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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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가요와 향가연구 (장지운)
2013년 01월 23일 15시 59분  조회:9547  추천:0  작성자: 최균선
                               摘 要
 
    韩国三国时期之前的歌谣内容大多是通过口头传唱并记录下来的,并且只是用简单的汉字记录了它的意思,现今我们知道也只有三篇而已,具体的题材模式以及这个时期形成的独特的样式我们却很难研究,所以将这一时期的歌谣称为古代歌谣,代表作有《龟旨歌》《箜篌引》等,通过一些作品来了解并推论出三国以前文化的题材及文化背景等;乡歌作为新罗时期到高丽时期形成的文化在统一南北的新罗时期极为盛行。
这一时期的乡歌借助了汉字的音和意用乡扎标记来,录又称借字文学,形成了特有的文系,是创作文学的根源,代表作有《薯童謠》等。古代歌谣和乡歌形成了固有的文化特色,将当时民族文化的个性形象化,对韩国文化具有重大意义,是贵重的文化遗产。
 
   关键词:口头传唱  文化和背景  乡歌 个性形象化  文化遗产  
 
                                           초 록
    
    한국의 삼국시기 이전에 가요내용은 대부분 구두로 불리어오다가 기록된 것들이며 아울러 간단한 한자로 그것의 뜻을 기록하였는데 지금까 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세 편밖에 없으며 구체 제재모식 및 이 시기에 형성된 독특한 양식에 대하여 연구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가요를 고대가요라고 부른다.
    대표작으로는 《구지가》《공후인》 [箜篌引] 등이 있는데 일부 작품 으로 3국시기 이전의 문화제재 및 문화배경 등을 추론할 수밖에 없다. 향가는 신라시기로부터 고려시기에 이르는 기간에 형성되어 통일신라÷ 시기에 가장 성행하였는데 이 시기 향가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빈 향찰로써 기록하였으며 또한 빌려온 글자문학이라고도 하는바 특유한 문자체계를 형성하였다. 대표작으로는《서동요(薯童謠)》등이 있다.
    고대 가요와 향가는 고유한 문화특색을 형성하였는바 당시 민족문화의 개성의 형상화는 한국문화발전에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으므로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되고 있다.
 
키워드: 구두   문화와 배경   향가 개성의 형상화   문화유산
 
차 례
서론……………………………………………………………………………………
1. 고대가요의 개념………………………………………………………………
2.고대가요의 율격………………………………………………………………
3.고대가요의 특징………………………………………………………
본론………………………………………………………………………
  1. 현존작품분석………………………………………………………………………
  2. 향가의 소개………………………………………………………………………
    1. 향가의개념……………………………………………………………………
    2. 향가의 발생…………………………………………………
    3. 명칭과 갈래……………………………………………………………………
결론

상고가요와향가문학의 의의

감사의 말

참고문헌
                                          1. 서 론
 
     농경 생활을 위주로 했던 한국인민의 조상들은 농사가 시작되고 끝나는 시기마다 각각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추며 노래를 부르고 놀았다는 문헌 기록이 있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 (舞天), 백제의 오월제(五月祭) 등과 같은 제천 의식이 그것인데, 이 과정 에서 행해진 원시 종합 예술로서의 제의(祭儀)놀이 속에서 고대 가요가 발생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가요는 집단적 민속요와 개인적 서정가요로 분화되어 발달하여 왔다.

1,상고가요의 개념
    삼국시대 이전의 노래로서 오늘날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세 편 뿐인데, 그것도 한자로 짤막하게 뜻만을 기록하고 있어 그 본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시기의 노래가 특별한 양식으로 형성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고대 가요'라 부른다. 초기 가요는 일정한 률동을 가진 감탄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인류의 의식과 언어가 발전하고 가요창작의 경험이 쌓아짐에 따라 점차 자유로와지면서 후렴구에다 집단적인 사상감정과 후의 개인감정을 표현하는 가사가 첨가 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상고가요란 함은 대게 한민족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예・맥족이 한반도와 남만주 일대에 생활의 터전을 잡은 이후부터 삼국시대 초 향찰 표기의 향가, 즉 기록문학이 나타나기 이전의 가요를 지칭하는 것이다. ‘상고’라 함은 문학사에서 고대 원시 시대부터 삼국시대 이전, 즉 본격적인 국가 체제가 형성되고 기록문학이 등장할 무렵까지의 시기를 지칭하는 말이고 가요(歌謠)는 민중 가운데 널리 불려진 속요와 음절을 붙여서 불려지는 노래를 총칭하는 의미의 본래 ‘악가와 속요’룰 칭하는 말이다. ‘가(哥)’는 곡과 장이 있고 절을 떼여서 음영하게 된 것이고, ‘요(謠)’는 곡이나 장이 없이 악기에 맞추지 않고 그대로 노래한 것을 이르는 것으로 역사적으로는 ‘요’가 더 오래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상고가요의 율격
    상고가요의 시행은 여전히 4구체 형식을 취하고 있고 시행도 한 시행 이 두 개 시구로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그러한 형식을 띤 한 국 후세에 국문기가에 자못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 반면 내용은 인간적이나 시어는 넑두리나 푸념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
    한국말은 그 언어조직이 2음절 또는 3음절어가 거의 주를 이루는 교착 어이고 체언에 용언이 잇달아야 하나의 문장이 이루어지는 통사구조를 갖기 때문에 후세에 한국어로 번역, 해석할 때 자연히 3․4조 또는 4․4조로 가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오랫동안 한국인의 몸에 젖어 그들의 정서, 감정 표현에 적절한 음조, 음수율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한국말은 굴절어인 까닭에 위에 한시처럼 엄격한 잣수율을 갖춘 정형시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원시 시가 처음 4구체 우수체 시가로부터 시작되였다는 것과 조선시가 고유의 특질의 하나로 되고있는 어음상 내외구 대응의 특징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에서 일정한 의의를 가진다.
3,상고가요의 특징
    상고 시대의 노래 세 편이 지니는 공통점은 그것이 모두 노래로 전해 지다가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노래들이 널리 전해진 것은 의식적인 노래로서의 가치때문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 들을 주술 또는 제의 중심의 생활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원시적인 신앙생활과의 결부속에 집단적성격을 띠고 상위일치의 미분화 상태에 있는것이 특징이라면 상고시가 개인에 의한 문학창작의 성격을 나탄내면서 계급문학으로서 분화상태에 있는것이 특징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상고 가요는 세편뿐이다. 따라서 이 노래들이 보여 주는 문학적 의의는 그 공통성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노래들이 널리 전해진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럴 만한 이유란 의식적인 노래로서의 가치 때문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시가 문학의 장르에 대해서도 추론해 볼 수 있다.
                           
                                        2.  본 론
 
1. 현존 작품분석
    상고시기의 주요한 문학작품으로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원시가요 <구지가>와 고대서정가요 <공무도하가> 그리고 <황조가> 등이 제일 유명 하다. '구지가'는 노동이나 놀이에 노래가 수반되었다는 전통성과 보편성을 보여주는 반면에, '공무도하가'나 '황조가'는 인간 본연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어 이미 시가의 기능과 성격이 다양하게 분화되어있음을 알 수 있고 전통성과 보편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이미 상고 시대는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다양성을 지닌 시가문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구지가>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거북에게 머리를 내놓으라고 위협한 짤막한 노래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여러 사람이 땅을 구르면서 이 노래를 불렀더니 가락국의 시조가 태어나서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구지가>는 노랫말의 짜임이나 노래를 불러서 무엇인가를 이루어 낸 경위가 「삼국유사」의 《수로부인》에 나오는 <해가>와 매우 흡사하다
   이를 근거로 <구지가>의 성격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위협 적인 노래를 해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소원을 이루는 주술적인 노래로 볼 수도 있고, 거북의 머리 모양이 남성의 서이와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과 이 노래를 매개로 사람이 태어났다는 점을 연관시켜 해석하면 출산 기원의 노래로 볼 수도 있다.
    <구지가(龜旨歌) >는 조선원시사회 <영신제의>의 실제적내용을 전하는 상고시가의 유일한 실례라는것 그리고 조선고전문학에서 가장 오랜 원시가요라고 추정되는 작품이라는 의미에서 귀중한 유산으로 되고있다.이 '구지가'의 성격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위협적인 노래를 불러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소원을 이루려는 주술적인 노래로 보기도 하고, 거북의 머리가 남성의 성기와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과 이 노래를 매개로 하여 사람이 태어났다는 점을 연관시켜 출산 기원의 노래로 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본디 노동요였던 것이 나중에 설화 속에 끼워진 것으로 보기도 하고, 동요와 흡사한 놀이의 노래로 보기도 한다.
            
龜何龜何 (구하구하)
              首其現也 (수기현야)
              若不現也 (약불현야)
              燔灼而喫也 (번작이끽야)
 
    이 가요의 기록년대를 보면 1 세기 좌우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가요가 불리우기 시작한 것은 거슬러올라가 퍽 오랜 고인시대가 아니겠는가 생각 된다. 다른말로 퍽 이전 거부기를 토템으로 하여 불리워지던 원시가요 이던 것이 가야국의 건국과 관련해서 노래되었고 후에 기재된 것이라 인정된다. 
    <구지가>에 대한 연구도 오늘날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연구 방법 및 연구자들의 서로 다른 견지로 인해 그 해명이 많은 차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명한 학자 박지홍선생님은 <구지가연구>에서 <구지가>를 영남지방의 <거미노래>와의 비교 속에 <잡귀를 쫓는 주문> 주가로 추정하면서 노동 가나 무답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병욱선생님은 <한국고전시가론>에서 <구지가>를 영신가로서가 아나라 명령과 위혁적인 표현에 근거하여 원시시가형태로 간주하면서 구수를 남성의 생식기로 보고 원시 시대의 생명근원설에 기초한 남녀간의 구애가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김열규선생님의 <가락국기고> 에서는 원시사회 <영신제의>에서 희생 또는 제의무용과 함꼐 가창되는 주가라 하였으며 김병욱선생님은 <한국상대시가와 주사>에서 신가라 하였다.
    위의 견해에 의하면 이 가요는 원시인들이 주술로 이용하고 있던 가요라 지적한다. 이 가요가 원래 주사였는가 주문이였는가 주언이였는가 하는 것은 가요 연구 자체의 핵심과 일정한 간격을 둘 수 있다. 상기한 것들이 후에 음악적 주원가로 변모하 였다고 할 수도 있다.
    <구지가>에는 거부기를 숭상하는 토테미즘의 원시자연종교사상이 반영 된다, 그리고 그 위협적인 표현을 보아 문면의 형성은 원시적인 토템사상 의식이 아직 성숙되어 가기 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식면에서 이 가요는 소박하고 단순하며 또한 일정한 운률조성과 시행조직에 안받침되면서 반복법, 수사학적 부름말 등의 수법도 비교적 효과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으로 주목된다.
    또는 일부 학자들은 <구지가>와 신라 성덕왕때의 <해가사>와의 비교를 통해 조선고대시가의 근원적형식을 립증해보려고까지 하였다. 이 <구지가> 는 아주 훌륭한 유일한 상고가요작품이다. 조선시가 창작사의 유구성을 보여주고 있음으로 하여 일정한 문학사적 의의를 가진다.
    또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  <공무도하가>는 이 시기의 훌룡한 작품 이다.  일명 <공후인>이라고도 한다.
 公无渡河              님이여 가람 건너지 마소
 公竟(终)渡河        님아 그대 가람 건느시네
 坠河而死              가람에 빠져 싀오시니
 将(当)奈公何           어저 님아 내 어이 하리오
   <공무도하가>와 작품의 작자, 창작동기 그리고 배경설화룰 전하고있는 가장 이른 문헌으롯서는 중국의 진나라사람 최표가 쓴 <고금주>이다. 그 배경설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공후인>는 조선진졸 곽리자고의 안해 려옥이가 지은 것이다. 자고가 새벽에 배를 저어가는데 어떤 백수광부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술병을 든채 강물을 거슬러 거니는 것이였다. 그 안해가 뒤쫓아가서 소리치며 말렸으나 사나이는 듣지 않고 계속 강을 건느다가 끝내 물에 빠져 죽고말았다. 이에 안해가 공후를 끌어다 타면서 <공무도하>라는 노래를 불렸는데 마디 마디가 구슬프고 처량하였다.
    노래를 마치자 그도 물에 몸을 던져 죽였다. 자고가 집에 돌아가 안해 려옥에게 그 광경을 말하였다. 려옥이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여 공후에 맞춰 그 광경을 노래를 지어서 타니 듣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자가 없었다. 려옥은 노래를 이웃인 려용에게도 들려줬는데 이름을 <공후인>이라고 하였다.
    위에 배경설화를 볼 때 인간 본연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성과 보편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부부의 순정과 절조 룰 노래한 가요라 볼수 있다, 안해는 남편이 강물에 몸에 던져 죽자  자기 도 남편을 따라 물에 빠져 죽는다. 작품의 주인공은 아주 서정적인 소유 하고 있는 사상감정세계는 그만큼 개인적이였고 사회적이였으며 또한 윤리 도덕적이였다. 다른 가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인간의 사상감정의 발현이다.
    <공무도하가>는 일련의 새로운 특징과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락구를 갖추고 있다. 즉 마지막 시구가 감탄사를 가진 락구로 되여있는데 깊은 여운을 남기고있다. 이러한 시가형식에서의 낙구형태는 후세 조선 국문시가 형식발전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되고있었는데 그만큼 이 가요는 조선국문시가의 낙구형태의 연원적 연구가치를 갖고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시가는 음절수조직이 더 길어 운률미가 보다 굴곡적이고 정서깊은 등 새로운 발전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동시에 시행조직의 새로운 발전요소를 담고있는 면에서 주목된다. 즉 <님이여 가람 건너지 마소>란 시구에서 우리는 이 시구를 두 행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 이것은 조선고대시가의 8 구체 형태에로의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향가
    향가는 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이어진 시가 문학으로써 고대 후기에 해당하는 남북국-통일 신라 시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이 시기에 향가는 구비 전승되던 노래에서 문자에 의해 기록되는 기록문학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삼국 통일 이후 향찰이 창안됨으로써 가능 하였다. 향가를 차자문학(借字文學)이라고 불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문학사적으로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민족 최초로 자국 문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향가 문학은 국어 문학을 개시 하였 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향가는 단연형 정형시의 원형과 창작가요의 근원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10구체 향가의 삼단 구성이나 낙구법은 이후 고려와 조선조에까지 연결되어 한국 시가의 기층적인 구조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단연형 정형시의 원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향가는 종합 예술적이며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했던 상고대의 시가로부터 탈피하여 개인의 서정성을 노래하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2. 1,향가의 개념
   순수한 자기글이 없었던 때에 한국말로 된 노래를 기록해야 했기 때문에, 향가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적는 향찰표기에 의해 기록되어 전하는 신라 및 고려시대의 시가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향가는 <삼국 유사>에 실린 14수와 <균여전>에 실린 11수 등 모두 25수의 시가를 지칭하는 장르 명칭이다. 이 시기에 제작되어 이두(吏讀)나 향찰(鄕札)로 표기된 시가.〈도솔가 兜率歌〉나 〈사뇌가 詞腦歌〉를 포함한 이 시기의 모든 시가를 총칭하는 말로 신라가요·신라시가·사뇌가라고도 한다.
    중국의 시(詩)나 불교의 범패(梵唄)에 대해 '우리 고유의 시가', '시골 노래'라는 개념으로 향가라고 했다. 신라인들은 향가를 숭상했는데,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향가도 많았다. 일반인들이 유희와 오락으로 삼는 도구 였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대중포교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고유한 문화적 성격을 한반도 전역에 확대시키면서, 민족 문화 로서의 개성을 뚜렷이 형상화(形象化)시킨 귀중한 문학적 유산이다.
2.2. 향가의 발생
    여기에는 많은 연구자들의 견해가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다. 중요한 사안별로 정리해 본다. 우선 초창기 연구자들의 견해는 조윤제의 학설로 집약해 볼 수 있다.
    조윤제는 기사방법이 이두식 문자에 의해 표기되었으면 이것을 향가라고 전제하고, 향가문학의 성립연대는 부득이 그를 표기하는 이두문자의 발명 연대에서 구하였다. 여기서 조윤제가 보는 이두의 발명 연대는 신라의 통삼기, 그렇다면 향가의 성립도 역시 삼국통일의 전후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향가문학의 성립은 국문학의 형성을 의미한다고 확대해석을 시도하였다. 국문학은 항상 민족의 생활을 표현한다고 할 때 그의 성립연대는 자연 민족의 형성기인 통삼기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통삼기가 이두의 발명과 더불어 향가의 발생기로 보는 또다른 근거인 셈이다. 조윤제는 신라의 한문학도 통삼기에 와서야 제대로 발달 되었다는 사실을 보충하고 있다.
    조윤제의 이같은 생각은 대체로 최근까지 받아들여져 왔다. 조동일은 그의 문학사에서, 향가가 노래를 지은 연대가 확실하고 노래를 짓게된 동기도 분명하고도 납득할 수 있게 나타나 있어서 그 출현은 문학사적 전환의 중요한 국면을 이룬다고 전제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발생경위를 밝히고 있다.
   굿노래를 부르며 주술을 행하던 전통 또한 새롭게 계승될 필요가 있었으며, 화랑제도가 창안되고 산천을 찾아 노래부르고 춤을 추면서 수련을 일삼는 기풍이 고조되자 사뇌가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또한 일반 백성의 민요도 나라에서 채택해 다듬을 수 있는 소재로만 존재하지 않고 그것대로의 오랜 전통을 이으면서 생활 내용이 복잡해지는 데 따른 발전을 보이는 한편 이따금씩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향찰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이 두 방향에서 사뇌가인 향가와 민요인 향가가 나타 났다.
3, 명칭과 갈래
① 문헌기록
‘향가’라는 명칭이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王素與角干魏弘通,至是常人內用事,仍命與大矩和尙修集鄕歌, 謂之三代目云”  <삼국사기>
  “明素云, 臣僧但屬於國仙之徒, 只解鄕歌, 不閑梵聲…明又嘗爲亡妹營齊, 作鄕歌祭之…羅人尙鄕歌者尙矣.” <삼국유사>
  “釋永才 性滑稽, 不累於物, 善鄕歌.” <삼국유사>
  “夫如是則 八九行之唐序, 義廣文體, 十一首之鄕歌, 詞淸句麗…”    
<균여대사전>
    향가란 명칭은 고려 문종 때(1075) 혁련정의 <균여전>에 처음으로 보이고,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기록은 고려 때의 것이지만 그 내용을 보아서는 신라 당대에도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② 명칭
  일반적으로 ‘鄕’ 즉 시골이란 말이 암시하듯 중국에 대한 한국노래의 비칭의 뜻으 로 이해되어 왔다가 점차 향가를 긍정적인 측면에서 ‘나라 노래’, ‘우리 노래’ 등으로 풀이하고자 하는 학설도 대두되고 있다.
  ․근대에 일본 학자인 오꾸라(小倉進平)의 식민사관에서 사용되기 시작 하여 자기비하적이고 부적으로 인식되어 온 단어이다. -신라 것을 ‘鄕言 ․鄕樂․鄕謠․鄕人’ 이라고 하고 唐을 ‘國’이라 한 것을 보아 사대부적 사고가 들어있다고 본 것이다..
   홍기문도 ‘鄕’을 ‘國’의 의미로 해석하다가 황패강에 의해 더욱 구체화 되는데 즉 ‘향가’란 ‘國歌(나라노래)’로 한시나 한문이 아닌 한국말로 된 노래를 지칭하되, 향가라는 말로써 자기 노래를 지칭했던 신라와 고려 시대에 국한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③갈래
  현전하는 작품과 용어의 개념에서 볼 때, 향가의 갈래로 크게 도솔가와 사뇌가, 그리고 불찬가의 세 갈래를 설정할 수 있다.
 
4, 대표적 향가작품
   통일신라시대말 진성여왕대에 향가집 〈삼대목 三代目〉이 편찬되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가사가 전하고 있는 것은〈삼국유사 三國 遺事〉에 14수, 〈균여전 均如傳〉에 11수로, 모두 25수이다. 문헌상의 창작시기를 기준으로 할 때 최초의 작품은 진평왕대(579~631)의 〈서동요 薯童謠〉·〈혜성가 彗星歌〉이며, 마지막 작품은 고려 광종(917~973) 때의〈보현십원가 普賢十願歌〉이다. 350여 년 간 당대인의 애호 속에 창작되었는데,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성행했다.〈보현십 원가〉 이후로 고려조에는 향가가 더이상 창작되지 않았으며 예종이 1120년에 지은 〈도이장가 悼二將歌〉를 향가의 잔존 형태로 보고 있다. 이 <서동요>(薯童謠)는 현전하는 최초의 향가이며 향가중 유일한 동요이다.


善化公主主隱  善化公主니믄  선화 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 그스지 얼어 두고    남몰래 사랑해 두고
薯童房乙                                    맛듕바알              맛둥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                    바매 몰 안고 가다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노래는 서동이 묘계로 선화공주님을 얻은 설화이다. 서동의 잠재적 갈망을 선화공주란 상대편에 전가시킨 것이다. 따라서, 주객을 전도시킨 데 수사적 특징이 있다. 국경을 뛰어 넘고 신분의 귀천을 초월한 낭만적인 한 소년의 사랑이 이 노래에 응집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의 하층인민들를 지혜에 찬미이며 왕공귀족에 멸시도 반영이다.
    서동이의 꿈이 장애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는 어떤 깊은 문학적 배경 은 의식하기 어렵다. 다만, 설화의 내용에서처럼 한 영웅의 일대기가 차지 하는 에피소드로 이해할 수 있다.
 신라 시대 남녀의 연애는 오늘날에 비해 오히려 자유롭고 공개적이었다. 그러나, 귀족의 경우 연애는 자유로왔지만 결혼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이 노래는 "공주의 통정"을 고발조로 노래하여, 듣는 사람들의 주위와 관심을 강하게 끌게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3. 결 론
 
    고대가요와 향가는 개인적인 사상감정 정서의 발견으로서의 개인창작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조선시가사견지에서 볼 때 이것은 획기적의의가 있는 것이다.상고가요으로서 <구지가>는 조선의 유일한 원시가요작품이라는 면에서, 조선시가창작사의 유구성을 보여주고 있음으로 하여 일정한 문학사적 의의를 가진다.그리고 <서동요 薯童謠>는 상랑을 위해 목숨을 건 고대인들의 강한 정열과 순진하고 소박한 노래로서 고대 동요의 정형적 형식을 띠고 있다.
    원시가요와 향가는 원시적인 신앙생활과의 결부속에 집단적성격을 띠고 삼위일치의 미분화상태에 있은 것이 특징이라면 고대시가는 개인에 의한 문학창작의 성격을 나타내면서 계급문학으로서 분화상태에 있은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원시가요라 할 때는 로동구호적인 성격을 벗어나 집단 적인 사상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 가사가 첨가되고 운률에서도 일정한 마디를 갖출수 있는 노래를 두고 말한다. 민족 문화으로서의 개성을 뚜렷 이 형상화(形象化)시킨 귀중한 문학적 유산으로서 후세에도 아주 큰 영향 을 줄 것이다.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 교수님의 사심없는 지도하에 논문을 순리롭게 완성했 습니다.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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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성기옥(1987) : 구지가의 작품적 성격과 그 해석(1), 울산어문논집 제 3집
14. 정병욱(1988) :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15. 장덕순(2001) : 이야기 국문학사, 새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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