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국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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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화기행8] 눈물의 민구 - 절구(최국철9) 댓글:  조회:705  추천:0  2012-07-31
[문화기행8]                           눈물의 민구 - 절구최국철 절구-곡식을 찧거나 빻는 민구(民具)이 하나다. 하지만 현시대 믹서, 주서의 출현으로 보기 흔치 않은 민구로 기억에 남아 있다.우리민족은 > 라는 속담을 출범시킨 민족답게 수천가지 민요군을 방출했지만 그 중에서 유독 절구 타령이나 절구에 관한 민요가 없다. 새 쫓는 노래, 쇠스랑타령 까지 만들어 낸 우리민족에게 절구 타령이 왜 없을가 의심해 보지만 결국 절구와 방아는 용도가 같은 민구에 속한다는 해답에서 방아타령을 대입해도 불편하지 않을것이다. 방아가 일반적으로 발로 사용되는 민구라면 절구는 알짜 손으로 사용하는 민구이고 발 방아보다 가변성이 있고 일감이 방대하지도 못하다.절구는 재료에 따라 나무절구·돌절구·무쇠절구 등이 있다. 두 사람이 마주서서 맞공이질을 할 수 있는 큰 절구도 있었다. 현재 이런 대형 절구는 언녕 소실되고 양념을 빻는 소형 무쇠절구들은 흔하게 볼 수 있다.할머니 말에 의하면 에 녀인들은 일터에서 돌아와서는 저녁에 먹을 보리쌀을 빻았다는데 얼마나 고달팠으랴. 삼 나이가 무릅을 퍼렇게 물들게 했다면 절구는 허리병을 도지게 하는 기구였다. 허리힘을 요하는 절구는 오래 빻으면 저도 모르게> 신음 비슷한 먹임소리가 흘러나간다.80년대까지 시골에서 꼬부랑 할머니가 등뒤에 손자, 손녀를 위태롭게 업고 절구를 빻는 경치를 흔하게 볼수 있었다. 엉덩이께로 흘러내리는 어이를 추스르고 한편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고... 고역이 틀림없었다. 정미소가 있지만 작은 량의 먹거리는 이런 절구에 의거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도 간혹 이런 전경을 볼수 있다.민요의 연변 과정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민요의 탄생을 지혜, 기지, 지향과 념원, 풍습 등, 아름다운 서사어를 동원하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민족의 민요는 먼저 애원이나 고달픔, 한. 넉두리, 눈물에서 배출된 것이 틀림없으리라절구 -언녕 소실되여 박물관에서만 소장해야 하는 민구다.  
6    [문화기행7]-쟁기-바람같이 사라지다 (최국철8) 댓글:  조회:725  추천:0  2012-07-31
[문화기행6]쟁기-바람같이 사라지다최국철 이번 시골 생활문화기행에서 거리던 소달구지의 소실이 첫 번째 기쁨이였다면 두 번째의 기쁨은 쟁기의 소실이다. 겨리- 소 두마리가 끄는 쟁기를 이르는 말이다. 시골에서 모두 라는 방언으로 통칭되는 쟁기의 출현은 수천년의 력사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그냥 무심하게 보아 왔던 쟁기가 갑자기 바람처럼 사라진 것이다. 아닌데...기자는 쟁기를 찾아서 이 마을 저 마을 찾아다니면서 기웃거리는 싱거운 행각을 보이다가 어쩌다가 쟁기풍경을 렌즈에 담는 수고도 했다. 사라진지가 어느 땐데... 시골사람들은 이제는 모두가 손잡이뜨락또르거나 소형뜨락또르용 쟁기를 쓴다고 했다. 실제 돌아보니 모두가 소가 아닌 동력으로 밭을 갈고 있었다. 어느 때부터 풍경이 바꿨나. 옛날 우리의 선조님들은 한겨울 쌀밥에 희나리(마른 장작나무)가 웰빙 생활이라 알았고 아지랑이 아물거리고 종달새 우짖는 봄날 남편이 앞에서 밭을 갈고 안해가 뒤에서 씨뿌리면 그것을 가장 따뜻한 경치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풍경이 가뭇없이 사라졌고 한 쪼각이 감동으로만 남았다. 시골에서 웬간한 장정이면 모두가 쟁기를 다룰 줄 알지만 그 쟁기를 만들거나 다루는 차이가 있다. 쟁기를 잘못 만들면 뒤 손이 무겁다고 툴툴거렸고 꽁무니에 연장을 차고 나가서 밭머리에서 뚝딱거리면서 고치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콩이나 옥수수를 심을때면 괜찮지만 조씨를 떨구 때면 묵은 곡식 그루를 뜨는지라 는 속담이 류전될 정도로 고도의 정신력을 수요하기도 했다. 밭갈이에는 보통 쟁기를 다루는 장정 한 명과 씨를 떨구고 비료를 두는 녀성 두 명을 멤버로 조를 짜는데 생산대 시절 처녀들은 은근히 잘생기고 자기마음에 드는 총각을 찾아 나섰고 총각들 역시 해사한 처녀들을 곁눈질했는데 시골 일에서 밭갈이만큼 남녀사이를 급속하게 가깝게 하는 일도 없었다. 총각이 밭을 갈고 처녀가 씨뿌리고... 이제 누군가 이런 풍경을 유화로 그려 역사에 넘겨야 하지 않을가 잠시 생각해 본다.
5    [문화기행6]'때려서 먹는 음식' -찰떡 (최국철7) 댓글:  조회:675  추천:0  2012-07-31
[문화기행6]"때려서 먹는 음식" -찰떡최국철지금으로부터 49년전 도문시 장안진의 소동구라는 시골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보리가을하고 저녁 늦게 들어온 한 중년녀인이 어둑한 등잔불 밑에서 떡을 치는 남편의 시중을 들다가 남편의 떡메에 골을 맡고 쓰러 졌다. 자루에서 빠진 메가 공중에서 란무하다가 사고를 낸 것이다. 그리고 녀인은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나갔다. 기자의 외조모는 이렇게 세상을 떠나갔다. 음식 중에서 찰떡만큼 공예가 번잡한 음식도 없다. 떡을 치는 순간부터 그 육중한 떡메로 하여 위험수위가 높았고 먹을 때도 자칫하면 목구멍에 걸려서 생명을 잃는다. 필자의 소학교4학년 반주임도 찰떡을 먹다가 목에 걸려서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찰떡을 먹다가 횡사한 사람들은 이전부터 부지기수다.그래서 찰떡을 먹는 습관이 가관인데 찬물에 휘적휘적 적셔 먹는 사람, 콩기름에 말아서 먹는 사람, 각양각색이다. 못살던 그 시절 동네에 떡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베보자기에 놓고 주근주근 밟아서 만들었다는 어느 깍쟁이 일화도 거짓말이 아니다. 찰떡에 대한 비화가 끊임없이 발생하여도 떡은 말 그대로 찰떡같은 끈기로 그 생명력을 연장해나가고 잇다. 찰떡이 점도가 강한 것은 찹쌀의 녹말이 주로 아밀로펙틴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밀로펙틴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사슬 모양의 구조를 가진 고분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찹쌀을 쪄서 치면 아밀로펙틴이 서로 엉겨서 끈끈해진다. 찰떡은 질이 치밀하므로 용적에 비하여 질량이 많으므로 칼로리가 높다. 오뉴월에 까마귀 골만한 찰떡을 먹어도 기를 돋구어 주고 삼복철에 개고기 국물을 넓적다리에 발라도 기를 돋군다는 속담은 지금도 유효한 걸로 알고 있다. 약이 귀하던 그 시절 민간에서는 위가 약하거나 위궤양에 찰떡을 먹혀서 치유했다. 어디 그뿐이랴. 대학입학시험일에는 락방하지 말라는 속설에 의해 학교의 출입문에 하얀 찰떡이 덕지덕지 매달린다. 끈기 있게, 풀기 있게...새로운 찰떡전설을 아름답게 구가 할 것이다. 지금은 떡메를 보기가 흔치 않고 기계로 대신하여 힘들게 때려서 먹는 중간고리를 생략해서 좋은 점도 있지만 그 대신 찰떡 맛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말을 듣는다. 타민족들이 가장 신기해하는 음식 중에서 단연 찰떡이 왕관을 차지한다.. 때려서 먹는 음식- 찰떡 지속적으로 껄끄러운 비화가 끊지 않는 음식이지만 맛좋은 우리민족의 전통음식이다.
4    [문화기행4] 덜커덕 달구지 댓글:  조회:595  추천:0  2012-07-31
[문화기행4]덜커덕 달구지최국철해밝은 길에 삐그덕 삐그덕 달구지가 흔들며 가네 덜커덕 덜커덕 삐그덕 삐그덕 흔들흔들 흔들며 가네 ... 앞마을에 복스러운 며느리감이 있다던데 ... 우리민족의 민요의 한 대목이다. 우리는 이 민요에서 봄이 내려앉은 시골의 흙 길에서 시름없이 흘러가는 소달구지를 련상할 수 있고 거기에 눈을 지그시 감고 느릿느릿 소가 끄는 달구지에 몸을 싣고 가는 늙은 촌옹의 보습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민족의 민요에서 상기한 노래만큼 농경사회의 풍경을 유연하게 묘사한 노래가 없다고 본다. 한 폭의 수채화다. 삐그덕, 덜거덕은 나무바퀴에 쇠테를 두른 달구지에서 나는 소리를 말한다. 이런 달구지를 찾아 필자는 이번에 십여개의 촌을 밟았는데 끝내 예기한 목표물을 찾지 못했다. 시골사람들이 말에 의하면 4-5년전에 벌써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어제같이 보았는데 벌써 자취를 감추다니... 그 대신 고무바퀴로 만든 달구지가 류행이였는데 멍에에서 자체까지 알뜰한 강철로 만들었다. 새 천년을 맞으며 새롭게 진화한 달구지들이다. 1300년경 은나라에서 전차가 출범하면서 동시에 나타난 소달구지는 700백년의 력사를 자랑하고 있고 아직도 집요하게 그 존재를 고집하고 있다. 달구지는 수레라고도 통칭되는데 의미지가 같으면서도 캐고 보면 약간 다르기도 하다, 달구지라면 소가 끌게 돼 있고 수레라면 소도 끌 수 있고 가볍게 만들면 사람도 끌 수 있게 돼 있다. 이런 수레는 각 나라마다 모양이 약간씩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다. 마퀴 4개 짜리도 있는데 우리민족은 대개 2개의 마퀴가 달린 달구지를 사용해 왔다. 하지만 남도에서는 흔히 멍에와 달구지 틀이 분리되여 있고 북도는 멍에와 자체가 채로 련결되여 있다. 그리고 평원에서 쓰는 달구지와 산지에서 쓰는 달구지도 약간씩 달랐다. 용정이나 화룡쪽에서는 달구지 틀이 약간 짧고 짐을 실어도 세로 실었지만 훈춘이나 왕청쪽에서는 차체가 약간 길었고 짐을 실어도 가로 실었다. 달구지라면 삐그덕 거리는 소리 외에도 겨울이면 눈길에서 짜르르 이상한 소리를 내는데 한겨울 벼 짚이나 조 짚을 성시에 실어 나르는 처서 때면 새벽에 짐 실은 달구지가 눈길에서 짜르르 들려오던 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날 저녁이면 동구 밖에서 아낙네들은 처서를 간 나그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달구지는 육중한 강철축대에 역시 쇠로 만든 강철원을(시골에서는 타리라 불렀음) 끼여서 바퀴가 돌게 했으니 거기에는 마찰을 줄이려고 기름칠을 하게 돼 있는데 달구지에 쓰는 기름은 고약처럼 질긴 검은 기름이다. 지금 보면 석유에서 가솔린, 디젤유 같은 상등 기름을 분유한 후 남은 찌꺼기다 보리밥에 박 바가지가 짝이고 된장에 풋고추가 제격인 것처럼 달구지에는 찌꺼기 기름이 제짝인가 한다. 고약처럼 필요 없이 질기고 상품가치도 전무한 그 보잘것없는 기름과 달구지의 소실은 이번 문화기행에서 제일 환호작약할 일로 남는다는 것을 밝히면서 그>소리를 아련한 향수로 떠 올려 본다.
3    [문화기행3] 시골 대문문화 댓글:  조회:657  추천:0  2012-07-31
[문화기행3]시골 대문문화최국철대문문화에서는 아무래도 성시보다 시골이 앞선 듯 하다. 시골의 대문은 부지 내의 시설을 보호하는 방어적인 목적과 시설을 표현하는 의장적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시골에서 현재 거이 대부분 마당으로 통하는 대문이 설계되여 있는데 대개 쇠파이프로 만든 철대문과 널판자로 만든 두 가지로 크게 볼 수 있다. 소유지를 표현하는 대문은 시대에 따라 대문의 의장, 구조, 재료의 구성, 경제 여건 등 복합적인 의미지로 변화되여 왔다.시골에서 제일 먼저 출현한 것이 사립문(삽짝문)이다. 가느다란 싸리나무나 잔잔한 나뭇가지로 엮어서 문짝을 만들었는데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연변의 노래에도 많이 오르내렸다. 개바자에 삽짝문은 사촌격이다. .사립문은 대충 만든 문이라 든든하지 못하고 삐걱거려서 사용하기가 불편했다.시골에서 주택개혁은 80년대 중기부터 고조를 일으켰는데 이시기에 벽돌담장이 서고 거기에 철대문이거나 솟을대문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시내에서 나온 철문장사차가 시골에서 어슬렁거린다. 현재 시골이라도 철대문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철대문은 든든하지만 엿 볼 수 있다는 괜한 불쾌감이 있어 몇년전부터 철판문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과거 우리조상님들의 주택대문은 계급에 따라 그 양식을 달리했다. 보통 농가나 초가에사는 서민들은 사립문을 설치했다. 이때 대문의 구성재료는 설치된 바자 재료와 대부분 같게 하는 것이 통례이나 때로는 담은 토담으로 구성되고, 대문은 사립문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기와지붕을 한 일반 서민주택이나 중류주택에서는 몸채 또는 행랑채와 같은 지붕 속에 문을 설치한 평대문 양식으로 했다. 이런 양식은 북도 보다 남도쪽에서 더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벼슬자리가 높은 관료들이거나 사대부의 주택에 주로 건축되는 솟을대문은 이 대문이 설치되는 행랑채보다 대문채 지붕을 한층 높이 솟게 만들었다. 또 좌우에 기둥을 하나씩 세우고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하고 두짝 판장문을 설치한 일각대문은 주로 마당과 마당을 구획하는 담에 설치되었다. 솟을 대문은 부와 권력이 상징이기도 했다.이런 력사가 있기에 우리 민족에게는 '남대문놀이'와 '문열어라놀이'라는 민속 놀이까지 있었다.
2    [문화기행2] 우리들의 담장문화 댓글:  조회:575  추천:0  2012-07-31
[문화기행2]우리들의 담장문화 최국철현재 연변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울바자는 야산에서 나는 싸리나무나 가둑나무 등으로 만든 울바자(《목책(木柵)》이라고도 하고 한국에서는 바자울이라 함)와 판장(板墻)으로 만든 나무울바자들이다. 이보다 튼튼하게 만든것은 담, 또는 담장이라 하는데 토담, 돌담, 벽돌담, 블록담, 콘크리트담 등이 있다.력사적으로 담장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든 성(城)에서 기원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담장문화에서 중국은 만만찮은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담장문화는 그 력사가 깊고 웅후하다. 중국인들의 담장은 조선사람들의 담장보다 높고 든든한것이 특징이다. 조선도 삼국시대부터 꾸준하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나름으로 력사가 있는 셈이다. 옛날의 성곽은 흔히 토성(土城) 과 석성(石城)이 알려져 있으나 목책으로 울타리를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현재 담장은 시골에서 가장 많이 볼수 있는데 크게 울바자와 벽돌담장으로 나누어 볼수 있다. 수만년전부터 사용해 왔던 울바자와 현대산물인 벽돌담장이 나란히 상존해 있는 보습이 퍼그나 신기하다. 훨씬 이전 우리 조상님들의 거주지와 집들은 대개 외주물집들이였다. 외주물집이란 마당도 크게 없고 밖에서 안을 마음대로 엿볼수 있는 그런 집을 말한다. 사실 깊은 산골에 외따로 떨어져서 지은 집에는 울타리가 필요없었을것이다. 군체를 이룬 부락이라 해도 셈평이 짭짤하게 펴인 집이라야 돌과 흙으로 만든 죽담이거나 지푸라기를 섞어 쌓은 흙담이 고작이였다.현재의 담장문화는 너무 높게 쌓는걸 맹신하지 않는다. 풍수설과 기후에서 기원한것이다. 시골에서는 지금도 주인집 나그네를 알려면 먼저 변소간부터 보라는 일설이 류행하는데 마찬가지로 담장을 보면 주인집 나그네 얼굴을 련상할수 있다. 울바자를 개바자로 대충 엉성하게 뭉그렸다면 틀림없이 어수선한 나그네의 일솜씨를 짐작할수 있다. 반대로 참나무로 튼튼하게 만든 울타리면 아주 튼실한 나그네의 모습을 엿볼수 있다. 지금은 시골에서 바자(담장) 싸움을 흔하게 하지 않지만 이전에는 봄이 되여 울타리를 다시 세울때면 앞뒤 집에서 흔하게 바자싸움을 하군 했다. 그 바자 너머로 언제 떡사발이 오갔냐 의심할 정도로 얼굴을 붉히고 삿대질이 오갔다. 담장은 울바자보다 경제적으로도 훨씬 투자가 많고 든든하고 이런 말썽도 피할수 있었다.이런 담장문화도 어쩔수 없이 제한성을 동반하고 있는데 괴리감을 조장하고 바깥세상과의 련계를 등지는 등 지적을 받기도 했고 개혁개방전에 담장문화는 중국의 전통적인 자기중심과 외계의 발전을 도외시한다는 대명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여 정부청사에 둘러막았던 담장을 철거하는 파격적인 모습도 보였다. 제창할 바다.
1    [문화기행1] 주거문화로 보는 력사 댓글:  조회:687  추천:0  2012-07-31
[문화기행1]주거문화로 보는 우리력사 최국철조선족들의 이주 력사가 통상적으로 백년안팎이라 볼 때 이민 1세들의 지은 주택은 이제 문화재 버금가는 고택으로 남았고 이런 대표적인 유물은 후세들에게 민속적인 읽음과 대단원을 달아야 하는, 은근한 무게로 압박을 해 오는 시점까지 왔다. 조선족들의 대표적인 주거 공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지금도 흔적이 랑자한 초가집들이고 다른 하나는 기와집 군체다. 초가집은 그 맥이 길어도 과거나 현재까지 거이 답습상태이기에 여기에서 기와집만 잠시 언급하련다. 현재 연변의 시골에 간혹 남아 있는 기와집은 그 력사가 대개 60-100 좌우로 봐도 무리가 없다. 도문시 량수진 소재지마을에 합각지붕 기와집이 네 채가 군체로 자리잡고 있는데 현재 한 채가 무너지고 세 채가 보존 되여 있다. 그 외에 월청진의 하석건, 백룡, 등지에 4-5 의 기와집이 남아 있는데 이중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 되여 있고 대표적인 기와집은 하석건촌의 조상룡 로인이 살던 기와집이다. 현재 도문시 민족 사무국에서 관심을 갖고 보전방식을 고려하고 있는 기와집이기도 하다.29일 기자와 도문시민족 사무국의 박영강과장은 도문시 정부 방부시장이 안배해준 전용차를 차고 하석건으로 향했다. 하석건촌에서 서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고택은 현재 주인이 바꿔였고 상주인도 없이 비여 있었지만 세살문까지 남아 있어 가장 전형적인 량통 팔간 기와집이였다. 부엌과 정지간을 중심으로 서쪽에 안방, 아랫방, 고방, 웃방이 붙어있고 동쪽은 외양간, 방앗간으로 설계 되였는데 외양간은 아직까지 수채 구멍이 남아 있었고 외양간 마루가 남아 있었다. 그 리고 밖에 툇마루가 있었다. 종가집 규모로 보이는 이 집 밖에는 아직도 우물자리와 연자방아자리가 남아 있었다. 토담까지 있었다지만 현재는 흔적이 없었다.이 집의 원래주인인 조상룡(76세)로인의 증언에 의하면 자기가 그 집에서 태여 났다고 했다. 그러면 1930년 이전에 세워졌다고 보아야 하는데 로인도 건축년대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이 집은 자기의 조부가 지었고 거기에서 5대가 함께 살았다는 기억밖에 없었다. 원래 조선 청강동(이전엔 보천개라 불었음)에서 조부님이 두만강을 건너오고 그 후에 지엇다고 하는데 90- 100년으로 잡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이런 집은 대못 한 개 사용 안하고 중방, 대공 들을 자개를 물려서 만드는데 그 건축방법이 어찌나 절묘한지 이런 집을 철거한 시골사람은 갈채를 보낸다. 여기에서 잠간 짚고 넘어갈 것은 이런 집은 일반적으로 양택풍수설에 근거하여 터를 잡고 지었다는 것이다. 현재 이런 주택 문화재가 바야흐로 훼기되고 있는데 관계부처에서 하루빨리 대책을 대여 보존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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