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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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분(赤墳)
2015년 04월 05일 14시 44분  조회:1742  추천:0  작성자: 최상운
 
       력사이야기
                                                   적분(赤墳)
 
 
     고려말기에 이르러 고려와 명나라와의 관계가 썩 좋지않았다. 고려에서는 오만무뢰한 명나라의 사신 채빈을 죽이였다. 채빈의 죽은것을 안 명나라에서는 대노하여 채빈을 죽인 값으로 부녀자 1천명, 학생 1천명. 내시1천명, 우마 각1천필을 보내야 한다는 등, 고려에 대하여 위협적인 행동을 자행하였다.
     불덩이를 않은 고려 조정내에는 명나라와 어떤관계를 유지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엇갈리는 두가지 시비가 있었다. 최영을 대표로 하는 강경파는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를 굴욕적으로 받아 들이지 말고 명나라와 맞서 싸우자는 주장을 했고, 리성계를 대표하는 친명파는 명나라와 화친하자는 주장을 했다. 드디어 우왕은 최영의 제기한 명나라를 선제 공격하자는 제의를 받아들이고 군사를 이를켜 료동으로 진군하기로 결정하였다.
    우왕은 명을 내려 팔도도통사에 최영,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리성계를 임명하고 그 밑에 수십 명의 장군과 7만명의 군사를 배속시켰다.
   우군도통사 리성계는 네가지 불가론을 내세워 요동징벌을 반대하고 나섰다.
    첫째; 소국으로서 대국을 치는것이 불가하고,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불가하고, 셋째; 전병력을 동원하면 이를 틈타 허점을 노린 왜구가 침입이 걱정되고, 넷째; 여름 장마철이라 활이 힘이 약해지고 전염병이 염려된다는 것이다. 
   우통사 리성게의 말이 불길함을 예고 한것과 달음없으나 왕과 최영은 받아줄리 만무했다.
    5월 초순에 좌우군은 위화도에 이르렀다. 때마침 우기가 닦쳐와 련일 큰비가 쏟아져 강물은 많이 불어 났다. 대군은 진격할수없었다. 이렇게 되자 계속 진격하자는 파와 회군하자는 파로 엇갈리여  쌍방은 며칠 공방을 벌리였다. 워나 마음속에 고려정권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있던 리성계는 고려에 반기를 들기로 하고 마침내 회군을 단행하였다.
     리성계일파가 회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왕과 최영은 즉시 서경으로 들어가 지휘하려고 하였으나 회군하는 속도가 빨라 수습할 길이 없었다.
    “고려는 망하는구나.”
    최영이 탄식을 하며 왕을 모시고 개성 화원으로 들어가니, 이때 최영의 휘하에는 50여 명의 군졸밖에 없었다. 개성에서 반란군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모집하여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최영은 리성계일파에 잡혀 마침내 명나라에 대한 역적이란 죄목으로, 고봉현에 귀양 갔다가 두 달 후에 처형되였다.
최영은 죽는 순간에 당당하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만약 조금이라도 남에게 억울한 일을 했으면, 내 무덤에 풀이 날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풀이 나지 않을것이다.”
    후에 과연 그의 무덤에 3년동안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 그 무덤을 적분(赤墳)이라 불렀다 한다. 최영의 죽었다는 소식이 서울에 전해지자 시민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슬퍼하였다. 시체를 버린 곳에는 누구나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왜서 사람들은 최영장군을 이렇게 존경했을가? 강직하고 용맹한 장수였던 최영은 고려를 위하여 현혁한 전과를 올려 행정과 군사 대권을 장악한 최고의 재상 으로 되였다. 최고의 재상이였지만 일편단심 나라를 위하고 뢰물을 받지않고 청렴하게 살았다. 재상인 그의 집 쌀독에 쌀이 떨어질 때가 있었다니 그의 고귀한 성품을 알수있었다.
    후일 변계량은 이런 시를 지어 최영을 추모 하였다.
    위험을 떨쳐 나라를 구할 때 백발이 성성했구나.
    삼척동자도 모두 그의 이름을 알고 있소.
    한 조각 붉은 마음 영원히 죽지 않아,
    그 이름 천추까지 태산과 같으리.
    최영장군의 묘소는 한국 고양시 필린핀참전역 뒷 골짜기에 있었다. 나는 최영장군의 무덤을 찾아가 보았다. 지금은 적분이 아니고 잔디로 덮혀있었다. 패자 장군이라 하여 무덤은 평민의 무덤과 별반 차이가 없어보였다. 비문에는 최영은 동주 최씨로서1315년 개성에서 사현 규정의 벼슬을하던 최원직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고 적혀 있었다.
    최영장군이 세상을 떠난지 몇 백년 세월이 흘렀갔건만 후세 사람들의 마음속엔 최영장군에 대한 그리움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최영함”을 건조하여 최영장군의 넋을 지켜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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