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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內觀的鐘聲響了-- 葛印&#21345;在第二屆世界佛&#25945;論壇上講話 댓글:  조회:2143  추천:19  2009-06-16
内观的钟声响了  本文录自2009年03月28日第二届世界佛教论坛上,葛印卡老师的代表在大会上的发言。 内容摘要:内观就是四念住,是佛陀教导的精髓,可使众生清净、克服愁叹、灭除痛苦、实践真理、体证涅盘。葛印卡所传授的内观,方便接引四方人士亲近佛陀的教导,也在中国大陆为和谐社会做出了实质的贡献。 ------------------------------------------------------------------------------------------------------------------------   萧老师 分论坛     佛教修学体系的建设与反思 内容提要   内观就是四念住,是佛陀教导的精髓,可使众生清净、克服愁叹、灭除痛苦、实践真理、体证涅盘。葛印卡所传授的内观,方便接引四方人士亲近佛陀的教导,也在中国大陆为和谐社会做出了实质的贡献。 关键词     内观, 葛印卡。 作者简介   1943年生,现住台湾。            为内观国际学院葛印卡导师所任命的内观老师,负责在中国大陆、台湾和韩国等地区推广内观。   在人类的文明历史上,当人们陷入困境,想要有效地解决问题时,大都会采用这样的策略:  分析现况、找出问题点并掌握关键的症结、寻求对策、拟出行动计画并付诸实施、(解决了问题之后)写成标准操作手册,做为将来的参考。 两千六百年前佛陀也用相同的模式来描绘人生的困境和其解决的办法,那就是四圣谛:  这是苦、这是苦之集、这是苦之灭、这是灭苦之道。 人们结集了佛陀灭苦之道的开示而成为经典,为人们提供了离苦得乐的指引,就如同给了人们最好的行动纲领。慈悲的佛陀还怕人们不知如何去实施这些行动纲领,故又给我们指示了实施的细则,那就是三十七道品。至此人们只要如法修行,就有如走上了一条康庄大道,一条笔直的高速公路。而且藉由修习内观而培养出的两项能力-觉知和平等心,就如同高速公路两边的护栏,使人在修行的道路上不致走岔,能稳步地前行直到圆满的解脱。 修习内观就是修习四念住,修习四念住就是修习内观。佛陀在《大念住经》中谈到修习四念住的重要性时,称它为一乘道(ekayano maggo) - 唯一的道路,可以使众生清净、克服愁叹、灭除痛苦、实践真理和体证涅盘。 在这部经中,佛陀开示了一个实用的方法: 藉由持续不断地观察身体、持续不断地观察感受、持续不断地观察心、和持续不断地观察心的内涵(也就是诸法),以发展自知的能力来探究有关我们自身的实相。 为了探究有关我们自身的实相,我们必须检视我们的“身”和“心”是什么。我们必须学习如何直接去观察这“身”和“心”,不是向外在的世界观察,而是在我们自身的范围内观察。为此,有三点注意事项必须牢记在心:  (1)身体的实相或许可藉由观想来想像,但是要直接体验身体的实相,就必须以身体内生起的感受来用功。 (2)同样地,要真正体验心的实相,就要以心的内涵(诸法)来用功,才能达到目标。因此,如同身体和感受无法分开体验,心和诸法也不能分开来观察。 (3) 由于身、心是如此紧密地互相关连,心的内涵(诸法)总是会以感受呈现在身体上。由于这个原因,佛陀说: Vedanasamosarana sabbe dhamma 当诸法在心中生起时,就有感受伴随而生。 因此,感受串连了身、受、心和法,而观察感受其实就是了解个人身心整体的方法 - 实际上这是唯一的方法。 乌巴庆尊者的传承,葛印卡所教授的内观,着重感受,有其殊胜的地方。除了上述的理由外,我们还可以从其他方面来看“感受”的重要性: (1)佛陀所说的三受(苦受、乐受、不苦不乐受)或五受(苦受、喜受、乐受、忧受、不苦不乐受)都会出现在八十九种的心里。 因为感受是一个“重要助缘”(upanissaya paccayena paccayo 亲依止缘而为缘),所以可以作为证果(涅盘)的直接管道。在论藏的第七部“发趣论” 中的“亲依止缘” 里简明强调了此一事实: “身体的乐受是身体乐受、身体苦受、证得果位(涅盘)的重要助缘。身体的苦受…。 季节(或周遭环境)…。 食物…。 躺着和坐着(也就是床垫和坐垫,或躺着、坐着的姿势等)是身体乐受、身体苦受、证得果位(涅盘)的重要助缘。” 从上所述,我们可以清楚地了解“感受”在解脱道上是多么地重要。身体的乐受和苦受、周遭的环境、我们吃的食物、睡觉和坐着的姿势,及使用的床垫和坐垫等,都是身体持续存在种种感受的原因。只要我们能正确地体验感受,这些原因,如同佛陀在“念住经”中所开示,就会成为我们解脱的最接近的助缘。 (2)在缘起法中,“受”是非常关键的环节。外道的大师们也都教人要从贪爱中出离,但多的是止于言说,而无实践的方法。唯有佛陀能指出“受”这个环节才是断除贪爱,斩断轮回的所缘。 (3)受是“当下”的具体所缘。虽说我们都可以从四念住中的任何一个念住起修,如直接从“心”或“法”修, 但是当一个强烈的诸法在心中起现时,往往使人无法观察诸法,却让业愈造愈深,甚至到了走火入魔,不堪收拾的地步。因为心和诸法非常地抽象,没有可触知的物件可以观察。古今也有很多的大师们都说,除非是个大智慧的人,否则“观法”是很难的。 观“法”虽然很难,但观“受”就很容易而且稳当,因为观“受”能使人活在当下。而活在当下且不起贪,不起嗔,就是正念具足。 这就有如下面这样一个比方。你想驾驭一匹奔腾的野马,故向它抛出一条缰绳,也好逮把它套住了。但因为你没有驯兽师的智慧,不知道如何驾驭野马,却只知死劲地拉住缰绳不放。结果这匹野马受到了更多的刺激而变得更加的狂野。你被野马拖倒了,害怕了,甚至有了生命的危险。 这比喻一个强烈的心法在心中生起时,你想藉由观察心法使它安住,然而却越观越炽盛,甚至到了走火入魔,不堪收拾的地步,你根本无法再修行下去。 这时聪明的你如果能在缰绳套住野马的那一刻,就将缰绳的另一端拴在一棵树桩上。虽野马会想摆脱缰绳,但终究它还是安静下来了。这就好比在强烈的心法出现的当下,你即刻观察感受,具足平等心地观察。你不但藉由观察感受使深层的心不起习性的反应,已经生起的心法也让你处理完了。 “受”是这么的具体,而且是二六时中时时俱在,可以掌握的。以感受来用功就不会落入妄想的陷阱中。这个一般人所忽略的环节被佛陀发现了。光是这一点,佛陀对人类的贡献是无与伦比的。 乌巴庆尊者的传承而由葛印卡所教授的内观,并非只修受念住,而是同时修四个念住,但非常着重感受。因为解脱得要时时彻知无常,而彻知无常是不能忽略感受的。  佛陀在另一个开示中说: “当禅修者精勤地修行,没有片刻忘失彻知无常,这样的智者完全了知所有的感受。于完全了知之后,他摆脱了所有的不净染污。在他的身体毁灭时,这样的人,已安住于正法,已完全了知感受,超越攀缘的世界而达到殊胜的境界。” 佛陀说修行四念住是“唯一的道路,可以使众生清净、克服愁叹、灭除痛苦、实践真理和体证涅盘。”故知Vipassana内观是必修的解脱道。 佛陀曾经讲过一个故事,是关于一个乐善好施的人。但在故事的结尾,佛陀下了一个结语: 即使他做了最大的布施,若他能以恭敬心皈依三宝,其功德将更加殊胜; 即使他能如此,若他能以恭敬心受持五戒,其功德将更加殊胜; 即使他能如此,若他能在短如挤牛奶的时间里,培养对一切众生的善念,其功德更加殊胜; 即使他能如此,若他能在一弹指的时间里,培养对无常的觉知,其功德更加殊胜。 以观察感受时时彻知无常修习内观,就是佛陀所说最殊胜的功德。 现在全世界已有越来越多的人修习内观。内观是佛陀教导的精华,然而却有人视它为小乘; 修习内观而成就了最高果位的阿罗汉,则被认为只是追求自我解脱的自了汉。这是多么不幸的误解! 佛法弘传第二轮的两千五百年才刚开始,如果我们还持续为这不幸的误解所烦恼,则佛法的第二弘传期将受到很大的挫败。我们想就以下几方面来与大家共同探讨。 1.声闻众(Savaka)是指有佛在世时和他的教化能有效弘传的五千年里,听闻佛陀的教导而修习解脱道的僧众。只有佛陀是未曾闻法能自觉法,以自已的智慧觉观,通达无上菩堤,又能成就诸声闻教授,教诫的人; 而其他人则必须有待先觉开导来觉悟自己。故广义的说,过去、现在和将来所有奉行佛陀的教导的人都是声闻众,不论他走的是阿罗汉道或是菩萨道。 2.有佛出世时,必定要有一大批的阿罗汉出现来印证佛陀宣说的解脱道。佛陀和祂的阿罗汉弟子们都是由于达成了于五受阴厌、离欲、灭、不起、解脱的重大目标而证得菩提。他们的修行成果没有高下之别。如果少了阿罗汉弟子们的印证,佛陀的解脱道也只不过是曲高和寡的个人哲学主张而已。 3.依法修行三十七道品的人至少要在很多劫中积累足够的波罗蜜之后,当时机成熟时而修成正果。誓愿成为佛陀的大弟子们则更需积累十万大劫的波罗蜜。他们在成就正果之前所修行的道,无疑的就是菩萨的事功,否则就不可能积累波罗蜜。当他们成就阿罗汉之后就如佛陀一样化入了法身体系,世世代代被泽十方众生。他们怎么可能是自了汉呢?! 4.众生在轮回的长流里沉沦,各有各的际遇,无非都是正或反的修行表现,但终究都会走上终极的目标- 解脱。解脱则要靠智慧,修习内观才能开发智慧而解脱。成佛也罢,成辟支佛也罢,成阿罗汉也罢,都得修习内观。行行复行行于菩萨道上的行者必定也要靠内观来保持修行的力道,否则就会步履蹒跚。犹如电瓶没电了就得充电一样,这是自然的法则。这也就是为什么佛陀说:“修习四念住-内观-是唯一的道路。”    佛陀说,只要四众弟子持续修习佛法,佛法就不会灭亡。乌巴庆尊者的传承葛印卡所教授的内观,经过了四十年的努力,已成功地把纯正的佛法由缅甸带回到它的发源地-印度,并从印度传播到世界各地。内观国际学院(Vipassana International Academy)在极力维持法的纯净的同时,也在全世界一百四十多个内观中心,以统一的教材和课程安排,方便接引想来亲近佛陀教导的人。 人们的痛苦都是共通性的,而对治的方法也必定是要能普遍通用的。内观符合了这项要求,故不但给佛陀的四众弟子提供正法的实修,也接引了为数众多的其他宗教的领袖和其信众,包括天主教徒,基督教徒,印度教徒,回教徒,耆那教徒,犹太教徒等等。每年这个传承的内观能接引将近十二万人次。广布世界各地的一百四十多个中心,统一的教材和课程安排,方便大众同时受习到正法。而对于想在解脱道上更精进耕耘的修行人,我们还提供有四念住、二十日、三十日、四十五日和六十日的课程。 本传承的内观在十年前经由佛教大德的努力,引进入了这个伟大的国家-中国。之后我们不曾间断地在不同的寺庙的邀请下,共举办了不少于一百二十个场次的十日内观住宿课程。正如贵会第一届论坛所揭橥的主题: “和谐世界从心开始”,我们在这十年来确实替中国“和谐社会”做了实质的贡献。人们带着各种各样的痛苦和期待的心来上课。在十日课程中,他们学会了如何以平衡的心来处理问题;他们学得了生活的艺术。他们带着更清净和更平衡的心回到了家。他们不但自己享受到安祥与和谐,更进而开始将这安祥与和谐散播给周遭的人。 “和谐世界,众缘和合”是本次论坛的主题。我们相信内观必定能继续为这个社会,这个国家,这个世界,在这个主题所揭示的精神上,再做出实质的贡献。我们谨以这样一幅对联: 协力同心各得其所 兴仁讲让必有余庆 来祝福大会顺利、成功。 愿正法引领我们迈向圆满的解脱。
29    현대인과 불교 명상 댓글:  조회:2910  추천:58  2008-12-05
현대인과 불교 명상 명상의 단계적 수행을 위한 지침 What Meditation Implies Āchārya Buddharakkhita 아차리야 붓다락키따 지음 이 경 숙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1981. Bodhi Leaves No. 74) * 이 책에 나오는 경(經)의 출전은 영국빠알리성전협회(PTS)에서 간행한 로마자 본 빠알리경임. * 주요 술어는 빠알리어 음을 취했으며 빠알리어는 이탤릭체로 표기함. * 본문의 주는 원주(原住)이며 역주(譯註)일 경우 따로 [역주]라고 표기하였음. ▶ 차 례 ․현대 생활에서의 명상 6    명상이란 무엇인가 13 ․명상 수행과 마음의 제어 21 ․명상과 재가자 41 현대 생활에서의 명상 현대의 특징은 대중문화이고, 거기에서 집단 히스테리, 세뇌, 규격화 그리고 개성말살을 초래하였다. 사람들은 물질적 발전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온 나머지 날로 비인간화해 가고 있다. 이제 사람은 한낱 복잡한 기계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전문화 추세를 열렬히 추구한 결과 시야는 좁아질 대로 좁아져서 사람들은 아주 작은 일들에 대해 쓸데없이  많이 알게 되었다. 획일화 경향은 판에 박은 사고를 하게 만들어 이제는 생산품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마저 규격화되었다. 그 결과, 개성 있는 자기표현이 사라져 버렸다. 한 집단의 구성원이 되고자 애쓰는 과정에서 개개인이 원래 지니고 있는 전일성(全一性)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일관조립식(一貫組立式) 생산기술이 사생활에까지 침투하여 그 대가로 고유한 인간성을 앗아가 버렸다. 그러나 진정한 비극은 가치의 붕괴다. 인간에 내재해 있는 더 높은 가능성의 씨앗을 현실로 꽃피워내는 내면의 율동인 도덕성이 첫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이다. 실제로 나타난 결과만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형편에서는 아무리 고상한 동기도, 계산하고 재려드는 의식구조, 즉 심화되어 가는 상업화 추세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사소한  적선마저도 이웃돕기 운동이라고 광고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어버렸다. 이렇듯 무미건조한 물질만능주의 세상에서 이제 유일한 희망은 마음밭을 갈아 그 가능성을 계발하는 데서 찾는 수밖에 없다. 교육의 상황은 어떤가. 고상한 가치 수단으로서의 교육 본래의 면목은 사라져버리고 교육 그 자체가 목적처럼 되어버려 현실적 이윤동기에 의해서만 사고파는 풍토로 변했다. 교육은 이미 나무 위에 주렁주렁 달린 푸짐한 과일을 딸 수 있도록 딛고 올라설 사다리가 아닌데다가 그 과일 역시 쓴맛으로 변해버렸다. 사람들은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으나 그 흥정 와중에 지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엄청난 힘은 획득했지만 막상 그 힘을 쓸 지혜가 없다. 인간이 자연의 보고(寶庫)를 노획했지만 그 보물을 쓸 재주는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우울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중차대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보려 하고 있을 뿐이다. 기술의 발달이 물질적 번영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 상응하는 문화와 인성(人性)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볼 수는 없다. 기술적으로 앞선 사회에서 일고 있는 온갖 대립과 부패 그리고 갈등이 바로 그 증거이다. 세상이 이런 비극적 상황에 직면한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심령과학의 초심리학(超心理學) 연구나 천안통(天眼通)과 같은 초자연적 지혜에 의하면 과거에도 비슷한 상황전개가 있었다고 한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아득히 먼 옛날, 지금은 대서양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지만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아틀란티스라는 대륙이 있었다고 한다. 이 대륙에서 이루어졌던 놀라울 정도로 높은 문명의 실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현재 가장 까다로운 과학자들마저도 진지한 검토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근래에 와서 급격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 우주과학 분야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자료에 의하면 아틀란티스 대륙은 순전히 물질적인 면으로만 발전하였고, 그 결과로 쾌락을 탐하는 문명에 빠져들어 결국 자멸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자체에서 생겨난 녹 때문에 쇠 조각 전체가 녹슬어버리고만 경우와 같다 하겠다. 부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물질만능주의에 젖어들고 있는 현재의 우리를 위해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담긴 두 단어를 이미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냥 보기(sight)’와 ‘꿰뚫어 보기(insight)’1)이다. 꿰뚫는 눈으로 보는 것, 그것이 지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실재에 연결시켜 주는 교량이다. 꿰뚫어 봄이 의미하는 지혜란, 사물을 간파하여 보통 사람들 이상으로 볼 수 있는 날카로운 이해능력을 말한다. 그것은 옳음과 그름,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을 판별하는 능력이며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름, 거짓, 악을 누르고 옳음, 진실, 선의 편에 서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사물의 겉모습 이상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상황의 노예가 아니라 그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사물을 피상적으로 보는 것에만 만족하여 겉보기에만 그럴듯하면 넋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언제나 바쁘고 소란하고 인위적이고 기계화된 삶을 살고 있어서 내면적으로 불안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치적․경제적․도덕적 혼란의 와중에서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그냥 보이는 것 이상을 보아내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다.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 위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하루빨리 깨달아야만 한다. 바로 이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명상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명상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며, 그 지혜가 우리의 행위를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고 우리 시대의 과학과 기술의 탐구가 나아갈 길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명상이란 말은 너무나 다양한 정신활동 ― 그것도 때로는 서로 상반되는 활동들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먼저 명상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한 후 그것을 자신의 체험과 연관시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질적으로 명상은 실제적 체험이며, 이 점에서 지적 관념과 구별된다. 부처님께서는 명상이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셨다. 1) 바와나(Bhāvanā) : 정신적 계발 또는 마음 밭 갈기[耕]. 2) 심청정(心淸淨 Citta Visuddhi) : 마음의 정화. 3) 사마타[止 Samatha] : 마음을 진정시킴 또는 가라앉힘. 4) 심일경성(心一境性 Ekaggatā) : 마음과 제반 정신적 기능을 한 곳에 집중시킴. 5) 사마디[三昧, 定 Samādhi] : 제각각인 정신적 힘들을 통일시키는 것, 그러면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이 드러나게 된다. 이제 위에서 열거한 용어들을 하나하나 풀어 명상의 정확한 의미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바와나(bhāvānā) ‘마음을 갈다, 마음을 계발하다’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를 토지에 비유해서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여기 얼마간의 땅이 있다. 만일 그 땅을 경작하지 않고 불모지로 내버려둔다면 쓸모가 없어 비생산적일 뿐 아니라 땅은 황폐해지고 잡초가 무성하여 뱀이나 전갈 같은 해충들이 서식하기 좋은 위험한 곳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발되지 않은 마음은 정신적으로 비생산적일 뿐 아니라 사회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위협이 된다. 왜냐하면 탐욕과 증오와 미혹이라는 독사․전갈들이 그 안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바와나(bhāvanā)는 ‘되다’란 뜻을 지닌 빠알리어 ‘bhu’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명상을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실상, 또는 진리와 하나가 ‘되는’ 창조적 과정에 시동을 걸게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되어가는’ 것이며, 그것도 업에서 점점 헤어나게 되는 ‘됨’이 되는 것이다. 심청정(citta visuddhi) 연못물을 예로 들어 ‘심청정’을 설명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열정과 이기심과 증오로 흐리고 탁해진 마음의 연못이 있다면 그 물에는 자신의 모습도 또 세상 사물의 모습도 바르게 비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명상을 수행하면 마음이 깨끗해져서 자신의 참 모습뿐 아니라 주변 세상의 실상에 대한 통찰까지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마타(samatha) 명상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행위, 또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행위이다. 규칙적인 명상은 내면의 고요와 평온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우리의 지각과 판별력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그래서 인생은 정말로 경이로운 경험으로 가득 찬 멋진 탐험 길이 된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에서 부딪쳐야 하는 갖가지 갈래길에 당황하지 않고 이를 태연히 바라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잃음과 얻음,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 등 삶이 몰고 오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런 마음은 동요되지 않고 평온하다. 이는 깊이 있는 제어력을 성취한 것을 뜻한다. 방파제를 비유로 들어보자. 바다에 방파제를 만들어 놓으면 아무리 거센 파도라도 그 벽에 부딪쳐 잘게 부서지므로 항구는 거센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명상을 수행한다는 것은 마음의 바다에 방파제를 쌓는 일이다. 그리하여 삶의 파도로부터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끝없이 성난 파도가 밀려드는 이 세상에서 든든한 마음의 방파제보다 더 유익한 것이 또 있을까. 심일경성(ekaggatā) 지적인 집중과 명상의 집중은 같지 않다. 지적 집중이 부분적인 것이라면 명상의 집중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전체적인 집중이다. 뉴턴의 일화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아이작 뉴턴은 연구에 몰두할 때면 다른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느 날 아침 하숙집 주인이 삶아서 아침 식사로 먹으라고 두 개의 달걀을 놓고 가자 그는 달걀대신 그의 회중시계를 끓는 물에 넣어버린 일도 있었다. 그러나 명상수행의 집중상태에서는 그와 같은 상궤를 벗어난 일이 일어날 수 없다. 명상 상태에서는 깨어있는 마음이 모든 감각 기능을 통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초세간의 저 높은 세계로까지 이끌어주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집중은 분명히 힘이다. 하지만 명상의 집중은 탁월한 힘이다. 사마디(samādhi) 삼매 또는 몰입(沒入)은 제각기 다른 그 모든 마음의 기능들을 종합한 상태를 말한다. ‘통일’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가지고 전혀 새로운 하나의 존재를 창조해낸다는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은 역어라 하겠다. 명상은 잠자고 있는 일체의 잠재력을 활성화해서 우리를 새로운 경지로 들게 함으로써 자기 변혁을 이루어내게끔 해준다. 명상 수행은 어디까지나 자기 변혁을 이루어내는 자기 계발의 방법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에도 대단한 이익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자기 계발은 매우 특이한 돌파 작업을 완수해내는 바, 그것은 지성의 겉껍질을 돌파하여 우리의 마음이 지혜의 빛 앞에 활짝 열리도록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지혜의 빛이 흘러 들어와야만 우리의 인격은 비로소 향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명상 수행과 마음의 제어 나아갈 것인가, 뒷걸음 칠 것인가 인격의 전반, 즉 지적, 윤리적, 정신적 제 방면의 발전에 끼치는 명상의 작용에 대해 저 유명한 세계적 고전인 󰡔법구경󰡕은 명쾌한 서술을 하고 있다. 이를 풀어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굴레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직관의 기능은 마음이 명상에 매여 있을 때에만 작용하네. 명상에 의해 마음이 계발되지 않으면 직관의 기능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위축되네.  나아갈 것인가, 뒷걸음질 칠 것인가,  이 두 길이 있을 뿐이니 이 점 분명히 깨달아서 직관의 지혜가 무르익도록 길을 잘 택하여 나아가라.                        [게송 282] 부처님은 정신적인 문제에 관한 한 중립적이라든가 혹은 두 발을 걸치는 식의 제3의 길은 없다는 것을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뒷걸음질 치게 된다. 세속주의자들이 취하는 것과 같은 엉거주춤한 태도는 이치에 맞지 않으며 소극적인 것이다. 불모지건 경작되지 않은 땅이건 둘 다 생산능력의 부재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마찬가지 듯이 어정쩡한 태도도 적극적인 정신적 결실을 맺지 못하는 점에서는 똑같다. 명상만이 인간의 잠재력을 활성화시켜 주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명상을 가르침의 핵심으로 삼으셨던 것이다. 위대한 스승께서는 한 조각의 불모지가 초목으로 우거진 정원으로 바뀌는 그림과 같은 정경을 그려 보여주며 명상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하고 계신다. 마음갈기 명상 수행은 마음을 가는 것이다. 나는 지금 ‘갈다’라는 이 말을 농사에서 사용하는 뜻으로 쓰고 있다. 말하자면 마음의 밭을 경작하여 그 마음이 가진 모든 가능성들을 초월적 완성이라는 꽃으로 활짝 피어나도록 계발한다는 뜻이다. 한편, 마음의 제어(mind control)는 명상 과정을 구성하는 필수적 부분 중 하나이다. 그것은 마치 농사를 짓자면 김을 매고 해충을 쫓는 등 갖가지 제어조치가 불가피한 것과 같다. 마음은 밭과 같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만일 밭을 경작하지 않고 방치해둔다면 땅은 메말라서 척박해질 뿐 아니라 잡초만 무성한 가운데 독사와 전갈 등이 끼어들어 아주 위험해질 수도 있다. 똑같은 상황이 마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의 마음 또한 갈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사악하고 그릇된 망념의 잡초가 무성해 질 것이다. 탐욕과 증오, 미혹으로 가득 찬 마음은 위험하다. 반대로 체계적인 방법으로 잘 갈아 나간다면 마음은 계발되고 본래 갖추고 있던 힘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마음을 간다는 것은 하루 한두 시간씩 명상 시간을 가지면서 마음을 챙기려 애쓰는 것만을 말한다기보다는 종일 깨어있는 시간 내내 일정한 속도로 내면적 진보를 지속하고 있는 그러한 발전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명상을 하다보면 다양한 관법(觀法)으로 마음을 훈련시키게 된다. 신체를 단련시킬 때 여러 가지 기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단련 역시 마음챙김과 정신집중 그리고 통찰을 계발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법으로 마음을 훈련시킨다. 신체단련을 통해 힘을 계발하고 허약함을 극복하고 인격과 건강을 증장(增長)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단련을 통해서는 정신적인 허약함과 한계를 극복하고, 악과 유혹에 맞설 수 있는 적극적 자질을 강화시켜 정신적 향상을 한층 더 높여줌으로써 마침내는 세상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든다. 마음의 제어 마음의 제어는 결코 그 어떠한 금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자연스런 정신적 욕망을 억제 또는 억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겠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초극의 과정인 것이다. 사실 어느 정도라도 마음의 제어를 하지 않고는 인생사를 감당해내기가 결코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못 박아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제어되지 않은 마음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하노라. 제어되지 않은 마음은 참으로 몰아가기 어렵다.” “비구들이여, 잘 제어된 마음보다 더 다루기 쉬운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하노라. 제어된 마음은 참으로 몰아갈만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제어되지 않은 마음보다 더 손해를 주는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하노라. 길들지 않은 마음은 참으로 큰 손해를 입힌다.” “비구들이여, 길들여지지 않고 제어되지 않고 지켜지지 못하고 참지 못하는 마음보다 더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하노라. 그러한 마음은 참으로 커다란 고통을 가져다준다.” “비구들이여, 길들여지고 제어되고 지켜지고 참는 마음보다 더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하노라. 그러한 마음은 참으로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준다.” 단번에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자기 초극은 지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면보다는 인격 전반에 걸쳐 새로이 태어나는 결과로 이루어지는 측면이 더 크다. 즉 견해와 태도, 정서와 의지 그리고 인생살이 전반에서 거듭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총체적인 변화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점진적인 도정이며 순차적인 발전이다. 신체적 습관에 대한 훈련, 삶을 보는 안목의 변화, 지적(知的)․의지적 활동유형의 재정립,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자기정화는 반드시 정확하고 미더운 방법론에 입각해서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 당시 유명한 수학자, 가나까 목갈라아나가 세존께 와서 여쭈었다.2) “존귀한 분이시여, 세속적인 직업의 경우, 어떤 직업에서건 으레 점차적인 배움과 점차적인 익힘 그리고 점차적인 훈련 과정이 있습니다. 고따마시여, 정신적인 삶을 닦아나가는 데 있어서도 그와 같이 점차적인 훈련과 점진적인 발전단계를 설정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방법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가능하오. 배움 많은 청신사(淸信士)여, 정신적인 삶에도 점차적인 훈련단계를 설정하는 것이 가능하오. 능숙한 조련사가 말을 길들일 때 갖가지 방식의 훈련에 말이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것과 같이 진리의 발견자인 여래도 사람을 정신적으로 순화시켜 나가는 데 단계적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쓰는 것이오.” 도덕적인 몸가짐 그 제자는 우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다. “오라, 제자여. 청정한 계율을 통해 도덕적 습성을 몸에 익혀라. 도덕적 의무를 자발적으로 준수하여 절제된 삶을 살라. 바른 행을 재산으로 알고 계율의 밭을 떠나지 말고 잘 지켜라. 계를 지킴에 있어 때를 묻히거나 타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살펴라. 그리고 계율에 따라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라.” 감각의 제어 제자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닦으면 세존께서는 그를 더 나아가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자, 이젠 감각기관을 잘 지키도록 하라. 감각기관의 주인이 되라.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보았을 때 그 드러나는 겉모습에 취해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자제력을 견지하라. 그대 만일 감각을 제어하지 않으면 감각적 매력뿐만 아니라 욕구불만과 온갖 좋지 못한 마음상태가 그대 속으로 흘러들어 올 것이다. 그대의 감각기관 즉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마음을 잘 제어하고 지키면서 길을 나아가라.” 음식 절제 제자가 자신의 마음과 함께 감각기관을 잘 제어해 나가면 부처님께서는 다시 그에게 지시하신다. “음식은 절제하도록 하라. 음식을 먹을 때는 그 목적이 맛을 즐기거나 식탐에 빠지는 데 있지 않으며 신체적 미모나 매력을 얻는 데에도 있지 않고 다만 몸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음식은 정신적인 삶을 도와서 우리가 안락하고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도록 해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의 깊게 명심하면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 방심하지 않음 세존께서는 다시 그를 더 나아가도록 훈련시킨다. “이제 방심하지 않도록[不放逸], 열심히 노력해서 마음챙김[正念]과 분명한 이해[正知]를 계발하라.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모든 행위를 명상 훈련의 기회로 전환시킴으로써 항상 챙겨진 마음상태를 유지하는 가운데 몸과 느낌과 생각과 모든 심리적 충동을 빈틈없이 분명하게 지켜볼[隨觀] 수 있도록 하라. 그리하여 너의 마음에서 장애가 되는 요소를 불식시켜라.” 장애를 극복하라 제자가 깨어있는 동안은 언제나 걷고 있건 앉아있건, 서 있건 누워있건 또 어떤 일을 하고 있건 간에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잘 챙긴 채로 예리한 식별력을 유지하여 잃지 않게 되면 세존께서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게 되도록 다음과 같이 훈련시킨다. “자, 이제는 너의 마음을 제어되지 않은 상태로 만드는 모든 그릇된 생각들을 극복하기 위해 마음을 훈련시켜야 한다. 욕망과 악의(惡意)라는 때를 씻어내고 너그럽고 관대하고 동정적인 마음으로 머물러라. 나태와 해이함을 쫓아내버리고 활발하고 확고하고 원기 왕성한 상태에 머물러라. 들뜸과 회한을 떨쳐 버리고 내면의 평온(平穩)에 머물러 고요해져라. 의심과 당혹을 떨쳐 버리고 신뢰와 확신에 찬 마음으로 머물라.” 제자가 마음을 능히 제어할 수 있게 되면 그는 다시 여러 가지 명상법을 지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사마디(samādhi)라는 더 높은 단계들, 즉 명상 몰입에서 오는 더 높은 식(識)에로 인도된다. 사마디(samādhi) 사마디는 정신적 면에서 특히 수승(殊勝)한 몇몇 가지의 상태를 한데 묶어 완전한 통일‧통합을 이루는 일종의 변증법적 종합을 가져온다. 이 종합은 단순히 마음을 완전하게 정화시키고 또 바람 없는 곳에 있는 등잔의 불꽃처럼 마음이 한 점에 모인 상태로 지속되게 할 뿐만 아니라 소위 지혜라고 하는 내면의 조명(照明)을 생겨나게 만든다. 이 지혜는 일체의 미망과 어리석음, 무지 그리고 자기 기만을 사라지게 만들어 우리가 실상(實相)에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직관력이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정신적 해탈로 나아가는 길이 밝혀지고 열려지는 것이다. 인도가 낳은 위대한 조어장부(調御丈夫)3) 부처님께서는 향상의 추구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도전이라고 선언하셨다. 자기 초극이란 바로 이 향상의 추구를 뜻한다. 우리들의 시대는 지식의 추구에만 모든 마음을 쏟아왔다. 지식은 본질적으로 고양된 덕목은 될 수 없고 단지 힘이 될 수 있을 뿐인데 때때로 파괴적 힘이 되어서 탈이다. 이에 반해 향상은 사람을 자제할 줄 아는 인격으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만듦으로써 진정한 행복과 안녕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더 높은 덕이자 내면적 빛이다. 현대사회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역설적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지식이 몇 배로 많아지는 가  했더니 문제도 똑같이 많아진 것이다. 현대 사회의 악은 지식의 증가에 정비례하여 늘어나는 것 같다. 오늘날 인류의 지식 축적은 가히 엄청나지만 인류의 굴레 역시 그러하다. 체계적인 계율 “길들여진 유순한 마음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온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음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체계를 갖춘 도덕률을 따르는 것이 꼭 필요하며, 이때 그 도덕률은 마음과 견해와 행동을 점차적으로 더욱 더 깊이 순화시켜 나가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부처님이 체계를 세운 오계(五戒)는 폭력, 부정직, 불륜, 거짓의 네 가지 행위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또 일체의 술이나 약물 중독을 멀리 할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이 계율들을 음미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매우 적극적으로 인간애, 자선, 순결, 만족 그리고 정직으로 충만한 삶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생을 그렇게 영위할 수 있다면 굳이 부와 권력의 획득이나 관능, 약물, 술 따위에 탐닉하는 식으로 표출되는 어떤 형태의 현실 도피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계율 체계가 갖는 사회적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범죄를 피할 뿐 아니라, 매우 고상한 인성(人性)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고상한 인성이 되려면 향상의 필요성이야말로 가장 절대적이다. 오늘날 급속히 바뀌고 있는 인성이 안고 있는 문제는 비단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불안과 불확실성에 끊임없이 쫓기고 있다는 점이다. 마음이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지면 키 없는 배와 같이 된다. 위없이 높은 깨달음을 성취하신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마음 닦는 법은 병든 인성을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이다. 부처님께서 살아 계실 때 비구니 단띠까는 부처님의 이 마음 닦는 법을 실제로 수행한 후 그 체험담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영축산에서 한낮의 휴식을 취한 후 내려오다  코끼리가 강어귀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는 것을 보았네. 조련사가 막대기를 들고 그 큰 짐승에게 명령하였네. ‘자 다리를 내밀어요.’ 코끼리가 순종하니 그 몰이꾼은 냉큼 목 위로 올라탔네. 나 분명 제멋대로 굴던 놈이 길들여진 것 보았네. 코끼리가 주인의 뜻에 복종하는 모습을. 그 광경 가슴에 새긴 채 나는 숲속 깊이 들어갔네. 확신에 차서 정진 끝에 거기서 나의 마음 마침내 모두 조복(調伏)받을 수 있었네.            [ 장로니게』3장 4, 게송 48〜50] 명상과 재가자 재가 생활인에게 명상이란 당치도 않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까닭인즉 명상을 하면 사람이 초연하고 무감각하고 제반 의무에 대해 냉담해지기 마련인데, 세속생활은 원래 삶에 대한 열정과 따뜻한 온기를 그 바탕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명상과 세속생활은 결국 서로 상충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재가자가 떠맡고 있는 의무가 얼마나 많은지 역설한다. 자신을 돌보아야 하고 가족과 공동체, 사회 그리고 국가에 대해서도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명상을 하기 때문에 이 모든 의무에 대해 무관심해지기 쉽다면 어떻게 명상을 재가자의 생활에 알맞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만일 명상이란 말이 ‘현실 도피(escapism)'를 뜻한다면 그들 말이 맞다. 그러나 ‘벗어남(escape)’을 뜻한다면 그들의 말은 틀렸다. 현실 도피는 그릇된, 건전치 못한 자세이다. 그것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현실을 직면하기를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타조가 제 머리를 땅에 박고는 ‘나는 없소’ 하는 것과 같이 자기 기만에 뿌리를 둔 자세라 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벗어남’은 건전한 접근 방식이다. 벗어남으로써 우리는 정신적 갈등과 한계성을 넘어서고 격정이라든가 여타의 갖가지 정신적 타락을 극복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그들이 만들어 놓은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명상 수행을 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이기심과 아만(我慢)으로 사방 벽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숨어 버린다면 명상은 한낱 자기중심적 성향을 가리는 가면에 불과하므로 분명히 그것은 현실 도피이며 따라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명상이 만일 탐욕과 증오와 미혹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하며 실제로 격정과 미움 그리고 무지에 갇혀 있는 사람을 풀어 주는 것이라면 이야말로 바람직한 일일 뿐 아니라 재가자를 줄곧 괴롭히고 있는 그 모든 병을 고쳐주는 유일한 만병통치약이 아닐 수 없다. 현실적으로 재가자는 두 가지 의무를 지고 있다. 하나는 이기심이 내리는 명령을 수행하여야 하는 의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타심이 내리는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의무이다. 이기심은 자기 이익을 도모할 때 생기고, 이타심은 타인의 이익을 도모할 때 생긴다. 자기 이익이라 해서 꼭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그것은 사회 전체 또는 국가까지 확대될 수 있다. 요컨대 여기서 ‘자기’란 각자의 경험적 공동체를 의미한다. 또 ‘타인의 이익’이란 정신적 요구와 책임을 염두에 둔 말이다. 현명한 재가자라면 이 두 가지 의무를 균형있게 잘 이행할 것이다. 그런데 경험적 의무와 정신적 의무 사이에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은 이른바 ‘현명함’이라는 놀라운 정신적 재능에서 온다. 이 자질을 계발시키는 것이 바로 명상 수행의 유일한 목적이라 할 수도 있다. 명상은 정신적 긴장과 오염을 제거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안정시키며, 마음의 갖가지 기능을 통합시키고, 마음이 갖추고 있는 잠재력을 계발시킨다. 마음은 하나의 광산이니, 우리가 이 내적 부의 보고를 파내는 방법만 안다면 얻지 못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이 무진장한 보고의 자물쇠를 여는 데에 명상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명상은 현실 도피이기는커녕 자유와 완성, 미(美)와 지(知), 지혜와 자비를 향해 내딛는 가장 적극적인 발걸음인 것이다. 현실적 이해를 정신적 수행과 융합시키는 일은 옛 사람들에게 커다란 문제였던 것 같다. 성스러운 빠알리경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 사회 지도층에 속했던 디가자누(Dīghajānu)라는 사람이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고 있다. “고귀하신 분이시여, 저희는 세속의 즐거움을 누리는 속인입니다. 저희는 처와 자식들에게 매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까아시(Kāsi)에서 가져 온 백단향으로 물들인 옷을 입고, 화관과 향수와 머릿기름으로  치장하고, 금․은 장식품으로 몸을 감쌉니다. 비록 이런 형편의 우리들이지만 고귀하신 분으로부터, 금생 동안 안락과 행복에로 이끌어 주고 또 다가올 생에서도 안락과 행복으로 이끌어줄 법을 가르침 받고 싶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디가자누여, 선남자(善男子)가 바로 이 생에서 안락과 행복을 누리려면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 네 가지란 무엇인가? 줄기찬 노력, 잘 보살핌,4) 좋은 친구와 사귐, 분수에 맞는 생활, 이 네가지의 구족(具足)이 그것이다. 디가자누여, 선남자가 다음 생에서 안락과 행복을 누리려면 다시 네 가지 조건을 더 갖추어야 한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신심, 계행, 자비, 지혜 이 넷을 구족하는 것이다.” 여기서 ‘구족’이란 단어가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안정감과 충족감의 토대를 형성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그것은 순전히 물질적 사회적 의미에서의 부, 재산, 명성, 권력뿐 아니라 지성적 및 정신적 차원에서의 성취를 돕는 도덕적 자질과 정신적 가치를 획득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의미로건 그것은 ‘성취’, 즉 안정감과 충족감의 토대를 의미한다. 위에서 말한 이른바 구족함의 두 가지 방향성, 즉 당장의 현실과 관련 있는 경험적 구족함과 그리고 차후와 관련 있는 정신적 구족함의 두 방향도 결국은 오로지 정신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일종의 정신적 수확인 것이다. 본질적으로 명상은 정신의 밭갈이이므로 명상을 통한 마음의 계발은 방금 말한 정신의 수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줄기찬 노력을 구족한다는 것은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일 ― 그것이 직업적인 일이든 자발적인 근로든 또 이해관계가 있든 순전한 취미든 간에 그 일을 완성하기 위해 기울이는 지칠 줄 모르는 정신력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소위 세속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을 딱 잘라 양분해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다. 직업이라 해서 반드시 생계 수단에 그쳐야 할 이유는 없고 정신적 발전의 수단도 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사무원이든, 사업가든, 주부든, 의사든, 농부든, 판사든 간에 바로 그 직업을 정신적 자질을 계발하는 수단으로 전환시켜야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열심히 전심전력을 기울일 때 그 직업은 이미 넌더리나는 귀찮은 짐거리가 아니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경이에 찬 경험의 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자신의 일에 그처럼 전심전력하는데 어찌 숙달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디가자누여, 여기에 한 선남자가 어떤 일, 그것이 농사일이든, 장사든, 가축 사육이든, 무사든, 왕을 섬기든 아니면 다른 어떤 재주로든 간에 생계를 꾸미다 보면 그 일에 차차 익숙해지면서 싫증낼 줄 모르게 된다. 그는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따라서 자신의 의무를 계획성 있게 채비하고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것을 일러 줄기찬 노력을 구족했다고 한다.” 이를 다시 정신적 맥락에서 표현한다면 모든 한계를 극복해 내어 정신적 자유로 충만한 저 무한대의 세계를 향해 뻗쳐나가도록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을 뜻한다. 두 번째의 구족인 ‘잘 살펴 지켜냄’은 정신차려 마음 기울이는 일을 말하는데, 이는 전생업(前生業)에 의해 타고 났거나 금생에 노력해서 얻었거나 간에 일단 자기 것이 된 훌륭한 재물과 자질을 잘 보존해 낼 수 있도록 해준다. 사실 인간은 어떤 것을 지니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무지와 마음을 기울이지 않은 탓으로 고통을 받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근면하게 마음을 기울이면 자신이 이미 얻은 것을 잘 보존할 수 있어 자신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디가자누여, 여기에 한 선남자가 열심히 일해서 벌고, 팔뚝 힘이나 이마의 땀으로 모아서 올바른 방법으로 정당하게 얻은 재산을 지니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왕이 그것을 수탈해가지 못하도록, 도둑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화재로 불타 버리거나 수마가 할퀴어 없어지지 않도록, 악에 기울기 쉬운 상속자가 탕진하지 않도록 지키고 살피어 그 재산을 잘 관리할 것이다. 이를 두고 신중성의 구족이라고 한다.” 정신적 맥락에서 말하자면 이는 의미있는 목적을 지향하도록 ‘방향’을 제시해 주는 정신적 역량을 말한다고 하겠다. 그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그것이 바로 그의 가치관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따라서 의미있는 목표를 놓치지 않을 때 의미있는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생에서 커다란 즐거움 중의 하나가 현명한 사람과 사귀는 일이다. 훌륭한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지 않고서는 성공도 기대할 수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군가 비린내 나는 생선을 꾸사 잎으로 싸맨다고 하자 그 풀잎도 비린내가 배고 말 것이다 어리석은 자와 사귀는 것도 그와 같으리. 이번엔 누군가 향기로운 따가라 꽃5)을 나뭇잎에다 싸면 그 잎도 향내를 풍길 것이다 현명한 사람과 사귀는 것도 그와 같으리.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영기(靈氣)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남들의 선한 영기를 쏘이면 쏘인 그만큼 그 사람도 선하고 고상해질 수 있다.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설한 「망갈라경」6)에서 부처님께서는 좋은 친구를 갖는 것이 전진과 번영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하셨다. “나쁜 친구를 갖지 않고 현명한 이와의 사귐을 돈독히 하며, 존경해야 할 사람을 존경하는 것, 이런 일들이 최상의 복을 이룬다.” 따라서 좋은 사귐이야말로 그것 없이는 지금에도 나중에도 아무런 성취가 있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구족’인 것이다. “디가자누여, 여기 한 선남자가 어떤 마을이나 읍내에 살고 있으면서, 신심이 견고하고 덕성이 고매하며 자비심이 충만하고 지혜가 수승한 선남자 또는 그 자제들,  젊었지만 수행이 높거나 또는 나이나 수행이 모두 높은 이들과 교류하고 담화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신심있는 이의 신심을, 덕성있는 이의 덕성을, 자비로운 이의 자비를, 현명한 이의 지혜를 본받으려 애쓴다고 하자. 이런 것을 두고 좋은 우정이라고 한다.” 정신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건전한 영향을 받음으로써 활력이 북돋아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네 번째 구족해야 할 요소인 균형있는 생활은 그 중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낭비와 인색 사이에, 또한 분수를 넘어선 생활과 자신에게 필요치 않은 것도 도무지 남에게는 주지 않으려는 성미 사이에 중용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분수 이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예상외로 빨리 파국으로 치닫고 말 것이다. 재산을 물 쓰듯 하는 심리는 그 원인이 대개 강력한 욕망이나 허영심 때문이거나 아니면 자만, 또는 망상 탓이다.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인색한 태도 역시 위축된 마음을 나타내는 징후이다. 사실 너무 인색하다 보면 스스로 생의 보람을 누리지 못하고 말뿐 아니라 남의 행복마저 앗아버리게 된다. 균형있는 생활을 함으로써 비로소 이러한 함정을 뛰어넘어 복된 생을 유지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며 그 밖에 다른 방법은 있을 수 없다. “디가자누여, 여기 한 선남자가 자신의 수입과 지출을 잘 알고 있어 낭비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은 가운데 자신의 수입이 지출을 웃돌도록, 그러나 지출이 수입을 웃도는 일은 없도록 균형 잡힌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마치 금세공인 또는 그 도제(徒弟)가 저울질을 할 때 어느 분량만큼 저울이 아래로 기울었는지 혹은 어느 분량만큼 위로 기울었는지 잘 아는 것과 같다. 그처럼 선남자는 자기의 수입과 지출을 잘 알아서 낭비하지도 인색하지도 않게 균형 있는 살림을 꾸민다.” 이를 정신적으로 말하자면 그 모든 상반관계의 대칭, 즉 좋고 싫음, 칭찬과 비난, 일어남과 스러짐, 지혜와 무지, 빈곤과 풍요, 젊음과 늙음, 사랑과 미움 등등을 초연할 수 있을 정도로 치우침을 벗어난 균형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마음이 되면 다음 단계의 네 가지 구족, 즉 정신적 발전을 돕는 심신, 덕성, 자비 그리고 지혜를 생각해 볼 채비가 된 셈이다. 신심은 더 높은 가치를 향해 마음의 창을 계속 열고 있음으로써 진리의 빛살을 맞아들이는 일종의 수용 태세를 말한다. 신심은 씨앗에 비유되어 왔으니, 이 씨앗이 싹이 트면 해탈이란 열매를 맺는 큰 나무로 자라나는 것이다. 신심은 재산이니 여기 인간에겐 가장 값진 것. 윤회의 바다 건너려면 신심부터 갖춰야 하리. 계행은 도덕적 정화를 이루어 주며 또한 자칫하면 유혹에 빠지거나 본의 아니게 분쟁에 휘말려들 위험이 많은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온갖 위험과 곤경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울타리 역할도 한다. 계행은 자발적으로 행하는 자기 훈련에서 우러나온다. 계행의 근거를 이루는 것은 일련의 행동규범이다. 자비심은 복을 담는 그릇으로 여겨왔다. 빈곤과 풍요, 행복과 불행, 출생 신분의 높고 낮음, 이 모두는 수행의 결과이기 때문에 자비심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자비심은 도덕적으로 우리를 고양시켜줄 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으로도 향상시켜 준다. 자비로운 그만큼 그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복락을 누리고 또 내생에 가서도 복락을 누린다. 지혜는 태양처럼 마음의 어두움을 모두 쫓아 버린다. 우리가 모든 악을 뿌리 뽑고, 마음을 깨끗이 닦아 이를 깨달음을 이루는 도구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혜 덕분이다. 인생은 윤회의 황야를 끝없이 구르는 바퀴처럼 끊임없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으로 묘사된다. 사람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는다. 그래서 생이라 불리는 여행을 끝없이 계속한다. 이 무의미한 편력은 업(業)이라는 의지적 행위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업력을 해탈 지향의 원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혜뿐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대장부가 구족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것이다. 자기 일에 활기차고 주의 깊으며 자신의 재산을 현명하게 관리하여 균형 잡힌 생을 사는 사람은 모은 재산 잘 지켜내네. 신심과 계행마저 갖춘 그는 허욕에서 벗어나 도량도 크구나. 길을 닦기 위해 언제나 힘쓰니 내생의 행복이 보장되는구나. 그렇듯 신심 넘치는 재가자에게 그분, 이름 그대로 ‘깨달으신 분’께서 이와 같이 여덟 가지 조건 말씀하셨나니 그것은 금생에도 내생에도 행복으로 이끌어준다네. 자, 그럼 이 모든 구족함을 최상으로 완성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명함’7)에 의해서라고 부처님은 저 유명한 ‘가없는 사랑의 찬가’8)에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현명함은 명상 수행을 통해 갖추어지는 마음의 성숙이다. 그러므로 명상 수행은 재가 생활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완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 수행을 하면 재가 생활 역시 더욱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1) [역주] 꿰뚫어보기 : insight(통찰)은 vipassanā(觀)의 역어이다. 2) [역주]『중부』107경, Ⅲ권 2~4쪽. 3) [역주] 조어장부(調御丈夫) :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 중의 하나. 중생을 잘 길들여 향상을 성취케 해주시는 분이란 뜻. 4) [역주] 잘 보살핌 : 보살핌의 구족, ārakkhasampadā. 한역은 수호구족(守護具足), 영역어는 여러 가지로 시도되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부지런히 공들인다는 뜻에서 diligence로 옮기고 있다. 5) 미나리아재비 같은 향기로운 흰 꽃. 6) [역주]「망갈라경」: 『소송경(小誦經)』 제5 길상경(吉祥經)과 『숫따니빠따』의 4 대길상경(大吉祥經)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복을 가져오는 서른일곱 가지의 공덕행을 들고 있다. 7) [역주] 현명함 : 본문에는 nepakka로 나오는데 저자는 이를 sagacity로 영역하고 있다. 보리수잎․여섯에서 prudent로 영역된 것을 ‘빈틈없고’로 옮겼었다. 8) [역주] 가없는 사랑의 찬가 : 『소송경(小誦經)』의 제오 길상경(吉祥經)과 『숫따니빠다』의 Ⅱ. 4, 대길상경(大吉祥經)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복을 가져오는 서른일곱 가지의 공덕행을 들고 있다.  출처: 고요한 소리
1238. 불방일경(不放逸經) ① 83) 83) 이 소경은 『별역잡아함경』 제4권 3번째 소경과 그 내용이 비슷하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바사닉왕은 혼자 고요히 사색하고 있다가 이렇게 생각하였다. '세존의 바른 법은 현재 세상에서 모든 번뇌를 여의고, 시절(時節)을 기다리지 않고, 통달하여 밝게 보고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증지(證知)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좋은 벗이고 좋은 짝이요, 나쁜 벗이 아니고 나쁜 짝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부처님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가 부처님의 발에 머리 조아리고는 한 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혼자 조용히 사색하다가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세존의 바른 법은 현재 세상에서 모든 번뇌를 여의고, 시절을 기다리지 않고, 통달하여 밝게 보고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증득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좋은 벗이고 좋은 짝이요, 나쁜 벗이 아니고 나쁜 짝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바사닉왕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세존의 바른 법은 현재 세상에서 모든 번뇌를 여의고, 시절을 기다리지 않고, 통달하여 밝게 보고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좋은 벗이고 좋은 짝이요, 나쁜 벗이 아니고 나쁜 짝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나는 좋은 벗이 되어 태어나는 법이 있는 중생들에게는 태어나는 법에서 해탈하게 해주고, 늙음․병듦․죽음․근심․슬픔․번민․고통이 있는 중생들에게는 그런 것에서 다 해탈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나는 어느 때 왕사성 어느 산 골에 있는 정사에 있었습니다. 그 때 아난다 비구가 혼자서 조용히 사색하다가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범행(梵行)을 하는 것에 있어 절반은, 좋은 벗․좋은 짝과 사귀는 것이요 나쁜 벗․나쁜 짝과 사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내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는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혼자 조용히 사색하다가 (범행을 하는 것에 있어 절반은 좋은 벗․좋은 짝과 사귀는 것이요, 나쁜 벗․나쁜 짝과 사귀는 것이 아니다)라는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 때 '아난아, (범행을 하는 것에 있어 절반은 좋은 벗․좋은 짝과 사귀는 것이요, 나쁜 벗․나쁜 짝과 사귀는 것이 아니다)라는 그런 말은 하지 말라. 왜냐하면 순일하고 원만하게 청정해지는 범행의 청백(淸白)함을 아주 순수하고 완전하게 깨끗해지도록 하는 것이 이른바 좋은 벗․좋은 짝과 사귀는 것이요, 나쁜 벗․나쁜 짝과 사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은 나는 언제나 모든 중생의 좋은 벗이 되기 때문이니, 저 중생들에게는 생겨남이 있기 때문에 세존의 바른 법을 알면 현재 세상에서 그들로 하여금 생겨남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늙음․병듦․죽음․근심․슬픔․번민․고통이 있으면, 그 모든 번뇌를 여의게 하여 시절을 기다리지 않고 현재 세상에서 그 고뇌를 벗어나게 해주어서 보고 통달하고 스스로 깨달아 증득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곧 좋은 벗․좋은 짝과 사귀는 것이요, 나쁜 벗․나쁜 짝과 사귀는 것이 아니니라'라고 그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 때 세존께서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방일하지 않음을 찬탄하는 것 그것은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이다. 선정을 닦아 방일하지 않으면 모든 번뇌 밝게 알아 증득하게 되리.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바사닉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떠나갔다. (一二三八) 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時。波斯匿王獨靜思惟。作是念。世尊正法。現法離諸熾然。不待時節。通達現見。自覺證知此法。是善知識.善伴黨。非是惡知識.惡伴黨。作是念已。往詣佛所。稽首佛足。退坐一面。白佛言。世尊。我獨靜思惟。作是念。世尊正法。現法離諸熾然。不待時節。通達現見。自覺證知。是則善知識.善伴黨。非惡知識.惡伴黨 佛告波斯匿王。如是。大王。如是。大王。世尊正法.律。現法離諸熾然。不待時節。通達現見。緣自覺知。是則善知識.善伴黨。非惡知識.惡伴黨。所以者何。我為善知識。眾生有生法者。解脫於生。眾生有老.病.死.憂.悲.惱苦者。悉令解脫 大王。我於一時住王舍城山谷精舍。時。阿難陀比丘獨靜思惟。作是念。半梵行者是善知識.善伴黨。非惡知識.惡伴黨。作是念已。來詣我所。稽首我足。退坐一面。白我言。世尊。我獨靜思惟。作是念。半梵行者是善知識.善伴黨。非惡知識.惡伴黨。我時告言。阿難。莫作是語。半梵行者是善知識.善伴黨。非惡知識.惡伴黨。所以者何。純一滿淨。梵行清白。謂善知識.善伴黨。非惡知識.惡伴黨。所以者何。我常為諸眾生作善知識。其諸眾生有生故。當知世尊正法。現法令脫於生。有老.病.死.憂.悲.惱苦者。離諸熾然。不待時節。現令脫惱苦。見通達。自覺證知。是則善知識.善伴黨。非惡知識.惡伴黨。爾時。世尊即說偈言  讚歎不放逸  是則佛正教 修禪不放逸  逮得證諸漏  佛說此經已。波斯匿王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 //
27    불교학과 불교명상은 아함에서 부터 댓글:  조회:2862  추천:92  2008-01-14
근 본 불 교 - 불교학은 아함에서 부터 - 고 익진 (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1988년 작고   동국대 불교대학 고 고익진 교수님의 에세이입니다. 본 에세이는 < 불교학은 아함에서부터> 인데 스승님께서 월간 범성지에 기고한 글로써 학문적인 깊이를 따지지 않고라도 누구나 아함의 청어한 공기를 맘껏 들이킬 수 있는 에세이 입니다. 고익진 교수님은 팔리 니카야를 연구해 <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라는 논문을 제출하기에 이르러 불교학계에 다시 없는 귀중한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불교를 처음으로 공부하려는 사람에게 나는 아함에서 부터읽어가라고 권하고 싶다. 불교 입문서나 불교학개론이 불교를 처음으로 대하는 사람에게 맨 처음에 추천되는 책들이지만, 이런 책들은 여행에 들어서서의 실제적인 '길'은 아니다. 아함은 불교라는 긴 여로의 맨 처음에 밟아야 할 길인 것이다. 불문에 들어와 이미 상당한 조예를 가진 사람이라도 자기의 불교가 어딘지 모르게 헛점이 있는것으로 느껴지는 분이 있다면 이런 분에게도 나는 아함에서부터 다시 읽어가라고 권하고 싶다. 아함은 모든 불교학의 기초라 할 수 있다. 대소승의 모든 불교사상은 원시불교로부터 시작된것이고, 아함은 원시불교의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아함에 대한 연구없이는 불교학의 기초는 다져질 수 없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나는 아함을 부디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대승불교는 아함의 이론과 정신을 바탕으로 성립한것이라는 점에 오늘날 모든 학자들은 의견을 모으고 있다. 비근한 예로 반야심경만 보아도 거기 나오는 5온, 12처, 18계,12연기, 4제 ,지(智), 득(得), 보살, 불(佛), 삼약삼보리와 같은 개념은 어느것 하나 아함에 설해지지 않았던 것이 없다. 반야개공의 제법무자성 사상은 아함에 숱하게 되풀리 되고 있는 " 5온은 무상,고,무아 " 라는 교의의 발달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법화나 화엄과 같은 높은 수준의 경전은 잘알면서도 그러한 사상의 원천이 되고 있는 아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함을 소승경전이라고 무시해서는 안된다. 아함은 대승의 기초경전이라고 해야 한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은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얻게 하려는 일대사 인연을 갖고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설하고 " 三乘方便 一乘眞實 " 의 교설의 뜻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모두 성불의 기별을 주고계신다. 이것은 아함에 " 여래는 세상에서 다섯가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나니, 첫째는 법륜을 굴리고, 둘째는 아버지를 위해서법을 설하고, 셋째는 어머니를 위해서 법을설하고, 넷째는 범부를 깨우쳐 보살행을 닦게하고, 다섯째는 보살에게 기별을 주는 것이니라 " < 증일아함권 15 > 고 설한 부처님의 오사에서 넷째와 다섯째의 과업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함에 " 마음이 더럽기에 중생이 더럽고, 마음이 깨끗하기에 중생이 깨끗하다. 비하건대 화가가 하얀 화폭에 뭇채색을 갖추어 여러가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고 한것은 화업에서 " 마음은 화가처럼 갖가지 오음을 그리나니, 모든 세계중에 만들지 않은 법이 없다. 마음과 같이 부처가 그렇고, 부처와 같이 중생이 그러하나니, 마음과 부처와중생의 이 셋은 차별이 없다 "고 한 주목할 만한 사상의 선구를이루고 있슴은 일독으로 요연할 것이다. 이러한 예는 여기에서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로 아함에 쌓여있다. 대승불교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것은 아함이요, 아함을 완성하고 있는 것은 대승이라 할 정도이다. 원시불교 사상의 연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부디 아함에서부터 읽어 갈 것을 권하고 싶다. 부처님의 금구소설은 부처님의 제세시는 물론,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2,3백년 까지도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이것이 문자에 정착되기는 부파불교 시대에 경율론(經律論) 3장의 성립이 이루어 지면서 부터라고 생각된다. 일미화합했던 불교교단은 불멸후 백 년쯤에 대중부와 상좌부로 분열하고 이 근본 2부로부터 다시 18파가 파생하여 20부파를 이루게 된다. 각 부파는 각기 독자적인 3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함은 이 중에서 경장(經藏)에 해당된다.아함이라는 말은 범어(agama)를 음역한 것인데 "옴" 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경장을 "옴" 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뜻 하나만으로 경장을 아함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전으로 말한다면 율장(律藏)도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파불교시대에 부처님의 교설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이런 움직임은 교단내에서 견해차를 발생시켜 이것이 부파형성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럴 경우 이견(異見)의 대립속에 구전되어온 교설이야 말로 움직일수 없는 권위로 내세워질 것이다. 경장을 특히 아함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아함이 당시에 얼마나 중시된 경전이었던가 ] 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접할 수 있는 한역 아함에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가 있다. 장아함     ( 22권    30경 ) 중아함     ( 60권   222경 ) 잡아함     ( 50권 1362경 ) 증일아함  ( 51권  471경 ) 장아함은 긴 경전을, 중아함은 중간 길이의 경전을, 잡아함은 짧은 경전을 모아 편집한 것이고, 증일아함은 법수(法數)에 따라 1법에서 11법에 이르는 경전을 모아 엮은 것이다. 그러나 경전의 길이나 법의 수에 따라 기계적으로 수집해 놓은 것은 아니다. 일단 그렇게 분류한 다음, 그들을 다시 어떤 방침 아래 편찬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편찬 방침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구구하지만, 어떻든 현 장아함은 4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제 1분은 부처님을 밝히고, 제2분은 부처님의 자각내용으로서의 법을 밝히고, 제4분은 세기경(世記經)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아함은 원시불교의 전반에 걸친 교리가 5송(五誦)으로 편집되어 있음을 본다. 현재의 한역 잡아함은 내용배열이 극히 혼란하고, 이질적인 요소(아소카왕에 관한 권23,25)까지 섞여 있다. 이러한 현상은 그것이 어느땐가 착간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학자들은 그 착간의 시기를 대개 A.D. 5~6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착간 이전의 원형을 추구하여 훌륭한 성과가 발표되고 있다. 잡 아함은 앞으로 이렇게 복원된 원형에 의하여 읽는것이 좋을 것이다. 남방불교는 아함에 해당되는 경장으로 현재 다음과 같은 5니카야를 갖고 있다. Digha-nikaya       (장부)         3품         33경 majjhima-nikaya  (중부)        15품       152경 Samyutta-nikaya (상응부)       5품     2875경 Anguttara-nikaya (증지부)   170품     2198경 Khuddaka-nikaya (소부)                       15경 이 5니카야를 아함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니카야(nikaya) 라고 부르는 것은 전승(傳承) 보다는 편집이라는 뜻을 강조한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팔리어로 니카야는 "신(信)" 이나 "집(集)"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각 부파의 경전이 대개 장.중.잡.증일의 형식으로 편찬되고 있음을 보면, 이런 편찬 형식의 기원은 상당히 오랜 것으로 부파 분열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수 있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 편찬 방식은 기억.구전(口傳)을 위한 형식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따라서 구전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편찬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아함의 전승은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므로 각 부파의 지송경전에는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차이에는 시대가 흐르고 부파간의 대립이 심해짐에 따라 부파적 요소까지 가미되어 더욱 증대되어 갔을 것이다. 오늘날 한역 4아함과 팔리 5니카야만 비교해 보아도 상당한 차이가 발견된다. 따라서 각 부파는 독자적인 3장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 부파의 3장이 오늘날 완전하게 전해지고 있는것은 남방불교의 팔리 3장 뿐이다. 한역 4아함은 장.중.잡.증일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실은 여러 부파에 속했던 것이 한역되어 4아함을 형성하게 된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내용을 자세히 고찰함에 밝혀지는 것인데, 학자들은 각 아함의 소속부파를 대개 앞에서 표시한 바와 같이 추정하고 있다. 4아함은 총 183권에 이르는 방대한 부피이다. 그러나 그들속에는 중복되는 것이 허다하고, 같은 내용에 편찬 형식만이 다른것도 상당히 있다. 따라서 핵심적인 것만을 추린다면 그렇게 많지 않을것 이다. 오늘날 이런 작업은 행해지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되며 그런 작업이 행해져서 아함의 요집(要集)과 같은 것이 나온다면 아함의 지송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아함에는 불교의 원초적인 형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거기에 나타나는 부처님은 모든 염오의 차별상을 초월하여 광대무변한 법계에 충만해 있는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부처도 아니고, 모든 괴로움을 여의어 청정무구한 정토에 안주하여 중생들의 귀의를 받고 있는 부처도 아니다. 오만하기 이르데 없고, 사악하기 헤아릴 길 없는 중생들 속에서 처참할 정도로 고생하면서 진리를 위해 싸우는 지혜와 사랑의 인간으로 나타나 있다. 아함을 읽는 이는 누구나 부처님이라기 보다는 인간 싯달타의 너무나도 청순한 인간미에 우선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이런 느낌은 다른 경전에서는 맛볼수 없는 것이다. 불교의 근간 사상과 입장이 무엇인가는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문제는 아함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파악되지 못할 것이다. 아함에서는 불교 흥기 당시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 사상이 불교에 도전 해오고 그런 도전에 대해서 부처님은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인생의 의의인가를 밝히고 게신다. 따라서 불교의 근본사상과 입장이 다른 철학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정통 바라문의 사상을 전변설(轉變說)이라 하고 새로운 사문들의 사상을 적취설(績聚說)이라고 한다면, 불교철학은 연기설(緣起說)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라는 것은 우리의 현실세계를 각자의 무지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부처님은 전변설의 "아트만(我)"을 부정하고, 적취설의 단견(斷見)을 부정하여 그러한 두 끝을 지양한 중도(中道)적 "무아"를 종교적 실천의 원리로 제시한 것이다. 연기만 알면 불교철학은 다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기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아함에는 6근.12처.육육법.5온.4제.12연기와 같은 법들이 잡다하게 산설(散說)되어 있다. 아무런 체계도 철학도 없이 법을 설해 놓은 듯한 인상마저 주고 있다. 그러나 조심히 살펴보면 그들은 모두가 연기의 일종이다. 범부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성인이 깨달은 것에 이르기까지 정교한 짜임새로 시설된 것들이다. 연기의 진정한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함에서부터 읽어가고 그 미묘한 뜻을 심시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아함에 그려진 부처님 제자들의 청순한 구도의 정렬과 생명을 아끼지 않는 홍법(弘法)의 정신도 우리들을 무한한 감도에 젖게 할 것이다. 증일아함 권13에 그려진 아나율을 보자. 부처님 제자중에서 아나율은 천안(天眼) 제일로 알려진 사람이지만 그가 천안을 얻게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이 읽기에는 너무나도 슬픈 이야기인 것 같다. 아나율은 어느날 좌선하다가 깜박 졸았던 모양이다. 그때 마침 부처님이 이것을 보고 주의를 주셨는데, 그로부터 아나율은 결코 눈을 감지 않아 마침내 시력을 잃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처절할 정도로 뜨거운 구도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잡아함 권13에 나오는 부루나는 홍법에 목숨을 바친 일례라고 할 것이다. 어느날 부루나는 부처님 앞에 나와 서쪽 지방의 포교에 나가겠다고 청하였다. 부처님은 그에게 " 서쪽 지방 사람들은 사나우니, 욕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고 물으셨다. 그때 부루나는 " 때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겠습니다." 고 답했다. " 만일에 때린다면 ?" " 몽둥이나 돌로 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 몽둥이나 돌로 친다면?" " 죽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만일 죽인다면?" "열반에 들게 해주는 것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부루나는 드디어 부처님의 허락을 받아 서방포교에 힘쓰다가 그곳에서 목숨을 마쳤다 한다.아함을 통해 이러한 부처님의 제자들을 만나게 되며 그들의 뜨거운 구도열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반성하여 불자로서의 사명에 다시금 불타게 할 것이다.
26    몸을 생각하는 명상과 네가지 선정 댓글:  조회:2022  추천:108  2007-12-01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되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몸을 담가 적시고 윤택하게 하여 두루 이 몸에 충만하게 하며,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목욕하는 사람이 그릇에 비누를 담고 물을 타서 둥글게 뭉쳐서 사용할 적에 물에 비누가 불으면 두루 충만하여 어느 곳이나 퍼지지 않은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몸을 담가 적시고 윤택하게 하여 두루 이 몸에 충만하게 하고,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게 해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혀야 한다. 비구는 선정[定 : 色界 第二禪]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몸을 담가 적시고 윤택하게 하여 두루 이 몸에 충만하고, 그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샘물이 깨끗하고 맑으며 가득 차서 넘쳐흘러, 사방에서 물이 오더라도 그 가장자리에 맴돌 뿐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다. 곧 그 샘물은 땅밑에서 저절로 솟아나 밖으로 넘쳐흘러 산을 적시고 윤택하게 하며, 두루 충만하여 두루 적시지 않은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비구는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몸을 담가 적시고 윤택하게 하여 두루 이 몸 가운데 충만하며,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혀야 한다. 비구가 기쁨을 여의므로 인해서 생기는 즐거움에 몸을 담가 적시고 윤택하게 하여 두루 이 몸에 충만하여, 기쁨을 여읨으로 인하여 생기는 즐거움이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한다. 마치 푸른 연꽃과 붉고 빨갛고 흰 연꽃이 물에서 나고 물에서 자랄 적에 물밑에 있을 때엔 뿌리와 줄기와 꽃과 잎이 다 젖고 불어, 두루 충만하여 어느 곳에나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기쁨을 여읨으로 인하여 생기는 즐거움에 몸을 담가 적시고 윤택하게 하여 두루 이 몸에 충만하여, 기쁨을 여읨으로 인하여 생기는 즐거움이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되 비구가 이 몸 속에 대하여 청정한 마음으로 알고 두루 차서 성취하여 노닐며, 이 몸 속에 대하여 청정한 마음으로써 어느 곳이나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7주(?)의 옷이나 혹은 8주의 옷을 입어 머리에서 발까지 이 몸을 덮지 않은 곳이 없는 것처럼, 비구는 이 몸에 대하여 청정한 마음으로써 해득하여 성취하여 노닐며, 이 몸 속을 청정한 마음으로써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되 광명상(光明想)을 생각하여 잘 받고 잘 가지며, 마음으로 잘 생각하는 것이 앞에서와 같이 뒤도 그러하고, 뒤에서와 같이 앞도 또한 그러하며, 낮과 같이 밤도 그렇고, 밤과 같이 낮도 그러하며, 아래와 같이 위도 그렇고, 위와 같이 아래도 또한 그러하다. 이렇게 뒤바뀌지 않고 마음에 얽매임이 없이 빛나고 밝은 마음을 닦으면, 끝내 어둠에 덮이지 않는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뜻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되 비구가 모습[相]을 관찰하여 잘 받고 잘 가지고 마음으로 잘 생각해야 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앉아서 누운 사람을 관찰하고, 누워서 앉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처럼, 비구도 모습을 관찰하여 잘 받고 잘 가지고 마음으로 잘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離生喜樂。漬身潤澤。普遍充滿於此身中。離生喜樂無處不遍。猶工浴人器盛澡豆。水和成摶。水漬潤澤。普遍充滿無處不周。如是比丘離生喜樂。漬身潤澤。普遍充滿於此身中。離生喜樂無處不遍。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定生喜樂。漬身潤澤。普遍充滿於此身中。定生喜樂無處不遍。猶如山泉。極淨澄清。充滿盈流。四方水來。無緣得入。即彼泉底。水自涌出。盈流於外。漬山潤澤。普遍充滿無處不周。如是比丘定生喜樂。漬身潤澤。普遍充滿於此身中。定生喜樂無處不遍。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無喜生樂。漬身潤澤。普遍充滿於此身中。無喜生樂無處不遍。猶青蓮華。紅.赤.白蓮。水生水長。在於水底。根莖華葉。悉漬潤澤。普遍充滿無處不周。如是比丘無喜生樂。漬身潤澤。普遍充滿於此身中。無喜生樂無處不遍。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於此身中。以清淨心意解遍滿成就遊。於此身中。以清淨心無處不遍。猶有一人。被七肘衣或八肘衣。從頭至足。於此身體無處不覆。如是比丘於此身中。以清淨心意解遍滿成就遊。於此身中。以清淨心無處不遍。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念光明想。善受善持。善意所念。如前後亦然。如後前亦然。如晝夜亦然。如夜晝亦然。如下上亦然。如上下亦然。如是不顛倒。心無有纏。修光明心。心終不為闇之所覆。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觀相善受.善持.善意所念。猶如有人。坐觀臥人。臥觀坐人。如是比丘觀相善受.善持.善意所念。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25    열가지 불교명상을 재차 마치며 댓글:  조회:1866  추천:103  2007-11-26
본 명상클럽의 주제인 열가지 불교명상을 두차례거쳐 소개를 완성하였다. 두번째는 비교적 짧은 시간내에 (열흘동안 하루에 한가지씩) 조금 심도깊고 긴 경전들을 인용하여 소개하였는데 사실은 불학에 기초가 없거나 혹은 상세한 해석이 없이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이 점을  알면서도 굳이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원문들을 올린것은 앞으로의 명상공부를 조금 심도깊게 하고싶은 이들을 위한것이라 하겠다. 그런 이유에서  열흘간 진도를 빨렸는데 이해 못했거나 혹은 도무지 이해를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된다. 그저 이러이러한 내용이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기회가 되는대로 반복적으로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반복은 가장 좋은 학습임)앞에서 말했듯이 불학을 배우는데는 문이 따로 없으며 모르는것을 직접 사전을 찾아보거나 아는이한테 물어보면서 하나하나 배우는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경전이 아함경인데 현재 인용한 대부분의 경전은 모두 아함경에 속하는 경전들이다. (불학은 아함경부터 배운다는 말이 있다. 아함이 기초되지않으면 대승경전을 이해할수가 없으니깐.) 사실 명상이 인연되여 지금 불교경전과 불학까지 론하는데 비교적 낮은 차원의 명상(특히 생활명상의 여러종류-- 단순히 현대심리학적인 차원에서 기원된 여러 명상들...내가 현대심리학을 차원이 낮다고 하는얘기보다 경전적인 리론적근거가 옅은 많은 명상을 가리킴)을 원하는 이라면 앞부분에서 소개한  명상의 종류 란을 참고하시면 되니 굳이 불교경전을 읽으면서 명상공부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진정 내 마음속깊이 잠재된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위해서는 불교심리학이 필요하며 인생의 참뜻을 찾는데는 심도깊은 경전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을 위하여 현재 명상클럽카페를 만들어 놓았는데 리론적공부를 더 하고싶은 분들은 회원가입을 하시고 체계적인 명상공부(불교심리학공부)를 권고한다. (주소는http://cafe.daum.net/randeng)특히 근 열흘간내용이 이해가 않되는것은  잡아함경과 같은 리론적인 공부를 못했기때문에 그러하오니 잡아함경부터 읽어보시기를 부탁드리며 통속적으로 불교를 알고싶은 이들은 증일아함경(혹은 불교를 처음 접촉하는 이들에게 추천)이나 혹은 장아함경을 읽어보시기를 부탁드린다. 그 중 장아함경은 불교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기타 세속적인 외도설과 비겨서 서술한 경전이니 철학을 하시는 분들이나 학술적인 분들의 좋은 참고서가 된다. (이상의 경전들이 명상클럽카페내에 모두 있음)앞으로 본 명상클럽에서는  이상에 서술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리론들을 계속 경전원문을 인용하면서 해석할것이며  또한 초기목적인 열가지명상을 중심으로 계속 서술하겠다. 초기경전에 모두 40가지 명상주제가 있는데 기회가 되는대로 극력 40가지를 모두 소개하겠지만 열가지명상을 기본원칙으로 하겠다. 이 열가지를 상세하게 해석하다보면 결국은 40가지 뿐만아니라 모든 수행법까지 료해할수가 있다.
24    열가지불교명상의 공덕 댓글:  조회:2026  추천:114  2007-11-23
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바이샤알리의 원숭이 못 가에서 五백의 큰 비구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바루를 가지고 아아난다를 데리고 바이샤알리에 가서 걸식하셨다. 그 때에 바이샤알리에는 비라선이라는 큰 장자가 있었다. 그는 재물이 많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인색하고 탐욕스러워 보시할 마음은 조금도 없고 오직 과거에 지은 복만을 먹고 새 복은 짓지 않았다. 그는 많은 미녀들을 데리고 후궁에서 풍류를 잡히면서 즐겨 하고 있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그 거리로 가시어 아시면서도 일부러 아아난다에게 물으셨다. "지금 풍류 소리가 들리는 저 집은 어떤 집인가." 아아난다는 사뢰었다. "저것은 비라선 장자 집이옵니다." "저 장자는 지금부터 이레 뒤에는 목숨을 마치고 체곡(涕哭)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떳떳한 법으로서 한 뿌리를 끊은 사람은 목숨을 마친 뒤에는 모두 체곡 지옥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지금 저 장자는 과거에 지은 복은 이미 다하고 세 복은 짓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혹 어떤 인연으로서 저 장자로 하여금 이레 뒤에 목숨을 마치지 않게 할 수 있겠나이까." "목숨을 마치지 않게 할 인연은 없다. 과거에 지은 업이 이제 다했으니 그것은 면할 수 없느니라." "혹 어떤 방법으로 저 장자로 하여금 체곡 지옥에 들어가지 않게 할 수는 없나이까." "저 장자로 하여금 체곡 지옥에 들어가지 않게 할 방법은 있느니라." "어떤 방법이면 저 장자를 체곡 지옥에 들어가지 않게 하겠나이까." "만일 저 장자가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옷을 입고 집을 떠나 도를 배우면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제자 지금 가서 저 장자로 하여금 집을 떠나 도를 배우도록 하겠나이다." 아아난다는 곧 세존을 하직하고 그 장자 집으로 가서 문밖에 서 있었다. 그 때에 장자는 아아난다가 온 것을 보고 곧 나가 맞이해 앉기를 청하였다. 아아난다는 장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 일체 지혜를 가진 이에게 들었다. 그런데 여래께서는 '그대는 지금부터 이레 뒤에는 목숨을 마치고 체곡 지옥에 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장자는 그 말을 듣고 곧 두려운 생각이 들어 몸의 털이 모두 일어섰다. 그는 아아난다에게 말하였다. "혹 어떤 인연으로 이레 뒤에 목숨을 마치지 않을 수 있게 하겠습니까." "이레 뒤에 목숨을 마치지 않게 할 방법은 없느니라." "혹 어떤 인연으로 내가 목숨을 마친 뒤에 체곡 지옥에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 장자가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옷을 입고 집을 떠나 도를 배우면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그대는 지금 집을 떠나 도를 배우면 저쪽 언덕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장자는 말하였다. "아아난다님, 우선 먼저 가십시오. 저도 형편 따라 곧 갈 것입니다." 아아난다는 그를 내버려두고 곧 떠났다. 장자는 생각하였다. '이레라고 하였으니 아직 멀다. 나는 우선 다섯 가지 향락으로 즐기자. 그리고 집을 떠나 도를 배우자.' 아아난다는 그 이튿날 다시 장자 집으로 가서 그에게 말하였다. "하루가 지났으니 이제 엿새밖에 남지 않았다. 곧 집을 떠나라." 장자는 말하였다. "아아난다님, 우선 먼저 가십시오. 나도 형편 보아 곧 따라 갈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여전히 떠나지 않았다. 그 때에 아아난다는 이틀, 사흘 내지 엿새가 되어 장자 집으로 가서 그에게 말하였다. "곧 집을 떠나라. 후회해야 소용없을 것이다. 만일 집을 떠나지 않으면 목숨을 마친 뒤에는 곧 체곡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장자는 말하였다. "존자님, 우선 앞에 가십시오. 나도 형편 보아 곧 뒤를 따라 갈 것입니다." 아아난다는 말하였다. "장자는 무슨 신통으로 저기 갈 수 있기에 나를 먼저 가라고 하는가. 우리 같이 가자." 그 때에 아아난다는 그 장자를 데리고 세존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사뢰었다. "지금 이 장자는 집을 나와 도를 배우려고 하나이다. 원컨대 세존께서는 그로 하여금 수염과 머리를 깎고 도를 배우게 하소서." 부처님께서는 아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직접 그 장자를 제도하라." 아아난다는 부처님 분부를 받고 곧 장자의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옷을 입히고 바른 법을 배우게 하였다. 그 때에 아아난다는 그 비구에게 말하였다. "너는 생각하기를 수행하라. 즉 부처를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며 비구승을 생각하고 계율을 생각하며 보시를 생각하고 하늘을 생각하며 휴식을 생각하고 숨길을 생각하며 몸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이와 같은 법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열 가지를 생각하면 곧 큰 과보를 얻어 단 이슬 법의 맛을 얻는다는 것이니라." 그 때에 비라선은 이러한 법을 수행하고 그 날로 목숨을 마쳐 四천왕천에 났다. 아아난다는 곧 그를 화장하고 세존께 돌아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서서 세존께 사뢰었다. "아까 그 비라선 비구는 이제 목숨을 마쳤나이다. 어디 태어났나이까."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 비구는 목숨을 마치고 지금 四천왕천에 났느니라." "거기서 또 목숨을 마치면 어디서 나겠나이까." "거기서 목숨을 마치면 三十三천에 날 것이요, 다시 계속해서 야마천, 도솔천, 화자재천, 타화자재천에 날 것이요, 거기서 목숨을 마치면 다시 돌아 와 四천왕천에 날 것이다. 아아난다야, 이와 같이 비라선 비구는 일곱 번 천상, 인간을 돌아다니다가 최후로 사람의 몸을 얻고 집을 떠나 도를 배워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여래에게 믿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알아야 한다. 이 남섬부주 땅은 남북이 二만 一천 요오자나요, 동, 서가 七천 요오자나인데,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남섬부주 땅에 사는 사람들을 공양한다면 그 복을 많다고 하겠는가." 아아난다는 사뢰었다. "매우 많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중생이 소 젖을 짜는 동안이나 믿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고 열 가지 생각을 수행하면 그 복은 헤아릴 수 없어 헤아리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아난다야, 부디 방편을 구해 열 가지 생각을 닦도록 하라. 아아난다야,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아아난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다. (五)聞如是一時。佛在毘舍離獼猴池側。與大比丘眾五百人俱是時。世尊到時。著衣持鉢。及將阿難入毘舍離乞食。爾時。毘舍離城內有大長者名毘羅先。饒財多寶。不可稱計。然復慳貪無惠施之心。唯食宿福。更不造新。爾時。彼長者將諸婇女在後宮作倡伎樂。自相娛樂爾時。世尊往詣彼巷。知而問阿難曰。今聞作倡伎樂為是何家阿難白佛。是毘羅先長者家佛告阿難。此長者卻後七日命終。當生涕哭地獄中。所以然者。此是常法。若斷善根之人。命終之時。皆生涕哭地獄中。今此長者宿福已盡。更不造新阿難白佛言。頗有因緣使此長者七日不命終乎佛告阿難。無此因緣得不命終乎。昔所種行。今日已盡。此不可免阿難白佛。頗有方宜令此長者不生涕哭地獄乎佛告阿難。有此方宜可使長者不入地獄耳阿難白佛言。何等因緣使長者不入地獄佛告阿難。設此長者剃除鬚髮。著三法衣。出家學道者。便得免此罪也阿難白佛言。今我能使此長者出家學道爾時。阿難辭世尊已。往至彼長者家。在門外立。是時。長者遙見阿難來。即出奉迎。便請使坐。時。阿難語長者曰。今我是一切智人邊聞。然如來今記。汝身卻後七日當身壞命終。生涕哭地獄中長者聞已。即懷恐懼。衣毛皆豎。白阿難曰。頗有此因緣使七日之中不命終乎阿難告曰。無此因緣令七日中得免命終長者復白言。頗有因緣我今命終不生涕哭地獄中乎阿難告曰。世尊亦有此教。若當長者剃除鬚髮。著三法衣。出家學道者。便不入地獄中。汝今可宜出家學道。得到彼岸長者白言。阿難並在前去。我正爾當往是時。阿難便捨而去。長者便作是念。言七日者猶常為遠。吾今宜可五欲自娛樂。然後當出家學道。是時。阿難明日復至長者家。語長者曰。一日已過。餘有六日在。可時出家長者白言。阿難並在前。正爾當尋從然彼長者猶故不去。是時。阿難二日.三日。乃至六日至長者家。語長者曰。可時出家。後悔無及。設不出家者。今日命終。當生涕哭地獄中長者白阿難曰。尊者並在前。正爾當隨後阿難告曰。長者。今日以何神足至彼間。方言先遣吾耶。但今欲共一時俱往是時。阿難將此長者往至世尊所。到已。頭面禮足。白佛言。今此長者欲得出家學道。唯願如來當與剃除鬚髮。使得學道佛告阿難。汝今躬可度此長者是時。阿難受佛教敕。即時與長者剃除鬚髮。教令著三法衣。使學正法。是時。阿難教彼比丘曰。汝當念修行。念佛.念法.念比丘僧.念戒.念施.念天.念休息.念安般.念身.念死。當修行如是之法。是謂。比丘。行此十念者。便獲大果報。得甘露法味是時。毘羅先修行如是法已。即其日命終。生四天王中是時。阿難即闍維彼身。還至世尊所。頭面禮足。在一面立。爾時。阿難白世尊言。向者。比丘毘羅先者今已命終為生何處世尊告曰。今此比丘命終生四天王阿難白佛言。於彼命終當生何處世尊告曰。於彼命終當生三十三天。展轉生豔天.兜術天.化自在天.他化自在天。從彼命終復還來生。乃至四天王中。是謂。阿難。毘羅先比丘七變周旋天人之中。最後得人身。出家學道。當盡苦際。所以然者。斯於如來有信心故阿難當知。此閻浮提地南北二萬一千由旬。東西七千由旬。設有人供養閻浮里地人。其福為多不阿難白佛言。甚多。甚多。世尊。佛告阿難。若有眾生如[(殼-一)/牛]牛頃。信心不絕修行十念者。其福不可量。無有能量者。如是。阿難。當求方便。修行十念。如是。阿難。當作是學爾時。阿難聞佛所說。歡喜奉行    
23    몸을 관하는 방법과 그 18가지 공덕 댓글:  조회:2424  추천:65  2007-11-22
한문출처 : 중화전자불전협회(中華電子佛典協會:CBETA)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국역출처 : 동국역경원 전자불전연구소 한글대장경--------------------------------------------------------------------------------------------- 중아함경 제 20 권 동진 계빈삼장 구담 승가제바 한역 7. 왕상응품 ④ 81) 염신경(念身經) 제 10 [제2 소토성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앙기국(鴦祇國)에 유행하실 적에 큰 비구들과 함께 아화나(阿那)에 있는 건니(?尼)가 사는 곳으로 가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 밤이 지나고 이른 아침이 되자,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아화나로 들어가 걸식하셨다. 공양을 마치신 뒤에, 오후가 되어 가사와 발우를 챙기고 손발을 씻으신 다음 니사단을 어깨에 걸치고 어떤 숲 속으로 들어가 한 나무 밑에 이르러 니사단을 펴고 가부를 맺고 앉으셨다. 그 때에 많은 비구들은 점심 식사가 끝난 다음 강당에 모여 앉아 서로 이렇게 의논하고 있었다. "여러분, 세존께서는 참으로 기이하십니다.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시어 분별하여 널리 펴시고, 잘 알고 관찰하시며, 잘 닦아 익히고 보호하여 다스리시며, 잘 갖추고 행하여 한마음 가운데 계십니다. 부처님께서는 '몸을 생각하면 큰 과보가 있어 눈을 얻고, 눈이 있으면 제일의(第一義)를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세존께서 연좌(宴坐)에 계시면서 사람의 귀보다 뛰어난 깨끗한 천이(天耳)로써 여러 비구들이 점심 식사 후에 강당에 모여 앉아 서로 이 일에 대하여 의논하는 것을 들으셨다. 세존께서 이 말을 들으신 뒤에 해질 무렵쯤 되어 연좌에서 일어나시어 강당으로 나아가 비구들 앞에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그리고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아까 무슨 일을 의논하였는가? 무슨 일로 강당에 모여 앉아 있었는가?" 그러자 모든 비구들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 비구들은 점심을 먹은 뒤에 강당에 모여 앉아 서로 이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여러분, 세존께서는 참으로 기이하고 특별하시다. 몸을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시어 분별하여 널리 펴시고, 끝까지 알고 끝까지 관찰하시며, 잘 닦아 익히고 잘 보호하여 다스리시며, 잘 갖추고 잘 실천해서 한마음 가운데 계십니다. 부처님께서 몸을 생각하면 큰 과보가 있어 눈을 얻고, 눈이 있으면 제일의(第一義)를 본다고 말씀하셨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아까 서로 이런 일을 의논하였고 이 일로 모여 앉아 있었나이다." 세존께서 다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언제 내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혀서 분별하며 널리 펴면 큰 과보를 얻는다고 말하던가?" (云何我說修習念身。分別廣布。得大果報。어떻게 내가 ...면.... 다고 말하는가?)그때 비구들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 되시고 법의 주인이 되시며 법은 세존으로부터 나오나이다. 원하옵건대 그 법을 말씀하여 주소서. 저희들이 듣고 나면 그 뜻을 자세히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곧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자세히 듣고 이것을 잘 기억하라. 나는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해 주리라." 그때 모든 비구들이 분부를 받아 경청하였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떻게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혀야 하는가? 비구가 다니면 곧 다니는 줄 알고 머물면 머무는 줄 알며, 앉으면 앉는 줄 알고 누우면 눕는 줄 알며, 잠자면 자는 줄 알고, 깨어 있으면 깨어 있는 줄 알며, 잠자다 깨면 잠자다 깬 줄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고 익혀야 한다. 비구는 드나드는 것을 바르게 알아, 굽히고 펴기와 굽어보고 쳐다보기 등 몸 가지는 태도와 그 차례를 잘 관찰하고 분별하며, 승가리와 모든 옷과 발우를 잘 챙겨 가지고서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과 자고 깨나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을 모두 바르게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는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된다. 그가 만일 이와 같이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병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혀야 한다. 비구는 악하고 착하지 앉은 생각이 생기면 선한 법을 생각함으로써 다스려 끊고 멸해 없애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목공예 스승이나 목공을 배우는 제자가 먹줄을 나무에 퉁기고는 곧 잘 드는 도끼로 깎아서 똑바르게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악하고 착하지 않은 생각이 생기면 곧 선한 법을 생각함으로써 다스려 끊고 멸해 없애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行)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와 같이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병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혀야 한다. 비구는 이[齒]와 이를 서로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어 마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려 끊고 멸해 없애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두 역사(力士)가 한 약한 사람을 붙잡고 곳곳마다 두루 돌아다니며 마음대로 때리는 것과 같이, 비구는 이와 이를 서로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어 마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리고 그렇게 다스려 끊고 멸해 없애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걱정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혀야 한다. 비구는 들숨을 생각하면 들숨을 생각하는 줄을 알고, 날숨을 생각하면 날숨을 생각하는 줄을 알며, 들숨이 길면 들숨이 긴 줄을 알고, 날숨이 길면 날숨이 긴 줄을 알며, 들숨이 짧으면 들숨이 짧은 줄을 알고, 날숨이 짧으면 날숨이 짧은 줄을 알아, 온몸에 숨이 드는 것을 배우고, 온몸에서 숨이 나는 것을 배우며, 몸에 드는 숨이 그치기를 배우고, 입에서 나는 숨이 그치기를 배워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병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되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몸을 담가 적시고 윤택하게 하여 두루 이 몸에 충만하게 하며,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목욕하는 사람이 그릇에 비누를 담고 물을 타서 둥글게 뭉쳐서 사용할 적에 물에 비누가 불으면 두루 충만하여 어느 곳이나 퍼지지 않은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몸을 담가 적시고 윤택하게 하여 두루 이 몸에 충만하게 하고,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게 해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혀야 한다. 비구는 선정[定 : 色界 第二禪]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몸을 담가 적시고 윤택하게 하여 두루 이 몸에 충만하고, 그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샘물이 깨끗하고 맑으며 가득 차서 넘쳐흘러, 사방에서 물이 오더라도 그 가장자리에 맴돌 뿐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다. 곧 그 샘물은 땅밑에서 저절로 솟아나 밖으로 넘쳐흘러 산을 적시고 윤택하게 하며, 두루 충만하여 두루 적시지 않은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비구는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몸을 담가 적시고 윤택하게 하여 두루 이 몸 가운데 충만하며,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혀야 한다. 비구가 기쁨을 여의므로 인해서 생기는 즐거움에 몸을 담가 적시고 윤택하게 하여 두루 이 몸에 충만하여, 기쁨을 여읨으로 인하여 생기는 즐거움이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한다. 마치 푸른 연꽃과 붉고 빨갛고 흰 연꽃이 물에서 나고 물에서 자랄 적에 물밑에 있을 때엔 뿌리와 줄기와 꽃과 잎이 다 젖고 불어, 두루 충만하여 어느 곳에나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기쁨을 여읨으로 인하여 생기는 즐거움에 몸을 담가 적시고 윤택하게 하여 두루 이 몸에 충만하여, 기쁨을 여읨으로 인하여 생기는 즐거움이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되 비구가 이 몸 속에 대하여 청정한 마음으로 알고 두루 차서 성취하여 노닐며, 이 몸 속에 대하여 청정한 마음으로써 어느 곳이나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7주(?)의 옷이나 혹은 8주의 옷을 입어 머리에서 발까지 이 몸을 덮지 않은 곳이 없는 것처럼, 비구는 이 몸에 대하여 청정한 마음으로써 해득하여 성취하여 노닐며, 이 몸 속을 청정한 마음으로써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되 광명상(光明想)을 생각하여 잘 받고 잘 가지며, 마음으로 잘 생각하는 것이 앞에서와 같이 뒤도 그러하고, 뒤에서와 같이 앞도 또한 그러하며, 낮과 같이 밤도 그렇고, 밤과 같이 낮도 그러하며, 아래와 같이 위도 그렇고, 위와 같이 아래도 또한 그러하다. 이렇게 뒤바뀌지 않고 마음에 얽매임이 없이 빛나고 밝은 마음을 닦으면, 끝내 어둠에 덮이지 않는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뜻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되 비구가 모습[相]을 관찰하여 잘 받고 잘 가지고 마음으로 잘 생각해야 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앉아서 누운 사람을 관찰하고, 누워서 앉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처럼, 비구도 모습을 관찰하여 잘 받고 잘 가지고 마음으로 잘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되 이 몸은 머무름을 따라 좋고 나쁜 대로 머리에서 발까지 온갖 더러운 것이 충만해 있다고 관찰해야 한다. 곧 이 몸에는 머리털 터럭 손톱 이 거칠고 섬세하고 엷은 살갗 피부 살 힘줄 뼈 심장 콩팥 간장 허파 대장 소장 지라 밥통 똥 골 뇌수 눈물 땀 콧물 가래침 고름 피 기름 뼛속 기름 침 쓸개 오줌이 있다고 관찰해야 한다. 마치 그릇에 약간의 씨앗을 담아 두었을 적에 눈이 있는 사람이 보면 이것은 벼와 조의 종자이고, 이것은 보리 밀 크고 작은 마두 갓 무 겨자의 종자라고 분별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비구는 이 몸의 머무름을 따라 그 좋고 나쁜 대로 머리에서 발까지 온갖 더러운 것이 충만해 있다고 관찰해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혀야 한다. 비구는 몸의 모든 경계를 관찰하되 '내 이 몸 속에는 땅의 경계 물의 경계 불의 경계 바람의 경계 허공의 경계 인식의 경계가 있다'고 관해야 한다. 마치 백정이 소를 죽여 가죽을 벗겨 땅에 펴놓고 여섯 부분으로 나누는 것처럼, 비구도 몸의 모든 경계를 관찰해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참 모양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혀야 한다. 비구는 저 송장이 1 2일 혹은 6 7일이 되어 까마귀나 솔개에게 쪼아 먹히고 승냥이나 개에게 먹히며, 불에 태워지고 땅에 묻히어 다 썩어 허물어지는 것을 관찰하고, 관찰한 뒤에는 자기에게 비교해 본다. '이제 내 이 몸도 또한 이와 같은 모든 법이 있어 끝내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혀야 한다. 비구는 일찍 무덤에 버려진 몸의 해골이 푸르딩딩하게 썩어 허물어지고 반이나 먹힌 뼈사슬이 땅에 딩구는 것을 관찰하고, 관찰한 뒤에는 자기에게 견주어 본다. '이제 내 이 몸도 또한 이와 같이 모두 이 법을 가져 끝내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혀야 한다. 비구가 일찍 무덤에 버려진 몸의 뼈마디가 분해되고, 사방에 흩어져 발뼈 허벅다리뼈 넓적다리뼈 엉치뼈 등뼈 어깨뼈 목뼈 정수리뼈가 각각 따로 따로 흩어진 것을 관찰하고, 관찰한 뒤에는 자기에게 견주어 본다. '이제 내 이 몸도 또한 이와 같이 모든 법이 있어 끝내 이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비구는 그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되 일찍 무덤에 버려진 몸의 뼈가 희기는 소라와 같고, 푸르기는 집비둘기 빛깔과 같으며, 붉기는 피를 칠한 것 같고, 썩어 허물어지고 부서져 가루가 되는 것을 관찰하고, 관찰한 뒤에는 자기에게 견주어 본다. '이제 내 이 몸도 또한 이와 같이 모두 이 법을 갖추고 있어 끝내 이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비구는 몸의 행을 따라 곧 그 진실 그대로를 보아야 한다. 그가 만일 이렇게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면 마음의 모든 근심을 끊어 결정된 마음을 얻고, 결정된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곧 그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비구가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만약 이와 같이 몸 생각하는 법을 닦고 익혀서 이와 같은 것을 널리 유포한 사람은 저 온갖 착한 법이 그 속에 있게 되나니 이를 일러 도품법(道品法)이라고 하느니라. 만일 그가 마음으로 해득하여 두루 차면 마치 큰 바다와 같아 저 모든 작은 강물이 다 바다로 흘러들어 가듯이, 이렇게 몸을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고 이렇게 널리 펴면 저 모든 좋은 법은 다 그 가운데 있나니, 이것을 도폼법이라고 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문 범지가 몸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세우지 못하고 유행(遊行)할 적에 소심(小心)하기까지 하면 그에게는 악마 파순(波旬)이 틈을 노리고 있다가 결국은 제 마음대로 요리하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저 사문 범지는 몸을 생각한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니라. 마치 물이 없이 텅 빈 병을 바르게 땅에 세워 논 것과 같나니, 만일 사람이 물을 가지고 와서 병 속에 쏟으면, 비구야, 네 생각은 어떠하냐? 이와 같이 할 적에 그 병이 물을 잘 받아들이겠느냐?" 비구가 대답하였다. "잘 받아들일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속이 비어 물이 없는 데다 바르게 땅에 세워 놓았기 때문에 반드시 물을 잘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와 같이 만일 사문 범지가 몸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세우지 않고, 유행(遊行)할 적에 소심(小心)하기까지 하면 그는 악마 파순이 그 틈을 노리고 있다가 결국은 제 마음대로 요리하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저 사문 범지는 몸을 생각한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어떤 사문 범지가 몸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세워, 노닐면서 한량없는 마음[無量心]을 가지면 그는 악마 파순이 그 틈을 노려도 끝내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사문 범지는 속이 비지 않은 데다가 또 몸을 생각한 일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물이 가득 찬 병을 바르게 땅에 놓아둔 것과 같다. 만일 사람이 물을 가지고 와서 병 안에 쏟아 부으면, 비구야, 네 마음에는 어떠하냐? 그 병을 이와 같이 하면 다시 물을 받아들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병에는 물이 가득 찬 채로 바르게 땅에 놓여 있기 때문에 물을 받아들이지 않나이다." "이와 같아서 만일 어떤 사문 범지가 몸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세워, 노닐면서 한량이 없는 마음을 가지면 저 악마 파순이 그 틈을 아무리 노려도 끝내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사문 범지는 속이 비지 않은 데다가 몸을 생각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어떤 사문 범지가 몸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세우지 않은 데다가 노닐 적에 소심하기까지 하면 저 악마 파순이 틈을 노리고 있다가 반드시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사문 범지는 속이 비어 있는 데다가 몸을 생각한 일도 없었기 때문이니라. 마치 역사(力士)가 크고 무거운 돌을 진창 속에 던지는 것과 같나니, 비구야,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진흙탕이 돌을 받아들이겠느냐?" "받아드립니다. 세존이시여, 진흙은 묽고 돌은 무겁기 때문에 반드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아서 만일 어떤 사문 범지가 몸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세우지 않고, 노닐 적에 소심하기까지 하면 그는 악마 파순이 그의 틈을 노리고 있다가 반드시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사문 범지는 속이 비어 있는데다가 소심하기까지 하며 몸을 생각한 일도 없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어떤 사문 범지가 몸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세우고, 노닐면서 한량없는 생각을 가지면 그는 악마 파순이 그의 틈을 아무리 노리고 있어도 끝내 승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사문 범지는 속이 비지 않은데 다가 몸을 생각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니라. 마치 역사가 가벼운 털 공을 평호선(平戶扇)에 던지는 것과 같나니 비구야,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털 공을 받아들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털 공은 가볍고 세워 놓은 부채는 꼿꼿하게 서 있기 때문에 털 공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 같아서 만일 어떤 사문 범지가 몸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세우고, 노닐면서 한량없는 마음을 가지면 그는 악마 파순이 아무리 그의 틈을 노린다 해도 끝내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사문 범지는 속이 비지 않은 데다가 몸을 생각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니라. 만일 어떤 사문 범지가 몸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세우지 않은 데다가, 노닐 적에 소심하기까지 하면 그는 악마 파순이 그 틈을 노리고 있다가 반드시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사문 범지는 속이 비어 있는 데다가 몸을 생각한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불을 구할 적에 마른 나무를 재료로 하고 마른 나무로 문지르는 것과 같나니, 비구야,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 사람이 이렇게 하여 불을 얻을 수 있겠느냐?" "얻을 수 있나이다. 세존이시여, 그는 마른 나무를 재료로 하고 마른 나무로 문지르기 때문에 반드시 불을 얻을 것입니다." "그와 같아서 만일 어떤 사문 범지가 몸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세우지 못한 데다가, 노닐 적에 소심하기까지 하면 그는 악마 파순이 그의 틈을 노리고 있다가 반드시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사문 범지는 속이 비어 있는 데다가 몸을 생각한 일도 전혀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어떤 사문 범지가 몸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세우고, 노닐면서 한량없는 마음[無量心]을 가지면 그는 악마 파순이 그의 틈을 노린다 해도 끝내 승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사문 범지는 속이 비지 않은 데다가 몸을 생각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니라. 마치 사람이 불을 구할 적에 젖은 나무를 재료로 하고 젖은 나무로써 문지르는 것과 같나니 비구야,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 사람이 이렇게 하여 불을 얻을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그는 젖은 나무를 모태로 삼아 젖은 나무로 문지르기 때문에 불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와 같아서 만일 어떤 사문 범지가 몸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세우고, 노닐 적에도 한량없는 마음을 가지면 그는 악마 파순이 아무리 틈을 노려도 끝내 승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사문 범지는 속이 비지 않은 데다가 몸을 생각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니라. 이렇게 몸을 생각하기를 닦아 익히고, 이렇게 널리 펴면, 마땅히 알라, 그는 열여덟 가지 덕(德)이 있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열여덟 가지 덕인가? 비구는 능히 굶주림 목마름 추위 더위 모기 등에 파리 이 바람 햇볕의 핍박을 받아도 참아내고 욕설과 매질을 당하더라도 또한 능히 참아내며, 모든 병에 걸려 몹시 괴롭고 목숨이 끊어지게 되는 등 즐겁지 않은 온갖 일을 당해도 다 능히 견디어 참아내느니라. 이렇게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고 이렇게 널리 펴면, 이것이 그 첫 번째 덕이니라. 또한 비구는 즐겁지 않은 일을 견디어 참되, 만일 즐겁지 않다는 생각이 나더라도 마음에 끝내 집착하지 않느니라. 이렇게 몸을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고 이렇게 널리 펴면, 이것이 그 두 번째 덕이니라. 비구는 두려움을 견디어 참되, 만일 두려움이 생기더라도 마음에 끝내 집착하지 않느니라. 이렇게 몸을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고 이렇게 널리 펴면, 이것이 그 세 번째 덕이니라. 비구는 세 가지 사악한 생각인 탐욕의 생각 성냄의 생각 해침의 생각을 내지 않고, 끝내 집착하지 않느니라. 이렇게 몸을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고 이렇게 널리 펴면, 이것이 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덕이니라. 또 비구는 욕심을 여의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의며, 나아가 제 4 선을 성취하여 노니느니라. 이렇게 몸을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고 이렇게 널리 펴면, 이것이 그 여덟 번째 덕이니라. 비구는 3결(結)이 이미 다하여 수다원(須陀洹)을 얻어 악한 법에 떨어지지 않고, 결정코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 끝내 7유(有)1)를 받고 천상과 인간에 한 번 왕래한 뒤에는 괴로움을 벗어나느니라. 이렇게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고 이렇게 널리 펴면, 이것이 그 아홉 번째의 덕이니라. 비구는 3결이 이미 다하여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져 천상과 인간을 한 번 왕래하게 되고, 한 번 왕래한 뒤에는 괴로움을 벗어나느니라. 이렇게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고 이렇게 널리 펴면, 이것이 그 열 번째 덕이니라. 비구는 5하분결(五下分結)이 다하고 저 세상에 태어나서 곧 열반에 들어 물러나지 않는 법을 얻으며,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느니라. 이렇게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고 이렇게 널리 펴면, 이것이 그 열한 번째 덕이니라. 또 비구에게 만일 식해탈(息解脫)2)이 있으면 색(色)을 떠나 무색(無色)을 얻고 여기상정(如其像定)을 몸으로 얻어 성취하여 노닐며, 지혜의 관찰로써 번뇌를 알아 번뇌를 끊게 된다. 이렇게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고 이렇게 널리 펴면, 이것이 그 열두 번째, 열세 번째, 열네 번째, 열다섯 번째, 열여섯 번째, 열일곱 번째 덕이니라. 또 비구는 여의족(如意足) 천이(天耳) 타심지(他心智) 숙명지(宿命智) 생사지(生死智)가 있고,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여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無漏心解脫]과 지혜의 해탈[慧解脫]을 얻어, 현재 세상에서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해 성취하여 노닐며, 생이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서고 할 일을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진실 그대로를 안다. 이렇게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고 이렇게 널리 펴면, 이것을 열여덟 번째 덕이라 하느니라. 이렇게 몸 생각하는 법을 닦아 익히고 이렇게 널리 펴면,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은 열여덟 가지 덕이 있느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염신경에 수록된 경문의 글자 수는 4,225자이다.]   1) 유(有)는 생사의 과보를 일컫는 말이다. 또는 과보 받은 인(因)을 말하기도 한다. 2) 팔리어로는 Santa vimokkha이다. 적정해탈(寂靜解脫)을 말한다. 색계의 선정을 넘어서 무색계의 선정에 들어 적정한 해탈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中阿含經卷第二十     東晉罽賓三藏瞿曇僧伽提婆譯   (八一)中阿含長壽王品念身經第十(第二小土城誦) 我聞如是 一時。佛遊鴦祇國中。與大比丘眾俱。往詣阿和那揵尼住處 爾時。世尊過夜平旦。著衣持鉢。入阿和那而行乞食。食訖。中後收舉衣鉢。澡洗手足。以尼師檀著於肩上。往詣一林。入彼林中。至一樹下。敷尼師檀。結跏趺坐 爾時。眾多比丘於中食後。集坐講堂。共論此事。諸賢。世尊甚奇。甚特。修習念身。分別廣布。極知極觀。極修習。極護治。善具善行。在一心中。佛說念身有大果報。得眼.有目見第一義 爾時。世尊在於宴坐。以淨天耳出過於人。聞諸比丘於中食後。集坐講堂。共論此事。諸賢。世尊甚奇。甚特。修習念身。分別廣布。極知極觀。極修習。極護治。善具善行。在一心中。佛說念身有大果報。得眼.有目見第一義。世尊聞已。則於晡時從宴坐起。往詣講堂比丘眾前。敷座而坐 爾時世尊告諸比丘。汝等向共論何事耶。以何事故集坐講堂 時。諸比丘白曰。世尊。我等諸比丘於中食後。集坐講堂。共論此事。諸賢。世尊甚奇。甚特。修習念身。分別廣布。極知極觀。極修習。極護治。善具善行。在一心中。佛說念身有大果報。得眼.有目見第一義。世尊。我等向共論如此事。以此事故。集坐講堂 世尊復告諸比丘曰。云何我說修習念身。分別廣布。得大果報 時。諸比丘白世尊曰。世尊為法本。世尊為法主。法由世尊。惟願說之。我等聞已。得廣知義 佛便告曰。汝等諦聽。善思念之。我當為汝分別其義。時。諸比丘受教而聽 佛言。云何比丘修習念身。比丘者。行則知行。住則知住。坐則知坐。臥則知臥。眠則知眠。寤則知寤。眠寤則知眠寤。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正知出入。善觀分別。屈伸低仰。儀容庠序。善著僧伽梨及諸衣鉢。行住坐臥.眠寤語默皆正知之。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生惡不善念。以善法念治斷滅止。猶木工師.木工弟子。彼持墨繩。用拼於木。則以利斧斫治令直。如是比丘生惡不善念。以善法念治斷滅止。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齒齒相著。舌逼上齶。以心治心。治斷滅止。猶二力士捉一羸人。處處旋捉。自在打鍛。如是比丘齒齒相著。舌逼上齶。以心治心。治斷滅止。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念入息即知念入息。念出息即知念出息。入息長即知入息長。出息長即知出息長。入息短即知入息短。出息短即知出息短。學一切身息入。學一切身息出。學止身行息入。學止口行息出。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離生喜樂。漬身潤澤。普遍充滿於此身中。離生喜樂無處不遍。猶工浴人器盛澡豆。水和成摶。水漬潤澤。普遍充滿無處不周。如是比丘離生喜樂。漬身潤澤。普遍充滿於此身中。離生喜樂無處不遍。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定生喜樂。漬身潤澤。普遍充滿於此身中。定生喜樂無處不遍。猶如山泉。極淨澄清。充滿盈流。四方水來。無緣得入。即彼泉底。水自涌出。盈流於外。漬山潤澤。普遍充滿無處不周。如是比丘定生喜樂。漬身潤澤。普遍充滿於此身中。定生喜樂無處不遍。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無喜生樂。漬身潤澤。普遍充滿於此身中。無喜生樂無處不遍。猶青蓮華。紅.赤.白蓮。水生水長。在於水底。根莖華葉。悉漬潤澤。普遍充滿無處不周。如是比丘無喜生樂。漬身潤澤。普遍充滿於此身中。無喜生樂無處不遍。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於此身中。以清淨心意解遍滿成就遊。於此身中。以清淨心無處不遍。猶有一人。被七肘衣或八肘衣。從頭至足。於此身體無處不覆。如是比丘於此身中。以清淨心意解遍滿成就遊。於此身中。以清淨心無處不遍。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念光明想。善受善持。善意所念。如前後亦然。如後前亦然。如晝夜亦然。如夜晝亦然。如下上亦然。如上下亦然。如是不顛倒。心無有纏。修光明心。心終不為闇之所覆。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觀相善受.善持.善意所念。猶如有人。坐觀臥人。臥觀坐人。如是比丘觀相善受.善持.善意所念。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此身隨住。隨其好惡。從頭至足。觀見種種不淨充滿。謂此身中有髮.毛.爪.齒.麤細薄膚.皮.肉.筋.骨.心.腎.肝.肺.大腸.小腸.脾.胃.搏糞.腦及腦根.淚.汗.涕.唾.膿.血.肪.髓.涎.膽.小便。猶以器盛若干種子。有目之士。悉見分明。謂稻.粟種.大麥.小麥.大小麻豆.菘菁芥子。如是比丘此身隨住。隨其好惡。從頭至足。觀見種種不淨充滿。謂此身中有髮.毛.爪.齒.麤細薄膚.皮.肉.筋.骨.心.腎.肝.肺.大腸.小腸.脾.胃.摶糞.腦及腦根.淚.汗.涕.唾.膿.血肪.髓.涎.膽.小便。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觀身諸界。我此身中有地界.水界.火界.風界.空界.識界。猶如屠兒殺牛。剝皮布於地上。分作六段。如是比丘觀身諸界。我此身中。地界.水界.火界.風界.空界.識界。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觀彼死屍。或一.二日。至六.七日。烏鴟所啄。豺狗所食。火燒埋地。悉腐爛壞。見已自比。今我此身亦復如是。俱有此法。終不得離。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如本見息道骸骨青色。腐爛食半。骨鎖在地。見已自比。今我此身亦復如是。俱有此法。終不得離。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如本見息道離皮肉血。唯筋相連。見已自比。今我此身亦復如是。俱有此法。終不得離。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如本見息道骨節解散。散在諸方。足骨.膊骨.髀骨.臗骨.脊骨.肩骨.頸骨.髑髏骨。各在異處。見已自比。今我此身亦復如是。俱有此法。終不得離。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如本見息道骨白如螺。青猶鴿色。赤若血塗。腐壞碎末。見已自比。今我此身亦復如是。俱有此法。終不得離。如是比丘隨其身行。便知上如真。彼若如是在遠離獨住。心無放逸。修行精勤。斷心諸患而得定心。得定心已。則知上如真。是謂比丘修習念身 若有如是修習念身.如是廣布者。彼諸善法盡在其中。謂道品法也。若彼有心意解遍滿。猶如大海。彼諸小河盡在海中。若有如是修習念身.如是廣布者。彼諸善法盡在其中。謂道品法也 若有沙門.梵志不正立念身.遊行少心者。彼為魔波旬伺求其便。必能得也。所以者何。彼沙門.梵志空無念身故。猶如有瓶。中空無水。正安著地。若人持水來瀉瓶中。於比丘意云何。彼瓶如是當受水不 比丘答曰。受也。世尊 所以者何。彼空無水。正安著地。是故必受。如是若有沙門.梵志不正立念身.遊行少心者。彼為魔波旬伺求其便。必能得也。所以者何。彼沙門.梵志空無念身故 若有沙門.梵志正立念身.遊行無量心者。彼為魔波旬伺求其便。終不能得。所以者何。彼沙門.梵志不空有念身故。猶如有瓶。水滿其中。正安著地。若人持水來瀉瓶中。於比丘意云何。彼瓶如是復受水不 比丘答曰。不也。世尊。所以者何。彼瓶水滿。正安著地。是故不受。如是若有沙門.梵志。有正立念身.遊行無量心者。彼為魔波旬伺求其便。終不能得。所以者何。彼沙門.梵志不空有念身故 若有沙門.梵志不正立念身.遊行少心者。彼為魔波旬伺求其便。必能得也。所以者何。彼沙門.梵志空無念身故。猶如力士。以大重石擲淖泥中。於比丘意云何。泥為受不 比丘答曰。受也。世尊 所以者何。泥淖石重。是故必受。如是若有沙門.梵志不正立念身.遊行少心者。彼為魔波旬伺求其便。必能得也。所以者何。彼沙門.梵志空無念身故 若有沙門.梵志正立念身.遊行無量心者。彼為魔波旬伺求其便。終不能得。所以者何。彼沙門.梵志不空有念身故。猶如力士。以輕毛鞠擲平戶扇。於比丘意云何。彼為受不 比丘答曰。不也。世尊 所以者何。毛鞠輕闡。戶扇平立。是故不受。如是若有沙門.梵志正立念身.遊行無量心者。彼為魔波旬伺求其便。終不能得。所以者何。彼沙門.梵志不空有念身故 若有沙門.梵志不正立念身.遊行少心者。彼為魔波旬伺求其便。必能得也。所以者何。彼沙門.梵志空無念身故。猶人求火。以槁木為母。以燥鑽鑽。於比丘意云何。彼人如是。為得火不 比丘答曰。得也。世尊 所以者何。彼以燥鑽鑽於槁木。是故必得。如是若有沙門.梵志不正立念身.遊行少心者。彼為魔波旬伺求其便。必能得也。所以者何。彼沙門.梵志空無念身故 若有沙門.梵志正立念身.遊行無量心者。彼為魔波旬伺求其便。終不能得。所以者何。彼沙門.梵志不空有念身故。猶人求火。以濕木為母。以濕鑽鑽。於比丘意云何。彼人如是。為得火不 比丘答曰。不也。世尊 所以者何。彼以濕鑽鑽於濕木。是故不得。如是若有沙門.梵志正立念身.遊行無量心者。彼為魔波旬伺求其便。終不能得。所以者何。彼沙門.梵志不空有念身故 如是修習念身.如是廣布者。當知有十八德。云何十八。 比丘者。能忍飢渴.寒熱.蚊虻.蠅蚤.風日所逼。惡聲.捶杖亦能忍之。身遇諸疾。極為苦痛。至命欲絕。諸不可樂。皆能堪耐。如是修習念身。如是廣布者。是謂第一德。復次。比丘堪耐不樂。若生不樂。心終不著。如是修習念身.如是廣布者。是謂第二德。復次。比丘堪耐恐怖。若生恐怖。心終不著。如是修習念身.如是廣布者。是謂第三德 復次。比丘生三惡念欲念.恚念.害念。若生三惡念。心終不著。如是修習念身.如是廣布者。是謂第四五六七德。復次。比丘離欲.離惡不善之法。至得第四禪成就遊。如是修習念身.如是廣布者。是謂第八德 復次。比丘三結已盡。得須陀洹。不墮惡法。定趣正覺。極受七有。天上人間一往來已而得苦際。如是修習念身.如是廣布者。是謂第九德。復次。比丘三結已盡。婬怒癡薄。得一往來天上人間。一往來已而得苦際。如是修習念身.如是廣布者。是謂第十德。復次。比丘五下分結盡。生於彼間。便般涅槃。得不退法。不還此世。如是修習念身.如是廣布者。是謂第十一德 復次。比丘若有息解脫。離色得無色。如其像定身作證成就遊。而以慧觀知漏.斷漏。如是修習念身.如是廣布者。是謂第十二十三十四十五十六十七德 復次。比丘如意足.天耳.他心智.宿命智.生死智。諸漏已盡。得無漏心解脫.慧解脫。於現法中自知自覺。自作證成就遊。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辦。不更受有。知如真。如是修習念身.如是廣布者。是謂第十八德。如是修習念身.如是廣布者。當知有此十八功德 佛說如是。彼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念身經第十竟(四千二百二十五字)十八德內關六七八并十三至十七者應在第五第十八德內也。南本結在第四第十二中理猶難曉
22    명상하는 이는 한적한 방에 앉아 어떤 법을 사유해야 하는가? 댓글:  조회:1743  추천:107  2007-11-20
464. 동법경(同法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섬미국의 구사라원에 계셨다. 그 때 존자 아난은 상좌(上座)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상좌라 불리는 이들에게 나아가 공경히 인사하고, 인사한 뒤에는 한쪽에 물러나 앉아 상좌라 불리는 이에게 물었다. 만일 비구가 공터나 나무 밑, 한적한 방에서 사유(思惟)한다면, 마땅히 어떤 법으로 골똘히 정밀하게 사유해야 합니까? 상좌가 대답하였다. 존자 아난이여, 공터나 나무 밑, 한적한 방에서 사유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두 가지 법으로 골똘히 정밀하게 사유해야 하나니, 이른바 그침[止]과 관찰[觀]입니다. 존자 아난이 또 상좌에게 물었다. 그침을 닦고 익히며 많이 닦고 익히고 나면, 장차 무엇이 이루어집니까? 관찰을 닦아 익히며 많이 닦고 익히고 나면, 장차 무엇이 이루어집니까? 상좌가 대답하였다. 존자 아난이여, 그침을 닦고 익히면 결국에는 관찰이 이루어집니다. 관찰을 닦고 익히고 나면 또한 그침이 이루어집니다.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그침과 관찰을 함께 닦아 모든 해탈(解脫)의 세계를 얻습니다. 아난이 또 상좌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모든 해탈의 세계라고 합니까? 상좌가 대답하였다. 존자 아난이여, 저 끊어진 세계[斷界]․탐욕이 없는 세계[無欲界]․적멸의 세계[滅界], 이것을 모든 해탈의 세계라고 합니다. 존자 아난이 또 상좌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끊어진 세계이며, ……(내지)…… 적멸의 세계입니까? 상좌가 대답하였다. 존자 아난이여, 일체의 행을 끊으면 이것을 끊어진 세계[斷界]라 하고, 애욕을 끊어 없애면 이것을 탐욕이 없는 세계[無欲界]라고 하며, 일체의 행(行)이 소멸하면 이것을 적멸의 세계[滅界]라고 합니다. 이 때 존자 아난은 상좌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따라 기뻐하였다. 또 5백 비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공경히 인사한 뒤에 한쪽에 물러나 앉아 5백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만일 비구가 공터나 나무 밑, 한적한 방에서 사유한다면 그 때, 마땅히 어떤 법을 골똘히 정밀하게 사유해야 합니까? 이 때 5백 비구들은 존자 아난에게 마땅히 두 가지 법으로 골똘히 정밀하게 사유해야 합니다. ……(내지)…… 적멸의 세계라고 합니다라고 상좌들의 말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 때 존자 아난은 5백 비구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따라 기뻐하였다. 또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조아린 뒤에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가 공터나 나무 밑, 한적한 방에서 사유한다면, 마땅히 어떤 법을 골똘히 정밀하게 사유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비구가 공터나 나무 밑, 한적한 방에서 사유한다면, 마땅히 두 가지 법을 골똘히 정밀하게 사유해야 하느니라. ……(내지)…… 적멸의 세계라고 하느니라라고 하셨으니, 저 5백 비구의 말과 같았다. 이 때 존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기이합니다. 세존이시여, 큰 스승님과 모든 제자들은 모두가 같은 법․같은 글귀․같은 이치․같은 맛입니다. 제가 오늘 상좌들께 나아가 상좌라고 불리는 이에게 이와 같이 묻자, 그 역시 이와 같은 이치․이와 같은 글귀․이와 같은 맛으로 저에게 대답하였는데, 지금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제가 또 5백 비구들에게 가서 또한 이와 같은 이치․이와 같은 글귀․이와 같은 맛으로 묻자, 그 5백 비구들 역시 이와 같은 이치․이와 같은 글귀․이와 같은 맛으로 대답하였는데, 지금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스승과 제자는 모두가 같은 법․같은 이치․같은 글귀․같은 맛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 상좌가 어떤 비구인 줄 아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알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 상좌는 바로 아라한(阿羅漢)이다.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였고 무거운 짐을 이미 벗어버렸으며, 바른 지혜로 마음이 잘 해탈한 사람이니라. 저 5백 비구들 역시 모두 그와 같으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존자 아난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21    약중의 최고의 약 -- 칠각지 댓글:  조회:1910  추천:94  2007-11-15
六.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셨다. 그 때에 존자 균두(均頭)는 중한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 스스로 기거하지 못하였다. 그 때에 그는 생각하였다. '세존께서는 지금 나를 가엾이 여기지 않으신다. 나는 지금 중한 병에 걸렸는데, 아무 약도 듣지 않아 목숨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들었다. 세존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건지지 못한 이가 있으면 나는 끝내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그런데 지금 나만 홀로 버림을 받았으니 이 괴로움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고. 그 때에 세존께서는 하늘 귀로써 균두 비구의 이런 청원을 들으시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모두 모여라. 균두 비구에게 문병하러 가자." 비구들은 사뢰었다. "그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데리고 균두 비구의 방으로 가셨다. 그 때에 균두 비구는 멀리서 세존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곧 땅에 내려와 엎드렸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병이 위중하다.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 없다. 나는 이 자리에 앉겠다." 세존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네 병은 좀 어떤가. 더하지나 않은가. 내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균두는 사뢰었다. "지금 저의 병은 매우 중하나이다. 더하기만 하고 덜하지 않나이다. 약이란 약은 다 써 보았나이다." 세존께서는 물으셨다. "병은 누가 간호하는가." "여러 범행자들이 와서 간호하나이다." "너는 지금 나를 위해 일곱 가지 각의(覺意)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때에 균두는 일곱 가지 각의의 이름을 세 번 일컬을 수 있었다. "저는 지금 여래님 앞에서 일곱 가지 각의의 법을 말씀드릴 수 있나이다." "만일 내게 설명할 수 있으면 곧 설명해 보라." 그 때에 균두는 부처님께 사뢰었다. "일곱 가지 각의란 무엇인가 하오면, 이른바 생각 각의니 이는 여래님이 말씀하신 바이오며, 법 각의, 정진 각의, 기쁨 각의, 쉼 각의, 선정 각의, 보호 각의이니, 이것이 이른바 세존께서 말씀하신 일곱 가지 각의 이옵니다." 균두가 이렇게 말하자 가졌던 병은 완전히 나아 아무 고통이 없었다. 그 때에 균두는 사뢰었다. "약 중의 좋은 약은 바로 이 일곱 가지 각의 이옵니다. 약 중의 좋은 약을 말하려면 이 일곱 가지 각의에 따를 것이 없나이다. 지금 이 일곱 가지 각의를 생각하오매 가졌던 온갖 병이 완전히 나았나이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이 일곱 가지 각의를 받들어 지녀 잘 생각하고 외우며 부처와 법과 중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 그리하면 중생들의 모든 병은 다 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일곱 가지 각의는 매우 알기 어렵고 이로써 모든 법을 다 알게 되며, 모든 법을 밝게 비추는 좋은 약이 온갖 병을 고치는 것과 같고 단 이슬 음식은 아무리 먹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만일 이 일곱 가지 각의를 얻지 못하면 중생들은 나고 죽음에 흘러 다닐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은 방편을 구해 이 일곱 가지 각의를 닦도록 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六) 聞如是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當於爾時。尊者均頭身抱重患。臥在床褥。不能自起居。是時。均頭便念。如來世尊今日不見垂愍。又遭重患。命在不久。醫藥不接。又聞世尊言。一人不度。吾終不捨。然今獨見遺棄。將何苦哉爾時。世尊以天耳聞均頭比丘作是稱怨。是時。世尊告諸比丘。汝等皆集至均頭比丘所。問其所疾諸比丘對曰。如是。世尊世尊將眾多比丘漸漸至均頭比丘房。是時。均頭遙見如來來。即自投地。爾時。世尊告均頭曰。汝今抱患極為篤重。不須下床。吾自有坐爾時。世尊告均頭曰。汝所患為增為損。不增損乎。有能堪任受吾教也是時。均頭比丘白佛言。弟子今日所患極篤。但有增無損也。所服藥草。靡不周遍世尊問曰。視瞻病者竟為是誰均頭白言。諸梵行來見瞻視爾時。世尊告均頭曰。汝今堪與吾說七覺意乎均頭是時。三自稱說七覺意名。我今堪任於如來前說七覺意法世尊告曰。若能堪任向如來說。今便說之是時。均頭白佛言。七覺意者。何等為七。所謂念覺意如來之所說。法覺意.精進覺意.喜覺意.猗覺意.定覺意.護覺意。是謂。世尊。有此七覺意者。正謂此耳 爾時。尊者均頭說此語已。所有疾患。皆悉除愈。無有眾惱。是時。均頭白世尊言。藥中之盛。所謂此七覺意之法是也。欲言藥中之盛者。不過此七覺意。今思惟此七覺意。所有眾病皆悉除愈爾時。世尊告諸比丘。汝等受持此七覺意法。善念諷誦。勿有狐疑於佛.法.眾者。彼眾生類所有疾患皆悉除愈。所以然者。此七覺意甚難曉了。一切諸法皆悉了知。照明一切諸法。亦如良藥療治一切眾病。猶如甘露食無厭足。若不得此七覺意者。眾生之類流轉生死。諸比丘。當求方便。修七覺意。如是。諸比丘。當作是學爾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20    안반수의 호흡명상 댓글:  조회:3005  추천:167  2007-11-13
  제 十七 안반품(安般品) 1 一.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에 계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바루를 가지고 라아훌라를 데리고 슈라아바스티이에 가서 걸식하셨다.                                       ( 注: 라아훌라는 석가모니의 아들임.)세존께서는 라아훌라를 돌아보고 말씀하셨다. “너는 육체를 덧없다고 관하느냐.” “예, 세존이시여, 육체는 덧없는 것이옵니다.” “라아훌라야, 느낌, 생각, 지어감, 의식도 덧없느니라.”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느낌, 생각, 지어감, 의식도 모두 덧없는 것이옵니다.” 그 때에 존자 라아훌라는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다. ‘무슨 이유로 걸식하러 성으로 들어가는데 세존께서는 길에서 친히 나를 가르치시는가. 나는 지금 내 처소로 돌아가자. 성에 들어가 걸식할 일이 아니다’고. (注: 존자 라아훌라의 깨우침에 대한 간절함과 정성을 여기서 알수있다. 옛 도인들이 학문을 위해 페침망식했다는 말이 과연 실말이다!)존자 라아훌라는 도중에 바로 제타숲 절로 돌아가 가사와 바루를 두고 한 나무 밑으로 갔다. 거기서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가부하고 앉아 알뜰한 마음으로 육체의 덧없음과 느낌, 생각, 지어감, 의식의 덧없음을 생각하였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에 가서 걸식하시고 제타숲 절에서 거닐으시다가 라아훌라에게 가서 말씀하셨다. “너는 아나아파아나[安般]의 법을 닦으라. 그 법을 닦으면 모든 근심, 걱정은 다 사라질 것이다. 또 나쁜 이슬[惡露]이 부정하다는 생각을 닦으라. 온갖 탐욕이 다 사라질 것이다. 라아훌라야, 너는 사랑하는 마음[慈心]을 닦으라. 사랑하는 마음을 닦으면 온갖 성내는 마음이 다 사라질 것이다. 라아훌라야, 너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悲心]을 닦으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닦으면 온갖 해치려는 마음이 다 없어질 것이다. 라아훌라야, 너는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喜心]을 닦으라.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을 닦으면 온갖 시기하는 마음이 다 없어질 것이다. 라아훌라야, 너는 보호하는 마음[護心]을 닦으라. 보호하는 마음을 닦으면 온갖 교만이 다 없어질 것이다.” (注: 이상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령단묘약이다. 부처는 일명 대의왕이라기도 한다. 중생의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大醫王이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라아훌라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집착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항상 스스로 법을 따르라 그러한 그 지혜로운 선비는 좋은 이름이 널리 퍼지리. 사람을 위해 횃불을 들어 큰 어두움을 깨뜨려 주면 저 하늘과 용들이 스승으로서 떠받들어 섬기고 공경하리라. 그 때에 라아훌라 비구도 게송으로 사뢰었다. 집착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저는 언제나 법 따르나니 이러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스승으로 섬김을 받게 되리라. (注: 라아훌라가 세존께 대답한 게송에서 집착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때의 라아훌라의 지견도 상당한 깨달음에 이루었음을 알수있다. 말뿐이 아닌 행으로 검증하는 깨끗한 끊음이다. 이는 라아훌라가 안반수의를 수행해서 짧은 시간내에 아라한이 될수있는 든든한 기초가 된다. 그리고 라아훌라비구는 언제나 법을 따른다고 했으니 수행앞서 더욱 중요한게 바른 소견을 갖는 일이다. 바른 생각이 있어야 법을 항상 따를수가 있고 법을 따라야만 바른 소견이 있을수가 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신 뒤 그를 두고 고요한 방으로 돌아가셨다. 그 때에 존자 라아훌라는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떻게 아나아파아나를 닦아 근심, 걱정을 없애고 온갖 생각을 없앨 수 있을까’고. 라아훌라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에게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았다가 조금 뒤에 다시 물러앉아 세존께 사뢰었다. (注: 수행이란 호기심으로부터 의문이 생기고 그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이다라고 말해도 무방하겠다. 그래서 그 의문이 클수록 도과의 성취는 더욱 큰것이다. 라아훌라는 부처님으로부터 인연한 그 의문을 밥먹는 일까지 잊으며 사유하여도 그 실마리를 풀수없었으니 때를 맞추어 세존께 물었으니 그것이  곧 수행자로서의 바른 태도라 하겠다. )“어떻게 아나아파아나를 닦으면 근심, 걱정을 없애고 온갖 생각이 없어지며 큰 과보를 성취하여 단 이슬 맛을 얻게 되나이까.” (注: 아나아파아나 즉 안반수의 혹은 호흡을 생각하는 법이라고 하는데 이는 쓸데없는 근심과 걱정을 없애는 령단묘약이다. 그렇다면 그 수행방법은 어떠한 것일가? 라아훌라가 후세의 우리들을 대신해서 세존께 물어보았다.)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다, 라아훌라야. 너는 능히 내 앞에서 사자의 외침으로 그런 이치를 묻는구나. 즉 ‘어떻게 아나아파아나를 닦으면 근심, 걱정을 없애고 온갖 생각이 없어지며 큰 과보를 성취하여 단 이슬 맛을 얻게 되는가’고. 라아훌라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나는 너를 위해 자세히 해설하리라.” (注: 사자의 외침이란 짐승의 왕중의 왕의 웨침이다. 사내대장부는 사내대장부다운 물음이 있다. 승냥이가 아무리 사자울음을 모방한대도 승냥이 울음을 떠날수 없듯이 세속적인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이 그 소견을 버리지않는 이상 성스런 도에 관한 바른 물음을 제기할수가 없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라아훌라에게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부탁하셨는데 명상의 가장 근본은 이치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해보는 일이다. 지혜란 생각에서 기원되며 사유에서 성취되는것이다. 그러니 사유가 있어야 이치를 알수있으며 이치를 알아야 비로서 수행을 할수가 있는것이다. )“그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그 때에 존자 라아훌라는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라아훌라여, 어떤 비구는 사람 없는 한적한 곳을 즐겨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가부하고 앉아 다른 생각이 없이 마음을 코 끝에 매어 두고 날숨이 길면 긴 줄을 알고 들숨이 길어도 긴 줄을 알며, 날숨이 짧으면 짧은 줄을 알고 들숨이 짧아도 짧은 줄을 안다. 날숨이 차가우면 차가운 줄을 알고 들숨이 차가와도 차가운 줄을 알며, 날숨이 따스하면 따스한 줄을 알고 들숨이 따스해도 따스한 줄을 알아서 온 몸의 들숨과 날숨을 관하여 모두 다 안다. (注: 명상은 항상 다른 사람이 방애를 주지않는 한적한 곳이 필요하다. 마음을 코 끝에 매어둔다는것은 숨이 드나들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단지 자각만 하고 있으면 된다.) 어떤 때에는 숨이 있으면 있는 줄을 알고 어떤 때에는 숨이 없으면 없는 줄도 안다. 만일 그 숨이 폐장에서 나오면 폐장에서 나오는 줄을 알고 혹은 그 숨이 폐장으로 들어가면 폐장으로 들어가는 줄을 안다. (注: 아나아파아나수행에서 많은 생리적인 현상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은 태여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인바 그것에 집착해서는 않된다. 그저 제 3의 주시자로 이러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들을 주시해볼뿐이다. 그래서 숨이 있으면 있는 줄을 알고... 줄을 안다고 했다.)라아훌라야, 이와 같이 아나아파아나를 닦아 행하면 곧 근심과 걱정과 번민과 어지러운 생각이 없어지고 큰 과보를 성취하여 단 이슬 맛을 얻게 되리라.”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라아훌라를 위해 묘한 법을 자세히 말씀하셨다. 라아훌라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세 번 돌고 떠났다. 그는 안다 동산의 어떤 나무 밑으로 가서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가부하고 앉아 다른 생각이 없이 마음을 코끝에 매어 두고 날숨이 길면 긴 줄을 알고 들숨이 길어도 긴 줄을 알며 날숨이 짧으면 짧은 줄을 알고 들숨이 짧아도 짧은 줄을 안다. 날숨이 차가우면 차가운 줄을 알고 들숨이 차가와도 차가운 줄을 알며, 날숨이 따스하면 따스한 줄을 알고 들숨이 따스해도 따스한 줄을 알아서 온 몸의 들숨과 날숨을 관하여 모두 다 안다. 어떤 때에는 숨이 있으면 있는 줄을 알고 어떤 때에는 숨이 없으면 없는 줄을 알았다. 만일 그 숨이 폐장에서 나오면 폐장에서 나오는 줄을 알고 혹은 그 숨이 폐장으로 들어가면 폐장으로 들어가는 줄을 알았다. (注: 법을 듣고는 듣는데서 끝마치는게 아니다. 아무리 많은 법을 들었다해도 직접 자기몸으로 체험하지 않으면 그것은 영원히 진리가 될수가 없다. 때문에 착실한 수행자라면 법은 듣는대로 성취하는것이다.)그 때에 라아훌라는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곧 욕심에서 해탈하여 다시는 어떤 악도 없고 다만 머트러운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있어서 기쁨과 편안함을 생각해 가져 첫째 선정에서 놀았다.(注:초선에 들어가기전의 조건은 우선 먼저 세속적인 욕망에서 해탈되어야 한다는 일이다. 욕심에서 해탈한 사람이 진일보 覺과 觀이 있어 기쁨과 편안함이 있어 초선에 들어가는것이다. 여기서 기쁨과 편안함은 세속적인 욕망의 개념이 아니다. 초선에 들어갈수있는 사람은 이미 성현의 항렬에 들어선 사람이다.爾時。羅雲作如是思惟。欲心便得解脫。無復眾惡。有覺.有觀。念持喜安。遊於初禪。) 다음에는 머트러운 생각과 세밀한 생각은 없어지고 안으로 스스로 기뻐하면서 마음을 온전히 하여 머트럽거나 세밀한 생각이 없는 삼매를 얻고, 거기서 생기는 생각과 기쁨으로 둘째의 선정에서 놀았다. 有覺.有觀息。內自歡喜。專其一心。無覺.無觀。三昧念喜。遊於二禪。다음에는 기쁜 생각도 없고 스스로 깨달아 알고 몸으로 즐겨 하며 성현들이 늘 구하는 바 보호하는 생각[護心]으로 기뻐하면서 셋째의 선정에서 놀았다. 無復喜念。自守覺知身樂。諸賢聖常所求護喜念。遊於三禪。그는 다시 괴로움과 즐거움이 이미 사라지고 다시는 근심, 걱정이 없으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보호하는 생각이 깨끗하여 넷째의 선정에서 놀았다. 彼苦樂已滅。無復愁憂。無苦無樂。護念清淨。遊於四禪그는 이 삼매의 힘으로 마음은 깨끗해 아무 더러움도 없고 몸은 부드럽고 연해져서 자기가 온 곳을 알고 하던 일을 기억하여 수없는 겁 동안의 전생 일을 모두 분별하였다. 즉 일생(一生), 二생, 三생, 四생, 五생과 十생, 二十생, 三十생, 四十생, 五十생과 백생, 천생, 만생, 수십만 생과 이루는 겁[成劫], 무너지는 겁[敗劫]과 수없는 이루는 겁, 수없는 무너지는 겁과 여러 억년의 셀 수 없는 겁 동안에 ‘나는 저기서 났을 때에는 이름은 무엇이요 성은 무엇이었다는 것과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어떤 고락을 받은 것과 목숨의 길고 짧았던 것과 저기서 죽어 여기서 났고,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났다는 것을 다 알았다. 그는 또 이 삼매의 힘으로 마음이 청정하여 아무 티가 없고 아무 번뇌도 없어져 또 중생들의 마음먹는 것을 다 알았다. 그는 또 하늘 눈이 깨끗해 티가 없어져 중생들의 나는 이와 죽는 이와 그들의 받는 몸의 좋고 나쁜 것, 그들의 사는 곳의 좋고 나쁜 것, 그 얼굴의 곱고 추한 것, 그 행한 것과 지은 것을 모두 관찰해 참답게 알았다. 또 혹 어떤 중생은 몸으로 나쁜 짓을 행하고 입과 뜻으로 나쁜 짓을 행하여 성현을 비방하고 삿된 소견으로 삿된 짓을 짓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지옥에 들어가며, 어떤 중생은 몸으로 착한 짓을 행하고 입과 뜻으로 착한 짓을 행하여 성현을 비방하지 않고 항상 바른 소견을 가지고 바른 행을 행함으로서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천상의 좋은 곳에 나는 것을 다보아 알았다. 이것이 이른바 하늘 눈이 깨끗해 티가 없어 중생들의 나는 이와 죽는 이, 그 받은 몸의 좋고 나쁜 것, 그 사는 곳의 좋고 나쁜 것, 그 얼굴의 곱고 추한 것이며, 그 행하는 것과 짓는 것을 관찰하여 참답게 아는 것이다. 그는 다시 뜻으로 번뇌가 없어진 마음을 성취하여 괴로움을 관찰하여 참답게 알고, 다시 괴로움의 쌓임과 괴로움의 사라짐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관찰해 참답게 알았다. 그는 이렇게 관찰함으로서 욕루(欲漏)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거기서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겼다. 그래서 나고 죽음은 이미 끝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생 몸을 받지 않을 줄을 참답게 알았다. 그 때에 존자 라아훌라는 이내 아라한이 되었다. (注: 아나아파아나수행은 4선의 경지를 뛰여넘어 3明(宿命智證明,天眼明,漏盡明)을 성취하여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할수가 있다.)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여미고 세존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서서 사뢰었다. “저는 이제 구하던 바를 얻어 모든 번뇌가 다 없어졌나이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라한이 된 이들로써 라아훌라 만한 이가 없다. 온갖 번뇌가 다한 이도 바로 라아훌라 비구요, 계율을 가지는 이도 바로 라아훌라 비구다. 왜 그러냐 하면 과거의 여러 여래와 다 옳게 깨달은 이 때에도 이 라아훌라 비구가 있었고, 부처의 아들로 말하여도 바로 라아훌라 비구이다. 그는 친히 부처에게서 몸을 받아 법의 으뜸 가는 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注:부처님이 라아훌라에 대한 긍정)세존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내 성문 가운데서 첫째의 제자로서 계율을 잘 가지는 이는 바로 라아훌라 비구이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는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그 계율을 완전히 갖추어 모든 감관을 잘 단속하면 그는 그 길로 차츰 나아가 마침내 모든 번뇌 없어지리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19    열가지 불교명상을 마치며... 댓글:  조회:2815  추천:146  2007-11-12
어제 천불지산(天佛指山)다녀왔었다. 아직도 황홀한 그 설경(霧淞)이 눈앞에 생생하다.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아마 내 자신이 천불지산하고 큰 인연이 있는듯하다. 그 인연이 앞으로도 지속될것이며 이날을 계기로 필시 크게 확산하리라 굳게 믿는다.... 천불지산이란 산이름에 부처님이름 있고 또한 그 뜻이 하늘에서 내려온 부처가 무엇을 가리켰다는 의미로 해석할수있는데 그렇다면 부처님이 도대체 무엇을 가리켰을가? .....  불교에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달을 보라고 하는데 어떤이는 손가락을 본다는 멋진 설화가 있다. 혹 이 글을 쓰는 이나 보는이나 그러한 착오를 범하지 않을가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마침 이날은 명상클럽을 개설해서부터 거이 두달동안거쳐 불교명상의 가장 기초적인 열가지명상의 소개를 마무리 하는 날이였다. 물론 말이 기초이지 사실은 모든 수행의 방법이 다 포함되는 방대한 량의 어마어마한 학문이다.  이 두달동안 명상클럽을 계기로 단지 개념정도의 수준으로 살짝 말만 꺼냈을뿐이다. 구체적으로 이 열가지를 해석하자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할지 나도 엄두를 못내겠다. 사실 기본적으로 머리에 개념이 서게 강의를 하자해도 적어서 석달은 걸려야 한다. 앞으로의 한달시간을 리용하여  이 열가지 명상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경전을 인용하면서 보다 심도깊게 해석하련다. 보탑에 문이 없듯이 명상을 배우는것도 특별한 문이 따로 없다. 모르는것은 물어봐야 알수있고 경전을 읽으면서 한쪽으로 부단히 사전등 도구를 뒤지면서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미묘한 문제는 스승이 제기하지않으면 그대로 두리뭉실넘어가기 쉬운데 참으로 명상공부를 하는데 가장 필요한게 선지식이라 하겠다. 경험있는자와의 대화는 굽은 길을 피면하여 직행할수가 있어 인생의 보귀한 시간을 절약하여 쓸데없는 고민에서 빨리 해탈할수가 있다.여기서 한가지 더 지적하고싶은 것은  열가지 기본 불교명상을 소개하며 있어서 순서가 거꾸로 되였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부처를 생각하는 명상이 가장 앞서 소개해야 할것을 제일 마지막에 놓았고 가장 마지막에  소개해야 할  호흡을 생각하는 명상을 결국은 제일 먼저 올려놓았다.  원인은 첫째는 많은 사람들이 불교 혹은 부처에 대한 오해를 피면하기 위해서이고 두번째는 명상에 관심없는 사람들이  혹 호기심에서라도 명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가 하는 노파심에서였다. 물론 명상을 접하고 않하고는 개개인의 인연에 따르겠지만 나 역시 인연의 한고리인만큼 신경을 쓰지 않을수가 없었으니 양해바란다. 그리고 한가지 가장 중요한점은 왜서 부처를 생각하는 명상을 제일 앞자리에 놓아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불자라면 대개 짐작은 가겠지만 불교를 접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잘 이해를 못할수가 있으니 여기서 잠간 시간을 들여 해석하련다.사람은 무엇을 배움에 있어서 그 사람의 첫 동기가 곧 그 사람의 꾸준함과 恒心를 결정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이 어떠한 일을 얼마 견지할수있는가에 따라 각자의 생각은 다른것이다. 처음 시작이 그저 한번 놀아보자는 사람이 있고 일생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앞의 사람은 해도 좋고 아니해도 좋으니 석달견지하기가 어렵고 뒤의 사람은 평생 견지할수가 있는것이다.  그리고 반년 1년 3년 10년을 견지하다가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런 말을 꺼내느냐 하면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여기 명상클럽에서 소개하는 명상을 제대로 확실하게 공부할수있기때문이다.  단지 그저 호기심으로 혹은 한번 놀아보자는 생각으로 들어오신 분이라면 한번 명상을 본인 인생의 문제로 곰곰히 사유하여 보시기를 부탁드린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 혹은 부처님이라 하면 우선 머리속에 종교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는 종교는 혹 미신적인사람들이나  우매한 사람들 그리고 할짓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일로만 생각하는데 참으로 떨어져도 십만팔천리 떨어졌고 시대의 락오자라해도 한심한 락오자라고 말하지 않을수가 없다. 물론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단지 무엇이나 이해할바에는 확실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이해하기를 바래서 이런 말을 한다. 미신이 무엇이냐 하면 무엇이나 두리뭉실하게 이해하고는 자기가 안다고 한다면 그게 곧 미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부처가 무엇이냐?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혹은 하나님하고는 어떠한 차별이 있으며 과학하고는 또한 어떠한 긴밀한 관계가  있는가?... 등등의 문제는 확실히 알고 넘어가야 불교명상을 바로 이해할수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그리고 부처란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부처에 대한 믿음과 신앙이 밑바탕이 되여야만 정확한 불교명상을 공부할수가 있는것이다.부처란 무엇인가는 앞으로도 부단히 제기할것이니 여기서는 간략하고 우선  불교란 무엇인가를 알아보자.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는데 한마디 게송으로 해석할수가 있다.즉: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행하라       스스로 그 뜻을 깨끗하게 하는 것       이것이 곧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다. 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教‘모든 악을 짓지 말라’는 것은 계행의 근본으로서 맑고 깨끗한 행이다.‘온갖 선을 행하라’는 것은 마음의 청정이다.‘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라’는 것은 그릇된 뒤바뀜을 버리는 것이다.‘이것이 곧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다’는 것은 어리석고 미혹한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諸惡莫作。戒具之禁。清白之行。諸善奉行。心意清淨。自淨其意。除邪顛倒。是諸佛教。去愚惑想혹 이 게송의 참뜻을 제대로 이해한 이라면  불교에대한 오해가 없을것이다. 오히려 훌륭한 사람이 될수있는 인간이라면 그 참뜻을 이해하고  부처에대한 존경과 공경 그리고 탄복이 일어날것이며 존중의 대상이 되고 본인 자체의 그릇된 생활방식을 송두리채 바꾸어 놀수도 있는 중요한 게기가  될수도 있을것이다. 불교명상은 바로 우리들의 지난 과거의 그릇된 생활방식을 알고 뉘우치여 바른 생활방식으로 바꾸어 나가 부처와 같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하여 가는 길이다...............................................열가지 불교명상을 수행하면 어떠한 공덕과 이익이 있는가?아래에 경전원문을 보자. 十.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열 가지 생각이 있다. 그것을 널리 분별하여 수행하면 욕심 세계의 욕망, 형상 세계의 욕망, 무형 세계의 욕망, 교만, 무명을 모두 끊을 것이다. 열 가지 생각이란 이른바 부처 생각, 법 생각,  비구 중 생각, 계율 생각,  보시 생각, 하늘 생각,  지관(止觀) 생각, 아나아파아나 생각, 몸 생각, 죽음 생각이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이른바 '어떤 중생으로서 이 열 가지 생각을 수행하면 욕심 세계의 욕망, 형상 세계의 욕망, 무형 세계의 욕망과 일체 무명과 교만을 모두 끊어 없앤다.'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五) 聞如是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有十念廣分別修行。盡斷欲愛.色愛.無色愛.憍慢.無明。云何為十。所謂念佛.念法.念比丘僧.念戒.念施.念天.念止觀.念安般.念身.念死。是謂。比丘。有眾生修行此十念者。盡斷欲愛.色愛.無色愛。一切無明.憍慢。皆悉除盡。如是。比丘。當作是學爾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열가지불교명상을 재차 마치며.... 본 명상클럽의 주제인 열가지 불교명상을 두차례거쳐 소개를 완성하였다. 두번째는 비교적 짧은 시간내에 (열흘동안 하루에 한가지씩) 조금 심도깊고 긴 경전들을 인용하여 소개하였는데 사실은 불학에 기초가 없거나 혹은 상세한 해석이 없이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이 점을  알면서도 굳이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원문들을 올린것은 앞으로의 명상공부를 조금 심도깊게 하고싶은 이들을 위한것이라 하겠다. 그런 이유에서  열흘간 진도를 빨렸는데 이해 못했거나 혹은 도무지 이해를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된다. 그저 이러이러한 내용이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기회가 되는대로 반복적으로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반복은 가장 좋은 학습임)앞에서 말했듯이 불학을 배우는데는 문이 따로 없으며 모르는것을 직접 사전을 찾아보거나 아는이한테 물어보면서 하나하나 배우는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경전이 아함경인데 현재 인용한 대부분의 경전은 모두 아함경에 속하는 경전들이다. (불학은 아함경부터 배운다는 말이 있다. 아함이 기초되지않으면 대승경전을 이해할수가 없으니깐.) 사실 명상이 인연되여 지금 불교경전과 불학까지 론하는데 비교적 낮은 차원의 명상(특히 생활명상의 여러종류-- 단순히 현대심리학적인 차원에서 기원된 여러 명상들...내가 현대심리학을 차원이 낮다고 하는얘기보다 경전적인 리론적근거가 옅은 많은 명상을 가리킴)을 원하는 이라면 앞부분에서 소개한  명상의 종류 란을 참고하시면 되니 굳이 불교경전을 읽으면서 명상공부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진정 내 마음속깊이 잠재된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위해서는 불교심리학이 필요하며 인생의 참뜻을 찾는데는 심도깊은 경전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을 위하여 현재 명상클럽카페를 만들어 놓았는데 리론적공부를 더 하고싶은 분들은 회원가입을 하시고 체계적인 명상공부(불교심리학공부)를 권고한다. (주소는http://cafe.daum.net/randeng)특히 근 열흘간내용이 이해가 않되는것은  잡아함경과 같은 리론적인 공부를 못했기때문에 그러하오니 잡아함경부터 읽어보시기를 부탁드리며 통속적으로 불교를 알고싶은 이들은 증일아함경(혹은 불교를 처음 접촉하는 이들에게 추천)이나 혹은 장아함경을 읽어보시기를 부탁드린다. 그 중 장아함경은 불교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기타 세속적인 외도설과 비겨서 서술한 경전이니 철학을 하시는 분들이나 학술적인 분들의 좋은 참고서가 된다. (이상의 경전들이 명상클럽카페내에 모두 있음)앞으로 본 명상클럽에서는  이상에 서술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리론들을 계속 경전원문을 인용하면서 해석할것이며  또한 초기목적인 열가지명상을 중심으로 계속 서술하겠다. 초기경전에 모두 40가지 명상주제가 있는데 기회가 되는대로 극력 40가지를 모두 소개하겠지만 열가지명상을 기본원칙으로 하겠다. 이 열가지를 상세하게 해석하다보면 결국은 40가지 뿐만아니라 모든 수행법까지 료해할수가 있다. 열가지불교명상의 공덕( 2007년 11월 23일 16시 54분 20초 )   NAME : 명상   |   HOME : http://cafe.daum.net/randeng VOTE : 13   |   HIT : 111   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바이샤알리의 원숭이 못 가에서 五백의 큰 비구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바루를 가지고 아아난다를 데리고 바이샤알리에 가서 걸식하셨다. 그 때에 바이샤알리에는 비라선이라는 큰 장자가 있었다. 그는 재물이 많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인색하고 탐욕스러워 보시할 마음은 조금도 없고 오직 과거에 지은 복만을 먹고 새 복은 짓지 않았다. 그는 많은 미녀들을 데리고 후궁에서 풍류를 잡히면서 즐겨 하고 있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그 거리로 가시어 아시면서도 일부러 아아난다에게 물으셨다. "지금 풍류 소리가 들리는 저 집은 어떤 집인가." 아아난다는 사뢰었다. "저것은 비라선 장자 집이옵니다." "저 장자는 지금부터 이레 뒤에는 목숨을 마치고 체곡(涕哭)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떳떳한 법으로서 한 뿌리를 끊은 사람은 목숨을 마친 뒤에는 모두 체곡 지옥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지금 저 장자는 과거에 지은 복은 이미 다하고 세 복은 짓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혹 어떤 인연으로서 저 장자로 하여금 이레 뒤에 목숨을 마치지 않게 할 수 있겠나이까." "목숨을 마치지 않게 할 인연은 없다. 과거에 지은 업이 이제 다했으니 그것은 면할 수 없느니라." "혹 어떤 방법으로 저 장자로 하여금 체곡 지옥에 들어가지 않게 할 수는 없나이까." "저 장자로 하여금 체곡 지옥에 들어가지 않게 할 방법은 있느니라." "어떤 방법이면 저 장자를 체곡 지옥에 들어가지 않게 하겠나이까." "만일 저 장자가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옷을 입고 집을 떠나 도를 배우면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제자 지금 가서 저 장자로 하여금 집을 떠나 도를 배우도록 하겠나이다." 아아난다는 곧 세존을 하직하고 그 장자 집으로 가서 문밖에 서 있었다. 그 때에 장자는 아아난다가 온 것을 보고 곧 나가 맞이해 앉기를 청하였다. 아아난다는 장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 일체 지혜를 가진 이에게 들었다. 그런데 여래께서는 '그대는 지금부터 이레 뒤에는 목숨을 마치고 체곡 지옥에 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장자는 그 말을 듣고 곧 두려운 생각이 들어 몸의 털이 모두 일어섰다. 그는 아아난다에게 말하였다. "혹 어떤 인연으로 이레 뒤에 목숨을 마치지 않을 수 있게 하겠습니까." "이레 뒤에 목숨을 마치지 않게 할 방법은 없느니라." "혹 어떤 인연으로 내가 목숨을 마친 뒤에 체곡 지옥에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 장자가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옷을 입고 집을 떠나 도를 배우면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그대는 지금 집을 떠나 도를 배우면 저쪽 언덕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장자는 말하였다. "아아난다님, 우선 먼저 가십시오. 저도 형편 따라 곧 갈 것입니다." 아아난다는 그를 내버려두고 곧 떠났다. 장자는 생각하였다. '이레라고 하였으니 아직 멀다. 나는 우선 다섯 가지 향락으로 즐기자. 그리고 집을 떠나 도를 배우자.' 아아난다는 그 이튿날 다시 장자 집으로 가서 그에게 말하였다. "하루가 지났으니 이제 엿새밖에 남지 않았다. 곧 집을 떠나라." 장자는 말하였다. "아아난다님, 우선 먼저 가십시오. 나도 형편 보아 곧 따라 갈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여전히 떠나지 않았다. 그 때에 아아난다는 이틀, 사흘 내지 엿새가 되어 장자 집으로 가서 그에게 말하였다. "곧 집을 떠나라. 후회해야 소용없을 것이다. 만일 집을 떠나지 않으면 목숨을 마친 뒤에는 곧 체곡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장자는 말하였다. "존자님, 우선 앞에 가십시오. 나도 형편 보아 곧 뒤를 따라 갈 것입니다." 아아난다는 말하였다. "장자는 무슨 신통으로 저기 갈 수 있기에 나를 먼저 가라고 하는가. 우리 같이 가자." 그 때에 아아난다는 그 장자를 데리고 세존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사뢰었다. "지금 이 장자는 집을 나와 도를 배우려고 하나이다. 원컨대 세존께서는 그로 하여금 수염과 머리를 깎고 도를 배우게 하소서." 부처님께서는 아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직접 그 장자를 제도하라." 아아난다는 부처님 분부를 받고 곧 장자의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옷을 입히고 바른 법을 배우게 하였다. 그 때에 아아난다는 그 비구에게 말하였다. "너는 생각하기를 수행하라. 즉 부처를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며 비구승을 생각하고 계율을 생각하며 보시를 생각하고 하늘을 생각하며 휴식을 생각하고 숨길을 생각하며 몸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이와 같은 법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열 가지를 생각하면 곧 큰 과보를 얻어 단 이슬 법의 맛을 얻는다는 것이니라." 그 때에 비라선은 이러한 법을 수행하고 그 날로 목숨을 마쳐 四천왕천에 났다. 아아난다는 곧 그를 화장하고 세존께 돌아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서서 세존께 사뢰었다. "아까 그 비라선 비구는 이제 목숨을 마쳤나이다. 어디 태어났나이까."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 비구는 목숨을 마치고 지금 四천왕천에 났느니라." "거기서 또 목숨을 마치면 어디서 나겠나이까." "거기서 목숨을 마치면 三十三천에 날 것이요, 다시 계속해서 야마천, 도솔천, 화자재천, 타화자재천에 날 것이요, 거기서 목숨을 마치면 다시 돌아 와 四천왕천에 날 것이다. 아아난다야, 이와 같이 비라선 비구는 일곱 번 천상, 인간을 돌아다니다가 최후로 사람의 몸을 얻고 집을 떠나 도를 배워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여래에게 믿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알아야 한다. 이 남섬부주 땅은 남북이 二만 一천 요오자나요, 동, 서가 七천 요오자나인데,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남섬부주 땅에 사는 사람들을 공양한다면 그 복을 많다고 하겠는가." 아아난다는 사뢰었다. "매우 많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중생이 소 젖을 짜는 동안이나 믿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고 열 가지 생각을 수행하면 그 복은 헤아릴 수 없어 헤아리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아난다야, 부디 방편을 구해 열 가지 생각을 닦도록 하라. 아아난다야,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아아난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다. (五)聞如是一時。佛在毘舍離獼猴池側。與大比丘眾五百人俱是時。世尊到時。著衣持鉢。及將阿難入毘舍離乞食。爾時。毘舍離城內有大長者名毘羅先。饒財多寶。不可稱計。然復慳貪無惠施之心。唯食宿福。更不造新。爾時。彼長者將諸婇女在後宮作倡伎樂。自相娛樂爾時。世尊往詣彼巷。知而問阿難曰。今聞作倡伎樂為是何家阿難白佛。是毘羅先長者家佛告阿難。此長者卻後七日命終。當生涕哭地獄中。所以然者。此是常法。若斷善根之人。命終之時。皆生涕哭地獄中。今此長者宿福已盡。更不造新阿難白佛言。頗有因緣使此長者七日不命終乎佛告阿難。無此因緣得不命終乎。昔所種行。今日已盡。此不可免阿難白佛。頗有方宜令此長者不生涕哭地獄乎佛告阿難。有此方宜可使長者不入地獄耳阿難白佛言。何等因緣使長者不入地獄佛告阿難。設此長者剃除鬚髮。著三法衣。出家學道者。便得免此罪也阿難白佛言。今我能使此長者出家學道爾時。阿難辭世尊已。往至彼長者家。在門外立。是時。長者遙見阿難來。即出奉迎。便請使坐。時。阿難語長者曰。今我是一切智人邊聞。然如來今記。汝身卻後七日當身壞命終。生涕哭地獄中長者聞已。即懷恐懼。衣毛皆豎。白阿難曰。頗有此因緣使七日之中不命終乎阿難告曰。無此因緣令七日中得免命終長者復白言。頗有因緣我今命終不生涕哭地獄中乎阿難告曰。世尊亦有此教。若當長者剃除鬚髮。著三法衣。出家學道者。便不入地獄中。汝今可宜出家學道。得到彼岸長者白言。阿難並在前去。我正爾當往是時。阿難便捨而去。長者便作是念。言七日者猶常為遠。吾今宜可五欲自娛樂。然後當出家學道。是時。阿難明日復至長者家。語長者曰。一日已過。餘有六日在。可時出家長者白言。阿難並在前。正爾當尋從然彼長者猶故不去。是時。阿難二日.三日。乃至六日至長者家。語長者曰。可時出家。後悔無及。設不出家者。今日命終。當生涕哭地獄中長者白阿難曰。尊者並在前。正爾當隨後阿難告曰。長者。今日以何神足至彼間。方言先遣吾耶。但今欲共一時俱往是時。阿難將此長者往至世尊所。到已。頭面禮足。白佛言。今此長者欲得出家學道。唯願如來當與剃除鬚髮。使得學道佛告阿難。汝今躬可度此長者是時。阿難受佛教敕。即時與長者剃除鬚髮。教令著三法衣。使學正法。是時。阿難教彼比丘曰。汝當念修行。念佛.念法.念比丘僧.念戒.念施.念天.念休息.念安般.念身.念死。當修行如是之法。是謂。比丘。行此十念者。便獲大果報。得甘露法味是時。毘羅先修行如是法已。即其日命終。生四天王中是時。阿難即闍維彼身。還至世尊所。頭面禮足。在一面立。爾時。阿難白世尊言。向者。比丘毘羅先者今已命終為生何處世尊告曰。今此比丘命終生四天王阿難白佛言。於彼命終當生何處世尊告曰。於彼命終當生三十三天。展轉生豔天.兜術天.化自在天.他化自在天。從彼命終復還來生。乃至四天王中。是謂。阿難。毘羅先比丘七變周旋天人之中。最後得人身。出家學道。當盡苦際。所以然者。斯於如來有信心故阿難當知。此閻浮提地南北二萬一千由旬。東西七千由旬。設有人供養閻浮里地人。其福為多不阿難白佛言。甚多。甚多。世尊。佛告阿難。若有眾生如[(殼-一)/牛]牛頃。信心不絕修行十念者。其福不可量。無有能量者。如是。阿難。當求方便。修行十念。如是。阿難。當作是學爾時。阿難聞佛所說。歡喜奉行       SITE : http://cafe.daum.net/randeng NAME : 바람 | 2007-11-26 명상님께서 들은적 있는데 퇴근후 다시 조용히 앉아 보니 새롭게 인식되는 점 있네요 고맙습니다. NAME : 명 상 | 2007-11-26 学而时习之 不亦说乎~ 공부중에 최고의 공부는 반복적인 학습임!
18    부처를 생각하는 명상 댓글:  조회:1907  추천:103  2007-11-11
  天上天下無如佛   十方世界亦無比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世間所有我盡見   一切無有如佛者  세간소유아진견     일체무유여불자   하늘 위나 하늘 아래 부처님 같은 이 없으며 시방세계에서도 또한 비교할 사람 없네. 세상에 있는 것을 내가 다 둘러보아도 그 무엇도 부처님 같은 이 없네. -『치문』 부처란 무엇인가? 참으로 한두마디로 어떻게 말할수없는 개념이다.세상에는 네가지 불가사이한 세계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 부처의 세계가 불가사이하다고 한다. 불가사이란 생각이나 언어로 표달할수없다는 말인데 세속적인 개념으로 몸 형상 지혜 삼매 본체 등등 여러 각도에서 정의할수는 있다. 하지만 진정 부처만이 부처를 알아볼수있다니 우리가 부처가 되기전에는 부처를 알수없는것이다.  부처를 생각하는 명상이란 우리도 부처님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기위한 명상으로서 또한 세상에서 오직 이 길만이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될수있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그렇다면 부처님을 생각하는 명상이란 무엇인가?아래에 경전원문을 보자.一.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의 제다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한 법을 닦아 행하고 한 법을 널리 펴야 한다. 한 법을 닦아 행하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果報)를 성취하여 온갖 선(善)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無爲處]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에 이르러 스스로 열반을 얻을 것이다. 어떤 것을 한 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부처를 생각하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부처 생각을 닦아 행하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를 성취하여,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게 되는가.” 그 때에 비구들은 세존께 사뢰었다. “모든 법의 근본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이옵니다. 원컨대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위하여 그 묘한 이치를 말씀하여 주소서. 저희들은 여래에게서 그것을 듣고는 꼭 받들어 가지겠나이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나는 너희들을 위해 널리 해설하리라.” “그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은 앞으로 나아가 듣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혹 어떤 비구는 몸과 뜻을 바루고 가부(跏趺)하고 앉아, 생각을 매어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부처를 생각한다.여래의 형상을 관(觀)하여 눈을 떼는 일이 없고 눈을 떼지 않고는 곧 여래의 공덕을 생각한다. ‘여래의 본체(本體)는 금강(金剛)으로 되었고 열 가지 힘을 완전히 갖추었으며 네 가지 두려움이 없어 대중 앞에서 의젓하시다. 여래의 얼굴은 단정하기 짝이 없어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계율의 덕을 성취한 것은 마치 금강과 같아서 부술 수 없고 티가 없어 청정하기는 마치 유리와 같다. 또 여래의 삼매는 일찍 줄어진 일이 없다. 아주 쉬고 길이 고요하여 다른 생각이 없다. 교만하고 사나운 모든 뜻은 담박하게 되었고,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과 망설임과 젠체하는 번뇌는 모두 다 없어졌다. 여래의 지혜의 몸은, 그 지혜는 끝도 밑도 없으며 걸림도 없다. 여래의 몸은 해탈을 성취하여 모든 갈래가 이미 다해 다시 태어나는 일, 즉 나는 나고 죽음에 떨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일이 없다. 여래의 몸은 지견(知見)의 성(城)을 넘고 남의 성질을 알아 제도할 것과 제도하지 못할 것을 따라 행하며,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고 돌아다니고 가고 오면서, 나고 죽는 지음에서 해탈하는 이와 해탈하지 못하는 이를 모두 두루 아신다.’ 이것이 이른바 ‘부처 생각을 닦아 행하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를 성취하여, 온갖 선은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는다’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항상 생각해 부처 생각에서 떠나지 않으면 곧 이런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廣演品第三    (一)  聞如是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告諸比丘。當修行一法。當廣布一法。已修行一法。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逮沙門果。自致涅槃。云何為一法。所謂念佛 佛告諸比丘。云何修行念佛。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獲沙門果。自致涅槃 爾時。諸比丘白世尊曰。諸法之本。如來所說。唯願世尊為諸比丘說此妙義。諸比丘從如來聞已。便當受持 爾時。世尊告諸比丘。諦聽。諦聽。善思念之。吾當為汝廣分別之答曰。如是。世尊。諸比丘前受教已 世尊告曰。若有比丘正身正意。結跏趺坐。繫念在前。無有他想。專精念佛。觀如來形。未曾離目。已不離目。便念如來功德。如來體者。金剛所成。十力具長。四無所畏。在眾勇健。如來顏貌。端正無雙。視之無厭。戒德成就。猶如金剛。而不可毀。清淨無瑕。亦如琉璃。如來三昧。未始有減。已息永寂。而無他念。憍慢強梁。諸情憺怕。欲意.恚想.愚惑之心.猶豫網結。皆悉除盡。如來慧身。智無崖底。無所罣礙。如來身者。解脫成就。諸趣已盡。無復生分。言。我當更墮於生死。如來身者。度知見城。知他人根。應度不度。此死生彼。周旋往來生死之際。有解脫者。無解脫者。皆具知之。是謂修行念佛。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獲沙門果。自致涅槃。是故。諸比丘。常當思惟。不離佛念。便當獲此諸善功德。如是。諸比丘。當作是學爾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17    재가수행자의 본보기--난제파라 도사 63.비바릉기경(婆陵耆經) 댓글:  조회:1956  추천:91  2007-11-09
한문출처 : 중화전자불전협회(中華電子佛典協會:CBETA)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국역출처 : 동국역경원 전자불전연구소 한글대장경---------------------------------------------------------------------------------------------63)비바릉기경( 婆陵耆經) 제 6 [초 1일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살라국(拘薩羅國)에 유행하셨다. 그 때 세존께서 큰 비구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도중에서 빙그레 웃으셨다. 존자 아난은 세존께서 웃으시는 것을 보고 부처님께 합장하고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웃으십니까? 모든 부처님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는 아무 인연 없이 함부로 웃으시지 않습니다. 무슨 뜻으로 웃으셨는지 듣고자 합니다." 그 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 곳은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여기 앉아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셨던 곳이다." 아난은 곧 거기에 자리를 펴고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옵건대 세존께서도 여기 앉으셔서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이 곳은 두 분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설법하신 곳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세존께서 곧 그곳에서 아난이 편 자리에 앉으셔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 곳에는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의 강당이 있었다.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는 그 강당 안에 앉아서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셨다. 아난아, 이 곳에는 옛날에 비바릉기( 婆陵耆)라는 마을이 있었다. 지극히 풍성하고 안락한 곳이어서 많은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 아난아, 비바릉기 마을에는 범지(梵志)인 큰 장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 장자의 이름은 무에(無?)라고 하였다. 대단히 큰 부자였으므로 재산이 한량없이 많았고, 목축 산업도 이루 다 계산할 수 없었으며, 여러 가지 봉호(封戶)와 식읍(食邑)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아난아, 저 범지 큰 장자 무에에게는 우다라마납(優多羅摩納)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부모의 자랑거리였다. 청정하게 태어났으며 7세(世) 동안 다른 종족(種族)을 죽이지 않았으며, 대대로 악한 일이 없었다. 그는 총지(總持)를 널리 듣고 네 종류의 전경(典經 : 吠陀)을 외우고, 인연(因緣 : 語彙) 정문(正文 : 儀軌) 희(戱 : 字源) 오구설(五句說 : 物語)에 깊이 통달하였다. 아난아, 우다라 동자에게는 좋은 벗이 있었는데, 난제파라(難提波羅)라고 하는 도사(陶師)였다. 항상 우다라 동자의 사랑을 받아 기쁘게 대하고 싫어하지 않았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비구승에 귀의하여 3존(尊)을 의심하지 않았고 고(苦) 집(集) 멸(滅) 도(道)에 대하여 의혹을 가지지 않았으며, 믿음을 얻고 계를 지키며 널리 듣고 은혜로 베풀며 지혜를 성취하였다. 살생을 여의고 살생을 끊어 칼과 몽둥이를 버리고, 제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남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었고 자비심이 있었으며 일체 중생은 물론 나아가 곤충에 이르기까지도 다 유익함을 주었다. 그는 살생에 대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주지 않는 것 가지는 일을 여의었고, 주지 않는 것 가지기를 끊었으며, 주는 것만 가지고 주는 것만 가지기를 좋아하였다. 항상 보시하기를 좋아하였고 아낌없이 베풀고는 즐거워하였으며, 보시하고도 그에 대한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았으니, 그는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범행이 아닌 것을 여의었고 범행이 아닌 것을 끊었으며, 범행을 부지런히 닦고 묘행을 부지런히 힘쓰며,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탐욕을 여의고 음욕을 끊었으니, 그는 범행이 아닌 것에 대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난제파라 도사는 거짓말을 여의고 거짓말을 끊었으며, 진실한 이치만을 말하고 진실한 이치만을 좋아하며, 진실한 이치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고, 일체가 다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였고 세상을 속이지 않았다. 그는 거짓말에 대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이간하는 말을 여의었고 이간하는 말을 끊었으며, 이간하지 않는 말만 실천하고 남을 파괴하지 않았으며, 여기서 들은 말을 저기 가서 말하여 이쪽을 파괴하려 하지 않고, 저기서 들은 말을 여기 와서 말하여 저쪽을 파괴하려 하지 않았다. 갈라진 것은 화합시키려 하였고 화합하면 기뻐하였으며, 당파를 만들지 않고 당파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당파를 거론하지 않았으니, 그는 이간하는 말에 대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거친 말을 여의고 거친 말을 끊었다. 만일 말씨가 거칠고 모질면 그런 악한 소리는 귀에 거슬려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으며, 사람을 괴롭게 하고 안정을 얻지 못하게 한다. 이와 같은 말은 끊어야 한다. 만일 말이 맑고 온화하고 부드러우면 귀에도 순하고 마음에도 들어, 기뻐할 만하고 사랑할 만하며 남으로 하여금 안락하게 한다. 말과 음성이 갖추어지고 분명하여 남들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남들로 하여금 안정을 얻게 한다.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그는 거친 말에 대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꾸밈말을 여의고 꾸밈말을 끊었으며, 때에 맞는 말, 진실한 말, 법다운 말, 뜻있는 말, 멈추어 쉬게 하는 말[止息說], 멈추어 쉬기를 좋아하는 말만 하였으며, 일은 때를 따라 형편에 맞추고, 잘 가르치고 잘 꾸짖었으니, 그는 꾸밈말에 대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살아가는 방법[治生]을 모색하는 일을 여의고 살아가는 방법 모색하는 일을 끊었으며, 저울[稱]이나 말[斗]과 섬[斛]을 버리고 재물 받기를 거절해 남을 속박하지 않았으며, 말이나 되 깎는 일을 바라지 않고 조그만 이익으로 남을 속이지 않았으니, 그는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에 대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과부나 동녀 받는 것을 여의고 과부나 동녀 받기를 끊었으니, 그는 과부나 동녀를 받는 일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난제파라 도사는 노비 받기를 여의고 노비 받기를 끊었으니, 그는 노비를 받는 일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코끼리 말 소 염소 받기를 여의고 코끼리 말 소 염소 받기를 끊었으니, 그는 코끼리 말 소 염소 받는 일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닭이나 돼지 받기를 여의고 닭이나 돼지 받기를 끊었으니, 그는 닭이나 돼지를 받는 일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밭이나 점포 받기를 여의고 밭이나 점포 받기를 끊었으니, 그는 밭이나 점포 받는 일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난제파라 도사는 벼나 보리나 콩 받기를 여의고 벼나 보리나 콩 받기를 끊었으니, 그는 벼나 보리나 콩을 받는 일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술을 여의고 술을 끊었으니, 그는 술을 마시는 일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높고 넓은 큰 평상을 여의고 높고 넓은 큰 평상을 끊었으니, 그는 높고 넓은 큰 평상에 대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난제파라 도사는 화만(華?) 영락(瓔珞) 바르는 향 연지 분을 여의고 화만 영락 바르는 향 연지 분을 끊었으니, 그는 화만 영락 바르는 향 연지 분에 대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난제파라 도사는 노래 춤 기생 유람 광대놀이를 여의고 노래 춤 기생 유람 광대놀이를 끊었으니, 그는 노래 춤 기생 유람 광대놀이에 대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생색상보(生色像寶 : 金) 받기를 여의고 생색상보를 받기를 끊었으니, 그는 생색상보를 받는 일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난제파라 도사는 점심때가 지나서 음식 먹는 일을 여의고 점심때가 지나서 음식 먹는 일을 끊었으며, 항상 하루 한 끼만 먹고 밤이나 공부할 때에는 먹지 않았으니, 그는 점심때를 지나서 음식 먹는 일에 대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한평생 손에서 가래[?]를 놓아 스스로 땅을 파지도 않았고 남을 시켜 파게 하지도 않았다. 만일 물 가에 무너진 흙이나 쥐가 파낸 흙이 있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질그릇을 만들어 한쪽에 놓아두고, 사러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완두콩이나 벼나 보리나 크고 작은 마두(麻豆)나 비두( 豆)나 겨자가 있거든, 그것을 쏟아 놓고 그 그릇을 마음대로 가져 가라'고 하였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한평생 부모를 공양해 모셨다. 부모가 볼 수 없어서 오직 사람을 쳐다보기만 하였으므로 그 부모를 봉양하고 섬겼다. 아난아, 난제파라 도사는 밤이 지나고 이른 새벽이 되면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에게 나아가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는 그를 위해 설법하셔서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고 기쁨을 성취하게 하셨다. 한량없는 방편으로 그를 위해 설법하여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고 기쁨을 성취하게 한 뒤에는 잠자코 계셨다. 아난아, 그 때 난제파라 도사는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그를 위해 설법하셔서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고, 기쁨을 성취하게 하시자, 곧 자리에서 일어나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의 발에 예배한 뒤 그 부처님을 세 바퀴 돌고 물러갔다. 그 때에 우다라 동자는 흰 마차를 타고 5백 동자와 함께 밤이 지나고 이른 아침이 되자 비바릉기( 婆陵耆) 마을을 나가서 한 무사처(無事處 : 수행처)에 이르러, 몇 나라에서 온 제자들에게 범지서(梵志書)를 읽게 하였다. 이 때에 우다라 동자는 멀리서 난제파라 도사가 오는 것을 보고 곧 그에게 물었다. '난제파라여, 그대는 어디서 오는가?' '나는 지금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에게 공양하고 예를 올린 다음 이리로 오는 중이다. 우다라여, 너도 나와 함께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에게 나아가 공양하고 예로써 섬겨야 할 것이다.' 그러자 우다라 동자가 대답하였다. '난제파라여, 나는 그 까까머리 사문은 보고 싶지도 않다. 까까머리 사문은 아마 도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도란 얻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난제파라 도사는 우다라 동자의 머리채를 잡아 수레에서 끌어내렸다. 우다라 동자는 곧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난제파라 도사는 평상시 남을 조롱하지도 않았다. 미치지도 않았고 어리석지도 않은데 지금 내 머리채를 잡아 끌었으니, 틀림없이 무슨 까닭이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한 뒤에 그에게 말하였다. '난제파라여, 내가 당신을 따라 가겠다. 내가 당신을 따라 가겠다.' 난제파라가 기뻐하면서 다시 말하였다. '간다면 오죽 좋으랴.' 이에 난제파라 도사는 우다라 동자와 함께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에게 나아가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 난제파라 도사가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에게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우다라 동자는 바로 제 벗입니다. 그는 언제나 나를 보고 좋아하고, 항상 나를 보고 기뻐하며, 조금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존에 대하여 믿고 공경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세존께서는 그를 위해 잘 설법하셔서 그를 기쁘게 하고, 믿고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게 해 주소서.' 이 때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는 난제파라 도사와 우다라 동자를 위해 설법하셔서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시고, 기쁨을 성취하게 하셨다. 한량없는 방편으로 그를 위해 설법하셔서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시고, 기쁨을 성취하게 한 뒤에는 잠자코 계셨다. 이에 난제파라 도사와 우다라 동자는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그들을 위해 설법하셔서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고 기쁨을 성취하게 하시자, 곧 자리에서 일어나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의 발에 예배하고 그 부처님을 세 바퀴 돌고는 물러갔다. 이 때에 우다라 동자는 얼마쯤 걸어가다가 난제파라에게 물었다. '난제파라여, 너는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으로부터 이렇게 미묘한 법을 얻어 듣고서도, 무슨 생각에 집에 머문 채 집을 떠나 거룩한 도를 배우지 않는가?' 그러자 난제파라 도사가 대답하였다. '우다라여, 너는 알고 있으리라. 나는 한평생 부모를 공양해야 한다. 우리 부모는 앞을 볼 수 없어서 다만 사람을 쳐다보기만 하신다. 나는 그 때문에 부모를 봉양해 모셔야 한다.' 우다라 동자가 난제파라에게 물었다. '난제파라여, 나도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을 따라 집을 나가 도를 배울 수 있으며, 구족계를 받고 비구가 되어 범행을 닦을 수 있겠는가?' 이에 난제파라 도사와 우다라 동자는 곧 거기서 다시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에게 나아가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 난제파라 도사가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우다라 동자가 얼마쯤 걸어가다가 저에게 (난제파라여, 너는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으로부터 이렇게 미묘한 법을 얻어 듣고서도 무슨 생각에 집에 머문 채 집을 떠나 거룩한 도를 배우지 않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에게 (나는 평생 동안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 우리 부모는 앞을 볼 수가 없어서 다만 사람을 쳐다보기만 하신다. 나는 부모를 봉양해 모셔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다라는 다시 저에게 (난제파라여, 나도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을 따라 집을 나가 도를 배울 수 있으며, 구족계를 받고 비구가 되어 범행을 닦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저 사람을 제도하셔서 출가하여 도를 배우게 하시고, 구족계를 주셔서 비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는 난제파라를 위하여 잠자코 받아 주셨다. 이에 난제파라 도사는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잠자코 받아 주심을 알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그 부처님을 세 바퀴 돌고나서 물러갔다. 이에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는 난제파라가 떠난 지 오래지 않아 우다라 동자를 제도하여 출가하여 도를 배우게 하고 구족계를 주셨다. 출가하여 도를 배우게 하고, 구족계를 주신 뒤에 비바릉기( 婆陵耆) 마을에서 며칠을 함께 머물다가 옷과 발우를 챙겨 가지고 큰 비구들과 함께 가사국(迦私國)의 읍인 바라내(波羅)로 가시려고 하였다. 계속 유행하여 곧 가사국 바라내에 이르렀다. 바라내시의 선인이 사는 곳인 녹야원(鹿野園)에 노니셨다. 이 때에 협비왕(頰 王)은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가사국에 유행하시면서 큰 비구들과 함께 이 바라내읍 선인이 살고 있는 곳인 녹야원에 오셨다는 말을 들었다. 협비왕은 그 말을 들은 뒤에 어자(御者)에게 말하였다. '너는 수레를 준비하라. 내가 지금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계신 곳으로 가고자 한다.' 어자는 왕의 분부를 받고 곧 수레를 준비한 뒤에 돌아와 왕에게 아뢰었다. '이미 좋은 수레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천왕의 뜻대로 하소서.' 이에 협비왕은 좋은 수레를 타고 바라내를 나와 선인이 사는 곳인 녹야원으로 갔다. 때에 협비왕은 멀리 숲사이로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의 얼굴이 단정하고 아름다워 마치 별 가운데 달과 같고, 빛나고 밝고 환하기가 금산(金山)과 같으며, 상호가 구족(具足)하고 위신(威神)이 당랑하며, 모든 감각기관은 고요하고 안정되어 아무 장애가 없고, 조어(調御)를 성취하였고, 마음이 쉬어 고요하고 잠잠한 모습을 보았다. 그것을 본 뒤에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 협비왕이 한쪽에 앉자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는 그를 위해 설법하셔서 마음을 내게 하고 간절히 우러르게 하였으며, 성취하여 기뻐하게 하셨다. 한량없는 방편으로 그를 위해 설법하셔서 마음을 내게 하고 간절히 우러르게 하며, 성취하여 기뻐하게 한 뒤에는 잠자코 앉아 계셨다. 이에 협비왕은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그를 위해 설법하셔서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고, 기쁨을 성취하게 하시자, 곧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합장한 채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 여쭈었다.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저의 청을 분명하게 받아 주십시오. 비구 대중들도 또한 받아 주십시오.'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는 협비왕을 위하여 잠자코 그 청을 받아 주셨다. 이에 협비왕은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잠자코 그 청을 받아 주시는 것을 알고는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그 부처님의 주위를 세 바퀴 돌고나서 물러갔다. 그는 집에 돌아가 밤에 매우 맛있고 깨끗하고 미묘한 여러 가지 음식을 풍성하게 준비하게 하였는데 곧 그 밤으로 다 장만하게 하고는 이른 아침에 상을 차려 놓고 청하였다. '세존이시여, 이제 때가 되었고 음식도 다 준비되었습니다. 원하옵건대 세존께서는 때를 맞추어 오시기 바랍니다.' 이에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는 밤이 지나고 이른 아침이 되자,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모든 비구들을 데리고 협비왕의 집으로 가셨다. 세존께서는 비구들 윗자리에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이에 협비왕은 부처님과 비구들이 앉으신 것을 보고는 직접 손 씻을 물을 돌리고, 매우 맛있고 깨끗하고 미묘한 여러 가지 음식을 손수 풍성하게 차려 한껏 공양하게 하였다. 공양이 끝나자 그릇을 거두고 손 씻을 물을 돌린 뒤에, 작은 평상을 가지고 와서 따로 앉아 법을 들었다. 협비왕이 앉자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는 그를 위해 설법하셔서,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시고, 기쁨을 성취하게 하셨다. 한량없는 방편으로 그를 위해 설법하셔서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고, 기쁨을 성취하게 하신 뒤에 잠자코 앉아 계셨다. 이에 협비왕은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그를 위해 설법하셔서,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고 기쁨을 성취하게 하시자, 곧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드러내고 합장하고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 여쭈었다.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이 바라내에서 나를 위해 여름 안거를 받아 주십시오. 비구들께서도 또한 받아 주십시오. 나는 세존을 위하여 방 5백과 침구 5백을 만들고, 또 구집(拘執)과 이렇게 하얀 멥쌀과 왕이 먹는 여러 가지 음식도 보시하여 세존과 비구들을 공양하고자 합니다.'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협비왕에게 말씀하셨다. '그만 두시오, 그만 두시오. 대왕이여, 다만 마음에 만족하고 기쁘면 그만입니다.' 협비왕은 이렇게 두 번 세 번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에게 합장하고 아뢰었다.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이 바라내에서 나를 위해 여름 안거를 받아 주소서. 또 비구들께서도 받아 주십시오. 나는 세존을 위하여 방 5백과 침구 5백을 만들고, 또 구집과 이와 같이 하얀 멥쌀과 왕이 먹는 여러 가지 음식도 보시하여 세존과 비구들을 공양하고자 합니다.'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도 또한 두 번 세 번 협비왕에게 말씀하셨다.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대왕이여, 다만 마음이 만족하고 기쁘면 그만입니다.' 이에 협비왕은 하고 싶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자 마음이 매우 슬퍼졌다.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는 나를 위하여 이 바라내에서 여름 안거를 받을 수 없다 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한 뒤에 협비왕은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속가에 살고 있는 속인으로서 세존을 받들어 섬기기를 나와 같이 하는 사람이 또 있나이까?'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협비왕에게 말씀하셨다. '있습니다. 왕의 경계에 있는 비바릉기( 婆陵耆) 마을은 지극히 풍요롭고 안락하여 많은 백성들이 살고 있습니다. 대왕이여, 그 비바릉기 마을에 난제파라라는 도사(陶師)가 있습니다. 난제파라 도사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또 비구 대중에게 귀의하여, 삼보를 의심하지 않고, 괴로움 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도 의혹을 품지 않으며, 믿음을 얻어 계율을 지키고, 널리 듣고 은혜로 베풀며, 지혜를 성취하였습니다. 살생을 여의고 살생을 끊어 칼과 몽둥이를 버리고, 제자신에 대해서나 남에 대하여 부끄러워함이 있고 자비심이 있으며, 일체 중생들과 나아가 저 곤충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요익하게 하고 있으니, 그는 살생에 대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주지 않는 것 가지기를 여의고 주지 않는 것 가지기를 끊어, 주면 가지고 주어야 가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항상 보시하기를 좋아하고 아낌없이 주기를 좋아하며,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았으니, 그는 주지 않는 것 가지는 것에 대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범행이 아닌 것을 여의고 범행이 아닌 것을 끊어 범행을 부지런히 닦고 묘행을 부지런히 힘쓰며,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탐욕을 여의고 음욕을 끊었으니, 그는 범행이 아닌 일에 대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거짓말을 여의고 거짓말을 끊어 진실한 이치만을 말하고 진실한 진리만을 좋아하며, 진실한 진리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아, 일체 중생이 다 믿게 하고 세상 사람을 속이지 않으니, 그는 거짓말에 대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이간하는 말을 여의고 이간하는 말을 끊어, 이간하지 않는 말만 실천하여 남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들은 것을 저기 가서 말하여 이쪽을 파괴하려 하지도 않고, 저기에서 들은 것을 여기 와서 말하여 저쪽을 파괴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갈라진 것을 화합하게 하려고 애 쓰고, 서로 화합하면 기뻐하며, 당파를 만들지 않고 당파를 좋아하지도 않으며, 당파를 칭송하지도 않으니, 그는 이간하는 말에 대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거친 말을 여의고 거친 말을 끊었습니다. 만일 말의 내용이 거칠거나 말이 악하여 귀에 거슬리면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 사람을 괴롭게 하고 안정을 얻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말은 끊어 버리며, 만일 하는 말이 맑고 온화하고 부드러우면 귀에도 순하고 마음에도 들어, 기뻐할 만하고 좋아할 만하여 남으로 하여금 안락하게 하며, 말과 음성이 다 같이 유쾌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안정을 얻게 합니다. 이와 같이 설하여 말하니, 그는 거친 말에 대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꾸밈말을 여의고 꾸밈말을 끊어, 때에 맞는 말, 진실한 말, 법다운 말, 뜻 있는 말, 다툼을 여의는 말, 다툼을 여의기를 좋아하는 말만 하며, 일은 때를 따라 형편에 맞추고 잘 가르치고 잘 꾸짖으니, 그는 꾸밈말에 대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살아가는 방법[治生]을 모색하는 일을 여의고 살아가는 방법 모색하는 일을 끊어, 저울과 말과 섬 따위를 버렸으며, 재물 받기를 거절하고 남을 속박하지 않으며, 말이나 되질할 적에 깎아 내리기를 바라지 않고 조그만 이익으로 남을 속이지 않았으니, 그는 살아가는 방법 모색하는 일에 대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과부나 동녀 받기를 여의고 과부나 동녀 받기를 끊었으니, 그는 과부나 동녀를 받는 데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노비 받기를 여의고 노비 받기를 끊었으니, 그는 노비를 받는 데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닭이나 돼지 받기를 여의고 닭이나 돼지 받기를 끊었으니, 그는 닭이나 돼지 받는 데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밭이나 점포 받기를 끊었으니, 그는 밭이나 점포 받는 일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벼나 보리나 콩 받기를 여의고 벼나 보리나 콩 받기를 끊었으니, 그는 벼나 보리나 콩을 받는 데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술을 여의고 술을 끊었으니, 그는 술을 마시는 데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난제파라 도사는 높고 넓고 큰 평상을 여의고 높고 넓고 큰 평상을 끊었으니, 그는 높고 넓고 큰 평상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화만 영락 바르는 향 연지 분을 여의고 화만 영락 바르는 향 연지 분을 끊었으니, 그는 화만 영락 바르는 향 연지 분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난제파라 도사는 노래 춤 기생 유람 광대놀이를 여의고 노래 춤 기생 유람 광대놀이를 끊었으니, 그는 노래 춤 기생 유람 광대놀이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생색상보(生色像寶 : 金) 받기를 여의고 생색상보 받기를 끊었으니, 그는 생색상보를 받는 데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난제파라 도사는 점심식사 때가 지나서 먹는 음식[過中食]을 여의고 점심식사 때가 지나서 먹는 음식을 끊었으며, 항상 하루에 한 끼니만 식사를 하고, 밤이나 공부할 때에는 먹지 않으니, 그는 점심식사 때가 지나서 먹는 음식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한평생 가래[?]를 놓아, 스스로 땅을 파지도 않았고 남을 시켜 파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만일 물가에 무너져내린 흙이나 쥐가 파헤친 흙이 있으면, 그것을 가져다 질그릇을 만들어 한쪽에 놓아두고, 그 그릇을 사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너희들이 만일 완두콩이나 보리나, 크고 작은 마두(麻豆)나 비두( 豆)나 겨자가 있거든, 그것을 쏟아 놓고 가져가고 싶은 그릇을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말했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한평생 동안 부모를 봉양해 모셨습니다. 그의 부모는 앞을 보지 못해서 다만 사람을 쳐다보기만 하였으므로 봉양해 모셨습니다. 대왕이여, 나는 옛날 비바릉기 마을에서 살았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왕이여, 나는 그 때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비바릉기 마을으로 들어가 밥을 빌었습니다. 차례로 밥을 빌면서 가다가 난제파라 도사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난제파라는 볼 일이 있어서 집을 나가고 없었습니다. 대왕이여, 나는 난제파라 도사의 부모에게 (장로 도사는 지금 어디 갔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세존이시여, 시자는 볼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가고 없습니다. 선서시여, 시자는 조그마한 볼 일이 있어 잠깐 나가고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조리 안에는 보리밥이 있고, 솥 안에는 콩국이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세존께서는 저희들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시어 마음대로 가져가소서) 하고 대답했습니다. 대왕이여, 나는 곧 울단왈법(鬱單曰法)을 따라, 곧 조리와 가마 안에 있는 국과 밥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뒤에 난제파라 도사가 돌아와 조리 안의 밥이 줄어들고 가마 안의 국이 줄어진 것을 보고, 부모에게 (누가 국과 밥을 가져갔습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부모는 (아들아, 오늘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여기 와서 밥을 빌다가 저 조리와 가마 안에 있는 국과 밥을 가져 가셨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난제파라 도사는 그 말을 듣고 곧 (나에게 좋은 이익이 있을 것이요, 내가 큰 공덕을 지었다.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마음대로 음식을 가져가셨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로 인해 기뻐하면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마음을 고요히 하여 잠자코 있은 지 7일이나 지나갔다. 그렇게 한 지 15일이 되자 큰 환락을 얻었습니다. 그 집의 부모도 또한 7일 안에 큰 환락을 얻었습니다. 또 대왕이여, 나는 옛날 비바릉기 마을에서 유행하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왕이여, 나는 그 때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비바릉기 마을에 들어가 밥을 빌었습니다. 차례로 밥을 빌다가 난제파라 도사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난제파라 도사는 작은 볼 일이 있어 집을 나가고 없었습니다. 대왕이여, 나는 난제파라의 부모에게 (장로 도사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세존이시여, 시자는 작은 볼 일이 있어 잠깐 나가고 없습니다. 선서시여, 시자는 작은 볼 일이 있어 잠깐 나가고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큰 가마 안에는 멥쌀밥이 있고 작은 가마 안에는 국이 있습니다. 오직 바라옵건대 세존께서는 저희들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셔서 마음대로 가져가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대왕이여, 나는 곧 울단왈법을 따라, 크고 작은 가마 안에서 국과 밥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뒤에 난제파라 도사가 집에 돌아와 큰 가마 안의 밥이 줄어들고 작은 가마 안의 국이 줄어든 것을 보고, 부모에게 (누가 큰 가마 안에서 밥을 가져갔고 작은 가마 안에서 국을 가져갔습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부모는 (아들아, 오늘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여기 와서 밥을 빌다가, 저 크고 작은 가마 안에서 국과 밥을 가지고 가셨다)고 대답했습니다. 난제파라 도사는 이 말을 듣고, 곧 (나에게 좋은 이익이 있을 것이며, 나는 큰 공덕을 지었다.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마음대로 음식을 가져가셨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이로 인해 기뻐하면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마음을 쉬고 잠자코 있은 지 7일이나 되었다. 그렇게 한 지 15일 만에 환락을 얻었고, 그 집의 부모도 또한 7일 안에 환락을 얻었습니다. 다시 또 대왕이여, 나는 옛날 비바릉기 마을에서 여름 안거를 지낸 일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때 새로 집을 지어 기와를 덮지 않았었고, 난제파라 도사의 집은 낡은 기와를 헐어내고 새 기와로 지붕을 덮은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때 시자 비구들에게 (너희들은 난제파라 도사의 집에 가서 묵은 기와를 헐어 그 기와를 가지고 와서 우리 집을 덮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시자 비구들은 곧 내가 시킨 대로 난제파라 도사의 집으로 가서 묵은 기와를 헐어 묶음으로 묶어 가지고 와서 우리 집을 덮었습니다. 난제파라 도사의 부모는 묵은 기와를 헐어낸다는 말을 듣고는 (누가 난제파라의 묵은 기와집을 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비구들은 (장로여, 우리들은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의 시자 비구들입니다. 난제파라 도사의 묵은 기와집을 헐어 그 기와를 묶음으로 만들어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의 집을 덮으려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난제파라 부모는 (여러분, 마음대로 가지고 가십시오.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뒤에 난제파라 도사가 집에 돌아와서 묵은 기와집이 헐린 것을 보고 부모에게 (누가 우리 묵은 기와집을 헐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부모는 (아들아, 오늘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의 시자 비구들이 묵은 기와집을 헐어 그 기와를 묶음으로 만들어 가지고 가서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의 집을 덮는다고 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난제파라 도사는 이 말을 듣고는 곧 (나에게 좋은 이익이 있을 것이고 내가 큰 공덕을 지었다.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우리 집에서 마음대로 기와를 가져가셨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기뻐하면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마음을 쉬고 잠자코 있은 지 7일이나 되었다. 그렇게 한 지 15일 만에 환락을 얻었고, 그 집 부모도 또한 7일 안에 환락을 얻었습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의 묵은 기와집 때문에 여름 4개월을 마치는 동안 조금도 집이 새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난제파라 도사는 참지 못하는 일이 없고 불평하는 일이 없었으며, 마음에 걱정과 슬픔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우리 집에서 마음대로 자재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대왕이여, 그런데 당신은 억제할 수도 없고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마음으로 매우 걱정하고 슬퍼합니다. 그래서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내 청을 받아 이 바라내에서 여름 안거를 받지 않으시고, 비구 대중도 또한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에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는 협비왕(頰 王)을 위해 설법하셔서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고 기쁨을 성취하게 하셨다. 한량없는 방편으로 그를 위해 설법하셔서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고, 기쁨을 성취하게 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셨습니다. 때에 협비왕은 가섭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 떠나신 지 오래지 않아 곧 시자에게 명령하였다. '너희들은 5백 대의 수레에 흰 멥쌀과 왕이 먹는 여러 가지 음식을 가득히 싣고, 난제파라 도사의 집에 가서 그에게 (난제파라여, 이 5백 대의 수레에는 흰 멥쌀과 왕이 먹는 여러 가지 음식이 가득히 실려 있습니다. 협비왕이 보내어 당신에게 주라고 한 것입니다. 부디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어 이제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말하라.' 때에 그 시자는 왕의 분부를 받고 나서, 5백 대의 수레에 흰 멥쌀과 왕이 먹는 여러 가지 음식을 가득 싣고 난제파라 도사의 집에 가서, '난제파라 도사여, 이 5백 대 수레에는 흰 멥쌀과 왕이 먹는 여러 가지 음식이 가득히 실려 있습니다. 이것은 협비왕이 당신에게 보내 드리는 것이니, 부디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이것을 받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 때에 난제파라 도사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리고 시자에게 '여러분, 협비왕은 나라가 커서 일도 많고 써야 할 경비도 많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받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 때의 동자 우다라를 너는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느냐?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마땅히 알라. 그 때의 그는 곧 지금의 나이다. 아난아, 나는 그 때에 내 자신도 요익했고 남을 요익하게 하였으며, 많은 사람을 요익하게 하였고 세상을 가엾이 여겼으며, 하늘을 위하고 사람을 위하여, 이치와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는 법을 설하여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고, 최상의 경지인 백정(白淨)에도 이르지 못했으며, 범행을 마치지 못하였다. 그 때에는 남 죽음 늙음 병 울음 걱정 슬픔을 여의지 못했고, 일체의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난아, 나는 이제 세상에 출현하여 여래 무소착 등정각 명행성위(明行成爲) 선서 세간해 무상사 도법어(道法御) 천인사 불중우(佛衆祐)라고 불리고 있다. 나는 이제 내 자신도 요익하고 남도 요익하게 하며, 많은 사람을 요익하게 하고 세상을 가엾이 여기며, 하늘을 위하고 사람을 위하여 이치와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한다. 나는 이제 법을 설하여 최후의 경지에 이르렀고, 백정을 마치고 범행을 마쳤다. 나는 이제는 남 늙음 병 죽음 울음 걱정 슬픔을 여의었고, 나는 이제는 일체의 괴로움을 벗어나게 되었느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존자 아난과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16    성스러운 대중이란.. 16)가람경(伽藍經) 댓글:  조회:1856  추천:108  2007-11-07
16)가람경(伽藍經) 제 6 [초 1일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가람원(伽藍園)을 유행하실 적에 큰 비구 대중과 함께 기사자(?舍子)에 이르러 그 마을의 북쪽에 있는 시섭화림(尸攝林)에 계셨다. 그 때 기사자 가람에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사문 구담(瞿曇)은 석가 종족의 아들로서 석가 종족을 버리고 출가하여 학도(學道)가 되어 가람원에서 큰 비구 대중들과 함께 이 기사자에 와서 이 마을 북쪽에 있는 시섭화림에 계신다. 그 사문 구담에게는 큰 명칭이 있어 그 명칭이 시방(十方)에 널리 퍼졌다. 사문 구담은 여래(如來) 무소착(無所着) 등정각(等正覺) 명행성위(明行成爲)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도법어(道法御) 천인사(天人師) 불중우(佛衆祐)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 세상의 하늘[天] 악마[魔] 범(梵) 사문(沙門) 범지(梵志) 등 인간에서 천상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알고[自知] 스스로 깨닫고[自覺] 스스로 증득[自作證]하여 성취하신 자유자재하신 분이시다. 그가 만일 설법하면 그것은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며 마지막도 또한 훌륭하신 데다 이치마저 분명하고 문채도 있으며, 청정을 구족하고 범행을 나타내신다. 만일 여래 무소착 등정각을 뵙고 그를 존경하고 예배하며 공양하고 받들어 섬긴다면 좋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도 마땅히 다 같이 가서 사문 구담을 뵙고 예로써 섬기고 공양하자." 기사자의 가람에 있던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각각 그 무리들과 권속들을 데리고 기사자에서 나가 북쪽으로 가서 시섭화림에 이르렀다. 그리고 세존을 뵙고 예로써 섬기고 공양하고자 하여 부처님을 찾아갔다. 그 가람 사람들은 어떤 이들은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한 뒤에 한쪽에 물러가 앉고, 어떤 이들은 부처님의 안부를 물은 뒤에 한쪽에 물러가 앉으며, 어떤 이들은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한 뒤에 한쪽에 물러가 앉고, 혹은 멀리서 부처님을 바라본 뒤에 아무말 없이 앉기도 하였다. 그렇게 가람 사람들이 저마다 앉고 나서 조용해지자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설법하시어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고 기쁨을 성취하게 하셨다. 한량없는 방편으로써 그들을 위해 설법하시어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고, 기쁨을 성취하게 하신 뒤에 잠자코 계셨다. 그 때 가람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설법하시어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고 기쁨을 성취하게 하시자 각각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의 옷을 벗어 메고 합장한 채 부처님을 향해 여쭈었다. "구담이시여, 어떤 사문 범지는 가람에 와서 다만 스스로 자기가 아는 것과 본 것만을 자랑하고 남이 아는 것과 본 것에 대해서는 헐뜯었습니다. 구담이시여, 또 어떤 사문 범지는 가람에 와서 또한 제 자신이 아는 것과 본 것만을 자랑하고 남이 아는 것과 본 것에 대해서는 헐뜯었습니다. 구담이시여, 저희들은 그 말을 듣고 문득 '이 사문 범지는 어떤 것을 진실이라 하고, 어떤 것을 거짓이라 하는가?' 하는 의혹이 생겼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가람 사람들아, 너희들은 의혹을 내지 말라. 왜냐 하면 의혹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곧 우물쭈물 망설임이 생기기 때문이니라. 가람 사람들아, 너희들은 스스로 깨끗한 지혜가 없으면서 후세(後世)가 있다고도 하고 후세가 없다고도 한다. 가람 사람들아, 너희들은 또한 깨끗한 지혜가 없으면서 한 일이 죄가 된다고도 하고 한 일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도 한다.  가람 사람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업(業)은 본래부터 있었던 세 가지 인습(因習)이란 것이 있다. 어떤 것을 세 가지라 하는가? (伽藍。當知諸業有三因。習.本.有。何云爲三。) 가람 사람들아, 이른바 탐욕이 곧 모든 업의 본래부터 있었던 인습이다. 가람 사람들아, 성냄[?]과 어리석음[癡]도 곧 모든 업의 본래부터 있었던 인습이다.   가람 사람들아, 탐하는 사람은 탐욕에 덮이게 되어 마음으로 싫어하거나 만족할 줄 모른다. 그래서 생물을 죽이거나 주지 않는 것을 취하며, 혹은 삿된 음행[邪淫]을 행하거나 제 자신이 알고 있으면서 거짓말을 하기도 하며, 혹은 술을 마시기도 한다. 가람 사람들아, 성내는 사람은 성냄에 덮이게 되어 마음으로 싫어하거나 만족할 줄 모른다. 그래서 생물을 죽이거나 주지 않는 것을 취하며, 혹은 삿된 음행을 행하거나 제 자신은 알고 있으면서 거짓말을 하기도 하며, 혹은 술을 마시기도 한다. 가람 사람들아,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음에 덮이게 되어 마음으로 싫어하거나 만족할 줄 모른다. 그래서 생물을 죽이거나 주지 않는 것을 취하기도 하며, 혹은 삿된 음행을 행하거나 제 자신은 알고 있으면서 거짓말을 하기도 하며 혹은 술을 마시기도 한다. 가람 사람들아,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살생을 여의고 살생을 끊어 칼과 몽둥이를 버리고, 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도 있고 남에 대한 부끄러움도 있으며, 또한 자비스런 마음이 있어 일체 중생은 물론 나아가 곤충까지도 이익되게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살생에 대해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낸다.   가람 사람들아,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을 여의고, 주지 않는 것 취하는 것을 끊어, 주는 것만 곧 취하고 주는 것만 즐겨 취한다. 항상 보시하기를 좋아하고, 기뻐하여 아낌이 없으며 그러면서도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는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그런 마음을 깨끗이 씻어낸다. 가람 사람들아,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범행이 아닌 것을 여의고, 범행이 아닌 것을 끊어 범행(梵行)을 부지런히 닦고 묘행(妙行)에 열심히 힘쓰며,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음욕을 여의고 음행을 끊는다. 이와 같이 그는 범행이 아닌 그런 마음을 깨끗이 씻어낸다. 가람 사람들아,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거짓말을 여의고 거짓말을 끊어 진실하게 말하고 진실한 말을 즐기며 진실한 말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아 일체 중생들에게 믿음을 주고 세상을 속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그런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내느니라. 가람 사람들아,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이간하는 말[兩舌]을 여의고 이간하는 말을 끊어 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아 남의 화합을 깨뜨리지 않는다. 이쪽에서 들은 것을 저쪽에 말해 이쪽을 파괴하려 하지 않으며, 저쪽에서 들은 것을 이쪽에 말해 저쪽을 파괴하려 하지 않는다. 갈라진 사람들을 화합시키고 화합하면 기뻐하며, 당파를 만들지 않고 당파를 즐기지 않으며 당파를 찬양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는 이간하는 말을 하는 그런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낸다. 가람 사람들아,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추한 말을 여의고 추한 말을 끊는다. 만일 어떤 이의 말에 대하여 그 말씨가 추악하여 그 말소리가 귀에 거슬리면, 대중들은 기뻐하지 않고 대중들은 좋아하지 않아 남으로 하여금 괴롭게 하여 안정을 얻지 못하게 하므로 기어이 이러한 말을 끊어 버리느니라. 만일 어떤 이의 말이 맑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윤택하여 듣기에 좋고 마음에 들면, 기뻐할 만하고 사랑할 만하며 남으로 하여금 안락하게 하며, 말씨와 말소리가 고르고 분명하여 남으로 하여금 두렵게 하지 않고 남으로 하여금 안정을 얻게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추한 말을 하는 그런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낸다. 가람 사람들아,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꾸미는 말을 여의고 꾸미는 말을 끊어 시기에 맞는 적절한 말[時說]만 하고, 진실된 말[眞說]만 하며, 법에 합당한 말[法說]을 하고, 이치에 맞는 말[義說]을 하며, 고통이 사라지는[止息] 말을 하고, 고통이 사라지게 하는 말을 즐거워하며, 하는 일이 때를 거스르지 않아 적절함을 얻게 하고 잘 가르치고 잘 꾸짖는다. 이와 같이 그는 꾸미는 말을 하는 그런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낸다. 가람 사람들아,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탐욕[貪伺]을 여의고 탐욕을 끊어 마음에 다툼을 품지 않아 남의 재물과 모든 생활 도구를 보고도 탐욕을 일으켜 나의 소득이 되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같이 그는 탐욕에 대한 그런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낸다. 가람 사람들아,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성냄을 여의고 성냄을 끊어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도 있고 남에 대한 부끄러움도 있으며, 또한 자비스러운 마음이 있어 일체 중생은 물론 나아가 곤충에 이르기까지도 이익 되게 한다. 이와 같이 그는 미워하고 성냄에 대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낸다. 가람 사람들아,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삿된 견해를 여의고 삿된 견해를 끊어 바른 견해만 행함으로써 뒤바뀌지 않아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 '보시가 있고 재(齋)가 있으며, 주문[呪說]도 있고 선악의 업에 대한 과보도 있으며, 이 세상[此世]과 저 세상[彼世]이 있고, 아비가 있고 어미가 있으며, 세상에는 참된 사람[眞人]이 있어 좋은 곳에 이르고, 이 세상에서 잘 떠나 저 세상으로 잘 향하며,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으며 스스로 증득하고 성취하여 노닌다.' 이같이 그는 삿된 견해에 대해서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낸다. 가람 사람들아,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이처럼 몸이 짓는 깨끗한 업을 성취하고, 입과 뜻이 짓는 깨끗한 업을 성취한다. 성냄을 여의고 다툼을 여의며, 잠[睡眠]을 없애고 명성에 대한 욕심이나 뽐냄이 없으며, 의심을 끊고 교만을 버리며,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가 있고 어리석음이 없다. 그의 마음은 자애로움[慈]을 구족하여 1방(方)에 두루 차서 성취하여 노닌다. 이와 같이 2 3 4방과 4유(維)와 상하 어느 곳이나 모두 두루하게 된다. 그 마음은 자애로움을 구족하여 맺힘[結]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으며, 지극히 넓고 매우 크며 한량없이 잘 닦아 일체 세간에 두루 차서 성취하여 노닌다. 이와 같이 슬픈 마음과 기쁜 마음도 또한 그러하며, 또 그 마음은 평정한 마음과 함께하므로 맺힘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으며, 지극히 넓고 매우 크며 한량없이 닦아 일체 세간에 두루 차서 성취하여 노니느니라. 가람 사람들아, 이와 같이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마음에 맺힘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어 문득 네 가지 편안하게 머물 곳[四安隱住處]을 얻는다.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있고, 선악의 업보(業報)가 있다. 나는 이 바른 견해와 서로 호응하는 업을 받아 지니고 구족함을 얻었으니,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면 반드시 좋은 곳에 가게 될 것이고 나아가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한다. 가람 사람들아, 이와 같이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마음에 맺힘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첫 번째 편안하게 머물 곳을 얻었다는 것이니라. 다시 가람 사람들아,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으며, 선악의 업보도 없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나는 현재 세계에서 이것 때문에 남의 비방을 받지 않는다. 다만 바른 지혜를 가진 사람은 칭찬할 것이고, 정진하는 사람과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그게 사실이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가람 사람들아, 이와 같아서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마음에 맺힘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두 번째 편안하게 머물 곳을 얻었다는 것이니라. 다시 가람 사람들아, '만일 지어야 할 일이 있다면 반드시 악한 것은 짓지 않아야 하리니 나는 악을 짓는 일은 생각지도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스스로 악을 짓지 않았는데 무엇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이 생기겠는가'라고 말한다. 가람 사람들아, 이와 같이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마음에 맺힘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나니, 이것이 이른바 세 번째 편안하게 머물 곳을 얻었다는 것이니라. 다시 가람 사람들아, '만일 지어야 할 일이 있다면 반드시 악한 것은 짓지 않아야 한다. 나는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것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을 다 범하지 않는다. 항상 모든 세상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겨 내 마음은 중생과 더불어 다투지 않고 혼탁해지지[濁] 않아 기쁘고 즐겁다'고 말한다. 가람 사람들아, 이와 같이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마음에 맺힘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나니, 이것이 이른바 네 번째 편안하게 머물 곳을 얻었다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가람 사람들아,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마음에 맺힘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다. 이것이 이른바 네 가지 편안하게 머물 곳을 얻었다는 것이니라." 가람 사람들이 세존께 여쭈었다. "그렇다면 구담이시여,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如是。瞿曇。多聞聖弟子... -- 그렇습니다. 구담이시여,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제자는 ....)마음에 맺힘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어 네 가지 편안하게 머물 곳을 얻겠습니다. 네 가지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있고, 선악의 업보가 있다. 나는 이 바른 견해와 서로 호응하는 업을 받아 지니고 구족함을 얻었으니,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면 반드시 좋은 곳에 가게 될 것이고, 나아가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구담이시여,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마음에 맺힘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첫 번째 편안하게 머물 곳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구담이시여,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으며, 선악의 업보도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현재 세상에서 이것 때문에 남의 비방을 받지 않는다. 다만 바른 지혜를 가진 사람은 칭찬할 것이고, 정진하는 사람과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그게 사실이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구담이시여,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마음에 맺힘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두 번째 편안하게 머물 곳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구담이시여, '만일 지어야 할 일이 있다면 반드시 악한 일은 짓지 않아야 하니, 나는 악을 짓는 일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스스로 악한 일을 짓지 않았는데 무엇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이 생기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구담이시여,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마음에 맺힘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나니, 이것이 이른바 세 번째 편안하게 머물 곳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구담이시여, '만일 지어야 할 일이 있다면 반드시 악한 일은 짓지 않아야 한다. 나는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것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다 범하지 않는다. 항상 모든 세상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겨 내 마음은 중생과 더불어 다투지 않고 혼탁해지지 않아 기쁘고 즐겁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구담이시여,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마음에 맺힘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나니, 이것이 이른바 네 번째 편안하게 머물 곳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담이시여,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마음에 맺힘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네 가지 편안하게 머물 곳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구담이시여, 저희들은 이미 알았습니다. 선서(善逝)시여, 저희들은 이미 이해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다 스스로 부처님과 법과 비구스님께 귀의합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세존께서는 제가 우바새(優婆塞)가 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저는 오늘부터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스스로 귀의하여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가람 사람들과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15    성스러운 대중을 생각하는 명상 댓글:  조회:1640  추천:93  2007-11-07
참으로 이 세상에는 여래의 거룩한 제자처럼 훌륭한 이가  더 없다.그들을 항상 생각한다는것은 바로 우리자신도 모든 결함과 번뇌와 고뇌로부터 벗어나 그들처럼 세상에 더 없는 성스런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어릴때부터 우리는 커서 무엇이 무엇이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어른이 되였다. 내가 커서 어떤 사람이되고 누구를 본받아야되겠다고 생각하여 그 위인의 사적을 읽고 따라배우다보면 우리는 자연히 그러한 사람이 되는것이였다. 그러니 현재의 자신은 어릴때 우리의 꿈의 결과였다. 미래를 알고자 하면 현재에 무엇을 하고있는가를 보고 과거를 알겠으면 현재에 받고있는 업을 보라는 말이있듯이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가 만들었고 미래의 나는 기필고 오늘의 나가 만들것이다.성스런대중을 믿고 생각한다는것은 인과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서 행하는것이다. 그렇다면 여래의 거룩한 제자란 어떠한 사람을 가리키는가? 불교경전란에 올린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多聞聖弟子)-- 16)가람경(伽藍經) 을 읽어보시기를 권유한다.아래에 성스러운 대중을 생각하는 명상을 보자三.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한 법을 닦아 행하고 한 법을 널리 펴야 한다. 한 법을 닦아 행하고 널리 펴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果報)를 성취하여,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에 이르러 스스로 열반을 얻을 것이다. 어떤 것을 한 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중(성스러운 대중)을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중 생각을 닦아 행하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게 되는가.” 그 때에 비구들은 세존께 사뢰었다. “모든 법의 근본은 여래의 말씀하신 것이옵니다. 원컨대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위하여 그 묘한 이치를 말씀하여 주소서. 저희들은 여래에게서 그것을 듣고는 꼭 받들어 가지겠나이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나는 너희들을 위해 널리 해설하리라.” “그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은 앞으로 나아가 듣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혹 어떤 비구는 몸과 뜻을 바로 하고 가부하고 앉아, 생각을 매어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중을 생각한다. 즉 ‘여래의 거룩한 중들은 착한 업을 성취하여 질박하고 곧은 이치를 따르며 삿된 업이 없고, 위 아래가 화목하여 법과 법을 성취한다. 여래의 거룩한 중들은 계율을 성취하고 삼매와 지혜와 해탈과 해탈지견을 성취한다. 거룩한 중이란 이른바 사쌍팔배(四雙八輩)다.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성스러운 중으로서 공경하고 예배하고 순종하기에 알맞은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세상의 복밭이기 때문이다. 이 대중들도 다 동일한 그릇으로서 자기도 건지고 남도 건져 주어 삼승(三乘)의 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업을 성스러운 중이라 한다’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이른바 ‘만일 중을 생각하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항상 생각해 중 생각에서 떠나지 않으면 곧 이런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三) 聞如是 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告諸比丘。當修行一法。當廣布一法。修行一法已。便有名譽。成大功德。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逮沙門果。自致涅槃。云何為一法。所謂念僧(如來聖眾) 佛告諸比丘。云何修行念僧。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獲沙門果。自致涅槃 爾時。諸比丘白世尊曰。諸法之本。如來所說。唯願世尊為諸比丘說此妙義。諸比丘從如來聞已。便當受持 爾時。世尊告諸比丘。諦聽。諦聽。善思念之。吾當為汝廣分別說 對曰。如是。世尊。諸比丘前受教已 世尊告曰。若有比丘正身正意。結跏趺坐。繫念在前。無有他想。專精念眾。如來聖眾。善業成就。質直順義。無有邪業。上下和穆。法法成就。如來聖眾。戒成就。三昧成就。智慧成就。解脫成就。度知見成就。 聖眾者。所謂四雙八輩。是謂如來聖眾。應當恭敬。承事禮順。所以然者。是世福田故。於此眾中。皆同一器。亦以自度。復度他人至三乘道。如此之業名曰聖眾。是謂。諸比丘。若念僧者。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逮沙門果。自致涅槃。是故。諸比丘。常當思惟。不離僧念。便當獲此諸善功德。如是。諸比丘。當作是學 爾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14    법을 생각하는 명상 댓글:  조회:1740  추천:106  2007-11-03
법은 방편으로서 우리에게 우리자신의 신심문제를 해결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몸에 병이 있으면 병원으로 가야 하겠지만 마음의 병은  법으로 치료해야 하며 법을 안다면 자신이 가장 훌륭한 의사가 될수있는것이다. 또한 몸의 병은 결국 마음으로 인한것이니 마음의 병을 치료할수있다면 몸의 병도 문제가 없다고 할수있겠다. 석가모니부처는 열반에 들기전에 마지막으로 중요한 유언을 남겼는데 곧 "부처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때 수행하는 사람은 사람을 의거하지 말고 법에 의거하라." 하셨다.  (너희들은 '자기[自]를 섬으로 삼아 자기를 의지하고, 법(法)을 섬으로 삼아 법을 의지하며, 다른 것을 섬으로 삼지 말고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법은 경전속에 담겨져있으며 경전은 성현들의 지혜가 파뭍힌 문화유산으로서 우리에게 수많은 값진 보물들을 제공해주는 보물창고이다. 이 보물창고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유용한 법들을 얻을수가 있다.훌륭한 스승을 만나지 못했을때 경전은  우리의 훌륭한 스승이 되며 특별히 현대인에게있어서 더욱 간절히 필요한게  경전독송이다..... 법을 생각한다는 것은 곧 번뇌의 근본원인인 애욕을 없애고 마음의 매듭을 풀어주는 방법을 사유하여 자신의 몸으로 직접 實修實證하여 우리들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8만4천 방편이 있는데 우리는 자신의 신심정황에따라 부동한 법을 선택하여 마음의 병을 치유할수가 있다.  본 클럽에 올리는 열가지기본명상은 곧 법을 생각하는 명상이며 이 열가지명상을 중심으로 올리는 여러경전을 공부하는것도 법을 생각하는 명상이라 하겠다.아래에 경전속의 법을 생각하는 명상을 보자.二.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한 법을 닦아 행하고 한 법을 널리 펴야 한다. 한 법을 닦아 행하고 널리 펴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果報)를 성취하여,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에 이르러 스스로 열반을 얻을 것이다. 어떤 것을 한 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법을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법 생각을 닦아 행하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게 되는가.” 그 때에 비구들은 세존께 사뢰었다. “모든 법의 근본은 여래의 말씀하신 것이옵니다. 원컨대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위하여 그 묘한 이치를 말씀하여 주소서. 저희들은 여래에게서 그것을 듣고는 꼭 받들어 가지겠나이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나는 너희들을 위해 널리 해설하리라.” “그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은 앞으로 나아가 듣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비구가 몸과 뜻을 바로 하고 가부하고 앉아, 생각을 매어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법을 생각하면, 욕심 세계의 모든 탐욕을 버리고 번뇌가 없어 간절한 욕망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개 바른 법이란 탐욕에서 탐욕이 없는 데에 이르고, 모든 결박과 덮개의 병을 떠나는 것이다. 그 법은 마치 온갖 향기와 같아서 어떤 티나 어지러운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비구가 법 생각하기를 닦아 행하면 곧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은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는다’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항상 생각해 법 생각에서 떠나지 않으면 곧 이런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二) 聞如是 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告諸比丘。當修行一法。當廣布一法。修行.廣布一法已。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逮沙門果。自致涅槃。云何為一法。所謂念法 佛告諸比丘。 云何修行念法。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獲沙門果。自致涅槃 爾時。諸比丘白世尊曰。諸法之本。如來所說。唯願世尊為諸比丘說此妙義。諸比丘從如來聞已。便當受持 爾時。世尊告諸比丘。諦聽。諦聽。善思念之。吾當為汝廣分別說 對曰。如是。世尊。諸比丘前受教已 佛告之曰。若有比丘正身正意。結跏趺坐。繫念在前。無有他想。專精念法。除諸欲愛。無有塵勞。渴愛之心。永不復興。夫正法者。於欲至無欲。離諸結縛.諸蓋之病。此法猶如眾香之氣。無有瑕疵亂想之念。 是謂。比丘。修行念法者。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逮沙門果。自致涅槃。 是故。諸比丘。常當思惟。不離法念。便當獲此諸善功德。 如是。諸比丘。當作是學 爾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13    사자(獅子)의 위풍 댓글:  조회:1731  추천:114  2007-11-01
어느 때 세존께서 왕사성을 유행하실 때 바위산에 계셨다. 이 때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누울 때 마땅히 사자가 눕는 법처럼 그렇게 누우라.' 아난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짐승의 왕인 사자가 눕는 법은 어떤 것입니까?' 세존께서 대답하셨다. '아난아, 짐승의 왕인 사자는 낮에는 먹이를 찾아다니다가 다니기를 마치면 굴로 들어간다. 만일 자려고 할 때에는 발은 포개고 꼬리는 펴서 뒤에 두며, 오른쪽으로 눕는다. 밤이 지나고 이른 아침이 되면 제 몸을 돌아본다. 짐승의 왕 사자는 몸이 바르지 못한 것을 보면, 곧 언짢아하고, 그 몸이 모두 바른 것을 보면 곧 기뻐한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굴을 나오는데 굴 밖으로 나와서는 기지개를 켜며 으르렁거리고 기지개를 켜고 으르렁거린 다음에는 제 자신의 몸을 살펴보며, 제 몸을 살펴본 뒤에는 사방을 바라보고, 사방을 바라본 뒤에는 두세 번 포효하며, 두세 번 포효한 뒤에는 먹이를 구하러 간다. 짐승의 왕인 사자가 눕는 법은 이와 같다.' 존자 아난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짐승의 왕 사자가 눕는 법이 그와 같다면, 비구가 눕는 법은 마땅히 어떠해야 합니까?' 세존께서 대답하셨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마을을 의지하고 살면서, 밤이 지나고 이른 아침이 되면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마을에 들어가 밥을 빌어야 하는데 그 때에 몸을 잘 보호해 가지고 모든 감관[根]을 거두어 지키며, 바른 생각을 지녀야 한다. 그렇게 하여 마을에서 밥을 빌어 식사를 마친 뒤에는 가사와 발우를 거두어 챙기고, 손과 발을 씻고 니사단(尼師檀)을 어깨에 걸치고 일 없는 곳으로 간다. 혹 나무 밑이나 빈집에 들어가 혹은 거닐거나 좌선하기도 하며 마음 속에 온갖 장애 되는 법을 깨끗이 버린다. 낮에도 혹 거닐거나 좌선하여 마음 속의 모든 장애 되는 법을 깨끗이 버리고, 또 초저녁에도 거닐거나 좌선하여 마음 속의 온갖 장애 되는 법을 깨끗이 버린다. 초저녁에 거닐거나 좌선하여 마음 속의 온갖 장애 되는 법을 깨끗이 버린 뒤, 한밤[中夜]에는 방에 들어가 눕는다. 우다라승(優?邏僧 : 울다라승)을 네 겹으로 접어 평상에 펴고, 승가리(僧伽梨)를 접어 베개를 만들고, 오른쪽으로 누워 발을 포개며, 마음은 명상(明相) 바른 생각 바른 지혜 항념기상(恒念起想)에 매어 둔다. 그리고 새벽 무렵에는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거닐거나 좌선하며 마음 속의 장애 되는 법을 깨끗이 버린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비구가 사자처럼 눕는 법이니라.' 존자 아난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그런 것이 비구가 사자처럼 눕는 법이옵니다.' 一時。世尊遊王舍城。在巖山中。是時。世尊告曰。阿難。汝臥當如師子臥法 尊者阿難白曰。世尊。獸王師子臥法云何 世尊答曰。阿難。獸王師子晝為食行。行已入窟。若欲眠時。足足相累。伸尾在後。右脅而臥。過夜平旦。回顧視身。若獸王師子身體不正。見已不喜。若獸王師子其身周正。見已便喜。彼若臥起。從窟而出。出已頻呻。頻呻已自觀身體。自觀身已四顧而望。四顧望已便再三吼。再三吼已便行求食。獸王師子臥法如是 尊者阿難白曰。世尊。獸王師子臥法如是。比丘臥法當復云何 世尊答曰。阿難。若比丘依村邑。過夜平旦。著衣持鉢。入村乞食。善護持身。守攝諸根。立於正念。彼從村邑乞食已竟。收舉衣鉢。澡洗手足。以尼師檀著於肩上。至無事處。或至樹下。或空室中。或經行。或坐禪。淨除心中諸障礙法。晝或經行或坐禪。淨除心中諸障礙已。復於初夜或經行。或坐禪。淨除心中諸障礙法。於初夜時。或經行。或坐禪。淨除心中諸障礙已。於中夜時。入室欲臥。四疊優哆邏僧敷著床上。襞僧伽梨作枕。右脅而臥。足足相累。意係明相。正念正智。恒念起想。彼後夜時速從臥起。或經行。或坐禪。淨除心中諸障礙法。如是比丘師子臥法 尊者阿難白曰。世尊。如是比丘師子臥法
12    계율를 생각하는 명상 댓글:  조회:1806  추천:105  2007-10-29
戒란 무엇인가?  글자풀이를 해보면 계는 바자굽에 창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다시말해서 무엇인가 접근을 못하게 창칼을 치켜들고 엄숙하게 지킨다는 뜻이 되겠다. 율이란 자아절제로 대중의 화합을 위하여 지켜야 하는 규칙을 가리킨다. 사람이란 해야될 일과 하지말아야 할 일이있다. 어릴때부터 우리는 부모님들한테서 잘못한 일로 수많은 꾸중을 들으면서 자랐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미워서가 아니라 훌륭한 인간이 되라는 가르침이였다.계란 바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향하는 지켜야할 도덕수양이다. 국가에는 국가의 법이 있고 가족에는 가족의 법이 있듯이 한 사람이 덕이 있고 수양이 있는 훌륭한 인간이 되기위해서는 그리고 대중의 화합과 이익을 위해서는 꼭 지켜야 할 사항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계율이며 그것을 반복적으로 사유하고 자신의 몸에 정착시킴으로 계율을 생각하는 명상이 되는 것이다. 계율을 가지는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의경에서 계율을 지켜야할 의미를 잘 설명했다.(불교경전란에 있음)계가 있는 사람은 보는 사람마다 기뻐하고 반길것일거요 계가 없는 사람은  누구나  싫어하고 멀리보기만해도  피할것이니 무엇인가 지켜야할줄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인간관계에서 장애만 있을것이요 남의 손각락질만 받을 것이다. 때문에 계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수있는 길상병이라고 비유한다. 계가 있으므로 법이 있으며 계가 있으므로 또한 모든 법을 성취할수가 있다.아래에 경전속의 계를 생각하는 명상을 보자.四.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한 법을 닦아 행하고 한 법을 널리 펴야 한다. 한 법을 닦아 행하고 널리 펴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果報)를 성취하여,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에 이르러 스스로 열반을 얻을 것이다. 어떤 것을 한 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계율을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계율 생각을 닦아 행하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게 되는가.” 그 때에 비구들은 세존께 사뢰었다. “모든 법의 근본은 여래의 말씀하신 것이옵니다. 원컨대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위하여 그 묘한 이치를 말씀하여 주소서. 저희들은 여래에게서 그것을 듣고는 꼭 받들어 가지겠나이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나는 너희들을 위해 널리 해설하리라.” “그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은 앞으로 나아가 듣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혹 어떤 비구는 몸과 마음을 바루고 가부하고 앉아 생각을 매어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계율을 생각한다. 즉 ‘이른바 계율은 모든 악을 그치게 하기 때문에 능히 도를 이루고 사람을 즐겁게 한다. 계율을 몸을 꾸며 좋은 모양을 나타낸다. 대개 계율은 길상병(吉祥甁)과 같아서 소원을 곧 성취시킨다. 모든 도품(道品)의 법은 다 계율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계율을 가지면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는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항상 생각해 계율 생각에서 떠나지 않으면 곧 이런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四)聞如是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當修行一法。當廣布一法。修行一法已。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逮沙門果。自致涅槃。云何為一法。所謂念戒佛告諸比丘。云何修行念戒。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獲沙門果。自致涅槃爾時。諸比丘白世尊曰。諸法之本。如來所說。唯願世尊為諸比丘說此妙義。諸比丘從如來聞已。便當受持爾時。世尊告諸比丘。諦聽。諦聽。善思念之。吾當為汝廣分別說諸比丘對曰。如是。世尊。諸比丘前受教已世尊告曰。若有比丘正身正意。結跏趺坐。繫念在前。無有他想。專精念戒。所謂戒者。息諸惡故。戒能成道。令人歡喜。戒纓絡身。現眾好故。夫禁戒者。猶吉祥瓶。所願便剋。諸道品法。皆由戒成。如是。比丘。行禁戒者。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獲沙門果。自致涅槃。是故。諸比丘。常當思惟。不離戒念。便當獲此諸善功德。如是。諸比丘。當作是學爾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11    73)천경(天經)-나는 어떻게 하늘을 알았는가? 댓글:  조회:1762  추천:92  2007-10-22
73)천경(天經)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지제수(枝提瘦)에 유행하실 적에 수저림(水渚林)에 계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전에 미처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無上正眞道]를 깨닫지 못하였을 때에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이렇게 하여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지게 해야 하겠다.' 나는 지견(智見)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말미암아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저 하늘들과 함께 모이지 못하여 서로 문안하지 못하였고, 서로 논설(論說)하지도 못하였으며, 서로 답변하지 못하였었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이제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위로하며, 서로 논설하고 답변하며, 이렇게 하여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지게 해야 하겠다.' 나는 지견이 지극히 밝고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인하여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였다. 그러나, 나는 저 하늘들이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이제 내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아서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져야 하겠다.' 나는 내 지견이 지극히 밝고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말미암아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으며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하였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차라리 내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으며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아서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져야 하겠다.' 나는 내 지견이 지극히 밝고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말미암아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하여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았다. 그러나, 나는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는 알아내지 못하였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차라리 내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은 무엇이며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하여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명이 다하는가를 알아서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져야 하겠다.' 나는 내 지견이 밝고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인하여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를 알았다. 그러나 나는 저 하늘들이 어떠한 업을 지은 뒤에 여기서 죽어 저기에 나는가를 알아내지 못하였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이제 내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떠 어떠한 업을 지은 뒤에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는가를 알아서 이렇게 하여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져야 하겠다.' 나는 지견이 밝고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말미암아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떠한 업을 지은 뒤에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는가를 알았다. 그러나, 나는 저 하늘들이 어느 하늘 가운데 났는가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하였다. 나는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차라리 내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떠한 업을 지은 뒤에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어느 하늘에 태어났는가를 알아서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져야 하겠다.' 나는 내 지견이 밝고 지극히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말미암아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떠한 업을 지은 뒤에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어느 하늘에 태어났는가를 알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저 천상에 내가 일찍이 났었던가 일찍이 나지 않았었던가는 알지 못하였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이제 내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떠한 업을 지은 뒤에 여기서 죽어 저기에 나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어느 하늘에 났는가를 알고, 또한 저 천상에 내가 일찍이 났었던가 일찍이 나지 않았었던가를 알아서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져야 하겠다.' 나는 내 지견이 밝고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말미암아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고, 또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은 무엇인지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떠한 업을 지은 뒤에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어느 하늘에 났는가를 알고, 또한 저 천상에 내가 일찍이 났었던가 일찍이 나지 않았었던가를 알았다. 만일 내가 바르게 알지 못하고서 이 여덟 가지 행(行)을 얻었다면 곧 한결같이 증득했노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요, 또한 나는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깨달은 줄을 알지 못할 것이며, 나는 또한 이 세간의 모든 하늘 악마 범(梵) 사문 범지들보다 뛰어날 수 없을 것이요, 나는 또한 여러 가지 해탈을 얻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나는 또한 모든 뒤바뀐 생각을 여의지 못했을 것이요, 생이 다하지 못했을 것이며, 범행이 이미 서고 할 일을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다운 진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내가 바르게 알고서 이 여덟 가지 행을 얻었다면 곧 한결같이 증득했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요, 또한 나는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깨달은 줄 알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이 세간의 모든 하늘 악마 범 사문 범지들보다 뛰어날 수 있을 것이요, 나는 또한 여러 가지 해탈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내 마음은 이미 모든 뒤바뀐 생각을 떠나, 생이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서고 할 일을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다운 진리를 알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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