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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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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천국에 가서도..." 댓글:  조회:3261  추천:0  2019-03-27
  [앵커의 눈]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년… 일본에서도 ‘영웅’ 2019-03-26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안중근 의사 유언 :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오늘은(26일)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109년이 되는 날입니다. 서울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도 추모행사가 열렸고요, 안 의사가 144일을 갇혀있다 순국한 중국의 뤼순 감옥에서도 추모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지금도 뮤지컬과 영화, 드라마 속에서 우리 곁에 살아 있습니다. 사형장에서까지 동양의 평화를 염원했던 모두의 영웅이었기 때문인데요, 일본에도, 이런 안 의사를 영웅으로 기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도쿄 이승철 특파원이 만났습니다. [리포트]  추모비로 향하는 길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안중근'이라는 이름 아래 전범기인 욱일기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워낙 세게 붙어 있어서 잘 떼지지도 않네요."] 그리고 안내판을 따라간 곳, 절 앞마당에 안중근 추모비가 서 있습니다. 안 의사가 중국에서 처형당할 당시 형무소의 간수였지만 그의 인품과 사상에 감복했던 일본인 헌병 지바 도시치. 안 의사가 처형 직전 지바 씨에게 써 준 '유묵'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계기로 지난 80년 세워진 추모비입니다. 이곳에서는 매일처럼 안중근 의사께 예를 표하고 그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간 협박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사이토/스님 : "(협박이 있다고요?) 빨리 비를 철거하라고, 왜 안중근이 일본에 있느냐면서."]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지난 2002년에는 지역 역사모임 회원들을 중심으로 또 다른 추모비를 건립했습니다. ["영웅... 안중근 의사"] [오노데라/구리하라시 역사이야기회 회장 :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안중근 의사의 신념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건 어느 시대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 단체는 일본 전국을 돌며 20차례 가까이 강연회를 열어 안 의사의 사상을 설파했고 건립비를 모금했습니다. 비에는 안 의사의 평화사상을 새겼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평생 그의 신념을 되새기며 살았던 지바 씨의 마음을 한일 양국이 공유할 수 있길 바라는 뜻도 담았습니다. ["가져 온 안 의사의 유묵을 모셔놓고 (지바 씨가) 매일 예를 올렸다고."] [스가와라/구리하라시 국제교류회 회장 : "두 사람의 인연처럼... 서로 신뢰하는 것이 평화운동의 기본이 되는 것이죠."] 지금도 매년 안중근 의사 순국일에는 한국을 찾고, 탄생일엔 일본에서 행사를 치르며 안 의사를 기리는 일본 시민들. 평화를 위해 침략을 멈춰야 한다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이 일본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야기에서 KBS 뉴스 이승철입니다. /이승철 기자
2    [그것이 알고싶다] - 안중근 유해 찾아 안식시켜야... 댓글:  조회:3466  추천:0  2019-03-27
109년째 지키지 못한 안중근 유언… 유해 발굴 제자리  2019-03-26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조국의 독립을 꿈꿨던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오늘(26일)로 꼭 109년이 됐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뼈를 중국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국권을 되찾으면 고국으로 옮겨달라는 말을 남겼었는데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안중근 의사 가족의 유해가 어디 있는지도 지금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송욱 특파원이 그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뤼순 감옥의 사형대 위에서도 대한국인의 의기를 꺾지 않았던 안중근 의사. 109년이 지난 오늘 그곳에는 안 의사에 대한 추모와 유언을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이 가득했습니다. 안 의사의 유해 발굴은 지난 2008년 실패 이후 답보 상태입니다. 유력한 매장지로 뤼순 감옥 공동묘지 터가 지목됐지만 중국은 남북한의 합의와 정확한 근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김월배/하얼빈이공대 교수 : (유력 매장지) 지역에 일반인의 묘지들이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고 있는 상태입니다. 더 요원하기 전에 지표투과 조사라든지, 그런 형태의 (조사를) 실현해야 (합니다.)] 안중근 의사뿐 아니라 안 의사 가족들의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형을 앞둔 아들 안중근 의사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고 했던 조마리아 여사와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동생 안정근 선생, 안 의사의 부인 김아려 여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눈을 감았고 상하이의 한 외국인 공동묘지에 안장됐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이 안장됐던 곳입니다. 하지만 1950년대 상하이 도심 개발 사업으로 이처럼 공원으로 변했습니다. [스위안화/푸단대 교수 : 당시 상하이 정부에서 그 공동묘지에 있는 묘들을 일정 기간을 주고 이장하라고 공고했습니다. 기간이 지나면 정부에서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묘지 이장 과정에서 안 의사 가족의 유해는 사라졌고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관련 서류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쑤즈량/상하이사범대 교수 : (기록보관소, 민정국 등을) 지난 1년여 간 모두 조사했습니다만 정확한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당시 이장 관련 일을 했던 사람을 찾으면 내용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동안 정부는 안중근 일가의 유해 봉환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공언해왔습니다. 이제는 말이 아닌 외교적 역량과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때입니다. (영상취재 : 이국진, 영상편집 : 정용화, 자료 : 안중근의사숭모회)   /송욱 기자
1    [그것이 알고싶다] - "실록" = 2219책 = 국보 댓글:  조회:3746  추천:0  2019-03-27
  "이 일을 모르게 하라"까지  철저한 기록정신의 산물, 실록 2219책 모두 국보된다 2019-03-26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보내기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반출해간 것으로 알려졌던 적상산(무주)사고본 중 일부(4책)가 국립중앙박물관(1책)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3책)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었다. |문화재청 제공 “사관의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臣如不直 上有皇天)” 1401년(태종 1년) 태종은 임금이 정사를 보다가 쉬는 공간(편전)을 따로 마련하고는 “이곳은 내가 쉬는 곳이니 사관은 들어오지 마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사관들은 “무슨 소리냐. 안된다”고 버텼다. 임금이라면 편전에서 쉬다가도 대신들을 불러 정사를 논할 수도 있고, 그곳에서 경연장(경전을 논하고 논쟁하는 곳)을 마련할 수도 있지 않은가. 따라서 임금의 일거수일투족, 정사의 한 대목 한 대목까지 빠짐없이 기록해야 하는 사관들은 당연히 임금이 쉬는 편전에도 입시해야 했다. 이복동생(방석)을 죽이고, 동복형(방간)까지 쫓아내고 정권을 틀어쥔 태종 이방원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가. 태종은 지존인 군주의 뒤를 찰싹 들러붙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관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기껏해야 7~9품 하위직에 불과하던 사관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봉모당’ 실록. 정조가 1776년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 부속 건물로 건립한 봉모당(奉謨堂)에 보관한 실록이다. 실록은 원래 임금들에게는 ‘열람불허’가 원칙이었다. 따라서 18세기 이후에는 일상적인 실록 외에 주로 역대 국왕과 왕비들의 생애와 행적 중심의 ‘어람용’ 실록을 따로 제작했는데, ‘봉모당본’이 대표적인 어람용 실록이다. |문화재청 제공 사관 홍여강은 “편전에 들어오지 말라”는 명을 어기고 편전의 뜰 아래까지 진입했다가 쫓겨났다. 내시들은 버티는 홍여강의 팔짱을 끼어 부축한채 쫓아냈다. 내시들은 대롱대롱 매달린 홍여강을 내동댕이 쳤다. 이번에는 사관 민인생이 나섰다. 도승지(박석명)의 제지에도 민인생은 편전 문을 밀고 쳐들어왔다. 태종이 “내 말이 말같지 않냐. 왜들어왔냐”고 꾸짖자 민인생은 “전하의 좌우에는 사관이 입시해야 정사를 기록할 수 있다”고 고집을 피웠다. 태종이 “과인이 쉬는 편전에는 왜 들어오냐. 굳이 쓰려면 편전 밖에서 쓸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웃으며 좋게 타일렀다. 그러나 민인생은 정색하면서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으면, 사관의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臣如不直 上有皇天)”라고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4월29일) 7월8일에는 편전에 앉아있던 태종이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과연 누군가 문밖에서 엿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태종이 “어떤 자가 편전을 엿보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내관들이 달려나가 보니 사관 민인생이었다.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까 몰래 훔쳐보며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려 한 것이다. 민인생은 결국 편전의 휘장까지 걷고 엿보는 등 예절에서 벗어났다는 죄목으로 유배형의 처벌을 받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태종은 시도 때도 없이 사냥을 나갔는데 이것은 나라의 안녕에는 큰일이었다. 사냥을 나갔다가 변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한다 말인가. 그런데 1404년(태종 4년) 임금이 반대를 무릅쓰고 노루사냥에 나섰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깜짝 놀라 훌훌 털고 일어난 태종이 한다는 말이 걸작이다.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 그런데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사관은 태종 임금의 “이 일을 모르게 하라”는 말까지 기록해서 결국 에 남겼다. 결국 당대의 사관들은 천하의 지존인 임금이 쓰지 말라는 것까지, 즉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이 ‘오프더레코드’를 걸어놓은 것까지 쓴 것이다. 은 이렇듯 ‘사관 위에 하늘이 있다’는 정신으로 군주와 신하들의 잘잘못과 당대의 정사를 일일이 기록하며 또 포폄까지 했던 뭇사관들의 춘추필법 정신이 녹아있는 결정체이다. 조선조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의 편년식으로 정리했다. 조선 시대의 정치·사회·외교·경제·군사·법률·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 사실에 대한 기록이며 당시 국왕도 마음대로 열람하지 못했다. 그만큼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자료이므로 1973년 국보(제151호)로 지정되었고, 국제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정족산사고본 실록. 1973년 정족산 사고본 1181책이 국보 제151-1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실제로 책수를 세어보니 1180책이었다, 왜 1책이 빠졌는지는 알 수 없다. 태백산 사고본(848책)은 제151-2호, 오대산 사고본(27책)은 제151-3호, 기타 산엽본(21책)은 제151-4호로 각각 지정됐다. 2006년 일본 도쿄대가 반환한 오대산사고본 47책은 국보 151-3호로 추가 지정됐다.|문화재청 제공 하지만 멀리는 임진왜란·병자호란부터 가까이는 일제강점, 한국전쟁, 분단 등의 이유로 실록은 거듭 수난을 당해왔다. 2016년에는 국보 151-1호인 ‘실록 정족산(강화)사고본’의 일부가 1973년 국보로 지정될 당시부터 누락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2017년부터 실록 소장처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함께 1년에 걸쳐 현황을 재검토한 뒤 지난해 실록의 소재지를 전수조사했다. 그 결과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85책, 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9책,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각 1책씩, 모두 96책을 새롭게 확인했다. 원소장처별로 보면 적상산사고본 4책과 오대산 사고본 1책, 정족산사고본의 누락본 7책, 봉모당(규장각 부속건물)본 6책, 낙질 및 산엽본(낱장으로 떨어져 흩어진 자료) 78책 등이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확인된 96책을 추가로 국보로 지정예고했다. 96책이 별다른 이의없이 국보로 지정될 경우 1973년 지정된 2077책(실제로는 2076책)과, 2006년 추가로 지정된 47책을 합해 모두 2219책의 조선왕조실록이 국보가 되는 셈이다. 황정연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학예연구사는 “지금까지 확인된 조선왕조실록 모두가 이번에 국보로 지정되는 셈”이라고 밝혔다.  가장 큰 성과는 한국전쟁("6.25전쟁") 때 북한군(조선군)이 북으로 반출했다고 알려진 적상산(무주) 사고본(4책)이 국립중앙박물관(1책)과 한국학중앙연구원(3책)이 나눠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적상산 사고본은 ‘광해군일기’이다. 북으로 반출된 것으로 알려진 적상산 사고본 일부의 발견으로 조선의 4대 사고(史庫)인 정족산·오대산·적상산·태백산 사고에 소장된 실록이 완질 또는 일부 형태로나마 국내에 다 남아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정족산사고본 누락본인 ‘성종실록’과 산엽본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었으나, 1973년대 국보 지정 과정에서 빠졌다. 오대산사고본은 문화재청이 지난해 3월 문화재 매매업자로부터 구매한 ‘효종실록’이다. 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있는 ‘봉모당본’은 정조가 1776년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 부속 건물로 건립한 봉모당(奉謨堂)에 보관한 실록이다. 푸른색 비단으로 장정하고 첫면에 ‘봉모당인(奉謨堂印)’이라는 인장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봉모당본’은 특히 어람용 실록으로 주로 역대 국왕과 왕비의 행적을 기록한 일대기이다.  어람용을 특별히 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실록은 객관성 보장을 위해 임금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태종은 물론이고 세종까지도 부왕(태조와 태종)에 대한 사관들의 평가가 궁금해서 실록을 열람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료들은 1438년(세종 20년) “임금이 사서를 열람하면 그때부터는 사관들이 그른 일을 옳게 꾸미고,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게 된다”면서 “사관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면 여러 신하들은 임금의 뜻에만 따르게 되는데, 그럴 경우 천년 뒤에는 무엇을 믿겠느냐”고 정색했다. 그럼에도 임금들은 실록을 보고싶은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18세기 이후에는 일상적인 실록 외에 주로 역대 국왕과 왕비들의 생애와 행적 중심의 ‘어람용’ 실록을 따로 제작했다. 황정연 학예연구사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않고 마음껏 당대의 정치를 포폄한 사관들의 일관된 태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새로 확인된 ‘낙질과 산엽본’은 78책이다. 낙질본은 원래 사고에서 제외된 중간본(重刊本)이 많고, 산엽본은 정족산사고본 실록의 낙장을 엮은 책이다. 그런데 ‘낙질과 산엽본’은 재해로 인해 훼손됐거나 일부를 오리거나 붙여 수정한 흔적이 많다. 그러나 일부 조각이라도 소중히 보관해야 한다는 사관들의 마음가짐과 편찬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이번에 지정예고한 실록은 갑작스런 재난에 대비해서 여러 사고에 나누어 보관한 체제와 수정, 개수 등 실록 간행의 종합적인 실상을 알려주고 선조들의 철저한 기록관리 정신을 다시한번 증명해주는 유산”이라면서 “국보로 추가지정하기에 충분한 유산”이라고 평가했다.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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