는 방법. 예를 들면 폐결핵으로
미열이 계속되고 있는 환자에게 해열제를 투여하는 것은 대증요법에 해당되며
이에 반하여 폐결핵제인 PAS, INAH 등을 투여하여 병의 원인인 결핵을
치료하는 것은 원인요법에 해당된다.
5) 산야스(駱nnya,j) :구도의 길에 입문하는 것.
6) 파라켈수스(Paracelsus, 1493-1541) :본명은 Philippus Aureolus
Theophrastu,j Bombast von Hohenheim. 스위스의 의학자·연금술사. 이탈리아의
페라리 대학에서 의학을 배우고 따젤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물질계의
근본은 유황·수은 염(營)의 3원소라고 주장하였으며, 질병은 이 3원소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발생하므로 무기질의 조합에 ◎하여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의학에서 화학의 역할을 확립했으며 저서에 대외과서가 있다.
7) 포인트(point) :한방(韓方)에서는 이를 경혈(經穴)이라 한다. 한방으
병관에 의하면 인체에는 장부(臟腑 :五臟六腑)가 있고, 이 장부의 기능으로
조화를 이루면 건강하지만 조화가 깨지면 병에 걸려 여러 가지 증세가
일어난다고 한다. 이 장부의 기능을 조절하는 에너지 순환계(循環系 :氣와 血
경락(經絡)"라고 하며, 이 경락의 군데군데에 에너지가 모여 있는 곳, ~
에너지가 모이기 쉬운 곳이 있는데 이를 경혈(經穴)이라 한다. 각 경락
중에서 에너지가 고여 있거나, 에너지가 흐르지 않는곳을 없애 주면
기의 흐름이 좋아지고 장부의 기능도 올바르게 조화를 이루게 된다. 오쇼는 그의
강연에서 경혈을 일컬어 바이탈 포인트(vital point), 침술 포인트(acupu
lure Point), 에너지 포인트(energY Point), 혹은 그냥 포인트(Point)라고
불렀다.
8) 전체론(holism)''전체는 단지 부분의 총화(脚和)'라는 기계론(Rec
nism)의 입장과는 반대로, '전체는 부분의 총화 이상의 것이며, 결코 부분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입장. 가령 물은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수소와
소와는 다른 성질을 가지는 것 등이 그 예다.
9) 림보◎默bo) :로마 가톨릭 신학에 나오는 용어로, 비록 벌을 받지는 %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천국에 살지는 못하는 영혼들이 머무는 곳. 럴통
국과 지옥 사이의 경계지대를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10) 수쉬루트(牀shrut) :인도의 전통 의학인 아유르베다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고대 인도의 외과 의사. 스와미 비쉬바미트꼭(Swami Vishvamitra)
아들로 알려진 그는 가장 컨위 있는 인도의 의학 고전인 (:수쉬루트 삼히
(.iu,IhrㄴIt-綿mhita)3를 남겼다. 수쉬루트는 수많은 질병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가 언급한 질병의 수는 대략 1,120개 정도라고 한다. 또한 수쉬루트는 대략 7
종류의 약용 식물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고대 힌두 의학에서 외과학은
절정에 달해 있었는데, 힌두의 외과 의사들은 종양의 절제(切除), 종기의 절
(切駱), 복수(腹水)의 제거를 위한 천자, 절단술. 제왕절개, 상처의
봉합 등을 포함한 다양한 외과 수술을 했다고 한다. 이런 외과 수술을 위해서는
다양한 수술 도구가 사용되었는데, 수쉬루트에 따르면 외과 의사는 20개의
예리한 수술 도구와 101개의 무딘 수술 도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수쉬루트의 출생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그란타(Grantha)라는 책에
의하면 대략 BC 1000년 경의 사람이라고 한다.
11) 아유르베다(Ayuweda) :아유르(ayur)는 생명을, 베다(veda)는 과학을
뜻한다. 따라서 아유르베다는 '생명의 과학'이라는 뜻이다. 인도의 전승(傳承)에
따르면 아유르베다는 브라흐마(Brahma) 신이 단반타리(Dhanvantari)에게
전수한 것이라고 한다. 아유르베다에는 세 권의 유명한 의학서가 있는데, 첫째는
:수쉬루트 삼히타(Sush.ut-samhita)이다. 이는 수쉬루트(Sushrut)가 쓴 것으로
아유르베다 의학에서 가장 권위 있는 백과사전적 고전이다. 두번째는
차라크 삼히타(Carak-samhita)로서, 내과 의사인 차라크(Carak)가 쓴 이 책은
주로 치료를 위한 진단법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비교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바과바타(Vagbhata)가 있는데, 이후의 모든 인도 의학은 이 세 권의 전통
의학서에 기초하고 있다.
12) 조지프 스탈린怒o,ieph Stalin, 1879∼1953) :정식 이금은 losif Vissari-
onovich Stalin. 소련의 정치가. 레닌의 후계자로서 1922∼1953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냈으며, 1941-1953년 소련 국가평의회 주석을 지냈다.
13) 조지 구제프(George Gurcliiefr, 1872∼1949) :본명은 George 5. Geor-
giAdes. 그리스계 아르메니아인으로 영향력 있는 유사종교운동을 창시한 신비
주의자. 어린 시절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나 청년기에는 북동 아프리카·
중동·인도, 특히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며 여러 종교 전통과 신비 지식 등을 배워
서양인들에게 소개했다. 구제프는 그저 평범하게 사는 인간의 삶은 잠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는데, 잠자는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이 필요하며
어렵지만 일단 잠자는 것을 극복하고 나면 놀라을 정도의 생명력과 자각을
지닌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14) 나그푸르(Nagpur) 인도 서부 마하라슈트라 주(州)의 북서부에 있는 도시.
15) 루피(nlpee) .인도의 화폐 단위. 1루퍼는 약 25원 정도.

        제2장
           다양한 요법들

요가에서는 인간이 여러 형태의 신체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질병이 어느 신체에서 유래하느냐에 따라
각 개인마다 특정한 치료법이 다른 치료법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인간에 관한 과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까지 파탄잘리의
요가가 인간에 관한 과학에 가장 근접한 것이다. 그는 신체를
한 개의 층, 혹은 다섯 개의 신체로 나누었다. 그대는 하나의 신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다섯 개의 신체를 갖고 있으며 그 다섯 개의
신체 뒤에는 그대의 존재가 있다. 그런데 심리학 분야에서 일어난 ~
똑같은 일이 의학에서도 일어났다. 역증요법은 거친 신체인 육체(pl-
ital body)만을 믿는다 역증요법은 행동주의')와 유사하다. 역증요법은
가장 거친 방법이며, 그렇기 때문에 과학적이 될 수 있었다. 과학:
장비로는 아직까지 가장 거친 것들만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중국의 의학인 침술은 역증요법보다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간다. 침술은
바이탈체(vital body)인 프라나마야코스(pranamayakos)에 속한다.
침술은 육체에 어떤 이상이 생겨도 전혀 육체를 건드리지 않는다
침술은 바이탈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침술은 생체에너지(bioenergy),
즉 생체플라스마(bioplasma)를 다룬다. 침술이 거기서 어떤 것을 안정시키면
거친 육체는 즉시 제대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바이탈체에 어떤
이상이 생기면 역증요법은 육체에, 즉 거친 육체에 손을 쓸 것이다.
물론 역증요법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침술로는 쉬운 일이다. 바이
탈체가 육체보다는 조금 더 높기 때문이다. 바이탈체가 제대로 안정되어 있다면
육체는 단순히 그 뒤를 따라간다. 왜냐하면 청사진이 바이탈체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육체는 바이탈체의 청사진을 수행할 뿐이다.
이제 침술이 점점 더 존중되고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5천 년 동안
침술사들에 의해 예측되어 온 7백 군데의 바이탈 포인트가 러시아의
킬리안 사진술(Kirlian photog,aphy)에 의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침술사들은 신체의 어디에 바이탈 포인트가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 장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그들은
차츰차츰 7백 군데의 바이탈 포인트를 발견했다. 이제 킬리안이 과학적인
장비를 가지고 7백 군데의 포인트를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킬리안
사진술을 통해서 한 가지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것은 육체를 통해서
바이탈체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인을
바꿈으로써 주인을 바꾸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주인은 하인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하인을 바꾸려 한다면 주인을
바꾸라. 그러면 하인은 즉시 주인을 따를 것이다 각각의 병사를 바꾸는 대신
장군을 바꾸는 것이 더 낫다 신체는 단순히 명령과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수백만의 병사, 즉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휘자를 바꾸면 신체의 모든 패턴이 바뀌게 된다.
동종요법은 침술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간다. 동종요법은 멘:
(mental body)인 마노마야코스(manomayakos)에 작용한다. 동종의
창시자인 하네만(Hahnemann)"은 이제까지 발견된 가장 위대한
것들 중의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사용하는 약의 양이 적을수록
그것이 더 깊숙이 침투한다는 것이다. 그는 돌종요법의 약을 만드는 방법을
'효력화(potentiaing)'라고 불렀다. 동종요법사들은 약의 양을 계속』
줄여 나간다. 그가 취했던 방식은 이렇다. 먼저 일정한 분량의 약을
해서 거기에 그 양의 아홉 배에 해당하는 유당(乳糖)이나 물을 섞는다.
1대 9의 비율로 혼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용액에서 다시
분의 1을 취해 거기에 아홉 배의 물이나 유당을 혼합한다. 그는
이런식으로 계속해 나갔다. 새로운 용액이 만들어지면 그 중에서 10분의
1을 취해 거기에 다시 아홉 배의 물을 혼합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B율로
약의 양을 줄여 나갔고 그러면 약의 효력은 증가하는 것이다.
약의 농도는 서서히 원자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다 약의 농도가
묽어져서 그대는 그 약이 가용하리라고는 믿지 못할 것이다. 약이
사라진 것이다. 이것이 동종요법에서 효력(potency)-열 배 효력,
무 배 효력, 백 배 효력, 천 배 효력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증상이 커질수록 약의 양은 적어진다. 만 배 효력의 약 속에는 원래의
1만 분의 1만큼 들어 있다. 다시 말해 약이 거의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때 약은 마노마야(manomaya)의 가장 깊숙한 중심에까지
들어간다. 이 약은 심체(心體, mind body)에까지 들어간다. 침술보다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그대가 원자나 혹은 원자보다 더
깊은 수준에 이른 것과 같다. 그때 약은 그대의 육체를 건드리지 않는다.
바이탈체를 건드리지도 않고 단순히 안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너무
근하고 너무 작아서 어떤 장벽도 만나지 않는다. 단지 마노마야코
(manomayakob) 속으로, 즉 멘탈체(mental body)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프라나미야
(pranamaya)보다 더 높은 지휘자를 발견한 것이다.
인도의 의학인 아유르베다는 이 세 가지의 종합이다. 사실 아유르베다는
가장 종합적인 의학 체계 중 하나이다.
최면요법(hypnotherapy)은 이들보다 좀더 깊이 들어간다. 최면요법은
네번째 신체이며 의식체(consciousne,is body)인 비그얀마야코스
(vigyanmayakos)에 작용한다. 최면요법은 약을 사용하지 않는다. 최면
요법은 아무 것도 사용하지 않는다. 단지 암시만을 사용한다. 최면요법은
단지 그대의 마음에 암시를 줄 뿐이다. 최면요법을 동물자기(動物磁
氣)")라고 부르든, 최면 상태라고 부르든, 혹은 그대가 원하는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물질의 힘이 아니라 생각의 힘을 통해서 작용하는 것이다.
동종요법 조차도 매우 적은 양이기는 하지만 물질의 힘을 이용한다.
그러나 최면요법은 물질을 완전히 배제한다 동종요법의 약은 아무리
희안하더라도 결국 물질이기 때문이다‥‥‥ 만 배의 효력이라도
그것은 아직 물질의 효력이다. 그러나 최면요법은 생각 에너지이며 의식체인
비그얀마야코스(vigyanmayakos)에 직접 도달한다. 그래서 그대의
의식이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면 네번째 신체는 즉시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최면요법의 미래는 때우 밝다 최면요법은 미래의 의학이 될 것이다.
단지 생각의 패턴을 바꿈으로◎ 마음이 바뀌고, 마음이 바뀜에 따라
바이탈체(vital body)가 바뀌고, 바이탈체가 바귐에 따라 거친 육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무엇 때문에 거친 독성 물질이나 거친 약에 대해
신경을 쓰겠는가? 왜 생각의 힘을 통해서 치료하지 않는가?
그대는 최면술사가 영매에게 최면을 거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아직 보지 못했다면 한 번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대는 어떤
통찰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대는 불 위를 걷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거나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인도에서는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단지 최면요법일 뿐이다. 그들은 '내 안에는 어떤 신이나 여신이 들어
있어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생각, 바로 그 생각만으로 불에 타지 않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육체의 일반적인 기능을 통제하고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24시간 동안 단식을 하며 준비를 한다. 단식을 해서
몸이 깨끗해지고 몸에 분비물이 없게 되면 그대와 육체 사이의 교량이
떨어져 나간다. 24시간 동안 그들은 사원이나 모스크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신에게 파장을 맞춘다. 그리고 나서 불 위를 걷는다. 그들은 신
린 채 춤추면서 나온다. 불에 타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어떻게 하면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런 신뢰만 있다면 불 위에서 춤을 추어도 불에 타지
않는 것이다.
종종 구경을 하던 사람도 자신이 불에 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다. 스무 사람이 불 위를 걸어가도 불에 타지 않으면
그때 구경하던 사람도 즉시 이런 확신이 선다. "이 사람들도
불 위를 걸어가는데 나라고 왜 안되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불 속으로 뛰어들지만
불에 타지 않는다. 그 갑작스런 순간에 신뢰가 솟아난 것이다.
가끔은 준비를 한 사람들이 불에 타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은 준비를
하지 않은 구경꾼이 불 위를 걸어도 타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준비를 한 사람들은 걱정을】??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불에 탈까 봐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묘한 의심이 그들◎ 의식 속에, 비그얀
코스(vigyanmayako)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전적인 신뢰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의심을 하며 나왔다. 그 의심
때문에 육체는 더 높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메시지를 받을 수 없었던 ? 것이다.
의심이 사이에 끼여들어서 육체는 보통의 방식으로 작용한 것이며,
그래서 불에 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는 신뢰를 강조한다.
신뢰는 최면요법의 핵심이다. 신뢰가 없다면 그대는 존재의 미묘한
부분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남아 있다면 거친
육체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의심은 과학의 동력이다. 의심은 과학의 한
방법론이다. 과학은 거친 것을 동력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대가 의심을
하든 의심을 하지 않든 역증요법사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약을 신뢰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약을 줄 뿐이다. 그러나 동종요법사는
그대가 약을 믿는지 물어 볼 것이다. 그대에게 믿음이 없다면
그대를 치료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최면요법사는
완전한 내맡김(surrender)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내맡기는 것이다. 종교는 일종의 최면요법이다. 그러나 아직
신체가 하나 더 남아 있다. 그것은 축복의 몸인 아난드마야코스(anand-
mayakos)다. 최면요법은 네번째 신체에 이르지만 명상은 다섯번째
신체에 이른다. 명상(meditation)이라는 말은 매우 아름답다 그 어원이
'약(medicine)'의 어원과 같기 때문이다 명상과 약은 같은 어원에서
나왔으며, 한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치료하는 것, 혹은 그대를 건강하고
전체적인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약이며, 그 약의 가장 깊은 차원이
다로 명상이다.
명상은 암시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암시는 외부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이 그대에게 암시를 주어야 한다. 암시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암시는 그대를 완전히 의식적으로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엔 다른 사람이 필요하며 그때 그대의 존재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명상은 아무 그림자 없이 그대를
완전히 의식적으로 만들며, 어둠이 없는 절대적인 빛으로 만든다. 그래서
명상에서는 암시조차도 거친 것으로 여긴다. 다른 사람이 암시를
한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무엇인가가 들어오는 것이며,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은
궁극적으로 분석해 보면 결국 물질이기 때문이다. 물체(matt
만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물질(material)도 외부로부터
들어온다. 생각도 미묘한 형태의 물질이다. 그러므로 최면요법조차도
유물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명상은 모든 지주(支柱)와 받침대를 떨쳐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을 이해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고 순수한 이해와 주시만이 남기 때문이단:"

침술에 대해 좀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침술은 전적으로 퐁양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적인 마음
가지고 동양의 학문에 접근한다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접근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대의 모든 접근 방식은 방법론적이고 논리적이며
분석적이다. 그러나 동양의 학문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예술에 가깝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그대의 에너지를 지력보다는 직관(直觀)에
있을 수 인는지, 그대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 양(陽)에서
음(陰)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적극적인
공격적인 접근 방식에서 수동적인 접근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대는 수동적이고 수용적이 될 수 있는가? 오직 그때에
침술을 배우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다면 침술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전혀 침술이 아닐 것이다. 그대는 침술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지만 침술 자체는 모를 것이다. 가끔은 침술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침술을 알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의
침술은 요령이다 단지 침술에 대한 통찰인 것이다.
동양의 여러 학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서양은 동양의 학문에
관심을 갖는다. 동양의 학문은 심오하기 때문이다. 서양은 동양의 학문에
관심을 갖지만 서양의 마음을 가지고 동양의 학문을 이해하려고 한다.
서양의 마음이 들어오는 순간, 동양의 학문은 기초부터 파괴된다. 그때
단편들만 남게 되며 이런 단편들은 결코 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침술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침술은 작용한다. 그러나 오직
동양적인 접근 방식을 지닐 때에만 작용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정말로 침술을 배우고 싶다면 침술에 대해 아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가능한 모든
것을 배우라. 그리고 나서 배운 것을 모두 잊고 어둠 속을 더듬어 나아가라.
1대 자신의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환자와 일체강을 ~
느끼기 시작하라. 그것은 다르다‥‥‥
환자가 양의(洋醫)를 방문하면 의사는 추리하고 진단하고 분석하며,
질병이 어디에 있는지, 질병이 무엇인지, 어떻게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알아내려고 한다. 그는 마음의 한쪽 부분, 즉 이성적인 부분을
이용한다. 그는 질병을 공격하며, 질병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이제 의사와
질병 사이에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환자는 게임에서 벗어나 있다.
의사는 환자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질병과 싸우기 시작하며,
환자는 완전히 무시된다
그러나 침술사를 찾아가면 질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환자가 중요해 진다.
질병을 만든 것은 환자이기 때문이다. 질병의 원인은 환자에게 있으며
질병은 단지 증상일 뿐이다. 그대는 증상을 바꿀 수 있으며, 그러면
새로운 증상이 계속 나타날 것이다. 그대는 한 가지 질병을 약으로
제압해서 질병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으나 그 질병은 다른 곳에서
좀더 위험하고 좀더 심하게 나타날 것이다. 나중에 생긴 질병은 처음 것
보다 치료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그대가 두번째 질병도 약으로
제압한다면 세번째 질병은 치료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역증요법은 이렇게 해서 암을 만들었다. 의사는 계속해서 질병을
다른 쪽으로 밀어 놓는다. 그때 질병은 다른 쪽에서 나타난다. 그러면
의사는 또 다른 쪽으로 질병을 밀어 놓는다. 이제 질병은 극도로 화를 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환자는 그데로
남아 있다. 원인이 남아 있으므로 계속해서 결과가 생기는 것이다.
침술은 원인을 다룬다. 결코 결과를 다루지 말라. 항상 원인을 다루라.
어떻게 하면 원인에 다가갈 수 있는가? 이성(理性)은 원인에
다가갈 수 없다. 이성은 그저 결과를 다룰 수 있을 뿐이다. 원인은 이성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오직 명상만이 원인에 다가갈 수 있다.
그래서 침술사는 먼저 환자를 느껴 본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모두 잊고
단지 환자와 같은 느낌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는 환자와 일체감을 :
느낄 것이며, 자신과 환자 사이에 다리가 놓였음을 느낄 것이다. 그는
환자의 질병을 자신의 몸 속에서, 자신의 에너지 체계 속에서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원인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거울이 되며
자신 속에서 그 반영(反影)을 찾아낸다
이것이 침술의 모든 과정이다. 침술은 가르처지지 않는다 가르침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침술은 몰두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제안한다. 먼저 서양에서 2년 동안 침술에 대해 배우라
그리고 극동의 나라로 가서 최소한 6개월 동안 침술사와 함께 있으라.
그의 현존 속에 있으라. 그가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라. 그의 에너지를
흡수하라. 그러면 그대는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힘들 것이다:"
서서히 자신의 에너지를 느끼기 시작하거나 몸 속에 있는 에너지의
작용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침술은 기술(technique)에 머물지 않고
도구(instrumellt)가 될 것이다 침술은 통찰이며-그대는 기술을 배울 수 있지만
그것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예술이라기보다는
직감에 가깝다. 고대의 기술들이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고대의 기술들은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과학적인 견해를 가지고 고대의
기술에 접근한다면 약간의 지식은 얻겠지만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을 것이고, 그대는 실망할
것이다.
고대의 접근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그것은 좀더 여성적이고 좀더 직관적이며 비논리적이다. 그것은 과학적인
마음이 생각하듯이 삼단 논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에 깊이
참여하고 있기에 오히려 꿈이나 몽상에 가까우며, 자연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밀과 신비를 드러내도록 한다. 그것은 자연을 공격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자연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면으로부터 접근한다.
그대는 가장 깊은 중심에서부터 자신의 육체로 접근해 들어가야 한다.
7백 군데의 포진트는 객관적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깊은
명상 속에서 알려진 것이다. 그대가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서 내면으로부터
모든 것을 바라볼 때, 마치 별들로 가득 찬 밤하늘을 보듯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침술의 포인트를 볼 수 있다. 이것은 굉장한
경험이다. 포인트를 보았을 때 비로소 그대는 준비가 된 것이다. 이제
그대는 내면을 이해하게 되어, 다른 사람의 몸을 만져 봄으로써 신체의
어느 부위에서 에너지가 빠졌는지, 어디에 에너지가 흐르고 어디에
흐르지 않는지, 어디가 차갑고 어디가 따뜻한지, 어디가 살아 있고 어디가
죽어 있는지를 느낄 수 있게 된다. 포인트 중에는 감응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전혀 감응하지 않는 곳도 있다.
그대는 자신을 아는 정도에 비례해써 침술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을
알고 침술을 알게 될 때 거기 위대한 빛이 있을 것이다. 그 빛 속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대는 자신에 대해서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육체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제3의 눈')이 열린 것처험 새로운
비전이 보일 것이다:'
침술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모든 예술은 깊은 내맡김을 요구한다.
침술은 기술자가 조작할 수 있는 다른 기술과는 다르다. 침술은 .
슴을 필요로 한다. 그대는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시인이 시를 :
쓰거나 음악가가 연주를 할 때 자신을 잊어버리듯이, 그대 자신을 잊어
버려야 한다. 침술은 그런 것이다. 기술자도 침술을 시술할?수 있지만, :
결코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결코 그렇게 될 수 : 없다.
물론 몇몇 사람을 도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침술은 위대한
예술이며 위대한 기예다. 그대는 침술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내맡기는 것이다. 그대가 침술 속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길 수 있다면
그대가 자신을 바쳐 침술에 몰두할 수 있다면, 침술 속으로 뛰어
들어라. 기쁘게 온 힘을 다해 침술 속으로 뛰어들라:"
그대 자신이 되기 시작하라. 그대 자신만의 비법을 발견해야 한다.
침술은 비법이며 예술이다. 그리고 침술에서는, 누군가를 규칙처럼
따라야 할 필요가 없다. 침술에는 아무 규칙이 없다. 단지 통찰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대 스스로 시작해 보라‥‥‥ 처음에는 다소 확신이
서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아닌지 자꾸 걱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게 헤매떠 시작하는 것이다. 조만간 그대는
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일단 문을 찾아나서게 되면 헤매는  일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러면 문을 알게 될 것이다. 당장 시작해 보라!'"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지거나 침을 놓을 때 그대는 신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매우 공손해야 하며 신중해야 한다. 그대는 지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시술해야 한다. 지식은 결코 적절하지 않으며 충분하지도 않다.
지식으로 사랑을 대하면 항상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지식은
한계가 있는 데 반해, 상대방은 하나의 온전한 세계이며, 거의 무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대를 건드리지만 결코 그대를 건드리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표면을 건드리지만 그대는 사랑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깊은 중심 속에 있다. 인간은 신비이며, 영원히
신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신비인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신비가 바로 그의 존재다. "

최면(hypnosis)이 명상으로 변화하는 것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세라피(therapy)와 명상 사이의 경계선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최면이 명상에 이르는 문으로 인식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중세의 기독교는 마법과 함께 최면을 비난했다. 최면에 대한 비난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자신도 모르게
기독교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최면에 대한 비난은
여전히 남아 있다. 왜 기독교는 최면에 반대하는가? 최면이 명상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최면에 반데했다는 사실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직자도 필요하지 않고 교회도 필요하지 않으며
심지어 신조차도 필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세상에 명상이 번창하면 어떤 종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존재계나 그대 자신과 직접 접촉할 것이기 때문이다.
브로커나 온갖 종류의 대리인들을 거쳐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그들은 단지 박식할 뿐이며, 여러 해에 걸쳐
사람을 감화시키고 친구들을 설득하는 훈련을 받아 왔을 뿐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숫자 게임일 뿐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라.
사람들의 숫자가 힘을 주고 세력을 줄 것이다:
최면은 성직 제도에 위협이 되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처음부터
최면으로 성직 제도에 기초하고 있었다. 예수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선언하지 않았으며
예수 이후의 어떤 기독교인도 예수가 깨달았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신의 독생자라는 터무니없는 선언을 했다. 신은
가설이며, 가설은 계속 아이들을 낳아 대는 인도인이 아니다. 가설은
번식 능력이 없어서 아무 것도 생산해 내지 못한다‥‥‥
기독교는 그대가 직접 존재계와 접촉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대는 사제와 교황과 신의 독생자를 거친 다음에 신에게 가야 한다
신과 그대 사이에는 많은 중개인들이 있다. 그래서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물론 그대는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신과 직통전화선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제는 교황과 직통 전화선을 가지고 있고, 교황은 예수와 직통
전화선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는 신과 직통전화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번호는 전화번호부책에 실려 있지 않다.
최면은 명상에 이르는 문이었으며, 지금도 명상에 이르는 문으로
남아 있다. 일단 어떤 사람이 명상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는 너무 명료해지고
강해지며, 너무 많은 삶이 그에게 일어나서 하늘에 있는 어떤
신도 필요하지 않게 된다. 그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성직자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그 자신이 기도가 된 것이다. 어떤 신에 대한
기도가 아니라 단순히 기도 자체가 된 것이다.
최면을 마치 악마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비난하는 것이 기독교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마법도 잔인하게
파괴되었다. 수백만 명의 여자들이 산 채로 불태워진 것이다. 교회라는 적절한
경로를 거치지 않고 그들 스스로 궁극의 것과 접촉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최면이 명상을 위한 것이 아닐 때, 최면 그 자체는 위험하게 쓰일 수도 있다.
최면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최면이 명상을 위해 쓰이지 않으면
어떻게 잘못 사용될 수 있는지 설명을 해야겠다.
최면(hypno쑈5)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잠'
이라는 뜻이다. 인류의 3분의 1인 33퍼센트의 사람들이 최면의 가장
깊은 단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33퍼센트는 이상한 숫자다.
왜냐하면 오직 33퍼센트의 사람들만이 심미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33퍼센트의 사람들만이 감수성을 가지고 있고, 33퍼센트의 사람들만이
우정을 가지고 있으며, 33퍼센트의 사람들만이 창조를 하기 때문이다.
내 경험으로는 이 33퍼센트의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창조성과 감수성은 명상이며, 사랑이며, 우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과 존재계에 대한 깊은 신뢰를 필요로 하며,
수응성과 열린 가슴을 필요로 한다.
최면은 두 가지 방법으로 유도될 수 있다. 첫번째 방법은 타인 최면
(hetero-hYpnoEi)이다. 바로 이 타인 최면 때문에 사람들은 최면이
위험하다는 기독교의 선전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타인 최면은 다른 사람이
그대에게 최면을 거는 것, 다시 말해 최면술사가 그대에게 최면을
거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많은 잘못된 샌각이 개입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최면술사가 그대를 최면에 빠뜨릴 능력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최면술사는
요점을 알고 있을 뿐, 최면에 빠뜨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최면에 빠지려고 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대를 최면에 빠뜨릴 수 없다.
그대가 알려지지 않고 탐험되지 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어떤 최면술사도 그대를 최면에 빠뜨릴 수 없다.
그러나 최면술사들은 그들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사람들을 최면에 빠뜨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최면에 빠뜨릴 능력이 없다. 오직 그대만이 :
자신을 최면에 빠뜨릴 능력이 있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통해 최면에 빠지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최면에 빠질 수 있는 능력은 그대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통해 최면에 빠질 때 최면은 잘못 사용될 수 있다.
최면을 유도하는 과정이나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최면술사는 그대의
눈 앞에 수정(水晶)을 매단 끈을 늘어뜨리고 이렇게 말한다. "눈을
더이상 뜨고 있지 못할 때까지 눈을 감지 마시오.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뜨고 있으시오." 수정은 그대의 눈 앞에서 반짝이고 있다 눈은 건조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깜박거려야 한다. 눈은 신체 중에서
가장 섬세한 부분이다. 그대는 눈을 깜박이게 된다. 눈꺼풀은 자동차
유리의 와이퍼처럼 작용하기 때문이다. 눈꺼풀은 눈을 적셔 주고, 눈의
먼지를 제거해 주며, 눈에 들어온 이물질을 제거해 준다. 눈꺼풀은
눈을 항상 신선하게 적서 준다
최면술사는 이렇게 말한다. "눈을 깜박이지 말고 수정이 반짝이는 것을
응시하시오!" 반짝이는 것은 눈을 곧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리 위에 매달려 있는 밝은 전등불을 바라-브라는 지시를 받는다면 눈은
극도로 피곤해질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눈이 저절로 감길 때까지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받았다.
이것이 히면의 첫 부분이다 나머지 부분은 최면술사가 '그대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며 눈은 극도로 피곤하다'고 끊임없이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대 옆에서 최면술사는 '그대의 눈이 피곤해지고 있으며
눈꺼풀이 내려온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그런데 그대에게는
반대의 명령이 주어졌다. 그래서 그대는 마지막까지 눈을 뜨고 있으려고 싸운다.
하지만 그대가 얼마나 견딜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3분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두 개의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눈을 피곤하게 하는 수정의 반짝이는 빛을 응시하고 있으며
최면술사는 매우 졸리는 목소리로 졸음이 그대를 엄습한다고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이제 그대는 눈을 뜨고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대는 잠에 저항할 수 없게 된다.
최면술사의 암시‥‥‥ 그리고 피술자의 저항. 피술자는 자신의 눈이
피곤해지고 눈꺼풀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는 것을 안다. 그러다가 3분
이내에-결코 3분을 넘기지 못한다∼눈이 감기도록 내버려두어야겠다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눈이 감기는 순간, 최면술사는
이렇게 되풀이한다. "그대는 깊은 잠에 빠지고 있으며 오직 내 목소리만
듣게 될 것이오. 그대는 오직 내 말만 듣게 될 것이오."
그대는 끊임없는 암시에 의해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그러다가 최면술사가 졸리는 목소리로 "그대는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지고 있다고
말하는 소리만 들리는 순간이 온다 그때 최면술사는 그대가
깊은 잠에 빠졌는지 아닌지 시험해 볼 것이다. 그는 핀으로 그대의
손을 찌를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깊은 잠에 빠져서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며
통증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에서는 수술에 타인 최면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마취가 필요없다. 적당한 조건이 주어지면 환자는 매우 깊은 최면에
빠진다. 매우 졸리는 분위기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침침한 불빛,
환자의 눈에 강하게 비치는 반짝이는 빛, 방안에 울리는 잔잔한 음악
은은한 향기‥‥‥ 이런 모든 것이 환자를 깊은 잠에 빠뜨려서 자신이
수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한다.
그래서 최면술사는 몇 가지 시험을 해 본다. 그는 그대의 손을
들어올렸다가 내린다. 그러면 그대의 손은 아래로 떨어진다. 그대는 깊은
잠에 빠져서 손을 들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잠을 자면서 손을 높이
들고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대의 눈꺼풀을 열고 눈을
쳐다본다. 이때 그대의 눈동자는 위로 올라가서 흰자위만 보이게 된다.
최면이 깊을수록 눈동자는 위로 올라가게 된다. 이런 일은 일상의
수면 속에서도 일어나며, 사란이 죽을 때도 일어난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즉시 눈을 감겨 주는 것이다. 완전히 흰자위만 남은
것을 보는 것은 끔찍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사람에게 죽음이
임박하면 눈동자가 서서히 위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수세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면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코끝을 볼 수
없게 된다.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서 코끝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그』
삶은 기껏해야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래서 최면술사는 눈꺼풀을 열고 눈동자가 위로 올라갔는지 보는 것이다.
그때 그는 그대가 더 이상 그말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없으며
더 이상 그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제
그대는 그가 무슨 말을 하건 그대로 따르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대의 돈을 모두 거네서 나에게 내놓으시오." 그러면 그대는
돈을 모두 꺼내서 그에게 줄 것이다. 그는 그대의 장신구를 빼앗을 수 있고
그데를 곤란하게 할 서류에 서명하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가령
그대의 집을 팔았다든지, 그대의 집을 기증했다든지 하는 서류에 서명하게
할 수도 있다
이해해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이것은 매우 위헐한 것인데,
최면술사는 그대에게 후최면(post-hypnotic) 암시를 줄 수도 있다. 후최면
암시란 예를 들면 최면술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열흘 뒤에
그대는 나에게 올 것이다. 그대는 모든 돈과 모든 장신구, 그리고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귀중품을 가지고 나에게 올 것이다. 그것들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돌아가라." 24시간 뒤에 누군가를 총으르 쏘라는 후
최면 암시를 주는 것도 가능하다. 피술자는 이런 명령들을 수행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에 관한 한, 그는 깊은
최면 속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깊은 최면은
그대의 무의식을 움직인다
이런 것들이 기독교가 과장해 대는 위험 요소들이다. 그들은 이런 것이
종교와 도덕에 위반된다고 말한다. 어떤 여자가 강간당할 수도 있지만
그녀는 알지 못할 것이다. 혹은 여자에게 이런 후최면 암시를 줄 수도 있다.
그대는 나와 사랑에 빠졌다. " 그러면 그녀가 최면에서 깨어나는 순간
위대한 로맨스가 시작될 것이다. 그녀는 약간 주저할 것이다.
그녀의 의식적인 마음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적인 마음과 무의식적인 마음 사이에서는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의식은 너무나 강력해서 무의식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의식은 이의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무의식은 의식보다 무려 아홉 배나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 요소들이 사람들 사이에 심하게 과장되어 퍼져 있다.
그러나 교회가 최면을 비난하는 것은 이런 위험으로부터 그대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목적은 최면을 비난함으로써 아무도 최면을
통해 명상이라는 궁극의 열역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일에 있다.
기독교는 사람들이 또 다른 형태의 최면에 대해서는 완전히 모르도록 했는데
자기 최면(ielr-hypno쑈5)이 바로 그것이다. 오직 타인 최면만이
잘못 사용될 수 있다 자기 최면 혹은 자동 최면(aLlto-hyl)no,us)은 잘못
사용될 수 없다. 자기 최면에는 최면술사가 없다. 그렇지만 그대
스스로 최면을 걸 수 있다. 그대는 알람 시계를 맞춰 놓고,'15분 뒤에
알람이 울리면 깊은 최면 상태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세 번 반복한다.
그후 최면을 거는 과정은 타인 최면과 동일하다.
그대는 빛을 쳐다보면서 최면술사가 했던 것과 똑같이 하면 된다.
빛을 쳐다보면서 "네 눈은 점점 무거워진다. 무거워진다. 무거워진다· .
나는 잠에 빠지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 없다. 나는
눈을 뜨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고 되풀이하면 된다.
그대가 눈을 감기까지는 정확히 3분이 걸릴 것이다. 3분이 최대한이다.
2분 만에 눈을 감을 수도 있고 1분 만에 감을 수도 있다.
그리고 더 오래 저항할수록 최면은 더 깊어진다
자신의 가족을 괴롭히는 노인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질병에 걸렸는지 손을 꼽아 헤아리곤 했다
의사들도 지쳤다. 의사들은 그에게 아무 질병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텔레비전의 의학 프로그램을 보고 질병의 이름을 배웠다. 그리고는
가족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병에 걸렸고, 저런 병에도 걸렸다.
그런데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 이것은 단지 노인들이 관심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이다 아무도 노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니 노인들은 관심을 끌 수 있는 자신들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성미가 급해지臺, 화를 잘 내며, 잔소리를 하게 된다. 그들은 관심을
끌 수 있는 자신들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평생 관심을 받으며
살았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신경쓰지 않는다.
나를 좋아하는 인도의 가수 자그지트 싱Uagjit Singh)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런던에 사는 친구가 그를 찾아왔기에
친구에게 가 말했다. "그동안 잘 지냈나?"
친구가 말했다. "잘 지냈네."
싱이 물었다. "자네 부인은?"
그 "=)사람도 잘 지내고 있네." 친구가 대답했다.
"아이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다네. "
마지막으로 자그지트 싱은 이렇게 물었다. "자네 아버님도 잘 지내시나?"
그러자 그 친구가 말했다. "우리 아버님? 물론, 거의 4년 동안 별탈
없이 잘 지내고 계시네." 4년 전에 그의 아버지는 죽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가 잘 지내고 계신다고, 4년 전부터 영원히 잘 지내고
계신다고 말한 것이다!
노인들은 관심을 끌기 위해 편두통이 있다, 배가 아프다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의학 용어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관심을 끈다.
마침내 의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를 거절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정신이 이상해지신 겁니다. 아무 데도 아픈 데가 없고, 아무 병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 진찰해 보았습니다. "
그러나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우린들 어쩌겠습니까? 우리는
의사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
결국 의사는 최면술사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면술사를
데려오시오. 최면술사가 그분에게 최면을 걸어서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말하게 하는 겁니다. 그것이 그분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의 무의식이 자신에게 아무 이상이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겁니다. "
아들들은 매우 기뻐하며 최면술사를 불렀다. 최면술사는 가방과 진료
잘비를 들고 왔다. 그는 마치 의사처럼 보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한 쪽 눈에 외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최면술사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옷을 입어야만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다.
최면술사가 노인에게 물었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노인은 많은 병명을 열거했다. 최면술사가 말했다. "좋습니다.
여기에 누우십시오. 제가 반짝이는 추를 들고 있을 테니 눈을 이 추에
고정시키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을 때까지 바라보십시오.
노인들은 삶의 오랜 체험을 통해 교활해지고 매우 약아진다. 노인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은 옷 입은 걸로 봐서 꼭 사기꾼처럼 보이는데
어떤 치료를 하려는 걸까?" 그는 3분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고 최면술사가 최면 상태를 확인하기 뛰해 그의
손을 들어올렸을 때 그는 손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그는 모든 수법을
알고 있었다 노인들이란‥‥‥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보아 온 것이다.
최면술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노인이 완전히 잠에 빠졌군 ·
그때趺터 이 사람이 완전히 정상이고, 아무 병도 없다는 암시를 주어어
그러면 걸리지도 않은 병으로 자식들을 괴롭히지 않을 거야!"
그러나 노인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들들은 매우 기뻤다. "왜 우리가 진작 최면술사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의사들에게 많은 돈을 낭비해 왔다. 그런데
의사들은 고작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당신들은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돈을 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귀찮을 뿐입니다. 이 사람은 정말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최면술사야말로 우리가 찾던 사람이다:
노인은 조용히 누워 있었다. 모든 암시가 끝나자 최면술사는 돈을
받았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 하나가 최면술사를 그의 차가 있는 곳까지
배웅하러 갔다가 미처 돌아오기도 전에 노인이 한 쪽 눈을 뜨고 이렇게
물었다. "그 미친 사람 갔냐, 안 갔냐?"
피술자가 즉시 눈을 감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의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때 최면술사가 무엇이라고 말하든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가? "당신의 눈이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 그대의 눈은 무거워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깊은 잠에
빠지고 있습니다. " 그대는 잠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완전히
깨어 있다. 그리고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는 그대에게 아무 병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자기 최면을 시도한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위험도 없다.
그대는 단지 눈을 피곤하게 하는 반짝이는 물체를 보면서 최면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대는 최면쑬사가 반복했던 말을 속으로 반복하면 된다.
마침내 그대는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눈이 감기는 것이다 그대는 눈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눈꺼풀을
통제할 수 없다는 느낌은 그대가 깊은 잠에 빠지고 있다는 느낌으로 이어진다.
깨어 있는 동안 그대는 "나는 점점 더 깊이 들어간다" 하고 계속
반복해야 한다. 그러면 무의식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러다가 10분이 지나면 알람이 울리고 그대는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대는 내면이 얼마나 젊고 얼마나 신선하게 느껴지는지
놀랄 것이다. 그대는 마치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고 꽃으로 가득 찬
정원을 지나온 것처럼 상쾌하게 느낄 것이다.
그대는 자신에게 후최면(post-hypnotic) 암시도 줄 수 있다 후최면
암시는 눈이 감기고 그대가 더 깊이 들어간다고 느껴지는 마지막 순간에
주어야 한다. 최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반복해야 한다.
내일부터 나의 건강은 더욱 좋아질 것이다. " 후최면 암시는 여러 개를
선택하지 말고 하나만 선택하라. 욕심을 내서는 안된다! 15일
혹은 3주간의 연습기간 동안 그대 자신에게 암시를 주어 보라‥‥‥‥
가령, 내일부터 명상이 깊어진다든지 하는. 그대는 명상이 깊어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최면과 명상 사이에 매우 아름다운 연결 고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이 깊어지면 이렇게 암시를 줄 수도 있다. "내일 나의 최면은
한층 더 깊어질 것이다. " 그대는 무의식의 심연에 이르기 위해 명상과
최면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일단 무의식의 심연에 닿게 되면 두번째 암시를 줄 수 있다. "비록
그대가 어두운 무의식 속에 있지만 약간의 각성은 남아 있으므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자 알 수 있다. " 그리고 이렇게 반복하라. "미약했던
나의 각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러면 어느 날 그대의 각성으로 인해
무의식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명상이다.
최면은 아무 두려움 없이 사용될 쑤 있으며,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신뢰하는 사람들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최면을 시도해 보라.
그러면 그들이 그대를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라지게 된다.
‥‥ 그대는 매우 친한 친구들과 함께 있다 그대는 그들이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대는 자신을 열고 무방비 상태가 될  수 있다.
혹은 그대 스스로 최면을 시도해 보라‥‥‥‥ 혼자서라면 시간이
약간 더 걸릴 것이다. 두 명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약간은 :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녹음기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은 필요하지 않다. 암시의
내용분을 녹음기에 녹음해 두면 된다. 녹음기는 암시된 내용을 오용할 수 없다.
녹음기에 녹음을 해 두지 않는 한, 녹음기는 그대에게 아내를
죽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때는 나라도 어쩔 수 없다. 녹음기는 그대의
녹음해 놓은 말만 반복할 것이다! 최면의 모든 과정을 녹음기에 녹음해
둘 수 있다. 잠에 빠진다는 암시, 눈꺼풀이 무거워진다는 암시, 최면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간다는 암시를 녹음해 둘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깊은 최면에 들어갔을 때-깊은 상태에서 쉴 수 있도록 4∼5분의
간격을 둔 후에-녹음기에서는 '오늘부터 명상이 점점 깊어지며, 사념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대가 눈을 감는 순간
사념들은 흩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녹음기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을 신뢰해야 하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무 두려움 없이 녹음기를 신뢰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도 그대의 녹음기를 가지고 장난을 하지 못하게 방문을
걸어잠글 수도 있다. 그러지 않으면 누군가가 그대를 속일지도 모른다.
자기 최면은 명상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이 최면을 가장 훌륭하게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최면은 건강에도 활용할 수 있고,
장수(長壽)에도 활용할 수 있으며, 사랑이나 우정, 용기에도 활용할 수 있다.
최면은 그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도와 줄 수 있다. 최면은 미지
(未知)에 대한 두려움을 쫓아 버릴 수 있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쫓아 버릴 수 있다. 최면은 그대가 홀로, 고요히, 평화롭게 있을 수 있도록
해 준다. 최면은 하루 24시간 동안 명상의 분위기를 지속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대는 이렇게 암시를 줄 수도 있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작은 각성의 불꽃이 내 잠을 방해하지 않고 밤새도록 지속될 것이다. "
그대는 질문에서 "세라피(therapy)(')와 명상 사이의 경계선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나의 오랜 염원이었다. 세라피는
최면 속으로 녹아들어가야 하고, 최면은 명상 속으로 녹아들어가야 한다.
그때 우리는 과거에는 사용된 적이 없는, 깨달음을 위한 가장 위대한 힘을
만들어 내게 된다.
세라피는 결코 사용된 적이 없었다. 세라피는 그대의 모든 쓰레기를
치워 줄 것이며, 그대의 모든 조건화를 없애 줄 것이다. 세라피는 내면에 있는
모든 것과, 그대가 억눌러 온 모든 것을 정화해 줄 것이다.
세라피는 그 모든 것을 내던질 것이다. 세라피는 아름다운 정화 과정이며
정화된 마음은 아무 어려움 없이 쉽게 최면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쉽게 최면이나 자기 최면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도-33퍼센트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도-세라피와 함께라면 최면을 이용할 수 있는
단계에 속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라피는 모든 사람들이 최면을 이용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세라피는 서서히 최면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방법으로 이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최면은 명상으로 나아가는 단계로
이용되어야 한다.
세라피와 최면과 명상, 나는 이 세 가지를 나의 삼위일체로 제안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 이런 난센스는 잊어버리라. 이것은 삼위일체가
아니다. 삼위일체는 좀더 과학적이고, 그대 자신이 실제로 실행해 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종교는 쓰레기로 가득 찬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질적인 것은 잊어버리고 쓰레기에만 더욱더
관심을 갖는다. 사실 오랜 세월에 걸쳐 히말라야같이 쌓여 온 쓰레기에
비한다면 본질적인 것은 너무 작아서 이제는 어디에 있는지 찾기도 어렵게 되었다.
내가 제안하고 있는 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다 어떤 성직자나 교회의
성스러운 경전도 필요없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이해와 용기다.
세라피 속에서 완전히 정화하라. 그대는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
그대 안에 있는진 알지 못한다. 자신을 정화하기 시작할 때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맙소사! 이게 나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일까? 내가 무엇」하고 있는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가끔 그대가 하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그데 안에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말이 튀어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명상에 장애가 되었고
앞으로도 깊은 최면에 들어가는 데 장애가 될 것이다.
그것이 중간에 끼어서 장벽을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세라피가 첫번째 순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두번째는
최면이며, 세번째는 두번째로부터 자연히 생겨날 것이며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의 궁극점은 깨달음이다.
명상이 완성될 때 그대의 존재는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며, 축복과
엑스터시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

     園 譯註
1) 파탄잘리(Patanjali) : BC 2세기 경에 활동한 인도의 요기(yogi). 그는
정신력(p,jychic power)''요가의 실제(p煦ctice of Yoga)''삼매(samadhi)'-
'해방(kaivalya)'이라는 이름으로 요가 사상을 범주별로 정리하여 (:요가수트라
Yoga sutra)를 완성했다 상키아(Sankhya) 학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2) 행동주의(behaviorism) :심리학의 대상을 의식(意識)에 두지 않고 사람
및 동물의 객관적 행동에 두는 심리학파. 최초의 주장은 미국의 심리학자
와트슨에게서 나왔는데 그는 1913년 』행동주의자의 입장에서 본 심리학에서 과학적
심리학은 객관적 관찰이 가능한 행동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고전적 행동주의는 1920∼1930년대를 지배하였다. 1930∼1940년대에 이르러
심리학자들은 와트슨의 일반적인 방법론적 주장을 엄밀한 실험에 바탕을 둔
적응행동으로 전환시키려고 시도했는데, 이를 신행동주의라고 한다. 톨먼, 클
라크, 스키너 등이 신행동주의의 이론가들이다.
3) 하네만(Samuel Christian Friedrich Hahnemann, 1715∼1843) :독일의
의사로서 1796년 동종요법을 창시했다. 하네만은 라이프찌히와 빈";1서 의학을
공부했고, 1779년 에를랑겐대학교에서 의사자격을 획득했다. 윌리엄 컬런의
』약물학 강의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동안 퀴닌(Quinine)이 건강한 신체에
일으키는 증상과, 치료를 위해 퀴닌이 사용되는 질환의 퐁상이 유사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런 관찰을 통해 그는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에 의하여
치료된다. " 즉 질병은 그 질병과 유사한 증상을 일으키는 약에 의해 치료된다고
주장했다. 하네만은 이 원리를 1796년에 출간된 한 논문에서 발표했고,
후에는 그런 약물을 소량 복용하면 치료효과가 있다고 확신하여 이들 약물을
'역동화의 효력화(potentization of dynamism)'원리를 발전시켰다. 그의 주
저작인 (:합리적 의학의 원칙(1810)에는 동종요법의 원리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4) 동물자기(,animal magnetism)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신비한 힘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프란츠 메스머(Frans Anton M(
mer: 1734 ∼1815, 독일의 의사, 근대 최면술의 선구자)가 자신좌 환자 치료에
이용했던 최면술에 적용한 말이다. 그는 동물자기란 자신의 몸에서 발산하는
신비로운 힘 또는 보이지 않는 유체(流體)이며, 일반적으로 이 힘은 우주에
가득 차 있으며 특히 별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5) 제3의 눈(a third eye) :인체에 존재하는 일곱 개의 차크라(chak.a, 에
지 센터) 중 미간 부근에 존재하는 아즈나(ama) 차크라를 말한다.
아나 차크라는 여섯번째 차크라인데, 에너지가 아즈나 차크라로 상승하여 제3의
눈이 열리게 되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6) 세라피(therapy) :인간의 심리와 생리적 장애들을 제거해 주어 보다 건강한
심리적 상태를 회복시키기 위한 심리요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정신분석 ·
을슬링 ·또디 워크· 엔카운터 그룹 등의 많은 심리요법이 존재한다.

        제3장
           심신과 건강 사이의 관계

마음과 건강의 관계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질병의 70퍼센트는 마음에서 생긴다. 최면을 이용하면 이러한
병들이 생기기 전에 예방할 수 있다. 최면을 이용하면 가까운 장래에 ·
어떤 질병이 생길지 알아낼 수 있다. 육체에는 아무 증상도 없고, 일반적인
검사를 해 보아도 그가 질병에 걸리리라는 어떤 징후도 나타나지 ' 않는다.
그는 완전히 건강하다. 그러나 최면을 통해 그가 3주 안에 질병에
걸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육체에
나타나기 전에 그것은 먼저 깊은 우주 무의식(Cosmic LInCOnSCiOU:◎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주 무의식에서 집단 무의식(collectiL
Llnconscious)으로, 집단 무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
의식에서 의식적인 마음으로 이동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육체에 나타나며
검사가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질병에 걸리리라는 것을 알기:
전에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소련에서는 킬리안(Kirlian)이라는 천패 사진가가 사람을 찍었는데
‥‥ 그는 보통의 눈이나 보통의 장비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매우 민감한 감광판과 렌즈를 가지고 평생 사진을 찍어 왔다.
그는 자신의 사진을 통해 어떤 일을 적어도 6개월 전에 미리 볼 수 있음을 알고
놀랐다.
그가 자신이 만든 민감한 감광판으로 장미 봉오리를 찍으면
사진에는 장미 봉오리가 아니라 장미가 나오는 것이다. 내일이면
장미 봉오리는 활짝 핀 장미가 될 것이다. 어떤 카메라도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없다. 처음에는 어떻게 민감한 감광판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는지 그 자신도 의아해했다. 다음날 봉오리가
피면 그것은 사진과 정확히 똑같은 것이다. 그 후에 그는 봉오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오라(aura)"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오라는
장차 장미 봉오리가 어떻게 피어날 것이라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민감한 감광판이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에너지 오라의 모습을 찍은 것이다.
그는 질병에 대해서도 같은 작업을 했으며, 소련 의학계에 커다란
혁명을 일으켰다.
그대는 질병에 걸린 후 치료할 필요가 없다. 어디가 아프다는 것을 알기도 전에
치료될 수 있다. 킬리안 사진술이 몸의 어느 부위에서 질병이
나타날지 보여 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몸에 질병이 나타나기 전에
그것은 먼저 에너지 오라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6개월 전에 나타난다.
에너지 오라는 그대의 우주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최면을 이용한
세심한 실험을 통해서 앞으로 발샐하게 될 질병을 알아낼 수 있고,
그 질병을 치료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좀더 행복해질 것이다.
정신분석가들은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 왜 전세계에 걸쳐 인간의 수명이
70년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인 것이 되었는지 궁금하게 여겨 왔다.
인도의 캐시미르 지역에-이제 이 지역은 파키스탄에 의해 점령되었다
-있는 몇몇 부족은 130년이나 140년, 혹은 150년까끼도 살고 있다.
그들은 백오십 살이 되어도 젊은 사람 못지않게 활동적이다.
그들은 결코 늙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젊음을 유지했다‥‥‥‥ 심리학자들은
전세계의 사람들이 보통 70년을 사는데  몇몇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더 오래 사는지 그 이유에 관심을 가져 왔다.
그것은 심리적인 프로그래밍에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오랜 세월
우리는 이렇게 프로그램되어 왔다 '70년을 살고 나면 우리는 죽는다.
이 생각이 그대에게 너무나 깊이 뿌리박혀서 그대는 죽는 것이다.
그대가 살아갈 능력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그데의 심리가 "보편을
따르라 군증을 따르라"고 우기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 그대는 군중을 따라왔으므로 죽음에 있어서도 당연히 군중 심리를
따르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육체가 적어도 3백 년은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육체가 70년 동안 계솥해서 재생되듯이, 사실 육체는 3백 년 동안 계속해서
재생될 수 있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바뀌어야 한다. 과학자들은
프로그램이 신체의 세포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치
우라늄에서 원자를 쪼개듯이, 인간의 세포를 쪼개서 다시 프로그램하기 전까지는
프로그램을 바꾸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매우 요원해
보인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가 이해하기로는 생리학을 거칠 필요 없이 심리학을 거치면 된다.
그대의 최면이 충분히 깊어진다면‥‥ 그리고 최면이 매일매일
일과가 된다면, 서서히 그대는 우주 무의식을 두드리게 될 것이다
거기에 진정한 프로그램이 들어 있으며, 그대는 그 프로그램을 바꿀 수 있다.
우리의 아이들은 더 오래, 더 건강하게, 더 젊게 살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이런 것을 만들어서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가들이 최면 기법을 손에 넣고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최면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

인간은 질병으로부터 구제될 수 있다. 질병의 70퍼센트는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질병들은 신체를 통해 나타나지만 그 기원은
마음 속에 있다. 그러므로 질병이 사라졌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다면 질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질병은 사라질 것이다‥‥‥
마음이 육체를 지배한다. 마음은 육체의 모든 것을 지시한다. 질병의
70퍼센트는 마음을 바꿈으로써 변화될 수 있다. 이런 질병들은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대가 넘어진다면 골절상을 입을 것이다.
그런데 골절상은 최면으로는 나을 수 없다. 골절상을 입지 않았다고 아무리
암시를 주어도 낫지 않을 것이다. 골절상은 육체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육체는 최면에 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육체는 자체와 작용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질병이 마음에서 시작하여 육체의 특정 부위에 나타났다면
그 질병은 쉽게 변화될 수 있다.
많은 종교가 이것을 개발해 왔다. 인도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회교도나 티벳인들, 버마인들‥‥ 그들은 불 속에서 춤을 추어도 불에 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승려들이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최면 상태에 있었으므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생각이
그들의 무의식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오직 70퍼센트만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미국에 한 종파가 있었는데 ‥‥ 나는 그 종파가 아직도 몇몇 지역에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종파는 금세기 초에 매우 유망한 종파였다.
그들은 기독교 집단이었는데, 자신들을 크리스천 사이언티스트
(Chri교an Scienti,it)')라고 불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모든 질병이 나을 수 있으며, 질병이란 단지 믿음에서 생기는 .
것이라고 믿었다. 가령 결핵에 걸렸다고 믿으면 결핵에 걸린다는 것이다.
한 젊은이가 거리에서 노파를 만났는데 그녀가 이렇게 물었다. "
모임에서 자네 아버님을 보지 못했는데‥‥‥‥ 그들은 매주 일요일에
모임을 가졌다.
그가 말했다. "아버님은 지금 아주 심하게 앓고 계십니다 "
그러자 노파가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게. 우리는 크리스천
사이언티스트야. 그리고 자네 아버님도 크리스천 사이언티스트야. 그러니
그 분은 단지 자신이 앓고 있다고 믿고 있는 거야."
젊은이가 말했다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아마 저희 아버님은
단지 앓고 있다고 믿고 계신 것이겠지요."
2∼3일 후에 그는 우연히 그 노파를 다시 만났다. 그녀가 물었다.
아버님은 어떻게 되셨나?"
그러자 젊은이가 말했다. "이제 아버님은 자신이 죽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묘지로 옮겨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붙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크리스천 사이언티스트입니다.
자신이 죽었다고 믿지 마십시오. 자신이 살아 있다고 믿으십시오!'
그렇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이웃 사람들은 웃었습니다. 이제
불쌍한 제 아버님은 자신이 죽었다고 믿으면서 무덤 속에 누워 계십니다.
육체는 믿거나 혹은 믿지 않거나 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이 육체를 지배하고 있다. ""

이제 의학은 어떤 현상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는
특이한데, 그것은 각 나라마다 각기 다른 질병이 유행한다는 것이다
모든 공동체나 종파(宗派)에서는 특정한 질병이 다른 질병보다 더 많이
발생한다. 가령 동양인들은 페스트나 콜레라 같은 유힝성 질병에
걸리기 쉽다. 다시 말해 전염병이나, 감염에 의해 퍼지는 질병에 걸리기가
쉬운 것이다. 동양에서는 개인이 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오직 공동체만이 존재한다
인도의 마을에는 마을이 존재할 뿐, 아무도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공동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공동체가 지나치게 많으면 전염병이
유행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오라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질병에 걸리면 공동체 전체가
서서히 그 질병의 희생자가 된다. 그 공동체 안에는 몇 명의 서양인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다. 사실은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나야 한다. 인도에 있는 서양인들은 면역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도의 기후나 질병에 대해 면역성이 없으므로 더 빨리 병에
걸려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지난 백 년 동안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유럽인들은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전염병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희생되고 만다.
인도인들의 마음은 공동체적이지만 유럽인들은 자기중심적이며 개인적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동양에서와는 전혀 다른 질병이 유행한다.
가령 심장마비와 같이, 전염되지 않는 개인적인 질병이 유행한다.
동양에서 심장마비는 흔한 질병이 아니다. 그대가 서양인이 아니라면, 그대가
서양의 방식으로 교육을 받아서 거의 서양인처럼 되지 않았다면,
심장마비는 흔한 질병이 아니다.
동양에서 심장마비는 큰 문제가 아니다. 당뇨병이나 혈압도 큰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전염되지 않는 질병이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질병에는
더 잘 걸린다. 서양인의 마음은 개인적인 단위로 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단위로 살아갈 때 공동체는 그다지 많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그대는 전염병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서서히 전염병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차
개인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 심장마비, 자살, 혈압, 정신이상, 이런
병들은 개인적인 질병이며 전염되지 않는다. 긴장, 고뇌, 근심‥‥‥
동양에서는 사람들이 좀더 여유 있게 살아간다. 그대는 동양인이
지나치게 긴장하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동양인들은 불면증이나
장 질환으로 고통받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공동체가 예방해 준다.
공동체에는 심장이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적인 삶을 산다면 심장 질환으로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희귀한 현상이다. 이것은 곧 그대의 마음이 어떤 질병에는
잘 걸리게 만들고 어떤 질병으로부터는 보호해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의 마음이 그대의 세계다. 그대의 마음이 그대의 건강이며,
그대의 질병이다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캡슬에 갇혀서 사는 것이다.
그대는 진실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진실은 모든 종류의
마음을 떨쳐 버릴 때 알려진다 공동체적인 마음이나 개인적인 마음,
기회적인 마음, 문화적인 마음, 사적인 마음‥‥‥ 이 모든 마음을 떨쳐
버릴 때 알려진다. 그때 그대의 마음은 우주적이 된다. 그때 그대의
마음은 우주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
마음을 갖지 않을 때 그대의 의식은 우주적이 된다.

모든 문제는 정신육체적(psychosomatic)이다. 왜냐하면 육체와 마음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은 육체의 안쪽 부분이며 육체는 마음의
바깥 부분이다. 그러므로 육체에서 시작된 것이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고
반대로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육체로 나올 수도 있다. 마음과 육체
사이에는 어떤 경계도 없고 뚜렷한 구획도 없다.
모든 문제에는 양극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 문제들은 마음을
통해서, 혹은 육체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모든 문제가 육체에 있다고 믿는다. 생리학짜들, 파블로프)) 학파의 ·
사람들, 행동주의자들‥‥ 그들은 육체를 치료하는데, 물론 50퍼센트의
경우에는 성공을 거둔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그들은 좀더 많은 성공을
기대하지만 결코 50퍼센트 이상의 성공을 거둘 수 없다. 그들의
성공은 과학의 발전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은 모든 문재가 마음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들도 첫번재 부류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Chri교an Science)")를 믿는 사람들과 최면술사들, 그리고 정신요법사들은
문제가 마음에서 생긴다고 생각한다. 이들도 50퍼센트의 경우에는
성공을 거둔다. 이들 또한 조만간 더 많은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난센스다. 그들은 50퍼센트 이상의 성공을 거둘
수 없다. 50퍼센트가 한계다.
모든 문제는 마음과 육체 양쪽에서 동시에 해결되어야 한다. 모든 문제는
마음과 육체 양쪽 문에서 동시에 파고들어가야 한다. 그때 인간은
100퍼센트 치료될 수 있다. 과학이 완전해지면 마음과 육체 양쪽을 모두
다룬 것이다‥‥‥
그러나 육체가 먼저 다루어져야 한다. 육체는 마음에 이르는 입구기?때문이다.
그리고 육체는 거칠기 때문에 쉽게 조종될 수 있다. 먼저
육체에 쌓여 있는 모든 구조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대가 허약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오랫동안 살아왔다면, 그 느낌은 분명히 육체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며 육체의 조직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먼저 이런
것들이 육체에서 제거되어야 글다. 그와 동시에 그대의 마음이 위로
상승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 지고 있던 모든 짐을 내던질 수 있도록,
마음을 격려해야 한다. ""

     園 譯註
1) 오라(allra) . 인간의 육체와 사물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미묘한 에너지
장(場)을 말한다. 오라의 빛깔과 형태는 사람의 십리적, 영적 상태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2) 크리스천 사이언티스트(Christian Scientist) : 크리스천 사이언스를 신
는 사람. 주4) 참조.
3)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 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
반사의 연구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그는 조건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인간의 행동을 신경계와 관련시키는 선구적인 연구를 했다. 1904년 소화에
대한 연구로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했다.
4)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 : 18駑년 메리 베이커 께디가
에 세운 교단. 에디는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병고침 이야기를 읽늑 동안
큰 사고로 얻은 것으로 보이는 후유증이 씻은 듯이 낫는 경험을 했다 이
터 에디는 오랫동안 성서 연구와 집필에 정열을 쏟았고 심도 있는 치유 실
했으며, 1879년 추종자 15명과 함께 '초기 그리스도교꼭 후대에 상실된
요소'를 회복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보스턴에 크리스천 사이언스 제1교회를
설립했다. 그후 1940년대까지는 교인 수가 꾸준히 증가했으나 1970년대부터
일부 지역(특히 제3세계 일부 국가)을 제외하고는 교인 수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 교단의 가르침은 (:성서에 비추어 본 과학과 건강(Science and He
with Key to the Srripture)B에 잘 나타나?있다.
종교사적 관점에서 볼때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소규모 종교운동이었으나,
규모에 비해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종파가 종교계에 준 충격은, 주로
점진적인 입장에 서서 영적 치유 사역을 통해 활퐁했다는 데 있다. 이런 치유에
데해 종교적인 방법으로든 의학적인 방법으로든 체계적인 평가가 이루어진
적은 없으나, 많은 주요 교단 사이에 영적 치유에 대한 관심을 다시 일깨우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제4장
                           치료자

치료자(healer)의 역할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치료자는 사실 치료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행위자(doe)
가 아니기 때문이다. 치료(healing)는 치료자를 통해 일어나는데,
그러기 위해서 치료자는 자신을 소멸시켜아 한다. 치료자가 된다는 것은 =
그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더 적게 존재할수록 더
훌륭한 치료가 가능하다. 그대가 더 많이 존재할수록 통로는 더욱 막히게 된다.
신(神), 전체성, 혹은 그대가 무엇이라고 부르든 바로 그것이
치료자다. 전체가 치료자다‥‥
질병에 걸린 사람은 단순히 그 자신과 전체 사이에 장벽을 만든 사람이다.
그레서 무엇인가가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치료자의 역할은
그를 다시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치료자의 역할이 그를 다시
연결시켜 주는 것이라고 말할 때, 나는 치료자가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치료자는 단지 작용할 뿐, 진정한 행위자는
전체다. ""
의료업은 일상적인 직업이 아니다. 의료업은 단순히 기술도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기계를 수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하우(know-how)의 문제가 아니라 깊은 사랑의
문제다‥‥‥
그대는 사람을 다루고 있으며 생명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복잡한 행위이다.
때때로 그대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고, 그런 실수는 누군가의
생명에 치명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깊은 기도와 함께 하라. 인간애와
겸허함, 소박함과 함께 하라.
마치 기술직에 종사하듯이 의료업에 종사하려는 사람들은 의사가 죄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잘못된 사람들이다. 환자를
대할 때 망설이지 않는 사람들은 부적절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동차
수리공이 차를 고치듯 사람을 수술할 것이다. 그들은 환자에게서 영적인
존재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증상을 치료할 것이다. 그들은 매우 확신에 차 있다. 기술자들은 언제나
확신에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다를 때에는 확신에 차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망설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대는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에 두 번, 세 번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귀중한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한번 떠나간 생명은 영원히 떠나간
것이다. 그리고 환자는 독특하며 대체될 수 없는 개인이다. 그와 유사한
사람은 결코 없었으며 앞으로도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그대는
불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망설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 속으로
뛰어들라! 그러나 크나큰 겸허함과 함◎께 하라. 환자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라. 환자를 치료할 때 그저 신성한 에너지의 매개자가 되라
의사가 되지 말고 그저 신성한 치료 에너지의 매개자가 되라. 그의
친구가 되라. 거기 환자가 있게 하라. 환자를 물건처럼 다루지 말고,
환자에게 커다란 존경심을 가지라. 그리고 거기 신이 있게 하라. 그리고
깊은 기도 속에서 신이 그대를 통해 환자에게 이르도록 하라. 환자는
질병에 걸렸으므로 신과 접촉할 수 없다. 그는 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는 자신을 치료하는 언어를 잊어버렸다. 그는 절망적인 상태이다.'
그대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 있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이 매개자가 되면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더불어 그 1이
건강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의학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신성한 에너지는 단지 미묘한 힌트만을 주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 힌트를 해독해야 한다 그대가 의학을 알고 있듯이
힌트를 매우 쉽게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대는 환자에게
어떤 것도 행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행한 것은 신이기 때문이다. 신이
그대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 그대의 모든 지식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환자를 돕는 것은 그대의 지식과 결합된 신의 치료
요지이다. 그것은 결코 해가 되지 않는다. 그대 자신만으로는 환자에게
해가 될 수 있다. 그러니 그대 자신을 떨쳐 버리고 거기 신굴 일에
한없2 속으로 뛰어들라. 그러나 명상을 계속하라."'

누구나 치료자가 될 수 있다. 치료는 호흡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누군가가 아프다는 것은 그가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치료 근원을 자각하지 못한다.
치료자는 환자와 근원이 서로 연결되게 도와 주어야 한다. 환자의 근원과
치료자의 근원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환자는 근원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치료자는 전체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중간 매개자가 될 수 있다.
치료자는 환자의 몸을 어루만지며 환자와 근원 사이의 연결 고리가
되어 주는 것이다. 환자는 더 이상 근원과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제는 간접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일단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하면
그는 치료된다.
그리고 치료자가 진정으로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대는
치료자이면서도 이해력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세상에는 많은 치료자가 있지만
그들은 어떻게 해서 치료가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다. 치료의
메커니즘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이해력이 있다면 환자의 치료를
도와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치료가 일어나는 근원을 자각하도록
도와 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그대는 현재의 질병을 치료할 뿐 아니라
미래의 질병까지도 예방할 수 있다 그때 치료는 완벽해진다. 그것은
치료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옌방 효과까지 있기 때문이다.
치료는 거의 기도의 체험이나 신의 체험이 되며, 사랑 혹은 전체의 체험이 된다.

저는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하면 병든 사람을 잘
돌볼 수 있는지 당신의 의견을 알고 싶습니다. 모든 종교에서는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아픈 사람을 사랑하고 병든 사람을
사랑하라. 병원을 짓고 병원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라."
여기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모든 종교가 아픈 사람, 병든 사람, 가난한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도 그대의 부유함이나 위대함, 숭고함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한, 자신의 부유함과
위대함을 발견하지 않는 한, 그대는 누구에게도 사랑을 나누어줄 수 : 없다.
아픈 사람과 병든 사람은 보호를 필요로 하지만 사랑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는 아픈 사람과 병든 사람을 ·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종교적이며 가장 영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것을 거의 보편적인 진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심리성에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다. 아픈 사람을 사랑하는 순간, 그대는
환자가 질병에서 회복되도록 돕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건강해지는
순간,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프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좋은 구실이다.
그대는 이런 일을 보았을 것이다. 아내들은 하루 종일 건강하게 지낸다.
그러나 창문을 통해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 즉시
세면대로 달려간다. 두통이 생긴 것이다. 두통을 앓고 있지 않으면 남편이
사랑을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통을 앓고 있다면 남편은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그녀 곁에 앉아서 머리를 만져 주고, 악간의
가짜 사랑을 보여 주며, 달콤하고 아름다운 말을 해 준다. 남편은 여러
해 동안 아내를 '달링(darling)'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그녀가 두통을
앓고 있을 때는 '달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아내는 이런 말을 듣고
좋아한다. "당신을 사랑해. 오늘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사랑할 거야."
아이들이 아플 때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대는
거기에 숨어 있는 간단한 심리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픈 것과
사랑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아이는 사랑이 필요할 때마다 아플 것이다.
누가 건강한 아이나 건강한 아내, 건강한 남편에게 신경을 쓰겠는가?
사랑은 마치 약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아픈 사람들만이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을 뚠명히 해 두고 싶다. 아픈 사람을 돌보되 사랑을 』
주지는 말라.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아픈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라. 왜냐하면 두통은 대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돌보기는 하되 달콤한 말은 피하라. 매우 실용적인 방법으로 돌보라.
 그녀의 머리맡에
두통약을 놓아 두라. 그러나 사랑을 보이지는 말라. 그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플 때 그를 돌보라. 그러나 전적으로
무관심하라. 아이가 아프다고 해서 그대를 우려먹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아이에게 이해시키라. 인류 전체가 서로를 우려먹고 있다. 아프거나
늙었거나 병들었다고 해서 그들은 이렇게 요구한다. "그대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프고, 늙었으며‥‥‥‥
누군가 아플 때 그대는 사랑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가
일상적으로 해 온 일이다. 그대는 화가 나더라도 아픈 사람에게는 화를
내지 않는다. 그리고 비록 그대가 사랑을 느끼지 않더라도 아픈 사람에게는
사랑을 보여 준다. 사랑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최소한 동정심은 보여 준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심리학적인 발견과도 무척
상반되는 일이다‥‥
그대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하지 말고 그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대는 살아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대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마치 그대가 숨쉴 자격이 있듯이. 그대는 숨쉴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음식이 육체에 영양분을 주듯이
사랑은 영혼에 영양분을 준다. 그대가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강하고 강인한
사람을 사랑하라.
아픈 사람을 돌보고 늙은 사람을 돌보라. 그러나 돌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사랑과 돌보는 것의 차이는 어머니와 간호사의 차이와 같다.
간호사는 돌보지만 어머니는 사랑을 준다. 아이가 아플 떼는 어머니도
그저 간호사가 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아이가 건강할 때 가능한 한
많은 사랑을 쏟아부으라. 사랑이 건강이나 강인함, 지성과 연결되도록 하라.
이것이 아이의 삶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저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제가 환자를 치료하는 데 명상이
도움이 됩니까?
정신과 의사는 어느 누구보다도 명상적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대가 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매우 침착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다면,
그대의 띨은 매우 위험할 것이다. 다른 어떤 건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도
정신과 의사들이 더 많이 미치며 더 많이 자살을 한다.
이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정신과 의사들이 미치거나 자살;하는
비율은 정말로 높다. 보통사람들보다 거의 두 배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 이것은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이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실 그렇다. 왜냐하면 심리적으로 혼란되어 있는
환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진동을 내뿜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에너지와 부정적인 파장을 내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대는 매우 주의해야 한다.
그대는 그를 보호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며, 자비로워야 한다. 그래야만 =
그를 도울 수 있다 그는 끊임없이 부정적인 에너지를 내뿜고 있으며 =
그대는 그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수록
그의 에너지를 더 많이 흡수하게 된다.
신경증이나 정신병에 걸린 사람과 오래 생활하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인간이란 본래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함께 지내는
사람들과 서서히 비슷해진다. 어느 누구도 따로 떨어져 있는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 행복해질 것이다. 모든 것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이다. 신경증은 전염성이 있으며 자살도 전염성이 있다.
그대가 깨달은 사람 주변에서 살고 있다면 그대 속의 무엇인가가
깨달음이라는 높은 가능성을 향해 감응하기 시작한다. 그대가 의식이
매우 낮은, 비정상적으로 낮은 사람들과 함께 지낸다면 그대 안의 어떤
병적인 것이 그들과 상응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병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그대를 보호하는 데에는 명상만한 것이 없다. 그때 그대는 자신이
주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으며, 그대가 환자를 돕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도울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에너지가 높을수록 도울 수 있는 가능성은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신과 의사나 치료자, 혹은 치료
받는 사람은 거의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이다. 아마 약간의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그 차이는 너무 작아서 고려할 만한 가치가 없다.
정신과 의사는 매우 쉽게 미칠 수 있다. 단지 조금 밀거나, 혹은
어떤 우발적인 일이 생겨도 그는 구제할 수 없는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신경증에 걸린 사람도 항상 신경과민이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이틀 전만 해도 그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시 정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상과 비정상은 양적인 문제이지 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99도, 100도, 101도, 이런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실, 보다 나은 세상이라면 모든 정신과 의사는 철저한 명상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개업(開業)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그대 자신을 보호하고 그대가 상처입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때 그대는 진정으로 환자를 도울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위데한 정신과 의사나 정신분석가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인류에게
전혀 희망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프로이트')조차도·
평생에 걸친 경험 끝에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절망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결과다. :
한편 그는 40년 동안 혼란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 보냈으며, 인간에
대한 경험이라고는 미친 사람들과의 경험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점차로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은 신경증에 걸려야 하며, 인간에게는 자신을 자연스럽게 신경계로
이끌어가는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이란 기껏해야 세상에 맞게 좀더 조정된 사람일 뿐이다.
세상에 맞게 조정되는 것이 건강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만일 온 사회가 미쳤다면 그대는 거기에 맞게
조정될 수는 있겠지만 그대 역시 미쳐 있을 것이다. 사실 미친 사회에서는
미치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적응이 안 된 것이다. 이것이 실제의
사실이다.
예수가 이 땅에 살았을 때, 그는 이 세상에 적응이 안 된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했다. 그는 그토록 낯선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를 관대히 봐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다만 우리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그가 현존할 때 오직 두
가지만이 가능하다. 그가 미쳤거나 아니면 우리가 미친 것이다. 둘 다
잘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다수지만 그는 혼자다. 물론 우리가 그를 죽일 것이다.
그가 우리를 죽일 수 없다. 붓다가 이 땅에 있었을 때 그는
건강해 보였다 건강한 사람, 정말로 자연스러운 사람, 정상적인 사람이
정상적인 사회 속을 움직였던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인류에게 미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껏』해야
우리는 사회의 방식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인간이 축복으로 넘칠 가능성은
사실상 그럴 가능성은 없다. 프로이트는 왜 이런 비관적인 결론에 도달
했는가? 그것은 그의 경험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전 생애는 기나긴 악몽이었다. 그는 미친 사람들을 치료하며
평생을 보냈다. 그래서 서서히 그 자신도 비절상이 되었다. 그는
정말로 건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축복에 넘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전체성(wholeness)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했다. 그는 사소한
일에도 두려워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누군가가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그는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는 두 번씩이나 기절했다! 그의 마음은 평정을 잃은
듯이 보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해가 가기도 한다. 사실 그가 평생을
제정신으로 살았다는 자체가 기적이다.
통찰력이 매우 뛰어난 정신과 의사,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미치고 말았다. 다른 의사들은 미치지 않았는데, 그가 미친 유일한
이유는 그가 정말로 통찰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하다.
프로이트나 라이히 혹은 다른 정신과 의사즐의 삶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것은 그들이 깊은 명상 속에서 훈련을 받았더라면 온
세상이 달라졌으리라는 것이다. 그랬더라면 신경증에 걸린 사람들이
표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붓다가 되기는 매우 어려울 테지만 그가 표준인다. 그리고 정상적인
사람이란 표준에 근접한 사람이다. 이것은 짙응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인간은 전체성이나 행복, 건강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

세라피스트(therapist)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저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협합니까?
사람들을 도와 주면서 동시에 저 자신의 에고를 해체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저는 내면 속에서 분명한 부분과, 분명하지
않은 부분 사이에서 미묘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당신의 지도하에서 저는 통찰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
지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요?

세라피스트(therapist)의 역할은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다.
세라피스트 자신도 그가 도와 주려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동일한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세라피스트는 단지 기술자(technician
뿐이다. 그는 자신이 스승인 체 속일 수 있는데 세라피스트가 되는 데
있어서 가장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약간의 이해만 있으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먼저, 다른 사람을 돕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런 생각은 자신이
구원자나 스승이 된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에고가 들어온다. 그대는 다시 중요해지고, 그룹의 중요한 인물이 되며,
모든 사람이 그대를 존경하게 된다.
돕는다는 생각을 버리라. '돕는다'는 말 대신에 '나눈다'는 말을 주시하라.
그대의 통찰력을 나누어주라. 그룹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대보다
열등한 사람들이 아니다. 세라피스트나 세라피를 받는 사람은 같은
배를 탄 것이다. 다만 세라피스트가 좀더 많이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대의 지식은 빌려 온 것임을 자각하라. 그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아직은 그대의 체험이 아니라는 것을 단 한 순간도 잊지 말라. 이런
생각은 그대의 그룹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인간은 매우 미묘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양쪽으로
작용한다. 먼저, 세라피스트는 스승이 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참석자들을
도와 주기보다는 오히려 참석자들이 가지고 있는 뭔가를 파괴한다
참석자들은 단지 테크닉만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 우정을 나누거나
신뢰하는 분위기는 없을 것이다. 다만 "당신은 좀더 알고 있고 나는 조금
알고 있다‥‥‥ 그러나 나도 몇 개의 세라피 그룹에 참석하고 나면
당신만큼 알게 될 것이다" 하는 생각만 있을 것이다.
참석자들도 서서히 세라피스트가 되기 시작한다. 세라피스트가 되는
데에는 어떤 자격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여러 나라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몇몇 나라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세라피들을 불법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대학에서 치료학이나 정신분석, 정신요법을
공부해서 학위를 가진 사람만이 세라피 그룹에서 사람들을 돕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은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라피는 사업이
되었으며 무자격자가 그 사업을 좌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라피의 테크닉을 알고 있다. 몇 개의 그룹에 참석해 보면 모든 테크닉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
그대가 도와 주는 사람의 역할을 하는 순간, 도움을 받는 사람은
결코 그대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대는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고 그의 에고에 상처를 준 것이다. 이것은 그대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대는 단지 자신의 에고를 부풀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의 에고에 상처를 줄 때에만 가능하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그대의 에고를 부풀릴 수는 없다. 부풀어오른
그대의 에고는 더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대와 항께
있기 위해 자신들의 공간과 인격을 위축시켜야만 한다.
시작부터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나는 사랑보다 더
유적인 것이 없음을 절대적으로 강조한다 테크닉도 도움이 되겠지만
진정한 기적은 사랑을 통해 일어난다. 세라피에 참석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저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되라. 그들보다 높거나 성스러운 체
하지 말라.
처음부터 이 점을 분명히 밝히라 "이것이 제가 알고 있는 테크닉입니다.
그리고 일부는 저의 체험입니다. 이제 테크닉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체험을 나누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저의
환자가 아닙니다. 단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친구들일 뿐입니다. 저는
작으나마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많지는 않지만 여러분에게
나누어쿨 수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서 많은 분들이 각기 다른
야과 영역에 대해서 많은 이해를 가끼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체험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룹을 더 풍요롭게 합시다. "
나는 완전히 새로운 세라피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라피스트
단지 협조자일 뿐이다. 단지 그룹을 좀더 조용하고 고요하게 만들며,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살피는‥‥‥ 스승이라기보다는 보호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제가 체험을 나누어줄
저 또한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그것은
여러분의 문제일 뿐 아니라 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 저는 말할 뿐 아니라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
그대가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라. 그룹을
시작하기 전에 그 사실을 분명히 하라. 그리고 그룹의 체험이 깊어지면
사실을 더욱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대는 단지 몇 걸음 앞서 나간 선구자로
남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테크닉을 배울 것이고 그들 자신이 세라피스트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충분한 바보들이-50억이나 되는 바보들이-있으므
사람들은 추종자를 발견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약점이다. 즉 사람들이
우러러보면 그대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보는 것은
럴니 나에게 뭔가 위대한 점이 있는 게 틀림없다. " 그들은 어려움에
처해 있으며, 인간적인 나약함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그대 또한
인간이므로 실수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어떤 비난도 하지 말고
커다란 사랑으로 참석자들이 가슴을 열 수 있도록 도우라. 이것은
그대가 자신을 열어 보일 때에만 가능하다.
나는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낯선 사람들끼리는, 아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말하지 않을 내용들을 말한다는 것이다. 기차 안에서 누군가를
만난다. 그의 이름도 모르며, 그가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오는 길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나는 20년간 쉬지 않고 이 나라 전체를 기차로 여행하면서 이상한 현상을
보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비밀을 낯선 사람들에게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낯선 사람들은 비밀을 악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것이고 다시는 그를 못 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그대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일에는 흥미가 없다. 오히려 자신의 비밀이나
약점을 이야기함으로써 상대방에게 그대에 대한 확신을 주며 더욱 사랑하고
더욱 신뢰하게 만든다. 상대방을 신뢰하면 상대방도 그대를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그대가 순진무구하며 열려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람들도
가슴을 열기 시작한다. 이것은 연쇄 반응이다·.
세라피 그룹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세라피 그룹은
명상을 위한 준비이며, 명상은 깨달음을 위한 준비다. 그대가 상황을 잘
이해한다면 그것이 어렵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룹을
좀더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룹은 그대와 더불어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룹에서 단지 선생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대 역시?배울 수 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알무스타파는 아름다운
말을 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우리에게 배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오"
 하고 요청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들이 물었기에
나는 말하겠다. 그러나 기억하라. 나는 대답하면서 동시에 그대들과
더불어 듣고 있다는 사실을‥‥‥‥
그룹에 참석한 사람들을 사랑하라. 장차 그들이 되어야 할 모습이
아니라 현재의 그들을 사랑하라. 그들은 평생을 온갖 종교와 정치와
시와 신학과 철학의 지도자들로부터 고통받아 왔다. 이런 지도자들은
그대를 완전히 죽이고 파괴해서 자기들의 생각대로 맞추고 난 후
그대를 사랑할 것이다.
모든 종교가 인류에게 그런 짓을 해 왔다.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대를 도우려는 확고한 태도를 가지고 그대에게 이상과
원칙과 계율을 주었다. 이들은 그대의 자유를 신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위엄을 존중할 수 없었다. 이들은 그대를 지독하게
격하시켰다. 심지어 물건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격하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훌륭한 의사인 내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그가 아직 살아 있는지
었는지 모르겠다. 최근 6년 동안 그에 대해서 들은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봄베이로, 그후 다시 푸나')로 이주하기 전에 살던
도시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였다. 그가 말했다. "내 평생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의사의 역할은 환자를 치료하는 게 아니야. 환자는 스스로
치유된다네. 의사는 단지 사랑의 분위기와 그가 나을 수 있다는 분위기를
만들어 줄 뿐이지. 의사는 단지 확신과 더 오래 살아야겠다는 희망만을
돋워 주는걸세. 의사의 모든 치료는 부차적인 도움을 줄 뿐이라네."
 환자가 살려는 욕망을 버린다면, 그의 경험으로는 어떤 치료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세라피스트에게 있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세라피스트는 사람의
심리적인 문제를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떨쳐 주고, 남들이
자기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내부에 억압되어 있던 것들, 무의식적인 상상들, 환상들, 욕망들을
표출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랑 어린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룹 전체가 치유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세라피스트는 단지 협조자일 뿐이다. 그는 심리적으로 병들었거나
혼란된 사람들을 한데 모아 놓고,그룹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지켜볼 뿐이다. 세라피스트가 그들에게 어떤 아이디어나 통찰력이나
관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는 이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것은 저의 지식일 뿐, 아직 체험은 아닙니다. " 그가 직접 체험하기 전에는
그렇게 말해야 한다.
그대가 성실하고 정직하며 진실하다면 스승이 되거나 구원자가 되려는
덫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덫에 빠지기는 아주 쉽다. 스승이나
구원자가 되는 순간-사실 그대는 스승이나 구원자가 아닌데-그대는
그들을 돕는 게 아니라 단지 착취하는 것이며, 그들의 약점이나 문제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정신분석 운동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실험들 가운데 가장
착취적인 것이다. 아무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엄청나게 착취만 당하고 있다. 정신분석가나 정신요법사들‥‥‥
심리학은 여러 분야로 갈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그대를 환자로 전락시켜 버리며 자신들은 의사로 남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자신도 같은 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정신분석가는 도움을 받기 위해 거의 일 년에 두 번씩 다른 정신
분석가를 찾아간다. 이것은 심각한 공모(共謀)다. 그대가 마음이나
마음의 모든 문제를 넘어서지 않은 상태에서 온갖 종류의 정신이상에
귀기울인다면 그대도 정신이상이 될 것이다. 그대는 환자들이 _
고통받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문제로 고통받기 시작할 것이며, 그들을
치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이 그대를 병들게 할 것이다. 그러나 책임은 =
그대에게 있다.
사랑과 열린 마음과 성실함을 지니라‥‥‥ 환자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단단히 지키고 있다. 그러므로 정신분석가의 :
첫번째 역할은 환자들이 가슴의 문을 열기 전에 자신이 먼저 가슴을 여는 것이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그 역시 그들처럼 인간적이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그 역시 똑같은 나약함과 탐욕, 권력이나 돈에 대한 욕망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도 근심과 걱정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받고 있다.
가슴을 완전히 열라. 이것은 그대를 신뢰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구원자나 예언자나 메시아, 혹은 티르탕카라나 아바타라(av:
taras)")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이들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 중에 어느 한 명이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사람들은
그를 돌로 쳐죽이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단지 그를 조롱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는 어리석다. 그대가 인1
전체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미친 생각이다 먼저 그대 자신부터
구원하라. 그러면 우리는 그대의 빛과 숭고함과 광채를 보게 될  것이다.
신뢰는 스스로 찾아온다. 신뢰는 요청을 받아서 오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마치 산에서 시원한 미풍이 불어오듯이, 마치 바다에서 조수의
물결이 밀려오듯이 그렇게 오는 것이다. 그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대는 단지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장소에 있기만 하면 된다.
그대 자신말고는 아무도 그대를 구원할 수 없다. 나는 그대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 자신의 구원자가 되라. 그러나 도움을 받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런 조건이 붙어야 한다. 즉 그 도움은 사랑과
함께 와야 하며, '나를 신뢰하고서 그대의 가슴을 열어 준 것에 대한
감사함과 함께 와야 한다
세라피스트의 역할은 매우 복잡하다. 그런데 바보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푸주한이 외과 수술을 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어떻게
자르는지 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뇌 수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버팔로나 암소, 기타 모든 종류의 동물을 죽일 수 있다.
그들의 역할은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세라피스트의 역할은
살리는 것이다. 세라피스트는 삶에 긍정적인 가치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직접 그런 가치들을 실천함으로써, 가슴의 고요함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삶에 긍정적인 가치들을 창조해야 한다.
내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그대는 다른 사람의 가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그 비율은 정확히 같다‥‥‥‥ 그대의 가슴이나
다른 사람의 가슴에는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이해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대는
자신도 어리석고 무지했으며, 여러 번 좌절했고, 그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아직도 그런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들도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며, 그 다음에는 그들 자신에게 맡겨
두어야 한다. 그들을 어떤 틀에 맞게 성형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럴 때 세라피스트가 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인간의 내면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은 삶에서 가장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는 장소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알게 됨으로써 그대는 자신을 좀더 알게 된다.
이것은 악순환(惡循環, vicious circle)이다 거기 악순환 이외의 다른
적당한 말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새로운 단어를 하나 만들겠다. 그것은 '선순환
(irtuous circle)'이다. 그대의 환자와 그룹의 참석자들에게 가슴을 열라.
그러면 그들도 가슴을 열 것이다. 이것이 그대 자신을 좀더 열게
도와 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좀더 열리도록 도울 것이다. 곧 거기에
세라피스트도 없고 환자도 없게 된다. 다만 서로가 서로를 도와 주는
사랑이 넘치는 그룹만이 남게 된다.
세라피스트가 그룹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그는 성공적인 세라피스트가 아니다.
이것이 나의 기준이다.
그대는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의 지도하에서 저는 통찰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지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요?" 둘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남을
지배하건 그대 자신을 지배하건 지배는 지배다. 자신을 지배한다면
그때 미묘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도 지배할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다.
그대가 먼저 떨쳐 버려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배가 아니다.
‥‥‥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대의 지배를 받아들일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먼저 자신에 대한 지배를 떨쳐 버려야 한다.
왜 대 주위에 감옥을 만들고 스스로 죄수가 되어 어디를 가든 감옥을
다니는가? 먼저 자유의 무한한 기쁨과 광활한 하늘을 나는 새의 기쁨을
배우라. 그때 그대의 자유는 다른 사람을 변형시키는 힘이 될 것이다.
지배는 참으로 추하다. 지배는 정치가들에게 맡겨 두라.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시궁창 속에서 살지만 스스로를
창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평생을 시궁창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죽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수상이며
대통령이고 왕이며 여왕이다· .
이집트의 어떤 저명한 시인이 한번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 "세상에
왕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왕은 다섯명 뿐이다.
한 명은 영국에 있고 나머지 네 명은 카드놀이 속에 있다. "
이제 그 대답은 달라져야 한다. 세상에는 다섯 명의 여왕이 있는데 한 명은
영국에 있고 나머지 네 명은 카드놀이 속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단지 공허한 내면을 채우기 위해
더욱더 많은 권력을 얻으려고 할 뿐이다.
바깥에서 보면 내면은 비어 있다. 그러나 내면에서 보면 온 세상이 비어 있다.
오직 내면만이 흘러넘칠 뿐이다. 그러나 흘러넘치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존재의 향기, 사랑, 축복, 엑스터시, 침묵, 자비 ‥‥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깥에서 보면 내면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커다란 충동이 일어난다. 어떻게 하면
내면의 공허를 채울 수 있을까?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로? 아니면 대통령이나
수상이 되는 것으로? 무엇이든 해서 내면의 공허를 채우라!
인간은 내면이 공허한 채로, 헝 빈 채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바깥에서 보았을 뿐이다.
이것이 문제다. 바깥에서 보면 오직 대상물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나 축복은 대상물이 아니며, 깨달음이나 이해, 지혜는
대상물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와 삶에 있어서 위대한 모든 것은 주관적인
것이지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깥에서는 오직 대상물만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는 서둘러서 온갖 쓰레기로 내면을 채우는
것이다. 빌어 온 지식으로 내면을 채우는 사람도 있고, 자학으로 내면
을 채우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성자로 받들어진다. 수상이나 대통령이
되려는 거지들이 있다. 내면의 공허를 느끼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지배는 그들에게 내면이 공허하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산야신"은 내면에서 자신의 주관성(subjectivity)을 탐구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리고 그는 굉장한 보물, 무진장한 보물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때에만 다른 사람과 그대 자신을 지배하지 않는다. 지배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 순간부터 그대는 모든 사람들이 개체성과 자유를 자각하도록
축복과 만족과 평화의 엄청난 원천을 자각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세라피가 명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한다면‥‥‥ 단지
세라피스트 모두를 위한 기반을 마련한다면 세라피는 올바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세라피는 명상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명상은 깨달음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토록 커다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단지
홀로 남아 있다니‥‥‥‥ 가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때 나는 슬픔을 느낀다.
그들은 거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지처럼 행동하고 있으며
거지 생활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거지 생활이 그들이 지닌 전부이기
때문이다. 거지 생활을 청산하지 않는 한, 그들은 자신들이 황제이며
그들의 제국은 내면에 있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가능한 한 깊이 그대 자신을 이해하라. 세라피는 그 다음이다.
침묵을 통해 그대 자신을 정제(精製'하라. 나는 세라피를 중단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질을 변화시키라고 말하고 있다.
마음을 열고 참석자들에게 그대의 약점과 그대의 문제를 말하라. 그리고
그들의 조언을 구하라 그들이 그대를 도와 줄 수 있는지. 일단 참석자로 하여금
세라피스트가 에고이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면 그들도
겸허해져서 자신들의 가슴을 열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세라피 자체만으로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가장 완벽한 세라피조차도 단지 첫 단계에 불과하다. 두번째
단계가 없다면 세라피는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환자들을 명상으로 들어가는 입구까지만 인도하라.
세라피는 환자들이 명상에 대해 묻기 시작할 때 완전해진다. 그들의 가슴에
명상에 대한 커다란 갈망을 심어 주라. 아울러 명상 역시 하나의
단계-두번째-임을 알려 주라. 명상이 그대를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않는 한, 명상 그 자체로는 충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야말로
이 모든 노력의 정점이다. 나는 그대가 잘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오데사")에서 온 한 유태인이 제정 러시아의 한 장교와 같은 객차 칸
에 있었다. 그 장교는 돼지를 한 마리 가지고 있었는데 유태인을 놀리
려고 그 돼지를 계속 모세라고 불렀다 "모세! 조용히 해! 모세! 이리
와! 모세! 저리 가!"
그는 기차가 키예프")에 이를 때까지 계속 그렇게 놀려 댔다. 마침내
진저리가 난 유태인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돼지가 유태인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매우 수치스런 일이오."
"어째서 그렇소, 유태인 양반?" 하고 장교가 능글맞게 웃었다.
"안 그랬다면 당신의 돼지는 러시아의 장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
1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
세라피의 한계는 명상이 시작되는 곳이며, 명상의 한계는 깨달음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물론 깨달음은 다른 어떤 것의
출발점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우주 의식(universal consciousness,) 속
으로 사라질 뿐이며, 연꽃잎에서 미끄러져 대양(大洋)으로 들어가는
이슬방울이 될 뿐이다. 이것은 굉장한 체험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삶을
의미 있고 중요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를 다시 우주의 일부가
되도록 해 준다. 그대의 에고는 우주로부터 그대를 분리시켜 놓았다.
그대는 단지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올바른 방향에 대한
감각만 있다면 모든 것이 더 높은 의식의 상태에 이르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나는 모든 방법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방향은 항상 같다
나는 수많은 명상법을 사용해 왔다. 겉으로 보면 그것들은 서로 다르게
보일 것이다. 명상법은 112가지나 있으며 그것들은 각기 다르게 보이다.
그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 많은 방법들이 모두
명상으로 이끌어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명상으로 이끌어 준다‥‥‥‥ 마치 화환의 꽃을
붙들어매는 실이 눈에는 보이지 않듯이. 그대는 오직 꽃만을 본다
그러나 112개의 꽃에는 실이 매여 있다. 그 실은 관조고 주시며,
관찰이고 각성이다.
환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많이 도우라
그러나 비록 문제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그대는 전과 동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라. 내일, 그대는 다시 똑같은 문제를 만들어 내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 다른 방식, 다른 색채를 띤 문제를 만들어 내겠지만
결국 똑같은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다. 세라피는 단지 명상을 위한
준비여야 한다. 그때 세라피는 굉장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세라피는 단지 마음의 게임에 불과하다"'

     譯註
1)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의 신경학자. 정신분석의
창시자. 빈에서 활동한 그는 샤르코, 리보, 브로이어 등의 영향을 받아
불면에 의한 신경증 환자의 치료에서 카타르시스 요법을 발전시켜 자유연상법1
의한 정신분석을 확립했다. 또 환자의 꿈에서 자유연상의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내용을 발견하여, 심리학적 병인을 푸는 열쇠가 꿈에 있으며, 꿈으
내용이 감정적 과거채험의 상징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이런 무의식의 세계가
환자의 행동을 실질적으로 지배한다고 생각하고 무의식의 작용을 탐구하여 리
비도 이론을 확립했다.
2)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 :빈 학파의 심리학자. 개별적인
신종증후보다는 성격구조 전반에 초점을 두는 정신분석체계를 발전시켰다.
그는 1927년 (:오르가즘의 기능에서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 즉
오르가즘 잠재력은 건강한 사람의 필수적인 속성이므로 억압된 성적 에너지를
오르가즘을 통해 해소하지 못하면 성인에게 신경증이 생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34년 정신분석운동과 결별하고 오르가즘 연구에 몰두하여, 신경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믿고 있던 우주에너지의 기본 단위인 오르곤(orgone)
을 측정하려 했다. 그는 정신병을 오르곤 결핍증이라고 생각했으며, 환자를
오르곤 상자라고 하는 특별히 제작된 캐비닛에 넣어 치료하고자 했고, 이 상자는
암을 비롯한 수많은 질병의 치료기구라고 하여 판매했다. 오르곤 상자의 실험과
상업화 때문에 1950년대 초 미국 행정당국과 충돌한 그는 법정모독죄로
유죄판결을 받아 감옥에서 사망했다.
3) 그룹(group) :오쇼의 아쉬람에는 거의 백여 개에 이르는 세라피(the.spy)
가 운영되고 있다. 이들 세라피에는 그룹 세라피(group therapy)와 개인 세라피
individual therapy)가 있는데, 그룹 세라피를 줄여서 그룹이라 한다.
4)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 1883∼1931) : 레바논 태생의 미국 수필가,
소설가, 신비주의 시인, 화가. 베이루트에서 초등교육을 받았고, 1895년 부모와
함께 미국의 보스턴으로 이주했다. 1898년 레바논으로 돌아가 베이루트에서
공부하여 아랍어에는 능통했다. 1903년 보스턴에 돌아와 첫번째 문학수필집을
냈고, 1912년 뉴욕에 정착하여 아랍어와 영어로 문학수필과 단편 들을 쓰고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사랑, 죽음, 자연, 고국에 대한 그리움 등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그의 글은 서정이 넘치며, 그의 내면의 종교적 신비주의적
성향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영어로 된 주요 저작에 (:광인(1918), (:선구자:)
(1920), (:예언자(1923), 』모래 물거품(1926), (:사람의 아들, 예수(1928)
등이 있다.
5) 푸나(poona) '인도 서부 마하라슈트라 주(州)에 있는 도시. 오쇼의 아쉬람이
있다.
6) 아바타라(avatars) 산스크리트어로 '하강'이라는 뜻. 힌두교에서 세속의
특정한 죄악을 물리치기 위해 신이 인간이나 동물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이 말은 비슈누 신의 열 가지 모습, 즉 마트시라(물고기)나
거북) · 바라하(멧돼지 ) 나라싱하(반인반사자) · 바마나(난쟁이) · 파라-
마(도끼를 든 라마) · 라마(서사시 라마야마의 주인공) 크리슈나(신성힌
된) ·부처 칼킨(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의 화신)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슈누 신의 아바타라의 숫자는 때로는 많아지기도 하며 지역의 취향에 따라
구성이 변하기도 한다.
7) 산야신(sannyasin) :구도의 길에 입문한 구도자.
8) 오데사(Odessa) : 우크라이나 오데사 주(州)의 해안이자 주요 도시 .
프 남쪽으로 443km 떨어진 흑해 연안의 얕은 만입부에 면해 있다.
9) 키예프(kiev) :우크라이나의 수도이자 키예프 주(州)의 주요 도시.


        제5장
           육체

인간은 육체에 반대하고, 육체의 자연스런 충동을 부정하고
억압하고, 육체를 돌보는 것을 비종교적인 행위로 여기도록
오랫 동안 조건화되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좀더 육체를 의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반면에 일부 사람들은 거의 강박적으로
육체적 안락함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육체와 건강한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인간은 수세기 동안 삶에 부정적인 일들에 대해 들어 왔다
육체를 학대하는 일조차 영적인 수련이 되어 왔다‥‥
걷고, 먹고, 마시는 모든 행위는 그대가 유기적인 전체로서 육체
의식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육체를 학대해서는 의식을 높일 수 없다.
육체는 사랑받아야 하며, 그대는 육체의 훌륭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육체는 그대의 집이며, 그대는 집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육체는
밤이나 낮이나 그대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대가 잠들어
있어도 육체는 음식을 소화하고, 음식을 혈액으로 바꾸며, 죽은 세포를
제거하고, 몸에 새로운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육체는 생존과 생명을 위해서 온갖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대는
결코 육체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없다. 오히려 종교는 육체를 학대하라고
가르쳐 왔으며, 육체는 그대의 적이므로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나 또한 그대는 육체 이상이며 육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사랑은 집착이 아니며, 자비도 집착이 아니다.
사랑과 자비는 육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육체에 꼭
필요한 영양분이다. 그대가 더 훌륭한 육체를 가질수록 의식이 성장할
가능성은 많아진다. 육체와 의식은 유기적 단일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교육이 필요하다. 그 교육은 모든 사람을
가슴의 침묵 속으로, 명상 속으로 인도할 것이며, 자신의 육체에 대해
자비로워지도록 가르칠 것이다. 자신의 육체에 대해 자비롭지 않는 한
다른 어떤 육체에 대해서도 자비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육체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며, 그대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다. 육체는 그대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대를 위해 일해 왔으며, 그대가 죽는 날까지
그대를 위해 일할 것이다. 육체는 그대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것이다.
심지어 불가능한 일까지도 할 것이다. 그리고 육체는 그대에게 결코
불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육체처럼 순종적이고 슬기로운 기계 장치를 만든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대가 육체의 모든 기능을 안다면 놀랄 것이다. 그대는
육체가 어떤 일을 해 왔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육체는 그토록 경이로우며
그토록 신비롭지만 그대는 결코 돌보지 않았다. 그대근 육체와 친해지는
데에는 결코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체한다.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에게는 다른 사람들 역시 육체로 보이기 때문이다.
육체는 존재계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다 우리는 이 신비를
이해해야 하며, 육체의 신비와 기능을 자세히 연구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모든 종교는 육체에 절대적으로 반대해 왔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이 육체의 지혜와 육체의 신비를 배운다면 결코 성직자들은
신에게 신경쓰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줄다. 그는 자신 속에서
가장 신비로운 것을 발견할 것이다. 육체의 신비 속에는 바로 의식의
도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식과 존재를 자각한다면 그대 위에 군림하는 신은 없을 것이다.
오직 그런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할 수 있으며, 살아있는
생명체를 존중할 수 있다. 그들도 모두 그대처럼 신비로운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주는‥‥‥ 한
인간이 자신 안에 있는 의식을 발견하면 그는 궁극에 이르는 열쇠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도록 가르치지 않는 교육은
육체에 대해 자비심을 가지도록 가르치지 않을 것이며, 육체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육체가 문이다. 육체가 디딤돌이다. 육체와 의식을 다루지 않는
교육은 극히 불완전할 뿐 아니라 전적으로 해로운 것이다. 그런 교육은
끊임없이 파괴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를 파괴로부터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내면의 의식을 꽃피우는 것이다. 의식이 꽃피게 되면 그대는 세계에
더 많은 아름다움과 더 많은 편안함을 창조하고자 하는 엄청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인간에게는 좀더 훌륭하고 좀더 건강한 육체가 필요하다. 인간에게는
좀더 의식적이고 좀더 깨어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 인간에게는 존재계가
제공하는 모든 편안함과 호화로움이 필요하다. 존재계는 지금 여기에서
낙원을 만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대는 계속 미루고 있다
항상 죽음 뒤로 미루고 있다.
스리랑카의 한 위대한 신비가가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를
숭배해 온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는 눈을 떴다.
이제 잠시 후면 그는 영원히 저쪽 기슭으로 떠나가 버릴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의 마지막 말을 듣기 위해 열심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생 동안 그대들에게 축복과 엑스터시와 명상에 대해 가르쳐 왔다.
이제 나는 저쪽 기슭으로 사라질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왔지만 내가 말한
것을 결코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대들은 항상 뒤로 미루어 왔다.
그러나 이제 미루는 것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 나는 떠날 것이다. 나와 함께
떠날 준비가 된 사람이 있는가?"
굉장한 침묵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은 40년 동안 제자였으니 준비가 되었을 거야‥‥‥‥ 그러나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바로 뒤에서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위대한 신비가는 이렇게
생각했다. '마침내 용기 있는 자가 나타났구나:
그러나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왜 일어서지 않았는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단지 손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저쪽 기슭에 도달할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끝내지 않은 일이 많이 있습니다.
집에 손님이 찾아왔고, 제 아들은 곧 결혼을 할 것이므로 오늘은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저쪽 기슭에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젠가는 분명히 스승님을 찾아가서 만날 것입니다.
비록 스승님께서 평생 동안 우리에게 설명해 주셨지만 딱 한 번만 더
저쪽 기슭에 이르는 방법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지금 당장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단지 제 기억을 새롭
서 적당한 때가 오면‥‥‥‥
적당한 때는 결코 오지 않는다. 이것은 그 불쌍한 사람에 대한
예기가 아니다. 이것은 수백만 명에 대한 이야기이며, 사실 거의 모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저마다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으며
적당한 별자리의 운세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점성술을 따지고 있으며
손금 보는 사람을 찾아가서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물어보고 있다.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미루기 위한 어리석은
전략일 뿐이다. 항상 오늘만이 있을 뿐이다.
올바른 교육은 사람들에게 지금 여기에서 사는 방법을, 땅에서  곡식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올 때를 손꼽아
기다리지 않도록, 사는 동안 불행하지 않도록 가르칠 것이다. 죽음으1
여금 춤추고 즐거워하며 사랑하고 있는 그대를 발견하게 하라.
인간이?낙원에서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다면, 죽음은 그의 체험 속에서
어떤 것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이것은 새로운 경험이다.
나는 이 세상이 낙원이며 그 외의 낙원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친다.
행복으로 넘치기 위해서는 어떤 훈련도 필요없다. 단지 약간의 각성과
마음의 깨어 있음, 약간의 이해가 필요할 뿐이다""

영혼을 존중하듯이 그대의 육체도 존중하라. 육체는 영혼만큼이나
신성하다. 존재계에서는 모든 것이 신성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신성한
고동으로 굽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순간에서 순간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한 단계의 의식에서
다른 단계의 의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육체는 깊이 잠들어 있으면서도
함께 깨어 있다 그대가 잠든 사이 모기가 그대를 괴롭히기 시작했을 때
그대는 잠에 취해 있지만 그대의 손은 모기를 쫓는다‥‥‥‥ 육체는 그
자체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육체는 수백만 개의 살아 있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세포는 그 자신의 생명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대는
감탄할 줄 모르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육체가 빵을 피로 바꾸는 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해야 한다. 우리는 아직 빵을 피로 바꾸는
공장을 발면하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육체는 그대의 몸에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하지 않은지 선별한다. 그래서 필요하지 않은 것은
내버리며, 필요한 것은 여러 목적을 위해 저장해 둔다.
육체는 몸의 각 부분에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고 있다. 그대가
먹는 음식을 통해 이런 필요가 충족된다. 그대가 먹는 음식으로부터
뼈가 만들어지고, 피와 피부가 만들어지며, 눈과 뇌가 만들어진다.
육체는 어디에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혈액은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각 부위에 특정한 화학 물질을 공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선 순위도 알고 있다. 첫번째 우선 순위는 뇌다.
그러므로 뇌에 충분한 양의 산소가 없다면 육체는 먼저 뇌에 산소를 공급한다.
다른 부분들은 좀더 강인하므로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지만 뇌 세포는
그다지 강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뇌세포는 6분 동안 산소를 공급
받지 못하면 죽어 버리며, 일단 죽은 뇌세포는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
육체의 다양한 기능에 대해 깨어 있기 위해서는 굉장한 지성이 필요하다.
그대에게 상처가 생기면 육체는 다른 부분에 지원을 중단하고 먼저
상처를 치료한다. 몸 속의 백혈구는 즉시 상처 부위로 달려가서
노출되지 않도록 감싼다. 그리고 나서 안쪽에서는 매우 정교한 작업이
진행된다.
의학은 우리가 아직 육체만큼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장 뛰어난 의사들은, 우리는 육체를 치료할 수 없으며 육체가 스스로를
치료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단지 도울 수 있을 뿐이다. 기껏해야
의사의 치료는 약간의 도움이 될 뿐이며, 근본적인 치료는 육체 자체가
된다는 것이다. 치료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경이롭다. 그것은 엄청나게
방대한 작업 이다.
나의 친구 중에 육체의 기능에 대해 연구해 온 과학자가 있는데,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육체가 수행하고 있는
모든 기능을 우리가 대신 하려면 복잡한 기계와 컴퓨터로 가득 찬 거의
수평방마일에 달하는 공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우리가
성공할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도 종교는 육체를 비난해 왔고,
육체를 돌보는 것이 비종교적인 일이라고 말해 왔다‥‥
먼저 내면에서 그대의 육체와 하나가 되라. 그리고 나서 존재계와
하나가 되라. 그대의 심장의 고동이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날,
그대는 종교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전에는 결코 종교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


         제6장
        긴장과 이완

육체에 긴장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모든 긴장의 근본 원인은 '되는 것(becoming)'에 있다.
인간은 언제나 무엇인가 되려고 한다.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존재(being)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부되며, 대신에 '
되어야 할 이상(理想)'으로서 다른 것이 갇아들여진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긴장은 항상 '현재의 그대'와 '되고자 하는 그대' 사이에 있다.
그대는 무엇인가가 되고자 한다. 긴장은 그재의 자신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되려는 것을 의미한다. 긴장은 그 둘 사이에서 생긴다.
무엇이 되고자 하는지는 상관이 없다. 부자가 되려고 하거나,
유명해지려고 하거나, 권력을 쥐려고 하거나 혹은 자유롭게 되고자 하거나,
신성해지려고 하거나, 불멸의 존재가 되고자 하거나 혹은 더 나아가
구원이나 모크샤(moksha)"를 갈망한다 해도 거기에는 긴장이 있을 것이다.
현재의 자신에 반(反)해서 미래에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긴장을 만들어 낸다. 이상(理想)이 불가능한 것일수록 더 많은 긴장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물질주의자들은 종교적인 사람들보다 덜 긴장하게 된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불가능한 것,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 거리는 너무나 커서 오직 커다란 긴장만이 그 간격을
메울 수 있다.
긴장은 '현재의 그대'와 '되고자 하는 그대' 사이의 간격을 의미한다.
간격이 클수록 긴장은 많을 것이다. 간격이 작다면 긴장도 적을 것이다.
그리고 긴장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현재의 그대에게 만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현재의 그대 외에 다른 무엇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그때 그대의 마음은 순간 속에 존재한다. 어떤 긴장도 없이 그대는
자신으로 편안하다. 간격이 없을 때 그대는 종교적이다.
간격에는 여러 층이 있다. 갈망이 육체적인 것이라면 거기 찾아오는
긴장도 육체적일 것이다. 그대가 어떤 특별한 육체를 원하거나 특별한
모양을 원한다면, 다시 말해 현재의 육체 외에 다른 육체를 원한다면
육체에 긴장이 생긴다. 그대가 좀더 아름다워지고자 한다면 육체는 긴장하게 된다.
이 긴장은 그대의 첫번째 몸인 육체에서 생긴다. 그러나 그
긴장이 지속되면 점점 더 깊이 들어가서 존재의 다른 층으로 퍼질 것이다.
그대가 영적인 힘을 갈망한다면 긴장이 영적인 층에서 시작하여 다른
층으로 퍼져 나간다 그것은 마치 호수에 돌을 던졌을 때 파문이 퍼져
나가듯이 퍼져 나간다. 돌은 특정한 지점에 떨어지지만 물결의 진동은
무한히 퍼져 나간다. 긴장은 일곱 개의 신체(seven bodies)') 중 어디서나
생길 수 있지만 그 근원은 항상 같다. 즉 '현재의 상태'와 '되기를
갈망하는 상태'의 간격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특정한 형태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 마음을 바꾸고자 한다면
좀더 영리해지거나 좀더 지성적이 되고자 한다면-그 때에는
긴장이 생긴다. 오직 우리가 자신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긴장은
사라진다 이렇게 자신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유일한 기적이다.
자신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찾는 것만이 유일하게 놀랄만한
일이다.
존재계 자체는 긴장하지 않고 있다. 긴장은 항상 가설 때문에, 비실존적인
가능성 때문에 생긴다. 현재 속에는 어떤 긴장도 없다. 긴장은
항상 미래지향적이다. 긴장은 상상에서 온다. 그대는 현재 이외의 자신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상상된 가능성이 긴장을 만든다 그래서 ·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긴장의 가능성은 더 많아진다. 그때 상상력은
파괴적이 된다.
그러나 상상력은 건설적인 것이 될 수 있고, 창조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상상력이 미래가 아니라 모두 현재에, 이 순간에 집중된다면 그대는
자신의 존재를 시처럼 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상상력은 갈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삶에 사용된다. . 현재 속에서 사는 삶은 ~
긴장을 초월한다.
동물들은 긴장하지 않는다. 나무들도 긴장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긴장을 넘어선 것이 아니라
긴장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긴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뿐, 그 가능성이 아직 발현되지 않았다. 그들은 진화하고  있다.
그들의 존재 속에 긴장이 폭발할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미래를 갈망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상상력은 활성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작용하는 첫번째 대상은 미래다. 그대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거기에 해당하는 현실이 없기 때문에 그대는 계속해서
더 많은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대는 현재와 관련된 상상을 할 수 없다.
어떻게 현재 속에서 상상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그대가 의식적으로 현재 속에 있을 수 있다면 상상 속에서는 살지
않을 것이다. 그때 상상력은 현재 속에서 자유롭게 창조할 것이다. 오직
올바른 초점이 필요할 뿐이다. 상상력인 실재에 초점이 맞춰질 때
상상력은 창조하기 시작한다. 그때 창조물은 어떤 형태로도 나타날
것이다. 그대가 시인이라면 창조력은 시로 터져 나올 것이다. 그 시는
미래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현재를 표현한 것이 될 것이다. 혹은 그대가
화가라면 창조력은 그림으로 터져 나올 것이다. 그때 그림은 그대가
상상해 온 것이 아니라,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이며 그대가 살아온 것이
될 것이다.
그대가 상상 속에서 살지 않을 때, 현재의 순간이 주어진다. 그때
그대는 현재를 표현하거나 혹은 침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죽은 침묵이 아니다. 침묵 역시 현재의 표현이다.
이 순간은 너무 깊어서 이제 침묵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시조차도
적절하지 않고 그림조차도 적절하지 않다. 어떤 것으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
침묵이 유일한 표현 수단이다. 이 침묵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으로 꽃피어난 것이다. 그대 내면에 뭔가가 꽃피어
난 것이다. 침묵의 꽃이 피어난 것이다. 이 침묵을 통해서 그대 삶의
모든 것이 표현된다.
상상력을 통해 표현되는 현재는 미래에 대한 상상도 아니고 과거에 대한
반응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알려진 어떤 체험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체험하고 있는 것(experiencing)의 체험이다.
그것은 그대가 살고 있는 것의 체험이며 그대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의
체험이다. 그것은 살아온 체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체험의
과정이다.
그때 체험과 체험하고 있는 것은 둘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그때 화가는 사라진다. 체험 자체가 그림이 된 것이다. 체험하고
있는 자체가 그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대는 창조자가 아니다. =
그대는 창조성이며 살아 있는 에너지다. 그대는 시인이 아니라 시다
체험은 미래나 과거에 대한 것이 아니다. 미래나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순간 자체가 영원이 되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여기로부터 온다.
그것은 개화(開花)다‥‥
육체 속에서 이렇게 긴장이 없는 순간을 느낄 수 있다면 전에 알지
못하던 안락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가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존재를
살아갈 때, 그대의 육체에는 긴장이 없게 된다. 그대가
음식을 먹고 있는 그 순간이 영원이 된다면 그때 거기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음식을 먹고 있는 과정 자체가 전부다. 그대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행위' 자체가 된 것이다. 그때 거기에는 아무 긴장도 없고,
그대의 육체는 충만감을 느낄 것이다. 혹은 그대가 성적인 합일
속에 있고 그 성이 단지 성적인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적극적인 표현이라면-그 순간이 전체고 그대가 그 속에 완전히
몰입해 있다면-그대는 육체 속에서 긍본적인 안락함을 알게 될 것이다.
뛰고 있을 때 뛰는 행위가 그대의 존재와 하나가 된다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느낌과 떨어져 있지 않고 그 느낌과 하나가 된다면, 거기 미래도 없고
뛰어가는 목적지도 없고 뛰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그대는
긍정적인 안락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의 육체에는 긴장이 없게 된다.
육체의 차원에서 그대는 긴장이 없는 삶의 순간을 알게 된 것이다. "
육체적인 긴장은 종효라는 미명 아래 육체에 대해 반대할 것을 설교해
온 사람들 때문에 생겨났다.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육체에 단호하게
반데해 왔다. 그래서 그대와 육체 사이에는 거짓 구별이 생겼으며,
깊은 골이 생겼다. 그때 그대의 전체적인 태도에는 긴장이 생긴다.
그대는 편안하게 음식을 먹을 수 없으며, 편안하게 잠잘 수도 없다. 모든 육체적
행동이 긴장이 된다. 육체는 적이 되었다. 그러나 육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대는 육체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대는 적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거기 끊임없이 긴장이 있다. 그대는 결코 휴식할 수 없다.
육체는 그대의 적이 아니다. 육체는 결코 그대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대에게 무관심하지도 않다. 육체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대가 육체를 선물로, 신성한 선물로 여기는 순간 그대는 육체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대는 육체를 사랑할 것이고 육체를 느낄 것이다.
그때 육체를 형언할 수 없이 미묘하게 느낄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느끼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의 육체도 느끼지 못할 것이고,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의 육체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육체를 돌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육체도 돌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자신의 육체를
돌보지 않는다! 그대는 자신의 육체를 돌본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자신의 육체를 돌보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한다. 육체를 돌보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돌보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다른 이유 때문에, 즉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육체를 돌본다. 그대는 결코
자신의 육체를 돌보지 않는다. 그대는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지 않는다.
육체를 사랑할 수 없다면 그대는 육체 속에 있을 수 없다
육체를 사랑하라. 그러면 전에 느끼지 못했던 휴식을 느낄 것이다.
사랑은 휴식을 가져온다. 사랑이 있을 때 거기 휴식이 있다.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대와 그 사이에, 혹은 그데와 그녀 사이에 사랑이
있다면, 그때 사랑과 함께 휴식이라는 음악이 찾아온다. 그때 거기에는
휴식이 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휴식을 느낀다면 그것이 사랑의 유일한 표시다.
누군가와 휴식할 수 없다면 사랑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적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타인은 지옥이다."
사르트르에게는 거기 지옥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흐르지 않을 때 상대방은 지옥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흐른다면 상대방은 천국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천국인지
지옥인지는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흐르는가 흐르지 않는가에 달려
있다.
사랑 속에 있을 때 침묵이 찾아온다. 언어가 사라지고 단어들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대는 할 말이 많지만 동시에 할 말이 없다. 침묵이 그대를
감쌀 것이며, 그 침묵 속에서 사랑이 꽃피어난다. 그대는 쉬고 있다.
사랑 속에는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다. 사랑이 죽었을 때에만 과거가 있다.
그대는 오직 죽은 사랑만을 기억한다. 살아 있는 사랑은 결코
기억될 수 없다. 그것은 살아 있으므로 기억해야 할 간격이 없으며,
기억해야 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현재 속에 있다. 거기에는
어떤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가장하지 않아도 된다. 현재의 자신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대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편안히 쉴 수 있다. 그대가
사랑하지 않을 때 그대는 가면을 써야 한다 그대는 매 순간 긴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가장해야 하며
경계해야 한다 그대는 공격적이 되거나 아니면 수비를 해야 한다.
그것은 싸움이며 투쟁이다 그대는 휴식할 수 없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 정도는 휴식의 기쁨이다. 그대는 휴식을 느끼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벌거벗은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대는 자신에 대해 신경쓸 필요가 없으며
가장할 필요도 없다. 그대는 열려 있고 공격받기 쉬우며, 그 열려 있음
속에서 휴식한다.
육체를 사랑할 때도 이와 동일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대는 휴식하며
육체를 돌보게 된다. 육체를 사랑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며 자기 도취도
아니다. 사실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는 것은 영성(靈性)을 향한 첫걸음이다.

휴식에 관해 몇 말씀 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제 중심 깊은 곳에
긴장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코 완전히
휴식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완전한 휴식은 궁극적인 것이다. 그 순간은 인간이 붓다가 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은 깨달음의 순간이며, 그리스도 의식(Christ-con-
sciousness)의 순간이다. 그대는 지금 당장은 완전히 휴식할 수 없다.
가장 깊은 중심에 긴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휴식하기 시작하라 바깥에서부터 시작하라, 우리는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대 존재의
표면을 쉬게 하라. 그대의 몸과 행동과 활동을 쉬게 하라. 휴식하듯이
걷고, 휴식하듯이 음식을 먹으라. 휴식하듯이 말하고 휴식하듯이
들으라. 모든 과정의 속도를 늦추라. 서두르지 말고 허등대지 말라.
영원한 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움직이라 사실 그대는 영원한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으며-만일 처음과 끝이 있다면
최후에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실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
우리는 항상 여기에 있어 왔고, 항상 여기에 있을 것이다. 형태는
계속 변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옷은 변하지만 영혼은 변하지 않는다.
긴장은 서두름과 두려움과 의심을 의미한다. 긴장은 자신을 보호하고
안전을 확보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의미한다 긴장은 미래나 내세에 대해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내일을 두려워하므로 실재에 직면하지
못한다. 그래서 준비하려는 것이다. 긴장은 그대가 진정으로 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을 뿐인 과거를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 주변을 떠다니며
그대를 둘러쌀 것이다.
삶에 관한 매우 근본적인 사실 한 가지를 기억하라. 그것은 살아 보지
않은 체험은 그대 주위를 떠다니며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를 마무리하라! 나를 살라! 나를 완성하라!"
모든 체험은 마무리되고 완성되려는 경향이 있다 일단 완성된 체험은
사라진다. 그러나 완성되지 않은 체험은 계속 남아서 그대를 괴롭히며.
그대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그대의 주의를 끌 것이다. 그것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이냐? 나는 아직 불완전하다. 나를
채워 다오! "
그대의 과거 전체는 완성되지 않은 채 그대 주위를 떠다닌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살아 본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모든 것을
대충 지나펐고, 부분적으로만 살았으며, 그저 그런 식으로 미적지근하게
살아 왔기 때문이다. 어떤 강렬함이나 열정이 없었다. 그대는 몽유병
병자처럼 움직였◎다. 그래서 아직도 과거가 따라다니며, 미래가 두려움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대의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짓눌리고 있다.
그러나 현재야말로 유일한 실재(實在)다.
그대는 표면에서부터 휴식해야 한다. 휴식의 첫 단계는 육체다.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목, 머리, 다리 등 몸의 어떤 부분에 긴장이
쌓여 있는지 찾아 보라. 그 부분을 의식적으로 휴식하게 하라.
그 부분에게 사랑스럽게 이렇게 말하라. "휴식해!"
몸의 어느 부분에게 말을 하든지 몸이 그대를 따르고 그대의 말을 듣는 것을 보면
놀랄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몸이다! 눈을 감고서 머리끝
부터 발끝까지 어느 부분에 긴장이 있는지 찾아보라. 그리고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긴장이 있는 부분에 대고 이야기하라. 몸과 대화를 시작하라.
몸에게 이렇게 말하라 "두려워할 것 없어. 두려워 마. 내가 돌봐
줄 거야. 이제 휴식해." 서서히 그대는 요령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몸은 휴식하게 된다.
이제 약간 더 깊이 들어가서 두번째 단계를 시도하라. 마음에게 휴식하도록
말하는 것이다. 몸이 말을 듣는다면 마음도 그대의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서부터 시작할 수는 없다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중간에서부터 시작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그들은 잘못된 곳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올바른 순서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임의대로 몸을 휴식하게 할 수 있으면 마음도 임의대로 휴식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은 좀더 복잡한 현상이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는
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 그대는 자신에 대해 새로운 신뢰를 갖게 될 것이다.
이제 마음도 그대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마음의 경우에는 좀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그 일은 일어난다.
마음이 휴식한게 되면 이제 느낌과 감정의 세계인 가슴을 휴식하게 하라.
이것은 좀더-복잡하고 미묘하다. 그러나 이제 그대는 자신에 대해
커다란 확신을 가지고 해 나갈 수 있다. 그대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몸에서 가능했고 마음에서 가능했다면 가슴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이 세 단계를 모두 통과했을 때 네번째 단계를 시도할 수
있다. 이제 그대는 몸과 마음과 가슴을 넘어선 존재의 깊숙한 핵으로,
그대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존재의 중심도 휴식하게
할 수 있다. 존재의 중심이 휴식할 때, 커다란 기쁨과 엑스터시의 절정과
수용이 일어난다. 그대는 축복과 환희로 가득 찰 것이며, 삶은
축복으로 가득찰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존재계 전체가 춤추고 있다. 존재계 전체는 매우 이완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분명히 움직이고 있지만 완전히 휴식하고
있다. 나무는 자라고 있으며, 새들은 지저귀고, 강물은 흘러가며, 별들은
움직이고 있다. 모든 것이 매우 이완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인간을 제외하면 아무도 서두르지 않고, 걱정하지 않으며, 헛되이 보내지도 않는다.
인간은 자기 마음의 희생물이 되었다.
인간은 신보다 높이 올라갈 수 있으며, 동물 이하로 떨어질 수도 있다.
인간은 굉장히 넓은 영역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연결되어 있는 사다리와 같다.
육체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깊이 들어가라. 기본적인 것을 해결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시작하지 말라. 몸이 긴장되어 있다면 마음에서부터
시작하지 말라. 기다리라. 먼저 몸에서부터 시작하라.
그대는 특정한 속도로 걷는다. 그 속도는 습관이 되었고 자동이 되었다.
이제부터 천천히 걸어 보라. 붓다는 그의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매우 천천히 걸어라 그리고 모든 걸음을 의식적으로 걸어라:
모든 걸음을 매우 의식적으로 걷는다면 천천히 걷게 될 것이다. 허겁지겁
뛰어간다면 발걸음을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매우
천천히 걸었다.
매우 천천히 걸어 보라.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대의 몸 속에서 새로운
자각이 생길 것이다. 천천히 먹어 보라. 그대는 놀랄 것이다. 거기』
커다란 휴식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천천히 하라‥‥‥‥ 낡은 생활
방식을 바꾸라. 낡은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라.
먼저 육체가 어린아이처럼 완전히 휴식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명상에
대해 시도하라. 과학적으로 움직이라. 먼저 간단한 것을 시도하고
그 다음에 복잡한 것을 시도하고, 그 다음에 좀더 복잡한 것을 시도하라.
그때에만 궁극적인 중심에서 휴식할 수 있다‥‥
휴식은 매우 복잡한 현상 중의 하나이며 매우 다차원적인 현상이다.
내려놓음(let-go), 신뢰, 내맡김, 사랑, 수용, 흐름과 함께 가기,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 에고 없음, 엑스터시, 이 모든 것이 휴식의 일부분이다.
휴식하는 방법을 알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소위 종교라고 하는 것이 그대를 매우 긴장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종교가 그대에게 죄책감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그대의 죄책감과 두려움을 없애 주는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다. 그러니 천국을 탐내지 말고
지옥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 그대는 이 순간을
천국으로 만들 수도 있고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천국이나 지옥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완전히
휴식할 때가 바로 천국이며, 극도로 긴장할 때가 바로 지옥이다. 완전한
휴식이 곧 낙원이다. "

저는 일을 할 때는 굉장히 신속해집니다만, 많은 스트레스를
느낍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휴식하라고 말하지만, 휴식하기가
어렵습니다. 저에게 조언을 해 주십시오.

캐나다의 정신분석가인 한스 셀리에(Hanii Selye)")박사는 평생 동안
스트레스를 연구한 결과 매우 심오한 격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는, 스트레스가 항상 나쁘지는 않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는
아름다운 방식으로 사용될 구 있다. 스트레스가 항상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스트레스는 부정적인 것이며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때는 문제가 생긴다. 스트레스 그 자체는 디딤돌로 이용될 수 있으며
창조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세대에 걸쳐 스트레스는-
나쁜 것이라고 배워 왔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생기면 두려워한다.
두려움은 스트레스를 더욱 가중시킨다. 두려움은 상황을 호전시키지 않는다.
가령 사업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그대는 긴장이나 스트레스가 느껴지는 순간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긴장을 풀어야 해." 그러나 긴장을 풀려고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긴장을 풀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긴장을 풀려는 노력 자체가 또 다른 스트레스를 만들어 낼 것이다. 스트레스가
생겼을 때 그대는 긴장을 풀려고 하지만, 긴장을 풀 수가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욱 복잡해진다.
스트레스가 생길 때 그것을 창조적인 에너지로 이용하라. 먼저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라. 스트레스와 싸울 필요가 없다.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라.
스트레스는 완전히 옳다. 그것은 단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업이 잘 되지 않는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 " 혹은 "그대는 패배자가
될지도 모른다. " 등등‥‥‥‥ 스트레스는 육체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시이다. 그런데 그대는 긴장을 풀려고 애쓰거나 진통제 혹은
진정제를 먹음으로써 육체에 반대하고 있다. 육체는 어떤 상황이나 도전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 도전을 즐기라!
가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염려를 떨쳐 버리고 그 에너지를 다른 데 사용하라. 열심히 걷거나 뛰어
보라. 긴 산책을 하고, 그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 보라. 억지로 잠을 자려고 애쓰지 말고, 그 상황을 창조적인 쪽으로
이용하라. 잠이 오지 않는 것은 육체가 어떤 문제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지금은 휴식할 시간이 아니다. 휴식은
나중에야 가능할 것이다.
사실 스트레스를 전체적으로 경험했을 때에만 자동적으로 휴식에
이를 수 있다. 그 과정을 거쳐야 육체는 자동적으로 휴식하게 된다. 중도에서
휴식하고자 한다면 문제를 만들어 내게 된다. 육체는 중도에서
휴식할 수 없다. 육체는 마치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올림픽의 육상 선수와 같다.
신호가 울리면 그는 바람처럼 달려나갈 것이다. 그는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다. 지금은 휴식할 시간이 아니다. 진정제를 먹는다면
그는 경기에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혹은 이 순간에 휴식을 하거나
TM')을 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이용해야 한다. 지금은 스트레스가 끓고 있으며, 에너지가 모아지고 있다..
그는 점점 더 활력이 넘치며 잠재력이 커진다. 이제 그는 스트레스를
에너지로, 연료로 이용해야 한다.
셀리에 박사는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유토리아(euphoria, 행복감)라는 말이 있듯이, 그는 이것을 '유스트레츠
(eustress)'라고 불렀다. 이것은 긍정적인 스트레스라는 뜻이다. 육상
선수가 달리기를 마쳤을 때 그는 깊은 잠에 빠질 것이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이제는 아무 문제도 없고 스트레스는 저절로 사라진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노력하라.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이 생겼을 때
흥분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그 속으로 들어가라 스트레스를 싸우는 데
이용하라 인간은 막대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에너지를 사용하면
할수록 더 많은 에너지가 생긴다‥‥‥ 스트레스가 오고 상황이 생겼을 때
싸우라.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 정말로 미친 듯이 그
속으로 들어가라. 스트레스를 인정하고,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라.
그리고 스트레스를 환영하라. 그것은 좋은 것이다. 스트레스는 그대를 싸울 수 있게
준비시켜 준다. 스트레스를 해결했을 때 그대는 롤랄 것이다.
왜냐하면 엄청난 휴식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 휴식은 그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아마 그대는 2∼3일 정도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는 45시간 동안 잠에서 깨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좋다!
우리는 잘못된 개념을 많이 가지고 있다. 가령 모든 사람이 매일
몇 시간을 자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수면 시간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수면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상황도 있다. 그대의 집에 불이 났다면
그대는 잠을 잘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며, 가능해서도 안된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불을 끄겠는가? 집에 불이 나서 타고 있을 때 다른
모든 것은 잊혀지고 그대는 갑자기 불과 싸울 준비가 된다. 그대는 졸리지
않을 것이다. 불이 꺼지고 모든 것이 정리되었을 때 그대는 오랫
동안 잠에 빠질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수면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 시간, 두 시간, 혹은 네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섯 시간, 여섯 시간 혹은 여덟 시간이나 열 시간, 열두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르며 거기 어떤 기준도 없다.
스트레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서로 다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늘 경주마 타입의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거북이 타입의 사람들이다. 경주마 타입의 사람들에게
빨리 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거나,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스트레스를 느낄 것이다. 그들에게는 빠른
속도를 허락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대는 경주마 타입이다! 그러니
휴식 같은 것은 잊어버리라. 휴식은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휴식은
거북이 같은 거북이 타입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니 경주마가 되라.
그것이 그대에게는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거북이 타입이 즐기고 있는
기쁨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다른 종류의 기쁨을 가지고 있다. 만일 거북이가 경주마가 되려고 한다면
거북이 역시 같은 문제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본성을 받아들이라. 그대는 투사이며 전사다.
그대는 그런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그대의 즐거움이다. 이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전심전력으로 그 속으로 들어가라. 사업과 싸우고
사업에서 경쟁하라 그데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라.
결과를 두려워하지 말라.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라. 일단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사라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대는 매우 만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스트레스를 이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는 일종의
에너지다.
휴식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휴식은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대의 휴식은 열심히 일한 뒤에 찾아올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타입을 알아야 한다. 일단 타입을 알게 되면 아무
문제도 없다. 그때 그대는 명확한 선을 따라갈 수 있게 된다. "'

당신은 과도한 긴장(hypertension)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과도한 긴장은 합리성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감성을 망각한
마음의 상태다. 과도한 긴장은 불균형에서 생긴다 즉, 이성을 너무 신뢰하는 것이
과도한 긴장의 근본 원인이다. 머리로 사는 사람들은 과도한
긴장을 느끼게 된다. 휴식은 가슴을 통해서 온다. 우리는 쉽게 머리에서
가슴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집에서 나왔다가 집으로
들어가듯이. 우리는 머리와 가슴 사이를 오갈 수 있어야 한다. 머리와
가슴은 그대라는 강물의 두 기슭이다. 그러므로 한 쪽 기슭에 매달려서는
안된다. 그러지 않으면 삶은 한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서양은 가슴의 언어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과도한 긴장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런데 오직 가슴만이 휴식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가슴만이 사랑하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오직 가슴만이 즐길 줄 알며
제를 벌일 줄 안다. 오직 가슴만이 춤추고 노래할 줄 안다. 머리는
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른다. 머리는 춤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난한다.
머리는 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시를 비난한다.
이상 국가를 생각해 낸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이 자신의 국가에는
시인이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한 사실을 아는가? 그의 국가에는 시인이
중용되지 않는다. 그는 시인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시인은 환상을 가져오며, 꿈을 가져오며, 혼동과 신비주의를 가져온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명확하고 논리적이며
학문적인 사회를 원한다. " 이런 사회는 과도한 긴장에 시달릴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신경증에 걸릴 것이다. 플라톤의 공화국에서는-만일
그런 것이 생긴다면-모든 사람이 신경증에 걸릴 것이고, 모든 사람은
항상 자신의 정신분석가를 데리고 다닐 것이다. 어디를 가든 저마다
정신분석가를 데리고 다닐 것이다. 서양에서는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뉴욕 거리에서 두 꼬마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꼬마들의 얘기란 늘 그렇고 그런 것이지만, 이들이 하는 이아기는
무척 새로운 것이었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정신분석가는 언제든지 네 정신분석가를 이길 수 있어." 꼬마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말해 왔다. "우리 아버지는 너희 아버지를 이겨." 혹은 "우리
집은 너희 집보다 더 커." 혹은 "우리 강아지는 너희 강아지보다
힘이 세," 꼬마들의 에고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정신분석가는 언제든지 네 정신분석가를 이길 수 있어." 이 말은 정말 새롭다
세 여자가 자신들의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명이 말했다
"우리 아이는 반에서 최고야. 항상 일등만 한다구."
두번째 여자가 말했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우리 아이는 겨우
일곱 살인데 모차르트나 바그너처럼 연주한다구."
세번째 여자가 말했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우리 아이는 겨우
다섯 살인데 혼자서 자기 정신분석가를 찾아간다구."
과도한 긴장은 균형을 잃어버린 상태다. 그대는 삶에서 가슴이 작용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논리가 모든 것을 대신하게 되었다.
논리는 피상적인 것이다. 논리가 모든 것을 대신하게 되면 근심이 생길 뿐이다.
논리는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논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문제를
일으킨다. 논리는 결코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논리로는 해결할
수 없다. 해결은 논리의 능력을 넘어선 것이다. 논리는 언제나 약속만
하며 가장(假裝)만 한다. 논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약속한 것을
이행하겠다. " 그러나 논리는 결코 약속한 것을 이행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는 계속 쌓이지만 그대는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모른다.
머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이들과 놀 줄 모르고
여자를 사랑할 줄 모르고, 나무들에게 다가가 이야기할 줄 모르며,
가끔 별들과 대화할 줄도 모른다. 그대는 이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그대는 더 이상 시인이 아니며, 더 이상 살아 있는 가슴도 아니다.
그런데 몸의 어느 부분이든지 억압이 지속되면 그 부분이 복수를 한다.
만일 마음의 한 부분이 억압을 받는다면 그 부분이 복수를 할 것이다.
그런데 가슴은 가장 중요하며 가장 근본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머리 없이는 살 수 있지만 가슴 없이는 살 수 없다 머리는 다소 피상적이다.
그것은 일종의 사치품이다. 그러나 가슴 없이는 살 수 없다.
머리는 인간에게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아주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다.
동물들은 머리 없이 살지만 인간보다 훨씬 더 조용하고 행복한 방법으로 살고 있다.
나무도 머리 없이 살고 있으며 새들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신비가들도 그렇다.
머리는 피상적인 것이다. 머리는 특정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이용하라. 그러나 그것에 이용당하지는 말라. 머리에게 이용당한다면
근심하게 될 것이다. 근심이 찾아와서 삶에 염증을 낼 것이다. 삶은
기나긴 고통이 될 것이며, 삶의 어디에서도 오아시스를 찾지 못할 것이다.
삶은 사막처럼 될 것이다. 본질적인 것을 억압하면 안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따라가야 하며, 본질적인 것의
그림자가 되어야 한다. 어떤 것을 부정하면 반드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들어 보라.

어느 날 비행접시가 엘시네 집의 정원에 착륙했다. 비행접시는 정원에
널어 놓은 그녀의 여름용 반바지들 한가운데 착륙했다. 그녀가 반바지를
입고 있었더라면 몹시 아팠을 것이다. 갑자기 윙 소리가 나더니
진줏빛이 나는 이상한 사람이 비행접시의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후문을
향해 곧바로 걸어와서 정중히 노크를 하였다.
엘시는 문을 열어 보고 재빨리 상황을 알아차렸다. "비행접시에서
당신 분인가요?"
사내는 "음" 하고 고통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화성에서 오셨나요?" 엘시가 물었다.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음" 하고 말했다.
"여기 오는 데 얼마나 걸렸나요? 10년?"
"20년? "
"음" 하면서 그는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20년? 20년 동안 비행접시를 타고 있었나요?"
"음," 그 사내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뭘 도와 드릴까요?" 엘시가 물었다.
그 조그만 사내는 무척 곤혹스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

어떤 것을 부정하면 그것은 더욱 강력해진다. 그는 20년 동안 화장실을
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대는 쓸데없는 질문을 하고 있다.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당신은 누굽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그가
어떻게 이런 것에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의 부정된 부분이 복수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대의 가슴은 여러 생 동안 부정되어 왔으므로 그것이 폭발하면 삶에
커다란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먼저 그대는 마음의 긴장과 근심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다음에는 가슴의 폭발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사람은 이렇게 해서 쓰러진다. 먼저 그는 마음의 긴장 상태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그러다 어느 날 가슴이 폭발해서 복수를 하는 것이다.
결국 그는 미치게 되며 난폭해진다.
두 가지 상황이 모두 잘못되었다. 먼저, 제정신(sanity)이 너무 많았다.
그것이 정신이상을 야기했다. 정말로 제정신인 사람은 제정신과
정신이상 사이의 완벽한 균형 속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정말로 제정신인 사람은
항상 그 자신 안에 약간의 정신이상을 지니고 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정말로 합리적인 사람은 불합리성을 존중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삶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성 때문에 웃을 수 없다면
이성은 웃음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기므로-그대는 틀림없이
곤란에 처할 것이다. 물론, 논리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웃음 또한 좋은 것이다.
웃음이 균형을 가져온다. 심각해지는 것은 좋다.
그러나 심각해지지 않는 것도 역시 좋은 것이다
거기에는 끈임없는 균형이 있어야 한다.
외줄타기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는 끊임없이 균형윽 맞춘다.
어떤 때는 그의 몸이 왼쪽으로 기운다. 그러다가 조금만 더 기울면
떨어질 것 같은 시점에 이른다. 그러면 그는 즉시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여서 균형을 잡는다. 그러다가 다시 조금만 더 오른쪽으로 기울면
떨어질 것 같은 쑨간이 온다. 그러면 그는 다시 몸을 왼쪽으로 기울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그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몸을 왼쪽 오른쪽으로
기울이면서 그는 계속 균형을 유지한다.
균형을 유지하고 싶다면 계속해서 몸을 양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선택해서는 안된다. 선택을 하면 떨어질 것이다. 머리를 선택한다면
떨어질 것이다. 그대는 지나치게 긴장할 것이다. 반대로 가슴을 선택해서
머리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면, 그때는 미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선택해야 한다면 미치는 쪽을 선택하라. 가슴을 선택하라. 왜냐하면 가슴이
더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고집
부려서 "나는 선택을 해야 돼" 하고 말한다면, 그때는 무미건조한
제정신보다는 미치는 쪽을 선택하라. 가슴이 되라. 사랑할 떼는 미친 듯
사랑하라. 노래할 때는 미친 듯이 노래하라. 춤출 때는 미친 듯이 추라.
이것이 계산적이고 논리적인 것보다 훨씬 나으며, 악몽에 시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제안이 아니다. 나의 제안은 선택 없이 남으라는 것이다 '선택 없는 자각
(choiceless awareness)'이라는 말이 핵심이다. 선택 없는 자각의
상태에 머물라. 그리고 균형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에는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이라. 다시 균형을 회복하라, 이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삶은  줄타기와 같다. "

     譯註
1) 모크샤(moksha) :해탈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2) 일곱 개의 신체(seven bodies) :우리는 일곱 개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첫번째 신체는 육체(physical body)이며, 두번째는 에테르체(etheric
body), 세번째는 아스트랄체(astral body), 네번쩨는 멘탈체(mental body),
다섯번째는 영체(tipi.itual body) , 여섯번째는 우주체(cosmic body) , 일곱번째는
니르바나체(niwanic body)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곱 개의 사원'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수피들은 '일곱 개의 계곡'으로, 힌두교에서는 '일곱 개의
차크라'로 언급하고 있다.
3) 사르트르(lean Paul Sartre, 1905∼1980) :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개별적
인간 존재의 자유를 주창하는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적 사상가.
4) 한스 셀리에(Hans Selye, 1907-1983) 오스트리아 태생의 캐나다
내분비학자. 1936년, 생체가 외상·중독·한냉 ·전염병 등의 비특이적 자극을
받으면
그 자극의 종류에 관계 없이 뇌하수체전엽과 부신피질을 중심으로 생리적인
반응이 일어난다는 이른바 '스트레스 이론'을 제창하였다. 그는 긴장에 대한
신체적 반응을 3단계로 구분해서, 이를 일반적 적응 증후군(General Adaptation
Syndrome)이라 불렀는데 여기에는 경고반응(alarm reaction), 저항(resin-
tance), 소진(exhaustion)의 3단계가 있다.
5) TM : 인도의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가 창시한 초월명상(Transcendetal
Meditation)의 약자.

   제7장
        우울증.
과거엔 이것을 억울병증( Melancholia)이라고 불렀습니다만
오늘날은 우울증 (depression)이라고 부릅니다.
선진국에서는 우울증이 중요한 심리적 문제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우울증은 절망감이나 허무감, 혹은 주위의 일에
흥미나 열정을 느끼지 못함과 동시에 자존감(自尊感)이 결여된
상태라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식욕부진이나 불면증
정력감퇴 같은 신체적인 증상을 동반합니다. 오늘날 전기 충격
요법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고, 약물이나 대화 요법은
효과가 신통치 않습니다. 우울증은 화학 물질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울증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침체되어 있는 세상에 대한
반응, 즉 '불만족스러운 겨울' 동안의 동면입니까? 우울증은
단지 억압이나 압박에 대한 반응입니까? 아니면 자기 억압의
형태일 뿐입니까?

인간은 항상 희망과, 미래와, 어딘가에 낙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다. 인간은 결코 현재 속에서 살지 않았다.
인간의 황긍시대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이것이 인간을 열정적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모든 바람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대 속에는 대단한 기쁨이 있었다. 인간은 현재 고통받고 있다
인간은 현재 비참하다. 그러나 내일이면 충족될 꿈을 생각하며 이 모든 것을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내일이 항상 활력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과거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꿈들을 충족시켜 줄 내일이 결코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희망을
품은 채 죽었다. 죽으면서도 인간은 미래의 삶을 희망하고 있었다.
인간은 결코 어떤 환희나 의미를 체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참을 만했다.
그것은 단지 오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이 지나가면 내일이 올 것이다.
종교적인 예언자들, 메시아들, 구세주들은 낙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정치적인 지도자들과 사회의 관념론자들, 이상주의자들도 같은 것을
약속했다. 그들은 낙원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 땅에서 사회가 완전한 혁명을
거치면 가난도 계급도 정부도 없어지고,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질 것이며,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지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근본적으로 양자 모두 동일한 심리적 욕구를 채워 주고 있다. 정치적,
사회적, 관념적 이상주의자들은 물질주의자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은 물질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호소력을 갖게 된 이유는 동일하다. 그들은 '그대가
상상하고 꿈꾸고 바라던 모든 것이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 꿈에 비하면 현재의 불행은 아주 작은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는 열정이 있었고 사람들은 우울하지 않았다. 우울증은 현대에
나타난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이제 네일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1다.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실패했다. 인간이 평등해질 가능성이나
정부가 없어질 가능성, 그대의 모든 꿈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인간은 더욱 성숙해졌다.
인간은 교회나 모스프(mosque)"나 시나고그(synagogue)"나 사원에 갈지도 모른다.
인간은 어둡고 우울한 상태에 혼자 있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군중과 함께 있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단지
사회의 위안물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거기 낙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어떤 구세주도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힌두교인들은 5천 년 동안 크리슨나를 기다려 왔다 그는 다시
오리라는 것만 약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불행이나 고통이 있을 때, 악(惡:이
선(善) 위에 올라섰을 때, 착하고 선하고 순진한 사람들이 교활하고
위선적인 사람들에 의해 착취되고 있을 때면 언제든지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5천 년 동안 그가 다시 오리라는 조짐은 없었다.
예수도 다시 오겠노라고 약속했다. 언제 올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곧. 올 것이라고 말했다. "곧 올 것이라는 그의 약속을 연기할 수는 있지만
』천 년이나 연기할 수는 없다. 이건 좀 지나치다.
우리의 불행과 고통과 근심이 사라지리라는 생각은 더 이상 호소력이 없다.
우리를 폴봐 주는 신이 있다는 생각도 그냥 농담처럼 보인다.
세상을 둘러보라 우리를 돌봐 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사실 영국에서는 거의 30만 명이 악마를 숭배하고 있다. 단지 영국에서만
세상의 작은 부분에 불과한 영국에서만, 30만 명이 악마를 숭배하고 있다.
그대의 질문과 관련해 볼 때 이들의 이데올로기는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들은 악마가 신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악마는 신의 아들이다. 신은 세상을 포기했다. 신이 세상을 돌보지 않으므로
이제 유일한 희망은 악마를 설득해서 세상을 돌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30만 명이 악마를 신의 아들로 숭배하고 있다‥‥‥ 신이 세상을
포기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신은 더 이상 세상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일한 길은 신의 아들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만일 그를
의식(儀式)이나 기도나 숭배로 설득할 수 있다면 아마 불행이나 어둠이나
질병은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필사적인 노력이다.
사실 인간은 늘 가난 속에서 살아 왔다. 가난 속에는 한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
가난은 결코 희망을 파괴하지 않으며, 꿈을 거스르지도 않는다.
가난은 항상 내일에 대한 열정을 가져온다. 인간은 사정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으며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어두운 시기는 이미 지나갔으며
곧 빛이 찾아올 것이다: 이런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선진국에서는‥‥‥ 우울증은 후진국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가난한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아직도 희망에 차 있다
우울증은 자신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얻은 선진국에서 일어나는 문제다.
이들에게는 낙원도 더 이상 소용이 없으며, 계급 없는 사회도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유토피아도 더 낫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목표를 달성했다. 이렇게 목표를 달성한 것이 우울증의 원인이다. 왜냐하면
이제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내일은 어두우며, 모레는 더 어두울
것이다.
그들이 꿈꾸어 오던 것들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들을 결코 보지 못했다 이제 그들은 꿈꾸던 것들을
얻었으므로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지만 식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자는 부유하지만 식욕이 없다.
부유하면서 식욕이 없는 것보다는 가난하지만 식욕이 있는 것이 더 낫다.
그대는 금이나 은이나 달러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먹을 수도 없다. 그대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대가 얻기 위해 노력한
식욕이 사라진 것이다. 그대는 성공했다. 그러나 나는 성공처럼
실패한 것은 없다고 계속해서 말해 왔다 그대는 원하는 곳에 도달했지만
거기에 따르는 부산물을 알지 못했다. 그대는 수백만 달러를 얻었지만
잠을 잘 수 없게 되었다‥‥‥
원하는 목표를 이루게 되면 그 주위에 많은 부산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령, 그대는 언젠가 돈을 모으면 느긋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평생 동안 돈을 모아 왔다. 그러나 그대는 평생
긴장하며 살아 왔다. 이제 긴장이 그대의 몸에 배어 버렸다. 그래서 삶의
마지막에 가서 원하는 만큼의 돈을 얻었을 때 그대는 휴식할 수 없는 것이다.
긴장과 고통과 근심 속에서 평생을 단련해 왔기 때문에 휴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승자가 아니다. 그대는 패자다.
그대는 식욕을 잃었고, 건강을 해쳤으며, 감각과 감수성을 상실했다. 그대는
감미적인 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달러가 생기지 않는 일에
투자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달러를 추구해 왔다. 그러니 누가 장미를 볼 시간이 있었겠는가?
누가 날아가는 새를 볼 시간이 있었겠는가? 누가 인간의 아름다움을
볼 시간이 있었겠는가? 그대는 언젠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으면
그때 즐기며 휴식하려고 이런 것을 미루어 왔다. 그러나 모든 것을
얻게될 때, 그대는 장미를 볼 수 없고, 아름다움을 볼 수 없으며, 음악을
즐길 줄 모르며, 춤이나 시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그대는
오직 달러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달러는 더 이상 만족을 주지 않는다.
이것이 우울증의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은 잘 사는 나라에 있으며
잘 사는 나라에서도 부유층에만 있는 것이다. 잘 사는 나라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우울증으로 고통받찌 않는다. 그리고
우울증을 제거하기 위해 그에게 더 많은 희망을 줄 수도 없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대가 상상하는 것보다'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정말로 딱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자연적으로 생기는 부산물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돈을 얻음으로써 무엇을 잃게 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것을
옆으로 제쳐 둠으로써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모든 것을 잃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늘 시간에 쫓겼고, 경쟁은 냉혹했으므로
그도 냉혹해져야 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가슴이 죽은 것을 발견한다.
삶은 무의미해졌다. 그는 미래에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지 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 무엇이 더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기
떼문이다.
사가르(Sagar))에서 매우 부유한 사람의 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노인은 매우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는 인도 전체에서 가장 큰 비디
(bidi)"' 제조 회사의 사장이었다. 그는 그대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즐길 수 없었다. 즐거움에
영양분을 주어야 한다. 즐거움은 일종의 수련이며 일종의 예술-어떻겐
즐길까 하는-이다. 삶의 위대한 일들과 조우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돈을 쫓는 사람은 신성에 이르는 모든 문을 그냥 지나친다.
결국 그는 죽음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길바닥 위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의 일생은 비참했다. 그러나 사정이 나아지기를 희망하며 참아 왔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내일이면 죽음 외에 아무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평생 동안 무시해 온 불행과
고통이 그의 존재 속에서 폭발할 것이다.
가장 부유한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다.
부유하면서도 가난해지지 않는 것은 위대한 예술이다. 그리고 가난하면서도
부유해지는 것은 그 예술의 또 다른 면이다. 그대는 가난하지만
굉장히 부유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부유하다. 그들의 풍요로운은 물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속에 있으며, 그들의 다차원적인 』
경험 속에 있다. 세상에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만 절대적으로 가난하며
공허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내면에 있는 것은 무덤뿐이다.
우울증은 사회 전체의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가난한 사람들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우울증은 단지 자연의 법칙이며 이제 인간은 그 :
법칙을 배워야 한다. 지금까지는 배울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 것을
얻은 사람이-비록 그 내면에는 완전한 어둠과 무지가 있더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삶에서 첫번째로 해야 할 일은 현재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대 존재의 본질적인 향기는 사랑이나 환희나 축제어야 한다. 그때
그대는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지만 돈은 그것을 파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모든 것을 제쳐 두고,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돈만을 추구해 왔다. 어느 날 그대는 돈으로 아무 것도
살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돈에만 평생을 바쳐 왔다.
이것이 우울증의 원인이다. 특히 서양에서는 우울증이 매우 심해지고 있다.
동양에도 부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차원이 있었다.
더 이상 부자가 될 수 없었을 때 그들은 거기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였다. 새로운 차원은 수세기 동안 열려 있었다.
동양에서는 가난한 사람들도 좋은 조건 속에 있었으며 부자들도 매우
좋은 조건 속에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만족을 배웠으며, 그래서
돈을 쫓는 일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부자들은 언젠가 모든 것을
버리고 진리와 의미를 찾아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끝에 가서는 길이 그냥 끝나 버린다. 그대는 되들아갈 ~ 수 있지만
퇴돌아간다 해도 우울증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대에게는
새로운 방항이 필요하다. 고타마 붓다, 마하비라, 파르쉬바나스(Par冷
vanath)', 이런 사람들은 부(富)의 정상에 있었지만 그것이 거의 짐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이 그대를 데려가기 전에 뭔가 다른 것을
발견해야 한다. 이들은 모든 것을 포기할 만한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포기는 잘못 이해되어 왔다. 사실 그들은 돈이나 권력에 단 1초도
신경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상을 보았고,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다리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지만 어디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사다리는 어디에도 이르지 못한다. 그대가 사다리의 중간에 있거나
중간 이하에 있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대 위에 사다리의
윗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사다리의 맨 윗단에 올라가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때는 자살이나 정신이상, 혹은 위선 외에 다른 길이 없다.
그대는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계속 미소지을 수 있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삶을 낭비해 왔다는 것을 알 것이다.
동양에서는 우울증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진 것이 적더라도 즐기는 법을 배웠으며, 부자들은 온 세상을 다 차지한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대는 돈이 아니라 의미를
찾아가야 한다. 그들에게는 선례가 있었다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진리를 구해 왔으며, 결국 진리를 발견했다. 그러니 실망하거나 우울증에
빠질 필요가 없다. 그대는 단지 미지의 차원으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사람들은 결코 그곳을 탐험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차원 속으로
탐험하기 시작하면-내면으로의 여행, 자기 자신으로의 여행을 의미한다-
잃었던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서양에서는 대규모 명상 운동이 시급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울증이
사람들을 죽일 것이다. 그들은 재능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권력을
성취했으며, 돈을 얻었고,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으며‥‥‥ 최고의
교육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재능있는 사람들인데 모두 절망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가장 재능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삶에 대한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삶에 열정적이지만
그들은 권력이나 돈이나 교육이나 존경을 얻을 재능도 없다. 그들은
재능이 없으므로 고통을 받으며 곤란을 겪는다. 그들은 단지 복수심에서
테러리스트로 변하며 불필요한 폭력을 행사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파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부자들은 더 이상 살 이유가 없기 때문에 어느 나무에라도 목을
매달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의 가슴은 오래 전에 멈추어 버렸다.
그들은 단지 시체일 뿐이다. 비록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고 많은 존경을 받지만
완전히 비어 있고 쓸모없는 시체일 뿐이다.
비록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동양이 가난하기 때문에 동양보다는
서양이 더 나은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서양이
훨씬 더 나쁜 상태에 있다. 가난은 부(富)의 실패만큼 큰 문제는 아니다.
부의 끝에 오는 실패감은 사람을 정말로 가난하게 만든다. 평범한
가난뱅이는 최소한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지만 부자는 그것마저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대규모 명상 운동이 필요하다.
서양에서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정신분석가나 세라피스트 혹은
온갖 종류의 돌팔이 의사들을 찾아가지만 그들은 환자들보다 더 큰 절망에
빠져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루 종일 우울하고 절망적이며 의미 없는
이야기들을 듣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재능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나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들 자신도 의욕을 상실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다. 오히려 그들 자신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
내 학교의 역할은 사람들을 명상적인 에너지로 채워서 우울한 사람」에게
본보기로 보내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우울하지 않고 오히려
굉장히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본다면 희망이 생길 것이다. 이제 그들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명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에게 부(富)나 그 밖의 어떤 것도 버리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라. 단지 그대의 삶에 한 가지를 더 보태라.
지금까지 그대는 삶에 오직 물질만을 보태 왔다. 이제 그대의
존재에 뭔가를 보태라. 그러면 그것이 음악을 가져오고, 기적을 일으키며,
마술을 행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스릴과 새로운 젊음, 새로운 신성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우울증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크지만 해결책은 매우 간단하다.

     譯註
1) 모스크(mosque) :회교의 사원
2) 시나고그(synagogue) :유태교의 회당
3) 사가르(Sagar) 인도 중부 마디아프라데시 주(州)의 중부에 있는 도시.
4) 비디(bidi) :담배를 잎째로 돌돌 말아서 만든 작은 여송연. 인도에서는
하층 노동자와 농민들이 주로 비디를 피운다.
5) 파르쉬바나스(Parshvanath) : 산스크리트어로 '뱀신'이라는 뜻. 인도 자이나교의
스물세번째 티르탕카라. 마하비라보다 250년 정도 앞선 시기의 사람이며
마하비라의 부모가 그의 가르침을 신봉했고, 마하비라도 한동안 파르쉬바나스가
세운 교단에 가입했었다고 한다. 파르쉬바나스는 역사적으로 그 존재가
증명되는 첫번째 티르탕카라어지만 그의 일생에 관해 알려진 내용들은 신화와
전설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제8장
        중독

모든 중독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대의 주위에는 그대를 전체적으로 살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널려 있다. 놀라운 일이다. 왜 그들은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살지 못하도록 하는 데 그토록 흥미가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인간에 대한 그들의 착취가 모두 거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이며, 어떤 종류의 약물도
복용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술이나 약물로 수백만 달러를 벌어
들이는 사람들은 그대가 전체적으로 사는 것을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살면 기쁨에 넘치므로, 술로 자신의 기쁨을 망가뜨리는 걸
원치 않게 된다. 술은 불행한 사람들, 문제가 있는 사람들, 아무튼 다만
몇 시간이라도 문제와 걱정을 잊고 싶은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술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는
다만 몇 시간의 휴식이 꼭 필요한 모양이다.
만일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산다면 매 순간이 너무나 충만해서 영화관
앞에 길게 줄을 서지 않을 것이다. 누가 남이 사랑을 나누는 걸 보려 하겠는가?
그대 스스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데 뭐 하러 영화관에 가겠는가?
그대 자신의 삶이 그토록 경이롭고, 미지의 것을 찾는 무한한 도전으로
가득 차 있는데 무엇 때문에 삼류 영화 스토리에 흥미를 갖겠는가?
전체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야망이 사라지게 된다. 그는 지금 현재
너무나 행복하므로 더 이상의 행복을 상상할 수 없다. 더 많은 것을
갈망하는 인간의 광기는 전체적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항상
거리감을 느끼고, 뭔가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단편적인 삶에서 모든 야망이 일어나고
그리하여 사회의 모든 게임이 진행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유명해지기를 원하고, 정치가가 되기를 원하며,
대통령이나 수상이 되기를 원한다.
지금껏 인류는 인간이 전체적으로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온갖 종류의
장애들을 만들어 왔다. 전체적인 사람은 세상의 수많은 기득권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사람은 기득권층에게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
충족되고 전체적인 삶을 즐기는 사람은 노예로 만들 수 없다.
그에게 군에 가서 사람을 죽이거나 죽음을 당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사회의 모든 구조는 붕괴될 것이다.
전체적인 사람들이 늘어나면 사회 구조는 달라질 것이다. 위대한 사람도 없고,
야망은 없지만 기쁨이 충만한 그런 사회가 될 것이다. 아마
그대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을 테지만, 위대한 사람은 오직 수백만의
위대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고타마 붓다를 기억하려 하겠는가? 만일 수백만의 고타마 붓다가 있었다면
수백만의 마하비라, 수백만의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면 누가
그들에게 신경쓰겠는가? 이 소수의 사람들이 위대하게 된 것은 수백의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살도록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불행하지 않다면 누가 교회나 절이나 시나고그나 모스크에 가겠는가?
누가 그런 곳에 있으려고 하겠는가? 누가 신을, 천국과 지옥을 신경쓰겠는가?
매 순간을 전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삶 자체가 천국이 된다.
삶 자체가 신성이 된다. 죽은 상(像)이나 죽은 경전, 썩어빠진 이념,
어리석은 미신을 숭배할 필요가 없다.
전체적인 사람은 기존 체제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다. ""
그는 유령을 너무도 무서워한 나머지 묘지 곁을 지나가지도 못할 정도였다.
보라. 대단히 예민한 지성을 지니고 마음의 모든 뿌리를 알며
마음의 모든 미묘한 작용을 안다는 프로이트와 같은 사람도 여전히
마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각성은 그대를 마음 너머로 이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들이나 마음의뿌리를
이해하는 데 관심이 없다. 각성은 단순히 마음을 치워 버린다.
단순히 마음을 벗어나 버린다. 동양에서 심리학이 발전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동양에서 최소한 만 년 이상이나 인간의 의식을 꾸준히
연구해 왔는데도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이나 정신종합요법이 발전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만 년 동안이나 아무도 그 문제를 손대지 않은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마음을 이해하는 대신 동양에서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이 발달됐는데, 그것은 오히려 '나는 마음이 아니다' 하고
마음과 자신을 분리한 것이다. 한 번 이러한 각성이 그대 안에서
결정화(結晶化)되면 마음은 힘을 못 쓰게 된다.
마음의 모든 힘은 그대가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하는 데서 나온다.
따라서 불필요하게 뿌리를 캐고, 원인의 원인을 찾고, 꿈을 조사하고,
꿈을 분석하고, 꿈을 해석하는 일이 소용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모든
심리학자들은 각까 다른 근원을 찾고, 다른 설명을 찾고, 다른 원인을 찾는다.
심리학은 아직 과학이 아니다. 심리학은 아직도 미신적이다
만일 그대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간다면, 그대의 꿈은 성적인 관점에서
해석될 것이다 그의 마음은 성에 사로잡혀 있다. 무엇을 가져가도
그는 곧 그것을 성적으로 해석할 것이다. 또 다른 학파이며 분석
심리학의 창시자인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에게 가 보라. 그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또 다른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그대가 무슨
꿈을 꾸건 간에 그는 그 개념에 맞춰 해석할 것이다. 그것은 권력에의
의지라고. 칼 구스타프 응,그는 모든 꿈을 과거 생의 먼 반향(反響)으로
해석할 것이다 그의 해석은 신화적이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학=파들이 있다.
아사지올리(Assagioli)')가 각고의 노력으로 확립한 정신종합은 이 모든
학파들을 함께 모은 것인데, 이것은 무익하기 그지없다. 적어도
정신분석은 약간의 진실을 담고 있다. 분석적 심리학도 약간의 진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정신종합은 잡탕에 불과하다. 그것은 한 학파에서 한
부분을 따오고 또 다른 학파에서 한 부분을 따와 그들을 한데 묶은 것이다.
아사지올리는 굉장히 지성적이다. 그는 그림 조각들을 제자리에
끼워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엔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있는 확실한
전후 관계의 의미가 없다. 그는 의미가 있어 보이는 것만을 뽑았지만
전후 관계가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아사지올리는
종합하는 데 일생을 바쳤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전혀 창조하지 못했다.
이 모든 학파들은 땀 흘려 작업해 왔다.
그러나 동양은 간단히 마음을 뛰어넘는다. 그들은 이유와 뿌리와
원인을 찾기보다는, 이 한 가지를 발견했다. 마음은 어디에서 그 힘을 얻는가?
그것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가? 마음을
키우는 에너지는 "내가 그것이다" 하는 동일시에서 비롯된다. 동양인들은
그 다리를 무너뜨렸다. '나는 육체가 아니다, 나는 마음이 아니다. 나는
자슴이 아니다. 나는 순수 각성일 뿐이다' 하는 사실에 깨어 있는 것.
그것이 각성이라는 것이다 이 각성이 깊어지고 결정화되면 마음은 서서히
희미해진다. 그대에게 끼치던 마음의 영향력은 모든 힘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각성이 100퍼센트가 될 때 마음은 간단히 소멸된다.
서양 심리학이 왜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정신분석과 여타 치료방법을 탐구했지만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심지어는 이러한 학파들의 창시자들조차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이 문제를 해결했다고도, 걱정, 근심, 두려움, 편집증을
벗어났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대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들에게도 존재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제자들에게서 여러 번 부탁을 받았다.
당신은 우리 모두의 정신을 분석합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우리의 꿈들을
해석하도록 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당신의 정신을 분석하도록 허락한다면
굉장한 실험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꿈들을 말해 주십시오.
우리가 분석해서 그 꿈들이 무슨 의미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가리키는지 밝혀 내겠습니다. "
하지만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신분석의
뼈대가 아주 약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자신이 그들의 꿈속에서
찾아낸 것과 똑같은 것들을 그들이 자신의 꿈속에서 찾아낼까
두려워했다. 그러면 창시자로서의, 스승으로서의 우월성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는 고타마 붓다나 마하비라나 나가르주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사람들은 꿈을 꾸지 않으므로 분석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마음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모든 연결고리가 壽어졌다. 그들은 지식이 아닌 각성 속에서 살았다.
그들은 마음이나 기억이 아닌 각성에 의해 행동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억압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꿈도 필요치 않았다.
꿈은 억압의 소산이다. 원시부족들은 꿈을 꾸지 않았다. 혹 꾼다 해도
극히 드물게 꾸었다. 그들은 문명인들이 거의 밤새도록 꿈꾼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워했다. 그대는 여섯 시간 잠자는 사이에 여섯 시간 동안
꿈을 꾼다. 원주민들은 여덟 시간 내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깊은
침묵 속에 잠잔다. 프로이트는 오직 병든 서양 사란만 알았을 뿐,
각성한 사람은 알지 못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서양 심리학의 전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마음의 뿌리와 그 경향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것은 시간낭비일 뿐이다. 단지 각성으로 충분하다
그분 이상이다. 깨어 있는 만큼 그대는 마음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마음은
거의 죽은 화석처럼 남는다. 어디서 탐욕이 비롯됐는지 신경쓸 필요가 없다.
진짜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벗어나는가이다. 문제는 에고가
어디에서 일어났는지가 아니다. 그것들은 구도자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인)
질문들이다.
그리고 수많은 철학적 관점이 있을 것이다. 탐욕은 어디서 일어나는지
에고는 어디서 비롯되는지, 질투는 어디에서, 미움은 어디에서,
인성은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이 모든 것의 시초를 찾는 관점이 있을 뿐이다.
또한 마음은 굉장히 복잡하다. 실제로, 모든 마음의 문제와 그
근원을 밝히기에는 삶이 너무 짧다. 그것들의 기원은 아마도 수천 생에 걸쳐
형성된 것들일 것이다. 서양 심리학은 서서히 그것에 근접했다.
령 프라이말 요법" 같은 심리학이 그것이다.
자노브秘anov)는 문제의 시초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는데,
일회적인 삶을 믿는 기독교인이었던 그에게 있어 뿌리가 틀림없c
어린 시절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린
시절을 기억하도록 하는 작업을 했다. 그러다가 그는 우연히 새로운
진실을 발견했는데, 깊은 최면 속에서 사람들은 어린 시절뿐 아니라
그의 탄생까지도 기억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또한 어머니 자궁 속에 있던
아홉 달도 기억했으며, 아주 민감한 몇몇 사람들은 전생까지도
기억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두려워졌다. 그대가 과거생으로 들어가면 그대의 기억이
또다시 기나긴 여정을 통해 그대를 다른 생으로 데려간다. 그대의 마음은
수많은 생을 살았고, 그래서 그대는 그 뿌리를 현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대는 수천 생을 거꾸로 여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에서 탐욕이 비롯되었는지 안다 해도
그것은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대는
어떻게 그것들을 끊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거기엔 수많은 문제들이 있어서
문제들을 하나씩 끊을 경우, 마음의 작업을 완벽하게 끝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또 다른 문제가 자라나 에너지를 모으고 더 강해져서 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주 어리석은 게임이다.
동양에서는, 중국, 인도, 일본, 아라비아에서는 과거를 통틀어 단 한 사람도
그것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그것은 그림자와의 싸움이다.
그들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단순히
마음으로부터 각성을 뽑아 낸다. 그들은 관조자로서 마음의 바깥에
서 있고, 그래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관조자가
되었을 때 마음은 무기력해져 모든 힘을 잃어버렸다. 어떤 것도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각성이 높이 성장해 갈수록 마음은 점점 더 작아진다. 그 비율은 같다.
각성이 50퍼센트라면 마음도 50퍼센트 잘려 나간다. 만일 각성이
70퍼센트라면 30퍼센트의 마음만이 남는다. 각성이 100퍼센트가 되는 날
마음은 흔적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동양의 모든 접근 방식은 무심(無心)의 상태, 그 침묵, 그
순수, 그 평화를 발견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그 모든 문제와 함께
그 모든 뿌리와 함께 사라진다 아침 해에 이슬방울이 증발하듯이
마음은 흔적도 없이 증발한다. 따라서 그대에게 말하노니, 각성이면 충분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다른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
서양 심리학 안에는 아직 명상을 위한 공간이 없다. 그래서 주변만 맴돌 뿐
해결책은 찾지 못하고 있다. 15년 동안 정신분석을 받아 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재산만 낭비한 것이다. 정신분석은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15년 동안 정신분석을 받으면서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정신분석에 중독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들은 그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문제를 풀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 그것은 거의 약물 중독처럼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정신분석가에게 지치면 또 다른 정신분석가를 찾아간다. 만일 정신분석을
하지 못하면 그들은 뭔가를 놓치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도 이루지 못했다. 완전히 분석된 사람은 서양 전체를
통틀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그들도 인정할 정도다. 하지만
그 눈먼 사람들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분석을 받고도 왜 완전히 분석되어
마음을 넘어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지 하는 그 간단한 점을 보지
못한다
분석은 그대를 초월시킬 수 없다. 초월의 길은 각성이다. 마음을
초월하는 길은 명상이다 그것은 간단한 길이면서 동양의 수많은 사람들을
깨닫게 했다. 그들은 마음을 갖고 무엇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것은
다른 것인데, 단순히 깨어 있고 민감하고 의식적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마음도 하나의 대상으로 사용한다.
나무나 기둥 혹은 다른 사람을 보듯이, 그들은 마음 역시 분리된
것으로 보려고 노력했고, 그들은 성공했다. 그들이 마음을 분리된 것으로
보는 데 성공한 순간, 그것은 바로 마음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 자리에서
명료성이 자라난다. 지식이 사라지고 지성이 일어난다. 그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고 감응한다. 반응은 늘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그리고, 감응은 단지 거울과 같다. 그대가 거울 앞으로 가면 거울은 감응한다.
거울은 그대의 얼굴을 보여 준다. 거울은 아무 기억도 담고 있지 않다.
그대가 떠나면 거울은 다시 순수해지고 아무 것도 반영하지 않는다
명상가는 궁극적으로 거울이 된다. 어떤 상황이든 그에게 반영되
그는 현 순간에, 현재 속에서 감응한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감응은
새로움과 신선함과 명료함과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반복되는 케케묵은 관념이 아니다. 이 사실은 이해되어야 하는데, 어떤
상황도 그대가 이전에 만났던 상황과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
속에서 반응하면 그대는 상황과 직면할 수 없다. 그대는 한참 뒤처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가 실패하는 원인이다. 그대는 상황을 보지 못한다.
그대는 반응에 더 익숙해서, 상황에 눈멀어 있다. 명상적인 사람은 그냥
열려 있어서 두 눈으로 상황을 볼 수 있으며, 상황이 안에서 감응을 불러
일으키도록 놔 둔다. 그는 이미 만들어진 대답을 갖고 다니지 않는다.
고타마 붓다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아침
한 사람이 붓다에게 물었다. "신은 존재합니까?"붓다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더니 붓다는 말했다. "없다. 신은 없다. "
바로 그날 오후에 다른 사람이 묻는다. "신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은 있습니까?" 다시 붓다는 그 남자의 눈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렇다, 신은 있다. "
함께 있던 아난다는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해석하지
않으려고 늘 주의했다. 그는 밤에 모두가 떠나고 붓다가 잠자러 갈 무렵이 되면
붓다에게 궁금한 것을 그때 물어 보곤 했다.
그런데 저녁에 해질 무렵, 세번째 사람이 형식만 다른 거의 똑같은
질문을 가지고 왔다. 그는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믿고
어떤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저 자신은 어느 편에 서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아난다는 붓다가 뭐라고 말할지 귀를 기울였다. 붓다는 같은 날 완전히
상반되는 두 개의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는 세번째 질문을 받았는데
세번째 대답이란 없었다. 하지만 붓다는 그에게 세번째 대답을 주었다.
붓다는 말 없이 두 눈을 감았다.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새들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고, 붓다는 망고 숲에 머물고 있었다, 해는
져물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붓다가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 아마 이게 그의 대답일 거라고 생각하며 자신도
눈을 감고 붓다와 함께 앉았다.
한 시간쯤 지나자 그가 눈을 뜨고 붓다의 발을 만지며 말했다.
당신의 자비는 한량없습니다. 당신은 제게 대답을 주셨습니다. 당신께 항상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
아난다는 믿을 수 없었다. 붓다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가 아주 만족해하길 흐뭇해하면서 떠난 다음, 아난다가 붓다에게 물었다.
너무하십니다! 제 생각을 좀 해 주십시오. 스승님 때문에
미칠 지경입니다. 전 신경쇠약으로 쓰러지기 직전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신이 없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신이 있다고 하고, 세번째
사람에게는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한 친구는 대답을
얻었다고 하면서 아주 흡족해하고 고마워하며 스승님의 발을 만졌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붓다가 말했다, "아난다야, 네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들은
너의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대답들은 너에게 한 것이 아니다. 왜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관여하느냐? 먼저 너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거늘."
아난다가 말했다. "맞습니다. 그것들은 제 질문이 아니었으며 그
답들은 제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저는 귀가 있어서 듣습니다. 저는 듣고 보아 왔으며, 제 온 존재가
혼란스럽습니다. 무엇이 옳습니까?"
붓다가 말했다.
"옳은 것? 옳은 것은 각성이다. 첫번째 사내는 유신론자였다. 』
내가 협조해 주길 원했다. 그는 이미 신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그는
이미 주어진 대답을 가지고 왔고, 가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려고
나의 협조를 청하러 왔을 뿐이다. '내가 옳다, 붓다도 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믿음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신이 없다고 말해야만 했다.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번째 사람은 무신론자였다. 그 역시
신은 없다는 주어진 대답을 들고 왔고, 내가 그의 불신을 강화시켜
주길 바랐다 그래서 내가 자신의 샌각에 동의했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신은 존재한다'고 대답해야만 했다.
그러나 내 의도는 같다.
그대가 내 의도를 본다면 모순이 없다. 나는 첫번째 사람의 선입견적인 믿음을
깨뜨려 주었고 두번째 사람의 선입견적인 불신도 깨뜨려 주었다.
신앙은 긍정적이고 불신은 부정적이지만 양쪽 다 같다. 둘 다
아는 자도 아니고 둘 다 겸허한 구도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세번째 사람은 구도자였다. 그는 선입견이 없었다. 그는 가슴을 열고 있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믿는 사람들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자신은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지 못합니다.
도와 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은 그에게 고요한
각성의 가르침을 주는 것이었다. 말은 필요없었다. 그래서 내가 눈을 감자
그는 그 암시를 이해했다 그는 분명히 지성적이고 열려 있는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도 눈을 감았다.
내가 침묵 속으로 깊이 들어가자 그는 내 침묵과 현존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침묵 속으로, 각성 속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났으나
겨우 몇 분밖에 안 지난 것 같았다. 그는 말로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으나
침묵 속에서 확실한 대답을 들었다 신에 대해 신경쓰지 말라.
신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침묵이 존재하는가,
각성이 존재하는가 아닌가이다. 그대가 침묵하며 깨어 있을 때, 그대 자신이
신이다.
신은 그대로부터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대는 마음이거나 신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침묵과 각성 속에서 마음은
용해되고 사라지며 그대의 신성이 드러난다. 비록 내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대답을 들었다. 참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각성은 그대의 눈으로 그대 자신과 우주의 궁극적인 실체를 볼 수 있는 지점으로
그리고 그대가 우주와 나누어지지 않은 전체의 부둔이라는
기적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지점으로 데려다 준다 내게 있어선
이것은 신성(神性)의 유일한 의미이다.
그대는 분석과 이해와 지적인 훈련 속에 살아 왔다. 이러한 것들은
아무도 돕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결코 어떤 사람도 도운 적이 없다.
가장 귀중한 차원인 깨달음과 각성이 서양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모든 부(富)도, 깨달음에서 오는, 무심 상태에서 오는 풍요에는
비할 수 없다.
그러니 마음에 빠지지 말라. 오히려 길가에 선 주시자가 되어 마음이
찌나가도록 내버려두라. 길은 곧 비게 될 것이다. 마음은 기생충처럼 산다.
마음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 그것이 마음의 삶이다. 그대의 각성으로
연결을 끊으면 마음은 죽는다.
동양의 옛 경전에서는 스승은 죽음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말이지만
무한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명상은 마음의 죽음이기에,
명상은 에고의 죽음이기에 스승은 죽음이다. 명상은 그대의 개체성의 죽음이며
그대의 본질적인 존재의 부활이다 그리고 본질적인 존재를 아는 것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베키 골드버그가 아래층의 호텔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어 성난 소리를 질렀다.
저는 510호실에 있는데요, 맞은편 방의 남자가 벌거벗고 돌아다니고 있어요.
블라인드도 치지 않구요
"당장 올라가겠습니다. " 관리인이 말했다 그가 베키의 방에 들어가
창문 너머를 뚫어지게 보고 나서 말했다. "맞군요, 부인. 저 남자는
벌거벗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허리 아래는 창문이 가리고 있으니 그가
방 안에 있는 한은 아무 문제 없습니다. "
베키가 소리를 질렀다. "네, 그래요, 하지만 침대 위에 서 봐요. 침대에
올라서서 보라구요!"

마음은 이상한 녀석이다. 문제가 없는 데서도 마음은 문제를 일으킨다.
왜 그대는 침대에 올라가 있는가? 벌거벗은 사람을 보려고? 그대는
이 모든 마음의 어리석음을 자각해야 한다. 나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 학설에는 어떤 경의를 갖고 있다.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역사적 진리는 아닐지 모르지만 심리적으로는 분명한 진실이다.
인간의 마음은 바로 원숭이 같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바보스러운
마음의 쓰레기들을 깊이 파 보면 핵심이 없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대가 수많은 생을 통해
끌어모은 쓰레기들에 불과하다.

젊은 여자가 의사에게 갔다. 그녀는 양쪽 넓적다리에 하나씩 생긴 작은
반점 때문에 회저병(悔疽病)이 아닌지 두려워했다. 의사는 주의 깊게
그녀를 검사해 보고 나서 회저병이 아니니 아무 걱정 말라고 말했다.
그녀가 떠나려 하자 의사가 물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집시인가요?"
"네 , 실은 그래요."
"그러면 그 남자친구에게 그의 귀걸이가 진짜 금이 아니라고 얘기해
줘요."

이러한 것들이 마음의 기능이다. 마음은 위대한 발견자이다.
철학자는 장님이라는 옛 정의가 있다. 그는 깜깜한 밤에, 불도 없이
어두운 집에서 있지도 않은 검은 고양이를 찾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는 고양이를 찾는다! 그리고는 위대한 논문을 쓰고
체계를 만들어 논리적으로 검은 고양이의 존재를 증명한다.
마음에 유의하라 마음은 장님이다. 마음은 결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위대한 사기꾼이다. 마음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 한 부류는 '박식한 바보들'이라
부르는데, 자기들은 안다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이다.
그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두번째 부류를 그는 '무지한 지성인들'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우리는 모른다'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겸허함,
'그들의 순수함 속에 앎이 찾아온다.
따라서 지식을 가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은 마음의 기능이다.
우리는 모른다'고 말하는 겸손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순수함 속에
앎미 있고, 이것이 명상과 각성의 역할이다. "'

저는 하루가 끝날 때면 늘 어느 정도 보상의 필요성을 느껴 왔습니다.
약간의 맥주나 담배, 또는 약물들. 이제 이러한 것들이
아무 만족도 주지 못하지만, 아직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어떤 만족감을 구합니다. 이 갈망은 무엇이며 무엇이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욕망의 미묘한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한다. 욕망의 기능은 이런 식이다. 욕망은 그대의 행복에
조건을 단다. (만약 이 차를, 이 여자를, 이 집을 갖는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 욕망의 성취는 행복의 조건을 제거한다. 그 해방감
속에서 그대는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상 그대가 해 온 일들이란 그대의 행복에 있어
쓸데없는 장애물들을 제거한 것이 전부지만, 얼마 안 가서
그대는 이렇게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내가 다시 그 장애물을
만들어서 다시 모두 제거해 버릴 수 있다면 지난번에 장애물을 제거하면서
느꼈던 해방감만큼 또 느낄 것이다. " 욕망은 이런 식이다. 욕망은
성취된다 해도 또다시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대는 그것을 따르는가? 먼저 그대는 조건을 만든다. 그대는 말한다.
이 여자를 얻지 못한다면 나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오직
이 여자와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 " 이제 그대는 여자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것이 어려울수록 그대는 더 열광하고 열중한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대는 더 자극받는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대는
온 존재를 걸고 모험할 각오를 한다. 그리고 물론 더욱 희망이 솟고
여자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 그 일은 너무나 고되고,
너무나 어렵다. 그것은 분명 대단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이토록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그대는 쫓고 또 쫓아 어느 날 여자를 얻는다. 여자를 얻는 날
조건이 제거된다. "이 여자를 얻는다면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
하고 그대는 먼저 조건을 만들었다. 이제 그대는 여자를 얻었다.
그대는 해방감을 느낀다. 이젠 더 이상 쫓지 않는다. 그대는 목표에 도달했다.
결과는 그대의 손 안에 있다. 그대는 해방감으로 좋아한다.

어느 날 나는 물라 나수르딘")이 식은땀을 흘리며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걷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
배탈인가, 아니면 두통이라도 났나? 뭐가 잘못된 건가? 몹시 괴로워
보이는군."
그가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니라네, 신고 있는 신발이 너무 작아서 그러네."
"그러면 왜 그 신발을 신고 있는가?"
그가 말했다. "하루를 마칠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해방감은
신발을 벗을 때라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야. 그래서 나는 이 신발을
버릴 수 없다네. 이 신발은 내 발보다 한 치수 작지. 그건 정말 지옥이야.
하지만 저녁 때면 그게 천국을 준다네. 집에 가서 신발을 벗고
소파에 주저앉으며 이제 도착했다고 말하지. 정말 근사한 일이야."

이것이 그대가 하고 있는 짓이다. 그대는 고통을 만들고 걱정하고
추구하고 열병에 걸리고 나서 어느 날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으며 말한다.
"근사해, 근사한 일이야! 이제 나는 집에 도착했어."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그 해방감은 잠시뿐이다. 그리고 나서 그대는 다시
갈망한다.
그녀를 얻었으므로 이제 이 여자는 쓸모가 없다. 그대는 다시 "이 여자를
얻으면 행복해질 것이다" 하는 조건을 만들 수 없다 그녀는 이미
그대와 함께 있으니 말이다 이제 그대는 다른 사람의 여자들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이 여자를 얻는다면‥‥‥‥ 이제 그대는 한 가지 속임수를
알게 되었다. 먼저 행복에 조건을 만들고, 조건을 필사적으로 쫓다 보면
어느 날 해방감이 오는 것이다. 이것은 헛된 짓이다.
이해가 깊은 사람은 어떤 조건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대는 조건 없이 행복할 수 있다 왜 나중에 해방감을 얻으려고 계속해서
작은 신발을 신고 고통받는가? 왜 늘 해방되어 있지 못하는가?
하지만 그때는 그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문제다. 그것을 느끼려면
대비(對比)가 필요하다. 대비가 없다면 그대가 행복하다 해도
그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정말로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 행복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이것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에 대한 정의이다.
너무나 행복한, 그토록 무조건적으로 행복한 사람이 어떻게
행복에 대해 알 수 있겠는가? 오직 불행한 사람만이 "나는 행복하다.
만사가 잘 돼 가니까" 하고 말한다. 이들은 불행한 사람들이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행복은 그냥 거기 있을 뿐이다.
그것은 늘 거기에 있다. 그것은 숨쉬는 것과 같다.
그대는 숨쉬는 것에 대해 별로 행복해하지 않는다. 그러면 한 가지만
해 보라. 코를 막으라. 요가 수련을 하듯이 숨을 참고 또 참으라. 이제
상당히 괴로을 것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참으라. 진짜 요가 수련자가 되어
계속해서 참으라. 그리고 나서 별안간 숨을 쉬면, 엄청난 기쁨이
솟아날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럼데도 모든 사람이 그 짓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저녁에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은 조건이 필요없다. 행복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것의 핵심을 보라. 행복에 조건을 달지 말라. 아무 이유 없이
행복하라 행복해지는 데 이유를 찾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행복하라.
만일 그대가 행복할 수 없다면, 어렵고 불가능한 조건을 만들지 말라.
그때는 물라가 옳다. 아주 작은 조건을 만들라. 나는 이해한다. 그는
그대가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성적이다 그렇게 단순한 계획-한
치수 작은 신발을 신는 것-그렇게 사소한 계획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다.
그러면 저녁 때 그대는 행복할 것이다. 아주 사소한 계획, 작은
계획을 하라. 그래서 그대가 원하는 만큼 행복해지라.
하지만 그대는 말한다. "오직 이 훌륭한 집이 내 것일 때, 나는 행복할 것이다.
지금 그대는 거창한 조건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고, 그러고 나면 그대는 지치고 탈진할 것이다. 이윽고
그대가 바라던 저택을 소유했을 때 그대에겐 죽음이 임박할 것이다.
이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대는 전 생애를 허비했고, 그 훌륭한 집은
그대의 무덤이 죌 것이다. 그대는 말한다. "백만 달러를 갖지 않는 한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 그러면 그대는 일을 하면서 전 생애를 소비해야 한다.
물라 나수르딘이 훨씬 더 지성적이다. 작은 조건을 달아서 그대가
원하는 만큼 행복하라.
그대에게 이해가 있다면 어떤 조건도 달 필요가 없다. 조건은 행복을
창조할 수 없고 오직 해방감만 줄 뿐이라는, 그 핵심만 보라. 그 해방감은
영원할 수 없다. 해방감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짧은
순간일 뿐이다.
-~그런 일을 보고 또 보지 않았던가? 그대는 차를 구입하고 싶어했다.
차가 그대의 현관 안에 있고 그대가 거기에 서 있다. 아주, 아주 행복하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내일이면 그 차는 낡은 차, 하루
,◎ 차가 될 것이다. 이틀 후면 차는 이틀이나 지난 차가 될 것이다.
이웃들이 칭찬하던 것도 그만이다! 이젠 아무도 그 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동차 회사가 해마다 새로운 모델을 내놓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대가 새로운 조건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단지 해방감을 얻기 위해 계속 갈망하는데, 해방감은 가능하다.
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한 거지가 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지나가던 부자의 차가 고장이 났다
운전사가 차를 고치는 동안 부자가 차에서 나왔다. 거지는 나무 밑에서
기분 좋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산들바람이 불고 햇살이 비추는 아름다운
날이었다. 부자가 와서 거지 곁에 앉으며 말했다. "왜 일하지 않소?"
거지가 대답했다. "무엇 때문에 일합니까?"
부자가 약간 불쾌해하며 말했다. "돈이 있으면 은행에 많은 돈을
예금할 수 있지 않소."
하지만 거지는 다시 물었다. "뭣 때문에 예금합니까?"
부자는 더욱 불쾌해져서 말했다. "뭣 때문이냐고 했소? 그러면 늙어서
은퇴해 쉴 수 있지 않소."
거지가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쉬고 있소! 뭐 하러 늙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요? 이 바보 같은 일이 죄다 뭐요? 돈을 벌어서 예금하고
말년에 쉰다. 안 보이시오? 내가 지금 쉬고 있는 게! 뭐 하러 기다리오."

왜 저녁까지 기다리는가? 왜 맥주를 기다리는가? 왜 물을 마시면서
즐기지 않는가?
그대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예수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는가?
기독교인들은 그 이야기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그가 정말 물로
술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는 분명 내가
그대에게 가르치고 있는 비밀을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 틀림없다. "물이 술이 될 정도로 기쁘게 마시라."
그대가 아주 기쁘게 물을 마실 수 있다면 그것이 그대를 취하게 한다.
시도해 보라! 바로 물이 그대를 취하게 한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것은 맥주나 포도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최면술사에게 물어 보라. 그는 안다 비록 물이라 해도 최면에
걸린 사람이 마신다면 그것은 술이다. 그는 취할 것이다. 물에.
이제 의사들은 플라시보(placebo)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리고 가끔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한 병원에서 실험이 행해졌다.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스무명의 환자들에게는
약을 주고, 같은 질병을 지닌 다른
스무 명에게는 물을 주었다. 물이 효능이 있는지 어떤지 알아 보기 위해서다.
어떤 것이 물이고 어떤 것이 약인지 의사들도 환자들도 모른다.
만일 의사가 안다면 행동이 바필 것이기 때문이다. 물을 주면서
진지하지 않을 것이므로 환자들이 눈치를 챌 것이다. 따라서 의사도 환자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그 정보는 지하 창고에 넣고 잠가 버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물로 효과를 본 환자와 약으로 효과를 본 환자의 숫자가 같았다.
양쪽 그룹에서 스무 명 가운데 열일곱 명이 2주 안에 건강해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물을 마신 사람들이 약을 먹은 사람들보다
더 오랫동안 건강했다는 것이다. 진짜 약을 먹은 사람들은 곧, 몇 주 후에
제발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왜 물이 그런 효과를 냈는가? 약을 먹었다는 생각이
효과를 본 것이지 약이 효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물은 순수하기 때문에 해가 없다. 약은 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진짜 약을 먹은 사람들은 재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약은 다른 욕망, 새로운 질병들,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약은 어떤 형식이든
그대의 신체조직에 영향을 주지 않고는 효과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약은 부작용을 갖고 있을 것이다. 물은 아무 부작용도 없다.
이것:은 순수한 최면이다.
그대가 그러한 열의와 함께, 그러한 기도와 함께 마시면 물은 술이 된다.
선(禪)을 하는 사람들은 차를 그러한 의식이나 예배와 함께 각성과
함께 차를 마신다. 그러면 한낱 차가 굉장한 것이 된다. 평범한 차가
탈바꿈을 한다. 평범한 행위가 탈바꿈을 한다. 아침 산책이 취하게 할 수 있다.
만일 아침 산책이 취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대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장미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취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그대를 취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땐 아무 것도 그대를 취하게 할 수 없다. 그저 이
이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취할 수 있다.
순간을 기쁘게 사는 법을 배우라. 결과를 바라지 말라. 그런 것은 없다.
삶은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삶은 목적이 없다. 삶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삶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을 살라. 전체적으로 살라.
의식적으로 살라. 기쁨에 럼쳐서 살라. 그러면 그대는 만족할 것이다.
만족은 미루어서는 안된다.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만족해야 한다. 지금이 아니면 결코 만족이란 없다. ""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명상적이 될 수 있습니까? 저는 25년간
담배를 피워 왔는데, 담배를 피우면 명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느낌니다. 그러나 아직도 담배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 몇 말씀 해 주십시오.

명상가는 초조함이나 걱정, 긴장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순간적인 걱정, 긴장, 초조를 잊는 데는 담배가 도움이 된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껌을 씹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담배를 피우는 것이
제일 낫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무의식 깊은 곳에서 어머니의 젖을 빠는 일과 연관이 있다.
문명이 발달하자 여성들은 아이에게 젖을 먹여 키우려고 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아이는 유방을 망가뜨릴 테니까. 유방은 둥그스름한 모습을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릴 것이다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르다.
아이에게는 둥그스름한 유방이 필요없다. 둥그런 유방은 아이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유방이 정말로 둥글다면 아이가 젖을
빠는 동안 숨을 쉴 수가 없다. 유방이 아이의 코를 막아 아이는 질식사
할 것이다.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은 화가나 시인이나 심미안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이는 코로 자유롭게 숨도 쉬고 젖을 먹을 수 있는
기다란 유방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자는 유방이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그녀의 아름다움, 그녀의 육체, 그녀의 외모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명이 발달하자 아이는 점차 어머니의 젖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젖을 먹고 싶어하는 갈망이 계속 남아 있는데
초조나 긴장, 걱정이 있을 때면 언제나 담배가 도움을 준다. 그것은
그들이 다시 어머니 무릎 위에서 쉬는 아이가 되도록 도와 준다.
담배는 아주 상징적이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젖꼭지와 같고, 담배를
피우면 따뜻하다. 마치 젖이 따뜻한 것처럼. 그래서 그것은 어떤 조화를
지니고 있고, 그대는 그 안에 끌려든다. 잠시 동안 그대는 걱정이나
문제나 책임이 없는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그대는 30년 동안 줄담배를 피워 왔는데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대는 끊을 수 없다. 그대는 그것을 만들어 낸 원인을
바꿔야 한다.
내가 처음 이런 제의를 했을 때 사람들은 웃었다. 그들은 그렇게
간단한 해결책이 도움이 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담배를 끊으려고 애쓰지 말라. 차라리 아기들이 사용하는 우유병을 잊어라.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 이불 속에서 우유를 마시라
따뜻한 우유를. 최소한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
그들은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게 도움이 됩니까?"
내가 말했다. "'어떻게'와 '왜'는 잊어버리라. 그냥 그렇게 하라.
그것은 잠들기 전에 좋은 음식이 될 것이고, 아무 해가 없다. 내 생각으론
다음날 흡연 욕구가 그렇게 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해 보라:'
그리고 그들은 놀랐다. 서서히 서서히 담배는 사라져 갔다.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근본적인 욕구가 채워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들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성숙해 갔고, 담배는 떨어져 나갔다.
그대는 담배를 끊을 수 없다. 그대가 성숙함에 따라 담배가 저절로
끊어질 때까지, 해롭지 않으면서도 좀더 건강한 뭔가를 대용품으로
가져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이것을 안다. 나는 이 비밀을 그들에게서 배웠다.
아이가 배가 고파 울거나 보챌 때, 엄마가 멀리 있으면 아이는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기 시작한다. 아이는 배고픔과 울음을 잊어버리고 잠에
떨어질 것이다. 아이는 대용품을 찾은 것이다. 비록 그 대용품이 음식을
주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비슷한 어떤 느낌을 준다. 그것은 아이를
이완시킨다. 나는 몇몇 산야신들에게 엄지손가락이라도 빨라고 제안해 왔다.
만약 병에 우유를 따르는 일이 주저된다면, 아니면 아내가 알게 되거나
아이들이 그대가 하는 짓을 본다면, 최선책은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잠드는 것이다. 엄지 손가락을 빨면서 즐기라.
그들은 늘 웃었지만 돌아와서는 항상 말했다. "효과가 있습니다
다음날로 담배개비가 줄고 계속해서 줄어듭니다. " 아마 몇 주는 걸릴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담배는 사라질 것이다. 끊지 않고도 담배가 사라지고 나면
끊는 것은 억압이다. 억압된 것은 엄청난 힘으로 복수하려
할 것이다.
절대로 아무 것도 끊지 말라. 근본적 원인을 찾아서 해가 없는 대용품으로 풀라.
그래서 근본 원인이 사라지도록 하라. 담배는 오직 증상일 뿐이다.
그러니 먼저 끊는 노력을 끊으라. 다음으로 예쁜 병을 구하되
그것을 창피해하지 말라. 창피하면 엄지손가락을 사용하라. 엄지손가락은
크게 도움은 안 돼도 효과는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말한 방법을
사용한 사람이 실패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느 날 그대는 자신이
순수하고 맑은 공기보다는 불필요하게 더러운 연기를 피우면서 폐를 망가뜨려
건강을 해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해방운동이 발전하면서 아기들은 젖을 먹지 못할 터이므로 이것은
점점 더 문제가 될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반드시 젖을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무의식에 난 상처가 껌을 씹는 거나
담배를 피우는 등의 문제를 유발시키지 않도록 유방의 대용품이
주어져야 한다. 이것들은 모두 증상이다. 이런 증상들은 나라마다 다르다.
인도에서는 줄기차게 구장의 잎을 씹거나 코담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들은 모두 똑같다. 코담배는 다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초조, 긴장,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 코담배를 피운다. 그것은
기분 좋은 재채기와 함께 마음을 씻어 주고 온 존재를 흔들어 대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걱정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코담배는
그것들을 없앨 수 없다. 그대는 존재의 근본적인 초조함을 없애야만 한다.
왜 그대는 초조해야 하는가?
많은 언론인들이 내게 말한다. "당신과 함께 있다 보면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우리가 초조해진다는 것입니다. " 그들은 또 말한다. "
우리가 정치가들을 인터뷰할 때면 그들이 초조해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
초조하게 만드는 겁니다. 당신은 우리를 초조하게 합니다. 그러면 문득
담배가 피우고 싶어지죠. 그러면 당신은 우리가 담배 피우는 것을 막습니다.
여기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다'고. 당신에겐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훌륭한 작전을 세우셨군요! 우리는 담배를 피울 수가 없죠,
당신은 우리를 초조하게 하고 긴장하게 합니다, 당신의 알레르기 때문에
우리가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합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출구를 주지 :
않습니다.
그러나 왜 그들이 내 앞에서 초조해야 하는가? 정치가들은 =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다. 만약 그들이 언론인들 앞에서 초조해한다면
그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이 권력가들은 속이 비었다.
그들의 힘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어 온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염려한다 말할 때마다 꼭 두 번씩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
신경이 예민해진다. 언론인들이 사람들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파괴하는
상황을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의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 때문에 아무리 힘없는 언론인이라도 그들을 초조하게 만들 수 있다.
나에게는 하등의 문제가 없다. 나는 사회적 지위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이미 악명이 높다. 그들이 나를 더 이상 악명 높게 만들 수는 없다.
나는 나를 초조하게 만들 모든 것을 해 왔다. 나는 이미 다 했다.
그들이 내게 뭘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잃을 만한 권력이 없다 또 나는 모순이나
비일관성을 걱정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면
뭐든 말할 수 있다. 거꾸로 나는 모순과 비일관성을 즐긴다. 그들은 불안해지면
아무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즉시 뭘 하든가, 뭔가 붙들 생각을 한다.
다만 지켜보라. 담배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이 왜 필요한지
다만 지켜보라. 거기엔 그대를 초조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고,
그대는 거기에 붙들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날 한 주교가 뉴욕의 교회에 들어갔는데 완전히 히피 차림을 한
이상한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주교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다" 하고 말해서 주교는
신경이 곤두섰다.
주교는 로마에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교황에게 물었다.
보이는 남자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 혼자 있고 그는 이른 아침에 여기 왔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왔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죄를 짓지 않도록 명확한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교황도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말했다. "한 가지만 하시오. 바쁘게
보이시오! 달리 어떻게 하겠소? 전화로 경찰을 부르는 동안 그 사람이
당신의 초조함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바쁘게 보이시오."

담배는 그대가 바쁘게 보이는 것을 도와준다. 그럼으로써 그대의
초조함이 가려진다. 그러니 담배를 끊으려고 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편안함을 느끼고 옛날 습관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욕망이 있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 그대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완결시키라
여기 간단한 방법이 있다. 아기의 우유병이 그 일을 해 줄 것이다. 이
방법은 그대에게 좋은 음식을 주고 그대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바쁘게
보이고자 하는 모든 욕망들을 없애 줄 것이다. ""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30년간 줄담배로 고통받아 왔다.
그가 병이 나자 의사가 말했다. "담배를 끊지 않으면 건강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오." 하지만 그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골초였다. 그는 )
말했다.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쓰며 고생을 했지만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다시 흡연 욕구가 엄청나게 밀려왔다. =
쉽게 유혹에 졌다. 다시 그는 똑같은 습성에 빠졌다. 이 흡연 때문에
그는 자신이 하찮은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감을 잃었다. =
담배를 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무가치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가 내게 와서 말했다. "어떡하면
좋습니까? 어떻게 하면 담배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아무도 담배를 끊을 수 없다. 그대는 이해해야 한다.
담배는 그대가 지금 결심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습관이 되었다. 그 습관은 뿌리를 내렸다. 30년이면 긴 세월이다.
은 그대의 몸 안에, 그대의 화학적 성질 속에 뿌리를 내리고 구석구석에
퍼져 있다. 그것은 단지 그대가 머리로 결심할 문제가 아니다.
머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머리는 무기력하다. 머리는 일을 시작할 수는 있지만
쉽게 멈출 수는 없다. 일단 그대가 그렇게 오랫동안 수련해 왔다면
30년간이나 흡연을 수련했으니 그대는 위대한 요기이다.
그것은 자동적이 되었다. 그대는 그것을 비자동화시켜야 한다.
그가 물었다. "'비자동화'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바로 명상의 모든 것이다. 비자동화
내가 말했다. "그대는 이 한 가지, 끊는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만 하라.
절대로 끊을 필요가 없다. 그대는 30년간 담배를 피우며 살아 왔다.
물론 그것은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대는 그것에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담배를 안 피웠을 때보다 조금 더 일찍 죽는다고 무슨 문제가 되는가?
여기에서 뭘 하려고 하는가? 그동안 뭘 했는가? 무엇이 핵심인가, 월요일에 죽든
화요일 혹은 일요일, 혹은 올해에 죽든 내년에 죽든 그게 무슨 문제인가?"
그가 말했다. "그래요. 사실입니다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
내가 말했다. "그건 잊어버리라, 우리는 절대로 끊으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려 할 것이다. 그러니 다음엔 그것을
명상으로 만들라."
그가 말했다. "담배 명상을 하라구요?"
"그렇다 선객들이 차 마시는 것을 명상화하고 의식화할 수 있는데
담배라고 왜 안 되겠는가? 담배 피우는 것도 아름다운 명상이 될 수 있다."
그는 감격해서 나를 쳐다봤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는 생기가
살아났다! 그가 말했다. "명상이오? 말씀해 주십시오.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
나는 그에게 명상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말했다. "한 가지만 하라.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낼 때 각성과 함께 천천히 움직이라. 그것을 즐기라.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의식적이 되라. 민감하라. 깨어 있으라.
천천히, 완전한 각성과 함께 꺼내라. 다음, 완전한 각성으로, 천천히 서두르던
옛 방식이 아닌, 무의식적이고 기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라. 그런 다음 담배로 담뱃갑을 톡톡 치라. 깊은 각성과 함께
그 소리를 들으라. 바로 주전자가 노래하고 차가 끓기?시작할 때
선객들이 하듯이‥‥‥ 그리고 그 향기. 다음, 담배 냄새를 맡으라.
그 아름다움을‥‥‥
그가 말했다. "뭐라고요? 아름다움이라니요?"
"그렇다. 그것은 아름답다. 담배도 다른 것들만큼 성스럽다. 그 냄새를 맡으라.
그것은 신의 냄새다. "
그는 약간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말했다. "네? 농담하시는
겁니까?"
"아니다. 농담하는 게 아니다. " 설령 농담할 때라도, 나는 농담을 하는 게 아니다.
나는 무척 진지하다. "그런 다음 담배를 입에 물라.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로. 완전한 각성 상태에서 불을 붙이라. 모든 행동을.
아무리 작은 행위라도 즐기라. 그대가 더욱더 각성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행위를 세세하게 나누어서. 그리고 나서 첫 모금을 빨라. 담배의 형상
속에 신이 있다. 힌두교 사람들은 말한다, '음식은 신이다: 왜 담배는
안 되는가? 모든 것이 신이다. 그대의 폐를 깊숙이 채우라. 이것이
프라나얌(pranayam)"이다. 그대에게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요가를
주겠다! 다음 담배연기를 내뿜고, 휴식한 다음, 또 한 모금을 빨라.
그렇게 할 수 있으면 그대는 곧 그 전체의 어리석음을 보고는 놀랄 것이다.
그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타인들이 말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나쁜 일이라고 타인들이 말해서가 아니다. 그대가 스스로 알게 될 것인데
그것은 머리로만 아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대의 온
존재가 될 것이고 그대 전체성의 비전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끊어지면
끊어지는 것이고, 그 습관이 계속된다면 계속되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
석 달 후에 그가 와서 말했다. "담배를 끊었습니다!"
내가 말했다. "이제 그것을 다른 것들에도 적용시키라."
비자동화. 이것이 비밀이다. 서서히, 조심스럽게 걸으라. 보라. 주의
깊게 보라. 그러면 나무는 전보다 더 푸르게 보일 것이다. 장미는 전에
보았던 것보다 더 장미로 보일 것이다. 들으라! 누군가가 이야기하고
잡담하는 것을. 들으라. 열심히 들으라. 이야기할 때는 열심히 이야기하라.
그대의 모든 깨어 있는 행동을 비자동화시키라."

약물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약물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인간이 도피처를 찾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인 리그베다(Rig Veda)는 약물 사용법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약물의 이름은 소마(soma)')이다. 고래로 모든 종교에서 사람들이
약물을 복용하지 못하도록 노력해 왔다. 모든 정부에서 약물을 반대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물이 정부나 종교보다 더 강력한 것으로
증명됐는데, 이는 아무도 약물 복용자의 심리상태를 들여다보지 않은 데
기인한다. 인간은 불행하다. 인간은 걱정과 근심과 절망 속에 산다.
약물말고는 거기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인다. 약물 복용을 막는 유일한 길은
인간을 즐겁고 행복하고 축복감이 넘치게 해 주는 것이다.
나 역시 약물에 반대한다. 약물은 단지 잠깐 동안 그대의 불행을 잊게
해 주기 때문이다. 약물은 그대가 불행이나 고통과 맞서도록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대를 약하게 한다.
그러나 내가 약물을 반대하는 이유는 종교나 정부에서 반대하는 이유와
전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불행하고 절망스런
상태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고통중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반항적일 수 :
없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의 존재로 인해 괴로워하며 망가진다. 그는
더 나은 사회, 더 나은 문화, 더 나은 인간을 상상할 수 없다 그는 그
때문에 쉽게 성직자들의 제물이 된다. 성직자들은 "가난한 자, 온유한 자,
고통받는 자는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저들의 것이므로"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은 또한 정치가들의 손 안에 있다. 고통받는 사람」들은
어떤 희망-미래에 어딘가에 있을 계급 없는 사회에 대한 희망,
가난이 없고 굶주림이 없고 불행이 없는 사회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평선 가까이 있는 유토피아를 가질 수만 있다면
그들은 견딜 수 있고 고통도 참을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유토피아라는 말의 의미이다.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지평선과 같다. 그것은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사람들은 하늘과 땅이 맞닿는 지점으로 뛰어가면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평생을 뛰어간다 해도 절대로 그곳에 닿을 수 없다.
그런 곳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환각이다.
정치가는 약속으로 산다. 성직자들도 약속으로 산다. 그러나 지난 만
수년간 아무도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 그들이 약물에 반대하는 이유는
약물이 그들의 모든 사업을 망가뜨린다는 데 있다. 사람들이 아편이나
하시시나 LSD를 복용하게 되면 공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내생이나
신과 천국에 데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 쑨간에
만족할 것이다.
여기 내가 반대하는 이유는 다르다. 나 또한 약물에 반대하지만 그것은
약물들이 종교나 정치의 뿌리를 자를까 봐서가 아니라, 영성(靈性)을 향한
그대의 내면의 성장을 파괴할까 봐서이다. 약물은 그대가 약속된 땅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대는 실체에 도달할 능력이 있는데도
계속해서 환각에 매달린다. 약물은 그대에게 장난감을 준다.
그러나 여전히 약물은 사라질 기미가 없다. 나는 모든 정부와 과학 연구소에서
부작용이 없이 당장 사용 가능하도록 약물을 정제하고 건강에
해가 없도록 만들었으면 한다. 우리는 (:리그베다의 추억에서 알도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소마라고 부르는, 악영향이 없고 중독성이 없으며,
기쁨과 행복과 춤과 노래가 될 수 있는 약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고타마 붓다가 되게 할 수 없다면, 고타마 붓다가
분명히 가졌을 심미적 상태를 최소한 환각으로라도 맛보는 것을
막을 명분은 없다. 이 작은 체헝은 그들이 더욱 탐험해 나가도록 이끌지도 모른다.
조만간 그는 약물에 질리게 될 것이다. 똑같은 장면이 되풀이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 장면이 아름답다고 해도 되풀이되면
질리게 된다.
그러니 먼저 약물의 모든 악영향을 제거하라. 둘째, 사람들이 즐기고 싶어하면
즐기게 하라 그들은 싫증낼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갈 길은
오직 궁극적 지복을 향한 명상법을 찾는 길이다.
그대의 질문은 기본적으로 뉴 에이지(New Age)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다.
세대차는 최근 들어 생긴 세계적인 현상이다. 전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예닐곱 살 된 어린이가 아버지와 함께 손과
마음을 사용하여 대대로 내려오는 일을 배웠다. 열네 살이 되면 이미
숙련공, 일꾼이 되어 있었고 결혼해서 책임을 지니게 되었다 이윽고
스무 살이나 스물네 살이 되면 자식들을 낳았기 때문에 세대차는 있을 수가 없었다.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와 겹쳐져 있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대차가 생겨났다. 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제 처음으로, 그대가 대학을 졸업하는 스물다섯이나 스물여섯 살에
책임도 없고 자식도 걱정도 없게 되었다. 그대가 꿈꾸어 온 세계가
그대 앞에 펼쳐져 있다. 어떻게 하면 더 멋지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부자가 될까, 어떻게 하면 수퍼맨족이 될 수 있을까 열네 살에서
스물네살 사이의 시기는 몽상가가 되는 때이다. 성욕은 무르익고
성욕과 함께 꿈들도 무르익는다. 성욕이 학교에서 억압받으므로 그의
에너지는 전부 꿈으로 간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고, 사회주의자가 되고,
페이비언(Fabian)")이 되고, 기타 등등이 된다. 이때는 또한 좌절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때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 관료사회, 정부, 정치가
집단, 종교, 이런 속에서는 그의 꿈이 실현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많은 계획을 갖고 대학에서 집으로 돌아오지만 모든 계획은
사회에 짓눌려 버린다 곧 그는 새 인간과 새 시대에 대해선 잊어버린다.
직장조차 구할 수가 없다. 그는 자기 자신도 먹여 살릴 수가 없다.
어떻게 그가 부자도 없고 가난한 자도 없는, 계급 없는 사회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약물로 눈을 돌리는 때가 바로 이때다. 약물은 일시적인
해방감을 준다. 하지만 현재의 모든 약물은 중독성이 있는 만큼
계속해서 복윽량을 늘려 가야 한다. 약물은 몸과 뇌를 망가뜨려, 곧 완전히
무기력하게 만든다. 약물 없이는 살 수가 없는데, 이 약물을 복용하는 한
삶이란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책임이 청소년들에게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을 벌주고 감옥에 집어넣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그들은 범죄자가 아니다. 그들은 희생자다‥‥‥
권력을 쥔 사람들은 이들을 금지하고 벌주는 등의 바보 같은 짓을 계속한다.
일만 년 동안이나 금해 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들도 안다.
만일 알코올을 금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알코을 중독자가 되고
위험한 종류의 알코올도 생기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독성으로 인해
죽는다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지금의 권력자들은 사람이 약물을
복용했거나 중독되어 있으면 벌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도 못한 체
청소년들을 몇 년씩 감옥에 가두고 있다. 그들은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명상을 배울 수 있고, 그래서 서서히 약물에서 더
나은 어떤 것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정신치료센터에 수용해야 한다.
이들을 10년씩이나 감옥에 집어넣으면 안된다. 권력자들은 인간의 삶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청소년들을 몇 년씩 감옥에 집어넣으면 그들의 가장
소중한 시간이 전혀 쓸모없이 낭비된다. 감옥에서는 다른 어느 곳보다도
더 쉽게 모든 약물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감자들은 모두 약물의 고수들이다.
그들은 이 초보자들에게 선생이 될 것이다. 10년 후에
그는 완전한 교육을 이수하게 될 것이다. 감옥에서 가르치는 한
다시는, 붙잡히지만 않는다면 뭘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붙잡히지만 말라.
그리고 그곳엔 다시 붙잡히지 않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스승이 있다.
따라서 이 모든 짓은 어리석기 그지없다. 나 역시 약물을 반대한다.
하지만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대가 이 점을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5讀 :-i峯:-i主
1) 아사지올리(Assagioli, 1884∼1974) 이탈리아의 정신의학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대항하여 정신종합(,jychosynthesis)을 주장했다.
2) 나가르주나(Nagarjllna,龍樹) . 150∼250년 경 인도의 불교 승려 철학자
중관학파(中觀學派, Madhyamika)의 창시자로 추앙된다. 이 학파의 공(空
sunyatA)에 대한 설명은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다. 후세의 몇몇 불교학파가
그에게 연원을 두고 있어, 중국에서는 그를 소위 '8종(宗)의 조사(祖師)'로
존경했다.
그의 산스크리트 저서에 (중론송, (회쟁론(廻諍論)이 있다.
3) 프라이말 요법 :유아기에 받은 상처의 경험을 다시 경험시켜 신경증을 치료하는
정신요법 .
4)물라 나수르딘 :원래는 수피의 스승인데 오쇼의 강의에서는 인간 에고의
허구성과 우스꽝스러움을 드러내는 농담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시킨다.
5)프라나얌(pranayam) : 인도 요가에서 주로 호흡을 특정한 비율과 방법으로
들이쉬고 내쉽으로 마음의 안정과 내부 에너지 흐름을 器어 주는 명상행법.
6) 리그베다(Rig Veda) :고대 인도 바라문교(敎)의 근본 성전인 4베다의
첫째 문헌. 10권 1,028개의 찬가로 되어 있고, BC 2000∼BC 800년 사이에 현재의
형태로 정비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며, 암송에 의해 후세에 전해졌다.
내용은 베다의 여러 신을 찬미하는 종교시이다
7) 소마(soma) :고대 인도에서 예배의식 때 사용한 미확인 식물. 베다인은
이 식물의 즙을 중요한 제물로 신에게 바쳤다. 줄기를 돌 사이에 넣고 눌러서
나온 즙을 양털 직물로 거른 다음 물과 우유를 섞는다. 먼저 신에게 헌주하고
나머지는 성직자와 제물을 바친 사람이 먹는데, 환각을 유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효과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8) 알도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 :영국의 소설가·비평가.
현대에 대한 회의와 환멸을 풍자적으로 표현함으로써 20세기의 새로운 소설의
선구가 되었다.
9) 페이비언(Fabian) : 페이비언 협회원. 페이비언 협회는 1884년에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영국에서 창립된 단체로, 조직의 목적은 영국에 민주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사회주의를 신봉했다.

 
        제9장
          음식

음식과 몸의 관계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동양의 신비 전통에 따르면, 그대가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음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의 몸도 음식이고 그대의 마음도 음식이며
그대의 영혼도 음식이다. 영혼을 넘어선 곳에 음식이 아닌 어떤 것이
분명히 있다. 그 어떤 것이란 아나타(anatta), 즉 무아(no self)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완전한 공(空)이다. 붓다는 그것을 수냐(shunya)
즉 허공이라 부른다. 그것은 순수 공간이다. 그것은 그 자체일 뿐,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 그것은 내용물이 없는 의식이다.
내용물이 지속되는 동안 음식이 지속된다.
음식이란 밖으로부터 섭취한 것을 의미한다.
몸은 물질적 음식을 필요로 한다. 음식이 없으면
몸은 시들어 간다. 그것이 몸이 생존하는 방법이다 몸에 담긴 것은 물질적
음식뿐이다.
마음은 기억, 생각, 욕망, 질투, 파워 게임 등등의 무수한 것을 담고 있다.
이것들도 전부 음식이다. 좀더 미묘한 차원의 음식이다. 생각은
음식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영양가 있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는 어깨가 펴진다.
그대에게 에너지를 주는 생각을 갖고 있을때에는 기분이 좋다.
누군가 그대를 좋게 이야기하거나 칭찬해 줄 때, 그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라. 그대는 영양분을 공급받았다 그리고 누가 그대를 나쁘게
얘기할 때 그대를 지켜보라. 마치 뭔가로부터 기습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대는 이전보다 약해진다.
마음은 미묘한 형태의 음식이다. 마음은 육체의 안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먹는 것은 마음에 영양을 준다. 그대가 육식을 한다면
그대는 특정한 마음을 지니게 될 것이다. 만일 채식을 한다면 그대는
확실히 다른 종류의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인도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인도는 일만
년이라는 역사에서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다. 결코 단
한 번도 공격적인 행위를 한 적이 없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왜?
이 나라에도 다른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인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육체가 다른 종류의 마음을 만들었다
그대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어떤 음식을 먹고 지켜보라. 또
다른 것을 먹고 지켜보라. 계속 관찰하라. 그대가 섭취하는 모든 음식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고 거기에 심리적인 요소가 있음을 발견하면 놀랄 것이다.
음식은 그대의 마음이 특정한 생각이나 욕망에게 쉽게 이끌리게 만든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마음을 강화시키지 않고 결국 해체되도록
돕는 종류의 음식, 마음을 강화시키는 대신 명상과 무심(無心)을
강화시키는 종류의 음식에 대한 탐구가 있어 왔다. 고정되지 않고 일정한
규정을 정하지 않은 음식을 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고
각자 자기에게 맞는 음식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마음 속에 무엇을 허용하는지 지켜보라. 사람들은 완전히
비자각적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모든 것을, 아무 거나 읽고 끊임없이 '
TV를 보며 바보 같고 어리석은 짓들을 계속한다. 끊임없이 라디오를 듣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과 잡담하며, 서로의 머리 속에 온갖
레기들을 쏟아붓고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란 쓰레기들뿐이1다.
쓸데없이 쓰레기들을 지게 되는 상황을 피하라. 그대는 이미 너무
많은 쓰레기를 갖고 있다 그대는 그 짐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대는 그것들이 마치 귀중한 뭐라도 되는 양 수집하고 있다. 말을 줄이고
본질적인 것만 들으라. 짧게 말하고 짧게 들으라. 그대가 말을 덜 하고
적게 듣는다면, 서서히 서서히 그대는 명료해질 것이다. 방금 목욕한 것처럼
순수한 느낌이 올라올 것이다. 그것은 명상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토양이 될 것이다. 온갖 종류의 난센스들을 계속 읽지 말라.
신문 읽기를 엄청나게 좋아했던 미치광이가 옆집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는 신문을 수집하기 위해 날마다 우리 집에 왔다. 가끔 그가
성이 나거나 내가 집에 없을 때면 나중에 오곤 했는데, 한번은 열흘 동
내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집에 돌아오자 그가 신문을 수집하려고 왔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이 신문들은 이제 지나갔어, 열흘이나
지난거야."
그가 말했다. "그게 무슨 문젠가? 똑같은 쓰레기야! 날짜만 바뀐  것일 뿐."
그때가 바로 그 미친 사람의 생애에 있어 아주 정상적인 순간이었」다.
그렇다. 소위 정상인이라는 사람들의 삶 속에는 비정상적인 순간들이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모두가 똑같이 지나간 난센스야. 뭐가 문젠가? 나는 시간이 있어. 뭔가를
해야 돼."
내가 물었다. "요 열흘 동안 뭘 했나?" 그가 말했다. "옛날 신문들을
읽었어. 읽고 또 읽었지."
그대의 마음에 빈 틈을 남기라. 이 빈 의식의 순간들은 첫 명상의 빛,
저 너머에 대한 준비, 무심의 첫 섬광이다. 그대가 이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그 다음 일은 공격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고 독소가 없는 음식물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젠 과학자들도 동물을 죽일 때 그 동물이 공포 때문에 온갖 독소가
분비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죽음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대가 동물을 죽일 때
동물의 내부에서는 공포로 인해 엄청난 떨림이 일어난다.
동물은 살아남기를 원한다. 그래서 온갖 종류의 독소를 뿜어내는 것이다.
그대 역시 공포를 느낄 때는 몸 안에 독소가 분비된다. 이 독소들은
그대가 싸우거나 도주하는 데 도움이 된다. 때때로 화가 나면 그대는
상상치도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평상시 흔들지도 못했던 바위를
옮겨 놓을 수가 있다. 하지만 거기엔 분노가 있고 독소가 퍼지고 있다.
공포로 인해 사람들은 올림픽 육상 선수도 앞지를 수 있을 정도로 빨리
뛸 수 있다. 누군가가 그대를 죽이기 위해 칼을 들고 뒤쫓아오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대는 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그대의 온몸은 최대한으로 작동될 것이다.
그대가 동물을 죽일 때, 분노와 불안과 공포가 일어난다. 동물의 눈
앞에 죽음이 닥쳐오고 있다. 동물의 모든 분비기관에서 수많은 종류의
독이 분비된다. 그래서 현대에는 동물을 죽이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만들고
마취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현대의 도살자들은 마취법을 쓴다.
하지만 극히 표면적인 차이만 있을 뿐, 별 차이가 없다. 마친가
미치지 못하는 가장 깊은 곳에서는 죽음을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일은 마치 꿈 속에서처럼 일어나고 있다.
동물은 악몽을 꾸고 있다. 그래서 고기를 먹는 것은 독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육체에 독을 주입하는 것은 무엇이든 피하라. 마음에 독을 주입하는 것은
무엇이든 피하라. 마음의 독은 좀더 복잡하다. 만약 자신이
힌두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독이 투입된 것이다. 만약 자신이 회교도라고
생각한다면 독이 투입된 것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이 기독교도, 자이나=교도,
불교도라고 생각한다면 독이 투입된 것이다. 그대에겐 서서히 독·이
투입되어 왔다. 그대가 적응할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그대는 중독되었다.
그대는 갓 태어난 첫날부터,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는 것을 받아·먹었다.
어머니의 가슴에서부터 그대에게 독이 투입되었다. 온갖 종류의
조건들이 다 독이다. 자기 자신을 힌두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인류에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을 독일인이라고,
영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인류와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친구가 아니라 적의 관점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을 단지 인간으로 생각하라. 일말의 지성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을 단순히 인간 존재로 생각하라. 그대의 지성이 좀더 성숙해지면
인간다운'이라는 형용사마저 버릴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오직
존재로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존재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나무와
산과 강과 별과 새와 동물들을.
더 커지고 더 거대해지라. 왜 터널 속에서 살고 있는가? 왜 좁고
어두운 검은 구멍 속을 기어가고 있는가? 하지만 그대는 그대가 위대한
이념체계 안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대는 위대한 이념체계 안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위대한 이념체계란 없기 때문이다. 관념은
인간 존재를 담을 만큼◎ 위대하지 않다. 존재성(being-hood)은 어떤
관념으로도 담을 수 없다. 모든 관념은 불구이고 무기력하다.
가톨릭교도도 되지 말고 공산주의자도 되지 말하 다만 인간 존재로
존재하라. 그러한 것들은 모두 독이고 편견이다. 오랜 세월을 내려오며
그대는 이러한 편견들로 최면당해 왔다. 그것들은 그대의 피와 뼈와 골수의
일부가 되었다. 이 모든 독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대는 매우
민감해져야 한다.
몸에는 마음처럼 독이 많지 않다. 몸은 단순한 현상이다. 몸은 쉽게
정화될 수 있다. 만약 그대가 육식을 해 왔다면 그것은 그만둘 수 있다.
그것은 그렇게 큰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고기 먹는 것을 중지한다면
석달 안에 몸은 채식을 하지 않은 데서 온 모든 독소로부터 깨끗이 벗어날 것이다.
그것은 간단하다. 생리학은 별로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심리학에 있다 자이나교 승려는 절대로 독이 있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채식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자이나교에 의해 다른 누구보다도 더 오염되고 중독되었다.
참된 자유는 어떤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이다. 아무 이념도 없이
단순하게 살 수는 없는가? 이념이 꼭 필요한가? 왜 그렇게 이념이
필요한가? 그것은 그대가 어리석게 사는 것을 돕는 데나 필요하다.
그것은 그대가 비지성적으로 사는 것을 돕는 데나 필요하다. .그것은 그대가
자신의 대답을 찾을 필요 없이 이미 주어진 대답을 얻는 데 필요한
것이다.
참된 지성인은 어떤 이념에도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없다.
그는 이미 주어진 대답을 짊어지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그것에 감응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지성적이라는 것을 안다.
왜 쓸데없이 과거의 짐을 지고 다닐 이유가 뭔가?
독성이 있는 음식을 바꾼다면 놀랍게도 새로운 지혜가 솟아나을 것이다.
이 새로운 지혜는 그대가 터무니없는 것들 때문에 숨막혀 하지 않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새로운 지혜는 그대가 과거와 그 기억들을
버릴 수 있는, 불필요한 욕망과 꿉들을 버릴 수 있는, 질투와 분노와 정신적 충격과
기타 온갖 종류의 상처를 버릴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 줄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적 상처들을 버리지 못하면 정신적 사기꾼의 희생자가
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여러 종류의 정신분석가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다양한 형태와 규모로 온다.
세상은 온갖 종류의 정신요법사들로 가득 차 있다.
왜 그렇게 많은 정신요법사들이 필요한 것인가? 그들이
필요한 것은 그대가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치료할 만큼 지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상처들을 치료하는 대신에, 상처들을 바람과 햇빛에 여는 대신에
그대는 자꾸만 감춘다. 그대의 상처들이 치유될 수 있도록, 그대의
상처들이 스스로 치유할 수 있도록 상처들을 햇빛에 드러내는 것을
돕는 데 정신요법사가 필요한 것이다. 백 명의 정신요법사 중 아흔아홉 명은
정신요법사가 아니라 정신적 사기꾼들이다.
정신요법사나 정신분석가가 다른 직업인보다도 더 많이 자살한다
이 사실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거의 두 배의 비율이다. 도대체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도와 온 것인가? 그들이
평생 동안 사람들을 도와 주면서 무엇을 한 것인가? 세상의 다른 어떤
직업인들보다도 정신분석가들이 더 미쳐 가고 비정상적이 돼 간다.
거의 두 배의 숫자다 왜? 그들은 자신들도 비정상이면서 타인이 정상인으로
되는 것을 도와 왔다. 그들이 정신요법에 흥미를 갖는 것은 자신들이
비정상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치료법을
찾는 노력이었다. 또한 정신요법사들이 정신요법을 받기 위해 다른 종』류의
정신요법사들에게 간다는 사실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프로이트
학설 신봉자는 융 학설 신봉자에게 가고, 융 학설 신봉자는 프로이트
학설 신봉자에게 가는 따위다. 이것은 아주 이상한 상황이다.
만약 그대 안에 지성이 있다면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스스로의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스스로의 정신적 충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프라이말 요법사들에게
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공동체에서 온갖 종류의 요법을 허용한다. 사실 이렇게 많은
정신요법이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전부 해서 60가지나 된다.
내가 이 세라피들을 허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그대들 때문이다. 그대들은 아직 지성이 드러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공동체에 내면의 실현이 깊어진다. 깊어지면 세라피는 중단될 수 있다.
그땐 사랑이 세라피다. 지성인 세라피다. 그땐 그날그날, 순간순간
살아가는 것, 깨어 있고 민감한 것이 세라피다. 그때는 일상중에
하는 것, 청소하고 요리하고 빨래하는 모든 것이 세라피다.
세라피들은 오직 잠시 동안만 필요하다. 이제 그대들 쿵 대부분이
세라피를 넘어섰다고 내가 확신하게 되면 세라피가 사라질 것이다. 그땐
다수가 峯수를 지성으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성적인 종류의 삶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종교적인 사람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며
영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 모든
범주는 나와는 무관하다. 그대는 나를 어떤 범주에 집어넣을 수 없다.
그대는 나를 비둘기장에 가둘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해야겠다.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가 '사랑 지성'이라고 불리는 에너지를 발산하도록
돕는 것이다. '사랑 지성'이 발산되면 그대는 치유된다.
독이 있는 세번째 종류의 음식은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아
(self)이다. 자아는 지속적인 주목을 필요로 한다. 자아는 주목받는 것이
음식이다. 주목은 자아의 음식이다. 정치가만 주목받는 데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소위 성자라는 사람들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성자나 정치가나
배우 사이엔 아무 차이가 없다. 그들이 근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똑같이 주목받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주목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봐야 한다. " 그것은 에고의 음식이 되고, 가장
미묘한 종류의 독성 음식이 된다‥‥
육체적, 심리적, 영적‥‥‥ 그대의 생리학적인 육체를 모든 독소에서
자유롭게 하자. 그대의 마음으로 하여금 온갖 종류의 쓰레기와 폐물같은
짐을 내려놓도록 하자. 그리고 그대의 영혼이 자아라는 관념예서
자유롭도록 하자. 영혼이 '나'라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때 그대는 무아
아나타(anatta)라고 하는 내면의 공간에 도달한다. 그것이 자유다.
그것이 니르바나(nirvana)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대는 집에 왔다
이제 가야 할 곳이 아무 데도 없다. 이제 그대는 정착하고 휴식하고 이완』할 수
있다.
이제 그대는 존재계가 뿌려 주는 수만 가지의 기쁨을 즐길 수 있다.
이러한 세 가지 독 있는 음식이 제거될 때, 그대는 허공이 된다.
하지만 이 허공은 부정적인 허공이 아니다. 모든 독소와 모든 내용물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그대는 허공이다. 하지만 그대는 가득 차 있다. 이』
지울 수 없는 어떤 것으로 가득 차 있다. 헌신자들이 '신'이라 부르는
어떤 것들로 가득 차 있다. ""

음식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 하나는 그대가 좋아하고 꿈꾸는 것
그대가 환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잘못된 건 없다. 하지만
그대는 거기에 숨은 작은 속임수를 알아야 할 것이다. 굉장히 끌리는 음식이 있다.
그 끌림은 그대가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대는 호텔의 식당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어떤
음식을 본다. 주방에서 냄새가 풍겨 오고 음식의 색깔과 향기가 남아 있다.
그대는 그 음식을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문득 끌린다. 이런 음식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대가 진짜로 바라던 음식이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먹을 수는 있지만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전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만족이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불만족은
강박관념을 만들어 낸다.
매일 음식을 먹기 전에 간단히 명상하라. 눈을 감고 그데의 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느끼라. 무엇이 됐든 필요한 건 그것이다! 아무
음식도 보이지 않는다면 음식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대는 그냥 그대의
존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무엇이 좋게 느껴지는지, 무엇을 갈망하는지.
레오나드 피어슨(Leonard Pearson) 박사는 이것을 '허밍푸드(hum-
ming food)'라고 부른다. 그대에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음식이다.
가서 그 음식을 그대가 원하는 만큼 먹으라. 그러나 그 음식만 먹으라.
또 다른 음식을 그는 '베코닝 푸드(beckoning foorl) '라고 부른다.
그 음식이 그대에게 주어지면 그대는 흥미를 갖는다. 그것은 마음의
일이지 그대가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만약 허밍 푸드의 소리를 듣는다면
원하는 만큼 충분히 먹어도 절대로 괴롭지 않을 것이다. 그대를
만족시킬 터이므로. 몸은 필요한 것을 요구한다. 그 음식은 결코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만족감을 줄 것이다. 일단 만족하게 되면
절대로 더 먹지 않는다. 문제는 오직 베코닝 푸드를 먹는 데서 일어난다.
그대는 그것들을 보고 나서 흥미를 느껴 먹는다 이런 음식은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족을 줄 수 없다. 그것들이 그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대는 불만스러워한다. 불만족을 느끼고 더욱
먹지만 아무리 많이 먹어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엔 욕구가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유형의 욕망이 채워져야 한다. 그러면 두번째는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은 결코 첫번째 음식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 그래서 두번째가
문제가 된다. 만약 그대가 허밍 푸드의 말을 듣는다면 베코닝 푸드는
사라질 것이다. 두번째가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그대가 내면의
요구에 귀기울이는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그것에
귀기울이지 말도록 배워 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것은 먹고 저것은 먹지
말라"는
식의 고정된 룰을 배워 왔다. 몸은 고정된 룰이라는 것을
모른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이 음식 앞에 혼자 남겨졌을 때,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만 먹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요즘엔 많은 심리학적 발견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그저 놀라워했다. 만약 아이가 어떤 병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사과가 그 병에 좋다면 아이는 사과를 택할 것이다.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도 아이는 사과를 택하는 것이다.
동물들도 모두 그렇게 한다. 오직 인간만이 그 언어를 잊어버렸다.
그대는 물소를 정원에 데려다 놓는다. 거기는 넓은 정원이다. 온갖 푸른
나무들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물소는 관심이 없다. 꽃과 나무들이
유혹할 테지만 물소는 신경쓰려고 하지 않는다. 물소는 자기를 부르는
풀에게 갈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에게 필요한 특정한 풀만을 선택할 것이다.
그대는 물소를 속일 수 없다. 인간만을 속일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물소보다도 낮은 수준으로 전락했다. 그대는 당나귀를 기만할 수 없다.
당나귀는 당나귀의 음식만 먹을 것이다. 인간은 기만당한다
여기저기에서 광고를 통해, 컬러 사진, TV, 영화를 통해 그대는 유혹당하고
그대의 '콧노래하는 육체'로부터 분리된다. 회사는 그대에게 어떤 것을
파는 데 관심이 있다. 그것은 회사 쪽에 좋은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아니라 회사에 유익한 것이다.
콜라 회사가 그대에게 콜라를 팔고 싶어한다. 콜라는 그대의 몸과
아무 관계가 없지만 그대를 유혹한다. 어디를 가든 콜라가 있다. 콜라는
가장 우주적인 것 중의 하나인 것 같다. 러시아에조차 다른 미국 제는
허용되지 않는데 콜라는 있다. 모든 곳에서 콜라가 그대를 부르고 있다.
이리 와' 하고 유혹한다. 그러면 문득 그대는 갈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 갈증은 거짓이다. 콜라를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이 콧노래를 부르도록 하라. 이것이 핵심이다.
무엇이 그대의 마음을 끄는지 느끼는 데는 며칠이 걸릴 것이다. 몇 해가
걸릴지도 모른다. 끌리는 것을 원하는 만큼 먹으라. 남들이 말하는 것에
신경쓰지 말라. 아이스크림이 끌리면 아이스크림을 먹으라.
만족할 만큼 먹으라. 가슴이 요구하는 만큼 먹으라. 그러면 문득 만족이
생겨나는 것을 볼 것이다. 만족을 느끼게 되면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사라진다.
불만족한 상태는 그대를 더욱더 채우게 하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그대는 배가 부르지만 여전히 불만족스럽다. 그래서 문제가 생겨난다.
우리는 단지 잊었을 뿐이다. 따라서 먼저 자연스러운 것과 앞으로
찾아올 것을 배우기 시작하라. 그것은 몸 속에 있다. 아침을 먹으려 할 때
눈을 감고 그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보라. 그대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라 무엇이 가능한지에 대해선 생각하지 말라. 단지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 그런 다음 가서 그것을 찾아서 먹으라.
그대가 원하는 만큼 먹으라. 며칠은 그것만을 먹으라. 차츰 그대는
이제 어떤 음식도 그대를 유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두번째는, 잘 씹어서 먹으라. 성급히 삼키지 말라. 그것이 입으로 먹는 것이라면
입에서 즐기라. 왜 더 씹지 않는가? 우리는 음식을 열 번
베어물 때 그 중 한 입만을 즐길 수 있다. 한 입 먹을 때마다 열 번을
씹으라. 입맛으로 보면 그것은 열 배를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본의 어느 지역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던 남자가 목구멍을 덴 일이 있었다.
일이 복잡하게 되어 그의 목구멍이 안에서 뚝 끊어져 버렸다.
의사는 그가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식도를 막아야만 했다. 의사는 위장에
파이프를 꽂아 주었고, 그는 음식을 씹어서 파이프 안에 뱉어 위장으로 보냈다.
남자는 계속 전과 똑같은 양의 음식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의사마저도 놀랐다. 처음에 의사들은 그가 가엽게도 더 이상 음식을 즐길 수 없게
되었다고 매우 불쌍해했다. 실제로 그는 음식을 전보다 더
즐기게 되었는데, 이제는 음식을 씹어서 위장에 넣기 싫으면 그냥
바로 러리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었다.
음식을 위장에 집어넣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입과 위장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러니 음식을 먹을 때에는 항상 더 씹으라. 즐거움은 목구멍 바로
아래 쪽에 있기 때문이다. 목구멍 아래에는 입맛이 없다. 그 비슷한 것도 없다.
그런데 왜 서두르는가? 더 씹으라. 맛을 더 느끼라, 더욱 강렬한 것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 어떤 것을 먹을 때는 먼저 그
냄새를 맡으라. 그 넹새를 즐기라. 맛의 절반은 냄새에 있기 때문이다.
많은 실험이 행해졌다. 만약 코가 꽉 막혀 있는데 음식이 주어진다면
그대는 맛을 느낄 수 없다. 그때 그대는 음식은 맛보다 냄새에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될 것이다 눈을 감고 있으면 맛을 느낄 수 없다. 눈을
유혹하는 색채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멋진 실험을 했다. 눈을 감고
코를 막은 상태에서 음식을 주면 그게 뭔지 알아맞출 수도 없다.
양파를 줘도 그대는 양파라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맛의 대부분은 냄새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감기에 걸렸을 때는 음식을 즐길 수 없는 것이다.
냄새가 없기 때문에 맛도 없다. 사람들은 감기로 고생하고 있을 때
향료를 넣은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그래야만 약간 얼얼한 맛이라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음식의 냄새를 맡고 음식을 바라보라. 서두를 필요가 없다
여유를 가지라. 그것을 명상으로 만들라. 사람들이 그대를 미쳤다고 생각해도
걱정하지 말라. 그저 음식을 모든 측면에서 바라보라. 눈을 감고
만져 보고 볼에 대 보라. 여러 방법으로 느껴 보라 냄새를 맡고 또 '
먹으라. 그런 다음 조금만 깨물고 씹으라. 그것을 즐기라. 그것이 명상이
되도록 하자. 아주 적은 양의 음식으로도 충분할 것이며, 그대에게
수많은 만족감을 줄 것이다. "'

단식이 어떻게 몸의 안락함을 도와 줍니까?

단식중일 때 몸은 더 이상 소화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그 기간 동안 몸은 죽은 세포들과 독소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할 수 있다.
일요일이나 토요일, 휴일에 그대는 집에 돌아와 온종일 청소를 한다.
몸이 소화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그대가 아무 것도 먹지 않을 때,
몸은 자기청소를 시작한다. 과정은 저절로 일어나고 몸은 불필요한
모든 것, 무거운 짐만 되는 것들을 쏟아 내기 시작한다. 단식은 정화의
방법이다. 가끔씩 하는 단식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냥 쉬는 것. 가능한 한 음료수를 많이 마시고
그저 편안히 쉬라. 그러면 몸이 정화될 것이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가끔 장기 단식을 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몸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니고 하라. 그러다가 단식이 어떻게든 몸을 해치고
있다고 느껴지면 단식을 중지하라. 단식이 몸을 도와 주고 있다면
그대는 더 많은 에너지가 솟아오름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더욱 생기가 넘치고
젊어지고 활력이 생기는 것을 느낄 것이다. 다음과 같은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대가 더 약해지고 있다고 느껴지거나 몸 안으로 알지 못할
떨림 같은 것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면 이제 더 이상 정화가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라. 단식을 중지하라.
우리는 단식의 총체적인 과학을 배워야 한다. 실제로 단식은 오랜 경험이 있고
단식의 전체 과정을 잘 알고 있으면서 단식에 따른 모든 증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 곁에서 해야 한다. 단식이 파괴적일 때는
어떤 증상이 일어나고 파괴적이지 않을 때는 어떤 증상이 일어나는지
아는 사람 말이다.
진정한 정화 단식을 했다면 그대는 새롭고 젊고 맑고 가볍고 행복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리고 이제 짐을 벗은 몸은 잘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단식은 그대가 잘못된 식사를 해 왔을 때만 하는 것이다. 잘못된
식사를 해 오지 않았다면 단식을 할 필요가 없다. 단식은 그대의 몸이
이미 잘못된 일을 해 왔을 때에만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잘못된
식사를 해 왔다. ""

특별히 추천하시는 음식이나 식이요법이 있습니까?
먼저, 나는 단식(fasting)을 신봉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
찬(feasting)을 믿는다. 내 모든 접근방식은 축제적인 것이다. 나는 =
그대의 즐거움을 반대하지 않는다. 즐거움이 전부는 아니고 우리는
즐거움을 넘어서야 하지만, 즐거움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인간은 아무것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부정된 부분은 앙같음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하는 순간 그대는 도(道)를 거스르는 것이다. 도는 자연스러워지는
것으로, 축제이지 단식이 아니다. 단식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만
이용될 수 있다.
동물들은 이따금 단식을 한다. 그대는 가끔 개가 단식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음식을 갖다 주어도 개는 먹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개가
자이나교도는 아니다. 개는 단식을 믿지 않는다. 단지 먹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원칙 때문이 아니다. 철학 때문이 아니다. 개는 병이 났다.
존재 전체가 먹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먹기보다는 오히려 토하고 싶어한다.
개는 가서 잔디를 먹고 토할 것이다. 개는 자신을 해방시키고 싶다.
개는 더 이상 소화할 조건이 아니다. 하지만 개는 단식가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단식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면, 규칙으로서가 아니라
훈련으로서가 아니라, 따라야 할 철학으로서가 아니라, 주어진
수련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 느낑이 들면 해도 좋다 이때에도
그대가 다시 잘 먹을 수 있도록 단식이 축제에 대한 봉사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단식은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가끔, 드물게 일어날 것이다. 먹는 동안 그대가 철저히 깨어 있다면,
그리고 즐기고 있다면 절대 과식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식사조절이 아니라 각성이다. 잘 먹으라. 식사를
한껏 즐기라. 기억하라, 룰은 이렇다. 만약 그대가 음식을 즐기지 못한다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그대는 더 먹어야 할 것이다. 만약 즐긴다면
그대는 덜 먹을 것이다. 보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천천히 먹고,
한입 한입 맛을 느끼면서 잘 십어 먹는다면 그대는 그 과정에 완전히
흡수된다 먹는 일은 명상이 되어야 한다.
나는 감각에 반대하지 않기에 맛에 반대하지 않는다. 감각적이 되는 것은
지성적이 되는 것이다. 감각적이 되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다
소위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은 그대를 둔감하고 무디게 만들려고 노력해 왔다.
그들은 맛을 반대한다. 그들은 그대의 혀가 완전히 무디어져서
아무 맛도 즐기지 못하도록 만들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은 건강한 상태가 아니다.
혀는 병이 났을 때만 무디어진다.. 그대가 열이 날 때, 혀는
무디어진다. 그대가 건강할 때 혀는 민감하고, 살아 있고, 고동치고,
에너지로 진동한다. 나는 맛에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맛에 찬성한다.
잘 먹으라 잘 맛보라. 맛은 신성하다.
맛과 똑같이 그데는 아릉다움을 보고 즐겨야 한다. 음악을 듣고 즐겨야 한다.
그대는 바위와 나뭇잎과 인간을 만져야 한다. 그 따뜻함과
질감을 즐기라. 그대의 모든 감각을 사용하라. 최대한으로 사용하라.
그러면 그대는 진정으로 살게 되고 그대의 삶은 환하게 빛날 것이다.
그대의 삶은 무감각해지지 않을 것이고, 힘과 생명력으로 빛날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감각을 죽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찬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몸에 반대한다
기억하라 몸은 그대의 성전이며 신성한 선물이다. 몸은 너무나 섬세하고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훌륭하다. 몸을 죽이는 것은 신에게
배은망덕한 짓이다. 맛은 신이 준 것이지 그대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그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신이 그대에게 눈을 주었고, 신이 이 꿈같은
세상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신이 그대에게 눈을 주었다 눈과
세상의 색채가 교감하게 하라‥‥‥‥ 모든 것은 더할 수 없는 조화 속에 있다.
이 조화를 깨트리지 말라.
이른바 마하트마(mahatma)')라고 하는 사람들은 에고의 속임수에 ?
말려든 것이다.
자신이 위대하다고 느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몽을 반대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그 짓을 한다. 어린이들은 움직이고 싶은 것을
억제하면서 자기에게 힘이 있다고 느낀다 자신의 의지를 느끼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몸에게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방광이 가득 차도 억누른다.
그는 몸에게 "나는 너의 적이 아니라 주인이야"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파괴적인 습관이다
몸의 소리를 들으라. 몸은 그대의 적이 아니다. 몸이 뭔가를 말하는
그것에 따르라. 몸은 나름대로 지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잊지 말라.
마음의 게임예 넘어가지 말라.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어떤
식사조절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오직 각성만을 가르친다. 완전히
각성 속에서 먹으라. 명상적으로 먹으라. 그러면 결코 과하게 먹거나
부족하게 먹지 않을 것이다. 과한 것도 부족한 것만큼 나쁘다. 지나친
음식이 나쁜 것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먹는 것도 나쁘다. 이 두 가지
모두 극단이다. 자연은 그대가 균형을 갖기를, 평형 속에 있기를, 한가운데
있기를,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기를 바란다. 극단으로 가지 말라
극단으로 가는 것은 곧 신경증이 된다. 음식과 관련한 신경증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몸의 소리를 듣지 않고 계속해서 먹는 사랑들이 있다.~
몸이 계속해서 "그만!" 하고 외치며 소리치는데도 계속 먹는다.
이들은 신경증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 한 부류가 있다. 먼저 몸이
계속 "나는 배고프다!" 하고 소리치는데도 단식을 한다 양쪽 다
종교적이지 않으며 신경증적이고 병적이다 그들에겐 치료가 필요하며,
입원시켜야 한다. 송교적인 사람은 균형잡힌 사람이다. 무엇을 하건 항상
중도에 있다. 모든 극단은 긴장과 불안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는 절대
극단으로 가지 않는다. 과식을 하면 몸에 부담이 생기므로 불안이 일어난다.
충분히 먹지 못하면 몸이 굶주리므로 불안이 일어난다. 종교적인 사람은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를 아는 사람이다. 이것은 어떤 교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성에서 나와야 한다.
내가 그대에게 먹어야 할 양을 제시하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그것은
평균치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는 몹시 말랐고 누구는 몹시
살이 쪘다. 그런데 내가 얼마만큼-세 개의 차파티')를-먹으라고 한다면
누구에게는 너무 많은 양이 될 것이고 누구에게는 먹으나 마나
한 양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정된 룰을 가르치지 않는다. 단지
그대에게 각성에 대한 감각만 줄 뿐이다 몸의 소리를 들으라. 그대는
다른 몸을 갖고 있다. 거기엔 다른 유형의 에너지, 다른 유형의 체계가 있다.
대학교수가 있다고 치자. 몸에 관한 한 그는 그다지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그에게는 많은 양의 음식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종류의 음식이 필요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노동자이다. 그는 많은
양의 음식이, 다른 종류의 음식이 필요할 것이다. 고정불변의 원칙은 위험하다.
어떤 규칙도 보편적인 규칙이 될 수 없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유일한 황금률이 있는 데
그것은 황금률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억하라. 황금률은 없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모든 개인은 너무나 독특해서 아무도 처방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대에게 감각만을 준다‥‥‥.
나의 감각은 원리나 법칙과는 관계가 없다. 나의 접근방식은 각성이다.
오늘은 음식이 더 필요하고 내일은 말한 양의 음식이 필요하지 않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가 타인들과 다르다는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그대의 하루하루도 다른 날과는 다르다. 하루종일
쉬고 나면 음식이 많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루 종일 정원에
구덩이를 팠다면 많은 음식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단지 깨어 있어서
몸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몸에 따르라.
몸은 주인도 아니고 노예도 아니다. 몸은 그대의 친구이다. 그대의
친구에게 다정하게 대하라. 계속해서 과식하는 사람이나 계속해서 단식하는
사람들은 다 같은 함정에 걸린 것이다. 그들은 모두 귀머거리이다.
그들은 몸이 말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기쁨을 위해 먹으라. 그러면 그대는 사람이며 인간이며 높은 존재다.
사랑의 기쁨을 위해 사랑하라. 그러면 그대는 사람이고 수준 높은
존재이다. 듣는 기쁨을 위해 들으면 그대는 본능의 억제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나는 행복에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긍정한다.
나는 쾌락주의자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세상의 위대한 모든 영적 인물들은
항상 쾌락주의자였다. 만약 쾌락주의자가 아니면서 영적인 사람인 체 한다면
그는 영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그들은 정신병자다. 행복이야말로
바로 목적지이면서 근원이고 모든 것의 끝이기 때문이다.
쾌락은 수만 가지의 형태로 그대를 통해 행복을 찾고 있다. 신에게 모든
행복의 가능성을 허용하고, 신이 행복의 더 높은 정상으로 오르고 더
높이 도달하도록 도우라. 그러면 그대는 종교적이다. 그러면 그대의 사원은
축제의 장이 될 것이고, 그대의 교회는 그렇게 슬프고 추하고 음울하고
죽어 있고 마치 무덤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엔 웃음이 있고
노래와 춤과 엄청난 기쁨이 있을 것이다.
종교는 자기 학대를 가르치는 사람들 때문에 커다란 고통을 받아 왔다.
종교는 이 모든 엉터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엄청난 쓰레기가
종교에 붙어 왔다. 종교의 정수는 기쁨일 뿐, 다른 무엇이 아니다. 따라서
그대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모두 덕이고 그대를 슬프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죄다.
이것이 기준이 되게 하라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기에 나는 그대에게 고정된 룰을
주지 않는다 한번 고정된 룰이 주어지면 그대는 각성을 잃고 고정된
룰을 따르기 시작한다 고정된 룰이 문제가 아니다. 그대는 룰을 따를 수는 있지만
조금도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몇 가지 예화를 들려주겠다.

베니가 집에 도착했을 때 부엌이 깨진 사기그릇으로 난장판이 되어
있는 걸 보았다.
"무슨 일이야?" 그가 아내에게 물었다.
"잘못은 이 요리책에 있어요." 그녀가 설명했다. "손잡이가 없는
옛날 컵으로 양을 재라고 씌어 있길레, 컵을 깨지 않고 손잡이를 떼내려고 하다가
컵을 열한 개나 깨 버렸어요."

요리책에 그렇게 씌어 있으므로 그렇게 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어리석다.
그것을 기억하라. 한 번 고정된 룰을 갖게 되면 그대는 그것을
따른다.

패거리들이 두목을 만나고 있었다. 두목은 뭐라고 지시를 내리고 가버렸다.
초인종이 울렸고, 부하 하나가 방문객을 맞기 위해 문 쪽으로 갔다.
그는 문에 달린 방문객 확인용 들창으로 살짝 내다보아 확인해 보고는
다시 들창을 닫았다.
·,우산을 문 옆에 두십시오." 부하가 방문자에게 말했다.
"가져오지 않았소." 방문객이 대답했다.
·,그러면 집에 가서 가져오십시오. 두목께서 누구든 우산을 문 옆에 두고
들어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 그러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규칙은 규칙이다‥‥

경찰차가 은행 강도들을 필사적으로 추격하다가 거의 따라잡았을 때
도련, 갑자기 방향을 바꿔 주유소로 들어갔다. 거기서
순경이 상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놈들을 잡았나?" 상관이 흥분해서 물었다.
·,그놈들은 운이 좋았습니다. " 순경이 대답했다. "거의 잡을 뻔했는데
주행 거리가 막 500마일이 넘었길래 오일 교환을 하려고 차를 세웠습니다.

500마일마다 오일을 바꿔야 하는데 500마일이 되었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는 오일부터 바꾸어야 한다
나는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는지 알기에 그대에게
고정된 룰을 주지 않는다. 나는 단지 느낌과 방향감각을 줄 뿐이다. 각성하라.
각성을 통해 살라.
보통 그데는 아주 무의식적인 삶을 살고 있다.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먹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른다.
무의식적이고 자신이 뭘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질투가 생기고 소유욕이 생긴다.
그대는 분노로 미치고, 사납게 날뛸 때는 거의 악마에게 사로잡힐것 같이 되며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르는 짓을 한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말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말이면서 엄청나게
중요한 말이다. 그는 말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하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짓을 모릅니다 " 지금 기독교인들은 굉장히 중요한
이 말을 제대로 해석한 적이 없다. 예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무의식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조금도 깨어 있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건 그들은 잠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잠 속에서
걸어다니는 몽유병자입니다. 그들을 용서하십시오. 그들은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대가 지나치게 많이 먹을 때 나는 신에게 기도한다.
아버지, 이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그는 자신이 하는 짓을 모릅니다 "
그대가 단식할 때 나는 또 신에게 기도해야만 한다. "이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그는 자신이 하는 짓을 모릅니다. " 진정한 문제는 행위가 아니라
그대의 존재 속에 각성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이다. 각성은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대는 술취한 사람과 같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 마이크가 패트에게 밤샘 파티에 갈 거라고 말하자
패트가 따라가겠다고 했다 도중에 패트가 술 한잔하자고 제의했고,
둘다 취하게 됐다. 결국 마이크는 주소를 잊어버렸다. "어디가 네 친구네
집이야?" 패트가 물었다.
"번짓수를 잊어버렸어. 하지만 이 거리가 확실해."
몇 분을 곧장 걸은 끝에 마이크는 확실히 이 집이라고 생각되는 집을
지나게 됐다. 그래서 그들은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는데, 홀이 어두웠다.
문을 열어 거실을 찾았지만 피아노 위에서 가물거리며 타고 있는
촛불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깜깜했다. 그들은 피아노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패트가 기도를 멈추더니 한참 동안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마이크, 나는 네 친구를 모르찌만, 치아가 고른 게 분명해."
이게 현 상황이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내가 그대애게 주고 싶은 것은
한 가지는 오직 각성의 맛이다. 각성은 그대의 전 생애를 바꿀 것이다.
그대를 훈련시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대의 개면을 밝히는 것이
문제다. "

음식과 감정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그대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대가 깊고 사랑스러운
인간 관계 속에 있다면 과식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식사조절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랑이 그대를 충만케 해 주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잡동사니로 채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 사랑이 없다면 그대는 무척
공허함을 느낀다. 그 공허함이 힘겨워서 그대는 뭔가로 채우고 싶어한다
그대는 왜 음식을 선택하는가? 그것은 사랑과 음식이 심리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가슴을 통해 음식과 사랑을 동시에 얻는다.
어머니는 사랑이 넘칠 때마다 아이에게 가슴을 주고 싶어한다. 반대로
사랑이이 없고 성이 날 때에는 아이에게서 가슴을 뺐는다. 어머니의 가슴은
타인의 몸과의 첫번째 접촉이다
모든 화가, 조각가, 시인이 여성의 젖가슴에 그토록 사로잡혀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수만 년 동안 화가들이 여성의 젖가슴을 그려 왔고
조각가들이 돌과 대리석을 자르며 그들의 전 생애를 소비해 왔다는 것은
거의 믿기 힘든 사실이다. 만약 카주라호(Khaiuraho)와 같은 ◎
도 사원을 본다면 그대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서른 개의 사원들이 있다. 페허가 있으니 예전에는 분명 수백 개의
사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서른 개의 사원들조차‥‥‥ 한
개의 사원이 그렇다 해도 믿기지 않을 터인데 서른 개를 생각하면 그대는
아찔해질 것이다. 한 사원에서라도 조각된 나체 여인상들의 숫자를
세나가기 시작한다면 그대는 당황할 것이다. 그대는 세고 또 세어야 할 것이다.
수천 명이 각각의 기둥과 벽, 모든 곳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조각되지 않고 남겨진 곳은 한 뼘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큰 가슴들. 그
가슴들은 단지 상상에 불과하다. 그렇게 큰 가슴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수도 없다. 여성이 그렇게 무거운 것을 달고 서 있어야 하다니!
그리고 카주라호만 그런 게 아니다. 인도에는 그런 사원들이 전국에 수천
개나 된다. 푸리, 코나라크, 엘로라‥‥‥ 아름다운 조각이기는 하지만
병든 마음에서 온 것이다.
왜 이 모든 화가들, 세상의 위대한 화가들은 계속해서 젖가슴을 그리는가?
어디에선가 그들은 거부당했다. 어디에선가 어머니는 사랑을 주지 않았다.
대체로 어머니들은 이른 시기에 젖을 뗀다. 원시사회에서만
아이가 원하는 만큼 젖이 주어진다. 그곳만이 젖가슴을 억압하지 않는
유일한 사회다. 그들에겐 어떤 가슴 그림도, 어떤 가슴 조각도 없으며,
어떤 시도, 어떤 노래도, 아무 것도 없다. 젖가슴은 그들의 상상력 속에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젖가슴 때문에 사랑과 음식이 마음 깊은 곳에서 서로 연결되었다.
그래서 사랑이 없을 때 그대는 먹으며 자신을 채운다. 사랑받을 때 채우는 일은
저절로 사라진다. 그럴 필요가 없다. 사랑은 풍부한 영양분이다.
매우 은근하며 보이지 않는 영양분이다. 그런데 누가 껌을 씹겠는가?
나는 인류가 껌을 씹는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다. 지구가 온통 미쳤는가?
껌은 그대에게 아무 영양분도 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뭔가를
심리적인 어떤 것을 해 준다. 아마도 그것은
그대로 하여금 계속 입을 사용하게 하는 젖가슴의 대용품일 것이다. ""
동물도 인간처럼 먹지 않는다. 모든 동물에게는 자신이 선택한
어떤 정원에 데려다 놓으면 특정한 풀만 먹을 것이다.
어떤 동물도 인간처럼 먹지 않는다. 모든 동물에게는 자신이 선택한
음식이 있다. 들소를 정원에 데려다 놓으면 특정한 풀만 먹을 것이다.
아무 것이나 먹어 대지 않을 것이다. 동물들은 매우 까다롭다. 자신의
음식에 대해서 확실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완전히 잃어버려서
자신의 음식에 대한 감각이 없다. 그는 계속해서 아무 거나 먹고 있다.
사실 인간이 먹지 못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어떤 곳에서는
미를 먹고 어떤 곳에서는 뱀을 먹으며, 어떤 곳에서는 개를 먹는다.
인간은 뭐든지 먹어 왔다. 인간은 완전히 미쳤다 인간은 무엇이 자기에게 맞고
무엇이 안 맞는지 모른다. 인간의 정신은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인간은 당연히 채식가여야 한다. 몸 전체가 채식을 위한 구조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전반적인 몸 구조가 육식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사실을 과학자들도 시인했다. 인간은 원숭이에서 왔다.
원숭이는 채식가이다. 철저한 채식가이다. 만약 다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채식가여야만 한다. 어떤 종의 동물이 채식가이고
채식가인지 판단하는 방식은 이렇다. 그것은 장(腸)의 길이에 달려 있다.
채식을 하지 않는 동물은 장이 매우 짧다. 호랑이나 사자의 장은
아주 짧은데, 고기는 이미 소화된 음식이기 때문이다. 고기를 소화하는
데에는 긴 장이 필요치 않다 그것은 인간이 채식가임을 뜻한다. 긴 장이
필요한 것은 밖으로 쏟아내야 할 배설물이 많기 때문이다.
육식가가 아닌 사람이 계속해서 고기를 먹으면 몸에 부담이 생긴다.
동양의 모든 위대한 명상가들, 붓다나 마하비라도 이 사실을 강조했는 데
그것은 비폭력에 대한 관념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두번째 문제다.
그대가 진정 명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자 한다면 몸이 가볍고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몸은 짐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비채식가의 몸은 너무나 많은 짐을 지고 있다.
고기를 먹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한번 지켜보라. 동물을 죽일 때
죽임을 당하는 동물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누구도 죽임을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생명은 스스로 오래 살고 싶어한다.
동물은 자진해서 죽으려 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그대를 죽인다면
그대는 기꺼이 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자가 덤벼들어 그대를
죽인다면 그대의 마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똑같은 일이 사자를
죽일 때도 일어난다. 엄청난 고통, 공포, 죽음, 걱정, 불안, 분노, 폭력,
슬픔‥‥‥ 이 모든 것이 동물에게 일어난다. 몸 구석구석에 폭력과 걱정과
격통이 스며든다. 몸 전체가 독소로 가득 찬다. 그는 자신의 뜻에 반해
억지로 죽고 있기 때문에 온몸의 분비선에서 독소가 흘러 나온다.
그리고 그대는 그 고기를 먹는다. 그 고기는 동물이 분비한 온갖 독소를
옮긴다 모든 에너지가 독소인데, 그 독소가 그대의 몸으로 운반된다.
그대가 먹는 고기는 동물의 몸에 속해 있었다. 그 몸은 특정한 목적을 갖고 있다.
동물의 몸에는 특정한 형태의 의식이 존재한다. 동물의
의식보다 높은 수준에 있는 그대가 동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대의 몸은
아주 낮은 수준으로,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러면 그대 의식과 몸
사이에 거리가 생겨나고, 긴장과 불안이 따라온다.
인간은 자연스러운 것을, 그대에게 자연스러운 것을 먹어야 한다.
과일, 콩, 야채는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으라. 이런 음식들의 아름다움은
필요 이상으로는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모든 것은 항상
만족을 준다. 그대를 배부르게 하고 충분히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대는 충만감을 느낀다. 비자연적인 것은 결코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아이스크림을 계속 먹어 보라 그대는 전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먹으면 먹을수록 더 먹고 싶을 것이다. 그것은 음식이 아니다.
그대의 마음은 속임수에 빠졌다. 현재 그대는 몸의 필요성에 따라 먹는 :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입맛 때문에 먹고 있는 것이다. 혀가 지배자가 되었다.
혀가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혀는 위(謂)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른다.
혀는 몸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른다. 혀는 음식의 맛을 느끼는 것이다.
당연히 혀는 어떤 음식이 몸(나의 몸)을 위해 좋은지, 어떤 음식이
안 좋은지 가려 내야 한다. 그게 혀가 할 일이다. 혀는 문 앞의
경비원일 뿐이다. 주인이 아니다. 만약 경비원이 주인이 된다면 모든 것은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이제 광고주들은 혀가 속임수에 빠지기 쉽다는 걸, 코가 속임수에
빠지기 쉽다는 걸 안다. 그것들은 주인이 아니다. 그대는 잘 모를 것이다.
세계적으로 음식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왔는데, 코를 꽉 막고 눈을 감는다면
양파를 먹어도 자신이 무엇을 먹는지 모른다. 맛의 절반은 냄새로부터 오므로
코에 의해 결정되고 나머지 절반은 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지배자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이 영양가가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안다.
아이스크림은 맛도 있고 화학적 작용으로 입맛을 만족시켜 줄 수도 있지만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머리는 뒤죽박죽이다. 들소보다 더 혼란스럽다 들소에게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라고 설득할 수 없다. 한번 시도해 보라!
자연스러운 음식‥‥‥ 내가 '자연스럽다'고 할 때는 그대의 몸이 필요로하는 것을
의미한다.
호랑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르다. 호랑이이는
아주 공격적이어야만 한다. 만약 그대가 호랑이가 먹는 고기를 먹는다면
그대는 공격적이 될 텐데, 어디에다 그대의 공격성을 표현하겠는가
그대는 정글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면 그대는 공격성을
억눌러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악순환이 시작된다. 공격성을 억누를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가 분노하고 공격적일 때 모종의 독은 에너지가
발생한다. 그 독소는 그대가 정말로 공격적이고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준다. 그 에너지는 그대의 손으로 이동한다.
에너지는 그대의 이로 이동한다. 이 두 지점이 동물들이 공격적이 되는 곳이다.
인간은 동물의 왕국의 일부이다.
그대가 분노하게 되면 에너지가 발산되는데 그것은 손과 이와 턱으로는
아니다. 그대는 문명세계에 살므로 동물처럼 행동할 수 없다. 만약
동물처럼 행동한다면 그 때문에 너무 많은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그대는
그 정도 대가를 치를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는 분노를 손에 억누르고 이에 억누른다. 계속해서 거짓 웃음을
지은 채 이로는 분노를 축적하고 있다.
나는 자연스런 턱을 가진 사람을 드물게 본다. 사람들의 턱은 자연스럽지가 않다.
분노가 너무 많이 쌓여 굳어 있다. 턱을 눌러 주면 분노가
풀릴 수 있다. 손들이 추해지고 사람들이 손에 너무나 많은 분노를
억누르고 있기에 손은 우아함과 유연성을 잃는다. 마사지를 깊이 해 본
사람들은 사람의 손을 깊이 만질 때, 손을 마사지할 때 그 사람이 분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턱을 누르면 그 사람은 다시 화낼 것이다.
그들에게는 분노가 쌓여 있다.
이것들은 몸 안에 있는 불순물들이다. 그것들은 발산되어야만 한다.
그것들을 발산하지 못하면 몸은 계속 무거울 것이다. 요가 수련은 몸 안에
축적된 모든 독소를 발산해 준다. 요가 운동이 그것들을 풀어 준다.
그래서 요기의 몸은 특유의 유연성을 갖고 있다. 요가 수련은 다른 운동과는
전혀 다르다. 요가 운동은 몸을 강하게 만들지 않는다. 반대로
몸을 더욱 유연하게 한다. 몸이 유연하면 그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강하다.
그대는 더 젊어진다. 요가는 그대의 몸이 더욱 부드럽고 더욱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만든다.


몸 안에 일체의 장애가 없다. 몸 전체가
그 자체의 깊은 리듬 속에서 유기적인 개체로 존재한다 그것은 시장의
소음과 같지가 않다. 그것은 오케스트라와 같다. 몸 안에 장애가 없이
깊은 리듬이 있을 때 몸은 순수하다. 요가 수련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다.
모든 사람이 위 속에 너무 많은 쓰레기들을 지니고 다닌다. 몸 안에서
억누를 수 있는 곳이 오직 그곳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은 없다.
그대가 뭔가를 억누르고 싶다면 위 속에 억눌러야만 한다. 만약 그대가
울고 싶은데-그대의 아내가 죽었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친구가 죽었을 때-여자 때문에 우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을까 봐, !
초라해 보일까 봐 참는다면 그 울음이 어디로 가겠는가? 자연히 그대는
위 속에 억눌러야 한다. 그곳은 몸 안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곳, 유일하게
비어 있는 곳이다. 그곳에다 억누를 수 있다.
만약 그대가 위 속에 억누른다면‥‥‥ 모두가 온갖 종류의 감정을
위 속에 억눌러 왔다. 사랑, 성욕, 분노, 슬픔, 울음, 심지어는 웃음까지도.
그대는 배꼽을 잡고 웃을 수 없다. 무례하고 천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문화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모든 것을 억눌러 왔다.
억압 때문에 그대는 깊은 호흡을 할 수 없다. 그대는 얕은 호흡을 해야 한다.
깊게 호흡을 하면 그 억압된 상처들이 자신들의 에너지를 발산할 것이다.
그대는 두려워한다. 모든 사람이 뱃속의 것들이 움직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모든 아이가 태어날 때는 배로 숨쉰다. 아이가 잠자는 것을 보라.
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절대 가슴이 아니다. 아이들은 가슴으로
숨쉬지 않는다. 그들은 배로 숨쉰다. 그들은 완전히 자유롭다. 아무런
억압이 없다. 그들의 배는 비었다. 그리고 그 비어 있음은 몸 안에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일단 배가 너무 많은 억압을 담고 있으면 몸은 :
수준이 낮은 부분과 높은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면 그대는 하나가 아니다.
그대는 둘이다. 수준 낮은 부분은 버려진 부분이다 조화가 깨진다.
그대 존재 안에 이원성이 개입했다. 이제 그대는 아름다울 수 없다.
우아할 수 없다. 그대는 하나가 아니라 두 몸을 가지고 다닌다. 둘 사이에는
항상 갭이 있을 것이다. 그대는 아름답게 걸을 수 없다. 어쩐 일인지
그대는 다리를 끌고 다녀야만 한다. 실제, 그대의 몸이 하나라면
다리가 그대를 끌고 갈 것이다. 몸이 두 개로 나누어지면 그때는 그대가
다리를 끌고 다녀야 한다.
그대는 그대의 몸을 질질 끌고 다녀야 한다. 그것은 짐과 같다.
그대는 즐길 순 없다.
그대는 경쾌한 걸음을 즐길 수 없고 유쾌한 수영을 즐길 수 없고
달리기를 즐길 수 없다. 몸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동작들을 즐기려면 몸이 재결합되어야 한다. 다시 조화가 일어나야 한다.
위는 깨끗이 청소되어야 한다.
위를 청소하려면 아주 깊은 호흡이 필요하다. 깊게 들이마시고 깊게
내쉴 때 위는 지니고 다니던 모든 것을 내버린.다. 날숨 속에서 위는 풀어진다.
그러므로 프라나야마, 즉 리듬이 있는 깊은 호흡이 중요한 것이다.
위가 불필요하게 지니고 다니던 모든 펏을 풀어놓도록 날숨이 강조되야 한다.
위가 그 안에 감정을 담고 있지 않으면, 그대에게 변비가·
있었다면 어느새 없어질 것이다. 감정을 억누르면 위의 운동이 부자연스러워져
변비에 걸리게 된다. 그대는 위를 강하게 통제한다. 그대는 위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감정이 억압되면 변비에 걸린다.
변비는 물질적이기보다는 심리적인 것이다. 그것은 육체보다는 마음에
속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나는 마음과 몸을 둘로 나누지 않는다. 그것들은 같은 현상의
양면이다. 마음과 몸은 둘이 아니다. 사실 '마음과 몸'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음-몸'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대의 몸은 정신
신체적 현상이다. 마음은 몸의 가장 미묘한 부분이고, 몸은 마음의
가장 거친 부분이다. 둘은 서로 영향을 끼치며 동일선상을 달린다.
만약 마음 안에 어떤 것을 억압하면 몸이 억압되기 시작할 것이다. 만약 '
마음이 모든 것을 풀어 놓으면 몸 또한 모든 것을 풀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카타르시스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는 정화의 과정이다.
다음 사항들을 준수하라. 단식, 자연스러운 식사, 깊고 리듬 있는
호흡, 요가 수련, 더욱더 자연스럽고 유연하고 부드러운 생활, 몸이 자유의
말을 하도록 허락하는 것, 몸의 지혜를 따르는 것, 덜 억압적인
태도를 지니는 것.
몸이 순수할 때 그대는 무한히 새처럼 에너지가 올라오는 것을,
새로운 차원이 그대 앞에 열리는 것을, 새로운 문이, 새로운 가능성이 홀연히
열리는 것을 볼 것이다. 몸은 숨은 에너지를 많이 갖고 있다. 한순간에
그것이 풀려나오면 그대는 몸이 그토록 많은 것들을 담고 있으면서
그렇게 닫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

저는 강박적으로 과식을 합니다. 제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 주시겠습니까?

배고플 때 왜 잠깐이라도 명상하지 않는가? 서두를 필요가 없다.
배고플 때 그저 눈을 감고 배고픔에 대해, 몸이 어떻게 느끼는지 대해
명상하라. 그대는 접촉을 잃은 것이다. 배고픔은 육체적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매일 1시에 먹는다고 하자. 그대는
시계를 본다. 1시다. 그러면 그대는 배고픔을 느낀다. 어쩌면 시계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누군가가 "그 시계는 자정에 멈춰서
움직이지 않아. 지금은 11시밖에 안 됐어" 하면 배고픔은 사라진다. 이
배고픔은 거짓이다. 단지 습관일 뿐이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마음은 말한다. "1시다. 너는 배고프다. " 그대는 배가 고파야만 한다.
그대는 늘 1시에 배고파 왔다. 따라서 그대는 배가 고프다.
우리의 배고픔은 거의 99퍼센트가 습관적이다. 진짜 배고픔을 느끼려면
며칠 동안 단식을 해 보라. 그대는 놀랄 것이다. 처음 3-4일 동안은
배고픔을 느끼겠지만 4일째나 5일째에는 별로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비논리적이다. 단식이 길어질수록 더욱더 배고픔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3일 후에는 배가 덜 고프고 7일 후에는 배고픔을
완전히 잊을 것이다. 11일 후에는 모든 사람이 배고픔은 까맣게 잊고
몸은 말할 수 없이 좋은 상태가 된다. 왜 그런가? 그리고 만일 단식을
계속한다면‥‥‥‥ 단식을 많이 해 본 사람들은 21일 후에야 진짜로
배가 고파질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3일 동안은 마음이 배고프다고 주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음식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3일 만에 마음은 말하는 데
지쳐 버린다. 그대가 듣지 않고 전혀 무관심하므로. 4일째에 마음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몽은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 3주 동안
그대는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굉장히 많은 지방을 축적해 놓았기 때문에
그 지방질이 작용할 것이다. 그대는 3주가 지나서야 배고픔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일반적인 몸의 경우이다.
만약 그대가 아주 많은 지방질을 축적해 놓았다면 3주 후에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지 모른다. 그리고 석 달, 즉 90일을 살 만큼 지방질을
축적해 놓았을 가능성도 있다. 몸에 축적된 지방질이 다 소모됐을 때
처음으로 진짜 배고픔이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갈증을 가지고 시도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하루 동안 물을 마시지 말고
기다리라. 습관적으로 마시지 말라. 그냥 기다리면서 갈증이 의미하는 것이 뭔지
보라 만약 그대가 사막에 있었다면 갈증이 무엇을 의미했을지.
그대는 오직 혀에 의해서만 알?뿐인데, 그 혀는 잘 속인다. 혀는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에 봉사해 와서 더 이상 몸에 봉사하지 않는다.
혀는 그대를 속일 수 있다. 혀는 마음의 노예가 되었다. 혀는 끊임없c
"계속 먹어. 먹는 건 좋은 거야" 하고 말할 수 있다 혀는 더 이상
몸에 봉사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혀는 "그만!" 하고 말했을 것이다. "=
그대가 무엇을 먹든 모두 쓸모없다. 그만 먹으라!" 그대의 혀보다는
들소의 혀가 몸에 더 뿌리를 두고 있다. 그대는 들소에게 아무 풀이나
억지로 먹게 할 수 없다. 들소는 까다롭다. 그대는 개가 병들었을 때
억지로 먹게 할 수 없다. 개는 즉시 밖으로 나가 풀을 먹고 토할 것이다
개는 몸과 더 밀접하다.
먼저 인간은 이 몸이라는 현상에 대해 깊이 자각해야 한다. 그대는
죽은 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다. 몸의 소생, 부활이 필요하다. 그때서야
그대는 서서히 느낄 것이다. 몸 전체가 그 모든 욕망과 갈증 배고픔과
함께 가슴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고동치는 가슴은 단순한
메커니즘이 아니라 고동치는 삶이며 바로 삶의 맥박이다. 그 맥박은
만족과 지복을 준다. ""

당신이 장수식(長壽食)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여러 산야신들이
말합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당신의 비판이 장수식의 원칙보다는
식사조절에 대한 강박적인 태도를 향한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장수식은 순수한 도가(道家, Taoism)입니다. 거기엔 규정도 없고
금지도 없습니다. 그것은 각성과 자유와 감수성과 유별남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특정한 음식에 대한 집착이나 고정된
식단이나 강박적인 태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현미를
수식의 기본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주식의 요소일 뿐이어서, 중요한 것으로 이용할 수도 있고 하찮은 것으로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의견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먼저, 나는 모든 유별남에 반대한다. 종류를 불문하고 나는
모든 유별남에 반대한다. 유별남은 강박적인 사람들을 유혹하기 때문이다.
유별남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의 피난처가 된다.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유별남 뒤에 자신을 숨긴다. 그리고는 제도와 학설과 이념을 만들어
논리화한다.
한 여자가 살았는 데, 무척 사랑스런 여자였으나 거의 광적으로
청소에 집착했다. 온종일 집을 청소하고 온종일 집을 꾸몄다. 아무 목적. 없이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집 안에 들어오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잔디밭에서 만나곤 했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끊임없이 집을 장식하고
누구도 집 안에 들어오도록 하는 걸 못 崙소.pi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이 집 안을 더럽힐까 봐 그래요.n
"그러면 청소하고 꾸미는 목적이 뭔가
"청결함은 신 다음가는 거예요
지금, 이 여자는 미쳤다. 청결함이 바로 피난처가 되었다. 그것은
종교적 의식이 되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청소하느라 정신이 없다. 하秊
하루종일 청소하는 것이 그녀의 전체 생활이 되었다 이것은 순전히 낭비다
하지만 청결함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이득이 있다.
그녀는 완전한 논리를 가진 광인이다. 그녀의 남편마저 응접실un으로
들어오는 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녀는 아이를 가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더럽고 말썽을 일으켜서 일을 엉망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일생은 청결함의 제단에 제물로 바쳐졌다.
내가 말했다. "물론, 그대는 청결함은 신 다음이라는 걸 증명했다.
그대는 청결함을 신의 제단으로 만들었고, 일생을 그 제단에 바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물을 것이다. "제가 틀렸나요?"
그녀가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다. 청결함은 좋은 것이다. 위생적이다.
하지만 거기엔 한계가 있다. 유별난 사람들은 항상 한계를 넘는다.
이런 사람들은 문제가 심각하다.
나는 여자에게 말했다. "한 가지만 하라. 3일 동안 집을 청소하지 말라.
만약 그대가 3일 동안 집을 청소하지 않고도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으면
나 또한 그대와 합류해서 온종일 그대의 집을 청소하겠다. "
그녀가 말했다. "3일 동안이나 청소를 하지 않는다구요? 그건 불가능해요.
전 미치고 말 거예요." 그녀는 이미 미쳤다?
그레서 유별남 뒤에 숨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보일 때마다, 그 유별남이
무엇이건간에-장수식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반대한다. 나는 그 강박적인 태도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들어 보라. 한 남자가 축구시합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그의 아내가 신문을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여기를 보세요, 프레드. 자기
아내를 축구시합 티켓하고 바꾼 사람에 대한 기사가 실렸어요. 당신도
열렬한 팬이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겠죠? 그죠?"
프레드가 말했다. "물론 난 안 해 그건 어리석고 창피한 일이야.
시간이 반이나 지나갔쟎아.! "
이것이 팬의 마음이고, 유별난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럴듯한 이유들 뒤에 숨을 수가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자신의 배변(에 끊임없이 신경을 썼다. 거의
강박적이었다. 위가 안 좋을 때는 배변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배변에 대해 끊임없이 신경쓰고 명상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마치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생각의
주제이기라도 한 듯이. 그는 기도를 하거나 총독을 만나러 갔으나
인도의 운명과 자유에 대한 결정을 하기 위해 원탁회의에 참가했을 때에도
먼저 관장약을 먹어야 했다. 그의 일기에 관장약이 신(神)만큼이나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논쟁한다면, 그는 그 일에 대해 완벽한 논리를 펼칠 것이다.
위는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위를 청소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독소들과 이런저런 것들이 쌓인다. 위가 깨끗해야 마음도 깨끗할 수 있다
몸의 건강 없이 어떻게 마음이 건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서 그는
계속해서 배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별남이고 병의 일종이다. 그리고 그것은 건강한 마음을 보여 주지
못한다. 그것은 건강치 못한 마음을 보여 준다.
이런 태도를 나는 반대한다. 나는 유별난 여러 산야신들에게 말했다
‥‥‥ 한 청년이 와서, 자신은 물만 먹고 사는 법을 배우러 왔다고 말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를 범죄자로 만들려고 하는군.
만약 내가 물만 먹고 사는 법을 가르치면 그대는 죽을 것이네!·, 그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이 여위고 말랐는데,
오직 물을 통해서만 순수할 수 있다는
유별남을 지니고 있었다. 물만이 순수하고 다른 모든 것은
불순하다는 것이다. 그의 눈은 노랗게 변하고 있었다. 그는 잘 먹지 않았고
몸이 굶주리자 마침내 머리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열이 심해지자
그는 더욱더 자신을 정화하려고 애썼다. 나는 이런 사람들은 아주 극히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을 말해 두고 싶다.

장수식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내게 온다‥‥‥‥ 나는 특별히
아무 것도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어떤 걸 반대하지도 않는다. 단지 나는 삶을
진지할 뿐이다. 삶 안에는 엄청난 풍요가 있다‥‥‥‥ 그대는 말한다
"장수식은 순수한 도가(Taoism)이다. " 원리가 없고 학설이 없을 때
순수할 수 있다. 도가조차 순수한 도가가 아니다. 노자는 평생 동안 주장했다.
그는 제자를 거부했고, 그의 전 원칙에 대한 이론을 만드는
모든 시도를 거부했다. 그는 말했다. "한번 말해진 도는 더 이상
'도'가 아니다. 진리는 말해질 수 없다. 학설화될 수 없다. " 끝에 가서야 =
그는 책을 하나 썼는데, 그것 역시 강요를 받아서 한 것이다. 그가
중국을 떠날 때였다. 인도에 오려던 참이었던 듯하다. 모두가 마지막에는
인도로 왔었다. 인도는 지리학상의 지점이 아니다. 인도는 바로 모든
인간 의식의 원천이다. 방향을 전환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모두 동양으로
와야 한다. 동양(Orient)은 바로 방향설정(orientation)을 의미한다.
노자는‥‥‥ 물론 중국 학자들은 그가 절대 인도에 오려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에고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들은 노자가
남쪽으로 가려 했다고 말하는데, 인도가 남쪽이다. 그들은 노자가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말하는데, 인도는 중국의 남쪽이다. 그리고 물론 노자가
인도로 돌아온 것, 그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더없이 적절하다.
모두가 와야 한다. 인도는 모든 사람의 집이다.
노자는 중국 국경에서 정부 관리에게 붙잡혔다.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보물을 갖고 나라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당신은 우리 나라를 떠나기 전에 책을 써야
떠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많은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것을 써서 정부에 건네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국경에서 관리들의 강요로 글을 써야만 했다. 3일 만에
얼른 (도덕경) 전체를 썼다. 그러나 첫 줄에서
그는 말한다. "도는
말해질 수 없다. 도라고 말해진 도는 더 이상 도가 아니다.  그러니 도
(Taoism)조차 순수한 도(Tao)가 아니다. '이즘(ism)' 것을 불순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장수식에 대해선 잊어버리라. 그것이 순수한 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라. 그것은 이론이고 가설이다.
아무런 규정도 없고 금지도 없다. 아무런 규정이나 금지가 없는데
불필요하게 장수식에 대해 걱정하는가? 규정이나 규제가 없다면 자신e
장수식의 추종자라고 부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대는 장수식이 현미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현미에 미쳤다! 그들은 현미가 신이라고 생각하며 현미 없이 살면 뭔가
뒤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대는 말한다. "사람들은 현미를 장수식의
근본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의 요소이며 중요한 것은
이용할 수도 있고 하찮은 것으로 무시할 수도 있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현미마저 제외되고 무시되면, 그리고 원리원칙도, 규제도 없이
그것이 순수 도가라면 무엇이 남는가? 아무 것도 남시 않는다. 그때
그대는 기쁘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장수식의 추종자가 되라. 아무 상관 없다.
나는 유별남을 반대한다. 나는 원칙에 매인 삶을 반대한다. 나는
원칙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원칙에 매인 삶을 반대하는 것이다.
모든것은 그대의 내면의 존재로부터 순간순간 나와야 한다. 그것은 내면의
것이지 밖에서 강요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삶에 대한 깊은 감응 속에
움직여야 한다. 인간은 어떤 이념도 따라선 안된다. 이념을 따르면
그대는 이미 결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푀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미
정해진 중심에 의해 산다. 그대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대는 유연할 수 없다.
그대의 원칙, 그대의 이념, 그대의 중심, 그대의 결정은 그대로
흐르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결정된 것에 따라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자유롭고 매 순간이 그 자체의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이 과거로부터 가져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더없이 좋다. 그때
그대는 참된 원칙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대는 원칙에 매인 삶을 살아선
안된다.
진정 살아 있는 사람은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성격을 가질 수 없다.
성격은 항시 죽은 것이다. 성격은 그대를 에워싼 죽은 구조, 과거로부터
가져온 과거의 경험이다. 만약 성격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대는 전혀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반응한 것일 뿐이다. 그대는 감응하지 못한다.
감응은 즉각적이다. 삶은 상황과 도전을 창조하고 그대는 감응한다.
그대는 어떤 중심도 없고 어떤 결론도 없이 그대의 존재로부터 감응한다.
과거를 통해서가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감응이 나온다. 순수히
그리고 순결하게.
이러한 원칙을 나는 인정한다. 이러한 원칙을 나는 사랑한다 하지만
그대 자신을 억지로 밀어넣는, 그대를 훈련시키는 원칙은 모두 위험하다.
그런 원칙은 그대를 죽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들의 원칙이 그들을 죽였다. "

저는 비만이 있어서 오랫동안 이런저런 식사조절을 했지만
몸무게는 조금도 줄지가 않습니다.

그대는 몸은 어떠해야 한다는, 그대는 어떠해야 한다는 아마
완벽주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그대에게는 극히 뚜렷한 목표가 있다.
그 목표 때문에 부족함을 느끼고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거부하는 것이다:. 그 거부로 인해 그대는 불행함을 느낀다.
그런 목표와 이상들을 무너뜨리라. 세상은 어때야 한다, 그대는 어때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잃런다 해도 아무 것도 잃을 게 없다.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한번
그런 순간 속에 있게 되면 몸무게가 줄기 시작할 것이다. 몸을 살찌게
만드는 것은 몸에 대한 끊임없는 적대감이다. 몸을 계속 적대하면 몸은
불안을 느낀다. 그 불안 속에서 몸은 계속 먹게 된다.
그것은 엉마를 신뢰할 수 없는 아기와 같다. 만약 아기가 엄마를
실뢰할 수 없다면 아기는 엄마의 젖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 다시 젖을 먹을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불확실하기 때문에 아기는 젖을 먹으면서 안심할 수 없다. 그래서
젖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아기는 가능한 한 많이 먹으려 할 것이다.
미래가 불확실하기 메문에 채우려 할 것이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고
언제 젖을 먹을 수 있다고 느끼면,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알면
아기는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 아기는 휴식할 수 있다.
아기는 순간에 필요한 만큼만 먹을 수 있다. 저축할 필요가 없다.
사실, 살찌는 것은 저축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사람들은 계속
저축한다. 인간은 음식 없이도 석 달 동안 살 수 있다. 그만큼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낡고 오래된 생물학적 습성이다. 수천년 전
인간이 사냥꾼이었을 매 음식이 불확실한 시절이 있었다. 음식이
부족한 날도 있었고, 여러 날 동안 음식이 전혀 없을 때도 있었다.
인간은 이와 같은 생물학적 습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불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대에는 문제가 없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그렇다.
처음으로 사회는 음식이 충분해졌다. 미국인들은 절대로 살찌지 말아야 한다.
인도인들은 음식이 불확실하므로 살찌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
내 말은, 현대에는 언제든 맛있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물질적으로는 더 먹을 필요가 없는데도 이젠 심리적인 불안감이
 몸의 메커니즘을 건드려 몸이 불안해한다. 몸은 불안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더 먹는 것이다. 계속 먹어서 자신을
체우는 것이다. 그것은 빈 틈을 없앤다.
그런 관념들을 버리라! 그대가 개선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그대는 있는 그대로 완벽히 아름답다. 살기 시작하라! 완전해진 미래에 살겠다.
마음이 정한 이런저런 기준에 이르고 나면 살겠다고 생각하지 마라.
삶은 지금 여기에 있으며, 그대의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고 있다.
내일은 죽음이다. 오직 오늘 속에 삶이 있다‥‥‥‥ 삶은 항상 오늘이다.
살고 즐기라. 많이 즐길수록 덜 먹게 될 것이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많이 먹지 않는다. 과식은 불행과, 아픔과, 공허함에서, 음식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허전함에서 나온다. "

몸은 많은 지혜를 축적해 놓고 있다. 몸은 아주 지혜롭다. 너무 많이 먹으면
몸은 말한다. "그만!" 마음은 지혜롭지 않다. 마음은 말한다.
"맛이 좋군. 더 먹어." 만약 그대가 마음의 말을 듣는다면 마음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몸을 망가뜨리게 된다 마음의 말을 듣는다면, 마음은
어리석기 때문에 "계속 먹어" 하고 말할 것이다. 마음은 자기가 뭘 말하는지
모른다.
마음은 신생아이고, 배우지 않았다. 마음은 지혜롭지 못하다.
마음은 아직 어리석다. 몸의 말을 들으라. 몸이 "배고파" 하고
말할 때 먹으라. 몸이 "그만"이라고 말할 때 그만두라.
마음의 말을 듣는 것은 어린아이가 노인을 이끄는 격이다. 그들은 ·
스스로 함정에 빠질 것이다. 마음의 말을 들으면 먼저 지나치게 감각 속에
있게 되고 그리고 나면 질릴 것이다. 모든 감각이 그대에게 불행을 ;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면 모든 감각이 그대에게 더 많은 걱정과 갈등을
가져다 줄 것이다. 너무 먹으면 고통이 오고 구토가 일어날 것이다. _
그래서 몸 전체가 교란될 것이다. 그때 마음은 말한다. "먹는 건 지독한
일이야. 그러니 단식해." 단식 또한 위험하다. 만일 그대가 몸의 소리를 듣는다면
절대 과식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부족하게 먹지 않을 것이다.
몸은 그저 도를 따를 것이다.
몇몇 과학자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연구하여 아주 아름다운 현상을 발견했다.
어린아이들은 배가 고플 때마다 먹는다. 그들은 잠이 올 때만 잔다.
그들은 몸의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부모가 방해한다.
그들은 강요한다. "저녁 먹을 시간이다. 점심 시간이다. 이거다, 저거다. -
시간이다. 빨리 자라!" 그들은 몸의 소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험자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25명의
어린이들을 실험했는데 그들을 억지로 자게 하지 않았고 억지로 일어나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6개월 동안 아무런 강요도 받지 않았다.
그 결과 깊은 이해가 왔다.
아이들은 잘 잤다. 그들은 꿈을 덜 꾸었고, 악몽을 꾸지 않았다.
몽은 그들을 강요하는 부모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들은 먹는 것을 즐겼고
때로는 전혀 먹지 않았다. 몸에 느낌이 없을 때는 먹지 않았지만 "
결코 먹는 것 때문에 병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예기치 않았던 '"
한 가지를 이해하게 됐는데,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발견이었다. 오직 승찬
(僧璨)")만이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노자나 장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도의 스승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굉장한 발견이었는데, 아이들은
병이 나면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구자들은 왜 그 음식을 먹지 않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 음식들을
분석해 본 결과 그 병에는 그 음식들이 해롭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떻
아이들이 그런 걸정을 할 수 있었을까? 바로 몸 때문이다.
아이가 자라고 있을 때에는 언제나 성장에 필요한 것을 더 많이 먹는다.
그래서 분석해 본 결과, 그 안의 성분들이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음을 알아냈다 필요가 바뀌면 음식도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필요한 것이 바뀐 것이다.
같은 어린이가 어느 날엔 어떤 음식을 먹고
다음날엔 먹지 않았다. 거기서 과학자들은 몸의 지혜를 느꼈다
몸이 자신의 말을 하도록 허락한다면, 그대는 정도(正道)를, 훌륭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음식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삶에 적용된다. 그대의 성(性)이 잘못돼 가는 것은 마음 때문이다.
그대의 위가 잘못돼 가는 것은 마음 때문이다. 그대는 몸에게 간섭한다.
간섭하지 말라! 설령 그대가 그것을 석 달 동안 할 수 있을지라도
간섭하지 말라. 그러면 문득 그대는 아주 건강해질 것이고,
편안함이 찾아을 것이다. "

園 譯註
1) 마하트마(mahatma) : '위대한 영혼'이란 뜻으로 인도에서 수로 '성자'들에 대한
존칭으로 쓰는 말이다.
2) 차파티 :인도의 대표적인 음식 중의 하나로 납작한 밀가루떡.
3)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60) .아일랜드의 극작가,
문학비평가, 사회주의 선전문학가. 192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4) 카주라호(Khajuraho) : 인도 북부에 있는 도시로 여러 가지 성적인 조각이
새겨진 사원들로 유명하다
5) 푸리(Puri) :인도 동부 오리사 주(州)의 동부에 있는 도시.
6) 펀나라크(KonA.ak) :인도 동부 오리사 주(州) 중동부에 있는 유서 깊은
마을. 벵골만 연안에 자리잡고 있다.
7) 엘로라(Ello) :인도 서부 마하라슈트라 주(州)의 중부 엘로라 마을
가까이에 있는 일군의 장엄한 석굴 사원
8) 승찬(僧璨) :서주(徐州) 사람으로 선종 제3조인 중국 스님 선종 제2조
체가(慧可)의 종요(宗要)를 잇고, 서주 환공산에 은거했다. 후주(後周)의
무제가 불교를 탄압할 때에는 일정한 거주지 없이 사공산을 왕래하며 사람들 모르게
10여 년을 지냈다.
 

        제10장
           심리학

당신은 정신분석과 관련 치료법에 대해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발전한 프리츠 펄스(Fritz Perls)')의 게슈탈트 요법
(Ge班alt therapy)')과 가장 최신의 방법인 보이스 다이알로그
(Voice Dialogue)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이 요법들(thera-
pies)이 이미 명상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목표를 더 명확히 보게 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먼저, 프리츠 펄스의 게슈탈트 요법이나 여타의 것들도 이미
낡은 것이다 그것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유일한 새것은 가장 최근에
유행하는 보이스 다이알로그인데, 이것도 따음의 게임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이미 명상을 하고 있는 사람에겐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
정신요법은 명상의 질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정신요법은 단 한 사람의
각자(覺者)도 탄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신요법의 창시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동양의 깨달은 존재들은 정신요법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심리학이나 마음 자체에 대해서도 신경쓰지 않았다. _
그들에게 있어서 관건은 마음의 문제를 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마음에서 보다 쉽게 벗어나는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모두 종결된다. 일단 그대가 마음을 벗어나면 마음은 문제를
일으킬 만한 토양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그것은 끝없는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정신분석을 받는다. 그것이 옛것이냐 새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은 같은 주제의 변형일 뿐이다. 심리 치료를 받고 나면
스스로의 짐을 덜기 때문에 마음은 약간의 신선함과 상쾌함을 느낄 것이다.
또 마음에 대한 약간의 이해도 올 것이다 그것은 그대를 정상으로
유지시켜 준다.
실제로, 모든 정신요법은 기존의 틀에 봉사한다. 그 기능은 사람들이
비정상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대중의 규떰을 벗어나
금지된 일을 하고 있다면, 비록 그 일이 해를 주지 않는다 해도 사회는 그를
용납할 수 없다. 사람들은 그를 정상으로, 표준치로 끌어와야 한다.
정신요법사들의 작업은 마음을 청소하는 것이다. 그대의 메커니즘에
일종의 기름을 치는 것이다. 마음이 좀더 잘 작동하면, 비록 혁명적인
변화는 일으키지 않을지라도 그대는 마음의 작용을 좀더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원인이
제거된 것은 아니다. 마음 자체가 문제다. 따라서 그대는 한 가지 문제를
제거할 수는 있지만 마음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나무의 가지를 치는 것과 같다. 하나의 잎사귀를 치면 나무는
자존심과 위신 때문에 한 장의 잎사귀가 있던 자리에 석 장의 잎사귀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래서 정원사들은 계속 가지치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가지치기는 더 많은 잎사귀를 만들어 낸다.
마음의 경우도 이와 같다. 그대는 큰 비용을 들여 한 가지 문제를 이해해서
제거할 수는 있지만 문제를 일으킨 마음은 여전히 남게 되고,
정신분석은 그 마음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마음은 해결된 것보다
더 복잡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마음은 그대가 그 정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자연적으로 더 새롭고 복잡하고 더 커다란
문제를 만들어 낸다.
명상은 마음에 묶여 있는 정신분석이나 여타의 요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것은 그냥 마음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네 문제는 네가
알아서 해라. 나는 집으로 가겠다" 하고 말이다. 마음은 기생충이다.
자체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대를 자기 안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 계속해서 그대를, 그대의 두뇌를 먹을 수 있다. 한편
그대가 밖으로 뛰쳐나가면 마음은 무덤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나 커다란
처치 곤란했던 모든 문제가 간단히 소멸된다.
명상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그대는 다만 마음을 지켜보고 그 지켜봄
속에서 마음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리고 서서히 마음은 그 모든 문제들과
함께 사라진다. 안 그러면 마음은 이상한 문제들을 일으키게 된다
마음이 그대의 유일한 문제이다. 다른 모든 문제는 마음의 가지일 뿐이다.
명상은 마음을 바로 그 뿌리에서부터 자른다 그리고 이 모든 요법
게슈탈트와 보이쓰 다이알로그와 프리츠 펄스는 아직 명상에 들어
가지 못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이해해서 마음에서 나가는 출구를 찾도록
도와 주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도움이 되는 모든 종류의
요법을 사용하지만, 명상가에게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 요법들은
아직 명상에 익숙하지 못한 초기에만 유용하다. 한번 그대가 명상적이 되면
아무 요법도 필요치 않다. 그때에는 어떤 요법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초기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서양 산야신에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오직 서양적인 마음과 서양의 전통에 환해서만
옳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랑하므로 모든 소녀들은 자기의 어머니를
미워한다고 말할 때, 이 모든 것은 인간은 이성(異性)을 사랑한다고
성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딸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한다. 하지만 딸은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
특히 아버지와는 성관계를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머니와 성적인
관계다. 그래서 그들은 어머니를 질투하게 된다. 어머니가 그들의 적이다.
아들은 어머니와 사랑을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가 적이 된다.
일본인들은 이런 것을 생각할 수도 없다 인도인들도 마찬가지다
양육 방식이 전혀 다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칼 융 또는 아들러나 아
사지올리나 프리츠 펄스에겐 그런 개념이 없다. 그들은 사람들이 서양인들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꿈속에서도 하지 못했다.
동양에서는 정신분석이 그다지 도움이 못 된다. 서양인들을 위해,
나는 그들이 그룹을 통해 단지 마음을 정화시키길 바란다. 마음이 맑으면
명상에 들어가기가 더 용이하다. 하지만 명상에 들어가지 않고 마음의
정화에만 매달린다면 그대는 평생을 마음만 정화하고 다른 어디로도 가지
못할 것이다 지향이 다른 동양에서는 대학들이 정신분석이 아닌
명상을 연구해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동양에서는 어떻게 마음을 벗어나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만이 유일한 문제였다. 그러나 서양의 마음은 다른 식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에 마음을 초월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유태교의 경전이나 기독교의 경전들을 들여다보았지만
서양의 역사를 통틀어 마음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한 사람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그들은 기도하는 데 마음을 사용했고, 신을 믿는 데 마음을
사용했다. 그들은 종교적이 되고 선하게 되기 위해 마음을 사용했지만,
마음을 넘어설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오직 단 하나의 탐구만이 있었다. 동양의 모든 천재들은
다른 문제는 모두 제쳐두고 한 가지에 대해서만 매진해 왔는데, 그것은
어떻게 마음을 넘어서는가였다. 마음을 넘어섬으로써 문제를 도매로
해결할 수 있는데 왜 소매로 해결하려 하겠는가? 마음은 계속해서 창조해
낼 것이다. 마음은 대단한 창조력을 갖고 있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난다. 그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난다.
그것은 정신분석가에겐 좋은 일이다 정신분석가는 그대가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은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정신분석가들은 특정한 문제들만을 풀어 줄 뿐이다. 마음이
근원이다. 그는 결코 뿌리를 자르지 못한다. 가지만을, 기껏해야 가지만을
칠 뿐인데, 그것들은 다시 자라난다. 뿌리는 남아 있다.
명상은 바로 문제의 뿌리를 자르는 것이다. 반복하건대 마음이 유일한
문제이므로 마음을 넘어서지 않고는 결코 문제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동양이 수많은 각자(覺者)를 탄생시켰다는 사실에 대해 서양의
심리학자들이, 숙고해 보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 누구도
마음을 분석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마음을 초월하도록 도와주는
방법이 수백 가지나 발견되었다. 한번 그대가 마음을 넘어서면
모든 마음의 문제들이 마치 다른 사람의 문제처럼 보인다. 그대는 언덕 위의
주시자가 되고, 모든 문제는 골짜기 안에 있다. 그래서 그것들은
그대에게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그대는 그것들을 넘어섰다.
서양은 순전히 마음 중심적이다. 서양인들의 생각은 물질과 마음에
국한되어 있다. 그들은 물질은 실체이고 마음은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음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물질은 환영(幻影)이고 마음은 모든 환영, 투사, 꿈의 부산물이다.
인간의 실재는 물질과 마음을 모두 넘어서 있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실체를
세 부분으로 나눈다. 물질은 가장 바깥쪽에 있고 영혼은 가장 안쪽에 ◎ 있으며
마음은 둘 사이에 있다. 물질은 상대적 실재다. 물질은 절대적 실제가 아니며
상대적으로만 실재한다. 마음은 완전한 비실재이며, 영혼은
절대적인 실재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전혀 다른 규정이다. 서양의 범주는 단순하다
물질이 실체이고 마음은 부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마음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억하라. 명상을 하면 아무 것도 필요없다.
만약 명상을 하지 않는다면 이 정신요법들이 명상을 위한 디딤◎돌로서
유용할 것이다. 서양은 명상이라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사기꾼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명상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바보들이 뭔가를 말하면 추종자들이 모여드는데, 명상은 만트라를 암송하는 것도
아니고 깡충깡충 뛰는 것도 아니며 , 공중 부양(浮陽)도 아니다.
‥‥ 이러한 것들은 명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명상은 오직 마음을
넘어서서 관조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관조 속에 기적이, 삶의
신비가 있다. "

"나는 누구인가?"라는 영적인 질문과, 심리학적 상처로서의
"나는 누구인가?"의 차이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은 에고(ego)와 자아(self)의 차이이다.
에고는 그대가 누구라는 거짓된 관념이다. 그것은 마음의 날조일 뿐이다.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 만들어 낸 관념일 뿐, 그에 해당하는 실재는 없다.
세상과 관련해서라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관념이다.
세상에서 그대는 다른 에고들과 상대하기 때문이다. 마음윽 넘어서는 순간
그대는 에고도 넘어서게 된다. 그리곤 문득 그대가 항상 나라고
생각해 왔던 존재가 아니라는 것-그대의 실재는 전혀 다르다는 것,
그대의 실재는 몸이나 마음이 아니라는 것,  실재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진리와 궁극적인 허위의 바로 사이에 있다. 그것은
거짓!보다는 낫지만 참 진리만은 못하다.
그대는 아직도 존재와 단절되었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 단절은
그대의 타고난 권리인 지복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만일 그대가 이 벽을 깨고
실재의 광대함에 자신을 연다면 단절된 존재로서의 그대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면일 뿐이다. 다른 한 면에서 그대는
영원하고 광대한 실체로서, 깨달음 혹은 해방의 거대한 체험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그대는 먼저 에고를 제거해야 한다. 에고는 그대의 심리적인 상처이고
좀더 좋게 말하면 심리적인 드라마이다. 거짓된 에고를 모든 것의
궁극으로 받아들이는, 에고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종교들이 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경향의 모든 무신론적 종교이고, 공산주의이다.
그 무신론자들이 공산주의자는 아닐 수도 있지만, 어떤 종류든
무신론자들은 에고에서 멈춘다. 그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실재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사람들이다. 나는 무신론을 일종의 종교로,
여타의 종교들보다 낮은 형태의 종교로 간주한다. 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는 그보다 한발 앞선다. 그런데 거기엔 길의 끝까지 다다른 선
(禪)과 같은 종류가 있다. 이들은 단지 에고를 버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버릴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자아마저도 사라졌을 때,
집이 깨끗이 비었을 때, 그대가 '나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라야 만족한다. 이 무(無)는 궁극적인 것이 피어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한다. 그것은 다른 어느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있어 왔다.
단지 썩은 가구들로, 불필요한 물건들로 어지럽혀져 있었을  뿐이다.
마치 그대가 방에서 모든 것을 옮겨 방이 비게 되듯이 그대가 이
모든 것을 제거하여 주체가 비게 뵉 때, 그 주체의 비어 있음 속에서
궁극적인 체험의 꽃이 피어난다. 그대는 더 이상 없다. 당연히 그대는
옛날의 불행들, 옛날의 상처와 드라마들을 지닐 수 없다.
그대는 그대의 과거와 아무런 연결도 가질 수 없다.
갑자기 그대는 그대였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잘라낸다.
문득 새롭고 신선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이 열린다.
한편으로 그대는 사라지고, 한편으로는 그대의 참 존재가 처음으로
그 넘치는 영광과 그 절대적 광휘에 이를 기회를 갖는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그것은 부정의 과정이다. 심리적인 에고를 부정하고,
영적인 자아를 부정하라. 더 이상 부정할 것이 없을 때까지 계속
부정하라 그리고는 폭발! 문득 그대는 한 번도 집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깨달음과 함께 집에 당도한다 그대는 항상 거기에 있었다. 다만
그대의 눈이 대상에 쏠려 있었을 따름이다. 이제 그 모든 대상은 사라졌다.
오직 관조만이, 순수한 각성만이 남았다. 이 관조가 모든 불행과
지옥의 끝이다. 그것은 또한 황금의 문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 문이 처음으로
열렸다‥‥
사람들은 사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훈련시키려 한다.
그리고 아무도 만족해하는 것 같지 않다. 조금도. 만약 사람들이 살고자 한다면
한 가지를 배워야 한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그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살라. 미래의 삶을 위해
훈련하지 말라. 세상에 온갖 불행이 생겨나는 것은 그대가 사는 것을 까마득히
잊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행위에 몰두해 왔다.
남자와 결혼하는 순간, 그대는 그가 성실해지도록 훈련시킨다. 그가
얼마-동안 성실한지 한번 살아 보라. 2주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2주가
인간의 한계다! 최대한 깊이 살라. 그대의 삶과 사랑이 깊다면 3주째에도
그가 성실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너무 길게 계획하지 말라.
3주면 충분하다. 내 자신의 경험으로는, 만약 3주를 사랑으로 살았다면
4주는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첫 순간부터 일을 망치기
시작한다. 살기도 전에 훈련하려고 한다. 그대는 훈련으로 시간을 망가뜨려버려
적어도 2주는 그대를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이 이틀 만에 질리게 된다.
평생을 독신으로 산 여자가 있다. 그녀가 죽을 때 친구가 물었다. "넌
왜 결혼을 안 했니? 너는 굉장한 미인이잖아."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뭐가 아쉬워서 결혼을 해? 훈련에 관해서라면, 난 개를 훈련시키고 있어.
하지만 그 개는 전혀 배우려고 하지 않아. 날마다 훈련시키고 있지만
개는 여전히 밤 늦게 집에 들어와. 남편 대신 모든 말을 다 해 주는
앵무새도 있어. 아침에 앵무새가 말하지 "안녕, 여보!" 맨날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하인도 있어. 이런 나한테 왜 남편이 필요해?
모든 게 다 있는데." 이런 것들 때문에 남편이 필요하단 말인가?
아내가 필요한 것은 친밀감과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전시하기 위해서다. 이웃들에게 아내를 보여서 그런 미인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부러워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녀를 온갖 것으로
장식해서 모든 사람이 그대의 부를 부러워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그대의 부를 보여 주겠는가? 아내는 쇼윈도이다.
그녀는 그대의 성취, 그대의 권력을 보여 준다. 당연히 그대는 그녀가
더 사회적이 되도록 그대의 사업에 더 도움이 되도록 훈련시킨다.
위대한 남자의 성공 뒤에는 여자가 있다는 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옳은 것 같다.
때로는 아내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광적으로 돈 버는 일에 매달리기도 한다.
헨리 포드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왜 계속해서 돈을 법니까?
그렇게 많이 벌었으면서. 이제 즐기면서 쉴 때도 되지 않았나요." 그가
말했다. "그건 내가 돈을 번 이유가 아닙니다. 처음엔 아내로부터 도망치려고
돈 버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 다음엔 내가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지, 아내가 얼마나 더 쓸 수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
경쟁, 평생 경쟁이다! 사람들은 이상한 드라마에 빠져 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참되게 산다. 사람들은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한 남자가 연극을 보고 있다. 아내는 그에게 주인공이 얼마나 아내에게
극진한 애정을 보이는지 상기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마침내 남편이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 당신은 저 남자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는지 몰라! 게다가 저건 연기야. 실제가 아니라구. 저 남자가
훌륭한 배우인 건 확실해."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저 배우들이 실제 부부라는 걸 모르고 있나보군요."
그가 말했다. "맙소사! 그게 사실이라면, 저 남자는 내가 이제껏 본
배우 중에 가장 훌륭한 배우로군. 그렇지 않다면, 무대 위에서까지
자기 아내를 저토록 사랑한다는 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거야. 저 남자는
연기에 관한 한 거의 천재야."

그대는 살기 위해 여기 있다. 그대는 춤추기 위해 여기 있다. 그대는
삶윽 체험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 타인들이 그대를 위해 그 일을 하고 있다.
그대를 위해 사람들은 사랑하고, 유희하고, 온갖 것을 다하고 있다.
그러면 그대에겐 무엇이 남는가? 그대는 그저 구경을 하고 있을 뿐이다.
죽음은 텔레비전말고는 그대에게서 별로 앗아갈 게 없.을 것이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거짓된 삶의 방식과
생활양식을 만들어낸 것은 거짓 에고이다.
거짓된 모든 것을 버리라. 참되고 진실하라. 이것이 첫걸음이다.
그대가 일단 참되고 진실하면 그것이 얼마나 아를다운지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초원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궁극적 진리를 향한
더 이상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마지막 말과 마지막 체험을 향한
열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사람들은 거의 미쳤다. 전면적인 정화가 필요하다. 그들이 비정상인 것은
대개 거짓된 생활 때문이다. 거짓된 생활은 만족을 주지 못한다.
거짓된 음식은 영양분을 줄 수 없다 거짓된 물은 그대의 목마름을
해소하지 못한다. 거짓건 에고는 그대에게 진정한 삶을 줄 수 없다.
이것은 간단한 산수다. "'

이른바 속성 교정 요법(qLiick fix therapy)에 대한 뉴스위크)
의 기사에서 농담 하나를 읽었습니다. 한 중년 남자가 종이를
조각조각 찢어서는 가는 곳마다 흩뿌리는 강박적인 습관 때문에
가족들의 골칫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가족들은 비싼 돈을
들여 가며 프로이트 학파, 운 학파, 아들러 학파의 유명한
의사들에게 그를 끌고 다녔지만 실망스러운 결과뿐이었습니다
그 습관이 자리잡고 있을 무의식의 어두운 심연에 빛을 쬐어
주려고 애썼지만 허사였습니다.
마침내 그의 친척들이, 아직은 무명이지만 혁신적인 치료법을
쓰는 요법사에게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이 마법사는 자신의
환자를 데리고 사무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그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런 다음 놀란 가족들에게 "집에 데리고
가도 좋습니다. 치료가 다 됐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1년이
지나도 그의 습관이 재발하지 않자 고마운 마음이 든 가족들이
의사에게 환자더러 러라고 말했었는지 물었습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습니다. "종이를 찢지 마시오."
한 말씀 해 주시겠습니까?

삶의 비밀은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마음은 그것을 복잡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복잡한 무언가가 있을 때에만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에
마음은 복잡함을 사랑한다. 만약 복잡함이 없다면 마음이 존재할 필요성
자체가 없어진다. 마음은 그대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싶어하지 않는다.
마음은 하인일 뿐인데 어느새 주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대의 삶은
본말이 전도되었다
그 농담은 아주 명백한 사실을 암시한다. 남자는 종이를 조각조각 찢어서
사방에 버리고 있었다. 당연히 모든 사람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정신분석이 필요하고, 그의 정신상태를 잘 이해해서
그를 교정해 줄 어떤 훌륭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그에게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남자가 비정상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가족들은 프로이트 학파,
아들러 학파, 융 학파 등 위대한 정신분석가들에게 갔다
그리고 그 정신분석가들은 분명 열심히 치료했을 것이다. 몇 시간을, 몇 년을
남자의 꿈을 분석하며 왜 그가 종이를 조각조각 찢어 사방에 버리는지
원인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최후의 수단으로 그들은 그를 마법사에게 데려갔고, 그가 남자를 치료했다.
하지만 뉴스위크지는 점잖은 체하는 잡지이기 때문에 농담을 완결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는 그 농담이 왜 그렇게 위대한지 모르는 것이다.
마법사는 층계를 오르내리며 남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종이 찢는
일을 그만해. 안 그러면 꼭대기에서 너를 걷어차겠어." 더구나 그는 힘이
좋은 남자였다. "그러니까 조심해. 나는 정신분석 같은 건 안 믿어.
단지 걷어차는 것만 믿을 뿐이야, 내가 사람들을 이 자리에서 걷어차면
사람들은 수백 계단을 굴러 길가로 떨어지지 이제 집에 가도 좋아.
다만 내가 단 한 가지 비결을 갖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 어떤 정신병자든지
나한테 데려오면 나는 고친다. 내가 너를 데리고 이 층계들을 오르내리는 건
너를 걷어찬다는 게 뭘 뜻하는지 보여 주기 위해서야. 그러니 이제
집에 가서 이것만 기억하고 있어. 다음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
다냥 내가 말한 대로 시행하겠어." 그리고 남자는 그 말을 이해했다.
누구라도 이해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 부분을 빠뜨려 농담의 맛을 손상시켰다. 그 남자는 종이를
조각조각 찢어 구석구석에 버리는 그 어린애 같은 짓을 즐긴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일로 당황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유치한 현상이었다. 남자는 정신이
지체되었을 뿐, 어떤 정신분석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멋지게
걷어차이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이 그가 즉각적으로 이해한 언어였다.
수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단순한 일을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의 문제들은 보통 아주 간단하나 마음이 그대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고 그대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대의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한 소년을 만난 일이 있다. 16∼17세 정도였는데, 그의 가족들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소년 때문에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소년은 파리 두 마리가 뱃속으로 들어와 몸 속을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머릿속에 있고, 지금은 손으로 왔다는 식이었다
여러 의사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병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x레이도 찍어 보았지만 파리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은 "네 몸 안에는
파리가 없어" 하고 말했다.
그러자 소년이 말했다. "선생님을 어떻게 믿죠? 파리들이 제 몸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어요. 제 체험을 믿어야 할까요, 선생님의 설명을
믿어야 할까요?"
누군가가 우연히 그 부모에게 내 이야기를 해서, 부모가 소년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자초지종을 들었다. 소년은 이 의사 저 의사에게
신물이 났고 "파리는 없다"는 말에 지쳤기 때문에, 마뜩찮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했다. "사람을 제대로 찾아왔군요. 나는 파리를 볼 수 있소.
가여운 소년이 고통받고 있는데, 당신들은 그가 어리석다고만 말해 왔군요.
소년은 안심했다. 나는 호의적이었고, 처음으로 파리가 있다는
생각을 인정해 준 사람이었다.
내가 말했다. "나는 파리들이 어떻게 들어갔는지 안다. 분명 입이 벌어졌을 때
들어갔을 거야."
"그래요."
"아주 흔한 일이지. 입을 벌리고 자면 뭐든지 들어갈 수 있단다.
파리만 들어간 게 다행이야. 나는 쥐가 들어간 사람도 보았다. "
"맙소사, 쥐가요?"
내가 말했다. "쥐만이 아니다. 쥐를 쫓아서 고양이도 들어갔지,"
"그 사람들은 엄청 고생하겠네요."
"그렇지. 너는 아무 것도 아니야, 네 경우는 아주 간단해. 겨우 파리
두 마린데 뭘. 여기 편하게 누워 있거라. 내가 파리들을 꺼내 주마."
"선생님은 불쌍한 저를 이해해 준 첫번째 분이예요. 아무도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나는 파리가 있다고 했어요. 그 자리를 가리켜 주면서
여기에 있다고, 지금 이쪽으로 갔다고‥‥‥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웃었어요. 나를 바보로 만들었어요."
"). 사란들이 모두 바보다. 이런 경우를 탕해 보지 않아서 그래.
이런 건 네 전공이야, 나는 입을 벌리고 자는 사람들만 봐 주거든 "
"선생님은 정말 제 병을 아시는 것 같아요. 파리가 있다는 걸 금방 아셨고,
위치까지 알아내셨잖아요."
나는 그의 부모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하고 소년과 함께 15분 동안 있었다.
나는 그에게 누우라고 말했다. 그리고 소년의 눈을 눈가리개로
가리고 나서 입을 벌리라고 했다.
그러자 소년이 말했다. "또 파리가 들어가면‥‥‥‥
"걱정하지 마라. 여기는 에어컨 때문에 파리가 없다. 입을 벌리고 누워 있으면
내가 파리들이 밖으로 나오도록 설득해 보마."
나는 소년을 남겨 두고 집 주변을 돌아다니며 어찌어찌해서 파리 두
마리를 잡았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나는 한 번도 파리를 잡아 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는 파리 두 마리를 작은 병에 담아 왔다.
그리고는 소년의 입에 병을 갖다 데고 나서 눈가리개를 치우고 말했다.
봐라! "
소년이 말했다. "이 조그만 파리 두 마리가‥‥‥ 얼마나 소동을 피우는지 몰라요.
내 생활을 토두 망쳤어요. 이 파리들을 저한테 주시겠어요?"
"그러지." 나는 병의 뚜껑을 닫아 소년에게 건네주면서 물었다. "뭘
하려고?"
"한 일도 없이 돈만 받고는 '파리는 없다'고 얘기한 의사들과 요법사들에게
가겠어요. 저한테 그렇게 말한 사람들에게‥‥‥ 이게 그 파리들이라는 걸
보여 주러 가겠어요."

그는 치유되었다. 그의 마음은 단지 한 생각에 열중했을 뿐이다.
만약 그대가 정신분석가에게 간다면 그는 수많은 학설과 설명으로 허풍을
떨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건드려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문제를 철학화해서 불쌍한
환자에게 그 철학을 적용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분분 마음의 병은-병의 70%가 마음의 병이다-쉽게
치유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인정하는 것이다. 부정하지 말라.
그대의 부정은 그 사람의 자존심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부정하면
할수록 그의 존재는 더 고집한다. 그것은 간단한 논리다.
그대가 그의 이해를 부정하고, 그의 느낌을 부정하고, 그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그의 존엄성을 부정한다. 그대는 말한다. "너는 아무 것도 모른다.
네 몸에 대해서조차도!
첫 단계는 인정하는 것이다. "네가 옳다. 너를 부정한 사람들이 틀렸다.
그러면 작업의 반은 끝난 것이다. 이제 그 사람과 공감대가 형성된다.
마음의 병으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공감이 필요하다.
부정이 아니라 인정이 필요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미친 사람으로, 정신병자로
격하되고 싶지 않다. 그저 그들과 공감하라. 그들을 이해하라.
사랑하라.
그들이 그대에게 다가와서 쉬운 길을 찾도록 하라. 프로이트 경전-
그것들은 거의 성경이다-을 가지고, 둘러 가지 말라 정신분석 서적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대는 이 모든 관념들을 그 불쌍한 사람에게
적용하려고 하고, 그는 별로 아는 게 없다.
나 자신이 이해하는 바로는 모든 사람은 사랑을 필요로 하고, 사랑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모든 사람들은 우정과 친애와 공감을 필요로 한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주고 싶어한다
조지 버나드 쇼가 80세가 다 되었을 때 일어난 일이다. 그의 의사∼
주치의-는 90세였다. 둘은 절친한 친구였다.
한번은 한밤중에 버나드 쇼가 갑자기 심장에 통증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겁이 났다. 심장마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즉시 오게. 내가 다시는 일출을 보지 못할지도 모르네."
의사가 말했다. "잘 버티게. 내가 갈 테니 걱정하지 말게." 의사가 왔다.
세 군데나 되는 계단을 90세의 노인이 가방을 짊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어 올라와야 했다
그는 가방을 마루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버나드 쇼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의사는 손을 자기 심장에 얹고 있었다. 버나드
쇼가 말했다. "맙소사, 자네야말로 심장마비군!" 그는 90세의 노인이
한밤중에 세 군데나 되는 계단을 뛰어올라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버나드 쇼는 일어나 선풍기를 돌리고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어 주고는
밤이 추웠으므로 그에게 브랜디를 마시게 하며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를 담요로 덮어 주고, 자기의 심장마비 때문에 의사가 불려 왔다는 것은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반 시간 후에 의사는 좋아지는 것을 느끼고 그에게 말했다. "이제 됐네.
정말 심각한 심장마디였네. 이런 일이 세 번씩이나 일어났으니 이젠
마지막이라 생각했지. 그런데 자네가 나를 많이 도와 주었네. 이제
돈을 내게."
버나드 쇼가 말했다 "자네에게 돈을? 내가 뛰어다니면서 이것저것
가져와 자네에게 봉사했네. 자네가 돈을 줘야 하잖나."
의사가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그것은 모두 연기였네. 나는 모든
심장병 환자들에게 그렇게 하네. 그러면 언제든지 효과를 보지. 환자들은
자신의 심장마비는 잊어버리고 90세의 노인인 나를 돌보기 시작하네.
아무 말 말고 돈을 내게. 밤이 절반이나 지났으니 집에 가야겠네:'
그는 결국 돈을 받아냈다.
버나드 쇼가 말했다. "이건 대단한 일이야. 나는 항상 내가 익살꾼이기라고
생각했지만, 이 의사는 실용적인 익살꾼이야. 그는 정말로 나를 치유했어.
그는 자신의 심장을 검사해 봤지만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는 그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사소한 통증일 뿐이었는데 그의 마음이
크게 부풀어 ‥‥ 심장마비에 대한 두려움, 심장마비에 대한 생각, 죽음에 대한
생각이 확대된 것이었다.
하지만 의사는 정말 훌릉했다. 그는 버나드 쇼를 일으켜세워 모든
봉사를 받고 좋은 음료수를 마셨으며, 마침래는 돈까지 받아내 계단을 내려갔다.
버나드 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모든
심장병에 이런 식으로 대처해서 늘 성공했다고 말했어. 단지 자신의 나이를 가지고
멋지게 처리했어. 저러면 누구라도 자기 병을 잊어버릴 거야.
다른 의사라면 그것을 복잡한 상황으로 만들어 주사와 약과 휴식을 주고
혹은 공기를 바꾸거나 24시간 간호사를 대기시켰을 거야.
하지만 이 사람은 복잡하지 않게, 빠르고 신속하게 처리했어."

나는 마음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사례들을 보아 왔다. 그들이 필요로하는 것은
극히 이해력 있고 다정하고 사랑스런 접근이 전부이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마다 독특한 치료법이 필요하다. 환자에게 적용된 치료법이
일반적이고 상식적이면, 환자는 자신이 온갖 부류의 의사들
-역증요법사, 동종요법사, 자연요법사, 아유르베다의사, 침술사, 지압사-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아무도 자기를
호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병이 뭔가 아주
특별한 것이라는 사실에 어떤 에고를 갖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병이
특별하게 인정되기를 원한다. 병은 대용품이다.
누구나가 특별하기를, 비범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누구나 위대한 음악가, 위대한 무용가, 위대한 시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위대한 음악가가 되려면 길고 고된 훈련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닫혀 있는 것 같다. 누구의 가슴에도 열린 창문이
달려 있지 않다. 누구의 문도 손님을 환영하기 위해 열려 있지 않다.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이 이상한 사태를 유발한다. 진정 인간의 마음이
필요로 하는 것은 채워지지 않고, 마음은 이상하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종이를 찢어서 여기저기에 흩뿌린 것은 바로 "내가 여기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나는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 하고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인정받지 못하고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받은 치료는 병보다 더 나쁘다.
누구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진짜 병이었다. 그런데
이제 마법사가 그를 치료한다. "만일 또 그 짓을 하면 너를 힘껏 걷어차서
이 수백 칸이나 되는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게 하겠어. 그러면
너는 길바닥에 종이조각처럼 찢어질 거야." 그래서 그는 그 짓을 그만· 두었다.
그것은 그가 사랑보다는 공포심을 더 얻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공포 또한 그대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다. 그것은 보다 나쁜 변화이다. 사랑이 가능한데 그것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 왜 이용하지 않는가?
나는 사랑보다 더 좋은 정신요법을 알지 못한다. 겅신요법사가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다면 병은 분석이 없이도 사라질 것이다.
분석은 도피일 뿐이다. 정신요법사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회피하고 있다. 그는 환자를 정면으로 보는 것을 회피하고 있다. 그는
진실을 알게 되는 걸 두려워한다.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진영인 프로이트
진영의 모든 정신분석가들은 환자의 정면에 앉지 않는다 환자를
긴 의자에 눕히고, 자신은 긴 의자 뒤에 앉는다. 환자가 긴 의자에  누워
아무도 없는 데 대고 말을 하고, 정신분석가는 그곳에 그냥 앉아  있는다.
인간적인 접촉이란 없다. 그는 환자의 손을 잡을 수도, 환자의
눈을 들여다볼 수도 없다
동양에서는 정신분석과 같은 일이 행해진 적이 없다. 명상이 깊은
수천 명의 스승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가면 누구라도 그들의 사랑과 연민을
받을 수 있고, 그들이 환자의 눈을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치유되었다. 그것은 정신분석이 없어도 된다는 얘기이다.
동양에서는 신경증 환자나 정신병자들이 즉각 변화되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무한한 사랑이 전부였다.
평화와 침묵의 사람, 바로 그의 현존이 약이다. 오랫동안 명상해 온
사람은 거대한 원천이 된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발산한다.
가슴은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 뭔가가 그대의 가장 깊은 곳의 존재에
닿아 그대를 변화시킨다.
문제는 단순하다. 해결책은 단순하다 단순함을 알기 위해서는 마음을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침묵 속에서, 평화 속에서, 기쁨 속에서 햄해진 것은
무엇이든 약효가 있고, 건강을 나누어 줄 것이다 그것은 치유의
힘이 될 것이다. ""

붓다들의 심리학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제자들이
동요되거나 막히거나 덫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적절한
순간에 밀거나 당기거나 부추기거나 치거나 입맞출 필요가
있는 깨달은 존재들만을 위한 과학인 것처럼 들립니다. 지난
30년간 당신이 발견한 것을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대의 질문은 근본적으로 대답이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대에게 몇 가지 암시를 줄 수는 있다 그대가 절대로 그 핵심을 이해하지는
못하리라는 확신은 들지만. 하지만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대 쪽에서 아주 수동적이고 고요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다면, 해석하지 않고 새소리를 듣듯이 들을 수 있다면
아마도 어떤 문이 열릴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 과정은
별로 어렵지 않다. 우리는 오랫동안 중독되어 왔다. 우리는 음악을 듣듯이
단순히 듣지를 못한다. 우리는 즉각 반응하고, 해석하고, 그것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우리는 마음 속을 방황하고, 음악은 지나가 버린다.
먼저, '붓다들의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쓸 때 그 말을 통상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깨달은 사람은 마음을 넘어서 있다. 실제로,
마음은 꿈들이 사라지듯이 스러져 버렸다. 서양의 모든 심리학들은
마음의 기능을 알아내는 데 관심을 쏟는다. 마음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왜
어떤 때는 제대로 작용하고 어떤 때는 그르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들은 진리가 아닌 기본적인 가설을 하나 받아들였다. 사람은 마음
이상이 아니며, 사람은 몸-마음의 구조라는 것이다. 자연히 심리학은
그대의 몸과 그 기능을 연구하고, 그대의 마음과 그 기능을 연구한다.
그대가 알아야 할 첫번째 핵심은, 마음에 의해 제한되지 않고 마음의
작용으로 규정될 수 없는 또 다른 공간을 자신 앉아서 발견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사념이 없고 퐈문이 없는 그 침묵의 공간이 붓다들의
심리학의 출발점이다.
'심리학'이라는 말은 세계 도처에서 완전히 잘못 사용되고 있지만
우리는 관습화한 것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린다. '심리학(psychology)
이라는 말 자체는 마음이 아니라 영혼(psyche)과 관련된 어떤 것을 가리킨다.
심리학의 원래 의미는 영혼(soLll)의 과학이라는 뜻이다. 마음의
과학이 아니다. 심리학은 잘못된 이름이고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직하다면 이름을 바꿔야 한다. 영혼의 과학이란
의미에서 보면 세상에 심리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해를 돕기 위해 임의로 말하자면, 인간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하지만 기억하라. 단지 임의로 분리한 것 뿐이다. 그대는 나뉠 수 없는
개체다.
몸은 그대의 바깥 부분이다. 그것은 존재가 그대에게 준 무한히 가치 있는
도구이다. 그대는 그대 몸의 존재에 대해 감사해 본 적이 없다.
그대는 몸이 그대를 위해 70년, 80년간, 어떤 곳에서는 150년간, 그리고
소련의 변방에서는 180년까지 줄곧 해 온 일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일흔 살이 되면 죽는다는 일반적인 관념은 사실이 아닌 허구인데, 그대의 몸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 허구를 그저 따라가고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조지 버나드 쇼가 아흔 살이 되기 직전, 여생을 보내기 위해
런던 교외를 돌아다니며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들은
굉장히 의아해하며 물었다. "도대체 이유가 뭔가? 자네는 모든 게
갖춰진 근사한 집이 있는데 왜 새 집을 구하려고 하나? 그것도 아주
이상한 방법으로. 자네가 노망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있네."
그는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며 시내가 아닌 공동묘지로 가서는 비석에 쓰인
글을 읽곤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쓰인 비석이 있는
마을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이 사람은 때가 아닌 죽음을 맞았다.
그는 112세밖에 안 되었다. "
그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세계적인 최면이네.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수명은 70년이라는 생각이 내려왔고, 인간의 몸은
단순히 그것을 따르고 있네. 만약 평균 수명이 112세인 마을에서 70세로
죽은 사람이 있다면 마을 사람들은 그가 '전혀 때가 아닐 때에
죽었다고, 죽을 때가 아닐 때 죽었다고 생각할걸세." 조지 버나드 쇼는 남은
생애를 그 마을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
파키스탄인들이 사는 캐시미르에서는 사람들이 백오십 살까지 아무
탈 없이 산다. 그것은 바로 일흔 살이라는 관념이 그들의 마음을 오염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련 변방의 아제르바이잔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사람들이 적어도 백팔십 살까지 사는데, 소수만 그런 게 아니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나이까지 살면서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은퇴하지 않고 들이나 정원에서 일하고 있다.
나는 이 사실을 나의 교수에게 말했으나 그는 믿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나는 철학과 심리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모든 인간이 심리학적
조건화(conditioning)로 인해 죽는다는 자네 생각에 동의할 수 없네 "
내가 말했다. "제가 보여 드리죠."
그가 말했다. "무슨 말인가?"
"며칠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건 논쟁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교수님에게는 증거가 필요할 겁니다. "
그 교수는 학교에서 1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살았다. 그는 건강했고,
매일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어느 날 나는 그의 아내에게 가서 말했다.
"제 편이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내일 아침 로이 교수님이 일어나면
왠 일이세요? 잠을 잘 못 잤어요? 안색이 무척 창백하군요. 열은 없으세요?
하고 말씀해 주세요."
다음날 아침, 그는 아내의 말을 단박에 부정했다.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요?
나는 거뜬해 열도 없고 잠도 잘 잤소. 컨디션이 최상이라구."
나는 그의 아내에게 그가 말하는 것을 정확히 적어 두도록 말해 왔고,
나중에 그 기록들을 모았다.
나는 그 집의 정원사에게도 말했다. "교수님이 마당으로 나오시면
이렇게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십니까? 많이 편찮아 보이시는군요:
그리고 그분이 말한 것을 잊지 말고 적으세요." 교수는 정원사의 말을 듣고
말했다. "밤에 잠을 잘 못 잔 것 같아."
그의 집 옆에는 우체국이 있었는데, 그는 그 앞을 매일 지나야만 했다.
우체국장은 그의 친구였는데, 나는 우체국장에게도 말해 놓았다.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우체국장이 물었다. "그런데 뭘 하려고 그러는 건가?"
내가 말했다. "저와 로이 교수님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서 그분께 뭘
좀 증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나중에 사실을 전부 말씀 드리죠. 한 가지만
해 주세요. 로이 교수님이 지나갈 때 밖으로 나와 그분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세요. '자네 비틀거리는구만, 오늘은 학교를 쉬게. 부총장에는
자네 상태가 좋지 않다고 알려 주겠네.'
교수가 우체국장의 말을 듣고 말했다. "나도 가지 않을 생각이네.
몸에 뭔가 이상이 생긴 게 확실해."
최종적으로 나는 늘 학과의 문 앞에 앉아 있던 철학과의 사환을 설득해야 했다.
그를 설득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웠지만, 그는 로이 교수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를 알고 있었고 내가 교수에게 어떤 해도 끼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말했다. "교수님이 오는 순간 펄쩍 뛰어
그분을 잡아. 그분이 저항해도 개의치 말고, 그분을 긴 의자에
눕히고 이렇게 말해 줘. "1마일씩이나 걸어다니실 때가 아닙니다.
교수님은 굉장히 편찮으십니다 "
"어떻게 미천한 사환인 내가‥‥‥
"걱정하지 마. 너한테 해가 가지 않도록 내가 보증할게. 그분이 말하는 걸
기록하는 것만 잊지 마. 그분이 저항했는지 안 했는지도 기억해두고."
교수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쉽게 사환의 생각에 따라 긴 의자에 누워서
사환에게 말했다. "학과의 차(車)를 쓸 수 있으면 기사에게 나를
좀 데려다 주라고 말해라‥‥‥‥ 나는 다시 그 1마일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그래서 나는 그 기록들을 전부 모았다. 로이 교수는 정신분석가가 환자들에게
제공하는 긴 의자에 누워 있었는데, 마치 여러 달 동안 앓은
사람처럼 보였다. 목소리도 속삭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말했다.
편찮으신 게 분명하군요. 그런데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여러 달
동안 앓았던 것처럼 보일 만큼 편찮으시게 되셨습니까? 어젯저녁에
저와 헤어질 때만 해도 아주 좋으셨잖습니까."
"나도 놀랐네."
"놀라실 필요없습니다. 이것들을 읽어 보십시오!"
아내에서 사환에 이르기까지 기록한 내용들을 읽고 나서 그는 갑자기
완벽히 좋아졌다. 그가 말했다. "자네는 논쟁을 하지 않는 편이 좋은것 같군.
못 말릴 친구로군! 자넨 날 죽일 수도 있었네. 이미 유언장까지 만들려고
생각했지 ."
내가 말했다. "이것이 며칠 전 교수님과 논쟁했던 것에 대한 대답입니다.
몸은 마음의 생각들을 따라간다는 겁니다. "
거의 전세계적으로 70년이 고정된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몸의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에 의한 몸의 타락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모든 종교들은 몸에 반대한다. 그러나 몸은 그대의 생명이며,
존재와 교감을 나누는 통로이다.
숨을 쉬는 것도 몸이고, 그대를 살아 있게 하는 것도 몸이며, 거의
모든 기적을 행하는 것도 몸이다. 그대는 빵 한 덩어리를 피로 바꾸고
여러 가지 성분으로 분류해 필요한 곳으로 보내는 방법을 아는가? 그대는
그대의 뇌가 얼마만큼의 산소를 필요로 하는지 아는가? 뇌가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면 그대는 단 6분 안에 혼수상태가 될 것이다. 평생 동안
그대의 몸은 뇌에 끊임없이 정확한 양의 산소를 공급하고 있다.
그대는 호흡의 과정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분명 호흡은 그대가
하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호흡을 하는 건 몸이다. 만약 그대가 호흡을
하고 있었다면 그대는 지금 살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수많은 걱정으로 인해
그대는 숨쉬는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릴 수도 있다. 특히 밤에는
숨을 쉬든지 잠을 자든지 한 가지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몸 안에 들어
오는 공기 속에는 위험한 요소들이 많기 때문에 호흡은 쉬운 과정이 아니다.
몸은 오직 생명에 자양분이 되는 것들만 선별하고, 그대에게 위험한
모든 것, 특히 탄산가스를 날숨을 통해 내보낸다.
세상의 어떤 종효도 몸의 지혜에 감사하지 않았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도
그대의 몸보다는 지혜롭지 않다. 몸의 기능은 너무나 완벽하다.
통제는 파괴적일 수 있기 때문에, 몸의 이해력은 완전히 그대의 통제 밖에
있어 왔다.
따라서 그대의 생명과 존재의 첫번째 요소는 몸이다. 몸은 실재적이고
솔직하고 진실하다. 모든 종교가 몸을 붕괴시키려고 노력해 왔지만,
그것을 붕괴시킬 길은 없다. 사람들은 그대에게 자연을 거스르고 몸의
요구를 거스르는 단식을 가르친다. 오랫동안 단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성자가 된다. 나는 그런 사람을 군중의 어리석음에 지배당하는
제일 큰 바보라고 부르겠다. 종교들은 몸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도 없이
그대에게 독신생활을 하라고 가르친다. 그대는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산소를 호흡한다 그대 안에 피가 창조되었듯이, 그대의 성 에너지
또한 창조되었다. 그것은 그대를 넘어서 있다. 진정한 독신주의자는
세상을 통틀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독신주의자인 양하는 모든
성직자들에게, 나는 과학자들로부터 검진을 받으라고 요구한다. 과학자들은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분비선과 똑같은 에너지를
가졌다는 것을 밝혀 낼 것이다
단식이 죄악인 것처럼, 독신주의는 죄악이다. 그것은 집착을 만들어 낸다.
너무 많이 먹는 것도 죄악이며 충분히 먹지 않는 것 또한 죄악이다.
만약 몸의 소리를 듣고 순순히 따른다면, 고타마 붓다나 마하비라나
예수 그리스도가 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칠 필요가 없다.
몸은 깊이 새겨진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어서, 그대는 그 프로그램을 왜곡
시킬 수는 있지만 바꿀 수는 없다.
따라서 그대에게 가르친다. 먼저 몸을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라.
그것이 붓다들의 심리학, 깨달은 자들의 심리학의 기초가 될 것이다.
몸 다음의 두번째 것이 마음이다. 마음은 순전히 허구다. 그것은
온갖 부류의 기생충들에게 너무나 많이 이용되어 왔다. 그 기생충이란
그대에게 몸을 반대하고 마음을 지지하도록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두뇌라
불리는 메커니즘이 있다. 두뇌는 몸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 속에는 새겨진
프로그램이 없다. 자연은 너무나 자비롭다. 그대의 두뇌에 아무런
프로그램도 새기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둔다는 것은 존재계가 그대에게
자유를 준다는 뜻이다. 그대가 두뇌로 무엇을 만들고 싶든지 그대는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자연의 편에서는 자비였던 것이 성직자들, 정치가들.
소위 위대한 자들에 의해 이용당해 왔다. 그들은 온갖 난센스들로 마음을
채울 엄청난 호회를 맞았다.
마음은 깨끗한 석판이라서 그대가 마음에 적는 모든 것이 그대의
학설이 되고 그대의 종교가 되고 그대의 정치 이념이 된다. 그리고 모든
부모, 모든 사회는 그대의 두뇌가 그대의 수중에 남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즉각 꾸란, 성경, 바가바드 기타를 적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대가
사회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성인이 되면, 더 이상 그대 자신이 아니다.
이것은 너무나 교활한 범죄인데,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가톨릭교도나 힌두교도나 자이나교도가
되도록 강요할 권리가 없다. 아이가 그대를 통해 해어나기는 했지만
그대에게 속한 건 아니다. 그대는 살아 있는 존재의 소유자가 될 수 없다.
그대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들이 아무 설득 없이, 아무 체벌 없이, 다른 사람의 어떤 노력도 없이
자연스럽게 자랄 수 있도록 자유를 줘야 한다. 두뇌는 완벽하다.
그것은 자연이 그대에게 준 자유이자 성장할 공간이다. ~
그것은 자연이 그대에게 준 자유이자 성장할 공간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 공간을 성장시키기도 전에 사회는 온갖 난센스로 그 안을 채워
버린다.
나는 룽가 교수를 알고 있다. 그는 마하트마 간디의 아쉬람에 살았다.
거기엔 채 20명도 되지 않는 과부와 괴짜들밖에 없어서, 아쉬람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자유로운 식사, 자유로운 복장,
자유로운 숙소 등 모두 어리석은 짓들뿐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예배라고 부르고
기도라고 부른다.
룽가 교수는 교육받은 사람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대는
교육받기 이전에 이미 물들고 오염되었다. 그는 6개월간 계속해서 소똥을
먹고 소의 오줌을 마셨다. 그게 그가 먹는 음식의 전부였고, 그것은 그를
위대한 성자로 만들었다. 마하트마 간디조차 그가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선언했다. 깨달음이 소똥을 먹는 것으로 성취될 수 있다면, 더 좋은
깨달음은 틀림없이 황소의 똥을 먹어서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하트마 간디가 그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을 때 전 국민이 순순히
그걸 믿었다. 그 이야기를 비난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나는 룽가 교수에게 말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당신은 이 나라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오."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경쟁이었다.
그러나 그대의 모든 종교를 보라. 종교가 그대의 마음에 무엇을 채워 왔는지
모든 힌두교도들은 소변을 보러 갈 때‥‥‥ 실을 몸에 감는다. 그것은
유태교도들이 아이들에게 할례를 하는 것과 유사한 실 의식이다. 나는
유태교도들이 그토록 명석한 이유가 할례 때문이라는 한 랍비의 주장을
들었는데, 그대는 믿겠는가? 이슬람교도들도 이보다 늦은 연령에 똑같은
짓을 한다.
유태교도들에게는 고유한 세례 방식이 있다. 힌두교도들은 실 의식을 통해
아이들을 힌두 사회의 일원으로 만든다. 실 한 가닥을 목에 걸면,
사람들이 성경을 암송한다. 모든 힌두교인들은 소변보러 갈 때 그 실을
셔츠 밖으로 내어 귀를 실로 싸고 가게 되어 있다. 나는 교수들이,
부총장들이 그와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트리파티라는 한 부총장을 현장에서 붙잡았다. 나는 그에게 "이
실을 귀에서 떼내지 않으면 소변보러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소" 하고
협박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이건 내 종교요,"그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내가 말했다. "이렇게 해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소?"
그가 말했다. "물론이죠. 실을 귀에 걸면 성적인 생각이나 성적인 욕망으로부터
보호를 받소. 독신생활을 지켜 줍니다. "
내가 말했다. "당신은 서양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
그는 서양에서 가르치고도 있었다. -"나와 함께 병원에 가야겠습니다. "
"무슨 뜻이오?"
"실을 귀에 걸면 성적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지 의사들에게 확인을
받고 싶소."
"당신은 언제나 이상한 생각만 하는군요."
그가 열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는 것은 간단한 증거였다. 내가 말했다.
이 실로 당신이 열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면, 실이 없었더라면 전
인류를 위협했겠군요! 그런데도 그것이 당신의 독신생활을 보호한다고
말할 용기가 있습니까?"
하지만 그대는 도처에서 똑같은 종류의 난센스들을 두뇌에 강요하는
것을 볼 것이다. 나는 그대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바란다.
두뇌는 자연적인 것이다. 마음은 두뇌에 채워진 것이다. 따라서 두뇌는
기독교도가 아니지만 마음은 그럴 수가 있다. 두뇌는 힌두교도가 아니지만
마음은 그럴 수 있다. 마음은 자연의 선물이 아니라 사회의 피조물이다.
붓다들의 심리학이 해야 할 첫번째 일은, 마음이라 불리는 이 모든
쓰레기를 치우고 그대의 두뇌를 고요하게, 순수하게, 천진무구하게,
타고난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현대 심리학은 두뇌를 분석하고 마음을 이루는 모든
사념들을 분석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동양에서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을 바라보고 이해한 바로는, 마음은 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쓰레기를 분석하는 것이다. 마음은 그냥 없애 버리면 된다.
마음이 없어지는 순간,-그 방법은 명상이다-그대는 참으로
훌륭한 몸과 함께 남는다. 그대는 소음이 없는 고요한 두뇌와 함께 남는다.
두뇌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순수한 두뇌는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새로운 공간을 자각하게 뵌다.
일단 그대가 영혼을 발견하면, 그대는 집을 찾은 것이다. 그대는
사랑을 발견한 것이고, 무한한 희열을 발견한 것이고, 온 존재가 그대를
위해 춤추고 기뻐하고 노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며,
강렬하게 살고 은혜롭게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저절로 일어난다. ""

     園 譯註
1) 프리츠 펄스(Fritz Perls, 1893∼1970) . 게슈탈트 요법을 창시한 독일사람
선(禪), 구제프, 오스펜스키 등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금리요법을 창시했다.
2) 게슈탈트 요법(Gestalt therapy) '몸의 동작과 소리를 통하여 깨달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방법.

 
        제11장
           보디 워크

마사지의 예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마사지란 배울 수는 있어도 결코 끝마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그 체험은 갈수록 깊어지고 높아진다. 마사지는
가장 미묘한 예술 중의 하나다. 그것은 단지 전문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사랑의 문제다.
테크닉을 배우라. 그런 다음 잊어버리라. 단지 느끼라. 느낌으로 움직이라.
깊이 배웠을 때, 작업의 90퍼센트는 사랑으로 행해지고 10퍼센트만이
테크닉이다. 단지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런 손길만으로도
몸은 휴식한다.
만약 그대가 타인을 사랑하고 자비심을 느낀다면, 그리고 그에게서
궁극의 가치를 느낀다면, 그를 바로잡아야 할 메커니즘으로서가 아니라
엄청난 가치를 지닌 에너지로 느낀다면, 그가 그대를 신뢰하고 자신의
에너지를 다를 수 있도록 해 준 데 감사함을 느낀다면, 점차 그대는 마치
오르간을 치고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몸 전체가 오르간의 건반이 되고
그대는 그 몸 안에서 화음이 이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사람뿐 아니라 그대 또한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마사지가 세상에 필요한 것은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한번 어루만지는 것으로 충분했다. 어머니가 아이를
어루만지고 아이와 몸장난을 한 것이 마사지였다. 남편이 아내의 몸을
유희했던 것이 마사지였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충분 이상이었다. 그것은
깊은 휴식이었고 사랑의 일부였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윽고 우리는 어디를 만져야 할지, 어떻게 만져야 할지, 얼마나
깊fi 만져야 할지를 잊어버렸다. 사실 접촉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언어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접촉을 어색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른바
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그 낱말을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접촉이라는
낱말에 성(性)적인 색깔을 입혔다. 그 낱말은 성적이 되었고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허락 없이는 남들이
자기를 접촉하지 못하도록 경계한다. 이제 서양에는 또 다른 극단이 생겨났다.
접촉과 마사지가 성적으로 된 것이다. 이제 마사지는 바로
성욕의 가리개이고 덮개이다. 사실 접촉이나 마사지는 성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사랑의 작용이다. 사랑이 추락하면 성이 되고 추해진다.
그러니 기도하듯이! 하라. 그대가 누군가의 몸을 만질 때 기도하듯이 하라.
마치 신이 거기 있고 그대는 단지 신에게 봉사하는 것처럼. 전체의
에너지와 함께 하라. 그 몸이 흐르고 그 에너지가 새로운 패턴의
화음을 창조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대는 전에 느껴 보지 못한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깊은 명상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마사지하는 동안에는 마사지만 하라. 다른 것들은 방해물이니 생각하지 말라.
그대의 손가락과 손 안에 그대의 전 존재를, 그대의 전 영혼을
실라. 단지 몸을 만진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의 영혼 전체가 타인의
몸 안에 스며들어가서 뿌리 깊은 번뇌를 휴식시킨다. 그것을 놀이로 만들라.
일이라 생각하지 말라. 그것을 게임으로 만들어 즐기라 웃으라.
그리고 타인 또한 웃게 하라.""

마사지는 타인의 몸에 깃든 에너지를 가까이 느껴서 그것이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몸의 어디가 허약해졌는지를 느끼고 그것을 전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몸의 에너지를 도와서 더 이상 허약하지 않도록, 더 이상
모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 몸의 에너지들이 대오를 이루어
오케스트라가 되었을 때 , 그대는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몸을 경외하라. 그곳은 바로 신의 거처이고, 신의
사원이다. 그러니 깊은 존경심과 기도를 가지고 그대의 예술을 배우라.
그것이야말로 배워야 할 가장 위대한 것 중의 하나이다. "'

치유의 손길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저 그대의 손을 그 사람이 필요한 부위에 얹으라. 만일 그가
두통을 앓고 있다면 두 손을 그의 머리 위에 얹고 눈을 감은 다음 에너지가
흐르는 것을 느끼라. 그러면 손에서 진동하는 감각이 느껴지면서
그대의 손은 전기를 띠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이 배탈이 났다면 손을
배 위에 앉고 필요한 부위를 만지라. 옷 밑으로 알몸을 만질 수 있다면 =
그게 더 좋다. 그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하지단 아픈 부위를 1분 이상 ~
만지지는 말라. 1분 이상 만지면 이따금 병이 그대에게 옮겨지는 수가 있다.
에너지는 리듬이다. 1분 동안은 바깥으로 나가고 다음은 안으로 들어 온다.
따라서 그대가 누군가의 몸에 손을 얹을 때는 숨을 내쉬도록  하라.
접촉은 들숨·날숨과 동조를 이루어야 한다. 더 이상 숨을 내쉴 수
없을 때 손을 떼고 숨을 들이마시라. 만약 손을 얹은 채 숨을 들이마시면
병이 전염될 수가 있다. 그 사람은 치유될지 모르지만 그대는 고통
받을 것이다. 그러면 의미가 없다. 꼭 숨을 내쉬면서 손을 얹으라.
그리고 들숨이 시작되면 손을 떼라.""

접촉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어떻게 고칩니까?

그대가 누군가를 치유할 때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쏟아져 나간다.
그대가 손을 대는 것은 거의 전류가 흐르는 전선으로 만지는 것과 같다.
그는 너무나 두려워 문을 닫을 것이고, 문이 닫히면 그대가 아무리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치유는 그대의 에너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에너지가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
그의 에너지가 될 때 가능하다. 만약 그대의 에너지가 문에 이르러
되돌아오면 치유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만약 그 사람이 그대를 신뢰하지 않으면 치유하려고 애쓰지 말라.
치유는 불가능하니 애쓰지 말라. 만약 그 사람이 그대를 의심하면
그를 잊어버리라. 치유는 오직 깊은 신뢰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대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치유하려고 하면 그대는 스스로의 에너지를
불신하게 될 것이다. 여러 번 실패하면 마침내 그대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구나. 나는 에너지가 없어." 사실
누구나 치유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것은 천성적인 것이다. 소수의 사람만이
치유자고 다른 사람은 아닌 것이 아니다. 누구나가 치유자로 태어나지만
능력을 잊어버렸거나 사용해 본 적이 없고, 아니면 그것을
잘못 사용하여 전혀 효과가 없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대에게 도전적인 사람에겐 절대 시도하지 말라. 치유는
도전이 아니다.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대와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치유는 아름다운 경험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건드리지 말라.
그 사람이 더욱더 이완되고 그대에게 그 사람을 만져야겠다는
충동이 느껴질 때-생각될 때가 아니라 느껴질 때-가령 그가 복:통이나
두통 같은 것을 앓고 있어서 머리를 만져 주면 도움이 되겠다는
느낌이 있을 때, 그때 만지라. 하지만 먼저 그가 그대에게 조율되도록 하라.
처음엔 몸을 만지지 말고 에너지 마사지만 하라.
5센티미터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라. 사람 몸의 오라(aura)는 몸에서
약 15센티미터 정도 뻗어 있기 때문이다. 5∼8센티미터를 유지하라. =
그대는 그의 에너지 오라를 접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의 물질적인
몸을 만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미묘한 몸을 만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에너지가 스며들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실제로 접촉을 당했지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전적으로
참여할 때, 그의 신뢰가 무한하고 그대와 함께 흘러감을 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대의 에너지가 스며들고 있음을 느낄 때, 그대의 에너지는
거부당하지 않는다. 그는 스펀지처럼 되어 그것을 빨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은 바늘끝 같은 구멍이 되어 그리로 모든 에너지가 쏟아져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간다.
시술을 마쳤을 때마다 샤워를 할 수 있으면 더 좋다. 그것이 불가하면
즉시 손을 씻고 털듯이 흔들라. 그대의 에너지가 타인에게 건너갈 때
그의 에너지 또한 그대에게 건너오는 일이 가끔 일어난다. 에너지가
오버랩되는 것이다. 때로는 그 사람이 아주 강할 수 있다. 그대보다
더 강할 수도 있다. 때로는 그 사람이 강하지 않아도 그의 병이 너무 강해서
병의 진동이 그대에게 들어와 파괴적이 될 수도 있다. 그 진동들은
그대를 아프게 하고 긴장을 야기할 수 있다. 치유하는 것은 좋지만
그대 자신을 해쳐서는 안된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그렇게 되면
그대는 많은 사람을 치유할 수 없다. 그대는 조만간 병이 나고 악화되어,
몸에 많은 혼돈이 오게 될 수도 있다. ""

마사지란 단순히 마사지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에너지를 나누는 것이다.
따라서 그대 안에 흘러들어오는 에너지가 없으면 그대는 곧
지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주 위험하다. 그것은 육체의 피로로 오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피로는 중요하지 않다 자고 먹고 나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마사지는 에너지를 깊이 나누는 것이다. 그대가 누군가의 몸을
마사지할 때는 그대의 몸뿐 아니라 그대의 미묘한 체(體), 두
에너지체, 두 바이오-플라스마梅io-plasma)가 관여하게 된다. 마사지를 받는 사람이
그대의 바이오-플라스마를 지나치게 가져가는 수가 있기 때문에
그대가 내면에서 지속적인 공급을 받거나 외부의 공급원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대는 몹시 고갈될 것이다. 그대가 젊기 때문에 당장
영향을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몇 달이나 몇 년 동안 그것을 못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그대는 자신이 쇠약해져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나의 이해로는, 먼저 그대 자신에 대한 작업부터 해야 한다.
그대는 중심에 있어야 한다. 중심에 있을 때 그대는 없다. 중심에 있을 때
근원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대는 더 이상 그저 통로일 뿐이다.
우주가 그대를 통해 흐르기 시작한다.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에너지를 나눌 수 있다 그래도 그대는
끊임없이 새로운 에너지를 얻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물이 흘러들지 않는
저수지가 아니다. 그대는 많은 물이 흘러들어오는 샘과 같다.
그대는 계속해서 물을 내보내고, 새 물이 안으로 들어온다. 그대는 고갈되지
않는다.
사실 그대는 오래되고 부패되고 닥한 물을 내보내고, 신선하고
살아 있는 물을 들여오는 것이다. 그래서 샘은 아주 행복하다.
그대는 샘에 있는 지나가고 오래되고 썩은 것을 덜어 주는 셈이다. 따라서
그대가 흐름 속에 있고 그대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따라서 마사지나 치유와 이러한 현상은 아주 미묘하다. 그것은 단순히
테크닉을 배우는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어떻게 근원 속에
존재하는가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면 나눈 테크닉에 대해서도
그대가 그것을 알고 모르고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는다. 그대는
그저 누군가의 몸과 놀이를 하고, 그러면 에너지가 흘러가 그에게 커다란
유익함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마사지하는 사람 또한
유익함을 얻을 때 정말로 유익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유익함이다.
그때는 치료하는 사람도 이롭고 치료받는 사람도 이롭다. 양쪽이
이롭다. 아무에게도 손해가 없다. ""

명상을 통해 제 몸이 더욱 활기차졌습니다. 이 새로운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명상이 올바로 가고 있다면 그대는 항상 더욱 활기차고 사랑으로
넘치게 될 것이다. 명상은 그대에게 에너지와 정열과 생명을 준다
그러니 그것을 막지 말라. 한번 에너지를 막기 시작하면 장애가 생긴다
이제 에너지가 흐르니, 그것이 흐르도록 내버려두고 그것과 함께 움직이라.
그것이 그대를 어디로 이끌고 가든, 신뢰하라. 신뢰한다는 건
이런 것이다. 그대의 에너지를 신뢰하라. 만약 사랑을 향한 갈망이 일어나면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 속으로 들어가라. 사랑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길 것이다. 사랑은 그대를 어려움 속으로,
임 속으로, 그리고 미지의 여정으로 이끌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위태로운
삶의 시작이 된다.
따라서 당연히 두려움이 생기겠지만 두려움의 소리를 듣지 말라.
무시하고 사랑 속으로 들어가라. 그 대가가 어떠한 것일지라도. 그대 안에
사랑이 일어날 때, 사랑의 에너지가 풀려 나올 때, 그때가 용기를 가져야 할,
용감해져야 할 순간이다. 위험을 무릅쓰라. 그러면 그대에게
더욱더 많은 삶이 일어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위축된다면, 그대의
에너지를 막는다면, 그 에너지는 얼어붙게 될 것이다.
그것이 생체요법가들이 계속해서 부수는 것∼그대 주변의 바위덩어리
같은 갑옷이다. 그대는 사랑하기를 원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것을 막았다.
나갔던 에너지는 근원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 되돌아오는 길은 없다.
만약 그대가 화가 난다면 상대방을 치고 때리게끔 에너지가 손으로
와야 한다. 그런데 그대는 때리지 않고 계속해서 미소만 짓고 있다.
그러면 에너지는 손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되돌아갈 수 없다. 길이
없는 것이다. 그 에너지는 손에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그것은 손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망가뜨릴 것이다. 그대의 손을 죽게 할 것이다.
따라서 에너지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따르라. 그것이 누군가를
위험하게 할 수 있다면-가령 그것이 분노라면-방으로 가서 베개를
치라. 뭔가는 하라. 다른 사람을 파괴할 필요가 없다.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지 말라. 하지만 베개에는 폭력을 가할 수 있다 그 에너지는 풀려
날 것이고, 그대는 신선한 에너지가 흐르는 것을 느낄 것이다. 어떤
에너지도 억제하지 말라
그대가 삶에 에너지를 주면 삶은 계속해서 그대에게 에너지를 준다.
이것은 내면의 생태학이다. 에너지가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것이다.
삶이 그대에게 에너지를 주고 그대가 그것을 되돌려주면 삶은 더욱더 주고,
그대도 더욱더 준다. 순환은 계속된다. 그것은 마치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이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산에 내리고, 다시 강물이 되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과 같다. 순환은 계속된다. 어디에도 장애물은 없다.

타이치(T'ai Chi, 太極拳)"는 어떤 작용을 합니까?
치(Chi)는 에너지를 뜻한다. 현대 물리학에서 보듯이, 고체는
오류라는 것이 그들의 개념이다. 이 벽들은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에너지일 뿐이다. 그러나 전자들이 맹렬한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낱낱이 분리해서 볼 수가 없다. 따라서 벽돌이 고체적인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도가의 사상가들c
수천 년 전에 알았던, 인간은 에너지라는 사실을 현대 물리학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한 타이치 스승이 제자들에게 자기를 공격하라고 말하고 자신은 중간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5-10명의 제자들이 각 방향에서 그를 공격하려고
돌진했으나, 그들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가 마치 구름처럼 사라졌다.
딱딱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마치 그를 통과해서 지나가도
아무 장애물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대가 자신이 에너지라는 생각을 계속한다면, 윤곽이 없는 것처럼 되어
존재계 속으로 녹아들 수 있다. 이 일화는 단순한 일화가 아니다.
타이치에 깊이 들어간 사람에게 있어서, 아무 장애도 없이 =
그를 통과해 가는 일이 아주 쉽게 일어날 수 있다. 그대는 그를 해칠 수
없는데, 상처받을 그가 없기 때문이다. "

제가 참가했던 엔카운터 그룹(encounter group)"에서 어떤 감정들이
분노를 일으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타이치를 이용해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법을 알았고, 고통이나 공포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몸의 각 동작들은 감정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타이치는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감정들은 몸의 동작(motion)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감정(emo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각 감정은 그것과
관련된, 그것에 대응되는 특정한 몸짓을 한다
화가 나면 그대의 눈은 특정한 제스처를 하고 손도 특정한 제스처를 하며
이도 특정한 에너지를 갖게 되고 턱은 더욱 공격적이 된다. 파괴하고
공격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에너지는 손과 이에 축적되는데,
인간이 동물이었을 때는 그것이 화를 내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여전히 이빨과 발톱으로 화를 낸다. 우리도 아직 그러한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만약 그대가 손과 이와 눈을 사용하지 않고 화를 내려 한다면 거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대는 화를 낼 수가 없다
위에서 말한 특정한 몸의 제스처가 꼭 필요하다. 그러면 무엇이 선행할까?
사실 그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질문과 같다.
공포가 먼저 오고 무서운 제스처가 오는가, 아니면 제스처가 오고 공포가 오는가?
그 두 가지는 함께 온다. 동시발생적인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직접 실행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이치 스승들은 타이치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타이치는 과거에 사용되지 않았던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사실,
타이치는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억압하기 위해서 사용되어 왔다.
모든 동양적 테크닉들은 어떤 면에서 억압적이다. 분노나 슬픔, 거부감을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이 무의식 속으로, 지하창고 속으로
들어가도록 극히 공손하게 설득하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타이치 스승들은 그다지 도움이 못 럴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타이』치를
그대 자신에게 쓸 수 있다. 그들에게서 타이치를 배우라. 그 다음
그것을 아주 카타르시스적인 방법으로 사용해서 타이치 동작을 통해
감정적인 감정들을 떨쳐 버릴 수 있다. 그대가 이런 방법을 개발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그것은 타이치의 새로운 차원이다.
나는 늘 언젠가는 타이치의 새로운 차원이 개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현재의 상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것에 대해 말하지 말라. 그래 봤자 그들은 안된다고 말할  것이다.
동양은 상당히 인습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러 세기 동안 =
그것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사용해서 고정시켜 버렸다. 그들은 새로운
가능성들을 탐구도 하지 않는다. 인도의 요가도 같은 경우다. 그것은
고착된 과학이 되었고, 3천 년 동안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다. 타이치의
경우도 3천 년 동안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그것은 3천 년 전과 똑같이
남아 있다. 마치 3천 년이란 세월이 지나지 않은 듯이.
동양은 아주 인습적이다 한번 어떤 작용을 발견하면 계속 똑같은 :
것으로만 사용한다. 서양은 끊임없이 탐구를 한 결과, 소달구지에서
우주 왕복선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동양은 그럴 수 없다. 동양은 아직도 」
달구지를 타고 다닌다. 똑같은 소달구지를! 붓다가 타고 다녔던 똑같은
소달구지, 파탄잘리가 타고 다녔던 소달구지, 노자가 타고 다녔던 소달구지,
똑같은 소달구지를 동양은 아직도 타고 다니고 있다.

    園 譯註
1) 타이치(T'ai chi chuan, 태극권) :보통 I"ai chi라고도 한다.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중국의 독특한 운동형태이자 공격 ·방어 권법. 중국 권법이라고도 한다.
운동으로서의 태극권은 신체조절 훈련을 하는 동안 굳어진 근육과 긴장을
풀도록 고안되어 있으며, 태극의 원리, 특히 음(陰) ·양()의 조화를 응용했다.
음과 양은 각각 수동적 소극적 성질과 능동적 적극적 성질을 나타낸다.
2) 엔카운터 그룹(Encounter Group) :평소 억눌렸던 감정이나 심리적, 육체적인
상처를 사람이나 물건, 또는 상황에 부딪쳐서 치유하는 치료 그룹.

 
        제12장
           아픔

아픔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관조자는 결코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항시 동일시만을 느낀다.
우리는 항시 동일성만을 느끼는 것이다. 관조 의식은 실재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대는 아픔을 겪는다. 안에서 진짜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상황
전체를 분석해 보자. 아픔이 있고, 아프다는 의식이 있다.
여기엔 두 포인트가 있는데,
아픔과 아프다는 의식이다. 거기엔 틈이 없다. 그래서
어쩐지 "나는 아프다"라는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아프다. "
이것뿐이 아니다. 조만간에 "나는 아픔이다"라고 느끼기 시작한다.
"나는 아픔이다. 나는 아픔 속에 있다 나는 아픔을 자각하고 있다.
이 세 가지는 다르다. 아주 다른 상태다. 리쉬(Rishi)"는 말한다. "나는
아픔을 자각하고 있다 " 이것은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다. 이때는 아픔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각성은 초월한다-그대는 아픔과는
떨어져 있고, 거기엔 큰 분리가 있다. 진정, 거기엔 아무 관계가 없다.
가까움 때문에, 즉 그대의 의식이 주변 일들과 친밀하고 가깝기 때문에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대가 아플 때 의식이 아주 가까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옆에, 아주 가까이 있다.
그건 그래야만 한다. 안 그러면 아픔이 치유될 수 없다.
아픔을 느끼고 알고 자각하기 위해 의식은 바로 옆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가까움 때문에 그대는 아픔과 동일시되고 하나가 된다 이것은
안전에 대한 척도이다. 그것은 안정의 척도이며 자연스러운 방어수단이다.
아픔이 있을 때 그대는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한다. 아픔이 있을 때 그대의 의식은
반드시 아픔을 향해 뛰어가야 한다. 그것을 느끼고 뭔가를 해
주기 위해.
길 위에서 그대는 문득 뱀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 그대의
전체 의식이 단지 점프한다. 망설일 틈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다.
자각하는 것과 행동 사이에 틈이 없다. 그대는 반드시 바로
근처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대의 몸이
아픔으로, 병으로 고통받을 때 그대는 반드시 가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만약 그대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대는 죽을 것이다. 반드시 즉각 그 아픔을 느껴야 한다.
거기 틈이 있어선 안된다. 그 메시지는 즉각 도착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대의 의식이 가서 반드시 뭔가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가까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필요성 때문에 다른 현상이 발생하는데,
너무 가깝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과 하나가 된다. 너무 가까워서 그대는
"이것은 나다. 이 아픔, 이 기쁨은 나다"라고 느끼기 시작한다. 가까움
때문에 동일시가 생긴다. 그대는 분노가 되고 사랑이 되고 아픔이 되고
행복이 된다.
이러한 거짓된 동일시로부터 그대 자신을 분리시키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리쉬는 말한다. 그대는 그대가 생각하고, 느끼고, 상상하고,
계획하는 그것이 아니다. 그대라는 것은 단순히 깨어 있는 사실 자체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그대는 다만 각성으로 남아 있다. 그대는 각성이다.
이 동일성은 깨질 수 없다. 이 동일성은 부정될 수 없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부정되고 버려질 수 있지만 각성은 궁극의 토대, 궁극의
기반으로서 존재한다. 그대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그대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대는 그것으펄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과정이다. 버려질 수 없는 것, 그대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것이 그대이다. 떼어낼 수 있는 것은 그대가 아니다. 아픔이 있다.
나중엔 없을 테지만 그대는 있을 것이다. 행복이 왔다가 갈 것이다.
그것은 존재했었지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존재할 것이다.
육체는 젊었다가 늙는다. 그 밖의 모든 것들도 오고 간다. 손님들은
오고 간다. 그러나 주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선승들은 말한다.
"손님이라는 군중 틈에서 방황하진 말라. 그대의 주인됨을 기억하라. 그
주인됨은 각성이다 그 주인됨은 관조의식이다. 그대 안에 항상 똑같이
머물러 있는 기본 원소는 무엇인가? 오직 그것이 되라. 오고 가는 모든 것과
그대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라.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손님과 동일시하게 된다.
진짜 주인은 온통 손님들에 쉽싸이고, 그는 망각한다.

물라 나수르딘이 친구와 손님들을 위해 파티를 열었다. 파티는 무척
지루하게 흘러가, 밤의 반이 그냥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한 손님이
물라가 주인이라는 것을 모르고는 물라에게 말했다. "이런 엉터리 파티는
처음 봅니다. 끝이 없을 것 같군요. 너무 지루해서 가 봐야겠습니다."
물라가 말했다. "제가 하려던 말을 하시는군요. 이렇게 지루한 엉터리
파티는 본 적이 없소. 하지만 나는 당신처럼 용기가 없었소. 나도 떠나려고
그냥 달아나려고 생각했소." 그래서 그들은 달아났다.
그런 다음 거리에서 물라가 말했다. "뭔가 잘못됐소. 방금 기억이 났는 데
내가 주인이오! 그러니 실례지만 돌아가야겠소."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주인은 없어진다. 주인은 매
순간 잊혀진다. 주인은 그대의 관조하는 자아이다. 아픔이 오고 기쁨이
따라온다. 행복이 있고, 불행이 있다. 매 순간, 무엇이 오든지 그대는
그것과 동일시된다. 그대는 손님이 된다.
주인을 기억하라. 손님이 있을 때 주인을 기억하라. 수많은 종류의 손님이 있다.
기쁨이거나 아픔이거나, 그대가 원하는 손님이거나 원하지
않는 손님이거나, 그대가 함께 살고 싶은 손님이거나 피하고 싶은 손님이거나,
모두 손님이다. 주인을 기억하라. 끊임없이 주인을 기억하라.
주인에게 중심을 두라. 주인됨에 머물라. 그러면 분리가 생긴다. 틈이 생긴다.
간격이 생긴다. 다리(橋)는 끊긴다. 이 다리가 끊어지는 순간
거부 현상이 일어난다. 그때 그대는 그 안에 있다. 그때 그대는 손님 안에 있다.
여전히 주인으로서. 그대는 손님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

영적 성장에서 느끼는 아픔과 더불어 육체적 아픔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성장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대가 삶 속에서 수천 가지 아픔들을
피해 왔기 때문이다. 피해서는 아픔을 없앨 수 없다. 아픔은 계속 쌓인다.
그대는 계속해서 아픔들을 삼키고 있다. 그 아픔들은 그대의 조직
속에 남는다. 그 때문에 성장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대가 성장하기 시작할 때,
성장하려고 결심할 때, 그대는 억눌러 왔던 모든 아픔들과
직면해야만 한다.
그대는 잘못된 방식으로 길러졌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지상에서
아픔을 억누르지 않은 집단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집단들은 억압에 의존한다.
그들은 두 가지를 억압한다. 하나는 아픔이고 다른 하나는 기쁨이다.
아픔 때문에 그들은 기쁨 또한 억압한다. 그들의 이유는 행복이
크지 않으면 결코 크게 불행해지지도 않으리라는 것이다. 즐거움을
없애면 큰 아픔도 없으리라는 끗이다. 그들은 아픔을 피하려고 기쁨을
피한다. 죽음을 피하려고 삶을 피한다.
그 논리 안에는 뭔가가 또 있어서 함께 성장한다. 환희의 삶을 살고 싶다면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하며, 히말라야의 정상에 오르길 원한다면
골짜기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골짜기는 아무 잘못도 없다.
그대의 접근방식만 달라지면 된다. 그대는 양쪽 다 즐길 수 있다
정상은 아름답다.
골짜기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사람은 정상을 즐겨야할 순간이 있고
골짜기에서 쉬어야 할 순간이 있다.
정상엔 햇볕이 잘 든다. 정상은 하늘과 대화하고 있다 골짜기는
어둡지만 쉬고자 할 때는 골짜기의 어둠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대가
정상을 원한다면 골짜기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뿌리를 깊이 내릴수록 나무는 더 높이 자랄 것이다. 나무는 뿌리 없이
자랄 수 없고, 뿌리는 토양 속에 깊숙이 내려져야 한다.
아픔과 기쁨은 삶의 본질적인 부분들이다. 사람들은 아픔을 너무나
두려워해서 그것을 억누른다. 그들은 아픔이 수반되는 상황을 피한다
그들은 줄곧 아픔을 교묘히 피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정말로
아픔을 피하고자 한다면 기쁨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과 마주친다. 그래서
승려들이 쾌락을 피하는 것이다. 그들은 쾌락을 겁낸다 사실은 모든
아픔의 가능성들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기쁨을 피한다면 자연히 큰 아픔은
생기지 않으리란 걸 그들은 안다. 아픔은 오직 기쁨의 그림자로서 온다.
그래서 그대는 평지를 걷는다. 결코 정상에 오르지도 않고 골짜기로
떨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러면 그대는 죽음을 사는 것이다.
그대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이 양측성 사이에 존재한다. 아픔과 기쁨 사이의 이 긴장이
그대에게 위대한 음악을 창조할 능력을 준다. 음악은 오직 이 긴장 속에서
존재한다. 양극을 파괴하면 그대는 멍청해지고 김빠지고 둔해질 것이다.
그대는 아무 의미도 못 찾고 광힐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대는 삶을 놓칠 것이다.  삶을 알고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껴안아야 한다. 그것들은 함께 온다. 그것들은 한 현상의 양면이다.
그래서 성장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대가 피해 왔던 이 모든 고통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것은 상처를 준다. 그대는 어떻게 해서든 보려고 하지 않았던
이 모든 상처들을 통과해 가야만 한다. 하지만 아픔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기쁨 속으로 들어가는 능력도 깊어진다. 아픔의 극한까지 갈 수 있다면
그대는 천국에 닿을 수 있으리라

들은 얘기다. 어떤 사람이 선사에게 와서 물었다. "어떻게 하면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습니까?"
그는 은유적으로 묻고 있다. "어떻게 하면 고(苦)와 낙(樂)을 피할 수
있습니까?"
더위와 추위, 이것은 선에서 고락을 말하는 방식이다. "어떻게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더울 때는 몸을 덥게 하고, 추을 땐 몸을 춥게 하라."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아픔을 필연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픔은 아픔이다. 그냥 아프다는 사실일 뿐이다. 그러니
고통은 아픔을 거부하며 삶은 아파선 안된다고 주장할 때 여지없이 찾아온다.
그것은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고 삶과 자연적인 일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죽음은 마음이며, 마음의 죽음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데
죽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인간은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알고 웃음을 안다. 그래서
훌륭하게도 인간은 죽음을 새로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인간은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 웃음을 아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다른 동물들은 웃지 않는다.
죽음을 아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 다른 동물들은 죽음을 알지 못한다.
동물들은 그냥 죽을 뿐이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현상을 의식하지 못한다.
인간은 동물들이 알지 못하는 두 가지를 자각하는데, 하나는 웃음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그래서 새로운 종합이 가능하다. 웃으면서
죽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의식과 웃는 능력을
연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웃으면서 살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죽음은 그대 삶 전체의
마지막 말-결론이자 귀결점이다. 그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그대의
죽음에서, 그대가 어떻게 죽는가에서 보여질 것이다. 그대는 웃으면서
죽을 수 있는가? 그러면 그대는 성장한 사람이다. 만약 울면서, 소리치면서,
매달리면서 죽는다면 그대는 어린애이다. 그대는 성장하지 못했고,
미성숙했다. 만약 울면서, 비탄해하면서, 삶에 매달리면서 죽는다면
그것은 그대가 죽음을 피하고 모든 아픔을, 온갖 종류의 아픔을 피해 왔다는 것을
보여줄 따름이다.
성장이란 실체를 직면하고 사실과 만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반복해 보자. 아픔은 그저 아픔일 뿐이다. 그 안에 고통은 없다
고통은 아픔이 없기를, 아픔이 뭔가 잘못된 것이기를 바라는 그대의 요구에서 온다.
지켜보라. 관조하라 그러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대가
두통을 앓는다 할 때, 거기 아픔은 있지만 고통이 있는 건 아니다.
고통은 부차적인 현상이고 아픔은 근원적이다. 두통과 아픔, 그것은 단순한
사실이다. 거기에 대해 판단할 건 없다. 그대는 그것을 좋다, 나쁘다 말하거나
그것에 어떤 가치를 두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사실일 뿐이다.
장미는 실재다. 가시도 실재다. 낮은 실재다. 밤도 실재다. 머리는 실재다.
두통도 실재다. 단순히 그것을 주목하라.
붓다는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두통이 있을 때는 그저 두 번 "두통,
두통" 하라고 했다. 주목하라. 그리고 평가하지 말라. "왜, 왜 이런 두통이
내게 생겼는가? 내겐 생기지 말아야 한다" 하고 말하지 말라.
두통이 일어나는 순간 그대는 말한다. "이래선 안돼." 그대는 그럼으로써
고통을 불러들인다 지금 그대는 두통이 아닌 고통을 창조한 것이다.
고통은 그대의 적대적인 해석이다. 고통은 사실에 대한 그대의 거부이다.
"이래선 안돼" 하고 말하는 순간, 그대는 그것을 회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외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잊기 위해 뭔가로 채우고
싶어한다. 그대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틀거나, 클럽에 가거나, 뭔가를 읽거나,
정원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주의를 돌리거나 자신을
미혹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아픔은 관조되지 못했다.
그대는 그냥 주의를 돌려 버렸다. 그 아픔은 신체에 흡수될 것이다.
이 열쇠를 깊이 이해하도록 하자. 그대가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두통을 관조할 수 있다면, 그냥 거기에서
두통, 두통" 하고 명상적으로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을 순수하게 볼 수 있다면
그때 두통은 사라질 것이다. 나는 그것이 기적적으로, 그저 보는
것으로 사라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 때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의 신체에 흡수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신체에 독을 주지 않을 것이다. 두통이 있고, 그대가 그것을 주목하고
그것은 사라진다. 그것은 해방된다.
그대가 어떤 것을 내면에서 관조할 때 그것은 신체 안에 들어올 수 없다.
그것은 항상 그대가 피할 때, 그것으로부터 도망갈 때, 그대가
부재하게 될 때 신체 안에 들어온다. 오직 그대가 부재할 때 아픔은 그대
존재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현존 속에 존재한다면
그것이 그대 존재의 일부가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그래서 그대가 계속해서 아픔을 볼 수 있다면 그것들은 쌓이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올바른 해결책을 배우지 못했고, 그래서 계속 피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너무나 많은 아픔을 축적하게 돼서 그것을 직면하길
두려워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길 두려워한다. 성장이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잘못 세뇌된 탓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장은 고통
스러운 것이 아니라, 무한한 기쁨이다.
나무가 자라서 무성해질 때 아픔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픔은 없다.
아기가 태어날 때도 엄마가 그 사실을 수용한다면 아프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그것을 거부하고 겁낸다. 그녀는 긴장해서 아기를 안에
잡아 두려고 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아기는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아기는 엄마를 떠나려 하고 있다. 아기는 자라서 자궁이 더 이상
담아 둘 수 없다. 만약 자궁이 계속해서 담아 둔다면 엄마도 죽고 아기도
죽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두려워한다. 그녀는 아기를 낳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식의 분만의 고통, 분만의 아픔에 대해서 들었다.
그녀는 겁나고, 이 공포로 인해 긴장하고 닫혀진다.
그러지 않는다면 원시 사회에는 아직도 이러한 부족들이 존재하는데
∼분만은 무척 쉽고, 전혀 아픔이 없다. 거꾸로, 그대는 놀랄 테지만,
산모는 엄청난 희열을 느낀다. 아픔이 없고 진통이 없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있다 성적인 오르가즘은 여자가 자연분만할 때 일어나는
오르가즘만큼 만족스럽고 무한하지 않다. 어떤 성관계에서도 그만큼
고동칠 수 없을 정도로 산모의 성적 메커니즘은 고동친다. 아기가 여자의
가장 깊은 속으로부터 오고 있다. 어떤 남자도 여자를 그토록 깊이
꽤뚫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진동은 안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진동은
분명 파도처럼, 엄청난 환희의 밀물처럼 올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아기가 밖으로 나오도록 도을 수 있을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아기를 위한
통로가 열리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엄청난 진동이 일어나고
여자의 성 전체가 무한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정반대이다. 여자는 일생 최대의 격통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교육이다.
그대가 수용한다면 출산은 자연스러운 것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대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성장이란 그대의 존재가
매일매일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탄생은 그대가 태어난 날 끝난 것이 아니다.
단지 그날 시작될 뿐이다 오직 시작일 뿐이다. 그대는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면 그대는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대는 태어남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출발일 뿐이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계속 태어난다.
그대는 한순간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탄생의 과정은 70년,
80년, 90년, 그대가 사는 만큼 계속된다. 그것은 연속이다. 그리고
날마다 그대는 기쁨을 느낄 것이다. 새 잎들이 자라나고, 새 꽃들, 새
가지들이 더 높이 높이 올라가 새로운 고도에 닿는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더 깊어지고 더 높아져, 정상에 다다를 것이다. 성장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장은 고통스럽다. 그것은 바로 그대가,
잘못 세뇌된 탓이다 그대는 성장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아 왔다.
그대는 정체되도록 교육받아 왔고, 익숙하고 잘 아는 것에 매달리도록
교육받아 왔다. 그래서 알고 있는 것이 수중에서 사라질 때마다 그대는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장난감이 망가지고 젖꼭지를 빼앗겼다고‥‥‥.
기억하라. 오직 각성만이 그대를 도울 것이다. 다른 것은 소용없다
그대가 삶의 기복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성장은 아픔으로 남을 것이다.
여름은 받아들여져야 하고 겨울 역시 그렇다. 이것이 명상이라 하는 것이다.
명상은 죽음에 대해 듣고 행해진 모든 낡은 것과 모든 것을 비워낼 때
일어난다. 그러면 그대는 본다 아니, 그보다 봄(seeing)이 일어날 것이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탄생한다. ""

저는 어린 시절부터 힘들고 끔찍한 병을 앓아 왔습니다. 이 자연의
실수가 저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습니다. 고통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고통은 그대의 해석이다. 그대는 그것과 너무 많은 동일시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대가 결정한 것이다.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그대의 고통은 악몽과 같은 것으로, 꿈속에서 그대는
가슴 위로 커다란 바위가 떨어져 그데를 압사시킨다는 생각을 한다.
공포 속에서 깨어나면‥‥‥ 발견되는 것이란 다름 아닌 그대의 손이
가슴 위에 얹어져 있는 모습이다. 손의 무게가 그런 상상을 유발했다.
그것이 바위가 되어 그대는 완전히 꼼짝 못한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공포 때문에 그대는 깨어난다‥‥‥ 그리고 이제는 웃는다. 붓다에게 물어 보라.
깨달은 자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세상에 괴로움은 없다고,
사람들은 깊이 잠들어 온갖 고통을 꿈꾸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대의 어려움을 안다 그대가 만일 육체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면
그대가 장님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다만 꿈일 뿐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대가 불구자라면 어떻게 그것이 다만 꿈일 뿐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대는 지켜보지 못했는가? 매일 밤 꿈꾸고 나서
매일 아침 그것은 꿈이었고 모두 터무니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는 다시 꿈꾸고, 꿈속에서 다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것이다.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는가? 수만 가지의 꿈들! 밤마다 그대는
거의 깨지 않고 꿈을 꾼다. 고작 몇 분 동안 멈출 뿐, 다시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다.
수만 가지 꿈을 그대는 꾸었다. 매일 아침 그대는 웃으며 그것은
실재가 아니었다고 말해 왔지만 별로 배운 것이 없다. 오늘 밤 다시 꿈꿀 때
똑같은 잘못된 생각이 고집을 피울 것이다. 그대는 꿈이 진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꿈 속에서 그대는 꿈이 진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꿈 속에서 꿈이 꿈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는 날 꿈은 즉시 사라진다‥‥‥
왜냐면 그대는 삶 속에 각성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것이 단지 그대 스스로가 만든 꿈이라는
사실을 믿는 일은 무척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깨달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말한 각자
(覺者)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각성이 명료해지는 순간 그대 또한 똑같은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를 위한 나의 제안은 이렇다. 그대의 문제는
지적인 토론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대의 문제는 오직 녹을 수 있을 뿐,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문제는 오직 더욱 각성하는 것으로
녹아들 수 있다.
아주 오래된 내 친구 하나가 층계에서 떨어져 두 다리가 부러졌다.
내가 그를 보러 갔을 때, 그는 굉장한 고통 속에 있었다. 그는 75세의 나이로
늙었지만 무척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아주 활동적이고 젊었으며,
이것 저것을 쫓아 뛰어다니고, 이일 저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침대에
누워 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석 달은 침대
위에 누워 있어야 한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것은 두 다리가 부러진 것보다
더한 불행이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우는 걸 처음 보았다. =
그는 강한 사람이었다. 너무나 강한, 거의 강철과 같은 사람이었고
삶 속에서 온갖 풍상을 겪어 아주 단련된 사람이었다. 내가 물었다. "울고
계시는데, 무슨 일입리까?"
그가 말했다. "내가 죽을 수 있게 축복해 주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네.
석 달이나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다니! 상상할 수 있겠나? 이건
고문이네. 3일밖에 안 지났는데도 거의 3년이나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 같네.
자네는 나를 알지? 나는 쉴 수가 없네. 내가 곧 죽을 수 있도록
빨리 축복해 주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네. 의사는 내가 석 달 뒤에는
평생을 절름발이로 지낼 것이라 하네. 그러니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말했다. "부디 명상을 하세요. 내가 곁에 앉을 테니, 나는 육체가
아니라는 간단한 명상을 하세요."
그는 의아해했다 "내게 뭘 시키려는 겐가? 나는 명상에 관해 자네가
한 말을 죄다 들어왔네 하지만 나는 고요하게 앉을 수가 없으니 명상을
할 수 없네."
"고요하게 앉을 필요가 없어요. 이미 침대에 누워 있으니. 이건 축복입니다.
눈을 감아요. 내가 명상을 가르쳐 줄 테니 그리고 당신이 죽기를 원한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니 내가 축복해 주겠어요. 하지만 내 축복은
효과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니 그동안 명상을 하세요:
그는 핵심을 이해했다. "할 일도 없으니‥‥‥ 명상을 마다할 까닭이 있는가?
나는 그에게 간단한 명상법을 말해 줬다. "그냥 안으로 들어 가서
안에서 육체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세요. '이건 내가 아니다.
육체는 아득히 멀리 있다 아득하다 더 멀어지고 더 멀어지고 더욱 멀어진다.
나는 언덕 위에서 바라보고 있고 육체는 저 멀리 어두운 골짜기
아래 있다. "
30분이 지났다. 나는 떠나야 했는데, 그는 내가 방해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깊은 명상 속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가 뭐라고 말할지 알고 싶었기 때문에 그를 남겨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흔들어야만 했다. 그가 말했다. "날
방해하지 말게 ! "
"하지만 난 떠나야만 해요."
그가 말했다. "떠나도 좋으니 날 방해하지만 말게. 너무나 멋지네.
육체는 정말로 아득히 멀리, 수천 리 멀리 있네 나는 골짜기를 떠나
햇빛이 잘 드는 언덕의 꼭대기에 앉아 있네. 너무나 멋지네.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네." 이 석 달은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귀중한 시기가 되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불구자로서 걸을 수도 없고
거의 침대 위에서 지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지복에
찬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지복으로 넘친다. 지금 그는 그 사고가
저주가 아니라 지복이었다고 말한다.
고통은 지복으로 변형될 수 있다. 누가 아는가? 그대가 지복을 고통으로
변형시키고 있는지.""

     園 譯註
1) 리쉬(Rishi) :인도 고대의 현자나 성자를 뜻한다.


제13장
육체적 기능들.

인간은 이제 호흡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 같습니다.
이 상황이 뜻하는 바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호흡은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이기 때문에 탐구해야 하는 일 가운 데 하나다.
충분히 호흡을 하지 못하면 충분히 살 수 없다. 그렇게 되면 .
그대는 모든 부분에서 무엇이든 억누르게 될 것이다. 심지어 사랑할 때.
조차도. 그대는 말하는 것조차 억누르게 되어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항상 무언가가 완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인다
일단 호흡이 완전하면 다른 것들도 따라오게 될 것이다. 호흡은 생기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무지하고 그런 것에 대해선 아무
걱정도 않고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다. 호흡의 변화에 따라 모든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오랫동안 잘못된 호흡을, 즉 얕은 호흡을 하면 그대의
근육조직은 굳어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그대의 의지호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마치 여러 해 동안 움직이지 않으면 발이 굳어 버리고
근육이 오그라들고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은 오랫동안 걸어 보려고 결심한다. 그것은 멋진 일이지만
너무 늦었다. 그는 움직일 수가 없다. 생각만으론 불가능하다.
이제 굳은 다리를 소생시키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호흡 통로의 주변에는 일정한 근육조직이 있어서 만일 그대가 잘못된
호흡을 해 왔다면-거의 대부분이 그렇다-이 근육조직은 굳어 있다.
이제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바꾸는 데는 여러 해가 걸릴 것이고
그것은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될 것이다. 깊은 마사지를 통해, 특히
롤핑(Rolfing)"을 통해 그 근육들이 풀어지면 그대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롤핑을 하고 일단 제대로 호흡을 하기 시작하게 되면
다시 옛날의 습관으로 돌아가지 말라.
사회 전체가 아주 잘못된 습관과 관념과 태도들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모두가 잘못된 호흡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아이가 울면 엄마는
울지 말라고 한다. 아이가 어떻게 하겠는가? 울음이 나오는데 엄마는
울지 말라고 한다. 아이는 호흡을 억누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만이
울음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호흡을 억누르면 모든 것이 멋는다.
울음, 눈물은, 죄다. 그러면서 점차 그 일은 하나의 고정된 틀이 되어 버린다.
화내지 말라. 울지 말라. 이것은 하지 말라. 저것은 하지 말라.
아이는 호흡을 얕게 하면 자신을 조절할 수 있다는 걸 배우게 된다.
모든 아이들이 태어날 때와 같이 완전하고 전적으로 숨을 쉬게 되면
아이들은 거칠어질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스스로 불구가 된다 남자애건
여자애건 모든 아이들은 생식기를 만지작거리며 놀기 시작한다.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어머니나 아버지가 보면 즉시
그만두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눈에 담긴 비난에 충격을 받아 깊이
호흡하는 걸 두려워하게 된다. 깊은 호흡은 내부로불터 생식기를 건드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제가 될 터이므로 아이는 깊은 호흡을 하지 않는다.
그냥 얕은 호흡을 함으로써 아이는 생식기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성을 억압하는 모든 사회는 얕은 호흡을 하는 사회일 수밖에 없다.
성에 대해서 아무런 억압을 하지 않는 원시적인 사람들만이 온전한 호흡을
할 수 있다. 그들의 호흡은 훌륭하다. 완전하고 전체적이다. 그들은
동물같이 호흡하며, 어린아이같이 호흡한다:"
호흡은 그대의 감정에 따라 계속해서 변한다. 화가 날 때 호흡은
불규칙적이고 불균형적이다. 그대가 성욕에 쉽싸이면 호흡은 거의 광적으로 된다.
그대가 조용하고 고요하고 환희로을 때 호흡은 음악적인 성을 지닌다.
그대의 호흡은 거의 노래가 된다. 그대가 존재의 편안함을 느낄 때,
그대에게 아무런 욕망도 없이 충만된 느낌이 들 때, 별안간 호흡이
거의 멎는다. 그대가 경외와 경이의 상태에 있을 때 일순간 호흡이 멎는다.
그러한 순간이 삶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호흡이 멎는 그 순간 속에서만 그대는 존재와 전적으로 조율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신 속에 있고 신은 그대 속에 있다.
그대의 호흡 체험은 더욱더 심원해지고, 면밀해지고, 관찰되고, 주시되고,
분석되어야 한다. 그대의 호흡이 그대의 감정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라.
그리고 반대로 감정이 호흡을 변화시키는 것도 보라.
예를 들면 두려울 때 호흡의 변화를 지켜보라. 그리고 어떤 날은 두려울 때와 같은
패턴으로 호흡을 바꿔 보라. 만약 두려웠을 때와 똑같이
호흡을 바꾸면 즉시 그대 안에 두려움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놀랄 것이다.
그대가 어떤 사람과 깊은 사랑에 빠졌을 때 호흡을 지켜보라. 그의
손을 잡고, 애인을 끌어안고 호흡을 지켜보라. 그리고는 어느 날 그늘
나무 밑에 고요히 앉아 같은 방식으로 호흡하는 그대 자신을 지켜보라
패턴을 만들어 같은 형태 속으로 다시 들어가라. 애인을 포옹했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호흡해 보라. 그러면 놀랄 것이다 전 존재가 그대의
애인이 된다. 다시 커다란 사랑이 그데 안에서 일어난다. 그들은 함께 온다.
그러므로 요가, 탄트라, 도(道)에서는-인간의 의식과 그것의
확장에 관한 세 가지 위대한 체계와 과학에서는-호흡이 하나의 열쇠가 된다.
이들은 다 호흡을 다룬다.
붓다의 명상 체계 전체는 특정한 호흡의 질에 의존한다. "단순히
그대의 호흡을 지켜보라. 그걸 바꾸려 하지 말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바꾸려
하지 말고 단순히 지켜보라," 그대는 놀랄 것이다. 지켜보는 순간
호흡은 바귄다. 왜냐하면 주시는 자체의 리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말한다. "호흡을 바꿀 필요가 없다. 그저 바라보라."
주시가 그 자체의 호흡 방식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은 저절로 온다.
그리고 서서히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호흡수가
줄어든다 호흡이 더 길어지고 깊어진다.
예를 들어 1분에 열여섯 번 숨을 쉬었다면 이제는 네다섯 번 정도만
쉬게 된다. 주시하는 만큼 호흡은 깊어지고 길어지면서 동일한 시간 동안
숨을 덜 쉬게 된다. 그러면 그대는 그것뜰 다른 쪽에서도 시도할 수 있다.
호흡이 느려지고 고요해지고 깊어져 긴 호흡이 되면 문득 그대 안에서
주시가 생겨나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마치 각각의 감정들이
호흡체계 안에 그에 대응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감정은 호흡에 의해
유발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길은 그대가 사랑 속에 있을 때, 친구 곁에 앉아 있을 때
주시하는 것이다. 그대의 호흡을 지켜보라 왜냐하면 사랑 속에
있을 때의 호흡 리듬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의 전
존재를 변형시킨다. 사랑은 그대가 분리된 존재로서의 불합리성과 기만성을
예민하게 느끼는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탈,
이런 불합리성을 통해 다른 식으론 표출할 수 없는 것을 표출할 수 있다.
바로 그대의 타자성(他者性, otherness)을 통해 그대는 동일성(同一
性, identity)을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사랑의 패러독스는 그대들이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로 느낀다는 것이다. 그대는 하나지만 둘이라고 알고 있다.
둘 속의 하나. 그것이 사랑의 모순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도나
명상의 모순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그대는 가끔 소중한 순간에 그대의
애인이나 연인이나 벗, 그대의 어머니나 그대와 아이와 함께 할 때처럼
존재계와 하나임을 느껴야 한다. 바로 그대의 타자성에 의해 동일성을
누릴 수 있다.
사랑의 순간들을 지켜보라. 민감해지라. 호흡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라.
그대 몸의 떨림을 보라‥‥‥ 그대의 연인을 안고 실험해 보라.
그러면 놀랄 것이다. 어느 날, 그냥 안고 서로 녹아들어가 적어도 한 시간 정도
앉아 있으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것은 가장 황홀한 체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한 시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단지 서로
끌어안고 상데방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상대방 속으로 녹아들어가면 차츰
차츰 호흡이 하나가 될 것이다. 그대들은 두 몸이지만 한 가슴인 듯이
호흡하게 될 것이다. 그대들은 함께 호흡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함께
호흡할 때∼그대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대가 많은 사랑을 느껴
호흡이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그것은 가장 위대하고 귀중한 순간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저 너머의, 아득한 데서 오는 것이다.
이 순간들 속에서 그대는 명상적 에너지를 처음으로 일별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아주 고요하게 호흡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호흡에 서두름이
없는 듯이, 그것에 무관심하고 초연하고 멀리 있고 거리가 있는 듯이
호흡예 대해 초연하고 떨어져 거리를 가지면 그대는 중도(中漣)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대는 둘 다이면서 둘 다 아니다. 그대는 초월하게 될 것이다‥‥
마음이 산란할 때 자신을 지켜보라. 호흡도 산란하다. 그대가 산란하지 않을 때,
흐트러짐 없이 고요히 앉아 있을 때, 호흡은 차분하고
고요하고 운율적일 것이다. 그것은 미묘한 음악의 성질을 지닐 것이다.
그것이 바로 중도(中道)이다. 그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활동하는 것도,
활동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대는 균형잡혀 있다 그리고 그 균형의
순간 그대는 실재에, 신에, 천국에 가장 가까이 있다.
기억하라. 각각의 호흡은 단지 호흡일 뿐만 아니라 사고이고 감정이고
망상이라는 것을, 그러나 이것은 며칠 동안 호흡을 주시해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성행위를 할 때 호흡을 지켜보라. 놀랄 것이다. 그대의 호흡은
혼돈스럽다. 성 에너지는 아주 거칠고 낮은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성적인 망상은 거칠고 저질이고 동물적이다. 성 속에는 특별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동물들도 그것을 가지고 있다. 성적으로 자극되면 그대는
세상의 여느 동물들처럼 행동한다. 나는 동물이 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나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그대가 성적인 사랑에 빠져 있을 때마다 자신의
호흡을 지켜보라. 완전히 균형을 다 잃었다.
그래서 탄트라에서는 성행위를 하면서도 자신의 호흡을 차분하고
고르게 지키는 법을 터득했을 때만 성행위가 허용되었다. 그렇게 되면
전적으로 다른 성질이 성행위에 깃든다. 그것은 기도적이고 신성하게 된다.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대가 한
여자나 남자와 성행위를 하고 있는 것만 볼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인에게
그것은 똑같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내부인에게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 모든 비전(秘傳)들을 개발하고 실험해 온
고대의 탄트라 학교에서는 이것이 그들 실험의 핵심 중의 하나였다.
만일 자신의 호흡에 영향받지 않고 성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성이 아니다.
그것은 성스럽다. 그렇게 되면 그 성행위는 그대를 그대 존재의
위대한 심연으로 데려갈 것이며 삶의 문과 신비들을 열어 줄 것이다.
그대의 호흡은 단순한 호흡이 아니다. 호흡은 그대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명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서구에서는 사람들이 불면에 시달리면서 신경안정제를 점점
많이 찾고 있습니다. 명상이 숙면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잠과 명상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잠을 잘 때 우리는 명상할 때와 똑같은 공간에 들어간다.
유일한 차이는 잠잘 때는 무의식적이고 명상중에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뿐이다. 각성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라면 잠 속에서도 명상시』처럼
동일한 체험을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만약 어떤 사람을 마취시켜서 무의식 상태로 들것에 실어
꽃이 만발하여 사방에 향기가 가득하고 태양이 빛나고 새들이 노래하는
정원에 데려다 놓더라도 그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를 다시 데려와 마취에서 푼 뒤 정원이 좋았느냐고 물어 보면 그는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같은 정원에 그를 완전히 의식적인
상태로 데려다 놓으면 전에 데려다 놓았을 때 그곳에 존재했던 모든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은 똑같은 장소에 갔지만, 첫번째 경우에는
주위의 아름다움을 자각하지 못했고 두번째 경우에는 꽃들과 향기로운
새들의 노래와 떠오르는 해를 완전히 의식했다. 따라서 그대가 아무 의식 없이
확실하게 무의식 상태 깊숙이 들어가 그 속의 어떤 지점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도달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잠 속에서 우리는 명상에서 도달하는 것과 같은 낙원에 가지만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매일 밤 우리는 이 낙원을 여행했다가 되돌아온다.
의식하지 못한 채. 그곳의 신선한 미풍과 달콤한 향기가 우리를 건드리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귓전에 울려도 우리는 전혀 모른다. 그러나 완전히
무의식 상태로 낙원에서 돌아왔는데도 그는 말할 것이다. "오늘 아침은
아주 좋군. 아주 편안해. 지난밤은 잘 잤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좋게 느끼는 것일까? 잠을 잘 자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겠는가? 잠을 자서 그럴 리는 없고, 분명 그대는 어딘가에 가
있었고 무슨 일이 그대에게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좋았다는 어렴풋한 생각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 밤에 깊은 잠을 잔
사람은 아침에 상쾌하게 일어난다. 이것은 그가 무의식 상태이긴 하지만
잠을 자는 동안 재생의 원천에 이르렀음을 나타내 준다. 밤에 잠을
잘 못 잔 사람은 전날 밤보다 더 지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며칠 동안 잠을 잘 자지 못하면 생존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생명의
근원과 연결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가야 하는 근본적인 곳에
이르지를 못한다.
뉴욕에서는 적어도 30퍼센트에 달하는 사람들이 신경안정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상황이 백 년 동안 지속되면
치료 없이는 단 한 사람도 잠들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잠을
깡그리 잃어버렸다. 잠을 잃은 사람이 그대에게 어떻게 잠자느냐고
물으면 그대는 "베개만 베면 장들어 버린다"라고 대답한다. 그는 그대의
말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기에 그 속에
자신이 모르는 어떤 속임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것이다. 그도 똑같이
베개를 베고 누웠지만 잠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 리는 없지만, 천 년이나 2천 년 후에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잠들지 못하게 된다면 1∼2천 년 전에는 사람들이 그냥 베개만 베면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겄을 꾸며낸 일이나
푸라나(purana)"에나 나오는 신화적인 이야기로 여길 것이다
그들은 말할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사실이 아닌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사실일 수 있겠는가?"
내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3∼4천 년 전엔 사람들이
눈만 감으면 요즘에 잠자러 가듯이 손쉽게 명상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앞으로 2천 년 후면 뉴욕에선 잠자는 것이 어려워질 것이다. 오늘날도
어렵다. 봄베이에서도 잠자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다. 이것은 시대적인
문제다. 오늘날엔 사람들이 눈을 감고 명상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믿기 힝들다. 요즘은 눈을 감고 앉아도 내면의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잡념들이 계속 오락가락하고 그대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따름이다.
자연에 가깝게 사는 사람들이 잠들기 쉽듯이, 과거에는 자연에 가까운
사람들에겐 명상이 쉬웠다. 먼저 명상이 사라졌고 이제는 잠이 사라지고 있다.
먼저 의식적인 것을 잃었고 그 다음엔 무의식적인 것을 잃었다.
명상이 사라짐과 함께 세상은 비종교적이 되었다. 그리고 잠이 사라지면
세상은 완전히 비종교적이 될 것이다. 잠이 없는 세상에는 종교가
피어날 가망이 없다.
우리가 얼마나 잠과 가깝고 깊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대는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는 전적으로 그가 어떻게
자느냐에 좌우된다.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사람은 삶 전체가 카오스(chaos:
가 될 것이다. 모든 관계는 엉클어지고 모든 것이 독이 되어 신경질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반대로 깊이 잠자게 되면 그의 삶엔 신선함이 깃들 것이다.
평화와 기쁨이 항상 그의 삶에 흐를 것이다 그의 관계와 사랑,
그 외 모든 것의 바탕이 평온할 것이다. 그러나 잠을 잃는다면
그의 모든 관계는 엉클어질 것이다. 그의 가족과 아내와 아들, 그의 어머니,
아버지, 선생, 학생, 그 모든 이들과의 생활이 엉망이 될 것이다.
길진 않지만, 잠은 무의식중에 우리가 신에게 잠겨드는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다 준다. 아주 건강한 사람도 밤에 여덟 시간을 자는 동안 10분 정도만
깊은 차원에 이른다. 이 10분 동안 그는 자신을 깡그리 잊고 꿈도
없는 잠 속에 던져진다.
꿈을 꾸는 한 잠은 완전하지 않다. 꿈을 꾸는 사람은 수면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를 왔다갔다한다. 꿈꾸는 것은 반은 잠자고 반은 깨어 있는 상태다.
꿈속에 있다는 것은, 그대가 눈을 감고 있다 하더라도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부의 영향이 여전히 그대에게 미친다.
낮에 만났던 사람들은 꿈속에서도 여전히 함께 한다. 꿈은 잠과 깨어 있음의
중간 상태에 놓여 있다. 아침이 되어 밤새 꿈꾼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미국에선 잠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열 개 정도의 큰 연구소에서 수천 명을 대상으로 8-10년
동안 실험해 오고 있다.
미국인들은 잠을 잃었기 때문에 명상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명상이 잠을 회복시켜 줄 수만 있다면 자신들의 삶을 평온하게 해 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명상을 신경안정제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비베카난다(Vivekananda)')가 미국에 처음 명상을 소개했을 때
한 의사가 찾아와 말했다. "당신의 명상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약 없는 신경안정제였습니다. 약이 아닌데도 사람들을 잠들게
해 주었습니다. 대단합니다. " 미국에서 요기(Yogi)들의 영향이 그토록
증대된 것은 요기들 때문이 아니다. 잠의 부족이 진짜 이유다.
사람들의 잠은 엉망진창이고 그 결과 미국에서 삶은 부담과 억압과 긴장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어쨌거나 사람들을 잠들게 해
주는 신경안정제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미국에선 매년 수백만 달러가 신경안정제를 위해 소비된다. 열 개의
큰 연구소가 아주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밤을 맞고 있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 대한 실험을 지휘하고 있다. 온갖 종류의 전극과 수많은 전선을
사람의 몸에 부착하고서는 그들 내부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여러 각도에서
시험한다. 한 놀라운 발견에 의하면 사람은 거의 한 밤 내내 꿈을
꾸는 것으로 나타났다. 깨어나면 어떤 사람은 꿈을 꾸지 않았다고 말하고
반면에 어떤 사람은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이
꿈을 꾸었다. 유일한 차이는 꿈을 잘 기억하는 부류가 있고 기억이
희미해 꿈을 되새길 수 없는 부류가 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아주
건강한 사람은 10여 분 동안 꿈 없는 깊은 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꿈은 계기(計器)를 통해 정밀하게 조사될 수 있다. 꿈을 꾸는 동안
두뇌의 신경이 활동을 하고 꿈이 멎으면 활동이 그치는데, 계기는 이때
갭이 생긴 것을 보여준다. 그 갭은 그 시간에 그 사람이 꿈도 꾸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꿈꾸는 상태에 있을 때는 계기가 운동을 기록하다가 꿈없는 잠 속으로
떨어지자 곧 계기에 갭이 나타난 것은 흥미롭다. 연구자들은 그 갭
속에서 그 사람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꿈 없는
잠이란 그 사람이 계기의 측정 범위를 넘은 장소에 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신성(神性)으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 갭 속에서이다.
계기는 그 사이의 공간을, 이 갭을 탐지하지 못한다. 계기는 꿈꾸는
동안의 표면적인 활동을 기록한다. 그러다가 갭이 생기고 그 사람은 어딘가로
사라진다. 그리고 나서 10분 후에 계기는 다시 기록을 시작한다
그 10분의 기간 동안 그 사람이 어디에 있었는지 말하기란 힘들다.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이 갭 때문에 몹시 곤혹스러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잠을 가장 큰 불가사의로 생각한다.
그대는 날마다 잠을 자지만 잠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른다. 인간은
평생에 걸쳐 잠을 자지만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잠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까닭은, 잠이 있을 때
그대는 없다는 데 있다 기억하라. 잠이 먼는 동안만 그대가
존재하므로 계기가 아는 만큼만 알게 된다는 것을. 갭에 직면하자마자
계기는 멎어 그 사람이 이동한 곳에 이를 수 없게 되고 그대 역시 거기에
이를 수 없다. 그대는 계기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갭과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잠은 신비로 남는다. 그것은 그대가
닿을 수 있는 영역을 넘어 있다. 인간은 '나는 존재한다'라는 것이
멎을 때만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에고가
자라날수록 잠은 점점 줄어든다. 에고적인 인간은 그의 에고, 즉 '나'라는
것이 하루 24시간 내내 자신을 주장하므로 잠잘 능력을 잃어버린다.
잠에서 깨어나는 '나'는 거리를 걷고 있는 '나'와 동일하다. '나'라는 것이
24시간 꼬박 존재하기 때문에, 잠에 빠지는 순간이 와도, '나'를 놓아야
하는 지점에 이르러서도 '나'를 제거하지 못한다. 확실히, 잠드는 것이
힘들어진다. '나'가 존재하는 한 잠은 불가능하다. 또 '나'가 존재하는 한
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잠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꼭 한 가지이고
같은 일이다. 한 가지 차이점은, 잠을 통해서는 무의식 상태에서 존재로
들어가고 명상중에는 의식 상태에서 존재로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큰 차이이다 그대는 수천 생 동안 잠을 통해 존재에
들어갔지만 존재에 대해선 아직도 전혀 모른다. 그러나 잠시 동안이라도
명상 속으로 들어가면 수천 생 동안 깊은 잠 속에서 도달했던 것
항시 무의식 상태에서였지만-과 같은 공간에 닿는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의 꿈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흥미로운 것은, 일단 어떤 사람이 명상에 들어가면 깊은 잠이 가져다
주는 진공에 들어가면, 결코 무의식으로 남아 있지 않게 될다는 사실이다.
잠을 잘 때조차도.

아난다는 여러 해 동안 붓다와 함께 지냈고 수년 동안 붓다의 곁에서
잠을 잤다. 어느 날 아침 그가 붓다에게 물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스승님이 주무시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스승님은 한 번도 몸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같은 자세로 주무십니다. 팔다리가 밤에 놓였던 3태로
있었습니다. 자다가 일어나 스승님이 움직였는지 여러 번이나
점검해 보았습니다. 밤새 스승님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손과 발은 같은 위치에 놓여 있었고 전혀 자세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밤새 잠에 대해 어떤 기록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나는 어떤 기록도 할 필요가 없다. " 붓다가 대답했다. "나는 의식적인
상태로 잠잔다. 그래서 나는 자세를 바꿀 필요가 없다. 내가 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는 것은 잠의 요구가 아니라
쉬지 못하는 마음의 요구이다. "
쉬지 못하는 마음은 단 하룻밤도 한 곳에서 쉬지 못하고, 낮에도
마찬가지다. 밤에 잠을 잘 때조차 그의 몸은 내내 자신이 쉬지 못한다는 걸
나타내 준다.
밤에 잠자는 사람을 지켜보면 그가 밤새 쉬지 못한다는 걸 알 것이다
그대는 그가 낮에 깨어 있을 때만큼이나 손을 움직이는 것을 볼 것이다
꿈을 꿀 때도 낮처럼 뛰면서 헐떡거리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숨이 차고 피곤해진다. 꿈속에서도 낮에 싸우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싸운다.
낮 동안 가졌던 열정을 밤에도 갖고 있다 피곤한 몸으로 무의식적으로
누워 있는 건  낮과 밤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은 없으며,
있는 모든 것은 보통 때처럼 흘러간다. 그래서 붓다는 말했다. "내가
원하면 자세를 바꿀 수 있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
하지만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의자에 앉아 다리흩
떨고 있다. 그에게 물어 보라. "왜 그렇게 다리를 떠시오. 걸어다닐 때
움직이는 건 이해가 가지만 왜 의자에 앉아 있을 때도 움직이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그칠 것이다. 그리고는 미동도 하지 않을 테지만,
자신이 왜 그랬는지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쉬지 못하는
내면이 몸 전체를 얼마나 동요시키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내부에 들뜬
마음이 있어서 한시도 고요하게 제자리에 있지 못한다. 그것은 온몸을
안절부절 못하게 만든다. 다리가 움직이고 머리가 움직이고 앉아 있을 때에도
자세를 바꾸게 한다.
그런 까닭에 그대는 10분 동안 가만히 앉아 명상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몸의 여기저기에서 그대로 하여금 몸을 뒤척이고 자세를
바꾸도록 재촉한다. 명상 속에 각성하고 앉기 전까지는 우리는 이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때서야 몸의 성질이 이렇다는 것을,
항시도 같은 자세로 있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온의 혼돈과 긴장과
흥분이 몸 전체를 뒤흔든다.
깊은 잠을 자는 10분 동안 모든 것이 사라진다. 비록 이 10분도
모든 사람이 아니라 아주 건강하고 평은한 사람에게 허용되는 것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런 시간이 길어 봐야 5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잠을 1∼2분밖에 못 잔다. 그 1분간 생명의 근원에 도달해
얻은 샘물을 우리는 다음 24시간의 일과 속에 공급한다. 그 짧은 시간에
받은 아주 적은 양의 램프 기름을 24시간 내내 사용한다. 사람은 그때
받은 기름으로 생명의 램프를 태운다. 그래서 램프는 그렇게 천천히
타는 것이다. 생명의 램프를 환하게 타오르게 할 정도로 기름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다. 천천히 탐으로써 불꽃을 유지하는 것이다.
명상은 그대를 생명의 근원으로 데려다 준다. 그러면 그대는 거기에서
한 움큼의 영양분을 가져오는 게 아니고, 단지 근원 속에 있게 된다.
그땐 좀더 많은 기름으로 램프를 채우는 게 아니다. 그땐 기름의 바다
전체가 그대에게 허용된다. 그러면 그대는 바로 그 바다에서 살기 시작한다.
그런 삶과 함께 잠은 사라진다. 그가 잠을 안 잔다는 개념이 아니다.
그런 개념이 아니라, 잠을 잘지라도 내면에서는 광대하게 깨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더 이상 꿈은 존재하지 않는다. 요기(Yogi)는
완전히 깨어 있다. 그는 자지만 결코 꿈을 꾸지 않는다. 그의 꿈은 완전히
사라진다. 그리고 꿈이 사라질 때 생각도 사라진다. 우리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생각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잠자는 상태에서의 꿈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각과 꿈 사이에는 아주 裂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생각들은 조금 더 문명화된 꿈이고, 꿈들은 본질상 좀더 원시적이다. 둘
사이에서, 하나는 근원적인 생각이다.
사실, 어린이나 원시 부족들은 말이 아니라 그림으로써만 생각한다.
인간의 첫 사고는 항상 그림 속에 있다. 예를 들어 아이는 배가 고플 때
"나는 배고프다"라는 말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는 엄마의 젖가슴을
떠올리고 젖을 빠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아이는 젖가슴을 향한 욕구로
채워질 수는 있지만 그것을 언어로 나타낼 수는 없다. 언어라는
등식은 훨씬 뒤에 시작되며, 그림이 먼저 나타난다
언어는 낮에는 편리하지만 밤에는 소용이 없다. 밤에 우리는 다시
원초적이 된다. 우리는 원래 상태 그대로 잠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그종 증명서와 학력 등 모든 것을 잃는다. 우리는 본래의 사람이 서 있는
그 지점으로 이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밤에 잠잘 땐 영상이 나타나고
다음엔 언어가 나타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낮에 성행위를 하고 싶다면
언어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지만 밤에는 영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다.
생각들은 꿈처럼 생생하지 않다. 꿈에서는 영상 전체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 자체를 읽는 것보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
영화를 보는 것을 더 즐긴다. 영화는 영상 언어인 반면에 소설은 말의
언어라는 것이 유일한 이유다. 그와 똑같이 그대는 여기서 살아 있는 나의
말을 듣는 .데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 만일 녹음 테이프로 이 말을
듣는다면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엔 이미지가 있고
테이프엔 말만 있기 때문이다. 영상 언어는 우리에게 더 친근하고
자연스럽다. 밤이 되면 말은 그림으로 바뀐다. 그것이 다르다.
낮의 꿈이 사라지면 생각도 사라지고 낮의 생각이 사라지면 꿈도
더불어 사라진다. 낮에 생각들이 비어 있으면 밤에 꿈들이 비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라. 꿈들이 그대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그리고 생각들이 그대를 잠자지 못하게 하고 깨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두 사실에 대한 이해를 확실히 하자. 꿈들은 그대를 잠들지 못하게 하고
생각들은 그대를 깨어 있지 못하게 한다. 꿈들이 사라지면 잠은
전체적인 것이 될 것이다. 생각들이 사라지면 깨어남은 전체적인 것이 될 것이다.
만일 깨어남이 전체적이고 잠도 전체적이면 그 둘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을 것이다. 유일한 차이는 눈을 감고 있느냐 뜨고 있느나,
몸이 활동하느냐 휴식하느냐 하는 것이다. 완전히 깨어난 사람은 전적으로
잠을 자지만 어느 상태에서나 그의 의식은 똑같다. 의식은 하나이고
바뀌지 않는 것이다. 단지 몸이 바뀔 뿐이다. 깨어나면 몸이 활동하고,
잠들면 몸이 휴식한다.
한 친구가 왜 잠 속에서는 신에 도달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내 대답은
잠 속에서 깨어 있을 수 있다면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명상 방법은 곧 잠자는 방법이다. 각성 속에 잠자고 각성 속에 잠으로
들어가는 것. 그래서 나는 그대 몸을 이완하고 그대 호흡을 이완하고
그대의 생각들을 고요히 가라앉히라고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잠을 위한
준비다. 그래서 가끔 명상중에 잠으로 빠져들어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분명히 이것은 잠을 위한 준비다. 잠을 준비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이
언제 장들지 모른다. 그런 까닭에 나는 세번째 제안을 되풀이해
말하는 것이다. 내면에서 깨어 있으라. 내면에서 의식을 가지고 있으라.
몸을 완전히 이완시키고 호흡을 잠잘 때보다 더 완전히 이완시키라, .
그러나 내면은 깨어 있으라. 내면에서 그대의 각성이 등불처럼 타올라·
잠들지 않게 하라.
명상과 잠의 첫 조건은 동일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차이가 있다.
조건은 몸이 이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불면증으로 고통받고
있으면 의사가 첫번째로 가르쳐 주는 것은 휴식하라는 것이다. 의사는
내가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몸을 이완하라. 몸에서
완전히 긴장을 빼라. 몸을 완전히 풀어 놓으라. 솜털처럼, 아기가 잠자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거기엔 아무런 긴장이 없다. 아이의 팔과 다리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풀어져 있다. 젊은이와 늙은이를 보라. 그들에게서는
온갖 긴장을 발견할 것이다. 그래서 의사는 그들에게 이완하라고 요구한다.
같은 조건이 잠에도 적용된다. 호흡은 이완되고 깊어지고 느려져야 한다.
조깅할 때 호흡이 빨라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일을 할 때 호흡은 빨라지고 혈액 순환은 증가한다. 잠잘 때 혈액
순환은 느려질 것이다. 조깅할 때와는 반대이다. 그렇게 되면 호흡이
이완될 것이다. 따라서 두번째 조건은 호흡을 이완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명상을 위한 조건은 기본적으로 잠을 위한 조건과 같다.
몸을 이완하라 호흡을 이완하라. 생각을 내려놓으라. 그러므로 명상과
마찬가지로 잠의 첫 조건은 똑같다. 차이점은 마지막 조건에 있다.
잠을 잘 때에는 그대가 깊은 잠 속에 있지만 명상 속에서는 완전히 깨어 있다는 것.
그것이 전부다.
따라서 그대가 한 질문은 옳다. 잠과 명상 사이에는 깊은 연관이 있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의식과
의식의 차이. 잠은 비(非) 각성적이며, 명상은 각성이다:"

불면에 시달리는 사랑들에게 조언을 해 주시겠습니까?

밤에 잠들려고 할 때, 잠잘 채비를 할 때, 그날의 모든 기억을
거슬러 가 보라. 아침에서부터 시작하지 말고 바로 그대가 있는 지점부터
바로 침대에서부터, 마지막 항목부터 시작하라. 그리고 나서 거슬러 가라.
그러면 이윽고 서서히 그대가 아침에 처음 깨어났을 때의 경험에
이를 것이다. 돌아가되, 지금은 그대가 그 상황에 있지 않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라.
예를 들어, 낮에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했다. 그대 자신을, 누군가에게
모욕당한 자신의 모습을 보라. 그러나 단지 관찰자로 남아 있으라.
빠져들지 말라, 다시 분노하지 말라, 다시 분노하게 되면 동일시하게 된다.
그러면 명상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분노하지 말라. 그는 」그대를
모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후에 있었던 그대의 모습을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은 이제 지나갔다.
그대는 흐르는 강과 같다. 모습들이 흐르고 있다. 어린 시절에 그대는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모습이 아니다. 그 모습은
지나갔다. 강물처럼 그대는 계속해서 변한다. 그러므로 밤에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거슬러 명상할 때 그대는 단지 관조자라는 걸 기억하라.
분노에 빠지지 말라 누가 그대를 칭찬했다 해서 우쭐대지 말라 물끄러미
영화필름을 보듯 그냥 전체 일들을 지켜보라. 특히 잠자는 것이
어려운 사람에겐 이러한 돌이킴이 아주 효과적이다.
불면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면, 잠드는 데 어렵다면, 이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왜? 이것은 마음을 풀어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침부터
마음을 감기 시작해서, 마음은 여러 가지 일과 여러 장소에 엉기게 된다.
끝나지 않고 완결되지 않은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에 남을 것인데,
그 일들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에 그것들을 가라앉힐 시간이 없다.
따라서 밤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라. 이것은 풀어내는 과정이다
그대가 침대에 누워 있던 아침으로, 아침에 처음 한 일로 거슬러가면
아침에 지녔던 것과 똑같은 신선함을 다시 가질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어린아이처럼 잠들 수 있다.
숱한 사람들이 특정한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심리학적인 것이나
의학적인 것은 아무 도움이 못 된다. 질병은 계속된다. 그 질병은 심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하겠는가? 그의 질병이 심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질병이 심리적이라고 말하멸 아무도 좋게
느끼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해롭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낀다.
이 거슬러감은 기적적인 방법이다. 그대가 서서히 돌아가면, 이 질병이
비롯된 첫 순간으로 서서히 마음을 풀어 나가면, 그대가 처음 질병에
걸린 때로 돌아가면, 그 순간으로 풀어 나가면, 이 질병이 다른 일에,
다른 심리적 사건들의 복합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돌아감으로 해서 그 일들이 끓어오를 것이다.
질병이 처음 그대를 공격한 그 순간을 지나가면 거기에 어떤 심리적인
요인이 작용했는지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이 깨짐으로써 많은
질병들이 그대에게서 사라질 것이다. 그것을 자각하게 되면 그것은
필요없게 된다. 그대는 깨끗하게 비워지고 정화된다.
이것은 깊은 카타르시스다. 이것을 매일 하게 되면 그대는 새로운
건강이, 새로운 신선함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것을
가르치면 아이들은 결코 자신들의 과거의 짐에 허덕이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도 달라붙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어떤 것도 그들 위를 맴돌지
않을 것이다:"

인성에 작용하는 뇌의 두 반구(半球)에 대해 말쏭해 주시겠습니까?

현대의 연구는 금세기에 이루어진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것은 그대가 하나의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두뇌는 두 개의 반구로 나눠진다.
우뇌와 좌뇌로. 우뇌는 왼손과 연결되어 있고 좌뇌는 오른손과
연결되어 있다. 엇갈리게 말이다. 우뇌는 직관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시적이고 플라톤적이며 상상적이고 낭만적이고 신화적이고 종교적이다.
그리고 좌뇌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수학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이고
과학적이고 계산적이다. 이 두 개의 뇌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있다. 세상의 근본적인 정치학이 그대의 내부에 있고, 세상의
가장 커다란 정치학이 그대의 내부에 있다. 그대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자각하게 되면, 이 두 마음 사이의
어딘가에 진짜 해야 할 일이 있다.
왼손은 우뇌, 즉 직관, 상상, 신화, 시, 종교와 관계가 있다. 그런데
왼손은 몹시도 비난받아 왔다. 사회는 오른손잡이들의 것이다. 오른손은
좌뇌를 뜻한다. 10퍼센트의 아이들이 왼손잡이로 태어나지만 오른손을
쓰도록 강요받는다 왼손잡이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비이성적이고
직관적이고 비수학적이고 비유클리드적이다. 그들은 사회에서
위험하기 때문에 온갖 수단에 의해 오른손잡이가 되도록 강요받는다.
이것은 단지 손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정치학의 문제이다. 왼손은 우뇌를 통해
기능한다. 그건 사회가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은 위험하다.
그러므로 너무 멀리 벗어나기 전에 멈춰야 된다.
처음엔 왼손잡이 아이가 50퍼센트고 오른쏜잡이 아이가 50퍼센트였는데,
오른손잡이의 무리가 통치하면서 차차 그 비율이 10퍼센트 대 90
퍼센트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대들 중의 많은 수가 왼손잡이일 텐데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대는 오른손으로 글을 쓰고 오른손으로
일을 할 테지만 유년기에 오른손을 쓰도록 강요당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일단 오른손잡이가 되면 좌뇌가 작동을 시작하므로, 이것은
하나의 속임수다.
소수파인 왼손잡이들은 흑인이나 빈민들보다도 더 압박받는 집단이다.
다음과 같은 분리를 이해하면 많은 일들이 이해가 될 것이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놓고 볼 때, 프롤레타리아는 늘 뇌의 우반구를
통해 작용한다. 가난한 사람은 보다 직관적이다. 원시인들에게 가 보라.
그들은 훨씬 직관적이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덜 지적이다. 그것이 그가
가난한 이유일 것이다. 그는 덜 지적이기 때문에 논리적인 세상과 경쟁할 수 없다.
그는 언어에 관해서나 논리에 관해서나 계산에 관해서는
불분명하다. 그는 거의 바보다. 그것이 그가 가난한 이유일 것이다.
부자는 좌뇌를 통해 작용하므로 보다 계산적이고 모든 것에 산술적이고
교활하고 영악하고 이성적이다. 또한 그는 계획적이다. 그것이 그가 부자인
이유일 것이다.
같은 사실이 남자와 여자에게도 적용된다. 여자는 우뇌의 사람이고
남자는 좌뇌의 사람이다. 남자는 수세기 동안 여자를 억압해 왔다.
이제 여자들이 반란을 시도하고 있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모두 같은
타입의 여자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마치 남자 같다. 이성적이고
논쟁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러시아나 중국에서 공산 혁명이 성공한
것같이 언젠가는 미국 같은 데서 여자들이 성공해서 남자들을 뒤집어
엎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자들이 성공할 때가 되면 여자들은 더 이상
여자가 아닐 것이고 좌뇌적이 되어 있을 것이다.
표면적인 것은 변하더라도 깊은 곳에는 똑같은 갈등이 남아 있다.
갈등은 인간 속에 들어 있다. 거기서 풀리지 않으면 다른 어느 곳에서臺
풀리지 않는다. 그 정치학은 그대 안에 있다. 그것은 마음의 두 부분 사이에 있다.
아주 작은 다리가 존재한다. 무슨 사고로, 어떤 심리적인 결함이나
여타의 일로 그 다리가 부서지면 그 사람은 분열되어 두 사람이 된다.
정신분열증이나 정신병이 발생한다. 다리가 부서지면-그 다리는
아주 약하다-그대는 둘이 되고 두 사람처럼 행동한다. 아침에
그대는 아주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는데, 저녁이 되면 심하게 화를 내며
전혀 딴판이 된다. 그대는 아침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다른 쪽 마음이 작용한다. 그 사람은 두 사람이 된다. 만약
이 다리가 두 마음이 사라질 정도로 아주 튼튼해서 두 개가 하나가 된다면
통합이, 결정화(結晶化)가 일어난다. 조지 구제프가 존재의 결정화라고
부른 것은 두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 여성과 남성의 만남, 음과
양의 만남, 속과 겉의 만남, 논리와 비논리의 만남,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만남을 이른 것이다. 삶이라는 나무의 근본이 되는 이 두 가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 안에서 되풀이되는 모든 갈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적인 마음은 우아함을 가지고 있고 낭성적인 마음은 효율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길게 보아 투쟁이 계속된다면 우아함이 질 수밖에 없다.
효율적인 마음이 이길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사랑이 아니라
수학의 언어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효율성이 우아함을 이기는 순간
그대는 참으로 소중한 어떤 것을 잃게 된다. 그대는 자신의 존재와의
접촉을 잃게 된다. 그대는 아주 효율적이 될 테지만 더 이상 참인간이
아닐 것이다. 그대는 기계나 로보트 같은 물건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있다. 그들은 나뉘어
있을 수 없고 또다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서로
함께 있을 수가 없다. 싸움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내면에 있다.
그리고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대의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좌뇌와
우뇌 간의 싸움을 해결하지 않는 한, 그대는 절대 평화롭게 사랑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절대로, 왜냐하면 내면의 싸움은 외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내면에서 싸우고 있으면서 자신을 좌뇌, 즉
이성적인 반구와 동일시해서 계속 우뇌를 압박하려 한다면 그대는 사랑에
빠진 여성에게도 같은 짓을 하려 할 것이다. 여자가 계속 내면의
논리와 싸우면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와도 계속 싸우게 될 것이다.
모든 관계들은, 계산에 넣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추하다. 처음에는 아름답다. 처음에 그대는 실체를
보여 주지 않는다. 처음에 그대는 속인다 일단 관계가 자리잡아
안심하게 되면 그대 내면의 갈등이 器어올라와 그대의 관계에 반영된다.
그러면 싸우게 되고 서로에게 수천 가지 바가지를 긁게 되고 서로를
파괴하게 된다. 그래서 호모섹스에 끌리게 된다. 사회가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될 때마다 곧 호모섹스가 출연한다. 적어도 남자와 남자 간에는
그렇게 많은 갈등이 없기 때문이다. 동성간의 연애관계는 그다지 만족스럽지도
못하고 엄청난 지복과 절정의 순간들을 이끌어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남녀 관계처럼 추하지는 않을 것이다. 갈등이 심해지면
여자는 레스비언이 될 것이다. 최소한 두 여자끼리의 연애 관계에는
그렇게 깊은 갈등이 없을 것이다. 같은 사람끼리 만나므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이해는 가능하지만 매혹은 잃을 것이고 양극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막대한 손실이다. 이해는 가능하지만 모든 긴장과 도전은
잃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도전을 선택하면 갈등이 온다. 왜냐하면 진짜
문제는 그대 내부의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대 안의 여성과
남성의 마음 사이의 깊은 조화에 이르러 안정하지 못하는 한, 그대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어떡하면 깊은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말한다. "먼저 명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그대 자신을 해결하지
않는 한, 이미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문제만 만들어 낼 것이다
그대가 관계 속으로 들어가면 온갖 문제들만 늘어날 것이다. 한번 보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 사랑이지만 그것보다 더 추하고
더 지옥 같은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한번은 물라 나스루딘이 내게 말했다. "끔찍한 일을 여러 달이나
미루어 왔는데, 이번에 하게 되었어요."
"치과에 가는 일인가?" 내가 되물었다.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결혼하게 되었어요."

‥‥‥바깥에서 보면 그것은 사막의 아름다운 오아시스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오아시스는 마르면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일단 그것에
붙들리면 그것은 구속이다. 구속은 다른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대 내부에서 온다.
좌뇌가 계속 그대를 지배하면 그대는 퍽 성공적인 삶을 살 것이다.
너무 성공적이어서 마흔 살쯤 되면 궤양이 생길 것이다. 마흔 살쯤 되면
한두 번의 심장 발작을 일으킬 것이고, 쉰 살쯤 되면 거의 죽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적인 죽음이다. 그대는 위대한 과학자가 될지도 모르지만
결코 위대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대는 충분히 부를 축적할 테지만
소중한 것을 모두 잃을 것이다. 그대는 알렉산더처럼 전 세계를
정복할지도 모르지만, 그대 내부의 영토는 정복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세상적인 두뇌인 자뇌는 많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차, 돈, 집,
권력, 명예 같은 일들과 더 관계가 있다.
우뇌는 산야신을 지향하고, 내면의 존재나 내면의 평화와 지복에 더
관심이 있으며 세상의 성공에는 관심이 적다 그것들이 쉽게 올 수
있다면 좋고, 오지 않는다 해도 좋다. 우뇌는 순간에 더 관심이 있고
미래에는 관심이 덜하다. 우뇌는 살의 시에 더 관심이 있고 산술에는
관심이 덜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핑켈슈타인이 경마에서 큰 횡재를 하자 무스코비츠가 그 사실을 알고
샘이 나, "어떻게 한 거지? 핑켈슈타인" 하고 물었다.
"쉬워." 핑켈슈타인이 말했다. "꿈 때문이야."
"꿈이라고?"
"그래. 처음에 난 세번째 말에 찍었지. 하지만 확신은 없었었네,
전날 밤 천사가 내 베갯머리에 나타나서 "축복받으라, 핑켈슈타인.
곱 축복을 일곱 번 내리노라," 하는 거야. 깨어나서 생각해 보니 일에다
일곱을 곱하면 48이 되더란 말야. 그 48번 말은 하늘의 계시였지.
하늘의 계시에 따라 세번째 말에 돈을 걸고 그냥 긁어들인 거지."
무스코비츠가 말했다. "그런데 핑켈슈타인, 7 곱하기 7은 49잖아!'
그러자 핑켈슈타인이 말했다. "그러니까 자넨 수학자나 해!"

산술을 통해서 삶을 따르는 길이 있고 꿈을 통해 꿈과 비전을 통해
삶을 따르는 길이 있다. 그 둘은 전적으로 다르다.

얼마 전에 누가 물었다. "유령이나 요정 같은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 있다. 만일 그대가 우뇌로 움직인다면 있고, 좌뇌로 움직인다면 없다.
모든 아이들은 우뇌로 산다. 그들은 도처에서 유령과 요정을 본다.
하지만 .3대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정신을 차리라고 말한다. "쓸데
없는 소리하지 마! 이 멍청아, 요정이 어디 있냐? 그림자밖에 없잖아."
마침내 그대는 아이를 설득시키고 힘이 없는 아이는 우뇌 지향에서 좌뇌
지향이 된다. 아이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아이는 그대의 세상에 살아야 한다.
아이는 자기 꿈을 잊어야 하고 모든 신화와 모든 시를 잊어야
하고 수학을 배워야 한다. 그는 물론 수학적이고 효율적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삶에 있어서는 불구가 되고 마비가 될 것이다. 존재로부터는 점점
더 멀어져 시장의 상품이 되어, 전 생애가 쓰레기에 불과하게 된다
. 설사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가치가 있다 해도.
산야신은 상상을 통해 살고, 마음의 꿈꾸는 특질을 통해 살고, 시를 통해 살고,
삶을 시화하고 비전을 통해 보는 사람이다. 그때
나무들은 보다 푸르고, 그때 새들은 더 아름다우며, 그때 만물은 눈부신
긍지를 가진다. 평범한 자갈이 다이아몬드가 된다. 평범한 돌이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 어떤 것도 평범하지 않다. 우뇌로 보면 모든 것이 성스럽고
신성하다. 종교는 우뇌에서 생겨난다:"

육체의 감각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육체의 감각은 이런 것이라고 결코 정해 놓고 생각지 말라.
그렇지 않다. 육체의 감각은 길들여져 왔다. 그대는 사회가 허용한 것만을 보고,
사회가 허용한 것만을 들으며 , 사회가 허용한 것만을 만진다.
인간은 자신의 감각 중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 이를테면 후각이 그렇다.
인간은 후각을 거의 잃었다. 개의 후각 능력을 한번 보라. 얼마나
발달했는지! 인간의 코는 어떤가? 왜 개나 말처럼 깊게 냄새맡을 수 없는가?
말은 수마일 떨어져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개는 냄새에 대한
엄청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기억이 없다. 무언가가 인간의
코를 막고 있다
이런 격차에 대해 깊이 연구해 온 사람들은 성(性)을 억압해서 후각을
잃었다고 말한다. 육체적으로 인간은 다른 동물처럼 감각적이지만
심리적으로 인간의 후각은 오염되어 왔다. 냄새는 그대의 몸에서 가장 성적인
통로 가운데 하나이다 동물의 경우에도 숫놈이 암놈과 교감하느냐
마느냐가 냄새를 통해서 결정된다. 냄새는 미묘한 암시다. 암놈이 숫놈과
교미할 준비가 되면 특정한 냄새를 풍긴다. 냄새를 통해서만 숫놈은
상대방이 자기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안다. 암놈의 생식기에서 냄새가
풍기지 않으면 숫놈은 물러난다.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인간의 후각이 자연 상태로 남아 있으면 소위 문명사회를 창조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냄새를 파괴했다. 길을 건너가는데
여자가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며 그대를 받아들인다는 암시를 준다.
그녀는 어떤 사람의 부인이고 남편이 함께 있다. 그대를 받아들인다는
신호가 왔다 어떡하겠는가?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대는 사람들의 눈을 마주보지 않는다. 혹 보더라도 아주 잠시 동안이다.
그대는 진짜로 사람을 보지 않고 줄곧 피한다. 그대가 그들을 보면
공격적으로 여겨질 것이다. 한번 기억해 보라. 정말로 사람을 쳐다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줄곧 사람들의 눈을 피해 왔는가? 만일 피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그 사람이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어떤 사실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을 보는 것은
좋은 매너가 아니므로 차라리 피하는 게 낫다. 우리는 말을 들을 때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과 얼굴이 자주 괴리될 테니까
그 사람은 어떤 것을 말하지만 그의 얼굴은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는 얼굴과 눈과 몸짓을 보는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혔다.
우리는 말만 듣는다. 가만히 지켜보면 그대는 사람들이 어떤 사실을 말하면서 줄곧
다른 것을 보여 준다는 데 놀랄 것이다. 그대는 똑바로 얼굴을 보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이 사실을 간파하지 못한다. 혹 보더라도 깨어서
주의 깊게 보는 것이 아니다. 그 눈길은 공허해서 거의 보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우리는 선택해서 소리를 듣는다 모든 종류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
선택해서 필요하면 듣는다. 사회나 나라마다 가치가 다르다. 원시적인 사회의
밀림에 사는 사람은 소리를 다른 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동물들에
늘 민감하게 깨어 있다. 그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민감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동물들이 없어서 공포가 없는 문명 세계에
살고 있다. 그대의 생명은 위태롭지 않다. 필요성이 없으므로
그대의 귀는 완전한 기능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서로 만지지도 않고 손을 잡지도 않으며 서로 껴안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대가 어떤 사람의 손을 잡으면 그대도 당황하고 그도 당황한다.
타인을 안는 것도 잘못된 일인 듯이 여긴다. 그대는 서둘러 그의
몸에서 벗어나려 한다. 타인의 몸이 그대를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조차도 부모가 안을 수 없다. 커다란 두려움이 있는데, 모든
두려움은 파고들어가 보면 근본적으로 성의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성에 반대하는 터부가 있다. 어머니는 아들을 안지 못한다. 아들이
성적으로 동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두렵다. 아버지는 자기 딸을 안지 못한다.
자기가 육체적으로 동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따뜻함은 나름대로
작용 방식을 갖고 있다. 육체적으로 동하거나 성적으로 동하는 데
잘못된 것은 없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살아 있다는, 싱싱하게 살아
있다는 표시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그 성적 터부는 서로 떨어지라고,
거리를 두라고 말한다‥‥‥
요가에서 하는 모든 노력은 바로 이것이다. 몸을 생기 있고 감각적으로
만들고 회춘시켜, 감각이 최상으로 기능하도록 하는 것. 그러면
인간은 터부가 없이 작용한다. 그러면 맑음과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흐른다.
다시 온기가 생기고 열림이 그리고 성장이 일어난다. 늘 새롭고 젊으며
항상 모험 속에 산다. 육체는 오르가즘 속에 있게 된다. 기쁨이
그대를 감싼다. 기쁨에 의해 첫번째 오염이 사라진다. 따라서 나의 주장은
기뻐하고 누리고 삶을 즐기고 육체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받아들일 뿐 아니라
신이 그대에게 그토록 아름다운 육체와 그토록 감각적인
육체를, 실재와 연결된 숱한 문들을, 눈과 귀와 코와 촉감을 준 것을 감사하라.
이 모든 창문을 열고 삶의 미풍이 흘러 들어오게 하라. 삶의 태양이
비쳐 들어오게 하라. 보다 감각적이 되는 것을 배우라. 감각적이
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 첫번째 필터를 떨쳐 버리라.
풀 위에 앉아 있다면 눈을 감고 풀이 되라. 풀처럼 되라. 자신이 풀
이라고 느끼라. 풀의 푸르름을 느끼라. 풀의 촉촉함을 느끼라. 풀에서
풍겨 나오는 그윽한 내음을 느끼라, 풀잎 위의 이슬방울을 느끼라.
이슬방울들이 그대 위에 있다고 느끼라. 풀잎 위에 햇살이 노니는 걸 느끼라.
잠깐 동안 그 안에 빠져들면 그대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갖게 될 것이다. 온갖 상황 속에서, 강 속에서, 수영장에서,
햇빛 쏟아지는 해변에 앉아서, 밤에 달을 보며, 모래 위에 눈을 감고 누워
모래를 느끼며 그렇게 해 보라. 그대의 육체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기회가 셀 수 없이 많다. 오직 그대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사회는
육체의 작용을 훼손시켜 왔으니 그대가 원상태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일단
기쁨을 통해 듣고 보고 만지고 냄새맡기 시작하면 그대는 실재를 듣고,
실재를 보고, 실재를 냄새맡게 된다:"

가끔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는 때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인간에게는 세 개의 주기가 있다. 첫번째 주기는 육체적인 것이다.
완결되는 데 23일이 걸리는 이 주기는 육체적 요인의 테두리
내에서 영향을 미치는데, 질댕에 대한 저항과 힘과 조정, 여타 기본적인
육체기능, 그리고 육체적 행복의 감각 등이 포함된다
두번째 주기는 정서적인 것이다. 여성의 몸이 월경을 하는 데 28일이
걸리는 것처럼, 이것이 완결되는 데는 28일이 걸린다. 이제 과학은
남자에게도 28일 단위로 일종의 주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성의 주기는 드러나 있고 가시적이다. 남자의 주기는 드러나거나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심리적이고 정서적이지만, 어쨌든 주기를 가지고 있다.
정서적 주기는 창조성과 감수성, 심리적 건강, 분위기,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각을 관장한다.
여성은 월경을 할 때 3-4일 동안 괴롭고 슬프고 부정적이고 음울하고
죽어 있고 몹시 처지는 걸 느끼고 신경질적이고 흔들린다. 그러나 그
과정이 너무 드러나 있어서 여성은 그것에 익숙해진다. 마침내 그건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다지 괴롭지 않게 된다. 매달 일어나는 일이고
드러난 것이라서 차차 자리를 잡게 된다. 그렇지만 남자의
문제는 좀더 어렵다 주기가 있으나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어디서 비롯되고 언제 끝날지 모른다. 이것은 육체 내에서 28일 주기를
갖는데, 달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달이 있으면 그대는 훨씬 행복할 것이고
달이 없으면 덜 행복할 것이다.
세번째 주기는 지적인 것이다. 그것은 약 33일에 걸쳐 진행된다. 이
주기는 기억과 민감함과 지식과,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기능들에 대한
수용성을 규정한다. 각 주기의 처음의 반은 긍정적이고 나머지 반은 부정적이다.
때로는 부정적인 단계와 긍정적인 단계가 뒤바뀌기도 한다.
세 개의 주기가 모두 긍정적인 상태에 있을 때 기쁨과 환희의 절정이 온다.
동시에 세 가지가 모두 부정 상태에 있을 때에는 지옥이 된다. 천국은
세 가지 모두가 긍정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고 지옥은 그 반대 극단이다.
그리고 그 양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니르바나, 모크샤, 절대 자유다.
그대는 그대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를 이해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부정적 단계에 대한 일기를 적어 가보라.
3-4개월 안에 그대는 자신의 도표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다음 월요일에는 자신이 안 좋은 분위기로 들어가리란 걸 예측할 수 있다.
옛날에는 요기들이 그런 도표를 작성하곤 했다. 바이오 리듬의 과학은
요가와 수피(Sufi)"'의 여러 학파에서는 상식으로 가르쳐졌다. 그
도표들은 아주 유용했다. 만약 매달 첫 주에 자신이 굉장히 부정적이리란 걸 알면
몇몇 문제거리들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주에는
나중에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 싸우지 말라. 화내지 말라: 정말로 이 도표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방에서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 7일 동안이나
3∼4일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하든
잘못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긍정적인 기간이 다가오면 그대는 안다. 관계를 맺을
때가, 가서 사람들을 만날 때가 된 것을. 아무 것도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전체적으로 다른 상태에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관찰하면
6개월이나 8개월 안에 그대는 관조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어떤 것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자연성의 일부이며 그대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을 알면 그대는 초월하기
시작한다:"

저는 왜 월경 때만 되면 파괴적인 느낌이 드는 걸까요?
많은 여자들이 월경 기간 동안엔 어느 정도 파괴적이 되는
그 이유는 지극히 생리적인 것이다. 그대는 이해하고 좀더 민감하고
깨어 있어야만 다소나마 자신의 생리보다 위에 있을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그것에 지배당하게 된다.
만일 그대가 임신을 하게 되면 월경 주기 중에 발산되던 에너지가
창조적이 되기 때문에 월경이 멈춘다. 그 에너지는 아이를 창조하는 것이다.
임신을 하지 않으면 매달 그 에너지가 쌓이는데, 이것이 창조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파괴적이 된다. 그래서 여자가 월경을 하게 되면 3∼4
일 동안은 아주 파괴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그 에너지를 갖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에너지가 진동해서 그대 존재의 깊은
핵심까지 넘나들기 때문에 어떤 창조성도 발휘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모든 창조적 에너지는 파괴적이 될 수 있고, 모든 파괴적 에너지는
창조적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히틀러는 처음엔 화가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예술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화가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파괴적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피카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하다. 에너지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의 에너지는
한없이 창조적이 될 수도 있었다.
대체로 여성들은 파괴적이지 않다. 과거에는 여자들이 계속 임신을
했으므로 전혀 파괴적이지 않았다. 한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다시 임신했다.
평생 동안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했다. 이제 세상에 처음으로
새로운 위험이 생겨나고 있는데, 그것은 여성의 파괴성이다 계속해서
임신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실상 임신은 거의 구시대적인 행위가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에너지는 남아 있다.
나는 출산조절 방법과 여성해방운동 사이에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
여성은 파괴적이 되어 가정 생활과 자신들의 관계를 파괴하고 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합리화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속 상태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파괴적인 국면이다.
그들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나 그걸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른다
출산조절 방법은 그들의 창조적인 연결을 끊어 버렸다. 이제 어떤 채널이
열리지 않으면 그들은 몹시 파괴적이 될 것이다.
서양에서 가정생활은 거의 끝나 버렸다. 계속되는 갈등과 싸움과
서로에 대한 악의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지만-생리적인 문제다.
따라서 생리 기간이 다가온다고 느끼면 한층 주의하라. 그 기간이
시작되기 전에 격하게 춤을 추라. 인간은 자연의 속성을 넘어설 수 있다.
인간도 고도의 자연적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리를
넘어설 수 있고 넘어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은 호르몬의 노예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파괴적이라고 느껴지면 춤을 추기 시작하라.
춤이 그대의 에너지를 흡수할 것이다. 그대는 반대로 하고 있다. 그대는
요 며칠 동안 쉬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언가, 어떤 일을 하라, 오래 걷는 것 같은 일을. 에너지는 분출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핵심을 잡으면, 그 춤이 그대를 완전히 이완시킨다는
걸 알면, 생리기간의 그 4일은 최고로 멋진 기간이 될 것이다.
이 기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에너지가 넘쳐나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는 7년 주기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이 주기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실제로 모든 인생에는 7년의 주기가 있다. 7년마다 한 주기가
완결되면서 우리는 바뀐다. 큰 변화는 모두 한 주기가 끝나는 지점과 다은
주기가 시작되는 지점 사이에서 일어난다.
먼저, 일곱 살이 되면 아이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시작된다. 그때까지 그는 순수하다. 이제 아이는 세상의 교활함과
영악함, 속임수, 게임 등을 배우기 시작한다. 꾸미는 걸 배우기 시작하고
가면을 쓰기 시작한다. 허위의 첫번째 껍질이 그를 에워싸기 시작한다.
열네 살이 되면 그때까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성이 불현듯 그의
존재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의 세계는 바귄다. 전적으로 바뀐다.
처음으로 이성(異性)에 관심을 갖는다. 완전히 새로운 인생관이 열리면서
꿈꾸고 공상하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7년을 살게 된다‥‥‥
스물한 살이 되면 이제 권력과 에고, 야망을 좇는 여행이 시작된다.
이제 그는 권력과 돈, 명예를 추구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때가 스무한
살이고, 이렇게 해서 다시 한 주기가 완결된다.
스물여덟 살이 되면 자리를 잡게 되고 안정과 안락과 은행잔고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히피들이 "서른이 넘은 사람은 아무도 믿지
말라"고 하는 말은 옳다. 그는 스물여덟 살이라고 해야 한다. 사람이 외골수가
되는 때가 바로 이때이기 때문이다.
서른다섯 살이 되면 다시 변화가 일어난다. 서른다섯은 거의 삶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인간이 일흔 살에 죽는다고 보면 서른다섯은
분기점이 된다. 큰 주기의 반이 지나가면서 인간은 죽음을 생각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위궤양과 고혈압, 심장 발작 등의 온갖 일이 일어나는
때가 서른다섯에서 마흔둘 사이, 바로 이 시기다.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움이 이 모든 일을 유발한다. 암, 변한‥‥‥ 인간은 온갖 사고에
시달린다. 두려움이 그의 존재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제 죽음이
가까워진 듯이 보인다. 서른다섯을 지나는 날, 죽음을 향한 발걸음을
뗀 것이다.
마흔두 살이 되면 인간은 종교적이 되기 시작한다. 이제 죽음은 논리상의 일이
아니다.
죽음에 더 민감하게 되면서 무언가를, 정말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한다. 더 이상 기다리면 너무 늦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흔
둘에 인간은 종교를 필요로 한다 열네 살에 여자가 필요했고 남자하고
관계를 맺고 싶어했던 것처럼. 그때에 성적인 관계가 필요했던 것처럼,
이제 종교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그는 자신을 헌신하고, 가서 자신을
내려놓을 신이, 스승이 필요하다.
마흔아홉 살에 인간은 종교 안에 자리를 잡게 된다. 탐구는 끝나고
그는 자리를 잡는다.
쉰여섯 살에는, 만사가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인간이 자신의 리듬을
따르기만 한다면 인간은 신성(神性)을 일별하기 시작한다.
예순세 살에는 모든 일이 순조롭다면 첫 사토리를 체험할 것이다.
만약 첫 사토리를 체험하는 일이 예순셋에 일어나면 일흔 살에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땐 죽음이 죽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신성을 향한 문이 되고 사랑하는 자와의 만남이 될 것이다. "

성과 건강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종교에서 나쁘다고 말해 온 모든 것들은 아주 유익한 용도로
이용될 수 있다.
가령 성은 그들이 나쁜 것이고 악마의 행위라고 비난해 왔지만,
그대가 성을 비난하면 그 에너지를 변형시킬 수 없게 된다‥‥‥
성은 에너지일 뿐이다. 그것은 아래든 위든 어떤 방향으로도 갈 수 있다.
그대가 성을 수용하면 바로 그 수용과 함께 그것은 위로 움직인다.
그것과 친숙해졌기 때문이다 성을 거부하는 순간 그대는 자신 안에
불화와 분리를 만들어 내게 된다.
이러한 신과 악마 사이의 분리는 성서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에게 스며들어 그대를 정신분열증 환자로 만든다. 한쪽 부분이
생각한다. "좋은 부분은 나야. 그리고 나쁜 부분은 악마에게서 온 것이
분명해," 그대는 뭉개어진다. 그러면 이제 그대의 존재 중에서 그대의 것이
아니라고 거부한 그 부분을 어떻게 변화시키려는가? 그것은
너무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거부는 그것을 더욱 열정적으로 만든다.
그대가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계속 축적하고 억압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마음의 질병 가운데 90퍼센트가 바로 성의 억압에서 온 것이고,
몸의 질병가운데 50퍼센트가 성을 억압한 데서 온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90퍼센트의 심리적 질병이
그냥 사라지고 50퍼센트의 육체적 질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처음으로, 건강과 헝복과 전체성에 있어 완전히
새로운 나이를 지닌 인간 존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에겐 전체성만이 성스러운 것이다. 그대에게 더 이상 정신분열증이 없고,
그대가 하나일 때, 통일된 하나일 때, 그리고 "그것이 나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나이고 나는 최상의 상태로 그것을 사용할 것이다"
라고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만한 용기가 있을 때 전체성은 이룩된다:"

성 에너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성 에너지는 그대가 지닌 생명력의 다른 이름이다. 종교들은
'성'이란 말을 비난한다. 그런 비난만 없다면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
그것은 바로 그대의 생명력이다. 성 에너지는 자연 에너지다.
그대는 그 에너지에서 태어났다. 성은 그대의 창조 에너지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시인이 시를 쓰거나 무용가가 춤을 출 때, 모든 것은
다 생명력의 표현이다.
그대의 성 에너지로부터 아이가 태어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서
창조한 모든 것이 성 에너지로부터 온다. 성 에너지는 많은 변형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낮은 차원에서는 생물학적이고 높은 차원에서는
창조적이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예외없이 대단히 성적이라는 점을 그대는
이해해야 한다. 시인이나 화가나 무용가를 보면 창조적인 사람들은 아마
성적인데, 이것은 내가 신비가라 부르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아마 그들은 지상에서 가장 성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 에너지로 충만하고 풍부하게 넘쳐 흐르기 때문이다‥‥‥
성 에너지는 영적 성장의 잠재력이다. 그대는 오직 그대의 성 에너지에
의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
나는 거의 35년 동안 온갖 종류의 책들을, 티벳과 중국, 일본
인도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경전을 가지고 있다-의 이상스런 경전들을
섭렵해 왔다. 그러면서 한 가지 사실을 찾아 봤는데, 그것은 깨달은
사람 중에 성불구자는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디메도 성불구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었다. 성불구자가 위대한 시인이나 위대한 가수, 위대한
조각가나 과학자가 된 적은 없다. 성불구자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에게는
생명력이 없다. 그는 빈 껍데기다. 그는 아무 것도 창조할 수가 없다.
한 사람을 깨달은 존재로 만드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성은 시장통의 일이 돼 버렸다. 한편 종교는 성 에너지를 억압하면서
타락을 창조했고, 이 타락은 치료가 불가능한 에이즈라는 위험스런
병을 만들었다. 그 모든 공로는 종교들에 돌아간다. 만약 그들이 조금이라도
인간을 이해한다면 모든 교회와 사원과 바티칸 자체를 에이즈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병원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들이 이 사람들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 그들은 남자로 하여금
여자와 떨어져 살도록 강요해 왔고, 독신이 종교생활의 근본 바탕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독신은 자연스럽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종교 생활의 근본이 될 수 없다.
독신은 비자연적이다. 또한 종교들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 다른 사원에
집어넣어 호모섹스라는 상황을 창조해 왔다. 그들은 호모섹스의
선구자이고, 호모섹스는 에이즈를 불렀다. 에이즈는 질병의 범주에 넣을 수
없기 매문에 단순히 질병이라 부를 수 없다. 그것은 죽음 자체다.
그리하여 종교는 한 손으로는 타락을 부르고 다른 손으로는 일부일처제
(monogamy)를 주장했다. 실상 그것은 단조로움(monotony)을 의미한다.
일부일처제는 창녀라는 직업을 창조해 냈다. 성직자들은 창녀에 대해
책임이 있다. 우리가 수많은 아름다운 여자들을 이용해서 착취의
대상을, 상품을, 물건을 만들어 온 것은 극히 추악하고 병적이다.
오늘날까지도 성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성은 억누를 필요가 없다.
성은 바로 그데의 에너지이므로. 성은 변형되어아 한다.
그것은 반드시 최고로 순수한 상태로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대가 위로
움직이기 시작함에 따라-그 사닥다리의 이름이 명상이다-성은
사랑이 되고, 성은 자비가 되고, 궁극적으로 성은 그대 내면 존재의, 광명의
각성의, 깨달음의 폭발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성 에너지다.
성은 부패할 수도 있고 악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성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명상을 통해서 침묵의 공간을 향해 위로 움직이도록 도우면,
그데의 가슴을 통과해 몸의 최고 지점인 일곱번째 센터에 이르도록 도우면,
그대는 에너지에게 감사함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부끄러움을 느낄 뿐이다.
이런 수치심과 죄의식은 종교 조직들과 종교의 창시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당연히 의문이 생긴다. 그들은 왜 성을 더러운 것으로 만들었을까?
그들은 성을 더러운 것으로 만듦으로써 온 세상과 마음과 성장을
더럽혀 왔다. 왜? 이것이 인류를 노예 상태에 묶어 두는 가장 간단한
발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엔게 죄의식을 안기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고,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머리를 반항적으로 쳐들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기득권층은 인간이 자신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잃고 죄의식과
수치심을 느끼기를 바란다 그들은 끊임없이 성을 비난해 왔다.
그들의 비난은 전 세계를 아주 불행하고 심리적으로 비정상인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 모든 범죄는 그대들의 소위 덕망 있는 지도자들과 종교의 성자들에 의해
저질러져 왔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이런 해악을 저질러 왔다
에너지를 승화시키고 창조적이 되도록 돕기는커녕 그들은 오직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에너지를 억누르도록 강요해 왔다. 억압된 에너지는
암이 되고, 온갖 종류의 타락을 만들어 낸다.

미술 수업중에 교사가 아동들에게 칠판에 자기를 가장 흥분시키는 것을
표현해 보라고 했다.
꼬마 하이미가 일어나더니 들쭉날쭉한 긴 선을 그렸다
"그게 뭐니?" 선생이 물었다.
"번개예요." 하이미가 말했다. "전 번개를 볼 때마다 너무 흥분해서
비명을 질러요."
"아주 좋아요." 선생이 말했다.
다음에 꼬마 샐리가 파도치는 긴 선을 그렸다. 그것은 늘 자신을
흥분시키는 바다라고 설명했다. 교사는 그것 역시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꼬마 에르니가 칠판으로 가더니 점 하나를 찍고  돌아가 앉았다.
"이게 뭐지?" 교사가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그건 생리 주기예요." 에르너가 말했다.
"근데,"> 교사가 말했다. "생리 때문에 왜 흥분한다는 거지?"
"모르겠어요." 에르니가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 언니가 그걸 두 번
걸렀는데 온 가족이 흥분했어요."

이런 흥분은 세상 전체를 정신병원으로 만들어 버리고 계속 급속도로
자라나 모든 과학적 계산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40년 전 인도가 해방됐을 때 인구가 4억이었다. 이제 겨우 40년이
지났는데 인구가 9억이다. 40년 동안에 5억 명이 늘었다. 그리고 과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금세기 말이 되면 인도는 처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는 중국이 첫째였다.
인도의 인구는 10억이 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자옌드라 사라스와티는
가족계획이나 산아조절을 하지 말라고 한다
에티오피아에서 하루에 수천 명이 죽어 가고 있는 데도 교황은 산아
조절을 하지 말라고 하고 테레사 수녀도 산아조절을 하지 말라고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테레사에게는 빈민들이 필요하다.
빈민이 없으면 그녀는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런데 산아조절이
허용되면 어디서 빈민들을 구할 것인가?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산아조절법이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것들을 비난하지만,
신의 창조물이 아닌데도 약은 비난하지 않는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그 6일 동안에 적어도 약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약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소련에는 118세를 넘긴 사람들이 있는데,
여전히 젊다. 이들이 200세를 넘기지 말란 법이 없다. 150세를
넘긴 사람이 수천 명이 있지만 어떤 종교지도자도 그것을 비난하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건강과 장수를 주는 약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종교 지도자도 질병은 신의 창조물이니 허용돼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약은 이용될 수 있고, 그러면 사람들은 좀더 건강해질 수 있다.
사람이 건강해지면 자연히 성적으로도 더 강해진다. 하지만 산아조절법은
그들의 신도 수를 줄일 것이므로 사용될 수 없다. 이것은 숫자싸움이다
가톨릭 신도수는 6억인데, 오직 그 숫자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다. 숫자만 아니면 가톨릭은 삼류 종교이며, 거기엔 종교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크고 위대한 종교다.
그것은 오로지 숫자의 힘 때문이다. 가톨릭은 숫자가 감소하는 걸 용인할 수 없다.
설사 그 숫자가 전 인류를 죽일지라도.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산아조절법을 전적으로 찬성한다. 산아조절은
세상을 건강하게 하고 풍요롭게 한다. 두번째로, 산아조절법이 사용되면
성은 그 불경스러움 혹은 그 신성함을 떨쳐 버리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놀이가 되고 에너지의 즐거운 변환이 된다. 내가 볼 때,
산아조절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혁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고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다면 여자는 끊임없이 임신하고, 그 임신 때문에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없고, 교육적으로도 독립할 수 없으며, 남성의 지배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
여성들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임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많은 시간과
많은 창조적 에너지를 갖게 된다. 여태까지 인류의 반은 비창조적으로
남아 있어서, 위대한 시인도, 위대한 성자도, 위대한 음악가도,
위대한 예술가도 없었다. 여성은 시간을 갖지 못했다. 나는 요리책도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썼다는 걸 알고 놀랐다. 뿐만 아니라 일류 요리사도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별 다섯 개짜리 특급호텔의 훌륭한 주방장들은
항상 남자다. 이상하다‥‥‥ 그것은 언제나 여성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여성에겐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종교인들로 인해 여자들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성 에너지는 그저 더 많은 아이를 생산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명쌈의 연금술을 퐁해 존재의 지고의 상태로, 다른 차원의 창조성으로
기꺼이 변형되어야 한다. 생명은 계획되어야 한다. 돌발적인 것이 되어선 안된다.

저는 남자와 관계를 하다가 완전히 자제력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마음속에서
문을 닫아 버립니다. 가끔 제 느낌을 드러내면 남자들은
거의 미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위축되어 밋밋하게 즐기고는
완전히 절망하곤 합니다. 교제에 대한 저의 이런 두려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인간은, 특히 여성은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받는다. 여태까지의
모든 문명과 문화는 심리적으로 병이 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병을
자각하지도 못했는데, 치료의 첫걸음은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특히 비자연적이었다.
몇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먼저, 남자에게는 오직 한 번의 오르가즘이
가능한데, 여자는 여러 번의 오르가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커다란 문제를 야기했다. 사람들에게 결혼과 일부일처제가 강요되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한 번의 오르가즘을 촉발시키면 여자는 적어도
내다섯 번이 넘는 오르가즘을 준비하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여자를 만족시킬 능력이 없는 것이다. 남자가 발견한 방법은
여자에게 단 한 번의 오르가즘도 주지 말자는 것이다. 그들은 여자가
오르가즘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마저 앗아갔다.
둘째로, 남자의 성은 성기에 국한되어 있다. 여자의 경우는 다르다.
여자의 성은, 여자의 감각은 몸 전체에 퍼져 있다. 여자가 달아오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여자가 달아오르기 전에 남자는 끝나 버린다.
남자는 등을 돌리고 누워 코를 골기 시작한다. 수천 년 동안 세상의
수없이 많은 여성들이 위대한 자연의 선물인 오르가즘의 환희를 모르고 살다가
죽어 갔다. 그것은 남자의 에고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성의 온몸이 관능적으로 흥분하려면 긴 전희가 필요한데, 남자의
처지에서는 그렇게 되면 위험하다 여러 번의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어떻게 하겠는가?
과학적으로 보면, 성을 그다지 심각하게 보지 말고 오르가즘의 모든
영역을 충족시키기 위해 친구들을 부르거나 아니면 진동기구 같은 것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양쪽 다 문제가 있다. 만일 진동기구를 사용하면
여자가 원하는 만큼의 오르가즘을 줄 수 있기는 하지만, 일단 여자가
그것을 알면‥‥ 남자의 성기가 너무 빈약하게 보여 남자친구 대신
기구를 선택할 것이다. 만일 여러 친구들이 참여하면 그것은 난교를
벌인다는 식의 사회적인 스캔들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남자가 발견한
제일 간단한 방법은, 성행위를 하는 동안 여자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자는 거의 송장처럼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남자의 사정은 극히
짧아서 기껏해야 2-3초 정도이다. 그 짧은 시간에 여자는 자기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생물학적인 생산에 관한 한, 오르가즘은 필수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영적 성장에 관한 한 오르가즘은 필수조건이다. 내가 볼 때, 최초에
인류에게 명상이라는 개념을, 그리고 더 낫고 더 강렬하고 더 생기있는
어떤 것을 찾는다는 개념을 가져다 준 것은 오르가즘에 의한 지복의 체험이었다.
오르가즘은 그대의 내부에 엄청나게 많은 지복이 담겨 있다는
자연의 암시이다. 오르가즘은 단지 그 맛을 보여 준다. 그리고 나서는
그대가 계속 찾아 나갈 수 있다.
오르가즘 상태를 발견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금세기가 되어서야
심리학자들은 여성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자각하게 되었다. 정길분석이나
여타의 심리학 유파들이 내린 동일한 결론은, 여성은 영적 성장을
방해받아 집안의 하인에 불과한 존재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를 생산한다는 측면에서는 남자가 사정하는 것으로 족하다.
생물학적으론 문제가 없다. 그러나 심리적으론 문제가 있다. 여성들은 비교적
신경이 예민하고, 수다스럽고 성미가 까다로운데, 그 이유는 여성들이
생존권을 박탈당해 왔다는 데 있다. 柔런데 여성들은 그 생존권이 무엇인지 모른다.
서구 사회의 젊은 세대들만이 오르가즘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들이 진리를, 환희를 찾았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르가즘은 순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저 너머의 것에 대한
일별을 가능케 한다.
오르가즘에 있을 때에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하나는 마음이 끊임없는
수다를 멈춘다는 것이다. 잠시나마 무심의 순간이 된다. 두번째는,
시간이 멈춘다는 것이다. 한 순간의 오르가즘이 주는 희열은 너무도 무한하고
충만해서 영원과 맞먹는다. 아주 오랜 옛날에 인간은 자연이
자신에게 허락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두 가지라는 것을 알았다.
마음의 수다가 멈추고 내면이 고요해져서 모든 것이-시간을 포함해서
멎을 수 있다면 그대가 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리라는 것은
간단하고도 합리적인 결론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다른 남자나 여자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혼자서 이 명상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
또한 오르가즘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명상은 24시간 전체를 책임질 수 있다.
고타마 붓다 같은 사람은 삶의 모든 순간을 오르가즘의 기쁨 속에 산다.
그것은 성과는 관련이 없다.
나는 여성 중에는 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극소수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다른 이유도 많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여성들이 한 번도
오르가즘을 맛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광활한 하늘을 향한 창문은 열린적이 없다.
그들은 생활을 하고 아이들을 낳지만, 그들은 죽어 있다.
그들은 생물학과 남자들에 의해 마치 아이를 낳는 공장처럼 이용되었다
동양에서는 지금까지도 오르가즘을 아는 여자를 발견하기가 힘들다.
매우 지적이고 교육도 받았고 교양있는 여성들에게 질문해 보았는데,
그들에게는 오르가즘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실제로 동양의 언어엔
오르가즘(oragsm)'을 번역할 말이 없다. 그 말은 필요가 없었다. 한 번도
건드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남성은 여성들에게 창녀들이나 섹스를 즐기는 거라고 가르쳤다 창녀들은
 신음소리를 내고 쿵쾅대고 비명을 지르고 거의 광적이 된다.
품위 있는 여자가 되려면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여자는 긴장해 있고
마음 깊은 곳에서 창피함을 느낀다. 그런 식으로 이용되어 온 것이다.
성행위 후에 남편이 계속 코만 골 때 눈물을 흘린다고 많은 여자들이
내게 말했다. 여자는 거의 악기와 같아서 몸 전체에 무한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 감각은 깨워져야 한다. 그래서 전희가 필요한 것이다
남자는 성행위 후에 잠자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추하고 비문명적이고
비문화적이다. 그대에게 그런 기쁨을 준 여자에게 후희 또한 필요하다
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대의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이 문제는 풀려야 한다 그러나 결혼이 장벽이고 종교가 장벽이 된다.
빠진 오랜 관념이 장벽이다. 그들은 인류의 반이 즐거워지는 것을 막고
그들의 전 에너지-그것은 기쁨의 꽃으로 피어나야 한다-~
막아서 심술맞고 독기 있고 바가지나 씌우고 성마른 사람으로 만든다.
이건 장벽만 없다면 이 보든 바가지와 성마름은 사라질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결혼과 같은 계약 속에 존재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사랑 속에 존제해야 하지만 자유 또한 잃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서로
아무 것도 빛진 게 없다. 삶은 한층 유동적이 되어야 한다. 여자가 많은
친구들과 접촉하고 남자가 많은 여자들과 접촉하는 것이 룰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섹스가 놀이로서, 재미로서 주어질 때만 가능하다
성행위는 죄악이 아니라 재미다. 그리고 산아조절법과 피임약이 생산된
이래로 아기를 갖는 것에 대한 불안은 사라졌다.
산하조절법은 나의 견해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직 인간에게 다 드러나지 않았다. 과거엔 성행위가
아이를 낳고 또 낳고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여자를 파괴했다. 여자는
늘 임신을 하고 있었다. 늘 임신을 하고 열댓 명의 아이를 낳는 것은 거의
고문이었다 여자는 소처럼 이용당했다. 그러나 미래는 전적으로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는 남자로부터 오지 않을 것이다
마치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에게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는 뭉치라. 아무 것도
잃을 게 없다" 하고 말했듯이, 얻을 것들뿐이다. 그는 사회를 부자와
빈자라는 두 계급으로 나누었다. 나는 사회가 남자와 여자라는 두 계급으로
나뉜다고 본다
남자는 수세기 동안 주인이었고 여자는 종이었다. 여자들은 경매에
부쳐지고, 팔리고, 산 채로 불태워졌다. 온갖 비인간적인 일들이 여자들에게
행해졌다. 하지만 그들이 인류의 반을 구성하고 있다
미래에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투표 제도의 분리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그래서 여자는 여자를 위해서만
투표하고 남자는 남자를 위해서만 투표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의회마다 반은 여성이고 반은 남성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남성은 작은
당파들로 나누어졌다 여성은 분열하지 말고 기본적인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수천 년을 이어온 예속의 문제이기 때문에 당파를 만들
겨를이 없다. 국제적인 여성 정당 하나만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세상의 모든 정부들을 장악할 수 있다.
이것이 여성의 지위를 바꾸는 유일한 길인 것 같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변형시키는 완전한 자유를 과학에 허용하고 결혼이라는 관념을
버리는 것 말이다. 결혼이란 일종의 사적인 소유일 뿐이어서 정말 추한 것이다.
인간 존재는 소유될 수 없다. 인간은 소유물이 아니다. 또 사랑은
단지 즐거운 놀이어야 한다. 아이를 원한다면 아이는 사회로 귀속되어서
여자에게 엄마나 아내, 혹은 창녀라는 딱지를 붙이지 말아야 한다.
이런 딱지는 떼어내야 한다
그대는 묻는다. "남자와 관계를 하다가 완전히 자제력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 모든 여자들이 두려워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자제력을 잃으면 남자는 거의 광적이 된다.
남자는 다스리지 못한다. 그의 관능은 너무 초라하다. 왜냐하면 남자는
제공자여서 성행위 도중에 에너지를 잃기 때문이다. 여자는 성행위중에 에너지를
잃지 않는다. 반대로 에너지를 받았다고 느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남자는 수세기 동안 여성이 자신을 자제하고
거리를 유지하고 너무 친해지지 않도록 강요했다. 남자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전부 소똥 같은 것이다.
그대는 말한다. "저는 마음속으로 문을 닫아 버립니다 가끔 제 느낌을 드러내면
남자들은 거의 미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위축되어
밋밋하게 즐기고는 완전히 절망하곤 합니다. " 이것은 그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여자들의 이야기다. 여잔들은 모두 깊은 좌절 속에 신다.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자신들이 무엇을 빼앗겼는지조차 모른 채,
여자들에겐 오직 한 가지 출구밖에 없다. 그들은 교회를, 절을, 유태회교를
찾아가서 신에게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신도 남성우월론자이다.
효회의 삼위일체에는 여자를 위한 자리가 없다. 전부 다 남자다
성부, 성자, 성신. 교회는 게이 클럽이다.
나는 신이 처음 세상을 창조하고 진흙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고~
그들에게 입김으로 생명을 부여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신은 남녀를
균등하게 창조했다. 그러나 세상을 보면 알겠지만, 누가 창조했던간에
엉성한 구석이 있다. 신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고 그들이 잠을 잘 수 있도록
조그만 침대를 만들었다 그 침대는 너무 작아서 딱 한 사람만 잘 수 있었다.
그들은 동등했지만, 여자는 고집을 피웠다. 자기가 침대에 자고
남자는 바닥에 자야 한다고. 그러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닥에서 자고 싶지 않았다.
존재계의 첫날밤이 베개 싸움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들은 신에게 가야 했다. 그리고 해법은 아주 간단했다 그냥 큰
침대를 만들면 되는 것이었고, 그것은 어떤 목수라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신은 남자였고, 여느 남자들처럼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부숴 버렸다. 그리고 나서 이브를 만들었지만 이제 여자는 더
이상 남자하고 동등하지 않았다. 여자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에게 봉사하고 남자를 돌보고 남자에게 이용당해야
했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스토리를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그들은 아담과
이브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브는 이미 노예의 신분으로
강등됐다 그날 이후로 여자는 수천 가지 방식으로 노예 생활을 해 왔다.
재정적으로 여자는 독립이 허용되지 않았고 교육적으로도 남자와
동등해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재정적으로 독립할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도 여자는 경전을 읽거나 남이 경전을 읽는 것을
들을 수도 없었다.
여자의 날개는 온갖 방식으로 잘려져 왔다. 여자에게 행해진 가장 큰
해악은 결혼이다. 왜냐하면 남자도 여자도 일부일처제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리적으로만 일처다부제적이다. 그래서 인간들의 모든 심리는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도록 강요받아 왔다. 여자가 남자로부터 독립하면
온갖 종류의 모폭으로 고통받아야 했다. 남자는 주인이었고
소유주였으며 모든 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일부다처제적인 본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자는 창녀를 만들어 냈다.
창녀는 결혼의 부산물이다. 이 추한 매춘제도는 결혼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겉혼의 그림자다.
왜냐하면 남자는 일부일처 관계에 얽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은신의 자유가 있으며 돈이 있고 교육을 받았고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창녀를 발명해 냈다. 여성을 창녀로 만듦으로써 여성을
파괴한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살인이었다. 이상한 일은
모든 종교가 매춘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매춘의 원인은 그들에게 있다.
그들은 모두 결혼을 지지한다. 그들은 매춘이 결혼과 함께
재계로 들어왔다는 간단한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이제 여성해방 운동은 남자가 여자에게 해 온 온갖 어리석은 일들」
흉내내려고 한다. 런던에서,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남자들을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이것은 혁명적인 발걸음이 아니라 ?
성공적인 발걸음이다
문제는, 성행위를 하는 동안 통제를 풀지 않으면 오르가즘을 체험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나의 사람들은 좀더 이해를 넓혀
여자들이 신음소리를 내고 끙끙거리고 비명을 지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여자의 온몸이 전적으로 용해되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우려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엄천난 치유다. 그녀는 그대에게
심술을 부리거나 바가지를 긁지 않을 것이다. 심술을 부릴 에너지가
무한한 기쁨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그들이 그대들의 신음소리와 끙끙대는 걸 걱정한다면, 그건
그들의 문제이지 그대의 문제가 아니다. 그대는 그들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의 사랑을 진실로 축연이 되게 하라. 뺑소니치듯이 하지 말며
춤추라 노레하라. 음악을 연주하라. 섹스를 두뇌적인 것으로 만들지 말라.
두뇌적인 섹스는 옳지 않다. 섹스는 자연발생적이어야 한다.
분위기를 창조하라. 그대의 침실은 사원처럼 성스러워야 한다. 침실에서는
다른 것을 하지 말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라. 사랑이 스스로 자연발생적인
일로 일어난다면 생물학이 그대에게 명상의 일별을 준다는 것을 알고
엄청나게 놀랄 것이다 여자가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라. 여자는
미쳐야 한다. 여자의 온몸은 전적으로 다른 공간 속에 있다. 여자는
자제할 수 없다. 자제하면 그녀는 시체같이 될 것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송장처럼 성행위를 한다.
나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죽자 오랜 이집트 의식에 따라 3일 동안 매장하지 않았다. 그녀는
3일 동안 강간당했다. 죽은 몸을 말이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경악했다. 어떤 종류의 인간이 그녀를 강간했을까?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남자들이 여자를
송장으로 격하시킨다. 적어도 성행위중에는.
사랑과 섹스에 대한 가장 오래된 보고서는 섹스에 관한 잠언집인
바츠야야나의 』카마 수트라이다. 거기엔 84가지의 체위가 묘사되어 있다.
기독교 전도사들이 동양에 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체위,
즉 남성상위 체위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것은 그래야 남자가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여자는 남자 밑에
송장처럼 누워 있다.
바츠야야나의 제안은 지극히 옳은 것으로, 여자가 위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 상위는 몹시 비문명적이다. 여자는 훨씬 연약하다.
그러나 남성이 위에 올라가는 것을 택한 까닭은 여자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수 밑에 깔리면 미녀는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여자는
눈을 뜨지도 못한다. 그러면 창녀처럼 보이니까, 여자는 숙녀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 자세, 즉 남성상위 체위는 동양에서는 선교사 체위로
알려져 있다.
남녀 관계에서 위대한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연구소들이
발전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 짐승도 사랑하는 법을 아는데
인간이 그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가르치는 겄 가운데 기본이 전희와 후희다. 그렇게 하면
사랑은 아주 성스런 경험이 된다.
남자와 관계를 하다가 완전히 자제력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떨쳐 버려야 한다. 멍청이들은 두려워하도록 내버려두라. 그가
두려워하고 싶어한다면 그건 그의 일이다. 그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진실해야 한다 그대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속이고 있다.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 남자가 미친 사람처럼 되어 벌거벗은 채로
밖을 뛰쳐나간다고 해서 뭐가 해가 되는가? 문을 닫으라! 이 남자가
미쳤다는 걸 모든 이웃이 알게 하라. 하지만 오르가즘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자제할 필요가 없다. 오르가즘의 경험은 몰입되고 녹아들고
마음을 잃고 시간을 잃는 경험이다 그것은 아마 남자 없이,
파트너 없이, 마음을 떨치고 시간을 떨치며 그대 자신 속에 있는
오르가즘의 기쁨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는 탐구에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나는 이것을 참된 명상이라 부른다.
그러니 위축되어 밋밋하게 즐기는 것을 그만두라 그러면 그대의
욕망이 전부 사라질 것이다. 왜 남자 때문에 걱정하는가? 그가 묻게 내버려 두라.
"어떡하죠? 이 여자가 미쳐서 내 위에 올라타고 얼굴을 할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기 내 장소에서는, 나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걸 가지고 소란을 떨 수 없다. 그는 그것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니면 명상하라. 누가 여자하고 관계를 가지라고 했는가?
여자는 명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여자와 온갖 귀찮은 문제들을
피하기 위해 명상을 발견한 사람은 아마 이런 미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고요히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봄이 오고
풀은 절로 자랐다. 그렇게 하면 된다.

한 뚱뚱한 미국인이 거리를 걷다 간판을 보았다. "경이적인 살빼기 요법!
24시간 코스 1,000달러. 6시간 코스 5,000달러."
호기심이 동한 그는 안으로 들어가 접수 담당자에게 24시간 코스에 관해
문의했다. 안내에 따라 큰 방 안을 들여다보니 아름다운 처녀가
벌거벗고는 목에 이런 글을 걸고 있었다. "나를 잡으세요. 나와 사랑을 나누세요.
하지만 먼저 나를 잡아야 해요."
그것이 살빼는 방법이었다! 그는 몹시 감동해서 생각했다. '이게
1,000달러짜리면 f,000달러짜리는 다섯 배로 좋을 거야: 그래서 그는
즉시 5,000달러, 즉 6시간 짜리 코스에 등록했다.
그는 옷을 벗고 다른 큰 방에 들어갔다. 문이 밖에서 잠겼다. 방 안에는
무지무지하게 큰 고릴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놈의 목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었다. "당신을 잡겠어요. 당신하고 관계를 갖겠어요."

걱정하지 말라 게임 전체를 즐기라. 섹스를 즐겁게 생각하라. 어떤
남자가 미친 짓을 하면‥‥‥ 세상에는 수백만 명의 남자가 있다. 언젠가는
미친 짓을 하지 않는 어떤 진짜 광인을 만날 것이다. 어쨌든 미친 듯이
침대 주변을 뛰어다니는 것은 그 남자에겐 1달러도 들지 않는 살빼기
요법이 될 것이다. "'

인간의 마음은 어떤 점에서 타락했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자신의 본성에 반해 성직자들과 정치가들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타락했다. 타락은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는 순간
생겨난다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창 밖으로 던져 버릴 수 없다.
그것은 그대 안에 있다. 그러나 그것을 거스르면 그것의 자연스런 표현은
차단된다. 그리고 자연스런 표현이 차단되면 그 비자연적인 에너지는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한다. 밖으로 분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독신은 수백만의 타락한 사람을 양산했다. 그들의 타락은
독신이라는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독신이라는 관념에서 호모섹스가
생겨나고 레스비언이 생겨나고 수간(獸姦)이 생겨나고 도색 사진이 생겨난다.
이제 그 모든 타락은 세상에 에이즈라는 새로운 질병을 가져왔는데,
이 병엔 치료법이 없다. 여태껏 어떤 인물도 그것이 독신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면 모든 종교를 건드리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때가 되었을 때 자신의 모든 기득권이 위협받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단 열 사람도 없을 정도로
인간성이 메마른 줄은 몰랐다 나는 세상의 지성들에게 놘전히 실망했다.
아무도 독신이 죄를 만들어 낸다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정부는
호모섹스가 범죄라고 하는 댑률을 제정하고 있다. 그러한 행위를 죄로 만들면서
아무도 사람들이 왜 호모섹스를 하게 되는지는 묻지 않고 있다.
가장 먼저 호모섹스로 돌아서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승려, 군인,
죄수, 대학 기숙사에 따로 사는 학생들이다. 그들은 열네 살이 되면 성적으로
성숙되지만 결혼하려면 적어도 10년은 기다려아 한다. 그런데
생리학자들은 남자의 성, 즉 남자의 성 에너지는 열여덟 살쯤에 최고조에
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때가 되어 결혼을 하게 되면 그들은 이미
하락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들의 에너지가 절정에 올라 있을 때 소녀들을
만나는 걸 금지한다. 소녀들도 마찬가지 형편이다. 기숙사에서도
섞이는 게 허락되지 않는다. 안 그러면 호모섹스는 있을 리 없다. 비구니와
비구들이 같은 절에 살도록 허락해야 한다. 그러면 호모섹스가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근본을 부숴 버리면 타락은 사라진다.
목동이 멀리 떨어진 숲이나 산 속에서 양떼들과 살면 양과 성헹위를
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수간이다. 그들은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외지에 혼자 있는데, 그들의 성 에너지는 분출할 통로를 찾는다.
종교들이 인간을 지배한 이래로 인간들 주위에는 타락이 있어 왔다.
그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아무런 이해 없이, 인간 생리에 대한 지식 없이
사람들에게 수행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직도 그 짓을 하면서
정부에다가 호모섹스에는 최소 5년형을 선고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이상한 일은, 호모섹스가 감옥에서 가장 널리 행해진다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을 감옥으로 보냄으로써 그들에게 새로운 목초지를,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도
독신이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가 독신을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신은 완전히 금지돼야 하며 모든 비구들과 비구니들이 서로 함께
살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나 한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비자연적인 행위는 막아야 한다.
타락은 종교들이 자연에 반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리고 신(神)은
모든 타락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타락이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들은
신의 죽음을 선언해야 한다. 오직 신의 죽음과 더불어 그 종교들은 사라지고
인간은 자기 본성에 따라 살 수 있는 자유 속에 남겨진다.

암소 엘시는 울타리의 이쪽에 있고 수소 페르디난드는 다른 쪽에 있었다.
엘시가 페르디난드에게 윙크를 하자 그놈은 엘시 쪽으로 넘어왔다.
네가 수소 페르디난드니?" 엘시가 물었다.
"페르디난드라고 불러 줘 ." 수소가 말했다. "울타리가 생각보다 높더군."

그래서 타락하게 된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가장 커다란 재난이자 재해이며, 인간 자신에 의한
자살 기도임이 드러났다. 그것은 온통 비자연적인 제도를 창조했다.
한 손에는 독신을, 다른 손에는 결혼을 그들은 결혼을 높이 추켜세워 왔다.
결혼은, 그들의 말에 따르면, 하늘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지옥 속에 산다. 이상한 일이다. 결혼은
하늘에서 탄생한 것인데 결혼한 사람들은 지옥 속에 산다. 그런데도
결혼에 반대하는 말을 하면 지옥 속에 사는 그 사람들조차도 분노하며
손을 들어 주질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인 레오 톨스토이와 체홉, 고리키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세 사람이 톨스토이의 집
정원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침내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체홉이 어떤 이야기를 했고, 고리키도 무슨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를 보며 말했다. "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소?"
그는 말했다. "말할 것이오. 그렇지만 내 한 쪽 발이 무덤에 들어갈 때
말하겠소. 말을 하고 무덤으로 뛰어들어갈 것이오. 내가 말을 하면
내 마누라가 들을 테니 말이오‥‥‥ 나는 이미 지옥에 살고 있소. 사태를
더 악화시킬 이유가 뭐 있겠소? 지금은 침묵을 지키겠소."

하이미 골드버그가 정신병원의 문을 두드렸다. 간호사가 문을 열자
그는 최근에 탈출한 환자가 없느냐고 물었다.
"왜 그러시죠?" 간호사가 물었다.
골드버그가 대답했다. "글쎄, 어떤 놈이 내 마누라하고 도망을 쳤지
뭐요. ""

아이를 낳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엄마의 자궁 속에서 아이들은 아무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있을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일단 엄마의 자궁에서 나오면 엄청난 두려움이
온 존재를 파고든다‥‥‥‥ 아이는 마치 나무가 땅에서 뿌리째 뽑히듯
뽑혀 나온 것이다. 나무 전체가 흔들리고 떨린다. 그대는 나무의 뿌리를
뽑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근본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는
다른 영양분이, 존재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안다. 땅이 그것을 돌보고
있었는데 그대가 뿌리를 뽑아 버린 것이다‥‥‥
아이가 자궁에서 나오는 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이다. 죽음
조차도 그렇게 큰 충격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예고 없이 오기 때문이다.
죽음은 대부분 무의식 상태에서 맞이한다. 하지만 엄마의
자궁에서 나올 때 아이는 의식 상태이다. 사실, 그는 처음으로 의식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9개월 동안의 긴 잠이, 평화로운 잠이 방해받는다.
그리고 그대는 어머니와 연결된 끈을 자른다.
그대가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을 끊는 순간 그대는 두려움을 가진
개인을 창조한 것이다. 이것은 바른 길이 아니다. 그러나 여태까지 그렇게
해 왔다 부지불식간에 성직자와 인간을 이것은 착취하는 종교들을
도와 주었다.
아이는 엄마에게서 종더 천천히, 좀더 서서히 나와야 한다. 그런 충격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조절할 수 있다. 과학적인 조절이 가능하다.
실내에 눈부신 빛이 있어서는 안된다. 아이는 9개월 동안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살았고, 전혀 빛을 본 적이 없는 몹시 섬약한 눈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병원에는 눈부신 광선과 형광등이 있어서 아이는
갑자기 빛과 마주친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한 눈
때문에 고생하고 뒤에 가서는 안경을 써야 한다. 어떤 동물도 안경이
필요치 않다. 안경을 쓰고 신문을 보는 동물옳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의
눈은 평생 동안, 죽을 때까지 완전히 건강하다. 안경을 쓰는 것은 인간
뿐이다‥‥‥‥ 그 시초는 생명이 탄생할 때부터 시작된다. 그래선 안된다
아이는 어둠이나 아주 부드러운 빛, 촛불 같은 빛 속에서 탄생해야 한다.
어둠이 최고지만 만일 약간의 빛이 필요하다면 촛불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의사들은 여태까지 어떻게 해 왔는가? 그들은 아이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들이 아이를 환영하는 방법을 보면
추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아이의 발을 잡아서 거꾸로 들고는 엉덩이를
때린다. 이 바보스런 의식(儀式) 뒤에 있는 생각은, 이렇게 해야 아이가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 아이는 스스로 숨쉬지 않았고
엄마가 아이를 위해 숨을 쉬고 아이를 위해 먹고 아이를 위해
모든 걸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으로 나온 것을 환영하기 위해
거꾸로 들고 엉덩이를 때린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시작이 아니다.
그러나 의사는 급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이는 스스로 호흡을
시작할 것이다.
아이는 엄마의 배 위에 놓아 두어야 한다. 탯줄을 자르기 전에 엄마
배 위에 올려 두어야 한다. 아이는 배 안쪽 바로 밑에 있었다 이제 아이는
밖에 있다. 그것은 커다란 변화다. 엄마가 있으니 아이는 엄마를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아이는 그 파동을 안다. 아이는 이것이 자신의
집이란 걸 확실히 자각한다. 아이는 밖으로 나갔지만 이것은 자신의
집이다. 엄마와 좀더 함께 있게 하라 그리하여 바깥에서 엄마와
친숙해지도록 하라. 아이가 스스로 숨을 쉴 때까지 탯줄을 자르지 말라.
그런데 어떤가? 우리는 탯줄을 끊고 엉덩이를 때려 숨을 쉬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아이에 대한 강요다. 이것은 폭력이고 정말로 비과학적이며
비자연적인 일이다.
아이가 스스로 첫 숨을 쉬도록 하라. 몇 분이 걸릴 것이다. 허겁지겁
서두르지 말라. 그것은 인간의 전 생애가 걸린 문제다. 그대는 2∼3분간
담배를 피울 수도 있고 여자친구와 사랑의 말을 몇 분 더 속삭일 수도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서두를 이유가 무엇인가?
아이에게 3분의 여유도 주지 못한단 말인가? 아이에겐 그 이상이
필요없다. 그렇게 내버려두면 아이는 3분 안에 숨을 쉬기 시작한다.
숨을 쉬기 시작하면 아이는 스스로 살 수 있다는 걸 확신하게 된다.
그때 탯줄을 끊을 수 있다. 이제 탯줄은 소용이 없으며 아이에게 충격을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를 침대의 담요 속에 집어넣지 말라는 것이다.
안된다. 9개월 동안 아이는 담요도 없이 벌거벗은 채
베개도 시트도 침대도 없이 지냈다. 그렇게 빠르게 변화를 주지 말라.
아이에게는 엄마의 양수와 같은 성분의 용액이 담겨 있는 작은 통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바닷물이다. 소금의 양도 같고 성분도 똑같다.
이것은 생명체가 바다에서 처음 생겨났다는 또 다른 증거다. 지금도 바닷물과
같은 양수 안에서는 그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여자가 임신을 하면 짠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궁이 계속 소금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은 통에 그와 똑같은
물을 담아 아이를 누이라. 그러면 아이는 자신이 환영받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것은 아이가 친숙해 있던 상황이다.
일본의 어떤 선승이 3개월 된 아이가 헤엄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자
대단한 실험을 했다. 그는 점차 더 어린 아이로 실험을 했다. 처음엔
9개월 된 아이로 시도하다가 6개월 된 아이, 이젠 3개월 된 아이로
시도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 당신은 아직 멀었다고 했다. 갓 태어난
아이도 헤엄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 아이는
헤엄을 쳐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이에게 기회를 주라. 엄마의 자궁과 유사한 것으로. 아이는
더욱 자신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어떤 성직자도 지옥불이나 온갖 난센스들을
들먹이면서 손쉽게 그를 착취할 수 없게 된다. "

     園 譯註
1) 롤핑(wolfing) :근육을 깊이 마사지하는 물리요법. 미국의 물리요법가
아이다 롤프(Ida Rolf, 1897-1979)가 창안하였다.
2) 푸라나(purana) 인도의 고대 경전.
3) 비베카난다(Vivekananda) : 1863년 인도 캘커타의 크샤트리야 가문에서
태어나 청년 시절 브라흐마 협회의 회원이 되었다가 뒤에 인도의 위대한 성자
스리 라마크리슈나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된다. 라마크리슈나의 수제자로 그의
댑을 이어, 후에 서양으로 건너가 동양의 가르침과 깨달음을 전한다 그 뒤
즉시 인도에 돌아와 캘커타 교외에 라마크리슈나 미션을 설립하고 사회사업과
종교교육에 열정을 바치다 39세 때인 1902년에 세상을 떠났다.
4) 수피(Sufi)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을 의미한다.
5) 사토리 일본말로 깨달음을 의미하는데 자아와 마음에 붙박혀 있다가
순간적으로 자아와 마음 너머의 본체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제14장
           노화(老化)

적어도 서양 사회에서는 젊음을 전부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삶의
모든 차원에서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되어 있다면 어느 정도는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당연한 귀결로,
인간이 젊음에서 멀어짐에 따라 생일은 더 이상 축하할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수치스럽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물어 보는 것이 실례가 되고, 흰 머리를 물들이고
치아는 덧씌우거나 통째로 갈아치우고 쭈글쭈글해진 가슴과
얼굴은 펴고 배는 팽팽하게 하고 확장된 정맥을 치료합니다
물론 몰래 말입니다. 나이대로 보인다고 하면 그걸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의 경험으론 나이를 먹을수록
한 해 한 해가 더 좋아집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래야 된다고
말하지 않았고, 누구도 나이먹는 것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끊이먹는 즐거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대의 질문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첫째, 서양의 마음에는
사람에게는 70년의 한 생애밖에 없으며 젊음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관념이 입력되어 있다. 서양에는 봄이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가능하면 젊음을 오래 붙들고 싶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신이
젊은 것처럼 가장하려는 깊은 욕구가 생겨난다.
동양에서는 늙은 사람일수록 가치를 인정하고 존경해 왔다. 노인들은
더 많은 경험을 했고, 많고 많은 계절이 오고 가는 걸 지켜보았으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그는 숙련되었고, 더 이상 미숙하지 않다. 그에게는
연륜해야지만 올 수 있는 어떤 고결함이 있다. 그는 유치하게 곰인형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그는 젊지도 않아서 '이게 사랑이야' 하며 헤매
하고 다니지도 않는다.
그는 이 모든 경험들을 지나왔고, 아름다움이 시드는 것을 보았다.
그는 모든 것이 종말에 이르고 모든 것이 무덤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요람에서 나오는 바로 그 순간부터는 한 가지 길밖에 없다.
그것이 요랑에서 무덤까지이다. 그대는 다른 데로 갈 수 없다. 애를 써도 딴
길로 갈 수 없다. 어찌됐든 그대는 무덤에 이를 것이다.
동양의 노인들은 존경받고 사랑받는다. 그들은 가슴의 어떤 순결함을
성취했다. 욕망 한가운데를 살면서 모든 욕망이 좌절로 귀결된다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는 온갖 관계를 맺고 살면서 모든 관계는
지옥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영혼의 어두운 밤들을 지나왔다.
그는 어떤 초연함에, 관찰자의 순수함에 도달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축구 경기에
참가하는 데 흥미를 갖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삶을 살면서
초월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존경받았고, 그의 지혜는
존경받았다.
동양의 관념은, 삶은 젊음이 한 번밖에 없는 70년이란 작은 단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관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히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여름이 오고, 비가 내리고, 겨울이 오고, 다시 여름이 온다.
모든 것은 수레바퀴처럼 움직인다. 삶도 예외가 아니다. 죽음은 수레바퀴의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이다. 다시 그대는 아이가 되고 다시 젊어지고
다시 늙을 것이다. 그것은 시작부터 그러했고 종국에도 그럴 것이다.
그대가 깨달아서 그 악순환에서 뛰쳐나와 완전히 다른 법칙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대는 그대의 개별성으로부터 우주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
그러므로 서두름이 없었고 집착이 없었다.
서양은 일회적인 생을 믿는 유태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기독교는
유태교의 가지일 뿐이다. 예수는 유태인이었고, 유태인으로 태어나
유태인으로 살다가 유태인으로 죽었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만일 그대가 어딘가에서 그를 만나 "안녕하세요? 예수
그리스도" 하고 인사하면 그는 자기 이름이 예수고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걸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대가 누구에게 인사했는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조슈아泌oshua)라는 히브리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는
신의 메시아였지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늠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이다 이슬람교도 동일한 전통인 유태교의 산물이다.
이 세 종교는 일회적인 생을 믿는다. 일회적인 생을 믿는 것은 그대에게
실수할 기회를 주지 않고 어떤 것을 충분히 체험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그대는 늘 서두르게 된다.
서양의 마음은 3주 비자밖에 못 받아서 두세 개의 카메라를 들고서는
모든 것을 다 찍으려고 쫓아다니는 여행자의 마음이 되었다. 3주 안에
나라 전체를, 위대한 유적들을 다 돌아야 한다. 그것들을 똑바로 쳐다
볼 시간이 없다. 집에 가서야 편안하게 앨범 안에서 보게 될 것이다.
여행자를 생각할 때면 나는 인생은 짧다며 아잔타에서 엘로라로, 타즈마할에서
캐시미르로 허겁지겁 쫓아다니는 노인네들을 떠올리게 된다
시간은 돈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서양의 마음이다. 동양에서는
모든 일이 천천히 흘러간다. 서두름이란 없다. 사람들은 영원을
통째로 갖고 있다. 내가 이곳에 있어 왔고 다시 이곳에 있게 될 텐데 왜
서두른단 말인가? 모든 것을 강렬하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즐기라.
그래서 일회적인 생이라는 관념 때문에 서양은 젊어지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되었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젊음을 유지하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것은 강박관념을 만들어내고 올바른
성장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노년에 정말 지혜로워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이드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노년은
죽음말고는 상기시키는 게 없다. 노년은 종지부를 찍는 날이 머지 않았다는 걸
뜻한다. 그대는 종착역에 도착했다. 경적이 한 번만 더 울리면
기차는 멈출 것이다.
내가 우리 할아버지와 협정을 맺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분은 내가
발을 안마해 드리는 걸 좋아했다. 하루는 내가 말했다. "잘 들으세요.
재가 '쉼표' 하고 말하면 '세미콜론이 가까워졌구나' 하고 알고 계셔요.
재가 '세미콜론' 하고 말하면,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마칠 때가 다됐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마침표' 하고 말하면 끝내는 것이예요." 그래서 그분은
쉼표'를 아주 겁냈다. 내가 '쉼표' 하고 말하면 그분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알았다. 하지만 세미콜론을 좀더 길게 하자. 너무 짧게 하지마."
서양에서 노년은 단순히 종지부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세미콜론이
연장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대는 누구를 속이려는가? 만일 그대가
이제 젊음이 끝났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면, 그대가 온 세상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그대는 젊지 않으며 속이려는 노력은 우스운 짓일 뿐이다.
사람들은 젊음을 붙들려고 애쓰지만, 젊음을 잃지 않을까 하는 바로 그
두려움이 그대가 전체적으로 사는 걸 막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또 두번째로, 젊음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그대가 노년을 고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한다. 그대는 젊음의 기쁨과 강렬함을 잃을 뿐만 아니라,
노년이 가져다 주는 고상함과 지혜, 평화를 잃는다. 모든 것은
삶에 대한 그릇된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서양이 한 생밖에 없다는
관념을 버리지 않는 한, 이 강박관념, 이 집착, 이 두려움은 바뀔 수가 없다.
실제로 한 생이 다가 아니다. 그대는 수많은 생을 살았고 수많은
생을 더 살 것이다. 그러므로, 매 순간을 최대한 전체적으로 살라. 성급하게
다음 순간으로 건너뛸 필요가 없다. 시간은 돈이 아니다. 시간은
무진장한 것이다. 부자건 빈자건 똑같이 쓸 수 있는 것이 시간이다.
시간에 관한 한 부자라고 더 풍족하지 않고 빈자라고 부족하지 않다. 삶은
영원한 윤회다
일회적인 삶이라는 개념은 서양의 종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들은 야박하게도 70년밖에 주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해 봐야
인생의 3분의 1은 잠으로 소비하고 3분의 1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소비한다. 조금 남은 것을 학교 교육과 축구시합, 영화구경, 멍청한
말다툼, 싸움에 할애해야 한다. 그대가 70년 동안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을
7분만이라도 건진다면 나는 그대를 현명한 사람이라고 꼽겠다.
그러나 일생을 통해 7분을 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자신을
발견하겠는가, 어떻게 그대의 존재와 삶에 깃든 신비를 알겠는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겠는가? 그대는 삶 자체의 체험을
놓쳤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위대한 체험도 놓칠 것이다 안 그러면 죽음을
두려워할 게 없다. 그것은 아름다운 잠, 꿈 없는 잠이고 그대가
고요히 평화롭게 다른 몸으로 움직여 가는 데 필요한 잠이다. 그것은
외과적(外科的) 현상이다 그것은 거의 마취와 같다. 죽음은 적이 아니라
친구다
일단 죽음을 친구로 이해하게 되면 그대는 70년이라는 잔은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두려움 없이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대의 시야가
삶이 영원하다는 쪽으로 열리면, 그러면 모든 것이 느려진다. 그러면
속도를 낼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서두른다. 나는 가방을 챙겨
물건을 집어넣고 그 여자가 자기 마누란지 아닌지 보지도 않고 키스하고
아이들에게 '안녕' 하고 달려나가는 사람들을 본다.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그 속력으로 어디를 가려는가?
젊은 부부가 새 차를 몬다. 그들은 전 속력으로 달렸다. 부인은 남편에게
자꾸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여자들은 아직도 낡은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는 거야?" 남자가 말했다.
귀찮게 묻지 말고 그냥 속도를 즐겨 진짜 문제는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른 속력으로 달리느냐 하는 거야."
속도가 행선지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삶이 짧기에 속도가 중요하게
되었다 그대는 속도를 내서 하지 않으면 처리할 수 없는 수많은 일을
해야 한다. 단 몇 분도 고요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시간낭비이기
때문이다. 그 몇 분이면 다만 몇 달러라도 더 벌 수 있다.
눈을 감고 시간이나 낭비하고 있다고? 안에 뭐가 들어 있길래? 그대가
정말로 보고 싶다면 병원에 가서 뼈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것이
그대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왜 몸 안을 들여다보면서 문제를 만드는가?
안을 들여다보면 그대는 뼈를 발견할 것이다. 일단 뼈를 보고 나면 삶은
더 어려워진다. 마누라에게 키스하면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두 뼈가 만나는 것이다. 누군가가 X레이 안경을
발명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x레이 안경을 쓰고 주위를
둘러보며 뼈들이 웃고 있는 것을 본다. 거의가 안경을 벗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수많은 뼈다귀들이 웃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박동을
멍추게 하기엔 충분하다. "맙소사, 이게 실체라니! 이것이 모든 신비가들이
내면을 보라'고 말해 오던 것이란 말이냐! 그자들을 피해야 돼!"

서양은 신비주의의 전통이 없다. 그들은 외향적이다. 바깥에는 볼 것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내면에 뼈다귀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그것은 그대의 의식이다. 눈을 감음으로써
그대는 뼈가 아니라 바로 그 생명의 근원을 마주치게 된다.
서양은 생명의 근원에 대한 깊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면 서두르지 않게 된다.
사랑들은 젊어서도 즐길 것이고 늙어서도 즐길 것이고 죽을 때도
즐길 것이다. 사람들은 마주치는 모든 것을 즐기고 그것을 축제로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축제로, 노래로, 춤으로 변형시키는
예술을 나는 참된 종교라고 부른다.

노인이 건강 클리닉을 찾아가 의사에게 말했다. "내 정력을 떨어뜨려
줘야겠소."
의사가 쇠약한 노인을 잠시 쳐다보더니 말했다. "노인어른, 지금
어르신의 정력은 머리에 다 모여 있는 것 같은데요."
"내 말이 그 말일세, 젊은이." 노인이 말했다. "그걸 약간 아래로
떨어뜨려야겠어 ."

이 노인조차 플레이보이가 되길 원하고 있다. 이로써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젊음을 전체적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젊음을 놓쳐서 여태껏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온통 제대로 살지 못했던
젊은 날들에, 허둥지둥 살았던 시절에 가 있다
젊은 시절을 제대로 살았다면 노년에 모든 억압과 성(性)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것이고, 성적 본능을 떨쳐 버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을 제대로 살면 성적 본능은 사라진다. 삶 속에서 증발한다.
종교나 성직자들로부터 제한받거나 간섭받지 않고 살아야만 사라진다.
안 그러면 젊었을 때 교회를 다닌 사람은 늙으면 성경책 뒤에 플레이보이를
숨겨 두고 보게 된다. 모든 성경책이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플레이보이 같은 잡지를 숨기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야만 자식들에게
들켜 부끄러운 꼴을 당하지 않는다.

세 노인에 대한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한 사람은 일흔이었고 또 한
사람은 여든, 또 하나는 아흔이었다. 그들은 오랜 친구고 다 퇴직해서
함께 산책을 하거나 공원 벤치에 앉아 온갖 잡담을 하곤 했다. 어느 날
그들 중에 제일 젊은, 칠십 먹은 노인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팔십 먹은 노인이 말했다. "무슨 일이야? 얼굴이 안돼 보이는구만."
그가 말했다. "죄책감을 느껴요. 말을 하면 짐이 덜어질 것 같군요,
예쁜 여자가 목욕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 집에 은 손님이었죠. 그걸
열쇠 구멍으로 훔쳐보다가 우리 어머니한테 들켰지 뭐요."
늙은 친구 둘이 웃더니 말했다. "답답한 친구, 누구나 어릴적엔
그런다네."
"어린 시절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 일어난 일이에요."
두번째 노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로구먼. 헌데 요
사흘 동안 나한테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지. 이 일 때문에 정말 마음이
무겁네. 사흘 동안 계속 마누라한테 사랑을 거절당했거든."
첫번째 노인이 받았다. "그거 정말 안됐군요:'
그런데 세번째 가장 늙은 노인이 껄껄 웃더니 말했다. "이 친구가
말하는 사랑이 뭔지부터 물어야 할걸세."
그래서 물으니 두번째 노인이 말했다. "별거 아니야. 왜 사람을
쑥스럽게 만드나? 간단해. 내가 마누라의 손을 잡고 세 번 누르면 마누라는
자러 가고 나도 자러 가지. 헌데 요 사흘 동안 내가 마누라의 손을 잡으려고
할 때마다 마누라는 '오늘은 안 돼요. 오늘은 안 돼요! 부끄러울 줄
아세요, 당신은 너무 늙었어요. 오늘은 안 돼요' 그러더라구요."
세번째 노인이 말했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내 얘기를 들어 볼
텐가? 자네들은 젊으니 들어 두면 도움이 될게야. 어젯밤 날이 거의 샐
무렵이었네. 마누라를 사랑해 주려고 막 준비하는데, 마누라가 그러는
거야. '뭐 하는 거예요? 정신나갔어요?' 그래 내가 그랬지. '뭘 하다니?
당신을 사랑해 주려고 그러지: 그러자 마누라가 그러더군. '오늘 밤에
벌써 세번째예요. 잠이나 주무시든지 아니면 날 좀 자게 내버려두세요.
어휴, 그저 사랑, 사랑, 사랑!' 내가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애.
자네들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야. 난 기억력이 깜빡깜빡하고 있다구."

늙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놀라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았어야
했던 일들만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 있게 됐을 땐 이미 때가
지나 버렸다. 젊은 시절에 그들은 성경을 읽고 성직자들의 말을 들었다.
그 성직자들과 성스런 경전들은 사람들을 오염시켰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연성에 어긋나는 관념을 심어 주어 그들이 자연스럽게 살지
못하도록 했다 우리에게 새로운 인성(人性)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전
과거를 지우고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 첫번째 원칙은
모든 사람들이 어떤 관념이 아니라 자신의 자연성에 따라 살고, 아무
두려움 없이 전체적이고 열정적으로 살도록 허용하고 돕고 가르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어린이들은 유년 시절을 즐길 것이고 젊은이들은
젊음을 즐길 것이고 나이든 사람들은 자연스레 찾아오는, 일생을
자연스럽게 산 결과로 찾아오는 고상함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대의 노년이 고상하고 지혜롭고 빛과 환희와 만족과 충만과 지복으로
가득 차지 않으면‥‥‥ 바로 그대의 현존 속에 꽃들이 피어나지 않고
영원의 향기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땐 제대로 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대가 어딘가에서 옆길로
샜다는 것을, 그대가 어딘가에서 오염원이자 범죄자들인 성직자들의
말을 들었다는 것을, 그대가 어딘가에서 자연을 거슬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자연이 복수를 한다. 그 복수란 그대의 노년을 파괴해서
타인들에게도 추하고 자기 눈으로 봐도 추하게 만든다. 그러지 않으면
노년은 젊음도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개 된다.
젊음은 지혜롭지 못하다. 젊음에는 너무나 많은 어리석음이 있다.
젊음은 미숙하다. 노년은 일생의 그림에 마지막 터치를 가한다. 그렇게
마지막 터치를 하면 그는 즐겁게 춤추며 죽을 준비가 된 것이다. 죽음을
환영할 준비가 된 것이다. ""

        제15장
           축음, 안락사, 자살

자연적인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중요한 질문이다.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대답은, 인간이 아무 이유도 없이 죽는 것이다
그냥 나이를 먹고, 노년에서 죽음으로 바뀌는 데에 어떤 질병도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은 단지 노년의 극치이다. 몸과 두뇌 속의 모든 것이
기능을 그친다. 이것이 자연적인 죽음의 일반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 자연적인 죽음은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닌다. 자연적인
죽음에 도달하려면 자연스런 삶을 살아야 한다. 자연적인 죽음은
금지 없이, 억압 없이, 자연스럽게 산 삶의 절정이다. 동물들이 살고,
새들이 살고 나무들이 사는 방식이다. 아무 분열 없이‥‥‥ 마치 그대가
부재해서 삶이 저절로 움직이듯이 그대 쪽에서 차단하지 않고 그대를
통해 자연이 흐르도록 하는 내려놓음의 삶. 그대가 삶을 살기보다는 삶이
그대를 사는 것. 그대는 두번째다. 그럴 때 그 절정은 자연스러운
죽음이 될 것이다. 내 정의에 따르면 오로지 각성된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엔 모든 삶이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모든 죽음도 부자연스럽다.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면서 어떻게 자연스런 죽음에 도달하겠는가?
죽음은 생애의 클라이막스를 반영할 것이다 응축된 형태 속에 그대가
살아온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따라서 극소수의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죽는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건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의 조건들은 맨 처음부터
우리가 자연 이상이어야 한다고, 그저 자연적인 것은 동물이 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초자연적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아주 논리적인 듯이 보인다.
모든 종교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연을 넘어서는 걸
의미한다고 가르쳐 왔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자연을 넘어서는 이성을
가르쳐 왔다. 그러나 아무도 자연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자연성을, 자연발생적인 아름다움을, 자신의 순수성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인간은 자연을 초월할 필요가 없다. 그대에게 말하노니,
인간은 자연을 충만하게 해야 한다. 어떤 동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이다.
종교는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고 기만했다. 그들은 동물들은 자연적이며
그대들은 초자연적이어야 한다고 구분을 지었다. 어떤 동물도
단식을 하지 않는다. 어떤 동물에게도 단식이 성스러운 것이라고 속일 수 없다.
동물들이 아는 것은 배고픔밖에 없고, 그들에겐 단식과 배고픔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동물에게 자연을 거스르도록 설득할 수는 없다.
인간에겐 적어도 자연에 대항하여 싸울 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소위 종교인들에게 호기를 제공했다. 인간은 결코 승리하지는 못할 테지만
싸울 수는 있다. 싸움 속에서 그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모든 기쁨과 자신의 모든 사랑, 자신의
모든 위엄을 파괴했고, 동물보다 높은 것이 된 게 아니라 낮은 것이 되었다.
그대는 어떤 야생 동물도 호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 말만 들어도 세상의 동물들이 전부 웃음을 터트릴 것이다.
한마디로 바보 같은 얘기다. 그러나 암놈이 허용되지 않는 동물원에서는
동물들이 절대적인 필요에 의해 호모섹스로 전환한다.
그러나 인간은 온 세상을 동물원으로 바꾸었다. 수백만, 수억의 사람들이
호모이고 레스비언이고 소도미스트(sodomist, 獸姦者)이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그대에게 자연을 초월하라고 초자연적 신성에
이르라고 가르쳤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뭐든지 억지로 하려고 하면 결과가 좋지 않은 법이다. 여러 종교가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을 자연을 초월한 존새로 만들려고 애써 왔다.
결과는 예외 없이 실패였다. 그데는 자연적 존재로 태어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넘어설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발을 당겨 자신을 땅바닥에서 들어
올리려는 짓과 같다. 잠깐 튀어오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금방 땅바닥에
떨어질 것이고, 어쩌면 골절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그대는 날 수 없다.
그런데 그게 우리가 해 오던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넘어서려고,
자신을 자연 위로 끌어올리려고 애써 왔다. 그들은 자연과 나뉘어지지
않았건만 그런 생각은 그들의 에고와 들어맞았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므로
자연을 넘어서야 한다. 인간은 동물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사랄들은 동물들을 동물같이 행동하지 못하게 하려고 애써 왔다. 그들은
동물들이 자연을 약간 넘어서도록 만들려고 애써 왔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는 사람들이 개하고 산책을 할 때 개들에게
옷을 입혔다. 개들이 자연쩍이 되지 못하게, 벌거벗어 알몸이 되지 못하게 했다.
그것이 개들에게 어울리는 데도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개를 동물들보다 조금 더 높게 끌어올리려고 애쓰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는 걸상 다리도 천으로 감췄다는 걸 알면
놀랄 것이다. 단지 그것이 '다리'이며 다리는 감춰야 한다는 이유로. 거의
백 년이라는 긴 생애를 살았던 버틀런트 러셀')은 자신이 어렸을 때에는
여자의 발을 보는 것만으로도 성적인 흥분을 일으켰다고 회상하고 있다.
당시에는 드레스가 발을 덮도록 되어 있어서 보통 때에는 발을 볼
수가 없었다.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왕족의 여자들은 다리가 하나라는 믿음이 퍼져 있었다.
왕족은 평범한 일반 시민과는 무언가 달라야 했고, 그들의 다리가
두 개로 갈라졌는지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에고는‥‥‥ 왕족들은 "그건 말도 안 된다. 우리는 너희와 똑같은 인간이다.
하고 털어놓지 않았다. 에고가 그들을 막았다. 사람들이 높이 받들어
모시는데 뭐가 걱정이랴. 그냥 왕족으로 남자. 왕족들이 평민과
왕족 간의 혼례를 허용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 평민은 모든
사실을 폭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진배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에게 왕족의 위엄 같은 것은 없다. " 그러나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런 관념을 유지해 왔다.
나도 그대들이 동물과 다르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그대가 자연을
넘어설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대는
자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동물들보다 더 자연적이 될 수 있다.
동물들은 자유롭지 않다. 그들은 깊은 혼수 상태에 있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해 오던 짓 이상을 하지 못한다.
그대는 어떤 동물보다도 자연스러워질 수 있다. 그대는 자연의 심연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자연의 높이와 똑같이 올라갈 수 있지만, 어떡
해도 그것을 초월할 수는 없다. 그대는 더욱 자연적이 될 수 있다.
그대는 더욱 다차원적으로 자연적이 될 수 있다. 나에게 있어 종교적인
사란이란, 자연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연스럽고 넘치도록
자연스러우며 모든 차원으로 본성이 개발되어서 더 개발될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동물들은 갇혀 있다. 그들의 존재에는 일정하게 제한된 테두리가 있다.
인간에겐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능력과 지성과 자유가 있다. 자연을
전체적으로 탐험하고 나면 그대는 집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자연이
그대의 집이다. 그렇게 되면 죽음은 기쁨이고 축제다. 그러면 그대는
아무 불만 없이 죽는다. 그대는 깊은 감사를 가지고 죽는다. 왜냐하면 삶은
그대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주었고, 죽음은 단순히 그대가 살아온
모든 것의 최고점인 까닭이다.
그것은 촛불이 꺼지기 전에 가장 밝게 빛나는 이치와 같다. 자연스런
인간은 죽기 전에 잠시나마 가장 눈부시게 산다. 그 사람 전체가 빛이고
진리 자체이다. 나에겐 이것이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취해야 하는 것이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회는 주어졌지만
그대가 개척해야 하고 성취해야 하며, 그대 스스로 그것을 누릴 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참된 인간의 죽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죽어 갈 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돌연 야릇한 기쁨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대의 눈물은
슬픔이나 아픔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와 지복의 눈물일 것이다. 왜냐하면
충만된 인생을 살아온 인간이 자연스럽게 죽을 때에는 자신의 존재를
자연 전체에다 흩뿌리기 때문이다. 그 곁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에 흠뻑 젖는다‥‥‥ 돌연한 신선함, 미풍, 새로운 향기, 그리고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는,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성취해야 하고
얻어내야 할 어떤 것이라는 새로운 느낌이 온다.
나는 그대들에게 삶의 예술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죽음의
예술로 불려야 할 것이다. 이 둘은 같은 것이다. "

저는 제가 의사라는 사실이 퍽 만족스럽습니다. 그러나 제 노력과
활동의 본질은 아픔과 죽음, 질병과 인간의 고통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여기서, 구별이 필요하다. 아픔과 질병과 고통은 같은 것이지만
죽음은 완전히 다르다. 서양식 사고에서는 아픔, 병, 고통, 죽음이
모두 함께 있다. 한 묶음으로 포장되어 있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죽음은 아름답지만 아픔은 아니다. 죽음은 고통이 아니다. 병도 아니다.
죽음은 아름답다. 죽음은 그대의 생명을 끊는 검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피는 꽃, 궁극의 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절정이다. 죽음은
생명의 나무의 꽃이다. 그것은 삶의 끝이 아니라 최고 지점이다. 그것은
궁극의 오르가즘이다. 죽음에 잘못된 것은 없다. 그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인간은 사는 법과 죽는 법을 알 필요가 있다. 삶의 예술과 죽음의
예술이 있는데, 뒤의 예술이 앞의 예술보다 더 값지다. 그러나 뒤의 것은
앞의 것을 알 때만 알 수 있다. 바르게 사는 법을 아는 사람만이
바르게 죽는 법을 안다. 그때 죽음은 신성으로 가는 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할 일은 죽음을 떼어놓는 일이다. 아픔과 병과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하라, 그대는 죽음과 싸울 필요가 없다. 그것이 서양의 사고와
서양의 병원, 서양 의학에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사람들은 죽음에
데항해서 싸우고 있다. 사람들은 병원에서 근근이 약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죽을 때가 되었는데도 사람들은 불필요하게
생명을 연장하려 애쓴다. 의학적 지원에 의해 그들의 죽음은 연기된다.
그들은 쓸모가 없다. 그들에게 생명은 쓸모가 없다. 게임은 끝났고 그들은
끝장이 났다. 지금 그들의 생명을 붙들어 놓는 것은 그들을 더 고통스럽게
할 따름이다. 때로는 혼수상태에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인간은
홍수상태에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죽음을 적대시한다.
~ 서양 사고에서는 이런 혼수상태가 커다란 문제가 된다. 어떤 사람이
홍수상태에서 소생하지 못한 채 몇 년이고 생존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송장이다.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뿐
삶은 없다. 무엇이 핵심이겠는가? 왜 죽게 내버려두지 못하는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적이다 어찌 적에게,
죽음에게 굴복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서양 의학계에는 큰 논란이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사랑을 죽게 놔두어야 하는가? 그 사람이 스스로 죽을지 말지 결정하도록
허용해야 하는가? 가끔 본인이 무의식 상태라서 결정할 수 없을 때가
있을 수도 있는데 이때는 가족이 그의 죽음을 결정하도록 허용해야 하는가?
그렇지만 사람이 죽는 것을 돕는 일이 옳은 것인가? 서양의 사고에는
큰 두려움이 일어난다. 죽게 놔둔다? 그건 그대가 누군가를
살해한다는 것을 뜻한다! 과학 전체가 그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제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기쁨이 없고 춤이 없고 창조성이 없고
사랑이 없는 한, 삶 자체는 아무 가치가 없다. 삶 자체만으로는 무의미하다.
그저 사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의미가 있고,
죽는 것이 자연스러울 때 의미가 있으며, 죽는 것이 아름다울 때
의미가 있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잠을 잘 때 갑어치가 있듯이. 죽음은
잠의 일종이다. 깊은 잠. 그대는 새로운 육체와 새로운 메커니즘,
새로운 재능과 새로운 기회들과 새로운 도전들과 함께 다시 태어날 것이다.
현재의 몸이 늙었으므로 떠나야 한다. 몸은 단지 거처일 뿐이다.
우리 동양에서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죽음은 적이 아니라 친구다.
죽음은 그대에게 휴식을 준다 그대는 피곤하다. 그대는 자신의 삶을 살았고,
삶에서 알 수 있는 모든 기쁨을 다 알았으며, 자신의 촛불을
완전히 태웠다. 이제 어둠 속으로 들어가 잠시 휴식하고 나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죽음은 그대를 신선하게 재생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죽음은 적이 아니다.
둘째, 의식적으로 죽을 수 있다면 죽음은 가장 위대한 체험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에만 의식적으로 죽을 수 있다. 만일 죽음에
저항한다면 그대는 엄청나게 두려워질 것이다. 너무 두려워져서 그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게 되면 몸 속에서 화학성분이 분비되어서 무의식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자연적인 메커니즘이 있다 인간에게는 인내가
불가능한 어떤 지점이 있고, 그곳을 넘어서면 의식을 잃게 된다. 그리하여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죽어서 위대한 순간을, 모든 순간 중에서
가장'위대한 순간을 놓친다. 그것은 사마디이고 사토리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일어나는 명상이다. 그것은 자연의 선물이다.
만일 그대가 깨어 있어서 자신이 육체가 아님을 볼 수 있다면 ‥‥
그대는 보아야 한다 육체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곧 그대는 자신이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분리되어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대가 마음과도 분리되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마음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바로 각성의 불꽃이 되며,
이것은 존재하는 것 중에 가장 위대한 열락이다. 그러니 죽음을 아픔이나
병이나 인간의 고통으로 생각하지 말라"

몇 달 전 친구와 함께 죽어 가는 그 친구의 아버지를 찾아갔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무관심했는데, 모두들 떠나고 나자 갑자기 눈을 뜨더니
우리에게 말했습리다. "몸이 두 개인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하나는 병들었지만 다른 몸은 완전히 건강하다. " 우리가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건강한 몸이 진짜니까 그 몸을 취하세요:'
그 분은 "알겠다" 하시더니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의
곁에 앉아 있는 동안 침대 주변을 감돌던 병적인 에너지가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그 새로운 에너지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당신(라즈니쉬)의 존재 안에‥‥ 지극히
아름다운 침묵 속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떠나고 나서
그 분은 잠시 병세가 호전되어서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침대에서
평온하게 죽었습니다. 저는 10년이나 당신하고 있지만 그토록
신뢰와 맑음과 평화 안에서 모든 것을 놓아 버릴 준비가 된
그 분 앞에서 제가 너무도 무지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대가 한 체험은 사람이 숙을 때에는 항시 가능한 것이다
필요한 것은 약간의 각성뿐이다. 죽어 가던 그 사람은 깨어 있었다 그런
체험을 위해선 그다지 큰 각성이 필요치 않다.
죽음의 순간에 그대의 물질적 몸과 영적인 몸은 분리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양쪽에 너무 빠져 있어서 분리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죽음이 일어나기 직전에 두 몸은 서로에 대한 동일시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제 그들의 길은 달라질 것이다. 물질적 몸은
물질적 원소로 돌아갈 것이고, 영적인 몸은 새로운 탄생을 향한 순례를
시작하여 새로운 형태 속으로, 새로운 자궁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깨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더구나 그대가 건강한 몸이 당신이며 병들어 죽어 가는 몸은 당신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한 순간에는 죽어 가는 사람은 자신의 눈앞에서
그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아주 쉽게 믿는다. 자신을 떨어져 나가고
있는 몸과 동일시하지 않고, 자신이 건강한 몸, 보다 깊은 몸이라는 것을
즉시 자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 사람을 더 크게 도울 수도 있었다. 그것도 좋았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물질적 몸과 동일시하지 않는 그 사람의
체험만으로도 방 안의 에너지가 고요하고 평온하게 바뀌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죽어 가는 사람을 돕는 법을 배웠다면 그 지점에서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는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그는 신뢰하는
상태에 있었으므로, 두번째 사실을 얘기해 주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삶은 문제와 의심을 만들어내고 연기도 하지만, 죽음은 연기할 시간을
갖고 있지 않다. 그 사람은 "보도록 노력해 보겠소"라든지 "내일 보겠소"
라고 말할 수 없다. 바로 다음 순간도 확실치 않기 때문에 그는
그 일을 지금, 바로 이 순간에 해야 한다 아마 그는 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믿는다고 잃는 게 뭐가 있겠는가? 죽음은 어쨌든 모든 것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니 신뢰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그것에 데해
생각할 겨를도 없다. 명확한 사실은 물질적 몸이 멀리, 아득히 떨어져
나간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건강한 몸이다" 하고 말한 것은 좋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두번째 단계도 말했어야 했다. "당신은 그 두 몸의 관조자다. 죽어 가는
몸은 물질적 몸이고, 건강하다고 느끼는 몽은 심리적 몸이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두 몸을 볼 수 있다. 분명히 당신은 세번째일 것이다.
당신은 그 두 개 중의 하나가 아니다 " 이것이 바르도(Bardo)')의
전 과정이다. 티벳만이 죽음의 예술을 발전시켰다. 전 세계가 삶의
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티벳은 죽음의 예술과 죽음의
과학 전체를 발전시킨 유일한 나라였다. 그들은 그것을 바르도라 불렀다.
만약 그 사람에게 "당신이 한 단계를 나간 것은 좋았습니다. 당신은
물질적 몸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심리적 몸에 대한
동일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당신이 그 몸도 아니며, 다만 각성, 순수의식
자각입니다" 하고 말한다면, 만약 그대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은
이 몸도 아니고 저 몸도 아니며 몸을 입지 않고 형태도 없는 순수의식이란 것을
이해하도록 돕는다면, 그때 그의 죽음은 전적으로 다른 현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대는 에너지의 변화를 보았다. 그대는 에너지의 또 다른 변화를
볼 수도 있었다 그대는 침묵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지만, 거기에 음악과,
춤추는 에너지와, 온 공간을 채우는 향기까지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얼굴은 새로운 현상, 빛의 오라를 보여 줄 수도 있었다.
만일 그가 두번째 단계마저 넘어갔다면 그때 그의 죽음은 마지막 죽음이
되었을 것이다. 바르도에서는 그것을 '위대한 죽음'이라 부른다. 이제
그는 또 다른 형상을 입고 또 다른 감옥 안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영원 속에, 온 우주를 채우는 광대한 의식 속에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을 잘 기억해 두라. 그대들 중의 많은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친구나 친척이, 어머니나 아버지가, 누가 죽을지 모른다.
그들이 죽어 가고 있을 때 그들이 두 가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첫째, 그들은 물질적인 몸이 아니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는
자각하는 것이 아주 손쉽다. 첫번째 것을 자각할 수 있다면, 더 어렵긴
하지만 두번째 것도 자각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그는 두번째 몸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두 몸을 넘어서 있다. 그는 순수 자유이자
의식 이다.
만일 그 사람이 두번째 단계를 넘어갔다면 그대는 그 사람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단순한 침묵이 아닌, 영원에 속하고
불멸에 속하는 뭔가 좀더 생생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은 그 죽음이 애도의 시간이 아니라 축제의 순간이
된 데 대한 감사로 충만할 것이다.
그대가 죽음을 축제의 순간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면 그대는 그대의
친구와 그대의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와 아내를 도운 것이다. 그대는
그들에게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준 것이다. 죽음에 가까이 있을 때에는
그 일이 아주 쉽다. 아이들은 삶이나 죽음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관심이 없다. 젊은이는 생물학적인 게임에, 야망에, 부자가 되는
일과 권력을 가지는 일에, 더 큰 명성을 얻는 일에 온통 빠져 있다.
그는 궁극적인 질문을 할 겨를이 없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는, 죽음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야망을 가질 수 없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아무 차이가
없으며, 죄인도 성자도 아무 차이가 없다. 죽음은 삶의 모든 분별 너머로
삶의 모든 바보스런 게임 너머로 그대를 데려갈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돕는 대신 그 아름다운 순간을 망가뜨린다.
그 순간은 사람의 일생중에 가장 귀중한 순간이다 그 사람이 백 년을
살았다 하더라도 이 순간은 가장 귀중한 순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울고 불고 법석을 떨며 자신들의 동정심을 내보이면서 말한다. "아직 때가 아니야.
죽으면 안돼." 아니면 그 사람을 위로하기 시작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가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이런 것들은 다 어리석은 짓이다. 의사도 이 멍청한 일에 한몫 거든다.
그들은 그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일러 주지 않는다. 그들은 핵심을
회피하면서 그대에게 계속 희망을 준다.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은
살 수 있을 거요." 그 사람이 죽으리란 걸 확실히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이야말로 그 사람이 죽음을 완전히 자각해야
하는 순간이며 정확하고 빈틈없이 깨어 있음으로써 순수의식을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이란 걸 모른 채 그에게 거짓 위로를 하고 있다. 그 순간은
위대한 승리의 순간이다. 이제 죽음이란 없고 영원한 삶만이 있다. "'

다가오는 네덜란드 의회 선거의 주요 쟁점은 안락사입니다.
정치가들은 안락사의 입법화를 놓고 다투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의견을 들려주십시오

안락사, 혹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자유는 모든 인간의 생존권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제한을 둘 수도 있는데, 이를테면 75세 정도로
제한하는 것이다. 75세가 지나면 병원들은 자기 육체를 벗기 원하는
사람들을 도울 준비를 해야 한다. 모든 병원에는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가 있어야 하고,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에겐 특별한 배려와
도움이 주어져야 한다. 그들은 아름답게 죽음을 맞아야 한다.
모든 병원에는 명상 교사를 배치해야 한다.
죽으려고 하는 사람에겐 한 달여의 기간이 주어져야 하고‥‥‥ 만일
마음이 바뀌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분으로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 기분을 한 달 동안 유지할 수 없다.
기분은 순간적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 순간만 더
기다렸어도 결코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자살은 분노나 질투나
증오로 인해 삶의 의의를 잃어버린 결과이다.
문제는, 정치가들이 안락사의 인정이 곧 자살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아니다. 그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자살은 여전히 범죄다.
안락사에는 병원 위원회의 승인이 따라야 할 것이다. 병원에서의
한 팔 동안의 휴식-그 사람이 침착하고 고요해질 수 있도록 베풀어지는
온갖 종류의 배려-속에서 친구들이, 부인이, 아이들이 그를 찾아온다.
이제 그가 머나먼 여행을 떠나려 하기 때문이다. 그를 저지할 이유가 없다.
그는 오래 살았고, 이제 더 이상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으며,
그의 일은 끝났다.
이 한 달 동안 명상을 가르쳐서, 죽음이 다가올 때 명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숙음을 위해, 의학적 도움을 제공하여 죽음이 잠같이
오도록 해야 한다. 서서히, 서서히 명상과 더불어 잠이 깊어지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깨달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엔 자살에 대한 염려는 없다. 그는 자살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살을 시도한다면 죄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승인을 요구한다 병원 위원회의 승인을‥‥‥‥ 어느 때고 마음을
바꿀 수 있는 한 달 동안의 시간이 주어진다. 마지막 날에 그는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 될 것이 전혀 없다. 그가 결정만 하면 된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현재 많은 나라에서 매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한다. 성공하면 좋지만 실패하면 법원에서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스스로 그 일을 하다가 중간에
발각된 것이다. 이제 2년 동안 재판이 진행될 것이고 검사와 변호사는
이런저런 논쟁을 하다가 최종적으로 그 사람은 다시 교수형을 당한다.
이것은 그 사람이 처음에 하려고 했던 일이다. 스스로 말이다! 이 모든
난센스는 뭐란 말인가?
안락사는 점점 더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의학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이
더 오래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천 년 전의 사람들 중에
마흔 살을 넘은 유골을 본 적이 없다. 5천 년 전에는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마흔 살이었고, 열 명의 아이가 태어나면 그 중 아홉은 2년 안에
죽었다. 한 명만 살아남는다. 그래서 목숨은 말할 수 없이 값진 것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의사들에게 머떤 상황에서라도 생명에게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는 선서를 하게 했다. 그는 자각하지 못했다. 그는 선지자가
아니었다. 그는 열 명 중 열 명이 다 살아남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한 통찰력이 없었다. 현재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한편으로는 9할이 넘는 아이들이 생존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학이
사람들을 더 오래 살 수 있도록-아흔 살이나 백 살도 드문 게 아니다-
돕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아흔 살이나 백 살 먹은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소련에는 백오십 살 먹은 사람들도 많고, 백팔십에 이른 사람들도 몇
천 명이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직도 일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사는 것이 지겨워졌다. 한번 생각해 보라. 백팔십이 되어도 계속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힘도 녹슬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죽을 가망이 없다.
죽음은 아직 먼 것만 같다. 그들은 여전히 일하고 있으며, 여전히
건강하다.
미국에는 몸에 온갖 의료기기를 연결하고 그냥 침대에 누워서 지내는
사람들이 수천 명이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공호흡기를 사용하고 있다.
사람이 스스로 숨을 쉴 수 없다면 그것이 사람인가?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耉주리며 죽어 가고 있는데,
나라 전체가 이 한 사람을 책임지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미국에서는 3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거처도 식량도 의복도 없이
길거리에서 지내고 있는데, 수천 명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이 병원 침대와
의사와 간호사들을, 그들의 작업과 노력과 그 기기들을 독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이 얼마 안 있어 죽으리란 걸 알지만,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생명을 연장시키려 하고 있다. 그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들은 죽고
싶다고 외치지만 의사들은 도와 줄 수가 없다. 이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어떤 권리가 필요하다. 그들은 살도록 강요받고 있고, 그 강요는
온갖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나는 이 문제가 아주 합리적으로 풀렸으면 한다. 그 기한을
일흔다섯 살이나 여든 살로 정하라. 그러면 살만큼 산 것이다. 자식들은
자랐다‥‥‥‥ 그대가 여든 살이면 자식들은 쉰 살이나 쉰다섯 살이 될
것이다. 자식들이 늙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걱정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은퇴했다. 이제 그대는 단순히 짐이 되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다.
노인들이 화를 잘 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에겐 일도 없고 존경도
받지 못하며 아무런 위엄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무도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싸우고 화내고
소리를 지른다. 이런 행동들은 단지 그들의 좌절을 드러내 보일
따름이다. 진짜로는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한다. 죽음이란 개념은 비기독교적이고 비종교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죽음에 국한되어선 안된다. 그들에겐 죽는
법에 대해 한 달 동안 수련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그 수련에는
명상이 기본 항목이 되어야 하고, 몸에 대한 관리가 기본 항목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건강하고 전체적이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죽어야 한다.
그리하여 서서히 죽음으로 깊이 미끄러져 들어가야 한다. 명상이 잠과
연결된다면 그들은 깨달은 채 죽을 것이다. 그들은 육체만이 뒤에
남을 뿐이고 자신들은 영원의 부분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죽음은 일반적인 죽음보다 낫다. 일반적인 죽음에서는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점점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
죽음을 위한 병원이나 특수기관에서 죽는 것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즐겁고 환희에 찬 방식으로, 크나큰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며
삶을 떠날 수 있다.
나는 안락사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이와 같은 조건에서만 행해지기를 바란다.

제 친구가 얼마 전에 자살을 했는데, 그 일 때문에 여러 가지로
착잡합니다. 그는 산야신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그를
보호하지 못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몇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먼저, 그대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이 문제다. 그대는 삶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
그대는 내가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들이 전적으로 살고 전적으로 죽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
나에게 죽음은 삶만큼 아름답다. 그대는 내가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내가 그렇게 하면 그 사람들을
거스르는 일이 된다.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며, 거기에 잘못된 것은 없다.
사실, 가끔 삶이 잘못될 수는 있지만 죽음은 잘못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휴식이고 내려놓음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대 친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의 죽음은 그대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것은
그대 의식 속에 그대 또한 죽어야 한다는 사씰을 인식시켰지만, 그대는
그 사실을 수용할 수 없다. 지금 그대는 나에게 어떤 결론을 바란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결론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로지 진실만을 줄 뿐이다.
죽음도 삶만킁 진실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은 해로운 것이니
피해야 한다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다는 식의 판념을 가지고 산다.
인간은 어쨌든 살아야 하고, 질질 끌려 다니더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설혹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고통받을 수도 있고 무기력해질 수도 있고 미칠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게 될 수도 있고, 자기 스스로에게 짐이 될
수도 있으며, 매 순간이 구차스런 고통일 수도 있으나, 삶에 본질적인
의의가 있는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이다. 죽음은 금기다. 그러나 나에겐 그렇지 않다. 나에겐 삶과
죽음이 모두 아름답다. 그들은 같은 에너지의 양면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가 살도록 돕고 그대가 죽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내가 그대를 보호하는 방식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하자. 안 그러면 그대는
늘 혼돈스러을 것이다. 누군가가 아프면, 산야신이 병이 들면, 그는
병든 처지에서 나를 신뢰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대를 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게 아니다. 나는 그대가 병을
이해해서 그것을 관조하고 바라보면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상태로
조용히 그것을 통찰하도록 돕기 위해 여기 있다. 병도 삶의 일부다.
내가 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결코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그가 죽어 가고 있다면 나는 그가 죽도록 도울 것이다.
죽음은 위대한 영광이다 그것은 위대한 절정이 될 수 있다. 죽음이
사람을 괴롭히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해 왔기 때문이다. 그대는
죽음을 거부하고 죽음에 반대한다. 그대는 죽기를 바라지 않고 영원히
머무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첫번째 문제다.
두번째 문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이
자살이었기 때문에 그대는 내가 그 산야신을 보호했어야 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살을 막아야 하고, 단 한 사람의 산야신도
자살을 해서는 안된다? 무엇 때문에?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다 만일
어떤 산야신이 게임이 끝났으므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정했다면,
그를 막는 나는 무엇인가? 나는 그냥 말할 것이다 "행복하게 춤추며 가라.
슬퍼하며 가지 말라.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행복한 여행이 되도록 하라."
그러나 그 산야신은 결코 내게 묻지 않았다. 설사 그가 물었더라도
나는 말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자유다. 나는 그대의 자유에 간섭하지 않겠다.
그것은 그대의 삶이고 그대의 죽음이다 내가 뭔데 간섭하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대가 모든 걸 아름답게 처리하도록
하는 것뿐이다. " 자살도 아름다울 수 있다.
인도에는 자살을 허용하는 자이나교라는 종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자이나교에서는 자살을 종교적 행위로서
허용한다! 그들은 산야신들이 자살을 하기로 결심하면 그것을 허용한다
나는 그것이 가장 위대한 자유의 인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타 종교들은
감히 그럴 용기가 없다. 조만간 세계의 모든 나라가 자살을 기본 권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죽기를 원하는데 그를 방해하는
그대, 그대의 법원, 그대와 경찰과 그대의 법은 무엇인가? 그대는 무엇인가?
누가 그대에게 그런 권리를 주었는가? 왜 그 사랑이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가? 왜 그가 범죄자의 심정이 되어야 하는가? 왜 그는
친구들을 초대해서 춤추고 노래하며 죽을 수 없는가? 왜 그 일을 범죄처럼
저질러야 했는가?
자살은 범죄가 아니건만, 그대의 법이 그것을 범죄로 만든다. 자유가
더욱 존중되는 더욱 나은 세상에서는 어떤 사랑이 죽기를 원하면 그의
친구들을 초청할 것이다. 그는 며칠 동안 친구들과 함께 지내며 춤추고
노래하며 좋은 음악을 듣고 시를 읽으며 이웃들에게 인사하러 다닐 것이다.
어느 날 모두가 함께 모였을 때 그는 간단히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잘 배웅할 것이다. 좋은 세상에서는 자살은 죄가 아닐될
것이다.
그대의 자세를 바꾸기만 하면 된다. 나에 대한 것도 명확히 해야 한다.
나는 사람들을 위안하는 일반적인 선생이 아니다. 나의 당부는 진리를
위한 것이지 위안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진리가 불편하다 하더라도
나의 당부는 진리를 향해 있다. 이것이 나에게는 성스런 현상이고
자유다.
그 사람이 자살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그대는
그에게 자살할 자유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대는 버티고 있다. 그는 이미
자살을 했는데 그대는 그것을 용인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대의 문제이지
그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문제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는
그대 안에 늘상 있어 왔던 문제를 건드린 것뿐이다. 그를 가게 하라.
작별인사를 하라. 마음을 풀고 그것을 이해하라,
이 슬픔의 순간은 위대한 이해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무언가가
그대 가슴 속 깊은 곳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그 일에 대해
명상하라. 여러 측면으로, 여러 각도로 보라. 화만 내고 있지 말라.
슬퍼하고만 있지 말라. 그것이 위대한 명상의 순간이 되도록 하라.
그렇다. 마치 그가 그대를 속이기라도 한 듯이 그대에겐 슬픔이 있고
분노가 있다. 그는 그대의 친구였는데, 그대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그는 그대를 속였다! 그런 이유로 그대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나에게도 화를
내고 있다. 내가 어째서 그것을 허용했을까 하고 말이다. 그는 내게
묻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물었더라도 나는 허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묻지 않았다. 사실 물을 필요가 없다 그가 가기를 원한다면
가는 것이다.
다 좋다. 자살도 좋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의 첫번째 터부는 섹스였지만, 차차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제 자살은
프로이트를 필요로 한다. 두번째 터부를 부숴 줄 프로이트 같은 이를
섹스와 죽음, 이 두 가지가 터부다. 이제 죽음을 즐겁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줄 누군가가, 자살은 잘못된 것이라는, 겁쟁이들이나 자살을
한다는 신화를 깨뜨려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자살이 잘못됐다?실상은
그 반대이다. 겁쟁이들이야말로 삶에 집착한다. 그러나 가끔 사람은
살아야 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시점에 이른다. 그는
신에게 입장권을 되돌려주면서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세계를 지켜라.
나는 간다. 나는 이 영화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
조지 버나드 쇼가 연극 관람에 초대되었다. 연극을 보다가 갑자기
그가 일어났다. 작가가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그가 말했다. "나는 반을 보았소,"
작가가 말했다. "하지만 아직 반이 남았잖습니까?"
버나드 쇼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똑같은 사람이 쓴 거요. 그러니
난= 다 본 거나 마찬가지요! "
인생의 반을 보고 나서 그 뒤의 절반이 똑같은 인물에 의해 씌어진 것을 알았다면
계속 남아 있을 이유가 뭔가? 집에 가서 쉬라!
그것에 대해 명상하라. 그것은 아름다운 순간이다. 그대는 슬프고
화가 나 있다. 그렇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명상하라. 그러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 산야신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봉사를 하고 갔다. 화내고
슬퍼함으로써 그 순간을 헛되이 만들지 말라. 그것을 명상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라. 왜 그렇게 느끼는가? 그것을 그대의 문제로 만들라.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 그것은 초점이 틀렸다. 우리는 그가
왜 자살했는지 자문한다. 그것은 핵심이 아니다. 그 일로 그대가 상처
받는 것이 문제다. 왜 그가 자살하려고 마음먹었을까? 왜 그가 그대에게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을까? 그것 역시 그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누구라서 그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유를 알겠는가?
왜 하필이면 그날 자살하기로 했는지 그 누가 알겠는가?
그는 아주 평화롭게 죽은 듯하다. 공동체의 의사 한 사람이 그가
죽은 다음 가 보았다. 그는 길 위에 아주 평온하게 누워 있었다. 마치
잠을 자듯이 한 손을 베고, 마치 소동이 지나간 듯, 폭풍우가 그친 듯.
왜 그가 자살했을까? 왜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왜 오쇼가 그걸 막지 않았을까? 왜 돌보지 않았을까?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대에게 있다. 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어디서 상처를 받았는가? 그대는 상처를 찾아내서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나와의 관계 역시 신뢰의 관계가 아니라 위안과 욕망의
관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관념들을
위해 사용하려 한다. 내가 그대를 보호해야 하며 그대에게 일종의 안전
장치라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 어떤 것을 위한 담보물도
아니다. 나는 아주 무책임한 사람이다. 나와 손을 잡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윤리를 따르지 않고 원칙이라는 것을 모르며, 소위 가치라 일컫는 것을
지니지 않고 전적으로 혼돈스러우며 삶과 그것의 혼돈을 완전히
신뢰하는 무책임한 사람에게 왔음을 전적으로 자각해야 한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나와 그대의 관계가 그의 죽음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왜 그대의 신뢰가 흔들리는지, 그대가 뭘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보라.
그 뒤엔 뭔가 깊은 동기가 있는 게 틀림없으며, 그 동기가
그대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명상을 할 수 있다면 그대는
그 일을 아주 신선하고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며, 그에게 감사할 것이다.
아울러, 그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라. 그는 벌써 태어났다
엄마를 찾았다. 세상에는 바보 같은 엄마가 수없이 많아서 그대는 그가
다시 태어나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3년 내에 그가
아이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가 오는 날 나는 "이 아이가
그 사람이다!" 하고 선언할 것이다. 기다리라!"

저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고, 죽음에 커다란 유혹을 느낍니다.
이 사실이 저를 괴롭게 하지만 동시에 기쁨을 주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멋진 일이다! 인간은 한 번밖에 자살할 수 없는데 그대는
몇 번씩이나 시도했는데도 아직 살아 있다 그 시도들은 진짜가 아니었고
다 가짜였다. 그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물라 나스루딘이 자살하고 싶어했다. 그는 머리가
뛰어나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여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 놓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자살을 시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권총을 들고
낭떠러지로 갔다. 바로 밑으론 깊은 강물이 바위투성이의 계곡을
위험하게 흐르고 있었다. 낭떠러지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는 밧줄도 가져갔다. 실수할 여지가 없도록 모든 경우를 계산에 넣었기 때문에
자살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한 것이었다. 그는 석유를 가득
채운 통도 들고 갔다.
그는 나무에 목을 매긴 했지만 그 밖에도 할 일이 너무 많아 땅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땅에서 발을 떼면 다른 일을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목을 매고 땅에 서서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러자 온몸이 불길에 쉽싸였다. 그는 요행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머리에 총알을 발사했다. 그러나 총알은 밧줄을 끊어서
그는 강으로 떨어졌고, 불은 꺼져 버렸다!
그는 자포자기해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나를 만났다 내가 물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했는데도 아직 살아 있는 건가?"
그가 말했다 "어떡합니까, 저는 헤엄을 칠 줄 알거든요."
죄다 실패하고 말았다!

그대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대는 자살을 원하지 않고, 그 생각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어떤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그것은 그대만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극히 일반적인 현상이다. 삶은 고문이며 짐이다
고통이다. 사람들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삶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 고통, 실망, 절망, 무의미, 마누라, 남편, 아이들, 일을 모두 떨쳐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유혹이 생겨난다. 죽음이
그대의 모든 불행을 끝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은 동시에
그대를 끝내 버린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겨난다.
그대는 사실은 살기를 원한다.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낙원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대는 지옥에서 살고 있다! 그대는 지옥을
없애고 싶어하지만 자기 자신은 없애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가
그대 자신의 지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자살이 그대의
불행을 끝내 주기에 거기에 끌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것이 그대마저
끝낼 것이라는 커다란 두려움이 있다
불행을 끝내고 더 강렬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을까? 나는 어떤 자살은
그대에게 도움이 된다고 가르친다. 그 자살이 그대가 아니라 에고의
자살일 경우다. 에고를 죽이라. 그리고 그와 더불어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걸 보라.
그대는 기쁨과 축복으로 넘치고 매 순간 새로운 신비를
향한 새 문이 열린다. 매 순간이 발견의 순간이 될 것이다. 그것은
끝나지 않는 과정이 된다.
그대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나의 스타일로 자살을
감행하라! 어쨌든 그대는 하도 여러 번 실패를 해서 실패에는 도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살을 원치 않는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말이다. 아직 삶을 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마감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삶을
맛보지도 않았고, 삶의 그 다양한 아름다움과 기쁨과 축복이 발현되지도 않았다.
자연히 그대는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나 그대는 불행을
제거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계속 자살을 시도한다. 그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보인다. 그대는 분열된다. 그대 마음의 반쪽은 말한다.
자살을 해서 이 모든 난센스들을 끝내 버려. 이제 더 이상은 안 돼." 다른
반쪽은 그대의 그런 노력을 방해하려고 애쓴다. 그 반쪽은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직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살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보다 많은 삶이, 보다 풍부한 삶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순간 에고를 죽이라.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는 걸 보라. 에고의 사라짐과 더불어 불행도 없고 고통도 없으며
자살할 필요도 없게 된다. 에고의 사라짐과 더불어 에고에 의해
닫혀 있던 모든 문이 갑자기 열리고 그대는 태양에게, 달에게, 별에게 개방된다.
그 일은 아주 쉽다. 에고를 죽이는 데에는 권총도, 석유도,
목맬 밧줄도, 불도 필요없고, 또 만일 모든 것이 실패해서 깊고 험악한
강으로 떨어질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필요없다. 에고는 단지
사회와 종교와 문화의 소산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에고는 그림자다. 그대는 그 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에고는 없다. 명상은
에고가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들여다
본 사람치고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없다.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안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어떤 에고도 만나지 못했다.
이것이 에고의 자살이다.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고, 단지 눈을 조금
안으로 돌리기만 하면 된다. 일단 에고가 그곳에 없다는 걸 알면 그대가
짊어지고 다니던 모든 고통은 사라진다. 그것은 비실재적인 에고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이제 설 땅을 잃는다. 그 모든 것은 세뇌와
외부의 입력에 의해 그대의 마음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사회가
그대에게 해 왔던 일이다. 우리는 추한 방식으로 전 역사를 살아왔다.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생각하는가? 그것은 단지 그대에게 주입된 관념이다.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관념이 그대에게 심어진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 역시 입력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는 입력되었다.
내가 그대에게 하는 작업은 그대의 입력을 푸는 것이다. 나는 그 모든 것이
그대를 둔하고 멍청하게 만들고 자살이나 죽음에까지 유혹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기록을 그대에게 날마다, 끊임없이 보여 주고 있다
나의 종교는 이런 면에서 독특하다. 과거의 모든 종교는 사람들을 입력시켜 왔다.
나는 그대의 입력을 푼다. 그리하여 그대를 홀로, 그대 자체로
남겨 둔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철학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나의 교리이다' 하는 걸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독교의 교리문답서 같은 것을 주실 수는 없습니까?"
나에겐 그런 것이 없다. 그것은 다시금 그대에게 입력될 것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인이 기독교인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기독교인은
힌두교인으로 입력된 것을 풀어 그를 다시 기독교인으로 재입력시킨다.
거기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나의 시궁창에서 또 다른 시궁창으로 옮겨간 것이다.
아마 며칠 동안은 새로움이 그를 행복하게 하겠지만 곧 그는
다른 시궁창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 그는 시궁창에 빠져 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을 뿐이다. 무덤은 그가 빠질 마지막
시궁창이다.
나는 그대의 프로그램을 지우고는 다른 프로그램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대를 홀로, 텅빈 채, 그냥 제로로 남겨 둔다. 그 제로 속에서 에고는
사라지고 모든 축복이 그대에게 쏟아진다"

지난 주 내내 혼수 상태에 있었던 비말키르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비말키르티에게는 무(無)가, 정확히 무가 일어났다. 무는
미르바나(nirvana)이기 때문이다. 서양은 무의 아름다움에 대한 아무런
개념이 없다. 서양의 사고방식은 온통 외향적이고 사물 지향적이며 행위
지향적이다. '무'는 일견 텅 비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 무가
텅 빔이 아니라 오히려 텅 빔의 정반대라는 것이야말로 동양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충만이고 넘쳐 흐름이다. '무(nothing)'
를 둘로 나눠서 'no-thingness'를 만들면 돌연 그 의미가 바뀐다.
무는 산야신의 목적지이다. 그는 무가 일어나는, 모든 일어남이 사라지는
공간에 이르러야 한다. 행위도 사라지고 행위자도 사라지고 욕망도
사라지고 목적지도 사라진다. 그는 단순히 있다. 의식의 호수에
물결 하나 일지 않고 소리도 없다.
선객(禪客)들은 그것을 "외손바닥이 내는 소리"라고 한다.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 그것은 소리 없는 소리, 옴카르(omkar),
침묵일 뿐이다. 그러나 침묵은 텅 빈 것이 아니고 꽉 찬 것이다.
그대가 전적으로 침묵하고 무와 동조되는 순간, 전체가 그대에게 내려오고
저 너머의 것이 그대를 관통한다.
그러나 서양적 사고가 전 세계를 장악했다. 우리는 일벌레가 되었다.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가 제로가 되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제로는 삶에 있어서
가장 완벽한 경험이다. 그것은 엑스터시의 경험이다.
비말키르티는 축복받았다. 그는 나의 선택받은 산야신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여기 있는 동안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고 전적인 신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질문한 적이 없고 결코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의 신뢰는 무척 깊어서 그는 차츰 나에게 녹아들었다.
그는 진실로 희귀한 영혼 중의 하나였는데, 그의 가슴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는 진정한 왕자였고, 진정한 왕족이었으며, 진정한 귀족이었다.
귀족은 태생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의 질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를 지상에서 가장 희귀하고 아름다운 영혼 중의 하나로
체험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주입된 낡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독일인들은 특히 더하다!

한 독일인이 천국에 이르러 문을 두드렸다. 성 베드로가 작은 창문을
열고 내다보며 물었다. "몇 살이오?" 그리곤 기록을 훑어보더니 의하해 말했다.
그 독일인이 "일흔"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말했다. "그럴 리가 없소. 당신의 작업시간 기록에 의하면
적어도 백마흔세 살은 되어야 하오!"

독일인들은 끊임없이 일한다. 이 독일인은 서양식 사고의 극단을 보여 준다.
인도인이 동양사고의 극단을 대변하듯이. 인도인은 늘 고요히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봄이 와서 풀이 절로 자라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풀은 정말로 자란다!

登마 조이가 나무 밑에 앉아 있다가 집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조이, 뭐 하고 있니?"
"아무 것도 안 해요, 엄마."
"그럴 리가 없다. 조이, 뭐 하고 있니
"아무 것도 안 한다고 했잖아요:'
"거짓말하지 말고, 뭐 하는지 말해!"
이렇게 되자 조이는 한숨을 길게 쉬더니
돌맹이를 집어 발 앞에 던졌다. "돌을 던지고 있어요!"
"그럴 줄 알았다! 당장 그만둬."
"제기랄." 조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무도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내버려두지 않는군!"

무언가를 해야 한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 비말키르티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존재했다고 말하면 그대는 믿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날 나는 그가 조금 염려가 됐다. 그래서 나는
내 산야신 의사들에게 그가 적어도 7일 동안은 육체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 주라고 했다. 그는 아주 아름답고 훌륭하게 해 오고 있었는데,
작업이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종국을 맞았다‥‥ 그는
가장자리에 이르러 있었다. 약간만 밀어도 그는 저 너머의 일부가 될 터였다.
이 공동체 안에 초현대적인 의료센터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실은 그 때문이다. 의학적 조치를 통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사람을
며칠 더 육체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할 수만 있다면 그는 다시 삶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생명을 유지시킨다는 나의 생각에 대해 많은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 지금 비말카르티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숨을 쉬고 있다.
그는 바로 그날 죽었을 것이다 그는 거의 죽었다. 이 인위적인 방법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벌써 다른 몸 속에 있었을 것이고 다른 자궁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이곳에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가 스승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더구나 나같이 미친 스승을! 일단 나와 깊이 연결되면
다른 스승은 소용이 없다. 너무 평범하고 둔하고 생기 없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좀더 버터 주기를 바랐다. 어젯밤에 드디어
그는 그 일을 해냈다. 그는 행위와 무위 사이의 경계선을 넘어갔다. 그의
내부에 남아 있던 '무언가'를 떨쳐 버렸다. 이제 그는 준비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축하할 수 있다.
이제는 그를 배웅할 수 있다. 이제는 기쁨으로 그의 여행을 축원할 수 있다.
그가 그대의 춤과 그대의 노래와 더불어 가도록 하라!
내가 그를 보러 갔을 때 나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은 이렇다. 나는 그의
곁에서 눈을 감고 기다렸다. 그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해했다. 그의 육체는
더 이상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외과의사들과 신경외과 의사들과
다른 의사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내가 그가 육체 속에 머물기를 바랐는지 묻고 또 되물었다.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해서 살려 낸다 한들
그의 두뇌는 정상대로 작동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가
그런 상태로 있는 걸 원하지 않는다. 차라리 가는 것이 낫다. 그들은 왜
내가 인위적으로 호흡을 유지시키는지 의아해했다. 잠시 그의 심장이 멎어
인위적으로 다시 작동시켜야 했다. 그의 신장은 전날부터 작동을 그쳤고
그의 두개골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그 안엔 커다란 혹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선천적인 것이어서 그런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의 몸에 내재된 일종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하게 해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는 이번 생을
궁극의 개화(開化)로 이용했다. 약간 미진한 것이 남아 있었지만,
지난밤 그것조차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비말키르리,
이제 나의 모든 축복과 더불어 저 너머로 가도 되네." 그는 기쁨에 넘쳐
소리쳤다. "우와∼" 내가 말했다. "그렇게 길게 뽑지 말게!"
그리고는 그에게 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다‥‥‥

까마귀가 개구리에게 와서 말했다. "천국에서 큰 파티가 열린대!"
개구리가 큰 입을 벌리고 말했다. "우와-"
까마귀가 덧붙였다. "진수성찬을 준비할 거래 !"
개구리가 대꾸했다. "우와∼ "

·,예쁜 여자들도 있고 롤링 스톤스가 연주를 할 거래?"
개구리가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쳤다. "우와∼"
까마귀가 덧붙였다. "그런데 입 큰 동물은 들여보내지 않는대!"
그러자 개구리가 입술을 잔뜩 오므리고 중얼거렸다. "불쌍한 악어 ! 고
친구 엄청 실망하겠군!"

비말키르티는 진실로 훌륭하다. 그는 다시 육체를 입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깨달음을 얻어 불성의 상태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모두 기뻐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축하하라! 그대는 삶을 축』하하는 것과
더불어 죽음을 축하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사실 삶은 죽음만큼
위대하지 않다. 그러나 죽음은 네번째 상태, 즉 투리야')에 도달했을
때에만 위대할 수 있다.
육체와 두뇌와 가슴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기는 어려운 법이다. =
그렇지만 비말키르티예게는 아주 쉽게 그 일이 일어났다. 육체가 이미
죽었기에∼죽은 상태로 5일 동안 있었다-비동일시가 가능했다.
두뇌는 이미 망가졌고 심장도 거의 멈추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겐 사망으로
보였을 테지만 비말키르티 자신에게는 사고를 가장한 축복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대는 그런 몸과 동일시될 수 없다. 신장은 작동하지 않았고,
호흡도 심장도 기능하지 않았으며, 두뇌는 완전히 손상되었다.
육신을 그런 몸과 어떻게 동일시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약간만
깨어 있어도 분리될 수 있다. 그는 그만큼 깨어 있었고, 그만큼 성장해 있었다.
따라서 그는 곧바로 "나는 육체가 아니다 나는 마음이 아니다
나는 가슴도 아니다"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세 가지를 넘어
갈 때 네번째에, 즉 투리야에 도달하며 그것이 그대의 참 본성이다.
한 번 그것에 도달하면 다시 잃는 법이 없다.
그는 나의 농담을 사랑했었다. 이것이 그를 위한 마지막 강의가 될
것이므로 그를 위해 두 개의 농담을 준비했다.

어떤 이탈리아인 부부가 아기를 낳기 위해 병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도중에 끔찍한 교통사고가 나서 남편이 혼수상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는 3개월 만에 깨어났다. 부인은 말짱했고, 그는 남녀 쌍둥이의
자랑스런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있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퇴원해서 집에
와서는, 부인에게 애들 이름은 뭘로 지었는지 물었다. 부인이 대답했다.
"저, 이탈리아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저는 이름을 짓지 않았어요.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일은 남자들의 몫이잖아요? 당신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삼촌이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그 말을 듣더니 남편이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내 동생은
돌데가리야! 그놈은 아무 것도 몰라! 그래 뭐라고 지었는데?"
부인이 말했다. "여자애는 데니스라고 짓구요‥‥
"야, 괜찮은데! 그리고 남자애는?"
"머슴애는 다 네퓨(Da nephew, '조카'라는 영어에 이탈리아어 관사를
붙인 이름)라고 지었어요."

에이브 아인슈타인은 오하이오에서 못을 만드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일을 열심히 한 결과 겨울 휴가를 마이애미에서 보낼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그가 없는 동안 그의 아들 막스가 사업을 잘 운영해 나갈는지
믿을 수 없다는 게 딱 한 가지 문제였다. 에이브의 친구인 모쉬는,
막스가 언젠가는 사업을 계승할 것이니 이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며 , 안심하고 겨울휴가를 보네고 오라고 설득했다
(계간 못)이라는 잡지를 받아 보기 전까지 에이브는 마이애미에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잡지에는 올 칼라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림과 함께 아인슈타인 회사의 못 광고가 실려 있었다. 선전문구는
이랬다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못을 사용했다!"
에이브는 즉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마라."
막스는 알겠다고 말해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에이브는 다음번 (계간
못)을 받기 전까지는 안심했다. 그 잡지에는, 예수가 십자가 밑에 그냥
누워 있고 설명문에는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못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는 문구가 실려 있었다.

내 철학의 세 가지 'L'은 이것이다. 삶(life), 사랑(love), 웃음(laugh-
leer). 삶은 씨앗일 뿐이고, 사랑은 꽃이며, 웃음은 향기다. 그저 태어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은 삶의 예술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명상의
A이다 그리고 인간은 사랑의 예술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명상의 B이이다.
그리고 나서 인간은 웃음의 예술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명상의 C이다.
명상에는  A, B, C의 세 글자밖에 없다.
그러니 오늘 그대들은 비말키르티에게 멋진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
커다란 웃음과 함께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 물론 그대들이 그를 그리워하리란 걸
안다.
나 역시 그를 그리워한다. 그는 이 공동체의 일부분이 되어
모든 이들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나는 그대들보다 더 그리울 것이다.
그는 내 문의 수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문을 나오면 그곳에 늘 비말
키르티가 미소짓고 서 있는 걸 보는 일은 언제나 즐거움이었다. 이제 』
일은 두 번 다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의 미소 속에
그대들의 웃음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꽃들 속에, 태양 속에
바람 속에, 비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도 진짜로 죽지 않으며, 단지 영원의 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혹 눈물이 나올지라도 그 눈물이 그가 도달한 것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 되도록 하라. 그를 그리워할 그대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충족된 그를 생각하라.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배워야 하는 것이다. 조만간
더 많은 산야신들이 아득한 피안으로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므로
그대들은 그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얼마 안 있어 나도
가야 한다. 그대들은 나에게 작별을 고하는 법 또한 배워야 한다. 웃음과
춤과 노래와 더불어 보내는 방법을 말이다.
나의 모든 접근방식은 축제의 그것이다. 나에게 종교는 축제의 전
스펙트럼, 축제의 모든 색채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을 그대 자신을 위한
위대한 기회로 삼으라. 사람을 축제 속에 떠나보냄으로써 그대들 중의
많은 이가 더 높은 경지에, 존재의 새로운 차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능하다. 죽음은 놓칠 수 없는 순간이다. 그것은 자신의 온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다.
나는 그와 함께 있어 행복하다‥‥‥ 그대들 또한 많은 수가 나와 똑같이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나의 사람들과 함께 있어 참으로 행복하다.
나는 아름다운 제자들을 이렇게 많이 가진 스승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극히 가난했다. 깨달은 제자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엔 붓다가 가장 부자였다. 그러나 내가 붓다를 능가할 것이 확실하다.

     園 譯註

1) 버트런드 러셀 .논리학, 형이상학, 수학 등의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국의 철학자이며 수학자. 195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학의 원리, 정신의 분석, 서양철학사3 등의 저서를 남겼다.
2) 바르도(Bardo) : 티벳에서는 인간이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기까지 49일 동안
생과 생 사이의 중간상태를 겪게 된다고 하는데, 이 중음(中陰)의 상태를
바르도라 한다 티벳에서는 이 기간에 죽음을 겪는 사람이 죽음을 통해 해탈의
차원으로 갈 수 있도록 스승이나 승려들이 천도를 하게 되는데, (:티벳 사자(死
者)의 서(書)에는 어떻게 인도하면 그 존재가 육신이나 카르마의 집착에서 벗어나서
원초적 광명상태인 투휘광체 속으로 녹아들어가 해탈에 이르게 되는지,
임종자는 그 49일 동안 어떻게 사후세계를 여행하게 되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생전에 깨달았거나 거의 깨달은 준비가 된 사람들은 스승의
인도 아래 죽음의 순간에 각성을 가지고 육체와 자아와의 동일시를 버리고 투휘
광체 속으로 녹아들어가지만, 생전에 수행이 부족하고 업이 두터운 사람은 그
빛에 들어가기 전에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로 떨어져, 이 바르도의 단계를 거쳐
다시 태어나는 경로를 밟게 된다.
3) 히포크라테스(Hippocrat點, BC 460∼577) 고대 그리스의 의사. 의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4) 비말키르티(Vimalkirti) '독일 하노버 왕가의 왕자로 태어나 오쇼 라즈니쉬의
제자로 입문했다. 오쇼가 거처하는 '노자(老子) 하우스'의 경비를 맡고 있었는데,
1981년 1월 5일 가라테 수련중 대뇌출혈로 쓰러졌다. 이후 5일 동안
인공호흡장치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오쇼의 설명을 빌리자면
비말키르티에게 남아 있는 약간의 미진한 부분을 해탈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말키르티는 1월 9일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러 다음날 육체를 떠나가게 된다.
바로 그때의 상황에 대해 오쇼가 강의하고 있는 것이다.
5) 투리야:인도 철학에서는 인간의 의식을 의식과 무의식, 꿈꿀 때의 의식으로
구분한다. 투리야는 이 3가지의 의식 너머의 초월적인 의식으로, 투리야에
도달했을 때 의식과 무의식이 만드는 마야(maya, 환영)에 속지 않고
미르바나의 세계로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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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3 ]

3   작성자 : 명상
날자:2007-10-10 11:14:28
강의 내용을 보면 오쇼는 명상가라 하기보다도 심리가라고 말하는게 더 합당할것같네요~ 물론 오쇼본신은 심리학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겠지만... 명상을 하는 사람들의 참고서가 될뿐이고 오히려 심리치료사들에게 더 합당한 책으로 생각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본 글은 명상자료실로 옮겨도 괜찮겠습니다.
2   작성자 : 명상
날자:2007-10-09 23:46:27
진짜 길긴 기네요~ 온 저녁 한권의 책 읽느라 정신없었습니다. 읽으면서 느낀점도 많았고 오쇼는 대단한 명상가이면서도 조금은 광적이란 느낌도 배제할수가 없고... 몇년전에 오쇼의 책을 조금 읽다가 그만두었는데 모두들 오쇼는 한무더기말을 꺼내놓고는 돌아서면 확실한 주제는 잡을수가 없이 남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맞네요~
1   작성자 : 다노
날자:2007-10-09 17:27:05
너무 길지요? 여러편으로 나눠 올릴가하다가 그냥 올렸습니다.
Total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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