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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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항운협주곡
2007년 03월 30일 00시 36분  조회:4057  추천:80  작성자: 박문희



   연변항운협주곡



높은 산 깊은 골 동트는 연항
망망한 대해를 헤치고 간다
야망과 패기가 가득찬 연항
진취적 기상은 우리의 자랑


   --<연변항운의 노래>에서
 



연항--심신유곡에 떠오른 기적

--세계와의 거리를 엄청나게 줄여


오늘 세상은 환상과 신화를 현실로 만드는 시대에 와있다. 하늘에 올라 별을 딴다 해도 별로 놀랄 이가 없으리만치 세상은 많이 변해 있다.

연변항운공사의 다섯척 상선이 동아세아 각국의 주목례를 받으며 일본해, 황해를 주름잡아 달리고있다.


△“연변1호”화학품특수선의 위용.

1992년 10월 10일, 연변의 첫 상선 <연변1호> 인수식이 천진항에서 성대히 거행되였다. 이날 연변, 길림은 해상선박이 없던 자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부터 나흘만인 14일, <연변1호> 는 화학제품을 가득 싣고 천진항을 떠나 18일 한국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는 연변항운사의 뜻깊고 성공적인 첫 운항이였다.

드디여 1993년 6월 12일 연변항운공사가 자기의 탄생을 세상에 선고했다.

그후 불과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연변항운은 1,000여만 딸라에 달하는 거액의 투자로 네척의 선박을 구입, 국제 항선우에 륙속 띄움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크게 놀래웠다.

바다와 부두를 끼지 않고 있는 내륙지로서 해운의 초창기에 이처럼 방대한 자금의 투하와 더불어 총적재톤수 2만톤을 육박하는 중형선박 다섯척을 연이어 경영에 투입시킨 일은 국제해운사에서도 매우 보기 드물다 한다.

*     *     *

지난 3월 4일, 연변자치주 정협 위원이며 연변항운공사 회장인 전룡만씨가 조선 평양에서 “각방면의 조화협력을 거쳐 부산--청진항로 개척의 모든 준비가 전부 끝났다. 3월 15일 우리 연변항운이 개척한 부산--청진 컨테이너 정기항선은 예정한대로 정식운항에 들어가게 된다”고 전화편으로 정식 통지를 해왔다.

금년 3월 15일!남북분단으로 끊어진 동해허리의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청진항 리용을 통한 일본해 진출을 실현하게 될 이날은 두만강지역 개발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하루로 세계 해운사에서도 그 위치를 차지하게 될것이다.

청진--부산 직통!근해를 통해 세계로!이 꿈은 인제 우리 앞에 현실로 성큼 다가왔고 아울러 아득히 멀었던 세계가 지척으로 가까워졌다.

청진항은 현재 적극 개발중인 로씨야의 짜르비노항과 조선의 라진항 외 요즘 유일하게 열릴 우리 성의 대외 수출 항구이다. 주지하다싶이 여직껏 흑룡강, 길림, 내몽골 등 지역의 바다를 통한 수출수입은 거의다 멀고 붐비는 대련항을 통해 어렵게 진행돼왔다. 이 항선이 개통됨으로 해서 이 지역의 “3자기업”을 망라한 많은 기업들은 연항의 선박을 리용하여 막대한 경제적 리익을 창출하게 될것이다.

*    *    *

연변항운의 개척사업에 줄곧 큰 힘을 경주해왔던 연변자치주 남상복부주장은 연항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연항은 중국내륙의 유일한 국제항운이다. 산골연변에 선 연항은 일대 기적이다. 연항의 신장발전으로 해서 연변과 주변지역의 수출입은 시간, 경비를 대폭 절감할 수 있는 가까운 해상통로를 갖게 되었다. 이 한가지만으로도 이 지역의 경제는 커다란 활력을 얻게 될것이다. 실상 연항의 의의은 이 지역을 훨씬 초월한다.”


기회의 서광 휘여잡고

--사나이 전룡만의 “야심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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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1호”--디젤오일탱크선(유조선), 적재톤수 3404톤, 93년 7월 17일 일본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 운항 구역: 한국의 울산--홍콩--중국의 대련, 상해, 광주--필리핀의 마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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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하반으로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훈춘의 개방작업과 두만강출해권회복사업, 탈랭전시대의 도래와 함께 다가온 두만강지역개발에의 유엔의 참여는 동북아의 중심, 속칭의 “황금의 삼각주”지대에 력사적인 발전기회를 시사했다.

국제적개발작업이 서막을 고한뒤 정부에서 “제2홍콩”건설을 영접하기 위한 기초작업을 자국나게 펼치는 가운데 기회의 서광을 틀어잡고 바다에로의 직접진출을 시도, 행동에까지 옮긴 이는 다름아닌 연변항운공사 회장 전룡만씨(금년 43세) 한사람 뿐이다.

85년도 창업의 난바다에 뛰여들어 갓 터진 시장경제의 모진 세파를 헤가르며 선후로 연변대외무역경제개발공사, 중조합자기업연진수산물합자경영공사, 중한합자기업 연고정수기유한공사 등 기업을 일떠세우고 드디여 연변대외무역경제개발그룹을 설립하기에 이른 전룡만씨가 진정 바다와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0년도 10월 중국해원대외기술복무 연변공사를 세울 때부터였다. 웅숭깊고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들먹이는 웅심으로 보다 큰 활무대에로의 출범을 계획한 그는 한국 해운계의 인사들과 널리 접촉하면서 서둘러 출두여건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드디여 당시 아직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형편에서도 국내 처음 한국 선주협회와 공식관계를 맺고 연변의 조선족가운데서 부원급 선원 700여명을 키워 한국,일본 등 나라의 상선에 수송하는 등 일들을 신용있게 추진해 나갔다.

수백명 선원을 외선에 보내면서 전씨에게는 자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국제물류업은 90%이상이 해운을 통해 실현되는데 우리 절로 해운업을 하면 어떠냐?“황금의 삼각주”에서 주무대로 등장한 연변이 으례당당 자기 몫을 해야 할것 아니냐? 이런 생각이 암시가 되어 그의 뇌리엔 차츰 “우리 항운을 세우자”는 대담한 구상이 륜곽을 그리며 나타났던 것이다.

전룡만씨의 구상에 대해 자치주 정부에서는 물심량면으로 열성껏 도와나섰다. 그와 수년간 합작을 해왔던 한국벗들도 발벗고 나서서 협력했다. 발뿌리 닳게 한국을 드나들면서 입술이 닳도록 유세를 들이댄 결과 한국 금융계를 크게 감동시켜 마침내는 한국특수선 주식회사, 동북선박주식회사 등의 결정적인 련대보증밑에 거익의 국제금융을 도입하는데 성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가운데 전씨의 끝질긴 노력, 강한 추진력, 드높은 신용이 한국 벗들이 그를 믿고 도와 나서도록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국제표준의 중형해운회사를 일거에 일떠세운 전룡만씨에게는 할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추호도 유예함이 없이 일들을 벼락치듯 밀어나갔다. 항운의 원활한 성장을 유력하게 보좌하기 위해 외국 벗들과 공동히 투자하여 한국 서울에 장룡해운회사를, 홍콩에 룡방해운회사를 설립하고 북경에 영업부를, 서울, 홍콩에 선박대리점을 세웠으며 그 외 대련, 광주, 상해 등 10여 개 연해도시의 대외수송대리공사와 실무계약을 체결하고 중국대외수송집단 도문공사 등과도 실무협조협의를 달성했다. 최근에는 한국에 있는 해운집행자매사인 장룡해운회사와 함께 해운경영관리정책협의회를 정식 설립하고 연변항운 연변본사 조직기구도 새오 조정, 확인했다.

이로써 연변항운공사의 조직 기틀은 원만히 잡혀진 셈이다. 그러나 연변항운이 해야 할 일이 어찌 이에만 그치겠는가?

 
기둥재목이 수풀 이루게

--연항의 인재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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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룡3호"--잡화물선, 적재톤수 8800톤. 93년 10월 24일 중국 영구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운항구역: 한국의 부산--중국의 영구, 룡구, 상해--대만의 기륭, 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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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인재!”

항운공사를 세울 준비를 할때부터 전룡만씨의 머릿속에서는 내내 이 문제가 지꿎게 맴돌이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그마한 일을 벌려도 인재가 수요되는 법인데 황차 바다라는 개념과 황운이라는것을 전혀 모르는 연변땅에서 그가 세우려는 것은 국제대상의 현대화한 대형물류업이 아닌가! 그에 걸맞는 상당수의 인재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선진적인 선박을 아무리 많이 해놓는다 해도 그것은 실상 페철무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여 그는 중해연변공사에서 해원송출사업을 할때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하면서 풍부한 해원사업경험을 쌓은 량동섭, 엄영자 등 중견인물들을 중역진에 기용하는 한편 고급해원양성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92년도부터 해마다 100여만원에 달하는 거액을 투자해서 중등전문학교 졸업생을 남경항해학원에 19명, 광주항해전과학교와 대련해운학원에 40명을 학습보냈고 또 한국 선주협회와 연줄을 달고 반년에 2명씩 한국의 해운회사에 보내여 실습하도록 했다. 그외 해마다 영어에 능한 대학교 졸업생들속에서 엄격한 시험을 거쳐 신입사원을 10명씩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역시 부족하다고 그는 인정했다. 참신한 사고방식을 가진 세계기업의 발전추세를 따를수있는 그런 관리일군이 필요했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취한 방법이 외국으로부터의 인재도입이다.

처음 청해들인 인재는 화교출신, 한국태생의 담도굉(한족, 32세)씨다. 84년도 한국고려대 기업관리학부를 나온 그는 현대그룹에서 유망한 관리일군으로 일하면서 오스트랄리아 주재원으로도 3년간 근무했었는데 상당한 외국어 회화능력과 현대화기업관리능력을 갖고있다.

다음은 신연우(24세)씨인데 특수산업학교인 부산해양대에서 항만, 운송공학을 전공했던 그는 항운지식이 막히는데가 없고 조직능력도 갖고 있으며 영어에 또한 능란하다.

그들은 선후하여 서울서 전룡만씨의 눈에 우연히(?) 걸려들었던 것인데 허심탄회한 속심얘기들을 수차 나눈 끝에 담도굉씨는 현대그룹의 정예공업회사에서의 승진기회를 내버리고, 신연우씨는 미국의 대형물류회사에 들어갈 기회를 포기하고 결국 “심산유곡의 연변항운”에서 하나와 같이 모이게 된것이다. 그들의 연변진출에서 연변개발의 밝은 전망이 전제로 작용한 것은 물론이지만 전씨에 대한 믿음이 그들을 떠밀어주었던 것도 역시 사실이다.

연변항운에 온 첫날부터 그들이 공동히 겪은 것은 뛰고있는 바깥세상과는 의념과 사고방식이 판판 다른 그런 사업환경과 분위기였다.“환경 속에 내가 용해돼 버리고 마느냐 아니면 환경을 변화시켜 뛰는 세계에 적응시키느냐”가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도전을 걸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적극적인 스타일로 그 도전에 응했다. 말그대로 항운이안 세계적인 물류서비스산업인만큼 국제관례에 따르도록 연항의 모든 기초사업을 다져가야 했다.

총경리 중임을 떠멘 담도굉씨는 이한 요구에 좇아 회장보좌, 통솔관리, 업무감독, 정책연구, 영어교수 등 일상사무를 타진해나가는 한편 “직원의 자질향상”,“회사의 대외이미지 향상”,“현대화기업질서수립”을 목표로 내걸고 그것을 회사의 전반 상버에 철저히 관철시켜나갔다. 전화를 받고 손님을 접대하는 례절, 상하급간의 례절로부터 시작해서 사업에 림한 자세, 실무자질제고 등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굳어진 재래의 습관을 새로운 이미지로 부각한다는것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지만 그것을 봉사정신, 애사정신, 분초정신 등 일련의 정신교육으로 받쳐주면서 아주 효과 있게 이 일을 진척시켜나갔다.

연항 종합기획실에 도임한 그날부터 신연우씨는 우선 지식과 경험의 결여로 초래되는 낮은 사업효률, 주, 부 순서가 뒤바뀌고 사업절차가 무시당하여 일어나는 질서마찰 등 곤혹을 자주 치러야 했다.하여 그는 자신이 익해 배워두었던 전업지식을 최대한 발휘해서 선원, 선박, 재무, 해사 등 제반 부서에 대한 종합적 기획관리와 해운지식 전수 등 업무를 진지하게 수행함과 동시에 서둘러 모든 사업절차를 새로 분명하게 만들어내고 각 부서들에서 소정의 절차를 드팀없이 밟도록 확실한 조치들을 따라세우기에 전념을 했다.



△“연변항운”은 태평양을 활무대로 삼아가지고 연변과 주변지역의 경제신장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충정을 토설하고 있는 연변항운공사 회장 전룡만씨.

연항에서 외국의 선진적 관리경험을 도입하여 조직, 관리, 경영체계를 일원화하고 인사, 행정, 재정, 기획체계를 개혁, 조정하는 행정에 한국에서 온 이 두 젊은 일군은 각자의 사업분야에서 열심히 뛰는 정신, 상당한 실력과 높은 사업효률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전 직원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영향과 전체 직원들의 노력 밑에 현재 연항에는 현대화 기업답게 완전히 새로운 사업분위기가 형성되였다. 여기에서는 일에 게으름을 부리거나 사업질서를 흐리우거나 상급에 거역하는 직원을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창의적인 자세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맡은 일을 해나가는 가운데 반수 직원이 중등영어 수준에 이르렀고 전체가 컴퓨터 조작을 배워냈으며 또한 상당한 해운지식을 배워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중견력량들이 불끈불끈 솟아나오고들 있다. 바뀌여진 환경은 어느새 사람을 키우는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     *     *

이 장에서 간과해 넘어가지 말아야 할 건이 하나 있다. 그것인즉 전룡만 회장이 한국에 스승 두 분을 모셨다는 것이다.

한분은 정책고문으로 한국동국대 경제학교수이며 동북아경제연구소 회장인 김태홍선생이고 한분은 한국 동북선박주식회사 리사인 한강륭선생이다.

1965년도에 연세대를 마치고 미국에 류학 가서 박사칭호까지 받은 김태홍교수는 귀국한 뒤 한때는 한국정부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으로도 있었는데 근년에 들어서는 두만강 개발 등 국제 경제협력활동에 빈번히 참가하면서 <동북아경제권--21세기 국가경영전략>, <동북아경제의 새 좌표> 등 저서도 펴낸 한국 1류의 중국경제연구 전문가이며 국제적으로도 상당히 명망 높은 분이다.

1968년도에 한국해양대를 졸업하고 한국특수선주식회사에서 다년간 근무했던 한강륭리사는 풍부한 해운경영경험을 가진 실력가인데 중국조선족선원송출사업에서 전룡만씨와 수년간 합작하면서 연항의 설립을 위해 크게 조력했던 분이다.

이 두분은 현재 연항으로부터 여러 가지 연구쩨마를 맡아가지고 연항의 순탄한 발전을 위해 고심들을 하고있다.
 
*     *     *

연항의 인재전략은 한마디로 말해서 현존인재를 기용하고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며 외부인재를 도입하고 외계의 지식과 경험을 자기 회사에 적용시키는 전략이다.

 
동북아해운과 사고방식 전환

--김태홍교수,전룡만회장과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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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룡4호”--세미컨화물선, 적재톤수 1600톤, 93년 12월 24일
부산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운항구역: 부산--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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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항에 대한 몇가지 관심사를 가지고 일전에 두분과 인터뷰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 따로 가진 부동한 내용의 대화지만 서술의 편리를 위해 여기에 한데 묶어 적는 바이다.)

 
김태홍교수와 가진 인터뷰
 

기자:갓 탄생한 연항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김태홍교수: 짧은 기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고 봅니다. 지리적으로 불리하고 (바다와 떨어져있음을 말함--필자 주) 기초작업이 끝나지 않아 어려운 점이 많은 연변실정에서 이와 같은 큰일을 해냈다는 것은 초인간적인 의지와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연항의 성과를 적어도 연해도시 상해나 대련에서 성취한 것의 200%로 볼 수 있습니다. “황금의 삼각주”개발과 더불어 이 지역의 기업들은 연항의 선박을 최대한 리용하게 될 것이며 그에 따라 연항은 이 지역 경제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기자: 근년래 세계경제의 불황으로 해운업도 진통을 겪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김교수의 견해는요?

김교수: 연항이 국제해운저조기에 탄생한건 사실입니다만 실상 저저기의 끝은 상승의 시발점으로 되기에 연변항운도 상승의 기점에 서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동북아지역의 경제는 호전의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경제기술합작이 활발해짐에 따라 자연 무역을 통한 물동량이 급 장성하게 될 것인데 물동량 대부분은 항구를 통한 해운으로 처리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항운은 이 지역 발전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업입니다.

기자: 연항의 성공에 대한 확신여부를 동북아 개발의 큰 시각으로 고찰함은 두말할 것 없이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국제해운의 특유의 존재발전법칙으로도 가늠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김교수: 그렇습니다. 이 문제를 해답하자면 이 지역 해ㅔ운의 성격부터 구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역의 해운은 그 성격으로 보아 연근해 해운입니다. 이 지역과 같이 가까운 거리의 해운에는 중형선박이 알맞지요. 하지만 동북아의 일본, 중국, 한국, 로씨야 등 나라는 모두 해운 강국들인만큼 대부분의 국가 기간 해운 선사들이 모두 대형 선박들로 편성돼 있어서 원양해운에는 알맞지만 근거리해운에는 알맞지를 않아요. 소형 선사들은 내항이 위주여서 역시 이지역의 해운에 알맞지 않습니다. 황해, 일본해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지역에서는 주로 이삼천 톤, 만 톤 좌우의 중형선박들로 편성된 연변항운이 우세입니다. 대형선박해운과 소형 선박해운의 “틈새시장”--이것이 바로 동북아 연근해 해운입니다. 연변항운은 이 “틈새시장”을 최대한 리용해서 신속히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자: 대형상선이 이 지역을 점령하기 어렵다는 리유는 뭡니까?

김교수: 일본, 한국, 대만 등 나라와 지역의 경우, 비싼 인건비가 그들을 주춤하게 만드는 관건적 요인이 됩니다. 다음 륙상관리비가 너무 비싸고 비용이 많이 들어 도저히 리윤을 내기 어렵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으로 되지요. 대형선박의 연근해해운은 수지가 맞지 않은 노릇이라 그거지요. 그러나 중국의 경우 저렴한 인건비의 선원을 양성할 수 있고 륙상관리비도 상대적으로 싸기에 한국, 대만 등과의 생존경쟁에서 충분한 우세를 가질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이런 여건을 어떻게 리용하느냐는 완전히 연항 지도진의 역할에 달려있습니다. 요컨대 전룡만회장은 추진력이 아주 큰 사람이고 정부 측의 대폭적인 지지도 있기에 연항은 전망이 매우 밝다고 봅니다. 이를 확신하고 있기에 한국 측에서도 연항을 발 벗고 나서서 돕는 거죠.



△국제금융도입은 신용을 생명으로 한다. 그만큼 전룡만회장의 어깨에 놓인 짐은 무겁다. 국제차관서약서에 싸인하고 있는 전씨(앞줄 가운데 사람).
 
전룡만회장과 가진 인터뷰

기자: 현재 여론은 연항이 전대미문의 사업을 창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을 해나가면서 전회장이 가장 깊이 느낀 감수는 무엇입니까?

전룡만회장: 모든 일에서 사고방식의 전환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부한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고서는 놀랍게 변해있는 바깥세상에 적응할 수 없어요.

쉬운 례 하나 들어봅시다. 로임을 누가 주냐고 물으면 우리는 사장이 주는 게 아니라 고객이 준다고 말합니다. 사장이 준다는 것과 고객이 준다는 것은 완전히 상반되는 사고방식이지요. 로임을 고객이 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다면 전화 한통을 받아도 심상히 넘겨버릴 수가 없습니다. 실상 전화 한통도 순간광고에 다름 아니죠. 친절한 표준어로 “안녕하세요! 연변항운입니다.”고 하면 그게 바로 광고가 되거든요.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그냥 견지를 해나가면 그게 곧 큰 광고역할을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전엔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요. 순간순간을 잘 해 나가는 사람이 부자가 됩니다. 그래서 벌린 게 “초(秒)관리운동”입니다. 매 하루를 분, 초로 나누어 관리한다는 것입니다. 주먹구구식의 경쟁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기자: 국제물류서비스기업으로서의 연항의 영업활동취지는 무엇입니까?

전회장: 통일적이고도 일원화된 경제체계 속에서 유력한 책임경영제를 도입하고 민족과 국적, 지역과 국경에 상관없이 세계적인 조직망을 건립하여 영업활동의 국제화와 효률화의 수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현재 중국, 한국, 인도네시아, 타이 등 7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그중 서울,연변의 륙상 근무 인원만 해도 16명이 외국인입니다.

사업효률성과 경제효과성에 구애 없이 월급을 주고 상금을 주던 그런 무책임한 관리체계를 털어버려야 합니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분공위임하고 그 책임과 근무여하에 따라 승진을 결정하고 공과를 판단하는 새로운 관리체계로 바꿔버리지 않으면 안 되지요. 우리는 항운의 현대화관리요구에 따라 20여세, 30세 좌우의 젊은이도 지도진, 중역진에 올려놓고 그렇지 못한 경우엔 원로파들도 말단 직원으로 배치하는 등 대담한 개혁조치를 댔는데 전반 사업에 대한 추진이 매우 컸습니다. 내부관리 측면으로 볼 때 우리의 사업효률은 이미 국제수준에 와있다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자: 전회장의 최종목표는 무엇입니까?

전회장: 동북아 최대의 기업을 키워나가자, 이 지역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어 사외에 보다 많은 재부와 가치를 창조해주자는 게 저의 리상이자 인생목표입니다. 목표를 크게 세워놓고 보니 어려움에 부딪칠 때도 많고 저의 능력과 회사의 능력에 비해 부하가 점점 커가고 있음도 느끼게 됩니다만 그럴수록 나 하나를 둘로, 셋으로 쪼개서 배 이상으로 뛰여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뜨거운 국제해운경쟁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기업을 모델로 삼아 열심히 뛰고 있어요. 이 순간에 일본의 회사들은 어떤 스타일로 일하고 있느냐? 이런 생각을 안고 말입니다. 직원들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처사가 국제적인 흐름에 몹시 뒤진다면 회사가 도저히 살아남질 못할 테니까, 그리고 회사운영효률의 여하에 따라 직원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만큼 직원모두가 높은 자각을 안고 뛰고있는 거죠. 때문에 곤난도 많지만 신심으로 충만돼 있습니다. 뜻이 있는 사나이들이 애써 일한다면 사회의 지지 밑에 꼭 풍만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연변자치주정부와 한국 벗들은 연항의 개척사업을 시초부터 물심량면으로 지지 협력해 왔다. 호상협력을 약속하며 뜨겁게 손을 잡은 자치주 남상복부주장(오른쪽)과 한국케미칼해운주식회사 박종규사장.

 
동트는 연항, 서막은 열렸다

--연변항운의 프로젝트와 밝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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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룡5호”--잡화물선 적재톤수 2611톤, 93년 11월 5일 한국 서울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운항구역: 한국--일본--중국--조선 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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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1월11일부터 이틀간 연변항운은 제1기 총회를 연길에서 가졌다. 이 회의는 1년 남짓한 동안의 준비와 연습을 거쳐 바야흐로 본격적 운영에 들어가는 시각에 열린, 앞으로 장기간에 걸쳐 그 영향력을 과시하게 될 중요한 회의였다.

회의에서는 연항의 지난 단계 사업을 총화검토하고 세계경제,해운형쎄와 내외사업여건을 연구분석한 기초우에서 향후목표를 전략적각도에서 명확히 제출했다.

회의는,

40만톤의 화물수송과 1000만 딸라의 영업수입창출을 금년도 목표로,

년간 150만톤 화물을 수송할수있는, 총적재톤수가 5만톤에 달하는 동북아해상수송의 중견사로 발돋움하는것을 96년도 말까지의 목표로,

해륙공복합수송체계를 수립하는것을 세기 말까지의 목표로 제기했다.

연항의 “야심”만만한 삼단도약전략!

뽀세창고, 콘테이너적하장 등 기초시설의 마련, 컴퓨터련락망 설립 등 현대화고한리의 정착, 엄밀한 인재양성체계의 확립, 과학적조직, 관리체계의 진일보의 구축, 타사와의 업무제휴 등을 그 바탕에 깔고있는 이 프로젝트는 두만강 삼각주에 대한 국제개발 프로젝트가 추진됨에 따라 허황한 신기루로가 아니라 뚜렷한 현실로 우리 앞에 성큼성큼 다가오게 될것이다.

보라, “연변1호”는 가동해서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연습의 때를 지우고 흑자를 기록했고 그 외의 선박들도 흑자경영체계의 기치밑에 한국, 일본, 중국, 조선, 필리핀 구간을 부지런히 뛰고들있다. “연룡4호”도 당금 동북과 세계와의 거리를 엄청나게 줄여 이 지역 경제에 흥분제를 주입하게 될 것이다. 동북아지역 물동량의 급증추세는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연변항운은 부원 급 선원 700여명을 키워 국내외 여러 선사들에 수송했다. 그들은 연변 제1대의 해원들이다.

해륙공복합수송체계의 수립도 막연한 호언장담이 아니다.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소요의 거액신용차관을 약속해왔기 때문이다.

전룡만씨는 말한다--

“방향과 목표를 뚜렷이 잡아놨으니 아무튼 우선 금년을 촌놈이 신사무대에서 겨루어 이기는 한해로 만들어야겠습니다!”

“촌놈”이 “신사무대”에서 겨루는 한해로! 아울러 겨루어 이기는 한해로!

이것은 심산유곡 연변항운의 세계로 향한 “야심”적인 도전이요, 진공태세인것이다.
이런 도전적 스타일은 1996년도 말, 본세기말에 가서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또한 약동하는 연항의 희망소재이기도 하다!

(본문의 사진은 연변항운공사의 량동섭씨가 제공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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