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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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동년의 그 언덕에 세운 기념비 댓글:  조회:8571  추천:2  2012-06-07
                                    동년의 그 언덕에 세운 기념비                                                      최 균 선                      기나긴 세월이                           흘렀어도                                   마음의 동심이                                           되살아나                     애시적 한달음                          달아올라                                   웨치던 그 언덕에                                           다시 서서                    높은 산 푸른 숲                         마주향해                                손나팔 아ㅡ 오ㅡ                                        웨쳐보면                   어제날을 내 모색                        알아보았노라 아ㅡ                                변하지 않았다고                                       또 다시 오ㅡ                                     찾아든 어린 시절                         내 목소리가                                동년의 메아리로                                        울려옵니다.      이 시는 홍용암시인의 동시집《사슴뿔나무》제8집에《동년의 메아리》의 전문이다. 《사슴뿔나무》는 동년의 그 언덕에 네번째로 세운 기념비이다. 열여섯 소년시기 벌써 동시집《꽃무지개》를 눈부시게 걸어놓고 세월의 비바람속에도 색바랠줄 모르는 파아란 동심에 푹 빠져서 끈덕지게 동시밭을 갈아온 시인으로 말하면 네번째 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어려운 일은 아니나 이처럼 다산시인으로 거듭난다는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본시집에 절대 대부분의 시들은 시인이 동년시절의 절실한 체험에서 시적종자를 잡아쥐고 창작한것으로서 생활정취가 짙고 동심이 생생하게 살아있어 진실성에 받들려있는 공명대를 근저로부터 튼튼하게 닦고있음을 인차 감촉할수 있다.     우선《사슴뿔나무》라는 표지제목이 말해주듯이 시편들마다에 회화성이 짙다는것을 우선 지적해야 하겠다. 보통 이미지로 나타나는 시의 회화성은 동시에서는 특히 귀중한바 홍용암시인의 작품에 일관된 특점이다. 시인은 다양한 심상들을 리용하여 형체가 없거나 추상적인것까지도 구상화하고있다. 얼핏 보면 일상적인 진술같지만 보다 구체화되고 감각화되고 있다데서 더구나 이목을 끈다. 말하자면 서술적 이미지와 비유적이미지의 능란한 결합이 시의 생명인 진실성을 살려나가는데 시종 벋침대로 되고있다는것이다.     홍용암시인의 시에서 회화성은 시각적이미지외에도 청각적, 미각적, 후각적, 등과 공감각이미지로도 잘 나타나고있다. 많은 시들이 그렇지만《말똥말똥》,《잠이 들었네.》《웃는다.》등을 우선 례로 들수 있다. 《웃는다》의 전문을 흔상해 보자. 엄마는    벙글써 입으로 웃고     할머니는 가느스름     눈으로 웃고 바둑이만     흔들흔들 꼬리고 웃는다.    시에서 느낄수 있듯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로 쓰이고있다. 이런 이미지는 그 속에 다른 사상이나 관념을 가지고있지 않기에 순수한 이미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에서 짙은 회화성을 감수하게 되면서 한가족의 양상들을 재미있게 그려볼수 있다.아놀드는 시를 인생의 비평이라하였다. 시는 그 속에 어떤 의미를 담고있어야 한다는 얘기인데 거의 모든 시가 의미에서 완전히 벗어날수는 없지만 특별히 그 의미를 강조하는 시를 사상성이 짙다고 한다. 홍용암시인의 동시에서 또 다른 특색이라면 바로 동시에 담기가 퍼그나 어려운 사상성이다.    시창작경향이 언제부터인가 자아감각의 표출로 경향을 잡고있는 현시대에 동시의 사상성을 거론하면 웃을사람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동시가 경직되다못해 작은 정치나팔로 둔갑했던 그 시기처럼 시에서의 사상성이라면 곧 정치와 련계시키는것은 일종 오해이다. 이른바 시에서의 사상이란 개별적사물현상에 대한 구체적인 계기들에서의 체험과정에 나타나는 감정의 표현이라 할수 있다. 그만큼 감정은 사상을 포섭하고 있는 생활의 개별적대상에 대한 정서적표현을 요구한다.    시의 사상성은 그 어떤 이야기의 대상도 아니며 개념을 밝히려는 추리와 설명의 대상도 아니다. 시의 사상은 시인이 느끼는 정서의 대상, 즉 시적대상이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예나제나 훌륭한 동시는 회화성, 음악성과 더불어 사상성을 조화롭게 담고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우《조국을 사랑합시다.》라는 구호식으로 생경하게 드러나지 말아야 함은 두말할것 없다.    홍용암시에서 사상은 도식적이 아니라《정서적등가물》로 되여있다. 마치 사과속의 영양분이 겉에 드러나 있지 않지만 먹으면 감칠맛이 나면서 영양가가 인체에 잘 흡수되는것처럼 시의 사상적영양이 내재적으로 어린독자들에게 잘 전달될수 있도록 정서화되여 있다. 동시《아기와 지도》를 음미해보자.                             내가 그린 조선지도                             아차 깜박 조는 새에                             아기가 고무로                             마구 지워놓았다.                               그만에 정신 번쩍                             눈 부비고 다시 보니                             내가 그린 분계선                             삼팔선이 없어졌다.                             야! 정말 대단해                             분단된 조선반도                             아기가 남북을                             《통일》시켜놓았다.                               하늘높이 우로 버쩍                             아기를 추켜들고                             아기 만세 만만세                             통일만세 만만세!!!     우리 민족비극의 상징물인《3.8선》은 력사성을 띤 심각한 국제문제이다. 허나 시인의 그 뼈저린 아픔과 그에서 분출되는 피빛사상이 재치있게 동시적으로 표현됨으로써 그 어떤 형식의 표현보다 더 처절한 사색을 안겨준다. 시는 철부지아기의 《걸작》을 희극적으로 표현하고있지만 시행속에 흐르는 사상은 그렇듯 눈물겨웁다.   시적대상으로 놓고볼 때 그 무슨 애족의 감정이니 시대정신의 전형화이니 하고 어마어마하게 높이 꿰여들수는 없지만 조선반도의 통일은 백의겨레의 지향과 념원, 의지와 신념이다. 그 사상이 후대양성의 립장에서 아이들에게 전달되고있다.      어린이들의 사상감정을 론리적으로 표현해서는 그들의 정신세계에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지 못하거니와 동시특유의 서정으로 꽃펴나지 못한다. 동시에서의 서정은 생활과 자연에 대한 열애의 서정이며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서정이며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동경에로 이끄는 서정이며 심령의 꽃밭을 스스로 알차게 가꾸어가도록 인도 하는 계몽의 서정이여야 할것이다.     따라서 동시창작에서 아이들의 주도적이거나 본질적인 사상감정을 서정을 통하여 느끼도록 하자면 아이들의 숨결과 정서로 표현해야 한다. 아동생활의 본질과 아동의 아름다운 내면세계를 깊이있게 조명한 동시가 읽을수록 깊은 인상과 감동을 주는것은 아동의 정서세계가 진실한 생활의 정서로 노래되였기때문이다.     아동의 자주적심미욕구가 발현되는 그 시점에서 다채로운 아동생활정서를 진실하게 노래하는것은 동시문학의 첫번째 사명이라 생각한다. 아동의 다채로운 생활을 노래한다고 해서 과장하고 추단하며 미화분식하는 그 어떤 작법도 동시는 배척한다. 그것은 특히 동시에서 형식주의, 자연주의경향을 낳는 기본조건으로 되는 사정과도 관계된다. 동시에서 자연주의는 아동생활과 동떨어져서 순수 자연만을 찬미하거나 아동생활의 이런저런 현상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추구밑에 아동생활의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것, 우연적인것과 필연적인것을 분별, 선택하지 않고 아동을 생물학적인 자연으로 간주하면서 마치 아동생활의 본질인듯이 분식하는것을 말한다.     그러나 홍용암시인의 시작품들에서는 아름답고 변화다단한 자연현상이 어디까지나 아이들의 생활, 성장하는 인간성과 젖과 물처럼 잘 융화되여있다. 동시《봄비》를 하나의 례로 들수 있다.         어지러워진             고까옷때문에                 상심해서                    애기꽃나무 섧게                       울고있을 때          지나가던 봄비가             그것을 보고                 차분히 내려                    얼룩진 먼지들을                            말끔히 닦아준다.            시어서 애기꽃나무는 어린이를 비유한것이라고 볼수 있다. 아이들의 천성이 봄비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그속에서 옷이랑 얼룩질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냥 봄비속에서 뛰놀면서 차분히 내리는 봄비속에서 구겨졌던 마음의 주름살들이 반듯하게 펴지는것이다. 이외에도《꽃망울》이라든가《꽃망울과 미풍》등을 훌륭한 실례로 들수 있으나 지면관계로 해석은 략한다. 서정적표현에서 형상적비유를 어떻게 하는가 하는것은 아동생활의 본질을 비유의 대상에 맞게 옳게 형상하는가 외곡되게 형상하는가 하는 심중한 문제이다. 동시는 일상적이고 무의미한 생활세절을 흥미본위로 그리는것이 아니며 글장난식으로 엮어나가는것이 아니다. 홍용암시인은 시적형상화에 아주 능란하다. 《잠이 들었네》와《꿈》등을 전형으로 꼽을수 있겠다.     홍용암시인은 동시창작에서 흔히 범하게 되고 여간 탐구해서는 초월하기 어려운 도식과 반복, 류사성을 극복하기에 각별히 마음을 쓰면서 독창성과 개성을 살리고 있다. 그것은 그의 시에서 시인의 독특한 동년시절의 생활경력과 기질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시적소재들을 다루는것과 관련되기도 한다. 동시《동생과 배와 비자루 》와《그림》,《아이들과 당콩넝쿨》등이 바로 그렇다고 할수 있다.    시창작일반이 다 그러하듯이 동시는 아동과 그 생활을 화폭으로 펼져보이지 않는다. 어린이들과 그들의 생활에 대한 강렬한 체험에서 새로운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노래하고싶은 사상적충동과 정서적충격을 가지고 시를 쓰게 된다. 이것은 동시란 그 창작출발점에서 개성적으로, 독창적으로 느낀 사상적이며 정서적인 충동을 주정적으로 서정적으로 펼친다는 설명이 된다.     동시에서는 시인이 체험한 주정을 아동의 심리각도에서, 어른으로서의 주정을 아동화한 서정으로 표현하는만큼 시인에 의하여 발견된 시적소재가 아동적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참다운 의미에서의 동심의 발로로 되지 못하고만다. 동시에서 서정을 느끼는것은 시인자신이 아니라 어린독자들이다. 만약 시인자신이 제나름으로 아무리 정서적으로 감흥된다 하여도 아동들이 읽어보고 자기의 심미취미와 지향과 어감요구 에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동시이에서의 진정한 서정으로 될수 없다.     아동현실생활을 체험하고 느끼는 창작개성이 아이들의 미감과 정서에 맞는 아동성격을 띠여야 하며 생활적으로 의의있고 절실한 정감을 발굴할수 있게 하는 아동적인 관점과 견해, 식견과 립장을 갖춘 성격으로 되여야 한다.. 동시시인이 아동생활에 대한 정서적체험이 없이 일반적표상을 그대로 옮겨놓으면서 류사성을 범하지 않을수 없다.    성인도 그러하지만 아동은 년령특점, 그 심리활동의 특성으로 하여 자기가 직접 체험하지 못한것에 대해서는 표상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직접 체험한것의 표상을 가지고 그려보게 된다. 그리하여 동시창작이 어렵다는것이다. 시인이 아동의 립장에서 생활을 정서적으로 체험하지 못하면 우선 근근히 기존체험으로부터 출발한 일반표상으로 근사하게 그려보기때문에 시가 경직되고 류사성을 범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홍용암시인의 시작품들에서 이 점들이 잘 극복됐다고 볼수는 없다.         예술적표현으로서의 서정, 동시의 서정은 현실에 대한 시인의 동심적인 정서적체험의 산물이라는것은 상식이다. 동시는 어린이들의 노래. 아동생활의 노래이지만 아동과 그 생활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것이 아니라 시인이 그것을 동심적으로 파악 하고 느끼고 융화시킨 사상감정을 구체적인 생활계기에서 정서적으로 토로한것이다. 구체적인 아동생활계기에서 정서적으로 표현되는 동시의 서정은 시인에 의해 고안되거나 시인의 잠재의식 혹은 자기의 동년의 체험을 기점으로 류추하는식으로 정서화하는것이 아니다.     현실에 대한 파악은 언제나 감성적, 정서적체험의 느낌으로 진행된다는것은 자명해진다. 그만큼 시에서 아동생활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아동의 능동적인 활동이면서도 의식정도와 심미여하에 의존하게 되는데 년령단계, 심리활동에 대한 파악미 달로 하여 제약을 받지 않을수 없게 된다. 그런데 홍용암시인의 어떤 시들을 이런 제약이 무시된채 주관적념원으로 쓰인때도 있다. 례컨대 동시《삼팔》에서 이렇게 읊조리고있다.                (상략)                                         삼팔 삼팔                        무엇이 삼팔                        남북 조선지도에                       《38분계선》이 삼팔                        삼팔분계선은                        온 민족이 울고우는                        원한의 계선!        (밑줄은 필자의것임)       이런 결함은 시《내가 만약 꼬마경찰이라면》이나《지구우의 념원》에서도 나타나고있다. 동시에서 시적파악은 아동과 그 생활을 동시적으로 감각하고 아동생활과 밀착된 감정, 의지, 심리를 동심적으로 느껴서 받아들인 정서적체험을 통하여 동시 적감흥과 음률(그것이 외재률이든 내재률이든 막론하고)을 얻는 예술적파악이다. 동시적인 감흥은 아동생활속에서 표현되는 아동의 사상감정을 그것이 살아숨쉬는 모습대로 느끼고 받아안은 시인의 아동화된 정서의 감흥이여야 하며 아동심령세계 에서 일어날수 있는 정서의 률조ㅡ운률이여야 한다.     시는 체험의 문학이며 정서의 문학이다. 동시도 마찬가지다. 시는 감동적인 사실이나 이야기로부터 창조되는것이 아니다. 이 진리는 동시에도 적용된다. 현실에 있는 대상을 아무리 잘 알고있다하여도 그것이 곧 시적소재인것이 아니며 동시를 창작할수 없는것과 같은 도리이다. 시적파악에서 종자는 아동의 가슴에 서정을 꽃피울수 있는   향상적요소가 뿌리내릴수 있는것으로 잡아야 한다. 시의 종자를 잡음에서 홍용암시인은 비교적 독창성과 개성특징을 보여주고있다. 이 점이 아주 고귀하다.     아동의 내면세계를 정서로 노래하는 동시문학에서도 전형화의 원칙이 확고하게 지켜져야 한다. 어린이의것이라도 순수한 감정. 순수한 정서는 전형적인것으로 될수 없다. 말하자면 동시의 서정은 언제나 아동의 사상감정에 맞는것으로 되여야 하며 아동심미세계를 집약적으로 구현한것으로 되여야 한다는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감정, 정서체험이 순수한 정서적체험으로 되여서는 안되며 사상적충격에서 기인된 아동적인 정서체험으로 되여야 함을 의미한다.     그 경우 시인자신의 느낌보다 일반화된 아동일반의 정감, 정서로 확대하는것만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심화된 정감, 정서의 안받침을 전제로 한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서정적일반화에서 체험된 사상감정을 서정화한다는것은 아동들의 심목속에 고유한 사상정서적이며 정수로서의 체험으로 생동한 서정을 얻어낸다는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례하여 제3집에 동시《베개》가 서정의 일반화가 잘된 시라고 볼수 있다.                        엄마팔이 내 베개                               엄마팔 베고 누워                                      옛날옛적 옛말 듣고                        어떤 때는                            아빠무릎 내 베개                                    아빠무릎 베고 누워                                            자장가에 취하고                        어떤 때는                                  동화책이 내 베개                                          동화책 베고 누워                                                  책속 호랑이와 꿈에 놀고                             어떤 때는                                    내 두손이 내 베개                                          엄마아빠 없는 밤                                                두손 베고 쪽잠 자고…     시에서 볼수 있듯이 어린이면 누구에게나 있을수 있는 생활이요 누구나 흔히 느낄수 있는 정서이다. 시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감각하고 느끼며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감정색채를 발판으로 하여 그것을 서정적으로 일반화함으로써 백, 천을 헤아리도록 하게 한다. 그래서 아이들에 쉽게 다가서고 쉽게 감흥을 안겨주는 훌륭한 시로 된것이다. 일반화가 잘 된 시로서《동년의 랑만》이나《고향》《수염》등을 더 들수 있지만 이로서 략한다.     문학비평은 옥에 티를 지적하고 어물쩍 넘어가는 감상문에 그쳐서는 안되며 묵결식의 찬가가 되여서도 안된다는 필자의 평론원칙에서 한마디 더 꼬집고 넘어갈 문제는 동시적시어의 구사이다. 환언한다면 동시로서는 손색을 입히는 성인화된 시어들이다. 례하여《천둥같이》,《호시탐탐》《상심》,《바야흐로》, 《측은해》,《유혹》등은 동시로서는 특히 생경한 느낌을 주고있다.      홍용암시인이 시집《사슴뿔나무》를 묶을때는 20대의 인생언덕에 갓올랐을 때라는것을 감안할 때 확실의 그의 문학의 길에서 혁혁한 리정비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말할수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창작에서 개성적인 시인으로서의 자기의 미학원칙, 시적발견에서의 예술적파악과 그것의 표현으로서의 서정, 동시의 서정성을 높이는 요소로서의 시어와 운률, 시적구성의 형태 등면에서 미흡한 점을 제기할수도 있다. 그러나 발전적안목에서 홍용암시인은 전도유망한 시인임에 틀림없다.                                                                      2006년 6 월 30 일             
91    동시의 예술매력 댓글:  조회:8830  추천:1  2012-06-03
                                                     동시의 예술매력                                                                  최 균 선     1. 동심세계에 대한 정서적체험     동시는 아동적체험의 문학이며 아동적서정의 문학으로서 아동생활과 아동에 대한 예술적체험을 통한 정서적파악의 산물이다. 따라서 동시창작에서 필수적요구로 제기되는 정서적파악은 시인이 동심세계에 완전히 파묻겨 아동의 정서로 생활을 체험하고 거기에서 금싸락같은 동심의 정감을 캐내는 전제작업이다. 시적체험의 본질적특성이 바로 생활에 대한 정서적체험이기에 감성적, 정서적체험은 시적파악의 기본형식으로 되는것이다.    아동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앞세운 정서적체험이 없이는 동심적인 서정이 진지하고 정취가 아기자기한 동시를 써낼수 없다. 아동생활과 감정이 어른들의것보다 더 개방된것이라해서 자체의 미를 누구에게나 다 보여주는것은 아니다. 객관적인 아동생활의 표면은 누구나 볼수 있고 일정한 감수를 받을수 있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것, 생기발랄한 그속에 희노애락과 내적인 진수는 오직 로련한 동시시인만이 보아낼수 있다. 환히 보여지는것보다 보여주지 않는 그 미묘한 감정의 파동을 시적종자가 움트는 계기로 삼는것이 중요하다. 단순하면서도 또한 가장 미묘 하기도 하며 더없이 섬세한 색채를 가진 아동들의 정서, 정열과 감정을 반사하여 아동생활의 합법칙적인 미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아이들은 원래 보이는것만큼 본다. 그러나 시인은 보이지 않는것도 보아내면서 향상하라고 계몽하고 손잡아 이끌어준다. 감동과 사색의 여울을 건너 오색찬란한 동 심의 봄언덕우에서 계몽의 손길을 뻗치고있는 시인, 그가 바로 한석윤시인다. 어른의 시도 순수 개체의 울타리안에서 순수《나》의 주관정서에 자족하는것은 금물이거니와 동시는 더구나 시인의 주관의식과 판단은 금물이다. 하나의 찰나적인 생활계기거나 생활정황을 통하여 감성적인 감흥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를 통하여 백, 천, 만을 헤아리는 동심을 보여주는 깊이 있는 동시야말로 감동과 공감력,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아동들의 정감현상에 대한 아동적인 정서적느낌이 성인의식, 주관적판단으로 되지 않아야 아동생활의 본질과 시대적인 정서를 구현할수 있으며 시인의 정서체험이 의의있고 가치있는것으로 될수 있다.    《내가 만약 노벨상을 만든다면》은 오늘 고기술시대, 정보화시대, 세계화시대에 살며 그 어느 세대에도 있을수 없는 현대적인 상상을 가능케 하는 어린이들의 있을 법한 그런 피상적인 꿈을 노래하고있는것이 아니라 진실로 현대아이들의 가슴속에서 이룰수 없는 낮꿈으로 되고있는 그 막무가내한 정서ㅡ아이들답게 마음껏 뛰놀면서 자연스럽게 자라고싶어하는 진실된 동경을 명시하고있어 각별하고 이채로운것이다. 시는 이렇게 명쾌하게 시작되고있다.   《너는 노벨상 받은 아이야》라고 소리높이 웨치고있다. 이 웨침은 진정 우리 아이들의 심장의 웨침이고 시인은 그 웨침을 쩌렁쩌렁한 메아리로 전하고있다. 다른 모든 창작도 그러하지만 시인의 시적사색은 더욱 집약성과 철학적사색을 요구한다. 자고로 아이들의 본성이 놀음을 탐하는것이라는것은 세인이 다 알고있다. 그러나 아 이들의 본성이 억눌리고 있고 그것에서 해방되는것이 가장 큰 영광인 노벨상에 비 할만큼 절절한 념원이며 아름다운 동경이라는것을 시적경지에 옮겨볼 착상은 아무나 할수 있는게 아니다.     아닌게 아니라 현대 아이들은 무거운 책가방에 눌려 가슴펴고 다니지 못하고 있으며 숙제산에 짓눌려 질식할 지경이고 문제바다에서 허우적이며 꽃피는 동년을 잃어가고있다. 비리한 현대교육관념, 시행착오같은 거대하고 심각한 문제가 기저에 깔려있지만 시인이 그것을 역설적으로가 아니라 시적형상으로 까밝히면서 교묘하게 질타하고있다는 거기에 정서적파악의 남다른 기량이 체현되고있는것이다.     마음껏 놀고싶다는 그 마음은 아이들의 공통한 념원이고 이 시대의 숨결이기도 하다. 시의 서정은 긍정적대상을 사랑하기에 자연히 갈마드는 안타까움이다. 그리하 여 그들의 념원속에 있는 사상감정을 체험한 시인의 정서세계에서 자연러운 분출이 있게 된것이며 근저로부터 서정의 진실성이 관통된것이다. 이외에《바다》,《철길》, 등이 있지만 해석은 략하려 한다. 생활이 있고 시가 있다. 생활에 대한 시인의 감성적, 정서적체험이 감각적인것과 사상감정의 세계가 정서적으로 통일되고 아동화되였기에 동시가 된것이며 그 체험이 시인의 남다른 안목과 사상의식에서 감성적인 강렬한 반응을 가지게 되였기에 자주적 이고 창조적인 시적경지를 구축하게 된것이 아닌가 싶다.     2. 동시의 서정성과 정서적색채     동심적인 서정성을 생명으로, 본질적특성으로 하는 동시는 동심적인 특유의 정서적색채를 가지게 된다. 동심적색채가 짙지 못한 동시는 어린이들의 심목속에 생소하게 안겨질뿐이며 객관적으로 보아도 지어낸 감을 줄수 있는바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한 아동적인 서정과 정서적색채가 결여한 동시는 동시라고 말할수 없다.     동시작품의 정서는 시적대상의 표면에 직선적으로 비낀 우연한 정서적색채가 아니라 시적대상을 진정 정서적으로 깊이 파고들어 과거와 현재, 꿈나라에 잇닿은 그 다양한 정서적색채로 채색된 감정의 분출이여야 바람직하다.     동시에서 정서의 저변에 깊숙히 깔려있는 사상성은 아동들의 내면세계에 무엇인가 호소하는 격동적인 률동을 내포하게 된다는것은 주지하는바이다. 과거 한시기 동시들에서는 정서의 흐름이 곧 사상감정의 흐름이 된것이 아니라 어른의 시각과 판단에서 시구에 주입되였거나 조각되였는바 그것이 동심적인 생활의 음률을 타고 아동들의 내면세계에 봄비처럼 차분히 스며들지 못하고 개울을 이루어 요란한 소리만 내다보니 아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한석윤 시인은 이런 전통적인 시의 인위적인 흐름을 누구보다 빨리 극복하고 새로운 차원에서 현대적아동들의 심령세계에 보다 어울리고 보다 잘 침투되는 좋은 동시들을 창작하여 왔고 오늘 또 하나의 풍성한 결실을 맺았다.     어른들의 시에서도 그러해야 하듯이 동시에서 서정의 진실성은 더구나 에누리없이 정서적체험의 진실성을 전제로 내세우고있다. 동시의 진실성은 아동들의 생활을 형상적으로 반영하여 아동들에게 현실사회와 인생에 대해 옳게 인식하도록 계몽하면 서 생활의 정취와 지혜를 주어야 할 특수사명을 지닌 문학이다.     학교, 집단생활속에서 공부하고 뛰노는 아동들은 정감적인 인간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집단과 생활을 사랑하며 꿈을 키우고 미래를 동경하는 천진란만한 내면세계 를 가지고있다. 그것이 다름아닌 아동의 사상, 감정, 지향, 의지이고 동심세계이다.     동시에서 동심의 본질을 구현한다는것은 전형적인 아동정서를 반영한다는것을 말한다. 아동의 전형적인 생활정서란 아이들이 공통하게 고유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생활의 격류속에서 고패치고 소용돌이치는 그러한 정서이다. 동시문학 은 아동생활의 본질을 화폭으로가 아니라, 더구나 조명식으로서가 아니라 생활적인 정서로, 묘사식, 설교식으로가 아니라 대상에 따라 교묘하게 형상화하여 노래해야 하는 까닭에 그 본질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어떻게 상징화하는가 하는것은 자못 심각 한 문제로 나서고있다.     문학, 특히 시에서 생활을 사진찍듯이 할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상속에 숨겨진 구체성과 형상성을 찾아내여 방불하게 표현하는것을 의미할뿐만아니라 인간의 내면세계, 심리정서를 실감있게 느끼게 하는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동시창작에서 아동들의 생활을 탐구하고 반영하기만 하면 아동들의 미감과 정서에 맞게 되는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현시대의 특성에 맞는 그 속성을 탐구하고 노래해야 하는것이다.     동시《콩꼬투리》에서 오손도손 들어앉은 콩알 오형제를 부러워할만한 아이들의 슬픈 정감은 시대가 조성하고있는것이다. 지금 많은 아이들에게 수요되는것은 돈보다도 험난한 인생길에서 반듯하게 자라도록 이끌어줄 부모의 다할길없는 사랑이며 형제자매들의 정애이다. 흔히 보는 꽁코투리에서 시대상을 련상하고 막무가내한 이런 현실에 대한 시인의 정감이 곧 아이들의 정감으로 표출되였기에 진실한것이다.     3. 서정토로의 독창성과 이미지구축의 개성화에서     시인의 창작활동은 철저히 자신의 세계와 미학관에 의하여 생활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일반화하게 되며 창조성은 시인이 자기의 예술적상상력과 형상기교에 의거하여 생신하고 특색있는 시적경지를 개척하는데서 현연된다. 시《어른과 아이》는 창조성이 기발하며 창작개성이 남다르게 보여진 훌륭한 작품이다. 어른들도 요즈음 자연에로의 회귀를 고창하며 자연을 찾는게 류행이지만 기실 순수의 마음으로 자연과 융합려는것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타산적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정감은 다르다. 비가 주는 리해관계와 상관없이 마음 그대로 비를  좋아하고 비속에서 자라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연과의 융합이 가장 결여되여 있고 제한되여 있는것이 현시대 아이들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비오는것을 마다하지 않을수밖에 없는것이다.     동시는 아동서정의 문학이며 아동적체험의 문학이다. 아동생활, 감정세계에 대한 감성적, 정서적파악이 있다하여 누구나 다 개성적인 동시를 창작할수 있는것은 아니다. 아동정서현상이나 대상의 속성과 특성자체를 체험했을 때 그것은 누구나 쉽게 느 낄수 있는 일반적감수에 머무른것이다. 그때의 감정도 다양할수 있으며 가슴에 오래 남아있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감정이 곧 동시가 되는것은 아니다.     아동시각으로 진행되는 시적파악에서 감성적, 정서적체험은 그것과 벌써 차원이 다른 파악이다. 그 체험을 아동적인것으로 자기에게 받아들여 아동의 감정, 정서로 만든다는것은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한석윤선생은 이 어려운 작업을 재치있게 해내 고있다. 생활속에서 아동적인 정서를 발견하고 아동의 정서로 느낄수 있어야 재미 있는 동시를 지어낼수 있다. 여기서 재미란 바로 새로운 시적경지의 개척과 그것의 물질수단인 언어표현으로 이룩한 예술화폭이다. 시《달》에서 시인은 부모를 그리며 울고있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그리며 눈물을 떨구있는 부모님들의 가슴을 어루쓸어주고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수 있는 동시를 쓰고싶다고 표백하고있다. 지금 수많은 아이들에겐 그리움이 생활의 주제로, 장감의 주선률로 되고있다. 밤하늘에 걸린 달을 쳐다보며 그 그리운 정을 하늘거울과 속삭이는 어린이의 모습은 련상에 앞서 벌써 눈물을 자아낸다.《그래서 말인데요》라는 시도 아이들이 자기네식의 랑만을 동경하는 절절한 마음을 읊고있다.     목적의식적으로 일정한 사상적경향을 가지고 진행되는 감성적, 정서적체험은 독 특한 체험이 될수 없으며 노래하는 그 목소리도 독창적일수 없다. 왜냐하면 론리적으로,사상적으로 아동을 인식하는데는 사람들의 의식과 판단이 거의 어상반하기때문이다. 시인들은 독창적인 예술감흥을 얻어야 하며 생활을 독창적인 시각으로 투시하고 독특한 정서로 감수해야 하며 남다른 서정을 폭발시켜야 한다.     한석윤선생의 시적체험은 대상적이면서도 전체적이고 체험의 현재뒤에 숨어있는 과거를 캐내여 지금 느낄수 있는 현재속에서 움트고있는 미래를 앞당기여 느끼면서 하나의 계기에 좌우의 생활을 폭넓고 풍부하게 노래하고있다.시인의 내제적체험일 지라도 결국 전체 아동들을 위하여 시적일반화가 필수적이 되는바 그것은 어린 독자들로 하여금 직접 체험한것이 아닐지라도 함께 감동하고 함께 깨우침을 받게 한다.    동시창작에서는 특히 시적체험이 순수《나》ㅡ어른의 주관적산물로 되여서는 아니될 일이다. 그만큼 주관화, 주정화는 동시창작규률과 독자대상의 특성으로 하여 엄격히 규제되고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창작자들이 쉽게 범할수 있는 착오이다. 한석윤선생의 동시《모래알》,《장백산은 정화수 들고》,《 병든 단풍입》등에서 주관화, 주정화의 경향이 안겨오는데 이는 옥에 티라고 례절스럽게 스치고 지나갈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동시창작에서 개성의 상실을 자초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공성을 가진 문제이기때문이다.     시적일반화의 본질은 하나를 통하여 하나를, 백을 통하여 백을 감동시키는것이 아니라 하나를 통하여 백을, 백을 통하여 천, 만을 보고 헤아리게 하는데 있다고 한다. 생활의 작은 세부에서 시대적이고 전형적인 모종 사색을 정서적으로 천명하는데 서 시적일반화가 완성된다. 물론 아동시에 어떤 사상 그 자체를 체현하라는것은 매우 무모한 요구이다. 다만 재미있고 감동적인 정서속에 생각하는 힘, 사상의 씨앗을 심 어주자는것이다. 이는 현시대 동시창작에서 과분한 요구가 아닐것이다.     시《하늘의 사랑》이나《하나라구요》등은 시인의 미학적추구로부터 일반화된 사상의 씨앗을 심어주려고 시도했다. 시 《하나죠. 하나라구요》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있다.《하나죠/하나라구요》라고 시작되여 마감부분에 가서《하나되여 엉켜 안는/동해바다가/ 중국배/한국배/도 일본배 싣고//소소소/하얀 웃음 터뜨립니다.》라고 형상화하면서 리익을 앞세운 세계적인 민족갈등과 무력충돌 등 재난많은 인류사회의 페단과 인간의 렬근성같은 거창한 사상을 담고있다. 물론 시인의 착상이 허무하거나 실제를 너무 떠났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한 시인이 만약 서정적계기를 기점으로 하지 않고 어떤 추상적인 사상감정을 일반화의  기초로 하였다면 감성, 정서적으로 체험한 시적정서는 희망사항에서 출발한 념원을 동시형태에 담으려는것이 되고만다. 그것은 확실히 동시라는 작은 그릇으로서는 분에 넘치는 작업이 아닐수 없다.     어떤 의의가 있는 훌륭한 동시라면 시적사색을 통한 일반화의 결정체가 되여진것이고 그 시적일반화가 시적사색의 정화로 된것이다. 동시에서 창작적사색이란 어른들의 시창작처럼 우연히 떠오르는 그 어떤 령감이 아니라 아동과 아동생활의 본질 및 시인의 사색을 물과 젖처럼 융화시키는 과정이다. 한석윤 시인은 사색적이면서도 예술적으로 완성된 훌륭한 시들을 꼬마독자들에게 선물하고있다. 례하여 《상장타 던 날》이라든가 《그래서 말인데요》등등.     4. 서정적언어표현의 뛰여난 기교    한석윤선생님의 동시들에서 상술한 모든 성과들을 잠시 제쳐놓고 천명하고 싶은 것은 바로 시인의 서정적언어표현기교이다. 이번 시집에서도 필자에게 강한 인상을 안겨준것은 서정적언어표현이다. 그만큼 언어구사의 기교를 흠상하노라면 수많은 광석에서 금을 제련해내는 련금술자의 로고와 같은 시인의 고심참담한 경영의식을 감지하게 되고 그로해서 한결 돋보인다.     무릇 시에서 서정적표현의 물질적수단은 언어문장일반이 아니라 서정적언어표현 즉 운률이다. 한석윤시인의 동시창작의 일관적 경향은 동심적인 운률을 중요시하는것이다. 우에서도 말했지만 동시는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 내용에서의 재미만이 아니라 시적언어에서도 아동심령에 맞는 아기자기해야 동시의 가독성, 취미성이 실현된다고 해도 어페는 아닐것이다.     비록 격정이 사라진 현시대이지만 차분한 정서적인 시라해도 자체의 률동성만은 무시될수 없다. 특히 동시에서는 운률미가 큰 몫을 감당한다. 한선생은 이점을 잘 알고 자기 시에서 일관적으로 알심들여 체현하고있다. 말하자면 시적언어표현의 구체 적특성을 너무나 잘 살리고있는것이다.     동시라는 작디 작은 그릇속에 뜻이 깊고 풍부한 정서를 담는다는것은 높은 예술 적기교를 수요한다. 언어표현에는 뜻빛갈과 정서적빛갈이 있다. 시적어휘는 개념만을 나타내는 어휘가 아니라 개념과 함께 뜻의 빛갈과 정서적색채를 나타내는 어휘여야 한다. 동시언어는 특히 감정, 정서적인 빛갈, 감미로움을 가지고있어야 하는바 동시의 감미로움은 곧 언어표현의 아동고유의 정서성, 간결성, 통속성, 함축성에 원천을 두고있다.  동시에는 아이들의 기쁨, 즐거움, 괴로움, 안타까움, 등 감정의 농도와 색채, 지어는 아동적인 억양까지 고스란히 담겨져야 바람직하다.     시적표현의 특징은 성음적요소에서 오는 음향미를 띠고있다. 읊기로 하고 쓴 동시이지만 곡을 달면 곧장 노래부를수 있는 동시야말로 최상의것이라 생각한다. 동시에서 생략과 함축, 비약과 절제, 반복과 대조 등에서 동시의 운률미가 조성되는 데 대상성과 회화성까지 가진다면 더구나 금상첨화일것이다. 한석윤 시인의 시적언어표현에서의 독창성은 새로운 시어의 발굴과 조합에서 잘 읽혀진다.     이외《아기 눈물》,《솔바람》,《산머루》 등에서도 춤추는 글, 노래하는 글인 동시의 률동미를 충분히 긍정해야 할것이다. 동시《하나라구요》에서《하나죠. /하나 라구요//돌돌돌/내물이 노래하며 갑니다.// 하나, 하나,/하나이지요//용용용/강물이 줄달음쳐갑니다.//하나되여 엉켜안은/동해바다가/중국배/한국배/또 일본배 싣고// 소소소/하얀 웃음 터뜨립다.》 보름달》에서의 《보름달은 꽹과리 같다.》《가족사진》에서의 《시계는 타박타 박/열두고개 넘는데》라든가《달》에서의《뱅싯뱅싯 돋아나는/싸리꽃웃음《개벌》 에서의《바다가 덤벙대며/ 하얀 깃치마/ 급히 내리고있어요》《산과 강물》에서의 《강물이 덤벙/큰 산을 업습니다》《락수물》에서의 《오늘도 쉼모르는 / 락수물의 곡괭이질》등     시《산골병아리》에서를 보자. 《산의 발가락/ 간지르고있다.// 콕/한번 쫏고/ 할끔 올려다보고// 콕콕/ 두번 쫏고/ 할끔 또 할끔 올려다보고//깊은 잠 드셨는가/ 산은/ 한오리 기적도 없다》등에서의 교묘한 비유나 상징, 암시, 및 재치있는 언어조합들은 읽을수록 감미로움을 안겨준다. 5. 동시의 생명력,     훌륭한 동시의 생명력은 단순히 아동들의 세계에서만 존재의 리유를 가지는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가슴에도 힘있게 살아남을 당당한 리유를 가지고있다. 동시의 생명력은 우선 동심에 안겨주는 충격적인 정서적공감력이다. 동시의 정서적공감력은 동심밖에서는 흘러나올수 없거니와 동심에서도 미개척상태인 가장 깊은 심령의 골짜 기에서 마를줄 모르는 샘물처럼 용솟아 나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적발견이고 창조이다. 이러한 창조성이 바로 로련한 한석윤시인에게서 빼여나게 실천되고있다고 한다면 결코 과찬이 아닐것이다. 동시창작자는 아동생활의 외부적환경에 집착하다가 우연적으로 동심적인 사상감정이 생겨나는것이 아니라 마냥 동심에서 살며 정서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와중에 류성같이 흐르는 사색의 류동에서 생겨나는것이다,     물론 그저 정서적차원에 머믈러있는것이 아니고 정서의 흐름속에 반짝이는 사상적인 인소가 있어야 오래 사색하면서 음미하게 되는 동시, 그것도 동시의 상록수로 살아남아서 동심세계에 이채를 돋구어줄수 있다. 한석윤선생이 이번 동시집에 수록한 동시들이 거의다 훌륭하지만 특히 시《 보름달》《대상받던 날》,《가족사진》등은 수난받는 아이들의 마음에 더더구나 동시나무로 뿌리내리라 믿어진다.     세월이 유정하다면 하늘 늙지 않는다던가 늙어도 하냥 동심에 사는 한석윤시인의 동시의 상록수가 한그루, 또 한그루 거목으로 솟아날것을 기원해본다     이상으로 수박겉핥기식의 천박한 소견을 마치면서 잘된 그림에 언감생심 덧칠을 하는 무모한 짓거리로 되지나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바이다.                                     2007년 7 월 7 일       
90    진언시조 (4) 댓글:  조회:8280  추천:0  2012-05-24
 진언련시조 4. 대자연 만물을 낳아주매 성은이 망극한데 은혜를 원쑤로 갚아주는 령장동물 자연의 엄한 징벌을 무정하다 하리오   자연은 조화와 대립이 분명한데   인간은 개조라 정복이라 기탄없어 지구촌 엉망진창을 어찌하려 하느니     자유의 강물은 의지대로 흐르는데 사람들 어이 그리 가두려고 안달인가 민심도 류수같거니 순리대로 흐르리     청산은 말없는데 록수만 분주하네 원천은 어이잊고 그리도 보채느냐 자식도 떨쳐버리고 떠나간년 방불타   대자연 정복한다 호언장담 하지마라 파괴냐 정복이냐 자연인들 모를손가 보시소 무서운 보복 시작인즉 끝임을   억천년 순리대로 흘러온 섭리를 멋대로 란장치니 장거냐 맹동이냐 자연의 인과보응에 상기아니 정신드냐 자연경관 심산은 지구촌에 유일한 정토인데 관광지 개발이라 그마저 결딴나네 미답의 절대경관은 언제까지 남을고   정상에 올랐던들 자족함이 있으리오 이 산에 올라보니 저 산이 더높은듯 청운도 등산같으매 상승욕이 끝없제    산첩첩 면면하야 산밖에 또 산이여니 정상에 올랐노라 으시대지 마옵소서 저보아 련산련봉은 키다툼을 모르네   험한봉 절승경개 헌헌하게 딛고서서 올랐노라 보았노라 호연지기 뽐내실제 아마도 산의 헌신에 감사함이 지당해   거연한 백두봉은 웅녀의 가슴인가 면면한 산발은 단군님의 혈맥인가 헌사토 헌사할세라 저 성산의 민족혼   몽몽한 아침안개 절승경개 덮었노라 면사포 오리무중 속빈줄을 내아노니 려산의 진면목이야 네가감히 가릴소냐   퍼내도 길어내도 넘쳐나는 박우물 용용솟아 고맙구나 시골의 생명수여 인심도 저 같다면야 삭막할줄 있으리   거목이 치솟아 하늘을 찌르던들 청산의 한오리 머리칼에 불과할뿐 만사에 내노라하고 으시대지 마시라   금강석 귀한줄을 어느 뉘가 모르랴만 속깊은 견인성이 속에 있어 값지거늘 우리도 그를 닮으면 참사람이 못되랴    옥돌도 다듬어야 그릇이 된다는데 연마의 가치로움 우리는 모르거니 인재도 저같을진저 다듬어서 써보라   모난돌 정맞는다 속담에 일렀건만 부시돌은 모날수록 불꽃이 잘 일거늘 사람도 두루뭉실이 능사만은 아닐터   본디는 바위돌 제모습이 있었건만 딩굴고 씻기여 닳아빠진 아란석(鵝卵石) 무작정 굴러가야 할 그 숙명이 얄궂다 가산석 기묘하야 명물이 되였구나 장공의 로고야 나무릴데 있으랴만 가산에 가산석이라 사람들 웃고가네   소낙비 그친뒤에 칠색고운 무지개 선녀가 타고내릴 금빛다리 방불타만  아희야 현란한중에 허황한것 많니라    창파는 바위에 하얗게 부서져도 억천년 격정을 잠재울줄 모르노라 우리도 파도같으면 못이룰것 없고저   칡넝쿨 담장가에 용케도 얽혔구나 자주성 전혀없어 바라오를 특기뿐이 정계촌 구석구석에 저같은이 많고녀
89    중편소설 웃음을 잃은 리유 댓글:  조회:11005  추천:0  2012-05-14
                                                  웃음을 잃은 리유                                                               최 균 선   주선생은 천자문이나 읽은 할아버지가 커서 으뜸가는 문장가로 되라고 지어준 원장(元章)이라는 이름때문에 웃음거리와 오해를 살때가 많았다. 그래서 학생들속에 별호가 원장어른이였다. 하지만 이름이 은을 냈는지 문장가로 되였고 교내외에 꽤나 명성을 떨친 대학훈장이였다. 그는 결코 조작해낸 허깨비같은 특급교원이나 대학문을 나온지 오래면 참외가 익어서 절로 떨어지듯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마대치기교수도, 경제대우를 높여주기 위한 년령교수도 아니다. 그는 비록 명패본과대학은 나오지 못했지만 진짜 실력과 실천성과로 사람들을 탄복시키고있었다. 그를 은근히 좋아하지 않는 몇몇 선생들마저 그의 박학다재에는 반기를 들지 않았으니 학원에서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사실 그가 스스로 교수에서 두번째라고 말한다면 어느 누구도 자기가 첫번째라고 나설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학자다운 높고 번듯한 이마에 테가 검고 굵은 안경까지 쓰고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도 그의 신분을 짐작할만큼 풍도가 유표하였다. 그런데 길을 걷는 자세만은 별로 였다. 머리가 특별히 무거운것같지 않은데 골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번쩍 들고 걷는 법이 없이 수긋하고 걷는데 여간 풍채를 흐리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거꾸로 쳐박아넣어도 시원찮을 좀도적놈들이 밤새 큰길 복판에 뚜껑을 도적질해가서 지천으로 널린 백주의 함정인 하수도구멍에 빠질념려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딱 한번은 자칫 하수도구멍마개로 될번했던 일이 있었다. 십여년전  어느 날 밤이였다. 그날도 습관처럼 저녁술을 놓자 바람으로  교무실에 나와앉았는데 본과대학에 추천은 받아놓고 경제난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녀학생이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조언을 청했다. 그가 혼자 조용한 교무실에 앉아있노라면 그런줄 알고있는 학생들이 곧잘 찾아와서 여러가지로 속심을 털어놓군했다. 밤늦도록 교무실에 불을 켜놓고 제사무를 본다고 뒤에서들 쉬쉬하는 공론이 있는줄도 알고있고 스스로 생각해도 공가의 전기를 사사로이 쓰는것이 조금 껄끄름 하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렴치를 들이대고있는 판이였다. 그에게서는 집이 한낮 려관과 다를배 없었다. 눈뜨면 학교에 나왔고 밤이 깊어야 집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자기가 직접 가르치는 학급의 학생이 아니라도 종종 찾아와서 친구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정분을 쌓은 학생들이 많았다. 그것이 또한 주선생에게는 돈으로 살수 없는 인생락이기도 했다. 그로말하면 교원이란 그저 지식을 전수하는 사람만이 아니였다. 학교도 교과서라는 매체를 가운데 놓고 함께 인생을 준비하는 만남의 장소였다. 그러기에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동등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있었고 실제로 학생들을 그렇게 대했다.   그러다보니 그에게는 학생지기가 많았고 해마다 민의측험인지를 할 때 좋을 호자를 쓰는 학생수가 제일 많다고 하였다. 가르치는 자로서 자기 제자들에게 애대 받는만큼 더 행복한 일이 있겠는가? 주선생은 그로써 자기는 이미 크낙한 보상을 받고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학원에서도 이름있는 사업광이였다. 지금은 괜찮은 아빠트에서 살지만 그때까지 주선생은 부엌사이에 간막이를 한 열덟평이 안되는 온돌집에서 살고있었다. 두루 가구들을 늘여놓고나니 궤짝만한 공간이 잠자리였다. 그런 주거환경에서 도무지 무엇을 사색할수도 없고 글을 쓸수도 없는 형편이였지만 수없이 많은 교수안과 론문들은 무릎우에 올려놓은 네모난 유리를 책상삼아 낡은 옷장에 기대앉아 써낸것들이였다. 그러다가 교내용교과서를 집필하게 되면서부터 집에서 멀지 않은  학교에 나와서 일할 궁리를 하게 되였다. 그날은 퍽 늦은때여서 숙성한 녀학생과 단둘이서 교무실에 앉아있는것이 무슨 말썽거리라도 만들가봐 주선생은 녀학생을 데리고 학원앞 큰거리로 나왔다. 그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녀학생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돈많은 사람들이 하루밤 도박 밑천도 안되고 관리들이 한번 차리는 연회상값도 안될 학비지만 시골현성에서 온 이 녀학생에게는 천문수자였다. 그리고 학교다니는 동안 내야 할 학비는 어찌하며 식비, 숙사비, 일상 소비돈은 어찌한단말인가? 촌에서 농사지으며 근근히 입말림이나 하고 산다는 큰오빠가 더는 돈을 대여줄수 없노라고 선언했다는것이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시내 어느 중학교에 들어가서 제노릇이나 하려고 생각하니 추천해달라고 사정하였다. 주선생의 위망이나 인품으로 중학교교원자리 하나 알선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황차 순금이라 부르는 이 녀학생은 시골태생이여지만 인물체격도 빼여나고 공부도 너무 잘해서 주선생이 인간적으로 고와하고 아끼는 제자들중 하나였던것이다. 그런 제자가 경제난으로 학업을 중도이페하지 않을수 없으니 자연히 감정이 격해졌던것이다. 진정한 교육자라면 자기 학생의 먼 인생길까지 지켜보며 도울수 있으면 끝까지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있는 그로서는 심히 그럴만도 했다. 그래서 열기띤 목소리로 녀학생을 바라보며 설복하다보니 앞을 잘 살피지 못했다. 그러다가 저녁때까지도 잘 덮혀있던 하수도뚜껑을 어느 잡귀신이 들어갔는지 퀭하니 아가리를 벌린 함정에 한발을 디밀어 상체를 기웃뚱했다. 반응이 빠른 녀학생이 얼른 잡아채지 않았더면 분명 하수도구멍마개로 될뻔했다. 발끝이 좀 얼얼하다 싶었으나 다행이라고 생각한데다가 담화에 열중하다보니 엄지발가락이 잘못된것도 몰랐다. 일단은 학교에 들어가놓고 본다음 후일을 차차 도모하는게 좋다고 설복해놓고 도울수 있는만큼 우선 돕기도 하겠으니 옥생각을 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단단히 못을 박아놓았다. 집에 돌아와 양말을 벗을때 보니 엄지발가락 뼈마디가 별스레 툭 삐여 져있었다. 얼결에 발길을 움츠리다가 하수도구멍 앞턱에 엄지발가락을 걸고 몸을 지탱할 때 엄지발가락을 삐였던게 분명했다. 무작정 발가락을 세괃게 콱 잡아당기니 뚝 소리나며 발가락이 제자리에 박혔다. 그 일이 있은후부터 주선생은 더구나 땅을 훑으며 걷는 습관에 더 충실했다.  교정내에서도 늘 길가에 무엇을 떨어뜨리고 찾는 사람처럼 수굿하고 걷다가도 누가 인사할라치면 사색에서 금방 깨여난 사람처럼 그윽한 눈길로 건너다보며 미소를 앞세우고 인사를 받았는데 더없이 후덕하고 인자스러워서 학생들속에도 더구나 인기 있었다. 숫기좋은 어떤 남학생들은 서로 롱담했다. 력사상에 주원장은 가마밑굽같은 얼굴을 가진데다가 심사도 고약한 개국황제였는데 우리 주원장어른은 미륵보살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뒤에서는 또 속이 산 미륵보살선생님이라는 별호가 나돌고있었다. 학벌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지식이 연박하고 구변도 좋아서 그가 강의하는 시간에는 조으는 학생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직접 배우지 않는 학생들도 주선생이라면 잘 몰라도 주원장이라면 모르는 학생이 거의 없으니말이다. 저작도 두권이나 되였고 성급, 국가급 리론간물에 발표한 론문같은것은 일일이 따져볼것도 없었다.        학술평의전문가가 그를 본학과에서 선줄군이라고 평가하였지만 그는 종래로 자기 학과에서 앞장서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올리막길에 무거운 짐수레를 끌어올리는 황소처럼 그저 머리를 틀어박고 강의와 교수연구에 열중했다. 학술에서 그는 그렇듯 근신했고 꾸준했다. 명예는 책장처럼 번져지면 곧 잊혀지지만 학술성과는 영구하다는게 그의 신조였고 인생의 락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원장선생은 결코 성인이 아니였다. 오히려 별스러운 이름처럼 못말려 내는 괴짜이기도 하였다. 가장 돌출한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한것은 실말을 하기  좋아하는것이였다. 평소에는 말을 아주 아끼는 성미였으나 관건적인 시각에 말할라치 면 인정사정 가리지 않았던것이다. 그것도 마디마디 론리가 정연했고 여러 사람들이 생각하고있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는 날이 선들선들한 말들이였다. 그래서 학원의 령도들마다 속으로 시한폭탄이라고 여기면서 십분 경계하고있었다.        어제도 그랬다. 교직공대회를 열고《우리 학원의 기구개혁방안》을 전달한후 부문별로 나누어서 충분히 의론할것을 제의했다. 주선생이 속한 사회학과조에서는 회의가 시작된지 이슥한데도 서로 흘끔거리며 눈치를 살필뿐 누구하나 말문은 열려하지 않았다. 나중에 약속이나한듯 모두의 눈길이 주선생에게 박혔다.결국 주선생이 여느때처럼 첫포를 쐈다. ㅡ그럼, 제가 좀 말해봅시다. 물론 이번 기구개혁방안은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정부기구의 간소화는 소나기소리만 요란하고 비는 내리지 않는것처럼 한바탕 떠들썩하기만 하고 실제 기구개혁을 시작하면 예이제 교육계통에만 손을 대는것이 불가사의하지만 말입니다. 안그렇습니까? 그많은 국가재정을 먹어치우는것이 어디 이 나라에 교원이 너무 많아서입니까? 아, 예 뭐 그렇다면 이런 민감한 문제는 더 말하지 않기로 하고 본론에 들어가지요.. 첫마디로 말했지만 이번 결구개혁은 우리 학원의 실제정황에도 부합되고 상급의 개혁정신과도 부합되며 전국의 형세에 비추어보아서도 적시적인 결책이라고 봅니다. 그렇구말구요. 우리 학원의 종합청사에 교원들의 교연실과 거의 맞먹는 그 수많은 사무실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령도들과 관리일군들이 들어앉아있는가요? 다들 보고있겠지만 교수일선의 선생님들의 수자와 거의 어상반합니다. 양은 한마리이고 몰이군은 아홉인 그런 엄중한 정도는 아니지만요. 총무처도 보십시오. 그많은 후근일군들이 사무실에 앉아 한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실제로 착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몇이 안됩니다. 무슨 일을 벌리면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림시고용일군들이 아닙니까? 물론 이것은 우리 학원에서 가장 엄중한 페단은 아닙니다. 이런 팽창국면을 가급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학원을 현시대에 적응된 인재배양의 요람으로 꾸린다는것은 공리공담에 불과합니다. 그렇지 않단말입니까? 학원지도부에서 이번에 과감하고 영명하게 내린 결정은 두말할것 없이 맞습니다. 맞구요. 그러나 개혁방안이 종이장에서 오래 머믈러있게 하지 말고 현실로 체현시키는가 하는것이 급선무입니다. 잠시 여기까지 말해두지요.》 주선생의 발언이 끝나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너도 나도 말할듯이 입술들을 옴찔거렸지만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회의를 집행하는 손부원장이 주선생의 발언의 적중성과 무게를 극구 표양하고나서 장내를 휘익 둘러보았다. ㅡ모두 주선생처럼 과감히 생각하고 과감히 말하는 실사구시적이고 개혁성적인 작풍을 발휘해야 하겠습니다. 자, 그럼 또 누가 발언하겠습니까? 누가 더 말할분이  없습니까? 없다구요? 예, 좋습니다.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는것은 모두 말할 생각이 없다는것을 의미합니다. 말할생각이 없다면 오늘 회의는 이만 끝마치겠습니다. 회의가 끝난후 원장사무실에는 각실, 처, 부, 관의 책임자들이 모여서 의론정황을 회보하였다. 회보를 받고보니 190여명의 교직공들중에서 주원장 한사람이 겁없이 건설적인 의견을 발표했을뿐이였다. 학원에서는 이튿날부터 기구개혁을 바싹 다그쳤다. 며칠후 기구개혁을 실시할데 관한 결정을 반포했다. 문건에는 기구개혁의 필요성, 중대한 의의를 천명하고 인원을 감축할데 관한 약간한 규정, 구체표준을 제기하였다. 문건이 하달되자 스스로 감축인 원들속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밤의 어둠을 타서 령도들의 집을 뻔질나게 방문하였다. 상하급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지도부에서는 밤에 낮을 이어가며 회의를 열고 머리를 짜냈다. 소식이 령통한 어떤 선생이 전하는데 의하면 학원에서 상급에 인원감축에 난도가 있다고 반영 하였으나 아무리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개혁을 추진시키라고 요구한다는것이였다. 그러나 학원령도에서 재삼 제기하자 인원은 꼭 감소해야 하지만 보급면을 확대화하지 않아도 된다고 고삐를 늦추었다는것이였다. 드디어 석달후 학원에서는 기구개혁ㅡ감원결정이 내려졌다. 감축대상은 모두 5명이였는데 모두 코를 싸쥐고 돌아앉아 킥킥거렸다. 그도그럴것이, 되짜듯 말짜듯이 안깐힘을 써서 선정한 다섯명중에 한사람은 십년전에 출국했고 한사람은 실종된지 오래며 다른 한사람은 원래 적을 남기고 하해하여 부자가 된 사람이고 다른 한사람은 교학이 망태기여서 보따리로 여기고있는 사람이였다. 조사해 보니 가짜 졸업증을 사가지고 어느 큼직한 어른이 등을 밀어주어 학원에 기여든 사기군이였다. 이 네사람을 이번에 과감히 감축시켜버렸다. 그런데 경악할 일은 나머지 감축대상자가 기상 천외로 주원장선생이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모두 악연해졌고 구석구석에서 쉬쉬하고 의론이 분분했으나 그저 의론에 그쳤을뿐 실제적인 반향은 담담하였다. 상급에서 기어이 감원해야 한다니까 주원장선생 아니면 박교수가 나가야 할것이고 아니면 서선생이 나가야 할것 이니말이다. 칼도마위에 고기야 주인이 베기에 달린것이 아니던가? 평시엔 자기들의 내심을 대표해서 속시원히 말한다고 극구칭찬하며 우리 학원에 주선생같은 사람이 있기에 민주의식이 살아숨쉬고 인문환경이 고인물이 되지 않고있다고 입에 침을 튕기던 사람들이 제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으니 강건너 시아비 보듯하는 태도들이였다. 배신감을 느낀 주선생은 분노하였다. 새둥우리가 뒤번져졌는데 알이 성한대로 있겠는가? 무섭고 두려울것이 없었다. 배도 갈앉고 가마도 깨진판에 강을 등지고 한번 겨루는수밖에 없었다. 제일 원장의 사무실문을 세괃게 노크하고 대답도 기다릴새도 없이 찬바람을 일구며 들어섰다. 기색이 말이 아닌 주원장을 보고 함께 앉아 무엇을 수군대던 일곱원장들이 저마다 아주 경건한 태도로 맞아주면서 차물을 부어준다 담배를 권한다 하며 한참 부산을 피워댔다. 그러나 주선생은 마시지도 피우지도 않고 묵묵히 앉아있다가 짜내듯 내밷듯 말을  꺼냈다. 그 목소리는 몹시 갈앉았지만 저력이 있었다. ㅡ그래 그렇게 연구하고 연구해낸것이 결국 나 하나를 밀어내는것이였습니까? 아따, 긴해석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만 말씀하시지요. 내가 감원대상이 된 리유와 조건이 무엇이지요?》 역시 손부원장이 점잖게 응대했다. ㅡ아참, 주선생, 그렇게 너무 격동할것까지야 있습니까? 이번에 감원대상이 어디 주선생 한사람입니까? 앞에 네사람이나 있다는것을 주선생도 알면서 그럼니까? ㅡ좋습니다. 허울좋게 네사람이 있다치고 내가 왜 밀려나야하는지 말해보시오. 내가 교학이 안되는가요? 론문이 없습니까? 사덕이 안됩니까? 학생들속에 의견이 있습니까? 나이가 많습니까? 일곱원장이 서로 눈길을 마주치며 소리없이 웃었다. 마음이 독하지 못한 남원장이 난색을 감추지 못하고 해석했다. ㅡ무슨 그런 말을…주선생님이 인재라는걸 누가 모릅니까? 선생이야 안되는게 있습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주선생은 자격이 넘쳐나서 감축된것이지요. 놀랄것 없습니다. 주선생같은분이 어데가나 자리가 없을가봐 걱정인가요. 여기서 나갔다는 소식이 나가면 여러 학교들에서 쟁탈할텐데요. 안그렇습니까 ?》 주선생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자격미달이면 정리대상이 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자격이 넘쳐나서 밀려나간다는것은 금시초문이다. 하긴 어느 원장의 말마따나 도깨비 세상이 아닌가? 그러나 이건 도깨비 기와장번진는 소리같지 않은가? ㅡ사실 우리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왔지요. 주선생은 능력이 있고 사회상에 지명도가 있지요. 다른 사람을 내보내면 능력이 없지 자기 주견을 선명하게 표현할줄 모르지 이런 사람을 어느 학교에서 요구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그저 너는 굶어죽어라 하고 내버릴수야 없지 않습니까? 개혁도 해야겠지만 인정도 말살할수야 없지요. 주원장선생은 들을수록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계속 따지며 시비를 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그는 고개를 푹 떨구고 실성한 사람처럼 무어라 중얼중얼하다가 일어나더니 문고리를 잡는 순간《하하하…》하고 앙천대소하였다. 느닷없이 터진 그 웃음소리는 몸서리치게 길었다. 그리고 시작되던때처럼 갑자기 뚝 끊기였다.  며칠후 주선생의 안해 옥녀가 무작정 원장실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대성통곡을 하였다. 펀펀해서 강의를 하던 사람을 내보내여 미치게 만든 사람들이 도대체 인정을 개를 베여먹였는가 하면서 자기 남편을 구해내라고 야단을 쳤다. 현모량처라고 소문 나 있던 주선생의 안해가 이렇게 살기등등해진데 모두 악연해졌다.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있었다. 태여날 때 웃음주머니를 물고나온 사람처럼 언제나 미소를 짓고있어 온화하기 그지없던 사람이 온하루 오만상을 찌프리지 않으면 얼굴이 댕댕해서 말도 하지 않고 점심때가 되여도 누운자리에서 일어날 념을 하지 않고 밥먹을 생각도 없는듯 하루 세끼 굶기가 보통이란다. 사람이 잘못되지 않고서야 이렇게 반상적일수 있냐며 복도가 따나갈듯이 설토했다. 듣고보니 아닌게 아니라 생사람을 페인으로 만들것같아서 원령도에서도 속이 후끈 달았다. 옥녀를 겨우겨우 달래서 돌려보낸후 일급령도들의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수완이 좋은 남원장이 이 일을 책임지고 잘 무마해나가도록 결정했다. 그날 오후 남원장이 차를 가지고 주원장을 찾아가 속죄하듯이 사정사정해서 병원에 싣고갔다. 한다는 교수를 청하여 진찰시킨후 며칠건너 좋다는 약을 이것저것 많이도 사들여 보냈지만 들리는 소식이 보름째 그냥 그 모양이란다. 누군가 먼저 사람을 한바탕 웃게 해서 정상심리로 돌아오게 한다음 치료를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옥녀는 그 말이 일리가 있는듯 싶어서 《떼떼》, 문혁이같은 소문난 웃음배우들의 록상테프를 사다가 전문 돌렸다. 그도 잘 안되니 강곤, 조본산의것도 보이면서 강짜 웃음을 터뜨리며 웃겨보려했지만 강건너 불구경하는 사람의 표정도 아니였다. 눈길은 굳어진대로 웃음사촌도 어른거리지 않았다. 다른때 같으면 밥알이 튕겨나오는것도 모르고 웃어대던 사람이였는데 정말 소경의 텔레비구경이였다. 그렇다고 락심하고 손을 놓을수는 없었다. 옥녀는 그가 간지럼을 잘 탄다는것을 생각해 내고 며칠동안 씻지 않아서 냄새가 나는 남편의 발을 코에 대다싶이 끌어다 안고는 발바닥에서도 가장 민감한 부분을 간질러댔다. 그러나 그 간지럼타던 본성이 어느 귀신이 다 잡아갔는지 본능적으로 발만 움츠려뜨릴뿐 구태의연하였다. 주선생의 안해는 그 학식에 어데가서 선생질 못하겠는가고 위안도 하고 결혼후 처음으로 걸직 한 욕사발도 안기면서 닥달질했지만 원장접대실 문고리를 쥐는 순간에 소름끼치도록 웃었다는 그 웃음이 한번 가버린후 종무소식이다. 막 찢어발기고 싶도록 역증이 나면서도 20여년을 속살을 비비며 살아온 살뜰한 남편이 저러다 영영 페인이 되지 않나 걱정도 무더기로 쏟아졌다. 누군가 전국에서 유명한 기공사가 연길에 와서 학습반을 꾸린다면서 한번 기공의 마력으로 웃음을 끄집어내보라고 권고했다. 그는 선걸음으로 그 기공대사를 찾아가서 사정을 구했다. 기공대사는 사람의 몸에 웃음혈, 울음혈, 벙어리혈, 눈물혈 등 368 개의 혈이 있는데 그 웃음의 혈을 면바로 찾아내여 자극하면 제가 웃지 않고 배길수 있겠느냐며 실넋한 사람처럼 한참이나 하하하!하고 웃다가 동가슴을 탕탕 치며 장담했다. 주사맞기 싫어하는 다 큰 아이를 욱박질러 병원에 데리고 가듯이 남편을 문밖으로 끌어내기도전에 기진해버린 그의 안해였다. 그러나 펀펀한 사람을 잘못만든 학원이 미워서라도 나그네를 정상인으로 만들리라 입술을 깨무는 그녀였다. 하긴 남들앞에서는 그렇게 강하게 나온다는 주원장이 안해앞에서는 정말 큰아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안해의 끈덕진 손길에 끌려 문을 나서고말았다. 아닌게 아니라 기공사의 손길은 령험하였다. 혈을 찾아 기를 넣기시작해서 10 분이 되였을가 기적이 나타났다. 주원장이 온 몸을 흔들어대다가 비틀면서 웃어대기 시작했던것이다. 하지만 그 웃음은 소름이 끼치게 처절하였다. 찰나에 주선생의 안해는 별로 심상치않기도 해서 얼른 그쳤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안도의 눈길로 남편을 지켜보았다. 강아지똥도 똥이라고 어쨌든 웃은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귀신이 곡할노릇이 또 있는가? 기공사가 돈을 받아넣어가지고 다른 사람을 보러 나간지 얼마 안되여 잔뜩 밀렸던 웃음보둑이 터진것처럼 너털대던 주선생은 몸에 기가 다 빠졌는지 내가 언제 웃어보았느냐는듯이 다시 돌처럼 굳어진 얼굴로 돌아오고말았다. 그저 진심으로 따뜻이 대해주고 곰살갑게만 대할줄 알았던 옥녀가 곁사람들이 무참할 지경으로 애교덩어리로 되였지만 역시 돌멩이를 가마목에 놓아두고 병아리가 되여줍시사 하고 비는것과 같이 무모한 짓이였다. 그렇게 줄기차게 하던 침대우에 유희도 숫제 흥미를 잃고 밤낮 쏘파우에서 새우잠을 자기가 일쑤였다. 다 큰 귀여운 딸애가 칭칭 감겨들어도 숫제 목석이였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마시지 않았다. 어느 날 주선생과 못하는 말이 없이 친밀하게 보낸다던 최선생이 찾아와서 이런 저런 미안한 말을 늘여놓다가 아무래도 심리충격때문에 생긴 변이 틀림없으니 유명한 심리자문소로 한번 가보는게 어떠냐고 제의했다. 그녀는 언제는 자리지킴을 하느라고 명철보신하더니 이제와서 행차뒤 나발같은 너스레를 떠느냐고 아니꼽게 여기면서도 그 제의에는 도리가 있는지라 심리전문가를 찾아갔다. 허씨라는 심리전문가는 자초지종을 다 듣고  머리를 개웃거리더니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풍채는 별로 없는 사람이였지만 어덴가 퍽도 리성적인 사람같았다. ㅡ듣고 보니 이만저만한 심리장애가 온것이 아니구만요. 아무래도 본인과 한번 솔직한 대화를 나눠봐야 방도가 나질것같으니 남편을 모시고 한번 오십시오. 허선생은 한식경이나 관상학과 심리학의 관계에 대해 한바탕 연설하고는 미모의 녀인을 이윽토록 지켜보았다. 그 눈길이 무엇을 말하는지 옥녀만 알수 있었을것이다. ㅡ사모님.ㅡ예 병근을 알아야 치료에도 좋을테니까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부인을 데리고 사는 교수님이 왜 웃음을 잃었는지 한번 보기도 할겸 담화도 해야겠으니 언제건 남편을 모시고 여기로 오시지요. 주선생의 안해는 며칠후 남편을 모시고 다시 심리자문소로 갔다. 그러나 주선생은 심리학박사를 한번 곁눈질도 하지 않고 시종 얼굴표정이 굳어져있었다. 그러나 심리의사의 교묘한 계발로 대화는 차차 잘 어울려갔다. ㅡ주선생이 심리평형의 실조는 사업에서 기인된것이지요. 말하자면 반생을 몸을 담그고있던 학원이 아닙니까? 뭐 부인께서 자상히 듣긴 했지만 주선생은 주요하게 학원의 비리와 비정을 두고 너무 격분한것같은데 주요하게 무슨 일이 마뜩치 않았습 니까? 그걸 좀 말해보시지요.  ㅡ 말하자면 한두가지 아닙니다. ㅡ 학교가 정토라고요? 미안합니다. 교육마당에 이미 정토란것은 없어졌습니다. 대학들은 이미 관청이나 다름없이 되였지요. 관청의 결구만이 아니라 관청문화가 되여 관청의 행사방식으로 운행되고있습니다. 이 몇년래 대학들마다에서 경쟁하듯 학생을 초과초생는것은 돼지고기에 물을 주입하는것과 같지요, 오직 학생들을 망치게 됐지요. 내가 학생들을 대신해 직언을 하였는데 그만 잠규칙을 범하게 된것입니다. ㅡ당신은 자기가 너무 과격하다는 혐의를 받지않는다고 생각합니까? 어떻게 생각하든 좋습니다. 아이들을 망쳤지요, 배양해낸 학생들이 쓸모가 없고 취업난에 모대긴다는것은 현재 국민들이 다 알고있는 일이지요. 말을 잘 듣는 학생은 노예근성만 배겼고 순종하지 않는 학생은 분노한 청년들이 되고말았지요. 대학확대초생은 더러운 물을 넣은 돼지고기와 같다는 말에 동감이 갑니다. ㅡ부원장이 전화하였는데 아무런 리유도 말하지 않더군요. 그전에 원장과 두차례 충돌이 있었지요. 한번은 우리 학원의 선우선생의 교수직무평정을 할 때 그를 위해 바른 말을 한것이고 다음 한번은 석사, 박사론문답변비에 관한 일로 목에 피대를 세우며 쟁론하였지요. 그후 그는 나와 사이가 괜찮은 선생들을 불러다 줄에 잘못 들어서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나를 고립시키려 작동했지요. 내가 그네들을 위해 포를 쏠때마다 은근히 공조하던 사람들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입에다 금을 물고 명철하는 모습이란 나원, 몇해전 령도의 눈에 난 한 재능있는 교원이 쫓겨났습니다. 학원의 잠규칙을 어기면 다 그런 좋은 대우를 받지요. 학원의 옹근 결구가 관료화되였지요. 층층이 임명하지요. 교원들이 계주임을 선거할 권리도 없습니다. 나와 관계없는 일에 왜 입을 다물지 않았는가구요? 나도 그러면 제밖에 해를 볼수밖에 없다는것을 알지요. 그러나 량심이 가만있게 합니까? ㅡ선생님은 학원에서 밀려난것이 아니 학원을 떠난것이 아쉽지 않습니까? ㅡ가슴이 아플지경으로 아쉽지요. 난 학생들을 떠나기 애석합니다. ㅡ 안되겠군요. 주선생님같은 특수경우엔 말입니다. 물리적으로 자극해서 한바탕 웃긴했겠지만 그런 웃음은 인공적이여서 기계적이고 피동적이지요. 말하자면 흉벽을 터치며 내심으로부터 울려나오는 웃음이 아니기에 웃음실조라는 특수병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습니다. 웃음이란게 뭐이겠습니까? 한번 들어보시지요. 예ㅡ도대체 웃음이란 말입니다. 쾌적한 정신활동에 수반하는 감정반응의 일종이라고 정의를 내리고있지요. 비교적 고상한 지적인 생활이나 사회생활에 부수하여 표출되는 현상이지요. 의학적으로 말한다면 웃음은 횡경막이 단속적이고 경련적인 수축을 수반하는 깊은 호흡으로부터 생기는겁니다. 그렇다 해도 웃음의 종류가 다 같은건 아니지요. 싱긍벙글 웃는것은 만족감을 나타내고 능글능글 웃는것은 비밀을 감추고 있는것이며 히죽히죽 웃는것은 악의를 나타내는것이지요. 깔깔거리며 웃어대면 기품이 없다는것을 말해주구요. 예, 또 일반적으로 유아들이나 아동의 웃음은 신체적, 감성적이고 아동기후에야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웃음이 많아지는데 그 표현은 미소로 변하지요. 보아하니까 주선생은 지성인이여서인지 늘 미소를 짓고있겠군요. 그렇습니까? 글쎄요. 에누리없이 들어맞는다니까요. 그건 그렇고 청년기가 지나면서 유모아가 발달하는데 유모아는 자기를 객관시하고 웃음의 자료를 제공하려는 마음에서 생기는겁니다. 주선생이 평시 아주 유모아적이였을겁니다. ㅡ예, 이 분은 유모아를 곧잘 해서 쩍하면 앵돌아지는 제 못돼먹은 딸년도 금방 웃고야 만답니다. ㅡ아, 그렇습니까? 글쎄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겠지요.  앙리 베르그송은 자기의 저서《웃음》에서 희극적인것을 의미론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사람은 타인과의 협조관계에서만 웃을수 있다는 점으로 보아서 인간의 웃음은 사회를 형성하는 기능을 가진것이 틀림없습니다. 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난 사람을 다시 불러들이는 작용을 하는겁니다. 하다면 주선생을 웃음의 세계에로 다시 불러들이는것이 바로 정상인이 되는 징표입니다. 암, 그렇구 말구요, 이제 사람이 흔히 웃게 되는 리유를 말하지요. 홉스는 웃음이란 돌연히 나타나는 승리의 감정이라 했습니다. 주선생은 이 경우에서 마지막으로 웃은게 아닙니다. 예. 그렇지요. 그때 상황이 그렇게 되였다니까. 베인이라는 학자는 타인의 권위와 체면이 상실되였을 때에 느끼는 쾌감이라고도 했지만 그것도 아닌것이고…쇼펜하우엘은 어떤 관념과 상념이 불균형인 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아ㅡ예, 좀 지루하겠지만 그냥 들어두는게 치료하는데 유조할것입니다. 례를 들자면 어떤 멋진 신사가 길가에서 빠나나껍질을 밟고 넘어졌다거나 어린아이가 어른의 옷을 입었을때와 같은 경우이지요. 립스는 무엇인가 중대한것을 기대하고 긴장해 있을때에 예상밖의 결과가 나타나서 갑자기 우습광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주선생이 그날 원장실에서 마지막으로 앙천대소한 심리바탕이 바로 이것이였지요. 그 한번의 억장이 무너지는듯한 웃음이 그만 주선생의 웃음신경을 꽉 막아버렸다고 할수 있습니다. 베르트 하이머는 만화를 보고 웃는것은 자신의 심정이 부분적으로 닮지않았으나 부분적으로는 그 내용에 근사하게 닮았을 때의 감정이라고 했습니다. 주선생은 학원에서 한 그 결정에 어처구니 없었던겁니다. 만화같은 이 인생현장에서 자기가 어떤 각색이 되였는가를 절감하고 본의가 아니게 웃음이 터졌지요. 그렇지요. 참, 그 경우에 웃지 않고 울겠습니까? 자유로워야 할 인간이 부자유한 기계와 같은 운동을 하였을 때도 웃음이 나올수있지요. 주선생이 아무리 직언을 잘한다 하여도 제 하고싶은 말을 다하고 살수 없는 이 세상이 아닙니까? 그래서 주선생은 할말을 하지 못하고 내심의 불만과 고통을 속으로 삼켰습니다. 그것이 그만 날숨에 묻어나왔는데 너무 성급하게 거세게 터져나오면서 성대를 진동시켰던거지요.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필경 이웃집 자전거가 김이 터지는 소리같은 그런 웃음이였지요. 웃음소리는 요란하였지만 기실 허구픈 웃음이지요. 자, 인제 본론으로 들어가볼가요? 웃음이란 어리석은 사람의 변상적인 처세용반 응이라기보다는 성실하고 보람차게 살아가려는 사람의 거울이며 그 사회의 화평을 측정하는 척도이기도 합니다. 옛글에 질풍노우(疾风怒雨)에는 새들도 근심하고 맑은 바람 밝은 달에는 초목들도 즐거워한다고 했지요. 그러니 이 천지간에 화기가 없이야 사는 맛이 나겠습니까? 인심에 하루도 기쁨이 없어서는 안되지요. 세상이란 마음을 가질탓이라 하지 않습니까? 밉게 보면 모두가 미움거리요 명랑하게 웃으며 바라보면 모두가 웃음거리지요. 괴롭고 즐겁고 밉고 고운것이 모두 제마음을 가질탓에 있다는 말입니다. 한사람의 마음이 평화로우면 이웃사람들까지도 부드러워지게 하지요. 인생은 길들일 탓에 있다고 한마디로 개괄할수 있겠죠. 즐겁게 살려거든 먼저 웃으며 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선생님, 울어보시오. 아무도 당신을 따라 울지 않을것입니다. 그러나 웃어보십시오. 사람들이 따라 웃을것입니다. 그까짓걸, 하십시오,《꽃잎이 싫다하면 닢에서 자고가쟈!》라는 옛시조가 있지요? 졸자는 옹졸하게 작은 리익에 탐욕을 부리지만 지성인은 대아정신에 뜻을 두고 자기 한생을 쾌적한 인생예술로 만들어간다지 않습니까? 그래요. 조금 미소를 짓는군요. 하하하…다음번엔 사모님 혼자서 오십시오. 그때 병의 근원을 더 깊이 알아봅시다. 남편되는 분의 은사에 관한 문제에서도 병근을 찾아야 하니까요. 에헴ㅡ》 주선생의 안해는 이튿날 다시 심리전문가를 찾아갔다. ㅡ어제는 주선생의 기분상태를 알아보느라고 연설이 길었습니다. 그럼 오늘은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연구봅시다. 이 최근년간에 생긴일을 떠올려 그를 웃게 할수 없겠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십시오.》 ㅡ예, 있습니다. 언녕 고급직함을 가져야 할 분이 몇년을 그냥 밀리다가 끝내 부교수로 되던 날 집에 들어서며 벌쭉 웃었습니다.》 ㅡ그건 안됩니다. 그 웃음은 이른바 쓰디쓴 웃음이라는것입니다. 그가 조건이 충분하겠는데 어찌하여 번번히 남에게 밀렸던가요? ㅡ다 입덕을 입은거지요. 입이 빠르고 보는 소리는 다하니까 누가 곱다고 하겠어요. 학교에서 교원주택을 지을 때 부정한 일이 많아서 집금한 사람들이 의견이 많았지요. 그때 글쎄 부실하게 군중대표인지 빈대포인지가 돼가지고 시비를 많이도 캤던가 봅니다. 세상과 시비를 걸지 말라는 도리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그게 우둔한 짓이 아니고 뭡니까? 결국 물을 막은 사람은 고기꼬랭이도 못쥐여보듯 옆에서 우야우야하던 사람들은 인심도 아니잃고 제노릇만 잘 하였지요.》 ㅡ오, 그ㅡ랬군요. 그러구보니 주선생의 우울증은 돌발성적이 아닌같습니다. ㅡ지난해 교학도 하지 않은 한 령도가 특급교원이 되고 또 어느 령도인가는 전국 무슨 모범이 되였다는데 그이가 혼자서 자꾸 희죽희죽 웃더군요. 그래서 어째 혼자 웃는가고 물었더니 더 참지 못하고《우우…》하고 웃는바람에 입에 밥알이 푸우 뿜겨나와서 마주앉았던 딸에게 야단맞은 일이 있습니다. ㅡ아, 예ㅡ나두 그런 일은 많이 들어봤지요. 뭐 지금은 그저 그렇구 그런거죠. 해가 비치면 먼지도 빛나게 되여있습니다. 그 웃음은 비리한 자들에 대한 경멸의 웃음입니다. 안되겠어요. 진짜 웃음이 아니거든요. ㅡ그럼…옳지, 한번은 어느 교원이 2천원을 팔고 관계를 통해 론문을 발표했다고 하면서 혼자 시물시물 웃었습니다. ㅡ그 웃음도 안되겠어요. 학술마저 부패하게 되여져서 론문따위를 하찮게 보는 자기경멸의 웃음이였을것입니다. 주선생이 웃긴 여러번 웃은것 같지만 자기다운 웃음은 한번도 웃지 못하였구만요. ㅡ이건 어떤지요? 몇몇 령도들이 가속을 데리고 려행을 가다가 길토비들을 만나서 몽땅 털리고 빈털털이가 되여 돌아오게 되자 여론이 와자자했지요. 그때 자다가 일어나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웃더군요.》 ㅡ그건 좋지 않은 웃음입니다. 키들키들 웃었지요? 맞습니까? ㅡ아이유, 전문가선생님이 다르긴 다르군요. 정말 그렇게 웃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잘못되지나 않았는가고 숫구멍에 손까지 대보았는데요. ㅡ주선생답지 않게 웃었습니다. 말하자면 남의 잘못된걸 보고 잘코사니야 하고 웃었으니 군자답지 않아요. 혹시 그때 이미 사람이…아니,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ㅡ그럼 또… 참 더 없는데… ㅡ아니, 미처 생각하지 못해 그렇지 필경 있었을것인데요. 기억의 매돌을 더 돌려 더 짜내보시지요. 어떤 돌발적인 사건이 생겨서 배를 끌어안고 웃은적이 없었던 가요? 이를테면 어떤… 한동안 심각한 표정이던 옥녀가 무릎을 탁 쳤다. 전문가의 말에서 기억의 대문이 활짝 열린것이였다. ㅡ참, 그래요. 지난해 8월이였던지…저녁을 다 먹고 설겆이를 하는데 어떤 낯모를 사람이 무슨 꾸러미들을 여러개 들고 우리 집을 찾아왔더랬습니다. 그 사람이 주원장선생님의 집이 맞는가고 물었지요? 하긴 그런데 누구ㅡ신지…하고 자세히 캐여물으려는데 글쎄 막 밀구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나는 집을 찾는체하면서 가택침입을 하는 강도인가 해서 가슴이 다 한줌만해졌습니다. 글쎄 그게 무슨 사람이였겠습니까? 기가차서…주원장님, 저의 처제의 조동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여 정말 고맙습니다. 인차 출근하여 교학까지 맡게 되였습지요. 정말 힘을 써주어서 고맙습니다. 원래 있던 선생님들마저 쌰강시키는 비상시국에 새로 사람을 받아넣자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두툼한 돈봉투를 내놓지 않겠습니까? ……? ㅡ그이도 나도 오리무중에 빠져서 멍하니 있는데 고중다니는 우리 딸애가 촉기 빨라서 입을 싸쥐고 웃었습니다. 그제야 생각해보니 불상참배에 려동빈묘를 찾은것이였습니다. 학교에 정말 주원장이 있었는데 동네 누군가 아무 생각없이 우리 집을 가리켜준것이였습니다. 어쩌다 딸애가 롱담삼아 그때 그 돈을 받았으면 자기가 대학갈 때 돈걱정을 안했을걸 그랬다고 말할라치면 입을 싸쥐고 위생실로 달려들어갔습니다요. 밥알이 또 딸애의 얼굴에 튀기나 하면 야단이니까요. ㅡ참, 우스운 일화가 많은 분이군요. 부인은 웃지 않는 날이 없었겠군요. 확실히 주선생은 군자형의 인물입니다. 속은 다 모르겠지만 생김새부터 풍채까지 본다면 분필가루를 날리는 사람으로 볼것이 아니라 한자리 크게 하는 사람으로 착각할때가 많게군요. 아무튼 내가 좀더 연구하고 병근원을 다시 확정해 보지요. 참 좋기는 남편되는 분을 한번 더 모시고 오십시오. 마지막으로 그와 더 진지하게 대담하면서 더 좋은 치료책을 모색해 보려합니다. 아, 참 녀사와 같이 이렇게 절색으로 아름다운 녀인과 함께 사는데 실조라니 참 아쉽군요. 하하하… 며칠후 조금 호전된 주선생이 다시 심리의사와 마주앉았다. 심리의사는 그간 옥녀에게서 한 료해와 본인과의 직접 담화에서 동조하는 심리가 생긴것인지 이번엔 의사로서의 틀을 버리고 주선생과 친구처럼 허심탄회하게 속심을 주고받았다. ㅡ들을라니 주선생은 조금 괴짜이군요. 오늘은 의사와 환자사이로가 아니라 친구처럼 한담해봅시다. 일상생활에서 있었던 우스운 얘기를 해보시지요. ㅡ글쎄말입니다. 하긴 이 인간세상을 어떻게 보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확실히 속으로는 울어도 겉으로는 웃으며 살려고 마음을  지어먹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겐 웃음거리얘기도 많습니다. ㅡ얘기가 두서없고 길어질수도 있는데요. ㅡ예, 괜찬습니다. 기실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나 소설을 좀 쓰는 업여작가입니다. 하긴 갖잖게 필명으로 발표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동네집 로친네들이 하는 허드레 잡소리도 귀를 기울여보는 직업병이 있습니다. 주선생님의 조우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참 좋아요, 하하하…주선생의 불행을 웃는게 아닙니다. ㅡ아니, 그럼 그새 나의 일을 가지고 소설을 구상했겠군요, 쓰지 마십시오. 어떤 일은 소설로 써서는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나도 소설가는 아니지만 소설속에서 현실을 보는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소설을 읽을 때가 많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몰래 웃어본 일도 한두가지 아닙니다. ㅡ좋군요. 그걸 말해보십시오. ㅡ선생님이 보기에 저란 사람이 쓰고 난 탈이 어떻게 보입니까? ㅡ글쎄요, 뭐 관상학적으로는 집에 부인님과 다 얘기했으니까 본인앞에서 말하면 좀 어색한 일인데…아무튼 주선생은 천생 주원장소리를 들을만큼 생겨먹었군요. 누가보나 한자리 하는 사람으로 보기 십상입니다. 나처럼 이렇게 빼빼 마르지 않고 보기좋게 몸도 나있구요. 하하하하… ㅡ하긴 내가 미관말직도 해보지 못한 처지인데 그러루한 웃음거리가 있지요. 예 말하자면 말입니다. 나는 이 실속없는 풍채때문에 난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 얘기 할가요. 생활이 그대로 소설이 되는건 아니지만 어쩌면…선생은 작가니까 물론 체호 브의 유명한 소설《뚱보와 말라꽹이》를 기억하고있겠지요. 그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어느 날 길에서 있은 일입니다. 아예 서사방식으로 얘기합시다. ㅡ 어이구, 이게 누군가? 주원장이가 아닌가? 이게 몇해만인가? 엉?!!     나는 갑자기 내손을 와락 잡는 사람을 한참이나 얼없이 쳐다보았다. 키가 껑충한것이 장승같고 마른 명태처럼 바싹 여윈 모습을 쳐다보노라니 그제야 기억이 꿈지럭거리며 기여나왔다. 그였다. 초중때 롱구선수이고 내 짝패였던 영수였다. ㅡ영수가 아니야? 참 오래간만일세, 그동안 어디가 무얼했기에 한번도 낯짝을 볼수 없는가?  영수는 시종 내 아래우를 훓어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ㅡ그동안 일이 잘 풀렸던 모양이구만. 풍채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나 탄복하네. 한자리 하지 않으면 크게 벌었던 모양일세그려. 옛친구는 아마 만면춘풍인 내 얼굴과 두둑한 내 배를 보고 아름다운 착각에 빠진게 분명했다. 중국사람들의 관념은 참으로 유치하다. 배가 나오고 좀 틀거지가 나면 무슨 어른이나 갑부와 련계시켜 생각하는게 일반적이니 말이다. 70 년대까지도 확실히 배가 나온 사람중 열에 아홉이 간부였던것은 사실이나 지금은 비게나 좋아하고 영양섭취가 좋으면 고구마를 구어파는 사람도 뚱뚱해지기 마련인데 아직도 배로 신분을 판정하는 의식은 얼마나 유모아적인가? 이런 관념으로 본다면 작은 부쉬나 일본의 고이즈미는 촤하층계층에나 알맞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나는 얼없이 웃었다. 때론 안해의 명령에 따라 남새지장에서 남새를 살때 장사군들이 각별히 은근하게 대하는것은 사실이다. ㅡ아야, 로반! 친히 남새를 사러나왔군요. ㅡ이러지 마시오. 난 무슨 로반도 아니니까. 무얼 보고 자꾸 로반이라 부르지… ㅡ아이유, 지금 배나온 사람이 배가 홀쪽한 사람보다 더 많은 세월이지만 당신의 그 풍채는 아무래도 일반 뚱보들과 다르다니까요. 그럴때마다 나는 웃었다. 내 배가 아무래도 복배가 틀림없는것 같았던것이다. 중학교에 있을 때도 간혹 일이 있어 교장실에 앉아있노라면 찾아온 손님들이 늘 내 앞에 와서 교장선생님을 개여올릴 때가 많았다. 한번은 장백산구경을 갔을때다. 한창 길닦이를 하느라고 길이 막혀서 차를 세우고 기다리는데 공지책임자가 내게 다가 와서는 길을 지체시켜 미안하다고 사정을 구하였다. 내가 령도는 저쪽 차에 있다고 해석해도 곧이 듣지 않았다. 그래서 교장선생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아무튼 이 한생에 배때문에 웃음거리도 많이 생겼고 자의 아니게 편리도 얻을 때가 얼마인지 몰랐다. 얼마전 농촌에 있는 어머니를 보러 가던 길에 한족마을을 지나는데 두아낙네들이 마을어구에서 대판 싸우고있었다. 싸움은 치렬했고 오가는 욕설은 그야말로 아주 정채로웠다. 나는 운전수더러 잠간 차를 세우라하고 내려서 구경하였다. 어떤 글감이라도 생길것 같았던것이다. 주위에 둘러서서 싸움을 구경하던 아낙네들이 난데없이 나타나 아무말도 없이 심각한 얼굴로 지켜보는것을 보고 내 눈치를 살피는것이였다. 제정신없이 다투던 두아낙들도 슬그머니 휴전을 하고 나를 흘끔흘끔 바라보더니 그중 한 녀자가 어줍게 다가와 호소했다. ㅡ향에서 내려오신 간부어른이시지요? 글쎄 이런 무법천지가 어데 있어요? 저년이 자기 밭에 풀을 뽑아서는 우리 밭머리에 마구 던지지 않구 뭐입니까. 그래서 내가 밭머리에 그렇게 풀을 던지면 풀씨가 들어앉는다고 걷어내가라구 말했지요. 그런데 제사 잘했노라구 욕질을 해대는게 아닙니까? 좀 사리를 따져주세요. 저 녀자가 촌장질을 하는 제남편의 위세를 믿고 패도를 부리는게 아닌가요? 역시 이 녀자들이 나의 배에서 착각을 가진게다.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오는것을 참을수 없었지만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랬다고 짐짓 아닌보살하고 다른 한 아낙네를 비평했다. ㅡ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좀 틀린것같습니다. 풀을 뽑을때는 마음이 급해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남의 밭머리에 그냥 쌓아둘 생각이였다면 안되지요. 이 아주머니가 옮겨가라고 요구하는것도 도리가 없는것은 아니지요. 그리구 촌장의 부인이니 더구나 자태가 높아야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나의 점잖은 어투와 배에 위압감을 느꼈던지 서로 화해하고 웃으며 함께 풀을 날라갔다. 나는 이렇게 아주 체면이 서게 한차례 민사분규를 해결해 준셈이였다. 둘러섰던 사람들도 나에게 십분 황공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친구가 친구답지 않게 나의 배에 흥취를 가지는것이 우스워 가가대소했다. ㅡ하하하…그런거 아니야, 자 가세! 식당보다 우리 집에 가세, 우리 옥녀아씨도 알현해야지, 지금은 자네에겐 형수니까. 나는 옛친구와 술잔을 나누며 그 동안 똥배때문에 생겼던 웃음거리를 안주로 삼았다. 내가 시문화국에 잠시 몸을 담그고 있을때였다. 위병이 있는 국장은 말라꽹이여서 늘 내배를 툭 치며 말할때가 드문했다. ㅡ내배속에 들어간 기름이 당신보다 많으면 많았지 절대 적을수야 없지, 그런데 나는 왜 그냥 살이 찌지 않은지 모르겠단 말이요. 하긴 그가 속이 탈만도 하였다. 우리는 늘 손님을 모시고 식당에 갈때가 많은데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국장으로 오해해서 진짜 국장을 난처하게 만들군하였 다. 그날도 그랬다. 복무원 아가씨가 채를 올릴 때 좋은 채는 번번히 내앞에 먼저 놓 군하였다. 앉은 사람들중에서 내가 제일 뚱뚱하니까 우두머리로 본게 틀림없었다. 내가 그런체하고 시치미를 떼고 앉아있자 류국장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있었다. 그래도 나는 아예 못본체 하고있었다. 내가 시킨일도 아닌데 안달아할 일이 무언가, 마지막으로 찐 물고기가 오를 때 류부국장이 큰 기침을 하고 나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ㅡ주비서, 시끄러운대로 그 물고기를 한국장님앞에 놓으라구, 한국장이 제일 좋아하는 물고니까, 이 말은 분명 큰 배를 가지고 사람을 흥량하는 복무원아가씨더러 들으라는 말이였다. 은근함을 잘못 바친 복무원아가씨는 나를 마뜩치 않은 눈길로 흘기였다. 그 눈길은 마치 (알고보니 하찮은 일개 비서를 우두머리로 알고 반나절이나 시중들었지 않았나? 괘씸한 뚱보라구야,)라고 쫑알거리는것 같았다, 나는 그 눈길도 태연히 받아주었다. 식사가 끝나자 우리는 아래층의 무도홀로 내려갔다. 그런데 뚱보의 복은 물리칠래야 물리칠수 없는것인듯 싶었다. 무도홀에 줄느런히 서서 기다리고있던 춤배동아가씨들도 아까 식당복무원아씨가 범했던 용서못할 착오를 범하였다. 그중에서 제일 곱고 미끈한 아가씨가 나한테 사뿐사뿐 걸어와서 경례를 올리고 춤을 청하는데 그 이상 더 은근할수 없었다. 그뿐만아니라 다른 아가씨들도 춤한판이 끝나면 내 앞에 날아와서 춤을 청하는 바람에 진땀을 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말라꽹이 류국장은 이번에도 령락의 운명을 면치못했다. 아마 생각같아 서는  당장 무도를 때려치우고 돌아가고싶었을것이다. 그가 무시로 나에게 의미심장 한 눈길을 던져오자 마음이 불안해지기시작했다. 한달이 지나서 류국장은 나를 선전과 부과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는 나의 실팍한 어깨에 한손을 올려놓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ㅡ주비서, 거기 가서 당신의 그 타고난 특장을 잘 발휘하게나.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언녕 딱한 각색을 놀지 않을수 없었던 비서질을 그만두고 평생 리상이던 교직에 설 생각이 간절했다. 나의 후임으로 온 사람은 한국장보다 더 왜소하고 여윈 젊은이였는데 그야말로 전형적인 비서타잎이였다. 한국장이 나를 전근시켜버린 진정한 리유를 실물로 시사하고있다. 나는 밖에 나와 킥!하고 웃었다. 뚱보40여년에 처음으로 복받은셈이였다. 안해가 듣다못해 한마디 께끼였다. ㅡ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좀 살까기를 하라고, 아니보살하는것도 한두번이지 그냥 그렇게 하다간 언제 강건너는 흙보살이 되지 않나보라구요. 킬킬거리던 친구가 안해의 말을 받았다.  ㅡ내버려두십시요. 뚱뚱보는 뚱뚱한 재미가 따로 있고 가끔 복도 받는데 좀 좋아서 그러오? 아닌게 아니라 자넨 어찌 생각하면 행복한 사람이네. 난 이렇게 말라있다 보니 누가 나를 경리로 보는 사람이 없다네. 하하하… ㅡ하나 더 하시지요. ㅡ그럴가요? 이건 내가 나의 체험이 아니라 현텔레비방송국에서 기자로 있었던 내 학생이 겪은 일입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한바탕 비릿하게 웃었습니다. 물론 눈물을 머금은 유모아였지만…역시 서사방식으로 하지요. 전달에 편리하니까요. …자기가 제작한 신문프로가 금방 방송되는것을 보고서야 려수는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굴을 씻고 금방 밥상에 마주앉으려는데 전화벨이 요란스레 울렸다. 태장의 전화였다. ㅡ나, 박태장이요. 당신이 채방하고 제작한 현령도동지들에 대한 뉴스프로에 문제가 생겼소. 엄중한 문제가 말이요!》 ㅡ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도 금방 도정신해서 보고 나오는 길인데요. 사람의 머리수에 따라 일일이 세여본 다음에야 촬영에 들어갔는데요. 문제가 생길리 없습니다. 《참 답답한 사람이라구야, 내가 없는 일을 만들어서 말썽을 피우는줄 아는가? 서부서기의 이름이 렌즈에 담기지 않았단말이요. 그래 자네 회의실에서 서부서기의 명함이 쓰인 패쪽을 못보았단 말이요? 엉?》 ㅡ아!네ㅡ에, 패쪽은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차 착석하려니하고 기다릴가 하는데…회의는 시작되지 비서가 무얼하느냐고 재촉하지 해서…아무튼 회의가 끝날때까지 서서기는 종시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뭐 사람이 없는거야 내 잘못인가요? ㅡ무슨 큰 일 날소리요? 패쪽이 놓여있으면 회의에 참석한것으로 되여있단말이요. 그런 상식두 모르오? 그리구 왜 마음대로 이름을 삭제하구 써넣지 않았는가말이요? 엉? 이거 큰 일 났군. 됐소. 됐소. 무슨 변명이 그리 많소?》 수화기를 탕! 하고 놓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려수는 억울했다. 그는 밥먹을 생각도 잊고 책장에서 국에서 찍은 문건을 겨우 찾아내여 현령도동지들에 대한 보도를 쓸 때의 규정을 한글자 한글자 따져 가며 읽었다. 시령도동지들에 대한 신문보도는 한낱 중요한 문제로서 우선 배렬문제상에서 중요성이 표현된다고했다. 그저 획에 따라 배렬해서는 절대 안된다. 그리고 괄호안에 선후를 분별하지 않았다는 따위의 주해를 다는것도 엄금한다. 령도의 이름배렬은 엄격한 론리적관계가 있는바 부문별로 나눈다면 먼저 현위, 다음 인대, 그리고 현정부, 정협 등 순서로 배렬하고 직위에 따라 정,부직을 선명하게 갈라놓아야 하며 상무 위원의 경우 부서기 바로 뒤에 배렬하며 부직들앞에 놓아야 한다. 동급이라도 누구를 앞에 놓는가 하는것도 신중해야 한다. 만약 약간의 차실이 라도 생기면 엄중한 실책으로서 이름을 배렬하는데 들이는 시간을 한편의 프로를 제작하는 시간보다 적게 해서는 안된다… 려기자는 서너번 곱배기로 읽어보았으나 패쪽이 있으면 회의참가자명단에 써넣야 한다는 조목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한숨을 쉬고 다 식은 밥을 모래알 씹듯이 억지로 씹었다. 안해도 그때까지 선채로 손에 땀을 쥐고있다가 호ㅡ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였다. ㅡ앞으로 정신을 바싹 건사하세요. 늘 데면데면하다가 전번처럼 큰코 다치지 말구요. 안해의 지청구가 딱 질색이였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섬찍한 왕금년의 일을 꺼내자 그만 저절로 기가 푹 죽었다. 2년전이던가, 그때도 현급회의를 채방하고 텔레비에 내보냈는데 그저 그렇게거니 하고 스쳐버린 하품문제때문에 하마트면 요행 잡은 밥통까지 깨질번했다. 그날도 여느때처럼 정신을 바싹 차리고 전투에 뛰여들었는데 그만 엄중한 “정치착오”를 범했던것이다. 역시 차원이 높은 회의인지라《려홍호텔》작은회의실에서 거행되였다. 사회자가 다시 한번 텔레비방송국기자들과 신문기자들이 다 와서 만단의 준비가 되여있는 가를 확인한후에야 개회를 선포했다. 촬영기자들은 요리조리 돌아가며 특사식촬영을 했다. 려수가 렌즈를 한 주요한 현위령도에게 돌리는 순간, 공교롭게도 하품을 시작하였는데 상당히 수준급의 하품 이였다. 잔뜩 늘어지게 하는것은 둘째 치고라도 굉장히 자재적이였다. 몸동작의 폭도에 대한 공제가 해제되여 있는데다가 보통 평민의 하품처럼 온몸을 움직이거나 코와 입, 눈이 마구 얼크러지는 하품이 아니라 입이 멋지게 귀밑으로 돌아가면서 하악골과 상악골사이에서 으드득 소리가 나는데 아무튼 남다른 특색이 있었다. 보는 사람의 눈에도 그 한번 하품이 육신의 나사를 다 푸는듯 싶었다. 려수의 데퉁스러운 성미때문에 그 장면이 텔레비화면에 그대로 나갔다. 방송국의 총편집도 이것을 보아내지 못한것은 아니였다. 그는 워낙 현의《텔레비별》들을 다룰 때는 비상히 신중한 사람이였다. 그리고 매번 긴장해서 가슴을 떨군했다. 그런데 방정맞게도 요시각에 하품걸작이 나왔는가고 두덜거리며 삭제할가 하다가 그저 간단 히 삭제해버려서 해결할 일이 아님을 발견했다. 그는 바늘방석에 앉은듯 안절부절 하다가 펄쩍 뛰여 일어나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것이, 하품하는 그 장면만 잘라버리자니 지도자의 전반 소묘를 잘라 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번 신문소식은 하나마나한것이 되였기때문이다.  (에익, 얼빤한 놈이라구야,) 그의 입에서 촬영기자를 욕하는지 누구를 욕하는지 모를 욕설이 터져나갔다. 당장 려수를 대령시켰다. 려수는 머리가 잘 돌았다. ㅡ총편님, 이 하품은 초불을 켜들고 찍자해도 없는 특경입니다. 이 하품이야말로 현위령도들이 침식을 잃어가면서 사업하다보니 때와 장소를 가릴것없이 체현되는 피로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현의 지도자동지들이 얼마나 수고하십니까? 회의 장소에서 코를 드렁드렁 골며 자는분들도 흔히 보는데요. 려수의 말을 듣고보니 아닌게 아니라 그럴듯 했다. 그는 늙은둥글이처럼 씨익 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다분히 막무가내한 웃음이였다. 결국은 한갖 촬영 기자인 려수가 그에게 새로운 측면에로의 사로를 열어준셈이다. 역시 현대젊은이 들의 창신의식은 미칠바가 못된다고 탄복도 했다. 그는 소식이 방송된후 인차 신문에도 내면 별다른 맛이 날것같아서 소식한편을 써갈겼다. 제목은《지도자가 회의장소에서 한 하품이 주는 계시》라고 별스럽게 달았다. 그는 흐뭇해서 빙그레 웃었다. 그 지도자의 하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상상의 나래를 달아주고 깊은 사색을 던져줄것은 의심할바 없었다. 이런 좋은 재료를 그저 깔아 둔다는것은 상급에 대해 매우 미안한 일이고 엄중한 정치실책이라고 생각되였던것이다. 아무튼 지금 같이 오묘한 세월에는 머리가 팽팽 유리골이 되여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복잡하게 여겼던 텔레비소식이 나간후 생각밖으로 별다른 반향이 없었다. 아마 날마다 나오는 얼굴이고 날마다 듣던 소리여서 거개 심드렁해서 보다 나니 누구나 눈길을 박아보지 않은게 분명했다. 이럴 때 문자의 위력을 발휘해야 했다. 총편은 어쩔가하고 망서리고있던 신문원고를 신문사에 보냈다. 신문소식이 나가자 자그마한 현성이 보리죽끓듯 했다. 그 지도자의 하품의 안팎을 두고 벼라별 기발한 상상들이 현실화되였다. 옛날 생산대회의같은데서 하품하기는 방구를 뀌는것처럼 례상사였고 그 때는 록상기라는것은 상상도 못했으니 그저 그렇지만 현에서 한다하는 령도어른이 텔레비화면에 하품하는 장면으로 양상된것은 거의 하늘이 기울어질 큰 일인것이였다. 결국 재화의 근원은 려수에게 있었다. 예측이 억측을 낳고 억측이 현실을 낳았다. 로신선생이 말했듯이 원래 중국 사람들의 상상력은 대단한것이다. (긍정적으로 온밤 술에 퍼져있다보니 너무 피로했던거야, 지금 벼슬깨나 하는 사람들치고 주지육림에 몸을 잠그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흥, 매일 술과 씨름하다보면 박달이라도 배겨내지 못할걸, 모르긴 하겠지만 어제밤, 또 작은 꿀벌에게 쏘였는지 누가 안담? 날을 샌게 분명하다니… 듣자니 향장으로 있을때도 녀색에 빠져서 맥살을 못추고 다녔다더군그래. 뜬 소문에는 그의 작은 꿀벌이 어느 국에 부국장으로 된다더군, 에끼, 함부로 넘겨집지 말라구, 간대루야 그렇게 망녕을 부리겠는가? 글쎄,  그게 아니면 어느 돈많은 부자와 온밤 장성을 쌓느라고 수고했겠지, 하루밤에 몇백원 몇천원을 따냈는지 알턱있나? 혹시 더 높이 청운에 오르자고 먼곳에 어른께 무엇을 가져다주고 밤도와 돌아 오느라고 하야안에서 잠을 설칠수도 있지, 그러지 않구야 텔레비에 나갈줄 알면서 하품을 하였겠나?처음엔 제각기 좋도록 상상해낸것들이 이 입, 저 입에서 옮겨다니며 현실화되고 그의 친신들의 귀에 들어가 나중에 현위 그 지도자도 알게 되였다. 천둥같이 노했다. 그는 분명 어느 놈이 뒤에서 자기를 거꾸러뜨리려고 작간한것이고 텔레비의 그 빈충맞은자들이 그놈에게 매수된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그는 그저 가만있지 않으려고 단단히 벼르는데 설상가상으로 신문에 론평까지 나왔다. 총편집이란자가 머리를 짜내여 쓴 글이 백성들속에서 꼬이고 얽히고 하다가 나중엔 그럴듯한 추문으로 활성화 되여졌다는것을 듣고 모골이 다 속연해졌다. 그는 귀머거리로 되여지는게 현명하다고 고쳐생각하였다. 그래서 그저 쉬쉬하다가 말았다. …이튿날, 려수는 별생각없이 국에 나갔다. 그런데 마주치는 동사자들마다 의상한 눈길로 힐낏거리며 총총히 지나치는것이였다. 마치 문화대혁명때 계급의적들을 만났을 때 던지던 그런 눈길이였다. 려수는 행사란에 전체 직공대회가 있다는 통고를 보며 기분이 찜찜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아니다 다를가 까마귀 날자 배떨어진다더니 회의는 려수의 엄중한 착오문제를 공포하였다. 국당위서기가 회의에서 열변을 토했다. ㅡ응, 이게 무슨 작법이란 말입니까? 려기자의 신문보도는 지금 서부서기의 신상에 매우 불량한 영향을 끼치고있단말입니다. 지금 현위에서 한창 령도기구를 조정하는 판에 사람들이 보도를 보고 모두 서부서기가 엄중한 착오를 지고 나떨어 졌는가고 여론이 분분하단 말입니다. 서부서기는 지금 대단히 노여워하고 있습니다. 에헴, 이번에 원칙대로 하면 려기자사건을 엄숙히 처리해야 하겠지만 패쪽이 놓여있으면 보도에 이름을 써넣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다시 검토되여야 하고 전번 에 오동무가 이름을 배렬하는데서 범한 착오와 성질이 다르므로 신중하게 처리하려 합니다. 사업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우리 지도부에서 어제 긴급회의를 열고 토론한 결과 다음같이 처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선 려기자는 참답고 심각하게 서면검사재료를 써야 하는데 원고지 열장이내여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달 장금은 삭감하기로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말할것은 현급령도들에 대한 보도규정에 만약 주석대에 패쪽이 놓여 있으면 본인이 앉아있는것으로 인정하고 보도에 이름을 반드시 써넣어야 한다는 이 중대한 새 조목을 가첨한다는것을 이 대회에서 선포합니다. 앞으로는 다시 이런 엄중한 정책성, 정치적착오가 나타나서는 절대 아니되겠습니다. 에헴, 엄, 》 회의는 끝났으나 려수는 자리에서 일어설 맥조차 없어 오래동안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타격이 침중하였다. 어깨가 축처졌으나 밥통은 깨지지 않고 남아있으니 다행이랄가, 려수는 억울하기도 했으나 처마가 낮으면 머리를 숙여야지 하면서 꿀먹은 벙어리처럼 수걱수걱 제앞에 일만 했다. 불에 덴놈 부지깽이만 보아도 놀란다고 현의 회의소식을 보도하라는 임무를 맡을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그렇게 조심조심하느라 전전긍긍하는 려수에게서 또 사달이 생기고야 말았다. 회의보도를 한 이튿날 , 출근하자마다 복도에서 왁자지 껄하는 소리가 그의 가슴을 쳤다. 서부서기의 부인이 한창 태장을 닦아세우고있었다. 려수는 자기가 한 보도에 또 실책이 있다는 소리에 가슴에서 널장이 떨어지면서 대번에 식은땀이 쫙 흘렀다. ㅡ그래, 려기자인지 여기자인지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떻게 돼먹은겁니까? 우리 서부서기에 대해서는 어째 그렇게 찡톨을 확대하지 않고 작게 나오게 했는가 말입 니다. 그리구 어째 한쪽에 치우치게 했는가 말임다. 그러구서야 서부서기의 위치가 돌출해질수 있단말임까? 우리 서부서기는 아직 물러나지 않았단 말임다. 왜 보도에 서는 한쪽에 물러난 인상을 주는가 말임다. 어째 동무네 텔레비를 그냥 꾸릴작정 입니까? 안꾸릴작정임까 ?… 기관총소사를 하다가도 가담가담 수류탄이 터지듯이 8음도로 높아지는 서부 서기부인의 질책에 태장은 그저《예예!》하며 굽석거리기만 하였다. 이튿날 또 직원대회가 열렸다. 려수라고 이름을 딱 찍어서 비평했다. 회의끝에 려기자는 더는 신문보도부에서 사업할 자격이 없기에 후근부분에 내려가 적당한 일을 할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현위령도동지들에 대한 보도를 할 때 특별히 중점을 돌출히 할 조목을 첨부한다고 선포했다. ㅡ내얘기는 여기서 마치지요. 모두 시시껄렁한 얘기니까요. ㅡ아니, 참 재미있는 일화입니다. 지금 “얼굴공정”이 극성인데 역시 정신적인 부패이지요. 그러나 그걸 말려낼수 있겠습니다? 인제 됐습니다. 주선생님은 먼저 잠간 나가계시십시오. 부인님에게 따로 부탁할 말이 있습니다. ㅡ예, 그러시지요. 주선생은 다시 심각한 얼굴로 문을 밀고 나가다가 돌아서서 한마디 했다. ㅡ허선생님, 그동안 나를 치료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선생도 들어서 알다싶이 나는 아마도 웃음을 되찾지 못할것 같습니다. 나는 이 며칠 선생을 심리학박사로 알고 담화에 응한것이 아니라 지성인이라 싶어서 속에 담고있던 얘기를 친구에게 하듯이 한것입니다. 그리알고 계십시오. 아무튼 고맙구요. 심리학박사는 주선생이 닫고나간 문을 이윽토록 바라보며 무슨 사색에 잠겨있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 돌아앉아 옥녀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ㅡ이자 함께 들으셨지요. 주선생은 그렇게 여유작작하게 인생일사를 이야기했습 니다. 참 좋습니다. 이름때문에 오해를 많이 샀다더니 참 의미가 있네요. 남편되는 분에게 자꾸 그런 일화를 꺼내도록 해보십시오. 그러면 차차 이 삭막한 세상에서 웃음의 오아시스를 찾을수 있을것입니다. 그리고 내 친구가 장춘의 어느 대학에서 교장으로 있는데 한번 알선해 보렵니다. 이번에 불행한 환자를 만난것이 아니라 좋은 친구를 만났습니다. 많은것을 배웠구요. 집에 돌아온 주선생의 안해는 친척들과 친우들을 가득 모아놓고 남편더러 우스웠던 이야기를 하라고 졸랐다. 그런데 주선생에게 울다죽은 귀신이나 붙었는지 종시 웃지 않았다. 안해가 너무 닥달해서 그랬던지 주선생은 잠간 시무룩하게 웃는듯 하는듯 싶다가 오히려 대성통곡하는것이였다. 비록 눈물은 아니흘렸지만 곁사람이 가슴이 찡하도록 가슴을 치며 울었다. 오래오래 슬프게 울었다… 주선생의 안해도  어쩌면 영원히 웃음을 잃을수도 있는 남편을 붙안고 소리내여 울었다…                                                   2000년 3월 6 일                                                      연변문학        
88    (교육에세이) 교원, 선생, 스승 댓글:  조회:8911  추천:8  2012-04-18
                              교원, 선생, 스승, 도사                                          최균선       교원(교사)는 직업적으로 학생을 지도하는 직책의 사람이다. 배움의 과정에서 학생을 이끌어주거나 도움을 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교원을 선생 또는 스승이라고도 하며 대학에서는 교수(敎授)라 부른다.     교원이란 교과서내용을 해석하며 일정한 수준의 지식을 저장하도록 인도하는 직업인이다.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직업외에 다른 의미를 찾을수 없을 때 교원일뿐이며 장악한 지식조차 아이들을 겨우 가르칠 정도라면 불적격의 직업인이다. 교원사업을 생계형 직종으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존재하기에 교원군체가 억울하게 매도되고 폄훼당한다.     교원이 학생들에게서 존경과 신뢰를 받음으로써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정신적힘을 교육적권위라고 부른다. 이런 권위가 구현될 때 교원은 학생의 자주적, 능동적인 자기활동을 조직하고 발전시키는 지도력을 발휘할수 있다. 교원의 자격은 자질과는 구별된다. 자격이란 법적인“교원자격증” 을 말하며 자질이란 교원이 될수 있는 인간적바탕을 뜻한다.     총체적으로 교원은 원만한 인격을 위해 근신, 노력하는 자세, 학생을 사랑하고 그들의 미래의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 동고동락할수 있는 선도자적자세가 요구된다. 교원은 까막눈 어린이들을 자연인으로부터 사회인으로 바르게 성장하도록 이끌어주고 도와주는것이 천직이다. 교원은 학생을 로동보수의 수단으로가 아니라 목적으로 삼고 개체의 인격가치를 존중하여 편애없이 대하고 솔선수범하여야 한다.      교육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진정한 교원은 학생과의 륜리를 지켜야 하며 동업자, 학부모와 일반사회에 대한 륜리도 지켜야 한다. 하여 옛날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된다고 했으며 임금, 부모와 동격의 존재로 대우하였다. 학교에서의 선생님이라면 아이들에게 마음의 등불이여야 함은 물론 지식전수가 지혜를 키우는 과정이 되고 인성을 가꾸는 목적에 도달하려고 심혈을 쏟아야 한다.     지식은 리치를 배워서 아는것이고 지혜는 살면서 쌓는것이다. 지식은 두뇌에 저장하는것이고 지혜는 경험으로 터득하는것이다. 지식은 리성적인 론리이고 지혜는 감성적, 실용적인 인생기술이다. 그것을 전수하는것이 바로 선생님의 몫이다.     교직을 직종으로 생각하면 기능직업자에 그치나 학생의 인생준비와 장차의 인격양상까지 책임지려는 교원은 선생님, 스승, 원예사로, 인류령혼의 공정사로 거듭난다. 인간교육에는 그저 교원이 아니라 스승이 필요하다. 스승의 참된 이미지는 무었일까? 거두절미하고 대부분 학생들의 마음이 절로 끌리게 하는 선생님이다.     스승은 대개 교원이나 선생님을 존경하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깊은 인격적감화를 통해 삶의 큰 전환을 마련해주는 위대한 선생님이다. 스승은 인격과 학식의 탁월함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며 스승으로서의 본보기로 학생들을 이끌어 인생의 진로를 개척하게 한다. 이처럼 최고와 최선의 교육을 하면서 모든 점에서 완벽한 인격과 학식을 갖춘 사람이라야 명실공히 스승이다.     스승은 우선 인간을 만드는 학자가 되여 한 사람이 사람이 되여가는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수 있어야 한다. 지식보다는 지혜를, 지혜보다는 인성을 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스승의 참된형상은 박학을 전제로  따스함, 인내, 관용, 자비의 미덕을 갖추고 눈길만으로도 자석처럼 학생들을 흡인하는 사람이여야 하며 상중하를 물론하고 평등의식이 갖춰줘야 한다. 그런 덕을 갖춘 사람만이 진정한 스승이다.     현대교육은 의혹을 해석하는것이 아니라 할줄 모르는것을 할줄 알게 하는것이다. 가르친다는 그 위치에 섰기에 도고하기만 하면 스승의 본분을 모르는것이다. 가르치는것은 동시에 많은 얻음을 의미한다. 가르치는자나 배우는자나 인격은 동등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청출어람, 람어람을 접수못하는 사람은 참된 스승이라 할수 없다. 제자가 계속 제자로만 남는다면 스승에 대한 고약한 보답이라는 니체의 말은 의미롭다.     사도존엄에서 종래로 자애로움이 배제된적이 없었다. 교원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처럼 살갑지 않아도 사심이 없는 사랑이다. 가장 훌륭한 선생이란 아이들과 함께 웃는 선생이다. 가장 좋지않은 선생이란 아이들을 우습게 보는 선생이다. 그만큼 학생을 믿어주는 스승이 훌륭한 스승이다. 자기 학생에게 믿음을 실을줄 모르는 교원은 되돌아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것과 다를배없다. 학생에 대한 믿음은 사랑에서 온다. 학생을 사랑하고싶지 않은 사람은 교단에 나설 자격이 없다.     무릇 모든 사람이 자기 인격대로 존재하듯이 교원은 스승의 이미지로 교단에 나설 리유를 창조한다. 꿀벌은 꿀을 채집하기 위해 꽃을 찾는다. 교원이 보수만 따지며 교직에 선다면 파리가 꽃을 찾은것과 다름이 없다. 빛나는것은 어둠속에서 존재한다. 직업교원이 있기에 우수한 선생님들과 현저하게 구별되는것이다.     상술한바와 같이 교원, 선생님, 스승님은 거의 같은 말로 사용되지만 지식경제 시대, 가치관념이 질변한 현상황에서는 다른 특성을 지니게 되였다. 생업을 위해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이들은 가르침이라는 무형의 상품교환을 하고있는셈이다. 교원이라면 직업도덕견지에서 자기 직업에 대한 열애로 로심초사하는지 아니면 불가피한 의무감에서 교직에 몸담그고 있는지 스스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완전완미한 스승은 존재할수도 없으니 완벽한 인격을 갖춘 스승이 되기에 노력해야 한다.  학생들보다 사회평판이나 권좌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을 수식하며 념불보다 젯밥에 관심을 두는 위학자들이 현시대에 없는곳이 없다. 그러나 이를 상품경제의식의 탓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교원은 우선 인성을 가르쳐야 하고 학생은 우선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배워야 한다. 좋은나무에 좋은열매가 열리며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수 있겠느냐?라는 말이 진부할지 모르되 아직도 계률이 된다고 믿는다. 령혼의 타락보다 슬픈일은 없지만 교육자들이 재부나 명예에만 매달리면 그보다 더 자괴하게 되는 일이 없다.     교원, 선생님, 스승의 층차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은 어느 층차에 서있는지 자리매김을 해보시라. 뭇눈치아래서 살아야만하는 일반인으로서 객관의 평가에 신경을 쓰게 되는 그런 보편적인 사회문제만이 아니다. 자기 하는 일에 혼신을 몰부을 때, 그리고 학생들의 애대를 받을때 이미 값치를수 없는 보수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너무 랑만적일가? 아버지로부터는 생명을 받았으나 스승으로부터는 생명을 보람있게 가꾸는것을 배웠노라고 제자들이 평생 외울때 그 교원은 거듭나는것이다.                                                     2011년 10월 9일 (교사절묵상)      
87    못생긴 나무에 걸어둔 잡념 댓글:  조회:7721  추천:0  2012-04-13
                                             못생긴 나무에 걸어둔 잡념                                                             최 균 선        산에 가면 늘 미끈한 나무보다 아픔을 먹고 어렵게 자란 못생긴 나무에 더 정이 끌린다. 보잘것없는 못생긴 나무가 저 큰산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릿하다. 사람들이 기암괴석에 찬탄할 때 험한 바위짬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나무가 내 심혼을 사로잡는다. 바람이 함부로 내던져 저 바위틈에 언제 움트고 뿌리를 박게 되였는가?    무성한 수림하고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바위우에 위태롭게 자란 못생긴 나무한그루! 사나운 비바람속에 자라며 눈보라를 이겨온 나무이다. 바위에 짓눌리는 그 억압이 과연 무엇인지 알것같다. 홀로 산을 지키는 나무는 바위하고만 대화를 하면서 살아왔으리.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락락장송이 아님을 알면서도 홀로서기를 하여왔으리. 자신이 키워가고 있는 꿈을 먹으면서 살아왔으리.    다른 나무들이 겪지 못한 역경을 이겨왔기에 다른 나무들이 볼수  없었던 새의 잔등을 보면서 컸을게다. 못생긴 나무는 허위와 거짓으로 가득찬 저 세상보다도 청정한 무주공산의 아침이슬을 머금고 사는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했을가? 부러운것없이, 그러는 동안 이 산에서 하나를 배웠을게다. 하나의 목숨으로, 일편단심 마음속에 묻어둔 청산도 드팀없이 하나였을게다.    아픔을 이기고 고통도 삼켜온 나무이지만 자신을 이기지 못한것은 아닐가? 바위우에서 악착스레 자란 나무를 차거운 나무라고들 하더라만 차거운 나무의 못생긴 그 양자때문에 더 많은 눈길을 끄는지도 모른다. 차거운 나무는 베여지고 끌려내리는 수많은 형제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을것이다. 정에 못이겨, 차가운 나무에 참된 시가 있고 선경의 그림이 있다. 차가운 나무, 못생긴 나무의 뜨거운 사랑이여!    새벽녘 찬바람에 꿈을 깨면 참이슬 한모금 머금고 밝아오는 아침에 나름대로 기지개를 켰을게다...못생긴 그만큼 홀로서기의 본보기로 되여, 못생긴 그대로 홀로 푸른 산을 지키니 의롭지 않느냐! 나무에 기대여앉아 나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싶다. 산사나이는 사랑을 하지 말라고 하던 선인들의 얘기도 깡그리 잊은채 이 산에 뿌리내리게 된 이야기랑, 목숨과도 바꿀수 있는 그 존재의 리유와 의미랑…….    아침, 몽몽한 안개속에서 깨여나는 모습도 보고싶고 또 해살과 함께 밝아져오는 잎새의 흐느낌도 듣고싶다. 속깊이에서 뭔가 꿈틀거리고 있는것도 느끼고싶다. 가진것 하나 없고 보잘것없는 못난 나무, 다른 나무들처럼 어엿한 자태도 없고 무성한 잎사귀도 없음에 장래의 동량감될 자신이 아님을 슬퍼하지는 않았을가?    못생긴 나무가 산을 통채로 바친다는 진솔한 내용의 시집일지 어이알랴, 산만을 알고 산만을 지켜왔던 못생긴 나무, 산을 선택한 몸이고 산에 선택된 몸이기에 아마 가진것은 산의 넓은 품일게다. 못생긴 나무 산의 공기처럼 청신하고 그윽한 잎내음이 페부에 스며들어 좋다. 새소리도 더 귀맛좋고 산속의 개울물도 전보다 더 달콤하다. 그날 이후 나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봉우리 하나 더 넘어 못생긴 나무가 선 그 바위를 누가 부르는듯, 누가 기다리는듯 허위단심 찾아가기 시작했다.    산을 지키는 나무들은 결코 잘난 나무들이 아니다. 잘난 나무는 일찍 베여지지만 못난 나무는 못난탓에 끝까지 남아 푸른 산을 지킨다. 가물과 비바람을 먹으면서 허리굽어진 못난 나무가 푸른 산을 지킨다는것은 얼마나 눈물겨운가. 나도 못난 나무가 되고싶다. 고향은 자고로 잘난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지 않았고 고향을 나무린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지 않는다. 고향의 풀한포기. 나무 한그루에 깊은 정을 가진 못나고《미련》한 자들에 의해 고향이 지켜졌다. 너무 못생긴탓에 저 큰산을 저렇게 드팀없이 지켜선 나무처럼,    산에 잡목들을 하찮게 여기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실재적으로 산을 지키고 산 사태를 막고 산홍수를 말리는 등 록색땜의 역할은 잡목들이 담당하고있다. 못난 나무가 없는 산은 골짜기가 없는 산을 찾는것과 같을것이다.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속담에는 오묘한 인생철리가, 처세의 묘리가 담겨져있다.    이 세상에는 약삭빠르게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 사람들은 정직하게 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바보로 여긴다. 자기들처럼 살지 못한다고 비웃는다. 편하게 사는 방법이 있는데 모른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들은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긴다. 세상을 잘 사는 방법은 사람나름에 달렸다고, 멋지게 사는것은 아무나 하는일 아니라고 은근히 자부심을 내세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일수록 일신에 해되거나 리득이 없을 때에는 나서지 않을뿐만 아니라 뒤걸음질친다. 그러나 리득을 볼 일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총명한체 하지만 기실 세상을 웃기는 존재들이다. 자기 목숨이나 부지하고 있을것이지, 왜 참견하는데? 누가 알아주기나 하는가? 죽으면 끝장인데.... 농촌에 남아 부모를 모시는 자녀들을 그 집에서 못난 자식이라 한다. 도시에서 공장을 지키고 있는 이들도 어쩌면 못난 사람들에 속한다고 할것이다.    허지만 나라나 민족도 사실 못난 사람들이 지켜왔다. 잘난 사람들은 정작 민족과 나라가 어려울 때 제몸 살려고 요리조리 피해버리지만 못난이들은 우직하게 목숨걸고 구국항쟁에 생명을 불태웠다. 그런 열혈지사들이 없었던들 오늘의 우리가 있을수 있으랴!력래로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수많은 사람들은《못생긴》민초들이였다.    세상에는 잘난 사람이 더 많은것일까? 아니면 바보가 더 많은것일까? 암투와 리기로 시끌벅적한 인간촌에는 잘난 사람이 더 많은지 모른다. 가령 가장한 바보들이 있다면 그냥 바보들로 보아서는 아니될 일이다. 박학다재하고 명지하던 정판교가 난득호도(难得糊涂)라는 절창을 내놓았을 때는 이만저만한 숙고가 없지 않았을것이다. 스스로 어리석은체 얼떨떨한체 하는 사람은 바보일지라도 거룩한《바보》들이다.    끼리 대화하면 편안하다. 그러나 한 사람과 간능한 사람과 일을 도모하면 파탄날수밖에 없다. 인간관계는 오묘하기 그지없다. 쾌적하게 살고싶으면 방법이 있다. 가 되면 된다. 적당히 속아주고, 적당히 넘어가주면 된다. 바보같은 수하가 되면 끝까지 자리를 지킬수 있다. 그러나 너무 똑똑하면 도무지 청운의 사다리를 끝까지 오를수가 없다.      자기 생각과는 다르게 지고가는 또 지고가야만 하는 그런 생활의 십자가가 우리 매개인에게 지워진 인간세상이다.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십자가를 질수 있겠는가. 십자가를 지고 가지 못하는 사람을 보라. 한결같이 똑똑한 사람이다. 자기 할일도 많고 이룰것도 많은데 어떻게 홍익인간의 십자가를 질수 있겠는가.    험난한 인간세상을 헤치고 나가는 비결은 큰 능력을 나타내는데 있지 않다. 너무 드러나서 먼저 썪는 서까래가 되지 않으려면 매사에 근신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따르면 흥하고 거역하면 패망하게 하는 칼자루를 쥐고 있고 그것을 능란하게 휘두를줄 안다. 요요한 권력자앞에서는 당연히 자로, 자로 되여야 한다. 그것이 살아남는 길이요 거듭나는 무대이다.      나는 오늘도 못생긴 나무처럼 살아간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살아간다. 제힘으로 변화시킬수 없는것은 받아들이며 질그릇에 금은보배를 담듯이 나의 못생긴 운명의 그릇에 나름껏 캐여내는 정신적보물을 담으면서…                                                                                               2012년 2월  (연변일보)
86    담배,신분 및 기타 댓글:  조회:9450  추천:0  2012-03-28
                                                               담배, 신분 및 기타                                                                           최 균 선          특색있는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이 시대에 고급담배로 신분이나 지위를 과시하는 자아가치실현이 만연되고있다. 기실 담배피우는것으로 신분의 고귀함과 지위의 재세를 부린것은 일찍 청조때부터였다고 한다. 그 우량한 전통을 계승하여서인지 마드로스를 들고 있으면 쓰딸린의 기질을 볼수 있고 여송연을 입에 물고있으면 귀족기질이 보이고 고급담배를 피우면 신분과 지위를 보아낼수 있다는 말이 있다.      “만리길 가느니 ‘만보로‘를 피우라던가? 확실히 고급담배 아니면 안피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최고급담배를 피우는양 너무 수선떨 필요는 없다. 기껏해 한갑에 몇십원짜리를 피우는것은 현재 중국흡연계에서는 새끼무당에 불과하니 말이다. 공보된 담배가격표를 보면 정말 혀가 내둘러질것이다.        초고급으로《(천리달목(千里达木)》39000원/ 보루《고희패세(高希霸世)》 22600원/보루, 제2등급으로《로미오 1호(罗密欧1号)》9968원/보루 등이 있고 소위 특급으로 최고870짜리, 최저 360원짜리도 있다. 그 아래 차원으로 266원짜리도 있고 고급담배로 명명되는것으로 192원, 186원,100원짜리가 있으며 그 버금으로 98원,96원, 50원/보루가 있다.        일컬어 대중담배로는《개은미등(盖银美登)》46원/보루,《개장정(盖长征)》40원/보루, 그 아래 차원으로《중남해》38원이다. 최하층 대중담배로 높은값이 18원/ 보루(연소웅묘(软小熊猫) , 제일 최하로《팔달령(八达岭 )비마(飞马) 》14元/ 보루이다. 이런 담배의 가격표에서 중국의 빈부격차와 부패일지를 읽는듯 할것이다.        최고 39000원짜리와 최하14원짜리를 비교해보라, 내가 수자에 둔감해서 계산기로 나누기를 해보니 2785.7142가 나왔다. 이게 공배수인지 모르겠다. 39000원 이면 담배한가치 값이 얼마일가? 아름차서 나누기를 략한다. 그것을 몇분안에 태워버린다는것은 참으로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장거이다. 담배가격차가 그대로 신분의 차이가 될것인가? 최하층인간으로 최고급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해서 인격력량마저 그렇게 몇천배 차이가 날수 있을것인가? 만약 날마다 몇만원, 몇천원짜리 담배를 피운다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수요의 소비인가, 자기과시의 소비인가?        어떤 고급담배를 피우든 어떤 방식으로 피우든 바탕맛은 담배맛이다. 담배맛은 그냥 담배맛이지 향료냄새일수는 없다. 수십백가지 배추김치맛이 있다해도 배추를 등질수 없는 도리와 같다. 담배의 가격차이에서 먼저 치부한 자와 권력자들의 사치한 추구는 뭇사람들의 위에 올라앉으려는 자세로서 실질적으로 “재부에서 향수하는 변태감”을 조장하고 있을뿐이다.        항간에는 억수로 취했는데도 술을 마시면 사람이 술을 마시는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이 있다. 같은 도리로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것이 아니라 담배가 사람을 피우는것이 아닐가? 결국 고귀하신 신분이나 직위가 담배연기로 사라진다는 추리가 나올법도 하다. 담배의 사용가치는 피우기 위한것이고 담배연기맛을 보는것이다. 물론 이것은 보통담배를 피우는 차원의 얘기이고 몇만원, 몇천원씩 태워버리는 장거는 이런 사용가치로 계산이 되지 않을것은 물론이다.        중국사회과학원 공업경제연구소의 한차례 조사통계에 의하면 초고급 담배를 소비하는 군체의 소비동기는 담배를 통하여 신분과 지위의 특수성을 체현하는것이나 이런 사람들은 제돈으로 천문수자의 높은 가격의 담배를 사서 피우는것이 아니라 뢰물로 들어온것을 피우는것이 절대다수라고 피로하였다.        요란하게 선전하는대로 담배가 그렇게 위해하다는데 최고급담배라해서 보건품이  될수는 없는 노릇이다. 흡연은 일종 비문명행위라고 규정짓고있다. 하다면 초고급담 배를 피우면 초고급문명행위가 되는건가? 그럼에도 피우는 담배가 신분과 지위의 상징으로 되고있다는것은 아이로니이다. 무슨 담배를 피우든 우선은 사람이 아니던가?        전하는데 의하며 발달국가의 상층계층에서는 흡연률의 70%로부터 15%로 하강되였다 하고 중국의 최고령도자들은 모두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이로써 어떤 담배를 피우는가로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려던 시대는 옛말이 되여 다시는 돌아 오지 않는다는 설명이 되겠다. 그래도 그냥 담배로 자기신분을 확증시키고 지위를 나타내려 한다면 우스운 사유방식이 아닐수 없다.        중국의 많은 상품의 물가가 대관절 왜 이렇게 되는지 궁금하다. 무릇 어떠한 상품이든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두개 인소로 구성되여있다. 사용가치란 사람들의 모종 수요를 만족시키는 물품의 효용성이다. 사용가치는 상품의 지연속성에 의해 결정된다. 최고의 담배와 최저의 담배의 질과 량이 그렇게도 몇천배 차이가 난단말인가?        상품의 사용가치를 벗겨버리면 남는것은 오직 하나의 속성ㅡ로동의 산품이라는것이다. 담배한가치를 만드는데 근 2천원의 로력이 든단말인가? 가치실체란 상품속에 응결된 인류의 추상로동이다. 그만큼 가치량은 상품속에 응결된 사회필요로동이 된다. 상품의 가치량은 가치실체를 형성한 로동량으로 계산되고 로동자체의 량은 로동지속시간으로 계산된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체이며 상품생산과정은 로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다.        그러면 가격의 기준은 무엇인가? 가치규률은 객관적인것으로서 사람의 의지에 의해 전이되지 않는다는 등 서책적인 정의와 해석이 잡다하지만 복잡하게 말할것없이 상품의 가격과 가치의 일치는 우연적으로서 불일치가 비일비재이다. 물가를 결정하는데 이런저런 의거가 있지만 주요하게는 시장의 공급상황에 따라 가격이 변화무상하다.《락양귀지(洛阳纸贵)》라는 성구가 있듯이 물건이 희소하면 귀하게 된다는것은 상식이다. 말하자면 공급과 수요사이에서 올랐다, 내렸다 하는것이다. 그러나 천문수자의 엄청난 담배값은 공급과 수요문제도 아니고 심리수요에서 생긴 롱간이 아닐수 없다.        각설하고, 담배의 유해성은 이미 범세계적으로 공인하고있다. 그런데 아래의 사실을 누가 명쾌하게 해석할수 있을가? 전하는바에 연초계통에서 국민경제에 매일1 0여억 인민페를 공헌한다고 한다. 1982년 부터 2004년 중국연초 산업에서 바친 공상세 루계가 무려 15778억원으로서 국가재정 수입을 증가하였고 시장소비를 만족시키는데 국민경제의 중요한 기둥의 하나로 되여 적극 공헌하고 있다고 한다.         동시에 로동밀집형기업인 연초기업에서 대량적인 일자리를 제공하고 취업률을 높이여 사회의 안정으로 도모하는 중요한 력량이라고 한다. 국내 연초산업계통에 종사하는 사람이 근 1억명이나 되며 각지에서 실업인원과 여러 학교졸업생들의 생계 를 해결해 준단다. 거기에 연초산업과 련계된 몇백만의 담배농들의 생계까지 포함하면 마멸시킬수 없는 공헌을 하고있다는것은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2005년 수치로 계산된바에 의하면 연초공상세수입의 합계는 2000여억원이 된다고 하였다. 실제상 연초산업이 나라에 공헌하는 세수액은 4000억원에 달하였고 “연초와 에너지산업은 줄곧 우리 나라 세수액의 두개 큰 명맥과 기둥”으로 되였다고 공보하였다. 연초산업에서 보유한 자산은 이미 5천억원이 되고 6000만이 연초업에 종사하고있으며 매년 국가공헌의 십분의 일의 재정수입을 올린단다.        이 모든 소위 공헌은 누가 창출한것인가? 물을것도 없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의 덕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금연을 제창한다면 국가재정수입의 주요한 통로를 막는것이 아니며 나아가서 국가재정 수입의 기둥을 흔들고 대동맥을 끊자는것과 같지 않은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전국 모든 흡연자들이 한결같이 금연한다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것이다. 담배는 위해성이 있다고 겉곽에 명백히 밝히면서도 부단히 담배 생산을 발전시키고 담배값을 높이는것은 병주고 약주기가 아닌가? 자가당착 인가? 모순률인가? 배중률인가? 자기 혀를 씹기는 아닌가?        이런 얘기가 있다. 만드는 사람은 제쓰자고 만드는것이 아니고 사는 사람도 제쓰자고 사는것이 아니고 쓰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쓰는것이 있는데 그게 무어냐? 관이다. 한보루에 39000원씩 하는 담배를 만드는 로동자는 제피울 생각 은 꿈에도 못할것이고 그것을 사가는 사람은 제피우자고 사기보다 거개 뢰물로 바치기 위한것이요, 뢰물을 받은자도 금연한 상태라면 그것을 다시 현금으로 바꿔들이고 처리한 담배는 다른 손으로 또 뢰물로 돌려지고…        고급담배로 자기를 나타내려 꾸밀필요가 없다. 남경시 강녕구방산관국원국장 주구경은 습관적으로 손가까이에 놓고있던 한갑의 담배가 조사대상의 빌미가 되였고 마침내 고급담배를 피우는 등 사치한 소비행위로 해임을 당하고 전도를 망치고말았다. 재주를 쓰다가 메주를 쓴 격이랄가. 몇만원, 몇천원짜리 담배를 제돈으로 사피운다는것은 아이보다 배꼽이 큰데 이런 밑지는 장사를 할 자가 세상에 있기나 할가?        아무튼 세상사에 자가당착인 일이 한두가지 아님은 사실이라 하겠다.                                                                                           2012년 3월 25일      
85    진언련시조(3) 역설 댓글:  조회:2501  추천:1  2012-03-16
 진언련시조  (3 ) 역설 마천루 하늘낮다 우후죽순 치솟는데 도덕은 나날이 일락천장 하노매라 고도의 물질문명의 또 다른 비애냐   날따라 고속도로 사통팔달 이루어도 친지들의 만남은 더더구나 묘연해라 인정도 사막화되니 오고갈일 있으랴   창문은 총총해도 마음의문 닫기고 출입문 마주해도 생면부지 이웃이여 이웃이 사촌이라는 그옛말이 그립소   네거리는 넓어져도 자가용만 제노란다 인행도라 냈건마는 정차장이 되여지고 보행자 천덕꾸러기 되여버린 시대런가   부자는 많다건만 자선가는 별로 없고 부익부 빈익빈은 갈수록이 우심하다 욕망은 채워갈수록 기갈증을 느끼느뇨   놀이터 많아지고 유흥업이 번창하야 흥분점 많건마는 지적감동 적어지고 무흥취 무감동시대 무료함이 하품해   큰집을 선호해도 식구는 줄어들고 방안은 널찍해도 흉금은 좁아지네 할일은 별로 없는데 긴장만 뒤쫓네   성적표 고공타도 실무능력 바닥이요 학벌은 높더라만 허명무실 놀라워라 교육의 일패도지는 어느 뉘의 걸작인가   학벌은 요란해도 유명무실 참괴해라 직함은 눈부셔도 물이 없는 저수지여 창궐한 학술부패는 어느놈이 원흉인가   영양소 오밀조밀 따져가며 먹더라만 의난잡증 많아지고 불치병이 발발하네 생명의 흥망성쇠를 인공으로 말릴가   세상은 만화경이 잡색이라 눈부신데 웃을 일 적어지고 분통만 터지누나 거짓이 판을 치는데 누구인들 내키랴   사랑이 가벼우니 리혼을 밥먹듯이 아이위해 출국하나 자식농사 황페하네 얻은것 많다하지만 잃은것은 후회막급   정화수 마시노니 심령 또한 깨끗한가 환경오염 걱정인데 령혼오염 어찌하노 장수가 관심사여도 인명재천 어이리 핵분렬 시대건만 편견은 깰수 없고 평균키는 커졌지만 인격은 난쟁이요 쾌락은 넘쳐나는데 행복지수 간데없네   가진놈 잘났노라 웃음꽃이 만개해도 량심떼여 개를주고 남은것 흑심이라 어찌타 인간관계가 팽팽하지 않으랴   구두굽 높아져도 인격가치 낮아지고 가슴은 높였건만 정조관념 바닥기고 얼굴은 최다정인양 시기질투 흘러라 웃으라 웃음거리 새록새록 만들지만 진실된 유모감은 어이하여 적어졌노 눈감고 야옹하거니 웃긴단들 웃으랴   곳곳에 약방이요 귀따가운 약광곤데 건강은 말째이고 의료비는 하늘솟네 일컬어 생명기사 명실상부 하능교   연설은 도도해도 지리멸렬 랑독이라 틀에 박힌 빈소리에 졸음이 먼저오네 말씀이 많으시여도 참된말은 없노라   우사모 높아지고 권세가 진감해도 형상은 엉망이요 위망은 바닥기네 어즈버 공복이란말 듣기에는 그럴싸   우주를 정복하니 국가주의 선꼴이요 인공위성 올랐는데 공생공처 잘되느냐 평화를 웨치는 구호에 대포소리 화답하네
84    표절과 인용 댓글:  조회:8468  추천:0  2012-03-05
                                                                                                인용과 표절의 차이                                                                                                         최 균 선           어느때부터 만연되였는지는 몰라도 중국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표절현상이 우심하여 의론이 분분하게 되였다. 표절이란 무엇인가? 위키백과에서는 표절(剽窃)이란 다른 사람이 쓴 문학작품이나 학술논문, 또는 기타 각종 글의 일부 또는 전부를 직접 베끼거나 아니면 관념을 모방하면서, 마치 자신의 독창적인 산물인것처럼 공표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고있다.          인용(引用)은 다른 사람들의 저작들에서 구절이나 단락을 발취하려 할때 원저자와 그것의 구체적출처를 밝히고 광명정대하게 리용하는것을 말한다. 인용은 여러가지 리유에서 사용된다. 의미를 명확하게 하거나 인용되는 글의 주장을 확실하게 뒷받침하려 할 때, 또는 자기 글에 색다른 정보를 제공하려는 경우에도 사용된다. 이는 단순히 론의를 위해서일수도 있고 원저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한것일수도 있으며 론거를 충실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다. “베른협약”이라는것이 나온것처럼 인용법은 범세계적으로 공인된 수법이다.           그런데 출처를 밝히기만 하면 표절이 아니라고 할수 있을가? 자기 이름으로 내는 론문에서 핵심내용이나 대부분이 남의 글에서 옮겨온것이라면 출처를 분명하게 밝혔더라도 표절로 볼수 있는데 인용과 표절의 차이를 딱 부러지게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우선 인용의 정도이다. 정당한 범위안에서의 인용이여야 하는데 항목 설명이 주된 구성부분이고 인용은 부수적이어야 한다. 주종관계가 인용이 원 문보다 길어서는 안된다는 등은 상식적인 규정에 불과하다.           인용하는 글이 저작의 일부여야 한다고 규정할수도 없다. 짧은 문구나 시, 가사 등은 그 전부를 인용할수도 있기때문이다. 한편, 잡지나 신문 등에서의 보도를 위한 인용의 범위에 대해서는 그 해석이 쉽지 않다고 생각된다. 특히 겨끔내기로 써내는 문법서들이나 사전들에서 어느것이 기성된것이고 어느것이 창조발명인지 아무도 금을 그을수 없다. 인용하면서 약간 수정하거나 변경시켜도 인용되는 저작물의 기본적 동일성에 변함이 없고 그 표현의 본질적특성을 그대로 감득할수 있다면 역시 인용이라고 보아야 한다.            전국의 다른 국립대학들에서는 어쩌는지 몰라도 내가 몇년 있었던 사립대학경우, 해마다 졸업론문를 쓸 때이면 학생마다 우선 착수하는것이 자료수집이고 이른바 연구  검토단계이다. 크든 작든 자기 집을 지으려면 네기둥과 간기둥, 그것들을 이어주는 가름목들과 대들보, 연목들이 두루 갖추어져야 착수할수 있다. 남에게서 얻어온 재목들로만 집모양이 얼추 나게 엮을수 없다. 학생들이 론문쓰기에서“집” 이라는 추상적 제목을 내놓고 막연하게 여기저기서 가능한대로 재목ㅡ자료들을 끌어들인다.           그다음 구조의 크기와 형식을 설정하고 그에 맞게 재료를 마르며 조합을 시도한다. 특히 한국어로 졸업론문을 써야 하니 아는것이 많지 않고 새 견해나 관점이란 있을수도 없는데다가 론증할수도 없고 사유방향도 서지 못하다보니 거의다 인터넷에 뜬 글에 매달린다. 여기 한단락, 저기서 한구절씩 뽑아내여 론제에 맞게 엮으려고 모지름을 쓰지만 룡두사미격의 글이 되기도 하고 말대가리에 당나귀주둥이를 갖다대는격의 글이 되며 종적인 련계, 유기적결합이 잘 되지 못하여 횡설수설이 되여진다.           이런 조합식론문은 학자,교수들속에서도 성행하고 있는데 학생더러 혼자 깨여있으라고 요구할수도 없다. 인용을 많이 하되 정당성을 기하여 각주같은것을 달것을 요구하지만 어느것이 인용이고 어느것이 작자의것인지 구별할수 없는판에 각주를 달아봐야 눈감고 야옹하는 격으로 자아기편이 아닐수 없다.           인용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타인의 글 전부나 일부를 그대로 가져다가 자기가 쓴것처럼 내놓것은 대학생들이 할수 있는 저차원의 표절이고 여러가지 동종의 글에 구절구절을 발취하여 단순히 조합하거나 한 문장을 통채로 옮겨다가 가담가담 자신의 해석인것처럼 보태거나 개념들을 동의어로 바꿔놓는것은 조금 고차원적인 표절방식이다. 가장 교묘한 표절로는 착상, 주제발굴을 가로채는것인데 문제의 제기, 가설, 론증, 결론 등을 도용하는것이다. 대학보고서와 론문에서 심심찮게 볼수 있는 상당히 수준이 높은 표절이다. 이런 표절방식은 학술계에서도 만연된지 오래다.           문학, 사회학, 언어학 범위의 학사론문은 지도성과 경제효익을 기약하지 않기에 두루뭉실 얽어가지만 기술가치함량이 높은 론문같은것을 베껴내면 문자만이 아니라 남의 연구성과까지 훔치는것으로 된다. 이 시점에서 대학(국립대학도)에서 학생들이 꼭 졸업론문을 써야 하는가? 하고 곤혹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지만 함께 탄 배가 물결 따라 흐르는데 혼자 뛰여내린다면 시세에 어두운 사람이 될것이다.         물론 본과4년을 배운것을 리용하여 어떤 과제를 조사연구하거나 총화를 짓는것은 사회에 학술가치나 경제적실효를 제공하는것 아니라 그저 학습성과를 현시하며 학사자격을 가지는 형식이고 론문이 학생에 대한 고찰정도에 그친다고 여기면 심상한 일이라 크게 문장을 지을 일도 아니나《그래도 이건 아닌데…》하고 뇌까리게 된다.          전국적으로 서로 베껴내는 풍조가 활개치는 마당에 내것도 다른 사람이 표절할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면 누구를 질타할 일도 못된다. 이 시점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옮겨쓰면 인용인데 아이보다 배꼽이 더 큰것처럼 자기 말은 몇구절 없이 대부분 남의 사상이나 견해의 조합하지 말라고 뒤를 누르지만 고양이에게 부뚜막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으름장에 불과한것이였다.          뉴톤이 모든 창조는 재창조라고 말했듯이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다다소소히 타인들의 사유에 힘입으며 자기 사상, 견해를 서술하지 않을수 없다. 그만큼 인용이 없이는 자기의 정당성을 론증명하기엔 무기력하다는것을 자인하고 어쩔수 없이 타인의 사유를 빌려다가 쓰는것이 정당화되여 왔다.           그런데 본문보다도 인용문이 더 많은 론문이나 참고문헌목록이 길고 긴 리론서들을 보면 명칭이 다를뿐 역시 옮긴것은 옮긴것이요 한두마디 건너 인용하는것은《나의 독창적인 견해는 별로 없소》라는 발견의 부재를 드러내는것이다. 비록 광명 정대하게 각주를 달아도 표절과 똑같은 효과를 얻고있다. 새 사상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피력할 자신이 있다면 남의 사상의 목장에서 방목하는격으로 그저 자료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으며 책을 인용투성이로 만들필요도 없으리라.         인용에는 대체상 소크라테스, 맑스, 프로이드, 니체, 칸트같은 대사상가들의 말로 자기 론증에 버팀목을 삼는게 관례이다. 그런데 선인들이 이미 기성화시킨 문법리론이 있는데도 새록새록 나오는 문법교과서들은 중복로동이 많기마련이고 읽기교과서나 문학작품선 같은것들은 편자의 가치기준, 선호도에 따라 기성작품을 옮기는것이니 컴퓨터시대에는 마음만 먹으면 해낼수 있는 쉬운《저술》작업이라 할것이다.          창작하거나 저술하거나 정확성을 담보할수 없더라도 한편의 글에 자기 모종 사상견해가 있어야 한다. 자기 발견이나 견해가 전무후무한데 책을 엮었다면 무모하며 결과적으로 무효로동이다. 사상,관념이란 지식과 지혜의 산물로서 명확한 목표를 전제로 한 사유활동의 결과물이요 저자의 령혼이며 그 글은 거기서 피여난 꽃이다.        사상표현이란 문필가들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오직 사상만이 글에 생명을 부여하고 사회적가치를 제공한다. 사상가는 명확한 목표와 의지와 책임감으로 대중을 계몽하고 인도하는 선구자로서 모든 문필가들의 귀감이다. 그리하여 불세출의 대사상가 들은 고귀하고 위대하며 그 지식과 사상의 빛발을 모든 독자들이 터득하려 하고 접수하고 자기 실천행동에 지침으로 삼으려하기에 숭경의 대상이 되는것이다.          참다운 리론가의 길은 진리ㅡ사상과 리론을 창출해내고 진리로써 인간들을 더 높은 차원의 인식단계로 끌어올려주데 있는것이며 그 진리의 빛으로 새로운 진리들을 탐색해낼수 있도록 나아갈 길을 비춰주는데 있다. 인류문명사에서 별처럼 떠올랐던 수많은 사상가들이 있었기에 인류는 오늘의 현대문명시대에 이른것이 아니랴,           설사 위대한 사상은 아니라도 독창적인 견해도 없고 개성적인 론술능력이 없다면 진리를 탐구하는 길에 튼튼히 설수 없고 앞장서서 갈수도 없는 절름발이“문필가, 리론”가라고 해야 할것이다. 두뇌에 기성리론만 가득차있으나 자신의 사유력으로는 촌보난행이기에 표절하거나 인용하는 길밖에 없을것이다.           물론 현대에는 참고문헌을 등지고 저술할수 있는 천재들이 많지 않고 한구절도 인용하지 않고 론술할수 있는 학자나 평생 타인의 리론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리론가들이 별로 없지만 적어도 타인의 사상노예로 충당되지 말아야 할것은 자명하다. 만약 그런 사유의 연골증“환자”들이 사상가, 리론가. 작가처럼 행세한다면 지극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세상이 변하여 종말이 온다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사상만은 영생하기를 바라는것은 모든 사상가들의 저술의 취지이다. 사상은 저자, 문장의 표지이다. 하여 사상이 있는 사람은 타인의 사상과 리론을 후무리려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론술에서 표절 행위가 공공연하면 사상가들이 배출되기 어려우며 지식인사회의 불치의 암증으로 어느 민족의 문화발전이든지 만성자살에 이르게 될것이다.                                                                                            2012년2월  15 일
83    진언련시조 (2) 댓글:  조회:2123  추천:0  2012-02-27
                           진언 련시조2                               별 별총총 하늘나라 성좌가 무수해도 자리다툼 모르는 평화의 천국인데 지구촌 인류의 력사 피로물든 살생부라   별들이 명멸함은 신비로운 거리미학   스스로의 명암을 분식없이 보여줄제 인간촌 인공별이야 어디그리 진실한가   길잃고 헤매이다 별빛아래 누우니 꿈결에 은싸라기 쏟아져 내리누나 황량몽 있다더니만 내꿈은 별로네   무성한 가지마다 별꽃이 피여있어 손뻗치면 한가득 따내릴듯 싶은데 행운이 별따기인줄 내 그로써 느꼈노라 대천세계 세사는 허무하고 인생은 맹랑하이 욕망도 부서지는 물거품 같거늘 공수래 공수거인줄 어찌하여 모르뇨   하늘도 둥글고 지구도 둥근데 인간촌은 각축장 쟁투로 살벌하네 말마소 조화세계란 꿈속에나 있을가   세상은 시장이요 인심은 되거릴세 욕망의 큰 배가 찌쿠덩 물이 샌다 어엿차 죽기내기로 쟁투를랑 저어라   세상이 넓다해도 지각만큼 넓을뿐 눈감으면 더 멀리 더 깊이 보일건가 인생의 희비극장에 어리광대 우리라   세상은 볼록거울, 오목거울 같아여 이그러진 자화상에 실소를 머금을제 모든것 이화시키는 현시대에 실망하리   다람쥐 속절없이 채바퀴를 돌린다고 사람들 우습다며 가가대소 하지만 우리도 시침을 따라 맴돌지를 않던고   세계는 허무한데 티끌만 자욱하니 정토가 따로 없네 절간에도 클랙슨소리 스님의 핸드폰소리 부처님을 웃길라
82    (교육칼럼) 자식은 피조물이 아니며 부모는 주물공이 아니다 댓글:  조회:10121  추천:5  2012-02-23
인간의 바람직한 성장, 발전이 전개되고 촉진되는 교육현장은 학교, 가정, 사회라는 불가분리적인 세마당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교차적이며 조화로운 협동속에서 종합자질이 구비된 “세계공민”을 육성하는데 취지가 있다. 그런데 많은 학부모들은 교육이 학교교육에서 전부 실현되는것처럼 생각하면서 그저 물질적뒤바라지나 해주면 부모의 의무와 도리를 다 한것으로 여기고있다. 가정은 인간교육이 사랑을 통해서 진행되는 최초의 교육마당으로서 조화로운 대인관계, 사회관계를 맺는데 필요한 례의범절, 량호한 습관, 풍속등을 익히고 시비 관념, 가치판단의 기준도 초보적으로 익히게 된다. 그래서 자기 자식에 대한 어머니 의 영향은 백명교원의 영향을 초과한다고 하는것이다. 이렇듯 학교교육은 가정교육의 터전우에서만이 충실한 열매를 맺을수 있다. 그런데 부모들의 교육관념에는 이런저런 문제점이 존재하고있다. 첫째로 자식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치이다. 자식을 저마다 “룡”이나 “봉황”으로 만들고싶은 욕망은 리해되나 이런 교육관념의 편차로 조건만 지어주고 본인이 노력만 하면 무엇이나 다 배워낼수 있다고 여기면서 아이의 정신적자질, 취미같은것은 외면하고 주관욕망에만 매달린다. 사실 어떤 자질은 시작부터 좌절당할수 있다. “항상 장군이 될수 없으나 항상 사람은 될수 있다.(괴테)”는 말을 명기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싶은것을 할 때 가장 빛나게 능력을 발휘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비현실적인 기대치가 사회 실제 수요와 아이의 심신발전의 내심수요와 엄청나게 어긋나면서 아이의 자연적인 발전에 인위적인 장애물을 조성하는것이다.  자기 아이를 잘 아는 부모가 명지한 부모이다. 아이를 자연적인 성장기회속에 놓아 두어야 하지 공연한 승벽심으로 아이를 경쟁의 소용돌이속에 몰아넣지 말아야 한다. 자식은 피조물이 아니며 부모는 주물공이 아니다.  둘째로 지적학습평가에 대한 편파적인 집념이다. 유일진학론의 지휘봉밑에서 아이들이 공부기계로 전락되고있는데 정서상수발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정서상수 (EQ)는 개체에 고유한 가장 중요한 생존능력이다. 아이들을 부호나 수자더미에 구겨박지 말라. 세계는 수자경쟁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보다는 인정세계로서 심리경쟁이 치렬한 세계이다. 성공의 요소에서 지력요소는 20%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작가 발자끄의 성공이나 발명대왕 에디슨의 성공사가 이를 잘 증명한다. 그리고 많은 가정들에서 아이들에게《넌 네공부나 해, 집일을 참견말고…》라고 하는것이 부모들의 부탁이고 공동한 심리상태이다. 이런 관심과 배려는 결국 영원히 크지 않는 “아이”를 길러내는것이며 의뢰심과 귀족심리의 토양이 되여 생존능력을 약화시키는것과 다를바 없다. 오직 행동으로 해냐갈수 있는 사람만이 치렬한 경쟁의 급류속에 떠밀려가지 않고 도태되지 않을수 있다. 명지한 학부모들이여!자기 자식을 무작정 “장군”으로만 키우려 하지 말고 적성에 맞는 “병사”를 키울 심리준비도 하시라. 훌륭한 “병사”가 될수 없다면 영원히 “장군” 으로도 될수 없다.   
81    (교육칼럼)학위와 능력의 삼각지대 댓글:  조회:10271  추천:8  2012-02-17
    학위란 대관절 무엇인가? 이런 물음은 오래전부터 있은 질문이지만 나로 말하면 더구나 우문으로 될것이다. 우문은 우문이로되 학위는 표상적으로 한 사람이 어느 한 방면에서 “돌파”를 하여 일정한 성적을 따냈다는 표지이지 한 사람의 전면적인 능력을 표지하는것은 아니다. 이 말은 누가 했는지 현답이다. 속담에 처녀면 다 확실한가? 학위가 정말 능력을 증명할수 있는가?     학력주의란 보다 높은 학력이 우선시되고 특권계층으로 되게 조건을 지어주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때는 학력의 명목가치가 그 실질가치, 즉 학력에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보상은 그 명목가치에 따라 이루어진다. 근간에 각 대학, 학원들의 한국어교원 초빙조건에서 언필칭 석사, 박사이다. 물론 그 요구대로 인입할수는 없고 희망사항인것은 알겠지만 아무튼 학위만능이 얼마나 우심한가를 설명한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은 비록 대학생들이지만 기점이 걸음마를 타는것으로서 접수능력과 사유능력, 자습능력 등면에서 우세할뿐 식자관부터 넘어야 하는 소학교일학년생들이다. 조선족소학교에 일학생들은 학전교육의 계단에 식자관을 넘고 들어온 아이들이고 언어환경의 우세로 언어습득면에서 대학생들보다 오히려 기점이 높다.     랭정하게 투시하면 대학교 교수라해서 꼭 이런 “소학생” 들에 적임교수자라고 말하기 어렵다. 경험많고 유능한 소학교원들이나 착실한 중학교원들이 식자교수에서는 오히려 적임자일수 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학위지상주의에 매달려있기에 그저 연구생 아니면 교수들만 선호한다. 물론 여러가지 리유도 있고 우세도 있겠지만도.     한족학생들은 한국어를 배우는것이지 연구생공부를 하는것이 아니므로 문법도 기초지식 위주이지 학술연구가 아니다. 숟가락이 크다해서 밥을 더 맛있게 많이 먹인다는 법은 없다. 곰방술이라도 폭폭 떠서 먹여주면 입이 작은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적격이 아니겠는가? 한국어를 갓배우는 학생들에게도 같은 도리이다.     지금 고학력자들이 위망이 높다해도 한손으로 해를 가리울수 없다. 생물의 다양성으로 하여 세계는 다채롭게 꾸며진다. 무조건 학위만 보는것은 적재적소의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 물론 고학년에 올라와서 한국문학사라든가, 개황같은 전업선택과들은 대학물을 먹고 대학교단에 섰던 사람들이 더 적임자일수 있다.     각설하고, 봉건시대에 문벌이라는게 판을 쳤는데 그 자체가 민주사회의 대적으로서 불평등의 대명사이다. 학벌이라는것도 실력경쟁의 견지에서는 역시 불평등기제로서 학위만능주의의 선입견을 앞세운 편파적인 관념을 키우는 바람이 새여들 온상이 될수 있다. 우스운것은 교수에도 무능교수란게 있음을 알게 되였고 석사라해도 포장이 그럴듯한 엉터리 상품에서 받는 그런 실망감을 느끼게 한것이다.     석사증은 따냈지만 어감문제인지 기본교수용어도 제대로 번지지 못하여 한마디 건너 중어를 답새기는 수준이였다. 그래도 석사, 박사라는 학력의 후광이 있어 학교당국에서는 절대적으로 만족하는데 사이비현상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그러니 중국의 각대학들에 직함으로서의 교수는 많지만 학자형이나 학문이 깊은 대학교수는 많지 않다고 하는것이다. 바다에는 고래가 있고 상어도 있고 준치도 있는 반면에 물개도 있고 새우도 있고 불가사리도 있다. 석사, 박사, 교수가 생활하고 가르치고 연구하는 교육현장을 바다에 비유할수 있다면 중국의 무변광대한 학해(学海) 에서 서식하는 석사, 박사, 교수라는 자연인도 류류별별에 다종다양하고 천차만층일것은 당연지사이다.    그 어디에도 상중하가 있는법, 어마어마한 학해에도 고래나 상어나 준치만 있을수 없다. 이런 자연인은 또한 학벌로 나눠지고 인맥으로 나뉘어지고 본학교에서 일한지 오래면 대우를 높여 부교수요 교수요 하는데 명실상부한 교수들과 한물밥이 되여져 교수들의 위상을 깎고 나아가서 학해를 흐리우고있다.     지식경제사회에 학문의 권위라는 위계질서가 존재함은 당연하다. 진정 박학한 권위도 있거니와 어찌하여 보직을 차지한 사람도 있다. 학벌과 관계없이 가진 직위에 따라 어부지리로 교수, 연구생의 계관을 쓴 사람들이 중국에 득시글거리는 상황을 감안할 때 무조건 우러러 보이는것도 맹종이다. 잉어가 준치인양 행세하는 인간들이 있음은 학해를 위해서는 불행이고 비애이지만 요는 성스러운 학해가 오해를 받고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의 학위제도의 회복은 지난세기70년대말에 발걸음을 떼여80년대에 박사학위수여가 시작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중국박사교육은 목동이 양을 방목하는것과 필적한다고 말할수 있다. 박사도사 한사람이 몇십명, 지어 백여명의 박사연구생을 지도하는 기관은 이미 뉴스가 아니다. 정녕 천재적박도인가?아니면 박사배양도 현대화흐름선이 되였는가? 이를 두고 “박사대약진”이라고 칭하고있다.  지난세기 50년대말 대약진운동의 악과가 돌이킬수 없이 심각했던것처럼 석사, 박사의 수준이 미끄럼타고있으니 학위의 광환도 색바래였다. 이리하여 근년의 박사들을 “물박사”라고 풍자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물박사현상이 불러온것은 당연히 학술부패일수밖에 없다. 각학교들에서 박사점을 쟁취한후 교수들도 박도로 승급하게 되였는데 그 모든 교수들이 다 합격된 박도일가?      대량적인 연구생배출, 교수등급제로 중국의 연구생몸값, 교수들 계관의 값이 크게 내릴수밖에 없다. 기록에 따르면 중국의 대학들에 교수인수는 이미 범람상태로서 재난성적이라고 한다. 모대학에 교장의 운전수마저 부교수님신분으로 핸들을 돌린다 니 아이러니인가? 유머인가? 전국정협위원이자 화동리공대학 장감조(张鉴祖)교수는 중국대학들에 교수들이 범람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작금의 중국대학교수들의 학술수준이 세계각국과의 횡적비교에서든 중국 백여년 학술사에서의 종적비교에서든 사람들이 경악할 정도로 저수준이라고 한다.      중국의 여론계에서 유행되는 물박사(水博士)란 말에 일리가 없는것이 아니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중국에 박사생만 하여도12만명으로서 미국, 독일다음 세계 제3위라고 한다. 교육부의 규획에 의하면 2010년부터 매년 5만명이 박사학위를 얻게 할것라 하는데 이는 세계 제1위를  차지하는 영광의 기적을 창조하는 셈이다.      그런 흐름식생산에서 나온 “거품박사”들보다 진정한 박사들이 더 많은것도 사실이나 문제는 학술계에 “진짜같은 가짜박사”,“가짜인 정말 박사”들이 있다는것이다, 소위 진짜같은 가짜박사란 “꿩(野鸡)대학”에서 얻은 박사칭호를 말하는데 실제상 인민페로 바꾼 학위증서이다. 물박사, 거품박사들은 독서에 품을 들이지 않았겠지만 돈은 분명 적잖게 들였을것이다. 외국에서 도금한 학위자들도 같고 같다.     이는 존경스러운 진짜 박사님들의 비애일뿐만아니라 이 시대의 비애이다. 박사라 하면 박학의 대명사로서 지난날 박사들이 쌀에 뉘만큼도 안되였을 때는 진정 어느 한가지 학문분야에서 조예가 깊은 전문가들이고 학자들로서 사람들이 진심으로 우러러 보았다. 그게 정상이다. 중학생들이 박사가 더 센가? 교수가 더 센가 하는 의론을 하던 그 시절에는 대학교수도 선택된 학자형의 인재들로서 학문에서 선택된 정영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더랬다. 그런데 학위마저 상품화가 다 되여진 지금은 박사, 교수라 해도 반신반의하고있다.      물론 학위획득자가 장악한 지식과 기술자의 실천경험을 동등시할수는 없다. 능력자가 꼭 학위가 높은 사람은 아니기때문이다. 이 역시 정확한 평가이다. 학력과 능력사이에 등호를 칠수 없다는 설명이다. 한걸음 물러서서 학위자가 능력이 없다고 말할수 없는것처럼 높은 학위소유자가 꼭 능력자라고 말할수도 없다. 능력자라면 허명무실할수 없지만 고학력자는 허명무실한사람이 많을수 있다.     고로, 저학력=저자질이 아니듯이 학위가 없다해서 업무자질이 낮다고 기시해서는 안된다. 같은 도리로 고학력자와 높은 자질사이에 등호를 칠수 없듯이 고학력자들속에 업무능력저질자가 있다.  말하자면 학력과 능력문제는 변증법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생각이요 나름대로의 주장이다.     한번 따놓으면 그 광환으로 득세하는 자격증일뿐이라면 세상은 제로섬이 되여진다. 하긴 물이 다 말라버리고 언제만 남아도 그냥 모모 저수지라고 칭하는 인습이니까 리유라면 리유가 되겠다. 실력이 있어도 학위가 없다는 리유로 불공정한 평가를 받고 제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는 사회는 바람직하게 굴러가지 못할것이다. 세상에서 창조적인것은 이런 류의 제도권에서는 창출되지 못한다는것을 알면서도 그냥 편견에 맹목성을 달아맨다는것은 일종의 사회비극이 아닐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사회상에서는 갈수록 학위만능주의에 더 목을 맨다. 이는 공개적인경쟁과 평가기회를 박탈하고 능력에 기초한인재등용의기회를 차단하여 학위증을 준신분증화하는 셈이다. 하여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학위를 포기한 본과대학생들을 설자리가 없게 만든다. 이것은 분명 불합리한 사회인소만 조장할뿐이다.                                                                                                                                2011년6월   20일
80    진언련시조 (1) 댓글:  조회:8189  추천:0  2012-02-09
                                진언련시조    (1)                           우주 별총총 신비한데 천국은 어드메냐 찾지마라 지구인이 득달하는 그날에는 필연코 아수라장이 되여질듯 싶으이   우주는 창망하고 세월은 억겁인데 현대문명 백년새에 인공위성 무수하니 언젠가 태공쓰레기 무더기로 쏟아지리   우주의 대폭발은 우연인고 필연인고 묻지마라, 지구촌이 하나 더 생겼더면 천궁의 옥황상제도 태평무사 하리요 태양 태양은 빛을주고 따스함을 쏟아주나 후예가 아홉개를 떨구지 않았던들 우리는 불덩이해를 좋아하지 않으리   해님도 엎어놓은 독안은 못비추듯 봄이라 모든 꽃이 만개하지 않거늘 두어라, 빈익빈부익부 불평등을 어이리   해빛이 비춰주매 시궁창도 번쩍이고 하찮은 먼지도 빛을받아 눈부시네 우리네 인생현장도 이와같은 풍경일세   진리는 태양이요 진실은 해빛이라 먹구름 저너머 태양은 웃노매라 진실을 숨기려하면 어리석기 짝없지   해님은 가난한 농가집도 찾아드네 일컬어 부모관들 해볕같이 한다면야 민심도 태양따르는 해바라기 아니되랴   아침해 청춘의 희망이요 랑만일제 서산에 락조는 로옹들의 묵념인가 석양이 무한히 좋아 불타는 여생요   해빛도 너무 쬐면 꽃비단도 색바랜다. 자식사랑 지나치면 응석둥이 길러내리 여보소 귀한자식은 매한개 더 쳐야제 달 휘영청 밝은달아 월색이 하도좋아 빌려온 빛이라도 칭송이야 아끼랴만 너처럼 호가호위식 인간들도 많더라   휘영청 밝은달은 앞뒤가 다 명경인지 등뒤에 숨긴 흑점 우리는 못보지만 앞면만 바라보면서 찬탄하니 우습다   차디찬 광한궁에 방아찧는 옥토끼야 상아님의 참회를 천년만년 찧으려나 두어라, 배반의 참회 찧는단들 가루뿐   휘영청 만월도 이지러지니 가석타만 기울고 차오름이 달의 탓이 아니여라 우리네 생로병사도 저같지를 않은가   물속에 달님을 건지려는 원숭이야 너를야 비웃을 리유 우리에게 없을진저 저저의 일확천금몽 수중로월 아니냐   교교한 달빛이요 차디찬 월색이라 보는 눈이 유정한가 느낌이 무정한가 아서라 인간의 마음 차일시에 피일시
79    (교육수필)꼭 이리 되여야만 할가 ? 댓글:  조회:10105  추천:3  2012-02-06
        지금 중소학교에의 정규교육못지 않게 필수적인것으로 되고있는 보충보도는 이미 풍조로 되여져 마치 두다리는 있어도 송엽장이 없으면 촌보난행인 사람들처럼 각종 학원에 매달리고 있는데 평범했던 교원이고 이미 성쌓고 남은 돌같은 사람이 되였지만 사회를 향하여 그냥 “꼭 이리 되여야만 합니까?”하고 다시 한번 묻고싶다.        매일 갓입학한 손자“님”을 “모시려” 교문앞에서 기다리며 귀동냥하면 로심초사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속에서 오가는 말이 시험얘기고 성적표이고 하학후 학원에 가는 일이였다. 아이가 “될성부르지”못할가 하면 담임선생들이 첫처방이 학원에 보내야지 않되겠다고 선포한단다. 진종일 갇혀있던 교실에서 아이들이 나오면 할아버지들은 저마끔 학원으로 끌고가는데 소학교에 입학한지 한달도 안되는 일학년생들도 례외가 아니였다. 조기인재교육에 감탄하기 앞서 곤혹과 갖잖은 사색이 내달린다.         그러다가 30여년만에 옛날 동성용 영성학교서 함께 있었던 옛친구를 만났는데 3학년에 다니는 손녀를 기디리고 있었다. 팔도중학에서 교도주임까지 한 그도 학원에 대한 일가견이 있을것같고 보충수업에 대한 체험이 있을듯 싶어서 손녀도 학원에 다니느냐고 물었더니 처음엔 남에게 뒤질세라 보내보았는데 재미가 쑬쑬해서 그만두고 지금은 자기가 “몸소 가르친다”고 하였다. 그의 많은 체험에서 얻은바가 컸다.        제발등에 불이 떨어져봐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내집에 학교다닐 아이가 있기전까지는 크고 작은 아이들이 방학간, 주말휴식시간은 물론 하학하후 곧장 보충 수업까지 받으러다니는 모습들을 볼때는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그저 고개만 비탈아 보았는데 역시 사람은 제모(사투리)에 부닥쳐봐야 하는갚다.         퇴직하고 한동안 외지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손주놈도 제민족교육을 시키고 싶어 연길에 돌아왔는데 소학에 입학시키고나니 근심이 제먼저 알았는지 지레 찾아들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한족애가 다 된 놈을 마른나무 꺾듯이 달구쳐서 조선어철자관은 간신히 넘겼지만 언어환경이 달라지고 교과서도 달라서 제대로 받아물지 걱정하며 학원보충수업도 떠올려보군 했다.        모두가 취해있는데 현인도 아닌 내가 혼자 깨여있는척 할수는 없는 일이라 학원들의 초생광고를 받아읽으면서 도깨비궁리를 많이도 굴리였다. 그러면서도 마음과 생각은 각각이여서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현상이지만 교육이 곁길로 빠졌다고 생각은 떨쳐버릴수 없었다. 왜그냥 곁길로 빠졌다고 고집하게 되는가?       주관적여건으로 말하면 유일승학주의가 이 시대 교육의 주제로 되여있기때문에 점수로서 학생자질의 우렬이 결정되고 교수사업의 성과가 흥량되는 상황에서 조류를 말려낼 사람이 없는것은 막무가내한 일이다. 따라서 부모들마다 자기 아이를 어릴때부터 높은 학점을 따내는 돌출한《특재》로 키우려 하고있기때문이다.        우리의 학교교육의 궁극적목표가 대학입학이고 학생들을 비롯하여 교사와 부모들이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있어 유치원부터 교육은 대학입시를 위해 경영되는것이다. 이러한 승학위주의 교육은 교육정상화의 실패를 비롯한 많은 문제점들과 사회적인 병폐를 낳으면서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고 보다 바람직하게 개혁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것을 철저히 해결할 적임자는 아직 테여나지 않았다.       감장송아지를 팔아서라도 자식공부는 시킨다는 우리 민족의 교육열은 세인이 다 아는 일이다. 천군만마가 외나무다리를 향해 진군한다는 흑색7월의 결전이 전국의 각 대학들에서 확대초생하면서부터 많이 느슨해졌지만 입시경쟁은 아직까지도 본인은 물론 부모와 교사의 피를 말리고있다. 교육이 산업화되면서 교육산업의 일종이라 할수 있는 각종 학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부모들은 아이들의 성적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이런저런 학원을 다니게 하면서부터 더구나 공부기계로 전락되고 말았다.        학교교육에 대한 기대만큼 학교가 부모들의 욕구를 제대로 채워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기실 이는 교원들의 비애만이 아니라 시대의 비애이기도 하다. 교육의 3대지표인 덕,지,체에서 오로지지(知)만 강구하면서부터 학교교육이라는 말과 승학교육이라는 말이 일맥상통하는 말로 쓰이게 되였다. 부모들은 보편적으로 학교에서는 별로 못배우고 제대로 배우려면 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인식을 선행시킨다.         학교수업이 미처 대응하기 어려운 특기적분야나 학습이 매우 뒤쳐진 학생을 위해서 사교육은 필요할수 있다. 그런데 사교육에는 자녀의 학습수요와 추구보다 부모들의 불안심리와 욕망과 “다른 애들이 다하니까”하는 식인 경쟁심리가 개입되여있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가 집에서 공부하면 불안해하고 신경전을 한다.         또 자녀의 재능발굴보다는 점수와 등수를 먼저 생각한다. 부모들의 자녀교육에 대해 과잉된 관심은 아이들은 물론 부모들의 생활에 많은 행복의 공간을 빼앗고있다. 또 생계로 동분서주하는 부모들이 보육문제로 울며겨자먹기로 사교육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교육은 학생의 실력, 거주구역, 가정경제수준을 불문하고 총체적으로 가행되고 그만큼 많은 가정들에 엄청난 사교육비부담을 들씌우고 있어 골치거리가 아닌것이 아니다.         기실 각종 학원, 보도반에서 보충수업은 거개 학교보다 진도를 앞당기는것이 “묘방”으로서 “우세를” 발휘한다. 이런 선행학습위주로 이루어져 학생들은 어려운 문제를 많이 풀다보니 학습에 대한 자신감과 흥미를 상실하게 된다. 또 점수와 석차를 올리는데 치중하다보니 문제풀이를 반복하게 하여 학생이 스스로 끈기있게 해법을 생각해내서 창의적으로 문제를 푸는능력과태도를 만성적으로 상실하게 한다.        까놓고 말해서 학원이 후진생들을 춰세우기 위한 자선적인 교육장치라기보다는 우선은 상업실체로서 학교정상수업에 차질을 빚고있다. 그런데도 학부모들은 학원에 보내지 않으면 자기 아이가 뒤떨어지는것으로 인식하고 시대풍조에 뒤떨어진 부모로 되는듯 심려하다보니 사교육으로 영양보충하는것은 학부모간. 학생들간의 필수적인 경쟁항목으로 되여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과외공부가 진짜공부이고 학교공부는 간식이라는 전도된 교육관념이 굳어졌고 학원공부라는“교육괴태”가 무소불위의 교육만능으로 부상되였다. 과외보도반은 지금 학생들이 학교, 집 다음 꼭가야 하는 곳이다. 학원에 가면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는것도 배우고 배운것을 공고화하기 위해서라고 하고 학교에서도 잘 배울수 있지만 한반에서도 실력차가많이 나서 호상피해를 본다하고 자신의 수준에 맞는 학습내용을 집중적으로 공부할수 없기때문에 가야 한다고도 한다.        보충수업을 하여 후진생들을 향상시키는것은 원래 교원의 직책내의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품경제시대 이전, 명실상부한원예사님들에게만 바랄수 있었던 일이였고“위인사표”를 철칙처럼 지키던 교원들만이 할수있은 고상한 책임이였다. 지금도그런 헌신적이고 책임적인 선생님들이 있지만 그리 많지 않다.         현재 학교정상수업정황은 어떤가?기초부터 차근차근하자니 이미 배운 학생들은 다 아는 내용이라 딴짓을 하는 학생이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기초닦기를 배제하고 가르치자니 과외보도를 받지않는 학생들은 전혀 진도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수업진도란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 절대대부분 학생이 새 지식을 장악하는 지식전수의 일환이다. 진도란 지식전수의 량적전수를 말한다.         철학에서는 량적변화가 질적변화를 일으키지만 학교수업에는 량이 질로 변한다는 철학이 없다. 물론 학기내 교수임무로 말하면 진도란 교원에게 드틸수 없는 우선 과업인것은 사실이다. 비록 주류는 아니지만 교원들속에는 수업시간에는 복습하고 과외지도라고 명명한 시간에도 진도를 나가는 피동적인 위치에 처하게 된다. 이는 역지사지로 생각하면 선생님들의 말못할 고충인것은 사실이다. 한알의 모래알에서 대천세계를 본다고 이런 정황하에 많는 문제점들을 류추해볼수 있다.         원래 과외보도, 써클이라면 말그대로 후진생, 혹은 흥취생을 따로 조직하여 각방면에서 향상을 도모하는것이여야 하는데 학교정상수업을 무시하고 진도를 나감으로써 무슨 묘리나 장악하고 있는듯이 표방하고있지만 기실 상업행위이다. 이처럼 학생의 부담문제 등 여러가지 페단을 감안하여 교육행정부문에서 시종 단속하고 있고 액외수입을 도모하는것을 엄금한다. 그러나 교원대오속에는 그냥 독직자들이 존재하고있다. 수업이 끝나서 의문나는것을 물으면 시간이 없다고 매몰차게 거절해버리고 더 지꿎게 달라붙으면 보도반에 와서 배우라고 하는 교원도 적지 않다.          재직교원들의 과외돈벌이가 단속되니 방법이 바뀌었다. 담임교원이 교외의 인연있는 선생에게 학생을 제공하고 학생당50원좌우를 소개비로 받는것은 언녕 공개된 비밀이다. 만약 자기가 지정한 보도반에 가지 않고 딴데 다니면 부모에게 그냥 성적이 말이 아니라고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교원들도 없지 않아 있는 실태이다.        물론 시대의 흐름으로 보아 과외보도반이나 학원의 존재를 무작정 부정할수 없고 긍정면을 시인하지 않을수 없다. 사교육의 가장 큰 장점은 첫째, 교육의 장을 공교육의 중추인 학교밖까지 확장시켜 학생들의 과외활동을 적절히 조률함으로서 열성껏 배움의 길로 이끌수 있다는것이고 둘째로 전문적, 실천적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말할수도 있다. 그러나 자타가 내심으로 시인하는것인즉 학생들이 정말 필요로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주기 위해서 경영되는 사교육은 매우 드물다.        그만큼 현상적으로 볼 때 정규적학교교육의 담벽을 “위협”하는 존재인것은 사실이다. 학교측 (선생님)은 과반수이상이 학원이나 과외를 다니기때문에 심화과정, 혹은 자률학습이라는 형태로 수업을 진행하게 되였는데 기초지식을 짧은 시간에 간단히 설명하기때문에 학원을 다니지 않는 학생들이 힘들어할것은 자명하다. 이렇게 소학교부터 중학, 고중에 가면 그 과정은 더심해지고 학생들은 학교수업에 흥미와 신념을 잃게 된다. 그러다 보면 문제아가 생기고 땡땡이를 치는 학생들이 생기고 수업시간에 딴전을 보는 등등의 문제가 비일비재하는것이다.        학원, 과외보도반에 다니는 아이들의 솔직한 말도 많이 들어봤다. 학원에 가면 학교에서 알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 다시 공부할수 있고 친구들과 어울려놀수도 있어 좋다고 한다. 하지만 학교선생님에 대한 또는 학교에 대한 학생들의 불신이 커지고 수업시간에 공부를 하지 않고 다른 행동을 하는 현상이 점차 보편성을 띠게 된다. 학원에서 또 배우면 되기에 학교에서는놀아도 된다고 생각하는것이다.          학교는 다만 지식을 전수받는 곳이고 학생은 지식의 저축기인가? 학교에서는 학습뿐만아니라 군체속에서 인성, 례절,도덕교육,생활교육 등등이 진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학생들은 학원을 더 좋아하고 학교의 생활들을 소홀히 하는 추세이다. 과연 학교의 좋은점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입학해서부터 곧장 학원에 다녀야 하는가? 아니면 학교공부에 더 충실해야 하는가?          상기한 교육의 각이한 페단으로부터 우리의 교육이 곁길로 빠졌다고 하면 착각이고 독선일가? 조선족부모들은 한족들보다 과외보도나 특장 교육에 더 극성을 부리고있다. 인재교육에 대핸 인식이 이상하게 뒤틀리고있다.  그러나 동기는 좋아도 설계도가 바로 건축물인것은 아니며 동경이 곧 미만한 현실로 되는것은 아니다.        과외보도가 만능이고 만사대길인가? 필자가 사는 마을에 한 소학생이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영어써클이요 수학보도요 끼리끼리 몰려다닐 때 늘 혼자서 뽈도 차며 자유자재로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도 궁금해서 몇번 대화하며 알아보았더니학전반도 다니지 않았고 한번도 무슨 써클에 참가하지 않았단다.          그애의 할아버지가 애가 애초에 유치원을 죽어라고 싫어해서 초기부터 독립적학습능력을 키워왔는데 일학년때부터 반장을 하고 각과의 성적도 언제나 앞장이고 웅변, 글짓기경연, 지식경연 등 여러면에서 거의 도거리로 상받는단다. 물론 한애의 사실이 보편성문제에 대한 론거로는 불충분하겠지만 적어도 과외보도반이 만능이라는 잠규칙에 구멍을 펑 뚫고 있음은 사실이 아니겠는가?         따지고 보면 학원이나 과외보도반의 현대화교육시설보다 나을리 없다. 가령 퇴직한 로교원이니 잘 가를칠수 있다고 근거를 댄다면 지금 재직교원들은 자격미달이고 신뢰할수 없는 교원이란 설명이 된다. 정녕 제사에는 마음이  없고 제사밥에만 마음이 있다거나 스스로 학생의 성적제고에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교원이 혹시 있다면 과시 길은 아는데 자동차는 몰줄 모른다거나 핸들은 잡았는데 아직 몰줄 모른다는 격이 된다. 과외교원들의 힘을 입어 성과를 나타내려 한다면 그 자신을 위해서는 참 슬픈 일이 아닐수 없다. 물론 절대 대부분 선생님들은 충성스러운 교원들이라 생각한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연길시내에 유격전을 하는 과외보도교원들은 많았지만 그 사이 각종 학원들이 무수히 일떠서 교육계에 기관을 이루고 있음에 경탄이 나왔다. 지식경제시대의 필연적인 산물인가? 현대교육이 나아갈 바람직한 길인가?   어떤 경관을 이루고 있든 과외보도에만 매달리면 남에게 업혀서 달리기를 배우는것과 다를바 없는것으로서 자학능력을 운운할수 없거니와 창신형의 인재로 되기에는 첫단추부터 잘못 채웠다고 생각한다. 결국 돈의 유혹이 이끄는대로 교육이 곁길로 빠진것이다. 현재 중국의 교육이 실패하고 있다는 공중여론이 무성한데 이 점에서도 론거가 제공될수 있다.         학원의 보충수업과 과외보도가 성행하게 된 근원을 따지고 보면 자발적이라기보다 한국의 교육현장을 닮아버린 현상이라고 단정하고싶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근간에 이르러 사교육비와 입시과열 현상으로 시끌벅적하고있다. 사교육이 사회문제로까지 치달아오른 한국에서도 사교육은 긍정적인 영향보다 부정적인 영향이 많은것이 사실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사교육이 성행되면서 정규적인 교육에 많는 페단들을 낳고 충격하고있다는 사실이 실천속에서 증명된것이고 교육관념상 조절이 요청된다는 설명이 되겠다.       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학교의 정상수업을 엄밀하게 짜나가면서 음으로 양으로 진행되는 회색수입을 단절시키고 담장밖에 뻗어나간 가지에서 익은 열매를 자기의 빛으로 익힌것이라고 내세우는 가치관을 가급적으로 개정해야 한다. 아니면 무작정 자기 본직업에 충성하고 몰두하는 길밖에 없다. 교원이 정당한 보수가 아닌 회색수입에 사덕마저  상실한다면 비록 교단에서 섰다해도 유령에 불과하며 애매한 자제들만 해칠뿐이다. 이른바 사교육의 리페를 잘 분별하고 정확한 교육기 제로 운영되였으면 하는 허황한 기대를 가져볼뿐이다.                                                                                                          2008년2 월10 일         
78    (교육칼럼)싱거운 걱정 한마당 타작해본다. 댓글:  조회:9230  추천:0  2012-01-21
    요즈음 한국의 중학교들에서 학교폭력에 배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학생이 속출하자 교육계는 물론 전 사회적으로 부심하고있다. 보도기사들을 보면 참으로 중학생들마저 인간성이 이렇게 비틀려 있는가에 경악하게 된다. 가해자들은 장난삼아, 심심 풀이삼아, 기분잡쳐서… 등 리유로 가지가지 야만적폭행을 했다하고 폭력과는 인연이 없어야 할 계집애들조차 사내애들 찜쪄먹게 동성에게 폭력을 가행한다니 정말 젖먹이던 암소도 하늘 우러러 개탄할 일이 아니냐.     가해학생들을 조사할 때 한다는 소리가 참으로 걸작이다.  “센척 안하면 친구들이 우습게봐”   "'차이'를인정하는 법을 못배웠어요."(서울목운중3학년최모군)   센척하지 않으면 우습게봐요. 애들한테 우월해 보이고싶어요.(경기수하중3학년임모군)   3. 스트레스 풀곳이 없어요. 학교갔다 학원갔다 매일 공부공부…. 때리고나면 스트레스 풀리고 우쭐해져요.(서울휘문중2학년 이모군)   4. 같이 왕따시키지 않으면 내가 왕따 되니깐요.(서울영림중3학년이모양)         그야말로 똥누는놈 주저앉히고 이앓는 놈 뺨치고 상가집에서 노래할 너절한 생명들이라 아니할수 없다. 그런데도 가해학생도 껴안아주어야 하고 락인이 찍혀 고등학교 진학을 망치는것도 일이 아니라거니“가해자도 피해자이다. 무조건적인 처벌보다 보호와 관심이 필요하다. 아직 어리지 않은가? 처벌이 능사가 아니다. ”이런 사이비 인권가들은 역향사유를 한다는건가?     참으로 군자들이요 흙으로 빚은 미륵보살이라고나 할가? 포섭의 리론이 성립된다면 피해학생들의 인생에 찍힌 락인ㅡ한평생 아물지 않을 심신의 상처는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가? 인간을 학대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그런 인간악을 가진 애들은 인성교육의 미달이 아니라 악질적본성으로 보는것이 상식이다.  우리 농촌에는 웬간한 마당에 비질이라는 말이 있다. 참으로 한가한 소리로 약한 애들을 죽이고있다.  한국 대학생46.1%가 “왕따”를 겪어본 경험이 있다고 하고 학교폭력배로 된 경력자70% 이상이 사회에 나가서 범죄자로 전락한다는 통계를 보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다.     나쁜 나무에 좋은 열매가 맺히는 법이 없다. 나무는 그게 무슨 종류이든 한해에 다 자라지 않는다. 중국말에《빙동삼척비일지한((冰冻三尺非一日之寒)이라는 말이 있다. 그애들의 심령속에 너무나 일찍 뿌리내린 인간악이 그래 학교인성교육이 부족하 고 껴안아주지 않아서인가? 물론 사회영향이 객관조건이 되겠지만 그들 내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수 없단말인가?     "차이에 대한 교육부족" "외부에 대한 자기방어 및 자기과시욕" "스트레스해소" "추종심리" 등이라고 종합하고 있는데 사회상의 악랄한 조폭들을 초월하는 비인간적행위의 심리바탕은 인성교육의 부족이 아니라 피속에 잠재한 기질적인 인소의 필연적인 악과라고 하면 무식한 소린가?     공부에 대한 과도한 압박감과 공부에 집중된 생활에서 그 리유를 찾기도 했다.  "스트레스 풀곳이없어요",“공부압박감에스트레스는 쌓이는데 풀시간도 없고 풀곳도 없으니 약한 애들한테 푸는것"이라고,“제대로 놀것도없고 스트레스 풀데도 없으니깐 애들 왕따시키면서 재미를느낀다", "일종의 집단놀이문화"다. 이게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가. 시에미 역증에 개배때기를 걷어차는 그런 잠시 비틀어지 심리도 아니다. 이런 방자한 구실에서 교육과 인식문제가 아니라 인간된 품질문제라는 결론을 지으면 안되는가?     학교교육이 굉장히 경쟁적이기때문에 애들이 더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주장도 내놓고있다. 어불성설도 유만부동이다. 사회는 학교보다 덜 경쟁적인가? 경쟁이 인간학대증을 낳는다는 천재적인 발상이 귀엽다. 그러나 아무쓸데도 없는 입방아로 구제 불능아들을 감싸려는 저의인지는 몰라도 좀 핑계같은 핑계를 했으면 사람들의 이목을 잠시 흐리겠는데 그도 아니니 가상할뿐이다.     인간악중에서 남을 강압하고 학대하는 그런 악을 생명의 지탱점으로 한다는 그런 인간들은 인간쓰레기들이다. 기실 약자들앞에서 거센체하는 자들은 강자앞에서는 눈물나게 비겁하며 비루한 이중인격자들이다. 종로서 뺨맞고 한강서 발구른다는 속담은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간접적반항심을 시사하는 의미도 있지만 별개의 문제이다.     "왜 학교폭력이 일어나는지 아이들에게 진솔하게 들어봐야 한다. 학교폭력을 막기위해서는 단순히 사후처리뿐아니라 평소의 인성교육에도 신경써야한다"고 말했다. 고명한 리론인듯하나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는 격이요 잠결에 남의 다리를 긁는격이다. 리론에서 리론으로 그치는 탁상공론으로서는 요란할지 몰라도 행차뒤 나발처럼 싱겁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래 인성교육은 별개로 해야만 하는가? 학교라는 인간집단속에서. 인문교육에 유조하다는 문장들을 배울때 인성교육이 동시적으로 진행되는것이 아니던가? 춤 출때 반드시 고개짓 따로 하고 엉덩이를 따로 흔들어야 하는가? 물론 이는 이로 갚으라는식으로 보복하라고 피해학생들을 부추길수는 없지만 죄는 지은데로 가야 한다.     가해자들을 전학시키는것도 능사가 아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선들 아니새랴, 다른 학교에 가면 몸에 배인 악습이 절로 떨어진단 말인가? 화살을 맞은 병사에게 겉에 나온 화살대를 잘라주고 살에 박힌 화살촉은 내과의사를 찾아가보라 하면 얼마나 고명한 의사인가? 생발가락을 앓느라 고생고생하다가 벽을 사이둔 이웃집에 아픈 발을 디밀었다. 그 집주인이 이게 웬발이냐고 호통치니 발이 너무 아파서 내보냈으니 인제 나와 상관없다고,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는 우직한자의 옛이야기도 떠올라 허구픈 웃음이 새여나온다     교육에는 감화만 있는게 아니라 강제적교화도 있는것이다. 폭력자들을 가차없이 퇴학시키거나 죄값을 법률적징계로 갚게 하고 인간이 될때까지 가혹하게 다루어 폭력의 맛을 제피부로 체험시키는것은 중요다. 소금이 짠줄은 먹어봤기에 아는것이다. 공권력의 위압감속에서 인성교육이 진행되는것이다. 순자는《인지초성본선(人之初性本善)》이라고 했지만 사실 인간들속에는 기질적으로 반인도적이고 반인애적인 인격장애자가 있고 악랄한 공격성을 가진 괴짜들이 많고도 많다.     그런 자들이 잡힌후 참회하는듯 눈물을 잘 짜는데 악어의 눈물일뿐이다. 한두마디 말에 개과천선했다고 가슴이 찡해하는것은 어리석은 오감이다. 바늘도적이 소도적이 되고 못된 송아지 뿔부터 난다는 속담을 한번 되새겨보자. 될성부르지 못한 애들을 어루만지기전에 보복의 두려움속에서 사회정의와 인간성의 륜리에 대하여 회의하면서 인격적으로 비틀어질수도 있는 피해자들에게 먼저 신경써야 상식에 맞는다. 그런 불쌍한 애들을 먼저 껴안아주고 수모와 치욕의 락인이 찍힌 심령을 보듬어 주는게 순리인데 천사인양 가해자들의 인격배양이니 년령이니 하는것은 식은차를 놓고 해바라기를 까며 한담하는격이다.     오래 쓴 밀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역시 걸레이다. 걸레를 부엌방에 생주와 함께 놓아두는 사람이 있는가? 승냥이는 양우리에 함께 넣어둘수록 양들만 피해를 본다는 도리가 너무 심오한가? 기해자들을 안고가야 한다는데는 교육학적도리도 없지는 않으나 서서 말하면 허리가 아프지 않은 법이며 탁상공론하면 목은 쉴지라도 엉덩이에 종기는 생기지 않는다.     이리하여 학교폭력을 두고 망국병이 들었다고 개탄한는 지성인들이 많다. 색시그루는 다홍치마때부터 앉히라는 속담은 반도사람이면 다 알것이다. 한인간의 인격형상은 어릴때부터 다듬어어야 할것은 자명한 도리이다. 각계에서 뒤늦게 대책들을 마련하느라 부심하고있는데 피해자의 인명에 관한 문제이고 장원한 관점에서 본다면 새 일대들의 인격문제로서 이번에도 열렬한 론의가 호들갑으로 끝날 위험을 경고하고 나선 지사도 있다. 소잃고도 외양간은 고쳐야 하거니와 단단히 잘 고쳐야 할것이다.     어릴 때 이렇게 반목하고 원한을 가슴에 새긴 사람이 생사를 같이할 전쟁마당에 가해자와 함께 있다고 하자. 뒤에서 총질하지 않으면 량지가 있는 셈이다. 지금 한국에 만연된지 오래나 대책미달로 여전히 횡행하는 폭력, 돈을 갈취하고 좋은 옷이나 금품을 강탈하는 악행들로 교육이 병들고있다.  비정한 힘의 론리를 어릴때부터, 동족사이에, 친구들 사이에서 조장한다면 그 미래는 긍정코 암담할것이며 악순환이 되여 한 나라를 망칠 재화를 불러올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앞질러 나가는지 모르겠다.     비록 한겨레라 해도 국경을 달리하는 이국의 일을 두고 콩이야 팥이야 할 계제가 아닌줄 알면서도 계발을 받게 된다. 하여 연길시내 몇몇 소학교5-6학년 학생들과 모중학교 학생들과 담화하며 소위 “왕따” 현상이 여기에는 없는가 료해하였더니 비슷한 사정이 더러 있지만 사회문제로까지는 번져질 조짐은 아니여서 다행이나 역시 우려되는기는 마찬가지이다.     하루는 모소학교 교문앞에서 한 젊은어머니가 일학년생으로 보이는 남자애를 닥달하고있었다. 귀동냥해보니 그애가 자기애의 돈을 몇번이나 빼앗다는것이다. 심상한 일이 아니였다. 이 학교의 일학년 다른 반에도 덩치큰 한 애가 약한 애들을 죽였다 살구고 학용품들을 망가놓는거나 좋은것이 있으면 뺏는 현상이 있다고 하였다. 아직 상습적인 “폭력”행위이라 할수는 없으나 직업병탓인지 심사숙고하게 되였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꽃향기도 들어오거니와 쉬파리들도 날아들듯이 한류를 타고 좋은것도 많이 들어왔지만 나쁜것들도 많이 들어왔고 계속 들어오고있다. 못된 버러지 장판방을 긴다고 배우라는것은 아니배우고 못된 짓부터 잘 배우는게 아이들이기도 하니까, 이국 학교들에 만연된 그런 지랄만은 우리의 순진한 학생들이 따라 배우지 말기를 속으로 비는바이다.                                                                                                       2011년11월16 일
77    (교육칼럼)인격배양문제초고 댓글:  조회:9307  추천:2  2012-01-12
                                          1. 문제의 제기       개혁개방시대에 진입하여30여년, 상품경제모식에로의 급전환, 사회분배체계의 대분화, 외래문화의 침투, 사회상의 온갖 부패현상 등은 사람들의 사상관념, 가치취향, 도덕기준을 크게 헝클어놓았다. 하여 진짜와 가짜, 미와 추, 선과 악에 대한 도덕적판 단에 비리한 영향을 생성시켰다. 이런 사회대환경은 학교덕육소환경을 점차 오염시켰으며 정치사상교양과 륜리도덕교육에서 덕육의 목표, 내용, 방법, 방식에 대하여 탐구과제가 제기된지 오래나 그 해결이 묘연하다.       2.《합격된 중학생》덕육목표       덕육목표에는 전면적인격발전이 전제로 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학교교육의 덕육현황을 본다면 의연히 정치리론의 주입과 암기, 시험점수, 각종 규장제도에 대한 약속력 등이 도덕륜리교육의 완성화 내지는 결과로 묵인되고 그로서 자족하고있다.  덕육을 단순히 정치화라고 생각하는것은 역시《극좌》사상의 관성, 후유증이라 해야 할것이다.       만약 리론설교에 력점을 두고 점수만 추구한다면 현대청년학생들의 자신발전의 심리수요를 도외시하게 되고 덕육과정에서의 개체의  도덕사회화와 사회도덕의 개체화, 량자간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보다높은 차원에서《합격된 공민》양성을 새 목표로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합격된(사회주의) 공민을 양성한다는것은 학생각도에서 문제를 사고하던데로부터 점차 공민의 각도에서 사회도덕문제를 사고하고 판단할줄 알게 하는 덕육의 최종목적을 실현하는것을 말한다.       학교덕육은 전반 국민도덕교육의 중요한 구성부분이자 그 기초로 되여있기때문에 국가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시대 청년학생들의 도덕관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있는가?       세계적범위에서 덕육의 추세는 언녕 사회화에로 나갔다. 그런데 우리가 의연히 리론에서 리론으로 그친다면 경쟁의식이 소용돌이치는 현대사회에 적응할수 있는 인재를 육성할수 없을것은 자명하다. 때문에 덕육의 목표를 시대적차원에로 끌어올려 인격배양에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해본다.       3. 덕육의 핵심문제      《사람은 오직 교육을 거쳐야만 사람이 된다.(칸트)》교육에서 사람을 육성한다는것이 바로 후자인 인격적인간이다.       오래전 전국을 들썽하게 한국기업주 김진선이 고용로동자들더러 무릎을 꿇게 한 사건에 대한 일부 대학생들의 도덕적가치판단은 실로 경악과 우려를 자아내지 않을수 없었다. 100명 중국로동자들이 한국기업주에게 무릎을 꿇은 사건에 대하여 광주 모대학의 96년급대학생들이 토론을 벌리였는데 그들의 언론은 참으로 우리를 심사숙고하게 하였다. 그때 그들의 언론을 회고해보자.     《무릎을 꿇었다는 그 행동으로 말하면 어느 누구에게 무릎을 꿇은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하여, 금전에 향하여 머리를 숙였을뿐이다. 이는 슬픈 인생일망정 결코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다.…》     《무릎을 꿇었다는것은 손천사(유일하게 무릎을 꿇지 않은 청년로동자ㅡ 필자주) 보다 더 용감하고 더 용기가 수요되는 일이다.》     《한사람의 잠시적굴욕은 한집안의 안녕과 포식을 안겨준다. 그래 속이 빈 몸으로 민족자존을 살릴수 있단말인가? …>등       이런 사이비한 가치판단에 실망한 선생은 옳바른 면에로 이끌려고 자기의 견해를 칠판에 써놓고 동의하는 학생은 손을 들라고 하였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80여명 학생들중에서 5-6명이 겨운 손을 들었고 나머지 학생들은《와》하고 웃었다. 물론 대학생들의 웃음에는 그들로서의 리유가 있었을것이고 또 이런 사건에 대한 도덕적가치판단이 전반 대학생들의 도덕가치를 대체한다고 단정할수는 없지만 아무튼 시대의 비극이 아닐수 없다.       일찍 미국의 정객 덜레스가 《평화적이행》이라는 악명높은《예언》을 내놓은후 자기들이 야망을 제3세대4세대에 기탁하면서 호시탐탐 노리고있다는 사실을 젊은 세대들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높은 도덕적각오에는 고상한 인격이 안받침되여있다. 자고로 충의지사들은 지성인이였고 우국우민의 고귀한 덕성은 륜리도덕과 갈라놓을수 없었다. 그런데 평화적환경과 행복의 요람에서 고이 자란 청년학생들은 자아주체, 자아중심의 경향이 극단에로 나아가고있다.       하다면 덕육과정에서 어떠한 인간상을 부각시킬것인가?       첫째, 자타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할줄 알며 남을 생각해주는 인정미가 있는 후더운 인간.       둘째, 밝은 사회가 수요하는 성실한 품성을 지녀 맡은바 소임을 책임껏, 열심히 하는 실질적인 사람.       셋째, 자존, 자주, 자애, 자강의 정신이 있고 굳센 의지를 지녀 역경을 헤쳐 나갈줄 아는 진실한 사람.       넷째, 공익과 헌신정신을 발휘할수 있으며 관용과 아량이 있으면서도 품위가있는 사람.       다섯째, 주견이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신의를 지키는 충성스러운 사람.       여섯째, 창조적의력으로 충만되여 자기 운명에 도전하며 협동정신이 있는 운치있고 슬기로운 사람.       일곱째, 애증이 분명하고 불의에 떨쳐나설줄 알면 정의를 위해 용감히 싸우는 고매한 성격의 사람.       여덟째, 렴결과 봉공을 인생척도로 나라와 민족의 진흥에 한몸을 바치려는 웅심이 깊은 사람.       상술한바와 같이 미덕은 인격형성의 주축이 되여지고있다. 미덕은 도덕의 집합이고 도덕의 기초는 인간의 자률정신이다. 미덕에 대한 자발적추구가 없다면 완정한 인간이 될수 없듯이 인간의 심미의식은 그 사람의 일정한 사회실천경험, 민족문화심리 등 제요소의 영향을 받게 되는바 옳바른 심미관수립은 인격형성의 죄표로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때까지 도덕완성의 자률정신배양을 유의무의하게 홀시해왔다. 자률정신배양에서 다음 몇개 방면에 모를 박아야 할것이다. 우선 륜리규범이 학생들 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것이라면 리성적천명은 어째서 그리해야 하는가를 납득시키는것 즉 해결이다. 이는 도덕적판단능력배양의 전제로 된다.       지(知)와 능(能)은 불가분리적이긴 하지만 도덕규범을 알고있다는것과 도덕 문제해결능력이 있다는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덕육은 주입이 위주가 아니라 부단히 자극하고 계발하면서 피교육자들로 하여금 적극 사고하게 하고 상응한  도덕 기준으로 자아인격을 형성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다음 독립성, 창조정신의 배양이다. 도덕의 선택방식에는《습관형,량지형,리지 형》이 있다. 습관형도덕선택방식의 특점은 여러 사람의 시비표준이 되고 권위의 시비표준이 곧 자기의 시비표준이 되여져 독립자주적 판단능력이 결핖한것이다. 이는《전형적인 중국전통적도덕선택방식》이며 또 우리청년학생들이 흔히 취하는 선택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권위라하여 절대적으로 미신하지 말고 자기의 경험, 자아 리성, 자아반성으로 분별, 판단할수 있도록 잘 이끌어주는것이 자못 중요하다.         4. 인격배양으 경로문제       자고로 덕이 높은자는 고상한 인격자였다. 우리가 양성해야 할 인간은 현대적인 인격자이므로 마땅히 시대적특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아래에 필자의 천박한 체득을 피력하려 한다.       1) 덕육은 사회발전과 변화에 긴밀히 련계되여야 한다.즉 재래의 덕육내용, 방식, 방법에서 해탈하여 일련의 사상, 도덕문제에서의 곤혹을 잘 풀어주어야 한다는것이다. 이를테면 사회주의특색의 현대화와 부패현상을 어떻게 분석할것인가? 개인발전과 공익과의 관계, 상회경쟁과 협동 정신을 어떻게 정확히 처리해야 바른가?       2) 덕육의 목표와 학생들의 심리를 긴밀히 련계시켜야 한다. 청년학생들은 취업, 련애, 개인발전,치부 등에 대해 사회인과 마찬가지로 민감하다. 따라서 사회상의 도덕충돌은 이들의 심령속에서도 진행되고있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학생들은 일단 학교문을 나서면 망연자실하고 속수무책이기가 일쑤다. 한것은 졸업증, 학력, 취직을 위한 공부만 했기때문이다. 그로써 자신의 향상정신에 만족을 얻을지 몰라도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인 자기 발전이나 사회에 기여하는 창족적인재로 되기엔 손색이 있는것이다.       현대청년학생들의 심리속에는 무관심, 무감동, 무흥취 등 심리공백이 많다. 그러므로 학교가 자신의 범위내에서 공부를 잘하고 규률을 잘 지키는 이른바《합격된 학생》각도에서만 사고하고 리론전수로 목적에 도달하려 한다면 시행착오이다. 그저 봉페식관리에 만족하지 말고 대학생들로 하여금 생활속에 침투시키고 사회화에 접근시켜야 장래 각종 모순충돌속에서 능란하게 처사하고 해결핤수 있는것이다. 한마디로 정치리론은 참다운 인생관을 수립시키기엔 너무 창백하다는 말이다.        3) 교육주체의 자아실천의 통제학교도덕교육과 교육자아실천의 탈점을 시급히 통제해야 한다. 교육의 취지가 전 면발전이지만 당면 교육의 실태를 보면 의연히 점수통수이고 민주의 기치 및 의의를 날마다 말하지만 교원의 권위가 절대적이고 독단독행한다. 특히 번다한 수금현상은 학생들의 심령에 오도된 가치관념, 금전위력을 락인찍어주고있다.      4) 덕육사업과 학생심리발전수요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야 한다.덕육사업자들은 학생들이 무엇을 듣고싶어하는가, 무엇을 가장 많이 말하는가, 현재 어떤 구체적곤난에 처하여 있는가? 등 문제의 해결에는 아랑곳없이 그냥 한본새로 각종 정치리론주입에만 자족한다면 사실상 학생들이 거부감을 가질뿐 자각적인 인 격수양을 이끌어가는데 아무 도움이 안된다.       교육자와 피교육자는 높은 문화층차를 배경으로 한 인정세계에서 동등한 인격의 성원이 되여지고 학교는 곧바로 지식전수와 더불어 평등한 삶의 의미를 나누어가지며 보람있는 인생을 준비하는 의로운 장소로 되여야 덕육사업도 잘 될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정치사상교육과 기본공덕양성을 병진시켜야 한다. 일반 사회공덕이 높다고 해서 정치각오가 높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도더적으로 고상한 사회공민이 될수는 있다. 이는 되돌아와서 정치사상교육으로 인격발전을 대체할수 없다는 설명이 되 기도 한다.       자기본위, 자아실현만이 실혜적이라는 인생관  및 가치취향이 시대사상인듯이 착 각하고있는 현시대야말로 인성의 회귀, 인간성의 발굴, 인간성의 함양이 절실히 수요 된다는것을 리성으로써만이 아니라 정감적으로 터득시켜야 처세술, 처세의 도리, 사교술, 공공관계처리 등이 능하고 보다 완미한 인격자로 거듭날수 있다.       현대교육의 시대적추세는 어디까지나《진리의 광명으로 인간심령을 밝혀준다》 따라서 교육자는 지력적, 체력적, 도덕적, 정감적, 심미적 제방면에서 가능한것, 환성된것, 인격적인간을 양성해야만 덕육사업이 성공적이라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2011년12월10일 수개
76    현대시의 곤혹 댓글:  조회:11039  추천:5  2011-11-08
         문학의 저조기라 일컫는 이 시대, 갈수록 현실과 동떨어진 문학, 독자를 외면하는 창작, 특히 현대시는 독자를 의식하기보다는 무시하고 멋대로 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 원인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요는 시인 스스로가 독자와의 사이에 단절의 담을 쌓고 소통과 공명에 신경쓰기보다는 자아도취의 상아탑속에서 스스로 자리매김을 하고 자족하고 있다는것이다.         현대파시를 표방하면서 정제되지 않은 과도한 이미지의 수사학이나 리해불가의 시들이 판을 치는 시단의 풍경에 독자들은 언녕 실망을 숨기지 않는다. 서정성을 생명으로 하던 시들을 낡은것이라고 부정하는 경향에 마주하여 문학은 반드시 어찌 되여야 한다고 론단할수는 없지만 시인들 스스로 비평적사고를 할 필요가 있을것 같다.        시의 소통부재, 공감부재를 우려하지 않을수 없는 이 시대에 진실한 삶의 의미를 읊고 철학적사고를 시창작의 취지로 내세우고 삶의탐구, 인생의 성찰을 보여주는 시, 진실한 시적경지와 예술적희열을 선물하는 시가 희소하기때문이다.       현대시라도 시인은 괴이함, 애매모호함에 심취하기보다는 시인 나름의 관찰과 사색을 시에서 형상화하려 애쓰면서 그 노력이 보다 많은 독자들의 흉벽을 두드려 공명의 대문을 활짝 여는게 바람직하지 않을가? 하고 무모한 곤혹을 굴리지만 해답이 명랑하지 않다. 물론 시가 도구로 전락되였던 시대로 돌아가지 말아야 하겠지만도 자연과 고향과 우리 주변의 인물들과의 정서합일은 진정 서정시가 독자를 불러들이는 길이고 그것이 시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말하고싶다.         재래의 경물시가 다 심오한 사색으로 채워져있은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의 오감에 와닿은 그것이 시인 개체의 아름다움이나 감동, 슬픔이나 혹은 고통만이 아니라 그 정서와 사색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정서적촉동을 받게 하는것이 시의 생존리유가 아니며 공간이 아닐가싶다. 인간의 삶의 현장, 심리심처의 활동에 대한 투시는 시인이 선 위치와 가치취향에 따라 달라진다. 기실 정태적자연경물의 재복사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배경으로 재조명하는것도 의미롭지 아니한것은 아니다.        시적동기와 창조된 시적경지는 시인의 새로운 시각과 창조의 열정은 어찌했든 현실생활, 인간의 공통된 심적상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수밖에 없다. 고요한 달밤 농가의 퇴마루에서 부는 젓대소리에는 연주자의 생명운동의 절주가 고스란히 담겨 있지만 그 정겨운 소리를 듣는 사람의 흉금에 감동이 일지 않을수 없다. 시의 예술적효응도 젓대소리와 같다면 결코 독자를 잃어버린 비애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시인의 시적상상이 자연과 현실, 대중을 배경으로 한 시라면 그것이 독자의 심금과 어우러짐은 시가 문자폭력이 아니고 삶의 골짜기에 잠복해있는 감동성, 다시말해 평화로운 일상을 동경하는 독자들의 가슴을 마술같은 힘으로 휘여잡을것은 틀림 없다.  요지경같은 현실과 인간의 조우와 인생의 의미와 진실을 재구성하고 현실에 대한 시적인식으로 변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것을 누군들 말리랴!        시의 현실반영은 시적대상의 외양과 속성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시인의 시적세계와 대상에 대한 깊고 넓은 주관성이 전제이다. 시적자아가 외부세계와 다양하게 만나면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가는데 이것이 현실반영만이 아닌 투시력을 과시하는 시의 성공여부를 결정짓는다.        시인은 삶의 현장을 남다른 시각으로 직시하며 그것을 시로 읊는데 이는 시인의 일상에 용해되여 있던 환경과 대상을 전시하면서 동시에 의미롭고 순결한 순간들을 독자의 마음밭에 옮겨심음으로써 생명의 의의를 환기시켜 친구같은 시적대상으로 접수시킨다.  자신만의 사색의 공간, 감탄 혹은 흐느낌일지라도 자기가 몸담그고 있는 인생현장의 구석구석을 눈빛질하며 동시에 시적경계를 펼쳐 소통하고자하는 노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인의 벗어버릴수 없는 숙명이다.        우리들 삶은 평범하기도 하지만 시각을 달리하면 미처 발견하지 못햇던 저마다의 사연들로 심각하게 엮어질수 있다. 보통의 인간심리와 일상이 중복되는것이 삶이지만 시인은 이 복잡하고도 미묘한 삶의 순간과 사건과 감정들을 절묘하게 긍정으로 빚어낸다는데 남다른 재능이 현시되는것이므로 독자가 수수께끼를 풀도록 글재주를 피우는것은 시인으로서는 보람없는 잔재주에 불과한것이다.        인간의 삶에 중뿔난것이 있으며 정감에 특수라는게 있는가? 날마다 생계로 동분서주하고 리기심에서 얼굴을 붉히고 흰술에 된장찌개를 안주로 하며 취한김에 노래가 절로나오는 그것이 민초들의 삶이다. 싫어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그 일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남다를수는 있어도 애매모호할수는 없다.        현대 시인들은 자아도취에 빠지면 안중에 독자가 없다. 그래서 정감이 넘치는 수식어를 동원하는것이 아니라 될수록이면 엄청 낯설게 만들기에 골머리를 짠다, 그런데 그런 문자조합을 미화시키는것만으로는 독자들의 시예술에 대한 관성비슷한 정서와 시적흥분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현실이 이것을 증명하고있다.      시에서의 재치있는 비유와 심오한 상징과 형용사에는 세상에 대한 체험과 사색이 녹아있어야 한다. 그것이 봄바람에 부푼춘심이든, 남산에서 아물거리는 아지랑이든, 잃어버린 님에 대한 애상이든, 신비한 밀어이든, 시인이 세상을 두루 탐지하며 쌓은 기억장치가 어느 순간 활 풀리면 결국 세상에 대한 인식의 표출이며 생명활동의 단면도로 펼쳐진다. 그러나 시인의 관심사는 혼자만의것이 아니라 될수록이면 많은 독자의 공감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설명이 되겠다.        일상의 대상들을 관조하는 시인의 독특한 시각에 의해 시속에서 하늘, 별, 바다, 산, 나무, 풀잎 등 자연물이 새로운 생명체로 환기되고 또한 보통인물들이 등장함으로써 삶의 친숙함과 정서적인감각들이 고스란히 전달되여야 시답다는 말이다. 이러한 시적특징에는서정 혹은 철학적사색, 세계관 내지는 미적의식이 바탕이 되여 있음으로 하여 시가 존재리유를 확보한다. 시적대상물은 처음에는 시인 혼자의 감각대상이지만 그냥 전유물로 남는다면 그 시는 존재의 가치를 잃고만다.        전통적정서의 맥을 이어가고있는 시인의 예지를 진부하다고 보는것은 설득력이 없다. 자연을 시적소재로 한 서정시, 그보다 평범할수 없는 민초들의 일상과 정서, 혹은 향수의정, 모성애, 심층적정서까지 담은 시들이라 하여 자연을 옮긴 시, 진부한 시라는 관념은 성립될수 없다. 경물을 소재로 한 시가 갖는 한계점을 어떻게 극복하는냐 하는 문제는 시인의 재능문제이지 전통시의 원죄가 아니다.         작고 하찮은것까지 다루는 시인의 세계관은 자연성은 물론 서정의 범위를 넘어선 확고한 자기 신념을 설득력있게 펼쳐보일수 있다. 경물이 시적대상일 경우라도 강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본질외에도 새롭게 형상화할수 있는 가능성도 소실된것은 아니다.        시인에게 있어 독특한 깨달음은 시적령감의 성취이자 시창작의 기본정신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감동되고 그 감동을 시적정서로 전환시키는 시인의 격렬한 정서파동, 사색의 모대김은 깨달음이자 동시에 성스러운  사명이라 할것이다.        세상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일반인과 다르지만 시인의 심미희열은 미처 보지못했거나 경험하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한 독자들에게 시읽기의 즐거움을 전해주는데 귀결된다. 우리가 스쳐지나는 일상에서 시인이 생에 대한 또 다른 깨달음, 내지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것은 그동안 쌓은 삶의 경험과 철학이 바탕이 되기때문이지 세상에 없는것에 대한 발견은 아니다.        모두의것, 공통된것을 시적소재로 잡기 위해서는 진실된 체험을 전제로 하는데 시인이 성스러운 눈길로 바라본 시세계에 사람들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고 사물에 불어넣은 생명현상을 제시해준데 감탄하고 고마움을 느끼게 한는것만큼 시인으로서 더 보람찬 일이 있을가?        낯설기만 한 언어조합,수수께끼로서가 아니라 진한 사람내음이 묻어나는 사색에 정감이 슴배여 있어야 음악같은 서정시이다. 그래서 시는 덕담이 되고 예술이 되고 미학이 되는것인지도 모른다. 하얀꽃'이든, 몽롱한 꿈이든, 인간냄새가 나는 정으로, 삶의 미학으로 전달하는 시인의 창조성은 그래서 일반인이 미칠수 없는 선각자같은 깨달음이며 예술경지이다.       우리의 삶은 어디까지나 실재적인것, 효용가치가 있는것에만 습관되여 왔다. 독자의 환영을 받는 시는 소박하고 독자의 심미능력을 시험하지않고 자연스럽게, 그렇듯 익숙하게 받아들여진다. 괴이한 억지사색과 표술로 하여 시의 미적균형상 파괴는시적대상을 따뜻하게, 섬세하게 들여다보면서 시적미와 존재의 신비한 현상을 흔상하는데 눈가리개가 된다. 존재의 보편성과공동지향성을 굳이 파괴해야 새로운 시창작이라고 맹신하는 시인은 생생한 인생현장을 깊이 투시하고 평범한 존재들의 아름다움을 발굴해 내고 그것을 섬세하게 보여주는데 흥미가 없는듯 하다.         시인과 시적대상이 하나가 되여야 할것은 물론, 분출되는 시적정서는 시인의 깨달음의 농축만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의 현시를 통해서 독자는 미지와 기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또 다른 깨달음을 획득하게 할 기회에 기뻐한다. 독자를 마다하는 시창 작자가 있을가? 누구나 독자의 공감대를 울릴 걸작을 시도할것이며 시적정서로 어렵지 않은 시어의 최적의  조합, 친숙한 소재들로 심미구심점을 노려야 한다.        부단한 시개혁정신으로 나름의 독자세계를 개척하는 시인만이 각박해지는 문학소비생활에서 소외당하지 않고 곧 잊혀지는 시인이 되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자아감각에만 집착한다면 문제는 달라지며 독자를 실망시킬뿐이다. 자연의 소중함, 주변 사물과 혹은 정서적가치를 도외시하거나 그것들과 동떨어진 심경에서 시적성취를 추구한다면, 독자에게 기대려하지 않는다면 협조와 조화에서만 가능한 문학소비가 그저 희망사항으로 남을 일이다.        너무 많은 홀시된것들, 잊혀진것들에서도 예술적향수가 될것들을 찾아내는 그 시적안목은 고귀하고 성스럽다. 이로 인하여독자는 시인의 혜안이 투시하고 있는 숭고하고 성스러운 예술경지의 창조에 존경을 품게되는것이다. 현시대의 재빨리 소실되어 가는 따스한 인정과 선량, 그리고 삶의 기본정신을 시에서 편달하는 시들은 시인의 성실하고 진지한 시정신에서만 가능하다. 문학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는 이 불확실한 문학의 화원에서 시대를 앞장서 이끌어가는 시적정신, 진정 문학의 새로운 길을 인도하는 시인의 구도자적사명이 필요한 때, 참된 시창작의 한길을 걸어가는 시인들에게는 독자들이 존경의 마음을 앞세우고 줄쳐오리라.                                                                                                              2011년5월23 일
75    잠타령 댓글:  조회:9756  추천:0  2011-08-25
                                                                               잠타령                                                                               최 균 선                                                          추야장 긴밤 월색도 처량한데                                                          창밖 단풍나무잎지는 소리에                                                          어즈버 잠 못이루는 로옹이라                                                          떠오르나니 잠타령뿐이로구나.         누군가 인생을 평균70년으로 치면 20여년을 잠자리에서 보낸다고했다. 인생의 1/3의 세월만큼 인생을 허송하는것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가석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고해속에서 자맥질하는 나약한 인간에게 주어진 안식으로서 지쳐버린 육체와 정신에 새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다사분주한 이 하루도 자고나면 세월의 락엽이 되고 고달픈 심신에 새 잎새가 활기차게 살아나게 된다. 그래서 잘자고 나서 달콤하게 잤다고 할게다.        인간의 수면자세는 다양하다. 자는 모양새를 어떤 대상물과 비교하여 말할 때 온몸을 오그리고 옆으로 누워자면 개잠이요 갓난아기가 두팔을 머리위로 벌리고 자는 잠은 나비잠이요 옷을 입은채로 자면 등걸잠이요. 꼿꼿이 앉은채로 자면 말뚝잠이요 새우처럼 몸을 꼬부리고 자면 새우잠이요 토끼처럼, 깊이 잠들지 못하고 아무데서나 잠깐 자는 잠은 토끼잠이라 일컫는다.        말뜻에 따라 이름하면 아침에 깨였다가 다시 든 잠은 두벌잠이라 하고 묶어가도 모르게 깊이 든 잠은 귀잠이요 한낮에 자면 낮잠이요 남의 발치에서 자면 발치잠이요 날샐녘에 겨우 잠들면 새벽잠이라 이른다. 초저녁부터 일찍 드는 잠은 초저녁잠이요 잠든지 얼마 안되여 옅은 잠은 풋잠이요 한데서 자면 한뎃잠이요 잔둥만둥하면 선잠이요 막 곤하게 금방 잠들면 첫잠이요 아주 달게 자고나면 꿀잠이라 한다.        몰래 잠들었다 깨는것은 도둑잠이요. 잠시잠깐 눈붙이고 난것은 쪽잠이요 비좁은 공간에서 여럿이 모로 누워 불편하게 자는 잠은 칼잠이요 너무 피곤하여 아무데서나 쓰러져 자면 멍석잠이요 기차칸이나 장도뻐스안에서 앉은 자리를 어른에게 양보하기 싫어서 잡지로 얼굴 가리고 자는체하는 잠은 야살궂은 꾀잠이다.        어떤 자세로 자든 잠의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은 정보처리와 갈등해소 기능이다. 이것을 담당하는게 꿈이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상당 부분을 잠자고 꿈꾸며 살아야만 한다. 사람의 꿈은 과거의 기억을 정리, 분류, 삭제, 저장하는 일을 담당한다. 쓰레기와 같은 과거의 기록을 모두 떠안고 살아간다면 그러잖아도 복잡한 인생이 얼마나 고달파질까. 꿈을 통해 사람의 뇌는 필요하고 유용한 기억을 저장하고, “쓰레기기억”을 삭제하게 된다.        성인은 꿈을 안꾸는 날도 있으나 대개20~25%가 꿈이고 아기의 잠은 절반 정도가 꿈이라고 한다. 이 시점에서《잠을 자야 꿈을 꾸고 꿈을 꿔야 님을 보지》하며 가슴뜯던 옥중 성춘향이 잠시 잠간 잠들어 오매불망 그리던 리몽룡을 꿈속에서 해후한 잠은 노루잠이지만 그에겐 다시없는 가장 행복한 시각이였을것이다.        대관절 잠이란 놈은 어찌타 그토록 불가항력적인가? 아직까지 잠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 대개 무의식상태에서 눈을 감고 쉬는것으로서 여러가지 운동, 감각 및 생리적기준들을 만족시켜주는 경험의 수렴(收敛)점일진대 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피로회복으로서 수면중엔 신체의 모든 기관이 휴식상태에 들어가고 낮시간에 축적된 각종 피로물질이 분해된다고 한다.        허구헌날, 매 하루는 잠에서 깨여나는것으로 시작되고 잠에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사랑이 인생의 주제라면 잠은 인생의 기본내용이 된다. 그러면 잠이란놈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가? 보통 수면은 죽음만큼 강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죽음은 최고 의 두려움이다. 그렇더라도 말려낼길 없는 인간의 성욕, 식욕, 수면욕중에서 가장 견딜수 없는것이 그래도 수면이 아닐가싶다. 졸음이 실린 눈까풀이 천근같이 무겁다는것을 누구나 체험해보았을것이다.        흔히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한다.사랑의 힘은 그처럼 유혹적이고 강렬하지만 사람을 직접 죽이는 힘은 없다. 사람이 그것을 이겨내려 하지 않을뿐이다. 어떤 리유에서든 불면증의 괴로움은 성유희상대가 없는 정황과는 비길바가 아니다. 불면의 고통은 사람이 겪는 가장 혹독한 경험중 하나다. 강제로 잠을 못자게 하니 각종 호르몬체계가 교란되고 면역력이 극도로 떨어져 사망했다는 동물실험 결과도 있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이 시대 현대인들은 불면증과의 싸움에 지치고있다. 평소에 잠을 못자면 육신이 물먹은 솜처럼 된다는것은 누구나 경험해서 잘 아는 상식이다. 일반적으로 잠이 부족하면 피로, 집중력 저하, 짜증, 환각, 망상, 공격성 증가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그런데도 본능적으로 잠의 깊은 늪에 빠지려하는 사람에게 몇백촉의 전등불빛을 비춰대며 강압적으로 련며칠 눈도 붙이지 못하게 하며 심문을 들이댄다면 그보다도 더 잔인한 인권유린은 없을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불철주야의 사업이라 말할것이다. 우리는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많이도 본다. 그게 어찌 영화에만 있는것이랴. 영화는 현실의 재현이 아니겠는가? 가해자 자신도 하품을 하면서도 인간의 본능이고 욕구인 수면의 자유와 권리를 강탈하는 행위를 그저 악착하다고 하기엔 너무 빈약한 표현이리라. 왜냐하면 그런 인간상을 표현할 말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때문이다.         일언이페지하고, 나는 잘수 있는데도 잠못드니 행복한 괴로움을 자초한것이지만 그가 누구이든간에 강압으로 자게 못해서 죽을맛인 그런 피해자들의 최저의 인권보장을 위해 기도하면서 게으른 하품에 인생일사의 허무하고 황당함을 날려버리는게 마음 편할것이라 이만 아무결과도 없을 생각을 접어두련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이 시조는 고려시대 문신 이조년의 다정가(多情歌)로 객관적 상관물인 리화 (梨花)와 자규(子規)를 통해 봄밤의 애상적인 한과 정서를 시각적, 청각적으로 노래하고있다. 시조에서처럼 다정한이 아니더라도 이래저래 잠못이루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 고달픈 인생들이 얼마나 많을가, 싱거우리만큼 오지랖 넓지만 장가도 못들고 추거운 베가에 한숨을 태우는 조선족농촌로총각들을 떠올리게 된다.         안해의 잔소리에 범벅이 된 사랑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인생도 헛산것이 된다. 그냥 하루의 일과같이 나누는 부부의 성애마저 누리지 못하는 웅성의 심신의 괴로움인들 오죽하랴! 정애에 주려 밤마다 잠못든다면 인생의 연장선이 아무리 길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흔적이 남을것인가?         …추색이 각일각 짙어가는데 용케도 살아남은 부나비 몇마리가 하루밤 정사에도 사생결단하는듯 전등을 싸고돌며 란무하누나. 타향의 단간방에서 오늘도 불면증에 시달리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굴리고 몽글리다가 별볼일없는 글을 이렇게 몇줄을 끄적여 보았다. 적어봤대야 아무도 읽지 않을 잡담에 불과하지만도…….                                                                                                 2010. 10 월 5일 황도에서
74    인생수사학 댓글:  조회:8345  추천:2  2011-08-05
                                                                                                 인생수사학                                                                                                          최 균 선          인생을 왜 수사학으로 풀어야 하는가? 인생을 수사학적으로 터득하면 첫째, 세상을 보는 눈이 더 밝아질것이며 둘째, 사색의 내용이 더 풍부해질것이며 셋째, 더욱 생동하고 형상적으로 자기 의사를 나타내여 듣는이와 소통이 더 잘 될수 있는바 어휘적수법이든 문장론적수법이든 인생의 참 의미가 더욱 투철해질수 있다.        세월은류수같고시간은살같고인생은 바람같고 세상은 구름이요 운명은 달빛, 인생은 일장춘몽같고 지리멸렬한 유희같고 인생현장은 경기장같고 희비극이 연출되는 극장같고 생활속은 장마당같고 각축장같고 바둑판같고 도박판같고…아름다운 화원 같기도 하고 해수욕장같고…락원같기도 하고 련옥같기도 하고…        인간의 양상은 어떠한가? 천층만층 구만층의 인간군속에는 부처같은 사람도 있고 아닌보살도 있고 면양같은 사람도 있고 승냥이 같은 자도 있고 여우같은 자도 있고 독사같은 자도 있고 소처럼 충직한 자도 있고 나귀같은 떼쟁이도 있고 돼지처럼 탐욕 스러운 자도 있고 개보다 못한 자도 있고…각양각색, 류류별별의 인간상을 이루다 말 할수 없지만 우연의 왕국에서 왔다가 필연의 왕국에로 돌아가야 하는 과객들이다.        민심은 천심이요 민중은 사회의 주추돌이요 로동인민은우리에게먹을것과우리 의 몸을 가리워줄옷을 만들어주고우리가안식할 거처와 침대를 만들어주는구세주 같은존재들이다. 그러나 농사짓는 농민들은 촌바우고 촌닭이고 시대락오자, 무지의 대명사로 되였있다.기실 조상3대이상을 거슬러 올라가 욕하는 셈인줄 모른다.         인생자세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 손바닥에는 운명이란 말을 쓰고 손등에는 의지라는 말을 쓰라. 그리고 주먹을 꼭 쥐고 앞으로 나가라. 이렇게 주먹을 쥐면 손등의 의지가 손바닥의 운명을 좌우할수 있다. 이 말은 간접인용법으로 남의 말을 빌려다 쓰는 수법이다. 손바닥에는 정감이라는 말을 쓰고 손등에는 리성이라는 말을 쓰고 주먹을 거머 쥐라. 그러면 손등의 리성이  손바닥의 정감을 조절할수 있다라고 한다면 앞에 말을 모방한것이다.          인생기술이란 불충분한 전제에서 충분한 결론을 찾아내려 아득바득하는것이다. 인생은 등산로,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것이다. 자기 그림자에 자기가 쫓기는 삶은고달픈 삶이건만 우리는 자기 그림자를 밟으려 내달리는 아이들같이 그냥 술래잡기를 한다.         인생마당은 도처에 진흙탕이다. 그러나 주변이 모두 흙탕물이여서 자신도 깨끗지 못하다는것은 자기 변명이다. 운명은 항거할수 없기도 하지만 만들어 지기도한다. 금수는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만포식밖에 모르지만 사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것을 생각하며 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하려고 애쓰는 존재이기에 고귀한것이다. 빅토르 프랑클은《인생이 당신을 위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묻지마라. 그대가 인생을 위해 어떤 의미를 창조해나갈것인가를 오히려 인생쪽에서 당신에게 묻고있다.》라고 쓰고있다.        즐거움은 잠깐이요 고통은 길다. 그것이 인생이다. 기쁨은 머물지 않고 날아가 버린다. 주체는 외부세계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화시킴으로써 그성과 위에 자아실현을 이룩해 나간다고 했다. 죽은 물고기는 떠내려가지만 산물고기는 강을 거슬러올라간다. 인생은 다만 내마음의 느낌에 따라 달라진다.        돈과 씨름하는 이 시대의 가장 큰아픔속에서 인생이 숨가빠진다. 땀흘리지 않는 자는 삶을포기한자요, 시련을 두려워하는자는 인생의 진미를 알수 없다. 나를 위하여 땀을 흘리고, 이웃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려야 한다는것은 대도리이지만 적어도 사회인의 자률을 시사한다. 작은 어려움은 오기로 버티고 큰 어려움은 반발심으로 버티고 더 큰 어려움은 희망으로 버텨야 한다. 돌밭에서 발굽이 굳어진 짐승은 어떠한 길도 질주할수 있다고 했거늘 역경을 이겨낸 사람만이 인생철학을 터득한 사람이다.        사랑의 청초가 없으면 인간세상은 사막이 될것이다. 이는 은유이다. 인생에 은유적으로 표현할 현상이 기지부수이다. 가재는 게편이라 끼리끼리 짜고들면 흰것도 검은것이 되고 검은것이 흰것으로도 되는 세상이다. 풍유적인 현상도 많다. 자식 뒤바라지를 한다고 한국에 나갔다가 산돼지 잡으로 갔다가 집돼지 잃는격의 현상도 가슴아프게 한다.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 여건도 마련되지 못하고 도시진출을 하다보니 항구적인 가원을 잃고 한지에 방아를 거는 사람도 많고 많다.        인생현장에서 가장 류행되는것은 과장법이다. 원래 과장법이란 감정, 사상, 사물 등을 실제보다 과장해서 표현함으로써 좀더 선명한 인상과 감동을 주고자 하는 수사법이지만 인생현장에서는 허위조작. 정적부풀리기, 허장성세 등 비리한 기량으로 악용되고있다. 과장법이 가장 정채롭게 운용되기는 잡다한 광고를 첫손가락으로 꼽아야 할것이다. 이를 소만큼 부풀리고 여기 은전 삼십냥이 없다는식의 아이러니도 비일비재로 생성되여 세인을 서글프게 하고있다.        아이러니는 어휘운용의 각도에서 특별한 곳이 없지만 아이러니가 아이러니로 되는 관건은 해석에도 있다. 인간사회는 역설적이다. 역설은 아이러니의 하위범주이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당신은 세상을 볼것이라는 말은 사색하는 인간이되여 세상을투시하라는 말일것이다. 명백히 모순되고 부조리한것을 곧이곧대로 말하기가 난처할 때 진실을 역설하라. 그것이 더 효과를 볼것이다.    사회는 자발적으로 대조법을 너무나 잘 설명하고있다. 다수는 일하고도 살수 없는데 소수는 놀고도 잘들 산다는 말은 우리가 책에서 배운 과거에만 있은 사실이 아님을 현실이 잘 보여주고있다. 극소수가 국민소득 절대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은 신문을 잘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잘 알고있다.         죄는 지은데로 가고 공은 닦은데로 간다는 속담은 뜻이 깊지만 현실에서는 무색해지고있다.  정의의 상징은 량심이요,관용의 상징은 리해심이요 조화의 상징은 평등이라고 확실하게 열거할수 있지만 국인들은 무질서가 질서이고 부조리가 조리이며 불평등이 평등이라고 믿는것이 오히려 마음 편하다고 생각할것이다.        도저히 관용해서는 안되는 비리한 사회현상을 관용한다면 그것은 프로이드가 말한 이화이고 집체무의식이다. 그 선함을 강인하게 지킬수있는 힘이 없다면 세상은 악으로 가득찰것이다. 원님은 불을 질러도 일없고 백성은 초불을 켜도 안된다는 속담을 만들어낸 우리 선조할아버지네가 참으로 지혜롭다. 하지만 황당한 세상이라 황당무계함도 공공연히《진리》가 되는 현실인데 누가 외우고 다닌단말인가?         작고한 한국의 한 수필가는 ‘펜은칼보다강하”다고 선언하고 다음같이 쓰고있다."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그친다. 우리에게는 현실의 가려진 허위를 벗기는 이성의 빛과 공기가 필요하다. 진실은 한사람의 소유물일수가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생명인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써야 했다. 쓴다는것은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정의로운 그의 글짓기 자세이지만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보다 언제 무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생을 수사학적으로 해석하면서도 마을에 걱정도감 이른아침부터 구시렁거리는거나 같아서 우습다.                                                                                                                                                                                                  2010년12 월15
73    편지를 쓰시라 (최균선) 댓글:  조회:9848  추천:1  2011-08-04
                                                                      편지를 쓰시라.                                                                  최 균 선       편지란 한때는 저저의 입에 오르고 귀에 익던 개념이다. 편지를 서신이라고도 하는데 멀리 떨어져있는 상대편에게 전하려는 사연이나 묻고 싶은 일, 요구되는 일이 있을 때 쓰는 글이다. 아무튼 편지란 쓰는 사람은 써서 즐겁고 읽는 사람은 받아서 반가운 글이다. 하지만 지금은 편지란 우리들의 기억속에 한낱 단어로 남아있게 되였다.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디지털시대에도 번거로움을 마다하고 손편지를 고집한다면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아집이겠지만 인정이 갈수록 삭막해지는 이 시대에는 사람냄새 풋풋해서 좋지 않은가?그 많은 글들 가운데서 편지만큼 쓰는 사람이 진정을 토로하는 글이 어데 있으며 읽는 사람이 감동을 안고 읽는 값진 문자가 더 있으랴!     편지를 쓸 시간이 없다는것은 아무래도 구차한 변명이다. 물먹은 해면을 비틀어 짜면 물이 나오듯 시간은 특수 경우 아니면 짜낼수 있다. 정 안되면 잠자는 시간을 줄이면 된다. 특히 먼곳에 벗의 정성담긴 편지에 여러차례 회답을 하지 않으면 벗을 잃을수도 있다. 그리고 응당한 감사편지나 위문편지를 쓴다거나 하는것은 문필활동이 아니라 인정의 나눔이다. 편지는 진솔하고 소박한 감정을 담는게 위주이기에 철자가 틀리거나 띄여쓰기가 틀렸다해도 대수가 아니다.     편지는 개인서한이라도 값매길수 없을만큼 보귀할 때가 있다. 편지는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문학거장 체호브도 처음엔 지방신문에 풍자소품이나 발표하는 무명작가였다. 그런데 평론가였던 그리고리예위치가 그의 작가적재능을 발견하고 그에게 축하의 편지를 써보냈다. 그의 편지에 감동된 체호브는 답장을 썼다.   《당신은 당신의 편지가 나의 자존심에 얼마나 큰 작용을 일으켰는가를 능히 판단할수 있을것입니다. 당신의 편지는 그 어떤 장금보다 귀중하며 한 초학자로 말하면 현재는 물론 장래에 있어서도 일종의 보수로 될것입니다. 나는 다만 반복할수 밖 에 없습니다. 이런 장려는 정말 저를 진동시켰습니다.》이렇듯 체호브가 후일의 문호로 된데는 한차례 힘있게 등을 밀어준 그리고리위치이다. 바꾸어 말하면 체호브에 대한 그리고리예위치의 원견성있는 평가를 담은 한통의 편지가 세계적인 단편소설 가를 낳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편지봉투에 우표를 붙여서 먼곳에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전자우편이 주지 못하는 매력인 인간의 따스한 정이 한가득 안겨오는 장점이 있다. 현대젊은이들에게는 불편하고 답답할수 있겠지만 가끔 한글자한글자 정성들여 편지 를 쓰는것은 문화인으로서의 또 다른 정취라는것을 모르기때문이다.       통신수단이 지금같이 발달되지 못했던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은 거개 가슴을 설레이며 련애편지를 써본 경험이 있을것이다. 지금 젊은이들이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편지를 보지도 않는 곳에서 혼자 쓰건만 그냥 신비롭게만 생각하며 쓰던 그 아름답던 기억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질것이다. 한마을에 살고 매일 일밭에서 얼굴을 맞대는 처지건만 감히 진정을 토로하지 못하고 끙끙거리다가 유일한 고백의 수단으로 편지를 택하였던 옛그날은 결코 락후하던 시대의 재고품만은 아니다.     마음을 다져먹고 쓴 사랑의 꽃편지를 써본 사람은 알수 있다. 저저히 순정을 지녔던 그 시절엔 부끄러움을 잘 타는 사람에게는 남몰래 편지를 쓰는게 상책이였다. 아니면 하고싶은 말이 이발에 걸려서 나오지 못하고 평생의 유감으로 될수 있다. 내심으로 아무리 격렬한 사랑에 휩싸인 사람이라도 편지지를 앞에 두면 말문이 막혔을것이다. 그러나 머뭇거림이 편지에 고유한 미덕이고 지우고 생각을 구겨버리고 파지를 내는 시간에 사랑의 감정을 솔직하게 만나게 되고 더 다지게 되였던것이다. 식구들도 몰래 밤새워 쓴 편지가 사랑하는 이의 손과 눈앞에 전달되기까지의 그 시간을 목마르게 헤아리며 가슴설레이던 그 기다림은 세상에 그 무엇보다 미쁜 기다림이였으리라. 강물이 흘러가는 그 기다림의 거리를 겪는 동안 사랑은 맑고 푸른 강 물처럼 소용돌이치며 더욱 수심이 깊어졌으리라.     편지는 력사성적인 기록이다. 그 어떤 최신기술도 세월령감이 돌리는 망각의 맷돌을 멈추지 못한다. 비록 허구한 세월이 흘러 편지지가 색이 바래고 보풀이 일었을지라도 그때, 그곳에서의 그 감정을 고스란히 새겨두고있는것이 바로 낡은 편지봉투안에 고이 접어둔 편지이다. 세상에는 간난신고를 거쳐 몇십년만에 마침내는 임자에게 전해진 사랑의 편지얘기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런 편지는 생명의 연장선 그 자체이고 박동을 멈출줄 모르는 심령의 긴 메아리이다.     지금은 인터넷시대, 현대화통신망이 지구를 하나의 촌으로 만들어서 핸드폰으로 만리이역도 지척인듯이 육성을 들을수 있고 당면해서 말하기 딱할 때 쓰는 좋은 방법이지만 시간촉박을 받고 청각적인 전달이여서 일차성적인 교류에 그친다. 문안편지는 차분하게 앉아 가장 다정한 말을 고르며 쓰기에 가장 사람답고 인정스러운 교류이다.     편지는 시각적인것으로서 장기성을 고유할뿐만아니라 편지를 쓰는 사람의 그 정성과 진실한 마음을 마음으로 감지하면서 두고두고 교류할수 있기에 소중한것이다. 그래서 편지는 아직도 편지로서의 특색이 색바래지 않고있다, 편지는 친혈육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례물이 된다는것을 잊지 마시라.     편지는 아름다운 인연의 무지개이며 마음과 마음의 골짜기에서 울리는 그윽한 정감의 부름이고 화답이며 시간과 공간을 날아넘어 길게 뻗어가는 뜨거운 포옹이다. 그것이 비보이든 희소식이든 심장의 울림을 실은 편지, 날아가고 날아오가는 편지 마다에 절절한 감정이 새겨지고 무릎을 맞대고 나누는 서로의 속삭임과 간절한 념원 이 담긴다. 편지지위에서의 만남은 비록 육성은 들을수 없으나 가장 진솔한 담화의 장이 되여 마음과 마음의 언덕에 지성의 금탑을 높이높이 쌓아준다.     지금 컴퓨터의 보급으로 영상을 마주하고 대화를 할수도 있는 고기술시대에 사는 현대청년들은 편지라는 이 전통적인 통신수단을 가볍게 보고 때지난 정감교류의 수단으로 보는것이 상례이다. 피아노를 치듯 키보드를 두드려 쓰는 이메일은 기계의 작동으로 되기에 풋풋한 사람냄새와 인정이 많이 희석된다.     편지를 받아보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편지쓰기는 게으름 부린다. 편지를 받아읽는 기쁨이 누구에게나 있다면 당연히 누군가는 편지를 써야하는데 모두들 쓰기는 싫어한다. 비록 몇장의 종이장이긴 하지만 외롭고 슬플때 포근히 감싸주는 미더운 사람의 심령의 전파이고 리해와 지성으로 쌓아올리는 정감의 철옹성이기도 한데도 말이다. 쓰는 편지는 온 마음을 다하고 읽는 편지는 그저 부호를 보는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듬으며 마음의 귀도 귀울인다.    편지는 손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쓰는 일이다. 편지를 쓰시라, 편리한 현대전파통신에 만족하지 말고 고향에 계신 부모들과 먼곳에 벗들에게 편지한통을 띄우시라. 편지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무지개 다리이며 진정에 호소하는 충정의 전파이다. 때때로 편지를 쓰시라. 편지는 지성을 지닌 문화인만이 향수할수 있는 특권이며 지성인들끼리 나눌수 있는 진솔한 대화이다.     편지를 쓰시라, 두보의《전란이 심한 때에 집에서 온 편지 만금보다 귀하여 라!》라는 시구를 누구나 감명깊게 읊었을것이다. 두보가 먼곳에서 어렵사리 받은 그 편지에 담겨지 그 의미는 그저 편지의 의미만은 아니다. 그리움을 앞세우고 한가득 정을 담은 편지를 쓰고 편지를 읽는 마음은 순수하며 그 모습 성스럽기 그지없거늘, 그대여, 종종 편지 한통 쓰시라!                                                                         2010.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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