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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무정장군》

1. 밝혀지는 장군의 신상
2018년 04월 11일 17시 34분  조회:1124  추천:0  작성자: 리함
제1부 압록강을 건너
 
 
밝혀지는 장군의 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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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람인 무정장군의 고향을 두고 함경북도 경성군(镜城郡)설이 절대적인것 같았다. 그 이상 상세한 고향은 밝혀지지 못했지만 중국 조선족사회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학계와 무정 연구가들 모두가 경성군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세불변의 권위적인 지배적 주장이였으니 학계에서는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 대세불변의 권위적인 주장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경성군설이 아닌 청진시 근동리설을 주장하는 분이 나섰으니 때는 지금으로부터 16년전인 1999년으로 돌아간다.  
 
인연이 닿아서인지 새세기를 앞둔 1999년 7월에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에서 친척방문을 온 70대 조선로인ㅡ리상섭(李相燮)씨를 알게 되였다. 리상섭로인은 지난세기 50년대 중반시절 중국 청화대학에서 학습한 조선류학생으로서 무정장군과 부인 김영숙을 익히 알고있었다. 이제 본 평전의 결말부에서 보다 밝히겠지만  무정장군의 세번째부인이자 조선녀성인 김영숙과 50년대 김영숙의 청화대학 류학에 대해서도 가담가담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장군의 묘소가 평양 애국렬사릉에 모셔졌음도 처음 듣게 되였다. 
 
연길에서 알게 된 리상섭로인, 아주 인상적인 지식인로인이였다. 새세기에 들어선후에도 수차 만남의 기회를 가지였지만 우리(조선에서)가 알고있는 무정장군의 고향은 절대 함경북도 경성군이 아닌 청진시 근동리라라는 주장은 변함이 없었다. 조선에서 온 분이고, 무정장군과 부인 김영숙을 알고있는 분이여서 그 말씀은 너무도 충격적이였다. 왠지 청진시 근동리설이 마음에 와 닿지만 절대적인 긍정을 할수는 없었다. 무정장군 연구가로서는 하나의 설로 받아들임이 옳을것 같았다. 언젠가는 무정장군 관련  실제자료가 밝혀질 때가 있으리라고 믿어마지 않았지만 그 밝혀짐이 그리도 빨리 다가서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다. 
 
하늘이 도왔을까, 일찍 10대 후반의 무정장군의 어린 시절과 소년시절을 몰라 그리도 안타깝더니 조선이 아닌 내 고향 연변과 대련에 장군의 친지분들이 계신다는 기적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은 2015년 8월 27일 오후, 연변위성텔레비 관련 다큐팀 일행 셋과 함께 복건 영안을 거쳐 홍색수도로 불리우는 강서 서금에 도착하여 투숙하고있는데 연변주 공무원으로 사업하다가 일터에서 물러선 리영씨로부터 핸드폰이 걸려왔다. 무정장군의 8촌 형제되는 분의 따님이 룡정에 있고, 8촌 동생되는 분이 지금 대련에 계신다는 놀라운 소식. 이어 룡정의 녀사분과 긴 통화가 이어지고 현재 사업터 강남 소흥으로 돌아가면 다시 련락하겠다는 답변을 주었다.
 
8월 30일 룡정의 녀사분과 다시 통화가 이어지고 9월 7일 드디여 내 고향 연길과 룡정에서 무정장군의 9촌 조카ㅡ김천희(金天姬)녀사분을 만났다. 9월 9일 오후에는 대련에서 녀사분의 아버지를 뵈였다. 무정장군의 8촌 동생되는 분ㅡ김하수로인(金河寿,2015년 79세)님이였다. 김하수로인은 딸애한테서 소식을 듣고 기다렸다면서 1945년 조선에 귀국한후의 무정장군의 표준사진을 건네였다. 종래로 보지 못했던 장군의 정면 표준사진, 이어 장군의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여난 아들 김정신(이미 사망)과 일가 사진, 무정의 두번째 부인과의 딸ㅡ등연려의 사진 등이 환히 펼쳐진다. 무정장군의 가족사가 옛말같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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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장군의 본명은 우리가 알고있는 김무정(金武亭) 아닌 김병희(金炳禧), 1905년 음력 5월 16일 생, 고향은 오늘의 함경북도 청진시 근동리, 가난한 집 자식이 아닌 꽤나 부유한 김해 김씨 가정의 장손. 형제로는 손아래 동생 인동(仁东)에 부친의 존함은 김기준(金基俊) !
 
알고보면 무정장군의 고향을 둘러싼 두가지 설 모두가 옳았다. 전자는 함경북도 경성군이라고 주장하지만 경성군 용성면 근동리라고까지는 밝히지 못했고, 후자는 청진시 근동리라고 옳히 밝히면서도 원래는 경성군 소속이였다가 현재 청진시 송평구역 소속 근동리라는 이 지명의 연변과정을 알리지 못하였다. 
 
아는것만큼 보인다고, 력사속에 들어서면 모든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무정장군이 태여나던 비운의 해ㅡ1905년의 고향은 함경북도 경성군 용성면 근동리라고 불리였다. 경성군은 함경북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한개 군으로서 동쪽은 동해와 면하고, 서쪽은 무산군, 남쪽은 길주군과 명천군, 북쪽은 부령군과 접하여있었다. 그러던 경성군내 용성면 근동리가 1940년 3월이후 주변의 부령군 청암면 일부와 경성군 라남읍, 용성면이 청진에 귀속되면서 지명부름을 달리하게 되였다. 
 
    오늘날 함경북도의 이름난 항구도시 청진은 개항전 한적한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1908년 개항후 항만시설이 정비되며 급성장을 이루니 1914년에는 제법 부(府)로 승격한다. 1929년 함경선(咸鏡線)이 개통에 이어 1933년에 도문선(圖們線)이 부설된데다가 국내의 각 항구는 물론, 일본의 각 항구와의 정기항로,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 등 항로도 열리며 수륙 교통요지로 부상하니 그 발전이 보다 빨라진다. 그 발전속에서 1940년 3월이후 근동리 등의 청진으로의 귀속이 이루어졌다. 
 
광복후 청진시도 여러 변혁의 시기를 거치여왔다. 1960년 10월의 청진시는 함경북도 소속이 아닌 직할시로 떠오르지만 그후 다시 함경북도에 소속되는 과정을 거친다. 청진시는 1977년에 이르러 다시 직할시가 되였다가 1985년에 다시 직할시가 폐지되면서 재다시 함경북도에 편입됨을 보인다. 변혁속의 청진시는 1993년 라진시와 선봉군이 라진선봉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라진시 소속 6개동·3개리를 넘겨받으니 조선 4대도시의 하나인  청진시는 행정구역이 7구역 93동, 14개리로 나타나면서 그제날 경성군 용성면 근동리는 오늘날 청진시 송평구역 근동리(松坪区域芹洞里)로 알려지게 되였다. 
그러고보면 무정장군의 고향을 일컿는 함경북도 경성군설도 옳고, 청진시 근동리설도 옳다. 다만 장군이 태여나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을 보낸 고향은 의연히 경성군으로 불러야 하고, 오늘은 청진시 근동리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99년 7월과 그후 연길 등지에서 만난 조선로인ㅡ리상섭씨의 청진시 근동리 주장은 전적으로  옳았으니 백배천배 감사한 마음이다. 
 
김하수로인의 구술에 따르면 무정의 아버지 김기준은 마음씨는 착하나 성격이 유달리 급하고 과격한 사람이라고 한다. 유년시절의 무정이도 자라면서 아버지의 성격을 쏙 빼닮았으니 후일 중국의 홍군시절과 팔로군시절, 태항산 조선의용군 시절, 조선 귀국후의 성격은 유년시절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성격의 계속이였다. 이 성격은 무정이를 홍3군단 총지휘 팽덕회와 지기로 만들어주며 홍군총부 작전과장, 팔로군총부 작전과장으로 키워도 주었지만, 이 성격은 또 무정이를 비운의 인물로 만들어준 토대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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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농을 둘만치 가정이 부유한 편인데서 무정은 고향 룡성면 근동리에서 무난히 6년제 천마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후 멀지 않은 옛 고을ㅡ경성군에 가서 경성농업학교를 다닐수가 있었다. 이후 커서 고향에서 가업을 빛내라고 한 아버지의 가르침 같았다. 하지만 그 시절 무정은 필경 10대 초반의 소년이여서 아버지 김기준은 시름을 놓지 못하다가 녀동생되는 무정의 고모가 경성에 가서 무정의 곁을 지켜주어서야 안심하더라고 동을 단다. 물론 김하수로인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성격을 물려받은 무정은 10대의 나이에 잡아들면서 눈에 거슬리면 참지 못하는 강인한 성격으로 번져갔다. 그 시절 경성농업학교 교장은 일본인교장인데 소년 무정에게는 정말이지 원쑤 쪽발이놈으로 보이였다. 1905년 을사늑약은 몰랐다지만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으로 인한 나라의 망국은 자라면서 가슴은 한으로 맺히였다. 일본사람들만 보면 눈에 불이 일었다. 무정은 학생들의 선두에서 일본인교장 구축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놈들의 눈에 났다. 무정은 부득히 경성농업학교를 떠나지 않을수 없었다. 
 
장손인 무정은 아버지의 지지로 멀리 서울로 남하하여 경신중학교에 들어갔다. 전해지는 서울 기독교중학교설과 중앙고등보통학교(즉 중앙고보)설이 아닌 경신중학교라고 김하수로인은 찍어 말한다. 경신중학교(儆新中学校)는 오늘날에도 서울 종로구에 현존하는 100여년 력사를 가진 사립중학교로서 서양식 학교설치의 일환으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였음을 보여주고있다.
 
미국 선교사들이 오늘의 한국땅을 처음 밟은것은 1885년으로 거스른다. 1883에 인천항이 새로 축조되여 개항하면서 1885년 4월에 미국 북감리교회 아펜젤러 부부와 북장교교회 목사가 인천에 첫발을 내디디였다. 이어 아펜젤러 선교사는 서울 중구 정동 34번지의 한옥을 빌려 최초의 근대교육기관 배재학당을 세우게 되고, 역시 이해 1885년에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H.G.언더우드(원두우)가 경신중학교의 전신인  “언더우드 학당”을세우고 1905년 경신학교로 교명을 개명하기에  이르렀다. 다음해 1886년에 다른 미국 선교사 루이스 스크랜부인이 또 배재학당 린근에 최초의 녀성전용교육기관ㅡ리화학당을 개설하였다. 
 
이로부터 보면 경신중학교는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배재학당, 최초의 녀성교육기관 리화학당과 더불어 그 이름이 뜨르르하다. 그러나 이런 최초의 근대 학교들은 조선 황실과 부유한 계층의 귀족자녀들만 다닐수 있었을뿐 가난한 집 자식들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였다. 1900년에 배재학당 정구부 학생들이 당시에는 낯설기만 하던 정구경기를 치르는 사진이 그러하고, 1900년대 초 전차타고 소풍가는 이화학당 학생들 사진(주. 1994년 10월 9일자 “동아일보”)이 그러하다. 가난한 집 자식들에게는 그림의 떡일수밖에 없다. 
 
20세기 10년대에 이르러서도 가난한 집 자식들은 학교다니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부유하다고 알려진 무정의 김해 김씨 가족한테는 자식공부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서울의 경신중학교에서도 무정의 주위에 같은 또래들이 뭉치더니 무정은 점차 학생수령으로 떠올랐다. 15세되는 해 1919년 전민족적인 만세운동ㅡ3.1운동이 터져오르며 무정은 완연 다른 사람으로 번져갔다. 무정은 서울의 여러 중학교와 한맘으로 배합하면서 경신중학교, 서울학생 3.1운동의 전렬에서 나아갔다. 무정은 또 일제놈들에 의해 학교에서 추방당할 신세가 되고 단기적이나마 무정한 옥살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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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수로인은 또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무정이 팔로군 시절 만난 중국인 등기는 첫 부인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이야기, 무정의 첫 부인은 10대 중반이후 고향에서 례를 올린 조선녀성이란다. 이 첫 부인의 이름은 무엇인지 김하수로인도 모르고있었고, 부부를 이룬 그해도 딱히 알수가 없지만 16~17세인 1920년~1921년 경임은 틀림이 없는것 같다. 조선의 그 시절은 남녀가 15살 쯤이면 의례 장가들고 시집가야 하는 나이, 무정도 부모님들의 주선으로 자기 또래 조선녀자를 안해로 맞아들이니 얼마후 태기가 있다. 열달 잉태만에 아기가 태여나고 고추가 달렸다고 정신(正新?)이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무정은 서울에서 중학교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소년시절로부터 청춘시절로의 과도기를 거치였다. 어느덧 10대 후반의 유망한 젊은이로 성장한 무정은 서울 학생운동의 수령의 하나로 떠오르면서 국내에 들어와 사람을 물색중인 독립운동가이고 사회주의자인 려운형선생의 눈에 들었다. 일제놈들의 요시찰 대상으로 점찍힌 무정은 려운형선생의 영향으로 드디여 중국행을 선택하게 되였다. 
 
무정의 중국행을 두고 가족에서도 몰랐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마도 조직과 개인, 가족 모두에 련루되는 일이니 비밀에 부친 모양인데 무정의 가족에서는 일본류학으로 알고있었으니 말이다. 
 
무정의 아버지 김기준씨는 아들의 월사금을 다달이 일본 관련주소로 부치치만 번마다 돌아오군 하였다. 하도나 이상하여 김기준씨는 현해탄(玄海滩) 넘어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아들의 종적은 묘연하기만 하다. 귀로에서 김기준씨는 즐기는 의학서적 몇책을 품에 지니고 오다가 모두 빼앗겨야 했단다. 어찌하든 무정의 일본류학으로 인기된 일인데, 그후도 김기준씨는 서울로 다달이 월사금을 부치지만 그상이 장상이다. 무정의 할아버지는 다달이 돌아오는 월사금을 모아서 황페한 린근 공동묘지를 사서 여러가지 과일나무를 심고 덩실한 2층집까지 지을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김하수로인네와 무정네 친척사이를 보면 무정네가 벌수가 높다고한다. 김하수 로할아버지와 무정의 로할아버지가 친형제간일 때 김하수 할아버지 김우공(金禹公,아들 5형제에 딸 하나)과 무정의 할아버지는 사촌간, 김하수 아버지 김현사(金铉仕)와 무정의 아버지 김기준은 벌써 6촌간이다. 그러니 무정은 김하수의 아버지 김현사한테 7촌 조카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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