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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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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    윤동주는 왜... 댓글:  조회:2416  추천:0  2019-09-17
윤동주는 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나 2019년9월16일    영화 '동주' 스틸컷(사진=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 있는 용정시에서는 길가에 우뚝 솟은 웅장한 바위 하나를 만날 수 있다. 그 유명한 '선바위'다.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사격훈련을 한 곳으로도 알려졌다   선바위가 내려다보는 마을이 있으니 바로 '명동촌'이다. 이곳은 북간도 한인 문화의 발상지로 불리운다. 북간도로 옮겨와 새로운 터전을 다졌던 한인들에게 정신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친 까닭이다.  명동촌은 한국 근대사에서 눈에 띌 만큼 모범적인 공동체로 평가된다. 이곳은 민족교육의 산실이었고 이상적인 기독교 신앙촌이었다. 명동촌에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신분의식을 타파하고 평등주의와 같은 시대정신을 꽃피웠다. 바로 이곳 명동촌에서 시인 윤동주(1917~1945)가 태어났다. 한반도에서 북간도로 넘어와 명동촌을 터전으로 다진 1세대에 이어 등장한, 윤동주가 포함된 명동촌 2세대는 부모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았다. 특히나 당대 독립운동가들이 일궈낸 승리의 기쁨은 물론 패배의 아픔까지 모두 듣고 자란 그들은, 민족 의식과 기독교 사상이 결합한 교육을 받으면서 스스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몸에 익히고 자랐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윤동주의 삶과 사상을 압축해 놓은 듯한 '서시'는 분명 이러한 시대적, 공간적 배경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리라. ◇ "윤동주가 생각했던 하늘…관념 아니라 뚜렷한 의미 담아"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여느 명동촌 집안처럼 윤동주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지식을 쌓고 삶의 태도를 다졌다. '십자가'와 같은 그의 시에서는 희생과 헌신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기독교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윤동주는 1936년부터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시, 시, 산문 등을 발표하면서 시집 간행의 꿈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그러나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일제 경찰에 체포돼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치면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시인으로서 윤동주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는 극에 달한 일제의 탄압 탓에 한국어 사용과 창작이 금지됐던 시기다. 1941년 윤동주가 우리말 시집 출간을 추진하다가 무산된 데도 이러한 이유가 있다. 결국 그의 사후인 1948년, 어렵사리 보존된 육필 원고가 친지들의 도움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태어났다. 널리 알려진 '서시' '별 헤는 밤' '십자가' 등 윤동주의 생을 대변하는 시들은 그렇게 빛을 봤다. 익히 알려졌듯이 윤동주 시에는 '하늘'이 자주 등장한다. 윤동주 연구에 천착해 온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는 윤동주의 하늘을 크게 세 가지 의미로 풀이한다.   그 첫 번째는 '맹자'에 나오는 하늘이다. 김 교수는 "윤동주의 하늘이 나오는 '서시' 문장을 주의해 봐야 한다"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문장은 '맹자'에 나오는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을 번역한 문장"이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 의미는 '자아성찰의 대상'으로서 하늘이다. "(윤동주 시) '자화상'의 '우물'이나 '참회록'의 '거울'처럼 하늘은 자신을 반성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의미가 '기독교의 하나님'이다. 김 교수는 "윤동주가 생각했던 하늘은 관념이 아니라, '맹자의 하늘' '자아성찰의 하늘' '기독교의 하늘'로 뚜렷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 "윤동주 정신,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우쳐 줘"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시인 윤동주는 자신이 발 붙인 시대, 그리고 그 험한 시대를 함께 살아내는 사람들을 향했던 두 눈과 가슴을 거두지 않았다. 그가 남긴 시들은 그 뚜렷한 증거다. 김응교 교수는 "윤동주 '서시'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가리키는 대상은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로 뚜렷하다"며 "윤동주의 '오줌싸개 지도' 속 부모가 없는 아이들, '병원'의 환자, '해바라기 얼굴'의 여공, 산문 '종시'에서 복선 철도 노동자에 대한 묘사 등이 그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어 "윤동주의 작품에서는 동시대를 산 노동자들의 모습도 세 차례 등장한다"며 "윤동주는 그렇게 현실적인 고민을 했다. 그의 '하늘'이 '경천애인' '민심'으로 읽히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윤동주의 시는 치열한 자아성찰을 담고 있다. 김 교수 표현을 빌리면 윤동주는 "자기 존재의 고유성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서시'를 두고도 김 교수는 "결국 윤동주 정신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우쳐 준다는 데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더 나아가 그는 "모든 언론, 논문이 윤동주를 '자아성찰' 안에 가두고 있다"며 "윤동주는 그야말로 혁명의 시인"이라고 강조했다. 그 근거로 김 교수는 윤동주 시의 구절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시 '십자가' 중에서),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시 '간' 중에서) 등을 들었다. 김 교수는 "윤동주처럼 산다는 것은 스스로를 냉철하고도 고독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을 방 안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쪼개어 자기 능력껏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라며 "꼭 정치적 행위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살피는 사회 그 자체가 곧 혁명이라고 믿는다. 윤동주 시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혁명적 존재"라고 강조했다.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면서 민족운동과 기독교를 결합시킨 남다른 문화를 뿌리내리죠. 이는 당대 항일 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뒤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칩니다. 10월 17일 개봉을 앞둔 다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바탕으로 북간도와 그곳 사람들의 숨겨진 가치를 조명합니다. [편집자 주]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 윤동주의 저항에 대해서 1. 들어가며......  우리는 흔히 역사라고 하면 굵직한 사건이나 인물들을 생각하게 된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이순신와 같은 일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만이 이 세계속에서 살아있었는가?  나는 여기서 생각한다.  정말 그러한가?  그 외에 아무도 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느 먼 훗날 내가 이순신과 세종대왕 같은 인물이 되지 못하면 나는 이 세상에 살아 있던 인간이 아닌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한국 문학사속에서 위대하게 불려지고 있는 사람 중 윤동주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한다.  생각을 지행시켜 나가는 방향으로는 우리는 항상 역사를 바로 인식하고 있나를 먼저 답하고 그 다음 그러한 역사는 누가 만들어 낼 수 있나를 답할 것이다.  2. 본론을 대신하여......  우리는 윤동주를 저항시인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과연 저항시인이였을까?  우리의 인식이 잘못 된것은 아닐까?  이러한 답을 위해 나는 윤동주를 저항시인으로 보는 견해와 그렇지 않은 견해 그리고 그 견해들을 절충한 견해를 살펴보려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를 저항시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아보려 한다.  그는 과연 이육사와 같은 저항시인인가?  2.1. 저항시인으로 보는 견해  우선 그를 저항 시인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  대체로 그를 저항시인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그가 처했던 시대적 특성과 역사적 상황때문인 것 같다.  즉, 그가 살았던 일제 말기의 어둡고 혼탁한 시대적 배경과 광복을 6개월 앞둔 시기에서 그의 옥사는 그를 '저항시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몫을 다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를 평가하는 견해를 보자.  평론가 '백철'은 그의 「한국 신문학 발달사」(박영사, 1976, 재판)에서 '저항 문학의 광맥'으로서 윤동주의 시사적 위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는 릴케를 사숙했다는 천연의 서정 시인이며, 그 위에 이 시인을 성스럽게 만든 것이 바로 고난의 시대에도 엄연하게 서 있는 숭고한 민족 저항의 정신, 민족 운명을 혼자서 십자가로 짊어진 그 숭고한 모습인 것이다.  ......  그의 시구에서 우리는 '밤', '어둠', '외로움' 그리고 '괴로움' 또 '새벽', '아침', '봄' 이란 말귀들을 많이 대하게 된다.  시인의 뛰어난 상상력으로 고난의 시대 저쪽으로 새벽과 봄의 풍경을 내다본 것이다.  ......  윤동주는 이런 순교적인 사명감에서 민족 저항의 시를 남몰래 썼던 것이다."  국문학자 '정병욱'도 '일제하의 저항 문학의 맥락'으로 윤동주의 시에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하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시사적 의미를 적고 있다.  "이 10년 동안 우리의 뼈를 저리게 하는 그의 시는 조국의 문학사를 고치게 하였고, 조국의 문학을 세계적인 물줄기 속으로 이끌어 넣는데 자랑스런 힘이 되었다.  독재와 억압의 도가니 속에서 가냘픈 육신에 의지한 항거의 정신, 아니 인간으로서의 처음이자 마지막의 권리이며 재산인 자유를 지키고자 죽음을 걸고 싸운 레지스탕스의 문학이 어찌 유럽의 지성인들에게만 특권일 수 있었으랴!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숨막히는 현실 가운데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었던' 동주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시인이었기에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야 했다.  아니 뼈를 꺽어골수에서 솟아난 수장으로 눈물 없는 통곡을 종이에 올린 그의 시는 진정 '슬픈 족속'의 혈서였다.  '잎새에 이는 발에도 괴로워'하던 동주의 시혼은 '파아란 하늘'에서 독재와 억압의 거센 '바람에 스치'우며 조국과 자유를 밤새워 지키는 '별'을 노래하였다."  시인의 의식이 그 시대적 환경이 암울하고 험난할수록 더욱 예리하고 투명한 일면을 가진다는 점-마치 밤하늘의 별이 초저녁에는 희미하게 빛을 발하다가도 밤이 깊어 갈수록 더욱더 청징하고 또렷하게 빛나는 것처럼-에서 그는 저항시인으로 규정될수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그를 저항시인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이제 그의 시가 저항시로서의 시사적 의의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된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에 실린 '윤동주, 혹은 순결한 젊음'이라는 글의 일부를 소개한 후, 그의 저항성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 보자.  "윤동주는 이육사와 함께 식민지 후기의 저항시를 대표한다.  그는 식민지 치하에서는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의 시들은 해방 후에 유시의 형태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속에 수록된다.  그와 이육사가 다같이 저항시를 쓰고 옥사를 하였지만 이육사와 그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서로 다른 체질의 시인이다.  이육사가 마지막 벼랑끝까지 밀림 민족의 위기를 초인에 대한 기원으로 극복하여 하고 있는 데 비하여 윤동주는 초월적 세계에서 그 극복의 가능성을 발견하려 하지 않는다.  이육사에게서는 그러므로 주자주의적 엄숙주의가 지배적이지만, 윤동주에게서는 그러한 서이 거의 보여지지 않는다.  이육사와는 달리 그는 식민지 치하에서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았다는 행복한 이점을 또한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의 존재를 더욱 신화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 증거로는 8.15 이후에 부당하게 늙어 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용이 그의 시 앞에 '무릎을 꿇고' 분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이 없이!"  그의 시는 그러나 그가 식민지 치하에서 옥사를 하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의 시는 한용운의 시가 슬픔을 이별의 미학으로 승화시켜 식민지 치하의 정서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한 것과 같이, 식민지 치하의 가난과 슬픔을 부끄러움의 미학으로 극복하여 식민지 후기의 무질서한 질서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한다.  그의 부끄러움의 미학은 자신과 생활에 대한 애정 있는 관찰, 그리고 자신이 지켜야 할 이념에 대한 순결한 신앙과 시의 형식에 대한 집요한 탐구의 결과이다."  이것은 동주의 시가 한용운.이육사 등의 시가 남긴 정신사적 가치를 승계한 저항시의 한 양상임을 보여주는 기술이다.  즉, 이육사의 초월의지로, 한용운의 시가 '이별의 미학'으로 일제하의 우리의 정서를 구축한데 비하여 윤동주의 시는 '부끄러움의 미학'으로 일제 말기의 무절제한 정서를 극복한 저항시의 한 양상이 되는 것이다.  많은 평론가들은 그의 시적 저항성을 '부끄러움의 미학'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면서,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서시」를 인용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객관적 의미로서 그 부끄러움이 가리키는 대상과 성격을 확실하게 알 수 있 는 자료가 불충분하므로 '부끄러움의 미학'적 차원에서 이 시를 이해하는 것이 과연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약간 회의적인 면도 없지는 않다.  다만 그가 일제 치하에서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던 시인이었고, 그의 많은 글에서 민족적 가치관이 산견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 시적 대상은 조국의 광복 혹은 민족의 해방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질 수 있다.  이런 생각이 종종 그를 잘못 판단하게 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서시」나 그 외 다수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부끄러움과 그것에 대한 결백함, 깊이를 잴 수 없는 고뇌, 그리고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는 신념의 태도는 당시의 불행한 환경에서 많이 연유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어쨌든, '부끄러움의 미학'으로 규정되는 그의 시는 이육사의 시와 함께 일제말의 우리 시 문학사에 저항시의 한 맥락으로 규정된다.  앞에서 살펴 본 대로 그의 시를 그렇게 보는 것은 그가 살아간 시대적 배경과 그의 죽음이 옥사였다는 것, 유작형태로 그의 시가 발표되었다는 점등의 신비감을 이유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이육사의 시와 윤동주의 시 사이에서 어떠한 공통점도 찾을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육사를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인정하면서도 같은 맥락에서 동주를 저항 시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육사는 '이기려는 저항' 이며 윤동주는 '지지않으려는 저항' 이라고  하지만 이말도 결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저항과 윤동주를 평가하는 저항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면 거칠게 말하면 윤동주의 시는 저항시가 아니라는 말의 다른 모습인 것이다.  험하게 말하자면 앞에서 인용한 모든 글들은 '지지않으려는 저항'이라는 말과 같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2.2. 저항시인이 아니라는 견해  이제는 윤동주를 저항시인이 아니라는 견해를 한번 뒤적여 보자.  시인 '오세영'은 「윤동주의 시는 저항시인가?」(문학사상, 1976.4)에서 '윤동주 옥사 사건의 추상적 미화, 문학사적 저항성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의도적인 우상화, 오늘날 사회적 상황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저항시의 전형으로 미화시킬 필요성'등을 지적하여 윤동주의 시에 대한 저항적 의미에 회의를 나타낸 바 이다.  또한, 그는 '윤동주의 시, 그것이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은 그의 저항성에서 온 것이 아니면, 더구나 그의 시가 저항시일 수는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대체로, 그를 저항시인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그의 성격적인 특성과 저항운동의 실천성에 두는 경향이 많다.  이에 대해 윤동주의 시가 저항시가 아니며 또한 그 자신도 저항인이 아니라는 견해를 밝힌 마광수 교수는 '그가 목숨을 걸고 일제에 저항한 증거는 시는 물론 그 밖에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윤동주는 차라리 순수시의 입장에서 파악되는 것이 그에대한 올바른 평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윤동주를 저항시인으로 보지 않고 회의적 휴머니스트로 본다고 해서 그의 시적 가치가 깎여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시의 가치는 정치적.사회적 상황과 함께 생각할 수 없다'라고 역설하면서 '윤동주의 저항은 자기 내면과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라고 시의 내면성과 자기 성찰에 관한 평을 내리고 있다.  2.3. 그외의 견해  이들의 견해가 아닌 다른 견해도 있다.  그것은 저항이라는 개념을 세분화하여 놓은 것이다.  평론가 '임헌영'은 '원래 저항이란 순수 예술의 한 속성이 된다'라고 밝히며, 「순수한 고뇌의 절규」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문학적 저항의 형태를 나누고 있다.  첫째, 단체.비밀 결사 등 지원 운도에 직접 가담하는 경우 둘째, 일시적인 의무.지원등으로 저항운동에 참여하는 경우 세째, 순수한 정서적인 저항이다.  이 경우 윤동주는 셋째의 저항에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 김소월도 둘째의 경우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저항시인이라는 것은 윤동주 보다 김소월이 더 저항 시인인 것이다.  3.결론을 대신하여......  이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저항시인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귀착하게 된다.  이에 나는 저항문학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았다.  저항문학은 압제나 외국지배에 대항하여 싸우는 민족적 운동을 기반으로 생겨난 문학이라고 나와있다.  이 말도 결국은 위에 있는 견해랑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윤동주를 저항시인으로 보느냐 안보느냐는 우리들의 생각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역사는 인식하는데로 생각되어지는 것이지 않은가?  역사적인 인물도 나의 인식에 의해 어떠한 의미가 붙혀진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내가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간혹 바보짓을 하는 아주 평범한-우리나라 역사책에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인간이다.  이제 나는 미국의 역사책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들의 책에는 세상을 바꾸지 않았던 한 평범한 사람이 나온다고 한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살았고 그리고는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 조양천진 제1회 개암채집절 개최 횡도촌에서 9월 3일까지 지속 2019-09-01 14:02:10     8월 31일, 연길시 조양천진 횡도촌은 개암을 따러 나선 시민들로 북적이였다. 이들은 저마다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개암나무에 매달려 개암을 따기에 여념이 없었다.     “개암은 시장에서 많이 사먹어 봤지만 개암나무를 직접 눈으로 보고 개암을 따기는 저도 처음입니다.”아이와 함께 개암을 뜯으러 왔다는 연길 시민 황녀사는 과일이랑 남새 채취는 여러가지 많이 해봤지만 견과류 채집은 처음이라 아이도 마냥 신기해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연길시 정부와 선전부에서 주최하고 조양천진 정부에서 주관한 이번 제1회 조양천진 개암채집절은 향촌진흥을 실시하고 빈곤해탈에 조력하며 전역관광을 추진하는 중요한 조치로서 레저채집농업생태관을 구축하고 개암산업 브랜드를 육성하며 관광빈곤층부축을 실시하여 농촌 경제 성장을 이끄는데 적극적인 의의가 있다.     2013년에 시작된 횡도촌 개암재배는 6년간의 노력끝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였다. 횡도촌은 ‘기지+합작사+농호’의 모식으로 개암산업을 부단히 발전시켰는데 현재 개암채집단지는 부지면적이 15헥타르에 달하고 개암 년간 생산량이 10만 킬로그람에 달하여 우리 주에도 비교적 규모가 큰 개암재배기지로 자리매김되였다. 또한 근 40명의 촌민들이 이 곳에서 장기적으로 일하면서 일년에 인당 1만여원의 수입을 올림으로써 촌민들의 치부에도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횡동촌 촌민위원회 주임이며 개암채집단지 책임자인 손지군은 향후 개암심층가공에 공을 들여 개암기름, 개암쵸콜렛, 개암술 등 상품을 개발해 부동한 소비자들의 수요를 만족시키고 판매경로를 확대함으로서 더욱 많은 촌민들의 치부를 이끌 것이라고 밝혔다.  료해한데 따르면 이번 개암채집은 9월 3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윤녕 기자
1409    에드윈 마크햄 - "원" 댓글:  조회:2670  추천:0  2019-09-16
에드윈 마크햄 시 = 그는 원을 그려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나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 =============================== 박승원의 1분 독서 - 한 수 위 사람이 되자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한 수 위 사람이 되자 계속 밀어내면 원은 점점 작아진다. 더 많이 초대하고 끌어들일수록 원은 넓어진다. /류시화, 에서   류시화 시인의 책 에 소개된 에드윈 마크햄의 시 ‘원’을 읽습니다.   "그는 원을 그려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나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   이 시의 원제목은 ‘한 수 위’라고 합니다. 작은 원을 그려 미운 사람을 원 바깥으로 밀어내는 사람보다 더 큰 원을 그려 미운 사람도 안으로 끌어들이는 사람이 ‘한 수 위’라는 겁니다.   노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기에 밝아집니다.(不自見故明) 스스로를 옳다고 하지 않기에 돋보입니다.(不自是故彰) 스스로를 뽐내지 않기에 공로를 인정받습니다.(不自伐故有功)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기에 오래 갑니다.(不自矜故長) 싸우려 하지 않기에 천하도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不惟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삶의 하수는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스스로를 옳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뽐내려고 합니다. 스스로를 훌륭하다고 합니다. 남과 경쟁해서 이기려 합니다. 자신의 원을 작게 그려 놓고 다른 사람들을 원 밖으로 밀어내는 사람입니다. 삶이 빈약해집니다.   삶의 고수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옳다고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뽐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훌륭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남과 경쟁하지 않고 포용하려 합니다. 자신의 원을 크게 그려 놓고 다른 사람들을 원 안으로 끌어들이는 사람입니다. 삶이 풍족해집니다.   다시 원을 그립니다. 내게서 남을 밀어내려고 작게 그렸던 원을 지우고 내게 남이 들어올 수 있도록 보다 크게 원을 그립니다.   한 수 위 사람이 됩니다. ======================/// ... ... 에드윈 마크햄은 말합니다. “그는 원을 그려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나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  더 큰 원을 그리는 것이 지혜로운 관계의 비결입니다. 캐나다 로키의 그 산을 만났을 때, 아마도 제 마음의 원은 지름이 쑥 늘어났을 겁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위대함을 만날 때 그 위대함을 닮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큰 바위 얼굴을 매일 보고 자란 소년이 결국 스스로 큰 바위 얼굴이 되는 것처럼.  자연과 마주할 때보다 더 위대한 만남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제대로 만나는 순간입니다. 삶의 정수를 제대로 마주하게 해 주는 지혜가 내 얼어붙은 삶에 도끼처럼 내리칠 때 느끼는 전율과 감동은 우리의 원을 백배, 천배로 크게 넓혀줍니다.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고전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들을 목소리 높여 외치는가 봅니다.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조신영 출처 : 경북매일  
1408    [시공부] - ... 댓글:  조회:2186  추천:0  2019-08-04
#문학강좌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적 발상 장옥관 시창작 과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원천적 단계과 의미화 단계, 형상화 단계. 원천적 단계는 선천적, 후천적 차원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 시창작 교육에서 다룰 수 있는 부분은 교육에 의해 계발될 수 있는 후천적 차원. 후천적 차원은 독서와 체험, 사색의 세 범주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화 단계를 다른 말로 하면 시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알맹이(관념/사상, 감정 따위)가 있어야 시를 쓸 수 있지 않겠는가. 허긴 알맹이 없는 시가 시중에 많이 나돌고 있다. 시가 그럴듯한 말로 아름답게 치장하거나, 설익은 관념을 그대로 노출하거나, 넋두리, 푸념에 가까운 질펀한 감정의 잔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선 깨달아야 한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적 인식의 개념을 명료하게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형상화 단계는 시적 인식을 언어표현을 통해 실현화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어쩌면 형상화 단계가 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를 빚는 솜씨를 가졌다 하더라도 시적 인식이 없거나 잘못되면 빈 수수깡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적 인식의 핵심은 감수성, 관찰, 상상력이 핵심이다. 우선 감수성에 대해 살펴보자. 시를 쓰고 싶은 의욕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인상적인 느낌(즉 아름다운 자연, 극적 사건, 감동적인 순간 등에서 갖게 되는 심리적 충격)에서 시작된다. 문제는 이런 충격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대수로운 사건에서도 이런 충격을 자주 받게 된다. 감수성은 천성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훈련에 의해서도 길러질 수 있다. ​ 1. 감수성 기르는 방법 감수성은 말 그대로 느끼는 능력. 느낌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 우리의 정신 속으로 들어온다. 감수성을 기르는 방법은 느낌을 강화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 ‘햇살이 눈부시다’라는 느낌을 갖는 순간, 한번 중얼거려본다. 그러면 햇빛의 찬란함이 더욱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 다음 햇살이 어떻게 환한지 느껴본다. ‘햇살 속에 유리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찌푸린 미간 때문에 눈썹이 다 없어질 것 같네’처럼 그 순간의 느낌을 되풀이해 느껴본다. 이처럼 느낌을 강화하게 되면 감각의 깊이가 생기고 남들보다 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가. 시각을 통한 대상 파악 광명에도 초박의 암흑이 발려있는 것 같다. 전깃불 환한 실내에서 다시 탁상용 전등을 켜야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분명 한 꺼풀 얇게 날아가는 휘발성분 같은 것 책이나 손등, 백지 위에서 일어나는 광속의 투명한 박피현상을 볼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이 때로 한 순간 살짝 벗겨내는 그대 이마의 그늘 같은 것 그런 아픔이 있다, 오래 함께 한 행복이여. - 문인수, ​ 나. 청각을 통한 대상 파악 말이 되지 않는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 쥔 에이 포 용지를 냅다 방구석으로 던졌다. 어, 처박힌 종이 뭉치에서 웬 관절 펴는 소리가 난다.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 진다. ​ 종이도 죽는구나 ​ 그러나 입 콱 틀어 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 얼마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으면, 그리고 그 무거운 암흑의 産道를 얼마나 힘껏 빠져 나왔으면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 기뻤을까 누가, 날 구겨 한 번 멀리 던져다오 - 문인수, ​ 다. 후각을 통한 대상 파악 사연인즉 이렇다 외출에서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 순간, 오물을 뒤집어 쓴 돼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잠시 한눈을 파는 동안 돼지들이 등비급수로 늘어나더니만 작은 사무실을 차지해 버렸고 아예 두개골 속으로 들어와 골치를 들쑤시는 것이다 견디다 못해 마침내 소굴을 찾아 나서니 이런! 물 대접에 담아 놓은 감자가 바로 범인이었던 것 싹이 난 감자 몇 알, 물 대접에 담아 볕 좋은 창가에 놓아두고 나갔다 온 참이다 움켜쥔 주먹처럼 단단하던 감자는 흐물흐물 허물어지고 바야흐로 흰 거품이 버글버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 부신 빛깔이라니― 무지개가 선 것처럼 공기 알갱이들이 뽀얗게 커튼을 치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티 한 점 없이 완벽한 악취, 쓰레기통에도 넣을 수 없어 수돗간에 내다두었다 돼지들이 사라지고 난 뒤 무심코 나가본 하수구 어이쿠! 그리마, 노린재, 괄태충, 쇠파리 온 동네 날것 물것들이 죄 모여 꼬물꼬물, 꿈틀꿈틀, 붕붕붕…… 한바탕 잔치판을 벌이고 있었던 것 그예 감자는 쭈글쭈글 갈색 피부만 남았고, 지독한 향기 흰 젖이 되어 여린 목숨들 거두고 있었다 쭈그러든 자궁― 거무죽죽 검버섯의 할머니가 그 자리에 누워 계셨던 것이다 - 장옥관, 라. 근육감각을 통한 대상 파악 모시 반바지를 걸쳐 입은 금은방 김씨가 도로 위로 호스질을 하고 있다./아지랑이가 김씨의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오르며 일렁인다./호스의 괄약근을 밀어내며 투둑 투둑 흩뿌려지는 幻의 알약들/아 아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아/뻐끔뻐끔 아스팔트가 더운 입김을 토하며 몸을 뒤튼다./장딴지를 감아 올린 거웃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일제히 용두질을 시작한다./한바탕 대로와 아지랑이의 질펀한 정사가 치러진다./금은방 김씨가 잠시 호스질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 짚는다./아 아 정말 살인적이군, 살인적이야/금은방 안, 정오를 가리키는 뻐꾸기 시계의 추가 축 늘어져 있다. - 김지혜, 부분 ​ 마. 공감각을 통한 대상 파악 1 흥덕왕릉*의 숲에는 비밀이 있다 섭씨 19도, 서풍과 함께 듣는 솔방울 소리, 부재를 위해 텅 빈 공간이 부푸는 한낮, 밤이 아니라도 등불이 하나 둘 차례차례 켜지는 느낌, 일만 그루 소나무가 손 뻗어 나를 만지도록 정지하는 것, 일만 그루의 소나무에 매달리는 섬모 운동, 내게 필요한 것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우는 울음이다 2 비밀이 탄로난 이유가 갑자기 휘몰아닥친 장대비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왕국을 베고 눕고자했다 왕이 누리던 고요 외에 십삼층 석탑 같은 왕의 비애를 열어 보고자 했다 어떤 기미도 없이 절규의 힘으로 빗방울이 관 뚜껑 닫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비를 오게 하는 왕국의 슬픔이다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인근의 신라 흥덕왕릉. 흥덕왕은 죽은 장화부인을 못 잊어 내내 독신으로 살았다. - 송재학, 기타 미각, 촉각, 기관을 통한 대상 파악은 생략.    
1407    [시공부] - ... 댓글:  조회:2310  추천:0  2019-08-04
/시론               원관념과 보조관념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습관에 관한 얘기를 더 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저의 경우로 말씀드렸듯이 첫번째는 같은 단어는 웬만해서 두번 이상 쓰지 말자 두번째는 인칭을 가능하면 사용하지 말자                 꼭 써야 한다면 한번만 어쩔 수 없을 때 두 번 꼭은 아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시맛을 내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세번째로 드리고 싶은 말씀 중복된 단어 조심하자 입니다 초심자들의 경우 무엇을 강조하고자 할 때 이런 실수가 나옵니다. 강조를 하고 싶어 쓰다보면 이 말도 그 말이고 그 말도 이 말인데 자꾸 가져다 붙이게 됩니다 그런데다가 한글이 참 어려워서 단어 자체가 그런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구름이 운집한 이경우도 사실은 한문으로 운이 구름 운이라 중복이 되는 셈입니다 이런 것들 말고도 역전 앞에서도 전이 한문으로는 앞전자라 유의해야 합니다 아무튼 중복되는 단어를 조심해서 사용하자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심상법에 관한 말씀을 드렸는데 조금 깊이를 더하려 합니다 어쩌면 진짜 시를 쓰는 법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원관념과 보조관념인데요 1. 원관념이란.? 내가 전하고자 하는 생각이고 2.보조관념은 내가 생각하는 원관념의 뜻이나 분위기가 잘 살도록 보조 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원관념) 나룻배 (보조관념)                   당신은 (원관념)  행인(보조관념)이 됩니다   * 내 마음은 호수처럼 맑다. -------- ------- ☜ 직유법 * 내 마음은 맑은 호수요. ------------------------- ☜ 은유법 예시로 저의 졸시 배롱나무를 보겠습니다      배롱나무   너 없이 피고 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 나는 배롱나무가 되었다 중구난방 피는 너를 안고 밑둥이 허예지도록 나는 야위웠는데 시든 날에 여름은 가고 내 모르는 눈물이 동강에 섞이었다 희나리처럼 설운 나는 먹빛 하늘에 살 수 없었으나 명패가 삼문三問인지라 마음만은 겹겹으로 지키었다 사는 것이 한 생만은 아니라서 나는 봄마다 너를 안고 일어나 햇불이 무색하도록 꽃 피게 하리라 이 글에서 너는 원관념 피는 꽃은 보조관념                  나는 원관념 배롱나무는 보조관념입니다   ■  '가려뽑은《무한화서》'/ 이성복 1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버리면 그 전제前提를 무시하는 거예요. 3 언어는 때 묻고 상스러운 것이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보고 들을 수 없어요. 언어는 어떤 대상이나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에요. 언어 자체가 대상이고 목적이에요. 언어를 수단으로 사용하면 언제나 결핍감을 느껴요. 글쓰기는 언어 자신의 탈주이며 모험이에요. 16 우리는 시를 쓰면서도 언어를 불신해요. 불성실한 하인쯤으로 여기는 거지요. 언어는 우리보다 위대해요. 언어를 믿어야 언어의 인도引導를 받을 수 있어요. 18 우리의 세계는 언어로 된 세계에요. ‘언어 너머’ 또한 언어이고, 지금 이 말조차 언어예요. 시인은 알몸으로 언어와 접촉하는 사람이에요. 20 머리는 의식적이고 사회적이지만, 손은 욕망과 무의식에 가까워요. 시는 머리를 뚫고 나오는 손가락 같은 거예요. 걸으면 벌어지고, 멈추면 닫히는 치파오라는 중국 치마 같은 거지요. 24 턱수염을 아래서 위로 쓸어 올릴 때의 느낌 아시지요. 그처럼 말에 저항이 없으면 바로 산문이에요. 시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35 말은 작고 가볍게 해야 해요. ‘…임에 틀림없다 must’ 보다는 ‘…일지 모른다 may’가 힘이 있어요. 판단 유보의 어조사 ‘의矣’를 즐겨 쓰는 공자에 비해, 단정적 어조사 ‘야也’를 자주 쓰는 맹자를 ‘아성亞聖’이라 한 대요. ‘성인’에는 좀 못 미친다는 것이지요. ‘삼천년뒤 성인이 다시와도 내 말은 못 바꾼다 百世聖人復起 不易吾言’는 그의 말은 너무 도도해서 힘이 떨어져요. 36 시는 빗나가고 거스르는 데 있어요. 이를테면 ‘서재’와 ‘책’대신 ‘서재’와 ‘팬티’를 연결하는 식이지요. 39 항상 입말에 의지하세요. 가볍고 쉽게 사라지기 때문에, 입말이 소중한 거예요. 우리 누구나의 인생처럼…… 65 시는 단도직입單刀直入이고 단도직입短刀直入이에요. 짧은 칼 한 자루 들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거지요. 시는 백미터 달리기에요. 그 짧은 시간에 무슨 말을 주저리주저리 하겠어요. 말수를 줄여야 실수도 적어요. 67 가야금 탈 때 손으로 ‘지그시’ 눌러주어야, 깊고 부드러운 음이 나오지요. 멋진 이미지로 장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이 ‘지긋함’이에요. 85 시는 반전反轉의 힘이에요. 행과행, 연과 연사이에 전환이 있어야 해요. 가령 ‘꽃이 피었다 - 새가 울었다’는 연결보다 ‘꽃이 피었다 - 새가 죽었다’는 연결이 힘이 있어요. 86 '아주머니 속에 주머니가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을 벗겨보세요. 주머니 속에는 또 머니가 있지요. 그러니까 아주머니의 주머니에 돈이 있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양파 껍질 벗기듯이 벗기다 보면 나중엔 아무것도 안 남아요. 시는 대상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99 시적 언어는 치타가 누의 목덜미를 무는 것처럼 대상의 급소를 공격해요. 그 한순간을 위해 '뜨거운 솥을 핥는 개'처럼 자꾸 말을 던져야 해요. 135 멋있는 것, 지적知的인 것, 심오한 것 찾지 마세요. 피상적이고 무의미한 것에서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시예요. 사소한 일상보다 더 잔인한 건 없어요. 죄수를 발가벗겨 대나무밭에 눕혀 놓으면, 나날이 커 올라오는 죽순竹筍에 찔려 서서히 죽어간다고 하지요. 170 시는 천둥벼락이고 집중호우예요.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써야 힘이 있어요. 악어가 누의 목덜미를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 보셨지요. '저 미안하지만 손 좀 잡으면 안될까요' 이러지 말고 바로 잡아버리세요. 안 그러면 힘들어져요. 171 항상 보여줘야해요. 내가 왜, 어떻게 우울한지 알려고 글을 쓰는 건데, '나 우울해, 건드리지마!' 이러면 되겠어요. 보이게 쓸 형편이 아니라면 말의 꼬임새라도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나'도 살고, '우울'도 살아요. 174 시 쓰기는 봉오리가 피어나거나, 풍선이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아요. 처음에는 어떤 모양이 나올지 짐작하기 어려워요. 또 시는 재즈 연주와 비슷해요. 과정이 목표이고, 멈추는 곳이 끝나는 곳이에요. 217 시는 침술과 같아요. 문제 되는 부위를 정확히 찔러 통증을 진정시키는 것. 투약이나 수술 없이도, 약간의 아픔만으로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는 거. 시는 한의학과 마찬가지로 오랜 전통이에요. 278 다친 새끼발가락, 이것이 시예요. 307 시는 알고 쓰는 게 아니라, 쓰는 가운데 알게 되는 거예요. 331 막막한 바다에서 어부는 어디에다 그물을 쳐야 할지 알아요. 간절함과 안쓰러움, 부질없음과 속절없음이 시의 포인트이고 기술이예요. 423 시하고 연애하고 같다고 하지요. 더 깊이 들어가면 저절로 빠져나올 텐데, 나오려고 하니까 못 빠져나오는 거예요. 425 이유 없이 상대가 함부로 대하더라도 속상해하지 마세요. 그 대신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세요. 나한테 잘못이 없으면 그 사람 문제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수신하지 않은 편지는 발신자에게 돌아간다 하잖아요. 430 왜 자기 눈에는 자기가 안 보일까? 470 '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말이 있지요. 사마귀가 겁 없이 수레 앞에 버티고 서서 한번 해보자고 덤비는 것이지요. 참 말도 안 되는 한심한 짓이지만, 시도 그런 것 아닐까 해요. 아름드리 나무 기둥을 뽑겠다고 부둥켜안고 용써보는 것.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 실패 안 할 수밖에 없다는 듯. 이 '올 인'하는 것. 그거라도 안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어요. (이성복 시론집《무한화서》에서)   그림에 빗대어 말할 때, 시는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읽으며 선명하게 그려지는 어떤 풍경이 없다면 모호한 안개 속을 거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읽으면 유년의 한때가 머릴 스치고 지나간다. 향토적이며 묘사적이며 또한 감각적인 시의 전개는 누구나 읽는 순간부터 자신의 풍경을 그리게 된다. ‘향수’의 전개 방식은 후렴구가 반복되는 병렬식 구조로 되어 있으며 선명한 영상과 동시에 감각적 언어의 붓질로 인하여 화면 가득 고향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에 젖어 들게 한다. 연마다 시상을 전개하거나 매듭지어 연결하는 영상미적 집약의 서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한 편 속에 시각적, 청각적, 공감각적, 촉각적 시상과 심상들이 자연스럽게 표현된 개연성과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어 글이 아닌 그림을 감상한 듯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누구나 아는 작품이지만 ‘시와 풍경’이라는 글제에 가장 적합한 작품이기에 전문을 인용해본다.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 정지용』전문 인용 문학의 장르는 다양하며 시 또한 시 속의 시 장르는 매우 다양하고 그것은 표현의 기법 이전에 심상의 전이와 시상의 표출 방식에 대한 시인 자신의 다양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풍경을 보고도 얼마든지 다른 그림이 나올 수 있다. 관찰자의 각도, 시간, 마음상태, 풍경의 배경 이 모든 것들이 달리 보이는 그림이 나오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림과 시의 동질성을 분석해본다면 같으면서 다르다는 것이다. 있는 것을,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린다면 다만, 풍경화일 것이다. 하지만 풍경 뒤에 분명히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풍경을 그린 그림이 웅숭깊듯 시 역시 풍경 너머 보이는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스스로 먼저 감동해야 한다. 자기 감동이 선행되지 않은 글은 사상누각이며 진정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좋은 풍경화를 아무리 세밀하게 원본과 흡사하게 그려낸다 해도 복사본에서는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타인의 글을 답습하거나 타인의 붓을 가져와 내 글에 현란한 채색을 한다 해도 그것은 이미 풍경으로서의 존재가 없다. 내 글에 대한 질감과 색채를 개발하고 연구할 때 그것이 풍경이 가진 배경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일의 기초가 될 것이다. 시와 풍경, 풍경과 배경을 나름의 색으로 채색한 몇 작품을 소개해 본다. 안개 속 풍경 정끝별 깜깜한 식솔들을 한 짐 가득 등에 지고 아버진 이 안개를 어떻게 건너셨어요? 닿는 순간 모든 것을 녹아내리게 하는 이 굴젓 같은 막막함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부푼 개의 혀들이 소리없이 컹컹 거려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발 앞을 위태로이 달려가는 두 살배기는 무섭니? 하면 아니 안 무서워요 하는데요 아버지 난 어디를 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바람 속에서는 바다와 별과 나무, 당신의 냄새가 묻어 와요 이 안개 너머에는 당신 등허리처럼 넓은 등나무 한 그루 들보처럼 서 있는 거지요? 깜박 깜박 젖은 잠에서 깨어나면 어느덧 안개와 한몸되어 백내장이 된 우우 당신의 따뜻한 눈이 보여요 덜커덩 덜컹 화물열차가 지나가요 그곳엔 당신의 등꽃 푸르게 피어 있는 거지요? 나무가 있으니 길도 있는 거지요? 무섭니? 물어주시면 아니 안 무서워요! 큰 소리로 대답할게요 이 안개 속엔 아직 이름도 모른 채 심어논 내 어린 나무 한 그루가 짠하게 자라는걸요! 나무는 언제나 나무인걸요! 『안개 속 풍경 / 정끝별』전문 인용 밥통의 계보를 묻다 서동인 부엌에 나뒹구는 파도 빛 얼룩진 밥통 뚜껑을 오랜만에 열었네 세상에, 주인이 먹다 남은 공양미 곰팡이 꽃망울 터뜨리는 텃밭에 나비도 없이 어디선가 검은 구름덩이 내려앉아 엉덩이를 살짝 살짝 내밀고 있었네 속의 것들이 울렁거리는 내 속도 내시경을 들이밀면 저런 풍경일까 하늘까지 뚫린 산동네 골목길을 기어 내려와 살아서도 싸늘한 지하 셋방이 싫어 공중에 매달린 거미집 옥탑방 까지 힘없는 주인을 따라 세간 옮길 때마다 용달차 한구석에 처박힌 불쌍한 녀석, 한강도 서너 번 건너 본 밥통은 현기증 때문인지 제대로 밥 지을 줄도 모르네 어느 해 였던가 유조선 시프린스호 기름띠 보상으로 바닷가 우리 家系에 걸어 들어온 너의 정체, 그 겨울 뚜껑을 연 양식장 굴껍데기 꺼먼 속살에 놀란 아버지 발길에 차여 파도 빛 멍든 너를 새 것으로 바꾸진 못하겠네 문득, 병들고 지친 밥통의 계보를 묻다가 거울 속 네 주인처럼 짠한 생각이 들었네 『밥통의 계보를 묻다 / 서동인』전문 인용 운주사 깊은 잠 이명윤 그들의 꿈에 잠시 스쳐가는 풍경처럼 다녀왔다 눈썹이 지워지고 입술이 지워져가는 석불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느 날 눈이 사라졌으니 잠에서 번쩍 눈뜰 염려가 없고 입술이 지워졌으니 또다시 저녁이 와도 끼니 걱정 안하실 일 무심한 얼굴을 더듬어 내려오다 두 손으로 곱게 모은 기도를 보았는데 언젠가 불타는 세월이 기도 앞을 쿵쿵거리며 뛰어다녔을 때도 철없이 눈썹을 쪼던 새가 어느덧 눈이 멀어 발등에 떨어져 죽었을 때도 꿈쩍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 기도보다 깊은 잠에 빠진 까닭이다 점점 얼굴이 지워져가는 얼굴들이 착한 아이들처럼 나란히 앉아 세월 좋게 주무시고 있었다 덩그러니 코만 남은 얼굴이 아침도 벗고 저녁도 벗고 훌훌 표정도 벗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떤 분은 아예 자리를 깔고 하늘 아래 누워 계셨다 신기한 듯 쳐다보는 사람들을 (허공에 주렁주렁 박힌 창백한 눈과 입들을) 본체만체 저들끼리 야속하게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운주사 깊은 잠 / 이명윤』전문 인용 위 인용한 세 편의 작품의 공통점은 풍경에서 풍경의 배경을 담아냈다는 점이다. 또한, 자신만의 붓을 들어 고유의 색을 채색하여 그 온도를 차별화했다는 점에서 본 글의 주제어인 시, 풍경화에 적합한 작품이라는 생각에 인용했다. 모던 포엠 6월호 글 감상의 주제는 시, 풍경화에 부합하는 작품 세 편을 선별하여 풍경이 담고 있는 시인의 시선을 주목해 본다. 단순하게 풍경을 그려내지 않고 세상을 담는 의미를 부여한 현상을 생각하며 시를 감상해 보자. 첫 작품은 송병호 시인의 [달동네의 손금을 읽는 오후]라는 작품이다. 달동네의 손금을 읽는 오후 송병호 좁은 고샅길 돌아도 돌아도 언제나 제자리인 그 골목에 숙명처럼 상처 안고 똬리 튼 골 깊은 손금들이 있다 명랑이발관의 해맑은 미소를 지나쳐 엇갈린 오복담뱃가게 생명선은 차마 풍년 쌀가게의 재물선과 영영 만날 수 없는 구획이 되었다 그나마 입시학원의 아직은 흐릿한 장래선만 또렷한 선이다 실선들, 흔들릴 때마다 칙칙한 배경의 가끔 끊어졌던 동시상영 두 편의 영화는 오간 데 없고 낡은 영사기 한 대 골목 짓무른 앵글로 바람을 채록하고 있다 한때는 민심을 쥐락펴락했을 선과 선의 공존 바닥이 다른 면 위의 또 다른 점선들 깨진 유리창 밖으로 하루를 점치지 못하는 도시의 손금으로 남아 있다 수면 手面의 수상학은 믿을게 못 된다고 툴툴거리며 다 닳아빠진 지문을 가지런히 포개 혼자 졸고 있는 노파 요즘은 거의 사라진 단어 달동네. 달동네는 도시의 외곽이나 산등성, 산비탈 등 비교적 높은 지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의미한다. 달동네의 연원은 해방 이후 귀국한 해외동포들과 종전 이후 월남한 난민들이 도시의 외곽에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달동네에 대한 의의와 평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960년대 이후 약 40년 동안 도시빈민 주거지역의 전형이었던 달동네의 도시빈민촌은 이른바 달동네 문화라고 부를 만큼 능동적이고 건강한 빈민문화를 상징했다. 이농민들이 주로 거주했던 달동네는 값싼 주거지인 동시에 생존의 공동체였다. 농촌의 이웃관계가 지속되는 공동체였으며, 험난한 도시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기착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진행된 재개발사업으로 달동네의 도시빈곤층은 주거비가 싼 곳을 찾아 단독주택지의 지하방, 옥탑방, 비닐하우스, 쪽방 등으로 흩어졌다. 일반인들에게 빈곤층은 눈에 띄지 않는 집단이 되었고, 빈곤층은 고립되면서 이전의 공동체를 통해 얻었던 물질적·정신적 이익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다음 백과 사전』인용 달동네와 손금. 얼핏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지만 시인은 폐가처럼 변한 달동네의 스산한 풍경 속에서 그 배경을 읽고 있다. 시의 전반을 흐르는 기조는 관찰이 아닌 관조를 바탕으로 시인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오래된 기억의 골목과 병치하여 손금이라는 占 행위와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돌아도 돌아도 언제나 제자리인 그 골목에 숙명처럼 상처 안고 똬리 튼 골 깊은 손금들이 있다 명랑이발관의 해맑은 미소를 지나쳐 엇갈린 오복담뱃가게 생명선은 차마 풍년 쌀가게의 재물선과 영영 만날 수 없는 구획이 되었다 시인이 채록한 달동네에 대한 온도는 2연 첫 행에 기록하고 있다. 달동네의 골목은 돌아도 돌아도 언제나 제자리인 골목에서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게 된다. 그 골목의 이리저리 난삽하게 이어진 골목과 골목의 입구와 출구는 입구라는 개념도 출구라는 개념도 없다. 들어오는 곳이 나가는 곳이며 나가는 곳이 들어오는 곳이라는 것은 나갈 곳이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느낌이다. 명랑이발관, 오복담뱃가게, 풍년 쌀가게가 의미하는 삶의 고단한 무게를 시인을 달동네라는 손바닥에서 보고 있다. 하지만 3행에서 시인은 달동네의 희망을 보여준다. 그나마 입시학원의 아직은 흐릿한 장래선만 또렷한 선이다 다른 모든 손금의 선들은 희미하고 퇴락하고 지워져 더 볼 것이 없지만 흐릿한 장래선은 또렷하다는 표현에서 시인이 던진 메시지는 경쾌하고 밝은 모습을 독자에게 던진다. 선과 선의 공존 바닥이 다른 면 위의 또 다른 점선들 도시의 손금으로 남아 있다 손바닥 위의 손금은 서로 공존하고 있다. 혹은 운명을 혹은 재물을 혹은 생명을 하지만 달동네가 만든 손금은 ‘도시’라는 새로운 사업화 시대를 건설하는 또 다른 점선의 기초가 된다. 도시의 손금이며 도시를 이루는 손금 일부가 되었다는 달동네 풍경의 배경, 시인이 읽는 달동네의 채색이 어떤 색인지는 시를 읽는 독자 누구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구 6행의 전체가 달동네와 현재와 과거, 미래의 모습을 담담한 어조로 조망하고 있는 것, 생의 막바지에 와있는 노파의 눈꺼풀에서 산업화 시대의 단면과 그 속에서 잃어버린 삶의 한 단면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이중성을 갖게 된다.    '관념적인 한자어를 척결하라' 어떤 말이 시가 될 수 있고 어떤 말이 시가 될 수 없을까? 일상어와 시어는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모든 일상어가 시어로 쓰일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문장과 대화에서 쓰이는 모든 말은 시어가 될 수 있다. 우리 현대시에는 표준어뿐만 아니라 꽤 오래 전부터 방언과 비속어까지 심심찮게 시어로 등장했다. 김용택은 “환장하것네 환장하것어/ 아, 농사는 우리가 쌔빠지게 짓고/ 쌀금은 저그들이 앉아 올리고 내리면서/(…)/ 풍년 잔치는 저그들이 먼저 지랄”()이라며 전라도 사투리를 통해 노골적으로 농민들의 편을 든다. 김진경은 “복어새끼처럼 왜 그런대유/ 배에다 바람을 잔뜩 집어넣구/ 가시를 있는 대루 세우믄 누가 무서워헐 줄 아남유”()하고 충청도 말로 능청을 부린다. 안상학은 “보래요. 삼시세끼 빵만 묵고 살라믄 살니껴? 대한민국 워델 가도 그런 사람 없을께시더”()라면서 경북 안동 말을 시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김수영이 일찍이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자, 한참 후에 이에 화답하듯 황지우도 풍자의 대열에 합류한다. “간밤에도 그는 외국 바이어들을 만났고, “그년”들을 대주고 그도 “그년들 중의 한 년”의 그것을 주물럭거리고 집으로 와서 또 아내의 그것을 더욱 힘차게, 더욱 전투적이고 더욱 야만적으로, 주물러주었다.”() 이에 질세라 박남철은 한 발 앞서간다. “내 시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놈들에게→차렷, 열중쉬엇, 차렷,”() 하고 호통을 친다. 현대어뿐만 아니라 중세국어, 영어, 화살표 같은 기호까지 시어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문장에 쓰이는 마침표·쉼표·물음표·따옴표·줄표와 같은 부호가 시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못해 절대적이다. 심지어 옥타비오 파스는 침묵도 말이라고 한다. “침묵조차도 무언가를 말하는데, 침묵은 무(無)가 아니라 여전히 기호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어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강철 조각이 아니다. 적어도 용접공이 강철과 강철을 이을 때 일어나는 불꽃이거나 그 불꽃의 뜨거움이거나 불꽃이 내장하고 있는 위험한 미래여야 한다. 그래서 때로 시어는 한글맞춤법이나 국어순화운동에 딴청을 부리기도 한다. 나는 자장면보다 ‘짜장면’이, 메리야스보다 ‘런닝구’가, 브래지어보다는 ‘브라자’가, 펑크보다는 ‘빵꾸’가, 머큐로크롬보다 ‘빨간약’이나 ‘아까징끼’가 더 시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옥타비오 파스도 시적인 언어는 일상으로부터 일탈할 때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작용의 첫 번째 행동은 말들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들을 뿌리째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 된다.”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전통 속에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우리는 한자 혹은 한자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시인들은 한자의 형상이 드러내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한자가 시인들을 자극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기호의 의미는 같지만 ‘산’이라고 쓸 때와 ‘山’이라고 쓸 때 그 함의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우스운 이야기 하나. 어릴 적에 나는 음식점 간판에 적힌 ‘산낙지’를 보고 한동안 산에 사는 낙지인 줄 알았다. 가재처럼 심산유곡의 돌덩이 밑 어디쯤 사는……) 그런데 뜻글자라고 해서 그 뜻과 형상이 다 미학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다. 관념적인 한자어는 시에서 척결해야 할 대표적인 낡은 언어다. 시적 언어의 성취 목표를 한 50년 이전쯤에 두고 있는 사람일수록 관념적인 한자어를 쉽게 지워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유치환이 에서 “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라고 노래한 것은 1930년대 말이었고, 박인환이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라며 절망스러워한 것은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였다. 김현승이 ‘堅固한 고독’을 발표한 때는 60년대 중반이었다. 이 시인들이 ‘애수’와 ‘애증’과 ‘견고한 고독’을 노래할 즈음에 그 시어들은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그 시어들은 시간의 무덤에서 하얗게 풍화된 죽은 말들이다. 무엇보다 관념적인 한자어를 써야만 그럴 듯한 시가 된다는 착각이 문제다. 정진규는 시에서 관념이 ‘화자의 우월적 포즈’()라고 꼭 집어 말한 바 있다. 당신은 관념적인 한자어가 시에 우아한 품위를 부여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품위는커녕 한자어 어휘 하나가 한 편의 시를 누르는 중압감은 개미의 허리에 돌멩이를 얹는 일과 같다. 신중하고 특별한 어떤 의도 없이 아래의 시어가 시에 들어가 박혀 있으면 그 시는 읽어 보나마나 낙제 수준이다. 갈등 갈망 갈증 감사 감정 개성 격정 결실 고독 고백 고별 고통 고해 공간 공허 관념 관망 광명 광휘 군림 굴욕 귀가 귀향 긍정 기도 기억 기원 긴장 낭만 내공 내면 도취 독백 독선 동심 명멸 모욕 문명 미명 반역 반추 배반 번뇌 본연 부재 부정 부활 분노 불면 비분 비원 삭막 산화 상실 상징 생명 소유 순정 시간 신뢰 심판 아집 아첨 암담 암흑 애련 애수 애정 애증 양식 여운 역류 연소 열애 열정 영겁 영광 영원 영혼 예감 예지 오만 오욕 오한 오해 욕망 용서 운명 원망 원시 위선 위안 위협 의식 의지 이국 이념 이별 이역 인생 인식 인연 일상 임종 잉태 자비 자유 자학 잔영 저주 전설 절망 절정 정신 정의 존재 존중 종교 증오 진실 질서 질식 질투 차별 참혹 처절 청춘 추억 축복 침묵 쾌락 탄생 태만 태초 퇴화 패망 편견 폐허 평화 품격 풍자 피폐 필연 해석 행복 향수 허락 허세 허위 현실 혼령 혼령 화려 화해 환송 황폐 회상 회억 회의 회한 후회 휴식 희망 “진부한 말이란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는 말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모든 경서와 옛사람들이 이미 언급한 말의 대부분이 이른바 진부한 말이다.”(김창협,  외편) 시는 이런 진부한 시어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다. 사유라는 것은 원래 그 속성상 관념적인 것이고 추상적인 법이다. 하지만 관념을 말하기 위해 관념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학대행위다. 관념어는 구체적인 실재를 개념화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관념어가 시만 좀먹고 있는 게 아니다. 예식장에도 있다. 흔해빠진 주례사가 그것이다. 행복과 공경과 우애와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간 주례사가 귀에 들리면 한시바삐 밥을 먹으러 가고 싶어진다. 진정한 사랑은 개념으로 말하는 순간 지겨워진다. 황지우의 시처럼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것, 그게 사랑의 표현방식인 것이다. 관념어는 진부할 뿐 아니라 삶을 왜곡시키고 과장할 수도 있다. 또한 삶의 알맹이를 찾도록 하는 게 아니라 삶의 껍데기를 어루만지게 한다. 당신의 습작노트를 수색해 관념어를 색출하라. 그것을 발견하는 즉시 체포하여 처단하라. 암세포 같은 관념어를 죽이지 않으면 시가 병들어 죽는다. 상상력을 옥죄고 언어의 잔칫상이어야 할 시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관념어를 척결하지 않고 시를 쓴다네, 하고 떠벌이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내고 나면 그 휑하니 빈자리가 몹시 쓸쓸하게 보일 것이다. 당신은 그 빈자리를 오래 응시하라. 당신의 상상력이 가동하기 시작할 것이고, 상상력은 이미지라는 처녀를 데리고 올 것이다. 말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그 처녀를 꽉 붙잡고 놓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낸 자리에 그 처녀를 정실부인으로 들어앉혀라. 그래도 관념어의 옛정이 그리워져 못 견디게 쓰고 싶거든 그 말을 처음 쓴 지 30년 후쯤에나 써라. 당신에게 시 한 편을 읽어주겠다. 이시영의  전문이다. 나는 이 시에서 ‘고독’이라는 말을 발견하고 온몸이 찌릿찌릿해졌다. 이쯤은 되어야 고독을 말할 자격이 있다. 고독을 모르는 문학이 있다면 그건 사기리 밤새도록 앞뜰에 폭풍우 쓸고 지나간 뒤 뿌리가 허옇게 드러난 잔바람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위태로이 위태로이 자신의 전존재를 다해 사운거리고 있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창작 강의] (22) 오늘은 현대시의 난해성을 가져온 '해체시'와 '무의미시' 중에서,  해체시에 관해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시대거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전통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계승하고자 하는 온건한 경향이 있는 반면, 이와는 달리 낡은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지향하고자 하는 진취적인 경향이 공존합니다. 전자를 보수파, 후자를 개혁 내지는 혁신파라고 부릅니다. 역사는 이 두 상반된 대립들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변증법의 이론이기도 합니다. 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평시조에 대한 사설시조, 시조에 대한 신체시, 신체시에 대한 자유시 등의 대립들을 통해 현대시로 발전해 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이르게 되면 이상(李箱)에 의해 소위 과격한 모더니즘의 혁신적인 실험시가 나타납니다. 이상(李箱)의 이러한 실험적인 시풍(詩風)은 한때 잠잠하다가 1980년대에 다시 기승을 부리며 일어납니다. 이것이 이른바 해체시(解體詩)라는 것입니다.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된 바 있는 이 해체적 경향은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서구적 풍조의 그늘 밑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시단에서 시도된 해체적 경향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림 시를 산문화(散文化)한다든지, 시에 희곡이나 시나리오 기법을 도입하기도 하고, 시 속에 회화나 도형을 삽입하기도 합니다. 둘째, 표현 매체의 개방 시는 언어 예술이지만 표현 매체를 언어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그림, 사진, 도형, 기호 등을 동원하여 표현하기도 합니다. 셋째, 기존의 규범 문법에 구속되지 않음 사회적인 약속인 기존 문법에 구애되지 않고 비문(非文)이나 논리적 타당성이 없는 문장을 구사하기도 합니다. 넷째, 시적 주체의 소멸 독특한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이 담긴 개성적인 글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글들을 여기저기서 무작위로 끌어다 자신의 글처럼 쓴다든지[pastiche], 광고나 기사(記事), 사진 같은 것들을 오려 붙인다든지[collage] 하는 행위입니다. 다섯째, 탈이념(脫理念) 현상 어떤 주의(主義)나 사상(思想)에 예속되지 않고 자유를 추구합니다. 나아가서는 도덕과 윤리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합니다. 여섯째, 예술의 저속화[kitsch] 현상 일상의 저속한 것들 속에서 소재를 구한다든지, 속어나 욕설 등의 비어(卑語)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으로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으로도 지적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해체시의 특징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기존의 것들 곧 전통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체 사상이 80년대에 유행하게 된 것은 당시 인기를 얻고 있었던 프랑스의 사상가 데리다(J. Derrida)의 영향 때문으로 보입니다. 데리다의 해체 이론은 기존의 것을 왜 바꾸어 놓아야 하는가 하는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데리다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불확정성(不確定性)’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을 바라다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서 천태만상의 다른 모습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물의 양태를 하나로 확정지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물의 시간적 존재 양태는 끊임없이 변해 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서구의 합리주의는 사물을 우열의 관계로 잘못 확정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성>감성, 남성>여성, 백인>유색인, 기독교>다른 종교 등으로 앞의 것을 우월한 것으로 확정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우열의 관계는 바른손과 왼손의 관계처럼 기회가 많이 주어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자리를 뒤바꾸어 후자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기존의 제도, 전통, 관습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잘못 굳어져 있으니 이를 해체(deconstruction)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해체는 결코 파괴(destruction)가 아니라고 합니다. 물론 잘못된 전통이나 편파적인 관습 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회가 향유하고 있는 문화는 수천 년 동안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그렇게 형성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된 것들은 비교적 최선의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것들보다는 바람직한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태도는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은 개혁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개악과 파괴로 규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해체시가 시도하고 있는 것들은 어떠한가 냉정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전통적인 시의 인습을 무너뜨리는 바람직한 혁신들인가. 아니면 기존의 것을 뒤집어 놓겠다는 데리다적인 단순한 거부의 발상인가를 신중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시(詩)로 불리어지려면 언어를 떠나서는 안 되고 또한 예술의 반열에 놓이려면 아름다움을 잃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시에 대한 도전은 의미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언어의 구조물’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건필을 기대하며 다음주 무의미시에 대한 소개로 시창작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시(詩)와 평론(評論)에 대한 소고(小考)/ 이담 정항석 일상적으로 시에 대한 것과 그 평에 대한 것은 많이 그리고 쉽게 접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접근에 대한 마음가짐과 훈련이 없다면 지난(持難)한 것이 되고 마는 경우를 경험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역설하고자 한다. ‘시(詩 poem)는 짓는 것이고 평론(評論)는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이에 대한 명제적(命題的)이고 선언적(選言的)인 주장을 어떻게 투영시켜야 하는가? 첫째는 그 접근의 마음가짐이다. 얼른 말하자면 이렇다. ‘시(詩)짓기는 절대적으로 글쓰기의 한 종류이다’. 글쓰기에 기본적인 바탕이 없이 ‘아귀가 맞는 글쓰기’가 어느 정도의 훈련이나 능력이 아니 되면 시를 짓는 것은 매우 어려워진다. 시가 다소 짧은 어휘나 단어들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만만해 보이지마는 결코 가벼이 다룰 것은 아니다. 예컨대, 1) 문학 장르로써 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이렇다. ‘모를 잘 심는 농부’라 하여 벼의 생육 상태를 알 수 있어도 그 생물학적 분석은 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 둘을 다 해야 한다. 2)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연구도 해야 한다. 아울러, 시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인(詩人 poet)의 역할이다. 그래야 가식(假飾)이 없이 선험적 진솔함을 담을 수 있다. 단지 시(詩)를 수백 편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할 경우 시의 형식과 문장 등을 외어서 하는 것으로 이는 흉내에 불과하다. 3) 문학 장르에서 가장 짧은 것이지만 시는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단지 고발이나 비판, 조소, 비아냥 등으로 그칠 것이 아니다(이것이 시라고 생각한다면 단세포적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볼멘소리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볼멘소리는 생산적이고 긍정적이며 교훈적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설명한다. 둘째, 평론(評論)은 글쓰기에 대한 훈련과 재능이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론에서도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금기이다. 특히, 최근에서 포스트 모던(post-modern)적인(? 설명이 더 필요하지만, 이하 각설) 생각에 갇혀서 ‘감성적 위주의 시’를 폄하(貶下)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주목할 것은 그 글과 시가 1) ‘전체적인 글의 틀(frame)’, 2) ‘어법적 문장의 구성’, 그리고 3) ‘동원된 개념이 적절하게 스며있는가’를 면밀하게 고려해야 한다. 더러 신춘문예 심사를 한 이후에 나오는 심사평들은 매우 자의적인 느낌에 의존한 경우가 허다하며 때로는 모호한 경우가 많다. 이는 ‘시를 오랫동안 써 왔다’ 하여 다른 이들의 시를 쉬이 접근하여 자신의 눈짐작이나 눈대중으로 저울질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시(詩)짓는 것과 평론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못하는 것을 억지로 해서도 안 된다. 3. 시는 짧은 것이 결코 아니다. 함축적으로 의미를 담을 수 있다면 최고의 것이라고 이를 수 있지만, 세월을 두고 시(詩)짓기의 견본(見本)이 되며 그 의미에서 감동과 교훈을 주는 시들을 보면 결코 단어나 어휘 몇 개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하여 시는 언어의 경제성을 감안(勘案)한다 하더라도 한 편의 논문(論文 an article)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간략하게 그 틀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서론(도대체 무엇이 문제(issue)인가?) 현상(자연적 사회적 현상=고발내용) 주장(화자의 느낌를 포함) 선험적 시각(이론과 가설) 주장과 선험적 시각에서 주장을 해야 되는 우선적 설명(說明)(기술(記述)과 서술(敍述)포함) 2. 자기 주장에 대한 개념을 구체화(무엇을 언급하려고 하는가?) 시에서는 관념적 그리고 추상적 언급도 가능하지만. 개념화는 분명하게 해야 한다. 이는 자기 논리적 사고가 접목되어야(embedded) 하기 때문이다. 자기주장에 대한 것을 정의적 개념화(시에서는 예를 들어, ‘누님같은 꽃이여’라는 것도 이에 해당)를 도식화시켜야 한다 자기 주장에 대한 이론화(理論化)를 갖추는 것이며 이는 비판적이고 우회적이지만 보편적 논리를 위반해서는 안 된다. 3. 현상의 구체적 언급(이 이슈가 이슈화가 되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1) ‘무엇이 문제인가’를 구체적으로 언급(=시에서는 묘사에 해당)한다 2) 화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한다(=시의 경우, 메타포가 동원될 수 있음) 3) 현상과 대상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관찰이 수반되어야 한다.(꽃의 경우도 언제 피는지, 생육과 그 발달에 대한 것, 그 꽃이 의미하는 보편적 인식을 접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개념을 구분할 수 있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되 '왜 그러한지'를 필히 언급해야 하며 그 언급은 논리적이고 이성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4. 분석적 접근 결국, 이 부분을 언급하기 위해서 위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와 3.를 대비하여 '대조한다든지' 혹은 '자기주장이 현상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언급해야 한다. 이를테면, (1) ‘현상은 이러했고’, (2) 그‘래서 이렇게 주장하는 데는 이러한 까닭이고’, (3)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을 제시한다’는 내용이 절대적으로 분석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어야 한다. 시의 경우에서는 이 부분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에는 카피라이터 식의 글이 이 경우만 언급하고, 그나마 더 자극적이고 호객 행위적인 것으로 종결짓고 마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집을 짓다가 만 경우와 같다. 정통성이 있는 운문(韻文)을 공부한 이후에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채, 디지털적인 사고방식으로 편하게(?) 다가가는 까닭에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러 조소적(嘲笑的)이고 냉소적(冷笑的)인 시들이 여기에 해당하다. 앞뒤 자르고 이것만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사회의 어두운 면을 쓰기 위해서 동원되는 단어들을 비틀어 쓰고는 ‘이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식의 시들이 그것이다. 문제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신춘문예에 당선작들이 여기에서 주춤거리다가 호기심을 유발하게 하지만 신춘문예 당선 이후에 글을 쓰지 못하는 경우(당선작에 대한 소감문과 그에 대한 설명을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함)가 있다. 그리고는 시를 짓지 못하는 경우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현대사회의 단면을 보고 고발(비아냥, 조소, 비판 등)하는 시들을 지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마치 어떤 현상을 보고 ‘욕’을 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잘못을 했다고 한다면 이에 대해서 접근하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이다. 1) 무관심, 2) 애 둘러서 언급(누구who를 나무라지 않고 그의 편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하는 경우), 3) 비아냥 혹은 조소, 그리고 4) 비난 등이 그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글과 시는 생산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4)는 제외된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2)와 3)이다. 그동안 감성적 위주의 시들이 1)에 해당하여 나와 나를 이해주기를 바라는 공감적 공유에 초점을 두었다면 ’자신의 일기장이나 자신만 볼 수 있는 작기장에 옮겨야 할 것이다. 문제는 2)와 3), 특히, 최근 포스트모던적인 성향을 가지는 것이 돋보여서 그런 것 같은데 그저 고발만 하고 그것으로 그치고 있다 무책임하다. 생산적인 대안적 제시는 없다. 그러다 보니 ‘아니면 말고 식’의 비난적 무책임의 공공성을 함유하고 있다.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판을 생산적인 결과로 도출하기 위해서 ‘쓴소리’를 할 수 있지만, 비난은 그것으로 끝이다. 비난은 댓구의 필요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자기감정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이지 ‘하늘에다 욕’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그동안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을 써놓고는 이전의 시들과 차별화되는 양 하지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다 또한, 시인이지만 평론을 못 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평론을 함부로 할 일도 아니지만 정작 본인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글쓰기가 기본바탕이 아니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를 짓기 전에 글쓰기를 절대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5. 결어 혹은 결론: 앞서 했던 것들을 간추려서 요약 정리하면 된다. 결론적으로는 이렇다. ‘시를 짓는다’ 하는 것은 위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들만 언급하기 때문에 마치 헝겊을 기워서 색다른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짓는다’고 하는 것이다. 평론 역시 글쓰기의 연장이기 때문에 위의 과정을 반드시 밟아야 한다. 위의 과정이 체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평론다운 평론이 있을 수 없으며, 시를 몇 편 지어봤다고 평론을 자처하는 어리석음에 처하는 경우를 피해야 한다. ** 의 내용 중에서 일부를 간추린 것입니다. 공유는 가능하지만, 저작권이 있으므로 반드시 출처와 저자를 밝히고 함께 옮겨가시기를 바랍니다.   바람과 구름 그리고 농담                                             하린     바람과 구름을 우려먹는 기술이 필요하다 만질 수 없는 것을 갖고 노는 비법이 필요하다 이성적인 혀와 몽롱한 감각이 만들어내는 혼종의 판타지가 필요하다 바람에게는 근사한 취미가 필요하고 구름에게는 우호적인 솜사탕이 필요하다 구름의 심장을 훔치거나 바람의 목덜미를 만지는 자질이 필요하다 구름의 목구멍에 손을 넣어 박힌 가시를 꺼내고 바람의 아래턱과 윗턱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는 여유가 필요하다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으니 나는 구름과 바람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시인이다 수시로 바람과 구름을 식재료로 볶고 지지고 삶고 찌는 방식이 필요하다 바람의 소문과 구름의 험담을 구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구름을 살해하고 바람을 수배하고 바람 속에 무덤을 만들고 구름의 사상을 읽어내는 경지가 필요하다 바람의 초대나 구름의 청혼을 듣는 귀가 필요하다    나는 언제쯤 바람의 시인 구름의 시인이라는 계급을 획득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바람 빠진 시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구름의 썩어 문드러진 살점을 삼키고 있다  바람과 구름도 모르는 백만 가지 사용법이 나에겐 필요하다   - 2012년 여름호    
1406    시는 무용이다... 댓글:  조회:2447  추천:0  2019-07-09
당신은 왜 시를 읽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1929년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 무용수였던 올가 코클로바와 결혼을 하고 아들 파울로를 얻었지만, 한 여자로 만족하지 못했다. 올가는 이혼을 원했으나,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은 를 그렸던 피카소의 이혼을 허용하지 않았다. 피카소는 올가와 20년 넘게 별거 생활을 하는 동안에 마리아 테레즈 발터와 딸 하나를 낳았고, 프랑수아즈 질로와 아이 둘을 낳았다. 피카소는 일흔두 살 때인 1953년, 스물일곱 살 난 이혼녀 자클린 후탱을 만났다. 피카소는 올가가 사망한 뒤인 1961년, 무려 마흔다섯 살 연하의 자클린과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페피타 뒤퐁의 (도서출판 율, 2019)은 두 사람의 사랑에 관한 기록이다.  피카소의 초기 시절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1930)을 썼고, 야심만만한 화가이기도 했던 프랑수아즈 질로는 (1964)을 출간했다. 프랑수아즈 질로는 그 자신이 바람둥이였기에 은 ‘폭로’였지 결코 ‘고해’가 아니었다(두 개념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멀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일설은 피카소가 유일하게 매달리던 여자로 그녀를 꼽고 있지만, 진실은 그녀가 두 아이를 인질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지영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클린 후탱은 보통교육을 받은 후, 열아홉 살에 토목기술자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몽상가로 불릴 만큼 문화 예술에 심취했던 반면, 남편은 뭇 여자에 더 관심을 쏟았다. 철도 건설 현장 책임자로 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로 파견된 남편을 따라나선 자클린은 어느 날 남편에게 실망하고 어린 딸과 함께 파리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칸과 가까운 바닷가 마을에서 도자기를 파는 점원 일을 하다가 프랑수아즈 질로가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난 직후의 피카소를 만났다. 자클린은 피카소 사후에 벌어진 복잡한 유산 분쟁 속에서 그의 그림을 흩어지지 않게 간수하고, 13년 동안 피카소를 위한 기념사업에 매달렸다. 그녀는 명문가 출신도 예술가도 아니었기에 정식 부인이었음에도 피카소 관련서에서는 존재감을 찾을 수 없었다. 여기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데이브 젤리의 (안나푸르나, 2019)는 스탄 게츠가 1964년에 출반한 앨범 ‘나 말고는 아무도’를 그대로 책 제목으로 삼았다. 재즈에 취미가 없는 독자들은 ‘스탄 게츠의 초상’이라는 부제를 보고도 무덤덤할 테지만, 재즈 애호가들에게는 반갑기 짝이 없는 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가 고른 스물여섯 명의 재즈 아티스트들에게 바친 (열림원, 2002)에 이렇게 썼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소설을 읽었고 다양한 재즈를 탐닉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스콧 피츠제럴드야말로 소설(the Novel)이고, 스탄 게츠야말로 재즈(the Jazz)라고 생각하고 있다.”  열세 살 때 생애 첫 색소폰을 갖게 된 스탄 게츠는 열다섯 살이던 1945년에 이미 프로 연주자로서의 “완성체 음악가”가 되었다. 그가 이때 벌어들인 주급 35달러는 아버지의 주급보다 더 많았는데, 곧 70달러씩이나 벌게 되어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되고, 여성 편력을 시작한다. 이런 점에서 재즈 연주자로서 스탄 게츠의 삶은 여느 유명 재즈 연주자의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에서 하루키가 첫 번째로 경애했던 쳇 베이커가 그랬다. ‘재즈계의 제임스 딘’이었던 두 사람은 문제가 너무 닮았던 탓에 “처음부터 서로를 싫어했고, 평생 서로를 경계”한 끝에 한 번도 좋은 녹음을 남기지 못했다.  시맹(詩盲)을 탈출하는 두 가지 방법  미국 재즈는 주로 흑인음악 전통 안에서만 해석되어온 편이지만, 지은이는 미국 재즈의 기원에는 “‘진지한’ 예술 또는 ‘저항의 음악’”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할리우드 뮤지컬과 브로드웨이 쇼”가 또 다른 중요한 기원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널리 알려진 재즈 명곡 가운데 많은 곡이 ‘아메리칸 송’이라고 불리는 그것에서 파생되었다. 이런 논리의 확장판이 ‘재즈는 원래 백인의 것’이라는 일부 백인 인종주의 재즈 뮤지션들의 주장이지만, 지은이가 그것을 지지하고 있지는 않다.  미국의 시 전문 잡지에서 이름난 시 애호가 50명에게 ‘당신은 왜 시를 읽는가?’라고 물었다. 프레드 사사키와 돈 셰어는 꽤 오랫동안 진행되었던 이 기획의 답변을 모아 (봄날의책, 2019)를 엮었다. 기획에 응해 에세이를 제출한 이들 가운데는 헬렌 피셔(인류학자), 리처드 로티(철학자), 록산 게이(작가), 로저 에버트(영화평론가), 아이웨이웨이(중국 현대미술가·인권운동가), 크리스토퍼 히친스(언론인), 크리스 헤지스(언론인)같이 우리에게 알려진 유명인도 있지만, 이름보다는 야구 선수였거나 지의 편집장처럼 특이한 경력이 더 눈길을 끄는 사람도 많다.  프레드 사사키·돈 셰어 엮음신해경 옮김, 봄날의책 펴냄이들이 내놓은 에세이를 보면 시가 필요한 이유 혹은 읽는 이유는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시는 아무런 효용도 소용도 없지만 “시는 무용하기 때문에 중요하다(리오폴드 프뢸뤼크)”라고 말하는 견해. 다른 하나는 창의력 확장이든, 위안이든, 행동의 수단이든, 적확한 감정의 표현이든 뭐든, 시는 삶에 유용하다는 견해.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총장을 지냈던 퇴역 중장 윌리엄 제임스 레녹스 주니어는 이렇게 강조한다. “미 육군사관학교가 계관시인을 배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명하게 소통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졸업생들을 키워낸다면, 우리는 군과 이 나라에 더 나은 지도자들을 준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서문을 쓴 돈 셰어의 말을 들어보면, 시가 점차 전문화되어 “요즘 나오는 시들은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해지는 것은 한국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읽고 싶지만 어려워서 포기한다는 고급 독자도 적지 않다. 시맹(詩盲)을 탈출하는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재즈 음악에도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장르가 따로 있듯이 “특정 종류의 시가 나와 공명한다는 사실”(마이클랜 피트렐라)을 빨리 알아채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좀 더 원론적이다. 대니얼 핸들러는 “시가 어렵다고 느꼈을 때는 재미로 시를 읽을 때였다”라면서, 시집은 한 번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는 것이라고 귀띔한다. 이처럼 ‘용을 써야’ 이해가 되는 것이 시라면, 시의 효용이나 소용이 결코 무용으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장정일 (소설가) webmaster@sisain.co.kr 싱싱한 뉴스 생생한 분석 시사IN
1405    [그것이 알고싶다] - 백서 "도덕경" 댓글:  조회:3411  추천:0  2019-06-29
도덕경   [ 道德經 ] 이미지 크게보기 노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 무위자연의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나라와 관련해서는 '삼국사기'에 처음 관련 기록이 보인다. 규장각도서. 유형 문헌 시대 고려 성격 도가서 편저자 노자 제작시기 기원전 4세기경 목차 정의 서지적 사항 개설 정의 중국 도가철학의 시조인 노자(老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 서지적 사항 『노자』 또는 『노자도덕경』이라고도 한다. 약 5,000자, 81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道經)」,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德經)」이라고 한다. 노자가 지었다고 하나 한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집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변형 과정을 거쳐 기원전 4세기경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고정되었다고 여겨진다. 여러 가지 판본이 전해 오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하상공(河上公)이 주석한 것으로 알려진 하상공본과, 위(魏)나라 왕필(王弼)이 주석하였다는 왕필본의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전문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당사본(唐寫本)과 육조인사본(六朝人寫本)이 있고, 여러 곳에 도덕경비(道德經碑)가 아직도 흩어져 있어 노자의 경문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근년에 후난성(湖南省)창사(長沙)의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백서노자(帛書老子)와 색담사본도덕경(索紞寫本道德經)은 『도덕경』의 옛 형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원래 『도덕경』은 상·하로만 나누어졌을 뿐이지만, 장구지학(章句之學)이 성행한 한대(漢代)에 들어와서 장·절로 나누어졌다고 보인다. 개설 『도덕경』의 구성 체재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였고, 성립 연대 및 실질 저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는데, 한 사람이 한꺼번에 저술하였다는 관점과 도가학파의 손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당시의 여러 사상을 융합시켜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한 사람의 전작물임을 주장하는 관점은 노자를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의 실존인물로 보아 『도덕경』을 그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부정하는 관점은 노자가 가공인물이라는 점과, 또한 비록 실존인물이라 하여도 『도덕경』과는 상관이 없다는 관점에서 현존하는 『도덕경』은 여러 사람에 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경』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많은 문제점과 상반된 처지에도 불구하고, 『도덕경』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기본 사상이 변함없이 계속해서 일관성을 유지해 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도덕경』의 사상은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위는 ‘도는 언제나 무위이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의 무위이고, 자연은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天法道道法自然).’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도덕경』의 사상은 모든 거짓됨과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이다. 좋다·나쁘다, 크다·작다, 높다·낮다 등의 판단들은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비교하여 만들어낸 상대적 개념이며, 이런 개념들로는 도(道)를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들의 집합체이므로 『도덕경』에서는 언어에 대한 부정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 점에서 유가사상과 현격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유가사상에서는 인위적 설정이 강조되는 예학(禮學)이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으며 언어에 의한 규정이 강력하게 요청되기 때문이다. 반면, 『도덕경』에서는 규정성의 파기와 언어에 대한 부정을 강조하는데, 유가사상이 중국 북방의 황하유역에서 형성된 것인 반면, 이런 무위자연의 사상은 중국 남방의 양쯔강유역에서 형성되었다는 기질적인 차이로 설명되기도 한다. 즉, 북방은 생존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투쟁적이어야 하지만, 남방은 날씨가 온화하고 자연 조건이 순조로워 평화적이고 낭만적이었는데, 이런 분위기의 차이가 사상 형성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유가사상이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덕목을 설정하여 예교(禮敎)를 강조하면서 현실적인 상쟁대립이 전제된 반면, 『도덕경』의 사상은 상쟁의 대립이 인위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생긴다고 보고, 무(無)와 자연의 불상쟁(不相爭) 논리를 펴나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도덕경』의 사상은 학문적인 진리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위·진, 남북조시대처럼 사회가 혼란과 역경에 빠져 있을 때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밝혀 주는 수양서로서도 받아 들여졌으며, 민간신앙과 융합되면서 피지배계급에게 호소력을 지닌 사상 및 세계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우리 나라 자료에는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근구수왕 즉위년조에 근구수왕이 태자로 있을 때 침입해 온 고구려군을 패퇴시키고 계속 추격하려 하는 순간, 휘하의 장수 막고해(莫古解)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듣기로는 도가의 말에, 족함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제 얻은 것이 많은데 더 욕심을 내어서 무엇합니까?” 이 말을 듣고 추격이 중지되었다고 하는데, 이 구절은 『도덕경』 제44장에 나오는 말이다. 『도덕경』의 구절이 장수의 입에까지 오를 정도였다면 당시 사회에서는 상당히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임에 틀림이 없고, 나중의 일이지만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도 비슷한 내용의 시를 수나라 장수에게 보낸 것이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다. 『삼국유사』 보장봉로조(寶藏奉老條)에는 당나라 고조(高祖)가 고구려인의 오두미교 신봉 이야기를 듣고 624년 천존상과 함께 도사를 보내어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듬해 영류왕은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불(佛)·노(老)를 배우고자 하였고, 고조는 이를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보장왕이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건의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배우도록 하였는데, 당나라 태종(太宗)이 도사 8명과 『도덕경』을 보내 주자 왕은 기뻐하며 승사(僧寺)를 지어 도사를 거처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신라에서는 575년 화랑도를 만들고 그 정신을 현묘지도(玄妙之道)라 칭하였는데, ‘현묘’라는 말은 『도덕경』 제1장에 나오는 ‘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衆妙之門)’을 연상시키는 용어로 도가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도술연구에 골몰하였던 김가기(金可紀)에 대해서는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海東異蹟)』에 나타나 있는데, 그는 『도덕경』을 비롯하여 여러 선경(仙經)을 계속해서 낭송하고 수련을 계속한 끝에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는 왕 중에서도 도교신앙이 제일 돈독하고 재위 당시 도교가 융성하였던 예종이 청연각(淸燕閣)에서 한안인(韓安仁)에게 명하여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유교경전과 대등하게 다루어서 강론시켰을 정도이므로, 당시 『도덕경』을 연구하던 사람의 숫자도 많았고 수준도 높았으리라 짐작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엄격한 주자학적 사상(朱子學的思想)과 그 배타적 성격 때문에 『도덕경』에 대한 연구가 위축되었지만, 유학자들 가운데서 주석서를 펴내어 끊임없는 관심을 보여 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박세당(朴世堂)은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을 저술하였고, 이이(李珥)는 『도덕경』 81장을 40여 장으로 줄여 『순언(醇言)』이라는 주석서를 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도덕경』에 관한 관심은 희박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 이외는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보는 성리학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덕경』의 기본 흐름은 일찍부터 도교신앙과 접합되어 오면서 민중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기층의 민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덕경 [道德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도덕경   [ 道德經 ] 《도덕진경(道德眞經)》의 약칭으로 노자(老子)가 지은 《노자(老子)》를 가리키는 말. 숭도(崇道) 천자인 당나라 현종이 741년(개원29) 장안ㆍ낙양 등에 도교사원 현원황제묘(玄元皇帝廟)를 세워 숭현학(崇玄學)을 두고, 《노자》ㆍ《장자(莊子)》ㆍ《열자(列子)》ㆍ《문자(文子)》의 도교 4서를 가르쳤는데, 이듬해인 742년(천보원년) 이들과 《부상자(庚桑子)》의 저자에게 각각 도덕진인(道德眞人)ㆍ남화진인(南華眞人)ㆍ통현진인(通玄眞人)ㆍ충허진인(沖虛眞人)ㆍ동령진인(洞靈眞人)의 호를 추증하고, 각각의 서적이름을 《도덕진경》ㆍ《남화진경》ㆍ《통현진경》ㆍ《충허진경》ㆍ《동령진경》이라 명명했다. 상ㆍ하 2권으로 《장자》와 함께 도가사상의 중핵을 이루며, 도교의 근본경전으로 존숭된다. 공자(孔子)가 예를 물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사기(史記)》의 노자백이열전(老子伯夷列傳)에 의하면, 노자는 주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으로 일했는데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은퇴하여 서쪽으로 가다가,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러 관령(關令) 윤희(尹喜)의 청에 따라 5천자의 글을 남겨서 이를 《오천언(五千言)》이라고도 부른다. 《도덕경》은 상ㆍ하 2권, 81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전반 37장의 상권을 《도경》, 후반 44장의 하권을 《덕경》으로 이름한다. 1973년 장사의 마왕퇴(馬王堆)에서 발견된 고조대 필사본 백서(帛書) 《도덕경》은 현재 장으로 나눈 부분에 방점을 찍고 《덕경》을 앞에, 《도경》을 뒤에 두었는데, 《하상공주도덕경(河上公注道德經)》에 이르러 장으로 나뉘었고, 이후 《도경》과 《덕경》 순으로 바뀌었다. 《도덕경》은 우주의 궁극적 실체를 도(道)로써 파악하고, 무위(無爲)를 정치처세술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는 “도의 본체는 공허하나 그 작용은 무궁무진하다. 도는 심오하여 잘 알 수 없으나 마치 만물의 종주같다”(제4장)하고, “상덕(上德)은 스스로 덕을 의식하지 않으므로 덕이 있을 수 있다. 하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므로 덕이 없게 된다”(38장)고 했다. 《도덕경》은 우리나라에 삼국시대부터 유행했다. 유ㆍ불ㆍ도 삼교가 정족(鼎足)의 치세관(治世觀)을 이룬 가운데,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설이 베풀어졌다. 소태산대종사도 교리형성에 있어서 이러한 흐름을 수용하여 “노자께서는 ‘상덕(上德)은 덕이라는 상이 없다’ 하셨으니, 공부하는 사람이 이 도리를 알고 이 마음을 응용하여야 은혜가 영원한 은혜가 되고 복이 영원한 복이 되어 천지로 더불어 그 덕을 합하게 될 것이니, 그대는 그 상 없는 덕과 변함없는 복을 짓기에 더욱 꾸준히 힘쓸지어다”(《대종경》 인도품17)라고 부촉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덕경 [道德經] (원불교대사전) ======================================///   도덕경   [ 道德經 ] 요약 중국의 사상가 노자(老子)가 지은 것으로 전하는 저서명. 저자 노자(老子)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상가인 노자(老子)가 지은 책이며 약 5,000자, 상하 2편으로 되어 있다. 도덕경이 쓰여진 연대에 관해서는 이설(異說)이 분분하며, 그 사상 ·문체 ·용어의 불통일로 미루어 한 사람 또는 한 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특히 후대에 오면서 내용이 추가된 것으로 판명되어 저자가 노자 한사람으로만 받아들이기 어렵다. 도덕경의 내용은 BC 4세기부터 한초(漢初)에 이르기까지의 도가사상의 집적(集積)으로 보여진다.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원본 《노자》가 있었던 모양이나, 현행본의 성립은 한초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 후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상편 37장, 하편 44장, 합계 81장으로 정착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노자 사상의 특색은 형이상적(形而上的)인 도(道)의 존재를 설파하는 데 있다. ‘무위(無爲)함이 무위함이 아니다’라는 도가의 근본교의, 겸퇴(謙退)의 실제적 교훈, 포화적(飽和的) 자연관조 등 도가사상의 강령이 거의 담겨 있어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다. 《노자》는 흔히 말하는 도(道)가 일면적 ·상대적인 도에 불과함을 논파하고, 항구 불변적이고 절대적인 새로운 도를 제창한다. 그가 말하는 도는 천지(天地)보다도 앞서고,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적 존재이며, 천지간의 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이를 성립시키는 이법(理法)이다. 다시 말하면, 대자연의 영위(營爲)를 지탱하게 하는 것이 도이며, 그 도의 작용을 덕(德)이라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도와 덕을 설파하는 데서, 《노자》의 가르침은 도덕(오늘날의 도덕과는 다름)으로 불리어 《도덕경》이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노자사상의 중심은 오히려 정치 ·처세의 술(術)로서의 무위를 설파함에 있고, 형이상적인 도의 논설은 그 근거로서의 의미를 지님에 불과하다. 노자는 하는 일만 많으면 도리어 혼란을 초래하고, 공을 서두르면 도리어 파멸에 빠지는 일이 흔한 세상에 비추어, 오히려 무위함이 대성(大成)을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선 의도하는 바는 아무런 작위(作爲)가 없고, 게다가 그 공업(功業)은 착실절묘하다고 설파하였다. 이 도를 본으로 하여 무위함에서 대성을 기대할 수 있다고 설파하며, 이 점에서 형이상의 도와 실천적인 가르침이 관련된다. 무위의 술(術)이란 구체적으로는 유약 ·겸손의 가르침이 되고, 무지 ·무욕의 권장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상징으로서는 물[水] ·영아(嬰兒). 여성에의 예찬이 된다. 유가가 말하는 인의예악(仁義禮樂)이나 번잡한 법제금령(法制禁令)은 말세의 것으로 배척하고, 태고(太古)의 소박한 세상을 이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궁극적으로는 세속적인 성공을 쟁취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 논법에는, ‘도는 언제나 무위하면서도 무위함이 아니다’ ‘대공(大功)은 졸(拙)함과 같다’ ‘그 몸을 뒤로 하여 몸을 앞세운다’와 같이 역설(逆說)이 많은 점이 두드러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덕경 [道德經] (두산백과) =====================/// 노자 「도덕경」     교과단원 전통윤리, Ⅱ. 개인과 가족의 가치 있는 삶, Ⅱ-1 인격 수양의 길 목차 1. 교과서 속 주개념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2. 확장 개념 고자의 인성론 3. 관련 지식 인식보다는 체험을 중시한 장자의 사상 1. 교과서 속 주개념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도(道)를 도라고 말로 표현하면, 그 도는 항구 불변한 본연의 도가 아니고, 이름지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참다운 실재의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 앞의 ‘도’는 명사로, 노자 철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우주의 본원, 즉 우주의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운행하고 발전시키는 실체이자, 원리이고 원동력이다. 뒤의 ‘도’는 동사로, ‘말하다.’의 뜻을 지닌다. ‘상’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항상 같다.”는 뜻이다. ‘상도’는 항구 불변의 본체를 의미한다.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 : 앞의 ‘명’은 명사로 실재나 실상을 의미하고, 뒤의 ‘명’은 동사로 “말로 나타내다.”, “일컫다.”의 뜻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인간의 감각이나 인식을 초월한 형이상적(形而上的)인 것이므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도는 만물의 근원이자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것이므로, 피조물의 유한한 말로 규제될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하는 방편으로 이름지어 도라고 하는 것이다. 2. 확장 개념 고자의 인성론1) 인간의 성(性)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생리적 욕망이 성품이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식욕과 색욕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나 동물이 다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 자체를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봇물을 동쪽으로 트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트면 서쪽으로 흐르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인성에는 인의(仁義)가 들어 있지 않으므로, 그 자체를 선 또는 악이라고 할 수 없다. 즉, 인의란 후천적인 교육이나 학습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것이지, 본래부터 고유하게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다. 이는 장인(匠人)이 버드나무로 바구니를 만드는 것과도 같은데, 버드나무 속에 바구니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인성은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개조시킬 수 있다. 즉 후천적 환경이 중요하다.(性無善惡說) 3. 관련 지식 인식보다는 체험을 중시한 장자의 사상 세상에서 도를 귀히 여겨 찾는 데는 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책은 말을 기록해 놓은 데 불과하고, 말이 귀히 여기는 것은 뜻이다. 그런데 그 뜻은 추구하는 바가 있는데, 그 뜻이 추구하는 바는 말로써는 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말을 귀히 여겨 책을 전한다. 세상 사람들이 비록 그것을 귀히 여기나 오히려 귀히 여길 것이 못 된다. 그러므로 보아서 볼 수 있는 것은 모양과 빛이요. 들어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이름과 소리이다. 슬프다. 세상 사람들은 모양 과 빛, 이름과 소리로써 저 도의 진실을 알 수가 없다. 대저 양과 빛, 이름과 소리로써 저 도의 진실을 알 수 없다면,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그것을 알까? 제환공이 대청 위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윤편은 대청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윤편은 망치와 끌을 놓고서 제환공에게 물었다. “대왕께서 읽으시는 것은 무슨 책입니까?” “성인의 말씀이시니라.” “그 성인은 지금 살아 계십니까?” “이미 돌아가셨느니라.” “그렇다면 대왕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 사람의 찌꺼기입니다.” “과인이 책을 읽는데 수레바퀴나 깎는 네 놈이 무슨 참견이냐? 네 변명할 구실이 있으면 좋거니와 변명을 못하면 죽이리라.” “저는 제가 하는 일의 경험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느리게 깎으면 헐렁해서 꼭 끼이지 못하고, 빨리 깎으면 빡빡해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는 것은 손에 익숙하여 마음에 응하는 것이나 입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이에는 익숙한 기술이 있는 것이나, 저는 그것을 제 자식에게 가르칠 수가 없고, 제 자식도 그것을 저에게서 배워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제 나이 70이 되도록 늙게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날의 성인도 마찬가지로 깨달은 바를 전하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 읽으시는 것도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해설] 중국에는 예부터 “글은 말을 다할 수 없고, 말은 뜻을 다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곧 말로는 추상적인 생각이나 영상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마치 불교의 불립문자(不立文字)나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경지와 같다고 하겠다. 따라서 장자는 인식보다는 체험을, 이론보다는 실제를 중시하여 도의 본체는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이런 표현은 노자가 도의 개념을 말한 「도덕경」 제14장이나 제35장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도의 진상은 언어와 문자로써는 표현할 수 없다는 전제를 내세워 놓고, 제환공과 윤편의 유명한 대화로써 실증을 보이는 것이다. 즉 장자는 현실적 체험과 소통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자 「도덕경」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한림학사) =======================/// "도덕경" 1,2,3장... 1. 道可道(도가도), 非常道(비상도), 名可名(명가명), 非常名(비상명), 無(무), 名天地之始(명천지지시), 有(유), 名萬物之母(명만물지모), 故常無(고상무), 欲以觀其妙(욕이관기묘), 常有(상유), 欲以觀其(욕이관기)교, 此兩者(차량자), 同出而異名(동출이이명), 同謂之玄(동위지현), 玄之又玄(현지우현), 衆妙之門(중묘지문).  [말로 나타낼 수 있는 도는 영구 불변의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구 불변의 이름이 아니다. 무명은 천지의 시원이고 유명은 만물의 모체이다. 그러므로 영구 불변의 무에서 만물의 미묘한 이법을 보도록 해야 할 것이며, 영구 불변의 유에서 그 귀착점을 살펴보도록 해야 한다. 없는 것과 있는 것은 같은 근원에서 나왔으되 그 이름은 다르다. 그 같은 바를 신비로움이라 한다. 신비하고도 신비하여 모든 오묘한 이치가 나오는 문인 것이다.] 2. 天下皆知美之爲美(천하개지미지위미), 斯惡已(사악이), 皆知善之爲善(개지선지위선), 斯不善已(사부선이), 故有無相生(고유무상생), 難易相成(난이상성), 長短相較(장단상교), 高下相傾(고하상경), 音聲相和(음성상화), 前後相隨(전후상수), 是以聖人處無爲之事(시이성인처무위지사), 行不言之敎(행부언지교), 萬物作焉而不辭(만물작언이부사), 生而不有(생이부유), 爲而不恃(위이부시), 功成而弗居(공성이불거), 夫唯弗居(부유불거), 是以不去(시이부거). [이 세상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인정하는 것은 추악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착한 것을 착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착하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유와 무는 서로를 낳게 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생성케 하며, 긴것과 짧은 것은 서로 모습을 노출시키기 때문이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가지런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과 성은 서로의 존재로써 화음을 이루고 전과 후는 앞이 있으므로 뒤가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의도적인 행위 없이 일을 처리하며 무언의 가르침을 베푼다. 만물의 활동을 위하여 그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며, 만물을 육성시키면서도 소유물로 삼지는 않는다. 일을 하고도 뽐내지 않고 공을 세우더라도 자신의 공로로 자부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공로라고 자부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은 항상 그에게서 떠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3. 不尙賢(부상현), 使民不爭(사민부쟁), 不貴難得之貨(부귀난득지화), 使民不爲盜(사민부위도), 不見可欲(부견가욕), 使民心不亂(사민심부란), 是以聖人之治(시이성인지치), 虛其心(허기심), 實其腹(실기복), 弱其志(약기지), 强其骨(강기골), 常使民無知無欲(상사민무지무욕), 使夫智者不敢爲也(사부지자부감위야), 爲無爲(위무위), 則無不治(칙무부치). [현자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경쟁 의식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손에 넣기 어려운 재물을 소중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도둑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욕심을 부추길 만한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백성의 마음은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정치는 백성들의 마음을 비게 만들고 그들의 배는 부르게 만들며, 그들의 의지력은 약화시키며 그들의 신체는 강건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백성들을 무지 무욕의 상태에 두게 한다. 비록 지혜와 수완을 갖춘 자가 있을지라도 감히 제주를 부리지 못하게 한다. 작위 함이 없는 다스림에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1404    [문단소식] - 림금산시인 "달을 만나고" 시집 낳다 ... 댓글:  조회:2457  추천:0  2019-06-16
림금산의 시집 《달을 만나고 온 날 밤엔》 출간 (ZOGLO) 2019년6월7일 연변작가협회 리사이고 중국작가협회 회원이며 중국조선족소년보사 문학편집으로 근무하는 림금산시인이 요즘 시집 《불새》, 동시집 《옹달샘》, 《살구꽃, 복사꽃》에 이어 네번째 시집 《달을 만나고 온 날 밤엔》을 펴냈다.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로 출판발행된 시집에는 시인이 최근에 창작한 78수의 시가 5부로 나뉘여 수록되였다. 제1부 에는 시인의 생활애를 담은 , , 등 20수의 시가, 제2부 에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담은 , , 등 22수의 시가, 제3부 에는 달에 기탁한 사랑이야기를 담은 5수의 조시가, 제4부 에는 교정의 달밤과 사랑을 담은 10수의 시가, 제5부 에는 , , 등 아련한 고향애를 담은 21수의 시가 각각 수록되였는데 시줄마다 진한 애정이 묻어나 독자들을 사랑세계로 이끌어간다. 림금산시인은 정지용문학상, 윤정석아동문학상, 연변작가협회 인터넷문학상, 해란강문학상 등 다수를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 현재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부주임이다. 한편 최국철과 김영건이 주임, 부주임을 맡고 김혁, 정승권, 정호원, 채운산, 최동일을 위원으로 하는 연변작가협회계렬총서 편찬위원회는 중국작가협회의 해당 정신에 따라 자매결연을 맺은 호북성작가협회에서 보내오는 후원금으로 해마다 4명내지 6명 작가의 작품을 엄선하여 계렬총서형식으로 작품집을 출간하고 있는데 림금산시인의 이번 시집은 작가협회가 펴낸 15번째 작품집이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1403    100년 뒤... 뒤...뒤... 댓글:  조회:2799  추천:0  2019-05-26
소설가 한강, 100년 뒤 출간 원고 전달… "삶과 죽음 사유” 2019.05.26.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여러분은 100년 뒤에 출간될 소설을 지금 쓴다면 어떤 이야기를 쓰시겠습니까?  소설가 한강 씨가 노르웨이의 미래도서관 프로젝트 작가로 선정돼, 100년 뒤에 세상에 나올 소설을 전달했습니다. 오슬로에서 유광석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리포트] 가문비 나무가 울창한 숲 길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갑니다. 맨 앞에서 흰 천을 끌며 인도하는 사람은 소설가 한강 씨,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상을 받은 한강 씨가, 최근 집필을 마친 작품의 제목을 발표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바로 출간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미래도서관' 프로젝트, 해마다 한 명씩 세계 저명 작가들의 원고를 받아 보관한 뒤, 프로젝트가 처음 시작된 2014년으로부터 100년 뒤인 2114년에 종이책으로 출간하는 사업입니다. 한강 씨가 다섯번째 작가, 아시아 작가로는 처음으로 선정돼 원고를 전달했습니다. [케이티 패터슨/'미래도서관' 기획자 : "제 생각에 그녀는 인류에 대해 명확하고 아름답게 이야기합니다. 실존, 존재, 아름다움, 상실과 슬픔에 대해 얘기합니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사라질 100년 뒤의 세계... [한강/소설가 :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라든지, 시간이라든지, 우리의 수명이 얼마나 짧은 것인지, 모든 불확실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책에 쓰일 종이는 새로 심은 나무 천 그루로 만듭니다. 한강 씨의 작품은 오로지 작가만 그 내용을 안 채 100년 동안 비밀에 부쳐지게 됐습니다. 한 세기 뒤 미래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으며 무슨 생각에 잠길까요?  오슬로에서 KBS 뉴스 유광석입니다. 유광석 기자
1402    [평, 評, 평, 評] - 작품과 상과 인간과 그리고... 댓글:  조회:2729  추천:0  2019-05-13
문학상과 문학창작 2019년 05월 06일 작성자: 강효삼        작품은 발표하면 그만인 것 같은데 발표가 되고나서도 한가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 상을 받는 것이 아닐가 생각된다. 이는 글을 쓰는 작자로서는 지금까지 누구도 버리지 못하는 욕망이다. 그것은 또한 한 작가가 상을 받는다는 것은 힘들게 쓴 작품에서 얻는 최대의 향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작품이 죄다 상을 받을 수는 없고 그 중에서 극히 개별적이고 우수하다는 작품만이 상으로 선정될 수 있는데는 상이 될 작품을 바르게 평가하는 공정성과 공평성이 우선되여야 하지 않을가싶다. 물론 작품이자 사람이고 사람의 수준이자 작품의 수준으로 작품과 사람을 다 같이 보는데는 의견이 없다.그 사람의 인격도 하나의 작품질이 될 수 있으니깐.   하지만 정작 상을 평할 때는 그렇게 되지 않는지 요즘 우리 문단에서 어떤 문학상에 대하여 진정 옳바르게 상을 평가했는가를 두고 이런 저런 뒤말들이 나돈다.마치 상을 론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 같아서 설사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뒤에서는 쉬쉬 하는 소음이 그치질 않는 것 같다. 요즘 해내외로 이런 저런 문학상이 많아지면서 이에 도전하는 과정에 키가 크면 그림자가 크다고 필자의 견해가 잘못되였는지 몰라 잡음 또한 적지 않은 걸로 짐작한다,   필자가 생각할 때 그렇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리유는 문학상을 줌에 있어서 작품을 보지 않고 사람을 우선하기 때문이 아닐가싶다.   어느 필회에 참가했을 때였다. 필자는 한 모모한 평론가가 자기의 제자라고 하는 한 보통 작자에게 “모 잡지에서 지금 문학상을 평하는데 그 평은 내가 한다. 그러니 나를 믿고 글을 보내라.”라고 로골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놀랐다. 그것은 지금 문학상을 평함에 대학교수들이나 모모한 평론가들을 초빙하여 그들의 절대적인 의견을 듣는 것 같은데 바로 우리의 어떤 문학상들은 그렇게 평가되고있는 것인가 하니 왠지 마음이 서글프다. 씁쓸해났다.   필자의 소견에 요즘 우리 문단의 평론가들 중에는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그가 누구든 작품을 보고 바른 평가를 해주는 평론가이고, 다른 한 부류는 말은 작품을 본다면서도 실은 사람을 보고 내려깎기가 아니면 추어주기식 (주로 추어주기식)절대 평가를 하는데 대개 이런 평론가들의 평론을 읽어보면 어렴풋이나마 그 진미가 알린다. 그래서 상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어떤 작품은 번연히 좋은 줄을 알지만 나와의 어떤 관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문풍이나 추구가 아니라는데서 문학상의 선택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닐가?   언젠가 필자가 한 중문잡지에서 보고 놀랐던 일이 하나 있다. 한 초학자가 자신이 쓴 작품에 현지 문단에서 이름 있는 작자의 이름을 달아 잡지에 투고하였는데 글이 발표되었을 뿐 아니라 상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남의 이름을 도용하여 작품을 발표한 것은 문인으로 말할 때 극히 비도덕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 아마츄어작자가 리용한 것은 문단에 존재하는 어두운 구석이요 문학비리에 대한 일종의 항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소홀한 편집에게도 잘못이 있겠지만)   하지만 이러한 일이 존재해도 문단에 별다른 반응이 없고 평온하며 작가들 또한 너그럽게 이 같은 현상을 수용하는 것은 상에 대한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우리의 많은 작가들이 글을 쓰기에 앞서 사람이 되여야 하는 것을 우선적인 작가적 사명으로 명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사 이런 사명감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령혼의 공정사나 다를 바 없다고 자처하는 작가로 말할 때 어쩌면 상을 두고 아웅다웅 따지고 떠드는 일을 수치로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정신적 제품인 문학작품은 여느 물질과 달리 저울에 올려놓고 그 무게를 달듯이 그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때론 그 저울마저 오차가 생기는데) 평가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작품에 대한 평가가 공정해야 문단이 바로 선다. 문학상 작품을 선정함에 있어서 어느 한 사람의 권위나 몇몇 사람의 평가에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여서 좀 시간이 걸리고 번거로울지라도 충분히 진지하게 론의된 작품을 상으로 준다면 보다 많은 작자와 독자들이 공감할 것이고 따라서 시야비야도 적을 것이며 상의 권위도 높아 진정 작품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할 뿐 아니라 문단 내 작자들의 공존과 화합에도 좋은 촉진제가 될 것이라 믿고싶다. 이런 번거롭고 복잡한 평의 과정을 거쳐 좋은 작품은 어디까지나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글은 글로써 평가하는 공정하고 형평성 있는 기준을 자대를 적용할 줄 아는 대바르고 정직하며 흉금있는 편집이나 평론가가 많아야 작가들 또한 이에 힘입어 순수한 마음으로 글쓰기에 혼신을 다 하는 치렬한 문학정신을 소유할 수 있다.   한편 문학상을 대함에 있어서 상을 주는 사람을 탓하지 말고 그 무엇보다 상을 바르게 대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가싶다. 진정한 작가라면 구차한 인간관계로 살기보다 깨끗한 량심으로 작가의 생명이나 다름 없는 작품으로 도전하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평가기준이 제각기라 해도 좋은 작품은 역시 좋은 작품으로 종당에 많은 사람의 공인을 받기 마련이다. 누구나 글을 쓰면서 자기 작품이 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상을 바란다고 하여 그 어떤 인간관계를 리용하거나 비문학적인 것에 공력을 들일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가짐과 흉금을 가지고 치렬한 문학정신으로 글에 매진하는 것이 진정 글쓰는 사람의 바른 자세가 아닐가.   필자의 경험에 의해도 상을 받겠다고 돌격적으로 쓰는 글이 오히려 좋은 글이 못되고 상을 념두에 두지 않고 평소에 꾸준히 노력한 글들이 오히려 좋은 글이 된다. 때문에 상을 목적이 아니라 글을 잘 쓰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삼아 글을 쓸 때는 상을 받을만한 표준의 높이에서 작품의 질을 높이기에 최선을 다 하면서도 그렇게 노력한 것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 상을 받으면 좋고 받지 않아도 마음에 부담이 없는, 편안하고 대범한 마음가짐으로 창작에 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작가다운 인격일 것이다. /흑룡강신문
1401    윤동주를 알리는 골수팬 일본인- 야스코 댓글:  조회:2873  추천:0  2019-04-23
[인터뷰: 야나기하라 야스코 / 시인 윤동주 연구가] "안녕하세요. 야나기하라 야스코라고 합니다. 저는 윤동주 시인의 골수팬이고 여러 가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속죄' (贖罪), 일본인이기에 할 수 있는 것 "일본에서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릿쿄대에서 추모식을 열거나 윤동주 시인의 일본에 있던 시절의 조사 같은 것도 하고 있습니다. 꽤 오래전, 20년도 더 전의 일이라서 세세하게는 기억이 안 나는데요. 아마도 이바라키 노리코라는 일본의 시인이 썼던 에세이 같은 걸 보고 윤동주를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때 윤동주 시인이 대학교 선배였다는 것, 물론 짧은 기간이었지만요. 릿쿄대에 있다가 그다음에 도시샤대(교토)로 옮겨갔다는 것을 에세이를 통해 알게 돼서 제가 학교 다닐 때보다 20년 정도 전에 윤동주가 같은 책상이나 의자를 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옥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마음이 아팠어요. 일본인으로서밖에 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없을까? 생각했어요. 속죄라고나 할까요? 그런 기분으로요. 근데 한국분들이 일본 시절의 윤동주를 조사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어요. 윤동주 시인은 원고에 반드시 서명을 남겼기 때문에 그것도 여기에 쓰여 있어서 고서점을 돌아다니거나 그런 것도 하고 있습니다. 또, 일본에 의해서 옥사한 젊은이가 있다는 사실을 일본인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윤동주의 시가 훌륭하다는 점과 함께 역사의 진실을 알릴 행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왜 윤동주인가? 윤동주에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요? 일본에서도 정말 많은 사람이 추도식에도 참석하고 있는데 혼자 시를 읽고 있다면서 처음 추도식에 온다는 사람도 꽤 많이 계세요. 숨은 팬이랄까? 그런 분들도 어떤 부분에서, 왜 윤동주에게 끌렸을까? 생각해봤는데요. 저 자신이 윤동주에게 끌린 이유도 사실 잘 모르겠지만, 우선은 윤동주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해서 철학을 공부했다, 철학을 했다는 것은 돌아보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좋은 일인지, 무엇이 아름다운 일인지,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은 항상 보편의 가치를 지향하면서 시를 썼다고 생각해요. 그것 하나와 또 윤동주 시인이 키르케고르(*덴마크 철학자)를 탐독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키르케고르는 실존주의, '실존'적인 생각을 먼저 했던 분이에요. 실존이라는 것은 위에서부터의 권력이나 이데올로기 그런, 위에서부터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윤동주 시인도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을 시를 읽을 때마다 느낍니다. 윤동주 시인은 원래 한반도 출생인데, 중국 쪽으로 이민 간 사람(재중동포)의 자손인데요. 당시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그러니까 고향이, 자기 존재의 정착지라고 저는 곧잘 표현하는데요. 정착하는 장소가 결국 한반도도 아니고 물론 중국도 아니었고, 역사적으로 간도는 어려운 곳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자기 존재의 정착지는 자신, 윤동주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찾았다고 문익환 선생님도 말씀하셔서 저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됐어요. 그러니까 키르케고르를 읽고 납득갔다고 할까요? 실존주의라는 것은 지금 민주주의와도 연결되는데요. 주권자 한 명, 한 명이 출발이라는 생각이죠. 그런 의미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는 옛것이 되지 않아요. 불변성도 갖고 실존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썼기 때문에 시대도 뛰어넘고 언어의 장벽도 국경도 물론 뛰어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보통 한국이나 일본에서 말씀하시는 게 윤동주 시인의 시와 삶이 일치하는 시인이라고 말씀들 하세요. 부모로부터 전해진 청아한 사상을 가진 분이었기 때문에 그 부분이 윤동주 시인의 시가, 청아한, 청명한 서정을 뿜어낸다고 할까요? 그 기원이 됐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시대가 달라도 기분 좋게, 평안을 얻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도 그 부분에 끌렸던 게 아닐까 싶어요. 이바라키 노리코 씨는 얼굴에서부터 시작됐다고도 했지만요. 그분도 멋지셨지만요. 릿쿄 재학시절, 윤동주가 썼던 '쉽게 쓰여진 시'. 하지만 '윤동주 흔적 찾기'는 쉽지 않았다 시집을 굉장히 많이 샀어요. 처음 읽었던 게 책을 펴서 '서시'였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신경 써서 읽었던 것은 릿쿄대 재학시절 쓴 시였어요. '쉽게 쓰여진 시'를 읽었던 것 같아요. 때마침 그때 조사를 하고 있었어요. 릿쿄대 졸업생, 당시에는 아직 생존해계실 때라서 윤동주와 같은 시절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 150명 정도에게 편지를 써서 기억이 없으신지 물어보면서 조사를 했어요. 딱 1분께서 기억하고 있다고 하셨죠. 그 시기였어요. 그때 '쉽게 쓰여진 시'는 (릿쿄대) 수업의 모습, '노교수의 수업을 들으러 간다'는 부분이 있는데 그 노교수는 '우노 선생님'이라는 분이라는 걸 알게 됐다거나 동양철학사 수업이었는데요. 동양철학사를 같이 들었던 분이 윤동주, 그러니까 '히라누마 씨'를 확실하게 기억하고 계셔서 그 히라누마 씨에게 선생님을 소개해줬다거나 어디서 수업을 들었다거나 그런 걸 자세히 기억해주셨어요. 그래서 당시 시간표 같은 것도 입수했고요. 제가 수업을 들었던 똑같은 장소에서 공부했을 것이니까 그 시를 제일 먼저 만났다고 해야 할까요, 서시를 먼저 읽고 끌렸지만 역시 릿쿄대 시절 시가 더 끌렸죠. 인간으로서 윤동주는 굉장히 강한, 정신이 강하고 흔들리지 않지만, 허용이 큰 사람, 사람을 용서하거나 끌어안거나 그런 매력적인 사람이었구나 생각해요. 시대를 바꾸는 힘은 정치 같은 게 아니라 결국 문화, 한 명 한 명이 마음을 바꿔 가는, 주권자이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결국 문학이나, 문화잖아요. 그 큰 증거가 되는 것이 '욘사마(배용준)'라고 생각해요. 저는 욘사마 팬이라거나 그런 건 아닌데요. 욘사마 좋아하세요? 라고 누가 물어보면 아뇨 전 윤사마(윤동주)요. 라고 대답했지만. 제가 욘사마가 굉장하다고 생각한 것이 욘사마 팬이 실제로 윤동주 추도회를 도와준 분이 정말 많고 동일본 대지진 때 희생된 분들의 추도 행사라든지 하는 분 중에서도 욘사마로부터 한국, 조선의 역사에 대해 흥미를 갖고 그것을 알게 됐다고 하는 분도 꽤 많이 계세요. 굉장히 인기 절정이었던 시기는 물론 지나갔지만, 그 안에서도 욘사마에 끌려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거나 역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분들이 착실하게 남아있어요. 그러니까 세상을 바꾸는 것은 역시 문화의 힘이라고 봐요. 윤동주 시인이 당시에 말로 전하고 싶던 것들도 틀림없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70년 넘게 윤동주에 빠진 일본인들, '윤동주의 삶과 시가 가진 힘' 역시 신기하게도 윤동주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예전부터 있었어요. 당시 시인 중 옥사한 분 중에는 '이육사'같은 분도 계시고 그분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도 물론 계시지만요. 근데 윤동주 시인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느낌이에요. 윤동주의 굉장한 점이랄까, 윤동주를 통해서 역사의 진실을 알면 굉장히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할까요? 왜냐하면, 격렬한 활동을 한 분도 아니고 조용한 학생이었고요. 근데 옥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역사적, 뭐라고 할까요, 암흑기였죠. 그런 것들을 많은 분이 예상외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게 윤동주 시인의 큰 존재감, 시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일본의 잘못이라고 강하게 책임을 물으면 오히려 젊은 사람 중에서는 특히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요. 대학생이나, 이곳저곳에서 이야기를 들어볼 일이 있는데요. 그때 보면 예상 밖에 많은 분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역사적 진실 사이에서 시를요. 일본에서도 진행하는데 굉장히 잘 받아들여 주세요. 그 안에서는 현재의 정치 환경과도 연관 지어서 감상을 말해주는 학생도 있고요. 그래서 역할? 윤동주 시인이 돌아가시고 70년이 넘었는데요. 굉장히 한일 사이에서 큰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계신다고 느껴요. "앞으로도 꾸준히 윤동주를 알리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으로부터 많은 걸 얻고 배웠다고 생각해요. 특정할 순 없지만, 윤동주 시인을 통해서 역사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알게 됐고요. 윤동주 시인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달 까요? 여러 가지를 알려주셨기 때문에요. 보은이 될 수 있도록 좀 더 조사나 여러 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이가 나이니까 앞으로 얼마 안 남았지만요. 지금 하는 추도식을 겨우겨우 라도 좋으니까 제 나이도 앞으로 몇 년 이상 하기는 어려우니까요. 대부분 고령이라서요. 젊고 열심히 일해 줄 분 찾기가 힘들어서요. 그래서 릿쿄대 안에서 추도 담당자가 평범해도 좋으니까 (추도식을) 정착시켜줄 사람을 만들어서 계속하고 싶어요.
1400    시를 암송하면 삶이 더 즐겁다... 댓글:  조회:2637  추천:0  2019-04-23
  "왜 우리는 시를 암송해야 하나요?" /김종남 장자 철학을 공부하는 자리였다. 일요일인데도 비움박물관은 시민 수강생들로 가득 찼다. 최진석 교수가 '시인은 문자의 지배자이고, 일반인은 문자의 사용자이다. 우리는 시를 암송해야한다'고 얘기하자 한 수강생이 던진 질문이다. 시 읽기를 그냥 막연하게 좋아하는 나도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최 교수는 '지적인 삶, 노력하는 삶을 살기위해, 함부로 막 사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시를 암송해야 한다'고 답했다. 혹시 시를 암송하지 않으면 '함부로 막 사는 삶'이 되는 건 아닐까라고 느껴질 만큼 확실한 어조였다. '지적인 삶'을 살기위해 적극 노력은 못하더라도 삶이 함부로 막 사는 삶이 되도록 놓아둘 수는 없겠다. 시 암송과 가까워진 계기가 생각난다. 십 수 년 전 첫눈 오는 날 깜짝 동창 모임에서 김춘수의 시 을 낭송했던 사건(?)이다. 그해 늦가을 동창회 때 사업가 친구가 '첫눈 오는 날, 술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대학 때 문학도였던 사업가 친구는 조건을 하나 걸었다. '시를 한 수씩 외워 오라'였다. 첫눈 오는 날 깜짝 모여 시를 읊으며 술을 마신다, 운치 있는 제안이었다. 시 암송이라고는 김소월의 이나 이육사의 몇 구절, 그것도 토막토막 외우는 정도였다. 그때 김춘수 시인(1922.11.25. ~ 2004.11.29.)이 타계하셨다는 신문기사가 났다. 대표 시 도 소개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짧지 않은 시지만 구절구절 마음에 닿았다. 시인이 말하는 '꽃'은 봄 여름 벌 나비가 좋아하는 꽃만은 아니었다. 열심히 외웠다. 한 달이 안 되어 첫눈이 내렸다. 시를 혼자 암송하는 것도 어려운데 여럿 앞에서 메모도 보지 않고 큰 소리로 줄줄 낭송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단 한 번 시 낭송이었지만 나에게 새로운 시 읽기 세상을 열어준 사건이었다. 저자 신영복 교수(1941~2016)는 에서 '장기자랑 때 를 암송했던 초등학생 이야기'를 전한다.   "비싼 과외 대신 시 암송 모임에 다녔던 가난한 초등학생이 소풍가서 장기자랑 차례가 되자, 어쩔 수 없이 암송 모임에서 공부했던 윤동주의 를 암송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놀랍게도 그 날은 물론 그 후 그 아이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아이돌그룹의 춤을 흉내내거나 유행가를 부르는 다른 아이들의 화려한 장기자랑'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아이들은 밋밋하고 무거운 시 낭송에 갈채를 보냈을까. 영화 속 이야기처럼 놀랍고 신선하다.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 세상이어서 가능했을 일이다. 설마 '죽는 날까지'로 시작되는 의 시구에 감동하지는 않았겠지. 신영복 교수는 "시를 암송한다는 것은 시인들이 구사하던 세계 인식의 큰 그릇을 우리가 빌려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에 봄이 왔다는 것을 알아내는, 상상력을 키우는 일'로 비유한다. 어른인 우리는 시를 얼마나 암송해야 상상력이 커질까. 차라리 시낭송에 갈채를 보내는 아이들 세상 닮아 가는 길이 더 가까울 것 같다. 걷기를 좋아해 자주 걸으면서 시를 암송한다. '황룡강 바람길'을 걸으며 윤동주의 를 소리 내어 외워본다.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 바람이 부는데 /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1399    "또 다른 고향"을 찾아가는 미완의 려정... 댓글:  조회:3140  추천:0  2019-04-23
글꼴 작게글꼴 크게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윤동주의 시 순결한 영혼의 시대적 고뇌   이미지 크게보기 간도 용정의 조선인 거리. 저자 윤동주(尹東柱) 해설자 이남호(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목차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시인 동시의 세계 : 따뜻하고 충만한 유년의 낙원 본성과 양심의 갈등 '또 다른 고향'을 찾아가는 미완의 여정 가혹한 시대의 순결한 영혼 더 생각해볼 문제들 추천할 만한 텍스트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시인 윤동주의 「서시(序詩)」는 우리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 중의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를 어렵지 않게 암송할 수 있을 것이고, 시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이 친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이 친숙함이 오히려 시인의 마음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은 아닐까? 잎새, 바람, 별 같은 편안하고 쉬운 단어들이 이 시를 무작정 쉽고 편안하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시인은 고작 잎새에 이는 사소한 바람에도 괴로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살아서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것들이 아닌, 죽어 가는 나약한 것들을 사랑해야겠다고 말한다. 시를 꼼꼼히 읽고 행간을 음미하다 보면, 세상을 사랑하는 시인의 간곡한 마음이 느껴진다. 제목이 알려 주다시피 이 시는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 페이지에 놓인다. 시집을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서시」가 보여 주는 시 세계를 좀 더 깊고 풍요롭게 만날 수 있다. 동시의 세계 : 따뜻하고 충만한 유년의 낙원 윤동주는 1917년 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간도'라고 하면, 가난에 찌들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버리고 떠난 유이민(流移民)이 떠오른다. 그러나 명동촌은 함경도의 학자들이 가솔을 이끌고 집단으로 이주하여 만든 한인(韓人) 마을이었고, 1900년 간도로 이주한 윤동주의 집안은 시인이 태어났을 무렵엔 이미 이 마을에 정착하여 안정된 기반을 다진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었다. 그는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하는 열다섯 살 때까지 고향에서 생활하며 평화와 순수의 세계를 지향하는 본질적인 자아를 형성한다. 윤동주는 명동촌을 떠나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면서 삶의 어두운 요소를 체험하고, 중학 시절에는 민족의식을 자극할 만한 여러 가지 정치적 사건들을 겪게 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대체로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문학 소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성장기 동안 그는 그 어둠에 물들지 않으며 자신의 순수한 세계만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동시에서 출발한 그의 시적 이력은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스무 살 무렵인 1936~37년경에 씌어진 그의 많은 동시들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소박하게 보여 준다. 사물과 동물과 식물들은 인간의 세계와 행복하고 충만하게 어우러져 있다. 밤에 소복히 내린 눈은 "지붕이랑 / 길이랑 밭이랑 / 추워한다고 / 덮어 주는 이불"처럼 따뜻한 존재이다(「눈」). 물소리를 그리워하는 "아롱아롱 조개껍데기"는 어린 화자의 마음과 넘나든다(「조개껍질」). 심지어는 이 따뜻한 세계를 파괴하는 근대 문물인 비행기에 대해서조차, "숨결이 찬 모양"이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보낸다(「비행기」). 동시 창작에서 멀어진 후에도 윤동주는 유년의 따뜻한 세계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별 헤는 밤」은 그러한 시인의 마음을 잘 보여 준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 「별 헤는 밤」 중에서 그가 간절하게 호명하는 이름들은 하나하나 모여서 순수하고 화해로운 유년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같은 순한 짐승들은 스스럼없이 인간들에게 다가가고, 가난한 이웃 사람들은 세파에 찌든 얼굴이 아닌 정겨운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다. 국경 지대의 이국 소녀들도 여기서는 네 땅, 내 땅을 가지고 싸우는 '타민족'이 아니라 그저 함께 노니는 벗들이며,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같은 이국(異國)의 시인들도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다. 이들은 이미 잃어버린 과거에 살고 있으며, 또 멀고 먼 북간도에 속하는 존재들이다. 별 하나마다 불러온 이름 사이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함께 놓아 보기도 하지만, 얼른 흙으로 덮어 버릴 수밖에 없다. 모순과 균열로 가득한 현실 속의 "나"는 이미 그 낙원으로부터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에 면면히 흐르는 간절한 그리움은, 그 세계를 결코 되찾을 수 없다는 데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별 헤는 밤」은 자선(自選) 원고 묶음의 맨 마지막에 놓이는 시이다. 그는 1941년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기념하여 그 동안 쓴 작품 가운데 19편을 골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발간할 예정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별 헤는 밤」과 「서시」 사이에 놓이는 시편들은, 잃어버린 과거의 낙원에 대한 동경과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미래를 향한 나지막한 다짐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는 시인의 내면적 고투를 보여 준다. 본성과 양심의 갈등 1938년 6월 19일에 씌어진 「사랑의 전당(殿堂)」은 윤동주 자신이 직접 묶은 원고에서 제외되었으며, 또 1948년에 간행된 유고 시집에도 수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는 동시의 세계를 포기하고 현실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시인의 결심을 보여 주는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고풍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과 그곳에 머물고 있는 "순이"에게서 멀어져야겠다고 말한다.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窓)에 부닥치기 전 / 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 뒷문으로 멀리 사라"져 "험준한 산맥"을 마주해야 한다. 아늑하고 평화로운 사랑의 전당에 계속해서 머물기만 한다면, "어둠과 바람"이 몰려와 사랑의 전당을 뒤흔들 것이라는 뼈아픈 인식이 엿보인다. 이 무렵부터 윤동주는 우리 민족이 처해 있는 참혹한 현실과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문학적 대상으로 삼은 것은 식민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아름다운 화해의 세계를 지향하는 그의 본성과 가혹한 시대를 정직하게 대면하고자 하는 양심의 내면적 갈등이었다. 1939년 9월에 씌어진 「자화상(自畵像)」은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미묘하고 섬세하게 그려 내고 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 「자화상」 중에서 우물 속의 얼굴은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 사이에 순수하고 평화롭게 머무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 시인은 자신의 얼굴이 미워지기도 하고 그리워지기도 하고 가엾어지기도 한다. 이 시는 유년의 풍경 속에 "추억처럼" 순수하고 평화롭게 머물고 싶은 갈망과 그러한 갈망을 떨쳐 내고 현실에 굳게 발 딛어야 한다는 결심 사이에서 망설이고 갈등하는 시인 자신의 고뇌를 보여 준다. 이 망설임과 갈등은 '부끄러움'이라는 자기 인식으로 집약된다. 유년의 순수한 낙원과 비교해 볼 때 현재의 자신은 현실의 모순과 균열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부끄럽다. 그는 그 아름다운 세계에 속할 수 없기에 자신의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한다(「별 헤는 밤」). 또한 도래해야 할 미래의 비전을 생각할 때 현재의 자신은 확신에 찬 신념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부끄럽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참회록을 쓰며 "부끄런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참회록」). 그리고 과거의 순수한 낙원을 지향하는 마음과 미래의 어느 밝은 날을 지향하는 마음은 "하늘"이라는 상징을 통해 도덕적 염결성으로 통일된다. 그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지만(「서시」),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르다(「길」). '또 다른 고향'을 찾아가는 미완의 여정 윤동주의 거의 모든 시에는 원고 말미에 시를 쓴 날짜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이 날짜들을 살펴보면, 그의 시들이 순수하고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가혹한 시대의 삶 쪽에 점점 더 무게 중심을 두어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민 지배를 받는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깊은 자각과 기독교적 사유에서 촉발된 실존 의식이 이러한 변화를 불러온 것 같다.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십자가(十字架)」 중에서 윤동주가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독실한 신앙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시에 기독교적 소재와 구조가 자주 나타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필 종교적 색채가 농후한 시들이 1941년에 집중적으로 창작되었다는 사실은, 시대의 분위기에 의해 그의 종교적 사유가 첨예해진 것은 아닌가 짐작하게 한다. 1941년은 식민 정책이 한층 강화된 시기였다.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며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고, 조선의 젊은이들은 강제 징용·징집의 대상이 되었다. 현실의 암울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기독교적 세계 해석과 만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 역시 1941년에 창작된 시들 중 하나이다. "어두워 가는 하늘 밑"이란 종교적 차원에서 보자면 원죄를 짊어진 채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가리키는 것일 테고, 정치·사회적 관점에서 보자면 식민의 탄압이 거세지는 가혹한 현실을 비유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어둠"을 피해 "햇빛"을 쫓아가는 대신, 어둠 속에 머물며 조용히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어둠을 진정으로 밝히는 일은 역설적으로 그 어둠을 함께 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뼈아픈 인식이 이 시의 근저에 흐르고 있다. 이 시가 종교적인 것은 다만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 같은 단어가 나오고 자기 희생의 문제가 다루어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화자는 현재 교회당 밑에서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는 사람이다.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서 조용히 피를 흘리는 일조차도 "허락"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 속에는 자기 희생조차 개인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섭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 시의 감동은 그저 현실과 신의 섭리에 대한 깊은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인식이 감동의 원천이라면 철학·신학 서적들이 더더욱 깊은 감동을 주어야 할 것이다. 시인은 현실과 종교에 대한 속 깊은 인식으로부터 자기 희생의 길을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교회당 꼭대기에 걸린 환한 햇빛 세계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못한다. 본성적 갈망과 실천적 의지 사이의 미묘한 갈등이 이 시의 감성적 울림을 크게 만든다. 윤동주가 한 단계 더 성숙한 내면의 모습을 보여 주게 되는 것은 「또 다른 고향」에서이다. 이 시는 그가 연희전문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고향에 가서 쓴 작품이다. 고향(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宇宙)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 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 - 「또 다른 고향」 그의 다른 시들이 내면적 고뇌로부터 시적인 감동을 끌어낸다면, 이 작품은 현실의 질곡과 모순을 타개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강하게 보여 준다. 이 시에서 시대적 양심을 실천하는 세계는 "또 다른 고향"이라 명명된다. 그가 백골과 함께 한방에 누워 있는 "고향"은 일차적으로 유년의 행복이 깃든 곳이다. 그러나 이 고향은 아늑하고 평화로운 만큼 폐쇄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1945년 3월 6일 간도 용정 자택. "쫓기는 사람"처럼 가야 한다는 구절은 일차적으로 고향을 떠나는 일이 고향을 박탈당하는 것과 다름없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가자 가자"라는 자기 추동의 언어가 말해 주듯, 고향을 잃는 일은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을 찾아가는 첫 걸음이기도 하다. 또 다른 고향의 추구는, 결국은 고향의 포기가 아니라 고향의 회복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생각은 폐쇄적이고 개인적인 순수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의 균열과 갈등을 포괄하고 넘어서는 더욱 크고 성숙된 선(善)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윤동주 시비간도 용정중학 교정에 세워진 윤동주의 시비이다. 윤동주는 자선 원고를 묶은 후 6편의 시를 더 썼다. 「참회록」을 제외하면 도쿄의 릿쿄 대학 영문과를 다니면서 쓴 시들이다. 그는 유학 생활을 하며 퍽 고독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이때 씌어진 시편들에는 이국 생활의 쓸쓸함과 함께 자신이 걸어갈 길에 대한 담담한 신념이 담겨 있다. "남의 나라"에서 시가 쉽게 씌어진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겠다고 말한다(「쉽게 씌어진 시」). 그러나 이듬해인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떠나기 전 윤동주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2월 16일 이국의 감옥에서 스물여덟의 짧은 생을 마쳤다. 죄명은 "사상 불온, 독립운동, 비일본신민(非日本臣民), 온건하나 서구 사상 농후" 등이었다. "또 다른 고향"을 찾아가는 그의 내면의 여정은 미완인 채로 끝나고 말았다. 가혹한 시대의 순결한 영혼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투명하게 비춰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시집을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사진 속의 온화하고 순한 시인의 얼굴이 그대로 연상된다. 시는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윤동주의 시들처럼 시인의 내면을 맑고 선명하게 비춰 주는 예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것은 시인이 가혹한 시대를 깊이 있게 고뇌하고 정직하게 살아내려고 했으며, 그로 인한 번민과 갈등을 솔직 담백한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시대의 어둠을 함께 하며 그 어둠 속에 스스로를 묻으려 했다. 생전에 변변히 발표된 적 없던 그의 시들 역시 시대의 어둠에 함께 묻힐 운명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윤동주의 영혼과 그의 시들은 시대의 가혹한 어둠을 함께 함으로써, 더욱 순결하고 밝게 지금까지도 빛나고 있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윤동주는 '저항 시인'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윤동주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고, 그의 시들 역시 투쟁적인 성격을 보이는 것은 거의 없다. 한 시인이 역사와 민족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1940년대의 식민지 현실을 염두에 두며 생각해 보자. 2. 윤동주가 동시 창작에서 멀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자. 3. 윤동주의 시대적 고민과 종교적 성찰은 어떻게 만나는가. 종교적 성찰이 두드러지는 시에서는 시대적 고민의 흔적을 찾아보고, 시대적 고민이 두드러지는 시에서는 종교적 성찰의 흔적을 찾아보자. [네이버 지식백과] 윤동주의 시 - 순결한 영혼의 시대적 고뇌  
1398    인도주의는 윤동주 시인이 이 땅에 심은 자산입니다... 댓글:  조회:2933  추천:0  2019-03-23
[세상읽기] 시인의 외침 함석천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2019.02.18  이맘때면 시인을 생각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사랑을 쉽고 정제된 언어로 풀어냈습니다. 시인은 보편, 인도주의, 휴머니즘으로 호흡했습니다. 인류가 사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든 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 윤동주 시인이 이 땅에 심은 자산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이 세상 어디에 내놔도 모두가 공감할 정서와 연민을 그의 말에 담았습니다. 특정 대상에 대한 저항시인으로만 평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윤동주 시인을 두려워했습니다. 창씨개명이라는 민족정신에 대한 지독한 고문을 가하던 시기에, 우리의 언어로 세계 어디서나 보편타당한 인류애를 담은, 사랑을 담은 연민 어린 시를 이 땅의 누군가가 쓴다는 사실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우리만의 시인이 아닌, 인류의 시인으로서 세계인의 보편 정서를 담은 시가 우리 말로 쓰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군국주의자들의 땅이 아닌, 그들이 핍박하던 땅에서 그런 시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의 의식을 분석한다는 명목으로 어두운 생체실험실로 그를 끌고 간 것입니다. 시인에게서 느낀 두려움이 이처럼 그들이 시인을 괴롭힌 이유라면, 사실 진실로 불쌍한 존재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 결국 시인을 우리 가슴에 더 깊숙이 박아서 진정한 인류의 시인으로 자라게 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로 시인의 그런 운명이 우리에게 깊은 연민을 심어준 것입니다. ... ... 100년 전에 우리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던 세계가 이제 우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숭고한 희생으로 지고한 가치를 지켜온 우리의 정서를 그의 시 속에 담아왔습니다. 편협하고 왜곡된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오히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힘을 그 안에 담았습니다. 처음에 연민으로만 다가왔던 그의 언어는 읽을수록, 들을수록 왜 우리 민중이 숭고한 희생으로 총칼 앞에 나섰는지 이해하게 해 줍니다. 저는 이런 우리들의 외침에 언제나 윤동주 시인이 함께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시인은 조국의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시간이 꽤 흘렀기 때문에 광복이니 해방이니 하는 말들을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남겨진 숙제들이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사안은 진행 중입니다. 이 사안은 인류 보편의 인권 문제라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국가가 피해자를 대신해서 양도나 포기를 운운할 수 없습니다. 상대국도 두려움을 떨치고 사안의 본질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남북한은 평화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상대가 손을 내민 상태라면 주변 국가들이 적극 동참하고, 그 손목을 잡아줘야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시인의 언어는 우리 안에서 살아납니다. 시인이 말한 도착하여야 할 시대의 정거장과 온정의 거리가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1397    윤동주, 그는 절대로 "문약한" 학생이 아니었다... 댓글:  조회:2906  추천:0  2019-03-23
'일본이 곧 망할 것'이라 생각한 윤동주, 그가 세운 계획 [영화·드라마 속 독립운동가] ㅡ 영화 윤동주 /김종성 2019.03.03        ▲1941년 연희전문학교 졸업 당시의 윤동주.ⓒ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윤동주는 문약한 학생이 아니었다. 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그는 노래했다. 이런 시만 보면 섬세하고 연약한 청년 같지만, 그렇지 않은 면도 있었다. 무장독립투쟁까지 생각했던, 내면적으로는 강한 면모를 보유했던 투사였다.   겉모습과 다른 윤동주의 그런 내면이 이준익 감독의 영화 에서 약간이나마 어느 정도 묘사됐다. 영화 속의 윤동주(김하늘 분)가 강한 모습으로 묘사된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자 했던 그의 강인함이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묘사된다.   는 윤동주가 일본 유학 중 체포돼 경찰 조사를 받는 장면을 중점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릿쿄대학에 입학했다가 도시샤대학으로 옮긴 뒤 항일운동 혐의로 붙들린 뒤의 상황이 주로 묘사된다.   . "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9/0227/IE002462878_STD.jpg" style="letter-spacing: -0.025em; word-break: break-all; 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0px; outline: 0px; vertical-align: baseline; background: transparent; max-width: 100%;" /> ▲영화 .ⓒ 루스 이 소니도스    영화는 중간중간 윤동주의 회상을 통해 체포 이전 상황을 하나둘씩 제시한다. 윤동주와 일본 경찰을 제외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회상 장면에서 등장한다. 회상 장면에서는 윤동주가 지은 시들도 이따금 흘러나온다. 시 낭송회를 감상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영화에서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런 일이다"라는 대목이 있는 도 나온다. 또한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골을 다시 들여다본다"는 구절이 있는 ,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어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는 부분이 있는 등이 소개된다.   는 주인공이 인생 단짝인 송몽규(박정민 분)의 영향을 받아 총칼을 들고 싸울 생각을 했다는 점을, 일본 고등형사(김인우 분)와의 대화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송몽규는 윤동주 집에서 윤동주보다 3개월 먼저 태어난 고종사촌형이다.   고등형사는 송몽규가 계획한 무장투쟁 계획을 윤동주에게 읽어주면서, 너도 알고 있었느냐는 식으로 물어본다. 110분짜리인 영화가 1시간 3분을 지날 때쯤 고등형사가 읽어준 송몽규의 친필 계획서는 아래와 같다.   "대일본제국에서 실시된 조선인 동원령을 조직적으로 이용할 것. 유사 시 이용할 일본인을 포섭할 것. 장교급으로 군부에 깊이 들어갈 조선인 제국대학생들을 선발할 것."   송몽규는 일본군에 편입된 조선인들을 이용해 무장투쟁을 벌이고자 했다. 이 계획에 윤동주가 어느 정도 가담했는지를 고등형사는 알아내고자 한다. 송몽규의 친필 서류를 보여주면서 형사는 말한다.   "송몽규 글씨는 알아볼 수 있겠지? 릿쿄대학으로 간 것도 송몽규의 영향 아닌가?""    ▲송몽규(앞줄 중앙)와 윤동주(뒷줄 오른쪽).ⓒ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윤동주는 1943년 7월 14일 교토에서 특고경찰(사상범 전문)에 체포됐다. 송몽규는 4일 전 체포됐었다. 이들에 대한 조사 기록이 내무성 경보국(警保局) 보안과가 작성한 1943년 12월호 에 실려 있다. '재(在)교토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 책동 개요'란 제목의 문서다.   정병욱 교수가 한국어로 옮기고 윤일주 교수(윤동주 동생)가 해설을 붙인 이 문서 번역문이 송우혜(송몽규 조카)가 쓴 에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주범' 송몽규와 '공범' 윤동주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상대로 조선문화 수호 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해방 뒤의 정치체제까지 준비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두 사람은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의 종국에 가서는 반드시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고 망단(妄斷)하고 일본의 국력이 피폐한 틈을 타서 조선독립의 여론을 환기시켜 민중을 봉기케 하여 일거에 독립을 완수시킬 것을 의도하여, 교토에 있는 조선인 학생 여러 명을 지목하여 충동함으로써 동지를 얻는 데 노력한 결과 제3고등학교 학생인 고희욱을 얻어, 1942년 10월경부터 금년(1943년) 7월경까지 교토의 시내 각처에서 3명이 가끔 회합하여 민족의식의 앙양 내지는 구체적인 운동 방침 등에 관하여 협의해 왔던 바 ······."   당시 일본이 곧 망할 거라는 윤동주 등의 판단을 두고 특고경찰들은 '망단'(妄斷)으로 폄하했다. 하지만 윤동주 등에게는 확신이고 갈망이었다. 일본이 곧 망할 거란 확신을 갖고, 또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면서 윤동주 등은 싸움을 결의했다.   이들은 우선 대중 선전전에 주력하기로 했다. 우리말과 우리 글이 없어지면 우리 민족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인식 하에, 우리 언어로 된 문학작품을 생산·배포해 조선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활동을 하고자 구상했다.   . "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9/0227/IE002462881_STD.jpg" style="letter-spacing: -0.025em; word-break: break-all; 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0px; outline: 0px; vertical-align: baseline; background: transparent; max-width: 100%;" /> ▲1948년 발간된 .ⓒ 위키백과     대중 선전전 외에, 실제적인 무장 투쟁도 계획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를 대비해 일본군 내의 조선인들을 모아 봉기한다는 발상이었다. 는 이렇게 말한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의 강화조약에 즈음하여 조선의 독립 문제가 반드시 조건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만일 제기되지 않더라도 일본의 국력이 약해지거나 또는 일본이 패전하는 기회를 타서 독립운동을 전개시키면 조선인은 모두 궐기할 것이다. 그때에 조선 출신 군인들도 큰 구실을 해야 할 것이며, 우리들도 목숨을 바쳐 궐기해야 한다."   그날이 되면 목숨을 바쳐 궐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일본을 몰아낸 다음에 어떤 정치 시스템을 구축할 것인가? 그들은 그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아래와 같은 임시방편적 대책을 준비했다. 에 나오는 내용이다.   "독립 후의 정치 주권자는 누구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얼마 동안 군인 중심의 독재정치에 맡겨야 한다."   해방 직후의 과도기 동안은 군인 독재를 통해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인식이었다. 소수의 청년 학생들이 세운 계획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그런 생각을 마음 속에 담아두거나 토론회에서 언급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 경찰의 조사 결과처럼, 이들은 조직원 확보에 나섰다. 계획을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윤동주 등의 계획은 빛을 보지 못했다. 실천 행동의 초기 단계에서 특고경찰들에게 발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념을 실행에 옮기고자 행동에 착수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전시의 암울하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 그것도 적지 일본에서 무장독립투쟁을 꿈꾸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윤동주의 민족 사랑이 관념적 사변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 실천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으며, 그가 시에서 읊었던 것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시구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윤동주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마루타 생체실험으로 의심되는 뭔가에 의해 몸이 시들어가다가 1945년 2월 16일 새벽 3시 36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28세 젊은 생을 마감했다. 정말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다 간 독립투사였다. 1990년, 대한민국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396    시인은 떠났어도 희망은 "낡지 않"았다... 댓글:  조회:3206  추천:0  2019-03-07
떠난 지 30년… 시인 기형도가 남긴 '낡지 않은' 희망 2019-03-07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질투는 나의 힘" 영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이 문구는 시인 기형도의 시에서 비롯됐지요. 시는 이렇게 끝납니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30년 전 오늘(7일) 기형도 시인은 29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강나현 기자입니다.   [기자]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 '희망' 기형도 세상을 떠난 날 시인 기형도가 남긴 가방 속 원고뭉치에 담겼던 시는 영화속에서도 불려집니다. 그 시를 모아, 한 권의 시집이 남았고, 여전히 너무나 많은 이의 가슴을 시리게 합니다. [장옥순 여사/기형도 시인 어머니 (2015년) :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 '엄마 걱정' 기형도 어릴 때부터 글 쓰기를 행복으로 알던 시인은 신문사 기자가 된 이듬해인 1985년 신춘문예에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29살이던 198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삶은 갑작스레 멈춰섰지만 글은 남았습니다. 한없이 쓸쓸하고, 깊은 고독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버릴 수 없는 한 자락 희망은 시대를 넘나들며 청춘들을 위로했습니다. [이광호/문학평론가 : 영원한 청춘의 초상이기 때문에 늘 젊은 친구들은 기형도의 시를 일종의 젊음의 통과의례처럼 읽게 된다는 것이고요.] 시인이 떠난 지 30년, 시간이 지나도 그가 남긴 시는 낡지 않은 채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로 남았습니다. (화면제공 : 기형도 문학관·문학과지성사) /강나현 //[영상취재: 정철원 / 영상편집: 김동훈] ===//////////////////////////////////////////////////////////=== '거리의 상상력' 기형도 시인 30주기... 뜨거운 추모 열기 2019-03-07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기형도 시인이 시집에 남긴 메모입니다. 한국현대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기형도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30년, 젊은 후배 시인들이 헌정 시집을 내는 등 어느 때보다 추모 열기가 뜨겁습니다. 이교준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기형도문학관. 건물 벽에 걸린 대형 현수막에 적힌 '정거장에서의 충고'의 시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기형도 시인 30주기를 맞은 문학관 곳곳에는 고인에 대한 그리움이 어느 때보다 깊이 배여 있습니다. [기향도 / 기형도 시인 누나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 기형도 시인 '빈집'] 암울한 시대를 견디다 29살의 젊은 나이에 불현듯 숨을 멈췄지만 그의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지금까지 30만 부를 돌파할 정도로 시대를 넘어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기향도 / 기형도문학관 명예 관장 : 서로 위로하고 따듯하게 격려하고 세워주고 이렇게 하면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사회가 되지 않을까 동생이 그런 노력을 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형도 시인의 모교인 연세대에서 그의 문학 세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추모 심포지엄이 처음으로 열리는 등 추모 열기가 뜨겁습니다. 젊은이들의 가슴을 두드린 도시적 서정성과 절망의 미학은 여전히 울림이 크다는 평가입니다. [정과리 /문학평론가 : 기형도 시가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었던 개인의 자유와 고독이라는 두 가지 문제성을 여전히 우리가 계속 고민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30주기를 맞아 그의 미발표작까지 모은 시 전집과 함께 2000년 이후 등단한 젊은 후배 시인 88명의 시를 묶은 헌정 시집도 나왔습니다. 그가 남긴 시는 고인의 생애보다 긴 시간 독자와 호흡하고 젊은 시인들과 교감하며 푸른 생명력과 상상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YTN 이교준입니다.
1395    [그것이 알고싶다] - "옥중가"와 100여년... 댓글:  조회:2823  추천:0  2019-03-02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뤼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가 직접 만들어서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옥중 생활의 고통과 독립에 대한 염원이 고스란히 담긴 이 옥중가가 100여 년이 지나 다시 불렀습니다. 김수현 기자가 보도합니다. "적막한 가을 강산 야월 심경에 슬피 울며 날아가는 저 기러기야." 뤼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가 민요풍 선율에 3절 가사로 지어 불렀던 노래입니다.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망국의 울분, 감방 생활의 고충을 토로하며 애상에 젖다가도 다시금 투쟁 의지를 다집니다. "콩 든 밥이 맛이 있어 누가 먹겠나 때려라 부숴라 왜놈들 죽여라" [김재일/바리톤 : 신세 한탄만 하는 게 아니라 다시 또 조국의 독립에 대한 의지가 들어 있기에 감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일제가 금지곡으로 지정했지만 안 의사의 사촌 동생 안익근, 6촌 동생 곽희종 씨를 거치며 구전돼 살아남았습니다. 음악학자 고 노동은 씨가 중국에서 발굴해 국내에 처음 알렸지만, 실제로 노래를 들을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인자/관객 (서울 길음동) : 그 어려운 시기에, 갈 때에, 정말 나라를 생각하고 이렇게 (노래를) 썼다는 건, 정말 우리가 다시 한번 새겨봐야 할 것 같네요.] [슈징징/중국인 관객 : 한국과 중국의 이전 역사가 깊이 관련되어 있잖아요. (안중근 옥중가를 처음 들어서) 정말 뜻깊게 생각합니다.] 옥중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안중근 의사의 옥중가,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신념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영상취재 : 주 범, 영상편집 : 유미라)   김수현 기자
1394    "한글, 이번에는 제가 배울 차례입니다"... 댓글:  조회:3281  추천:0  2019-02-16
윤동주 떠난 날에 조선일보  이한수 Books팀장 음성으로 읽기 기사 스크랩   이메일로 기사공유   기사 인쇄   글꼴 설정         100자평 페이스북 공유4 트위터 공유 카카오스토리 공유 기사 URL공유 공유 더보기  2019.02.16    스물여섯 살에 죽은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1886~1912)는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하자 이를 비판하는 시를 씁니다. '지도 위 조선 나라에 새까맣게 먹물을 칠하면서 가을 바람을 듣는다. 누가 나를 피스톨 갖고 쏴주지 않으려나 이토처럼 죽어 보여주련다.' 시인 백석(白石·1912~1996)은 이시카와를 좋아해 '석(石·이시)'을 이름으로 삼았다네요. 후배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는 이시카와 시를 인용하고 이렇게 씁니다. '일본어가 밀어내려 했던 이웃 나라 말 한글/ 어떤 억압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한글/ 용서하십시오/ 땀 뻘뻘 흘리며 이번에는 제가 배울 차례입니다.' 이바라기는 윤동주를 사랑해 한글을 배웠다네요. '너는 왜 이제야 왔나/ 윤동주가 부드럽게 나를 꾸짖습니다/(중략)/ 젊은 시인 윤동주/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그대들에게는 광복절/ 우리에게는 항복절인/ 8월 15일이 오기 겨우 반년 전 일이라니/ 아직 교복 차림으로/ 순결을 동결시킬 듯한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십니다.' 이번 주 새로 나온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집 '처음 가는 마을'(봄날의책)에서 읽었습니다. 오늘(16일)이 윤동주 시인이 떠난 날이네요. 증오 가득찬 정치인의 말에서 사랑 넘치는 시인의 말로 바뀌는 날은 언제 올까요. 이바라기는 씁니다. '틀어진 모든 것을/ 시대 탓하지 마라/ 자기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이 바보야.'
1393    [동네방네] - "윤동주", 실시간 알리기... 댓글:  조회:3048  추천:0  2019-02-16
배우 박솔미 "오늘 '윤동주' 실검 만들자"  2019-02-16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16일 옥사일 맞아 서경덕 교수와 알리기 캠페인 윤동주 서거일 관련 카드뉴스[서경덕 교수 제공]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KBS 드라마 '죽어도 좋아'에 출연했던 배우 박솔미가 16일 윤동주 옥사일을 맞아 '윤동주' 실시간 이슈 검색어(실검) 만들기에 도전한다. 서경덕 교수가 전개하는 '대한민국 역사, 실검 프로젝트'에 동참한 것이다. 박솔미는 이날 하루 서 교수가 제작한 카드뉴스를 자신의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확산시켜 '윤동주'를 포털사이트 실검에 오르도록 활동을 한다. 1장의 카드뉴스에는 학사모를 쓴 윤동주 사진과 함께 "시인 윤동주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일제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시(詩)로 표현했다. 하지만, 1943년 조선인 유학생들과 조선의 독립 및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2월 16일 28세의 나이에 순국하였다"는 글이 실렸다. 이어 "우리는 이날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고 끝을 맺는다. 박솔미는 "의미 있는 역사 캠페인에 동참하게 돼 기쁘다. 팔로워들이 '좋아요'를 통해 함께 힘을 모은다면 오늘 하루 윤동주를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라며 "적극적인 동참을 바란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올해는 3·1 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라면서 "이를 기념해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의 의미 있는 날을 함께 기억하자는 대국민 캠페인을 지속해서 펼치겠다"고 밝혔다. ...  
1392    [명작 쟁명] -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 댓글:  조회:4184  추천:0  2019-02-15
  세계문학사 작은사전 마지막 수업     구분 문학작품 프랑스 저자 알퐁스 도데 '한 알자스 어린이의 이야기'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작품으로 프로이센에 의해 프랑스 어를 마지막으로 공부하는 날 아침에 지각한 어린이 '나'를 통하여 표현한 1인칭 소설이다. 그날 아침 나는 학교에 몹시 늦었다. 그래서 야단을 맞을까 봐 퍽 겁이 났다. 더구나 알멜 선생은 분사(分詞)에 관해서 물어 보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전혀 깜깜했다. 그래서 나는 수업을 까먹고 들판으로 달아날 생각도 했다. 그지없이 따스하고 청명한 날씨였다. 목장에서는 프로이센 병사들의 훈련받는 소리가 들려 왔다. 확실히 나는 분사의 규칙보다는 그러한 것에 더욱 매혹되어 있었다. 읍사무소를 지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게시판 앞에 모여 있었다. 2년 전부터 나쁜 소식, 패전, 징발 명령, 포고령 등을 바로 저 게시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이 떠드는 틈을 타서 조용히 자리에 앉을 생각이었으나 일요일 아침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아멜 선생님은 호통을 치기는커녕 "귀여운 프랑즈, 빨리 네 자리로 가거라"하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정장을 하시고 계셨으며, 오젤 노인 등 마을 사람들이 같이 와 앉아 있었다. 모두가 슬퍼 보였다. 엄숙한 음성으로 "여러분, 이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마지막 수업입니다. 알자스와 로렌의 초등학교는 독일어만을 가르치라는 명령이 베를린에서 왔습니다. (···) 오늘은 여러분의 마지막 프랑스 어 수업입니다. 열심히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몇 마디 말씀은 나를 한없이 당황하게 했다. 나는 프랑스 어를 영원히 못 배우고 마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내가 수업을 빼먹고 놀러 다니던 일이 무척 뉘우쳐졌다. 가엾은 분! 내 차례가 와서 분사법을 외우지 못했을 때 나는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몇 마디 더 말씀하시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아멜 선생님은 '알자스', '프랑스', '알자스', '프랑스' 이렇게 커다란 종이에 써오셨다.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40년 동안 한결같이 프랑스 말을 가르침으로써 조국에 봉사해 왔는데 이것이 마지막이다. 감정이 복받쳤다. 이윽고 선생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가능한 크게 "프랑스 만세!"라고 썼다. 그러고는 벽에 기대어 서서 말없이 손짓을 했다. "이제 끝났어······ 다들 돌아가도록······." [네이버 지식백과] 마지막 수업 ============================{쟁명}     1945년 8월15일 서울의 어느 보통학교 국어 교실를 무대로 삼은 한 일본인의 단편소설 끝장면이다. 히로히토 천황의 무조건적인 항복 선언을 방금 전해 들은 일본인 선생님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조선인 학생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일본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언어임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국민이 설혹 노예의 처지에 빠지더라도 국어만은 잘 지키고 있으면 스스로의 손에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때 창 밖에서 호각소리가 울려왔다. 일본인 선생님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하고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선생님은 끝내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칠판으로 돌아서 분필로 "일본 만세"라고 큼지막한 글을 썼다. 이것은 19세기 후반에 활약한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1840-1897)의 단편소설 의 마지막 장면을 1945년 한국 상황으로 패러디화해 본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패러디가 아니다. 이 묘사하는 시대적 배경, 즉 1871년 보불전쟁으로 패한 프랑스가 독일계 주민이 다수인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 넘겨주고는 퇴각해야 했던 배경과 연합국에 패한 일본이 조선에서 물러나야 했던 상황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단편소설이 패전 뒤 어떻게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에서까지 중·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을까? 이 소설이 실리는 것이 식민지시대 향수를 잊을 수 없는 일본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도데의 이 해방 직후 1989년 무렵까지 중·고교 국어교과서에 버젓이 실렸던 것이다. 그 후 이 소설이 갖는 영향력은 아직도 남아 있다. 비록 이 소설이 교과서에서 사라졌다고는 해도 도데라는 이름까지 잊혀졌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동화라든가, 세계명작 같은 형태로 지금도 국내에서 '도데 신화'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1936년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을 통해 번역소개된 이 작품은 1939년에 국어(일본어) 교과서에 채택됐으며, 패전 이후에도 우리처럼 한동안 국어교과서에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다가 1970년대 초반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재미 있는 것은 이 교과서에서 도태되기까지 한일 두 나라가 전혀 판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도데와 이 추악한 프랑스 내셔널리즘을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임이 역사학계의 집요한 추적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교과서에서 축출된 데 비해 한국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실려 신선미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이 교과서에서 탈락하고 난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도데는 여전히 사랑받는 작품, 사랑하는 작가로 통용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전세계적으로 프랑스 작가로서 2류, 3류 축에도 들지 못하고 일본에서마저 배척을 당하고 있는 도데가 한국에서만은 새천년을 맞이한 지 2년이 되는 지금까지 '식지 않은 열풍'을 지속하고 있는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의 작품은 흔히 서정성이 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부 프랑스 프로방스 출신인 그는 국내에서는 말고도 이라는 단편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런 표면적인 서정성과 함께 은 식민지 경험과 결부돼 도데가 말하는 '잃어버린 프랑스어'와 '잃어버린 알자스-로렌'이 각각 '일본에게 잃어버린 조선말'과 '일본에게 잃어버린 조선 강토'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러한 증거가 23년만에 다시 빛을 본 소설가 고 이병주의 (원제는 「허망과 진실」)에 나오는 그의 이 작품에 대한 감상문에서 포착된다. 이 글에 따르면 이병주는 일제 식민강점 치하인 열두 살 때 일본인 교장 부인에게 선물로 받은 소년소녀 동화집 같은 책에서 을 처음 접했다고 하면서 "그 작품은 내게 있어서 심각한 충격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이병주의 설명은 이렇다. "어린아이에게도 나름대로의 의식은 있다. 열두 살 소년인 나는 그 소설에서 받은 충격으로 그때까지 전혀 해보지도 않은 생각에 차례차례로 말려 들었다. 첫째 생각한 것은 알자스와 로렌이 어쩌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알자스와 로렌처럼 슬픈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한마디로 을 통해 조선은 일본식민지로 있을 수 없으며 우리 언어를 살려야 한다는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 대다수는 지금까지도 을 프랑스의 민족의식, 나아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명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작품은 프랑스의 추악한 내셔널리즘을 가장 극명하게 표출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이미 30년 전에 추방됐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는 알자스는 14세기 이래 프랑스령이었으나 그 주민 대부분은 독일계로 언어 또한 독일어를 사용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언어 통제 정책은 더욱 강화돼 학교에서는 프랑스어를 강제로 가르쳤다. 그러다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다음 알자스는 프로이센에게 넘어갔다. 이로써 이 지방 주민들은 일상 언어, 곧 독일어를 되찾게 됐다. 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면서 알자스는 독일 땅일 수 없으며 세계 언어 중에 오직 프랑스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임을 강변했던 것이다. 실제 도데는 국내에는 '서정작가'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극렬한 왕당파였으며 그의 아버지 또한 우익 왕당파의 수괴였다. 도데가 더욱 악랄한 것은 보불전쟁 당시 알자스 주민 대부분이 프랑스어를 모르는 독일계였음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 은 프랑스어를 모르는 알자스 주민들을 대상으로 프랑스어 교사가 마지막 수업을 진행하는 장면을 설정하면서 "프랑스 만세"라는 말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 프랑스 교사는 비유컨대 일제의 패망으로 식민지 조선땅에서 할 수 없이 물러나면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일본 만세"라는 큼지막한 글을 남긴 일본인 국어교사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인지 한국에서 은 외세에 저항하는 민족의식을 가장 극적으로 '대리표출'한 작품으로 통하고 있다. 이는 '적대적 문화변용'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본 제국주의 논리를 고스란히 답습한 희극적인 현상인 것이다.   ========================///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 서정성 짙은 사실주의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을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어디선가 잔잔한 선율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짧은 얘기로 마음을 안온하게 감싸면서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건 놀라운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자극적이면서 폭력적이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 알퐁스 도데의 소설이 더욱 가슴 깊이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것은 순수하고 낭만적인 분위기 뒤에 강력할 사실주의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퐁스 도데는 1840년 남프랑스 님에서 태어났다. 리옹의 고등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공부를 중단하고 중학교 조교사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열일곱 살에 파리로 가서 신문 기자로 일하며 문학에 전념하게 된다. 그 시절 도데는 당대 사실주의의 정점에 올랐던 귀스타브 플로베르, 에드몽 드 공쿠르, 에밀 졸라 등의 문인들과 우정을 나눴다. 다양한 경험과 사실주의 분위기 속에서 도데는 특유의 시적 서정성과 감수성을 곁들여 19세기 말 프랑스 소시민들의 삶을 날카롭게 그렸다. 알퐁스 도데의 여러 단편소설 가운데서 ‘마지막 수업’과 ‘별’이 가장 유명하다. ‘별’은 한때 교과서에 수록됐는데 ‘국민단편’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랑받는 작품이다. 국내 서점가에 나온 ‘별’의 판본이 70종이 넘는다고 하니 열기가 충분히 전달되는 듯하다. ‘별’의 주인공 양치기는 몇 주일씩이나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개와 양떼와 함께 목장에서 외롭게 지낸다. 2주일마다 농장 머슴이나 늙은 아주머니가 보름치 양식을 실어다 줄 때가 가장 즐거운 날이다. 양치기는 외로운 시간을 별을 보면서,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생각하며 견딘다. 그러던 어느 날 양식을 싣고 오는 노새 방울 소리에 반갑게 달려 나간 양치기의 눈앞에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등장했다. 양식을 갖다 주던 꼬마 머슴은 앓아눕고 아주머니는 휴가를 얻어 아들네 집에 갔기 때문이다. 늘 그리워하던 아가씨를 만난 양치기의 가슴이 얼마나 쿵쾅거렸을까. 꿈 같은 시간을 보내고 아가씨를 배웅했는데 낮에 온 비로 인해 불어난 강물에 빠진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그날 밤 목장에 묵게 된 아가씨에게 양치기는 별 이야기를 들려주며 행복에 빠진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깨끗하게 해준, 양치기와 아가씨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언제나 마지막 수업처럼 ‘마지막 수업’은 많은 교훈을 남기는 소설이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우리의 선조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더욱 가슴을 울린다. 지각도 잘하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는 프란츠는 오늘도 수업에 늦고 말았다.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교실에 들어서는데 멋지게 차려입은 선생님이 상냥하게 맞아주고, 뒤쪽에는 마을 어른들이 죽 앉아 있다.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이었던 것이다.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에 항복하면서 알자스 로렌 지방의 일부가 독일에 병합돼 더 이상 프랑스어 수업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프란츠는 그제야 수업을 빼먹고 놀러 다닌 걸 후회한다. 선생님은 지각한 프란츠에게 “화를 내지는 않겠다. 너는 충분히 벌을 받은 셈이니까. ‘아, 시간은 아직 많아. 내일 공부하지 뭐.’ 그러나 결과는 이렇단다. 교육을 언제나 다음날로 미룬 것이 우리 알자스의 불행이다”라고 말한다. 마지막 날 프란츠는 아멜 선생님이 나눠준 특별한 글씨본으로 열심히 공부한다. 뒤쪽에 앉은 오제 할아버지가 프랑스어 교본을 들고 아이들과 함께 더듬더듬 읽을 때 프란츠는 웃음이 나올 뻔하지만 울음이 나와 참는다. 우리의 선조들도 한글을 배우지 못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꿔야 하는 수난을 겪었다. 광복이 된 후 어른들은 자녀 교육에 최선을 다했고,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발전하게 됐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어쩔 수 없이 비장함을 동반한다. 마지막 수업에 임하는 아멜 선생님과 프란츠처럼 매사에 열심을 다한다면 우리들은 분명 인생에서 원하는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근미 < 소설가 >  ======================/// 1871년 5월, 이제는 독일 제국이 된 프러시아와의 전쟁에 패배한 프랑스는 독일과의 접경 지역인 알자스와 로렌을 독일에 할양해야만 했고, 그때까지 프랑스의 영토로 프랑스어를 배우던 사람들은 프랑스어 대신 독일어를 배워야 했다. 주인공인 소년 프란츠는 어느 날 아멜 선생님의 수업에서 오늘이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날 아침 나는 학교에 몹시 늦었다. 그래서 야단을 맞을까 봐 퍽 겁이 났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교실에 도착한 나는 아이들이 떠드는 틈을 타서 조용히 자리에 앉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교실은 마치 일요일 아침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아멜 선생님은 호통을 치기는커녕 "프란츠, 어서 네 자리로 가거라" 하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재빨리 책상에 앉은 나는 그제야 선생님이 장학사가 오는 날이나 시상식이 있는 날에만 입는 정장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평소에는 비어 있던 교실 뒤편 의자에 삼각모를 쓴 오젤 할아버지와 전임 면장님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이 같이 와 앉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모두가 슬퍼 보였다. 내가 이 모든 광경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동안 아멜 선생님이 교단에 올라와 엄숙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여러분, 이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마지막 수업입니다. 알자스와 로렌의 모든 초등학교는 독일어만을 가르치라는 명령이 베를린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의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입니다. 열심히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몇 마디 말씀은 나를 한없이 당황하게 했다. 이제는 프랑스어를 영원히 못 배우고 마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내가 수업을 빼먹고 놀러 다니던 일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읽기 지루하고 들고 다니기 거추장스럽기만 했던 문법책과 이야기 성경책이 이제는 헤어지기 싫은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선생님의 정장도 마지막 수업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입고 오신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왜 마을 어른들이 교실 뒤에 앉아 계시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분들은 좀 더 학교에 자주 찾아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시는 것 같았고, 또한 사십 년 동안 충실히 봉사하신 선생님에 대한 감사와 사라진 조국에 대한 의무감의 표시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내가 외울 차례가 돌아왔고,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셨는데도 분사법을 제대로 외우지 못한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부끄럽고 서글픈 마음에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서있는 내게 선생님은 야단을 치시는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다. "프란츠, 너를 야단치지 않으마. 넌 충분히 벌을 받고 있으니까 말이야. 사람들은 매일 이렇게 생각하지. '시간은 많아. 내일 배우면 돼.' 그래서 결국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너도 보고 있잖니. 그래! 교육을 늘 내일로 미루려 한 것이 우리 알자스 사람들의 커다란 불행이었어. 이제 프러시아 사람들이 우리에게 '거 보시오, 당신들은 프랑스인이라면서 프랑스어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잖소!' 이렇게 비웃은들 뭐라고 하겠니. 하지만 프란츠, 이건 너의 잘못만은 아니란다. 우리 모두 너와 마찬가지로 자기 잘못을 반성해야 해." 그리고 나서 아멜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프랑스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셨다. 선생님은 프랑스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확하며, 가장 확실한 언어라고 하셨다. 또한 우리가 프랑스어를 잘 간직해야 하며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어떤 민족이 노예가 되더라도 자신들의 언어만 잘 간직한다면 감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도 하셨다.   아멜 선생님은 새로운 교본을 준비해 오셨는데 거기에는 커다란 종이에 '알자스', '프랑스', '알자스', '프랑스'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이따금 책에서 눈을 들어 볼 때마다, 아멜 선생님이 교단에서 꼼짝 않고 자기 주변의 물건들을 응시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이 조그만 학교에 있는 모든 것들을 눈에 담으려는 듯 말이다. 선생님은 40년 동안이나 한결같이 이 교실에서 프랑스 말을 가르침으로써 조국에 봉사해 왔는데 이제 내일이면 선생님과 선생님의 누이 동생은 짐을 싸서 이 교실과 이 지방을 영원히 떠나야 하는 것이다. 선생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   갑자기 교회 시계가 정오를 알렸고, 그와 동시에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프러시아 군인들의 나팔 소리가 우리 교실 창문 바로 아래서 들려왔다. 아멜 선생님께서는 매우 창백한 얼굴로 교단에서 일어서셨다. 선생님의 키가 그렇게 커보였던 적은 처음이었다.   "여러분," 선생님이 말문을 여셨다. "여러분…저는, 저는…" 목이 메시는지 선생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셨다. 선생님은 칠판을 향해 돌아서더니 분필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글씨로 이렇게 쓰셨다. "프랑스 만세(Vive la France)!"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벽에 머리를 기댄 채 한참을 아무 말없이 계시다가 손짓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다 끝났다······ 다들 돌아가거라······."   ▲ 19세기 후반의 알자스-로렌 지방 지도. 프랑스와 독일(프러시아)의 접경지인 알자스와 로렌은 수 없이 많은 국경 분쟁에 휘말려 국적이 여러 번 바뀌는 비운을 겪었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은 1871년에 프랑스가 프러시아와의 전쟁에 패배해 이 두 곳을 독일에 할양할 당시의 알자스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1391    "풀꽃" 댓글:  조회:3030  추천:0  2019-02-06
라태주 시 "풀꽃"  
1390    윤동주 시 또 중국어로 번역되다... 댓글:  조회:3976  추천:0  2019-01-27
도서   하늘과 바람과 별을 중국어로 노래하다! 중국어판 ‘윤동주 시집’ 발간 September 18.2018 윤동주의 시 60편을 중국어로 번역한 윤동주 시집이 발간됐다. 중국어 교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재원이 십시일반으로 모여 만들어진 특별한 시집이다. 중국어판 윤동주 시집에 대한 발상은 서울 종로구 자하문 고개의 윤동주 문학관에서 시작되었다. 문학관을 찾은 중국인들이 한글을 몰라 벽에 전시된 윤동주의 시를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중국어로 윤동주의 시를 읽게 하겠다는 결심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 결심은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재능기부로 1년여 만에 결실을 맺었다. 중국 조선족 출신인 허동식 시인이 기꺼이 시 번역을 맡았으며, 현직 국어 선생님이 시집에 실을 작품을 선정하고, 미술 선생님이 표지 디자인을 지원했다. 시집을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은 전국의 중국어 선생님들의 기부로 마련했다. 이외에도 각 시의 한국어 녹음과 그림을 학생들이 재능 기부해 각 시에 들어간 QR코드를 스캔하면, 해당 시를 음성으로 들을 수도 있다. 이렇게 탄생한 중국어판 윤동주 시집은 윤동주 문학관에 기증했다. 문학관에 찾아오는 중국인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기 위함이다. 또한, 중국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윤동주의 시를 알리기 위해 시집은 중국 유명 대학의 한국어과와 국내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어학당에도 기증하기로 했다. 시집을 기획, 발행한 ‘중국을 읽어주는 중국어교사모임’ 대표 심형철 교사는 “많은 분들의 정성으로 만든 시집이 윤동주 문학관을 찾는 중국인들에게 전달되어 읽히게 될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하다”라고 밝히며, “중국 학생들이 윤동주의 시를 읽음으로써 일본의 침략에 의한 서로의 아픈 역사를 나누고 이해하는 밑거름이 될 거라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序诗(서시) 我只为了 直到生命的最后一刻 仰望悠远苍穹之时 敢言今生没有一丝耻恨 竟然悲情过风中之叶 但我要以咏恋星儿的心 讴歌一切生与灵 要走完命中注定的路 今夜又见遥远群星 在阵阵狂风中闪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389    윤동주와 "아리랑" 댓글:  조회:3237  추천:0  2019-01-27
부끄럼 많다던 윤동주는 왜 가운데에 서 있을까 [중앙일보] 2018.04.26    기자 채혜선 기자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리   다고 기치로 씨가 발굴한 윤동주 사진. 현존하는 윤동주 최후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윤동주. [연합뉴스] 최근 『생명의 시인 윤동주- 모든 죽어가는 것이 시가 되기까지』를 펴낸 일본인 다고 기치로(62·多胡吉郞)씨는 26일 "일본에 유학하러 왔다 옥사한 윤동주 시인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이웃 나라의 고통을 일본국민에게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기치로씨는 이날 공개된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윤동주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는 질문에 이같이 답한 뒤 "윤동주의 시를 그대로 읽고 싶어 한국어도 공부했다"고 했다.    '생명의 시인 윤동주'의 작가 다고 기치로가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찻집에서 열린 한국어판 출간기념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30년 넘게 윤동주의 삶과 시를 취재한 그는 일본 NHK에서 PD로 일하며 KBS와 공동으로 다큐멘터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일본 통치하의 청춘과 죽음'을 제작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일본 공영방송 NHK PD 출신인 그는 30년 넘게 윤동주를 취재해왔다. 1995년 KBS와 공동으로 다큐멘터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일본 통치하의 청춘과 죽음'을 제작한 경험도 있다. 기치로씨는 "당시 시청률이 그해 방송된 프로그램 중에서 뒤에서 두 번째였으나 이제는 보고 싶다는 사람이 많다"며 "'욘사마(배우 배용준)'보다 '윤사마(윤동주)'가 더 잘생겼다는 여성 팬이 많다"고 했다.       그는 현존하는 윤동주 최후의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을 발굴하기도 했다. 기치로씨는 "윤동주는 부끄럼을 잘 타는 성격이라 조선에서 찍은 사진에는 늘 가장자리에 있다. 그런데 이 사진에선 앞줄 가운데에 있다"며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한 윤동주를 위해 일본 친구들이 송별회를 해줬고, 친구들이 주인공을 윤동주를 가운데에 서라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치로씨에 따르면 윤동주는 이날 '아리랑'을 불렀다. 당시는 조선어로 '아리랑'을 부르는 게 금지였던 때였다고 한다.     /채혜선 기자
1388    윤동주와 명동, 룡정, 평양, 서울, 도쿄, 교토... 댓글:  조회:3015  추천:0  2019-01-24
窓(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疊房(육첩방)은 남의 나라,// 詩人(시인)이란 슬픈 天命(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줄 詩(시)를 적어 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그니 품긴/ 보내주신 學費封套(학비봉투)를 받어// 大學(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敎授(교수)의 講義(강의) 들으러 간다.(후략) 윤동주와 정병욱 윤동주(왼쪽)와 후배 정병욱. 연희전문에 다니면서 만난 정병욱은 윤동주의 유고시 19편의 원고를 목숨 걸고 지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쉽게 씌어진 詩(시)’, 윤동주(1942년 6월3일)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던 시인 윤동주. 그는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9세의 짧은 생을 마쳐야 했다. 그리고 한 줌 재가 되어 고향 땅 북간도로 돌아갔다. 그런 윤동주는 생전에 자신의 시집을 끝내 남기지 못한 ‘비운의 시인’이었지만, 가족들은 그의 무덤 앞에 ‘詩人尹東柱之墓(시인 윤동주의 무덤)’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천만 다행히도 그가 모국어로 쓴 시 19편은 후배 정병욱의 목숨 건 노력 덕분에 살아남았고, 여기에 친우 강처중이 소중히 간직하던 그의 시 12편을 더해 1948년 1월, 마침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시)’가 온전히 출간될 수 있었다. 윤동주가 생전에 존경해 마지않던 시인 정지용도 그 유고시집에 서문을 더해 ‘시인 윤동주’를 기렸다. 윤동주가 다닌 릿쿄태 윤동주는 ‘마지막 시’ 5편을 일본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 유학시절에 지었다. 그는 릿쿄대 본관 1층 강의실에서 동양철학사를 수강했는데, ‘쉽게 씌어진 시’에 등장하는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다. ◆윤동주가 걸은 문학의 길 윤동주는 그의 생애 마지막 3년을 일본에서 보냈다. 그 시절 작품으로 현재 남아 전하는 것은 5편(‘흰 그림자’,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追憶(추억)’, ‘쉽게 씌어진 詩’, ‘봄’)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윤동주가 도쿄의 릿쿄(立敎)대학 영문과 유학시절 ‘대학노트’에 남긴 것들로, 사실상 ‘마지막 작품들’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그 시절 시인 윤동주의 치열했던 창작의 산실은 어디였을까. 일본에 남겨진 ‘국민시인’의 흔적은 과연 지금 찾아볼 수 있는 것일까.  윤동주의 일본 유학기간 중 ‘문학 동선’은 도쿄의 릿쿄대학 시절(1942년 3월∼1942년 7월)과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시절(1942년 10월∼1943년 7월)로 나뉜다. 현재 전하는 5편의 시는 바로 릿쿄대학 시절 남긴 것들이다. ‘쉽게 쓰여진 詩’ 속에 등장하는 ‘육첩방’은 도쿄 교외 그의 하숙집이다. 당시 그 하숙집을 방문했던 고 문익환 목사에 따르면 “6조 다다미방 이층집이었다”고 한다. 또한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가던 강의실은 릿쿄대학 본관(모리스관) 강의실이다. 당시 윤동주의 학적부에 기록된 수강과목과 강의실을 대조해 확인한 결과다. 생각해 보면 윤동주는 국운이 기울던 무렵 중국 ‘용정’ '명동'에서 태어나 시인으로 성장한 뒤, 식민지 한반도의 ‘평양’과 ‘서울’에서 그의 시세계를 다듬고 완성해 갔으며, 일본 ‘도쿄’와 ‘교토’를 끝으로 마지막 시를 남겼다. 그리고 해방된 조국의 남쪽 땅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기적처럼’ 유고시집 단 한 권을 낼 수 있었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 그의 문학적 흔적이 남겨진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의 역사적 공간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물론 ‘시인 윤동주’에 대한 독해와 기념방식의 차이는 존재한다. 역사적 실존인물의 공간을 올바로 기억하고, 함께 가꾸어 가기 위한 노력은 이제 우리를 포함해 모두의 과제로 제시된 것이다. 이는 우리의 실정법이 미치지 못하는 ‘국외 소재 사적지’가 새로운 틀에 따라 관리되어야 한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1387    윤동주 시를 지켜준것은 "우정"이였다... 댓글:  조회:2788  추천:1  2019-01-24
2018.10.09      함양에서 말벌술을 함께 마신 정 교수님은 국문학자 정학성 교수다. 정 교수의 부친이 정병욱 교수라는 것을 그 밤에 알았다. 내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2학년이 되어 국문학과 배정을 받아 과 사무실을 드나들었을 때 바로 앞방이 정병욱 교수 연구실이었다. 봄학기 내내 연구실 문이 닫혀있더니, 그해 가을에 정병욱 교수가 암으로 타계했다. 나는 , 교재를 통해서만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30년도 더 지나 말벌술을 마신 그 밤에, 정병욱 교수의 호 백영(白影)이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에서 딴 것이고, 그가 양조장집 아들이었고, 그 양조장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손 글씨 원고가 보관되어 오늘의 윤동주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명의 윤동주를 시인으로 일으켜 세운 친구들   ▲ 함께 하숙하며 연희전문을 다닌 윤동주와 정병욱 ⓒ 윤동주 시집을 다시 읽어보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는 시 속에서 술 한 잔 마시지 않았다. 그는 술로 생을 위로받지 않았고, 술 마신 사연을 한 줄 시 속에도 남기지 않았다. 감성적인 문학 청년이 일제 탄압이 혹독해지던 시절인데도 술 한 잔 마신 흔적을 남기지 않다니, 그의 시가 맑고 깨끗하고 선명했던 이유를 알 듯도 하다. 윤동주는 살아서 문단에 정식 데뷔하지 못했다. 그의 시가 튼튼해지던 시기는, 당대의 문학청년들이 등단하고 싶어했던 지가 1941년 4월호로 폐간되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1940년 8월로 폐간된 상태였다. 우리말로 자유롭게 글을 짓고 뜻을 펴지 못하고, 창씨개명을 하고 친일부역을 하듯이 글을 쓰던 상황이었다. 윤동주가 개인시집을 내려고, 훗날 '서시'라는 제목이 붙게 된 서문을 쓰고 시집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붙이고 지인들의 의견을 구했을 때가 연희전문 졸업을 앞둔 1941년 11월이었다. 윤동주는 일제로부터 탄압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출판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아들였고, 자필 시집 3권을 만들어 한 부는 영시를 배운 연희전문 이양하 교수에게, 한 부는 함께 하숙을 했던 정병욱에게 주고, 한 부는 자신이 소장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42년 2월에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1945년 2월 후쿠오카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가족에게 시신이 인도되어 북간도 용정현에 묻혔다. 윤동주는 데뷔도 하지 않았기에 무명의 문학도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를 시인으로 일으켜 세운 친구들이 있었다. 연희전문 문우였던 강처중이 그렇다. 윤동주는 일본에서 5편의 시를 편지지에 써서 건넸는데, 그중의 한 편인 '쉽게 씌여진 시'가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정지용의 소개문과 함께 게재되었다. 이는 당시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던 강처중이 노력한 결과였다. 이 시가 해방 뒤에 발표된 윤동주의 첫 작품이고, 윤동주라는 시인의 존재를 알린 작품이다. 윤동주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서시', '별 헤는 밤', '또 다른 고향', '십자가', '자화상'은 1941년 손 글씨로 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 속에 담겨 있었다. 그런데 윤동주가 소장한 작품들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이양하 교수에게 건넨 것도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정병욱에게 건네준 것만이 남아 오늘의 윤동주 시인을 이루게 된다.   ▲ 광양 망덕포구의 양조장에 보관되어 있던 윤동주의 손 글씨 시집 ⓒ 허시명   윤동주보다 2년 늦게 연희전문을 졸업한 정병욱은 1944년 학병으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 정병욱은 전라남도 광양에 계신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시를 맡겼다.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달라고 유언처럼 남겨놓고 떠났었다.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님은 명주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던 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레 내주시면서 기뻐하셨다."  정병욱의 증언이다. 어머니가 시집을 보관했던 곳은 양조장 마루장 밑의 항아리 속이었다. 정병욱은 1948년 강처중, 그리고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와 함께 정음사에서 시집을 펴냈다. 윤동주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이다. 1948년 시집을 내기 위해서 서문을 받으러 윤일주가 정지용 시인을 찾아갔을 때였다. 그때 정지용 시인이 윤일주에게 그의 형에 대해 물었다. "무슨 연애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습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인색하진 않었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싸스나 거저 줍데다."  이 문답 끝에 정지용은 윤동주를 이렇게 해석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빼앗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다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윤일주는 형이 술을 '먹는 것 못보았습니다'고 했지만, 윤동주가 술을 전혀 마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병욱의 수필 "잊지 못할 윤동주 형"(백영의 수필집 에 수록되어 있으며 원래는 이라는 잡지 1976년 여름호에 실려 있는데 여기서는 글 제목 끝에 "형"이 라는 칭호가 빠져 있다)에서 윤동주의 일상생활을 회고하는 부분을 보면 "가끔 영화관에 들렀다가 저녁 때가 늦으면 중국집에서 외식을 했는데, 그때 더러는 배갈을 청하는 일이 있었다. 주기가 올라도 그의 언동에는 그리 두드러진 변화는 없었다. 평소보다는 약간 말이 많을 정도였다. 그러나 취중일지라도 화제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고 적고 있다.  윤동주가 술을 입에 대긴 했지만, 술로 마음까지 움직이진 않았던 것 같다. 부끄럼 많은 청년이 괴로움을 달래는 방법은 하늘의 별과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시를 쓰는 것이었다. 절망적인 시대를 견디는 방식이 고요하고 아득했다. 그는 비록 술로 마음을 달래진 않았지만, 그의 영혼이 담긴 시를 지켜준 것은 남도 끝 망덕 포구의 양조장이었다. 광양 망덕 포구의 양조장에 가다   ▲ 전남 광양 망덕포구의 양조장 건물 ⓒ 허시명   나는 보리 이삭이 피는 봄날 도다리쑥국이 맛있을 무렵에, 광양 망덕 포구의 양조장을 찾아갔다. 광양군의 문화해설사가 양조장 가옥을 설명했다. 가게와 살림집과 양조장이 연동되어 있는 건물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니, 윤동주의 시집을 숨겨놓았던 마룻장 위에 시집이 놓여 있었다. 바로 앞 망덕 포구는 섬진강을 거슬러 하동으로 이어지고 바깥으로 남해군으로 연결되는 바닷길이다. 일제강점기 때에서는 인천에서 시모노세키로 연결되던 연락선이 들어오고, 육지와 다도해 섬을 연결시키는 곳이라 물산이 풍부했다. 백영 정병욱은 이곳에서 성장했고, 부산과 서울로 유학하던 시절에 방학이면 이곳을 찾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남해군 사람으로 3.1운동에 연루되어 피신하다가 하동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망덕 포구로 나와 어장과 양조장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아들 정병욱을 따라 1960년대에 서울로 이주하기까지 양조장을 운영했고, 그 뒤로 처조카에게 양조장을 넘겨주었다. 그 처조카 박영주는 1980년대까지 양조장을 운영하다 그만두었는데, 다행히 그 양조장은 허물어지지 않고 그의 아들 박춘식씨에게 이어졌다. 양조장 건물 옆에서 도다리쑥국을 해내는 횟집을 운영하는 박춘식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에게 청하여 양조장 안채와 안마당을 보게 되었다. 정병욱이 부산대학교 교수 시절에 우장춘 박사에서 씨앗을 받은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사람은 갔지만, 꽃은 다시 찾아왔다. 양조장 발효실은 어느 해 태풍 오던 날, 뒷산 흙더미에 무너지고 말아 빈 터가 되었다. 그래도 본채에 딸린 양조 공간은 남아있어 그곳에 누룩방이 있었다. 창고로 쓰이는 창문없는 누룩방이 쓸쓸해 보였다. 안마당에 양조장 우물이 남아있는데, 덮개를 열고 보니 우물물이 거울처럼 빛나고 있었다. 술을 담았던 질항아리가 장독대에 하나 간신히 남아 있었다. 종이덮개를 하고 있는 질항아리는 자존심을 잃고 매실청을 담고 있었다. 이제 술 향기는 나지 않지만, 양조장 건물은 2007년에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되었다. 양조장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으로 명명되었고,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과 인연을 소개한 글이 벽보로 붙어있고, 간간이 사람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은 멀리 북간도에서 유학온 윤동주의 영혼이 한반도를 가로질러 광양 망덕 포구의 양조장 마루 밑에 깃들면서 새롭게 재구성된 공간이 된 셈이다. 섬진강이 남해 바다로 접어드는 망덕 포구를 걸으면, 지금도 윤동주와 정병욱이 포구에 앉아 도란도란 시를 나누고 있는 것만 같다. 이곳은 한국문학사가 기억하는 최고의 우정이 깃든 곳이라고 평할 만하다. 이 땅에서 이만큼 아름다운 사연을 지닌 양조장도 아마 없을 것이다. 연희전문 졸업을 앞둔 1941년에, 윤동주는 '별 헤는 밤' 원고를 정병욱에게 보여주었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은 "따는 밤을 세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로 끝나 있었다. 정병욱은 윤동주에게 넌지시 "어쩐지 끝이 좀 허전한 느낌이 드네요"라고 말했다. 윤동주가 무척 싫어하는 것은 그의 시를 고쳐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의 힘 때문이었을까? 윤동주는 필사본 시집-양조장에 숨어있다가 세상 빛을 본 그 시집-의 원고를 정리하여 '서시'까지 붙여서 "지난번 정형이 '별 헤는 밤'의 끝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라면서 마지막 넉 줄을 정병욱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한 '별 헤는 밤'의 아픈 마지막 시 구절이 완성되었다. 시는 윤동주가 썼지만, 그 시를 지킨 것은 우정이었고, 그 시를 품어준 것은 땅끝 모퉁이 망덕 포구의 양조장이었다.
1386    윤동주 유고 시집과 시인 정지용 "서문", 친구 강처중 "발문"... 댓글:  조회:3080  추천:0  2019-01-24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지용의 서문   서(序)―랄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고 정성껏 몇 마디 써야만 할 의무를 가졌건만 붓을 잡기가 죽기보담 싫은 날, 나는 천의를 뒤집어쓰고 차라리 병(病) 아닌 신음을 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써야 하나? 재조(才操)도 탕진하고 용기도 상실하고 8․15 이후에 나는 부당하게도 늙어간다. 누가 있어서 “너는 일편(一片)의 정성까지도 잃었느냐?” 질타한다면 소허(少許) 항론(抗論)이 없이 앉음을 고쳐 무릎을 꿇으리라.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遺稿)에 분향(焚香)하노라.   겨우 30여 편 되는 유시(遺詩) 이외에 윤동주의 그의 시인됨에 관한 목증(目證)한 바 재료를 나는 갖지 않았다. ‘호사유피(虎死留皮)’라는 말이 있겠다. 범이 죽어 가죽이 남았다면 그의 호피(虎皮)를 감정하여 ‘수남(壽男)’이라고 하랴? ‘복동(福童)’이라고 하랴? 범이란 범이 모조리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소니 윤동주의 시가 바로 ‘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호피는 마침내 호피에 지나지 못하고 말 것이나, 그의 ‘시’로써 그의 ‘시인’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 그의 유시(遺詩) 「병원」의 一節     그의 다음 동생 일주 군과 나의 문답, ― “형님이 살었으면 몇 살인고?” “설흔한 살입니다.” “죽기는 스물아홉에요―” “간도에는 언제 가셨던고?” “할아버지 때요.” “지나시기는 어떠했던고?” “할아버지가 개척하여 소지주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노?” “장사도 하시고 회사에도 다니시고 했지요.”   “아아, 간도에 시(詩)와 애수(哀愁)와 같은 것이 발효(醱酵)하기 비롯한다면 윤동주와 같은 세대에서 부텀이었고나!” 나는 감상하였다.     ..........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 「또 태초의 아침」의 一節       다시 일주 군과 나와의 문답, - “연전을 마치고 동지사에 가기는 몇 살이었던고?” “스물 여섯 적입니다.” “무슨 연애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습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인색하진 않았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샤쓰나 거져 줍데다.” “공부는?” “책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하면 시간까지도 아끼지 않읍데다.” “심술(心術)은?” “순하디 순하였습니다.” “몸은?” “중학 때 축구선수였습니다.” “주책(主策)은?” “남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도 함부로 속을 주지는 않읍데다.”     ............... 코카사스 산중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 「간」의 一節     노자 오천언(五天言 )에, ‘허기심(虛基心) 실기복(實基腹) 약기지(弱其志) 강기골(强其骨 )’이라는 구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無名)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십자가」의 一節     일제 헌병은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故土) 간도에 누워 있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또 다른 고향」     만일 윤동주가 이제 살아 있다고 하면 그의 시가 어떻게 진전하겠느냐는 문제.   그의 친우 김삼불 씨의 추도사와 같이 틀림없이, 아무렴! 또 다시 다른 길로 분연 매진할 것이다. - 1947년 12월 28일 지 용               강처중의 「발문」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앉아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런 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듯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獄死)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 강처중   -『윤동주 평전』중에서   윤동주 평전 소개글 : 작가이자 사학자인 송우혜가 되살려낸 윤동주의 순결한 초상 의지와 신명의 인물로서 그네타기까지 즐겼던 증조부, 소박한 농부이자 관후한 장자였던 조부, 시적 기질을 지닌 창백한 지식인이었던 부친, 따뜻하고 너그러운 인품의 어머니. 동경제대 출신 노스승 명희조의 날카로운 역사 인식. 고종사촌 송몽규의 파란 많은 인생 역정. 그의 시 가운데 가장 즐겁고 밝은 시 「봄」의 배경이 된 성악 전공의 동경 유학 여학생. 웃는 얼굴로 한인들의 혼을 빼던 일본 대륙낭인 일고병자랑. 형무소 간수들에게서 '함경도 미남'이란 별칭으로 불렸던 사형수 강처중. 선배의 작품을 눈 밝게 알아보고 소중하게 보존해낸 정병욱…… 그처럼 다양했던 주변인물들과 함께 살다간 다채로운 삶의 자취, 북간도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상황,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일본 경도재판소의 판결문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에 대한 예리하고 집요한 추적과 분석을 통해서 황홀하게 떠오른 민족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 - 푸른역사 출판부     송우혜는 견고한 작가이며 사학자이다. 이번에 그가 이룩해낸 윤동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문학의 순결한 초상은 이 시대가 뜻하는 문학행위의 일단이자 역사행위의 한 열매에 값하고 있다. 결코 과장하지 않고 일탈하지 않는 충실한 탐구정신과 정열과 책임이 어우러진 이 업적을 나는 크게 자랑한다. - 고은     송우혜 씨의 '윤동주 평전'은 풍부한 자료 섭렵과 빈틈없는 현장답사로 씌어진 역저로 윤동주 연구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였다. 그의 치밀한 자료 검증은 명망 높은 소설가로서의 상상력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조화되어 더욱 생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문학 연구자들에게 미개척의 영역을 향한 새로운 도전을 강요한다. - 최동호   /////////////////////////  윤동주의 시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경향신문 주필인 정지용 시인이다. 윤동주의 친구인 강처중은 경향신문 기자로 있으면서 1947년 윤동주의 시를 정지용에게 보였다. 윤동주는 생전에 정지용의 시를 좋아했다. 정지용은 윤동주 시의 뛰어난 작품성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윤동주의 시 ‘쉽게 씌어진 시’가 처음 실렸다. 정지용은 1948년 발행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에 서문을 실었다. 서문 일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일제 헌병은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 간도에 누워있다.” //////////////////////////////////////////////////////// "잊어서는 안되는 분들인데…." 정병욱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앞에 앉은 윤동주의 아우 윤일주가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1948년 1월30일 발간된 초판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펼쳐 놓고 말을 아끼고 있었다. 55년 초, 윤동주 서거 10주기를 앞두고 있는 때였다. 윤동주가 시인다운 면모를 갖춘 지면에 처음 소개된 것은 앞서 말한 대로 47년 2월13일자 경향신문에서였다. 이후 같은 해 3월13일자에 '또다른 고향'이, 7월27일자에 '소년'이 같은 지면에 게재되었고, 아마도 정지용이 그해 7월 초에 경향신문을 그만두고 이화여대 교수로 복직하지 않았다면 시 몇 편이 더 게재되었을 것이다.   ‘서시’ 의 육필 원고. 정지용(왼쪽), 강처중. 그러나 정지용은 자신을 좋아한 후배 시인 윤동주와의 인연을 더 한층 뜻깊게 이어간다. 47년 2월16일 윤동주와 송몽규를 기리는 추도회를 가진 바 있는 친구들은 이후 유고 시집 발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강처중 등 친구들이 시집의 서문 집필자로 정지용을 지목한 것은 거의 필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정병욱이 보관한 '서시'로 시작되는 원래 시집 원고 19편과 강처중이 보관하고 있던 시들에서 가려 뽑은 시들을 합해 모두 31편을 담은 윤동주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달고, 3주기 무렵인 48년 1월 정음사에서 발간된다. 정지용은 각박해진 이념 시대에 생각을 미루고 붓을 머뭇거리던 태도를 씻고 보기 드문 품격의 문장을 선보인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윤동주에게 "동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시인이라는 찬사를 바칠 수 있었던 사람이 정지용이었다. 한편, 정지용에게 윤동주를 알리고, 연전 동창생들과 후배 정병욱, 그리고 윤동주의 아우 윤일주를 독려하면서 유고시집 발간을 주도한 인물이 강처중이다. 정병욱과 윤일주는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두 사람의 공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윤동주 서거 10주기를 맞아 누이 혜원이 가지고 온 윤동주의 다른 시 원고를 보충해 새롭게 선보이는 증보판 시집에서 두 사람의 글을 삭제하고 함께 입을 다물기로 묵계하고 있었다. 대시인 정지용은 이때, 6·25때 남침한 북한군을 따라 북으로 가 행방불명된 시인이었다. 강처중은, 그때껏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좌익 활동을 배후에서 지휘한 인물로 지목되어 사형 언도를 받은 인물이었다. 윤동주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은 이렇듯 한국 역사에서 지워져 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정지용이 우리 곁에 먼저 돌아왔다. 이제는 '빨갱이'였던 강처중마저 소설가 송우혜에 의해, 사형수였다가 6·25의 와중에 감옥을 나와 '쏘련'을 향해 월북한 뒤 소식 없는 인물로 취재되고 있다. 윤동주는 우리에게 읽히고 사랑 받으면서 절로 굴곡의 역사를 중심에서 지켜온 인물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1385    윤동주 시집과 여러 사람들... 댓글:  조회:3088  추천:0  2019-01-2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윤동주 열풍이다. 영화 가 관객 110만 명을 돌파하였고, 윤동주 시집은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3위에 올랐다.     1948년 1월30일에 정음사는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후배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윤동주 자선시집의 시 19편과 연희전문학교 문과 동기 강처중이 보관한 시 12편 도합 31편이 실렸다.     유고시집 출간에 앞서 경향신문 기자 강처중은 윤동주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1947년 2월13일자 경향신문에 윤동주의 시 ‘쉽게 씌여진 시’가 주간(主幹) 정지용의 윤동주 소개 글과 함께 실렸다. 이 시는 일본 유학중에 윤동주가 강처중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시 5편중 하나이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중략)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942.6.3.     이 시 뒤에 윤동주의 연전 졸업앨범에 있는 사각모를 쓴 사진이 실렸고, 정지용은 윤동주의 생애를 소개하면서 “그의 비통한 시 10여 편은 내게 있다.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라고 적었다.     경향신문은 1947년 3월13일에 윤동주의 시 ‘또 다른 고향’을 소개했다.   1947년 7월27일에는 세 번째로 시 ‘소년’을 소개했다. 그런데 경향신문의 윤동주 시 소개는 이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지용도 1947년 7월9일에 경향신문 주간을 사직하고 이화여대 교수로 복직하였다.     한편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2주기인 1947년 2월16일에 강처중 · 정병욱 · 윤일주 · 유영 등 30여명이 서울 소공동 ‘플라워 회관’에 모여 윤동주와 송몽규를 기리는 추도회를 가졌다. 이 추도회에 정지용도 특별히 참석했다. 이들은 윤동주 3주기 이전에 유고시집을 발간키로 하였다.     시집 출간을 주도한 이는 강처중이었다. 당시에 정병욱은 서울대 국문학과 4학년이었다. (송우혜, 윤동주 평전, 2016, p 487)     강처중은 정지용에게 시집의 서문을 부탁하였다. 강처중은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를 정지용에게 데리고 가서 윤동주의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듣게 했다.     그러면 정지용의 서문을 읽어보자.     서(序) – 랄 것이 아니라     (전략)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었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에 분향하노라. (중략)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소니 윤동주의 시가 바로 “시 詩”고 보면 그만 아니냐? (중략)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 뿐이나, 무명(無名)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限)이 없는 시(詩)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후략)     1947년 12월28일   지용       한편 강처중은 유고시집의 발문을 지었는데, 그는 시인 윤동주의 사람됨을 말하면서 “동주의 시가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강처중은 윤동주를 일약 민족 시인으로 발돋움시켰지만, 1950년 6.25 전쟁 이후 정지용과 함께 금기인물이 되었다. ‘남로당의 실세’로 활약한 강처중은 간첩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고, 정지용은 월북했다.     그리하여 1955년 2월 윤동주 10주기 기념 증보판 시집이 정병욱과 윤일주의 손에 의해 출간될 때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은 아예 삭제되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향수’의 시인 정지용은 1988년에 해금되었고, 강처중은 영화 로 인하여 재평가를 받았다.     윤동주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그의 시를 지켜준 이들이 여럿 있었으니.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호남미래포럼 기자
1384    윤동주 시집 원 제목은 "병원"이였다... 댓글:  조회:3601  추천:0  2019-01-24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의 유고시집. 1948년 정음사 간행 개설 B6판. 72면. 작자의 유고시집으로, 초간본은 1948년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하였다. 정지용(鄭芝溶)의 서문과 강처중(姜處重)의 발문 및 유령(柳玲)의 추모시와 더불어 「서시(序詩)」를 포함한 31편의 시가 3부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이 시집은 원래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문과졸업기념(1941)으로 자신이 고른 시 19편을 77부 한정판으로 출판하기 위하여, 우선 자필로 3부를 만들어 이양하(李敭河)와 후배 정병욱(鄭炳昱)에게 각각 한 부씩 주고 한 부는 자신이 간직하였다고 한다. 그 때 이양하가 일제 검열의 통과 여부를 걱정하여 시집 출간을 만류하였기 때문에 보류되었던 것을 광복 후 정병욱의 주선으로 유고 31편을 모아 처음 간행하였다. 원래 이 시집의 제목은 ‘병원(病院)’으로 붙일 예정이었다고 하는데, 정병욱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의 세상이 온통 환자투성이’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내용 제1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에는 「자화상」·「소년」·「눈 오는 지도(地圖)」·「또다른 고향」·「별헤는 밤」 등 18편, 제2부 ‘흰그림자’에는 「흰그림자」·「사랑스런 추억」·「쉽게 쓰여진 시」 등 5편, 제3부 ‘밤’에는 「밤」·「유언」·「참회록」 등 7편이 각각 실려 있다. 이후 윤동주의 10주기를 맞아 1955년 정음사에서 간행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아우 윤일주(尹一柱)의 「선백(先伯)의 생애」가 첨가 수록되었다. 1968년 정음사에서 간행한 증보판 시집은 시 66편, 동시 22편, 산문 5편이 5부로 나뉘어 실려 있고, 백철(白鐵)의 「암흑기 하늘의 별」, 박두진(朴斗鎭)의 『윤동주의 시』, 그리고 장덕순(張德順)·문익환(文益煥) 두 사람의 글이 회고 형식으로 실려 있고 연보가 붙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시집에 실린 작품들은 윤동주의 뿌리 깊은 고향 상실 의식과, 어둠으로 나타난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 및 이 모두를 총괄하는 실존적인 결단의 의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윤동주의 작품 경향은 어둠의 색채로 물들어 있고, 밤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을 정도로 절망과 공포, 그리고 비탄 등 부정적 현실이 팽배하고 있다. 이는 윤동주의 현실 인식이 비극적 세계관에 자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동시에, 불변하는 것에 대한 이상과 염원은 일제 암흑기를 이겨나가는 예언적인 시인의 모습을 나타내어준다. ===============///     故 최영해 정음사 대표 장남 동식씨, 선친 탄생 100주기 맞아 공개       윤동주(1917∼1945) 시인의 유고 시집이자 첫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최초본(사진)이 공개됐다. 이 시집에는 ‘서시’ ‘별 헤는 밤’ ‘십자가’ 등의 시들이 담겨 있다. 이 시집을 펴낸 정음사 최영해(1914∼1981) 대표의 장남 최동식(71) 고려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27일 윤동주 시인의 3주기(1948년 2월 16일) 추도식에 헌정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최초 본을 공개했다. 최 교수는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의 손자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선친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오랫동안 간직하던 최초본을 공개한다”며 “윤동주 시인의 지인들이 시인의 3주기에 맞춰 시집 출간을 준비했는데 출간이 늦어지자 급히 만든 시집 10권을 추도식에 헌정했다는 얘기를 선친에게서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시집의 본문을 다 만들어 발간일을 1월 30일로 잡았는데 표지 때문에 발간을 못 하고 있다가 동대문시장에서 구한 섬유질로 된 벽지를 마분지에 입혀 표지를 만든 뒤 시집 10권을 급하게 제본해 3주기 추도식에 가져갔다”고 전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최초본은 같은 해 발간된 초판본과 정지용 시인이 쓴 서문, 본문, 인쇄 및 발행 일자, 속표지 등은 같지만 파란색의 겉표지가 없다. 최 교수는 “초판본은 1000부정도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중 10권만 따로 뽑아서 제본해 3주기 추도식에 가져갔고 나머지는 제대로 된 파란색 표지를 만들어 한 달 후쯤 발간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초판본은 당시 보기 드물게 가로쓰기로 되어 있다. /한승주 기자 =====================/// 윤동주 유고 시집 초판본과 증판본       윤동주, 초판본, 1948 아래) 윤동주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년 정음사        〈서시〉를 비롯한 19편의 시가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의 육필 시고집을 그가 죽고 나서 해방 뒤에야 비로소 책으로 출간. 1948년(3주기)에 나온 초판본(왼쪽)과 1955년(10주기)에 나온 증판본     ===============///   1948년 발간된 윤동주 시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본이 지난 21일(2015년 1월), 경매에서 1천300만원에 낙찰됐다. 23일 (2015년 1월), 경매사 코베이에 따르면 정음사에서 발간된 윤동주의 초판본은 시작가 250만원에 경매에 들어가 경합 끝에 1300만원에 낙찰됐다.  코베이 관계자는 "지난 2013년에도 같은 책의 초판본이 출품돼 390만원에 낙찰된 적이 있지만 이번 출품작은 보존 상태가 훨씬 좋아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고 설명했다. 이번 경매에선 이광수의 '무정' 5판본이 750만원에 낙찰됐다. /박태훈 기자      ================///     윤동주 시 원고 노트 원본
1383    정지용과 윤동주 댓글:  조회:3124  추천:0  2019-01-24
[세종포스트 한지혜 기자]  해방 후 윤동주 유고 시집의 서문을 쓴 사람은 바로 정지용 시인이다. 청년 윤동주는 그를 동경했고, 죽어서는 그의 찬사를 받았다. 강연 주제는 ‘윤동주와 정지용’이다.  강연자는 이숭원 서울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 교수는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정지용 시인을 다룬 논문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교수는 “윤동주 시인의 습작기 작품을 보면 정지용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며 “실제 윤동주 시인의 창작 노트를 통해서도 정 시인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쉽게 씌여진 시’는 정지용 시인이 경향일보 주필로 재직할 때 세상에 공개된 작품”이라고 말했다. 잘 나가던 유명 시인과 학생 윤동주 시인 정지용의 모습. 윤동주 시인은 발간 이듬해인 1936년 3월 시집을 소장했다. 유품으로 남은 시집에는 정독한 것으로 보이는 메모 등이 그대로 기록돼있다. 정지용 시인은 190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1917년 출생한 윤동주 시인과는 15년 차이다. 둘은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에서 유학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정 시인은 22살이었던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수학했다. 윤 시인은 도쿄의 릿쿄대에 입학해 한 학기가 지난 1942년 10월 도시샤대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했다. 지금도 도시샤대학교에는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나란히 서 있다. 1935년 시문학사에서 출간된 정지용 시집은 한국 문단계의 큰 주목을 큰 받았다. 하지만 곧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뛰어들면서 전시체제에 접어들었고, 조선 신문·잡지도 차례대로 폐간됐다. 정 시인은 1941년 두 번째 시집 을 출간했지만 좌익 문학인으로 찍혀 경향신문 주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경기도 녹번리에서 은거하던 정 시인은 한국전쟁 이후 1950년 9월 행방불명됐다. 한동안 월북 문인으로 규정돼 작품조차 공개되지 못했다. 이 교수는 “당대 한국 최고의 시인이 사망 원인과 시점도 모른 채 사라지게 된 것은 민족사의 비극”이라고 평했다. 유품으로 남은 윤동주 시인의 장서에도 정지용 시집이 포함돼있다. 책에는 1936년 3월 19일 ‘동주소장’이라는 글귀가 친필로 쓰여있다. 윤 시인이 평양 숭실중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이다. 이 교수는 “윤동주 시인은 시집 발간 이듬해가 돼서야 정 시인의 책을 샀다”며 “경제 사정도 넉넉지 못했을 것이고, 당시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에 반대한 학생들이 동맹휴업과 동맹자퇴를 하던 시기였다. 3월 말 자퇴 직전 시집을 구입해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유품이었던 정지용 시집을 보관한 이는 바로 윤동주 시인의 벗 강처중이다. 시집에는 밑줄, 단어 해석 등 윤 시인의 메모가 그대로 기록돼있는데, 그가 얼마나 시집을 정독했는지 알 수 있다. 당대 최고 시인과 윤동주의 만남   윤동주 시인의 유품 목록 중 하나인 정지용 시인의 시집. 종이에 친필로 날짜와 동주소장이라는 글귀가 써있다. 윤동주의 은진중학교 1년 선배인 라사행 목사의 증언을 통해 생전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의 만남이 알려졌다. 1939년 윤동주는 북아현동에서 하숙을 했는데, 라사행 목사는 그와 함께 정지용 시인의 자택을 방문했다고 증언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다만 영화에서는 만남의 시점과 동행인 등 약간의 픽션이 가미돼있다. 이 교수는 “윤동주 평전을 쓴 송우혜 소설가가 라사행 목사의 증언을 기록한 바에 따르면 정지용 자택을 생전 윤동주가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며 “당시 정 시인의 집은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통했다”고 했다. 해방 후 정지용 시인은 윤동주 유고 시집  서문을 썼다. 1947년 12월 28일자 글이다. 당시 정 시인은 경향신문 주필, 윤 시인의 친구 강처중은 기자로 재직했다. 서문에는 윤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를 향한 찬사가 함께 드러나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일제 강점기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정지용 시인이 쓴 서문) 습작기 작품에서 보이는 정지용의 영향   . 윤동주 시인은 1941년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19편의 시를 묶어  3권을 제작했다. 한 권은 자기가 소장하고, 한 권은 연희전문 스승 이양하 선생, 마지막 한 권은 후배 정병욱에게 선물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윤동주 시인의 시는 습작기인 1938년까지, 본격적인 자각을 갖고 쓴 1939년부터의 시로 나뉜다. 습작기 작품에는 정지용 시인의 영향, 본격적인 창작기 작품들은 독자적 사유에 바탕을 둔 성숙한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습작 시절 정지용 시인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긴 하지만 두 시인의 시상이나 주제는 확연하게 다르다”며 “정 시인이 감각적인 언어 표현에 중점을 뒀다면 윤 시인은 내적 고뇌를 표현한 작품이 다수”라고 설명했다. 습작기 정 시인의 영향이 나타난 작품은 ‘모란봉에서’, ‘산림’, ‘압천’, ‘비로봉’, ‘사랑의 전당’ 등이다. 주로 시어나 표현적인 면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윤 시인은 1년이 넘는 절필기를 두 어 번 거친 뒤 1939년부터 자기만의 글쓰기에 집중했다. 첫 시집에 냈던 19편의 시가 그 때 나온 작품들이다. 이 교수는 “윤동주 시인은 노트에 습작하면서 정지용 시인의 영향을 받은 것을 그대로 기록했다”며 “당시 젊은 시인들이 정 시인을 답습하는 경향을 많이 보였는데, 윤 시인은 그만큼 순정하고 정직한 시인”이라고 말했다...
1382    윤동주는 시를 들고 일제와 싸웠다... 댓글:  조회:3207  추천:0  2019-01-22
윤동주는 시를 들고 일제와 싸웠다 [중앙일보] 2017.04.05    기자 손민호 기자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의 무대. 거대한 달이 떠 있다. 손민호 기자  2017년은 시인 윤동주(1917∼45)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올 봄 윤동주를 기리는 문화예술 행사가 잇따르는 까닭이다.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담은 공연도 여럿 있었는데, 눈길을 끌었던 한 편을 소개한다.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이다. 3월 21일∼4월 2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 오른 작품은 전 객석 매진 기록을 세우고 화려한 막을 내렸다. 서울예술단의 레퍼토리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를 중심으로 윤동주의 짧았던 생애를 돌아본다.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로 재구성한 윤동주의 삶과 시 만주 용정에서의 중학교 시절 일본어 낙제 점수 받아 창씨개명에 고뇌하던 시절 '자화상' '서시' 등 대표작 남겨 가무극의 하이라이트는 토해내고 절규하는 '별 헤는 밤'  창작가무극은 서울예술단이 주도하는 한국형 뮤지컬의 형식  # 윤동주 vs 히라누마 도주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명동촌에서 태어났고, 1945년 2월 16일 일본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숨졌다. 윤동주의 국적은 한 번도 조선인 적이 없었다. 조선이 망한 뒤 일제가 점령 중이던 만주에서 태어났고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일본 열도에서 죽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시인’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윤동주는 평생 조선어로 시를 썼다. 중국 연변에 있는 룽징마을. 만주벌판을 가로지르는 해란강을 끼고 있다. 손민호 기자  윤동주의 고향이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도 등장하는 룽징(龍井)이다. 일송정 푸른 소나무가 자라고 해란강이 광활한 평야를 가로지르는 고장이다.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에 속한다.     룽징에 가면 윤동주가 스무 살에 편입해 2년간 다녔던 광명중학교가 있다. 이름은 중학교이지만 지금의 고등학교다. 이 학교 본관 건물 앞에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를 새겨놓은 시비가 서 있다.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광명중학교에서 윤동주의 성적은 의외로 평범했다. 특히 일본어 실력은 낙제 수준이었다. 제일 잘 받은 점수가 62점이었고, 40점을 받은 적도 있었다.   윤동주가 2년간 다녔던 명동중학교. 본관 건물 앞에 윤동주 시비가 서 있다. 손민호 기자 명동중학교에 전시 중인 윤동주의 학적부. 윤동주는 특히 일본어에 약했다. 4학년 때는 40점을 받기도 했다. 손민호 기자  윤동주도 창씨개명을 했다. 히라누마 도주(平沼東住). 그의 일본 이름이다. 일본에 유학을 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윤동주는 1942년 4월 도쿄(東京) 립교(立敎)대학에 입학했고, 일본으로 떠나기 전 착잡한 심정을 여러 편의 시에 남겼다. 조선어로 시를 쓰는 일본 이름의 시인. 이 부끄러운 현실이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참회록’을 낳았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윤동주는 ‘욕되다’고 썼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참회록’ 1연, 1942년 1월 24일.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윤동주, 달을 쏘다.’에는 모두 9편의 윤동주 시가 등장한다. 8편이 전편 인용되고 1편이 부분 인용된다. 노래에 쓰인 시는 없다. 작곡을 담당한 오상준은 “윤동주의 시 안에 음악적 선율이 내포돼 있다는 생각에 시는 독백과 낭독으로 표현하고 음악은 시의 감성과 비슷한 결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오상준 작곡의 설명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윤동주의 시는 굳이 멜로디를 얹지 않아도 음악성을 띤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윤동주의 시를 스스럼없이 암송하는 까닭이다.   '윤동주, 달을 쏘다.'의 오프닝 장면. 윤동주가 시 '팔복'을 천천히 읊으며 감정을 고조시킨다. [사진 서울예술단]  윤동주 시에 내재한 음율 덕분에 ‘윤동주, 달을 쏘다.’의 인상적인 첫 장면이 탄생할 수 있었다. 배우는 오로지 시를 읊었으나, 관객은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것 같은 감상에 빠졌다. 무대를 보자. 깜깜한 무대 왼쪽 구석에 윤동주가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끼적거린다. 처음에는 나지막이 한 행을 읊는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시행을 반복할 때마다 감정이 상승하고, 마침내 윤동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관객을 마주 본다. 배우가 시를 읊을 때마다 무대 중앙 스크린에선 시어가 한 자 한 자 새겨진다. 1940년에 쓴 ‘팔복(八福)’이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가 모두 여덟 번 되풀이된다. 시어는 같지만 행마다 감정이 다르다. 처음엔 서글프다가 나중엔 복받친다. 올해 공연에서 처음 윤동주 역할을 맡은 배우 온주완은 오프닝 장면이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온주완 배우의 대본을 보면 치밀했던 고민이 뚝뚝 묻어난다. 윤동주 역을 맡은 온주완 배우의 실제 대본. '팔복'의 한 행 한 행마다 다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빼곡히 메모를 했다. [사진 서울예술단]  이 처연한 구절은 성경에서 따왔다. 마태복음 5장 예수가 축복을 내리는 장면에 등장한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 등 여덟 부류의 사람이 축복을 받는다고 말했다. 예수가 내리는 축복 중에서 두 번째가 슬퍼하는 자의 축복이다. 슬픔이 곧 축복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시인은 꾸역꾸역 받아 적었다. 그리고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갈무리했다.     영원히 슬프겠으니 영원한 복을 달라는 자학적인 바람이었다. 여기에 윤동주 시의 미학이 있다. 윤동주의 시는 염결한 기독교주의에서 기인한다. 할아버지 대부터 윤동주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도 윤동주의 짧은 생애를 다뤘다. 그 영화로 많은 사람이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의 존재를 알게 됐다. 영화를 보면 윤동주가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이다. 송몽규는 윤동주보다 공부도 잘했고 먼저 등단했다. 무엇보다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했다. ‘윤동주, 달을 쏘다.’에도 둘 사이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슬쩍 끼워져 있다.   '윤동주, 달을 쏘다.'의 한 장면.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급우들이다. 사진 맨 오른쪽부터 윤동주, 강처중, 정병욱, 송몽규. [사진 서울예술단]  하나만 더. 윤동주는 만주 명동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송몽규을 비롯한 급우들과 문학에 심취했다. 그 시절 윤동주와 함께 아동잡지를 구독하고 연극활동을 했던 급우 중 한 명이 고(故) 문익환(1918∼94) 목사다. 문 목사는 돌아가기 전까지 수차례 만주를 드나들며 윤동주 추모사업을 벌였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윤동주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본  윤동주는 단 한 권의 시집을 남겼다.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발간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다. 그가 죽은 뒤 시집이 나왔으므로 그는 제 이름이 적힌 시집을 본 적이 없다. ‘윤동주, 달을 쏘다.’에서는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윤동주가 함께 하숙했던 연희전문학교 2년 후배 정병욱에게 시 19편을 담은 원고를 건네는 것으로 그려졌다.     윤동주는 원래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시집을 출간할 작정이었다. 하나 사정이 생겨 포기하고 정병욱에게 원고를 넘겼다. 정병욱이 건네받은 시편은 19편이었지만 다른 유고를 더 모아 모두 31편으로 시집을 묶었다. 서문은 생전의 윤동주가 존경했던 시인 정지용(1902∼50)이 썼다. 정지용과 윤동주는 도시샤 대학 동문이다. 정지용이 쓴 서문에서 일부를 인용한다.    무시무시한 독방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역 문사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뱉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윤동주가 애초에 생각했던 시집 제목은 ‘병원’이었다. 윤동주는 제가 쓴 시로 병든 세상을 치유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1941년 11월 20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쓰면서 윤동주는 이 시의 제목을 시집의 제목으로 삼았다. 시집에 제목을 넘긴 시는 대신 ‘서시(序詩)’가 됐다.   윤동주가 남긴 '서시' 원고. 글씨도 시처럼 반듯하다. 손민호 기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쓴 무렵은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가 극에 달했을 때였다.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한 달쯤 앞둔 시점이었고 그는 유학을 고민하고 있었다. 역시 시는 고뇌의 산물인가 보다. 이즈음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비롯해 ‘십자가’ ‘별 헤는 밤’ ‘참회록’ 등 주요 작품 대부분을 생산했다.      # 달을 쏘다 '윤동주, 달을 쏘다.'의 한 장면.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학생들이 반발하고 있다. [사진 서울예술단]  윤동주는 1943년 7월 14일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리고 1944년 3월 31일 교토 지방재판소 제2형사부는 윤동주에게 징역 2년형을 선고했다. 판결문이 적시한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다. 주요 혐의는 다음과 같다.    유년 시절부터 민족적 학교 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서 등을 탐독하고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던 바, 우리의 조선 통치 방침을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절멸시키고 조선 민족의 멸망을 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결과, 독립운동의 소지를 배양할 수 있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 유발에 힘써야 한다고 결의하기에 이르렀으며 …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 추구의 견지에 입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하는 등 민족의식의 유발에 부심함.    그러니까 윤동주는 일본에 유학을 가서도 조선어로 조선의 정서를 담은 시를 쓰다 처벌된 것이었다. 윤동주의 독립운동 이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의 주장처럼 윤동주는 만주 벌판에서 총칼 들고 싸우지 않았다. 그러나 윤동주는 그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무기를 들고 일제에 맞섰다. 윤동주의 무기는 ‘시’였다.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 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꼿꼿한 나뭇가지를 끊어 띠를 째서 줄을 메워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산문 ‘달을 쏘다(1938. 10)’에서 부분 인용    시인은 무사의 마음을 먹고 갈대로 화살을 삼아 달을 쐈다. 부질없는 짓이고 어처구니없는 행동이다. 하나 정지용이 윤동주의 시집 머리에 쓴 것처럼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가무극의 제목이 이 산문에서 발췌됐고, 2시간 30분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노래로 활용됐다.  '윤동주, 달을 쏘다.'의 하이라이트 장면. 병든 윤동주가 '별 헤는 밤'을 절규하며 읊는다. [사진 서울예술단]  가무극의 하이라이트는 병든 윤동주가 ‘별 헤는 밤’을 부르짖는 장면이다. 하나 이 장면은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하겠다. 윤동주가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를 한 음절 한 음절 토해낼 때, CJ토월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 767명 가운데 절반이 훌쩍거렸고 나머지 절반이 펑펑 울었다.    이 마지막 20분을 위해 2시간을 기다렸다는 평이 쏟아졌을 만큼 ‘별 헤는 밤’의 장면은 강렬했다. 윤동주의 잔잔한 시어가 이렇게 폭발력이 있을 줄 몰랐다. ‘별 헤는 밤’ 장면이 있어서 ‘윤동주, 달을 쏘다.’는 윤동주를 빌린 작품이 아니라 윤동주와 어울린 작품이 될 수 있었다. '윤동주, 달을 쏘다.'의 장면. 후쿠오카 감옥에서 만난 윤동주와 송몽규가 껴안고 울고 있다. [사진 서울예술단]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었다. 그와 함께 수감돼 있었던 송몽규도 윤동주가 간 지 23일 뒤인 3월 10일 죽었다. 생전의 송몽규는 면회 온 친척에게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으로 희생됐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는 윤동주가 일본 유학 시절에 쓴 5편이 포함돼 있다. 조선의 친지에게 우편으로 부친 시다. 윤동주는 일본에서도 부지런히 시를 썼다고 전해지지만, 이 5편 말고 추가로 발견된 작품은 없다. 아직도 어느 깊은 책장 구석에 윤동주가 눈물로 쓴 노래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윤동주의 유학시절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쉽게 쓰여진 시’ 일부를 옮긴다. 윤동주의 말마따나 그래, 사는 것은 늘 부끄러운 것이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은 집단 안무가 강하다. '윤동주, 달을 쏘다.'에서도 집단 안무가 두드러졌다. [사진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윤동주, 달을 쏘다.’는 창작 뮤지컬이다. 그러나 창작가무극이라고 부른다. 서울예술단 작품이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북한 평양예술단이 서울에서 공연을 했다. 평양예술단의 총체극에 자극을 받은 정부는 대형 종합예술단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1986년 ‘88서울예술단’을 창단했다. 91년 지금의 이름이 됐고, 현재 문체부 산하 재단법인이다.   서울예술단은 출범 취지에 맞게 한국적 음악과 춤, 한국적 소재를 활용한 한국형 가무극 창작에 집중했다. 그 대표작이 ‘윤동주, 달을 쏘다.’다. 2012년 초연, 2013년 재연, 2016년 3연에 이어 올 봄 4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서울예술단의 대표 레퍼토리라 할 수 있다. 가무는 한국적이지 않지만 소재가 한국적이다. 네 차례 공연 모두 윤동주 역을 소화한 박영수 배우가 이 작품으로 스타가 됐다.    서울예술단 작품의 특징이 있다. 총체극에서 출발한 전통을 이어받아 집단 안무가 강하다. ‘윤동주, 달을 쏘다.’에서도 공연팀의 연기가 눈에 띄었다. 무대 뒤편에서도 제 역할을 소화했고, 안무가 일사불란하고 동선이 컸다. 하지만 일본 욱일기를 흔드는 장면에선 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1381    서시(윤동주)를 리해하기...3 댓글:  조회:2776  추천:0  2019-01-22
윤동주 시인의 ‘’서시’’ 해석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늘을 우러러 죽어도 죄 짓지 않겠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저는 마음이 여려서 작은 죄도 짓지 못합니다.    많은 민초들이 어둠-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에 나는 괴로워합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별은 외로운 빛, 모든 죽어가는 것은 시대의 어둠! 어둠은 죄, 빛은 정의이다. 밤 시대에는 빛이 어둠을 돕고 죽어가고(공멸), 낮 시대에는 어둠이 빛을 돕고 살아간다(공생). 음(어둠)과 양(빛)은 짝이자 적으로서, 작용반작용 원리로써 서로 싸우며, 돕거나 해친다. 저와 당신들은 빛과 어둠으로 묶인 공동운명체이니, 저를 위해서라도 당신네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저는 이제 어둠을 짖는 개 짓을 그만 둘 것이니, 이제 저의 길을 막지 마세요.   저는 인류 미래와 하늘의 정의를 위해 나아갈 것입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나는 외롭지만 빛나는 별이고, 어둠-바람은 곧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계절을 지나가는 변화와 희망의 바람을 느끼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 밤에도 어둠 바람에 죄 없이 스침 당하고 있다. --스치운다;; ‘스치다’의 피동태 ;;터치 당하고 있다 ;;감시 위협 차단 고립 당하고 있다. --형제와 이웃과 친구들과 수 많은 동족이 죄다! 어둠의 감시자가 되어, 늘 시인의 눈에 스치고, 감시함을 비추고,적반하장, 미친-자라고 음해한다.   / ** 이 시 해석은, 윤동주 님의 시 “또 다른 고향”을 바탕으로 한다. 그 시가 아니면 이 시의 해석은 어려워진다. 그리고, **파블로-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윤동주 시인이 당한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강국의 약소국에 대한 선악과 술수로서 수 천년 동안 반복된 술수이다. ** 윤동주 님의 시는, 시어들이 가지는 상징성 및 이중적 의미를 이용해서, 겉은 능금처럼 아름답고, 속에 본질을 숨기는 기법으로써, 참으로, 바이블의 그것보다 더 세련되다. ** 그 시대에 모든 이들이 어둠 속에 덮이었을 때, 그 님은 홀로 빛으로 남아, 탄압을 견디시었다. 그 님의 시는, 사람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 ** 일본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연구 토론하는 단체가 여럿 있지만, 한국에는 꺼꾸로, 엉터리 해석이 주류이고, 옳은 해석 글은 돈에 팔리고 차단되고,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을 은밀히 교묘하게 탄압한다. 어둠의 역사의 정보가 차단되면 그것은 그 역사를 반복함을 뜻한다. 윤동주 시인은 예수님처럼 동족에게 탄압 받고, 사회적으로 죄 없이 죽은 백골 되시어, 창씨개명 하시고 일본으로 유학 가셨으니, 그 님은 국적과 민족을 초월한 객관적인 입장이시다. 그런 고로, 그 님은 “민족시인”이 아니고 “하늘시인” 이시다. “하늘바람별-시인” 이시다.   ** 어둠의 역사는 덮임으로써 재개되고, 엄청난 다수의 힘으로써 그 어둠을 덮으니 다 덮인다. 지금 한국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죄다, 스스로 눈 코 귀 입 막고, 떼 자살 중. 죄 짓고 덮는 입장이 되면, 어둠의 노예가 되어, 선인을 감시 음해 차단하는 것이 다 죽을 죄 라는 것을 모른다. 이성과 인성을 잃은 마귀가 된다. ** 신이란, 작용과 반작용으로 되어 있고, 왼손과 오른손으로 되어 있다. 죄 준 자가 벌한다. 신은 어둠 속의 머리카락을 다 헤신다. 그리고, 집단은 공동운명체.   2014-03-26 오영석(청천)
1380    서시(윤동주)를 리해하기...2 댓글:  조회:3317  추천:0  2019-01-22
핵심 정리 [이 작품은] 적절한 상징과 시각적 심상을 활용하여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도덕적 순결성에 대한 고뇌와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성찰적, 고백적, 의지적, 상징적 *제재 : 별 *주제 : 순수한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의지 *특징 ① 시간의 이동에 따라 시상을 전개함. ② 이미지를 대립시켜 시적 상황을 제시함. *출전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작품의 구성 [1 ~ 4행] 부끄러움 없는 삶에 대한 소망(과거) [5 ~ 8행] 미래의 삶에 대한 결의(미래) [9행] 어두운 현실에 대한 자각(현재)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두에 붙여진 작품으로, ‘서시(序詩)’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집 전체의 내용을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한다. 2연 9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시간의 이동(과거 - 미래 - 현재)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1~4행)은 순결한 도덕적 삶을 살고자 했던 화자의 의지와 고뇌를 과거의 시점에서 말하고 있다. 화자는 지금까지 윤리적 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되는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죽는 날까지’ 세속적 삶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어떤 ‘부끄럼’도 없는 삶을 살기를 기원했다. 그래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아주 작은 흔들림에도 괴로워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결백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5 ~ 8행)에서는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사랑을 나타내면서 미래의 삶에 대한 화자의 결의를 다짐하고 있다. 화자는 밤하늘에 빛나는 맑고 밝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삶의 고통에 부대끼는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 즉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향해 꿋꿋하게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9행)은 어두운 밤하늘과 별, 그리고 바람 간의 관계를 통해서 화자가 처한 상황을 보여 주면서 도덕적 순결성에 대한 화자의 의지를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현실의 어둠과 괴로움 속에서 자기의 양심을 외롭게 지키며 맑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자 했던 한 젊은 지식인의 모습을 간결한 언어와 상징어들을 통해 보여 준 작품이다. ⓒ (주)천재교육 | BY-NC-ND 작품 연구실 ‘별, 바람, 밤’의 의미 관계는? 이 시에 나오는 시어 ‘별’, ‘바람’, ‘밤’은 각각의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 작품의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다. 즉, 어둔 ‘밤’ 하늘에서도 빛을 잃지 않으며, 시련의 ‘바람’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별’을 통해, 어떤 시련과 어둠의 현실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양심의 결백함을 지켜 내려는 화자의 의지를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시어의 상징적 의미 *하늘 : 윤리적 판단의 절대적 기준 *별 : 화자가 추구하는 희망, 이상적 삶의 세계. ‘바람’과 대립되는 이미지 *바람 : 3행의 ‘바람’ - 화자의 내면적 갈등 또는 양심의 가책/9행의 ‘바람’ - 화자가 처한 어두운 현실, 일제 강점하의 시대 상황 *길 : 화자가 걸어가야 할 숙명, 운명 *밤 : 화자가 처한 어두운 현실. 일제 강점하의 시대 상황 이 시에 나타난 화자의 태도 화자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도 양심을 지키며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삶, 즉 부끄러움이 없는 순결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 즉,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현실에 괴로워하면서도 ‘별’과 같이 이상적인 삶, 도덕적으로 순결한 삶을 살기를 소망하며 민족을 위해 고난과 시련의 삶을 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헤쳐 나갈 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화자는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시대에 도덕적 순결성과 양심을 지켜 나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화자의 태도 ⓒ (주)천재교육 | BY-NC-ND 작가 소개 - 윤동주(尹東柱, 1917 ~ 1945) 시인. 북간도 출생.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 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이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쓰인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작품으로 ‘자화상’(1939), ‘또 다른 고향’(1948) 등이 있다. 윤동주의 시 세계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을 섬세한 서정과 투명한 시심으로 노래한 시인이다. 그의 시의 특성은 고요한 내면세계에 대한 응시를 순결한 정신성과 준열한 삶의 결의로 발전시킨 데 있다. 그의 시가 추구한 핵심적 문제는 현실적 존재의 슬픔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소극적이고 자책적이며, 어떤 경우 자기 분열의 상태까지 이르기도 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그가 생애를 마감할 무렵인 일본 유학 시절의 시는 비로소 윤동주의 저항 시인으로서의 평가를 가능하게 해 준다. 그의 시는 근본적으로 그의 생애의 흐름과 일치하며 발전한다. 즉, 개인적 자아 성찰에서 역사와 민족의 현실에 대한 성찰로 인식이 확대되는 것이다. 민족의 해방을 기다리며 자신의 부끄러움 없는 삶을 위해 죽을 때까지 시대적 양심을 잃지 않은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일제 강점기의 종말에 대한 희생적 예언으로서 자리 잡고 있다.
1379    서시(윤동주)를 리해하기...1 댓글:  조회:2669  추천:0  2019-01-22
시대 근대 저작자 윤동주 창작/발표시기 1941년 11월 20일 성격 시 유형 작품 분야 문학/현대문학 요약 윤동주(尹東柱)가 지은 시.   내용 윤동주(尹東柱)가 지은 시. 1941년 11월 20일에 창작되었고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1948)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윤동주의 생애와 시의 전모를 단적으로 암시해주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윤동주의 좌우명격 시인 동시에 절명시에 해당하며, 또한 ‘하늘’과 ‘바람’과 ‘별’의 세 가지 천체적 심상(心像)이 서로 조응되어 윤동주 서정의 한 극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서시>는 내용적인 면에서 세 연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연은 ‘하늘-부끄럼’, 둘째 연은 ‘바람-괴로움’, 셋째 연은 ‘별-사랑’을 중심으로 각각 짜여져 있다. 첫째 연에서는 하늘의 이미지가 표상하듯이 천상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순결 의지가 드러난다. 바라는 것, 이념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한계적인 것 사이의 갈등과 부조화 속에서 오는 부끄러움의 정조가 두드러진다. 둘째 연에는 대지적 질서 속에서의 삶의 고뇌와 함께 섬세한 감수성의 울림이 드러난다. 셋째 연에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서의 ‘진실한 마음, 착한 마음, 아름다운 마음’을 바탕으로 한 운명애의 정신이 핵심을 이룬다. 특히,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는 구절은 운명애에 대한 확고하면서도 신념에 찬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운명애의 결의와 다짐은 험난한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운명과 맞서서 절망을 극복하려는 자기 구원과 사랑에 있어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망의 환경일수록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기자신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윤동주가 택한 자기 구원의 방법은 운명에 대한 긍정과 따뜻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운명애의 길은 관념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진솔한 자아 성찰과 통렬한 참회의 과정을 겪으면서, 변증법적 자기 극복과 초월의 노력에 의해 마침내 획득되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참된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운명 감수의 태도가 아니라 그 극복과 초월에 목표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인 이 작품은, 시집의 전체적인 내용을 개략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시이며, 존재론적 고뇌를 투명한 서정으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광복 후 혼란한 시대에 방황하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감동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378    "서시" 일본어 번역본에 오류가 있다??? 댓글:  조회:4078  추천:1  2019-01-22
윤동주 ‘서시’ 일본어 번역본 오류있다 재일동포 서경식교수 지적 이부키 1984년 번역때 정반대 해석 진실 훼손뒤 일본어역 정본으로 사용             » 윤동주 서시       ‘죽어가는 것들→살아있는 것들’로 왜곡일본에 저항, 의도적으로 은폐   윤동주 서시는 현재 일본 고교 국어교과서인 에 실린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에세이 ‘윤동주’에 전문 번역본이 인용돼 있다. 또한 윤동주가 다닌 도시샤대 구내에 1995년 세워진 그의 시비에도 이 번역본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번역본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을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해야지’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구절로 바꿔버린 것이 논란의 초점이 됐다. 윤동주 연구가 이부키 고가 서시를 그렇게 번역해 84년에 출간했으며, 그 번역본은 지금 거의 일본어역 정본처럼 자리잡고 있다.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있는 일본 도쿄경제대학의 재일동포 2세 서경식 교수는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논란에는 억압자와 피억압자, 머조리티(다수자/주류)와 마이너리티(소수자/비주류) 간의 왜곡되고 불평등한 ‘식민주의적 권력관계’가 짙게 반영돼 있다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17일 한일민족문제학회 주최로 숙명여대에서 열릴 강연회에서 발표할 ‘디아스포라와 언어-재일조선인의 입장에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를 자세히 다룬다.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문학연구자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교수는 일찍이 서시의 번역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윤동주가 서시를 쓴 당시 일본 군국주의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죽어갔고, 조선인의 말과 민족 옷, 생활풍습, 이름 등 민족문화의 모든 것이 ‘죽어가는’ 시대였다. 이렇게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외친 그는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당연히 심히 증오했을 것이다. 이부키의 번역은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도 꼭같이 사랑한다는 꼴이 돼버리지 않을까?” 그러자 이부키는 자신의 2002년판 책에 이에 대한 반박문을 실었다. 그는 “모든 죽어가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기에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며 “모든 죽어가는 것, 모든 살아가는 것 모두 다 동의이어(同義異語)”라고 주장했고, 아울러 “(윤동주의) 실존응시적 사랑의 표출에는 군국주의 일본인에 대한 미움 같은 것은 상관없다”는 주장도 펼쳤다. 서경식 교수는 이부키가 번역하기 전에 이미 김소운, 김학현 등의 번역본이 출간됐고 김학현은 문제의 구절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이부키는 자신의 번역시집에 붙인 문헌목록에 김학현의 책을 실어 그런 번역이 이미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해,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해당 구절을 굳이 그렇게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서 교수는 “일본의 많은 독자들은 일본이 식민지배를 통해 조선민족에게 가한 죄악에 대해 무지하며, 게다가 그런 사실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윤동주의 시를 읽을 때도 그것을 되도록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고발로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실존적인 사랑의 표출’로 읽으려는 경향을 지닌다”고 비판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윤동주 일본어 번역본 오류있다 ’를 읽고 의도된 오류와 의도하지 않은 양보   가해자의 얼굴이 낯선 것은 그들이 언제나 자기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일체의 반성이나 자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의 의미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을 의도적으로 구겨놓은 일본인 문인의 숨겨진 의도가 너무 천해 보여…   지난 17일치 에서 ‘윤동주 일본어 번역본 오류 있다’라는 기사를 읽었다. 연세대 윤동주 기념사업회 일을 6년간 보아오면서 윤동주에 대한 여러 해석을 눈여겨보곤 하였다. 윤동주 시들을 항일 의도로 읽지 않고 빼어난 서정시로 읽으면 그가 더 보편적인 시인으로 자리잡지 않겠느냐 하는 논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모든 작가나 시인은 그가 태어난 시대에 포위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가해자 집단이 설치는 시대에 피해자였던 작가 의식을 어떻게 그 시대감각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가? 나는 그 의도가 옳지 않다고 읽는 쪽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이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바뀐 내역, 그야말로 숨겨진 두 차원의 슬픈 이야기를 윤동주 장조카 윤인석 교수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 착한 가족사는 내 마음을 슬픔에 젖게 한다. 일본인이 윤동주 시를 번역할 당시 그의 친동생인 윤일주 선생은 일본에 있었고 일본인 이부키 고는 자주 윤일주 선생을 찾아와 번역한 시들을 보여주면서 자문을 청하곤 하여, 이 시 ‘서시’에 대한 번역도 고민, 고민 끝에 그대로 용인한 모양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 봐라 바로 그 시인의 아우가 용인한 번역이니 틀림이 없지 않으냐? 이 번역에 왜 시비냐?’ 정도의 느긋한 배포가 이 번역자에게는 있다고 내겐 읽혔다. 내가 이 사실 이야기를 놓고 슬퍼하는 이유는 이렇다.   모든 가해자는 그가 행한 가해 사실을 숨기거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한다. ‘거 뭐 대단일 일이라고 자꾸 과거를 들추느냐? 앞으로 올 미래만이 더욱 중요하지 않으냐?’ 따위의 추악한 궤변이 우리 주변에는 횡행한다. 시인 이상이 ‘하루치씩만 잔뜩 산다’고 썼을 때 이 하루란 언제인가? 어제와 오늘, 담날, 모레, 이 시간개념은 따지고 보면 편의상 붙인 날짜일 뿐이다. 윤동주가 ‘내일은 없다’라는 시에서 썼듯 누구나 내일, 내일 하지만 실은 내일이란 없고 언제나 오늘만 있다. 이 오늘은 또한 놀랍게도 순식간에 어제, 그제, 과거로 바뀐다. 감추려는 가해자의 악행과 기억에서 영원히 지우지 않으려는 피해자의 선량한 다짐(경우에 따라 복수의 칼날을 갈 수도 있겠지!)은 인간 존재가 쥐고 있는 양날의 칼이자 슬픔이고 설움이다.   가해자의 얼굴이 낯선 것은 그들이 언제나 자기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일체의 반성이나 자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 말에 나는 중견작가 정찬의 두 작품 ‘슬픔의 노래’와 ‘완전한 영혼’ 그리고 이것을 에서 각색 방영한 ‘팩션 드라마-오월의 두 초상’ 강의로 끝을 마쳤다. 5·18 광주, 군부 독재자들이 탱크로 밀고 들어가 민간인들을 살해한 이 사건 당시, 한 피해자 장인하와 가해자인 계엄군 출신 박운형의 삶을 놓고 작가는 피를 흘리듯 정신의 기운을 모아 마무리짓고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슬픔의 강물로 흐른다는 이 소설적 가설은 가해자가 그 스스로 가해자였다는 자의식이 전제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결코 그런 자의식을 갖거나 그것을 슬픔으로 품어 안지 않는다. 그게 악의 본질이니까.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의 의미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랑 또한 그 너비와 폭은 아예 다르다. 그것을 의도적으로 구겨놓은 일본인 문인의 숨겨진 의도가 너무 천해 보여 한마디 적어 둔다. 악당은 언제나 악당일 뿐이고 천박한 것이다.   ///정현기/문학평론가·연세대 교수       ========================================///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1. 伊吹郷(이부키 고우) 번역ㅡ  1984년 윤동주의 시집을 번역 출간.  일본 현대문 교과서에 실려 있는 번역.  序詩  死ぬ日まで空を仰ぎ  一点の恥辱《はじ》なきことを、  葉あいにそよぐ風にも  わたしは心痛んだ。  星をうたう心で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そしてわたしに与えられた道を  歩みゆ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吹きさらされる。  2. 曹紗玉 번역ㅡ  『明洞のキリスト  韓国キリスト者三十九人詩集』에 실린 번역.  序詩  死ぬ日まで天を仰ぎ  一点の恥なきことを、  葉群れにそよぐ風にも  私は心を痛めた。  星を歌う心で  すべての死に行くものを愛さねば  そして私に与えられた道を  歩んでい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こすられる。  3. 上野潤 번역ㅡ  * 199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번역 출간.  역자가 서울에서 유학했고, 번역 당시 윤동주의 대학 동기인 柳玲교수 및 여러 한국인들에게 시어에 대해 물어보고 번역 했다고 함.  序詩  息絶える日まで天《そら》を仰ぎ  一点の恥の無きことを、  木の葉にそよぐ風にも  私は心痛めた。  星を詠う心で  全ての死に行くものを愛さねば  そして私に与えられた道を  歩み行かねばならない。  今夜も星が風に擦れている。                           1941.11.20.  4. 上野都 (우에노 미야코) 번역ㅡ  * 최근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번역 출판.  序詩  召される日まで天を仰ぎ  いかなる恥もなさぬことを、  一葉(ひとは)に立つ風にも  わたしは心を痛めた  星をうたう心で  すべての滅びゆくものを慈(いつく)しまねば  そしてわたしに与えられた道を  歩いてゆかねばならない。  今夜も風が星にかすれて光る。  # 문제 삼는 부분은  하늘 -> 空  부끄럼 -> 恥辱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보면 알겠지만 다른 번역에서는  空 대신 天을, 恥辱 대신 恥로 쓰고 있어.  그런데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이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당장 네이버 일본어 사전에서 生きとし生けるもの를 검색하면 '살아 있는 온갖 것'이라고 나와.  모든 죽어가는 것들은 결국 살아있다는 의미이고,(살아있어야 죽을 수 있으니)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들이라고 의역한거 같은데,  이건 솔직히 시어를 훼손한거라고 보거든.  참고 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53375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41145.html  http://www.eonet.ne.jp/~koreanya/02shi1/shiron1-YoonDongJyunoJyoshi.htm "  チャン・ウニョン 선생님이 번역한 윤동주의 서시를 읽고, 처음으로 이 시의 진실된 반짝임을 알았다.  이것이라면 납득할 수 있다.  어지간히 나쁜 번역으로 읽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진 이 시가 진부하다고 느껴진걸까? 하고 생각해서 다른 번역을 찾아보았다.  문제는 6행이었다.  チャン・ウニョン의 번역에는 'すべての死にゆくものを愛さねば' 라고 한 부분이  伊吹郷의 번역에는 '生きとしい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라고,  마치, 장래 일본에서 수감되어 옥사한 자신의 운명과,  일본의 조선지배로 살해당한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조선에게서 모든것을 빼앗았다는 의미마저도, 아주 훌륭하게 은폐하고 있다.  이런식으로 단어를 써서, 자기들의 시꺼먼 죄를 거대한 생명의 일부 속으로 녹여 섞고있다.  茨木のり子는 伊吹郷의 번역을 절찬하고 있지만, 이건 사기가 아닌가?  본래의 시는 한글을 좀 알고있다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평범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죄를 얼버무리려는 일에, 시와 관련된 사람들, 그것도 조선에 마음을 주고 있다과 여겨지는 사람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날이었다.  "     이 사람의 반응이 결코 주류는 아닐거야.  그럼에도 일본인이라도 이 번역은 아니다, 라고 진실은 안다면 저렇게 말 하는 걸 보면,  정말 이부키 고우의 번역은 심한 문제라고 생각해.  그게 교과서에서 학생들이 배우는거라면 더더욱.  4번 역자의 번역은 독특해.  2, 3번 역자는 모두 6행을 全ての死に行くものを愛さねば라고 번역했는데  이 사람은 すべての滅びゆくものを慈しまねば라고 번역했거든.  그 뉘앙스 차이...  http://m.jabo.co.kr/a.html?uid=35665§ion=sc4   ========================================///     윤동주 서시의 일본 시비詩碑 - 오역으로 윤동주를 두 번 죽여서야   이 해 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윤동주가 ‘정병욱 형 앞에, 윤동주 정呈’이라고 써서, 18편의 시를 담은 시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든 후, 그 머릿부분에 갖다 놓은 무제無題의 시가 오늘날 우리들이 애송하고 있는 이른바 윤동주의 서시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용정 교외의 명동에서 출생,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 일본에 도항, 도시샤대학 문학부에서 수학했다. 재학 중이던 1943년 7월 14일 우리 모국어로 시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고종사촌 송몽규(당시 교토대학 재학생)와 함께 사상범으로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체포 구금되었다. 재판 결과, 두 사람 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징역형이 선고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 생체실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옥사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처럼 생전에 시집 한 권 내지 못하고 죽은 그의 유고집은 친구 정병욱 님의 정성으로 마루 밑에 숨겨져 보관되다가 해방 후 동생 윤일주에게 전해져서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출간되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의 선배요 사장이라 할 수 있는 정지용은 윤동주 시집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에 분향하노라. 겨우 30여 편 되는 유시 이외에 윤동주와 그의 시인됨에 관한 아무 목증目證한 바 재료를 나는 갖지 않았다.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소니 윤동주의 시가 바로 ‘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우리 나이 - 필자 註)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윤동주가 수학했던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에는 그의 시비가 서 있다. 시비는 1995년 2월 16일 동 대학 코리아 클럽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또 최근엔 그가 살던 아파트가 있던 자리(현 교토조형예술대학)에도 시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의 서시는 우리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지만 그의 목숨을 앗아간 일본 땅에도 시비가 세워지다니 참 뜻깊은 일이다. 그러나 일본어로 번역된 비문을 읽어보면 여기엔 치명적인 오역이 있어 이래서야 윤동주를 두 번 죽이는 게 아닌가 하는 분노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그 시비에 새겨진 서시 옆에 이부키 고(伊吹鄕) 씨가 번역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序詩   死ぬ日まで空を仰ぎ 一点の恥辱(ハジ)なきことを、 葉あいにそよぐ風にも わたしは心痛んだ。 星をうたう心で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そしてわたしにあたえられた道を 歩みゆ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吹きさらされる。                 (伊吹郷)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을 살펴보면, 먼저 첫 연의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에서 ‘하늘’을 ‘空ソラ’로 번역한 것은 잘못이다. 윤동주는 경건한 기독교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박애정신과 민족 사랑이 그 정신세계의 뿌리였기에 그의 하늘은 공허한 하늘(空ソラ)이 아니라 신앙으로서의 하늘 혹은 천지신명을 뜻하는 하늘(天テン)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일본의 기독교회가 공통적으로 쓰고 있는 주기도문의 하늘도 '덴(天)'이며, 영어의 경우에도 '스카이(Sky)'가 아닌 '헤븐(Heaven)'이 되어야 옳다. 우리 한글에서는 '하늘'에다 '님'을 붙여 '하늘님' 혹은 '하느님'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해 왔다. 다음 두 번째 오역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하고 다짐한 것을 ‘한 점 치욕(恥辱)이 없기를’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박해나 고난을 당하더라도 자기의 신앙과 민족의 양심 앞에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다짐한 것인데 ‘한 점 치욕이 없기를’하고 번역했으니 이 또한 그의 시 정신을 올바르게 전하지 못했다. 부끄러울 恥 자만 써도 될 것을 굳이 욕 당하는 일 없게 해달라고 비는 듯한 욕辱 자를 덧붙여서 의미를 왜곡시킬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세 번째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의 구절을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해야지(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로 번역하여 작자의 시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시켜 놓았다. '죽어가는 것'이 '살아있는 것'과 어떻게 의미가 같을 수 있겠는가. 암울한 일제의 압제 아래서 사람만이 아니라 민족의 언어도 풍속도 문화도 죽어가는 시대에 이렇게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까지 사랑하겠다는 시인의 결연한 의지를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번역한 것은 이부키 씨가 아무리 이어동의異語同義라고 우긴다 할지라도 치명적 오역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이미 1995년, 구라타 마사히코, 한석희 씨 등, 일본 기독교 문인들이 뜻을 모아 『天と風と星と詩』라는 시집을 새롭게 펴내어 이부키 씨의 시집 『空と風と星と詩』를 반박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한 바 있다. 序詩死ぬ日まで天を仰ぎ一点の恥もないことを葉群れにそよぐ風にも私は心を痛めた。星をうたう心ですべての死んでいくものを愛さねばそして私にあたえられた道を歩んでいかねば。今宵も星が風にこすられる。(일본 기독교 출판국日本キリスト敎出版局)   저명한 윤동주 연구자인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전 와세다대 교수(문학평론가)도''서시'의 일본어역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일본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는 '서시'의 일본어 번역에 일부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부키 고(伊吹鄕) 씨가 번역한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부분을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번역한 것은 원래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서시’ 2007. 가을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윤동주 시인이 하숙했던 연고지(교토조형예술대학)에 세워진 새 시비에 여전히 이부키 씨의 번역문이 버젓이 새겨져 있다니, 비록 그가 일본에서 처음 윤동주 시집을 완역한 공功의 부분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이는 일본의 역사 왜곡과 맥을 같이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다.   =========================/// @@ 원래 윤동주의 서시 그 대목은 맹자의 군자삼락에서 따온 것입니다.  거기에 "仰不愧於天, 埠俯작於人"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내용입니다. 윤동주가 이 구절의 내용을 평소에 좋아하여 서시에 변형하여 담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어로 번역한다면 원문 그대로 마땅히 하늘은 天이라 해야 맞습니다. 그걸 空으로 변역했다면 그 사람은 맹자도 안 읽어본 무식장이 아니면 일부러 誤譯을 한 것일 것입니다. 아마도 홍이표 기자의 말대로 일부러 誤譯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번역깨나 한다는 일본인이 맹자도 안 읽었을 리는 없을 테니까요. =============================/// 윤동주 연구자 김응교 교수 ㅡ"'역사성' 지우고 '착한 사람'으로 박제화" 영화 '동주' 스틸컷(사진=영화사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올해로 탄생 100주년(2017년)을 맞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작품이 일본에서 왜곡 번역됨에 따라, 그가 '역사성'을 잃은 채 단순히 '착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 비판이 나온다. 오는 12일부터 9월 19일까지 서울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서 열리는 '세계가 취(醉)한 우리문학' 기획특별전 프로그램 가운데, 시인 정지용(1902~1950)과 윤동주의 번역문학을 전시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전 세계 42개 언어로 번역된 한국문학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를 총괄하는 기획위원단 측은 "정지용과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말의 육체와 정신을 세계적 수준까지 고양시킨 작가"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전시에서는 윤동주 시의 일어 번역을 둘러싸고 제국주의적 관점을 고수한 이부키 고(伊吹郷)와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의 번역을 소개하고 이들 번역가의 시선을 곱씹어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기획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동주 연구자인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는 10일 CBS노컷뉴스에 "이부키 고는 윤동주의 시에 적힌 '하늘'(天)을 '빌 공'(空)으로 번역했다"며 "이러한 번역으로 인해 윤동주가 지닌 역사성이 지워졌다"고 지적했다.    "윤동주의 '하늘'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맹자'에 나오는 하늘의 의미다. 윤동주의 '하늘'이 나오는 '서시' 문장을 주의해 봐야 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문장은 '맹자'에 나오는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을 번역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보았을 때 '天'으로 번역돼야만 의미를 지닌다.” '맹자' '주역' '추구' 등을 윤동주는 시에 풀어 인용했는데, 이 책들에서 '하늘'은 공(空)이 아니라, 천(天)으로 쓰여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둘째 자아성찰의 대상으로 하늘을 생각할 수 있다. '자화상'의 '우물'이나, '참회록'의 '거울'처럼, 하늘은 자신을 반성하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셋째, 기독교의 하나님을 상징할 수도 있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 '하늘'도 '텐'(天)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하늘을 '空'으로 번역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된다. 이부키 고의 얘기로는 '일본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번역'으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더욱이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라는 영향력 있는 인기 작가는 이부키 고의 번역본을 보고 감화를 받아 윤동주 관련 수필을 썼는데, 그것이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다"며 "그 글에 '서시' 등 윤동주의 시가 몇 편 인용돼 있다.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윤동주의 '역사성'보다는 단순히 '착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결국 인류애를 저버린, 참혹했던 제국주의 시대에 살며 꿈을 접어야 했던 한 청년 지식인의 현실적이고 치열한 고뇌가 지워진 자리에는, 관념에 기댄 낭만적인 모호성만 남게 됐다는 지적이다. "윤동주가 생각했던 하늘은 관념이 아니라, '맹자의 하늘' '자아성찰의 하늘' '기독교의 하늘'로 뚜렷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을 '빌 공'으로 번역하면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영화 '동주' 스틸컷(사진=영화사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이부키 고의 번역을 비판하는 움직임은 일본에서도 있어 왔다.  김 교수는 "더욱이 이부키 고는 윤동주의 '서시' 가운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를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生きとし生けるもの)로 번역했다"며 "일본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윤동주 연구를 위해 가장 실증적인 연구를 해 온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이러한 번역에 대해 '결국 당시 살아있는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시가 됐다'는 비판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앞서 재일동포 2세인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는 이러한 논란에 대해 지난 2006년 한겨레신문 기고를 통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내 생각에 여기에는 단지 번역어의 적절성 수준을 넘는 심각한 문제가 내포돼 있다. 오오무라는 윤동주의 '저항'정신을 강조하고, 이부키는 보편적인 '실존응시의 사랑'을 보려 한다. 이것은 윤동주의 생애나 작품에 관한 해석의 어긋남(차이)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 지배라는 현실 그 자체에 대한 감성의 어긋남이 존재한다는 걸 시사하고 있다. 원문을 그대로 읽으면 굳이 '살아있는 모든 것' 따위로 거드름 피는 번역어를 고를 이유를 찾기 어렵지만 일본에서는 이부키 고 번역이 정역본으로 보급돼 있다. 일본의 많은 독자들은 (결코 모든 독자는 아니지만)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통해 조선민족에게 해를 가한 사실을 자세히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꺼림칙한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윤동주의 시도 가능한 한 일본을 향한 고발로서가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실존적 사랑의 표백(표출)'으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서시'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가리키는 대상은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로 뚜렷하다"며 "윤동주의 '오줌싸개 지도' 속 부모가 없는 아이들, '병원'의 환자, '해바라기 얼굴'의 여공, 산문 '종시'에서 복선 철도 노동자에 대한 묘사 등이 그 증거"라고 강조했다. "윤동주의 작품에서는 동시대를 산 노동자들의 모습도 세 차례 등장한다. 윤동주는 그렇게 현실적인 고민을 했다. 그의 '하늘'이 '경천애인' '민심'으로 읽히는 이유다. 이부키 고의 번역에 숨어 있는 문제를 비판한 서경식·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와 같이 저 역시 여러 차례 이 문제를 지적해 왔지만, 일본의 윤동주 시 번역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도시샤 대학에 있는 윤동주 시비에도 이부키 고의 번역이 새겨져 있다. 이후 새로운 일본어 번역 시집이 5종 나왔지만, 이부키 고 번역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1377    서시(윤동주)와 서시 영어 번역본 댓글:  조회:5065  추천:0  2019-01-22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Prologue (서시 / 윤동주)    May I look up into the heavens until the day I die  Without a bit of shame  From even the wind rustling the leaves  I have suffered  With the singing heart of the stars  I shall love all that is to die  And the road given me  I shall walk Tonight also, the stars are touched by the wind [출처] 윤동주의 서시 영문 번역시|작성자 봉팔 [출처] 윤동주의 서시 영문 번역시|작성
1376    [매일(끝)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서시 댓글:  조회:3373  추천:0  2019-01-22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성찰적. 고백적. 의지적, 참여적, 반성적      어조 : 엄숙하고 정결한 분위기, 절대 순결을 윤리적 지표로 하는 청년의 양심 고백적 목소리, 고백적 어조와 의지적 어조      심상 : 별과 바람의 시각적 심상      구성 : 시간의 이동에 따른 전개 (과거 - 미래 - 현재)     1연 - 1-4행 과거 1연 - 5-8행 미래 2연 - 9행 현재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부끄러움 없는 삶에 대한 소망 미래의 삶에 대한 결의와 의지 현실 인식과 시적 화자의 의지 1연 1-2행 부끄럼이 없는 삶에 대한 간절한 바람 3-4행 현실 상황 속에서의 고뇌 5-8행 사랑의 실천과 진실한 삶의 다짐 2연 - 시련과 고뇌의 현실 확인    제재 : 별(이상의 세계와 순수한 양심)      주제 : 부끄러움이 없는 순결한 삶에의 소망, 부끄러움 없는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      특징 :   ① 대조적 심상의 부각(별과 바람) ② 서술과 묘사에 의한 표현 ③ 자연적 소재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함    표현법 : 자기 응시의 독백적 형식, 죽음과 삶의 대립적 구조, 고통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함      의의 : 서시(序詩)’라는 제목 그대로 윤동주의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머리에 수록된 작품이다. ‘'과거 - 미래 - 현재'의 순서로 시상이 전개되면서,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현실 극복 의지를 간결하면서도 평이한 시어로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표현된 순수한 삶에 대한 소망이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출전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내용 연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이다. 그래서 이 시에는 '하늘', '바람', '별'과 시인의 삶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가 담겨 있다. 삶의 절대적 기준인 '하늘'에서 어떠한 외부의 고난과 시련에도 빛을 잃지 않고 반짝이는 '별'은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암울한 현실인 '바람', '밤'과 대비를 이루면서 시적 화자의 '시'를 향한 삶의 방향을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삶의 지향점 / 완전무결한 대상, 시적 화자가 양심을 비추어 보는 거울로 절대적 윤리의 표상이고 동양적인 의미의 천도(天道)를 뜻함]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죽는 날까지 ~ 부끄럼이 없기를 : 고난의 현실 속에서 세속적 삶에 타협하지 않으며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시적 화자의 태도로 인유(다른 예를 끌어다 비유함)적 표현한 것으로 맹자의 진심장 君子三樂(군자삼락) 중 仰不愧於天(앙불괴어천)과 관련이 깊다. 잎새에 이는 바람[바람에 흔들리는 잎새는 작은 고뇌와 갈등에 흔들리는 화자의 내면 세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3행에서의 '바람'은 화자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므로, '화자의 내면적 갈등'을 의미한다. / 현실적 시련과 고난을 주는 대상으로 '별'과 대립적 이미지로 '나'의 소망을 방해]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시인의 시적 안목이 가장 섬세한 곳에까지 미치고 있는 3 ~ 4행임] 잎새에 ~ 괴로워했다 : 순결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시적 화자의 의지와 고뇌와 연민이 드러나 있는 부분으로 그의 괴로움은 자신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생겨난다. 부끄러움이란 잘못을 저질러서만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을 하지 못 하였을 경우에도 올 수 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결백한 삶을 추구하는 젊은이에게 있어서 그의 양심의 뜨거움에 비례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사소한 것에서조차 괴로움을 느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잎새'는 '바람' 앞에서 끊임없이 실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작고 연약한 존재를 상징한다. 별[화자가 추구하는 순수, 이상적 가치이거나, 화자가 걸어갈 길을 제시해 주는 도덕적 목표 등. 순결한 삶, 광명, 소망의 대상, 순수하고 도덕적인 양심]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별을 노래하는 마음 :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도덕적 순결성을 추구하는 삶의 자세] 모든 죽어 가는 것[일제 강점하의 우리 민족 / '죽어 가는 것'은 '잎새'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삶의 고통에 부대끼는 모든 존재를 뜻함 / 살아있는 것의 역설적 표현 / 연약한 존재]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역사와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지식인의 시적 화자가 해야 할 일 혹은 역할'을 의미함 / 민족을 위한 삶의 길, 인생의 과정, 역사적으로 부과된 사명,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 순명(順命)의 태도]을 걸어가야겠다.[의지의 표현 - 소명(사람이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는 일. '부름'으로 순화.) 의식] ~ 겠다. : 확신과 의도를 나타내는 종결어미(시적 자아의 의지)  오늘 밤[어둡고 암울한 현실, 일제 강점기의 암담한 현실]에도 별['별'은 어두운 밤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으며, 시련의 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외로운 양심을 상징]이 바람['별'과 대조되는 '바람'은 화자가 추구하는 참삶이나 지켜 오고 있는 양심을 흔들리게 하는 '현실적 시련'을 의미]에 스치운다.['나'의 현재적 상태임]       시적 화자의 태도 :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있고, 도덕적으로 순결한 삶을 지향하고 있으며,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순교자적 자세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려 한다.         이 시가 감동을 주는 주된 이유는 ? : 순교자적 삶에의 기원과 각오         3행과 9행에 '바람'이라는 시어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해 보자    지도 방법 : 이 활동은 똑같은 시어라 하더라도 문맥에 의해 얼마든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점을 학생들 스스로 파악하도록 하기 위한 활동이다. 다소 어려움이 뒤따르는 활동이므로 가급적 모둠별로 나누어 집단 사고를 통해 의미의 차이를 구별해 보도록 지도한다. 특히 문맥적 상황을 최대한 고려하여 섬세한 의미 차이를 발견해 보도록 유도한다. 여기서 ‘바람’은 상징적 표현이므로 그 의미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게 마련이다. 따라서 특정한 해석을 정답으로 강요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명확히 밝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시어라 하더라도 문맥에 따라 의미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는 것에 있다.  : 1, 2행에서 화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했는데, 3, 4행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는 작은 고뇌와 갈등에 흔들리는 화자의 내면 세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3행에서의 '바람'은 화자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므로, '화자의 내면적 갈등'을 의미한다. 9행에서의 '바람'은 현실 상황과 관련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별'과 대조되는 '바람'은 화자가 추구하는 참삶이나 지켜 오고 있는 양심을 흔들리게 하는 '현실적 시련'을 의미한다.(출처 : 김윤식 외 4인 공저 '문학교과서')    이해와 감상    1945년 해방 직후 두 권의 유고 시집이 눈길을 끌었는데 그 하나가 (1946)이요, 또 하나가 바로 윤동주의 (1948)였다. 윤동주의 이 시집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스물 여덟의 젊은 나이로 일본 감옥에서 옥사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고작을 모아 세상에 내 놓게 된 것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첫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서시"이다. 이 시에는 '1941년 11윌 20일'이란 창작 일자가 남아 있는데 이 때는 윤동주가 연희 전문의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고민하던 때로서 그의 나이 스물 넷이었다.  서시란 '책의 서문 대신 쓴 시'라는 뜻으로, 그의 유고 시집에 수록된 작품 전체의 내용을 개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를 분석함으로써 '부끄러움과 자아 성찰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윤동주의 시 세계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서시"는 2연 9행으로 된 짧은 작품이다. 그러나 비록 짧지만 우리는 양심과 사랑을 추구하여 마침내 도덕적 순결의 자기 수행을 다짐하는 시인의 고뇌와 만날 수 있다.  시상의 전개상 1연은 1행-4행 / 5행-6행 / 7행-8행 등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 시제로 쓰여진 첫 4행은 식민지인으로서의 시인의 고뇌를 절절이 느낄 수 있으며, 조선인을 말살시키기 위해 급기야 창씨개명과 신사 참배를 강요했던 일제 말기에 조국과 민족, 무엇보다도 자신의 양심 앞에서 부끄러운 변절이나 타락을 하지 않으려는 도덕적 순결 의식이 나타나 있다. 1,2행의 표현은 의 '군자 삼락(君子三樂)' 가운데 하나로 '우러러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다(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의 인용이다. 바로 이런 군자의 마음으로 시인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한 점'의 잘못조차 허용하지 않고,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3행의 '잎새에 이는 바람'은 2행의 '한 점 부끄럼'을 비유하고 있는 시구로 '부끄럼'이란 추상적인 관념을 시각화시켜 감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도덕적인 순결과 양심의 추구는 5,6행의 다짐과 7,8행의 강한 결의로 이어진다. 5,6행은 현재 시제로 쓰여진 점으로 보아 시인이 처한 현재에 대한 다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별'의 심상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별'은 순수, 영원, 희망, 빛, 불변의 가치, 지고지순(至高至純)의 진리 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란 '도덕적인 순결의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 또는 '불변의 가치를 예찬하는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죽어 가는 모든 것' 즉 '소멸되고 사그라지는 생명'들을 밝히는 사랑의 등불이 될 것을 다짐하고 있다.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아가페 사랑을 말이다.  그의 "십자가"란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괴로웠던 사나이 /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나에게도 십자가가 / 허락된다면 / 꽃처럼 피어나는 피로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이 시는 예수가 너무나도 인류를 사랑하여 스스로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듯이 시인도 이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나머지 기꺼이 어두운 시대의 속죄양이 되어 시대를 밝히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그 지고지순한 사랑이 바로 "서시"의 '모든 죽어 가는 것'에 대한 사랑과 일치한다. 이처럼 시인이 추구하는 사랑은 죽음을 각오하고 죽음을 사랑하는 종교적 사랑인 셈이다.  사랑의 다짐이 미래에의 결의로 나타난 시행이 7,8행이다. 도덕적인 양심과 아가페적인 사랑을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알고 결의를 다지고 있다. 자기 수행의 길을 주어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엄숙하고 경건한 자세가 사뭇 진지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1연이 시인 자신의 양심, 사랑, 수행의 다짐이었다면, 1행으로 된 2연은 주체가 '나'가 아니라, '별'이 되고 있다. 여기서 '별'은 '순수 소망 양심의 세계', '이상적 삶'을 가리킨다고 앞에서 이미 지적하였다.   '오늘 밤'은 시인이 어둠의 역사로 규정한 식민지 현실을 암시한다. 캄캄한 이 어둠의 세계를 빛으로 밝혀 주는 동시에 시인이 지향하던 순수와 불멸의 세계인 '별'이 '바람'이라는 시련에 놓여 있음을 객관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시련은 그젯밤도, 어젯밤도, 오늘밤에도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시련의 제시는 그저 단순한 제시만은 아니다. 오히려 바람이 사납게 불고, 밤이 더욱 캄캄해질수록 시인의 별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다짐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이해와 감상1   이 '서시(序詩)'는 2연의 시이나 다음과 같이 의미를 4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연 1행-2행은 결백하고자 하는 진실의 선언이며, 3행-4행은 욕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적 고뇌, 5-8행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찾아 떠나고 싶은 갈구, 2연은 아픈 자기 성찰로 발전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던',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 위한 결백한 양심의 선언이 이 '서시'의 주제로 부각된다. 특히 9행은 암담한 상황을 상징적. 서정적. 극적으로 형상화했다.  특히 '서시'에서 '별'과 '부끄럼'과 '죽음'이 주요 모티브가 된다. 별의 이미지는 몇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별처럼 멀리 있는 육신의 고향, 북간도의 이국 정서와 단풍잎 같은 동심적 정서가 결합되어 별로 나타난다. 이런 자연 묘사의 수법을 통해 과거의 자아를 회상하는 매개체로서의 별이다. 둘째로, 신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별로 나타난다. 이 때 별은 '순수한 마음'을 뜻하고, 또한 영혼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혼의 표상으로 제시된다.  부끄러움의 미학은 자기 혼자만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아픈 자각의 표현이다. 이와 같은 여성 이미지인 부끄러움은 조국에 대한 역사적 민족적 사명을 다하지 못한 송구스러움, 죄책감,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도덕적 순결성에 대한 욕됨 등으로 또한 심화되기도 한다.  이해와 감상2   이 작품은 해방 후 간행된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머리에 놓여, 참답고 올곧은 삶을 지향했던 시인의 정신을 대변해 주는 명시(名詩)이다. ‘과거(1~4행) - 미래(5~8행) - 현재(9행)’의 시간 순서를 축으로 하여 자기 양심 앞에 추호도 부끄럽지 않게 살려는 화자의 내적인 번민과 간절한 소망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처음 4행에서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고 하여 초월적 세계와 도덕적 순결성을 지향하는 화자의 삶의 지표를 제시하고, 막상 현실 속에 부대끼며 그렇게 살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함으로써 부끄러움 없는 삶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다음 4행에서는 운명에 대한 인식과 투철한 역사 의식에서 비롯된 소명 의식을 표현함으로써 미래의 삶에 대한 다짐과 각오를 보여 준다. 마지막 행에서는 이와 같은 결의를 어둠과 바람 속에서도 결코 꺼지거나 흐려질 수 없는 외로운 양심을 의미하는 ‘별’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은 식민지 상황에 처해 있는 젊은 지식인의 고뇌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표백(表白)한 시다. 그래서 더욱 진솔(眞率)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백적인 시가 감상에 흐르거나 관념에 빠지기 쉬운데, 이 시는 적절한 상징과 시각적 심상을 활용하여 서정시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해와 감상3  이 시는 해방 후 간행된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모두(冒頭)에 놓여 참삶을 추구, 지향하는 윤동주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명시(名詩)이다. 윤동주는 식민지라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지성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뇌와 아픔을 섬세한 서정과 투명한 시심(詩心)으로 노래한 시인이다. 그는 고요한 내면의 세계를 응시하려는 순결한 정신의 소유자요, 자신이 걸어야 할 삶의 길에 순응하고자 했던 인간이다. 그를 일제 말기라는 문학적 공백기에 민족적 의지와 양심을 지켜주던 대표적 시인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시가 시대적 상황의 투시와 양심에서 배태된 '부끄러움'의 인식 때문이다.  이 작품의 구조는 2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시간의 변화에 따라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연은 둘로, 즉 1∼4행과 5∼7행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락은 과거 시제로 지금까지 화자가 살아온 생활의 고백이고, 둘째 단락은 미래 시제로 미래의 삶에 대한 화자의 신념의 표명이다. 셋째 단락인 2연은 현재 시제로 현재의 시적 상황의 제시이다. 결국 이 시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며, 지금 현재는 어떠하다는 구조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배경은 별과 밤 하늘이다. 별이 빛나는 그 밤 하늘 아래 시적 화자인 '나'가 존재하고 있다. '밤'은 암울한 시대 상황이며 자아의 실존적 암흑 의식을 표상하고 있으며, '별'은 외로운 양심의 표상이자 구원(救援)의 지표로 희망과 이상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화자는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희원(希願)하며, 도덕적 결백성과 순결성 때문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있다. '별'과 대조가 되는 '바람'은 화자가 추구하는 참삶과, 지켜 오고 있는 양심을 흔들리게 하는 현실적 시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는 우주 섭리(攝理)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에 충실하는 한편,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상 세계를 지향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죽어가는 모든 것과 조국과 민족의 고난을 포근히 감싸 안고자 했던 시인의 지극한 휴머니즘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마지막의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시행은 그가 처한 암담한 현실 상황을 대변하는 동시에, 바람에 부대낄수록 더욱 밝은 빛을 발하는 별과 같이 자신의 이상도 빛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어, 아직 채 완성되지 못한 24세 때(1941.11.20) 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투철한 현실 인식과 뛰어난 자기 인식으로 드러나는 그의 인간적 성숙도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러므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28세의 젊은 나이로 후쿠오카 어두운 감옥에서 숨을 거둔 그가 하늘과 양심 앞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했던 번민과 의지의 결실인 이 시는, 우리 모두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주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해와 감상4  윤동주(尹東柱)가 지은 시. 1941년 11월 20일에 창작되었고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1948)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윤동주의 생애와 시의 전모를 단적으로 암시해주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윤동주의 좌우명격 시인 동시에 절명시에 해당하며, 또한 ‘하늘’과 ‘바람’과 ‘별’의 세 가지 천체적 심상(心像)이 서로 조응되어 윤동주 서정의 한 극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서시〉는 내용적인 면에서 세 연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연은 ‘하늘-부끄럼’, 둘째 연은 ‘바람-괴로움’, 셋째 연은 ‘별-사랑’을 중심으로 각각 짜여져 있다.   첫째 연에서는 하늘의 이미지가 표상하듯이 천상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순결 의지가 드러난다. 바라는 것, 이념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한계적인 것 사이의 갈등과 부조화 속에서 오는 부끄러움의 정조가 두드러진다.  둘째 연에는 대지적 질서 속에서의 삶의 고뇌와 함께 섬세한 감수성의 울림이 드러난다. 셋째 연에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서의 ‘진실한 마음, 착한 마음, 아름다운 마음’을 바탕으로 한 운명애의 정신이 핵심을 이룬다.  특히,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는 구절은 운명애에 대한 확고하면서도 신념에 찬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운명애의 결의와 다짐은 험난한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운명과 맞서서 절망을 극복하려는 자기 구원과 사랑에 있어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망의 환경일수록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기자신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윤동주가 택한 자기 구원의 방법은 운명에 대한 긍정과 따뜻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운명애의 길은 관념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진솔한 자아 성찰과 통렬한 참회의 과정을 겪으면서, 변증법적 자기 극복과 초월의 노력에 의해 마침내 획득되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참된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운명 감수의 태도가 아니라 그 극복과 초월에 목표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인 이 작품은, 시집의 전체적인 내용을 개략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시이며, 존재론적 고뇌를 투명한 서정으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광복 후 혼란한 시대에 방황하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감동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正音社, 1948), 韓國現代詩人硏究(金載弘, 一志社, 1986), 尹東柱論(金烈圭, 國語國文學 27, 1964), 윤동주론(金興圭, 창작과 비평 33, 1974), 윤동주의 문학사적 위치(吳世榮, 現代文學 244, 1975), 윤동주특집(나라사랑 23, 1976), 윤동주시와 시론의 반성(홍정선 외, 현대시 1, 198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375    윤동주와 친구 강처중 "발문" 댓글:  조회:3405  추천:0  2019-01-20
목차 브나로드 운동에 뛰어들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윤동주와 만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들다 경향신문 기자에서 좌익인사로 사라지다 시인 에머슨은 ‘친구를 얻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사랑과 정성을 쏟아부어야만 겨우 가능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 윤동주에게는 완전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바로 강처중이다. 강처중은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재일유학생 윤동주의 시와 삶을 세상에 전파함으로써 영원히 그의 동반자가 되었다. 아울러 친구에 대한 굳은 의리와 아름다운 헌신을 통해 자신의 가슴팍에 새겨진 주홍글씨까지 퇴색시킬 수 있었다.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문과 동기생이었던 강처중은 타고난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윤동주와 함께 학창시절을 꽃피웠고, 재가 되어버린 윤동주의 삶을 복원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일본 유학을 떠난 윤동주가 서울에 두고 간 〈참회록〉 등 필사본 시집에 들어가지 않은 원고와 그의 장서, 졸업앨범, 앉은뱅이책상 등속까지 죄다 보관했다가 해방 후 서울에 온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에게 전해줌으로써 후세인들이 시인의 생생한 체취를 맡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게다가 그는 윤동주가 도쿄에서 자신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담겨있던 5편의 시를 공개함으로써 윤동주 시문학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1947년의 소란스런 해방공간에서 강처중은 경향신문 기자로 봉직하면서 무명시인 윤동주의 작품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한편, 후배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자선시집 안에 있던 19편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작품 가운데 12편을 추려내 1948년 1월 총 31편의 작품이 담긴 정음사 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발간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 ⓒ 연합뉴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후 강처중은 이념 대립이 극심하던 1950년대 초반 남로당 요인으로 활동하다가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로 인해 강처중은 남쪽에서 기피인물이 되었고 모든 공식문서에서 삭제되었다. 그 영향으로 학계에서도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에서 그를 제외함으로써 절름발이 논문을 자초했다. 윤동주가 일제의 탄압으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옥사했다면 강처중은 그처럼 민족 내부의 갈등으로 희생되었던 비극적인 존재였다. 브나로드 운동에 뛰어들다 강처중은 1916년생으로 함경남도 원산 출신이다. 부유한 한의사 집 맏아들로 태어났지만 성품이 매우 신중하고 과묵했다. 그가 어린 시절 어떤 학교에 다녔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17세 때인 1932년 동아일보에서 실시한 제2회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한글보급과 문맹타파에 헌신했음은 당대의 동아일보 기사로 확인할 수 있다. 1931년부터 시작된 브나로드운동은 일제시기 광복군으로, 해방 후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활약했던 14세의 장준하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청년 학생들의 전폭적인 참여를 이끌어냈고, 당대의 수재였음에 분명한 강처중 역시 솔선수범하여 이 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브나로드운동은 애초에 한글보급을 통한 민족의 독립역량 배양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두고 추진되었다. 식민지 조국의 비참한 상황을 직시하고 있던 소년 강처중으로서는 한 줄기 단비 같은 뉴스였다. 당시 강처중은 방학기간인 8월 2일부터 고향에서 가까운 함경도의 고평역에서 100여 명의 농민들에게 한글, 일용계수법, 성경, 지리, 역사, 유희, 창가, 체조, 동화 등을 가르쳤다. 책임대원이었던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강처중 자신은 한글을 가르쳤고, 다른 과정은 여러 동지와 타처에서 피서 온 학생들이 가르쳤다. 그 결과 한글과 일용계수법을 해득한 사람이 20명이었다. 이듬해인 1933년부터 브나로드운동은 학생하기계몽운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는 도쿄, 간도 등지에서도 참가신청이 이어졌고, 특히 간도의 명신여학교에서는 40명이나 참가하여 주목을 받았다. 강처중은 전년과 마찬가지로 함경북도 덕원군의 책임대원으로서 북성면 문평리에서 남녀 70여명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당시 그의 보고 내용이 동아일보 지면에 실려 있다. ‘이곳에서는 장소와 당국의 허가 관계로 하는 수없이 기독교에서 하는 하기아동성경학교와 연합하여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비용이나 당국 금지를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고, 다만 교회에서 하므로 성경본위로 하여 한글(산술은 하지 않음)을 중요시 아니하는 것이 유감이오나, 책임이 있는 저로서는 최대의 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재미있는 일은 이것이 조직적으로 되어 이곳에 해변으로 인하여 피서 온 고등 대학교 학생 중등보통학교 교사 등을 강사로 하는 훌륭한 학교가 되어 각기 전문하는 학과를 가지고 어린이들에게 수중하여 주고 있습니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윤동주와 만나다 강처중은 23세 때인 1938년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 본과에 합격했다. 당시 송몽규는 문과 별과에 합격하여 동급생이 되었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기숙사 핀슨홀의 3층 지붕 밑 방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문과 동기들 가운데 1, 2등을 다투면서 ‘영어도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한편으로 뒤틀린 심사를 에둘러 표현하는 풍자적인 면도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강요로 창씨개명을 강요받자 이름을 신농처중(神農處重)이라고 지어 학적부에 올렸던 것이다. 누군가 너무 심하지 않냐고 타박하자 중국의 삼황오제 중에 한 사람인 신농씨(神農氏)가 본래 강(姜)씨였으니 거리낄 게 무어냐며 되받아쳤다. 문과 학생이었던 강처중은 윤동주나 송몽규처럼 문학에 심취했는데 3학년 때인 194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부문에 지원했다가 낙방했다. 그때 평자는 그의 작품이 너무나 허구적이어서 실감이 없었다고 혹평했고, 특히 글에 설명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리더십으로 매사에 앞장섰던 그는 4학년 때 연전 문과 학생회인 문우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문예부장인 송몽규와 함께 잡지 《문우》를 발간했다. 하지만 편집과정에서 많은 원고가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고, 잡지는 최종호가 되었으며, 국민총력운동이라는 미명하에 문우회까지 해산의 비운을 겪는다. 후배 장덕순의 회고에 의하면 그 무렵 강처중은 연희동 산기슭을 산책하다가 개울가에서 뱀을 사로잡은 뒤 자신에게 보여주며 “세상의 모든 동물 중에 제일 독한 종자가 바로 뱀이다. 동물은 보통 먹이를 주는 사람에게 길들여지기 마련인데 뱀은 먹이를 받아먹기는 하면서도 전혀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아무리 잘해주어도 끝내 길들여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열정이 압제에 눌리고 패배감만 안겨주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통탄하는 듯한 느낌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들다 윤동주의 육필원고 ⓒ 연합뉴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후쿠오카감옥에서 옥사한 뒤 반년 만인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되자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이 조카의 유품을 회수하기 위해 서울에 내려와 그가 한때 묵었던 북아현동 하숙집을 찾다가 실패하고 돌아갔다. 이후 남북이 좌우로 갈리고 38선으로 가로막혀 어수선한 1946년 6월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가 단신으로 월남하여 강처중을 찾아왔다. 그러자 강처중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원고와 유품을 아낌없이 건네주었다. 당시 그가 전해준 윤동주의 육필 시고는 아래와 같은 세 종류였다. 첫째, 윤동주가 필사본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엮기 전에 쓴 작품 가운데 시집에 넣은 19편의 작품을 제외한 시 작품. 〈팔복〉, 〈위로〉 등. 둘째, 자선시집을 엮은 뒤 새로 쓴 시 작품. 〈참회록〉, 〈간〉 등. 셋째, 일본에서 쓴 시 작품. 〈쉽게 씌어진 시〉,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봄〉. 1947년 2월 16일의 윤동주 사망 2주기를 앞두고 강처중은 정병욱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시작품을 모아 유고시집을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출간시기는 사망 3주기인 1948년 2월 16일 이전으로 잡았다. 그 일은 당시 경향신문 기자로서 언론계와 문화계에 발이 넓은 강처중이 도맡았다. 강처중은 시집 발간에 앞서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하고 1947년 2월부터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윤동주의 작품을 게재했다. 정지용이 퇴사하고 난 뒤인 7월 27일자 지면에 세 번째 실린 〈소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소개 글까지 덧붙였다. ‘고 윤동주는 젊은 나이에 일본감옥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 우리들의 선배입니다.’ 이런 사전작업과 함께 강처중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던 정지용에게 유고시집의 서문을 부탁했다. 그 무렵 경향신문사를 퇴직하고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정지용은 강처중이 데려온 윤일주로부터 윤동주와 그의 집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 그 내용을 서문에 자세히 썼다.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48년 1월 30일 서울 정음사에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었다. 강처중이 쓴 초판본 시집의 발문에는 친구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 그리움이 아래와 같이 애타게 묘사되어 있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가이든 아무런 때 아무 데를 끌어도 선뜻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들이를 부지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 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 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않았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않았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람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후쿠오카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 그는 나의 친구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도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후쿠오카에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강처중은 이처럼 친구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과 지극한 우정을 모아 윤동주를 무명시인에서 일약 민족시인으로 발돋움시켰지만 대가는 참담했다. 해방공간의 극심했던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의 여파로 정지용과 함께 강처중은 사회적 금치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5년 2월 윤동주 서거 10주년 기념 증보판 시집이 정병욱과 윤일주의 손에 의해 출간될 때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삭제되기까지 했다. 정지용은 전쟁 당시 월북했다는 이유로, 강처중은 좌익인사라는 이유였다. 1987년 공식적으로 해금되기 전까지 정지용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고, 학계의 논문이나 학술서적에서 반드시 필요한 경우 ‘정○용’, ‘정용’ 등으로 표기했다. 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수차례의 개정판에서 두 사람의 흔적을 지웠다가, 1983년 10월 10일 간행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개정판에서 강처중을 ‘서울의 한 벗’이라고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기자에서 좌익인사로 사라지다 경향신문은 1946년 10월 1일 경성의 가톨릭재단에서 창간한 신문으로 최초의 회장은 노기남 주교, 주간은 정지용, 편집국장은 횡보 염상섭이었다. 이때 강처중은 조사주임으로 창간작업에 참여했다. 1947년 1월 15일 정지용이 ‘여적(餘滴)’ 란에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문제를 실었다가 미군정 당국과 극우 단체로부터 수난을 당했다. 그와 같은 경향신문의 진보적인 성향을 주도했던 강처중은 이후 기자로 활동하면서 골수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47년 4월 27일자 2면에는 충무공 탄생 402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쓴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시대가 올수록 충무공 이순신은 더욱 빛나는 존재가 된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민을 위하고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과 함께 강토를 지킨 때문이다. 인민은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민과 함께 싸우던 위한 인물들은 영원히 민족의 마음속에 사는 것이다. 그런 위대한 인물들은 민족존망의 위기에 나와서 인민과 함께 그 위기를 극복하고 간 분들이다. 때문에 그 민족이 위기에 당면하면 그 인물을 더욱 사모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같은 정세에 처하여 이순신을 가일층 사모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냥 영웅 이순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동고동우(同苦同憂)하며 투쟁하던 이순신이 그리운 것이다.’ 현재 경향신문 데이터베이스에는 강처중의 흔적이 이순신과 윤동주에 대한 2편의 기사만 남아있다.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가, 한국전쟁 이후 계엄령 치하였던 1953년 9월 21일 손원일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정국은 간첩사건’에서 이름을 드러낸다. 정국은은 일제 강점기 일본 마이니치(朝日)신문 기자를 지낸 언론인이었는데 해방 후 연합신문사 주일특파원, 국제신문사 편집국장 들을 지냈으며 동양통신사 및 연합신문사 주필로 재직하던 중 간첩협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치안국 고위관리인 홍택희 총경을 비롯하여 언론, 정부, 국회의원까지 연루되어 국회 내에 조사위원회까지 구성되었던 초대형 사건이었다. 정국은은 고등군법회의에 송치되어 단심으로 군사재판을 받은 뒤 그해 12월 2일 사형이 언도받았다. 한데 1954년 1월 23일 총살형 장소로 예정된 홍제원 화장터 근처에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사형집행이 연기되었다. 결국 정국은은 1955년 2월 18일 수색에서 총살되었지만 그가 죽지 않고 미국 극동사령부의 보호 아래 일본에서 이중스파이로 활약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바로 이 사건에서 강처중은 남로당의 젊은 실세로서 크게 부각되었다. 군 당국은 정국은의 모든 간첩 혐의가 남로당의 상부선인 강처중의 지령에 따라 행해졌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한데 작가 송우혜의 조사에 따르면 강처중은 이미 1950년에 남로당 간부였던 김삼룡, 이주하 등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돌파한 뒤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면서 강처중은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9월 4일 강처중은 갑자기 부인 이강자 여사에게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출해 버렸다. 어쩌면 그는 생사의 기로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왔건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전쟁의 참상이 이어지자 실망한 나머지 현실도피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먹이를 주어도 길들여지지 않은 뱀 같은 민족의 비정한 세월을 조소하면서……. 그래서일까. 그 후 남로당과 관련된 어떤 문건이나 서적에서도 그의 존재는 완벽하게 지워졌다. 그의 얼굴이 다시 세상에 드러난 것은 송몽규의 조카인 작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이었다. 그리고 2016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서 그는 해맑은 미소를 띠며 관객들의 앞에 섰다. =================///          
1374    윤동주와 정지용 댓글:  조회:2975  추천:0  2019-01-20
▲  1941년 윤동주가 원고지에 정서해 간직했던 첫 번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간되지는 않았다.   ▲  1948년 정음사에서 처음 발간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자필 원고에 이어 두 번째다.   ▲  1955년 정음사에서 재간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전체적으론 세 번째 판본이다.   ▲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왼쪽)와 정지용(오른쪽)이 만나는 장면. 그러나 둘이 생전에 만났다는 문헌적 증거는 없다. 다만 정지용과 윤동주는 일본 도시샤대 영문과 선후배였으며 해방 후에 정지용은 윤동주의 동기인 강처중을 통해 윤동주의 유고를 접했고, 시집 초판에 서문을 썼다.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세 권의 시집 ◇ 정지용과 윤동주와 ‘카톨릭소년’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카톨릭소년’에 동시를 몇 편 발표하였다. 시를 써두기만 하고 발표를 거의 안 했던 그로서는 이 잡지가 중요한 발표 지면이었던 셈이다. 이 잡지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힘에 의해 일제강점기에 서울과 만주에서 발행되었는데, 이는 당시 만주 옌지(延吉)에 가톨릭 교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에 다니던 정지용은 1928년 7월 교토의 가와라마치(河原町) 성당에서 천주교 입교 의식으로 세례를 받았다. 영세명은 프란치스코였고, 중국식 표기인 방지거(方濟各)를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9년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돌아온 정지용은 천주교 종현(鍾峴) 성당 청년회 총무를 맡았다. 1933년에는 천주교 전국 5개 교구(옌지교구 포함) 연합으로 창간한 월간 ‘카톨릭청년’의 문예란 편집을 맡게 되었다. 편집위원은 윤형중 신부를 비롯하여 장면, 장발, 정지용으로 구성되었고, 주간은 이동구였다. 필진은 이병기, 정지용, 이상, 신석정, 이태준, 김기림, 김억, 조운, 유치환, 김동리, 박태원, 김소운, 이효상 등이었다.  정지용은 카톨릭청년 문예란에 이병기의 ‘조선어강좌’를 연재하였다.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상(李箱)의 시편을 처음 싣기도 했다. 처음에 그림과 숫자로만 시를 썼던 이상은, 이 지면에 이르러 처음으로 ‘꽃나무’ ‘이런 시(詩)’ 등 의젓한 한글 시편을 발표하였다.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청년회가 해체되기는 했지만, 정지용의 신앙은 더욱 고양되어 1937년 성프란치스코회 재속(在俗) 회원으로 입회하기도 하였다. 이후 정지용은 서울 백동(혜화동) 성당에서 장면, 장발, 유홍렬, 한창우 등과 착의식에 참석하였는데, 한창우는 나중에 경향신문 사장이 되는 인물이다. 정지용은 일제 말기에 부천 소사로 이사하여 천주교 공소 신자로 신앙생활에 열중하였다.  바로 그 무렵 윤동주는 가톨릭 만주 옌지교구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의 애독자이자 투고자로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매체들에 의해 연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정지용은 해방 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정음사, 1948년) 서(序)에서 윤동주의 신앙시 ‘십자가’를 정성스레 인용할 정도로, 두 사람은 신앙이라는 공통항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던 경향신문 주간도 물러나고, 이화여대 교수도 사퇴한 후 녹번동 한 초가에 은둔하다가 정지용은 홀연히 북으로 떠나갔다.  ◇‘정지용시집’과 정음사와 윤동주  정지용과 윤동주는 도시샤대 영문과 선후배였지만 생전에 만난 적은 없다. 영화 ‘동주’에서는 윤동주가 정지용을 찾아갔을 때 정지용이 일본 유학을 권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윤동주가 정지용을 만났다는 문헌적 증거는 없다. 다만 해방 후에 정지용은 윤동주의 동기인 강처중을 통해 윤동주의 유고를 접하게 되었고, 시집 초판에 감동적인 서문을 씀으로써 도시샤대 선후배로서의 인연을 완성한다. 그리고 정지용의 월북 후 만들어진 윤동주 시집 재판은 ‘정지용시집’(시문학사, 1935년)의 배열을 그대로 따랐다. 북으로 간 강처중이 아니라, 시인의 아우인 윤일주와 후배인 정병욱의 편집 결과였다. 박용철에 의해 만들어진 정지용시집은 모두 5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 최근작, 2부 초기 시편, 3부 동요·동시, 4부 신앙시, 5부 산문시였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재판(정음사, 1955년 2월 16일) 역시 1부 자필시고, 2부 도쿄(東京) 시편, 3부 연대가 기입되지 않은 작품군(群), 4부 동요, 5부 산문으로 배열했다. 윤일주와 정병욱이 이 시집을 편집했을 때 정지용시집을 깊이 참고했으리라.  이 시집을 출간한 정음사(正音社)는 1928년에 국어학자인 외솔 최현배가 창설하여,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한글을 지키는 출판 활동을 벌여온 출판사이다. 정음사에서는 외솔의 ‘우리말본’을 비롯하여 1930년대에도 꾸준하게 한글 관련 책을 출간하였다. 바로 그 출판사에서, 일본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사상불온, 독립운동’ 죄목으로 싸늘하게 옥사한 비극적 청년 시인의 유고시집이 출간된 것이다. 정음사 사장 최영해는 최현배의 아들로서, 양정고보와 연희전문 문과를 나왔고, 조선일보 출판부에 들어가 ‘소년’ 편집을 하기도 했고, ‘삼사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후 경향신문 부사장을 역임하였고, 정음사 사장을 지내면서 윤동주 유고시집을 출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정지용과 강처중, 최영해, 한창우 등이 결속하여 윤동주의 유고 시편을 발표하고 시집을 발행하는 동선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가톨릭-연희전문-경향신문-정음사’의 동선과 그대로 겹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윤동주는 정지용시집을 소장하게 된 날짜를 1936년 3월 19일로 시집 내지에 감격적으로 기록하였다. 정지용 시는 윤동주뿐만 아니라 당대의 여러 후배 예컨대 신석정, 이상, 임화, 청록파 등에게 매우 보편적으로 감염된 어떤 수원(水源)이자 정전(正典) 역할을 했다. 마치 근대 초기에 시인들이 모두 김억의 번역 스타일을 따라 하자 춘원 이광수가 “전부 ‘오뇌의 무도’화(化) 하였다”고 말한 현상이 1930년대에 정지용 모방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특별히 윤동주에게는 정지용 영향의 흔적이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말하자면 정지용시집은 윤동주 습작 시절의 교과서였던 셈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맥락  그런데 이 재판 시집은 사실 세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첫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윤동주가 연희전문 졸업반 때 자신의 시편 가운데 18편을 정선하고, 마지막에 1941년 11월 20일 날짜로 시집의 서시를 써서, 모두 19편으로 만들어 원고지에 정서해 묶은 것이다. 비록 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발간되지는 않았지만, 1941년 11∼12월에 완성된 윤동주 자선 친필 시고가 온전한 제목으로서의 첫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인 셈이다.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준 이 원본 시고가 남아, 훗날 일반에게 공개되어 친필 전집의 자양이 된 것이다. 이어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에 정지용의 소개 글과 함께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詩’가 최초로 발표되었고, 1948년 1월에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 서문과 강처중 발문과 유영의 추도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을 간행하였다. 말하자면 이것이 두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이 시집 표지는 파란색으로 더 유명하지만, 초간본 겉표지는 사실 갈색이었다. 정음사 대표 최영해의 장남인 최동식(전 고려대 화학과 교수)은 “윤동주의 3주기 추도식에 초간본을 헌정하려 했으나 제작이 늦어져 동대문시장에서 구한 벽지를 마분지에 입혀 표지를 꾸민 뒤 10권을 급하게 제본해 가져갔다”라고 증언한 바 있는데, 즉 벽지로 표지를 제본한 ‘갈색’ 시집 10권이 세상의 빛을 처음 본 윤동주의 최초 시집이었던 셈이다. 이후 한 달 정도 지난 1948년 3월에 초판본 1000부가 파란색 표지로 출간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이 시집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아니어야 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19편만 그 제목으로 출간하려 했던 윤동주의 뜻을 존중한다면, 시집 전체 제목은 ‘윤동주시집’ 정도로 하고 1부 19편을 원래 시집 제목으로, 그리고 나머지 12편을 다른 소제목을 달아 펴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밋밋하게 윤동주시집으로 했다면 대중들의 호응은 훨씬 덜했을 것이니, 윤동주 시집 제목은 역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운명을 타고난 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세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이후 1948년 12월 누이 윤혜원이 윤동주의 습작 노트를 가지고 북간도에서 서울로 이주하였다. 1953년 7월 15일 정병욱이 ‘연희춘추’에 ‘고 윤동주 형의 추억’을 썼고, 1953년 9월에는 윤동주에 대한 최초 비평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가 고석규에 의해 쓰였다. 1955년 2월에는 시인의 10주기를 기려 시 89편과 산문 4편을 엮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재판을 정음사에서 펴냈는데, 이때 초판본에 실렸던 정지용 서문과 강처중 발문은 제외되었다. 편집은 정병욱과 윤일주가 하고 표지화는 김환기가 담당했다. 이것이 세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앞에서 말한 정지용시집 편제를 따른 바로 그 시집이다. 그리고 1967년 2월에는 백철, 박두진, 문익환, 장덕순의 글을 책 말미에 추가 수록하고 판형을 바꾸어 새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대중 보급판이 완료된 셈이다. 이러한 텍스트의 역사 안으로 제국과 식민, 기억과 망각, 해방과 분단과 전쟁의 흔적이 흘러간다. 그 점에서 모든 텍스트는 역사적 산물이다. 우리가 텍스트의 맥락과 구성까지 면밀히 들여다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습작과 완성작, 진정한 윤동주 정전을 위하여  윤동주는 명동소학교에 들어간 이후 죽을 때까지 학생 신분으로만 있었다. 학교도 여럿 다녔다.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학생’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견지하면서, 선행 명편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 가운데 핵심이 되는 표현이나 사유에서 자신의 시적 좌표를 정성스레 찾아갔다. 마치 서양화 그리는 학생이 데생 연습을 반복하면서 어떤 상(像)을 그려가듯이, 윤동주는 선배들의 빛나는 성과에 힘입어 자신의 시상(詩想)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해간 것이다. 그 대상은 정지용, 김광섭, 이상, 백석, 이용악 등에 두루 걸쳐 있다. 특별히 정지용의 압도적 영향 아래 여러 편의 습작들을 써두었다.  그러나 윤동주는 자신이 마지막 정리한 친필 시고에서 정지용 모작들을 모두 뺌으로써, 그것들이 학생 시절 습작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그러니까 윤동주가 남긴 노트의 습작들을 인용하면서 그가 엄선한 작품들과 등가적으로 처리하는 일은 적절치 않다. 심지어 그것을 예로 들어 윤동주 시의 결함이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전혀 온당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윤동주가 최종적으로 갈무리한 19편을 일단 윤동주 정선(精選)이라고 보아야 하고, 그 나머지는 섬세하게 실증적 위상을 따져 윤동주의 ‘습작’과 ‘완성작’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그가 오랜 습작기를 거쳐 진정한 ‘시인’에 이르게 된 과정을 온전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문화일보 )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1373    윤동주, 시 한수가 씌여지기까지... 댓글:  조회:2710  추천:0  2019-01-20
2017-07-11    【서울=뉴시스】 소년 윤동주   【서울=뉴시스】 신동립 기자 = 시인 윤동주(1917~1945)가 쓴 글 124편을 모두 담은 ‘윤동주 전 시집’이 나왔다. 윤동주의 작품 전체를 한 권에 수록한 첫 책이다.   소실되지 않은 윤동주의 시와 수필뿐 아니라 윤동주를 위해 쓰여진 서문, 후기, 발문도 빠뜨리지 않았다.    ‘윤동주 전 시집’ 제1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은 1948년 초판본 전문이다.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는 1948년 본의 시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을 소개했다. 3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79’는 1948년 본과 1955년 본에 없는 시들로 이뤄졌다. 4부 ‘나중에 발굴된 시’는 기존의 윤동주 시집에서 볼 수 없는 작품 8편이다. 1~3부 시들은 당시 발간된 본문 순서대로, 4부는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를 빼고는 창작연도에 따라 실었다.  9인의 윤동주 추모문은 자체로 하나의 문학작품이라는 평이다. 1부에서는 1948년 나온 원본 그대로 정지용의 서문, 유영의 추도 시, 강처중의 발문을 읽을 수 있다. 북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사라진 정지용과 강처중의 글을 현대어로 정리해 넣었다. 2부에는 정병욱의 후기와 윤일주의 ‘선백(先伯)의 생애’, 3부에는 백철·박두진·문익환·장덕순의 후기가 들어있다. 윤동주 연보는 4부 뒤에 게재했다.   【서울=뉴시스】 윤동주(뒷줄 오른쪽) 은진중학에서 숭실중학으로 편입했을 무렵이다. 초판본의 서문과 발문 등은 1955년 이후 인쇄본에는 누락됐다. 시인 정지용은 6·25동란 때 납북됐고, 경향신문 기자 강처중은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가족에게 남기고 1950년 9월4일 가출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당시 강처중은 남로당 지하당원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 전쟁이 터졌고, 서울로 침략한 인민군이 형무소를 개방하자 집에서 두 달 남짓 요양하다가 떠났다. 정지용은 1950년 9월께 동두천 부근에서 폭격에 희생됐다.    정지용은 ‘서(序)’에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遺稿)에 분향하노라”고 적었다. 그리고 애도했다. “노자(老子) 오천언(五千言)에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虛基心 實基腹 弱基志 强基骨)’이라는 구(句)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강처중은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고 발문에 남겼다.  【서울=뉴시스】 윤동주 전 시집 윤동주의 친구인 문익환은 ‘동주 형의 추억’을 전했다. “나는 동주 형이 시인이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시를 쓴다고 야단스레 설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는 사상이 능금처럼 익기를 기다려서 부끄러워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양 쉽게 시를 썼다. 그렇게 자연스레 시를 쓰는 듯이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취미로 시를 쓴다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그는 몇 수의 시를 남기려 세상에 왔던 것이다. 그의 가장 동주다운 멋은 역시 그의 시에 나타나 있다고 나는 믿게 되었다. 그는 사상이 무르익기 전에 시를 생각하지 않았고, 시가 성숙하기 전에 붓을 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시 한 수가 씌어지기까지 그는 남모르는 땀을 흘리기도 했으련만, 그가 시를 쓰는 것은 그렇게도 쉽게 보였던 것이다.” 264쪽,   =========================================/// 덤으로 더... ... ‘동(冬)섣달 꽃 같은 청년시인, 연심을 품었다’에서는 시인과 관련해 거의 알려진 바 없는 여성 관계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저자는 자료와 정황을 토대로 생전에 세 명의 여성과 연을 맺었다고 설명했다. 시인의 절친한 후배였던 국문학자 장덕순의 말을 빌려와 ‘해란강변(별칭: 연애공원)을 함께 거닐었던 추억 속의 여자’가 시인의 시에서 ‘순(順)’ ‘순(이)’로 표현하는 여성일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경남일보
1372    {자료} - 윤동주 시의 무궁무진한 힘과 그 가치... 댓글:  조회:2834  추천:0  2019-01-20
윤동주와 그의 시에 대한 분석심리학적 해석 오광욱(용정, 윤동주연구회 회원,연변대학 문학박사)   1. 들어가는 말   민족시인 윤동주(1917.12-1945.2)에 대한 연구는 1948년 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된 후 많은 연구자들에의하여 지금까지 활발하고 다각적인 시각에서 다루어져 왔다. 윤동주는 당시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심하고 문필활동이 자유스럽지못한 상황에서 125편의 시, 동시, 산문 등을 남겼는데 지금까지 시인에 관한 각종 연구논문, 저서 등은 220여 편에 달하고 있다. 윤동주에 대한 연구를 간단히 살펴보면 크게 전기적 사실에 대한 연구, 문학사적위치에 관한 연구, 정신사적 측면에서의 연구, 비교문학적연구, 원전확정에 관한 연구, 형식적 측면에서의 연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정신사적 측면에서의 연구는 다시 크게 주체성, 저항성, 종교성 등에 대한 연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처럼 시인과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다각적인 시각과 심도 있는 차원에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윤동주의 시를 조명한 논문은 손꼽을 정도로 가련한 상황이다. 심리적 모티브에서 일어나게 된 인간의 활동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활동의 결과인 문학작품도 역시 심리학의 대상이 될 수 있듯이 시인의 작품도 심리학적인 관점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리고 또한 윤동주의 시가 오늘날까지 작가와 다른 시대, 사회에 살고 작가와 전혀 다른 경험을 지니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사랑받는 것도 시대와 사회를 초월한 우리들이 모두 공감하는 어떤 보편적인 제시를 심리적으로 우리들에게 안겨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여 본고에서는 윤동주와 그의 대표적인 시 작품들을 칼·융(Carl Gustav Jung,1875-1961)의 분석심리학으로 해석해보려 한다. 윤동주에 대한 이러한 심리학적 접근은 한 작품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는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해줄 수 있을 뿐더러 시인의 정신세계를 진일보 파헤쳐 작품의 심층적 의미와 지니고 있는 가치를 더욱 분명히 할 수 있을 뿐더러 현시대 심리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된다.     2. 자아의 성숙   칼·융의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의식의 중심에는 자아(自我)가 존재하고 무의식의 중심에는 자기(自己)가 존재하는바 의식 속의 자아가 무의식의 내용물을 부단히 파헤치고 깨달아나가 자기와 포옹할 때 자기성장, 즉 자기실현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의식의 중심에 위치한 자아는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하나는 바깥세계와 관계를 맺고 이에 적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의식의내면세계를 살펴 이와 관계를 맺고 이에 적응하는 기능이다. 의식의 중심으로서 의식을 통제하고 견고히 하는 것이 자아이지만 동시에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에 받아들여 이를 동화시키거나 그 뜻을 인식하는 것도 자아의 몫이다. 그만큼 성숙된 자아는 자기실현의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되는 것이다. 윤동주는 기독교가정에서 태어나 종교적인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소학시절 윤동주는 서울에서 발행되던 아동지 《어린이》와 《아이생활》 등 잡지를 정기적으로 구독하였고 5학년 때에는 송몽규 등과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 잡지를 만들 정도로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우등생인 것으로 전해진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어린 시절 윤동주는 이미 자아가 의식의 중심을 통치하고 자아의식이 어느 정도 성숙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윤동주의 성품에 대하여 동생 윤일주는 “동주형의 근실하고 관유함은 할아버지에게서, 내성적이요 겸허함은 아버지에게서, 온화하고 치밀함은 어머니에게서 각각 물려받은 성품”이라고 말하였다. 윤동주와유년시절을 같이 보낸 문익환도 회고담에서 윤동주를 “내면적이고 말수 적은 사람이지만 그를 건방지다고 보지 않았고 모두들 그런동주와 사귀고 싶어했다”고 말하였다. 그 외에 장덕순도 윤동주를 “外美内美한 인간이며 그의 시가 아름답듯이 그의 인간도 아름답고 그의 용모가 端正优美하듯이 지극히 아름답다”고 하였다. 상기 진술에서처럼 윤동주가 “근실하고 관유하고 겸허하고 온화하고치밀하고 내성적이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역시 자아가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자아의식이 어느 정도 성숙되었음을 의미하며 “건방지지 않았다”는 것은 어린 윤동주에게 있어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이미 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시인의 이런 성숙된 자아의식은 그의 초기작품인 《초 한대》, 《거리에서》등 작품에서도 아주 잘 나타나고있다.   초 한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맛는다.   光明의 祭坛이 무너지기전 나는 깨끗한 祭物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같은 그의 몸. 그의 生命인 心志까지 白玉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暗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祭物의 伟大한 香내를 맛보노라.   -1934년 12월 24일, 《초 한대》전문   시인은 초 한 대를 깨끗한 제물, 염소의 갈비뼈로 비유하면서 자기희생정신을 노래하고 있으며 생명인 심지까지 불태우면서 어둠을밝힌 한 대의 초와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예수를 동일화함으로써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살려는 시인의 성숙된 자아의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1935년 9월 1일, 윤동주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여 평양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되어 수학하지만 이듬해 봄, 신사참배 거부문제로학교가 폐교당해 다시 용정광명중학교로 전학해 중학교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소년잡지에 글도 게재했고 많은 양의 책을 읽었으며 문학에 상당히 심취해 있었다. 자아의 성숙과 함께 시인은 차츰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세계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   달밤의 거리 狂风이 휘날리는 北国의 거리 都市의 真珠 电灯밑을 헤염치는 조그만 人鱼 나, 달과 전등에 비쳐 한몸에 둘셋의 그림자,   커졌다 작아졌다. 괴롬의 거리 灰色빛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 마음 旋风이 일고 있네   -〈거리에서〉중에서   1935년 북간도에서의 일제의 탄압과 통치가 극심해진 시기에 씌여진 이 작품에서 어린 윤동주의 자아가 느끼는 북간도의 거리는 광풍이 휘날리고, 괴로움이 넘쳐나고, 회색빛에 잠긴 쓸쓸하고 암울한 거리다. 현실세계는 결코 자아가 느끼고 있던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36년 봄에 씌여진 작품 《닭》에서도 “한间 鸡舍 그넘어 苍空이 깃들어, 自由의 乡土를 잊은닭들이, 시들은 生活을 주잘대고, 生产의 苦劳를 부르짖었다.”고 씀으로써 시인은 자유와 고향을 잃어버리고 피폐한 생활난에 허덕이는 우리 민족을 닭에 비유하면서 슬픈 현실의식을 잘 나타냈다. 《초 한대》등 작품에서 보여 지는 것이 종교적인 환경 속에서 일상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아의식의 성숙이라고 할 때 《거리에서》, 《닭》등 작품에서 보여 지는 것은 실존적인 차원에서의 좀 더 성숙된 자아의 현실적인 의식이라 할 수 있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부친이 원하는 의과를 포기하고 대신 연희전희학교 문과에 송몽규와 함께 입학한다. 여기서 윤동주가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고집대로 좋아하는 문과를 택함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자아가 완전히 의식의중심을 굳게 통제하고 자아의식이 상당히 성숙되었음을 의미하는바 이제는 힘 세고 성숙된 자아가 무의식의 여러 내용물들을 서서히 맞이할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무의식의 의식화, 즉 자기실현을 시작하였다.     3. 무의식의 의식화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무의식은 거대한 창조적 힘을 지니고 있고 사람은 생명본연의 성질에 따라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모든 정신적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기를 원하기에 자아가 자기를 향해 가는 것, 즉 자기실현을 하는 것은 자아가 무의식을 적극적으로 의식화함으로써 가능하며 무의식을 보는 작업은 힘들고 고민과 고통이 동반될 뿐더러 인간의 삶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과제라고주장한다. 이제 시인 윤동주가 어떻게 자신의 무의식을 의식화하는가를 작품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발에 터부한 것을 다 빼어 바리고 黃昏이 湖水우로 걸어 오듯이 나도 삽분삽분 걸어 보리이까?   내사 이 湖水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 온것은 참말 异迹이외다.   오늘 따라 恋情, 自惚, 猜忌, 이것들이 자꼬 金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余念없이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湖面으로 나를 불러 내소서.   -1938년 6월 15일, 《이적》전문   작품 《이적》에서 황혼이 내려앉은 어느 날 시인은‘부르는 이’ 없는 ‘소리’를 따라 기이하게도 호수가로 와 연정, 자홀, 시기 등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우선, 시간적으로 볼 때 황혼이다. 황혼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대략 중간쯤 되는 시간 때다. 낮은 의식세계요 밤은 무의식세계를 상징할 때 황혼은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가 만날 수 있는 경계선인 것이다. 바로 이 경계선에서시인은 무의식 세계로 진입하였던 것이다. 다음, 시인이 다가간 곳은 호수이다. 심리학적으로 호수는 그 깊이, 내용물 등을 가늠하기어려운 존재인 것만큼 미지의 세계, 즉 무의식세계를 상징하며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와의 대면을 상징한다. 셋째로 호수라는 무의식세계를 마주하고 시인이 느껴지는 연정(恋情), 자홀(自惚), 시기(猜忌) 등은 무의식의 여러 가지 내용물로서 시인의 자아는 바로무의식을 의식화하였음을 상징한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어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忆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년 9월, 《자화상》전문   상기《자화상》에서 ‘우물’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심층적공간이다. 즉 분열된 자기를 엄중하게 들여다보고 내면적 고통과 맞대면하는 공간이며 자기성찰의 공간이다. 무의식의 의식화, 즉 자기실현을 위해서는 우선 “나는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와 같은 아주 근원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을 바탕으로 하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하여 시인은 자기성찰을 하는 바 현재의 자신을 미워하고 자기성장과정에서 내면적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자신이 가엽게 생각되고 ‘있어야 할 자신’ 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있어야 할 자신’이바로 ‘自己’이며 자기실현은 ‘있는 나’인 자아가 ‘있어야 할 나’인 자기를 찾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바로 무의식세계를 인식하고 자기성장 즉 자기실현을 요구한 것이다. 자기실현을 의식의 중심인 자아가 의식과 무의식을 합친 전체정신의 중심인 자기를 찾아가 포옹하는 과정이라고 칼·융은 말한다. 윤동주의 대부분 시는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려는 자아의 자기실현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시인은 바로 작품을 통하여 무의식을 의식하고 자기실현에 도달하려는 확고한 신념과 그 욕구를 아주 잘 표현하였다. 《무서운 时间》(1941.2.7) 에서 “거 나를 부르는것이누구요”, 《또 太初의 아침》(1941.5.31)에서 “하얗게 눈이 덮이였고 电信柱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启示일까”에서 모두 ‘소리’가 등장한다. 이 ‘소리’를 심리학적으로 볼 때, 무의식의 ‘부름’이고 나를 일깨우는 각성의 소리이며 평화로운 존재의 상태를 뒤흔들어 고통스런 번민을 시작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소리인 것이다. 윤동주가 자기실현을 위하여 이미무의식의 의식화를 시작하였음을 시사하는 바다. 그리고《또 다른 故乡》(1941.9) 에서 “가자 가자 쫓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아름다운 또 다른 故乡에 가자.”와 《序诗》(1941.11.20)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한 것처럼 시인의 확신에 가득한 “가자”라는 결심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바로 자기실현을 향한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칼·융의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무의식의 의식화과정에는 수없이 많은 내적인 고민과 갈등이 동반된다. 시인의 《바람이 불어》(1941.6.2) 에서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理由가 없다”, 그리고 또한 《序诗》(1941.11.20)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한 것처럼 바람으로 인해 시인은 괴로움을 깨닫고 있으며 심리학적으로 그것은 바로 자신 내부의 문제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시인이 처한 시대와 현실상황을 잠시 떠나 심리학적으로 볼 때 윤동주한테 고민과 갈등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바로 성숙한 자아가 거대한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과정에서 감수해야 하는 심리적 고민과 고통인 것이다.     4. 그림자의 인식과 통합   칼·융의 분석심리학에서 그림자는 의식에 가장 가까운데 있는 무의식의 내용이며 무의식의 의식화과정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심리적 내용이다. 그림자는 자아의 어두운 면, 자아로부터 배척되고 버림받아 무의식에 억압된 자아의식의 여러 가지 성격 측면이다. 쉽게 말하면 그림자는 “나”가 싫어하는 “또 다른 나”, 앞으로 “나”가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나의 어두운 “형제”다. 그래서그림자는 자아와 비슷하면서도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부정적이고, 열등한 측면과 자아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도덕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그림자는 우리가 직면하기를 꺼려하는 모든 열등요소고 아직 자아가 접수하지 않은 요소들이지만 사람의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들이기에 언제나 의식에 동화되려 하며 우리가 그림자를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지고 심하면 자아의식을 덮쳐 지배하고 자신뿐만 아니라 남까지도 해칠 수 있는 거대한 파괴적인 힘이 작동된다. 하여 칼·융은 “사람들이 그림자를인식하지 못할 때 그것은 본능의 냉혹하고 위험한 양상을 지니게 된다”고 주장한다. 무의식에 잠재한 그림자는 단지 햇빛을 보지 못하여 나쁜 것처럼 보일 뿐 의식화로서 그림자는 발전될 뿐더러 자기실현의 좋은 에너지, 좋은 밑거름으로 될 수 있다. 하여 자아의 버림으로 무의식에 억압된 그림자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살려서 자신의 것으로 통합하여야만 정신적으로 더 성숙되고 더 인간적인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이다. 이제 윤동주가 어떻게 자아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여 자기실현을 향한 힘겨운 여정을 시도하였는지를 살펴보자. 1941년 9월,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시절에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고향》을 쓴다. 이 시는 윤동주가 최초의 시 《초한대》(1934년)에서 마지막 시 《쉽게 씌여진 시》(1942년)에 이르는 자기 찾기 과정의 중심에 있는 시로서 윤동주가 자기 내면의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면서 전체정신의 중심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故乡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房은 宇宙로 通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风化作用하는 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것이냐 아름다운 魂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乡에 가자.   -1941년 9월, 《또 다른 故乡》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어두운 방’에 처해있고 ‘어두운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서는 바람이 불어온다. 이런 방에서 시적 자아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고 또 다른 고향에 가기를 갈망한다. 심리학적으로 해석할 때 우선 어두운 방은 무의식세계를 상징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자아에 흡수되기를 바라는 무의식의 내용물이다. 때문에 시적자아는 ‘바람’이라는 무의식의 공격에 괴로움을 느끼고있다. 다음 어둠을 짖는 ‘지조높은 개’는 시적자아의 내면을 각성시키고 깨닫게 만드는 영혼의 목소리다. 셋째로 이 시에서 시적 자아는 ‘나’와 ‘백골’과 ‘아름다운 혼’으로 분열되고 있는데 특히 ‘백골’과 ‘아름다운 혼’은 대립의 관계에 처해있다. 또‘백골’이라는 시어가 4회 등장하는 바 이는 무게중심이 ‘아름다운 혼’ 보다 ‘백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시에 나타나는 ‘백골’은 자아의 버림으로 무의식에 잠재한 그림자며 ‘아름다운 혼’은 전체정신의 중심인 자기로, ‘나’는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에받아들여 이를 동화시키거나 그 뜻을 인식하려는 성숙된 자아다. 여기서 시인은 분명 ‘백골’이라는 그림자를 인식하고 있으며 그그림자를 통합하고 ‘아름다운 고향’으로 상징되는 자기, 즉 자기실현에 도달하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세계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여 전체정신의 중심인 자기로 다가가려는 힘겨운 노력과 도전은 고국에서의 마지막작품 《忏悔录》(1942.1.24) 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보자. 그러면 어느陨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우선 여기에서 밤은 무의식세계를 상징하고 거울은 《자화상》의 우물처럼 자기성찰의 상징적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거울을 통하여 자아를 응시하고 무의식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다음운석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행동인 것만큼 자기실현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음을 상징하고 슬픈 사람의 뒤 모양은 바로시인 자아의 버림으로 무의식에 잠재한 어두운 그림자를 상징한다. 이런 자신의 그림자를 통하여 자아를 응시함은 시인이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살려서 보기 좋게 통합하는 걸 상징한다. 칼·융은 진정한 자신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세계의 자신의 그림자를 억압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왜냐 하면 이러한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자기의 주동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만이 자신이 싫어하는 “어두운 형제”인 그림자를통합하여 그 속의 창조적인 힘이 의식세계를 지배하게 함으로써 심리학적인 의미의 성장, 즉 자기실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여칼·융은 그림자를 통합하는 것은 평생 동안 해나가야 할 작업이라고 잘라 말한다. 1942년 1월 29일,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한 후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은 윤동주에게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일제의 식민통치 속에서서럽고 힘겨운 삶을 영위하는 모든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분명히 모두가 싫어하는 그림자다. 이러한 그림자를 직면하여 윤동주가 도일(渡日)함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자신이 싫어하는, 힘이 강한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윤동주의 일본에서의 작품을 보기로 하자.   黃昏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로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이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소리를 들을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든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든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고장으로 돌려 보내면 거리 모통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든 흰 그림자들,   내 모든것을 돌려 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黃昏처럼 물드는 내방으로 돌아오면   信念이 깊은 으젓한 羊처럼 하로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1942년 4월 14일, 《흰 그림자》전문 우선 시간적으로 보면 황혼이다. 황혼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가 만날 수 있는 경계선이며 이 경계선에서 시인은 무의식세계로 진입하였던 것이다. 다음 발자취소리는 무의식의 ‘부름’이고 나를 일깨우는 각성의 소리다. 셋째로 시적자아를괴롭게 만들었던 수많은 ‘나’와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는 자아의 어두운 ‘형제’인 그림자이며 수많은 ‘나’를 제고장으로 돌려보내고 또한 ‘흰 그림자’를 연연히 사랑함은 자아가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신이 오래도록 들여 보았던 어두운 내면의 그림자를 통합한 후 시적자아는 그제야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 즉 깨달음을 얻은 양이요, 자기실현을 이룬 인간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세계의 그림자를 통합하고 자기실현을 향한 자아의 절실한 갈망과 힘겨운 도전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완성도가 높은 절창인 《쉽게 씌어진 诗》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时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最后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慰安으로 잡는 最初의 握手. -1942년 6월 3일, 《쉽게 씌여진 诗》중에서   이 시에서 윤동주는 자신의 무의식세계의 그림자인 ‘어둠’을 통합하고 자기실현을 이룬 ‘最后의 나’ 가 되기를 희망하고 ‘最后의나’를 전체중심인 자기로 상징한다고 할 때 시인은 바로 자아와 자기가 포옹하고 악수하는 성숙되고 지혜로운 모습, 즉 자기실현에도달한 자신을 심리적으로 갈망하는 것이다.     5. 나오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윤동주의 생애와 그의 작품을 중심으로, 특히는 작품을 완성한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윤동주의 내면의 정신세계를살펴보았다. 기독교적인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고 자아가 의식의 중심을 굳게 통치하고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분화되었을 뿐더러 자아의식이 어느 정도 성숙되었다. 그리고 자아의 성숙과 함께 시인은 차츰 자신이 처해있는참혹한 현실에 눈길을 돌리게 되며 자기실현을 서서히 시작하였다. 자기실현을 함에 있어서 시인의 자아는 무의식의 부름을 듣게 되고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과정에서 내적인 고민과 갈등을 겪게 되며 이러한 것을 자신의 《서시》등 작품을 통해 아주 잘 표현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고향》, 《참회록》 등 작품에서 시인은 자신의 ‘어두운 형제’인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여 자기실현을 지향하며 도일의 심층적인 의미와 도일후 작품인 《흰 그림자》, 《쉽게 씌여진 시》 등 작품에서도 자신의 그림자를 진일보 통합하는 모습과 자기실현을 향한 갈망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전체정신인 자기에 도달하기 위한 시인의 절실한 욕망이며 자신한테 주어진과제이기 때문이다. 분석심리학에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누구에게나 자기실현, 즉 전체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의식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모든 사람이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기실현은 사실 엄숙한 것도 심각한 것도 아니다. 바로개인의 ‘평범한 행복’을 구현하는 과정이며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으나 아직 실현하지 못한 삶을 가능한 한 많이 실현하는 것이다. 특히 삶의 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자기실현은 행복 그 자체거나 행복한 삶의 중요한 조건이자 자질이다. 윤동주의 대부분 작품들은 전체중심인 자기를 찾아가려는 자아의 자기실현을 표현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종교, 시대와 사회를 떠나 현재까지 우리 모두가 시인의 작품에서 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시인은 보편적인 인간심성이며 인간의 원초적 조건인 자기실현을 작품 속에 구현하였고 또한 독자들한테 심리적으로 진정한 행복을 위해 자신의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하는 과정, 즉 자기실현을 적극 요구한 것이다. 바로 우리 모든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한 자기실현의 욕구를 작품 속에 표현한 것이 윤동주의 많은 대표적인 시가 우리 후세한테 전해주는 심리적인 제시이고 수많은 독자들이 공감하고 또한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이며 진정 윤동주의 시가 지니고 있는 무궁무진한 힘과 크나큰 가치인 것이다.     오광욱 프로필: 문학박사, 연변작가협회 회원, 《두렵게 노크하다》(공저), 《최서해 소설의 인간형과 대사회적 대응양상》, 《윤동주 향토애의 심성과 그의 시세계》, 《리색 한시연구》,《김혁의〈마마꽃, 응달에 피다〉에 대한 분석심리학적고찰》 등 논문이 있음. 현재 연변대학 재직 중.
1371    연세대의 건물들은 기억하고 있다... 댓글:  조회:3587  추천:0  2019-01-20
      언더우드관. 스팀스관 아펜젤러관. 언더우드 동상.   스팀스관 / 사적 제275호 / 일제강점기 1920년. 스팀스관은 1920년에 준공된 옛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의 건물로 사적 제275호이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거주하던 찰스 스팀슨의 기부금으로 캠퍼스에 세워진 최초의 석조건물이다. 아펜젤러관 / 사적 제277호 배재학당 설립자인 아펜젤러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 매사추세스 피츠필드시의 기부를 받아 1921년에 착공해 1924년에 완공했다. 석조 3층의 단아한 고딕풍 건물로 언더우드관과 함께 연세대에 두 번째로 세워졌다. 언더우드관을 중심으로 스팀슨관과 아펜젤라관이 앞으로 들어서 "ㄷ"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당시 이 건물은 이학관으로 자연과학계의 강의동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사용하고 있다. 언더우드관 / 사적 제276호 / 완공년도 1924년. 이 건물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1924년 완공된 연면적 2,700m2의 근대식 4층 건물이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자인 고 원두우(元杜尤, H. G. Underwood)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언더우드 관이라 하였다. 설립자의 장남 원한경 교수가 초석을 놓았고, 공사 감독은 스팀슨관과 아펜젤러관을 감독한 화학교수 밀러가 맡았다. 당시 문학관이라 불리었으며 본래는 강의동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대학본부로 쓰이고 있다.  이 건물은 중앙 현관문이 튜더(Tudor)풍의 아치로 되어 있는 준고딕양식의 웅장한 석조 건물이며, 스팀스관과 아펜젤러관이 건물 양쪽으로 인접하여 건물군이 "ㄷ"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의 중앙부에는 1개 층의 탑옥(塔屋)이 솟아 있다.        언더우드관.   최현배 선생 동상.       윤동주 기념관(핀슨 홀).   핀슨 홀과 윤동주. 연희전문학교 창립 초기에 공이 큰 미국 남감리교 총무 핀슨박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핀슨홀로 명명된 이건물은 1922년에 학생기숙사로 준공되었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윤동주(1917~1945)는 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사색하고 고뇌하며 시 쓰기에 전념하였다.   기념관 입구, 기념관은 2층에 있다. 윤동주 생가 기와. 윤동주 시인의 생가 지붕 수막새 기와에는 특이한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집안의 깊은 신앙심과 애국심을 나타내는 태극문양과 무궁화 그리고 십자가. 이런 문양을 보며 조국에 대한 사랑을 키워왔던 시인은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또 다른 고향집을 보게 된다. 연희전문학교에는 건물마다  정면 꼭대기와 출입문 그리고 돌계단에 조차 태극이 새겨져 있고, 정원 곳곳에 무궁화가 만발하였으며, 뒷면 벽 꼭대기에 새겨있는 열두송이 무궁화를 본 윤동주 시인은 고향을 발견한 듯 남다른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연희는 민족적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로, 만주에서 볼 수 없는 무궁화가 캠퍼스에 만발하여 있고, 도처에 우리 국기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일본말을 쓰지 않아도 되고, 우리 말로 가르치는 조선문학도 있다(고향에 돌아간 윤동주의 연희전문 소개말 중, 장덕순의 증언) 명동촌 막새기와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명동촌의 사람들은 모두 집의 지붕 막새기와에 무궁화, 십자가, 태극문양 등을 새겨 넣을 만큼 애국심과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100여년이 지나 우여곡절 끝에 우리 앞에 그 편린을 드러낸 그들의 용광로같은 조국애가 우리 가슴에 뜨거운 북을 울린다.  -김재흥선생(김약연 목사의 증손) 기증-   참회록 / 육필 원고와 해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래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1941년 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에 유학하여 대학과정을 밟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때 일본에 유학하고자 하려면 필수적인 것이 창씨개명이었다. 창씨개명 압박에 못이겨 숭실학교를 자퇴까지 했던 윤동주이지만, 결국 일본유학 수속을 위하여 성씨를 라 바꾸게 된다. 윤동주는 1942년 1월 졸업증명서 등 도일 수속을 위하여 연희전문에 창씨계를 제출하는데, 창씨계를 제출하기 5일 전인 1월 24일의 시작품은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된다. 참회록은 일제가 강요하는 창씨개명에 굴복한 자신에 대한 참회로, 시에서 나오는 만 24년 1개월은 1917년 12월생으로  1942년 1월에 만 24년 1개월이 된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당시에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창씨개명이었지만 그로 인해 상당한 괴로움을  표현했다. 그의 괴로움과 번민은 시 본문 뿐 아니라 원고 여백에 쓰여진 낙서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공상(空想) 내 마음의 탑(塔) 나는 말없이 이 탑을 쌓고 있다. 명예(名譽)와 허영(虛榮)의 천공(天空)에다, 무너질 줄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   무한(無限)한 나의 공상.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을 펼처서, 나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황금(黃金), 지욕(知慾)의 수평선(水平線)을 향하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 1955년 증보판 / 표지그림, 김환기.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48년. 그의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으로 유고 시집 를 출간하였다.(정음사) 1955년에는 윤동주의 서거 10주년을 기념하여 유고를 보충한 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1948-   용재 백낙준 박사상 여기 모신 이 어른은 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통합하여 연세대학교로 다시 세운 초대총장 백낙준 박사이시다. 교육과 학문 민족봉사와 자유정신의 구현에 뜻을 두시고 일생동안 연세와 민족을붙들고 키운 연세의 정신적 지주시며 민족교육의 스승이시며 겨레의 지도자시고 하나님의 종이시다. 일찌기 연세를 국학연구의 발상지로 민족교육의 터전으로 진리 자유의 전당으로 힘써 이끄시며 연세는 연세인의 연세요 한민족의 연세요 세계의 연세임을 밝히시고 연세에 맡기어진 하늘의 사명을 일깨워 주시다 그러기에 용재 선생에게 있어서 연세는 사랑이요 생명이시니 여기 연세인과 함께 영원히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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