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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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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0    [시공부 101] - 32... 댓글:  조회:2828  추천:0  2020-04-04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감정이입과 객관적 상관물의 차이?     분야 현대 시 목차 정말 슬픈 건 누구일까? 객관적 상관물 : 감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대상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본질과 속성 고등학교 문학 문학 작품의 구성 원리 시를 공부할 때 감정이입이라는 말과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둘 다 화자의 정서를 다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것이라는데 차이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정말 슬픈 건 누구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감정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온갖 정서를 타인과 나누고 싶어 하지요. 타인에게서 공감을 얻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시에서도 감정을 다른 것과 함께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감정이입이지요. 이 말은 독일의 헤르만 로체가 1858년에 처음 사용한 표현입니다. 시적 화자의 감정을 다른 대상에 이입하여 마치 대상이 화자의 정서를 함께 느끼는 것처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백석, 「여승」 중에서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김소월, 「초혼」 중에서 백석의 「여승」에서 “산꿩도 섧게 울은”이라는 말에서 ‘섧게’는 ‘서럽게’를 줄인 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산꿩이 서러워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요. 산꿩은 서러움을 느끼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산꿩이 시 속 상황을 이해하고 서러움에 빠지기는 더욱 힘들겠지요. 따라서 산꿩이 서럽다는 것은 시적 화자가 느끼는 서러움을 산꿩에 이입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김소월의 「초혼」에서 사슴의 무리가 슬피 운다고 했지만 사슴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인간이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슬프다는 감정은 시적 화자의 정서를 이입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의인법으로 표현된 것들도 감정이 이입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네요. 객관적 상관물 : 감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대상 자, 이제 감정이입과 구별이 잘 안 되는 ‘객관적 상관물’을 살펴봅시다. 객관적 상관물은 20세기 초 영국의 문예비평가이자 시인인 T. S. 엘리어트가 사용했던 말로 그 역사가 감정이입보다는 짧습니다. 객관적 상관물은 화자의 감정이나 생각을 주관적으로 바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대상이나 정황에 빗대어 표현할 때, 그 대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슬프다는 말을 직설적으로 쓰지 않고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구슬프게 내리는 비’를 동원할 때 바로 ‘비’가 객관적 상관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정이입에 사용된 표현들은 모두 객관적 상관물이 됩니다. 백석의 「여승」에서의 ‘산꿩’과 김소월의 「초혼」에서의 ‘사슴’은 감정이입의 대상이기도 하고 객관적 상관물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입과 객관적 상관물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적 상관물 중에는 감정이입이 아닌 것들도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객관적 상관물은 화자가 어떤 정서를 느끼게 되는 계기를 제공해 주는 대상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즉 화자가 느끼는 감정과 같은 감정을 갖지 않더라도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이라면 객관적 상관물로 볼 수 있지요. 우리 집도 아니고 일가 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용악,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중에서 시적 화자는 고향이 아닌 곳에서 침상도 없이 비참하게 운명하신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화자는 자신의 쓸쓸하고 힘겹고 외로운 정서를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지요. 따라서 풀벌레 소리는 화자의 정서를 직접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화자가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느끼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풀벌레 소리에 감정이입이 직접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화자의 정서를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는 객관적 상관물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객관적 상관물은 감정이입을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감정이입 외에도 화자의 정서에 기여하는 모든 대상이나 정황 들을 포괄하는 보다 넓은 범주의 개념이라고 보면 됩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감정이입은 슬프다, 기쁘다, 자랑스럽다 등등의 감정을 드러낼 만한 표현이 있는 경우이고, 그런 말이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감정을 일깨우는 대상이나 정황이 존재하면 그것은 객관적 상관물로 보면 되는 것입니다. 감정을 절제한다는 표현도 가끔 눈에 띄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감정을 절제한다는 건 화자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코미디 배우가 무대에서 자신이 한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스스로 웃는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러면 관객들이 무대에 몰입하기가 어려워지겠지요. 그래서 배우들은 자기 감정을 절제한 채 공연을 해야 합니다. 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적 화자가 격정적으로 자기 감정을 내세울 때보다 자기 감정을 절제하여 전달할 때가 더욱 감정 전달이 잘 될 수 있으니까요. 독자가 작품을 읽을 때 더욱 안타까워할 수도 있지요. 정지용의 「유리창 1」은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고 쓴 작품이지만 어디 한 군데 슬프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그 슬픔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감정이입과 객관적 상관물의 차이?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89    언어 - 마음의 소리, 문자 - 마음의 그림 댓글:  조회:3218  추천:0  2020-04-03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문심조룡 마음과 언어의 예술적 만남 [ 文心雕龍 ] 이미지 크게보기 『문심조룡(文心雕龍)』의 본문 저자 유협(劉勰) 해설자 김민나(서울여자대학교 동양어문학부 교수) 목차 언어-마음의 소리, 문자-마음의 그림 예술정신이 충만한 시대를 살았던 작가 유협 문학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 - 감정과 예술적인 언어표현 작가의 창작활동 작품의 이상적인 스타일 독자의 감상 활동 본질적인 차원에서 문학예술을 탐구한 동양의 문예학 고전 더 생각해볼 문제들 추천할 만한 텍스트 언어-마음의 소리, 문자-마음의 그림 언어는 마음의 소리이며 문자는 마음의 그림이다. 『문심조룡(文心雕龍)』의 작가 유협(劉勰)은 『문심조룡』의 「서기」편에서 양웅(揚雄)이라는 고대 작가의 말을 인용하여 언어문자와 마음의 상관관계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문심조룡』의 서문에 해당하는 「서지(序志)」편에서는 『문심조룡』이라는 책이름(書名)이 갖는 의미를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문심(文心)'은 문학창작이나 문학 감상 또는 문학비평 등의 활동을 하는 인간마음의 전체적인 움직임, 다시 말해서 언어를 매개체로 하는 예술 활동을 위한 인간의 정신과 감정 및 영감의 작용을 말한다. '조룡(雕龍)'은 문학은 언어예술이고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미적인 가치라는 것에 근거한 상징적인 용어로서 용을 조각하듯 문학을 구상하고 창작하는 전 과정은 세심한 주의력과 기교 등이 요구됨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문심조룡』이라는 책이름을 오늘날의 용어로 재해석해 본다면 '문학 활동에 있어서의 마음의 작용과 언어문자의 예술적인 표현' 정도가 되겠다. 이제 간단한 해제를 통해 이 책의 주제는 다 밝혀진 셈이다. 유협은 이러한 그의 기본 논지를 단지 추상적인 이론으로 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국 고대의 문학현상을 시대 순으로 고찰하여, 구체적이고도 풍부한 실례를 바탕으로 객관성 있게 전개해 나갔다. 『문심조룡』은 그 구체적인 실례들을 통해서는 중국 고대문학 현상의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문학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양대 지주인 '문학 활동에 있어서의 마음의 작용'과 '언어문자의 예술적 표현'에 관한 이론의 전개를 통해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이 책의 요지를 파악하고 활용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예술정신이 충만한 시대를 살았던 작가 유협 『문심조룡』은 중국 진시황의 진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인 기원전 12~13세기경에서 『삼국지』의 배경이 된 삼국 시대를 조금 지난 서기 6세기 무렵까지의 문학 현상을 시대 순으로 관찰하고 연구하여 이론으로 집대성시킨 중국 고대의 문학이론서이다. 역사적인 저작 연대는 501~502년 사이로 추정되며, 작가는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살았던 유협(劉勰)이라는 사람이다. 중국의 미학자인 종백화(宗白華)는 그의 『미학과 의경』이라는 책에서 이 시기의 시대적인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나라 말엽에서 위진ㆍ육조 시대-중국의 4세기에서 6세기-는 정치적으로는 가장 혼란스럽고 사회적으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대였다. 그러나 오히려 정신사(精神史)적으로는 최고의 자유와 해방을 구가하고 지혜와 열정이 가장 풍부하고 농후했던 시기였다. 때문에 예술정신 역시 가장 풍요로웠던 시대였다. 작가 유협은 당시 소외된 지식인의 신분으로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던 정림사(定林寺)라는 절에서 중국의 고적들을 정리하는 일을 하였다. 중국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문심조룡』 저작에 커다란 밑거름이 된다. 유협은 가난하여 결혼도 하지 못했으며 일생 고적을 정리하고 문서를 살피는 낮은 관직에 종사하였다. 당시 유협은 문장실력을 인정받아서 유명한 승려들의 비문을 쓰기도 하였다. 『문심조룡』을 제외한 유협의 저작 중 『멸혹론(滅惑論)』과 「양건안왕조염산석성사석상비(梁建安王造剡山石城寺石像碑)」 한 편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유협은 역대의 문학 활동에 대한 반성과 사색을 통하여 기존의 문학이론서들과는 차별화 된 종합적인 문예이론서를 창작해냄으로써 후대의 문학연구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랐다. 안타깝게도 유협은 생전에 『문심조룡』으로 인한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국 고대 문학이론의 집대성이자 동양의 문예학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문심조룡』을 완성함으로써 비록 사후이기는 하지만 후대의 문학연구에 대대적인 기여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불후의 명성도 얻게 된다. 육조(六朝)1) 시대의 지식인들은 개인보다는 단체가 우선이었던 이전 가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의 감정과 삶의 가치를 긍정하고 중시하게 되었다. 감상활동의 주체가 되는 '정신', '뜻', '감정' 등 개인의 내면적인 가치를 중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의 형식 자체, 외적인 모습, 언어 문자 표현 자체, 언어 문자의 수식적인 아름다움이나 외적으로 드러나는 여러 장식들(采)의 미적인 특질도 중시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인물의 아름다움이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때 모두 공통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문학 작품을 감상할 때도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면서도 언어문자 표현이 아름다운 작품을 선호했다. 이에 문인들은 문예 활동의 매개체인 언어문자에 대한 반성과 고찰을 하였으며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작품의 예술적인 형식미를 다각도에서 추구하게 되었다. 개성과 예술의 형식미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문학에 대한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고 문예 관념이 성숙해졌다. 이에 따라 선진 시대 이후로 축적되어 온 문학유산과 당대의 저작들에 대한 비평과 반성이 이루어졌다. 유협은 이전의 창작 성과와 문학 평론들을 총괄하고, 여기에 나름의 창조적인 견해들을 더하여 이를 체계화함으로써 마침내 비교적 완전한 체계를 갖춘 문예 이론서인 『문심조룡』을 완성한다. 문학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 - 감정과 예술적인 언어표현 유협은 문학 활동에 있어서 감정과 예술적인 언어표현을 중추로 하여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작자와 작품과 독자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은 정감이 일어나면 그것을 언어 문자로 표현하며 작품을 보는 이는 언어 문자의 표현 형태를 통해서 작자가 표현하고자 했던 감정의 세계로 들어간다. 작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작자는 자신의 감정을 예술적인 언어문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작품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작품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적인 언어 표현의 형태이며 이러한 예술적인 표현 형태는 내적으로 작자의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의 형식을 이루는 언어 표현과 작품의 내용을 이루는 감정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이상적인 문예 작품으로서의 특성을 연출하게 된다. 독자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독자는 우선적으로 작품의 언어 표현을 접하게 되고 이를 통해 작자의 감정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예술적인 언어 표현은 문예작품의 미적 특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영역이고 감정은 문학 활동(창작과 감상) 자체가 가능하도록 하는 본질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문심조룡』의 문예이론은 감정과 예술적인 언어 표현이라는 양대 요소를 중심으로 작자의 창작 활동과 독자의 감상 활동 및 작품의 이상적인 스타일에 관한 논의를 골자로 하고 있다. 작가의 창작활동 유협은 외부의 현상에 감동을 받고 창작의 충동을 느끼고 상상력을 통해 문예구상을 이루고 이를 언어 문자로 표현해내는 과정을 창작을 하는 작가가 겪게 되는 심리 역정(歷程)이라고 보았다.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풍경이 있고 그 풍경들은 나름대로의 특수한 모습들을 지닌다. 감정은 풍경에 따라 변화하고 언어문자의 표현은 감정의 흐름에 따라 생겨난다. 작자는 외계의 사물에 대한 미적 경험을 통해(感物) 창작 충동을 느끼게 된다(興情). 작자는 외계현상에 대해 미적 경험을 하고 창작충동을 느끼게 되면 상상력을 통한 구상의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문학의 구상에 있어서 상상력의 범위는 참으로 크다. 그러므로 조용히 생각을 모으면 천 년의 삶도 접할 수 있고, 천천히 얼굴을 움직이면 만 리도 내다볼 수 있다. 글을 읊조리는 중에 주옥같은 소리가 나오고 눈앞에는 바람과 구름의 변화 많은 모습이 펼쳐진다. 이는 모두 상상력의 극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창작 구상에 있어서 상상이 필요한 궁극적인 목적은 문학적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데 있다. 생각이 진행되는 이치란 오묘한 것이라서 정신과 외계사물이 서로 만나 노닐게 한다. 정신은 마음에 있고 의지와 기질이 그것을 통제하는 관건이 된다. 외적인 사물이 눈과 귀를 통해 정신과 접촉될 때 언어는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표현수단이 잘 소통되면 표현하고자 했던 사물의 모습은 숨김없이 나타날 것이며 관건이 막히면 정신은 가슴속으로 숨게 된다. 상상 사유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상상 사유를 통해서 창조되는 문학적 이미지는 작자가 접했던 사물자체가 아니며 작자 감정의 단순한 투영도 아니다. 상상 사유의 이치가 오묘한 것은 실제적인 사물이 작자의 마음속에서 문학적 이미지로 전환되어 작가의 감정과 대상의 특징을 예술적으로 융화시킨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상상 사유 활동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유협은 그것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 작자가 취해야 할 마음의 상태와 수양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문예구상력을 훈련하는 데 있어서는 잡념이 없는 고요한 심경이 중요하다. 신체를 깨끗이 하고 정신을 맑게 하여 배움을 쌓아 지식의 보고들을 모으고, 이치를 헤아려 타고난 재능을 풍부히 가꾸고 이전 것들을 연구하여 환히 알도록 하며 생각의 흐름을 질서 있게 배열하도록 훈련한다. 문학은 작자의 구상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작자가 현실생활 가운데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언어 문자로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의 잠재적인 역량이 충분히 발휘되어야 한다. 정신이 맑고 기운이 충만하고 심정이 차분하게 안정된 상태가 되어야 작자는 창조적인 상상 활동을 전개시킬 수 있고, 이를 적절한 언어 문자로 표현해냄으로써 문예 작품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작자의 문예수양문제는 작자의 창작 활동을 논의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유협은 말하고 있다. 작품의 이상적인 스타일 유협은 작자에게 창작 충동을 느끼게 한 감정이 작품의 내용을 이루며 이를 형상화시킨 언어 문자의 표현 자체가 작품의 형식을 이룬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미적인 언어 표현이 결여된 작품이나 참다운 내용이 없이 화려한 수식만을 구사한 작품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유협은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룬 작품이 지니게 되는 스타일의 특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작품의 이상적인 스타일을 제시하고 있다. 유협은 작품이 이상적인 스타일을 이루기 위해 갖추어야 할 내용적인 면과 형식적인 면에서의 요건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요구하고 있다. 첫째, '풍(風)'이라는 것으로서 작자 개인의 감정과 생명력이 작품에 녹아들어 정취를 이룰 때 작품이 지니게 되는 감동력, 둘째, '골(骨)'이라는 것으로서 작자의 언어 문자의 활용 능력에서 비롯되는 어휘의 적절한 배치와 작품 구성의 치밀성, 셋째, '채(采)'로서 미적인 언어표현을 가리킨다. 유협은 이 세 가지 요건이 구비된 작품이야말로 이상적인 스타일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중에 어느 하나가 결여되어도 완전한 작품의 스타일을 이루어낼 수 없음을 「풍골(風骨)」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꿩이 비록 찬란한 외양을 갖추고 있어도 백 걸음의 거리밖에 날지 못하는 것은 살이 쪘어도 힘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매는 화려한 외양은 갖추고 있지 못하나 한번 날개 쳐서 높은 하늘을 나는 것은 골격이 굳세고 기운이 세기 때문이다. 작품의 생명력에도 이와 같은 것이 적용된다. 감동시키는 힘과 구성의 치밀함을 갖추고 있어도 미적인 언어표현이 결여되면 그것은 문학의 수풀에 매 떼가 모여드는 것과 같으며, 언어표현은 화려하나 감동시키는 힘과 치밀한 구성이 결여되면 이는 문학의 동산에 꿩이 도망쳐 들어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외양도 아름다우면서 높이 날 수도 있는 작품이라야 문학에 있어서 봉황이 되는 것이다. 작품의 '풍'과 '골'은 높이 나는 새의 날갯짓과 같이 작품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작품으로 하여금 생명력을 지니게 하는 요소이며, 작품의 '채'는 미적인 언어 표현으로 작품의 형식미를 이루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사실 유협이 논의하고 있는 작품의 '풍', '골', '채'는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는 문예 작품이 지니게 되는 독창성과 외재적인 형식미와 미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유협은 문예 작품이 지니게 되는 이러한 이상적인 특성들은 결과적으로는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발휘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유협은 곳곳에서 작품의 내용을 이루는 작자의 감정과 작품의 형식을 구성하는 언어표현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미적인 언어표현, 감동을 주는 내용, 치밀한 구성이 어우러져 각 작품의 미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낼 때 각 작품은 나름의 이상적인 스타일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작품의 스타일에 대한 유협의 견해이다. 독자의 감상 활동 유협은 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객관성이 있으므로 감상 활동을 통해 그것을 파악하고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로부터 감상의 기쁨을 얻는 이상적인 감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관건은 바로 독자의 감상 능력에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유협은 광범위한 학식과 풍부한 감상 경험 등 독자의 예술수양을 강조하고 있다. 천 개의 곡조를 다룬 후에야 명곡을 알게 되고 천 개의 칼을 본 후에야 명검을 알게 된다. 때문에 편견 없는 감상법을 위해서는 우선 많은 작품을 보아야 한다. 높은 산을 보고 나면 작은 언덕의 형체를 알게 되고 큰 바다를 보고 나면 도랑의 물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작품을 감상할 때 그 비중을 다루는 면에서 사심을 넣지 말고 애증에 편벽되지 않아야 한다. 그런 후에야 저울처럼 공평하게 이치를 평할 수 있고 거울처럼 맑게 작품의 어휘사용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독자의 감상활동에 있어서 유협이 말하는 "문학작품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 즉 지음(知音)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작품의 독창적인 면모와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고 이해하여 느끼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날 굴원이 말하기를 "문사의 지나친 꾸밈도 없고 내용도 충실한데 사람들은 나의 독창적인 면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독창적인 면을 보아내는 것은 올바른 감상을 하는 것 즉 '지음'뿐이다. 예술 작품은 개인 창작의 산물이다. 따라서 그 가운데는 반드시 나름의 독창적인 특성이 있다. 독창적인 특성이 없는 작품은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기 힘들다. 성공적이지 못한 작품 즉 유협이 「여사(麗辭)」편에서 말했듯이 "작품의 기세에 새로움이 없고 어휘사용에도 독창성이 없이 대구만을 늘어놓은 글"은 읽는 이들의 "졸음만을 부를 뿐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술 감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예술영역에 대한 어느 정도의 조예가 있어야 비로소 감상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작품의 예술적 성취와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더 전문적인 예술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유협이 논한 독자의 감상활동은 독자가 작품에 대해 임의적인 느낌을 갖는 활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독자가 작품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함으로써 작품의 형식과 내용이 연출해내는 예술 가치를 보아내고 이를 통해 감상의 기쁨을 향유하게 되는, 객관적인 심미적 판단까지를 포함시킨 수준 높은 감상 활동을 가리킨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문학예술을 탐구한 동양의 문예학 고전 중국 근대 문학의 거장인 루쉰(魯迅)은 일찍이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필적할 동양 문예학의 고전으로 『문심조룡(文心雕龍)』을 들고 있다. 『문심조룡』에서 논의되고 있는 문예학의 기본 범주는 바로 문학 활동에 있어서의 마음의 작용과 언어 문자의 예술적 표현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유협은 작자와 작품과 독자가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문예 활동을 문학의 차원에서 논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 차원 더 높여 전 우주자연의 질서와 그 질서 속의 일환으로 형성된 인간의 문화와 관련지어 논했다. 유협은 문학을 언어문자로 이루어진 문화의 한 형태로서 파악했다. 즉 유협은 문학의 제반현상을 논함에 있어 역사와 문화의 전체성을 함께 고려했다. 우주와 사회문화 현상 속에서 우주만물의 현상 - 『문심조룡』에서는 이를 '도지문(道之文)'으로 표현하고 있다 —, 사회문화의 현상 — 『문심조룡』에서는 이를 '인문(人文)'으로 표현하고 있다 —, 문예미학의 세계 — 『문심조룡』에서는 이를 인간의 정서와 감정에 비중을 두어 '정문(情文)'이라 표현하고 있다 —, 이 삼자가 기본적으로 공통되는 하나의 질서 — 『문심조룡』에서는 이를 '도(道)'라 표현하고 있다 — 속에 통합되어 서로 간에 긴밀한 연계를 맺으며, 나름의 질서를 유지해간다고 파악하였다. 그러므로 문학의 문제를 중국 고대의 사상과 문화의 발전과 긴밀하게 연계시켜 우주론 본체론의 차원까지 끌어올림으로써 하나의 광대한 사상의 시야로 문학의 본질을 파악해 보려 했던 것이다. 유협의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문예 탐구는 『문심조룡』에 나타난 내용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 원인이 된다. 즉 유협의 『문심조룡』은 당시의 문학의 흐름을 가장 잘 반영하면서도 반성적인 고찰을 통해 그 시대의 한계를 넘어선 보다 보편적인 내용의 문학이론을 전개했다는 데 그 탁월성을 나타내고 있다. 『문심조룡』에서 논의되고 있는 문학의 문제들을 한 지면을 통해 상세히 논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는 『문심조룡』이라는 서적 자체의 체제가 워낙 방대하고 논의하고 있는 문제들이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문심조룡』이라는 책이름에 함축되어 있는 핵심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문심조룡』의 주요내용을 간략하게 개괄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서양의 논리와 이론에 너무 길들여져 있어 중국 고대의 '문학 이론'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쯤으로 고리타분하게 여기게 되고, 사용된 언어가 한자(漢字)라는 것 자체로부터 뭔가 개화되지 않은 수구적인 인상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이러한 편견을 벗어버리고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문심조룡』안에서 문학 현상의 제반 문제에 대한 주옥같은 내용들을 많이 섭렵하기를 권하고 싶다. 현대의 문학이론서들에서 논의되고 있는 여러 주제들이 이미 『문심조룡』안에서 언급되고 있음도 알게 될 것이며 방대한 체계로 다양한 주제의 이론을 전개하면서도 확실한 이론의 골격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중국 문학 이론이 논리적일까 하는 의문이 있는 독자는 이 책을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중국 고대의 문학현상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고, 중국 문학은 물론 어느 시대 어느 문학 현상의 연구에나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내용의 문학이론을 섭취하는 데는 더할 수 없는 보고(寶庫)가 될 것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근대화 이전까지 거의 절대적인 중시를 받아왔던 동양 고전의 가치를 오늘날에 부활시키는 일은 가능한가? '동양적인 것'은 곧 구태의연하며 전근대적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고전 텍스트 자체의 역사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가치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2. 동양 문예학 고전의 현대적 활용은 가능한가? 고전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오늘날에 되살려 문학 활동에 풍성한 원료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소개할 필요가 있다. 3. 『문심조룡』이 오늘날에 와서 동양 문예학의 집대성으로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창작과 감상을 포함한 문학활동 전반에 대한 보편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문심조룡』은 역사적인 가치와 보편적인 가치를 동시에 갖추고 있으므로 중국 문학의 역사는 물론,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유용한 책이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1. 『문심조룡ㆍ동양 문예학의 집대성』, 유협 지음, 김민나 옮김, 살림출판사, 2005. 2. 『문심조룡』, 유협 지음, 최신호 역주, 현암사, 1975. 각주 1) 위(魏)나라 촉(蜀)나라 오(吳)나라가 대립했던 삼국시대에서 시작되는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기에 중국의 남방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던 여섯 왕조인 오(吳)나라, 진(晉)나라, 송(宋)나라, 제(齊)나라, 양(梁)나라, 진(陳)나라를 말함. 진나라는 서진과 동진으로 나뉘어 진다. 건강(建康)-현재의 남경-으로 수도를 옮긴 동진 시대부터 건강을 중심으로 건립된 송나라, 제나라, 양나라, 진나라를 남조(南朝)라고 말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심조룡 [文心雕龍] - 마음과 언어의 예술적 만남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두산백과 문심조룡   [ 文心雕龍 ] 요약 중국 6조시대(六朝時代)의 문학평론서. 구분 문학평론서 저자 유협 시대 499∼501년 추정(중국 6조시대) 10권 50편(篇).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시문(詩文) 평서로서, 양(梁)나라의 유협(劉勰)이 제대(齊代) 말인 499∼501년에 저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반(前半) 25편에서는 문학의 근본원리를 논술하고, 각 문체(文體)에 관한 문체론을 폈다. 후반(後半) 25편에서는 문장 작법과 창작론에 관하여 논술하였다. 전체가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의 미문(美文)으로 씌었으며, 문학이란 내용이 충실해야 하고 그로부터 자연히 꽃피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며, 당시 기교에만 치우친, 내용 없는 미문 위주의 경향을 비판하였다. 같은 시대 종영(鍾嶸)의 《시품(詩品)》, 소명태자(昭明太子)의 《문선(文選)》과 함께 중국 문학론 연구에 중요한 원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심조룡 [文心雕龍] (두산백과)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유협   [ 劉勰 ] 출생 - 사망 465년 ~ 521년 자가 언화(彦和)이다. 그의 선조는 동관(東莞) 거(莒 = 현 산동(山東) 거현)에 살았고, 경구(京口 = 현 강소(江蘇) 진강(鎭江))에 세거(世居)하였다. 공부하기를 좋아하였지만, 가난하여 장가를 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당시의 유명하였던 중인 승우(僧佑)의 도움으로 10여 년 동안 정림사(定林寺)에 거주하였다. 이 사이에 많은 책을 읽었다. 불경에 정통하여 불경을 정리하는 일에도 참가하였다. 양나라 때에는 남강왕기실(南康王記室) 겸 태자(太子) 소통(蕭統)의 통사사인(通事舍人)을 하였으며, 이 때 소통의 신임을 얻었다. 늦게 출가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혜지(慧地)로 바꾸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문심조룡 『문심조룡(文心雕龍)』은 그의 나이 30여 세 때, 5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문심조룡(文心雕龍)』은 총 50편으로 내용을 대략 첫째, 제50편 「서지(序志)」(총서(總序)), 둘째, 제1편 「원도(原道)」~제5편 「변소(辯騷)」(문학본원론(文學本原論)), 셋째, 제6편 「명시(明詩)」~제25편 「서기(書記)」(문학체재론(文學體裁論)), 넷째, 제26편 「신사(神思)」~제44편 「총술(總術)」(문학창작론(文學創作論)), 다섯째, 제45편 「시서(時序)」~제49편 「정기(程器)」(문학비평론(文學批評論))등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협 [劉勰]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두산백과 유협   [ 劉勰 ] 요약 중국 육조시대의 양의 문예평론가. 주요 저서인 《문심조룡(文心雕龍)》은 심오한 학문적 소양이 잘 나타나 있다. 소명태자(昭明太子)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태자의 《문선(文選)》 편찬에는 그의 창작이론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출생-사망 465 ~ 521 국적 중국 육조시대 양(梁) 주요저서 《문심조룡(文心雕龍)》 불전(佛典)을 비롯하여 각종 서적을 열독하여 많은 교양을 쌓았는데, 그의 심오한 학문적 소양은 《문심조룡(文心雕龍)》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의 원고를 탈고하여 당시 문단의 중진이었던 심약(沈約)에게 교열을 부탁하자 심약은 한 번 보고 감탄하면서 그의 탁자 위에 정중히 놓았다고 한다. 소명태자(昭明太子)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태자의 《문선(文選)》 편찬에는 그의 창작이론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만년에는 출가하여 난징[南京] 교외의 정림사(定林寺)에서 승려생활로 보냈다. 참조항목 [네이버 지식백과] 유협 [劉勰] (두산백과) =================================/// 유미주의(唯美主義, Aestheticism)  남북조시대에는 유미주의·형식주의의 문학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문학의 특색은 내용보다는 형식의 미를 추구하는 것이어서 변려문(騈儷文)이 발달하게 된다.  변려문이란 일종의 문자의 조직 방식으로, 대구·음률·전고·문사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문장이다. 동한말부터 문장 가운데 대구가 많이 사용되기 시작하고, 위진에 이르러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해진다. 남북조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변려문이 극성하여 일체의 문장이 거의 모두 변려화 하였다. 문학작품은 물론이거니와, 비문학적인 글들, 예컨대 조서(詔書)·장표(章表)·서간(書簡) 또는 학술적인 저서들이 모두 변려문으로 쓰여졌다. 그러나 변려문은 외형적인 형식미를 지나치게 추구하여 내용은 자연히 공허하고 빈약하게 되어버려서, 문학적으로는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은 극히 드물다.  변려문 가운데서 유명한 것으로는 공치규(孔稚圭)의 과 구지(丘遲)의 , 그리고 오균(吳均)·도홍경(陶弘景) 등의 짧은 서간문이 있다. 서릉(徐陵)과 유신(庾信)은 변려문의 형식과 기교를 더욱 완숙하게 하였으며, 유협의 ≪문심조룡≫과 종영의 ≪시품≫도 변려문으로 쓰여진 것이다. 산문은 동한 이래로 변려화 되어갔다. 위진시대에는 그래도 완적(阮籍)의 , 왕희지(王羲之)의 , 도연명의 등 몇 편의 산문이 있으나, 제·양에 이르러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변려문이 극성하여 산문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북조에서는 훌륭한 산문체의 작품이 나왔으니, 북위(北魏) 역도원(력道元)의 ≪수경주(水經注)≫와 양현지(楊衒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북제(北齊) 안지추(顔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이 그것이다.  ≪수경주≫는 산수의 경치와 전설·풍물 등을 묘사한 것이 청려(淸麗)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낙양가람기≫는 번영했던 당시의 낙양의 풍모와 생활상을 기록한 것으로 문장이 질박 간결하다.  위의 두 책은 후대 유기(遊記)문학과 소품문(小品文)에 영향을 주었다. ≪안씨가훈≫의 문장은 질박 평이하며, 특히 은 제·양의 부화(浮華)한 문학사조에 강한 반대를 하고 있다. < 유미주의(唯美主義, Aestheticism) > 탐미주의(耽美主義)·심미주의(審美主義)라고도 함. 미적 가치를 가장 지고한 가치로 보고 모든 것을 미적인 견지에서 평가하는 태도 및 세계관. 대개 생에 대한 수동적·체념적·관조적 태도라든가 쾌락적 감각주의, 또는 모순적이고 적대적인 현실로부터 미적 현상세계로 도피하려는 생각에서 연유한 까닭에, 종종 반사회적·비정치적 허무주의로 귀착하기도 한다. 이런 유미주의의 경향은 이미 고대(특히 헬레니즘)·중세·르네상스(매너리즘)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근세에 와서 예술과 문학에서 더욱 발전하여 19세기말 유럽에서는, 예술은 오로지 아름다움 자체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신조 아래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의 이론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따라서 유미주의는 예술지상주의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1830~70년대 프랑스에서 풍미하던 예술이론의 표어로서 1818년 프랑스 철학자 빅토르 쿠쟁이 만들어낸 말이다. 그러나 예술 자체를 예술의 목적으로 선언하고 예술을 종교·정치·도덕·세계관 등 어떤 다른 목적이나 관심에서 분리시켜 어떠한 효용성도 거부하는 예술지상적 유미주의를 제일 먼저 강력하게 내세운 사람은 테오필 고티에였다(1835년에 쓴 소설 〈모팽 양 Mademoiselle de Maupin〉의 서문). 여기서 드러나는 비정치적 태도는 콩트의 실증주의 미학에 근접하는 측면도 있으나, 특히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변호론적 문학에 대립한다는 점에서 반실증주의적인 예술지상주의는 '순수'문학(상징주의운동)을 촉진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환상을 비판하는 문학(공쿠르 형제, 귀스타브 플로베르)이 나오는 배경이 되었다. 예를 들어 플로베르는 사실주의 소설 〈보바리 부인 Madame Bovary〉을 쓰면서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입장에서 자연주의로 떨어질 위험에 저항할 수 있었다. 예술의 자율성 문제는 역사적으로 보아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실용주의적 사회철학과 산업시대의 추악성 및 속물근성에 대한 반발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판단력 비판 Kritik an der Urteilskraft〉(1790)에서 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유로운 예술'과 다른 목적을 지녀 노동 및 수단이 되는 '임금 예술'을 구별하고, 미학적 기준은 도덕성·실용성·쾌락 등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유미주의의 토대를 제공했다. 이런 예술의 자율성 사상은 독일에서는 괴테와 J. L. 티크 등을 통해 바이마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로 이어졌고, 영국에서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토머스 칼라일 등을 통해, 프랑스에서는 스탈 부인과 고티에, 쿠쟁을 통해 보급되었다. 영국에서는 라파엘 전파에 속하는 화가들이 1848년부터 유미주의의 씨를 뿌렸고,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와 에드워드 번 존스, 앨저넌 찰스 스윈번 등의 작품은 의식적으로 중세 취미를 선택하여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유미주의의 표본이 되었다. 오스카 와일드와 월터 페이터의 작품들, 오브리 비어즐리가 잡지 〈옐로 북 The Yellow Book〉에 그린 삽화들에서도 유미주의적 태도가 나타난다. 세련된 감수성의 계발이라는 유미주의 운동의 이상을 가장 높이 끌어올린 사람은 아마도 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일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플로베르와 공쿠르 형제 외에도 샤를 보들레르, 샤를 르콩트 드 릴, 테오도르 드 방빌, J. K. 위스망스 등 상징주의와 고답파 시인들도 유미주의의 신봉자들로 꼽히며, 독일에서는 나중에 게오르게파에 속하는 시인들이 유미주의의 영향을 보인다. 당대의 유미주의 비판자로는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와 존 러스킨, 러시아의 레프 톨스토이 등을 들 수 있다. 톨스토이는 도덕성을 떠난 예술이 무슨 가치를 지니겠느냐는 물음을 던졌다. 그러나 유미주의 운동은 예술의 형식미학에 관심을 집중시켜, 로저 프라이와 버나드 베렌슨의 예술비평이 나오는 데 이바지했다. 또한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됨으로써 어떤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 운동이 되었고, 미술과 공예 운동을 촉진했으며, 아르 누보(Art Nouveau) 운동을 일으켜 20세기 예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문학본원론   [ 文學本原論 ] 유협은 「원도론(原道論)」에서 "사람은 오행의 정화인 것이요, 천지의 마음인 것이다. 이 천지의 마음이 생김으로써 언어가 나타나고, 언어가 나타나면서 문장의 형태가 분명해진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도리인 것이다.(爲五行之秀, 實天地之心. 心生而言立, 言立而文明, 自然之道也.)"라고 하였다. 또, 「명시편(明詩篇)」에서 "사람은 일곱 가지 감정을 갖고 있어서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반응하고 감응하여 그 뜻을 노래하게 된다. 이것은 모두 자연이 아닌 것이 없다.(人稟七情, 應物斯感, 感物吟志, 莫非自然.)"라고 하였다. 유협의 '자연'을 사람들은 '道(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석하였으나, 그 도리는 모두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며, 바로 문학본원론의 기초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본원론 [文學本原論]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문학비평론   [ 文學批評論 ] 「지음편(知音篇)」에서 문학비평의 올바른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대체로 천 개의 곡조를 다룬 뒤에야 비로소 음악을 알게 되고, 천 자루의 칼을 본 뒤에야 겨우 칼이 잘 드는지를 안다고 한다. 때문에 원만하게 문학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많은 작품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높은 산을 본 일이 있으면 조그만 언덕의 모양을 확실히 알 수가 있고, 큰 바다 물결을 알고 있으면 작은 냇물의 흐름도 짐작할 수 있다. 남의 작품을 평가하는 데 사심을 넣지 말고, 개인의 애증에 편벽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한 뒤에야 저울과 같이 공정한 논리를 펼 수가 있고, 거울처럼 분명하게 표현을 비추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凡操千曲而後曉聲, 觀千劍而後識器, 故圓照之象, 務先博觀. 閱喬岳以形培塿, 酌滄波以喩畎澮, 無私於輕重, 不偏於憎愛, 然後能平理若衡, 照辭如鏡矣. 이와 같은 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네 가지의 비평 원리를 내어 놓았다. 즉, 첫째, "옛 것을 귀하에 여기고 지금 것을 천하게 여기지 말라(勿貴古賤今)", 둘째, "자신을 숭상하고 다른 사람을 억제하지 말라(勿崇己抑人)", 셋째, "거짓됨을 믿고 진실됨을 흐리지 말라(勿信僞迷眞)", 넷째, "같은 무리끼리 당을 만들고 다른 사람을 치지 말라(勿黨同伐異)"라고 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비평론 [文學批評論]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문학체재론   [ 文學體裁論 ] 문학의 체재에 대하여 당시에는 '문(文)'과 '필(筆)'로 구별하였다. 운(韻)이 있는 것을 '문'이라고 하였고, 운이 없는 것을 '필'이라고 하였다. 유협은 문체를 대략 세 가지 체재로 분류하였는데, 즉 '문필(文筆)'에 의한 분류, '성질'에 의한 분류, 분류할 수 없는 것이다. 「서지편(序志篇)」에 "각 양식의 기원부터 시작해서 결론을 말하고, 명칭을 해석해서 내용을 분명히 하고, 한 편의 모범을 정하고, 이치를 부연하여 수미를 정리하였다.(原始以表末, 釋名以章義, 選文以定篇, 敷理以擧統.)"라고 하였는데, 이 네 가지가 문체 분류의 원칙론이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체재론 [文學體裁論]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문학창작론   [ 文學創作論 ] 내용을 글보다 우선하는 문질병중(文質並重)의 문학을 주장하였다. 그는 「정채편(情采篇)」에서 다음과 같이 문학의 내용과 형식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대저 분이나 눈썹 그리개는 얼굴을 장식하는 것이나, 참된 미모는 타고난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이며, 비록 수사로써 말을 문식한다고는 하나, 실질적인 미는 그 사상과 감정 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감정이란 문식의 날이 되며, 말이란 논리의 씨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날이 바로 잡혀야만 씨가 제자리에 놓여지며, 논리가 정해진 뒤에야 말이 창달하게 된다. 이 도리야말로 문장의 수사에 관한 기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夫鉛黛所以飾容, 而盼倩生於淑姿, 文采所以飾言, 而辯麗本於情性. 故情者, 文之經, 辭者, 理之緯, 經正而後緯成, 理定而後辭暢, 此立文之本源也. 이것이 그의 기본적인 문학창작론으로서, 당시 유행하던 유미주의 문학 풍조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창작론 [文學創作論]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1488    [시공부 101] - 31... 댓글:  조회:3105  추천:0  2020-03-28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왜 시인들은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을까요?     분야 현대 시 목차 반어의 힘 역설 :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진실을 내포한다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본질과 속성 고등학교 문학 문학 작품의 구성 원리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이 일부러 반대로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을 두고 반어라고 하던데 반어를 사용했을 때에는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인가요? 그리고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 표현을 역설법이라고 하던데 역설법을 사용하는 까닭을 설명해 주세요. 반어의 힘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움을 추구합니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고자 하지요. 대상을 기존의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색다르게 제시할 때 사람들은 더욱 집중하지요. 익숙한 것을 낯설게 제시하면 호기심과 궁금증이 커지기 마련이니까요. 또한 일상적인 말에 변화를 주면 독자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고 그 의미를 더욱 인상 깊게 느낄 수 있습니다. 반어법과 역설법은 어떤 대상이라든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일상적인 것과 달리 낯설게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먼저 반어법은 표현할 내용을 실제 의미와 반대로 제시하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즉 전달하고자 하는 말은 숨긴 채 반대로 말하는 방법이지요. 시험을 망친 아이에게 엄마가 화가 나서 “잘했다 잘했어”라고 거꾸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반어가 사용된 표현은 본 의미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나타난 내용만으로 의미를 짐작하기는 어렵습니다. 반어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언어적 반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상황적인 반어입니다. 언어적 반어는 겉으로 드러난 말과 숨은 의도가 정반대인 경우로 의미를 강조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기형도, 「안개」 중에서 이 시에서 여공들의 얼굴이 흰 것은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했거나 햇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노동만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녀들의 얼굴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창백하고 핼쑥하다고 말할 수 있지요. 다음으로 공장으로 가는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무럭무럭’은 아무 걱정과 근심 없이 잘 자란다는 의미를 더하기 위한 부사어인데 공장으로 가는 아이들이 아무 걱정이나 근심이 없을 리가 없지요. 따라서 두 표현은 언어적 반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반어법은 독자들을 긴장시켜 여공들은 정말 아름다운가, 아이들은 정말 무럭무럭 크는가를 질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지요. 상황적 반어는 시에서보다는 주로 소설이나 희곡에서 사용합니다. 상황적 반어는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알고 있지만 정작 작품 속 인물은 그것을 모르고 행동할 때 생기는 반어입니다. 등장인물이 작중 상황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 상황적 반어가 일어나지요. 김유정의 소설 「만무방」의 마지막 장면에서 쌀도둑을 잡으려고 기다리던 응칠이가 동생 응오가 도둑임을 알게 되는 장면이 상황적 반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설 :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진실을 내포한다 역설은 겉으로 보면 의미가 모순되고 이치에 맞지 않지만 그 속에 진실이라든가 진리가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역설은 반어와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신선함과 놀라움을 불러일으켜 작품에 좀 더 집중하게 만듭니다. 역설은 모순어법과 모순형용으로 나뉩니다. 모순어법은 문장 자체에 논리적인 모순이 나타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이에 해당합니다. ‘갔다’와 ‘보내지 아니했다’의 상황은 동시에는 가능할 수가 없는데 함께 사용하고 있으니 논리적인 모순에 빠져들지요. 모순형용은 꾸미는 말과 꾸밈을 받는 말이 서로 조화롭지 않거나 배치될 때를 일컫습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정지용, 「유리창 1」 이 시는 정지용 시인이 아들을 잃고 쓴 것으로 유명하지요. 유리에 비친 차고 슬픈 것은 곧 죽은 아이의 환영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아주 독특한 표현 하나가 눈에 띕니다. “외로운 황홀한 심사”. ‘외롭다’는 말은 고독하다, 쓸쓸하다와 같이 부정적인 정서를 일컫는 말이며, 이에 반해 ‘황홀하다’는 긍정적인 정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외로운 황홀한 심사”는 부정적인 말이 긍정적인 말을 꾸미는 논리적인 모순을 지닌 것이지요. 이처럼 어울리지 않는 말끼리 서로 꾸밈을 주고받을 때 이를 모순형용이라고 합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과 아들을 잠시나마 추억할 수 있다는 설렘이 동시에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지요. 시를 공부하다 보면 ‘낯설게 하기’라는 말이 나오는데 무슨 뜻인가요? ‘낯설게 하기’란 쉽게 말해서 일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내용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다 보면 듣는 이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비유라든가, 상징 · 역설 · 반어 등을 사용하여 일상적인 말보다 낯설게 표현하면 긴장과 집중 효과가 생기지요. ‘낯설게 하기’는 바로 이러한 전달방식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왜 시인들은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을까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87    [시공부 101] - 30... 댓글:  조회:2953  추천:0  2020-03-28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상징도 결국 비유법의 한 종류 아닌가요?     분야 현대 시 목차 원관념, 꼭꼭 숨어라! 맥락을 알아야 상징이 보인다 관습적 상징, 개성적 상징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본질과 속성 고등학교 문학 문학 작품의 구성 원리 비유가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면 상징도 비유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요? 상징을 비유라고 하지 않고 굳이 상징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나요? 원관념, 꼭꼭 숨어라! 비유와 상징은 원관념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모두 나타나지만 상징은 원관념 없이 보조관념만 제시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예를 들면 전쟁을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한 시민이 ‘전쟁 없는 세계를 꿈꾸며 하늘에 비둘기를 날립시다’라고 제안한다고 할 때 ‘비둘기’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왜냐하면 이때 비둘기는 단순히 하늘을 날아가는 새의 의미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기원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라는 원관념을 쓰지 않더라도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원관념이 문장 표현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상징입니다. 비유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일대일대응을 이룬다면 상징은 보조관념과 원관념이 일대다대응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비유가 둘 사이의 유사성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지는 반면 상징은 둘 사이의 유사성이 거의 없어도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두 대상이 공통점 없이 동떨어진 개념이기 때문에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앞에서 예를 들었던 비둘기와 평화는 어떤 유사점이 있을까요? 과거에는 비둘기 편지가 주요한 통신 수단 중 하나였지요. 그 시절, 이 새는 인간에게 유익한 동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떤가요? 도심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온갖 구박을 듣고 있지요. 기생충이 가득한 배설물을 도시 곳곳에 뿌리고 건축물을 부식시킨다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요. 다시 말해 오늘날의 비둘기는 인간 세상의 평화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두 대상 사이에 별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대단히 다양한 의미를 함축할 수 있게 됩니다. 맥락을 알아야 상징이 보인다 상징은 비유에 비해 훨씬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크기 때문에 해석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비유적인 의미는 유사성을 근거로 바로 파악할 수 있지만 상징의 의미는 시의 전체적인 맥락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박남수, 「새」 중에서 위의 시에서 ‘새’는 단순한 ‘새’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새에게 뜻을 만들지 않는다거나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는 표현 따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새에는 새 자체의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상징적이어서 바로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르지요. 다행히 다음 연에서 시적 화자는 새의 정체를 ‘순수’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새는 순수한 속성을 지닌 모든 것들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자연, 사랑, 우정 등등을 상징할 수 있지요. 작품 속의 또 다른 상징인 ‘포수’와 ‘한 덩이 납’은 순수한 것들을 해치는 존재이지요. 인위적인 것, 폭력적인 것, 수단화하려는 것, 위험한 것 등등 순수를 더럽히는 것들은 모두 포수와 한 덩이 납에 해당되지요. 이와 같이 상징적인 시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 전체의 맥락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관습적 상징, 개성적 상징 흔히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고 십자가는 기독교를 상징하며 대나무는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이런 상징들은 오랜 세월 사람들이 되풀이하여 사용해 온 것들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 대부분이 별다른 노력 없이 단어의 상징적인 의미를 알고 있기 마련이지요. 조금 어렵게 말하자면 이러한 상징들은 사회적으로 공인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문화권에서 형성된 풍습이나 제도 속에서 보편성을 얻은 것들이지요. 시조에서 ‘해’가 임금을, 해를 가리는 ‘구름’이 간신을 상징하거나 ‘대나무’가 절개를 상징하는 것은 모두 관습적인 상징에 해당합니다. 한편, 한 작품에서만 상징적 의미를 가지며 시인의 독창적인 체험에 의해 특별한 의미를 지닌 상징을 개성적 상징이라고 합니다. 개성적 상징은 의미의 폭이 넓고 암시적이므로 숨겨진 의도와 참뜻을 알기 위해서는 복잡한 사고작용이 뒤따릅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는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중에서 원래 ‘님’은 ‘사모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님’은 단순히 사모하는 사람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용운 시인의 독창적인 체험에 비추어 볼 때 달리 해석될 여지도 있기 때문이지요. 한용운이 시인이자 민족운동가이자 승려였고 한 사람의 사내인 것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시에 나타난 ‘님’은 절대자, 사랑하는 사람, 조국 등등 다양하게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징 중에 원형적 상징이 있던데 그것은 무엇인가요? 원형적 상징이란 역사, 문학, 종교 등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 인류에게 유사한 정서나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상징물을 뜻합니다. 인간의 잠재의식에 담긴 원초적인 이미지로 전 인류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개 원형적 상징은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물 : 생명력, 탄생, 죽음, 소생, 정화, 속죄 불 : 밝음, 생명, 정열, 파괴, 분노 해 : 광명, 생명력, 희망, 탄생, 창조 달 : 그리움과 소망의 대상 땅 : 생산, 생명의 근원, 다산, 풍요로움 바다 : 죽음과 재생, 신비, 무한성 [네이버 지식백과] 상징도 결국 비유법의 한 종류 아닌가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86    [시공부 101] - 29... 댓글:  조회:2993  추천:0  2020-03-28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비유를 잘하고 싶어요. 방법이 있을까요?     분야 현대 시 목차 비유 : 유사성 속에서 차이 만들기 비유법, 종류별로 알아볼까?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본질과 속성 고등학교 문학 문학 작품의 구성 원리 말재주가 좋아서 인기 있는 친구들을 보면 비유를 참 잘 써요. 뜨는 유행어를 잘 만드는 코미디언도 비유를 잘 쓰는 것 같고요. 좋은 비유를 만드는 비밀은 대체 뭘까요? 비유 : 유사성 속에서 차이 만들기 사람들은 왜 직접 말하지 않고 빗대어 말하는 것을 좋아할까요? 빗대어 표현하면 대상을 보다 친근하고 익숙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낯설게 표현함으로써 상투적인 개념들을 새롭게 인식하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지요. 대상의 이미지가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나타날 수도 있고요. 비유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필요합니다. 원관념이란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본래의 관념을 뜻하며 보조관념은 원관념을 잘 전달하기 위해 활용되는 개념을 일컫습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은 일단 유사성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유사성이 없는 대상을 서로 연결하면 본래의 의미가 전달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유사한 것을 짝 지우느니 차라리 비유를 사용하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진달래가 철쭉처럼 피었다는 말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진달래와 철쭉은 비슷한 분홍색이고 또 봄에 피는 꽃이어서 둘 사이가 아주 비슷합니다. 따라서 진달래와 철쭉을 연결 짓는 것은 좋은 비유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참신성이 떨어지는 것이지요. 좋은 비유가 되기 위해서는 차이성을 갖춰야 합니다. 유사성을 갖춘 상태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차이가 클수록 참신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참신한 표현일수록 독자들이 긴장을 하게 되고 상상력도 더 발휘하게 되지요. 물론 차이만 있어서는 안 되고 기본적인 유사성은 반드시 갖춰야지요. 서정주의 「동천」에서 밤하늘에 걸린 그믐달을 보고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심어놨다고 비유한 것은 참신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유법, 종류별로 알아볼까? 가장 널리 알려진 비유법은 직유와 은유입니다. 직유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에서 보듯이 ‘~처럼’, ‘~같이’, ‘~듯이’ 등을 사용하여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연결하는 방법입니다. 이에 반해 은유는 “내 마음은 호수요”와 같이 ‘A는 B이다’의 형식으로 ‘~처럼’과 같은 연결어를 뺀 채 마치 두 대상이 동일한 것처럼 간접적으로 연결하여 표현하는 방법이지요. 이 밖에도 비유법에는 의인법과 활유법, 대유법, 풍유법 등이 있습니다. 먼저, 의인법은 사물이나 관념과 같은 무생물체에게 인간의 속성을 부여하여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이성부, 「벼」 중에서 인용된 부분을 보면 소재는 분명히 ‘벼’입니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시적 화자는 ‘벼’를 마치 사람인 양 표현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아끼고”라든가,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는 표현은 모두 사람만이 가능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는 ‘벼=인간’이라는 비유가 먼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요. 직유와 은유처럼 원관념, 보조관념의 형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생물=인간’이라는 비유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인법도 비유법의 일종으로 볼 수 있지요. 활유법은 의인법과 비슷하게 무생물을 생물이라고 전제하고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활유와 의인은 굳이 따로 구분하지 않고 의인법으로 통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유법은 사물의 일부분이나 특징을 들어 전체를 나타내는 비유법입니다. 대유법은 방법에 따라서 두 가지로 다시 구분됩니다. 대상의 속성이나 특징을 그와 밀접하게 관련된 다른 사물로 나타내는 표현 방법을 환유라고 하고, 사물의 부분을 활용하여 전체를 나타낼 때 이를 제유라고 부릅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烟氣)인 줄 알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중에서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중에서 첫 번째 한용운의 시에서 시인은 권력과 자본을 칼과 황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칼은 힘을 지닌 사람이고 그런 점에서 권력과 연결되고, 황금은 물질적인 것과 연결되므로 자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칼과 황금은 환유법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 이상화의 시에서 빼앗긴 들은 빼앗긴 조국을 뜻합니다. 작품이 발표된 것이 일제 강점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리한 해석이 아니지요. 여기서 “빼앗긴 들”은 농사를 짓는 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 것이지요. ‘들’이라는 아주 작은 부분으로 ‘나라’ 전체를 표현했으니 이 구절은 제유법에 해당합니다. 관념적인 대상도 비유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비유는 유사성과 차이성만 있으면 어떤 대상이든지 가능합니다. 다음 시조를 한번 살펴볼까요.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잘라 내어 /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어론임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황진이의 시조) 자, ‘동짓달 밤’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이라도 되는 듯이 ‘허리’를 잘라 낸다고 되어 있습니다. ‘밤’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비유되어 있네요. 이처럼 비유의 대상에는 거의 제한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유를 잘하고 싶어요. 방법이 있을까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85    [시소사전] - 서사시 댓글:  조회:3524  추천:0  2020-03-09
두산백과 서사시   [ epic음성듣기 , 敍事詩 ] 요약 일반적으로 발흥기·재건기의 민족이나 국가의 웅대한 정신을 신(神)이나 영웅을 중심으로 하여 읊은 시. 어느 민족이나 고유의 신화나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서사시도 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사시의 흐름은 넓은 의미에서 이야기시(詩)로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유사 이래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서사시로서는 BC 800년경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있다. 이들 작품은 다 같이 트로이 전쟁을 주제로 한 그리스 전체의 국민적 서사시일 뿐만 아니라 그후 모든 서사시의 전형이 되었으며 현대에까지 서유럽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헤시오도스에 의해서도 읊어졌는데 '테바이 이야기' 또는 '아루호(號)의 원정' 등이 서사시의 주제가 되었다. 그 후 로마에서는 베르길리우스(BC 1세기)의 《아에네이스》가 유명한데 로마 문학 황금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중세에서는 프랑스의 기사 이야기인 《롤랑의 노래》, 북유럽의 《에다》, 영국의 《베어울프》 그리고 독일의 비극적 국민시 《니벨룽겐의 노래》가 있다. 《에다》는 북유럽 신화와 영웅전설을 집대성한 것이며 《베어울프》는 주인공이 괴물과 화룡(火龍)을 퇴치하는 무용담이다. 영국에는 아더왕의 전설에서 딴 맬로리의 《아더왕의 죽음》과 초서의 《캔터베리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또 단테의 《신곡(神曲)》과 밀턴의 《실낙원(失樂園)》은 세계문학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두 작품이 모두 특이한 이야기시인데 《신곡》은 지옥편·연옥편·천국편의 3부로 되어 있고 단테 자신이 처음에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다음에는 애인 베아트리체의 선도를 받아 그들의 미지의 세계를 순력(巡歷)하는 이야기이며, 《실낙원》은 구약성서 《창세기》의 원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종교시이다. 근세에는 괴테의 《헤르만과 도로테아》, 바이런의 《돈 후안》, 스콧의 《호수의 여인》, 하이네의 《아타 트롤》 등의 발라드와 이야기시가 있으나 이들 작품은 서사시와 서정시의 중간적 존재라고 하는 편이 옳으며, 서사시 자체는 사회의 근대화에 따라 산문소설로 변용한다. 한국의 서사시로는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현대 작품으로는 서사시다운 것이 거의 없으나 3·1 운동 이후 한때 유행한 김동환(金東煥)의 《국경(國境)의 밤》 《승천(昇天)하는 청춘》이 있고 광복 후의 작품으로는 김용호(金容浩)의 《남해찬가(南海讚歌)》 등이 서사시에 가깝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사시 [epic, 敍事詩] (두산백과)   드라마사전 서사시   [ epic음성듣기 ] 분류 용어 서정시, 극시와 함께 시의 3대 종류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서사시는 장중한 문체로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 장편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시로서 신화, 전설, 국가, 민족, 역사 또는 인류의 운명 따위를 그대로 순서를 좇아 시의 형식으로 서술한 객관적 문학이다. 영웅 서사시는 영웅의 위업을 찬양하는 것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룬다. 서사시는 대체로 성립된 사정에 따라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전승적 일차적 서사시(원시서사시 혹은 민족서사시)로서 한 민족 집단이 위대한 지도자영웅의 영도 아래 외적을 물리치고 국가를 형성하던 창업 시대의 역사 및 전설을 소재로 하여 익명의 시인이 지은 장편의 노래를 말한다. 이는 기억에 의하여 구전되던 것인데 점차 문자로 정착되었다. 민족생활을 통해 성립·전승된 ‘설화내용’이 영웅이야기로 형성된 것이다. 대표작으로는 호머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 그리고 독일의 『니벨룽겐의 노래』를 들 수 있다. 또 하나는 문학적, 또는 이차적 서사시(예술적 서사시나 인공서사시)로서 일차적 서사시를 모범으로 삼아 시인이 의도적으로 창작한 서사시를 말한다. 이차적 서사시는 구술되지않고 처음부터 문자로 기록된다. 역사적 설화나 사건을 소재로 하는 경우에도 작가의 예술적 의식에서 생산된다. 대표작으로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 밀턴의 『실락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헨리필딩의 『톰 존스』에 이르는 피카레스크 소설이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등의 ‘자기 탐구’ 소설의 산문에는 희극적 서사시의 전통이 있다. 서사시는 한 때 민중이 공동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장구한 세월에 걸쳐 덧붙이고 세련시키고 다듬은 결과 현재의 예술적 작품으로 발달했다. 관련이미지 호메로스출처: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서사시 [epic] (드라마사전)   문학비평용어사전 서사시     서사시는 한 민족이나 국가의 운명을 걸머지고 있는 영웅적인 존재를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그가 주도하거나 참여한 건국, 전쟁, 혁명, 천재지변 등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장중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서술하는 시로 알려져 있다. 에이브럼즈는 『문학용어사전』에서 서사시를 크게 1차적 서사시와 2차적 서사시로 나누었다. 전통적 서사시는 1차 서사시나 민속서사시로 불리운다. 2차 서사시는 1차 서사시를 모방하되 시인 개인의 뛰어난 솜씨로 재창조하거나 변용시킨 문학적 서사시라고 한다. 여러 학자들에 의해 1차적 서사시의 특징으로 주인공이 국가적이거나 민족적 영웅인 점, 배경이 세계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점, 비현실적이거나 초자연적 행위가 나타나는 점 등이 제시되어 왔다. 1차적 서사시 그 자체보다는 1차적 서사시에서 2차적 서사시로 넘어가는 과정을 주목하고 있는 커(W.P.Ker)는 『서사시와 로망스』에서 발라드를 서사시의 계승과 변용과정으로 파악하는 데서 시작하고 있다. 서사시는 초기에 민족이나 국가의 문제를 안고 있는 영웅을 다루었으나 시간의 경과에 따라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서사시가 단순한 이야기시(narrative poems)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사시와 서술시의 중간단계로 "예술적 서사시"(artificial epic)이라는 양식을 상정할 수 있다. 커가 제시한 서사시-예술적 서사시-서술시의 과정은 높이로서의 1차적 서사시가 넓이로서의 2차적 서사시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사시가 다룬 설화는 한 민족의 전통, 시대적 요구, 시인 나름의 창작태도 등에 의해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포스트 모더니즘 전에는 이러한 변용작업은 크게 보지는 않았으나 포스트 모더니즘에 와서 패러디나 상호텍스트성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폴 머천트(Paul Merchant)는 『서사시』에서 서사시를 "역사를 내포한 시"로 포괄적으로 정의하게 된 내력을 다음과 같이 들려 주었다. 서사시는 1차적 서사시와 2차적 서사시로 나누어지는데 1차적인 서사시는 구전서사시로 불리우는 것으로 6음보격이나 그와 비슷한 운율로 짜여지며 영웅과 문화사적 대사건(로마제국, 기독교)을 이야기로 엮은 시를 말한다. 이에 반해 2차적인 서사시는 그밖에 서사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총칭한다. 서사시는 역사에 연결되기도 하고 일상성에 연결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서사시는 한 민족이나 집단의 연대기가 되거나 종족사 혹은 제도와 전통에 관한 기록이 된다. 후자의 경우 서사시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끔 만든 이야기책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결국 1차적 서사시가 2차적 서사시로 내려가는 그 사이에 '역사'라든가 '이야기'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사시에서 시적인 요소가 약해지고 이야기적 요소가 강화되면서 특히 20세기에 들어와 서사시라는 개념으로 소설을 셜명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대표적인 소설이론가인 루카치와 바흐틴이 바로 이러한 시도를 보여 주었다.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서사시가 스스로 완결된 삶의 총체성을 형상화하는데 반해, 소설은 감추어진 삶의 총체성을 발견해 내려고 하고 구축하려 한다. 서사시와 비극은 범법도 모르고 광기도 알지 못한다, 소설은 서사시의 규범적인 아동기의 성격과 대조적으로 성숙한 남성의 형식이다, 소설은 신에 의해서 버림받은 세계의 서사시다 등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이처럼, 루카치는 서사시와 소설을 총체성 형상화/총체성 발견, 광기와 범법에 무지/광기와 범법에 중점, 어린아이의 형식/성숙한 남성성의 형식, 완성성/진행성 등과 같이 대비하였다.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전승희 옮김)에 드러난 미하일 바흐틴의 서사시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서사시의 특징은 민족의 과거가 제재로 사용되며 민족적 전통이 서사시의 원천으로 사용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서사시는 완성되고 완결된 장르로 서사시에서의 시간개념은 가치론적인 시간적 범주들이다. 서사시적 세계 속에는 어떤 미완결성, 미해결성, 불확정성도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절대적인 완결성과 폐쇄성이야말로 시간적으로 가치평가 된 서사시적 과거의 특징이다. 서사시적 주인공은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주도권도 결여하고 있다. 서사시적 세계는 작가와 청중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에게도 강요되는 의심할 여지없는 진실로서의 단 하나의 통일된 세계관만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이처럼 바흐틴은 서사시를 민족적 전통, 완성된 장르, 완결성, 폐쇄성, 통일된 세계관 등으로 인식하고 있다.(조남현) 참고문헌 미하일 바흐틴,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전승희 외 역, 창작과 비평사, 1988년 조남현, 『소설신론』, 서울대 출판부, 2004년 Georg Lukacs, Theorie des Romans, Luchterhand, 1971년 M.H.Abrams, A Glossary of Literary Terms, Holt, Rinehart and Winston, Inc, 1971년 Paul Merchant, The Epic, Methuen & Co Ltd, 1971년 W.P.Ker, Epic and Romance, Dover Publication, 1957년 관련이미지 호메로스출처: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서사시 (문학비평용어사전, 한국문학평론가협회)  
1484    [시공부 101] - 28... 댓글:  조회:2975  추천:0  2020-03-08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이미지라는 말이 어렵게 느껴져요. 정체가 뭐지요?     분야 현대 시 목차 이미지의 연금술 이미지를 만드는 세 가지 레시피 : 묘사, 비유, 상징 이미지, 오감을 자극하다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문학 작품의 구성 원리 시를 공부할 때 이미지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미지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영상 같은 것을 가리킨다는데 그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싶어요. 그리고 이미지가 시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그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알려 주세요. 이미지의 연금술 시를 읽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어떤 감각적인 영상이 떠오르는 것을 느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런 영상을 이미지, 또는 심상이라고 합니다. 자, 흥미로운 시를 하나 살펴볼까요.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 「청노루」 여러분은 혹시 청노루를 본 적이 있나요? 아마 대부분 도시 생활을 하니까 노루 같은 야생동물을 보는 것이 어렵겠지요. 그래도 흔하게는 동물원에서, 아주 우연히는 산길을 가다가 한 번쯤 노루를 보았을 것입니다. 노루의 색깔은 어떤가요? 대개는 노란색이나 붉은색을 조금 띠고 있는 갈색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이 시에서 노루는 청색을 띠고 있습니다. 솔직히 여러분도 이 시를 읽으면서 별 의심 없이 청색 노루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청색 노루가 현실 속에 존재하는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말입니다. 이처럼 시를 읽다 보면 시의 분위기에 취해서 어떤 특정한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미지, 곧 심상입니다. 이미지를 만드는 세 가지 레시피 : 묘사, 비유, 상징 시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데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묘사에 의한 방법입니다. 앞에서 제시된 박목월의 「청노루」를 보세요.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대상에 대한 묘사만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청노루 / 맑은 눈에 // 도는 / 구름”을 시각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마치 눈앞에서 청노루를 보는 듯한 착각을 만들어 놓고 있지요. 두 번째는 비유에 의한 방법입니다. 비유하려는 대상을 매개물에 빗대어 표현함으로써 이미지를 형성하는 방법입니다. 직유, 은유, 대유, 의인 등의 방법을 통해서 시의 이미지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 선생님이 걸어오신다 회초리를 들고서 선생님은 낙타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는 항시 추억한다 이한직, 「낙타」 중에서 이 작품에는 나이 드신 선생님의 모습이 낙타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지만 선생님을 떠올리면 낙타의 모습도 함께 연상이 되지요. 그 반대도 성립이 가능하고요. 낙타의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왠지 행동도 굼떠 보이고 퀭한 눈을 깜박거리는 것이 노인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지요. 이처럼 비유를 활용하면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방법은 상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상징은 추상적인 관념을 아무 관련 없는 다른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구체적인 사물을 이용하면 이미지가 만들어집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중에서 위 시에는 두 가지 상징적인 시어가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와 십자가입니다. 예수는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 존재이며 십자가는 그가 못 박혀 죽은 형틀이지요. 두 가지 시어 모두 자기희생의 이미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상징적 심상은 감각적인 이미지와 달리 감각적인 인상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희생’과 같은 관념을 연상시킨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이미지, 오감을 자극하다 이미지는 앞에서 말했듯이 크게 감각적인 이미지와 상징적인 이미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감각적인 이미지는 감각을 연상시키고 상징적인 이미지는 관념을 연상시키지요. 그리고 감각적인 이미지는 다시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이미지들의 실례는 아래와 같습니다. 시각 :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 그렇게 가오리다 /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임께서 부르시면」 중에서 청각 :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 두 점을 치는 소리 /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 눈을 뜨면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중에서 촉각 :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김종길, 「성탄제」 중에서 후각 : 방 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백석, 「여우난곬족」 중에서 미각 :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山)도 자작나무다 /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 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백석, 「백화(白樺)」 중에서 밑줄 친 부분을 읽으면 아마도 여러분은 각각의 감각들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잘 느껴지지 않는다면 상상력을 동원해 보세요. 상상력이 없이 문학 작품을 접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읽는다 해도 감흥이 없으니까요. 두 가지 이미지가 함께 제시되는 경우는 없나요? 하나의 시 구절에서 두 가지 이미지가 제시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를 두고 공감각적 심상이라고 합니다. “금(金)으로 타는 태양(太陽)의 즐거운 울림”(박남수, 「아침 이미지」 중에서)이라든가,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김기림, 「바다와 나비」 중에서)를 살펴보세요. 전자는 시각적인 대상인 태양이 ‘울림’이라는 청각적인 이미지와 만나고 있고요, 두 번째 구절은 ‘초승달’이라는 시각적 대상을 ‘시리다’는 촉각적 이미지와 연결해 놓았네요. 이처럼 두 가지 이미지가 함께 제시되는 공감각적 심상은 우리 시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미지라는 말이 어렵게 느껴져요. 정체가 뭐지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83    [시공부 101] - 27... 댓글:  조회:2702  추천:0  2020-03-08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이것’만 있으면 리듬을 만들 수 있다?     분야 현대 시 목차 리듬은 반복에서 시작된다 소리를, 단어를, 문장구조를 반복해 볼까? 음절수의 반복, 호흡 단위의 반복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문학 작품의 구성 원리 제 장래희망은 싱어송라이터예요. 그런데 음악하는 선배들에게 제가 쓴 가사를 보여 주면 내용은 좋지만 리듬이 느껴지지 않는다고들 해요. 대체 어떻게 하면 리듬을 만들 수 있을까요? 시에서 리듬을 만드는 방법을 알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리듬은 반복에서 시작된다 시는 노래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시와 음악은 본래는 같은 것이었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분화한 것입니다. 시가 노래에서 분화되기는 했지만 시에는 여전히 리듬감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운율이라고 부릅니다. ‘운’은 규칙적인 소리의 반복을 뜻하며 ‘율’은 소리가 반복되는 패턴을 의미합니다. 운율, 즉 리듬은 소리의 반복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아무 음악이라도 떠올려 보세요. 어떤 박자를 계속 반복하면 리듬감이 생겨납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음악처럼 선율은 없지만 특정한 소리나 호흡의 단위를 반복하면 리듬감이 생깁니다. 소리를, 단어를, 문장구조를 반복해 볼까? 시에서 반복되는 리듬의 요소는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특정한 소리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고려 가요 「청산별곡」에서 ‘ㄹ’ 소리와 ‘ㅇ’ 소리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후렴구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와 같은 경우도 있고,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파도의 소리를 흉내 낸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처럼 음절이 반복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둘째로 낱말이 반복될 때도 리듬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김소월의 「금잔디」에서 “잔디, / 잔디, / 금잔디, /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라는 시구에는 ‘잔디’라는 단어가 반복되면서 리듬감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같은 시인의 「접동새」에서 “접동 / 접동 / 아우래비 접동”과 같은 구절도 ‘접동’이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운율감이 형성되었지요. 셋째로 문장구조가 반복되어 리듬감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주어+서술어, 주어+서술어’와 같이 문장구조가 반복되면 안정적인 리듬감이 만들어지는 동시에 주제를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삼월 하늘에 뜨거운 피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대지에 뜨거운 살과 피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이어야 함을 알았다 박두진, 「3월 1일의 하늘」 중에서 위 시에는 ‘~음을 알았다’는 구절이 세 차례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조국에 대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는 동시에 운율감을 형성하지요. 또한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처럼 ‘관형어 + 주어’의 형식이 반복되면서 문장의 리듬감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덧붙여서 음성 상징어를 구사해서 리듬을 형성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도란도란’, ‘퐁당퐁당’, ‘쑥덕쑥덕’처럼 음성 상징은 그 자체에 이미 반복적인 리듬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의 리듬을 형성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줍니다. 이육사의 「청포도」에서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라든가, 박두진의 「묘지송」에서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같은 표현에서 이런 사례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음절수의 반복, 호흡 단위의 반복 운율은 소리와 단어와 문장이 반복되는 것 이외에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읽는 패턴에 따라서 글자수가 반복되거나 일정하게 호흡의 단위가 반복되면 리듬감이 형성됩니다. 특정한 글자수가 반복되는 것을 음수율이라고 하고 호흡 단위가 반복되는 것을 음보율이라고 합니다. 산 너머 남촌(南村)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南)으로 오네 김동환, 「산 너머 남촌에는」 중에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 「초혼」 중에서 첫 번째 작품을 보면 1연과 2연이 뭔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글자의 배열이 첫행은 3자, 4자, 둘째행은 5자로 되어 있다는 점이지요. 3자, 4자, 5자가 반복된 것입니다. 앞의 3자, 4자를 합하면 7자가 되어 7자, 5자의 형식이 만들어지지요. 이를 두고 사람들은 7 · 5조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7 · 5자의 글자수가 각 행에 동일하게 반복되면서 음수율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근대 시 초기에 많이 등장했던 운율입니다. 두 번째 작품은 글자수가 잘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약간의 규칙성이 느껴지지요. 그것은 각 행을 세 번씩 끊어 읽으며 리듬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산산이 ˅ 부서진 ˅ 이름이여! / 허공중에 ˅ 헤어진 ˅ 이름이여!”처럼 세 번씩 끊어 읽기가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음보율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처럼 시의 리듬은 박자와 선율이 없어도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내재율은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내재율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고 시 속에서 은근하게 느껴지는 운율을 말합니다. 따라서 일정한 규칙이 없이 각각의 시에 따라서 자유롭게 만들어지게 되지요. 대개는 주제의식에 따라 형성되는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운율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것’만 있으면 리듬을 만들 수 있다?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82    [시공부 101] - 26... 댓글:  조회:3407  추천:0  2020-03-08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남성적/여성적 어조라는 표현, 이거 성차별 아닌가요?     분야 현대 시 목차 어조 : 시적 화자의 말투 외계인의 어조를 상상해 볼까? ‘남성적 / 여성적 어조’는 사회적 관습의 반영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문학 작품의 구성 원리 시에서 화자의 어조를 공부하다 보면 남성적 어조, 여성적 어조라는 말이 나옵니다. 남성, 여성으로 어조를 가르는 것이 성차별적인 것은 아닌가요? 어조 : 시적 화자의 말투 시를 공부하다 보면 어조라는 말 때문에 신경이 쓰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조는 아주 단순한 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어조는 ‘말투’를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한 말이지요.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단어와 문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각자의 독특한 억양과 강세, 음색, 속도, 목소리의 크기 등이 존재합니다. 기분에 따라서 말투가 달라지기도 하고 누구와 말하느냐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지요. 같은 말을 두고도 새침하고 뾰로통하게 전달할 수도 있고 격식을 갖춰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투에 따라 의미가 잘못 전해져 가끔 사람들 사이에 오해가 생기기도 하지요. 시에서도 일상생활처럼 말투가 존재합니다. 그것을 바로 어조라고 부르지요. 같은 의미를 전달하더라도 어조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에 어조는 시의 주제를 형성하는 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합니다.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김현승, 「가을의 기도」 중에서 ‘~소서’로 된 어조를 ‘~다’로 바꿔 볼까요. ‘가을에는 사랑하고 싶다. 오직 한 사람을 택하고 싶다.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고 싶다.’ 위의 시에서는 시적 화자의 어조가 어떤 절대자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기원의 의미를 지니지만 바꾼 문장에서는 화자의 의지와 바람을 나타내는 소망의 의미로 바뀝니다. 어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시적 화자의 어조는 시의 주제를 강조하거나 시적 화자의 태도를 반영하는 역할을 해 줍니다. 외계인의 어조를 상상해 볼까? 시의 어조는 상황에 따라서 아주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듣는 이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시의 어조는 독백적 어조, 대화체 어조로 나뉩니다. 또한 듣는 이가 누구인지에 따라 명령적 어조, 청유적 어조, 기원적 어조 등이 존재할 수 있지요. 그뿐만 아니라 시적 화자의 정서에 따라 영탄적 어조, 격정적 어조, 그리움의 어조, 낙천적 어조 등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 냉소적 어조, 풍자적 어조, 비판적 어조, 해학적 어조, 예찬적 어조 등으로 구분할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시적 화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어조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어른인지, 어린이인지, 지식인인지, 노동자인지, 남성인지, 여성인지에 따라서 어조가 달라지지요. ‘남성적 / 여성적 어조’는 사회적 관습의 반영 자, 이제 여러분이 궁금해 했던 남성적 어조, 여성적 어조를 살펴봅시다. 일단 남성적 어조는 대개 상황을 단정하는 어미나 명령형 종결 어미를 취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는 데 어울리며 의지적이고 힘찬 기백을 담은 내용을 전달하기에 적절합니다. 이에 반해 여성적 어조는 부드럽고 유연한 느낌의 여성성이 드러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여성적 어조는 간절한 기원, 애상의 내용을 전달하기에 적합하며, 높임, 청유형, 가정형 등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이육사, 「광야」 중에서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중에서 두 편의 시에서 어느 것이 남성적이고 어느 것이 여성적일까요? 아마 대부분 쉽게 답을 맞췄을 텐데 여러분의 생각대로 이육사의 「광야」는 남성적 어조를,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여성적 어조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지요. 전자가 ‘~으리라’라는 의지적인 표현을 쓴 반면에 후자는 ‘~습니다’처럼 높임과 존경의 의미를 나타내는 어미를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하나의 작품 안에서 남성적 어조와 여성적 어조가 함께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김소월의 시 「초혼」을 보면 남성적인 어조, 여성적인 어조를 모두 찾을 수 있지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초혼(招魂)」 중에서 ‘초혼’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부른다는 뜻입니다. 시적 화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이름을 “부르다가 내가 죽을” 만큼 간절하게 외치며 그리워하고 있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절규하듯이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남성적인 어조로 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애상의 정서를 드러내는 것은 일반적으로 여성적 어조라고 봅니다. 같은 시인데도 혹자는 ‘남성적 어조’로, 혹자는 ‘여성적 어조’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시의 어조를 ‘남성이냐, 여성이냐’로 제한하지 않고 ‘반복과 영탄을 통한 강렬한 어조’로 보는 시각도 꽤 있습니다. 그럼 남성적 어조, 여성적 어조는 왜 이렇게 유형화되었을까요? 다름 아닌 사회적 관습 때문입니다. 예전에 남자들에게는 주로 의지적이고 기백이 있는 모습들이 요구되었고, 여자들에게는 순종적이고 간절히 갈구하는 모습들이 요구되었지요. 이는 우리 사회가 과거에 그러했던 것을 언어가 반영한 것이지 언어 표현으로 남녀를 차별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남성과 여성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지위가 과거와 달리 많이 변했지요. 예컨대 남성적 성향으로 일컬어 왔던 ‘당당함’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까요? 과연 당당함이 남성 고유의 성향일까요? 성별을 떠나 사람, 동물, 사물의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성향일 텐데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흔히 여성적 성향으로 일컬어 온 ‘섬세함’ 또한 남성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선입견이 조금씩 사라질수록 화자의 어조를 성별에 따라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어지겠지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적지 않게 쓰이는 말이니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시는 아름다움을 언어로 표현한 것인데 냉소적이거나 풍자적일 수도 있나요? 시는 언어를 통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이때 아름다움이란 굳이 서정적인 것만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조화롭고 균형 잡힌 아름다움 이외에도 초월적이거나 비극적인 아름다움도 존재하지요. 대개 냉소적이거나 풍자적인 시들은 현대 문명이라든가 세계의 모순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점에서 시에서도 성찰적, 냉소적, 풍자적 어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사령」이라든가, 최승호 시인의 「북어」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성적/여성적 어조라는 표현, 이거 성차별 아닌가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81    [시공부 101] - 25... 댓글:  조회:2774  추천:0  2020-03-07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시인과 시적 화자는 다르다고요?     분야 현대 시 목차 시인이 작가라면, 시적 화자는 배우 시적 화자는 1인칭과 3인칭으로 존재한다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문학 작품의 구성 원리 시에서 말하는 사람을 시적 화자라고 하는데 시인과 시적 화자를 구분하는 이유는 뭔가요? 굳이 그렇게 구분해서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소설에서 말하는 서술자와 시적 화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알고 싶어요. 시인이 작가라면, 시적 화자는 배우 시인과 시적 화자는 분명히 다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들을 떠올려 보세요. 대개 사랑과 실연의 아픔을 표현한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실제로 사랑에 빠졌거나 실연을 당한 사람이 있나요?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이별의 아픔이 없는 사람도 있고 사랑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마치 실제로 그런 상황에 놓인 것처럼 기쁘거나 슬픈 표정을 짓지요.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노래가 우리 마음을 흔들 수 없겠지요. 혹은 무대 매너가 별로라고 인기가 곤두박질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노래가 가수의 실제 경험이 아닌 줄 알면서도 가수가 노래에 실감나게 감정을 담아 부를 때 큰 감동을 얻습니다. 물론 노래가 끝나면 가수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일상으로 되돌아옵니다. 시인과 시적 화자의 관계도 비슷합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일 뿐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시 속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노래를 하는 아이돌처럼 시의 상황에 흠뻑 취하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만 시인은 시라는 무대가 아닌 작품 밖에, 즉 삶 속에 머무르는 생활인입니다. 무대 밖에서 노래를 만들고 가사를 쓰는 작곡 · 작사가처럼 말입니다. 물론 가수가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노래할 수 있듯이 시인도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시로 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시인이 자기 이야기만 쓴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작품을 쓰기가 곤란해질 것입니다. 소재도 떨어지고 자기가 쓴 시 때문에 실제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제약도 생길 수 있지요. 시인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허구적인 대리인을 내세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시적 화자라고 부르며 또 다른 말로는 ‘서정적 자아’라고도 하지요. 시적 화자는 1인칭과 3인칭으로 존재한다 시적 화자는 소설의 서술자처럼 복잡하지 않습니다. 소설의 서술자는 1인칭과 3인칭으로, 다시 1인칭은 주인공 · 관찰자 시점으로 3인칭은 관찰자 ·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복잡하게 구분이 되지만 시적 화자는 이보다 훨씬 단순하게 나뉩니다. 시적 화자는 시 안에 직접 나타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가 있지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중에서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중에서 두 편의 시를 보면 시적 화자가 어떻게 다른지 금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작품모두 시적 화자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작품은 ‘나’가 직접 작품 속에 등장하지만, 두 번째 작품에서는 시적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습니다. 소설의 3인칭 관찰자처럼 객관적인 상황만 제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시적 화자가 1인칭인 경우,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과 정서를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이별의 슬픔이 그토록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나’라는 화자의 감정이 ‘나’의 입을 통해 섬세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지요. 반면 시적 화자가 3인칭인 경우, 독자들은 시적 상황과 대상을 좀 더 사실적이고 현장감 있게 느낄 수 있습니다. 박목월의 「나그네」에서 나그네의 외로운 정서는 시에 나타난 강나루, 밀밭, 구름 등 사실적인 소재들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 시에서 화자는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시인과 시적 화자가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닐 수도 있나요? 물론입니다. 시인과 시적 화자는 서로 다른 인격이기 때문에 굳이 입장을 같이할 필요는 없지요. 특히 시인이 자기 반성과 성찰을 한다든가, 자신을 스스로 풍자할 때는 시인과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것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광규의 「상행」에서 시인은 물질적인 가치만을 중시하는 시적 화자를 내세워 시적 화자 자체를 풍자하기도 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인과 시적 화자는 다르다고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80    [시공부 101] - 24... 댓글:  조회:2855  추천:0  2020-03-07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시어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분야 현대 시 목차 함축적 의미를 지닌 시어 시는 일종의 랩 시는 형상성을 지닌다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본질과 속성 고등학교 문학 문학 작품의 구성 원리 시에서 사용하는 말들은 일상적인 말들과 다른 특징이 있는 것 같아요. 시를 아무리 읽어도,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다 알아도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때도 있잖아요. 왜인가요? 시어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건가요? 함축적 의미를 지닌 시어 산문은 그냥 줄을 따라 읽으면 의미가 쉽게 파악되는데 시는 집중을 하고 주의를 기울여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시에 사용된 언어가 함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축은 문자 그대로, 무엇인가를 포함하고 모아 두며 때론 의중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어는 일상 속에 사용하는 의미만 지닌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모아 두는 것이지요. 따라서 시어를 일상적인 산문처럼 읽다가는 시어가 품고 모아 둔 다양한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이름을 불러 주었더니 꽃이 되는 현상은 일상적인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시에서 꽃은 단순히 식물로서의 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도 단순히 소리 내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지요. 일단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상대방을 의미 있게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선생님이 ‘야!’ 혹은 ‘너!’라고 부를 때보다 이름을 불러 줄 때가 더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 까닭은 선생님이 ‘나’를 알아봐 준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한 명의 학생, 매년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채워지는 ‘몇 학년 몇 반 몇 번’이 아니라 고유한 ‘나’로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지요. 이처럼 이름을 부르다는 말에는 대상을 인식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꽃은 어떤 의미일까요? 꽃은 대개 식물의 가장 윗부분에서 색깔과 향기를 지닌 채 피어납니다. 따라서 식물을 볼 때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것이 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어떤 식물들은 꽃으로 씨앗을 지키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꽃은 커다란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춘수의 「꽃」은 내가 먼저 대상을 의미 있게 받아들일 때, 대상이 나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시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표현과 ‘꽃’이라는 단어에는 일상적인 의미 이외에 다른 의미들이 포함되고 쌓여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들을 함축적인 의미라고 합니다. 시어는 일상적인 언어와 달리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시는 일종의 랩 시어의 또 다른 특성으로는 음악성을 들 수 있습니다. 음악성은 시어의 배열 속에서 느껴지는 리듬을 가리킵니다. 원래 시는 악기의 리듬에 맞춰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서정시를 뜻하는 영어의 ‘lyric’은 ‘리라(lyra)’라는 악기의 리듬에 맞춰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었지요. 오늘날에도 작사가의 이름을 쓸 때 ‘lyrics by ◯◯◯’로 표기하기도 하고요. 시는 산문과는 달리 리듬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를 줄글로 쓰지 않고 행과 연을 구분하여 쓰는 것도 모두 리듬과 운율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대중음악의 랩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 중에서 이 시는 고려 가요입니다. 마지막 줄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는 ‘ㄹ’ 소리와 ‘ㅇ’ 소리를 반복해서 독특한 리듬을 보여 줍니다. 리듬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소리의 반복입니다. ‘ㄹ’과 ‘ㅇ’ 소리가 반복해서 나타나니 그 안에 리듬의식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위의 고려 가요에는 반복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는 ‘살어리 ˅ 살어리 ˅ 랏다’로 세 번 끊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이처럼 세 번 끊어 읽는 말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지요. 뒤에 살펴보겠지만 이를 음보율이라고 합니다. ‘보(步)’가 ‘걸음’을 나타내는 글자니까 쉽게 얘기해서 ‘음이 발자국을 찍는 자리’, 즉 끊어 읽는 횟수라고 생각하면 쉬울 거예요. 이처럼 시는 일상적인 말들과 달리 음악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는 형상성을 지닌다 시어의 특징 중 빠뜨릴 수 없는 것은 형상성입니다. 우리는 시 구절을 읽으면 어느 구절에선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시각적일 때도 있고 촉각적이고 후각적일 때도 있으며 둘 이상의 감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박용래, 「겨울밤」 이 시의 화자는 고향집에 있지 않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해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을 보내고 있지요. 그런데 이 사람에게 고향집 마늘밭에 쏟아지는 눈과, 추녀 밑의 달빛이 떠오릅니다. 분명히 현실 속에는 없는 것이지만 독자의 머릿속에도 그것들이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에서는 발목에 서늘한 시냇물이 닿은 것 같은 촉각적인 느낌도 얻을 수 있지요. 물론 상상력을 동원한다는 조건을 만족한다면 말이지요. 이처럼 시는 지금 당장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만드는 형상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 이제 정리해 봅시다. 시는 일상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의미와 성격은 실제 쓰이는 표현과 조금 다릅니다. 시어는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음악적인 리듬도 갖추고 있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읽으면 형상성마저 느낄 수 있습니다. 시어는 일상 언어와 형태는 같을지 몰라도 그 쓰임새는 다른 것입니다. 시는 문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나요? 시는 문법을 따로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기본적인 소통이 되지 않을 정도로 쓰면 안 되겠지요. 시의 분위기라든가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문법에 어긋난 것도 허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 ‘시적 허용’이라고도 부릅니다. 예를 들면 김영랑의 시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에서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 은결을 도도네”의 경우에서 “도도네”는 ‘돋우네’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또한 “빤질한”은 ‘반질반질’이라는 부사를 활용하여 시인이 만들어 낸 말이지요. 이처럼 시인은 운율을 위해서 문법에 어긋난 표현을 일부러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어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79    [시공부 101] - 23... 댓글:  조회:2249  추천:0  2020-03-07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한시는 한자로 쓰였는데 왜 국어 시간에 배우나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한시는 우리 시가 문학에 속한다 을지문덕도 신사임당도 한시 작가 방랑시인 김삿갓, 풍자적인 시를 짓다 정약용, 백성의 삶을 건강하게 표현하다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의 갈래와 흐름 한시는 우리 문학 작품에 포함되나요?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방랑시인 김삿갓이 지은 작품도 있고, 실학자 정약용이 지은 한시도 있다는데, 어떤 내용이었나요? 한시는 우리 시가 문학에 속한다 한시는 우리의 시가 문학에 속합니다. 한 민족의 문학은 그 민족에 속한 사람이 그 민족의 사상과 이념, 또는 정서를 그 민족의 언어로 표현해야 합니다. 따라서 한국 문학은 한국인이 한국인의 사상과 정서를 한국어로 표현한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나라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전까지 고유의 문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말로 된 노래와 시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한자어로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작품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자로 적혀 있다고 해도 그 안에는 한민족이 지닌 고유한 사상이나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한자로 쓰여졌지만 한시를 한국 문학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만약 한자로 기록된 문헌들을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을 스스로 버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을지문덕도 신사임당도 한시 작가 한시가 창작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입니다. 삼국 시대에 이미 을지문덕이 지은 「여수장우중문시」가 있었고 신라 말기에 최치원이 지은 작품들도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도 한시는 적극적으로 창작되었습니다. 고려는 광종 시절부터 과거를 실시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한문학이 크게 발전했던 것입니다. 정지상, 이제현, 이인로, 이규보, 이색 등 뛰어난 한시를 남긴 이들이 고려 시대에 많았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뛰어난 한시 작가들이 많았습니다. 기생 황진이, 그리고 그와 인연이 있던 서경덕과 임제,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며 세상을 떠돌았던 『금오신화』의 작가 김시습,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그의 누이 허난설헌, 이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 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명성을 지닌 이들은 모두 한시를 잘 지었습니다. 방랑시인 김삿갓, 풍자적인 시를 짓다 자, 이제 여러분이 질문했던 방랑시인 김삿갓을 알아볼까요? 그의 원래 이름은 김병연입니다. 양반가에서 태어났지만 가문이 몰락하여 숨어 지내다가 사면을 받아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지요. 과거에 급제할 당시 김병연은 홍경래의 난에 항복한 김익순을 비판하는 글을 답으로 써냈는데 사실은 그가 비판한 김익순이 김병연의 조부였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김병연은 벼슬을 버리고 스스로를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큰 삿갓을 쓰고 다녔습니다. 그 까닭에 사람들이 그를 두고 김삿갓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김병연은 전국을 방랑하면서 시를 남겼는데 그의 작품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 불립니다. 日出猿生原(일출원생원) 해 뜨자 원숭이가 언덕에 나타나고 猫過鼠盡死(묘과서진사) 고양이 지나가자 쥐가 다 죽네 黃昏蚊檐至(황혼문첨지) 황혼이 되자 모기가 처마에 이르고 夜出蚤碩士(야출조석사) 밤 되자 벼룩이 자리에서 쏘아 대네 김병연, 「원생원(元生員)」 이 시는 김병연의 풍자적인 경향을 바로 알 수 있는 작품입니다. 시의 해석을 보면 등장하는 것들이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와 쥐, 모기, 벼룩과 같은 미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시의 원문을 보면 ‘원생원’, ‘서진사’, ‘문첨지’, ‘조석사’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이 말에서 각각 ‘원숭이 원(猿)’, ‘쥐 서(鼠)’, ‘모기 문(蚊)’, ‘벼룩 조(蚤)’ 자를 떼어 내 볼까요. 그럼 생원, 진사, 첨지, 석사라는 말이 남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이지요. 특히 생원과 진사는 조선 시대를 다룬 TV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접했을 것입니다. 생원은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을, 진사는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을 가리키는데 생원시, 진사시는 모두 조선 시대 과거시험이었지요. 그렇다면 첨지와 석사는 무슨 뜻일까요? 첨지는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키는 말, 석사는 벼슬하지 않은 양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생원, 진사, 첨지, 석사처럼 마을에서 유세를 떠는 사람들을 각각 원숭이, 쥐, 모기, 벼룩에 비유한 것입니다. 조선 후기에 민중을 핍박하고 못살게 굴던 지방관리와 유지들을 이처럼 풍자한 것입니다. 자, 김삿갓이 어떻게 풍자를 작품 속에서 활용하고 있는지 알겠지요? 정약용, 백성의 삶을 건강하게 표현하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입니다. 또한 거중기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건설하는 등 실질적인 일들에도 힘을 썼지요.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다양한 저서를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한시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은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실사구시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지요. 新芻濁酒如湩白(신추탁주여동백) 새로 거른 막걸리 젖빛처럼 뿌옇고 大碗麥飯高一尺(대완맥반고일척) 큰 사발에 보리밥, 높기가 한 자로세 飯罷取枷登場立(반파취가등장립) 밥 먹자 도리깨 잡고 마당에 나서니 雙肩漆澤翻日赤(쌍견칠택번일적) 검게 탄 두 어깨 햇빛 받아 번쩍이네 呼邪作聲擧趾齊(호사작성거지제) 옹헤야 소리 내며 발 맞춰 두드리니 須臾麥穗都狼藉(수유맥수도랑자) 삽시간에 보리 낟알 마당에 가득하네 정약용, 「보리타작」 중에서 이 시에는 사대부의 한시에서 보기 어려운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농민들의 생활상입니다. 사대부들은 주로 자연을 그리거나 유교적인 이념을 노래했는데 이 작품에는 보리를 타작하는 농민의 건강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인용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이어지는 구절에는 “마음이 몸의 노예 되지 않았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농민의 삶이야말로 육체와 정신이 일치하는 생활이라며 그렇지 못한 사대부와 자기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요. 이처럼 정약용은 실사구시 정신을 바탕으로 현실의 건강한 모습을 그려 냈습니다. 정약용은 주로 어떤 작품들을 지었나요? 정약용은 학자이기 이전에 시인이었습니다. 그가 지은 시들은 대부분 삶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들이었지요. 그는 19세기 초 조선의 농촌 사회를 구석구석 섬세하게 살펴보고 당대 사회의 모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봉건적 신분 제도의 모순, 과거 제도의 폐해 비판 등도 정약용 시의 주제의식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조선시 선언」이라는 글을 통해서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의 정서를 표현하면서 중국 시의 율격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등 주체적인 문화적 태도를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시는 한자로 쓰였는데 왜 국어 시간에 배우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78    [시공부 101] - 22... 댓글:  조회:2701  추천:0  2020-03-01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사설이 길다’와 ‘사설시조’의 ‘사설’이 같은 글자라고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시조의 유쾌한 반란, 사설시조 사랑과 그리움 듬뿍 담은 ‘서정성’ 웃음보 간질이는 ‘해학성’ 권력의 횡포에 도전하는 ‘풍자성’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의 갈래와 흐름 어른들을 보면 수다를 잔뜩 늘어놓고는 “사설이 길었다”고 하잖아요? 근데 국어 시간에 ‘사설시조’를 배우면서 설마 같은 글자는 아니겠지 했는데, 국어사전을 뒤적여 보니 웬걸 “사설(辭說)은 말이나 이야기, 잔소리나 푸념을 늘어놓는 것을 말한다. 판소리에서 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는 ‘아니리’를 말한다”라고 적혀 있어요. 정말 같은 글자였어요! 시조의 유쾌한 반란, 사설시조 말씀 사(辭)에 말씀 설(說), 두 글자가 이어지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말의 잔치가 떠오르지요? 우리는 시조 하면 흔히 초장—중장—종장의 3장 6구 45자 내외의 평시조를 떠올립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시조는 거의 대부분이 이와 같은 평시조에 해당하지요. 하지만 조선 후기 시조는 더 이상 사대부만 향유하는 문학이 아니었습니다. 기녀, 중인, 상인, 몰락한 양반 등 다양한 계층이 시조를 지어 부르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이들은 사대부처럼 유교의 이념을 전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시조를 통해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들을 표현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도 있었고 욕설이나 음담패설도 들어 있었지요. 또한 권위를 풍자하거나 세태를 비판하는 내용도 적지 않았습니다. 해야 할 이야깃거리가 많아졌기 때문에 시조의 형식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시조의 형식적인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더 많은 내용을 시조에 담아냈지요. 초장 · 중장 · 종장의 구별은 있었지만 그것들의 길이는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중장은 평시조의 두 배 내지 세 배를 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평시조보다 길어진 시조를 사설시조라고 부릅니다. ‘사설이 길다’라는 관용구가 떠오르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이지요. 사랑과 그리움 듬뿍 담은 ‘서정성’ 사설시조가 주제로 삼았던 대표적인 내용은 임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대부의 시조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지요. 사대부로서 남녀상열지사라고 비난받을 수 있는 작품을 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까닭에 임에 대한 사랑은 기생들의 노래에 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다가 향유층이 넓어지면서 서민들도 사설시조를 통해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작품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귀뚜라미, 저 귀뚜라미 가련하다 저 귀뚜라미 어찌 된 귀뚜라미인지 지는 달, 새는 밤에 긴 소리 짧은 소리 마디마디 슬픈 소리 저 혼자 울어 지낼 때 규방에 살짝 든 잠을 살뜰하게 깨우는구나 두어라, 제 비록 미물이나 외로운 밤 내 뜻 알기는 너뿐인가 하노라 작자 미상의 시조 현대어로 풀이해서 리듬감이 떨어졌지만 임을 향한 그리움을 표현한 대표적인 사설시조입니다. 작품 속 시적 화자는 귀뚜라미에 감정을 이입하여 귀뚜라미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밤 혼자 지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서 볼 때 밤새 내내 울고 있는 귀뚜라미도 가련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임에 대한 그리움은 사설시조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도 쉬어 넘고, 새들도 쉬어서 넘는 고갯길을 임이 왔다고 하면 한 번도 쉬지 않고 가겠다는 시조도 있고,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를 임 그림자로 오해했다는 내용의 시조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설시조에는 남녀 간의 애정이 우리말로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웃음보 간질이는 ‘해학성’ 사설시조의 내용상 특징 중 하나는 해학성에 있습니다. 해학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름 그림자를 임으로 착각한다든가, 답답한 심정 때문에 가슴에 창문을 내고 싶다든가, 게젓 장수가 게젓 하나를 팔면서 온갖 유식한 말을 한다는 등의 상황은 듣는 이들에게 웃음을 짓게 합니다. 개를 열 마리 넘게 기르지만 이 개처럼 얄미우랴 미운 임이 오면 꼬리를 회회 치면서 치뛰락 내리뛰락 반겨서 내닫고 고운 임 오게 되면 뒷발을 바둥바둥 물러섰다가 나왔다가 캉캉 짖어 돌려 보내는 요 암캐야 쉰밥이 그릇 그릇 난들 너 먹일 줄 있으랴 작자 미상의 시조 미운 임이 오면 꼬리를 치며 반기고 고운 임이 오면 캉캉 짖는 개가 있다면 그 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인이 개를 오래 돌보지는 않을 것 같네요. 하지만 실제로 개에게 무슨 잘못이 있을까요? 잘못이 있다면 오지 않는 임에게 있지요.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랄까요. 원망해야 할 대상은 임인데 괜히 개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네요. 이런 상황을 지켜보노라면 은근히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지요. 권력의 횡포에 도전하는 ‘풍자성’ 사설시조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풍자성을 들 수 있습니다. 풍자란 웃음을 통해서 기존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풍자는 겉으로는 우스꽝스럽지만 속으로는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요. 좀 전에 소개했던 게젓 장수가 게젓을 팔면서 온갖 유식한 말을 지껄이는 우스꽝스러운 상황도 자신의 유식함을 내세우는 이들을 풍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두꺼비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치달아 앉아 건너편 산을 바라보니 흰 송골매가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펄쩍 뛰어 내닫다가 두엄 아래 자빠졌구나 모쳐라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피멍 들 뻔했구나 작자 미상의 시조 위 작품은 탐관오리의 횡포와 허세를 풍자한 작품입니다. 파리는 힘없는 사람들, 즉 민중을 의미하고 두꺼비는 지방관리를 의미하지요. 송골매는 두꺼비를 잡아먹는 존재로 두꺼비보다도 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힘 있는 자에게는 엎드리고 힘없는 자에게는 군림하려 드는 양반, 혹은 관리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피멍 들 뻔”했다는 두꺼비의 독백은 그들의 자기합리화, 혹은 허세를 연상시킵니다. 풍자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설시조처럼 서민들이 즐기던 풍자적인 예술 장르로는 또 무엇이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으로는 를 예로 들어 보자면, 시부모의 학대와 시집살이의 고된 노동, 남편의 외도로 인한 여성의 한스러운 삶이 풍자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작품의 일부를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아버지 호랑새요 / 시어머니 꾸중새요 / 동서 하나 할림새요 / 시누이 하나 뾰족새요 / 남편 하나 미련새요 / 자식 하나 우는 새요 / 나 하나만 썩는 샐세 / 귀먹어서 삼 년이요 / 눈 어두워 삼 년이요 / 말 못해서 삼 년이요 / 석 삼 년을 살고 나니 / 배꽃 같던 요 내 얼굴 / 호박꽃이 다 되었네 / 삼단 같던 요 내 머리 / 비사리춤(싸리나무 껍질)이 다 되었네” [네이버 지식백과] ‘사설이 길다’와 ‘사설시조’의 ‘사설’이 같은 글자라고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77    [시공부 101] - 21... 댓글:  조회:2309  추천:0  2020-03-01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시조에 연과 행의 구분이 있나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시조 한 수가 하나의 연이 되다 유교의 이념을 실어 나르다 연시조의 슈퍼스타, 윤선도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의 갈래와 흐름 시조는 초장—중장—종장으로 구성되었다고 배웠어요. 그렇다면 시조에는 연과 행의 구분이 없는 것인가요? 연시조라는 말이 있던데 연시조는 어떤 것인가요? 시조 한 수가 하나의 연이 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평시조는 대개 초장—중장—종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45자 내외로 쓰여집니다. 시조는 현대 시처럼 연과 행의 구분이 존재하지는 않지요. 그런데 시조 중에는 평시조 여러 편이 묶여서 마치 현대 시에서 여러 연을 지닌 작품처럼 지어지는 시조도 있습니다. 이런 시조를 연시조라고 합니다. 시조 한 편으로는 담지 못할 내용을 여러 편의 시조로 묶어서 작품을 쓰는 것이지요. 각각의 시조는 독립된 작품이지만 크게 보면 여러 작품이 하나의 주제를 이루는 것입니다. 최초의 연시조는 조선 세종 때 맹사성이 지은 「강호사시가」입니다. 이 작품은 총 네 수의 시조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시조는 봄날 시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기는 내용이며, 두 번째 시조는 여름날 바람을 쐬며 더위를 잊고 지내는 한가로움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 번째 시조는 가을날 강가에 배를 띄우고 고기잡이를 하는 모습을, 네 번째 시조는 겨울에 눈 내린 경치를 바라보며 추위를 견디는 소박한 생활을 표현하고 있지요. 각각의 시조는 독립적이지만 그 내용이 ‘자연을 즐기며 한가롭게 살아가는 삶’이라는 점에서 주제가 하나로 모아집니다. 이처럼 연시조는 커다란 주제를 놓고 각각의 시조들이 하나의 연처럼 배열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유교의 이념을 실어 나르다 조선 전기에 지어진 연시조는 사대부들의 시조로서 유교의 이념을 전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표 작품은 이황의 「도산십이곡」과 이이의 「고산구곡가」, 그리고 주세붕의 「오륜가」, 정철의 「훈민가」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사대부의 이상과 삶의 태도가 잘 나타난 작품입니다. 「도산십이곡」은 총 열두 수로 학문하는 자세와 이상적인 자연을 노래하고 있으며, 「고산구곡가」는 총 열 수로 학문하는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세붕의 「오륜가」는 삼강오륜과 같은 유교의 덕목을 계몽적인 어조로 노래한 작품이며, 정철의 「훈민가」는 노래 제목대로 백성에게 유학의 도리를 가르치는 노래입니다.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하리라 이황, 「도산십이곡」 중 11곡 이 작품은 이상적인 자연을 닮고자 하는 화자의 소망이 나타난 작품입니다. 유학자들은 인간 세상보다 자연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은 질서와 조화를 갖춘, 인간 세계의 복잡한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세계로 비추어졌습니다. 이 작품에서 청산과 유수, 즉 푸른 산과 흐르는 물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모습, 즉 어떠한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는 인간이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과 대조를 이루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청산과 유수는 인간이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삶의 태도를 지닌 존재입니다. 유학자들은 청산과 유수처럼 변하지 않는 이상적인 모습을 지닌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학문을 해야 한다고 보았고 그러한 생각이 작품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사대부의 작품 속에서 자연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연시조의 슈퍼스타, 윤선도 앞에서 언급한 이황, 이이, 주세붕, 정철의 연시조는 모두 유교적 이념을 전달한다는 목적성이 분명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문학 작품에서 이념적 목적이 지나치면 독자들이 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앞의 작품들은 감동을 주기에 앞서 마치 훈계와 설교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요. 이러한 목적성과 계몽성에서 벗어나 문학적인 재미와 상상력, 표현의 다양성을 갖춘 연시조 작가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윤선도입니다. 윤선도는 「오우가」 여섯 수, 「견회요」 다섯 수, 「만흥」 여섯 수, 「어부사시사」 사십 수 등 다양한 연시조 작품을 써낸 연시조계의 슈퍼스타였습니다. 그의 시조는 편수도 많지만 문학적인 상상력과 표현도 세련되어 있어서 지금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드나무숲인가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어촌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하는구나 지국총 어사와 지국총 어사와 맑고도 깊은 못에 온갖 고기 뛰노는구나 윤선도, 「어부사시사」 중 춘사 4수 이 작품은 윤선도가 당쟁으로 귀양을 가 있던 보길도에서 지은 것입니다. 잠시 여러분 머릿속에 남해안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섬들을 떠올려 보세요. 배를 저어 가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섬들이 정말 아름답게 보이겠지요. 이 작품은 바로 남해의 다도해 풍경을 작가가 어부가 되었다고 가정하고 쓴 시조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언뜻 보기에 시조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초장—중장—종장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중간에 “노 저어라 노 저어라”와 “지국총 어사와 지국총 어사와”를 생략하면 온전한 시조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윤선도가 중간 중간에 반복되는 구절을 쓴 까닭은 어부가 배를 타고 노를 젓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지요.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이황 등의 연시조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지요? 이황의 시조에서 보았던 엄숙함 대신 경쾌하고 생동감 넘치는 묘사가 펼쳐지고 있음을 여러분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인용된 작품 이외에 윤선도의 작품을 찾아 읽는다면 그의 문학적 면모를 더욱 뚜렷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를 지을 때 진짜 어부로 살았나요? 아닙니다. 윤선도는 어부로서 살아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부가 되었다고 가정한 채 작품을 지었지요. 그런 까닭에 작품 속에 등장한 어부는 고기잡이의 어려움과 고통, 애환을 느끼지 않고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즐기고 있지요. 만약 진짜 어부였다면 손이 부르트게 고단한 일상, 추위에 떨며 고기를 잡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심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을까요? 윤선도의 작품은 어부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렸다기보다는 낭만적으로 아름답게 그려 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요. 그런 맥락에서 「어부사시사」에 등장한 어부는 진짜 어부가 아니라 가짜 어부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조에 연과 행의 구분이 있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76    [시공부 101] - 20... 댓글:  조회:2548  추천:0  2020-03-01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한글은 조선 시대에 규방의 문자였다?     분야 고전 시가 목차 내방가사, 부녀자들이 지은 노래 봉건적 관습과 여성의 삶을 그리다 허난설헌의 「규원가」, 가장 뛰어난 문학성을 지닌 내방가사 그리움과 기다림의 사계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의 갈래와 흐름 조선 시대에는 여성의 사회적 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조선 후기부터는 여성도 작품을 창작했다고 하는데 어떤 작품이 있나요? 내방가사, 부녀자들이 지은 노래 조선 시대 여성들은 봉건적 관습에 얽매여 활동하는 데에 많은 제약이 따랐습니다. 부엌일, 바느질, 손님 접대 등 주로 집안 살림을 돌보기에 바빴고, 사회적 활동이나 대외적인 문화 활동은 기대하기 어려웠지요. 그런데 부녀자들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선비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한글로 시가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학자와 문인은 훈민정음을 천대했지만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에게는 두루 보급되었습니다. 이들은 사대부들의 노래 중에 우리말 위주로 창작되는 가사 문학에 자연스럽게 눈을 뜨게 되었고 작품까지 창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내방가사는 주로 영남 지방에서 크게 발전하였는데 학자들에 따르면 영 · 정조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지어져서 일제 강점기 시절과 해방 직후까지 약 6,000여 편의 내방가사가 창작되었다고 합니다. 내방가사가 영남 지방에서 주로 지어진 까닭은 영남 지방에 한글을 깨우치고 교양을 갖춘 부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서민들이 지어 부른 민요 대신 사대부의 가사를 선택하여 자신들의 감정과 정서를 노래했을 것입니다. 봉건적 관습과 여성의 삶을 그리다 내방가사의 주요 내용은 상당수가 양반 부녀자들의 생활 주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양반 사대부가 유교적인 이념을 전달하기 위해 골몰했던 것과 달리 실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 놓고자 했지요. 따라서 사대부의 가사와는 큰 차이를 보였고 어떤 점에서는 서민들이 지은 가사와 그 성격이 유사했습니다. 관념이 아니라 실제 생활을 다루었기 때문에 내방가사는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표현할 수 있었지요. 내방가사의 주요 내용을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부녀자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노래한 작품들이 다수 있습니다. 시집간 딸이 지켜야 할 내용을 노래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사친가」도 있고, 자신의 환경을 탄식하는 「여탄가」, 「여자탄식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봉건적 인습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여성들의 고민과 정서를 호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내방가사라고 해서 현실이나 환경을 한탄하는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화전가」나 「향원행락가」와 같이 때로는 여성들이 지닌 취미라든가 놀이도 노래로 지어 불렸고 당시의 문물이나 풍속도 소재로 활용되었습니다. 허난설헌의 「규원가」, 가장 뛰어난 문학성을 지닌 내방가사 현재까지 전해지는 내방가사 중에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는 허난설헌의 「규원가」를 들 수 있습니다.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이로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인물이지요. 뛰어난 문학적 재주를 지녔던 허난설헌은 어릴 때부터 재주가 남달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한시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했으니까요. 문학적인 재주가 뛰어난 그녀였지만 삶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극은 결혼을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허난설헌은 열다섯 살에 김성립과 혼인을 합니다. 그런데 김성립의 집안은 허난설헌의 집안과는 달리 지극히 가부장적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시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지요. 더군다나 남편은 무뚝뚝하고 고집스러웠으며 허난설헌을 버거워하여 집안을 돌보지 않은 채 밖으로만 돌아다녔습니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허난설헌이 낳은 두 아이도 돌림병에 걸려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한 아버지와 오빠의 잇따른 죽음으로 상심이 컸지요. 마침내 그녀도 몸과 마음이 쇠약해져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리움과 기다림의 사계 「규원가」는 작품 제목대로 규방에서 지내는 여인의 원한을 그린 가사입니다. 작품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허난설헌에게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아직 남아 있을 때 지어졌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의 사랑을 잃고 슬픔에 잠긴 채 원망과 그리움을 함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규원가」의 일부를 현대어로 풀이하여 감상해 보겠습니다. 삼삼오오 어울려 다니는 기생집에 새 기생이 나타났는가? 꽃 피고 날이 저물 때 정처 없이 나가 있다가 좋은 말을 타고 어디어디를 머물며 놀고 있는가? 원근의 지리를 모르는데 임의 소식을 어찌 알까. 인연을 끊으려 한들 임 향한 생각이 없을까. 임을 못 보거든 그립지나 말 것을, 하루 열두 때 길기도 하고 한 달 서른 날이 지루하기만 하다. 창밖에 심은 매화 몇 번이나 피고 졌는가? 겨울 밤 차고 찰 때 눈이 섞어 내리고, 여름날 길고 길 때 궂은비는 무슨 일인가? 아름다운 봄철에 좋은 풍경을 보아도 아무 감흥이 없다. 가을 달이 방에 비치고 귀뚜라미가 침상에서 울 때에 긴 한숨 떨어지는 눈물에 헛된 생각만 많다. 아마도 모진 목숨 죽기도 어렵겠구나. 허난설헌, 「규원가」 중에서 자, 감상한 부분이 어떻습니까. 일단 남편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도 봉건적인 질서 속에서 부녀자는 집 안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겠네요. “원근의 지리를 모르는데”라는 구절을 보면 당시 부녀자들의 바깥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지을 당시 허난설헌은 남편에 대한 기대를 버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임 향한 생각이 여전하며,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가슴속에 남아 있음을 표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인용된 뒷부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변하도록 임이 오지 않는 것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겨울밤 눈이 섞어 내리고 여름에 궂은비가 내리며 가을날 귀뚜라미가 우는 상황은 임과 떨어져 지내는 시적 화자의 정서를 더욱더 애달프게 하는 데 기여하는 객관적 상관물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표현에서 이 작품의 문학성이 드러나는 것이겠지요. 허난설헌이 남긴 작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허난설헌은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창작을 했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죽기 직전에 모든 작품을 다 태우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그런 까닭에 남아 있는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지요. 지금 전해지는 허난설헌의 작품은 허균이 죽은 누이의 작품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예전에 보았던 누이의 작품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난설헌집』에 실려 있는데 한시 142편 정도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난설헌집』에는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도 극찬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관련이미지 3                               이미지 이전 교녀가 / 계녀가사작자, 연대 미상의 규방가사. 평소 시집가기 전의 딸을 교훈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한글은 조선 시대에 규방의 문자였다?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75    [시공부 101] - 19... 댓글:  조회:2557  추천:0  2020-02-28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그 선비들은 왜 불면의 밤을 보냈을까?     분야 고전 시가 목차 꿈속으로, 시 속으로 파고든 전쟁 낭만적 언어에서 현실의 언어로 사대부의 미의식을 뛰어넘다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 작품의 맥락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과 사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 시대에 가장 큰 전란인데 전쟁을 겪으면서 사회가 많이 변했다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시가 문학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이정환과 박인로 등의 작품을 보면 조선 전기의 사대부 시가 작품과는 사뭇 달라 보이거든요. 꿈속으로, 시 속으로 파고든 전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있기 전까지 상당수의 시조는 주로 사대부들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시조는 대개 유교적인 이념을 전달하거나 자연의 경치를 노래한 작품이 많았지요. 그런데 전쟁 이후에 시조의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전란의 고통을 노래한 시조들이 나타났으며, 기존 체제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긴 시조도 등장했고 현실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시조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시조의 향유층도 이전과는 달리 점점 더 넓어졌습니다. 한밤중에 혼자 일어나 묻노라 이 내 꿈아 만 리 요양(遼陽)1)을 어느덧 다녀왔느냐? 반갑다 학가 선용(鶴駕 仙容)2)을 친히 뵌 듯하여라 이정환, 「국치비가」 중 1수 이 작품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초장에는 ‘꿈’을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네요. 꿈은 아무리 먼 곳이라도 얼마든지 오고 갈 수 있습니다. 시적 화자는 조선 땅에 있지만 꿈속에서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만나게 됩니다. 짧은 내용 속에 치욕스러운 전쟁의 결말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 후기의 시조는 유교적 이념으로부터 차츰 벗어나 다양한 주제의식을 표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윤선도와 같은 시인들은 자연을 벗 삼아 노래하기를 즐기기도 했지요. 낭만적 언어에서 현실의 언어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 가사는 시조에 비해서 예술성이 떨어지며 조선 전기에 비추어 볼 때 문학성이 뒤처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가사 작품을 쓴 작가가 있는데 그가 노계 박인로입니다. 박인로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쓴 「선상탄」과 선비의 곤궁한 삶을 표현한 「누항사」가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정철의 가사에 비해서 문학적인 기교는 떨어지지만 훨씬 더 사실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누항사」는 제목처럼 누추한 집의 이야기를 노래로 부른 것입니다. 이 작품은 박인로가 나이 51세 되던 해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생활하던 중에 지은 가사입니다. 이 작품 역시 서사—본사—결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사는 모든 일을 하늘에 맡기고 안빈낙도하며 살아가고자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음을 한탄하는 내용입니다. 본사에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자 하나 소가 없어서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워 하는 화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가뭄에 잠시 동안 비가 와서 때마침 소를 빌려 주겠다는 사람의 말을 듣고 밤늦게 소를 빌리러 갔다가 소를 빌리지 못하고 수모만 당하고 돌아오는 처지를 그려 놓습니다. 소를 빌려 주겠다던 사람이 그만 다른 사람에게 먼저 빌려 주어야 할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시적 화자는 세상을 한탄하며 밭 갈기를 포기해 버립니다. 잠 못 드는 새벽, 그는 붓을 들어 몸과 마음이 고단했던 하루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결사에서는 자연을 벗하며 늙어 가겠다는 다짐을 하지요. 가난하다고 해서 남을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며, 가난한 중에도 충과 효를 지키면서 형제간에 우애하고 친구간에 의리를 지키며 살아갈 것을 맹세합니다. 결사에 나타난 충과 효, 우애와 의리는 모두 유교적인 이념으로 사대부의 태도를 변함없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비록 결사에서 사대부 가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박인로의 가사는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일상생활의 언어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에서 조선 전기 가사와 다릅니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언어를 버리고 솔직한 언어로 선비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전기 가사와 큰 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사대부의 미의식을 뛰어넘다 박인로 이후에 가사 장르에는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고 가사를 향유하는 계층도 넓어집니다. 기행가사, 유배가사, 내방가사, 평민가사 등 다양한 가사의 형태가 나타난 것도 이 시기이지요. 이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일반 서민들도 가사를 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해학적인 표현으로 가사 문학이 지녔던 엄숙함을 떨쳐 내고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등 사대부들의 미의식을 뛰어넘는 가사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가사의 형태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실생활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길이가 길어졌지요. 가사가 운문적인 경향에서 산문적인 경향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사의 산문화 경향은 18세기 우리 문학에서 산문이 발달하던 시대적인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 가사 중에서 길이가 긴 가사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조선 후기에는 대체로 장편가사가 창작되었습니다. 유배가사, 내방가사, 평민가사 모두 적지 않은 분량이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산문이 발달하던 현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긴 작품은 기행가사에서 꼽아 볼 수 있지요. 특히 홍순학이 지은 「연행가」는 총 3,924구로 청나라 북경을 다녀온 130일간의 기록을 노래한 작품입니다. 여정이 매우 자세하게 제시되어 있고 북경의 새로운 문물에 대한 감상이 객관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장편기행가사로는 김인겸이 일본을 다녀와 쓴 「일동장유가」가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 선비들은 왜 불면의 밤을 보냈을까?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74    [시공부 101] - 18... 댓글:  조회:2542  추천:0  2020-02-28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고려 가요가 남녀상열지사라면, 조선의 시가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임금을 사모하여 부르는 노래 충신연주지사의 대표작, 「사미인곡」 「사미인곡」의 뒤를 잇다, 「속미인곡」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 작품의 맥락 고등학교 국어Ⅱ 한국 문학의 전승과 흐름 고려 가요를 가리켜 남녀상열지사라고 했던 것처럼 조선 시대 사대부의 노래에는 충신연주지사라는 말이 따라붙는 것 같아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어요. 임금을 사모하여 부르는 노래 충신연주지사는 한자로 ‘忠臣戀主之詞’라고 적습니다. 한자를 풀이하면 충성스러운 신하가 임금을 사모하는 노래라는 뜻이지요. 대개의 충신연주지사에서 임금은 남성으로, 신하는 여성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임을 그리워하는 주체가 여성으로 그려질 때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충신연주지사의 시작은 대개 고려 시대 정서가 지은 「정과정」을 손꼽습니다. 이 작품은 고려 시대 때 지어졌지만 향가와 비슷하다고 하여 향가계 여요(고려 가요)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내 임을 그리워하여 울고 있으니 산 접동새와 나는 비슷합니다 옳지 않으며 거짓인 것을 지는 달과 새벽 별이 알 것입니다. 넋이라도 임과 한곳에 살고 싶어라, 아아 정서, 「정과정」 중에서 정서는 고려 시대 인종의 처남으로 왕의 사랑을 받았으나 의종 때 역모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아 귀양을 갔습니다. 3행의 “옳지 않으며 거짓인 것을”이라는 구절은 모함을 당했음을 암시합니다. 의종은 정서에게 곧 다시 부를 것이라며 위로했지만 정서는 이후 20여 년 동안 부름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정서가 자신의 억울함과 더불어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애절하게 표현한 노래가 「정과정」입니다. 이와 같이 임금과 떨어져서 임금을 사모하며 부른 노래가 충신연주지사입니다. 정서의 「정과정」 이후 충신연주지사는 사대부들의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습니다. 자연을 노래한 송순의 「면앙정가」마저도 마지막 구절은 ‘이 몸이 이렇게 지내는 것도 또한 임금의 은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역시 충신연주지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충신연주지사의 대표작, 「사미인곡」 충신연주지사의 대표 작품은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들 수 있습니다. 정철은 송순의 가사 「면앙정가」에 영향을 받아 「성산별곡」이라는 가사를 썼던 인물입니다. 그가 지은 「사미인곡」과 그 속편 「속미인곡」의 의미는 미인을 사모하다, 혹은 그리워하다라는 것인데, 여기서 미인은 ‘아름다운 사람’을 일컫는 말인 동시에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사미인곡」은 송강 정철이 관직에서 물러나 전남 담양 창평에 머물면서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별한 임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에 비유하여 표현한 작품입니다. 당시 정철이 창평에 머무른 까닭은 과열된 붕당 정치로 인해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인과 서인이 첨예하게 갈등하던 시절이었는데 정철은 당시 서인의 대표 격으로 벼슬살이와 귀양을 반복하고 있었지요. 정철은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임금에 대한 충직한 마음과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는 초조한 마음을 동시에 표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작품의 구조는 서사—본사—결사로 나뉘는데 본사는 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계절에는 이별한 임에게 보내는 시적 화자의 정성이 담긴 사물들이 제시되어 있지요. 결사 부분을 현대어로 풀이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시라도 임 생각을 하지 말자. 이 시름을 잊고자 하니 마음속에 맺혀 있어 뼛속까지 사무쳤으니, 편작 같은 훌륭한 의사가 열 명이 온다 한들 나의 병을 어찌하랴. 아, 내 병이야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서 호랑나비가 되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가는 곳마다 앉아 있다가, 향기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아가 앉으리라. 임께서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쫓으려 하노라. 정철, 「사미인곡」 중에서 사랑하는 임을 잊고자 하지만 잊을 수가 없는데 그 까닭은 임에 대한 그리움이 뼛속까지 사무쳐 있기 때문입니다. 임을 향한 충성스러운 마음은 변함없다는 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죽어서 호랑나비가 되더라도 임을 따르겠다는 구절 또한 임금에 대한 충절을 나타냅니다. 「사미인곡」의 뒤를 잇다, 「속미인곡」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의 속편으로 이 작품 역시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사미인곡」과 달리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두 여인의 대화’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시적 화자는 임과 이별한 서러운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를 듣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은 시적 화자의 말에 대해 공감하며 위로하고 있습니다. 시적 화자가 처한 상황이 다른 사람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작가가 전달하려 했던 것이지요. 마음속에 맺힌 일이 있습니다. 임을 모신 적이 있어서 임의 형편을 내가 잘 아는데, 물같이 연약한 몸이 편하실 때가 몇 날일까? 이른 봄날의 추위와 한여름의 무더위에 어떻게 지내시며, 가을과 겨울은 누가 모셨을까? 아침, 저녁 진지는 예전과 같이 잡수시는가? 기나긴 밤에 잠은 어떻게 주무실까? 정철, 「속미인곡」 중에서 내용이 모두 이별한 임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걱정하는 것이네요. 비록 임과 이별한 상황이지만 임에 대한 사랑과 충심은 변하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정철의 임금에 대한 충성된 마음은 기행가사인 「관동별곡」에도 고스란히 나타나있습니다. 정철은 지금의 강원도 지역 관찰사로 부임하고 난 후, 자신이 다스리는 강원도 지역 전체를 유람하며 가는 곳마다 임금과 나라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충신연주지사는 조선 사대부들의 대표적인 노래였습니다. 임금에 대한 충절은 유교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도 많은 사대부들이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시조와 가사, 한시로 표현했는데 그것들도 모두 충신연주지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충신연주지사에서 시적 화자는 왜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나요? 우리 시가 문학에서 여성적 화자를 설정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고대 가요 「공무도하가」, 「정읍사」, 그리고 고려 가요와 기녀들의 시조에는 모두 여성 화자가 등장했지요. 이 여성들은 임과 어쩔 수 없이 이별에 처한 이들이었습니다. 안타깝고 절실한 마음으로 임이 자신을 다시 찾아 주길 바라는 이들의 어조는 깊은 공감을 자극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임금에게 내쳐진 신하가 글로써 공감을 불러일으키려면 안타깝고 절실한 여성적 어조를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었겠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 가요가 남녀상열지사라면, 조선의 시가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73    [시공부 101] - 17... 댓글:  조회:2421  추천:0  2020-02-28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가사문학관은 왜 전라도 담양에 있나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정읍 태인에서 최초의 가사가 탄생하다 호남 가사 문학의 계통을 잇다, 「면앙정가」 호남 가단을 완성하다, 「성산별곡」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의 갈래와 흐름 고전 시가 중에 가사 장르가 있던데 그것을 기리는 가사문학관은 어째서 전라도 담양에 있는 것인가요? 가사 문학이 전라도에서 많이 발달한 건가요? 정읍 태인에서 최초의 가사가 탄생하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시가 형식인 가사(歌辭)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래의 가사가 아닙니다. 가사를 정의한다면 4 · 4조 4음보로 연속체 시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조처럼 4음보로 되어 있지만 초장—중장—종장의 구분 없이 길게 이어서 노래한 작품이지요. 형식은 운문이지만 내용이 길어서 산문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요. 운문과 산문의 중간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사가 형성된 것은 대개 경기체가가 쇠퇴한 이후라고 보고 있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정제된 형식의 시조보다 좀 더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펼칠 수 있는 문학을 추구했습니다. 경기체가가 있었지만 그것은 한자를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 한계가 있었지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대부들이 고안해 낸 장르가 바로 가사였습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가사를 통해서 교훈적인 내용을 전달하기도 하고, 기행과 견문을 기록하기도 하고, 임금에 대한 충절과 자연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 등 다양한 주제의식을 작품을 통해 형상화했습니다. 조선 시대 최초의 가사는 정극인의 「상춘곡」입니다. 정극인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고향인 정읍 태인에 내려와 그곳에서 후진을 양성했다고 합니다. 「상춘곡」은 바로 그곳 태인에서의 삶을 그린 작품이지요. 세속에 묻혀 사는 분들이여! 나의 삶이 어떠한가? 옛사람의 풍류에 미칠까, 못 미칠까. 세상에 남자 몸으로 태어나서 나만 한 사람이 많지마는 산림에 묻혀서 지극한 즐거움을 모르는 것인가? 초가집을 푸른 시냇물 앞에 두고 소나무 대나무 빽빽한 곳에 자연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구나. 정극인, 「상춘곡」 중에서 현대어로 풀이해서 리듬감이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본래는 4 · 4조 4음보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인용된 부분은 작품의 첫 부분인데 뒤에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자연 속에서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물질적인 만족보다 정신적인 만족을 추구했고 그런 까닭에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자연 속에서 도의(道義)를 기르고자 했습니다. 이를 가리켜 흔히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하지요. 세속의 이익과 권세를 따지다 보면 도의를 추구하기 어렵지만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는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호남 가사 문학의 계통을 잇다, 「면앙정가」 정극인의 「상춘곡」 이후로 가장 주목할 만한 가사 작품도 호남 지방에서 지어졌습니다. 바로 송순의 「면앙정가」입니다. 송순은 그의 나이 41세에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고향인 전남 담양에 내려와 면앙정을 짓고 자연을 즐겼는데 그때에 지은 작품이 「면앙정가」입니다. 작품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첫 번째 부분인 서사에서는 면앙정이 있는 제월봉의 모습을 노래하였고, 두 번째 부분인 본사에서는 면앙정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노래하였지요. 본사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서는 시선을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이동하며 면앙정의 근경과 원경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면앙정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풍경을 묘사하였지요. 마지막 결사 부분은 ‘이렇게 지내는 것도 모두 역군은(亦君恩, 역시 임금의 은혜)이샷다’ 라며 유학자로서의 충절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떠나와도 내 몸이 겨를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쐬려 하고 달도 맞으려 하니 밤은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고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까. 아침이 부족한데 저녁이 싫겠는가. 오늘이 부족하니 내일이라 여유가 있을까. 이 산에 앉아 보고 저 산에 걸어 보니 번거로운 마음에 버릴 일이 아주 없다. 쉴 사이 없거든 소식 전할 틈이 있으랴. 다만 푸른 지팡이만 다 무디어져 가는구나. 송순, 「면앙정가」 중에서 인용한 부분은 「면앙정가」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잘 나타난 부분입니다. 인간 세상의 번거로운 일로부터 벗어났지만 자연의 흥취를 즐기는 데에 몹시 바쁘다는 시적 화자의 자부심이 나타난 구절입니다. 밤도 줍고 달도 맞아야 하고 낚시도 하고 꽃도 쓸다 보면, 벼슬을 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마음이 바쁘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이 구절에는 벼슬을 그만둔 이후에 심리적인 보상을 얻으려는 마음도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호남 가단을 완성하다, 「성산별곡」 송순의 「면앙정가」는 이후에 등장하는 정철의 「성산별곡」에 영향을 줍니다. 이 작품은 정철이 전남 담양 창평에 내려가 있을 때, 그곳에 식영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김성원을 예찬하며 부른 노래입니다. 김성원은 정철 아내의 일가친척이었습니다. 작품의 내용은 식영정의 경치와 김성원의 풍류를 예찬한 것인데 그 구조가 「면앙정가」와 매우 흡사합니다. 「면앙정가」가 면앙정의 사계절을 노래했듯이, 「성산별곡」도 식영정에서 바라본 성산의 사계절을 노래하고 있지요. 이런 까닭에 이 작품은 「면앙정가」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학자들은 흔히 전라도 지역에서 자주 지어진 가사 문학을 일컬어 호남가단이라고 부릅니다. 호남가단은 정극인의 「상춘곡」,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이어져 내려온 셈이지요. 자, 이제 여러분의 궁금증이 조금 해결되었나요? 가사문학관이 전라도 담양에 있는 것은 당시 가사 문학이 전라도를 중심으로 발달하였기 때문입니다. 전라도에서 가사 문학이 발달한 것은 정치적인 갈등으로 인해 지방으로 내려온 사대부들이 다른 지역보다 전라도 지역에 많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들은 남도의 여유롭고 한가로운 자연과 벗하며 자신들의 좌절감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사 문학은 사대부만 지어 부른 건가요? 아닙니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사대부들이 지어 불렀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양반뿐만 아니라 여인들도 불렀고 평민들도 지어 불렀습니다. 개화기에는 개화가사가 지어지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 여인들이 부른 내방가사는 편수도 많았고 가장 오랫동안 지어지기도 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사문학관은 왜 전라도 담양에 있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72    [시공부 101] - 16... 댓글:  조회:2396  추천:0  2020-02-25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조선의 기녀들에게 시조는 연애편지?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정신이 아닌 마음을 노래하다 조선 최고 기녀의 문학적 상상력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작품 창작 고등학교 국어Ⅰ 작가의 개성 이해와 작품 감상 조선 시대 기생들은 뛰어난 시조를 많이 남겼다는데 그들의 시조는 사대부 남성들의 시조와 어떻게 달랐을지 궁금해요. 정신이 아닌 마음을 노래하다 시조는 본래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정서보다는 유교의 관념을 전달하고자 했지요. 그런 까닭에 사대부들의 시조는 인간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정서를 전달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조의 성격을 뒤바꾼 사람들은 다름 아닌 기녀들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기녀들은 예능에 탁월한 재주를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시와 글씨, 그림, 악기 연주와 노래 등 다양한 방면에서 재주를 뽐냈지요. 그러던 중 기녀들은 사대부들이 즐기던 시조까지 짓기에 이르렀지요. 그런데 기녀들의 시조는 양반 사대부의 것과는 그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기녀들은 남녀 간의 애정 및 인간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습니다. 또한 한문투를 벗어나 순우리말의 아름다움이 표현된 작품들을 창작했습니다. 이들에 의해서 시조는 사대부의 문학에서 벗어나 조선 후기에는 중인 계층의 전문 가객들이 즐겨 짓는 문학 장르가 되었고 그 후에는 일반 백성들까지 즐기게 되었습니다. 기녀들의 시조는 시조가 ‘국민 문학’으로 발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홍랑의 시조 이 시조는 기생 홍랑이 지었습니다. 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골라 꺾어 임의 손에 보내면, 임께서 그 가지를 창밖에 심어 두고 보다가 새 잎이 나면 그것을 자신으로 알아봐 달라는 간곡한 심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아마도 시적 화자가 사랑하는 임과 이별하며 자신을 잊지 말라는 정표로 버들가지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물망초의 꽃말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네요. 자, 어떤가요? 사대부의 시조처럼 유교적 이념이 담겨 있나요? 오히려 여러분 머릿속에는 고려 가요 「가시리」라든가 「서경별곡」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녀들의 시조는 인간의 본성을 표현하는 데에 전혀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조선 최고 기녀의 문학적 상상력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기녀는 누가 뭐래도 황진이일 것입니다. 그녀는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기록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얼굴이 아름답고 시를 잘 지었으며 글씨도 뛰어났고 음악에도 재주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그녀는 서경덕, 임제를 비롯하여 당대에 뛰어난 문인, 유학자 들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합니다. 그녀가 남긴 작품은 시조 6수와 한시 4수밖에 없지만 창의적인 발상이 뛰어나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작품은 대개 남녀 간의 사랑을 소재로 삼았는데 그리움, 애달픔, 아쉬움, 후회 등의 정서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임 오신 날 밤이면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의 시조 일단 이 작품에서 “어론 임”이라는 표현은 ‘사랑하는 임’이라는 말입니다. ‘얼다’는 ‘물이 언다’는 의미 이외에 ‘남녀가 사랑을 나눈다’는 의미도 있지요. 자,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 낸다고 되어 있네요. 밤을 어떻게 베어 낼 수 있을까요? 밤은 추상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아무리 베려 해도 베어 낼 수 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황진이는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밤과 같은 추상적인 시간을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대상으로 바꿔 놓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그 많은 밤 중에 동짓달 밤을 잘라 냈을까요? 이는 우리나라 절기와 관련이 깊습니다. 우리나라 절기 중에서 밤이 가장 긴 절기가 동지입니다. 따라서 동짓달 밤을 잘라서 이불 아래 넣어 두었다가 펴면 그 어떤 날보다도 밤이 길게 흐르겠지요. 그러면 시적 화자는 사랑하는 임과 그 어떤 밤보다도 오랫동안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가요? 황진이의 표현이 기발하지 않습니까? 이 밖에도 서리서리, 굽이굽이처럼 의태어를 사용한 것도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황진이가 잘 살렸다는 근거이지요. 이 외에도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와 같은 시조에도 황진이의 문학적 진가가 발휘되고 있습니다. ‘벽계수’는 푸른 시냇물을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왕족인 ‘벽계수’를 가리키는 말이며, ‘명월’은 밝은 달을 가리키는 동시에 ‘황진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황진이의 기생 이름이 명월이었으니 말입니다. 따라서 이 시조는 왕족 벽계수에게 인생은 덧없는 것이니 자신과 함께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자고 권유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중의적인 표현을 통해 상대를 유혹하는 기지가 잘 나타난 작품이지요. 황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시조도 있다던데요? 네. 바로 임제가 지은 시조입니다. 다음 시조를 감상하기 바랍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으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임제의 시조 ‘청초’, 즉 푸른 풀잎이 우거진 골짜기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황진이입니다. ‘홍안’은 붉은 얼굴로 아름다운 용모를 뜻하지요. ‘백골’은 죽음을 의미하겠지요. 잔을 잡아도 권할 사람이 없다는 데에서 황진이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시적 화자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작품을 지은 임제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소설 「수성지」, 「원생몽유록」 등을 지은 당대의 뛰어난 문인이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의 기녀들에게 시조는 연애편지?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71    [시공부 101] - 15... 댓글:  조회:2505  추천:0  2020-02-25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시조를 보면 조선의 주류 사상이 보인다고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사대부, 지조와 충절을 노래하다 사대부, 효를 노래하다 사대부, 자연을 노래하다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작품 창작 고등학교 국어Ⅰ 작가의 개성 이해와 작품 감상 조선의 기득권이었던 사대부들의 작품 속에는 분명 그들이 지지하는 이념이 드러나 있겠지요? 그들은 주로 어떤 시조를 썼나요? 고려 시대 시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비교해서 설명해 주세요. 사대부, 지조와 충절을 노래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세력은 고려 말 등장한 신진 사대부였습니다. 이들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조선은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기틀로 삼은 유교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따라서 시조에는 유학의 정신을 표현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지요.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사대부들의 시조는 임금에 대한 충절을 노래한 것이 많습니다.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성삼문의 시조 위 작품은 집현전 학사로 한글 창제에도 많은 공헌을 했던 성삼문이 지은 것입니다. 그는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세조가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것에 반대하고 단종의 복위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죽음을 맞이했지요. 그가 남긴 이 시조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지조와 절개를 담고 있습니다. 작품 속의 ‘낙락장송’은 절벽 위에 떨어질 듯이 서 있는 키 큰 소나무를 뜻합니다.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다음으로 ‘백설이 만건곤하다’는 것은 하얀 눈이 하늘과 땅에 가득 차 있다는 의미로 소나무를 더욱더 고통스럽고 힘겹게 만드는 현실을 뜻합니다. 정치적으로 매우 힘겨운 환경을 비유하고 있지요. 하지만 시적 화자는 ‘독야청청’할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독야청청은 세상이 아무리 눈으로 뒤덮여 있다 하더라도 홀로 푸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삼문의 시조는 굽히지 않는 충절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길재, 원천석, 박팽년과 같은 사대부들이 지조와 절개를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시조를 창작하였습니다. 사대부, 효를 노래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추구했던 유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효입니다. 효는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도덕이지요. 현대에 와서 효의 의미가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효를 실천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사람다움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반중 조홍감이 곱게도 보이는구나 유자가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 가 반길 이 없으니 서러워하노라 박인로의 시조 위 시조에서 시적 화자는 소반 위에 있는 홍시감을 보고 부모님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비록 유자가 아니더라도 품속에 품어서 부모님께 드리려 했지만 감을 가져가도 반겨 주실 부모님이 안 계시니 이를 서러워하고 있네요.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자신이 효를 다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효를 추구하던 조선 사대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대부, 자연을 노래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남긴 시조에는 자연을 노래한 작품이 적지 않습니다. 이 점은 고려 시대 시조와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왜 자연을 노래한 것일까요? 일단 자연은 세속적인 세상과 부귀공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물질적인 만족이 아니라 정신적인 만족을 추구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조화를 추구하며 살아가길 원했습니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것을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하나의 길로 여겼기 때문이지요.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을 지어 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송순의 시조 이 시조를 지은 송순은 강호가도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문인입니다. 강호가도란 자연을 예찬하며 세속을 버리고 자연으로 되돌아간 삶을 소재로 쓴 시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송순의 호는 면앙정인데 이는 그가 지은 정자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 고향인 전남 담양에 내려가 생활했는데 그때 지은 「면앙정가」는 조선 시대 가사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시조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10년을 계획해서 초가삼간을 지었는데 그 한 칸은 자신이 살고, 한 칸은 달을, 남은 한 칸은 맑은 바람을 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초가삼간은 초가지붕을 얹어 만든 아주 초라한 집을 의미하는데 이로부터 물질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선비의 모습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여기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달, 맑은 바람, 강산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자연과 함께하려는 조선 사대부의 면모를 보여 준다고 하겠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의 시조밖에 없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조는 처음에는 사대부가 주로 향유했지만 이후에는 향유층이 넓어져서 김종서, 이순신, 남이 등과 같은 무신들도 시조를 지었고 기생들 또한 시조를 짓고 즐겼지요. 또 조선 후기에는 전문적인 노래꾼들이 등장하여 시조를 지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중인 계층이어서 사대부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아예 사설시조라는 새로운 형태가 등장해서 평민들도 시조를 창작하는 등 시조의 향유층은 점점 확대되었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조를 보면 조선의 주류 사상이 보인다고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70    [시공부 101] - 14... 댓글:  조회:2338  추천:0  2020-02-25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아부하는 사람들한테 왜 용비어천가 부른다고 하나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조선 왕조를 예찬하는 장대한 서사시, 「용비어천가」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 후대 왕이시여, 선정을 펼치소서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 작품의 맥락 고등학교 국어Ⅱ 문학의 효용과 문학 활동 권력 앞에서 아부하는 모습을 보면 ‘용비어천가 부른다’고 하던데 「용비어천가」는 무엇이고 왜 저렇게 말하는 걸까요? 조선 왕조를 예찬하는 장대한 서사시, 「용비어천가」 「용비어천가」는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악장이라는 장르에 속한 문학 작품입니다. 악장이란 궁궐에서 행해지는 여러 의식과 행사에 사용된 노래로 대개 송축(頌祝)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사를 치를 때에 제창하는 와 같은 것이었지요. 현재 우리가 부르는 의 내용은 어떻죠? 우리 민족의 무궁한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고 있지요. 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장은 조선 왕조의 무궁한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거나 왕조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악장의 작자들은 대개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유학자들이었습니다. 이성계를 도와 나라의 기초를 다진 정도전은 「정동방곡」과 「신도가」를 지어서 태조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을 찬양했으며, 정인지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은 「용비어천가」를 지어서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널리 알렸습니다. 또한 세종은 친히 「봉황음」을 지어서 조선의 문물을 노래했고 『월인천강지곡』을 지어 석가모니를 찬양하기도 했지요. 조선 초기에 활발하게 창작되었던 악장은 주로 궁궐 안에서만 향유되었던 탓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성종 때에 이르러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보다시피 악장의 내용적 특성은 왕조의 신성성, 즉 기성 권력의 정당성을 소리 높여 노래한다는 점이지요. 이러한 까닭에 ‘용비어천가를 부른다’는 말은 오늘날 권력을 찬양하는 사람들을 비꼴 때 자주 사용됩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 악장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용비어천가」입니다. 일단 이 작품은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문헌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1443년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난 뒤,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훈민정음으로 글을 짓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용비어천가」였습니다. 그래서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의 한글을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입니다. 「용비어천가」는 전체가 125장으로 되어 있는 서사시로서 조선을 건국한 6대조의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6대조는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입니다. 「용비어천가」는 크게 서사—본사—결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사는 조선 왕조의 정당성과 조선의 무궁한 발전을 송축하는 내용이며 본사는 6대조의 업적, 결사는 후대 임금들에게 전하는 경계가 그 주요 내용입니다. 「용비어천가」 중에서 우리말을 가장 잘 살려 표현한 부분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가나니 「용비어천가」(2장) 자,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 본 적이 있는 내용이지요. 아마 TV드라마로 제작된 소설 『뿌리 깊은 나무』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네요. 「용비어천가」 속에 등장하는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기초가 튼튼하고 역사가 깊은 나라를 의미할 것입니다. 바람과 가뭄은 전쟁이라든가 내란과 같은 내우외환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화자는 기초가 튼튼한 나라는 내우외환에도 결코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번성할 것이라고 소신을 밝히며 조선이 그러한 나라가 되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한자어를 한 구절도 쓰지 않고, 순우리말만으로 고도의 상징성을 담아낸 뛰어난 작품입니다. 후대 왕이시여, 선정을 펼치소서 「용비어천가」의 본사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을 포함한 6대조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6대조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어서 「용비어천가」를 영웅서사시로 보기도 하지요. 「용비어천가」의 결사 부분은 후대 임금에게 정치를 잘하기 위해 근면히 노력하길 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천 년 전에 미리 도읍으로 정하신 한강 북쪽 땅에 덕을 쌓아 나라를 열어 운수가 끝이 없나니 성군의 자손이 대를 잇더라도 하늘을 섬겨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부지런히 힘써야 나라가 굳건할 것입니다. 후대의 임금들이시여, 아십시오. 낙수에 사냥을 가서 할아버지를 믿으시겠습니까. 「용비어천가」(125장) 여기에는 중국 하나라 때의 고사가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낙수에 사냥을 가서 할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라의 태강왕을 두고 한 말입니다. 하나라 태강왕은 할아버지 우왕의 덕만 믿고 정치는 소홀히 한 채 늘 사냥하는 재미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번은 낙수라는 곳에 사냥을 가서 백 일이 넘도록 궁궐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를 참지 못한 제후들이 태강왕을 폐위시켜 버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정치를 잘못하면 쫓겨날 수도 있는 것이 임금이지요. 이와 같은 고사를 작품 속에 언급했던 까닭은 조선의 후대 왕들이 중국 하나라의 태강왕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부지런히 하늘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려야 함을 깨우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용비어천가」의 제목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과거에 용은 대체로 임금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용비’는 왕이 되어 난다는 뜻이고 ‘어천’은 하늘을 본받는다는 뜻이니, ‘용비어천’이라는 말은 ‘용이 날아서 하늘을 본받아 처신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용비어천가’란 제목은 조선의 건국이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조선 건국이 정당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관련이미지 13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용비어천가조선 세종 때 선조인 목조에서 태종에 이르는 여섯대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 한글 창제에 의해 이루어진 우리 문학사상 최초의 국문시가로서 전 10권으로 되어 있다. 규장각도서.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아부하는 사람들한테 왜 용비어천가 부른다고 하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69    [시공부 101] - 13... 댓글:  조회:2629  추천:0  2020-02-22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음보율만 알아도 시험에서 몇 문제는 더 풀 수 있다고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음보율 : 끊어 읽는, 또는 숨을 쉬는 단위 고려 가요는 3음보율 시조는 4음보율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의 전통과 특질 대입을 마친 형에 의하면 음보율만으로도 대략 고려 가요인지, 시조인지 알 수 있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음보율 : 끊어 읽는, 또는 숨을 쉬는 단위 시에서 리듬은 시를 시답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시가 산문과 다른 것은 운율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시의 리듬은 반복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노래에서도 같은 선율이나 박자가 반복될수록 리듬감이 살아나지요. 우리나라 시의 리듬에는 음절의 숫자가 일정하게 반복되어 형성되는 음수율과, 호흡의 단위가 일정하게 반복되어 리듬이 형성되는 음보율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전 시가를 언급할 때는 음수율보다는 음보율을 통해서 리듬을 설명하는 경향이 더 크지요. 음보란 끊어 읽거나 숨을 쉬는 단위라고 생각하면 쉬워요. 음보율은 2음보, 3음보, 4음보 등등 다양한 형태를 생각할 수 있는데 전통 시가에서는 3음보와 4음보가 주를 이룹니다. 그렇다면 3음보율과 4음보율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고려 가요는 3음보율 3음보 율격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민요입니다. 우리 민요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 보아도 “아리랑 ˅ 아리랑 ˅ 아라리요 / 아리랑 ˅ 고개를 ˅ 넘어간다”로 세 번씩 끊어서 부릅니다. “도라지 ˅ 도라지 ˅ 백도라지 / 심심 ˅ 산천에 ˅ 백도라지”에서 보듯이 도 3음보로 이루어져 있네요. 3음보율은 4음보율에 비해서 호흡이 빠릅니다. 다시 돌아오는 것이 4번보다 3번이 빠르니까요. 그런 까닭에 3음보 율격은 4음보 율격에 비해 비교적 경쾌하고 발랄한 느낌을 줍니다. 3음보 율격은 고려 가요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시리」의 첫 구절 “가시리 ˅ 가시리 ˅ 잇고 / 버리고 ˅ 가시리 ˅ 잇고”와 「청산별곡」의 “살어리 ˅ 살어리 ˅ 랏다 / 청산에 ˅ 살어리 ˅ 랏다”처럼 고려 가요는 3음보 율격이 주를 이룹니다. 고려 가요는 후렴구와 여음구를 빼면 상당수의 작품이 3음보 율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조는 4음보율 고려 가요가 3음보율 위주인 데 비하여 시조는 4음보율을 지니고 있습니다. 호흡의 단위가 좀 더 긴 4음보율은 때로는 장중하고 때로는 여유로운 느낌을 주지요. 여러분이 잘 알 만한 시조 한 편을 살펴볼까요.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의 시조 “한산섬 ˅ 달 밝은 밤에 ˅ 수루에 ˅ 혼자 앉아”. 시조를 읽다 보니 위엄 있고 진지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내용이 진지하기도 하지만 4음보율을 사용하고 있기에 그 느낌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불리는 거의 모든 시조는 4음보율로 되어 있는데 4음보율은 3음보율에 비해서 안정감을 더 많이 주는 것 같습니다. 4음보율은 조선 시대에 발생한 가사 문학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현대 시에도 전통적인 음보율을 활용한 작품이 있나요? 당연히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시인은 바로 김소월이지요. 「진달래꽃」을 볼까요? 원문의 행 구분에 관계 없이 호흡만 살려 읽어 보겠습니다. “나 보기가 ˅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 고이 보내 ˅ 드리우리다 / 영변에 ˅ 약산 ˅ 진달래꽃 / 아름 따다 ˅ 가실 길에 ˅ 뿌리우리다”. 자, 잠깐만 봐도 3음보율로 읽히지요? 최근에는 음보율을 활용한 시가 많이 창작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리듬이니 앞으로도 살려서 쓰는 게 좋겠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음보율만 알아도 시험에서 몇 문제는 더 풀 수 있다고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68    [시공부 101] - 12... 댓글:  조회:2210  추천:0  2020-02-22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시조가 융성한 진짜 이유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새 술은 새 부대에’ 시조는 어디에서 왔을까 고려 시대 시조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의 갈래와 흐름 시조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요. 고려 가요도 있고 경기체가도 있는데 굳이 시조라는 형식이 등장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새 술은 새 부대에’ 우리나라의 시조는 고려 시대부터 불리기 시작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창작되고 있는 문학 장르입니다. 그러니까 천 년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시조를 짓고 불러 온 것이지요. 그 긴 역사만으로 시조는 가히 세계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조는 고려 중엽에 발생해서 고려 말에 그 형식이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시조가 발생한 고려 중엽에는 사대부들이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바탕으로 정치를 펼치려던 사람들이었지요. 훗날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던 이들도 바로 고려 중엽에 등장한 신진 사대부들이었습니다. 신진 사대부들은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유교적인 이념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문학 형식이 필요했습니다. 당시에는 고려 가요와 비슷하게 귀족들 사이에서 불리어지던 경기체가가 있었지만 그 성격이 향락적이어서 유교 이념을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발생한 것이 시조였습니다. 시조는 초장—중장—종장의 형식으로 작가의 생각을 간결하고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한자가 아닌 우리말 위주로 표현할 수 있기에 향유층이 넓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사대부의 유교 이념을 펼치기에 매우 적절한 형식이었던 것이지요. 시조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렇다면 시조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시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먼저 민요가 발전하여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향가가 사라지면서 만들어졌을 거라는 설도 있습니다. 10구체 향가의 형식이 4구—4구—2구로 되어 있어서 시조의 초장—중장—종장으로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향가의 마지막 2구 첫 음보가 감탄사 ‘아아’, ‘아으’ 등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이 시조의 종장 첫 3음절로 변화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여러 학설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은 고려 가요가 형식적인 변화 과정을 거쳐 시조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고려 가요 중에서 「만전춘」은 다른 고려 가요와 달리 3음보가 아니라 4음보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시조의 4음보 율격과 같습니다. “얼음 위에 / 댓잎자리 보아 / 임과 나와 / 얼어 죽을망정”은 그 실례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시조는 다양한 기존 장르의 영향을 고루 받아서 성립되었다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고려 시대 시조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고려 시대 시조는 주로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조를 지은 이들이 대부분 신진 사대부였기 때문이지요. 특히 임금과 왕조에 대한 충성을 표하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이 몸이 죽어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 「단심가」 정몽주는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서 허물어져 가는 고려 왕조를 개혁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지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자기편으로 삼고자 했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적인 이념을 몸소 실천하며 고려 왕조에 충성을 다합니다. 결국 정몽주는 이방원의 철퇴를 맞고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이했지요. 이처럼 시조는 유교적 이념을 실천하고자 했던 사대부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고려 시조 중에 사랑을 노래한 작품은 없나요?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의 시조 이 작품에는 하얗게 핀 배꽃에 달빛이 비치고 은하수가 쏟아지는 깊은 봄밤에 두견새가 울고 있어서, 시적 화자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다정’도 병인 것 같다니, 시적 화자는 그날 밤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거나 보고 싶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고려 시조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문학성을 지닌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조가 융성한 진짜 이유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67    [시공부 101] - 11... 댓글:  조회:2606  추천:0  2020-02-22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고려 가요가 남녀상열지사라고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노래 회회아비가 손목을 잡았습니다, 「쌍화점」 얼어 죽더라도 사랑하다 죽으리, 「만전춘」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에 대항 흥미 고등학교 국어Ⅰ 문학과 사회적 소통 고려 가요를 왜 남녀상열지사라고 불렀나요? 남녀상열지사란 무슨 뜻인지, 고려 가요가 왜 남녀상열지사인지 알고 싶어요.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노래 남녀상열지사는 남녀 간의 애정을 노골적으로 다룬 노래를 가리킵니다. 이 말은 고려 시대 때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 조선 전기의 학자들이 남녀의 애정을 다룬 노래를 업신여기며 만들어 낸 말입니다. 고려 가요는 당시에는 기록으로 남지 못하고 조선 시대에 와서야 기록으로 남게 되었는데 이때 조선의 유학자들이 남녀의 애정을 다룬 고려 가요를 기록에서 누락하거나 수정했지요. 조선은 고려와 달리 불교가 아니라 유교를 섬기는 나라였기 때문에 예법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 까닭에 남녀의 자유로운 연애를 엄격하게 금했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도 ‘19금’이라는 규제가 있는 것처럼 당시에도 일종의 사회적 금기가 있었던 것이지요. 기록에 의하면 남녀상열지사로는 「가시리」, 「서경별곡」도 포함되어 있는데 요즘의 관점으로 보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내용도 많습니다. 임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지요. 회회아비가 손목을 잡았습니다, 「쌍화점」 남녀상열지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쌍화점」을 들 수 있습니다. 몇 해 전에는 같은 이름의 19금 영화 이 제작되기도 했지요. 작품의 내용은 야하다기보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풍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 가고신데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여이다 이 말이 이 가게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쌍화점」 중에서 「쌍화점」의 1연입니다. “더러둥셩 다리러디러”라든가, “다로러거디러”와 같은 말들은 후렴구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들이므로 특별히 해석할 것이 없습니다. 후렴구를 제외한 내용은 쌍화점, 즉 만두 가게에 만두를 사러 갔는데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잡아서 정을 통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가게 밖으로 소문이 나면 조그마한 새끼 광대가 소문을 낸 것으로 알겠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내용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시 상인 계층의 성도덕이 문란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쌍화점」의 두 번째 연은 삼장사(三藏寺)에 불을 켜러 갔는데 그 절 주인이 내 손목을 잡았다는 내용이고, 세 번째 연은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갔는데 우물의 용이 내 손목을 잡았다는 내용입니다. 삼장사의 절 주인이 손목을 잡았다는 것은 종교의 타락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고 우물의 용이 손목을 잡은 것은 용이 과거부터 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 왕실의 타락상을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쌍화점」은 상인 계층, 종교계, 왕실에 이르기까지 성적으로 타락해 버린 고려 사회를 풍자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 작품은 고려 충렬왕 때 지어졌다고 하는데 고려 충렬왕 시절은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로 당시 고려 사회는 부패와 타락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얼어 죽더라도 사랑하다 죽으리, 「만전춘」 또 하나의 남녀상열지사로는 「만전춘」을 들 수 있습니다. 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진솔하게 나타낸 노래로서 형식과 구성 면에서 자유롭다고 평가받고 있지요. 특히 이 작품은 시조처럼 4음보 율격을 지니고 있어서 시조 형식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자료로서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얼음 위에 댓잎자리 보아 임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얼음 위에 댓잎자리 보아 임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정(情) 준 오늘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만전춘」 중에서 얼음 위에 대나무 잎으로 자리를 만들어서 사랑하는 임과 내가 얼어 죽을망정 오늘 밤이 더디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것이 시적 화자의 바람입니다. 이 작품에는 중의적인 구절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얼다’라는 단어와 관계가 있습니다. ‘얼다’는 말은 과거에는 ‘물이 얼다’는 뜻 이외에도 ‘남녀가 얼다’, 곧 ‘남녀가 사랑하다’는 뜻이 있었습니다. 현대 국어에서 ‘어른’은 ‘얼다’라는 말을 그 어원으로 삼고 있지요. 따라서 뒷부분에 나오는 “얼어 죽을망정”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추워서 죽는다는 뜻도 되고, 사랑하다 죽는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만전춘」은 남녀 간의 사랑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남녀상열지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전춘」은 총 4연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쌍화점」처럼 일관성을 지닌 가사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다른 시가들이 합해져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내용상 일관성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왜 남녀상열지사가 많이 지어졌던 것일까요? 고려 시대에 남녀상열지사가 유독 많았던 것은 고려가 유교적인 질서를 따른 사회가 아니라 불교를 숭상한 나라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조선 시대처럼 유교가 정신적인 바탕을 이루었다면 남녀를 분별하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겠지요. 또한 고려 시대에 남녀상열지사가 많은 것은 고려 사회가 후대로 갈수록 정치 ·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사회적 질서가 깨졌고 그것이 성적 타락으로까지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 가요가 남녀상열지사라고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66    [시공부 101] - 10... 댓글:  조회:2730  추천:0  2020-02-04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가 무슨 뜻인가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입에 착착 달라붙는 후렴구, 여기 모여라! 유랑민의 비애, 「청산별곡」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본질과 속성 고등학교 문학 문학과 공동체 저는 우리 고전 시가 중 「청산별곡」을 좋아해요. 후렴구를 입에 담고 웅얼거리면 뭔가 옛사람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기분이에요. 입에 착착 달라붙는 후렴구, 여기 모여라! 고려 가요는 노래마다 각각의 후렴구가 따로 있습니다. 「청산별곡」은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이지만, 「서경별곡」은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이고 「가시리」는 “위 증즐가 대평성대”입니다. 「동동」은 “아으 동동다리”, 「쌍화점」은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이지요. 이 말들은 아무런 뜻도 없지만 리듬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아마도 현악기의 소리를 흉내낸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지요. 그럼 이참에 「청산별곡」 텍스트가 지닌 의미까지 한번 알아볼까요? 후렴구를 즐겨 부르려면, 나머지 부분도 알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지요? 유랑민의 비애, 「청산별곡」 「청산별곡」은 사회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떠돌이로서의 운명을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시적 화자는 전란 중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이거나, 무신란 때 쫓겨난 지식인이거나, 실연의 슬픔을 잊고 청산으로 도피하려는 사람이라는 등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시적 화자는 삶의 터전을 상실한 채 유랑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1연) 울어라 울어라 새여, 자고 일어나 울어라 새여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 우는구나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2연) 어디에 던지던 돌인가, 누구에게 맞히던 돌인가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이 맞아서 우는구나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5연) 가다가 배부른 독에 설진 강술을 빚는구나 조롱꽃 누룩이 매워 잡으니 내 어찌할까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8연) 「청산별곡」 중에서 전체 8연으로 되어 있는 고려 가요입니다. 주요 부분만 인용했는데 일단 후렴구 “얄리얄리 얄라셩 얄리라 얄라”가 인상적이지요. ‘ㄹ’, ‘ㅇ’을 반복해서 음악적인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1연에 등장하는 ‘청산’은 현실과 대비를 이루는 자연적인 공간입니다. 현실의 근심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상의 공간인 것입니다. 2연에는 시적 화자의 처지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시적 화자는 울고 있는 새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슬픔이 더 크고 오래된 것임을 호소하고 있지요. 3연은 자신이 떠나온 현실에 대한 미련이 나타나 있고, 4연에는 밤이 되어도 오갈 데 없는 처지를 비관하는 화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5연의 내용은 화자의 처지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것임을 말해 줍니다. 누군가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울고 있다는 화자의 모습에서 전쟁이나 난리 같은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고려 민중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야 하니 민중은 억울할 수밖에 없겠지요. 6연에는 공간이 뒤바뀌어 청산 대신 바다가 등장하는데 상징적인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7연에는 사슴이 장대에 올라 해금을 연주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절박한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요. 8연은 화자가 독한 술을 빚는 곳을 지나치는 장면을 그립니다. ‘누룩이 맵다’는 말은 술 익는 냄새가 진동한다는 뜻이며, 화자는 그 냄새에 못 이겨 결국 술로써 자신의 시름을 달래려 합니다. 술을 마시고 현실의 고통과 설움을 잊고자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청산별곡」은 현실의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려는 고려 민중의 아픔이 절실하게 나타난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막상 의미를 들여다보니 어떤가요? 혹시 후렴구가 내용에 비해 너무 가볍고 흥겨운 느낌이 들어 시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나요? 그렇다면 한번 을 떠올려 보세요. 혹자는 이 후렴구에서 우리 민요 의 기원을 찾기도 하는데, 삶의 고달픔도 애달픈 가사도 구성진 목소리와 흥겨운 춤사위로 승화시키던 멋이 「청산별곡」에서도 느껴지지 않는지 말이지요. 현대 시에는 현실을 비판하거나 풍자한 작품이 있는데 고려 때에는 그런 작품이 없었나요? 고려 시대는 전란도 많았고 무신 정권이 들어서는 등 정치적인 혼란도 많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방관리들은 농민들을 탐욕스럽게 수탈했습니다. 고려 농민들은 이런 수탈을 노래로 표현하여 비판했지요. 그 대표적인 작품이 「사리화(沙里花)」입니다. 이 작품은 고려 때에 지어진 민요로 본래의 가사는 전해지지 않지만 이제현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 창작된 민요이니 「상저가」처럼 고려 가요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참새야 어디서 오가며 날아가느냐 / 일 년 농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 늙은 홀아비 홀로 농사지었는데 / 밭의 벼와 기장을 다 없애 놓다니” 작품에 등장하는 참새는 일 년 농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벼와 기장을 수탈해 가는 권력자, 혹은 탐관오리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늙은 홀아비는 권력자에게 수탈당하며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는 힘없고 가난한 농민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이 시는 당시 권력자의 수탈과 횡포를 비유적으로 비판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목의 ‘사(沙)’가 ‘목이 쉬다’라는 의미를, ‘리(里)’가 ‘근심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농부들이 목이 쉬도록 참새를 쫓고 속을 태워 얻은 곡식을 뜻한다고 전해집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가 무슨 뜻인가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65    [시공부 101] - 9... 댓글:  조회:2664  추천:0  2020-02-04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중세 시대, 우리나라의 유행가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임의 발목을 잡는 노래, 「정석가」 부모님을 그리며 부르는 노래, 「사모곡」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에 대한 흥미 고등학교 국어Ⅱ 문학의 효용과 문학 활동 고려 가요는 귀족이 아니라 평민이 불렀다고 하는데 그럼 요즘 사람들이 부르는 유행가와 비슷했던 것인가요? 고려 가요의 내용이 주로 어땠는지 알고 싶어요. 임의 발목을 잡는 노래, 「정석가」 고려 가요는 귀족의 노래가 아니라 평민의 노래였습니다. 신라 향가를 주로 화랑이라든가 승려가 지어 불렀던 것과는 차이가 있지요. 그런 점에서 고려 가요는 현재 대중이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 즉 유행가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를 보면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루거나 사회현실을 풍자한 노래들이 있습니다. 또한 현실에서 느끼는 고단함이나 어려움을 토로한 노래도 있고 반면에 밝고 경쾌한 인생관을 담은 노래도 있습니다. 이처럼 대중가요를 살펴보면 대중이 느끼는 정서와 감정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지요. 고려 가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려 가요에는 고려 시대 민중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편수는 역시 남녀 간의 애정담을 다룬 작품들입니다. 삭삭기1) 세모래2) 벼랑에 나 삭삭기 세모래 벼랑에 나 구운 밤 닷 되를 심습니다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난다면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난다면 유덕(遺德)하신 임과 이별하겠습니다 옥으로 연꽃을 새깁니다 옥으로 연꽃을 새깁니다 그 꽃을 바위 위에 접을 붙입니다 그 꽃이 세 묶음 피어나면 그 꽃이 세 묶음 피어나면 유덕하신 임과 이별하겠습니다 「정석가」 중에서 이 작품은 고려 가요 중에서 임과 이별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때 ‘임’은 간혹 ‘임금’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사랑하는 임으로 해석하는 것도 틀린 해석은 아닙니다. 작품의 내용은 불가능한 상황을 설정하고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면 그때에 임과 이별하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임과 이별이 불가하다는 것을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고려 가요는 임과의 사랑과 이별을 다루고 있습니다. 몇몇 고려 가요의 내용을 살펴볼까요? 먼저 「가시리」에는 겉으로는 임과의 이별에 체념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또한 「서경별곡」은 대동강을 건너는 임에 대한 원망을 배를 내어 주는 뱃사공에 대한 원망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동동」은 일 년 열두 달을 하나씩 열거하면서 임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그려 낸 점이 특징적이지요. 이와 같이 고려 가요도 현대의 대중음악처럼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자주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부모님을 그리며 부르는 노래, 「사모곡」 여러분은 대중음악 중에서 뜻밖의 곡들이 사랑을 받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인순이의 라든가, 지오디의 등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도 그중 하나이지요. 이런 곡들처럼 고려 가요에도 부모님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모곡」입니다. 호미도 날이 있지마는 낫처럼 들 리가 없어요 아버님도 어버이시지마는 위 덩더둥셩 어머님같이 사랑하실 분이 없어요 아아, 임들이여! 어머님같이 사랑하실 분이 없어요 「사모곡」 아버지들이 「사모곡」을 보면 아쉬움이 크겠지만 이 작품은 어머니의 사랑을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호미와 낫에 비유하여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보다 크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네요. 농기구에 아버지, 어머니를 비유한 것이 조금 어색할 수도 있지만 농경 사회에서는 가장 친근한 물건이었으니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시에 대해 공감을 했을 것입니다. 이 외에 「상저가」라는 방아 찧는 노래에도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덜컹 방아를 찧어서 거친 밥이라도 지어 그 밥을 아버님 어머님께 먼저 드리고 남거든 먹겠다는 「상저가」의 내용은 당시 사람들이 부모님을 각별히 공경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지요. 자, 이제 고려 가요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알겠지요. 비록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의 성격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남녀의 사랑이라든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작품들을 살펴보니 고려 시대에나 현대에나 사람의 정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상저가」, 방아 찧는 노래는 노동요라고 할 수 있나요? 고려 가요 「상저가」는 노동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아를 찧는 노동의 피로를 달래기 위해 부른 노래인 것이지요. 작품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듥기동 방아나 찧어 히얘 / 거친 밥이나 지어 히얘 / 아버님 어머님께 받잡고 히야해 / 남거시든 내 먹으리 / 히야해 히야해” 작품의 길이도 대단히 짧고 내용도 단순해서 민요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고려 가요도 민요가 발전해서 만들어진 노래 형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중세 시대, 우리나라의 유행가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64    [공부공부공부] - "이(머릿니)타령" 댓글:  조회:2422  추천:0  2020-02-02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문학사전(민요 편) 이타령     목차 정의 개관 사설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머리에 살았던 이[蝨]를 해학적으로 그렸으며, 이를 잡아 죽이는 과정이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유희요. 개관 은 문학적 분류로는 유희요에 해당한다. 유희요에는 세시유희요·경기유희요·언어유희요·놀림유희요·자연물 대상 유희요·가창유희요가 있는데, 이 노래는 그 가운데 가창유희요에 해당한다. 은 위생의 개념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던 지난날 머리에 흔했던 피를 빨아먹고 살던 작은 곤충에 관한 민요이다. 사설 갈강아 갈강아/ 서대기 데리고 잘 있거라/ 석석바오 난간에 빨래질 가다/ 맞바우 만나믄 나는 죽는다 - 국악방송, 전북 진안, 2009. 옷에 이야 백단춘아 머레 이야 깜동춘아/ 니발이 육발이믄 이리 팔팔 걸어봤나/ 니 등어리 납닥하마 성에 성에 집 질 적에 돌 한 딩이 실어봤나/ 니 조디이 납닥하마 성에 성에 질 직에 옥지 한 번 불어봤나 - 국악방송, 경북 경산, 2009. 갈강아 갈강아/ 쌔갱이 동상 데루고 잘 있거라/ 나는 나갔다가/ 두 방구[바위] 틈에 찌기면 올지 말지 하다 - 현지조사자료, 강원 삼척, 2003. 내용 서로 다른 곳에서 채록된 을 견주어보면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니 등어리 납작한데 형님 집 질 적에 돌 한 덩어리 실어봤냐, 니 주둥이 납작한데 형님 집 질 적에 옥지 한 번 불어봤나”라는 노랫말은 흔하게 보이는 것이다. 위 노래에서 ‘갈강이’는 갓 태어난 이의 새끼를 말하고 ‘서대기’ 또는 ‘쌔갱이’는 서캐(이의 알)를 말한다. 잘 있으란 말은 사람 눈에 띄어 죽지 말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마지막이 해학적이면서 비극적인데 “맞바우 만나믄 나는 죽는다”와 “두 바위 틈에 끼면 올지 말지 한다”라는 대목이다. 여기서 두 바위는 다름 아닌 사람의 두 엄지손톱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 머리 위로 돌아다니다가 사람 눈에 띄는 날에는 여지없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말이다. 두 엄지로 이를 눌러 터뜨리는 소리를 묘사한 노래도 있는 것을 보면 이와 사람 사이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특징 및 의의 에는 이의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점, 납작해서 사람 머리에 착 달라붙는 점, 입이 조그만 점 등을 노래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혐오하는 벌레인 이에게 노래를 만들어줬던 옛 사람들의 관심과 세밀한 관찰이 잘 드러나고 있다. 집필 [네이버 지식백과] 이타령 (한국민속문학사전(민요 편))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타령」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작품/민요와 무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대야길 56[자산리 613-1] 출처 디지털진안문화대전-「이타령」 목차 정의 개설 채록/수집 상황 구성 및 형식 내용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현황 의의와 평가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자산리에서 이를 해학적으로 표현한 유희요. 개설 「이타령」은 사람의 몸에 기생하면서 피를 빨아먹는 작은 벌레인 이의 생김새를 익살스럽게 그려낸 노래이다. 이를 잡으면서 부르기도 했고 노래 부르기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가창 유희요로 부르기도 했다. 아이들이나 부녀자들이 주로 가창하였다. 채록/수집 상황 「이타령」은 한국학 중앙 연구원 어문 생활 연구소와 안동 대학교 민속학 연구소가 공동으로 추진한 ‘한국 구비 문학 대계 개정·증보 사업’ 전북 조사팀이 2010년 2월 23일 진안군 동향면 자산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최복순[여, 1936년생]으로부터 채록하였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에서 지원하는 한국 구비 문학 대계 웹 서비스[http://gubi.aks.ac.kr/web]를 통해서 조사 자료 텍스트와 연동되는 디지털 음원을 들을 수 있다. 구성 및 형식 「이타령」은 4·4조 4음보 율격이다. 혼자서 부르기도 하고 여럿이 모여 있을 때 누군가 먼저 부르면 같이 따라서 부르기도 했다. 내용 머리털에서 기생하는 머릿니는 검고 옷 속에 붙어사는 몸이는 하얗다. 「이타령」은 이의 주둥이, 등, 배, 발 등 생김새를 들먹이며 이로운 일을 한 것이 무엇이냐고 시비를 걸면서 죽어 마땅하다고 비난하는 내용이다. 피를 빨아먹는 뾰족한 입은 말 한 마디도 못 하고, 납작한 등으로는 등짐 한 짐도 싣지 못하고, 빨아먹은 피로 가득한 배는 먹통 같지만 천 자 한 마디 읽고 쓰지 못하며, 발을 여섯 개 가지고 있어도 십리 걸음조차 걸어본 적이 없고 이로운 일을 한 적이 없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를 잡아서 엄지손톱으로 눌러 터트리는 소리를 표현하면서 ‘똑죽이’라고 별명을 붙인 점이 흥미롭다. 머릿니는 검검수름 옷의 이는 백발이요/ 네 입이 뾔쪽한들 말 한 마디를 해여 봤냐/ 네 등허리 넓죽한들 짐 한 짐을 실어봤냐/ 네 배지가 먹통인들 천 자 한 마디를 읽어 봤냐/ 네 발이 육발인들 십리 걸음을 걸어 봤냐/ 똑 죽어라 똑 죽어라 네 이름이 똑죽이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생활이 어렵고 위생 상태도 좋지 않았던 지난날에는 머리나 몸에 이가 기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옛날에는 한가한 시간에 부녀자들이 아이들의 머릿니를 잡아주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이는 지난날 우리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소재 가운데 하나이다. 현황 위생 관념이 보편화된 오늘날 진안 지역에서 이는 거의 사라졌고 「이타령」을 가창 유희요로 부르는 일도 거의 없지만 이 노래를 기억하는 일부 가창자들이 간혹 부르기도 한다. 의의와 평가 「이타령」은 사람의 머리와 몸에 기생하면서 피를 빨아먹고 사람을 괴롭히는 이를 비난하는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대개 곤충이나 벌레를 다루는 노래들이 그렇듯이 이 노래 역시 세심한 관찰을 바탕으로 사설이 구성되어 있어서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재미있게 들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타령」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향토문화전자대전 「이타령」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작품/민요와 무가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출처 디지털영암문화대전-「이타령」 목차 정의 개설 채록/수집 상황 내용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전해지는 이를 잡으며 부르는 노래. 개설 「이타령」은 이의 생김새를 묘사하며 부르는 노래로, 「거미 타령」이나 「빈지래기 타령」 등과 유사한 민요이다. 이의 생김새를 모사하는 데 영암 사람들의 뛰어난 익살과 재치를 엿볼 수 있다. 채록/수집 상황 이순임[영암군 시종면 신학리 정동 마을, 1923생, 여]이 구연한 「이타령」이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 위원인 이소라에 의해 채록되어 『영암의 민요』에 사설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이타령」은 “이야 이야 옷엣 이야/ 니야 발이 여섯인들/ 단 십리를 걸어 봤냐/ 니 주뎅이가 쫑긋한들/ 만좌중에 모인디가/ 말 한마디를 하여 봤냐/ 니 등거리가 납작한들/ 너거 선산 석출헐 때/ 묏장 한번이나 져 봤느냐/ 니 배아지가 먹통인들/ 천자 한 자를 기려 봤냐/ 니 이름이 작은인게/ 작근 작근 죽여불자”는 내용으로 영암군에서 수집한 것들도 모두 동류의 것이다. 영암군 시종면 신학리 이순임이 구연한 「이타령」은 아래와 같다. 이야 이야 뚱이야/ 니 주뎅이가 납작한들/ 공사판에 가 공사 한번이나 해봤느냐/ 니 등거리가 납작한들/ 너거 선산에 석출헐 때/ 묏장 한번이나 져 봤느냐/ 이야 이야 뚱이야/ 아직끈 자직끈 죽여불자 영암군 시종면 신연리 나명순이 구술한 「이타령」은 아래와 같다. 이냐 발이 여섯인들 남북 댕길손가/ 니 주댕이가 기다 한들 열두 골 출력들 때 나발 한번 불린손가/ 니 등거리 넓다 한들 열두골 출력들 때 떼 한 장을 지을 손가/ 니 먹통이 크다 한들 열두 골 출력들 때 먹 한 장을 줄릴 손가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내의나 속옷 속에 성하던 이를 잡으며 부르던 노래이다.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노래 중에는 이의 삶에 사람의 한평생을 비유한 것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타령」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463    [공부공부공부] - "서캐타령" 댓글:  조회:2222  추천:0  2020-02-02
향토문화전자대전 「서캐 타령」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작품/민요와 무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대야길 56[자산리 613-1] 출처 디지털진안문화대전-「서캐 타령」 목차 정의 개설 채록/수집 상황 구성 및 형식 내용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현황 의의와 평가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자산리에서 부르는 서캐를 소재로 한 유희요. 개설 사람 손에 잡히면 꼼짝없이 죽는 서캐를 해학적으로 표현한 노래이다. 서캐를 잡으면서 부르기도 했고 노래 부르기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유희요로 부르기도 했다. 아이들이나 부녀자들이 주로 가창하였다 채록/수집 상황 「서캐 타령」은 한국학 중앙 연구원 어문 생활 연구소와 안동 대학교 민속학 연구소가 공동으로 추진한 ‘한국 구비 문학 대계 개정·증보 사업’ 전북 조사팀이 2010년 2월 23일 진안군 동향면 자산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최복순[여, 1936년생]으로부터 채록하였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에서 지원하는 한국 구비 문학 대계 웹 서비스[http://gubi.aks.ac.kr/web]를 통해서 조사 자료 텍스트와 연동되는 디지털 음원을 들을 수 있다. 구성 및 형식 「서캐 타령」은 4·4조 4음보 율격이다. 내용 「서캐 타령」은 사람 손에 잡혀 손쉽게 죽음을 당하는 서캐의 상황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노래이다. 서캐[시캐]는 이의 알이고, 깔갱니는 갓 태어난 이의 새끼이다. 이가 서캐들에게 사람 손에 잡히면 꼼짝없이 죽을 터이니 어린 깔갱니를 잘 지키라고 당부하는 내용이다. 두 바위가 작신 하면 죽는다는 표현은 사람의 두 엄지손톱에 눌려 죽는다는 뜻이다. 이 노래를 민중의 관점에서 보면 “두 바우가 작신 하면 오도 가도 못하고 죽는다”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거대한 폭력 앞에서 한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민중의 삶과 애환이 읽힌다. 시캐들아 시캐들아 우리 깔갱니 잘 거쳐내라/ 석석바우 끝이 가먼 두 바우가 작신 하면/ 오도 가도 못하고 죽는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생활이 어렵고 위생 상태도 좋지 않았던 지난날에는 머리나 몸에 이와 서캐가 기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서캐는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곤충은 아니지만 지난날 우리 삶의 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현황 「서캐 타령」을 기억하는 일부 가창자들이 부르고 있다. 「이타령」과 함께 이 노래를 부른 제보자는 언젠가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서캐 타령」을 했더니 좌중이 매우 우스워했다고 하면서 이와 서캐에 관한 노래가 추접스러운 것은 아닌지 걱정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타령」에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별로 유익할 것 없는 이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면, 「서캐 타령」은 서캐의 입장에서 사람에게 손쉽게 잡혀 목숨을 잃는 처지가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서캐와 같은 미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과 해학적 표현력이 잘 어우러진 노래라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캐 타령」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462    [시공부 101] - 8... 댓글:  조회:2340  추천:0  2020-02-02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장르가 바뀌는 이유는 뭘까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한문학의 발달 평민들이 즐겨 부르는 고려 가요의 등장 고려 귀족의 시가 : 경기체가와 시조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의 갈래와 흐름 신라의 대표 장르는 향가, 고려의 대표 장르는 한시라고 배웠어요. 이렇게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장르가 바뀌는 이유가 있을까요? 한문학의 발달 고려 때에도 향가는 창작되었습니다. 고려 초에 균여대사가 지었다는 「보현십원가」가 대표적이지요. 하지만 그 이후 향가는 차츰 소멸해 버렸습니다. 대신 한시가 발달하였습니다. 과거 제도가 실시되고 국자감이라는 교육기관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한문학이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 제도는 경전을 이해하는 것보다 시와 글을 짓는 능력을 더 중요하게 평가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시문을 창작하는 능력은 귀족이 갖춰야 할 필수 교양이었지요.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갠 긴 둑에는 풀빛이 짙어가고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그대를 남포에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저 물은 언제쯤 마를까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하네 정지상, 「송인(送人)」 이 시는 임을 보내는 정한이 아주 잘 나타나 있는 작품입니다. 비가 그친 뒤의 풀빛은 더욱 푸르러 생기가 넘치지만 시적 화자는 ‘그대’를 보내야 하는 마음에 슬픈 노래만 떠오르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생기가 넘치는 풀빛은 시적 화자의 슬픔을 더욱 두드러지게 해 줍니다. 3행에 등장하는 ‘대동강 물’은 그대를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인데 우리 시에서 ‘물’은 이별의 안타까움을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마지막 구에 따르면 대동강 물은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더해지는 까닭에 마를 수가 없습니다. 이는 임과의 이별이 지속적이라는 의미인 동시에 시적 화자가 임을 오래도록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 한시를 창작한 대표적인 작가로는 이인로, 이규보, 이승휴, 이색, 이제현 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특히 이규보와 이승휴는 각각 「동명왕편」과 『제왕운기』와 같은 민족 서사시를 창작하여 거듭되는 외침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각성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는 한문학이 발달하여 신라 향가는 더 이상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웠습니다. 사회 변화가 예술 장르의 융성과 쇠락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평민들이 즐겨 부르는 고려 가요의 등장 한편 고려 시대에 민간에서 불리던 유행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려 가요, 혹은 고려 속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려 가요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민요가 발전하여 형성된 것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조선 초기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악장가사』와 같은 문헌에 기록으로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려 가요의 특징은 3음보로 되어 있다는 것과 후렴구가 발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거의 모든 작품이 작가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주로 남녀 간의 사랑, 이별의 아쉬움 등 고려 평민들의 소박하고 풍부한 정서가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문 구절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했고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감정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 리고 가시리잇고 나 위 증즐가 대평성대(大平盛大) 날러는 엇디 살라 고 리고 가시리잇고 나 위 증즐가 대평성대 잡와 두어리마 선하면 아니 올셰라 위 증즐가 대평성대 셜온 임 보내노니 나 가시 도셔 오쇼셔 나 위 증즐가 대평성대 「가시리」 이 작품은 고려 가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별의 정한을 다루고 있지요. 눈치챘겠지만 우리나라의 시가 문학에는 이별의 슬픔을 다룬 작품이 끊임없이 창작되어 왔습니다. 고조선 노래 「공무도하가」, 백제 노래 「정읍사」, 정지상의 「송인」, 민요 에 이르기까지 말이지요. 「가시리」도 이러한 시가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작품입니다. 아마도 이런 전통이 만들어진 것은 우리나라가 외침이 자주 있었던 탓일지 모르겠습니다. “위 증즐가 대평성대”는 후렴구입니다. 나라가 평안하고 발전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인데 작품의 본래 내용과는 큰 관계가 없지요. 따라서 고려 가요의 후렴구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각 구절 끝에 놓이는 ‘나’이라는 말도 가락을 맞추기 위한 의미 없는 여음입니다. 고려 귀족의 시가 : 경기체가와 시조 고려 가요가 민간에서 유행하자 귀족들도 고려 가요처럼 쉽게 즐길 수 있는 노래를 창작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형식이 경기체가입니다. 경기체가라는 이름은 시가의 끝 구절에 ‘경(景)긔 엇더하니잇고’라든가, ‘경기하여(景幾何如)’라는 감탄형 문장이 등장하기 때문에 붙여졌습니다. 대표 작품으로는 「한림별곡」, 「죽계별곡」등이 있는데 주된 내용은 선비의 학식과 체험을 노래하여 선비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성이 높지 않으며 유흥적이고 향락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편 경기체가만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전달할 수 없다고 여겼던 사대부들이 만들어 낸 문학 형식으로 시조가 있습니다. 시조는 고려 중엽에 발생하였고 우리말만으로 표현하여 훗날 귀족과 평민을 아우르는 국민 문학으로 성장했습니다. 고려 향가는 「보현십원가」 외에는 없나요? 고려 시대에는 향가와 비슷한 성격의 노래가 두 작품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향가계 여요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한 편은 고려 의종 때 정서가 지은 「정과정」인데 그 내용은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면서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편은 고려 예종 때 예종 스스로 지은 작품으로 「도이장가」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고려 건국 당시 태조 왕건을 위험에서 건지고 대신 목숨을 잃은 신숭겸과 김락, 두 장수를 추모하며 부른 작품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장르가 바뀌는 이유는 뭘까요?(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61    [시공부 101] - 7... 댓글:  조회:2188  추천:0  2020-02-02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고대 국가도 "애국가"를 불렀나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국가의 안정을 기원하는 노래, 「안민가」 승려가 전하는 유교적 메시지? 하늘에 해가 두 개 떠서 부른 노래, 「도솔가」 다채로운 신라 향가의 모습 4구체 향가 8구체 향가 10구체 향가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가치와 중요성 고등학교 국어Ⅰ 문학과 사회적 소통 나라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노래가 있잖아요? 고대에도 애국가 같은 노래가 있었을까요? 국가의 안정을 기원하는 노래, 「안민가」 신라 시대에도 처럼 공적인 목적을 지닌 노래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 노래가 처럼 모든 신라인들에게 불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노래의 가사라든가 창작 의도를 보면 처럼 국가의 번영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서 창작된 것만큼은 틀림없습니다. 제목은 ‘안민가(安民歌)’인데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노래라는 뜻입니다. 함께 감상해 볼까요? 군(君)은 아비여, 신(臣)은 사랑하실 어머니여, 민(民)은 어린아이라고 한다면 민(民)이 사랑을 알 것입니다 구물거리며 살아가는 백성 이들을 먹여 다스리어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한다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 것입니다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 충담사, 「안민가」 「안민가」는 신라 경덕왕 때에 승려 충담사가 지어 부른 것입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것은 정치 · 사회적 분위기와 관계가 깊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경덕왕 시절에는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뜨는 등 천재지변이 백성의 삶을 위협하고 귀족들이 정치 권력을 얻기 위해 서로 다투는 등 정치 · 사회적 위기 상황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경덕왕은 이러한 위기를 벗어나고자 충담사에게 노래를 지어 부를 것을 요청했는데 이에 충담사가 지은 작품이 바로 「안민가」입니다. 승려가 전하는 유교적 메시지? 신라가 불교를 신봉하는 나라이고 지은이가 승려이기는 하지만 작품의 성격은 유교적입니다. 경덕왕은 당시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자 중국식 제도와 학문을 따랐다고 하는데 이런 과정에서 유교의 통치 이념을 널리 퍼뜨리려 했다고 합니다. 시에 언급된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는 유교 경전 『논어』의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말을 인용한 것이지요. 또한 이 작품은 임금을 아버지, 신하를 어머니, 백성을 자식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이는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가족적인 사랑과 유대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 노래는 목적성이 매우 강한 작품입니다. 우리나라의 가 우리 민족의 발전과 번영을 기원하듯이 「안민가」는 나라가 태평해지고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른 노래였지요. 충담사는 승려였지만 국가의 장래를 위해 「안민가」라는 유교적인 작품을 창작했던 것입니다. 하늘에 해가 두 개 떠서 부른 노래, 「도솔가」 신라 향가 중에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목적성을 띤 노래를 한 편 더 소개하자면 「도솔가」를 들 수 있습니다. 「도솔가」 역시 신라 경덕왕 시절에 지어진 노래입니다. 어느 날 하늘에 해가 두 개가 뜨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해가 두 개 뜬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이지요. 아마도 천재지변을 과장하여 표현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해가 임금을 상징하니, 해가 두 개라는 말은 정치 권력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때 일기를 맡아보던 신하가 경덕왕에게 스님이 꽃을 뿌리며 정성을 들이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충고합니다. 이에 경덕왕은 신하의 충고를 받아들여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승려 월명사에게 기도문을 지어 부르게 합니다. 월명사는 기도문 대신 향가를 지어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도솔가」입니다. 오늘 이에 산화(散花)의 노래 불러 뿌리온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심부름하옵기에 미륵 좌주를 모셔라! 월명사, 「도솔가」 작품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꽃을 뿌리며 곧은 마음의 자세를 지니고 미륵 부처님을 모시자는 것이지요. 미륵 부처에게 국가의 안녕을 빌었던 것입니다. 월명사가 왕에게 시를 지어 바친 후 정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해 하나가 사라져서 세상은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노래 역시 집단과 사회의 안녕을 위해 지어 부른 목적성이 매우 강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채로운 신라 향가의 모습 4구체 향가 신라 향가에는 이 밖에도 다양한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존재했습니다. 먼저 4구체 향가인 「서동요」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를 바탕으로 창작되었으며, 「풍요」는 민요로서의 성격이 강합니다. 「헌화가」는 절벽 위에 피어 있는 꽃을 수로부인을 위해 꺾어 바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8구체 향가 4구체 향가가 두 번 반복된 형태인 8구체 향가는 「모죽지랑가」와 「처용가」가 있습니다. 「모죽지랑가」는 죽지랑이라는 화랑을 추모하면서 그의 낭도가 지어 부른 노래이며, 「처용가」는 아내를 범한 역신을 노래를 불러 물리쳤다는 처용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10구체 향가 10구체 향가에는 죽은 누이를 추모하며 부른 「제망매가」, 서쪽에 떠 있는 달에게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원왕생가」, 기파랑이라는 화랑을 찬양하며 부른 「찬기파랑가」, 신하가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는다며 왕을 원망하며 부른 「원가」, 이 외에도 「우적가」, 「혜성가」 등 다양한 주제를 지닌 작품들이 있었습니다. 신라 향가는 당대에 수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어서 진성여왕 때에는 『삼대목』이라는 향가집까지 출간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삼대목』은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지요. 만약 그 책이 남아 있다면 신라 시대 향가의 모습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처용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남아 있습니다. 어느 날 왕이 개운포(지금의 울주)에서 놀다가 돌아가려 하였다.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길을 잃고 말았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날씨를 보는 관직)이 아뢰었다. “동해(東海) 용의 조화입니다. 마땅히 좋은 일을 해 주어 풀어야 할 듯합니다.” 그래서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해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기 때문에 그곳을 개운포라 불렀다. 동해의 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와 정사를 도우니, 이름은 처용(處容)이라 하였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도록 하고, 관직도 주었다. 그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질병을 옮기는 신)이 그를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의 집에 몰래 가서 잤다. 처용이 밖에서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곧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서울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로리 넷이러라 둘은 내 것이고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 앗음을 어찌하리꼬.” 이때 역신이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제가 공의 부인을 부러워하여 지금 그를 범하였는데, 공이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고 맹세코 지금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에 등장한 처용은 이처럼 동해 용왕의 아들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처용은 누구였을까요? 후대 사람들은 그가 신라의 호족 출신 중에 한 명일 것이라고도 하고, 신라에 출입하던 아라비아 상인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현재 민간에 전래되는 처용탈을 보면 호족보다는 아라비아 상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고대 국가도 애국가를 불렀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60    [시공부 101] - 6... 댓글:  조회:2410  추천:0  2020-02-02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고구려와 백제의 작품은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나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을지문덕, 고구려의 기상을 노래하다 백제 상인의 아내, 그리움을 노래하다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가치와 중요성 고등학교 국어Ⅱ 한국 문학의 전승과 흐름 신라 향가는 25수가 전해 온다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고구려와 백제의 노래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이 없나요? 고구려와 백제도 신라에 못지않은 문화를 발전시켰으니 몇 작품은 남아 있겠지요? 을지문덕, 고구려의 기상을 노래하다 현재까지 전해 오는 고구려와 백제의 노래는 아쉽게도 각각 한 편씩밖에 없습니다. 한 편은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이 지은 한시이며, 또 다른 한편은 백제의 노래로 어느 행상인의 아내가 지은 「정읍사」라는 노래입니다. 을지문덕의 시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고, 정읍사는 『악학궤범』이라는 조선 시대 문헌 속에 전해지고 있지요.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는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살수대첩 중에 지은 한시입니다. 고구려 영양왕 때 수나라는 30만 군대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적군에게 항복한 뒤 적진을 정탐한 후 탈출했습니다. 이에 수나라 군사가 추격해 오자 을지문덕은 일부러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패하는 유도 작전으로 적의 군사력을 소모시킵니다. 연이은 전투로 인해서 수나라 군대는 지쳤고 추위와 배고픔도 견디기 어려웠지요. 을지문덕은 적군을 평양성 30리까지 유인하고 나서 그제야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아래와 같은 시를 써 보냅니다.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그대의 신기한 계책은 하늘의 이치를 다하였고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기묘한 헤아림은 땅의 이치를 통하였네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싸움에 이겨 그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을지문덕, 「여수장우중문시」 이 작품은 겉으로는 을지문덕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우중문의 지혜를 칭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의도는 상대방을 조롱하는 데 있습니다.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이 시를 보낸 까닭은 상대방의 마음을 흐트러뜨려 사기를 꺾기 위해서였습니다. 우중문은 이 시를 건네받고서야 자신이 을지문덕에게 속은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후회하며 군대를 후퇴시키지만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를 끝까지 추격하여 살수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을지문덕은 상대방에 대한 자신감과 여유를 내비치면서 우중문을 자극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을지문덕의 지략과 고구려의 기상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지요. 백제 상인의 아내, 그리움을 노래하다 고구려의 작품이 한시로 지어졌고 강인한 남성성을 표출한 반면에, 백제의 노래는 우리말로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노래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 두 작품이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 노피곰 도샤 달님이시어 높이높이 도드시어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멀리멀리 비춰 주십시오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어걍됴리 아으 다롱디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교요 시장에 가 계신가요 어긔야 즌를 드욜셰라 어긔야 진 곳을 디딜까 두렵습니다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느 곳에나 짐을 놓으십시오 어긔야 내 가논 어긔야 당신 가는 곳이 졈그셰라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아으 다롱디리 「정읍사」 이 시의 화자는 남편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요? “저쟤 녀러신교요(시장에 가 계신가요)”라는 표현으로 볼 때 남편은 행상을 하는 인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상을 떠난 남편이 오래 돌아오지 않자 아내는 고갯마루에 올라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노래를 지어 부릅니다. 노래에 등장하는 ‘달님’은 시적 화자가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입니다. 달은 높이높이 떠서 어둡고 위험한 밤하늘을 비춰 주는 광명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달님은 화자와 임의 사랑을 유지해 주는 매개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에 반해 ‘즌 데’는 위험한 곳을 가리킵니다. 어두운 밤에 질퍽하게 땅이 ‘진 곳’은 그야말로 무거운 짐을 들쳐 멘 행상인에게는 위험한 곳이지요. 학자에 따라서는 ‘즌 데’를 다른 여자, 남편을 유혹하는 존재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으로 보나 ‘즌 데’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로서는 매우 부정적인 공간입니다. 그런 까닭에 시적 화자는 달님이 더 높이높이 돋아서 멀리멀리 비추길 간절히 기원했던 것입니다. 이 시의 배경 설화는 『고려사』의 가요편 ‘악지’를 해설하고 있는 『악학궤범』에 전해 내려오는데 남편을 기다리며 아내가 서 있던 자리에 마침내 망부석이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기다리던 여인이 그만 돌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망부석(望夫石)은 글자 그대로 남편을 바라보다가 돌로 변해 버린 아내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고려 가요나 시조, 김소월의 시에 등장하는 ‘임을 기다리는 여성상’은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노래인 「정읍사」에 이미 나타나 있었던 것입니다. 망부석 설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 또 있나요? 현대 시 중에서 김소월의 「초혼」에도 망부석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는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돌’은 곧 망부석 설화의 돌과 같은 것이지요. 「정읍사」와 함께 김소월의 「초혼」을 감상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고구려와 백제의 작품은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나요?(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5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저작권보호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503  추천:0  2020-02-02
  윤이형 절필 이어 최은영 사과 요구… 이상문학상 파문 확산 2020.02.01.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작년 대상’ 윤이형 “상 돌려주고 싶지만 방법 없어 활동 중단”  ‘올해 우수상 거부’ 최은영 “반성할 사람들은 반성 안 하고…”  절필을 선언한 윤이형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수상작 발표 연기를 부른 이상문학상 수상 거부의 파문이 더 크게 확산될 조짐이다. 지난해 대상 수상자인 윤이형(44)이 절필을 선언하며 출판사에 사과를 요구한 데 이어, 올해 우수상 수상을 거부한 최은영(35)까지 사과 요구 움직임에 가세하면서다.  윤이형 작가는 지난달 31일 트위터 계정에 원고지 27매짜리 입장문을 올려 “작가를 그만둔다”고 밝혔다. 윤 작가는 “제가 받은 이상문학상을 돌려드리고 싶다. 부당함과 불공정함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돌려드릴 방법이 없다. 저는 이미 상금을 받았고 그 상에 따라오는 부수적 이익들을 모두 받아 누렸다. 더불어 저작권 개념에 대한 인식 미비로 양도 문서에 사인을 했기 때문에 제 작품을 그 일에서 떼어낼 수도 없게 됐다. 그래서 그 상에 대해 항의할 방법이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고 절필 배경을 설명했다. 이상문학상의 저작권 양도 요구 조항이 절필 선언의 이유임을 처음 밝힌 것이다.  윤 작가는 “작년 1월 이상문학상 수상 통보를 받은 직후 저는 ‘대상 수락 및 합의서’에 서명했다. 거기에는 작가는 작품의 저작권을 (이상문학상 주관사인) 문학사상에 양도하고, 3년 뒤에 개인 작품집이나 단행본에 수록할 수 있지만 대상 수상 작품은 표제작으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고 공개했다. 이어 “이것은 오랫동안 이상문학상 작품집 뒤에도 실려 있던 약관이다. 그러나 저는 평소 그 상을 받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았고 그때까지 문제의식이 없기도 했다”고 해명했다.  “저에게만 온 문서이기 때문에 우수상 수상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그는 김금희와 최은영, 이기호 등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자로 선정됐던 작가들이 수상 거부 선언을 하는 모습을 보며 “수치심과 자괴감을 견딜 수 없었고, 이제 더 이상 문학계에서 어떤 곳을 믿고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우수상 작가들의 권리 침해가 일어났는데 저는 그 사실을 모른 채 거기에 일조한 상황이 됐다”고 참담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제가 무엇에 일조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부조리에, 범죄에, 권리 침해에 일조하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다.  윤 작가는 “지금껏 문학계에서 어떤 문제를 제기했을 때 연루된 작가들의 피해가 제대로 보상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며 “이런 제도와 관행들을 만들어 놓은 것은 윗세대 문학인들인데 피해는 젊은 작가들만 보게 된다. 아무도 작가들의 상처에 대해 보상해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저는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 일할 수 없다. 일하지 않는 것이 제 작품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가를 그만둔다”라고 천명했다.  윤 작가는 “문학사상사는 회장님 한 사람의 억압적인 명령에 따라 이상문학상을 자의적으로 운영한 것, 우수상 수상자들의 저작권을 불공정한 방식으로 빼앗은 것, 형식상의 계약서를 보내며 거래하듯 상을 수여해 작가들에게 부당한 상황을 만든 것, 그리고 이것이 직원의 실수라고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고 상처 받은 작가들과 독자들에게 사과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앞으로 이 상의 운영 방식과 저작권 관련 방침을 개선해 정상적으로 운영할 것임을 약속해 주시기 바란다”고 글을 맺었다.  이상문학상 주관사인 문학사상사에 사과를 요구한 최은영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윤 작가의 입장 발표 직후 최은영 작가도 블로그에 글을 올려 문학사상사에 사과를 요구했다. 글에서 최 작가는 “윤이형 작가님의 입장문을 읽고 한 사람의 동료 작가로서 안타까움과 슬픔, 분노를 피할 길이 없었다. 왜 반성해야 할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고, 사과해야 할 사람들은 사과하지 않고 부당함에 피해를 입은 작가가 절필을 선언해야 했을까. 지금까지의 저의 침묵이 윤이형 작가님의 고통에 한몫한 것이 아닌지 돌아보게 된 하루였다”고 했다.  이어 최 작가는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을 거부하게 된 경위를 설명한 뒤 “이번 사건이 발생하고, 저는 작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받았던 사실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꼈다. 제가 분별없이 수상에 동의하고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기에 올해의 수상 작가님들에게까지 피해가 갔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라며 “우수상 수상자였던 저조차도 작년에 우수상을 받았던 저의 안일함을 지난 몇 주간 돌아보며 채찍질했는데, 대상을 받으셨던 윤이형 작가님이 느꼈을 충격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지 상상하기가 어렵다”고 털어놨다. “동료 작가로서, 한 사람의 독자로서 윤이형 작가님과, 윤이형 작가님의 문학을 잃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책임을 직원 개인의 ‘실수’로 몰아가며 자신들의 부당한 행동을 반성하지 않는 문학사상사에 제대로 된 사과를 요구한다”며 “문학사상은 잘못을 인정하고 진실한 사과를 하라”고 거듭 촉구했다.  지난달 6일 예정됐던 올해 수상작 공개를 무기한 미루고 한 달 가까이 공식 입장 표명도 보류 중인 문학사상사는 파문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기색이다. 윤 작가도 “문학사상사 측에서 공식 입장 발표를 최대한 늦추기로 했다고 전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논란이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작가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조만간 공식 입장을 피력해 사태를 진화하고 수상작도 2월 중에는 공개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권경성 기자 ============================/// 이상문학상 불공정 논란, 윤이형 '절필'에 이어 ' #문학사상사 업무 거부'로 일파만파 2020.02.02.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소설가 윤이형이 문학사상사에서 운영하는 이상문학상의 불공정성 때문에 ‘절필 선언’을 하면서 문학사상사 청탁을 거부하는 동료 작가들의 운동이 어어지고 있다. 소설가 황정은, 권여선, 조해진, 구병모, 장류진, 천희란, 정세랑, 최은미, 김이설, 우다영, 시인 오은, 권창섭 등이 트위터에 ‘#문학사상사_업무_거부’를 올리며 보이콧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현재 선언에 동참한 작가는 수십명에 이른다.  소설가 윤이형은 지난달 31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내가 받은 이상문학상을 돌려드리고 싶다. 부당함과 불공정함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라며 “상에 대해 항의할 방법이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고 자신의 ‘절필 선언’ 이유를 밝혔다.  이에 SNS에선 동료 작가들의 지지와 함께 문학사상사 청탁 거부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등을 펴낸 소설가 황정은은 “윤이형 작가의 피로와 절망에 그리고 절필에 책임을 느낀다. 고통을 겪고 있을 수상자들에게 연대하고 싶다. 문학사상사는 이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더는 작가들에게 떠밀지 마시고 제대로 논의하고 사과하고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밝혔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던 작가들이 연이어 문학사상사에 시정을 촉구하고 있다. 2008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소설가 권여선도 “이상문학상의 기수상자로서 관행이란 말 앞에 모든 절차를 안이하게 수용한 제가 부끄럽다. 이상문학상의 기형적 운영은 문학사상사의 독단적 운영과 맞닿아 있다.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고 바닥부터 새롭게 바꿔나가달라”고 밝혔다. 2018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소설가 조해진도 “염치없게 목소리 하나 얹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행동을 해야 힘이 된다는 것도 알기에 공식적으로 말한다. 문학사상이 정식으로 사과하고 해결방안을 마련하기 전까지 문학사상으로부터 모든 업무와 청탁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젊은 소설가들의 선언도 이어지고 있다. 을 펴낸 장류진도 “문학사상사가 이상문학상을 운영하면서 수상작가들의 저작권을 갈취해온 것과 그로 인해 마땅히 격려받아야 할 작가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해 사과를 하기 전까지, 문학사상사로부터의 모든 업무와 청탁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을 거부했던 소설가 최은영은 지난달 31일 밤 블로그에 글을 올려 문학사상사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최은영은 자신이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거부하게 된 이유로 “작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받았던 사실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꼈다. 제가 분별없이 수상에 동의하고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기에 올해의 수상 작가님들에게까지 피해가 갔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라며 “우수상 수상자였던 저조차도 작년에 우수상을 받았던 저의 안일함을 지난 몇 주간 돌아보며 채찍질했는데, 대상을 받으셨던 윤이형 작가님이 느꼈을 충격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지 상상하기가 어렵다”고 털어놨다. “동료 작가로서, 한 사람의 독자로서 윤이형 작가님과, 윤이형 작가님의 문학을 잃고 싶지 않다”며 “모든 책임을 직원 개인의 ‘실수’로 몰아가며 자신들의 부당한 행동을 반성하지 않는 문학사상사에 제대로 된 사과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상문학상 불공정을 이유로 ‘절필 선언’을 한 소설가 윤이형. 이상훈 선임기자 이상문학상에 대한 문제제기는 소설가 김금희·최은영·이기호가 2020년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을 거부하며 불거졌다. 소설가 김금희는 지난달 우수상 시상 조건으로 수상작의 저작권을 3년간 출판사에 양도하게 한 조항 등이 불공정하다며 문제제기했고, 이에 지난해 대상 수상작가인 윤이형이 ‘절필’을 선언했다. 문학사상사는 매년 초 발표해오던 이상문학상 수상작 발표를 무기한 연기한 채 공식적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거부한 소설가 김금희(왼쪽부터), 최은영, 이기호. /이영경 기자 --------------------------------------------------///   소설가 윤이형, 이상문학상 파문에 절필 선언 2020.02.02.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작년 대상 수상자…"항의할 방법은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뿐"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지난해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소설가 윤이형(44)이 최근 이상문학상 수상 거부 파문과 관련, 작가로서 영원히 작품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상문학상 운영 방식에 항의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게 윤이형의 설명이다. 문학계의 불공정한 관행과 불신 등에도 너무 지쳐 더는 활동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이유다. 윤이형은 지난달 31일 소셜미디어에 올린 장문의 글에서 "이상문학상을 돌려드리고 싶다. 부당함과 불공정함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려드릴 방법이 없다"면서 "그래서 그 상에 대해 항의할 방법이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환경에서 더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 일할 수 없다"면서 "일하지 않는 것이 내 작품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가를 그만둔다"라고도 했다. 이어 "수상을 무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일조한 책임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다"면서 "그러나 이제 앞으로의 활동을 영구히 중단했으니 조금은 말할 자격이 생겼다"며 문학사상사 대표를 향해 공식 입장 표명과 사과, 운영 방식 개선 등을 요구했다. 윤이형은 이 글을 올리기 하루 전날 연합뉴스에 보낸 문자 메시지에서 절필 선언이 맞는지 확인하는 질문에 "이상문학상 논란 이후로 어디를 믿고 일을 해야 할지, 나에게 내려진 평가가 정당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회의가 느껴져서 그렇다"면서 "문단 전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열심히 일해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부당함과 부조리에 일조해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이 싫다"고 했다. 소설가 윤이형[연합뉴스 자료사진] 앞서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자로 결정된 김금희·최은영·이기호 작가가 잇달아 수상을 거부하면서 지난달 6일 예정한 수상자 발표가 무기한 연기되는 등 논란이 확산했다. 이들은 최근 '수상작 저작권을 3년간 양도하고 작가 개인 단편집에 실을 때도 표제작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주최 측 문학사상사 요구에 반발해 수상을 거부했다. 최은영 등은 여전히 문학사상사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 3명이 수상을 거부함에 따라 수상작품집 출간도 불투명해진 상태다. 올해 수상 대상자는 대상 1명, 우수상 5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문학상은 작품집을 출간하지 못하면 운영하기 어려운 구조다. 문학사상사는 이달 중 공식 해명과 함께 대상과 일부 우수상 수상자를 발표할 복안인 것으로 알려졌다. 1977년 제정한 이상문학상은 이문열, 이청준, 최인호, 신경숙, 김훈, 한강 등 당대 최고로 인정받던 작가들을 수상자로 배출하면서 권위를 쌓아왔지만, 이번 사태로 작지 않은 흠집이 났다.
1458    [그것이 알고싶다] - "판도라" 댓글:  조회:3657  추천:0  2020-02-01
그리스로마신화 인물백과 판도라 신화 속 여인 [ Pandora음성듣기 ] 요약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초의 여성.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로부터 불을 얻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진흙을 빚어서 만들게 하였다. 인간으로 태어난 판도라가 온갖 불행을 가두어 둔 상자를 호기심에 못 이겨 여는 바람에 인류의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판도라원본보기 외국어 표기 Πανδώρα(그리스어) 구분 신화 속 여인 상징 사악한 아름다움, 치명적인 호기심 어원 모든 선물 별, 별자리 토성의 판도라 위성 관련 상징 상자 또는 단지 관련 사건, 인물 프로메테우스, 인류의 창조, 판도라의 상자 목차 판도라 인물관계도 신화 이야기 인류의 탄생 판도라의 탄생 판도라의 상자 피라와 데우칼리온 판도라 인물관계도 ※ 관계도 내 인명 클릭시 해당 표제어로 연결됩니다. 판도라는 제우스가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창조하였다. 판도라는 인간을 창조하고 불을 준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와 결혼하여 새 인류의 조상이 되는 딸 피라를 낳았다. 피라는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과 결혼하여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을 비롯하여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다.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는 티탄 신족 이아페토스의 아들이다. 신화 이야기 인류의 탄생 만물이 창조될 때 에피메테우스는 형 프로메테우스와 함께 모든 짐승과 인간에게 각각 재주와 능력을 부여하는 일을 담당했다. 하지만 ‘뒤늦게 생각하는 자’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에피메테우스는 미리 앞뒤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짐승들에게 좋은 재능을 다 써버린 나머지 가장 늦게 만들어진 인간에게 줄 것이 남지 않게 되었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파울 루벤스, 1618년. 필라델피아 미술관 이에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금지한 명령을 어기고 인간에게 몰래 불과 지혜를 선사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이로 인해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쇠사슬로 묶인 채 독수리에게 날마다 간을 쪼아 먹히는 벌을 받았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밤새 온전히 회복되어 계속해서 새롭게 고통 받아야 했다. 판도라의 탄생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을 받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에피메테우스에게 선물을 한 가지 한다. 그 선물은 다름 아닌 헤파이스토스에게 진흙을 빚어서 만들게 한 최초의 여성 아리따운 판도라였다. 판도라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69년, 개인 소장 헤파이스토스는 판도라를 불멸의 신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었다. 판도라가 만들어질 때 신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그녀에게 선물을 주었다. 아테네는 옷과 손재주를 주었고, 아프로디테는 인간이 이 새로운 존재를 사랑하도록 아름다움을 주었고, 헤르메스는 그녀 마음속에 거짓과 속임수를 넣어 주었다 (판도라는 ‘모든 선물’이라는 뜻이다). 판도라의 상자 판도라해리 베이츠, 1891년. 테이트브리튼 갤러리 ‘먼저 생각하는 자’라는 이름처럼 제우스의 의도를 미리 짐작했던 프로메테우스는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절대로 제우스가 주는 선물을 받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반한 에피메테우스는 덜컥 선물을 받아들여 판도라를 아내로 삼았다.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시켜 판도라에게 상자를 하나 전달하는데 그 안에는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온갖 나쁜 재앙과 악덕이 다 들어있었다. 헤르메스는 상자를 건네주며 판도라에게 호기심을 불어넣어 그것을 열어보게 하였고, 그 결과 인간 세상에는 온갖 불행이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상자 안에는 희망도 들어 있어 인간이 온갖 불행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판도라의 상자는 헤르메스가 선물로 준 것이 아니라 에피메테우스의 집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에피메테우스가 형 프로메테우스와 함께 인간과 동물을 만들었을 때 그들에게 온갖 좋은 재능을 다 부여하고 남은 나쁜 것들을 죄다 담아 놓은 상자였는데, 판도라가 그만 그것을 열어버렸다는 것이다. 피라와 데우칼리온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 사이에는 딸 피라가 태어나는데 피라는 나중에 프로메테우스의 아들인 데우칼리온과 결혼하였다. 피라와 데우칼리온은 제우스가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대홍수를 내렸을 때 프로메테우스의 귀띔으로 미리 방주를 만들어둔 덕에 유일하게 살아남아 새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물이 빠지고 난 뒤 두 사람이 신들께 제사를 올리자 어머니의 뼈를 등 뒤로 던지라는 말이 들려왔다.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이를 대지의 뼈인 돌을 뒤로 던지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그대로 하였더니 돌은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데우칼리온이 던진 돌은 남자가 되고 피라가 던진 돌은 여자가 되어 새 인류가 생겨났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또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이 태어났다. 참고자료 헤시오도스, 『일과 날』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플라톤, 『대화편: 프로타고라스』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토마스 불핀치, 『그리스 로마 신화』 M. 그랜트, J. 헤이즐, 『그리스 로마 신화사전』, 범우사 피에르 그리말, 『그리스 로마 신화사전』, 열린책들 W. H. Roscher, 『Ausführliches Lexikon der griechischen und römischen Mythologie』 관련이미지 12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이미지 갤러리 출처: 명화 속 그리스 신화 [네이버 지식백과]판도라 [Pandora] - 신화 속 여인 (그리스로마신화 인물백과)   ===============================/// 부활하는 보물 판도라의 상자 아름다운 재앙 [ Pandora Box ] 소유자 판도라 시대 고대 그리스 지역 그리스 출전 신통기 등 물건의 형상 항아리, 상자 목차 판도라의 항아리 아름다운 재앙 여러 가지 이설(異說) 판도라는 고대 여신 금단의 상자를 열어 인류에게 죽음과 병을 안겨준 처녀 판도라. 그러나 원전을 찾아가면 원래 그녀 자신이 인류에 대한 재앙으로 만들어진 인조인간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과연 최후에 남은 '희망'은 나쁜 것이었을까, 아니면 선한 것이었을까?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를 읽어보자. 판도라의 항아리 판도라 이야기는, 사람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를 설명하는 그리스판 죽음의 기원 신화이다. 이런 종류의 신화로는 구약성서에 있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 견줄 만큼 중요하다. 판도라 이야기는 긴 역사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왔는데, 그러면서 각각 시대에 맞도록 조금씩 내용이 변화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살아남아 성장해온 신화이다. 그 증거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판도라가 연 것은 상자였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원전을 기록한 그리스 서사시인 헤시오도스(그리스 신화의 원전 『신통기(神統記)』의 저자. 기원전 8∼9세기의 사람)의 기술에 의하면 원래는 '판도라의 항아리'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식품 보존을 위해 사용되었던 피토스라는 종류의 항아리에 온갖 재앙이 봉인되어 있었다. 항아리가 상자로 바뀐 것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인 것 같다. 또한 판도라의 속성도 크게 변화했다. 무엇보다도 오리지널에서는 그녀 자신이 제우스가 인류를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낸 아름다운 재앙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재앙 헤시오도스가 기술한 전승에서 판도라 이야기는 거인 프로메테우스와 신들의 왕 제우스 사이에서 일어난 일련의 싸움들 속에 등장한다. 거인 프로메테우스('앞을 보는 자'라는 의미)는 신들 중에서도 특출한 지혜를 지닌 자이며 인간들의 편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처음 인간을 창조한 자였다고도 한다(원래 남성만의 종족이었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제물로 바쳐진 소의 몫에 대해 인간의 편의를 꾀하고, 제우스의 뜻을 거스르고 인류에게 불과 기술(문화)의 지식을 전달했다. 이로 인해 둘은 대립하게 되고 후에 프로메테우스는 카우카소스 산 봉우리에 결박되어 오랜 시간에 걸쳐 독수리에게 간을 갉아먹히는 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 전에 제우스는 불을 얻게 된 복만큼의 재앙을 인류에게 보내주려고 했다. 제우스의 뜻에 따라, 우선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흙으로 꽃조차 부끄러워하는 처녀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지혜와 기술의 여신 아테나는, 그녀에게 여성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관한 재능과 띠와 옷을 선물했다. 아프로디테는 처녀에게 사랑스러움을 주었다. 이처럼 신들이 계속해서 선물을 주고 마지막으로 헤르메스가 그녀의 가슴에 거짓, 아첨, 교활함, 호기심을 채워주고 처녀에게 신들로부터의 선물이라는 의미를 지닌 판도라라는 이름을 붙였다(판도라의 어원에는 아주 다양한 해석이 있다). 이리하여 '최초의 여자' 판도라가 탄생했다. 이것은 신들이 힘을 기울여 창조한 아름다운 재앙이고, 남자가 결코 거절할 수 없는 매력 덩어리였다. 헤시오도스는 말한다. 실로 판도라에게서 시작된 여성의 계보야말로 남자들에게는 최대의 재앙이라고. 제우스는 신들의 사자(使者)인 헤르메스에게 명하여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 앞으로 데려갔다. 에피메테우스('후에 생각하는 자'라는 의미. 지혜로운 프로메테우스와 비교하면 다소 우둔한 동생)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제우스가 보내는 선물은 인간에게 화를 미치기 때문에 받지 말고 돌려보내라"라는 말을 들어왔었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는 이 말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기뻐하며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했다. 이름에 걸맞게 그는 나중에서야 겨우 실수를 깨닫게 된다. 한편 에피메테우스의 저택에는 항아리가 하나 있었다. 그 안에는 인간에게 해가 되는 온갖 것들이 봉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헤르메스에게서 호기심을 부여받은 판도라는 그 안을 확인해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어느 날 항아리를 살짝 열어보고 말았다. 그러자 안에서 죽음과 병, 질투와 증오와 같은 수많은 해악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사방에 흩어지게 되었다. 판도라의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 재앙으로 괴로워하게 되었다. 판도라는 허둥대며 항아리를 닫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모든 해악은 풀려나오고 만 것이다. 다만 유일하게 항아리 안에 들어 있었던 희망을 제외하고는……. 이것이 판도라 이야기의 원형이다. 여러 가지 이설(異說) 헤시오도스가 남긴 전승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나 의문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설들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판도라가 연 것은 온갖 좋은 것들은 가득한 상자였다는 이야기도 그 하나이다. 이 이야기에서 판도라는 제우스가 인간에게 준 성실한 선물이었고 상자는 신들로부터의 결혼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판도라가 부주의하여 항아리를 열어보고 말았기 때문에 좋은 것들은 모두 날아가버리고 유일하게 희망만이 남겨졌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왜 희망이 나쁜 것들의 항아리에 봉인되어 있었는지는 역시 커다란 의문점이었던 것 같다. 희망이라는 것은 어느 때에도 인간을 버리지 않으며 이것을 품고 있는 한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일은 없는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헤시오도스의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후세 사람들은 제각각 이 이야기에 수정을 가했고, 현재 폭넓게 연상되고 있는 '마지막으로 남겨진 유일한 희망'은 곧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을 버리지 않는 유일한 구원'으로 인식되고 재앙을 초래한 여자 판도라라는 이미지를, 마지막 희망을 안고 일어서는 기특한 처녀 판도라로 변화시킨 것이다. 판도라는 고대 여신 이에 대한 감성의 차이는 이야기 속의 판도라(여성)의 취급에도 잘 나타나 있다. 헤시오도스는 원전(『신통기』, 『일과 나날』)에서, 요컨대 남자의 모든 재앙의 원인은 여자라고 말하며, 노골적으로 되풀이하여 여성을 멸시한다. 여기에는 헤시오도스 자신의 개인적 여성관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서는 황금 양피의 마녀 메디아도 그랬던 것처럼 여성은 그다지 좋은 역할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제우스로 대표되는 부권적 권위가, 대지모신을 대표로 하는 모권적 권위로부터 사회의 주도권을 빼앗았다는 고대 그리스 역사 그 자체에 원인이 있다. 모성은 고대를 향한 반작용으로 부당하게 명예를 손상당했다. 판도라도 사실상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판도라라는 이름은 원래 대지의 여신, 생명을 잉태하는 모신의 다른 이름 중 하나였다. 헤시오도스 시대에서조차 제의나 이름이 이미 잊혀져버렸을 정도로 오래된 존재였던 것 같지만, 원래는 오래된 여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인류에게 재앙을 초래하는 '최초의 여자'로서 전승되게끔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근거로 하여 현재는 판도라라는 이름의 어원은 헤시오도스의 기술과는 매우 다르게 '전부를 주는 여자'였다는 게 정설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녀가 항아리에서 날려보낸 것은 원래 대지의 혜택(곡물 같은)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도 가능하다. 판도라 상자의 이야기에는 독자가 이처럼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치게 만드는 공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 이외의 이야기가 녹이 슨 지금도, 판도라 상자는 살아남아 변화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반영시켜 알맹이의 형태를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이 금단의 상자 전승은 앞으로도 역시 살아나갈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판도라의 상자 [Pandora Box] - 아름다운 재앙 (부활하는 보물)  
1457    시와 그림, 그림과 시 댓글:  조회:3510  추천:0  2020-01-30
문학비평용어사전 그림시     그림시에서 시인은 낱말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즉 말하는 화가이다. 그림이 눈으로 포착된 외부 세계를 묘사하기 때문에 시적 그림화 현상은 단번에 눈으로 감지되는 장면들 즉 일련의 시각적 단위들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각각의 단위는 바로 그림들의 목록으로 읽혀지게 된다. 작품들은 단번에 눈으로 파악해서 포착되어 질 것 같은 장면들, 말하자면 일련의 시각적 단위들로 나뉘어 지고 그래서 시의 구절들이 회화의 카탈로그 식으로 읽혀진다. 시각적이고 생생한, 세밀한 묘사와 더불어 표현이 풍부한 형상과 형태를 묘사하고 시간과 공간의 특수화 현상이 뚜렷하다. 근본적으로 시의 본질은 언어를 표현매개로 하는 반면 그림은 색을 창조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이 둘 사이의 상호 관계는 부적절해 보이지만, 시인과 화가가 눈으로 지각된 외부 세계를 그릴 때 그 둘을 동일한 존재로 간주해 왔다. 시와 그림의 내적 동일화(identificationintime)의 개념은 모방이론에서도 확인된다. 즉 시는 현실의 모방에 있으며, 그림은 인간의 행위, 본질적으로 모방할 수 있는 행위의 모방에 다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호라티우스(Horatius)의 시 이론 이후에 시와 그림 간에 아주 내밀한 관계가 형성되었으며, 이것들이 동일한 예술로 인식되어 응용되어왔다. 17세기의 페늘롱(Fenelon)은 시는 모방이고 그림이고 시인은 곧 화가라고 쓰고 있다. 그림시가 가능하기 위해서 시인에게는 시각의 고유 통찰 능력이 요구된다. 즉 통찰력있는 시선과 실체의 강렬한 관찰력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화가가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시인은 수많은 디테일로 장면들을 시각화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시적 장면들이 그림같은 장면들로 구성되게 된다. 특히 17세기 바로크 시인들에게 보통 시의 장면이 사상의 암시나, 하나의 상징, 혹은 세계관의 표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바로크 시인들은 장면의 심오한 가치 부여보다는 그런 장면의 조형적이고 회화적인 면이 더 민감하다. 만일 시인이 한 장면을 세밀하게 그리려고 한다면 화가가 그 장면의 모든 부분을 동시에 캔버스 위에 제시할 수 있는데 반해, 시인은 반드시 전체의 다양한 부분 부분의 디테일을 늘어놓아야 한다. 즉 시인은 일련의 묘사적 싯구로 제시하는 수밖에 없다. 이와같이 바로크 시인은 시의 전체적인 조망을 이미지와 윤곽을 병렬함으로써 짧고 적은 색의 터치를 더하고 누적시키는 점묘파화가들의 방식으로 묘사한다. 시의 그림화가 바로 시와 그림의 구별을 없애도록 해 주었다. 또 그림시 이론은 더욱 확산되었고 17세기 바로크 시의 이론에도 더욱 영향을 비치게 되었다. 말하자면 17세기 시인들은 시와 그림의 동화를 시도했는데, 이에 대해 르네 웰렉(Rene Wellek)과 오스틴 워렌(AustinWarren)의 시와 그림의 '교신'은 아주 적절한 지적이다. 생-따망(Saint-Amant)은 시와 그림의 내밀의 동화를 시도하면서 이 두 예술의 관계를 같은 부모의 피를 받은 사촌들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 곳곳에 시적 원칙을 해설하고 주석하는 기준점으로 그림, 혹은 회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회화에 대한 정통한 지식과 기법, 그림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바로 그의 시적 글쓰기에 깊이 스며들어있는데, 진정한 시가 대가의 모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창성에 있다는 그 당시에는 혁명적인 그의 지론은 시와 그림의 비교를 통해서 설파된다. 근본적으로 시인은 직접적인 생동감이나 색깔의 공간성을 제시하는 화가와 동일할 수는 없으나, 장면들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화가를 모방하려고 할 수 있다. 회화시는 그림은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문학적 시도로 머물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시인은 수사적 기법을 통해서 자기가 재현하고 있는 것의 특수성을 독자들에게 설득시키고자 한다. 생-따망은 자신을 화가로 간주하면서 그는 화가와 같은 역할 즉 오브제를 보면서 스케치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화가는 시인보다 그만큼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시인은 시적 주제에 있어서 더 광범위한 영역을 모방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시인은 말하는 붓이 가는 뛰어난 필치로 보이지 않은 것, 소리, 생각, 화음,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그리는 화가인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림시 (문학비평용어사전, 한국문학평론가협회)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정선의 그림 속에 살아나는 이병연의 시     이병연의 시, 「소악후월」 이병연의 시가 없으면 정선의 그림이 무색해지고, 반대로 정선의 그림이 아니면 이병연의 시가 빛을 잃었으리라 생각될 만큼 두 사람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었다. 친척 한 사람이 이병연의 집을 방문했다가 서재 가득 쌓아 놓은 중국 서적을 보고, 어떻게 이 많은 서적을 수집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내 친구 정선의 그림이 중국에서 인기가 있어 고가로 팔린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와 친구 사이로 많은 그림을 얻었다. 사행으로 중국에 가는 사람에게, 정선의 그림을 팔아서 책을 사 오라 했다. 그렇게 모은 책들이다.” 정선의 그림이 중국에서 고가로 거래되었다는 사실과, 이병연이 정선의 그림을 많이 소장하였다는 사실을 잘 설명하는 일화이다.   정선, 「소악후월(小岳候月)」1740~41년, 비단에 채색, 23.0×29.2cm, 간송미술관 소장. 이들 두 사람은 비록 표현 매체가 시와 그림으로 달랐으나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자’는 약속 아래 서로의 작품을 비평, 격려, 추만(推輓)하여 조선 예술사상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워 냈다. 시와 그림을 바꾸어 보자는 뜻을 형상화한 시화상간화(詩畵相看畵)를 진경산수가 아니라 이념산수로 표현한 사실도 재미있다. 시냇가 풀밭 노송 아래 두 노인이 시축과 그림을 놓고 비교하며 담론하는 한유(閒遊)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 다음과 같은 이병연의 화제(畵題)가 실려 있다. 나와 겸재는 시가 가면 그림이 오도록 왕복을 기약하여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자 하였다. 시와 그림의 경중을 어찌 값으로 따지겠는가. 시는 가슴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을 휘둘러서 이루어지니, 누가 쉽고 누가 어려운지 모르겠더라. 정선, 「시화상간(詩畵相看)」1740~41년, 비단에 채색, 29.0×26.4cm, 간송미술관 소장. 이처럼 이병연의 시풍은 평지에서 돌출한 것이 아니라 평생의 지기이며 당대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예술 경향과 연관이 있다. 또한 당시에 고조되었던 문원(文苑)의 대세를 반영했다고 보아야 하며 스승인 김창흡으로 소급해 보아야 한다. 김창흡은 형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과 함께 문명을 날렸는데, 노론학파가 18세기 초에 와서 호론과 낙론으로 나뉘는 분기점에서 낙론의 핵심 인물이 된 학자이다. 18세기 후반 정조는 이들 형제의 시문(詩文)을 이렇게 평했다. “농암 김창협의 시문은 우아하며 깨끗하고, 삼연 김창흡의 시문은 맑고 고담(古淡)하다. 김창흡은 부귀한 가문의 자제로 초야에서 종신(終身)하였으니, 그 형제의 시도 그러하다.” 형 김창협의 시문이 우아하고 깨끗한 데 비하여 동생 김창흡의 시문은 맑고 고담하다는 평은 형제의 시문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조의 평가는 결코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문체가 식암 김석주(息庵 金錫胄, 1634~1684년)와 농암 김창협에 이르러 일변했고, 조선의 문폐(文弊)1)가 여기서부터 유래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체는 김석주와 김창협에 이르러 일변하여 한 세상을 풍미하니 모두 이를 좇았다. 대개 전 시대 사람을 능가한 듯싶지만 원기(元氣)는 아득하여 부진하였다. 문폐가 이에서 점차 생겨났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학문이나 학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두 사람의 문체만을 모방함으로써 생겨난 부작용을 지적한 것이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문체가 정치의 흐름을 반영한다는 발상을 하고, 문풍복고(文風復古)의 기치로서 문체반정(文體反正) 운동을 일으켰다. 이는 문화 정책을 탕평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것으로서, 노론 벽파 계열의 인재를 포섭하기 위한 공작이었다. 김석주나 김창협의 문체가 비판 대상이 된 것은 정조가 표방하는 고문(古文), 즉 순정문(醇正文)의 문체에 위배되었기 때문이다. 고문의 문체에 위배된다는 것은 조선적 색채가 강한 문체를 구사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니, 두드러진 조선풍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를 테면 속담, 속어, 조선의 제도, 지명, 관명 등 문물 제도가 시어로 구사 되는 문풍을 비판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선의 그림 속에 살아나는 이병연의 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1456    시와 문장부호 댓글:  조회:2310  추천:0  2020-01-30
시는 소설, 수필, 희곡, 평론 등과 함께 문학의 한 갈래입니다. 다른 장르들과는 다른 시 만의 특징이 있다면 운율이 있다는 것과 가장 함축적이라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특징 외에도 언어에 대한 변형이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도 시가 가지는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김영랑 시인의 시 가운데 '나는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과 같은 시구를 예를 들어 볼게요. '찬란한 슬픔'이라는 구절은 사실상 말이 안 되는 표현이죠. 슬픔이 찬란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시적 기교인 역설을 이용한 문학적 표현입니다. 또한 문장 전체가 '나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가 맞는 표현이겠지만 어순이 도치되어 있습니다. 이 또한 문학적인 장치로 어법을 파괴한 것이지요.   제가 위와 같은 설명을 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시에 부호(, . ! ?)를 쓰는 것은 시를 쓰는 시인이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문장부호 외에도 다른 기호나 화살표와 같은 것을 시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변형이나 형식에서 자유로운 것이 바로 문학 장르 가운데도 시라는 장르입니다. 심지어 그림을 시에 삽입하는 시인도 있지요. 오히려 기본적인 문장부호보다 훨씬 폭 넓은 일상 생활의 기호나 상징들이 시에 들어갑니다.    한국 현대시들을 살펴보면 부호가 많이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부 교수나 시인들이 시를 처음 배우는 학생들에게 시의 감정을 문장 부호로 나타나게 하는 것을 막고 시어를 통해 감정이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 문장부호를 쓰지 말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1.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2.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의 시의 일부입니다. 1번과 2번 중에 어디가 더 절절하게 다가오나요? 느낌표가 붙어 있는 2번일 겁니다. 시에는 느낌표가 됐든 어떤 다른 부호가 됐든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실제로도 많은 시들이 그렇게 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이나 시인의 강의에서 쓰지 말라고 한 것은 교육적 차원일 겁니다. 강의를 듣고 있다면 그 가르침에 따라 쓰지 않고 시어를 통해서 시를 쓰는 연습을 해 보는 것도 시작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영국 시인들은 수백 년 전부터 시(운문)는 구어체로 써야 한다고 했는데 구어체시(운문)를 완성하려면 당연히 붙여야 하지요.   영국 시인들이 말하는 구어체시(운문)란 뜻은 운율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시(운문)를 말하는 거니까요.   현대시에서 말하는 운율의 정체는-대한민국에서 잘못 가르치는-음률(리듬)적인 것이 아니라 [고아한 품위가 있는 기상적 개념]이랍니다. 그러므로 시(운문)는 그저 심상이나 좋은 느낌 따위를 서술하거나 묘사한 작문(시)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진정한 시(운문)는 고아한 품위가 있는 기상적 개념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문장만을 뜻하는 거랍니다.   영국 시인들이 쓴 구어체 시를 보면 알 수 있듯 한글로도 구어체 시를 써 보면   저절로 여러가지 부호를 사용하게 된답니다.   한글로 된 어떤 시 문장이 구어체 시인지 증명도 못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설도 많은데 잘 생각해보시길.   참고로 한글로 된 대표적 구어체시 몇 편을 제시하면 이상님의 , 김수영님의 , 윤동주님의 , 이육사님의 , 김영랑님의 등등.  
1455    [시공부 101] - 5... 댓글:  조회:2479  추천:0  2020-01-30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누가 향가를 지었나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글자 옷을 입은 민요, 향가 향가를 짓던 신라의 지식인은 누구? 스님이 지은 아름다운 10구체 향가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작품 비평과 소통 고등학교 국어Ⅰ 작가의 개성 이해와 작품 감상 향가는 향찰로 기록되었다는데, 한자를 모르고는 향가를 지을 수 없었겠네요. 그렇다면 향가는 대개 어떤 사람들이 지었나요? 그리고 향가는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졌나요? 글자 옷을 입은 민요, 향가 향가는 향찰로 썼기 때문에 한자를 아는 사람이 기록하거나 창작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아야만 향가를 지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처음부터 향가가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에 의해 창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해 오는 향가 중에 가장 오래된 작품은 「서동요」입니다. 이 노래는 어린아이들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민요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민요로 불리던 것이 누군가에 의해서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지요. 「서동요」 외에도 지은이가 알려지지 않은 「풍요」, 월명사가 지은 「도솔가」, 견우 노인이 지었다는 「헌화가」 등은 모두 형식이 「서동요」와 비슷했습니다. 아주 짧은 4구 형식의 노래인데 이를 두고 4구체 향가라고 부릅니다. 결과적으로 신라 향가는 민요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향가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4구체였던 향가가 그 두 배인 8구체 형식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8구체 향가로는 「처용가」와 「모죽지랑가」가 있습니다. 「처용가」는 처용이 아내를 범한 역신을 물리치기 위해서 지어 부른 노래로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모죽지랑가」는 죽지랑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득오곡이 부른 노래이지요. 8구체 향가는 두 작품 이외에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없습니다. 신라 향가 중에서 가장 발달된 형태는 10구체 향가입니다. 10구체 향가는 8구체 향가에 2구를 덧붙여 만든 것인데 마지막 2구의 첫머리에는 ‘아아’, ‘아으’ 같은 감탄사가 위치해 있습니다. 따라서 10구체 향가의 형태는 4구—4구—2구,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지요. 어떤 학자는 이처럼 세 부분으로 나뉘는 형태가 이후에 초장—중장—종장의 형태를 갖춘 시조의 형식으로 발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답니다. 신라 향가 중에서 가장 많이 남아 있는 형태는 10구체 향가로서 ‘사뇌가’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향가를 짓던 신라의 지식인은 누구? 이제 여러분이 처음 제기했던 질문, 향가의 작가는 누구였는지 밝혀 보겠습니다. 민요의 형식인 것을 배제하면 향가의 작가는 대개 화랑과 승려가 많았습니다. 특히 10구체 향가는 대부분이 이들에 의해 창작되었습니다. 신라가 화랑의 나라였고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였기에 화랑과 승려가 지은 작품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향찰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아는 지식인층이었기에 무난하게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이 지은 아름다운 10구체 향가 자, 이제 10구체 향가 중에서 여러분이 쉽게 이해할 만한 작품 한 편을 감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월명사가 지은 「제망매가」입니다. 이 작품은 죽은 누이의 제사를 지내며 애도의 뜻을 담은 작품입니다. 생사 길은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아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나 도(道) 닦아 기다리겠노라. 월명사, 「제망매가」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누이를 잃은 슬픔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를 지은 사람은 월명사로 신분이 승려였지만 혈육에 대한 정은 남달랐습니다. 누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깊이 상심을 했던 것입니다. 3~4구의 “나는 간다는 말도 / 못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에서 ‘나’는 바로 죽은 누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누이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이라는 구절은 누이가 일찍 세상을 떠났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누이가 어려서 죽은 것이 시인의 마음에 큰 상처로 남은 것입니다. 시인은 인간 삶에 대한 무상감을 자연 현상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 한 가지에 나고 / 가는 곳 모르온저”라는 말에서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가는 곳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허망하다고 느끼고 있지요. 그렇다면 시인은 어떻게 혈육을 잃은 슬픔을 극복했을까요? 답은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9구에 제시된 ‘미타찰’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말로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정토를 가리킵니다. ‘아미타’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어의 ‘아미타유스’에서 온 말로 ‘무한한 수명을 가진 것’이란 뜻입니다. 한자로는 무량수, 무량광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절에 가면 흔히 무량수전이라는 건축물을 볼 수 있지요. ‘아미타’는 원래는 도를 깨우치던 보살이었습니다. 오랜 수행의 결과 현재는 극락 세계에 머물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요. 따라서 아미타불이 있는 미타찰은 죽음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이 없는 세계입니다. 시인이 “미타찰에서 만날 나”라고 표현한 것은 일단 누이가 ‘미타찰’로 갔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며, 자신도 언젠가 불법을 닦아 미타찰로 갈 것이라는 의지를 나타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도를 닦는 것이 현재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결국 시인은 혈육을 잃은 슬픔을 누이를 다시 만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극복하고 있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현재 우리가 읽고 쓰는 시에 못지않게 격조 있고 아름다운 시이지요? 이처럼 신라 향가, 특히 10구체 향가는 정제된 형식미를 갖추고 아름다운 인간의 정서를 표현해 낸 우리 문학의 유산입니다. 신라는 불교 국가였으니 불교적인 노래가 많을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노래가 있을까요? 신라 향가 중에서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으로는 「원왕생가」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신라 문무왕 때 ‘광덕’이 지은 작품으로 “두 손을 모아 / 원왕생 원왕생 / 그리는 사람이 있다고 아뢰소서”라는 구절에는 극락왕생을 하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정서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또 다른 신라 향가 「도천수관음가」에도 ‘천수관음’ 앞에서 아이의 눈이 뜨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관련이미지 12 이미지목록 이전     , 《삼국유사》에서"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0912_000_1/20120308234646340_H1FWKHLYA.jpg/ca4_146_i1.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33" />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삼국유사 중 도솔가 본문삼국유사 권5에 실려 있는 월명사의 도솔가 본문이다. 1989년 2월 촬영.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누가 향가를 지었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54    [시공부 101] - 4... 댓글:  조회:2309  추천:0  2020-01-30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한글 이전에도 우리말 표기법이 있었다고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다 향찰의 실제를 보자 “선화공주주은” “타밀지가량치고” 향찰은 왜 고려 시대에 자취를 감추었을까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작품 이해와 해석 고등학교 국어Ⅱ 한국 문학의 전승과 흐름 신라 시대에는 향찰을 통해서 우리말을 표기했다고 하는데 향찰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고 싶어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말은 한자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한자로 이루어진 단어가 많기는 하지만 한자로는 적을 수 없는 고유어도 적지 않습니다. 또한 한자로 문장을 이룬 한문과 우리 문장의 어순은 완전히 다르지요. 우리말에 맞는 우리 글자는 1443년에야 만들어졌지요. 그전까지 우리 민족은 우리말을 사용하면서도 글자는 한자를 쓰는 이중적인 언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노래와 시까지 한자로 적는 것에는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한자로 표현하는 순간 우리말이 지닌 고유한 느낌은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나라의 시를 영어와 같은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고유의 아름다움이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지요. 신라 시대 때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향찰입니다. 향찰이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우리말을 적는 방법이었습니다. 기존에 사용하는 한자를 이용해서 우리말을 적을 수도 있겠다는 참신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향찰의 실제를 보자 여러분도 우리나라 도로 표지판에 지명을 로마자로 표기한 것을 본 적이 있지요? 우리말의 발음과 비슷한 해당 영문자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향찰 표기도 이와 유사합니다. 다만 로마자가 소리만 빌려 온 것에 비해 향찰은 뜻까지 빌려 온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 한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려운 작품이 아니니 너무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善花公主主隱(선화공주주은) 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타밀지가량치고) 남 몰래(그지) 결혼해 두고 薯童房乙(서동방을) 서동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야의묘을포견거여) 밤에 몰래 안고 가다 「서동요」 이 작품은 백제 30대 임금이었던 무왕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노래입니다. 무왕의 어린 시절 이름은 서동이었지요.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연못가 근처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곳의 용과 정을 통해서 서동을 낳았다고 합니다. 서동이란 이름은 그가 어릴 때부터 마를 팔아서 생활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합니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로 건너가 아이들에게 마를 공짜로 나누어 주며 노래를 부르게 시켰다고 합니다. 그 노래가 바로 「서동요」입니다. 이 노래가 유행가처럼 퍼져 나가 선화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쫓겨난 그녀를 서동이 아내로 삼습니다. 이후 서동은 집 근처에서 발견한 금을 진평왕에게 보내어 사위로 인정받았으며 차차 인심을 얻어 백제의 임금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자, 그럼 이제 한자로 표기된 향찰을 우리말로 읽어 볼까요. “선화공주주은” 일단 1구의 선화공주와 3구의 서동방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신라 향가는 현대 시의 ‘행’에 해당하는 것을 ‘구’로 부릅니다.) 어차피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니까요. 1구의 한자를 읽으면 “선화공주주은”이 됩니다. 이때 ‘主’는 ‘주인 주’ 자이지요. 따라서 ‘主’는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님’, 아니면 존경과 사랑의 대상을 가리키는 ‘임’과 통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主’는 ‘주’라는 소리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임’이라는 뜻을 빌려 온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隱’은 ‘숨을 은’ 자인데, 여기서 뜻을 빌리면 의미가 이상하게 되겠지요. 따라서 이 글자는 뜻을 빌린 것이 아니라 ‘은’이라는 소리를 빌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1구는 ‘선화공주님은’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타밀지가량치고” 두 번째 구까지만 살펴볼까요? 두 번째 구는 한자를 “타밀지가량치고(他密只嫁良置古)”로 읽을 수 있습니다. ‘他’는 남이라는 뜻을, ‘密只’는 ‘그윽할 밀’과 ‘다만 지’인데, 이 중에서 ‘密’ 자는 뜻을, ‘只’ 자는 음을 빌려 왔습니다. 그래서 ‘그지’라는 단어로 해석했지요. ‘그지’라는 말은 ‘그윽하게’의 옛 표현이며, ‘몰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嫁’는 ‘시집가다’라는 의미이고, ‘置’는 ‘두다’라는 의미이므로 두 글자는 모두 뜻을 빌린 글자입니다. 나머지 글자는 모두 한자의 음을 빌려 왔지요. 여러분이 익히 아는 쉬운 글자 ‘古(고)’의 의미는 ‘옛’이지만 작품에서는 ‘옛’의 의미는 사라지고 오로지 ‘고’라는 음만 사용되었지요. 이처럼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쓰는 것이 향찰입니다. 향찰은 왜 고려 시대에 자취를 감추었을까 향찰은 비록 한자의 음과 뜻을 빌리기는 했지만 시가를 표현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향찰로 표기된 시가를 향가라고 부르지요. 비록 많은 작품은 아니지만 우리가 신라 향가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은 향찰 덕이 크지요. 하지만 향찰의 운명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고려 시대에 가서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고려의 귀족은 향찰로 작품을 창작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고려의 평민은 어려운 한자를 익힐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려 시대에도 『균여전』에 실린 「보현십원가」라는 향가가 쓰이기도 했지만 이후에 계속 창작되지는 않았습니다. 향가는 후대 문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신라 향가는 고려 시대에 발생한 시조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시조는 초장 — 중장 — 종장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0구체 향가가 4구 — 4구 — 2구,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10구체 향가의 마지막은 ‘아아’, ‘아으’와 같은 감탄사로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시조의 마지막 종장 3음절이 고정되어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까닭에 시조가 향가가 변형되는 과정에서 생겼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글 이전에도 우리말 표기법이 있었다고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53    [시공부 101] - 3... 댓글:  조회:2135  추천:0  2020-01-30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노래가 마법을 부린다고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노래는 힘이 세다 옛날 옛적, 가야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나를 맞으라! 왕이여, 당신의 모습을 보이소서!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가치와 중요성 고등학교 국어Ⅱ 한국 문학의 전승과 흐름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노래를 주문처럼 부르기도 한다면서요? 주술사들이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말이에요. 노래는 힘이 세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노래와 시에는 주술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주술이란 초자연적인 존재나 신비적인 힘에 의지해 인간 생활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기술입니다. 그렇다면 노래와 시 속에는 어떻게 주술적 힘이 담기게 된 걸까요? 일단 노래는 반복적인 선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한 한 번만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는 없지요. 여러분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르는 새 반복적으로 부르게 되지 않나요? 특정한 가사말을 계속 반복해서 부르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것에 익숙해지고 노래에서 지시하는 메시지를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에 담아 둘 것입니다. 광고에서 CM송이 사용되는 것을 보세요. CM송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작용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CM송과 연관된 상품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처럼 노래는 인간의 행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것이 좀 더 자주 반복되거나 대다수 집단이 부르게 되면 강력한 주술성을 지니게 됩니다. 옛날 옛적, 가야에서는······ 고대에 부르던 노래 중에서 주술성을 지닌 노래로는 「구지가(龜旨歌)」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노래는 가락국(금관가야) 건국 설화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락국은 낙동강 유역에 존재했던 육가야 중 하나로 다른 가야국과 비교해 볼 때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합니다. 가락국을 세운 사람은 김수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출생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나 신라의 박혁거세처럼 비범하고 기이했던 것입니다. 자, 이제 김수로 왕의 출생에 대한 설화와 그것과 관련된 노래 한 편을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아래 작품을 감상하겠습니다. 龜何龜何(귀하귀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내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구지가」 이 노래는 「구지가」라는 이름 외에 「영신군가(迎神君歌)」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영신군’이라는 말은 왕을 맞이한다는 뜻이지요. 즉, 「구지가」는 왕을 맞이하는 노래입니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나를 맞으라! 이 노래가 불리던 시점에는 그 지역에 강력한 왕권을 지닌 나라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국사 시간에 가야가 삼국 시대에 가장 늦게 만들어진 나라라고 배웠을 것입니다. 이 지역의 소국들은 서로 통합되지도 못했고 그런 까닭에 힘도 미약했지요. 사람들은 자신들을 통치해 줄 신령스런 통치자를 원했습니다. 때마침 그들이 사는 곳 근처, 구지봉 기슭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하늘께서 내게 명령하셨는데 이곳에 나라를 새롭게 하고 왕이 되라고 하셨다. 너희들은 산꼭대기에서 흙을 파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나를 맞으라”라는 것이었지요. 이에 부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3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구지봉에 올라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여섯 개의 황금알이 내려와 여섯 명의 귀공자로 변하여 각각 육가야의 왕이 되었지요. 그중에서 가장 큰 알에서 깨어난 사람이 김수로 왕이었다고 합니다. 김수로 왕에 얽힌 설화는 여기까지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이 「구지가」는 왕을 고대하면서 백성들이 부른 주술성이 강한 노래였던 것입니다. 왕이여, 당신의 모습을 보이소서! 자, 이제 작품을 살펴볼까요. 한눈에 봐도 아주 짧은 작품입니다. 짧다는 것은 그만큼 반복하기 쉽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다시 말해서 주술성을 갖추기에 적합한 형태인 것입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거북’은 오래전부터 신령스러운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물과 뭍을 오가는 존재이기에 사람과 자연, 사람과 신을 연결해 주는 상징물로 받아들여 졌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머리’는 지도자, 즉 왕을 뜻합니다. 따라서 “머리를 내어라”는 왕을 내어 주길 바라는 민중의 욕망이 표현된 것입니다. 자, 이제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째서 ‘거북’과 같은 신령스런 존재에게 “구워서 먹으리”와 같은 위협적인 말투를 사용했던 것일까요. 이러한 태도 때문에 이 시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이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민중의 강력한 욕구를 간절하게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민중의 욕망은 실현되었습니다. 그들이 노래를 부른 것처럼 왕이 탄생했으니 말이지요. 이처럼 주술성을 갖춘 노래들이 과거에는 여러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맹세를 어긴 왕에 대한 원망을 담은 시를 나무에 걸었더니 그 나무가 말라 죽었다는 신라 향가 「원가」도, 병을 옮기는 역신을 물리쳤다는 신라 향가 「처용가」도 모두 주술성을 지닌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지가」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란 어떤 것인가요? 「구지가」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노래를 잡귀를 쫓는 주문으로 보았고, 또 다른 학자는 신에게 제사 지내는 동안에 불렀던 노래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 밖에 거북의 머리를 남성의 성기로 보고 고대인들의 성욕이 표현된 노래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래가 마법을 부린다고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52    [시공부 101] - 2... 댓글:  조회:2391  추천:0  2020-01-30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정시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집단 가요와 개인 서정시 사이, 「공무도하가」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서정시, 「황조가」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국어Ⅱ 한국 문학의 전승과 흐름 고조선 사람들도 서정시를 알았을까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정시는 언제 지어졌는지, 무엇인지 알고 싶어요. 집단 가요와 개인 서정시 사이, 「공무도하가」 우리나라는 한글이 창작되기 이전까지 모든 기록이 한자로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한자의 음과 뜻을 빌린 향찰이 한동안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라의 노래를 적는 데 활용되었을 뿐 거의 모든 기록물은 한자로 적혔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시 작품은 모두 한자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서정시는 『해동역사』에 실려 있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로 고조선 때의 노래입니다. 公無渡河(공무도하)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공경도하) 임은 마침내 물을 건너시네 墮河而死(타하이사) 물에 휩쓸려 돌아가시니 當奈公何(당내공하) 가신 임을 어이할꼬 「공무도하가」 이 노래의 작가는 백수광부의 아내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수광부란 ‘머리가 하얀 미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노래의 내용은 아주 단순합니다. 남편이 물에 빠져 죽자 그 슬픔을 노래한 것입니다. 물론 이 노래를 부른 여인도 결국에는 남편의 뒤를 따라 물에 빠져 목숨을 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노래에 등장하는 백수광부를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적인 인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고대 사회에는 인간과 자연을 이어 주는 무당과 같은 존재가 필요했는데, 백수광부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신적인 인물은 고조선 시대 단군 왕검과 같은 현실적인 지배 권력이 등장하자 자신의 지위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술에 가득 취한 채 마지막 굿판을 벌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학자는 백수광부를 술의 신, 그의 아내를 음악의 신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개인의 정서가 아니라 집단의 역사를 표현한 노래라고 해석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 시에서 백수광부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내의 감정은 충분히 개인적인 정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별과 죽음, 슬픔과 그리움이 시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지요. 특히 ‘물’은 중요한 상징성을 지닙니다. 물은 1구에서 여인의 애절한 사랑을 표현하는 소재로 쓰였고, 2구에서 이별을, 3구에서 죽음, 곧 영원한 이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배경 설화에 따르면 노래를 부르고 난 후 여인도 남편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던집니다. 따라서 물은 죽음의 의미로만 끝나지 않고 만남과 재생의 의미도 갖게 되지요. 이처럼 「공무도하가」는 개인적인 정서를 담아낸 서정시로 보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노래는 집단의 노래에서 개인적인 서정시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서정시, 「황조가」 「공무도하가」는 집단의 노래가 개인 서정시로 나아가는 형태였습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개인 서정시는 언제 쓰인 것이며, 그에 해당하는 작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아마 고구려의 유리왕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주몽이 부여를 탈출하면서 그곳에 남겨 두고 온 자식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비 없는 자식’이라며 천대를 받고 자라다가 결국에는 아버지를 찾아와 마침내 고구려의 두 번째 왕에 등극합니다. 유리왕에게는 원래 송씨라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자 왕은 다시 두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한 사람은 화희로 고구려 사람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치희로 한나라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유리왕은 동궁과 서궁을 짓고 두 사람을 따로 머물게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유리왕이 사냥을 떠나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화희와 치희는 다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치희는 “너는 한나라 여인인데 어찌 이리 무례한가”라는 화희의 말에 부끄럽고 분해서 한나라로 돌아가 버렸지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유리왕이 서둘러 치희를 쫓아갔지만 그녀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유리왕이 아쉬움을 뒤로한 채 돌아오면서 나무 그늘 아래에 쉬고 있을 때 마침 나뭇가지에서 꾀꼬리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습니다. 유리왕은 그것을 보고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翩翩黃鳥(편편황조) 훨훨 나는 저 꾀꼬리 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 서로 정답구나 念我之獨(염아지독) 외로워라 이내 몸은 誰其與歸(수기여귀) 누구와 함께 돌아갈까 유리왕, 「황조가」 이 시는 전반부에는 시적 화자가 바라보는 경치가, 후반부에는 자신의 감정이 나타난 전형적인 선경후정 방식이 쓰였습니다. 경치를 제시하고 정서를 표현하는 작품은 이후로 줄곧 창작되지요. 1행에서 시적 화자는 암수가 서로 정답게 지내는 꾀꼬리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적 화자의 처지와 대비되는 존재이지요. 유리왕은 치희와 함께 돌아오지 못한 채 쓸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꾀꼬리’는 유리왕의 마음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황조가」는 남녀 간의 애정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소재를 개인적 체험과 정서에 바탕해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 서정시로 볼 수 있습니다. 「황조가」를 서사시로 볼 수는 없는 것인가요? 「황조가」를 서사시로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화희와 치희 사이에서 일어난 다툼을 부족 간의 갈등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화희로 대표되는 농경 민족과, 치희로 대표되는 수렵 민족의 분쟁을 다룬 작품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요. 어느 한 개인의 서정이 아니라 부족 간의 분쟁에 대한 안타까움을 그려 낸 작품이라고 본다면 서사시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 서정시라는 것이 더 보편적인 견해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정시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51    [시공부 101] - 1... 댓글:  조회:2238  추천:0  2020-01-30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사람들은 언제부터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지었나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가설 하나 : 원시 시대 축제에 답이 있다 가설 둘 : 노동의 피로에 답이 있다 가설 셋 : 인간은 유희적 동물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국어Ⅰ 문학 갈래의 이해 유튜브를 보면 잘하건 못하건 노래 솜씨 자랑하는 사람이 정말 많아요. 왜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언제부터 그리고 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짓게 된 건지 이유가 궁금해요. 가설 하나 : 원시 시대 축제에 답이 있다 인류가 노래를 처음 만들어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 원시 시대 때부터입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이 시기 사람들에게 하늘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자 삶의 축복을 기원하는 신앙 그 자체였습니다. 천재지변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지만 천혜의 조건에서는 풍요로운 수확을 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에 잘 보이기 위해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제천의식이라고 부르지요.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가 바로 이러한 제천의식이었습니다. 제천의식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일단 원시 부족을 이끄는 제사장이 성스러운 의식을 집전했을 것입니다. 제단을 쌓고 그곳에 제물을 올리고 절을 했겠지요. 추석이나 설날을 비롯해 돌아가신 어른들을 기리는 제사들을 떠올리면 그 형태를 대충 짐작할 수 있지요. 성스러운 의식이 끝난 뒤에는 곧바로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참여하여 함께 즐기는 축제를 벌였지요. 이는 부족민의 화합을 위해서 필요한 행사였습니다. 사람들은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며 즐거움을 누렸는데 이것이 바로 원시종합예술(Balad Dance)입니다. 원시종합예술에는 음악 · 미술 · 문학 · 무용 등 다양한 예술의 형태가 녹아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이 장단에 맞춰 부르던 소리가 음악으로 발전했고, 가사말은 시로 발전했으며, 몸동작은 무용으로, 분장이라든가 무대를 꾸미는 행위는 미술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시와 노래는 원시종합예술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가설 둘 : 노동의 피로에 답이 있다 노래와 시가 노동의 피로를 이겨 내고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 피로가 사라지고 일의 효율이 높아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모차르트 효과라고 해서 음악이 인간의 지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의견까지 있었지요. 이처럼 노래와 시가 노동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위로하며 때로는 기쁘게 해서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려고 만들어졌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견은 우리나라의 여러 지역에 분포하는 ‘노동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동요는 민요의 한 형태로서 사람들이 노동을 하며 박자에 맞춰 소리를 내고 그 소리에 가사를 얹어 부르는 노래를 말합니다. 모내기철에 부르는 노래나 김매기할 때 부르는 노래가 그 예이지요. 이처럼 노래와 시가 노동하는 행위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가설 셋 : 인간은 유희적 동물 시와 노래를 부르게 된 까닭이 인간이 지닌 놀이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목적 없이 행위 자체를 즐기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와 실러는 이러한 욕망을 유희 충동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하위징아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고 명명하며 ‘놀이하는 인간’의 개념을 만들어 낸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위징아는 사람이 시를 짓고 문화를 이루고 사는 것이 모두 유희 충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았지요. 놀 줄 안다는 것은 인간과 그 밖의 동물을 구별 짓는 여러 가지 특성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자주 하는 게임을 생각해 보세요. 프로게이머가 아닌 이상, 게임을 한다고 좋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성적은 떨어지고 그 때문에 어른들에게 눈총을 받고 사회 적응에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게임을 좋아합니다. 이유는 게임이 즐거워서입니다. 인간에게 게임을 즐기려는 욕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노래와 시가 탄생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쓴다고 해서 그것이 당장 경제적인 형편을 나아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직업 가수는 조금 다르겠지요. 하지만 직업으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자기의 내면을 시와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이 돈이 되지는 않지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는 것은 그 일을 통해서 스스로 심리적인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노래와 시는 인간의 다양한 욕구로부터 탄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정시가 먼저 나왔나요? 서사시가 먼저 나왔나요? 고대에는 개인보다는 집단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서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집단의 의식이 노래로 표현되기가 쉬웠습니다. 또한 집단의 신화적 · 영웅적 내용을 시를 통해 널리 퍼뜨려 공동체의 결속을 다질 필요가 있었지요. 따라서 영웅이나 신화적 존재를 다룬 서사시가 개인적 체험과 정서를 다룬 서정시보다 먼저 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람들은 언제부터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지었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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