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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인 - 폴 엘뤼아르
2016년 12월 05일 21시 59분  조회:7048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일 1895. 12. 14, 파리 생드니
사망일 1952. 11. 18, 샤랑통르퐁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시인.
본명은 Eug대체이미지ne Grindel.

 

초현실주의 운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20세기의 대표적 서정시인이다. 제1·2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란, 독일군 점령, 레지스탕스, 공산당 투쟁, 연애, 시사 동향, 만남, 우정, 꿈 등 자신의 인생 경험을 소재로 작품을 썼다.

1919년 앙드레 브르통, 필리프 수포, 루이 아라공 등 초현실주의 시인들과 알게 되어 1938년까지 매우 가깝게 지냈다.

첫번째 주요작품인 〈고통의 수도 Capitale de la douleur〉(1926)에서는 새로운 언어기법을 실험했고, 꿈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이론을 적용했으며, 의식의 흐름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뒤이어 〈대중의 장미 La Rose Publique〉(1934)·〈풍요로운 눈 Les Yeux fertiles〉(1936) 등을 발표했는데, 일반적으로 이 3권의 책에 실린 시들은 초현실주의 운동이 낳은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 시기에 앙드레 브르통과 함께 〈무염시태(無染始胎) L'Immaculée Conception〉(1930)에서 정신불안증세의 진행과정을 연구했다.

스페인 내란 뒤에는 초현실주의 실험을 그만두었다. 후기 작품에는 정치적 투쟁 성향이 잘 나타나 있으며, 독재를 반대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기본 입장이 더 확고해졌다. 1942년 공산당에 들어갔으며, 인간의 고통과 동지애를 다룬 작품 〈시와 진실 Poésie et vérité〉(1942)·〈독일군의 집합소에서 Au rendez-vous allemand〉(1944)·〈살 만한 가치 Dignes de vivre〉(1944) 등은 제2차 세계대전중 비밀리에 유포되어 레지스탕스의 사기를 높였다.

특히 〈시와 진실〉에 수록되어 있는 그 유명한 시 〈자유 La Liberté〉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저항시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난 뒤 발표한 〈모든 것을 말하라 Tout dire〉(1951)·〈불사조 Le Phénix〉(1951) 등은 시어가 간결하고 표현이 생생하여 프랑스의 대표적 서정시로 꼽히고 있다.



















































 
 

폴 엘뤼아르 (Paul Éluard, 1895년 12월 14일 ~ 1952년 11월 18일) 는 프랑스의 시인이다. 본명은 외젠 에밀 폴 그랭델 (Eugène Émile Paul Grindel)이다. 다다이즘 운동에 참여하고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시인은 영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영감을 주는 자'라고 생각했다. '자유'라는 시로 유명한 시집 《시와 진실》, 《독일군의 주둔지에서》 등은 프랑스 저항시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1]

생애[편집]

파리 북쪽 생드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폐결핵으로 공부를 중단하고 스위스 다보스에서 요양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2] 1911년 ~ 1913년 요양소에 있을 때 보들레르아폴리네르 등 프랑스 시인들과 휘트먼 등 미국 시인들에 자극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다가 독가스로 를 다쳐 평생의 고질(痼疾)이 되었다. 1917년 러시아인 안내 갈라를 만나 결혼했지만, 그녀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사랑하게 돼 1924년에 그를 떠났다. 1934년 마리아 벤즈와 결혼했지만, 그녀 역시 파블로 피카소와 염문을 뿌렸다.[3] 전후 앙드레 브르통루이 아라공 등과 쉬르레알리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스페인 내전 때 인민 전선에 참가하여 레지스탕스로서 활약하였다. 1952년 11월 18일 과로와 협심증으로 숨을 거뒀고, 파리 페르라셰즈 묘지에 안장됐다.

대표 시집은 《고뇌의 수도 (首都)》(1926년), 《사랑, 그것은 시(詩)》(1929년), 《정치적 진실》(1948년) 등이다. 그의 시는 불연속으로 뜻밖의 이미지와 논리를 무시한 교묘한 비유로, 쉬르레알리즘의 강한 특징을 보이면서 어휘는 점차 투명해지고 내면적인 속삭임을 상기시키는 가락으로 변했다. 불안과 고뇌, 또 연애와 전쟁을 주제로 했어도 "한 인간의 지평선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한다"라고 그가 읊은 바와 같이 미와 사랑과 인생의 여명에의 신뢰를 언제나 잃지 아니하였던 희유(稀有)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각주[편집]

  1. 이동 구정은. 1952년 자유의 시인 엘뤼아르 타계. 경향신문. 2009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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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ner Link

 

 

사랑의 시인 - 폴 엘뤼아르

 


파블로 피카소

아르튀르 랭보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샤를르 보들레르

폴 엘뤼아르 - 자유 · 이땅에 살기 위하여·

김지하 - 타는 목마름으로 ·

 

 


- <인생을 바꿔야 한다>는 랭보의 테마와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맑스의 테마 사이에서 평화로운 화해를 이루어 낸 시인. 엘뤼아르

소등 - 폴 엘뤼아르 : 어이할까나, 문에는 적의 보초가 지켜 서 있는데 / 어이할까나, 우리는 갇혀 있는데 / 어이할까나, 거리는 통행 금지인데 / 어이할까나, 도시는 정복되어 있는데 / 어이할까나, 도시는 굶주려 있는데 / 어이할까나, 우리는 무기를 빼앗겼는데 / 어이할까나, 밤은 이미 깊었는데 / 어이할까나, 우리는 서로 사랑했는데

  랑의 시인 혹은 정치적 시인이란 평을 받는 폴 엘뤼아르는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시인 중 하나다. 그는 파리 북쪽 교외에 있는 노동자의 거리 생 드니에서 출생하였으나 아버지는 회계사이며 어머니는 양재사인 비교적 유복한 중산층 출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여 중고등학교 시절 폐결핵으로 공부를 중단해야 했고, 1911년에서 1913년까지 스위스의 다보스라는 곳에 있는 요양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보들레르, 아폴리네르 등의 작품을 읽게 되고 특히 미국 시인 휘트먼의 시를 좋아하며 스스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또한 소년 엘뤼아르는 여기에서 러시아 태생의 한 소녀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그 사랑은 결실을 맺어 4년 뒤인 1917년 드디어 결혼하게 되는데 후일 그가 애칭으로 '갈라'라고 부른 여인이다. "그녀는 순결한 눈을 녹게 하고 풀 속에서 꽃을 피어나게 한 유일의 존재이다"라고 그는 찬양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사랑도 초현실주의자들의 사교 모임에서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갈라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파국에 빠지고 만다. 엘뤼아르는 둘의 행복을 빌어주며 갈라의 곁을 떠나 준다. 오히려 살바도르 달리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 부도덕한 짓을 저질렀다며 격분하여 달리에게 먹다만 성게 껍데기를 보내며 부자간의 인연을 끊은 일은 유명하다. 어쨌든 달리는 갈라를 만남으로 그의 예술 세계의 무한한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젊은 시절의 폴 엘뤼아르.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이후 평생동안 파시즘과에 반대했다.

 

 

 

 

 

"시인은 자기의 사상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 사상은 진보를 향한 인간의 궤적 속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인 뉘쉬와 함께

 

 

 

 

 


피카소가 그린 엘뤼아르

 

 

 

 

 

 

 만년의 폴 엘뤼아르

 

 

 

 

 


엘뤼아르의 무덤(페르 라세즈)

 

 


  이보다 앞서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엘뤼아르는 요양원에서 나오자마자 간호병으로 전선에 동원되었다. 그는 야전 병원에서 전쟁의 참상을 맛보았고 이는 그의 마음에 큰 충격을 주어 전시 중 병원에서 쓴 '평화를 위한 시' 외 1편의 선언문 같은 시들을 자비 출판했다. 파리에 돌아온 그는 한때 차라와 당시 유행하던 다다이즘 운동을 벌였고 후에는 앙드레 브르통을 만나 데스노스, 아라공과 함께 초현실주의 운동의 중요하고 열렬한 멤버가 되었다.

  엘뤼아르와 초현실주의와의 관계는 밀접할 뿐 아니라, 이 새로운 문학 정신이 그의 시에 준 영향은 깊다. 1920년에서 1936년까지 그는 브르통이나 르네 샤르와 공동으로 여러 권의 초현실주의적인 시집과 평론을 펴냈을 뿐만 아니라 '죽지 않으므로 죽는 일' 및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고통의 수도', '사랑', '시', '목전의 삶', '모든 사람의 장미' 등 그의 중요한 시 작품들은 모두 직접 간접으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초현실주의와의 결별

   <모든 사람의 장미>로 그의 초현실주의 시대는 끝난다. 이 동안에 엘뤼아르는 첫 부인 갈라와 헤어지고 제2의 부인 마리아 벤즈, 속칭 뉘쉬와 결혼한다. 엘뤼아르는 그녀를 가장 <완전한 여인>이라고 예찬한다. 뉘쉬와의 사랑과 애정은 그의 첫사랑인 갈라에 못지않게 짙고 깊어 수많은 아름다운 시를 낳게 했으며 그녀의 영향은 그녀가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이 새로운 여인의 출현으로 그의 시는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고 빛의 세계를 향한 일대 도약을 하게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사랑이란 내 자유를 고통스럽게 희생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달라졌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도 않고 질투도 하지 않으며 그 여자는 나를 자유롭게 한다. 이제 나에게는 자유로와질 수 있는 용기가 있다."

  1936년을 전후하여 그의 시는 점차 사회적, 정치적 관심을 보이고 인류와 정의를 위한 연대 운동에 가담한다. "지금의 모든 시인은 그가 다른 사람의 생에, 공동의 생에 깊이 관여되어 있음을 주장할 권리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때가 왔다"고 그는 썼다. 이 1935년에 그는 그의 오랜 지기이자 가장 절친한 벗이었던 파블로 피카소 회고전을 위해 1월부터 5월까지 스페인의 많은 지역을 순회했다. 스페인을 둘러 본 엘뤼아르의 시선에는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였다. 나치가 베르사이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무장 선언을 했으며 그 전해에는 이탈리아에서 뭇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누구보다 이런 시대의 파랑을 예견하고 있던 그는 이듬해인 1936년 영국 런던에서의 한 강연에서 "지금 모든 시인들이 타인의 생활 속에, 공통된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하는 시대가 왔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가 시련의 시대가 될 것이며, 시인들을 비롯한 예술가들이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에 참여할 것을 부르짖었다.

  그의 강연이 있은 지 불과 한 달 뒤인 1936년 7월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고,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재판도 없이 처형되고 말았다. 그는 당연히 공화파에 가담하였고 <게르니카의 승리>를 발표했다. 이 동안 인간애와 자유를 노래부른 시집에 <풍요한 눈>, <자연의 흐름>, <볼 것을 준다> 등이 있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사상적으로 엘뤼아르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 역시 비극적인 상황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피카소가 공산당에 입당하게 된 것도 스페인에서의 파시스트정권에 저항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런 일 역시 엘뤼아르의 영향이 컸다.

전쟁과 시인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한때 사랑과 꿈의 시인이었던 엘뤼아르는 자유와 조국을 위한 투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엘뤼아르의 시는 커다란 변모를 보여준다. 그의 시는 <한 인간의 지평에서 모든 사람들의 지평을 향한> 전환을 꾀하고 집단적인 감동을 표현하려고 애쓴다. 그는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모든 죄악과 억압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표현하며 그때부터 시는 저항을 위한 투쟁의 수단과 무기가 된다.

   "시인은 자기의 사상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 사상은 진보를 향한 인간의 궤적 속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로부터 1944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항독 비밀 저항 운동에 가담하여 싸웠고, 작가 국민 위원회의 북부 책임자가 되어 비밀 출판물인 <심야총서>를 간행하여 자유와 조국 해방을 위하여 시를 통해 투쟁했다. 이 동안에 그는 시집으로 <시와 진실>(이 시집 맨 첫머리에 유명한 시 '자유'가 실려 있다), <전쟁 중에 일곱 편의 사랑의 시>, <독일인의 집합지에서> 등이 있다. 1942년에는 영국의 항공 편대가 수천 부의 그의 <시와 진실>을 독일군 점령 아래 싸우는 프랑스의 항독 투사 위에 뿌렸다. 시가 무기가 된 것이다.

  대전이 끝나자 그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인간에 대한 신뢰와 연대감을 고취하고 계속 시집을 펴냈으로써 자유와 인간애를 노래불렀다. <그치지 않는 시>, <정치 시편>, <도덕의 한 교훈>, <모든 것을 말한다> 등이다. 그가 세계와 인류와의 연계를 주장하는 소위 참여 문학에 가담했다고 하나 그의 시는 계속 개성적이며 서정적이고 그의 시의 주제는 언제나 영원한 사랑과 죽음, 평화, 자유였다. 피카소와 엘뤼아르는 삶의 뜨거운 연대자이자 정신적 동지였다. 엘뤼아르가 피카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피카소를 "한 폭의 그림 앞에 설 수 있는 시인처럼 그는 한 편의 시 앞에 설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어둠 그건 눈뜰 때의 나의 이름
어둠 그건 나를 괴롭히는 원숭이
나는 어둠의 거울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미치광이인 척 한다네
어둠 그것은 부조리한 나의 무게
차갑게 썩어버린 나의 반신(
半身)

<마지막 유예의 노래> 중에서
 

 

통행금지

 

    - 폴 엘뤼아르

 

 

어쩌란 말이냐 문에는 감시병이 서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갇혀 차단되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거리는 차단되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도시는 점령되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그녀는 굶주리고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무기를 빼앗겼는데 
어쩌란 말이냐 밤은 닥쳐 왔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서로 사랑했는데

 
 



 

엘뤼아르와 피카소

  뤼아르와 피카소는 여름 휴가철마다 남프랑스 무쟁의 바닷가에서 가족들끼리 오붓한 바캉스를 즐기기도 했다. 엘뤼아르가 피카소에게 그의 그림에 있어 사상적 깊이를 주었다면 피카소는 엘뤼아르에게 시적 영감을 주었다. 전통적인 스페인의 색이자 원시적 제의의 색이랄 수 있는 검은 색에서 엘뤼아르는 초현실주의자 특유의 감각으로 인간의 내면 속에 감춰진 어둠의 실체를 밝음 속에 드러내고 있다. 엘뤼아르는 참다운 시인이란 '어두운 진실'을 작품 속에 드낸다고 생각했으며 평생 세계의 어둠과 맞섰다. 엘뤼아르는 평생 동안 두 차례 공산당에 입당한다. 처음의 입당은 1926년 <고뇌의 수도> 간행 이후 일련의 초현실주의자 그룹과 함께였다. 그후 1933년 공산당에서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축출된다.

   당시의 프랑스 공산당은 이념적 경직으로 인해 초현실주의자들의 자유분방함을 견딜 수 없었고,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공산당의 엄격함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1943년 그는 나치 독일하의 프랑스에서 공산당에 재입당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유럽을 통틀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나치 독일에 대해 가장 극렬하게 저항한 세력은 좌파였기 때문이다. 엘뤼아르가 <게르니카의 승리>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전인류에 대한 사랑과 평화'를 갈구하는 그의 마음은 폭력과 전쟁, 죽음과 암흑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참다운 정신을 그가 쉬르 레알리즘이란 그의 문학적 사조 안에서도 실현시키고 있다. 그의 이런 정신은 멀리 우리나라에 까지 영향을 미쳐 1970년대 유신시대의 김지하, 5월 광주 이후의 김남주 시인 등에게 이르러 꽃을 피웠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타는 목마름으로> 중에서

초현실주의와 공산주의 운동 - 폴 엘뤼아르

  1946년 강연 여행으로 스위스에 있을 때 그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뉘슈의 죽음의 통지를 받았다. 엘뤼아르는 이때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니쉬의 죽음으로 그는 한때 절망과 공허에 빠져 약 1년 동안 실어증에 빠져 있었다. 엘뤼아르가 기운을 되찾게 된 이유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여인을 발견했다는 것에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그에게는 어둠 속에서 회한을 일삼는 태도를 거부하며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평생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의 성품도) 인류에 대한 신뢰와 사랑과 희망으로 이 위기를 극복했다.

  1949년 멕시코의 세계 평화 회의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다시 도미니크라는 여성을 만나 제3의 부인으로 맞이했다. 이 재혼을 기하여 엘뤼아르는 <불사신>이라는 시집을 써서 생의 기쁨을 되찾은 행복을 노래했지만 엘뤼아르의 시들은 뉘쉬의 죽음 이후 쓰라린 회한과 생에 대한 쓸쓸함이 암시되어 있었다. 1952년 엘뤼아르는 과로와 협심증을 일으켜 급사했다. 그의 유해는 전세계의 지식인과 문인의 애도를 받으며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파리의 다다그룹 - 오른쪽 1열부터 Tristan Tzara, Céline Arnauld, Francis Picabia, André Breton 2열: Benjamin Péret, Paul Dermée, Philippe Soupault, Georges Ribemont-Dessaignes; 3rd: Louis Aragon, Théodore Fraenkel, Paul Eluard, Clément Pansaers, Emmanuel Faÿ

  외국의 문학사조나 유파의 이름만을 듣고서 한 마디로 정리해 버리는 편리한 이해방식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문화 사조에 있어서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Sur-realism)에 대한 오해의 상당수도 그렇게 발생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의 기법까지 초현실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상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통해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탐구를 더한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이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통해 초현실주의가 지향하고 있는 바를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물론 초현실주의 선언문 자체는 암시적인 서술로 전개되어 있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초현실주의의 핵심적인 요소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상상력이 지닌 가치를 환기시키면서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꿈꾸며 살 권리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초현실주의 선언의 배경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경험과 더불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류와 부르주아 문명의 종말을 예감했다. 자크 라깡이 "광기로 하여금 항상 이성을 감시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유럽 문명을 지배했던 부르주아의 도덕율이 한계에 달했음을 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사회의 속박과 검열, 억압에 의해 욕망을 축소하게 된 인간의 모습을 비참한 현실로 파악하고, 이 세계를 인간의 욕망 차원에서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문명(전쟁과 부르주아 물질문명)으로 인해 파괴된 인간 본연의 정신적인 힘과 억압된 무의식적 욕망을 해방시키기 위해 시인은 현실 세계의 논리와 일치하는 언어의 질서를 파괴하려 했다. 그들은 현실과 몽상이 조화롭게 연결되는 통일된 세계를 지향했다. 초현실주의가 추구했던 정신적 모험은 합리주의적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예속되지 않으려는 반항과 현실세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 세계의 강력한 장벽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전체주의의 출현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폴 엘뤼아르를 비롯한 초현실주의자들이 공산당에 입당한 까닭은 초현실주의가 실제 현실세계에서 부딪친 무기력함 때문이었다. 초현실주의의 이상은 좌절되었고, 현실은 개선되지 않았다. 진정한 삶 La varie vie과 현실적 삶 La vie reelle의 대립에서 초현실주의는 무기력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인생을 바꿔야 한다>는 랭보의 테마와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테마 사이에서 평화로운 화해를 이루어 낸 시인" 이라고 엘뤼아르를 말한 것은 그가 초현실주의의 이상을 실현한 시인으로서, 실천적 삶을 살았던 인간으로서 열렬히 살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삶은 치열했다.
 

 

 

 

 

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이 곳에 살기 위하여』/ 폴 엘뤼아르 지음/ 오생근 옮김/ 1974년
  
- 엘뤼아르의 시집을 읽으면 저도 모르게 행복해진다. 그것은 그의 시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치유력같은 것이다. 가슴 아픈 젊음은 한 번쯤 읽어보시길.

 사랑에 눈 먼 사람 하나 있었다지P.엘뤼아르/ 반도기획/ 1995년 
  
- 엘뤼아르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영세출판사에 낸 책들이 많은 편이다. 상대적으로 젊을 수밖에 없는 출판사 사장들이 엘뤼아르의 시를 읽고 뭔가 감동을 받은 것일까?

 『미술과 문학의 만남』/ 이가림 지음/(주)월간미술 / 2000년
  
-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의 시인이자 인하대 불문학과 교수인 이가림 선생이 <월간미술>에 연재하던 글을 모아 낸 책이다. 피카소와 엘뤼아르를, 모딜리아니와 장 콕토 등을 연결해서 재미있게 해설해 가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세 예술가의 연인 - 엘뤼아르.에른스트.달리, 그리고 갈라』/ 도미니크 보나 지음/ 김남주 옮김 / 한길아트 / 2000년
  
- 가끔 예술가들의 격정에 희생당하는 불쌍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음, 이말엔 이런 남근주의가 숨어있는 것이다. 예술가 = 남성이란 식의 암시가 깔려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엘뤼아르의 첫 번째 아내이자 달리의 부인, 에른스트의 연인이었던 갈라에게는 그다지 해당되지 않는 말 같다. 그녀가 달리에게 얼마나 무한한 영감을 주었는지는 차차 다루게 될 일이겠지만 갈라를 좋아하기는 참 힘들 것 같다. 이 책은 그런 갈라의 입장에서 쓰인 책이다.

 엘뤼아르
 
 - 불어권 시인인 만큼 불어 사이트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불어를 읽지 못하니 무용지물이다. 다만 이 사이트에 있는 그의 사진은 봐둘만 할 것 같다.(불어)

 

 

 



폴 엘뤼아르 Paul Eluard 연보

1895 12월 14일 쎙 드니에서 태어남. 
본명 으젠 에밀 폴 그렝델 (Eugene Emile Poul Grindel).
1908 가족 전체가 파리로 이주, 콜베르 중학, 건강이 좋칠 않아 학업을 중단한다.
1912~1914 스위스에서 요양하며 시를 많이 읽는다. 그리고 러시아 여인 갈라를 만난다.
1914~ 1916 제1차 세계대전이 터져 보병으로 입대, 육군병원에서 많은 부상자들을 보며 전쟁을 혐오하게 됨. 엘뤼아르라는 이름으로 시집 『의무와 불안 간행』
1917 갈라와 파리에서 결혼 한다.
1918 5월 11일 딸 세실이 태어남, 『평화를 위한 시편들』 출간
1919 제대함
1920~1922 아라공, 브르통, 수포, 짜라 등과 교유, 다다운동에 참여.『속담Proverb』 지 간행
1920년『동물과 그 인간들』, 1921년 『삶과 필연성과 꿈의 정복』,『반복』 간행
1924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1차 선언문이 발표됨. 엘뤼아르 『죽지 않은 죽음』간행, 초현실주의 활동에 참여, 3월에서 9월까지 세계일주 여행(서인도제도, 타히티, 오스트레일리아, 아시아 등)
1925 초현실주의자들과 본격적 활동 시작
1926 『고뇌의 수도』 간행, 공산당 가입
1929 뉘쉬와 만『사랑시』 간행, 르네 샤르와 만남
1930 샤르, 브르통과 함께『작업지연』,브르통과 함께 『무염시대』 공동 집필
1932 아라공과 불화 『직접적인 삶』 간행
1933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공산당에서 축출됨.
1934 뉘쉬와 정식 결혼
1935 파시스트 등에 대한 투쟁을 호소
1936 스페인 내란 발생, 게르니카가 공습으로 파괴되자 <게르니카의 승리>를 쓰고 민중을 지원함. 런던에서 열린 초현실주의 전시회에서 <시적 명증성> 발표.
1939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군경리부에서 중위로 근무함
1940 파리함락, 독일군 점령하 『열린책』 간행
1941 레지스탕스 운동 가담
1942 『시와 진실』 간행
1943 공산당에 다시 들어감,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시를 쓰면서 투쟁, 한때는 정신병원에 피신 하기도 함
1944 레지스탕스 운동에 더욱 깊이 참여.『고통의 무기들』 간행. 8월 파리 해방. 그 무렵 심야출판사에서 저항시들을 모아『독일인의 집결지』간행
1945 전쟁이 끝나자 스위스와 영국 등지로 강연 여행
1946 『중단 없는 시』
1947 고독을 벗어나 정치적인 활동, 그는 여러나라를 여행하며 민중의 평화와 독립을 위한 집회에 참석 강연.
1949 멕시코 평화회의 참석, 도미니크를 알게 됨
1951 도미니크와 세 번째 결혼,『모든 것을 말하다』, 『불사조』 간행
1952 폐렴이 악화되어 사망.
 

 

 

 


죽음 사랑 인생
폴 엘뤼아르 (1895-1952)
 
그대를 향해 갔고 끝없이 빛을 향해 갔으며
삶은 몸통을 갖게 되었고 희망은 돛을 올리고
잠은 꿈으로 넘쳐흐르고 밤은
새벽에 신뢰의 눈길을 약속하였으며
그대의 양팔의 빛살은 안개를 헤쳐 퍼져나갔으며
그대 입술은 최초의 장미 잎으로 젖어 있었고
황홀한 휴식은 피로를 몰아내고
나는 내 생애 최초의 날들처럼 사랑을 찬미 했네
(중략)
사람이란 서로의 말을 듣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도록 만들어졌으며
그 아이들은 자라서 아버지가 되는 법이고
불도 없고 집도 없는 아이들이라면
인간과 자연과 그들의 나라를 다시 건설하리니
모든 사람들의 나라
모든 시대의 나라를
(오생근 역)
 
번역된 외국 시인들의 시를 읽는 것은 마치 비타민 알약을 먹는 것과 같다.
그 시는 싱싱한 과일이나 채소를 먹을 때의 그 씹는 촉감과 냄새와 빛깔이 사라지지 않은 것, 좋은 거니까 먹어봐, 하고 쑥 내밀어진 과제물 같은 것이다. 가끔씩 엘뤼아르의 시는 내게 많은 영감을 준다. 그의 저항 정신을 감싼 초현실주의를,...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는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를 대 놓고 베낀 것이다.
 
오늘 엘뤼아르의 시를 옮긴 것은 조금은 따뜻해지고 싶고 위로받고 싶어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신뢰의 눈길을 보내고, 사랑을 찬미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모든 사람들의 나라, 모든 시대의 나라’가 문득 그립다. 그러나 그러한 과거를 가진 적이 없으므로 문득 그립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는 그의 시 제목처럼 ‘이곳에 살기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불을 피웠네/ 친구가 되기 위한 불/ 겨울밤을 지내기 위한 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불을>. 이 겨울도 모두가 따뜻했으면 좋겠다.
 
(매일신문. 노태맹 시인)



황현산 "모두 표절인 걸 알았지만 민주화의 대의가 중요해 말하지 않았다"

한 저명한 문학평론가가 시인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표절 작품이라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다.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논란과 맞물려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평론가 황현산은 지난 7일 자기 트위터에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게 (폴) 엘뤼아르의 표절인 걸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민주화의 대의가 중요했기 때문. 지금 생각하면 그게 잘한 일이었는지 묻게 된다. '타는 목마름으로'를 온전하게 살린 것은 이성현의 작곡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와 문학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으로 유명한 황현산은 현재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유명 평론가다. 그가 트윗에서 언급한 엘뤼아르 작품은 '자유'. 황현산의 지적대로 '타는 목마름으로'와 '자유'는 주제는 물론이고 어투 등에서도 빼다 박을 정도로 닮았다.

'내 학생 때 공책 위에/ 내 책상이며 나무들 위에/ 모래 위에도 눈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읽어본 모든 책상 위에/ 공백인 모든 책상 위에/ 돌, 피, 종이나 재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숯칠한 조상들 위에/ 전사들의 무기들 위에/ 왕들의 왕관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밀림에도 사막에도/ 새 둥지에도 금송화에도/ 내 어린 날의 메아리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밤과 밤의 기적 위에/ 날마다의 흰 빵 위에/ 약혼의 계절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내 하늘색 누더기 옷들에/ 곰팡 난 해가 비친 못 위에/ 달빛 생생한 호수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들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림자들의 방앗간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새벽이 내뿜은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또 배들 위에/ 넋을 잃은 멧부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구름들의 거품 위에/ 소낙비의 땀방울들 위에/ 굵은 또 김빠진 빗방울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형상들 위에/ 온갖 빛깔의 종들 위에/ 물리적인 진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잠깨어난 오솔길들 위에/ 뻗어나가는 길들 위에/ 사람 넘쳐나는 광장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켜지는 램프 불 위에/ 꺼지는 램프 불 위에/ 모여 앉은 내 집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겨울의 또 내 방의/ 둘로 쪼개진 과실 위에/ 속 빈 조가비인 내 침대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주접떠나 귀여운 내 개 위에/ 그 쫑긋 세운 양쪽 귀 위에/ 그 서투른 다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내 문턱의 발판 위에/ 정든 가구들 위에/ 축복 받은 넘실대는 불길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사이 좋은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내미는 손과 손마디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놀란 얼굴들의 유리창 위에/ 침묵보다도 훨씬 더/ 조심성 있는 입술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은신처들 위에/ 허물어진 내 등대들 위에/ 내 권태의 벽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나는// 욕망도 없는 부재 위에/ 벌거숭이인 고독 위에/ 죽음의 걸음과 걸음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다시 돌아온 건강 위에/ 사라져 간 위험 위에/ 회상도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그리고 한 마디 말에 힘입어/ 내 삶을 다시 시작하니/ 너를 알기 위해 나는 태어났다/ 네 이름지어 부르기 위해// 오 자유여'(폴 엘뤼아르의 '자유' 전문)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전문)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조국은 하나다/양키 점령군의 탱크 앞에서/자본과 권력의 총구 앞에서/조국은 하나다 ///이제 나는 쓰리라/사람들이 주고받는 모든 언어 위에/조국은 하나다라고/탄생의 말 응아응아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의 말 아이고아이고에 이르기까지/조국은 하나다라고/갓난아기가 엄마로부터 배우는/최초의 말/엄마 엄마 위에도 쓰고/어린아이가 어른들로부터 배우는/최초의 행동/아장아장 걸음마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나는 또한 쓰리라 /사람들이 오고 가는 모든 길 위에/조국은 하나다 라고/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고/기쁨과 슬픔을 나눠가지는 인간의 길/오르막길 위에도 쓰고 /내리막길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도 쓰고 /파도로 사나운 뱃길 위에도 쓰고 /끊어진 남과 북의 철길 위에도 쓰리라///오 조국이여 /세상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꽃이여 이름이여///나는 또한 쓰리라 /인간의 눈길이 닿는 모든 사물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눈을 뜨면 /아침에 당신이 맨 먼저 보게 되는 /천정 위에도 쓰고 /눈을 감으면 /한밤에 맨 나중까지 떠 있는 /샛별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축복처럼 /만인의 배에서 차오르는 겨레의 양식이여///나는 쓰리라 /쌀밥 위에도 쓰고 보리밥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바다에 가서 쓰리라 모래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파도가 와서 지워버리면 그 이름 /산에 가서 쓰리라 바위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세월이 와서 지워버리면 그 이름 /가슴에 내 가슴에 수놓으리라 /아무리 사나운 자연의 폭력도 /아무리 사나운 인간의 폭력도 /감히 어쩌지 못하도록 /누이의 붉은 마음의 실로 /조국은 하나다라고///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외치리라 /인간이 세워놓은 모든 벽에 대고 /조국은 하나다라고 /아메리카 카우보이와 자본가의 국경 /삼팔선에 대고 나는 외치리라/조국은 하나다라고 /식민지의 낮과 밤이 쌓아올린/분단의 벽에 대고 나는 외치리 /조국은 하나다라고 /압제와 착취가 날조해낸 허위의 벽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고 나는 외치리/조국은 하나다라고//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내걸리라 /지상에 깃대를 세워 하늘 높이 /나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키가 장대 같다는 양키의 손가락 끝/가난의 등에 주춧돌을 올려놓고 그 위에 /거재를 쌓아올린 부자들의 빌딩도 /언제고 끝내는/가진 자들의 형제였던 교회의 첨탑도 /감히 범접을 못하도록 /최후의 깃발처럼 내걸리라///자유를 사랑하고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식민지 모든 인민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남과 북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김남주, 「조국은 하나다」 전문.

 

=《덧글들》=


박남철 (2007-**-08 23:15:10) 


내가 남주 형을 처음으로 본 것은 남주 형이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작가회의'의 무슨 모임의 뒤풀이 자리에서인가였다. 더 정확하게 얘기해보자면, 인사동 '학고재화랑' 위쪽의 어느 호프집에선가였을 거다. 

 

더욱 정확하게 얘기해보자면,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는 나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진을 치고 있는---나는 어느 선배에게든, 후배에게든, 처음 보는 선후배들에게는 일부러 먼저 찾아가서 인사를 하지 않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시건방진 처사였다고 아니 반성할 수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남주 형에게 먼저 인사를 하지 않고 그저 먼발치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소변을 보려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화장실에 먼저 와서 소변을 보고 있던 남주 형의 뒷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남주 형의 왼편의 소변대로 다가가서 내 힘없이 질질질 흘러내리는 소변을 잠시 보다가, 문득, 내 오른편 소변대에서 세찬 오줌발 소리로 소변을 보고 있던---저 오줌발 소리가 캄캄 감옥에서 10년씩이나 썩은 사람의 오줌발 소리일 것이란 말인가!---남주 형 쪽으로 고개를 들어 가만히 한마디 던져보았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지요?" 

남주 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고개만 바로 들어 나를 바라보며, 소년처럼 수줍게 웃기만 하던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처음 보는 사람을 눈이 부신 듯이 바라보는 듯한, 그 거만하지 않던 눈길! 남주 형의 눈길은 이미 나를 잘 인지하고 있는, 바로 그러한 눈길이셨던 것이다! 


박남철 (2007-**-09 10:26:23) 

 

위 본문에다 인용해본, 세계적인 세 시인들의 대표시들 중에서, 지하 선생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폴 엘뤼아르의 「자유」를 창조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변용하여 성공한 대표적인 경우에 속할 것이다. 
 

 'FREEDOM'도 아닐, 'LIBERTY'로서의 '자유', 프랑스 적인, '불란서 영화 같은', "불란서 흰빵 같은 자유"를, 바로 저 우리의 6, 70년대의 처절한 현실이었던 "타는 목마름의 민주주의의 자유"로 변용시켜놓은 경우(?)일 것이다. 


박남철 (2007-**-09 14:03:47) 

 

그리하여, 지하 선생의 바로 저러한 '징검다리'로서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선행되었기에, 남주 형의 저 타는 듯한 아지프로로써의 「조국은 하나다」라는 통일 시의 데마고기도 성립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주 형도 명백히 그 자신의 시의 서두에서부터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 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라고, 바로 '공산당선언'적인 어투로, 지하 선생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공공연하게 비판하면서도, 수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주 형도 이미 이러한 사실들을 잘 의식하면서, 미친 듯이, 작품을 써내려갔을 것이지만, 만약 지하 선생의 '징검다리'로서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선행하지 않았다면, 남주 형 역시 「조국은 하나다」를 쓰지 않았을 것이지만, 지하 선생의 '징검다리'로서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선행하지 않았다면, 남주 형의 저 "위대한 반동적 통일 시" 「조국은 하나다」는 한낱, 불란서어의 콧소리 가득 섞인, '슬로건' 아닌, 음색들을 너무나도 불란서적으로 잘 표현해놓고 있을, 폴 엘뤼아르의 세계적인 대표작 「자유」에 대한, 지루하고도 지루한, 열거법과 반복법만이 뒤섞인, 한낱 표절작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박남철 (2007-**-09 14:29:17) 

 

 그리하여, 이제와, 우리의 문학 작품, 특히 시문학 작품에 있어서의 "그 창조적 변용", 또는 "그 창조적 비판 및 그 변용의 확산" 및 "'포절'이냐, 표절이냐" 하는 문제들은 언제나 그 문학사적인 문제들과 더불어, 매우 중차대한 문제들이 되어주고 있다고 아니 말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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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프랑스의 대표 시인인 엘뤼아르는 초현실주의 작품을 쓰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정치색을 강하게 품은 작품을 쓴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 참여했을 정도다. 평화와 자유, 정의를 관통하는 엘뤼아르 작품 중에서도 대표적인 게 '자유'다. 1942년 영국 공군은 엘뤼아르의 시집 '시와 진실'을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에 뿌리기도 했다. 이 시집의 맨 앞에 실린 작품이 '자유'다.

'타는 목마름으로'는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었던 김지하가 엄혹한 유신시대의 억압 속에서 민주주의를 열망한 작품. 숨이 막힐 듯한 시대적 상황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절규하는 문체로 풀어낸 한국문단?대표적인 사회참여시다.

사실 '타는 목마름으로'가 '자유'의 표절작이라는 주장은 진작 제기됐다. 시인 노태맹은 올 초 한 지방지에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는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를 대 놓고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두 시가 워낙 유명한 만큼 시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타는 목마름으로'가 '자유'의 표절작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일반인은 왜 이 같은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일까. 전태흥 미래티앤씨 대표가 2013년 1월 한 지방지에 기고한 글에서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며칠 전 페이스 북에서 친구가 쓴 글을 읽었다. 그 글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시인인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와 한국에서 오랫동안 저항시인(무엇에 저항했는지는 모르지만)으로 불린 김지하의 대표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비교한 것이었다. 그 글의 내용은 한마디로 김지하의 시가 폴 엘뤼아르의 시를 베낀 것인데 이미 오래전에 '자유'라는 시가 한국에 소개되었고 그 시를 읽은 사람들이 김지하가 그 시를 표절한 것을 알면서 침묵한 것은 표절의 명백한 공범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어 친구는 우리가 그동안 김지하라는 이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주저해 왔던 것은 젊은 날 자신이 지켜왔던 것들을 잃지 않으려는 일종의 보상심리와 같다고 썼다. 전적으로 동의한다.""민주화의 대의가 중요했기 때문"에 모두들 표절인 걸 알고서도 침묵했다는 황현산의 글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한 문인은 "표절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이 있다는 이응준의 지적은 김지하의 사례에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응준은 최근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 -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이란 글을 기고해 신경숙의 소설 '전설' 중 한 문단이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憂國)'의 한 문단을 거의 베끼다시피 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찬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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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흥의 이야기가 있는 음악풍경] 김민기 곡, 양희은 노래 '상록수'


며칠 전 페이스 북에서 친구가 쓴 글을 읽었다. 그 글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시인인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와 한

국에서 오랫동안 저항시인(무엇에 저항했는지는 모르지만)으로 불린 김지하의 대표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비교한 것이었다. 그

글의 내용은 한마디로 김지하의 시가 폴 엘뤼아르의 시를 베낀 것인데 이미 오래전에 '자유'라는 시가 한국에 소개되었고 그 시를

읽은 사람들이 김지하가 그 시를 표절한 것을 알면서 침묵한 것은 표절의 명백한 공범이라는 내용이었다
.

 

문학작품에 관해 이런 것이 표절이 성립하는 지는 내가 잘 모르겠다. 단언할 수 있는 건 패러디라는 것도 그렇고 일부 따올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은 드는데 그렇게 하면 저자가 그런 사실을 다른 방법을 통해 알리는 것이 망신을 피하는 길이 될 것 같기는 하다. 그대로 따온 구절도 있지만 새로 덧붙여 놓은 것도 있으니 청출어람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단, 이것이 김지하의 대표작이라면 그것 역시 사기의 일종이라는 것까지는 나도 인정할 수 있다.

 

또, 폴 엘뤼아르의 "자유"도 시인의 대표작으로 2차대전 중 지어져 영국항공기로 뿌려졌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외국에서 이렇게 널리 알려진 게 한국사람들만 모른다는 이유로 표절이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리다. 모르는 한국사람들에게는 사기일 수 있겠다. 한 작가의 대표작이 일종의 패러디(?)라는 것은 뭔가 우스워 보이고, 그가 한국문학의 대표작가라면 솔직히 "국격"에도 손상이 가는 일이다. 문학에 대한 감식안이 없는 일개 독자인 나로 김지하를 기억하는 것은 최인호 작가가 몹시 칭찬하던 시인이라는 것 뿐이다. 또한, 일본 같이, 얄밉고 한편으로 증오스런 노릇이지만,1분명 문화적으로는 한국이 넘볼 수 없는 동양의 대표주자2인 나라에서 그를 꾸준히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해왔다는 점도 내가 쉽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겠다.3 적어도 한 때 한국문화예술인들이 그렇게도 베껴왔던 일본 것은 그가 베끼지 않았다는 증거겠다. 하긴, 주작업이 민족적이고 전통적인 시였으니 그런 일이 있을 지 모르겠으나, 거의 드물게도 현대적 풍으로 쓴 대표적 하나가 그런 쪽이라니 실망이 되는 건 사실. 앞으로는 이 시에 대해 작가나 소개하는 사람들이나 폴 엘뤼아르의 "자유"도 함께 언급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폴 엘뤼아르도 엘뤼아르지만,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과도 비슷하다. 마지막에 도데의 소설에서 하멜 선생은 마지막으로 목이 메인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대신 칠판에 "프랑스 만세"라고 크게 쓰는 장면이 있다.

 

문학도 좋고 뭣도 좋지만 우리는 먼저 우리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아직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해 마다 노벨문학상 후보 누구누구 하는 이야기가 나오며 한국문학도 덩달아 대단해 진 줄 생각하지만 정말 아직까지는 우리 문학 수준이 이 정도 밖에는 안된다. 아니 수준이라기 보다는 이것은 혼탁함의 척도에 더 가까운데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지 않는다는 것도 다 이유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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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엘뤼아르 시모음

 

http://aidadedoouro.wordpress.com/2008/06/09/paul-eluard/

엘뤼아르

 1895~1952

 

초현실주의 시인으로서, 또한 열렬한 저항시인으로

비교적 다양한 문학적 생애를 보낸 엘뤼아르는

 

1936년 스페인 내란 이후 뒤늦게 정치적 움직임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전쟁 중 항독운동에 가담 하였다.

 

하지만 다른 참여시인들 보다는 훨씬 너그럽고 온건하여,

순수한 시인으로서의 기질과 천분을 가졌고

 

스페인 내란 이후 매우 전투적인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어딘가 체념의 여지가 깃들여 있고, 초현실주의의 흔적이 남아있다.

 

 

주요작품: 고뇌의 수도(Capitale de Douleur)1926,

         직접적인 인생(La Vie Immediate)1932,

         시와 진실(La Poesie et la verite)1942 등

 

 

 

 

 

경쾌한 노래

 

 

나는 앞을 바라보았네

군중 속에서 그대를 보았고

 

밀밭 사이에서 그대를 보았고

나무 밑에서 그대를 보았네.

 

 

내 모든 여정의 끝에서

내 모든 고통의 밑바닥에서

 

물과 불에서 나와

내 모든 웃음소리가 굽이치는 곳에서

 

 

여름과 겨울에 그대를 보았고

내 집에서 그대를 보았고

 

내 두 팔 사이에서 그대를 보았고

내 꿈속에서 그대를 보았네.

 

 

나 이제 그대를 떠나지 않으리.

 

 

 

 

한 순간의 거울

 

 

그것은 빛을 분산시키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외모와는 다른 섬세한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방심할 여유를 앗아가버린다.

그것은 돌처럼 단단하다,

 

형태가 없는 돌,

움직임이 있고 시각이 있는 돌처럼,

 

그리고 그것의 섬광은 그 어떤 갑옷이나 그 어떤 가면도

일그러질 만큼 찬란하다.

 

손에 잡혀 있었던 그것은 손과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이해되었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새는 바람과 뒤섞이고,

하늘은 진리와

 

사람은 현실과 뒤섞인다.

 

 

 

자유

 

            

국민학교 시절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조상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 둥우리 위에 금작화 나무 위에

 

내 어린 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경이로움 위에

일상의 흰 빵 위에

 

결합된 계절 위에

나는 어늬 이름을 쓴다

 

 

누더기가 된 하늘의 옷자락 위에

태양이 곰팡 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방앗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무미한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깨어난 오솔길 위에

뻗어나간 큰 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불켜진 램프 위에

불꺼진 램프 위에

 

모여 있는 내 가족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갠 과일 위에

거울과 내 방 위에

 

빈 조개껍질 내 침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게걸스럽고 귀여운 우리 집 강아지 위에

그 곤두선 양쪽 귀 위에

 

그 뒤뚱거리는 발걸음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 문의 발판 위에

낯익은 물건 위에

 

축복받은 불의 흐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화합한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건네는 모든 손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놀라운 소식이 담긴 창가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을 넘어선 곳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등댓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없는 부재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되찾은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그리고 미소를

 

 

밤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불켜진 창이 있다.

 

언제나 꿈은 깨어나듯이

충족시켜야 할 욕망과 채워야 할 배고픔이 있고

 

관대한 마음과

내미는 손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함께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

 

 

 

나이는 없이

 

        

 

숲속을 향하여

우리는 가까이 간다

 

아침의 거리를 지나서폴 엘뤼아르,

안개의 계단을 올라보라

 

 

우리가 가까이 가면

 

대지의 가슴은 파르르 떨고

여전히 다시 태어나는 하루

 

 

하늘은 넓어지리라

잠은 폐허 속에서

 

휴식과 피로와 체념의 두터운 어둠 속에서

산다는 일은

 

얼마나 견딜 수 없는 일이었을까

대지는 싱싱한 육체의 모습을 회복하고

 

바람은 가라앉아

우리의 눈 속에 태양과 어둠은

 

변함없이 흐르리라

 


 

 
그리고 미소를
 엘뤼아르
 
밤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켜진 창이 있다.
언제나 꿈은 깨어나며
욕망은 충족되고
배고픔은 채워진다.
관대한 마음과
내미는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함께 나누어야  
삶이 있다.
 
폴 엘뤼아르 (Paul Eluard, 1895~1952)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7 4 26독재자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 공군이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 바스크를 폭격한다 폭격으로 마을 인구의 3분의 1 해당하는 2000여명 죽거나 다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사건을 접한 유럽대륙의 예술가들은 분노한다뜻을 함께 하기로  예술가들은 같은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강력한 항의 메시지를 전달한다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 탄생하는 순간이다전쟁의 잔학함과 인간의 비참함을 빛과 어둠으로 그려낸 불세출의 명작은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 파리박람회 스페인관에는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 걸려있었던  아니다그림 옆에는  편의 시도 같이 전시됐다바로  엘뤼아르의 「게르니카의 승리」라는 시였다 대목만 옮겨보자.
 
“여인들과 어린아이의 눈빛 속에는
보석을 가지고 있고
남자들은 있는 힘을 다해 이를 보호하고
살고 죽기 위한 공포와 용기
그렇게 어렵고 그렇게 쉽기도  죽음
 
보석을 노래하게  사람들
보석을 망쳐버린 사람들”
 
엘뤼아르는 상반된 듯한 이미지를 지닌 시인이다.
그는 육감에 가까울 정도로 사랑에 몰두한 사랑의 시인이자압제와 불의에 맞선 저항시인이기도 하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만나야 하는 시가 서두에 인용한 「그리고 미소를」이다.
 시는 아주 감미롭고 따뜻하게 공동체가 나아가야  길을 제시하고 있다거친 구호도 다급한 분노도 담겨 있지 않지만 시는 충분히 강력하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아껴야 하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지굳이 목소리 높여 외치지 않아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피카소, <게르니카>
 
1895 파리 북부에서 태어난 엘뤼아르는 고등학교 시절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스위스 다보스로 요양을 떠난다이곳에서 그는 ‘갈라’라고 불리는 러시아 출신 여성과 결혼을 한다훗날 갈라가 살바도르 달리와 사랑에 빠지면서  사이는 파국을맞지만이때의 경험과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교류는 엘뤼아르의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그는 루이 아라공 등과 함께다다이즘 운동의 주요 멤버가 된다.
요양원에서 나온 엘뤼아르는 1 대전에 간호병으로 참전해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으며 인간내면의 폭력성에 대해 커다란 회의를 느끼게 된다.
초현실주의자였던 그를 현실참여파 시인으로 변모시킨 것은 피의 역사였다스페인 내전과, 1,2 세계대전나치즘의 횡포 등을 목도하면서 ‘사랑의 시인’ 엘뤼아르는 자유를 위한 투사로 거듭나게 된다 무렵  유명한 시가 「자유」라는 유명한 시다주요부분은 이렇다.
 
“반짝이는 모든  위에
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살포시 깨어난 오솔길 위해
곧게 뻗어나간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중략)
자유여.
 
우리가 엘뤼아르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의 삶과 사랑을   번도 저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만약 그가 자기가 살아야 했던 시대에 눈을 감은  감미로운 사랑만 노래했다면 만약 그가 오로지 목적에만 부합하는 구호같은 투쟁시만 썼다면우리는 그를 위대한 시인으로 기억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는  가지를 모두 노래했다 둘은 떼려야   없는 시대정신이었고우리가 살아냈던 삶이었으므로.
 
엘뤼아르는  몸으로  정신으로 그가 살았던 시대를 증거했다 치의 어긋남도 없이 치의 비겁함도 없이 자기가 살았던 시대를 증언했다그리고  증언은 너무나 아름다운 ‘연시(戀詩)’로 우리에게 남아있다그리고 엘뤼아르의 모든 문학은 공동체를 향해 있었다.
 
“우리는 혼자서가 아니라 둘이서 목적지를 향해 가리라우리 둘이 서로를 알게 되면 모든 사람을 알게 되리라우리는모두 서로를 사랑할 것이며 우리의 아이들은고독한 자가 눈물 흘리는 서글픈 전설을 비웃으리라. (「우리의 삶Ⅱ」)
 

허연 (시인매일경제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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