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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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잡문) 시와 시인의 아리러니 댓글:  조회:3200  추천:0  2018-11-09
                                          시와 시인의 아이러니                                                           최 균 선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깍이는 대로                               억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黙)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이 시는 말썽많은 한국시인 유치환의 “한 개 바위가 되리라”는 시의 전문이다. 이 시를 누군가 찬양하여 가라사대 작자의 기질적 특성인 의지를 가장 잘 반영한 시란다. 바위의 속성은 어떤것에도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작자 자신의 의지적 태도라는가, 그래서 그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했다고, 그러나 인간은 변화될수밖에 없는 약하고 슬픈 존재.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단속하며 의지적 존재가 되기를 념원하던들 그게 어디 마음을 먹는대로 되는 노릇인가?     시의 끝련에서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란 변질되지 않는 의지는 첫연의 발진과 수미쌍관을 이룬 단호하고 강인한 결의로 읽혀지는것은 사실이나 실지로 청마(靑馬)선생님은 그런 사람이였던가! 누구신가 찬양하는바에 의하면 그는 외양적으로 과묵하고 고독(孤獨)의 내면에는 비정의 강인함과 사랑의 불 꽃이 이글거렸다는가,     당시 시조류에 야합하지 않고 독특한 내면세계에 군림하였다는 그는 후에 정말 바위같이 드놀지 않은 지성인이 되셨던가? 묻지 않을수 없다. 해답은 그의 론란거리 가 된 시 “首”가 잘 해석해 줄것이다.                                                                              首                                                                          유치환       十二月의 北海 눈도 안오고 오직 萬物이 苛刻하는 黑龍江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街城 네거리에 匪賊의 머리 두 개 내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少年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寒天의 模糊히 저물은 朔北의 山河를 바라보고 있도다 너희 죽어 律의 處斷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四惡이 아니라 秩序를 保全하려면 人命도 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희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意味함이었으리니 힘으로서 힘을 除함은 또한 먼 原始에서 이어온 피의 法度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險烈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수 없는 無賴한 넋이여 暝目하라! 아아 이 不毛한 思辨의 風景위에 하늘이여 思惠하여 눈이라도 함빡내리고지고…     이 시는 유치환이 1942년 3월 ‘국민문학‘ 에 발표한 작품으로서 항일독립군을 비적이라 표현하고 법을 지키지 않아 만주국정부에 의해 처형당했음을 암시. 일제는 조선독립군을 선비(鮮匪), 공산당항일유격대를 공비(共匪), 토착항일민중을 토비(土匪), 만주의 항일군벌을 병비(兵匪), 대도회(大刀會) 같은 항일교단(敎團)을 교비(敎匪), 홍창회(紅槍會) 같은 항일결사원을 회비(會匪)라고 그 전체를 '비적'이라 총칭했다.      이 시로 하여 당시에는 명망을 떨치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 자신도 예상할수 없었던 후일에는 일제시대 대표적인 친일시로 락인찍힌 작품으로서 평생을 한국의’실록 친일파’의 저자 고 임종씨가 시에서 등장하는 ‘비적(匪賊)’이 대륙침략에 항거하던 항일세력의 총칭이었다.‘라고 말하면서부터 시비거리가 된것이다.     이 시는 또한 자기 자신의 량지를 속인 거짓말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보다싶이 일제침략자들의 잔인행위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항일하다 잡혀서 효수당한 '머리 두 개'를 꾸짖은 철두철미 친일시이다. 그럼에도 최근에도 혹자들은 일컬어 남성적이요, 시의 소재를 확대한 혁명적 업적으로 극찬했으니 흑백전도가 가관이라 하겠다.     죽어서도 바위같이 되리라고 호언장담하던 그는 너무 쉽게 자가당착에 빠졌다. 왜냐하면 이 밖에도 유치환에게는1943년 발표한 '전야'라는 친일시가 또 있기때문 이다. 유치환은 학병지원 특집으로 출간된 친일잡지 '춘추' 12월에 이 시를 발표 하였는데 학병출정 장려시라고 질타한 사람도 있다. 1944년 4월 '조광'에 기고한 '북두성' 에서는 '아세아의 산맥 넘어서 동방의 새벽을 일으키다' 라며 서구제국주의 자들을 물리치고 대동아공영권을 수립하는 일제를 찬양하였다.     유치환은 만주국에서 일제가 준 농장을 경영하였고 그는 친일세력을 확대하고 반일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조직된 최대의 친일단체 '만주협화회'에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로골적으로 일제침략자를 찬양하는 산문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를 발표하기도 했다. 문필인즉 곧 그 사람이라 한다. 유치환은 초기에는 랑만적, 상징적 경 향의 허무성(虛無性)이였으나 차츰 범신론적(汎神論的) 자연애를 바탕으로 허정무위 (虛靜 無爲)의 세계와 강인한 원시적 생명력의 추구를 보여줬다고 평하고있다.     허정무위(虛靜無爲) 그것은 바로 자연의 법칙이며 그 길이야말로 훼손을 막고 우리가 다시 살길이라고 말했던 같다. ‘비와 바람에 깎이는대로, 억년 비정의 침묵에 안으로, 안으로 채찍질하여 나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허정무위’의 길을 제시 하였는가? 참으로 꿈보다 해몽이 더 그럴듯하다고 하리라.     그러나 피로써 씌여진 력사는 필묵으로 지워지지 않으며 각성한 지성인들의 혜안은 세월따라 무디여지는것이 아니다. 례하면 한국의 “통영시민연대”는 "통영시장과 통영시의원들의 역사관이 도대체 어떠한지 묻고 싶을 따름이다"며 "자신의 영달과 안위를 위해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이들을 지금껏 위인이라고 교육하고 혈세를 부어 기념하고 있는 이 마당에 과연 우리 사회는 일본정부만 나무랄 자격이 있는가!"라고 따지며 대성질호하고있다.     잡담제하고, 문필은 그 사람의 인격과 백프로 일치하지 않음을 읽을수 있다. 예나제나 약자들인 문인들이 폭압앞에서 절개를 굽히는것은 인간본성의 약점이라고 생각할 때 리해의 여지가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며 인성은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던가, 하지만 바위든 갈대이든 자신마저 속이 얄팍한 분식은 하지 말아야 하리라. 강폭앞에서 견정 불이한 자란 세상에 흔하지 않다. 그러나 자진하여 친일주구가 된 유치환처럼 스스로 아이러니를 창조하여 후세에 웃음거리를 남기는 시인의 이미지는 막무가내한 인성에 개탄하고도 나머지가 있게 한다.                                                                                       2017년 6월 30일
2    숲속의 대변론 댓글:  조회:3239  추천:0  2018-11-09
                                                   숲속의 대변론                                                           진 편역         개인재산공개문제로 인류사회가 시끌시끌하는 판에 이 사실이 동물세계에까지 전해져서 덩달아 만국동물대회를 열고 의론을 끓이였다.     금사후(金丝猴)가 여론의 첫매가 자기에게 돌아오자 변명하였다. 여러분이 류의할바는 내몸에 금빛옷이 정종금실로 뜬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도 첫인상으로 말하면 표범 (金钱豹)씨가 정말 돈이 많아보인다는것입니다.     표범(金钱豹)이 발끈했다. 참으로 억울합니다. 나의 등에 지고있는 금전은 조상이 물려준 유산입니다. 나는 개인재산공포를 강렬하게 지지합니다. 나는 청백합니다. 그런데 달팽이(蜗牛)는 그냥 자동차집을 몰고다니는데 아무도 고발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도적이 매를 드는 판이라도 이거야말로 말이 됩니까?     달팽이(蜗牛)이는 어이없어 한마디했다. 여러분이 보다싶이 우리네 달팽이가족 전체가 자동차집을 몰고다니지만 근근히 한사람만 용납할수 있습니다. “와차(蜗车” 가 비록 많다한들 누구에게 거저 주어도 욕심내지 않을것이고 또 쓸수도 없는것입 니다. 주택조건이 좋기는 그래도 제비를 첫손에 꼽아야 할것입니다.     제비(燕子)가 달팽이의 무함에 맞받아쳤다. 달팽이 말이 맞는가요? 지난해 나는 왕씨네집에서 지냈는데 한해 한해 못해가는 형편입니다. 사실 내가 집이 있고 층집이라지만 처마밑신세를 개변하지 못하고있습니다. 주택을 여러채 가지고있는 사람들처럼 집을 가진자로 말하면 그래도 토선생을 거들어야 할것입니다. 옛말에 역은 토끼 굴을 세개 판다고 하지 않습니까? 허허허…     토끼(兔子)가 눈을 붉혔다. 비록 내게 집이 세 채 있지만 모두 천적을 피하기 위해 마련한 피난소일뿐이지요. 게다가 해빛도 들지 않은 캄캄한 토굴일뿐입니다. 이건 사실이 아닌가요? 재산공개문제가 제기되면 왜들 나에게만 눈길을 박는지 리해할수 없습니다. 군자는 대도행이라 했는데 저 쥐들은 노상 밤에 나가 활동하기 좋아하는 족속들인데 필경 부정축재를 많이 했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쥐(老鼠)가 찍찍거렸다. 모르는 소리, 기실 나도 심야에 나가 활동하는것을 좋아 하는것이 아닙니다. 만약 대낮에 거리에 나가는 날이면 사람마다 때려잡으라고 소리칠게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주야장철 아글타글하여 모은 재산이 좀 있기는 해도 그것은 생활을 향상시키려는것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우리와 같은 약세군체를 못잡아 먹어서 야단입니까? 지금 고양이님이 경찰청장을 맡고있는데 우리는 부득불 수시로 치성해야 합니다. 그러니 고양이는 회색수입이 가관일것입니다.     고양이(猫)가 대노했다. 적반하장이로다. 나쁜놈이 먼저 고소한다더니, 내가 경장을 맡은후 불철주야 안건을 파내고 불법분자들을 잡아내여 심판받게 하는것이 사실이니 일부 사람들에게 득죄할것은 당연합니다만 여러분,절대 쥐가 불어대는 류언비어를 믿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인터넷상에 나붙는 이런저런 말들에 혹해서는 아니될것 입니다. 에, 여러분은 마땅히 락타와같은 거물들을 감독해야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락타(骆驼)가 코웃음쳤다. 헝, 련며칠씩 광막한 사막을 걸으면서도 물한모금 마시지 못한다는 나의 비참한 조우를 누가 안단말입니까? 내가 여위여죽으면 당신들은 동정하기는커녕 여위여 죽은 락타라도 말보다 크다는 말을 잘하지요, 참 싱거운 롱담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왜 코끼리같은 거물과 비교하지 않고 하필이면 나와 비긴단 말 입니까? 모두 눈망울을 어디다 두고 있습니까?     코끼리(大象)가 긴 코를 홰홰 내두르며 소리질렀다. 보시오, 내게서 값이 나갈것이란 두 가닥 앞이빨이 아닙니껴? 단순히 덩치를 보고 불법재산이 많을것이라고 생각하는것은 웃기지도 않는 편견입니다. 하긴 내가 식량이 크지만 먹는것은 풀이지요, 잘먹고 먹을줄 아는 미식가를 꼽자면 저 웅씨네를 내세워야 할것입니다.     검은곰(熊)이 분통이 터져서 힝힝거렸다. 지어낸 말이요.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먹을줄 아는것은 공개된 비밀입니다. 물고기며 꿀이며 고기며 과일, 오곡잡량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먹지요, 헝, 그런데 당신들은 공무접대에 응수하기에 얼마나 지치는줄 알기나 합니까? 어떤 날에는 예닐곱번씩이나 식탁에 마주앉아야 한다면 당해보지 않고는 도저히 알수 없는 사이비한 식복이지요.     지금은 3고(三高:高血糖、高血脂、高血压)에 걸리지 않으려고 무척 근신하지만 보다싶이 내몸이 원체 생겨먹은대로 이렇게 비대합니다요. 그러나 나는 그저 흥청망청 먹고마실뿐 공금을 제중태에 넣는짓은 하지 않습니다. 아시다싶이 나는 우직하지만 성품이 강직하기도 합니다. 재산공개는 령도부터 이신작칙해야 아래로 효험을 볼것이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저기 점잖게 앉은 호랑이님말입니다.     범(老虎)은 쓸데없이 자기를 씹어치는 곰이 괘씸해서 따웅!하고 불호령을 내렸다. 곰씨를 비롯해서 여러분이 말하려는 저의를 잘 알고있습니다. 즉 령도인 나로부터 앞장서서 재산을 공개하라는것인줄, 하지만, 먼저 알려드리지요. 내 엉덩이 아래에는 더러운 똥이 묻지 않았다는거요. 만약 누가 믿기지 않는다면 당장 내밑구녕에 코를 대고 맡아보란 말이여. 젠장…     숲속 동물대회에서 재산공개문제를 두고 콩이야 팥이야 하고 법석을 피웠지만 결론이 난것은 한가지도 없었다. 저마다 다른 동물을 물어먹는판이라 아무에게서도 확실한 근거를 잡아낼수 없었다. 역시나 동물세계에도 시비기준이 없는것 분명하였다. 회의가 끝나자 제할노릇을 하러 뿔뿔히 떠나갔다. 꿩구어먹은 자리도 아니였다.                                            출처: 2014년7월 31일자 《북경일보》
1    그저 미중부족만이 아닐세그려 댓글:  조회:3149  추천:0  2018-11-09
                                                 그저 미중부족만 아닐세그려                                                                                                      진 언       고기술로 휩싸인 대천세계, 걸어다니면서도 세상만사를 손금보듯 할수 있다는 스마트폰시대, 현대인의 하루는 스마트폰으로 시작해 스마트폰으로 마무리된다. 친구와의 채팅과 인터넷 검색은 기본이고 직장의 업무토의와 이메일 확인, 출퇴근길엔 터테인먼트까지 스마트폰은 다양한 기능을 제공한다. 공공뻐스에서 앉았거나 섰거나 간에 스마트폰에 눈길을 박고 있는 모습은 이제 점입가경이 되였다.     스마트폰은 2010년에 처음으로 출시되고 뒤미처 남녀노소가 스마트폰이 필수품이 되였다. 생활내용도, 절주도 급변하였다. 단점만 빼면 스마트폰은 21세기의 완벽한 기계이지만 인간의 자률과 절제능력을 무력화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디지털로 인한 편리함의 과잉은 우리에게 걱정도 안겨주었다. 대표적인 례가 20~30대 젊은층을 포함하여 디지털치매증후군이 증가하는것이다. 디지털기기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다 보면 기억력을 키우는데 게을러지고 차차 기억을 재생하지 못하게 되는것이다. 마치 치매환자처럼 기억을 되돌리기 어렵게 된다. 디지털기기는 우리가 애써 기억해야 할 노력을 대신하기에 우리 뇌는 그냥 놀기 바쁘다.     심리, 정신세계에도 일대 급변이 일어났다. 휴대전화가 나온이후 사람들은 대체로 성미가 급해졌는데 스마트폰이 나오면서부터는 아예 전화본연의 기능이 “저리 비켜”로 되고 소위 정보의 홍수가 들이닥쳤다. 스마트폰이 전달하는 정보량은 이루다 감당할수 없는데 인간의 두뇌활동이 더 차원이 높아진것은 아닌데도 한결같이 몰두한다. 대뇌발전의 황금시기인 애들이 스마트폰을 과도하게 가지고 놀면 공부에 지장이 있다는것은 상식인데 아이들 자신부터 외면하고 만다.     첫째, 글을 읽음에서 "겉읽기"에 습관된다는것이다. 열독함에서 "겉읽기" 와 “깊이 읽기”가 있는데 "겉읽기"는 비유해 말한다면 기차의 차창밖에 보이는 간판 등의 문자를 읽을 때처럼 단시간에 슬쩍 읽고 내용을 인지하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길수도 없는 그런 읽기이다. 유관된 연구에서 밝혀진데 의하면 스마트폰으로 텍스트를 읽을 때는 "겉읽기"가 압도적이 된다고 한다. 스마트폰으로 텍스트를 읽을 때 자연히 "겉읽기"가 되고 집중력도 저하된다는 바람직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할수 있단다.     두번째는, 스마트폰에서의 다중과업화(한대의 컴퓨터로 두 가지 이상의 작업을 동시에 처리하거나 프로그램을 동시에 구동시키는것ㅡ멀티태스킹)는 인간의 집중력을 크게 저하시킨다는것이다. 걸어가면서, 붐비는 뻐스안에서 열심히 스마트폰에 몰입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매우 분주한듯, 매우 효률적으로 새로운 정보를 섭취하고 있는것 같지만 하나의 정보에 집중하는것을 방해한다고 한다.    스마트폰, 인터넷만으로는 창의성이 발휘될수 없다는것은 역설인가? 아무튼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의 과도한 사용은 어린이뿐만아니라 성인들의 뇌에도 상당히 부정적영향을 미치고 있음에 류의할 필요가 있다. 세상사 새옹지마요 환득환실이 섭리인지라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이 어마어마한 량의 정보를 쏟아내여 인지능력을 고도화 함으로써 단시간에 훏어보고 인식할수 있게 하는 능력을 새로히 몸에 익힐수가 있다 고 할수 있으나 심층에 이를수 없으니 문제거리가 된것이다.     현시대는 이른바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다. 현대인은 이미 '정보과부하'에 걸렸다. 굳이 알고 싶지 않고 알 필요도 없는 사실을 과하게 알게 되는 상황에 뒤늦게나마 짜증나하는 스마폰사용자들이 늘고있다. 꼭 장악해 할 지식만 장악하고 잡다하고 시시매새한 정보들에서 핵심만 간추려 정리하는 능력도 경쟁력이라고 한다. 정보의 흙탕물속에서 진주를 골라내는 눈이 필요하다. 몰라도 되는 내용까지 알게 해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할 일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상기한 피해는 그래도 사치한 피해이다. 스마트폰이 발산하는 전자파가 육체에 끼치는 영향도 악렬하다. 십여년전, 한 동료가 자기 외손자가 네댓살부터 컴퓨터유희를 놀줄 안다고 자랑하더니 얼마후 싼광(散光)안경을 쓰고 다니는것을 보았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된것이다. 얼마전 고향친구가 손자놈이 어릴때부터 유희기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더니 마침내 싼광(散光)안경을 쓰게 되였다고 걱정하였다.     어디 그뿐이랴, 스마트폰에 정신을 팔다 발생하는 사고가 련속부절이다. 산서성의 한 물놀이장에선 젊은엄마가 스마폰을 들여다 보느라 정신을 빼앗긴 사이 어린아 들이 아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도 스마트폰을 보느라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아이는 물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뻐스운전사가 휴대전화를 보느라 도로 상황을 주시하지 않아 사고가 나기도 했고…     지금의 시대는 어떤 일은 물론 공부에도 창의성의 선행되여야 한다. 스마트폰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면 "깊이 읽기"를 하거나 집중해서 무엇인가를 사고할 때가 있을가? 스마트폰은 더없이 편리한 등 장점이 있기에 애용하게 되였는데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능동적으로 적절하게 다루어 창의성 발휘의 수단으로 삼을것인가 아니면 기계의 노예가 될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난제로 안겨졌다.     스마트폰을 과도하게 리용하는것뿐만 아니라 곁에 놔두기만 해도 뇌인지능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또한 스마트폰을 장시간 눈에 대고 있으면 시력손상이 불가피한데 특히 아동, 청소년 시력저하 등 치명적인 위협이 동반되고 있다는것이다. 그럼에도 잠자는 시간을 내놓고 스마트폰을 사용하기에 스마트폰에 따른 증후군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다. 이 또한 고기술이 빚은 비애가 아닌가?     컴퓨터가 보급되지 못하고 “따거다”도 보급되지 못했던 지난세기 90년대, 일컬어 “왕바(网吧)”라는것이 도처에 생겨나서 사람들을 유혹하였는데 얼마나 많은 중소학생들이 전자유희, 게임에 빠져 학업을 망치고 전도를 망쳤는지 모른다. 지금은 코흘리개들의 손에도 스마폰인지 지능핸드폰인지가 쥐여져 있는 시대라 21세기 자녀교육에 풀수 없는 대난제로 되고있다. 감각을 따라 간다는 시대여서인지 중소학생들이 자극을 추구하여 자기를 절제할수 없을 정도가 되였으니 누가 이 난제를 풀것인가? 스마트폰이 개체에 주는 리해득실은 각자 알아서 분별할 일이다.     문제는 전지구적, 전 인류적인 재난을 불러온것이다. 주지하다싶이 쓰다버린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전자쓰레기로 하여 또 다른 쓰레기대란을 불러온것이다. 보도에 의하면 2010~ 2015년 사이 아시아 12개국 전자쓰레기 발생량은 총 1230만t. 5년만에 63%나 급증했다 중국이 670만톤, 일본 223만톤, 한국 83만톤, 인도네시아 81만톤, 베트남 45만 톤이나 된단다. 쓰다버린 스마트폰, 예상하지도 못한 전자쓰레기로 지구가 또 다른 몸살을 앓게 되였다.     환득환실이란 말은 참으로 만고의 경세지언이 아닐수 없다. 고도의 물질문명, 고기술의 덕택으로 더할 나위없이 편리해지고 편해졌지만 얻은것보다 잃은것도 그에 못지 않으니 이는 인류문명의 이률배반인가? 간소한 삶일수록 행복지수가 높다고 하면서도 한편 끝없이 복잡하고 번거로운 삶을 자초하고 있으니 자가당착은 아닌가. 스마폰의 유혹력을 이겨내지 못하게 된 인류는 자업자득을 경축할것인가?                                                                     2017년 1월 20일                                                                                                 (2018년 11월 2일) 연변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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