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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의 열매
2008년 12월 30일 20시 32분  조회:1906  추천:61  작성자: 명상클럽
 


명상의 열매

붓다다싸 스님 ․ 지음

     서 형 석 ․ 옮김


The Fruit or meditation


Buddhadasa Bhikkhu


Bodhi Leaves No. B.33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 Sri Lanka


마음챙김과 알아차림

나나위라 스님 ․ 지음

  강 대 자 행 ․ 옮김


Mindfulness & Awareness


Nānavira Thera


Bodhi Leaves No. B.60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 Sri Lanka




명상의 열매

 

 명상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첫째 열매는 우리가 일찍이 맛본 적이 없는 새로운 종류의 행복이다. 이 행복은 감각대상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대상에 기인한 행복은 감정상의 행복일 뿐 진정한 행복은 아니며, 잠재적인 고(苦) 이상의 별것이 아니다. 명상을 통해 얻는 행복감은 번뇌에서 완전히 해방된 열반의 경지를 미리 맛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열반을 이루지 못한 채 그 맛을 미리 논할 수는 없지만, 추측컨대 이 명상에서 오는 즐거운 체험은 열반 증득의 맛에 배견할 수 있는 것이며 다만 얼마나 미묘하고 굳건하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명상의 이 첫째 열매를 전문적인 술어로는 현법이익(現法利益, dattha-dhammikattha), 즉 바로 누릴 수 있는 이득이라 부른다. 가령 이 단계에 이르러서 힘이 다해 명상수행이 더 나아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주 헛된 것은 아니다. 이만큼으로도 이미 얻은 바가 크니까.

 명상수행의 둘째 열매는 우리 마음이 모든 현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갖출 바탕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수행이란 마치 칼을 갈아 잘 들게 하는 것과도 같고 창을 잘 닦아 밖을 훤히 내다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잘 닦은 마음은 잘 길든 원숭이나 코끼리와 같다. 이 마음은 활기차고 굳건해서 열정이나 분노․증오․질투 따위의 충동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잘 닦은 마음이 이런 번뇌에 굴복할 리가 없다. 설사 삿된 세력이 일어나 마음을 흔들려고 할지라도 여유롭게 미소로 대할 수 있다. 잘 닦은 마음은 나쁜 세력들이 결코 흔들어내지 못한다.

 명상의 이 두 가지 열매, 즉 현법이익과 통찰력을 다 얻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을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어떤 사물도 감각기관을 통해 우리를 들쑤시지 못한다. 어떤 것도 우리의 눈을, 귀를, 코를, 혀를, 또는 몸을 미혹시킬 수 없다. 우리 마음은 모든 유혹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사람의 마음을 매혹하는 어떤 것도 미소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그냥 웃어넘길 수 있다. 세상을 실상(實相) 그대로 마음의 눈으로 보는 한,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온 세상이 통째 한줌거리로 손안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마음이 이런 경지에 들어, 어떤 처소에서 어떤 자세로 있거나 마음의 눈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커다란 평정심을 얻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충분히 숙련되지 못했다. 우리의 내관(內觀) 또는 직관력은 갓 자라기 시작했을 뿐 성숙하지 않아 쉽게 퇴전해버릴 수 있다. 온갖 노력을 기울여 그것을 지켜야 한다. 경전의 말씀처럼, 전륜성왕이 될 아이를 밴 왕후가 유산하지 않도록 정성을 다하듯 갓 자라기 시작한 통찰력은 그것이 굳건해질 때까지 부지런히 힘써 지켜내야 한다. 그러려면 마치 치명적인 병에 걸린 사람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듯 세속적 권익을 버려야 한다. 병든 사람이 자기에게 해로운 것을 피하듯 꼭 그와 같은 방식으로, 맞지 않는 사람이나 처소를 피하고 명상에 알맞은 환경 속에 살도록 해야 한다.

 또 반드시 알아야 할 점은, 이런 식으로 마음 다스리는 공부를 한다고 해서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거나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걷고 서고 잠자는 등 일상생활을 유별나고 이상하게 해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어디엘 가든 항상 명상을 하고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명상에 한번 숙달되기만 하면 명상은 자신과 하나가 되어 뗄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비록 난생 처음 참선을 해보거나 수련 중에 있다하더라도 주의력이 흩어지지 않는 한, 우리 마음은 참선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에 꽤 긴 시간 동안 젖어들 수 있다. 격정 ․ 미혹 ․ 분노 ․ 증오 ․ 질투와 같은 더럼들이 좀체 당신을 오염시키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정치가라면 주의 깊게. 참을성 있게, 설득력을 발하며 논의할 수 있다. 당신이 포교자라면 불신자들의 강력한 반발이나 조롱을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다. 생업이나 직종이 무엇이든 당신은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으며 자부심도 느낄 것이다. d어떤 장소에나 스스럼없이 그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을 것이며, 평상심이랄까 균형 잡힌 마음상태랄까를 일상화시켜 챙기고 있게 될 것이다. 명상수행을 잘 닦기만 하면 정신적 향상은 물론 세속적인 면에서도 얼마나 유용한가 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요컨대 마음을 잘 다룸으로써 궁극적 행복과 직접적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더 높은 경지를 성취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물을 본성 그대로 본다고할까 불법(Buddha Dhamma)을 깨닫는다고 할까, 그러기 위해선 마음을 한 곳에 모을 필요가 있다. 집중력이 r아하면 그만큼 쉽고 빠르게 불법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 바로 법을 깨닫는데는 실패한다 할지라도 오래지 않아 그것을 얻도록 조처를 할 수 있으니, 그 법을 당신의 삶의 방식으로 만들고 그래서 죽는 날까지 그 모든 나날을 수행하는데 바치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 그 날은 빨라질 것이다.


 불법을 깨닫기 위해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길이 있다. 그것은 남들에게 베푸는 일이다. 베풂이란 불법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르치거나 보여줌으로써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감정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닦았을 때, 우리는 거기에서 얻는 경험만큼 남을 가르치거나 안내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선 자기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가르치려드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자기가 진실로 행할 수 있는 일은 남에게도 가르쳐주도록 권장하셨다. 이런 면에서도 부처님은 인류의 모범이 되신다. 남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이로운 일이다. 불법을 가르치다 보면 자기에게도 깨달음은 물론 자비심이 생겨나고, 무엇보다도 지혜의 뿌리가 자라날 수 있게 스스로를 가르치게 된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지도방침을 가장 이상적인 방식으로 제시하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권고하노니 자비심을 발휘하여 너희 자신들이 자유로워진 그 범위만큼 남들을 안내함으로써 해탈의 길로 향하도록 도와줄지니라.”

 남들을 이끌어 가는 동안 솟아나는 자비심은 자심의 마음을 집중시키고 계발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갖가지 질문을 받다보면 누구나 그 쟁점을 보다 주의 깊게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답을 하기 위해선 문제를 철저히 이해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남을 돕는 사이에 어느덧 자기 자신의 공부도 더욱 더 진척되게 마련이다. 『해탈처경』(Vimuttāyatana Sutta)에는 열반이라는 최고선(最高善)을 남들에게 설명해주려 애쓰는 사이에 자신이 그 경지를 깨닫게 된 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세상에는 남을 가르치거나 충고할 때야말로 생각이 훨씬 더 잘 돌아가고 즐거움도 만끽하는 독특한 심성(心性)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가르치는 입장에 서게되면 새로운 발상들이 머리에 번쩍번쩍 떠오르면서 동시에 적절한 표현이 입에서 줄줄 나온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항상 신바람을 낼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오청에 부응해서 남들을 이끌어주려 머리를 짜내는 것은 남을 깨우쳐줄 뿐 아니라 자신도 깨우치게 만드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런 타인교화 노력은 바람직한 일이며 실천에 봄직한 일이기도 하다. 또한 위에서 말한 지도방침은 불교의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며, 더욱이 남에게 봉사하는 행위는 불법을 깨닫는 데도 매우 도움이 된다는 것 또한 자명하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불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감각대상이거나 견해들이거나 자기 스스로 지어낸 ‘자아’이거나 간에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집착의 감정을 품지 않아야 한다. 모든 문제는 집착에서 기인한다. 집착의 어머니는 무명(無明)이다. 집착의 감정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모든 중생에 공통되는 본능이며, 특히 집착은 밖을 향해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강해진다. 사유력 때문에 감각대상들의 그 다양한 맛들을 더욱더 즐기게끔 된다. 그리고 맛에 착(着)할수록 집착의 굴레도 더 강해진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은 그가 가진 사유능력을 높은 가치를 위해 써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주장과 생각이 많을수록 그와 비례하여 자기기만으로부터 자유롭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으로 지어낸 것이 상전으로 군림하게 놔두지 말고 종으로 부려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안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마음이 지어낸 것들이 당신을 속이게 두어서는 안 된다. 사유능력을 적절히 그리고 건설적으로 쓸 때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 할 것이다. 지식이 파멸을 초래하게 놓아두어선 안 된다. 선과 악, 정과 사를 분명히 가리는 지혜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집착을 여읜다는 것은 무명을 몰아내는 지혜를 얻는 것을 말한다. 집착이나 끌리는 마음을 갖지 않았을 때 형상 ․ 소리 등 여섯 경계가 사람을 속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통찰력 앞에 제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엎드려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그것들을 바르게 다룰 수 있게 된다. 바꿔 말하면, 형상 ․ 소리 등 여섯 경계가 더는 격정 ․ 비애 등등의 모습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협조적이며 교육적으로도 도움도 되어 심신의 건강상태 즉 고요함을 증진시키게 된다. 마음에서 집착의 감정을 놓아버리는 그 순간 우리 내면에 불법이 광명을 발할 것이다.

 위대하신 부처님께서 발견하고 가르치셨던 것을 이제 우리도 비로소 발견하게, 다시 말해 재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그 법을 증득해야 하는 것이니,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성숙됨을 나타내는 기준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이상이자 고결한 삶의 목표이다. 우리는 이 목표를 향해 온 힘을 다 쏟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 세계를, 그리고 세계의 모든 현상들을 뛰어 넘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진실로 어떤 세속사도 당신을 건드릴 수 없고 그래서 일체의 세상사를 초월하게 된다. 이제 당신은 비구도 비구니도 우바새도 우바이도 아니고, 남자도 여자도 젊은이도 노인도 아니다. 그런 존재상태는 한낱 장애가 될 뿐이다. 또 이 인간계나 삼계의 다른 어느 세상에도 형상 ․ 소리 ․ 냄새 ․ 맛 ․ 감촉 같은 대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로 그대의 그 왕자다운 고요함을 조금이라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생로병사가 끊어진, 부동의 확고한 상태뿐이다. 이 상태야말로 위대한 부처님, 대각자, 완성자께 귀의한 우리 불자들의 희구하고 열망하는 바, 생의 제(諸)가치의 완성 바로 그것이다.


*나가세나 스님이 영역한 『불법을 향하여』에서 발췌함.*



마음챙김과 알아차림


 ‘알아차림’은 빠알리어(Pāli語)인 삼빠잔냐(sampajaῇῇa)의 역어이다. 경에서는 이 말을 ‘마음챙김’[正念, sati]과 한데 묶어 사띠-삼빠잔냐 즉, ‘정념-정지’라는 복합어로 쓰는 경우가 많다. 『염처경』 (Satipatthāna Sutta)에 몸으로 짓는 행위에 대한 알아차림이 몸에 대한 마음챙김 부분에 들어있는 걸로 미루어 보아, ‘알아차림’은 ‘마음챙김’과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며 다만 보다 국한된 특별한 의미를 지닐 뿐이라고 결론지어도 무방하겠다. 마음챙김은 정신이 산만하지 않은 상태, 즉 일반적 의미에서 정신을 차리고 있음을 뜻하는데 반해, 알아차림은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자신을 계속 관찰하고 있음을, 자신의 행동들을(또는 생각들이나 느낌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려 하고 있음을 뜻한다.


 얘기를 전개하기에 앞서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알아차림’ 수행의 범위를 밝혀놓으신 세 경을 먼저 소개해둘 필요가 있겠다.


 (1)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알아차리고 있는가? 비구는 왔다갔다 걷고있는 중에 알아차리는 공부를 짓는다. 앞을 보고 옆을 보고있는 중에 알아차리는 공부를 짓는다. 몸을 굽히고 펴고있는 중에 알아차리는 공부를 짓는다. 가사와 발우를 쓰고있는 중에 알아차리는 공부를 짓는다. 대변을 보고 소변을 보고 있는 중에 알아차리는 공부를 짓는다. 걷고 서고 앉고 잠들고 깨어나고 말하고 침묵하고 있는 중에 비구는 알아차리는 공부를 짓는다.                                                              -『상응부』․Ⅳ,211 -


 (2) 어떤 것이 집중의 개발인가? 이에, 비구들이여, 느낌(vedanā)이 일어날 때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으며, 느낌이 지속되고 있을 때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으며, 느낌이 사라질 때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다. 지각 ․ 인식(saῇῇā)이 일어날 때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으며, 지각 ․ 인식이 사라질 때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다. 생각(vitakka)이 일어날 때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으며, 생각이 지속되고 있을 때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으며, 생각이 사라질 때 또한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다.           - 『증지부』․ Ⅱ,45 -


 (3) 이에, 아난다여, 비구는 걸어가면서 마음을 챙기고 있고 , 돌아오면서 마음을 챙기고 있고, 서 있으면서도 마음을 챙기고 있으며, 자리에 누우면서도 마음을 챙기고 있으며, 열심히 일하면서도 마음을 챙기고 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은 명상을 이런 식으로 개발하고 소중히 지키면 정념정지가 계발된다.                             - 『증지부』 ․ Ⅲ, 325 -

 그 다음으로 할 일은 언어의 혼란을 수습하는 일이다. 우리의 행동들은 습관적인 것이 되면 생각 없이 그것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그 행동들은 ‘자동적’ 내지는 ‘본능적’인 것이 된다. 머리를 긁거나 눈을 깜박이는 것처럼. 이것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의식적 행동’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 이해한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무의식적 행동’이란 있을 수 없다. 부처님은 ‘행동’[kamma]은 ‘의도’(cetana)라고 규정지으신다. 그리고 의식[viῇῇāṇa]이 없이는 어떤 의도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무의식적 행동이라면 행동이 전연 없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고 순전히 ‘움직임’이 될 따름이다. 예를 들어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거나 바위가 빗물에 밀려 산비탈을 굴러내려 기차를 탈선시킨 경우와 같다. 이런 경우 서양의 법률계에서는 묘하게도 신의 행위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행위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바위의 움직임만 있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느 sahems 식(識)은 행(行)이다. 식은 유위법이고 따라서 행에 든다. 이 행은 신 ․ 구 ․ 심 삼행(三行)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모든 행에는 식이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모든 행동이 똑똑히 알아차리는 가운데 행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보통 무의식적 행동이라 부르는 것은 다만 일부러 하지 않은, 부지불식간에 행해진 의식적 행동인 것이다. 또 우리가 보통 의식적 행동이라 부르는 것은 엄밀히 말해 일부러 한 행동, 가령 이전에 해본 적이 없거나 자주 해보지 않았던 어떤 일을 하려들 때처럼 그 일을 하기 위해 어느 정도 생각을 요하는 그러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을 할 때에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수를 범할지 모르므로. 사실 ‘알아차림’을 짓는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 그것이다. 살펴봄 없이 행하는 행동은 무의식적 행동이 아니라 알아차리지 못하고 한 행동인 것이다.

 졸지 않고 분명하게 깨어있는 동안은 늘 어느 정도의 알아차림이 일어나 있는 게 사실이다. 크고 작은 새로운 문제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단지 한 두 순간만이라도 그에 대해 고려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 알아차림마저도 멈춰버린다.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꿈과 깨어있을 때의 차이이다. 깨어있을 때 우리는 ‘내가 깨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만 꿈을 꿀 때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 실제로 악몽을 꾸면서 깨어나려고 애쓸 때,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내기 위해, 즉 알아차리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일뿐이며, 그 노력이 성공하면 잠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이다.

 깨어있을 때는 잠잘 때와 달리 어느 정도의 알아차림이 항상 작용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알아차림은 보통 예기치 못한 상황을 그 상황이 전개되어 가는 대로 따라가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고, 그 밖의 경우에는 자신이 하고있는 일에 온통 매몰되어 정신이 팔려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생계비를 버는 일상적 의무이건 또는 애정 ․ 혐오 ․ 분노 ․ 욕망 ․ 권태 같은 타인에 대한 정서적 태도가 끼여드는 인간사이건 상관없이 사정은 똑같다. 규칙적인 일상사라 할지라도 서둘러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 거리를 두고 대하는 태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또 그런 일들은 우리가 남들과 맺는 인간적 관계에서도 정서적 만족감을 죄다 앗아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최소한의 손해만 보고 그 일에서 벗어나는 쪽으로 애쓰며, 그리하여 감정의 늪에 빠져들어 진훍탕 속의 몰소처럼 뒹굴고 싶어한다. 자기가 하고있는 일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어차피 일종의 노력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이런 종류의 노력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알아차림을 전적으로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일이라 해도 예기치 않은 문제에 대처하자면 알아차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료의 알아차림도 공부이기는 할 테지만 일상생활에서 겪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그래서 삶을 한갓 사업처럼 가장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해 버리려는 그런 공부밖에 안 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서 알아차림은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다. 여기선 삶에서의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공부이다. 이들 두 가지의 상이한 목적들은 서로 정면 대치하여 적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서로 협력하지도 않는다. 사실은 이 둘은 서로 직각으로 엇갈리는 관계에 있다. 어느 한 순간에 공부할 수 있는 알아차림의 양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 양쪽 목적은 알아차림을 서로 쓰려고 경쟁을 벌인다. 가령 이 글을 쓸 때와 같이 단지 무언가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 많은 알아차림을 필요로 하는 행위는 해탈을 향한 알아차림을 닦을 여지를 그다지 많이 남겨두지 않는다. 실제로 그럴 수는 없겠지만 가령 지금 쓰고있는 이 글자들을 똑같이 하루에 두 번씩 베껴 쓰기를 습관화해서 수년간  계속 한다면, 그때는 틀림없이 보다 많은 알아차림을 해탈 목적에 바칠 수 있게 되겠지만.

 부처님께서는 『여시어경』 (Itivuttaka)에서 유학(有學, sekha bhikkhu: 道에 이르렀으나 아직 아라한과는 이루지 못한 수행자)의 공부 발전을 해치는 세 가지를 말씀하셨다. 일하기(집짓기, 옷 꿰매기, 자질구레한 허드렛일 하기 등)를 좋아하는 것,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잠자기를 좋아하는 것이 그것이다. 물건을 만들건 법을 설하건, 그런 일을 제대로 해내려면 많은 알아차림을 기울여야 하고, 잠잘 때에는 알아차림이 아예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알아차림은, 앞서 인용한 경에서 분명해지듯, 습관적이고 특별히 많은 생각을 요하지 않는 행동들을 대상으로 할 때, 즉 걷고 서고 앉고 눕고, 육체적 요청에 부응하는 갖가지 일을 할 때 가장 잘 닦을 수 있다. 인용문 (1)에서 ‘잠’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잠깰 시간을 마음에 새기면서 알아차림을 유지한 채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얘기지, 실제로 잠을 자면서 알아차림을 닦으라는 뜻은 아니다. 비구가 살다보면 아무리 피하려 해도 완전히 일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말도 부득이 해야만 할 경우가 있게 마련인데, 이런 때에도 역시 마음챙김을 잃지 않고 가능한 한 알아차리면서 해야 할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말하자면 ‘마음챙겨 일에 임한다’, ‘말하거나 침묵하는 가운데 그는 알아차림을 닦는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도 말했듯 보통 사람은, 꼭 필요하지 않을 경우, 다시 말해 습관적 행동을 할 경우에는 알아차림 공부를 닦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는 이런 습관적 행동을 할 때에도 알아차리면서 하도록 가르침을 받으며,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자신의 행동을 이런 습관적 행동에 국한시키도록 배운다. 새로운 일을 시도하거나 밀어붙이는 등의 행위는 실업계나 실무처리에선 극구 찬양 받겠지만 해탈을 구하는 사람에겐 장애가 될 뿐이다.

 그러면 해탈을 목적으로 알아차림을 닦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간다하다. 모든 행동은 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남에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하고 일부러 물어 확인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 태도를 조금만 바꾸면 된다. 주의를 조금 기울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에 너무 정신없이 몰두하지 말고, 행동하는 자신을 계속 관찰하는 것이다. 물론 행동을 중단할 필요는 없다. 단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하고 자신에게 묻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행동은 일단 의식적인 것이 아닐 수 없으므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선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래서 단지 질문만 하면 그 답은 저절로 나오게 된다. 즉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고 스스로 물으면 그 즉시로 ‘나는 글을 쓰고 있다’, 또는 ‘내가 지금 침대 위에 앉아 있다’, ‘다리를 긁고 있다’등등 끝없는 대답이 나온다.

 알아차림 공부를 하고 싶다면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계속 던지고 그리고 그것에 답하기를  계속해나가야 하며, 마침내는 질문을 생략하고도 자동적으로 습관적으로 대답하기까지에 이르러야 한다. 이렇게 되면 알아차림 공부는 성공적이며, 이젠 이런 상태를 발전시키는 일과 게으름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 후퇴하지 않도록 하는 일만 남게 된다. 물론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지각에 대한 알아차림, 생각에 대한 알아차림에도 동일한 고려가 적용된다(인용문(2) 참조). 여기서도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또는 ‘무엇을 지각하고 있는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고 자신에게 물어야 하며 그 대답 또한 어김없이 곧바로 나올 것이다.

 혹시 한 순간에 두 가지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어떤 행위를 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알아차리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식(識)의 성질 또는 경험의 성질에 대해 그릇된 관념을 가진데서 오는 편견에 불과하다. 우리는 몇 가지 행위를 동시에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글을 쓰고  있으면서 나는 숨도 쉬고 있다. 한 행위를 위해 다른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물론 같은 순간에 그 모든 행위들에 똑같이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다. 두 행동을 동시에 할 수 있듯이 행동과 그 행동에 대한 알아차림도 동시에 행해질 수 있다. 이 사실은 쉽게 증명된다. 걷기 시작해 보라. 그리고 걷고 있으면서 자신에게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고 물어보라. 그러면 걸음을 멈추지 않고도 ‘나는 걷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답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그 대답을 위해 걸음을 멈칫하거나 냅다 달리거나 넘어지거나 할 필요는 전연 없는 것이다.

 왜 우리는 알아차림 공부를 해야만 하는가? 분명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우선 세 가지 중요한 이유를 댈 수 있겠다. 첫째,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항상 알아차리고 있는 사람은 계를 지키기가 한결 쉬워진다. 가령 옆집 아낙네에게 정신이 팔린 사람이 ‘내가 지금 남의 아내를 탐하고 있구나’하고 알게되면 부처님께서 지키라고 하신 세 번째 계를 어기려 하는 자신을 깨닫게 됨으로써, 남의 아내를 탐하면서도 전혀 자각이 없는 사람에 비해 정신 차리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요컨대 알아차림은 일종의 자기비판으로 이끈 다음 자기 시정을 하게끔 도와준다.

 둘째, 알아차림은 ‘식힘’에 해당되며, 욕망이나 미움같은 ‘끊임’에 해당되는 격정들과는 정반대 관계에 있다. 이는 다시 말해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격정을 누를 수 있는 제어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알아차림의 공부를 계속해나가면 격정이 일어났을 때 이를 억누를 수 있을 뿐 아니라 격정의 빈도 또한 현저히 줄일 수 있다.

 셋째, 알아차림의 수행은 불법의 핵심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선생조건이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불법은 일반적으로 어느 한 경험(의식, 느낌 등)과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두통과 같은 가벼운 것에서 불치의 암에 이르기까지 어떤 한 특정 경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부처님의 지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든 경험에서 헤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다. 자, 이제 살펴보자. 우리가 어떤 일에 정신이 팔려 알아차림이 없이 행동하고 있는 보통 상태에서는 오직 이런저런 경험(‘저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 ‘저 여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이나 특정한 상황과만 관련될 뿐이지, 보편적 경험(‘사랑의 감정의 본질은 무엇인가’)과는 결코 관계없는 상태로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고있는지 어떤 느낌을 갖고있는지 알아차리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여전히 우리는 행동하거나 느끼고 있지만 그 행동이나 느낌을 어느 정도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며, 그럴 때 행동과 느낌의 보편적 성질이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그런 경우 지금 내가 봉착하고 있는 특정 행동과 경험은 보편적 행동과 느낌의 한 예로 나타난 것이 될 뿐이다. 이렇게 모든 사물의 보편적 성질이 보여질 때 우리는 비로소 부처님의 안내에 힘입어 무상 ․ 고 ․ 무아라는 모든 존재에 고루 편만한 특성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얘기가 이런 식으로 접어들게 되면 너무 깊이 들어가게 된다. 이 정도로 논하는 것만 해도 벌써 쉬운 얘기는 아닌데 여기서 더 이상 난해한 논의로 나아갈 필요는 없겠다. 마지막으로 방금 말한 알아차림 공부의 세 가지 소득은 각기 계 ․ 정 ․ 혜 삼학에 배대(配對)된다는 점만 밝혀두고 여기서 얘기를 끝낼까 한다.



출처: 보리수 잎 ․서른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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